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장 남동생이 너무 낯설다
진이 지끈거리는 머리를 매만졌다. 지난밤 밀리안과의 협상 때문이었다. 어쩐지 앞뒤 생각 없이 일을 저지르는가 싶더라니. 설마 그렇게 치밀하게 준비했을 줄은 생각도 못 했다. 진이 눈가를 매만지며 그날의 대화를 떠올렸다.
* * *
집무실로 들어온 밀리안이 비뚜름한 표정으로 말했다.
“프레아가 결혼하면 제가 포기할 줄 아셨습니까?”
“그건…….”
“저를 열 받게 하실 생각이었다면 성공하셨습니다.”
“밀리안, 아버지에게 말이 좀 지나치구나.”
에밀리가 밀리안의 거친 말투를 제지했다. 밀리안은 가만히 생각하는가 싶더니 에밀리를 향해 씨익 웃었다. 그러곤 진에게 한 것과 달리 자못 다정한 말투로 에밀리에게 대답했다.
“그렇네요. 장모님을 앞에 두고 제가 너무 지나쳤나 봅니다.”
“자, 장모님?”
에밀리가 놀란 얼굴로 말을 더듬었다.
진은 밀리안의 태세 전환에 기가 찼다. 저한테만 성을 내는 게 맘에 들지 않았다. 자식새끼 키워봤자 소용없다더니. 이리 홀대할 수는 없었다. 진이 애써 침착한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우선 청혼장은 없던 일로 하자.”
“예, 저도 그럴 생각이었습니다.”
“안 된다, 아무리 네가 싫어도…… 응? 뭐라고?”
진이 뜻밖의 말을 듣고 멍하니 밀리안을 바라보았다. 에밀리 역시 밀리안의 말이 이해되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아니, 그럴 거면 애초에 청혼장은 왜 보낸 건지 몰랐다. 한마디로 황당했다. 얼이 빠진 두 사람을 보며 밀리안이 홀로 쿡쿡거리더니 담백한 어조로 대답했다.
“아버지가 당황한 모습을 보고 싶었을 뿐 저도 그렇게 무턱대고 일을 저지를 생각은 없었습니다.”
“뭐야?!”
진이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씩씩거렸다. 자신이 그 일 때문에 하루 종일 얼마나 조마조마했는지 모른다. 그런데 이제 와서 없던 일로 하자니. 자신이 당황한 모습을 보고 싶었다니. 기가 차서 말이 제대로 안 나왔다.
그때 에밀리가 진을 다시 앉히며 진정시켰다. 진이 씩씩거리다 말고 아차 싶어 다시 자리에 앉았다. 어쨌든 지금 이 협상에서 우위에 있는 건 밀리안이었다. 밀리안이 그런 진을 보며 어깨를 으쓱였다.
“하지만 프레아와 결혼하고 싶다는 마음은 진심입니다.”
“밀리안, 그건 프레아와 합의된 일이니?”
밀리안의 말에 에밀리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진도 에밀리와 같은 생각이었다. 일단 밀리안의 마음도 마음이지만 프레아도 같은 마음인지가 더 중요했다. 괜히 혼자 헛물켜는 건 아닌가 걱정되었다. 하지만 밀리안은 확신에 차 있었다.
“곧 그렇게 될 겁니다.”
“그 말은 프레아는 아직 아니라는 거구나.”
에밀리가 염려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진이 그 말을 받으며 밀리안을 탓했다.
“허세 하고는. 애초에 프레아는 널 동생으로 여겨왔다. 갑자기 네가 남자로 느껴질 리 없지 않느냐?”
“안 될 건 없죠. 어차피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남입니다.”
밀리안의 말에 에밀리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남이라는 말에 너무 많은 것이 얽혀 있어서였다.
“만약 서로 좋아한다고 해도 사람들의 이목이란 게 있단다. 무턱대고 좋아하는 마음만으로 결혼할 수 있는 게 아니야.”
“……혹시 친남매가 아니냐는 헛소문 때문에 걱정하시는 겁니까?”
에밀리가 잘 타일러 말하자 밀리안이 그녀를 보며 물었다. 에밀리는 부정하지 않았다. 어쨌든 제일 우려되는 일이었으니까. 에밀리는 두 사람 모두 걱정스러웠다. 괜한 소문에 휩싸여 듣지 않아도 될 말들을 듣게 될까 봐.
당시 에밀리는 진과 상의하여 프레아에게 따로 그가 친아버지가 아니라는 걸 알려주었다. 혹시라도 소문을 믿고 정말로 진을 친아버지라고 생각하면 곤란했으니까. 한참 말이 없는 에밀리를 보며 밀리안이 담담하게 말했다.
“소문은 소문일 뿐입니다. 그런 게 무서워 프레아를 포기할 순 없습니다.”
“포기하라는 말이 아니라 좀만 미뤄달라는 말이다.”
진이 밀리안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당부했다. 밀리안은 진을 쓱 쳐다보았다. 진이 조용히 에밀리에게 신호를 보냈고 둘의 시선이 마주쳤다.
지금이 말할 때였다. 이미 서로 위장 결혼이라는 사실을 밀리안에게 말하기로 입을 맞춘 상태였다. 어쨌든 반란군을 소탕하기 전까지 그를 멈추어야 했다.
그 이후에는 주변에서 말이 많든 이목이 집중되든 상관없었다. 어차피 모두 근거 없는 말들이고 당사자의 마음이 제일 중요하니까. 진이 조금 차분한 목소리로 운을 뗐다.
“사실 네게 말하지 않은 게 있다.”
“위장 결혼 말입니까?”
“그래, 위장…… 뭐? 지금 뭐라고 했지?”
“……!!!”
진과 에밀리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밀리안을 바라보았다. 그 단어가 밀리안의 입에서 나올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밀리안은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하는 두 사람을 향해 태연하게 말했다.
“들었습니다. 그날.”
“그날이라니?”
“결혼식 날 우연히 피로연 자리에서 두 분의 대화를 들었습니다.”
“그럼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는 말이니?”
에밀리가 놀랍다는 얼굴로 재차 확인했다. 그러고 보니 그날 잠시 위장 결혼에 대해 말이 오갔던 게 떠올랐다. 이미 알고 있었다니. 그것도 결혼한 지 얼마 안 된 상태에서 알게 되었다니.
진이 한 방 먹은 얼굴로 밀리안을 바라보았다. 어쩐지 8년간 남매로 지냈는데 그런 감정을 느꼈다는 게 믿기지 않았었는데. 설마 미리 눈치채고 있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러게 좀 더 조심하시지 그러셨습니까. 황태자 전하도 모르는 비밀 임무 같던데.”
어쩐지 밀리안이 얄밉게 생글거렸다. 이 상황이 모두 제 계획대로 움직이고 있다는 표정 같았다. 두 사람은 밀리안을 쳐다만 볼 뿐 아무런 말을 하지 못했다. 그런 두 사람을 가만히 보던 밀리안이 한 가지 방안을 제시했다.
“두 분이 제 제안을 들어주신다면 저도 두 분의 비밀 임무를 망칠 생각이 없습니다.”
“제안이라니?”
* * *
진이 거기까지 떠올리는데 갑자기 집무실 문이 벌컥 열렸다.
“프레아?”
진이 놀란 얼굴로 프레아를 바라보았다. 프레아가 어쩐지 살벌한 얼굴로 다가오더니 재촉하듯 물었다.
“아버지, 밀리안 어디 있어요?”
“집 나간 녀석을 내게 물어보면 어찌…….”
“정말 몰라요?”
프레아가 쏘아보며 다그쳤다. 하루라도 빨리 밀리안을 만나야 한다는 표정이었다. 진은 무슨 영문인지 몰라 프레아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프레아는 뜸 들이지 말고 얼른 말하라는 눈빛을 보냈다.
진은 고민했다. 밀리안이 옆집에 산다고 말을 해줘도 되나 하고. 그녀의 표정을 보니 한판 뜨러 가려는 듯해 더욱 망설여졌다. 우선 프레아를 진정시키기 위해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프레아, 무슨 일이냐. 왜 이렇게 잔뜩 화가 났…….”
“말 돌리지 마시고요.”
프레아가 눈에 힘주어 바라보며 또박또박 대꾸했다.
“…….”
진 에드모어는 생각했다. 가짜 부인도 그렇고 프레아도 그렇고 화나면 무섭다고. 에밀리 레이첼도 툭하면 제게 앞뒤 맥락 없이 내뱉기를 잘했다. 물론 에밀리에 비해 프레아는 사근사근하고 귀여운 아이였다.
정말 딸로 삼고 싶을 정도로 아주 사랑스러운 아이였다. 아, 물론 아주 가끔 화가 나면 좀 통제가 안 되기는 했다. 그래도 제게는 귀여운 아이였다. 그랬던 아이가 오늘처럼 이렇게 막무가내로 그를 대한 적은 없어 적잖이 당황스러웠다.
“옆 성에 새로 입주한 귀족이 있다는 건 들었을 테지.”
진이 어리바리한 얼굴로 말했다. 프레아가 곧바로 다시 물었다.
“거기예요?”
“그래, 그곳이…….”
쪽.
“고마워요, 아버지!”
프레아가 진이 채 말을 뱉기도 전에 볼에 입을 맞추곤 사라져 버렸다. 이 와중에도 답례는 확실한 아이였다. 진이 한숨을 푹 쉬었다. 자식 농사는 참 맘대로 되는 게 아니구나 싶었다.
* * *
프레아는 곧장 에드모어 성 옆에 있는 성으로 찾아갔다. 바로 코앞에 있었다니. 프레아가 씩씩거리며 벨을 눌렀다. 곧이어 문이 열리고 제법 젊은 집사 한 명이 나왔다. 그는 프레아를 바로 알아봤다.
“프레아 아가씨?”
“절 아는 걸 보니 밀리안의 집이 맞나 보네요.”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전 이 성의 집사, 게라 우스입니다. 들어오십시오.”
집사가 프레아에게 예를 갖추며 통성명하곤 정중히 성안으로 안내했다. 성에 들어서자마자 프레아가 집사를 향해 물었다.
“밀리안은 어디 있죠?”
“아, 후작님께서는 이제 막 들어오셨습니다.”
“그래서 어디로 들어갔다고요?”
프레아가 계속해서 밀리안이 어디 있는지를 캐묻자 집사가 난감한 얼굴로 어떤 문을 가리켰다. 그는 속으로 프레아가 들은 것과 달리 야차 같은 분이라 생각했다.
“저쪽에…….”
“고마워요.”
프레아가 집사를 향해 씨익 웃고는 재빨리 가리킨 방향으로 사라졌다. 귀족이 저리 급하게 뛰어가는 모습은 짧은 집사 인생에서 처음 보는 일이었다. 게라가 멍하니 프레아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말고 아차 싶어 소리쳤다.
“앗! 아가씨, 그…… 그곳은 욕실입니다!”
물론 프레아는 이미 저 멀리에 있어 듣지 못했다. 게라는 하얗게 질려 서둘러 그녀를 뒤따라갔다. 프레아는 노크도 하지 않고 문을 벌컥 열었다. 노크할 정도로 예의를 차릴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밀리…… 헉!”
밀리안을 부르려던 프레아의 말문이 막혔다. 문을 열자마자 뭉게뭉게 피어오른 김이 시야를 가렸다. 때마침 샤워를 마친 밀리안이 욕조에서 몸을 일으켰다.
눈이 김에 적응하자 곧 그의 뒤태가 시야에 들어왔다. 다부진 근육들이 물기를 머금고 있었다. 프레아는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밀리안이 뒤돌아 있던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의 나체에 당황하여 얼굴이 새빨개졌다.
어느새 뒤따라온 게라가 굳은 프레아를 보고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싼 채 신음했다.
이미 늦어버렸다. 아가씨가 다 봐버리시다니.
밀리안이 프레아의 목소리에 고개만 뒤로 돌렸다. 눈이 잠시 커지는가 싶더니 별일 아니라는 듯이 앞에 있던 수건을 허리에 감쌌다. 아주 태연한 동작이었다.
프레아는 이미 사고가 정지되어 딱딱히 굳은 상태였다. 저가 뭘 하러 왔는지도 잊어버린 채 멍하니 밀리안을 바라보고 있었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게라가 서둘러 프레아의 두 눈을 가리며 사죄했다.
“아가씨, 죄송합니다!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
“게라, 괜찮으니 그 손 떼고 나가라.”
“후, 후작님!”
“나가래도.”
밀리안의 딱딱한 어조에 게라가 침음하며 말했다. 저가 뭐라고 하는지 의식하지 못한 채 말이다.
“알겠습니다. 그럼 좋은 시간 보내십시오.”
게라가 사라지자 밀리안이 웃옷도 입지 않고 프레아에게 다가갔다. 프레아는 당황해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가 움직일 때마다 물방울이 뚝뚝, 하고 떨어졌다. 촉촉하게 젖은 머리카락과 주변에서 풍기는 향내가 코를 자극했다.
붉어지다 못해 새빨개진 얼굴을 한 프레아가 뒤늦게 두 눈을 가렸다. 미쳤다고 그걸 계속 보고 있었냐며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간 밀리안이 부드럽게 속삭였다.
“왜? 계속 보지. 보고 싶어 한 것 같은데.”
“아, 아니거든! 시, 실수야.”
“실수라면서 얼굴은 왜 빨개진 건데?”
“이, 이건 더워서……!”
프레아가 말도 안 되는 소리로 반박하려는데 밀리안이 프레아의 손을 붙잡아 내렸다. 프레아의 눈이 자연스레 밀리안의 복근으로 향했다. 그 모습을 본 밀리안이 피식 웃었다.
프레아가 낮게 침음하며 서둘러 눈을 돌렸다. 주인 말도 안 듣는 눈을 찔러 버리고 싶었다. 남자의 벗은 몸을 봐버렸다. 그것도 엄청 다부진 몸을 말이다.
이제 다른 몸을 보고 감탄하지 못할 것만 같았다. 밀리안의 몸이 생각보다 탄탄해 당황스러웠다. 프레아가 웃통을 벗은 채 저를 빤히 보는 밀리안에게 괜히 호통쳤다.
“오, 옷 좀 입어!”
“보고 싶지 않다면서 왜 바로 내 몸을 보는 거야?”
“그, 그야 네가 앞에 있으니까…….”
“솔직하지 못하긴.”
프레아는 한껏 당황해 버벅거렸다. 밀리안의 입꼬리는 내려갈 줄 몰랐다. 그는 프레아를 지나 옆에 있던 가운을 몸에 아무렇게나 둘렀다. 대충 묶은 탓에 그의 가슴께가 얼핏얼핏 보였다.
밀리안이 수건으로 제 머리를 가볍게 털어내며 프레아를 향해 눈웃음을 지었다. 그 모습을 보자 쿵, 하고 무언가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 것 같은 착각이 일었다.
프레아의 눈이 세차게 흔들렸다. 심장이 쿵쿵거리고 속이 울렁거렸다. 아무래도 산소가 부족한 탓이리라. 프레아가 눈을 도르르 굴리다 말고 재빨리 창문을 열어 습기를 제거했다.
그래, 산소가 부족해서다. 절대 남자 몸을 보고 흥분한 게 아니다.
맞아, 처음 봐서 그런 거지. 저런 것도 계속 보면 아무런 감흥이 없을 거라고!
프레아는 속으로 그렇게 되뇌었다. 밀리안은 그런 프레아를 빤히 바라보았다. 프레아는 여전히 당황하여 허둥거리고 있었다. 밀리안이 그런 그녀를 한참 보다 피식 웃으며 생각했다.
귀엽기는.
프레아는 창문에 바짝 기대어 심호흡을 하고 있었다. 그때 밀리안이 프레아에게 다가가 말했다.
“마침 저녁 먹으러 오라고 하셔서 가려던 참인데. 시간 맞춰 마중 왔네.”
“저녁이라고?”
맑은 공기를 마시며 쿵쿵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던 프레아는 밀리안의 말에 놀라 뒤를 돌았다. 부모님에게 밀리안과 저녁 식사를 하기로 했다는 말을 듣지 못해서였다.
그 순간 프레아의 눈앞에 밀리안의 가슴팍이 보였다. 언제 이만큼 왔는지 밀리안이 무척 가까이에 있었다. 당황한 프레아가 느린 동작으로 슬그머니 밀리안을 올려다보았다. 밀리안이 그런 프레아를 마주 보며 사르르 눈웃음을 흘렸다.
“내가 그렇게 보고 싶었어? 이렇게 데리러도 오고.”
“아니거든!”
프레아가 순간적으로 밀리안을 팍, 하고 밀치며 소리쳤다. 하지만 밀리안에게 그리 타격을 주지는 못한 듯했다. 밀리안이 기꺼운 얼굴로 낮게 웃으며 순순히 밀려났다. 그가 조금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은근슬쩍 만지네, 이젠?”
“무, 뭐?”
“그렇게 갑자기 만지면 흥분되는데.”
밀리안이 프레아를 향해 씨익 웃어 보였다. 그제야 프레아는 자신이 밀리안의 가슴팍을 밀쳐냈다는 걸 깨달았다. 겨우 진정시킨 얼굴이 다시 새빨개졌다.
어, 어쩐지 추, 축축하고 딱딱하더라니.
가운이 얇아서인지 닿았던 촉감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프레아가 삐걱거리며 물러났다. 사실 그녀는 충격을 크게 받은 상태였다. 그 이유는 생각보다 남동생 몸이 너무 좋아서.
‘이런 생각하는 내가 수치스러워.’
프레아가 속으로 괴로워하며 애꿎은 밀리안에게 씩씩거렸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계속 말리게 될 것 같았다.
“너…… 너어…….”
밀리안은 당황하여 이를 악물고 있는 프레아를 귀엽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그러곤 자꾸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숨기지 않고 쿡쿡거리며 입을 뗐다.
“그만해야겠다. 더 하면 얼굴 터지겠어.”
“…….”
“그래서. 내가 보고 싶어서 온 것도 아니면 왜 온 건데?”
“아! 그래, ……너 말야! 도대체 글라디안 님한테 뭔 짓을 한 거야?”
프레아가 그제야 성에 온 이유를 떠올리며 앙칼지게 소리쳤다. 그러자 밀리안이 놀랍다는 얼굴로 말했다.
“오. 멸치가 생각보다 실행력이 빠르네.”
“멸치라고 하지 마!”
“그럼 북어라고 할까?”
“지금 말장난하는 거 아니잖아.”
프레아가 씩씩거리며 밀리안의 말을 받아쳤다. 멸치든 북어든 둘 다 말라빠진 생선이었다. 어쩐지 밀리안은 글라디안의 이름을 제대로 부를 생각이 없어 보였다. 프레아의 과민 반응에 밀리안이 게슴츠레한 눈을 했다.
“네가 죽이지 말래서 특별히 봐준 건데. 역시 죽일 걸 그랬나 봐.”
“……너 진짜.”
프레아가 말끝을 흐렸다.
진심이구나. 진심으로 죽이려고 했구나!
그녀는 당황한 얼굴로 밀리안을 바라보았다. 얘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뭐가 이렇게 막무가내인 걸까. 하지만 제일 중요한 건 글라디안의 일이 아니었다. 일단 글라디안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있었다. 프레아는 그의 팔을 붙들며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너. 전쟁터에서 뭔 짓 했어?”
“뭐 하긴. 열심히 싸웠지.”
밀리안이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대꾸했다. 언제까지 숨길 수 있을 거라 생각한 걸까. 그의 태연한 모습에 프레아가 차갑게 웃으며 비아냥거렸다.
“아, 그래? 그럼 혼자 적진에 쳐들어간 것도 열심히 싸우느라 그랬겠네?”
“……다 알고 왔구나.”
밀리안이 웃음기를 거두었다. 무모한 행동을 한 걸 알았으니 화낼 거라 생각한 모양이다. 그가 다소곳한 모습으로 프레아를 바라보았다. 순순히 장난기를 거두는 밀리안을 보며 프레아도 평정을 되찾고 걱정 어린 얼굴로 말했다.
“네가 다칠 뻔했어.”
“지금 내 걱정해 주는 거야?”
“그럼 걱정 안 해?”
“……이건 좀 기쁜데.”
밀리안이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그 모습을 프레아가 멍하게 바라봤다. 밀리안은 정말 기쁘다는 듯이 입을 움찔거리고 있었다. 여기서 또 웃어버리면 프레아가 화낼 걸 알고 웃음을 참는 것 같았다.
프레아는 한숨을 푹 쉬고 붙잡은 팔을 내려놓았다. 저렇게 바보같이 기뻐하는 모습을 보니 맥이 탁, 풀렸다. 죽을 뻔한 사람이 누이의 사소한 걱정 하나에 좋아할 줄이야.
그래, 살아 돌아왔으니 된 거다. 프레아가 그리 생각하고 있는데 밀리안이 다시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프레아가 붙잡힌 손을 멍하니 보자 밀리안이 진지하게 말했다.
“그렇게 내가 걱정되면 옆에 있어주면 돼.”
“미안한데 이건 여자가 아니라 누나로서 하는 걱정이야.”
프레아는 딱 잘라 말했다. 일부러 ‘누나’라는 단어에 힘을 주면서. 그래, 지금 떨리는 건 그냥 5년 만에 만나서 낯설기 때문이다. 오랜만에 만난 것도 어색한데 고백까지 들었으니 더 의식하는 것이리라.
“그놈의 누나 소리는 그만 듣고 싶은데.”
밀리안이 잡은 손을 세게 움켜쥐었다. 프레아는 그런 밀리안의 손을 가볍게 떼어내며 사뭇 진지한 얼굴로 타박했다. 정말 그가 걱정돼서 하는 말이었다.
“어쨌든 다신 그런 무모한 짓 하지 마. 또 그러면 다리를 부러뜨려서라도 말릴 거니까.”
“살벌하네.”
“잘 알아들었으면 얼른 옷 갈아입고 나와. 밖에서 기다릴게.”
“그러지요.”
완강한 태도에 밀리안이 순순히 물러났다. 속으로는 생각보다 그녀가 크게 화를 내지 않은 것에 안도하면서. 프레아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방을 나왔다. 호기롭게 나온 것과 달리 방문을 닫자마자 그대로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았다.
“쟤 정말 왜 저래…….”
프레아가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도록 작게 속삭이며 얼굴을 두 손으로 가렸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남동생이 너무 낯설다. 낯설어서 무섭고 또 그런 밀리안을 의식하게 되는 자신이 이해가 안 되었다. 진짜 최악이었다.
* * *
밀리안이 옷을 갈아입고 나왔다. 이미 평정을 찾은 프레아는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그를 맞아 함께 에드모어 성으로 돌아왔다. 에밀리도 이미 귀가한 뒤였다.
5년 만에 가족들이 식탁에 모였다. 프레아는 정말 오랜만에 가족이 모두 모인 것이 기쁘면서도 어딘가 불편했다. 마음속이 여전히 복잡한 탓이었다.
“이렇게 다 같이 먹는 것도 오랜만이구나.”
진이 부드러이 웃으며 운을 떼자 에밀리가 말을 받으며 웃었다.
“그러게요, 좋네요.”
“저도 기쁩니다.”
밀리안 역시 두 사람을 보며 씨익 웃었다.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프레아만 웃지 못했다. 그간 그의 행동으로 미루어 짐작해 보면 부모님 앞에서도 이상한 말을 할 것 같아 불안했다.
괜히 여기서 밀리안이 저를 좋아한다느니 하는 헛소리를 할까 봐 조마조마했다. 그때 진이 밀리안에게 물었다.
“그래, 독립해서 어떠냐?”
“아직 시작 단계인걸요.”
“아버지, 독립이라뇨? 밀리안이 나갈 거 알고 계셨어요?”
프레아가 진의 말에 놀라 그를 쳐다보았다. 설마 밀리안이 집을 나갈 걸 알고 있었던 걸까. 진은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프레아에게 태연하게 대꾸했다.
“홀로서기를 해보고 싶다 해서 잠시 나간 거란다. 그렇지 밀리안?”
“예. 맞습니다, 아버지.”
“…….”
프레아가 굳은 얼굴로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다 알고 있었다고? 밀리안이 가문에서 자기 이름을 빼버릴 걸?
프레아는 저만 빼고 모두가 알고 있었다는 걸 알게 되자 기분이 좋지 않았다. 서운함이 가득한 얼굴을 하니 진이 헛기침을 큼큼, 하며 말했다.
“미리 말하지 못해서 미안하구나. 그동안 너무 바빠서 내가 깜박했지 뭐냐.”
“……그러셨군요.”
프레아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서운하지 않다면 거짓말이라 괜찮다고는 하지 않았다. 그래도 부모님이 태연한 걸 보니 다행히 아직 밀리안이 저를 좋아하는지는 모르는 것 같았다.
곧이어 음식들이 차례대로 나왔다. 밀리안이 익숙하게 프레아가 좋아하는 음식들을 그녀 앞쪽에 밀어주며 다정히 말했다.
“많이 먹어.”
그러곤 사르르 눈웃음을 쳤다. 프레아는 밀리안을 쳐다도 보지 않고 접시에 코를 박듯이 밀착했다. 알아서 먹을 테니 신경 끄라는 무언의 암시였다. 밀리안이 프레아의 뜻을 알아듣곧 피식 웃으며 식사에 집중했다.
“그나저나 곧 축하연이 열리겠구나. 파트너는 당연 프레아겠지?”
한참 식사 중에 에밀리가 유려하게 웃으며 새로운 화두를 꺼냈다. 프레아가 스테이크를 입에 넣고 우물거리다 놀라 캑캑거렸다.
“저, 저요?”
엄마, 안 돼요.
프레아가 간절한 얼굴로 에밀리를 바라보았다. 파트너라니. 가뜩이나 저가 좋다고 저돌적으로 나오는 녀석인데, 떡하니 파트너 자리를 주었다간 함부로 행동해 남들이 눈치챌까 겁났다.
평소 같았으면 당연히 하겠다고 했겠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에밀리는 그런 프레아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기꺼운 얼굴로 이야기했다.
“설마 남동생이 쓸쓸히 입장하길 바라는 건 아니겠지? 네가 가문을 대표해서 밀리안의 기를 살려줘야 할 것 같은데.”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부인.”
진이 에밀리의 말에 얼른 동의했다. 프레아의 눈이 세차게 흔들렸다. 밀리안이 자신을 좋아한다는 걸 부모님은 모른다. 여기서 왜 안 되는지를 설명할 순 없었다. 그러려면 밀리안이 자신을 좋아한다는 걸 말해야 했으니까. 그건 불가능했다.
그렇다고 이대로 밀리안의 파트너로 연회에 참석하기도 불편했다. 순간 밀리안의 알몸이 떠올라 얼굴이 화끈거렸다. 뭔가 대책이 필요했다. 프레아가 아무 말도 못 하고 우물쭈물하는 그때, 불현듯 빠져나갈 구멍이 떠올랐다. 그녀는 애써 밝게 웃으며 말했다.
“아! 전 그날 메샤르에서 할 행사가…….”
“어머, 무슨 소리니? 비숍한테 이미 일정 다 확인했는데. 그날 아무 일 없다는데?”
“어, 어머니?”
프레아가 제 일정을 꿰고 있는 에밀리를 보며 움찔했다. 그런 프레아에게 에밀리가 쐐기를 박았다.
“설령 있다고 해도 브레이크 씨를 시키면 되지 않니?”
“……그, 그렇네요.”
프레아는 본전도 못 찾고 에밀리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밀리안은 이 모든 상황이 즐겁다는 듯이 피식거렸다. 프레아가 그런 밀리안을 째려보았다. 이게 다 너 때문이야! 하는 얼굴이었다.
절대, 절대, 절대로 부모님에게 사실을 말할 순 없다. 부모님이 알게 되면 쓰러지실지도 모른다. 저만 해도 충격을 무지하게 받았지 않은가. 부모님은 저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그녀는 지금까지 단란하던 가족 관계가 깨질까 봐 무서웠다. 프레아는 절대로 밀리안이 자신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두 사람이 알아선 안 된다고 다짐했다. 또한 그가 싫어할 만한 행동을 해 마음을 단념시켜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 까짓것 파트너쯤이야 해버리자.
프레아는 잔뜩 힘이 들어간 목소리로 호기롭게 이야기했다.
“맞아요, 누나로서 제가 당연히 같이 가줘야죠.”
“역시, 그렇지?”
“네, 잘 다녀올 테니 걱정 마세요.”
“그래, 우린 네가 자랑스럽단다.”
에밀리와 진이 동시에 말하며 프레아를 향해 푸근히 웃었다. 프레아 역시 덩달아 미소 지었다. 그러곤 밀리안을 보며 손짓으로 입 다물라는 신호를 보냈다.
프레아가 그러는 사이 은근슬쩍 에밀리와 진의 눈이 마주쳤다. 두 사람은 눈빛으로 성공했다며 환호하고 있었다. 프레아만 몰랐다. 부모님이 이미 밀리안의 마음을 다 알고 있다는 걸.
밀리안은 프레아가 파트너를 한다는 말에 낮게 웃었다. 이 모든 상황이 유쾌하기 그지없었다. 생각보다 두 분이 너무 연기를 잘해 쉽게 일을 성사시켰다. 여전히 저를 보며 으르렁거리는 프레아를 보자 또다시 피식 웃음이 나왔다.
정말이지 자신이 예상한 대로 움직이는 프레아가 귀여웠다. 모든 일이 그의 계획대로였다. 그걸 알 리가 없는 프레아는 결연한 얼굴로 밀리안을 흘겨보았다.
프레아는 테일러스 성으로 돌아가려는 밀리안을 뒤따라갔다. 미리 단단히 주의를 주기 위해서였다. 밀리안이 제 옆으로 온 프레아를 보며 물었다.
“이젠 집까지 따라오려고?”
“아니거든? 너 말야, 부모님한테 말한 건 아니지?”
“뭘?”
프레아의 추궁에 밀리안이 생글거리며 눈높이를 맞추었다. 프레아는 한껏 여유로운 그의 모습에 더 약이 올랐다. 뒤에서 진과 에밀리가 손을 흔들며 잘 가라고 하고 있었다. 프레아는 그들의 눈치를 보며 입으로는 웃으면서 밀리안에게 단단히 경고했다.
“하여튼 말하지 마. 난 절대, 절대 네 마음 받아줄 생각 없어.”
“미안하지만 나도 절대, 절대 포기할 생각 없어.”
밀리안이 프레아의 말투를 따라 했다. 장난기 가득한 그의 목소리에 프레아가 눈을 흘겼다. 매사에 여유로운 그의 태도가 불만스러웠다. 그때 밀리안이 피식 웃으며 경고하듯이 속삭였다.
“자꾸 그렇게 무섭게 굴면 다 이야기하는 수가 있어. 지금이라도 말할까?”
밀리안이 뒤를 돌아 공작 부부에게 갈 것처럼 굴자 다급해진 프레아가 그의 팔을 붙잡으며 낮게 소리쳤다.
“밀리안 테일러스!”
막상 그의 풀네임을 다 부르고 나니 새삼 깨달았다. 그 이름이 무척 어색하다는 걸. 프레아는 그의 이름에 에드모어와 레이첼이 함께 있는 것이 좋았다. 그래서 그의 이름을 부르자마자 침울해졌다. 프레아의 낮은 외침에 밀리안이 진지한 눈빛으로 말했다.
“그래, 난 이제 테일러스야. 그러니까 네가 내 마음을 못 받아주는 이유에 남동생은 없어. 정 거절하고 싶으면 다른 이유를 찾도록 해.”
“내게 그 이유만큼 큰 건 없어.”
프레아의 목소리는 잔뜩 풀 죽어 있었다. 도무지 다른 이유가 떠오르지도 않을뿐더러 남동생을 안 하겠다는 그의 말이 섭섭했다. 한눈에 봐도 풀 죽어 있는 프레아를 밀리안이 빤히 응시하다 다정히 말했다. 눈을 맞추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 말은 꼭 남동생만 아니면 내가 좋다는 말로 들려.”
“그런 뜻 아닌 거 알잖아. 다른 이유를 대지 않아도 될 만큼 아주 큰 이유라는 말이야.”
“어쨌든 난 그 이유는 인정할 수 없어. 정 댈 이유가 없으면 나한테 와야지, 별수 있어?”
밀리안은 선택지가 저에게 오거나 자신이 수긍할 이유를 대거나 둘 중 하나인 것처럼 말했다. 애초에 어떤 이유를 대도 그가 납득할 것 같지 않았다. 결국 선택지는 하나나 마찬가지였다.
“말도 안 돼. 내가 왜 그래야 하는데!”
프레아가 불합리함을 호소했다. 왜 거절하는 쪽에서 이유를 상대에게 납득시켜야 한단 말인가. 밀리안은 프레아가 안달 날수록 즐거운 기색이었다. 그는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넌 어차피 내게 오게 되어 있어. 그만 튕기고 오도록 해.”
“내가 왜……!”
프레아가 막무가내로 고집을 피우는 밀리안에게 버럭 화를 내려 했다. 그 순간 그가 쪽, 하고 그녀의 볼에 입 맞추었다. 그의 눈이 아주 예쁘게 접혔다.
“이건 마중 온 것에 대한 답례.”
“너…… 너!”
프레아가 밀리안의 입술이 닿은 볼을 손으로 가리며 말을 더듬었다.
“왜? 네가 내게 자주 하던 거잖아.”
밀리안이 어깨를 으쓱이며 한 대꾸에 프레아는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밀리안의 행동은 자신이 가족들에게 늘 하던 버릇이 맞으니까. 프레아는 아무 말도 못 하고 충격받은 얼굴로 서 있었다. 얼굴이 새빨개진 그녀를 향해 밀리안이 말했다.
“지금 네 얼굴 체리 같아.”
그 말에 얼굴이 더욱 홧홧해진 것은 분명 낯설어서이리라.
“……그, 그만 놀려.”
“굉장히 먹음직스럽네. 먹어봐도 돼?”
“밀리안 테일러스!”
“장난이야. ……밤공기가 차다. 그만 돌아가.”
프레아가 소리를 빽 지르자 밀리안이 뒤로 물러났다. 그러곤 자연스럽게 겉옷을 벗어 프레아의 어깨에 둘렀다.
“코앞인데.”
프레아가 여전히 씩씩거리며 웅얼거리자 그가 피식 웃었다.
“잘 가.”
손을 흔들며 인사한 밀리안이 성문을 빠져나갔다. 그 자리에서 프레아만 웃질 못했다. 돌아가는 그의 뒷모습을 보자니 심장이 쿵쿵거려서 견딜 수가 없었다.
제대로 말려 버렸다. 그의 말에 어느 하나도 제대로 대답한 게 없었다. 전혀 프레아 답지 않은 일이었다. 이렇게 완벽하게 말로 밀려 버리다니, 분했다.
프레아가 분한 마음에 입 모양으로 그의 뒤통수에 대고 ‘가다가 콱 넘어져라!’ 중얼거리곤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 * *
“그래서 정말 가려고?”
에리카가 침대 위에 누운 채로 물었다. 그 옆에 덩달아 누워 있던 프레아가 한숨을 푹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가야지…….”
프레아는 결국 혼자 끙끙 앓다가 에리카에게 하소연했다. 누구에게라도 말해야 답답함이 풀릴 것 같아서였다. 혼자 고민하기엔 너무 벅찬 일이었다. 그렇다고 부모님께 말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며칠 동안 고민하던 문제를 에리카에게 털어놓으니 조금이나마 후련했다. 그녀는 말 못 할 비밀을 안고 있는 게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인지 요 며칠 뼈저리게 체감했다.
“걔도 참 의외다. 언제부터 좋아했대?”
에리카가 머리맡에 있는 아몬드를 집어 오도독 깨물며 물었다. 프레아는 몸을 뒤집어 에리카의 옆에 바짝 붙으며 말했다. 스스로도 밀리안이 이해되지 않는다는 얼굴이었다.
“그걸 모르겠어. 한 번도 티 낸 적이 없거든.”
“티 냈는데 네가 모른 건 아니고?”
“아니야. 정말 티 안 났단 말야.”
프레아도 머리맡에 있는 아몬드를 집어 먹었다. 솔직히 말해서 언제부터 좋아했냐고 물어보고 싶었다. 분명 어릴 때만 해도 프레아가 밀리안을 따라다녔으면 따라다녔지, 밀리안 쪽에서 먼저 반응한 적은 드물었다.
게다가 밀리안과의 첫 만남은 지금 생각해도 민폐 그 자체였다. 그때는 밀리안이 너무 좋고, 친해지고 싶어서 다가가기 바빴었다. 그랬던 관계가 역전되니 당황스러웠다. 어릴 적 같았으면 멋모르고 좋아했겠지만 지금은 어린아이가 아니었다.
프레아는 자신이 밀리안을 좋아하는 것과 그가 자신을 좋아하는 것의 깊이가 다르다는 걸 이미 알 만큼 나이를 먹었다. 에리카는 한참 생각하는 듯하더니 프레아의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난 사실 네가 밀리안을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뭐? 그건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야. 내가 왜.”
프레아가 기겁하자 에리카는 아몬드를 오도독 씹어 먹으며 피식 웃었다.
“네가 밀리안을 좀 따라다녔니?”
“그건 누나로서……!”
“그건 네 생각이고, 밀리안 테일러스는 아니었다는 게 중요하지.”
에리카가 핵심을 딱 짚었다. 이에 프레아는 입을 다물었다. 그래, 애초부터 밀리안은 자신을 누나로 본 적이 없다고 했다. 그걸 알고도 잘해준 건 프레아였다.
그저 엄마의 빈자리를 레이첼 가문이 채우는 게 싫어서 하는 말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가족으로 인정받기 위해 더욱 노력했던 건데. 오히려 그것이 더 역효과를 냈던 걸까 싶어 그녀는 속상했다. 프레아의 반응이 미지근하자 에리카가 부연했다.
“네 탓이라고 말한 건 아니야. 그냥 원래 사람 감정이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라는 거지. 넌 바로 가족으로 받아들였을지 몰라도 밀리안은 아니었던 거잖아.”
“나도 알아, 그냥, ……이렇게 될 거라곤 생각해 본 적이 없어서 너무 혼란스러워.”
프레아가 한숨을 크게 내뱉었다. 머릿속에선 밀리안의 잔상이 아른거렸다. 원래 그렇게 적극적인 아이였던가. 순간적으로 제 볼에 닿았던 입술의 감촉을 떠올린 프레아가 괜히 이불을 팡팡 쳤다. 그 행동이 괴이해 보였는지 에리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생각해?”
“아니야, 좀 수치스러운 일이 떠올라서.”
프레아는 차마 밀리안의 알몸을 봤었고, 그에게 볼 키스까지 당했다는 말을 할 수 없어 얼버무렸다. 그런 프레아를 수상하다는 얼굴로 보던 에리카가 재차 물었다.
“근데 얼굴은 왜 빨개져?”
“더워서 그래!”
“여기 지금 엄청 시원한데…….”
에리카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창밖에서 시원한 바람이 휭, 하고 불었다. 프레아는 애써 모른 척하며 꾸물거렸다. 다행히 에리카는 집요하게 캐묻지 않고 그녀의 고민에 동참했다.
“근데 걔가 네게 진심이라면 큰일이긴 하네. 부모님이 아시면 집안이 발칵 뒤집히는 건 시간문제일 텐데.”
“……그래, 그래서 내 선에서 어떻게든 밀리안을 말려봐야지.”
프레아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에 에리카가 궁금하다는 기색을 띠었다.
“어떻게 말리려고?”
“일단 선을 다시 볼 거야.”
“그러다 글라디안 로테인 꼴 날 거 같은데.”
에리카가 미덥지 않다는 듯 중얼거리자 프레아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자는 겁이 많아서 그래! 밀리안이 정말로 죽일 리가 없잖아. 배짱 없는 남자는 이쪽에서도 사양이라고.”
프레아가 글라디안의 일을 떠올리며 씩씩거렸다. 그런 프레아를 본 에리카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밀리안은 그 말 진심이었을 텐데.’
하지만 구태여 입 밖으로 속마음을 꺼내지 않았다. 분명 프레아가 듣고 상심할 테니까. 프레아는 당당하게 제 계획을 읊기 시작했다.
“밀리안 몰래 결혼 주선 업체로 찾아갈 거야.”
“그러다 들키면?”
“벌써부터 들킬 걱정 해야 해?”
프레아가 에리카를 쏘아보았다.
“미안.”
에리카는 손으로 입을 가리며 짧게 얼버무렸다. 그녀의 눈빛이 너무 완강한 탓이다.
프레아의 계획은 이랬다. 밀리안 몰래 결혼 주선 업체에 가입해 밀리안 앞에서도 겁먹지 않는 아주 강한 사람을 만난다. 이왕이면 작위가 높은 상대가 훨씬 수월할 것 같았다.
혹시라도 밀리안이 보복할 수도 있으니 주선 조건을 까다롭게 제시할 생각이었다. 적어도 3번은 만나야 한다든가 하는 조건들을 말이다.
프레아는 글라디안이 사색이 되었던 그날을 떠올렸다. 글라디안처럼 두 번의 만남 만에 차이고 싶지 않았다. 솔직히 그게 차인 거지 어떻게 찬 거란 말인가. 정말 자신이 좋았으면 밀리안이 좀 협박한다고 지레 겁먹고 그만 만나자고 하진 않았겠지.
이럴 줄 알았으면 밀리안이 전쟁터에 있을 때 선보라는 아버지의 말을 들을 것을. 프레아는 자탄했다. 한 가지 이상한 점은 아버지가 더 이상 결혼을 강요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버지라도 나서주면 좋을 텐데.
프레아가 그리 생각하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한참 우울한 얼굴빛을 하던 그녀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금세 기운을 차린 듯했다.
“우선 밀리안에게 맞춰줄 생각이야. 그래야 의심을 안 하겠지.”
“잘해봐.”
프레아가 결연한 얼굴로 그리 말하자 에리카가 덩달아 두 주먹을 불끈 쥐며 응원했다.
* * *
축하연 당일이 되었다. 밀리안이 약속 시간에 맞춰 에드모어 성으로 왔다. 그가 미리 보내준 드레스로 갈아입은 프레아가 밀리안을 맞았다.
“예쁘네.”
밀리안이 프레아를 보며 나긋하게 말했다. 프레아가 그런 밀리안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는 기사단 제복을 입고 있었다. 어느새 그의 망토로 시선이 옮겨졌다. 자연스레 입단식에서의 일이 떠올랐다.
설마, 그때도 좋아했던 걸까.
아버지가 아니라고 단언한 건 밀리안이 자신을 좋아해서 그랬다고는 생각하지 못한 걸지도 몰랐다. 밀리안을 바라보는 그녀의 시선이 한껏 의심스러운 빛을 띠었다. 밀리안은 그저 지금의 상황이 좋은지 웃기만 했다.
“갈까?”
마차 앞에 도착한 그가 손을 내밀었다. 붙잡고 올라타라는 의미였다. 프레아가 그의 손을 붙잡아 마차 안으로 들어서자 밀리안도 뒤따라 들어왔다.
마차 안은 비교적 넓었지만 키가 큰 두 사람이라 그런지 무릎이 간간이 부딪쳤다. 프레아는 의자에 바짝 붙어 앉았다. 밀리안이 뻣뻣하게 굳은 프레아에게 말했다.
“걱정 마, 아직 안 잡아먹어.”
“……아직?”
프레아가 밀리안의 말에 의문을 가져 되물었다. 묘하게 곧 잡아먹겠다는 의미로 들려서였다. 밀리안은 낮게 웃었다. 그의 목소리가 마차 안을 울렸다. 덜커덩거리는 마차처럼 프레아의 마음도 세차게 흔들렸다.
“네 허락 없인 아무 짓도 안 해.”
“그러기엔 어제 키스했잖아.”
프레아가 못 믿겠다는 얼굴로 밀리안을 바라보았다. 밀리안은 그윽한 눈빛을 하고 물었다.
“그래서 불쾌하고 싫기만 했어?”
프레아는 입을 다물었다. 불쾌하거나 싫지는 않았으니까. 하지만 곧이곧대로 싫지 않았다고 하면 좋아할 것 같아서 대답하지 않았다. 곧장 대답이 돌아오지 않자 밀리안이 덧붙였다.
“그래……. 네가 불쾌하고, 싫고, 내 얼굴만 봐도 역겹다면 다신 안 그럴게.”
“아니, 왜 그렇게 극단적으로…….”
프레아가 밀리안의 팔을 붙잡으며 말렸다. 그의 풀 죽은 모습에 안절부절못했다. 아니, 왜 그렇게 부정적인 쪽으로 넘어가는 건데. 솔직히 자신이 밀리안을 역겹다고 생각할 리가 없었다. 프레아의 손길에 밀리안이 처연한 얼굴을 했다.
“그럼 내 키스가 불쾌하고 싫거나 역겹지 않았다는 말이야?”
밀리안이 제 입을 가린 채 프레아를 시선으로 좇았다. 이에 프레아가 세차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당연하지! 내가 왜 널 역겹다고 생각해. 절대 아니야.”
“그래? ……그럼 계속해도 된다는 말이야?”
“……뭐?”
“고마워, 허락해 줘서.”
밀리안의 눈이 사르르 접혔다. 뭘, 허락한다는 말이지? 프레아가 밀리안의 말을 곱씹었다. 뭔가 이상했다. 이럴 의도가 아니었는데?
프레아는 어째서 계속해도 된다는 쪽으로 결론이 난지 몰라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다 그 말이 결국 키스해도 된다는 쪽으로 귀결됨을 깨닫고는 다급하게 소리쳤다.
“저기, 잠깐만. 내 말은 그런 게……!”
“도착했습니다.”
프레아가 무어라 해명하려 입을 떼는 순간, 마부가 도착을 알렸다. 곧이어 마차가 멈추고 밀리안이 먼저 내려 프레아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한참 멍하니 그의 손을 보고 있으니 밀리안이 손을 흔들며 재촉했다.
“뭐 해, 잡지 않고.”
“…….”
하는 수 없이 그대로 내릴 수밖에 없었다.
남이 된 남동생이 남편이 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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