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남동생이 내게 반응한다
프레아는 방에서 밀리안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친구를 만난다고 오후에 나갔으니 지금쯤이면 올 터였다. 그녀는 창밖을 내다보며 기웃거렸다.
‘또 나가? 누구 만나는데?’
‘그냥, 시골에서 올라온 귀족이야. 말해도 모를 거야.’
밀리안이 귀찮다는 듯 대꾸했다. 하도 궁금해서 여러 차례 물은 결과 얻어낸 정보였다. 그것 말고는 그의 친구에 관해 아는 게 없었다.
프레아가 밀리안을 기다리는 이유는 하나였다. 밀리안에게도 토토를 소개해 주려고. 에밀리에게도 허락받은 일이라 이제 안심하고 토토에 대해 말할 수 있었다.
진은 성안에 머무는 사용인 모두 에드모어 가문 대대로 함께해 온 집안들이라 믿을 만한 사람들이라고 했다. 진이 그렇게까지 말하니 에밀리도 승낙했다.
그래도 염려되는지 성 밖의 사람들에겐 정령의 ‘정’ 자도 꺼내선 안 된다고 신신당부했다. 에드모어 성에서만큼은 토토가 인형 행세를 하지 않아도 되었다.
처음엔 말하는 인형을 보고 사용인들이 제법 놀라기는 했지만 그때뿐이었다. 다들 언제 그랬냐는 듯이 평소처럼 행동했다. 에드모어 가문이 워낙 특이하여 말하는 인형에는 그리 놀랍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동안 토토가 인형 행세를 하느라 고생했던 것을 떠올리며 프레아는 기뻐서 헤헤거렸다. 토토 역시 내심 좋은 기색을 띠었다. 물건 행세를 하는 게 쉽지 않았으리라.
그때 저 멀리 외출하고 돌아오는 밀리안이 보였다. 프레아는 벌떡 일어나 누가 무어라 할 새도 없이 밖으로 뛰어나갔다. 정작 중요한 토토는 빼먹은 채로 말이다.
밀리안이 막 열린 성문 틈으로 걸어 들어오고 있었다. 프레아가 헐레벌떡 밀리안 쪽으로 내달리며 한 손을 번쩍 들고 흔들었다.
“밀리안, 어서 와!”
“뛰지 마! 넘어지면 누구 좋으라고.”
밀리안이 넘어질 듯 말 듯 달려오는 프레아를 보자 경악하며 덩달아 뛰었다. 그동안 저렇게 에너지 넘칠 때마다 사고 쳤던 것이 떠오른 탓이다.
게다가 이미 성에서 함께 지내며 프레아가 얼마나 덤벙거리는지 몸소 체감한 터라 더 과민 반응했다. 프레아는 밀리안이 당황하든 말든 헤실헤실하며 연신 손을 흔들더니 가까이 온 밀리안을 덥석 껴안았다.
“아, 쫌!”
밀리안은 설마 프레아가 저를 껴안을 줄은 몰라서 깜짝 놀라 소리쳤다. 아무렇지 않게 제 선 안으로 확 들어와 버리는 게 여간 어색한 일이 아니었다. 밀리안의 두 귀가 저도 모르는 사이 새빨개졌다.
프레아는 성안에서 줄곧 밀리안을 기다리고 있던 터라 밀리안이 귀찮아해도 좋아서 방긋거렸다.
“왜 이렇게 늦었어.”
“네가 알 바 아니잖아.”
“그렇게 말하면 섭섭해, 나 계속 밀리안 기다렸단 말야.”
“이거나 받아.”
밀리안이 프레아에게 종이봉투 하나를 무심하게 내밀었다. 그 안에는 큼직한 체리가 담겨 있었다. 체리를 본 프레아의 눈이 반짝반짝해졌다.
“우와 체리다!”
“오다가 보여서 샀을 뿐이야.”
밀리안이 격한 반응을 보이는 프레아를 보며 별거 아니라는 듯이 말했다. 프레아는 그 말이 꼭 변명같이 들렸다.
“고마워. 잘 먹을게.”
“딱히 널 위해 사 온 건 아니니까 그렇게 좋아하지 마.”
“응, 딱히 날 위해 사 온 건 아니지만 내 생각이 나서 샀다는 거지?”
프레아가 요점을 콕 집어 말하자 밀리안이 할 말을 잃고 입을 꾹 다물었다. 스스로도 왜 체리를 사 온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냥 돌아오는 길에 보였는데 무심코 돌아보니 손에 들려 있었다.
밀리안은 프레아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그대로 걸음을 옮겼다. 괜히 그녀에게 말리는 게 싫어서였다. 프레아는 그런 밀리안에게 연신 방긋거리며 체리를 소중히 안은 채 따라갔다.
* * *
밀리안이 씻고 오는 동안 프레아는 먼저 식당으로 갔다. 진과 에밀리가 두런두런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렸다. 두 사람은 프레아가 식당에 막 들어서자 말을 뚝 끊었다.
“일찍 왔구나.”
에밀리가 프레아의 볼에 입을 맞추며 맞이했다. 프레아 역시 에밀리의 볼에 뽀뽀하며 헤헤거렸다.
“밀리안이 왔어요.”
“봤단다.”
“체리도 사 왔어요.”
“체리를?”
에밀리가 뜻밖의 말에 진을 쳐다보았다. 진이 프레아의 말을 듣자 낮게 웃으며 말했다.
“밀리안이 예민하게 굴어도 나름대로 누나를 챙기고 있었나 보구나.”
“역시, 그렇죠?”
프레아가 진의 말을 재차 확인하며 미소 지었다. 제가 생각해도 밀리안이 자길 위해 체리를 사 온 거 같아서였다. 진이 프레아의 물음에 긍정하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를 본 프레아의 두 볼이 발그레해졌다.
남동생의 마음에 들어 다행이었다. 예전 피로연에서 밀리안을 편든 이후 그가 자신에게 좀 관대해진 것 같다. 밀리안에 대해 말하기가 무섭게 그가 가벼운 실내복으로 갈아입고 식당으로 들어왔다.
원탁으로 된 식탁에서 밀리안이 자연스레 빈자리를 찾아 프레아의 옆에 앉았다. 가족들만 소소하게 모여 앉아 먹을 수 있는 적당한 크기의 식탁이었다.
애피타이저부터 시작해서 잇따라 음식이 나왔다. 프레아는 그중에서도 토마토, 파프리카, 라즈베리 같은 붉은 계열의 음식을 쏙쏙 골라 먹었다.
“프레아, 골고루 먹어야지.”
에밀리가 넌지시 꾸중을 하자 프레아가 아차 싶었는지 그 옆에 있는 브로콜리며 감자 같은 것들을 집어 먹었다. 밀리안은 그런 프레아를 빤히 보며 중얼거렸다.
“그냥 붉은색은 다 좋은가 보네.”
“어머, 밀리안도 눈치챘구나. 언제부터인지 붉은색만 찾아서 나도 곤란했단다.”
에밀리가 피식 웃으며 밀리안의 말을 받았다. 이에 밀리안이 한참 생각하는가 싶더니 고개를 끄덕거리며 알만 하다는 표정을 짓곤 입을 뗐다.
“후작님께서도 꽤 곤란하셨겠군요.”
밀리안은 에밀리에게 어머니라고 부르지 않았다. 에밀리는 그걸 알면서도 무어라 하지 않았다. 그저 그를 보며 다정히 웃었다.
“아니야, 나 다른 것도 잘 먹어.”
프레아가 밀리안의 말에 발끈하며 포크에 커다란 감자를 끼워 입에 욱여넣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목이 막히는지 가슴을 쿵쿵 치며 괴로워했다.
밀리안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프레아에게 물잔을 내밀었다. 참 손이 많이 가는 여자애였다. 물을 받아 마신 프레아가 탄성을 지르며 말했다.
“후아, 죽는 줄 알았네.”
“원래부터 이렇게 덤벙거리는 건지 아니면 일부러 이러는 건지.”
밀리안이 프레아의 입가에 묻은 감자 부스러기를 발견하자 저도 모르게 휴지로 닦아내다 말고 멈추었다. 왜 이걸 자신이 닦아주고 있는 걸까. 밀리안이 휴지를 내려놓곤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어쩐지 누나가 아니라 동생이 생긴 기분이었다. 아니, 자신이 보모가 된 것 같았다. 아니, 그것보다 왜 자신이 챙기고 있는지 몰랐다. 설마 이 덜떨어진 애한테 적응이라도 한 걸까.
스스로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하고 연신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더니 접시에 코를 박듯이 고개를 숙인 채 식사에 집중했다. 그냥 프레아를 보지 않기로 마음먹은 것처럼.
* * *
프레아는 밀리안이 체리를 사 온 것에 정신이 팔려 토토에 대해 설명하지 못했다는 걸 다음 날이 되어서야 깨달았다. 뒤늦게 밀리안의 방을 찾아갔지만 이미 그는 외출한 뒤였다.
매일 아침 어디를 그렇게 나가는 건지 몰랐다. 게다가 점심때가 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집에 돌아와 있었다. 분명 창밖을 열심히 염탐하고 있었는데 뒤돌아보면 밀리안은 이미 성안이었다.
설마 성안에 숨겨둔 아지트라도 있는 걸까. 그런 게 있으면 같이 가지. 프레아는 속으로 투덜거리며 브레이크를 기다렸다. 밀리안은 마치 바람처럼 사라졌다가 바람처럼 돌아오곤 했다.
같이 살게 되면 함께 놀 일이 많을 줄 알았는데 그게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밀리안은 프레아가 생각한 것보다 아주 바쁜 사람이었다. 브레이크는 약속된 시간에 맞춰 에드모어 성으로 찾아왔다.
브레이크가 도착하자 집사 랭이 두 사람을 성 지하 쪽으로 안내했다. 멀쩡한 정원을 두고 왜 지하로 가는지는 몰랐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어쩐지 탐험을 떠나는 것 같아 마냥 들뜨기만 했다.
프레아가 콩닥거리는 가슴을 한 채 토토를 꼭 끌어안았다. 지하실의 문을 열자 지하라고는 볼 수 없는 허허벌판이 나왔다. 프레아가 놀라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분명 음습한 곳이 나올 거라 예상했는데 완전 다른 공간이었다. 성 규모와 비슷한 황무지라니, 꼭 마법 같았다. 놀라서 입이 떡 벌어져 있는 프레아를 보며 랭이 친절하게 설명했다.
“에드모어 성과 연결되어 있는 아공간입니다. 도련님께서도 이곳에서 훈련하십니다.”
“밀리안도?”
프레아가 밀리안도 이곳에서 훈련한다는 말에 눈을 빛냈다. 그럼 매일 아침 어디론가 사라지는 게 설명이 되었다.
이곳에 온 거였구나. 프레아는 밀리안에 대해 하나를 더 알았다는 생각에 히죽거렸다. 프레아의 옆에서 아공간을 꼼꼼히 살펴보던 브레이크가 감탄하듯 말했다.
“역시 에드모어군요. 이런 규모의 아공간을 계속 유지하려면 꽤 많은 마석이 필요할 텐데요.”
“에드모어 가문의 주된 수입원이 마석이죠. 이 정도의 마석은 에드모어에선 흔한 물건입니다.”
랭이 우쭐한 목소리로 말했다. 마치 제 주인이 이렇게 대단하다고 자랑하는 것도 같았다. 랭은 에드모어 성에서 가장 오래 일한 집사였다. 진의 뒷모습만 봐도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정도로 눈치 빠른 사람이기도 했다.
그는 적정 거리를 두고 진과 밀리안을 보필했고, 필요 이상으로 다가가는 법이 없었다. 그의 눈은 항상 에드모어에 대한 깊은 경외심을 담고 있었다. 그 뒤로도 랭은 에드모어에 대한 설명을 차분히 이었다.
무엇을 물어봐도 척척 대답해 줄 것 같은 막힘없는 설명에 프레아는 괜히 뿌듯했다. 나중에 에드모어에 대해 궁금한 게 생기면 그에게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럼 훈련이 끝나시면 불러주십시오.”
랭이 자리를 떠나며 지하실의 문을 닫자 언제 그랬냐는 듯이 문이 사라졌다. 프레아는 그것마저도 신기해서 문이 있던 곳을 손으로 휘휘 저었다.
그러기를 한참, 토토가 갑갑한지 프레아의 품에서 빠져나왔다. 어차피 아공간이라면 외부인에게 들킬 염려도 없으니 더욱 자유롭게 움직이는 모양이다. 브레이크가 수업을 시작하려는지 프레아를 향해 부드러이 웃으며 말했다.
“우선 영류를 순환하는 방법에 대해 알려 드리겠습니다.”
브레이크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일전에 보았던 마린이 등장했다. 귀여운 물고기 형태의 하반신을 흔들며 물 흐르듯 프레아의 곁으로 다가왔다. 프레아는 그 모습을 말똥히 보고만 있었다.
“반가워요. 듣던 대로 대단한 영류를 지녔네요.”
“우와.”
프레아는 눈앞에 둥둥 떠 있는 마린이 제게 말을 거는 것을 보며 탄성을 질렀다. 이에 마린이 프레아의 주변을 빙글빙글 돌며 반가움을 표했다. 그때 토토가 프레아의 어깨로 폴짝 뛰어 올라와 둘 사이를 헤집었다.
“저리 가. 내 정령사야.”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는 토토를 보며 마린이 입을 비쭉였다.
“누가 뭐래요? 그것보다 영류 정말 깨끗하다. 그동안 다른 정령들도 많이 따라다녔을 것 같아요.”
“음, 토토 말고는 다른 정령을 본 적은 없어.”
프레아는 마린의 모습이 저와 비슷한 또래 같아 자연스레 말을 놓았다. 마린은 프레아의 말을 듣곤 말도 안 된다는 표정을 지었다.
“에? 그럴 리가? 이렇게 강하게 느껴지는데……. 설마 당신이 일부러 정령들을 막은 거예요?”
“어쩔 수 없잖아. 훈련도 안 하는 애를 무분별하게 계약하도록 내버려 두면 죽으라는 거지.”
마린이 토토를 쏘아보자 토토가 눈을 슬슬 피하며 해명했다. 그 모습을 보니 그 이유만은 아닌 모양이었다. 마린은 그런 토토의 의중을 알겠다는 듯이 브레이크를 향해 말했다.
“누가 오래 산 늙은이 아니랄까 봐, 정령사가 제 건 줄 아나 봐. 시대가 어느 땐데.”
“누가 늙은이야!”
토토가 마린에게 버럭 하자 마린이 두 귀를 막았다.
“아이코, 어르신 화나셨어요?”
“하, 내가 진짜 이런 인형 속에만 안 갇혀 있었어도 넌 그대로 소멸이야.”
“아이 무서워라. 살려주세요, 윈드 샬로만데라 님.”
마린이 은근히 토토를 골려댔다. 말로는 무섭다고 하지만 표정은 하나도 무서워하는 것 같지 않았다. 프레아는 둘이 티격태격하는 모습이 귀여워서 키득거렸다. 말릴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마린과 토토가 계속해서 으르렁거리자 브레이크가 마린을 떼어내며 말렸다.
“싸우려고 온 거 아닙니다.”
“나도 알아. 어르신이 너무 시대착오적인 모습을 보이니까 그렇지.”
마린이 시대를 언급하며 브레이크의 어깨에 앉았다. 프레아가 생각한 것보다 토토의 나이가 훨씬 많은 모양이다. 브레이크가 프레아에게 다가가 말했다.
“아가씨, 처음 윈드 님을 만났던 때가 언제였는지 기억하십니까?”
“날이 무척 쌀쌀했어요. 단풍 구경을 갔다가 숲에서 만났고요.”
프레아가 곰곰이 생각하고 말하자 브레이크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바람의 정령이 제일 활보할 때였군요.”
“그냥 갑자기 바람이 슝, 하고 불더니 갑자기 토토가 말을 했어요.”
프레아가 ‘갑자기’라는 단어에 손짓을 겸하며 힘주어 말했다. 그 말을 들은 브레이크가 인상을 찌푸리며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무의식적으로 언령을 사용하셨나 봅니다. 혹시 무어라 했는지 기억나는 건 없습니까?”
“소용없어. 내가 이미 기억해 내라고 난리를 쳤는데 아예 기억을 못 해.”
토토가 브레이크의 말을 가로막으며 투덜거렸다. 이미 처음 인형 속에 들어왔을 때부터 프레아에게 여러 번 추궁했던 일이었다. 이상하게도 프레아는 계약 당시를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
언령은 영혼에 새기는 명령이라 주인만 알 수 있다. 그래서 프레아가 기억하지 못하면 토토도 기억할 수 없었다. 브레이크가 토토의 말에 얕은 신음을 내뱉었다.
“그럼 조금 어렵게 되었군요. 현재 언령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정령사는 없습니다. 아니, 숨어 있다고 보는 게 맞죠.”
“아니, 왜?”
토토가 황당하다는 듯이 브레이크에게 따져 물었다. 분명 자신이 잠들기 전까지만 해도 언령 연구가 활발했기에 드는 의문이었다. 브레이크가 토토의 물음에 단안경을 추키며 말했다.
“정령 협회에서 모두 숙청했습니다. 연구 자료도 모두 폐기된 지 오래고요.”
“……숙청?”
토토는 귀여운 얼굴을 구기며 말했다. 별로 무서워 보이지는 않았지만 분위기는 꽤 심각했다. 프레아가 ‘숙청’이라는 단어가 낯설어 입으로 우물우물했다.
청으로 끝나는 단어라면 사과청이나 레몬청밖에 생각나는 게 없었다. 과일청을 떠올리니 갑자기 입안에 침이 고였다. 프레아는 수업이 끝나면 꼭 레몬청을 먹어야겠다 다짐했다.
그러는 사이 브레이크가 윈드를 보며 낮은 한숨을 쉬었다. 갑자기 잠적했다는 기록을 보아서 대략 짐작하고는 있었지만 생각보다 그가 오래 잠들어 있었던 모양이다. 그는 현재 정령 협회의 내막을 잘 모르는 것 같았다.
“윈드 님이 깨어 있을 때는 어땠는지 모르지만 현재는 정령을 제 소유물로 여기는 정령사가 대부분입니다. 그걸 가능하게 한 게 언령 연구였죠.”
“하지만 처음 언령 연구를 시작한 건 인간들에게서 정령들을 보호하기 위함이 아니었나? 당시에 힘에 환장한 마법사 놈들 때문에 정령사와 함께 정령들이 희생되는 일이 잦았으니까. 애초에 정령을 보호하려 시작한 일이 그런 일에 쓰이다니, 뭔가 앞뒤가 안 맞는데.”
“그랬었죠. 하지만 지금은 정령을 속박하고 부려먹는 용도로 변질되었습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언령 연구자가 반발하며 협회를 나가려 했죠. 협회의 정령사들은 이를 막으려 그들의 연구 자료를 모두 빼앗고 모함해 죽이기를 서슴지 않았습니다.”
“허어, 세상이 미쳐 돌아가는군. 처음 정령 협회를 만들었던 비넷이 그걸 바란 게 아닐 텐데. 내가 아무래도 너무 오랫동안 잠들어 있었던 모양이야. 그런 곳에 프레아를 보낼 뻔하다니.”
토토가 낮게 혀를 차며 말했다. 자신이 알던 정령 협회는 친정령 집단이었다. 정령을 마음대로 하려는 사람들에게서 정령사와 정령을 보호하기 위해 만든 집단 말이다.
그런데 그런 끔찍한 일이 협회에서 일어나다니. 윈드 샬로만데라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브레이크가 토토의 안색이 좋지 못한 것을 보곤 이해한다는 얼굴로 말했다.
“정령의 수면 시간은 길면 천 년까지도 간다고 들었습니다. 하지만 인간에게 천 년이란 아주 긴 시간이죠.”
“저거 봐, 세상 물정 모르는 어르신 맞지?”
마린이 브레이크 주위를 빙빙 돌며 말했다. 이에 토토가 마린을 노려보기는 했지만 맞는 말이라 무어라 하지 않았다. 어쨌든 지금의 세상은 윈드 샬로만데라가 알던 것과 많이 달라져 있었다.
프레아는 그 모든 상황을 듣고 있자니 머리가 빙빙 돌았다. 어쩐지 홀로 겉돌고 있는 기분이었다. 프레아가 그들을 향해 제가 이해한 바를 이야기했다.
“그러니까, 정령 협회는 나쁜 곳이란 말이지?”
“네, 맞아요! 그러니 협회의 사람을 만나면 일단 피하세요. 그쪽은 워낙 영류가 특별해서 협회가 노릴지도 모르거든요.”
마린이 프레아의 말에 강하게 긍정했다. 프레아는 머릿속으로 ‘정령 협회는 나쁜 곳’을 세 번 읊었다.
* * *
브레이크와의 수업은 간단히 마쳤다. 토토와 교감을 하는 방법부터 시작해 영류라고 하는 것을 순환하는 기초적인 방법에 대해 배웠다. 프레아는 교감할수록 몸의 피로도가 줄어들어 감탄했다.
마치 토토가 피로 회복제가 된 느낌이었다. 조금 아쉬운 점은 영류의 순환이 잘 안 된다는 것이었다. 브레이크의 말로는 너무 오랜 시간 방치되어 정령에 의해서만 순환되다 보니 더욱 더딘 거라고 했다.
조금 힘들더라도 자주 순환을 하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것도 잊지 않고 당부했다. 브레이크와 함께 아공간에서 막 빠져나오는데 마침 밀리안이 맞은편 문을 열고 나왔다. 밀리안이 문을 닫자 문은 조용히 사라졌다.
“네가 왜 여기 있어?”
밀리안이 조금 당황한 기색을 띠며 물었다. 그의 옷에는 어쩐지 검붉은 얼룩이 가득했다. 허리춤에는 검을 차고 있었다. 훈련이라는 게 검술 훈련인 모양이다.
프레아가 반가운 마음에 바짝 다가가려 하자 밀리안이 한 손으로 막으며 말했다. 어쩐지 그의 눈이 전보다도 붉게 빛나는 것 같았다.
“가까이 오지 마. 마수의 피가 잔뜩 묻어서 더러워.”
“아…….”
프레아는 밀리안의 말에 걸음을 멈추었다. 피로연에서 마수를 찢어발겼다고 말했던 것이 생각나서였다. 아무래도 검술 훈련을 마수로 하나 보다.
‘대단하다, 벌써 마수랑 대치할 수 있다니.’
프레아는 보통은 두려워할 법한 일을 들었음에도 전혀 무서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그저 대단하다 여기며 밀리안의 실력에 감탄했다. 밀리안을 물끄러미 보고 있던 토토가 말했다.
“피에 잔뜩 취했군.”
“……!!”
밀리안이 놀란 눈으로 토토를 바라보았다. 인형이 말을 해서 놀란 건지 그의 말에 놀란 건지는 알 수 없지만 평소답지 않게 동요하는 기색이었다. 토토는 밀리안이 놀라든 말든 한 마디를 더 거들었다.
“그렇게 무작정 피를 보는 것 말고 다른 방법을 찾는 게 좋을 거야, 소년. 마수로도 한계는 있으니까.”
토토가 조언하듯 말하자 밀리안이 인상을 팍 썼다. 그러기를 얼마 지나지 않아 밀리안이 조소하며 읊조렸다.
“저건 또 뭔가 했더니, 정령이었군.”
“어? 어떻게 바로 알았어?”
프레아가 놀라 밀리안을 쳐다보았다. 먼저 말해주지 않았는데도 알아챈 것이 신기했다. 밀리안은 뭘 당연한 걸 묻냐는 듯이 담백하게 대답했다.
“어쩐지 너한테서 바람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거든.”
“역시 에드모어야. 감이 좋네.”
토토는 제 존재를 일찍부터 눈치챘다는 대답에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말했다. 토토는 프레아 이외의 사람 모두에게는 다 산 늙은이처럼 오만하게 굴었다. 물론 인형 속에 갇힌 신세라 전혀 위엄 있어 보이지 않는다는 게 함정이지만.
밀리안은 감히 제게 감이 좋네 마네를 운운하는 토토를 보며 피식 웃었다. 그러곤 프레아의 옆에 있던 브레이크를 스윽 쳐다보았다.
“오랜만이네, 레이.”
“오랜만입니다, 도련님.”
브레이크가 밀리안의 안부를 정중히 받으며 인사했다. 아무래도 진뿐만 아니라 밀리안도 브레이크와 아는 사이인 듯했다.
“그럼 나는 이만.”
밀리안이 프레아와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더니 물러나며 말했다. 프레아는 빠르게 퇴장하는 밀리안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어쩐지 그가 보이고 싶지 않은 모습을 들켰다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의 뒷모습이 어쩐지 쓸쓸해 보였다.
* * *
프레아는 약속한 대로 마리아의 티파티에 참석하겠다고 느지막이 편지를 부쳤다. 별로 가고 싶지 않았지만 그래도 마지막 소원을 들어준 셈 쳤다.
티파티 당일이 되자 프레아는 아침부터 치장으로 분주해졌다. 레이첼 가문의 상징, 아이리스를 연상시키는 푸른 계열의 보라색 드레스를 입었다.
화려하게 떨어지는 드레스 라인에는 보석 가루들이 뿌려져 반짝거렸다. 푸른빛과 보랏빛이 오묘하게 섞인 프레아의 눈동자와 아주 잘 어울렸다.
연보라색 머리는 양 갈래로 땋아 둥글게 올려 묶었다. 그 옆에 붉은 아마릴리스 형상의 핀을 꽂아 마무리했다. 아마릴리스는 에드모어 가문을 상징하는 꽃이었다. 특별히 자신이 에드모어가 되었다는 걸 보이기 위해 고른 것이다.
이왕 가기로 한 이상 수틀리면 모임에서 한바탕 난리를 치고 돌아올 계획이었다. 마리아는 주목받는 걸 좋아했지만 프레아는 반대였다. 이목을 끌어 남의 입에 오르는 걸 딱히 좋아하지 않았다. 그래서 화려한 마리아의 옆에서 늘 무난히 묻어가는 쪽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그럴 생각이 없었다. 티파티에 참석한다고 했지 예전처럼 가만히 있겠다고는 하지 않았다. 만약 마리아가 또 저를 못살게 굴거나 무시하는 발언을 한다면 아주 제대로 싸워줄 생각이었다.
“설마 진짜 가게?”
토토가 한껏 치장 중인 프레아의 옆에 와 물었다. 어쩐지 치장이 평소보다 과해서 묻는 말이기도 했다. 이에 프레아가 결연한 얼굴로 말했다.
“당연하지. 완전 박살 내줄 거야.”
“불안한데…….”
토토는 어쩐지 힘이 잔뜩 들어간 프레아를 보며 불안한 기색을 띠었다. 저렇게 의지가 불타올랐을 때마다 큰 사고를 친 전적이 많아서였다.
프레아는 생각보다 욱하는 기질이 있어서 스스로 아니다 싶은 일에 단호해지는 경향이 있었다. 토토가 걱정스러워하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프레아는 잔뜩 호승심에 찬 얼굴을 하고 있었다. 치장을 마치고 성을 나서려는데 토토가 프레아의 품으로 폴짝 뛰어올랐다.
“안 되겠어. 같이 가.”
“안 돼. 인형 들고 가면 또 애냐고 뭐라 할 거란 말야.”
프레아가 조금 부루퉁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왜 자꾸 자신을 애 취급하냐고 반항하는 얼굴이기도 했다. 이에 토토가 프레아의 허리에 대롱대롱 매달리며 늘어졌다.
“불길해서 그래.”
“나도 혼자서 할 수 있어.”
프레아는 토토를 억지로 떼어냈다. 토토는 다시 프레아를 붙잡으려 했지만 이미 힘차게 방문이 닫힌 뒤였다. 토토는 서둘러 창문 쪽으로 달려갔다. 계속 어딘가 불안한 기분이 들었다. 마차를 타고 이동하는 프레아를 보며 토토가 웅얼거렸다.
“사고 칠 것 같은데…….”
* * *
라즐리 성에 도착하자 곧장 티타임이 이루어지고 있는 유리 정원으로 인도되었다. 부러 30분 늦게 도착해서인지 모임 회원들이 저들끼리 한창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었다.
“프레아 레이첼 에드모어 영애께서 오셨습니다.”
집사의 말에 영애들이 이야기하던 것을 멈추고 일제히 프레아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이 중에서 제일 핫한 소식을 지닌 영애이기 때문이었다.
프레아가 모임에 참석한 사람들을 쓱 훑었다. 개중에 처음 보는 영애들이 섞여 있었지만 대부분 기존 멤버였다. 프레아의 시선이 레나에게로 향했다.
레나는 상석에서 제일 떨어진 곳에 조용히 앉아 있었다. 프레아의 눈치가 보이는지 시선을 슬슬 피했다. 프레아는 레나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침착하게 자리를 훑었다.
어디를 앉아야 하나. 늘 마리아의 오른쪽에 앉았지만 오늘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프레아는 마리아의 옆자리가 뻔히 빈 것을 보았으면서 부러 처음 보는 영애의 옆자리에 앉으며 방긋 웃었다. 마리아의 표정이 일시에 굳었다.
“오랜만이야, 다들.”
“왜 이렇게 뜸했어. 보고 싶었잖아.”
이 모임에서 가장 가십거리를 좋아하는 말 많은 슈코 영애가 프레아에게 살갑게 굴었다. 다 알고 있으면서 모른 척하는 게 분명했지만 프레아는 굳이 꼬집어 말하지 않았다.
“새로운 성에 적응하느라 바빴거든. ……그나저나 처음 보네요, 우리.”
프레아가 슈코에게서 제 옆에 앉은 영애에게로 시선을 옮기며 말했다. 슈코와 길게 말하기 싫다는 암묵적인 표현이었다. 슈코 역시 그날 피로연장에 있었다. 밀리안에 대해 마리아가 막말할 때 고개를 끄덕거리며 긍정했던 것도 잊지 않고 눈여겨봤었다.
만약 그날 밀리안이 해명하지 않았으면 슈코 성정상 밀리안에 대한 악질적인 소문을 잔뜩 퍼다 날랐을 게 분명했다. 슈코가 프레아의 의도를 알곤 멋쩍은 얼굴로 눈앞의 셔벗을 떠먹었다.
옆에 앉은 영애는 프레아를 신기한 눈으로 보고 있었다. 그녀는 붉은 머리에 푸른 눈을 하고 있었는데, 또래 여자애들답지 않게 얼굴이 햇빛에 그을어 있었다. 프레아는 그녀가 운동을 좋아하나 보다, 짐작했다.
“반가워요, 에리…….”
“이번에 백작이 된 프레드린 가문의 에리카 영애야.”
영애가 인사를 채 끝내기도 전에 마리아가 선수 쳤다. 자연스럽게 프레아의 시선이 마리아에게로 향했다. 마리아는 미소 짓고 있었는데 한쪽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 있었다. 티 내지는 않았지만 프레아가 제 옆에 앉지 않은 것이 몹시 불쾌한 눈치였다.
에리카는 말이 싹둑 잘렸음에도 아무렇지 않은 듯 프레아를 향해 씨익 웃었다. 이미 그녀가 오기 전부터 이런 식으로 무시당한 탓에 놀랍지도 않았다. 그러다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쩐지 프레아의 표정이 저를 반가워하는 듯했다.
“이번에 백작이 된 가문이라면 혹시 보물섬을 발견했다던……?”
프레아가 눈을 빛내며 에리카에게 물었다. ‘프레드린’이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부터 프레아가 에리카에게 관심을 보이기에 충분했다.
아닌 게 아니라 최근 신문에서 보물섬을 발견한 사람이 있다는 걸 보았기 때문이다. 탐험가는 보물섬에서 발견한 보물 일부를 황실에 바친 대가로 ‘프레드린’이라는 백작위를 받았다고 했다.
신문사는 그가 탐험가라는 것보다 백작위를 받았다는 것에 초점을 맞춰 기사를 실었다. 하지만 프레아의 관심을 끈 것은 백작위가 아니라 탐험가라는 그의 직업이었다.
프레아는 그가 탐험가라는 것에 호기심이 동했다. 한 번도 성 밖으로 자유롭게 돌아다녀 본 적이 없어서 그런가. 탐험가라는 것이 엄청 대단하게 느껴졌다.
그런 대단한 사람의 딸이라니. 기회가 된다면 에리카를 통해 그 백작님을 만나고 싶었다. 이제 모임이라면 지긋지긋해서 다시는 오고 싶지 않았는데, 마지막이라고 생각했던 모임에서 이런 행운을 얻다니. 프레아는 티타임에 오길 정말 잘했다고 생각했다.
“네, 맞아요. 아주 멋진 보물섬이었죠.”
에리카가 기분 나쁜 기색 없이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그 말이 보물섬에 함께 갔다는 것처럼 들려 프레아의 눈빛이 더욱 초롱초롱해졌다.
그렇다면 검게 그은 피부도 그녀의 부모와 함께 여행했기 때문에 그런 걸지도 몰랐다. 프레아가 또랑또랑한 눈으로 에리카에게 말했다.
“보물섬이라니 대단해요. 혹시 영애도 같이 간 건가요?”
“이번에 발견한 보물섬은 아니지만 다른 여행에 자주 따라갔었어요.”
“우와, 정말 대단해요!”
프레아가 에리카의 말에 잔뜩 부러움을 담아 감탄했다. 여행이라니. 그것도 미지의 세계를 탐험하다니. 프레아는 그녀가 무척 대단해 보였다.
“여행을 좋아하세요?”
에리카는 처음으로 제게 관심을 보이는 프레아를 보며 기쁜 얼굴로 물었다. 모임이라고 해서 왔더니 그동안 온통 장신구며 드레스 이야기뿐이라서 지루하던 참이었는데, 보물섬에 관심을 가지는 프레아가 반가웠다.
프레아는 에리카의 말에 세차게 고개를 끄덕거리며 달뜬 목소리로 말했다. 어쩐지 잔뜩 흥분한 상태였다.
“환장하죠!”
“저도 좋아해요.”
에리카가 프레아의 격한 반응에 소리 내어 키득거렸다. 환장한다니. 귀족 영애의 입에서 그런 단어가 나올 줄이야. 게다가 프레아는 이번에 화제가 된 영애인지라 더욱 흥미로웠다. 프레아와 에리카가 보물섬에 대해 한창 이야기하려는데 마리아가 끼어들었다.
“황실에 바쳤다는 보물의 규모가 꽤 대단했나 봐요. 백작위씩이나 받은 걸 보면요.”
“글쎄요, 정확히 뭘 바쳤는지는 저도 잘 몰라요.”
에리카가 조금 떨떠름한 얼굴로 대꾸했다. 어떤 의도로 저리 말하는지 알았기 때문이다. 처음 모임에 참석해 들떴던 것도 잠시, 자신이 이곳에 초대된 이유를 알아챈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이상하게 어떤 대화가 오가도 에리카가 말을 덧붙이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화제가 바뀌었다. 한두 번이면 그런가 보다 하겠지만 레이첼 에드모어가 오기 전에는 줄곧 그런 상태였다.
보물섬에 대해서도 처음부터 말했지만 아무도 반응을 보이지 않았었다. 이제 와 프레아가 관심을 보이니 관심 있는 척 넌지시 대화에 끼어들다니. 속이 빤했다. 에리카가 뜨뜻미지근하게 대꾸하자 마리아가 다시 한번 쾌활하게 말했다.
“하긴 부모님이 하는 일을 다 알기는 어렵죠.”
“네.”
에리카가 짧게 대답하고 프레아를 향해 말했다.
“나중에 저희 성에 한번 놀러 오세요. 아버지가 여행 다니며 그린 지도며 자료들이 많아요.”
“우와, 정말 가도 돼요?”
프레아가 에리카의 초청에 신이 나서 되물었다. 이렇게 먼저 제안해 오다니! 프레아는 벌써부터 프레드린 성에 놀러 갈 생각에 들떴다.
“그럼요.”
에리카가 활짝 웃으며 답했다. 흔쾌히 말하는 에리카의 손을 프레아가 두 손으로 꼭 잡았다. 프레아는 제법 진지한 얼굴로 재차 확인하듯 물었다.
“그 말 무르면 안 돼요. 저 진짜 가요?”
“네, 편하실 때 말씀해 주세요.”
“그럼 다음…….”
프레아가 얼른 약속 날짜를 잡으려는데 옆에서 마리아의 언짢은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하! 이거 차 맛이 왜 이래? 메이! 내가 고작 차 때문에 입맛을 잃어야겠어?!”
“죄, 죄송합니다. 다시 내올게요, 아가씨.”
프레아와 에리카의 화기애애한 모습이 기분 나빴던 걸까. 마리아가 부러 들으라는 듯이 크게 성을 내며 옆에 있는 하녀를 구박했다. 하녀는 아까부터 잘만 마시던 차를 다시 내오라는 말에도 무어라 하지 못했다. 그저 마리아에게 연신 고개를 숙이고는 찻잔을 들고 자리를 떠났다.
그 덕에 분위기가 착 가라앉았다. 프레아도 할 말을 잃었다. 모두가 심기가 불편해진 마리아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마리아는 제게 이목이 쏠리자 더욱 불편한 기색을 드러내며 차 맛을 탓했다.
“하, 정말 이번에 바꾼 차 맛은 좀 괜찮은가 했는데 완전 별로잖아? 퉤퉤.”
연신 죽을상을 짓는 마리아에게 프레아가 딱딱하게 물었다.
“뭐가 불만인데?”
“무슨 소리야? 난 아무렇지 않은데? 과민하긴. 얘, 그러면 피부에 안 좋아.”
마리아가 애써 괜찮은 척하면서도 은근히 프레아를 깎아내렸다. 프레아 역시 그런 마리아의 의도를 알고 인상을 팍 썼다. 마리아는 가만히 있는 사람의 멱살 잡는 소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하고 있었다. 그것도 무척 품위 있는 척하면서.
그녀는 자신이 하는 행동이 품위 없는 행동임을 모르는 것 같았다. 프레아는 기껏 에리카를 만나 신났던 기분이 착 가라앉음을 느꼈다. 더 이상 마리아의 기분에 맞춰줄 생각이 없어 그녀의 속내를 콕 집었다.
“여기 있는 사람 아무한테나 물어봐, 그게 그냥 차 맛을 탓한 건지 아니면 불만 표시인 건지. 과민한 게 누구인데 뒤집어씌워?”
프레아의 정곡을 찌르는 말에 마리아가 인상을 팍 쓰며 바들거렸다. 설마 이렇게 직설적으로 나무랄 줄은 몰랐던 모양이다. 보통은 서로 돌려서 대응하니까. 잠시 뒤 마리아가 못 참겠다는 듯이 소리를 빽 질렀다.
“그래, 다 불만이야! 너 도대체 왜 그러니?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니야? 정신 좀 차려.”
“말조심해.”
연이어 저를 무시하는 발언에 프레아가 얼굴을 딱딱하게 굳히며 경고했다. 하지만 마리아는 프레아가 제게 하는 행동이 참을 수 없었는지 씩씩거렸다.
“말조심? 너야말로 행동 똑바로 해! 오늘 티타임의 주인공은 나야, 저 어디서 온지도 모를 가문의 영애가 아니라.”
마리아가 에리카를 삿대질했다. 프레아는 에리카에게 무례하게 구는 마리아를 쏘아보았다. 불만은 제게 있으면서 애먼 에리카를 저격하는 것이 볼썽사나웠다. 도대체 어디까지 맞춰달라는 건지.
프레아는 제 머리에서 뭔가 뚝 끊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지금이 바로 한바탕 난리 칠 타이밍이라 확신했다. 저쪽에서 언성을 높이니 이쪽에서도 높이는 수밖에. 이젠 어떻게 할 도리가 없었다.
“하! 너 진짜 못돼먹은 애구나?”
프레아가 평소답지 않게 큰소리를 버럭 냈다. 그러면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마리아가 황당하다는 얼굴로 덩달아 일어나며 되물었다.
“무, 뭐?!”
못 들을 말을 들은 것처럼 격양된 어조였다. 이에 옆에 있던 슈코와 벌벌 떨기만 하던 레나를 포함한 모임에 있던 영애들이 둘을 말렸다. 에리카는 흥미로운 얼굴로 가만히 앉아 있었다.
“그, 그만해. 프레아.”
“마리아, 네가 참아.”
에리카는 이 상황이 재밌다는 듯이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귀족이라며 한껏 고고한 척, 겉으로만 웃던 아까보다 이쪽이 더 인간다워 보였다. 뭐, 귀족들도 싸우는 데는 장사 없네. 에리카가 귀족 싸움을 불구경하듯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
마리아는 제 주변에 있는 영애들이 말리는 것에 오히려 힘을 얻어 프레아에게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아주 시원하게 한 소리를 해줄 생각이었다.
“네가 이러고도…… 아악!”
하지만 마리아는 프레아에게 한바탕 훈계하려 다가가다 말고 비명을 내질렀다. 주변에 있던 영애들은 눈이 두 배나 커져 두 사람을 빤히 바라보았다. 에리카 역시 프레아의 행동이 뜻밖이었는지 놀란 얼굴로 쳐다보았다.
“헉!”
“맙소사…….”
모두 프레아가 마리아의 머리채를 잡아서 나온 반응이었다.
“아아아악! 이거 놔!”
“싫은데?”
프레아는 화사하게 웃으며 마리아가 한껏 예쁘게 올려 묶은 머리를 한 손에 움켜쥐고 좌우로 흔들었다. 주변에 있던 영애들은 얕은 신음만 내뱉을 뿐 말리지 못하고 있었다. 프레아가 한 번도 이런 적이 없어 다들 무척 놀란 상태였다.
프레아는 누가 보든 말든 우악스럽게 마리아를 쥐고 흔들었다. 이미 마리아에게 화가 머리끝까지 난 상태였다.
‘진짜 사람이 가만히 있으니까 가마니로 보이나. 시도 때도 없이 훈계질이야!’
속에서 감정이 들끓었다. 그동안의 행동을 참아줬던 것이 폭발하여 이성을 잃은 뒤였다. 이판사판이었다.
“아아악! 이 미친 계집애가!”
“그래, 어디 미친 애한테 제대로 당해봐. 그래야 알지, 미친 애는 건드리면 안 되는 거!”
마리아의 말에 프레아가 얼굴을 순식간에 굳히며 살벌한 목소리로 반박했다. 이에 약이 바짝 오른 마리아가 격하게 손을 휘둘렀다.
“이거 놔아!”
“싫어! 내가 놓고 싶을 때 놓을 거야!”
프레아는 가뿐하게 마리아의 손을 피했다. 키가 작은 마리아는 또래보다 큰 프레아의 머리에 손이 닿지 못해 안달하며 씩씩거렸다. 프레아의 손을 떼어내려 꼬집기도 하고 주먹질을 했지만 놓아주지 않았다.
“지, 집사!”
잠시 뒤 상황이 심각하게 돌아가는 걸 본 슈코가 비명을 질렀다. 곧장 옆에 있던 종을 울리려 손을 뻗는데 프레아가 슈코를 쏘아보았다. 프레아의 눈총을 받은 슈코는 손을 멈추곤 다시 제자리로 돌아갔다. 프레아의 눈이 무척 무서웠기 때문이다.
이내 마리아가 앓는 소리를 내더니 엉엉 울며 잘못했다고 빌기 시작했다. 그래도 놓아주지 않고 쥐고 흔들자 울음소리는 더욱 커졌다. 한참 뒤 프레아가 마리아를 바닥에 패대기쳤다.
“으허헝!”
마리아는 체면도 생각할 새 없이 바닥에 주저앉아 엉엉 울었다. 설마 프레아가 제 머리채를 잡을 줄은 몰라 한껏 충격을 받았다. 이미 머리는 엉망이 된 상태였다. 티파티 역시 엉망이었다.
머리가 욱신거리고 얼얼했다. 얼마나 세게 잡고 흔들었는지 프레아의 손에는 마리아의 머리카락이 한 움큼이나 들려 있었다. 프레아는 그래도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씩씩거리며 말했다.
“너 앞으로 내 눈에 띄지 마. 진짜 보자 보자 하니까 누굴 보자기로 알고 개수작이야.”
“흐흐흑, 저게 진짜 미쳤나 봐아아앙.”
마리아가 프레아의 말에 더욱 서럽게 울었다. 프레아는 그러거나 말거나 짐을 챙겨 들었다. 이제 이 모임은 안녕이었다.
“난 이제 이 모임에서 탈퇴야. 어디 너희들끼리 잘해봐.”
“프레아!”
프레아의 말에 슈코가 기겁하며 소리쳤다. 옆에 있던 다른 영애들도 프레아의 탈퇴 선언에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프레아를 불렀다. 몇 명이 프레아를 쫓아가기도 했지만 프레아는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프레아가 떠나고도 마리아는 울음을 멈추지 못했다. 그녀가 서럽게 울며 프레아를 욕하기 시작했다.
“저런 게 귀족이라고, 흐어어엉!”
마리아의 말에 영애들이 아무런 대답도 못 하고 우물쭈물했다. 누구의 편을 들어야 할지 몰라서였다. 그때 한참 그 상황을 지켜보던 에리카가 갑자기 손뼉을 치며 말했다.
“완전 멋있어……. 나 반한 것 같아.”
“흐흐흑. 저 계집애는 또 뭐라는 거야아아아앙!”
마리아는 에리카의 얼빠진 표정을 보며 자지러지게 울었다. 에리카는 마리아가 무어라 하든 말든 프레아가 사라진 쪽을 바라보며 감탄했다.
프레아는 자신이 여태껏 봐온 귀족 중에서 제일 매력 터지는 사람이었다. 진짜 남자였으면 그대로 사랑 고백을 할 뻔했다. 에리카가 홀린 듯이 일어나며 말했다.
“저도 이 모임 탈퇴요.”
“흐어엉! 다 꺼져 그냥!”
마리아는 에리카의 탈퇴 선언에 그대로 바닥에 드러눕고 소리쳤다. 영애들이 당황해서 마리아를 붙잡아 일으키려 했다. 에리카는 그런 마리아를 보고 피식 웃은 후 그대로 정원을 빠져나왔다.
* * *
“아, 따가워.”
프레아가 마차 안에서 제 손등을 보며 앓는 소리를 했다. 마리아 고것이 얼마나 세게 꼬집었는지 손등이 죄다 상처투성이였다. 울긋불긋한 손등 사이사이 손톱에 긁힌 자국과 피가 고여 있었다.
“그래도 이겼어.”
프레아가 제 상처들을 보며 울상을 짓다 말고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이상한 곳에서 희열을 느끼고 있었다. 프레아는 어쨌든 마리아가 먼저 울었으니 저가 이겼다고 보았다.
게다가 마리아는 평소 제 머리카락이 빠지는 것에 엄청 예민했다. 할아버지가 대머리라서 더 그랬다. 그런 마리아의 머리를 한 움큼이나 뽑아놨으니 완벽한 승리였다. 그렇게 생각하니 손등의 상처가 훈장처럼 느껴졌다.
생각해 보니 그동안 왜 마리아의 말을 다 맞춰주고 지냈을까 싶었다. 이렇게 저를 업신여기고 있었는데 뭐가 예쁘다고 친구라 여겼는지. 프레아는 절대 다시는 마리아와 말을 섞지 않겠다 마음먹으며 눈을 부릅떴다.
“아, 맞다. 에리카 영애.”
프레아는 뒤늦게 에리카 영애에게 작별 인사도 하지 않았단 걸 깨닫고는 망연한 표정을 지었다. 약속 날짜를 잡으려 했는데 마리아가 초를 친 탓에 그대로 나와 버리고 말았다.
잠깐 울상을 짓던 프레아가 고개를 도리질했다. 그래도 언제든지 놀러 가도 좋다고 했으니 기회를 봐서 편지를 하면 그만이다. 그것보다 초면에 웃긴 꼴을 보인 것이 더 민망했다. 부디 자신을 오해하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는데.
프레아가 그렇게 혼자서 구시렁거리는 사이 마차는 에드모어 성에 도착했다. 확실히 수도 안에서 지내니 이동 거리가 무척 짧아서 좋았다.
마차에서 내리기 전 소매로 손등의 상처를 억지로 가렸다. 괜히 부모님이 보고 놀랄까 싶어서였다. 혹시라도 싸운 걸 알게 되면 크게 경을 칠지도 몰랐다. 프레아는 사용인들 몰래 약방에 가서 약을 바를 생각이었다.
프레아는 이렇게 이따금 화를 참지 못하고 막 나갈 때가 있었다. 자주 있는 일은 아니지만 한번 못 참겠다 싶으면 앞뒤 안 가리고 일을 저질렀다.
‘분명 엄마가 알면 귀족이 어쩌고를 논하시겠지만 상관없어. 후련하면 됐지.’
살금살금 사용인들의 눈을 피해 약방으로 향했다. 약방 안에 들어가니 소독약 냄새가 약하게 났다. 프레아가 연고를 찾으려고 이리저리 뒤적거리는데 뒤에서 누군가 말을 걸었다.
“뭐 해?”
“으앗!”
프레아가 놀라 펄쩍 뛰며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밀리안이 있었다. 어쩐지 밀리안의 눈동자가 무척 붉게 빛나고 있었다. 마치 그날 지하실에서 봤을 때처럼.
“깜짝 놀랐잖아, 밀리안.”
“……어디 다쳤어?”
“아, 아니?”
프레아가 제 손등을 감추며 말했다. 그런 프레아에게 밀리안이 한 발짝 다가오며 중얼거렸다.
“이상하네. 너한테서 좋은 냄새가 나서 온 건데.”
“응? 나 오늘 향수 안 뿌렸는데.”
“그런 인위적인 향 말고, 아주 비린 피 냄새 말야.”
피 냄새가 왜 좋은 냄새라는 거야? 프레아는 밀리안의 이해할 수 없는 말에 멍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어쩐지 밀리안의 반응이 이상했다. 눈은 불이 켜진 것처럼 빛났고 표정은 몽롱했다.
프레아는 갑작스러운 밀리안의 태도에 놀라 뒤로 한 발짝 물러섰다. 어쩐지 위험한 분위기였다. 밀리안이 프레아가 뒷걸음질 치는 것을 보고 인상을 썼다.
“누가 보면 내가 잡아먹는 줄 알겠어.”
“그러는 밀리안은 약방에 무슨 일이야?”
“나?”
밀리안이 요사스럽게 웃으며 스스로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어쩐지 잔뜩 취한 사람 같기도 했다. 프레아가 그런 밀리안에게 무어라 하려다 그의 손에서 피가 흐르는 걸 발견해 깜짝 놀라 소리쳤다.
“밀리안, 피 나!”
프레아가 성큼 다가가 피가 철철 흐르는 밀리안의 손을 붙잡았다. 어디에 베이기라도 했는지 손바닥에서 흐르는 피가 손목을 타고 주르륵 흘러내리고 있었다.
프레아의 시선이 밀리안의 반대편 손으로 향했다. 그가 날카로운 단검을 쥐고 있는 탓이었다. 시선을 느낀 밀리안이 손을 쳐냈다.
“건드리지 마.”
“이거 왜 이래? 설마 네가 그런 거야?”
프레아가 잔뜩 인상을 쓰며 밀리안에게 소리쳤다. 딱 보니 칼에 베인 상처였다. 밀리안은 그런 프레아의 말이 들리지 않는지 자조적으로 웃으며 말했다.
“이 정도로 에드모어는 안 죽어.”
“안 죽어도 아프겠지!”
프레아가 인상을 팍 쓰며 지혈을 하려 제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들었다. 하지만 밀리안이 손으로 막았다.
“필요 없어. 어차피 금방 나아.”
“뭐?”
“……이런 내가 저주스러워.”
밀리안은 말을 끝내기가 무섭게 주먹을 꽉 쥐어 피가 더 나오게 했다. 일부러 상처를 벌어지게 하니 피가 세차게 흘렀다. 프레아가 경악한 얼굴로 이를 말렸다. 어쩐지 밀리안의 상태가 이상했다.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프레아를 향해 밀리안이 물었다.
“너도 내가 무서워지겠지?”
“무슨 소리야, 내가 왜 널 무서워해! 그것보다 힘 좀 풀어봐! 피가 자꾸 나오잖아.”
프레아가 안간힘을 쓰며 밀리안의 손을 풀려 했다. 밀리안은 프레아의 단호한 말에 피식 웃었다. 그렇게 말하고 안 무서워하던 사람이 없어서였다.
에드모어 성에 있는 모두가 그랬다. 그리고 그 모두에는 밀리안 자신도 포함되어 있었다. 밀리안은 스스로가 두려웠다.
“……난 내가 무서워.”
밀리안이 그렇게 말하곤 그대로 프레아의 품에 안기듯 쓰러졌다. 마치 바람 빠진 풍선처럼 그렇게 픽 하고.
“……밀리안?”
설마 피를 많이 흘려 기절한 건가 싶어 밀리안을 쥐고 흔들었다. 밀리안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프레아가 놀라서 계속 흔들다 그가 색색거리는 소리에 흔드는 것을 멈추었다. 잠이 든 것 같았다. 프레아는 곧바로 그의 손에서 단검을 빼내고 소독약과 연고를 찾아 움직였다.
“어라?”
약을 발견해 막 치료해 주려 밀리안의 손을 펴는 순간 프레아가 움찔했다.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상처가 아물어 있는 탓이었다. 당황한 프레아는 우선 대충 피를 닦아내며 상처가 정말 아물었는지 확인했다.
아까까지만 해도 피가 흘러나오던 손바닥엔 아무런 흉도 보이지 않았다. 프레아가 놀라 밀리안을 쳐다보는데 밀리안이 흐느끼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흐윽, 엄마.”
‘엄마’라는 단어에 프레아가 밀리안을 빤히 바라보았다. 어느새 밀리안의 뺨 위로 한줄기 눈물이 툭 하고 떨어졌다.
* * *
프레아가 정령술 훈련에 집중하지 못하고 딴생각을 했다. 어제 그렇게 밀리안과 약방에서 만난 뒤, 뒤늦게 하녀가 두 사람을 발견했다. 상처는 없고 피만 흥건한 밀리안의 팔을 보고도 하녀는 놀란 기색 없이 에드모어 공작을 모셔왔다.
약방에 온 진은 잔뜩 놀란 프레아를 다독이며 그대로 밀리안을 안고 가버렸다. 왜 이러는지 물어도 진은 대답해 주지 않았다.
“딴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브레이크가 프레아를 부르며 말했다. 프레아는 아차 하며 다시 수업에 집중했다. 토토와 동화해 바람을 직접 사용하는 연습이었다. 그러기를 얼마 뒤 프레아가 다시 심각한 표정이 되었다.
아무래도 밀리안이 걱정스러웠다. 스스로가 저주스럽고 무섭다는 기분이 어떤 건지 잘 이해되지 않았다. 게다가 마지막에 엄마를 부르며 훌쩍거리던 밀리안이 무척 신경 쓰였다.
“저어, 스승님.”
“네, 아가씨.”
브레이크가 이대론 수업이 안 될 걸 알았는지 한숨 쉬듯 대답했다. 이에 프레아가 우물쭈물하며 물었다.
“혹시 돌아가신 공작부인과도 아는 사이였나요?”
“네, 만난 적이 있습니다. 그건 왜 물으십니까?”
“……어떤 분이셨어요?”
프레아는 잔뜩 긴장했다. 고인에 대해 물어보는 것이라 조심스러웠다. 프레아의 물음에 브레이크가 잠시 생각하는가 싶더니 담백하게 말했다.
“평범한 분이셨습니다.”
“네?”
“너무 평범해서 에드모어와 어울리지 않는 분이셨죠.”
프레아는 입을 달싹거리다 슬며시 다물었다. 너무 평범해서 어울리지 않았다니. 에드모어처럼 혈통이 강한 가문에 평범한 여인이 들어온 것도 신기했지만 그렇다고 어울리지 않았다고 하는 말도 조금 어감이 이상했다.
“혹시 뭔가 듣기라도 하신 겁니까?”
“무얼요?”
“아니면 됐습니다.”
어리둥절한 프레아의 반응에 브레이크가 말을 돌렸다. 프레아는 그가 뭔가 숨기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더는 캐묻지 못했다. 괜히 말했다가 어제 밀리안이 자해한 걸 이야기해야 될까 봐 조심스러웠다.
그런 프레아를 브레이크가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 이후로도 프레아는 수업에 온전히 집중할 수 없었다.
* * *
그날에 대해 프레아는 침묵했다. 사정이 있다고는 느꼈지만 선뜻 물어볼 수 없었다. 밀리안 역시 아무 일이 없던 것처럼 평상시와 같이 행동했다.
아니, 그런 줄 알았지만 알 수 없는 벽이 툭 하고 생긴 기분이었다. 그렇게 한 달이 지날 무렵, 가족 소풍이라는 명목하에 근교 강가로 놀러 가게 되었다. 평상시와 다름없는 하루였다.
“밀리안! 여기 봐봐! 물고기가 있어.”
“당연한 거에 호들갑 떨지 마.”
프레아가 달뜬 목소리로 물고기를 가리켰다. 밀리안은 그걸 보며 귀찮은 기색을 띠고서 돌을 던져 물고기를 내쫓았다. 덩달아 물을 맞은 프레아가 까르르 웃으며 밀리안에게 복수하듯 물을 뿌렸다.
“하지 마.”
“밀리안도 들어와 봐. 엄청 시원해.”
이미 물속에 들어가 물장구를 치고 있는 프레아가 말했다. 밀리안은 그런 프레아를 본체만체했다. 프레아는 밀리안을 다시 한번 끌었다. 그제야 밀리안이 하는 수 없다는 듯이 물속에 들어가더니 재빨리 프레아에게 물을 뿌려댔다.
“너무 멀리 가진 마라.”
진이 정신없이 놀고 있는 두 아이에게 당부했다. 그런 진의 말은 물소리에 의해 프레아와 밀리안에게 닿지 못했다. 진은 들었겠거니 하고 에밀리와 사담을 이었다. 굳이 수도를 벗어나 소풍을 온 목적은 따로 있었기에.
“그래서 알아낸 건 있습니까?”
“예상대로 그날의 사고가 반란군과 관련 있어 보이더군요.”
에밀리가 ‘반란군’을 언급하자 진의 얼굴에 그늘이 졌다. 역시, 그건 단순한 사고가 아니었다. 에드모어 공작가를 견제하기 위해 일으킨 테러 행위였다.
진이 괴로운 표정을 지으며 마른세수를 했다. 사랑하는 아내가 그렇게 비명횡사한 것이 괴롭기만 했다. 그 모습을 보며 에밀리가 차분히 말을 이었다.
“확실하지 않지만 반란군 틈에 정령사가 끼어 있는 것 같아요. 어쩌면 협회도 연관되어 있을 수 있어요.”
“생각보다 조직적으로 움직이고 있군요.”
“그러게요. 어느 틈에.”
에밀리가 눈앞의 찻잔을 휘휘 돌렸다. 그녀의 눈빛은 무척 날카롭고 서늘했다. 에밀리는 협회 이야기만 나오면 예민하게 반응했다. 진이 그런 에밀리에게 물었다.
“폐하께선 알고 계십니까?”
“확실하지 않은 일에 괜한 근심을 더하게 할 순 없죠. 공작께서도 모른 척하세요.”
에밀리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레이첼 가문은 황제의 정보통이다. 모든 것은 레이첼 가문에 있다고 할 정도로 제국과 관련된 정보는 모두 꿰고 있었다.
물론 에밀리가 유능하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에밀리는 확실하지 않은 정보는 절대 황제에게 전하지 않았다. 객관적인 증거가 나오기 전에는 자기 선에서 정보를 분류하고 때에 따라 폐기했다.
그 정도로 세간에 허위 정보가 많았다. 만약 레이첼 가문이 다루는 정보를 모두 황제에게 전했다가는 그가 과로사할 게 뻔했다.
에밀리는 자신이 하는 일이 좋았다. 수집욕이 있어 정보를 완벽히 파헤치고 정리하길 좋아했으니까. 그런 완벽주의적 성격을 이미 알고 있던 진이 못 말린다는 듯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완전히 도려내려면 얼마나 걸릴 것 같습니까?”
“글쎄요, 생각보다 미끼를 물지 않아 뿌리까지 찾아내는 데에는 좀 걸릴 것 같군요.”
“그렇다면 연극이 꽤 길어질 수도 있겠군요.”
“왜요? 이 연극이 재미없나요?”
에밀리가 진을 물끄러미 보며 물었다. 재미없냐고? 글쎄, 이 일은 재미의 차원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일이었다.
사람들의 눈을 가리기 위해 시작한 연극이었다. 자신이 계속해서 미친 듯이 부인의 죽음을 파헤쳤다간 범인이 더욱 꼭꼭 숨어버릴 테니까. 완벽히 속이기 위해서는 아이들에게도 비밀로 할 수밖에 없었다. 철저하게 사랑해서 하는 결혼이어야 했다.
그렇게 아이들을 속이면서까지 이 일을 파헤치기로 한 자신이나, 좋다고 황명을 내린 황제나 결국 이익을 위해 움직일 뿐이었다. 진은 황명에 의해 성사된 이 말도 안 되는 연극이 사실 좀 씁쓸했다.
“그저 아이들에게 미안할 뿐이죠.”
“걱정 말아요. 애들도 크면 이해할 거예요. 어쨌든 황명이잖아요? 그렇다고 반역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에밀리가 자조적으로 웃으며 찻잔을 비웠다. 에밀리 역시 가족이 생겼다며 기뻐하는 프레아를 볼 때마다 죄책감이 밀려왔다. 사건이 해결되면 다시 남이 될 사이였다.
하녀가 조용히 다가와 빈 찻잔에 차를 담았다. 그렇게 한참을 사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문득 하늘에서 투둑투둑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시종들이 곧장 우산을 폈다. 에밀리와 진이 숙소로 이동하려 프레아와 밀리안을 찾았다. 그러나 강가에서 놀고 있어야 할 아이들이 보이지 않았다.
* * *
비가 갑작스럽게 쏟아지기 시작했다. 정신없이 수영하다가 돌아보니 에밀리와 진이 보이지 않았다. 프레아가 당황하자 밀리안이 프레아와 떨어지지 않으려 손을 붙잡았다.
우선 급한 대로 비를 피해야 했다. 둘 다 젖어 있던 터라 이대로 비를 맞고 있다간 감기에 걸리기 십상이었다. 다행히 좀 걸으니 사람이 살지 않는 빈집이 보였다.
“으스스하다.”
안에 들어서자 프레아가 몸을 부르르 떨며 말했다. 빈집인 줄 알았던 곳은 우물집이었다. 지붕에서 간혹 떨어지는 물로 인해 우물에서 음울한 소리가 났다. 빗소리까지 더해지니 그 음향이 무척 기이했다.
하늘에 구멍이라도 뚫렸는지 비가 엄청 쏟아졌다. 프레아는 물놀이를 한 뒤라 더욱 지친 상태였다. 몸이 서늘하고 배도 고팠다. 밀리안이 프레아의 말에 주머니에서 마석 하나를 꺼내 내밀었다. 프레아가 마석을 받자마자 따뜻한 기운이 프레아의 주변에 감돌았다.
“와, 따뜻해.”
프레아가 흐물거리는 목소리를 뱉었다. 헤벌쭉한 프레아를 보며 밀리안이 피식 웃더니 구석 자리에 젖은 손수건을 깔았다. 프레아가 그 모습을 멍하니 응시하자 밀리안이 손수건 위를 툭툭 치며 앉으라고 신호를 보냈다. 프레아는 쭈뼛거리며 밀리안의 옆에 앉았다.
“일단 비가 그치면 다시 돌아가자.”
“밀리안은 안 추워?”
“됐어. 너나 해.”
프레아가 밀리안에게 마석을 내밀자 그는 무심히 대답했다. 분명 추울 텐데. 프레아는 약하게 떨리는 그의 몸을 보곤 그에게 바짝 다가가 어깨동무를 했다.
“뭐 하는 짓이야?”
“이렇게 붙어 있으면 둘 다 따뜻할 거야.”
“찝찝하니까 저리 떨어져. 난 이 정도로 안 죽어.”
밀리안이 프레아의 팔을 쳐내자 프레아가 울상을 지었다. 고집쟁이 같으니라고. 제 호의를 늘 아무렇지 않게 밀어내는 밀리안이 야속했다. 게다가 스스로를 함부로 하는 듯한 태도가 마음에 안 들었다.
“왜 자꾸 안 죽는다는 소릴 입에 달고 사는 거야?”
“사실이니까. 이 정도로는 안 죽어.”
“안 죽어도 추운 건 추운 거지!”
프레아가 버럭 하며 마석을 밀리안에게 던지듯 쥐여주었다. 밀리안이 인상을 팍 쓰자 프레아가 밀리안에게 등을 돌려 앉으며 선언했다.
“그럼 밀리안 혼자 써. 난 추위에 떨다가 콱! 감기에 걸릴 거니까.”
“억지 부리지 마.”
밀리안이 다시 프레아를 돌려세워 마석을 내밀었다. 프레아는 몇 번을 사양하다 밀리안의 손을 덥석 잡았다.
“그럼 손만 잡고 있을 테니까, 너야말로 억지 부리지 말고 같이 써.”
“…….”
밀리안이 물놀이로 쭈글쭈글해진 프레아의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마석을 사이에 두고 손을 맞잡고 있으니 어느새 온몸에 훈훈한 기운이 퍼졌다.
밀리안은 더 이상 프레아를 말릴 수 없다는 걸 깨닫곤 그대로 손을 잡은 채 벽에 기대어 눈을 감았다. 비가 얼른 멈췄으면 좋겠는데 빗소리는 더욱 거세지기만 했다. 프레아도 별말 없이 조용히 벽에 등을 기댔다.
‘하여간 이상한 데서 고집이 센 남동생이라니까.’
물론 속으로는 계속해서 구시렁거리고 있었지만. 한참 빗소리를 듣고 있는데 밀리안이 조심스레 물었다.
“그날 일에 대해 안 물어봐?”
“물어보면 알려줄 거야?”
프레아가 밀리안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밀리안이 먼저 물어볼 줄은 몰라서 얼떨떨했다. 그냥 모른 척 지나갈 줄 알았다. 아닌 게 아니라 한 달 내내 언급조차 하지 않았으니까. 프레아의 질문에 밀리안이 입술을 꾹 다물고 있다 말고 담담히 말했다.
“그 토끼 정령이 말 안 해줬나 보네.”
“토끼 정령이 아니라 토토야.”
“그래, 토토인지 도도인지.”
밀리안이 굳이 이름을 정정하는 프레아를 보며 피식 웃었다. 프레아는 그런 밀리안을 따라 배시시 웃었다. 밀리안의 웃음은 언제 봐도 좋았다. 하지만 그의 웃음은 보기 드물었다. 이왕이면 좀 더 자주 보여줬으면 좋겠는데…….
“전에 내가 힘 조절을 잘 못 한다고 했지.”
“그랬지.”
“그날이 그런 날이었어. 가끔 마수로도 갈증이 채워지지 않을 때가 있어.”
“갈증이 나면 물을 마시면 되잖아.”
프레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밀리안의 상태를 알았다면 하지 않았을 반문이었다. 밀리안은 씁쓸한 얼굴로 설명했다.
“목이 마른 것과는 달라. 난 강한 존재의 피에 반응하거든.”
“아…….”
프레아는 그제야 토토가 에드모어에 대해 피에 반응하는 혈통이라 했던 것을 기억했다. 오러가 검붉은색에 가까울수록 더 면역이 없다는 것까지.
“난 아버지보다도 피에 면역이 없어. 그래서 가끔 참을 수 없이 피를 보고 싶을 때가 있어.”
“그래서 스스로 상처를 낸 거야?”
“그래, 맞아. 사실 내 피가 전혀 도움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참을 수 없거든.”
밀리안이 자조적으로 말했다. 피가 보고 싶어 스스로 찌르다니. 프레아는 어쩐지 밀리안이 안쓰러웠다. 그는 자신의 힘이 무섭다고 했었다. 아마도 그것이 피와 관련 있는 모양이다.
“잠깐, 근데 그날 내 피 냄새가 좋다고 했잖아?”
프레아가 생각났다는 듯이 물었다. 분명 강한 존재의 피에 반응한다고 했는데, 저는 강한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녀의 물음에 밀리안이 프레아를 빤히 바라보다가 시선을 거뒀다.
“그래, 그게 문제야.”
“왜 문제인데?”
“사람의 피에 반응한 건 처음이니까. 한 번도 나보다 강하거나 비등한 사람을 본 적이 없어.”
“그럼 공작님한테도 반응 안 해?”
“아버지는 예외야. 다칠 일도 별로 없으시고.”
밀리안의 말은 결국 프레아가 밀리안과 비등하기 때문에 반응한다는 뜻이다. 어쩐지 그동안 자신을 슬금슬금 피하더니. 이 때문인 모양이다.
왜 특별히 저한테만 반응하는 건지는 이해되지 않았다. 어쩌면 브레이크가 말한 영류와 관련이 있을 지도 모른다고 짐작할 뿐이었다. 제 영류가 다른 사람과 다르다고 했으니까.
“그 반응이란 게 대체 뭔데?”
“글쎄. 마수에게는 항상 죽이고 싶은 충동이 일었지만 사람에게는 느껴본 적 없어서.”
“그럼 내 피를 봤을 때 날 죽이고 싶었어?”
“……그렇다고 하면 어쩔 건데?”
밀리안이 서늘하게 프레아를 바라보았다. 그 모습에 프레아가 침을 꿀꺽 삼켰다. 정말 날 죽이고 싶었을까? 그렇다기엔 단검을 쥐고도 공격할 생각은 없어 보였는데.
오히려 피 냄새를 맡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밀리안의 반응에 한동안 멍하니 있던 프레아가 가벼운 목소리로 말했다. 물론 그 내용은 전혀 가볍지 않았지만.
“죽임당하지 않도록 열심히 단련해야지, 뭐!”
“허어?”
밀리안은 정작 기다린 대답이 너무 담백해서 괴상한 소리를 냈다. 보통은 무섭다고 해야 정상이었다. 아무리 프레아가 저와 비등하다고 해도 결국 공격력 면에서는 밀리안을 이기지 못할 게 뻔했다.
자신은 공격과 방어 모두에 특화되어 있으니까.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이 바보 같은 여자애는 명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퍽 자신감에 찬 얼굴이었다.
“내가 너보다 강해지면 된다는 거 아냐? 스승님이 그랬어, 나 대단한 정령사가 될 거래.”
자신 있게 말하는 프레아를 보며 밀리안은 어이없어 실소를 터뜨렸다.
“말이 되는 소리를 해. 뭘 해도 넌 나한테 안 돼.”
“길고 짧은 건 대봐야 알지.”
프레아가 발끈하며 호기롭게 대꾸했다. 이에 밀리안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정령사가 대단하긴 해도 결국 영류에 따라 천차만별로 달랐다.
게다가 이제 막 훈련을 시작한 프레아가 저를 능가하게 될 리도 없었다. 그렇게 프레아를 황당하게 보는데, 다시 한번 프레아가 자신 있게 말했다.
“그러니 피가 보고 싶으면 나한테 와. 내가 특별히 보여줄게.”
프레아는 진심이었다. 어차피 자주 넘어지는데 까짓것 피 몇 번 보여주는 게 대수인가 싶었다. 일부러 자기를 베고 피를 보는 것보다는 나을 것 같았다.
가끔 건강진단을 위해 피를 뽑는 것과 비슷하다고 여기면 되었다. 물론 죽이고 싶어 한다는 건 좀 무섭지만 자신이 강해지면 그만이라 생각했다.
뭣하면 아버지에게 도망가면 되지 않을까? 하는 태평한 생각도 들었다. 어쨌든 괜히 그런 이유 때문에 밀리안과 거리를 두고 싶지 않았다.
“에드모어에게 그런 소릴 하는 건 너뿐일 거다.”
밀리안이 헛웃음을 내뱉었다. 저를 죽여달라는 거랑 뭐가 다른 건지 모르겠다. 승낙하면 정말로 제게 피를 들이밀 것 같았다. 밀리안은 한숨 쉬듯 말했다.
“걱정 마. 죽이고 싶은 느낌은 아니었어.”
“그럼?”
“글쎄, 잘 모르겠네. 그냥 마셔보고 싶었던 것 같기도.”
밀리안은 그날의 갈증을 떠올렸다. 솔직히 핥고 싶다는 쪽에 더 가까웠다. 어떤 맛인지 궁금했으니까. 그만큼 강렬한 향이었다. 마수에게도 느껴보지 못했던 느낌이었다. 그래서 저도 모르는 사이 약방으로 갔었다.
“그럼 다음에 한번 먹어볼래?”
프레아가 태평하게 말했다. 저도 가끔 피가 나면 지혈한답시고 빨았던 적이 있다. 그런 개념으로 생각하면 오히려 효율이 좋다고 여겼다. 어차피 저를 죽이고 싶은 느낌도 아니라니 거리낌도 없었다. 그편이 스스로에게 상처 주는 것보다 더 나아 보였다.
“장난치지 마. 어차피 무섭다고 도망갈 거면서.”
밀리안이 조금 신경질적으로 대답했다. 프레아는 이게 얼마나 심각한 일인지 알지 못하는 듯했다. 온전히 힘을 다룰 수 있게 되기 전까지 프레아에게 가장 위험한 건 밀리안 자신이었다.
게다가 이 힘을 언제 완벽히 통제할 수 있을지 저도 알지 못했다. 프레아의 피를 본 이후 마수의 피에도 반응하지 않은 지 오래였다.
프레아는 밀리안이 저를 믿어주지 않자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고 보면 무서워한다는 것에 강하게 집착하는 것 같다. 누가 그를 무서워하기라도 한 걸까. 밀리안은 이상하게 힘에 대해서만 방어적이었다.
“왜 자꾸 내가 널 무서워할 거라 생각하는지 모르겠지만 난 그런 걸로 무서워하지 않아.”
“그럼 뭐가 무서운데?”
“음…… 글쎄. 나는 어둡고 조용한 곳이 싫어.”
“싫은 것과 무서운 건 다른 거야.”
“싫으면 무섭기도 하던데…….”
밀리안의 말에 프레아가 작아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를 본 밀리안이 깊어진 눈빛으로 담담히 말했다.
“그건 네가 진짜 무서운 걸 못 봐서 그래. 크면 그런 것도 우스워질걸.”
밀리안의 말은 마치 자신에게는 무서운 게 있다는 것같이 들렸다. 프레아가 궁금한 얼굴로 조심스레 물었다.
“그럼 넌 진짜 무서운 걸 본 적 있어?”
“있어.”
“뭔데?”
“말하기 싫어.”
“뭐야, 나는 말했는데.”
프레아가 투정하듯 말했다. 밀리안이 그런 프레아를 빤히 바라보았다. 프레아의 얼굴에는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제 피에 반응한다고 털어놓았는데도 아무런 타격도 받지 않은 듯했다.
밀리안은 그 모습에 알 수 없는 안심이 들었다. 만약 프레아가 놀라며 무서워했다면 견디지 못했을 것 같았다. 밀리안은 프레아에게 저도 모르게 낮게 읊조렸다.
“난 지금 네 눈빛이 좋아.”
“응?”
“그래서 변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걱정도 많네, 내 동생은. 네가 내 동생인 한 난 절대 안 변해. 밀리안은 내 하나뿐인 동생인걸.”
프레아가 배시시 웃으며 밀리안을 바라보았다. 이에 밀리안이 덩달아 피식 웃었다. 동생이라. 밀리안은 한 번도 프레아를 누나로 여겨본 적이 없었다. 첫 만남부터 인상적이었으니까.
분명 귀찮고 성가신 사람이었는데 언제 이렇게 편안해졌는지 몰랐다. 프레아의 말을 들으니 어쩐지 복잡한 감정이 속에서 휘몰아쳤다. 이게 도대체 어떤 감정인지 알 수 없었다. 그냥 지금 이 순간, 이 말이 하고 싶다는 생각에 입을 뗐다.
“미안하지만 난 널 누나로 본 적 없어.”
밀리안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프레아의 두 눈이 커졌다.
“그게 무슨…….”
“프레아 아가씨! 밀리안 도련님!”
“이제야 왔군.”
프레아가 놀라서 그게 무슨 말이냐고 물으려는 순간, 바깥이 소란스러워졌다. 밀리안은 저를 부르는 소리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프레아는 일어나지 않고 망연히 밀리안을 올려다보았다.
어느새 우물집까지 온 하녀가 여기 계셨냐며 걱정스레 물었다. 하지만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혼자만 가족이라 여겼구나. 프레아는 밀리안의 마지막 말에 울고 싶었다.
* * *
“아야.”
프레아가 꽃꽂이를 하다 가시에 찔려 신음했다. 아이 같은 모습은 사라지고 그녀는 어느새 훌쩍 자랐다. 키도 크고 이목구비 또한 또렷해져 아리따운 여인이 되었다.
프레아는 연보라색 머리카락을 곱게 하나로 땋아 내린 채 열심히 꽃꽂이에 여념이 없었다. 그녀가 에드모어가 된 지 8년째였다.
“프레아.”
그때 기사단 제복을 빼입은 밀리안이 프레아를 불렀다. 프레아가 밀리안의 목소리에 반가운 얼굴로 뒤를 돌아보았다. 그는 오늘의 주인공이었다. 다름 아닌 밀리안의 입단식이 있는 날이기 때문이다.
저보다 작았을 때 만났던 밀리안은 어느새 저와 엇비슷하게 자라 있었다. 프레아가 키가 크지 않았다면 밀리안을 꽤나 올려다보아야 했을지도 몰랐다.
물론 아직까진 힐을 신게 되면 비슷했다. 프레아는 또래 여인들보다도 키가 커서 밀리안과 견줄 수 있었다. 하지만 프레아는 알았다. 조금만 지나면 밀리안이 저보다 훌쩍 커질 거란 걸.
“피가 나네.”
밀리안이 가시에 찔려 핏방울이 살짝 맺힌 손가락 쪽으로 시선을 옮기며 말했다. 프레아는 밀리안에게 손가락을 내밀었다.
“먹을래?”
밀리안이 프레아를 빤히 바라보았다. 지난 8년간 밀리안은 힘을 통제하려 부단히 노력했다. 그 결과 이젠 피를 봐도 쉽게 흥분하지 않았다.
가끔 참을 수 없는 날도 있었는데 그때마다 프레아가 피를 내어 진정시켰다. 밀리안이 힘을 통제하기 시작하니 이런 도발도 가능해졌다.
프레아가 손가락을 흔들며 배시시 웃었다. 밀리안이 그 모습을 어이없다는 듯이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 밀리안의 눈빛이 붉게 빛났지만 전혀 무서운 기색은 없었다.
프레아도 어릴 적 프레아가 아니었다. 지금은 드러내 놓고 정령사로 활동하며 정령 협회와 척을 질 정도로 강해졌다. 그래서 더 도발적으로 밀리안을 골리고 있었다.
프레아의 귓바퀴에 은색 피어싱이 반짝거렸다. 결국 토토를 봉인했던 언령을 알아내지 못한 프레아는 성인이 돼서도 인형을 들고 다닐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성인이다 보니 애착 인형을 들고 다니는 건 사실상 불가능했다. 그래서 생각해 낸 방법이 새로운 언령을 덧씌우는 것이었다. 프레아는 토끼 인형에 봉인된 토토를 피어싱으로 옮기는 데 성공했다.
순전히 프레아가 엄청난 재능을 지니고 있었기에 가능했던 방법이었다. 시험 삼아 해본 것이 성공하자 브레이크가 무척 놀라워했다. 이론으로만 가능하다고 생각했던 것이 현실이 되었으니까.
이제는 토토를 부르기만 해도 마린처럼 제 형상을 온전히 드러낼 수 있게 되었다. 더 이상 사물에 갇혀 있지 않고 피어싱을 매개로 하여 어느 정도 자유롭게 지낼 수 있게 된 셈이다.
물론 첫 언령을 생각해 내지 못해 사물에 얽매여 있는 건 매한가지였지만. 밀리안이 프레아의 손을 움켜잡고 핏방울이 맺힌 손가락을 가만히 핥았다.
프레아는 그런 밀리안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튕기는 것 같더니 잘만 받아먹는 밀리안이었다. 정복을 입은 그는 무척 근사했다. 어릴 적 앳된 모습은 이미 사라졌다. 밀리안이 손가락을 핥다 말고 프레아에게 시선을 맞추었다.
“왜?”
프레아가 그런 밀리안에게 의아한 얼굴로 묻자 밀리안이 손가락을 살짝 깨물었다.
“어쩐지 긴장감이 없어 보여서. 좀 기분이 그러네.”
“긴장할 게 뭐 있어. 남동생한테 맛있는 거 준다 생각하고 있어.”
프레아가 별일 아니라는 얼굴로 웃으며 말했다. 그러자 밀리안이 인상을 팍 쓰며 낮게 읊조렸다.
“그건 그것대로 짜증 나는걸.”
밀리안이 프레아의 손을 내려놓았다. 기분이 좀 상한 것 같았다. 너무 놀렸나 싶어 프레아가 웃었다. 이에 밀리안이 재킷 안주머니에서 상자 하나를 꺼내 내밀었다.
“선물이야.”
“음? 오늘은 내가 선물을 줘야 하는 날이잖아.”
“이미 받았잖아.”
밀리안이 손가락 쪽을 눈짓했다. 프레아는 용납할 수 없다는 어투로 소리쳤다.
“싫어, 나도 선물 줄 거야.”
피는 피고 선물은 선물이다. 프레아는 이미 밀리안에게 줄 선물을 사둔 터라 더욱 완강히 행동했다. 그 모습을 본 밀리안이 낮게 웃으며 상자를 열었다.
상자에는 레드 다이아몬드가 박힌 머리 장식이 담겨 있었다. 정교하게 세공된 다이아몬드가 붉은빛을 발하며 시선을 끌었다.
아마릴리스 형상으로 세공된 레드 다이아몬드였다. 줄기와 잎사귀는 금으로 장식되어 있었고, 백색 다이아몬드가 꽃술 모양으로 박혀 있었다. 한눈에 봐도 장인이 혼을 담아낸 것 같았다.
“우와.”
“하나밖에 없는 귀한 거야.”
“그런 걸 나한테 줘도 돼?”
“너니까 주는 거야.”
밀리안이 사르르 눈웃음 지었다. 프레아는 영롱한 빛을 띠는 머리 장식을 홀린 듯 바라보았다. 그녀가 보기에도 무척 예쁜 머리 장식이었다.
밀리안이 프레아에게 한 걸음 가까이 다가가 머리 장식을 끼웠다. 뒤를 돌라고 하면 될 텐데 굳이 불편하게 안은 듯한 자세로 끼우는 밀리안을 프레아가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렇게 보지 마.”
밀리안이 시선을 프레아에게 맞추며 말했다. 그런 밀리안을 향해 프레아가 배시시 웃으며 입을 뗐다.
“기사단장이 된 거 축하해.”
“형식적인 것뿐이야.”
밀리안이 대수롭지 않다는 목소리로 대꾸했다. 프레아는 그런 밀리안에게 달뜬 목소리로 말했다. 제 남동생이 너무 자랑스럽다는 듯이.
“그래도 황태자 전하께 가장 신임받는 신하가 된 거잖아. 장차 헤로스 제국을 다스릴 분과 나란히 서게 될 텐데. 정말 대단해.”
“설마…… 황태자한테 관심 있어?”
어쩐지 밀리안이 딱딱한 어조로 물었다. 분명 밀리안을 칭찬했는데 갑자기 황태자 이야기로 빠지는 것이 이상했다. 프레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응?”
“관심 갖지 마. 당장 그만두고 싶어지니까.”
“……오늘 입단인데?”
프레아가 떨떠름한 얼굴로 물었다. 입단하자마자 그만두고 싶다니. 변덕도 변덕 나름이었다. 이에 밀리안이 으르렁거리듯 선언했다.
“안 되겠어. 오늘 입단식에 오지 마.”
“왜!”
“올 거면 눈 감고 와.”
“뭐어?”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리는 밀리안을 보며 프레아가 인상을 팍 썼다. 아무리 저를 누나로 안 본다지만 입단식에도 못 오게 하려 하다니.
내심 섭섭했지만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다. 또 누나로 생각한 적 없다는 말을 듣게 될까 봐. 프레아가 생각보다 잠잠하자 밀리안이 빤히 보더니 한결 누그러진 목소리로 말했다.
“장난이야. 네가 안 오면 머리 장식을 준 의미가 없는걸.”
“응? 의미 있는 거야?”
“글쎄.”
프레아의 물음에 밀리안의 눈매가 부드러이 접혔다.
“늦지 않게 와.”
그렇게 말하곤 밀리안은 입단 준비를 하러 성을 나갔다. 밀리안이 방에서 나가자 토토가 갑자기 등장하며 혀를 끌끌 찼다. 토끼 인형의 모습이었던 예전과 달리 아주 커다란 회색 늑대 형상을 하고 있었다. 토토가 금색 눈을 번뜩이며 말했다.
“몹쓸 것한테 잡혀 버렸어. 처음부터 마음에 안 든다 했지만 제대로 미친 게야.”
“밀리안 욕하지 마.”
프레아가 토토를 눈으로 흘겼다. 토토는 저를 나무라는 프레아를 보며 심술궂게 말했다.
“남이 주는 거 함부로 받지 마.”
“남이 아니라 내 남동생이야.”
“흥! 어디 그 말 그대로 그 녀석한테 해봐. 뭐라 하는지.”
“……어차피 기대 안 해. 나만 가족으로 생각하는 거 알아.”
프레아는 시무룩해져 밀리안이 달아준 머리 장식을 가만히 매만졌다. 토토는 그런 프레아를 보며 인상을 팍 썼다. 그 머리 장식이 어떤 의미인지 잘 알았기 때문이다. 토토는 에드모어 혈통이 존재했을 때부터 살아왔으니까.
“속 터지는군. 하여튼 그 머리 장식 끼고 갈 생각하지 마. 난리가 날 테니까.”
“싫어. 밀리안이 처음으로 준 선물이란 말야. 끼고 갈 거야.”
프레아가 듣기 싫다는 듯이 영류를 이용해 토토를 강제로 흩뜨려 버렸다. 토토는 당연히 채 말을 끝내지 못했다. 피어싱을 강하게 진동시키며 반항했지만 프레아는 제 영류로 손쉽게 토토가 나오는 것을 막아버렸다.
* * *
모든 귀족 영식은 18살이 되면 정식 기사로 임명된다. 실력에 따라 황제가 소수의 인원을 기사단장으로 임명하면 그를 추종하는 귀족들이 그의 밑으로 들어가 새로이 기사단을 꾸린다.
대체로 기사단은 계보를 따르는데 밀리안은 당연 에드모어 공작의 계보를 이어 불사조 기사단에 소속될 예정이었다. 그렇다고 밀리안이 가문의 힘으로 기사단장에 임명된 건 아니었다. 같은 가문 출신이라고 동일한 계보를 이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으니까.
기사단은 철저한 능력주의 집단이었다. 가문이 아예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가문의 명성에 비해 능력이 낮으면 기사단장으로 임명되지 않고 일반 기사로 시작했다. 평생 단장직에 오르지 못하고 그에 준하는 명예직을 받게 되는 경우가 바로 그 예이다.
밀리안의 실력이라면 프레아가 제일 잘 알았다. 자신이 정령술을 연습할 때 자주 도움을 주었으니까. 프레아는 밀리안이 입단과 더불어 기사단장에 임명된 것이 자랑스러웠다.
입단식은 18세를 맞이한 기사들이 기사가 되었음을 공포하는 날이다. 귀족뿐 아니라 실력 있는 평민들도 18세 이상이라면 기사가 될 수 있어 규모가 큰 행사였다.
행렬은 광장에서부터 시작하여 황궁으로 입궐하는 것으로 끝났다. 밀리안은 그중에서도 기사단장으로서 새롭게 조직된 불사조 기사단 기수의 맨 앞에서 행진을 주도할 예정이었다.
프레아가 들뜬 얼굴로 행진이 잘 보이는 곳에 자리를 잡았다. 옆에서 시에라가 양산으로 햇살을 가려주었다. 프레아는 베일로 얼굴의 반을 가린 채 밀리안이 준 머리 장식을 꽂고 있었다.
진과 에밀리는 황궁에 출근해야 해서 후에 연회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다. 프레아는 밀리안에게 줄 꽃다발과 커프스 단추가 담긴 상자를 단단히 챙겼다.
몇 개월 전부터 주문 제작한 커프스 단추였다. 레이첼 가문과 에드모어 가문을 상징하는 문양을 세공했다. 프레아가 연신 커프스 단추가 담긴 상자를 만지작거리며 확인했다.
“나 이거 보려고 수도까지 왔잖아.”
그때 옆에 있던 여인들의 수군거리는 소리가 프레아의 귀에 들어왔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입단식을 보려고 수도까지 온 모양이다. 옷차림을 보아하니 귀족인 것 같았다.
“이럴 때 아니면 수도의 기사님들을 언제 단체로 보겠어.”
“맞아, 하아……. 나도 수도의 기사님에게 맹세 한 번 받아봤으면.”
“아서라. 누가 너한테 맹세를 하겠니? 정말 지켜주고 싶은 영애한테만 하는 거라잖아.”
“얘는, 상상도 못 하니?”
맹세에 대해 옥신각신하는 영애들을 프레아가 빤히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밀리안은 누구한테 맹세하는지 몰랐다. 아예 그쪽으로 이야기를 해본 적이 없었다.
프레아도 입단식 전통에 대해 건너 들었을 뿐 자세히 아는 바가 없었다. 자신이 아는 것은 그 전통의 유래가 무척 로맨틱하다는 점이었다.
보통 궁에 들어가기 전, 기사들은 저마다 약속된 영애에게 다가가 맹세했다. 원래는 과거 어떤 귀족이 입단식에서 사랑하는 여인에게 청혼했고, 그것이 크게 화제가 되었다고 했다.
당시 그것을 본 영애들이 부러워했고, 우후죽순으로 따라 하기 시작하며 정착되었다고 들었다. 지금은 기사가 된 연인에게 미리 해달라 하거나 연인이 없는 경우에는 가족들이 대신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프레아는 어쩐지 밀리안이 관례를 그대로 따라 하지 않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런 전통이 있다는 걸 모를 가능성도 다분했다. 워낙 그런 쪽에는 무딘 아이였으니까.
게다가 알더라도 할 사람이 없으리라. 도통 그가 여자를 만나는 걸 본 적이 없었다. 데이트는 고사하고 대부분을 성에서 보냈다. 그가 하는 일이라곤 에드모어의 일을 인계받거나 저와 시간을 보내는 게 다였다. 간혹 친구를 만난다며 나가기는 했지만 늦지 않게 들어왔다.
프레아 역시 성인이 되면서 가업을 잇기 위해 후계자 수업을 병행하고 있었다. 에드모어와 레이첼은 결혼하긴 했지만 두 가문이 병합되는 일은 없었다. 그러기엔 너무 영향력 있는 집안들이라서.
“아가씨, 시작해요.”
옆에 있던 시에라가 소곤거렸다.
커다란 나팔 소리와 함께 밀리안이 선두로 행진을 시작했다. 옆에서 영애들의 꺅꺅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저 멀리 밀리안이 무심한 얼굴로 행진을 잇다가 프레아를 발견하곤 예쁘게 웃었다. 프레아가 덩달아 흐물거리며 미소 짓고 있는데 뒤에 있던 영애가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봤어, 봤어?”
“어, 봤어. 지금 날 보고 웃었잖아.”
“무슨 소리야, 날 보고 웃은 거거든.”
아무래도 프레아를 보고 웃은 걸 절 보고 웃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영애들이 서로 왈가왈부하며 저에게 웃었다며 싸웠다. 프레아는 그러거나 말거나 밀리안의 멋진 모습을 놓치지 않으려 눈으로 좇았다. 그의 은발이 햇빛을 받아 눈이 부셨다.
어느새 밀리안이 프레아가 있는 궁 입구 쪽에 다다랐다. 궁 입구에 멈추자 기사들이 저마다 정해진 영애에게 한쪽 무릎을 꿇고 손등에 맹세의 입맞춤을 했다. 프레아의 예상대로 밀리안은 우두커니 서서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아니, 그런 줄 알았다.
“야야, 이쪽으로 오고 있어!”
“정말 나한테 맹세하려나 봐!”
뒤에 있던 영애들이 호들갑을 떨었다. 프레아는 당황스러워서 밀리안을 빤히 바라보았다. 밀리안은 이런 거 안 좋아할 거라 생각해 말도 꺼내지 않았었는데.
보통 가족들에게 맹세할 경우 전날에 알려주었다. 그러나 프레아는 밀리안에게 언질을 받은 바가 없었다. 밀리안이 프레아 앞에 우뚝 섰다.
“머리 장식 잘하고 왔네.”
밀리안이 프레아의 머리에 꽂힌 머리 장식을 슬쩍 보며 말했다. 밀리안이 프레아에게 말을 걸자 뒤에 있던 영애들이 아쉬운 탄성을 내질렀다.
프레아가 밀리안을 멍하니 보고 있는데 그가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의 어깨에 둘려 있던 망토가 바닥에 끌렸다. 밀리안이 손을 내밀며 말했다.
“손 줘야지, 프레아.”
“아, 맞다.”
프레아가 그제야 밀리안의 손 위에 제 손을 포갰다. 하여간 놀라게 하는 데 일가견이 있는 남동생이다. 이런 건 제때제때 말해주지. 프레아의 손이 포개지자 밀리안이 가만히 붙잡아 제 입가로 가져갔다.
프레아는 처음 보는 밀리안의 정중한 태도에 기분이 오묘했다. 뭔가 울렁거리고 가슴이 콩닥거리는 게 어지간히 놀란 모양이다. 밀리안의 부드러운 입술이 손등에 맞닿았다. 짧게 닿았다 떨어질 줄 알았던 입술은 아주 오랜 시간 떨어질 줄 몰랐다.
“저어, 밀리안? 원래 이렇게 하는 거야?”
프레아가 의문 가득한 얼굴로 고개를 숙여 밀리안의 귓가에 속삭였다. 이에 밀리안이 입술을 떼며 말했다.
“응, 원래 이런 거야.”
밀리안이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프레아는 어쩐지 그런 밀리안을 쳐다보고 있기 민망해 손을 뺐다. 그 순간 밀리안이 제가 두르고 있던 망토를 풀더니 프레아에게 둘렀다.
“헉…….”
순간 주변에서 짧은 탄성이 들려왔다. 망토를 둘러주는 걸 목격한 기사들이 저들끼리 수군거렸다. 프레아는 영문을 몰라 밀리안을 보았다.
뭐지? 망토는 왜 둘러주는 거지? 이것도 맹세의 일종인가?
프레아가 아는 건 손등의 키스가 다였다. 망토를 둘러주는 것까지 맹세에 포함된다는 건 지금 알게 된 사실이었다. 어쩐지 어리숙하게 반응한 것이 미안했다. 미리 알았다면 어떻게 하는지 찾아보았을 텐데. 갑작스럽게 당한 탓에 어리바리하게 반응했다.
“이 모든 영광을 당신에게.”
밀리안이 짧게 말하고는 프레아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프레아가 넋 나간 얼굴로 밀리안을 바라보았다. 어쩐지 이마가 화끈거렸다. 밀리안이 얼빠진 표정을 짓고 있는 프레아에게 부드러이 미소 짓곤 다시 행렬에 합류했다.
프레아가 굳은 채로 멍하니 있는데 뒤에 있던 영애들이 또 수군거렸다.
“망토를 주는 건 그거 아냐?”
“그거지. ……부러워.”
“그게 뭔데요?”
프레아가 수군거리는 영애들에게 뒤돌아 물었다. 갑자기 프레아가 말을 걸 줄은 몰랐던 영애들이 우물쭈물했다. 그중 한 영애가 먼저 말했다.
“기사단장의 망토는 황제가 직접 임명 전에 주는 선물이에요.”
“그건 알고 있어요.”
프레아가 여전히 멍한 얼굴로 말했다. 물론 그런 건 자신도 알고 있었다. 단지, 망토를 건넨 데에 무슨 의미가 담겨 있는 건지가 궁금했다. 주변 반응이 무척 이상했으니까. 영애는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이제 영애는 다른 기사들에게 맹세를 받지 못할 거예요. 저 기사님보다 강하지 않은 이상.”
“네?”
“망토를 받은 여인은 그것을 준 기사 휘하에 있는 기사들이 건드릴 수 없어요.”
“맞아요, 그건 상사와 결투하겠다는 거랑 같거든요.”
“…….”
프레아가 영애들의 말을 듣고 할 말을 잃었다. 그런 의미 있는 행동을 밀리안이 왜 했는지 모르겠다. 프레아는 밀리안의 의중을 알 수 없어 인상을 썼다. 좀처럼 속내를 알 수 없는 아이였다. 그 모습을 본 영애가 조금 부럽다는 어조로 이야기했다.
“한 마디로 이 여잔 내 거라고 공표한 거예요.”
* * *
프레아는 연회에 가서도 넋을 잃은 채였다. 영애들이 해주었던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밀리안 이 나쁜 녀석. 누나 혼삿길을 제대로 막으려고 그런 짓을 해?’
어느새 밀리안이 저를 놀린다고 생각한 프레아가 눈앞의 얼음물을 벌컥벌컥 마셨다. 이미 망토는 벗어 시에라에게 맡긴 뒤였다.
영애들은 그 이후에도 재잘거리며 별로 알고 싶지 않은 정보까지 프레아에게 털어놓았다. 결국 망토의 의미는 그거였다. 망토를 둘러준 기사와 싸워 이길 자신이 없으면 건드리지 말라는 것.
“저어, 아가씨?”
옆에 있던 시에라가 조심스러운 얼굴로 불렀다. 레이첼 성에 있을 적부터 저를 담당했던 시녀였다. 프레아가 시에라를 빤히 바라보았다.
“왜?”
“정말 그 영애들의 말이 사실일까요?”
“모르지. 밀리안에게 확인해 볼 수밖에.”
프레아가 지끈거리는 머리를 매만졌다. 그것을 본 시에라가 조심스럽게 다시 질문했다.
“만약 정말로 아가씨께 고백이라도 한 거면 어떻게 하실 거예요?”
“말도 안 돼. 아무리 피가 안 섞였어도 우린 남매잖아. 그것도 8년이나 같이 살았어. 앞으로도 그럴 거고.”
“그래도 피가 안 섞인 건 사실이잖아요.”
시에라가 말을 흐렸다. 이에 프레아가 살짝 눈치를 주며 눈을 흘겼다. 맹세는 가족에게도 하는 거니 어쩌면 이것도 ‘내 누나와 만나려면 나부터 쓰러뜨려라’ 하는 경고일지도 몰랐다.
아니, 그렇게 생각하려 애썼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불안한 마음이 물밀 듯 밀려왔다. 저 멀리 진과 에밀리가 프레아를 향해 손짓했다. 프레아는 밝은 얼굴을 하곤 두 사람에게 다가갔다.
“프레아, 그거 들었니?”
에밀리가 프레아를 보자마자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었다는 듯이 말했다. 프레아는 무슨 재미난 이야기라도 있나 해서 밝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어떤 거요, 어머니?”
“밀리안이 어떤 아가씨에게 고백했다는구나. 혹시 누군지 봤니? 다들 말이 달라서 누구 말을 믿어야 할지 모르겠다.”
에밀리가 기쁜 기색을 띠며 이야기했다. 그 말은 들은 프레아가 놀라 주춤했다.
“네?”
“나 참, 그 녀석이 그렇게 대담한지 몰랐구나. 언질이라도 해줄 것이지. 아들의 연애사를 동료에게 건너 들을 줄이야.”
진도 덩달아 대견하다는 듯이 말을 보탰다. 두 사람 모두 밀리안의 돌발 행동을 기꺼워하고 있었다. 밀리안이 처음으로 여인에게 관심을 보였기 때문이다. 두 사람을 보며 프레아는 웃을 수 없었다. 그 망토를 받은 사람이 다름 아닌 자신이라서.
“사실 그 망토 제가 받았어요.”
프레아가 어색한 얼굴로 이실직고했다. 말하면서도 민망해 고개를 들 수 없었다.
“뭐?”
에밀리와 진이 동시에 놀란 얼굴로 프레아를 바라보았다. 설마 망토를 받은 사람이 프레아일 거라고는 생각 못 한 모양이다. 프레아가 멋쩍은 표정을 지으며 뒷머리를 만졌다. 에밀리가 당황해하며 말했다.
“그게 무슨 말이야, 밀리안이 왜 네게…….”
“잠깐, 프레아. 그 머리 장식은 누가……?”
이때 진이 에밀리의 말을 끊으며 다급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가 가리킨 것은 오늘 아침에 밀리안이 준 머리 장식이었다. 프레아는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아, 밀리안이 오늘 아침에 줬어요. 예쁘죠?”
“…….”
순식간에 진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에밀리는 그런 진을 보며 왜 그러냐고 물었다. 프레아 역시 갑작스러운 진의 반응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버지?”
“하아, 이 녀석을 그냥…….”
“왜요? 뭔데요?”
프레아는 진의 반응이 이상하여 재촉했다. 진은 그런 프레아를 흔들리는 눈동자로 바라보았다. 입을 열어 무언가 말하려다 다물었다. 입을 달싹이기만 하고 말하지 않는 진이 답답했다. 진이 얼굴을 잔뜩 구기며 혼자서 무어라 중얼거렸다.
“진, 뭔데 그래요?”
에밀리가 진의 팔을 붙잡으며 물었다. 이에 진이 에밀리의 귓가에 대고 무어라 속삭였다. 진의 말을 들은 에밀리가 눈을 잔뜩 크게 뜨곤 소리쳤다.
“뭐라고요?!”
“하아, 미안합니다. 미리 눈치챘어야 했는데.”
진이 에밀리를 향해 면목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프레아는 저에게만 말해주지 않는 상황에 조금 강경한 목소리로 말했다.
“무슨 얘길 하시는 거예요. 저만 빼고.”
“아니다, 알아서 좋을 게 없다. 아무래도 망토는 밀리안이 장난을 친 모양이야. 깊은 의미 둘 것 없다.”
“장난이라고요……?”
프레아는 의심쩍은 얼굴로 진을 바라보았다. 장난이라고 하기엔 밀리안의 태도가 무척 진지했는데……. 프레아가 믿지 않는 기색을 보이자 진이 한숨 쉬듯 설명했다.
“그래, 간혹 자기 누이에게 망토를 주어 함부로 하지 말라 경고하기도 한단다. 일종의 가족에 대한 애정을 드러내는 거다.”
프레아는 진의 말을 듣곤 수긍했다. 기사단에 대해서는 저보다도 진이 더 잘 알 테니까. 프레아는 어쩐지 괜한 걱정을 했다는 생각에 깊은 안도의 숨을 내뱉곤 금세 헤실헤실했다.
결국 밀리안이 망토를 준 건 자신을 가족으로 인정한다는 의미였다. 누나를 생각해서 귀찮음도 무릅쓰고 해준 일이라니. 어쩐지 감동이었다. 거기다 제 누이에게 함부로 하지 말라는 경고를 대놓고 해주다니. 드디어 자신을 누나로 인정해 준 것 같아 프레아가 달뜬 목소리로 말했다.
“절 위해 그렇게 해준 거였네요.”
“그렇다고 볼 수 있지.”
진이 초롱초롱한 눈으로 말하는 프레아를 보며 떨떠름한 얼굴로 긍정했다. 에밀리는 그 사이에서 표정을 굳힌 채 잔뜩 머리를 굴리는 기색이었다.
그때 밀리안이 모든 순서를 마치고 연회장에 들어왔다. 막 세 사람이 있는 곳으로 걸어오는데 진이 먼저 선수를 쳤다. 그가 빠르게 밀리안에게 다가가 연회장 밖으로 그를 끌고 나갔다.
“아버지가 왜 저러시는 거예요?”
프레아가 사라져 버린 밀리안과 진 쪽을 보며 물었다. 이에 에밀리는 체리가 올려진 브라우니를 내밀며 신경 쓰지 말라는 듯이 말했다.
“급하게 할 말이 있는 모양일 테지. 신경 쓰지 말고 이것 좀 먹어보렴.”
프레아가 브라우니를 한 입 베어 물며 새침하게 대꾸했다.
“어머니도 참, 저 이제 체리에 집착할 나이 아니잖아요.”
“그래도 좋아하잖니.”
“그건 그래요.”
에밀리가 피식 웃자 프레아도 배시시 웃으며 맞장구쳤다.
* * *
“이게 무슨 짓이냐.”
진이 엄한 얼굴로 밀리안에게 물었다. 밀리안은 그런 진을 보며 무심하게 말했다.
“무얼 말입니까?”
“망토 말이다! 그걸 왜 프레아에게 준 거야. 설마 몰랐던 건 아니겠지.”
진이 답답하다는 듯이 밀리안을 다그쳤다. 도대체 철이 언제 들려는지 그런 엄청난 짓을 해버리다니. 난감하기만 했다. 하지만 밀리안은 고작 그것 때문이었냐는 듯 피식 웃으며 답했다.
“다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알아도 확인하고 싶어 이러는 거다.”
“생각하시는 그대로입니다.”
“하아…….”
너무나도 당당한 밀리안을 보며 진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프레아에겐 그렇게 얼버무리긴 했지만 사실 그 일은 가족에게 하지 않는 행동이었다. 물론 아직 사례가 없으니 그런 거라고 얼버무릴 수는 있었지만, 말이 나오기에 충분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프레아의 신원이 밝혀지지 않은 것이다. 만약 밀리안이 고백한 상대가 프레아라는 걸 사람들이 알았다면 엄청난 파장을 불러일으켰을 터였다. 그렇게 되면 진이 손쓸 수 없었다.
“네가 무슨 짓을 한 줄 알고 이렇게 당당한 것이냐.”
“당당하지 않을 게 뭐가 있습니까. 어차피 친남매도 아닌데.”
“프레아는 네 누나야.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진이 단호하게 말했다. 계약이긴 해도 서류상 두 사람은 남매였다. 사회적 물의를 일으킬 순 없었다.
“죄송합니다, 아버지.”
밀리안의 사죄에 한결 누그러진 목소리로 진이 타이르듯이 말했다.
“그래, 네가 이제야 잘못을…….”
“전 프레아와 결혼할 겁니다.”
“뭐……?”
하지만 이어진 밀리안의 말에 평정심을 잃은 진이 황당해하며 되물었다. 밀리안은 이미 마음을 굳힌 것처럼 결연한 표정이었다. 그 말에 한 치의 거짓도 없어 보였다.
언제 그렇게 마음을 키워간 건지 몰랐다. 아무리 그래도 할 수 있는 일과 없는 일이 존재했다. 지금이라도 마음을 정리시켜야 한다고 생각한 진이 말했다.
“미안하지만, 그건 안 될 일이다.”
“제가 에드모어라서 그러십니까?”
“그래, 네가 에드모어인 이상 절대 프레아와 이어질 수 없어.”
“그럼 나가겠습니다.”
“밀리안!”
진이 거세게 소리쳤다. 밀리안은 잔뜩 노한 진을 보고도 담담했다. 이미 단단히 작정한 모양이었다. 진이 마른세수하며 밀리안을 타일렀다. 아들이 아직 어려 현실 인식을 못 한다고 생각했다.
“네가 에드모어를 나가서 뭘 할 수 있단 말이냐. 그렇게 되면 넌 귀족도 아니게 되고 귀족인 프레아와 이어질 수도 없어.”
“작위를 받으면 됩니다.”
“헛소리하지 말거라. 큰 공을 세우지 않는 이상 작위를 받는 일은 없다.”
진이 억지를 부리는 밀리안에게 인상을 썼다. 객기를 부리는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밀리안은 담백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전쟁에 나갈 겁니다.”
“뭐?”
“나가서 적장의 목을 베고 뭣하면 왕의 머리도 따 올 겁니다.”
진이 얼빠진 표정으로 밀리안을 바라보았다. 이제 막 기사가 되었으면서 전장에 나가겠다니. 전장은 경험 있는 기사들이 가서도 곤욕을 치르는 곳이었다.
“밀리안 에드모어 레이첼.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느냐.”
“왜 말이 안 됩니까?”
“아무리 네가 에드모어 혈통을 강하게 이었다고 해도 아직 18살이다. 유혈이 낭자한 전쟁터에서 버틸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못 버티면 그건 그것대로 좋은 일이죠. 아무 걱정 없이 적을 쓸어버리고 피를 볼 수 있는 일이 어디 흔하답니까?”
“그게 문제야! 네가 적군 아군 구분 없이 죽여 버릴까 봐. 안 된다. 절대 나가지 마라.”
진이 강경하게 반대하자 밀리안 역시 밀리지 않고 세게 나갔다. 어차피 이럴 작정으로 입단식까지 제 마음을 꼭꼭 숨겨왔었다. 자신이 에드모어인 이상 프레아와 이어질 수 없다는 것쯤은 스스로도 잘 알았으니까.
“싫습니다. 그리고 이젠 적인지 아군인지 정도는 구분할 수 있습니다. 아시잖습니까, 제가 프레아의 피에 반응한 뒤로 웬만해선 피에 반응하지 않는다는 걸요.”
“설마, 그것 때문에 착각이라도 하는 거냐? 네가 프레아를 좋아해서 그런다고?”
“아버지, 전 그 정도로 멍청하지 않습니다. 제 마음은 제가 더 잘 압니다.”
진의 말에 밀리안이 서슬 퍼런 얼굴로 대꾸했다. 저에게 저리 냉정하게 구는 밀리안은 처음이었다. 진이 인상을 팍 썼다. 진심인 모양이다. 그것도 무척 깊어 보여 난감했다. 진이 잔뜩 노한 얼굴로 말했다.
“그래, 어디 한번 네 마음대로 해봐라. 어차피 한 달도 못 되어 안 되겠다고 돌아올 테니. 에드모어의 혈통이 그렇게 가벼운 건 줄 아느냐. 넌 절대 그 유혈 현장에서 정신을 못 잡을 게다.”
“바라던 바입니다. 그러니 그 말 잊지 마십시오.”
“아니, 그래도!”
“가보겠습니다.”
진이 울컥하자 밀리안은 정중히 인사하곤 자리를 떠나 버렸다.
* * *
프레아는 연회 내내 밀리안을 보지 못했다. 진은 먼저 돌아왔는데, 어쩐지 밀리안은 오지 않았다. 프레아는 다 끝나가는 연회장에서 하염없이 밀리안을 기다렸다. 선물을 줘야 하는데 도통 보이질 않았다. 그때 기사 하나가 프레아에게 말을 걸어왔다.
“여기 계셨군요.”
“누구세요?”
프레아는 낯선 남자가 말을 걸자 물끄러미 보며 물었다.
“단장님이 찾으십니다.”
“밀리안이요?”
“예.”
정중하게 이야기하는 사내를 보며 프레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연회장에는 보는 눈이 많아서 저를 따로 부르는 모양이다. 프레아가 남자를 뒤따라갔다. 제법 앳되어 보이는 얼굴에 프레아가 친근하게 말을 걸었다.
“이번에 입단한 기사이신가요?”
“……그, 그렇습니다.”
남자가 조금 뜸을 들이며 답했다. 자신을 소개하는 것에 어색한 눈치였다. 이번에 입단했다고 하니 어쩌면 당연한 반응이었다. 그 뒤로도 그는 아무 말 없이 탑을 올랐다. 프레아는 뒤따라가면서 점차 의구심이 들었다. 어두침침한 곳으로 안내하는 탓이었다.
“그런데 어디로 가는 거예요? 점점 어두운 곳으로 가는 것 같은데요.”
“조금만 더 가면 됩니다.”
어쩐지 기사가 우물쭈물하며 얼버무렸다. 잔뜩 긴장한 뒷모습에 프레아가 남몰래 바람을 모았다. 아무래도 그의 행동이 수상했다.
프레아의 주변에 어느새 바람이 감돌았다. 언제든지 공격할 수 있도록 태세를 갖추었다. 마침 기사가 걸음을 멈추며 눈앞의 문을 힘껏 열었다.
“오, 나의 피앙세 안젤리카! 내 마음을 받아주오.”
“…….”
프레아가 바람을 흩뜨리고 멍하니 눈앞의 남자를 바라보았다. 분명 밀리안이 불렀다고 했는데 눈앞에 있는 사내는 밀리안이 아니었다. 아무래도 저를 데려온 기사가 사람을 착각한 모양이다. 그런 줄도 모르고 그에게 공격부터 하려 했다니.
다행이다. 하마터면 이유 없이 선방을 날릴 뻔했어.
한껏 멋들어진 멘트를 하려던 남자가 자신이 원했던 여인이 아님을 보고 얼굴을 굳혔다. 그 순간 펑, 하는 소리와 함께 폭죽이 터졌다. 폭죽이 신호를 받아 팡팡 터지자 준비하고 있던 악공들이 연주를 시작했다.
아름다운 선율이 탑에 가득 울려 퍼졌다. 모두가 굳어 있는 가운데 프레아가 저를 데려온 남자를 향해 물었다.
“분명 제게 밀리안이 불렀다고 하지 않으셨나요?”
“예? 저는 빌리앙 님이라고 들었는데…….”
“…….”
아무래도 그쪽 프로포즈 망한 것 같아요.
프레아가 안쓰러운 얼굴로 빌리앙 기사단장을 바라보았다. 눈치도 없이 폭죽은 계속해서 펑펑 터지고 있었다. 프레아가 침착한 얼굴로 기사에게 말했다.
“아무래도 뭔가 착오가 있던 모양이에요. 전 저분을 처음 보거든요.”
“아니, 그럼 왜 따라오신 겁니까?”
“그걸 왜 저한테 물으세요?”
기사가 허둥거리며 따져 묻자 프레아가 어이없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이에 기사가 당황한 기색을 내비쳤다. 뒤에 있던 빌리앙은 이미 망연자실한 얼굴로 마른세수를 했다. 그 순간 문이 또 벌컥 열리며 새침한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빌리앙!”
“안젤리카!”
그제야 한쪽 무릎을 꿇은 채 굳어 있던 빌리앙이 벌떡 일어났다. 프레아가 뒤를 돌아보자 잔뜩 성이 난 얼굴을 한 여인이 프레아를 쏘아보고 있었다.
“당신 뭐예요?”
“네?”
“뭔데, 남의 프로포즈를 대신 받고 있는 건데요!”
“저기 그러니까…….”
프레아가 당황한 기색을 띠며 뒷머리를 매만졌다.
아니, 그러니까 저도 피해자라니깐요? 이건 그냥 일종의 사고였어요!
“아무래도 부하가 실수한 것 같아, 사람을 잘못 데려올 줄이야.”
“이게 뭐예요, 빌리앙!”
여자가 울먹거리며 빌리앙의 품에 폭 하고 쓰러졌다. 그제야 악공들도 뭔가 잘못됨을 느꼈는지 음악을 멈추었다. 사무치게 민망한 정적이 흘렀다. 프레아는 헛웃음을 내뱉었다. 누군가의 로맨틱한 현장에 난입한 방해꾼이 된 기분이었다.
“아하하, 그럼 좋은 시간 보내세요.”
“죄송합니다, 영애.”
프레아를 데려온 기사가 연신 고개를 숙이며 사과했다. 입단 첫날이라 많이 긴장한 모양이다. 근데 왜 민망함은 내 몫이란 말인가. 프레아는 서둘러 탑을 빠져나갔다.
밖은 무척 어두웠다. 프레아가 조용히 밤 산책을 했다. 탁 트인 곳을 거니니 어쩐지 후련한 기분이었다. 프레아는 황궁에 온 것이 처음이었다. 행사가 있는 날이 아니면 황궁에 들어올 일이 없었다.
연회장이 제법 먼데도 음악이 은은하게 들렸다. 이제 그만 성으로 돌아가야겠다 싶어 걸음을 돌리려는데 저 멀리 반딧불이들이 보였다.
“와, 반딧불이다.”
프레아가 홀린 듯 반딧불이가 날아다니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작은 인공 호수 위에 반딧불이들이 빛을 발하고 있었다. 황궁에 이런 곳도 있다니. 신기하여 구경하려는데 이미 누군가 자리를 잡고 있었다.
“아.”
프레아의 낮은 탄성을 듣고 호수에 앉아 있던 남자가 뒤를 돌았다. 밤이라 더욱 어두워 보이는 흑발에 달처럼 빛나는 금색 눈동자를 지닌 사내였다.
“누구지?”
사내가 잔뜩 경계하는 목소리로 물었다. 흑발에 금색 눈동자라면 황족이었다. 프레아가 얼른 예를 갖춰 인사했다.
“프레아 레이첼 에드모어라고 합니다.”
레이첼 에드모어라는 말에 그의 금안이 잠시 커졌다가 원래대로 돌아왔다.
“잠깐 구경한다는 게…… 죄송합니다.”
프레아가 얼른 돌아가기 위해 고개를 숙였다.
“보고 가도 상관없네.”
남자가 돌아가려는 프레아를 말렸다. 가문을 알고 경계를 푼 듯했다. 프레아는 황족이 직접 허락해 주었는데 그냥 돌아갈 수 없어 짧게 구경하는 시늉을 하기로 했다.
“감사합니다…….”
프레아가 최대한 황족의 감상에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 멀찍이 떨어졌다. 반딧불이는 호수 근처를 맴돌며 쉴 새 없이 빛을 쏘아댔다. 프레아는 옆에 남자가 있든 말든 반딧불이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어쩐지 번쩍번쩍하는 게 신기했다.
“연회는 재미있었나?”
그때 남자가 프레아를 향해 물었다. 프레아는 반딧불이를 감상하다 말고 놀라 남자를 쳐다보았다. 설마 말을 걸 줄은 몰랐다.
“아, 네. 재미있었어요.”
“그것 참 다행이군.”
남자가 낮게 웃었다. 그의 고저 없는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
그 후로 다시 침묵이 이어졌다. 어쩐지 계속 말을 걸어야만 할 것 같은 어색한 기류가 흘렀다. 남자는 나른한 표정으로 그저 멍하니 호수에 비친 달을 보고 있었다. 결국 어색함을 견디지 못한 프레아가 작별 인사를 했다.
“그럼 저는 이만.”
“왜 벌써?”
남자가 자리를 뜨려는 프레아에게 물었다. 프레아는 차마 ‘그쪽이 불편해서요’라고 말하지 못하고 엉거주춤했다. 이에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좀 더 구경하고 가도록 해. 어차피 이제 막 가려던 참이니.”
“아, 저 때문에 그러실 필요 없어요!”
본의 아니게 저가 황족을 쫓아내는 것 같아서 프레아는 화들짝 놀라 소리쳤다. 연신 손사래를 치며 그녀가 황송해하자 남자가 피식 웃으며 프레아에게로 다가왔다. 그러곤 프레아에게 손을 내밀었다. 프레아는 엉겁결에 악수했다.
“그럼, 또 보지.”
남자는 그렇게 말하곤 자리를 떠나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