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이 된 남동생이 남편이 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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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리 장편소설
목차
6장 프레아의 맞선 계획
7장 코헨의 딸과 망나니 아들
8장 포르 섬, 그 여행에서 생긴 일
9장 지름길에서는 맹수를 조심할 것
10장 인정하면 모든 게 편해지는 법
“밀리안 테일러스 후작님과 프레아 레이첼 에드모어 소후작님께서 입장하십니다.”
문지기의 외침과 함께 연회장의 문이 열렸다. 두 사람의 등장에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오늘의 축하연 주인공 중 하나인 밀리안이 입장했기 때문이다.
문이 열리기 전까지 밀리안과 옥신각신하던 프레아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부드러이 웃으며 홀 안으로 들어섰다. 밀리안은 그런 프레아의 태세 전환에 낮게 웃었다.
저 멀리 마리아가 보였다. 그녀의 옆에는 기사단 제복을 입은 남성이 서 있었다. 아마도 그녀는 지난번에 말한 고우 경의 파트너로 온 모양이었다. 제법 사이가 좋아 보였다.
프레아의 시선을 느낀 마리아가 연신 힐끗거리더니 몸을 돌렸다. 제 머리를 애써 매만지는 게, 저번에 경고한 것이 무서워서 그러는 듯했다. 프레아가 마땅찮은 얼굴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또 괴롭혔나 보네. 시선을 피하는 걸 보면.”
그때 밀리안이 프레아의 귓가에 대고 속삭이며 마리아를 눈짓했다. 프레아는 별거 아니라는 듯 담담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네가 가문을 나갔다는 걸 말하면서 놀렸거든. 그때는 네가 진짜로 나간 줄도 모르고 경고했는데.”
“그럼 멸치랑 대면했던 날이겠네. 그때 내가 말해줬으니까.”
“그랬지.”
프레아가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자 밀리안이 제 턱을 매만졌다.
“이상하네, 내가 가문을 나간 건 입성 전에는 말하지 말라고 했는데. 누가 얘기한 걸까.”
“고우 경인가 하는 사람이 알려줬다는데?”
“흐음, ……그래?”
밀리안이 ‘고우 경’이라는 말에 마리아 옆에 있는 남자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고우 경으로 추정되는 남자가 밀리안과 눈이 마주치자 반가운 얼굴로 다가왔다. 그가 다가오는 걸 본 밀리안이 아주 차갑게 웃었다.
밀리안의 태도를 보며 프레아는 어쩐지 심상치 않다고 생각했다. 괜한 말을 한 것 같아 밀리안과 고우 경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프레아는 해맑은 얼굴로 다가오는 고우 경에게 조언하고 싶었다. 도망치라고.
그가 가까워질수록 밀리안의 미소가 짙어졌다. 자고로 상사가 하지 말라고 한 건 하지 말아야 한다. 프레아는 보고 있기 안쓰러워 시선을 거뒀다.
초면에 미안합니다, 고우 경.
마리아는 둘과 마주하는 것이 불편한지 그에게 연신 눈치를 주었다. 물론 그걸 눈치채지 못한 고우 경이 호탕하게 웃으며 말을 걸었다.
“단장님, 축하드립니다!”
“고맙군.”
“밀리안 테일러스 경, 오랜만이에요.”
마리아가 그제야 떨떠름한 어조로 인사했다. 프레아에게는 시선도 주지 않았다. 밀리안은 그런 마리아를 본체만체하며 고우 경을 불렀다.
“고우 어웨이 경.”
“예! 단장님!”
어쩐지 힘이 잔뜩 들어간 고우 경이었다. 축하연 자리라서 그런 걸까, 한껏 들떠 보였다. 그의 눈빛엔 상사에 대한 존경심이 담겨 있었다. 하지만 그 눈빛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밀리안이 고우 경을 보며 말했다. 아주 담백한 목소리로.
“자네는 오늘부로 불사조 기사단에서 제명이다.”
“……예?”
“그런 줄 알고 그만 꺼지게.”
“다, 단장님!”
고우 어웨이 경이 당황한 목소리로 밀리안을 불렀다. 밀리안은 그를 차갑게 내려다보며 ‘얼른 안 꺼져?’ 하는 신호를 보냈다. 그때 안절부절못하고 있던 마리아가 소리쳤다.
“자, 잠깐만요 테일러스 후작! 이렇게 갑자기 인사 처리하는 법이 어딨어요?!”
“기사단 내부 조항에 따른 처분이니 상관하지 마시지요.”
밀리안이 싸늘한 표정으로 말했다. 경어체를 사용했지만 그의 말투는 전혀 마리아를 존중하고 있지 않았다. 고우 경은 상사의 처사가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절박한 목소리로 매달렸다.
“단장님! 제가 왜 제명되어야 합니까, 이유를 설명해 주십시오!”
“이유는 자네의 잘난 파트너에게 물어보게. 그녀가 대답해 줄 테니.”
“예? ……그게 무슨.”
고우 경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밀리안과 마리아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마리아 역시 자신이 그걸 어떻게 아냐는 얼굴이었다. 이에 프레아가 난감한 얼굴로 마리아에게 말했다.
“미안, 이렇게 될 줄은 몰랐어. 물론 이게 네게 사과할 일은 아니지만.”
“무슨 소리야?”
“아무래도 네가 고우 경에게 들었던 말이 기밀이었던 모양이야. 밀리안이 가문을 나간 거 말야.”
“잠깐, 마리아. 설마 그걸 말하고 다녔습니까? 제가 분명 혼자만 알고 있으라고 했잖습니까!”
고우 경이 프레아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마리아를 향해 호통쳤다. 마리아는 그런 고우 경에게 마주 소리쳤다.
“가족끼리는 이미 알고 있는 줄 알았죠! 지금 저한테 화내는 거예요?!”
마리아의 앙칼진 목소리에 고우 경이 세상을 다 잃은 표정으로 밀리안의 팔을 붙잡으며 애원했다.
“단장님, 잘못했습니다! 하도 단장님께 관심이 많길래 그냥…….”
“두 번 말하게 하지 말고 눈앞에서 사라지게. 다른 기사단을 알아보도록 해.”
밀리안의 단호한 태도에 고우 경이 망연한 얼굴로 프레아를 바라보았다. 프레아는 딱히 도와줄 생각도, 도와줄 이유도 없어서 고개를 저었다.
뭐, 어쨌든 마리아에게 말했다는 점에서 고우 경도 잘못이 있는 셈이니까. 물론 과하다는 점은 인정하지만. 밀리안 성격상 세 번 말하게 하면 그를 연회장에서 날려 버릴 것 같아 한마디 거들었다. 그녀 나름의 배려였다.
“몸 성히 돌아가고 싶으면 그냥 가세요, 고우 어웨이 경.”
“…….”
고우 경이 시무룩한 얼굴로 터덜터덜 연회장을 나가 버렸다. 마리아가 저를 두고 홀로 가버린 고우 경을 뒤따라가며 프레아를 향해 소리쳤다. 흡사 뒷걸음치며 도망치는 것 같았다.
“너 두고 봐!”
“두고 보라는 사람 중에 무서운 사람 본 적이 없는데.”
프레아는 이미 사라진 마리아 쪽을 향해 그리 중얼거렸다. 그러곤 밀리안을 바라보았다. 그는 지금 막 부하를 내친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아주 편안해 보였다. 프레아가 밀리안을 향해 조심스레 타이르듯 말했다.
“제명은 좀 심한데. 솔직히 금방 알려질 비밀이었고.”
“명령 불복종은 원래 가장 큰 잘못이야.”
“그러는 너도 명령 불복종해서 왕의 목을 따 왔잖아.”
“……똑똑하네, 프레아는.”
밀리안이 프레아를 향해 씨익 웃었다. 딱히 해명할 생각도 없는 듯했다. 원래 내가 하면 괜찮고 남이 하면 안 괜찮은 법이다. 진짜, 이런 상사 밑에서 일 안 하는 것만 해도 감사한 일 같았다.
고우 경, 부디 좋은 상사 만나 행복하세요. 프레아가 고우 경이 사라진 자리를 바라보며 축복했다. 그때 문지기가 다시 소리쳤다.
“클로드 반 헤로스 황태자 전하가 입장하십니다!”
그의 호령에 모든 이가 담소를 나누던 것을 멈추고 클로드를 향해 예를 갖추었다. 검은 머리에 황금색 눈동자를 지닌 그가 근엄한 표정으로 입장했다.
프레아와 밀리안 역시 그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프레아는 클로드와 눈이 마주쳤다. 클로드는 잠시 금안을 크게 뜨더니 기쁜 기색을 띠며 그녀를 향해 걸어왔다. 그 모습을 본 밀리안의 표정이 굳어갔다.
“지금 우리한테 오는 것 같지 않아?”
프레아가 눈치 없이 밀리안의 옆구리를 찌르며 말하자 밀리안이 인상을 팍 썼다.
“말 걸어도 무시해.”
“황태자 전하께……?”
“상관없으니까, 그냥 말도 하지 말고 눈 감고 있어.”
밀리안이 프레아를 제 뒤로 끌며 말했다. 어쩐지 굳은 그의 표정에 프레아의 입가가 슬며시 올라갔다. 원래 하지 말라면 더 하고 싶은 법이다. 어느새 다가온 클로드가 프레아에게 말을 걸었다.
“드디어 자네를 보는군.”
“처음 뵙겠습니다, 프레아 레이첼 에드모어입니다.”
“알지, 알지. 그간 밀리안에게 많이 들었네.”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십시오.”
밀리안이 클로드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으르렁거렸다. 하지만 그 말이 프레아의 호기심을 더욱 자극했다.
도대체 무슨 소리를 했길래?
프레아가 잔뜩 궁금한 얼굴로 클로드를 바라보았다. 클로드 역시 프레아를 아주 신기한 동물을 바라보듯 했다.
“쳐다보지 마.”
눈빛 교환을 본 밀리안이 프레아의 눈을 제 손으로 가렸다. 프레아가 밀리안의 손을 끌어 내리려 애쓰는데, 클로드가 말했다.
“사실 자네를 아주 어릴 때부터 보고 싶었네.”
“네?”
겨우 손을 붙잡아 내린 프레아가 멍한 얼굴로 반문했다. 어릴 때부터 보고 싶었다는 말 때문이다. 이에 밀리안이 살벌한 눈빛을 황태자에게 보내며 말했다.
“괜한 소리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전하.”
“너무 박하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명색이 어릴 적부터 함께한 친우건만.”
“……어릴 적부터요?”
둘의 대화를 가만히 듣고 있던 프레아가 뭔가 깨달은 얼굴을 했다. 밀리안이 외출을 나갈 때마다 만나던 친구가 떠오른 탓이었다. 그때는 워낙 어려서 그냥 친구를 만나러 가나 보다 했는데…….
“혹시 밀리안이 만나러 다니던 그 시골 귀족이?”
“오오, 바로 알아채는군. 맞네, 그게 바로 나네.”
프레아의 말에 호탕하게 웃은 클로드가 악수를 청했다. 프레아가 얼떨결에 악수했다. 밀리안의 시선이 아주 뜨거웠다. 클로드는 그런 밀리안이 익숙하기라도 한 것처럼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어떻게 보면 밀리안의 태도가 불경스러울 수도 있는데, 그의 표정은 불쾌한 기색 없이 유쾌해 보였다. 프레아가 새삼 놀라워 밀리안에게 시선을 돌렸다.
시골 귀족이라면서 왜 매번 먼저 찾아가나 했더니 그런 내막이 있었구나 싶었다. 그래서 이렇게 황태자를 잔뜩 경계하는 거구나. 어릴 적부터 친했으면 밀리안을 아주 잘 알 테니까.
프레아가 밀리안과 클로드를 번갈아 보며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그녀도 그 시골 귀족을 만나보고 싶기는 마찬가지였다. 어쩌면 황태자와 죽이 잘 맞을지도 모른다. 프레아의 수상한 낌새를 느낀 밀리안이 말했다.
“눈빛이 음흉해.”
“아닌데?”
“생각하는 그거, 하지 마.”
“내가 뭘 생각하는 줄 알고?”
밀리안이 안절부절못하자 프레아가 배시시 웃으며 물었다. 이에 밀리안이 인상을 팍 썼다. 프레아는 그런 밀리안을 살포시 무시하고 클로드를 향해 해맑게 웃었다.
“전하, 그래서 밀리안이 저에 대해 뭐라고 하던가요?”
그녀의 눈이 빛나며 초롱초롱해졌다. 마치 애인의 사생활을 속속들이 알고 싶어 하는 사람 같았다. 어서, 뭐든 좋으니 말해보라는 눈빛이었다.
클로드가 그 모습에 낮게 소리 내어 웃었다. 프레아의 옆에서 눈빛으로 말하지 말라고 계속 되뇌는 밀리안도 밀리안이지만 남동생 일에 눈을 빛내는 그녀가 신기했다.
보통은 남동생 일에 전혀 관심 없지 않은가. 저만 해도 누나와 사이가 퍽 좋지 않았으니까. 클로드는 턱을 쓸며 무엇부터 폭로해 줄까 고민했다.
밀리안이 숨겨둔 보물을 겨우 마주하게 되자 그를 난처하게 해주고 싶었다. 이런 자리가 아니면 그를 골탕 먹일 기회는 없을 듯하여. 클로드가 밀리안을 쓱 보며 배시시 웃었다.
그러게, 보여달라고 할 때 보여주었으면 이러지 않았지.
클로드의 미소를 본 밀리안이 얼굴을 팍 구겼다. 그 의미를 알 것 같아서. 클로드가 무언가 생각난 것처럼 유쾌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아, 그게 있었지. 그러니까…….”
“한참 찾아다녔습니다, 전하.”
누군가 클로드에게 말을 걸었다. 클로드는 뒷말을 채 하지 못하고 목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초롱초롱하게 눈을 빛내던 프레아는 방해꾼이 누구인가 하여 덩달아 시선을 옮겼다.
클로드에게 말을 건 자는 클로드와 같은 검은 머리카락에 금안을 지닌 사내였다. 프레아가 어쩐지 낯익은 모습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익숙한 얼굴인데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의 시선이 잠시 프레아에게 향했다가 다시 클로드에게 돌아갔다.
“오랜만이오, 대공.”
클로드가 그에게 ‘대공’이라 칭했다. 헤로스 제국의 대공이라면 한 사람뿐이었다.
현 황제의 이복동생인 에시드 안 헤로스. 아네모네 가문 출신의 후궁에게서 태어난 자였다. 선황제가 노년에 젊은 후궁에게서 낳은 아들이라 현 황제와 나이 차가 많이 났다.
그 덕에 현황제의 아들인 클로드와 그는 나이 차이가 비교적 적었다. 클로드는 밀리안과 같은 23살이었고, 그는 이제 막 30을 바라보고 있었으니까.
에시드가 클로드에게 예를 갖추었다. 그러곤 다른 이에게 들리지 않게끔 귓속말로 무언가를 알렸다. 클로드가 고개를 끄덕거리더니 밀리안을 향해 말했다.
“밀리안, 같이 가봐야 할 것 같네.”
“무슨 일입니까?”
밀리안의 물음에 클로드가 프레아 쪽을 슬쩍 쳐다보며 낮게 말했다.
“여기서는 이야기하기 좀 곤란하군. 영애, 얘기 도중 실례하겠소.”
“괜찮습니다. 다음에도 기회가 있으니까요.”
프레아가 아쉬운 얼굴을 애써 감추었다. 어쨌든 한 번 얼굴을 알아두었으니 언제든지 이야기할 수 있으리라. 밀리안은 프레아에게 금방 오겠다고 말하곤 사라졌다. 그들과 같이 갈 줄 알았던 에시드가 프레아에게 말을 걸었다.
“또 보는군, 레이첼의 소후작.”
“우리가 언제 만난 적이 있던가요?”
프레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낯이 익기는 하지만 정확히 언제 만난 사이인지 몰랐다. 대공이라는 걸 알았다면 기억 못 할 리가 없는데, 이상했다.
프레아의 질문에 에시드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느른한 그의 목소리가 나직하게 울렸다.
“내 인상이 그렇게 흐릿할 줄은 몰랐는데.”
“죄송합니다, 제가 웬만해선 사람을 잘 기억하는 편인데.”
“그 말은 결국 내가 인상적이지 않았다는 뜻이니 나를 두 번 죽이는 말이군.”
“아…….”
프레아가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자신이 생각해도 결국 그가 별로 인상적이지 않아서 기억하지 못했다로 결론 나기 때문이었다. 프레아가 난감한 기색을 띠자 그가 나른한 미소를 지었다.
“괜찮네, 반딧불이를 함께 보았다고 하면 좀 기억하겠는가?”
“……아!”
프레아는 그제야 놀란 얼굴로 탄성을 질렀다. 밀리안의 입단식 연회에서 만났던 바로 그 황족이었다. 그래, 그때 정체도 말해지 않고 가버려서 기억에서 지운 모양이다.
프레아가 단번에 알아채자 그가 곱게 웃었다. 부드러운 인상을 지녀서일까, 웃는 것이 무척 고와 보였다.
“그러고 보니 그때 내 소개를 안 했었군. 에시드 안 헤로스네.”
그가 다시 악수를 청했다. 프레아는 그날 나누었던 악수를 떠올리며 그의 손을 잡고 인사했다.
“정식으로 다시 소개하겠습니다, 프레아 레이첼 에드모어입니다.”
프레아의 당찬 목소리에 에시드가 낮게 웃었다.
“못 본 새 더 자란 것 같군. 하마터면 못 알아볼 뻔했어. 그땐 어둡기도 했고.”
“저는 아예 몰라본 걸요.”
프레아가 뒷머리를 매만지며 어색하게 웃었다. 그저 황족이라고만 생각했지 그가 대공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 대공이 나이가 어리다고는 들었지만 실제로 만나본 적은 한 번도 없어서 더 그랬다.
그녀는 에시드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때도 느꼈지만 뭔가 자기만의 세상에 머무는 사람 같아 대하기 어려웠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종잡을 수 없는 표정이나 느릿한 말씨가 마치 세상일에 달관한 것 같았다. 한참 침묵하던 그가 다시 프레아에게 말을 걸었다.
“오 년 만인가? 그동안 한 번을 못 보다니 참 이상하군.”
“아무래도 활동하는 곳이 달라서 그런 거겠죠. 게다가 대공님은…….”
“내가 마법사라서 그렇다고 말하려는 건가?”
“일단은요.”
프레아는 부정하지 않았다. 에시드 대공은 마법사였다. 물론 마탑 소속의 마법사는 아니었지만, 마법사는 마법사였다. ‘마법사’ 집단과 ‘정령사’ 집단은 사이가 좋지 않았다. 과거에 수많은 정령사가 마법사에게 희생되었으니까.
정령 협회가 만들어진 이유도 다 마법사의 눈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정령사들은 재능을 발견하기 어렵고, 발견하더라도 정령술은 훈련이 필요한 능력이라 협회가 설립되기 이전엔 마법사의 실험체가 되는 경우가 대다수였다.
그나마 정령 협회가 창설되고, 본격적으로 정령사들을 보호하기 시작하면서 정령사의 명맥이 유지될 수 있었다. 물론 지금의 정령 협회가 정령사들을 제대로 보호하고 있다는 말은 아니다. 그저 과거에는 그랬다는 거다.
이런 이유로 보통 마법사와 정령사는 활동 자체가 겹치는 일이 없었다. 정령사의 일방적인 무시에 가까웠지만. 에시드는 당돌하게 말하는 프레아를 보며 부드러이 웃었다.
“내가 마법사인 게 부담스러운가?”
“조금은요. 어쨌든 저도 정령사니까요. 그것도 귀족으로 태어나 운 좋게 살아남은 정령사죠.”
프레아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생긋 웃으며 대답했다. 지금 생각해도 자신은 운이 좋은 축에 속했다. 이날까지 마법사와 정령 협회의 눈을 피해 독립적으로 수련할 수 있던 건 모두 높은 작위 덕이었다. 프레아의 말에 에시드가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다 나직이 말했다.
“모든 마법사가 정령사에게 흥미를 갖지는 않아.”
“대공님께서 그 예외에 해당하는 걸로 들어도 될까요?”
“물론이지.”
에시드는 피식 웃곤 덧붙였다.
“사실 나도 마탑에서 하는 비윤리적인 행동을 좋아하지 않아서.”
“오, 마탑을 욕하는 마법사는 처음 보네요.”
프레아가 신기하다는 듯이 손바닥을 마주 쳤다. 그간 프레아에게 접근했던 마법사는 그녀의 영류를 탐내서 온 경우가 많았다. 어떻게든 친해져서 영류 부스러기 하나 건져보려는 속셈 말이다.
눈앞의 대공은 확실히 정령에 대한 특별한 관심이 없어 보였다. 만약 그가 자신의 영류에 관심이 많았다면 5년 전 만났을 때 그렇게 보내지 않았을 테니까. 분명 접점을 만들어서 어떻게든 꼬여내려 했을 것이다.
“나도 마탑에 당한 게 있어서.”
“흐음.”
에시드의 말에 프레아가 얕게 신음하며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그의 어머니의 죽음이 사실은 마탑에 의해 희생된 거라는 뒷소문을 들은 게 있어서였다. 아마도 그는 그 루머를 사실로 여기는 모양이다.
그의 어머니도 에시드와 같은 마법사였다. 아네모네 가문이 대대로 마법사를 배출한 가문이라는 걸 감안하면 당연했다. 마법사들이 흔히 겪는 병 중 하나가 마나의 과부하였다. 가진 마나에 비해 과하게 마법을 사용할 경우 오는 병이었다.
그리고 그의 어머니의 죽음은 마나의 과부하로 인한 사망으로 결론이 난 일이었다. 프레아는 에시드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어머니의 죽음을 떠올리게 한 것 같아 난감했다. 프레아가 진지한 얼굴을 하자 에시드가 담담하게 말했다.
“딱히 나를 불쌍히 여겨달라고 한 말은 아니네.”
“불쌍히 여기진 않았어요.”
“그럼 다행이고.”
에시드는 피식 웃으며 옆에 있던 와인 잔을 들었다. 그가 붉은 와인을 목으로 넘기는데, 그의 목 언저리에 붉은빛의 실선 하나가 보였다. 무언가를 조준하려는 것처럼 그의 목 주변에서 어지러이 흔들리고 있었다. 프레아가 빛의 끝 쪽을 향해 고개를 돌리는 순간이었다.
콰앙!
“꺄악!”
폭발음과 함께 파티장 안 사람들이 비명을 질렀다. 아수라장이 된 연회장에서 사람들이 혼비백산하며 밖으로 나가고 있었다. 연회장 한쪽은 폭발과 함께 바스러졌다. 덕분에 안개가 자욱해져서 눈앞이 흐렸다. 에시드가 콜록거리는 프레아의 어깨를 붙잡았다.
“괜찮은가?”
“잠깐만요, 가만히 있으세요.”
“뭐?”
프레아가 저를 부축하는 그를 붙잡으며 붉은 선을 찾았다. 실선은 어느새 정확히 그의 왼팔에 가 있었다. 폭발은 속임수이고 표적은 대공인 것 같았다. 그 순간, 붉은 화살 하나가 에시드를 향해 날아오는 게 보였다.
“토토!”
프레아는 침착하게 에시드를 제 뒤로 밀며 토토를 소환했다. 딱히 말하지 않아도 뜻을 알아들은 토토가 곧바로 바람막을 세우려는데 에시드가 쓰러진 의자에 걸려 넘어지려 했다. 그를 붙잡아 세우려다 프레아까지 몸의 중심을 잃고 덩달아 넘어졌다.
“토토, 이 사람한테도 바람막 세워!”
프레아는 넘어진 건 신경도 쓰지 않고 명령했다. 토토가 곧바로 프레아와 에시드 주변에 바람막을 세우고 수도 없이 날아오는 붉은 화살을 튕겨냈다. 그러다 튕긴 화살에 맞은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자 토토가 낮게 욕을 읊조리며 화살을 멈추는 데 신경 썼다.
“저건 또 뭐야?!”
토토가 당황한 목소리로 외쳤다. 마법이었다. 누군가 에시드를 노리고 마법을 사용하고 있었다. 여전히 에시드 주변에 붉은 선이 어지러이 흔들렸다. 프레아가 붉은 선을 가리키며 토토에게 소리쳤다.
“토토, 저거 잡아! 한 놈도 놓치면 안 돼!”
넘어진 탓에 프레아 아래에 깔려 있던 에시드가 멍하니 프레아를 바라보았다. 프레아는 자신이 에시드를 깔아뭉갠 줄도 모르고 그대로 다친 사람들에게도 바람막을 세웠다.
이 넓은 홀에 제 몸보다도 큰 방어막을 만드는 그녀를 보며 에시드의 눈이 더욱 커졌다. 그는 이내 소환된 정령을 바라보았다. 살면서 저렇게 큰 정령은 처음 보았다. 천장이 높지 않았으면 분명 건물이 무너졌으리라.
토토는 프레아의 명령을 받자마자 사라졌다. 덩치 큰 늑대가 사라지자 에시드의 표정이 절로 망연해졌다. 그는 제 위에 올라타 있는 프레아를 다시금 멍청하게 바라보았다.
“다들 방어막 주변으로 모이세요! 경계 밖은 위험합니다!”
프레아가 주변에 대고 소리치며 에시드를 밟고 일어섰다. 에시드가 윽, 하는 얕은 신음을 내뱉었다. 프레아의 무릎이 그의 배를 짓누른 탓이었다. 자비 없는 발길이었다. 프레아의 외침에 채 도망가지 못한 귀족들이 바람막 안으로 모여들었다.
화살이 잦아진 걸 보니 토토가 그들을 붙잡은 모양이다. 프레아가 거추장스러운 힐을 벗어 던지고 드레스 자락을 올려 단단히 묶었다. 당장에라도 창밖으로 뛰어나갈 것처럼 구는 그녀를 에시드가 붙잡았다.
“자, 잠깐. 설마 뒤쫓아가려는 건가?”
그가 프레아의 손목을 놓아주지 않으려는 것처럼 꽉 붙들었다. 프레아는 이거 놓으라는 듯이 험악한 얼굴로 쏘아보았다. 그러곤 당연한 거 아니냐며 소리쳤다.
“당연히 뒤쫓아가야죠!”
“혼자서는 위험해! 같이 가지.”
에시드가 그리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완강하게 붙드는 에시드를 프레아가 귀찮다는 눈빛으로 쳐다보며 말했다.
“지금 저들의 목적은 딱 봐도 그쪽이에요. 저기에 몇 명이 있을 줄 알고 대공님을 데리고 가나요? 그러다 죽으면 저만 곤란해지는 거 모르세요?”
프레아가 저를 거추장스러운 짐짝 취급하자 에시드는 입을 꾹 다물었다. 화살이 모두 그를 향해 쏟아졌다는 걸 모르지 않았다.
귀족은 황족을 보호하는 것이 의무였다. 눈앞에서 황족이 죽도록 내버려 두었다간 그녀도 큰 화를 당할 게 뻔했다. 잠잠해진 에시드에게 프레아가 말했다.
“저 생각보다 강하니까, 그냥 얌전히 보호막 안에 계세요. 나오기만 해요?”
마치 저를 어린애 취급하는 듯해 에시드는 프레아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물론 프레아는 그 말을 끝내기가 무섭게 창밖으로 뛰어내렸다. 에시드가 당장에라도 창문 쪽으로 가려다 멈추었다.
그녀가 보호막 안에서 나오지 마라고 했던 것이 생각나서였다. 에시드가 안절부절못하며 창문을 응시하는데 창밖으로 늑대의 등에 올라탄 프레아가 보였다. 그 모습에 그는 안심한 듯 한숨을 내쉬었다.
* * * * *
홀을 빠져나가 집무실에 도착한 클로드가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혹 누가 들을까 주위를 살피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때 지시받은 일이 생각보다 심각한 것 같다.”
“마법사의 의문사 말입니까?”
“그래. 하나같이 사인이 마나 과부하야. 그것도 멀쩡히 잘만 돌아다니던 마법사가. ……아무래도 냄새가 나, 냄새가.”
클로드가 영 심상치 않다는 얼굴을 했다. 밀리안 역시 계속되는 마법사의 의문사에 얼굴을 굳혔다. 승전보를 들고 온 직후, 황제는 황태자에게 마법사의 의문사에 관해 조사하라고 지시했다.
황태자는 명령을 받자마자 밀리안에게 함께할 것을 제안했다. 그만큼 클로드가 밀리안을 신임한다는 뜻이었다. 원래는 에시드 대공이 조사하고 있었으나 더 이상 일을 진행할 수 없게 되었다.
조사 도중 에시드의 어머니가 마나 과부하에 의해 사망하는 큰 사건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조사 관계자가 피해자의 유족이 되었으니 객관적으로 조사하기가 어려울 것으로 판단되었다.
황제는 에시드 대공을 무척 아꼈기에, 그의 상태를 염려해 이제 막 귀국한 황태자에게 일을 넘겼다. 에시드 대공이 이를 거부하기는 했지만 황명을 거역할 수는 없는 법. 결국 에시드는 형의 뜻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현재는 그가 클로드에게 정보를 인계하며 참조인으로 남게 되었다. 사실 선대 황비가 죽은 일은 아주 엄청난 일이었다. 타살일 경우 황성을 위협한다고 간주할 수 있었다. 하나, 심증만 있는 상태여서인지 진척이 없었다.
몇 달 전 황비가 사망한 직후, 에시드 대공은 무작정 마탑으로 찾아갔었다. 그로 인해 마탑에게 무고죄로 고발당하는 일까지 발생해 난리가 났었다. 지금은 합의하에 잘 해결되었지만 그 행동은 조금 무모했다. 아마도 대공이 어머니의 죽음으로 인해 판단력이 흐려진 듯했다.
클로드는 이번 사건이 마탑과 관련이 있는 게 맞는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에시드는 마탑의 짓이라 확신했지만 어째서인지 그 이유에 대해 뚜렷이 설명하지 못했다. 현재로써 그가 마탑을 의심하는 근거는 심증뿐이었다.
이러나저러나 죽은 마법사들의 사인이 너무 명확해서 심증만으로 마탑을 몰아세울 수 없었다. 그들은 심증만으로 잘못을 시인할 집단이 아니었다.
물론 만약 이 일이 정말 마탑의 그 광적인 연구와 관련 있다면 황족을 죽였으니 협약을 어긴 거나 마찬가지였다. 클로드는 대공에게서 전해 들은 소식에 난감하기만 했다.
이제 막 조사에 참여하게 되어 이전 사건도 다 보지 못한 상황에서 또 마법사가 죽었다. 눈 뜨고 코 베이는 것처럼 소리 소문 없이 죽어나가고 있어 골머리를 썩였다. 클로드가 잔뜩 인상을 찌푸리고 있는데 밀리안이 물었다.
“대공 각하의 말처럼 마탑이 무언가를 숨기고 있는 거라면 어떻게 하실 겁니까?”
“글쎄, 정말 비밀리에 뭔 짓을 꾸미고 있다면 협약은 깨지고 그대로 전쟁이겠지. 게다가 선대 황비가 죽은 건 엄청난 일이야. 타살이라면 이러니저러니 가볍게 끝나지는 않을 거야.”
“전쟁 하나를 끝내니 또 다른 전쟁 하나가 들어오는 격이군요.”
“나야 뭐, 자네가 있어 든든하네.”
밀리안의 진지한 태도에 클로드가 그의 어깨를 툭툭 쳤다. 그의 눈빛은 밀리안에 대한 신뢰로 가득했다. 밀리안이 피식 웃더니 그에게 경고하듯 말했다.
“제가 계속 전하 옆에 있기를 바라신다면 프레아에게 괜한 소리 하지 마십시오.”
“괜한 소리라니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 혹시 자네가 저녁때만 되면 누나가 기다린다고 가버렸던 거? 아니면 체리 앞에서 왔다 갔다 하며 고민하던 거?”
“그걸 포함해서 전부입니다.”
클로드가 놀리는데도 밀리안은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그의 말이 몹시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티를 숨기지 않은 채.
“그러니 내게 더욱 잘하게!”
클로드가 호탕한 웃음을 내뱉으며 으름장을 놓았다. 그는 속으로 ‘사실 자네 동생이 아주 엄청난 시스콤이네’라고 프레아에게 언질 줄 생각도 했다.
딱 봐도 밀리안의 누이는 그가 저를 얼마나 챙기는지 모르는 모양이었다. 미리 언질을 해주는 편이 나중에 좋으리라. 지금 같아서는 결혼도 못 하게 막을 것 같았다. 게다가 단장 망토까지 주었으니 저보다 못난 놈에겐 보내지 않을 게 뻔했다.
그때, 밀리안의 눈이 갑자기 사납게 변했다. 붉은 눈이 더욱 짙어지며 빛이 났다. 전쟁터에서나 봤던 눈빛이었다. 클로드는 식은땀을 흘리며 물었다.
“설마 이 정도 놀렸다고 그렇게 화내는 건가?”
“가봐야겠습니다.”
“뭐?”
밀리안은 클로드의 말을 채 듣지도 않고 그대로 창밖으로 뛰쳐나갔다. 클로드가 놀라 창틀에 매달려 소리쳤다.
“야 이 미친놈아, 여기 3층이야! 어디 가는데!”
이따금 돌발 행동을 하는 친우를 걱정스러워하는 외침이었다.
클로드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으나 밀리안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어딘가를 향해 급히 달려갈 뿐이었다.
* * * * *
프레아가 난감한 기색을 띠며 턱을 쓸었다. 그녀의 드레스는 어느새 피투성이가 되어 있었다. 물론 프레아가 흘린 피는 아니었다. 그렇다고 자신이 흘리게 한 피도 아니었다. 저들끼리 공격하다 다쳤다고 보는 쪽이 알맞았다.
복면을 쓴 자들이 몸을 바들바들 떨며 프레아를 노려보았다. 이미 자객의 절반이 넘는 수가 바닥에 나뒹굴며 피를 흘리고 있었다. 마치 저를 가해자 취급하는 그들의 태도에 프레아가 심드렁하게 설명했다.
“분명히 말해두는데 내가 한 거 아니야. 자폭도 정도껏 해야지.”
“이, ……이! 괴물!”
프레아가 난 잘못이 없소 하고 두 손을 들자 자객들이 얕은 신음을 내뱉으며 소리쳤다. 자객들은 프레아를 괴물이라 칭하며 그녀의 주변을 둘러싼 채 공격하지 않고 멈춰 있었다. 아마도 도망갈 타이밍을 잡는 듯했다.
몇 분 전, 뒤따라온 프레아를 향해 자객들이 마법을 쏘아댔다. 붉은 화살부터 시작해서 별의별 마법을 시전했으나 번번이 토토에 의해 튕겨 나갔다. 그러던 중 애석하게도 자신이 쏜 화살에 맞아 쓰러진 자객들이 절반이 넘었다. 프레아는 방어만 했을 뿐인데 말이다.
이렇게 허술해서야. 자객이라면 적어도 싸울 상대를 봐가면서 공격할 줄 알아야 할 텐데.
의도치 않게 가만히 서서 반을 해결했으니 먼저 공격하는 쪽보다 방어하는 쪽이 훨씬 효율이 나아 보였다. 그들이 도망칠 걸 우려한 프레아가 재빨리 바람을 이용해 그들을 단단히 포박하고 제 앞으로 끌어왔다.
자객들이 안간힘을 쓰며 벗어나려 했지만 그렇게 쉽게 깨질 힘이 아니었다. 애초에 마법사에 대항하여 훈련한 게 얼마인데, 이런 조무래기들에게 당할 그녀가 아니었다. 프레아는 맨발로 제 앞에 있는 자객의 어깨를 짓누르며 협박했다. 제법 악당 같은 말투였다.
“누구야, 누가 시켜서 왔어?”
“크윽! 내가 헤로스의 개 따위에게 그걸 말할 것 같으냐.”
자객이 밀리지 않으려 어깨에 힘을 주며 말했다. 프레아가 ‘헤로스의 개’라는 발언에 얼굴을 굳혔다. 그러곤 사정없이 정령술을 이용해 그의 어깨를 강하게 짓눌렀다. 그가 얕은 신음을 내뱉으며 프레아의 앞에 바짝 엎드렸다.
“귀족을 헤로스의 개라고 하는 걸 보니 마탑에서 보냈구나.”
“……하, 어차피 네년의 증언만으로는 우릴 건드릴 수 없다.”
바닥을 기고도 사태의 심각성을 모르는지 자객이 잔뜩 비아냥거렸다. 이에 프레아가 엎드린 자객의 턱을 들어 올렸다. 서늘한 그녀의 시선에 그가 바짝 긴장했다. 프레아가 그런 그를 보며 해맑게 웃었다. 그 미소를 본 자객들의 표정은 굳어만 갔다.
“있잖아, 마법사 씨? 나처럼 신사적인 귀족을 만난 걸 다행으로 알아.”
“신사적이라고? 이게 무슨 신사적이라는 거냐, 이 개만도 못한 정령사 나부…… 크악!”
자객이 프레아를 향해 ‘개만도 못한 정령사 나부랭이’라고 말하려다 말고 비명을 질렀다. 프레아가 그의 어깨를 바람으로 만든 창으로 뚫어버린 탓이었다.
‘하여간 마법사들의 정령사에 대한 인식은 바닥이라니까.’
그녀는 사람 같지도 않은 자들이 사람을 개만도 못하다고 하니 매우 언짢았다. 특히나 마탑의 마법사들은 정령사를 사람 취급 안 하기로 유명했다. 프레아가 아주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
“다시 말해봐, 개만도 못한 뭐?”
“크윽……!”
그가 바닥을 기며 신음했다. 분통스러운지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있었다. 대답할 정신도 없어 보였다. 프레아가 그를 차갑게 내려다보다 옆에서 와들와들 떨고 있는 자객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프레아와 눈이 마주친 자객은 자진해서 엎드리더니 엉엉 울며 ‘살려달라’고 했다. 프레아는 겁먹은 쪽이 더 회유하기 쉽다고 판단해 그에게로 손을 뻗었다.
“그쪽이 좀 말이 통할 것 같네.”
프레아가 가까이 다가갈수록 그가 사색이 되어갔다. 그때 갑자기 맨 뒤에 있던 자가 소리쳤다.
“마탑이여 영원하라!”
프레아가 저건 또 뭔 멍청한 짓이래? 하고 쳐다보는 순간 그가 마법을 이용해 제 동료를 모두 불태우고 자결했다. 화르륵 타는 시체들을 보며 프레아가 할 말을 잃은 표정으로 소리쳤다.
“누가 미친 집단 아니랄까 봐!”
그녀는 잔뜩 황당해하면서도 바람을 이용해 불을 끄려 했다. 하지만 마나에 의한 불은 쉽게 사그라지지 않았다. 물의 정령이 아니라 더 어려웠다. 마침 가지고 있는 마석도 없어서 난감하기만 했다.
프레아가 속으로 망했다며 욕을 하고 있는데 누군가 갑자기 뒤에서 끌어안았다. 놀란 프레아가 반격하려다 말고 헐떡거리는 소리에 숨을 참았다. 고개를 옆으로 돌리자 은발이 살짝씩 흔들리고 있었다.
“밀리안?”
“하아…… 진짜 한곳에 가만히 안 있을래?”
프레아의 목소리에 밀리안이 밭은 숨을 내뱉으며 읊조렸다. 신경질적인 목소리였다. 그는 뛰어왔는지 무척 숨이 차 보였다. 하는 말로 짐작하건대 저를 찾아 여기저기 돌아다닌 모양이다.
프레아가 무어라 답하지 못하고 멍하니 서 있자 밀리안이 더욱 세게 그러안았다. 이에 놀란 그녀가 떼어내려 했지만 밀리안은 놓아주지 않았다.
적들의 피를 잔뜩 뒤집어쓴 상황이라 제게는 역한 피 냄새가 났다. 괜히 피 냄새를 맡게 해 그를 자극하고 싶지 않아 프레아는 그의 팔을 밀었다. 밀리안은 약한 자의 피를 더 역해하니까.
“잠깐만 나 지금 엄청 지저분해. 피가 잔뜩 묻어서…….”
“어떤 자식이야?”
“……어?”
뜬금없이 누가 그랬냐는 물음에 프레아가 할 말을 잃었다. 잠시 뒤 밀리안이 프레아를 품에서 놓아주고 그녀의 이곳저곳을 살폈다. 걱정이 뚝뚝 묻어나는 그의 얼굴에 프레아는 멍해졌다.
그는 프레아의 무릎 언저리를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멍하니 있던 프레아가 그의 눈이 붉게 빛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곤 변명하듯 말했다. 정확히 제 드레스에 묻은 피를 가리키면서.
“오해할까 봐 하는 말인데, 이거 내 피 아니야.”
“피 냄새가 났어.”
“응?”
프레아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녀는 정말로 다친 곳이 없었다. 다친 사람이라면 지금 저기서 활활 불타고 있는 시체들이었다.
물론 그의 눈이 붉게 빛나고 있어 통하지 않는 말이었다. 밀리안은 자신의 피에만 반응하니까. 프레아가 저도 모르게 어디를 다쳤나 몸을 훑었다.
그때 밀리안이 품에서 마석을 꺼내 시체의 불을 꺼버렸다. 그러곤 통신석으로 누군가에게 시체를 치우라고 명령했다. 그 모습을 멀뚱히 보고 있는데 밀리안이 프레아의 무릎 아래와 겨드랑이 사이에 손을 넣어 번쩍 안아 들었다.
“무, 무슨 짓이야?”
“조용히 해, 나 돌아버리는 거 보고 싶지 않으면.”
갑작스러운 밀리안의 태도에 화들짝 놀라 묻자 그가 으르렁거렸다. 한눈에 봐도 무척 화났다는 걸 알 수 있어 프레아는 입을 다물었다. 물론 그가 저에게 화가 난 게 아니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눈이 붉어진 상태에서는 더 예민해지는 법이니까.
진짜, 크게 다친 곳은 없을 텐데.
프레아가 속으로 생각하며 제 동생을 힐끗거렸다. 그의 이마에 땀이 맺혀 있었다. 피 냄새를 맡자마자 달려온 모양이다. 그 모습을 보니 어쩐지 심장이 쿵쿵거렸다. 자신을 소중하게 대하는 게 느껴졌다.
이 마음이 동생으로서였다면 좋았을 텐데…….
프레아가 아쉬운 마음에 그의 품에 파고들었다.
기사단장실에 도착한 밀리안이 프레아를 소파 위에 사뿐히 올려놓았다. 프레아는 아무 말도 못 하고 멍하니 그의 행동을 살폈다. 그 또한 아무 말이 없었다.
고요한 가운데 밀리안이 이리저리 움직이더니 젖은 수건과 구급함을 챙겨 프레아 앞에 꿇어앉았다. 그러곤 제 허벅지에 프레아의 발을 올렸다. 그가 조심스럽게 프레아의 무릎을 수건으로 닦아냈다.
“아야.”
물수건이 닿자 따끔해 그녀는 저도 모르게 신음했다. 밀리안이 그런 프레아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다시 치료에 집중했다. 그가 조심스럽게 무릎에 소독약과 연고를 바른 뒤 밴드로 묶었다.
“……엄청 살짝 까진 건데.”
프레아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다친 곳을 보니 아까 에시드와 넘어지면서 무릎이 까진 모양이다. 경미한 상처에 비해 치료가 과한 것 같아 민망했다. 치료가 끝나 발을 내려놓으려는데 밀리안이 프레아의 발목을 붙잡았다.
“가만히 있어.”
낮은 음성으로 그렇게 말하곤 맨발로 돌아다녀 더러워진 발을 물수건으로 마저 닦아냈다. 그 모습에 놀란 프레아가 말을 더듬으며 외쳤다.
“자, 잠깐만! 나 계속 힐 신고 있어서 더럽고 냄새날 텐데!”
“네 피 냄새 때문에 정신 못 차리겠으니까 발 냄새는 걱정하지 마. 지금 너, 나한테 굉장히 자극적이야.”
“…….”
밀리안이 단호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의 눈은 여전히 붉었다. 만약 그가 훈련을 게을리했다면 벌써 이성을 잃었을지도 몰랐다. 5년 만에 맡는 피 냄새라 더욱 힘에 부치는 모양이었다.
프레아의 피는 밀리안에게 위험했다. 그래서 프레아는 항상 자신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해야 했다. 괜히 피를 흘려 그에게 피해 주고 싶지 않으니까.
그가 그녀의 다른 쪽 발을 제 허벅지에 올렸다. 하녀들이나 할 법한 수발을 밀리안에게 받고 있으니 어색했다. 발에 닿은 허벅지가 무척 단단해서 프레아는 저도 모르게 숨을 참았다.
어쩐지 그가 발을 닦아낼 때마다 얼굴이 화끈거리고 심장이 간질간질했다. 프레아가 괜히 헛기침하며 고개를 돌렸다. 도무지 밀리안을 보고 있을 수가 없었다.
밀리안은 발을 모두 닦아낸 뒤에도 한참 그녀의 발을 쥐고 있었다. 어색한 침묵을 견디다 못한 프레아가 발을 빼며 말했다.
“이, 이제 그만…….”
밀리안이 도망가는 발을 다시 붙잡으며 시선을 맞추었다. 그와 눈이 마주치자 자연스레 프레아는 흔들리는 눈으로 그를 좇았다. 그사이 밀리안의 눈길이 아무렇게나 묶인 드레스 자락에 향했다.
그녀의 하얀 허벅지가 훤히 드러나 있었다. 그녀의 하얀 다리에는 채 닦이지 못한 피가 얼룩덜룩했다. 그 모습에 밀리안의 눈썹이 얕게 꿈틀거렸다.
“내가 먼저 죽였어야 했는데…….”
그가 아주 화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프레아는 화들짝 놀라 해명했다.
“그거 내가 죽인 거 아니야, 자기들끼리 자결한 거라고.”
프레아의 변명에 밀리안이 지금 무슨 소리를 하냐는 듯 뚱한 얼굴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프레아는 그의 뜨거운 시선에 고개를 돌렸다. 프레아가 시선을 돌리자 밀리안이 단호한 목소리를 뱉었다.
“나 똑바로 봐.”
밀리안의 말에 프레아가 다시 그를 바라보았다. 밀리안은 여전히 화가 난 얼굴로 더 다친 곳이 없는지 살피고 있었다. 그게 너무 부끄러워 프레아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별로 안 다쳤어…….”
“다친 게 중요하지. 네가 다치면 내가 화가 나, 안 나?”
“내가 다치는데 네가 왜 화가 나?”
프레아의 악의 없는 질문에 밀리안이 입을 다물었다. 프레아는 자신이 말하고도 아차 싶어 두 손으로 입을 가렸다. 너무 단정적으로 얘기한 탓이었다.
무서운 침묵이 흘렀다. 한참 뒤 그가 가만히 그녀의 발을 내려놓곤 깨끗한 물수건을 건넸다.
“허벅지에 묻은 건 네가 닦아.”
“아, 응.”
물수건을 건네받아 어색하게 피 얼룩을 닦아냈다. 비릿한 냄새가 방 안에 진동했다.
‘밀리안이 날 좋아하는 걸 알면서 그렇게 잔인하게 말해 버리다니.’
프레아는 저를 위해 달려와 준 동생에게 매몰차게 군 것 같아 속상했다.
“미안해.”
“뭐가.”
프레아의 사과에 밀리안은 퉁명스레 대꾸했다. 그러곤 자리에서 일어나 프레아의 옆에 털썩 앉았다. 프레아는 딱딱한 밀리안의 어조에 절로 시무룩해졌다. 그녀는 피 얼룩을 모두 닦아낸 뒤 걷어 올렸던 드레스 자락을 내리며 힘없이 말했다.
“너무 매정하게 말해서.”
“알긴 아는구나.”
밀리안이 풀 죽은 프레아를 넌지시 바라보더니 그녀의 머리를 가볍게 눌렀다. 한풀 누그러진 그의 모습에 프레아가 배시시 웃었다.
“진짜로 다치니까 짠, 하고 와주었네.”
“다치기 전에 왔어야 했는데 미안.”
“어차피 넘어져서 다친 거였어. 자객들은 내 손가락 하나도 건드리지 못했거든.”
프레아가 검지를 자신 있게 세우며 말했다. 밀리안의 시선이 검지로 향하자 프레아가 방정맞게 손가락을 흔들었다.
밀리안이 어이없다는 듯이 헛웃음을 내뱉었다. 그가 웃음을 참으려 손으로 입을 가렸다. 하지만 부드럽게 휘어진 눈까지는 숨길 수 없었다. 밀리안의 풀어진 모습에 프레아가 턱을 괸 채 그를 보며 말했다.
“그나저나 자객들이 에시드 대공을 노리는 것 같았어.”
“에시드 대공을?”
밀리안도 덩달아 프레아와 같은 자세를 취하며 물었다. 프레아는 정말 수상하다는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응, 그래서 뒤따라간 건데 저들끼리 자결해 버리더라고. 알아낸 정보는 마탑에서 보냈다는 것밖에 없어. 마탑이 왜 에시드 대공을 공격한 걸까?”
“글쎄.”
밀리안이 나직이 말한 후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프레아를 향해 밝게 웃었다.
“걱정 마. 내가 다 잡아줄 테니까.”
“나도 할 수 있는데.”
“네 손에까지 피를 묻힐 필욘 없지.”
밀리안이 부드럽게 웃으며 말하곤 프레아의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눈이 커다래진 프레아를 보며 밀리안이 덧붙여 속삭였다.
“지켜주기로 했으니까.”
“…….”
그제야 프레아는 그가 입단식에서의 일을 말하는 걸 깨달았다.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가족으로서 지켜준다는 의미인 줄 알았던 것이 사실은 이성으로서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다.
“……그때, 망토 왜 준 거야?”
“이미 알고 있잖아, 내가 왜 그랬는지.”
밀리안이 담담히 대답하며 프레아를 응시했다. 프레아가 시선을 피하며 눈을 도르르 굴렸다. 괜히 물어봤다. 분위기가 어쩐지 이상해진 것 같다. 대충 눈치챈 일을 말로써 확인받으니 더욱 착잡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굳어 있는 프레아를 보며 밀리안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프레아는 그런 밀리안을 멍하니 쳐다봤다. 그가 그녀를 다시 번쩍 안아 들었다.
자신을 가볍게 드는 그를 흔들리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프레아는 그가 하는 행동 하나하나가 너무 좋으면서도 불편했다. 동생이 너무 낯설어서 괴로웠다. 5년이라는 시간이 생각보다 컸던 모양이다.
“내, 내려줘.”
“신발 없잖아.”
“아…….”
밀리안이 프레아의 발 쪽을 눈짓했다. 이에 프레아가 할 말을 잃고 가만히 밀리안에게 안겼다. 맨발로 돌아다닐 수는 없는 탓이었다. 밀리안이 제 품에 다소곳이 안긴 프레아를 아주 만족스럽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그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마차가 있는 곳으로 이동했다.
6장 프레아의 맞선 계획
프레아는 신문을 보며 말도 안 된다고 소리쳤다. 지난번 폭발 사고가 단순 관리 소홀에 의한 폭발로 보도되었기 때문이다. 분명 자객까지 와서 마법을 쏘아댔는데, 그것에 대해 일절 언급이 없었다.
게다가 이 일이 마탑과 관련되어 있다는 어떤 의견도 첨부되지 않았다. 참고인으로 조사까지 받았던 입장에서 어이가 없었다.
‘……하, 어차피 네년의 증언만으로는 우릴 건드릴 수 없다.’
그 순간 제 발아래에서 신음하던 자객이 했던 말이 떠올라 인상을 찌푸렸다. 그의 말대로 자신의 증언만으로는 마탑의 혐의를 밝히기에 역부족인 듯했다.
프레아가 씩씩거리며 애꿎은 레모네이드를 들이마셨다. 하여간 마탑이 문제다. 자신이 열심히 발로 뛰면 무엇 하는가. 상대가 너무 굳건해서 그대로 진실이 묻혀 버리는데.
프레아는 그때 그 빌빌거리던 자객을 따로 빼두었어야 했다며 입맛을 다셨다. 그랬다면 적어도 그자를 증인으로 세울 수 있었을 테니까. 그때 안경을 낀 여자가 프레아를 향해 밝게 인사했다.
“반갑습니다, 프레아 회원님이시죠?”
“네, 맞아요.”
프레아도 여자에게 밝게 인사했다. 프레아가 레모네이드 안의 레몬을 빨대로 쿡쿡 찌르며 기다린 사람은 결혼 주선 업체인 ‘겨로네’의 직원이었다.
비밀리에 ‘겨로네’에 가입하는 데 성공한 프레아는 근처 카페에서 직원을 기다리고 있었다. 밀리안을 피해 거사를 치러야 해 더욱 신중히 처리한 일이었다.
겨로네는 결혼 주선 업체 중에서도 회원의 개인정보를 아주 철저히 보호하는 곳이었다. 아무리 밀리안이라 해도 알아내기 어려우리라. 세상에 ‘프레아’라는 이름이 얼마나 많은데.
게다가 어떤 티도 내지 않았으니 자신이 결혼 주선 업체를 찾아갔으리라곤 꿈에도 생각하지 못할 거다. 프레아는 겨로네에서만 진행하는 특별 이벤트에 대한 기대가 컸다.
일명 ‘사랑의 우체통’이라고 불리는 사업인데 이름은 좀 구리지만 가장 인기 있는 상품이었다. 이 상품은 다른 맞선에 비해 익명이라는 점이 좋았다.
업체에서 비슷한 가문끼리 매칭을 해주면 익명으로 편지를 주고받게 된다. 그러다 서로 마음에 들면 실제로 만나게 되는데, 프레아는 이 점이 가장 좋았다.
그녀는 지난번 글라디안의 일로 인해 처음부터 만나봤자 소용없으리라 생각했다. 적어도 서로 어느 정도 애틋해진 뒤에 만나야 밀리안이 방해해도 포기하지 않을 것 같았다.
프레아는 들뜬 얼굴로 눈앞의 작고 앙증맞은 빨간 우체통을 바라보았다. 숨기기에 충분한 크기였다. 미리 준비한 주머니에 우체통을 넣었다.
“말씀하신 대로 계약 조항도 하나 추가했습니다.”
직원이 계약서를 앞에 내밀며 말했다. 프레아가 조항을 쭉 훑더니 마지막 특약을 보며 회심의 미소를 띠었다. 특약에는 ‘만남 시 무슨 일이 있어도 최소 3번은 만나야 한다’라고 적혀 있었다. 이 조건에 맞춰 우체통에 편지가 올 것이다. 프레아가 만족스러워하며 계약서를 가방에 넣었다.
“그런 특약이 굳이 의미가 있을까요? 회원님 정도라면 모두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 텐데요.”
그 모습을 본 직원이 특약에 대해 이해되지 않는다는 얼굴로 물었다. 하긴, 프레아 정도의 가문이면 굳이 업체를 끼지 않고도 좋은 상대를 만날 수 있다. 물론 밀리안이 없다는 전제하에 가능한 일이지만. 프레아가 뭘 모르는 소리를 하지 말라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제가 결혼하는 것을 죽기보다 싫어하는 동생이 있거든요. 이렇게 조건을 박아놓지 않으면 될 일도 안 돼요.”
“동생분이 회원님을 무척 따르나 봐요.”
직원이 비즈니스적인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이에 프레아는 어깨를 으쓱일 뿐 별다른 말을 더하지 않았다. 동생에 대해 더 말하고 싶지 않다는 프레아의 의도를 눈치챈 직원은 우체통에 대해 차분히 설명했다.
“회원님의 조건에 부합하는 상대가 편지를 보내면 자동으로 우체통에서 알림음이 울릴 거예요. 무음도 가능해요. 편지를 확인하시고 답신을 써 우체통에 넣은 뒤 이 버튼을 누르면 상대에게 보내진답니다.”
“신기하네요. 마석으로 만든 건가요?”
“네, 저희 업체가 특별히 만든 발명품이에요. 그럼 좋은 인연 만나시길 기원할게요.”
“감사해요.”
프레아가 두 손으로 우체통이 든 주머니를 꼭 끌어안으며 배시시 웃었다. 그래, 이거라면 밀리안 몰래 운명의 상대를 만나 백년해로할 수 있으리라. 어쩐지 돌아가는 발걸음이 가벼웠다.
프레아는 곧장 에드모어 성으로 돌아가 방에 들어서자마자 구석 자리에 놓인 금고를 열었다. 금고 안에는 프레아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물건들이 들어 있었다. 그중에는 이전에 에리카에게서 받은 정령석도 있었다.
프레아가 우체통을 넣다 말고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정령석을 꺼내 이리저리 살폈다. 잊고 지낸 지 오래라 먼지가 살짝 앉았다. 프레아가 정령석의 먼지를 털어내며 중얼거렸다.
“약간 금이 간 거 같은데…….”
우웅.
여전히 정령석은 웅웅 울리기만 할 뿐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확실히 처음 받았을 때보다 크기도 작아지고 금이 살짝 가 있었다. 사실 정령이 언제 깨어날지 몰라 안전히 보관해 두는 게 다였다.
정령석은 보통 마법사들의 표적이었다. 마법사들은 정령석을 이용해 힘의 정점을 추구하려 했다. 이전에는 살아 있는 정령으로 실험하다 정령 협회와 크게 싸움을 벌인 적도 있었다.
마법사들이 정령석을 원한다는 걸 아는 사람들은 정령 협회의 눈을 피해 암거래를 하기도 했다. 그러다 걸리면 돌인 줄 알았다고 변명하기 일쑤였다.
그들은 정령석에 깃든 정령을 생명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정령이 가장 취약할 때는 정령석에 잠들어 있을 때였다. 그래서 정령들은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후미지거나 인적이 드문 곳에 있는 돌에 들어가는 경우가 많았다.
아마도 에리카가 발견한 이 정령석도 그러한 정령 중 하나이리라. 일반적으로 정령사들은 정령석을 발견하면 즉시 가장 안전한 곳으로 옮겨둔다. 정령이 깨어날 때까지 안전히 보호하기 위함이기도 하고, 정령이 깨어나지 않으면 도와줄 수 있는 일이 없기 때문이기도 했다.
“크기도 전의 반밖에 안 돼.”
프레아가 정령석을 요모조모 따져보며 중얼거렸다. 정말 토토 말대로 수명이 다한 정령일까. 이대로 모습도 보지 못한 정령이 죽게 되는 건 아닌가 걱정이 일었다.
정령석이 부서지는 경우는 들어본 적이 없다. 정령이 깨어나면 매개체는 평범한 돌로 변할 뿐이다. 만약 정령이 담긴 채 매개체가 부서진다면 그 안에 있는 정령도 덩달아 소멸한다.
그런 정령석이 언제부턴가 작아지기 시작했다. 분명 주먹만 하던 크기였는데 지금은 그의 반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매번 이에 대해 브레이크에게 물어보려 했지만 번번이 까먹고 말았다.
게다가 최근에는 밀리안의 일로 정신없어서 완전히 잊고 지냈다. 생각날 때 바로 물어봐야 하는데 그럴 때마다 매번 브레이크가 공석인 것도 한몫했다.
“안 되겠다. 꺼내놔야 좀 기억이 나겠어.”
프레아가 금고 안에서 정령석을 꺼내 눈에 잘 띄는 곳에 올려두었다. 브레이크는 지금 여행 중이라 그가 돌아올 즈음엔 또 까먹을 게 뻔해서였다.
혹시 몰라 정령석 주변에 강한 결계를 쳐두었다. 그러곤 금고 안, 정령석을 두었던 자리에 우체통을 넣었다. 금고에 잘 들어갔는지 재차 확인한 뒤 자물쇠로 걸어 잠갔다. 나중에 알림음이 울리면 열어볼 생각이었다.
일사천리로 일을 치른 뒤 이제 좀 쉴까 하고 옷을 벗으려는데 누군가 방문을 노크했다. 들어오라는 말에 시에라가 방문을 열었다.
“아가씨, 누가 찾아오셨어요.”
“응? 누가?”
“반딧불이라고 하면 알 거라는데요?”
“반딧불이?”
“혹시 모르시는 분이면 돌려보낼…….”
“아, 아니야! 귀빈실로 모시고 잠시 기다리라고 전해줘.”
“네, 아가씨.”
프레아가 ‘반딧불이’라는 단어에 고개를 갸웃하다 말고 에시드가 떠올라 얼른 대답했다. 시에라가 방을 나갔다. 프레아는 벗으려던 옷을 다시 입었다.
반딧불이라면 에시드 대공일 텐데……. 우리가 언제 약속을 했었던가?
그와 따로 약속한 적이 없어서 갑자기 찾아온 것이 의아했다. 그 순간 그를 밟았던 것이 떠올랐다. 무릎으로 배를 밟고 일어설 때 그가 윽, 하고 신음을 내뱉던 것까지 생생히.
“아…… 망했다.”
프레아가 난감한 얼굴로 나가기를 주저했다.
‘아무리 다급하다고 해도 황족을 발로 밟다니. 만나면 무조건 사과해야겠어.’
그녀는 다짐하며 찝찝한 표정으로 문을 나섰다.
귀빈실로 향하는 도중, 공교롭게도 또 다른 실수가 생각났다. 가만히 있으라고 해놓고 연회장으로 돌아가지 않은 것이다. 프레아의 발걸음이 더욱 무거워져만 갔다.
그를 두고 그대로 밀리안과 함께 성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한마디 말도 없이. 적어도 찾아가 봤어야 했는데. 그럴 여력도 정신도 없었다.
“아, 가기 싫다…….”
프레아가 느릿느릿한 걸음으로 복도를 지나며 중얼거렸다. 황족을 발로 밟은 것도 모자라 바람까지 맞히다니. 괜히 밀리안에게 말려서 그를 완전히 까먹어 버렸다.
이번뿐만이 아니다. 요즘은 밀리안의 일로 머릿속이 가득 차 다른 일을 종종 까먹었다. 에시드가 그 자리 그대로 기다렸으리라 생각하니 미안한 기분이 들었다.
자신이 시전한 바람막은 방어 대상이 안전해지면 자동으로 사라진다. 분명 성에 돌아올 즈음에 바람막이 사라진 걸 느꼈음에도 에시드를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정말 까맣게 잊어버린 것이다.
문 앞에서 프레아가 망설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의 방문이 의문스러웠다. 만일 사과를 받고자 했다면 굳이 방문하는 게 아니라 그를 찾아오라 하는 쪽이 더 나았으니까.
게다가 에시드 대공이라고 말하면 될 일을 ‘반딧불이’라는 단어로 대신한 것이 이상했다. 그 말은 공식적으로 온 게 아니라는 말과 같으니까.
“괜찮아.”
프레아가 스스로에게 주문을 걸듯 중얼거리며 잔뜩 기합을 넣고는 문고리를 당겼다. 귀빈실에 들어서자 에시드가 자리에서 일어나 맞았다.
축하연에서와 달리 간편한 복장을 하고 있었다. 프레아가 최대한 사죄하는 표정을 지으며 그의 앞에 앉았다. 자리에 앉자마자 그녀는 고개를 숙이며 사과했다.
“말도 없이 가서 죄송합니다…….”
“…….”
“……발로 밟은 것도 죄송하고요.”
아무 말도 없는 그의 눈치를 보며 덧붙였다. 에시드는 그런 프레아를 물끄러미 바라만 보았다. 가시방석에 놓인 것처럼 자리가 따끔따끔했다. 그때 에시드가 느릿한 말씨로 말했다.
“놓고 간 물건이 있기에.”
“네?”
무어라 따지러 온 줄 알았던 프레아는 그의 뜬금없는 말에 고개를 갸웃했다. 에시드가 종이 상자를 내밀며 부드러이 웃었다. 프레아가 얼결에 상자를 받아 열자 지난번 연회장에서 벗어두고 간 구두가 들어 있었다. 그것도 깨끗이 탁된 채로. 프레아는 황당한 얼굴로 에시드를 바라보았다.
“설마 이걸 전해주려고 오신 거예요?”
“그대를 만나러 올 이유가 필요했거든.”
에시드가 그리 말하곤 차를 한 모금 마셨다.
만나러 올 이유가 필요했다니?
앞뒤 설명도 없는 대답에 프레아는 그를 멍하니 바라만 보았다. 그의 말에는 생략된 것이 너무 많아 도통 무슨 소린지 알 수 없었다. 프레아는 이해되지 않아 물었다.
“절 왜 만나고 싶으셨는데요?”
그리 말하며 상자를 자연스레 시에라에게 넘겼다. 옆에 있던 또 다른 시녀가 프레아의 찻잔에 차를 따랐다. 에시드가 따라지는 찻물을 가만히 응시하더니 대꾸했다.
“인상적이라서.”
“네?”
“구두가 아니라 무릎에 밟힌 걸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죄송해요.”
프레아가 다소곳이 손을 모으고 다시 한번 사죄했다. 이에 에시드의 눈이 곱게 접혔다.
역시, 화내러 온 거였어.
프레아가 속으로 그리 꿍얼거리며 에시드의 눈치를 봤다. 에시드가 한참을 침묵하더니 고요하게 입을 뗐다.
“아주 오래 기다렸네.”
“…….”
“바람막이 사라진 걸 보고 혹여 다친 줄 알고 찾아다녔고.”
“하하…… 저 세다니까요, 끝까지 안 믿으셨네.”
프레아가 헛웃음을 내뱉으며 괜히 차를 후루룩 마셨다. 정령술을 처음 본 사람이라면 당연히 그렇게 생각할 수 있는 일이었다. 보통 마법은 시전자가 위험해지면 그대로 사라져 버리니까.
하지만 정령술은 달랐다. 시전자가 죽어도 정령이 죽은 게 아니라 강제로 없애지 않는 이상 사라지지 않았다. 프레아가 눈을 도르르 굴리며 눈치를 보는데 에시드가 잠잠히 말했다.
“눈으로 확인하고 싶어서 왔네. 무사한 걸 보았으니 됐어.”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프레아가 어색한 얼굴로 감사를 표했다. 솔직히 자신이 다쳤으면 이미 신문에 나고 난리가 났을 거다. 그가 굳이 찾아온 이유가 다른 데에 있을 것 같다는 직감이 들었다.
그게 아니라면 친분도 없는 사이에 이런 방문을 하는 게 납득이 안 되었다. 에시드가 차를 다 마시자 시녀가 빈 잔에 찻물을 따랐다. 찻물이 차오르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에시드가 조용히 말했다.
“이건 공식적인 이유고 사실은 다른 이유가 더 있네.”
“무슨 일이신데요?”
프레아가 에시드의 말에 그를 응시했다. 그가 옆에 있던 시녀들을 눈짓했다.
“둘이서 얘기하고 싶은데.”
“잠깐 나가들 있어.”
“하지만 아가씨…….”
“괜찮아. 내가 아는 사람이야.”
프레아가 단호하게 말했다. 잠시 머뭇거리던 시녀들은 말없이 고개를 꾸벅이곤 자리를 피했다. 귀빈실에는 프레아와 에시드만이 남았다. 프레아는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시녀까지 물리나 하여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시녀가 나갔음에도 에시드는 주위를 살피며 사일런스 마법을 시전했다. 경계 밖의 제삼자는 대화를 들을 수 없게 하는 마법이었다. 프레아가 에시드의 행동을 가만히 보며 입을 뗐다.
“이제 얘기해 보세요.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누가 들으면 안 되는 일인가 보네요.”
“그래, 아주 중요한 일이라.”
에시드가 나른한 목소리로 대꾸하더니 느릿한 동작으로 가방에서 무언가를 잔뜩 꺼냈다. 그가 꺼낸 물건들을 본 프레아가 놀라 말끝을 흐렸다.
“이건…….”
“최근 내게 계속해서 오는 협박 편지네. 그때의 습격도 이와 관련이 있고.”
에시드가 담백한 목소리로 말했다. 협박당하고 있는 당사자라고는 믿기지 않는 차분함이었다. 프레아는 너무 평온한 그의 모습에 헛웃음을 내뱉었다.
“협박당하고 계신 것치곤 너무 차분하시네요.”
“원래 좀 무딘 편이라.”
에시드가 프레아를 응시하며 대꾸했다. 프레아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것 같네요.”
그가 꺼낸 편지를 하나하나 들춰보았다. 동물의 피로 온갖 저주를 적은 편지와 네가 가지고 있는 걸 얼른 돌려놓으라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간혹 진짜 저주 마법과 함께 보낸 편지도 있었다. 찢어진 걸 보니 미리 알고 해제 마법을 사용해 편지를 연 모양이다. 한눈에 봐도 악의가 가득한 물건들에 프레아가 얼굴을 찌푸렸다.
대공에게 이런 짓을 하다니. 목숨이 여러 개인 사람인가?
“언제부터 받으셨어요?”
프레아의 물음에 에시드가 제 입 주변을 가만히 쓸었다.
“최근에 내가 마탑에 갔었다는 건 들었겠지.”
프레아는 최근 그가 어머니의 일로 흥분하여 마탑에 쳐들어갔던 것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들었어요.”
“그때부터였네. 그 협박 편지를 받기 시작한 건.”
담백한 어조였다. 프레아가 물끄러미 에시드를 바라보았다. 에시드 역시 시선을 피하지 않고 프레아를 바라보았다.
“마탑이라는 거네요.”
“일단 내 추측은 그렇네.”
“이들이 대공님께 뭔갈 돌려달라고 하는데 혹시 짐작 가는 일이 있으신가요?”
프레아가 조심스럽게 묻자 에시드가 그녀를 지긋이 바라보았다.
“그 이야기를 하려면 그대가 나를 도와주겠다는 약조를 받아야 해.”
결국 도움을 청하기 위해 그녀를 찾아왔다는 말이었다. 그것도 그의 이름을 드러내지 않고 하는 부탁이었다. 프레아로서는 거절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가 황족이라고 해도 그의 신변 보호가 프레아에게만 강제되는 일은 아니니까.
만약 그가 황족의 이름으로 정식 요청했다면 프레아는 거절하지 못했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프레아가 다리를 꼰 채 손깍지를 껴 무릎에 올리곤 제법 계산적인 어투로 물었다.
“도움을 요청하시는 분치고 너무 당당하신 거 같네요. 비밀리에 찾아오신 걸 보면 대외적으로 드러내지 못할 일이 있으신 것 같은데, 제게 오는 이득이 뭐죠?”
“마탑에 제대로 엿 먹일 수 있겠지. 난 그대가 마탑을 굉장히 싫어하는 줄 알고 왔는데.”
에시드가 프레아를 가만히 응시하며 낮게 말했다. 프레아는 어깨를 으쓱였다. 어쩐지 냄새가 났다. 이 일이 아주 위험한 일이라는 냄새가. 그녀는 한발 물러섰다.
“마탑을 싫어하는 건 맞지만 무모하게 대항하지는 않아요. 게다가 그들은 황실과 협약까지 맺은 집단이잖아요.”
“내가 마탑에서 그들의 존재 자체를 위협할 만한 것을 보았다면?”
“듣기 전에는 못 믿겠어요.”
“들으려면 날 도와주겠다고 약속해야 하네.”
“조건부라면 듣지 않을게요. 돌아가세요.”
프레아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손으로 문 쪽을 가리켰다. 에시드가 덩달아 일어나 프레아의 앞에 섰다. 설득하려는 그에게 프레아가 단호한 목소리로 축객령을 내렸다.
“그만 가주시길 바라요.”
“생각보다 단호해서 놀랍군.”
에시드가 완강한 프레아의 태도에 담담하게 반응했다. 프레아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대답했다.
“딱 봐도 손해 볼 것 같은 일이라서요.”
“글쎄, 이걸 보고도 그대가 나를 도와주지 않을 수 있을까?”
에시드가 주머니에서 제법 큰 무언가를 꺼냈다. 유리관 속에 든 그것을 보자마자 그녀의 두 눈이 커졌다. 동요하는 모습에 에시드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이미 프레아가 수락할 걸 알기라도 하듯이.
“내 부탁은 간단하네. 마탑으로부터 날 보호해 주면 돼.”
* * *
“그 신사분은 누구예요? 반딧불이는 또 뭐고요.”
에시드가 돌아간 뒤 막 목욕을 마친 다음이었다. 시에라가 프레아의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털어내며 넌지시 물었다. 그녀의 눈동자가 무척 빛났다. 궁금한 게 생겼을 때 늘 하던 버릇이었다.
검은 머리에 황금 눈이니 황족인 건 대충 눈치챘을 테고, 무슨 사이인지 궁금한 게 핵심인 듯했다. 프레아는 나른한 기운에 눈을 감고 있다가 멍한 눈으로 거울 속 시에라를 응시했다. 그러곤 담백하게 말했다.
“몰라도 돼.”
“아가씨, 저한테만 살짝…….”
“안 돼, 묻지 마.”
“네에…….”
프레아의 단호한 목소리에 시에라가 깨갱, 하며 물러났다. 프레아는 다시 눈을 감았다. 시에라의 부드러운 손길에 잠이 몰려왔다. 시중을 받으며 가만히 에시드와의 만남을 회상했다. 차마 ‘그것’을 보고도 에시드의 부탁을 거절할 수 없었다.
마탑이 미친 집단이란 걸 알고 있었지만 설마 또 그 짓을 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이미 그 일은 불법으로 명명되었다. 정령 협회와의 강한 충돌 이후, 다시는 그 실험을 하지 않기로 서로 약속한 일이었다.
프레아도 실제로 ‘그것’을 본 것은 처음이었다. 마법사들 사이에서는 ‘키메라’로 불리는 것인데, 보통은 마나를 응축해 동물에게 주입하는 실험이었다.
살아 있는 정령을 이용한 실험은 이미 사라진 줄 알았다. 그런데 그들은 비밀리에 끈질기게 연구를 지속했던 모양이다. 에시드가 보여준 것은 정령과 동물의 혼종이었다.
작은 쥐에게 정령의 기운이 남아 있는 것을 본 프레아는 차마 그를 돌려보낼 수 없었다. 아직도 작은 유리관에 담긴 키메라의 사체가 눈앞에 아른거렸다.
이 미친 집단이 기어이 정령을 가지고 장난질을 치고 있었다. 물론 사체였으니 아직 연구가 성공하지는 못한 것 같다. 마음 같아서는 그냥 마탑에 쳐들어가서 다 부수고 싶었다.
“개자식들…….”
프레아가 저도 모르게 욕설을 입에 담았다.
“아가씨?”
“아, 아무것도 아니야. 시에라 이만 나가봐.”
마침 머리 말리기를 마친 시에라가 프레아의 갑작스러운 욕설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프레아는 머쓱해 민망한 미소를 지으며 시에라를 내보냈다. 그녀는 나가는 순간까지 프레아를 눈으로 좇으며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프레아는 그런 시에라의 시선을 애써 무시하곤 침대에 누웠다. 결국 에시드를 보호해 주기로 약속할 수밖에 없었다. 차마 정령사로서 그것을 보고도 외면할 수 없었다.
사체는 에시드가 마탑의 마법사들 몰래 훔쳤다고 했다. 그가 그것을 훔친 이상 마탑은 끊임없이 그를 위협할 게 뻔했다. 축하연에서 대놓고 반란군인 척 위장하여 대공을 죽이려고 했던 것을 보면 더욱 분명했다.
공식적으로 이에 대해 항의하자니 예전 샘플이라고 우기면 할 말이 없다. 게다가 그 물건은 에시드 대공이 불법적으로 훔친 것이다. 어디서 났냐고 물어보면 오히려 이쪽이 곤란해진다.
마탑이 대공을 도둑으로 몰 게 뻔했다. 에시드는 프레아의 수락에 잔잔한 미소를 띠곤 다음 약속을 잡았다. 신변 보호 관계임을 증명할 계약서와 그 외 필요한 장비들을 교환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돌아가기 전 굳이 다른 이도 아닌 프레아를 찾아온 이유를 밝혔다. 프레아가 정령 협회에 소속되지 않은 정령사이기 때문에 찾아왔다고 했다. 정령 협회도 믿을 수 없다면서.
뭐, 그의 심정은 충분히 이해되었다. 예전에 정령 협회가 마탑과 내통하던 일이 밝혀져 발칵 뒤집혔었으니까. 물론 그 일을 수면 위로 올린 건 프레아였다.
헤로스 제국은 기본적으로 황족의 신변을 보호할 의무가 있다. 그중에서도 특별히 위험이 예견되는 황족의 경우, 귀족을 지정해 신변 보호를 요청할 수 있다.
요청받은 귀족은 공식적인 요청일 경우 무조건 승낙해야 하며 비공식적인 경우에는 선택권이 주어졌다. 그런 점에서 에시드는 꽤 신사적으로 요청한 셈이었다.
한참 에시드와의 일을 떠올리는데 눈꺼풀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반신욕으로 인해 이미 한껏 나른해진 것도 한몫했다. 프레아는 몰려오는 잠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 * *
“좋은 아침.”
프레아가 눈을 떴을 때, 아름다운 얼굴이 그녀를 향해 유려하게 미소 지었다. 밀리안이었다. 프레아는 흐리멍덩한 눈으로 가만히 깜박깜박하다가 놀란 토끼 눈을 하고 소리 질렀다.
“꺅!”
“격한 환영이네.”
“네가 왜 여기 있어!”
프레아가 괜스레 이불을 그러쥐며 소리쳤다. 밀리안은 그런 프레아에게 마실 물을 건넸다.
“우선 물부터 마시고.”
프레아는 수상한 눈으로 바라보다 물을 덥석 받아 마셨다. 밀리안은 잔뜩 경계하고 있는 프레아를 흥미로운 동물을 쳐다보듯 빤히 보았다. 어쩐지 그는 즐거워 보였다. 프레아가 물을 다 마신 뒤 다시 물었다.
“그래서 왜 여기 있는데.”
“여기가 내가 못 올 곳이라도 돼?”
“넌 이제 테일러스잖아.”
“하지만 에드모어의 피를 물려받았지.”
“순 제멋대로야. 네 입맛대로 가문을 이용하지 마.”
프레아가 밀리안을 흘기며 타박했다. 밀리안은 어깨를 으쓱였다. 스스로도 가문을 이용하고 있다는 걸 인정한다는 듯이. 그가 일어서려는 프레아에게 손을 내밀었다.
잡고 일어나라는 뜻이었지만 그녀는 일부러 그의 손을 잡지 않고 일어났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시에라를 부르려고 옆에 있던 종에 손을 가져갔다. 그때 밀리안이 이를 저지하며 말했다.
“오늘은 내가 시중들게.”
“됐어, 시에라 부르면 돼.”
“그럴 줄 알고 이미 심부름 보냈어.”
“무어?”
프레아가 황당한 얼굴로 밀리안을 바라보았다. 밀리안은 화사하게 웃더니 프레아의 어깨를 두 손으로 붙잡아 의자에 앉혔다. 그녀는 그대로 끌려가면서도 아주 불편한 심기를 그대로 드러냈다.
밀리안이 그런 프레아의 앞에 세숫물과 수건을 챙겨 왔다. 정말 시중을 들 모양이다. 프레아가 떨떠름한 얼굴로 눈을 흘기곤 세수를 마치자 밀리안이 곧바로 수건을 내밀었다. 그런 밀리안을 게슴츠레한 눈으로 보며 물었다.
“무슨 꿍꿍이야?”
“그냥, 좀 더 같이 있고 싶어서. 싫어?”
“싫다기보단 부담스러워.”
“싫지 않다는 거네.”
밀리안이 프레아의 말을 듣고 싶은 대로 해석하며 부드러이 미소 지었다. 그가 프레아의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빗으로 빗었다. 프레아는 멍하니 거울을 통해 밀리안을 바라보았다.
그는 아주 흐뭇한 얼굴로 프레아의 연보랏빛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조금 서툴기는 했지만 제법이었다. 프레아가 얼결에 수발을 받고 있는데 밀리안이 물었다.
“오늘도 그 머리 장식?”
“그건 좋은 날에만 하는 거야.”
“멸치 만날 때도 좋았나 봐?”
밀리안이 차갑게 미소 지었다. 머리카락을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간 게 거울을 통해 보였다. 웃는 낯은 여전한데……. 질투하는 듯했다.
프레아가 입 모양으로 퉁명스레 ‘남이사’라고 벙긋벙긋하자 밀리안이 낮게 소리 내어 웃었다. 그러곤 강 건너 불구경하듯 심드렁하게 이야기했다.
“그 머리 장식 사실 에드모어 가보야.”
“……뭐?”
“역시 몰랐구나. 어쩐지 잘만 하고 돌아다니더라.”
“…….”
프레아는 충격받았다. 그렇게 중요한 걸 저에게 주어도 되나 싶어서였다. 어쨌든 에드모어를 이을 사람은 밀리안이었으니까. 어느새 프레아의 머리를 예쁘게 올린 밀리안이 사파이어로 된 머리 장식을 꽂았다.
“무슨 의미인지 궁금하면 아버지한테 여쭤봐.”
“의미까지 있는 거야?”
“글쎄.”
프레아가 두려운 기색을 띠며 묻자 밀리안이 유려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러곤 의자를 돌려 프레아가 저를 보게 했다. 그가 눈높이를 맞추며 질문했다.
“그래서 오늘 저녁에 뭐 해?”
“뭘 하든 하지 않든 너랑은 놀지 않을 거야.”
그의 의도가 뻔해서 프레아가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에 밀리안이 문 쪽을 바라봤다.
“튕기면 재미없을 텐데. 지금 바로 아버지한테 갈까?”
“사악해…….”
밀리안의 협박에 프레아가 울상을 지었다. 정말 억울해 미치겠다는 얼굴이었다. 밀리안이 그 모습에 소리 내어 웃었다. 그리운 모습을 본 사람처럼 무척 즐거워 보였다.
“보고 싶었어, 그 모습도.”
“자꾸 보고 싶다고 하지 마. 기분 이상해.”
“보고 싶은 걸 보고 싶다고 하지 뭐라고 해?”
“어쨌든. 하지 마.”
프레아가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중얼거렸다. 예전이라면 덩달아 나도 그렇다고 했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그가 계속해서 훅 들어올 때마다 느낌이 이상했다.
뭔가 기쁘면서도 그런 감정을 느끼는 것에 양심이 콕콕 찔렸다. 밀리안은 출근하기 전인지 제복을 입고 있었다. 그가 시계를 확인하곤 제안했다.
“오늘 저녁에 외식할까? 오랜만에.”
“부모님도 같이 간다면 갈게.”
프레아가 부러 ‘부모님’을 세게 발음했다. 하지만 그녀의 예상과 달리, 밀리안은 망설임 한번 없이 흔쾌히 응했다.
“좋아. 그럼 저녁 비워둬.”
그의 대답에 프레아가 놀란 얼굴을 했다. 분명 단둘이 봐야 한다고 우길 줄 알았는데 의외로 손쉽게 넘어간 탓이다. 밀리안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작별 인사했다.
“그럼 그때 보자.”
“어…… 응.”
프레아가 어색하게 대답하자 밀리안이 다시 화사하게 웃었다. 그녀는 돌아가는 그의 뒷모습을 빤히 바라보았다. 이렇게 순순히 돌아가는 게 이상했다.
* * *
메샤르 사무실에 도착한 프레아가 비숍에게 물었다.
“브레이크가 언제 온다고 했지?”
“음, 이번에는 조금 길게 다녀오신다고 했어요. 그곳에 찾는 물건이 있을지도 모른다면서요.”
비숍의 대답에 프레아가 하품하며 말했다.
“저번부터 찾던 것 같은데, 아직 못 찾았나 보네. 말을 해주지 않으니 도와줄 수도 없고.”
“원래 비밀이 많으신 분이잖아요.”
비숍이 말을 받으며 미소 지었다. 프레아도 덩달아 배시시 웃고는 하려던 말을 이었다.
“내일 오후에 잠깐 외출할 것 같아. 의뢰가 하나 들어왔거든. 그전에 위치 추적 가능한 마도구 좀 알아봐 줄래?”
“어떤 의뢰길래 위치 추적기가 필요해요?”
비숍이 메모하며 물었다.
“음, 황족의 신변 보호?”
“신변 보호요? 반란군의 표적이라도 되었대요?”
“그건 아닌데, 아무래도 마탑이 그 실험을 또 하고 있는 것 같아.”
“그 실험이라면…….”
“그래, 네가 생각하는 그거 맞아. 직접 눈으로 실험체도 확인했어.”
“허어…….”
비숍이 얕게 신음했다. 프레아는 비숍에게 에시드와 했던 대화를 차근히 설명했다. 비숍이 모든 이야기를 듣곤 더욱 얼굴을 굳혔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비숍도 정령사였다. 가족과도 같은 정령을 함부로 하는 실험 행위를 달가워할 리 없었다.
메샤르에 있는 사람은 모두 정령사였다. 일반인이나 마법사는 믿을 수 없어서였다. 정령사 집단은 정령사에 관한 지식을 외부에 알리지 않았다. 필요하면 서로 알음알음 정보를 전했다.
그래서 정령사의 자질을 지닌 자를 미리 찾아내는 것이 무척 중요했다. 아주 오래전, 정령사에 대한 정보를 일반인 연인에게 제공했던 정령사가 끔찍하게 죽은 사건이 있었다.
그의 연인이 비싼 값에 마법사에게 정보를 팔아서 벌어진 일이었다. 그 후 더욱 정보에 관해 조심스러워졌다. 설령 그것이 연인이라 할지라도.
“이왕이면 휴대하기 편한 물건이면 좋겠어, 액세서리 종류면 더 좋고.”
“찾아볼게요.”
프레아의 말에 비숍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프레아가 시킨 업무를 하러 나가려다 멈칫하더니 뒤를 돌아보며 물었다.
“대공의 말대로 확실한 근거를 찾게 되면 어떻게 하실 건가요? 대공께서 협약을 깨뜨려 주겠다고 약속하셨으니 당연히…….”
비숍이 말끝을 흐리며 프레아를 쳐다보았다. 프레아는 저만 믿으라는 듯이 손으로 제 가슴을 툭툭 치곤 무언가 사르르 사라지는 것 같은 손동작을 하며 말했다.
“당연히 먼지로 만들어줘야지. 협약만 아니었으면 이미 마탑은 해산됐을 거야.”
프레아의 확신에 찬 모습에 비숍이 싱그럽게 웃었다.
“제가 이래서 대표님을 좋아해요.”
“나도 네가 좋아, 비숍.”
프레아도 덩달아 피식 웃었다. 비숍이 자리를 떠났다. 프레아 역시 대공에게 가져갈 자료들을 살폈다.
* * *
에드모어 성으로 퇴근한 프레아가 곧장 진이 있을 집무실로 갔다. 노크하자 안에서 진이 들어오라 말했다. 프레아는 문을 연 뒤 얼굴만 빼꼼 내밀었다.
“아빠, 오늘 밀리안이 저녁 먹자고 했는데 들었어요?”
애교 섞인 목소리로 ‘아빠’라고 부르는 프레아를 진이 부드러이 바라보며 대답했다.
“그래, 들었다. 자주 가던 레스토랑에서 보자고 하더구나.”
“기다렸다 같이 갈까요?”
프레아가 집무실에 완전히 들어서며 물었다. 진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아니야, 할 일이 좀 남아서. 밀리안 심심하지 않게 먼저 가 있거라. 에밀리도 퇴근하면 바로 레스토랑으로 간다고 했다.”
“알겠어요, 그럼 먼저 가 있을게요?”
프레아는 아쉬운 마음에 손을 흔들고 방문을 닫았다. 진이 프레아가 나갈 때까지 같이 손을 흔들었다. 문이 닫힌 걸 확인한 진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손을 내리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일이 남기는.
점심쯤 밀리안에게서 전보가 왔다. 프레아와 저녁을 먹을 거니 가는 척하고 알아서 빠져달라는 내용이었다. 에밀리에게 연락해 보니 자신과 같은 전보를 받았다고 했다.
어쩐지 프레아에게 죄짓는 기분이 들어 마음이 편하지만은 않았다. 들키지 않으려 아등바등하는 프레아를 보니 더욱 그랬다. 그렇다고 해서 이미 다 알고 있다고 말할 수 없었다. 지금은 정말 중요한 시기였으니까.
당분간은 계속 이런 상태를 유지해야 했다. 조금만 버티면 반란군의 수장을 알 수 있을지도 몰랐다. 이날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진이 품속에서 펜던트 하나를 꺼내 들었다. 사별한 전 부인의 사진이 담긴 펜던트였다.
진이 부인의 이름을 가볍게 읊조리며 마른세수를 했다. 그의 얼굴에 그리움이 가득한 그늘이 서렸다. 스파이를 통해 반란군 사이에 내란이 일어났다는 것을 알아냈다.
한 번도 의견을 달리한 적 없던 반란군이 뭔지 모를 이유로 서로 언성을 높이는 일이 많아졌다고 했다. 아무래도 상부에 문제가 생긴 모양이다.
스파이가 반란군의 중심에 합류하게 된 건 아직 아니었지만 꽤 쏠쏠한 정보들을 제공했다. 이대로 중심부에 침투해 수장을 알아내고, 반란군을 돕는 핵심 귀족을 찾아낸다면 일은 순조롭게 처리될 예정이다.
그리고 그 일이 밀리안 덕에 빠르게 풀리고 있었다. 밀리안은 위장 결혼이라는 걸 알았을 때부터 진과 에밀리가 반란군을 뒤쫓고 있음을 눈치챈 게 틀림없다.
그러니 그런 제안을 했으리라. 진이 밀리안이 내건 제안을 떠올리며 혀를 찼다. 작위를 받으려고 전쟁터로 간 줄 알았던 밀리안은 꽤 흥미로운 정보를 전해주었다.
진이 밀리안에게 들은 귀족의 이름을 입안에서 우물거렸다. 설마 그가 반란군과 관련되어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는 황제가 신임하는 귀족 중 하나였으니까.
게다가 그는…….
진이 불현듯 떠오르는 누군가를 애써 지웠다. 확실하지 않은데 의심부터 하면 오히려 일이 꼬이는 법이다. 우선, 허리를 잡았으니 그 위와 아래에 무엇이 이어져 있는지 확인해야 했다.
확실히 밀리안이 말한 그 사람은 반란군과 관련이 있었다. 그에 대해 파면 팔수록 밀리안이 제공한 정보가 너무 정확해서 놀라울 지경이었다.
진은 제 아들이 여러모로 운이 좋은 아이라고 생각했다. 이자에 대한 것을 전쟁터에서 우연히 듣게 되다니. 에밀리와 자신이 그동안 했던 것이 어쩐지 허무해지기까지 했다.
물론 지금까지 모은 정보가 없었다면 밀리안이 제시한 정보는 그저 의미 모를 퍼즐 한 조각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조각이 이번 일을 해결할 결정적 조각이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었다.
“하하, 정말. 누굴 닮아 그리 철저한지.”
진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집무실 한편에 있는 침대로 향했다. 깜빡 잠이 들었다는 핑계를 대기 위해서.
* * *
레스토랑에는 프레아가 제일 먼저 도착했다. 예약한 자리로 안내받은 프레아가 가족들이 오기를 기다렸다. 아직 약속 시간보다 조금 이른 시간이었다.
잠시 뒤 밀리안이 평상복 차림으로 들어왔다. 제복을 갈아입고 온 모양이다. 프레아가 밀리안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밀리안이 자리로 와서 다정히 말했다.
“먼저 와 있었네.”
“조금 일찍 퇴근해서.”
밀리안은 피식 웃곤 의자에 앉았다. 예약 시간이 거의 다 되어가는데 에밀리와 진이 올 기미가 없었다. 프레아가 시계를 확인하며 두리번거리는데 밀리안이 말했다.
“어머니는 갑자기 퇴근 전에 일이 생겨서 오늘도 야근이시래.”
“아, 진짜? 아버지는 일 끝내고 오신다고 했으니까 좀 더 기다려 보자.”
“배고프진 않아?”
“참을 만해.”
그렇게 말하는 사이 프레아의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이에 밀리안이 얕게 웃었다.
“그러지 말고 먼저 먹고 있자. 배고픈 것 같은데. 오신다고 했으면 오시겠지.”
“으음, 그럴까?”
프레아가 어색하게 대답하곤 눈치 없이 꼬르륵거린 배에 힘을 주었다. 하필 타이밍 좋게 배에서 소리가 날 게 뭐람. 어쩐지 얼굴이 홧홧했다. 밀리안이 웨이터에게 손짓하자 애피타이저가 나왔다. 프레아가 애피타이저를 게 눈 감추듯 먹고 있는데 밀리안이 운을 뗐다.
“어제 황족이 왔다 갔다던데.”
“그건 또 어디서 들었어?”
“아침에 성에 들렀을 때 몇몇 시녀가 수군거리더라고.”
“……으음.”
프레아가 음식을 오래도록 씹으며 신음했다. 에시드와의 일을 말해도 되는지 잘 몰라서였다. 밀리안이 아무 말 없는 프레아를 향해 물었다.
“혹시 황태자 전하였어?”
“아니. 전하가 왔으면 내가 아니라 널 찾았겠지.”
프레아가 손사래를 치자 밀리안이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럼 에시드 대공인가.”
“……어?”
그가 황태자 다음으로 에시드 대공의 이름을 꼽자 프레아가 표정 관리를 하지 못하고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밀리안이 피식 웃었다.
“맞나 보네.”
“어떻게 알았어?”
“축하연에서 그가 널 아는 것 같았거든.”
밀리안이 담담히 말하며 눈앞에 놓인 음식을 한 입 베어 먹었다. 눈치 하나는 기가 막혔다. 어떻게 그 짧은 만남만으로 대공이 그녀를 안다는 걸 알아챈 건지. 프레아는 감탄까지 나왔지만, 애써 숨기며 툴툴거렸다.
“눈치가 너무 빨라. 이러면 숨길 수도 없잖아.”
“네 일에 대한 거라면 난 항상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거든.”
“……전혀 기쁘지 않아.”
“나중엔 기뻐하게 될 거야.”
밀리안이 그리 말하곤 낮게 웃었다. 어쩐지 얄미웠다. 어릴 때는 그가 당황한 표정을 자주 봤었는데, 어째 크면 클수록 당황은 프레아만의 몫이 되어가는 느낌이다.
‘어릴 땐 귀여웠는데…….’
프레아가 속으로 중얼거리는 사이 요리는 차례대로 나왔다. 진은 여전히 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프레아는 음식들을 느릿하게 먹다 말고 밀리안에게 물었다.
“황태자 전하와는 언제부터 친하게 지낸 거야?”
“글쎄. 너무 오래전 일이라. ……말하지 못한 건 미안, 비밀이었거든.”
밀리안이 기억을 더듬으며 대답했다. 이에 프레아는 어깨를 으쓱였다.
“괜찮아. 네가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닌걸.”
프레아가 선심 쓰듯 괜찮다고 하자 밀리안이 예쁘게 미소 지었다. 음식이 들어가서 그런가, 어쩐지 포용력이 넓어진 기분이었다. 그런 프레아를 밀리안이 물끄러미 보더니 나직이 말했다.
“그러고 보니 이렇게 저녁 먹으러 나온 것도 정말 오랜만이네.”
그러곤 레스토랑을 죽 훑었다. 프레아도 그를 따라 주변을 빙 둘러보았다. 이곳은 처음 상견례를 했을 때 온 레스토랑이었다. 그 이후로도 특별한 날에 가족들과 함께 오던 곳이기도 했다.
예약한 자리도 딱 그때 그 자리였다. 프레아가 밀리안에게 브로콜리를 날리고, 밀리안이 코피를 흘리던 그때 말이다. 프레아는 밀리안을 처음 만났던 그날을 떠올렸다. 그러곤 얼굴에 미소를 가득 띠며 추억을 회상하듯 이야기했다.
“그때 여기서 처음 만났었지.”
“그래, 그날 네가 내게 브로콜리를 던졌지.”
“던졌다니. 어감이 이상하잖아.”
밀리안의 말에 프레아가 핀잔줬다. 정말 던질 의도가 없던, 일종의 사고였다. 지금 생각해도 이불을 퍽퍽 치고 싶은 일이기도 했다. 밀리안은 뭐가 재미있는지 쿡쿡거리더니 가볍게 말했다.
“난 그때 네가 일부러 그런 줄 알았어. 너도 나처럼 가족이 되는 걸 싫어할 줄 알았거든.”
가족이 되는 걸 싫어했다는 밀리안의 말에 프레아가 조금 가라앉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럴 리가. 난 가족이 생겨서 기뻤는걸.”
“그래, 결혼식장에서 아버지를 보는 네 눈빛을 보고 바로 알았어. 네가 이 결혼을 무척 기뻐하고 있단 걸.”
밀리안이 담담히 말했다. 어쩐지 그의 눈이 조금 슬퍼 보였다. 프레아도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다. 그가 아버지의 재혼을 거부했단 걸. 어머니가 죽은 지 1년밖에 되지 않았는데 하게 된 재혼이니 더 그랬으리라. 프레아가 잔뜩 풀 죽은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딱히, 네 어머니의 자리를 뺏으려던 건 아니야.”
“오해하지 마. 나도 지금의 가족에 만족하고 있으니까. 그땐 그냥 내가 좀 힘들었거든.”
풀 죽은 프레아를 본 밀리안이 덤덤하게 대답했다. 프레아는 그가 조금 힘들었다는 말이 신경 쓰였다.
“어머니 일 때문에 싫어했던 게 아니야?”
“그게 아예 없던 건 아니지만 나는 좀 다른 문제였어. 말할 순 없지만.”
“매번 비밀이구나, 넌.”
프레아가 조금 서운한 어조로 대꾸했다. 예전에도 뭐가 제일 무섭냐는 물음에 비밀이라고 했었으니까. 밀리안이 토라진 프레아를 향해 그윽하게 이야기했다.
“나에 대해 궁금한 게 많네, 프레아는.”
“나는 그냥…….”
프레아가 말을 채 잇지 못하고 얼버무렸다. 그에게 부담을 주는 것 같아서였다. 밀리안은 그런 프레아를 안심시켰다.
“내가 말하지 않는 건 널 믿지 못해서가 아니야. 단지 네가 나를 불쌍하게 여길 것 같아서 말하고 싶지 않아. 난 너와 동등하게 있고 싶거든. 동정받고 싶지 않아.”
“내가 널 불쌍하게 여길 리 없잖아.”
프레아의 단호한 말에 밀리안이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이 오래도록 프레아에게 머물렀다. 무엇을 말하는 눈동자인지 알 수 없었다. 감격한 것도 같고 두려워하는 것도 같았다. 프레아는 밀리안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밀리안이 한참 뒤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그래, 넌 항상 내게 열려 있었지.”
“알고 있으면서 왜 그런 생각을 해.”
그녀가 씁쓸히 웃자 밀리안이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되받아쳤다.
“음…… 그래. 네가 날 받아주면 말하는 걸 생각해 볼게.”
“그건 좀…….”
“그럼 나도 계속 비밀로 해야지,뭐.”
밀리안이 그리 말하곤 부드러이 웃었다. 더 이상 묻지 말라는 뜻이었다. 프레아는 밀리안을 슬쩍 흘긴 뒤, 더는 묻지 않고 식사에 집중했다.
디저트까지 다 먹은 뒤에도 진은 오지 않았다. 물론 에밀리가 오는 예외도 일어나지 않았다. 어쩌다 보니 밀리안과 단둘이 식사를 한 셈이었다.
밀리안은 프레아를 에드모어 성까지 데려다주었다. 어차피 밀리안이 거주하는 성이랑 이웃해 데려다주었다고 해보았자 몇 걸음 안팎이었다. 프레아가 밀리안을 향해 손을 흔들며 말했다.
“잘 가.”
“들어가는 거 보고 갈게.”
“그래 그럼.”
프레아는 밀리안의 말에 곧장 대답하곤 성으로 들어갔다. 뒤를 힐끗거릴 때마다 밀리안이 우두커니 서 있는 것이 보였다.
평소라면 함께 성에 들어왔어야 할 사람이 그저 성문 앞에 서 있기만 하니 기분이 이상했다. 프레아는 성에 들어서자마자 진의 집무실로 향했다. 진이 오기로 해놓고 오지 않은 탓이었다.
“아ㅃ……!”
방문을 벌컥 연 뒤 진을 부르려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그가 문이 열리는 줄도 모르고 곤히 자고 있었다. 프레아가 서둘러 손으로 입을 막곤 조용히 문을 닫았다. 일하다 지쳐 잠드신 것 같았다. 혹여라도 소리를 듣고 깰까 봐 조심스럽게 행동했다.
씻고 방으로 들어온 프레아는 시에라의 시중을 받았다. 시에라가 프레아의 연보랏빛 머리카락을 조심스럽게 말리고 머릿기름을 발라주고 있을 때였다.
딸랑, 하는 경쾌한 음이 방 한구석에서 들려왔다. 시에라와 프레아가 동시에 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시에라는 고개를 갸웃하며 프레아에게 물었다.
“무슨 소리 들리지 않았어요?”
“아, 새로 테스트하려고 산 마도구야. 신경 쓰지 마, 가끔 저래.”
알림음을 듣자마자 프레아의 심장이 쿵쿵거렸다.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프레아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알림음을 설명하곤 넌지시 금고 쪽에 시선을 두었다. 분명 편지가 도착했다는 소리였다.
“무슨 마도구인데요?”
“그냥 통신구 같은 거야.”
“아아.”
시에라는 별로 관심 없는 분야의 마도구라는 것을 듣곤 더 이상 물어보지 않았다. 프레아는 어쩐지 콧노래가 나왔다. 제 계획이 잘되어도 너무나 잘되어가고 있었다.
잘 준비를 모두 마친 프레아는 금고 속에 있던 우체통에서 편지 하나를 꺼내 침대 위로 벌렁 누웠다. 이미 시에라도 돌아간 뒤라 거칠 것이 없었다.
편지는 생각보다 단순했다. 깔끔한 하얀 봉투에 담긴 카드는 프레아가 좋아하는 붉은색이었다. 하얀 봉투 수신인에는 ‘체리’가, 송신인에는 ‘실버’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체리는 프레아가 미리 제출한 예명이었다. 이 상품은 익명으로 진행되는 것이기 때문에 본명이 아닌 예명으로 서로를 불러야 했다. 물론 실제 만남으로 이어진다면 서로의 얼굴과 이름을 확인하게 될 터였다.
예명을 뭐로 할까 고민하다가 딱히 떠오르는 것이 없어 체리라고 지었다. 막상 짓고 보니 입에서 구르는 소리가 제법 예뻐서 마음에 들었다.
프레아가 봉투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저를 ‘체리’라고 칭하는 편지가 낯설면서도 간질간질했다. 그녀는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카드를 열었다.
[체리 님, 안녕하세요. 저는 실버라고 합니다.
무어라 적어야 하나 고민하다 이제야 편지를 보냅니다.
벌써 밤이네요. 오늘 하루 어떠셨나요?
저는 가족과 오랜만에 외식을 나가 무척 즐거운 날을 보냈습니다.]
프레아가 편지를 읽고는 혼자 헤실거렸다. 실버의 말투가 무척 정중한 탓도 있지만 모르는 사람과 편지를 주고받는 게 색달라서였다. 직접 해보니 생각보다 더 재미있었다.
[예명을 짓는 게 쉽지 않더군요. 체리 님은 체리를 좋아해서 체리라고 지으셨습니까?
저는 체리 님과 맞춰서 레드로 바꿀까 고민했습니다만 그냥 실버로 했습니다.
예명을 바꾸려면 겨로네에 다시 가야 했거든요. 사실 지금도 조금 아쉽습니다.]
“풉. 뭐야.”
프레아가 실버의 말에 실실거렸다. 체리를 좋아해서 체리라고 지은 걸 단번에 알아차린 것도 신기했다. 게다가 저와 맞춰 레드로 바꾸려고 했다니. 제법 분위기를 환기한다고 우스갯소리를 하는 그의 편지가 마음에 들었다.
실버는 그 뒤로도 자신과 계속 좋은 만남을 잇고 싶다, 좋은 꿈을 꾸었으면 좋겠다는 말을 적었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사람에게 쓴 편지치고는 아주 길고 정성스러웠다.
[……그럼 답장을 기다리겠습니다.]
편지가 끝나자 아쉬운 마음에 여러 번 다시 읽었다. 편지의 내용이나 길이로 봐서 그도 이 맞선을 통해 좋은 인연을 만들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프레아는 어쩐지 첫 시작부터 느낌이 좋다고 생각했다.
‘까먹기 전에 답장을 써야겠어.’
자려다 말고 프레아가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러곤 펜과 편지지, 밑에 받칠 단단한 판을 챙겨 다시 침대로 향했다. 이번엔 침대에 엎드려 단단한 받침대를 대고 그 위에 편지지를 올려놓아 답장을 쓰기 시작했다.
[실버 님, 체리입니다. 편지는 잘 받았습니다.
사실 우체통에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아 고장이 난 줄 알았어요.
만약 오늘 실버 님이 편지하지 않았다면 저는 겨로네로 찾아갔을지도 몰라요. 그만큼 많이 기다렸다는 말이에요.
실버 님의 예상대로 체리를 좋아해서 예명을 체리로 했답니다.
실버 님은 레드였어도 잘 어울렸을 것 같아요. 물론 지금 예명도 무척 잘 어울린다고 생각해요.
편지를 읽으면서 좀 신기한 부분이 있었어요. 저도 마침 오늘 가족과 식사를 했거든요.
물론 부모님은 바쁘셔서 못 오셨지만, 남동생과 오랜만에 단둘이 좋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저도 실버 님과 계속해서 편지를 주고받고 싶네요. 그럼 답장 기다릴게요.]
편지 쓰기를 마치자 프레아가 무엇이 좋은지 배시시 웃었다. 어쩐지 마음이 들떴다. 이미 잠은 달아난 지 오래였다. 프레아가 침대에서 일어나 총총거리며 우체통을 향해 걸어갔다.
창밖을 보니 벌써 밤이 깊어 달빛이 어스름이 비추고 있었다. 프레아는 우체통에 편지를 넣고 바로 전송이 아닌 예약 전송을 건 뒤 다시 금고에 넣었다. 괜히 바로 편지를 보냈다가 실버의 잠을 깨울까 염려한 행동이었다.
침대에 누워 이불을 덮었다. 편지를 쓴 뒤라 그런지 정신이 말똥말똥했다. 이리저리 뒤척이며 생각에 잠겼다. 자신의 계획대로 맞선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다.
밀리안도 전혀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아 기분이 더욱 좋았다. 프레아가 한참을 헤실거리다 까무룩 잠들었다. 그날은 오랜만에 아주 좋은 꿈을 꾸었다.
* * *
비숍은 프레아에게 부탁받은 위치 추적기를 건네주었다. 메샤르의 상징이 그려진 브로치였다. 생각보다 마땅한 것이 없어 에드모어 성에 주문 제작해서 받은 위치 추적기라고 했다.
프레아는 제 왼쪽 가슴에 세트로 제작한 브로치를 단 뒤, 필요한 서류를 챙겨 사무실을 나왔다. 에시드의 성은 황성 근처에 있었다. 황제가 그와 자주 만날 수 있는 장소를 선점한 탓이었다.
황제와 대공은 우애가 깊기로 소문난 형제였다. 보통은 왕위 쟁탈전이 벌어질 수 있는 관계지만 대공은 황제가 황태자였을 시절부터 그를 잘 따랐다고 한다.
게다가 자신을 왕으로 세우려는 귀족을 모두 쳐낸 것도 모자라 스스로 왕위 계승권을 포기하기도 한 사내였다. 그래서 어머니와 사이가 틀어져 왕래를 잘 하지 않았다고 했다.
그 와중에 어머니가 죽었으니 아마도 죄책감이 심할 터였다. 형과 틀어지고 싶지 않다는 명목으로 계승권을 버린 건 엄청난 일이다. 그 후 에시드가 반란군의 수장이 아니냐는 말은 쏙 들어갔다.
행동으로 자신의 충정을 황제에게 보인 덕이었다. 항간에선 대공이 권력에 욕심이 없는 사람이라고 칭해지고 있었다.
“아, 오신다는 소식은 들었습니다.”
대공 성의 집사가 프레아를 반갑게 맞으며 귀빈실로 안내했다. 성은 무척 깔끔했다. 검소한 성품이라는 소문답게 사치품들이 잘 보이지 않았다. 딱 필요한 물건들만으로 이루어진 성이었다.
보통은 제 작위를 과시하기 위해 사치품으로 도배할 법도 했는데 에시드는 그러지 않았다. 물론 그러지 않아도 넘볼 수 없는 작위이기도 했다. 헤로스 제국의 유일한 대공이니까. 프레아가 귀빈실에서 차를 마시며 기다리고 있는데 에시드가 들어왔다.
“또 보는군. 생각보다 일찍 왔어.”
“원래 일 처리는 확실히 하는 편이라서요.”
“그렇군.”
에시드가 부드러이 웃으며 프레아의 앞에 앉았다. 그가 앉자 그의 앞에도 찻잔이 놓였다. 에시드가 조용히 찻물이 따라지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프레아는 에시드에게 계약서와 위치 추적기가 든 상자를 내밀었다. 계약서를 쭉 훑어보고 사인을 마친 에시드가 옆에 놓인 상자를 열었다. 상자 속에는 붉은 나비가 그려진 브로치 하나가 담겨 있었다.
“이렇게 작은 위치 추적기는 처음 보는군. 직접 만들었나?”
“에드모어에선 이 정도 마도구는 금방 만듭니다.”
“역시 마석은 에드모어라는 건가.”
가문에 대한 자부심을 드러내는 프레아를 보며 에시드가 피식 웃었다. 에드모어에서 운영하는 상단을 통해 마석이 유통되므로 일리 있는 자부심이었다. 그가 브로치를 가만히 바라만 보고 있자 프레아가 덧붙였다.
“사실 마땅한 게 없어서 특수 제작했어요. 가지고 다니기 편한 게 좋을 것 같아서요. 마음에는 드시나요?”
“마음에 드는 정도가 아니라 아주 만족스럽네.”
에시드가 흡족해하며 미소를 지었다.
“다행이네요.”
프레아도 덩달아 배시시 웃으며 대꾸했다. 가문에 대한 칭찬을 받아 기분이 좋았다. 에시드의 시선이 프레아의 왼쪽 가슴에 달린 브로치로 향했다.
메샤르를 상징하는 화려한 붉은 나비가 유려하게 날갯짓을 하는 형상이었다. 에시드가 프레아를 따라 느릿한 동작으로 제 왼쪽 가슴에 브로치를 달며 말했다.
“이것만 봐도 마탑에서 조심하겠군. 메샤르의 대표가 그대니까.”
“이미 습격한 인원이 전멸한 걸 보고 짐작하고 있지 않을까요? 제가 대공님을 돕고 있단 걸.”
프레아가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에 에시드는 가만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며 느릿한 어조로 대답했다.
“그럴 수도 있고.”
프레아는 사인받은 계약서를 가방에 넣곤 차근히 앞으로의 계획을 설명했다. 에시드는 조용히 그녀의 맑은 목소리 울림을 들었다.
“가문이 아닌 메샤르를 통해서 계약을 체결한 거니 메샤르에서 대공님을 적극적으로 보호해 줄 겁니다.”
“든든하군.”
그가 가벼운 추임새를 곁들였다. 프레아는 그를 보며 어깨를 으쓱이곤 덧붙였다.
“앞으로 매일 정령사들이 번갈아 가며 대공님을 지킬 거예요.”
“……그대가 직접 보호해 주는 게 아니었나?”
에시드가 조금 얼빠진 목소리로 질문했다. 예상치 못한 소리를 들은 얼굴이었다. 프레아는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는 얼굴로 말했다. 설마 자신이 24시간 그의 옆에서 지켜줄 줄 알았던 걸까.
“죄송하지만 전 바쁜 몸이라서요. 설마 제가 온종일 대공님께 붙어 있을 거라고 생각하신 건 아니죠? 그걸 바라셨던 거라면 전 못해요. 하고 있는 일이 몇 갠데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들었다는 것처럼 손사래를 치자 에시드가 시무룩한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그래도 그대가 일주일에 한 번쯤은 함께할 줄 알았는데.”
“일주일에 한 번은 좀 많고 2주에 한 번은 가능해요. 그 이상은 일정상 무리예요. 워낙 벌여놓은 일이 많아서.”
“그런가.”
에시드가 어쩐지 아쉬운 기색을 띠었다. 프레아는 제 가슴에 달린 브로치를 손가락으로 톡톡 치며 말했다.
“정 급하신 일이나 저와 단둘이 해야 할 이야기가 있다면 브로치를 통해 연락하세요. 저랑 직통으로 연결된 거거든요.”
“아…….”
“그리고 약속하셨던 대로 마탑에 대해 제대로 파헤쳐 주시고요.”
“그건 걱정 말게. 차근히 진행하고 있네.”
“혹시 수사에 도움이 필요하시면 언제든지 연락하세요. 도와드릴 테니.”
“그러지.”
에시드가 나른한 미소를 띠며 대답했다. 창으로 햇살이 내리쬐서 그런지 그의 황금색 눈동자가 더욱 빛나 보였다. 프레아가 이어서 앞으로 어떻게 할지 마저 설명하곤 숨을 크게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설명은 다 드린 것 같으니 저는 가보겠습니다.”
“음? 이대로 가는 건가.”
“뭐가 더 남았나요?”
“……아니네. ……음, 데려다주지.”
“예?”
프레아는 느릿느릿한 말씨로 저를 데려다주겠다는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굳이? 라는 의문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황족의 제안을 거절하는 것도 좋지 못한 것 같아 고개를 끄덕이며 수락했다.
“그럼 부탁드려요.”
프레아가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에시드가 조심스럽게 프레아의 손을 마주 잡았다. 그가 덥석 손을 잡자 프레아는 조금 난감한 목소리로 말했다.
“손 말고 팔을 달라는 말이었는데…….”
“아, 이런.”
에시드가 얼른 손을 떼며 팔을 내밀었다. 뭔가 어리숙한 그의 태도에 프레아가 풉,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느리기만 했던 동물이 무언가를 보고 놀라 빨라진 것 같은 동작이었다.
에시드와 세 번째 만나니 그의 성격이 어떤지 가늠이 되었다. 처음엔 워낙 표정도 없고 말수도 적어서 그냥 과묵한 사람인가 보다 했는데. 이제 보니 그냥 좀 어리숙한 사람 같았다.
에스코트를 한두 번 해본 사람도 아닐 텐데. 그가 아무 생각 없이 손을 잡은 걸 떠올리니 우스웠다. 마치 강아지에게 ‘손’ 하면 강아지가 꼬리를 흔들며 앞발을 내미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행동이었다.
“대공님 이제 보니 완전 숙맥이네요.”
“음?”
에시드가 그런 말은 처음 들어본다는 얼굴로 반응했다. 하긴. 자신도 처음엔 에시드가 이런 사람인 줄 몰랐다. 첫인상이 무척 다가가기 힘든 분위기였으니까. 어쩐지 조금 억울한 빛을 띠는 에시드를 보곤 프레아가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칭찬이에요.”
물론 그것이 칭찬이 아니라는 것쯤은 에시드도 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