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장 코헨의 딸과 망나니 아들
프레아는 요즘 기분이 무척 좋았다. 그 이유는 맞선 상대인 실버 때문이었다. 어색했던 첫 편지를 시작으로 하루에 한 번꼴로 실버와 편지를 주고받기 시작한 지 벌써 한 달이 넘었다.
약속된 시간에 오는 편지를 기다리는 것이 프레아의 일상이 되었다. 편지로 뭐 그렇게 할 말이 많냐고 물을 수도 있는데, 사실 별 얘기는 없었다.
그저 시시콜콜한 이야기들이었다. 사람 사는 이야기가 다 그렇겠지만 프레아는 그마저도 특별하게 느껴졌다. 익명이라는 게 이렇게 대단한 거였구나.
가문에서 벗어나 오로지 ‘나’라는 사람을 드러낼 수 있는 그 시간이 좋았다. 남자들은 보통 편지 쓰는 걸 어려워한다고 들었는데 실버는 아닌 모양이다.
그의 편지가 한 번도 짧았던 적이 없었다. 오늘은 무얼 했는지와 같은 사소한 얘기를 생략하는 법도 없었다. 그의 편지가 무척 달콤해서 비밀리에 진행한 맞선이 아니었다면 벌써 시에라에게 편지를 보여주고도 남았을 것이다.
최근 에리카에게 말하긴 했지만 매번 그녀를 찾아가 편지를 자랑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오늘도 정해진 시간에 편지가 도착했다. 경쾌한 알림음이 들리자 프레아가 벌떡 일어났다.
우체통에서 편지를 꺼낸 뒤 다시 침대로 올라가 봉투를 뜯었다. 한참 즐겁게 읽는데 말미에 실버의 고민이 담겨 있었다.
[오늘은 고민이 생겼습니다. 체리 님이 도움을 주었으면 좋겠군요.
사실 곧 누님의 생일입니다. 선물을 줄까 하는데 무얼 주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습니다.
게다가 오랫동안 떨어져 있다가 만난 터라 누님이 저를 조금 어색해하더군요.
누님과 다시 잘 지내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그는 일 때문에 오랫동안 가족과 떨어져 지냈다고 했다. 프레아는 그 말에 그가 무역하는 사람인가 짐작했다.
익명이기 때문에 가문과 관련된 일에 대해서는 서로 말하지 않아 그렇게 추측할 수밖에 없었다. 프레아가 진지한 얼굴로 제 일인 양 그의 고민을 도와줄 방법에 대해 골몰했다.
“다시 친해지려면 역시 그거지?”
그녀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띠며 홀로 중얼거리더니 펜을 들었다. 답변의 내용은 무척 담백했다. 프레아는 콧노래를 부르며 정성스레 한 자 한 자 눌러 썼다.
[실버 님, 아마 누님도 오랜만에 동생을 만나서 어색한 걸 거예요.
그럴수록 더 자주 만나야 한답니다. 마침 누님의 생일이라고 하니 가족 여행을 가는 건 어떤가요?
같이 있다 보면 다시 예전처럼 친하게 지낼 수 있을 거예요.
음, 선물은 글쎄요. 누님의 취향을 잘 모르니 선뜻 추천하기 어렵네요.
저라면 동생이 무얼 주든 좋아할 것 같긴 한데…….
혹시 누님은 어떤 분인가요? 누님에 대해 알면 추천하기 쉬울 것 같아요.]
편지를 우체통에 넣고 금고를 닫을 무렵이었다. 누군가 노크도 없이 벌컥 문을 열며 소리쳤다.
“서프라이즈!”
“앗, 깜짝이야! 놀랐잖아, 에리카!”
프레아가 진심으로 버럭 소리 지르며 에리카를 흘겼다. 우체통을 들키는 줄 알고 더 크게 놀란 탓이었다. 이에 에리카가 검지를 세워 입에 가져다 대곤 입 모양으로 ‘미안’이라 말했다.
에리카가 문을 단단히 닫고는 프레아 곁으로 쪼르르 달려왔다. 금고 속에 담긴 빨간 우체통을 신기하다는 눈빛으로 바라봤다.
“이게 그거야?”
“응. 신기하지?”
프레아가 에리카에게 우체통을 내밀었다. 에리카는 우체통을 덥석 받아 들며 부러운 기색을 띠고 속삭였다.
“나도 할까 봐. 네가 편지 주고받는 거 보니까 괜히 부럽다.”
괜스레 에리카가 우체통을 이리저리 만져보았다. 프레아는 누가 들어올세라 문 쪽을 살피고 있다가 우체통을 받아 다시 금고 안에 넣고 단단히 잠갔다. 그러곤 예고 없이 찾아온 에리카를 향해 물었다.
“어쩐 일이야?”
프레아의 물음에 에리카가 무언가 생각났다는 얼굴로 말했다.
“아, 나한테 티파티 초대장이 하나 왔는데, 도무지 생각해 봐도 나한테 올 초대장이 아닌 것 같아서. 혹시 너한테도 왔나 해서.”
“사교계에 발도 안 들이는 너한테 초대장이 왔다고?”
프레아가 덩달아 이상하다는 얼굴로 묻자 에리카가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그러니까. 게다가 후작가에서 온 거라 거절도 못 해. 거절했다간 백작 주제에 후작을 능멸했다고 할걸?”
“어디서 왔는데?”
“코헨 후작가.”
“……코헨?”
어쩐지 싸한 기분이 들었다. 그녀가 초대받은 시기가 좋지 못한 탓이었다. 사실 보물을 바쳐 작위를 받은 프레드린 가문을 좋게 보는 귀족은 별로 없었다. 돈을 주고 작위를 샀다며 불명예스럽게 여기는 꽉 막힌 귀족이 많았다.
에리카가 사교계에 잘 나타나지 않는 건 그녀가 사교계를 싫어한 이유도 있지만 어울려 주지 않는 귀족들도 한몫했다. 다행인 것은 에리카가 그 부분에 대해서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는 점이다. 오히려 귀찮아지지 않아서 좋다고 했다.
물론 에리카가 프레아와 친한 사이라는 걸 알고 일부러 초대장을 보내는 사람도 있었다. 그런 경우 대개 백작 가문에서 프레아와 어떻게든 연줄을 맺고자 에리카를 이용하려 한 거였다.
그걸 아는 에리카는 초대장을 족족 거절했다. 여러 사유를 대서.
하지만 후작가의 요청을 거절할 순 없다. 일단 프레드린은 백작 가문이니까.
“흠…….”
프레아는 고민에 빠졌다. 메샤르가 에시드 대공을 보호한다는 것이 공공연해진 시점에서 에리카를 초대한 코헨 후작가의 속내가 어쩐지 순수해 보이지 않았다.
코헨 가문은 대대로 마법사 가문이자 마탑의 추종자였다. 그런 가문에서 갑자기 아무 연고도 없던 에리카를 초대했다? 프레아는 그 의도가 분명 저와 관련되어 있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일단 코헨 후작가에 나도 가겠다고 연락을 넣어둘게.”
“괜찮겠어? 마법사 집안인데.”
“어쩔 수 없지. 널 그 소굴에 홀로 보낼 순 없잖아.”
프레아가 에리카의 어깨를 단단히 잡으며 저만 믿으라는 듯이 눈에 힘을 주었다. 이에 에리카가 속상한 기색을 띠며 중얼거렸다.
“역시 너 때문에 날 미끼로 이용한 걸까? 내가 만만하니까?”
“가봐야 알겠지만 아마도 그럴 가능성이 높지.”
“진짜 싫다.”
에리카가 인상을 팍 썼다. 이런 식으로 피해를 주는 게 싫은 모양이다. 게다가 번번이 저를 건너서 프레아와 어떻게 해보려는 귀족들이 진절머리 난다는 표정이었다. 프레아가 그런 에리카에게 미안한 기색을 띠며 위로했다.
“미안, 괜히 나 때문에 네가 귀찮게 됐네.”
“딱히 너한테 화난 건 아냐. 그냥 내가 참 잘난 친구를 두었구나 싶다.”
“헤헤. 그래도 나한텐 너밖에 없어, 에리카.”
프레아가 에리카를 와락 안았다. 에리카는 피, 하는 바람 빠진 목소리를 내곤 배시시 웃었다. 그녀의 말이 빈말이 아니라는 것쯤은 이미 알고 있는 탓이었다. 잠시 뒤 에리카가 프레아의 옆구리를 살짝 찌르며 속삭였다.
“근데 실버인가 뭔가 하는 사람은 어떤 거 같아? 마음에 들어?”
에리카의 눈이 반짝반짝했다. 빨리 그에 대해서 얘기해 달라는 눈빛이었다. 프레아는 어쩐지 조금 수줍어져 볼을 붉혔다.
“응, 정말 좋은 사람 같아. 사실 만나고 싶은데 뭐라고 운을 떼야 할지 모르겠어.”
프레아가 자신감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에 에리카는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항상 적극적이던 애가 왜 이렇게 겁을 낼까? 내가 아는 프레아 맞아?”
“사실 글라디안 님처럼 될까 봐 좀 무서워. 만약 실버 님도 그러면 이번엔 정말 상처받을 거 같거든.”
프레아가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조금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그에게 거절당할까 봐 무서웠다. 그와 만나는 순간 밀리안이 알게 될 테고, 그러면 어떤 식으로든 방해할지도 몰라서였다.
근 한 달간 밀리안과 여러모로 마주치기는 했지만 그가 무슨 사건을 담당하면서부터 자주 보기 어려웠다. 많이 바쁜 듯했다. 전처럼 같이 살았다면 그래도 자주 마주쳤을 텐데……. 고작 옆 건물로 이사한 것뿐인데 만나는 게 쉽지 않았다.
“그럼 한번 떠봐. 나를 끔찍이 아끼는 남동생이 있는데 감당할 수 있겠느냐고.”
“그래도 될까?”
에리카가 프레아의 어깨를 쭉 펴주며 말하자 프레아가 한결 기분이 나아진 목소리로 질문했다.
“어차피 편지이고 익명인데 뭐 어때? 만약 조금이라도 주저하는 기색을 보이면 그냥 다른 사람이랑 다시 편지하면 되지.”
에리카는 프레아에게 용기를 북돋워주기 위해 말을 보탰다. 프레아는 그가 주저하는 모습을 보이기만 해도 속상할 것 같지만 굳이 말하지 않고 화제를 돌렸다.
“근데 이상하게 실버 님 말곤 다른 사람한테서 편지가 안 와. 내가 매력이 없나?”
“음? 이상하네. 그거 원래 여러 명이랑 연락해 보는 거 아니었나?”
“그러니까. 혹시 고장이라도 난 걸까?”
“고장 났으면 실버 님한테서도 편지가 안 왔겠지.”
“그런가.”
프레아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에리카가 담백한 목소리로 말했다.
“근데 뭐, 어차피 실버 님이 마음에 든다며. 오히려 수고를 던 거니까 좋게 생각하자.”
“하긴, 그건 그래.”
프레아가 에키라의 말에 헤실거리며 대답했다. 이왕 마음먹은 거, 오늘 당장 실버 님께 답장이 오면 밀리안에 대해 살짝 떠봐야겠다 결심했다. 그간 연락했던 실버 님이라면 글라디안보다는 나으리라. 프레아가 그리 생각하며 에리카의 손을 붙들었다.
“온 김에 차 한잔하고 가.”
“어머, 나 그냥 보내려고 했어?”
에리카가 섭섭하다는 목소리로 물었다. 프레아는 배시시 웃으며 대꾸했다.
“그건 아니고.”
* * *
“그러고 보니 곧 네 생일이구나.”
진이 진한 커피 향을 코끝으로 음미하며 프레아에게 말했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함께 디저트를 먹던 중이었다. 에밀리가 옆에서 ‘그러게요’ 하고 진의 말을 받았다. 이에 프레아가 깜박했다는 목소리로 반응했다.
“어? 벌써 그렇게 됐나요?”
“네 생일도 기억 못 하면 어떻게 하니.”
“아, 요즘 너무 정신이 없어서…….”
에밀리의 작은 타박에 프레아가 뒷머리를 매만지며 배시시 웃었다.에밀리는 부드러이 웃으며 물었다.
“갖고 싶은 게 있니?”
“음, 좀 더 생각해 보고 말씀드릴게요.”
“그래, 그러렴.”
그때 옆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진이 말했다.
“프레아의 생일이니 모처럼 다 같이 가족 여행을 가는 것도 좋겠구나.”
“가족 여행이요?”
프레아가 들뜬 목소리로 대꾸했다. 밀리안이 전쟁터로 간 이후로는 한 번도 가지 못해서였다. 기쁜 기색이 역력한 프레아를 보며 진이 부드러이 웃었다.
“그래, 어디에 갈지는 좀 더 생각해 보자꾸나.”
“벌써부터 신나요!”
프레아가 눈을 빛내며 대답했다. 씩씩한 그녀의 대답에 에밀리가 덩달아 미소 지었다. 한참을 어디로 여행 갈지 이야기한 뒤 방으로 돌아가려는데 에밀리가 조금 주저하는 목소리로 프레아를 불렀다.
“프레아.”
“네?”
프레아가 에밀리의 부름에 일어서려다 다시 앉았다. 이에 에밀리가 프레아의 손을 다정히 붙잡았다. 프레아는 잡힌 손에 잠시 시선을 두었다가 에밀리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에밀리가 그런 프레아를 보며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코헨 후작가에 티타임을 간다는 소식 들었다.”
“아…….”
에밀리가 코헨 후작가를 언급하자 프레아는 그녀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에밀리가 깊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마법사들과는 어울리지 말라고 했잖니.”
에밀리의 목소리에 걱정이 묻어났다. 에밀리는 여전히 프레아가 정령사라는 걸 드러내 놓고 사는 삶을 두려워했다. 혹여나 프레아가 잘못되기라도 할까 봐 늘 노심초사했다.
게다가 마법사들이 프레아에게 노골적으로 접근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이 때문에 에밀리는 저도 모르게 마법사에게 예민하게 반응했다. 프레아는 그런 에밀리의 손을 꼭 잡으며 안심시켰다.
“저도 그러고 싶은데 에리카가 초대를 받아서요. 혼자 보낼 순 없잖아요.”
“코헨 후작가에서 에리카를?”
에밀리가 의외라는 얼굴로 물었다. 에밀리의 반응은 당연했다. 코헨 후작가는 귀족 중에서도 보수적이기로 소문난 가문이었다.
그런 가문에서 프레드린 가문의 에리카를 초대한다는 건 무척 이상한 일이다. 물론 프레아는 그 이유가 에시드 대공과 관련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티 내지 않았다.
“아무래도 에리카를 곤란하게 할 것 같아서 같이 가려는 것뿐이에요.”
“그랬구나.”
에밀리가 여전히 얼굴에 그늘을 드리운 채 힘없이 대답했다. 프레아는 부모님에게 에시드 대공이 마탑을 파헤치고 있어서 그런 것 같다는 말은 숨겼다. 에시드가 확실해질 때까지 비밀로 해달라고 했었으니까.
가만히 듣고 있던 진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의 목소리에도 에밀리와 같은 걱정이 묻어 있었다.
“그래도 조금 불안하구나. 너만 괜찮다면 밀리안과 함께 가는 건 어떠냐? 그 녀석이 좀 못 미덥게 굴기는 해도 다른 호위 기사들보다 나을 것 같구나.”
“밀리안이요? 영애들끼리의 티타임인데 가려고 할까요?”
프레아가 놀란 얼굴로 물었다. 설마 진이 밀리안과 함께 가라고 할 줄은 몰랐다. 그의 말대로 다른 호위 기사를 대동하는 것보다 밀리안과 함께하는 것이 훨씬 안전했다.
아들과 함께 보내고자 하는 진을 보며 프레아가 슬며시 미소 지었다. 그가 저를 정말 딸처럼 아끼고 있음이 느껴져서였다.
걸리는 점은 밀리안이 기사단장이라 무척 바쁘다는 거였다. 괜히 바쁜 사람에게 자신의 호위를 부탁하는 것 같아 주저되었다. 망설이는 프레아를 본 진이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누나의 안위가 달린 일인데 거절할 리 있겠느냐.”
“음, 그럼 한번 물어볼게요. 사실 그렇게 걱정하실 필욘 없는데……. 그래도 괜히 어머니와 아버지를 불안하게 할 순 없죠.”
프레아가 조금 풀 죽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너무 과보호를 받는 것 같았다. 에밀리는 다정히 미소 지으며 프레아를 달랬다.
“우리도 네가 혼자서 잘해낼 수 있는 아이라는 건 믿어 의심치 않는단다. 하지만 상대는 마탑의 마법사 가문이지 않니? 조심해서 나쁠 것 없단다. 엄마는 네가 너무 소중해서 그래.”
“알고 있어요.”
프레아가 에밀리를 따라 미소 지었다. 그들의 걱정이 괜한 게 아니라는 걸 알고 있다. 마탑은 어떤 미친 짓을 할지 모르는 집단이니까. 문득 자신이 막 정령사라는 것을 공포했을 때의 일이 떠올랐다.
프레아의 방에 도둑이 든 적이 있었다. 괴한은 프레아가 잠든 사이 머리카락을 몰래 줍다가 걸려 그녀에게 두들겨 맞았다. 그대로 진이 그를 끌고 가 심문했더니 결국 마탑에서 보낸 괴한인 게 밝혀졌다.
물론 마탑은 아니라고 펄쩍 뛰었지만, 그들이 아무리 아니라고 우겨도 정황상 마탑이 확실했다. 괴한이 보석도 아니고 굳이 머리카락 따위를 주울 이유가 없다.
그들이 프레아의 머리카락을 가져가서 뭘 하려 했는지는 뻔했다. 아마 영류에 대해 알아보려 했을 터였다.
프레아는 저를 걱정하는 가족들을 향해 해사하게 웃었다. 과보호 같긴 하지만 가족의 애정 어린 말과 행동이 조금 감동이었다. 프레아가 조금 간질거리는 말이지만 볼을 붉히며 말했다.
“사랑해요, 엄마. 사랑해요, 아빠.”
프레아가 에밀리와 진을 차례로 바라보며 수줍게 웃었다. 이에 에밀리와 진의 눈이 잠시 커지는가 싶더니 프레아를 사랑스럽게 보며 대답했다.
“우리도 너를 사랑한단다, 프레아.”
* * *
밀리안에게 코헨 후작가의 티파티에 함께 갈 수 있겠냐고 전보를 보내자 곧장 대답이 왔다. 약속 시간을 알려주면 마중 나가겠다는 담백한 내용이었다. 분명 바쁘다고 들었는데 이렇게 답변이 빨리 오다니. 프레아는 어쩐지 든든하면서도 알 수 없는 기분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언제부턴가 밀리안이 자신의 부탁을 거절한 적이 없었다. 물론 최근에는 저를 난처하게 만들긴 했지만 그렇다고 선을 넘지는 않았다.
약속 날짜가 되자 밀리안이 늦지 않게 에드모어 성으로 찾아왔다. 프레아가 오랜만에 보는 밀리안을 향해 배시시 웃었다.
“얼굴 보기 힘드네.”
“내가 많이 보고 싶었나 보네.”
프레아의 말에 밀리안이 부드러이 미소 지으며 답했다. 프레아는 그저 가볍게 어깨를 들썩일 뿐이었다. 그는 기사단장 제복이 아닌 티파티에 어울리는 예복을 입고 있었다. 프레아가 밀리안의 팔에 손을 얹은 채로 말했다.
“갑자기 부탁해서 미안해. 나도 갑자기 가게 된 거라.”
“괜찮아. 네가 혼자 갔으면 그게 더 걱정됐을 거야.”
밀리안의 대답에 프레아가 소리 없이 웃었다. 그러곤 그의 옆모습을 넌지시 바라보았다. 밀리안은 참 자상하구나 싶어서였다. 프레아가 문득 ‘넌 왜 그렇게 나한테 관대하게 굴어?’라고 물으려다가 입을 꾹 다물었다. 그의 고백이 생각난 탓이다.
조금 이상한 점은 그는 고백 이후 아무런 행동을 보이지 않았다. 보통은 좋아하면 자꾸 찾아오고, 설레서 말도 막 더듬고 그래야 하는 게 아닌가? 밀리안은 고백한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날 좋아하는 건 포기하기로 한 건가.”
프레아가 저도 모르게 속마음을 입 밖으로 내 중얼거렸다. 밀리안이 그런 프레아를 보며 물었다.
“왜? 내가 아무 짓도 안 해서 서운해?”
“……어?”
프레아가 뜬금없는 밀리안의 질문에 그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밀리안이 그런 프레아를 향해 짓궂게 미소 짓더니 손가락으로 자신의 머리를 톡톡 치며 말했다.
“너 지금 속마음 입 밖으로 뱉었어.”
“헉!”
프레아가 제 입을 한 손으로 막고 흔들리는 눈으로 밀리안을 바라보았다. 밀리안은 그런 프레아를 사랑스럽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그의 뜨거운 시선에 프레아가 말을 더듬었다.
“아니 그게……. 이건 그러니까…….”
목소리가 점점 기어들어 갔다. 그 모습을 본 밀리안이 소리 내어 웃더니 갑자기 프레아에게 바짝 다가갔다. 프레아가 반사적으로 뒤로 물러서자 밀리안이 멀어지는 프레아의 손을 덥석 잡으며 말했다.
“연애에는 순서가 있다고 하더라고.”
“뭐?”
프레아가 엉거주춤한 자세로 묻자 밀리안이 몸을 물리곤 예쁘게 웃었다.
“그래서 천천히 다가가는 중이야.”
프레아는 밀리안의 말이 이해되지 않아 멍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도무지 알 수 없는 말이다. 게다가 이렇게 몸을 가까이 붙인다고 갑자기 우리 사이에 연애 감정이 생기는 게 아닐 텐데.
연애 한 번 못 해본 그다운 대답이었다. 평정을 되찾은 프레아는 피식 웃었다. 그러면 그렇지. 밀리안이 조금 낯설긴 해도 저보다 3살이나 어린 동생이다.
그래, 어려도 한참 어리지!
프레아가 기고만장한 얼굴로 팔짱을 끼고 말했다.
“그렇게 다가오다간 평생 연애 못 할 것 같은데.”
“그건 두고 보면 알지.”
밀리안은 갑자기 태세 전환하는 프레아를 보며 의미심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프레아는 그런 밀리안을 보았다.
하지만 흥, 네가 해봐야 소꿉놀이 연애겠지! 하고 속으로 으름장을 놓았다. 그때 밀리안이 프레아에게 손을 내밀었다. 어느새 마차 앞이었다. 프레아가 새침한 얼굴로 그의 손을 잡고 마차에 올라탔다.
* * *
이번 코헨 후작가의 티파티는 장녀인 머레니 코헨이 연 모임이었다. 코헨 후작가의 성 앞에 도착하자 마침 에리카가 마차에서 내리고 있었다. 밀리안이 마차에서 먼저 내린 뒤 프레아를 붙잡아 내려오게 했다.
“프레아!”
에리카가 프레아를 발견하곤 손을 흔들었다. 프레아 역시 밝게 미소 지으며 손을 흔들었다. 밀리안이 그런 프레아를 물끄러미 보았다. 에리카가 밀리안을 발견하곤 의아한 얼굴로 다가와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이네요, 밀리안 소공…… 아니, 이젠 후작님이군요.”
“오랜만이군, 메리카 양.”
“메리카가 아니라 에리카입니다, 밀리안 후작님.”
“아…….”
에리카가 이름을 자꾸 잘못 부르는 그를 탓하며 말했다. 알고 지낸 지가 몇 년째인데 저한테 관심이 없어도 그렇지, 매번 이름을 잘못 부르는 게 심통이 났다.
밀리안은 에리카의 말에 관심 없다는 듯 영혼 없이 얕은 탄성을 뱉었다. 에리카는 그런 밀리안에게 눈을 흘기곤 프레아에게 팔짱을 꼈다. 어느새 좌 에리카, 우 밀리안이 된 프레아는 무거운 양팔을 흔들었다.
“이게 뭐 하는 거야?”
“메리카 양, 에스코트는 내가 할 테니 팔을 놓아주었으면 좋겠는데.”
“에리카고요, 원래 친구끼리는 팔짱을 끼는 법입니다. 밀리안 후작님.”
“하지만 오늘 내 역할이 에스코트라서 말이지. 오늘까지만 살고 싶은 게 아니라면 놓는 게 좋을 텐데.”
밀리안이 서늘하게 웃자 에리카가 펄쩍 뛰며 말했다.
“제, 제가 죽으면 프레아가 엄청, 엄청, 엄청 슬퍼할 거예요! 그럼 밀리안 후작님을 다시 보지 않을걸요?!”
에리카가 꼬박꼬박 ‘밀리안 후작님’이라 부르며 앙칼진 목소리로 대들었다. ‘다시 보지 않는다’는 말에 밀리안의 눈썹이 조금 꿈틀거렸지만 이내 평상시와 같은 얼굴로 돌아왔다.
에리카가 그런 그를 보며 조금 겁먹은 얼굴로 프레아의 옷깃을 잡아끌었다. 이전에도 밀리안과 여러 번 마찰이 있었는데, 그때마다 굴하지 않고 대드는 걸 보면 에리카도 대단했다.
그녀와 달리 밀리안은 표정 변화가 별로 없었다. 마치 배부른 맹수가 앞에서 알짱거리는 작은 짐승을 보는 것 같은 태도였다. 발톱으로 한 번 튕기면 꿱, 하고 죽을 짐승을 보는 무료한 눈 말이다.
프레아가 두 사람을 빤히 보고는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그러곤 에리카를 향해 말했다.
“에리카, 손 놔줘.”
“……프레아?”
에리카가 청천벽력같은 소리를 들은 얼굴로 프레아를 바라보았다. 어떻게 쟤 편을 들 수 있어?! 하는 표정이었다. 밀리안은 프레아의 말에 피식 웃으며 손을 더욱 단단히 고정했다. 그러곤 에리카를 향해 주의를 주려 했다.
“곤란하게 하지 말고…….”
“밀리안, 너도 손 놔.”
“…….”
밀리안이 뒷말을 삼켰다. 두 사람은 돌이 된 것처럼 굳은 채 프레아의 팔을 놔주지 않았다. 이에 프레아가 냉정하게 팔을 힘껏 털며 말했다. 아주 단호한 목소리였다.
“혼자 갈 거야.”
“프레아!”
에리카가 성큼성큼 걸어가는 프레아를 부르며 뒤따라갔다. 밀리안이 그런 프레아를 한 방 먹었다는 얼굴로 보았다. 그러다 못 말리겠다는 표정으로 피식 웃으며 프레아를 따라갔다.
“반가워요, 머레니 코헨입니다.”
코헨 후작의 장녀 머레니가 프레아와 에리카를 향해 미소 지었다. 머레니는 금발에 에메랄드빛 눈동자를 지닌 아리따운 여인이었다. 프레아가 그녀를 보며 예를 갖춰 말했다.
“티파티에 함께할 수 있게 허락해 줘서 고맙습니다. 프레아 레이첼 에드모어입니다.”
“와줘서 고마워요. 영애께서 오고 싶다는 편지를 받았을 때는 정말 기뻤답니다. 사실 영애도 초대하고 싶었거든요.”
머레니가 부채로 제 입을 가리며 호호거렸다. 그녀의 말에 테이블을 쓱 쳐다보았다. 딱 3명이 앉을 자리만 있었다. 설마설마했는데 티파티라 해놓고 에리카만 초대했던 모양이다.
“근데 저기 신사분은 호위 기사이신가요?”
머레니의 시선이 어느새 밀리안에게 향했다. 한눈에 봐도 저 남자가 누군지 궁금하다는 얼굴이었다. 프레아가 머레니를 향해 담백하게 말했다.
“제 동생, 밀리안 테일러스예요.”
“어머, 그 가문을 나가고 새로운 후작이 되었다던?”
머레니가 놀랍다는 듯 부채를 내려놓고 두 손으로 입가를 가렸다. 프레아는 굳이 여기서 가문을 나갔다고 강조하는 그녀를 보며 애써 웃었다. 이미 그가 가문을 나간 소식이 전역에 퍼진 모양이다. 밀리안이 머레니를 쓱 쳐다보며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밀리안 테일러스네.”
“듣던 대로 미남이시네요! 이렇게 실물을 보게 될 줄이야. 우리 이것도 인연인데 악수 한번 할까요?”
머레니가 들뜬 얼굴로 밀리안에게 손을 내밀었다. 한껏 과장된 말씨였다. 밀리안이 그런 머레니를 보며 딱딱하게 대꾸했다.
“악수할 줄 모르네.”
“음? 네?”
머레니가 무슨 소리냐는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악수할 줄 모르는 귀족도 있냐는 표정이었다. 밀리안은 얼굴에 철판을 깐 사람처럼 그 말만 되풀이했다. 결국 머레니는 밀리안과 악수하지 못했다.
시녀가 밀리안을 위한 의자를 내왔다. 3명이서 하려던 티파티라고 하기엔 과한 음식들도 줄지어 나왔다. 갖은 빵과 과일, 초콜릿과 치즈 퐁듀가 예쁜 그릇에 담겨 있었다.
“차린 건 없지만 기쁘게 즐겨줬으면 좋겠어요.”
머레니가 은근슬쩍 밀리안 쪽으로 케이크 하나를 밀며 말했다. 그런 머레니를 프레아가 뚱한 얼굴로 보았다. 뭔가 제 동생에게 관심 있는 티를 팍팍 내는 머레니를 보자니 괜히 속에서 이상한 것이 올라왔다.
우리 밀리안이 너무 아까워!
프레아는 속으로 그리 생각했다. 동생을 마법사와 결혼시키고 싶지 않았다. 그럼 마법사가 아니면? 마음속 또 다른 프레아의 질문에 그녀의 사고가 정지했다. 꿀 먹은 벙어리처럼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했다.
밀리안의 애인을 왜 자신이 판단하는지 모르겠다. 이건 밀리안이 저에게 했던 행동과 동일한 것이었다. 프레아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생각하기를 관뒀다.
밀리안은 혼자서 갖은 표정 변화를 짓는 프레아를 빤히 보곤 그녀의 앞에 체리가 올려진 케이크를 슬쩍 밀었다. 프레아는 무의식적으로 케이크를 떠먹으며 여전히 생각에 잠겨 있었다.
“체리 여전히 좋아해?”
“응? 뭐, 그냥…….”
프레아가 입안의 케이크를 우물거리며 낮게 중얼거렸다. 밀리안은 그런 프레아를 부드럽게 바라보았다. 밀리안은 머레니가 앞에 가져다준 당근 케이크에는 입도 대지 않았다.
아니, 아무것도 먹지 않고 있었다. 그저 차만 홀짝거렸다. 프레아가 그 모습을 넌지시 보더니 그의 앞에 담백한 치즈 케이크를 밀어주며 말했다.
“이거 좋아하지?”
“기억하고 있네.”
밀리안이 프레아의 호의에 예쁘게 웃었다. 덩달아 그녀도 배시시 웃는데 그의 뒤에 있던 머레니가 시야에 들어왔다. 밀리안의 미소를 본 머레니의 표정이 멍했다. 넋 나간 게 어쩐지 사랑에 빠진 얼굴이었지만 애써 모른 척했다.
에리카는 셋이서 그러거나 말거나 편안한 마음으로 케이크를 맛있게 먹었다. 프레아와 함께하는 자리라 불편함이 덜해 가능한 일이었다.
“에리카 영애.”
그때 머레니가 에리카를 불렀다. 에리카가 케이크를 먹으려다 말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네?”
“제가 영애를 초대한 이유가 궁금하지 않으세요?”
“음…….”
글쎄요, 전 지금 먹고 있는 딸기 시폰 케이크를 누가 만들었는지가 더 궁금한데요?
에리카가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며 머레니를 바라보았다. 너무 갑작스러운 질문이라 뭐라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 머레니는 그 모습이 자신에게 주눅이 든 거라 여기며 낮게 웃었다.
“긴장할 것 없어요. 그냥 탐험가에 대해 관심이 생겼거든요.”
“여행을 좋아하시나요?”
에리카가 예의상 그리 물으며 홍차로 입안을 헹구었다. 머레니는 갑자기 소리 내어 웃더니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들었다는 것처럼 대답했다.
“그럴 리가요. 괜히 나갔다가 새까맣게 타고 오는 여행을 좋아하는 귀족도 있나요?”
“…….”
머레니의 말에 에리카의 입이 꾹 다물어졌다. 그녀의 말은 명백한 모욕이었다. 에리카는 탐험가라는 직업에 무척 자부심이 강했다. 물론 살이 타는 건 따갑기도 해서 저도 좋아하지 않지만 건강하게 탄 구릿빛 피부도 꽤 괜찮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에리카는 작위 차이로 인해 무어라 반박하지 못하고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이때 잠자코 대화를 듣던 프레아가 어이없다는 듯이 머레니를 보며 생각했다.
얘가 지금 뭐래니?
탐험가에 관심이 생겼다 해놓고 곧바로 탐험가를 비하하는 발언을 하다니. 프레아는 여행을 동경하는 귀족으로서 머레니의 일반화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갑자기 싸해진 분위기에 머레니가 호호거리며 해명했다.
“아, 딱히 에리카 영애의 피부가 너무 까무잡잡하다고 말한 건 아니에요. 나름 건강해 보이고 좋네요.”
“……감사합니다.”
에리카가 입맛이 떨어졌는지 포크를 내려놓았다. 머레니는 그녀가 그러거나 말거나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나불거렸다.
“사실 찾고 있는 물건이 있는데 혹시 여행 중에 봤을까 싶어서 초대했어요.”
“찾는 물건이요?”
“네, 예를 들면 정령석이라든가…….”
머레니가 프레아 쪽을 슥 쳐다보았다. 프레아는 정령석이라는 말에 애써 짓고 있던 미소를 거두었다. 그녀는 지금 정령사 앞에서 정령석을 거래하겠다고 말하고 있었다. 프레아가 애써 차분한 어조로 그녀를 불렀다.
“머레니 영애.”
“네, 프레아 영애.”
“정령석을 찾아 뭐 하시려고요?”
프레아가 가식적인 미소를 띠며 추궁했다. 머레니가 그런 프레아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러곤 별거 아니라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글쎄요. 우선 제가 찾는 정령석이 맞나 확인해 봐야겠죠?”
“그것 참 궁금하네요. 머레니 영애가 찾는 정령석이란 게 대체 뭔가요?”
“제가 뭘 찾는다고 하면 영애가 찾아 주시게요?”
“아니요, 귀족으로서 엄연한 불법 행태에 대해 자세히 듣고 신고하려고요.”
프레아가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까까지 유지하던 미소는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 이 정도까지 얘기했는데 계속 장난스럽게 대처하는 그녀의 태도에 조금 화도 났다.
프레아의 강한 어조에 머레니가 부채를 쫙 펴곤 입가를 가렸다. 프레아의 동요가 기껍다는 얼굴이었다.
“그러고 보니 영애 앞에서 할 얘기는 아니었네요. 기분 나쁘셨다면 사과할게요.”
“제 앞이 아니더라도 어디에서든 하지 마셔야 할 말이었어요. 정령석 거래는 엄연히 불법입니다. 그건 생명 윤리에 어긋나는 일이니까요.”
프레아가 굳이 머레니의 말을 정정했다. 정령사 앞이라서 하면 안 될 말이 아니라 정령석 거래는 이미 불법이니까. 프레아의 말에 머레니가 피식 웃었다.
“순진하시긴. 아무리 법에 어긋난다고 해도 돈으로 못 할 일은 없어요. 게다가 마탑에서는 정령석을 생명으로 치부하지 않는답니다. 아시잖아요?”
“하지만 헤로스 제국은 생명으로 인정하고 있죠. 영애는 귀족인가요, 아니면 마탑의 마법사인가요?”
“어려운 질문이네요. 저는 그저 그런 의견도 있다는 걸 말씀드린 겁니다.”
머레니가 대답을 회피했다. 헤로스의 귀족이라 칭하면 자신이 한 말에 오류가 생기는 것이고, 마탑의 마법사라고 하면 헤로스 제국보다 마탑을 우선한다고 볼 수 있어서였다. 프레아가 대답을 회피하는 머레니를 보며 말했다.
“코헨 가문이 귀족이면서 마탑의 마법사라는 것쯤은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귀족이라면 헤로스 황족이 인정한 법령에 어긋나는 행동을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요.”
“사과하지요.”
머레니가 더 이상 프레아를 자극하지 않으려는지 순순히 물러났다. 프레아는 그런 머레니의 태도가 고까웠다. 애초에 자신을 떠보려 했던 것 같아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녀는 이후에도 에리카에게 탐험가에 대해 질문했다. 물론 더 이상 정령석의 ‘정’자도 꺼내지 않았다 에시드 대공의 일도 일이지만 머레니는 에리카를 통해 무언가를 찾고 있는 듯했다. 그게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프레아가 대화 도중 잠시 머리를 식히기 위해 일어났다. 오랜만에 말이 안 통하는 마법사와 대화를 하려니 속이 부글부글했다. 성격 같아서는 확 뒤집어엎고 싶지만, 그들이 어떤 꼬투리를 잡을지 몰랐다.
“여기 화장실이 어디죠?”
“시녀가 안내해 줄 거예요.”
머레니가 시녀 한 명에게 안내를 명했다.
“이쪽으로 오십시오.”
시녀가 뒤편을 가리키며 정중히 말했다. 프레아가 그녀의 뒤를 따르자 밀리안도 덩달아 일어나려 했다. 하여간 제 역할을 칼같이 하려는 모양이다. 프레아는 밀리안의 어깨를 꾹 누르며 귓속말했다. 그까지 자리를 뜨면 에리카가 무척 피곤해질 걸 염려해서였다.
“에리카를 여기에 혼자 둘 셈이야? 잠시 머리 식히러 가는 거니까, 저 답도 없는 영애한테서 에리카 좀 봐줘.”
“난 널 지키러 온 건데?”
밀리안이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물었다. 이에 프레아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에리카를 지키는 게 날 지키는 거야.”
밀리안은 에리카를 쓱 바라보았다. 에리카와 시선이 마주치자 다시 무심히 고개를 돌리곤 ‘다녀와’라고 작게 말할 뿐이었다.
* * *
프레아가 화장실에 들어가자마자 심호흡을 후후, 내뱉었다. 마법사와 이렇게 오랜 시간 대화해 본 것은 처음이었다. 아, 에시드가 있으니 처음은 아니지만 적어도 그는 머레니와 달리 정령사를 존중해 주었다.
내가 이래서 마법사랑 어울리기 싫은 거야.
프레아가 속으로 중얼거리며 애꿎은 거울 속 자신을 노려보았다. 일부러 그런 게 분명하다. 저를 자극해서 무얼 얻으려 했는지는 아직 확실하지 않지만 진짜 할 말은 따로 있어 보였다.
결국 정령석 이야기는 속임수라는 건데……. 누구를 속이려 했는지는 모르지만 불쾌하고 찝찝했다. 다행히 에리카가 머레니의 질문에 대처를 잘해주었다. 요리조리 에둘러 거절했으니까.
프레아가 한층 진정하곤 화장실을 빠져나왔다. 다시 시녀의 안내로 티파티 장소로 향하고 있을 때였다. 맞은편 복도에서 머레니와 같은 금발에 녹색 눈동자를 지닌 남자가 걸어오고 있었다.
그도 마침 프레아를 보았는지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머레니와 같은 금발에 녹안이라면 코헨 가문의 망나니라고 불리는 머제리 코헨일 것이다.
머레니의 손님으로 온 거니 굳이 인사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프레아는 조용히 옆을 피해 가려 했다. 그때 머제리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프레아 쪽으로 다가왔다.
프레아가 그를 피해 오른쪽으로 비키자 그가 따라서 오른쪽에 섰다. 왼쪽으로 비키니 덩달아 왼쪽으로 이동했다. 프레아가 뭐 하는 짓이냐는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비켜주시겠어요?”
“네가 그 에리카 프레드린인가 보네.”
머제리가 대뜸 그리 말하며 프레아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 그의 무례한 행동에 프레아가 헛웃음을 내뱉었다. 그는 프레아가 뒤늦게 티파티에 합류하게 된 줄 모르는 모양이었다. 보자마자 저를 에리카로 오해하는 것을 보면.
그가 프레아를 이리저리 살피며 인상을 찌푸렸다. 그와 가까워지니 술 냄새가 풍겼다. 대낮부터 술이라니. 누가 코헨의 망나니 아니랄까 봐. 프레아가 질색하며 한 손으로 코를 막았다.
“이거 놓으시죠?”
“까무잡잡하다고 들었는데 생각보다 살결이 곱잖아?”
머제리가 프레아의 손을 제 코끝에 가져다 대고 숨을 들이쉬었다. 프레아가 뭐 이런 미친놈이 다 있냐는 얼굴로 그를 보았다. 술에 취해서인지 제 말은 전혀 안 듣고 있었다. 그녀가 조금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무례하군요. 귀족 영식이 처음 보는 영애에게 이렇게 무례히 굴어도 되나요?”
“귀족이 아니니까 무례히 대하는 거지. 프레드린이 귀족이었나?”
머제리가 비아냥거렸다. 프레드린을 귀족으로 대우하지 않는 그의 말에 프레아가 인상을 팍 썼다. 에리카가 아니라 자신이 머제리를 만난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에리카였다면 이런 수모를 당해도 그 작위 때문에 한마디도 못 했을 테니까. 황제가 직접 작위를 주었음에도 프레드린을 귀족이 아니라고 단정하는 그의 무례함에 기분이 착 가라앉았다.
프레아가 굳은 얼굴로 가만히 있자 그가 피식 웃으며 프레아를 끌어당겼다. 그러곤 프레아의 턱을 다른 손으로 들어 올리며 말했다.
“생각보다 곱상해서 놀라워. 붉은 머리라고 들었는데, 헛소문인 모양이군.”
“…….”
“응? 갑자기 왜 말을 안 하나? 이러면 재미없잖아.”
머제리가 그녀의 턱을 살살 긁었다. 마치 애완동물의 턱을 매만지는 것과 같은 행동이었다. 노골적인 비웃음. 상대를 향한 조롱이 선연하자 프레아가 차갑게 미소 지으며 낮게 중얼거렸다.
“이…… 같은 게.”
“뭐? 잘 안 들리는데? 옹알이하지 말고 제대로 말해.”
“이 손 놓으라고 이 머저리 같은 놈아!”
프레아가 머제리의 손을 거칠게 떼어내고 바람 창을 만들어 그의 목을 겨누었다. 참다 참다 못해 한 행동이었다. 프레아는 분명 참으려 했다. 그가 저를 동물 취급하지 않았다면 말이다. 프레아가 신경질적으로 앞머리를 쓸어 올리며 그의 목에 창을 바짝 댔다.
“이름값 제대로 하네.”
“뭐?”
머제리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프레아는 머제리가 상황 파악을 하든 말든 아랑곳하지 않고 속에 있던 말을 쏟아냈다.
“그쪽이 머저리 같으니까 머제리 같은 이름을 받았겠지.”
“뭐, 머, 머저리?!”
머제리가 성난 얼굴로 소리치자 프레아가 차갑게 웃으며 이죽거렸다.
“왜? 귀족 아닌 귀족한테 머저리 소리 들으니까 화나니?”
“네까짓 게 감히! 백작 영애래 봤자 산 작위일 뿐이면서……!”
머제리가 말을 이으려다 입을 다물었다. 프레아의 눈빛에 독기가 가득해서였다.
“귀족 같지 않은 게 누군데 누구보고 귀족이 아니래?”
프레아가 제 손을 붙잡았던 머제리의 손을 바람으로 구속하며 싸늘히 말했다. 이에 머제리가 사색이 된 얼굴로 소리쳤다.
“허, 허! 너 뭐야, 너도 마법사였어?!”
정령을 소환하지 않고 바람을 사용하니 마법이라 착각한 모양이다. 멍청한 머제리. 목에 겨눈 바람 창은 생각도 않고 이제야 놀라는 게 우스웠다.
그가 매개체를 찾는지 두리번거렸다. 하지만 매개체 같은 건 마법사한테나 필요한 거였다. 프레아는 자신이 마법사인지 정령사인지 그에게 설명해 줄 생각이 없었다. 그것보다 바람 창 하나를 더 만들어 그의 머리 쪽에 가져갔다. 정말 머리를 뚫어버릴 것처럼.
“내가 마법사든 아니든 그쪽이 상관할 일 아니고요. 이 예쁜 머리통에 구멍 나기 싫으면 꺼져.”
“너, 너어! 네가 이러고도 무사…… 아악! 알았어! 갈게, 간다고!”
머제리가 잔뜩 욕을 퍼부으려다 제 머리카락이 사각 잘리는 소리를 듣곤 비명을 질렀다. 자비 없는 프레아의 행동에 머제리가 낮게 욕을 읊조렸다. 프레아가 창을 거두고 꺼지라는 의미로 턱짓했다. 머제리가 뒷걸음치며 소리쳤다.
“너, 두고 봐! 내가 오늘 치 마법만 다 사용하지 않았으면 넌 죽었어!”
머제리의 외침에 프레아가 귀찮다는 얼굴로 창을 들었다. 그 모습을 본 머제리가 기겁하고 도망갔다. 정말 오늘 치 마법을 다 사용한 모양이다. 저렇게 반항도 못 하고 도망가는 걸 보면.
분명 술 먹고 자랑한다고 마법을 난발한 거겠지. 프레아는 그가 완전히 보이지 않게 될 때까지 기다리다 창을 거두었다. 프레아의 뒤에서 이 모습을 모두 지켜본 시녀가 와들와들 떨고 있었다. 그녀는 그런 시녀를 향해 다정히 말했다.
“무서웠구나, 미안.”
“아, 아니에요.”
시녀가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하며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프레아가 그녀의 어깨를 토닥거렸다.
“걱정하지 마. 착한 사람은 해치지 않아. 오늘 일은 비밀인 거 알지?”
“네, 네!”
시녀가 과하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프레아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티파티가 열린 곳으로 향했다. 어쩐지 머레니 몫까지 머제리에게 복수한 기분이었다.
* * *
프레아가 자리를 뜨자 티파티의 분위기가 사뭇 달라졌다. 아까까지만 해도 밀리안에게 반한 것처럼 눈을 빛내던 머레니의 표정이 여유롭게 바뀌었다. 밀리안이 그런 머레니에게 고요히 시선을 두었다. 머레니가 밀리안의 시선에 배시시 웃으며 물었다.
“제게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신가요?”
“무슨 꿍꿍이지?”
“음? 무슨 소리이신지 잘 모르겠어요.”
머레니가 화사하게 웃으며 딴청을 피웠다. 에리카는 그런 두 사람을 멍하게 바라보았다. 프레아가 가자마자 분위기가 완전히 바뀌었기 때문이다.
에리카는 머레니가 밀리안에게 관심 있다고 생각했던 것을 취소했다. 그녀는 밀리안을 향해 조금 차가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프레아와 함께 있을 때와는 다른 얼굴이었다. 밀리안이 다리를 꼰 채 말했다.
“뭘 꾸미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내 누이의 머리털 하나라도 건드리면 가만있지 않을 거네.”
“무섭네요. 머리털 정도는 괜찮지 않나요?”
머레니의 농담에 밀리안이 싸늘하게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 머리털이라는 걸 마탑이 훔치려고 한 전적이 있기 때문이다. 이에 머레니가 입을 꾹 다물었다. 에리카는 자리를 피하고 싶다 생각했다. 프레아를 따라갈걸. 이곳은 완전 살얼음판이었다.
“자네 동생에게서 내 얘길 들었을 텐데.”
“그 망나니 얘긴 하지 마세요. 별로 궁금하지도 않으니까요.”
“동생에게 퍽 매정한 누이군.”
“그러는 그쪽은 누이에게 퍽 다정하시네요. 시선도 무척 뜨겁던데, 설마 아니죠?”
“답할 가치가 없는 질문이군.”
밀리안이 짧게 혀를 찼다. 물론 그 답할 가치가 없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머레니는 알지 못했다. 머레니가 밀리안의 말에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제 누이를 좋아할 리 없겠죠.”
“그쪽이 일부러 정령석 이야기를 꺼내 프레아의 심기를 건드린 건 이미 알고 있어.”
밀리안이 화제를 돌리자 머레니가 과장되게 놀란 척했다.
“알고 계셨군요?”
“너무 티 났으니까. 아마 내 누이도 대충 눈치챘을 테고.”
“그렇군요.”
머레니와 밀리안이 서로 주거니 받거니 뜻 모를 소리를 했다. 에리카는 굳은 얼굴로 그 둘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머레니가 제 턱을 가만가만 쓰다듬으며 밀리안에게 말했다. 어느새 주변에 사일런스 마법이 걸려 있었다. 물론 그걸 알아챈 건 밀리안 뿐이었다.
“본론을 좋아하시는 것 같으니 말할게요. 지금 그쪽 남매, 마탑의 감시 아래 있어요.”
“그걸 말해주는 이유는?”
“음, 단순 호기심?”
머레니가 그리 말하며 윙크했다. 물론 밀리안은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머레니가 잠시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자세한 건 여기서 말할 수 없고요, 어쨌든 조심하라고 말해주려고 했어요. 에리카 영애를 통해 말할 생각이었는데 이렇게 본인들이 직접 나서줄 줄은 몰랐어요. 덕분에 좀 망한 것 같지만.”
머레니가 상큼하게 웃으며 말을 끝맺었다. 눈에 띄는 행동을 최대한 하고 싶지 않다는 기색이었다. 이에 밀리안이 머레니를 추궁했다.
“나는 마법사의 의문사 때문이라 치고 프레아까지 마탑의 감시를 받는 이유는 뭐지? 설마 에시드 대공의 신변 보호 때문인가?”
“글쎄요. 그것까진 말해줄 생각 없고요.”
머레니가 음흉한 빛을 띠며 웃었다. 맞다는 건지 아니라는 건지 모를 웃음이었다. 그녀는 손깍지를 낀 채 턱을 괴더니 나른한 목소리로 물었다.
“마법사의 의문사가 타살이라고 확신하시나요?”
“내가 그걸 답해야 하는 이유는?”
“제가 도움될 수도 있으니까요.”
머레니의 말에 밀리안이 인상을 찌푸렸다. 마탑의 마법사가 저를 도와주겠다? 의심스러울 수밖에 없는 제안이다. 밀리안이 탐탁지 않은 기색을 드러내자 머레니가 배시시 웃었다.
“일단 옆에 있는 귀여운 아가씨가 우리 이야기를 다 듣게 하고 싶지 않으시다면 절 테일러스 성에 초대해 주세요. 이곳은 듣는 귀가 많거든요. 아, 영애께도 말씀 전해주세요. 이왕이면 같이 보는 게 좋겠네요.”
“그러지.”
밀리안이 에리카를 쓱 보며 말했다. 사실 에리카는 두 사람의 얘길 들어도 무슨 소리인지 몰랐다. 도통 관심 없는 주제라 지루하기까지 했다.
‘역시 귀족들은 늘 가면을 쓰는 존재라니까.’
분명 아까 전까지만 해도 시답지 않은 이야기만 오갔었는데 본론에 들어서자 매섭게 변했다. 도통 그들의 화법을 이해할 수 없었다. 에리카가 한숨을 쉴 즈음 프레아가 저 멀리서 다가왔다.
에리카는 프레아를 보며 반겼다. 적어도 프레아는 뜻 모를 소리로 저를 소외시키지 않았다. 그녀는 귀족이지만 귀족답지 않은 프레아의 솔직함이 좋았다.
* * *
머레니의 티파티를 마치고 성으로 돌아가는 마차 안. 밀리안은 프레아에게 머레니의 말을 전했다. 프레아도 어느 정도 그녀가 속내를 숨기고 있다고 느낀 터라 가만히 듣기만 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마탑이 뭔가 일을 꾸미고 있기는 한 모양이다. 그가 맡은 사건이 타살일 수도 있다고 이야기하는 것을 보면.
사실은 머레니가 티타임의 끝물에서도 별다른 신호를 보내지 않아 자신이 괜한 추측을 한 건가 싶었다. 분명 할 말이 따로 있어 보였으니까.
그런데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에리카가 보는 앞에서 그랬을 줄은 몰랐다. 하여간 마법사들의 속은 짐작하기 어려웠다. 프레아가 밀리안을 향해 심드렁하게 물어보았다.
“그래서, 초대할 거야?”
“일단은. 너도 올래?”
“으음…….”
프레아가 주저하며 신음했다. 에시드 대공의 일을 밀리안이 있는 자리에서 함께 논해도 되는지 몰라서였다. 일단 정확한 신변 보호 내용은 비밀이었으니까.
게다가 마탑과 짜고 판을 까는 걸지도 모를 머레니와 만나는 일이다. 신중할 필요가 있다. 밀리안이 고민하는 프레아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말을 보탰다.
“신변 보호 내용은 걱정하지 마. 우린 우리가 알고 싶은 내용만 듣고 빠지면 그만이니까.”
“하여간 눈치 하나는 엄청나다니까.”
프레아가 피식 웃으며 밀리안을 쳐다보자 밀리안이 담담하게 말했다.
“어차피 머레니 영애와 둘이 만난다고 해도 네 얘기는 나올 거야. 내가 에시드 대공에 관한 일이냐 떠봤을 때 딱히 부정하지 않았거든.”
프레아는 생각에 잠겼다. 왜 굳이 밀리안과 나를 동시에 만나려고 한 걸까. 게다가 머레니는 밀리안이 온다는 말을 듣지 못했었다. 그런데 마치 잘되었다는 듯이 밀리안에게 만남을 요청한 게 이상하기만 했다. 그사이에 작전이라도 바꾼 걸까.
마법사의 의문사, 마나의 과부하, 정령 실험.
이 세 가지 일이 도대체 어떤 연관이 있는 걸까. 이 모든 건 머레니를 만나보지 않고는 해결되지 않는 일이었다. 프레아가 결심한 얼굴로 말했다.
“흠…… 일단 가는 거로 할게.”
“날짜 잡히면 알려줄게. 아무래도 네 생일 이후에 만나는 게 좋겠지. 그전엔 바쁠 테니까.”
“아무래도 그렇겠지?”
밀리안이 부드러이 웃으며 말하자 프레아도 배시시 웃으며 대답했다. 모든 게 결정되자 프레아가 등받이에 등을 기대곤 푸우, 숨을 내쉬었다.
한참 뒤 밀리안이 고저 없는 어조로 물었다. 뜸 들이다 물어보는 걸 보니 긴가민가한 듯했다.
“아까 잠깐 바람이 느껴지던데.”
“아, 누굴 좀 혼내주느라.”
“누군데?”
밀리안이 프레아를 빤히 응시했다. 프레아는 머제리에 대해 말하려다 입을 꾹 다물었다. 그가 머제리를 아주 박살 냈던 과거가 떠오른 탓이었다.
이미 자신의 선에서 끝낸 일을 굳이 그에게 전할 필욘 없었다. 분명 그가 날 함부로 했다는 걸 들으면 그는 또 밀리안을 만나야 할 테니까.
“그냥. 그것보다 내 생일에 여행 가자는데 가능해?”
프레아가 말을 돌리자 밀리안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의 얼굴에 흡족한 미소가 지어졌다.
“물론이지.”
“즐거워 보이네. 일 안 해서 좋지?”
프레아가 장난스럽게 말하자 밀리안이 피식 웃었다.
“너랑 계속 같이 있을 수 있으니까 좋은 거야. 일을 안 해서 즐거운 게 아니라.”
“……그러지 좀 마.”
프레아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무슨 말만 하면 결론이 저런 식으로 나오니 대답하기 곤란한 탓이었다. 밀리안은 그런 프레아의 모습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옅은 미소를 지었다. 창틈으로 부는 바람이 살랑거리며 그의 은빛 머리카락을 흩뜨렸다.
“이제 하고 싶은 말은 할 거야. 적응 안 돼도 적응해 보도록 해.”
“순 자기 멋대로야.”
프레아가 그런 밀리안을 흘겼다. 살짝 올라간 입꼬리가 그의 손 틈으로 언뜻언뜻 보였다. 기분이 좋을 때마다 손으로 입을 가리는 버릇은 여전한 모양이다. 밀리안은 아주 기분이 좋아 보였다.
그 이후론 서로 별말이 없었다. 마차는 간헐적으로 덜커덩거렸다. 프레아는 창밖을 내다보며 마차의 움직임에 몸을 맡겼다.
그러다 졸음이 몰려와 고개가 절로 끄덕여졌다. 눈꺼풀이 점점 무거워졌다. 그때 밀리안이 옆으로 자리를 옮기더니 자기 어깨를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
“도착할 때 깨워줄게.”
“으음, 괜찮아.”
프레아가 손을 내저었다. 목소리는 잠이 들려는지 잔뜩 잠겨 있었다. 이에 밀리안이 프레아의 머리를 억지로 어깨에 올렸다.
“아무 짓도 안 할 테니까, 고집 피우지 마.”
“으웅…….”
프레아가 무거워진 눈꺼풀을 가만가만 깜빡이며 무어라 웅얼거렸다. 아마도 알겠다는 말이리라. 밀리안은 조용히 잠이 든 프레아를 바라보다 창밖에 시선을 두었다. 그녀의 숨소리가 목 언저리를 간질이자 그의 목울대가 꿀렁였다.
* * *
완전히 깊은 잠에 빠진 프레아는 결국 밀리안의 품에 안겨 에드모어 성에 돌아왔다. 밀리안이 익숙하게 프레아의 방을 찾아가 그녀를 침대에 누였다. 그녀는 누가 잡아가도 모를 만큼 깊이 잠들었다.
프레아의 숨소리가 잔잔히 들렸다. 그녀의 코에 놓인 몇 오라기의 머리카락이 얕게 흔들렸다. 밀리안은 자연스레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었다. 그러곤 한동안 프레아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의 손이 그녀의 둥근 이마에서 눈썹, 오뚝한 코와 앙다문 붉은 입술을 조심스레 매만졌다. 프레아가 그것이 간지러운지 끙, 하며 몸을 밀리안 편으로 돌렸다.
밀리안이 움찔하며 손을 떼어내곤 멍하니 프레아를 응시했다. 잠시 후 프레아의 머리카락을 슬며시 들어 얼굴을 묻은 그가 나직이 속삭였다.
“나 너무 기다리게 하지 마.”
그녀가 깰까 봐 낮게 속삭이는 말이었다. 잠든 사람을 향해 할 말은 아니었지만 밀리안은 이렇게라도 말하고 싶었다. 기다림이 싫은 건 아니었다. 기다림조차도 기쁘다는 미친 생각을 하고 있었으니까.
단지 눈앞에 두고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상황이 요즘은 조금 힘에 부쳤다. 얼른 모든 일을 끝내고 자유롭게 그녀에게 다가가고, 사랑한다 말하고, 사랑해 달라 애원도 하고 싶었다.
솔직히 자신도 프레아에게 빠지게 될 줄은 몰랐다. 제 감정을 알아챘을 때 멈춰보려고도 했지만 한번 싹튼 마음은 쉽게 가라앉지 못했다.
첫사랑은 열병 같은 거라던데. 밀리안은 그 말을 처음으로 썼던 사람 역시 지독한 첫사랑을 겪었으리라 생각했다. 물론 밀리안은 이 사랑의 끝은 해피 엔딩일 거라 확신했다. 아니, 그래야만 했다. 그렇게 되기 위해 이 고생을 하고 있지 않은가?
밀리안이 자리에서 일어나 나가려는데 웅웅거리는 소리가 한편에서 들렸다. 그의 시선이 선반 위에 올려진 작은 돌로 향했다. 돌이 옅은 빛을 내뿜으며 진동하고 있었다. 아주 약한 빛이었지만 어두운 곳에서 제 존재를 알릴 정도는 되었다.
밀리안이 이상하다는 얼굴로 자신의 품에 있던 돌 하나를 꺼냈다. 전쟁 나가기 전 토토가 준 돌로, 정령석은 아니지만 프레아의 영류와 토토의 기운이 담겨 있었다.
밀리안이 자신의 손에 있는 돌과 웅웅거리는 돌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분명 다른 느낌인데 어딘가 닮은 모양새였다. 토토가 그를 위해 돌에 기운을 불어넣은 것처럼 저 돌에도 무언가가 들어가 있는 것 같았다.
선반 위 돌이 얕게 떨렸다 멈추기를 반복했다. 한참 뒤 밀리안은 그 속에 살아 있는 생명이 잠들어 있다는 걸 깨달았다. 가까이 가보니 중요한 돌인지 주변에 프레아가 걸어둔 결계가 느껴졌다.
“정령석이군.”
밀리안이 낮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이렇게 중요한 걸 왜 이렇게 잘 보이는 곳에 두었나 싶었지만 결계가 쳐져 있으니 걱정할 필욘 없어 보였다. 밀리안이 다시 품에 돌을 넣곤 걸음을 돌려 방을 나갔다.
* * *
시에라가 커튼을 걷자 햇살이 프레아의 눈가를 어지럽혔다. 프레아가 잔뜩 눈을 찡그리며 손으로 햇살을 가렸다. 언제 잠들었는지도 모르게 잠이든 모양이다. 분명 마차 안이었는데……. 프레아가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았다.
“좋은 아침이에요, 아가씨.”
그때 시에라가 프레아를 향해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좋은 아침이야, 시에라.”
프레아가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로 대꾸하곤 배시시 웃었다. 일어날 시간이었다. 프레아가 주섬주섬 자리에서 일어나 침대 헤드에 몸을 기대자 시에라가 물잔을 건네며 물었다.
“어제 많이 피곤하셨어요?”
“응?”
아직도 잠이 덜 깬 목소리로 프레아가 되물었다. 시원한 물이 목구멍을 타고 들어가니 잠이 슬슬 깨어갔다. 시에라가 맑은 목소리로 설명을 보탰다.
“도련님께서 아가씨를 방으로 옮기셨어요.”
“아…….”
프레아가 입을 벌리며 탄성을 내뱉었다. 햇살이 나른해서, 마차의 움직임이 규칙적이어서, 자기도 모르게 꾸벅꾸벅 졸던 것이 떠올랐다. 밀리안이 어깨를 빌려준 것까지 기억나자 프레아가 마른세수를 했다.
“왜 하필 거기에 기댔니 과거의 나야.”
“아가씨?”
시에라가 프레아의 영문 모를 소리에 고개를 갸웃거리자 프레아가 끙, 하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렇게 깊게 잠들 줄은 몰랐다. 아마도 긴장이 풀려서 잠이 온 모양이다. 코헨 성에 있는 내내 몸에 힘을 주고 있었으니까.
프레아가 흐물거리며 욕실로 향하다 말고 선반 위에 올려진 정령석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어이없는 목소리로 작게 중얼거렸다.
“더 작아졌잖아?”
프레아가 황당한 얼굴로 돌을 매만졌다. 이제는 거의 손가락 두 마디 정도밖에 되지 않는 크기로 변해 있었다. 그때 토토가 현신하지 않은 채 머릿속에서 공명하며 말했다.
-그때 그 정령석인가?
-맞아.
프레아가 덩달아 머릿속으로 신호를 보냈다. 혼자서 입 밖으로 말하면 시에라가 이상하게 쳐다볼 걸 염두에 둔 것이다. 시에라는 뒤에서 잠자리를 정리하고 있었다.
-작아진 게 아니라 본래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 같은데? 저길 봐. 거무튀튀한 것들 사이로 붉은빛이 보이잖아.
-정말이네. 원래 붉은 돌이었구나.
프레아가 정령석을 손으로 문질렀다. 거무튀튀하고 볼품없는 색으로 저를 가리고 있었던 모양이다. 일종의 보호색처럼. 정령석은 요 며칠 순식간에 크기를 줄였다.
전에는 작아진 줄도 모르게 작아져서 나중에야 알아챘었는데, 이렇게 갑자기 줄어들다니. 이상한 징조였다. 토토가 흐음, 하더니 덧붙였다.
-기운도 전보다 강해졌어. 죽지는 않겠네. 아마 치명상을 당했던 모양이야.
-그래? 다행이다. 안 그래도 걱정돼서 스승님한테 여쭤보려 했어.
-잠깐, 이제 보니 언령이 걸려 있군. 깨어나기 쉽지 않겠는데?
프레아는 의아해 질문했다.
-언령이라니? 그럼 이미 계약한 정령이라는 거야?
-확실하지 않지만 계약자는 이미 죽은 것 같다. 죽기 전에 정령을 보호하려 언령을 사용한 모양이야. 계약자가 정한 사람이 아니면 못 풀어, 이거.
“말도 안 돼.”
프레아가 놀라 저도 모르게 입 밖으로 소리를 냈다. 이에 시에라가 잠자리를 정돈하다 말고 대답했다.
“네? 저한테 하신 말씀이세요, 아가씨?”
프레아는 시에라를 보며 고개를 내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시에라가 잠자리를 다 정돈하곤 생각났다는 듯이 프레아에게 다가와 말했다.
“아 맞다, 어제 브레이크 씨에게 전보가 왔었어요.”
“스승님이?”
프레아는 브레이크의 전보라는 말에 시에라를 빤히 보았다. 시에라는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프레아는 마침 정령석도 생각났겠다, 얼른 물어봐야겠다 싶어서 다시 물었다.
“뭐라고 왔는데? 이번 주에는 오신대?”
“아뇨, 일이 생겨서 이번 주에도 못 오실 것 같대요. 어쩐지 다급해 보이셨어요.”
“도대체 이 스승님은 뭘 하고 돌아다니는 거야…….”
프레아가 김빠진 얼굴로 정령석을 내려놓았다. 도대체 찾는 물건이 뭐길래 그렇게 싸돌아다니는지. 말을 해주면 돕기라도 할 텐데. 이 고집스러운 스승은 도움을 청하지도 않았다.
“혹시 브레이크 씨에게 전하실 말씀 있으세요?”
시에라는 그의 전보에 답신할지 여부를 물었다. 이에 프레아는 단단히 일러주듯 말했다. 괜한 화풀이였다.
“자꾸 이런 식으로 나한테 일 몰아줄 거면 스승님이 대표 하라고 전해줘. 이건 뭐, 내가 을이고 스승님이 갑인 거 같잖아. 자리에 있는 꼴을 못 봐요!”
프레아가 뚱한 얼굴로 외치자 시에라가 풉,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프레아가 그런 시에라를 퉁명스럽게 보자 시에라가 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마음에도 없는 소리 하시긴.”
“진심인데.”
“메샤르 일 좋아하시잖아요. 일은 좋아하는 마음이 없으면 그렇게 열심히 못 한답니다, 아가씨.”
시에라의 말에 한참 생각하던 프레아가 넌지시 물었다.
“그럼 시에라도 내 시중드는 일이 좋아서 그렇게 열심히 하는 거야?”
“그럼요.”
시에라가 고민 없이 바로 대답했다. 프레아는 새삼 감동해 시에라를 와락 안으며 배시시 웃었다.
“예뻐, 예뻐.”
시에라는 수줍게 미소 짓곤 프레아의 귓가에 속삭였다.
“아가씨가 더 예뻐요.”
* * *
프레아의 생일이 다가오자 에드모어 성은 분주해졌다. 매년 이맘때 성대한 생일 파티를 3일간 열었지만, 이번에는 조금 달랐다. 딱 생일 당일에 파티를 연 뒤 다음 날 가족 여행을 가기로 한 것이다.
장소는 남부의 휴양지였다. 남부는 기후가 온화해 여름 피서지로 유명한 곳이었다. 그중 에드모어가 아니면 입장조차 안 되는 가문 소유의 섬이 있었다. 외딴곳에 위치한 포르 섬이었다.
프레아도 몇 번 갔었는데 한적하고 좋아서 즐겨 찾는 곳이었다. 프레아가 생일에 앞서 도착한 선물들을 살피고 있는데 우체통에서 띠링, 하고 맑은 음이 들렸다.
소리를 들은 그녀가 곧장 금고 앞으로 갔다. 우체통을 열자 안에는 편지와 함께 작은 상자가 있었다. 프레아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편지와 상자를 꺼냈다. 상자는 아주 예쁘게 포장되어 있었다.
[누님의 생일 선물을 산 김에 체리 님 것도 골라보았습니다.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군요.]
실버가 보낸 선물이었다. 정체가 들통날까 봐 일부러 생일이라고 말도 안 했는데 뜻밖의 선물을 받아 기분이 좋았다. 물론 실버는 생각도 못 하고 준 거겠지만 자신이 생각나서 샀다는 말이 기뻤다.
프레아가 들뜬 얼굴로 상자 위 포장을 뜯었다. 상자 안에는 백금 팔찌가 들어 있었다. 별이 박힌 것처럼 반짝거리는 청색의 탄자나이트가 자잘하게 장식된 독특한 디자인이었다.
프레아가 감탄하며 얼른 팔에 팔찌를 둘렀다. 맞춤 제작한 것처럼 손목에 착 감겼다.
[일전에 도움을 준 덕분에 오랜만에 가족 여행을 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당분간 연락하기 어려울지도 모르겠습니다.]
프레아도 마침 여행을 갈 예정이라 오히려 반가운 말이었다. 안 그래도 우체통을 어떻게 숨기고 가져가나 했는데 다행이었다. 프레아는 편지를 마저 읽다가 멈칫했다. 마지막 줄 때문이었다.
[여행을 마치고 오면 체리 님을 뵙고 싶습니다.
저랑 만나주시겠습니까?]
사실 만나자고 해야지 하면서도 여태 말하지 못한 건 순전히 두려워서였다. 혹시라도 거절당할까 봐. 밀리안의 방해에 쉽게 이별을 고할까 봐 불안했다.
그런데 실버 쪽에서 먼저 만나고 싶어 하다니. 어쩐지 기쁘면서도 불안하기만 했다. 프레아가 한참 멍하니 카드와 팔찌를 보았다. 더 이상 미루다간 이도 저도 되지 않을 게 분명했다.
걱정된다고 마냥 빙빙 돌아갈 수는 없는 일이다. 그녀는 결심한 얼굴로 선물 잘 받았다는 말과 만날 날을 기대하겠다는 답장을 써서 보냈다.
* * *
생일 당일이 되자 프레아는 아침부터 치장하느라 바빴다. 머리카락을 위아래로 나눈 뒤 윗머리를 반으로 나누어 곱게 땋아 예쁜 장미 모양으로 머리를 묶었다. 머리카락 사이사이에는 반짝거리는 실들을 연결해 조명에 비칠 때마다 은은한 빛을 뿜었다.
“아가씨, 이거 끼실 거죠?”
시에라가 아마릴리스 머리 장식을 꺼내며 물었다. 이에 프레아가 한참 고민하더니 그 옆에 있는 은색 티아라를 가리켰다.
“아니야, 오늘은 이걸로.”
“웬일이세요? 좋은 날엔 항상 이걸 끼셨으면서.”
“어쩐지 알고 싶지 않은 정보를 알게 될 것만 같아서…….”
프레아는 시에라가 든 머리 장식을 다시 보석함에 넣으며 말했다. 그녀는 차마 진에게 머리 장식의 의미를 물어보지 못했다. 진이 별말 없는 걸 보면 크게 문제 될 것은 없어 보였지만 어딘지 찜찜한 탓이었다.
아무 의미가 없는 물건이면 밀리안이 그렇게 의미심장하게 말하지 않았으리라. 괜히 진에게 물어보았다가 그게 정말 대단한 물건이란 걸 알게 된다면 조금 당황스러울 것 같았다.
게다가 진에게 추궁이라도 당하게 된다면 밀리안이 저를 좋아한다는 걸 실토해야 할지도 몰랐다. 그냥 모르고 넘어가는 것이 최선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치장을 마친 시에라가 거울 앞에 서 있는 프레아를 향해 다정히 말했다.
“생일 축하해요, 아가씨.”
“고마워, 시에라.”
프레아가 뒤돌아보며 배시시 웃었다. 매번 저를 아껴주는 그녀가 고마웠다. 그때 누군가 노크를 하고 들어왔다. 집사 랭이었다.
“생일 축하합니다, 아가씨.”
“고마워, 랭.”
프레아가 랭에게도 밝게 웃으며 대답했다. 랭은 전할 말이 있는지 조금 뜸을 들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가씨, 혹시 코헨 가문의 머제리 영식도 파티에 초대하셨나요?”
“음? 아니?”
‘그럴 리가.’
프레아는 고개를 내저었다. 아무리 너도 나도 초대하는 파티라 한들 마법사를 초대할 리가 없지 않은가? 프레아의 반응을 본 랭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랭은 더는 묻지 않고 방문을 닫았다. 어쩐지 엄숙해 보였다. 그가 뜬금없이 머제리 이야기를 할 리가 없을 텐데……. 의아해진 프레아가 궁금증을 담고 시에라를 응시했지만, 그녀도 딱히 왜 저러는지 알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시에라와 함께 마지막으로 파티장의 상황을 확인하려 걸음을 옮기는데 입구 쪽이 소란스러웠다. 그 소리를 들은 프레아가 고개를 갸웃했다.
“이게 무슨 소리지?”
“음, 글쎄요. 확인하고 올까요?”
시에라도 덩달아 고개를 갸웃했다. 점점 소란스러운 목소리가 커지고 있었다. 그 순간 쾅 하는 굉음이 들렸다. 프레아가 놀라 웅성거리는 곳으로 뛰어 내려갔다.
“아가씨 뛰시면 안 돼요! 그러다 머리가 다 망가지겠어요!”
시에라가 뒤따라오며 다급하게 소리쳤다. 소리가 난 곳은 입구였는데, 그곳에 랭이 신음하며 한쪽 벽에 쓰러져 있었다. 그리고 랭의 복부를 머제리가 밟고 있었다.
프레아의 머리가 차게 식었다. 이게 무슨 행패인지 몰라 머제리를 노려보았다. 마침 프레아가 달려오자 잘되었다는 듯이 머제리가 말했다.
“내가 말했지. 두고 보자고.”
“…….”
“갚아주러 왔어.”
그가 오른손에 주렁주렁 낀 반지를 흔들었다. 마석이 박힌 반지였다. 싸울 준비를 아주 제대로 하고 온 모양이다.
뭐 이런 참신한 미친놈이 다 있지?
프레아가 그를 황당하다는 얼굴로 응시했다. 설마 이렇게 대뜸 찾아와 행패를 부릴 줄은 몰라 어이가 없었다. 그녀가 헛웃음을 내뱉으며 그의 앞으로 다가갔다.
“이게 무슨 짓이죠, 머제리 영식.”
“그러니까 누가 거짓말하래? 왜 말 안 했지? 네가 이 집 딸이라는 거.”
머제리가 당당히 팔짱을 꼈다. 태도를 보아하니 어서 자신에게 거짓을 고한 걸 해명하라는 것 같았다. 후작의 아들이 공작의 딸에게 이렇게 당당한 게 어이가 없었지만 굳이 따져 묻지 않았다.
그가 왜 코헨의 망나니라고 불리는지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애꿎은 집사 하나를 때려놓고 이렇게 당당하다니. 생일에 거하게 한 방 먹여주니 아주 고마울 지경이었다.
분명 오늘이 그녀의 생일이란 걸 알고 왔을 게 뻔해서 그대로 당해주고 싶지 않았다. 프레아가 침착한 얼굴로 말했다.
“시에라, 우선 랭 부축해서 치료실로 데리고 가.”
“네, 아가씨.”
이미 굉음을 듣고 달려온 기사들이 머제리 주변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물론 머제리는 이쪽에서 그러든지 말든지 콧방귀를 뀌었다. 마법에 자신 있다는 얼굴이었다. 프레아가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
“선전포고인가요?”
“선전포고라면 네가 먼저 했잖아.”
“제가요? 그럴 리가. 그쪽이 먼저 추행했잖아요?”
“추행이 아니라 작업이겠지.”
추행이라는 말에 머제리가 눈썹을 꿈틀거렸다. 그의 말도 안 되는 변명에 프레아가 조소했다.
“영식은 작업과 추행을 구분하지 못하는 머저리였군요.”
“머저리라고 하지 마!”
쾅!
머제리가 옆에 있던 가구를 마법으로 부쉈다. 이에 뒤에서 지켜보던 시녀들이 벌벌 떨었다. 기사들은 어느새 프레아 주변을 보호하며 그에게 검을 겨누었다. 머제리가 공격을 두 번이나 한 이상 기사들이 이대로 그를 공격해도 됐다.
하지만 프레아는 기사들에게 가만히 있으라는 눈빛을 보냈다. 그건 저쪽에서 원하는 시나리오라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프레아가 머제리의 속을 살살 긁었다.
“머저리 같아서 머저리라고 하는데, 머저리라 하지 말라고 하시니 어떻게 불러야 할지 모르겠네요. 머저리 영…… 아니, 머제리 영식.”
“미쳤나, 이게.”
머제리가 프레아를 향해 손을 올렸지만 그의 의지와 달리 프레아를 위협하지 못했다. 보이지 않는 바람이 머제리의 팔을 꽉 붙잡은 탓이었다. 머제리가 헛웃음을 내뱉었다.
“내가 이래서 정령사가 싫다니까. 잔꾀나 부리고 말이야. 이봐, 프레아 레이첼 에드모어. 운 좋게 귀족으로 태어난 걸 다행으로 알아야지 왜 가만히 있는 마법사를 건드려.”
머제리가 잔뜩 비아냥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운 좋게 후작으로 태어나 떵떵거리고 사는 게 누군데. 적어도 그가 할 말은 아니었다. 프레아가 부서진 가구 쪽을 보며 말했다.
“손해배상은 따로 코헨 가문에 청구하겠습니다. 어쨌든 저도 그쪽을 위협했었으니 이걸로 서로 합의를 보죠.”
“합의? 무슨 합의? 난 아직도 그날만 생각하면 머리에 피가 몰리는 기분인데.”
“그럼 어떻게 하고 싶으시죠, 머제리 영식.”
“우린 해야 할 일이 있잖아?”
그가 그리 말하며 장갑을 벗기 시작하자 기사들이 동요했다. 프레아는 그제야 머제리가 온 이유를 알고 피식 웃었다. 왜 저렇게 마석을 주렁주렁 매달고 왔나 했더니. 머제리가 장갑을 프레아의 발치에 던졌다. 자신만만한 얼굴이었다.
“결투다.”
“진심인가요?”
프레아가 여유롭게 물었다. 마법사가 정령사에게 결투 신청을 했다. 이게 무슨 의미인지는 그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어느 쪽을 보든 진 쪽은 망신을 당하고 두고두고 불명예로 남을 일이다.
마법사는 정령사를 사람 취급하지 않았고, 정령사는 마법사를 혐오했으니까. 이 결투가 밖으로 새어 나가면 패배자는 그 치욕을 감내해야 한다.
즉, 자신이 속한 집단을 건 결투나 마찬가지였다. 그녀에게 모욕을 당한 것이 어지간히도 분했던 모양이다. 머제리가 턱을 올리며 말했다.
“당연하지. 나중에 봐달라고 울지나 말라고.”
“제가 이 결투를 해서 얻는 건 뭐죠?”
프레아가 팔짱을 꼈다. 이미 장갑이 던져졌으니 무르는 것도 모양 빠지는 일이다. 이왕 얻어진 기회, 이 기회를 프레아가 놓칠 리 없었다.
프레아가 머제리를 여유롭게 바라보았다. 상대도 안 될 것 같은 자가 싸우자고 왈왈 짖는 것이 우습기만 했다. 프레아의 물음에 머제리가 당당히 말했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네가 이기면 오늘 내가 한 일에 대한 배상을 배로 해주지.”
“배상해 주는 건 승패와 관련 없이 당연히 해야 하는 거고요. 굳이 그 쥐꼬리만 한 배상을 받아야 할 정도로 레이첼과 에드모어가 궁하지도 않아요.”
“그럼 원하는 게 뭐지?”
머제리가 재미있다는 듯이 실실 웃으며 물었다. 뭘 걸든 이길 자신이 있다는 얼굴이었는데, 모르면 용감하다는 말이 딱 어울렸다.
“이건 어때요? 이기면 한 달간 상대 쪽의 개가 되는 건? 마침 메샤르 일이 많아서 잔심부름꾼이 필요했거든요. 마법사시니 일에 비해 좀 고급 인력이긴 하지만요.”
“……뭐?”
머제리가 저를 평민들이나 하는 심부름꾼으로 삼으려는 것을 듣자 인상을 찌푸렸다. 게다가 ‘개’라는 어감이 좋지 못해 표정 관리를 못 했다.
프레아는 아랑곳하지 않고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머제리의 약을 살살 올렸다. 정령사 밑에서 일하라는 것이 그에게 어떤 의미인지 알고 한 말이었다.
“어머, 설마 정령사 따위에게 질까 봐 겁먹으신 건가요? 그럼 눈감아줄 테니 장갑 줍고 돌아가시든가요.”
“누가 겁먹었대? 좋아! 이 결투에서 지는 사람은 곧장 그 사람의 개가 되는 거다. 두고 봐. 매일 내 밤 시중을 들게 할 테니까.”
밤 시중이라는 말에 기사들이 발끈하며 몸을 들썩였다. 프레아는 그런 기사들을 막아서며 서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는 밤 시중이라는 도발에 꼼짝하지 않았다.
“들었지? 이 내용 그대로 서약서 써서 가지고 와.”
어차피 말이 통하지 않는 상대는 직접 당해봐야 알아듣는 법이다. 아무리 말로 설명해도 못 알아들으니 직접 알게 하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프레아의 명령에 기사가 당황한 기색을 띠었다. 밤 시중이라는 말 때문이었다. 그것까지 서약서에 적을 순 없었다. 차라리 이 일을 공작님께 알리는 게 좋지 않을까 하는 갈등이 일었다.
“어서.”
그녀는 우물쭈물하는 기사를 향해 어서 가져오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이에 그가 서둘러 종이와 펜을 들고 왔다. 기사는 떨리는 손으로 들은 내용 그대로 서약서를 작성해 프레아와 머제리 앞에 내밀었다.
프레아와 머제리가 각각 정령술과 마법을 이용해 서명했다. 절대 무를 수 없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좋아요, 따라오세요.”
“옷은 갈아입는 게 좋을 텐데. 안 그럼 넝마가 돼서 생일을 맞이하게 될걸?”
“역시 생일인 줄 알고 왔네요. 치졸해라.”
프레아가 잔뜩 비아냥거렸다.
“흥, 난 내가 당한 수욕은 꼭 갚아주자는 주의라.”
아아, 그래서 밀리안한테는 갚아주었나요? 소문에는 밀리안만 보면 벌벌 떤다던데……. 프레아가 머제리 쪽을 슬쩍 응시했다. 결투 후 그가 저를 봐도 벌벌 떨려나 싶어서였다.
“갈아입을 새가 없어서요. 누가 예의도 없이 생일 당일에 찾아왔으니 말이에요. 괜찮으니 맘껏 공격하세요.”
“그렇게 말한다고 봐줄 생각 없어.”
“안 봐줘도 돼요.”
어차피 봐가면서 싸울 수도 없을걸요? 뒷말은 상큼하게 웃음 뒤로 숨겼다.
프레아는 머제리를 에드모어 성 뒤편에 있는 대련장으로 안내했다. 에드모어에 소속된 기사들이 훈련하는 공터였다. 머제리가 거드름을 피우며 프레아를 따라갔다.
결투가 시작되자마자 그가 프레아에게 선제공격을 했다. 손가락에 주렁주렁 낀 마석 반지들이 빛을 내며 마나를 증폭시켰다. 영애 하나 잡겠다고 완전 무장하고 온 본새가 추잡했다.
프레아는 간단하게 바람막으로 공격을 막고는 토토를 소환했다. 토토가 거대한 위용을 자랑하며 머제리 앞에서 으르렁거렸다. 머제리가 그런 토토를 보곤 조소하며 이죽거렸다.
“흥! 덩치만 크면 다 센 줄 아나 보지?”
“그러는 머저리 씨는 입으로 싸우면 이기는 줄 아는가 봐요.”
“머제리라니까!”
“아, 죄송.”
프레아가 두 손을 과장되게 들며 미안하지도 않으면서 사과했다. 머제리는 자꾸 저를 보고 머저리라고 하는 프레아에게 약이 바짝 올랐다. 그가 손가락에 낀 마석 다섯 개를 모두 증폭시키며 거세게 공격해 왔다.
* * *
“으아아악!”
처절한 남자의 비명이 에드모어 성 뒤에서 이어졌다. 머제리가 입고 있던 긴팔은 어느새 반팔이 되었고, 바지 역시 너덜너덜했다. 여기저기 생채기 난 팔뚝과 다리에서는 피가 뚝뚝 흘렀다.
그와 달리 프레아는 드레스 자락 하나 그을음 없이 멀쩡했다. 그 자리 그대로 서서 흉흉한 미소를 띠며 머제리를 공격하고 있었다. 머제리는 프레아의 손가락 하나 건드리지 못하고 도망 다니기 바빴다.
그때 토토가 커다란 입으로 머제리의 허리를 앙, 하고 물었다. 물론 죽이려고 했다면 이미 두 동강 났을 거다. 토토는 일부러 죽지 않을 정도로 조절해 물었다. 토토에게 대롱대롱 매달린 머제리가 애처롭게 부르짖었다.
“그마아아안!”
“항복하시는 건가요? 벌써?”
“정령사가 뭐 이렇게 세! 으아아악.”
머제리가 분하다는 듯이 비명을 질렀다. 아직 정신을 못 차렸나 싶어 프레아가 토토를 쳐다보자 토토가 머제리를 물고 도리질했다. 머제리가 어지러운지 우욱, 헛구역질했지만 토토의 도리질은 계속되었다. 잠시 뒤 머제리가 얼굴이 하얗게 질려 소리쳤다.
“항보오옥! 내가 졌다고 이 미친 정령사야!”
머제리가 눈물 콧물을 쏟았다. 이에 토토가 웩, 하고 머제리를 바닥에 뱉어냈다. 토토의 침으로 흥건해진 허리께를 신경 쓸 정신도 없이 머제리가 바닥에 엎드려 구역질하기 시작했다. 어지러웠던 모양이다. 머제리 앞으로 다가간 프레아가 아주 상냥한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멍멍아.”
“…….”
머제리가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프레아가 상쾌한 목소리로 머제리를 ‘멍멍이’라고 칭했기 때문이다. 이미 서약도 했고 무를 수도 없는 상황이다. 그는 그녀의 개가 된 셈이었다.
“어라? 주인한테 대답을 안 하네. 벌을 주어야 하나.”
프레아가 고개를 갸웃했다. 아무런 악의도 없다는 순진무구한 얼굴이었지만 머제리는 그 얼굴이 무척 사악하다고 생각했다.
“주, 주인님…….”
머제리가 분한 목소리로 띄엄띄엄 말했다. 이에 프레아가 머제리와 눈높이를 맞추며 해사하게 웃었다.
“주인님 소리도 듣기 좋네. 특히 마법사한테 들으니 더 유쾌해.”
“…….”
“그러게 사람 봐가면서 덤벼야지. 아까운 시간 다 보냈잖아. 파티에 늦으면 책임질 거니, 멍멍아?”
“……죄, 죄송합니다.”
머제리가 침통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프레아는 그가 의기소침해 있든 말든 관심 없었다. 완전 기가 팍 죽은 모습을 보니 유쾌해 죽을 지경이었다.
물론 마음 한편에선 적당히 하자고 중재하고 나섰지만. 그는 말끔한 복장으로 왔던 것과 달리 완전 거지꼴이었다. 프레아가 손수건을 꺼내 그의 입가를 쓱쓱 닦아주었다.
“내 생일은 어떻게 알고 이렇게 손수 선물이 되어주었을까.”
머제리의 입술이 부들거렸지만 그녀는 모른 척했다. 더러워진 손수건을 그의 앞에 던지곤 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멍멍아, 손.”
프레아가 머제리에게 손을 내밀었다. 명백한 모욕이었지만 이미 서약서까지 쓴 마당이라 그는 거역할 수 없었다. 거부했다간 그대로 서약을 위반해 고소당하는 것뿐만 아니라 기간이 두 배로 연장될 게 뻔해서였다.
왜 하필 기간을 한 달씩이나 했나 싶어 침통하기만 했다. 머제리가 떨리는 손을 들어 프레아의 손 위에 포갰다. 프레아가 그런 머제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이, 착하다.”
“으으…….”
머제리가 이젠 눈물을 뚝뚝 떨어뜨렸다. 태어나서 이런 모욕은 처음이었다. 프레아가 머제리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밤 시중이 뭐 어쩌고저쩌고했더라.”
“…….”
“어디서 그런 저급한 말을 배웠어? 멍멍아?”
“자, 잘못…….”
머제리가 사죄하는 기색을 띠며 말하려는데 프레아가 그의 입을 막았다. 더 이상 말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그녀의 손가락에 닿은 입술이 바들바들 떨렸다. 프레아는 그런 머제리를 보며 세상 해맑은 얼굴로 말했다.
“너 완전 잘못 걸렸단다. 네 말대로 내가 미친 정령사라서 뒤끝이 좀 있거든.”
“……제, 제발.”
머제리가 침통한 얼굴로 프레아를 처연히 바라보았다. 그녀는 그런 그를 가볍게 무시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곤 손바닥을 마주치며 명령했다.
“자, 멍멍아, 짖어보자.”
“……뭐?”
“음, 그건 개 소리가 아니잖아. 멍멍이는 멍멍! 하고 짖어야지.”
프레아가 손수 개 소리를 시범했다. 머제리가 마지막 인간의 존엄성을 잃고 싶지 않은지 머뭇거렸다. 하지만 프레아는 봐줄 생각이 없었다. 잠자코 짖을 때까지 기다리자 머제리의 입이 힘겹게 열렸다.
“멍…….”
“더 크게 짖어야지. 덩치는 크면서 목소리는 왜 그렇게 작니? 내 정령은 덩치도 크고 힘도 센데.”
“멍멍!”
머제리가 치욕스러워 눈물을 뚝뚝 흘리며 개 소리를 부르짖었다. 프레아가 그만하라고 할 때까지 계속해서 짖었다. 오래도록 에드모어 성 뒤편에서 이유 모를 개 소리가 들렸다. 사용인들은 사람이 짖는 소리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냥 지나가던 개가 짖는가 보다 했다.
프레아가 한참 좌절해 있는 머제리를 아주 유쾌하게 보고 있는데 뒤에서 누군가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참다 참다 터진 웃음소리 같았다.
“푸흐흐…….”
소리가 들린 방향을 쳐다본 프레아의 두 눈이 커졌다. 에시드가 배를 붙잡고 웃어대고 있어서였다. 평소 무미건조한 반응만 보이던 그가 우스워 죽겠다는 얼굴로 웃는 모습이 무척 생소했다.
“대공님?”
“아하하!”
프레아가 에시드를 부르자마자 에시드가 더욱 소리 내어 웃기 시작했다.
언제부터 보고 있으셨던 거죠?
프레아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에시드는 프레아가 저를 부르는 소리를 듣고도 계속해서 웃었고 머제리는 대공을 보자마자 수치심에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프레아는 우선 머제리를 보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머제리는 이미 사색이 되어 있었다. 아무래도 황족 앞에서 우스운 꼴을 보였기 때문인 것 같았다. 혹여라도 소문이 날까 봐 더 불안해하는 듯했다.
“멍멍아, 내일부터 메샤르에 출근해서 비숍이 시키는 잡일이나 하렴.”
“……멍?”
머제리가 사람이기를 포기한 것처럼 자연스럽게 개 소리로 물었다. 프레아가 그를 보며 답답하다는 듯이 말했다.
“이제 됐으니 집으로 돌아가라고.”
“……멍.”
머제리가 그렇게 말하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애처로워 보이는 뒷모습에 프레아가 선심 쓰듯 소리쳤다.
“사람 소리 내도 돼, 이제.”
“감사합니다…….”
프레아의 허락이 떨어지자 머제리가 사람 소리로 대답했다. 하나도 감사하지 않으면서 뱉은 빈말이라는 것쯤은 살포시 무시했다. 그는 돌아가라는 말에 비련의 여주인공처럼 흐느끼며 뛰쳐나갔다. 그 뒤로 에시드의 웃음소리는 계속해서 울렸다.
“일찍 오셨네요? 아직 파티가 시작되기 전인데.”
프레아가 멋쩍은 얼굴로 말했다. 어디서부터 본 건지 꺼림칙하기만 했다. 에시드가 겨우 진정하더니 대답했다.
“아, 파티에 참석하지 못할 것 같아 일찍 왔네.”
얼마나 웃겼으면 눈물까지 고여 있을까? 프레아는 아주 즐거워 보이는 에시드를 멍하니 응시할 뿐이었다. 그러다 시선이 그의 손으로 향했다.
그의 한 손에는 풍성한 장미꽃 다발이 들려 있었다. 프레아는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이미 저 꽃다발의 주인이 저라는 걸 알아서였다.
“바쁘면 굳이 안 오셔도 되는데.”
“내가 아쉬워서 말이지.”
에시드가 그녀가 내민 손을 보며 부드러이 웃고는 장미꽃 다발을 건넸다. 프레아가 꽃다발을 들어 꽃향기를 맡았다. 아주 진한 장미 향이 났다. 그녀는 에시드를 향해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고맙습니다.”
“붉은색을 좋아한다고 들어서.”
“맞아요, 좋아해요.”
프레아가 맑게 웃자 에시드가 덩달아 은은하게 미소 지었다. 한참 그렇게 웃으며 마주 보고 있는데 그가 주머니를 뒤적거리더니 작은 상자 하나를 꺼냈다. 에시드는 상자를 열어 프레아의 앞에 내밀었다.
“이게 진짜 선물.”
“아…….”
상자 안에는 곳곳에 루비가 박힌 금팔찌가 있었다. 프레아는 자신의 손목에 이미 걸려 있는 팔찌와 상자 안의 팔찌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팔찌 선물이 유행인 건가. 그때 에시드가 우물쭈물하더니 조심스레 물었다.
“직접 걸어줘도 되나?”
“그럼요.”
프레아가 아무것도 차지 않은 손목을 내밀자 에시드가 덤덤한 얼굴로 팔찌를 걸어주었다. 사락거리는 쇠붙이 마찰 소리가 들렸다. 그는 손을 놓아주지 않고 팔찌를 빤히 보았다.
“대공님?”
프레아가 의아한 목소리로 대공을 부르자 그가 낮게 말했다. 잡은 손도 꼭 쥐었다.
“파티에 참석 못 해 미안하네.”
“괜찮대도요.”
프레아가 너스레를 떨며 손을 떼어냈다. 그런 프레아를 멍하니 응시하던 에시드가 쓴웃음을 내뱉었다. 서운한 기색이 역력했다.
“내가 참석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모양이야.”
“그럴 리가요. 어쩔 수 없는 일이겠거니 하는 거죠.”
“그런가.”
여전히 대답이 뜨뜻미지근했다. 프레아의 무미건조한 반응이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다. 프레아는 그런 에시드를 보며 일부러 과장된 말투로 이야기했다.
“알겠어요. 가지 마세요, 대공님.”
“응?”
에시드가 놀란 눈으로 프레아를 빤히 보았다. 갑자기 단호한 목소리로 가지 마라고 해서였다. 프레아는 애써 험상궂은 얼굴을 만들었다.
“가기만 해요, 가면 두고두고 이 일에 대해 구시렁거릴 거예요.”
“그건 좀…….”
“그건 좀 뭐요?”
“아니야, 내가 미안하네. 그러지 마.”
에시드가 얼빠진 얼굴로 얼버무렸다. 그러지 마라면서 입가에는 미소가 번지려 했다.
좋아하는 것 같은데?
프레아는 그런 에시드를 기이한 동물을 보듯 쳐다보았다. 어느 부분에서 좋아하고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에시드가 한참 입술을 움찔거리며 미소를 참더니 화제를 돌렸다.
“그나저나 머제리 코헨과도 아는 사이인 줄 몰랐군. 마법사랑은 상종하지 않는 거 아니었나?”
“상종하고 싶지 않은데 상대해 달라고 하니 어쩌겠어요.”
프레아가 한숨을 푹푹 내쉬자 에시드가 유려하게 웃었다.
“아무래도 상대를 잘못 고른 모양이군.”
“저야 심부름꾼이 공짜로 생기니 좋죠.”
프레아가 뿌듯하게 말하자 에시드가 씨익 미소를 지었다.
“일찍 오길 잘했군. 덕분에 좋은 구경 했으니.”
“……혹시 다 보셨어요?”
“다 보았지.”
에시드가 유쾌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그의 반응을 보니 얼추 다 본 모양이다. 프레아는 어쩐지 민망해졌다.
아무리 그래도 인정사정 봐주지 않고 마법사를 눌러 버린 일이나, 그에게 개 소리를 짖게 한 것이 조금 과해서였다. 일반적인 귀족들이 할 만한 행동이 아니었다. 프레아의 염려를 알았는지 에시드가 덧붙였다.
“딱히 탓하지 않네. 날 얕보는 사람에게 본보기를 보여주는 것도 중요하니까.”
“머제리 일은 비밀로 해주세요. 그래도 그의 마지막 자존심은 지켜줘야죠.”
“이미 그 자존심도 바스러진 것 같던데.”
“어쨌든요.”
프레아가 능청을 떨자 에시드가 주억거리며 대답했다.
“비밀로 하지.”
그러곤 곧바로 회중시계를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가야 할 시간인가 보다. 그가 아쉬운 목소리로 말했다.
“이만 가봐야겠네.”
“조심히 가세요. 선물은 감사히 받을게요.”
“잘 어울려 다행이야. 웬만한 일이면 빠질 텐데 이번 건 좀 급한 일이라.”
“괜찮아요. 마음에 잘 담아둘게요. 팍팍 찔리라고.”
프레아가 장난 섞인 목소리로 투덜거리자 에시드가 부드러이 미소 지었다.
“그래, 언젠가 갚겠네.”
* * *
파티는 오후 때가 되어서야 시작했다. 프레아는 생일 축하한다는 말에 일일이 답하고 다니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녀에게 잘 보이려는 귀족이 줄지어 성으로 모였고 파티는 늦은 저녁이 되어서야 끝이 날 수 있었다.
파티 내내 밀리안을 찾았지만 그는 보이지 않았다. 프레아는 저도 모르게 서운한 감정이 몽글몽글 피어올랐다.
못 오면 말이라도 해주지. 그랬다면 기다리지도 않았을 텐데.
그녀는 샤워를 마치고 수면을 위해 따뜻한 카모마일차를 마시며 방에 딸린 테라스에 앉아 있었다. 시원한 밤바람에 머리칼이 나부꼈다. 그때 타닥거리는 소리와 함께 반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다행이다, 아직 안 자고 있었네.”
“밀리안?”
프레아가 놀란 얼굴로 나무에 올라타 있는 밀리안을 바라보았다. 멀쩡한 문을 놔두고 테라스로 뛰어들어 오려는지 나무에서 도약했다. 이에 놀란 프레아가 혹시라도 밀리안이 넘어질까 걱정하며 벌떡 일어나 붙잡았다.
“위험하게 왜 이리로 들어와.”
“자고 있으면 얼굴만 보고 가려 했지.”
밀리안이 저를 타박하는 프레아를 보며 곱게 미소 지었다. 그에게서 비릿한 피 냄새가 약하게 풍겼다. 프레아가 걱정스레 물었다.
“무슨 일 있었어?”
“아니야, 아무것도.”
“거짓말. 너한테서 피 냄새나.”
“이런. 지운다고 지웠는데 들켜 버렸네.”
밀리안이 어쩔 줄 몰라 하며 배시시 웃었다. 아무래도 이 상황을 무마하려는 웃음 같았다. 프레아가 표정을 풀지 않고 가만히 있자 밀리안이 달래기 시작했다.
“오늘 안에 일을 해결하려 했는데 이도 저도 아니게 됐어. 사실 지금 좀 허탈해, 다 잡은 물고기를 놓쳐 버렸거든.”
“다 잡은 물고기라니?”
“말할 수 있는 건 여기까지. 더 알면 다쳐.”
밀리안이 입술 위에 집게손가락을 올리며 쉿, 하는 소리를 냈다. 잠시 뒤 그가 프레아에게 가까이 다가가 물었다.
“많이 기다렸어?”
“안 기다렸어. 너무 재미있어서 네가 온지 안 온지도 몰랐어.”
프레아가 일부러 아무렇지 않은 척 밝게 대답하자 그녀를 가만히 응시하던 밀리안이 나직이 말했다.
“그런 것치곤 날 보자마자 반가워하던데.”
“…….”
“솔직하지 못한 건 여전하구나.”
밀리안이 낮게 웃었다. 프레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밀리안이 오지 않아서 아주 많이 서운했던 건 사실이었으니까.
이상한 점은 막상 그가 눈앞에 나타나니 화가 싹 풀렸다는 것이다. 오히려 바쁜 일을 마치고 지쳤을 법도 한데 뒤늦게라도 와준 것이 고마웠다.
“용서해 줄래?”
밀리안이 프레아를 향해 예쁘게 미소 지으며 선처를 바랐다. 딱히 사과할 일이 아니었음에도 제게 용서를 구하는 밀리안을 프레아가 빤히 바라보았다.
“응, 해줄게.”
“고마워.”
프레아의 용서에 밀리안의 눈이 부드러이 접혔다. 밀리안이 천천히 다가왔다. 프레아는 점점 가까워지는 밀리안을 멀뚱히 보았다. 뭐 하는 건가 하고 멍하니 있던 프레아는 그의 얼굴이 코앞까지 다가오자 놀라서 눈을 꽉 감아버렸다.
당황해 얼굴이 새빨개진 프레아는 시간이 지나도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자 조용히 실눈을 떴다. 밀리안이 여전히 코앞에서 자신을 보고 있었다.
그와 시선이 마주치자 그가 씨익 미소 짓곤 고개를 돌려 그녀의 귓가에 대고 달콤하게 속삭였다.
한순간 입맞춤을 하는 줄 알았는데…….
“생일 축하해.”
“……그냥 말해도 들리는데.”
어쩐지 민망해진 프레아가 귀를 애써 매만지며 투덜거렸다. 밀리안의 낮은 웃음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그가 다시 한번 부드러운 목소리로 속삭였다.
“너만 듣게 하고 싶어서.”
그의 맑은 목소리가 가벼운 웃음소리와 섞여 나부꼈다.
“어차피 둘밖에 없잖아.”
프레아가 민망해하며 밀리안을 밀어냈다. 어쩐지 심장이 콩닥거리는 게 이상한 기분이었다. 왜 귀에다 대고 이야기하는지 몰라 눈을 흘겼다.
순순히 밀려난 밀리안이 피식 웃더니 프레아의 눈앞에서 손을 펼쳤다. 그의 손에 예쁜 목걸이가 달랑거리고 있었다. 프레아가 커다래진 눈으로 목걸이를 바라보았다.
실버에게서 받은 팔찌와 세트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비슷한 목걸이였다. 프레아는 저도 모르게 숨을 참았다. 지금 실버를 두고 밀리안에게 심장이 뛴 건가 싶어서.
“이리 와봐.”
멀뚱히 바라만 보는 프레아에게 밀리안이 속삭였다. 프레아가 움찔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그의 뜻대로 해주고 싶지 않았다. 이에 밀리안이 다시금 프레아의 앞에 서더니 그녀의 머리카락을 한쪽으로 넘겼다. 그러곤 자연스레 두 팔로 프레아를 감쌌다.
“내, 내가 낄게.”
“가만히 있어봐.”
밀리안이 타이르듯 속삭였다. 프레아는 더 이상 무어라 하지 못하고 입을 꾹 다물었다. 귓가에 밀리안의 고른 숨소리가 닿았다. 목 언저리에서 움직이는 그의 손길에 긴장돼 프레아는 저도 모르게 눈을 꼭 감았다.
심장이 심하게 요동쳤다. 행여나 제 심장 소리가 밀리안에게 들릴까 조심하며 그녀가 두 손을 마주 잡았다. 밀리안은 아주 느릿한 동작으로 목걸이를 목에 걸었다. 한참 뒤 밀리안이 여전히 두 눈을 꽉 감고 있는 프레아를 향해 물었다.
“눈은 왜 감아?”
“그, 그냥!”
밀리안의 물음에 프레아가 멋쩍은 얼굴로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 모습을 본 밀리안이 재미있다는 듯 말했다.
“난 또 입 맞춰달라는 건가 했지.”
“아니거든!”
프레아가 강하게 부정하자 밀리안이 소리 내어 웃었다. 뭐가 그렇게 즐거운 건지 모르겠다. 프레아가 밀리안에게서 물러나려 하자 그가 그녀를 붙잡으며 진지한 어조로 말했다.
“맞아, 사실은 내가 입 맞추고 싶었어.”
“…….”
그런 말은 좀 떨어져서 해줄래?
프레아는 지금 무슨 말을 들었나 싶어 딱딱하게 굳었다. 도무지 이렇게 대놓고 좋다며 다가오는 밀리안이 이해되질 않았다. 이전에는 한 번도 좋아하는 티를 내지 않던 아이였다.
그런데 왜? 전쟁에서 무슨 일을 겪었기에 돌아온 이후 줄곧 이런 상태일까. 누나로서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모르겠다. 이런 복잡한 심장과 달리 프레아의 심장은 아까보다도 크게 뛰었다.
심장이 쿵쿵거리고 머릿속에서는 밀리안의 입 맞추고 싶었다는 말이 윙윙거렸다. 뭔데, 왜 콩닥거리는 건데. 프레아는 제 심장 소리가 커지는 것을 느끼곤 충격받아 자문했다.
그의 말을 들은 순간부터 몸이 제멋대로 반응하고 있었다. 겁을 먹어서 뛰는 건지, 좋아서 뛰는 건지 모를 일이다. 하지만 하나만은 확실했다. 불길한 징조였다.
“놀리지 마.”
프레아가 애써 밀리안을 탓했다. 한순간에 분위기가 이상해졌다. 아니, 자신이 이상해지는 것 같았다. 왜 자꾸 밀리안에게 끌려다니는 건지 알기 어려웠다.
혼란스러워하는 프레아에게 밀리안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곤 그녀의 소매 부근 옷깃을 슬며시 붙잡았다. 고작 옷깃이 붙잡힌 것뿐인데 시선이 붙들린 듯했다. 프레아는 그의 올곧은 눈동자와 마주치자 피하기 어려웠다.
“진심인데.”
“진심도 말하지 마.”
“그건 싫어.”
밀리안이 프레아의 말에 단호히 대답했다. 잡힌 옷깃이 형편없이 구겨졌다. 도무지 포기할 줄 모르는 밀리안에게 프레아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아니, 스스로에게 소리 지르고 싶었다는 쪽이 더 맞을 것이다.
“밀리안!”
“귀 안 먹었어. 작게 말해도 돼.”
“정말 왜 이러는 거야! ……우리 그동안 좋은 남매였잖아.”
프레아가 울먹울먹했다. 밀리안이 그런 프레아를 보며 짙은 한숨을 내뱉었다. 그 한숨조차 한없이 다정해서 프레아는 가슴이 조여왔다.
“너한테만 좋은 남매였겠지. 나는 아니었어.”
‘너에게만 좋았다’는 밀리안의 말에 그녀가 크게 상처받은 얼굴을 했다.
“난 가족을 잃고 싶지 않아.”
프레아가 중얼거리며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 프레아는 가족이라는 울타리를 참 좋아했다. 어쩌면 가져본 적 없던 가족이라서 더 집착하는 걸지도 몰랐다.
그런 안전한 울타리를 함부로 뚫으려는 밀리안이 야속했다. 그러면서도 싫지 않다고 느끼는 자신에게 혐오감이 들었다.
“너와 내가 어떻게 된다고 해서 가족을 잃게 되는 건 아니야, 프레아 레이첼.”
그가 부러 에드모어를 빼고 말했다. 그녀는 그에게 붙잡힌 옷깃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표정 관리를 하려 했으나 그가 한 말뜻을 알자 얼굴이 굳는 걸 막을 수 없었다.
그래, 그에게 자신은 그저 레이첼일 뿐. 처음부터 누나로 여긴 적 없다고 했었다. 프레아가 자조적인 웃음을 띠며 선언했다.
“네가 아무리 그래도 난 네 누나로 평생 살 거야.”
“그건 내가 용납 못 해.”
밀리안이 옷깃을 놓고는 프레아가 도망치지 못하도록 손을 붙들었다. 꽉 쥔 손은 강압적이기보다는 절박한 것 같았다. 프레아는 저를 붙잡은 밀리안의 손을 빤히 보았다.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말을 해야 할까, 말아야 할까.
입을 달싹였다. 지금 하고자 하는 말이 어떤 파문을 불러올지 짐작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더 이상 어중간하게 행동해서는 안 되었다. 밀리안에게 괜한 희망 고문하고 싶지 않았다. 망설이던 프레아가 한숨 섞인 목소리로 결국 운을 뗐다.
“나 좋아하는 사람 있어.”
“……뭐?”
밀리안이 얼빠진 얼굴로 프레아를 바라보았다.
“그 사람도 내가 좋다고 했어. 이 팔찌가 그 증거야!”
그녀가 손목에 찬 실버가 준 팔찌를 밀리안 앞에 내밀었다. 밀리안이 그 팔찌를 보자마자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잔뜩 굳어 있던 얼굴은 어느새 몰라보게 펴졌다.
“하…….”
밀리안이 프레아의 양심선언에 적잖이 충격을 받았는지 헛웃음을 내뱉었다. 그의 입꼬리가 내려갈 줄 몰랐다. 얼마나 충격적이었으면. 프레아는 차마 보기 힘들어 시선을 피했다.
그때 갑자기 밀리안이 한 손으로 제 얼굴을 가린 채 고개를 돌렸다. 그의 어깨가 여러 차례 크게 들썩였다. 밀리안은 깊은 심호흡을 여러 번 내뱉었다.
프레아는 그런 밀리안에게 또박또박 얘기했다. 어쩐지 그를 쳐다볼 수 없어 고개를 푹 숙인 채로.
“막무가내인 너와 달리 무척 다정하고 표현도 잘하는 분이야.”
이왕 말해 버린 김에 자신이 실버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낱낱이 말해줄 생각이었다. 아니, 그래야만 한다고 판단했다. 실버를 두고 밀리안에게 설렜다는 사실이 용납되지 않았다. 프레아는 스스로를 헤픈 사람이라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프레아의 말을 듣던 밀리안이 나직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리고?”
그의 잠긴 목소리에 프레아가 움찔거렸다. 그는 생각 외로 차분했고, 너무 차분한 그 때문에 마음이 많이 상해서였다.
‘마음 상할 것 없어. 밀리안이 차분하면 다행인 거잖아. 차라리 잘됐어. 이렇게 끊어내는 게 서로에게 좋을 거야.’
프레아는 도리질하며 더 매정하게 말했다.
“아직 얼굴은 모르지만 분명 무지무지 잘생겼을 거고.”
“그래, 그렇겠지.”
“뭐?”
“아니야, 더 말해봐.”
밀리안의 중얼거림에 프레아가 날 선 목소리로 되묻자 그가 대충 손사래를 치며 계속하라는 몸짓을 취했다. 어쩐지 그의 어깨가 들썩였다.
설마 우는 건 아니겠지?
프레아가 고개를 들어 그의 얼굴을 보려 했으나 그는 보여주지 않았다. 그녀는 밀리안의 반응이 영 이상해서 게슴츠레한 눈을 하고 다음 말을 이었다.
“그 사람도 나한테 홀딱 반했으니까 네가 아무리 방해해도 절대, 절대 날 포기하지 않을 거야.”
“그 사람‘도’라면 너도 그 사람이 진짜로 좋다는 거네.”
밀리안이 이제는 고개까지 끄덕거리며 여유롭게 프레아와 시선을 맞췄다. 분명 화낼 줄 알았는데 홍조까지 띠며 기뻐하다니. 왜 저런 표정을 짓는 거야? 꼭 부끄러워하는 것 같잖아.
너무 충격받아서 정신이라도 놓은 걸까. 저게 차이는 사람의 표정이 맞느냔 말이야. 프레아가 어쩐지 기분이 몹시 상해 더욱 힘을 주어 말했다.
“그래, 너무 좋아! 실버 님이 혹여 너 때문에 싫다고 해도 내가 끝까지 따라가서 결혼하고 말 거라고!”
“푸핫.”
프레아의 앙칼진 목소리에 밀리안이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가 한참을 소리 내어 웃었다. 그 모습을 본 프레아는 밀리안이 드디어 미쳤구나 싶었다. 그녀는 얼이 빠져 밀리안을 바라보았다.
지금 자기가 좋아하는 여자가 다른 사람이 좋다는데 웃어? 웃음이 나오느냔 말이야!
어쩐지 속에서 화가 끓었다. 물론 그녀는 스스로가 화난 상태라는 것도 인지하지 못했다.
“……웃어?”
프레아는 오히려 자신이 상처받은 얼굴로 밀리안을 바라보았다. 아니, 상처받다니. 이 무슨 망발인가. 애초에 밀리안을 떼어내려 한 말이니 그가 순순히 포기하면 당연히 기뻐해야 할 일이었다.
프레아가 얼른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어 잡념을 없애고 밀리안을 노려보았다. 여전히 그는 웃고 있었다. 너무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다. 그 모습을 보니 마치 그동안 자신을 좋아한다고 한 말이 장난이었나 하는 의심까지 들었다.
어쩐지 기분이 완전히 상해 버린 프레아가 붙잡힌 손을 떼어냈다. 밀리안이 제 손아귀에서 멀어지는 손을 다시 붙잡았다. 그러곤 무어라 할 새도 없이 프레아를 품에 안았다.
“이거 놔.”
프레아가 굳은 목소리로 말했다. 애써 침착하게 대처했지만 심장이 심하게 요동치고 있었다.
‘들키고 싶지 않아.’
프레아가 밀리안의 품에서 벗어나기 위해 안간힘을 쓰려는데 그가 달콤하게 속삭였다.
“사랑해.”
“……갑자기 웃다 말고 뭐? 지금 사람 가지고 놀아?”
프레아가 넋이 나간 얼굴을 하다 금세 찡그리며 반문했다. 프레아의 차가운 목소리에도 밀리안은 굴하지 않고 그녀를 품에 더욱 끌어안으며 고백했다.
“넌 지금 나한테 무슨 말을 한지 모를 거야.”
“……무슨 소리야.”
“네가 너무 좋아, 프레아.”
밀리안이 감정이 북받친 목소리로 읊조렸다. 기쁜 것처럼 달뜬 목소리였다. 프레아는 갑자기 웃다가 고백을 해오는 밀리안으로 인해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누군가 이 상황을 설명해 주었으면 싶었다.
그의 고백을 듣자마자 프레아의 심장이 이전보다 더 크게 요동쳤다. 프레아는 덜컥 겁이 났다. 혹시라도 그가 이 소리를 들을까 무서웠다. 그녀가 재차 품에서 벗어나려 했지만 그럴수록 더 깊이 안길 뿐이었다.
품속에서 심장 소리가 크게 들렸다. 이제 모든 게 끝장이라고 생각할 즈음 그 소리가 자신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밀리안에게서 들리는 소리였다.
프레아는 그 소리에 힘껏 밀어내려던 손을 가만히 내렸다. 그의 품처럼 무척 크고 기분 좋은 심장 소리가 빠르게 오르내렸다. 그 소리가 프레아의 가슴을 덩달아 울렸다.
프레아는 제 심장 소리인 줄 알았던 것이 그의 것임을 알고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손끝이 찌릿하고 어찌해야 할지 몰랐다. 그의 심장 소리가 너무 커서 프레아의 콩닥거리는 소리는 들리지도 않았다.
그가 프레아를 놓지 않으려는 것처럼 가득 끌어안았다. 그러곤 얼굴을 프레아의 어깨에 비볐다. 어찌나 세게 끌어안았는지 프레아는 숨이 다 막힐 지경이었다.
그의 심장 소리에 가만히 있던 것도 잠시, 정신을 차린 프레아가 밀리안의 가슴을 가볍게 방망이질하며 말했다.
“이, 이러지 마. 난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니까?”
“그래. 네가 좋아하는 건 실버야, 그렇지?”
밀리안은 그녀가 실버를 좋아한다는 것을 재차 확인하려 들었다. 그런 그의 태도에 어쩐지 프레아는 기분이 상해서 떨떠름히 대꾸했다.
“……그, 그래. 그러니까 이런 짓 더 이상 하지 마. 오해받기 싫어.”
“그렇구나.”
품에 안긴 터라 밀리안의 표정을 볼 수 없었다. 부드러운 목소리 뒤에 어떤 감정이 숨겨져 있는지 궁금하면서도 알고 싶지 않았다. 프레아는 눈을 질끈 감으며 애써 말했다.
“이제 내가 널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유를 말했으니까 포기하는 거지?”
“일단은.”
“일단이라고?”
밀리안의 모호한 대답에 프레아가 말꼬리를 붙잡았다. 포기한다는 건지 안 한다는 건지 애매했기 때문이다. 그때 밀리안이 프레아를 품에서 놓아주었다. 그제야 그의 얼굴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는 어쩐지 들떠 보였고, 예쁘게 접힌 눈은 프레아만을 좇았다. 그 모습이 어쩐지 몽환적으로 느껴졌다. 그의 입가에 미소가 끊이질 않았고 수줍은지 입술을 계속해서 움찔거렸다.
차인 사람이라고 느껴지지 않았다. 보통 차이면 인상을 써야 정상이 아닌가. 아니면 울든가, 매달리든가 해야 하는 게 아니었나. 밀리안의 반응은 프레아의 상식으론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결심한 얼굴로 해사하게 웃었다.
“고마워. 이렇게 확실하게 알려줘서. 이제 네가 바라는 진짜 가족이 되겠다.”
“……진짜 가족? 정말 이렇게 순순히 포기해 준다는 거야?”
진짜 가족이 되겠다는 말에 프레아의 머리에 번개가 일었다. 그 말은 포기한다는 말이나 마찬가지였다. 기뻐해야 하는데 기쁘지가 않았다. 가슴이 따끔거리고 어쩐지 그가 야속하게 느껴졌다.
아니, 야속할 이유는 없어. 한 번 설렌 거 가지고 호들갑 떨지 마.
프레아가 스스로에게 윽박질렀다. 그냥 낯설어서 그랬던 거다. 분명 예전처럼 지내다 보면 다시 자연스럽게 남동생으로 느낄 것이다. 프레아는 애써 기쁜 기색을 띠며 배시시 웃었다. 밀리안이 그녀를 마주 보며 눈을 곱게 접고 미소로 화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