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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제 손으로 키워 낸 공주님 (1/4)

제1장. 제 손으로 키워 낸 공주님

“……열어라!”

미카엘라는 벨벳 쿠션을 끌어안으며 몸을 뒤척였다. 달콤한 아침잠을 즐기는 중이건만 시끄러운 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왔다.

어제 밤늦게까지 뜨개질을 하느라 잠자리에 늦게 든 탓에 태양이 성탑 꼭대기에 걸릴 때까지 침대를 벗어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밖에서 들리는 소리는 너무도 크고 우렁찼다. 외적의 침입을 알리는 뿔피리 소리도 저만큼 시끄럽지는 않을 것이다.

제발, 좀. 제발.

“난 체르메흐 왕국의 7왕자 알폰소다! 악독한 드래건에게 잡혀 있는 미카엘라 공주님을 구하러 왔다!”

그래, 알아. 그 용건이 아니면 누가 미쳤다고 ‘저주받은 숲’에 들어오겠어?

다 좋은데 말이야.

미카엘라는 햇볕에 바싹 말린 냄새가 나는 베개들 사이로 얼굴을 푹 파묻고 손끝으로 더듬어서 쿠션도 집어 들었다. 그리고 커다란 그것으로 제 머리를 덮었다.

부탁이니 오후에 다시 와줄 순 없을까?

지지난달로 그녀는 열여덟 번째 생일을 맞았다. 성안에 갇혀 산 지 10년이 되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세상 물정을 모르는 건 아니었다.

그래서 더더욱, 우거진 서쪽 숲속의 고성을 찾아오는 이웃나라 왕자들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다들 같은 스승 밑에서 배우나? ‘성에 갇힌 이웃나라 공주를 구하러 갈 왕자들의 필독서’ 뭐 이런 책이라도 읽고 온 게 아니고서야 어쩜 저리 대사가 똑같지? 아침부터 해자(垓字) 너머에서 고래고래 고함이나 치고 말이야.

한 명이라도.

정말 단 한 명이라도 자신이 세수를 하고 머리를 빗고 만족스러운 식사로 기분이 좋아진 오후쯤, 정중한 태도로 ‘먼 길을 와서 목이 마른데 물 한 잔만 청할 수 있을까요?’라고 말했더라면.

“악마를 등에 업은 사악한 드래건은 지금 당장 내 검의 심판을 받아라!”

“아아아아아아!”

미카엘라는 천장에 머리를 박을 기세로 일어났다. 거위 털을 채운 이불이 훌러덩 젖혀졌다. 작고 하얀 발이 신경질적으로 슬리퍼를 꿰신었다. 하늘색 잠옷 위로 두꺼운 숄을 걸친 그녀는 온 대륙의 왕자들을 몰살할 기세로 복도를 걸었다.

“……왕자란 것들은 말이지.”

등 뒤로 물결치는 회갈색 머리카락이 걸음을 옮길 때마다 바람결에 나부꼈다.

“나보다 제노를 좋아하는 게 틀림없어.”

미카엘라는 짜증과 분노에 몸서리치며 모퉁이를 돌았다. 성탑으로 가는 계단이었다. 어딘가의 창문이 열려 있나 보다. 빵 부스러기를 주워 먹으려 들어온 참새 몇 마리가 그녀의 등장에 깜짝 놀랐다. 오늘따라 공주님의 살기가 이만저만이 아니라고 짹짹댈 것이다.

“공주를 구하러 왔다면서 매번 제노만 찾지. 도대체 날 구하고 싶은 거야, 아니면 드래건이랑 한판 붙길 원하는 거야? 어느 쪽이 먼저냐고!”

쾅!

성탑 문을 부숴 버릴 기세로 열어젖혔다. 머저리 같은 왕자들. 세 시간밖에 못 자서 분노한 공주님은 성벽 밖으로 몸을 내밀려다가 아슬아슬한 순간에 멈춰 섰다. 잠시 규칙을 잊고 있었다.

자신은 외부인, 즉 왕자들에게 모습을 드러내선 안 된다.

그것은 어린 미카엘라와 아버지 사이의 유일한 약속이었다. 대외적으로 그녀는 고통받는 존재여야 했다. 쇠사슬에 묶여 가련하게 흐느끼는 대신 장밋빛 뺨을 한 채 자유로이 성안을 누비는 모습을 보여서는 곤란했다.

[네가 성에 있는 동안 네 어머니의 무덤을 잘 돌봐 주마.]

황금빛 지붕의 궁전에 사는 아버지.

첫 번째 왕비를 잃은 지 1년이 채 지나지 않아 눈부시도록 매혹적인 두 번째 왕비를 맞아들인 아버지.

당시 사람들은 어린 공주의 눈치를 살폈다. 아예 모르는 사람보다는 그녀의 유모가 새어머니인 편이 낫지 않느냐며 애써 좋은 쪽으로 설득하려 했다.

미카엘라는 떼를 쓰지 않았다. 왜 웨딩드레스를 입은 새어머니의 배가 벌써 부풀어 있는지도 묻지 않았다. 아버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순순히 짐을 챙겨 서쪽 숲으로 들어왔다.

그 후로 10년이 흘렀다.

“듣고 있나, 악랄한 드래건!”

“잘못된 패를 골랐어, 왕자. 정비의 딸을 구하면 뭔가 훌륭한 상이라도 주어질지 알았겠지? 7왕자라니 본국에서의 입지도 좁을 테고 말이야. 하지만 애초에 날 여기 가둔 건 이 나라의 왕이라고.”

미카엘라는 원래 대포를 두기 위해 만들어진 네모난 틈 사이로 고개를 내밀려 했다. 얼빠진 낯짝을 봐두고 싶었다.

체르메흐 왕국의 알폰소 왕자. 하늘에서 쏟아지는 화염을 마주하고도 여전히 기세등등할 수 있을까?

“키는 나보다 한 뼘 반 작고, 머리카락은 보라색. 체격은 좋은 편. 근육을 키운 상체에 비해 하체가 다소 부실하군.”

“깜짝이야.”

미카엘라는 어느새 등 뒤로 다가온 존재에 흠칫 놀랐다. 제노. 그녀와 함께 10년째 고성에 살고 있는 드래건이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해자 너머의 왕자를 보려면 미카엘라는 두 눈을 찌푸려야 하지만 신비로운 이종족인 그는 눈앞의 책을 대하듯 30미터 밖의 얼굴을 읽었다.

“외모도 이전 왕자들에 비해 훌륭하다. 다만, 눈 밑이 지나치게 퀭한 데다 말안장의 짐 밖으로 술병이 두 개나 보이는 걸로 봐선.”

“싫어.”

미카엘라가 성벽에 등을 대고 쪼그려 앉은 채 고개를 저었다.

“술 마시는 남자는 싫어, 제노.”

아버지는 술을 좋아하고 사람을 좋아하고 흥을 좋아하는 사내였다. 늘 파티를 열어 손님들을 불러들였다. 동시에 정원에서 조용한 시간을 보내는 어머니를 재미없는 사람이라며 핀잔했다. 농담 삼아 아내 흉을 보는 거라고 했지만, 단순한 농담이라기엔 그 횟수가 잦았다.

“그럼…….”

짧은 대화가 끝났다. 미카엘라는 성벽에 올라서는 제노를 바라보았다. 입고 있던 가운을 벗어 성벽 안쪽에 떨어뜨린 그는 까마득한 아래로 몸을 던졌다.

이윽고 거대한 붉은 드래건이 하늘로 날아올랐다.

악독한 드래건이니 악마를 등에 업었다느니, 방금 전까지만 해도 기세 좋게 소리 지르던 왕자는 차마 말을 잇지 못한 채 굳어 버렸다. 다음 순간, 용암보다 뜨거운 불길이 드래건의 입에서 뿜어져 나왔다. 솜씨 좋은 대장장이가 만든 왕자의 검이 한여름의 얼음 조각처럼 눈 깜짝할 새 녹아 버렸다.

“으어…… 허어어억!”

퇴로를 남겨 준 건 계산된 행동이었다. 왕자가 허겁지겁 말에 올라탔다. 체면이고 뭐고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상대는 꽁지가 빠져라 도망치기 시작했다.

저주받은 서쪽 숲의 염룡(焰龍)은 오늘도 그렇게 공주의 일상에서 또 한 명의 왕자를 몰아냈다. 머리카락과 옷이 타 버린 채로 반쯤 혼이 나가 말을 모는 왕자는 드래건의 악명을 널리널리 퍼뜨릴 것이다. 미카엘라도, 그녀의 아버지도 원하는 바였다.

하지만 드래건도 그것을 원하는지에 대해서는 어느 누구도 알지 못했다.

◈ ◈ ◈

차가운 물이 제노의 머리 위로 쏟아졌다. 짙붉은 머리카락이 물기를 머금고 가라앉았다. 다시 나무통에 물을 한가득 채워 머리 위로 쏟아부은 그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아지랑이 비슷한 김이 그의 전신에서 피어오르더니 1분도 되지 않아 물기가 말랐다. 흠뻑 젖어 있던 머리카락은 가벼운 한숨에도 흩날릴 만큼 보송하게 변했다.

고개를 들자 빨래 바구니를 들고 복도를 지나가는 미카엘라가 보였다. 그녀는 여느 공주님과 다르다. 빨래며 요리, 청소, 텃밭 가꾸기를 혼자 힘으로 해낸다. 아니, 해내야만 했다.

잠시만 주의를 게을리 하면 이끼와 담쟁이넝쿨로 뒤덮이는 이곳에서 그녀를 도울 하녀라곤 단 한 명도 없었으니까.

“터무니없는 결혼을 해 버렸어, 힐디안.”

제노는 천 년간 잠자고 있던 자신을 깨운 계약자의 이름을 나지막이 입에 담아 보았다.

힐디안 로와나 프리시드.

잔잔한 미소가 아름다웠던 사람. 선대왕의 딸이자 현왕의 죽은 첫 번째 왕비, 그리고 미카엘라의 어머니.

오랜 잠에서 깬 염룡은 자신의 봉인을 깬 자가 난세의 영웅이나 왕국을 탈환하려는 야심만만한 장군이 아니라 연보랏빛 히스꽃 같은 공주임을 깨닫고 한동안 허탈한 웃음을 흘렸었다.

힐디안이라며 제 이름을 밝힌 공주는 발톱 하나로도 충분히 자신을 찢어 죽일 만큼 거대한 드래건을 앞에 두고도 초연한 모습을 보였다.

그거 하나는 인상적이었다.

일단 봉인이 풀리면 계약자가 파기하기 전까지 종속의 계약이 유지된다. 인간의 모습으로 변신한 뒤 바위 끝에 걸터앉은 제노는 새로운 계약자에게 무엇을 원하느냐고 물었다.

[왕위 계승을 막는 배다른 왕자가 있나? 여왕이 되고 싶어? 아니면 뭘 원하지? 드래건을 가진 자는 그냥 자신만의 새 왕국을 세울 수도 있어. 그 힘을 모르고 깨운 것은 아닐 텐데.]

[그냥.]

새 계약자는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며 해사하게 웃었다.

[친구가 되어 줘.]

[…….]

[그거면 충분해.]

농담이겠지, 하는 사이 시간이 흘렀다. 힐디안은 몇 살을 더 먹었고, 결혼을 앞두게 되었다. 천 년 만에 눈 뜬 것치고 허무하리만치 평화로운 시간을 보내던 제노는 계약자의 결혼 상대에 대해 알아보고는 냉소를 흘렸다.

천 년 전에도, 이천 년 전에도 저런 자들이 있었다. 왕자나 영웅으로 태어나지 않은 까닭에 공주와의 결혼으로 왕이 되고자 하는 이들.

사내는 유쾌한 미남 귀족으로 평판이 좋았으나, 염룡은 한눈에 그의 변변찮음을 꿰뚫어보았다.

제노는 힐디안에게 결혼을 거부하라고 말했다. 여느 공주라면 어쩔 수 없이 아버지의 명에 따라야겠지만 힐디안은 달랐다. 그녀에겐 자신이 있었다. 공주를 힐난하며 반기를 드는 자들에게 지옥을 맛보여 줄 드래건이.

하나 돌아온 것은 고요하고 쓸쓸한 웃음이었다.

[상관없어.]

그 말을 할 때 힐디안은 금방이라도 바람결에 흩날려 사라질 것 같은 모습이었다. 위태롭다고 할까. 이미 마음 깊은 곳에서 이 땅을 떠난 것 같은 분위기랄까. 분명 눈앞에 그녀가 있는데 왠지 허상이란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왜 넌 그렇게 웃지.

네 자신을 좀 더 생각하라고 할 때마다 마치 남 일이라는 듯이.

[아버지가 그를 마음에 들어 해. 그거면 나쁘지 않아.]

그리고 3년 뒤, 힐디안은 아이를 낳았다. 작고 꼬물거리는 그것은 따끈따끈하고 말랑했으며, 너무도 연약했다. 머리카락과 눈 색깔은 친부를 닮았지만 나머지는 영락없는 힐디안이었다.

늘 조용하던 계약자는 아이와 함께 있을 때 자주 웃음을 터뜨렸다.

한때 창공을 날며 대지를 불사르던 염룡은 어린 미카엘라가 끔찍이도 먹기 싫어하는 순무조림을 접시째 불태워 주고, 순서대로 알파벳을 쓰는지 감시하는 나날을 보냈다. 그를 알던 다른 드래건들이 봤으면 머리에 대포를 맞기라도 했냐고 황당해했을 시간들이었다.

하지만 그는 정말 괜찮았다.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조심스럽게 이런 표현을 쓸 수도 있을 것이다. 소소한 기쁨이 뭔지 알게 되었다고.

그러던 어느 날, 힐디안이 쓰러졌다.

정원에서 갑자기 정신을 잃은 왕비는 마치 몸살처럼 사흘을 앓더니 그대로 눈을 감았다. 인정을 베풀던 우아한 왕비의 죽음에 많은 이들이 눈물을 흘렸다.

한데 어째서일까. 정작 힐디안과 가까웠던 제노는 슬픈 감정이 들지 않았다.

인간과 궤를 달리하는 드래건이어서가 아니었다. 그는 오히려 계약자가 오래 버텼다는 생각을 했다. 힐디안은 끝까지 덧없는 미소의 이유를 말하지 않았지만, 제노는 그녀가 드디어 자유의 몸이 되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하여 염룡은 여덟 살짜리 공주와 단둘이 남게 되었다. 늘 아내 곁에 머무는 드래건을 두려워했던 왕은 감히 시선도 마주치지 못한 채 이런 제안을 했다.

[미카엘라를 데리고 서쪽 숲으로 가게. 음식이나 옷 같은 생필품은 정기적으로 보내 주겠네.]

무언의 질문을 던지자 왕의 목소리가 더욱 떨렸다.

[벌써부터 어린 공주를 노리고 결혼을 청하는 자들이 있다네. 게다가 미카엘라는 제 엄마를 닮아 아주 예쁘지. 사람들의 눈길이 닿지 않는 곳에서 안전하게 자라는 편이 좋을 게야.]

[당신이 언제부터 딸의 안전에 신경을 썼다고.]

조롱 어린 말을 던졌지만 왕은 반박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아무리 듣기 좋은 핑계를 짜냈다 하나 결국은 드래건에게 꺼져 달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었다. 이만하면 옹졸한 필부치고는 애를 썼다. 어차피 미카엘라를 덜떨어진 놈 곁에 두고 싶지 않았던 그는 군말 없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오냐오냐해 줬더니 도를 넘어선 것까진 미처 예상하지 못한 바였다만.

[혹시라도 공주가 이웃나라 왕자와 결혼하는 일이 없도록!]

뒤돌아보지 않고 물러가는 제노를 향해 왕이 다급하게 외쳤다.

[미카엘라가 계속 성안에서 살도록 해 주게.]

[왜 그딴 부탁을 하는 거지, 인간 왕이여?]

[그, 그것은.]

왕이 머뭇거렸다. 사실 답을 듣지 않아도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사내는 본디 귀족 신분이었고, 힐디안과 결혼을 함으로써 왕위 계승권을 얻었다. 당장은 왕국의 왕이라 하나 순수 혈통을 따지고 든다면 오직 힐디안의 딸 미카엘라만이 정통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혹시라도 미카엘라가 이웃나라 왕자와 결혼한다면, 그리고 공주 부부 사이에 아들이라도 태어난다면.

“힐디안.”

염룡의 낮은 목소리가 아침 공기 속에 아스라이 흩어졌다. 친구가 되어 달라는 것 외에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았던 계약자는 눈을 감기 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주인의 권리를 입에 담았다.

어린 딸을 지켜 달라는 말.

이제 정말 혼자가 되어야 하는 아이의 곁에 있어 달라는 부탁을 그가 거절할 수 있을 리 없었다. 미카엘라는 계약으로 맺어진 주인이 아니었으나 이미 그의 심장을—.

“까마귀들이 호두 바구니를 물어 갔어!”

미카엘라가 창문 밖으로 머리를 내밀며 분한 듯 소리쳤다. 이른 아침에 벌어진 일인데 그녀는 이제야 발견한 모양이었다.

“오늘 호두파이 구우려고 했는데!”

미카엘라는 또다시 이런 일이 일어나면 다음엔 까마귀를 파이로 만들어 버리겠다며 화를 내는 중이었다. 제노는 묘한 눈길로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정말 갓 태어난 아기 때부터 지켜봐 온 공주였다. 그녀가 첫걸음마를 할 때도, ‘용용이’라며 조그만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킬 때도 늘 함께 있었다. 베틀로 첫 직물을 완성한 순간을 아직도 생생히 기억했다. 서툰 티가 역력한 작품이었지만 공주의 으쓱해하는 표정이 퍽 귀여웠다.

이제 성에 들어온 지 10년. 미카엘라는 한평생을 제노와 살아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 역시 공주의 전 생애를 지켜봐 왔다.

“내가 인간이었다면 노망이 난 거라 해야겠지.”

그는 엷은 한숨과 함께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믿을 수 없게도, 아니, 믿고 싶지 않게도 언젠가부터 미카엘라가 더 이상 어린 공주로 보이지 않았다.

언제부터였을까.

책에 나오는 키스의 느낌이 궁금하다며 열여덟 번째 생일 선물로 첫 키스를 바랐을 때부터? 그때 자신의 반응을 떠올려 보면 더 이전일 수도 있겠다. 어이없는 웃음을 흘리는 대신 황당한 소리 하지 말라며 자리를 피했으니까.

정말 미카엘라를 어리게 보았다면 가벼운 키스쯤은 문제없었을 것이다. 힐디안이 아기에게 입 맞추었듯, 자신도 비슷한 모양새로 키스해 줄 수 있었을 것이다.

애송이 왕자들을 쫓아내는 임무가 점점 진심으로 변해 갔다.

“인간 흉내를 내는 데도 정도가 있지.”

이쯤 되면 힐디안의 친구 놀음에 장단을 맞춰 준 나머지, 자신이 진짜 인간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든다. 원래 드래건은 감정에 동요되지 않으며, 세상사에 냉소적인 존재다. 그런 자신이 제 손으로 키우다시피 한 미카엘라에게 끌리다니.

하지만 계약자 탓을 하기엔 힐디안이 세상을 뜬 지 너무 오랜 시간이 지났다. 그래서 제노는 요즘, 유일한 동거인을 보면 상당히 곤혹스럽고 심란한 상태에 빠지기 일쑤였다.

“혼자 뭐라고 중얼거리는 거야?”

“아무것도.”

“방금 되게 착잡한 표정이었거든.”

“잘못 봤겠지.”

“얼버무리네, 제노.”

공주님의 입매가 흥미로운 곡선을 그렸다.

“야릇한 상상이라도 했어?”

“날 대체 뭐라고 생각하는 거지?”

어느새 미카엘라의 관심은 까마귀들에게서 제노로 옮겨 왔다. 반갑지 않은 일이었다. 오묘한 빛깔의 눈망울이 자신을 향하면 숨통이 죄는 것 같은 기분이 드니까.

“글쎄. 음흉한 드래건?”

미카엘라가 작게 웃더니 창가를 떠났다. 자신은 그녀와 손끝이 닿기라도 하면 그대로 굳어 버리는데, 정작 공주는 태평하게 저런 소리나 하고 있었다.

그만두자. 미카엘라를 탓할 일이 아니다. 그녀는 잘못한 게 없다. 제정신이 아닌 쪽은 자신이다.

제노는 고개를 내저으며, 차가운 물로도 씻어 내리지 못한 번민을 떨쳐 내려 애썼다.

드래건은 인간 꼬마에게 욕정하지 않는다. 인간 꼬마는 아침잠을 깨운답시고 방에 들어갔다가 머리맡에서 숨죽인 채 지켜보는 대상이 아니다. 그러다가 뺨을 부드럽게 어루만진다거나 말간 입술을 건드려 보아선 안 되는 존재다.

마음을 다잡으려던 계획은 뜻밖의 암초를 만났다. 단순하기 그지없는 단어 하나가 제노의 호박색 눈동자를 일렁이게 만들었다.

“말간…… 입술이라.”

아무도 네가 이토록 아름답게 성장한 줄 모르겠지. 우거진 숲과 높은 성벽이 널 가리고 있으니. 별다른 일이 없다면 계속 이대로 내 시선이 닿는 곳에만 머물며 하루하루를 보낼 테지. 널 독점하고 있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한없이 기쁘다가도, 성 밖의 삶을 모르는 네가 안타까워져.

미카엘라. 너를 떠올리면 붉은 장미 꽃잎과 가을 하늘의 구름과 호수에 떨어진 빗방울이 차례로 스쳐 지나가. 풀잎에 맺힌 새벽이슬이 혀끝에 닿는 것 같지.

미카엘라 프리시드. 내 손으로 키워 낸 나의 달콤한 공주님.

“……단단히 미쳤군.”

한숨을 쉬며 눈가를 문질렀다. 정말 사랑스러운 아이지? 자신을 보며 활짝 웃던 힐디안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그래, 지나치게 사랑스러워서 죽을 지경이야.

제노는 이미 오래전 세상을 뜬 계약자를 향해 으르렁거린 뒤 몸을 돌렸다. 이 위험한 번민이 계속되도록 놔두고 싶지 않았다.

하, 이것 봐라.

삼천 년 묵은 드래건이 또 비겁자처럼 자리를 피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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