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장 남동생이 돌아왔다
5년이 지났다.
밀리안은 여전히 전쟁터에 있었다. 그의 안위가 걱정되어 프레아는 수도에서도 제대로 쉴 수 없었다. 피가 낭자한 곳에서 어떻게 지내는지 몰랐다. 또 스스로에게 상처 내며 버티고 있을까 봐 걱정되었다.
“아가씨, 공작님이 부르세요.”
“하아…….”
프레아는 시에라가 노크하며 하는 말에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벌써부터 진이 무슨 소리를 할지 알아서였다. 프레아가 다시 한번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진이 작년부터 계속해서 프레아에게 결혼하는 것이 어떻겠냐고 물어왔다. 에밀리는 뜬금없이 웬 결혼이냐고 천천히 해도 늦지 않다고 말렸지만 막무가내였다.
물론 프레아는 이제 26살이었고, 어느 정도 신랑감을 물색해야 한다는 것쯤은 알았다. 그래, 자신이 평범한 상태라면 말이다. 단란한 가족의 축복을 받으며 갈 수 있는 상황이었다면 프레아는 기꺼이 결혼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밀리안이 전쟁터에 있었다. 프레아는 결혼이 싫은 게 아니라 밀리안이 없는 상태로 훌쩍 결혼하는 게 싫었다. 남동생은 나라를 위해 열심히 싸우고 있는데 저 혼자 남자를 만나고 결혼식을 올리는 게 마땅찮았다.
또한 결혼하면 성에서 나가 가정을 꾸리게 될 텐데, 프레아는 아직 그럴 준비가 안 되었다. 물론 이 모든 걸 처치하더라도 거부하는 이유는 하나였다.
결혼식에서 밀리안의 축하를 받고 싶었다. 어쨌든 남동생인데 결혼식에도 오지 못하는 건 너무 슬픈 일이니까. 남동생이 죽은 것도 아니고.
“저 왔어요, 아버지.”
프레아가 공작의 집무실 앞에서 노크하며 말했다. 진이 문을 벌컥 열고는 프레아를 반겼다.
“어서 와라.”
어쩐지 진이 잔뜩 수선 떨며 프레아를 자리에 앉혔다. 프레아는 오늘은 또 어떻게 거절해야 하나 고민하며 입을 뗐다.
“아버지 저는…….”
“오늘 어디 좀 가야겠다.”
진이 프레아의 말허리를 잘랐다. 갑작스러운 외출 소식에 프레아가 놀라 되물었다.
“네? 어딜요?”
“로테인 후작가의 장남이 마침 네가 마음에 든다고 하는구나. 그냥 간단히 점심을 먹는 거니…….”
“아버지!”
프레아는 저 몰래 약속을 잡은 진에게 버럭 화를 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제 허락도 없이 맘대로 약속을 잡는 게 어디 있나 싶었다. 하지만 진은 프레아가 거부해도 무를 생각이 없는지 더욱 강경하게 말했다. 거세게 도리질하는 게 무척 초조해 보였다.
“안 돼. 안 된다. 이번엔 절대 안 돼. 무조건 가라.”
“도대체 왜 그러세요. 설마 제가 얼른 성을 떠나길 바라세요?”
“아니다. 그런 게 아니라…… 하아, 이걸 진짜 뭐라고 설명해야 하는지.”
진이 마른세수하며 괴로워했다. 아무래도 아들이 곧 수도로 올 것 같다. 그것도 최종 승전보를 들고 말이다. 이거야말로 총체적 난국이었다. 승리의 여신은 이미 헤로스 제국의 손을 들어주려 하고 있었다.
이제 적국의 수장만 치면 끝날 싸움이었다. 적국은 마지막으로 발악하고 있는 상태였다. 예상 종전 날짜는 한 달 정도 잡고 있다고 이미 보고가 내려온 상태였다.
한 달,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이다. 적국이 워낙 수성전에 강한 나라라 생각보다 공성전에서 난항을 겪고 있다지만 한 달이라는 기간을 내건 것을 보면 얼추 작전이 완성된 듯했다.
그러니 한 달이라는 시간 안에 프레아의 일을 해결하지 못하면 완전 끝장이었다. 이번이 정말 마지막 기회였다. 그래서 진은 막무가내로 일을 처리할 수밖에 없었다. 이것 말고는 다른 방도가 떠오르지 않았다.
진은 불안했다. 제 아들 녀석이 기어이 폭탄을 들고 올까 봐. 그렇다. 밀리안은 한마디로 시한폭탄이었다. 그것도 반드시 터질 예정인 폭탄 그 자체였다.
“아버지, 제가 결혼이 싫어서 그러는 건 아니에요, 단지…….”
“그래. 밀리안이 전쟁터에 있어서 그런다는 건 나도 안다.”
“알면서 왜 그러세요. 밀리안이 오고 나서 선을 봐도 늦지 않잖아요?”
“아니지, 어차피 할 결혼이라면 밀리안이 오기 전에 연애라도 해두어야 하지 않겠니? 그럼 밀리안도 포기할 테고.”
“뭘 포기해요?”
“아니다. 마지막 말은 잊어라.”
프레아는 도무지 진의 화법이 이해가 되질 않았다. 평소에는 자상하고 제 이야기를 잘 들어주면서 결혼 얘기만 나오면 이 모양이었다.
“하아, 아버지 정말 이상해요.”
“그래, 이상하게 생각해도 좋으니 제발 선이라도 봐다오. 이렇게 부탁하마.”
“……알겠어요.”
프레아는 더는 말리지 못하고 결국 백기를 들었다. 당장 결혼하겠다는 것도 아니고 선만 보는 거니 이제 그만 아버지의 청을 거절하지 말아야겠다 생각했다.
물론 밀리안을 사지에 두고 태평하게 선이나 보러 다니는 게 여전히 꺼림칙했다. 하지만 진이 저렇게 간청하니 더 이상 거절하기 어려웠다.
“정말이냐?”
진이 그 어느 때보다도 환한 얼굴로 물었다. 프레아가 힘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진이 손을 덥석 잡으며 말했다.
“고맙다, 정말 고마워. 네가 날 살렸다.”
“아버지를 살렸다니 다행이에요…….”
프레아는 그런 진을 보며 찝찝한 얼굴로 웃었다. 제가 생각한 것보다 진이 무척 기뻐 보였다. 도대체 자신이 결혼하는 것과 아버지의 목숨이 어떤 연관이 있는 건지 모르겠다.
집무실을 나와 약속 장소로 가기 전 잠시 방에 머무는데 때마침 밀리안의 편지가 왔다. 편지를 전해준 시에라는 도련님이 참 지극정성이라며 말을 덧붙였다.
그런 말을 들을 수밖에 없는 게 전쟁터로 간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편지가 자주 왔다. 편지의 내용은 주로 보고 싶다는 말과 어서 만나기를 고대한다는 이야기들이었다.
프레아가 기분 좋게 편지를 뜯어보았다. 편지는 평상시처럼 보고 싶다는 내용으로 시작하고 있었다.
[사랑하는 프레아에게.
보고 싶다. 정말 하루에도 몇 번씩 널 보러 갈까 고민해.]
“뭐야, 그거 탈영이라고.”
프레아가 밀리안의 편지를 보며 혼자 키득거렸다. 하여간 누나가 보고 싶다는 말을 이렇게 절절하게 하는 동생이 어디 있나 싶었다. 프레아는 곧장 다음 내용을 살폈다.
[프레아, 나는 지금 케르베르만 산맥에 있어. 곧 공성전이 벌어질 거야. 이번 전쟁에서 이기면 이 지긋지긋한 전쟁도 끝날 것 같아.
벌써부터 널 볼 생각에 무척 설레. 프레아는 어때?]
“나도 설레.”
프레아가 대답하듯 중얼거렸다. 어쩐지 밀리안의 편지가 간질거렸다. 밀리안이 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벌써 들뜨기까지 했다. 전쟁터에 가서도 누나가 걱정할까 봐 수시로 연락해 주는 남동생이라니. 정말 밀리안은 배려심이 극진하다 못해 흘러넘쳤다.
이젠 어린 시절 좀 삐딱하게 굴었던 건 생각도 안 났다. 정말 오기만 해봐라. 아주 꽉 안아주다 못해 진하게 재회의 뽀뽀를 해줄 테다.
[지난번 편지를 보니까 아버지가 자꾸 결혼을 재촉하는 것 같은데, 무시해.
아버지가 노망이 들었나 무슨 헛소린지.
하여튼 무시해, 아니, 아예 듣지 마. 결혼은 무슨, 설마 날 두고 결혼하려는 건 아니지?
만약 그렇다면 정말 탈영하는 수가 있어.]
프레아는 밀리안의 성화에 시무룩해졌다. 그가 우려하는 일이 현실이 되었으니까. 밀리안의 바람과 달리 프레아는 오늘 당장 선을 볼 예정이었다.
[네가 너무 그리워. 곧 보자.]
편지를 마저 다 읽은 프레아가 잠시 머뭇거리는가 싶더니 펜을 들었다. 밀리안에게 아무래도 선은 봐야 할 것 같다고 말할 생각이었다.
편지에서 그가 진을 욕한 것은 그저 결혼하기 싫어하는 티를 제가 편지에 드러냈기에 부러 역성들어 준 것이리라. 프레아는 한 글자 한 글자에 심혈을 기울이며 글을 쓰기 시작했다.
[사랑스러운 내 동생, 밀리안에게.
밀리안, 매번 이렇게 편지를 보내줘서 너무 고마워.
나도 네가 곧 온다는 소식을 들으니 무척 설레고 보고 싶어.
밀리안, 지난번에 결혼 강요한다고 투덜댄 건 사실 그냥 한 말이었어.
그래도 날 대신해서 역성들어 준 건 정말 고마워, 감동이야.
그리고 밀리안, 사실…… 나 이번에 선봐. 로테인 후작의 장남이라는데 내가 마음에 든대.
아버지가 만나만 보라고 해서 오늘 볼 예정이야. 아직 결혼할지는 모르겠지만 네가 오기 전에는 절대 하지 않을 테니 걱정하지 마.
그럼 사랑하는 밀리안, 다치지 말고 무사히 귀환하길 늘 기도할게.]
프레아는 그렇게 편지를 마무리하곤 시에라에게 전했다. 그 편지를 받은 밀리안이 곧장 작전도 무시하고 홀로 적국의 왕 목을 따 올 줄은 꿈에도 모른 채.
* * * * *
편지를 보낸 지 일주일이 지났는데도 밀리안에게 소식이 없었다. 보통 답장을 보내면 3일 안에 편지를 부치던 밀리안이라 걱정이 앞섰다.
“설마 아프기라도 한 걸까?”
“걱정되면 사람을 보내볼까요?”
시에라가 멍하니 창밖을 보는 프레아에게 말했다. 하지만 프레아는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그냥 갑자기 일이 생겼을 수도 있는데 괜히 그의 일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연락이 올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그때 들뜬 목소리로 하녀 한 명이 노크도 하지 않고 들어와 소리쳤다.
“아가씨!”
“얘, 노크도 없이 이게 무슨 짓이니?”
“시에라,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 도련님이 돌아오신대!”
“뭐어?!”
하녀의 말에 프레아가 덩달아 크게 소리치며 벌떡 일어났다. 한눈에 봐도 기쁜 기색이 역력했다. 밀리안이 돌아온다. 드디어, 온다. 프레아가 잔뜩 상기된 목소리로 물었다.
“언제 온대?”
“3일 뒤에 온대요.”
프레아는 그 말을 듣자마자 방을 박차고 달려 나갔다. 뒤에서 시녀들이 ‘아가씨! 복도에서 뛰시면 안 돼요!’ 하고 외치는 건 들리지도 않았다. 프레아는 설레는 얼굴로 곧장 진의 집무실 문을 열어젖혔다.
“아버지, 밀리안이 온대요!”
“그래, 들었다.”
같이 기뻐할 줄 알았는데 진의 표정이 좋지 못했다. 아들이 돌아온다는 데 마치 사신이 온다는 소식을 들은 것처럼 사색이 되어 있었다. 프레아는 밀리안의 심신에 문제가 생긴 걸까 불현듯 걱정돼 잔뜩 긴장한 얼굴로 물었다. 사고를 당해 돌아오는 건가 싶어 불안해졌다.
“아버지? 무슨 일 있어요? 혹시 밀리안 다쳤대요?”
“아니, 아니다. 그것보다 프레아, 글라디안 경은 어땠느냐?”
“나쁘지 않았어요.”
프레아는 지금 밀리안이 더 중요한데 진이 선본 남자에 관해 묻자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면서도 성심성의껏 대답했다.
“그래? 그럼 곧바로 결혼을…….”
“무슨 소리예요, 이제 한 번 만났는데.”
“한 번이면 충분하지 않느냐?”
어쩐지 진이 억지를 부리자 프레아는 얼굴을 찡그렸다.
“말도 안 돼요. 누가 한 번만 보고 결혼을 해요, 적어도 세 번은 만나야죠.”
“……그래, 그렇겠지. 미안하다. 실언이었다.”
진이 심란해하며 연거푸 마른세수를 했다. 그러곤 랭을 향해 아주 시무룩한 얼굴로 말했다. 마치 묵혀둔 죄를 고백하려는 죄인 같아 보였다.
“랭, 지금 당장 에밀리에게 급한 일이 있으니 좀 와달라고 전해라.”
“네, 알겠습니다.”
“아버지, 정말 무슨 일 있는 건 아니죠?”
프레아가 진에게 다가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진은 아주 처연하게 프레아를 보았다. 마치 모든 게 끝났다는 얼굴이라 프레아는 의아한 빛을 띤 채 고개를 기울였다. 아버지가 정말 이상했다.
“아버지?”
프레아의 ‘아버지’라는 말에 진이 다시 생기를 얻으며 다짐을 받듯이 말했다.
“그래, 프레아. 난 누가 뭐래도 네 아버지란다. 밀리안은 네 동생이고.”
“계속 확인시키지 않아도 알고 있어요.”
프레아가 새삼스럽게 무슨 소리를 하냐며 피식 웃었다. 하지만 진은 웃을 수가 없었다.
* * * * *
에밀리는 갑자기 저를 부른 진을 빤히 보았다. 어쩐지 똥 마려운 강아지가 똥 눌 자리를 몰라 안절부절못하는 것 같았다.
“도대체 무슨 일이에요. 일하던 중에 부르고.”
“그게…… 그러니까.”
진이 우물쭈물하며 답하지 못하자 에밀리가 답답하다는 듯이 호령했다.
“에드모어 공작, 이런 식이면 곤란해요. 우리 규칙 잊었어요? 서로의 생활을 방해하지 않기로 한 거.”
“아닙니다,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 이 일은 그런 규칙보다도 더 중대한 문제라서…….”
“그러니까 그 중대한 문제가 도대체 뭐냐고 묻고 있는 거예요, 진 에드모어 공작님.”
에밀리가 뒷말에 힘을 주었다. 에밀리는 제 업무 시간을 방해하는 것을 무엇보다 싫어했다. 만약 제대로 된 사유가 아니라면 아주 으름장을 놓으리라 여기고 있었다.
진은 에밀리가 화를 내자 더욱 말하기 어려워 망설였다. 이를 어찌해야 할지 몰랐다. 그렇게 움찔거리기만 한참, 진이 토해내듯 말했다. 물론 앞뒤 맥락을 싹둑 자른 채였다.
“프레아가 위험합니다!”
“네? 무슨 소리예요, 프레아가 왜요?!”
진이 고래고래 소리 지르자 에밀리도 덩달아 놀라 소리쳤다. 프레아가 위험하다니! 설마 반란군이 그녀도 모르는 새 프레아를 표적으로 삼기라도 한 건가 싶어 간담이 서늘했다.
에밀리의 사자후에 놀란 진이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진은 어디서부터 말해야 할지 가늠이 안 잡혔다.
“밀리안이, ……하아. 그러니까 밀리안이 그 아일 좋아해요.”
“……난 또 뭐라고. 동생이 누날 좋아할 수도 있죠. 사이가 나쁜 것보다는 낫잖아요.”
“아닙니다! 그게 아니라고요!”
진이 에밀리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비명을 지르듯 외쳤다. 평소답지 않게 무척 초조해 보였다. 마치 오랫동안 앓던 문제를 고백하려는 것처럼 주변을 연신 두리번거렸다.
이에 상황이 심각하다는 걸 눈치챈 에밀리가 더는 추궁하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그가 말을 다할 때까지 기다리겠다는 몸짓이었다. 한동안 침묵이 이어졌고, 진이 다시 용기를 내어 말했다.
“사실 말하지 못한 게 있습니다.”
“뭔데요?”
“그때, 밀리안이 프레아에게 머리 장식을 줬던 날 말입니다.”
“아, 그랬었죠. 밀리안도 참, 제 신부에게 줘야 할 물건을 프레아에게 주다니. 아마 지금쯤 후회하고 있겠죠? 이젠 성인이라 그 가보가 어떤 의미인지 알았을 테니까요.”
“아니에요, 후회할 리 없습니다. 알고 준 거니까요. 그건 한마디로 족쇄였습니다.”
“네?”
에밀리가 당황한 기색을 띠며 진을 바라보았다. 분명 그날 진은 밀리안이 가보의 의미를 모르고 함부로 프레아에게 선물한 것 같다고 얼버무렸었다. 공작의 말이니까 당연히 그런가 보다 하고 넘어갔었는데 이제 와 족쇄였다니? 이해하기 어려웠다.
진은 괴로움에 몸부림치며 이 사태를 어찌해야 할지 몰랐다. 사실 그때 밀리안이 프레아에게 준 머리 장식은 에드모어 가문 대대로 이어져 오는 가보였다. 그것도 에드모어가 제 신부에게 주는 예물이었다.
그 당시 진이 밀리안과 만난 뒤 경황이 없는 나머지 그냥 잘 몰라 잠시 맡긴 거라고 에밀리에게 얼버무렸던 것이 더 화근이었다. 한번 시작한 거짓말은 손쓸 새 없이 커져 있었다.
“죄송합니다, 속일 생각은 없었는데…….”
“설마, 진심이라는 건가요?”
“맞습니다.”
“허어…….”
에밀리가 충격받은 얼굴로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설마 진심으로 프레아에게 청혼한 거였다니.
“에밀리, 놀란 와중에 미안하지만 더 큰 문제가 있습니다.”
“이것보다 더 큰 문제가 있나요?”
에밀리는 진이 무슨 말을 할지 무서워졌다. 그녀가 되묻는 말에 진이 턱을 쓸며 대꾸했다.
“네, 더 큰 문제입니다. 밀리안이 전쟁터로 가기 전에 저와 한 대화가 있습니다.”
“대화요……?”
에밀리가 얼마나 더 큰 똥이 남은 거냐는 얼굴로 진을 바라보았다. 밀리안이 싸지른 똥은 고스란히 진에게 떠넘겨졌고 다시 에밀리에게 넘겨지고 있었다. 그 양은 한마디로 어마어마했다.
“밀리안이 가문을 나가겠다고 했습니다. 나가서 프레아와 결혼을…….”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예요?!”
에밀리가 듣다못해 고함을 질렀다. 이에 진이 깨갱 하며 고개를 숙였다. 참다못한 에밀리가 으르렁거렸다. 이건 명백한 계약 위반이었다.
“이봐요, 에드모어 공작. 우리가 지금 소꿉장난하자고 결혼한 줄 알아요? 가뜩이나 반란군이 점점 거대해져서 열 받는데!”
에밀리가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마치 프레아가 폭발할 때와 비슷한 모습이었다. 진은 손수건으로 식은땀을 닦으며 말했다.
“잠시 진정을 좀 하고…….”
“진정하게 생겼어요?!”
에밀리가 표독스럽게 진을 노려보았다. 처음 계약 결혼을 했을 때, 최대한 눈에 띄지 않는 결혼 생활이어야 한다는 조항이 있었다. 그 이유는 반란군의 의심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반란군은 테러 집단이었다. 황실에 본보기를 보여준다는 명목하에 수많은 사람을 죽였다. 귀족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미 반란군에 의해 가족을 잃은 귀족이 많았다. 에드모어 가문 역시 테러로 인해 공작부인을 잃었다.
부인을 잃은 진은 미친 듯이 반란군을 헤집고 다녔다. 에드모어 공작의 기세에 반란군이 몸을 사렸음에도 그의 행동은 계속되었다. 황제는 아끼는 신하가 이러다 대형 사고를 쳐 그 빌미로 정적에게 책을 잡힐까 염려했다.
그래서 이왕 날뛰는 거 아예 날개를 달아주고자 반란군에 대한 소탕 지휘권을 비밀리에 에드모어에게 넘겼다. 이 일을 계기로 도를 넘고 있는 반란군을 토벌한다면 일석이조라고 생각했다.
에드모어 공작은 지휘권을 받자마자 모든 정보를 수집하는 레이첼 후작에게 동맹을 제안했다. 때마침 서로 이익이 맞아 어떤 보상을 조건으로 손을 잡게 되었다.
일단 반란군에게 에드모어 공작이 부인을 잊었다는 인식을 심어주기 위해서 위장 결혼을 했다. 상대를 방심시킬 일종의 암막 작전이었다.
그런데 만약 밀리안이 돌아와서 프레아와 결혼하겠다고 설치면 어떻게 될까? 반란군 입장에서는 두 사람이 위장 결혼을 했다고 의심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실제로도 결혼 당시에 그런 말이 잠깐 오갔다는 걸 두 사람은 모르지 않았다. 에밀리는 제 자료가 몽땅 종이 쪼가리가 될까 봐 걱정됐다. 어떻게 모은 자료인데.
정체가 탄로 날 경우 13년간 비밀리에 조사했던 일들이 공중분해 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자그마치 13년의 조사가 말이다. 조금만 더하면 배후를 알고 처단할 수 있었다.
한데 혹여라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눈앞이 아찔했다. 반란군은 현재 이쪽의 감시를 느슨하게 한 상태였다.
의심 많던 그들도 공작이 제 부인을 잊었다 생각하고 있었다. 대외적으로 에밀리와 진은 사랑하는 사이였으니까. 그들은 여전히 자잘한 테러 행위를 하며 야금야금 민심을 흩뜨리고 있었다. 반드시 그들을 잡아들여야 했다.
“막아야 해요. 정말 최악의 상황엔 우리가 위장 결혼 중이란 걸…….”
“안 됩니다. 그렇게 했다간 더 좋다고 결혼하려 할지도 모릅니다.”
“그럼 어떻게 해요, 황제 폐하께도 이미 보고를 모두 올린 상태예요. 여기서 그들이 근거지를 옮기고 발을 빼게 된다면…….”
“미안합니다.”
“미안하다고만 하지 말고 대책을 내놓으시라고요.”
에밀리가 환장하겠다는 얼굴로 애꿎은 천장에 대고 씩씩거렸다. 물론 그런다고 해결책이 뚝딱 나오는 건 아니었다. 그날 에밀리는 황성에 가지 못하고 밤새 진과 회의해야 했다.
이 일을 어찌해야 할지, 밀리안이 돌아와서 폭탄을 터뜨리기 전에 프레아를 어떻게 빼돌려야 할지 등을 말이다. 하지만 그들에겐 프레아라는 또 다른 복병이 있었다.
에밀리가 프레아에게 여행을 다녀오는 게 어떻냐고 은근히 제안하자 좋다고 밀리안과 함께 가겠다고 한 것이다. 전쟁터에서 고생했을 테니 한 열흘쯤 같이 가도 좋겠다면서 한술 더 뜨기까지 했다.
결국 에밀리와 진은 반 포기 상태로 밀리안이 오기로 한 날짜를 맞이할 수밖에 없었다. 프레아를 혼자 보내자니 그녀를 납득시켜야 했다. 하지만 납득시키려면 밀리안이 프레아를 좋아한다고 말해야 했다.
그야말로 첩첩산중이었다. 그나마 나은 결론은 하나였다. 그냥 솔직하게 위장 결혼 중이란 걸 말하고 반란군을 소탕할 때까지 참아달라고 밀리안에게 사정하는 수밖에 없었다.
* * *
드디어 공포의 ‘그날’이 왔다. 아침 일찍 랭이 의아해하며 진에게 서류 하나를 내밀었다.
“공작님, 프레아 아가씨께 청혼장이 왔습니다.”
“뭐라고?”
진이 날카롭게 반응했다. 마침 함께 있던 에밀리가 얼른 청혼장을 빼앗았다. 청혼장 봉투 안에는 서류가 두 개 있었다. 하나는 오늘부로 ‘밀리안 에드모어 레이첼’이 에드모어 레이첼 가문을 떠나 ‘테일러스’라는 새로운 가문의 주인이 되었다는 서류였다.
에밀리는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진이 얼른 에밀리가 든 서류를 빼앗아 읽었다. 밀리안의 제명 소식보다 충격적인 건 그 뒤에 있는 서류였다.
[친애하는 에드모어 공작 각하, 레이첼 후작 각하.
귀하의 사랑스러운 딸, 프레아 레이첼 에드모어와 평생의 연을 맺고자 청혼장을 보냅니다.
저는 이번 전쟁에 큰 공을 세워 ‘테일러스’라는 새로운 후작위를 받은 밀리안 테일러스입니다.
따님을 평생 아껴줄 마음은 누구 못지않으니 부디 허락해 주십시오.]
“이…… 이게 무슨!”
진이 청혼장을 채 다 읽지 못하고 목덜미를 잡고 하늘을 바라보았다. 에밀리는 얼른 청혼장을 쥐고 마저 읽었다.
[아, 혹시나 해 덧붙입니다. 이 청혼장을 불태우고 없던 일로 여길 생각이라면 포기하시길 바랍니다.
만약 그렇게 하실 경우 각하께서 눈에 띄는 행동을 좋아하시는 거라 판단하고 기꺼이 성심을 다해 내일부턴 제가 직접 매일 에드모어 성으로 찾아가 청혼장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안 돼!”
에밀리가 청혼장을 내팽개치며 소리를 질렀다. 매일 아침 청혼장을 들고 온다니. 반란군에게 ‘우리가 위장 결혼 중이오’ 하고 광고하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이 편지 어디에서 왔나?”
“어…… 그게.”
랭이 혼비백산한 두 사람을 보며 의아한 얼굴로 서류의 출처를 밝혔다. 그걸 듣자마자 진은 실내복을 채 갈아입지도 않고 방을 박차고 나갔다. 이어서 에밀리도 정신을 차리고 뒤따라갔다.
이 막무가내 아들을 막기 위해서.
* * *
프레아는 약속 장소로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오늘로 글라디안 로테인과 두 번째 만남이다. 처음 우려했던 것과 달리 글라디안은 꽤 호감이었다. 이야기도 잘 들어주고 모든 행동이 신사적인 남자였다.
한눈에 팟 하고 튀는 감정은 없었지만 귀족 사이의 결혼에서 그런 걸 바라는 것도 우스워 프레아는 결혼을 긍정적으로 검토하고 있었다. 어차피 결혼 이후에도 레이첼 가문의 사업은 자신이 이어갈 테니까.
프레아는 레이첼 사업 이외에 따로 벌여놓은 일이 있었다. 즉, 결혼한다고 가업을 남편에게 맡기고 안주인 노릇만 할 생각은 없다는 뜻이다.
약속 장소에 도착할 무렵, 번뜩 그에게 매번 얻어먹었던 것이 생각났다. 프레아는 작은 선물이나 할까 하고 방향을 틀어 제과점으로 향했다. 간단한 마카롱 세트를 선물할 계획이었다.
“어머, 이게 누구야?”
제과점에 도착하자 달갑지 않은 사람과 마주쳤다. 때마침 제과점을 나오던 마리아가 프레아를 보며 아는 체했다. 프레아는 우리가 인사할 사이는 아니지 않나 싶어 마리아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러곤 예의상 고개를 까닥하고 들어가려 했다. 하지만 마리아는 프레아를 그냥 보내주지 않았다. 마리아가 한껏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아 참, 오늘 네 잘난 남동생이 온다고 들었어. 축하해.”
“그래, 그런 좋은 날이라서 네가 지금 멀쩡히 서 있는 거야.”
프레아가 한껏 해맑게 웃으며 받아쳤다.
그 말은 즉, 밀리안이 오는 날이 아니었다면 넌 또 내게 머리채가 잡혔을 거라는 뜻이었다. 분명 눈앞에 띄지 말라고 했었으니까. 물론 그 이후로 프레아가 마리아와 마주치지 않았던 건 아니었다.
어쨌든 마리아는 라즐리 후작의 딸이었고 어딜 가나 그녀와 마주칠 수밖에 없는 사이였다. 전과 달라졌다면 서로 아는 척을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러니 프레아는 이렇게 갑자기 말을 걸어오는 상황이 거슬릴 수밖에 없었다. 마리아는 프레아의 의중을 알아듣곤 인상을 팍 썼다. 그러곤 손에 든 부채로 부채질하며 말했다.
“허, 참. 경박하긴.”
“할 얘기는 그게 다야? 나 좀 바쁜데.”
프레아가 마리아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덤덤하게 대꾸했다.
“안 그래도 나도 가려고 했거든?!”
마리아는 저를 귀찮아하는 프레아를 보며 새침하게 꽥꽥거렸다.
“화통을 삶아 먹었나.”
프레아는 귀를 막는 시늉을 하며 중얼거렸다. 어째 나이가 먹어도 저렇게 속이 빤히 보이는지. 이제는 그녀가 귀여워 보이는 수준이었다. 마치 누르면 꽥 하고 소리를 내는 인형 같았다. 꽥꽥.
프레아는 그대로 자리를 뜨려 했다. 약속 시간이 얼마 안 남은 탓이었다. 괜히 마리아의 대화를 다 받아주다가는 늦을지도 몰랐다.
“그럼 서로 갈 길 가자.”
“근데, 너 그 소식은 들었니?”
마리아는 여전히 프레아에게 할 말이 있는지 그녀를 불러 세웠다. 오늘따라 프레아가 귀찮은 티를 내는데도 물고 늘어지는 게 수상했다.
“무슨 소식인지 모르지만 아마 들었겠지. 얼른 가줄래?”
프레아는 자꾸 제 발목을 잡고 시간을 끄는 마리아를 쳐다보며 무심히 대꾸했다. 설마 내가 못 들은 소식을 네가 알겠느냐는 표정은 덤이었다.
레이첼 가문에 대한 자부심이 만들어낸 표정이었다. 레이첼 가문이 모르는 건 없으니까. 이에 마리아가 씩씩거리며 소리쳤다.
“그래, 그럼 이미 알고 있겠네! 네 동생이 가문을 나갔다는 거!”
“뭐?”
“……어머, 몰랐나 봐. ……풉, 레이첼 가문도 별거 없네. 하긴, 난 전쟁터에서 돌아온 고우 경에게 직접 들었으니 네가 모를 수도 있었겠다. 호호.”
프레아가 당황한 기색을 보이자 마리아가 한껏 기분이 좋아졌는지 웃으며 비아냥거렸다. 어쩐지 뭐가 반갑다고 말을 거나 했는데 헛소문을 듣고 온 모양이다.
프레아가 슬며시 표정을 딱딱하게 굳혔다. 레이첼 가문을 얕본 것도 문제였지만 그 내용이 더욱 가관이었다. 도대체 그런 거짓 소문은 어디서 들은 건지 모르겠다. 아무리 자신이 에드모어가 된 게 마음에 안 들어도 과하다 싶었다.
프레아가 순간 마리아를 향해 손을 세차게 올렸다. 마리아는 제 머리를 보호하며 움찔거렸다. 하지만 프레아의 손은 마리아의 머리가 아닌 제 머리로 향했다. 프레아가 태연하게 머리를 매만지며 물었다.
“어머, 설마 지금 쫄았니?”
“누, 누가 쫄았다는 거야?!”
“아님 말고.”
“이…… 이!”
마리아가 저를 놀리는 프레아에게 씩씩거렸다. 그러게 왜 가만히 있는 사람한테 시비를 거는 건지. 프레아가 씩씩거리는 마리아에게 가까이 다가가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아주 달콤한 목소리로.
“있잖아, 마리아. ……한 번만 더 그 예쁜 주둥이로 헛소문을 나불거리면, 내가 네 입을 귀에 걸어줄 거야. 더 예뻐지라고.”
“헉……!”
마리아가 프레아의 말을 듣자마자 사색이 되어 쳐다보았다. 프레아는 마리아의 입을 찢어버리는 시늉을 하며 밝게 웃었다. 입 모양으로 ‘예쁘겠다’고 말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메, 메이!”
저도 모르게 눈을 피해 버린 마리아는 모욕감에 물든 얼굴로 하녀를 불렀다. 메이가 얼른 다가와 마리아를 부축하여 마차로 이동했다. 프레아는 그 모습을 보곤 코웃음을 쳤다.
“어디서 그런 못된 헛소문을 들이댄담.”
유쾌한 얼굴로 제과점에 들른 프레아는 글라디안에게 줄 마카롱 세트를 샀다. 알록달록한 마카롱들을 보니 문득 밀리안 것도 사야겠다 싶어 한 세트 더 주문하여 시에라에게 맡겼다.
* * * * *
“선물이에요.”
“그냥 오셔도 괜찮은데.”
글라디안이 마카롱 세트를 받으며 기쁜 기색을 비쳤다. 그 모습에 프레아는 배시시 웃었다. 선물을 주었을 때 상대가 기뻐하면 같이 기분이 좋아지는 법이니까.
밀리안도 마카롱을 받고 기뻐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자 괜스레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그를 본 글라디안이 물었다.
“기분 좋은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남동생이 오는 날이거든요.”
“아, 그 전쟁터로 갔다던?”
“네. 그것도 승전보를 들고 온다고 해요. 정말 대단하지 않아요?”
프레아가 저도 모르게 들떠 목소리를 높이자 글라디안이 피식 웃었다.
“남동생 사랑은 여전하네요.”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아이거든요.”
그녀는 자랑스럽게 대답했다가 아차, 하고 글라디안의 눈치를 살폈다. 생각해 보니 그의 앞에서 밀리안 이야기를 너무 자주 했다. 선보는 대상에게 남동생 이야기를 하는 여인은 조금 지루할 텐데.
스스로 자중해야겠다 다짐해 놓고 또 밀리안 이야기를 꺼내고 있었다. 한참을 그렇게 신나서 밀리안의 이야기를 하는데 글라디안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프레아.”
“네?”
“남동생이 은발에 적안이라고 했던가요?”
“그랬죠. 붉은 눈이 얼마나 예쁜 줄 아세요? 남들은 핏빛 같다며 무서워하는데 저는 또 그게 반짝반짝한 루비 같아서 좋아요.”
프레아가 설레는 얼굴로 대꾸하자 글라디안이 어쩐지 식은땀을 흘렸다.
“사람들이 왜 핏빛 같다고 말했는지 알겠네요.”
“네?”
“지금 굉장히 저를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거든요.”
“네에?”
프레아는 글라디안의 말에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낯익은 얼굴이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포마드로 올린 은발이 그의 훤칠한 이목구비를 두드러지게 했다.
밀리안이다. 드디어 왔다. 프레아가 너무 놀라서 그를 뚫어져라 바라보기만 했다. 밀리안도 프레아에게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마치 시간이 멈춘 듯했다.
5년 만이었다. 그는 멀리서 봐도 훌쩍 커버렸다는 걸 알 수 있을 정도로 자라 있었다. 프레아가 저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 밀리안에게 가려는데 그가 먼저 그녀에게 빠르게 다가왔다.
“밀리안!”
기쁜 마음에 프레아가 밀리안을 부르며 그에게 달려갔다. 바로 코앞에 다다라서야 저보다 훨씬 커져 버린 그의 몸집이 실감되었다. 프레아가 그를 안으려다 말고 움찔거리니 밀리안이 먼저 그녀를 세게 끌어안았다.
그의 품은 무척 넓었다. 오랜만에 느껴지는 밀리안의 향에 프레아는 왠지 모르게 가슴이 북받쳤다. 와, 진짜 밀리안이다. 그에게 안겨 있으니 그가 왔다는 게 실감이 났다.
이 나쁜 녀석, 어떻게 말도 없이 전쟁터로 가버릴 수 있는지. 프레아는 반가우면서도 화가 나고, 화가 나면서도 기쁜 모순적인 감정이 들었다. 너무 커버려서 조금 당황스럽긴 했지만 그래도 밀리안이었다. 프레아는 그가 온 것이 너무 좋아 그의 가슴에 얼굴을 비볐다.
“보고 싶었어.”
그런 프레아의 행동에 밀리안이 그녀를 더욱 세게 그러안으며 속삭였다. 정말이었다. 그동안 보고 싶어서 미치는 줄 알았다. 이대로 프레아를 안고만 싶었다.
그러다 뒤에서 놀란 얼굴로 바라보는 남자에게 시선이 옮겨졌다. 편지에서 읽었던 그 겁도 없이 프레아를 맘에 들어 한 로테인 후작의 아들인 모양이다.
밀리안은 편지를 받고 피가 거꾸로 솟는 기분이었다. 프레아가 보고 싶었던 만큼 간이 배 밖으로 나온 저 작자도 궁금했었다. 프레아보다 나이가 많아 보이는 게 아마도 입단식 날 있던 일을 모르는 듯했다. 죽으려면 뭔들 못 할까 싶어 싸늘히 웃었다.
만약 편지를 받은 그때 저자가 눈앞에 있었다면 살아 있지 못했을 것이다. 그만큼 밀리안은 제정신이 아니었으니까. 클로드조차도 저를 막지 못했다. 그러니 작전도 무시하고 적장에 들어간 것이다.
글라디안 로테인은 키만 멀대같이 컸다. 이미 사전 조사도 끝냈고 프레아와 만난 횟수만큼 제대로 갚아줄 생각이었다.
감히 프레아와 선을 봐?
밀리안이 보기에 글라디안은 비리비리하게 생긴 것이 꼭 멸치 같았다. 사실은 준수한 편이었음에도 밀리안의 눈에는 한 조각의 멸치였다. 순간 밀리안 주변으로 살벌한 살기가 흘러나와 글라디안에게 향했다.
그의 붉은 오러가 강하게 요동치며 글라디안을 먹어 삼킬 것처럼 위협했다. 물론 프레아가 이를 보지 못하도록 꽉 안고 한 행동이었다. 그걸 모른 채 프레아가 들뜬 목소리로 물었다.
“밀리안! 언제 왔어?”
시선이 마주치자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오러를 없앤 밀리안이 부드러이 웃으며 대답했다.
“방금 왔어. ……근데 프레아, 지금 뭐 하는 거야?”
분명 저를 두고 결혼하지 않겠다고 했던 프레아였다. 그런데 어떻게, 다른 남자를 만날 수 있나 싶어 배신감이 들었다. 성질 같아서는 전쟁을 빨리 끝내 버리고 싶었지만 군대에는 엄연히 규율이 존재했다.
그것이 밀리안에게 많은 제약이 되었고, 결국 5년간 질질 끌었다. 그래, 사실 이 모든 원흉은 아버지인 진 에드모어였다. 프레아를 좋아한다는 걸 버젓이 알면서도 뒤에서 프레아를 빼돌리려 하다니.
아버지의 의중을 너무나도 잘 알았기에 어디 한번 해보자는 심산으로 아침부터 선물을 보냈다. 아버지의 속을 뒤집어놓을 청혼장 말이다. 그는 앞으로도 자신이 마음 졸인 만큼 아버지를 달달 볶을 생각이었다. 그가 제풀에 지쳐 프레아를 내놓을 때까지.
“응? 뭐 하냐니? 편지 못 받았어? 나 선본다고 했잖아.”
프레아가 순진한 얼굴로 그리 말하자 밀리안이 살벌하게 웃었다. 편지만 딸랑 보내면 저가 ‘아, 그렇구나. 축하해’라고 할 줄 알았던 걸까. 그나마 다행인 건 프레아가 선본다고 곧장 말해준 것이다. 그 덕에 빨리 올 수 있었다.
편지를 받은 밀리안은 작전도 무시하고 홀로 사지로 뛰어들어 왕의 목을 베었다. 물론 그 과정에서 밀리안도 좀 위험할 뻔했지만 어쨌든 전쟁은 빠르게 마쳤다.
설마 목을 베고 돌아올 줄 몰랐던 클로드는 명령 불복종으로 죽어야 했던 밀리안에게 큰 포상을 내렸다. 바로 그가 바라던 작위였다. 어쨌든 밀리안 덕에 전쟁이 빠르게 종지부를 찍었으니 내린 결정이었다.
밀리안이 막무가내로 일을 저지른 건 순전히 불안해서였다. 그렇게 지지부진하게 공성전을 미루다간 프레아가 멸치 같은 놈한테 반할지도 몰랐다.
게다가 그녀가 저를 두고 홀랑 시집을 가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미치는 줄 알았다. 그렇게 되면 밀리안이 5년간 개고생한 게 헛수고가 되는 셈이었다.
밀리안의 시선이 에드모어의 가보인 머리 장식으로 옮겨졌다. 아버지가 머리 장식의 의미를 프레아에게 말해주지 않은 모양이다. 저렇게 대놓고 머리 장식을 하고 다니는 걸 보면 말이다.
물론 저게 그런 의미가 있다는 건 에드모어만 아는 것이었다. 비슷한 모형이나 가품이 꽤 많았으니까. 에드모어만이 저것이 진짜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밀리안은 프레아의 머리에 꽂힌 장식을 풀었다. 그녀에게서 좋은 향이 났다. 밀리안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움켜쥐고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그러곤 입술로 훑어 내렸다.
“이렇게 예쁘게 차려입고.”
프레아는 밀리안을 멍한 얼굴로 바라만 보았다.
밀리안은 조금 심술이 났다.
예쁜 애가 예쁘게 꾸미고 멸치를 만나러 왔다는 게 화가 났다. 방향이 틀려먹었다는 거다. 당장에라도 이 모습을 본 로테인의 눈을 뽑아버리고 싶었다.
프레아의 눈빛이 얕게 흔들렸다. 바들바들 떠는 정도는 아니었지만 마치 위기에 처한 새끼 고양이 같았다. 구미가 당기는 모습이었다. 밀리안은 금방이라도 프레아의 입에 입 맞추고 싶은 것을 참아내며 조심스럽게 그녀의 입술에 손을 가져갔다.
이 바보 같은 여자는 제 마음조차 모르고 있으니까. 물론 그런 사정 봐가면서 조심하기엔 너무 오래 참았다. 부드러운 감촉이 손가락을 타고 전해지자 밀리안의 눈빛이 깊어졌다.
아까 전 이 입술로 로테인에게 웃었던 것이 생각나 화가 났다. 이 미소는 자신이 제일 먼저 발견한 아름다움이었다. 이 아름다움을 다른 이에게 한순간이라도 빼앗긴 것이 참을 수 없었다.
“내가 아닌 남자한테 웃기나 하고.”
“미, 밀리안?”
프레아가 밀리안의 행동에 놀라 뒤로 물러나자 밀리안이 그녀의 허리를 붙잡아 더욱 가까이 끌어당겼다.
어딜 도망가려고.
밀리안이 속으로 그리 말하며 이글거리는 눈으로 프레아를 바라보았다.
“잠깐만, 뒤에 글라디안 님이 계시잖아. 얘가 갑자기 왜 이럴까, 하하.”
프레아가 손으로 밀리안을 때렸다. 하나도 아프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가 저를 두고 선을 보러 간다고 했을 때가 더 아팠다.
“누구 마음대로 선을 본 거지? 나 미치는 꼴 보고 싶어서 그래?”
“무슨 소리야, 내가 선을 보는 게 왜 네가 미치는 일인데?”
프레아는 여전히 아무렇지 않게 밀리안에게 선을 그었다. 너는 그냥 내 남동생일 뿐이라고 말하는 것 같아 화가 났다. 그래, 매번 이런 식으로 잊을 만하면 남동생이란 걸 강조하던 프레아였다.
밀리안이 가식적으로 프레아에게 웃곤 글라디안 쪽을 살벌하게 보았다. 이제 더 이상 남동생으로 있을 생각이 없었다.
“지금 당장 저자의 눈을 뽑아버리지 않은 것만 해도 기적이야, 프레아.”
진심으로 하는 말이었다.
글라디안과의 데이트는 밀리안으로 인해 완전히 망쳐 버렸다. 어쩐지 글라디안은 프레아를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하고 그대로 식당을 나가 버렸다. 꽁지 빠지게 도망치는 글라디안을 프레아는 망연히 바라보았다.
밀리안은 당연하다는 듯이 제 앞에 앉았다. 지금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알기나 하는 건지. 글라디안이 앉았던 자리를 어쩐지 흡족한 얼굴로 차지하고 있었다.
프레아가 불만스러운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가 온 것이 기쁘지 않은 건 아니지만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를 몰랐다. 어차피 잠시 만났다가 밀리안을 보러 갈 생각이었는데, 이런 식으로 내쫓는 형국이 될 줄이야. 프레아는 조금 부루퉁한 어조로 말했다.
“나중에 글라디안 님께 사과해. 오늘 너무 무례했어.”
“글쎄, 내가 뭘 잘못했는데?”
“네가 쫓아냈잖아.”
“그럼 프레아도 내게 사과해.”
“내가 뭘?”
프레아는 다짜고짜 자신에게 사과하라는 밀리안을 황당하다는 얼굴로 바라보았다. 저는 잘못한 게 없었다. 그저 오늘 아침 밀리안이 온다는 소식을 들었고, 그가 오기 전에 잠깐 글라디안을 만났을 뿐이었다.
그 과정에서 그녀가 밀리안을 섭섭하게 할 만한 일은 하나도 없었다. 밀리안이 턱을 괴곤 프레아를 빤히 바라보았다. 어찌나 진하게 바라보는지 낯이 뜨거워졌다. 그가 아주 감미로운 목소리로 물었다.
“정말 네가 뭘 잘못했는지 모르겠어?”
“내가 뭘 잘못했다는 거야?”
“날 두고 선을 봤잖아.”
프레아를 지긋이 쳐다보는 시선이며, 강한 어조가 마치 엄청난 잘못을 저지른 걸 탓하는 듯했다. 프레아는 그게 무슨 상관인지 도무지 짐작되지 않았다.
설마 누나의 연애 대상은 자신이 고르겠다는 뭐 그런 이상한 논리인가 싶어 황당하기도 했다. 도무지 자신이 선을 본 게 왜 밀리안에게 사과해야 할 일인지 몰랐다.
그런 프레아의 생각을 눈치챈 건지 밀리안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어쩐지 눈빛이 조금 서운함을 띤 것도 같았다.
“넌 내게 너무 잔인해.”
“도통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어. 내가 선을 본 게 왜 네게 사과할 일이란 거야?”
“그야, 그 말을 듣고 내가 아팠으니까.”
“아팠다고……?”
“그래. 너무 아파서 하마터면 아군이고 뭐고 다 죽여 버릴 뻔했어.”
“…….”
프레아는 밀리안이 아팠다는 말에 걱정하려던 것도 잠시, 그의 뒷말을 듣고 입을 다물었다. 이상했다. 아픈데 왜 다 죽여 버리고 싶었다는 걸까. 설마 피 때문인가?
“혹시 폭주할 뻔했어?”
“폭주라면 폭주였지. 내가 그날 무슨 짓을 한지 알면 깜짝 놀랄 거야.”
“괜찮은 거지? 막 눈 돌아가서 미친 짓 한 거 아니지?”
프레아가 밀리안의 말에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곤 그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 쥐고 이리저리 살폈다. 의원도 아니면서 밀리안의 눈을 괜히 크게 벌리며 동공이 멀쩡한지 확인했다.
만약 그가 정말 미쳐서 돌아다녔다면 지금 이렇게 멀쩡한 눈을 할 리 없었다. 프레아는 밀리안이 폭주한 걸 한 번 본 적 있었다. 그 당시엔 밀리안이 어려서 진 혼자 통제가 가능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아마 그가 폭주하기라도 한다면 저와 공작이 같이 나서야 겨우 진정될 것이다. 처음 밀리안이 사라졌을 때 그 부분이 제일 걱정되었다. 설마 그가 그렇게 피가 낭자한 곳에 자진해서 갈 줄은 몰랐으니까. 에드모어에겐 너무 위험천만한 곳이었다.
밀리안은 프레아가 저를 걱정하며 제 얼굴을 만지작거리는 걸 빤히 바라보았다. 밑에서 느껴지는 뜨거운 시선에 프레아가 내려다보았고, 정확히 그와 눈이 마주쳤다. 밀리안의 시선이 너무 노골적이라 프레아가 조심스레 물었다. 어쩐지 보고 있기 민망한 시선이었다.
“왜 그렇게 봐?”
“보면 안 돼?”
“아니, 그런 건 아닌데…….”
“그냥 보고 싶어서 봤어. 사실 지금 엄청 기쁘거든.”
“…….”
프레아가 저도 모르게 손을 떼고 자리에 앉았다. 원래 이렇게 표현을 잘하던 아이였던가. 밀리안은 표현이 서툰 아이라 생각했다. 새침데기처럼 굴 때가 많았으니까. 그나마 편지에선 속마음을 잘 표현하는 것 같아 다행이었다.
그랬는데…… 이렇게 육성으로 직접 보고 싶다느니 기쁘다느니 하는 이야기를 들으니 어쩐지 심장이 쿵쿵거렸다.
‘뭐지, 왜 떨리지?’
프레아가 몸이 이상한 데서 반응하자 놀라 주춤거렸다.
‘남동생이 너무 낯설어서 그런가.’
밀리안은 재차 턱을 괴곤 프레아를 빤히 바라보았다. 시선이 다시 한번 마주치자 그가 사르르 눈웃음쳤다. 정말 많이 기쁜가 보다. 그 모습을 프레아가 멍한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그래서 오늘은 멸치랑 뭘 할 계획이었지?”
밀리안의 말에 프레아는 무슨 소리인가 싶어 고개를 갸웃거렸다.
“멸치?”
“그래, 아까 네 앞에 있던 그 멸치 같은 놈 말야.”
“설마 글라디안 로테인을 말하는 거야?”
밀리안은 당연한 걸 뭘 묻냐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곤 어쩐지 거슬린다는 어조로 말했다.
“네 입에서 그놈 이름이 오르내리는 것도 싫은데.”
“말조심해. 글라디안 님은 네 매형이 될 수도 있는 사람이야.”
“매형……?”
밀리안이 눈썹을 꿈틀거리며 낮게 읊조렸다. 프레아는 그런 밀리안을 보며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그러니 더 이상 무례하게 굴지 말라는 뜻이었다.
도대체가 예비 매형에게 그러는 이가 어디 있나 싶었다. 물론 그와 결혼할지 아직 확실하지 않지만 어쨌든 긍정적인 대상이다. 되도록 그의 앞에서 오해 살 만한 행동은 하지 않았으면 했다.
“그러니까 앞으로는…….”
프레아가 주의를 주기 위해 마저 얘기하려는데 밀리안이 서늘하게 말을 끊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릴 하네.”
“응?”
“미안하지만 프레아, 그놈은 네 신랑감이 아니야.”
“무슨 소리야. 내 남편은 내가 정하는 거지.”
“……그래?”
프레아의 단호한 반응에 밀리안이 자조적으로 웃었다. 무척 붉어진 눈이 프레아를 꿰뚫을 듯이 응시했다. 그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 멸치가 좋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해.”
“……나쁘지 않다라.”
어느새 주변 공기가 무척 서늘해졌다. 프레아는 밀리안의 행동이 이해되질 않았다. 무슨 이야기를 해도 그의 심기를 건드리는 기분이었다. 왜 자꾸 글라디안에 대해 예민하게 구는지 몰랐다.
게다가 그의 행동은 남동생의 범주를 벗어난 듯했다. 어쩐지 자신이 바람피우다 들켜 추궁당하는 모양새였다. 프레아의 눈빛이 심하게 흔들렸다. 불현듯 한 단어가 생각났다.
이건 마치, ‘질투’하는 것 같았다. 그래. 질투라는 단어 말고는 설명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애써 그 단어를 지워 버리려 하는데 밀리안의 아주 차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안 되겠다. 멸치는 명이 짧을 운명인가 봐.”
“그게 무슨 말이야?”
“말 그대로야. 오늘 그자가 이 세상에서 사라질 예정이거든.”
밀리안이 예쁘게 웃으며 손으로 제 목을 슥 그었다. 아주 담백한 살인 예고였다. 밀리안은 지금 글라디안을 죽이겠다고 선포하고 있었다. 그것도 해맑게 웃으면서.
프레아가 당황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전쟁터에 다녀오더니 정신이 어떻게 된 걸까? 전에도 타인에게 관대한 편은 아니었지만 이 정도였나 싶었다. 그 순간 아까 전 마리아와 마주쳤을 때가 떠올랐다.
‘있잖아, 마리아. ……한 번만 더 그 예쁜 주둥이로 헛소문을 나불거리면, 내가 네 입을 귀에 걸어줄 거야. 더 예뻐지라고.’
마리아의 입을 찢어버리겠다고 위협했었지……. 아, 정상이구나. 다행이다.
프레아는 속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혹여나 밀리안이 피를 너무 많이 봐서 제정신이 아닌 걸까 했는데 생각해 보니 저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피도 안 섞였는데 이런 면에선 닮은 게 신기했다. 프레아가 저도 모르게 웃으려다 말고 멈칫했다.
잠시만. 굳이 밀리안이 글라디안을 죽이겠다 위협할 만한 이유가 없지 않나?
자신이 마리아에게 한 것은 헛소문 때문이었지만 밀리안은?
프레아가 당황스러워하며 밀리안을 쳐다보았다. 이상했다. 그는 마치 연적을 처단하겠다는 눈빛을 띠고 있었다. 정말 질투라도 하는 듯한 눈이었다. 결국 프레아는 잔뜩 혼란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남동생이 너무 낯설어서 물을 수밖에 없었다.
“내가 정말 헷갈려서 그러는데…… 너 밀리안 맞아?”
“그럼 내가 밀리안이지 누구겠어.”
밀리안이 괴상한 소리를 한다는 듯이 대꾸했다. 하지만 프레아는 덩달아 웃을 수 없었다. 그의 행동이 이상해도 한참 이상했으니까.
“갑자기 글라디안 님을 왜 죽이겠다는 거야 그럼?”
“죽이고 싶어졌으니까.”
“…….”
“그러니 다른 남자한테 웃어주지 마. 나 살인자로 만들기 싫으면.”
서늘한 목소리였다. 다른 남자한테 웃어주지 말라니. 그건 정말 질투 같잖아. 프레아는 밀리안이 제게 느끼는 감정이 단순히 누나를 향한 마음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밀리안이 다시 꽂아준 머리 장식을 매만졌다. 물어보고 싶은데 두려웠다. 정말로 저를 좋아한다고 하면 어쩌지 싶어서. 프레아는 일부러 유쾌한 척했다. 하지만 떨리는 목소리까진 감출 수 없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누가 들으면 네가 날 좋아하는 줄 알겠어. 장난치지 마.”
그리 말하면서도 눈빛이 세차게 흔들렸다. 제발, 장난이라고 말해달라고 신호를 보냈다. 그는 곧바로 ‘아니’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저 빤히 그녀를 바라만 보았다. 표정 변화가 없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몰랐다.
그 모습이 마치 긍정하는 것 같아서 숨을 참았다. 제발 부정해 달라 속으로 읊조리는데 밀리안이 입을 열었다. 그는 아주 정확한 발음으로 프레아의 바람을 짓밟았다.
“장난이길 바라는 것 같아 미안하지만 내가 널 좋아하는 건 너만 몰랐어.”
“…….”
“전에도 말했지만 네가 내게 누나였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고.”
밀리안이 담담하게 대답하곤 새로 내온 차를 가볍게 홀짝였다. 프레아는 돌이 된 것처럼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물 흘러가듯이 고백을 받았다. 그것도 8년 동안 같이 살았던 남동생에게. 프레아의 눈이 세차게 흔들렸다.
“그게 무슨 소리야, 좋아한다니. 거짓말이지? 아하하, 진짠 줄 알았잖아.”
프레아가 현실을 애써 부정하며 밝게 대꾸하자 밀리안이 다시 한번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고저 없이 평온했다.
“부정해도 소용없어, 사실이니까.”
“밀리안 에드모어 레이첼!”
프레아가 듣기 싫다는 듯 소리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말도 안 된다. 고백이라니, 고백이라니! 밀리안은 제 동생이었다. 누가 뭐래도 제 동생이란 말이다. 애초에 연애 대상으로 성립될 수 없는 관계였다. 한 번도 그런 식으로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프레아의 태도에 밀리안이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곤 덩달아 자리에서 일어나 프레아를 향해 고개를 기울였다. 키가 커서 올려다보아야 했다. 코앞까지 온 그가 말했다.
“난 이제 에드모어 레이첼이 아니야.”
“……뭐?”
“오늘부로 밀리안 테일러스 후작이라고 불러줬으면 좋겠어, 프레아 레이첼 에드모어.”
“……!!”
어느새 품에서 서류 하나를 꺼낸 밀리안이 눈앞에 펼쳐 보였다. 서류에는 밀리안 에드모어 레이첼이 가문을 나간다는 말과 황성에서 밀리안에게 테일러스 후작위를 주었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프레아가 바들거리는 손으로 서류를 붙잡았다. 눈앞의 현실이 믿기지 않았다. 그 순간 제과점 앞에서 마리아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래, 그럼 이미 알고 있겠네! 네 동생이 가문을 나갔다는 거!’
가문을 나갔다는 말이 이 뜻이었어? 프레아가 충격받은 얼굴로 밀리안을 바라보았다. 전쟁터로 나갔던 남동생이 남이 되어 돌아왔다. 남이 된 것도 모자라 고백까지 받았다.
밀리안 에드모어 레이첼, 아니, 이제는 밀리안 테일러스가 된 남동생이 제게 예쁘게 미소 지었다. 그의 담백한 목소리가 머리를 꽝 하고 치는 기분이었다.
“이제 누나 아니야.”
어떻게 그 말을 그렇게 즐겁게 할 수 있어?
밀리안은 아주 유쾌한 얼굴이었다. 프레아가 온몸에 힘이 풀려 쓰러지려 했다. 물론 밀리안이 이를 가뿐히 받아냈다. 남동생이 생겨 기뻤던 게 엊그제 같은데, 한순간에 남동생이 사라졌다. 프레아가 헛웃음을 내뱉었다. 밀리안이 제게 이럴 순 없다.
* * * * *
에드모어 성은 한마디로 아수라장이었다. 사용인들은 작은 주인님이 집을 나갔다는 소식을 접하고 수군거렸다. 물론 밀리안이 왜 나갔는지는 랭 말고 아무도 몰랐다.
랭은 주인님이 팽개치고 간 서류를 통해 밀리안이 프레아에게 청혼했음을 알게 되었다. 다른 이들이 볼까 미리 서류를 주워 챙겼다. 직감적으로 이 일이 알려져서는 안 된다는 걸 알았다. 랭에게는 어떤 사명감마저 들었다.
진과 에밀리가 저택으로 돌아왔다. 물론 아무런 소득 없이 돌아온 것이었다. 서류의 출처는 수도 밖에 진을 치고 있던 막사였다. 막사에서 밀리안을 찾으니 이미 수도로 먼저 들어갔다는 말뿐이었다.
한마디로 수도로 가기 전, 서류를 보냈다는 뜻이었다. 정식으로 입성하는 것은 내일이지만 황태자와 일부 귀족들은 미리 성으로 돌아갔다고 했다.
즉, 밀리안의 거처를 아는 이가 아무도 없다는 말이다. 막사 안 기사들은 그가 에드모어 성에 돌아간 줄 알고 있었다.
“이를 어쩌면 좋죠?”
“우선 프레아보다 먼저 밀리안을 만나야 합니다.”
진이 이 사태에 깊은 책임감을 느끼며 말했다. 에밀리는 이미 기진맥진한 상태였다. 그녀는 점점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정보도 정보였지만 이제는 딸아이가 괜한 구설에 오를까 겁났다.
애초에 남매인데 그런 감정을 갖게 될 거라곤 생각도 못 한 제 잘못이었다. 만약 밀리안이 계속해서 프레아와 결혼하겠다고 나서면 그에 따른 파장이 너무 막강했다.
법적으로 아무리 밀리안이 에드모어 레이첼을 버렸다고 해도 사회적 시선까지 피할 수는 없다. 사람들은 프레아와 밀리안의 사이에 대해 왈가왈부하며 떠들 것이다. 그러다 보면 자연스럽게 진과 에밀리의 갑작스러운 결혼으로도 화제가 튈 수 있다.
처음 에밀리와 진이 결혼한다는 말이 나왔을 때 한편에서는 진과 에밀리가 사실 공작부인이 죽기 전부터 내연 관계였다는 소문이 돌았다.
에밀리는 애초에 남편이 없었다. 그냥 갑자기 애를 낳았고, 딸이 생겼다고 공표했을 뿐이었다. 결혼식도 올리지 않았으며 애 아빠가 누구인지도 말하지 않았다.
당시에도 에밀리의 남편에 대한 추측이 난무했었다. 그런 자신이 공작부인이 죽은 지 얼마 안 되어 공작과 결혼한다고 하니 말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두 사람 다 그 정도의 소문은 예상하고 시작한 위장 결혼이었다. 에밀리와 진은 딱히 그 부분을 해명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소문을 크게 키웠었다.
그 이유는 계약 결혼이다 하는 근거 없는 소문도 같이 돌았기 때문이었다. 악의적인 소문이었지만 정확한 사실이라는 게 문제였다. 에밀리가 소문의 근거지를 파헤쳤을 때는 이미 소문을 낸 귀족이 반란군의 테러에 죽임당한 뒤였다.
그때 알았다. 반란군이 냄새를 맡고 떠보고 있다는 걸. 그래서 진 에드모어가 프레아의 아빠가 아니라고 해명하지 않았다. 어차피 뭘 하든 해결될 루머도 아니었다.
거기다 의도적으로 입을 다물어 반란군이 프레아의 아빠가 진이라고 믿도록 유도했다. 한데, 만약 이대로 밀리안이 대놓고 프레아에게 들이댄다면 사람들은 다시 과거의 소문을 찾아내어 떠들어댈 것이다.
사람들은 보고 싶은 대로 보고 듣고 싶은 대로 듣는 경향이 있다. 그러다 보면 소문의 방향이 밀리안과 프레아의 스캔들에서 지저분한 가정사로 옮겨질 소지가 다분했다. 그렇게 계속 말이 많아진다면 반란군 쪽에서도 수상한 낌새를 맡을지도 몰랐다.
이제 조금만 버티면 그들의 주도자가 누군지 알 수 있는 상황이었다. 에밀리와 진은 이미 스파이까지 심어두었다. 최근 반란군 쪽의 움직임이 수상했다.
스파이로 보냈던 자가 경계가 삼엄해 당분간 연락을 못 하겠다고 전보를 보내올 정도로 사태는 급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이럴 때일수록 상대에게 괜한 흥미를 줄 만한 사건을 던져주어선 안 되었다.
섣부른 우려일 수도 있지만 조심해서 나쁠 게 없다는 것이 두 사람의 생각이었다. 때마침 프레아가 기운 없는 얼굴로 성에 들어왔다. 프레아가 성으로 돌아오는 걸 본 진과 에밀리가 다급히 달려갔다.
“어디 갔다 오니?”
“아, 글라디안 님을 만나고 왔어요.”
“그렇구나.”
진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에밀리 역시 안심하는 기색을 띠었다. 아직 밀리안을 만나기 전인 것 같아서. 프레아는 멍하니 두 사람을 보았다.
두 분은 알고 계실까. 밀리안이 집 나갔다는 거. 만약 그걸 아셨다면 이렇게 멀쩡히 있으실 수 없을 텐데.
저도 모르게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마리아가 고우 경인지 뭔지 하는 기사님에게 들었다는 걸 보면 소문은 곧 일파만파 퍼질 터였다. 프레아는 밀리안의 고백을 받고 도망치듯 나와 버렸다.
도저히 옆에 계속 있을 수가 없었다. 아무래도 오늘 하게 될 환영 파티에서 그를 다시 볼 자신이 없었다. 오기는 할까, 가문을 나갔다 했으니 오지 않을 확률도 있었다.
“프레아, 어디 아프니? 얼굴이 조금 붉은데.”
“아, 좀 더워서요. 저 피곤해서 그런데 먼저 들어가 볼게요.”
“그, 그러렴.”
프레아가 제 볼을 매만지며 말했다. 급하게 달려와서 얼굴이 빨개진 건지 고백을 받아 붉어진 건지 몰랐다. 프레아가 터덜터덜 걸어 올라가는 모습을 진과 에밀리가 물끄러미 보다 서로를 응시했다.
“이상하죠?”
“예, 아주 많이 이상합니다.”
“설마 무슨 말을 어디서 들은 걸까요?”
“글쎄요, 만약 그랬다면 득달같이 달려와 소리치지 않았을까요?”
“안 되겠어요, 진. 제가 다시 한번 밀리안을 찾아…….”
“제가 많이 보고 싶으셨나 봅니다.”
진과 에밀리가 대화를 주고받는데 누군가 끼어들었다. 자연스레 두 사람의 시선이 목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향했다. 그곳엔 밀리안이 있었다. 진과 에밀리가 경악하며 밀리안에게 달려갔다.
“밀리안!”
“절 찾으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래, 아주 열심히 찾아다녔다!”
진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밀리안은 어깨를 으쓱였다. 애초에 그들이 찾아다닐 줄 알고 일부러 돌아다닌 거였으니까.
“제 선물은 마음에 드셨습니까?”
“……선물이라고?”
진이 질린다는 얼굴로 밀리안을 바라보았다. 그때 옆에 있던 랭이 품속에 숨겨둔 서류를 진에게 내밀었다. 진이 보기도 싫다는 얼굴로 질색하자 에밀리가 대신 받았다.
“마음에 드셨나 봅니다.”
그 모습을 본 밀리안이 아주 유려한 미소를 띠며 말했다. 제가 바라던 반응이라는 얼굴이었다. 진이 입을 달싹이다 보는 눈이 많다는 걸 깨닫고 낮게 말했다.
“일단 들어가서 이야기하자. 여기서 할 얘기는 아니구나.”
“그래, 일단 당장 머물 곳도 없을 텐데 같이 깊은 대화도 좀 하고 여독을 풀어야지.”
에밀리도 밀리안을 끌며 거들었다. 지금이라도 회유하면 집을 나간다느니, 가문을 버리겠다느니 하는 말은 철회하게 할 수 있으리라. 나중에 작위를 받고 철없이 독립하려다 말았다고 얼버무리면 그만이었다.
두 사람이 나긋나긋하게 말하는 모습을 보며 밀리안이 경쾌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들의 속이 빤히 보였다.
“저도 바라는 바입니다. 근데, 후작님.”
“응?”
“머물 곳은 이미 정했습니다. 제 거처를 걱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응? 무슨 말이니, 설마 집도 나가겠다는 거니?”
에밀리가 멍하니 밀리안을 바라보았다. 벌써 거처를 정했다니. 만약 매매 계약서에 도장까지 찍었다면 곧 소문이 날 수도 있었다. 에밀리가 당황한 기색을 띠며 밀리안의 팔을 꽉 잡았다.
‘아니다. 그냥 성을 선물로 줬다고 하면 되겠지.’
일단 밀리안을 설득하는 것이 더 중요했다. 에밀리가 애써 침착하게 머리를 굴리며 모든 경우의 수를 생각했다. 진정해야 했다. 자고로 감정적으로 대처하면 되는 일이 없다는 걸 되뇌었다.
하지만 이어지는 밀리안의 말을 듣자 더는 진정할 수 없었다. 밀리안이 고개를 젓고는 낮게 웃으며 말했다.
“전 제 성으로 돌아갈 겁니다. 이곳에서 아주 가깝거든요.”
밀리안이 턱짓으로 에드모어 성 옆을 가리키자 진과 에밀리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3일 전 이웃하고 있던 성의 귀족이 성을 팔았다는 말을 들었던 게 불현듯 스쳐 지나갔다.
“설마 옆에 새로 이사 온다는 귀족이…….”
“네, 바로 접니다.”
밀리안이 화사하게 웃으며 긍정했다. 진과 에밀리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이렇게 치밀하게 준비하다니!
전쟁터에서 정신없을 줄 알았던 녀석이 언제 이렇게 착착 계획을 진행한 건지 몰랐다. 밀리안은 전쟁터에서 마냥 싸움만 하지 않았다. 돌아와서 아버지가 방해하지 못하도록 사전에 모든 준비를 마쳤다.
즉, 이 정도 마찰을 예상하지 않고 막무가내로 진행한 게 아니란 말이다. 당황하여 딱딱하게 굳은 두 사람을 보며 밀리안이 협상가의 미소를 띠었다.
“아무래도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습니다, 각하.”
더 이상 감정을 숨길 수 없었다. 이젠 직진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 * *
다음 날, 프레아는 아침조차 거르고 출근했다. 어젯밤 결국 밀리안은 환영 파티에 오지 않았다. 아프다는 핑계로 가지 않으려 했는데 좀 허무했다.
이미 밀리안이 작위를 받았다는 것과 가문을 나갔다는 소문이 성에 퍼져 있었다. 프레아가 부모님의 눈치를 살폈으나 생각보다 멀쩡해 보였다.
에밀리는 밀리안이 일이 있어 환영 파티를 다음으로 미뤘다고 말할 뿐이었다. 의외로 집 안은 무척 평온했다. 비서 비숍이 프레아가 평소보다 한 시간이나 일찍 출근한 것을 보고 놀란 얼굴로 물었다.
“대표님, 왜 이렇게 일찍 오셨어요?”
“생각이 많아서.”
프레아가 멍하니 대답했다. 어젯밤 한숨도 자지 못했다. 계속해서 밀리안이 제게 고백하는 장면과 사르르 눈웃음치는 것이 떠오른 탓이다.
남동생이 너무 잘나서 곤란하다. 5년 동안 못 봐서 그런 거겠지. 그래, 프레아는 밀리안의 얼굴에 약했다. 처음 만났을 때도 밀리안의 붉은 눈에 꽂혀서 체리를 주기도 했었다.
이상하게 밀리안이 눈웃음치던 장면과 고백해 오는 장면을 떠올리면 꽃이 날아다니는 것 같은 착시 효과가 일었다.
미친 게 분명해.
프레아는 고개를 흔들며 괴로워했다. 이럴 바엔 차라리 일을 하자 싶어 일찍 ‘메샤르’에 왔다. 메샤르는 정령 협회를 반대하는 사람들이 모인 새로운 협회였다.
즉, 정령을 노예처럼 부리는 정령 협회에 반대해 정령을 동반자로 여기는 정령사들이 모인 집단이었다.
아직은 소규모라 정령 협회에 비하면 턱없이 영향력이 없었지만, 그 대표가 레이첼 에드모어라 함부로 하지 못했다. 공작과 후작이 뒤를 봐주는 집단을 함부로 할 수 있을 리가.
프레아는 비밀리에 힘을 키운 뒤 메샤르를 세워 정령 협회의 뒤통수를 제대로 쳤다. 정령 협회에서 발언권이 없던 정령사들이 메샤르의 취지를 알고 설립 이후 대거 이동해 왔다.
메샤르 회원은 모두 정령 협회에서 주는 회원증을 폐기했다. 애초에 회원증은 외부로부터 정령과 정령사를 보호한다는 명목하에 만들었건만, 현재는 제 기능을 하지 못했다.
오히려 그것이 정령사들의 걸림돌이 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회원증이 없으면 직장에서 차별을 받거나 마탑의 표적이 되기도 했다. 결국 협회에 소속되지 못한 정령사들은 그들의 더러움을 알면서도 하는 수 없이 회원증을 구매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처음부터 메샤르에 몰려온 것은 아니었다. 그들이 정령 협회를 탈퇴하게 된 결정적 계기는 따로 있었다. 바로 정령 협회가 비밀리에 마탑과 모종의 유착 관계를 갖고 있었다는 사실을 프레아가 밝혔기 때문이었다.
마탑의 마법사와 정령사는 원수지간이었다. 실제로 마탑의 마법사에게 납치되어 실험체로 이용당하다 죽은 정령사가 많았으니까. 마법사들은 진리를 탐구한다는 명목으로 정령사를 실험체 취급해 왔었다.
그런데 정령 협회에서 마탑에 회원 정보를 제공한 정황을 메샤르가 포착한 것이다. 그날로 정령 협회는 거의 풍비박산 수준이었다. 아니라고 발뺌하는 족족 증거 자료를 제시한 탓에 신용이 바닥이 되고 말았다.
성공적인 작전이었다. 브레이크가 알아낸 정보를 프레아가 자신의 권력을 이용해 제대로 판을 키운 합작이었다. 당시를 생각하면 지금도 입가에 미소가 번질 정도로 유쾌했다.
프레아가 서류를 꺼내 들며 행사들을 쓱 훑었다. 한참 뒤적거리며 일거리를 찾아 헤맸다. 애꿎은 시계를 계속 쳐다보면서. 그때, 비숍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제 곧 밀리안 님 입성식 아닌가요? 가보셔야 할 텐데.”
“안 갈 거야.”
프레아는 또 시계를 보다 화들짝 놀라며 단호하게 말했다.
“네?”
“비숍, 오늘부터 밀리안은 금기어야.”
“…….”
비숍은 말도 안 된다는 얼굴로 프레아를 바라보았다. 하루가 멀다고 남동생 자랑만 하던 그녀였다. 게다가 아까부터 시간에 쫓기는 사람처럼 시계만 보지 않았던가? 설마 싸우기라도 했나 싶어 비숍이 제법 의젓한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화해는 빨리하는 게 좋습니다.”
“…….”
“피한다고 되는 것도 없고요.”
“비숍, 이건 내 친구 얘긴데…….”
프레아가 비숍을 빤히 보며 머뭇거렸다. 말해도 되나 싶어 우물쭈물하는데 비숍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친구가 왜요?”
“아니다. 하아, 아니야. 그래, 피한다고 되는 건 없겠지.”
프레아가 머리를 쥐어뜯었다. ‘내 친구 얘긴데’라는 말은 사실 자기 이야기라는 공식을 잘 아는 그녀였다. 괜히 말했다가 이상한 소문이 날까 봐 아무에게도 말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더 괴로워 미치고 팔짝 뛸 것 같았다. 게다가 생각해 보니 오늘을 위해 일을 몰아 해서 당장 해야 할 일이나 행사 일정이 없었다.
일이라도 많으면 생각이라도 못 할 텐데. 쓸데없이 부지런해서는!
프레아는 미리 처리한 일 더미를 처연히 바라보다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흐느적거리며 다시 외투를 입었다.
* * *
광장 쪽은 승전보를 들고 온 기사들을 나팔을 불며 한창 맞이하고 있었다. 여기저기서 손수건을 흔들고 연달아 꽃가루를 날렸다. 프레아는 멀찌감치 떨어져서 주위를 살폈다. 피하지 말자고 오긴 했는데 막상 만나려니 겁났다. 프레아가 부러 챙이 넓은 모자로 제 얼굴을 가렸다.
“왕의 목을 땄다지?”
“그래, 역시 에드모어야. 어떻게 혼자서 그곳을…….”
프레아가 ‘에드모어’라는 단어에 귀를 쫑긋했다. 사내 둘이 그녀의 뒤에서 이번 전쟁의 무용담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공이 너무 커서 오히려 작위까지 받았다더군!”
“어마어마하구먼. 나중에 공작위까지 물려받으면 아무도 못 건들겠군.”
“그러게 말이야. 세상 혼자 사는 인사야. 저 혼자 다 해먹으면 우리같이 평범한 기사들은 어쩌라는 건지.”
“예끼, 이 사람. 누가 들으면 어쩌려고. 그 소문도 못 들었는가?”
“무슨 소문?”
갑자기 남자들의 목소리가 작아졌다. 대화하는 내용을 들어보니 전쟁에 나가지 않은 다른 기사인 모양이었다. 프레아가 슬며시 그들 옆으로 가 귀 기울였다. 앞에서 얼핏 왕의 목을 땄다느니 하는 말을 들은 게 신경 쓰여서였다.
“코헨 후작의 아들 알고 있지?”
“아, 그 망나니?”
“그래, 그 망나니가 글쎄 에드모어 소공작만 보면 벌벌 떨고 경기를 일으킨다더군.”
“아니, 왜? 그자 꽤 잘나가는 마법사가 아니던가?”
“어릴 적에 뒷담화 한번 했다가 에드모어에게 아주 곤죽이 되었다고 해. 그날로 소공작만 보면 회까닥한다는구먼.”
“쯧쯧쯧.”
난 또 뭐라고.
프레아는 흥미를 잃었다. 코헨 후작의 아들 일이라면 이미 들은 적이 있었다. 아마도 밀리안이 10살 때쯤 했던 일이리라. 보통 어릴 때 크게 당하면 커서도 벌벌 떠는 법이다.
그 코헨 후작의 아들이 마법사가 되었다니. 만나보지 않았는데도 안 맞을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프레아는 인상을 팍 쓰며 자리를 떠나려 했다. 마법사랑 정령사는 앙숙이었다. 굳이 시간을 내어 마법사 이야기를 들을 이윤 없었다.
“하긴 작전도 무시하고 왕의 목을 따러 간 정신이면 그럴 법도 하구먼.”
“누가 아니래. 내 친구가 그 전쟁터에 있었는데 글쎄 왕의 목을 들고 와서 웃더란다. 눈이 어찌나 붉게 빛나는지 사신인 줄 알았대.”
“무어?”
남자가 질겁하며 되물었다. 프레아는 자리를 뜨려다 말고 우뚝 멈춰 서고 말았다. 지금 자신이 뭘 들은 건가 싶었다.
“전쟁터에서 정신이라도 이상해진 게지. 그게 아니라면 사람 목을 따고 좋다고 웃겠는가.”
“무섭구먼, 무서워. 역시 에드모어 가문이야. 괴물이 따로 없어.”
“저어, 기사님들?”
프레아가 애써 웃으며 두 사람에게 말을 걸었다. 기사들은 갑자기 귀족 영애가 말을 걸자 움찔거렸다. 프레아가 멋쩍은 듯 배시시 웃자 기사들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무, 무슨 일이십니까, 레이디?”
“아까 이야기, 좀 더 자세히 듣고 싶은데요.”
“예? 영애께서 듣기엔 좀 무서운 이야기일 텐데요.”
기사가 떨떠름한 얼굴로 대답했다. 어떻게 보면 뒷담화라고 볼 수 있는 이야기를 처음 보는 영애에게 하기 거북해서 댄 핑계였다. 하지만 프레아는 굴하지 않고 사근사근한 어조로 살살 달랬다.
“전쟁 소설을 좋아해서요. 그래서 밀리안 에드모어 레이첼이 어떻게 했다고요? 너무 흥미로워서 그냥 지나칠 수 없었어요.”
프레아가 일부러 수줍은 미소를 띠었다. 그 미소를 본 기사들이 얼굴을 더욱 붉히며 앞다퉈 이야기를 시작했다. 프레아는 듣는 내내 미소를 잃지 않으려 노력했다. 하지만 평온한 척하는 겉과 달리 속에서는 온 세포들이 난리를 치며 경고음을 울렸다.
이 미친 동생이 무슨 짓을 하고 돌아온 거야.
* * *
입성을 마친 밀리안은 황제와 알현한 뒤 클로드와 빠져나왔다. 밀리안은 입성식 내내 프레아가 왔나 찾았지만 아쉽게도 보지 못했다. 이런 행사엔 항상 와주었던 그녀였는데. 제 고백이 적잖이 충격적인 모양이다.
뭐 그렇다고 해도 제 마음을 숨길 생각은 전혀 없었다. 우선 고백을 해야 저를 남동생으로 보지 않을 테니까. 그때 클로드의 유쾌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래, 그토록 원했던 수도에 오니 어떤가?”
“아주 좋습니다.”
“좋을 테지. 얼마나 오고 싶었으면 죽으려고 환장한 사람처럼 적진으로 들어갔을까. 그때 경이 목을 가져온 걸 보고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클로드가 당시가 생생하다는 듯 얼굴을 찌푸렸다. 피범벅이 돼서 형형하게 눈을 빛내던 밀리안은 흡사 사신 같았다. 아군이 아니었다면 아주 공포스러운 상황이었다.
밀리안은 클로드에게 딱딱한 어조로 대꾸했다. 또 그날 일을 말하냐며 질린다는 듯이.
“결과적으로 종전되어 전하께 좋지 않았습니까?”
“좋기는 한데, 나보다 네가 더 명성을 얻는 상황은 좀 위험하지. 알지 않나? 반란군이 영웅을 싫어한다는 걸.”
“걱정 마십시오. 기사의 명성은 곧 모시는 주군의 명성이기도 합니다.”
“그 말은 결국 위험해지는 건 네가 아니라 나라는 것 같네.”
“아시면서.”
밀리안이 낮게 웃었다.
‘이 자식, 알고 일부러 그런 짓을 한 거였어.’
클로드가 경악한 얼굴로 밀리안을 봤다. 물론 클로드가 반란군이 무서워 그의 충정을 달갑지 않게 여기는 건 아니었다. 밀리안은 제 친우이자 가장 아끼는 신하였다.
게다가 그는 능력까지 출중하여 모두가 탐내는 인사였다. 가끔 저렇게 미친놈처럼 굴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뒷수습은 죄다 제 몫이었다. 당시 명령 불복종으로 처단해야 한다는 기사단장들을 간신히 설득했었다. 하여간 자신이 신임해 주니 앞뒤 없이 일부터 저지르는 밀리안이었다.
벌써부터 밀리안이 왕의 목을 베어 왔다는 소식이 수도 전역에 퍼졌다. 아마 반란군도 들었을 것이다. 클로드가 조금 걱정스럽다는 듯이 물었다.
“그나저나 혹시라도 자네 누이가 위험해지면 어쩌려고?”
“글쎄요. 그녀를 공격한 반란군을 걱정하시는 게 아니라면 신경 쓰지 마십시오.”
“그게 무슨 소리인가?”
클로드가 영문 모르겠다는 얼굴로 질문하자 밀리안이 확신에 찬 미소를 지었다.
“설령 그럴 일은 없겠지만 그녀가 혹시라도 다치면 반란군은 다 죽은 목숨입니다.”
“응? 반란군이 그렇게 쉽게 잡히나? 아직 배후도 못 찾았는데.”
“어떻게든 찾아서 제가 다 죽여 버릴 겁니다.”
밀리안이 웃음기를 걷으며 살벌하게 대답했다. 클로드는 침을 꿀꺽 삼켰다. 전쟁터에서 적군을 쓸어버리던 모습이 떠올라서. 딱히 반란군을 옹호할 생각은 없지만 만약 그들이 프레아 레이첼 에드모어를 공격하려 한다면 말리고 싶었다.
이 미친놈은 한다면 하는 놈이니까.
아, 아니지. 지금 누굴 걱정한단 말인가. 오히려 그녀를 공격해 밀리안의 심기를 건드려 그가 반란군을 토벌하도록 하는 게 황실에 더 좋은 일이었다. 클로드가 밀리안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자네는 참 대단해.”
“알고 있습니다.”
“재수 없는 것도 대단하고.”
밀리안은 새삼스럽게 뭘 그러냐는 얼굴로 클로드를 슥 쳐다보았다.
“아마 축하연은 며칠 뒤에 열리겠지. 드디어 자네의 누이를 보는 건가?”
“관심 갖지 마십시오.”
밀리안의 서늘한 표정에 클로드는 기가 차 구시렁거렸다.
“매일 그렇게 편지를 주고받으니 궁금하지 않을 리가. 내가 자네를 아주 오래전부터 알았지만 그렇게 정성 들여 편지를 쓰는 걸 본 적이 없어.”
“그야 프레아니까요.”
“이러니 궁금할 수밖에.”
클로드가 혀를 끌끌 찼다. 피도 안 섞였는데 너무 싸고돌았다. 게다가 그가 입단식에서 망토를 누이에게 주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땐 쟤가 왜 저러나 싶었다.
에드모어 공작이 설명해 주지 않았다면 크게 오해할 뻔한 행동이었다. 보통은 연인한테나 하는 거니까. 밀리안이 그럴 정도라니. 모든 게 레이첼 후작과 에드모어 공작이 가족이 되려고 노력한 결과라고 생각했다. 그 결혼식은 말이 많았으니까.
클로드 역시 에드모어 공작이 갑자기 레이첼 후작과 결혼하겠다 할 때는 당황스러웠다. 공작부인이 그렇게 된 지 1년이 지날 무렵이라 더욱 그랬다.
게다가 부인의 죽음에 대해 밀리안의 상처가 채 아물지 않은 상태였다. 어쨌든 그 사고에 함께 휘말렸었으니까. 그래서 밀리안이 생각 외로 새로운 가족을 받아들인 모습을 보여 의아했었다.
클로드는 전쟁터에서 밀리안과 함께 머물며 그가 악몽을 꾸는 모습을 종종 보았다. 간혹 어머니에 대해 잠꼬대할 땐 걱정스러운 마음마저 들었다. 홀로 상처를 삭이고 있는 건 아닌가 해서.
“그래, 차라리 친한 게 좋지. 그나저나 내가 얘기했던 건 생각해 보았는가?”
“필요 없습니다.”
밀리안이 들어볼 것도 없다는 듯이 딱 잘라 말했다. 클로드는 물러서지 않고 그를 설득했다.
“다시 생각해 봐. 계속 악몽을 꾼다는 건 아직 그 일이 자네에게…….”
“개인사입니다. 제 병은 제가 알아서 합니다.”
“차갑기는.”
클로드는 알겠다며 혹시라도 관심이 생기면 언제든지 말하라고 했다. 물론 밀리안은 대답하지 않았다.
* * *
프레아는 애써 침착한 모습으로 빠르게 성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밀리안이 작전도 무시하고 위험천만하게 사지로 뛰어들었다고 한다. 그것도 혼자서.
‘죽으려고 작정한 것도 아니고 그런 짓을 하다니!’
아무리 자신이 선을 본다고 했다지만 그 정도로 정신 나간 짓을 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저 전쟁이 일찍 끝났구나 싶었는데, 제 목숨을 담보로 무리수를 둔 거라니. 프레아는 무모한 행동을 한 밀리안에게 화가 났다.
그러다 다치면 어쩌려고.
죽었으면 어쩌려고.
아무리 밀리안이 강하다고 해도 적진에 홀로 뛰어드는 건 미친 짓이었다. 또 자긴 안 죽는다느니 헛소리를 했을 것 같아서 벌써부터 입이 바짝바짝 말랐다.
밀리안을 찾아가려고 보니 그가 어디에 머무는지 몰랐다. 그날은 너무 놀라서 그냥 도망쳐 버렸으니까. 결국 어제 밀리안을 만났다던 진에게 물어보는 수밖에 없어 에드모어 성으로 향하고 있었다.
성에 다다를 무렵, 때마침 성문 앞에서 글라디안과 마주쳤다. 뜻밖의 만남에 놀라 프레아는 멀뚱히 그를 쳐다보았다. 글라디안이 어쩐지 잔뜩 주눅 든 목소리로 서두를 던졌다.
“이렇게 갑자기 찾아와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저야말로 그렇게 보내고 연락을 드렸어야 했는데 경황이 없어서…….”
“아닙니다, 오히려 연락을 주지 않으셔서 감사했습니다!”
“네?”
프레아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게 무슨 말이지. 연락하지 않아서 고맙다니. 그녀는 글라디안이 뭔가 말실수를 했다고 여겼다. 그렇지 않은 이상 앞뒤가 너무 안 맞는 말이라서. 우물쭈물하던 글라디안이 마카롱 세트를 내밀었다.
“음? 이건 왜?”
“돌려드리려고 왔습니다.”
“어째서요?”
“생각해 보니 마카롱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무슨 소리예요. 처음 봤을 때 제일 좋아하는 게 마카롱이라고 하셨잖아요.”
“이제부터 싫어할 겁니다.”
“예?”
프레아가 황당하다는 얼굴로 글라디안을 바라보았다. 엉겁결에 마카롱을 돌려받은 채 말이다. 글라디안이 잔뜩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속사포와 같이 말을 쏟았다.
“프레아 레이첼 에드모어 영애.”
“네, 말씀하세요. 글라디안 로테인 님.”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게 조금 무례하다는 건 알지만 사람 하나 살린다 생각하고 들어주십시오.”
“……네?”
“앞으로 연락하지 말아주셨으면 합니다. 물론 이건 영애가 저를 찬 겁니다. 절대 제가 영애를 차는 게 아니라 영애가 저를 차는 거라고요. 아시겠습니까?”
“그게 무슨…….”
“저는 오늘부로 영애에게 큰 잘못을 저질러 차이게 된 겁니다. 예, 그래야만 합니다.”
“……잠시만요, 글라디안 님. 좀만 천천히 말쓰…….”
“으악, 건드리지 마십시오!”
프레아가 초조해 보이는 글라디안이 걱정되어 손을 가져다 대려 하자 그가 화들짝 놀라며 소리쳤다. 격한 반응에 놀란 나머지 프레아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소, 소리쳐서 죄송합니다!”
글라디안은 얼굴을 하얗게 물들이곤 연신 사과했다. 침묵이 이어졌다. 글라디안이 재차 90도로 허리를 굽혀 깍듯이 사죄하고는 작별을 고하며 부리나케 달아났다. 그의 수상한 행동을 보며 한 사람이 떠올랐다.
‘밀리안…….’
프레아의 눈에 불꽃이 팟 튀었다. 곧장 성에 들어가 진에게로 달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