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 * *
집무실을 나온 디아나는 카이루스와 함께 걷다 나직이 중얼거렸다.
“음, 두 분은 참 알다가도 모르겠어요.”
“네?”
“오라버니와 카이루스요. 친한 거 같은데 가끔 보면 친한 거 같지 않고 아까도 묘하게 살벌하달까…….”
특히 에키온이 카이루스를 경계하는 모습이 종종 보였다.
디아나는 고개를 갸웃하며 카이루스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는 당황스런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하하, 살벌하다뇨. 그저 남자들 사이에 살가운 말을 나누기 어색해 그런 거뿐이랍니다.”
“그런가요…….”
“네, 에키온과 전 어릴 적부터 친우였어요. 특히 제겐 친형제나 다름없죠.”
카이루스는 에키온과의 오랜 세월을 떠올리는 건지 편안한 미소를 지었다.
“하긴 두 분이 얼마나 친한지 레귤러스에게 다 들었는데 제가 괜한 오해를 했나 봐요.”
“뭐…… 가끔은 오해가 아니었을 수도…….”
“네?”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보다 영애, 점심 안 드셨으면 저와 함께 드시겠어요?”
카이루스의 제안에 디아나의 눈이 살짝 커졌다.
“……둘이서요?”
“네.”
둘이서…….
디아나는 잠시 멍하니 카이루스를 바라보았다. 둘이서 식사를 하는 게 엄청 특별한 일은 아니었다.
카이루스와 자신의 관계를 생각해 보면 어릴 적부터 알아왔고 오랜 시간 편지를 나누며 격 없이 친해진 사이였다.
그러니 둘이서 식사를 하는 게 이상할 것도 없다.
근데 왜 이렇게 아무렇지 않지가 않지.
파티에서 그를 다시 본 그때부터 자꾸만 그가 편한 듯 편하지 않다.
햇살을 등지고 선 카이루스를 물끄러미 바라보자 콩닥, 심장이 두근거렸다.
“큼…….”
두근거림을 감추려 고개를 비스듬히 돌리며 헛기침을 내뱉자 그가 오해한 듯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둘이서 식사하는 것이 불편하시면 거절해도 됩니다.”
다시 고개를 돌려 그를 보자 눈꼬리가 내려간 카이루스의 얼굴이 보였다.
한데 그 모습이 묘하게 상처받은 유네스의 모습과 닮아 보이며 마음을 콕콕 쑤셨다.
“불편할 리가…… 있겠어요. 점심 같이해요, 카이루스.”
그의 시무룩해지는 얼굴에 디아나는 결국 졌다는 듯 미소를 그릴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함께 점심을 먹자고 한 것까진 좋았는데 분위기가 왜 이렇게 된 걸까.
대공저의 다이닝 룸.
디아나는 달그락 달그락 식기가 움직이는 소리만이 울리는 룸 안에서 어색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분명 카이루스와 함께 대공저로 올 때까진 분위기가 화기애애했었다.
편지 속에서 못다 했던 이야기들도 나누고 카이루스에게 애교를 피우는 유네스를 보며 웃기도 했다.
문제는 그와 함께 저택에 도착했을 때부터였던 거 같다.
저택에 도착하자마자 디아나는 막 저택으로 들어가고 있는 대공과 마주쳤다.
밖의 볼일이 생각보다 빨리 끝난 대공은 저택으로 일찍 돌아왔고 그렇게 디아나와 카이루스 둘이 먹으려 했던 점심 식사에 대공도 함께하게 된 것이다.
그때부터 묘하게 어색해진 분위기는 식사가 시작되자 무거운 침묵으로 바뀌었다.
디아나는 연한 생선 살을 괜스레 포크로 꾹 찌르다 대공을 한번 카이루스를 한번 바라보았다.
어딘지 닮은 듯한 두 사람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굳은 얼굴이었다.
그러고 보면 황제 폐하와 달리 아버지와 카이루스는 별로 접점이 없는 거 같았다.
딱히 두 사람이 함께 있던 걸 본 적도 없었고 아버지가 카이루스에 대한 이야기를 꺼낸 적도 없었다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자신의 생일 파티에서도 묘하게 아버지가 카이루스에게 날을 세웠었다.
두 사람이 친하지 않다는 것은 알겠지만 이대론 자신이 밥 먹다 체할 거 같았다.
물을 마신 디아나는 일부러 밝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렇게 같이 식사하니까 좋은 거 같아요. 아버지도 아시죠? 왕태자님이랑 제가 꾸준히 서신을 주고받은 걸요. 왕태자님께서 제 성년식을 축하해 주기 위해 먼 오도어 왕국에서 제국까지 와 주셨잖아요.”
생선 스테이크를 얼려 버릴 거 같은 눈빛으로 식사를 하고 있던 대공이 고개를 들었다.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눈썹을 꿈틀거리던 대공은 디아나의 미소를 보며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그래. 알고 있지. 멀리서 디아나의 성년식을 축하해 주러 온 것은 진심으로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왕태자 저하.”
“아닙니다. 성년식을 겸하는 생일이니만큼 제가 꼭 직접 축하를 전하고 싶었습니다.”
카이루스는 형식적으로 입꼬리만 올리고 있는 대공에게 부드럽게 미소를 그렸다.
대공이 그를 마음에 들어하지 않는다는 것은 이미 파티장에서 마주했을 때부터 눈치챘다.
에키온과는 비교도 안 되는 강한 경계심이 느껴지는 눈빛으로 그를 보았으니 말이다.
하지만 대공은 디아나의 아버지이니 어떻게든 좋은 인상을 남기고 싶은 게 그의 마음이었다.
물론 지금 마주한 싸늘한 금안을 보니 마음대로 될 거 같진 않지만.
“한데 파티가 끝난 지 벌써 며칠이나 흘렀는데 아직 제국에 계시는군요. 설마 이렇게 제 저택에서 왕태자님을 만날 줄은 몰랐습니다.”
왜 네가 내 집에 왔냐는 듯한 눈빛이었다.
카이루스가 어색한 웃음을 짓던 그때 디아나가 말했다.
“아, 왕태자님은 건국제를 보고 왕국으로 돌아가신데요. 그리고 저택에서 오신 건 점심을 같이 먹기로 했는데 수도의 레스토랑은 보는 눈이 많을 거 같아서 제가 저택으로 모셨어요. 아버지 허락 안 받아서 혹시 불편하셨나요?”
저택의 주인은 대공이었으니 손님의 방문도 당연히 미리 허락을 받는 게 원칙이긴 했다.
대공은 디아나에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네 손님을 초대하는 건데 내 허락이 왜 필요하겠니. 그런 건 신경 쓰지 말거라.”
“다행이에요.”
“그럼 왕국으로 돌아가기 전까지 디아나를 보러 자주 놀러 와도 될까요?”
카이루스가 대공에게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순간 대공의 눈썹이 매섭게 치켜세워졌다.
“레귤러스와 자주 들려주세요, 왕태자님. 아까 했던 오도어 왕국 이야기도 더 듣고 싶어요.”
하지만 디아나가 미소를 지으며 말하자 대공은 차마 오지 말라고 할 수 없었다.
마음 같아선 오도어 왕태자는 대공가에 출입금지라고 기사라도 세워 두고 싶었지만 말이다.
“정말이지, 마음에 안 드는군.”
“아버지, 방금 뭐라고 하셨어요?”
너무 작은 목소리라 듣지 못한 디아나가 되묻자 대공은 언제 날을 세웠냐는 듯 미소를 지었다.
“아무것도 아니란다. 그보다 왕태자님이 자주 오신다니 저도 기쁘군요. 앞으로 저도 왕태자님을 자주 뵐 수 있도록 언제나 시간을 비워 놓겠습니다.”
“네? 아…… 하하, 감사합니다……대공 전하.”
디아나와 둘이서의 만남은 절대 허락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느껴지는 대공의 금빛 눈동자에 카이루스를 향해 번뜩였다.
대공의 눈빛을 마주하자 카이루스는 꼭 이곳이 식당이 아니라 검을 들고 있는 연무장인 것처럼 몸이 긴장되었다.
대공에게 좋은 인상을 남기고 싶었던 카이루스의 바람은 이미 날아간 듯했다.
“앞으로 아버지와 왕태자님도 많이 가까워지면 좋겠어요.”
대공의 살벌한 눈빛을 보지 못한 디아나만이 즐거운 미소를 그렸다.
“……저도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디아나.”
식당은 카이루스와 대공이 만들어 낸 묘한 분위기로 가득 찼다.
* * *
“디아나, 배웅해 줘서 고마워요.”
묘한 기류가 가득했던 만찬이 끝나고 디아나는 카이루스를 배웅하고 있었다.
“좀 더 이야기를 나누고 가셔도 좋았을 텐데요.”
카이루스와의 어색함이 많이 풀어진 디아나는 점심을 먹자마자 떠나는 그가 아쉬웠다. 카이루스 역시 디아나와 더 함께 있고 싶었다.
하지만 오늘은 이만 돌아가는 것이 좋았다. 갑작스런 방문으로 대공의 심기가 많이 불편해 보였으니 말이다.
만찬장에서 살아나온 것을 다행이라 여겨야 할 눈빛이었다.
카이루스는 대공의 살벌했던 눈빛을 떠올리다 피식, 가벼운 웃음을 지었다.
그를 향한 적대심이었지만 디아나의 아버지여서인지 어려울 뿐 불쾌하진 않았다.
“카이루스?”
딴생각을 하는 듯한 카이루스를 부르자 검은 눈동자가 디아나를 바라보았다.
“디아나, 제가 빨리 돌아가서 많이 아쉬운가요?”
“네? 아니 그게…….”
아쉬운 건 사실인데 아쉽다고 솔직히 말하려니 부끄러움이 밀려들었다.
‘왜 부끄럽지…….’
디아나가 말을 얼버무리자 카이루스가 짙은 미소를 그렸다.
“디아나, 지금 볼이 붉어진 거 아나요?”
“앗 이건 갑자기 좀 더워서…….”
손부채를 부치며 카이루스 때문이 아닌 척해 보았지만 자신이 생각해 봐도 말이 안 되는 변명이었다.
가을 날씨에 싸늘한 바람이 부는데 갑자기 덥다니, 우습지 않은가.
이놈의 홍조는 왜 고쳐지질 않는 걸까.
어릴 적부터 고쳐지지 않는 부끄러우면 볼을 붉히는 습관을 괜히 욕한 디아나는 당황해 눈을 도르륵 굴렸다.
창피함에 그에게서 한 걸음 물러나려 한 순간 카이루스가 손을 잡았다.
갑작스레 손을 잡는 그에게 놀라 눈을 크게 떴지만 불쾌하지 않아 뿌리치지 않았다.
카이루스는 그런 디아나를 가만히 응시하다 천천히 고개를 내렸다.
작별의 키스.
디아나의 손등에 카이루스의 입술이 내려앉았다. 손등 키스를 처음 받아 본 것도 아니었건만 디아나는 그의 입술이 닿는 순간 심장에 쿵 천둥이 치는 것만 같았다.
멍해진 디아나와 시선을 마주한 카이루스의 붉은 입술이 매력적인 호선을 그렸다.
“오늘만 날이 아니니까요. 레귤러스와 자주 들를게요. 그리고 오늘 함께해서 즐거웠습니다, 디아나”
“……저도…… 즐거웠어요, 카이루스.”
심장이 너무 빨리 뛰어서 목소리마저 떨렸다. 카이루스는 아쉽다는 듯 디아나의 손을 느리게 놓아주었다.
“그럼 전 이만 가 보겠습니다.”
“……조심히 가세요.”
카이루스는 미소를 짓곤 마차에 올랐다. 마차의 문이 닫히고 마차가 저택을 완전히 나갈 때까지 디아나는 멍하니 서 있었다.
“대공녀님, 괜찮으세요?”
피비가 다가와 묻고 나서야 정신을 차린 디아나는 아직까지 쿵쾅거리는 심장에 살포시 손을 얹었다.
“피비…….”
“네?”
“나 아무래도…… 심장이 이상한 거 같아.”
“네?”
그게 무슨 말이냐는 듯 피비가 되물었지만 디아나도 그 답을 알 수가 없었다.
그저 발그레한 볼로 카이루스의 입술이 닿았던 손등을 꼭 그러쥐었다.
꼭 자국이 남을 거처럼 손등의 열기가 식지 않았기 때문에.
* * *
어둠이 짙게 깔린 밤.
수도의 경비대가 순찰을 돌고 있었다. 순찰을 마친 경비대가 상점 거리를 빠져나가자 아무도 없는 거리엔 적막함이 내려앉았다.
얼마나 흘렀을까 적막 속에서 무거운 구둣발 소리가 울렸다.
상점의 골목으로 들어선 한 남자는 검은 로브를 쓴 채 한 건물로 다가갔다.
폐점이란 팻말을 단 오래된 건물 앞에 멈춘 남자는 주변을 탐색하듯 둘러보았다.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그는 곧 팻말을 치우며 상점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버려진 상점 안은 어질러진 물건들과 먼지로 가득했다.
남자가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오래된 나무 바닥에서 삐거덕거리는 소리가 났다.
상점 안쪽 벽장이 있는 곳에서 멈춘 그는 탁상 위에 놓여 있는 도마뱀 구리 동상으로 손을 뻗었다.
곧게 뻗은 도마뱀의 머리를 오른쪽으로 돌리자 책장이 스르륵 옆으로 밀려나며 숨겨졌던 비밀 문이 드러났다.
문을 열고 들어간 남자는 계단을 내려갔다.
그곳엔 폐허가 된 상점 안이라 믿을 수 없는 아늑한 공간이 있었다.
넓은 공간과 몇 개의 방이 있었다.
남자는 거실 카우치 소파에 늘어져 있는 여자에게 다가갔다. 남자가 로브를 벗자 짙은 푸른 머리칼이 지하의 불빛 아래 드러났다.
남자는 여자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주인님.”
남자의 목소리에 눈을 감고 있던 여자가 눈을 떴다. 피보다 새빨간 눈동자와 허리까지 늘어진 갈색 머리카락.
뱀 같은 묘한 분위기를 풍기는 여자의 모습으로 자란 어둠의 정령은 남자를 내려다보았다.
“왔구나. 그것들은 잘 지내고 있니?”
“……네, 아직 별다른 일들은 없었습니다.”
“하긴 온 수도가 가디언과 대공녀의 찬양으로 시끄러운데 잘 지내지 않을 리가 있겠어. 도둑고양이처럼 남의 힘을 훔쳐가 놓고 그 영광을 누리고 있다니 정말 배알이 꼴려 미치겠어. 그렇지 않니?”
세이아는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힘을 모으기 위해 밖을 나갈 때마다 들려오는 디아나의 이야기에 속이 역겨워졌다.
디아나와 가디언에 대한 찬양을 어딜 가든 피할 수 없었다. 가디언에게 힘만 빼앗기지 않았다면 그 어린 소녀가 성년식을 맞을 일 따윈 없었을 것이다.
지금쯤 죽어 없어졌을 테니까.
“주인님, 어차피 얼마 지나지 않아 사라질 자들입니다. 곧 그들을 찬양한 어리석은 자들도 주인님 앞에 무릎을 꿇을 것입니다.”
분노에 손을 꽉 그러쥐던 세이아는 남자의 말에 머리가 차분해졌다.
‘그래, 얼마 남지 않아 사라질 것들이야.’
그리고 그걸 실현해 줄 눈앞의 남자가 제겐 있었다.
“준비는 잘되어 가고 있는 거겠지?”
“네, 건국제의 방어벽을 구축하는 마법사들의 명단을 전부 손에 넣었습니다. 건국제가 열리기 전날 제가 마도구 전부를 바꿀 것입니다.”
“절대 들키지 않게 마지막까지 조심해. 멍청한 것들이 경악하는 얼굴을 난 꼭 보고 싶으니까.”
“네, 반드시 주인님이 그들의 목숨을 취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그래야 할 거야.”
세이아는 경악으로 물들 그들의 얼굴을 상상하며 만족스럽게 붉은 눈을 번뜩였다.
* * *
“대공녀님, 도착했습니다.”
오랜만에 호위로 따라 나온 에드윈이 마차 문을 열어 주며 손을 내밀었다.
“고마워, 에드윈.”
“별말씀을요.”
에드윈의 손을 잡고 마차에서 내린 디아나는 눈앞의 커다란 극장을 보며 눈을 크게 떴다.
“와 진짜 크다.”
“원래는 이 정도로 크지 않았는데 오페라가 크게 인기를 끌며 공연을 보러 오는 귀족들이 늘어나 몇 년 전에 증축 공사를 했다고 합니다.”
에드윈이 극장을 보며 말했다.
“그렇구나. 에드윈은 오페라 본 적 있어?”
“네, 어릴 적 한 번 본 적 있습니다. 근데 너무 어릴 적이라…… 사실 기억은 잘 안 나네요.”
에드윈은 과거를 떠올리듯 이맛살을 살짝 구기다 가벼운 웃음을 지었다.
“난 오늘 처음 보는 거야.”
“근데 어쩐지 기대하는 표정이 아니신 거 같습니다. 오페라 싫어하시나요?”
에드윈은 어딘지 불편해 보이는 디아나의 얼굴을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오페라 공연.
귀족들의 고상한 취미 생활이자 문화생활이라 할 수 있는 오페라 공연을 그렇게 좋아하지도 않았지만 싫어하는 것은 아니었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오페라 공연이 무엇인지는 알지만 딱히 관심이 없었다. 어린 시절을 북방에서 보냈기에 보러 갈 만한 기회가 많지도 않았고 말이다.
그런 자신이 이렇게 오페라 공연을 보러 오게 된 건 레귤러스 때문이었다.
며칠 전 대공가로 카이루스와 함께 놀러 온 레귤러스가 최근 오페라 공연이 그렇게 재밌다고 이야기를 꺼냈다.
그냥 그러려니 듣고 있었는데 오페라의 내용이 초대 황제 폐하의 사랑 이야기란 말에 호기심이 들었다.
- 초대 황제의 사랑이라면 에이루스와 케일라의 사랑인가 보군. 케일라가 죽지만 않았더라면 아마 초대 황후는 그녀가 되었을 텐데. 안타까운 사랑이었어.
거기다 그날 모습을 드러내고 함께 있던 가디언의 말에 더욱 흥미가 생긴 디아나는 처음으로 오페라를 보러 가고 싶단 생각을 했다.
그렇게 다 같이 오페라를 보러 가자 했고 그때까지만 해도 한 번도 본 적 없는 공연을 상상하며 설레어 했다.
어제 갑자기 레귤러스의 서신이 도착하기 전까지만 해도 말이다.
다시금 오늘의 현실을 떠올리자 긴장감에 얼굴이 딱딱해졌다.
“대공녀님, 어디 불편하신 곳 있으세요?”
자신의 얼굴이 많이 굳었는지 에드윈의 녹빛 눈동자에 걱정이 살며시 스몄다.
“아냐. 그냥 사람이 좀 많아서 그런가 봐. 건국제가 얼마 남지 않아서 그런가, 수도에 사람들이 많이 늘어났네.”
적당한 핑계를 찾으려 한 말이었는데 주변을 둘러보니 정말 사람들이 북적이고 있었다.
특히 오페라 극을 보러 온 게 아닌 듯한 평민들이 특히 많이 보였다. 건국제가 이틀 남아서인지 수도에 사람들이 많이 들어온 듯했다.
“아무래도 이번 건국제엔 대공녀님도 참석하시고 하니…… 제국 전역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모이고 있다 들었습니다. 저도 듣기만 했는데…… 확실히 사람이 많군요.”
에드윈은 많은 인파에 호위를 강화하려는 듯 뒤따른 기사들에게 손짓했다.
“디아나.”
그때 그녀를 부르는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리자 막 그녀에게로 다가오고 있는 카이루스가 보였다.
“카이루스.”
그리고 역시나 그의 곁에 레귤러스는 보이지 않았다. 갑자기 레귤러스의 일정이 바뀌어 같이 오지 않을까 했던 희망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원래 셋이서 함께 보기로 했던 공연이었다.
한데 어제 갑자기 레귤러스가 서신을 보냈다.
자신이 기르는 식물 상태가 많이 안 좋아져서 간호하느라 공연을 못 보러 간다고 말이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고 했겠지만 레귤러스에겐 식물이 자식이나 다름없었다.
‘유네스가 아팠다면 나도 공연을 보러 가진 않겠지.’
누구보다 그 마음을 잘 이해했지만 문제는 카이루스와 단둘이 있는 것이 불편하단 것이다.
카이루스가 싫어진 것은 절대 아니었지만 대공가에서 함께 점심을 먹었던 그날 이후 카이루스를 볼 때마다 심장이 병이 난 거처럼 뛰고 있었다.
정말 심장에 이상이 생긴 것일까 싶어 의원의 진찰도 받아 봤지만 자신의 몸은 아주 건강한 상태라고 했다.
‘괜히 의원을 불러서 아버지에게 걱정만 끼쳤지.’
하여튼 지금의 자신은 카이루스와 둘이 있는 것이 힘들었다. 주체가 안 되는 심장 때문에.
“저보다 일찍 도착하셨네요. 레이디를 기다리게 하는 건 예의가 아닌데 늦어서 죄송합니다.”
카이루스는 디아나를 보며 매끄럽게 미소 지었다. 검은 머리칼을 뒤로 단정히 넘기고 베이지색 프록코트를 입은 그는 평소와 달리 수수한 차림이었지만 그게 자연스러운 멋이 느껴졌다.
주변의 지나가는 귀부인들과 영애들은 물론이고 남자들까지 한 번씩은 카이루스를 힐끔거렸다.
그리고 그의 멋진 모습에 디아나의 심장이 또다시 말을 안 들었다.
두근두근.
또렷한 검은 눈동자를 응시하던 디아나는 큼, 작은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살짝 내렸다.
‘그냥 누가 봐도 너무 잘생겨서 이러는 걸 거야.’
아름다운 명화를 보거나 조각상을 보면 감탄사가 절로 흘러나오는 거처럼 말이다.
디아나는 떨리는 심장에 마음을 가다듬고 아무렇지 않은 척 그를 향해 입꼬리를 올렸다.
“아니에요, 저도 금방 도착했는걸요. 오늘 레귤러스가 함께했다면 더 좋았을 텐데…… 아쉽게 됐어요.”
“그런가요, 전 사실 레귤러스가 오지 못한다 해서 더 좋았습니다.”
“네?”
“디아나와 둘이서 공연을 볼 수 있으니까요.”
상냥하다 느꼈던 그의 검은 눈동자가 일순 짙어진 거 같았다.
둘이서 공연을 봐서 좋다니…….
태연을 가장했던 디아나의 표정이 무너졌다. 부끄러움으로 볼이 붉어진 디아나는 당황한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함께 있어서 좋아, 행복해.
이런 말은 자주 들었었다. 스스로도 자주 하기도 했었고. 근데 그런 말을 주고받은 사람들은 항상 가족들이었다.
피비나 에드윈도 있었지만 그들 역시 디아나에겐 가족이었다.
‘그런데 카이루스는…… 가족은……아닌 거 같은데…….’
어린 시절부터 그와 친하게 지내오긴 했지만 가족이라 하기엔 뭔가 달랐다.
카이루스는…… 친한 친구에 가까운 사람이었는데 친구 사이에 둘이서 공연을 봐서 좋다고 하기도 하나…….
유일한 친구라 할 수 있는 데이빗을 떠올려 보았지만 그런 얘기를 나눈 적은 없었던 거 같다.
“……저도…… 카이루스랑 함께 공연을 봐서 좋아요…….”
혼란스러움이 아직 정리되지 않은 디아나는 어색하게 말했다. 삐걱거리는 소리가 날 거 같은 디아나의 미소를 보던 카이루스는 피식, 가벼운 웃음을 지으며 손을 내밀었다.
“그럼 이만 공연장으로 들어갈까요, 디아나.”
“네. 그래요…….”
디아나는 카이루스의 손을 잡았다. 오늘따라 그의 손이 뜨겁게 느껴진다 생각하며 함께 공연장으로 들어갔다.
* * *
“그를 볼 때마다 내 심장이 터질 듯이 뛰어요. 이러다 심장이 터져 버릴까 두려울 정도로 말이죠. 정말 왜 이러는 걸까요, 혹시 저 병에 걸린 걸까요?”
“허허, 그럴 리가 있나. 그게 병이었다면 아마 수많은 사람들이 심장이 터져 죽어 버렸을 걸세. 그건 병이 아니야, 케일라.”
“그럼 대체 왜 이러는 건가요.”
케일라는 이런 자신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얼굴을 찡그렸다. 그리고 케일라를 연기하는 배우에게 디아나도 숨을 죽이고 몰입하고 있었다.
그녀가 말한 이해할 수 없는 증상을 디아나도 겪고 있었으니까.
눈도 깜박이지 않고 늙은 의원이 입을 열기를 기다렸다.
“그건 네가 사랑에 빠졌기 때문이지.”
“네?! 말도 안 돼요!”
믿을 수 없다는 듯 케일라가 소리쳤다. 그리고 동시에 디아나도 충격을 받은 듯 멍청한 얼굴을 했다.
“인정하기 싫겠지만 케일라 넌 사랑에 빠진 거란다. 그 사람을 볼 때마다 어디 심장만 뛰었을까. 생각해 보렴. 그와 함께 있는 시간이 즐겁고 또 그가 웃으면 너도 기분이 좋아지고 그가 하는 사소한 말들이 특별하게 느껴지지 않았니?”
“그건…… 그랬지만…….”
“그 사람을 볼 때마다 무감각하게 심장만 뛰었는지 가슴께가 간질거리고 설레는 기분도 함께였는지를 생각해 보렴. 그럼 네가 그를 사랑하는 것을 부정할 수 없을 거란다.”
공연장을 크게 울리는 늙은 의원의 말이 디아나의 가슴팍에 박혔다.
케일라가 무어라 이야기를 하고 또 다른 대사들이 이어지고 아름다운 노랫소리가 공연장을 울렸지만 디아나는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사랑이라니. 그럼 나도……카이루스를…….’
디아나는 마음속의 말을 채 끝맺지 못하며 무릎 위로 손을 꼭 그러쥐었다.
‘아냐, 아닐 수도 있어. 방금 무감각하게 심장이 뛰는 거라면 아닐 수도 있다고 했잖아.’
디아나는 감정을 확인하기 위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옆자리에 앉아 있는 카이루스의 옆얼굴이 보였다.
공연에 집중하고 있는지 늘 부드러운 미소가 서린 얼굴이 진지했다.
반듯한 콧날과 붉고 도톰한 입술.
수려한 그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자 심장이 콩닥콩닥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그리고 무어라 딱 말할 수 없는 가슴 어딘가가 간질거리고 볼에 열기가 스민다.
“디아나?”
그 순간 시선을 느낀 카이루스가 고개를 돌렸다. 그와 눈이 마주치고 나직한 음성이 귓가를 울리자 디아나는 더 이상 부정할 수가 없었다.
그를 향해 심장이 뛰는 이유가 무엇인지 알아 버렸다.
디아나는 그의 시선을 마주할 수 없어 고개를 홱 돌렸다.
“디아나?”
의아함이 서린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지금은 도저히 아무렇지 않게 카이루스를 바라볼 수가 없었다.
‘사랑이라니…… 내가 카이루스를 사랑한다니.’
그를 바라보면 심장이 터질 듯이 뛰고 가슴께가 간질거리고 몸에서 열이 났다.
자신은 늙은 의원의 말처럼 사랑에 빠진 것이었다.
그 사실을 깨닫자 심장이 더욱 터질 듯 뛰었다.
사랑이란 단어가 낯선 건 아니었지만 지금 자신이 느끼는 사랑은 아버지를 사랑하고 피비를 사랑하는 그런 감정이 아니었다.
로맨스 소설에 나오던 남녀 간의 사랑. 남들의 일이라, 책 속에서나 있는 일이라 생각했던 낯선 그 감정을 지금 자신이 겪고 있는 것이다.
디아나는 처음 겪는 이 생경한 감정에 머리가 멍해졌다.
“혹 어디 불편하신 건가요?”
“……아니에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걱정스러운 듯한 카이루스에게 고개도 돌리지 못하고 작게 대답한 디아나는 두 손을 꼭 잡으며 떨림을 감추려 노력했다.
하지만 이미 깨닫게 된 감정은 봇물 터지듯 자신을 덮쳐 와 모든 감각이 카이루스를 향하고 있었다.
* * *
“유명해질 만한 공연이었네요. 오랜만에 재밌는 공연을 본 거 같아요. 이게 다 디아나 덕분이네요. 고마워요.”
공연이 막을 내리고 카이루스는 만족스런 미소를 그리며 디아나에게 말했다.
“……아니에요, 제가 뭘……. 레귤러스가 재밌다고 해서 보러 오자고 한 건데요. 그러니 감사 인사는 레귤러스가 들어야죠.”
“음…… 그렇다면 그럴 수도 있지만 오늘 제 곁에 있는 사람은 디아나이니까요.”
카이루스는 디아나를 바라보며 싱긋 웃었다. 늘 보여 주었던 장난기가 서린 웃음이었건만 오늘따라 너무 멋있게 보였다.
심장이 파르르 떨리는 기분에 디아나는 홱 고개를 돌렸다.
“디아나?”
갑작스럽게 고개를 돌리자 당황한 듯한 카이루스의 목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지금 디아나에겐 그를 보는 것이 너무도 어려운 일이었다.
막 자신의 감정을 깨달은 데다 처음 겪는 사랑이었다. 어떻게 그를 봐야 할지 어떤 말을 해야 할지 감이 잡히질 않았다.
대공성에 있는 수많은 책들을 읽었지만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알려 준 책은 없었다.
감정을 깨닫기 전보다 더 콩닥거리는 심장 때문에 이러다가는 자기도 모르게 좋아한다고 말할 것만 같았다.
“저희 그만 돌아가는 게…….”
“대공녀님, 왕태자님.”
오늘은 빨리 헤어지는 게 좋을 거 같아 돌아가자 말하려던 그때 에드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에드윈?”
“무슨 일인가?”
“오페라 공연 배우들이 대공녀님과 왕태자님께 인사를 드리고 싶어 합니다.”
“아…….”
평범한 귀족도 아니고 대공녀와 왕태자였으니 배우들이 인사를 하고 싶어 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극장에 들어올 때 극단의 단장이 나와서 직접 인사를 했었다.
“전 괜찮은데 디아나는 어떤가요?”
“저도 괜찮…… 아요.”
‘인사 정도면 금방 끝나겠지.’
디아나가 허락하자 에드윈이 객석을 나갔다. 그리고 금방 배우들과 함께 돌아왔다.
“대공녀님과 왕태자님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대공녀님과 왕태자님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에이루스를 연기한 남자 배우와 케일라를 연기한 여자 배우였다.
주연 배우들만 올라온 듯했다.
무대 위의 모습도 아름답고 멋졌지만 가까이서 보니 더욱 예쁘고 잘생긴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특히 케일라를 연기한 배우는 가발을 벗자 탐스런 붉은 머리칼이 고양이 같은 눈매와 잘 어울렸다. 매혹적인 장미 같은 여자에게 디아나는 미소 지었다.
“공연 잘 봤네. 특히 노래를 하는 그대의 목소리가 아름다워 귀가 황홀한 느낌이었어.”
사실 공연의 중반부부턴 카이루스 때문에 보는 둥 마는 둥 했지만 그래도 초반부에 들었던 노래는 정말 좋다고 생각했다.
디아나의 칭찬에 여배우가 미소를 지었다.
“감사합니다, 대공녀님. 기회 닿는다면 또 제 공연을 보러 와 주세요.”
“꼭 그러겠네.”
“제 노래는 어떠셨나요, 대공녀님?”
낮은 음성에 고개를 돌리자 남자 배우가 디아나를 보며 눈을 반달 모양으로 접었다.
서글서글한 미소를 짓는 남자는 여자만큼이나 꽤 출중한 외모였다. 금발까진 아니었지만 밝은 갈색 머리칼과 뚜렷한 이목구비, 다부진 턱선은 남자다움을 부각했다.
큰 키와 단단해 보이는 몸도 기사처럼 단련된 듯했고.
공연을 보러 오기 전 배우들에 대해 들은 이야기 중에 하나가 눈앞의 남자 배우에 대해서였다.
귀부인과 영애들에게 인기가 엄청나다고 했었다.
최근에 후작가 영애와 백작가 영애를 사이에 둔 양다리 스캔들이 터져 사교계를 꽤나 시끄럽게 만들었다고 한다.
‘잘생기긴 했는데 그 정도는 아닌 거 같은데.’
디아나는 주변의 남자들로 인해 심미안이 상당히 높아졌다.
객관적으로 남배우를 보던 디아나는 순간 가려지는 시야에 시선을 들었다.
비스듬히 그녀의 시선을 가리며 앞으로 선 사람은 다름 아닌 카이루스였다.
완전히 시야를 가린 것은 아니었다. 남자 배우만이 잘 보이지 않게 그가 서 있었다.
‘말을 해야 하는데.’
남자 배우에게도 의례적인 칭찬을 해야 했다.
“그대의 연기력도 좋았네.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또 그대들의 공연을 보러 오지.”
뭔가 자신의 할 말까지 다 해 버린 카이루스였다.
“그럼 우린 이만 가 봐야겠군.”
인사까지 하는 그 때문에 더 이상 말을 하기가 이상해졌다. 카이루스는 몸을 돌려 자신에게 손을 내밀었다.
“이만 가죠, 디아나.”
분명 미소를 짓고 있는데 어딘지 딱딱해 보이는 카이루스의 얼굴에 멈칫했다.
‘내 착각인가.’
“그럼 다음에 기회가 되면 또 보지.”
디아나는 카이루스의 손을 잡고 특별석을 나갔다.
“제가 저택까지 바래다 드리겠습니다.”
극장을 나온 카이루스가 말했다.
쉴 새 없이 뛰고 있는 심장에 그와 빨리 헤어지려 했던 디아나의 얼굴이 당황으로 물들었다.
“네? 괜찮은데…….”
“디아나를 혼자 돌려보낸 걸 알면 에키온과 레귤러스에게 매너가 없다고 욕을 먹습니다. 모셔다드리면 안 될까요?”
눈꼬리를 내리는 그의 모습에 차마 거절을 말할 수 없었다. 그가 시무룩해하는 모습을 보는 것이 싫었으니까.
“……데려다주세요.”
“제 마차를 타시죠.”
순간 밝아지는 카이루스의 얼굴에 뭔가 속은 거 같은 기분이 들었지만 지금 디아나는 이성이 거의 없는 상태였다.
카이루스의 사소한 움직임, 표정 하나하나에 자기도 모르게 집중하고 있었다.
그가 웃으면 자기도 모르게 같이 미소가 지어졌고 그의 얼굴이 조금이라도 굳으면 뭐가 마음에 안 드는 것일까 신경 쓰였다.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말이다.
그저 그를 좋아하고 있단 감정을 깨달았을 뿐인데 이토록 모든 게 신경 쓰이는 게 신기하면서도 대체 언제부터 그를 좋아했던 것인지 궁금해졌다.
어릴 적엔 자신을 많이 도와준 고마운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다. 물론 첫 만남부터 조각처럼 잘생긴 미소년이라 생각하긴 했었지만 그때부터 좋아한 거 같진 않다.
그럼 편지를 나누면서 점점 마음이 간 걸까.
돌이켜보면 그와 그렇게 친하지 않았지만 오랜 시간 편지를 나누며 편해졌었다.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일상을 공유하고 또 서로에 대해 몰랐던 것을 알아갔다.
강해 보이는 카이루스가 사실은 귀여운 동물들을 좋아하고 검술을 배우는 걸 싫어하고 취미로 피아노를 친다는 것.
디아나는 생각보다 그에 대해 많은 걸 알았다.
‘그렇게 알아 가면서 나도 모르게 그를 좋아하게 된 걸까.’
언제부터인지 모를 순간을 생각하던 그때 카이루스가 물었다.
“……정말 대단한 거 같지 않나요?”
“네?”
방금 뭐라고 한 거지.
대공가로 가는 동안 카이루스는 디아나가 지루하지 않게 계속 이야기를 해 주고 있었다.
문제는 디아나가 다른 생각에 빠져 그의 이야기를 듣지 못했다는 것이다.
디아나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죄송해요. 제가 잠시 딴생각을 하느라…… 뭐라고 하셨죠?”
“초대 황제 폐하의 사랑이 정말 대단한 거 같지 않느냐는 말이었답니다. 그보다 극장에서도 그렇고…… 계속 딴생각을 하시는 거 같네요.”
카이루스의 검은 눈동자가 짙어졌다.
마치 자신의 마음을 파악하려는 듯한 느낌이었다. 디아나는 혹시라도 그가 자신의 마음을 알아차릴까 아무렇지 않은 척 표정을 관리했다.
아직은 그에게 좋아한다는 말을 할 준비가 되지 않았다.
아니,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보다 고백을 하고 나면 그다음은?’
카이루스와 어떻게 되는 거지?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고 키스를 하던 로맨스 소설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화르륵.
저도 모르게 볼이 달아올라 태연을 가장했던 표정이 무너지고 말았다.
들켰을까.
아직 자신을 응시하고 있는 그의 눈빛에 어쩔 줄 몰라 하던 때 낮은 음성이 마차 안을 울렸다.
“……그 남자 배우를 생각하시는 건가요?”
“네……? 남자 배우요?”
뜬금없는 말이었다. 순간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할 정도로 말이다.
“에이루스를 연기한 남자 배우 이름이 알렉스라 하더군요. 사교계에서 꽤 인기가 많다 들었습니다. 이번 공연이 인기가 많은 것도 그 배우를 보러 귀부인들과 영애들이 많이 찾아서라고 하던데…… 뭐, 한 번 보면 그 매력에 헤어 나올 수 없다든가…… 그런 말이 많더군요.”
카이루스는 자신의 말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 미간을 살짝 좁혔다 풀었다.
그리고 디아나는 당최 그가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어 고개를 갸웃했다.
왜 그 남자 배우 이야기가 나오는 거지. 거기다 한번 보면 그 매력에서 헤어 나올 수 없다는 그 말엔 동의할 수가 없다.
그 정도로 잘생기지도 않았고 생각보다 느끼하게 생겼던데.
“저도 그런 말을 듣긴 했어요. 근데 실제로 보니 그렇게 잘생긴 거 같진 않던데. 음…… 카이루스가 훨씬 더 잘생겼…… 아.”
무의식적으로 말하던 디아나는 아차 하며 말을 멈추었다.
‘이런, 내가 무슨 말을.’
하지만 카이루스는 정확히 들은 듯 눈이 살짝 커졌다.
“하하…… 카이루스가 객관적으로 봤을 때 엄청 잘생기긴 했으니까요. 그래서 한 말이에요. 아! 그리고 전 음, 그 남자 배우보다 여자 배우분이 훨씬 더 아름다운 거 같았어요. 꼭 한 송이 장미 같아서 그렇지 않던가요, 카이루스?”
디아나는 황급히 말을 돌렸다.
“글쎄요. 전 디아나가 너무 아름다워서 다른 사람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어요.”
하지만 노력이 무색하게 카이루스는 자신을 보며 매력적인 미소를 그렸다.
한 번 보면 매력에서 헤어 나올 수 없단 말은 그 배우가 아니라 카이루스를 위한 말 같았다.
심장이 터질 듯 뛰었다.
그를 계속 보면 심장이 머지않아 터질 거 같아서 눈을 돌렸다. 하지만 좁은 마차 안이라 시선을 둘 곳이 없었다.
어색하게 눈을 도르륵 굴리자 피식, 그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디아나, 도착한 듯합니다.”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마차가 멈추었다.
디아나는 다행이라 생각하며 속으로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문을 열고 먼저 내린 그의 손을 잡고 마차에서 내렸다.
“데려다주셔서 감사해요, 카이루스. 그럼 조심히…….”
작별 인사를 하며 손을 놓으려 하자 그가 손에 힘을 주어 잡았다. 말을 멈춘 디아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손을 꼭 잡자 따스한 온기가 그대로 전해졌다. 고개를 든 디아나와 그의 시선이 정면으로 마주쳤다.
그의 짙은 시선에 깃든 처음 보는 열기에 말문이 막힌 듯 아무런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때 카이루스의 목소리가 울렸다.
“디아나, 부탁이 있습니다.”
“……부탁이요?”
“네, 꼭 들어주셨으면 좋겠어요.”
“……말씀하세요.”
“건국제 파티에서 첫 춤을 저와 함께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건국제 파티의 첫 춤.
- 건국제 파티에서 첫 춤을 연인과 추면 그 사랑이 영원하다는 말이 있지.
언젠가 레귤러스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카이루스는 그 말을 알고 내게 이런 부탁을 하는 걸까.
하지만 그가 알았든 몰랐든 이미 자신의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그를 바라보는 디아나의 금빛 눈동자가 떨렸다. 그리고 천천히 입술을 움직였다.
“……네, 함께해요, 카이루스.”
그에겐 거절을 말할 순 없었으니까.
* * *
건국제 하루 전.
수도 광장엔 마법사들이 분주히 건국제 행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만큼 미연의 사고를 방지하기 위해 광장 곳곳에 방어 마나석을 박고 있었다.
황실의 일원들이 설 단상으로 다가가지 못하도록 말이다.
밤늦게까지 이어진 작업은 인적이 끊어진 새벽이 되어서야 끝났다.
“으아…… 허리 빠지겠네.”
“허리만 빠지냐. 난 어깻죽지부터 안 쑤시는 데가 없다. 거기다 마나를 얼마나 썼는지 몸에 힘이 하나도 없어.”
“그래도 특근 수당 많이 나오잖아.”
“물론 그렇기야 하지만…… 힘들긴 하다는 거지.”
일을 마친 마법사들이 이야기를 나누던 그때 짙은 푸른 머리칼의 남자가 그들에게로 다가왔다.
“방어석 설치는 다 끝났나요?”
“누구시죠?”
“아, 전 황태자 전하의 보좌관 중의 한 명인 앨빈 크리텐이라고 합니다. 황태자 전하께서 마지막 점검을 하고 오라 하시어 들린 것입니다.”
황태자 궁의 패를 보여 주자 마법사들이 경계를 풀었다.
“아, 그렇군요. 막 방어석 설치 다 끝났습니다. 완벽하게 마쳤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방어석을 건드리지 못하도록 저희가 몇 시간 동안 경비를 설 것이니 아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된다고 황태자 전하께 전해 주십시오.”
“그렇군요. 근데 피곤하실 텐데 경비는 제가 서겠습니다. 어차피 새벽 몇 시간만 있으면 되는 거고 딱히 사람들이 다니질 않으니 위험한 일도 없지 않겠습니까. 다들 피곤하실 테니 어서 들어가 보세요.”
“네? 아니…… 그래도 저희 일인데…….”
“방금 들어 보니 다들 지치신 거 같던데요. 황궁에서 일하는 같은 처지끼리 돕고 살아야죠. 걱정 마세요. 이래 보여도 검술 수련을 오래 해서 호위를 서는 데 문제없습니다.”
앨빈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마법사에게 허리에 찬 검을 보였다.
서글서글한 눈웃음에 마법사들이 서로 눈치를 보았다. 안 그래도 몸이 피곤해 미칠 거 같던 차에 이런 호의를 받으니 판단력이 흐려졌다.
“그럼 부탁 좀 드리겠습니다. 하하, 다음에 저희 마법사들 도움이 필요하시면 언제든 말씀해 주십시오.”
“네, 그러겠습니다.”
기분 좋은 웃음을 터뜨린 마법사들은 앨빈과 인사를 하곤 광장을 벗어났다.
그들이 마차를 타고 떠나자 고요해진 어둠 속에 앨빈만이 남아 있었다.
그리고 그는 사람 좋아 보였던 웃음을 지우고 차디찬 얼굴로 방어석을 바라보았다.
* * *
테라비타 제국의 건국제.
역대 최고로 많은 인파가 모인 건국제의 날이 드디어 밝았다.
수도의 호텔과 여관엔 방이 하나도 남지 않아 몇 배의 갚을 쳐줄 테니 방 하나만 달라는 사람들도 한둘이 아니었다.
신전에서 급히 문을 열어 객실을 구하지 못한 사람들을 받아 주었지만 그 수가 엄청나 결국 길에서 노숙을 하는 사람들까지 있었다.
매년 건국제가 열리긴 했지만 이렇게 사람들이 몰린 것은 이례적이었다.
“이번 건국제에 대공녀님께서 나오신다는 거 진짜 맞죠?”
“아휴, 당연히 진짜지. 대공녀님께서 가디언님과 함께 모습을 보이신다고 해서 이렇게 수많은 사람들이 수도로 올라왔잖아.”
“제국 사람들뿐만 아니라 타국에서도 사람들이 엄청 왔어.”
“그럴 만하지. 대륙의 신화라 할 수 있는 가디언님이 모습을 드러내는 건데. 나도 살면서 건국제 보러 온 건 처음이라니까요.”
“그쪽도 처음 왔소? 나도 저 먼 동부 끝에서 왔소.”
아직 건국제 행사가 시작되지도 않았지만 벌써 광장에 모여든 사람들은 신이 나 서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멍청한 것들.”
그 활기찬 사람들 사이로 싸늘한 목소리가 울렸다. 하지만 너무 작은 목소리라 다른 사람들은 듣지 못했다.
짙은 푸른색의 로브에 모자까지 눌러쓴 어둠의 정령은 가디언을 만날 생각에 들뜬 사람들의 행복한 얼굴을 둘러보며 비틀린 미소를 지었다.
이제 곧 저 행복한 얼굴이 경악과 공포로 물들 것이다.
그 순간을 떠올리자 오래 묵은 체증이 내려가는 기분이었다.
“빨리, 빨리 오렴, 디아나.”
‘내가 이렇게 널 기다리고 있으니까.’
어둠의 정령은 수많은 인파에 자연스럽게 몸을 숨기며 짙은 미소를 그렸다.
* * *
오후의 햇살이 기울고 하늘이 붉게 물들었다.
카이루스의 생각으로 시간 가는 줄도 몰랐던 걸까, 그날로부터 이틀이 지나 벌써 건국제였다.
거기다 좀 있으면 건국제의 축제가 열리는 시각이었다.
시간이 다가올수록 다른 생각은 전부 지워지고 축제에서 사람들 앞에 서야 한다는 사실이 실감이 났다.
그에 마음이 초조해 문득 하늘을 보던 디아나는 붉은 빛에 시선을 빼앗겼다.
“디아나, 뭘 그리 보고 있느냐.”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가디언은 아까부터 창밖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디아나에게 물었다.
“오늘따라 이상하게 노을이 붉어 보여서요. 꼭 핏빛 같아서…… 계속 시선이 가네요.”
매번 보는 노을이었건만 오늘은 뭔가 달랐다. 선명한 색은 꼭 하늘을 피로 물들인 거 같았다. 그 선명함이 아름답기보다는 어쩐지 기분이 이상하기만 했다.
불길한 일이 벌어질 거 같았다.
“불안해하는구나.”
디아나는 가디언에게 고개를 돌렸다. 디아나의 정령술이 강해질수록 감정을 공유하는 연결도 강해졌다.
특히 불안함이나 두려움 같은 좋지 않은 감정을 가디언은 더욱 잘 느꼈다.
“……오늘은 좋은 날이고 모든 게 다 완벽한데 뭔가 기분이 이상해요.”
“흠…….”
작은 바람을 일으킨 가디언은 창밖으로 몸을 돌렸다. 붉은 하늘을 검은 눈동자로 응시하던 가디언이 말했다.
“설령 불길한 일이 벌어진다 해도 디아나 넌 내가 있고 난 네가 있으니 우린 잘 이겨 낼 것이다. 그러니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을 미리 두려워하지 말려무나.”
따스한 바람이 디아나의 머리를 살랑 흔들었다. 가디언이 불어 준 온기에 잠시나마 불안했던 디아나의 마음도 평안해졌다.
“네, 그럴게요.”
가디언의 말대로 어떤 일이 벌어진다 해도 감당할 수 있을 만큼 자신은 강했다.
하니 굳이 일어나지도 않은 일에 두려워할 필요는 없었다.
어차피 저 노을도 곧 사라질 테니까.
디아나는 창에서 몸을 돌리고 가디언은 다시 모습을 감추었다.
가만히 곁을 지키는 유네스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던 그때 방문이 열리고 피비가 들어왔다.
“피비, 어딜 다녀온 거야?”
치장을 마치자마자 피비는 잠시 뭘 좀 가져오겠다며 방을 나갔었다. 디아나는 피비가 들고 온 은쟁반을 바라보았다.
“대공녀님, 이것 좀 드세요.”
피비가 디아나에게 내민 것은 김이 모락모락 나는 따뜻한 우유차였다.
어릴 때 자주 먹었던 우유차였다.
북방으로 다시 내려갔을 때, 아버지와의 관계가 아직 어색하고 대공녀로서의 삶에 익숙해져야만 했을 때 가끔씩 잠을 잘 못 자거나 과거가 떠올라 기분이 가라앉을 때가 있었다.
그럴 때면 피비가 꿀을 듬뿍 넣은 따뜻한 우유를 가지고 왔었다.
하지만 모든 것들이 안정되고 점차 나이를 먹자 피비가 우유를 가져오는 일도 없어졌었다.
오랜만에 다시 보는 우유차의 달달한 냄새를 맡던 디아나는 피비를 의아하게 바라보았다.
“근데 피비, 갑자기 우유차는 왜 가지고 온 거야?
“오늘 중요한 행사가 있잖아요. 수많은 사람들 앞에 서셔서 아주 중요한 일을 치르셔야 하는데 긴장되실 거 아니에요. 그래서 특별히 준비했어요. 대공녀님께서는 항상 이걸 드시면 금방 기운도 차리고 긴장도 푸셨으니까요.”
피비는 어서 마시라는 듯 내게 머그잔을 쥐여 주었다.
“밤이 되면 쌀쌀해질 거예요. 추우면 더 긴장되는 법이니까 몸을 따뜻하게 하고 가셔야 해요.”
디아나는 피비의 잔소리에 미소를 짓다 우유차를 들이켰다. 딱 먹기 좋게 따뜻하고 달달한 우유였다. 한 컵을 쭉 들이켜자 피비가 잘했다며 미소를 지었다.
몸 안에 퍼지는 온기가 우유의 따뜻함이 아니라 피비의 애정 같았다.
“피비, 나 안아 줘.”
피비를 꼭 안았다. 어릴 땐 피비의 품에 안겼는데 이젠 자신이 피비를 안는 모양새였다.
그만큼 자신이 자랐단 것이다. 피비를 꼭 안고 또 모두를 지킬 수 있을 만큼.
“어머, 성인식도 치르신 영애가 이런 어리광 부리면 남들이 흉봐요.”
“흉보라 그래. 난 꼬부랑 할머니 돼서도 피비에게 어리광 부릴 거야.”
잔소리를 하면서도 싫지 않은지 피식 피비가 웃는 소리가 들렸다. 피비가 등을 토닥여 주며 말했다.
“성인식 때보다 더 긴장되시죠?”
“……응.”
성인식 때도 수많은 귀족들 앞에 서긴 했지만 그래도 그땐 생일을 축하하는 가벼운 자리에 가까웠다. 하지만 오늘은 자신을 축하하는 자리가 아니라 자신이 맹세를 하는 자리였다.
가디언의 힘으로 테라비타 제국과 그 안에 사는 수많은 사람들을 수호하겠다고 말이다.
그 막중한 무게가 당연히 무거웠고 또 긴장되었다.
그런 자신의 마음을 피비는 알고 있는지 나직이 말했다.
“대공녀님, 조금 못해도 괜찮아요. 전부 다 짊어지려고 하지 마세요. 대공녀님은 절대 혼자가 아니니까 힘들면 힘들다고 주변에 말하세요. 그럼 모두가 대공녀님을 도와줄 거예요. 그리고 전 믿어요. 대공녀님이 아주 잘해 내실 거란 걸. 대공녀님은 엄청 강하고 아주 따뜻한 분이시잖아요.”
“피비, 고마워.”
디아나는 피비를 힘주어 꼭 안았다. 이렇게 누군가를 안아 줄 수 있을 만큼 컸고 강해졌으니 자신에게 소중한 모든 것들을 지킬 것이다.
“행복한 시간을 방해해서 미안하지만 이제 황성으로 출발해야 할 시간이란다, 디아나.”
방 안을 울리는 낮은 음성에 디아나는 피비를 놓아주었다. 언제 들어온 건지 대공이 방문을 열고 서 있었다.
“대공 전하.”
피비는 인사를 올리곤 옆으로 물러섰다.
“아버지, 언제 오셨어요?”
“피비와 네가 다정하게 안고 있을 때부터 왔다.”
대공은 입꼬리를 살짝 올리고 있었지만 말속에 어딘지 뼈가 느껴졌다.
디아나는 아버지의 불만이 무엇인지 알기에 가벼운 웃음을 지으며 다가갔다.
그리고 피비에게 했던 것처럼 안기자 기다렸다는 듯 대공이 등을 감싸 안았다.
“오늘도 너무 예쁘구나, 디아나.”
아까보다 훨씬 풀어진 상냥한 목소리가 머리 위에서 울렸다. 금발을 예쁘게 땋아 틀어 올리고 꽃핀이 화관처럼 땋은 머리에 박혀 있었다.
새하얀 드레스는 아래로 갈수록 파스텔 톤의 보랏빛으로 깊어져 신비로운 느낌을 더했고 화려하지 않은 목걸이와 귀걸이는 밤하늘의 별 모양을 하고 있었다.
밤의 여신 같은 모습이 정말 아름다웠지만 디아나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눈을 가늘게 떴다.
“정말요? 아버지는 항상 저 예쁘다고 하셔서 잘 안 믿기는데요.”
대공의 미간이 고민을 하듯 좁아졌다. 무언가 말을 고르는 것 같았다. 이윽고 대공은 디아나에게 말했다.
“오늘은 네 엄마만큼 예뻐.”
디아나는 웃음을 지었다. 아버지가 엄마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알고 있기에 그 칭찬이 최고란 걸 알았다.
“아버지도 늘 멋있어요.”
이건 기분 좋으라 하는 말이 아니라 진짜였다. 자신이 이렇게 자랐는데도 대공은 어릴 때 봤던 모습에서 크게 변한 것이 없었다.
눈가에 주름이 조금 늘긴 했지만 그마저도 중후한 분위기를 가중시키며 더 멋지게 만들었다.
에키온이 지나가다 흘린 말론 제국의 최고 신랑감 후보로 꼽히는 에키온 다음이 아버지라 했었다.
물론 평생 엄마만을 사랑할 아버지였기에 다른 여자를 볼 일은 없겠지만 충분히 그럴 만했다.
대공은 다정한 미소를 그리며 디아나의 손을 잡았다.
“그럼 함께 가자꾸나.”
“네.”
* * *
황실 식구들이 다 같이 움직여야 했기에 디아나와 대공은 먼저 황궁으로 가 합류한 뒤 이동하기로 했다.
광장에는 예상보다 많은 인파가 몰려 호위나 기타 여러 가지 측면에서 함께 움직이는 것이 편했다.
그렇게 황궁에 도착하자마자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가 크게 울렸다.
예법 따윈 신경도 안 쓰고 이렇게 주인을 만난 강아지처럼 밝은 목소리를 낼 사람을 한 명뿐이었다.
“레귤러스.”
“유네스도 왔네!”
자신의 앞으로 달려온 레귤러스는 목적이 따로 있었는지 유네스의 목을 끌어안았다.
“냐아-.”
물론 유네스는 가차 없이 앞발로 레귤러스의 얼굴을 밀어냈다.
하지만 그래도 좋은지 레귤러스는 며칠 보지 못한 유네스에게 애정 표현을 멈추지 않았다.
정말이지 사람들의 시선 따윈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 모습이었다.
그런 레귤러스를 뒤에서 보던 황제가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것이 보였다.
하지만 자유분방한 레귤러스에게 딱히 뭐라 하거나 제지하진 않았다. 레귤러스는 어린 시절 과하게 타인의 시선을 의식해 주눅 든 채 살았기에 황제도 싫은 척해도 지금 레귤러스의 모습을 더 좋아했다.
디아나는 어차피 자신을 보러 온 게 아닌 레귤러스를 유네스와 두고 대공과 함께 황실 식구들에게 걸어갔다.
“폐하, 황후 폐하, 잘 지내셨나요?”
“물론이다.”
“잘 지냈단다. 그보다 디아나, 오늘 너무 아름답구나.”
황후는 디아나에게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황후 폐하가 더 아름다우세요.”
“고맙구나, 디아나.”
“디아나, 나도 있어.”
에키온이 자신을 봐 달라는 듯 말하자 디아나가 가벼운 웃음을 지었다.
“오라버니가 있는 걸 어떻게 모르겠어요. 이렇게 멋있으신데. 잘 지내셨죠?”
“응. 나야 뭐 늘 똑같은 일상이지. 디아나 너도 오늘 너무 예쁘다. 어머니보다 더 예뻐.”
에키온이 덧붙이는 말에 황후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러다 갑자기 디아나에게 말했다
“아 참, 오늘 카이루스도 함께 가기로 했단다. 인사 나누렴.”
황후가 갑자기 카이루스를 불렀다.
황후는 디아나가 카이루스를 미처 보지 못했을까 부른 듯했지만 디아나가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제일 먼저 본 사람이 카이루스였다.
그에 대한 마음을 깨닫고 처음 보는 것이다. 디아나는 속으로 몹시 당황스러웠지만 가족들이 모두 모여 있어 티를 낼 순 없었다.
“대공녀님, 잘 지내셨나요.”
안간힘을 쓰며 표정 관리를 하던 그때 나직한 음성이 들렸다. 고개를 들자 그녀의 앞에 선 카이루스가 보였다.
부드러운 미소를 그리고 있는 그를 보자 순간 표정이 풀어지고 말았다.
‘너무 멋있다.’
오도어 왕국의 하얀 제복은 정말 그에게 너무나 잘 어울렸다. 소설 속에 나오는 백마 탄 왕자님에 대한 그 어떤 묘사도 카이루스를 따라갈 수 없으리라.
저도 모르게 멍하니 그를 보고 있자 큼, 작은 헛기침 소리가 들렸다.
“흠, 디아나, 인사를 받아 주는 게 좋겠구나. 아님 네 아버지가 여기서 칼을 뽑을 분위기라 말이다.”
디아나의 정신을 차리게 한 사람은 다름 아닌 황제였다.
칼을 뽑는다는 말에 휙 고개를 돌려 아버지를 보았다.
“왕태자님을 계속 기다리게 하면 안 된단다, 디아나.”
하지만 대공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여느 때와 똑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황제의 말과 달리 전혀 화가 난 거 같지 않았다. 고개를 갸웃하던 디아나는 이내 카이루스에게 고개를 돌렸다.
모두의 말대로 왕태자를 계속 기다리게 할 순 없었으니까.
“전 잘 지냈어요. 왕태자님도 그간 평안하셨나요?”
“네, 전 잘 지내고 있답니다.”
뭔가 묘하게 어색했다. 그는 변한 게 없었지만 자신이 변한 게 문제였다.
카이루스의 눈을 마주하는 것이 어려워 슬쩍 시선을 내린 때 레귤러스가 다가왔다.
“둘이 되게 친해진 거 아니었어? 뭔가 갑자기 분위기가 어색해진 거 같아. 이틀 전엔 둘이서 오페라 공연도 보러 갔다 왔잖아.”
“둘이서?”
에키온이 되물었다. 레귤러스가 답을 하려 입술을 열려던 그때 스산한 저음이 울렸다.
“둘이서 오페라 공연을 보러 간 줄은 몰랐는데……. 황자 저하, 저하께서 함께 가는 걸로 알고 있었는데 아니었습니까?”
레귤러스는 순간 자신을 바라보는 대공의 서릿발 같은 눈빛에 등골이 서늘해졌다.
마치 죄인이 되어 취조를 받는 듯한 느낌이었다.
‘내가 뭘 잘못했더라?’
자기도 모르게 지은 죄가 있었던가 돌이키던 레귤러스는 디아나의 목소리에 막혔던 숨을 내쉴 수 있었다.
“그게 원래는 레귤러스도 함께 가기로 했었는데 레귤러스에게 갑자기 일이 생겨서 왕태자님과 둘이서 가게 됐어요. 음…… 제가 아버지에게 말한다는 걸 깜박했네요.”
“……그랬구나.”
디아나의 미소에 대공은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언제 싸늘한 기운을 풍겼냐는 듯 풀어진 대공을 보며 헛웃음 짓던 황제가 말했다.
“그래, 그래. 둘이서 오페라를 봤다 한들 이미 다 지난 일인데 뭐 어쩌겠느냐. 재밌게 잘 봤으면 된 것이다. 그보다 이제 밤이 찾아왔으니 광장으로 출발하자꾸나. 모두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고개를 들자 완전한 밤이 찾아온 하늘이 보였다.
“광장에서 뵙죠, 대공녀님.”
“네, 왕태자님”
디아나는 황제 부부와 함께 마차에 올랐다. 황자들과 왕태자 그리고 대공이 말에 오르고 곧 대공의 목소리가 울렸다.
“출발한다.”
그렇게 마침내 건국제의 축제가 열리는 광장으로 마차가 출발했다.
“제국의 태양이신 황제 폐하께 모두 예를 갖추시오!”
우렁찬 기사의 목소리가 마법 증폭기를 통해 광장을 크게 울렸다.
황족들이 도착하기만을 기다렸던 사람들은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광장 중앙으로 트인 길을 따라 황제가 가장 먼저 걸어가고 그 뒤를 황후, 황태자, 황자가 뒤따랐다.
그리고 그들의 뒤로 대공과 디아나가 함께하고 있었다.
황족들이 모두 단상 위로 오르자 황제는 제국민들을 향해 한 걸음 앞으로 나갔다.
“모두 고개를 들어라.”
황제의 위엄 있는 목소리가 광장을 크게 울렸다.
황족들이 도착하기만을 기다렸던 사람들은 선망의 눈빛으로 단상 위의 찬란한 황족들을 바라보았다.
제국의 황족들은 고귀함을 몸에 두른 듯 금빛으로 빛났다.
황제부터 황후, 황태자를 쭉 보던 사람들은 모두 디아나를 본 순간 시선을 멈추며 감탄을 내뱉었다.
대공녀의 미모가 엄청나다는 소문은 자자했지만 실제로 보니 말이 나오지 않을 정도였기 때문이다.
순백의 드레스를 입고 어두운 밤하늘 아래 서 있는 모습은 인간 같지 않아 경외감이 들 정도였다.
“다들 네 아름다움에 정신을 못 차리는 거 같아.”
하지만 그런 시선들과 달리 디아나는 단상에 오르는 순간부터 긴장감으로 온몸이 뻣뻣해지고 있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자신에게 멈출수록 더욱 긴장하던 디아나는 레귤러스의 목소리에 움찔하며 크게 숨을 들이켰다.
어찌나 긴장했던지 숨조차 최대한 억누르고 있었던 것이다.
“감탄을 넘어 경외가 가득한 눈빛이네. 디아나 네가 예쁘긴 예쁘지.”
사람들의 시선에 속으로 어쩔 줄 몰라 하던 그때 옆에 서 있던 레귤러스가 또 한 번 말했다.
쿡, 말끝에 웃음이 서리는 것을 보니 이건 자신을 놀리는 것이었다.
사람들에게 보이지 않게 레귤러스의 옆구리를 꼬집어 준 디아나는 입술을 최대한 움직이지 않으며 말했다.
“공개적인 망신당하고 싶지 않으면 쓸데없는 말 하지 마.”
“진짠데.”
“레귤러스.”
그를 살짝 흘기자 레귤러스가 미소를 지었다.
“지금 모습 보기 좋다. 긴장 풀어, 디아나.”
디아나의 눈이 살짝 커졌다. 레귤러스가 자신을 놀리려던 게 아니라 긴장을 풀어 주려 일부러 장난친 것이란 걸 알았기 때문이다.
진짜 장난인 줄 알고 이번엔 발을 밟으려 했었는데.
하이힐로 밟았으면 꽤 아팠을 것이다. 세게 밟을 준비를 하고 있던 디아나는 괜히 미안해져 슬쩍 옆으로 갔던 발을 물리며 미소를 지었다.
“고마워.”
그때 황제의 목소리가 다시 이어졌다.
“초대 황제 폐하께서 이 나라를 만드실 때 품으셨던 뜻은 평화와 화합이었네. 오늘날 수백 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아직까지 그 뜻은 퇴색되지 않고 제국을 지키는 힘이 되고 있네. 난 앞으로도 그 뜻을 지킬 것을 제국을 수호하는 가디언님 앞에서 맹세하겠네.”
연설을 마친 황제가 디아나에게 고개를 돌렸다. 드디어 자신이 나서야 하는 순간이 왔다. 긴 숨을 내쉰 디아나는 황제에게로 걸음을 내디뎠다.
한데 한 걸음 내디딘 순간 무언가 서늘한 느낌이 등줄기를 스쳤다.
‘뭐지?’
디아나는 수많은 인파가 모인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방금 무언가 소름 끼치는 시선을 느꼈는데.’
하지만 수많은 사람들은 여전히 자신을 호의적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내 착각이었나.’
디아나는 잠시 멈칫했던 걸음을 내디뎌 황제의 곁에 섰다.
이제 자신이 가디언을 부르고 황제가 가디언 앞에서 맹세를 하면 오늘의 특별한 축사는 끝나는 것이다.
황제의 얼굴에 미소가 서리고 디아나의 입술이 열린 그때.
“가디…….”
펑! 펑! 펑!
엄청난 폭발음에 목소리가 완전히 묻혔다.
폭발음이 들림과 동시에 땅이 크게 흔들리고 가디언의 다급한 목소리가 디아나를 불렀다.
바람이 단상 위를 휘감자 눈앞의 황제가 쓰러졌다.
“윽…….”
“디아나, 디아나!”
디아나는 머릿속을 울리는 가디언의 목소리에 천천히 눈을 떴다. 언제 눈을 감았는지도 알 수 없을 만큼 모든 것이 갑작스럽게 일어났다.
매캐한 연기에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바람이 자신을 보호하듯 온몸을 감싸 안았지만 완전히 폭발을 빗겨 갈 순 없었다.
디아나는 이마에서 흐르는 피를 손등으로 닦으며 정신을 차리려 애썼다.
폭발은 황족들만을 노린 거처럼 단상을 빙 둘러 터졌다.
황실 근위 기사들과 황족들 모두에게 치명타였다. 살아남은 기사들이 황제 폐하와 황후 폐하를 보호하라 외치는 소리가 울렸다.
고개를 들자 흐릿한 시야 속으로 쓰러져 있는 에키온과 아버지, 레귤러스가 보였다.
‘정신 차려야 해.’
귀를 울리던 이명이 사라지자 디아나는 가디언에게 답했다.
“……전 괜찮아요.”
말이 끝나자마자 손을 들었다.
그녀의 손끝에서 시작된 작은 바람이 곧 하늘로 치솟으며 거대한 회오리바람을 일으켰다.
회오리바람은 폭발로 인한 매캐한 먼지들을 단숨에 빨아들여 저 멀리 날려 버렸다.
시야가 확보되자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된 광장이 보였다. 쓰러진 사람들과 어디서 나타났는지 알 수 없는 새카만 늑대들이 이쪽을 향해 달려들고 있었다.
부상을 입은 기사들과 카이루스가 늑대들을 막고 있었지만 힘에 부쳐 보였다.
“가디언님.”
그녀가 힘을 써야 했다. 디아나의 마음을 느낀 가디언이 모습을 감추며 완전히 디아나와 하나가 되었다.
디아나의 금안이 번뜩인 순간 땅이 진동하며 땅속 깊은 곳에서 나무뿌리가 치솟았다. 창칼 같은 나무뿌리가 늑대들의 몸을 꿰뚫었다.
검은 늑대들의 비명이 소름 끼치게 울리고 카이루스의 시선이 자신을 향했지만 디아나는 오직 한곳을 보고 있었다.
아수라장이 된 광장 속에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짙은 로브의 인영.
로브 속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지만 자신을 바라보는 그 눈빛에 온몸에 소름이 돋아났다.
“……어둠의 정령…….”
디아나는 그 인영이 사람이 아니란 걸 너무 늦게 알아차렸다. 입술을 짓씹은 디아나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은 그때 어둠의 정령이 로브 모자를 벗으며 모습을 완전히 드러냈다.
“오랜만이네. 내가 이날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넌 모르겠지.”
휘날리는 갈색 머리칼과 붉은 눈동자.
세이아의 얼굴을 하고 있는 저건 어둠의 정령이 맞았다.
“죽을 자리를 찾아왔나 보네. 겨우 이 정도의 폭발로 내가 죽을 거라고 생각한 건 아니겠지?”
엄청난 폭발이긴 했지만 자신은 가디언의 수호를 받는 사람이었다. 겨우 이 정도로 가디언과 자신을 죽일 수 있다 생각했다면 큰 오산이었다.
디아나는 기묘한 위화감에 순간 멈칫했다.
‘뭔가 이상해.’
어둠의 정령은 천년 넘게 봉인되어있던 정령이었다. 초대 황제와 수없이 전투를 치른 어둠의 정령이 가디언이 겨우 이 정도에 죽을 거라 생각했다는 게 말이 안 됐다.
이미 자신에게 소멸당할 뻔해 몸 사리느라 지금까지 도망쳤던 어둠의 정령이 말이다.
‘뭔가 더 있어.’
본능적인 감각이 번뜩인 그 순간 세이아의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갔다.
“설마 내가 이 정도로 널 죽일 수 있다고 생각했을까. 내가 너에게 보여 주고 싶은 건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는걸.”
“무슨…….”
디아나는 어둠의 정령의 주변으로 피어오르는 검은 연기에 말을 멈추었다.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검은 연기가 기괴한 형체를 만들었다.
“키에엑!”
역겨운 괴물이 기이한 소리를 질렀다. 몸이 꿰뚫렸던 늑대들 역시 검은 연기가 닿자 기괴하게 몸이 꺾이며 뿌리를 벗어났다.
더 이상 생명이라고 할 수 없는 어둠의 괴물들이 시뻘건 눈을 번뜩였다.
목이 꺾인 늑대 한 마리가 기사를 향해 달려든 순간 푸른빛을 번쩍이며 나타난 유네스가 늑대의 목을 뜯었다.
광장 밖, 마차에서 대기하고 있던 유네스가 비명 소리와 피 냄새를 맡고 달려온 것이다.
유네스는 날카로운 이빨로 단번에 늑대의 머리를 뜯었다. 머리가 없어진 늑대는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머리를 잘라 내라!”
카이루스의 목소리가 울리고 늑대들과 기사들의 싸움이 다시 시작되었다.
디아나가 손을 휘젓자 허공에서 나타난 물줄기가 카이루스를 도와 늑대들의 머리를 잘라 냈다.
“네가 신경 써야 할 건 그쪽이 아닐 텐데.”
웃음기가 섞인 스산한 음성이 울리고 이윽고 아직 광장을 벗어나지 못한 사람들의 비명 소리가 울렸다.
괴물과 늑대들이 방향을 틀어 사람들을 향한 것이었다.
“으아악!”
“살려 줘!”
“안 돼!”
디아나는 다급히 손을 휘저었다.
그녀의 의지를 담은 바람이 날카로운 칼날이 되어 사람들을 공격하는 괴물들을 향해 날아갔다.
한데 괴물들에 채 닿지도 못하고 바람들이 모두 사라졌다.
“이게…… 무슨…….”
디아나는 다시 한번 정령술을 썼다. 하지만 이번에도 역시 매서운 바람의 칼날은 사람들을 구하지 못했다.
또 한 번, 또다시.
힘을 썼지만 디아나는 죽어 가는 사람들을 구하지 못했다. 아니, 구할 수가 없었다.
디아나는 죽어 가는 사람들의 비명소리에 숨이 턱 막혀 왔다.
“하하하! 내가 너의 그 멍청한 얼굴을 얼마나 보고 싶었는지 아니? 너 같은 사람들은 지가 죽는 것보다 눈앞에서 사람이 죽어 나가는 걸 더 무서워하지. 특히 그 죽음 앞에서 자신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함, 그것만큼 널 두렵게 만드는 것도 없을 거야. 디아나, 하니 이 비명 소리를 똑똑히 들으렴. 모두 네가 구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비명이니까.”
또렷하게 귀에 박히는 어둠의 목소리에 디아나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으아아악!”
계속, 계속 정령술을 쓰는데 닿지 않았다. 끝없는 비명 소리에 몸이 덜덜 떨리고 깊이 잠겨 있던 어릴 적 기억들이 떠올랐다.
- 이게 다 너 때문이야!
끝나지 않을 거 같던 레아의 매질과 그 속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자신.
“디아나, 정신 차리거라.”
눈앞이 흐릿해지던 순간 가디언의 목소리가 머릿속을 울렸다.
“넌 혼자가 아니다.”
‘맞아, 난 혼자가 아니야.’
디아나는 눈을 번쩍 떴다. 그리고 어둠의 정령을 향해 달려갔다. 닿을 수 없다면 닿게 만들 것이다.
자신을 향해 거침없이 달려오는 디아나의 모습에 세이아의 붉은 눈동자가 커졌다.
하지만 어둠의 힘으로 바뀐 거대한 방어벽은 정령술의 침입을 막았다.
쾅!
거대한 물줄기와 강한 바람이 방어벽에 부딪히고 디아나의 몸도 뒤로 튕겨 나가떨어졌다.
“디아나!”
카이루스가 크게 소리쳤다. 하지만 지금 디아나에겐 눈앞의 어둠의 정령 말고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몸을 일으킨 디아나는 손을 꽉 그러쥐었다. 튕겨져 나간 충격으로 온몸이 아팠지만 지금은 이 방어벽을 부셔야 했다.
그래야 사람들을 구할 수 있었다.
어둠의 정령을 없애야 저 괴물들도 모두 사라질 테니까.
땅이 흔들리고 수십 개의 뿌리들이 방어벽을 내리쳤다. 하지만 견고한 어둠의 방어벽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젠장…….”
어둠의 정령이 파 놓은 함정이 너무 지독했다. 평생 뱉어 본 적 없는 욕지기가 입 안을 맴돌았다.
‘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거야.’
방어벽 너머로 죽어 가는 사람들이 그대로 보였다. 그리고 카이루스와 기사들이 막는데도 늑대들의 수는 자꾸만 늘어갔다.
기사들이 하나둘 쓰러지고 있었다.
이대로 혼자서는 아무도 지킬 수가 없었다.
제발 누군가 자신을 도와주었으면 좋겠다고 간절히 바란 그때 광장을 울리는 말발굽 소리가 들렸다.
히이잉--!
수십 마리의 말들이 아수라장 속으로 달려 들어왔다.
그리고 황금 매가 수놓아진 검은 기사 제복을 입은 기마부대의 선두엔 붉은 머리칼의 남자가 있었다.
“로운…….”
오래전 대공가를 떠난 대공가의 기사단장.
그가 대공가의 기사들을 이끌고 달려온 것이다.
“괴물들의 약점은 목이다, 목을 쳐라!”
로운의 목소리가 크게 울리고 기사들이 괴물들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제국 최정예 기사들이란 칭호를 증명하듯 그들은 어둠의 괴물들에게 밀리지 않았다.
휘이잉-!
그 순간 뒤에서 정령술의 기운이 느껴졌다. 고개를 돌리자 기사들을 공격하던 늑대들의 목을 날리는 매서운 바람과 날카로운 돌부리들이 보였다.
“이쪽은 신경 쓰지 말거라.”
아버지의 목소리였다. 흙먼지와 얼굴에 드문드문 피가 묻은 대공은 부상이 작아 보이지 않았지만 눈빛은 이미 완전히 회복되어 있었다.
그리고 정신을 차린 에키온도 돕고 있었다.
하나둘 쓰러졌던 사람들이 정신을 차리고 있었다.
지원군이 늘어나자 무너지던 기사들도 다시 힘을 얻어 늑대들과 싸웠다.
그들을 보던 디아나는 손을 들었다. 모두가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하니 자신도 포기할 수 없다.
세찬 바람이 방어벽을 때리고 또 때렸다.
“그런다고 어디 부서질까. 백번 천번 힘을 써 보렴. 그런다고 무너질 내 힘이 아니니까. 같은 실수를 두 번 반복하진 않아.”
어둠의 정령은 디아나를 비웃으며 괴물들을 향해 손을 휘저었다. 기사들의 검에 무너진 괴물들에 다시 생명력을 불어넣어 주었다. 그리고 본보기로 죽여 버릴 그들의 우두머리를 향해 몸을 돌리려 했다.
방어벽이 크게 흔들리지만 않았다면.
디아나는 비웃음에도 멈추지 않았다. 백번 천번 해 보라는 그 말을 정말 행동으로 보였다.
메마른 흙에서 솟아난 세찬 물줄기가 뿌리들과 함께 벽을 내리치고 회오리바람이 방어벽에 휘몰아쳤다.
그뿐만 아니라 맑은 하늘에서 천둥이 치고 벼락까지 내려쳤다.
바람의 힘만으로 안 된다면 모든 힘을 동원해서 방어벽을 부숴 버릴 것이다.
디아나의 의지를 담은 모든 공격이 한 번에 쏟아진 순간 미동도 하지 않던 방어벽이 흔들렸다.
세이아의 붉은 눈동자가 경악으로 물들었다.
“이게 무슨…….”
“고마워. 네 말대로 백번 천번 힘을 쓰면 무너질 벽이었나 봐. 나도 같은 실수를 두 번 하긴 싫었거든.”
디아나는 경악에 물든 어둠의 정령을 바라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한번 흔들리기 시작한 방어벽이 쿵쿵 떨림을 보였다. 균열이 일어나려 하고 있었다. 그것을 본 어둠의 정령이 다급히 손을 뻗으며 고개를 돌렸다.
‘누구를 보는 거지?’
괴물들을 보는 것인가 했지만 시선이 닿은 곳은 어두운 숲속이었다. 디아나의 시선이 그쪽으로 향하려던 순간 갑자기 강한 힘이 방어벽에서 방출되었다.
“윽.”
방어 작용으로 방출되는 힘에 직통으로 맞은 디아나의 몸이 날아갔다. 가디언의 힘으로 바람이 디아나의 몸을 감싸 안았지만 땅을 구르는 거까진 보호하지 못했다.
몇 바퀴를 구른 디아나는 정신을 차리며 몸을 일으켰다.
“디아나! 괜찮은 겁니까?”
언제 달려온 것인지 카이루스가 자신을 부축했다.
“전 괜찮아요, 그보다 여기 있어도…….”
“됩니다. 에키온과 대공 전하께서 저쪽을 도와주고 있으니까요. 방어벽을 함께 부수죠.”
카이루스의 검에 새하얀 빛이 서려 있었다.
“디아나, 방어벽을 만든 마나석의 자리를 찾아야 한다.”
그와 함께 다시 공격을 시작하려 한 순간 가디언이 모습을 드러냈다.
“방어벽을 만든 마나석 말이군요.”
카이루스가 물었다.
“그래, 그 마나석을 어둠의 힘이 가득한 정령석으로 바꾼 것이다. 이대로 힘을 계속 써 봤자 방어벽은 깨지지 않을 것이다. 어둠의 힘이 내 힘을 거부하고 있는 것이니까. 그 정령석을 부셔야 해.”
가디언은 이 방어벽을 부술 방법을 드디어 찾은 듯했다.
“어둠의 정령이 저쪽을 보았어요, 누가 있는 거처럼. 마나석을 정령석을 바꾼 수하가 있는 거라면…….”
디아나의 시선이 숲을 향했다. 하지만 그곳을 가기 위해선 이 방어벽을 넘어야 했다. 그리고 벽을 지나가려면 방어벽을 지키고 있는 늑대들을 뚫고 지나가야 했다.
“제가 가겠습니다. 가디언의 힘을 거부하고 있는 거라면 디아나와 황족들은 이 방어벽을 넘지 못할 겁니다. 신성력은 정령의 힘과는 다르니 전 가능할 수도 있습니다. 어둠의 정령의 시선을 끌어 주세요.”
검을 쥔 그의 손끝에선 피가 흐르고 있었다. 부상을 당한 게 분명한 그를 보내야 하는 것이 마음에 걸렸지만 지금으로선 그만이 가능한 일이었다.
디아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시선을 끌게요.”
카이루스가 늑대들을 향해 달려가자 디아나는 거대한 회오리바람을 일으켰다.
세이아의 시선이 공격을 감행하는 디아나를 향했다. 나무들이 움직이고 천둥이 크게 울리고 벼락이 쏟아졌다.
“어리석은 짓을 멈추지 않는구나.”
방어벽을 향해 천천히 다가가자 세이아의 시선은 오로지 디아나에게 집중되었다.
벼락이 또 한 번 땅에 꽂히던 순간 카이루스가 신성력을 발현했다.
신성력을 두른 검기로 늑대들의 목을 베어 낸 그는 순간 흩어지는 늑대들 사이를 파고들었다.
그보다 두 배나 더 큰 덩치인 늑대의 목을 단번에 베고 또 베어 내며 길을 뚫었다.
그리고 늑대의 등을 밟고 도약한 그는 벽 안으로 몸을 던졌다.
크게 튕겨 나간다면 그대로 늑대 무리에 떨어질 수도 있는 아찔한 순간이었다.
하지만 신은 그를 버리지 않았는지 그는 무사히 검은빛을 띠는 벽을 통과했다.
디아나를 상대하고 있는 어둠의 정령은 그를 보지 못했다. 카이루스는 디아나가 가리켰던 숲속으로 곧장 내달렸다.
“거기서!”
카이루스는 다급히 도망치는 남자를 향해 검집을 날렸다. 정통으로 뒤통수를 맞은 남자가 쓰러지고 카이루스는 남자의 몸을 돌렸다.
“……넌?”
짙은 푸른 머리칼의 남자는 에키온의 보좌관이었다. 카이루스는 그제야 마나석을 어떻게 바꿔치기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스릉-.
아는 자이든 아니든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었기에 카이루스는 검을 남자의 허벅지에 찔러넣었다.
“으아악!”
고통에 찬 남자의 비명이 울렸지만 카이루스의 눈빛은 조금도 흔들림이 없었다.
“시간이 없으니까 다음은 네 팔이 잘려 나갈 거야. 그러니 고통이라도 덜고 싶으면 마나석이 박혀 있는 곳을 말해.”
허벅지에서 검을 뽑는 카이루스의 검은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 살기로 번뜩였다.
아무리 쏟아붓는 공격에도 어둠의 방어벽은 미동도 없었다. 아까의 흔들림은 착각이었다는 듯 더욱 견고해져 있었다.
그럼에도 디아나는 공격을 멈추지 않았고 어둠의 정령은 비틀린 웃음을 즐겁다는 듯 쏟아냈다.
“이건 뭐 계약자가 멍청한 건지, 아님 가디언이 오랜 세월에 멍청해져 버린 건지. 네가 백날 그러고 있어 봤자 달라지는 게 없다니까?”
디아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벽을 두고 어둠의 정령과 마주하고 있을 뿐이었다. 흐릿한 검은 벽 너머 보이는 붉은 눈을 집요하게 응시하고 있었다.
절대 그 눈이 자신에게 시선을 돌리지 못하도록.
“그래, 네가 이렇게 멍청한 짓을 하는 동안 내가 이 제국에 살아 있는 사람이 없도록 만들어 주마. 그것도 볼만하겠지.”
그때 숲속에서 하얀 빛이 솟구쳤다. 아무 말 없이 같은 공격만 반복하던 디아나가 돌연 모든 것을 멈추었다.
디아나는 천천히 입꼬리를 올렸다.
“내 생각엔 넌 결국 아무것도 못할 거 같은데.”
세이아의 눈썹이 치켜세워진 순간 쩌적, 균열이 생기는 소리가 울렸다.
디아나는 손을 살짝 휘저었다. 잠시 멈추었던 세찬 물줄기가 벽을 강타하자 어둠의 방어진이 무너졌다.
흐릿해지던 검은 벽이 곧 검은 가루가 되어 허공에 흩날리고 세이아의 붉은 눈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어떻게…….”
“이젠 내 차례야.”
디아나의 금안에 이채가 스치고 어둠의 정령을 중심으로 둥글게 불이 만들어졌다.
위협적인 불길은 어둠의 정령이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하도록 붙잡았다.
세이아의 손끝에서 나온 검은 연기가 불길을 꺼뜨리려는 듯 공격했지만 디아나는 더욱 강한 불길로 검은 연기를 집어삼켰다.
“그 자리를 벗어나려 한 발자국만 움직여도 네 몸이 불태워질 거야. 물론 죽진 않아. 끝없이 네 육신만 태우고 태울 거야. 내 의지가 없다면 꺼지지도 않을 불이지. 그 고통에 비명을 지르고 싶은 게 아니라면 입 다물고 조용히 봐.”
한순간이나마 자신이 무력하게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그 순간을 그대로 되돌려줄 생각이었다.
콰르릉--!
땅을 울릴 만큼 거대한 천둥이 몰아치고 수십 개의 벼락이 괴물들을 향해 내려쳐졌다. 비명도 못 지른 괴물들이 검은 재가 되어 사라지고 창이 된 바람에 늑대들의 목이 베어졌다.
방어벽이 무너지자 모든 것은 너무도 쉽게 디아나의 힘 앞에서 사라졌다.
“죽어! 죽어야 하는 건 내가 아니고 너야! 내 걸 빼앗아 간 건 너라고! 아아악!”
분노를 참지 못한 어둠의 정령이 디아나에게 달려오려다 불길에 몸이 휩싸였다. 살갗을 태우는 고통에 끔찍한 비명이 디아나의 귀를 시끄럽게 울렸다.
괴물들이 모두 사라지고 디아나는 비명을 지르고 있는 어둠의 정령에게 몸을 돌렸다.
“원래 내 것이었어. 원래 내 것…….”
고통 속에서 붉은 눈을 번뜩이는 어둠의 정령은 똑같은 말을 반복하고 있었다.
어둠의 정령의 힘을 가져간 것이 가디언이었다. 하니 그 말을 하는 것일 거다.
하지만 세이아의 겉가죽을 쓰고 있어서인지 디아나는 마치 세이아가 자신에게 말하고 있는 거 같았다.
어쩜 이렇게 자신에게 알맞은 몸을 찾았는지 어둠의 정령과 세이아 둘은 정말 닮은 점이 많은 거 같았다.
“이제 모든 걸 끝내야 할 때가 되었다.”
가디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둠의 정령이 파 놓은 함정은 모두 부쉈고 어둠의 힘은 자신을 이길 수 없다.
디아나는 드디어 끝내야 하는 순간이 왔다는 걸 알았다.
디아나는 붉은 눈을 번뜩이는 세이아에게 다가갔다.
“넌 내 것을 훔쳤어. 내 걸, 내 힘을, 내 모든 걸 훔쳤어. 도둑이나 다름없는 너희가 악한 거지, 어떻게 나를 악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마지막 발악을 하는 거처럼 어둠의 정령이 날카롭게 소리쳤다. 그 모습이 꼭 자신에게 악을 지르던 세이아와 똑같아 디아나는 마치 열 살로 돌아온 거 같았다.
“그러고 보니, 그 말을 하지 못했어.”
나직이 중얼거린 디아나는 손가락을 살짝 움직였다. 물로 만들어진 날카로운 칼이 그녀의 손에 쥐어졌다.
“도둑년의 말 따위…….”
“네 것인 적이 없었어. 처음부터 네가 아니라 나였으니까.”
“……뭐…….”
붉은 눈이 흔들렸다.
“그러니 이젠 다 끝났어.”
디아나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세이아의 심장에 칼을 꽂았다. 그녀를 바라보는 세이아의 얼굴이, 피를 토하며 무너지는 찰나의 순간이 마치 어둠의 정령이 아닌 세이아인 거처럼 보였다.
하지만 저건 진짜가 아냐.
디아나의 흔들렸던 금안이 고요해지며 칼을 더 깊게 박았다.
털썩-.
심장에 박힌 물의 칼이 사라지고 어둠의 정령도 바닥으로 쓰러졌다. 겉가죽이었던 세이아의 몸이 발끝에서부터 검은 가루가 되어 사라지고 마침내 어둠의 정령이 완전히 소멸하였다.
세이아의 육신이 검은 가루가 되어 허공에 흩날리고 괴물들도 모두 사라졌다.
눈앞에서 갑자기 사라지는 괴물들에 검을 휘두르던 기사들의 눈이 커졌다.
그리고 하나둘 사람들의 시선이 광장에 서 있는 디아나에게로 향했다.
인간 같지 않았던 정령술.
자연의 모든 힘을 손끝으로 휘두르던 디아나의 모습을 본 사람들은 경외감과 두려움이 섞인 시선으로 디아나를 바라보았다.
검은 새의 형상을 한 가디언과 함께 서 있는 디아나는 아무것도 남지 않은 땅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어둠의 정령.
분명 자신은 어둠의 정령을 상대 한 것인데 마지막 순간엔 세이아를 마주한 기분이었다.
레아와 세이아.
그 둘을 마침내 다 떨쳐 버렸다는 시원한 마음과 동시에 묘한 허탈감이 들기도 했다.
잊고 지냈던 과거가 떠오르기도 하고 복잡한 기분에 바닥에 남은 검은 가루에 자꾸만 시선이 갔다.
“복잡한 마음은 어쩔 수 없단다. 악연이라 할지라도 긴 시간을 얽매여 있었으니까.”
가디언의 씁쓸한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리자 가디언 역시 검은 눈동자로 어둠의 정령이 사라진 흔적을 바라보고 있었다.
자신도 세이아에게 긴 시간 엮여 있었지만 가디언과 비교할 순 없었다.
가디언은 자신의 평생을 어둠의 정령을 소멸시키기 위해 살아왔었다. 계약자의 죽음 뒤에도 홀로 남아 말이다.
디아나도 가디언의 계약자이긴 하지만 초대 황제와 비교할 순 없을 것이다.
“가디언님, 수고하셨어요. 초대 황제 폐하께서도 분명 기뻐하실 거예요.”
나직한 위로를 건네자 가디언의 황금빛 눈동자가 자신을 향했다.
“디아나 너도 수고했다. 네 덕분에 내가 해야 할 사명을 다 할 수 있었단다. 그리고 네 말대로 에이루스도 기뻐할 것이다.”
가디언도 디아나도 서로의 마음이 한결 편해진 것을 느꼈다.
“디아나!”
그때 대공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디아나는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대공에게 몸을 돌렸다.
대공은 디아나를 품에 꼭 끌어안았다. 디아나가 무사하다는 것을 온기로 확인하려 하는 듯이 절박함이 서린 포옹이었다.
“아버지, 전 괜찮아요.”
디아나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대공의 마음은 쉽게 진정되지 않았다. 의식을 차렸을 순간부터 디아나를 찾았었다.
혼자 싸우고 있는 모습을 보았을 때 심장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기분을 느꼈지만 디아나의 곁으로 갈 수 없었다.
디아나를 도와주는 것은 곁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함께 싸워 주는 것이었으니까.
디아나가 잘해 낼 것이라 믿었지만 혹시라도 잘못될까 하는 불안감에 마음이 애달팠다.
대공은 디아나의 온기를 놓치지 않겠다는 듯 한참을 꼭 안고 있다 천천히 팔을 풀었다.
“괜찮기는, 이렇게 다쳤는데.”
피딱지가 굳은 디아나의 이마를 손끝으로 조심스레 훑은 대공이 자신이 아픈 거처럼 미간을 좁혔다.
“이 정도는 아무렇지도 않아요. 아버지가…… 더 많이 다쳤잖아요! 괜찮으세요?!”
안겨 있느라 미처 보지 못했던 상처들이 보였다. 혈향이 짙긴 했지만 자신도 다쳤으니 그래서 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깨에서부터 흐르는 피와 찢겨진 허벅지, 피에 젖은 금발까지 성한 곳이 없었다.
“괜찮다. 심각한 부상이 아니라 다 조금 긁힌 것뿐이다. 이 정도는 기사에게 익숙한 것이야.”
“이게 어떻게…….”
“디아나, 난 정말 괜찮다. 네가 이렇게 무사하니 상처는 아무것도 아니다. 무사해 줘서 정말 고맙다.”
대공은 디아나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어둠의 정령의 소멸 따위 그에겐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하나뿐인 딸이 살아 있다는 것이 중요할 뿐이었다.
“아버지도 무사하셔서 다행이에요.”
옅은 미소를 짓던 디아나는 광장을 둘러보았다. 어둠의 정령은 사라졌지만 아직 할 일이 남아 있었다.
습격과 폭발로 인한 부상자와 사상자들이 광장에 가득했다.
부상이 크지 않은 사람들이 부상을 입은 사람들을 돕고 있었다.
의식을 차린 황제와 황후가 기사들의 부축을 받고 있었고 레귤러스도 에키온이 부축하고 있었다. 그리고 디아나의 시선이 카이루스에게 멈추었다.
다들 누군가의 도움을 받고 있는 와중에 카이루스만 홀로 서 있었다.
“아버지, 잠시만요.”
디아나는 대공의 손을 놓으며 카이루스에게 달려갔다.
“카이루스!”
“디아나, 내가 도움을 준 거 같아 정말 다행…….”
카이루스는 왈칵 안기는 디아나 때문에 말을 끝내지 못했다. 갑작스런 포옹에 굳어 버렸던 카이루스는 이윽고 디아나를 조심스럽게 끌어안았다.
“고마워요. 언제나 날 도와줘서 고맙고 또 이렇게 무사해 줘서 고마워요. 정말 많이 좋아해요, 카이루스……. 아…….”
말을 잇던 디아나의 어깨가 딱딱하게 경직되었다.
‘방금 내가 뭐라고 했더라.’
무사한 그를 보자 안도감과 고마움이 물밀 듯이 밀려들어 자신도 모르게 숨겨 왔던 감정이 나와 버렸다.
‘어떡하지?’
순간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하며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았다.
“디아나, 괜찮습니까?”
갑자기 돌처럼 굳은 디아나의 모습에 카이루스가 걱정스런 얼굴을 했다.
디아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자신을 바라보는 걱정이 가득한 검은 눈동자는 아버지와 비슷하지만 조금 다른 애정이 서려 있었다.
‘어쩌면 그도 나와 같은 마음이 아닐까?’
숨겨 왔던 진심을 자기도 모르게 내뱉은 것에 당황하던 것도 잠시, 디아나는 더 이상 감정을 숨기고 싶지 않았다.
좋아한다는 말을 못 들은 듯한 그에게 다시 말하려 입술을 뗀 순간 황성의 기사들과 마법사들이 광장에 도착했다.
그렇게 디아나의 사랑 고백은 말발굽 소리에 완전히 묻혔다.
“디아나, 방금 뭐라고 했나요?”
디아나는 고작 말발굽 소리에 묻히고 만 고백이 슬프면서도 왠지 웃겨 싱거운 웃음을 흘렸다.
“다음에 다시 말할게요.”
숨기려고 했을 땐 저도 모르게 감정이 툭 튀어나오더니 결심을 하고 말하려니 상황이 도와주지 않았다.
지금은 그에게 고백을 할 타이밍이 아닌 거 같았다.
카이루스에게 미소를 지은 디아나는 기사들과 마법사들에게 다가갔다.
“황족들을 궁으로 모시고 마법사들은 부상자들의 응급 처치를 도와라.”
“네, 대공녀님.”
황제 폐하와 황후 폐하는 부상으로 정신이 없었고 에키온도 많이 지쳐 있었다.
디아나가 나서서 명령을 내리자 기사들과 마법사들은 빠르게 움직였다.
대공의 명령을 받은 대공가의 기사들도 광장의 사상자를 옮기자 끔찍한 비명으로 가득했던 광장은 빠르게 예전 모습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렇게 끝나지 않을 거 같던 이 밤도 마침내 저물었다.
많은 일이 있었던 밤이 지나고 아침이 찾아온 제국은 어둠의 정령의 습격 사건으로 소란스러웠다.
평민 귀족 할 거 없이 모두 습격에 대해 충격을 받았고 어둠의 정령을 소멸시킨 디아나에 대한 찬양이 이어졌다.
땅을 움직이고 하늘을 울렸던 엄청난 정령술에 대한 이야기는 입에서 입으로 끊임없이 전해졌다.
그리고 이야기의 주인공인 디아나는 아침 해가 뜨자마자 조용히 혼자 광장을 찾았다.
보랏빛 로브에 모자까지 깊이 눌러쓴 디아나는 신분을 숨기며 사람들을 지나쳤다.
광장 한복판에서 멈춘 디아나는 준비해 온 보랏빛 꽃다발을 내려놓았다.
당신을 영원히 기억하겠습니다, 란 꽃말을 가진 꽃이었다.
어둠의 정령을 소멸시킨 자신에 대한 이야기가 떠들썩했지만 어둠의 정령에게 희생된 자들이 있었다.
자신이 지키지 못했던 사람들을 짧게나마 추모하고 싶어 이른 아침 광장을 찾은 것이다.
보랏빛 꽃이 사람들의 발에 밟혀 사라지지 않도록 흙을 움직였다.
스르륵 모여든 흙들이 꽃을 소중하게 감싸며 땅으로 다시 파고들었다.
꽃은 이곳에 영원히 남을 것이다.
디아나는 어젯밤의 일을 모두 잊은 듯 푸른 하늘을 올려다보다 광장에서 몸을 돌렸다.
* * *
습격 사건의 희생자들을 기리는 추모와 사건의 정리로 인해 건국제 행사는 기간 내내 조심스러우면서도 소란스럽게 지나가고 마지막 날이 밝았다.
희생자들에 대한 보상까지 마친 황실은 타국에서 온 사신들을 배웅하기 위해 건국제의 마지막 파티를 황성에서 열었다.
사건이 벌어진 지 얼마 되지 않았기에 악단도 화려한 드레스도 자제하는 파티였다.
“황제 폐하와 황후 폐하, 황실 일원들께서 입장하십니다!”
부상으로 말이 많았던 황실 일가가 모습을 드러내자 사신들과 귀족들의 시선이 집중됐다.
사람들의 시선은 특히 어둠의 정령을 소멸시킨 디아나에게 집중되었다.
그날 습격 사건이 있은 이후 디아나는 대공가에서 칩거하고 있었다.
이야기는 끊이지 않는데 정작 대공녀는 조용하니 사람들은 의심하기도 했다.
어둠의 정령에게 크게 부상을 당해 움직이지 못하는 것이 아니냐고 말이다.
가디언의 능력까지 폄하했던 몇몇 어리석은 귀족들과 타국의 사신들은 의심이 무색하게 당당한 디아나의 모습에 입을 꾹 다물었다.
황제와 황자마저 부상이 심한 듯 팔에 부목을 대고 있었건만 대공녀는 멀끔하다 못해 빛이 났다.
아름답고 우아한 기품이 절로 흐르는 디아나의 시선이 좌중을 훑자 귀족들은 저도 모르게 시선을 내렸다.
황제가 단상에 오르고 디아나는 그의 곁에 섰다.
“많은 일이 있었지만 건국제의 마지막 날까지 제국에 남아 자리를 빛내 준 사신들을 위해 특별히 준비한 자리이니 부디 편안한 마음으로 즐겨 주길 바라네. 그리고 제국의 황제로서 오늘 자리를 빌려 어둠의 정령을 소멸하고 제국과 이 대륙의 평화를 지켜 낸 대공녀, 디아나 테라비타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합니다.”
황제는 디아나에게 살짝 고개까지 숙였다. 경외를 담은 행동에 귀족들도 디아나에게 허리를 숙였다.
갑작스런 황제의 행동에 당황했지만 디아나는 당황하지 않고 시선을 낮추며 말했다.
“과찬이십니다, 폐하. 저는 가디언의 계약자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가디언의 역할은 제국을 지키는 일, 앞으로도 전 테라비타 제국의 수호자로서 그 역할을 다하겠습니다.”
디아나는 매끄럽게 미소를 그렸다.
황제는 대륙의 평화라 했지만 디아나는 제국으로 선을 그었다.
대륙의 평화를 말하기엔 태초의 시대와 달리 왕국들이 많아졌고 이해관계가 복잡했다.
그리고 황실과 자신을 은근히 깎아내려 했던 타국 사신들의 소문을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하여 돌려 말하며 타국의 사신들과 귀족들에게 황실의 건재함을 과시한 것이다.
“고맙구나, 디아나. 모두들 건국제의 마지막 날을 즐겨 주시게.”
황제는 부상을 당하지 않은 손으로 디아나의 손을 꼭 잡았다 놓아주었다.
그렇게 파티가 시작되고 디아나는 파티장을 둘러보았다. 귀족들과 인사를 하고 있는 카이루스를 발견한 디아나는 미소를 지으며 단상을 내려갔다.
“카이루스.”
그의 이름을 나직이 부르자 귀족들이 물러났다.
“디아나.”
그날 이후 처음 보는 것이었다. 혹시라도 상처가 남아 있을까 그의 팔과 얼굴을 자세히 보자 카이루스가 가벼운 웃음을 흘렸다.
“전 괜찮습니다. 신성력으로 다 치료했는걸요. 디아나야말로 다친 곳은 괜찮나요?”
“아, 전 괜찮아요. 원래 가디언의 계약자는 몸의 회복도 빠르거든요.”
“다행입니다.”
그의 부드러운 미소에 디아나의 심장에 파르르 하는 진동이 느껴졌다.
화이트 톤의 턱시도를 입고 있는 그를 보던 디아나는 텅 빈 댄스 홀을 힐긋 보았다.
원래 파티에서 첫 춤을 함께하기로 했는데.
오늘은 추모의 뜻을 담아 음악단이 없었다. 그러니 당연히 댄스홀도 비어 있었다.
카이루스가 돌아가면 또 한동안은 보기 힘들 텐데.
“디아나?”
다른 곳을 향해 있는 자신의 시선을 느낀 그가 이름을 불렀다.
“아…… 카이루스가 함께 춤을 추자 했던 말이 기억나서요.”
“아쉽지만 함께하는 건 다음으로 미뤄야 하겠군요.”
텅 빈 댄스홀을 본 카이루스가 아쉽다는 듯 눈가를 살짝 접었다.
“춤은…… 출 수 없지만 테라스로 나가실래요? 둘이서 조용히 함께 있을 수 있으니까요.”
디아나가 먼저 손을 내밀자 카이루스의 검은 눈동자가 살짝 커졌다.
둘이서 조용히 함께.
자신이 한 말에 부끄러움이 물밀 듯이 밀려든 디아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애를 쓰고 있었다.
‘빨리 잡아 줬으면.’
마음속으로 바라던 그때 카이루스가 손을 잡았다.
“좋아요, 디아나.”
비록 디아나가 먼저 손을 내밀었지만 카이루스는 젠틀하게 테라스로 디아나를 에스코트했다.
테라스의 문을 열자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다.
그러고 보니 자신의 생일날 그가 왔을 때도 이렇게 테라스에서 함께 있었던 것이 떠올랐다.
그땐 멋진 남자가 된 그를 9년 만에 처음 봐 마냥 어색한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돌이켜보면 그때부터 반했던 게 아닐까 싶다.
이렇게 잘생겼는데 어떻게 반하지 않을 수 있겠어.
황성의 정원을 바라보는 카이루스의 옆얼굴을 물끄러미 보던 디아나가 가벼운 웃음을 흘렸다.
“디아나, 뭐가 그렇게 재밌나요?”
디아나의 맑은 웃음소리에 카이루스가 고개를 돌렸다. 혼자 웃는 디아나에게 짓궂은 눈빛으로 묻자 디아나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음…… 카이루스가 너무 잘생겨서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어요.”
“네?”
장난기가 서렸던 그의 얼굴에 당황이 맴돌았다. 항상 당황하던 것은 디아나였는데 이렇게 역으로 그가 놀란 것을 보는 것도 재밌다고 웃던 그때, 카이루스의 검은 눈동자가 짙어졌다.
“……제가 잘생겨서 좋나요?”
“……네?”
디아나의 웃음이 뚝 멈추었다.
“그날 디아나가 내게 말했잖아요. 아주 많이 좋아하고 있다고.”
그걸 들었었다고……?
그가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아 못 들었다고 생각했었다. 한데 다 들었다니.
디아나의 심장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좋아한다고 말을 하면 되는데 너무 갑자기 그가 말을 꺼내서일까,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했다.
“아…… 그게…….”
디아나가 입술을 달싹이자 카이루스가 한 걸음 그녀에게로 다가갔다.
“그날은 너무 정신이 없어서…… 그런 곳에서 디아나에게 말하고 싶지 않아 아무런 말을 못 했어요.”
“무슨 말을…….”
자신에게 할 말이 있는 거 같은 그의 말에 디아나의 눈이 동그래졌다.
“사실 이번에 고백하려 제국을 방문한 것은 아니었는데…… 천천히 디아나가 내게 익숙해지길 바랐거든요. 하지만 디아나가 먼저 그런 고백을 해 줄 줄은 정말 상상도 못했어요. 순간 모든 시간이 멈춘 거처럼 기뻤어요.”
카이루스는 짙은 눈빛으로 디아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디아나의 오른손을 잡았다. 손가락 끝을 받치듯이 잡은 그는 천천히 한쪽 무릎을 굽혔다.
“디아나.”
자신을 올려다보는 아름다운 밤하늘 같은 눈동자엔 꼭 디아나가 카이루스를 바라볼 때와 같은 떨림과 설렘이 서려 있었다.
설마…… 그도…….
“아주 오래전부터 당신을 사랑해 왔습니다. 부디 저의 마음을 받아 주시겠어요?”
그의 낮은 음성이 테라스를 울렸다. 약간의 떨림을 담은 그의 목소리에 디아나의 심장도 같이 떨렸다.
그도 자신과 같은 마음이었다.
혹시라도 그가 자신을 좋아하지 않으면 어쩌나 했던 불안과 걱정이 단번에 사라지고 주체할 수 없는 충만한 행복감이 가슴을 뒤덮었다.
디아나는 얼굴 가득 환한 미소를 그리며 카이루스의 손을 꼭 잡았다.
“저도 많이 사랑해요, 카이루스.”
몸을 일으킨 카이루스가 디아나를 끌어안았다. 파티장의 소란스러움도 드문드문 들리는 사람들의 말소리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두 사람에게 들리지 않았다.
“사랑해요, 디아나.”
그저 서로의 두근거리는 심장 소리만이, 숨길 수 없는 행복한 웃음소리만이 들릴 뿐이었다.
건국제의 마지막 밤, 별이 빛나는 하늘 아래 두 사람의 행복한 미소가 깊어져 갔다.
* * *
건국제 마지막 날의 파티가 끝나고 저택으로 돌아온 디아나는 목욕을 마치고 화장대 앞에 앉아 있었다.
- 사랑해요.
근데 자꾸만 떠오르는 카이루스의 모습에 입꼬리가 자꾸만 올라갔다.
그가 날 사랑한다니, 아니, 우리가 서로 사랑한다니.
꺅, 소리를 지르고 싶기도 했고 가슴께가 간질거려 어쩔 줄 모르겠기도 했다.
누군가와 마음을 나눈다는 게 이렇게 기분 좋은 일일 줄 몰랐다.
자기도 모르게 실실 웃던 디아나에게 피비가 말했다.
“우리 대공녀님께서 왜 이렇게 기분이 좋으실까요?”
거울 속으로 디아나와 머리를 빗겨 주던 피비와 시선이 마주쳤다. 피비는 아무런 말도 안 했는데 괜히 감정을 들킨 거 같아 디아나의 볼이 발그레 물들었다.
디아나가 부끄러워하는 것을 본 피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머, 뭐예요? 정말 제가 모르는 일이라도 있는 거예요?”
“음…… 그게…… 나 오늘 고백받았어, 피비.”
“고백이요?”
“응. 그리고 나도 사랑한다고 고백했어.”
피비에게 처음 말하는 것이었다.
아직 아무에게도 카이루스와 교제 하게 되었단 말을 하지 않았다. 부끄럽기도 했지만 카이루스가 자신이 먼저 말하겠다고 했기 때문이다.
얼굴이 펑 하고 터질 거처럼 빨개진 디아나를 입을 쩍 벌리고 보던 피비가 눈을 도르륵 굴리다 조심스럽게 물었다.
“상대는…… 오도어 왕태자님인가요?”
“어, 어떻게 알았어?”
아직 카이루스라고 말하지 않았는데.
디아나가 눈을 동그랗게 뜨자 피비가 미소를 지었다.
“그야, 전 대공녀님에 대해 모르는 게 없으니까요. 저번에 오페라 공연 보고 오셨을 때부터 뭔가 있으시구나 짐작하고 있었죠.”
“……그날부터 눈치챘다니, 피비는 정말 나에 대해 모르는 게 없네.”
깜짝 놀래 주려고 했던 것이 수포로 돌아가 약간 허탈했지만 또 피비가 다 알고 있었다는 게 좋은, 이상한 기분이었다.
“그래도 대공녀님께서 사랑하시는 분이 왕태자님이라 다행이에요. 웬 놈팡이 같은 놈이 대공녀님의 마음을 훔치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왕태자님은 능력도 있으시고…… 꽤 오래 대공녀님을 사랑하셨으니 전 찬성이에요.”
“오래전?”
“음…… 그런 게 있답니다.”
피비는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으며 머리를 다시 빗겨 주었다. 무슨 말인지 알 순 없었지만 피비가 카이루스를 칭찬해 준 건 몹시 좋았다.
“아버지도 피비처럼 카이루스를 좋아했으면 좋겠는데.”
왠지 그게 힘들 거 같았다.
저번에 함께했던 식사를 떠올려 보면 카이루스를 바라보던 아버지의 눈빛은 싸늘하기 짝이 없었으니까.
피비 역시 나와 같은 생각인지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대공 전하께선…… 그래도 대공녀님이 좋다면 받아 주실 거예요, 걱정 마세요.”
“응, 피비. 늦었다, 이제 그만 쉬러 가.”
디아나는 하루가 넘어가기 직전인 시간을 보고 말했다.
피비는 빗을 내려놓았다.
“네. 그럼 전 이만 물러가 볼게요. 내일 왕태자님에 대해 더 이야기해 주세요.”
눈을 찡긋하는 피비를 보고 디아나가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알겠어.”
“좋은 밤 보내세요, 대공녀님.”
피비가 방을 나가고 디아나가 일어나자 유네스가 다가왔다.
“유네스도 잘 자.”
유네스의 머리를 쓰다듬고 침대로 향하던 디아나는 문득 창밖을 보다 걸음을 멈추었다.
대공 저택의 정원을 홀로 거니는 아버지의 모습이 보였기 때문에.
“이 시간에…… 왜…….”
디아나는 홀로 서 있는 아버지의 뒷모습을 보다 소파에 걸쳐진 숄을 들었다.
“유네스, 잠시 나갔다 올게.”
사용인들마저 퇴근한 대공가의 저택은 고요했다. 계단을 빠르게 내려간 디아나는 정원으로 나갔다.
싸늘한 바람에 살짝 몸이 떨리자 따스한 바람을 몸에 둘렀다.
“아버지.”
“디아나?”
분수대 앞에 서 있는 그를 부르자 대공이 몸을 돌렸다.
디아나는 미소를 지으며 그의 팔에 자연스럽게 팔짱을 꼈다.
“이 시간에 왜 안 주무시고 나와 계세요.”
“생각이 많아져서……. 그보다 너야말로 이렇게 얇은 차림으로 나오면 어…….”
미간을 찡그리는 대공에게 따스한 바람을 느끼게 해 주자 잔소리가 멈추었다.
“제 걱정은 하지 마시라니까요. 제가 이렇게 능력이 좋아요, 아버지.”
대공은 피식 웃으면 디아나의 손을 잡았다.
“그래, 알고 있지. 어느새 이렇게 커서 어둠의 정령도 멋지게 소멸시켰지 않느냐. 또 이제 아버지의 에스코트는 필요 없다 거절하기도 하였지.”
미소를 짓던 디아나가 당황스러운 얼굴을 했다.
“아니, 그건…… 카이루스가 내일이면 돌아가니까…… 그래서 그런 거였어요.”
파티장에서 나올 때 카이루스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나왔었다. 원래라면 아버지와 함께했겠지만 곧 떠나는 그와 조금 더 함께하고 싶었다.
그 일을 마음에 담아 두고 계셨을 줄이야.
디아나가 미안한 얼굴을 하자 대공이 가벼운 웃음을 흘렸다.
“괜찮으니 걱정 말거라. 그보다 그 왕태자…… 놈이…… 그리 좋은 것이냐?”
방금 왕태자 놈이라고 한 거 같은데……. 그 부분에서 살짝 말이 뭉그러져 제대로 듣지 못했다.
디아나는 대공의 살짝 올라간 눈썹을 보다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너무 좋아요.”
아버지는 이미 카이루스와의 관계를 눈치챈 거 같았으니 거짓말은 필요 없었다.
“그럼 이제 그를 따라가 내 곁을 떠나는 것인가.”
“네? 아버지를 떠난다뇨? 전 그럴 생각 조금도 없는데요?”
“카이루스는 오도어 왕국의 왕태자이니 결국 그리되지 않겠느냐.”
대공이 심각한 얼굴로 슬프다는 듯 말하자 디아나의 금안이 커졌다.
“아니에요! 전 아버지 곁에 있을 거예요, 만약에…… 아주 나중에 카이루스랑 결혼한다고 해도 마법진으로 자주 왔다 갔다 하면 되고…….”
“벌써 결혼까지…….”
“아니, 그게 아니라…….”
디아나가 어쩔 줄 모르자 대공이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그에 디아나는 아버지가 자신을 놀렸다는 걸 깨달았다.
“아버지…….”
“뭘 그리 안절부절못하느냐. 당연히 널 오도어 왕국에 보낼 순 없지. 결혼도 쉽게 허락해 줄 마음 없다.”
왕태자라 해도 그의 마음에 차지 않는 사윗감일 뿐이다. 그리고 희박한 가능성으로 결혼한다 한다면 당연히 워프 마법진을 만들어서라도 왕태자가 왔다 갔다 하게 할 것이다.
너무도 당연하게 대공의 머릿속엔 디아나가 움직이는 일은 없었다.
“음…… 아버지, 카이루스를 너무 고생시키진 말아 주세요.”
“그건 노력은 해 보마. 근데 네가 그리 편들면 더 고생시키고 싶단다.”
“아, 그럼 편 안 들게요!”
디아나는 황급히 태세를 전환했다.
어쩐지 편 안 든다는 말이 더 편드는 거처럼 느껴져 대공의 눈썹이 치켜세워졌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디아나가 좋다면 그는 언제나 질 수밖에 없었다.
대공은 행복이 가득한 디아나의 얼굴을 물끄러미 보다 옅은 미소를 그렸다.
“……언제 이렇게 컸는지.”
그의 허리춤에 겨우 닿던 작은 아이가 어느새 이렇게 커 사람들의 경외심을 받고 사랑하는 남자를 만났다.
후자는 상당히 마음에 안 들긴 하지만 어둠의 정령도 사라지고 디아나의 얼굴에서 그늘이 완전히 사라진 것이 기뻤다.
“아직 다 안 컸어요. 그러니까 이렇게 아버지 곁에 꼭 붙어 있을 거예요.”
애틋한 대공의 눈빛에 디아나는 팔짱을 더욱 끼며 넓은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어렸을 때처럼 어리광을 부리자 대공의 바람 빠진 웃음소리가 들렸다.
“그래, 이렇게 한 십 년은 더 내 곁에 있거라.”
“십 년이라뇨, 백 년은 있을 건데요?”
디아나의 말에 대공이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백 년? 내 다 세고 있을 것이다. 나중에 왕태자놈에게 가기만 해 보거라.”
“아버지야말로 나중에 딴소리하지 마세요. 저도 다 세고 있을 거예요. 그러니 이렇게 쭉 제 곁에 오래 계셔야 해요.”
“……그래.”
대공은 디아나의 손을 꼭 잡았다.
십 년, 아니 정말 백 년은 이렇게 늘 행복하길 바라면서.
그렇게 밤이 깊어졌지만 대공과 디아나의 웃음소리는 영원히 끝나지 않을 거처럼 한참 동안 이어졌다.
-<네가 아닌 나였다> 완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