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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장 남동생이 갑자기 떠났다 (4/20)

3장 남동생이 갑자기 떠났다

연회가 열린 지 한참 지났다. 프레아는 아침부터 미소를 숨기지 않고 식사했다. 그 모습을 본 밀리안이 넌지시 물었다.

“뭐 좋은 일 있어?”

“오늘 에리카가 돌아오는 날이거든.”

프레아가 잔뜩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아…… 그 탐험가 가문의 딸 말인가.”

프레아의 반응을 본 밀리안이 알 만하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에리카는 프레아의 가장 친한 친구였으니까. 8년 전 마리아와 한판 뜬 날 처음 만난 것을 계기로 연락이 닿게 되었다.

탐험가 집안답게 성격도 시원시원하고 어쩐지 프레아를 무척 좋아해서 친해지는 데 어렵지 않았다. 에리카는 사교계가 잘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다른 모임에 들어가기를 거부했다.

프레아는 모임을 나와 새로운 모임을 만들었다. 레이첼 가문을 이으려면 사교계에 발을 걸치고 있어야 했기 때문이다. 사교계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에리카와 친해진 것은 순전히 ‘여행’이라는 공통 관심사 덕분이었다.

에리카는 귀족이 된 이후에도 아버지와 종종 여행을 다녔다. 그런 자유로운 모습이 프레아는 이따금 부러웠다. 에리카와 달리 프레아에겐 귀족으로서 주어진 책임이 컸으니까. 프레아는 어머니를 이어 황실을 보필할 의무가 있었다.

프레아가 막 아침을 다 먹었을 때 밀리안이 턱을 괸 상태로 프레아를 빤히 보며 물었다. 표정이 무척 부드러웠다. 어느 순간부터 저리 다정하게 대해주니 기분이 오묘했다.

“주말에 연극 보러 갈래?”

주말이라면 프레아도 시간이 남아 곧장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가족끼리 영화를 본 지 오래되었다.

“좋아. 아버지랑 어머니도 같이 보러 갈까?”

“두 분은 바쁘시대.”

“주말인데?”

프레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최근에는 일이 별로 없어서 늘 주말에 쉬셨었는데 그새 바쁜 일이라도 생긴 걸까 싶었다. 프레아가 우물쭈물하며 대답을 미루자 밀리안이 얼굴을 찡그렸다.

“왜? 나랑 둘이 보기 싫어?”

딱히 둘이 보기 싫다는 건 아니라 얼른 손사래 쳤다. 그냥 이왕이면 다 같이 보러 가는 게 좋으니까 망설인 거였다. 프레아가 화사하게 웃었다.

“아냐, 둘이서도 좋아.”

“그럼 그날 비워놔.”

프레아의 확답을 받은 밀리안이 씨익 웃으며 자리를 떴다. 그 말을 하려고 다 먹을 때까지 기다린 모양이다. 프레아 역시 항구로 에리카를 마중 나가기 위해 서둘러 자리를 떴다.

* * *

“어서 와.”

프레아가 에리카를 반갑게 맞이했다. 에리카는 전보다 살이 더 탄 채 배시시 웃으며 프레아를 꼭 안았다.

“오랜만이야.”

“어째 살이 더 탄 것 같아. 내가 준 크림 안 발랐어?”

“바른다고 발랐는데 워낙 햇빛이 강해서.”

에리카가 볼을 매만지며 변명했다. 프레아는 다음에는 챙이 넓은 모자를 선물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크림을 사줘도 잘 바르지 않으니 물리적으로 가리는 수밖에 없었다.

“오랜만입니다, 소후작님.”

프레드린 백작이 호탕한 목소리로 인사했다. 그 역시 에리카와 마찬가지로 얼굴이 잔뜩 그을어 있었다. 프레아는 밝게 웃으며 말했다.

“백작님도 제가 드린 크림을 안 바르신 모양이네요.”

“허허. 뭘 바르는 데 익숙하지 않아 그러니 노여워 마십시오.”

백작이 멋쩍었는지 소리 내어 웃었다. 이에 프레아가 이해한다는 얼굴로 어깨를 으쓱였다. 미리 준비시켜 둔 마차에 시녀들이 짐을 실었다. 이를 본 프레드린 백작이 말했다.

“매번 이렇게 마중 나와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제 기쁨이에요.”

프레아가 별거 아니라는 듯이 활짝 웃었다. 정말 즐거워서 하는 일이었다. 이에 에리카가 프레드린 백작에게 무어라 속닥거리더니 프레아에게 말했다.

“안 그래도 줄 게 있어.”

“줄 거?”

“응. 바쁜 거 아니면 잠시 성에 들를래?”

“좋아.”

프레아가 흔쾌히 수락하자 에리카가 배시시 웃었다. 마차에 짐을 다 싣자 프레아도 백작 부녀와 함께 프레드린 성으로 향했다.

* * *

에리카와 함께 프레드린 성에 도착했다. 프레아는 에리카가 짐을 정리하는 동안 귀빈실에서 차를 마시며 기다렸다. 프레드린 성은 이제 8년 정도 되어 제법 모양새가 갖춰진 상태였다.

처음 성에 놀러 왔을 때만 해도 아주 엉망이었던 곳이다. 프레아는 그때 무척 놀랐었다. 여행에서 발견하거나 사 온 물건들이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었으니까.

당시 에리카가 멋쩍은 얼굴로 청소에 소질이 없다고 했고, 그날로 프레아가 청소를 잘하는 시녀를 구해다 주었다. 누구를 부려본 적이 없어 시녀를 구해야 한다는 생각도 못 한 부녀였다.

“미안, 많이 기다렸지.”

“아냐, 차 맛이 좋다.”

프레아가 에리카의 부담을 덜어주고자 말했다. 이에 에리카가 배시시 웃고는 손에 쥔 상자를 내밀었다. 아주 회심에 찬 얼굴이었다.

“이게 뭐야?”

“열어봐.”

에리카가 턱짓하며 말했다. 상자는 생각보다 묵직했다. 의아한 얼굴로 상자를 여니 투박한 광석 하나가 들어 있었다. 도무지 뭔지 모르겠어서 에리카를 바라봤다. 그제야 에리카가 설명했다.

“아버지가 그러는데 그곳에 정령이 깃들어 있는 것 같대.”

“정령이?”

프레아는 정령이라는 말에 광석을 손에 들어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손이 닿자마자 광석이 미세하게 떨리며 반응했다. 정말 무언가가 느껴졌다. 조금 미약하긴 하지만 정령의 기운이었다. 프레아가 유심히 관찰하자 에리카가 말을 덧붙였다.

“이번에 여행 갔던 정글의 고대 부족들은 과거에 정령이 돌에서 나오는 걸 보고 신이라 여겼대. 어쩌면 그들이 모시던 정령석 중 하나일지도 몰라.”

“하긴 정령들이 본래 사물에 깃들어 있다가 태어나는 걸 모르는 사람은 정령이 신처럼 느껴지겠네.”

프레아의 말에 에리카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사실 발견하긴 했는데 어떻게 해야 하나 싶었거든. 그러다 마침 네가 정령사라는 게 생각나서 가져왔어.”

“정말 고대 부족이 모시던 정령이라면 토토랑 비슷한 연배일지도.”

프레아가 광석을 매만지며 말했다. 광석은 여전히 미동하며 웅웅 소리를 냈다. 에리카가 토토라는 단어에 슬쩍 물었다.

“토토 씨는 잘 있지?”

“지금 부를까?”

프레아가 피어싱을 매만지자 에리카가 손사래 쳤다.

“아냐, 난 아직도 적응이 안 되더라고. 그 귀여운 인형이 그렇게 큰 늑대였다니.”

“나도 사실 놀랐어.”

프레아가 큭큭 웃으며 동감했다. 프레아도 인형에서 피어싱으로 토토를 옮기고 나서야 처음으로 토토의 실체를 봤었다.

얼마나 놀랐는지. 토토와 계약했던 당시의 기억이 전혀 없다 보니 토토가 늑대였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토토는 드디어 본모습을 현시할 수 있게 되자 으스대며 저를 뽐냈었다. 프레아가 광석을 다시 상자에 담으며 말했다.

“우선 내가 가져갈게. 언제 깨어날지는 모르겠지만.”

“그래. 어차피 정령이 깨어나도 우린 아는 게 없으니까, 그나마 정령에 우호적인 네가 관리하는 게 낫겠지.”

“고마워. 정령 협회보다 네가 먼저 발견한 건 이 아이의 행운이네.”

“아니지, 내가 네 친구였다는 게 그 아이에게 행운인 거지.”

두 사람이 사이좋게 덕담을 주고받더니 동시에 소리 내어 웃었다. 프레아는 현재 정령 협회와 대척점을 둔 집단에 대표로 소속되어 있었다.

“그래서 여행은 어땠어?”

“정말 최고였어.”

에리카가 여전히 흥분된다는 듯이 말했다. 프레아는 그런 에리카를 재촉하며 눈을 빛냈다. 이후로는 줄곧 여행에 대한 이야기였다. 두 사람은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대화했다.

* * *

프레아는 주말이 되자 약속한 대로 밀리안과 연극을 보러 시내 극장으로 향했다. 오랜만에 둘이 나온 터라 잔뜩 들떠 있었다. 요즘처럼만 밀리안과 시간을 보내면 소원이 없었다.

마차가 덜컹거리며 움직일 때마다 시원한 바람이 창을 타고 들어왔다. 이에 기분 좋은 얼굴로 눈을 감고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맞은편에 앉아 있던 밀리안이 말했다.

“기분 좋아 보이네.”

“우리 둘이 나온 건 오랜만이니까.”

“더 자주 같이 나올 걸 그랬네.”

밀리안이 아쉽다는 듯이 피식 웃었다. 프레아는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괜찮아. 어차피 같이 보낼 시간은 많은걸.”

“어른인 척하긴.”

밀리안이 코웃음 치더니 프레아를 따라 창에 기대어 바람을 맞았다. 마차가 극장 앞에 도착하자 밀리안은 마부에게 언제까지 오라고 하더니 그대로 보냈다.

“예매는 했어?”

“누구처럼 덜렁대진 않아서.”

프레아의 물음에 부러 들으라는 듯이 그가 콕 집어 말했다. 예전에 프레아가 먼저 가족끼리 연극 보러 가자 해놓고서 예매를 깜박해 보지 못했던 걸 아직도 기억하는 모양이다.

프레아가 입을 비쭉이며 언제까지 놀려먹을 거냐고 투덜거렸다. 이에 밀리안이 쿡쿡거리며 극장으로 프레아를 끌었다. 표를 직원에게 건네고 극장 안으로 들어갔다. 무대와 적당한 거리에 있는 좌석이었다. 아직 시간이 남아서인지 극장 안에는 사람이 없었다.

“기사단 일은 어때?”

프레아가 남동생의 사생활이 궁금해 물었다.

“그럭저럭 할 만해.”

밀리안이 어깨를 으쓱였다. 딱히 달라진 게 없다는 어조였다. 순간 기사단 이야기를 하니 빌리앙이 떠올라 프레아는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빌리앙 씨는 프로포즈에 성공했으려나.”

“누구야, 그놈은.”

밀리안이 곧장 불편한 기색을 띠었다. 어쩐지 잔뜩 날 선 목소리에 프레아가 고개를 갸웃거리곤 지난번 겪었던 엉뚱한 에피소드를 들려주었다. 가만히 듣고 있던 밀리안이 언제 그랬냐는 듯이 표정을 풀었다. 곧이어 못 말린다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넌 정말 별일이 다 있는 것 같아.”

“하마터면 커플 하나를 깨뜨릴 뻔했지 뭐.”

프레아가 유쾌하게 웃었다. 밀리안은 덩달아 웃다 말고 표정을 굳히더니 주의하라 말했다.

“아무나 따라가지 마.”

“어차피 내가 더 세.”

프레아가 우쭐거렸다. 정령술을 익힌 뒤론 자신감이 넘쳤다. 이에 밀리안이 무슨 소리냐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누가 너보고 약해서 따라가지 말래?”

“그럼?”

프레아가 무슨 소리냐는 얼굴로 쳐다보자 밀리안이 능글거리며 대답했다.

“널 만날 그 악당이 불쌍해서 하는 말이야.”

“……너부터 가만 안 둘 거야.”

프레아가 밀리안의 놀림에 약이 바짝 올라 때릴 듯 위협했다. 이에 밀리안이 키득거리며 프레아의 두 팔을 간단히 저지했다.

“걱정 마. 위험하면 찾아갈 테니.”

“무슨 수로 찾아오려고.”

프레아가 새침하게 되물었다. 밀리안은 새삼스럽게 뭘 물어보냐는 얼굴로 말했다.

“네가 다치면 난 다 알아.”

사실이었다. 밀리안은 프레아에게서 피가 나면 귀신같이 알아차렸다. 개코도 아니고 피 냄새를 맡고 찾아올 건 뭐람. 밀리안에게 있어 제 피는 위치 파악에 유용한 단서였다.

“너 개 같아.”

프레아가 일부러 놀리듯 해맑게 웃으며 말했다. 이에 밀리안도 덩달아 가식적으로 웃었다.

“이왕이면 귀여운 강아지라고 해줘.”

“싫어. 이렇게 큰 강아지가 어딨어?”

“자꾸 그러면 정말 개처럼 물어버리는 수가 있어.”

더욱 놀리자 밀리안이 으르렁거리는 시늉을 하며 대답했다. 이에 프레아가 어디 한번 해보라는 듯이 으름장을 놓았다.

“하기만 해봐. 그럼 나도 물어버릴 테니까.”

“……무섭네.”

밀리안은 전혀 무서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영혼 없는 그의 대답에 프레아가 정말 할퀼 것처럼 인상을 찡그렸다. 밀리안은 그런 프레아의 미간을 꾹 누르며 말했다. 무척 다정한 말투였다.

“그러니까 혼자서 감당 안 될 정도로 위험해지면 날 기억해. 피 한 방울이면 되니까.”

“결국 나보고 한 대 맞으라는 거잖아. 난 내 힘으로 이길 거야. 싸움엔 선빵인 거 몰라?”

프레아가 기분 좋으면서도 일부러 툴툴거렸다. 해맑은 표정으로 선빵을 운운하는 프레아를 보며 밀리안이 재미있다는 듯이 턱을 괴고 말했다.

“그래서 그때 라즐리 후작의 딸 머리채를 잡은 거야?”

“……어떻게 알았어?”

프레아는 마리아와 싸운 걸 집안에 말한 적이 없어 놀라 물었다. 어쩐지 그 일이 어릴 적 흑역사 같아서 민망하기까지 했다. 아무리 화난다고 해도 머리채를 잡을 것까진 없었으니까. 이에 당연하다는 듯이 밀리안이 대답했다.

“다 아는 수가 있지.”

“말도 안 돼.”

프레아는 경악했다. 분명 비밀리에 끝났다고 생각한 일이었다. 설마 부모님도 다 알고 계신 걸까. 프레아의 눈빛이 묘하게 흔들렸다. 그러고 보니 이상하게 라즐리 후작 쪽에서 별말이 없었다. 보통은 항의할 일인데도.

프레아가 설마 하는 얼굴로 밀리안을 바라보았다. 그 모습을 본 밀리안이 소리 내어 낮게 웃더니 말했다.

“걱정 마. 부모님 모르게 내가 처리했으니까.”

“휴…….”

부모님이 모른다는 말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프레아를 밀리안이 깊은 눈빛으로 보며 말했다.

“앞으로도 네가 사고를 치게 된다면 수습해 줄 테니 맘껏 날뛰어도 좋아.”

“정말?”

프레아가 활짝 웃었다. 물론 날뛰고 싶어서 한 반응은 아니었다. 밀리안이 언제든 제 편을 들어주겠다는 약속 같아서 기뻤을 뿐이었다. 밀리안이 해맑게 웃는 프레아를 보며 자신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입은 웃고 있는데, 눈빛은 무척 진지했다.

“그래. 혹시라도 네가 선빵에 실패하거나 맞아서 돌아오면 내가 10배로 갚아줄게.”

“그럼 그 사람 죽을 텐데. 네가 일반인도 아니고.”

프레아가 고개를 저었다. 밀리안에게 10배로 당하는 미래의 누군가가 불쌍해서. 이에 밀리안이 어깨를 으쓱였다.

“죽으라지 뭐.”

프레아는 그 모습이 마치 누나를 지켜주겠다는 것 같아서 배시시 웃으며 말렸다.

“불쌍해, 그러지 마.”

“그럼 널 건드리지 말았어야지.”

밀리안이 진심이라는 듯이 말했다. 프레아는 그런 그의 반응이 기꺼웠다. 어쩐지 요즘은 기분 좋은 일투성이였다. 이렇게 먼저 연극에도 오자고 하고 저를 위해 싸워주겠다고도 하니 더욱 그랬다. 이젠 정말 밀리안이 자신을 누나로 인정한 모양이다.

그때 불이 꺼지며 연극이 시작됐다. 극장에는 이상하게도 프레아와 밀리안뿐이었다. 프레아가 이상하다는 듯이 밀리안에게 귓속말했다.

“근데 왜 사람이 없지? 이거 꽤 유명한 건데.”

“내가 다 빌렸으니까.”

밀리안도 프레아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프레아가 놀라 곧바로 밀리안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 순간 밀리안과 밀착된 채로 시선이 맞붙었다.

조금만 더 앞으로 다가갔으면 입이 닿았을지도 몰랐다. 불이 꺼진 곳이라 밀리안의 표정이 잘 보이지 않았다. 프레아가 놀라서 멍하니 바라보다 흠칫하며 뒤로 몸을 물렸다. 밀리안이 그런 프레아를 가만히 바라보더니 낮게 속삭였다.

“아쉽네.”

“뭐라고?”

“재밌게 보라고.”

프레아가 제대로 듣지 못해 되묻자 밀리안이 낮게 웃으며 말했다.

* * *

연극을 보고 돌아온 프레아가 침대에 풀썩 드러누웠다. 연극은 무척 재미있었다. 신파라고 할 수도 있는 내용이지만 출생의 비밀이 밝혀지는 시점에선 오오, 하며 보았다. 오랜만에 본 연극이라 들떠서 그런지,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봤었다.

프레아가 이불에서 뒹굴며 여운을 즐기고 있는데 피어싱이 웅웅거리더니 토토가 모습을 드러냈다. 토토는 난데없이 나타나 이곳저곳을 탐색하듯 움직이다 에리카에게 받은 상자 앞에 우뚝 섰다.

“이건 또 뭐야?”

“아, 맞다. 토토 그것 좀 봐봐.”

그제야 정령석을 받아 온 게 생각난 프레아는 상자를 제 앞으로 끌어왔다. 토토가 그 옆에 바짝 다가서더니 경계 어린 눈빛으로 열린 상자 틈을 통해 광석을 살폈다.

“정글에서 가져온 거래.”

“정글?”

“응, 헤로스 제국과 멀리 떨어진 코호코호 대륙에 있는 밀림이래.”

“흠.”

토토가 광석을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어쩐지 자세히 관찰하는 게 뭔가 아는 눈치였다.

“혹시 아는 정령이야?”

“글쎄. 기운이 너무 약해서, 원.”

토토가 코를 킁킁거리며 이번에는 광석을 만졌다. 정령석은 여전히 웅웅거리기만 할 뿐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프레아는 에리카와 있었을 때 느꼈던 것을 덧붙여 말했다.

“정령은 확실한 것 같아. 어쩐지 내가 만지니까 반응했거든.”

“그래, 정령석은 맞는 것 같다. 근데 아주 깊이 잠든 모양이야. 이렇게 기운이 흐린 걸 보면 몸에 무리가 와서 잠이 든 걸지도.”

토토가 광석에서 물러나며 대답했다. 정령들은 비정기적으로 수면을 취했다. 잠이 드는 이유는 다양했는데, 토토의 경우는 유희가 지긋지긋해서였다고 했다. 프레아는 제 생각대로 정령이 들어 있다는 걸 확인받자 토토에게 호기심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언제 깨어날까?”

“글쎄. 기운이 약한 걸 보니 깨어나도 별로 오래 살 것 같진 않은데.”

토토가 한껏 비관적인 전망을 내비쳤다. 그러자 프레아가 안타까운 얼굴로 중얼거렸다.

“사연이라도 있나.”

“왜? 관심 있어?”

토토가 프레아를 멀뚱히 보며 질문했다. 프레아가 그런 토토에게 얼버무리듯 대답했다.

“그냥, 정령이 잠든 정령석은 처음이라…… 좀 신기하잖아?”

“흐음.”

“신으로 모시던 물건이래. 불을 불러온다면서.”

프레아는 에리카에게 들었던 것을 넌지시 얘기했다. 의외로 토토가 정령석에 관심이 많아 보여서였다.

“그럼 불의 정령이겠네. 혹시 계약하게?”

토토가 일부러 관심 없다는 듯한 어조로 물었다. 그 의도가 빤해서 프레아는 피식 웃었다.

“음, 글쎄. 난 토토로도 충분해서.”

프레아가 부러 토토를 추켜세우자 기분이 좋아진 토토가 으스대며 말했다.

“불의 정령이면 나쁘지 않지. 물비린내보단 탄내가 더 나아.”

“그 말 마린이 들으면 화낼걸?”

“화내라고 하는 말인데 뭐. 내가 갓 태어난 햇병아리도 무서워해야 해?”

토토가 바람을 휭 하고 일으켜 프레아의 머리칼을 휘날렸다. 저를 얕보지 말라는 항의였다. 토토는 인형에서 자유의 몸이 된 뒤 한껏 자신감이 오른 상태였다. 그걸 잘 알아서 그가 더욱 귀여워 보였다.

물론 실제로도 토토가 마린보다 더 강한 것은 맞다. 어쨌든 마린보다 살아온 세월이 오래된 정령이니까. 하지만 그걸 대놓고 드러내는 건 다른 문제였다. 프레아는 은근히 토토를 나무랐다.

“너무 그러지 마. 안 그래도 마린이 요즘 네 눈치 보잖아.”

“그래, 그래서 재미없어. 깐족거리던 애가 조용하니까.”

토토가 코웃음 치며 대답했다. 마린의 바뀐 태도가 어지간히 마음에 안 드는 모양이다. 이에 프레아는 마린이 이해된다는 어조로 토토를 타일렀다.

“네가 너무 크니까 그렇지. 마린은 내 손바닥만 하잖아.”

“미안하지만, 크기의 문제가 아니라 내가 너무 강해서 그런 거야. 크기는 언제든지 줄일 수 있어.”

한껏 턱이 올라간 그를 보며 프레아가 고개를 저었다.

“그럼 좀 줄여봐. 너 때문에 건물이 자주 부서지잖아.”

“생각해 보지.”

토토는 새침하게 반응했다. 안 그래도 토토 때문에 벽을 몇 번이나 갈았는지 모른다. 끝까지 크기를 줄이지 않는 토토 탓에 전체적으로 성의 천장을 높이는 보수공사까지 했다.

“하여간 자기애 하나는 밀리안 못지않아. 강함은 크기에서 나온 게 아니라고 말만 하면 뭐 해? 크기를 하나도 줄이질 않는데.”

프레아가 툴툴거리자 토토가 단호하게 말했다.

“지금 그 오만한 녀석이랑 날 비교하는 거야? 그 녀석은 제 잘난 맛에 살잖아.”

“그야 실제로도 잘났으니까.”

토토의 말에 당연한 거 아니냐는 듯이 프레아가 대꾸하자 토토는 인상을 팍 썼다.

“어휴, 못 들어주겠군.”

그러곤 듣기 싫다는 표정을 지으며 귀를 접더니 그대로 사라졌다.

* * * * *

프레아는 피곤했는지 곧장 잠들었다. 밤이 어둑해지고 창밖에 은은한 달빛이 비쳤다. 그때 프레아의 방 안으로 누군가 조용히 들어왔다. 밀리안이었다.

밀리안은 밤인데도 기사단 제복을 갖춰 입은 채 잠든 프레아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의 손에는 편지 한 장이 들려 있었다. 밀리안은 조용히 방 안에 있던 테이블에 편지를 올려놓았다.

사실 오늘 밤이 출정 날이었다. 에드모어 성에서는 아무도 밀리안이 오늘 밤 출정한다는 걸 알지 못했다. 혹시라도 진이 알게 되면 가지 못하게 막을까 봐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밀리안은 최대한 비밀리에 출정 날짜를 잡았다. 이 모든 게 황태자인 클로드와 친구 사이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밀리안은 프레아에게까지 비밀로 한 게 좀 미안했다.

연극을 보러 갔을 때 무척 즐거워하던 걸 떠올리니 더욱 죄책감이 들었다. 밀리안이 다시 프레아 앞으로 다가가 그녀에게 속삭였다.

“몰래 가서 미안해.”

작별 인사였다. 전쟁터에 가면 언제 돌아올 수 있을지 짐작할 수 없었다. 어쩌면 전쟁터에서 죽게 될지도 몰랐다. 물론 밀리안은 죽지 않을 자신이 있었지만.

밀리안이 깊이 잠든 프레아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망설였다. 분명 아침에 일어나면 크게 상심할 텐데. 어쩐지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금방 돌아올게.”

그녀가 듣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렇게 속삭이곤 결심한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순간 토토가 밀리안을 막아섰다.

“이젠 도둑처럼 몰래 들어오기까지 하는 건가.”

“그렇다면 어쩔 거지?”

밀리안이 차갑게 올려다보며 말했다. 사사건건 저를 방해하던 그가 마음에 들지 않은 탓이었다. 밀리안은 그를 프레아의 호위 기사 정도로 취급해 왔다. 토토는 저를 도발하는 밀리안을 보며 언짢은 기색을 띠었다.

“이젠 대놓고 구애라도 할 속셈인가 보지? 그 머리 장식을 준 걸 보면.”

“난 늘 프레아에게 애정을 갈구해 왔어. 그쪽이 없었으면 더욱 수월했을 거고.”

밀리안이 뻔한 걸 묻는다는 듯이 당당히 대꾸하자 토토가 으름장을 놓았다.

“어차피 프레아는 널 동생 이상으로 생각하질 않는다. 그러니 헛수고하지 마.”

“그건 두고 볼 일이지.”

밀리안이 토토를 슬쩍 노려보며 지지 않고 대답했다. 밀리안은 프레아를 확실하게 꼬실 자신이 있었다. 근거 없는 자신감은 아니었다. 프레아는 유독 자신에게 무르게 행동했다.

게다가 눈이 마주치면 넋 놓고 있거나 피할 때도 종종 있었다. 아마도 자신의 얼굴이 그녀의 취향인 듯했다. 아예 승산이 없는 게 아니라면 미인계로라도 그녀에게 어필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할 수 있는 것은 다 동원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런 생각을 토토에게 설명할 이유는 없었다. 밀리안이 토토를 슥 밀어내며 방을 나가려 했다. 그때 뒤에서 토토의 염려 섞인 목소리가 그를 붙잡았다.

“전쟁터는 위험할 텐데.”

“또 쥐새끼처럼 엿들었나 보군.”

“바람은 어디든 있으니까.”

밀리안이 으르렁거리자 토토가 코웃음을 치며 대답했다. 그래, 바람의 정령은 어디에나 존재하기에, 토토가 듣지 못할 소리는 없었다. 듣고 싶은 정보가 있다면 바람의 기억을 훑어 쉽게 찾을 수도 있었다.

물론 시간의 제한이 있어 아주 오래된 정보는 소실되어 알 수 없지만 비교적 최근의 내용은 알 수 있었다. 그걸 잘 아는 밀리안은 토토가 마음에 안 든다는 기색을 띠며 이죽거렸다.

“용케도 프레아에게 얘기하지 않았군.”

“네가 옆에 없는 편이 더 좋으니까.”

“누구한테 좋다는 거지? 프레아한테, 아니면 그쪽한테?”

“둘 다라고 해두지.”

토토가 하품하며 심드렁하게 말했다. 프레아가 밀리안을 이성적으로 좋아하지 않는 한 토토는 밀리안에게서 프레아를 보호할 의무가 있었다. 아무래도 밀리안은 집착이 꽤 강해 보였으니까.

“여전히 재수 없네.”

밀리안이 싸늘하게 웃자 토토가 무심하게 무언가를 밀리안에게 던졌다. 엉겁결에 날아온 물건을 받아버린 밀리안이 토토를 빤히 바라보았다. 토토는 몹시 언짢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도 프레아가 널 많이 아끼니 죽지는 말라고.”

“이게 뭐지?”

밀리안이 투박하게 생긴 돌을 가만히 들어 올리며 질문했다.

“프레아의 영류와 내 기운을 담은 돌이다.”

“그건 딱 봐도 느껴져. 왜 주는지 묻는 거라고.”

밀리안이 뚱하게 말하자 토토가 괜히 줬다는 표정을 지었다.

“괜히 피 보고 눈 돌아가지 말라고 주는 거니 잘 지니고 다니기나 해. 피에 대한 반응이 좀 덜할 테니까.”

“……이것도 둘 다를 위한 건가?”

밀리안이 토토를 힐끗거리고는 피식 웃었다. 왠지 걱정해서 주는 게 티가 나서 웃음이 나왔다. 밀리안이 웃으며 하는 말에 토토가 버럭 하며 말했다.

“무슨 그런 헛소리를. 네가 뭐가 예쁘다고!”

“그렇다고 해두지. ……그럼 난 이만.”

밀리안은 토토가 변명하든 말든 쿡쿡거리더니 한 손을 슬쩍 올리곤 방을 나가 버렸다. 토토는 밀리안이 나간 문 쪽을 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어휴, 내가 미쳤지. 미운 놈 뭐가 귀엽다고 오지랖은.”

그 말과 동시에 토토는 제 발로 귀를 털었다.

* * *

밀리안이 성을 빠져나오자 대기하고 있던 클로드가 밀리안을 향해 말했다.

“정말 이렇게 떠나도 되겠어? 전쟁터로 가면 한동안 수도로는 못 올 텐데.”

“어차피 이미 결심한 일이니 상관없습니다.”

“하여간 고집스럽긴. 도대체 전쟁터엔 왜 못 가서 안달인 건데? 설마 내 걱정돼서 그런 건 아닐 테고.”

“그렇게 믿고 싶다면 그렇게 믿으시면 됩니다.”

밀리안이 무심하게 대꾸하곤 클로드를 빤히 바라보았다. 얼른 가자는 눈치였다. 이에 클로드가 출정을 명했다.

일제히 수도를 빠져나와 전쟁터로 가는 길이었다. 클로드가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이 밝게 웃으며 물었다.

“그나저나 전쟁터에서 돌아오면 네 그 잘난 누나 얼굴 좀 보여줘. 연회에서도 못 보게 했으니 무사히 돌아오면 소개해 줄 거지?”

“눈 뽑힐 각오가 되어 있으면 보여 드리겠습니다.”

“농담도 살벌하긴. 더 보고 싶게.”

클로드가 털털하게 웃자 밀리안이 무표정하게 바라보았다. 서늘한 시선에 클로드가 웃음을 멈췄다.

클로드는 그 모습을 보고 알았다. 그가 제게 누나를 보여줄 생각이 없다는 걸. 혹시라도 정말 보려고 한다면 눈을 뽑으려 할지도 모른다는 걸 말이다.

* * *

평소처럼 일어난 프레아는 편지를 보고 경악했다. 밀리안이 사라졌다. 아니, 가출했다. 아니, 전쟁터로 나가 버렸다. 그것도 제게 아무 말도 없이.

“이게 무슨…….”

프레아는 편지를 다시 한번 읽으며 손을 부들거렸다. 편지는 무척 간단했다. 전쟁터에 가게 되었다는 것과 많이 보고 싶을 테니 편지를 자주 보내라는 내용이었다.

프레아가 다리 힘이 풀려 털썩 주저앉았다. 어쩐지 연극을 보러 가서도 계속 저를 힐끗거리더라니. 설마 그 행동이 모두 멀리 떠나기 전에 저를 담아두려는 것이었나.

프레아는 서운함에 마음이 아렸다. 이제 좀 남매로서 잘 지내려나 보다 했는데, 이렇게 갑자기 사라지는 게 어디 있을까. 프레아는 작별할 기회도 주지 않은 밀리안에게 섭섭했다.

“아가씨!”

때마침 들어온 시에라는 바닥에 주저앉은 채 떨고 있는 프레아를 보고 경악했다. 프레아가 손에 든 편지를 조용히 시에라에게 전했다. 편지를 본 시에라 역시 놀라 프레아를 빤히 바라보았다.

“……이건?”

“아버지도 아실까?”

“그럴 리가요! 아셨으면 아가씨께 당연히 말씀하셨겠죠.”

“그럼 왜…… 왜 이렇게 갑자기 가버린 거야.”

프레아가 허망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밀리안이 전쟁터로 나갔다는 소식은 에드모어 성에 빠르게 퍼졌다. 그 일로 에드모어 성은 발칵 뒤집혔다. 시에라를 통해 편지를 건네받은 진이 잔뜩 노한 얼굴로 소리쳤다.

“기어이 이 자식이!”

“진정해요. 아직 멀리 가지 못했을 테니…….”

“공작님, 황성에서 공문이 왔습니다.”

에밀리가 화가 난 진을 진정시키려는데 마침 랭이 황실 문양이 그려진 공문을 건넸다. 진은 숨을 고른 뒤 서류를 읽었다.

“하…….”

두통이 오려는지 진은 이마에 손을 얹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에밀리 역시 진에게서 공문을 받아 읽고는 덩달아 목덜미를 잡으며 하늘을 바라보았다. 공문의 내용은 이랬다.

[진 에드모어 공작과 에밀리 레이첼 후작은 들으시오.

전일 부로 밀리안 에드모어 레이첼은 황태자인 나, 클로드 반 헤로스의 명을 받아 참전하게 되었음을 알리는 바이오.

비밀리에 꾸린 정예군이라 미리 알리지 못하였으나 시국이 급한 만큼 그대들이 헤아려 주길 바라오.

-클로드 반 헤로스]

“황태자 전하의 명이라면 도로 데려오기도 힘들겠네요.”

에밀리가 중얼거리는 말에 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밀리안에게 완벽하게 뒤통수를 맞고 말았다. 그저 오기라 생각했건만 정말로 전쟁터로 가버릴 줄이야.

게다가 제 주군을 이용하다니. 진은 그것이 아주 악질적인 방법이라 생각했다. 밀리안은 어려서부터 황태자의 친우로서 황성을 자주 오갔다. 그 이유는 장차 헤로스 제국을 이끌 주군을 미리 모시게 하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이놈의 아들내미가 그걸 이런 식으로 이용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때 에밀리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밀리안, 괜찮을까요?”

“이제는 그러기를 바랄 수밖에 없습니다.”

진이 포기한 듯한 어조로 대답했다. 그는 이제 다른 부분이 걱정되었다.

혹시라도 밀리안이 전쟁에서 공을 세워 돌아오기라도 한다면……?

상상하고 싶지 않지만 그거야말로 최악이었다.

“아무래도 대책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레이첼 후작.”

그가 에밀리를 ‘레이첼 후작’이라고 부르자 공적인 이야기라는 걸 눈치챈 그녀가 집사를 내보냈다.

“어떤 대책 말인가요? 혹여 밀리안이 눈치라도 챘어요?”

“그건 아닙니다. 근데 그게…… 참.”

진이 입을 달싹이기만 할 뿐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제 아들이 아무래도 그쪽 딸을 연모하는 것 같다고, 그것도 굉장히 깊은 것 같다고 설명하기 어려웠다. 결정적으로 프레아랑 결혼하기 위해 전쟁터로 나갔다는 걸 말할 수 없었다. 그건 정말 중대한 일이었으니까.

“뭔데 그래요?”

에밀리가 재촉하자 진이 속으로 끙, 하며 난감한 기색을 띠었다.

“아닙니다. 그냥 프레아가 상심했을까 봐 걱정되어 대책이 필요하다고 한 겁니다.”

진은 결국 진실을 말하지 못하고 말을 돌렸다. 그래, 정말로 제 아들이 공을 세워서 올 리가 없다. 분명 힘을 통제하기 어려워 며칠 못 버티고 돌아올 게 뻔했다. 그렇게 스스로를 합리화했다. 아니, 그래야만 했다.

“난 또 뭐라고. 갑자기 후작이라고 해서 놀랐잖아요.”

“미안합니다. 경황이 없어서…….”

진이 에밀리의 핀잔에 사과했다.

안타깝게도 진의 바람과 달리 밀리안은 곧장 수도로 돌아오지 않았다. 돌아오는 것은 승전 소식이 담긴 편지뿐이었다. 그럴수록 진은 피가 바짝바짝 마르는 기분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헤로스 제국의 신하이면서 밀리안이 제발 패하고 오길 바랐다. 물론 패한다고 해도 밀리안이 죽을 리가 없다는 걸 알고 하는 바람이었다. 하지만 에드모어 공작의 바람은 이뤄지지 못했다.

그 이후로도 밀리안은 계속해서 승리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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