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장 포르 섬, 그 여행에서 생긴 일
프레아는 바다 위를 두둥실 떠다니는 나뭇잎 하나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저 잎사귀는 어느 틈에 바다로 넘어와 혼자 떠다니고 있는 걸까.
잠시 뒤 나뭇잎이 파도에 휩쓸려 바다 아래로 잠겼다. 프레아가 그 모습을 망연히 바라보더니 한숨을 푹 내쉬었다. 어제부터 알 수 없는 감정이 심리를 어지럽혔다. 도무지 이해 안 될 감정이었다.
밀리안이 저를 포기한다고 했다. 이제 진짜 가족이 될 거라면서. 당연히 기뻐해야 할 일인데 곱씹을수록 괘씸하고 이유 없이 화가 치밀었다.
도대체 왜? 왜 화가 안 가라앉는 거지?
프레아는 납득할 수 없는 감정의 여울에 머리를 쥐어뜯었다. 도대체 왜 이러는 건지. 왜 자꾸 밀리안의 사랑한다는 말이 귓가에 맴도는지 모르겠다.
“그렇게 쳐다보고 있다가 빠질지도 모른다.”
어느새 다가온 진이 난간에 있는 프레아가 뒤로 물러나게끔 경고했다. 괜히 난간에서 파도를 보고 있다가 그대로 떨어질까 염려해서였다. 프레아가 난간을 붙잡았던 손을 떼곤 진이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곤 조금 힘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밀리안은요? 여전히 멀미 중이에요?”
“그래, 약도 먹었는데 오늘따라 더 심하더구나. 지금은 수면향에 취해 잠들어 있단다. 프레아 너는 괜찮니?”
진이 프레아의 이마에 손을 얹었다. 그렇게 말하는 진 역시 뱃멀미로 얼굴색이 좋지 못했다. 프레아가 따뜻한 손에 기대어 눈을 감았다.
“저도 좀 어지러운 것 같아요. 포르 섬엔 왜 게이트가 없어요?”
“게이트가 있으면 제대로 쉬지 못할 테니까.”
막 문을 열고 나오던 에밀리가 프레아의 질문에 대답했다. 그녀가 프레아에게 시원한 물을 내밀었다. 프레아는 물을 받아 꿀꺽꿀꺽 마셨다. 뱃멀미는 좀처럼 익숙해질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저도 밀리안처럼 약이나 먹고 잠을 자는 편이 나을지도 몰랐다.
“어머니 말이 맞단다. 게이트가 있으면 휴가 중에도 황궁에 불려 갈 테니.”
“그렇게 생각하니 없는 편이 낫겠네요.”
프레아가 어질어질한 머리를 매만지며 대꾸했다. 에밀리는 프레아가 힘겨워하자 등을 토닥거려 주며 제안했다.
“차라리 한 번 게워낼래?”
“아니에요. 이미 게워낼 것도 남아 있지 않을걸요?”
“그럼 밀리안이 자고 있는 방에서 너도 쉬렴. 수면향을 피워놨단다.”
“으음…… 그래야겠어요.”
프레아는 밀리안이 있는 곳이라는 말에 잠시 머뭇거렸지만 수면향을 피울 수 있는 선실이 한곳이기에 어쩔 수 없었다.
프레아가 힘없이 고개를 끄덕이곤 비실비실 배 안쪽으로 걸음을 옮기려 하자 옆에 있던 시에라가 부축해 왔다. 프레아는 시에라를 슥 쳐다보았다. 흔들리는 배 위에서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다.
“너의 건강이 부러워, 시에라.”
프레아의 진심 어린 목소리에 시에라가 울상을 지으며 대답했다.
“할 수 있다면 제가 아가씨의 멀미를 가져가고 싶어요.”
“말이라도 너무 고마워.”
프레아가 힘없이 미소 지었다. 그녀의 말이 단순한 아부가 아니라는 것쯤은 표정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시에라의 부축을 받아 밀리안이 잠든 침실로 향했다.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가니 밀리안이 깊게 잠들어 있었다. 방 안에는 수면향이 자욱했다. 그가 누워 있는 침대 맞은편에 다른 침대가 3개나 더 놓여 있었다.
“편히 쉬세요.”
시에라가 조용히 속삭이며 방문을 닫았다. 프레아는 비틀거리며 침대 위로 풀썩 쓰러졌다. 수면향을 마시니 정신이 몽롱해졌다. 그녀는 잠이 들락 말락 하는 와중, 맞은편 침대에서 자고 있는 밀리안을 빤히 보았다.
“쓸데없이 잘생겨서.”
들리지도 않을 말로 속삭였다. 프레아는 이제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밀리안을 보는 것만으로도 주책없이 뛰어대는 심장을 더 이상 모른 척하기도 힘들었다.
보기만 해도 심장이 쿵쿵거리니 모를 수가 없었다. 이 감정은 진짜였다. 단순한 착각이었다면 이렇게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 심장이 떨려오진 않겠지.
프레아가 마른세수를 하며 괴로워했다. 남동생을 좋아하게 되었다. 이 일을 어떻게 해야 할까. 밀리안이 너무 좋다. 언제부터 좋아한 건지는 잘 모르겠다.
최근 그에게 과민히 반응하게 된 걸 보면 아마도 오래된 감정은 아닐 것이다. 아니, 오래되었는데 모르고 있었을지도. 모든 것이 혼란스럽고 자신의 감정이 너무 갑작스러웠으며 또 익숙했다.
프레아는 휘몰아치는 감정에 쓰게 웃었다. 이제 와서 언제 좋아했는지가 뭐가 중요할까. 좋아하게 되어버린 지금 이 상황이 중요하지. 그래도 지금이라도 거리를 둔다면 없어질지도 모를 감정이라는 것으로 위안 삼았다.
이미 실버와 만나기로 한 마당에 밀리안에 대한 마음을 깨달아 버리다니. 최악이었다. 그와의 만남을 무를 수도 없는 상황이다. 아니, 무를 생각이 없다는 쪽에 가까웠다.
프레아는 자신의 이기적인 마음에 진저리가 났다. 그녀는 실버에게 못 할 짓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와 만남을 이어갈 생각이었다. 그래야만 이 꼬인 상황을 해결할 수 있다.
어쨌든 순순히 밀리안이 물러나겠다고 했으니 그가 다시 제게 다가오려 하기 전에……, 아니, 자신의 마음을 알아채기 전에 얼른 결혼해 버려야 했다.
그렇게 되면 더는 밀리안도 어쩌지 못할 테고, 자신도 밀리안을 잊을 테니까. 실버와 만나다 보면 자연스럽게 밀리안에 대한 감정을 정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뒤늦게 마음을 깨달았다고 해서 달라질 것은 없다. 마음이 이끄는 대로 움직일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러기엔 걸리는 것이 너무나도 많았으니까.
프레아가 깊은 한숨을 쉬며 손으로 밀리안의 얼굴을 가렸다가 말았다가를 반복했다. 몽롱한 가운데서도 밀리안이 너무 선명하게 보였다. 프레아가 헛웃음을 내뱉었다.
미쳤구나.
그녀는 그렇게 스스로를 저주하다가 수면향에 취해 까무룩 잠이 들었다.
* * *
포르 섬에 도착했지만 다들 멀미로 인해 맥을 못 추렸다. 도저히 관광할 여력이 없었기에 별장에 도착하고 각자의 시간을 보냈다. 본격적인 휴양은 다음 날부터 하기로 했다.
프레아는 일부러 밀리안의 방과 멀찍이 떨어진 곳에 짐을 풀었다. 물리적인 거리를 두는 방법을 선택한 것이다.
다음 날 새벽이 되자 누가 깨우지도 않았는데 번쩍 눈이 떠졌다.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해서 몸이 찌뿌둥했다. 마음이 복잡하니 잠이 잘 올 리가 없었다.
시에라가 오기에는 이른 시간. 프레아는 침대에서 일어나 혼자서 세수하고 옷을 갈아입었다. 새벽 공기나 마실까 하여 가벼운 숄을 어깨에 두르곤 방문을 나섰다.
모두가 잠든 새벽이라 고요했다. 프레아는 조심스럽게 계단을 내려가 성을 빠져나왔다. 포르 섬에는 새벽안개가 은은하게 둘려 있었다. 아직 완전히 해가 뜨기 전이라 밝지는 않았지만 어둡지도 않았다.
프레아가 조심스럽게 모래사장 위를 걸었다. 차갑지만 맑은 공기에는 짭짤한 바다 냄새가 섞여 있었다. 조심스럽게 신을 벗고 모래 위에 발을 올렸다.
사각사각하는 소리와 함께 발이 모래에 묻혔다. 바다 쪽으로 몇 걸음 걸어가니 물결이 프레아의 발을 쓸고 지나갔다. 여러 차례 멍하니 그 모습을 보고 있었다.
“조금 춥네.”
프레아가 옷깃을 여미며 조용히 말했다. 어느새 해가 해안선 너머로 얼굴을 빼꼼 내밀고 있었다. 그 모습이 무척 눈부셔서 멍하니 떠오르는 해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포르 섬은 고요함 그 자체였다. 새벽만 되어도 북적거리던 수도의 시장과는 다른 분위기였다. 일출을 보고 성으로 돌아온 프레아가 조용히 방으로 올라가려 할 때였다.
에밀리와 진이 머무는 방 쪽에 불이 켜져 있었다. 벌써 일어나셨나 하고 인사하려는데 말소리가 심상치 않았다. 언뜻 들리는 목소리가 제법 날카로웠다.
아침부터 무슨 일이 있으신 건가?
프레아가 살금살금 방 쪽으로 다가갔다. 방에 귀를 바짝 대니 에밀리와 진의 대화가 작게 들렸다.
“그가 계속 혼수상태면 어떻게 되는 거죠?”
“글쎄요. 일이 이렇게 꼬이는 걸 보니 반란군 쪽에서도 수상한 낌새를 느낀 모양입니다.”
‘반란군?’
프레아는 반란군이라는 단어에 멈칫했다. 아무래도 공적인 대화 같았다. 그녀는 어쩐지 들어서는 안 되는 대화 내용인 것 같아 자리를 옮기려다가 익숙한 이름이 등장해 다시 한번 멈칫했다.
“라즐리 후작이 살아날 확률은 얼마나 되죠?”
“지금 항간은 그의 병세를 쉬쉬하는 분위기입니다. 조만간 그 아들이 가문을 이을 것 같습니다.”
“시기가 이상하네요. 뭔가 일이 터질 것 같아요.”
에밀리가 한숨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프레아는 라즐리 후작이 혼수상태라는 말에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마리아가 아버지를 얼마나 자랑스러워했는지 어릴 적 그녀와 몇 번 대화만 나누어도 알 수 있었으니까.
그런데 그녀의 아버지가 혼수상태라니. 게다가 살지 못할 거라니.
그녀와 딱히 친한 사이는 아니었지만 미운 정도 정이라고 순간적으로 마리아가 걱정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어쩐지 딱한 마음이 들려는데 에밀리가 답답하다는 어조로 말했다.
“공작께서는 이 사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요? 전 아무래도 불안해요. 반란군의 움직임도 이전과는 좀 달라요. 정말 내부에 문제라도 생긴 건지……. 게다가 지난번 축하연에서 생긴 일은 반란군으로 위장한 마탑이었잖아요. 설마 마탑이 반란군에 합류라도 한 걸까요?”
“그렇다기엔 시기가 좋지 못합니다. 지금 마법사의 의문사가 마법사들 사이에서만 발병하는 전염병이 아니냐는 소문이 돌고 있지 않습니까? 제 건강을 끔찍이 여기는 마법사들이 전염병이라는 말에 겁먹어 출입을 자제한 지 오래입니다. 반란군을 도와 거리를 활보할 리 없죠.”
“역시, 그렇겠죠?”
진이 타이르자 에밀리가 음울한 어조로 대답했다. 잠시간의 침묵 후 에밀리가 이를 악물며 말했다.
“하아, 이제 다 잡았다 했더니 중요한 열쇠였던 자가 혼수상태라니. 누구 물 먹이는 것도 아니고.”
“그것보다 프레아의 일은 어찌할 겁니까? 이젠 대공도 믿을 수 없는 상황입니다. 라즐리 후작이 반란군이라는 것이 확정된 상황에서 그와 친분이 있는 모든 사람은 경계 대상이지요. 게다가 라즐리 후작은…….”
진이 뒷말을 흐리고 채 말을 잇지 못했다. 프레아는 숨죽여 대화를 듣고 있다가 대공이라는 단어에 화들짝 놀랐다. 두 사람은 대공이 반란군과 관련 있다고 여기는 모양이었다.
‘대공이 나를 이용하려 한 걸까.’
프레아는 어쩐지 저만 모르는 무언가가 벌어지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하지만 에시드와 알고 지낸 바로 그는 권력에 욕심이 없는 사람이었다.
게다가 어머니의 죽음에 대한 죄책감도 짙어 보였다. 어머니와 사이가 좋지는 않았어도 그런 식으로 돌아가신 것에 마음 아파했으니까. 프레아의 생각이 그쯤 미쳤을 때 에밀리가 말했다.
“라즐리 후작은 아네모네 황비를 선황 폐하께 추천했던 사람이기도 하죠.”
“예, 그러니 프레아에게 이번 신변 보호에 대해 조심하라고 하는 편이 좋을 듯합니다. 어쩌면 황비의 죽음과 라즐리 후작의 혼수상태가 대공과 관련 있을지도 모르니까요.”
“하지만 아직 확실하지도 않은 일에 프레아를 끌어들일 수는 없어요. 괜히 말했다 그의 의심이라도 받게 되면 더욱 곤란하니까요. 당신도 알잖아요, 반란군이 어떤 식으로 뒤쫓는 자들을 처단하는지요. 처음 계약했을 때 말했지만 전 제 딸아이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해요. 더 이상 가족을 잃고 싶지 않습니다.”
에밀리의 가족이라는 말에 프레아가 움찔했다. 본능적으로 그 잃었다는 가족이 아버지일 거라고 짐작했다.
‘그렇구나. 내 친아버지는 이미 이 세상에 없구나.’
프레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뒷이야기를 더는 들어서도 안 됐고, 듣고 싶지도 않았다. 그 순간 등 뒤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 화들짝 놀랐다.
“여기서 뭐 해?”
“……!!”
다리를 삐끗해 넘어지려는 것을 밀리안이 가뿐히 받았다. 그의 품에 안기는 형세가 되자 프레아가 놀라 밀리안을 올려다보았다. 밀리안이 뭐 하고 있냐는 얼굴로 빤히 내려다보았다.
프레아가 저도 모르게 쉿, 하고 집게손가락으로 입을 가린 채 도리질했다. 엿듣고 있던 것을 들키지 않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이미 밀리안의 말소리를 들었는지 두 사람의 대화가 일시에 멈췄다.
프레아는 두 사람이 나오기 전에 얼른 밀리안을 끌고 옆방으로 도망쳤다. 방에 들어오고 나서도 혹여 소리를 낼까 봐 밀리안의 입을 막고 벽으로 밀었다.
급히 들어온 거였는데 생각해 보니 밀리안의 방이었다. 방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에밀리의 목소리가 들렸다. 마침 계단을 지나던 집사 랭이 인사했다.
“좋은 아침입니다, 마님.”
“아, 랭이었구나. 일찍 일어났네?”
아무렇지 않게 몇 마디 대화가 오간 뒤 다시 방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프레아는 콩닥거리는 심장을 뒤로한 채 밀리안에게 바짝 붙었다. 아주 적절한 타이밍에 랭이 지나가서 다행이었다.
프레아가 한시름 놓은 얼굴로 한숨을 푹 내쉬고 밀리안을 바라보았다. 언제부터 그렇게 쳐다보고 있었던 걸까. 밀리안과 눈이 정면으로 마주쳤다. 그 눈빛이 어찌나 그윽한지 심장이 다른 의미로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그러다 자신이 밀리안에게 밀착하고 있다는 걸 깨닫고 말았다. 벽으로 밀친 것까진 좋은데 이건 뭐, 자신이 밀리안을 덮치려고 하는 형세였다. 프레아가 화들짝 놀라 떨어졌다.
“이, 이건 그러니까…….”
“굴러들어 온 먹잇감은 놓아주지 않는 법인데.”
밀리안이 피식 웃으며 프레아에게 다가왔다. 프레아가 뒷걸음질 치며 낮게 소리쳤다. 혹시 옆에서 들을까 봐 조심하면서.
“아니, 이건!”
“걱정하지 마. 지난번에 충분히 알아들었으니까. 그냥 한 말이야.”
밀리안이 부드럽게 웃으며 프레아의 머리를 흩뜨렸다. 프레아는 예상했던 반응과 달리 싱겁게 대꾸하는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는 이제 막 일어났는지 부스스한 머리에 잠옷을 입고 있었다.
“일찍 일어났네.”
“응.”
“혹시 무슨 얘기 들었어?”
밀리안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프레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도리질했다.
“아니야. 그냥 인사하려다 진지한 얘기 중인 거 같아서 지나가려 했어.”
“그랬구나.”
밀리안이 담백하게 대답하곤 물을 마셨다. 프레아가 힐끗 그를 쳐다보았다. 목울대가 크게 울렁이는 모습이 어쩐지 숨이 막혀 헛기침이 나왔다.
“그, 그럼 나 먼저 식당에 가 있을게! 씻고 와.”
프레아는 밀리안이 무어라 말하려는 것도 듣지 않고 부리나케 방을 나오고야 말았다. 심장이 쿵쿵거리고 목이 바짝바짝 탔다. 뭘 훔쳐보고 심장 떨려 하는지 알아서 스스로 자괴감이 들었다.
* * *
포르 섬에서의 일과는 무척 평온했다. 성대한 생일 파티 이후 찾아온 고요함은 프레아의 가족에게 휴식을 가져다줬다. 모두 딱히 무언가를 하려고 노력하지 않았다.
그냥 늘어지게 잠을 자고 일어나 늦은 아침을 먹거나 다 같이 바다로 나가 물장난을 했다. 보는 눈도 없어 거리낄 것이 없었다. 포르 섬에는 오직 프레아의 가족과 사용인들뿐이었다.
창문만 열어도 탁 트인 바다가 보였고, 심심하면 산책할 곳이 넘쳐났다. 물론 수도처럼 마도구가 잘 비치되어 있지는 않았지만, 오히려 그것이 완벽한 휴식을 가능하게 했다.
좋은 마도구 옆엔 항상 일거리가 가득했고, 늘 에밀리의 머리를 어지럽히던 정보가 즐비했었으니까. 게다가 게이트도 없었다. 급하다고 해서 이곳에 마음대로 들락거릴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말이었다.
포르 섬에는 인공적인 장치 없이 그저 성만 덜렁 놓여 있었다. 게이트를 설치하지 않는 것에 대해 황제에게 자연 파괴가 어쩌고저쩌고하는 핑계를 대었다고 들었다.
그만큼 오랜만의 휴식이었다. 에밀리가 옆에서 열심히 밀가루 반죽을 치대는 프레아를 바라보았다. 간식으로 먹을 빵을 만드는 중이었다.
프레아의 뺨에 하얀 가루가 묻어 있어 에밀리가 손수건을 적셔 볼을 문댔다. 분명 어엿한 숙녀가 되었음에도 에밀리의 눈에는 프레아가 항상 어린아이 같았다. 에밀리가 푸근한 미소를 띠며 말했다.
“우리 딸, 요리를 볼로 하는구나. 이래서 언제 시집보내지?”
“엄마, 나 시집가야 돼? 엄마랑 계속 같이 살면 안 돼?”
에밀리의 장난에 프레아가 그녀를 빤히 보며 물었다. 어쩐지 프레아의 얼굴에 그늘이 있었다. 포르 섬에 온 뒤로 내내 근심 있는 모습에 걱정이 일었다.
에밀리는 프레아가 ‘시집’이라는 단어에 예민하게 반응한다고 생각했다. 그간 밀리안을 떼어내기 위해 진이 시집 타령을 했던 것 때문일지도 몰랐다. 이젠 밀리안과 한패가 된 이상 더 이상 결혼을 강요할 필요가 없었다. 에밀리가 부드러이 타이르듯 말했다.
“지금은 좋은 사람을 못 만나서 그런 거야. 나중에 정말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엄마가 가지 말라고 해도 가버릴걸?”
“…….”
“우리 딸, 요즘 들어 이상하네. 혹시 섬 생활이 지루해서 그러니? 이제 그만 돌아갈까?”
에밀리의 물음에 프레아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저었다. 섬 생활이 지루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가족이랑 온종일 같이 있을 수 있는 시간은 흔하지 않았으니까.
그것보다도 다른 것으로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그날 부모님의 대화 때문이었다. 아무리 지워내려 해도 생부에 대한 궁금증이 해소되지 않았다.
하지만 입을 달싹거릴 뿐 말을 잇지 못했다. 수차례 입 밖으로 나오려는 의문을 애써 삼키기를 반복했다. 물어보아도 될까 싶어서였다. 에밀리가 그 모습을 보곤 프레아의 손을 꼭 잡았다. 자못 엄한 얼굴이었다.
“엄마가 늘 뭐라 했지?”
“하고 싶은 말이 있을 땐 숨기지 않고 해야 한다고 했어요. 그래야 후회가 없다고.”
프레아가 시무룩하게 답했다. 에밀리가 왜 그것을 물었는지 알아서였다.
“그래, 그럼 이제 말해보렴. 여기 온 뒤로 계속 엄마에게 할 말이 있어 보였는데, 아니니?”
에밀리가 부드러운 미성으로 질문했다. 그 목소리가 무척 따뜻해서 프레아는 더욱 망설였다.
엄마, 날 낳아주신 아빠는 어디에 계세요? 엄마는 아빠를 사랑해서 날 낳았어요? 그럼 왜 결혼하지 않았어요?
머릿속에 여러 가지 질문이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끝내, 프레아가 힘겨운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물었다.
“사실 지난번에 엄마랑 아빠 대화를 우연히 들었어요.”
“응? 무슨 대화 말이니?”
“엄마가 또다시 가족을 잃고 싶지 않다고 했었어요. 전 그 가족이 친아버지를 말하는 것 같아 머릿속에서 지울 수가 없었어요. ……엿들어서 죄송해요.”
에밀리의 동공이 커졌다. 그녀는 놀라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입만 벙긋거렸다. 그동안 딸의 근심거리였던 것이 설마 그 사람에 대한 것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
이른 아침이기도 했고, 프레아는 아침잠이 많아서 당연히 자고 있을 거라 생각했다. 프레아가 잡힌 손을 꽉 쥐었다. 한번 물꼬를 트니 봇물 터지듯 궁금한 것이 쏟아졌다.
“한 번도 친아빠가 누구냐고 물어본 적 없었어요. 그냥 엄마가 말해주시겠지 생각만 했어요.”
“프레아…….”
“죽은 건가요? ……아버지는?”
“…….”
에밀리는 답하지 못했다. 무어라 해야 할지 몰랐다.
아직 죽지 않았다고? 아니면 죽었을 거라고?
에밀리조차 그가 어떻게 되었는지 생사도 확인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해줄 말은 없었다. 네 아빠가 결혼 준비 도중 사라졌다고. 그래서 많이 찾아다녔지만 어디에서도 찾지 못했다고. 그 이후로 지금까지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다고.
그렇게 갑자기 어디에도 없던 사람처럼 행방불명되었다고 어떻게 말할까. 에밀리의 손이 얕게 떨렸다. 에밀리가 침묵으로 일관하자 프레아가 도리질하며 말했다.
“죄송해요, 궁금해하지 않을게요! 그냥, 갑자기 그런 말을 들으니까 자꾸 떠올라서…….”
“아니, 아니다. 네가 한 번도 묻지 않아서 굳이 말하지 않았었다. 그래, 궁금할 테지. 굳이 사과하지 않아도 된다. 미리 설명해 주지 못해 미안하구나.”
“어머니…….”
에밀리의 다독거림에 프레아가 그녀를 물끄러미 보았다. 그녀의 얼굴도 저와 같이 복잡해 보였다. 에밀리가 더듬더듬 과거를 회고하며 말했다.
“그래. 이미 20년도 넘게 보지 못했으니 어딘가에라도 살아 있다면 다행이겠지. 아니, 이젠 죽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단다.”
에밀리가 씁쓸한 얼굴로 시선을 바닥에 두었다. 생각보다 덤덤한 말투였다. 프레아는 그 모습에 괜히 조마조마해서 어쩔 줄 몰라 했다. 에밀리의 어깨가 조금 들썩이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녀는 곧장 밝은 얼굴을 하곤 프레아를 바라봤다.
“그이의 이름은 ‘그레이 크로이드’고 너와 같은 정령사였어.”
“……!!!”
프레아는 갑작스럽게 쏟아진 정보에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레이 크로이드. 처음 듣는 아버지의 이름이었다.
크로이드라면 공작 가문일 텐데……. 아버지도 귀족이었구나.
어머니가 혼인도 하지 않고 저를 낳았기에 당연히 아버지는 귀족이 아닐 거라 여겼었다. 귀족은 평민과 결혼할 수 없으니까. 그런데, 아버지도 귀족이었다니.
어쩐지 씁쓸한 감정이 들었다. 사랑했다면서 왜 결혼하지 않았을까 하는 원망이 불쑥 올라왔기 때문이다. 게다가 아버지도 저와 같은 정령사였다니.
그래서 자신이 정령을 다룰 수 있게 되었다는 말에 슬픈 표정을 지으셨던 걸까. 아버지가 생각나서? 어쩐지 제 능력이 어머니를 슬프게 만든 것 같아 속상했다. 프레아가 울먹울먹한 목소리로 물었다. 사실 가장 궁금한 내용이었다.
“그렇게 사랑했는데 왜 결혼하지 않았어요? 아버지가 우릴 버린 거예요?”
“아니야! 그런 게 아니란다. ……하지 않은 게 아니라 못한 거야. 네 아버지가 갑자기 사라졌거든.”
에밀리가 괴로운 얼굴로 프레아의 말을 부정했다. 프레아는 그런 에밀리의 답을 이해하지 못해 되물었다.
“사라지다뇨?”
“청혼받고 얼마 안 되어 실종되었어. 아주 흔적도 없이.”
에밀리가 진실을 토해냈다. 베일 속에만 가려져 있던 아버지에 대한 첫 번째 사실이었다. 프레아는 에밀리가 한 말을 듣고 멍해졌다. 에밀리가 걱정스러운지 그런 프레아의 손을 꼭 붙들며 이어 말했다.
“그날이 마지막이었다면 난 그 사람을 보내지 않았을 거야. 네 아버지는 정령 협회의 간부였고, 상부에 불려 간 뒤 그대로 행방불명되었어. 협회에선 모른 척 시치미를 떼더구나. 부른 적이 없다고.”
“그런…….”
프레아의 눈이 흔들렸다. 아버지가 정령사라는 것도 놀랄 일인데 정령 협회의 간부였다니. 그동안 에밀리가 정령 협회 이야기만 나오면 예민하게 굴었던 것이 납득되었다.
아버지가 협회에 불려 갔다가 실종되었다면 살해당했을지도 모른다. 물론 그들이 왜 아버지를 살해했는지는 알 수 없다. 프레아는 엄마의 삶을 되새겼다.
귀족으로서 혼인 없이 아이를 낳는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프레아는 잘 알았다. 작위가 높지 않았다면 대놓고 손가락질하는 사람이 많았을 테지.
실제로도 생각 없이 나불대다가 프레아에게 호되게 당한 이도 있었다. 프레아가 다문 입술을 조심스레 열었다. 굳이 듣지 않아도 됐을 말을 묵묵히 감내한 엄마에 대한 연민이었다.
“힘들지 않았어요?”
“힘들었지.”
“정말 몰랐어요.”
20여 년간 실종되었다면 죽었다고 보는 편이 맞다. 엄마는 결혼도 전에 남편을 잃은 셈이었다. 프레아의 두 눈에 눈물이 맺혔다. 삽시간에 떨어지는 눈물이 뺨에 어지러이 아롱졌다.
에밀리는 묵묵히 울음을 참아내는 것 같았다. 순간적으로 자신이 배 속에 없었다면 엄마가 미혼모라는 손가락질을 받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하는 못된 생각이 들었다. 그걸 알기라도 하는 것처럼 에밀리가 프레아의 눈가를 매만지며 말했다.
“그래도 엄만 네가 있어서 버틸 수 있었어. 넌 그 사람의 유일한 흔적이었거든.”
“제가 귀찮지 않았어요?”
“그럴 리가. 엄만 네가 없었으면 그대로 죽었을지도 몰라. 그만큼 절망적이었단다. 당시에 그와 내가 교제 중이라는 걸 아무도 몰랐거든. 그래서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었어. 크로이드에선 곧바로 사망신고를 하더구나.”
“말도 안 돼요. 시신도 없이 그럴 수 있어요?”
프레아가 믿을 수 없어 되받아쳤다. 아무리 그래도 영식이 실종되었는데 그런 식으로 처리하는 법은 없었다. 프레아의 화난 목소리에 에밀리가 고개를 내저었다.
“네 아버지는 내놓은 자식이었거든. 그땐 나도 제정신이 아니라 그가 죽었다는 말에 따라 죽으려고 했단다. 그러다 네가 배 속에 있다는 걸 알고 살기로 마음먹었어. 네가 내 유일한 희망이었어.”
“엄마…….”
엄마가 죽음까지 생각했다는 말에 프레아는 망연해졌다. 그렇게 힘들었구나. 그런 엄마에게 저가 귀찮지 않았냐는 철없는 말을 한 것이 죄송했다.
한편으론 안심이 되기도 했다. 내가 있어 엄마가 살 희망을 찾았다는 말이 철딱서니 없게도 위안되었다. 그 모든 감정이 죄송해서 에밀리의 품에 와락 안겼다. 에밀리는 프레아가 흐느끼자 등을 토닥였다.
“그러니 프레아, 혹여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면 주저하지 말고 다가가렴. 엄마처럼 망설이다 후회하지 말고.”
프레아는 입을 꾹 다물었다.
엄마, 그 사랑하는 사람이 밀리안이라고 해도 그렇게 말할 거예요?
하지만 프레아는 물어보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 에밀리가 그런 아픔을 딛고 만난 것이 에드모어 공작이니까.
“그래도 이젠 아버지가 있으니까 외롭지 않죠?”
대신 애써 씩씩한 목소리로 말했다. 엄마의 위로는 감사했지만 프레아는 잠깐 타오르는 감정보다 가정이라는 안전한 울타리를 지키고 싶었다. 프레아의 말에 에밀리의 손이 잠시 멈추었다가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다정히 토닥였다.
“재혼이 아니더라도 엄만 네가 있어서 처음부터 외롭지 않았어.”
“거짓말. 그런 사람이 매번 딸을 바람맞혔어요? 나 어릴 때 엄마 엄청 기다렸어요.”
프레아가 부러 주의를 환기하자 에밀리가 억울하다는 얼굴로 항변했다.
“언제 적 이야기니? 어릴 땐 그래도 지쳐서 들어온 엄마한테 꽃다발도 주고 그랬는데, 이젠 엄마 탓만 하는구나. 네가 엄마 일 해보고도 그러지, 응?”
에밀리가 프레아를 품에서 떼어내고 괘씸하다는 듯이 프레아의 뺨을 꼬집었다.
“에에? 제가 그랬어요?”
프레아는 전혀 기억나지 않아 반문했다. 그러자 에밀리는 어릴 적 그녀가 얼마나 사랑스러웠는지를 말하면서 자주 놀아주지 못한 것을 미안해했다.
그래, 엄마는 바빠도 너무 바빴다. 아마도 다른 사람들에게 트집 잡히지 않으려 더 이를 악물고 일했을지도 몰랐다. 물론 엄마가 일을 만들어서 했을 가능성도 있다. 프레아도 엄말 닮아 일을 만들어서 하는 기질이 있으니까. 프레아는 에밀리를 향해 배시시 웃었다.
“엄마 낳아주셔서 감사해요.”
“태어나 줘서 고맙다고 해야 할 타이밍이니?”
에밀리가 프레아의 볼을 놔주며 부드러이 미소 지었다. 그녀의 손길이 무척 따뜻했다. 프레아는 역시 물어보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하고 싶은 말은 덮어두지 말아야 한다는 엄마의 철칙이 과연 정답인 모양이다.
에밀리는 그 이후로도 아버지에 대해 가만가만히 들려주었다. 프레아는 빵을 만드는 내내 에밀리의 이야기에 귀 기울였다. 우려했던 것보다 따뜻한 시간이었다.
* * *
이제 슬슬 수도로 올라가야 할 때였지만 누구도 먼저 올라가자고 하지 않았다. 넉넉히 휴가를 받아온 터라 다들 이왕이면 오랫동안 있으려는 것 같았다.
오늘은 다 함께 오후의 티타임을 갖기로 했다. 밀리안은 아침 식사 이후 다시 방에 들어가 나오지 않고 있었다. 이에 진이 프레아에게 밀리안을 깨워 오라고 시켰다. 어젯밤 늦게까지 안 자고 있더라니. 아무래도 다시 잠든 모양이다.
밀리안은 포르 섬에 온 뒤로 낮잠 자는 시간을 많이 가졌다. 밤에 도대체 무얼 하길래 낮에 자는지 몰랐다. 아니, 낮잠도 제대로 자는지 의심스러웠다. 늘 피곤해 보였으니까.
어젯밤만 해도 새벽에 잠시 깨었을 때 그의 방에 불이 켜진 것을 보고 놀랐었다. 시곗바늘이 새벽 3시를 가리킬 때였다. 프레아는 조심스럽게 노크했다. 안에서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다시 한번 노크했으나 여전했다.
하는 수 없이 문고리를 돌려 방문을 열었다. 암막 커튼을 쳐두어서인지 방 안은 대낮인데도 밤처럼 깜깜했다. 프레아가 살금살금 밀리안의 곁으로 다가갔다.
“밀리안.”
프레아가 밀리안을 흔들며 소곤거렸다. 밀리안이 미동도 하지 않자 조심스럽게 옆에 놓인 스탠드의 불을 켰다. 불빛이 방 안을 밝혔으나 밝지 않아 여전히 어스름했다.
갑작스러운 빛 때문에라도 깰 법한데 밀리안은 깨지 않았다. 프레아가 어쩔 줄 몰라 하다 침대맡에 얼굴을 기대고 밀리안을 빤히 보았다. 계속 흔들어 깨우기에는 그가 간신히 잠든 것 같아 그냥 자게 내버려 둘까 싶었다.
티타임이라면 나중에 해도 될 테니까.
가까이서 보니 잠을 잘 자지 못하는 게 분명해졌다. 신경 쓰이는 일이라도 있는 걸까. 프레아가 조심스럽게 밀리안의 눈가를 만졌다. 눈 그늘이 포르 섬에 오기 전보다 짙었다.
물론 그렇다고 밀리안이 초췌해 보인다는 건 아니었다. 조금 미친 것 같지만 이마저도 잘생겨 보였다. 자신이 제대로 돈 게 분명했다. 무방비하게 흐트러진 채 잠든 그는 위험한 페로몬을 뿜는 것처럼 고혹적인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걱정되게, 왜 잠을 못 자는 걸까.”
프레아가 작은 목소리로 투덜거리며 아예 침대맡에 자리를 잡았다. 이젠 대놓고 그를 구경하기에 이르렀다. 분명 머리로는 돌아가야 한다 생각했는데 선뜻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마음과 머리가 따로 놀았다.
잠든 모습을 본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보통은 프레아가 먼저 잠들고 밀리안이 먼저 일어나는 터라 보기 드문 광경이었다. 프레아가 밀리안의 이목구비를 요모조모 바라보았다. 혹여 깰세라 조심조심했다.
요 작은 얼굴에 어떻게 눈, 코, 입이 다 들어갔나 싶었다. 게다가 머리카락은 뭐가 이렇게 찰랑찰랑한지. 온몸으로 주인을 뽐내고 있었다.
프레아가 저도 모르게 손으로 밀리안의 눈썹과 콧날을 쓸었다. 쓸데없이 잘생긴 남동생을 두어서 불순한 감정을 느끼는 거라고 도리어 밀리안을 탓했다. 사실은 자신이 문제라는 걸 알면서도.
사랑하는 이가 생기면 주저하지 말라던 에밀리의 말이 순간 떠올랐지만 애써 지워냈다. 프레아의 손길이 어느새 밀리안의 굳게 닫힌 입술에 닿았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만진 입술에 화들짝 놀라며 손을 떼어냈다.
나, 남자 입술이 이렇게 부드러울 게 뭐야.
한껏 당황한 눈으로 제 손을 매만졌다. 심장이 또 제멋대로 쿵쿵거렸다. 손가락 끝에 입술의 감촉이 생생했다.
아니, 왜 입술을 만지고 그래 이 못된 손아!
프레아가 경악하며 밀리안의 눈치를 보았다. 다행히 밀리안은 여전히 깊이 잠들어 있었다. 그 모습에 마음속에서 못된 마음이 일었다. 프레아가 제 손을 붙잡고 ‘안 돼, 안 돼!’를 외쳤지만 본능은 다시 밀리안의 입술에 손을 가져다 대라 명령했다.
사실 한 번만 더 만져보고 싶었다. 숨을 잔뜩 참은 채 밀리안의 입술을 꾹 눌렀다. 촉촉한 입술 새로 하얀 치아가 언뜻 보였다. 말캉한 감촉이 손끝을 타고 전해졌다. 멍한 얼굴로 그 모습을 보던 프레아가 다시 이성을 찾아 손을 끌어냈다.
이 요망한 손 같으니라고! 주인 말 안 듣고 이게 무슨 짓이야? 잘리고 싶어?!
프레아가 제 손을 찰싹찰싹 쳤다. 그러곤 벌떡 일어났다. 아니, 그러려고 했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앉기를 반복했다. 몸과 마음이, 이성과 감정이, 멋대로 저울질하며 싸워댔다.
이건 나쁜 짓이다. 변태 짓이다. 자는 사람을 두고 이런 망측한 일을 하다니. 프레아는 도무지 제 행동이 이해되지 않았다. 여전히 다시 한번 닿고 싶다 생각하는 미친 머릿속을 망치로 꽝꽝 치고 싶었다.
밀리안을 좋아한다는 감정을 인지한 뒤로는 항상 이런 식이었다. 분명 피해야 한다고 이성이 말했으나 번번이 감성이 이성을 치고 나갔다.
자괴감에 빠져 머리를 쥐어뜯었다. 그러면서도 손끝의 감촉에 신경이 한껏 곤두섰다. 호흡이 가쁘고 심장이 제멋대로 날뛰었다. 프레아가 심호흡을 후, 하, 하고 내뱉었지만 진정되는 것은 그때뿐이었다.
그 순간 밀리안의 입술이 움찔하더니 슬며시 벌어졌다. 그가 몸을 뒤척였다. 그 모습을 프레아는 멍하니 바라보았다. 뒤척임으로 인해 이불이 걷혔고 밀리안의 가슴팍이 잠옷 사이로 슬쩍슬쩍 보였다.
프레아가 화들짝 놀라 이불을 목까지 단단히 끌어 올려주었다. 흐트러진 모습이 너무 해로웠다. 그 상태로 밀리안을 내려다보니 그의 숨결이 프레아의 머리카락을 흔들었다.
제 머리카락처럼 프레아의 심장도 마구 흔들리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그가 흔든 게 머리카락만이 아닌 모양이다.
이 정도까지 했는데 깨지 않는 걸 보면 몰래 입을 맞춰도 모르지 않을까?
또다시 이성을 마비시킨 감정이 그대로 덮쳐 버리라고 요동쳤다. 어차피 어릴 때도 뽀뽀쯤은 아무렇지 않게 하지 않았나? 그때마다 화들짝 놀라며 화를 낸 건 밀리안 쪽이었다.
그래, 이건 일종의 답례다. 바쁜 와중에도 이렇게 무리해서 여행까지 와준 게 고마우니까! 그래서 해주는 거다. 이건 절대 밀리안 입술이 예뻐 보여서 하는 게 아니라고. 이건 남자와 여자가 하는 그런 야시꾸리한 행위가 아니란 말이지!
어느새 합리화에 성공한 프레아가 제 머리칼을 등 뒤로 넘기고 슬며시 밀리안의 얼굴에 다가갔다. 침대 헤드를 붙잡아 자세를 고정했다. 움찔움찔. 프레아가 주저하며 닿을 듯 말 듯한 거리를 유지했다.
이성이 마지막까지 발악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미 합리화를 끝낸 몸뚱이를 막을 수는 없었다. 입술이 속절없이 닿았다. 혹여 그가 깰까 봐 눈도 감지 못하고 그대로 입술을 꾹 내리눌렀다. 조금 차가운 입술이었다.
프레아의 입술이 미세하게 떨렸다. 결국 일을 저지르고 말았다. 밀리안의 입술은 무척 부드러웠다. 감촉이 생생하게 느껴지자 빠르게 현실을 깨닫고 말았다.
이게 어떻게 답례라는 걸까. 이미 생각부터가 글러 먹었는데!
프레아가 스스로를 혐오하며 입술을 떼어내려고 했다. 그 순간 밀리안의 손이 프레아의 목덜미를 붙잡아 움직이지 못하게 했다. 놀란 프레아가 두 눈을 크게 떴다. 그는 여전히 눈을 감고 있었다.
떨어졌던 입술이 다시 붙은 것은 순식간이었다. 그의 한 손은 프레아의 목덜미를, 다른 한 손은 허리를 옭아맸다. 순식간에 그에게 붙잡혀 그대로 입술이 잡아먹히고 있었다.
그가 입술을 열어 프레아의 입술을 우악스럽게 훔쳤다. 너무 놀란 프레아가 두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혹여라도 그가 눈을 뜨고 저를 바라볼까 봐 겁이 났다.
눈 깜짝할 사이에 입안으로 침투한 밀리안이 사정없이 프레아를 잡아끌었다. 숨이 턱턱 막히고 머리가 몽롱했다.
“흣.”
프레아가 얕은 신음을 내뱉으며 밀리안의 가슴팍을 때렸다. 밀리안은 놓아줄 마음이 없는지 허리를 붙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첫 키스였다. 단순한 뽀뽀 정도가 아니었다. 혀가 얽히고설키는 진한 입맞춤이었다. 입술만 닿았다 떼는 답례 따위가 아니었다. 이것이 사랑하는 사람끼리 하는 입맞춤이라는 것쯤은 본능적으로 알았다.
프레아가 이제는 밀리안의 가슴팍에 매달려 부족한 숨을 채우기 위해 헐떡였다. 그가 숨 쉴 시간조차 주지 않고 저돌적으로 입을 맞춘 탓이었다. 싫다고 더 세게 밀어내야 하는데 그게 안 되었다.
오히려 미치도록 좋았다. 입맞춤이란 게 이런 거였구나 싶어서 얼굴이 화끈거리고 심장이 사정없이 뛰어댔다. 밀리안의 혀가 프레아의 입안을 마구 헤집고 치열을 훑을수록 심장이 터질 것처럼 뛰었다.
이미 벌어진 일이었다. 프레아는 이 모든 게 꿈인 것 같았다. 그런 게 아니라면 이렇게 자신이 밀리안과 입을 맞추고 혀를 섞고 있을 리가 없다.
눈물이 왈칵 쏟아지려 했다. 감정이 물밀듯 치고 올라왔다. 프레아는 제 감정을 막을 수가 없었다. 저를 포기하기로 했다는 남동생에게 먼저 입을 맞추는 누나라니. 완전히 누나로서 실격이다.
그가 왜 키스했냐고 되묻는다면 속절없이 제 마음을 고백해 버릴 것만 같았다. 긴 입맞춤 끝에 밀리안이 입술을 떼어냈다.
프레아는 눈을 뜨지 못하고 감고만 있었다. 그의 뜨거운 시선이 느껴져서 도저히 눈을 뜰 수 없었다. 이 모든 게 꿈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밀리안이 그런 프레아를 향해 속삭였다. 그의 목소리가 무척 달콤하게 들렸다. 마치 금단의 열매를 권하는 뱀과 같은 목소리였다. 아니, 좀 전의 입맞춤처럼 달짝지근하게 들렸다. 프레아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나 안 볼 거야?”
“……나, 나는 그냥 답례로…….”
프레아가 말도 안 되는 답례를 운운하자 밀리안이 헛웃음을 내뱉었다. 그 웃음에 노여움은 없었다. 그저 기꺼운 목소리였다. 그가 부드러운 미성으로 말했다. 그녀는 여전히 그에게 목덜미와 허리를 붙잡힌 상태였다.
“내 누이는 답례로 남동생이랑 혀도 섞는구나.”
“…….”
밀리안의 적나라한 표현에 얼굴이 화끈거렸다. 프레아가 계속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밀리안이 두 손으로 프레아의 뺨을 붙잡았다. 그러곤 프레아의 입술에 도장을 찍듯 제 입술을 짓누르더니 이빨로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약을 올리는 것처럼 장난스러운 입맞춤이었다.
프레아가 부끄러워서 입을 꾹 다물었다. 잠시 뒤 밀리안의 입술이 다시 멀어지는가 싶더니 그가 프레아를 제게로 끌었다. 그 덕에 누워 있던 그에게 안긴 형세가 되었다. 그가 프레아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너 다 들켰어.”
“나는…….”
프레아가 더듬더듬하며 말했다. 더 이상 피할 수만은 없다는 걸 알고 눈을 떠서 그와 시선을 맞추었다. 밀리안의 눈이 부드러이 휘며 프레아를 뚫어져라 응시했다.
저도 모르게 시선이 그의 입술에 닿았다. 좀 전의 키스로 윤기가 흐르는 것이 요사스럽게 보였다. 얼마나 오래 입술을 맞대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그의 살짝 부어오른 입술이 대신 대답할 뿐이었다.
밀리안이 프레아를 안은 채 몸을 일으키더니 침대 아래로 다리를 떨어뜨렸다. 자연스럽게 프레아의 무릎이 그의 다리 사이에 놓였다. 프레아는 그 모든 상황이 혼란스러워 아무 반응도 할 수 없었다. 밀리안이 프레아의 허리를 꽉 붙든 채 말했다.
“자는 사람한테 입 맞춰놓고 아니라고 하지 마. 아무한테나 입 맞추는 거라 오해하게 만들고 싶지 않으면.”
“…….”
밀리안이 한 손으로 프레아의 손목을 움켜쥐곤 가만히 프레아의 맥박을 짚었다. 심장이 이미 폭발하듯 뛰고 있는데 맥박이라고 다를 리 없다. 프레아가 고개를 푹 숙였다. 들키고 싶지 않았다. 그런 그녀에게 밀리안이 다정하게 속삭였다.
“이렇게 맥박도 빨라졌으면서 인정 안 할 거야?”
미치도록 달콤한 목소리였다.
“이, 이건 그냥 놀라서!”
프레아가 화끈거리는 얼굴을 다른 손으로 가렸다. 이건 계획에 없는 일이었다. 스탠드의 불빛이 그의 달뜬 얼굴을 선명히 비췄다. 분명 자신도 밀리안과 다르지 않은 얼굴이리라. 프레아가 얼굴을 돌리며 변명했다.
“시, 실수였어. 깨우려다가 발을 헛디뎌서 입술을 부딪친 것뿐이라고.”
“실수?”
밀리안의 목소리가 비틀렸다. 프레아는 차마 그런 밀리안을 쳐다보지 못해 아래만 보았다. 인정할 수 없었다. 들켰다고 해도 제 입으로 남동생이 좋다고 확정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면 정말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는 거니까.
그냥 잠깐의 실수로 치부하고 싶었다. 그것이 상대에게 얼마나 무례한 행동인지 모르지 않았으나 달리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밀리안이 붙잡은 손목을 제 얼굴께에 가져다 대며 아무렇게나 지분거렸다. 그 모습을 본 프레아가 경악했다.
처음부터 깨어 있었구나!
당장에라도 이불을 뻥뻥 차고 싶었다. 밀리안이 프레아의 손가락을 제 입술 위에 올려놓으며 말했다.
“그렇다기엔 손으로 내 얼굴을 더듬었잖아.”
프레아는 파르르 떨었다. 부끄러움에 얼굴이 홧홧해졌다. 처음부터 깨어 있었다면 이미 들켰다는 그의 말은 확신인 셈이다. 누가 자고 있는 남동생의 얼굴을 더듬을까. 몰래 낙서하는 것도 아니고.
“너 나 좋아하는 거야.”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프레아를 향해 밀리안이 또박또박 말했다. 확인받듯 꾹꾹 눌러 담은 목소리였다. 프레아가 흔들리는 눈으로 밀리안을 바라보았다.
“내가 널 좋아하는 거라고?”
“그래, 좋아하는 거야. 좋아하지 않으면 그럴 이유 없잖아.”
프레아의 되물음에 밀리안이 단호히 대답했다. 다시금 여유를 찾은 그가 제 입술 위에 놓인 프레아의 손가락에 짧게 입을 맞추곤 내렸다. 그의 여유로운 태도에 울컥한 프레아가 따지듯 물었다.
“너 나 포기한다며.”
“그럼 너는 포기하라고 해놓고 왜 내게 입 맞췄어? 앞뒤가 안 맞잖아.”
“그건 답……!”
“또다시 답례라는 헛소리할 거면 다시는 그런 소리 못 하게 제대로 입 맞출 테니까, 어디 자신 있으면 계속 이야기해.”
밀리안의 말에 프레아가 다음 말을 잇지 못하고 제 입술을 손으로 막았다. 일종의 보호였다. 또 아까처럼 입을 맞췄다간 입술이 퉁퉁 부어서 그대로 부모님께 들켜 버릴 게 뻔했다.
프레아가 잔뜩 경계하자 밀리안이 실실거리며 말했다. 여유가 한껏 묻어난 목소리였다.
“내가 말했지. 굴러들어 온 먹잇감은 안 놓친다고. 이미 한 번은 봐줬다고 생각하는데.”
“두 번도 봐줄 수 있잖아!”
프레아가 버럭 소리 지르고 다시 제 입술을 손으로 가렸다. 두 번 봐줄 수도 있다니. 이게 무슨 헛소린가. 당장에라도 이 방에서 뛰쳐나가고 싶었다.
“그리고 말은 바로 해야지. 먹잇감을 노린 건 내가 아니라 너잖아.”
밀리안이 슬금슬금 프레아를 조여오며 말했다. 웃음기 섞인 그의 말에 프레아가 기겁하며 소리쳤다.
“먹잇감을 노리다니! 나, 나는 그저 네가 너무…….”
“내가 너무 뭐?”
예뻐 보여서…….
프레아는 차마 뒷말을 할 수 없어 속으로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 묵비권을 행사하는 프레아를 밀리안이 장난기 섞인 얼굴로 보며 말했다.
“비겁하네, 함부로 순결을 빼앗아놓곤.”
한눈에 봐도 저를 놀려먹겠다는 말투였다. 프레아가 새빨개진 얼굴로 다시 소리쳤다.
“순결을 빼앗다니. 어감이 이상하잖아! 난 입만 대려 했어! 그 이상은 네가 했잖아!”
“그럼 내가 뺏은 거네.”
“뭐?”
“좋아, 내가 책임질게.”
“밀리안 테일러스!”
아무렇지 않게 나오는 책임지겠다는 말에 프레아가 버럭 했다. 책임진다는 말을 함부로 하지 않았으면 했다. 그 책임엔 너무 많은 것이 담겨 있다.
순간적으로 에밀리와 진이 떠올랐다. 자신의 행동이 엄마가 애써 다시 찾은 사랑에 찬물을 끼얹는 행위라는 것도 번뜩 생각났다. 하지만 이미 마음을 들킨 마당에 밀리안이 저를 놓아줄 리 없다. 밀리안이 붙잡은 손등에 입술을 지그시 눌렀다 떼며 달콤하게 속삭였다.
“그냥 하는 말 아냐. 책임질게, 너는 그냥 허락만 해주면 돼. 내가 널 책임지게 해줘, 프레아.”
밀리안의 애정 어린 목소리에 프레아가 멍한 얼굴로 그를 응시했다. 제발 자신을 받아달라고 어리광을 피우는 것만 같았다. 조금 전 느껴졌던 장난기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는 진심이었고, 온 힘을 다해 제게 구애하고 있었다. 그 모습에 저도 모르게 ‘그럴게’라고 대답할 뻔한 순간이었다. 때마침 올라온 에밀리가 문밖에서 노크하며 말했다.
“프레아? 아직도 밀리안 깨우는 중이니?”
우당탕퉁탕.
프레아가 에밀리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밀리안을 세게 밀쳤다. 물론 밀리안은 밀리지 않았고, 그 덕에 프레아가 몸을 휘청이며 뒤로 쓰러졌다.
이에 놀란 밀리안이 얼른 프레아를 붙잡으려다 그대로 같이 침대 밖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에밀리가 요란한 소리를 듣고 문을 벌컥 열었다. 그러곤 괴상한 것을 보았다는 얼굴로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밀리안이 한 손으로 프레아의 머리를 받치고 끙, 신음을 내뱉고 있었다. 한참 뒤 잘 알겠다는 듯 에밀리가 혀를 찼다.
“요란하게도 깨우는구나. 얼른 내려오렴! 벌써 한 시간 넘게 지났어. 덕분에 차를 한 주전자나 마셨단다.”
에밀리의 말에 프레아가 벌떡 일어나 그녀를 따라나섰다. 그러곤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말했다.
“어찌나 안 깨는지 한참 흔들었어요.”
프레아의 능청에 밀리안이 소리 내어 웃어댔다. 에밀리가 그런 밀리안을 이상하게 쳐다보더니 프레아에게 물었다.
“근데 너 얼굴이 왜 그렇게 빨가니? ……어머, 열도 있네?”
어느새 에밀리가 프레아의 이마에 손을 가져다 대어 열을 쟀다. 프레아는 손으로 부채질하며 변명했다.
“더, 더워서요! 쟤 방에 마석 좀 놔야겠어요. 너무 덥더라고요. 완전 찜통인 줄 알았어요! 아하하.”
“그런 것치곤 공기가 서늘한데?”
“이, 이상하네, 전 더운데. 그나저나 아버지 기다리시겠어요, 얼른 가요. 밀리안! 너도 얼른 준비하고 나와!”
프레아가 그를 쳐다도 보지 않은 채 소리치곤 에밀리에게 팔짱을 껴 방 밖으로 끌어냈다. 적절한 타이밍에 에밀리가 온 덕에 밀리안의 추궁에 답하지 않을 수 있었다. 하마터면 그대로 허락할 뻔했던 것을 생각하니 아찔했다.
이렇게 몸과 마음이 따로 놀아서야 될 일도 안 될 것 같았다. 프레아가 방을 완전히 나가기 전에 슬그머니 밀리안 쪽을 곁눈질했다. 밀리안이 저를 아주 흥미롭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붉은 눈이 이글거리며 프레아를 좇았다. 프레아는 그 시선을 애써 피해 버렸다.
그날로 프레아는 철저히 밀리안을 피해 다녔다. 밀리안이 출몰하면 어김없이 도망치기 일쑤였다. 여행도 끝물이었고, 수도로 돌아오니 더욱 그를 피해 다니기 쉬웠다.
그러기를 얼마 뒤, 테일러스 성에서 연락이 왔다. 머레니가 비밀리에 테일러스 성에 오기로 했다는 내용이었다. 계속해서 그를 피해 다니니 공적으로라도 만날 생각인 모양이다.
얼마 전, 그의 앞에서 대놓고 도망쳤을 때 본 밀리안의 표정이 생생했다. 조금 상처받은 것 같았는데……. 그 모습에 잠시 흔들리긴 했지만 마음을 다잡았다.
에밀리가 떠오른 탓이다. 공작님을 만나 행복한 어머니를 두고 자신이 그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본의 아니게 입술을 빼앗고 도망 다니는 모양새가 좋지 않았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
머레니와의 만남은 비밀리에 이루어졌다. 그녀가 몰래 만났으면 좋겠다고 당부한 탓이다. 그녀에게서 우리가 마탑의 감시에 놓여 있다는 것을 들었으니 어쩌면 당연한 요구였다.
일전에 프레아가 머레니의 티파티에 정식으로 참여 의사를 밝힌 것도 난색을 보였었다. 그녀는 최대한 마탑이 이 일을 모르기를 바라는 것 같았다.
프레아는 그것이 좀 의심스러웠다. 마탑은 충성도가 높은 집단으로 유명했다. 사실 개인주의적인 마법사들이 탑이라는 공동체를 조성한 것도 모자라 유지하고 있는 것 자체가 아이러니했다.
틀어질 법도 한데 그들이 와해되는 일은 없었다. 오히려 너무나도 조직적으로 움직여서 놀라울 지경이었다. 그런데 그런 공동체에 소속된 마법사가 따로 만나자고 하다니. 이례적인 일이다.
게다가 마탑에게 비밀로?
이거야말로 마탑 내부에도 다른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음을 방증하는 것이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테일러스 성에 도착하자 게라가 프레아를 반갑게 맞았다.
“오랜만입니다, 아가씨.”
“오랜만이에요, 게라. 그동안 잘 지냈어요?”
“덕분에 잘 지냈습니다. 저어…… 아가씨, 말씀 편히 하십시오. 굳이 존대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자신이 모시는 주인의 누이가 계속해서 존대하는 것이 불편한 모양이다. 프레아 역시 게라와 첫 만남이 아름답지 못해 어색하긴 마찬가지였다.
당시에는 밀리안에게 너무 화가 난 상태라 게라에게 제대로 된 소개도 하지 않고 막무가내로 성을 뒤졌었다. 지금 생각해 보니 게라 입장에서는 황당했을지도 모르겠다. 프레아가 어색하게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그래, 그럴게.”
“감사합니다, 아가씨. 그럼 이쪽으로.”
프레아가 선뜻 대답하자 게라가 부드러이 웃으며 접견실로 안내했다. 프레아는 게라를 따라가며 둘이 어떻게 만난 사이인지 궁금해했다.
그날 흥분해서 얼결에 성을 찾아왔을 때 밀리안이 게라를 무척 편하게 대했었다. 밀리안이 남에게 그렇게 편히 구는 타입이 아니라 신기했다.
게라는 밀리안과 어디서 만난 걸까? 밀리안은 언제부터 독립할 생각을 했을까. 언제부터…… 내가 좋았던 걸까?
프레아는 모든 생각의 끝이 밀리안으로 귀결되는 것에 화들짝 놀라며 도리질했다. 그런 걸 태평하게 궁금해할 때가 아니었다. 그때 게라가 프레아에게 정중히 사죄했다.
“아가씨, 지난번엔 정말 죄송했습니다.”
“음? ……뭐가 죄송하다는 거야?”
“제가 모르고 욕실로 안내했으니까요. 아직 내부 구조에 익숙하지 못해서 실수했습니다.”
“아아, 괜찮아. 설명도 안 듣고 막무가내로 들어간 건 나인걸.”
게라가 한껏 미안한 기색을 띠자 프레아가 자연스럽게 고개를 저었다. 하긴. 성에 이사 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상태였으니 집 안 구조가 헷갈릴 법도 했다.
욕실을 떠올리니 다시금 밀리안의 알몸이 떠올랐다. 우람했던 뒤태가 생각나자 얼굴이 괜히 화끈거려 손부채를 부쳤다. 게라는 그런 프레아를 보며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
“사실 그날 정말 많이 혼났습니다.”
“밀리안에게?”
욕실 하나 헷갈린 거로 혼내다니. 그때 아무렇지 않은 척해놓고 속으로 당황하기라도 한 걸까? 프레아가 그리 생각하는데 게라가 다음 말을 이었다.
“예. 아가씨의 얼굴을 함부로 만졌다고 손이 잘릴 뻔했습니다.”
“뭐?”
프레아는 뜻밖의 죄목에 놀라 그를 바라보았다. 생각지도 못한 잘못이었다.
보통은 왜 욕실로 안내했냐고 혼내야 하는 게 정상 아니야?
게라가 제 얼굴을 만진 건 저를 보호하기 위함이었다. 그날 밀리안의 알몸을 보고 완전히 굳어버렸으니까. 얼른 가려준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덕분에 충격에서 헤어날 수 있었는데 그 일 때문에 혼났다니. 프레아로서는 이해가 안 되었다.
그럼 그 알몸을 계속 보고 있어야 했다는 거야?
어쩐지 화끈거리는 얼굴을 손으로 매만졌다. 도대체 뭘로 혼내는 거야, 밀리안은. 프레아는 게라를 쳐다보기 민망해 잔기침을 했다.
게라는 그녀가 민망해하고 있다는 걸 인지하지 못해 계속 말을 이었다. 들어보았자 마음만 심란해지는 쓸데없는 정보들이었다. 그 덕에 프레아는 고개를 들기 더욱 어려워졌다.
“자기 몸이 못 볼 것도 아닌데 몹쓸 것을 가리는 것처럼 행동했다고 화내셨지요.”
“그, 그게 무슨…….”
“아, 칭찬 하나는 받았습니다. 덕분에 아가씨가 후작님을 의식하기 시작한 것 같다고 좋아하셨습니다. 하긴, 후작님을 보면 누구라도 반하…….”
“그, 그만해, 게라 우스. 그리고 밀리안은 내 동생이라고. 반하는 건 말이 안 되지.”
“으음, 일단은 그렇지요.”
게라가 떨떠름한 얼굴로 대답했다. 그의 애매한 반응에 프레아가 의아한 얼굴로 그를 응시했다. 게라가 그런 프레아를 마주 보며 덧붙여 말했다.
“하지만 아가씨, 후작님 정도면 정말 훌륭한 신랑감입니다. 외람된 말씀이지만 조금 더 마음을 관대하게 먹으신다면 좋은 인연으로…….”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죄송합니다. 잊어주십시오.”
갑자기 밀리안에 대해 어필하다니. 프레아는 제 귀를 의심했다. 저 말은 마치 밀리안과 잘해보라는 것처럼 들렸다. 설마 게라도 밀리안이 자신을 좋아하는 걸 알기라도 하는 걸까.
프레아의 눈이 심히 흔들리기 시작했다. 대체 그가 뭘 하고 돌아다니는 건지 모르겠다.
왜 집사한테까지 말하고 다니는 건데! 이러다 부모님이 아시면 어쩌려고!
프레아의 얼굴이 다시금 화끈거렸다. 게라는 프레아가 지금 얼마나 심란한지 모르는 듯 해맑게 웃었다. 어쩐지 그 모습이 예비 마님에게 잘 보이려는 것 같아서 꺼림칙했다.
저 표정을 보아하니 게라도 밀리안의 마음을 아는 게 확실했다. 그렇지 않다면 저렇게 우리 주인님 좀 잘 부탁드린다고 아부할 리 없다. 프레아가 애써 화제를 돌렸다.
“어쨌든 나 때문에 혼났다니 미안해. 솔직히 가려줘서 고마웠어. 남자 알몸은 처음 봐서 좀 당황했거든.”
프레아가 다시 생각해도 부끄러운지 눈을 도르르 굴리며 시선을 피했다. 그 모습을 본 게라가 쓸데없이 자랑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래도 그렇지요. 하지만 후작님의 몸은 무척 좋으시니 처음 보시기에도 좋았을…….”
“제발. 그만해 줄 수 없겠어? 듣고 싶지 않아.”
“알겠습니다.”
듣다 못한 프레아가 게라의 말을 가로막았다. 이에 게라가 즉각적으로 사죄하며 입을 다물었다. 몸이 좋은 건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잘 알았다. 맨눈으로 봐도 밀리안의 몸은 무척 좋았으니까.
그걸 굳이 다시 상기시켜 눈앞에 아른거리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럼 정말 하루 종일 얼굴을 빨갛게 물들이고 있을 것이다. 이쯤 되니 어쩐지 게라와 밀리안도 한통속처럼 느껴졌다.
그렇게 게라와 아웅다웅하는 사이 접견실에 도착했다. 게라가 노크하며 프레아가 왔다고 알렸다. 출입 허락이 떨어지자 문이 열렸다.
이미 머레니와 밀리안이 앉아서 이야길 나누고 있었다. 약속 시간에 딱 맞춰 온다고 온 건데 먼저 와 있던 모양이다. 프레아가 출입하자 머레니가 부드러이 웃으며 반겼다.
“여행은 즐거우셨나요?”
“이쪽으로 와.”
밀리안이 자리에서 일어나 제 옆자리에 놓인 의자를 밀었다. 저를 보자마자 표정이 환해지는 밀리안이 어딘가 낯설었다. 피해 다니느라 정신이 없었는데 그가 너무 반기니 미안했다.
프레아가 자연스레 그의 옆에 앉았다. 머레니는 맞은 편에 앉아 있었다. 머레니가 싱글벙글한 얼굴로 다시 물었다.
“얼굴이 좋아 보여요. 여행이 무척 즐거우셨나 봐요?”
“네, 오랜만에 가진 휴식이라서요. 그러는 영애도 기분이 좋아 보이네요. 무슨 좋은 일 있나요?”
머레니의 표정이 눈에 띌 만큼 무척 좋아서 한 말이었다. 오히려 휴가를 다녀온 건 머레니처럼 보일 정도였다. 프레아의 물음에 머레니가 아주 상쾌한 얼굴로 말했다.
“영애 덕분에요. 사실 영애에게 고맙다고 사례하고 싶었어요. 머제리 일은 감사합니다. 속이 다 시원하네요.”
“네?”
프레아가 멍하니 그녀를 응시했다.
제 동생을 무참히 밟아주었는데 감사하다니?
동생에게 굴욕을 안겨준 사람에게 할 말은 아니었다. 설마 머제리 가족의 입에서 감사 소리를 들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프레아의 애매한 반응에 머레니가 배시시 웃었다.
“자꾸 메샤르에 들락날락하길래 사고라도 칠까 봐 찾아갔었어요. 거기서 비서한테 다 들었고요. 결투했었다죠?”
“그, 그랬죠.”
“뻔하죠. 그 녀석이 애먼 영애에게 추근거렸겠죠. 잘하셨어요. 그 녀석은 좀 밟아줘야 정신 차려요. 자기가 제일 잘난 줄 아는 애니까.”
머레니는 당연히 동생이 잘못했을 거라는 듯이 말했다. 물론 머레니의 예상대로 머제리가 먼저 시비를 건 건 맞았지만 어딘지 꺼림칙했다.
만약 밀리안이 밖에서 그런 일을 당했다면 그녀는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내 동생을 건드렸다며 길길이 날뛰었을 것이다. 물론 그런 일이 일어날 일도 없겠지만.
“……동생이 당한 일인데 기분 안 나쁘세요?”
머레니의 반응이 영 이상하여 프레아가 눈살을 찌푸렸다. 너무 좋아하니까 오히려 돌려서 비판하는 건가 싶었다. 하지만 놀랍게도 그녀는 정말 진심인 모양이었다. 프레아의 반응에 소리 내어 까르르거리더니 유쾌한 목소리로 말했다.
“기분 나쁘지 않냐고요? 천만에요. 잘난 척하던 코가 아주 납작해져서 요즘 정말 살맛 난답니다. 영애가 원한다면 더 맘대로 굴려도 돼요. 한 달이 아니라 1년이었어야 했는데. 아쉽네요.”
“…….”
머레니는 정말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아무래도 머레니와 머제리는 사이가 좋지 않은 모양이다.
‘모든 남매가 나와 밀리안 같지는 않은가 보다.’
머레니는 그 이후로도 한참 제 동생의 안 좋은 행실을 고발하며 프레아의 동의를 구했다. 그녀의 말만 들어도 그가 얼마나 개차반으로 살았는지 알 것만 같았다.
대부분이 마법 재능만 믿고 머레니를 깔봤다는 내용이었다. 머레니의 결론은 모두 재수 없다로 귀결되었다. 옆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밀리안이 끼어들었다.
“근데 결투는 왜 한 거야?”
“아, 그자가 날 에리카로 오해하고 추근거려서 혼내줬었거든. 그게 자존심이 상했는지 찾아왔었어.”
“흐응?”
밀리안이 처음 듣는다는 듯 프레아를 빤히 보았다. 그의 눈빛이 무척 탁해졌다. 아무래도 ‘추근거렸다’라는 말이 거슬렸던 모양이다. 프레아가 빠르게 해명했다. 물론 해명하면서도 왜 자신이 변명해야 하는지 물음표가 떠올랐지만.
“그냥 손목을 움켜쥐었던 것뿐이야. 게다가 제대로 교육시켜 줬다고. 이젠 다신 안 그럴걸?”
“어머. 영애, 가장 중요한 걸 왜 숨기세요. 결투 서약에 머제리가 밤 시중…… 읍.”
“밤 시중? ……이게 무슨 말이지?”
프레아가 머레니의 입을 급히 막고 도리질하는데 옆에서 서늘한 음성이 들렸다. 이미 ‘밤 시중’이라는 단어를 들었나 보다. 삐걱거리는 고개를 애써 밀리안 쪽으로 돌렸다.
그의 표정이 싸늘하게 식었다. 아니, 아주 살벌하게 미소를 짓고 있었다. 잠시 후 공기가 따끔거리고 식탁 위에 놓인 찻잔이 진동했다. 그의 주변에 검붉은 오러가 스멀스멀 움직였다.
밤 시중이라는 말에 열이 받은 듯했다. 조금 전까지는 가소롭다는 듯이 잠자코 듣던 밀리안이 처음으로 격한 반응을 보였다. 사태의 심각성을 느낀 프레아가 머레니에게 무언의 신호를 보내며 다그쳤다.
“아니, 아니! 머레니 영애! 그렇게 오해할 말을 하면 어떻게 해요!”
머레니는 프레아의 신호를 알아들었으면서 능청을 떨었다.
“오해라뇨. 사실이잖아요. 뻔하죠, 한 달간 개가 되기로 서약했으니 그 발정 난 놈이 천박하게 입을 씨불거렸겠죠.”
아, 나는 몰라.
프레아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머레니는 기어이 동생을 다시 밀리안에게 던질 모양이다. 차마 밀리안을 쳐다볼 수 없었다.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한숨을 푹 내쉬었다. 밀리안이 아주 흥미롭다는 듯이 머레니에게 되물었다.
“그게 사실입니까?”
“그렇다니까요. 어때요? 죽이고 싶죠? 이참에 죽여줄래요?”
머레니가 밀리안에게 유쾌하게 권유했다. 마치 약을 올리는 것도 같았다. 제 동생을 죽여달라고 부탁하는 누나라니. 프레아로서는 코헨 남매가 이해되지 않았다. 프레아가 밀리안의 팔을 붙잡으며 말렸다.
“밀리안, 어차피 내 선에서 끝낸 일이니까 신경 안 써도 돼. 지금 그자는 어차피 내 개일 뿐이야.”
“내 개라는 말이 무척 거슬리는데?”
밀리안이 여전히 살벌한 미소를 머금으며 반박했다.
왜 생각이 그쪽으로 튀는 건데!
프레아가 그 모습에 버벅거리며 항의했다.
“아니, 말 그대로 노예라고. 또 왜 거기에 의미 부여하는 건데? 하여튼 생각하는 그거, 하지 마.”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데?”
“아주 위험한 생각!”
“왜 그 자식 편들어?”
밀리안이 으르렁거리듯 쏘아댔다. 한번 꼬아 듣기 시작하니 모든 것이 꼬불꼬불하게 들리는 모양이다. 프레아는 그의 팔을 쓰다듬으며 달랬다. 그러면서도 내심 밀리안이 질투하는 게 기분 좋았다. 인상을 찌푸린 채 화를 내는 꼴이 무섭기보다는 귀여웠다.
“그 자식 편드는 게 아니라 네가 괜히 힘 빼는 게 싫은 거야.”
“흐음.”
“내가 왜 머제리 편을 들겠어. 머제리는 그냥 나한테 머저리일 뿐인데.”
도대체 이걸 왜 설명하고 있는지 알 수 없지만 두서없이 한 말이 효과가 있었나 보다. 프레아가 말하면 말할수록 밀리안의 표정이 점차 풀려갔다.
“하여튼 마음에 안 들어, 그 자식.”
밀리안이 오러를 감추며 차갑게 말했다. 일단은 머제리를 죽이려 했던 생각을 보류한 듯했다. 죽여주겠다고 대답하지 않는 밀리안을 머레니가 아쉬운 얼굴로 바라보았다.
도대체 뭔데. 동생한테 왜 그렇게 매정한 건데?!
프레아는 이 사달을 만든 머레니를 흘겨보았다. 왜 이미 끝난 일을 또 끄집어내서 2차전에 불붙이려는 건지.
“그것보다 우린 해야 할 이야기가 있잖아요? 머제리가 여기서 뭐가 중요하죠?”
프레아가 머레니를 톡 쏘아보며 화제를 돌렸다. 이에 머레니가 어깨를 으쓱했다.
“맞아요. 그 망나니 녀석 이야기는 이쯤 하죠. 별로 유쾌한 이야기도 아닌데.”
“난 이미 네가 오기 전에 얘길 끝냈어.”
밀리안이 프레아에게 부드러이 말했다. 아무래도 자신이 오기 전에 논의를 마친 모양이다. 프레아가 밀리안의 눈을 흘겼다. 저 몰래 무슨 얘기가 오갔는지는 모르지만, 제게 그 내용을 말해줄 생각은 없어 보였다.
이미 할 얘기는 다 했다면서도 밀리안은 나가지 않고 그대로 앉아 있었다. 저와 머레니가 하는 대화를 따라 들으려는 것 같았다. 예전 같으면 대공과의 비밀 때문에 나가 있으라고 했겠지만, 지금은 조금 상황이 달랐다.
진과 에밀리의 대화를 들은 이상 대공도 완전히 신뢰할 만한 사람이 아닌 것 같으니까. 물론 지금껏 봐온 대공은 좋은 사람에 속했기에 섣불리 판단하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의 말을 곧이곧대로 따르는 것도 조금 위험해 보였다. 게다가 밀리안이라면 믿을 만했다.
“그래서 따로 하고 싶다는 말이 뭔가요, 머레니 영애.”
프레아가 진지한 어조로 물었다. 이에 머레니가 차 한 모금을 마신 뒤 입을 열었다.
“그래요, 괜히 돌아 돌아 시간 끌 필요는 없겠죠.”
머레니가 침착한 어조로 서두를 꺼냈다. 프레아가 묵묵히 그녀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머레니는 목을 큼큼, 가다듬고는 말을 이었다.
“사실 이건 아직 알려지지 않은 건데 라즐리 후작이 사경을 헤매고 있어요. 아마 곧 죽을 거고 그 아들인 데오 라즐리가 작위를 이을 예정이죠.”
“그건 이미 알고 있어요. 그게 저를 부른 것과 무슨 상관인 거죠?”
이미 알고 있다는 말에 머레니의 눈이 크게 뜨였다. 밀리안은 제법이라는 얼굴로 프레아를 응시했다. 차마 그날 엿들은 게 이거라고 할 수 없어 그녀는 가만히 있었다. 머레니가 깊어진 눈빛으로 감탄했다.
“레이첼의 정보력은 정말 무섭네요. 저도 간신히 얻어들은 이야긴데 말이죠. 하여튼 데오 라즐리가 후작이 되면 일이 엄청 곤란해져요.”
“뭐가 곤란해진다는 건지 모르겠네요.”
“데오 라즐리가 에시드 대공과 어릴 적부터 함께했던 친우인 건 알겠죠. 저는 영애가 에시드 대공을 말려주었으면 좋겠어요. 그가 마탑을 뒤흔들고 있거든요. 아니, 아예 없애려고 하고 있죠.”
이번엔 프레아의 두 눈이 크게 뜨였다. 대공이 신변 보호 계약을 할 때 협약을 깨뜨려 주겠다고는 했지만 마탑 자체를 없애준다고는 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마탑을 없애 버리고 싶던 건 프레아 쪽이었다. 프레아는 마탑을 없애려는 일을 왜 자신이 막아야 하는지 도무지 몰랐다. 제게 마탑은 항상 눈엣가시일 뿐이니까.
“저보고 마탑을 도와달라는 말씀이신가요? 정령사인 제게?”
프레아가 어이없다는 듯 되물었다. 자신이 제대로 들은 게 맞는지 의심스러웠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알아서 마탑이 사라지면 감사할 일이다. 굳이 제 손에 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없어져 준다는 데 막을 이유는 없었다.
게다가 데오 라즐리가 후작이 되는 것이 누구에게 곤란하다는 건지 애매했다. 그 주체가 마탑인지, 황실인지, 귀족인지 모를 말이었다. 프레아가 황당해한다는 걸 아는지 머레니가 침착하게 의견을 덧붙였다.
“정령사인 영애에게 이런 부탁하는 게 이해되지 않겠죠. 그냥 도와달라는 말은 아니에요. 이쪽에서도 그만한 대가를 치를 예정이에요.”
“제가 에시드 대공의 신변 보호를 맡게 된 이유는 알고 그러는 건가요?”
“네, 알아요. 정령 실험에 관한 일이겠죠. 그 일이라면 제대로 설명할게요.”
“설명할 게 있나요? 제 눈으로 직접 그 실험체를 확인했는데?”
프레아의 목소리에 날이 섰다. 유리관에 들어 있던 그것을 떠올리니 속이 울렁울렁했다. 머레니는 정령 실험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걸 알고 있다. 그걸 알고도 제게 동맹을 요구하다니.
프레아가 점점 마음의 문을 닫고 날카롭게 반응하자 머레니가 한숨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영애가 그 일에 대해 격분하는 건 충분히 이해해요. 하지만 그 일이 모든 마법사가 동의한 일이 아니란 걸 알아줬으면 좋겠어요.”
“일부 마법사가 꾸미는 짓이라고요? 그걸 제가 믿어야 하나요?”
“그래요, 솔직히 말해서 일부는 아니에요. 지금의 상부가 그 일을 묵인하고 있죠. 아니, 오히려 후원하는 쪽에 가까워요. 하지만 젊은 마법사들은 생각이 달라요. 이건 제가 보증할게요. 저는 그들을 대표해서 두 분을 찾아온 거예요. 전 목숨을 걸고 여길 왔어요.”
“목숨을 걸다뇨?”
프레아가 도통 알아듣지 못하겠다는 얼굴로 머레니를 바라보았다. 프레아의 반응에 머레니가 잠시 실례하겠다고 말하더니 블라우스의 단추를 열어 왼쪽 어깨를 드러냈다.
프레아는 갑작스러운 머레니의 노출에 놀라 두 눈을 크게 떴다. 저도 모르게 밀리안의 눈을 손으로 가리기도 했다. 그러나 한껏 당황한 저와 달리 밀리안은 덤덤해 보였다. 마치 돌을 보는 것처럼 무미건조한 태도였다.
프레아가 놀라서 머레니를 쏘아보았다. 그런 프레아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머레니가 가슴이 보일 듯 말 듯 아슬아슬할 정도로 옷을 내렸다.
그 행동을 막기 위해 벌떡 일어났으나 프레아는 그녀를 막지 못했다. 아니,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녀의 가슴에 새겨진 흉측한 문양 때문이었다.
머레니의 왼쪽 가슴 윗부분에 붉은 인장이 새겨져 있었다. 머리 두 개 달린 뱀이 책을 칭칭 감고 있는 문양. 마탑의 상징이었다.
“그게 뭐죠?”
프레아가 살이 타들어간 기괴한 문양에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문양의 정체를 몰라 묻는 게 아니었다. 자연스럽게 밀리안의 눈을 가린 손을 내렸다. 머레니가 다시 옷을 추어올려 입으며 담담히 말했다.
“마법사들이 왜 그렇게 마탑에 충성을 다한다고 생각하세요?”
“설마…….”
“네, 맞아요. 이 빌어먹을 인장 때문이죠. 마탑의 마법사는 모두 심장에 이 인장을 새겨요. 충성을 맹세하기 위한 의식이자 족쇄나 마찬가지죠. 마탑주는 언제든지 마탑의 마법사를 죽일 수 있어요. 이 마법의 발동은 마탑주만 할 수 있거든요.”
마탑이 왜 그렇게 견고하나 했더니 이런 의식을 치르고 있었을 줄이야. 상상도 하지 못했다. 프레아가 머레니의 말을 듣다가 의심 섞인 목소리로 추궁했다.
“이상하네요. 영애의 의지로 그 의식을 치른 게 아닌 건가요?”
“설마 제가 의식을 자진해서 치렀을 거라 생각하세요?”
머레니가 불쾌하다는 기색을 보이며 쏘아붙였다. 멋쩍어진 프레아가 슬며시 되물었다. 한층 조심스러워진 어조였다.
“그럼 아닌가요?”
프레아의 말에 머레니가 씩씩거리며 항변했다.
“당연히 아니죠. 마탑의 마법사들은 자식이 태어나면 곧바로 이 의식을 거행해요. 자녀의 의사는 필요 없어요. 한 번 마탑의 마법사가 되기로 한 이상 영원히 그 가문은 마탑의 마법사로 살아야 해요. 만약 거부하면 그 가문을 몰살하는 게 마탑의 규칙입니다. 게다가 마탑주가 굳이 나서지 않아도 이미 의식을 치른 마법사들이 가만있지 않아요.”
“나만 죽을 수 없다, 뭐 이런 건가요?”
프레아가 떨떠름한 목소리를 뱉자 머레니가 다시금 평정을 되찾아 담담히 대답했다.
“그런 셈이죠. 어차피 벗어나지 못한다면 마탑이 무너지지 않도록 견고하게 만드는 편이 서로에게 좋으니까요. 덕분에 안전한 울타리도 생겼고, 황실과 협약을 맺을 정도로 강해진 건 사실이잖아요?”
“정말 마탑은 예쁘게 보려야 볼 수 없는 집단이네요.”
프레아가 속내를 애써 포장하지 않고 말했다. 그녀의 솔직한 대답에 머레니가 소리 내어 웃었다.
‘보통의 귀족들은 뒤에서 수군거리지 앞에서 드러내 놓고 말하지 않는 법인데, 일반적인 귀족에 속하지 않는 모양이네.’
어쨌든 자신도 마탑의 마법사인데 대놓고 별로라고 말하는 것이 신선했다. 프레아가 생각이 많아진 얼굴로 차를 응시했다. 마탑이 유지된 이유가 고작 서로의 목숨 줄을 붙들고 끊임없이 의심하고 경계하게 만드는 거라니.
어떻게 보면 가장 확실하게 집단을 유지하는 방법이지만 한편으로는 끔찍한 전통이었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저주를 안고 살게 된 것이니까. 머레니가 프레아의 눈치를 살피며 이어 말했다.
“이런 이유로 마탑의 마법사는 마탑주를 거스를 수 없어요. 그래서 정령 실험에 반대한다고 대놓고 말하지 못하죠. 그 일을 허락한 건 마탑주니까요.”
“그래요, 그쪽이 정령 실험에 결백한 건 이제 알겠어요.”
“믿어줘서 고마워요. 이걸 말해도 믿어주지 않으면 어쩌나 했어요.”
“느껴지거든요. 문양에 새겨진 끔찍한 마법이요.”
프레아가 지끈거리는 머리를 매만졌다. 마법사들을 볼 때마다 느꼈던 기분 나쁜 기운이 설마 몸에 새겨진 저주였다니. 누가 몸에 독을 품고 돌아다닐 줄 알았겠는가. 그냥 하도 당한 게 많아서 그런가 보다 했었다. 프레아의 대답에 머레니가 놀랐다.
“이게 느껴지다니, 과연 마탑의 상부가 영애를 노릴 만하네요. 영류라는 게 참 무궁한 힘인가 봐요.”
“별로 받고 싶지 않은 관심이네요.”
프레아가 떨떠름한 얼굴로 머레니의 말을 일축했다. 영혼의 흐름이 맑다는 건 여러모로 불순한 것들에 예민하단 뜻이다. 저런 악한 마법을 몸에 지니고 있으니 당연히 불쾌할 수밖에.
그간 풀리지 않던 난제가 해결되어 고개를 주억거렸다. 마법사에게 특히 예민한 것이 단순한 기호의 문제가 아니었다. 잠시 뒤 이상한 점을 느낀 프레아가 얼굴을 굳혔다.
생각해 보니 에시드에게선 그런 걸 느껴본 적이 없었다. 불쾌하다는 감정 그 비슷한 것조차 느낀 적이 없었다. 에시드의 어머니는 마탑의 마법사였다. 그렇다면 에시드에게도 그 문양이 있어야 하는 게 맞다.
하지만 에시드는 마탑 소속의 마법사도 아니었다. 몇 안 되는 무소속 마법사였다. 앞뒤가 안 맞는 일이었다. 머레니의 말대로라면 에시드도 마탑의 마법사여야 했다. 프레아가 혼란스러워 질문했다.
“잠깐만요, 마탑의 마법사는 모두 그 문양을 지니고 있어요?”
“그럼요. 마탑주도 예외 없이 그 문양을 지니고 있어요. 다른 점이라면 붉은빛이 아닌 검은빛을 띤다는 거죠.”
머레니가 이상한 걸 묻는다는 듯이 대답했다. 프레아는 머레니의 말을 듣고 마냥 그렇구나 납득할 수 없었다. 에시드에게서 아무런 불쾌감을 느끼지 않았다는 건 문양이 없다는 말인데……. 설마 아네모네 황비가 마탑의 눈을 속인 걸까.
솔직히 호수에서 반딧불이를 같이 봤을 때도, 다시 만났을 때도 그에게서 불쾌한 기분은 느껴지지 않았다. 애초에 그가 대공이라는 걸 몰랐다면 마법사인 줄도 몰랐을 것이다. 프레아가 머레니에게 의심스러운 부분을 콕 집어 물었다.
“이상한 점이 있어요. 에시드 대공은 어떻게 마탑에 소속되지 않은 거죠? 아네모네 황비는 마탑의 마법사였잖아요.”
“황족에겐 그 마법이 통하지 않거든요. 어떻게 보면 운이 좋은 분이죠, 그분은. 사실 마탑에서 대공을 무척 눈엣가시로 여겨요. 그가 마탑을 거부하고 황실을 선택했으니까요.”
“그게 무슨 뜻이에요?”
프레아는 마탑이 아닌 황실을 선택했다는 말에 설명을 요구했다. 이에 머레니가 차 한 모금을 마시곤 프레아를 시험하듯 물었다.
“아네모네 황비가 왜 다 늙어빠진 선황 폐하께 시집갔다고 생각하세요?”
“설마…….”
프레아가 경악해 머레니를 바라보았다. 자신이 생각하는 그것이 아니길 바랐다. 하지만 머레니는 유감이라는 얼굴로 이어 말했다. 프레아가 우려한 내용 그대로였다.
“마탑의 궁극적인 목적이 마법사들의 나라 건국이라는 건 알고 계시죠. 일반인은 침범할 수 없는 강한 나라를요.”
“아직도 그런 허황된 꿈을 꾼다고요?”
프레아가 놀라 되묻자 머레니가 설명을 덧붙였다.
“그래요. 아주 오랫동안 이어진 염원이죠. 아네모네 황비가 황제에게 시집간 이유도 바로 그것 때문이에요. 황비는 누구보다도 마탑에 충성하는 마법사였거든요.”
“말도 안 돼. 그 정도로 정신 나간 집단일 거라곤 상상도 못 했네요.”
프레아가 질린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에 머레니가 동의하는 의사를 띠며 대답했다.
“저도 마탑이 왜 그렇게까지 건국에 집착하는지 몰라요. 저도 썩 좋아하지 않는 면이죠. 대부분의 젊은 마법사는 현재에 만족하고 있거든요. 말을 못 해서 그렇지.”
프레아는 강한 긍정을 표하고자 고개를 열심히 끄덕거렸다. 이에 머레니가 피식 웃으며 마저 이야기했다.
“어쨌든, 아네모네 황비는 황족의 피와 마법사의 피가 섞인 아이를 갖기 위해 황제와 결혼했어요. 그리고 그 일에 성공했죠. 에시드 대공님은 아주 훌륭한 마법사였으니까요.”
“하지만 마법이 통하지 않는다는 게 변수였군요.”
프레아가 허를 찌르는 핵심을 짚자 머레니가 제법이라는 얼굴로 피식 웃었다. 밀리안은 대화에 끼어들지 않고 가만가만히 차를 음미할 뿐이었다. 이미 다 들은 듯했다.
“맞아요. 황족에겐 표식이 통하지 않았어요. 만약 통했다면 대공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겠죠. 마탑을 거부하자마자 즉결 처분됐을 테니까요.”
“여러모로 그는 운이 좋은 사람이었네요.”
프레아가 수긍하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에시드는 정말로 운이 좋은 사람이었다. 만약 표식이 제대로 발동했다면 계승권을 포기한 그 순간 심장이 멎었을 테니까.
마탑은 결국 대공을 통해 헤로스 제국을 통째로 먹어버릴 생각을 했던 모양이다. 안타깝게도 실패했지만. 아니, 어쩌면 정령 실험에 심혈을 기울이는 것도 그 일과 연관되어 있을지도 몰랐다.
그렇지 않다면 암암리에 그 일을 계속해서 진행할 이유가 없다. 프레아가 생각에 잠겨 아무 말도 하지 않는 동안 머레니는 계속 이야기했다.
“하지만 마탑은 강해요. 에시드 대공에게 표식이 통하지 않는다고 해서 마탑을 방해하는 데 안전하다고 볼 순 없어요. 물론 영애께서 보호를 자청하고부터는 이쪽에서도 난리가 났지만요.”
“아마도 대공은 그걸 알고 저를 찾아온 거겠죠. 저는 귀족에다 정령사이기까지 하니까요.”
“그럴 테죠. 하지만 마탑은 포기하지 않을 거예요. 대공이 가져간 실험체는 사실 실패작이 아니에요. 몇 안 되는 아주 중요한 표본이죠. 마탑은 반드시 그걸 되찾으려 할 거예요.”
중요한 표본이라는 말에 프레아가 얼굴을 굳혔다. 실패작이 아니었다니. 그냥 사체라고만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프레아가 찜찜한 얼굴로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