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장 그날 이후
그날 이후 일주일이 지났다. 에밀리에게 자택 근신 처벌을 받은 프레아는 바깥 상황을 전혀 알지 못한 채 멍하니 창밖에 시선을 두었다. 생각보다 부모님의 실망이 컸던 모양이다.
모든 정황을 들은 에밀리와 진은 크게 화를 냈다. 옆에서 에밀리를 안정시키던 진도 그답지 않게 화를 삭이지 못했다. 아마도 마탑이 건국을 위해 반란을 꾸미고 있었다는 말이 그들에게 자극이 된 것 같았다.
마탑이 진행하는 연구의 뒤를 봐줄 조직은 반란군밖에 없으니까. 에밀리도 그렇고 진도 그렇고, 반란군에 대해서만큼은 늘 엄격하고 단호했다. 프레아는 숨김없이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
마탑에서 오랜 시간 대규모 정령 실험이 이루어진 것과 마탑 내부가 두 파로 나뉘어 싸웠다는 것, 정령 협회가 마탑과 모종의 거래를 하고 있었다는 것까지 모조리 말했다.
그 결과가 외출 금지령이었다. 프레아는 부모님의 강경한 체벌에 적잖이 당황했다. 아무래도 그런 엄청난 일을 하면서 언질조차 않은 것에 괘씸죄가 더해진 것 같았다.
그래서 조용히 일을 해결하고 싶었던 건데…….
자신이 쓰러져 피를 토한 탓에 더는 숨길 수 없게 된 셈이었다. 게다가 아침에 밀리안과 한 침대에 있어 생긴 오해를 풀려면 다 말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밀리안도 화를 피하지는 못했다. 잠에서 깨자마자 진에 의해 축객령을 당했고, 이후 성에는 얼씬도 못 하고 있었다. 두 남매가 짜고 부모를 속였다는 것이 이유였다.
밀리안이라면 아무리 부모님이 성에 못 오게 한다 해도 창을 통해 올 수 있을 텐데, 그는 정말 오지 않고 있었다. 우체통에 여러 번 편지를 보냈지만 답장도 오지 않았다.
답장을 안 할 사람이 아닌데 소식이 없으니 슬슬 걱정이 밀려왔다. 마지막으로 본 그가 잔뜩 흐트러졌던 모습이라 더욱 염려되었다. 분명 자신이 갑자기 쓰러져서 많이 놀랐을 것이다. 아픈 사람 앞에서 정신까지 놓았으니 얼마나 죄책감에 빠져 있을까.
밀리안을 생각하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뭐라도 알고 싶은데 사방이 벽에 둘러싸여 볼 수 있는 것은 창밖 풍경이 다였다. 프레아는 마음만 먹으면 몰래 나갈 수 있지만 워낙 경비가 삼엄하고 들키면 정말 답이 없을 것 같아 조용히 지내고 있었다.
‘에리카 님이 오늘도 왔다가 그냥 돌아가셨어요.’
시에라가 슬쩍 전해준 말이 떠올랐다. 에리카라면 그냥 들여보내 줄 법한데 진이 허락하지 않아 그녀는 벌써 3번이나 헛걸음을 했다.
‘나중에 에리카한테 다 설명해야겠다.’
프레아는 에리카에게 미안한 마음에 그렇게 다짐했다. 그녀가 지금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부모님의 화가 누그러지기를 바라는 것뿐이었다. 그때 시에라가 노크하며 들어왔다.
“식사하실 시간이에요.”
시에라가 다정히 말하며 프레아의 앞에 정갈한 음식들을 내려놓았다. 방 안에서 모든 일을 해결하는 상황이 제법 익숙했다. 프레아는 자연스럽게 의자에 앉아 음식이 차려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몸은 좀 어떠세요?”
시에라가 수프를 떠먹는 프레아를 향해 조심스레 물었다. 프레아는 그런 시에라를 말갛게 쳐다보았다. 그녀의 얼굴에는 모시는 주인이 어디 아프지는 않은지 하는 염려가 묻어 있었다.
아, 걱정을 끼친 사람이 여기 또 있구나.
“일주일간 아무것도 안 하고 영류 순환만 했더니 많이 좋아졌어.”
프레아가 애써 씩씩한 목소리로 답했다. 사실 일주일간 푹 쉬고 나니 몸 상태는 전처럼 좋아졌다. 물론 완전히 회복한 건 아니지만 굳이 말하지 않았다. 시에라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자 프레아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부모님은 아직도 화 많이 나셨어?”
“으음, 워낙 평상시랑 똑같으셔서 잘 모르겠어요.”
“그렇구나.”
“아, 최근에 황실에서 여러 번 사람이 오가긴 했는데 무슨 대화를 하셨는지까지는 몰라요.”
시에라가 소곤거렸다. 황실에서 사람이 왔다면 이번에 자신이 벌인 일과 관련이 있을 것 같았다. 경과를 설명하러 왔을 수도 있고, 조사를 위해 왔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자신이 방 안에만 있는 걸 보면 모든 걸 부모님 선에서 끊어내고 있는 듯했다. 식사를 마치자 시에라가 식기를 쟁반에 담아 도로 나갔다.
프레아는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창밖을 응시했다. 마침 낯선 마차가 막 성에 들어오고 있었다. 금칠한 마차 외벽에는 황실 문양이 선명하게 그려져 있었다.
강렬하게 타오르는 금빛 태양과 차갑고 깊은 검은 달이 서로를 잡아먹듯 겹쳐 있는 문양이었다. 저렇게 황실 문양을 대놓고 드러낸 마차를 타고 오는 걸 보니 황족인 것 같았다. 프레아가 뚫어지게 마차를 응시하는데 익숙한 인영이 보였다.
“……대공님?”
프레아는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평소답지 않게 예복을 갖춰 입은 에시드는 황족으로서 공식적으로 방문한 것인지 위풍당당하게 마차에서 내렸다. 에밀리와 진이 맞이하는 걸 보니 예견된 방문인 모양이다.
프레아가 에시드에게 시선을 두고 있는데 때마침 고개를 든 그와 눈이 마주쳤다. 허공을 가르고 고정된 그의 시선을 프레아는 피하지 않았다. 그가 한참 그녀를 그윽이 바라보더니 곧 성으로 들어왔다.
그들이 완전히 보이지 않게 되자 프레아가 허무한 얼굴로 침대에 풀썩 누웠다. 그때 띠링, 하는 반가운 소리가 금고에서 들렸다. 프레아가 벌떡 일어나 금고 속 우체통을 열었다.
밀리안의 편지였다. 프레아는 다시 침대로 가 두근두근하는 마음으로 봉투를 뜯었다.
[늦게 연락해서 미안. 곧 보러 갈게.]
비교적 짧은 메시지였다. 프레아가 편지를 여러 차례 읽으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히 큰일 없이 잘 지내고 있는 모양이다. 하도 연락이 없어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닐까 조바심이 들었던 마음도 안정을 되찾았다.
“빨리 와, 바보야…….”
프레아가 베개에 얼굴을 묻은 채 중얼거렸다. 무심해 보일 수 있는 그 편지가 프레아는 마냥 반가웠다. 그가 힘을 제어하지 못할 때면 늘 자기만의 동굴 속에 몸을 묻고 몇 날 며칠 나오지 않는다는 걸 알아서였다.
연애를 시작하긴 했는데 그 주변에 얽힌 것이 복잡해져만 갔다. 제게 잔뜩 화난 부모님에게 밀리안과의 관계를 말하는 건 지뢰를 밟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날 밀리안은 진이 화를 내며 축객령을 내릴 때, 일언반구도 없었다. 또 자기 탓이라고 여기고 있을 게 뻔해서 얼른 그를 보듬어주고만 싶었다.
타이밍 한번 참 얄궂다. 거짓말해서 외출 금지를 받았는데, 또 다른 거짓말이 숨어져 있었다는 걸 알면 어떻게 될까. 게다가 그 거짓말은 평화로운 시간을 송두리째 흔들 수도 있는 중차대한 문제였다.
그때는 지금처럼 간단히 끝나지 않으리라. 프레아가 축 늘어진 채 꼬여 버린 상황을 원망하고 있는데 누군가 노크했다.
“아가씨, 랭입니다.”
“들어와.”
프레아의 허락에 랭이 문을 열었다. 프레아는 여전히 침대에 엎드린 채 고개만 돌려 랭에게 시선을 던졌다.
“무슨 일이야?”
“공작님께서 귀빈실로 모시고 오라 하셨습니다.”
“어? 나 나가도 돼?”
랭의 말에 프레아가 화들짝 놀라며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에 랭이 푸근한 미소를 띠며 고개를 끄덕였다.
“준비되는 대로 나오십시오. 밖에서 대기하겠습니다.”
랭이 한 걸음 비켜서자 시에라가 방에 들어섰다. 랭은 말을 끝내고 문을 닫았고, 시에라는 프레아에게 다가와 그녀의 머리를 손질해 주었다. 손님맞이용 드레스로 갈아입고 치장을 마친 프레아가 방을 나서려는데 시에라가 속삭였다.
“지난번에 오셨던 신사분이 귀빈실에 계세요.”
“응, 창으로 봤어.”
프레아가 담백하게 대답하며 대기하고 있던 랭을 따라 귀빈실로 향했다. 드디어 외출 금지령이 풀리려는 모양이다. 어쩐지 발걸음이 산뜻해졌다.
귀빈실 앞. 랭이 한차례 노크하며 프레아가 왔음을 알렸다. 안에서 허락이 떨어지자 문이 열렸다. 진과 에밀리, 에시드가 마주 보고 앉아 있었다.
에시드와 시선이 마주치자 그가 부드러이 미소 지었다. 마치 아무것도 걱정하지 말라는 얼굴이었다. 프레아는 그에게 예를 갖춰 인사했다.
“에시드 안 헤로스 대공님께 제국의 빛이 함께하시기를.”
프레아의 정중한 태도에 에시드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곤 시선을 거두었다. 프레아가 자연스럽게 에밀리의 옆에 앉았다. 에밀리가 프레아에게 말했다.
“황실에서 너를 초대한다는구나.”
“네?”
프레아는 뜻밖의 초청에 두 눈을 크게 떴다. 황실 문양의 인을 친 봉투가 테이블 위에 놓여 있었다. 그때 가만히 프레아를 응시하던 에시드가 나직이 말했다.
“이번 일에 큰 공을 세운 그대에게 황제께서 친히 치하하고 싶다 하셨네.”
“이번 일이라 함은…….”
프레아가 멍한 얼굴로 말꼬리를 흐렸다. 바깥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전혀 알지 못해 눈을 도르르 굴렸다.
‘공이라고 말하는 걸 보면 일이 잘된 것 같은데…….’
어리둥절한 프레아의 표정에 에시드는 제법 서늘한 얼굴로 진을 바라보았다. 그런 그를 프레아가 의문이 가득한 얼굴로 쳐다보았다.
평소와 사뭇 다른 분위기 탓도 있지만 그에게서 전에 느껴보지 못한 불쾌한 기운이 감지되었다. 평소에 마법사들과 마주칠 때마다 느꼈던 감각과 비슷했다.
“아직 말하지 않은 모양이군.”
에시드의 차가운 음성이 방 안을 울리자 진이 담담한 얼굴로 대답했다.
“황실에는 큰 공을 세웠으나 가문에는 큰 우려를 끼쳐 섣불리 말하지 않았습니다.”
진은 자신의 선택에 일말의 잘못도 없다는 듯한 태도였다.
“신중한 것도 좋으나 마땅히 축하할 일을 숨기는 것도 좋지 못하네.”
“주의하겠습니다.”
에시드가 연달아 책망하자 진이 가볍게 유감을 표했다. 두 사람의 주고받는 대화로 열심히 추측하건대 마탑의 일이 잘 해결된 것이 확실해 보였다. 프레아는 잠자코 세 사람의 대화를 듣기만 했다.
“황실에서는 이번 사건이 반란군과 관계있다는 것으로 확정했네. 마탑의 실험도 모두 폐기했고.”
에시드는 황실의 입장을 대변하듯 설명했다. 아마도 프레아가 이번 사태를 잘 알지 못하니 자세히 이야기하는 것 같았다.
“또한 황제 폐하께선 황실의 큰 위협이 될 뻔한 키메라 실험을 조기에 발견해 준 밀리안 테일러스 경과 프레아 레이첼 에드모어 경의 공을 치하하기 위해 연회를 베풀겠다 했으니 꼭 참석하길 바라네.”
에시드의 요구에 진과 에밀리가 고개 숙여 대답했다.
“그렇게 알고 준비하겠습니다.”
이로써 외출 금지령이 끝이 난 듯했다. 황제가 직접 초청하겠다는데 가문의 예법을 들먹일 순 없을 테니까.
“연회는 언제 열립니까?”
“2주 뒤에 열 예정이네. 물론 그 전에 황제 폐하께서 프레아 레이첼 에드모어 경을 보고 싶다 하니 입궁을 준비하도록.”
“예. 그렇게 하지요.”
얼추 대화가 마무리되어 파하려는데 에시드가 입을 뗐다.
“나는 소후작과 할 말이 있으니 먼저들 나가보게.”
“……알겠습니다.”
진과 에밀리가 짧은 침묵 끝에 무거운 목소리로 대답하고 귀빈실을 나갔다. 에시드와 단둘이 남게 된 프레아가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황족으로서, 대공이라는 작위를 내세우고 찾아온 에시드는 이전에 만났던 그와 사뭇 달랐다. 늘 말랑말랑한 태도를 보였던 것과 달리 목소리부터 단호함이 묻어났다. 그런 그가 낯설었지만 궁금함이 앞서 프레아는 대뜸 질문했다.
“어떻게 된 거예요?”
에시드는 대답 없이 프레아를 응시했다. 아까의 냉랭함을 풍기던 분위기는 누그러졌지만 평상시답지 않은 것은 여전했다. 거기다 희미하긴 하지만 머레니에게서 느꼈던 마법 기운이 그에게서도 느껴졌다.
‘분명 그전에는 느끼지 못했었는데.’
불쾌한 기운이 스멀스멀 피어올라 프레아는 저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렸다. 도대체 자신이 쓰러지고 무슨 일이 생긴 건지. 잘은 몰라도 에시드에게 뭔가 변화가 있었다는 건 확실한 듯했다. 정작 본인은 말할 생각이 없어 보였지만. 잠시 뒤 그가 나직이 말했다.
“그날 이후 마탑은 폐쇄 상태네. 협약은 깨진 지 오래고 문제라면…….”
에시드가 뒷말을 삼키며 숨을 골랐다. 프레아는 마탑이 폐쇄 상태라는 말에 적잖이 놀랐다. 머레니와 만난 직후. 마법사들이 건국을 위해 키메라 군단을 만들려 한다는 걸 들었을 때, 들키면 황실이 강경하게 대응할 거라곤 예측했다.
그런데 그게 폐쇄로까지 이어지다니. 처분이 신속하다 못해 과한 느낌이었다. 하지만 이 의문은 금세 해결되었다. 프레아는 이어지는 에시드의 말에 폐쇄된 이유가 단순히 실험 때문이 아니었음을 알아챘다.
“그날 관계자들을 색출하는 과정에서 마법사들의 집단 자살이 있었네.”
“……네?”
“게다가 마탑주는 행방불명인 상태고, 그들의 추종자로 보이는 마법사가 대거 사라졌지.”
프레아는 충격받았다. 집단 자살도 놀랄 일이지만 마탑의 마법사들이 사라질 거라곤 전혀 짐작도 못 했다. 정령 실험이 들키긴 했다.
하지만 그건 반란을 도모하려 했던 게 아니라 우기면 시간을 벌 수도 있는 일이다. 그들은 항상 그런 식으로 죄목을 요리조리 피해왔으니까.
“이해가 안 돼요. 황실은 그럼 증거도 없이 어떻게 마탑을 반란군과 한패라고 단정한 거죠?”
“마탑에 내부 고발자가 있었으니까.”
“내부 고발자라면…….”
에시드가 조금 낮은 목소리로 말하자 프레아가 얼버무렸다. 불현듯 떠오른 누군가가 있어서였다.
“머레니 코헨. 마탑에 가기 전부터 그녀는 황실 감옥에 구금됐었네. 자진해서 왔다는군. 현재는 그녀를 어떻게 할지 내부에서 논의 중이야.”
프레아가 입을 헤벌렸다. 혹시나 했는데 정말 머레니 코헨이라니. 에시드가 잠시 말을 멈추고 프레아를 살폈다. 계속 이야기해도 되는지 묻는 것 같았다.
“계속하세요.”
프레아의 독려에 에시드가 이어 말했다.
“그녀가 아무리 마탑의 중요 자료를 넘겨주었다고 해도 실험에 깊게 관련된 건 사실이라 책임을 피하지는 못할 거네. 게다가 지금 마땅히 남아 있는 마법사들이 없어서…….”
“말도 안 돼.”
프레아가 저도 모르게 얕은 탄성을 내뱉었다.
머레니가 왜 굳이?
무엇을 위해서 그런 짓을 벌인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녀는 마탑의 존속을 원했는데, 처벌을 피할 수 없는 감옥에 자진해서 들어가 스스로 마탑을 대표해 심문을 당하고 있다니.
뭔가 앞뒤가 안 맞았다. 설마 그녀가 정말 원한 건 따로 있었던 걸까. 에시드는 혼란스러운 얼굴을 한 프레아에게 담담히 말했다.
“당시 포박했던 대부분의 마법사는 죽었고, 나머지는 전부 사라진 상태네. 코헨 가문도 머레니를 제외하고 모두 사라진 상태고.”
“제가 아무것도 모르고 편하게 쉬고 있었네요.”
프레아가 착잡한 표정을 짓자 에시드가 입을 달싹이며 머뭇거렸다.
“……쓰러졌다고 들었다. 공작도 그대의 상태를 염려해서 그런 명령을 내린 거겠지.”
에시드가 조금 딱딱한 어조로 말했다. 그의 일렁이는 눈동자에서 잠시간 걱정이 묻어났지만 이내 가려졌다. 꾹꾹 눌러 참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프레아가 그런 그를 물끄러미 보며 덤덤하게 말했다.
“하지만 맡은 일을 끝까지 마무리하지 못한 건 조금 찝찝하네요.”
“그대는 할 만큼 했어.”
에시드가 마침표를 찍듯 내뱉은 말을 끝으로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에시드가 애써 제게 딱딱하게 구는 듯해 프레아는 몹시 신경 쓰였다.
“대공님, 혹시 무슨 일 있으세요?”
“아니, 아무것도…….”
에시드가 우물거렸다. 계속해서 미적지근한 반응을 보이자 프레아가 장난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그럼 이제 계약 끝난다고 내외하시는 거예요?”
“아니야, 그런 게 아니라…….”
“그것도 아니면 어디 떠나기라도 하세요?”
“……뭐?”
떠난다는 말에 에시드가 멍한 표정으로 프레아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가벼운 질문들로 물 흘러가듯 제 속내를 파악하려는 것을 눈치챘기 때문이다. 그는 속마음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입을 꾹 다물었다.
‘마음을 들키기라도 한 듯한 반응……. 그냥 찔러본 건데 얼추 맞은 모양이네.’
한순간 그의 표정이 어벙해진 걸 프레아는 놓치지 않았다. 프레아가 그를 향해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자꾸 어디 떠날 사람처럼 선을 그어서 하는 말이에요.”
“그렇게 보였나.”
그냥 해본 말이라고 가볍게 덧붙이자 에시드가 조금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어쩐지 수상한 태도에 프레아는 그가 떠날 만한 일이 있었나 생각해 봤다.
그는 외가와도 사이가 좋지 않은데, 어디로 떠난다는 걸까? 어디 멀리 요양을 가려는 게 아니라면 마땅히 갈 만한 곳도 없다. 그렇다면 그냥 뭔가 떠나고 싶다는 욕구만 지녔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래도 말은 하고 갔으면 좋겠는데. 갑자기 사라지면 좀 섭섭할지도.’
그런 생각이 들자 프레아의 입가에 픽 웃음이 흘렀다. 그새 친해지기라도 한 걸까. 에시드가 말없이 떠나 버리면 조금 섭섭할 것 같다니. 프레아가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디 가시면 간다고 말이라도 하고 가세요.”
“…….”
“대공님이 갑자기 사라지시면 조금 섭섭할 것 같거든요.”
프레아의 솔직한 발언에 에시드의 눈이 한차례 일렁이다 잠잠해졌다. 그의 안에서 무언가 허물어지듯 깊은 한숨이 쏟아져 나왔다. 이내 에시드가 느른한 미소를 띠며 말했다.
“그대는 정말 이상해.”
프레아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대꾸했다.
“으음, 대공님? 아무리 제가 편하다고 해도 면전에서 인신공격하시는 건 너무한데요? 좀 황당하다.”
그러자 에시드가 가벼운 웃음소리를 냈다.
“뭐예요? 그 반응은?”
프레아가 몹시 불만스럽게 되물었다. 한순간에 주변을 감싼 조금 텁텁하고 불편했던 분위기가 몰라보게 바뀌었다. 에시드가 한참 뒤 프레아를 향해 말했다.
“에시드.”
“네?”
“대공님 말고 에시드라고 불러도 된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대공님을 어떻게…….”
“지금은 둘만 있지 않은가?”
에시드가 서글서글한 미소를 띠었다. 그는 도무지 눈앞의 상대를 쳐낼 수 없을 것 같다 생각했다. 그와 그녀 사이에 놓으려고 했던 작은 벽이 채 완성되지 못하고 다시 허물어졌다.
프레아는 에시드가 도무지 무슨 생각으로 저러는지 몰라 고개를 갸웃거렸다. 결국 재차 거절할 순 없어 그의 뜻을 들어주기로 했다.
“알겠어요, 에시드.”
프레아의 입에서 제 이름이 나오자 에시드의 볼이 옅게 붉어졌다. 그의 입가에 호선이 그려졌다. 에시드는 스스로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모르는 듯했다. 프레아는 그런 그를 보고 참 수줍음이 많으시네 하며 덩달아 미소 지었다.
* * *
에시드가 돌아간 뒤. 프레아는 창밖을 응시한 채 그와 나누었던 대화를 다시 상기했다.
‘이번 일은 반란군이 벌인 것으로 확정된 만큼 관련 인물을 하나둘 심문하고 있어.’
‘진척은 좀 있나요?’
‘아니. 어떻게 알았는지 정령 협회 간부들은 미리 도주했더군. 현재 지명 수배령을 내리긴 했는데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꽤 난항을 겪겠네요.’
‘미리 포박한 마법사들은 죽거나 사라졌으니 더 큰일이지. 이상한 건 사라진 사람들이나 죽은 사람들이나 모두 구속구를 낀 상태라 마법을 쓸 수 없었다는 점이야.’
‘결국 구속구를 차지 않은 누군가가 그들을 이동시켰다는 거네요.’
‘그런 셈이지.’
프레아는 지끈거리는 이마를 짚었다. 실은 에시드에게 구속구에 관해 듣자마자 마탑주가 떠올랐다. 머레니는 분명 마탑주가 인장을 통해 마법사들의 생명을 쥐락펴락할 수 있다고 했다.
한마디로 마탑주는 마탑의 마법사들을 언제든 죽일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현재 행방불명인 것을 보면 아마 마법사들의 집단 자살이 타살일 가능성이 높았다.
황실은 아직 그 인장에 대한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자살이라고 추측하는 듯했다. 그들이 제 몸에 시한폭탄과도 같은 마법을 품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못했겠지.
그런데 에시드라면 알고 있을 텐데 왜 따로 말하지 않았을까. 프레아는 그에게서 느낀 불쾌한 기운이 생각났지만 애써 지워냈다. 지금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니었으니까.
‘마탑주는 왜 마법사들을 죽였을까.’
어쩌면 비밀이 새어 나가기 전에 불길한 싹을 치운 걸지도 몰랐다. 게다가 그의 추종자를 모두 순간 이동시키지 않았는가. 아직도 그 빌어먹을 마법사의 나라에 대한 희망을 포기하지 않은 것 같았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머레니가 일이 터지기 전에 황실에 자진해서 찾아갔다는 점이다. 머레니는 이미 마탑의 밤 때 황실 감옥에 갇힌 상태라 마법이 통하지 않았다.
지하 감옥은 철저히 마나가 차단된 곳이라 안에 갇힌 사람에게 임의로 순간 이동이나 다른 마법을 사용할 수 없다. 구속구가 그것을 찬 사람의 마나만 차단한다면, 황실 감옥은 아예 모든 마나를 차단하는 곳이었다.
정황상 추종자들을 순간 이동시켰다고 보는 쪽이 맞는 듯했지만, 그 속에 머제리 코헨과 그의 가문이 속해 있다는 건 어딘가 찝찝했다. 머레니가 내부 고발자라는 걸 마탑주가 알아챘다면 그들이 살아 있을 가능성은 없다.
“아무래도 마탑에 가봐야겠어.”
영 개운치 못한 마음에 프레아는 겉옷을 챙겼다. 폐쇄된 상태라고 해도 기척을 줄이고 다녀오면 괜찮을 것 같았다. 황실에선 실험과 관련된 것을 모두 파기하고 자료들을 압송했다고 했다.
하지만 마탑주가 사라진 시점이다. 즉, 정말 중요한 자료는 진즉 빼돌렸을 가능성이 있다는 말이다. 게다가 마탑에서 본 실험은 꽤 체계적이었다. 키메라 군단을 양성하려 했던 흔적이 역력했다.
아무리 마탑이 철옹성 같은 곳이라고 해도 위험을 대비한 공간 하나쯤은 있을 것 같았다. 정말 있다면, 도주한 마탑주를 찾는 데 큰 도움이 되리라.
프레아가 막 창밖으로 뛰어내리려는 순간, 누군가 방 안으로 폴짝 뛰어들어 왔다. 은발이 달빛에 반사되어 흰빛을 더욱 발하며 빛을 냈다. 은빛 속눈썹 아래의 붉은 눈이 프레아를 바라보았다.
프레아는 방금 자신이 무얼 하려 했는지 잊은 채 넋을 놓고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열리지 않을 것처럼 굳게 닫힌 입술이 서서히 벌어지고, 나직한 음성이 들렸다.
“어디 가?”
밀리안이었다. 프레아는 눈앞에 나타난 밀리안이 현실이 맞나 싶어 눈을 깜빡깜빡했다. 감았다가 떠도 밀리안은 사라지지 않았다. 밀리안을 보며 프레아가 멍하니 있자 그가 가까이 다가와 프레아의 볼을 매만졌다.
“아직도 아파?”
걱정이 뚝뚝 묻어나는 목소리였다. 프레아가 조금 얼떨떨한 얼굴로 말했다.
“아, 아니. 그냥 네가 갑자기 나타나서.”
그러곤 어쩐지 부끄러워 시선을 내리깔자 밀리안이 부드러이 웃었다.
“보러 가겠다고 했잖아.”
밀리안이 프레아의 볼을 쓸며 다정히 대답했다. 이에 프레아의 시선이 잠시 밀리안을 향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다른 곳으로 옮겨졌다. 막 나가려 했던 차라 방 안은 어두웠다. 오로지 달빛만으로 서로의 얼굴을 마주하고 있었다.
어두운 곳에 단둘이 있으니 조금 의식되었다. 티 나게 제 눈을 슬슬 피하는 그녀의 행동이 어딘가 수상했다. 밀리안이 눈을 가늘게 뜨며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가늠하려 했다. 잠시 뒤 그는 그녀의 턱을 들어 올려 시선을 맞추었다.
“왜 내 눈 피해?”
“……너무 오랜만이라서.”
프레아가 쑥쓰러워하며 말했다. 차마 네가 야밤에 갑자기 찾아와서 의식하게 된다고 이야기하지 못했다. 밀리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프레아가 힐끗 그를 보았지만 하필 달빛을 등지고 있어서 무슨 표정을 짓는지 파악이 되지 않았다. 밀리안이 프레아의 눈치를 살피더니 이내 흥미롭다는 듯이 ‘흐음’ 하는 소리를 냈다.
그러곤 프레아의 팔을 끌어당겨 제 품에 가까이 두었다. 그가 무척 여유로운 목소리를 뱉었다.
“내가 많이 보고 싶었나 봐.”
“그럼 안 보고 싶어?”
“어?”
한 치의 망설임도 없는 프레아의 답변에 밀리안이 오히려 할 말을 잃고 바보 같은 소리를 냈다. 조금 장난을 치려고 했을 뿐인데 그녀가 먼저 듣고 싶은 말을 해주니 기분이 오묘했다. 프레아는 괜히 헛기침을 큼큼하고 덧붙였다.
“아무리 아버지가 오지 말라고 했다지만, 어쩜 한 번을 안 와.”
“아…….”
밀리안이 낮은 탄성을 내뱉었다. 저만 보고 싶었을까 초조했던 감정이 그녀의 말 한마디로 사그라들었다. 저를 향해 툴툴거리는 프레아가 어쩐지 낯설면서도 기분이 좋았다. 밀리안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걸렸다.
“더 이상 밉보이면 안 될 것 같았거든.”
“나한테 밉보이는 건 괜찮고?”
프레아가 새침한 표정을 지었다. 밀리안은 그런 프레아를 내려다보았다. 제 품에 안겨 있음에도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는 그녀가 낯설었다.
부모님 말씀이라면 철석같이 순종하던 그녀가 오히려 그들의 말을 왜 곧이곧대로 따랐냐고 탓하는 상황이라니. 프레아는 스스로가 달라진 줄도 모르는지 연신 그를 물끄러미 보았다. 마치 어서 답해보라고 요구하는 것처럼.
기분이 이상했다. 하지만 나쁘지 않았다. 아니, 좋은 것 같다. 밀리안은 속에서부터 올라오는 이상한 감정을 주체할 수 없었다. 그가 그대로 고개를 내려 무어라 말하려던 프레아의 입술을 막았다.
창을 타고 바람이 살랑살랑 나부꼈다. 프레아는 그가 입을 맞추리라 예견이라도 한 것처럼 두 눈을 감았다. 밀리안도 눈을 감은 채 부드러이 프레아의 입안을 쓸었다.
프레아가 그의 허리를 꼭 붙들었다. 보드라운 입술이 프레아의 아랫입술을 지분거렸다. 사람의 입술이 이렇게 말캉할 수 있단 말인가. 밀리안은 프레아가 사랑스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잠시 뒤 두 입술이 떨어지자 프레아가 아쉽다는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무방비한 그녀의 표정에 밀리안이 손에 힘을 주었다. 그가 프레아의 이마에 제 이마를 가져다 대며 나직이 속삭였다.
“가만히 있어도 홀리는 기분이야.”
“응?”
그가 입을 열고 무어라 할 때마다 그의 숨결이 코끝을 간질였다. 밀리안이 다시 한번 프레아의 입술을 훔치고 떨어지며 말했다.
“근데 제일 웃기는 게 뭔지 알아?”
“뭔데?”
프레아가 낯을 붉히며 대꾸했다. 그의 말이 간질간질해서 속에서 거품이 몽글몽글 피어나는 기분이었다. 밀리안이 슬그머니 그녀를 품에 붙든 채 걸음을 옮겼다. 턱, 하는 소리와 함께 침대 끝에 프레아의 다리가 걸렸다.
풀썩.
프레아가 침대 위로 넘어져 걸터앉게 됐다. 그녀의 눈이 세차게 흔들렸다. 밀리안이 천천히 상체를 내리며 프레아의 이마에 짧게 입을 맞추었다. 눈이 어둠에 익숙해져 아까완 달리 그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그의 눈에 연한 불꽃이 일렁이려 했다.
그 순간 지난번 그가 정신을 놓고 쇄골을 지분거리던 것이 떠올랐다. 얼굴이 홧홧해졌다. 그때의 연장선 같았다. 밀리안이 그런 프레아를 보며 예쁘게 웃었다.
“홀리는 줄 알면서도 헤어 나오고 싶지가 않다는 거야.”
“호, 혹시 또 정신을 놓으려는 거야?”
프레아가 아닌 줄 알면서도 애써 화제를 돌렸다. 그렇지 않으면 정말 어떻게 될지 몰라서였다. 이에 밀리안이 피식, 가소롭다는 듯이 비웃었다.
“프레아는 이 와중에도 날 동생 취급하네. 지금 내가 제정신이 아닌 거로 보여?”
밀리안이 제 목을 조이던 넥타이를 거칠게 풀어 바닥에 떨구었다. 프레아의 시선이 떨어지는 넥타이로 향했다. 저게 저렇게 단숨에 풀어지는 물건이었나. 저도 모르게 입안에 침이 고였다.
“그래, 정상이 아니라면 아니겠지. 나도 내가 이렇게 속이 까만 놈인 줄 몰랐으니까.”
그가 이번에는 셔츠의 단추를 하나둘 풀어냈다. 단추가 하나씩 풀릴 때마다 심장이 세차게 방망이질했다. 그 사이로 탄탄하게 자리 잡은 근육들이 프레아의 시선을 어지럽혔다.
“그냥 돌아가려 했는데 날 유혹한 건 너야.”
“내, 내가 언제.”
“말했잖아, 가만히만 있어도 홀리는 것 같다고. 근데 그 예쁜 입으로 자꾸 예쁜 말만 하는데 내가 그냥 돌아갈 수 있을까?”
밀리안이 프레아의 입술을 손가락으로 꾹 누르며 말했다. 프레아는 멍하니 밀리안을 바라보았다. 심장 소리가 너무 크게 들렸다. 그가 말도 안 되는 궤변으로 이 모든 게 제 탓이라고 말하고 있음에도 반박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밀리안이 단추를 모두 풀고 셔츠를 벗어 던졌다. 훤히 드러난 성난 근육들에 프레아가 한차례 숨을 참았다. 밀리안이 그런 프레아를 보며 경고하듯 말했다. 야수 같은 모습이었다.
“신사적으로 굴고 싶은데, 너만 보면 사나워지는 기분이야.”
“……아.”
프레아가 얕은 신음을 내뱉었다. 그 말을 끝으로 밀리안이 프레아의 허리를 양팔로 들어 올려 침대에 누이었다. 그러곤 어느새 그 위로 가뿐히 올라타 예쁘게 미소 지었다.
유혹하는 것이 명백한 시선. 시선을 어지럽게 하는 예쁜 근육들. 쇄골을 타고 목울대, 턱, 입술, 코, 눈, 이마까지. 안 예쁜 곳이 없는 밀리안이야말로 가만히 있어도 저를 홀리기에 충분했다.
프레아가 저도 모르게 침을 꼴깍 삼켰다. 밀리안이야말로 지금 온몸으로 자신을 유혹하고 있다는 걸 알까. 프레아는 제가 하고 싶은 말을 그가 하고 있다고 생각하며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부끄럽지만 그가 하려는 게 무엇인지 알면서도 피하고 싶지 않았다. 밀리안이 프레아의 목이 한차례 일렁이는 것을 보며 나직이 물었다.
“긴장했어?”
“으으, 묻지 마.”
프레아가 잔뜩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에게 완전히 동요하고 있다는 걸 들킨 게 분명했다. 그녀도 모르는 새 온몸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밀리안이 그 모습을 보고 오해했는지 움직임을 멈추며 꾹꾹 감정을 눌러 말했다.
“억지로 할 생각은 없어. 아직 버틸 만하니까 네가 싫으면 이대로…….”
채 말이 끝나기도 전에 프레아의 두 팔이 밀리안의 목을 감았다. 끌려 내려간 고개가 프레아의 코앞에 닿았다. 그녀의 눈가가 제법 붉었다.
밀리안이 두 눈을 크게 떴다. 하도 바들바들 떨어서 싫어하는 줄만 알았는데……. 그녀의 표정을 보니 괜한 기우였던 모양이다. 그녀의 얼굴이 마치 익은 토마토같이 불그스름했다. 프레아가 새된 목소리로 말했다.
“너, 너야말로 홀려놓고 발 빼면 안 되지!”
“…….”
“사람이 칼을 뽑았으면 장작이라도 패야지! 아, 물론 내가 장작이라는 건 아니…….”
프레아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아니, 말하지 못했다. 밀리안이 그대로 프레아의 입을 막은 탓이었다. 평소답지 않은 조급한 입맞춤이었다. 살랑살랑 부는 바람에 밀리안의 향기가 코끝에 감돌았다.
잠시 후 사르륵거리는 소리가 들리며 온몸에 서늘함이 감돌았다. 낯선 손길에 등허리가 빳빳해지자 밀리안이 가만히 쓸었다. 그 손길이 무척 다정해서 안정되었다.
그의 입술이 눈가에 닿았다 떨어졌다. 프레아는 파르르 떨던 속눈썹을 들어 밀리안을 응시했다. 그의 눈가에 옅은 열기가 감돌았다. 그의 얼굴에도 긴장된 기색이 역력했지만 애써 감추려는 듯했다.
그게 뭐라고 이렇게 사랑스러운 건지. 프레아는 저도 모르게 밀리안의 눈가를 쓸며 중얼거렸다.
“예뻐.”
그러자 밀리안이 움찔하다 이내 그녀의 손끝에 가만가만 입을 맞추었다. 손끝이 점점 뜨거워졌다. 밀리안의 손길이 마치 조각상을 빚듯, 피아노로 아름다운 선율을 연주하듯 부드러이 움직였다.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것처럼 온 감각이 집중되었다. 숨결이 닿은 자리에 열꽃이 피어올랐다. 그렇게 밤이 깊어갔다.
* * *
긴 밤을 끝으로 지쳐 잠든 프레아를 밀리안이 응시했다. 여린 몸체가 규칙적으로 오르락내리락하며 숨을 쉬었다. 그것을 가만히 보기만 했다. 숨소리마저도 예쁜 것이 신기해서 밀리안이 그녀의 얼굴을 매만졌다.
저를 보며 웃을 때 올라가는 눈꼬리, 진지할 때마다 찌푸리는 미간, 그 아래로 곧게 뻗은 코와 제게 달콤함을 주는 입술까지. 차례대로 손을 옮겼다.
주인의 허락도 없이 매만지는 손길이 일순간 멈추었다. 방금 전까지 프레아를 붙잡고 놔주지 않았다는 것이 무색할 만큼 그의 아래가 뻐근해진 탓이었다.
밀리안이 주체 못 할 감정에 피식 웃었다. 언제부터 이렇게 키운 걸까. 몰라보게 커져 버린 마음이 신기했다. 남에서 남동생으로, 또다시 남이 된 것도 모자라 이젠 연인이 될 줄이야.
그 어린 날의 자신은 꿈에도 몰랐다. 자신이 속절없이 빠져가는 모습이 한편으론 두려웠다. 너무 소중한 것이 생기면 그것이 사라질까, 다칠까, 늘 노심초사하게 된다.
행복할수록 불안은 커졌다. 매일 밤 꿈에 찾아와 저를 괴롭히는 어머니는 이제 프레아를 인질로 삼았다. 그의 눈 밑 그늘이 점점 짙어지는 건 모두 그 허무맹랑한 악몽 탓이었다.
‘넌 결국 주변 사람들을 파멸로 몰아넣을 재앙 덩어리야!’
악몽은 매번 밀리안을 찌르는 말을 내뱉었다. 아니라고, 어머니 때와는 다르다고. 나는 이제 내 힘을 통제할 수 있고, 얼마든지 사랑하는 사람을 지켜낼 수 있을 정도로 노련해졌다고 반박했다.
‘저것 봐. 네 누이가 너 때문에 죽어가잖아. 이 피에 굶주린 괴물!’
하지만 그 반박을 조롱하듯 악몽은 차가운 조소와 함께 프레아가 쓰러지는 장면을 몇 번이나 보여줬다. 미쳐가는 걸까. 기어이 어머니는 나를 죽여야 속이 편할 걸까.
밀리안이 프레아의 둥근 어깨를 쓸고 그녀의 허리를 깊게 끌어안았다. 그녀가 도망치기라도 할 것처럼 강하게 붙잡았다. 그날 마탑에서 프레아가 쓰러지는 순간, 밀리안은 꿈속에서 일어난 광경이 재현되는 기분을 느꼈다.
마치 꿈속에서 헤매는 느낌. 꿈에서처럼 무기력하게 죽어가는 프레아를 붙들고 엉엉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래서 멍청하니 시간을 허비했었다. 윈드가 아니었다면 아마 위험했을지도 몰랐다는 생각에 눈앞이 아찔했다.
몰려드는 죄책감과 그녀를 잃고 싶지 않다는 양가적인 마음이 폭발했고, 그 뒤로는 기억이 나지 않았다. 눈을 뜨니 그녀의 침대라 또 힘을 통제하지 못했구나, 미루어 짐작할 뿐이었다.
사실 그는 곧바로 진에게 쫓겨난 것을 다행이라고 여겼다. 그때 당시엔 도무지 프레아를 마주할 수 없을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였다. 밀리안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언제쯤 이 지나친 피로가 풀릴 수 있을까. 오랜만에 왔음에도 그녀가 저를 반겨주었을 때 그는 안도감을 느꼈다. 또한 그녀가 저와 같은 마음이라는 것에 감사했다. 밀리안이 그녀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추며 두 눈을 감았다. 조금만 더 이 기분을 느끼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