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2장. 미약은 거들 뿐 (2/4)

제2장. 미약은 거들 뿐

“제노!”

조용한 고성 안에 미카엘라의 비명이 울려 퍼졌다. 그네 의자를 고치고 있던 제노는 망치를 내던진 뒤 즉시 비명이 들린 곳으로 달렸다. 미카엘라는 쉽게 비명을 지르는 공주님이 아니었다. 갑자기 툭 떨어진 송충이나 바닥에 미끄러지는 정도로는 비명을 터뜨리지 않았다.

성탑이다.

발걸음이 초조해졌다. 인간의 형체를 한 지금의 속도가 성에 차지 않았다. 드래건으로 돌아가면 성탑쯤이야 날갯짓 한 번에 올라갈 수 있다. 대신 성이 무너지겠지만 말이다.

“어떻게……. 저리 치워……!”

성탑에 가까워질수록 미카엘라의 목소리가 드문드문 들렸다. 안간힘을 짜내는 목소리에 제노는 보통 상황이 아님을 직감했다.

콰광!

결국 힘을 제어하지 못하고 문을 부숴 버렸다. 두꺼운 나무 문이 마치 종잇장처럼 날아갔다. 동시에 제노의 눈에 미카엘라가 들어왔다.

어제 아침에 자신이 쫓아내 버린 왕자가 그녀의 손목을 잡은 채 단검을 들이대고 있었다. 불타서 너덜너덜해진 옷과 달리 왕자의 단검은 새파랗게 날이 선 상태였다.

“정체를 밝혀라, 이 마녀!”

이성을 놓은 게 확실한 왕자가 머저리처럼 검을 휘둘렀다. 미카엘라는 제노와 단검을 번갈아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미카엘라는 단 한 번도 검으로 겨눠지는 대상이 되어 본 적이 없다. 그녀는 공주다. 성을 찾아온 왕자들은 얼굴 한 번 보지 못한 미카엘라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겠다고 맹세했다. 검은 그녀를 지키기 위한 수단이었지, 그녀를 해치는 도구가 아니었다.

적어도 미카엘라의 세계에선.

게다가 그녀의 곁에는 늘 제노가 있었다. 뭇사람들이 두려워하는 지옥의 화염이 미카엘라를 든든히 방어했다.

목숨을 위협받는 날이 오리라고는 꿈에서조차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심지어 다른 누구도 아닌, 왕자에게 말이다.

“공주님은 어딜 가고 요망한 마녀가 성을 휘젓고 다니는 거냐!”

“그러니까 내가 그 공주라니깐?”

“헛소리!”

왕자는 검이 파리채라도 되는 양 마구잡이로 휘둘렀다. 그는 충격과 공포에 제정신이 아니었다. 검게 묻은 재 사이로 흰자위가 번득였다.

“공주님은 탑에 갇혀 계시다고 했다. 슬픔과 외로움에 눈물로 밤을 지새우신다고 들었단 말이다! 그런데 너는…… 즐거워 보이잖아. 내가 성벽을 절반도 채 기어오르지 못했을 때부터 네 노랫소리가 들렸다!”

“내 집에서 내가 노래를 부르는 게 뭐 어때서.”

“헛소리! 헛소리!”

“제노가 당신을 죽이기 전에 성을 떠나. 어젠 위협에 그쳤지만 오늘은 정말 참지 않을 거야.”

나무 열매를 닮은 빛깔의 눈동자가 불안으로 떨리는 와중에도, 미카엘라는 제법 단단한 목소리로 상대에게 경고했다. 눈물을 글썽이지도 않았다.

반면 철석같이 믿어 온 무언가가 붕괴당한 왕자는 미카엘라의 말에 부르르 떨었다. 그러던 왕자의 눈길이 제노에게 이르렀다.

언제든 드래건의 원형으로 변신할 수 있게 가벼이 걸친 가운, 그 사이로 드러난 상체의 근육. 가슴팍에 새겨진 염룡의 문양. 바로 어제 마주쳤을 노란 호박색 눈동자.

눈으로 받아들인 모든 조각이 왕자의 안에서 멋대로 끼워 맞춰졌다.

“드래건과 마녀가 사통했구나.”

“……뭐라고?”

미카엘라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되물었다. 사통이라는 단어가 귀를 의심케 했을 것이다. 단검으로 겨눠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오늘 이 시간까지 자신을 설명하는 데 쓰일 줄은 꿈에도 몰랐을 단어.

“가여운 공주님을 죽이고, 너랑 저 악마 드래건이 공주님 행세를 하고 있는 거지!”

“어제 머리라도 다쳤어?”

“사특한 마녀! 공주님의 원수!”

더는 말이 통하지 않음을 깨달은 미카엘라가 이거 놓으라며 손목을 흔들었다. 왕자는 아랑곳 않고 무기를 휘둘렀다. 고운 머리카락 한 줌이 단검에 베여 나갔다. 미카엘라의 가냘픈 어깨에도 핏줄기가 맺혔다.

피를 본 순간 제노의 이성이 툭 끊겼다.

제노는 그대로 왕자에게 달려가 놈을 끌어안은 채 성벽 밖으로 몸을 던졌다. 꾸에에엑! 왕자의 입에서 우스꽝스러운 비명이 터져 나왔다.

땅에 닿기까지 몇 초의 시간 동안, 제노는 인간의 모습으로 왕자의 면상에 주먹을 박아 넣었다. 드래건으로 놈의 몸을 찢는 건 쉬웠다. 지나치게 쉬웠다.

그는 왜 인간들이 주먹으로 치고받으며 싸우는지 깨달았다. 주먹에 직접 와 닿는 감촉이 짜릿했다. 살갗이 터지고 그 아래 뼈가 으스러지는 것이 생생히 느껴졌다. 상대의 피 냄새가 제 안의 잔혹한 본능을 일깨웠다.

지면까지 고작 몇 미터가 남았을 때 제노는 원래 모습으로 변해 날아올랐다. 그의 날갯짓 한 번에 땅이 움푹 패었다. 거대한 발톱에 잡힌 왕자는 목이 터져라 비명을 지르며 버둥거렸다.

‘차디찬 호수에 잠재워 주지. 한여름에도 북해의 빙하처럼 차가운 그곳으로 떨어지면 네놈의 덜떨어진 머리가 얼어붙을 거다.’

생각만으로도 만족스러웠다.

‘감히 미카엘라에게 상처를 입히다니.’

결코 용서할 수 없었다.

숲속의 커다란 호수를 향해 날아가고 있는데 왕자가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또 다른 단검인가? 그렇다면 참으로 쓸데없는 짓이다. 드래건의 피부는 어떤 갑옷보다도 질기고 단단해서 한낱 인간의 무기 따위로 해를 가할 순 없으니 말이다.

“고, 공주님의 복수다!”

치이이이익!

단검이 아니었다. 왕자는 꼭 향수처럼 생긴 병을 꺼내 제노를 향해 분사했다. 장렬한 표정은 마치 순교자의 그것과도 같았다.

‘뭐야, 이게?’

눈과 코가 조금 간지러웠다. 후춧가루라도 섞은 건가 싶을 때쯤 호수에 도착했다. 제노는 망설임 없이 머저리 놈을 호수로 떨어뜨렸다. 만약 살아남는다면 꼭 다시 찾아오길 바랐다. 다음번엔 몸의 절반을 불태우고 나머지 절반은 찢어 죽일 테니까.

성으로 돌아가고 있는데 미카엘라의 음성이 들렸다. 문제가 해결되었는데 어째서 공주는 겁에 질린 목소릴 내고 있을까.

다음 순간, 제노의 눈앞이 휘청했다.

대체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알아차리기도 전에 그의 몸 안에서 이상한 기운이 끓어올랐다. 속이 울렁거리고 온몸이 욱신거렸다. 머리가 띵하게 울렸다.

왕자가 뿌린 것이 독이었나. 무기는 그에게 무용지물이지만 독이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제노는 잠깐 방심하고 만 자신에게 화가 났다. 이 모든 게 미카엘라의 일이라면 이성을 잃는 제 탓이었다.

“망할…….”

“제노!”

순식간에 균형을 잃은 드래건이 성탑으로 떨어져 내렸다.

◈ ◈ ◈

“제노, 정신 차려. 아, 어떡하지…….”

미카엘라의 손이 떨렸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알 수가 없었다. 화난 제노가 평소보다 격하게 왕자를 응징한 뒤 성으로 돌아오는 중이었다.

거기까지는 괜찮았는데, 갑자기 하늘에서 비틀거리더니 균형을 잃고 떨어졌다. 천만다행히 성탑에 부딪히기 직전 인간의 형체가 되었지만, 그는 외상이 자연 치유된 이후에도 좀처럼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왜 의식이 돌아오지 않는 걸까? 무섭다. 이대로 제노가 잘못되기라도 한다면.

“안 돼. 제발 눈 좀 떠 봐, 제노.”

“으읏, 흐…….”

“어디가 아픈 건지 모르니까 약도 함부로 못 쓰겠어…….”

30분이 더 지났다. 연신 앓는 소리를 흘리며 고통스러워하던 제노가 눈을 떴다. 미카엘라는 그의 이마에 손바닥을 대고 체온을 살폈다.

아직 열기가 남아 있긴 하지만 막 정신을 잃었을 때보다는 한결 나아진 듯했다. 안도감이 벅차오른 나머지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단검으로 위협당할 때조차 괜찮았던 자신이었는데.

제노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괜찮아? 움직일 수 있겠어?”

순간 미카엘라의 몸이 얼어붙었다. 도와주려고 뻗은 손을 제노가 밀쳐 낸 것이다. 자신에게 눈길도 주지 않고 너무나 차갑게, 그렇게 탁. 이런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자신이 진짜 귀찮은 꼬마였을 때조차 제노는 이렇게 굴지 않았다.

아마 아파서 그런 걸 거야. 몸이 안 좋으니까 내게 신경 쓸 여력이 없는 거야.

애써 그리 생각하려 했지만 냉정하게 밀쳐 내진 손이 아렸다. 안도하던 마음은 어딜 가고, 갑자기 휑한 서늘함만이 미카엘라의 곁을 맴돌았다.

“……윽!”

밀쳐진 충격에 차마 다시 손을 뻗지도, 그렇다고 아예 자리를 뜨지도 못한 채 머뭇거리며 뒤를 따르던 미카엘라가 황급히 제노에게 다가갔다. 든든하기만 하던 어깨가 보는 사람이 겁날 정도로 떨리고 있었다.

“많이 아파? 어디가 어떻게 아픈 거야? 말해 줘. 약을 가져올게.”

창고에 약이 종류별로 있다. 최근 들어 생필품이 오는 횟수가 부쩍 줄긴 했지만 그래도 웬만한 약은 다 갖춰져 있었다. 예전에 그가 두통이 심할 때 약 먹는 걸 본 적이 있으니 제노에게도 약이 들을 것이다.

말해 주면 좋겠다. 부디 그를 도울 수 있게. 항상 제노가 자신을 도와주었으니까.

하지만 그가 잔뜩 쉰 목소리로 내뱉은 말은 거절의 한마디였다. 심지어 미카엘라를 눈에 담기도 싫은 사람처럼 이쪽을 보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제노는 아까부터 줄곧 시선을 피했다. 거부당하고 있다는 자각이 미카엘라의 가슴을 욱신거리게 했다.

“혼자 있게 내버려 둬.”

“또 쓰러지면 어떡해. 안색이 나빠 보여.”

“나쁜 건…… 그쪽이 아니야.”

힘겹게 말을 잇던 제노가 돌연 웃음을 터뜨렸다. 그답지 않은 행동이었다. 삼천 년이나 살아온 존재이기 때문인지, 드래건은 가장 기쁠 때조차 엷은 미소를 띠는 게 고작이었다. 애초에 감정의 변화가 크지 않은 제노였다.

한데 지금은 뭔가 달랐다. 달라도 너무 달랐다.

“나쁜 건 나지.”

“그게 무슨 소리야……. 이, 일단 일어나. 내가 침대까지 부축해 줄게.”

“침대.”

제노가 다시 웃음을 흘렸다.

“돌겠군.”

미카엘라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묘하게 오싹했다. 그를 일으키기 위해 애쓰던 미카엘라는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찔 떨고 말았다.

“셋을 셀게. 마지막 숫자를 내뱉기 전에 내 방에서 나가, 공주님.”

“제노.”

“그러곤 네 방으로 돌아가. 문을 잠그면 더 좋고.”

“아까부터 자꾸만.”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냐고 물으려 했다. 다음 순간, 그와 눈이 마주쳤다. 미카엘라는 그가 계속 시선을 피하던 이유를 알게 되었다.

제노의 눈동자가 드래건의 그것으로 바뀌어 있었다. 인간의 것과는 형태 자체가 다른 동공이 잔뜩 수축되었다가 커지기를 반복했다. 이런 경우는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제노의 상태가 더더욱 정상이 아니라는 증거였다.

“네 어깨에.”

제노가 여전히 섬뜩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피…….”

“아, 이거? 괜찮아. 신경 쓸 것 없어. 나보다는 제노가.”

더는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미카엘라의 상처를 뚫어져라 응시하던 그가 갑자기 하얀 어깨에 얼굴을 묻은 것이다. 할짝, 핥는 느낌이 살갗 위로 느껴졌다. 미카엘라의 모든 사고가 정지했다.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지.

“왕자 놈들은, 모조리 목을 분질러야 돼.”

제노가 무서운 말을 아무렇지 않게 했다. 그가 입을 열 때마다 뜨거운 숨결이 미카엘라의 어깨에 닿았다 흩어졌다.

“하루가 멀다 하고 내 아침 감상을 방해하거든. 잠든 널 들여다보는 게 얼마나 즐거운 일인데. 물론 놈들의 방해가 없었다면 그저 감상만으로 끝나지 않았겠지.”

“……아마 지금 아파서 제정신이 아닌가 봐. 그, 그래. 지금 자기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지? 열이 많이 나면 그럴 수 있대.”

“널 핥고 싶어.”

미카엘라가 입을 다물었다.

“널 샅샅이 빨아 먹은 뒤 네 안에 날 쑤셔 박고 싶어.”

제노의 입술이 삐뚜름하게 위로 올라갔다. 익숙한 냉소가 아니었다. 사고뭉치 꼬마를 한심하게 쳐다보는 표정도 아니었다. 위험하기 그지없는 분위기에 미카엘라가 짧게 숨을 들이켰다.

“예쁘게 자랐지, 미카엘라. 내 달콤한 공주님.”

평소엔 들을 일이 없는 다정한 찬사가 미카엘라의 귓가에 쏟아졌다. 이어서 그의 입술이 말랑한 귓불에 닿았다.

“왕자 따위에 널 넘겨주지 않아.”

질투와 위협으로 일그러진 음성에 목덜미의 솜털이 바짝 섰다. 그의 이름을 부르려는데 저항할 새도 없이 몸이 끌려갔다. 미카엘라의 등에 제노의 달아오른 가슴팍이 부딪혔다.

◈ ◈ ◈

미카엘라는 상황을 따라가려 애썼다. 작은 그녀쯤은 완전히 파묻힐 만큼 커다란 몸. 그 안에 갇힌 채 턱이 들어 올려졌다. 이윽고 제노의 입술이 그녀를 삼켰다.

그가 내게 키스를 하고 있어.

“……흐읏, 으으.”

첫 키스치고는 너무 짙었다. 지나치게 뜨거워 정신이 아득해졌다. 그는 미카엘라의 입술을 강하게 빨아들였다가 놓아주길 반복했다.

여린 턱을 잡고 있던 제노의 손가락은 이제 목을 나른히 문지르며 그녀 안의 열기를 부채질하고 있었다. 살갗이 쓸리는 기분에 발가락이 곱아들었다. 자꾸 부끄럽게 흐느끼는 소리가 나올 것만 같았다.

어떻게 숨을 쉬어야 하지?

가슴이 갑갑해질 무렵, 제노가 도톰한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생경한 감각에 미카엘라의 입술이 벌어졌다.

“으읏!”

제노가 고개를 틀며 뜨거운 혀를 밀어 넣었다. 돌기가 반대로 쓸리는 감각이 미카엘라의 가슴을 부풀게 했다. 혀가 들고나는 움직임이 무언가를 떠올리게 할 만큼 음란했다.

타액이 섞이고 혀가 얽힌다. 그가 계속 안으로 숨으려 드는 조그만 혀를 낚아채 힘껏 빨아올렸다. 뿌리가 얼얼하리만치 빨릴 때마다 미카엘라의 허리께가 찡하게 울렸다.

제노의 손이 드레스로 감싸인 가슴을 움켜쥘 즈음엔 미카엘라가 저도 모르게 허리를 틀며 고양이처럼 몸을 비비고 있었다.

깃털처럼 가볍고 부드러운 실크 드레스 자락이 미카엘라의 다리에 휘감겼다. 실크와 피부가 비벼지면서 차츰 야릇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몸 안쪽 깊은 곳이 욱신거리며 다리 사이가 촉촉하게 젖어 드는 기분이었다.

“하아, 하, 아.”

“……언제나 이렇게 하고 싶었지.”

입술이 떨어지자마자 숨을 몰아쉬는 미카엘라를 내려다보며 제노가 속삭였다. 언제나, 라고 했나, 지금? 몽롱한 와중에 그의 말이 미카엘라의 뇌리에 스며들었다.

아니, 마음에 새겨 두지 마. 그는 지금 뭔가 정상적이지 않은 상태야. 독에 취했든 어쨌든 간에 평소의 제노가 아니란 말이야.

“흣…….”

미카엘라가 핑 도는 눈물을 참으며 그에게 매달렸다. 어지러운 감정이 혼란스러웠다. 어릴 때부터 속상한 일이 있을 때면 이렇게 그에게 매달려 마음을 달래곤 했지만.

“그런 표정은 좋지 않아, 공주님.”

제노가 그녀를 안아 들며 중얼거렸다. 불편한 몸으로 움직이다니. 무리하는 게 아닐까 걱정되었는데 그는 더 이상 통증 따윈 개의치 않는 표정이었다.

단 세 걸음 만에 미카엘라는 푹신한 침대 위로 내려졌다.

“제노! 그렇게 갑자기…….”

미카엘라를 내려놓자마자 그는 공단 슬리퍼를 벗긴 뒤 그대로 드레스 안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단단한 손바닥이 매끈한 종아리와 허벅지를 거쳐 순식간에 속옷이 자리한 데까지 올라왔다.

“흐, 으응……. 너무 빨라.”

“이보다 느리게는 못해.”

그가 낮게 답하며 한 손으로 옷을 벗어 던졌다. 제노는 언제든 드래건으로 변할 수 있게 가운 같은 겉옷만을 걸치고 다녔다. 추운 겨울에도, 화창한 봄에도 앞섶을 열어 둔 채 아래에 검은 바지만 입은 차림으로 성안을 돌아다녔다. 그는 인간의 옷이 답답하고 불편하다고 말했었다.

언제부터였을까.

그가 미카엘라 앞에서 겉옷 앞을 여미게 된 것은.

“잘도 거짓말을 했구나, 미카.”

“하, 앗!”

제노의 손가락이 미카엘라의 속옷 위를 꾹 눌렀다. 예민한 부분이 자극당하자 저절로 신음 소리가 터져 나왔다.

“갑자기라니. 벌써 이렇게 젖어 있는데.”

“싫어어…….”

“느껴지지 않아? 여기가, 이렇게, 여기가 흠뻑 젖었잖아.”

제노가 한마디를 할 때마다 속옷 위로 손가락을 힘주어 눌렀다. 키스를 하고 어루만져지는 동안 젖어 버린 레이스 속옷이 민감한 살갗에 달라붙었다. 발갛게 무르익은 미카엘라의 꽃술이 포피를 밀어 올리며 몸집을 키우고 있었다.

거기다 손가락을 자꾸 문지르면 견딜 수 없어진다. 부끄러운 신음이 애액만큼이나 울컥 터져 나왔다.

“흐으, 읏, 안 돼. 아…… 싫어, 아!”

걷잡을 수 없었다. 벌려진 허벅지가 파들파들 떨렸다. 미카엘라는 눈을 질끈 감고 몰아치는 쾌감에 흐느꼈다. 제노의 손가락이 정확히 바로 그 부분을 자극하고 있었다. 피하려고 허리를 뒤틀어도 결국 부드러운 벨벳 시트에 몸을 문지르는 게 되어 버린다.

자신이 제노의 손을 피하고 싶은 건지, 아니면 좀 더 강하게 해 달라고 응석을 부리는 건지. 진짜 원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미카엘라의 머릿속이 하얘졌다.

“천천히 해 줄까?”

제노가 레이스 속옷을 벗겨 내며 그녀에게 물었다. 그의 손가락은 짓궂고 야했지만 그녀의 의향을 묻는 목소리는 다정했다. 한차례 폭풍을 겪은 미카엘라는 눈물이 맺힌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깊은 곳이 너무도 욱신거렸다. 틀림없이 드레스는 물론이고 벨벳 시트에도 얼룩이 졌을 것이다. 아래로 밀려 나온 체액의 존재감이 다리 사이에 가득했다. 허벅지 안쪽까지 끈적하게 젖고 말았다.

“가엾게도…… 미안하지만 역시 안 되겠어.”

“으응?”

가벼이 들어 올린 그녀의 종아리에 입을 맞춘 제노가 웃었다. 또다시, 위험한 미소였다. 그는 드레스 자락을 걷어 내고선 그대로 몸을 겹쳐 왔다. 미처 벗지 못한 바지가 그의 허벅지에 걸려 있었다.

“아플 거야.”

“제노…….”

“그래도 난 멈추지 않을 거고.”

제노가 입술을 내렸다. 미카엘라의 정신을 혼미하게 만들려는 게 목적인 듯 그가 혀끝으로 예민한 점막을 핥고 간질였다. 말캉한 혀가 얽히는 감각은 두 번째인데도 여전히 적응이 되지 않았다.

그러는 새 벌려진 다리 사이로 제노의 몸이 천천히 들어왔다. 그저 닿는 것만으로도 뜨거움과 단단함이 느껴졌는데, 두꺼운 쐐기 끝이 그녀의 안을 가르며 들어오기 시작하자 엄청난 이물감이 밀어닥쳤다.

아파. 조금이 아니라 많이 아파.

미카엘라가 항의하듯 제노의 입술을 깨물며 흐느꼈다. 그가 입술을 떼더니 억눌린 듯한 신음을 흘렸다.

“큭, 너무 좁아. 힘을 빼라고 해도 무리겠지.”

“아파, 아프단 말이야. 흑, 흐으…….”

“그럼.”

제노가 하체를 완전히 밀어붙였다. 두꺼운 성기가 미카엘라의 안에 푹 파묻혔다. 고운 얼굴이 통증으로 일그러졌다. 반면 제노는 턱이 떨릴 때까지 이를 악물고 극도의 쾌감을 견뎠다.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한 채 그녀 머리 옆의 벨벳 시트를 움켜잡고선 이 순간을 버텼다.

촉촉하고 섬세한 내벽 주름이 그의 몸을 조여들었다. 이미 예전에 잃어버린 이성의 잔해까지 탈탈 털어 없애겠다는 듯 빈틈없이 밀착하여 쥐어짰다.

괴로운 신음을 토해 낸 제노가 미카엘라의 구슬에 다시 손을 내렸다. 부드럽게 달래는 손가락에 경직되어 있던 미카엘라가 반응하기 시작했다. 사르르 굴리고 아래위로 나른하게 어루만진다. 미끈거리는 액을 돌기에 바른 뒤 가볍게 두드리고 비벼 주자 점점 통증 너머로 기묘한 감각이 피어올랐다.

“이상해, 제노. 뭔가…… 흐으으!”

“그래, 좋아.”

그저 조여들기만 했던 내벽이 주인의 쾌감에 따라 꿈틀거렸다. 미카엘라는 제노의 성난 몸이 천천히 들고나는 것을 느꼈다. 몸 안을 갈랐다가 즈윽, 하고 멀어진다. 여전히 아릿한 통증이 남아 있었지만 그가 제 안에서 빠져나갈 때마다 미카엘라는 입술을 깨물며 엉덩이를 들썩였다.

“넌 네 안이 어떤 느낌인지 모르겠지.”

“제노, 아앙……. 읏…… 하앗!”

“이렇게 야하게 달라붙어선.”

제노가 구슬에서 손을 뗐다. 대신 몸을 밀어붙이는 속도를 올렸다. 음란하게 젖은 소리가 찌걱찌걱 미카엘라의 귀를 괴롭혔다. 제노가 뿌리 끝까지 몸을 파묻을 때마다 그녀 안에서 견딜 수 없는 간지러움이 부풀어 올랐다.

마치 터지기 위해 몸집을 키우는 비눗방울처럼.

“앗, 아앙, 앗, 앗!”

미카엘라의 몸이 흔들렸다. 머리가 이상해져 버릴 것만 같았다. 지나친 쾌감에 눈물과 교성이 함께 터져 나왔다.

그런 미카엘라를 더없이 사랑스럽다는 눈으로, 한편으론 이보다 엉망으로 만들고 싶다는 눈으로 바라보던 제노가 돌연 몸을 뺐다.

쑥 빠져나간 뒤의 상실감에 칭얼거리는 것도 잠시. 그가 미카엘라의 몸을 안아 들더니 방향을 바꾸어 엎드리도록 만들었다.

이러면 제노의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 그를 보고 싶었다. 얼굴이 보이지 않으니 불안했다.

다시 몸을 돌리려는 미카엘라를 부드럽게 무게로 내리누른 건 제노였다. 체중을 실어 그녀가 움직이지 못하도록 한 제노는 손끝으로 허벅지 안쪽부터 흠뻑 젖은 꽃잎까지 쓸어 올렸다. 미카엘라는 섬세한 자극에 몸을 떨며 다리를 모으려 했다.

그러자 제노가 가볍게 엉덩이를 때렸다. 찰싹 내리치는 손바닥에 미카엘라의 내벽이 조여들었다. 아주 어릴 때 그가 ‘이 말썽꾸러기’라며 이마를 콩 박은 적이 있었다. 하필 이런 타이밍에 옛 생각이 떠오르다니 부끄러웠다.

“이대로 들어갈게.”

“으응?”

짧은 예고가 끝나자마자 제노가 단단히 부푼 몸을 밀어 넣었다. 젖은 입구를 가르며 꾸욱 들어오는 그것은 아까 전보다 벅차고 뜨거웠다. 이번엔 익숙해질 여유도 주지 않고 곧바로 내벽을 파고들어 예민해진 점막을 마구 긁어 댔다.

미카엘라는 거의 짓눌리다시피 한 채로 거센 자극을 당해야 했다. 희고 말랑한 가슴이 벨벳 시트 위에서 뭉그러졌다. 제 입에서 새어 나오는 신음 소리가 낯설었다.

‘온몸에서 터질 것 같아.’

그리고 겁이 날 정도로 극심한 쾌감이 미카엘라의 몸을 하늘 끝까지 떠밀어 올렸다.

“……아아앗!”

미카엘라가 흐느끼며 진저리를 쳤다. 경련하듯 몸이 떨렸다.

‘너무 좋아서 무서워. 아니, 아파. 아니야, 이건, 지금 이건.’

호흡이 짧게 끊겼다. 미카엘라는 이러다 잘못되어 버리진 않을까 두려워질 때까지 몸을 떨다가 시트 위로 축 늘어졌다. 온몸에서 맥박이 쿵쿵 뛰어 댔다. 눈앞이 어지러웠다.

‘이상하지, 제노? 평소대로가 아닌 건 제노인데 어째서 내 머릿속이 엉망진창 무지갯빛일까.’

제노가 무슨 말을 한 것 같았는데 미카엘라의 정신은 꿈결 속으로 멀어졌다. 잠결에도 나직하게 속삭이는 그의 목소리를 느낄 수 있었다.

잠깐의 시간이 지난 다음 제노의 입술이 또다시 미카엘라의 가슴에 내려앉았다. 흐으응, 보채는 건 잠시뿐. 꿈속에서도 달콤한 순간은 계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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