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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필로그: 계약자의 미소, 드래건의 번뇌 (4/4)

에필로그: 계약자의 미소, 드래건의 번뇌

“네 신부가 스무 살이라고?”

북해의 끝에 사는 빙룡이 느릿하게 되물었다. 상대는 원래 말이 느린 자가 아니었다.

“예전에 듣기로, 남쪽 어딘가의 특별한 종족은 그들만의 셈법이 있다더군. 그들 사회에서 한 살은 인간들의 백 년을 뜻하지. 네 신부는 그쪽 출신인가?”

그렇다고 해도 여전히 너보다 천 년이나 어리지만. 대략 그런 뜻을 담고 있었다.

제노는 조용히 고개를 내저었다. 빙룡이 물담배 파이프를 내려놓으며 쯧, 하고 혀를 찼다.

“내 옛 동료가 변태 자식이었구먼.”

“이봐…….”

“아무리 드래건이 인간 사회의 윤리 도덕에 얽매이지 않는 존재라고 해도 말이네. 염치라든가 품위라든가, 응? 그런 게 있잖나.”

초월적인 두 존재의 시선이 마주쳤다.

“심지어 계약자의 딸이라고?”

빙룡이 다시 한 번 혀를 찼다. 과장스럽게 물담배 연기를 뻑뻑 뿜어 대고는 있지도 않은 수염을 쓰는 척 턱을 문질렀다.

얼핏 보기엔 어린 인간 신부를 맞은 옛 동료를 꾸짖는 듯 보인다. 점잖게 질책하는 것 같겠지. 하지만 제노는 상대의 됨됨이를 알고 있었다. 빙룡은 제노의 상황이 웃겨 죽겠는 것이다. 턱을 문지르는 척하면서 실룩대는 입가를 가린 것, 다 보았다.

이미 모든 사정을 털어놓았는데도 굳이 제노가 찔리는 부분을 되짚는 것이 고약했다. 지그시 노려보자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는 양 딴청을 피우더니 이내 킬킬거리며 웃었다.

“재미있구먼. 역시 오래 살고 볼 일이야.”

진짜 오래 사는 놈이 그런 말을 하니까 어이가 없었다.

“드래건 중에 인간을 반려로 맞아들인 자가 있던가……. 그저 놀이 상대로 취한 것 말고 반려로 맞은 자는 두엇뿐인 듯한데 내 기억이 확실한지 모르겠군. 확실하다면, 자네가 세 번째가 되겠지.”

이젠 대놓고 희롱하였다.

“축하하네.”

“이렇게 좋아할 줄 알았으면 결혼식에도 초대할 걸 그랬어.”

“결호온시익?”

빙룡이 무릎을 치며 폭소했다. 조금만 더 크게 웃었으면 얼음성 전체가 흔들렸을 것이다.

“그런 것도 올렸나? 아하하하하하! 결혼식? 진짜 그런 걸 했단 말인가?”

“안 했네.”

“에이, 시시해.”

아래로 축 내려갔던 입가가 제자리로 돌아오는 데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번거롭고 요란한 인간들의 예식을 올리지 않았다고 해도, 염룡 제노가 스무 살짜리 어린 신부를 맞았다는 사실엔 변함이 없었다.

참, 결혼은 2년 전의 일이라니까 당시 신부는 열여덟 살이었겠군.

두고두고 놀려 먹을 거리가 생겼다는 기쁨이 빙룡을 압도했다. 반면 제노는 성주와의 접견을 마무리한 뒤 미카엘라에게 돌아가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자칫하다간 밤새도록 옛 동료의 말상대가 되어야 할지도 모른다. 드래건의 시간 감각은 인간과 달라서, 별것 아닌 유흥으로도 일주일을 훌쩍 흘려보내곤 했다. 예전이라면 몰라도 지금은 어림없는 일이었다.

슬슬 일어나려는 제노를 상대가 잡았다.

영생의 효능이 있는 샘은 남쪽 끝에 있는데, 어째서 눈보라와 빙하가 있는 북해에 왔느냐는 거였다. 이에 대한 제노의 답은 간단했다.

“미카엘라가 세상 구경을 하고 싶어 해서.”

“……아, 아아! 하하하하! 그렇구먼. 공주님은 성에 갇혀 반평생을 보냈다고 했지?”

또다시 놈의 웃음보를 자극하고 만 것 같다.

“스무 살은 세상 구경하기 딱 좋은 나이지. 더구나 이토록 든든한 호위 겸 남편이 옆에 있으니 말일세.”

풉, 큭, 이상한 소리가 연신 터져 나왔다. 제노는 다음 방문지의 드래건은 적어도 눈앞의 놈보다 정상적이길 바랐다.

자신이 시계 찾는 모습을 보고 배꼽이 빠져라 웃지 않는 정도면 족하다. 미카엘라를 너무 오랫동안 혼자 둔 듯해서 시간을 확인코자 한 건데, 그걸 두고 인간이 다 됐다느니 시간에 신경 쓰는 드래건을 본 건 처음이라느니 아주 난리도 아니었다.

“그만 일어날게.”

“그래, 어서 사랑스러운 신부에게 돌아가라고.”

아무리 마음이 급해도 날아가진 말라고 익살 부리던 빙룡이었다. 그가 문득 떠올랐다는 양 말을 이었다. 이번에야말로 못 들은 척 무시하려던 제노였으나, 질문의 내용이 자연스레 걸음을 멈추게 만들었다.

“한데 네 계약자가 좀 이상하다는 생각 안 드나?”

이미 죽은 사람이니 과거형으로 말해야겠지만 두 드래건 중 누구도 이를 바로잡지 않았다. 중요한 건 그 부분이 아니었다.

“잠든 드래건을 깨우는 방법이야 수소문해 봤을 수 있지. 인간은 언제나 우릴 탐내는 한편 두려워하니까. 은화 다섯 닢이면 누군가 공주에게 입을 열었을 걸세. 용병이나 뭐 그런 자들 있잖나.”

어쨌든 힐디안은 왕의 외동딸이었다. 은화 몇 닢쯤이야 어렵지 않게 뿌릴 수 있었을 것이다. 드래건의 심장에 닿는 만월의 빛과 계약자의 피. 좋다. 정보를 입수했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검도 못 들고 마법도 못 쓰는 허약한 공주가 어떻게 염룡을 찾아냈냐는 거지. 잠에서 깼을 때, 흔한 호위병 하나 안 보였다지 않았나?”

제노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의 계약자는 혼자 왔다. 궁전에서 수백 킬로미터나 떨어진 바위산까지, 갈색 말 한 마리를 끌고. 과일 껍질이나 제대로 깎을 수 있을지 의심스러운 비수는 손바닥을 그을 때나 사용되었다.

“네 계약자가 지도를 지참했던가?”

“못 봤는데.”

“지도도 없고 호위병도 하나 딸리지 않은 몸으로 그 먼 데까지 갔다?”

빙룡의 눈매가 푸르스름한 빛을 띠며 가늘게 휘었다.

“도저히 말이 안 되잖나. 그건 마치…….”

“내가 있는 장소를 알고 찾아온 것 같지.”

“그래.”

빙룡이 동조했다.

“다른 머저리들처럼 헤맬 필요가 없었던 게지. 길을 잘못 들어 도적에게 당할 일도 없고 말이야. 왜냐면 네게 바로 갈 수 있는 경로를 아니까.”

상대는 흥미 가득한 웃음을 베어 물었다. 어쩌면 드래건의 봉인을 푸는 조건도 힐디안 스스로 알아냈을 가능성을 제기했다.

“그렇게 찾아낸 네게 요구한 게 고작…… 친구가 되어 달라는 거였다며.”

응접실을 나와 복도를 걷는 내내, 빙룡의 마지막 말이 귓가를 맴돌았다. 제노보다 조금 더 오래 산 옛 동료는 성탑만큼이나 뾰족한 턱을 문지르며 말했다.

아무 데도 매인 곳 없이 늘 초연한 태도. 다른 드래건을 두고 굳이 제노를 찾은 계약자. 이유를 물어도 돌아오는 건 쓸쓸한 미소뿐. 딸이 열여덟 살 생일 전후로 해야 할 일을 미리 적어 둔 공책.

그리고 무려 10여 년 뒤의 제노를 향해 남긴 말.

처음엔 제 계약자다운 짓이라며 웃음을 삼켰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뭔가 묘한 기분이 들었다. 바람에 나부끼는 레이스 커튼 너머 힐디안이 지켜보고 있었던 게 아닐까 하는 상상은 정말 ‘상상’에 불과했을까.

[오직 미래를 보는 인간만이 그리할 수 있지.]

그제야 모든 조각이 맞춰지는 느낌이었다.

◈ ◈ ◈

“제노, 나 이렇게 큰 생선은 처음 봐. 내 팔 길이랑 거의 비슷하네.”

저녁 식탁에 오른 생선찜을 보며 미카엘라가 혀를 내둘렀다. 지난번 바다 위를 지날 때 고래를 보지 않았느냐고 말하려다가 그만두었다. 그 고래가 통째로 식탁 위에 올라오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옛 동료를 신나게 놀려 먹은 것과 별개로 빙룡의 손님 대접은 훌륭했다. 하인들이 내오는 요리는 음식에 별 흥미가 없는 제노마저 감탄할 수준이었다.

자신이 성주에게 잡혀 있는 동안, 미카엘라는 침실에서 지루하게 기다리는 대신 하녀의 안내를 받으며 얼음성을 구경하고 다녔다고 한다.

이곳에 온 이후로 미카엘라의 표정은 줄곧 밝았다.

물론 그 지긋지긋하고 빌어먹을 서쪽 숲의 성을 나온 뒤로 미카엘라는 쭉 행복한 상태였다. 10년에 달하는 유배 생활의 끝. 드디어 자유의 몸이 되었으니 기쁠 만도 했다.

미카엘라가 기쁘니 제노도 기뻤다. 그렇다. 티끌 한 점의 주저함도 없이 ‘기쁘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하는데.

“또 야릇한 표정을 짓네.”

테이블 너머에서 미카엘라가 고개를 갸웃했다.

“뭐가?”

“제노 말이야. 친구를 만나고 온 뒤부터 계속 묘한 얼굴을 한다고. 왠지 말수도 적어진 것 같고.”

“내가 원래 말이 많은 편이 아니잖아.”

“그 원래의 상태에서 더 적어졌다니깐.”

버터와 갖은 향신료로 쪄낸 생선살이 미카엘라의 입 속으로 사라졌다.

“무슨 얘길 듣고 온 거야?”

제노가 별일 아니라고 대꾸한 뒤 포도주를 입가로 가져갔다. 미카엘라가 여상스러운 말투로 다른 질문을 했다.

“북해의 침실 풍습에 대해서 듣기라도 했어?”

풉!

입에 머금은 포도주가 창 너머 몰아치는 눈보라처럼 요란히 뿜어져 나갔다. 새하얀 식탁보 위로 붉은 점이 흩뿌려졌다. 미처 뿜지 못한 몇 방울은 기도로 넘어가 쿨룩거리는 기침을 하게 만들었다.

미카엘라는 자신의 말이 이토록 격한 반응을 불러올 줄 예상하지 못한 듯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남편을 쳐다보았다.

남편의 안색이 평소대로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 주긴 했다. 배려가 돋보였다. 이상한 데서 양육자로서의 자부심을 느끼고 마는 드래건이었다.

“그런 말, 안 들었거든.”

“안 들었으면 안 들었지. 방금처럼 격한 반응을 보일 건 또 뭐야.”

괜히 목이 탔다. 제노는 저도 모르게 포도주 잔으로 손을 뻗다가 멈칫했다. 다시 사레들지 않으리란 법이 없다. 그렇다면 안전하게 물을 마시자. 얼음 조각을 띄운 물이 벌컥벌컥 그의 목구멍 안으로 흘러들었다.

“식사 자리에서 침실 풍습이니 뭐니 하는 말을 꺼낸 쪽은 너야.”

“뭐 어때. 대놓고 야한 말을 한 것도 아닌데.”

“미카엘라 프리시드.”

시중드는 하인들이 멀리 있지 않음을 일깨우려 했다. 천만다행히도, 빙룡은 다른 일이 있다며 두 사람만 오붓하게 저녁을 들도록 해 주었다.

놈이 한자리에 있었다면 어떤 반응을 보였을지 상상만으로도 끔찍했다.

“부부가 된 지 2년이나 됐는걸. 이 정도 농담은 가볍게 해도 되지 않아?”

미카엘라가 입술을 삐죽거렸다. 그런 모습마저 예쁘게 보이니 스스로도 어이없을 지경이었다. 빙룡의 말을 듣기 전이었다면, 신부에게 푹 빠진 사내답게 식사를 중지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점잖은 목소리로 하인들을 내보낸 뒤, 요리 대신 미카엘라를 맛보았을 가능성도 높았다.

옛 동료고 뭐고 집어치우라지.

온몸으로 신혼임을 주장했을 수도 있다.

그러니까 계약자의 비밀에 관련된 말을 듣기 전이었다면 말이다.

모든 조각이 맞춰진 이후 새롭게 떠오른 의문. 그것이 아까부터 제노를 자꾸 딴생각에 빠지도록 만드는 원인이었다.

‘어디까지 본 거냐, 힐디안.’

미치도록 신경 쓰였다.

‘무엇을 얼마나 상세하게 본 거냐고.’

지도 한 장 없이 수백 킬로미터를 찾아온 능력자. 제노는 오래전 죽은 계약자의 멱살을 잡고 짤짤 흔들고 싶은 기분이었다. 힐디안이 이따금 자신을 보며 기묘하게 웃었던 이유를 이제야 알게 되었다. 그녀답지 않게, 옆구리를 뜬금없이 꼬집었던 이유도.

‘그것은 친구가 아니라 사위를 보는 표정이었나. 10년 후 미카엘라를 밤새 물고 빨며 괴롭힐…….’

탁!

제노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섰다. 미카엘라가 왜 그러느냔 눈으로 쳐다보았다. 어린 신부에게 친어머니의 비밀을 털어놓을까 고민하던 제노는 본능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아직은 안 된다. 아직은, 제노 스스로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다.

“잠깐 실례하지.”

“어디 가?”

“그게…… 응접실에 두고 온 물건이 떠올라서.”

식사를 하다 말고 뛰쳐나갈 정도로 중요한 물건인가. 미카엘라의 얼굴에 의문이 스치는 것을 보았다. 제노는 공연히 목을 큼큼 가다듬으며 식당을 벗어났다. 그러고는 최대한 빠른 걸음으로 현관을 향해 움직였다.

북해의 차디찬 바람에 머리를 식힐 필요가 있었다. 상시 달아오른 상태인 몸도 같이 식으면 더할 나위 없이 좋고.

“대체…….”

힐디안의 묘한 미소와 미카엘라의 애달픈 교성이 번갈아 떠오르며 염룡을 번뇌에 들게 했다. 제노가 눈보라 사이로 더운 한숨을 몰아쉬었다.

어떤 비밀은 모르는 채로 사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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