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장 마탑의 밤
마탑의 밤이 시작되었다. 늘 베일에 가려진 마탑이 오늘만큼은 모든 사람에게 개방되었다. 이때가 아니면 마탑에 들어가기가 쉽지 않으니 어김없이 사람이 붐볐다.
프레아가 머뭇거리는 에시드를 향해 물었다. 벌써 사람들이 마탑에 줄지어 들어가고 있는데 줄조차도 서지 않고 있어서였다.
“언제 들어갈 거예요?”
“오기로 한 이가 있어.”
에시드는 여전히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프레아는 그런 그를 못마땅한 얼굴로 보며 물었다.
“네? 누구요?”
“……아! 저기 오는군.”
일행이 있다고는 듣지 못한 터라 프레아가 얼빠져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밀리안?”
“늦어서 죄송합니다. 미리 매복해 놓느라 좀 걸렸습니다.”
프레아는 깜짝 일행이 밀리안이라는 것에 어안이 벙벙해졌다. 밀리안이 프레아를 보며 은은하게 미소 지었다. 에시드는 품에서 폴리 사탕이 담긴 작은 유리병을 꺼내 하나씩 내밀었다.
“대공님, 밀리안이 온다는 말은 없었잖아요.”
“어제 급히 경에게 연락을 받아서 뒤늦게 합류하게 되었네. 이번 일은 황실도 돕기로 했어.”
에시드가 황실을 언급하자 프레아의 눈이 커졌다. 단순히 정령 실험만 무마하고 돌아오려 했는데 생각보다 일이 커진 모양이다. 밀리안이 프레아를 향해 차근히 설명했다.
“마탑에서 인간들을 대상으로 실험한 경위를 확인했어. 내가 이번에 받은 임무는 살아 있는 인간들을 구출하고 남은 실험체를 파괴하는 거야.”
“인간들이라니, 설마 정령 실험을 인간에게도 사용했다는 거야?”
“그래, 이미 황제 폐하께서도 이 일을 그냥 넘어가지 않으시겠다고 하셨어.”
프레아는 밀리안의 말에 헛웃음을 내뱉었다. 마탑이 정말 갈 데까지 갈 모양이다. 정령석을 가지고 실험을 한 것도 모자라 동족까지 이용해 먹을 줄이야. 꼭 인간의 탈을 쓴 마수 같았다.
“지금 황태자 저하께서 기사들과 함께 매복 중이십니다. 우리가 실험에 이용당한 사람들을 구출하고 증거를 압수할 동안 마탑 주변을 포위하기로 했습니다.”
밀리안이 에시드에게 짧게 현황을 보고했다.
“그렇다면 자네와 그대는 피해자를 구출하고 증거를 찾는 데 집중하게. 나는 밖에 있는 군사가 마탑에 안전하게 들어올 수 있도록 방어 체제를 찾아 부술 테니.”
에시드의 말에 프레아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러곤 서로 신호라도 보낸 것처럼 폴리 사탕을 먹었다. 달짝지근한 맛이 입안에 퍼지면서 온몸이 변하는 느낌이 났다.
프레아가 눈을 깜빡거리며 에시드와 밀리안이 변화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에시드는 지난번과 달리 갈색 머리의 준수한 외모를 가진 청년으로 변했다.
그리고 옆에 있던 밀리안은…….
“세상에……!”
프레아가 밀리안을 보자마자 눈을 휘둥그레 떴다. 붉은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뜨린 채 영롱한 청안으로 저를 바라보고 있는 미인 때문이었다.
“풉! 밀리안, 여자 됐어.”
폴리 사탕은 랜덤이라더니, 여자가 되어도 밀리안은 여전히 예뻤다. 즐거워하며 밀리안을 바라보던 프레아는 이상한 낌새를 느꼈다. 어째, 저를 바라보는 두 사람의 표정이 묘했다.
그러고 보니 눈높이가 많이 낮아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목소리도 좀 앳되어진 것 같은데……. 프레아가 저를 이상하게 쳐다보는 두 사람을 망연히 올려다보자 밀리안이 피식 웃으며 한쪽 무릎을 꿇었다.
“꼬마가 되어버렸네.”
“…….”
프레아는 그제야 제 몸이 아주 작아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금발이 치렁치렁 어깨를 타고 흘러내렸다. 프레아가 서둘러 주머니에서 거울을 꺼내 얼굴을 비춰보았다. 거울 속에는 세차게 눈이 흔들리는 5살 정도의 여자아이가 있었다.
“마, 말도 안 돼! 나만 왜 꼬마야!”
프레아가 억울한 빛을 띠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래 가지고는 아무리 뛰어봤자 아장아장하는 수준에 불과할 게 뻔했다. 에시드는 그 옆에서 미안한 기색을 보이며 말했다.
“아무래도 랜덤이라……. 그래도 금발이 무척 잘 어울리네.”
“전혀 위로 안 되거든요!”
프레아가 에시드를 흘겼다. 사람들을 대피시키려면 적어도 신장이 어른은 되어야 할 텐데. 이 상태론 오히려 방해되지나 않으면 다행이다.
배불뚝이 아저씨가 될까 봐 걱정했던 것이 무색하게 자신은 머리카락은 금색으로, 눈은 파란색으로 변한 채 키만 쏙 작아졌다. 외형이 완전히 달라진 쪽은 에시드뿐이었다. 밀리안이 프레아를 한 팔로 번쩍 안아 들었다.
“으앗, 무슨 짓이야!”
“네 걸음 기다리다간 한참 걸릴 것 같아서.”
“잠시만, 밀리안 경.”
에시드가 밀리안을 만류하며 말을 걸었다. 프레아는 당연히 한 소리 해줄 줄 알고 그를 쳐다봤다. 하지만 에시드는 밀리안의 다른 쪽 팔도 프레아에게 올려줄 뿐이었다.
“그 가녀려 보이는 팔로 여자애를 한 손에 드는 건 좀 이상하군. 두 손으로 드는 게 좋겠어.”
“아, 그렇군요.”
에시드의 조언에 밀리안이 짧게 대답하며 두 손으로 얼른 프레아를 고쳐 안았다. 다리가 짧아진 것도 서러운데 저를 짐짝 취급하다니. 프레아는 두 사람을 망연히 바라보았다. 마치 언니와 소풍을 온 꼬마가 된 기분에 울컥했다.
왜, 왜! 왜 하필 나만 어린이인 건데!
프레아가 저도 모르게 발을 동동 구르자 밀리안이 말했다.
“가만히 좀 있어.”
“그럼 3시간 뒤에 약속한 장소에서 만나자고.”
에시드가 그리 말하곤 먼저 탑으로 향했다. 실망한 채 축 늘어져 있는 프레아에게 밀리안이 말했다.
“네가 아주 어릴 때 만났다면 이런 기분일까?”
“뭐가.”
“프레아는 아이 때도 귀여웠네.”
밀리안이 오동통한 프레아의 손가락을 들었다. 어쩐지 이 상황을 몹시 재미있어하는 그의 태도에 프레아는 눈을 흘겼다.
마탑의 밤이라 그런지 탑으로 향하는 거리부터 사람들이 북적북적했다. 밀리안은 어느새 마탑의 마법사처럼 로브로 갈아입은 뒤였다. 마법사로 위장해야 탑의 꼭대기까지 출입할 수 있어서였다.
프레아는 너무 어리게 변한 탓에 마탑의 마법사로 위장하지 못하고 밀리안에게 이끌렸다. 좀 굴욕적이긴 했지만 대의를 위해 묵묵히 그를 따랐다.
탑 안에 들어서자 탑 밖과는 비교도 안 되는 인파가 보였다. 간혹 마탑의 마법사가 말을 걸었는데 그때마다 밀리안은 저를 ‘친동생’이라고 말하며 무마했다.
다들 마탑의 밤 행사로 정신이 없는 터라 금세 관심을 끈 것은 어찌 보면 다행이었다. 양초들이 허공을 둥둥 떠다니고 오색 빛깔의 불빛들이 천장을 밝혔다.
요란한 음악 소리와 허공을 떠다니는 각양각색의 음식들이 사람들의 시선을 붙잡았다. 프레아는 혹여나 머리 위의 음식 소스가 머리에 떨어질세라 움찔했다.
그러다 유독 사람이 많이 모여 있는 곳을 응시했다. 커다란 나무가 황금 사과를 주렁주렁 매달고 있는 곳인데 사람들은 그곳에서 소원을 빌기 바빴다. 팻말에는 소원을 이루어주는 황금 사과나무라고 적혀 있었다. 그 아래로 명랑한 문구가 새겨진 팻말이 유독 이목을 집중시켰다.
[사과를 쪼개 미래의 길흉화복을 점쳐보세요!]
말이 좋아 소원을 이뤄주는 나무지, 실은 상술에 지나지 않는 거였다. 이 세상에 미래를 미리 알고 준비할 수 있었다면 모두가 성공하고도 남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그 아래에서 열심히 사과를 쪼개고 앉아 있었다.
“왜? 하고 싶어?”
밀리안의 물음에 나는 가볍게 고개를 내저었다.
‘우리가 한가하게 소원이나 점칠 때인가?’
프레아가 밀리안에게 바짝 기댄 채 조용히 속삭였다.
“대공님이 분명 이쯤에 있다고 말했는데.”
“그렇다기엔 너무 사람이 많아. 길을 잘못 든 모양이야.”
밀리안이 나직이 말하곤 저를 바짝 끌어안았다. 아이가 된 상태로 그에게 안겨 있으니 기분이 묘했다. 프레아는 밀리안의 팔을 꾹 눌렀다.
“근데 팔 아프지 않아? 손잡고 다녀도 될 것 같은데.”
“이편이 훨씬 이동하기 좋아서. 왜? 불편해?”
“아니 그건 아닌데……. 너무 가까워서.”
프레아가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말했다. 그 모습을 본 밀리안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어이, 거기! 일손이 부족한데 이 짐 좀 110호실에 옮겨줘.”
그때 마탑의 마법사 중 하나가 밀리안을 향해 소리쳤다. 프레아가 저도 모르게 밀리안에게 바짝 기대었다. 밀리안은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프레아를 내려놓으며 짐을 받아 들었다. 마법사가 그런 두 사람을 빤히 보더니 너털웃음을 내뱉었다.
“동생을 데리고 온 모양이군. 이거 즐거운 시간을 방해해서 미안하네.”
“괜찮습니다.”
밀리안이 그리 말하며 자연스럽게 한 손을 프레아에게 내밀었다. 프레아가 얼른 그의 손을 붙잡았다. 서둘러 뒤돌아 가려는데 마법사가 밀리안에게 다시 말을 걸어왔다.
“근데, 자네 못 보던 얼굴인데.”
“……이번에 새로 들어왔어요.”
“흐음, 그래? 이상하다. 이번에 들어온 신입 중에 이렇게 미인이 있다는 소리는 못 들었는데.”
마법사가 의심스럽다는 표정으로 밀리안을 훑었다. 괜히 등골이 오싹해지는 기분이었다. 하긴, 이렇게 눈에 띄는 미인인데 기억을 못 할 리가 없다. 어쩐지 들킬 것만 같아 조급해진 프레아가 얼른 밀리안의 옷깃을 붙잡고 칭얼거렸다.
‘나는 5살이다, 나는 5살이야.’
스스로 세뇌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언니이, 그것만 옮기고 나 쩌어기서 파는 솜사탕 사 줘어. 라라 배고파.”
최대한 아이인 척 애교 섞어 뱉은 말에 밀리안이 멍한 표정으로 프레아를 바라보았다. 프레아는 어쩐지 낯이 화끈거렸지만 계속 저 마법사와 밀리안이 대화하다간 정체를 들킬 것만 같아 다시 재촉하듯 말했다.
“우웅? 라라는 솜사탕 먹고 시포. 언니이.”
“크흡.”
밀리안이 웃음을 참는 것처럼 연신 기침을 했다. 그 모습을 본 마법사가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됐으니까, 얼른 짐 놓고 가서 동생과 어울려 줘.”
“예.”
밀리안이 빠르게 답하곤 프레아의 손을 꼭 붙든 채 걸음을 재촉했다. 프레아는 밀리안에게 관심을 끄고 사라진 마법사를 보며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
휴. 완벽한 연기였다. 조금 부끄럽긴 했지만 그대로 들키는 것보다는 나았다. 그때였다. 밀리안이 사람이 없는 복도에 들어서자 걸음을 우뚝 멈추었다.
그 바람에 그의 몸에 몸을 부딪친 프레아가 코를 문지르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밀리안이 갑자기 짐을 내려놓더니 프레아와 눈을 마주치려는지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왜 그래?”
프레아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되묻자 밀리안이 무언가 복잡한 표정을 짓곤 마른세수를 하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갑자기 프레아를 응시하며 이상한 말을 했다.
“라라는 솜사탕을 좋아하는구나.”
“…….”
한참 뒤 그가 내뱉은 말에 프레아가 조개처럼 입을 앙다물었다. 저를 두고 ‘라라’라고 지칭한 것도 부끄러워 죽겠는데 그걸 밀리안이 말하니 더욱 죽을 맛이었다. 프레아가 고개를 푹 숙인 채 말했다.
“……하지 마.”
“아니면 달콤한 걸 좋아하는 건가, 라라는?”
“……조용히 해.”
“솜사탕 못지않게 달콤한 걸 하나 아는데.”
밀리안이 눈웃음을 살살 치곤 프레아의 오동통한 손등에 입을 맞추며 속삭였다.
“어때, 달콤하지.”
순식간에 프레아의 얼굴이 체리처럼 빨개졌다. 프레아는 당혹감에 입을 여러 차례 열었다 닫았다.
“야……!”
뒤늦게 프레아가 소리를 꽥 지르려는데 밀리안이 갑자기 그녀를 쑥 안아 들었다. 그러곤 아무 문이나 열고 들어가 숨었다. 그가 프레아의 입을 가린 채 열린 문 틈새로 복도를 살폈다.
복도에는 마침 마법사들이 지나가고 있었다. 밀리안이 마법사들이 완전히 지나갈 때까지 복도를 주시하는데, 프레아가 그의 옷깃을 잡아당겼다.
“저기…… 아무래도 찾은 것 같은데.”
밀리안은 프레아가 가리킨 방향을 응시하더니 허탈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이렇게 대놓고 있을 줄은 몰랐네.”
에시드가 말한 문양이 그려진 벽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밀리안은 미리 머레니를 통해 건네받은 암호를 벽에 그렸다. 암호를 입력하자 벽이 빛을 발하더니 우르르,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만들어졌다. 프레아가 밀리안의 옷깃을 재차 당겼다.
“서두르자.”
문을 열자 매캐한 연기가 자욱했다. 시큼한 것 같기도 하고 썩은 것 같기도 한 냄새가 났다. 프레아가 저도 모르게 코를 막았다. 불빛 하나 없는 어두컴컴한 공간. 지하로 향하는 계단이 끝없이 아래로 이어지고 있었다.
안에 들어서자 문이 드르륵하며 다시 닫혔고, 곧 주변은 어둠뿐이었다. 밀리안이 마석을 꺼내 불을 밝혔다. 가파른 계단이 아래로 이어지자 밀리안은 프레아를 단단히 붙잡은 채 기척을 죽이고 아래로 내려갔다.
냄새는 아래로 향할수록 더욱 진하게 풍겼다. 도대체 무슨 실험을 하길래 이런 썩은 내가 진동하는 건지 몰랐다. 계단을 다 내려가니 유리관이 여러 개 놓여 있었고 그 속에 살아 있는 걸로 추정되는 사람들이 갇힌 채 잠들어 있었다.
“제대로 찾아온 것 같네.”
밀리안이 유리관과 연결된 정령석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정령 실험이 어느 정도 성공했다더니 이젠 인간에게 임상 실험을 하고 있던 모양이다.
유리관에 갇힌 사람은 아이도 있었고, 젊은이도 있었다. 그들은 모두 원피스 형태로 된 흰옷을 입은 채 희뿌연 연기 속에서 잠들어 있었다. 유리관 아래에는 실험 날짜와 실험 번호, 그리고 실험당하는 사람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냄새는 저쪽에서 나는 것 같아.”
프레아가 구석을 가리켰다. 구석에는 실패한 실험작이 아무렇게나 쌓아져 있었다. 이미 죽은 사람들이었다. 한꺼번에 처리하기 위해 방 한편에 모아둔 것 같았다.
프레아가 시체들을 보며 눈을 찌푸리곤 밀리안의 품에서 풀쩍 뛰어내렸다. 그러곤 사람들을 꺼내기 위해 기계 앞으로 향했다. 정령석은 이미 여러 차례 혹사당했는지 숨이 느껴지지 않았다. 아무래도 모두 죽은 것 같았다.
프레아가 침통한 얼굴로 눈앞의 기계 작동을 멈추었다. 밀리안은 그 옆에서 능숙하게 유리관과 정령석을 분리했다. 치이익 소리와 함께 유리관 속 연기가 빠지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유리관 안에 수면 향을 잔뜩 피워 놓은 것 같았다. 수면 향이 모두 빠져나간 뒤에도 사람들은 잠에 취해 해롱해롱하고 있었다. 간혹 정신을 금세 차려 콜록콜록 재채기하는 사람도 보였다.
밀리안은 사람들을 안전하게 대피시키기 위해 휴대용 게이트를 설치하기 시작했다. 밖에 대기하고 있는 클로드에게로 바로 이동시켜 주는 게이트였다.
프레아는 아직 깨지 못한 사람들의 뺨을 찰싹찰싹 때렸다. 이내 몽롱한 얼굴을 하던 사람들이 하나둘 정신을 차렸다. 그들의 피부가 얼룩덜룩한 것을 보니 매튜가 떠올랐다.
‘혹시 매튜도 정령 실험을 당했던 걸까?’
정신을 금방 못 찾는 사람일수록 피부색이 짙었다. 금세 깨어난 사람들은 이제 막 실험에 이용당했거나 이용당할 예정인 사람들 같았다.
“깨어났으면 게이트 위에 올라타세요.”
사람들은 갑자기 나타난 꼬마가 명령하자 인상을 찌푸렸다. 아직 상황 파악이 덜 된지라 마탑의 로브를 입고 있는 밀리안을 경계하는 눈치였다.
하지만 밀리안이 형형한 눈빛으로 ‘좋은 말로 할 때 들어라’ 하는 것 같은 표정을 짓자 다들 깨갱 눈을 깔았다. 사람들이 어영부영하며 게이트 위에 서자 프레아가 도도도 소리를 내며 밀리안의 옆으로 갔다. 밀리안은 사람들을 향해 무심한 얼굴로 말했다.
“이곳을 벗어나면 황실 기사들이 대기하고 있을 거다. 자네들은 황태자 전하께 이곳에서 있었던 실험 행위들을 낱낱이 고해야 할 것이다.”
“화, 황실에서 저희를 구하러 온 겁니까?”
“아아, 신이시여! 감사합니다!”
“살았어! 젠장, 살았다고!”
그제야 상황 파악을 마친 사람들이 눈물을 훌쩍거리더니 온갖 신을 찾기 시작했다. 몇몇 사람은 연신 밀리안에게 고마움을 표했다. 프레아가 어쩐지 멋쩍은 얼굴로 코를 쓱 문지르고 있는데 유리관에 있다 구출된 남자아이가 손을 잡아끌었다.
“너도 얼른 올라타.”
프레아도 실험에 희생당한 사람으로 생각한 모양이다. 순진무구한 표정으로 제 옷깃을 잡아당기는 아이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데 밀리안이 냉정히 그의 손을 잡아뗐다.
“함부로 만지지 마라. 네가 함부로 만질 사람이 아니다.”
밀리안의 말에 남자아이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프레아가 그 옆에서 큼큼, 헛기침을 하고 말했다.
“내가 지금은 이래 봬도 너보다 20년은 더 살았다고 봐도 무방해. 그러니 내 걱정 말고 어서 대피하렴.”
프레아가 한껏 어른인 양 답했으나 남자아이는 여전히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밀리안은 그런 남자애에게 설명해 줄 생각이 없는지 거칠게 아이를 게이트 위로 올렸다.
그러고 남자애가 무어라 말할 새도 없이 그대로 이동시켜 버렸다. 강렬한 빛과 함께 사람들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는 쉴 틈 없이 움직였다.
황실 기사들에게 들어와도 좋다는 신호를 보내고, 서둘러 실험관들을 모조리 파괴하려고 오러를 끌어올렸다. 프레아 역시 토토를 소환해 막 실험실을 파괴할 무렵이었다.
“이런, 쥐새끼가 들어왔군.”
살벌한 목소리와 함께 밀리안과 프레아의 발밑에 거대한 마법진이 발동했다. 그것을 본 프레아가 의식을 잃은 건 순식간이었다.
“프레아……?”
종이처럼 허물어지는 프레아를 밀리안이 황망한 얼굴로 받아냈다. 어느새 두 사람의 폴리모프는 깨진 뒤였다.
* * *
에시드는 익숙하게 마탑을 활보하며 방어석들을 찾아내 파괴했다. 마탑은 살아 움직이는 탑. 그런 탑이 위험을 인식하지 못하도록 다른 마석으로 위장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얼추 퇴각로를 확보한 그는 마탑의 기능을 마비시킨 뒤에 약속 장소로 향했다. 사람들은 탑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모르고 그저 즐거운 한때를 보내고 있었다.
에시드가 그런 사람들을 물끄러미 보며 프레아와 밀리안을 기다렸다. 잠자코 기다리려니 다시금 마음이 심하게 요동쳤다. 익숙하게 누이를 품에 안아 드는 밀리안을 보았을 때. 에시드는 알 수 없는 불쾌감이 불쑥 올라오는 걸 느꼈다.
두 사람이 피가 섞이지 않은 남매라는 것을 알아서일까. ……그렇다고 해도 이미 십여 년을 남매로 지낸 두 사람이다. 그 정도의 친밀감을 가지는 건 당연했다.
그러니 전혀 불쾌해할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제게 있어 그녀는 별로 중요한 사람이 아니다. 아니어야만 했다. 그런데…… 왜일까. 두 사람에겐 너무나도 당연한 일인데 왜 이렇게 화가 날까.
에시드는 감정이 들쑥날쑥한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짐작하기에는 프레아가 밀리안에게만 짓던 표정 때문인 것 같다. 제 앞에서 늘 고고하게 굴던 프레아는 밀리안 앞에서만큼은 그러지 않았다.
부드러운 말씨, 어딘가 쑥스러워하는 태도, 익숙하게 그의 품에 안기는 팔, 그를 따뜻하게 바라보는 눈빛. 어느 것 하나 에시드가 본 적 없는 것들이었다.
파직.
“아…….”
에시드는 손에 쥐고 있던 여분의 마석이 산산조각 난 것을 망연히 바라보았다. 언제 이렇게 힘을 주고 있었던가. 그는 갈피를 못 잡는 감정이 제 안에서 세차게 요동치는 것을 가만히 잠재웠다.
생각보다 그녀와 보냈던 시간이 즐거웠던 모양이다. 소중한 거라곤 하나 없었는데. 삶에 대한 미련조차 없이 그저 이 삶이 어서 끝나기만을 손꼽아 기다려 왔었다.
어차피 끝났어야 할 목숨이 조금 연장되었을 뿐이다. 소중한 것들을 만들지 않으려 애써왔다. 그런데 왜, 순조롭게 일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갑자기 살고 싶어진 걸까.
왜 욕심이 생겨 버린 걸까. 어째서 갖지 말아야 할 마음을 가지려는 걸까. 어차피 갖지 못할 것들, 가지려 하면 부서져 버릴 한낱 실오라기에 불과한 감정들이다.
태어난 이유조차 불순했던 제가 감히 누굴 마음에 품고 평범하게 살 수 있다는 걸까. 그 순간 마탑에서 애애앵 하는 경고음이 울리며 문들이 봉쇄되기 시작했다.
에시드가 미리 손을 써둔 터라 문은 채 닫히지 못하고 곧 멈추었다. 마탑의 마법사들이 탑 안의 사람들을 위협하며 한곳에 모았다. 그 틈새로 가녀린 여체를 품에 안고 뛰어오는 한 사내가 보였다.
에시드는 단숨에 그가 밀리안이라는 것과 그 품에 안겨 축 늘어진 것이 프레아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밀리안은 에시드를 보지 못했는지 곧바로 마탑을 뚫었다.
그의 주변을 형형하게 감싼 검은 오러가 다가오는 모든 마법사를 튕겨냈다. 밀리안의 눈은 붉게 빛났고, 잔뜩 굳은 얼굴로 프레아를 밖으로 옮기려 하고 있었다.
‘저 검은 오러와 붉은 눈 때문에 그가 ‘전장의 사자’로 불렸구나.’
에시드가 저도 모르게 프레아의 안위를 확인하러 따라가려다 걸음을 멈추었다.
따라가서 어쩌려고?
에시드는 인상을 팍 썼다. 시시하게 실험이나 파괴하려고 자신이 마탑에 들어온 게 아니라는 것을 되새겼다. 잠시 뒤, 에시드는 마음을 다잡고 밀리안과는 반대 방향으로 향했다.
그는 해결해야 할 일이 남아 있었다. 오히려 어수선한 이때가 적기였다. 황실의 기사들이 마탑 안으로 몰려오며 마탑의 마법사들을 억류했다.
갑자기 마법사와 황실 기사가 대치하자 사람들이 우왕좌왕하며 마탑에서 도망치기 시작했다. 에시드는 이미 머레니를 통해 파악해 둔 비상계단 쪽으로 재빨리 이동했다.
분명 그가 그곳으로 도망치리라 생각해서였다. 역시나, 외팔 사내는 비상계단을 힘없이 딛고 있었다. 아니, 이제는 팔이 없는 사내라고 하는 쪽이 맞았다.
그는 오른쪽 집게손가락에 끼워져 있던 매개체를 이로 악문 채 비틀비틀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에시드가 그의 앞을 막아서자 그가 황망한 표정으로 에시드를 바라보았다.
다 늙어빠진 영감탱이. 마탑의 보호 아래 황실을 능멸하고 기어이 유모를 죽이라 명한 파렴치한 사내.
“네, 네놈은……!”
사내가 매개체를 놓치지 않으려 이를 악문 채 어눌한 말씨로 소리쳤다. 에시드는 그런 사내를 가만히 바라보며 조소했다.
“역시 그녀를 혼절시킨 게 자네였군.”
에시드가 차가운 눈빛으로 넝마가 된 마탑주를 바라보았다. 보아하니 팔 한쪽을 마저 잃고 가까스로 순간 이동을 한 것 같았다. 밀리안이 죽이려다 실패했는지 그의 오러 흔적이 있었다.
이 교활한 늙은이가 미리 새겨둔 마법으로 목숨을 겨우 부지한 듯했다. 그것마저도 중간에 막혀 산송장 신세지만.
“그 자리에 너무 오래 있었어.”
에시드가 그의 로브를 거칠게 찢으며 그의 가슴께에 손을 얹었다. 마탑의 마법사들만이 지닌 문양이 그 위에 선명히 자리 잡고 있었다. 머레니와 다른 점은 그 문양이 붉은색이 아닌 검은빛을 띤다는 것이었다.
“이…… 이!”
갑자기 마탑주의 눈이 세차게 흔들렸다. 눈알이 빠질 것처럼 눈을 부릅뜨는가 싶더니 곧 게거품을 물기 시작했다. 잠시 후 그가 생명 줄처럼 마지막까지 물고 있던 매개체가 형편없이 바닥을 뒹굴었다.
에시드가 그의 몸 안에 뱀같이 가느다란 것을 끼워 넣자 그가 발작했다. 에시드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를 가볍게 밀어뜨리려 했다. 그러자 그가 에시드의 가슴께를 물어뜯었다. 살고자 발악하는 몸짓이었다.
“애쓸 것 없어.”
건조한 목소리가 계단에 울렸다. 곧이어 에시드가 우아한 몸짓으로 그의 정강이를 내려쳤고, 그는 미처 저항할 새도 없이 계단 아래로 추락했다.
그 여파로 에시드의 로브가 거칠게 찢겨 나갔다. 에시드의 가슴에 마탑의 마법사를 상징하는 문양이 드러났다. 다만 붉은색이 아닌 금빛을 띠고 있었다. 황실의 보호 아래 기능이 마비되었음을 나타내는 금빛이었다.
단말마의 둔탁한 소리가 들렸다. 에시드는 싸늘한 눈으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살인을 한 사람의 눈빛이라기엔 무척 메말랐다. 그 순간 마탑이 웅웅 울리기 시작했다.
잠시 뒤 흰빛이 에시드의 온몸을 감쌌다. 찢겨 나간 가슴께에 새겨진 문양이 선명한 빛을 띠었다. 그러길 수 분. 마탑의 문양은 마탑주를 상징하는 검은빛으로 물들었다.
* * * * *
프레아가 눈을 깜박거렸다. 분명 마탑에 잠입했었는데 눈을 떠보니 웬 단풍이 가득한 숲길이다. 누군가에게 발각된 직후 마법진을 보자마자 기절했던 거 같은데……. 도대체 여긴 어디지?
“설마 환각 마법에라도 걸린 걸까.”
프레아가 인상을 찌푸린 채 바닥에서 일어났다. 마법진을 보았으니 분명 마법사가 뭔 짓을 한 게 분명하다. 얼른 정신을 차려야 할 텐데. 밀리안이 걱정할 거야. 프레아는 마법을 깨뜨릴 만한 것을 찾기 위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때, 한 소녀가 다다다다 소리를 내며 숲길을 헤치고 들어가는 걸 목격했다. 그 뒷모습이 어릴 적 저를 닮아서 저도 모르게 소녀를 뒤쫓았다.
한참 아이를 따라가자 이상하게 익숙한 숲길에 접어들었다. 마치 자주 오갔던 길처럼 눈에 익었다. 소녀가 어느 지점에서 멈춰 섰다. 프레아가 게슴츠레한 눈으로 소녀의 신원을 확인했다.
예상대로 소녀는 프레아 자신이었다. 어린 프레아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니 힘차게 누군가를 불렀다.
“아저씨이!”
그 순간 가을에 어울리지 않는 꽃잎이 흩날리더니 금발에 벽안을 한 사내가 소녀 앞에 떡하니 등장했다. 처음 보면 움찔할 만큼 커다란 덩치에 어울리지 않는 수더분한 미소가 어쩐지 익숙한 사내였다.
사내의 금발이 빛을 받아 반짝반짝했다. 그의 벽안이 올곧이 소녀를 향하더니 부드러이 미소 지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가슴 한편이 따끔거리기 시작했다. 기억하고 싶지 않은 장면을 보는 것 같은 기분에 마음이 아렸다.
도대체 저 사내가 누구이기에 이렇게 가슴이 아픈 거지?
사내는 익숙하게 소녀를 번쩍 안아 들며 맘에도 없는 핀잔을 늘어놓았다.
“이제 그만 오라니까.”
“그치마안, 아저씨랑 있고 싶은걸!”
소녀가 어리광을 피우며 그에게 안겼다. 그는 그런 소녀를 말릴 생각이 없는지 번쩍 들어 올리며 빙글빙글 돌았다. 까르르, 소녀의 맑은 웃음소리가 숲에 가득 울렸다.
소녀는 뭐가 그리도 좋은지 연신 방긋거렸다. 사내 역시 푸근한 미소를 띠고 아이를 사랑스럽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프레아는 도대체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몰라 혼란스러웠다. 환각 마법인 건지, 아니면 자신이 몰랐던 기억의 편린인 건지 혼동되었다.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파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파삭.
당황한 프레아가 마른 나뭇가지를 밟아 소리를 냈다. 그도 들었는지 소녀를 가만히 내린 채 천천히 프레아에게 다가왔다. 프레아는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한 채 그저 사내가 되돌아가기만을 바랐다.
그와 눈이 마주쳤다. 이상하게도 그는 저를 보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의 맑은 눈동자와 마주치자 프레아는 저도 모르게 매튜를 떠올렸다. 매튜와 비슷한 홍채를 지닌 사람이 눈앞에 있어서였다.
‘정말 흔한 벽안이라 매튜가 낯설지 않았던 모양이네.’
프레아가 그리 생각하며 울렁이는 심장을 부여잡고 그들 옆에 살며시 자리 잡았다. 그의 주변에선 은은한 꽃향기가 났다.
그는 어린 프레아와 두런두런 이야기했는데, 자세히 들으니 정령에 관한 것이었다. 정령사는 일반인에게 정령에 대해 말하지 않는 것이 불문율임에도 그는 소녀에게 거리낌 없이 정령에 대해 설명했다.
“정령사에게 정령은 도구가 아니라 친구야.”
“친구……. 나도 정령 친구 갖고 싶다…….”
어린 프레아가 축 저진 목소리로 대답하며 고개를 떨구었다. 그러자 사내가 포근히 웃으며 소녀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이건 정말 비밀인데…….”
프레아는 귀엣말을 듣기 위해 바짝 다가갔으나 어째선지 들리지 않았다. 잠시 후 어린 프레아가 활짝 핀 꽃처럼 웃으며 물었다.
“정말? 정말이야?”
“그래. 정말이란다.”
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화답했다.
화기애애하게 이야기하던 것도 잠시, 소녀가 엉엉 울기 시작했다. 사내를 붙잡고 늘어지며 세상이 무너져라 울었다.
“으허엉, 아저씨 가지 마아아아!”
그는 난감한 얼굴로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니 소녀와 눈높이를 맞추려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소녀는 사내가 떠날세라 그의 소매를 붙든 채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렸다. 사내가 소녀의 등을 토닥거리며 달래느라 진을 뺄 때였다. 소녀가 사내를 향해 말했다.
“아저씨 그냥 내 아빠 하면 안 돼?”
“…….”
“아저씨도 우리 엄마 좋아하잖아. 그래서 자꾸 나한테 꽃다발 전해달라고 한 거 아니야?”
“그건…….”
사내의 눈동자가 세차게 흔들렸다. 프레아는 그 소리를 듣자마자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어릴 땐 엄마한테 꽃 선물도 하고 그랬는데…….’
이따금 에밀리가 한숨 쉬던 것이 떠오른 탓이었다. 그럴 때마다 ‘제가 그랬어요?’ 하고 반문할 뿐 기억하지 못했었다.
그런데, 왜? 어째서 환각 마법일지도 모를 이곳이 이런 장면을 보여주는 걸까. 마치 진짜 내 기억인 것처럼. ……정말 내 기억의 편린인 걸까?
“그레이, 이제 정말 가야 해.”
그때 뒤에서 후드를 깊게 쓴 남자가 사내를 불렀다. 프레아는 갑자기 등장한 남자보다도 소녀의 눈앞에 있는 사내의 이름이 ‘그레이’라는 것에 놀라 딱딱하게 굳고 말았다. 프레아가 부들부들 떨리는 입술을 열어 그를 불렀다.
“아빠……?”
프레아의 목소리를 듣지 못한 사내는 소녀에게 작별을 고하며 떠나고 있었다. 프레아는 엉엉 울며 뒤따라가는 소녀와 그 소녀를 여러 차례 뒤돌아보는 그레이를 황망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그 순간 다시 암흑이었다.
* * *
“마법사는 다 생포했나.”
“예, 현재 탑 내부에 있던 마법사 모두 구속구를 채웠습니다. 그런데…… 마탑주가 보이지 않습니다.”
클로드의 물음에 기사가 정연한 목소리로 보고했다. 클로드가 한편에서 치료를 받는 사람들을 훑었다. 밀리안이 말한 대로 미리 설치해 둔 게이트에 차례로 사람들이 이동해 왔다.
마탑이 미친 집단이라는 것은 익히 알았지만 이 정도까지일 줄은 몰랐는데……. 아무래도 그동안 마탑을 너무 후히 평가한 모양이다.
“이로써 마탑과의 협약은 깨지겠군.”
클로드가 차가운 시선으로 잡혀 온 마법사들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자신들이 쌓아온 업적이 산산조각 나는 광경을 망연히 바라보고 있었다.
물론 모두 황망한 표정을 짓는 것은 아니었다. 개중에는 무심하게 탑이 무너지는 꼴을 보는 마법사도 있었다. 그들은 수백 년간 대를 이으며 적을 두고 살아온 곳이 허무하게 무너져 내리는 것을 무심히 바라보았다.
그들의 표정은 하나같이 묵은 사업을 해결한 것처럼 상쾌했다. 클로드가 그런 그들을 찜찜한 표정으로 보았다. 저들은 알까. 이번 정령 실험에서 제일 적극적이었던 머레니 코헨이 내부고발을 했다는 걸.
현재 그녀는 황실 감옥에 구금되어 있었다. 일종의 보호였다. 혹여나 마탑이 눈치채 결정적 증인인 그녀를 죽일 수도 있으니까. 클로드가 붙잡힌 마법사들에게서 시선을 돌려 옆에 있는 기사에게 물었다.
“밀리안은 어디 있지?”
“그게…… 보이지 않습니다.”
기사가 난감한 얼굴로 뜸을 들이더니 조심스럽게 말했다. 클로드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피해자들을 무사히 이동시키고 마탑으로 들어와도 좋다는 신호까지 보낸 것을 보면 작전에 성공한 게 분명하다.
그런데 보이지 않다니? 이 묶어둘 수 없는 친우는 또 어디로 증발한 걸까. 클로드가 불타고 있는 마탑을 바라보았다.
‘설마 저 속에 있는 건 아니겠지.’
하지만 밀리안이 마탑을 불태운 거면 모를까, 불 속에서 못 빠져나올 위인은 아니라 생각해 걱정을 덮었다. 이는 친우에 대한 클로드의 믿음이었다.
그때였다. 갑자기 웅성웅성 소란스러워지더니 마법사들이 하나둘씩 쓰러지기 시작했다. 모두들 가슴을 부여잡은 채 고통을 호소하며 픽픽 쓰러졌다.
그와 동시에 몇몇 마법사가 순식간에 어디론가 사라졌다. 분명 구속구를 채워서 순간 이동을 할 수 없을 텐데 하나둘 자리를 이탈했다.
“이게 무슨?!”
클로드가 당황하여 도미노처럼 픽픽 쓰러져 싸늘한 시체가 되어가는 마법사들을 바라보았다. 그 순간 마법사 중 하나와 눈이 마주쳤다. 클로드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도 사라지려 하고 있었다. 씨익 웃고 있는 표정을 보아하니 이 일의 원인을 알고 있는 게 분명했다. 클로드가 다급하게 그를 붙잡으려 했다. 하지만 클로드의 손은 빛보다 빠르지 못했고, 그는 결국 허공에 헛손질할 뿐이었다.
“전하! 모두 사망했습니다!”
기사들이 힘없이 쓰러진 마법사들의 숨을 확인하며 소리쳤다. 클로드가 황망한 시선으로 파리 목숨처럼 쉽사리 죽어버린 마법사들을 바라보았다.
신호가 울린 것처럼 집단으로 발작을 일으키는 상황이 이상하게만 느껴졌다. 불현듯 마나 과부하에 의한 마법사의 의문사가 떠올라 서둘러 그들의 왼쪽 귀 뒤를 확인했다.
의문사를 당한 마법사는 모두 그곳에 붉은 반점이 세 개 찍혀 있었다. 하지만 지금 눈앞에 있는 시체 더미에는 반점이 없었다. 전혀 다른 사인이라는 것이다.
“정말 귀신이 곡할 노릇이군.”
클로드가 헛웃음을 내뱉으며 살피던 시체를 내려놓았다. 연이어 일어난 심상치 않은 일에 불길한 기운이 감돌았다.
* * *
밀리안은 눈앞에서 힘없이 쓰러지는 프레아를 황망히 바라보았다.
왜? 왜 또 내 앞에서 누군가가 죽는 거야?
밀리안은 무슨 정신으로 쓰러지는 프레아를 받아냈는지 몰랐다. 사고가 마비되고, 여러 의문이 떠오르며 감정이 세차게 요동쳤다. 분명 마법이 발동되는 걸 인지하자마자 오러를 이용해 끊어냈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윈드까지 소환돼 반사적으로 마법을 튕겨낸 것도 눈으로 보았다. 그런데 왜 프레아만 눈처럼 녹아내리듯 쓰러진 걸까. 마치 역린이 건드려진 사람처럼.
밀리안은 완전히 패닉 상태가 되어 굳어 있었다. 그때 뒤에서 누군가 밀리안의 정신이 번쩍 들 만한 소리를 지껄이기 시작했다.
“아아, 이제 보니 내게 진리를 전해줄 아이였구나. 여기서 만날 줄이야. 이날을 얼마나 고대했는지 모르겠군.”
마법을 시전한 사내가 음흉한 빛을 띠곤 쓰러진 프레아를 보며 입맛을 다셨다. 밀리안이 몸을 부들부들 떨며 그를 진정 죽이고야 말겠다는 듯이 쏘아보았다.
안타깝게도 마탑주는 자신이 세계에서 최고로 강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특히 탑은 마탑주를 보호하는 살아 있는 탑. 아무리 대단한 사람이 온다고 해도 탑 안에서만큼은 그를 막을 수 없다고 자부했다.
물론, 그건 우물 속 개구리가 하는 환상이나 마찬가지였다. 어디까지나 마탑이 제대로 기능할 때라야 승산이 있는 법. 그는 이미 에시드에 의해 탑의 방어 체제가 완전히 파괴되었음을 몰랐다. 밀리안은 이성이 뚝 끊어지는 기분이었다.
‘감히…… 감히 너 따위가!’
밀리안의 눈빛이 심하게 떨리며 한순간 주변의 공기가 살얼음처럼 날카롭게 솟아났다. 밀리안은 당장에라도 눈앞의 사내를 찢어발길 것처럼 서늘한 얼굴을 했다.
아니, 아예 그냥 이 마탑을 통째로 부숴 버리면 속이 시원할까? 밀리안이 어떻게 하면 저자를 시원하게 치워 버릴 수 있을까를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뭔가 이상함을 감지한 마탑주가 고개를 갸웃하더니 이내 알겠다는 듯이 낮게 읊조렸다.
“음……? 네놈은 에드모어군. 아아, 그래 맞아. 저 아이 못지않게 내 관심을 끌었었지.”
“죽여 달라고 발악을 하는군.”
밀리안이 짓눌린 음성으로 차갑게 말했다. 저자가 프레아를 관심에 뒀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피가 솟구치는 듯했다. 한데, 거기다 죽여 달라는 소리도 아주 참신하게 지껄이다니. 마탑주는 제법 놀란 체하며 자신만만한 목소리로 그의 약을 바짝바짝 올렸다.
“이런, 화가 단단히 난 모양이야. 하지만 소용없다. 이곳은 마탑 안, 마나가 아닌 오러 따위로 날 어찌할 수는 없…… 크헉!”
마탑주가 말을 채 끝내지도 못하고 비명 섞인 숨을 토해냈다. 어느 틈에 다가온 건지, 오러가 그나마 남아 있는 그의 오른팔을 물어뜯듯이 잘라 버렸기 때문이다.
밀리안은 남은 두 다리도 잘라낼 것처럼 손을 들었다. 그의 손에는 검처럼 솟아난 오러가 형형한 빛을 띠고 있었다. 반사적으로 위험을 감지한 마탑주가 오른 집게손가락에 끼워진 매개체를 얼른 이로 악문 뒤 순간 이동을 외쳤다.
엄청난 파공음과 함께 마탑주는 자취를 감추었다. 밀리안은 그를 따라갈 생각도 하지 않고 다시 굳은 얼굴로 프레아를 끌어안았다. 깊은 심연에 내려앉은 건지 밀리안은 탁한 눈으로 프레아를 바라보았다.
프레아가 이미 시체라도 된 양 단단히 패닉 상태에 빠져 있었다. 밀리안은 자신이 이곳에 왔던 이유조차 잊고 지독한 악몽을 재현했다. 제 앞에서 처참히 죽어갔던 어머니의 모습이 머릿속에 스쳐 지나갔다.
마지막에 마지막까지도 저를 두려워했던 어머니. 대외적으론 마차 사고로 죽었다고 되어 있으나 실은 밀리안 때문에 억울하게 죽은 어머니.
밀리안이 몸을 세차게 떨었다. 그는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한 채 완전히 넋을 놓은 사람처럼 멍하니 있었다. 소중한 사람이 눈앞에서 쓰러지는 걸 두 번 다시 보고 싶지 않았다.
밀리안의 오러가 세차게 요동치며 주변을 둘렀다. 그는 제 어둠을 몰아내지 못하고 그날의 악몽을 거듭 되새겼다.
어머니는 평범한 귀족 영애라 비범한 에드모어의 혈통에 본능적인 두려움을 느꼈다. 하지만 어머니는 강했다. 그녀는 본능적인 두려움을 뛰어넘어서 밀리안을 사랑했다. 밀리안은 그것을 한 치도 의심하지 않았었다. 바로 그 일이 있기 전까지.
마차 소리가 듣기 좋은 음악처럼 들렸다. 어머니의 부드러운 손길이 밀리안의 머리칼을 쓸었다. 밀리안은 안전한 그늘에 있는 아이처럼 편안한 미소를 지었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온통 피바다였다. 손에는 누구의 피인지 모를 것이 흥건했다. 근처에 어머니가 피투성이가 된 채 쓰러져 있었다.
“엄마……?”
밀리안이 핏덩이가 된 어머니에게 엉금엉금 기어갔다. 그러자 그녀가 사시나무 떨듯이 몸을 흔들었다.
“오, 오지 마. 이 괴, 괴물……!”
어머니는 마치 그가 사신인 것처럼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모든 에너지를 쏟아 온몸으로 밀리안을 거부했다. 기억이 끊어졌다는 건 폭주했다는 증거. 그렇다면 일이 이렇게 된 게 자신과 관련 있을지도 몰랐다.
잠시 뒤 어머니는 죽었다. 마지막까지 밀리안을 공포스러운 것으로 여긴 채. 밀리안은 죄책감이 들었다. 뒤늦게 온 아버지가 비통한 울음을 내질렀다. 그렇게 어머니는 죽고, 아버지는 미친 사람처럼 방황했다.
“밀리안. 네 잘못이 아니다. 이건 그냥 사고였어.”
아버지의 뒤늦은 말은 밀리안에게 들리지 않았다. 그사이 밀리안의 상처는 이미 곪을 대로 곪았으니까.
저주받은 아이처럼 감당 못 할 힘을 가지고 태어나 주변을 파멸로 몰아가는 재수 없는 아이. 그것이 밀리안 스스로가 정의하는 자기 자신이었다. 악몽은 다시 마차 안으로 돌아가려 했다.
그때 윈드가 강한 오러를 뚫고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앞발로 그의 머리를 세게 내려쳤다.
“이 미친놈이 지금 한가하게 있을 때야?! 급하니까 얼른 프레아 안고 브레이크한테 가!”
“……레이한테?”
밀리안이 윈드를 몽롱한 시선으로 응시했다. 분명 자신은 엄마의 시체 앞에 있었는데 돌아보니 윈드가 있었다.
여전히 흐린 눈동자에 윈드가 혀를 차곤 밀리안의 왼뺨을 내려쳤다. 이번에는 통증을 느낀 건지 밀리안이 낮게 신음하며 인상을 썼다. 그러자 윈드가 짐승이 으르렁거리는 소리 같은 호령을 뱉었다.
“서둘러! 이건 마법에 의한 쇼크가 아니라고! 뭐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프레아의 영류가 미친 듯이 요동치고 있어. 뭔가 몸속에서 거부반응을 일으키는 것 같은데 나도 더 이상 현신하고 있기 어렵…….”
윈드가 채 말을 끝내지 못하고 바람처럼 사라졌다. 밀리안이 그 모습을 탁한 눈으로 보다 말고 번뜩 정신을 차렸다. 아, 이곳은 마차 안 따위가 아니었다.
마탑이었고, 자신은 방금 전까지 프레아와 함께 정령 실험에 희생된 사람들을 구출하고 있었다. 그러다 프레아가 쓰러졌…….
“프레아!”
밀리안이 얼른 프레아를 번쩍 안아 들었다. 윈드의 말대로 프레아의 영류가 이상하게 용솟음치고 있었다. 까딱 잘못했다간 치명적인 내상을 입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밀리안이 지하를 빠져나가기 위해 계단을 뛰어올랐다. 그 순간 애애앵 하는 소음과 함께 창문이 다 봉쇄되기 시작했다. 밀리안은 제 앞을 가로막는 벽들을 간단히 부수며 곧장 출구로 향했다.
다행히 에시드가 일을 잘 처리했는지 문은 닫히다 말았다. 마탑주를 만나기 전에 들어와도 좋다는 신호를 보낸 터라 황실 기사들이 마탑 안으로 빠르게 들어오고 있었다. 밀리안은 그들을 잠시 보다 쓰러진 프레아를 데리고 메샤르로 향했다.
* * *
“조금만 늦었어도 큰일 날 뻔했습니다.”
브레이크가 땀을 훔치며 밀리안에게 말했다. 메샤르 소파 위에는 깊이 잠든 프레아가 새근거리고 있었다. 밀리안은 그런 프레아의 손을 꼭 잡은 채 아무 말이 없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는 얼굴에는 형용할 수 없는 감정들이 용솟음치고 있었다. 브레이크는 밀리안을 넌지시 응시했다. 다짜고짜 메샤르로 찾아온 밀리안에게 놀랄 새도 없었다.
그는 프레아의 상태를 보고 경악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프레아의 영류가 제멋대로 폭주하고 있었다. 밀리안은 제정신이 아닌 것처럼 서늘한 표정으로 당장 치료하라고 소리쳤다.
때마침 매튜가 옆에 있지 않았다면 저 혼자서 영류를 제어하진 못했으리라. 프레아의 영류는 일반적인 정령사들과는 차원이 다른 크기와 순수한 기운을 지니고 있어, 갑자기 탁해진 영류를 되돌리는 게 쉽지 않았다.
여전히 영류에 탁한 기운이 감돌았지만 다행히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다. 지속적인 영류 순환을 해준다면 금세 좋아질 거라는 말에 밀리안이 입을 다문 것이 벌써 한 시간째였다.
브레이크가 끙, 신음을 하며 매튜를 바라보았다. 이상하게 매튜 이 녀석도 엄청난 충격을 받은 것처럼 동공이 심하게 흔들렸다.
“이봐, 괜찮아?”
“…….”
브레이크가 매튜의 옆구리를 찌르며 소곤거렸으나 묵묵부답이었다. 돌이 된 것처럼 입을 꾹 다문 두 사람 사이에서 브레이크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가만히 있었다. 그 순간 밀리안이 다시 프레아를 안아 들었다.
“어디 가십니까?”
브레이크의 물음에 밀리안이 그를 서늘하게 바라보았다. 맛이 간 것 같은 그의 표정에 브레이크가 움찔했다. 매튜의 시선은 여전히 잠들어 있는 프레아에게로 향했다. 밀리안이 잠시 브레이크를 싸늘히 응시하더니 짧게 대답했다.
“좀 더 편한 잠자리가 좋을 듯해서.”
밀리안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매튜가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는 말씀하시지 않을 생각입니까?”
밀리안과 매튜의 눈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브레이크는 숨죽여 두 사람을 지켜보았다. 밀리안이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답했다.
“아무 일도 없었네.”
“그걸 믿으라고…….”
“자네가 프레아와 어울리고 있다고 해서 그녀에 대해 다 알아야 하는 건 아닐 텐데.”
“…….”
매튜는 말문이 막혔는지 그저 멍하니 밀리안을 바라보았다. 밀리안은 그를 무심히 한 번 응시하곤 사무실을 나가 버렸다. 고요한 정적 가운데 브레이크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원래도 차가웠지만 오늘은 특히 더 냉랭하군. 저렇게 도련님이 동요하는 건 그때 이후로 처음이야. 그나저나 멀쩡하던 영류가 폭주할 정도라면 안에서든 밖에서든 무언가에 의해 충격을 받았다는 건데…….”
브레이크가 말을 하다 말고 매튜를 흘낏거렸다. 매튜는 주먹을 꾹 쥔 채 숨을 고르고 있었다. 무언가를 삭이는 것만 같았다.
스승님의 정령을 찾으러 갔다가 우연히 마주친 매튜는 생각보다 상태가 심각했었다. 그는 정령 협회에서 대대적으로 언령 연구자들을 숙청할 때에 사라졌다. 그래서 브레이크는 당연히 그가 스승님을 배신했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다시 만난 그는 마법사들에게 실험당해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상태였다. 그 사실을 알았을 때,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느꼈다. 단순히 뜻이 안 맞는 정적을 숙청한 거라고 하기에는 그에게 가해진 실험이 너무나도 끔찍했기 때문이다.
“그레이.”
브레이크가 조용히 매튜의 진짜 이름을 불렀다. 그레이는 갈무리하지 못한 감정을 고스란히 눈에 드러내며 브레이크를 응시했다. 브레이크는 그런 그레이를 향해 당부했다.
“흥분하면 위험해.”
“알아.”
브레이크의 진심 어린 걱정에 그레이가 피식 웃었다. 임시방편으로 멈춘 저주는 여전히 유효했다. 저주는 그가 조금의 동요를 보일 때마다 틈을 놓치지 않고 그를 갉아먹었다.
그레이가 한숨을 내쉬었다. 죽기 전에 꼭 한 번, 딸아이와 에밀리의 얼굴을 보고 싶었을 뿐이다. 브레이크가 에드모어 성에 머문다는 말을 듣지 않았다면 그를 따라오지 않았을 것이다.
더러운 권모술수가 판치는 수도에 오고 싶지 않았다. 스승님은 죽었고, 자신은 협회에 배신당해 처절하게 이용당했다. 복수를 생각하지 않은 것은 아니나 제 바보 같은 머뭇거림에 동료도 모두 잃었다.
거기다 몸에 끔찍한 저주까지 새겨져 죽음을 기다리는 산송장 신세가 되었으니 비참하기 짝이 없다. 실험실에서 도망친 직후 에밀리가 재혼한다는 소식을 뒤늦게 들었다.
그레이는 그녀와 딸을 위해 조용히 죽어주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얼굴을 마주하면 마주할수록 바보같이 자꾸만 살고 싶어졌다.
자꾸만 내가 그레이라고 말하고 싶어졌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그래선 안 됐다. 그레이는 매일 밤 저를 찌르고 찔러 마음을 죽여야만 했다.
“이래서 오고 싶지 않았어.”
그레이가 낮은 음성으로 뇌까렸다. 그런 그를 브레이크가 한참 응시했다.
“그레이, 너 정말 뭐 숨기는 거 없어?”
브레이크의 진중한 목소리에 그레이는 희미한 미소를 띠었다. 에밀리와 연애하는 사실을 세간에 숨긴 것이 에밀리를 살렸다. 적어도 협회의 화살이 그녀에게 향하지 않았으니까.
물론 그로 인해 그레이는 가족의 품으로 갈 수 없게 되었다. 하지만 그는 앞으로도 쭉 모두가 모르길 바랐다. 딸과 에밀리가 이대로 쭉 행복하길 바랐으니까.
“없어.”
그레이의 낮은 음성을 끝으로 대화는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 * *
프레아가 눈을 떴을 때는 새벽 어스름이었다. 그녀는 눈을 깜박깜박하며 어둠에 눈이 익숙해지기를 기다렸다. 분명 마탑에서 마법사와 마주쳤던 것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그 뒤로는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익숙해진 눈으로 주변을 살피니 제 방 안이었다.
“윽.”
그때 가슴에 통증이 느껴졌다. 프레아는 가슴을 부여잡으려다 말고 움찔했다. 왼손이 누군가에게 붙잡혀 있음을 그제야 눈치챘다. 고개를 돌려 옆을 확인하니 찰랑거리는 은발이 보였다.
밀리안이 침대에 머리를 기대고 제 손을 꼭 쥔 채 불편한 자세로 잠들어 있었다. 프레아는 멍하니 밀리안을 바라보았다. 밀리안은 잔뜩 미간에 주름을 잡고 있었다. 나쁜 꿈이라도 꾸는지 식은땀을 잔뜩 흘리고 있었다.
그래서일까, 밀리안이 무척 안되어 보였다. 프레아가 붙잡히지 않은 다른 손으로 밀리안의 미간을 꾹 눌렀다.
“무슨 꿈을 꾸길래 이렇게 괴로운 표정이야.”
프레아의 다정한 목소리가 방 안에 나직이 울렸다. 밀리안의 주름은 여전히 펴질 기색이 없었다. 프레아가 열심히 그의 미간을 꾹꾹 누르며 속삭였다.
“그러지 말고 좋은 꿈 꿔, 밀리안.”
잠시 뒤 그녀의 말이 주문인 양 밀리안의 미간이 펴졌다. 프레아는 밀리안 쪽으로 슬쩍 몸을 기울이며 어둑한 방 안에서 그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분명 마법이 발동되려는 걸 보자마자 토토를 소환해 깨뜨렸던 건 기억한다. 하지만 이상하게 그 뒤 기억이 없고, 몸 상태는 최악이다. 특히 영류가 몰라보게 막혀 있었다.
누군가 억지로 순환시켜 뚫은 것 같은 느낌이 감돌았다. 그 사이로 브레이크와 매튜의 영류가 희미하게 느껴졌다. 아무래도 밀리안이 저를 두 사람에게 데리고 간 듯했다.
마법사가 다른 마법을 사용해 내상을 입힌 걸까. 프레아는 마법진을 보자마자 무언가 금이 가는 소리를 들었다. 파삭, 하는 소리와 함께 그대로 시야가 점멸했었다. 마치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본 사람처럼 제 몸은 순식간에 어둠 속으로 빨려갔었다.
“그 마법진 너무 익숙한데.”
프레아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처음 보는 마법진이라기에는 그 교묘한 수식이 어딘가 익숙했다. 마법사들은 고유의 수식과 마법진을 사용했다. 얼마나 연구하고 노련한가에 따라 다양한 마법진을 구사할 수 있었다.
‘마법진뿐만 아니라, 그 남자도 어디서 본 것 같았어.’
프레아가 흐려지는 시야에서 마주친 마법사를 떠올리며 인상을 찌푸렸다. 요즘 기억력에 정말 문제가 있는 건지 자꾸 알아야 할 사람은 기억 못 하고, 처음 본 사람은 익숙하게 느껴졌다.
이상하다. 머리에 문제라도 생긴 걸까?
프레아는 머리를 긁적이곤 좀 전의 꿈을 떠올렸다. 자세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그 숲은 처음 토토와 계약했던 숲 같았다.
분명 무척 슬프고 그리운 느낌이었는데…….
프레아가 자세를 바르게 고쳐 누워 눈을 감고 그 위를 손으로 꾹 눌렀다. 잊어버리지 말아야 할 것을 잊어버린 것처럼 찝찝했다. 꿈에서 분명 중요한 사람을 만났던 것 같은데……. 깨자마자 기억나는 것은 숲과 단풍 냄새뿐이었다.
그곳에서 무얼 하고 있었는지는 아예 생각조차 나지 않았다. 어지러운 생각을 떨치고자 프레아는 다시 고개를 돌려 밀리안을 바라보았다.
잠든 것은 좋지만 저런 자세로 자다간 다음 날 몸이 찌뿌둥할 터였다. 프레아는 염려스러운 마음에 그의 어깨를 슬며시 흔들며 속삭였다.
“밀리안, 방에 가서 편하게 자.”
“…….”
굳게 닫혀 있던 속눈썹이 슬며시 열렸다. 붉은 눈이 지나치게 짙고 선명하게 빛났다. 그 모습을 본 프레아가 움찔했다. 밀리안이 고요히 프레아를 응시하며 갈증이 나는지 마른침을 삼켰다.
“프레아.”
밀리안이 입술을 열어 나직이 프레아를 불렀다. 몽롱한 그의 시선에 프레아는 아무 말도 못 하고 가만히 있었다. 밀리안이 다시 한번 그녀를 부르며 말했다.
“프레아, 내 눈앞에서 쓰러지지 마. 미치는 줄 알았어.”
그가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초점 없는 그의 눈이 더욱 붉게 빛났다. 무언가를 잘못 건드린 것 같았다. 밀리안의 상태가 이상했다. 갈증을 견디지 못해 정신을 놓은 것처럼 보였다.
그렇다면 피를…….
프레아가 익숙하게 손에 피를 내려는데 갑자기 가슴에서 울컥하고 무언가 올라왔다.
“우욱.”
비릿한 맛이 입안 가득 퍼졌다. 각혈이라니, 영류가 갑자기 잠재워진 탓에 내상을 입은 모양이다. 프레아가 손으로 입을 가린 채 울컥 올라오는 것을 받아냈다. 프레아의 손에 핏빛이 선연했다.
완전히 피투성이가 된 프레아가 흠칫 떨었다. 제정신이 아닌 밀리안 옆에서 피를 토하는 상황이라니. 프레아가 얼른 밀리안에게 붙잡힌 손을 떼어내려는 순간이었다.
묵직한 무게가 프레아의 몸을 짓눌렀다. 완전히 맛이 간 밀리안이 그대로 프레아의 입술을 덮쳤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밀리안은 피를 보자마자 이성을 잃은 듯했다. 그가 오아시스를 발견한 사람처럼 프레아의 입안을 마구 헤집었다.
“으으, 자, 잠깐…….”
이렇게 제정신이 아닐 때면 프레아가 아무리 말리려 해도 말릴 수 없었다. 밀리안이 우악스럽게 프레아의 두 손을 붙들었다. 그러곤 할짝거리는 적나라한 소리를 내며 프레아의 입안 곳곳에 있는 피를 정신없이 훑었다.
입안 가득 비린내가 진동했다. 프레아는 헐떡거리며 밀리안을 떼어내려 애썼으나 상태가 좋지 않아 토토를 소환하기도 힘들었다. 도대체 무슨 마법에 걸렸었기에 이렇게 속수무책으로 내상을 입은 건지, 적잖이 당황스러웠다.
밀리안의 입술이 프레아의 입에서 턱과 목으로 옮겨갔다. 각혈하면서 피가 목과 가슴께까지 묻은 탓이었다. 밀리안이 제정신이었다면 멈추었겠지만 지금의 그는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었다.
‘성인이 된 뒤 그가 이런 식으로 정신 못 차린 적은 없었는데…….’
게다가 이런 모습을 제게 보이는 걸 무척 싫어해서 버티고 버티다 안 되겠다 싶을 때 피를 요구했던 밀리안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달랐다.
마치 잠자는 사자의 코털을 뽑아 경을 친 것처럼, 깨어난 밀리안은 대화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아니, 어쩌면 지금처럼 많은 피를 그의 앞에서 쏟은 적이 없어서 몰랐던 모습을 마주한 걸지도 몰랐다.
프레아는 자세가 불편하여 몸을 비틀었다. 삐거덕거리는 소리가 침대에서 새어 나왔다. 프레아가 몸을 자꾸 움직이자 밀리안이 나서서 자세를 고쳐주었다.
그러다 프레아의 잠옷이 매트 모서리에 걸려 그대로 북 찢겼다. 하필 입고 있던 잠옷이 슈미즈 타입의 원피스라 속수무책이었다.
‘으아아.’
프레아가 잠옷을 부여잡으며 허둥지둥했다. 그사이 밀리안의 입술은 쇄골로 옮겨가 제멋대로 지분거렸다. 분위기가 무척 야릇해지는 것 같았다. 프레아는 다급하게 옷을 말아 쥐며 소리쳤다.
“아앗, 잠깐만! ……밀리안!”
프레아가 당황하며 허우적거리자 밀리안의 몽롱한 시선이 다시 그녀에게로 향했다.
입안에 있던 피를 제법 많이 마셔 정신이 돌아오기라도 한 걸까? ……라고 기대했으나 헛된 바람이었다.
“왜? ……내가 싫어?”
밀리안이 여전히 탁한 눈빛으로 프레아를 응시하며 낮게 읊조렸다. 건조하게 울려 퍼지는 목소리가 어쩐지 간드러지게 들렸다.
“아니, 싫고 좋고의 문제가 아니라…….”
프레아가 어물쩍거리며 그와 시선을 마주쳤다. 지금의 밀리안은 어딘가 묘하게 금단의 기운을 풍기는 듯했다. 어둑한 곳에서 선명하게 번뜩이는 눈은 올곧이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제 손을 붙든 팔뚝에 선명히 도드라진 힘줄. 축 늘어진 머리카락. 입술에 묻은 피를 훔치는 그의 표정 등. 모든 것이 아주 위험한 호르몬을 풍겼다.
남동생이 이상해졌어요!
프레아는 그렇게 소리치고 싶었다. 프레아가 한동안 말이 없는 것이 불만스러웠는지 밀리안이 인상을 쓰며 말했다.
“내 앞에서 한눈팔지 마.”
“어떻게 널 두고 한눈을 팔아.”
‘게다가 널 보고 있었던 거잖아!’
프레아는 뒷말을 삼키며 쿵쿵거리는 심장을 애써 진정시켰다. 어쩐지 원초적인 밀리안의 모습을 보는 기분이었다. 본능만 남아 있는 것처럼 먹고 싶으면 먹고, 자고 싶으면 자고, 하고 싶으면 해야만 하는 상태라고 할까.
‘안 되겠다. 일단 달래면서 허점을 노려야지.’
프레아가 결연한 표정을 짓곤 온몸에 힘을 풀었다. 그에게서 벗어나려던 것을 멈춘 것이다. ‘나 잡아먹으쇼’ 하는 듯한 프레아의 태도에 밀리안이 게슴츠레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프레아는 그런 밀리안을 살살 달래기 시작했다.
“뭐 해, 하던 거 마저 해.”
프레아의 도발에 밀리안의 동공이 다시금 탁해졌다. 밀리안이 고개를 천천히 내렸다. 그의 입술이 다시 프레아의 입술로 향하려 할 때였다.
‘잡았다, 요놈!’
프레아는 남아 있는 힘을 모두 끌어내 바람으로 그의 뒷목을 가격했다.
“윽.”
갑작스럽게 당한 공격에 밀리안이 얕은 신음을 내뱉곤 그대로 프레아의 품에 털썩 쓰러졌다.
“하여간 나한텐 지나치게 방심한다니까.”
프레아가 투덜거리며 그를 힐끗거렸다.
“기절한 거 맞지?”
그러곤 밀리안을 툭툭 건들며 잠들었는지를 재차 확인했다. 가뜩이나 몸도 안 좋은데 힘을 써서 그런지 손에 힘이 하나도 안 들어갔다. 프레아는 겨우겨우 손을 들어 그의 등을 가만가만 토닥였다.
“네가 싫은 게 아니야. 그냥 지금의 밀리안도 좋지만 역시 제정신인 네가 더 좋은 것뿐이지.”
자신이 기절시킨 사람에게 속삭이는 말치곤 다정한 음성이었다. 하여간 다음 날 일어나서 나한테 얼마나 미안해하려고 이러나 몰라. 프레아가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리곤 낑낑거리며 밀리안을 옆으로 떨구었다.
헉헉, 힘들어 죽겠네.
프레아가 젖 먹던 힘까지 끌어올려 밀리안을 바른 자세로 눕게 한 후 몸에 힘을 쫙 풀었다. 이렇게 힘이 부족했던 적은 이번이 처음이라 더 이상은 못 움직일 것 같았다. 도무지 그를 방으로 옮길 여력이 없었다.
“아, 몰라.”
프레아가 옆에 기절한 채 잠든 밀리안을 슬쩍 쳐다보았다. 어차피 침대도 큰데 그냥 이대로 다시 자고 싶었다. 아니, 싶었다가 아니라 그냥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프레아의 손이 가만가만 밀리안을 토닥였다.
내일 일은 내일 걱정하고, 오늘은 푹 자길.
밀리안이 편안히 자도록 바라는 마음에 간헐적으로 그를 토닥이던 손길이 잠시 뒤 뚝, 멈추었다.
* * *
아침의 새소리가 창틈으로 밀려들어 왔다. 프레아는 제 허리를 무겁게 짓누르는 무언가에 끄응, 괴로운 신음을 내뱉으며 눈을 떴다.
온몸이 물먹은 솜처럼 무거웠다. 이렇게 아픈 건 또 오랜만이라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는데, 뭔가 제 것이 아닌 것이 몸에 닿아 있는 기분이 들었다.
돌덩어리가 허리에 얹어져 있는 오묘한 감촉이었다. 프레아가 잔뜩 인상을 쓰고 아래를 내려다보다 말고 두 눈을 크게 떴다.
“헉!”
밀리안이 제 허리를 꼬옥 끌어안은 채 잠들어 있었다. 프레아는 짧은 탄성을 내지르곤 이내 흠칫하며 누가 들을세라 얼른 입을 막았다.
아, 맞다. 어제 같이 잤지.
프레아가 놀란 가슴을 애써 쓸어내리며 밀리안을 바라보았다. 밀리안은 어제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까맣게 모른 채 태평하게 자고 있었다.
잠결에 옷은 또 어디다 벗어둔 건지, 허리를 붙든 팔뚝 너머로 그의 등 근육이 여실히 보였다. 시선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모르겠다. 프레아가 움찔거리며 밀리안의 얼굴을 살폈다.
어제 이후로 갈증이 사라졌는지 한결 편안해 보였다. 그 모습에 다행이라 생각하며 조용히 품에서 벗어나려는데, 힘이 어찌나 센지 밀리안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게다가 지금은 힘이 하나도 없는 상태라 그를 떼어내기 더욱 어려웠다. 프레아가 씨름하듯 끙끙거리고 있는데 누군가 노크하며 들어왔다.
“아가씨, 좋은 아…… 꺄아아!”
시에라는 들어오자마자 프레아의 허리에 웬 남정네가 거머리처럼 들러붙어 있는 것을 보고 소리를 질렀다. 프레아가 한껏 당황해서 다급히 외쳤다.
“시에라! 진정해! 이거 밀리안이야!”
“네, 네? 도, 도련님이요?”
시에라가 질겁한 표정으로 말하자 프레아가 얼른 밀리안의 예쁘장한 머리통을 가리켰다. 그제야 시에라는 제 주인을 범하려 했던 파렴치한이 밀리안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입을 다물었다.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굳힌 시에라가 사시나무 떨듯 몸을 떨며 할 말을 잃은 표정을 지었다. 그때였다. 시에라의 비명에 다급히 다가온 랭이 밀리안에게 안겨 있는 프레아를 보고 망연자실한 표정을 지었다.
“기, 기어이 도련님께서!”
그러더니 자리에 털썩 주저앉으며 절규했다. 시에라에 이어 랭까지 패닉 상태가 되자 프레아가 허둥지둥했다.
“자, 잠깐! 반응이 다들 왜 이래? 한두 번 이런 것도 아니고.”
프레아의 말은 듣기에 따라 달리 해석될 여지가 충분했다. 전에도 이런 적 있다는 말뜻은 변함없다. 하지만 함정은 그 ‘이런 것’에 대한 생각이 프레아와 두 사람이 달랐다는 점이다.
프레아는 전에도 밀리안이 폭주했다는 뜻으로 말했고, 그들은 밀리안과 프레아가 이미 여러 차례 밤을 보냈다고 해석했다. 두 사람의 표정은 더욱 가관이 되었다.
“하, 한두 번 이런 게 아니라고요?”
망연히 서 있는 시에라와 달리 랭은 얼른 정신을 차리고 재차 확인하듯 물었다. 그런 랭의 반응이 어쩐지 이상해 프레아는 인상을 찌푸렸다. 그때 시에라가 말을 더듬으며 말했다.
“아, 아가씨, 정말 도련님과…….”
“다들 왜 이렇게 호들갑이야?”
프레아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묻자 시에라가 프레아의 옷을 가리켰다. 시에라의 손을 따라 프레아의 시선이 아래로 떨어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프레아는 저들이 왜 저렇게 호들갑을 떨었는지 알 수 있었다.
어젯밤 밀리안과 요란하게 대치하느라 엉망이 된 침대 시트며, 군데군데 떨어진 핏방울들이 보였다. 게다가 프레아의 슈미즈 원피스 타입의 잠옷 위에는 피 얼룩이 선명했다.
어젯밤 실수로 찢긴 잠옷 사이로 프레아의 하얀 어깨가 슬쩍슬쩍 드러난 건 덤이었다. 화룡점정은 웃통을 벗은 밀리안이었다. 침대 아래를 살피니 밀리안이 아무렇게나 벗어놓은 옷가지가 널브러져 있었다.
마치 뜨거운 밤을 보낸 것 같은 침실의 분위기였다. 누가 봐도 이상하게 여길 만했고, 당연히 의심할 만한 상황이었다. 프레아의 동공이 심하게 흔들렸다.
“이, 이건…….”
프레아는 무어라 설명하지 못하고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그때 밀리안이 으음, 하고 신음하며 프레아의 허리를 더욱 끌어안았다.
“맙소사…….”
그 모습에 랭은 말없이 흠칫 몸을 떨었고, 시에라는 멍하니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단단히 오해하는 듯한 그들을 향해 프레아가 해명했다.
“지금 생각하는 그거, 아니야.”
“제, 제가 뭘 생각하고 있다고 그러세요?”
시에라가 찔렸는지 말을 더듬었다. 랭은 이미 하얗게 질린 채 인형처럼 멈춰 있었다. 두 사람의 눈빛엔 불신이 가득했다. 프레아가 그런 둘을 향해 침착하게 말했다.
“어젯밤 내가 각혈했는데 그걸 본 밀리안이 갑자기 회까닥해서 실수로 옷이 찢어진 거야. 얘가 옷은 왜 벗었는지 나도 모르겠…….”
“가, 각혈이요?!”
시에라가 각혈이라는 말에 화등잔처럼 눈을 크게 뜨며 소리쳤다. 랭도 그제야 태엽을 감아 동력을 찾은 인형처럼 몸을 벌떡 일으키며 말했다.
“어, 얼른 의원을 불러오겠습니다!”
다행히 두 사람이 바로 의심을 거두자 프레아가 힘없이 손을 휘휘 저으며 입을 열었다.
“그것보다 밀리안 좀 떼줘. 힘이 하나도 없어.”
그녀의 요구에 방을 막 나서려던 랭이 되돌아와 허둥지둥 프레아에게서 밀리안을 떼어냈다. 밀리안은 끈덕지게 허리에 매달리다 떨어졌다.
프레아는 여전히 누운 채 숨을 골랐다. 아침부터 소리쳤더니 안 그래도 없던 기운이 바닥을 드러낸 것 같다. 어느새 다가온 시에라가 울먹울먹하며 프레아의 손을 꼭 붙들었다.
“각혈이라니, 어제까지만 해도 건강하셨던 아가씬데! 그것도 모르고…….”
“시에라, 나 괜찮아. 사람이 가끔 피도 뱉고 그런 거지.”
“그걸 말이라고…….”
프레아의 힘없는 목소리에 시에라가 무슨 헛소리냐는 얼굴로 찌릿 그녀를 쳐다보았다. 나름대로 걱정 말라고 한 소리인데 더욱 걱정스럽게 만든 모양이다.
프레아는 저를 안쓰럽게 바라보는 시에라를 응시하며 배시시 미소 지었다. 뒤늦게 소식을 듣고 온 진과 에밀리가 프레아의 침대에 떡하니 누워 있는 밀리안을 보고 경악했다.
때아닌 소동이 에드모어 성을 흔들었다. 정작 원인 제공자인 밀리안은 시끄러운 집 안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프레아의 침대에서 오후 내내 자다가 저녁때가 되어서야 눈을 떴다.
* * *
“그러니까, 마탑에 들어갔었다는 말이니?”
에밀리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프레아를 바라보았다. 프레아는 잔뜩 화가 난 것 같은 에밀리의 표정에 어색한 미소를 흘렸다. 하지만 그것이 에밀리를 더욱 자극한 모양이다. 에밀리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웃음이 나오니?”
“죄송해요.”
프레아가 서둘러 미소를 거두며 그녀의 눈치를 보았다. 당장에라도 태풍이 몰아칠 것처럼 고요하고 무거운 분위기였다. 밀리안은 여전히 제 방 안에서 단잠을 자고 있었다.
평소 잠도 별로 없는 애가 오늘따라 잠을 늘어지게 자고 있어 이 위기를 프레아 홀로 넘겨야 했다. 프레아는 눈을 도르르 굴리며 옆에 있는 진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프레아의 간절한 눈빛을 감지한 진이 에밀리의 어깨를 도닥거리며 말했다.
“에밀…….”
“바른대로 말하렴. 마탑에는 왜 들어갔어?”
하지만 에밀리는 진의 말을 뚝 끊고 그냥 넘어가지 않겠다는 듯 프레아를 다그쳤다. 평소답지 않게 엄한 모습이라 프레아는 망설였다. 옆에 있던 진은 입을 달싹이다 곧 짙은 한숨을 내뱉었다. 그도 그녀를 말리지 못하겠다는 표정이었다.
“그게…….”
프레아는 머뭇거렸다. 쉽사리 입술을 열기 어려웠다. 에밀리에게 에시드 대공과의 거래 내용을 말했다간 분명 더 크게 혼이 날 테니까. 결국 프레아가 에밀리를 빤히 보며 쭈뼛거렸다.
“화내지 않는다고 약속해 주세요.”
“내가 화낼 만한 일을 하고 다녔다는 말이구나.”
에밀리가 딱딱한 어조로 말하자 프레아는 망연자실한 표정을 지었다. 안 해도 될 말을 해서 그녀의 심기를 더욱 건드린 걸 알아서였다.
어제까지 멀쩡했던 딸이 마법사들의 소굴인 마탑에 말도 없이 다녀온 것도 모자라 다치기까지 했다. 이런 상황에서 그녀에게 화내지 말라고 하는 건 억지였다.
납작 엎드려 잘못을 빌어야 했는데…….
낯선 엄마의 모습에 저도 모르게 변명할 궁리를 찾으려 했다. 서재의 분위기는 더욱 차갑게 얼어붙었다. 그때 진이 프레아를 독려했다.
“프레아, 괜찮으니 말해봐라.”
프레아는 진과 에밀리를 번갈아 보며 심호흡을 크게 내뱉었다. 지금이 솔직해져야 할 때라는 걸 모르지 않았다. 마탑에 조용히 다녀오려고 했던 계획이 무산된 시점에서 더 이상 숨기고만 있을 순 없으니까.
그래, 모든 걸 고백하고 용서를 구해야 했다. 프레아는 에시드 대공이 저를 찾아와 요구했던 일부터 머레니와의 만남, 마탑에서 있었던 일들을 빠짐없이 이야기했다.
프레아가 이야기하는 내내 에밀리의 표정은 좋지 못했고, 진 역시 얼굴을 굳힐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