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이 된 남동생이 남편이 되려 한다
3
센리 장편소설
목차
11장 브레이크의 귀환
12장 마탑의 밤
13장 그날 이후
14장 황녀와의 조우
15장 밝히려는 자와 감추려는 자
16장 드러나는 진실
“여기가 은밀하고 내밀하며 으슥하기까지 한 어두운 곳이야?”
프레아가 테일러스 성에 들어오며 김빠진 목소리로 물었다. 어쩐지 아는 장소로 이끄는 것에 실망감이 든 건 기분 탓이리라. 밀리안은 그저 방긋거렸다.
뭐야, 하도 거창하게 말하길래 어딘가 했는데 바로 옆집이라니.
콩닥콩닥 뛰던 심장이 짜게 식었다. 하도 꼬시겠다고 선언해서 수상한 짓을 할까 봐 경계했는데 생각보다 담백한 데이트 장소였다. 하긴, 집이면 확실히 남들 눈에 띌 걱정 없이 데이트를 즐길 수 있는 곳이지.
그런데 왜 기분이 이상하지? 으음, 설마 지금 실망한 거야, 나?
프레아가 제 몸의 급격한 반응에 인상을 팍 썼다. 그에게 끌려오면서도 내심 다른 것을 기대하기라도 한 것처럼 미묘한 기분이었다. 잠시도 표정을 가만히 내버려 두지 못하는 프레아를 보며 밀리안이 말했다.
“밖에서 만나면 네가 계속 신경 쓸 것 같아서.”
“으음, 뭐…… 그렇긴 한데.”
“무슨 상상을 한 거야? 설마 내가 널 침대에라도 끌고 갈 줄 알았어? 생각보다 엉큼하네.”
“아니거든!”
프레아가 애꿎은 밀리안에게 버럭 했다. ‘자꾸 네가 막 입을 문대니까 그쪽으로 생각이 꽂힌 거잖아!’라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게라가 앞에 있어 참았다. 게라는 프레아를 반갑게 맞이했다.
“오신다고 하여 준비해 두었습니다.”
“수고했어. 그럼 다 퇴근해. 이 성엔 우리 둘만 있겠다.”
“그러겠습니다.”
게라가 방긋방긋 인사하고 나갔다. 그가 웃는 것이 일찍 퇴근할 수 있어서인지, 주인의 연애가 순조로워서인지는 알 수 없었다. 아니, 알고 싶지 않아!
프레아가 게라의 뒷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멍하니 보다가 주변을 살폈다. 성안에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모두 퇴근한 모양이다. 이 이른 시간에. 프레아가 어리둥절해하자 밀리안이 그녀의 손을 붙잡으며 말했다.
“둘만 있고 싶다길래.”
“아니, 나는…….”
“갈까?”
밀리안이 프레아의 손을 잡아끌었다. 프레아는 멍하니 밀리안에게 이끌렸다. 그는 성 맨 꼭대기로 프레아를 인도했다. 아무도 없는 빈 성에 단둘이 있다고 생각하니 다시 심장이 쿵쿵거렸다. 이놈의 심장은 줏대 없이 이랬다저랬다 했다.
“어?”
밀리안이 이끄는 장소에 도착한 프레아는 머릿속에 물음표를 만들었다.
‘내가 좋아하는 연극이잖아?’
뜻밖의 장면이 벽면 가득 재현되고 있었다. 방 안은 무척 아늑했고 천장 일부가 유리로 되어 하늘이 잘 보였다. 창틈으로 보이는 하늘은 이미 노을이 지고 있었는데, 곧 완전히 해가 지고 밤이 될 터였다.
프레아는 믿기지 않아 벽면에 빛을 쏘아대는 물건을 바라보았다. 두두두 소리를 내며 빛을 쏘고 있는 물건은 마도구 같았다. 처음 보는 마도구 덕에 꼭 극장에 있는 기분이었다. 벽면에는 여자 주인공이 남자 주인공과 데이트하는 장면이 상영되고 있었다. 얼빠진 프레아에게 밀리안이 말했다.
“신기하지? 이젠 네가 보고 싶으면 극장에 안 가도 언제든지 볼 수 있어.”
“와아…….”
그제야 프레아가 낮은 탄성을 내질렀다. 밀리안이 그런 프레아에게 다정히 물었다.
“어때? 네가 상상한 그대로야?”
프레아는 그를 멍하니 응시한 채 답하지 않았다. 상상한 대로라는 말로 부족할 정도로 완벽한 재현이었다. 프레아가 다시 황홀한 얼굴로 하얀 벽에 쏘아진 빛을 바라보았다.
세상에 이렇게 기뻐도 되는 걸까. 어릴 적 지나가면서 밀리안에게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했던 적이 있다. 당시에 프레아는 연극에 푹 빠져 있던 터라 더 자주 그런 상상을 하곤 했다.
머릿속에서 그때 밀리안과 나눴던 대화가 떠올랐다. 연극을 보고 성으로 돌아오며 아쉬움을 토했던 날이었다.
‘연극을 매일 볼 수 있으면 좋겠다.’
‘그럼 자주 극장에 오면 되지.’
‘아니. 그런 거 말고, 보고 싶을 때 언제든지 볼 수 있으면 좋겠다고.’
그날 퉁명스럽게 대꾸하던 남자아이는 다 기억하고 있던 모양이다. 툴툴거리는 제게 아무 대답도 하지 않던 그 아이는 사실 속으로 그 꿈을 이뤄주기로 다짐했었던 걸까.
그런 줄도 모르고 무심하다고 서운해했었구나. 당연히 제 상상을 말도 안 되는 일이라 여겨 대답하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걸 기억하고 진짜로 만들어주다니. 스스로도 잊고 있던 어릴 적 투정을 지금까지 기억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이건 좀 많이 감동인데.
프레아가 저도 모르게 심장을 부여잡았다. 심장이 몽글몽글하고 숨이 가빴다. 붉은 노을이 점점 보랏빛이 되었다. 하늘이 붉었다가 파랬다가 보랏빛으로 물들자 밀리안의 은발도 색을 바꾸었다.
그 모습이 무척 예뻐서 저도 모르게 멍하니 밀리안을 응시했다. 좀 황당하지만 밀리안이 마치 저 노을 같다고 느껴졌다. 아깐 분명 붉은색이었는데 눈 깜짝할 사이에 보라색이 되어버린 노을처럼, 밀리안도 예고 없이 제 마음에 마음대로 자리 잡아버렸다. 정말 눈 깜짝할 사이에.
인지했을 때는 이미 속절없이 그에게 빠져 허우적대고 있었다. 해가 밤이 싫다고 아무리 빛을 발한다 해도 어김없이 밤은 오듯이, 밀리안의 마음을 밀어내면 밀어낼수록 더 빠져드는 건 프레아 자신이었다.
더 이상 이 마음을 숨기기 어려웠다. 세 번 만에 인정하게 만들겠다는 밀리안의 말이 떠올랐다. 세 번은 무슨, 처음부터 완전히 인정하고 만 기분이다.
내가 졌다. 완벽히 그에게 지고 말았다.
“이렇게 좋아할 줄 알았으면 더 빨리 보여줄걸.”
밀리안이 프레아의 볼을 매만지며 말했다. 애정 어린 그의 눈빛에 프레아의 눈이 세차게 흔들렸다. 프레아는 자신이 어떤 표정으로 밀리안을 보고 있을지 궁금했다. 사랑에 빠진 얼굴일까, 난감한 얼굴일까. ……아무래도 전자일 것 같다. 프레아가 고개를 숙였다.
“고마워.”
“말로만?”
밀리안이 상체를 옆으로 숙여 프레아와 시선을 맞추며 되물었다. 프레아는 장난기가 가득한 그의 얼굴을 물끄러미 보았다. 그가 원하는 것이 답례라는 것도, 농담처럼 말하지만 실은 진심이란 것도 알았다. 문득 에밀리가 떠올랐다.
‘엄마, 미안해. 나 밀리안이 너무 좋아.’
프레아는 결심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눈을 감아야 해주지.”
“어차피 볼에 해줄 거 눈감아야 해?”
“눈 안 감으면 안 해줄 거야.”
밀리안이 기꺼운 빛을 띠며 눈을 감았다. 그러고는 볼을 프레아에게 쭉 내밀었다. 하지만 그의 예상과 달리 그녀가 입을 맞춘 곳은 볼이 아니라 입술이었다. 짧게 닿았다 떨어진 입술에 밀리안이 멍하니 프레아를 바라보았다.
지금, 뭐가 닿았던 거지?
눈앞에 있는 프레아의 양 볼이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녀가 시선을 피하지 않고 밀리안을 마주 보았다. 지나치게 수줍어하는 것을 보니 입술에 닿은 것이 프레아의 입술이 맞는 모양이다.
“이건 반칙인데.”
밀리안이 얼른 입술을 손으로 가린 채 말했다. 농담이었다. 그냥 당황하는 모습이 귀여워서 보고 싶었을 뿐인데……. 밀리안은 깊어진 눈빛으로 프레아를 응시했다. 이건, 허락한다는 의미인 걸까.
그때 프레아가 입술을 가린 손등에 다시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촉, 촉, 촉.
밀리안은 당황한 것을 들키지 않으려 표정을 갈무리했다. 프레아는 그런 밀리안을 보고도 계속해서 입술을 부딪쳐 왔다.
연달아 제 손에다가 입술 도장을 찍는 것이 어쩐지 참을 수 없어서 밀리안이 프레아를 붙잡았다. 이대로 두다간 이성이 제대로 기능하지 못할 것만 같았다.
“답례는 보통 한 번…….”
밀리안의 손이 입술에서 떨어지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프레아가 다시 입을 맞추었다. 밀리안의 뒷말은 프레아의 입술에 막히고 말았다. 이번엔 답례를 위한 가벼운 입맞춤 정도가 아니었다.
밀리안이 주춤주춤하자 프레아가 그를 벽으로 밀었다. 그녀의 적극적인 행동에 적잖이 놀란 밀리안은 엉거주춤 벽으로 밀리고 말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밀리안이 능숙하게 프레아의 허리를 안아 자세를 잡았다.
프레아 역시 그의 목에 팔을 둘렀다. 마도구는 계속해서 윙윙 소리를 내며 빛을 쏘았고 연극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그 옆 어둑한 방구석에서 밀리안과 프레아가 입을 맞추었다.
쉬지 않고 이어지는 입맞춤에 프레아와 밀리안의 숨이 거칠어졌다. 프레아는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밀리안에게 매달려 입술을 훔쳤다. 밀리안을 놓아주지 않을 것처럼 꼭 붙잡는 것도 잊지 않았다.
한참 불같은 입맞춤을 끝내고 드디어 프레아가 밀리안을 놓아주었다. 밀리안이 잔뜩 촉촉해진 입술로 물었다.
“지금 이거 뭐야? 설명이 필요할 것 같은데.”
낮은 중저음이 프레아의 귓가에 가만가만 울렸다. 그의 눈이 어둑한 공간에서 오묘한 빛을 냈다. 스스로에게 수없이 물었던 질문에 대한 답을 할 시간이었다.
멈출 수 있다고, 멈춰야만 한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곰곰이 돌이키면 그런 생각을 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지고 시작한 게임이란 뜻이다. 프레아가 밀리안을 빤히 보며 나직이 말했다.
“네가 이겼어.”
“……뭐?”
프레아의 항복 선언에 밀리안이 놀라 되물었다. 프레아가 그런 밀리안을 그윽이 보더니 입을 달싹였다.
“네가 좋다고.”
“…….”
“인정할게. 네가 좋아, 좋아서 미치……!”
프레아의 서툰 고백이 밀리안에게 먹혔다. 밀리안이 프레아의 목덜미를 한 손으로 붙잡고 다른 손으로 허리를 단단히 받친 채 다시 입을 맞추었다.
프레아도 그에게 매달리듯 안긴 채 입을 훔쳤다. 오래도록 입을 맞춘 터라 입술이 아릿했다. 그것마저도 기분이 좋았다. 말랑말랑한 입술을 마음껏 베어 물고 싶었다.
프레아는 스스로를 잘 알았다. 어릴 적부터 무엇에 한 번 꽂히면 집요하게 굴었다. 체리도 그랬고, 토토도 그랬다. 그리고 지금은 밀리안에게 완전히 꽂힌 기분이었다.
이 못된 동생 녀석이 저를 야금야금 길들이기라도 한 걸까. 머릿속으로 안 된다고 외치던 소리가 잦아들고 심장이 방망이질했다. 이제 모르겠다. 밀리안이 좋아서 다른 건 눈에도 들어오지 않았다.
이미 정해진 대답을 모른 체하며 망설였던 것도 아쉬울 지경이었다. 원래 키스가 이런 건가 싶을 정도로 달았다. 달아서 놓아주기 싫다. 프레아가 제게서 떨어지는 입술을 아쉽다는 얼굴로 쳐다보았다.
밀리안의 얼굴은 무척 상기되어 있었다. 이런 표정은 또 처음 보는데. 프레아가 밀리안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싼 채 가만히 감상했다. 영상은 이미 끊긴 지 오래였고, 달빛이 간신히 서로의 얼굴을 알아보게 했다. 밀리안이 제 얼굴을 감싼 손에 자기 손을 포개며 말했다.
“프레아.”
“응.”
“프레아.”
“응, 밀리안.”
밀리안의 호명에 프레아가 대답하기를 여러 차례 반복했다. 밀리안은 조금 북받친 얼굴로 손을 옮겨 프레아의 볼을 쓰다듬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소파였다. 그사이 자리를 옮겨 밀리안을 비스듬히 눕힌 채 입을 맞춘 모양이다.
밀리안이 무방비한 얼굴로 프레아를 응시했다. 흐트러진 그의 시선이 무척 매혹적이었다. 입술이 따끔따끔했다. 얼마나 오랫동안 물고 빨고 한 건지 모르겠다.
프레아가 멍하니 밀리안을 응시했다. 밀리안이 손을 더듬거려 옆에 놓인 스탠드 램프를 켰다. 은은한 불빛 사이로 그의 입술이 전보다 퉁퉁 부은 게 보였다. 그 모습조차 귀여운 걸 보니 단단히 미쳤나 보다. 프레아가 밀리안의 입술을 손가락으로 꾹 누르며 말했다.
“너 붕어 같아.”
“네 입술은 꼭 체리 같네.”
여전히 밀리안을 아래에 깔고 앉은 터라 프레아가 눈을 도르르 굴렸다. 불이 켜지니 어쩐지 민망해져 내려갈 타이밍을 보고 있었다. 그런 프레아를 보며 밀리안이 말했다.
“전부터 느꼈는데, 위에 있는 걸 좋아하나 봐. 결혼식에서도 그러더니.”
“그, 그건! 널 붙잡아주려다 힘에 부쳐서……!”
“그래? 근데 지금도 내 위에 올라타 있잖아.”
밀리안이 제 허리께를 눈짓했다. 소파가 좁다 보니 밀리안은 엉거주춤한 자세로 누웠고, 프레아는 그 위에 올라타 입을 맞췄었다. 프레아가 얼굴이 화끈거리는 듯해 얼른 일어나 옆에 다소곳이 앉았다.
밀리안은 낮게 웃으며 일어날 생각도 않고 손에 턱을 괸 채 프레아를 응시했다. 따가운 시선을 피해 시계를 보니 새벽이었다.
응? 새벽?
프레아가 두 눈을 크게 뜨더니 벌떡 일어났다.
“왜 그래?”
밀리안이 갑자기 일어난 프레아에 덩달아 상체를 일으켰다. 프레아의 동공이 세차게 흔들렸다. 처음으로 외박을 했다. 아니, 아직 돌아갈 수 있으니 외박은 아니지만 하루를 넘긴 것은 처음이었다.
“엄마한테 죽을 거야.”
프레아가 허둥지둥하며 방을 나서기 위해 막 문고리를 당기려는데 밀리안이 다가와 막았다.
“데려다줄게.”
맑은 목소리가 살랑살랑 귓가를 간질였다. 프레아가 밀리안을 보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네 입술 좀 보고 말해.”
“그러는 네 입술도 만만치 않아, 프레아.”
밀리안이 입꼬리를 올렸다.
“아…….”
프레아는 그제야 제 입술도 밀리안 못지않게 퉁퉁 부었겠구나 싶어 낮은 탄식을 내뱉었다.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한 채 머뭇거리자 밀리안이 말했다.
“괜찮아, 몰래 데려다줄게. 어차피 다들 자고 계실 거고.”
밀리안이 프레아의 손을 꼭 붙들었다. 그래, 어차피 바로 옆이니 성으로 살금살금 들어갈 수 있을 거다. 프레아는 어떻게 몰래 나무를 타고 창문을 통해 방으로 들어갈지 골똘했다. 그때 밀리안이 그녀의 손등에 가볍게 입을 맞추며 물었다.
“두 번 만에 인정한 기분은 어때?”
“으음, 아직도 얼떨떨해. 한 번 더 튕길 걸 그랬나?”
프레아가 실실 웃으며 이죽거리자 밀리안이 피식 웃었다. 그러곤 손가락을 얄궂게 깨물더니 경고하듯 말했다.
“여기서 얼마나 더 애태우려고.”
“응?”
“오늘 집에 돌려보내 주는 것도 고맙게 여겨야지.”
“으응?”
프레아와 시선이 마주치자 밀리안이 요사스럽게 웃었다. 그 미소가 음흉해서 프레아가 슬슬 시선을 피했다. 집에 안 보내면 어쩔 건데! 라고 소리쳤다간 정말 돌려보내지 않을 것 같아서 입을 꾹 다물었다.
그 순간 밀리안이 프레아를 번쩍 안아 들었다. 마치 공주님을 안 듯 조심스러웠다. 그러곤 곧장 창틈에 올라탔다.
“뭐, 뭐 해?!”
“몰래 가자며.”
“여, 여기 꼭대긴데?”
“새삼스럽게.”
밀리안이 온몸에 오러를 두르고 그대로 창 너머로 뛰어내렸다. 프레아는 그제야 제가 괜한 걱정을 했구나 싶었다.
밀리안이 가벼운 몸짓으로 건물 여기저기를 밟고 도약해 어느새 에드모어 성에 진입했다. 토토의 등에 탔을 때보다 편안한 감각에 그녀는 밀리안을 물끄러미 보았다.
“성 경비가 허술한 모양이야.”
“그럴 리가. 나라서 안 들킨 거야.”
“잘난 척하는 것 같지만 사실이라 할 말이 없네.”
프레아가 배시시 웃으며 양손 엄지를 척 들곤 방정맞게 흔들었다. 밀리안이 그런 프레아를 기껍게 바라보았다.
프레아의 방에 도착하자 밀리안이 그녀를 내려주었다. 그에게서 떨어지니 어쩐지 마음이 허전했다. 그가 창틀에 몸을 기댄 채 그대로 프레아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프레아도 따라서 고개를 들었다. 짧게 닿았다 떨어진 입술과 함께 그가 달콤한 목소리로 말했다.
“좋은 꿈 꿔.”
“밀리안도.”
그 말을 끝으로 밀리안이 폴짝폴짝 건물을 뛰어넘으며 테일러스 성으로 사라졌다.
* * * * *
라즐리 후작이 별안간 밭은 숨을 내뱉었다. 그가 손에 흥건하게 묻은 붉은 피를 허탈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그러기를 잠시, 후작이 자조적인 웃음을 띠고 문 쪽을 바라보았다. 언제 왔는지도 모를 아들, 데오가 다가왔다.
그가 라즐리 후작을 차가운 시선으로 내려다보며 침묵했다. 흔들림 없는 그의 눈동자를 본 후작은 일순간 멍해졌다. 아비가 피를 토하는 상황에서 보일 만한 모습이 아니었다. 후작이 고개를 가볍게 흔들더니 비식거리듯 낮게 읊조렸다.
“내가 호랑이 새끼를 키웠구나.”
“……각하께서 그러셨지요, 누구를 따르냐가 인생을 좌지우지한다고요.”
데오가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각하’라는 말에 후작이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아버지라고 부르지 않음으로써 그가 무엇을 선택했는지 표명했기 때문이다. 후작이 데오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고 연거푸 기침했다. 그가 바스러질 것처럼 몸을 떨며 간신히 입을 떼었다.
“그래, 그랬지. 그래서 누구를 따를지 선택했느냐.”
“예.”
“그렇군, 쿨럭!”
후작이 밭은기침을 내뱉으며 망연히 아들을 보았다. 그 말을 누누이 강조했던 건 사실 후작 자신이 그 일을 잘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적어도 자식들은 후회 없이 따를 누군가를 만나 평생을 약속하길 바랐다.
후작은 그러지 못했고, 결국 아들의 손에 죽음을 맞이하고 있었다. 자신의 애정 어린 당부가 이렇게 살이 되어 날아온 것은 조금 서글펐다.
라즐리 후작은 스스로가 느끼기에도 우유부단한 편에 속했다. 그런 성정으로 인해 늘 잘못된 선택을 하거나 때를 놓칠 때가 많았다. 그래서일까? 그의 삶은 모순투성이였다.
그는 아네모네 황비의 뜻에 따라 그녀를 선황제에게 추천했고, 곧바로 후회했다. 그녀를 그렇게 보내지 말았어야 했다고 생각했다. 모든 것을 되돌려 놓기 위해 후작은 지금의 황제가 왕위에 오르는 데 협력했고, 결국 황제로 세우는 것에 성공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또 후회의 고배를 마셔야 했다. 그녀가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니 이게 아니었나 싶었으니까. 왜 자꾸 후회할 행동만 하는지 몰랐지만 라즐리 후작은 늘 후회만 했다.
그런 그에게 황비가 다시 찾아온 건 꽤 오래전의 일. 후작은 그녀가 제게 접근하는 이유를 알면서도 또 속아 넘어가 주었다. 처음엔 그저 그녀의 달콤한 마수에 넘어갔다 생각하며 후회했지만…… 글쎄,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싸늘한 시체가 된 황비를 보았을 때의 기분이란.
후작이 다시금 밭은기침을 했다. 그래, 돌아보면 그 순간이 처음으로 후회하지 않은 선택이었다. 불에 뛰어드는 거나 마찬가지임을 알면서도 다시 또 황비의 곁에 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지금 아들이라는 불에 날개를 잃고, 목숨까지 잃을 순간이 목전에 와 있었다. 그는 누구 하나를 선택하지 못해 갈팡질팡했고, 결국 이렇게 아들에게 죽임당하는 최후를 남겨두고 있었다.
후작이 비죽비죽 터져 나오려는 실소를 애써 참았다. 잠시 뒤 후작이 흐린 눈으로 데오를 보았다. 입을 달싹이며 무어라 말하려 했지만 시간은 그를 기다려 주지 않았다.
후작이 기침을 멈추었다. 입가에 있던 손이 허무하게 툭 떨어졌다. 초점이 사라진 눈을 본 데오가 가만히 그의 눈을 감기며 단정하듯 말했다.
“저는 아버지처럼 살지 않겠습니다.”
“…….”
후작은 대답이 없었다. 그를 향해 데오가 또 한 번 다짐하듯 선언했다.
“아버지처럼 살지…….”
하지만 그 말은 끝맺어지지 않았다. 데오가 채 말을 잇지 못하고 한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의 어깨가 얕게 흔들렸다. 화려한 경력과 막강한 권력을 자랑하던 후작의 죽음은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
* * * * *
프레아를 무사히 성으로 돌려보낸 밀리안이 허전한 마음으로 성에 돌아왔다. 성은 밀리안의 마음처럼 텅텅 비어 있었다. 그가 손끝으로 입술을 매만지며 몽롱한 표정을 지었다.
달빛 사이로 보이던 프레아의 눈동자가 여전히 생생했다. 제 목덜미를 간질이던 윤기 나는 머리카락도, 촉촉해진 입술도, 가느다란 몸 선도……. 밀리안이 중얼거렸다.
“위험했어.”
그렇게 오래도록 입을 맞추고도 프레아는 전혀 그런 쪽으로는 생각하지 않는 눈치였다. 밀리안만 홀로 달아올랐을 뿐이었다. 밀리안은 주체하지 못하고 단단하게 굳어버린 제 하체를 애써 외면한 채 주먹에 힘을 바짝 주어 견뎌야만 했다.
드디어 확인한 마음이었다. 프레아는 자신이 얼마나 그녀를 갈망해 왔는지 전혀 몰랐다. 괜히 다가갔다가 으스러질까 봐 그는 모든 행동에 조심스러웠다. 밀리안은 그녀가 도망가지 못하게 살살 꼬실 생각이었다.
야금야금, 천천히.
처음엔 입만 가져다 대도 화들짝 놀라던 프레아였지만, 이젠 먼저 입을 맞추는 적극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러니 그다음도 곧…… 가능하지 않을까.
“하하, 미쳤구나.”
밀리안이 갑작스럽게 실소를 터뜨리며 스스로를 향해 미친놈이라고 읊조렸다. 상대방은 아무 생각 없는데 혼자서 어디까지 상상하는 건가 싶어 도리질했다.
자신이 음흉한 사람이었다는 걸 새삼 느끼며 계단을 올라갔다. 방으로 돌아와 소파에 몸을 기울였다. 소파는 이미 차갑게 식어 있었다. 누가 앉아 있었는지도 모를 만큼. 밀리안이 입술을 반만 연 채 중얼거렸다.
“결국 연극은 못 봤네.”
소파를 더듬으며 남은 온기가 없는지 집요히 찾았다. 그러지 않으면 그녀를 방으로 돌려보낸 것을 후회하다 잠이 들 것 같았다. 그 순간 손에 달그락거리는 무언가가 잡혔다.
손을 들어 확인하니 그녀가 사무실에서 열심히 꽃단장할 때 고민하던 그 머리 장식이었다. 원체 격한 입맞춤을 했던 차라 도중에 떨어진 모양이다. 밀리안이 머리 장식을 가만히 바라보며 나직이 말했다.
“칠칠맞긴.”
밀리안의 입꼬리가 자연스럽게 올라갔다. 후회하지 말라고 남겨둔 것 같은 머리핀을 발견하자 웃음이 나왔다. 그것이 제게 오늘 일어난 일이 꿈이 아니라고 말해주는 것 같았다.
가만히 눈을 감았다. 여전히 눈앞에 프레아가 아른거렸다. 그녀와 입을 맞춘 것이 현실이라서, 꿈이 아니라서 자꾸 저도 모르게 웃음이 비죽비죽 새어 나왔다. 밀리안이 몰려오는 수마에 몸을 의지했다. 그날은 오랜만에 단잠을 잔 날이었다.
* * * * *
개운한 아침이었다. 프레아가 기지개를 쭉 켜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제 잠을 설쳤는데도 상쾌한 시작이었다. 프레아가 곧장 커튼을 걷고 창을 열었다. 열린 창 사이로 시원한 공기가 들어찼다.
그녀는 콧노래를 부르며 한껏 들떠 있었다. 세상이 다 자신을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아름다워 보였다.
“변덕이 바람 불듯 하는구나? 나 말고 네가 바람의 정령이라 해도 믿겠어.”
뒤에서 못마땅한 얼굴로 토토가 말했다. 바람의 정령이 바람 탓을 하는 모양새가 영 우스워 프레아가 실없이 웃었다.
“좋은 아침이야, 토토.”
“좋은 아치임??”
토토가 어이없다는 듯 프레아를 바라보았다. 밀리안이 돌아가자마자 토토를 소환하더니 밤새 못살게 굴고는 좋은 아침이라 인사하는 것이 우스웠다. 저를 붙들고 이불을 데굴데굴 구르며 어찌나 요란을 떠는지, 그만 좀 하라고 소리치기에 이르러서야 놓아주었다.
프레아는 토토에게 산뜻한 아침 인사를 하곤 거울로 얼굴을 살폈다. 밤새 얼음찜질해서인지 부기는 많이 빠져 있었다. 그때 토토가 뒤에서 툴툴거렸다.
“상담은 내가 다하고 공은 다 그 자식 거지?”
“그 자식이라니.”
프레아가 눈을 흘기자 토토가 프레아의 어깨에 폴짝 올라타며 말했다.
“그렇잖아. 한동안 그놈 때문에 우울해하더니 이젠 또 헬렐레하고 있고, 도대체 인간들은 왜 그렇게 감정에 따라 움직이는지.”
토토가 이해 못 하겠다는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감정이 있으니까 살아 있는 거야.”
“퍽이나!”
토토가 고개를 홱 돌렸다. 아무래도 지난번에 창밖으로 쫓아낸 것부터 시작해서 어제 일까지. 잔뜩 성이 난 모양이다. 프레아가 그런 토토를 살살 달래듯 상자에서 달콤한 젤리를 건네며 물었다.
“크기 줄이기 싫다더니 내 말 듣고 작게 해준 거야?”
“아니거든.”
토토가 쌀쌀맞게 톡 쏘아붙이며 날름 젤리를 받아먹었다. 싫은 내색을 팍팍 하면서도 젤리를 먹는 토토를 프레아가 헤실거리며 바라보았다. 그때 프레아를 깨우러 시에라가 노크하고 들어왔다.
“어머, 일어나 계셨네요? 윈드 님 오랜만이에요.”
시에라가 토토와 프레아를 향해 다정히 말했다. 그러곤 토토를 향해 손을 내밀자 토토가 무심히 앞발을 올렸다. 표정을 보아하니 ‘영광인 줄 알아라, 인간이여’ 하는 듯했다.
어쩐지 날이 갈수록 토토의 정령부심이 심해지는 것 같지만 굳이 꼬집어 말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피어싱에 갇혀 지내는 신세다 보니 저렇게라도 정체성을 잃지 않으려는 것 같았으니까.
하루빨리 언령을 기억해 내야 할 텐데 도무지 기억나지 않았다. 시에라가 토토의 앞발을 살살 주무르며 말했다.
“오늘은 깜찍하시네요.”
“흥. 이 나이에 들을 소리가 아니다.”
토토가 새침데기처럼 코웃음 치며 한껏 근엄한 목소리를 뱉었다.
“그런가요?”
시에라가 환히 웃으며 반문하더니 주머니에서 주섬주섬 초콜릿을 꺼내 토토의 앞발에 내밀었다. 그것을 본 토토가 구시렁거리더니 초콜릿을 입에 털어 넣었다. 시에라가 하품하는 프레아를 향해 말했다.
“아가씨, 오늘은 준비를 서둘러야 할 것 같아요. 공작님께서 라즐리 후작 성에 가자고 하시네요.”
“어? 거기는 왜……?”
프레아가 라즐리 후작 성이라는 말에 말꼬리를 늘였다. 불현듯 스쳐 지나간 후작의 병세 때문이었다. 어쩐지 그곳을 향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알 것만 같았다. 프레아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지자 시에라가 조심스레 답했다.
“라즐리 후작께서 서거하셨다고 해요.”
“아…….”
역시, 그렇게 된 모양이구나.
프레아가 착잡한 표정을 지었다. 순간적으로 마리아가 떠오른 탓이었다. 분명 슬퍼할 텐데. 마음 한편이 불편했다. 미운 정도 정인 걸까. 프레아가 한껏 찝찝한 마음을 애써 갈무리했다.
그냥 간단히 조의를 표하는 거로 성의를 보이면 그만인 일이다. 괜히 과하게 이입할 필요가 없었다.
토토는 그런 프레아를 가만히 보다가 시선을 돌리더니 곧바로 말도 없이 사라졌다. 시에라가 어쩐지 시무룩해 보이는 프레아를 향해 밝게 말했다.
“그리고 오늘 오후 즈음에 브레이크 씨가 오신다고 합니다.”
“스승님이?”
“네, 일행이 있으시다며 손님 방을 준비해 달라고 하셨어요.”
“일행이 있다고?”
프레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전보 하나만 딸랑 남기고 출장인지 도주인지 모를 긴 여행을 한 것도 부족해서 혹까지 붙이고 올 모양이다. 우리 집이 숙박업소도 아닌데.
프레아가 툴툴거리며 시에라에게 제일 좋은 방을 준비해 두라고 했다. 어쨌든 스승님의 일행은 제게 귀빈이니까.
옷은 온통 검은색으로 이루어진 드레스로 갈아입었다. 머리를 단정히 하나로 묶고 검은 레이스 베일이 어우러진 모자를 썼다. 장례식은 여러 번 갔었지만 아는 사람의 장례식은 처음이라 어쩐지 기분이 이상했다.
준비하고 나오니 진과 에밀리가 프레아와 마찬가지로 검은색 정장 차림을 하고 있었다. 소식을 듣고 왔는지 그들 옆에는 밀리안도 함께 있었다.
프레아가 뜻밖의 조우에 움찔했다. 어젯밤 일이 스쳐 지나가 어쩐지 얼굴이 뜨뜻해지는 기분이었다. 밀리안이 프레아를 발견하곤 자연스레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그가 환히 반기니 기분이 이상했다. 밀리안의 등 뒤에서 마치 준비라도 한 것처럼 햇살이 비췄다. 그 모습을 프레아가 헤벌쭉 쳐다보다 말고 번뜩 정신을 차렸다. 옆에 있는 부모님이 눈에 들어온 탓이었다.
‘그나저나 부모님한테는 뭐라고 하지?’
일단 마음이 가는 대로 저질러 버렸는데, 그 후 어떻게 해야 할지 난감하기만 했다. 프레아가 눈을 도르르 굴리며 진과 에밀리의 눈치를 살폈다. 두 사람의 표정이 좋지 못했다.
특히 에밀리의 표정에 그늘이 많았다. 후작의 죽음을 우려했던 지난 대화를 떠올리면 아무래도 프레아는 모르는 ‘그 일’이 헝클어진 것에 속이 타는 모양이다.
프레아는 고민에 빠졌다. 설령 부모님이 허락하지 않는다고 해도 밀고 나가려 했지만 막상 얼굴을 마주하니 주저하게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부모님의 허락을 받지 않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법적으로 밀리안은 테일러스인 상황. 프레아와 밀리안의 관계가 법에 어긋나는 건 아니다.
하지만 도의적인 문제가 남았다. 십여 년을 가족으로 지내던 사이다. 갑자기 연분이 나게 되면 잡음이 많아질 터였다. 오래전 프레아가 사실은 공작의 숨겨둔 딸이 아니냐는 소문이 돌기도 했으니 더욱 조심스러웠다. 적어도 부모님의 허락과 지지가 필요했다.
‘음? 근데 왜 굳이 결혼을 서둘러야 하지?’
그 순간 무언가가 떠오른 것처럼 머리에 종이 울렸다. 생각해 보니 결혼을 서두를 이유가 없었다. 자신이 결혼하려 했던 건 순전히 밀리안을 떼어내기 위함이었다.
괜히 마음만 급해서 저질렀다가 가족 간의 불화가 생기는 것보다 기회를 보는 편이 나았다. 프레아가 에밀리를 쳐다보았다. 라즐리 후작이 죽어 상심한 어머니에게 굳이 충격을 안겨 드리고 싶지 않았다.
그래, 조금만 나중에 말하자.
프레아가 속으로 그리 다짐하며 다시 한번 에밀리를 보았다. 안 그래도 그 뭔지 모를 ‘일’ 때문에 마음이 복잡할 텐데 제 일까지 떠넘기고 싶지 않았다.
후작이 죽어 침울한 상황에서 저와 밀리안의 관계에 대해 말하는 것은 눈치 없는 행동이리라. 그야말로 짐 위에 짐을 얹어주는 격일 터.
프레아가 앞서가는 부모님을 힐끗거리며 몰래 밀리안을 당겼다. 밀리안이 의아한 얼굴로 프레아를 쳐다보더니 이내 부드러이 웃으며 속닥였다.
“잘 잤어?”
“응, 그것보다 밀리안.”
프레아가 밀리안을 더욱 당기더니 귀에다 소곤소곤 말했다. 혹시나 부모님이 들을까 조심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우리 일…… 부모님한텐 내가 말할 때까지 말하지 마.”
“그냥 말해도 될 텐데.”
밀리안이 아무렇지 않게 말하자 프레아가 쉿, 하고 소리를 내며 다시 속삭였다.
“넌 눈치도 없어? 부모님 지금 후작님 죽음 때문에 정신없으시잖아. 이 상황에서 우리가 사귄다고 해봐. 얼마나 놀라시겠어.”
프레아가 훈계하듯 말하자 밀리안이 물끄러미 그녀를 보았다. 이미 자신이 수도에 왔을 때 한 번 뒤집어준 일이라 놀랄 가슴도 남아 있지 않을 텐데.
하지만 밀리안은 프레아 혼자 제 계획을 종알거리는 것을 말리지 않았다. 혼자서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이 귀엽기도 하고, 아직 반란군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터라 조심스러웠기 때문이다. 그는 덤덤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눈치는 네가 없는 것 같은데.”
“뭐?”
프레아는 밀리안에게 일장 연설하느라 잘 듣지 못해 되물었다. 밀리안은 그녀를 물끄러미 보다 피식 웃으며 말했다.
“네 마음대로 해. 난 뭐든 좋아. 대신…….”
말끝을 흐린 그가 주변을 살피곤 가볍게 그녀의 볼에 입을 맞췄다. 프레아가 형용할 수 없는 얼굴로 비명을 참았다.
밀리안, 이 자식이! 비밀로 하라고 하자마자! 또, 또! 입을 놀려!
그녀가 도끼눈을 하거나 말거나 밀리안은 눈꼬리를 길게 늘이며 속삭였다. 들키는 것을 괘념치 않는 태도였다.
“모닝 키스.”
“야아……!”
담백한 어조에 프레아가 낮게 소리쳤다. 밀리안과 프레아가 한참 옥신각신하며 다투는데 마차 앞에 도착한 진이 크게 외쳤다.
“얼른 오지 않고 뭐 하냐.”
“아, 가요!”
프레아가 화들짝 놀라더니 밀리안의 팔을 잡아당기며 급히 마차로 향했다. 밀리안은 그런 프레아에게 끌려가며 비죽비죽 새어 나오려는 웃음을 참았다.
“참기 너무 힘든데…….”
그는 남에게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게 읊조렸다. 마차에 탄 뒤에도 프레아는 여전히 그를 주도면밀하게 지켜보며 티 내지 말라고 경고했다. 그 모습이 너무 귀여워서 밀리안이 실소를 터뜨렸다. 이에 에밀리가 밀리안을 보며 한 소리 했다.
“넌 아침부터 왜 자꾸 웃니?”
“아닙니다.”
밀리안이 얼른 웃음을 감추며 딱딱한 어조로 대답했다. 프레아가 입 모양으로 그만 웃으라고 소리치고 있었다. 그녀의 등쌀에 얼굴이 따끔따끔한 기분이다.
밀리안은 부모님이 없었다면 당장에라도 프레아를 끌어안고 안 놔주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을 느끼며 입가를 가렸다. 그의 입술이 슬쩍슬쩍 올라갔다.
11장 브레이크의 귀환
장례식은 엄숙하기만 했다. 마리아는 프레아를 보고도 쫑알거리지 않았다. 그저 눈을 내리깐 채 멍하니 유모에게 몸을 기대고 있었다. 늘 아웅다웅했던 대상이 축 처져 있으니 기분이 이상했다.
프레아는 풀 죽은 그녀를 슬쩍슬쩍 쳐다보았다. 답답했다. 마리아의 눈에 눈물이 계속해서 고였다 떨어지기를 반복했다. 그녀는 아랫입술을 약하게 깨물며 소리를 참고 있었다. 이미 눈물로 얼룩덜룩해진 얼굴은 붉게 상기된 채였으면서.
그런 마리아와 달리 데오는 울지 않았다. 그저 입을 꾹 다문 채 묵묵히 묘소를 찾아온 사람들을 맞이했다. 딱딱하게 굳은 표정을 보아하니 애써 슬픔을 삼키고 있는 것 같았다.
아침부터 모여든 귀족이 라즐리 가문을 상징하는 튤립을 관 위에 던졌다. 귀족들은 조의를 표할 때 죽은 자의 가문을 상징하는 꽃을 관에 뿌렸다. 가문은 걱정하지 말고 편히 가라는 의미였다.
프레아의 손에도 앙증맞은 튤립이 들려 있었다. 빛깔이 너무 고와서 더 서러운 느낌이었다. 분명 하늘은 맑고 푸른데 이곳에만 먹구름이 낀 것처럼 어두침침했다.
프레아가 조심스럽게 관을 향해 꽃을 던졌다. 관 위에 꽃이 한가득해질 때까지 조의가 이어졌다. 꽃에 파묻혀 관이 보이지 않게 될 즈음 그 위로 흙을 덮었다.
귀족들이 하나둘 흩어지자 마리아가 풀썩 주저앉으려는 듯 휘청였다. 데오가 얼른 마리아를 붙잡아 안았다. 파리해진 그녀가 제 오라비의 품에 기대 울음을 참고 있었다.
그 주변을 귀족들이 무심히 지나쳐 갔다. 프레아는 걸음을 멈추고 멍하니 마리아를 응시했다. 그녀의 눈에 눈물이 아롱졌다. 입술을 부들부들 떨면서도 차마 소리 내지 못하는 것은 주변에서 힐끗거릴 것을 생각해서이리라.
바보같이 소리 내어 울지도 못하고 있었다. 체면 때문에 슬퍼도 맘껏 울지 못하는 게 어쩐지 안되어 보였다. 프레아가 계속해서 멈칫멈칫하자 에밀리가 등을 도닥이며 말했다.
“다녀와도 된다. 마차에서 기다리마.”
“네…….”
“난 저기 앞에서 기다릴게.”
밀리안이 멀찍이 있는 나무를 가리켰다. 진과 에밀리가 마차로 들어가고, 밀리안은 나무에 기대어 프레아가 일을 끝내기를 잠자코 기다렸다.
프레아가 머뭇거리다가 조심스럽게 방향을 틀어 마리아에게 되돌아갔다. 오지랖이라고 해도 저렇게 울음을 참는 걸 보고만 있을 순 없었다. 속 시원히 울 수 있게 도와주고 싶었다.
슬플 때 울지 못하는 건 너무 서글픈 일이니까. 마리아가 울다 말고 물끄러미 프레아를 보았다. 프레아가 그런 마리아에게 손수건을 내밀며 다정하게 말했다.
“소리 내 울어도 돼.”
“…….”
“주변 신경 쓸 거 없어. 여기서 네가 슬프다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으니까.”
“으흐흑.”
프레아의 말이 주문이라도 된 양 마리아가 눈물을 뚝뚝 흘리며 흐느끼기 시작했다. 갑작스럽게 터진 울음에 지나가던 귀족들이 힐끗거렸다. 프레아는 조심스럽게 마리아를 몸으로 가렸다.
마리아가 그런 프레아를 망연히 보며 계속해서 울었다. 두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쳤다. 마리아가 눈으로 네가 뭔데 날 울리냐고 말하는 것 같아 프레아는 피식 웃었다.
잠시 후 마리아의 얼굴에 때아닌 비가 쏟아졌다. 그녀가 참았던 눈물을 쏟으며 엉엉 울었다. 마치 어린 시절 제게 머리채를 붙잡혔을 때처럼.
늘 귀족의 체면이 어쩌고저쩌고하며 고고한 척하던 마리아는 이곳에 없었다. 당연했던 그녀의 세상이 사라졌다. 그것이 슬퍼서 마리아는 울음을 참지 못했다.
오라비를 붙들고 대성통곡했다. 프레아는 묵묵히 그녀가 울음을 그칠 때까지 곁에 있어 주었다. 온 얼굴을 적시던 비가 잦아들었다. 마리아는 눈을 끔벅거리며 남은 눈물을 털어냈다.
마리아의 울음이 그친 것을 확인한 프레아는 아무 말 없이 뒤돌았다. 괜히 서로 머쓱할 것을 생각해서였다. 그때 등 뒤에서 데오가 말했다. 목소리가 무척 잠겨 있었다.
“친절 감사합니다.”
“사실 그쪽한테도 한 말이에요.”
“……그렇습니까.”
데오가 낮게 읊조렸다. 프레아는 돌아보지 않았다. 그저 그가 크흠, 하고 울음을 삼키는 소리만 들었을 뿐이었다. 물론 그가 정말로 울었는지는 눈으로 확인하지 않았다.
* * *
“오셨습니까?”
성에 도착하니 브레이크가 반갑게 인사했다. 프레아는 브레이크를 보자마자 걸음을 빨리해 성큼성큼 다가가 서글서글하게 웃으며 말했다. 물론 속으로는 왜 이제 와! 하고 윽박지르고 있었지만.
“스승님? 얼굴 보기 힘듭니다?”
프레아의 의도를 눈치챘으면서도 브레이크는 그저 웃기만 했다. 프레아는 그가 몇 달 만에 와놓고 겨우 ‘오셨습니까?’로 화두를 시작한 것이 못마땅했다. 브레이크가 그런 프레아를 향해 뺨을 긁적이며 답했다.
“물건을 찾으러 갔다가 사람을 찾아서요. 안 온다는 걸 끌고 오느라 애먹었습니다.”
브레이크의 말에 옆에 있던 남자가 찌릿하고 눈짓을 보냈다. 브레이크는 못 할 소리도 아니지 않냐는 듯 뻔뻔한 얼굴로 남자를 보았다. 제법 친한 사이인 모양이다.
프레아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남자에게로 향했다. 몸집이 무척 큰 사내였는데 골격에 키까지 크니 곰을 만난 기분이었다.
때마침 프레아를 향해 고개를 돌린 남자와 떡하니 시선이 마주쳤다. 후드를 쓴 남자가 움찔하더니 곧바로 시선을 피했다. 프레아는 그런 사내를 게슴츠레한 눈으로 보며 브레이크에게 물었다.
“누군데요?”
“같은 스승님 밑에서 수학했던 선배입니다.”
브레이크가 그를 앞으로 내세웠다. 그와 시선이 정확히 닿았다. 남자의 눈은 예쁜 벽안이었다. 프레아가 그를 향해 밝게 웃으며 말했다.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그는 느릿하게 인사했다. 프레아는 어쩐지 그의 눈이 낯설지 않았다. 가까이서 보니 그는 가면을 쓰고 있었다. 가면 사이사이로 화상을 입은 것 같은 흉터가 언뜻언뜻 보였다. 아니, 흉터라기보다는 불로 지진 것 같은 문양에 가까웠다.
남자는 자기소개에 서툰지 그 말을 끝으로 그저 프레아를 바라만 보았다. 그 시선이 무척 다정해서 꼭 원래부터 알던 사람 같았다. 남자는 멍하니 프레아를 응시할 뿐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프레아가 무어라 말을 걸려는 순간, 남자의 눈동자가 심하게 일렁이기 시작했다. 꼭 무언가를 보고 놀란 것 같은 표정에 프레아가 뒤를 돌아보았다. 입구에는 때마침 이야기를 마친 에밀리와 진이 들어오고 있었다.
“음?”
프레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부모님을 보고 왜 그렇게 놀라는 거지?’
이미 시선을 돌린 그는 어딘가 불안한지 손가락으로 팔꿈치를 툭툭 건드리고 있었다. 브레이크가 그런 그의 어깨에 가만히 손을 올리고 토닥거렸다.
“덩치에 안 맞게 낯을 많이 가립니다.”
“아아.”
프레아가 이해했다는 어투로 대답했다. 모르는 사람이 자꾸 몰려오니 부쩍 민망해진 거라 여겼다. 에밀리가 브레이크를 발견하곤 놀란 기색을 띠며 말했다.
“왔어? 이번엔 좀 길었네.”
“오랜만입니다, 후작님.”
브레이크가 나긋나긋한 말씨로 대답하곤 진을 바라보았다. 진은 브레이크를 한 번 보더니 남자를 향해 시선을 옮겼다.
“옆에 있는 자가 그 손님인가?”
“예, 당분간 신세 좀 지겠습니다.”
“매튜라고 합니다.”
남자가 저를 매튜라 소개했다. 매튜의 목소리를 들은 에밀리가 갑자기 표정을 굳혔다. 사실 그녀는 입구를 들어설 때부터 표정이 좋지 않았었다. 에밀리가 성큼성큼 그의 앞으로 다가가더니 물었다.
“매튜라고 했나?”
“……네.”
“왜 그렇게 후드를 깊게 눌러쓰고 있지?”
“그건…….”
“난 진과 달리 의심이 많네. 적어도 내 성에 머물 손님의 신원은 확인하고 싶은데.”
“아, 실례했습니다.”
“후작님?”
매튜가 에밀리를 빤히 보더니 수더분한 목소리로 사과하며 후드를 벗었다. 브레이크는 조금 날카롭게 반응하는 에밀리를 당황한 목소리로 불렀다.
이미 신원이라면 그가 보증한 일인 데다 성에서 지낼 것을 허락한 후작인지라 더욱 놀랐다. 그가 후드를 벗자 일순간 사용인들이 헉 하고 숨을 참았다.
가면으로 가려진 곳을 제외한 나머지 부위에 뜻 모를 문신이 가득했기 때문이다. 불로 지진 듯한 울긋불긋한 문양을 제외한 피부는 독이 퍼진 것처럼 검게 그을려 있었다.
매튜의 머리카락에 유독 시선이 갔다. 본래 무슨 색이었는지 모를 정도로 여러 색깔이 얼룩덜룩했다. 그나마 표현하자면 적갈색에 가까웠다.
“가면은 왜?”
에밀리가 조금 당황해하며 묻자 그가 어리숙하게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보시다시피 제 몸이 이런 상황이라 미관상 좋지 않아 가렸습니다.”
에밀리의 시선이 매튜의 머리카락에 닿았다. 한참 말이 없던 에밀리가 자조적인 미소를 띠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그럼 그렇지.”
“…….”
“불편하게 해서 미안하네. 편히 있게.”
에밀리가 볼일이 끝났다는 듯이 무심하게 걸음을 옮겼다. 매튜가 그런 에밀리에게 잠깐 시선을 두었다가 거두었다.
“진, 방으로 와요. 할 말이 있으니까.”
에밀리가 계단을 올라가다 말고 진을 불렀다. 진이 에밀리에게 고개를 끄덕이곤 매튜를 향해 말했다.
“미안하네, 오늘 좀 안 좋은 일이 있어서 예민한 모양이야.”
“괜찮습니다.”
매튜가 부드러이 웃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어떤 불쾌함도 없었다. 오히려 가면 사이로 보이는 잔잔한 미소가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진은 매튜를 보며 말을 이었다.
“치료가 필요해 보이는데 의원을 보내줄 테니 진단받아 보게.”
“아닙니다. 보통의 의술로는 해결이 안 되는 문제인지라.”
매튜가 담백한 어조로 거절하곤 말을 이었다.
“어느 못된 마법사가 건 저주라서요.”
“아…….”
진은 말을 채 잇지 못했다. 운 나쁘게 마법사에게 걸려 실험체가 되는 정령사가 왕왕 있었다. 그걸 아는 진은 굳이 캐묻지 않고 조용히 신음했다.
프레아는 마법사의 저주라는 말에 두 눈을 화등잔처럼 크게 떴다. 실제로 마법사에게 당한 정령사를 처음 본 터라 당혹스러웠다. 한순간 정적이 흐르자 매튜가 다시 한번 담백하게 말했다.
“심려치 않으셔도 됩니다. 어서 부인께 가보시지요.”
“그럼.”
진이 에밀리를 뒤따라 계단을 올라갔다. 프레아가 막 매튜에게 아프진 않냐고 물어보려는데 브레이크가 말을 걸었다.
“못 본 새 표정이 확 피셨습니다?”
프레아는 위선적인 미소를 띠었다.
“그럴 리가요. 스승님이 일을 다 팽개치고 가서 정말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답니다.”
그러곤 입을 비쭉이자 브레이크가 능구렁이처럼 칭찬을 늘어놓았다.
“그건 다 제자가 너무 출중해서 그렇습니다.”
“아부는 필요 없고요.”
“들켰습니까?”
“네. 완전.”
프레아의 단호함에 브레이크가 소리 내어 웃었다. 프레아는 그런 브레이크를 한 번 더 흘겨주곤 옆에 있는 매튜를 향해 배시시 웃었다.
“스승님의 선배시면 제가 무어라 불러야 할까요?”
“그냥 매튜라고 불러주십시오.”
“좋아요, 매튜.”
프레아가 해맑게 웃으며 악수를 청하자 매튜가 덩달아 미소 지으며 악수했다. 그의 벽안이 맑은 빛을 띠며 프레아를 응시했다. 어딘가 익숙한 홍채 색을 프레아가 멍하니 바라보자 매튜가 의문을 담은 눈빛을 보냈다.
그때 두 사람을 가만히 바라보던 브레이크가 손바닥을 마주쳐 주의를 끌며 말했다.
“그럼 아가씨, 제가 없는 동안 얼마나 강해지셨는지 확인해 볼까요? 오늘은 매튜가 상대해 줄 겁니다.”
“매튜가요?”
프레아가 놀라 매튜와 브레이크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래도 아픈 사람과 대련하는 건 좀…….”
“몸이 아픈 것은 사실이나 정령술을 다루는 데엔 문제없으니 심려치 마십시오.”
매튜가 저를 염려하는 프레아에게 다정히 말했다. 그래도 프레아가 주저하자 브레이크가 매튜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비실비실해 보여도 스승님의 수제자였습니다. 경험이 많은 자이니 아가씨께 도움이 많이 될 거고요.”
‘딱히 비실비실해 보이는 체형은 아닌데…….’
프레아는 속으로 말을 삼키며 떨떠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브레이크가 저렇게까지 말하니 크게 아프지는 않은 걸 테지.
“으음, 좋아요. 대신 아프면 꼭 말하세요?”
“그러겠습니다.”
프레아가 단단히 주의 주듯 당부하자 매튜가 부드러이 웃으며 대답했다. 프레아가 덩달아 배시시 웃자 매튜가 움찔하며 웃음을 거뒀다.
프레아도 키가 큰 편인데 매튜는 정말 컸다. 골격이 커서 그런지 밀리안보다도 크게 느껴졌다. 훈련장으로 가는 사이 프레아가 매튜 옆으로 쪼르르 다가가 물었다.
“그런데 매튜.”
“예, 아가씨.”
“혹시 우리 어디서 본 적 있지 않아요?”
“……예?”
매튜가 당황한 목소리로 반문했다. 프레아가 생각하기에도 질문이 영 작업 멘트 같기는 했지만 진심으로 하는 말이었다. 어쩐지 그의 벽안이 낯설지가 않았다. 그녀는 제 턱을 가만히 쓸며 말했다.
“아무래도 그 눈이 익숙해서요.”
“글쎄요. 벽안은 흔하지 않습니까.”
매튜가 버벅거렸다. 프레아는 매튜를 보며 여전히 고개를 갸웃거렸다.
“역시 그런가요?”
“네, 저는 오늘 아가씨를 처음 뵀습니다.”
매튜가 답지 않게 활자에 점을 찍듯 또렷이 말했다. 아까까지만 해도 어리숙하게만 굴던 그가 단언하니 더욱 의심스러웠다. 원래 한 번 본 건 잘 잊는 편이 아니었다.
……아, 에시드는 열외. 그와 만났을 땐 어두웠으니까.
어디서 본 게 확실한데.
프레아가 게슴츠레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매튜가 프레아의 푸른빛 도는 보라색 눈동자를 애써 피했다. 프레아는 재차 물어보려 했으나 아공간에 도착한 뒤였다.
* * * * *
깊은 밤, 밀리안이 온통 새까만 복색을 한 채 어디론가 향했다. 그의 옆에는 마탑의 마법사 로브를 입은 머제리가 있었다.
제리가 연신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누가 볼세라 얼른 밀리안을 탑 안으로 들였다. 밀리안이 무심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머제리가 밀리안과 눈이 마주치자 으름장을 놓았다.
“분명 탑 안에만 들여보내 주면 된다고 했어.”
“그래, 알겠으니까 이제 가도 좋아.”
밀리안이 냉정히 대꾸하곤 그대로 탑 안으로 사라졌다. 머제리는 여전히 이래도 되는 건가 싶어 심장이 벌렁벌렁했다. 들켜도 제 이름을 대지 않겠다는 것을 확인받긴 했지만 어딘가 찜찜했다. 그가 복잡한 마음을 털어내며 머리를 세차게 헝클곤 자리를 떴다.
밀리안은 기척을 죽인 채 머제리를 통해 미리 파악해 둔 연구실로 향했다. 정령 실험이 정확히 어디까지 진척을 이루고 있는지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머제리가 연구와 관계된 마법사가 아니라 실험이 이루어지는 장소까지는 알지 못했지만 연구실은 안다고 했었다. 조금 협박하니 술술 이야기하는 것이 제법 다루기 편했다.
마탑의 밤을 제외하면 탑의 마법사를 제외하곤 아무도 탑에 들어갈 수 없다. 무턱대고 들어갔다간 마나의 흐름을 읽혀 금세 발각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머제리의 도움이 필요했다. 출입구만 뚫으면 들키지 않을 자신이 있으니까.
밀리안은 미리 준비한 마석을 통해 마법사와 비슷한 마나 장을 주변에 둘렀다. 마탑의 눈을 피하기 위함이었다. 마석에 시간 제한이 있어 빠르게 확인하고 돌아갈 생각이었다.
연구실에 다다라 책상 위에 어지러이 흩어져 있는 서류를 하나둘 살피기 시작했다. 마탑이 워낙 철통 보안인 곳이라 그런지 중요한 자료들이 손쉽게 확인할 수 있게끔 올려져 있었다.
밀리안은 정령 실험이 어디까지 진척되었는지를 빠르게 훑었다. 자료를 확인할수록 표정이 차갑게 식어갔다.
자료의 상당 부분에 ‘머레니 코헨’이라는 이름이 담당자로 적혀 있어서였다. 분명 억지로 실험에 참여하고 있다 했는데, 자료의 내용을 보면 무척 적극적으로 일을 진행하고 있었다.
이것도 어쩔 수 없이 했다는 걸까. 밀리안이 인상을 찌푸리며 머레니 코헨이 담당자로 적힌 자료들을 집중적으로 훑기 시작했다. 얼마나 오랜 시간 공을 들여 연구했는지 자료가 무척 방대했다.
“그래서…….”
그때 문밖에서 두런두런 대화하는 소리가 들렸다. 밀리안은 서둘러 방 옆에 딸린 작은 창고로 몸을 숨겼다. 벌컥, 연구실의 문이 열렸다.
밀리안이 슬쩍 살피니 머레니와 나이를 지긋이 먹은 마법사가 이야길 나누고 있었다. 아예 소파에 자릴 잡고 대화하고 있는 터라 밀리안은 시계를 살폈다. 마석의 지속 시간이 그리 길지 않은 탓이었다.
“벌써 이게 몇 번째인지 모르겠군.”
“죄송합니다, 마탑주님.”
‘마탑주?’
밀리안이 머레니의 맞은편에 있는 사내를 쳐다보았다. 마탑주는 마탑 안에서만 생활하여 직접 얼굴을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마탑주에 대해 소문만 무성했던지라 생각보다 나이가 많은 그의 모습이 생경했다.
게다가 마탑주는 불구였다. 그의 왼쪽 소매가 허전하게 펄럭거리고 있었다. 머레니가 난감한 기색을 띠며 눈앞의 사내에게 말했다.
“정령 협회에서도 요즘 메샤르 때문에 조심하는 터라 정령석 보급이 쉽지 않습니다.”
“서두를 것 없네, 이미 자네가 방법을 찾아내지 않았는가? 우리에게 필요한 건 시간뿐이네.”
“인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머레니가 가볍게 묵례하자 사내가 기꺼운 기색을 띠며 허허허, 너털웃음을 내뱉었다. 그의 오른쪽 집게손가락에 뾰족한 금속성의 장식품이 끼워져 있었다. 그가 머레니의 심장께에 손가락을 지그시 가져다 대며 말했다.
“하나 이번에도 실패한다면 더 이상 자네에게 일을 맡기지 않을 거다.”
“명심하겠습니다.”
머레니는 침음하며 답했다. 이에 만족스러운 미소를 띤 남자가 기대 가득한 어조를 뱉었다.
“이날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모르겠군.”
그의 눈이 번뜩였다. 탐욕스러운 본성을 드러내듯 그가 낮게 말했다.
“프레아 레이첼 에드모어.”
사내의 발언에 머레니가 그를 응시했다. 밀리안은 낯익은 이름이 들리자 그들의 대화에 더욱 촉각을 곤두세웠다. 그는 머레니를 향해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그 계집만 있으면 진리는 우리 손안에 들어올 것이다.”
“…….”
“내 생에 그렇게 충만한 영류를 가진 정령사를 본 적이 없었지.”
사내의 발언에 밀리안의 낯빛이 싸늘하게 굳었다. 일을 벌이기엔 수적으로도 불리하고 마탑 자체가 마법사들을 보호하는 살아 움직이는 탑이기에 당장은 곤란했다.
‘마탑 안만 아니었다면 저자를 갈기갈기 찢어버렸을 텐데.’
밀리안은 주먹을 쥐었다 펴며 진정했다.
“온 김에 경과나 보고 받는 게 좋겠군.”
그때 마탑주가 밀리안이 있는 창고 쪽으로 발길을 돌리며 말했다. 마탑주가 창고의 코앞까지 도달했을 때 머레니가 그를 만류했다.
“아직 정리가 덜 되었습니다. 내일 제가 정리되는 대로 찾아뵐 테니 오늘은 이만 가시지요.”
“아,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되었군.”
마탑주가 그제야 시간을 확인하곤 다시 발길을 돌렸다. 검집에 손을 올린 채 숨죽여 지켜보던 밀리안은 끊임없이 경계하며 그들이 나갈 때까지 기다렸다. 달칵거리는 소리와 함께 발걸음 소리가 점차 멀어져 갔다. 그 순간이었다.
“이제 나와요.”
“……역시 알고 있었군.”
밀리안이 머레니의 말에 창고에서 조심스럽게 빠져나갔다. 창고에 들어가지 못하게 말렸을 때부터 짐작하고 있던 터라 크게 놀라지 않았다. 밀리안은 벽에 기댄 채 머레니를 차갑게 응시했다.
“억지로 한다고 하기엔 연구 대부분이 자네를 통해 이루어지는 것 같은데.”
“제가 워낙 출중해서요.”
머레니가 방문을 걸어 잠그며 답했다. 밀리안이 시계를 슥 쳐다보더니 이어 말했다.
“프레아를 데리고 뭘 할 생각이지?”
“다 들어놓고서 뭐가 더 궁금하시죠?”
“숨기지 않는 게 좋아. 난 인내심이 없거든.”
밀리안의 눈빛이 차갑게 빛나자 주변 공기가 무척 따끔따끔해졌다. 그 상황에 머레니가 재미있다는 듯이 소리 내어 웃더니 책상에 기대어 앉았다.
마탑은 마법사를 보호하는 살아 있는 생물체였다. 겉보기엔 평범한 탑 같지만 지적 능력을 지닌 존재였다. 그런 곳에서 아무렇지 않게 오러를 개방하는 그의 패기가 아주 놀라웠다. 들킬까 봐 조마조마하는 것은 저뿐인 것 같았다.
“들은 그대로예요. 마탑주는 영애를 통해 진리를 추구하려 하고 있죠. 물론 말만 진리지 결국 오래 살고 싶어서 발악하는 거예요.”
“범죄를 참 아름답게 포장하는군.”
밀리안의 말에 머레니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런데 여긴 어떻게 들어왔죠? 설마 날 보러 왔을 리는 없고.”
“내가 그걸 말할 의무는 없을 것 같은데.”
“그렇긴 하죠. 하지만 너무 위험했어요. 들켰으면 당신뿐 아니라 저도 죽게 될지도 모를 일이었잖아요.”
“하, 나를 너무 쉽게 보는군. 지금 당장에라도 이곳을 부숴 버릴 수도 있어.”
밀리안이 가소롭다는 표정으로 조소하자 머레니가 창문을 활짝 열며 말했다.
“마탑이 부서지면 곤란해요. 제가 부탁드린 일을 시작하는 건 마탑의 밤일 텐데요.”
“내가 그쪽을 믿을 수 있어야 말이지. 확인차 들렀을 뿐이야. 게다가 지금은 더더욱 의심스러워서 그 일을 도와줘야 할지 망설여지는군.”
“다 보았으니 알 것 아니에요. 전 목숨을 위협받으며 실험을 감행하고 있어요. 아까 그자가 제 심장을 누르는 걸 보았잖아요.”
머레니가 제 가슴께를 톡톡 건드리곤 서류 하나를 밀리안에게 건넸다.
“잘됐네요. 온 김에 이것도 챙겨 가요. 준다고 했던 자료예요. 정령 협회가 마탑에 정령석을 제공했다는 내용과 마탑이 정령 실험을 불법으로 감행한 것도 모자라 살아 있는 인간에게까지 손댔다는 정황이 담긴 서류예요.”
“정말로 내부 고발자가 되겠다는 말인가.”
밀리안이 서류를 받아 들며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살고 싶어서 실험에 참여했다는 자가 자신에게 해가 될 자료를 덥석 주다니. 그로선 납득이 안 되었다. 그때 머레니가 자조적인 미소를 띠었다.
“영감탱이가 벌인 일이 꽤 수습 불가라서요. 아예 도려내야 해요.”
“이해가 안 되는군. 이러다 들키면 자네는 그대로 죽을 텐데. 마탑주에게 목숨을 저당 잡혀 있지 않나?”
“저를 죽으려고 불에 뛰어드는 나방이라 생각하면, 천만에요. 전 살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중이거든요. 그러니 제가 부탁한 일 잘 처리해 주길 바라요.”
머레니가 알 수 없는 말을 하곤 창틈에 서 있는 밀리안을 그대로 밀어뜨렸다. 그와 동시에 밀리안의 몸이 둥실 뜨더니 그대로 사라졌다.
머레니가 사용한 순간 이동 마법으로 인해 마탑 밖으로 내쫓긴 밀리안은 가만히 탑을 응시했다. 살기 위해서 죽을 자리를 파놓는 행위가 여전히 의심스러웠지만 자료를 제게 쥐여 준 것을 보면 진심인 것 같았다. 밀리안은 서류를 손에 쥔 채 곧바로 클로드에게로 향했다.
* * * * *
매튜가 성에 머문 뒤, 프레아는 종종 그와 대련했다. 브레이크의 말대로 그는 노련한 정령사였다. 프레아가 힘만 세고 경험이 적은 정령사라면 매튜는 적당한 강함과 실전 경험이 많은 정령사였다.
매튜의 정령인 플라리스가 토토를 꽃으로 결박하여 내리꽂았다. 토토가 저항하다 무기력하게 바닥에 엎어졌다. 어쩐지 가면 갈수록 토토의 실력이 영 형편없어지는 것 같다.
프레아 또한 덩달아 튕겨 나갔지만 밑에 꽃잎이 사르르 깔려 엉덩방아를 찧었음에도 아프지 않았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시죠.”
매튜가 엉덩방아를 찧은 프레아에게 손을 내밀며 말했다. 프레아는 그의 손을 마주 잡아 벌떡 일어나 답했다.
“다음엔 꼭 이길 거예요!”
매튜는 푸근한 미소를 띠었다. 토토는 분한 얼굴로 플라리스에게 으르렁거렸고, 사람 형상을 한 꽃잎 플라리스는 토토 앞에서 까르르 웃었다. 살면서 이렇게 막무가내로 당했던 적이 있었나. 프레아가 매튜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때 눈이 마주친 매튜가 달래듯 말했다.
“아무래도 윈드 님의 힘이 점점 줄어들고 있는 것 같습니다. 본디 정령은 자연 그 자체이니 오랜 시간 사물에 갇혀 있어 힘의 제한이 있을 겁니다. 자유롭게 된 윈드 님에겐 플라리스가 당해내지 못할 테니까요.”
“그래요, 윈드. 그렇게 속상해하지 말아요.”
플라리스가 토토 주변을 어지럽게 흩날며 말했다. 날개 달린 요정 형상을 한 플라리스는 꽃잎으로 이루어져 있어 쉽게 잡기도, 공격하기도 어려웠다. 토토가 제게 손을 내민 플라리스를 무시한 채 바닥에 벌러덩 누웠다.
“정말 언제까지 이렇게 갇혀 있어야 하는 건지 모르겠군.”
프레아가 토로를 빤히 보았다. 그럼 요즘 크기를 줄이고 현신했던 게 다 힘이 부족해서였던 걸까. 프레아가 시무룩한 얼굴로 말했다.
“제가 토토를 아프게 하는 건가요?”
“의도한 게 아니니 너무 마음 쓰실 것 없습니다. 방법을 찾아보겠습니다.”
매튜가 제법 듬직한 어투로 말했다. 아닌 게 아니라 그는 브레이크 스승님의 수제자로 스승과 함께 언령 연구를 하던 자라고 했다.
정령 협회가 언령을 연구하던 정령사들을 다 죽였는데, 마침 스승님의 심부름을 갔던 매튜는 살아남았다고 했다. 물론 곧바로 마법사에게 붙잡혀 잔혹한 실험을 당해야 했지만 현 제국에서 언령에 대해 가장 잘 아는 것은 그였다.
“언령을 기억하지 못하는 데는 여러 가설이 있습니다. 생명의 위협을 받아 본능적으로 언령을 사용했거나, 무의식적으로 언령을 내뱉었다거나. 그것도 아니라면 무언으로 언령을 사용한 경우일 겁니다.”
“매튜는 어느 쪽이라고 보시는데요?”
“글쎄요, 아가씨의 영류가 워낙 강력하시니 무언으로 언령을 사용했을 가능성 쪽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생명에 위협될 만한 일은 겪지 않은 듯하니.”
매튜가 부드러이 웃으며 말했다. 프레아는 그의 말을 곱씹었다.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토토와 계약했던 기억 자체가 희미한 것이 이상했다.
어머니에게도 종종 물어보긴 했지만 그냥 갑자기 토토를 데려왔다고만 답할 뿐이라 더욱 답답했다. 프레아가 풀 죽은 목소리로 말했다.
“어릴 때 기억이 그렇게 많지 않아요.”
“……어릴 때의 기억은 모두가 흐릿한 법입니다. 나중에 후작님과 따로 얘기해 보겠습니다.”
프레아는 매튜를 게슴츠레한 눈으로 보았다.
말은 저렇게 하면서 계속 에밀리를 피해 다닌 걸 알았던 터였다.
“거짓말. 매튜, 우리 엄마 불편해하잖아요.”
“……네?”
“맨날 엄마만 보면 움찔움찔하면서 슬금슬금 자릴 피하는 거 다 봤어요. 무슨 사람이 그렇게 낯을 가려요?”
프레아의 말에 그의 몸이 여러 차례 움찔거렸다. 에밀리 얘기만 나오면 저렇게 흠칫거리니 의심스럽기까지 했다. 아무래도 첫 만남이 너무 강렬해서 어머니를 어려워하는 것 같다.
“그날 엄마가 좀 예민했던 거지 원래는 무척 좋으신 분이에요.”
“압니다.”
늘 대답을 느릿하게 하던 것과 달리 매튜가 확신이 담긴 목소리로 즉답했다. 이에 프레아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안다고요? 근데 왜 피해요?”
“……이제 그만 일어날까요?”
매튜가 프레아의 물음에 답하지 않은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순식간에 아공간에 문이 생겼다. 프레아가 뚱한 표정으로 그의 뒤를 따라가며 복도를 걷는데 마침 방을 나서는 에밀리와 딱 마주쳤다.
“훈련하고 오는 길인가?”
“네, 후작님.”
매튜가 어리숙한 말씨로 답했다. 호리호리한 에밀리 옆에 덩치 큰 매튜가 서 있으니 이질적이었다. 프레아가 그런 매튜와 에밀리를 물끄러미 보다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띠며 말했다.
“엄마.”
“응?”
“매튜 씨가 엄마랑 할 얘기가 있대요.”
“예?”
매튜가 당황해하며 프레아를 보았다. 방금 따로 얘기해 보겠다 말하긴 했지만 이렇게 빨리 자리를 만들 생각은 없었다. 프레아는 천연덕스럽게 에밀리에게 말했다.
“토토 문제로 내가 토토와 계약한 당시가 궁금하대.”
“아, 그럼 잠시 시간을 내겠네. 이쪽으로 오게.”
에밀리가 접견실 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매튜가 잔뜩 긴장한 기색을 띠자 프레아가 슬쩍 귓속말했다.
“우리 엄마 진짜 좋은 분이에요! 그러니까 걱정 말고 잘 얘기하고 와요.”
“아가ㅆ…….”
매튜가 막 그녀를 부르려는데 프레아는 모른 척 그를 밀며 사뿐사뿐 자리를 피해 버렸다. 하는 수 없이 매튜는 에밀리를 따라 접견실로 향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