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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장 인정하면 모든 게 편해지는 법 (11/20)

10장 인정하면 모든 게 편해지는 법

프레아는 메샤르로 향하며 에시드와의 대화를 떠올렸다. 영 뒤가 찜찜한 대화였다. 폴리 사탕에 대해 한참 토론을 진행하고 나서야 에시드와 구체적인 작전을 회의할 수 있었다.

발명품을 인정해 준 것이 무척 기뻤는지 그가 자꾸 다른 것도 보여주려 해서 말리느라 진이 쪽 빠졌다. 이로써 에시드에 대해 새롭게 알게 된 점은 그가 연구를 무척 좋아한다는 거였다. 눈이 어찌나 초롱초롱해지는지.

처음엔 혹평이 두려워 자신이 만든 게 아닌 것처럼 말했지만, 훌륭하다는 말 하나에 덜컥 사실을 밝히는 걸 보면 인정받고 싶었던 모양이다.

회의 내내 마탑에 들어가서 어떻게 다른 실험체를 확보할 것인지, 증거들은 어떤 식으로 찾아낼 것인지 등을 의논했다. 이왕이면 그들이 진행하고 있는 정령 실험을 무용지물로 만드는 게 목표였다. 에시드가 그들의 실험 기지 위치를 알고 있기에 가능한 작전이었다.

‘실험 기지가 그곳에 있다는 건 어떻게 아셨어요?’

프레아가 그와 헤어지기 전 지나가는 소리로 물은 말에 에시드는 가만히 웃으며 말했다.

‘예전에 그곳에 갇힌 기억이 있거든.’

‘갇히다니요?’

프레아가 놀라 되물었다. 아무리 마탑의 마법사가 미친 집단이라고 해도 대놓고 황족을 납치할 수는 없는 일이다.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저를 바라보는 프레아를 향해 에시드가 담백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날 가둔 건 어머니였어. 그날로 난 어머니가 날 위해 존재하는 분이 아니란 걸 깨달았지.’

너무나도 태평한 얼굴이었다. 어머니에게 배신당해 마탑에 갇혔었다는 과거의 기억이 아무런 상처가 되지 않는 사람처럼 무미건조한 목소리였다.

프레아는 어떤 위로도 하지 못했다. 그러고 보니 에시드 대공이 어릴 적 행방불명되었다가 기억을 잃은 채 돌아왔다던 일화가 떠올랐다. 자신을 가둔 사람이 어머니라고 확신하는 것을 보니 그는 소문과 달리 기억을 잃지 않은 모양이다.

‘이건 황족만 아는 비밀인데…….’

에시드가 멍하니 있는 프레아에게 조심스레 다가와 그녀의 귓가에 살랑살랑 바람이 나부끼듯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마탑에 갇힌 나를 구해준 건 폐하야. 나는 그날, 그에게 충성을 맹세했어. 다시 어머니에게 돌아가고 싶지 않았거든. 내가 그날을 기억하고 있다는 건 폐하밖에 몰라.’

‘……왜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말해요?’

‘음, 그러면 울어야 할까. 이미 다 지난 일에?’

에시드는 평온해 보였다. 딱히 울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아무렇지 않은 것도 이상했다. 아네모네 황비가 그에게 어떤 실험을 하려 했는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어린 그에겐 상처였으리라.

‘힘들면 힘들다고 하는 게 좋아요.’

프레아가 진지한 목소리로 말하자 에시드가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

‘어머니가 그랬어요.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해야 나중에 후회가 없다고요. 대공님도 그랬으면 좋겠어요. 화가 나면 화가 난다. 속상하면 속상하다고 솔직하게 말할 수 있었으면 해요.’

‘……그래, 알겠네.’

에시드는 한참 뒤에야 옅은 미소를 띠며 답했다. 말뿐인 대답이었다. 에시드는 솔직하게 자신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아무것도 드러내지 않았다. 그의 웃음 뒤에 감춰진 수많은 감정을 프레아는 굳이 꺼내려 노력하지 않았다. 그건 남의 일이니까.

회상에 잠겨 있을 즈음 누군가 앞을 가로막았다. 프레아가 자연스럽게 오른쪽으로 비키자 상대가 따라서 오른쪽에 섰다.

“죄송한데 비켜주시겠…….”

프레아는 고개를 들어 눈앞의 사내를 확인하곤 할 말을 잃었다. 밀리안이 앞에서 아주 예쁘게 웃으며 저를 보고 있었다. 그가 사근사근하게 물었다.

“대공 성에 다녀오는 길이야?”

“으응.”

어쩐지 어색해져서 말꼬리를 늘였다. 갑자기 마주쳐서 당황스러웠다. 메샤르 사무실 앞에 있는 걸 보니 저를 기다린 모양이다.

“갑자기 웬일이야.”

“보고 싶어서 왔어.”

보고 싶다가 이렇게 떨리는 단어였나. 프레아가 헛기침을 큼큼, 했다.

“나 아직 할 일 남아 있는데.”

“알아. 이따 끝나고 데이트하자고 말하려고 왔어.”

“그런 건 전보를 보내도 되잖아.”

프레아가 눈을 도르르 굴리며 새침하게 말했다. 딱히 톡 쏘아 말하려고 한 건 아닌데 왠지 모르게 자꾸 부끄럽고 쑥스러워서 말투가 이 모양이었다. 밀리안은 그런 프레아를 보며 생글거렸다. 무척 유쾌해 보였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불안해져 괜히 딴지를 걸었다.

“왜 웃어?”

“그냥, 전보 보내면 안 되겠구나 싶어서.”

“무슨 소리야?”

“앞으로도 할 말이 있으면 이렇게 찾아와서 얼굴 보고 말할게. 그러니까 그렇게 쑥스러워할 필요 없어.”

“……!!”

“그럼 끝나고 데리러 오겠습니다, 체리 님.”

밀리안이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체리’라 칭했다. 프레아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다짐을 받듯 한 번 더 말했다.

“세 번밖에 없는데 바람맞히지는 않겠지.”

“안 그래!”

“이따 봐.”

밀리안이 버럭 하는 프레아의 볼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프레아가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며 제 볼을 붙잡고 주변을 살폈다. 다행히 지나다니는 사람은 없었다.

“없는 거 확인하고 한 거야.”

“너어……!”

“그럼 진짜, 안녕.”

밀리안이 눈웃음을 사르르 흘리더니 그대로 돌아갔다.

* * *

비숍은 좀 전에 다녀간 밀리안을 떠올렸다. 그는 프레아가 없는 시간에 맞춰 메샤르로 찾아왔다. 이미 일정표를 전해주었던 터라 프레아가 없을 때 온 것이 의아해 물었다.

‘지금 대표님 안 계시는데요?’

‘알아. 알고 왔어.’

밀리안이 서늘히 미소 지으며 사무실을 쓱 훑었다. 프레아의 방은 따로 구분되어 있었다. 밀리안이 소파에 앉아 프레아의 방을 응시하며 누군가를 기다리는 기색을 띠었다.

당연히 프레아를 기다리는 거라 생각한 비숍이 자연스럽게 차를 내오려는 찰나였다.

철퍽.

물걸레를 빨고 돌아온 머제리가 들어오다 말고 대걸레를 떨어뜨렸다. 그는 제 구두 위에 걸레가 떨어진 줄도 모르고 하얗게 질린 얼굴로 밀리안을 응시했다. 밀리안이 사근사근한 미소를 지으며 머제리를 반겼다.

‘오랜만이야.’

‘너, 네가 왜……!’

‘너랑 할 얘기가 있어서.’

밀리안이 그리 말하곤 턱짓으로 제 앞에 앉으라고 했다. 비숍은 조용히 머제리의 옆에 다가가 속삭였다.

‘왜 그래요? 꼭 무기 없이 마수 만난 사람처럼.’

‘마수가 차라리 나아.’

‘네?’

머제리가 힘없이 중얼거리며 밀리안의 앞에 앉았다. 비숍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둘 모두에게 찻잔을 가져다주었다. 서로 아는 사이 같았다. 비숍은 두 사람 사이에서 느껴지는 기류에 조심스럽게 물었다.

‘불편하시면 잠시 나가 있을까요?’

‘그래 주겠나?’

밀리안이 여유로운 얼굴로 부드럽게 말했다. 반면 머제리는 와들와들 떨며 눈빛으로 나가지 말아 달라고 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비숍은 그 눈빛을 읽지 못했다. 어차피 잠깐 나가려던 참이라 그녀는 얼른 가방을 챙겼다.

‘그럼 잠시 물품 좀 사고 올게요.’

몇 시간 뒤, 필요한 물품을 사 들고 돌아온 사무실에는 사색이 된 머제리가 멍한 눈으로 같은 곳을 반복해서 걸레질하고 있었다. 비숍이 그의 앞에서 손을 휘휘 저었으나 머제리는 반응하지 않았다.

“머제리 씨?”

“날 버리고 갔어…….”

머제리가 울먹울먹한 목소리로 비숍을 탓했다. 비숍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밀리안의 태도를 봐선 퍽 친해 보여 자리를 피해주었을 뿐이다.

그가 그렇게 다정하게 누군가에게 말을 거는 걸 본 적이 없기에 더더욱 그랬다. 비숍이 머제리를 진정시키며 물었다.

“왜요, 무슨 일인데요. 혹시 후작께 잘못이라도 하셨어요?”

“잘못? ……그래. 난 태어난 게 잘못이야.”

머제리가 눈물을 뚝뚝 떨구며 세상 다 잃은 얼굴을 했다. 비숍은 갑자기 제 인생을 비관하는 그를 빤히 보았다. 평소에 조금 비굴하게 굴긴 해도 자부심 하나는 대단한 사람이었는데 이렇게 기가 팍 죽다니.

그때 프레아가 멍하니 사무실로 들어왔다. 얼굴은 또 왜 발그레하신 건지 모르겠지만, 그녀는 비숍에게 인사도 하지 않고 홀랑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프레아가 방 안 커튼이 젖혀 있다는 것도 모르고 잔뜩 상기된 얼굴로 볼을 매만졌다. 그러더니 갑자기 소리 내어 웃다가, 버럭 성을 내다가, 허공에 손을 휘두르는 등 원맨쇼를 했다.

비숍은 스스로를 비관하는 머제리와 이랬다저랬다 연극하는 것 같은 프레아를 번갈아 보았다. 오늘따라 다들 이상했다.

머제리가 정신을 차리지 못해 결국 조퇴시켰다. 어차피 저 상태면 바닥에 구멍을 뚫을 기세로 한 곳만 닦을 게 뻔했다.

프레아는 그래도 금세 정신을 차리고 할 일을 했는데, 퇴근 시간이 다가오자 갑자기 꽃단장하기 시작했다. 연신 거울을 보며 머리를 이렇게 했다 저렇게 했다를 반복하고 있었다. 그때, 사무실 안으로 누군가 들어왔다.

“음? 또 오셨네요?”

“쉿.”

밀리안이 비숍을 향해 조용히 하라는 자세를 취하곤 프레아의 방으로 살금살금 다가갔다. 여전히 커튼이 젖혀 있었다. 그는 가만히 프레아의 꽃단장을 구경하더니 노크 후 방으로 들어갔다.

비숍이 의아한 얼굴로 염탐하려 했지만 밀리안이 커튼을 내린 터라 볼 수 없었다. 그녀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메모지에 먼저 퇴근하겠다고 적은 뒤 자리를 떠났다. 이상한 것투성이인 하루였다.

* * *

프레아는 거울을 보며 이 장신구를 할까, 저 장신구를 할까 고민했다.

‘뭔가 이쪽은 너무 꾸민 티가 날 것 같고, 그렇다고 저걸 하자니 너무 밋밋한데…….’

한참 장신구를 가지고 씨름하는데 누군가 명쾌한 해답을 내놓았다.

“오늘 옷에는 이쪽이 더 잘 어울릴 것 같은데?”

“역시 그렇지? 나도 그렇게…… 헉!”

“안녕?”

프레아가 무의식적으로 대답하다 말고 목소리의 주인을 알아채 숨을 참았다. 장신구에 정신이 팔려 밀리안이 옆에 와 있는 줄도 몰랐다. 그가 프레아를 보며 싱글벙글했다.

왜 자꾸 저렇게 웃음을 흘리고 다니는지 모르겠다. 프레아가 찜찜한 얼굴로 밀리안을 보았다. 밀리안은 그녀가 앉은 의자 쪽으로 다가오며 물었다.

“나 만나려고 꽃단장하고 있었어?”

“아니, 이건 그냥 아까부터 마음에 안 들어서 바꾸려고…….”

“아까랑 머리 모양도 다른데?”

“이건 내가 실수로 머리를 헝클어뜨려서…….”

“흐음……. 그래?”

밀리안이 재미있다는 듯이 미소를 머금었다. 그의 입가가 움찔움찔했다. 아무래도 그녀가 그를 의식하고 있다고 확신하는 표정이었다. 제대로 들킨 모양이다.

프레아가 애써 헛기침하며 밀리안이 골라준 장신구를 머리에 매달았다. 그러곤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물었다.

“그래서 오늘 어디 가실 건가요? 실버 님.”

실버가 밀리안이란 걸 안 날이 첫 만남이다. 그리고 이번이 두 번째 만남. 오늘만 버티면 마지막 한 번이 남은 셈이다.

“글쎄요. 가고 싶은 곳 있으십니까?”

밀리안이 프레아를 따라 존대하며 되물었다. 여전히 기분 나쁘게 생글생글한 얼굴이었다. 프레아가 그를 슬쩍 흘기며 대답했다.

“이왕이면 사람이 없거나 어두컴컴한 곳이 좋겠죠? 남들이 보면 안 되니까요.”

“그런 곳에 가면 저는 좋지만 체리 님이 곤란하실 텐데요.”

“아닌데요? 완전 좋은데요?”

프레아가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며 되물었다. 괜히 밖에서 대놓고 돌아다니다가 또 아까처럼 뽀뽀라도 당하게 될까 봐 지금도 심장이 벌렁벌렁했다. 프레아의 강한 부정에 밀리안이 소리 내어 웃었다.

“그럼 체리 님의 말대로 아주 으슥하고 둘만 있는 공간으로 가야겠군요.”

“네! 아주 으슥하고 둘만…… 으음?”

프레아는 그제야 제 말뜻이 다르게 들릴 수도 있다는 것을 인지했다. 어쩐지 등 뒤로 식은땀이 삐질삐질 나오는 것 같았다. 그녀가 이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눈을 도르르 굴리는데 밀리안이 말했다.

“체리 님께서 그렇게 은밀한 곳을 원하신다니 어쩔 수 없군요.”

“아, 아니, 잠깐!”

“가시죠. 체리 님이 원하시는 내밀한 곳을 제가 한 군데 압니다.”

“자, 잠깐마안!”

프레아가 밀리안이 내민 손을 붙잡고 늘어졌다. 머릿속에서 경고음이 애앵애앵 울렸다.

뭔데, 그 은밀한 곳이 도대체 뭔데!

그녀가 흔들리는 눈으로 밀리안을 바라보았다. 밀리안을 붙잡은 손이 축축해지는 게 느껴졌다. 밀리안은 갈 곳 잃은 눈동자로 저를 보는 프레아에게 담백하게 말했다.

“체리 님도 좋아할 겁니다.”

밀리안이 해사한 미소를 머금고 프레아를 질질 끌었다. 프레아가 도살장에 끌려가는 것처럼 매달렸지만 소용없었다. 물론 힘주어 손을 떼어내면 된다. 그걸 알면서도 떼지 않은 건 순전히 프레아의 무의식이었다.

남이 된 남동생이 남편이 되려 한다

2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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