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남동생이 생겼다
프레아는 제 앞에 뚱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사내아이를 초롱초롱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은발 사이로 비치는 붉은 눈이 그녀가 가장 아끼는 토토의 눈과 닮았다고 생각했다. 토토는 붉은 루비가 눈에 박힌 흰색 토끼 인형이었다.
엄마가 재혼하겠다고 했을 때, 프레아는 속으로 환호성을 질렀다. 전부터 제 오빠를 자랑하며 은근히 자신을 깔보던 마리아에게 할 말이 생겼기 때문이다.
게다가 눈앞의 남동생은 마리아의 오빠보다 잘생겼다. 이렇게 귀여운 남동생이 생기게 될 줄이야. 프레아는 마리아에게 어떻게 우쭐거릴까 생각하며 속으로 키득거렸다.
그런 프레아와 달리 밀리안은 프레아를 별로 달가워하는 것 같지 않았다. 처음 두 가족이 만나는 상견례 자리에서 밀리안은 하품하는 등 이야기에 전혀 집중하지 않았다.
프레아는 결심한 얼굴로 제가 가장 좋아하는 체리를 밀리안의 접시에 넘기며 해사하게 웃었다. 잘 지내보자는 나름의 표현이었다.
“이거 먹어.”
체리가 제 접시에 올려지자마자 밀리안의 표정이 굳었다.
“어머, 프레아. 밀리안이 마음에 들었나 보구나. 네가 체리를 넘겨주기도 하고.”
어머니 에밀리가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프레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프레아는 에밀리에게 칭찬을 받은 것이 기분 좋은지 헤실헤실했다. 체리는 프레아가 제일 좋아하는 과일이자 최근 가장 주된 관심사였다. 체리에 지나치게 집착한다고 할까?
또한 그런 체리를 닮은 붉은 색에 집착했다. 새빨간 드레스를 입은 것부터가 그것을 방증하고 있었다. 그래서일까. 프레아는 밀리안이 마냥 좋았다. 그때 밀리안이 낮게 중얼거리며 체리가 올려진 접시를 멀리 치웠다. 그러곤 새 접시를 가져왔다.
“더러워.”
“응?”
프레아는 자신이 잘못 들었나 싶어 밀리안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밀리안은 그런 프레아의 얼굴을 보곤 눈을 날카롭게 치뜨며 말했다.
“네가 먹던 포크로 주는 저의가 뭐야? 싸우자는 거야?”
“밀리안, 누나한테 그게 무슨 말버릇이냐.”
에드모어 공작인 진이 엄한 얼굴로 밀리안을 탓했다. 이에 프레아가 손사래를 쳤다. 왠지 저 때문에 아버지에게 혼나면 밀리안의 기분이 상할 것 같았다. 어쨌든 밀리안의 말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아니에요, 제가 실수한걸요. 생각 없이 먹던 포크로 줘가지고…… 미안해, 밀리안.”
그러곤 새 포크로 체리를 다시 찍어 밀리안의 새 접시 위에 올렸다. 밀리안이 프레아의 말에 움찔거렸다. 예상 밖의 반응이라 생각한 모양이었다.
밀리안은 프레아를 남몰래 살짝 힐끗거리더니 체리를 입안으로 쏙 넣었다. 통통한 젖살 사이로 커다란 체리 알갱이를 우물거리는 모습이 흡사 토끼 같았다. 그러고 보니 눈도 빨갛고 머리카락도 은색인 게 영락없는 토끼였다.
‘귀여워!’
프레아는 심통 난 얼굴로 체리를 받아먹는 밀리안을 보며 환호성을 질렀다. 세상에 이렇게 귀여운 남동생은 저에게만 있을 거라 생각했다. 프레아가 전율이 오른 표정으로 밀리안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밀리안을 몰래 훔쳐보며 한참을 실실거렸다. 그러다 무의식중에 먹던 브로콜리 하나가 목에 턱 하고 걸렸다. 제대로 씹지도 않고 꿀꺽 삼킨 탓이었다.
“캑!”
프레아가 놀라 캑캑거리며 연신 기침을 내뱉었다. 하지만 목에 걸린 브로콜리는 나올 생각이 없는지 그대로였다. 놀란 에밀리가 프레아의 등을 두드리고 진이 물을 내밀었다.
“컥!”
그 순간 프레아의 입안에 있던 브로콜리가 포물선을 그리며 밀리안에게로 날아갔다. 순식간의 일이었다. 밀리안은 경악했고, 프레아의 입안에 있던 브로콜리는 눈치도 없이 밀리안의 하얀 셔츠에 툭 하고 떨어졌다.
“…….”
“미, 미안해!”
프레아가 벌떡 일어나 밀리안에게로 다가가며 말했다. 밀리안은 굳은 채로 가만히 있었다. 프레아가 얼른 손수건으로 밀리안의 셔츠를 닦아냈다. 당황하여 손이 떨렸다.
안타깝게도 브로콜리에 묻어 있던 진한 라즈베리 소스는 쉽게 지워지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얼룩이 더욱 커졌다.
“저리 비켜!”
밀리안이 신경질적으로 프레아의 손을 쳐내며 벌떡 일어났다. 그 덕에 때마침 디저트인 푸딩을 가지고 오던 직원과 프레아의 몸이 부딪쳤다.
“어억!”
“으앗!”
직원과 프레아가 동시에 비명을 질렀다. 직원이 손에 든 푸딩을 사수하려 몸을 비틀었다. 그러나 접시 위에 있던 푸딩은 직원의 바람과 달리 바닥으로 수직 낙하했다.
탱글탱글한 푸딩이 퍽 하고 바닥에 떨어졌다. 하필 밀리안의 발치였다. 밀리안은 푸딩을 보지 못하고 짓밟은 채 내달리려 했다. 그러나 미끈거리는 푸딩을 딛고 달리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밀리안은 푸딩을 밟자마자 그대로 앞으로 고꾸라졌다.
꽈앙!
“…….”
요란한 소리가 레스토랑을 울렸다. 놀란 프레아가 밀리안의 곁으로 다가갔다. 밀리안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코가 깨지지는 않았을까 염려하며 프레아가 밀리안을 잡아 흔들었다.
“밀리안! 괜찮아?! 어디 안 다쳤어?!”
밀리안은 프레아가 흔들어도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럴수록 프레아는 더욱 힘차게 밀리안을 흔들었다. 잠시 뒤 밀리안이 외마디 신음을 내뱉으며 무어라 중얼거렸다.
“조용…… 시끄…… 러워.”
“응? 뭐라고? 의원을 불러달라고?”
프레아가 밀리안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그의 곁에 귀를 바짝 가져다 대며 물었다. 정말 순수하게 걱정돼서 하는 행동이었다. 이에 새빨개진 얼굴을 한 밀리안이 고개를 쳐들곤 프레아를 향해 고래고래 소리쳤다.
“쪽팔리니까 조용히 하라고!”
“…….”
오히려 밀리안의 목소리가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 밀리안도 그걸 알았는지 전보다 더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젠장!”
밀리안이 일어나지도 못하고 얼굴만 든 채 붉으락푸르락했다. 프레아가 그런 밀리안을 보며 경악해 소리쳤다.
“밀리안!”
“……꺼지랬지.”
“그, 그게 아니라…… 피, 피가.”
“뭐?”
밀리안의 하얀 피부 위로 붉은 액체가 주륵 하고 흘러내렸다. 쌍코피였다. 코는 주인의 사정은 생각 않고 묽은 액체를 툭툭 떨어뜨렸다. 피를 보자 밀리안의 인내심이 뚝 끊어졌다.
프레아가 울먹거리는 목소리를 뱉으며 제 손수건을 밀리안의 코에 가져다 댔다. 브로콜리를 닦아내던 그 손수건이었다.
밀리안은 창피했다, 아니, 수치스러웠다. 여자애 앞에서 요란하게 넘어진 것도 모자라 쌍코피라니. 게다가 지금 뭘 닦던 거로 제 얼굴에 대는 건지. 화가 머리끝까지 올라왔다. 밀리안이 거칠게 프레아의 손수건을 쳐내고는 벌떡 일어나 쏜살같이 나가 버렸다.
프레아는 첫 만남부터 제대로 미움을 당한 것 같아 울먹거리는 얼굴로 뒤를 돌아보았다. 새아빠에게 제대로 혼날 거라 생각해서 최대한 사죄하는 표정도 잊지 않았다.
프레아와 에드모어 공작의 눈이 마주쳤다. 프레아의 예상과는 달리 에드모어 공작은 어깨를 크게 들썩이며 웃음을 참고 있었다. 어머니 에밀리 역시 눈가의 눈물을 훔치며 큭큭거리고 있었다.
“엄마? ……에드모어 공작님?”
프레아가 당황스러운 얼굴로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두 사람은 프레아의 부름에도 대답하지 않고 계속해서 킥킥거렸다. 밀리안이 다쳤는데 웃고 있는 모습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아 볼을 빵빵하게 부풀렸다.
그런 프레아를 보며 두 사람은 더욱 헐떡거리며 웃음을 참아내려 노력했다. 프레아가 울상이 돼 자리에 가 앉았다. 아무래도 새 가족이 될 사람들과의 첫 만남이 영 꼬여 버린 것 같다.
잘 보여도 모자랄 판에 남동생에게 제대로 미움을 산 것 같아 눈물이 찔끔 났다. 침울해하는 프레아를 본 진이 웃음을 겨우 멈추고는 담담한 목소리로 에밀리에게 말했다.
“밀리안이 저렇게 당황하는 건 처음 봤습니다.”
“하하, 미안해요, 내 딸이 좀 허당이라.”
“괜찮습니다. 오히려 조용했던 성이 유쾌해질 것을 생각하니 기분이 좋군요.”
진이 기분 좋은 미소를 띠며 커다란 손으로 프레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프레아는 얼굴도 보지 못했던 아버지를 대신해 아빠가 되어주려 하는 진이 고마워 수줍게 볼을 붉혔다.
그래도 공작님이 저를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아 다행이라 여겼다. 밀리안은 그대로 집으로 돌아가 버렸는지 다시 내온 푸딩을 다 먹을 때까지도 테이블로 돌아오지 않았다.
* * * * *
레이첼 후작과 에드모어 공작이 재혼한다는 소식이 빠르게 전해졌다. 제국에서는 희대의 로맨스라며 기사가 실렸고, 결혼식장에는 수많은 사람이 축하하기 위해 모여들었다.
프레아는 싱글벙글한 얼굴로 밀리안을 바라보았다. 결혼식 당일이 되어서야 두 번째로 만나게 된 밀리안은 프레아와 비슷한 색감의 예복을 입고 있었다. 두 사람은 결혼식에서 꽃잎을 함께 뿌릴 예정이었다.
밀리안은 프레아 쪽은 쳐다도 보지 않았다. 팔짱을 끼고 다리를 꼰 채 프레아를 거들떠도 보지 않았다. 프레아는 그런 밀리안의 태도에 아랑곳하지 않고 바짝 붙어 앉았다.
“밀리안, 안녕?”
“…….”
밀리안은 대꾸도 하지 않고 소파의 끄트머리 쪽으로 옮겨 앉았다. 프레아는 이에 질세라 더욱 가까이 붙어 앉았다. 오랜만에 만나서 수줍어하는 것이라 생각해서였다.
그러기를 여러 번 했을까. 밀리안이 허벅지의 반만 걸쳐지게 위태롭게 옮겨 앉았고 프레아가 다시 따라붙었다. 그러나 너무 빠르게 따라 앉은 터라 프레아가 그만 밀리안을 밀치고 말았다. 밀리안이 억! 하는 소리와 함께 휘청거리며 뒤로 넘어지려 했다.
“어어!”
프레아가 놓칠세라 밀리안을 붙잡아 자빠지지 않도록 막았다. 그 덕에 밀리안의 허리를 붙잡은 채 내려다보는 자세가 되고 말았다. 마치 왈츠의 한 장면처럼.
“…….”
“…….”
프레아의 기다란 머리카락이 밀리안의 귓가를 간질였다. 밀리안이 한동안 멍한 표정을 짓다 말고 인상을 팍 썼다.
“저리 비켜!”
밀리안이 프레아를 밀치며 거칠게 소리쳤다. 이에 프레아까지 휘청거렸고 밀리안은 그대로 뒤로 넘어져 머리를 부딪쳤다.
프레아 역시 밀리안을 도로 붙잡으려 시도하다가 그만 같이 앞으로 고꾸라지고 말았다. 졸지에 밀리안을 깔아뭉개 버린 프레아가 허둥거리며 그의 허리에 올라탄 채 소리 질렀다.
“어떻게 해. 괜찮아, 밀리안?!”
“…….”
밀리안은 충격받은 얼굴로 멍하니 누워 있었다. 여자애한테 몸이 깔린 것도 억울하고, 균형 하나를 못 잡고 뒤로 자빠진 자신도 한심하게 느껴졌다.
이 여자애를 만나서 되는 일이 하나도 없었다. 프레아가 밀리안의 눈치를 살폈다. 어쩐지 ‘이런 게 누나라니, 정말 싫어’라고 말하는 것만 같은 눈초리였다
프레아는 머리를 다치지는 않았나 걱정돼 밀리안을 일으켜 연신 그의 머리를 더듬거렸다. 일단 자신의 실수였다. 반가운 마음에 너무 들러붙어서 이 사달이 났다.
“만지지 마.”
밀리안이 신경질적으로 프레아의 손길을 쳐내며 말했다. 프레아는 그대로 뒤로 물러났다. 밀리안은 이쯤 되면 저쪽에서도 화낼 법하다고 생각했다.
만날 때마다 자신이 무례하게 군다는 것쯤은 이미 알고 있었으니까. 그런데 이상하다. 프레아는 화내기보다도 울상이 돼 중얼거렸다.
“어떻게 해, 혹 났어. 많이 아프지, 밀리안?”
예상 밖에 제 걱정만 하는 프레아에게 밀리안이 저도 모르게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이게 다 누구 때문인데!”
밀리안은 도무지 잘해주려야 잘해줄 수 없는 여자애라고 생각했다. 이에 프레아가 움찔거렸다. 프레아는 이 모든 상황이 당황스럽기만 했다. 그저 잘 지내보려고 했던 건데 만날 때마다 그를 다치게 하는 것 같아 속이 상했다.
그래도 명색이 누나인데, 이러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프레아가 씩씩한 얼굴로 밀리안의 옷매무새를 정돈해 주었다. 밀리안이 질색하며 프레아를 밀어내려 했지만 자신보다 키가 큰 프레아를 당해낼 리 없었다.
밀리안은 프레아의 제멋대로인 행동에 두 손 두 발을 다 들었는지 더 이상 발버둥 치지 않았다. 그저 묵언 투쟁을 하듯 입을 꾹 다물었다. 프레아가 정돈을 마치고 얌전히 있어준 밀리안을 향해 해맑게 웃으며 말했다.
“아이, 착하다. 내 동생.”
“누가 네 동생이야?”
“이제 오늘부로 우린 남매인걸?”
“난 인정 못 해! 이런 덜떨어진 누나 따위…….”
밀리안의 말에 프레아가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밀리안은 말을 하다 말고 프레아를 응시했다. 표정을 보아하니 이제야 제 입장을 안 것이리라. 밀리안이 한껏 의기양양한 얼굴로 다음 말을 이으려는 순간, 갑자기 머리에 우레 같은 꿀밤이 내려쳤다.
아주 매운 꿀밤을 맞은 밀리안이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머리를 만지작거렸다. 밀리안의 머리를 내려친 사람은 다름 아닌 에드모어 공작이었다.
‘아프겠다.’
어쩌면 혹 하나가 더 늘어났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프레아는 절로 인상이 찌푸려졌다. 그러다 말고 두 사람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참 많이 닮은 부자였다. 둘 다 은발에 적안을 가진 미남자였다.
프레아는 저도 모르게 제 연보라색 머리카락을 바라보았다. 온통 푸른 계열의 저와 달리 공작과 밀리안은 하얗고 붉었다. 요리조리 살펴보아도 저와 두 사람의 닮은 구석은 하나도 없었다.
순간적으로 외롭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금세 마음가짐을 달리했다. 꼭 닮아야만 가족이 되는 건 아니니까.
“이 녀석이, 누나한테 계속 그렇게 건방지게 굴 거냐.”
“아버지!”
밀리안이 억울한 목소리로 진에게 대들었다. 진은 그런 밀리안을 엄한 얼굴로 보며 ‘쓰읍!’ 하는 소리를 냈다. 프레아는 저 때문에 밀리안이 혼나게 된 것 같아 진의 팔을 붙잡으며 말했다.
“혼내지 마세요, 제가 잘못한 거예요.”
“프레아, 동생이라고 편들어줄 것 없다. 누가 봐도 밀리안이 버르장머리 없지 않았느냐.”
“그치만…….”
프레아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대답하곤 고개를 푹 숙였다. 좋은 모습만 보여 드리고 싶었는데. 어쩐지 자신이 모자라서 서툰 행동만 보이는 것 같았다.
혹시나 자신을 딸로 여기기 싫어하시면 어쩌지? 하는 생각에 불안하기만 했다. 한눈에 봐도 풀이 죽은 듯한 프레아에게 진이 다정하게 말했다.
“그것보다 오늘 무척 예쁘구나. 레이첼 후작이 좋아하겠어.”
“가, 감사합니다. 공작님도 오늘 정말 멋있으세요!”
“공작님이라니, 이제 아버지라고 해야지.”
진이 프레아의 옷매무새를 단정하게 해주며 말했다. 진의 말에 프레아의 눈이 초롱초롱해졌다. 아버지라니. 한 번도 아버지라는 단어를 입 밖에 꺼내본 적이 없었다. 부를 대상이 없었기에.
“아, 버지?”
“옳지. 듣기 좋구나, 프레아.”
프레아가 어색하게 내뱉은 단어를 듣자 진이 다정히 웃었다. 그에 프레아가 볼을 수줍게 붉히며 좋아했다. 정말 아버지가 생겼다. 그것도 엄청나게 잘생기고 능력 많은. 마리아의 얼굴이 부러움으로 물들 것을 생각하니 기분이 무척 좋았다.
밀리안이 그런 둘을 게슴츠레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닮은 구석이 전혀 없는 두 사람이지만 어딘가 친밀해 보였다. 남이 보면 부녀 관계라고 여길 정도로.
진과 닮은 것은 오히려 밀리안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자신이 외부인같이 느껴졌다. 밀리안은 코끝이 찡한 기분을 느끼며 휙 몸을 돌려 대기실을 나가 버렸다.
* * *
결혼식이 시작되었다. 예쁜 웨딩드레스를 입은 에밀리는 눈이 부셨다. 그 옆에 턱시도를 입은 진 역시 무척 멋있었다. 프레아가 흐물거리는 얼굴로 손에 꽃잎이 담긴 바구니를 꼭 붙잡고 헤실헤실했다.
아빠가 생겼다. 게다가 남동생까지 생겼다. 이렇게 좋을 수는 없었다. 엄마와 저뿐이었던 가족에 아빠와 남동생이 한꺼번에 더해지니 기쁘기 그지없었다.
헤헤거리는 프레아와 달리 밀리안의 표정은 좋지 못했다. 무엇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바구니를 드는 둥 마는 둥 하며 잔뜩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하지만 잘생긴 얼굴은 구겨져도 빛이 났다.
프레아는 밀리안이 몹시 신경 쓰였지만 괜히 그의 화를 돋울까 봐 가만히 있었다. 주례의 축사가 마무리되고 드디어 행진이었다. 프레아는 실수하지 않기 위해 허리를 꼿꼿이 폈다.
밀리안도 준비하려는지 자리를 잡았다. 쏟아지는 박수 세례와 환호 속에서 프레아의 엄마와 밀리안의 아빠가 행진했다. 프레아가 달뜬 얼굴로 꽃잎을 연신 뿌렸다. 밀리안은 시큰둥한 얼굴로 건성건성 꽃잎을 뿌려댔다.
그러기를 한참. 프레아는 너무 들뜬 나머지 바구니에 있던 꽃잎을 행진이 채 끝나기도 전에 다 뿌리고 말았다. 당황한 프레아는 바닥에 있는 꽃잎을 주워 다시 뿌려야 하나 망설였다. 이렇게 저 때문에 결혼식을 망치게 되는 건 아닌가 조바심이 났다.
그때 맞은편에 있던 밀리안이 제 바구니에서 꽃잎을 한 움큼 집어 프레아의 바구니로 옮겼다.
“쯧, 이런 것도 하나 제대로 조절 못 해?”
“우와…….”
프레아는 밀리안이 꼭 동화 속 요정 같다고 생각했다. 위기에 처한 자신을 짠! 하고 도와주는 그런 요정 말이다.
“뭘 멍청하니 보고만 있어. 어서 뿌리지 않고?”
밀리안은 저를 빤히 보고만 있는 프레아를 향해 낮게 소리쳤다. 이에 프레아가 화사하게 웃으며 말했다.
“헤헤, 그래도 남동생이 도와주니까 너무 좋다. 꼭 요정님 같았어!”
“딱히 널 위해서 한 게 아니니까 너무 좋아하지 마. 그저 이 지루한 결혼식이 너 때문에 길어지는 게 싫어서라고.”
밀리안이 퉁명스럽게 말하곤 다시 꽃잎을 뿌렸다. 어찌나 쌀쌀맞게 구는지 그래도 두 번째인데 여전히 낯가림이 심한 밀리안이었다. 물론 낯가림이라곤 없는 프레아에게 그의 철벽이 통할 리는 없었다.
프레아는 그런 밀리안의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헤실헤실하며 그의 옆에 찰싹 붙어 따라 움직였다. 밀리안이 프레아에게서 멀찍이 떨어지려다 말았다. 뒤에서 진의 눈총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가 쳇, 하고 낮게 읊조리고는 프레아와 나란히 서서 보폭을 맞추었다. 신랑 신부보다도 프레아가 더 행복해 보였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자신에게도 가족이 생겼다. 그것도 완전한 가족이. 꿈에서나 그리던 그런 단란한 가족이 될 생각에 기분이 무척 좋았다.
결혼식이 모두 끝나고 피로연이 밤늦게까지 이어졌다. 프레아는 밀리안에게 다시 한번 고맙다는 인사를 하기 위해 그를 찾아다녔다. 손에는 깨끗한 손수건에 곱게 싼 체리가 담겨 있었다.
프레아는 체리가 제일 좋았다. 동글동글하니 먹기 좋게 생긴 것 하며, 불그스름한 색감이 특히나 좋았다. 톡 하고 터지는 듯한 식감은 어찌나 신기한지. 입에 넣고 도르르 굴리는 재미도 있었다.
그래서 체리를 남에게 나눠 주는 일이 드물었다. 엄마인 에밀리에게도 선뜻 주지 못하고 마지못해서 주는 것이 체리였다. 그런 귀한 체리였다.
프레아는 밀리안이 마음에 들었다. 처음 본 순간부터 이 아이는 내 남동생이다 싶었다. 특히나 그의 루비 같은 붉은 눈이 좋았다. 이왕이면 저를 좋아해 줬으면 싶은데 아무래도 제대로 미움받고 있는 것 같았다.
밀리안은 이 결혼식이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결혼식 시작 전에 코끝이 붉어지며 쌩, 하고 나가 버렸던 밀리안의 얼굴이 떠올랐다.
자신은 본래부터 아버지가 없었다. 아버지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궁금해하지도 않았다. 그냥 가끔, 엄마가 혼자 애를 낳았을 리는 없을 텐데, 하고 생각했을 뿐이다.
그래서 아버지가 생긴다는 것만으로 기뻤다. 하지만 밀리안은 자신의 경우와 달랐다. 밀리안의 어머니는 작년 이맘때쯤 돌아가셨다고 들었다. 그러니 이제 1년이 지났을 뿐이다. 여전히 엄마의 품이 그리울 나이였다. 어쩌면 우리에게 아버지를 빼앗겼다고 생각할지도 몰랐다.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되는데…….
밀리안의 어머니와 공작은 사이가 무척 좋았다고 들었다. 그래서 갑작스럽게 공작부인이 죽었을 때 공작이 넋을 잃고 한동안 칩거했다는 것도 전해 들었다.
그래서일까? 이 재혼은 말이 많았다. 누구는 축하하고 누구는 비방했다. 세기의 결혼식이라고 추앙받는 뒤편에는 공작과 후작을 축하하는 사람보다 손가락질하는 사람들이 더 많았다. 그저 그 둘의 위세에 눌려 대놓고 말하지 못할 뿐.
어린 프레아도 어른들이 뒤에서 쑥덕거리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다. 그게 정확히 무슨 말인지는 알아듣지 못했지만 구설에 오를 만한 일이라는 것쯤은 어린 자신도 짐작할 수 있었다. 그 정도로 말 많은 결혼식이었다.
사실 엄마의 결혼이 갑작스러운 것은 프레아도 마찬가지였다. 프레아만 있으면 된다고 했던 일중독자 엄마였다. 직장과 집만 전전하던 엄마가 재혼하겠다고 했을 때 프레아는 장난치는 줄 알았다.
프레아의 엄마인 에밀리 레이첼은 능력 있는 자랑스러운 엄마였다. 어찌나 능력이 좋은지 무려 황제의 왼팔이라는 별명까지 갖고 있었다.
그리고 황제의 오른팔은 바로 진 에드모어, 자신의 아빠가 된 남자였다. 왼팔과 오른팔의 만남이라. 프레아는 어쩐지 묻지도 따지지도 않을 궁합인 것 같아 배시시 웃었다.
어쨌든 그런 두 사람이 결혼했다. 이미 벌어진 일이다. 밀리안이 아무리 자신의 남동생이 하기 싫다고 떼를 써도 무르지 못할 일이었다. 프레아는 누나로서 밀리안을 다독여 줄 생각이었다. 바로 자신이 손에 든 체리와 함께 말이다.
반드시 돌아가신 공작부인을 대신해 정성스레 보살펴 주리라. 그게 프레아의 다짐이었다. 프레아가 그리 다짐하고 밀리안을 찾고 있었다.
그때 정원 한구석에 있는 벤치에 밀리안이 앉아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달빛에 의지해 멍하니 앉아 있는 것이 조금 처연해 보였다. 프레아가 매무새를 단정하게 하고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여기 있었구나.”
“뭐야, 여긴 또 어떻게 알고 왔어?”
밀리안이 잔뜩 긴장한 얼굴로 프레아를 바라보았다. 또 사고를 칠까 봐 지레 경계하는 얼굴이었다. 프레아는 그러거나 말거나 그의 옆에 폭, 앉으며 두 손으로 체리 더미를 건넸다.
“이거 먹어.”
“또 체리야?”
밀리안은 프레아가 건네는 물건이 체리인 것을 발견하곤 인상을 찌푸렸다. 받을 생각이 없는지 프레아의 손을 무안하게 세워두었다. 프레아는 밀리안이 쑥스러워 그런가 보다 했다. 프레아가 배시시 웃으며 그의 조막만 한 손 위에 체리가 든 손수건을 올려주었다.
“이번엔 깨끗한 손수건이야.”
“……필요 없어.”
“정말 달고 맛있어.”
진심으로 하는 말이었다. 이 체리는 프레아가 열심히 고른 체리였다. 맛이 없을 리가 없었다.
“그렇게 맛있으면 너나 혼자 먹어!”
밀리안이 체리 더미를 다시 프레아에게 밀어내며 말했다. 생각보다 힘 조절을 제대로 하지 못해 체리 몇 알이 손수건에서 벗어나 우수수 쏟아졌다. 개중에 몇 알은 프레아의 얼굴로 튀었다.
“아야!”
프레아가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얼굴을 두 손으로 가렸다.
“……!!”
밀리안은 프레아가 아파하는 것을 보고 움찔거렸다. 아프게 할 생각까지는 없었다. 그저 저를 혼자 내버려 두기를 바랐다. 어차피 구색 맞추는 이런 결혼식에 제가 낄 자리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냥 셋이서 하하, 호호하라지 싶어 부러 더 쌀쌀맞게 굴었다.
“그, 그러니까! 왜 이런 걸 주고 난리야!”
밀리안이 도리어 성질을 내며 벌떡 일어났다. 이제는 분명 프레아가 화났을 거라 어림짐작했다. 아니, 그래야 정상이라고 생각했다. 밀리안은 눈앞의 여자애가 싫었다.
더럽게 먹던 포크로 체리를 건네준 것부터, 입에 있던 브로콜리를 뱉어서 맞추질 않나. 게다가 그걸 닦아냈던 손수건으로 제 코피를 닦아내기까지 하다니.
완전 조심성 없고 성가신 여자애였다. 그런데 고작 3살 더 먹었다고 누나라고 다가오니 기가 막혔다. 도대체 왜 자신에게 체리를 주지 못해 안달인지도 모르겠다.
“…….”
분명 성을 내며 따질 줄 알았던 프레아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숙인 채 가만히 있었다. 밀리안은 어쩐지 조바심이 났다. 설마, 잘못 맞아서 상처라도 난 걸까? 그럼 아버지한테 죽음인데.
밀리안이 쭈뼛거리며 자리를 옮기지 못하고 다시 프레아의 옆에 앉았다. 그러곤 조심스레 소곤거렸다.
“야, 뭐라고 말 좀 해봐.”
“…….”
“많이 아파? 하, 그러니까 이런 건 좀!”
밀리안은 대답 않고 가만히 있는 프레아에게 다시 짜증을 냈다. 아니, 짜증을 낼 생각은 없었는데 울컥 짜증이 올라왔다. 그때, 갑자기 프레아가 고개를 팍 들며 말했다.
“뻥이지롱!”
“…….”
아주 활기찬 목소리였다. 화가 난 사람이라고는 볼 수 없이 명랑했다. 밀리안은 지금 프레아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몰랐다.
뻥이라고? 뭐가 어쩌고 저째?
“속았지? 지금 완전 내 걱정한 것 맞지?”
프레아는 밀리안이 황당해하고 있다는 건 생각도 하지 못하고 해맑게 웃으며 말했다. 뭐가 좋다고 헤헤거리는 건지. 밀리안은 바보같이 제 앞에서 웃기만 하는 여자애가 짜증이 났다.
“헤헤, 그러니까 왜 자꾸 내 체리를 거부하고 그래. 밀리안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었으면 달려가서 발로 뻥 차버렸을 거야.”
프레아가 발차기 하는 시늉을 했다. 방정맞은 발짓이었다.
“……꺼져, 진짜.”
밀리안이 김이 팍 샌 얼굴로 멀찌감치 떨어져 앉았다. 물론 프레아가 곧바로 밀리안의 옆에 붙어 앉았지만 말이다. 밀리안은 저리 가라고 말하려다 말고 입을 꾹 다물었다. 어차피 말이 통하지 않는 여자애였다. 밀리안은 그저 아무 말 없이 앉아 있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난데없이 프레아가 일어나더니 떨어진 체리를 주워 담기 시작했다. 이미 바닥에 떨어져 지저분해진 손수건에다가.
“뭐 하는 거야?”
“엄마가 먹는 거 함부로 버리는 거 아니랬어.”
“너 땅에 떨어진 것도 주워 먹어?”
밀리안이 경악해 프레아를 바라보자 프레아가 씨익 웃으며 말했다. 정말 별일 아니라는 듯이.
“물로 헹구면 안 더러워.”
“…….”
밀리안은 할 말을 잃었다. 프레아는 이전에 만났던 귀족 영애들과는 너무 달랐다. 후작의 딸이라고 해서 엄청 깐깐하고 못돼먹은 여자애라 생각했는데 영 딴판이었다. 못돼먹은 것은 둘째 치고 그냥 어디가 모자란 애 같았다.
귀족 중에 누가 떨어진 걸 헹궈 먹으면 된다고 할까? 물론 밀리안도 저 체리가 씻으면 더럽지 않다는 것쯤은 알고 있다. 단지 그걸 주워 먹을 정도로 궁하지 않았을 뿐이다.
프레아의 가정교사가 누군지 궁금했다. 레이첼 후작 정도면 꽤 유명한 교사를 들였을 텐데. 프레아의 행동은 자연인에 가까워 보였다. 마치 자유롭게 풀어서 키운 것 같은 느낌이었다. 프레아는 밀리안이 제게 말을 거는 것이 좋아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그래도 떨어진 건 내가 먹을게. 그러니 다음번에는 내 체리 거절하지 마. 진짜 맛있거든.”
“하아, 알겠으니까. 그놈의 체리 얘기 좀!”
밀리안이 버럭 성을 냈다. 프레아는 그러거나 말거나 열심히 모은 체리를 손수건에 단단히 봉했다. 다행히 체리들은 상처 없이 탱글탱글했다.
프레아는 다시 밀리안의 옆에 가 앉았다. 밤이라 그런지 풀벌레 소리가 찌르르 들렸다. 프레아는 무언가 곰곰이 생각하더니 밀리안을 불렀다.
“밀리안.”
“왜.”
밀리안이 귀찮다는 티를 내며 건성으로 대답했다. 이에 프레아가 고개를 빼꼼 내밀며 물었다.
“왜 여기 혼자 있었어? 여기는 맛있는 음식도 없고, 풀벌레 소리뿐인데.”
“그래서 온 거야.”
“어째서?”
프레아가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물었다. 프레아는 활기찬 곳이 좋았다. 엄마는 집에 있는 일이 별로 없었다. 일이 바빠서이기도 했고, 너무 유능해서이기도 했다.
그래서 어릴 때부터 혼자 노는 것에 익숙했다. 아니, 익숙해져야 했다. 간혹 마리아의 성에 놀러 가기는 했지만 북적북적 재미있게 노는 일은 드물었다.
파티는 언제나 즐겁고 좋았다. 적어도 조용하지 않으니까. 그런데 밀리안은 아닌 모양이다. 밀리안은 한동안 대답하지 않고 가만히 있다 조용히 말했다.
“어차피 다들 내가 없는 게 더 편할 거야.”
“왜 그렇게 생각해? 난 밀리안이랑 있어도 편해. 다들 그럴 거고.”
프레아가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밀리안이 스스로를 그렇게 생각하는 게 싫었으니까. 이에 밀리안이 담담하게 말했다.
“글쎄, 저들이 관심 갖는 건 내가 에드모어라는 것뿐이야.”
“그게 뭐 어때서? 밀리안은 에드모어가 맞잖아?”
프레아의 말에 밀리안이 프레아를 흘겼다. 말귀를 못 알아듣는 게 답답해서였다.
“그건 나도 알아. 그냥 다들 내가 아니라 내 배경만 보는 것 같아서 기분이 나쁘다는 말이었어. 입바른 소리만 하는 그들 장단에 맞춰줄 생각 없다고.”
“나는 아닌데.”
프레아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담백한 목소리로 말했다. 진심이었다. 딱히 밀리안이 에드모어이기 때문에 좋았던 게 아니었다. 프레아의 말에 밀리안이 시선을 맞춰왔다.
“나는 밀리안이 에드모어라서 친해지고 싶은 게 아니었어. 그냥…….”
“그냥 뭐.”
밀리안이 은근히 프레아의 다음 말을 기대하며 무심한 척 물었다. 프레아는 곰곰이 생각하며 한참 턱을 매만졌다. 그러곤 재빨리 두 손을 머리 위로 올려 토끼 행세를 하며 말했다. 아주 명랑한 목소리로.
“토토 같아서 좋아.”
“토토?”
밀리안은 그 이상한 단어는 뭐냐는 듯이 되물었다. 이에 프레아가 확신에 찬 얼굴로 말했다.
“응! 내가 갖고 다니는 토끼 인형 이름이 토토거든. 솔직히 토토보다 밀리안이 더 귀여운 것 같아.”
“귀, 귀여워?”
밀리안은 제게 아무렇지도 않게 귀엽다고 말하는 프레아를 보며 경악을 했다. 보통 밀리안을 평가하는 단어는 한정되어 있었다.
무섭다, 재수 없다, 차갑다, 예민하다, 날카롭다, 오만하다.
그중에 귀엽다라는 단어는 없었다. 밀리안이 당황하고 있다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프레아가 다시 경쾌하게 말했다.
“토토도 밀리안처럼 눈이 붉거든. 나는 밀리안의 붉은 눈이 좋아.”
“다들 핏빛이라고 무서워하던데.”
에드모어 가문의 상징은 붉은색이었다. 혈통을 강하게 물려받을수록 짙고 어두운 붉은 눈을 지니는 게 특징이었다. 밀리안은 에드모어 공작보다도 짙고 어두운 붉은 눈을 지니고 있었다. 오러 자체도 검은색인지 붉은색인지 구분되지 않을 정도로 탁하고 어두웠다.
그래서 다들 밀리안의 눈만 봐도 두려워했다. 지금은 어려서 에드모어 공작보다 못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밀리안이 아버지를 능가할 테니까.
과연 이 애는 자신의 힘을 다 보고도 귀엽다고 할까?
밀리안은 프레아가 밀리안의 눈 색이 어떤 의미인지 모르고 하는 말이라 생각하곤 피식 웃었다. 하여간 마음속이 꽃밭뿐인 여자애였다.
“내 눈엔 아주 예쁜 루비로 보여.”
“너도 나중에는 날 무서워할걸?”
“내가? 밀리안을?”
프레아가 절대 그럴 리 없다는 듯이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밀리안은 그 모습을 보며 잠깐 힘을 개방해 골려줄까 싶었지만 이내 멈추었다. 괜히 기절시킬까 봐. 딱 봐도 아무런 힘도 없어 보이는 애 앞에서 굳이 힘을 드러낼 이유가 없었다.
“난 아직 힘 조절을 잘 못 해. 그래서 실수도 여러 번 했고.”
프레아는 밀리안의 말을 듣고는 이해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인걸? 난 너무 덤벙거려서 늘 사고만 쳐. 밀리안도 조심해, 언제 또 내가 널 다치게 할지도 몰라.”
무서운 맹수처럼 어흥! 하는 손짓을 하며 말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어쩐지 ‘어때? 무섭지?’ 하는 표정이었다. 물론 그래 봤자 하나도 안 무서웠다.
밀리안은 피식 웃었다. 스스로 덤벙대는 걸 안다는 게 웃겼다. 게다가 프레아가 다치게 하는 수준과 제 실수의 수준은 엄연히 달라서 더 우습게 느껴졌다.
눈앞의 여자애는 지나가는 개미 하나도 못 죽일 것 같았다. 물론 그렇다고 밀리안이 살생을 좋아한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사실 밀리안도 자신의 힘이 두려웠다.
“그래서 넌 고작 체리 하나 주려고 여기까지 날 찾으러 온 거야?”
밀리안은 화제를 돌렸다. 힘에 대해 계속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다.
“아, 맞다!”
프레아가 밀리안의 말에 생각났다는 듯이 손바닥을 마주쳤다. 그러고는 밀리안이 무어라 하기도 전에 그의 볼에 가볍게 입을 맞추고 말했다.
“아까 도와줘서 고마워!”
아주 상쾌한 목소리였다. 프레아의 얼굴에 티 없이 맑은 미소가 그려졌다. 밀리안은 한동안 멍하니 그 모습을 보다가 화들짝 놀라며 소리쳤다.
“이, 이게 무슨!”
밀리안이 보드랍고 말랑한 것이 닿은 볼을 매만졌다. 자신이 지금 무슨 일을 당한 건지 몰랐다. 갑자기 뽀뽀하다니. 도대체 어느 장단에 맞춰야 할지 모를 여자애였다.
프레아는 갑자기 홍당무처럼 새빨개진 밀리안의 양 귀를 보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 표정이 너무 순진무구해서 밀리안은 얼굴이 더 홧홧해졌다.
“엄마가 고마운 사람에겐 뽀뽀로 답례해 줘야 한다고 했어.”
“필요 없어!”
어느새 얼굴까지 새빨개진 밀리안이 버럭 성을 내며 일어났다. 도대체 레이첼 후작은 딸에게 뭘 가르친 건지. 고마운 사람한테는 뭐? 뽀뽀? 밀리안에게는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밀리안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성큼성큼 빠르게 걸어나갔다.
“같이 가.”
곧장 프레아가 뒤따랐지만 밀리안은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밀리아안! 같이 가자니까?”
프레아는 볼멘소리를 하며 밀리안을 여러 차례 불렀으나 그는 오히려 속도를 높여 빠르게 도망쳤다.
* * *
결국 밀리안을 놓치고 말았다. 저보다 키도 작은데 어찌나 날쌘지. 금세 저 멀리 사라져 버려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고맙다는 답례를 했으니 되었다고 생각했다.
파티장 안으로 들어서니 마리아가 다른 귀족 영애들과 수다를 떨고 있었다. 피로연이 거의 끝나갈 무렵인데도 마리아는 프레아를 기다리고 있었다. 밀리안을 잠시 만나고 오겠다 하고 마리아를 깜박했던 것을 깨닫곤 서둘러 다가갔다.
“미안, 너무 늦었지?”
“안 그래도 그냥 가야 하나 했어.”
마리아가 은근히 타박하며 말했다. 프레아는 연신 사과를 하며 방긋 웃었다. 그때 마리아 곁에 있던 레나가 어쩐지 마리아의 옆구리를 쿡쿡 찌르며 무언가를 재촉했다. 이에 프레아가 레나를 향해 물었다.
“레나, 나한테 할 말 있어?”
“어? ……그러니까.”
레나가 주저하며 말을 못 했다. 프레아는 자리를 비운 사이에 무슨 재미있는 이야기라도 했나 싶어 호기심이 올라왔다. 무슨 말이길래 저렇게 우물쭈물하는지 궁금했다. 그때 마리아가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니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네 동생 말이야.”
“밀리안?”
“그래, 밀리안 에드모어.”
마리아의 표정은 자못 진지했다. 그녀는 말하면서도 주변을 살피는 것을 잊지 않았다.
“응, 우리 밀리안이 왜?”
프레아가 밀리안을 향해 ‘우리 밀리안’이라고 칭하며 친밀감을 드러내자 마리아가 말을 멈췄다. 입을 달싹이며 망설이는 마리아에게 뭔데 그러냐고 어깨를 가볍게 치며 재촉했다.
혹시 제게 동생을 소개시켜 달라 하는 건 아닌가 지레짐작하면서. 그런 프레아의 예상과는 달리 마리아의 입에서는 뜻밖의 말이 튀어나왔다.
“걔가 사람을 죽였다는데?”
“그게 무슨 말이야?”
프레아가 평소답지 않게 얼굴을 굳히며 되물었다. 마리아의 말이 너무 뜻밖이었기 때문이다. 조금 황당한 것도 같고, 난데없이 남동생이 모함을 받은 것 같아 화가 나기도 했다.
처음 보는 프레아의 차가운 모습에 마리아가 움찔거렸다. 레나 역시 눈을 동그랗게 뜨며 프레아를 바라보았다. 마리아는 조금 떨떠름한 얼굴로 힘을 주어 말했다.
아까 전 밀리안에 대해 생각 없이 내뱉던 때보다 단호함이 묻어난 어투였다. 밀리안이 사람을 죽였다고 확신하는 모양이었다.
“너도 놀란 건 이해하는데, 네가 걱정돼서 말했을 뿐이야. 사람을 죽이다니, 조금 소름 끼치잖아.”
“……소름 끼쳐?”
프레아가 미간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마리아는 왜 그렇게 정색을 하고 그러냐며 오히려 기분 상한 티를 냈다. 그때 마리아의 옆에 있던 레나가 중재에 나섰다. 물론 중재라고 보기에는 일방적으로 마리아의 편을 드는 말이었다.
“에드모어 공작 성에서 간혹 신원 불명의 사체가 나올 때가 있는데 그게 다 밀리안 에드모어 짓이래.”
프레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도무지 두 사람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건지 몰랐다. 에드모어 공작 성에서 사체가 나오는 건 어디에서 들었는지, 그리고 그것이 왜 밀리안 짓이라고 확신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또한 그것이 소문이든 사실이든 너무 악의적이라고 생각했다. 사람을 죽였다니. 열 살 남자애에게서 나올 만한 화제가 아니었다. 물론 밀리안이 조금 예민하고 과격하기는 하다.
하지만 그런 소문까지 돌 정도로 나쁜 아이라고 여겨지지 않았다. 사실 알고 보면 귀엽고 든든한 아이였다.
“확실한 거야?”
프레아가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소문의 근원이 어디인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만약 거짓이라면 당장에 요절을 내주리라 생각했다. 감히 자신의 남동생을 모함하는 사람이 있다면 앞장서서 맞서리라.
프레아가 평소답지 않게 강하게 몰아세우자 레나가 조금 울컥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래도 프레아가 자신을 무시한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난 거짓말 안 해! 우리 성 시녀가 에드모어 공작 성에서 일했었으니 확실하다고.”
“그래? 그럼 그 시녀를 내 앞에 데려와 봐.”
“뭐?”
레나가 황당한 얼굴로 프레아를 쳐다보았다. 그녀가 저를 믿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명백한 증거까지 말해주었는데도 오히려 이제 막 가족이 된 밀리안의 편을 드니 기분이 상했다.
게다가 평소답지 않은 프레아의 행동에 적잖이 당황스러웠다. 늘 싱글벙글 웃고 다니던 애가 표정을 싹 굳히니 제법 매서워 보였다. 그저 걱정돼서 말해준 건데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마치 자신이 거짓말쟁이가 된 기분이었다.
레나는 조금 억울했다. 프레아의 발언은 참을 수 없는 모욕이었다. 레나는 백작가의 여식이었다. 당연히 프레아보다 작위가 낮았다. 그런 자신에게 이리 추궁하는 것은 대놓고 명령하는 것과 같았다. 이에 몹시 수치스럽고 자존심이 상했다.
프레아는 레나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주먹을 꼭 쥐고 있는 것을 보았다. 저도 이런 식으로 강제하고 싶지 않았지만 이대로 넘어가기엔 밀리안의 소문이 꺼림칙했다.
이 기회에 확실히 하고 넘어가는 것이 서로에게 좋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공작 성에서 일했던 시녀라니. 보통 가문을 옮기면 타 가문에 대해 발설하지 않는 것이 불문율이다. 이직할 때마다 가문에 대한 일을 소문낸다면 신용을 잃을 테니까.
프레아의 심장이 쿵쿵거렸다. 처음으로 친구들의 말에 반대한 날이었다. 하지만 그런 말을 듣고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자신에 대한 소문도 아닌데 어쩐지 기분이 좋지 않았다. 밀리안은 그런 애가 아니었다. 적어도 프레아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만해, 프레아. 레나가 울잖아.”
이때 프레아와 레나 사이를 마리아가 가로막았다. 아니, 프레아를 밀치고 레나를 감쌌다는 게 더 정확했다. 마리아가 조금 엄한 얼굴로 제법 어른스러운 체하며 프레아를 탓했다.
“정말 실망이야. 널 위해서 말해준 친구한테 너무한 거 아니야?”
“정말 너무한 게 누군데?”
프레아는 마리아의 말에 더욱 울컥해 반기를 들었다. 너야말로 나한테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따져 묻고 싶었다. 마리아는 프레아가 얼마나 이 결혼에 대해 기뻐하는지 알고 있었다. 그런데 고작 시녀의 말만 듣고 확실하지 않은 일을 마치 사실인 양 여기는 것이 화가 났다.
“그럼 우리가 너무하단 거야?”
마리아가 말도 안 된다는 표정을 지었다. 마리아는 그 시녀가 에드모어 성에서 일했다는 게 충분한 증거가 된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프레아는 억울했다. 그저 사실 확인을 제대로 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친구들과 싸울 생각은 없었다.
‘아니, 솔직히 내가 화낼 수도 있는 일 아냐? 가족을 욕한 거잖아.’
프레아는 충격받은 얼굴로 마리아와 레나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어쩐지 두 사람에게 배신감이 들었다. 꽤 친하다고 생각했는데, 서로 편을 먹고 자신을 몰아세우는 통에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오늘이 무슨 날인 줄 알아?”
프레아가 조금 울먹거리며 말했다. 이에 마리아가 움찔했다. 프레아가 어떤 의미로 이런 질문을 했는지 아는 모양이었다. 마리아가 한숨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나도 하필 네가 가족이 생긴 날에 이런 말을 한 건 참 유감이야.”
“거짓말.”
“뭐?”
프레아가 마리아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딱 잘라 말했다. 마리아는 그런 프레아를 어이없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제 호의를 가볍게 쳐낸 것이 불만인 것 같았다. 프레아가 눈물을 꾹 참으며 말했다.
“정말 유감이었으면 적어도 사실 여부는 확인하고 말해줬겠지.”
“여기서 더 확실한 사실이 어디 있어? 에드모어 성에서 일했던 시녀라잖아.”
마리아가 답답하다는 듯이 프레아를 나무랐다. 그 순간 갑자기 레나가 ‘흐어엉’ 하고 울기 시작했다. 레나가 울자 주변이 웅성거렸다. 이에 레나는 더욱 서럽게 울며 마리아에게 기댔다.
프레아만 나쁜 아이가 된 기분이었다. 울고 싶은 건 자신인데 레나가 울어버리니 울 수조차 없었다. 여기서 자신마저 울게 된다면 형편없이 지게 되는 거니까.
프레아는 엉엉 울고 싶은 것을 꾹 참으며 드레스 자락을 움켜잡았다. 그때 프레아의 뒤에서 누군가가 차갑게 말했다.
“정말 못 들어주겠군.”
“……!!”
언제부터 있었는지 뒤편에서 밀리안이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밀리안의 등장에 프레아의 눈빛이 심하게 흔들렸다.
설마 다 들은 걸까?
프레아는 밀리안이 들었을까 봐 조바심이 났다. 좋은 이야기도 아닌데 그가 듣고 상처를 받을까 봐 걱정됐다. 안 그래도 에드모어라는 것에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 아이였다. 이렇게 입방아에 오르게 된 것을 알면 불쾌해할 게 뻔했다.
밀리안이 등장하자 레나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울음을 뚝 그쳤다. 아니, 꾹 참았다는 말이 더 맞았다. 그만큼 밀리안의 표정은 너무 살벌했다. 마리아 역시 당사자가 나타날 줄은 몰랐는지 적잖이 당황한 듯 보였다.
“거기 갈색 머리 너.”
밀리안이 턱짓으로 레나를 지목했다. 그 모습이 어찌나 오만하고 또 위압감이 드는지 몰랐다. 분명 저보다도 어린 남자아이임에도 그는 한눈에 봐도 지체 높은 공작가의 영식 같았다. 초면부터 반말하는 무례함에도 무어라 할 수 없을 정도로 압도적인 분위기였다.
레나는 저를 지목하는 밀리안을 보며 움찔거렸다. 밀리안의 붉은 눈이 레나를 무미건조하게 바라보았다. 그게 얼마나 차갑고 무서운지 레나는 저도 모르게 손을 덜덜 떨었다.
“그 시녀가 뭘 봤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건 사람의 사체가 아니라 마수의 사체다.”
“네?”
레나는 시체가 아니라 마수의 사체라는 말에 멍한 얼굴로 밀리안을 쳐다보았다. 도무지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이에 밀리안이 낮게 혀를 차곤 사납게 말했다.
“허드렛일을 하다 관둔 모양인데, 신원을 확인할 수 없을 정도로 찢긴 채로 나온다는 건 마수라고.”
“아……!”
레나가 짧은 신음을 내뱉었다. 어쩌면 시녀가 마수를 본 적이 없어서 그것을 시체로 오해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불현듯 떠올랐기 때문이다.
“마수라뇨, 수도에 무슨 마수가 있다는 건가요? 조금 억지 같아요.”
그때 마리아가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밀리안에게 따져 물었다. 마리아는 라즐리 후작 가문의 영애였다. 물론 에드모어에 비해 작위가 낮다. 하지만 무례하기 짝이 없는 밀리안에게 항의할 정도의 힘은 있었다.
제 나름대로 논리적으로 반박하는 마리아를 밀리안이 귀찮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쓸데없이 의심만 많아서는. 밀리안이 짧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야, 일부러 잡아 온 거니까.”
“예?”
마리아가 저도 모르게 경망스러운 톤으로 말했다가 화들짝 놀라며 손으로 입을 막았다. 마수를 피하는 게 아니라 잡아 오다니? 이해되지 않는 행동이었다.
그 위험한 것을 수도에 들인다고 생각하니 소름이 돋았다. 밀리안은 그런 마리아가 가소롭다는 듯이 비릿하게 미소 지었다.
“아, 그 시녀의 말도 일리는 있어. 그거 내가 다 찢어발긴 거거든.”
“헉!”
마수를 찢어발기다니. 마수는 웬만한 기사들도 감당하기 어려워하는 괴물이었다. 그 가죽은 무척 단단하고 억세서 오러를 두르지 않고는 무기가 견디지 못해 부러진다고 들었다.
게다가 오러는 선천적인 재능과 노력이 뒷받침되어야 하는 힘이었다. 마수를 죽였다고 해도 놀랄 일인데 신원을 확인할 수 없을 정도로 엉망으로 만들어놓다니.
에드모어 공작 가문이 특별한 힘을 지니고 있다는 건 알았지만 그게 열 살짜리 남자애에게도 해당하는 줄은 꿈에도 몰랐다. 레나가 아까보다도 더욱 세차게 바들바들 떨며 두려워했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밀리안이 마리아와 레나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그가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두 사람의 얼굴은 하얗게 질렸다. 밀리안은 두 사람에게 바짝 다가가 프레아에게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게 속삭였다.
“근데 그 소문은 못 들었나 보지?”
“소, 소문이요?”
마리아가 애써 시선을 맞추며 되물었다. 여기서 그의 기세에 눌려 눈을 내리깔게 된다면 밤새 자존심이 상해 견딜 수 없을 것 같아서였다.
레나는 귀족의 명예고 뭐고 마리아에게 의지해 와들와들 떨고 있었다. 밀리안이 눈을 붉게 빛내며 싸늘히 웃었다. 분명 입은 웃고 있는데 눈은 차갑기 그지없었다.
“내가 뒷담화를 무척 싫어한다는 거 말이야. 못 들었다면 코헨 후작 가문에 물어봐. 내가 그 집 아들을 아주 반 죽여놨거든.”
“……!!”
“이쯤 하면 알아들었을 테니 어서 꺼져.”
“죄, 죄송합니다!”
마리아는 코헨 후작의 영식까지도 무차별적으로 때렸다는 밀리안의 말을 듣자마자 곧바로 무릎을 꿇고 잘못을 빌었다. 마리아도 언제든지 코헨 후작의 영식처럼 될 수 있다는 의미로도 해석되는 탓이었다.
물론 영식처럼 자신을 때리지는 않더라도 가문을 힘입어 제게 보복할 수 있는 위치였다. 게다가 이번 일은 명백히 마리아와 레나의 실수였다. 확실하지도 않은 일에 에드모어 가문을 모함한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만약 소공작에 대해 함부로 말하고 다닌 것을 제 부모가 알게 되면 크게 경을 칠 일이었다. 밀리안은 꺼지래도 가지 않고 무릎을 꿇는 영애들을 바라보았다. 누굴 귀찮게 하려고 이렇게 쇼를 하나 싶었다.
밀리안은 두 사람이 그러거나 말거나 거칠게 머리를 쓸어 올리며 뒤를 돌아 프레아에게 다가갔다. 프레아는 제 앞에 와서 손을 내미는 밀리안을 빤히 바라보았다. 도대체 무슨 말을 했길래 두 사람이 바짝 엎드리는지 모르겠다.
마리아가 저렇게 놀라는 모습도 처음이었다. 마리아는 늘 당당했으니까. 밀리안이 프레아의 앞에서 손을 얕게 흔들었다. 어서 잡으라는 뜻 같았다.
“뭐해, 집에 가자.”
“어?”
“데리고 오라고 해서 와봤더니 어쭙잖은 것들한테 밀리기나 하고.”
“……나, 나는.”
“됐고, 얼른 가자고.”
밀리안이 귀찮다는 듯이 프레아의 손을 덥석 잡으며 말했다. 프레아는 밀리안의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어린아이 손답지 않게 딱딱하게 굳은살이 박여 있었다.
밀리안은 프레아를 문 쪽으로 끌었다. 프레아는 그런 밀리안의 손을 놓칠세라 바르게 고쳐 잡았다. 이에 밀리안이 프레아 쪽을 보며 피식 웃었다.
그 웃음을 보고 있자니 프레아는 기분이 이상했다. 어쩐지 그가 대단해 보였다. 프레아는 그저 멍하니 밀리안을 홀린 듯 바라보며 뒤따라갔다.
* * *
결혼식이 지나고 열흘이 지났다. 프레아와 에밀리는 수도에 있는 에드모어 성으로 거처를 옮겼다. 레이첼 후작 성은 본래 수도 밖에 있었다.
에밀리가 황성에 자주 드나드니 수도에 별채를 살 법도 한데 구태여 후작 성에서 지내는 것을 고집했다. 프레아가 수도로 이사 가자고 조를 때면 으레 거절하는 말이 있었다.
‘프레아. 자고로 집이란 건 직장과 멀리 떨어진 곳이어야 해. 그래야 편안히 쉴 수가 있거든.’
말은 저렇게 해도 직장에서 살다시피 한 엄마라 별로 설득력이 없었다. 하지만 매번 그런 식으로 거절하니 프레아도 수도에 집이 생기는 것을 반 포기한 상황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꿈쩍도 하지 않던 에밀리가 쉽게 에드모어 성으로 거처를 옮기다니. 프레아는 엄마가 정말 에드모어 공작을 사랑해서 그런 거라고 확신했다.
그렇지 않다면 제 발로 수도에 걸어 들어갈 리 없다고 생각했다. 엄마가 자기 뜻을 꺾는 걸 보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프레아는 제 이름을 입에서 한참 우물거렸다.
프레아 레이첼 에드모어.
프레아 레이첼에 에드모어만 붙었을 뿐인데 어감이 무척 생소했다. 마치 새로 이름을 받은 느낌이었다. 재혼이라고 해서 에밀리의 작위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가주끼리의 결혼은 각자의 가문을 그대로 이어갈 수 있었다.
단, 자식이 있는 경우에는 자식들이 양쪽의 성을 순차적으로 물려받게 된다. 이후 부모가 죽으면 어떤 작위를 물려받을지 결정하게 되며, 외동인 경우 두 작위를 모두 물려받게 되어 있었다.
프레아가 침대에서 뒹굴뒹굴하며 따분한 표정을 지었다. 피로연에서 마리아와 레나와 싸운 이후, 프레아는 그들 모임에 참석하지 않았다. 아직 화가 안 풀려서는 아니었다. 그냥 다시 그 모임에 들어가는 것이 어색하고 싫어서였다.
밀리안까지 합세해서 제대로 무안을 주었는데 그들이 가만히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어쩌면 그 모임에서 저를 잔뜩 욕하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도무지 가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프레아는 자신이 도마 위에 올려져 다져지는 상상을 하며 인상을 찌푸렸다. 지금까지도 마리아에게서 편지 한 통 없는 것을 보면 저와 화해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하긴 그렇게 사람들 앞에서 망신을 당했는데 마리아 성정상 사과를 해올 것 같지 않았다.
그 모임을 주도하는 건 마리아 라즐리였다. 그러니 그녀에게 밉보인 자신이 다시 그 모임에 들어갈 수 있을 리 없다. 어쩌면 다른 모임을 찾아야 할지도 몰랐다.
프레아가 한숨을 푹 쉬었다가 다시 기운을 차리기라도 했는지 배시시 웃었다. 슬픈 일보다 기쁜 일이 더 커서였다.
“프레아 레이첼 에드모어.”
프레아가 제 이름을 소리 내어 말했다. 이름을 부르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무척 좋았다. 마리아의 일은 유감이지만 그것보다도 지금 가족과 함께 복작거리는 것이 더 좋았다.
당분간 마리아에 관한 일은 잊어버려야겠다고 생각했다. 뭣하면 다른 모임에 들어가면 그만이다. 어차피 그 모임에 계속 어울리던 건 심심해서였으니까. 그때 옆에 있던 흰 토끼 인형이 제 귀를 손으로 접으며 앓는 소리를 했다.
“이러다 귀에 딱지가 앉겠어. 도대체 몇 번을 말해야 직성이 풀리는 거야?”
새침한 남자아이 같은 목소리였다. 아니, 여자인지 남자인지 모를 애매한 음성이었다. 프레아는 인형이 말을 하는데도 대수롭지 않게 히죽거렸다. 이미 인형이 말할 수 있다는 걸 아는 것처럼.
“토토, 이제 나 레이첼 에드모어야.”
“그래, 이미 백 번도 넘게 말했어.”
토토가 앙증맞은 발로 아장아장 프레아에게 걸어왔다. 토끼 인형이 두 발로 걷는다. 게다가 사람처럼 말도 할 줄 알았다.
남이 보면 놀랄 일이었으나 프레아는 놀라지 않았다. 토토가 말을 하게 된 건 프레아가 한 일이었으니까. 어느새 코앞으로 다가온 토토가 프레아의 입을 앞발로 턱 하니 막으며 말했다.
“그만.”
“헤헤, 알았어.”
프레아가 헤실헤실하며 푹신한 토토의 손을 떼어냈다. 온기 하나 없는 그저 평범한 인형이었지만 사실은 그 안에 바람의 정령이 봉인되어 있었다.
물론 그를 인형에 봉인한 건 프레아 자신이었다. 그것도 무의식적으로 봉인하는 바람에 해제하는 방법을 몰랐다. 토토의 말로는 훈련해야 한다는데 프레아는 정령사 훈련을 받아본 적도 없고 오히려 힘을 숨기고 있었다.
“그렇게 좋아?”
“당연하지. 너도 알잖아, 내가 얼마나 가족을 바라왔는지.”
“알긴 알지만, 에드모어라니 조금 위험할 것 같은데.”
토토가 프레아의 옆에 털썩 앉으며 말했다. 토토는 아주 오랜 세월을 살아온 정령이었다. 지금의 헤로스 제국뿐 아니라 그 이전 나라들의 흥망을 모두 지켜봐 온 존재였다.
조상급의 나이를 먹은 정령에게 ‘토토’라는 귀여운 이름을 지어준 것은 순전히 프레아의 취향이었다. 사실 그에게는 ‘윈드 샬로만데라’라는 멀쩡한 이름이 있었다.
처음 프레아를 만났을 때 윈드는 깜짝 놀랐었다. 몇백 년에 한 명 나올까 말까 한 영류(영혼의 흐름)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저도 모르게 영류에 이끌려 다가간 것이 화근이 되어 그대로 프레아의 애착 인형 신세가 되어버렸다.
정령사들은 모두 정령 협회에 소속되어 보호받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상하게 프레아는 일반인 행세를 하며 힘을 숨기고 있었다. 정령사는 선천적 재능도 중요하지만 훈련이 필요했다. 실제로 정령사의 자질이 있다는 걸 모르고 죽는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그런 점에서 아무런 훈련 없이 저와 계약한 것도 모자라 사물에 강제로 봉인한 것은 엄청난 재능이었다. 이대로 썩히기엔 아쉬워 여러 번 정령 협회에 가보라고 제안했지만 프레아는 엄마가 비밀로 하라 했다고 말할 뿐이었다.
“에드모어가 왜 위험하다는 거야?”
“그야 그들은 피에 반응하는 혈통이니까.”
“피에 반응한다고?”
프레아가 영문을 몰라 물었다. 순진무구한 표정으로 되묻는 프레아를 보며 토토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렇게 세상에 어두우니, 원. 만약 귀족으로 태어나지 않았으면 마법사의 실험체가 되어 요절했을 게 뻔할 아이였다. 토토는 한껏 인자한 목소리로 차근차근 설명했다.
“그들의 오러가 붉은색이라는 건 알고 있지?”
“응, 그건 들었어. 붉은색이라니 멋지다.”
하여간 붉은색이 뭐가 좋다고 저렇게 환장하는지. 토토가 진저리가 난다는 얼굴로 덧붙였다.
“에드모어는 오러가 검붉은색에 가까울수록 피에 대한 면역이 떨어져. 피를 보면 저도 모르게 흥분해서 큰일을 저지를 수도 있는 게 에드모어거든. 하여튼 가까이해서 좋을 게 없는 작자들이야. 특히 너처럼 세상 물정 모르는 어린애는 말이지.”
“내 가문 욕하지 마.”
프레아가 조금 감정 상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쨌든 프레아도 에드모어였다. 피 한 방울 섞이지는 않았지만. 그런 그녀에게 에드모어를 욕하는 것 같은 토토의 발언은 참을 수 없었다.
피에 대한 면역이 떨어지다니. 여태껏 본 에드모어 공작은 무척 신사적인 사람이었다. 게다가 기사 가문에서 강한 힘을 지닌 것은 오히려 자랑스러워해야 할 일이지 두려워해야 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이에 토토가 앙증맞은 손가락을 내저으며 덧붙여 말했다.
“이건 욕이 아니라 사실을 말한 거야. 게다가 네 남동생이라는 애 엄청난 힘을 지니고 있던데? 선대 에드모어라고 해도 믿을 정도야.”
“우리 밀리안이 그렇게 대단하단 말이지?”
프레아는 제 남동생 칭찬에 눈을 밝히며 대답했다. 칭찬이 아니라 경고였음에도 프레아는 들리지 않는 모양이다. 누가 어린애 아니랄까 봐 듣고 싶은 대로 듣고 있었다.
토토는 고개를 내저었다. 기껏 설명해 줬더니 더 좋아라 하는 것 같아서 답답했다. 도무지 말이 안 통하는 인간이었다. 토토가 포기하듯이 하품하며 말했다.
“하여튼 가까이하지 마. 네 능력도 금방 눈치챌 수 있어. 원래 천재는 천재를 알아보는 법이거든.”
“내가 천재야?”
“그럼. 윈드 샬로만데라를 무차별적으로 인형 속에 가둔 자인데 천재지. 너 잊었나 본데 나 대단한 정령이야. 고작 이런 인형 따위에 들어가 있다고 무시하면 안 돼.”
“무시 안 해. 귀여워하지.”
프레아가 토토를 껴안고 얼굴을 비볐다. 이미 프레아의 질척거림에 익숙해진 토토는 가만히 있었다. 포기하는 것이 빠르다는 걸 이미 몇 년에 거쳐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때 누군가 방문을 두드렸다.
“아가씨, 라즐리 후작가에서 편지가 왔어요.”
“들어와.”
외부인의 음성이 들리자마자 토토는 인형인 척 움직임을 멈추었다. 시녀가 프레아의 방에 들어와 편지를 내밀며 말했다.
“누구랑 얘기하는 소리가 들렸는데, 혼자 계셨어요?”
“아, 토토랑 얘기했어.”
“인형 놀이를 하셨군요.”
시녀는 토토를 쓱 보고는 프레아가 인형 놀이를 했다 판단했다. 하긴, 누가 인형이 말할 줄 안다고 생각할까? 프레아는 어깨를 으쓱이며 받은 편지를 뜯었다.
열흘 만에 온 편지치고는 퍽 친근한 내용이었다. 새로 이사를 했으니 놀러 가도 되냐는 말과 함께 마지막에 짧게 일전에는 미안했다고 적혀 있었다.
이게 끝?
프레아는 어쩐지 아무렇지 않게 편지를 보내온 마리아에게 오묘한 기분이 들었다. 아예 절교 선언을 보낼 줄 알았는데 먼저 미안하다고 한 것도 모자라 놀러 오고 싶다니.
이상한 일이었다. 그래도 꽤 오래 친하게 지낸 친구들이니 한 번쯤은 용서해 주어도 되지 않을까 싶어 시녀에게 말했다.
“와도 좋다는 답신을 보내.”
“알겠습니다.”
* * *
마리아의 방문은 생각보다 빨랐다. 답신을 보낸 지 얼마 되지 않아 방문한 마리아가 프레아에게 달려오며 한껏 과장된 목소리로 말했다.
“보고 싶었어!”
“……어서 와.”
마리아가 먼저 이렇게 살갑게 군 적이 있었던가. 프레아는 얼결에 마리아를 환영했다. 마리아는 프레아가 그러거나 말거나 들고 있던 꽃다발을 프레아에게 넘기며 상쾌하게 말했다.
“네가 좋아하는 아이리스야. 빈손으로 오기 뭐해서.”
“아, 고마워.”
프레아가 어색하게 꽃을 받아 들곤 집사에게 넘겼다. 아이리스는 레이첼 후작 가문의 상징 꽃이었다. 집사는 프레아에게 받은 꽃을 꽃병에 담아서 방에 두겠다고 말했다.
프레아와 마리아는 곧바로 귀빈실로 걸음을 옮겼다. 마리아는 복도를 걷는 내내 성 이곳저곳을 구경하며 재잘거렸다. 생각보다 활기찬 모습에 어안이 벙벙했다. 잔뜩 화낼 줄 알았는데.
귀빈실에 도착하자 시녀들이 다과를 내왔다. 프레아는 달콤한 핫초코를 마셨지만 마리아는 쓰기만 한 홍차를 마셨다. 예전 같았으면 ‘넌 아직도 핫초코 먹니?’ 하고 새침하게 물었을 마리아지만 이번에는 그러지 않았다.
“레나 말이야.”
“응?”
프레아는 마리아가 레나 이야기를 하는 것에 놀라 쳐다보았다. 이제야 본색을 드러내는 건가 싶었다. 그냥 넘어가진 않을 거라 짐작했으나 바로 본론부터 이야기할 줄은 몰랐다.
프레아는 바짝 긴장했다. 만약 마리아가 또 화를 낸다면 저도 할 말은 제대로 해야겠다고 단단히 마음먹었다. 마리아가 차를 한 모금 우아하게 마신 후 말했다.
“어쩜 제대로 확인도 안 하고 그런 이야기를 하나 몰라. 정말 나도 깜박 속았지 뭐야.”
“…….”
예상 밖의 말에 프레아가 허탈하게 마리아를 바라보았다. 이건 마치 레나를 욕하는 것 같았다.
“너도 알겠지만, 레나가 좀 자격지심이 있잖아. 백작이든 후작이든 그게 뭐 중요하다고 그러는 건지, 좀 우습지 않아?”
“하나도 안 우스운데.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해. 나도 좀 지나친 감이 있었고.”
“…….”
마리아는 말문이 막혔는지 눈을 동그랗게 뜨고 프레아를 바라보았다. 그러기를 한참, 마리아가 새침하게 웃으며 말했다.
“하여간 프레아는 착해 빠졌다니까. 감싸줄 필요 없어. 어차피 그날 이후로 레나는 우리 모임에서 빼버렸으니까.”
프레아는 할 말을 잃었다. 고작 한 번 실수한 걸 가지고 모임에서 빼버리다니. 프레아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친구가 그렇게 쉽게 뗐다 붙였다 할 수 있는 걸까. 그럼 마리아에게 자신도 그런 친구이지 않을까.
사실 레나가 제게 잘못한 건 맞지만 본래부터 나쁜 의도를 가지고 한 말이 아니라는 것쯤은 프레아도 알고 있었다. 그냥 기분이 나빠서 저도 모르게 화를 냈을 뿐. 금방 화해할 수 있는 일이라 생각했다.
게다가 레나의 성격상 그런 일을 주도적으로 모함했을 것 같지도 않았다. 어쩌면 마리아가 주동했을지도 모르겠다. 프레아가 아무런 반응이 없자 마리아가 재촉하듯 이야기했다.
“그러니까 이제 모임에 나와도 돼. 걸리적거리는 애는 치웠어.”
‘걸리적거리는 애?’
프레아는 마리아의 마지막 말에 충격을 받았다. 3년을 같이 지낸 친구를 함부로 말하는 마리아가 어쩐지 낯설었다. 마리아에겐 우리가 친구가 아니었구나. 프레아는 그제야 마리아가 저를 찾아온 이유를 조금 알 것 같았다.
자신이 레이첼 에드모어가 되었으니까. 그게 아니라면 자존심 센 마리아가 먼저 한 수 접고 들어올 이유가 없었다. 레이첼과 에드모어 모두에게 척을 지는 것은 라즐리 가문의 입장에서는 손해였다.
마리아는 은근슬쩍 선심 쓰듯 다시 모임을 제안하는 걸 통해 나름대로 자존심을 지키려는 모양이었다. 결국 진심으로 미안해서 온 게 아니어서 프레아는 실망스러웠다.
그래도 친구라고 생각했는데……. 어쩐지 씁쓸한 기분이다. 프레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모임에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마침 이번 주에 우리 성에서 티타임을 갖기로 했어, 올 거지?”
마리아는 당연히 프레아가 올 거라 생각하며 말했다. 권하는 것이 아니라 강요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자신이 이렇게까지 했는데 설마 거절할 건 아니지? 하는 표정이었다.
“당분간은 집에서 쉴 거야.”
프레아가 그런 마리아의 기대를 깨며 말했다. 단호한 거절에 마리아가 얼굴을 살짝 찡그렸다.
“열흘이면 충분히 쉰 거 아니니? 그렇게 게을리 살면 안 돼.”
은근히 프레아를 타박하는 마리아를 보며 프레아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티타임에 가지 않는 것과 게으름이 무슨 관련이 있는 걸까. 프레아는 마리아에게 뭘 기대하여 방문을 허락했나 싶었다.
프레아의 반응이 떨떠름한 것을 본 마리아가 넌지시 물었다. 은근히 눈치를 살피는 모습이었다.
“설마 일전에 내가 레나 편을 든 것 때문에 그러는 거야?”
“아니야.”
“아니라면 티타임에 꼭 와.”
“생각해 볼게.”
“생각할 게 뭐 있어? 어차피 너 할 일도 없잖아?”
마리아의 말에 프레아가 마리아를 쓱 쳐다보았다.
‘사과하러 온 건지 싸우러 온 건지 확실히 했으면 좋겠는데.’
도대체 마리아가 뭘 하고 싶어서 온 건지 모르겠다. 숙이려고 온 건지 따지려고 온 건지. 이건 마치 억지로 끌려온 것 같은 느낌이었다. 이쪽에서는 오라고 한 적도 없었는데.
마리아의 말처럼 예전의 프레아는 하는 일이 별로 없었다. 성이 수도 밖에 있던 탓에 할 수 있는 일은 한정되어 있었고, 수도로 가는 데만 시간이 꽤 걸려 마음먹고 가야 했다.
게다가 수도 밖은 밤에 위험하므로 해가 지기 전에 돌아와야 해서 제약이 컸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마음만 먹으면 수도 이곳저곳을 볼 수 있을 정도로 에드모어 성은 중심지에 있었다.
수도는 볼거리가 무궁무진했다. 그동안 위험하다며 어둑해지기 전에 성에 돌아가야 했던 것도 더는 지키지 않아도 되었다. 수도 밖과 달리 수도 안은 치안이 잘되어 있으니까. 결정적으로 자신에게는 함께 야시장에 놀러 가줄 남동생도 생겼다. 심심할 틈이 없다 이 말이다.
설령 여전히 할 일이 없다고 한들 제게 무례하게 구는 마리아의 말을 더는 용납할 수 없었다. 친구라고 해서 아무렇게나 대해도 되는 것은 아니었다. 프레아가 마리아를 향해 조금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쨌든 한 번은 해야 하는 말이었다.
“마리아, 정작 내게 해야 할 말은 쏙 빼고 있잖아. 티타임에 초대하기 전에 내게 할 말이 있지 않아?”
“내가 뭘?”
마리아가 영문 모르겠다는 얼굴로 물었다. 프레아는 담담히 마리아를 응시했다. 직설적으로 표현해야 알아들을 모양이다.
“편지로 딸랑 미안하다고 하면 다야?”
“미안하다고 했잖아. 뭘 더 해야 하는데?”
“뭘 더 하라는 게 아니라 진심으로 사과하라는 말이었어. 너 나한테 하나도 안 미안한 것 같아.”
“…….”
마리아는 프레아의 말에 얼굴을 굳혔다. 사실 프레아의 말이 맞았다. 아버지가 억지로 보내서 온 거였으니까. 프레아에게 먼저 사과 편지를 보낸 것도 꽤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다.
모임의 중심은 자신이어야 하는데 어쩐지 프레아에게 빼앗길 것만 같았다. 쓸데없이 재혼 제도는 왜 있어서 프레아에게 날개를 하나 더 달아주는 걸까? 프레아는 이미 근사한 날개가 달려 있었는데. 또 다른, 심지어 더한 날개까지 달리려고 하니 불만스러웠다.
마리아는 이 모든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저보다 잘나가는 친구는 필요 없었다. 그래서 일부러 레나의 말을 듣고 꾀를 내어 프레아를 내쫓으려고 쇼를 벌였다.
그렇게 잘 끝나리라 생각했던 걸 에드모어 소공작이 파투 낸 것도 모자라 아버지까지 불같이 화를 내니 기분이 몹시 상했다. 마리아가 남에게 먼저 수그리고 들어가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래서 상당히 수치스럽고 모욕감이 들었다. 하지만 마리아는 이를 악물고 작은 소리로 말했다. 이대로 프레아와 화해하지 않고 돌아갈 수는 없었다.
“……미안해.”
“그래, 받아줄게. 그리고 내가 티타임에 오길 원한다면 레나를 다시 모임에 참여시켜 줘.”
“뭐? 그건 안 돼!”
마리아는 혹시 프레아가 자신이 레나를 부추겨 일을 저지른 것을 알게 될까 봐 발끈하며 반대했다. 이미 오지 말라 한 것을 번복하는 것도 싫었다. 마리아의 거절에 프레아가 단호하게 말했다.
“그럼 나도 안 가.”
“프레아 레이첼!”
“마리아 라즐리. 난 이제 레이첼 에드모어야. 이름을 똑바로 불러줬으면 좋겠어.”
“…….”
마리아가 부들거리며 아무 말도 못 했다. 프레아가 자신에게 이럴 순 없다고 생각했다. 늘 웃으며 제 말을 들어줬던 순진한 애가 갑자기 왜 저러나 싶었다.
프레아는 그런 마리아를 위로할 생각도 않고 눈앞의 핫초코를 모두 마셨다. 그러곤 친구에 대한 마지막 예의를 담아 정중하게 권했다.
“이만 돌아가.”
“잠시만……!”
마리아의 말을 채 기다리지 않고 옆에 머물고 있던 시녀에게 말했다.
“마리아 영애가 돌아간다고 하네. 잘 모셔다드려.”
“네, 아가씨.”
명백한 축객령에 마리아가 망연한 얼굴로 프레아를 바라보았다.
“그럼 좋은 소식 부탁해.”
프레아는 마리아에게 마지막 말을 남기곤 귀빈실을 빠져나왔다. 뒤에서 무어라 하는 소리가 들렸지만 집중하지 않았다. 한 번 마리아에게 마음이 떠나니 끊어내는 것도 손쉬웠다.
친구란 게 이렇게 가벼운 거였구나. 프레아는 어쩐지 우울해졌다. 귀족 사이에서의 관계는 정말 딱 이 정도구나 싶어서.
* * *
얼마 뒤 마리아에게서 레나가 모임에 다시 참석하기로 했다는 편지를 받았다. 프레아는 조금 모질게 굴었던 게 미안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마리아의 뜻대로 휘둘릴 생각도 없었다. 그동안은 친구라는 명목하에 눈감아준 일들이 많았지만 앞으로는 그러지 않을 작정이었다.
“아가씨, 공작님과 마님이 기다리세요.”
“아, 갈게!”
프레아는 시녀의 재촉에 서둘러 옷매무새를 정돈하고 공작의 서재로 찾아갔다. 부모님이 함께 프레아를 따로 부른 일은 처음이라 내심 긴장했다.
무슨 말을 하시려는 걸까? 프레아가 콩닥거리는 심장을 애써 감추려 토토를 꼭 끌어안은 채 걸음을 옮겼다. 토토는 평상시처럼 인형인 척 꼼짝도 하지 않았다.
집사의 안내를 받아 서재로 가니 에밀리와 진이 프레아를 반갑게 맞이했다. 그 모습을 보자마자 프레아의 표정이 흐물거리며 풀어졌다.
혹시 자신이 잘못이라도 한 걸까 걱정했던 것이 무색하게 그들의 표정이 무척 온화한 덕이었다. 프레아가 반가운 마음에 헤헤거리며 두 사람에게 다가가다 말고 멈칫했다. 서재에 둘 말고도 한 사람이 더 있었다.
“어서 와라.”
진이 프레아에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프레아는 드레스 자락을 살짝 들어 올려 예를 갖추었다. 그러곤 옆에 서 있는 남자를 빤히 바라보았다.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낯선 남자는 20살 남짓해 보였다. 그는 물빛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뜨린 채 단안경을 쓰고 있었다. 물빛 머리 색이 특이하여 이목을 끄는 사람이었다. 프레아가 궁금해한다는 걸 알기라도 하듯이 남자가 예를 올리며 말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프레아 아가씨. 앞으로 아가씨에게 정령술을 알려줄 브레이크 훗센입니다.”
“에에?”
프레아가 당황한 얼굴로 진 옆에 있는 에밀리를 빤히 바라보았다. 이곳에는 에밀리뿐만 아니라 진도 함께 있었다. 그동안 비밀로 했던 걸 이렇게 대놓고 드러내도 되는 건가 싶어 혼란스럽기까지 했다.
토토의 성화에 여러 번 선생님이 필요하다 요청해도 거들떠보지도 않던 에밀리였다. 그런 엄마가 이렇게 갑자기 정령사를 제게 붙이다니. 상상도 해보지 못한 일이었다. 이에 에밀리가 다정히 웃으며 말했다.
“원래 결혼하자마자 모셔올 생각이었는데 생각보다 늦어졌단다.”
“엄마, 비밀 아니었어요?”
“언제까지고 비밀로만 할 순 없으니까.”
에밀리가 조금 씁쓸한 얼굴로 말했다. 프레아는 멍하니 에밀리를 바라보았다. 엄마가 어쩐지 슬퍼 보였다. 그러고 보면 프레아가 정령술에 재능이 있다는 걸 알게 됐을 때도 표정이 좋지 못했다.
프레아는 그것이 조금 신경 쓰였지만 애써 모른 척했다. 브레이크가 안경을 추키며 프레아가 들고 있는 토토 인형을 유심히 보았다. 눈싸움 끝에 브레이크가 프레아에게 물었다.
“거기에 정령이 들어 있는 건가요?”
“음…….”
“흥! 다 알면서 뭘 물어봐?”
브레이크의 물음에 프레아보다도 토토가 먼저 대답했다. 이미 다 들킨 마당에 속 시원히 말이나 해보자는 심산 같았다. 하긴, 인형인 척 사는 게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겠지. 어쩐지 토토에게 미안했다.
브레이크는 프레아에게 잠시 실례하겠다고 하곤 토토를 들어 이리저리 살폈다. 토토가 바둥거리며 불편한 심기를 대놓고 드러냈으나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바람의 정령이군요.”
“흥! 그냥 바람의 정령이 아니다.”
“그렇네요. 아주 오래 산 늙은이네요.”
“뭐야?”
토토가 잔뜩 성난 표정을 지었다. 그 순간 브레이크의 머리카락이 얕게 일렁였다. 토토가 바람을 몰아온 탓이었다. 프레아가 놀라 토토를 떼어내려 하자 브레이크가 괜찮다고 손짓했다. 그러곤 토토가 무섭지도 않은지 담담하게 프레아를 보며 말했다.
“좋습니다. 대충 아가씨의 능력을 알겠군요. 수업은 내일부터 바로 시작하죠.”
“이봐! 내 말 아직 안 끝났어!”
토토가 외침과 동시에 바람이 브레이크를 세게 내려쳤다. 그 순간 브레이크 곁에 인어 형상의 정령이 순식간에 나타나 물 장벽을 세워 막았다.
프레아는 그 인어를 보고 눈이 또랑또랑해졌다. 인어라니! 인어는 처음 보았다. 게다가 물을 다루는 걸 보니 물의 정령인 것 같았다.
‘우와 정령사는 처음 봐.’
프레아는 자신을 제외한 다른 정령사를 본 건 처음이었다. 게다가 물의 정령도 처음이었다. 프레아가 선망을 담은 얼굴로 브레이크를 바라보았다.
어쩐지 자유자재로 정령을 다루는 모습이 멋있어 보였다. 저도 그렇게 토토를 잘 다루게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때 인어 형상을 한 물의 정령이 토토를 향해 수선을 떨며 말했다.
“어머! 경박하게 이게 무슨 짓이에요?”
“뭐야, 어쩐지 물비린내가 난다 했더니 물의 정령사였어?”
토토가 앞발로 코를 막자 발끈한 물의 정령이 소리쳤다.
“뭐? 물비린내? 지금 저한테 그런 거예요?”
“마린, 그만하십시오.”
브레이크가 제 정령더러 마린이라고 부르며 말렸다. 마린은 제게만 무어라 하는 것에 못마땅해하며 입을 비쭉였다.
“흥! 맨날 나만 뭐라고 해.”
새침하게 소리친 마린은 말릴 새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프레아는 마린이 사라진 것이 아쉬워 빈자리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만져보고 싶었는데……. 나중에 수업이 시작되면 부탁드려 봐야겠다. 마린이 퇴장하자 브레이크가 토토를 향해 제법 대우하며 말했다.
“무례했다면 죄송합니다, 윈드 샬로만데라 님.”
“응? 뭐야, 너 내 이름을 어떻게 알아?”
“지금은 아니지만 예전에 정령 협회에 있었거든요. 그곳에 당신의 기록이 꽤 많습니다.”
“별일이군.”
토토는 제 진가를 알아봐 주는 인간을 만난 것에 흡족했는지 크게 일렁이던 바람을 없앴다. 하여간 칭찬에 약하다니까. 프레아는 토토의 반응을 보며 키득거렸다.
나이도 많으면서 귀여운 짓만 골라 하는 정령이었다. 진이 인형이 말을 하고 물의 정령이 소환되는 상황을 모두 지켜보더니 에밀리에게 말했다.
“귀엽기만 한 줄 알았는데 대단한 딸이 생긴 거였습니다.”
“그쪽 아들도 대단하니 서로 윈윈이네요.”
에밀리가 피식 웃으며 말을 받았다. 프레아는 그런 두 사람을 말똥히 바라보았다. 한동안 프레아를 물끄러미 응시하던 브레이크가 나직이 말했다.
“잠시만 실례하겠습니다.”
그러더니 커다란 손을 프레아의 이마에 가져다 대었다. 그의 손이 닿자마자 시원한 느낌과 함께 무거웠던 몸이 가벼워졌다. 항상 있던 피곤함이 가신 기분이었다.
“계약한 지 얼마나 되셨습니까?”
신기해하는 프레아에게 브레이크가 물었다. 프레아는 잠시 머릿속으로 셈을 하더니 선뜻 대답했다.
“3년 정도 된 거 같아요.”
“그럼 그동안 몸이 무겁고 움직이는 게 힘들지는 않았습니까? 자주 넘어진다거나 잠이 많아졌다거나.”
“어? 어떻게 알았어요? 저 정말 잘 넘어지는데. 그리고 잠도 엄청 자요.”
프레아는 에밀리에게도 말하지 않은 증상을 브레이크가 콕 집어 묻자 놀란 얼굴로 되물었다. 이에 브레이크의 얼굴에 그늘이 졌다. 에밀리의 얼굴에도 수심이 가득해졌다. 브레이크가 프레아의 이마에서 손을 떼며 말했다.
“역시 몸에 무리가 가고 있던 모양입니다.”
“왜요?”
프레아가 순진무구한 얼굴로 질문했다. 그것 말고는 딱히 크게 아픈 곳이 없어서였다. 그 모습을 가만히 보던 브레이크가 차근차근히 설명했다.
“정령과 계약만 한다고 끝나는 게 아니라 그렇습니다. 계약 이후에도 정령과 교감하고 계속해서 영류를 순환시켜야 하죠. 그렇지 않으면 자주 몸이 무겁고 피곤이 몰려옵니다.”
“하지만 그동안 딱히 불편한 건 없었어요.”
“그건 아가씨의 영류가 보통 사람들보다 몇 배는 맑고 깨끗해서 그 정도로 끝난 겁니다. 만약 다른 정령사였다면 벌써 영류가 엉망이 되어 수명이 단축됐을 겁니다. 거기다…….”
브레이크가 설명하다 말고 토토를 쓱 쳐다보더니 이어 말했다.
“아마 윈드 님이 일부러 힘을 제어해서 아가씨를 도운 것 같군요. 맞습니까?”
“그래, 이 녀석이 훈련받을 생각이 없다니 내가 인위적으로 순환시키는 방법밖엔 없었지. 그것마저도 이 녀석이 천재라 가능했던 거고.”
“그런……!”
에밀리가 동요하며 소리쳤다. 브레이크가 시선을 에밀리에게로 옮겼다.
“부인께서 결단을 서둘러 하시길 잘하셨습니다. 조금만 늦었어도 위험할 뻔했습니다. 이럴 걸 어느 정도 예상하신 겁니까?”
“예상은 했지만 이렇게 위험할 줄은 몰랐네. 그동안은 정령 협회의 눈을 피하는 것만으로도 벅차서 몸에 무리가 올 거라는 건 전혀 생각도 못 했어.”
“하긴 일반인들이 정령사들이 겪는 병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브레이크가 에밀리를 격려하자 그녀가 기운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에드모어 공작이 자네와 알고 지내 다행이야. 무리한 요구였을 텐데 흔쾌히 수락해 줘서 고맙네.”
브레이크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 역시 자신의 이해관계에 맞아 제안을 수락한 터였다.
“이해합니다. 이런 재능을 지닌 아가씨를 지금까지 숨긴 것만 해도 대단하십니다. 지금의 정령 협회는 제가 생각해도 초심을 잃었으니까요.”
“알아주니 고맙네.”
“잘 부탁한다, 레이.”
진이 브레이크를 향해 ‘레이’라고 친근히 칭했다. 브레이크를 에밀리에게 소개해 준 건 바로 진이었다. 브레이크가 멀뚱히 서 있는 프레아를 한번 쓱 보았다. 그러곤 공작 부부를 향해 피식 웃으며 말했다. 퍽 자신감에 찬 얼굴이었다.
“걱정 마십시오. 저 역시 부인 못지않게 정령 협회를 아주 싫어하는 사람 중 하나입니다. 제가 아가씨를 정령 협회에서 건들지 못할 정도의 강한 정령사로 만들어 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