14장 황녀와의 조우
삼 일 뒤, 프레아는 입궁하라는 전갈을 받고 아침부터 궁에 갈 준비로 바빴다. 뭐가 좋은지 그녀의 입가에는 미소가 가득했다.
시에라는 그것이 황제 폐하를 알현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아직 작위를 받지도 않은 여식이 황제와 직접 대면하는 것은 엄청난 일이었으니까. 시에라는 어쩐지 제 주인이 자랑스러워 어깨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이날은 처음으로 황제를 알현하러 가는 딸을 위해 에밀리가 동행했다. 성을 나서는 내내 프레아의 표정이 밝자 에밀리가 의아한 얼굴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외출 금지가 그렇게 힘들었나 싶어 조금 안쓰러운 마음까지 들었다. 그렇게 시에라와 에밀리가 서로 다른 생각을 하며 프레아를 바라봤다. 마차가 출발하자 창밖에서 시에라가 잘 다녀오라고 손을 흔들었다.
사실 두 사람의 추측은 모두 틀렸다. 애초에 프레아가 기분이 좋은 것은 그런 연유가 아니었다. 프레아는 성에서 지내는 내내 조금 따분하기는 했지만 힘든 적은 없었다.
게다가 황제 폐하를 알현하는 것은 긴장만 되지, 즐거운 일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계속 기분이 붕붕 뜨고 저도 모르게 헤벌쭉 미소를 띠게 되는 이유는 하나밖에 없었다.
첫 연애에 들뜬 거였다. 그것 말고는 딱히 기분이 이렇게 오락가락하지 않으리라. 프레아는 연애란 것을 해본 적이 없었다. 연애 감정을 느껴본 적도 없었다.
이성에게 호감을 느껴본 적은 있었다. 하지만 지금처럼 자꾸 눈앞에서 아른아른하고 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던 적은 처음이었다. 한번 마음을 인정하고 나니 봇물 터지듯 마음이 제멋대로 왔다 갔다 했다.
부모님께 들킬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불안하면서도 아슬아슬한 느낌에 더 떨리기도 했다. 프레아는 그날, 아침 일찍 몰래 성으로 돌아간 밀리안을 배웅했다.
밀리안이 없는 방 안을 돌아보자 가슴에 구멍이 뚫린 것 같은 허전함이 들었다. 혼자서도 잘 지냈고 그것을 편하게 느끼던 그녀지만 어쩐지 그땐 둘이서 잘 먹고, 잘 사는 것을 상상했었다.
“밖에 나온 것이 그렇게 좋으니?”
한참 달리는 마차 안에서 에밀리가 넌지시 물었다. 프레아는 그녀의 물음에 씩씩하게 대답했다.
“네!”
거짓말은 아니었다. 외출한 것도 좋았으니까. 드디어 외출 금지령이 풀렸다. 밀리안이 올 때까지 기다리지 않아도 되고, 원하면 제가 먼저 가도 되니 기분이 좋았다. 물론 이런 뒷말은 숨긴 채 배시시 웃었다. 에밀리는 어쩐지 오늘따라 잔뜩 들뜬 딸아이에게 나직이 말했다.
“네가 잘하리라 믿지만 폐하 앞에서는 몸가짐에 각별히 주의해야 한다.”
“걱정하지 마세요.”
프레아가 빙그레 웃었다. 그 모습을 보니 에밀리는 더더욱 걱정스러웠으나 말을 아꼈다. 어련히 알아서 할까. 그동안 제 일을 이어 할 때도 실수 없이 잘했던 아이였다. 물론 실수한다고 해서 에밀리가 그녀를 탓할 리도 없었지만.
에밀리가 못 말리겠다는 얼굴로 피식 웃었다. 하지만 그녀의 미소는 곧 프레아의 말 한마디에 조금 오묘한 빛을 띠었다.
“그나저나 제가 없는 동안 스승님이 대신 일하느라 꽤 고생했겠죠? 쌤통이다.”
프레아가 짓궂은 표정을 짓더니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일주일도 넘게 메샤르의 일을 손 놓고 있었으니 브레이크가 뒤이어 관리했을 터. 게다가 이번 마탑 사건에 정령 협회가 연루되어 여러모로 메샤르도 대비가 필요했으리라.
외출 금지도 풀렸으니 미뤄둔 일을 처리해야 했다. 협회를 계속 존속시켜야 하는가에 대한 논의가 필요한 시점이니까. 에밀리가 조금 머뭇거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말이 나와서 하는 말이지만, 이번에 브레이크가 데려온 매튜란 사람은 어떤 것 같니?”
“갑자기 매튜는 왜요?”
프레아가 의아한 빛을 띠며 묻자 에밀리가 별것 아니라는 것처럼 에둘러 말했다.
“그냥, 성에 머무는 사람인데 너무 관심을 안 준 것 같아서.”
어머니 쪽에서 먼저 매튜에 대해 물어본 것은 처음이었다. 좀처럼 그와 가까이하기를 꺼렸으니까. 그래서 그럴까. 에밀리의 표정이 뭔가 좋지 못했다. 프레아는 그런 에밀리를 보며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으음, 좋은 사람인 것 같아요. 정령에 대한 지식이 브레이크보다도 대단하고 또, 실력도 굉장해요. 덕분에 많이 늘었어요.”
“그렇구나.”
에밀리가 더욱더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무언가를 가늠하려는 얼굴, 혹은 의심하거나 혼란스러워하는 표정 같기도 했다. 하지만 프레아는 창밖에 얼굴을 내밀고 있느라 그것을 보지 못했다. 프레아가 경쾌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 게다가 매튜가 계약한 정령이 꽃의 정령인데 엄청 예뻐요! 꽃잎이 흩날리는 모습이 장관이라 공격인 줄도 모르고 당한 적도 있다니까요?”
“꽃의 정령이라고?”
에밀리가 꽃의 정령이라는 말에 반응했다. 그녀의 눈동자에 불현듯 희망과도 같은 빛이 떠올랐지만 이내 심연 깊숙한 어둠이 드리웠다. 마치 무언가를 간절히 바라면서도 아니길 원하는 표정이었다. 그녀의 목소리가 조금 날카로웠으나 프레아는 눈치채지 못한 채 중얼거렸다.
“네. 이름도 엄청 예뻐요, 뭐였더라…….”
프레아가 정령의 이름이 무엇이었나 골몰하는데 에밀리가 해답을 내놓았다. 이미 알고 있던 것처럼 분명한 어조였다.
“플라리스.”
“아, 맞아요! 플라리스. 이름 엄청 예쁘지 않아요? 매튜는 리스라고 부르더…….”
프레아가 에밀리를 돌아보며 말하다 말고 멈추었다. 에밀리의 표정이 심각하게 굳어 있었다. 알 수 없는 표정이었다. 기뻐하는 것도 같고, 분노하는 것도 같은 얼굴이었다.
그때 에밀리가 짧은 조소를 내뱉었다. 누군가에게 기만당한 것처럼 그녀의 얼굴이 사정없이 구겨졌다.
“엄마?”
프레아가 조금 놀란 표정으로 그녀를 불렀다. 때마침 마차가 멈추었다. 에밀리는 마차의 문을 열고 애써 자상하게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프레아, 미안한데 갑자기 급한 일이 생각나서 같이 못 갈 것 같구나. 곧장 가봐야겠어.”
“……아, 괜찮아요.”
프레아가 얼떨떨한 표정으로 대답하며 마차에서 내렸다. 마차의 문이 곧바로 닫혔다. 마차는 방향을 틀어 본래 왔던 길로 되돌아갔다. 프레아는 그런 마차의 뒷모습을 멍하니 보았다.
“내가 뭐 또 실수했나?”
매튜를 조금 탐탁지 않게 생각하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매튜의 이야기를 먼저 물은 건 어머니였다.
처음 매튜를 만났을 때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에밀리와 매튜 사이에 저가 모르는 무언가가 있는 것 같았다. 프레아가 망부석처럼 멍하니 서 있자 마중 온 시녀가 그녀를 궁으로 안내했다.
프레아가 힐끗 황제의 얼굴을 보았다. 이미 그가 고개를 들어도 된다고 허락했으나 프레아는 그를 똑바로 보지 않고 슬쩍슬쩍 응시하며 시선을 내리깔았다.
처음으로 마주하는 황제는 에시드와는 조금 다른 인상이었다. 에시드가 부드러운 인상이라면 황제는 조금 차가운 인상이었다. 에시드가 선대 황제를 좀 더 닮았다는 소문을 보아 지금의 황제는 어머니를 닮은 모양이다.
황제는 검은 머리칼을 높게 올려 묶은 채 휘황찬란한 금장식으로 동여맸다. 가까이 서 있는 것만으로도 위압감이 들 정도로 강한 분위기를 풍겼다. 인상이 진하기는 했지만, 세월의 연륜 덕인지 마냥 날카로워 보이지만은 않았다.
‘젊었을 적엔 조금 무서웠을지도.’
프레아는 그를 보며 자연스럽게 에시드를 떠올렸다. 눈앞의 사내는 에시드와 형제라기엔 무리가 있어 보였다. 선대 황제가 노쇠할 때 에시드를 낳았기 때문이리라.
에시드가 황태자와 나이 차이가 별로 나지 않는다는 걸 생각하면 지금의 황제는 아들뻘 되는 동생을 얻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황제는 이번 일을 치하하며 프레아에게 친히 검을 하사했다. 프레아는 그 검을 받고 물러났다.
그 뒤로도 이번 연회가 모두 프레아를 위한 파티이니 아무쪼록 즐겼으면 좋겠다고 후히 그녀를 대접했다. 공에 대한 확실한 보상을 모두 마치자 황제가 조금 사적인 이야기로 서두를 시작했다.
“안 그래도 내 자네를 꼭 한번 보고 싶었네.”
“네?”
프레아는 뜻밖의 말에 멍한 얼굴로 저도 모르게 말대답했다. 황제는 그것을 전혀 개의치 않아 하며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내 동생을 지켜줘서 고맙네.”
“아…….”
프레아는 그제야 그가 저를 만나보고 싶었다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한동안 에시드를 신변 보호하며 그가 하는 일을 도왔으니 하는 말 같았다.
아마 우애가 돈독한 형제이니 제 이야기가 간혹 나왔던 모양이다. 황제가 프레아를 가만히 응시하더니 턱을 쓸었다. 늘 삶에 의욕도 없이 무기력하기만 했던 동생이 그녀의 이야기를 하며 지었던 표정이 떠오른 탓이었다.
딱 한 번 보였던 표정이었지만 황제에게는 강렬한 인상으로 남아 있었다. 동생이 그런 표정을 짓는 건 본 적 없었으니까. 공교로운 것은 그가 관심을 가진 상대가 하필 레이첼 에드모어라는 점이었다.
하나같이 영향력이 크고, 세력이 센 집안이었다. 소후작은 약혼자가 없고 결혼 적령기였다. 하지만 에시드가 그녀와 잘된다면, 안 그래도 그를 황제로 세우고 싶어 하는 외척들에게 좋은 빌미를 줄 터.
에시드도 그걸 아는지 피어나는 감정을 일찌감치 외면하는 것 같았다. 지나치게 저를 위해서만 살아가는 동생이 황제는 안타까웠다. 일부 신하들은 아무리 에시드가 계승권을 포기했다고 해도 완전히 경계를 풀어서는 안 된다고 조언했다.
하지만 황제는 그가 절대 자신을 배신하지 않으리라는 걸 알았다. 자신은 그의 생명을 구해준 적이 있었고, 그에게 충성 맹세를 받았으니까.
물론 이것만으로 그를 완전히 신뢰한다는 건 말도 안 되지만 그는 동생을 믿었다. 지난 세월 동안 반란을 꾀하려 했다면 진즉 일을 치렀을 터다.
“자네는 에시드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황제가 가볍게 그녀를 떠보았다. 프레아의 대답은 곧바로 돌아왔다.
“좋은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퍽 사무적인 답변이었다. 그녀의 대답이 조금 모호하다 여긴 황제가 재차 물었다.
“좋은 분이라는 범주에 이성적인 호감도 있는가?”
“예?”
프레아는 지금 자신이 무슨 소리를 들은 건가 싶어 고개를 들어 그를 응시했다. 황제의 표정은 여전히 무표정하기만 했다.
프레아는 열심히 생각을 모았다. 솔직히 이번 일은 밀리안도 같이했는데 저만 부른 것이 조금 의아하던 찰나라 황제의 의중이 궁금했었다.
그런데 이런 질문이라니. 아무래도 그는 저와 에시드의 사이를 가늠해 보려 저를 부른 것 같았다. 프레아는 침착하게 미소를 띠었다. 그래, 아무리 우애가 깊다고 해도 에시드와 황제는 영원히 팽팽한 줄 위에서 서로를 떨어뜨려야만 하는 관계다.
“폐하께서 걱정하시는 그런 관계는 아닙니다.”
“짐이 걱정한다라…….”
어쩐지 황제의 표정이 조금 구겨졌다. 프레아는 서둘러 또박또박 구체적으로 읊었다.
“예, 저는 에시드 안 헤로스 대공 전하를 이성으로 여겨본 적이 없습니다. 안심하셔도 됩니다.”
단호한 프레아의 대답에 황제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가 연신 제 턱을 매만지며 묘한 표정을 지었다. 곧 그가 작게 중얼거렸다.
“아쉽구나.”
소리가 작아 알아듣지 못한 프레아는 그저 바짝 엎드리듯 다시 한번 사죄했다.
“염려를 끼쳐 드려 송구합니다.”
황제는 그런 프레아를 빤히 보더니 입맛을 다시듯 말했다. 프레아는 전혀 생각해 보지 못한 뜻밖의 말이었다.
“난 자네가 괜찮다면 에시드를 주선해 줄 생각이었는데.”
“……예?”
“자네가 보기에 내 동생이 그리 매력이 없는가?”
“…….”
“그 녀석이 조금 게을러 보여도 자네 말대로 좋은 녀석인데.”
황제가 여전히 아쉽다는 기색으로 말을 이었다. 프레아는 그의 물음에 대답조차 못 하고 입을 헤벌렸다.
지금 무슨 소리를 들은 거야?
그녀는 그제야 황제가 저와 에시드가 잘되기를 바라서 했던 말임을 깨달았다. 아무 말도 못 하고 프레아가 어버버, 당황하자 황제가 이어 말했다.
“늙은이의 괜한 푸념이라 듣고 흘려 버리게.”
“소, 송구합니다, 폐하.”
“……근데, 역시 안 되겠나?”
황제가 여전히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다시 물었다. 프레아의 동공이 세차게 흔들렸다. 연거푸 제안하는 말이 황명인지 아니면 단순한 물음인지 몰랐다. 황명이라면 거절하기 어렵지만, 단순한 물음이라면 어떻게든 무마할 수 있었다.
“저, 저는…….”
프레아가 이 상황을 어떻게 지혜롭게 빠져나갈지를 생각하는데 갑자기 바깥이 소란스러웠다. 언뜻 ‘안 됩니다, 황녀님!’ 하는 소리가 들렸다.
프레아가 말을 잇다 말고 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황제 역시 소란을 듣고 문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잠시 뒤 누군가 문을 박차며 힘차게 들어왔다.
* * *
에밀리는 방금 자신이 들은 말을 곱씹으며 바닥을 세게 짚었다. 심장이 세차게 뛰고 식은땀이 났다. 그렇게 수소문하던 사람이 제 발로 찾아오는 상상을 멈춘 지는 이미 오래였다. 그만큼 너무 많은 시간이 흘렀다. 당연히 마음속으로 그가 죽었을지도 모른다고 여겼다.
그런데, 왜? 왜 갑자기 이렇게 제 앞에 다시금 나타난 건지.
에밀리는 예전에 그와 프레아에 대해 얘기를 나누었을 때를 회상했다. 당시 에밀리는 그레이를 닮은 것 같은 사내가 괜히 껄끄러웠다. 그도 자신이 꺼린다는 것을 느꼈는지 필요 이상으로 다가오는 법이 없었다.
서재에서 단둘이 대면했을 때, 에밀리는 그가 그레이가 아니라는 것을 요모조모 따지며 마음을 다스렸다.
그레이였다면 마법사에게 쉽게 당하지 않았을 거야.
그레이는 금발인데 저자는 칙칙한 적갈색이야.
덩치만 크지 자상함이라곤 없는 딱딱한 말투는 그레이가 아니야.
……게다가 그레이라면 날 모른 척할 리가 없잖아?
‘혹시 아가씨가 어릴 때 사고를 당한 적이 있습니까?’
‘워낙 크고 작은 사고를 많이 치고 다니던 아이라.’
에밀리가 프레아의 어릴 적을 회상하며 답했다. 워낙 덤벙거리는 아이인지라 자주 다치고, 깨지던 것이 생각나서 괜스레 미소가 지어졌다.
‘현재 윈드 님의 상태는 많이 불완전합니다. 나중에는 프레아 님의 몸에도 부담을 줄 수 있고요.’
‘그러고 보니 어릴 때 말도 없이 사라져서 찾아다닌 적이 있었네. 당시에 웬 숲에서 발견돼서 얼마나 놀랐던지.’
‘숲이라고요…….’
에밀리의 말에 매튜가 어깨를 얕게 떨며 중얼거렸다. 무언가 알기라도 하는 것 같은 그의 태도에 에밀리가 그를 가만히 살펴보았다. 저 가면 사이에 보이는 눈동자가 거슬렸다. 쓸데없이 그레이를 닮았다고 착각하게 만드는 목소리도.
‘아가씨가 윈드 님과 계약했다는 건 언제 아셨나요?’
‘으음, 크게 앓고 난 뒤에 갑자기 인형이 말을 한다고 해서 알았네.’
‘혹시 앓았다는 날이…….’
‘그래, 숲에서 감기에 들었는지 몸살을 심하게 앓았어.’
‘…….’
‘왜 그런가? 혹시 프레아에게 안 좋은 일이라도 있나?’
말없이 입술을 꾹 깨물고 있는 매튜를 향해 에밀리가 물었다. 하지만 매튜는 아무것도 아니라며, 도움 주셔서 감사하다고 한 뒤 자리를 떠났었다. 그리고 떠나기 전 그가 했던 말은 에밀리를 혼란스럽게 했다.
‘좋아 보이십니다.’
‘뭐?’
당시에는 뭐가 좋아 보인다는 건지 모를 말이었다. 뜬금없이 내뱉어진 데다 당시에는 못 알아들을 말이었으니까. 에밀리는 마차 안에서 차게 미소 지었다.
좋아 보인다고? 좋아 보여?
에밀리가 주먹을 세게 쥐었다. 어느새 메샤르에 도착한 에밀리는 성큼성큼 사무실로 올라갔다.
“후작님?”
비숍이 놀란 눈으로 에밀리를 바라보았다. 브레이크는 외출 중이었고, 그를 대신해 매튜가 일을 하고 있었다. 그는 갑작스러운 에밀리의 방문에 놀랐는지 눈을 크게 떴다. 에밀리가 조금 딱딱한 어조로 비숍에게 말했다.
“두 시간만 밖에 나갔다 오렴.”
“아, 네.”
비숍이 겉옷을 챙기곤 매튜와 에밀리를 한번 번갈아 본 후 사무실을 나갔다. 사무실 안 분위기는 차갑게 내려앉았다.
“무슨 일이신지.”
매튜가 선 채로 꼼짝도 하지 않는 에밀리에게 다가가며 말했다. 에밀리는 그런 그를 차갑게 올려다보았다.
그래, 사람이 이렇게 닮을 수는 없지. 금발이 아닌 게 뭐? 애초에 실험당했다는 걸 들었으면 짐작할 수 있던 일이잖아.
마법사에게 당했을 리 없다고? 그럼 눈앞에 있는 이 사람은 도대체 뭐란 말인가. 에밀리는 막상 눈앞의 남자를 보자 무슨 말부터 꺼내야 할지 몰랐다.
참을 수 없는 것이 물밀듯 올라왔다. 이렇게 멀쩡히 살아 있으면서 왜 저를 찾아오지 않았는지. 왜 생사조차 말해주지 않았는지. 생각할수록 화가 치밀었다.
“왜 이제야 나타났어?”
“예?”
“이십여 년 동안 날 그렇게 괴롭게 하더니 왜 지금이야?”
“그게 무슨…….”
“시치미 떼지 마. 다 알고 왔으니까.”
에밀리의 단호한 말에 매튜가 숨을 참았다. 그녀가 무엇을 다 알고 왔다는 건지 그는 직감적으로 알았다. 매튜가 그녀에게 손을 뻗으려다 멈추었다.
지금 무슨 자격으로 변명하려는 걸까. 애초에 그는 이렇게 되기를 내심 바랐다. 그런 게 아니라면 대놓고 플라리스를 프레아에게 보여주지 않았을 거다.
그나마 가면이라는 속임수로 숨길 만큼 숨겼다고 합리화했다. 알아보지 못하는 것에 안도하면서도 서운한 감정이 피어올랐다. 애써 숨겼다. 그래서는 안 된다고, 못 알아보는 게 그들에게 낫다고 생각하며 위안 삼았었다.
“못 알아보는 날 보면서 무슨 생각 했어?”
“…….”
에밀리의 목소리가 세차게 흔들렸다. 매튜는 제 가슴이 미어지는 기분이었다.
“당신이 어딘가에서든 살아 있길 바랐어. 그런데 살아 있으면서도 날 찾아오지 않았지. 그래 놓고 이제는 내 성에까지 와서 날 기만해?”
“에밀리…….”
찾아가지 않은 게 아니었다. 감시하는 눈길을 피해 그녀를 보러 갔다가 괜히 그녀가 다칠까 봐 먼발치에서 지켜만 봤었다. 모든 일이 끝나면 돌아가리라 마음먹으며 프레아를 통해 꽃을 보내기도 했었다.
그녀라면 그게 어떤 의미인지 알리라고 생각했건만……. 그녀는 몰랐던 모양이다. 가지 말라고 우는 프레아를 두고 차마 발이 떨어지지 않아 주저하던 사이 협회에 뒤를 밟혔었다.
결국 어영부영하는 사이 동료를 모두 잃었다. 그 뒤, 지독한 실험을 당하면서도 살아 돌아가려고 이를 악물고 버텼다. 협회의 비리를 밝히고 당당하게 에밀리와 프레아에게 찾아가고자 했었다.
그러나 힘겹게 도망쳐 나왔을 때 본 건 에밀리의 결혼식이었다. 몸뚱이는 이미 죽어가고 있었다. 아무리 정령의 힘을 이용해 시기를 늦추었다고 해도 죽음을 피할 수는 없는 상황이다.
그 상태에서 그레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들이 행복하길 바라고 퇴장하는 일뿐이었다. 그래서는 안 되었던 걸까. 잘못된 판단이었던 걸까. 그레이는 제 앞에서 한없이 무너져내리는 에밀리를 망연히 바라보았다. 가슴이 아릿아릿했다.
에밀리는 제게 가까이 다가오지도 못하고 머뭇거리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차오르는 분노 너머에 깊은 슬픔이 자리 잡아서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돌아오지 말지. 그런 모습으로 돌아오지 말지.
에밀리는 브레이크를 통해 손님의 상태를 전해 들었었다. 당시에는 딱한 사람이라 여기며 성에 오는 것을 허락했지만, 그가 그레이를 닮은 것을 알았을 때는 심장이 철렁했다. 그래서 더욱 그가 그레이가 아닐 거라는 가정을 계속해서 만들어냈다.
브레이크는 차분히 말했었다. 그가 마법사의 실험에서 간신히 도망쳐 나왔으나 이미 실험이 많이 진행되었다고, 실험이 성공하지 못해 부작용을 안고 살고 있다고, 그리고…….
에밀리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왜 하필 그런 꼴로 돌아온 거야?”
곧 죽을 운명이라고.
에밀리의 진한 보랏빛 눈동자에서 한줄기 눈물이 툭 하고 떨어졌다.
곧 죽을 거라고? 이제야 나타났으면서 다시 내 곁을 떠날 거라고?
이십여 년을 놓지 못한 희망이었다. 최근에야 겨우 그가 죽었을 거라는 것을 인정했다. 시체라도 찾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런 그녀를 비웃듯 반송장 신세인 그가 눈앞에 나타났다.
‘내 눈앞에서 죽으려고 온 걸까. 내가 자기를 죽은 사람 취급하니 홧김에 소원대로 시체나 주려고?’
“돌아오지 말지. 무슨 염치로…….”
“미안해.”
그가 이렇다 할 변명도 하지 않은 채 사과했다. 에밀리는 그것이 더욱 화가 났다.
뭐가 미안한데? 이십여 년을 죽은 사람처럼 나타나지 않았던 거? 애만 남기고 사라진 거? 아픈 채로 돌아온 거? 나한테 거짓말한 거?
에밀리의 어깨가 세차게 흔들렸다. 그녀가 참지 못하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휘청거리는 그녀를 본 매튜가 얼른 그녀에게 다가왔다.
“만지지 마.”
“…….”
매튜가 손에 닿은 온기를 얼른 떼어냈다. 에밀리가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죽지도 마.”
“…….”
“내가 살릴 거야. 그러니까 내 허락 없이 죽을 생각하지 말고 평생 사죄하면서 살아.”
“나는…….”
매튜가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을 느끼며 입을 열었다. 마치 평생 옆에 있어 달라는 말로 들렸다. 그의 눈빛에 묘한 파랑이 일었다. 그 순간 벌컥 문이 열리며 브레이크가 들어왔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브레이크가 움찔했다. 그의 시선이 후작에게로 향했다. 에밀리의 눈가가 운 것처럼 붉어 보였다. 슬그머니 매튜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매튜의 눈가도 제법 촉촉했다. 좋지 않은 타이밍에 들어왔다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혹시 제가 괜히 들어왔습니까?”
“아니네. 돌아가려 했어.”
에밀리가 애써 부드러이 말하곤 자리를 떠났다. 도망치듯 사라지는 그녀를 매튜가 응시했다. 그는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멍하니 서 있었다. 브레이크가 그의 옆에 가서 물었다.
“형, 후작이랑 아는 사이였어? 후작님 표정이 왜 저래?”
브레이크가 웬일로 ‘형’이라고 불렀지만 매튜는 들리지 않았다.
“……나는 방해만 된다고 생각했는데.”
매튜는 브레이크가 알아듣지 못할 말을 중얼거렸다. 그 모습이 어찌나 처량한지. 누가 보면 짝사랑하는 상대에게 호되게 버림받은 모양새였다.
하필 골라도 임자 있는 사람을 좋아하다니.
브레이크는 이미 후작과 공작의 계약 결혼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녀가 전남편에게 여전히 미련이 남아 있다는 사실도 익히 알았다. 그러니 브레이크가 생각하는 임자는 진 에드모어 공작이 아니었다.
그것보다도 어려운, 허상뿐인 남자를 말한 셈이다. 게임이 안 되는 상대에게 마음을 주려 하는, 아니, 어쩌면 이미 줘버린 매튜를 보며 그가 단호히 말했다.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이지만 관심 갖지 마. 이미 다른 분에게 마음 가 있는 사람이니까.”
“……알고 있어.”
매튜는 브레이크가 말하는 그 다른 분이 공작이라는 걸 잘 알았다. 이미 결혼까지 했으니 어찌 보면 당연했다. 하지만 아까 전 그 발언은 어쩐지 제게 미련이 남아 보였다.
정확히 무슨 뜻이냐 묻고 싶었지만 브레이크가 들어온 탓에 물어볼 수 없었다. 차라리 잘된 걸지도 몰랐다. 물어봐서 어쩌려고. 어차피 자신은 곧 죽을 운명이다.
이제 와서 되돌리려 해봤자 상처받는 것은 에밀리와 프레아다. 브레이크는 넋이 나가 있는 그를 한심하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그때 매튜가 나직이 그를 불렀다.
“……레이.”
매튜가 울먹울먹한 눈으로 브레이크를 바라보았다. 평소답지 않은 모습에 브레이크가 얼굴을 굳혔다. 아무리 스승님 다음으로 존경했던 선배라고 해도 이 우유부단한 성격은 영 존경할 수가 없었다.
“아무래도 나는 벌을 받고 있는 것 같다.”
“그걸 이제 알았냐? 형 때문에 죽었던 사람들에게 미안하면 얼른 그 물건 찾아내야지.”
“차라리 그때 죽었으면 지금보다 덜 괴로웠을까.”
“헛소리하지 마. 형이 이런 약한 소리 하는 걸 알면 형을 위해 죽은 동료들이 무덤에서 벌떡 일어날 테니까.”
“…….”
“잊었어? 형 하나에 희망을 걸고 죽은 스승님을 생각해. 나약한 소리 할 시간에 해야 할 일을 해. 형이 살 방법은 내가 지금 찾고 있으니까…….”
브레이크가 말을 잇지 못하고 멈추었다. 덩치가 산만 한 남자가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고 있어서였다. 그는 잔뜩 당황한 눈빛으로 말했다.
“아씨, 조금 뭐라 한 거로 울면 나보고 어쩌라고.”
“너 때문이 아니다. 그냥…… 크흡.”
매튜가 어울리지 않게 코를 훌쩍였다. 가관이었다. 브레이크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스승님은 도대체 정령석을 어디까지 날려 버리신 걸까.
제자들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저 얼른 나타나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매튜는 그 뒤로도 한참 훌쩍거렸다. 브레이크는 연신 혀를 차며 그가 진정되기를 기다릴 뿐이었다.
* * *
“아바마마!”
낯선 여인이 벌컥 들어와 황제를 불렀다. 황제를 아바마마라고 부를 수 있는 여인은 하나뿐이었다.
비비안 반 헤로스. 클로드의 누나이자 궁에 사는 궁녀들도 그녀를 보기 힘들 정도로 바깥출입을 안 한다는 황녀였다. 그런 황녀를 첫 입궁 날에 본 것은 어찌 보면 엄청난 일이었다.
“비비안, 이게 무슨 소란이냐.”
황제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남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체통 없이 뛰어온 것이 못마땅한 듯했다. 하지만 비비안은 옆에 누가 있다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잔뜩 화가 난 목소리로 소리쳤다.
“내 마법 구슬 어디에 있어요? 타로 카드는? 점술 책들은요!”
“버렸다.”
“아바마마!”
마법 구슬? 타로 카드? 점술 책?
프레아는 황녀가 찾는 것이 하나같이 불법적인 물건이라 멍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헤로스는 점술가와 관련한 것들을 철저히 금지했다. 괜히 백성들을 현혹한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미래를 안다는 것은 달콤한 꿀 속에 숨겨진 날카로운 검처럼, 때로는 현실을 망쳐 버리니까. 그런데 그런 물건들을 황녀가 어떻게 갖고 있던 거지?
황녀는 화려한 드레스를 입은 채 씩씩거리고 있었다. 어깨선을 그대로 드러낸 오프숄더 타입의 드레스였는데, 허리를 꽉 조인 채 그 아래로 드레스 자락이 풍성하게 퍼져 있었다.
전체적으로 푸른빛이 도는 드레스는 그녀의 피부를 더욱 창백하게 보이게 했다. 이상하리만치 온몸의 장신구가 파랬다. 파란색에 집착하는 사람처럼. 프레아는 한창 황제와 입씨름 중인 황녀를 향해 기회를 보아 예를 갖추었다.
“황녀님을 뵙습니다, 프레아 레이첼 에드모어입니다.”
흠칫.
비비안은 프레아가 있다는 걸 그제야 눈치챘는지 그대로 굳었다. 황제는 그런 황녀를 보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소후작은 이만 가 보도록.”
“네, 이만 가 보겠…….”
“데이 님……?”
프레아가 예를 갖추어 인사하다 말고 멈추었다.
데이는 또 누굴까.
프레아는 저를 향해 데이라 부르며 눈을 빛내는 황녀를 바라봤다. 어느새 비비안이 프레아에게 성큼성큼 다가와 손을 맞잡았다.
실로 무례한 행동이었지만 프레아는 아무런 말도 못 한 채 그녀를 응시했다. 그녀의 눈빛이 너무나도 초롱초롱했던 탓이었다. 비비안은 설레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나 책에서 봤어. 오늘 푸른 드레스 입으면 귀인을 만날 거라고.”
“네?”
귀, 귀인이요?
“역시, 영험하다니까!”
비비안이 확신하듯 소리쳤다. 귀인은 또 뭐고, 무엇이 영험하다는 건지. 프레아는 자신이 제대로 들은 게 맞는지 몰라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비비안이 프레아의 손을 더듬거렸다.
“어쩜, 상상 속 데이 님과 똑 닮은 사람이라니! 완전 계 탔잖아?”
“저어, 화, 황녀님?”
프레아가 당혹감에 황녀를 불렀다. 하지만 황녀는 금세 황제를 향해 고개를 돌려 외쳤다.
“아바마마! 나 이 사람 줘요!”
“비비안. 사람은 물건이 아니다.”
황제가 이마를 짚으며 단호히 거절하자 비비안이 잔뜩 심통 난 얼굴로 말했다.
“아빤 다 줄 수 있잖아요!”
“그녀는 엄연히 레이첼을 이을 소후작이다. 떼쓰지 말거라.”
주세요, 안 된다.
줄 수 있잖아요, 안 된다고 했다.
프레아는 저를 두고 아웅다웅하는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죄송하지만 저는 제 건데요, 라는 말이 목구멍에서 맴돌았다. 황제가 ‘그래, 가져라’ 하지 않는 게 다행인 일일까. 찝찝한 기분이 들었다. 프레아는 깊게 생각하기를 포기하고 나갈 기회를 엿보았다.
그녀의 말을 들어보면 자신이 누구를 닮았다는 것 같은데…….
온몸을 푸른색으로 도배하고 있는 비비안. 그녀의 발언을 생각해 보면 파란색에 집착한다기보다는 오늘의 운세, 이런 걸 보고 맞춰 입은 것 같았다.
“소후작은 이만 가 보도록.”
황제가 얼른 프레아를 보내 버려야겠다고 생각했는지 단호히 말했다. 하지만 곧바로 비비안이 소리쳤다.
“안 돼! 가면 안 돼!”
“…….”
프레아가 비비안에게 붙잡혀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못하자 황제가 엄하게 경고했다.
“비비안, 그놈의 소설책들도 당장 불태워 없애기 전에 손 놔라.”
“어쩜 그런 심한 말을…….”
비비안이 손을 슬며시 떼며 울먹거렸다. 어느새 그녀의 눈가가 촉촉해졌다.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눈동자는 무척 연약해 보였다. 황녀가 퍽 가냘파 보여서 프레아는 동요했다. 하지만 황제는 그런 비비안을 보고도 눈 하나 꿈쩍이지 않고 말했다.
“연기하지 말거라.”
“쳇.”
눈물을 글썽거리던 황녀님은 어디 간 걸까.
비비안은 황제의 말에 눈물을 뚝 그쳤다. 그녀가 울었다는 건 붉어진 눈가로만 알 수 있었다. 소름 돋는 연기의 한 장면이었다. 프레아의 동공이 심하게 흔들렸다.
하마터면 당할 뻔했다!
“그럼 이만 가 보겠습니다.”
프레아가 얼른 인사하고 뒤로 물러나자 비비안이 입맛을 다시며 그녀를 바라보기만 했다. 더 떼를 쓰지 않는 걸 보니 황제가 불태운다고 했던 소설책이 꽤 중요했던 모양이다. 그 뒤로도 등에 꽂히는 시선이 느껴졌지만 프레아는 서둘러 자리를 피했다.
* * *
“레이첼 소후작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누구시죠?”
알현실을 빠져나오자 마침 대기하고 있던 기사 하나가 프레아를 불렀다. 프레아가 의아한 빛을 띠며 쳐다보자 그가 제 소속을 밝혔다.
“황태자 전하의 직속 기사, 제이든입니다.”
“아.”
프레아가 황태자라는 말에 짧은 탄성을 냈다. 안 그래도 이번 일 때문에 그를 한 번 만나봐야겠다고 생각했던 차라 더욱 반가웠다.
“전하께서 전하실 말씀이 있으니 잠시 시간을 내달라 하셨습니다. 같이 가주실 수 있으십니까?”
“네, 괜찮아요. 안내해 주세요.”
제이든이 정중하게 동행할 것을 권하자 프레아가 가볍게 승낙했다. 제이든이 앞장서며 클로드가 있는 곳으로 안내했다.
클로드와는 예전 축하연에서 말고는 본 적이 없었다. 그때 아쉽게 대화가 끊겼던 것이 생각났다. 하지만 지금은 그가 공적으로 부른 걸 테니 사적인 이야기는 넣어두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어서 오게.”
제이든이 안내한 곳에 도착하자 클로드가 반갑게 그녀를 맞이했다. 프레아는 그를 향해 예를 갖추며 인사했다.
“미래의 태양이신 전하의 앞에 제국의 빛이 함께하시기를.”
“이리 앉게.”
클로드가 앞에 놓인 의자를 눈짓했다. 프레아가 자리에 앉자, 옆에 있던 시녀가 차를 따랐다. 클로드가 여상한 말투로 서두를 시작했다.
“쓰러졌다고 들었네. 몸은 좀 어떤가?”
“황실에도 소문이 퍼졌나 보네요. 걱정해 주신 덕분에 많이 좋아졌습니다.”
“자네가 아프니 밀리안 그 녀석이 정신을 못 차리더군. 참 우애가 깊은 남매야.”
클로드가 별 뜻 없이 두 사람의 우애를 칭찬했다. 이에 프레아가 움찔했다. 그 우애라는 단어에서 ‘애’만 남은 상황이라 더욱 그랬다. 아무래도 밀리안이 그에게 말하지 않은 모양이다.
“밀리안이 제 걱정을 많이 했었나 보네요.”
“그 녀석도 유난이지, 자네가 쓰러진 동안 성안에서 꼼짝도 안 했다네.”
“예?”
뜻밖의 말이었다. 프레아는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자신은 외출 금지를 당해서 성에 있었다지만 밀리안이 칩거할 이유는 없었다. 클로드는 처음 듣는다는 것처럼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 프레아를 보며 혀를 끌끌 찼다.
“이런, 그 녀석이 또 도진 모양이었군.”
“또 도지다니요?”
프레아가 클로드의 말꼬리를 붙잡자 그가 침착한 목소리로 설명했다.
“몰랐는가? 그 녀석, 지독한 수면장애를 앓고 있어. 그래서인지 죽은 사람처럼 몇 날 며칠을 잠만 잘 때도 있지. 못 잘 때는 며칠 동안 안 자기도 하고.”
그러고 보니 포르 섬에서도 밀리안이 통 잠을 못 자는 것 같았다. 일시적인 줄로만 알고 있었는데 그게 꽤 오래된 일이었다니. 프레아는 적잖은 충격을 받고 입을 헤벌렸다. 최근에도 밀리안의 눈가가 어두웠던 것 같다.
“언제부터였는지 아시나요?”
프레아의 질문에 클로드가 턱을 쓸며 망설였다. 잠시 후 그가 입을 열었다.
“이미 한 가족이나 마찬가지이니 영애도 알아야겠지. 공작부인이 마차 사고를 당한 날부터였네. 잠을 못 자게 된 건.”
“아…….”
공작부인의 죽음과 관련이 있었구나. 어린 나이에 어머니를 잃은 충격이 신체에도 영향을 미친 거야.
프레아는 자신이 밀리안의 상태를 놓치고 있었다는 걸 깨닫자 우울해졌다.
이래선 누나로서도, 연인으로서도 실격이잖아.
한껏 침울해진 프레아를 본 클로드가 말을 걸었다.
“안 그래도 치료를 권했는데 말을 안 들어. 자네가 한 번 얘길 해보겠나? 자네 말이라면 좀 들을 것 같은데.”
“치료요?”
“그래, 그 녀석이 못 자는 게 다 악몽 때문인 것 같아서.”
“악몽이라니요? 설마 그때부터 쭉 악몽에 시달렸다는 말인가요?”
프레아의 물음에 클로드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긍정했다.
말도 안 돼. 그게 벌써 십여 년 전 일인데…….
게다가 같이 살면서 한 번도 그가 악몽으로 힘들어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언제나 듬직한 동생이었다. 오히려 자잘한 사고를 치는 프레아 쪽이 모두의 걱정거리였을 정도로.
어떻게 그렇게 중요한 일을 여태 숨길 수가 있지?
프레아는 큰 충격을 받아 손끝이 얕게 떨렸다. 그녀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그런데 그걸 왜 여태 숨긴 거예요? 에드모어 공작께선 이 사실을 아시나요?”
“글쎄. 공작은 모를 수도 있지. 녀석이 아픈 티를 내는 법도 없을뿐더러, 그렇게 된 데에 공작이 어느 정도 일조하기도 했으니까.”
“그게 무슨 말이죠?”
날 선 물음에 클로드가 뜸을 들였다.
“으음, 이걸 자네에게 말해도 되는지 모르겠는데…….”
“이미 다 말씀하셨잖아요.”
프레아의 추궁에 클로드가 깊은 한숨을 쉬며 운을 뗐다.
“내가 말했다고 하지 말게.”
“절대 말 안 할게요.”
프레아가 냉큼 대답하자 클로드가 이야기를 시작했다.
“공작부인이 사고사로 죽은 건 알고 있겠지.”
“네, 나들이를 갔다가 그렇게 되었다고 들었어요.”
“공식적으론 공작부인 혼자 나들이를 갔다가 사고가 난 거로 되어 있지만 사실 그날 밀리안도 그 마차 안에 있었네.”
“……네?”
프레아가 너무 놀라 되물었다. 마차 안에 함께 있었다니. 그럼 어머니가 죽는 걸 두 눈으로 목격했다는 소리였다. 어린 밀리안이 받았을 충격을 생각하니 절로 얼굴이 굳어졌다. 클로드가 한차례 숨을 고르고 이어 말했다.
“그날 공작부인은 즉사했고, 밀리안은 기절해 발견되었어. 그 이후는 영애도 알다시피 에드모어 공작이 미쳐 날뛰었고. 아마 녀석이 그런 아버지를 보고 자기 상태를 숨긴 것 같아.”
“…….”
들은 적이 있었다. 아내를 잃고 미쳐 버린 공작의 이야기. 공작도 미처 밀리안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던 거다.
‘아내를 잃은 슬픔 때문에 아들의 상처를 들여다보지 못한 거야. 그래서 치료 시기를 놓쳐 버린 거고.’
프레아는 왈칵 눈물이 나려는 걸 꾹꾹 참았다.
“나도 밀리안이 악몽을 꾸는 건 전쟁터에서 알았네. 잠을 통 자지 않는가 싶더니 갑자기 죽은 듯이 자더군. 후에 시름시름 앓으며 공작부인을 부르기에 깨웠다가 죽을 뻔했어. 그때 생각만 하면 간담이 서늘해.”
클로드가 목덜미를 매만지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너도 내가 무서워지겠지?’
‘장난치지 마. 어차피 무섭다고 도망갈 거면서.’
갑자기 밀리안이 했던 말들이 생각났다. 당시에는 그냥 사춘기 소년이라 그런 줄 알았다. 하지만 최근까지도 그는 그것을 염려하곤 했다. 자신이 싫냐고, 무섭지 않냐고, 그런 말을 강박적으로 물어오곤 했다. 프레아는 애써 덤덤하게 물었다.
“혹시 밀리안과 공작부인은 사이가 어땠나요?”
공작부인이 밀리안을 무서워했나요? 진짜 묻고 싶은 말은 차마 하지 못했다. 혹시라도 그것조차 밀리안에게 상처가 될까 봐. 클로드가 과거 일을 회상하는 듯 뜨문뜨문 답했다.
“글쎄, 워낙 공작부인이 몸이 약해서 자주 보진 못했네. 몇 번 마주칠 때마다 아들을 잘 부탁한다는 말을 하곤 했지.”
“그랬군요.”
클로드가 공작부인과는 데면데면했던 모양이다. 인사치레 정도만 기억하는 것을 보면. 프레아가 그늘진 얼굴로 생각에 잠겼다.
“하여튼 그 녀석 치료 좀 받아보라고 하게. 얼굴이 피죽도 못 먹은 것 같다니까, 그래 봤자 자기가 더 잘생겼다고 어찌나 젠체하는지.”
분위기를 가볍게 하려 클로드가 농담을 건넸다. 프레아도 눈치껏 말을 받았다.
“으음. 엄밀히 말하면 잘난 척은 아니죠. 진짜 잘났으니까.”
“자네도 동생과 별반 다르지 않은 별종이었군. 이럴 땐 상대방의 말에 동조를 해주는 거네.”
“동조하기 어려운 일인걸요.”
프레아가 싱긋 웃으며 대꾸하자 클로드가 질색하며 혀를 내둘렀다. 덕분에 무거운 분위기가 조금 가벼워졌다. 프레아는 진심을 담아 말했다.
“저는 밀리안처럼 잘생긴 사람을 본 적이 없어요.”
“자네 이제 보니 브라콤이었구먼.”
브라콤이라. 그럴 수도 있겠다. 제 눈에는 밀리안이 그 누구보다 멋졌으니까. 어떻게 눈 그늘이 짙어도 잘생길 수가 있지? 이건 콩깍지가 껴서라기보다는 객관적인 사실에 가까웠다.
밀리안은 아파도, 화나도, 잘생김이 사라지지 않는다고!
프레아는 이미 자신의 안목에 객관성은 사라졌다는 걸 알지 못했다. 클로드가 단호한 프레아의 표정을 보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밀리안이 왜 그렇게 누이를 따르나 했더니 같은 부류여서 그랬던 모양이라고 생각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