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장 지름길에서는 맹수를 조심할 것
“그 말은 실험에 어느 정도 성과가 나타나고 있다는 말인가요?”
“그래요. 거의 성공 단계죠.”
“하!”
프레아가 기가 차 헛웃음을 내뱉었다. 그 실험이 성공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정령이 희생되었을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도대체 그 많은 정령을 어떻게 안전하게 확보했는지 알 수 없었다.
물론 이러한 생각이 물꼬를 틀자 한 가지 가설이 떠올랐다. 별로 하고 싶지 않은 가정이지만 어쩐지 제일 그럴듯한 추측이었다. 프레아가 마른세수를 했다.
상대는 정령사들의 눈을 피해 정령을 손쉽게 빼돌릴 수 있는 자들. 게다가 황실도 전혀 알지 못하고 있다. 그 오랜 시간 동안 성공적으로 실험을 숨길 수 있도록 도울 수 있는 존재는 그녀가 알기론 한 곳뿐이었다. 프레아가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
“혹시 정령 협회가 그 일을 돕고 있나요?”
“……전 말하지 않았어요.”
머레니가 한참 뒤 느릿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그녀의 눈빛은 긍정하고 있었다. 아마도 표식 때문에 확답을 주지 못하는 것 같았다. 금기어라도 문양에 새겨진 걸까. 그렇다는 건 머레니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이 거지 같은 실험이 진행되었다는 말인데…….
“정령 협회가 실험을 도우면서 얻게 될 이득이 뭔지 모르겠네요.”
“그것까진 말씀드릴 순 없지만…… 그들은 합당한 대가를 받을 예정이에요.”
머레니가 난감한 기색을 띠었다. 아마도 이것 역시 말할 수 없는 모양이다. 프레아가 손을 부들부들 떨자 옆에 잠자코 있던 밀리안이 걱정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괜찮아?”
“아니. 안 괜찮아.”
프레아가 즉각적으로 대답하며 벌떡 일어나자 머레니가 멀뚱히 쳐다보았다. 곧이어 프레아가 머레니에게 손을 내밀었다.
“아무래도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네요.”
프레아의 악수 요청에 머레니가 피식 웃었다. 그것은 머레니에게 협조하겠다는 의사 표현이었다.
“고맙습니다, 영애.”
머레니가 프레아의 손을 마주 잡으며 환하게 웃었다.
* * *
머레니와의 대화는 생각보다 오래 걸렸다. 저녁 약속이 예정되어 있던 프레아는 제시간에 약속 장소로 가기 위해 급한 정보들만 우선 교환했다. 프레아는 이동하는 길에 그녀와 나눈 대화를 회상했다. 이야기는 어느덧 마법사의 의문사로 넘어갔었다.
‘저는 에시드 대공이 이번 마법사의 의문사와 관련 있다고 생각해요.’
머레니가 확신에 찬 어조로 이야기했다. 프레아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설명을 요구하자 그녀가 이어 말했다.
‘다들 자연사라고 생각했지만 제 생각은 달라요. 분명 타살이에요. 죽은 마법사들의 마나 코어 상태가 엉망이었으니까요. 뭔가 중독된 것처럼요.’
프레아는 이쯤에서 회상을 멈추었다. 그러곤 밀리안을 쳐다보았다. 그 역시 마법사의 의문사가 타살이라고 생각하는 듯했으나 그녀와 달리 그것이 에시드 대공의 소행이라고 단정하지 않는 듯했다. 프레아가 조금 찜찜한 얼굴로 물었다.
“너도 정말 에시드 대공이 그랬을 거라 생각해?”
“글쎄, 죽은 마법사들의 공통점이 아네모네 황비의 측근이라는 건 사실이긴 하니까. 합리적인 의심은 들지.”
밀리안이 아무렇지도 않은 목소리로 대답하곤 창밖을 바라보았다. 마차의 속도에 맞춰 바람이 창틈으로 들어왔다. 그는 머레니의 말을 듣고 에시드 대공이 범인일 가능성도 열어두는 듯했다.
프레아도 덩달아 창밖을 바라보았다. 머레니와 헤어지고 혼자 가겠다는데 굳이 약속 장소까지 데려다준다고 하여 같이 나온 참이었다. 웬만하면 떼어내고 가려 했는데 막무가내였다.
밀리안은 알까. 만나기로 한 사람이 실버라는 걸?
프레아가 조금 씁쓸한 얼굴로 밀리안을 쳐다보았다. 그녀는 그날 이후 밀리안을 피해 다녔었다. 이번이야 머레니의 일이기 때문에 만났던 거지, 그런 게 아니었다면 분명 이렇게 마주 보고 있지도 않았을 테다.
실버를 만나러 가는 줄도 모르고 배웅해 주는 그에게 죄책감마저 들었다. 그가 저와 좀 더 오래 있고 싶어서 배웅한다는 걸 알아서였다. 이미 실버와 잘해보기로 마음먹은 이상 밀리안과의 거리가 더 이상 좁혀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했다.
게다가 실버는 글라디안 때와 달리 더 편하고 마음이 잘 맞았다. 3번 만나는 동안 어쩌면 밀리안보다 더 좋아질 수도 있다. 그렇게 실버와 결혼까지 하게 된다면 아예 수도 밖으로 다시 나가는 것도 괜찮은 방법이리라.
수도에 있으면 밀리안과 어떻게 해서든 자꾸 부딪치게 될 거고, 그를 말릴 수 있을지도 지금으로썬 확신할 수 없으니까. 입을 왜 맞추어서 이 사달을 냈을까. 어떤 식으로 말해도 변명일 뿐이라 더욱 답답했다.
그가 조금 막무가내인 성격이긴 해도 자신이 싫다고 하면 강요하지 않았다. 조금 비겁하긴 해도 칼같이 거절하여 그가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해야 했다. 그렇게 혼자 수많은 생각을 할 때였다.
“무슨 생각해?”
갑작스러운 밀리안의 물음에 프레아가 멍하니 있다가 곧바로 아까 전 머레니와의 대화를 끌어왔다.
“아, 그냥. 정말로 에시드 대공이 아네모네 황비를 죽였을까 하고.”
밀리안이 그녀를 지긋이 바라보았다. 그 생각을 그렇게 골똘히 한 거냐는 얼굴이었다. 그가 조금 딱딱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아니길 바라는 목소리네.”
“으음……. 일단은 내가 아는 대공님은 그런 쪽에 전혀 관심이 없어 보였으니까. 어머니의 죽음에도 슬퍼하셨고, 권력이나 욕심을 위해 사람을 죽일 것 같진 않았어.”
프레아가 두서없이 말하며 움찔했다. 그냥 한 말에 밀리안의 반응이 영 딱딱했기 때문이다. 밀리안은 한참을 응시하더니 나직이 말했다.
“그 정도 연기는 황궁 생활 몇 년이면 쉽게 터득할걸. 그를 너무 믿지 않는 게 좋아.”
“그렇긴 하지. 나도 알고 있어.”
프레아가 덤덤하게 대답했다. 그의 말이 맞았다. 황족은 언제나 서로를 견제하는 자들. 충신을 얻기 위해 어떤 아름다운 말과 태도를 보일지 모를 사람들이다.
프레아는 밀리안의 말에 반박하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어쨌든 아네모네 황비가 황궁에 들어간 이유, 그리고 에시드와 불화가 생긴 원인을 알게 되니 에시드를 마냥 옹호할 수는 없었다.
황비가 먼저 그를 죽이려 했었으니 더 이상 정상적인 모자 관계는 아니었다. 그가 무슨 억하심정으로 마탑을 없애려고 하는지, 왜 어머니를 살해해야만 했는지는 프레아가 알아내야 할 몫이었다.
머레니와 비밀리에 연락할 통신구를 교환했다. 또한 앞으로 대면해서 만날 때는 안전하게 밀리안의 성에서 보기로 했다. 그의 성에는 다른 사람들의 눈을 피할 수 있는 안전한 공간과 숨겨진 게이트가 있었으니까.
조금 무거워진 분위기 속에서 밀리안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오랜만이네. 둘이 있는 것도.”
“그러게…….”
“그날 이후 자꾸 피하기만 하고.”
밀리안이 서운한 기색을 띠며 프레아를 훑었다. 그러더니 나직한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근데, 오늘 예쁘네.”
“어?”
“누굴 만나는데 그렇게 꾸몄어?”
밀리안의 물음에 프레아가 화들짝 놀랐다. 그는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띠었다. 누굴 만나는지 관심도 없어 보여 안심했더니 갑자기 훅 하고 들어왔다. 설마 관심 없는 척 관련 없는 질문으로 방심하게 하려던 거였나. 프레아가 잔뜩 버벅거렸다.
“에, 에리카랑 오랜만에 저녁 먹고 놀기로 했어.”
“흐음?”
밀리안이 수상하다는 듯 프레아를 빤히 보았다. 자기도 모르게 거짓말을 해버린 프레아는 속으로 제 입을 찰싹찰싹 때렸다.
그냥 실버를 만난다고 당당히 말하면 될 것을, 에리카 핑계를 댈 게 뭐람.
프레아가 밀리안의 눈치를 슬슬 보며 얼른 약속 장소에 도착하길 바랐다.
“그날 대답 아직 못 들었는데.”
밀리안이 배시시 웃으며 프레아의 머리카락을 훑었다. 그가 상체를 기울여 프레아의 머리카락에 가볍게 입을 맞추고 올려다보았다. 밀리안과 눈이 마주치자 다시금 프레아의 심장이 콩닥거렸다.
“다, 당연히 거절이지!”
“매정하긴.”
프레아가 제 머리카락을 날렵하게 채가며 소리쳤다. 밀리안이 그 모습에 씁쓸하게 중얼거리곤 순순히 상체를 뒤로 물렀다. 그는 허둥지둥하는 프레아를 빤히 바라만 볼 뿐이었다. 어쩐지 조금 의기소침해 있는 것도 같았다.
무거워진 공기에 프레아가 입을 달싹였다. 하지만 때마침 약속 장소에 도착해 프레아의 말은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밀리안이 먼저 내리며 손을 내밀었고, 프레아는 살포시 손을 올려 빠르게 마차에서 내린 뒤 떼어냈다.
밀리안이 사라진 온기를 되찾으려 주먹을 두어 번 쥐었다 폈다. 그러곤 프레아를 향해 부드러이 웃었다.
“재밌게 놀아.”
“데려다줘서 고마워.”
프레아가 서둘러 밀리안에게 작별 인사를 고하곤 안으로 들어갔다. 새로 생긴 디저트 카페였는데, 특이하게도 내부 구조가 칸막이 형식으로 설계되어 있어 실버와 몰래 만나기에 안성맞춤이었다.
혹시라도 밀리안이 안 가고 있을까 봐 몰래 바깥을 살펴보았다. 이미 마차가 사라진 뒤였다. 프레아는 점원에게 예약했던 이름을 밝혔다. 점원이 능숙하게 프레아를 구석진 자리로 안내했다.
하늘하늘한 커튼으로 입구를 가린 채 멍하니 앉아 실버를 기다렸다. 이런 애매모호한 마음으로 실버와 마주하게 될 줄은 몰랐다. 그래도 분명 만나면 더 좋아지리라.
프레아가 잡념을 없애며 가방에서 손거울을 꺼내 얼굴을 재차 확인했다. 꾸민 듯 안 꾸민 것처럼 했는데 밀리안이 단박에 알아챈 걸 보면 실버도 눈치챌지 몰랐다. 괜히 첫 만남부터 힘주고 왔나 싶어 두어 번 거울을 확인할 때였다.
“일행이 오셨습니다.”
점원이 문 앞에서 상대가 왔음을 알렸고, 이내 커튼이 젖혀졌다. 프레아의 시선이 곧바로 입구 쪽으로 향했다. 실버와 눈이 마주쳤다. 프레아의 눈이 몰라보게 커졌고, 들고 있던 손거울은 자연스럽게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처음 뵙겠습니다, 체리 님.”
저를 보고 놀란 프레아를 향해 실버가 부드러이 미소 지었다. 자연스럽게 그가 프레아의 맞은편에 앉았다. 점원이 커튼을 쳐 다시 밀폐된 공간엔 실버와 프레아뿐이었다.
‘말도 안 돼.’
프레아는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실버의 머리카락에 시선이 갔다.
그래서 실버였구나.
프레아는 그제야 실버의 머리가 은발이라는 것과 눈동자가 아름다운 붉은색임을 깨달았다. 자신이 제일 좋아하는 색을 모두 가진 남자는 자신이 가장 잘 아는 사람이었다.
그동안 그와 죽이 잘 맞는다고 생각했던 대화들이 스쳐 지나갔다. 그 대화들이 결국은 모두 같이했던 일들이었다.
어쩐지 기시감이 들 정도로 대화가 척척 진행된다 싶었는데…….
프레아는 충격받은 얼굴로 몸을 떨었다. 그가 자연스럽게 떨어뜨린 손거울을 프레아의 앞에 내밀며 화사하게 웃었다. 아무렇지도 않게 행동하는 모습에 프레아가 기가 찬 목소리로 소리쳤다.
“너…… 너!”
“이제야 만나게 되었네요. 본의 아니게 에리카가 된 밀리안 테일러스입니다.”
그가 능청을 떨었다. 이곳에 도착하기 전에 에리카를 만난다고 거짓말했던 것을 콕 집어 말하고 있었다. 실버가 밀리안이었다니. 그것도 모르고 감쪽같이 속아 넘어갔다. 그것도 모르고 실버에게 못 할 짓을 한다고 고민했다.
프레아의 얼굴에 배신감이 어렸다. 곧이어 세상을 다 잃은 듯 처연한 빛을 띠었다. 왜…… 도대체 왜! 호감을 느낀 상대가 번번이 밀리안인 걸까.
이러면 밀어내기도 힘들다. 운명의 신이 장난질하는 게 아니라면 이럴 수는 없다. 밀리안이 계속해서 제 안을 침범하려 한다. 막으면 막을수록 그의 존재가 자꾸만 커지는 것 같아 불안했다. 프레아가 애써 앙칼진 목소리로 외쳤다.
“네가 왜 여기에 와!”
“제가 마음에 안 드십니까? 전 마음에 들었는데.”
프레아의 호통에 그가 처연한 표정을 지었다. 천연덕스럽게 슬픈 빛을 띤 그를 보며 프레아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당했다. 완전히 그에게 당하고 말았다. 그렇게 쳐다보면 받아줄 거라 생각했니?!
자신의 계획이 애초부터 밀리안 손바닥 안이었다는 생각에 얼굴이 화끈화끈했다. 프레아가 얼굴에 속아 넘어가지 않으려 일부러 단호한 어조로 그를 다그쳤다.
“언제부터 알았어?”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
“시치미 떼지 말고 말해, 밀리안!”
프레아가 날뛸수록 밀리안은 즐겁다는 기색이었다. 그가 프레아의 추궁에도 실실거리며 답을 피했다. 그녀는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어쩐지 계획대로 일이 진행된다고 했다.
그의 표정을 보니 이미 처음부터 자신의 계획을 눈치챈 모양이었다. 어디서 정보가 새어 나갔던 걸까. 이 일을 아는 것은 에리카와 겨로네뿐이었다.
……설마, 겨로네?
순간적으로 우체통 제작에 마석이 필요하다고 했던 직원의 말이 떠올랐다. 마석 하면 에드모어 가문이다. 프레아가 어처구니없다는 얼굴로 밀리안을 바라보았다.
“이건 무효야.”
프레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밀리안은 덩달아 일어나 프레아의 손을 붙잡았다.
“이러시면 안 되죠. 우린 약속한 게 있지 않습니까?”
“무슨 소리야, 약속이라니?”
프레아는 밀리안과 약속한 기억이 없어 되받아쳤다. 이에 밀리안이 피식 웃더니 차근히 설명했다.
“영애가 먼저 특약을 걸지 않았습니까. 우리에겐 3번의 만남이 필수라고 들었습니다.”
“그, 그건!”
프레아가 그제야 특약을 떠올리고 소리치자 밀리안이 단호하게 말했다.
“약속은 지키라고 있는 거지요.”
그의 시선이 집요하게 프레아에게 닿았다. 잠시 뒤 그가 아주 해사하게 웃었다. 별 뜻 없다는 듯 지은 미소였지만 그의 의도를 알아챈 프레아는 힘없이 푹 자리에 주저앉았다. 밀리안 때문에 선본 상대가 도망칠까 봐 특약을 건 것은 자신이었다.
망했다. 지름길이라고 생각했던 길에서 맹수를 떡하니 만난 기분이었다. 한마디로 빠져나갈 구멍이 없었다.
밀리안의 선언에 전의를 상실한 프레아가 시무룩한 얼굴로 눈앞의 디저트를 바라보았다. 좋아하는 케이크 앞에서도 깨작거리는 프레아에게 밀리안이 포크로 먹기 좋게 떠서 내밀었다.
“아, 해.”
“……내가 먹을 거야.”
프레아가 포크를 뺏어 입에 넣었다. 심술이 가득한 프레아의 표정에 밀리안이 피식 웃었다.
“그거 내가 입 댄 포크인데.”
“……뭐?”
“잘 먹네.”
밀리안이 싱글벙글하며 포크를 가져가더니 자연스럽게 케이크를 떠서 제 입에 가져다 댔다. 프레아가 입에 넣었던 바로 그 포크로 말이다. 프레아가 딱딱하게 굳어 그를 바라보다 사나운 표정으로 소리쳤다.
“너, 너! 처음 만날 땐 먹던 포크로 체리 줬다고 화냈잖아. 근데 나한텐 왜 이래!”
“그땐 안 좋아했으니까.”
프레아의 말을 당당하게 받아친 밀리안이 이어 말했다.
“물론 지금은 좋아해서 아무렇지 않은 거야.”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알거든?”
프레아가 애써 손부채질을 하며 투덜거렸다. 이에 밀리안이 기분 좋은 목소리로 장난스럽게 물었다.
“그래? 그럼 너도 내가 좋아서 입 댄 거 알고도 가만히 있는 거야?”
“난 원래 그런 거 신경 안 써!”
“그럼 이제부터 신경 써보는 게 어때? 난 네가 날 의식해 줬으면 좋겠는데.”
밀리안이 뻔뻔스러운 태도로 홍차를 홀짝였다. 어쩐지 심통이 잔뜩 난 것 같은 그의 태도에 프레아가 머리를 빠르게 굴렸다. 아무래도 그를 대놓고 피해 다닌 것이 단단히 서운했던 모양이다.
“다른 건 몰라도 대놓고 피하지 마. 그거 정말 피 말리니까.”
밀리안이 아주 맑게 웃으며 말했다. 입은 웃고 있지만 눈은 웃지 않았다. 일종의 경고였다. 지금 네 목숨은 내게 속했으니 더 이상 귀찮게 하지 말라는 경고. 이미 그의 발톱이 목전에 와 있는 기분이었다.
자, 가만히 생각해 보자. 맹수와 마주치면 위험하다 한들 배부른 맹수라면 상황이 달라지는 법이다. 맹수들은 배부를 때엔 사냥을 안 하니까.
그럼 지금 밀리안은 배부른 맹수인가, 배고픈 맹수인가.
여유롭게 차를 즐기는 걸 보면 이미 배부른 것 같다. 그런데 또 미소 짓는 표정을 보면 어쩐지 등 뒤가 서늘해지는 게, 잔뜩 굶주린 것 같다. 프레아는 어떻게든 이 상황을 헤쳐 나가기 위해 눈을 요리조리 굴리다 번뜩 할 말을 떠올렸다.
“너도 예전에 나 많이 피해 다녔잖아.”
“아아, 그래서 지금 복수하는 거야?”
밀리안의 눈빛이 살벌하게 접혔다. 그의 눈웃음을 보고 있자니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도대체 나한테 왜 이러는 건데!
프레아가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한 채 우왕좌왕했다. 여기에서 괜히 그를 자극해 보았자 잡아먹히기밖에 더하겠는가. 이미 맞선은 시작되어 버렸고, 만남이 이루어진 이상 3번 만나기로 한 계약 조건은 무를 수가 없다.
애초에 직원이 특약을 작성할 때 여러 번 강조했던 일이다. 물론 겨로네가 약속을 어기고 밀리안에게 제 정보를 주었을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굳이 그들과의 의리를 지킬 필요는 없다.
그런데도 ‘3번은 만난다’로 마음이 기운 건 순전히 프레아의 성격 탓이었다. 본인이 먼저 하자고 제안한 일을 손바닥 뒤집듯 무르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남동생과 선을 보게 된 걸 겨로네가 모를 가능성도 염두에 두어야 했다. 괜히 말을 꺼냈다간 스캔들만 날 게 뻔했다.
“피해 다닌 건 미안해.”
“나도 속이고 선봐서 미안.”
프레아의 사과에 밀리안도 덩달아 사죄했다. 그를 빤히 본 프레아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물었다.
“처음부터 나인 줄 알고 선본 거야?”
“그래, 맞아. 네가 나 몰래 선보겠다는데 내가 가만히 있을 리가.”
“어떻게 알았어? 아니, 언제부터 알았는데?”
“글쎄, 언제부터 알았을까?”
밀리안이 프레아의 추궁에 배시시 웃으며 답하지 않았다. 그의 눈빛을 보는 순간 프레아는 그의 속내를 간파해 속으로 외쳤다.
처음부터 알았구나, 요놈!
프레아는 밀리안의 농간에 제대로 빠져 버린 자신을 탓했다. 어쩐지 일이 순조롭게 풀린다고 했다. 겨로네의 기밀 엄수를 너무 믿었던 모양이다. 바보같이!
농락당한 기분에 주먹이 절로 꼭 쥐어졌다. 그런 프레아를 본 밀리안이 부드럽게 말했다.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이지만 겨로네에서는 내가 직접 선을 보는지 몰라.”
“무슨 말이야, 그게?”
“다른 이름으로 신청했거든.”
“아주 작정했구나?”
프레아가 뻔뻔한 밀리안의 태도를 비꼬았다. 물론 그 말이 그에게는 전혀 타격이 없어 보였다. 그가 한동안 프레아를 빤히 바라보았다. 무언가를 깊이 생각하는 얼굴이었다. 잠시 후 그가 차분한 어조로 대답했다.
“내가 작정하고 덤벼야 네가 날 봐주잖아. 오늘처럼.”
“…….”
“그러니까 특약 조건은 꼭 지켜줬으면 해.”
“밀리안!”
“막무가내라고 해도 상관없어.”
밀리안이 자리에서 일어나 프레아에게 몸을 기울였다. 프레아가 소파에 바짝 붙자 밀리안이 그녀의 머리카락에 얼굴을 묻었다. 그러곤 프레아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딱 세 번이야.”
“뭐?”
“그 안에 네 입으로 내가 좋다고 인정하게 할 거야.”
“…….”
“정말 피하고 싶고, 도망치고 싶었으면 내게 입 맞추지 말았어야지.”
밀리안의 눈빛이 이글거렸다. 프레아는 차마 그의 눈을 피하지도 못하고 마주 보았다. 그런 프레아를 빤히 보며 밀리안이 해사하게 웃었다.
“천천히 다가가려 했더니 입술을 훔쳐간 것도 모자라 도망치려 한 건 너야.”
“…….”
“너한테 푹 빠지게 해놓고 물러나면 곤란해.”
“내가 빠지라고 한 것도 아니잖아!”
프레아가 억울한 빛을 띠자 밀리안이 부드러이 말했다.
“하지만 내가 네게 단단히 빠진 건 사실이니까. 그래서 이젠 나 혼자 빠져 있지 않으려고.”
“뭐?”
“내가 너한테 미쳐 있는 것처럼 너도 나한테 미쳤으면 좋겠어. 아니, 그렇게 만들어보려고. ……그러니, 프레아.”
밀리안의 입술이 가만히 프레아의 코끝에 앉았다 떨어졌다.
“나한테서 빠져나갈 수 있으면 어디 한번 해봐. 내가 망설일 만한 이유는 얼마 전 누구 덕에 완전히 해결됐거든. 앞으로 난 최선을 다해 널 꼬실 거야.”
“무, 뭐?”
프레아가 당황해 되물었다. 배고프다느니, 배부르다느니. 그런 생각을 할 때가 아니었다. 그는 다른 먹이들을 제쳐 두고 못 먹을 곳에 있는 먹이만을 탐하는 맹수였다. 아니, 그 먹이 하나를 위해 수년을 준비한 지조 높은 맹수였다.
그 먹이가 제 발로 맹수 앞에 방정맞게 다가가고 말았다. 그것이 맹수를 자극하는 줄도 모르고. 맹수를 건드린 먹이는 잡아먹히는 일만 남았을 터.
피하면 될 줄 알았으나 피해서는 안 되는 감정이었고, 없던 일처럼 굴면 된다고 생각했으나 없던 일이 될 수 없는 입맞춤이었다. 프레아는 도무지 밀리안에게서 헤어 나올 자신이 없었다. 그의 모든 행동이 자극이었고, 유혹이었다.
프레아의 얼굴이 불에 댄 것처럼 빨갛게 익었다. 그 모습을 밀리안이 눈웃음을 살랑살랑 치며 바라보았다.
“이거 봐, 너 나 좋아한다니까.”
* * *
집에 어떻게 돌아온 건지 모르겠다. 프레아는 멍한 얼굴로 침대에 풀썩 드러누웠다. 밀리안에게 망설임은 보이지 않았다. 단 세 번만으로도 저를 완벽히 포섭할 수 있다고 자신하는 것 같았다. 괜히 피해 다녀서 그의 심기를 건드리고 그의 행동력을 강화시키고 말았다.
프레아는 세 번의 만남 동안 저 자신을 지킬 자신이 없었다. 대놓고 미인계를 쓰고, 유혹하려 드는 밀리안을 당해낼 수 없을 것 같았다. 코끝에 닿았던 입술의 감촉이 여전히 생생했다. 입술이 아니라 코에 닿아서 아쉽다고 생각했던 요망한 뇌 구조를 싹 다 고쳐 버리고 싶다.
“한심하다, 한심해.”
그때 토토가 불쑥 말을 걸었다. 아주 조그마한 형상으로 현신한 토토는 혀를 끌끌 차며 프레아를 나무랐다. 평소답지 않게 작은 모습으로 등장한 그가 의아했지만 굳이 묻지 않았다. 그것보다도 바람을 통해 엿들었다는 게 더 마음에 걸렸다.
“왜 엿듣고 그래.”
“엿들은 게 아니라 그냥 들렸다. 나도 안 듣고 싶어. 그런 오글거리는 말들.”
토토가 헛구역질하는 시늉을 했다. 그가 피어싱에 묶여 프레아의 곁을 떠날 수 없는 탓이었다. 보통의 정령들은 정령사가 소환할 때만 등장하지만 토토는 상시 대기인 셈이나 마찬가지였다.
“혹시 토토는 알아? 밀리안이 나 언제부터 좋아했는지?”
프레아가 토토를 넌지시 보며 물었다. 저를 항상 따라다녔으니 밀리안의 심경 변화를 누구보다 잘 알 것 같아서 물은 것이었다. 프레아의 물음에 토토가 황당해했다.
“그걸 알면 내가 사랑의 정령이지 바람의 정령이게? 그냥 어느 순간 좋아하는구나 했지. 그건 본인한테 물어보는 게 제일 빠를 거다.”
“그걸 어떻게 물어봐.”
프레아가 베개에 얼굴을 묻고 웅얼거리자 토토가 그녀의 머리맡에 안착했다.
“적어도 가벼워 보이진 않는다. 꽤 오래 숨겨둔 감정이야.”
“모르겠어, 토토. 나 어떻게 해야 해?”
프레아의 말에 토토가 깊이 생각하는 듯하더니 속 시원히 이야기해 보라는 듯이 물었다.
“네가 거리끼는 게 뭔데.”
“거리끼는 것?”
“그래. 보아하니 너도 그놈이 마음에 드는 것 같은데. 받아주지 못하는 결정적인 이유가 있을 거 아냐.”
프레아는 제법 상담해 주는 것처럼 콕 집어 물어보는 토토를 물끄러미 보았다. 떠오르는 이유가 여러 가지지만 그중 제일 걸리는 것은 역시 에밀리였다.
“엄마가 나 때문에 불행해질까 봐, 겁나.”
“네가 그놈이랑 잘되는 게 왜 에밀리가 불행해지는 건지 모르겠는데.”
“생각해 봐. 엄만 에드모어 공작님을 좋아해서 재혼까지 하셨어. 호적상 완전히 남매인 우리가 좋다고 하면 분명 쓰러지실 거라고. 그건 부모님께 이혼하라고 하는 거랑 똑같은걸!”
프레아가 열변을 토했다. 그래, 아무리 밀리안이 지금 가문을 나간 상태라고 해도 결국 돌아올 수밖에 없다. 에드모어에 가장 어울리는 사람은 밀리안뿐이니까.
이 상황에서 밀리안과 자신이 잘되는 방법은 부모님의 이혼 말고는 없다. 설령 이혼한다고 해도 말 많은 결혼이 될 게 뻔했다. 한마디로 이러나저러나 가문 망신을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프레아의 말에 토토가 곰곰이 생각하는 것 같더니 명쾌한 결론을 내렸다.
“그럼 이번이 기회이지 싶다.”
“기회라니?”
“그놈 말대로 딱 세 번 너도 마음 열고 다가가 봐. 그리고 계산해 봐. 그놈과 있는 게 행복할 것 같은지 아니면 이대로 가족 행세하며 무늬만 가족인 편이 행복할 것 같은지 말이야.”
“…….”
“답은 세 번 만나보고 결정해도 늦지 않아, 프레아.”
토토가 제법 의젓한 체하며 프레아의 어깨에 두툼한 앞발을 올렸다. 그러곤 근엄한 목소리로 이어 말했다. 아주 오래 산 자신의 연륜을 걸고 하는 말이었다.
“정령인 입장에서 한마디 하자면, 인간들의 가족 놀음 못 봐주겠어. 막말로 에드모어 공작이 양아버지든 시아버지든 똑같은 아버지 아니냐? 어차피 죽어서 썩을 육체, 살아 있을 때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아.”
“썩을 육체라니…….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어, 이 허무주의자!”
프레아가 토토를 쏘아보며 버럭 했다. 토토는 흥, 하고 콧방귀를 한 번 뀌며 말했다.
“내 말은 괜히 네 엄마 걱정한다고 후회할 짓 하지 말라는 거야. 네가 걱정 안 해도 네 엄만 알아서 잘하고 있으니까.”
“그게 무슨 소리야? 알아서 잘하고 있다니.”
프레아의 물음에 토토가 느른한 웃음을 흩뜨리더니 곧장 눈을 번뜩였다.
“아, 몰라. 내가 무슨 메신저도 아니고 들리는 걸 다 너에게 고해바쳐야겠어? 나는 네가 밀리안 그놈이랑 연애하든 쿵작쿵작 떡방아를 찧든 상관 안 할 테니까 이 답답한 물건에서 빠져나갈 방법이나 알아내라!”
토토가 프레아의 귀에 걸린 피어싱을 붙잡고 늘어지며 꽥꽥 소리쳤다.
“이…… 이 저질 정령!”
퍽.
토토의 말을 알아들은 프레아가 새빨개진 얼굴로 토토를 밀쳐 버렸다. 토토가 창밖으로 튕겨 나갔다.
“악!”
외마디 비명을 지른 토토가 억울하다는 듯이 창을 두들겼다. 프레아가 서둘러 창문을 걸어 잠근 탓이었다. 그녀는 토토를 흘겨보더니 침대로 돌아가 등을 돌리고 누웠다.
토토는 사춘기 소녀처럼 예민하게 반응하는 프레아를 보며 혀를 내둘렀다. 현신을 풀고 들어갈 수도 있지만 프레아가 잔뜩 화가 났으니 그녀가 잠들 때까지 잠자코 기다리기로 했다.
* * *
머제리가 메샤르로 출근한 지 스무날이 넘었다. 한 달. 길다고 여겼던 기간이었는데 생각보다 빠르게 지나고 있었다. 머제리는 군소리 없이 메샤르 사무실을 빗자루질 했다.
허드렛일하는 것이 귀족으로서 모양 빠졌지만 레이첼 소후작 앞에서 개 소리를 내거나 아양을 떠는 것보다는 나았다. 아니, 그렇다고 스스로 합리화를 하며 버텨내고 있었다.
사실 프레아가 여행을 떠난다고 했을 때 옳다구나 하고 메샤르에 걸음 하지 않았었다. 저 집요하고 못돼먹은 비서만 없었다면 여행 내내 그랬을 것이다.
한 10일 즈음 무단결근했을 때일까? 비숍이 갑자기 머제리를 데리러 꼬박꼬박 코헨 가문에 오기 시작했다. 그런 비숍을 회유하려던 머제리는 번번이 실패하고 말았다.
돈을 주겠다고 해도 싫다, 그냥 눈감아 달라고 사정사정해도 싫다. 도무지 그녀가 원하는 걸 몰라 결국 다시 메샤르로 출근 도장을 찍을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그가 무단결석한 기간을 모두 계산해 프레아에게 고해바친 탓에 기간이 뒤로 미뤄지기까지 했으니, 통탄할 일이었다. 머제리가 제법 익숙하게 사무실에서 빗자루질 하자 그 모습을 무심하게 보던 비숍이 한마디 했다.
“은근슬쩍 구석 자리 안 쓰는 거 다 봤어요.”
“그런 건 좀 그냥 넘어갑시다!”
“대표님께 말할까요?”
“합니다, 한다고요!”
자비 없는 비숍의 말에 머제리가 울상을 지었다. 그가 툴툴거리며 군소리 없이 구석 자리를 꼼꼼히 쓸자 그를 넌지시 보던 비숍이 피식 웃었다.
몇 번 세게 군기를 잡았더니 툴툴거려도 할 건 다 하는 것이 제법 기특하다고 생각했다. 물론 여전히 경계하는 것은 잊지 않았다. 그는 마법사였으니까.
대표님이 여행을 떠나기 전 서약서를 보여주며 한 달간 아주 본전을 뽑아야 한다고 단단히 일렀다. 프레아가 마법사와 결투한 사실도 놀랄 일이었지만 살면서 마법사를 부려먹는 날이 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
비숍이 유쾌한 얼굴로 머제리를 보았다. 처음 저를 보자마자 어떻게든 구워삶으려고 했던 걸 떠올리자 피식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에 비해 지위가 낮으니 어떻게든 작위로 눌러볼 심산이었겠지만 순순히 당할 그녀가 아니었다.
비숍은 제 발로 가문을 버리고 나왔다. 귀족 사회에 만연한 정치질도 지긋지긋했고, 자신이 정령사라는 걸 알고 마법사에게 팔아먹으려고 했던 부모님은 인간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솔직히 처음 머제리가 왔을 때만 해도 전형적인 귀족 같은 행태에 아주 비호감이었다. 물론 지금도 딱히 호감은 아니지만 며칠 같이 지내며 깨달은 것은 그가 그냥 철없는 귀족이라는 점이었다.
“좋은 아침!”
프레아가 상쾌한 얼굴로 사무실에 들어왔다. 머제리가 프레아의 방문에 움찔했다. 프레아가 여행에서 돌아온 뒤로 계속 저 상태였다.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움찔움찔하는 게 조금 안쓰럽기도 했다.
“오, 오셨습니까. 주인님.”
“그래, 멍멍아. 오늘도 활기차게 빗자루질을 하고 있구나. 그러게 나 없다고 무단결근하면 되겠니?”
프레아가 유쾌한 목소리로 머제리의 군기를 잡았다. 비숍은 프레아가 일부러 그러는 것을 알기에 애써 웃음을 참고 두 사람을 보았다. 머제리가 잔뜩 풀 죽은 얼굴로 대답했다.
“죄송합니다.”
“죄송하다고 말만 하지 말고 열심히 일하자. 성실하게!”
“네에…….”
머제리는 저를 개 취급하는 프레아에게 힘없이 대꾸하곤 빗자루질을 마저 했다. 그의 어깨가 한껏 축 내려앉아 있었다. 비숍이 그런 머제리를 잠시 딱한 눈으로 보다가 프레아에게 말했다.
“오늘 에시드 대공님과 만나시는 날이죠.”
“아, 그랬지.”
프레아가 잠깐 딴생각을 했다가 돌아온 것처럼 멍하니 대답했다. 그런 프레아를 비숍이 물끄러미 보더니 넌지시 물었다.
“요즘 무슨 일 있으세요? 통 정신을 못 차리시는 것 같아요.”
“아냐, 그냥 푹 쉬고 왔더니 영 일이 손에 안 잡히네.”
프레아가 배시시 웃었다. 표정을 보아하니 무슨 일이 있는 게 분명했지만 굳이 캐묻지 않았다.
“대표님께서 일이 손에 안 잡힐 때도 있군요.”
“아하하. 그러게 말야.”
“무리하지 마세요.”
프레아는 비숍을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배시시 웃으며 그녀를 와락 안았다.
“역시 내 걱정해 주는 건 우리 비숍밖에 없어.”
“응석받이 다 되셨네요.”
“비숍이 자꾸 받아줘서 그래.”
프레아가 은근히 비숍을 탓하자 비숍이 프레아의 등을 가볍게 두드렸다. 잠시 뒤 프레아가 필요한 짐을 챙겼다. 사무실에 들른 것은 짐을 챙기기 위해서였으니까. 프레아가 나가려다 말고 멈춰 서서 말했다.
“비숍, 멍멍이가 나 없다고 농땡이 피우면 혼내줘. 봐주면 버릇 들어.”
“이미 잘하고 있으니 걱정 말고 다녀오세요.”
비숍이 당연한 거 아니냐는 얼굴로 단단히 말했다. 믿음직한 그녀의 태도에 프레아가 눈을 가볍게 찡긋했다.
‘역시 비서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잘 뽑았다니까.’
어쩜 저렇게 척척 잘하는지. 스승님이 제일 잘한 건 비숍을 소개해 준 것이다. 프레아와 비숍이 한동안 서로를 보며 미소 지었다. 웃지 못하는 건 빗자루를 든 머제리뿐이었다.
* * *
에시드 대공 성에 막 도착할 무렵이었다. 마침 성을 빠져나오는 데오 라즐리와 떡하니 마주치고 말았다. 에시드 대공 성을 몇 번 오갔지만 데오 라즐리와 마주친 것은 처음이었다. 그가 프레아를 향해 먼저 알은체하며 악수를 청했다.
“오랜만입니다, 레이첼 소후작님.”
“그러게요. 마리아네 모임에서 나간 뒤로는 처음이네요, 라즐리 소후작님.”
프레아가 담담하게 미소 지으며 악수했다. 어릴 적 마리아의 성에 놀러 갔을 때 자주 마주쳤기에 하는 인사말이었다. 에시드는 데오 라즐리 옆에 있다 프레아를 반겼다.
“왔는가?”
프레아는 표정에 반가운 기색이 역력한 그에게 가볍게 묵례했다. 데오가 그런 프레아를 가만히 보더니 심심한 사과의 말을 전했다.
“일전에 축하연에서 제 동생이 무례히 굴었다고 들었습니다. 주의를 시켰으니 용서하시길.”
“뭐, 저도 그다지 예의 있게 동생님을 대하지 않았으니 굳이 사과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렇습니까?”
두 사람 모두 애초에 인사치레로 한 사과라는 걸 모르지 않았다. 프레아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에시드에게 말했다.
“일이 처리되는 대로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그래, 네가 수고가 많다.”
에시드가 데오를 격려하듯 어깨를 가볍게 두들겼다. 친한 사이라는 말이 허언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에시드와 데오 사이에서 깊은 신뢰가 느껴졌다.
프레아는 두 사람을 가만가만 지켜보았다. 평소라면 아무렇지 않게 봤을 장면에 생각이 많아진 탓이었다. 머레니의 말과 부모님의 대화를 종합해 보면 에시드 대공이 이번 마법사 죽음의 용의자이고, 데오 라즐리는 친부 살해 또는 방조죄일 가능성이 있다.
라즐리 후작이 반란군이었으니 아네모네 황비 역시 반란군일 수도 있고. 그렇다는 건 반란군의 규모가 생각보다 크고 조직적이라는 뜻이다. 나아가 마탑도 반란군에 속해 있다는 말이고, 어쩌면 마탑이 반란군의 중심일지도 모른다.
부모님은 아직 마법사의 의문사에 대한 정보가 없으셔서 마탑을 객관적으로 배제하려 하셨겠지만, 양쪽의 정보를 알음알음 아는 저로서는 마탑의 정령 실험이 반란 도모와 관련 있다고 여겨졌다.
여기서 가장 난제는 에시드였다. 정말 그가 이 사건의 주범이라면 그는 왜 어머니를 죽였을까. 또 아네모네 황비의 측근들을 왜 죽이고 있는 걸까. 그가 원하는 건 무엇일까. 그도 반란군일까? 아니면 형을 위해 스스로 반란군을 토벌하려는 의리일까.
프레아는 에시드를 전처럼 편하게 대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접견실에 도착하자 따뜻한 차를 내오며 에시드가 말했다.
“여행은 즐거웠나?”
“네, 오랜만에 수도를 벗어나니 편하더라고요.”
프레아가 생글생글 미소를 띠었다. 에시드의 입가도 자연스럽게 호선을 그렸다. 그가 가볍게 등받이에 몸을 기댄 채 느른한 웃음을 흘렸다. 한눈에 봐도 무방비했다.
얇은 천으로 된 헐렁한 셔츠 차림, 두어 개 풀린 단추. 일광욕을 즐기며 축 늘어진 고양이처럼 우아하지만 기운 없는 모습이었다. 프레아가 에시드를 빤히 바라보자 에시드가 부드러이 웃으며 물었다.
“왜 그렇게 보나?”
“아…… 그냥, 대공님과 이렇게 편안하게 마주 앉아 얘기하는 게 새심 신기해서요.”
“그런가.”
에시드가 뺨을 긁적이며 배시시 웃자 프레아가 이어 말했다.
“대공님은 제가 무척 편하신가 봐요.”
“으음? 아. 내가 너무 그대 앞에서 편히 있었나 보군.”
별 뜻 없이 한 말에 에시드가 화들짝 놀라더니 옷차림을 정돈하며 바르게 앉았다. 딱히 자세가 삐딱하다고 뭐라 한 게 아니었음에도 허둥거리는 그를 프레아는 가만히 보았다.
그가 굳이 단추를 모두 채우며 의자에 바짝 붙어 앉았다. 이 상황이 뭔가 당황스럽고 우스워서 프레아가 가볍게 웃음을 터뜨렸다.
“누가 보면 제가 대공이고 대공님이 소후작인 줄 알겠어요. 그냥 편안해 보여서 좋다는 뜻이었어요.”
“아…….”
“단추 답답하시면 풀고 있으셔도 돼요. 밀리안도 자주 그래요.”
물론 밀리안이 단추를 굳이 굳이 여러 개 풀어 헤치는 이유는 에시드와 다를 것 같지만. 프레아가 밀리안을 생각하며 피식 웃었다. 밀리안이 제 앞에서 끼 부리는 것이 떠올라서였다.
그러고 보면 전쟁에 나가기 전에도 그는 항상 그런 식이었다. 저만 그걸 동생의 치근덕거림으로 치부했을 뿐.
어쩌면 무의식적으로 그의 마음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토토 말대로 스스로의 마음을 돌아볼 필요가 있는 일이었다. 에시드는 프레아가 저를 보고 웃는다 여겨 수줍게 말했다.
“내가 그대를 좀 편하게 생각하긴 하지.”
에시드의 느른한 말씨에 덩달아 편안해진 프레아가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자신이 편안하게 앉지 않으면 그가 계속 정자세로 있을 것 같아서였다. 프레아가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물었다.
“대공님은 제가 편하세요?”
“그래, 편해.”
“왜요?”
프레아의 반문에 에시드가 프레아를 빤히 보다가 피식 웃었다.
“글쎄, 그대의 카리스마 때문일지도?”
“제가 대공님을 좀 막 대하긴 하죠.”
프레아가 멋쩍은지 눈을 도르르 굴렸다. 에시드는 그녀를 보며 담담히 말했다.
“좋은 의미의 카리스마야. 그대를 보면 죽은 유모가 떠오르거든. 내가 가장 존경했던 분이야.”
“이젠 저를 호위 기사로도 모자라 유모 취급하시는 거예요?”
프레아가 가볍게 농담하며 배시시 웃었다. 하지만 농담할 분위기가 아니었던 모양이다. 에시드의 얼굴이 어두웠다. 그늘진 표정 위로 처연한 빛을 띤 그가 중얼거렸다.
“그야, 유모는 어머니에게서 날 보호하는 기사이기도 했으니까. 그대와 입장이 비슷하다고 볼 수 있지.”
그리움이 묻어난 표정이었다. 프레아는 분위기가 착 가라앉음을 느끼고 헛기침을 했다. 괜한 장난을 친 것 같았다. 이에 에시드가 멍한 표정으로 수습하듯 말했다.
“아, 갑자기 너무 무거운 이야길 했나.”
“아닙니다. 유모를 무척 따르셨나 봐요.”
프레아가 괜찮다고 하자 에시드가 씁쓸히 미소 지었다. 그녀는 더 물어볼까 망설였다. 물어보면 대답해 줄 것 같지만 괜히 사적인 영역에 발을 들이는 것 같아 망설여졌다.
유모가 죽었다는 것만 봐도 비극적인 이야기일 게 뻔했다. 그것이 그의 아픈 과거이리라. 평소라면 깊은 얘기까지 오가는 것에 부담이 없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괜히 대공에 대해 깊이 알게 되어 훗날 그가 반란군이거나 범죄자라는 게 확정될 때 사적인 감정이 끼어들면 곤란하다. 프레아가 침묵하자 에시드도 굳이 들추어 말하지 않았다. 그저 담백한 어조로 이야기했다.
그의 눈동자가 일순간 일렁였다. 늘 감정을 크게 드러내지 않던 그의 눈빛이 여러 감정으로 소용돌이치는 모습이 조금 낯설었다.
“좋은 분이셨어, 그대처럼.”
에시드는 그리 말하곤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에시드의 유모에 대해서는 이야기가 그리 오래 진행되지 못했다. 에시드는 말을 아꼈고, 프레아가 눈치껏 화제를 돌리니 다시금 느른한 얼굴로 돌아왔다. 한참 정령 실험에 관해 이야기하던 중 에시드가 말했다.
“곧 마탑의 밤인 건 알고 있지?”
“그럼요. 그때 마탑에 잠입할 생각이신 거죠?”
“그래, 그날은 그대가 나와 함께 가주었으면 하는데.”
에시드가 가만히 프레아를 응시했다.
마탑의 밤. 1년에 딱 3일간만 일반인에게 탑을 개방하는 날이다. 워낙 비밀이 많은 탑이지만 그날만큼은 사람들이 탑에 출입할 수 있게 허용했다.
마나가 가장 충만한 날에 거행되는 마탑의 밤은 마법의 탄생을 축하하는 날이자 마법사들이 일반인들에게 마법 용품을 파는 날이기도 했다.
일종의 야시장이었다. 3일 동안 저녁에 개방해 새벽까지 진행하는 축제라 마탑의 밤이라고 불렸다. 어둑할 때 개방하여 가장 어두울 때 닫으니까.
“그런데 어떻게 잠입하려고요?”
프레아가 의문을 가득 담아 에시드를 바라보았다. 이미 마탑의 표적이 된 터라 대놓고 가보았자 문전 박대당할 것이 뻔해서였다. 프레아의 염려에 에시드가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변장을 해야겠지?”
“변장이요?”
프레아가 어리둥절해 에시드를 멀뚱멀뚱 쳐다보았다. 고작 변장 따위로 마법사들의 눈을 가릴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녀가 한숨을 푹푹 내쉬자 에시드가 여유롭게 웃었다.
그러곤 프레아의 앞에 유리병 하나를 꺼냈다. 병 안에는 동글한 구슬 모양의 알록달록한 사탕이 담겨 있었다. 프레아가 그걸 보고도 도통 모르겠다는 얼굴로 물었다.
“음? 갑자기 웬 사탕이에요?”
“그냥 사탕이 아니야. 최대 6시간 동안 외형을 바꿔주는 폴리 사탕이네.”
“외형을 바꿔준다고요? 하지만 마탑에선 마법이 통하지 않을 텐데요? 분명 들어가자마자 폴리모프가 해제될 거예요.”
“이건 마법을 이용한 폴리모프가 아니라서 괜찮아. 폴리 나무 열매와 모프 열매를 섞어 만든 거거든.”
“처음 듣는데요?”
“그야 제국에는 없는 나무 열매들이니까.”
에시드가 보기 드물게 자신만만한 얼굴로 말했다. 폴리 열매와 모프 열매라니. 난생처음 들어본 열매 이름에 프레아는 여전히 납득하지 못했다.
에시드의 말에 의하면 폴리 나무와 모프 나무는 각각 다른 지역에서 자라는데, 우연히 그 두 나무 열매를 같이 먹고 외형이 잠시간 변한 사례가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것을 계기로 만들어진 약이라는데……. 설명을 듣는 내내 프레아의 표정에 의심이 가득했다. 그런 우연에 의해 이런 엄청난 약이 만들어졌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물론 세상에 우연으로 만들어진 것이 제법 많기는 했지만, 여전히 눈으로 보기 전에는 믿을 수 없었다.
“못 믿는 눈치인데, 지금 내가 한번 먹어볼 테니 잘 보라고.”
아무리 설명해도 프레아가 의심하자 에시드가 결심한 얼굴로 유리병의 마개를 열곤 구슬 하나를 꺼냈다. 그러곤 프레아가 무어라 말하기도 전에 사탕을 입에 넣었다.
와그작와그작.
사탕을 깨물어 먹는 소리가 크게 들렸다. 유리병이 열리자 달큼한 냄새가 났다. 손쉽게 부숴 먹는 걸 보니 딱딱한 사탕은 아닌 모양이다. 에시드가 한참 우물거린 끝에 사탕을 모두 삼켰다.
잠시 뒤 프레아의 두 눈이 커졌다. 에시드의 검은 머리카락이 초록색으로 변하고, 눈부신 금안이 탁한 청록색으로 변한 탓이었다. 게다가 그의 흰 피부는 몰라보게 까무잡잡해지고, 외관도 아저씨 같아졌다. 프레아는 완전히 의심을 풀고 신기해 소리쳤다.
“와, 진짜네! 진짜로 변했어요, 대공님.”
“역시 날 안 믿었구나.”
반색하는 프레아의 표정에 에시드가 서운한 기색을 띠었다. 이에 프레아가 시선을 도르르 피했다. 이내 그녀가 배시시 웃으며 말을 돌렸다.
“완전 아저씨 다 되었네요, 대공님.”
“아, 이번엔 아저씨로 변했나 보네.”
아저씨라는 말에 눈썹을 씰룩거리던 에시드가 난감한 얼굴로 볼을 긁적였다. 미청년인 에시드가 다 늙은 아저씨가 되어 뺨을 매만지는 모습은 괴리감이 컸다. 그가 조금 주저하더니 난감한 기색을 띠며 말했다.
“이게 사실 한 가지 단점이 있어.”
“뭔데요?”
프레아가 신기해하다 말고 에시드를 물끄러미 보았다.
“변형은 확실한데 그게 무작위라는 게 문제네.”
“네?”
“그러니까, 그대가 이걸 먹고 아저씨가 될지 어린이가 될지 노인이 될지 모른다는 거야. 물론 체력까지 떨어지는 건 아니라 상관없겠지만…….”
“허어.”
프레아가 얕게 탄성을 내뱉었다. 그 말은 즉, 랜덤으로 변한다는 것이 아닌가. 아름다운 청년이 될 수도 있고, 노인이 될 수도 있다니. 아마도 일전에는 지금과 다른 모습으로 변형했었나 보다.
뭐, 변형이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 조금 낯설 뿐이지 오히려 완전 딴판으로 바뀌는 편이 좋았다.
“그래도 확실히 대공님처럼 보이지 않는다는 면에서는 합격이네요. 엄청나요!”
프레아가 곧장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답하자 에시드의 얼굴이 활짝 펴졌다. 아까부터 폴리 사탕에 대한 자신의 평가에 일희일비하는 모습이 이상했다. 그때 에시드가 부끄러운 기색을 띠며 수줍게 말했다.
“사실 이거 내가 만든 거야. 칭찬을 들으니 기쁘군.”
“예? 대공님이 만드신 거라고요?”
그는 아까보다 격양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래. 사실 이걸 보여준 것도 그대가 처음이야. 부작용은 걱정 마. 그대에게 해가 될 걸 먹이고 싶지 않아서 이미 내 몸을 가지고 실험을 끝냈으니.”
에시드가 제 몸을 가지고 실험했다는 말에 프레아가 망연히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잘못되면 어쩌려고 스스로 실험체가 되기를 작정한 걸까.
누가 마법사 아니랄까 봐 실험 정신이 참 투철했다. 그러니 이런 신기한 물품도 만든 거겠지. 프레아가 그를 바보 같다고 생각하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에시드가 헬렐레 웃음을 흘렸다.
“다음에는 꼭 원하는 모습으로 변형하는 사탕을 만들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
“아뇨. 지금도 충분해요.”
프레아가 힘이 잔뜩 들어간 에시드를 웃으며 만류했다. 시간만 허용된다면 정말 만들어낼 기세여서 저도 모르게 막았다. 잠시 뒤 하녀가 간단한 디저트를 내왔다. 회의가 생각보다 길어진 탓이다.
하녀는 에시드 대공이 있어야 할 자리에 아저씨가 있어 놀란 것 같았으나 티 내지 않고 방을 나갔다. 프레아는 하녀가 가져온 디저트를 한 입 베어 물었다.
달콤한 초콜릿 향이 입안에 퍼지자 피로가 사르르 녹는 기분이었다. 흐뭇한 얼굴로 케이크를 음미하는 프레아를 본 에시드가 넌지시 말을 걸었다.
“전부터 궁금했던 게 하나 있는데…….”
“뭔데요?”
프레아가 오랫동안 앉아 있어 몸이 찌뿌둥한지 기지개를 쭉 켜며 되물었다. 에시드는 그런 프레아를 빤히 보며 질문했다. 무척 조심스러운 목소리였다.
“정령과는 언제 계약했나?”
“으음, 10살 때였나. 사실 언제 정확히 토토와 계약하게 됐는지는 몰라요. 그냥 눈떠보니 토토와 계약한 상태였거든요. 근데 그건 왜 궁금하셨어요?”
“그냥…… 정령사들은 언제쯤 정령과 계약하는지 궁금해서…….”
에시드는 열 살이라는 단어를 입안에 굴리듯 작게 웅얼거렸다. 마치 무언가를 가늠하려는 것처럼. 프레아는 옆에서 케이크 한 조각을 입에 우물거리며 고개를 갸웃할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