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 * *
뜨거웠던 여름이 지나고 나뭇잎들이 알록달록하게 물드는 가을이었지만 북방의 영지는 이미 겨울에 접어든 듯 해가 높은 시간에도 바람이 차가웠다.
“디아나, 춥지 않니?”
“전 괜찮아요.”
여름을 수도에서 보내고 북방의 대공성으로 돌아온 디아나는 오늘도 대공과 함께 산책을 하고 있었다.
처음 그와 산책을 같이 할 땐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어색하기만 했는데 이젠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아도 어색하거나 불편하지 않았다.
대공성에 돌아온 뒤 대공은 늘 디아나의 곁에 있으며,(가끔은 피비가 과하다 느낄 정도로) 디아나와 가까워지려 노력했다.
10년 동안 알지 못했던 디아나가 좋아하는 것, 싫어하는 것들을 알아가며 대공은 부모에 관한 책까지 읽으며 공부했다.
그리고 사실 두 사람이 가까워진 계기는 바로 한 달 전 열렸던 디아나의 생일 파티였다.
대공은 그날 디아나에게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선물을 했다.
디아나가 딱 한 번 스치듯 말한 것을 기억해 하늘의 별이라 불리는 절벽 꽃을 따 펜던트를 만들어 선물했었다.
영원히 시들지 않는 마법을 걸어서.
어둠 속에서 별처럼 빛나는 꽃같이 디아나의 앞길도 영원히 빛나길 바란다는 말도 함께였다.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펜던트.
펜던트는 대공의 무한한 사랑이 담긴 선물이었다.
절벽까지 가서 직접 꽃을 따온 대공의 마음에 디아나가 감동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게 자신을 위해 노력하는 대공의 모습에 디아나의 마음에 남아 있던 응어리들도 조금씩 풀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자리엔 아버지를 향한 애정이 쌓였다.
“요새 수업들은 힘들지 않니? 너무 갑자기 많은 수업을 듣는 게 아닐까 걱정되는구나.”
대공성으로 돌아온 뒤 데릴 선생님의 수업이 다시 시작되었고 또 예절과 춤, 음악을 가르치는 새로운 선생님들이 늘어났다.
처음엔 예절 선생님만 붙여 주겠다고 했었지만 디아나가 배우고 싶은 것들이 많아 선생들을 더 붙여 달라 말한 것이었다.
가디언과의 정령술 연습까지 있었기에 하루하루가 꽤 빡빡하게 흘러가긴 했지만 새로운 것을 배우는 건 디아나에게 언제나 즐거운 일이었다.
“조금 힘들 때도 있지만 배우는 게 훨씬 더 즐거워요. 예절 수업이 다 끝나면 나중에 도예랑 또 약초학에 대해서도 배워 보고 싶어요.”
학문은 배우면 배울수록 더 넓은 세상이 펼쳐졌다.
디아나가 눈을 반짝이며 말하자 대공은 피식, 가벼운 웃음을 지으며 금빛 머리칼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배우는 걸 좋아하는 건 엄마를 꼭 닮았구나.”
새로운 학문은 물론이고 손으로 익히고 만드는 것까지 무엇이든 도전하고 배우려 했던 아리엘의 모습이 떠올라, 대공은 은은한 미소를 그렸다.
“엄마도 저처럼 배우는 걸 좋아했어요?”
“그랬단다. 한 번은 검을 만드는 법을 배우겠다고 대장장이들을 찾아가 며칠 밤을 새운 적도 있었지. 그때 결국 검을 만들어 왔었단다.”
새카만 그을음을 얼굴 곳곳에 묻히고 그에게 검을 선물하던 아리엘의 환한 웃음은 아직도 선명하게 떠올랐다.
“검이라니…… 대단해요!”
디아나는 검을 만드는 엄마의 모습을 상상하며 감탄했다. 왠지 그 모습이 아리엘과 똑같아 순간 대장장이를 찾아갈까 불안해진 대공이 덧붙였다.
“디아나, 검을 만드는 일은 상당히 어렵고 위험한 일이니…….”
“엄마가 만든 검, 저도 볼 수 있을까요?”
디아나는 대공의 나직한 말은 들리지 않는 듯 호기심 가득한 초롱초롱한 눈을 했다.
그 맑은 눈빛에 대공은 차마 안 된다고 할 수 없었다.
검을 만들고 싶다면 대공성 내에 대장간을 만들어 주면 되겠지.
머릿속으로 걱정에 대한 약간 다른 방향의 결론을 내린 그가 입술을 열려던 그때, 피비의 목소리가 정원을 크게 울렸다.
“대공녀님, 대공녀님 어디 계세요?”
“나 여기 있어, 피비.”
디아나는 몸을 홱 돌리며 피비에게 손을 흔들었다. 요즘 피비가 이렇게 급히 자신을 찾을 이유는 하나뿐이었으니까.
“대공 전하와 대공녀님을 뵙니다.”
“일어나거라.”
대공은 피비의 손에 들린 편지 봉투에 눈썹을 살짝 올리며 말했지만 디아나는 강아지처럼 피비에게 쪼르르 다가갔다.
“오도어 왕국에서 온 편지인 거지?”
“네, 대공녀님.”
바로 왕국으로 돌아간 카이루스가 보내온 편지.
디아나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피비에게서 편지를 받아들었다.
카이루스가 오도어 왕국으로 떠난 후 디아나는 그의 편지를 가장 기다리게 되었다.
“아버지, 저 이만 방으로 가 볼게요.”
“……그래.”
편지를 받자마자 환한 미소를 그린 디아나는 얼른 답장을 적어 주고 싶어 방으로 뛰어갔다.
[디아나 영애에게.
영애, 저번 편지는 잘 받았습니다. 북방의 영지로 돌아가셨다니, 생각보다 빨리 영지로 돌아가셔서 조금 놀랐습니다. 그리고 보지 않아도 울상이었을 레귤러스의 얼굴이 떠올라 웃음이 나네요. 수도의 생활도 좋겠지만 영애껜 북방의 영지가 고향일 테니 부디 돌아가셔선 항상 행복한 일만 있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전 요즘 저를 도와줄 사람들을 모으기 위해 노력하고 있답니다. 쉽지 않지만 이번엔 도망치지 않고 열심히 해 보려 해요.
곧 겨울이 다가오네요. 북방의 겨울은 매섭다고 들었는데 부디 항상 건강하시기 바랍니다. 답장 기다릴게요, 영애.
-카이루스-]
[카이루스 왕자님께.
북방의 겨울은 매섭지만 이번 겨울은 제게 따뜻할 거 같아요. 이제까지 춥기만 했던 겨울과 달리 제 주변에 많은 사람들이 있으니까요. 왕자님의 말처럼 이제 이곳에서 행복한 일들만 있을 거 같아요. 레귤러스는 많이 서운해하긴 했지만 북방으로 자주 보내 주겠다는 황후 폐하의 말씀에 금방 기운을 차렸어요. 겨울이 끝나면 레귤러스도 놀러 오기로 했고요. 저의 겨울은 따뜻할 테니 왕자님도 왕자님을 도와줄 좋은 사람들과 따뜻한 겨울을 보내셨으면 좋겠어요. 그래서 꼭 다시 만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그럼 왕자님의 답장 기다릴게요.
-디아나-]
디아나의 편지를 매단 비둘기가 하늘 높이 날아오르고 새파란 하늘이 빛났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북방의 겨울이 찾아오고 수십 번의 계절이 바뀐 어느 날, 뜨거운 햇빛이 내리쬐는 하늘에서 편지를 매단 새하얀 비둘기가 한 남자의 어깨 위로 착지했다.
“수고했다.”
오도어 왕성으로 들어오는 편지들을 관리하는 우편관리국.
편지를 배달하느라 고생한 비둘기에게 먹이를 먹인 그때, 푸른 장발의 남자가 관리국의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는 몹시 피곤해 보이는 얼굴로 말했다.
“페테일 경, 오셨군요.”
“그래, 오늘도 왔지. 아직도 테라비타 제국에서 편지가 도착하지 않았나?”
푸른 장발의 남자, 페테일 로이슨은 바로 오도어 왕국의 왕태자의 보좌관이자 페테일 공작가의 차기 공작이었다.
왕국에서 알아주는 재원인 그가 어쩌다 편지를 전하는 비둘기처럼 우편관리국을 드나들게 되었는지 모르겠지만 그는 꾸준히 우편관리국을 드나들고 있었다.
아니, 사실 그는 근 일주일 동안 우편관리국에 매일 출근 도장을 찍고 있었다.
테라비타 제국에서 편지가 부디 오늘은 도착했기를 하는 마음으로 말이다.
원래 주기적으로 우편관리국에 오긴 했지만 이렇게 매일 오는 것은 드문 일이었다.
관리국의 수장은 페테일 경을 안쓰러운 얼굴로 바라보다 말했다.
“오늘 막 테라비타 제국에서 편지가 도착했습니다.”
비둘기에게 먹이를 준 남자가 편지를 들고 그의 앞으로 다가갔다.
“방금 테라비타 제국에서 왕태자님 앞으로 도착한 서신입니다.”
“후…… 드디어 왔군. 오늘도 안 왔으면 아마 왕태자님이 제국으로 가신다고 했을 텐데, 정말 다행이네.”
페테일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편지를 조심스럽게 가슴 안쪽 주머니에 넣었다.
“그럼 수고들 하게.”
즐겁고 가벼운 마음으로 우편관리국을 나온 페테일은 서둘러 왕태자의 궁으로 향했다.
* * *
오도어 왕국, 왕태자 궁의 연무장.
강한 햇볕 아래 지치지도 않는지 연신 검을 휘두르고 있는 흑발의 남자가 있었다.
큰 키와 넓은 어깨, 살짝 미간을 찡그린 수려한 얼굴.
왕궁의 시녀들이 흑발의 남자를 몰래몰래 힐끔거리던 그때, 연무장에 큰 목소리가 울렸다.
“왕태자님, 왕태자님!”
날카롭게 검을 휘두르고 있던 흑발의 남자, 카이루스는 익숙한 목소리에 검을 멈추며 몸을 돌렸다.
“무슨 일이길래 그렇게 호들갑이야. 왕태자 보좌관이 이렇게 무게감이 없어서야. 아랫사람들 보기 부끄럽지도 않느냐.”
카이루스는 자신의 앞으로 달려온 페테일을 보며 이맛살을 찡그렸다.
페테일은 카이루스의 서늘한 눈빛은 이제 너무도 익숙했기에 아무렇지 않게 미소를 지었다.
“왕태자님께서 너무 무게감이 넘치시니까 저라도 이렇게 좀 편한 사람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야 이 얼음궁전이라 불리는 왕태자 궁에도 사람 사는 온기가 돌지요. 그리고 제가 지금 무얼 들고 온지 아시면 절 이리 박대하시지 못 하실 텐데요.”
핀잔에도 주눅 들지 않는 뻔뻔함은 카이루스의 막역한 친우를 떠올리게 했다.
잠시 에키온을 떠올리던 카이루스는 상의 안쪽 주머니에서 편지 봉투를 꺼내는 페테일을 보았다.
“편지가 왔구나.”
익숙한 편지 봉투를 보는 카이루스의 검은 눈동자에 이채가 스쳤다.
은은한 아이보리색, 테라비타 대공가의 문양이 찍힌 편지 봉투는 바로 디아나가 보낸 것이었다.
“네, 드디어 테라비타 대공가에서 편지가 도착했습니다. 이번 편지는 생각보다 늦게 도착해서 제가 얼마나 노심초사했는지 모릅니다. 편지가 안 오는 동안 왕태자님 심기가 정말 저 설산의 냉기보다 더 차가웠…….”
탁, 페테일은 그의 말엔 관심도 없다는 듯 편지를 뺏어 가는 카이루스를 보며 쩝, 입을 다물었다.
무려 9년 동안 왕태자의 곁에서 충성를 다 바친 가신이었지만 자신보다 저 편지가 카이루스에게 더 소중하단 걸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검을 시종에게 건네고 조심스럽게 봉투를 연 카이루스는 유난히 기다림이 길었던 이번 편지를 빠르게 읽어 내렸다.
“……성인식을 맞이하는군.”
“아, 그래서 이번 편지가 늦게 도착한 거군요. 하긴 대공녀님의 나이가 올해로 19살이시니 성인식을 치르실 나이가 되셨네요. 곧 대공녀님의 생일이시죠?”
페테일은 자신의 생일은 까먹어도 타국 대공녀의 생일은 까먹지 않았다.
매년 대공녀님의 생일이 다가올 때면 왕태자를 도와 가장 귀한 선물을 준비해 보냈으니까.
“벌써 한여름이니, 곧 생일이시지.”
“그럼 이번 대공녀님의 생일 파티는 정말 성대하게 열리겠네요. 중요한 성인식까지 같이 치러야 하니까요.”
“그래서 이번엔 수도의 황성에서 파티를 연다고 하는군.”
“이야, 제국의 귀족들은 물론이고 타국의 왕족들도 참석하겠는데요? 그 유명한 테라비타 제국의 대공녀이자, 가디언의 선택을 받은 황족이니 엄청나겠어요.”
“그래서 나도 가려고.”
“네, 네……?”
고개를 끄덕이던 페테일은 화들짝 놀라며 카이루스를 바라보았다.
한 나라의 왕태자가, 그것도 즉위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 해야 할 일이 많은 왕태자가 지금 어딜 간다고 한 거지……?
페테일은 방금 자신이 들은 말이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카이루스를 바라보았다.
“왕태자님, 방금 제가 이상한 말을 들은 거 같은데…….”
“그래? 그럼 다시 말해 주마. 난 이번 대공녀님의 생일 파티에 참석할 것이다.”
카이루스가 불안함 가득한 페테일의 얼굴을 보며 한 자 한 자 정확히 말한 순간.
“왕태자님!”
절규와 같은 페테일의 목소리가 연무장을 크게 울렸다.
* * *
뜨거웠던 여름이 지나고, 선선한 바람이 찾아온 가을.
테라비타 제국 수도 내 가장 큰 저택인 대공가가 오랜만에 사람들의 활기로 넘쳐나고 있었다.
북방에서 올라온 짐들을 하인들과 하녀들이 분주히 나르던 그때, 화려한 마차의 문이 열렸다.
기사의 손을 잡고 한 여자가 마차에서 내리자 순간 저택 내 분주하던 사용인들의 시선이 일순 그녀에게 쏠렸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구불거리는 황금빛 머리칼과 고양이를 닮은 새초롬한 눈, 그 밑으로 붓으로 그린 듯 반듯한 콧대와 도톰한 붉은 입술은 가히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시선을 사로잡는 황홀한 미모였다.
“와, 정말 오랜만이다.”
19살, 내일 저녁에 열릴 생일 파티이자 성년식을 위해 9년 만에 수도로 돌아온 디아나는 저택을 보며 매끄럽게 입꼬리를 올렸다.
디아나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린 사용인들은 다시 분주히 짐을 나르고 디아나는 오랜만에 돌아온 수도의 풍경을 만끽하듯 맑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러게요, 이게 정말 몇 년 만이죠? 너무 오랜만에 와서 저택이 낯설어 보일 지경이에요, 대공녀님.”
여름에도 서늘한 북방과 달리 아직도 뜨거운 햇빛이 내리쬐는 하늘을 보던 디아나는 피비의 말에 고개를 내렸다.
“그러게. 무려 9년 만에 올라온 거니까 진짜 오랜만이다.”
일부러 수도에 올라오지 않고 북방에서 쭉 지냈던 건 아니었다. 황실 식구들도 1년에 몇 번씩 북방의 영지로 찾아오고 할아버지도 북방에 자주 들르시는 터라 굳이 수도에 올 이유가 없었던 것뿐이었다.
물론 사교계 모임 초대는 간간이 받았지만 가디언의 선택을 받았다는 것과 어둠의 정령이 돌아왔단 것이 예정보다 빨리 밝혀져 소문의 장이 되는 사교 모임을 피하기는 했다.
완벽히 정령술을 쓸 수 있기 전까진 괜한 말들이 나올 수 있었으니까.
그렇게 어찌어찌하다 보니 성년식이 오는 생일까지 북방에서 지내게 된 것이다.
“그래도 이렇게 수도로 오니까 좋네요. 역시 북방보단 수도가 뭔가 활발한 분위기도 있고요.”
피비는 오랜만에 수도로 와서 기분이 좋은 듯 꽤 긴 여정이었음에도 목소리가 밝았다.
“냐아--.”
그리고 유네스도 기분이 좋은지 디아나의 곁으로 와 드레스에 몸을 비볐다.
“응, 나도 좋아. 북방도 좋지만 가끔은 이렇게 수도로 오는 것도 좋겠어.”
유네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작은 미소를 지은 그때, 익숙한 목소리가 크게 울렸다.
“디아나!”
디아나는 저택 안에서 나오는 남자를 보고 눈을 크게 떴다.
“레귤러스, 왜 거기서 나와? 설마 대공 저택에 먼저 와 있었던 거야?”
구불거리는 금발을 휘날리며 자신의 앞으로 달려온 레귤러스는 장난스런 미소를 지었다.
“당연히 미리 와 있었지. 나 너 온다는 소식에 이틀 전부터 기대돼서 잠도 잘 못 잤어.”
정말 잘 못 잤는지 레귤러스의 하얀 눈가가 거뭇거뭇했다.
9년이나 흘렀지만 레귤러스는 어릴 때와 크게 달라진 것이 없었다.
여전히 디아나에게 자신의 감정을 여과 없이 드러냈고, 다른 사람이 보면 디아나와 쌍둥이 남매라 오해할 만큼 가깝고 친하게 지내고 있었다.
디아나는 너무 보고 싶었다고 투정을 부리는 레귤러스를 보며 가벼운 웃음을 흘렸다.
“누가 보면 우리가 몇 년 만에 다시 만나는 줄 알겠어. 네가 북방을 다녀간 지 아직 일주일밖에 안 됐거든?”
그랬다.
다른 황실 식구들도 자주 북방으로 놀러오긴 했지만 레귤러스는 거의 북방에서 살다시피 했었다.
식물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나이가 들수록 식물과 약초학에 관심을 가졌고, 북방엔 새로운 약초와 식물들이 많았다.
그래서 추위가 심해지는 겨울을 빼고 북방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던 것이다.
“일주일이나 된 거지. 유네스, 나 없는 동안 잘 지냈어? 나 안 보고 싶었어?”
레귤러스는 디아나에게서 시선을 내려 유네스에게 다가갔다.
‘어쩐지 내가 보고 싶었던 게 아닌 거 같네.’
레귤러스는 시큰둥한 유네스의 목을 꼭 끌어안았다. 함께한 세월이 있어서인지 딱 몇 초만 참아 준 유네스가 이내 앞발로 레귤러스의 얼굴을 귀찮다는 듯 밀어냈다.
“냐--.”
“유네스는 어쩜 이렇게 발 냄새도 안 나니. 말랑한 발바닥까지 너무 완벽한 거 아니냐고.”
자신을 밀어내는데도 좋다고 실실 웃는 레귤러스를 보던 디아나는 어이가 없어 싱거운 웃음을 지었다.
‘가끔은 나보다 더 유네스를 좋아하는 거 같다니까.’
절레절레 고개를 내젓던 그때, 나직한 음성이 들려왔다.
“디아나.”
“아버지!”
디아나는 자신에게로 다가오는 대공을 향해 한달음에 달려가 안겼다.
일이 있어 대공이 먼저 수도로 올라가고 한 달 만에 다시 만나는 것이다.
9년간 거의 떨어져 본 적이 없었다. 어린 시절 함께하지 못했던 시간들을 채우듯 대공은 늘 디아나와 함께했다.
그리고 함께하는 시간들이 늘어나고 추억들이 생겨날수록 두 사람의 관계도 각별해졌다.
대공은 품에 꼭 안기는 디아나에게 미소를 지으며 다정히 등을 토닥여 주었다.
“오는 길은 힘들지 않았니.”
“네, 힘들 게 뭐가 있겠어요. 마법진을 타고 편하게 왔는걸요. 아버진 잘 지내셨어요?”
“난 잘 지냈단다. 그보다 살이 좀 빠진 거 같은데.”
대공이 미간을 좁히며 얼굴을 살피자 디아나는 슬금슬금 그의 품 안에서 벗어났다.
“하나도 안 빠졌어요. 아버지는 항상 저만 보면 살 빠졌다고 그러시잖아요. 그보다 계속 밖에 있기 그런데 우리 안으로 들어가요, 아버지.”
디아나는 미소를 지으며 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렸다. 살이 빠졌다는 이야기가 시작되면 그에 따른 걱정의 잔소리가 길어지기 때문이었다.
“아니, 그보다 한 달 동안 식사를…….”
“아버지, 저 먼저 들어갈게요.”
잔소리를 피해서 디아나가 도망치듯 저택 안으로 들어가자, 대공도 피식 웃음을 지으며 이내 디아나의 뒤를 따랐다.
“와, 이게 다 뭐야?”
과식했다 할 만큼 많이 먹은 아버지와의 늦은 점심 식사를 마치고 방으로 들어온 디아나는 방 안 가득한 선물들을 보며 눈을 크게 떴다.
“그야 당연히 디아나, 너의 성년식과 생일 파티를 축하하는 귀족들의 선물들이지.”
디아나를 따라 방으로 들어온 레귤러스가 말했다.
“이 많은 것들이 전부 다? 이번엔 너무 많은데…….”
북방에서 쭉 지내고 생일 파티도 가족끼리 보내긴 했었지만 자신의 생일 때마다 온 대륙 각지에서 수많은 선물들이 대공가로 도착했었다.
하나뿐인 대공녀에게 잘 보이고 싶은 귀족들은 많았으니까.
하지만 이번 선물은 여느 때보다 엄청났다.
드레스 룸은 물론이고 방 안에 쌓여 있는 선물들이 약간은 질려 보일 만큼 말이다.
“이번 생일은 더욱 특별해서 그래. 성년식이 열리는 데다 처음으로 파티를 크게 열잖아. 가디언의 선택을 받은 하나뿐인 대공녀의 성년식 파티. 이제 성인이 된 네가 대외활동을 시작한다는 뜻이기도 하니까. 그곳에 초대받고 싶은 귀족들이 얼마나 많았겠어. 초대받지 못한 귀족들이 너에게 인사라도 한번 전해 보려고 보낸 것들인 거지.”
“엄청나네.”
“이것도 많이 줄인 거예요.”
피비가 선물들을 정리하며 말했다.
“줄인 거라고?”
“네. 그래도 조금이라도 이름 있는 귀족들의 선물들만 추렸고 나머지는 저택 창고에 보관되어 있어요.”
피비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말했지만 디아나는 새삼 자신의 신분이 실감 났다.
황족, 그리고 가디언의 선택을 받은 대공녀.
북방에서 조용히 지내느라, 수도에서 사는 동안 자신이 얼마나 많은 관심을 받았었는지 잊어버리고 살았었다.
하지만 앞으론 상당히 바빠질 거 같은 예감이 들었다.
“대공녀님, 선물들은 풀어 보시겠어요? 아님 일단은 다른 방으로 옮겨 놓을까요?”
“다른 방으로 옮겨 줘. 지금은 피곤해서 안 볼래.”
“네, 근데 많이 피곤하세요? 피곤하시면 안 되는데…….”
피비가 눈썹을 모으며 난감하단 얼굴을 했다.
워프를 타고 온 여정이긴 했지만 먼 북방에서 수도까지 왔는데 안 피곤한 게 이상한 거 아닌가……?
“피비는 안 피곤해?”
“전 안 피곤해요! 아주 힘이 넘친답니다.”
“왜…… 힘이 넘쳐?”
피비는 왜인지 아주 밝은 얼굴로 디아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과하게 반짝이는 주홍빛 눈동자.
디아나는 그 눈빛의 의미를 알았다.
설마…….
“그야 당연히 대공녀님의 피팅을 볼 시간이니까요!”
등골을 서늘하게 만들었던 불길한 예감은 역시나 디아나를 피해 가지 않았다.
“피팅을…… 벌써 해……?”
드레스 피팅의 시간, 그것은 정말이지 나이를 아무리 먹어도 적응되지 않는 힘겨운 시간들이었다.
거기다 한 살 한 살 먹을수록 이상하게 피팅 시간도 길어져만 갔다.
어릴 적에 통했던 애교 섞인 투정도 이제 잘 통하지 않았다.
디아나의 눈빛은 떨렸지만 피비는 오히려 무슨 말이냐는 듯 눈을 크게 떴다.
“벌써라뇨, 바로 내일이 파티 날인걸요. 어후, 사실 피팅을 하려면 적어도 일주일 전엔 올라와서 드레스, 신발, 액세서리까지 전부 하나하나 맞춰 봐야 했는데 너무 늦게 올라와서 걱정이라고요.”
다 못 입어 보면 어쩌죠.
진심으로 슬프다는 듯 이어지는 마지막 말에 디아나는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다 못 입을 만큼의 옷들이 있단 말이었으니까.
“피비…… 그 옷들을 다 입어 볼 필요는…… 없지?”
“그러니까, 어서 서둘러야겠어요. 대공녀님, 제가 옷들 가지고 올라올 테니 조금만 기다리세요.”
피비는 디아나의 어색한 미소가 보이지 않는다는 듯 후다닥 방을 나갔다.
“이런.”
결국 피비를 막지 못한 디아나가 포기의 한숨을 내쉬자 유네스를 연신 쓰다듬고 있던 레귤러스가 웃으며 말했다.
“큭큭, 디아나, 힘내. 내가 옆에서 응원해 줄게.”
* * *
“디아나는 지금 뭘 하고 있지?”
잠시 바깥일을 보고 돌아온 대공은 집무실에 들어서자마자 집사에게 물었다.
“대공녀님께선 지금 내일 파티장에서 입으실 드레스 피팅을 하고 계십니다.”
“드레스 피팅이라.”
그는 디아나가 유난히 치장하는 것을 싫어한다는 걸 잘 누구보다 잘 알았다.
허례허식을 싫어하고 제복을 갖춰 입는 것조차 귀찮아하는 것이 바로 대공 자신이었으니까.
그 점은 디아나가 자신을 쏙 빼닮은 듯했다.
“지금쯤 죽상을 하고 있겠군.”
피비의 열의와 달리 울상을 하고 있을 디아나를 떠올린 대공은 피식, 싱거운 웃음을 흘렸다.
“그보다 전하, 로운 경께서 보내신 편지가 도착했습니다.”
“그래? 이리 다오.”
집무실 책상에 편히 앉아 있던 대공의 금빛 눈동자가 날카롭게 빛났다.
대공이 디아나와 북방의 영지로 내려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로운이 청했었다.
어둠의 정령을 쫓는 일을 맡게 해 달라고.
어둠의 정령의 힘이 약해져 도망쳤다고 했지만 마냥 가만히 두고 볼 수는 없었기에 긴 여정에 대비해 추격대를 꾸리려 했던 참이었다.
그리고 그중에 대공가의 기사단장인 로운은 포함되지 않았었다.
하지만 로운은 디아나에게 대공만큼이나 죄책감을 가지고 있었고 디아나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 싶다 말했었다.
그 마음을 모르지 않기에 대공은 로운을 필두로 추격대를 꾸려 지금껏 어둠의 정령을 쫓고 있었다.
잡을 듯 말 듯 아슬아슬한 순간 들이 있었지만 아직까지 어둠의 정령을 찾지는 못하고 있었다.
“흠.”
로운의 편지를 다 읽은 대공은 미간을 좁히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힘이 약해진 후 제국과는 점점 멀어지던 어둠의 흔적들이 방향을 틀었다는 내용이었기 때문이다.
바로 제국을 향해서.
고민이 깊은 얼굴로 원목 책상을 손끝으로 두드리던 대공은 이내 편지를 한쪽에 놓아두고 편지를 적어 내려갔다.
그리고 밀봉한 서신을 집사에게 내밀었다.
“로운에게 바로 답신을 보내거라.”
“네, 전하. 그리고 보셔야 할 서신이 더 있습니다.”
“봐야 할 서신?”
“네, 오도어 왕국에서 보낸 서신입니다.”
집사에게 서신을 전해 받은 대공은 편지 봉투에 찍힌 오도어 왕국의 인장을 보고 눈썹을 추켜세웠다.
딱히 읽어 보지 않아도 무슨 내용이 담겨 있을지 알 거 같았다.
평소 서신을 주고받은 적도 없는 왕국의 왕태자가 이 시점에 디아나가 아닌 자신에게 편지를 보낼 이유는 하나뿐일 테니까.
이맛살을 찡그리던 그는 이윽고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새하얀 편지봉투를 열었다.
마음 같아선 보지 않겠다고 가지고 돌아가라 하고 싶지만 디아나 때문에 그럴 수가 없었다.
“마음에 안 드는군.”
서신의 내용은 역시나 대공의 예상을 벗어나지 않았다.
바로 내일 열리는 디아나의 생일 파티에 참석하고 싶다며, 주최자인 대공에게 허락을 구하는 내용이었다.
카이루스 오도어.
오도어 왕국의 권력을 휘어잡으며 스스로 왕태자가 된 인물.
왕태자가 가지고 있는 신성력은 이미 현 왕을 넘어섰고, 검술 또한 매우 출중하다고 소문이 자자했다.
최근엔 타국과의 외교에서 엄청난 성과를 보여 더욱이 대륙에서 주목을 받게 된 차기 국왕이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하나뿐인 딸과 지속적으로 편지를 주고받고 있었다.
처음엔 그저 몇 번 주고받고 말 것이라 생각했기에 그리 관심 두지 않았지만 두 사람의 서신 왕래는 여전히 이어지고 있었다.
특히 디아나는 왕태자의 편지가 도착할 때마다 너무도 밝고 예쁜 미소를 지었다.
그 편지를 아주 많이 기다린 사람처럼.
그래서 더욱이 오도어 왕국의 왕태자가 마음에 안 들었다.
그의 본능적인 감이 카이루스가 디아나를 쉽게 포기할 거 같지 않다고 말하고 있었으니까.
“서신이 오늘 도착했다는 건 이미 제국에 와 있다는 것이겠지. 왕태자의 시종이 서신을 가져왔더냐?”
“네, 오도어 왕국의 시종이 직접 대공가를 방문했습니다. 수도의 고급 여관에 묵고 계신다 합니다.”
한 달 전쯤 미리 허락을 구하는 게 예의였지만 미리 말하면 자신이 허락해 주지 않을 것이란 걸 알기 때문이리라.
그러니 제국에 짐부터 풀고 파티 하루 전날 서신을 보낸 것이겠지.
이미 제국에 도착해 머물고 있다는 타국 왕태자의 방문을 거절한다면 왕태자를 박대했단 말이 나돌 수 있었다.
물론 대공은 그런 소문 따위 조금도 신경 쓰지 않지만 그게 디아나의 귀에 들어간다면 말이 달라진다.
편지를 받을 때마다 그리 기뻐하는데 자신이 그를 문전 박대한 것을 알면 실망하겠지.
그 어떤 이유에서라도 디아나가 시무룩해하는 것을 볼 순 없었다.
그의 하나뿐인 딸은 힘들었던 만큼 남들보다 몇 배로 행복해야 했으니까.
대공은 짧은 한숨과 함께 집사에게 명했다.
“시종에게 파티 초대장을 보내거라.”
“네, 전하.”
“내가 더 봐야 할 일이 있나?”
“아뇨, 없습니다.”
“그럼 오늘 다른 업무는 더 가져오지 말거라. 그리고 주방장에게 과일 디저트를 많이 준비하라 이르게.”
“네, 대공 전하.”
자리에서 일어난 대공은 한참 피비에게 시달리고 있을 디아나의 기분을 달래 주기 위해 집무실을 나섰다.
* * *
화창했던 햇살이 수그러들고 아름다운 노을이 하늘을 붉게 물들인 시각, 테라비타 제국 황성의 가장 큰 파티 홀에 불이 밝혀졌다.
장인이 직접 만든 커다란 샹들리에가 파티 홀의 천장에서 반짝반짝 빛이 나고 황족을 상징하는 샛노란 꽃이 크리스털 화병에 담겨 테이블의 중앙에 놓여 있었다.
은은한 향이 나는 초들이 불을 밝히고 있는 파티 홀은 황성 파티 역사에 기록될 만큼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와, 정말 엄청나네요.”
“황태자 저하의 성인식 때도 이렇게 화려하진 않았는데 말이에요.”
“굳이 황태자 저하의 성인식과 비교하지 않더라도 이만큼 큰 파티가 열린 적은 황제 폐하 재위 이래 이번이 처음인 거 같습니다.”
“맞아요, 황후 폐하의 검소함이야 워낙 유명하셔서 오리온 파티 홀은 잘 열지도 않으셨잖아요.”
“그만큼 황제 폐하와 황후 폐하께서 대공녀님을 아끼신다는 거겠죠.”
“특히 황후 폐하가 그렇게 아끼신다잖아요. 황녀를 그리 가지고 싶어 하셨는데 황자 저하만 둘이시니 대공녀님을 황녀처럼 아끼신데요.”
“그런 걸 다 떠나더라도 대공녀님께선 가디언의 선택을 받으신 분이 아닙니까, 당연히 황녀보다 더 귀한 대우를 받으셔야죠.”
파티장에 하나둘 도착한 귀족들은 삼삼오오 모이며 처음엔 파티 규모에 대한 감탄을, 그 뒤엔 자연스럽게 디아나에 대한 찬양을 이어 가고 있었다.
그렇게 귀족들의 이야기가 무르익기 시작할 때쯤 황후궁에선 디아나의 웃음소리가 연신 울려 퍼지고 있었다.
* * *
“큭, 간지러워, 유네스.”
디아나는 연신 손을 핥는 유네스의 미끄덩한 혀가 간지러워 웃음 지었다.
“오늘따라 애정 표현이 많은 걸 보니 유네스도 오늘 대공녀님이 눈부시게 아름답다는 걸 아나 봐요.”
디아나의 드레스 자락을 정리해 준 피비가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대공녀님, 치장 다 끝났습니다.”
유네스와 손장난을 치고 있던 디아나는 고개를 들었다.
거울을 바라보자 아름다운 여자가 한 명 서 있었다.
가슴께를 넘는 구불거리는 금빛 머리칼과 잘 어울리는 황금빛 드레스.
은은한 화장으로 선명해진 이목구비와 분홍빛 입술.
분명 자신이었지만 낯설 만큼 예쁜 모습에 디아나의 금빛 눈동자가 살짝 커졌다.
“와, 너무 마음에 들어. 내가 아닌 거 같을 정도야. 피비, 어떻게 이렇게 완벽하게 꾸밀 수 있지? 너무 대단하잖아!”
날이 갈수록 피비의 치장 실력은 일취월장하는 거 같았다.
아마 제국에서 가장 치장을 잘하는 사람이 아닐까.
디아나는 자신의 아름다움보다 이렇게 만들어 준 피비의 실력에 진심으로 감탄했다.
“아휴, 제가 뭘 한 게 있다고요. 다 대공녀님의 미모가 출중하신 거죠. 전 그냥 조금 도와드린 것뿐이에요.”
피비는 칭찬이 부끄러우면서도 기분 좋은지 미소 띤 얼굴로 손을 내저었다.
“조금 도와준 거라니. 피비는 최고의 실력을 가지고 있어. 거기다 내가 이렇게 예쁘게 클 수 있었던 것도 다 피비가 잘 보살펴 줬기 때문이잖아. 고마워.”
피비가 아니었다면 지금의 디아나도 없었을 것이다.
그만큼 피비는 디아나에게 키워 준 엄마 같은 사람이었다.
“그래서 오늘 피비에게 주고 싶은 게 있어.”
“네?”
디아나는 싱긋 웃으며 피비 몰래 가져온 것을 클러치 안에서 꺼냈다.
작은 상자를 내밀자 피비가 놀란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았다. 망설이는 피비에게 상자를 쥐여 주었다.
얼떨떨한 얼굴로 작은 상자를 연 피비는 곧 감탄사를 내뱉었다.
“예쁘지? 내가 직접 디자인한 팔찌야.”
피비의 탄생석이 박혀 있는 금으로 만든 팔찌는 디아나가 직접 디자인한 것이었다.
디아나는 떨리는 눈빛으로 팔찌를 보고 있는 피비에게 불쑥 자신의 팔목을 내밀었다.
“아직 놀라긴 일러. 이 팔찌는 무려 나와 같이 맞춘 커플 팔찌거든!”
“아…….”
디아나는 해사한 웃음을 지으며 미리 팔목에 차고 있던 팔찌를 흔들어 보였다.
“피비의 팔찌엔 내 이름을 새겼고 내 팔찌엔 피비의 이름을 새겼어.”
피비에게 어떤 선물을 줄까 계속 고민하던 디아나는 피비와 자신이 함께 나눈 것이 하나도 없다는 걸 깨달았다.
그래서 고민 끝에 제국에서 가장 유명한 보석 세공사에게 의뢰해 만든 것이었다.
피비의 호들갑스러운 반응을 기대하며 눈을 반짝이던 디아나는 왈칵 울음을 터뜨리는 피비의 모습에 놀라 눈을 크게 떴다.
“흑…….”
“피비, 갑자기 왜 울어. 어디 아픈 거야? 아님 선물이 마음에 안 들어?”
디아나가 안절부절못하자 얼른 눈물을 닦은 피비가 미소를 지었다.
“마음에 안 들다뇨. 제 평생 이렇게 귀한 선물은 꿈도 꿔 보지 못 했는걸요. 그저…… 모든 게 너무 벅차서…… 그 조그맣던 대공녀님이 이렇게 어여쁘게 자라시는 걸 옆에서 지켜볼 수 있었던 것만으로도 제겐 큰 행복이었는걸요. 근데 이렇게 미천한 저까지 챙겨 주시다니 어떻게 눈물이 나지 않겠어요.”
“미천하다니, 피비는 내게 소중한 가족인걸. 다신 그렇게 말하지 마.”
디아나의 심각한 표정을 본 피비가 귀엽다는 듯 가벼운 웃음을 지었다.
어느새 아름다운 여인이 된 디아나였지만 피비에겐 여전히 눈에 밟히는 작은 소녀였으니까.
“알겠어요, 대공녀님. 다신 그런 말 하지 않을게요. 그리고 귀한 선물 죽을 때까지 잘 간직할게요.”
“음, 팔찌 이리 줘 봐.”
디아나는 상자에서 팔찌를 꺼내 피비의 손목에 직접 걸어 주었다. 피비의 성격상 자신이 이렇게 해 주지 않으면 아무도 건드리지 못하는 보물 상자에 넣어 두기만 할 거니까.
“아니, 이 귀한 걸…….”
“귀한 것도 이렇게 예쁘게 차고 다녀야 빛나는 거 아니겠어? 그리고 나랑 함께 맞춘 거니까 당연히 피비도 차고 다녀야 해. 혹시라도 누가 피비 무시하면 이 팔찌 보여 줘. 내 이름이, 대공가의 성이 새겨진 팔찌니까 아무도 함부로 대하지 못할 거야.”
피비는 또 울 것 같은 눈을 하다 후, 심호흡을 했다.
“감사합니다. 절대 안 뺄게요. 진짜 절대로 안 뺄 거예요.”
피비는 소중하다는 듯 팔찌를 어루만지며 결심하듯 말했다.
“피비가 좋아하니까 나도 기분 좋다.”
정말로 피비가 행복해하니 자신도 행복했다.
“대공녀님…….”
“앞으로도 내 곁에 오래오래 있어 줘, 피비.”
디아나가 환한 미소를 그리자 또 울컥하는지 피비의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냐아--.”
“피비, 유네스도 위로하니까 울지 마.”
피비가 신경 쓰였는지 유네스가 그녀의 곁으로 다가가 허벅지에 머리를 비볐다.
“……안 울어요. 이렇게 좋은 날 왜 울겠어요.”
피비는 킁, 코를 먹으며 눈에 힘을 꾹 주었다.
울음을 참느라 이상해진 피비의 표정에 디아나가 즐거운 웃음을 터뜨린 그때,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황후 폐하이십니다.”
“디아나, 이제 파티장으로 가야 할 시간…… 어머나!”
방으로 들어온 황후는 말을 다 하지 못하며 눈을 크게 떴다. 감격스럽다는 듯 손으로 입술을 막았던 황후는 이윽고 탄성을 내뱉으며 말을 이었다.
“어쩜 이리도 아름다운 것인지! 디아나, 난 순간 네가 사람이 아니라 여신이라 착각했단다.”
“여신이라니. 과찬이세요, 큰어머니.”
디아나는 황후를 보며 빙그레 미소를 그렸다. 큰어머니란 호칭이 입에 붙은 만큼 황후도 디아나를 향해 친근한 웃음을 지었다.
“과찬이라니. 너도 알잖니, 내가 빈말 같은 거 하는 사람이 아니란걸. 난 예쁜 것은 예쁘다, 못난 것은 못났다 솔직하게 말한단다. 보아하니 오늘 너 때문에 제국의 영식들이 밤잠을 못 이룰 거 같구나.”
노골적인 말에 디아나의 볼이 부끄러움으로 붉어졌지만 황후는 그저 재밌다는 듯 웃고 있을 뿐이었다.
그 모습이 에키온의 장난기 가득한 모습과 꼭 닮아 있었다.
에키온 오라버니의 능글맞음은 당연히 황제 폐하를 닮은 것이라 생각했었는데 아니었다.
인자하고 고상하신 황후 폐하의 뒤엔 에키온의 능글맞음과 장난기가 숨어 있었다.
황후의 농담과 거침없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땐 많이 당황했지만 이젠 너무도 익숙해졌다.
“그보다 아까 이제 입장할 시간이라고 하셨죠?”
웃음을 멈춘 황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어머, 내 정신 좀 봐.”
황후는 문을 향해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디아나의 준비가 다 끝났으니 들어오세요, 대공.”
달칵 문이 열리고 검은 제복을 차려입은 대공이 모습을 드러냈다.
기사 제복이 아닌 금실이 수놓아진 황실 제복을 차려입은 대공은 나이가 무색할 만큼 멋있었다.
“아버지!”
디아나가 먼저 환한 미소를 지으며 부르자 대공의 걸음이 멈칫, 멈추었다.
살짝 떨리는 눈동자로 디아나를 응시하던 대공은 이내 매끄럽게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아름답구나, 디아나.”
담백한 말이었지만 그 속에 담긴 벅찬 감정들을 디아나는 느낄 수 있었다.
“아버지도 너무 멋있어요.”
디아나가 대공에게 다가가자 황후가 말했다.
“그럼 전 황제 폐하와 먼저 파티 홀로 가 있겠습니다. 디아나, 아버지의 에스코트 잘 받으며 오렴.”
찡긋, 디아나에게 눈웃음을 보인 황후가 먼저 방을 나갔다.
“저도 그럼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피비마저 나가고 방엔 대공과 디아나만이 남았다.
“아버지, 저희도 이제 그만 파티장으로 갈까요?”
“잠시, 너에게 줄 것이 있단다.”
“뭔데요?”
디아나는 대공을 보며 궁금하단 얼굴을 했다. 대공은 그런 디아나에게 옅은 미소를 지으며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자신과 똑같은 금빛 눈동자에 스미는 그리움이 보였다.
가끔씩 아버지가 자신을 이렇게 응시할 때, 어머니를 생각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말없이 기다려 주자 대공은 상의 안쪽 주머니에서 작은 상자를 꺼냈다. 작은 상자의 모양만 보아도 디아나는 그 안에 든 것이 목걸이란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늘 받았던 유명한 세공사가 만든 고가의 목걸이 상자라고 하기엔 상자는 손때가 묻어 낡은 상태였다.
디아나가 의아함을 느낀 그때 대공이 천천히 상자를 열었다.
“너의 엄마가 아꼈던, 늘 하고 다녔던 목걸이란다. 네가 성인이 되면 이 목걸이를 주고 싶었단다. 아리엘도 그걸 원했을 거 같아서 말이지.”
푸른 사파이어가 빛나는 목걸이는 아리엘이 그녀의 어머니에게서 받은 유품이었다.
- 나중에 내 아이가 성인이 되면 어머니가 그랬듯 이 목걸이를 물려주고 싶어요.
그에게 나직이 속삭였던 아리엘의 목소리가 귓가를 울리는 거 같았다.
함께 디아나의 성인식을 축하해 줄 수 있었더라면.
“아버지, 아버지가 해 주세요.”
과거의 잔영에 눈빛이 흐려지던 대공은 디아나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어서요, 아버지.”
디아나는 대공을 바라보며 어여쁘게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의 삶의 이유라 할 수 있는 디아나의 미소에 잠시나마 슬픔으로 얼룩졌던 가슴에 온기가 퍼졌다.
“그래.”
대공은 디아나의 목에 조심스럽게 목걸이를 걸어 주었다.
“어때요? 잘 어울려요?”
“잘 어울리는구나. 너무 완벽해서 걱정될 정도야.”
아버지라서가 아니라 객관적으로 보아도 디아나는 너무 아름다웠다.
어릴 때도 물론 남다르게 예쁘긴 했지만 많은 상황들이 안정되고 디아나의 웃음이 늘어날수록 얼굴이 활짝 폈다.
쓸데없는 것들이 꼬일까, 걱정될 만큼.
불쾌한 상상에 미간이 좁아지던 그때, 붉었던 하늘이 완전히 어두워졌다.
파티 홀로 가야 할 시간이었다.
“디아나.”
“네?”
“디아나 19번째 생일을 축하한다.”
아리엘의 몫까지 담아 그가 제일 먼저 축하를 말하고 싶었다.
나직이 말하며 다정한 미소를 그린 대공은 디아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럼, 이만 가 볼까.”
“네, 아버지.”
눈을 반달 모양으로 예쁘게 접은 디아나는 오늘의 주인공을 기다리고 있을 파티 홀을 향해 발을 내디뎠다.
“대공 전하와 대공녀님 입장하십니다!”
탕탕-!
지팡이가 대리석 바닥을 울리고 시종의 목소리가 파티 홀 안을 크게 울렸다.
삼삼오오 모여 웃음 짓던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문으로 향했다.
“와.”
“어머나.”
“정말…… 완벽해요…….”
홍해가 갈라지듯 스르르 사람들이 물러나고 그 사이를 대공과 디아나가 걸었다.
금장이 박힌 제복을 차려입은 대공은 과거 사교계 여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젊은 시절과 별반 달라진 게 없었다.
나이가 무색한 모습에 귀부인들은 물론이고 영애들의 눈빛도 흔들렸다.
하지만 그의 손을 꼭 잡고 걷는 대공녀에게 시선을 돌리는 순간 대공의 모습은 더 이상 생각할 수가 없었다.
화려한 샹들리에 불빛 아래 반짝이는 구불거리는 금빛 머리칼.
매끈한 이마와 그 아래로 그린 듯 수려한 이목구비, 반짝이는 황금빛 눈동자는 감탄을 넘어 경외가 느껴졌다.
스스로 빛을 내고 있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아름다운 디아나의 모습에 홀 안의 귀족들은 숨을 삼키며 눈을 크게 떴다.
쏟아지는 시선들에 더욱 허리를 꼿꼿하게 편 디아나는 아버지와 함께 단상에 올랐다.
디아나의 손을 꼭 잡은 대공이 먼저 입을 열었다.
“먼저 이렇게 좋은 날, 제 딸의 성인식을 축하해 주기 위해 모이신 손님들께 감사의 인사를 전합니다. 그리고 하나뿐인 내 딸 디아나, 성인이 된 것을 진심으로 축하한다.”
생일 축하에 이어 성년이 된 것도 그가 가장 먼저 축하의 말을 전했다.
매끄럽게 미소를 그리는 아버지를 바라보던 디아나는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사람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경외감이 느껴지는 시선들 속에 담긴 기대감이 고스란히 닿았다.
긴장감에 손끝이 살짝 떨렸다.
- 나의 선택을 받았다는 것은 마냥 행복한 일이 아니기에 항상 너에게 미안한 마음이 있단다. 디아나 네가 자라날수록 사람들이 너에게 기대하는 것들도 커질 테니까……. 하지만 언제나 당당해지렴. 넌 내가 아니더라도 충분히 고귀한 사람이니.
그때, 언젠가 가디언이 자신에게 해 준 말이 떠올랐다.
그러자 긴장됐던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았다. 거기다 고개를 돌리자 아무 걱정 말라는 듯 자신을 응시하는 아버지와 눈이 마주쳤다.
옅은 미소를 그린 디아나는 대공의 손을 놓고 한 걸음 앞으로 나갔다.
좌중을 둘러본 디아나는 천천히 분홍빛 입술을 열었다.
“저를 축하해 주기 위해 시간을 내 주신 귀빈 여러분들께 감사의 인사를 전하며 제 열아홉 번째 생일이자 성인식 파티를 마음껏 즐겨 주시면 좋겠습니다.”
디아나는 매끄럽게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아름다운 미소에 홀린 사람들이 작은 탄성을 내뱉은 그때, 단상으로 올라온 황제가 즐거운 웃음을 지으며 샴페인 잔을 높이 들었다.
“그럼 파티를 시작하지.”
은은한 현악기의 선율이 파티장에 흐르고 디아나를 바라보던 사람들의 시선이 흩어졌다.
샴페인을 단번에 들이킨 황제는 상기된 기분을 숨기지 못하며 디아나에게 말했다.
“디아나, 성인이 된 것을 축하한다. 네가 이렇게 예쁘게 자란 모습을 보니 내 정말 기쁘구나. 앞으로도 건강해야 한다.”
“감사합니다, 폐하.”
“그래, 그래. 내 오늘 너의 특별한 날이니 만큼 특별한 생일 선물을 준비했지. 시종장.”
황제의 부름에 시종장이 다가와 허리를 숙였다.
황제의 선물이란 말을 들은 귀족들의 시선도 이쪽을 향했다.
황제는 미소를 지으며 시종장에게 받은 하얀 봉투를 디아나에게 내밀었다.
“받거라. 케일트 산맥 광산의 소유권이다.”
“네?!”
“케일트 광산이라니!”
“케일트 산맥이라면……!”
경악한 디아나의 외침과 함께 귀족들이 크게 웅성거렸다.
황제가 디아나에게 선물한 케일트 산맥의 광산은 제국에서 세 번째로 큰 금 광산이었다.
매달 나오는 금의 양만 해도 소왕국의 한 달 예산일 만큼 그 가치가 어마어마했다.
한데 그 광산을 선물한다니.
디아나는 물론이고 파티장의 모두가 놀랄 수밖에 없었다.
“뭘 그리 놀라느냐. 넌 내 하나뿐인 조카이거늘 이 정도 선물은 당연한 것이지.”
모두가 놀란 와중 황제만이 즐겁다는 듯 호탕한 웃음을 터뜨렸다.
“폐하, 이것은 제게 너무 과분한…….”
“디아나, 괜찮으니 받으렴. 아마 이미 네 쪽으로 소유권 이전을 다 해 놓으셨을 테니까.”
안 받는다고 하면 아무나 가지라고 던져 버릴지도 모른다.
황제의 곁으로 다가온 황후가 디아나에게 작은 목소리로 덧붙이며 미소를 지었다.
그러곤 아무도 보지 못하게 황제의 옆구리를 세게 꼬집었다.
큰 선물을 줄 것이라 하긴 했지만 설마 케일트 광산을 줄 줄은 몰랐다. 물론 케일트 광산 따위 디아나에게 몇 번이고 줄 수 있지만 이렇게 깜짝 놀라게 한 것에 대한 응징이었다.
상의했더라면 자신이 주었을 텐데.
“윽.”
황제의 신음이 들렸지만 황후는 아무렇지 않은 척 부채를 펼치며 눈웃음을 지었다.
두 사람을 보던 디아나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봉투를 받아들었다.
“감사합니다, 폐하.”
“그래, 허허. 아마 이보다 더 귀한 선물은 오늘 없지 않겠느냐.”
아주 만족스럽다는 듯 호탕한 웃음을 지은 황제가 황후와 함께 귀족들의 인사를 받으러 가자 후작이 디아나에게로 다가왔다.
“할아버지!”
후작이 잠시 현자의 탑에 가 있어 석 달 만에 얼굴을 보는 것이었다.
반가움에 미소를 지으며 안겨 들자 후작의 행복한 웃음소리가 디아나의 귓가를 울렸다.
“보고 싶었어요, 할아버지.”
“나도 많이 보고 싶었단다, 디아나. 건강히 잘 지냈느냐.”
“네, 할아버지는요? 어디 아프신 곳 없으시죠?”
“걱정 말거라. 아직 한 십 년은 거뜬히 살 거 같으니.”
“십 년이라뇨, 오십 년은 더 사실 거예요! 그러니 너무 무리하지 마시고, 식사도 꼭 잘 챙기셔야 해요.”
“알겠다, 알겠어.”
클수록 아리엘을 똑 닮아 가는 디아나는 후작에게 잔소리가 늘어나고 있었다.
후작은 걱정 말라며 디아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리고 준비해 온 선물을 건넸다.
“생일 선물이란다, 디아나.”
후작의 선물은 책이었다.
가죽으로 만들어진 책 표지는 상당히 오래된 거 같았다.
‘무슨 책이지.’
디아나가 고개를 갸웃하던 그때, 레귤러스가 휘둥그레진 눈으로 다가왔다.
“헉, 이건 현자의 탑에서 보관되는 고대 서적인 거 같은데.”
“고대 서적?”
“네, 맞습니다, 황자 저하. 고대 왕국들의 역사를 기록해 놓은 서적입니다. 이번에 제가 탑의 수장님께 부탁해 얻은 것이지요. 대륙에 하나밖에 없는 책이란다. 디아나 넌 배우는 것을 좋아하니 내가 특별히 준비해 보았단다.”
“현자의 탑에서 절대 내주지 않았을 텐데 어떻게…….”
레귤러스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중얼거렸다.
당연히 현자의 탑에서 쉽게 내주지 않았었다. 책을 얻기 위해 3개월 동안 현자의 탑에서 했던 고생들이 후작의 눈앞을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던 때 디아나가 기쁨이 가득한 얼굴로 외쳤다.
“감사해요, 할아버지! 정말 정말 감사해요!”
무엇이든 배우는 것을 좋아하는 디아나에겐 정말이지 최고의 선물이었다.
광산을 받았을 때와는 비교도 안 되는 밝은 얼굴에 후작의 얼굴에도 부드러운 미소가 퍼졌다.
손녀딸이 이렇게 좋아하는데 그깟 고생쯤이야 백번이고 더 할 수 있었다.
“네가 좋다니, 나도 기쁘구나. 고대서적이 필요하면 언제든 말하거라.”
“네!”
“와, 디아나…… 완전 부럽다.”
레귤러스가 디아나의 품에 안긴 고대 서적을 보며 눈을 반짝이자 어느새 디아나의 곁으로 다가온 에키온이 옆구리를 푹 찔렀다.
“남의 선물 보고 침 흘리는 건 황자의 체통에 어긋난다.”
“누가 침을 흘렸다고. 형님이나 체통 지키세요, 요새 황궁에서 체통 없다 소리 듣는 분이 누군데.”
여전히 티격태격하는 형제였다.
에키온은 눈을 가늘게 뜬 레귤러스가 귀엽다는 듯 곱슬머리를 헝클었다.
“형님!”
불만 가득한 레귤러스의 외침을 무시하며 에키온은 디아나에게 한 걸음 다가갔다.
“디아나, 생일 축하해. 성년이 된 것도 축하하고 이건 내가 준비한 선물이야.”
에키온은 디아나에게 길쭉한 상자를 내밀었다.
디아나는 상자를 열자마자 보이는 영롱한 금빛에 눈을 크게 뜨며 탄성을 내뱉었다.
“와.”
“마력을 담은 금빛 다이아몬드야. 대륙에 단 하나밖에 없는, 연금술로 세공한 거야. 그걸로 너에게 어울리는 목걸이나 팔찌를 만들렴.”
디아나는 꼭 자신의 눈동자처럼 금빛으로 빛나는 보석을 홀린 듯이 바라보다 환한 미소를 그렸다.
“귀한 선물 감사해요, 황태자 전하.”
“뭐, 나름 회심의 선물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버지와 후작이 너무 큰 선물을 준비해 별로 귀한 거 같지도 않네.”
에키온은 아쉽다는 듯 입을 쩝 다셨다.
“아니에요, 진짜 너무 마음에 들어요. 이걸로 예쁜 목걸이를 만들고 싶어졌어요.”
“네가 마음에 든다니 다행…….”
“디아나, 내 선물도 있어.”
에키온이 디아나에게 미소를 지으려던 그때, 몸이 휙 밀려났다.
어느새 에키온만큼이나 넓어진 어깨로 형을 밀친 레귤러스가 준비한 선물을 주려던 찰나 파티장 입구에서 작은 소란이 일었다.
“뭐지? 누가 온 거 같은데.”
“파티에 초대된 사람들은 다 참석한 거 아니었어?”
“그러게요…….”
에키온과 레귤러스의 말에 디아나도 영문을 몰라 고개를 갸웃했다.
그때 시종이 급히 걸어와 대공에게 말을 전했다.
미간을 살짝 좁히던 대공이 무어라 말을 하고 시종이 다시 입구로 달려갔다.
그리고 이내 우렁찬 목소리가 홀 안을 울렸다.
“오도어 왕국의 카이루스 오도어 왕태자께서 도착하셨습니다!”
갑작스런 손님에 파티장이 크게 술렁거렸다.
“……카이루스……?”
디아나는 멍한 표정으로 그의 이름을 나직이 중얼거렸다.
자신이 제대로 들은 것이 맞는 건지 믿기지 않았다.
“뭐? 누가 와?”
“카이 형?”
그리고 그것은 에키온과 레귤러스도 마찬가지인 듯 놀란 얼굴로 파티장의 입구를 바라보았다.
모두가 혼란스러워하던 그때, 파티장으로 들어서는 장신의 남자가 시선을 사로잡았다.
화려한 파티장의 불빛을 모두 집어삼킬 거 같은 칠흑 같은 흑발, 조각을 빚은 듯한 수려한 얼굴.
신성왕국의 새햐얀 제복을 입은 카이루스는 홀 안 사람들의 시선을 단숨에 사로잡았다.
“……와…….”
그를 본 이름 모를 영애가 황홀한 얼굴로 감탄을 내뱉었다.
하지만 카이루스에겐 이름 모를 영애의 황홀함 따위 보이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오직 단상 위,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디아나만을 향했으니까.
대리석 바닥을 울리는 그의 구둣발 소리가 유난히도 크게 디아나의 귓가를 울렸다.
그가 파티장으로 들어선 그 순간부터 자신의 앞에서 발을 멈춘 지금까지 디아나는 눈도 깜박이지 않고 그를 응시했다.
그가 자신의 시야 안에 있다는 것이 믿기지가 않아서.
“대공녀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카이루스의 나직한 음성이 울렸다.
“……진짜였어.”
자신의 눈앞에 정말 카이루스가 서 있었다.
디아나가 낮게 중얼거리자 카이루스가 매끄럽게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수려한 그의 미소에 디아나의 심장이 크게 뛰었다. 어릴 적에도 항상 그의 미소에 심장이 반응하곤 했었다. 너무도 잘생겼으니까.
하지만 지금의 카이루스는 디아나의 심장이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더 멋있어졌다.
그래서인지 디아나는 두근거리다 못해 심장이 터질 듯 쿵쾅거렸다.
그의 흑빛 눈동자가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무어라 말을 꺼내야 하는데 너무 놀라서일까,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왜 이러지.’
디아나가 어쩔 줄 몰라 하는 자신의 반응에 당황하던 그때 대공의 목소리가 울렸다.
“늦으셨습니다, 왕태자님.”
가만히 뒤로 물러나 있던 대공이 디아나의 곁으로 섰다. 카이루스의 시선이 대공의 시선과 마주쳤다.
카이루스는 훤칠하다 못해 흠잡을 곳 없이 완벽했다. 그를 응시하는 대공의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
그 미묘한 반응을 본 카이루스는 시선을 낮추며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준비한 선물이 조금 늦게 완성되어 부득이하게 파티에 늦고 말았습니다. 실례를 범해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먼 오도어 왕국에서 이렇게 귀한 걸음을 해 주신 것만으로도 영광인 일이지요. 제 딸의 생일 파티에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왕태자님.”
언뜻 듣기엔 환영하는 듯했지만 대공의 얼굴을 가까이서 보는 사람들은 그게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말과 달리 대공의 얼굴은 북풍한설이 몰아치는 듯 차가웠기 때문에.
하지만 카이루스는 차가운 눈빛에도 유려한 미소를 지었다.
“환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대공 전하. 그리고 영애.”
대공의 눈썹이 더욱 매섭게 치켜진 그때 디아나가 입을 열었다.
“왕태자님…… 이렇게 저의 생일 파티에 귀한 걸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흠.”
불편한 심기가 가득한 짧은 숨을 내뱉은 대공은 뒤로 한 걸음 물러나 주었다. 마음 같아선 늦은 것을 핑계로 파티장에서 쫓아내고 싶었지만 오늘은 디아나의 생일 파티였다.
그리고 디아나는 카이루스의 등장에 몹시 감동한 듯했다.
왕태자가 들어온 순간부터 눈을 떼지 못했으니까.
대공이 비켜 주듯 몸을 물리자 카이루스가 디아나에게로 한 걸음 다가왔다.
“다른 사람도 아닌 대공녀의 성인식 파티가 아닙니까. 꼭 직접 와서 축하를 전하고 싶었습니다.”
편지로 카이루스와 수없이 많은 대화를 나누었지만 이렇게 목소리를 직접 듣는 것은 느낌이 달랐다.
반갑고 기쁘지만 모든 것이 어색하고 낯설었다.
수많은 편지를 나누며 꽤 많이 친해졌다고 생각했는데…….
그에게 보내는 편지를 쓸 때는 조금도 없었던 망설임이 자꾸만 들었다.
편지에 온다는 말이 없어서 온 것에 너무 놀랍다, 기쁘다 이런 말을 하면 되는 건데 자신을 바라보는 흑요석 같은 눈동자를 마주하자 입술이 쉬이 떨어지지 않는다.
“……다시 한번 감사합니다…… 왕태자님.”
결국 의례적인 인사를 하자 자신을 바라보는 카이루스의 입꼬리가 살짝 움찔했다.
하지만 곧 짙은 미소를 지었다.
“대공녀를 위해 특별히 준비한 선물이 있습니다. 부디 기쁜 마음으로 받아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카이루스는 디아나에게 금으로 만든 케이스를 내밀었다.
케이스부터 범상치 않은 선물에 주변의 모든 시선이 집중되는 것이 느껴졌다.
디아나는 조심스럽게 뚜껑을 열었다.
검은 흑요석이 정중앙에 박힌 팔찌는 엄청나게 아름답거나 화려하진 않았다.
황족에게 하는 선물이라고 하기엔 조금 약소해 보일 만큼 말이다.
하지만 디아나는 마음에 들었다.
팔찌에 박힌 흑요석은 꼭 카이루스의 영롱한 눈동자를 닮았기 때문에.
“……팔찌네요. 너무 마음에 들어요, 왕태자님.”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팔찌랍니다. 괜찮으시다면 제가 직접 채워 드려도 될까요?”
“네?”
“그 팔지의 특별함을 보여 드리고 싶어서요.”
‘특별함?’
디아나는 알 수 없는 웃음이 가득한 카이루스를 보다 곧 고개를 끄덕였다.
무엇이든 그가 자신에게 해를 가할 일은 없을 테니까.
다가오려는 대공에게 괜찮다고 작게 속삭인 디아나는 카이루스에게 팔을 내밀었다.
“네, 왕태자님.”
카이루스가 디아나의 팔목에 조심스럽게 팔찌를 채운 순간 하얀빛이 디아나의 몸을 휘감았다.
갑작스런 빛에 놀란 것도 잠시, 디아나는 온몸을 휘감는 따스한 온기에 몸이 편안해졌다.
마치 가디언의 힘과 비슷한 부드러운 온기는 디아나의 몸과 정신을 맑게 해 주었다.
“이건 설마…….”
정령술과 비슷한 성질을 지닌 힘이라면 하나뿐이었다.
“네, 신성력입니다. 저의 신성력을 담은 이 팔찌는 대공녀께서 위험에 처하시거나 몸이 좋지 않으실 때 힘이 발현되어 대공녀님을 지켜 줄 것입니다.”
신성력이 담긴 팔찌라니.
수많은 책을 읽고 많은 것을 배운 디아나였지만 마법의 술식이 아닌 힘의 원천을 어디에 담을 수 있다는 건 들어 본 적이 없었다.
이론적으로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지만 정령의 힘이나 신성력은 마력과 달리 생명력과도 관련이 있어서 무리하게 힘을 무언가에 담으려 하면 몸에 큰 타격이 가기 때문이었다.
좌중은 물론이고 디아나의 금안에도 경악이 스쳤다.
“마음에 안 드시나요?”
하지만 모두가 놀란 이 와중에도 카이루스는 태연한 미소를 그리며 디아나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마음에 안 들 리가요, 단지 너무 큰 선물인 데다…… 이걸 만드시느라 혹시 몸에 무리가 가신 것은 아닐지 걱정이 되어요.”
이걸 만드느라 몸에 무리가 가서 파티에도 시간을 맞추지 못했던 게 아닐까.
경악은 어느새 걱정으로 뒤바뀌었다.
“아닙니다. 신성력을 담는 것을 처음 해 봐서 조금 시간이 걸리긴 했지만 제 몸에 무리가 가는 일은 없었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렇게, 지금도 신성력은 넘치니까요.”
카이루스는 보란 듯이 손안에 하얀 구를 만들어 보였다.
그에 귀족들 사이에서 또 한 번 경악의 탄성이 흘러나왔다.
신성왕국의 초대 왕을 제외하고 신성력을 이토록 쉽게 다뤘다는 왕족은 여태까지 없었기 때문이다.
오도어 왕국의 왕태자가 범상치 않다는 소문을 실제로 확인한 귀족들 사이에서 웅성거림이 일었다.
말소리가 점점 커지는 것을 느낀 카이루스가 신성력을 거두었다. 신기하다는 듯 금안을 반짝이는 디아나에게 말을 꺼내려던 때 대공이 먼저 입을 열었다.
“선물 증정식은 이 정도면 된 거 같구나, 디아나. 파티가 끝날 때까지 선물만 받고 있을 순 없잖니.”
대공은 은근슬쩍 카이루스를 비스듬히 가리며 음악단을 향해 손짓했다.
은은한 선율이 왈츠 곡으로 바뀌자 가장 먼저 황제가 황후에게 춤을 청했다.
부채를 접은 황후는 매끄러운 미소를 지으며 황제의 손을 잡고 댄스 플로어로 향했다.
그들의 춤이 시작되자 웅성거리던 귀족들의 시선도 댄스 플로어를 향했다.
귀족들도 하나둘 파트너와 춤을 추기 시작하자 이를 바라보던 디아나는 훅 자신의 앞으로 내밀어지는 손에 시선을 들었다.
“디아나, 춤추자.”
손을 내밀고 싱글벙글 웃고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레귤러스였다.
이렇게 큰 파티는 처음이지만 소소하게 대공가에서 열린 생일 파티에서 레귤러스와 춤을 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하지만 오늘은…….
레귤러스에게 말을 꺼내려던 그때 불쑥 그녀의 앞으로 손이 더 늘어났다.
“오늘은 나와 첫 춤을 추는 게 어때, 디아나.”
“대공녀님과의 첫 춤을 출 수 있는 영광을 제게 주시겠습니까.”
에키온과 카이루스였다.
“카이루스, 좀 비키지. 네가 아직 여기 낄 만큼 디아나와 친하진 않은 거 같은데.”
눈썹을 치켜세운 에키온은 카이루스의 어깨를 슬쩍 밀었다.
“그건 대공녀께서 판단하시겠지.”
하지만 과거보다 훨씬 단단해진 카이루스는 에키온의 불만을 가볍게 웃어넘겼다.
안 본 사이에 몸을 얼마나 단련한 것인지 조금도 밀리지 않는 카이루스의 어깨에 에키온은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디아나, 나와 출 거지?”
물론 하나뿐인 사촌 동생과의 첫 춤을 포기한 건 아니었다.
“음, 거의 항상 나랑 췄는데. 형은 갑자기 왜 끼어들어.”
레귤러스가 덧붙이고,
“디아나.”
카이루스가 편지 속에서처럼 나직이 자신의 이름을 불렀다.
세 남자의 손을 가만히 보고 있던 디아나는 싱긋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그들의 기대 어린 눈빛을 외면하며 고개를 돌렸다.
“아버지, 오늘 첫 춤은 아버지와 추고 싶어요.”
디아나는 대공에게 손을 내밀었다.
춤을 추자고 할 줄은 몰랐는지 대공은 놀란 얼굴로 디아나를 바라보았다.
생일 때마다 파티를 열었지만 의외로 대공과 춤을 춘 적은 한 번밖에 없었다.
그래서 오늘은 특별한 생일이니만큼 첫 춤은 아버지와 추겠다고 이미 마음먹은 상태였다.
“음…… 싫으세요?”
상처받았다는 듯 눈꼬리를 살짝 내리자 대공이 바로 디아나의 손을 잡아 왔다.
“그럴 리가 있겠느냐. 단지.”
“단지요?”
잠시 말을 멈춘 그에게 되묻자 이윽고,
“너무 기뻐서 말이 나오지 않았단다.”
대공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서리고 디아나의 입가에도 행복한 미소가 만개했다.
“저도 기뻐요, 아버지.”
서로 손을 꼭 잡은 두 사람은 댄스 플로어로 향했다.
“음…… 숙부님은 이길 수가 없는 상대지.”
두 사람의 뒤로 에키온의 체념한 목소리와 카이루스의 아쉬움 가득한 작은 한숨만이 울려 퍼질 뿐이었다.
즐거웠던 아버지와의 왈츠가 끝나고 디아나는 대공과 멀어졌다.
대공은 황제에게로, 디아나는 자신들을 기다리고 있는 귀족들에게로 향했다.
대공이 곁에 있으면 든든하긴 하겠지만 이제 성인이었으니 언제까지 아버지의 보호를 받는 유약한 모습을 보일 순 없었다.
그리고 디아나에겐 아버지가 잠시 자리를 비우더라도 든든한 지원군이 되어 줄 에드윈이 있었다.
대공가 기사단의 부단장이자 검술 대회의 우승자.
그 타이틀 말고도 에드윈은 황제로부터 백작의 작위를 받았다.
몇 년 전 서부 몬스터 토벌에서 로운 대신 기사단을 이끈 에드윈이 큰 공을 세웠기 때문이다.
백작위를 받았기에 더 이상 대공가 밑에서 지내지 않아도 됐지만 에드윈은 스스로 대공가의 가신이 되길 청했다.
정확히는 대공녀의 가신으로.
“대공녀님, 저쪽으로 먼저 가시지요. 황제 폐하의 충신들입니다.”
대공이 멀어지자마자 디아나의 곁으로 다가온 에드윈이 낮게 중얼거렸다.
“에드윈, 오늘 멋있다.”
에드윈은 오늘 일이 있어 파티 전에 보지 못했었다. 항상 입는 대공가의 제복도 멋있지만 턱시도를 차려입은 모습도 멋있었다.
아버지도 그렇고 에드윈도 그렇고 나이가 빗겨 가는 외모이니까.
에드윈은 디아나를 보며 싱긋 미소를 지었다.
“대공녀님도 너무나 아름다우세요. 홀로 입장하실 때 눈을 뗄 수가 없었습니다.”
“고마워.”
“그럼 가실까요?”
디아나는 에드윈의 손을 잡았다. 그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귀족들에게 다가가자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귀족들이 몸을 돌렸다.
“대공녀님.”
디아나는 인자한 미소를 짓는 백발의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는 황제파 귀족들의 수장인 일레드 공작이었다.
테라비타 제국의 공신 가문으로 그 명맥이 황족만큼이나 오래된 명문가였다.
디아나는 일레드 공작에게 부드럽게 미소를 그렸다.
“일레드 공작님, 오늘 이렇게 제 성년식을 위해 자리를 빛내 주셔서 감사합니다.”
“자리를 빛내다니, 허허, 그리 좋게 말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이렇게 대공녀님의 성년식까지 볼 수 있어 오히려 영광입니다.”
공작이 너털웃음을 지으며 말하자 옆에 서 있던 푸른 머리칼의 남자가 입을 열었다.
“맞습니다. 가디언의 선택을 받으신 대공녀님의 성년식에 이리 초대받았다는 것이 영광 아니겠습니까.”
“네, 네. 가디언과 함께이신 대공녀님이 이리 성년이 되셨으니 앞으로 제국의 앞날에도 큰 영광이 찾아오지 않겠습니까. 대공녀님, 생일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루엔 후작과 바티움 백작이었다.
황제파 주요 인사들의 얼굴은 파티 전에 익혀 두었기에 그들이 누구인지 바로 알 수 있었다.
“감사합니다, 후작님, 백작님. 아, 백작님, 최근 동부 쪽이 시끄럽다고 들었는데 로투스 령은 괜찮은가요?”
바티움 백작은 동부의 국경을 수호하는 변경백이었다. 특히 동부는 호시탐탐 제국의 땅을 노리는 왕국과 밀접해 있어 작은 전투가 잦은 곳이었다.
그렇기에 바티움 백작가의 기사단은 대공가의 기사단만큼이나 강한 군사력을 가지고 있었다.
바티움 백작은 디아나의 걱정스런 물음에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대공녀님께서 동부의 국경선에 관심이 많으신 줄 몰랐습니다.”
“동부를 노리는 왕국들이 많지 않습니까. 그 어려운 전선을 바티움 백작께서 완벽히 지켜 주신다는 것을 익히 들어왔답니다. 아버지께서도 항상 동부의 로투스 령에 관심이 많으십니다. 언제든 로투스령의 영지민들이 힘들다면 북방에 도움을 요청해 주세요.”
“하하, 대공 전하께서도 동부에 관심을 기울여 주시고 계셨군요. 말씀만으로도 감사합니다.”
바티움 백작은 즐겁다는 듯 웃음을 지었다.
“대공녀님께서 영민하시다는 소문이 진짜였나 봅니다.”
“이러다 시아페 후작님처럼 현자의 탑에 최연소로 이름을 올리시는 것 아닙니까?”
“하하, 현자의 타이틀에 가디언님까지 함께라면 감히 어느 왕국에서 제국을 넘볼 수 있겠습니까. 모두가 고개를 숙일 것입니다.”
이어지는 귀족들의 말에 디아나는 옅은 미소를 그렸다.
“현자의 탑이라니, 그곳에 이름을 올리기엔 제가 아직 많이 부족하답니다. 과찬이세요.”
“아닙니다, 대공녀님이라면…….”
“현자의 탑이라니, 그곳이 뭐 흔한 아카데미도 아니고 이름을 올리는 것이 쉬운 일입니까. 대공녀님의 생일을 축하하는 기쁜 자리이기는 하나 다들 너무 사탕발림이 심하십니다.”
일레드 공작의 말을 끊으며 다가온 붉은 머리칼의 남자가 디아나를 보며 비틀린 미소를 지었다.
언뜻 보기엔 호의적으로 보이겠지만 디아나는 진저색 눈동자에 박힌 진득한 적의를 느낄 수 있었다.
적발에 진저색 머리칼.
디아나는 굳이 귀족들의 초상화를 떠올리지 않아도 그가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악투스 후작가.
차일러스 공작가가 망하고 귀족파의 수장이 된 가문이자 9년 전 어둠의 정령을 도왔던 그 어리석은 귀부인의 아버지 되는 사람이었다.
자신이 제대로 알아본 듯 악투스 후작의 뒤로 데이빗이 보였다.
어둠의 정령 사건이 있고 난 후 디아나는 데이빗과 꾸준히 연락하며 지냈다.
몇 번 북방의 영지로도 초대한 적이 있었다.
어둠의 정령과 엮였었다는 것이 무색하게 데이빗은 정말 너무 착했다.
그리고 자신과 똑같은 학대의 아픔을 가지고 있어 더욱 빠르게 친해지기도 했다.
하지만 그건 둘의 관계였을 뿐 가문의 이해관계는 달랐다.
난감함과 미안함이 가득한 얼굴을 하고 있는 데이빗에게 괜찮단 눈빛을 보낸 디아나는 악투스 후작을 바라보았다.
“악투스 후작님, 반갑습니다.”
“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대공녀님. 이렇게 성년의 날 파티에 절 초대해 주어 감사합니다. 한데 혹 방금 저의 이야기로 마음이 상하신 건 아니시겠지요? 전 그저 대공녀님께서 감언이설에 넘어가 판단력이 흐려지실까 저어되어 드린 말씀이었답니다.”
“그러셨군요.”
탁, 부채를 편 디아나는 입가를 살짝 가렸다.
우아하게 기분 나쁨을 티 내는 방법 중 하나였다.
대놓고 시비를 거는 그가 몹시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괜한 소란을 만들어 봤자 자신에게 이로울 것이 없었다.
어쨌든 오늘은 정식으로 귀족들 앞에 처음 서는 날이었으니까.
좋게 좋게 마무리하고 싶었다.
데이빗도 있었고.
하지만 후작은 작정을 하고 온 것인지 뱀 같은 적안을 번뜩이며 말을 멈추지 않았다.
“안 그래도 이미 가디언의 선택을 받았다고 제국이 소란스럽지 않습니까. 물론 가디언님의 선택을 받았다는 것은 영광스러운 일이나…… 어디 그 일이 마냥 행복한 일이겠습니까. 밝은 면이 있다면 어두운 면도 있는 법. 가디언님이 깨어나시고 결국 봉인되어 있던 어둠의 정령도 풀려나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아직까지 어둠의 정령을 찾지 못하고 있고요. 전 제국의 앞날이 마냥 영광스럽지 않은 거 같아 걱정이 많답니다. 어느 날 갑자기 어둠의 정령이 제국을 덮친다면…… 대공녀님께서 과연 제국을 구하실 수 있으실지…… 이미 한번 놓치신 적이…….”
“후작, 말조심하는 게 좋겠군.”
인자한 웃음을 띠고 있던 일레드 공작이 얼굴을 굳히며 말했다.
악투스 후작의 말에 주변의 분위기가 삽시간에 딱딱해졌다.
어둠의 정령.
그것은 제국의 금기어나 다름없는 것이었다.
좌중의 굳어 버린 얼굴을 둘러본 후작은 오히려 재밌다는 듯 짙은 비소를 머금었다.
“이런, 제가 너무 솔직한 이야기를 꺼냈나 봅니다. 전 그저 대공녀님께서 어둠의 정령을 잊지 마셨으면 하는 마음일 뿐이었답니다. 그래야 앞으로 제국에 어떠한 위험이 닥치더라도 가디언님의 힘으로 제국을 지켜 주시지 않겠습니까. 행복한 때일수록 경계를 늦추지 말아야 하니까요.”
이쪽을 주시하고 있던 대공이 다가오는 게 보였다.
대공의 서릿발 같은 얼굴은 당장 칼을 뽑을 거 같았다. 분명 이곳으로 와 악투스 후작을 마주한다면 사달이 나고 말 것이다.
디아나는 시선이 마주친 대공에게 오지 말라 고개를 살짝 내저었다.
마음에 안 든다는 듯 눈썹을 치켜세웠지만 대공은 그 자리에서 멈춰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탁.
디아나는 입가를 가리고 있던 부채를 접었다. 그리고 악투스 후작을 향해 입꼬리를 올렸다.
“네, 후작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어둠의 정령을 잊으면 안 되죠. 항상 어둠의 정령의 위험에 대하여 기억하고 있답니다. 9년 전 어둠의 정령과 직접 맞섰던 그 순간을 어찌 잊겠어요. 어둠의 정령은 물론이고 정령을 도왔던 어둠술사까지 전부 기억하고 있답니다. 후작께서도 기억하고 계시겠지요? 따님의 몸에 새겨진 어둠의 술식을 푸느라 마탑주님은 물론이고 가디언님까지 힘을 보태 드렸지 않습니까.”
자신을 공격하고 싶어 잊어먹은 것인지 모르겠지만 어둠의 정령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은 악투스 후작도 마찬가지였다.
바로 후작의 딸이 어둠의 정령을 도왔으니까.
“…….”
비소가 사라지고 돌처럼 굳은 악투스 후작을 보며 디아나는 사르르 눈웃음을 지었다.
“그러고 보니 귀부인께선 요즘 어찌 지내시는지 걱정입니다. 과거는 실수였다지만 또 안 좋은 일이 생긴다면 그땐…… 모든 것을 책임지셔야 할 테니까요. 하니 후작께서도 여유롭다 안심하시지 마시고 언제나 귀부인을 각별히 살펴봐 주세요.”
“……네, 그러겠습니다, 대공녀님. 그럼 전 이만.”
후작은 찬바람이 쌩 불 듯 빠르게 몸을 돌리며 멀어졌다. 꽤나 분통이 터지는 듯한 걸음걸이였다.
“대공녀님을 보니 앞으로도 황실은 굳건할 거 같아 마음이 놓입니다.”
“칭찬 감사합니다, 공작님.”
일레드 공작에게 미소를 지은 디아나는 이만 가 보겠단 인사와 함께 몸을 돌렸다.
다른 귀족들과도 인사를 나누고 귀부인들과도 짧게 말을 나눈 디아나는 조금 쉬고 싶었다.
“에드윈, 난 잠시 테라스에서 쉴게.”
“네, 대공녀님.”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테라스로 나온 디아나는 시원한 밤바람에 숨을 크게 들이켰다.
“아, 이제 좀 살 거 같네.”
“잠시 실례해도 될까요, 대공녀님.”
나직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밤하늘과 똑같은 검은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쳤다.
“왕태자님…….”
“잠시 들어가도 될까요?”
“네, 당연히 되죠.”
디아나는 카이루스에게 미소를 지었다.
파티장에서 그를 막 마주했을 땐 많이 놀라서 어쩔 줄을 몰랐지만 지금은 긴장이 풀려서인지 아까만큼 그가 낯설게 느껴지지 않았다.
디아나의 곁으로 다가온 카이루스는 황실의 정원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9년이나 흘렀지만 테라비타 황성은 여전히 아름답네요.”
“맞아요, 언제나 보아도 아름다워요.”
다른 왕국의 왕성들을 직접 본 건 아니었지만 테라비타 제국의 황성이 가장 아름답단 건 대륙에서 유명한 사실이었다.
괜히 자부심이 느껴져 미소를 짓자 카이루스가 피식, 가벼운 웃음을 지었다.
“대공녀님께선 아름다운 황성의 풍경보다 훨씬 더 예뻐지셨지만요.”
“아, 하하…… 감사해요, 왕자님.”
디아나는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예쁘단 말을 오늘 처음 들은 것도 아닌데 그 말이 왜 이렇게 낯뜨거운지 자꾸 볼에 열기가 스몄다.
밤바람이 시원하게 불어 그나마 다행이라 생각하며 디아나는 말했다.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오늘 이렇게 와 주셔서 감사해요. 전 항상 오던 편지가 늦어져 걱정만 하고 있었지 이렇게 직접 오실 줄은 정말 상상도 못 했거든요, 그래서 아까 많이 놀랐어요.”
“많이 놀란 게…… 기뻐서 놀라신 거겠죠? 혹시 반갑지 않은 손님이 와서 놀라신 거라면 지금이라도 바로 돌아갈게요.”
“반갑지 않다뇨! 당연히 기뻐서 놀란 거예요!”
디아나가 화들짝 반응하며 외치자 카이루스가 웃음을 터뜨렸다.
장난이었단 걸 눈치챈 디아나가 눈을 가늘게 떴다.
“농담이셨군요.”
“네, 대공녀님께서 절 너무 어색하게 대하는 거 같아서요. 얼굴을 보는 건 오랜만이긴 하지만 우리 계속 편지를 나누었잖아요. 그러니 편지 속에서처럼 절 편하게 대해 주시면 안 될까요?”
편지 속에서라면…….
디아나는 수려한 얼굴을 바라보며 입술을 달싹였다.
편지에선 수십 번 불렀던 호칭이 얼굴을 마주하니 쉽게 나오질 않았다.
금빛 눈동자에 어려움이 서리자 카이루스가 입을 열었다.
“불편하시다면 괜찮아요, 무리하지 마세요.”
“아니에요, 그냥 좀 어색해서 편히 부를게요, 카이루스.”
그동안 두 사람은 편지에서 서로의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카이루스가 자신보다 나이가 많았지만 오라버니란 호칭은 에키온이 생각난다며 거절했었다.
문득 그때의 편지 내용이 떠오른 디아나는 웃음 지었다.
“저도 편히 부를게요, 디아나.”
“네, 근데 왕국을 이렇게 비우셔도 되는 건가요? 국왕께서 허락을 해 주시던가요?”
카이루스가 부왕과 사이가 안 좋다는 것은 이미 타국에까지 유명했다.
스스로 권력을 모아 원래 있던 왕태자를 끌어내리고 그 자리에 오른 것이니까.
“괜찮습니다. 부왕께선 지금 저 말고도 꽤나 시끄러운 일들이 많거든요.”
방탕하게 살았던 대가를 치르는 것인지 부왕은 지금 왕후와 후궁들의 싸움에 정신이 없었다.
지금 상황으로 보자면 아마 재위 기간을 더 채우지 못하고 왕좌에서 내려오게 되지 않을까, 모두가 그리 생각하고 있었다.
물론 카이루스는 부왕이 허수아비 일지라도 좀 더 왕좌에 앉아 있길 원하지만 말이다.
“시끄러운 일들에 카이루스는 괜찮은 건가요?”
걱정스런 목소리에 상념을 치워 버린 카이루스는 디아나와 눈을 마주했다.
“괜찮습니다. 저완 별개의 일이니까요. 그보다 디아나…… 전부터 말하고 싶었던 게 있는데 들어줄 수 있을까요?”
“뭔데요?”
“우리 서로 이름도 허락했으니 말도 편하게 하는 게 어떨까요?”
“아…….”
뭔가 예상치 못한 부탁이었다.
“이름을 부르면서 격식을 갖춰 말하려니 뭔가 너무 어색해서요. 나만 그런가요?”
에키온, 레귤러스와도 비공식적인 자리에선 말을 편하게 하고 있었다.
사실 디아나도 편지를 쓰며 편하게 말하고 싶었던 적이 있었다. 격식을 차리려니 뭔가 전달하려는 의미가 딱딱하게 변한 적이 많았기 때문에.
“저도 좀 그렇긴 했어요. 그럼 우리 이제 말 편하게 해요, 카이루스.”
“그래, 디아나. 내가 먼저 해야 너도 편하게 말하겠지.”
카이루스는 디아나의 성격을 잘 알았다. 그가 먼저 말을 편히 하지 않으면 절대 말을 낮추지 않을 것이다.
떨어져 있던 시간을 보상하듯 더욱 빨리 디아나와 가까워지고 싶었기에 그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편히 말했다.
그러자 조금 놀란 것인지 디아나의 눈이 커졌다.
그 모습이 꼭 어릴 적 모습과 닮아 카이루스의 입꼬리가 절로 올라갔다.
자신을 보며 자연스럽게 웃는 그의 모습에 볼이 홧홧해졌다. 특히 움푹 파이는 매력적인 보조개가 디아나의 시선을 끌었다.
잘생겨서 그래.
어릴 적에도 그가 웃을 때면 잠시 멍해지곤 했으니까.
자기도 모르게 멍하니 그의 미소를 바라보고 있던 디아나는 붉어지는 볼을 들킬 거 같아 홱 고개를 돌렸다.
훤한 황성의 풍경을 보자 두근거리던 심장이 조금 가라앉았다.
디아나는 테라스 난간을 손으로 잡으며 그에게 물었다.
“그럼 한동안은 제국에 머무는 건가…….”
말을 편히 하는 것이 어색해 말끝이 이상하게 흐려진다. 끙, 소리를 내며 미간을 좁히자 카이루스가 픽, 웃음을 지었다.
그는 난간에 팔꿈치를 기대고 디아나를 바라보았다.
“어려우면 당장 하지 않아도 됩니다. 우리 말은 차차 편하게 하는 걸로 해요. 어차피 한동안은 제국에서 머물 테니까요.”
“하하, 아무래도 그래야 할 거 같네요. 근데 얼마나 있으…….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무심코 고개를 돌리던 디아나는 언제 온 것인지 바로 옆에 서 있는 카이루스를 보고 말을 멈추었다.
난간에 팔꿈치를 기대고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카이루스가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였다.
살랑, 밤바람이 그의 검은 머리칼을 흔드는 모습이 그림처럼 아름다워 디아나의 눈빛이 흔들렸다.
“디아나?”
카이루스는 말이 없어진 디아나를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냥…… 바람이 시원해서…… 그보다 언제까지 있으시는 거예요?”
“아마 건국제가 끝나는 날까진 있을 거 같습니다. 어차피 건국제에 초대받을 테니까요.”
테라비타 제국의 건국제.
매년 겨울에 열리는 건국제가 코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그럼 당분간 황성에서 지내시겠네요.”
“음. 에키온이 허락해 준다면요.”
“당연히 허락해 주시겠죠, 절친한 친우이시잖아요.”
디아나는 당연한 걸 왜 걱정하냔 눈빛이었지만 카이루스는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었다.
“디아나도 건국제에 참석하죠? 아님 북방으로 내려가나요?”
“아뇨, 이번 건국제엔 참석해요. 참석만 하는 게 아니라 건국제에서 가디언과 함께 정령술을 보이기로 했어요.”
“정령술을 보인다는 건…… 공식적으로 가디언의 선택을 받았다는 걸 발표하는 것이군요.”
“네. 어차피 이미 소문이 나기도 했고 몇몇 일부의 믿지 못하겠단 의심들도 잠재워야 하니까요.”
가디언의 선택을 받았지만 아직 한 번도 공식적으로 힘을 드러낸 적이 없었다.
워낙 북방의 영지에서 조용히 지내 왔기에 귀족파 일부에선 가디언의 선택을 받았다가 버려진 것이 아니냔 말도 안 되는 소문을 낸 적도 있었다.
황제 폐하의 분노로 순식간에 잠재워졌지만 그래도 아직 의심하는 자들이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이번 건국제에 제대로 보여 줄 생각이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그곳에서 힘을 보인다면 더 이상 뒷소문을 만들어 낼 수 없을 테니까.
“한 점의 거짓도 없으니 그들도 결국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겁니다. 디아나의 진짜 능력을요.”
카이루스의 검은 눈동자가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디아나를 응시했다. 난 너를 믿어 의심치 않는다는 듯한 눈빛에 디아나의 안정되었던 심장이 또 콩닥거렸다.
자꾸만 왜 이러는 거지.
차가운 밤바람도 자꾸만 달아오르는 볼의 열기를 더 이상 식히지 못했다.
오늘 성년식이라 평소보다 긴장해서 이러나.
디아나는 카이루스의 눈을 마주할 수가 없어 먼저 시선을 피했다.
헛기침을 한번 하며 목을 가다듬은 디아나는 난간을 꼭 쥐며 말했다.
“큼, 흠, 네. 그렇게 말해 줘서 감사해요, 카이루스.”
“혹시 추우신가요? 볼도 조금 붉어지신 거 같고…….”
아무래도 자신의 헛기침 소리를 오해한 듯했다.
하지만 지금은 들어가는 게 더 낫겠지.
디아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난간을 놓았다.
“그러게요, 밤바람이 꽤 차네요. 이만 들어가요.”
“네.”
카이루스가 에스코트하려는 듯 손을 내밀려 했지만 디아나는 못 본 척 후다닥 테라스를 먼저 빠져나갔다.
디아나가 나가자 카이루스는 쓸쓸해 보이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다 피식 가볍게 웃었다.
“귀여워.”
9년 만에 다시 만난 자신을 보고 아무런 감흥이 없으면 어쩌나, 혹 그사이에 소중한 사람이라도 생겼으면 어떡하나 밤잠을 설칠 만큼 불안했는데 다행히 디아나는 자신을 많이 신경 쓰는 듯했다.
“정말, 다행이야.”
카이루스는 짙은 미소를 지으며 테라스를 나갔다.
* * *
화기애애했던 성년식 파티가 끝나고 디아나는 대공과 함께 저택으로 돌아왔다.
피로를 풀기 위해 목욕을 하고 머리를 말린 디아나는 노곤함에 침대에 기대었다.
고롱고롱, 침대 옆 카펫 위에서 잠든 유네스의 소리가 편안하게 들려오고 촛불 하나 켜진 은은한 불빛 속에서 디아나는 만월이 밝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흠.”
그리고 그때, 고요한 방 안에 중후한 음성이 울려 퍼졌다.
“디아나.”
“가디언님.”
디아나는 모습을 드러낸 검은 매를 바라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오늘 수고했단다.”
파티장에서 모습을 드러내진 않았지만 디아나의 긴장과 떨림을 가디언은 전부 느끼고 있었다.
“가디언님이 해 주신 말 때문에 잘할 수 있었어요.”
“아니다. 나 때문이라 아니라 그저 네가 스스로 빛났을 뿐이야.”
“감사해요, 근데 갑자기 왜 모습을 드러내신 거예요?”
“오늘이 가기 전에 너에게 축하를 해 주고 싶어서.”
가디언은 날개를 펄럭였다.
그러자 방 안에 밤하늘의 별빛 같은 반짝임이 휘날렸다.
“와.”
반짝이는 별빛들이 자신을 향해 모여들었다. 마치 자신을 축복하는 것처럼 둥글게 도는 빛에 디아나는 탄성을 내뱉었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언제나 너와 함께하는 자연의 생명들이란다. 디아나, 늦었지만 성년이 된 것을 진심으로 축하한단다.”
가디언의 나직한 음성이 울린 순간 작은 빛들이 반짝이며 디아나를 둥글게 맴돌았다.
마치 자신을 축하해 주듯이.
“감사해요, 가디언님. 그리고 너희들도 고마워.”
꼭 살아 있는 듯한 빛을 손끝으로 톡 건들이자 작은 빛들이 방 안을 환히 비출 만큼 크게 빛을 발했다.
눈부신 불빛과 따스한 온기에 디아나는 환한 미소를 그렸다.
* * *
테라비타 제국의 서부 국경선인 펜타임 영지의 성문.
검은 로브를 입은 기사들이 말에서 내렸다. 그중에는 행복한 미소를 그린 사람도 있었고 제국의 향취를 깊이 들이마시는 사람도 있었다.
“얼마 만에 맡아 보는 고향의 냄새인지…… 흡, 하…….”
“그러게 말입니다.”
“5년 만에 돌아왔지 않습니까.”
영지민들은 이야기를 나누는 기사들을 힐끔거렸다.
범상치 않은 기사들의 등장에 영지민들의 시선이 쏠리자 검은 로브에 모자까지 눌러쓰고 있던 남자가 나직이 말했다.
“사람들의 시선이 너무 몰리니 이야기는 여관에 도착해서 하거라.”
“네, 단장님.”
낮은 음성에 군기가 바짝 들어간 기사들은 여관을 향해 단장을 따라 말을 움직였다.
딸랑, 여관의 문이 열리자 바쁘게 움직이던 주인장이 고개를 돌렸다.
“어서 오…… 세요…….”
밝은 얼굴로 인사를 하던 주인장은 들어오는 남자들의 모습을 보며 목소리가 점점 줄어들었다.
아무리 로브로 모습을 가렸다 해도 풍기는 풍채가 남달랐다.
사막 왕국으로 이어지는 국경선의 영지이기 때문에 타국의 사람들과 용병들이 많이 드나들었지만 이렇게 기사들은 잘 오지 않았다.
온다 해도 이렇게 허름한 여관엔 작은 상단의 기사들이나 작위만 있는 허울뿐인 기사들이 대부분이다.
언뜻 보면 오래 떠돈 여행객 같았지만 그들이 차고 있는 검집은 귀족들에게나 볼 법한 비싼 가죽이었고 분위기 자체가 남달랐다.
주인장은 더러운 행주를 앞주머니에 구겨 넣고 일행의 맨 앞에 선 남자에게 다가갔다.
“식사만 하시는 건가요? 아님 묵으시는 건가요?”
주인장이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말하자 로브 모자를 뒤집어쓰고 있던 남자가 모자를 벗었다.
타오를 듯한 적발을 뒤로 쓸어 넘긴 남자, 로운은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주인장을 바라보았다.
“하룻밤 묵을 것이네. 방 4개와 식사를 준비해 주게.”
“네, 식사는 방으로 배달이 안 되고 여기 식당에서만 가능한데 괜찮으시겠습니까?”
“괜찮네.”
“그럼 바로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주인장이 주방으로 후다닥 들어가자 로운은 기사들과 함께 외진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귀족 같은 분위기에 식당 안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었지만 기사들의 날카로운 눈빛에 곧 눈을 돌렸다.
“단장님, 이곳은 불편하실 텐데, 제가 식사가 나오면 방으로 올려다 드릴까요?”
“됐다. 전장의 폐허에 앉아 육포 먹던 생활도 있는데 멀쩡한 식당이 뭐가 불편해. 신경 쓰지 말고 먹어라. 어차피 내일 아침 날이 밝자마자 쉬지 않고 수도로 달릴 것이니까.”
“네.”
음식들이 나오고 말 없는 식사가 이어졌다.
제일 빠르게 식사를 마치고, 제국으로 방향을 튼 어둠의 정령이 어디로 숨어든 것일지 머릿속으로 생각하고 있던 로운은 순간 옆에서 들려오는 말소리에 눈썹을 꿈틀거렸다.
“아니, 글쎄 진짜라니까!”
“뭐가 진짜긴 진짜야. 아니 뭐 귀신에 홀렸어? 사람들이 갑자기 왜 없어져. 이상한 소리 하지 마. 그리고 사람들이 없어지면 영지가 시끄러울 텐데 얼마 전에 그곳 영주가 옷감 거래 새롭게 텄다던데? 영지가 시끄러우면 상단이랑 거래 틀 여력이 있겠어? 말이 안 되잖아.”
“그거야 그 영지의 영주가 돈에 눈먼 자니까 그런 거지. 거 예전에 영지에 가뭄이 심하게 들었을 때도 세금 안 낮춰서 말이 많았잖아. 영지민들 몇 명 없어지는 거? 그런 거에 눈 하나 깜짝할 사람 아니지.”
“그 아들은 멀쩡하다며. 아들이 영지 관리한다는 말 많더만.”
“아들이 멀쩡했지. 근데 내 듣기로 한 2년 전쯤 황실 행정부로 취직했다던데? 지금 영지엔 아들 없어.”
“허참…… 그럼 정말 영지에서 실종 사건이 계속 일어나고…….”
“그게 사실인가?”
대화를 나누고 있던 상인들은 갑자기 끼어드는 저음에 어깨를 움찔했다.
로운은 사람들이 없어진다는 말을 꺼낸 보랏빛 머리칼의 남자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네?”
“방금 영지에서 사람들이 없어진다는 말 사실이냐고 물었네. 거짓말을 하면 곤란해질 걸세.”
로운의 차가운 푸른 눈빛에 남자가 어깨를 바르르 떨었다.
거짓말을 하면 죽을지도 모른다.
남자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아…… 그게…… 사실입니다.”
“그곳이 어디지?”
“북방과 가까운 크리텐 영지입니다.”
“……크리텐 영지…….
로운은 검집을 세게 그러쥐었다.
* * *
“디아나, 이거 봤어?”
테라비타 제국의 황성, 황태자 궁.
에키온을 만나기 위해 궁에 들른 디아나는 레귤러스가 내미는 신문을 힐긋 보았다.
신문엔 자신에 대한 기사가 신문 1면을 장식하고 있었다.
어제 황후 폐하와 함께 보육원 행사를 다녀왔단 내용의 기사였다.
“별것도 아닌 걸 1면으로 냈네.”
“별게 아니긴! 지금 제국에선 네가 황제 폐하보다 더 유명해. 네가 뭘 먹었다, 뭘 입었다 난리잖아. 아마 네가 하루에 화장실을 몇 번 가는지에까지 관심 있을걸.”
“레귤러스.”
레귤러스의 거침없는 말에 디아나의 미간이 좁아졌다.
“미안, 내가 너무 솔직했지. 내 말은 하여튼 그만큼 지금 제국의 최대 관심사가 너란 거였어.”
“나도 알고는 있어.”
모를 수가 없었다. 성년식이 끝나자마자 제국의 있는 모든 신문사에서 자신에 대한 기사를 쏟아냈으니까.
거기다 파티가 끝난 지 삼 일이 훌쩍 넘었지만 아직도 그 열기가 식지 않은 듯했다.
성년식이 끝나고 황후 폐하와 함께 행사를 많이 다녔는데 가는 곳마다 기자들이 가득했다. 아마 건국제가 끝나면 더 심해질 것이다.
가디언까지 모습을 드러낸다면 모든 관심을 한 몸에 받을 것이다.
“하긴 매일매일 신문이 쏟아지는 데 모르는 게 이상하긴 하겠다. 그래도 다 우호적인 기사들이야.”
“뭐…… 폐하와 아버지가 수시로 신문사들을 검열하시니까.”
귀족들이 쓸데없는 헛소문을 내지 못하도록 황제와 대공이 신문사들을 압박하고 있단 걸 알고 있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찬양 가득한 기사들만 나올 리 없으니까.
디아나는 낯간지러운 단어들이 가득한 기사를 읽는 레귤러스에게서 신문을 빼앗았다.
“그만 봐, 별 영양가도 없는 내용인걸.”
“재밌잖아. 디아나 네 고운 심성이 동양에서 사막을 넘어 들어오는 비단보다 더 곱고 착하다는데 기분 좋지 않아?”
레귤러스가 즐겁다는 듯 큭큭거렸다.
“레귤러스, 자꾸 그러면 고대 서적 안 빌려줄 거야.”
할아버지에게 받은 고대 서적을 보고 싶어 발을 동동거리고 있는 레귤러스였다.
레귤러스는 단번에 웃음기를 지우며 말했다.
“내가 잘못했어. 아주 큰 실언을 한 거 같다.”
진지하게 사과하는 얼굴에서 간절함이 느껴졌다. 피식, 웃은 디아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내일 저택으로 와서 책 가져가.”
“오! 역시 너밖에 없어.”
“됐거든. 근데 너 안 바빠? 이렇게 나랑 있어도 돼?”
레귤러스의 집은 황성인데 요즘 대공가의 저택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지금도 저택에서 그와 함께 황궁으로 온 것이었다.
레귤러스는 회중시계를 확인하며 말했다.
“안 그래도 지금 가야 했어. 형 집무실까지 너 데려다주고 갈까 했는데 안 되겠다. 다 왔으니까 조심히 가.”
“내가 애니.”
머리를 쓰다듬는 그의 손을 밀어내며 눈을 가늘게 떴지만 고대 서적 때문에 기분이 좋은지 레귤러스는 싱글벙글 웃음을 지으며 떠났다.
“냐아-.”
레귤러스가 멀어지자 기다렸다는 듯 유네스가 디아나의 손에 머리를 비볐다.
레귤러스의 관심이 귀찮은 유네스는 요즘 그가 있을 땐 숨소리도 크게 내지 않고 있었다. 없는 척하기엔 상당히 컸지만 말이다.
디아나는 미소를 지으며 유네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네가 고생이 많다. 내가 레귤러스 보고 한동안 저택에 놀러 오지 말라고 할게.”
“냐-.”
만족스러운지 고로롱거리는 유네스의 모습에 피식 웃은 디아나는 거의 도착한 황태자 집무실을 향해 마저 걸어갔다.
“어…… 저 남잔…….”
집무실에 거의 다다랐을 때쯤 디아나는 문을 열고 나오는 짙은 푸른 머리칼의 남자를 보고 걸음을 멈추었다.
어릴 적 아버지와 북방 주변 영지를 시찰 나갔다 만난 적이 있던 남자였다.
크리텐 백작의 아들.
상당히 탐욕스러웠던 자신의 아버지에 비해 똑똑하고 착했던 소년이라 디아나의 기억에 남아 있었다.
영주의 아들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부자가 달랐기 때문이다.
‘전 언젠가 이 크리텐 영지를 나갈 거예요. 더 큰 곳으로 가서 더 큰 일을 하고 싶거든요. 아무도 넘보지 못할 그런…… 높은 자리에 올라보고 싶어요.’
문득 과거의 기억 하나가 떠올랐다.
어린 자신에게 소년이었던 남자가 했던 말.
‘영지를 떠날 거라더니……정말 떠났네. 황성에서 일하는 건가.’
“대공녀님, 황태자 저하께 아뢸까요?”
점처럼 작아지는 남자의 뒷모습을 보고 있던 그때 집무실의 문을 지키는 시종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응.”
“황태자 저하, 대공녀님께서 도착하셨습니다.”
“들여보내.”
더 이상 보이지 않는 남자에게 미련을 떨친 디아나는 시종이 열어 준 문 안으로 들어갔다.
“디아나, 어서 와.”
“제국의 두 번째 빛…….”
“됐어, 인사는 무슨.”
무릎을 살짝 굽히기도 전에 에키온이 손을 내밀었다.
“감사해요, 오라버니.”
격식을 차리길 원하지 않는 거 같아 편하게 부르며 에키온의 손을 잡은 디아나는 집무실에 있는 또 다른 사람을 보고 눈을 크게 떴다.
“카이루스…….”
“디아나.”
창가의 햇빛을 홀로 다 받는 것처럼 환한 미소를 지은 그가 디아나에게로 한 걸음 다가왔다.
“에키온을 만나러 온다는 소식을 듣고 기다리고 있었답니다.”
카이루스는 디아나에게 싱긋 미소를 지었다.
“왜 이곳…… 아, 건국제를 보시고 가신다고 했었죠.”
순간 그가 제국에서 건국제까지 지낸다 했던 말이 떠올랐다. 워낙 일이 많아 카이루스에 대해 까먹고 있었다. 미안해서 살짝 미소를 짓자 그가 괜찮다는 듯 미소를 보였다.
“카이루스는 건국제 끝날 때까지 황성에서 지내기로 했어. 근데 그보다 너희 둘 서로 이름 부른 거 맞지? 내가 잘못 들은 거 아니지?”
에키온이 두 사람 사이로 끼어들며 말했다.
디아나가 대답하기도 전에 카이루스가 에키온에게 말했다.
“이름만 부르는 거 아닌데. 차차 말도 편하게 하기로 했어.”
“뭐? 너랑 디아나가 왜 말을 편하게 하냐? 디아나, 얘랑 막 말 편하게 하고 이름 부르고 그러지 마.”
“왜요?”
디아나가 에키온을 향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어……?”
“왜 말을 편하게 하면 안 돼요? 카이루스는 오라버니랑도 오랜 친구 사이고 저랑도 오래 알고 지냈잖아요. 특별히 안 되는 이유라도 있는 건가요?”
“그게…….”
디아나는 정말 이해가 되지 않아 물었다. 다른 의도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 순수한 눈빛에 에키온의 얼굴에 당황이 서렸다.
“그러게, 뭐 특별한 이유라도 있는 거야, 에키온?”
카이루스가 재밌다는 표정으로 에키온을 응시했다.
카이루스가 디아나에게 사심이 있다는 걸 절대 제 입으로 말할 수 없는, 아니, 입에 담고 싶지도 않은 에키온이었다.
에키온은 여유로운 카이루스를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보다 디아나에게 어색한 미소를 그렸다.
“……안 되는 이유 같은 건 없지. 하하. 그냥…… 농담 삼아 해 본 말이었어.”
“아, 전 진짠 줄 알고 놀랐어요.”
디아나가 다행이라는 듯 싱긋 웃자 에키온이 자리를 권했다.
“그만 앉아서 이야기 나누자. 네가 좋아하는 차랑 쿠키 준비해 놨어.”
“네, 오라버니. 카이루스도 같이 먹어요.”
“네, 디아나.”
디아나가 소파로 향하고 에키온은 카이루스의 옆구리를 꼬집으려 손을 뻗었지만 보기 좋게 허탕을 쳤다.
“에키온, 애냐.”
“와, 저게.”
유유히 손을 피한 카이루스가 에키온에게 피식, 웃어 보이곤 먼저 디아나에게로 걸어갔다.
가자미눈으로 카이루스를 흘긴 에키온은 소파에 앉자마자 언제 그랬냐는 듯 표정을 환히 바꾸며 디아나에게 고개를 돌렸다.
“디아나, 어제 어머니와 함께 보육원 행사에 다녀왔다며. 힘들진 않았니?”
“전혀요, 아이들이 다 너무 예쁘고 착해서 자주 가야겠다고 생각했는걸요. 그래서 어제 제국 보육원들의 재정 상태나 지원 물품 자원들에 대한 조사를 아버지께 부탁드렸어요. 그리고 빈민가의 아이들도 보육원에서 후원을 받을 수 있도록 제도를 개선하는 게 좋을 거 같아 황후 폐하와 함께 보육원 후원 사업을 대대적으로 늘려 보려고요.”
“와, 어제 하루 봉사 나가서 거기까지 생각한 거야? 넌 정말 가끔 보면 머리가 엄청 좋다니까. 이러다 네가 나보다 일 더 잘하는 거 아냐? 나 황태자 자리에서 밀려나는 건가.”
에키온이 우스갯소리로 칭찬하자 디아나의 볼이 부끄러움으로 발그레 물들었다.
“아니에요, 이제 겨우 하나씩 배워가는 중인걸요. 오라버니에 비하면 너무 부족해요.”
“그거야 넌 이제 시작하는 거니까 당연히 서툴지. 차차 사교계도 적응되고 재정 관리에도 눈을 뜨면 나만큼, 아니, 나보다 더 뛰어날 거야. 디아나 넌 똑똑한 아이니까.”
“맞아요. 그리고 디아나는 이미 많은 능력을 가지고 있으니 에키온보다 절대 부족하지 않아요.
카이루스가 덧붙였다. 분명 디아나를 칭찬하는 말이었지만 왜인지 묘하게 기분이 나빴다. 에키온의 눈썹이 꿈틀거렸지만 디아나의 미소에 아무런 말을 할 수 없었다.
“두 분 다 감사해요.”
“당연한 말인데 뭘. 그보다 오늘 갑자기 무슨 일이야?”
“아, 건국제에 관한 일은 오라버니와 상의하면 된다고 아버지께서 말씀해 주셔서요. 건국제에서 제가 가디언의 힘을 보이기로 한 그 일 때문에 들렸어요.”
“아, 맞다. 건국제에서 가디언의 모습을 드러내기로 했었지. 내가 요즘 너무 정신이 없어서 미처 생각 못하고 있었네. 흠…… 정령술을 보여 줄 거지?”
“네, 물의 힘을 보여 주려 해요. 이때까지 물의 힘을 가진 황족이 없기도 했고 제가 제일 잘 다루는 힘이 물이라서요. 건국제 행사 당일 언제쯤이 좋을까요?”
“흠…… 황제 폐하의 축사가 끝나고 난 뒤가 좋겠어. 폐하께서 널 소개하고 네가 단상으로 올라가는 게 좋겠지. 내가 제대로 행사 일정이 나오면 너에게 보내 줄게. 그리고 네가 정령술을 편히 쓸 수 있도록 행사장의 건축도 손보고 말이야.”
건국제 당일 행사는 황성이 아니라 수도의 광장에서 열렸다. 물론 황성에서 파티가 열리긴 하지만 광장에서 황제가 축사를 말하고 불꽃을 터뜨리는 것이 건국제의 주요 행사였다.
귀족들뿐만 아니라 수많은 제국민들도 모이기에 기회 삼아 가디언의 힘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아무도 반박할 수 없을 테니까.
“그럼 전 일정 기다리고 있을게요.”
“그래. 건국제가 보름도 안 남았으니까 모레쯤 저택으로 보내 줄게. 점심 먹었니?”
“아뇨, 아직 안 먹었어요.”
“그럼 같이…….”
“황태자 전하, 재상께서 오셨습니다.”
에키온이 말을 꺼낸 그때 집무실 밖에서 시종의 목소리가 울렸다.
“아, 점심은 안 될 거 같네. 미안.”
“괜찮아요. 바쁘신 거 같으니 전 이만 일어나 볼게요.”
디아나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기다렸다는 듯 카이루스도 일어났다.
그러자 단번에 에키온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넌 왜 일어나?”
“재상과 이야기를 나누는데 나도 있으라고?”
너무도 당연한 말에 순간 할 말을 잃은 에키온이 반 박자 느리게 답했다.
“그건…… 안 되지.”
아무리 친구라 할지라도 국가의 중대사를 논하는 일에 타국의 왕태자를 둘 순 없었다.
하지만 카이루스가 디아나와 함께 나가는 것은 너무도 마음에 안 들었다.
9년 만에 돌아온 자신의 친우는 과거보다 훨씬 멋있어진 데다 이젠 서로 망설일 거 없는 성인이었으니까.
카이루스가 작정하고 꼬신다면 디아나도 넘어가리라.
벌써 서로 이름까지 부르는 사이였다.
하나뿐인 예쁜 사촌 동생의 곁에 누군가가 서 있는 것을 볼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은 에키온이 카이루스를 잡았다.
“근데 뭐 너라면 괜찮지 않을까 싶네? 넌 나의 하나뿐인 친우잖아.”
온 힘을 다해 손을 잡았지만 대체 검술 연습을 얼마나 한 것인지 돌처럼 단단한 카이루스의 손이 너무도 쉽게 에키온의 손을 떼어 냈다.
“친우이기 이전에 제가 타 왕국의 왕태자라서요. 이상한 말 하지 마시고 정무 보시죠, 황태자 전하.”
에키온의 어깨를 두어 번 두드린 카이루스는 무어라 살벌한 말을 중얼거리는 그의 입술을 모른 척 디아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디아나, 제가 에스코트해 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