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3장. 왕자 따위 필요 없거든 (3/4)

제3장. 왕자 따위 필요 없거든

“……망할.”

염룡 제노가 눈을 뜬 뒤 처음으로 내뱉은 말은 그것이었다. 망할. 이보다 더 좋은 표현을 찾긴 힘들 것이다. 아, 사실 훨씬 적합한 표현을 몇 개 알고 있긴 했다.

나가 죽어라, 파렴치한 개자식?

백번 찢어발겨도 모자랄 왕자 놈이 제게 뿌린 것은 이성을 잃게 만드는 미약이었다. 워낙 비장한 표정으로 뿌리기에 무슨 엄청난 극독이라도 되는 줄 알았다. 그런데 지금 이 순간, 제노는 차라리 자신이 들이마신 것이 극약이었더라면 하고 바라고 있었다.

미카엘라를 안았다.

아무리 미약에 취해 있었다고 해도 자신이 저지른 짓을 용서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네가 미카엘라를 안았어. 생일 선물로 바라던 가벼운 첫 키스도 피해 버린 네가, 아주 이날만을 기다렸다는 듯이 발정 난 사내자식처럼 그 애를 물고 빨고 핥아 먹었지.

아직도 공주의 향긋한 체취가 코끝에 감도는 것만 같았다. 약 기운이 완전히 빠지는 새벽이 될 때까지 그녀를 못살게 군 기억이 떠올랐다.

얼마나…… 달콤하던지.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군.”

제노는 뜨거운 물로 몸을 씻은 뒤 겉옷을 걸쳤다. 미카엘라의 얼굴을 봐야 했다. 그녀는 시트 위에 적갈색으로 굳은 흔적을 남긴 채 침대를 빠져나간 이후였다.

새벽까지 함께한 기억이 있으니 그럼 이른 아침에 방을 나간 건가? 분명 지쳐서 나가떨어졌을 텐데 왜 밖으로 나간 거지? 몸 상태가 나빠졌을까. 만약 그렇다면 큰일이다.

하지만 그것도 아니라면.

“꼴도 보기 싫다는…….”

제노는 말을 하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어처구니없게도 가슴 한구석이 쑤시듯 욱신거렸다. 그의 보폭이 커졌다. 보통 미카엘라는 이 시간이면 안뜰이 내다보이는 발코니에서 아침을 먹었다. 그러나 오늘은 달랐다. 어디에도 미카엘라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그녀를 찾아 성 이곳저곳을 누비고 다닌 제노는 결국 최후의 심판을 받아들이는 자처럼 굳게 닫힌 그녀의 방문 앞으로 나아갔다. 문에 대고 노크를 하려던 손이 허공에서 몇 번이나 멈추었다.

삼천 년의 시간이 전부 헛되이 느껴졌다.

미카엘라에게 이야길 해야 한다는 처음의 결심이 무색하게 문 앞에서 노크조차 하지 못하고 주저하는 꼴이라니.

똑똑.

제노는 스스로를 비웃으며 문을 두드렸다. 그리고 안에서 들리는 기척에 귀를 기울였다. 사삭, 하고 뭔가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안에 누군가가 있다.

“꼬마.”

말을 뱉는 동시에 자신의 혀를 깨물고픈 충동이 일었다. 내가 방금 뭐라고 지껄인 거지? 그녀를 달래고 대화를 하러 온 주제에 평소 미카엘라를 부르던 대로 부르고 말았다. 이래서 습관이 무섭다.

처음 그렇게 부른 게 언제였더라? 아마 미카엘라가 진짜 꼬마일 때부터이리라. 다섯 살, 또는 여섯 살. 정확히 기억나진 않지만 어쨌든 그쯤.

10년 전에 같이 성으로 들어올 때도 그 호칭이 이상하지 않았다. 이제 어린애 취급하지 말아 달라고 요구할 때 피식 웃음 흘렸던 이유는, 당시 공주님께서 여덟 살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미카엘라는 정말 꼬마가 아니게 되었다. 내면으로나 외면으로나 모든 것이 달라졌다. 갸름해진 얼굴 위로 뭐라 꼬집어 말하기 어려운 감정이 스치는 것을 본 순간, 제노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고 말았다.

어떤 표정은, 그 자체로 어른이 되었음을 뜻하기도 한다. 미카엘라가 원래대로 궁전에 살았다면 결혼식을 올리고도 남았을 것이다.

이후 제노는 더더욱 필사적으로 종전의 호칭을 고수했다. 한심하기 이를 데 없는 발버둥이었다.

하, 그 ‘꼬마’와 어제 늦은 오후부터 어떤 걸 했더라? 새벽까지 ‘꼬마’의 다리 사이에 얼굴을 파묻고 타액과 꿀로 범벅이 된 꽃잎을 핥은 기억이 떠올랐다.

죽자. 그냥 빨리 죽어, 드래건.

“안에 있다면 이야길 좀 하고 싶은데.”

“……안에 없어.”

부루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음이 제대로 상한 낌새였다. 그럴 만도 했다. 어젠 둘도 없는 연인인 것처럼 굴더니 날이 밝자 딱딱한 후견인으로 돌아간 듯 굴고 있으니까. 하지만 제노는 1만 년을 봉인되었다 깨어나도 어제와 같은 식으로 그녀를 부를 순 없었다.

그거, 미약이 맞긴 했나? 미약은 원래 비정상적으로 흥분시키는 용도에 그치는 걸로 알고 있다. 미친놈처럼 또 다른 인격을 눈뜨게 하는 게 아니란 말이다.

[좋아, 잘 삼키고 있어. 힘들겠지만 허리를 좀 더 들어 봐. 구석까지 깊게 박아 줄 테니.]

[아래가 녹아서 달라붙겠어.]

[미카, 사랑스러운 내 공주님.]

미쳤나.

차라리 기억을 싹 지워 버리는 효과도 함께였다면 지금처럼 자살 충동이 들진 않을 텐데. 제노는 어제의 자신을 향한 분노를 지그시 삼키며 말을 이었다.

일단은 미카엘라에게 사과를 해야 맞겠지.

“어제 있었던 일이라면 내가.”

목에 무언가가 걸린 것처럼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사과가 어려운 게 아니다. 미카엘라가 이 사과를 어떻게 받아들일지가 신경 쓰였다. 자꾸 울면서 매달리던 그녀의 모습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제노, 그만두지 마……. 아앙…… 읏! 좋아, 제노.]

“내가 사과를.”

해야 하는 게 맞는데.

“꺼져!”

염룡의 입을 다물게 만드는 한마디가 방문 밖으로 터져 나왔다.

평소였다면 어디서 그런 말을 배웠느냐고, 사람들이 아무리 공주 대접을 안 해 준다지만 힐디안과 자신은 그런 걸 가르친 적이 없다고 나무랐을 것이다.

“미카엘라, 지금 너.”

“싫어, 싫어! 제노 얼굴 보기 싫다고!”

“그러니까 내가.”

“그런 일을 저질러 놓고 지금 나랑 이야기하겠다는 거야? 차분한 대화, 뭐 그딴 걸 하고 싶다는 뜻이야? 꺼져. 뻔뻔하기도 하지. 한마디도 듣기 싫으니까 날 내버려 둬!”

질풍노도의 시기에도 저런 말은 하지 않았다. 아, 열여덟이니까 아직 인간들의 그 격정적인 시기가 지나지 않은 건가? 아닌데. 미카엘라의 나이면 벌써 2, 3년 전에 성인식을 치르고 결혼까지 했을 텐데.

혹시 그사이 인간 세상의 분위기가 바뀌었나?

그들 세상에선 뭐든지 빠르게 변하니까. 권력을 공고히 하겠답시고 혈육 사이의 결혼을 거듭할 땐 언제고, 내가 잠깐 다른 곳에 다녀온 사이 그런 풍습은 야만적인 옛것이 되고 말았지. 겨우 백 년, 백오십 년밖에 지나지 않았는데도.

이젠 열대여섯 살이 아니라 마흔다섯쯤 되어야 성인으로 쳐준다고 해도 놀라지 않을 것이다. 턱수염 성성한 마흔네 살 사내가 울며불며 떼를 써도 너그러이 봐주게 되었다 한들 눈 깜짝하지 않을 터다.

드래건에게 인간 세상의 ‘기준’이란 늘 바뀌는 개념이었다.

하지만 미카엘라는 일반적인 인간 세상에서 고립된 존재이지 않나. 지금보다 어릴 적, 화가 머리끝까지 났을 때도 방문을 쾅 닫는 짓은 하지 않았던 그녀였다.

‘……그딴 거? 꺼져?’

너무도 생소한 표현에 말을 잇지 못하는 드래건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18년의 노고가 허사로 돌아갔다고 탄식하기엔 양육자란 놈이 저지른 죄의 무게가 컸다.

급기야 방 안에서는 하늘이 무너져라 우는 소리가 들렸다. 통곡이란 표현이 어울리는 울음이었다.

잠겨 있는 문, 이깟 게 뭐라고.

헛웃음조차 나오지 않는다. 겨울바람을 막는 성탑의 두꺼운 문도 부숴 버리면서 정작 미카엘라의 방문 손잡이엔 손도 올리지 못하고 있었다.

일단은 후퇴다.

“점심을 만들어 놓지. 이따 다시 올게.”

엉엉 우는 소리가 너무 커서 자신의 말이 들렸을지 모르겠다. 다시 올 때까지 부디 공주의 감정이 다소나마 가라앉길 빌며 그는 문 앞을 떠났다.

왜 살아 있나,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 ◈ ◈

손봐야 될 놈이 너무 많다.

제노는 손에 들려 있는 종이를 구겼다. 궁전으로부터 온 소식이었다. 위엄을 실어 보려는 노력의 일환인지, 왕실 문장이 새겨진 고급 종이에 붉은 인장을 떡하니 찍어 놨다. 금실을 꼬아 만든 끈으로 묶기까지 했다. 그래 봤자 아버지가 딸에게 보내는 편지인데 말이다.

진짜 위신을 세우고 싶다면 편지를 건네기 무섭게 줄행랑치는 사신부터 바꿔야 하지 않을까.

궁전 사람들은 항상 제노를 두려워했다. 제노에 대한 두려움은 그를 아무렇지 않게 대하는 힐디안을 향한 경외심으로 번졌다.

그리고 힐디안이 사라진 지금, 아무도 드래건을 통제할 사람이 없다고 여기는 모양이었다.

‘내가 심심하면 마을을 불태우고 다니는 포악한 놈인 줄 아나 보군.’

그저 그런 식으로 무시해 왔지만 지금 제노는 인간들의 기대에 부응하고픈 욕망을 느꼈다. 배 속에서 화염이 부글부글 끓는 것만 같았다.

왕은 미카엘라를 공주에서 폐한다고 했다.

주변국 왕자와 청년들의 피해가 극심하여 여론을 수렴할 수밖에 없다며 안타까운 마음을 전했다. 그러면서 새 왕비로부터 넷째 남동생이 태어났음을 알렸다.

“인간 왕의 나이가 몇이더라.”

이제 좀 자중할 때도 됨 직한데 꾸준히 자식을 생산하는 꼴에 배알이 틀렸다. 숨만 쉬고 살아도 곱게 보이지 않는 자다. 힐디안은 남편까지 봐달라고 부탁하지 않았다. 자신이 이제껏 궁전을 불바다로 만들지 않은 까닭은 오로지 미카엘라 때문이었다.

한데 이런 식으로 나온단 말이지?

“하필 보낸 시기도 기가 막히는군.”

제노는 공주의 방이 있는 쪽을 올려다보았다. ‘그 일’이 있은 후로 사흘이 지났다. 미카엘라는 이보다 노골적일 순 없을 정도로 제노를 피해 다니고 있었다.

점심을 만들었다고 하자 문 앞에 두고 가면 먹겠다고 했다. 내려놓은 척하고 앞에서 버틸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가 보겠다고 말한 지 족히 10분이 지나서야 미카엘라는 방문을 열고 복도를 내다보았다. 그의 예민한 감각에는 공주가 언제 방문을 열고 까치발로 살금살금 나오는지, 어디로 가는지가 다 느껴졌다.

하지만 제노는 그저 모르는 척, 일부러 2인분의 식사를 만들어 남은 절반을 화덕에 넣어 두고 부엌을 떠나 주었다. 미카엘라의 동선과 겹치지 않게 일부러 복도에 서서 시간을 끌기도 했다.

대면을 원치 않는 공주님에게 강제로 들이대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한데 슬슬 인내심이 바닥났다.

피하기만 하는 미카엘라에게 화가 나는 게 아니다. 억울한 것도 아니다. 이게 정말이지, 떠올릴 때마다 어이가 없고 미친놈이라는 생각밖에 안 드는데.

“잊히지가 않아…….”

혼자 있는 시간이 늘어나자 그 시간은 오롯이 미카엘라를 떠올리는 데 쓰이게 되었다.

미카엘라가 싫어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은 게 문제다.

그날 미카엘라는 제노를 밀어내지 않았다. 오히려 나중에는, 가지 말라거나 어디를 어떻게 해 달라는 요구를 하며 울먹이기도 했다.

그 말을 할 때의 표정을 떠올리면 그네 의자를 고치다가도, 혹은 자려고 침대에 누웠다가도 전신에 열이 후끈 도는 것이다.

피가 죄다 아래로 쏠리는 경험. 이렇게 생각만으로 몸이 반응한 적은 처음이라 당혹스러운 드래건이었다.

“왜 여기 있는 거야!”

미카엘라가 놀라서 소리쳤다.

“창고 정리를 한다고 했잖아. 거기 있는 거 아니었어?”

“있었지.”

두 시간 전까지는.

갑자기 의문이 들었다. 미카엘라의 침실이 유독 방음이 잘되는 건가? 아니면 방 안에서 귀를 솜으로 틀어막고 있기라도 한단 말인가. 아무리 자기만큼 뛰어나게 예민하지 않다고 해도, 보통 성의 모든 방에서는 바깥 소리가 어느 정도 들리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래서 미카엘라가 매일 왕자들이 고함치는 소리에 짜증을 내며 아침잠에서 깼는데.

이 꼬마 아가씨가 방에서 뭘 하는 거지?

“뭐야, 자리를 옮기면 옮긴다고 알려 줘야 할 것 아냐.”

“두 번 말했는데.”

“그러니까…… 아주 큰 소리로.”

“네 방문 앞에서 말했거든.”

나무 열매 빛깔의 눈동자가 바람 앞의 촛불처럼 흔들렸다. 괜스레 헛기침을 하였다. 다소 수상스러웠지만 일단 모른 척 넘어가기로 했다.

“뭘 찾으러 왔지?”

“찾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들어올 때부터 갈색 서랍장만 쳐다봤으면서 미카엘라는 괜히 딴청이었다.

“뭐가 필요한지 말하면 바로 그 위치를 알려 주지.”

이래 봬도 공주를 옆에서 지켜봐 온 지 18년이 되는 몸이다. 미카엘라를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 정도는 이미 터득했다. 아니나 다를까, 필요한 것을 바로 찾고 나갈 수 있다는 사실에 혹한 듯 그녀의 눈이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운 서랍장과 제노 사이를 분주히 오갔다.

이내 결정을 내린 것 같았다.

“뜨개실.”

“왼쪽에서 네 번째 줄, 위에서부터 다섯 번째 서랍.”

“아.”

미카엘라가 도도도 서랍장 앞으로 달려갔다. 제노는 그녀가 서랍 안의 흰색 뜨개실을 모조리 작은 바구니 안에 쓸어 넣은 뒤 그를 힐끗 보고는 노란색 털실 뭉치도 하나 넣는 것을 지켜보았다.

뜨개실로 사다리를 엮어 성을 빠져나가기라도 할 심산인가.

무슨 실이 저만큼 필요하냔 생각을 누른 채, 그는 조용히 미카엘라의 이름을 불렀다. 고맙다는 인사를 생략하고 얼른 방으로 돌아가려던 공주가 멈춰 섰다.

“보여 줄 게 있어.”

“아, 안 볼래. 안 궁금해.”

미카엘라가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뭔지 듣지도 않고 그런 행동, 좋지 않아. 미카엘라 프리시드.”

“또 그런 말투.”

분홍빛 도는 입술이 불만스레 튀어나왔다.

“완전 애 취급이야.”

순간 귀를 의심했다. 지금 녀석이 바보 같은 제노라고 중얼거렸나? 허례허식과는 거리가 먼 솔직한 아가씨로 키우긴 했지만 아무리 화가 났을 때에도 이토록 대놓고 막말을 하진 않았는데.

자신과 힐디안의 교육 방식이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단 말인가.

딱히 교육 방식이라기보다, 모든 문제는 네가 꿈속에서 저 애를 만지기 시작했을 때부터 일어난 게 아닐까?

……머저리가 따로 없는 질문이었다.

“궁전으로부터의 소식이다. 네 아버지가 보낸 건데.”

귀를 막고 도리질을 치려던 미카엘라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미리 말해 두지만 별로 유쾌하지 않은 내용이야.”

“언제는 좋은 이야기였나, 뭐.”

“읽어 봐.”

제노가 그녀에게 두꺼운 종이를 넘겨주었다. 미카엘라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그것을 건네받았다. 내용은 그리 길지 않았다. 처음의 안부 인사 두 줄을 제외한 나머지가 죄다 구차한 변명일 뿐.

제노는 공주가 편지를 다 읽길 기다렸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중일까. 그녀의 머릿속을 들여다보고 싶었다.

살짝 굳은 얼굴로 아무 말 없이 편지를 내려다보는 그녀가 걱정되었다. 그리고 머리에 대포 파편을 맞기라도 했는지 저 좋을 대로 행동하는 왕에게 화가 치밀었다.

너무 오랜 시간 순순히 말을 들어준 탓이려나. 왕은 자신의 딸 뒤에 서 있는 자가 드래건임을 깜빡 잊은 모양이었다.

하긴, 10년이면 안일해지기 충분한 시간이지.

제노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어떻게 해 주길 원하지? 말만 해. 궁전으로 가서 네 정당한 권리를 찾아 줄까? 아니면 응징이라도…….”

“날 공주에서 폐한다고?”

“보다시피.”

“제노.”

언제든 준비된 상태임을 알리려는데 미카엘라의 표정이 묘했다. 그녀는 아버지의 결정에 충격을 받았다기보다, 뭔가 다른 이유로 놀란 것 같았다. 저건 어리둥절해하는 표정인가? 반신반의인가? 기쁨까지는 아닌 것 같고.

그녀를 어떻게 다뤄야 할지 숙지하고 있다는 말은 취소다. 제노는 여전히 인간 여자의 마음을 읽기가 힘들었다.

“성을 나가지 말란 말이 없어.”

“그거야…….”

워낙 저밖에 모르는 놈이니 미카엘라의 처우에 대해 언급할 필요도 못 느낀 게 아닐까. 편지지가 빼곡하도록 제 얘기밖에 없었다. 이런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는 자신의 슬프고도 곤란한 처지에 대해서 어쩌고저쩌고.

아무리 그래도 아버지인데 이건 너무하다며 화를 내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었다.

그런 상황인 거, 아닌가?

“날 까맣게 잊어버릴 모양이야.”

미카엘라의 입이 벌어졌다. 그리고 제노가 무슨 말을 덧붙이기도 전에 그녀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제 방으로 달려갔다. 소중히 안고 있던 뜨개실 바구니가 바닥에 떨어졌다.

혹시 우는 거라면 왕을 가만두지 않겠다. 제노는 지그시 어금니를 악문 채 미카엘라의 뒤를 따랐다. 어느 때보다도 위로가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5분 뒤 제노를 맞이한 건 예상과는 조금 다른 풍경이었다.

◈ ◈ ◈

“방 안에 이게…….”

제노는 사람만큼 거대한 고양이가 있다면 이런 헤어볼을 토해 냈으리라 생각되는 털 뭉치를 주워 들었다. 그런 괴이한 물건들이 미카엘라의 방 여기저기에 널려 있었다.

뭔가를 만들어 보려 시도한 것 같긴 한데, 공주는 대체 뭘 만들려고 했던 걸까.

“꺅, 언제 따라온 거야!”

책상 앞에 앉아 열심히 공책에 끄적거리던 미카엘라가 비명을 질렀다. 지금 이 상황에 일기를 쓰는 건가, 이 아가씨가?

“요 며칠 아무 소리도 못 듣고 몰두한 게 이…….”

이걸 뭐라고 불러야 하지?

제노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질문을 했다. 본격적인 대화를 나누기에 앞서 사물의 정확한 명칭을 알고 싶었다.

“이게 뭐지?”

“역시 못 알아보는구나.”

미카엘라가 분한 듯 중얼거리며 레이스라고 대답했다. 그러니까 뜨개실로 레이스를 만들려다 실패한 것이라고. 그리고 그녀의 책상 위에는 손수건보다 조금 더 큰 크기의 레이스가 놓여 있었다. 삐뚤빼뚤하긴 해도 이전 실패작들보다는 훨씬 의도한 바에 가까워 보였다.

결과물들이 형편없지만 뭐랄까. 모종의 필사적인 의지가 느껴져서 제노는 잠시 입을 다물고 공주를 쳐다보았다.

인간 부모들이 자식에게 들려주는 동화 중에 백조가 된 오라비들의 저주를 풀기 위해 쐐기풀로 옷을 지은 공주 이야기가 있다. 미카엘라는 거기서 무슨 감화를 받기라도 한 것일까.

“조금만 더 하면 제대로 완성시킬 수 있었는데.”

저런 말을 듣고 있으니 더더욱 이상한 의심이 들었다. 더 물어보려는 제노의 눈에 펼쳐져 있는 공책이 들어왔다.

공책 속 글씨체가 낯익었다. 거기엔 미카엘라의 귀여운 글씨 말고도 다른 누군가의 것이 있었다.

힐디안의 글이었다.

“머리를 덮을 크기의 레이스를 짜서 제노에게 씌우면 드래건과 계약을 할 수 있다고 그랬어.”

“누가?”

“엄마가 그렇게 써 놨단 말이야. 꼭 스스로 짠 하얀 레이스로 덮어야 한다고. 그리고 눈을 감은 다음 드래건이여, 부디 저와 계약을 맺어 주세요, 라고 말하면.”

“힐디안이 그랬다고?”

“……응, 틀림없이 그렇게 써 놨어. 그래서 제노에게 부탁하려고.”

순간 미카엘라의 뺨이 붉게 물들었다. 안뜰에 핀 분홍빛 장미보다 더 붉고 수줍은 모습이었다. 이렇게 준비되지 않은 상황에서 말하는 게 조금은 분하다는 얼굴로.

“나 제노를 좋아해.”

연보라색 드레스 위에 자리한 손가락이 부끄러움과 난처함으로 얽혀들었다.

언제부터라고 딱 잘라 말할 순 없다. 마치 가랑비에 옷이 젖어 들듯 자연스럽게 제노는 미카엘라의 마음속으로 스며들었다. 작은 설렘으로 시작한 마음이 조바심, 기쁨, 질투와 흔들림, 스스로가 한심해지는 안도를 거쳐 이렇게 부풀기까지.

그녀 안에서 제노는 어느새 남자가 되었는데 상대는 여전히 저를 어린애로 보는 것 같아 슬펐다.

어떻게 해야 좀 더 어른스러워질 수 있을까.

제노는 오랜 세월 동안 많은 사람들을 봐 왔겠지. 그중에 나보다 아름답고 성숙한 아가씨도 많았을 거야.

멀리 갈 필요도 없이, 힐디안이 바로 그런 인물이었다.

초연한 태도와 잔잔한 웃음.

결코 잊을 수 없는 계약자라며 힐디안을 언급할 때 제노가 어떤 표정을 짓는지 미카엘라는 쭉 보아 왔다. 전 계약자를 향한 그의 감정은 연모나 그리움 같은 게 아니었다.

그런 단순한 감정이 아니었다.

그들은 아직 미카엘라가 제대로 이해하기 어려운 관계였다. 아마 그들조차 자신들의 관계를 명확하게 정의 내릴 수 없을 것이다.

[아무렴 어때.]

그래, 그런 느낌이었다. 타인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고 상대를 그 본연의 모습으로 존중해 주며 공존하는 그런 관계.

이제 겨우 사랑을 알게 된 미카엘라에게 그것은 마치 뛰어넘을 수 없는 아득한 벽과도 같았다. 입술을 삐죽이며 투정이나 부려 온 자신은 절대로 엄마처럼 될 순 없을 것이다.

제노가 이제 어린애 시중은 질렸다며 당장 내일이라도 성을 떠나면 어쩌지?

그녀의 걱정은 이뿐만이 아니었다.

미카엘라는 계속 성에서 살았지만 제노는 가끔씩 사람들이 사는 마을로 가기도 했다. 급한 생필품이 동났을 때 그러곤 했는데, 그는 동화책 속 ‘아빠’처럼 시장에서 그녀에게 줄 선물을 들고 돌아왔다. 처음부터 끝까지 아이 취급이었다.

굳이 웃을 필요도 없이, 그저 서 있는 것만으로도 눈길을 끄는 그에게 예쁜 마을 아가씨가 다가온다는 생각만 하면 가슴이 쿵쾅거려서 숨을 쉴 수가 없었다.

그때 떠오른 것이다.

열여덟 번째 생일을 맞이하면 열어 보라고 했던 엄마의 작은 공책에는 딸에게 남긴 비밀 이야기가 적혀 있었다.

“뭐라고 적혀 있는지 내가 봐도 될까?”

제노는 또다시 나이 많은 후견인처럼 굴려고 했다. 흠, 그가 실제로 나이가 많기는 하다. 후견인이란 것도 맞고.

하지만.

“제노에겐 보여 주지 말라고 했어.”

“그것도 힐디안이 말한 건가?”

“응, 드래건의 계약이 끝나면 보여 줘도 된다고.”

제노가 허공을 쳐다보았다. 그러고는 기가 찬 듯 픽 웃었다.

“굳이 주종 계약을 맺지 않아도 넌 나를 이용할 수 있어, 꼬마.”

“계약을 맺는다면 맨 처음 소원으로 그걸 빌 거야. 더 이상 꼬마나 꼬맹이라고 부르지 않기로.”

“되게 분했나 보군.”

방금 전까지도 수줍은 듯 말하더니 바로 욱해서 되받아치는 모습이라니. 어지간히 마음에 안 드는 걸 알겠다며 웃었다.

제노가, 웃었다. 그것만으로도 마음이 주책없이 풀려서 허탈해진 미카엘라였다.

자신은 아무리 노력해 봤자 이 관계에서 우위를 차지할 순 없을 것이다. 어림도 없는 소리. 얼굴도 보지 못한 네 명의 남동생들조차 배를 잡고 웃을 일이다.

그래서 그녀에게 남은 건 드래건의 계약뿐이었다. 엄마 힐디안이 권한 방법이기도 했다.

“첫 번째 소원은 그렇다 치지. 그럼 두 번째는 뭘 빌려고?”

“……신부가 되게 해 달라고.”

제노의 웃음이 뚝 그쳤다. 아, 어쩌자고 말해 버렸담? 미카엘라가 입술을 깨물었다. 아직 계약을 맺기 전인데 분위기에 휩쓸려 대답해 버리고 말았다.

제노는 자신이 끼치는 남자로서의 영향 따윈 생각지도 않고 여전히 후견인처럼 군다. 문제는 미카엘라도 18년 동안 거기에 익숙해져 있다는 것이다.

저렇게 물으면 나도 모르게 순순히 대답해 버리게 돼. 어리석은 공주님. 강제성을 띠는 계약 이후까지 입조심을 해야 했는데.

“제노가 좋다고 말했잖아. 설마…… 내가 복숭아를 좋아하듯 그런 식으로 좋아할 거라 생각했어?”

한동안 침묵이 이어졌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미카엘라의 머리 위로 깊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제노는 한눈에도 심란해하는 모습이었다.

사흘 전 그날 밤은 정말 미약 해프닝에 불과했나 보다. 그가 심란해하는 모습에 미카엘라의 심정은 더욱 우울하게 가라앉았다.

“일단 그 계약에 대한 오류를 바로잡자면.”

제노가 말을 이었다.

“필요한 건 레이스가 아니라 내 심장에 닿는 만월의 빛과 계약자의 피다.”

“하지만 엄마는.”

“힐디안 로와나 프리시드.”

제노는 능히 죽은 자를 부활시켜 목을 조를 수도 있을 듯한 목소리로 전 계약자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제노가 그런 식으로 감정을 담아 힐디안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미카엘라는 난생처음 들었다.

그는 이후로도 교활한 꿍꿍이속이라는 둥 처음부터 이럴 속셈이었냐 어쩌고 하는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제노가 엄마 욕을 하고 있는 듯한데.

“하…….”

그가 미카엘라를 내려다보았다. 제노를 피해 다니는 사흘 동안 잘생긴 얼굴이 조금 까칠해진 것도 같았다. 눈 밑 그늘이 어둡다. 그는 도대체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는 양 헛웃음을 흘렸다.

“난 삼천 년을 살았어, 미카. 그 전엔 용암 속에서 오백 년을 웅크리고 있었고.”

“그 정도 암산은 나도 할 수 있어.”

미카엘라가 불통하게 대꾸했다. 3000 - 18 = 2982. 제노는 두 사람의 나이 차에 대해 말하고 싶은 거다.

흥, 그런 걸로 따지면 너무 비현실적인 숫자여서 오히려 감각이 무뎌진다고 말해 주고 싶었다.

“넌 내가 아기 때부터 봐 온 녀석이고.”

제노가 고개를 내저었다.

“이날 이때까지 키웠어.”

나 혼자 자란 부분도 없지 않거든. 반박하고 싶어 입이 간지럽다. 하지만 미카엘라는 우선 그가 하는 말을 들어 보기로 했다.

“근데 널 신부로 맞아 달라는 제안을 수락하면 내가 뭐가 되겠어?”

대답을…… 원하는 질문인가?

“미친놈이지.”

그리고 그 말이 떨어짐과 동시에 미카엘라는 손목이 끌려가 안겼다. 제노가 그녀를 품에 안았다. 항상 자신보다 조금 높은 체온. 따스하고 단단한 그가 미카엘라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네 엄마는 날 너무 잘 알아. 이미 십 년 전에 무려 십 년 뒤를 내다보고 그런 말을 써 놓다니. 말도 안 되는 레이스와 계약을 운운하면 네가 귀여워 죽을 줄 알았겠지?”

적중해서 기분이 나쁠 지경이라고 덧붙인다. 미카엘라는 여전히 얼떨떨한 상태로 그의 키스를 받았다. 가볍지만 더없이 달콤한 입맞춤이었다.

열여덟 살 생일에 받길 원했던 바로 그런 키스였다.

“레이스는 넣어 둬, 공주님.”

그가 떨어진 입술 새로 말했다. 그의 말이 맞았다. 더 이상 밤잠을 줄여 가며 레이스를 뜰 필요가 없어졌다. 조바심 나는 짝사랑도, 매일 아침잠을 깨우는 고약한 왕자들도 안녕이다.

성탑의 공주님은 드디어 꿈결 같은 사랑을 이루었으니까.

바로 그녀를 지키던 드래건의 품 안에서.

“한 번만 더, 제노. 방금 전엔 제대로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단 말이야.”

“원래 그러라고 하는 거거든.”

그가 엷게 웃었다. 그리고 미카엘라에게 세 번째 소원을 빌라고 했다. 드래건의 곁에서 영원히 행복하게 살 수 있게 해 달라는 소원. 그것을 빌면 그는 기쁜 마음으로 대륙 저 끝에 있는 신비의 샘에 데려다주겠다고 했다.

정말 ‘이후로도 영원토록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를 이룰 수 있는 것이다.

미카엘라의 얼굴에 예쁜 볼우물이 패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왕자님 따윈, 전혀 필요치 않았다.

키스를 나누는 두 사람 사이로 싱그러운 바람이 불어들었다. 반쯤 열린 유리창 문으로 들어온 바람에 책상 위의 공책 페이지가 파라락 넘어갔다.

마지막 페이지에는 푸른 잉크로 쓴 문장 한 줄만이 적혀 있었다.

아주 짧디짧은 문장이었다.

내가 고맙지?

그것은 유일하게 딸이 아닌 다른 이에게 남긴 메시지였다. 피를 부르는 소원만 들어주며 살아온 드래건의 입가에 드디어 천천한 미소가 번져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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