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 * *
반달이 높게 뜬, 새벽 밤이 깊은 시각.
황제가 기거하는 본궁의 불은 꺼지지 않고 있었다.
“폐하, 진찰을 마쳤습니다.”
침음을 흘리며 미간을 좁히고 있던 후작은 황궁의에게 다가갔다.
“디아나는 괜찮은 것입니까?”
“네, 다행히 크게 부상을 입으신 곳은 없으십니다. 단지 심적으로 많이 놀란 상태라 안정이 필요합니다.”
다친 곳이 없다는 말에 후작은 그제야 숨을 똑바로 내쉬었다. 혹시라도 디아나가 잘못되었을까,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후작의 곁으로 다가온 황후가 황궁의에게 말했다.
“심신의 안정에 좋은 약을 가져오게.”
“네, 황후 폐하.”
황궁의가 나가고 후작은 침대에 누운 디아나에게 다가갔다. 후작은 눈물이 굳어 말라붙은 볼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얼마나 울었는지 디아나의 눈이 퉁퉁 부어 있었다. 그 모습이 후작의 마음을 아릿하게 만들었다.
“축제를 즐기러 나간 것인데 이런 일이 벌어질 줄은……. 이럴 줄 알았으면 디아나를 보내지 않았을 텐데……. 디아나를 잘 보살피겠다 해놓고 이리 만들어 미안합니다, 후작.”
황성에만 있으면 답답하니 축제를 즐기고 오라며 황궁에서 내보낸 사람은 다름 아닌 황후였다.
디아나가 이리 의식이 없는 것이 자신의 잘못 같아 죄책감을 지울 수 없었다.
“황후 폐하의 잘못이 아닙니다. 황후 폐하께서 디아나를 딸처럼 아끼신다는 걸 제가 어찌 모르겠습니까. 그리고 오늘 일은 우연이었고, 잘잘못을 따진다면 황후 폐하가 아닌 제 잘못이 더 큽니다.”
후작은 담담한 척 말했지만 의식이 없는 디아나의 모습에 속이 문드러졌다.
상대적으로 경비가 허술한 후작가보단 황성이 낫다고 생각했었다.
어둠의 정령이라 할지라도 수많은 마법진과 기사들이 지키고 있는 황성엔 침입하기 어려울 테니 말이다.
디아나가 황성에서 잘 적응하는 거 같아 안심하고 있었던 자신의 실책이었다.
어둠의 정령에 대해 황후는 몰랐다 하더라도 후작은 계속 쫓고 있었다.
어둠의 정령이 수도에 있을 수도 있단 가능성을 생각했음에도 디아나가 축제에 놀러간다 했을 때 가디언의 힘만 믿고 안일하게 대처하고 말았다.
호위 기사들을 더 늘리고 마법사들도 붙였더라면, 어쩌면 오늘 이런 사단도 어둠의 정령을 놓치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
물론 그의 가설일 뿐이지만.
그래도 그리되었다면 디아나도…… 대공도 무사했을 것이다.
아무리 아비가 싫다 해도 하나뿐인 혈육이었다. 디아나의 나이가 부모를 모를 만큼 어린 것도 아니었고 원망이란 감정도 결국은 애정이 있었기에 생긴 것이다.
“……황후 폐하, 혹 대공 전하에 관한 소식은 아직입니까?”
후작은 디아나의 소식을 듣자마자 황궁으로 달려와 줄곧 이 방 안에 있었다.
디아나의 상태를 살핀 황제는 곧장 대공가로 갔었다.
황제가 간 지도 시간이 꽤 흘렀으니 혹시나 소식이 들어온 것이 있나 물었지만 황후는 어두운 얼굴로 고개를 내저었다.
“아직 폐하께서 보내신 소식은 없습니다.”
“하아…… 그렇군요. 대공 전하께서 부디 무사하셔야 할 텐데…… 말입니다.”
대공의 상태를 직접 보진 못했지만 에드윈 경에게 말을 전해 들은 황제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방을 나갔었다.
분명 심각한 상태일 것이다.
“제가 사람을 보내 좀 알아보겠습니다. 후작께선 디아나의 곁을 지켜 주세요.”
“네, 부탁드리겠습니다.”
디아나를 걱정 어린 눈빛으로 보던 황후는 이윽고 방을 나갔다.
“아직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냐.”
황후는 방을 나오자마자 서 있는 에키온과 카이루스를 보고 눈을 크게 떴다.
디아나가 환궁했을 때부터 에키온과 카이루스가 보고 싶어 했지만 황후가 상황이 좋아지면 부르겠다고 기다리라 했었다.
한데 설마 새벽이 될 때까지 궁으로 돌아가지 않고 문밖에서 기다릴 줄은 몰랐다.
“디아나의 상태는 어떤가요, 어머니.”
“영애는 아직도 의식이 없나요?”
에키온은 그렇다 쳐도 카이루스의 불안한 눈빛은 의외였다. 황후는 답지 않게 초조한 카이루스를 놀란 눈빛으로 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의식은 없지만 괜찮다. 곧 회복할 것이야.”
“하아, 다행이네요.”
에키온은 안도한 듯 가슴을 쓸어내렸지만 카이루스는 디아나를 직접 보고 싶었다.
축제에서 갑자기 헤어지고 디아나가 어둠의 정령과 싸우고 있단 말을 들었을 때부터 그는 초조함과 불안함에 심장이 터질 거 같았다.
하지만 겁을 먹은 레귤러스를 혼자 환궁시킬 수 없어 어쩔 수 없이 궁으로 먼저 돌아온 것이었다.
황후 뒤의 굳게 닫힌 방문을 당장 열고 들어가고 싶었지만 그럴 만한 자격이 그에겐 없었다.
괜찮다고 했으니 곧 만날 수 있을 거야.
스스로의 마음을 진정시킨 카이루스는 황후를 바라보았다.
“황후 폐하, 나중에 영애께서 의식을 차리면 알려주실 수 있을까요?”
“……그래, 그러마, 카이루스. 하니 둘은 이만 궁으로 돌아가거라. 내 디아나가 의식을 찾으면 바로 궁으로 사람을 보낼 테니.”
“……네.”
“네, 황후 폐하.”
에키온과 카이루스는 아쉬움이 가득한 눈빛으로 문을 보다 이내 몸을 돌렸다.
계단을 내려가는 그들의 뒷모습을 옅은 미소를 그리며 바라보던 황후는 곧 굳은 얼굴로 시종에게 손짓했다.
“지금 대공가로 사람을 보내 대공 전하의 상태를 알아보거라.”
“네, 황후 폐하.”
* * *
대공가의 저택.
늦은 새벽, 저택의 하녀들은 분주히 침실을 왔다 갔다 하며 움직이고 있었다.
그들이 들고 나오는 은쟁반은 붉은 피가 묻은 천들로 가득했다.
황실에서 도착한 시종과 함께 대공의 침실 앞에 선 하녀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황제 폐하, 황성에서 시종이 도착했습니다.”
“들여라.”
황제는 방 안으로 들어온 시종에게 고개를 돌렸다.
“황후가 보낸 것이냐.”
“네, 폐하. 황후 폐하께서 대공 전하의 상태를 알려 달라 전하셨습니다.”
“흠…….”
황제는 깊은 침음을 흘리며 침대로 몸을 돌렸다. 황궁의는 물론이고 의원들이 셋이나 더 붙어 대공을 치료하고 있었다. 화살을 맞은 곳에서 출혈이 멈추지 않아 곤욕을 치렀다.
지금까지 출혈을 멈추게 하는 데 모든 치료를 집중했을 정도다.
대공이 흘린 피가 얼마나 많았는지 중간중간 포션을 억지로 먹어야 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과다출혈로 죽었을 테니까.
그렇게 어떻게 출혈은 잡았지만 아직 대공의 상태가 어떤지 황제도 알 수 없었다.
의원들이 그에게 아뢸 시간도 없는 듯 대공의 치료에만 전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분주한 뒷모습만 보아도 대공의 상태가 심각하단 것을 느낄 수 있기에 황제는 아무것도 묻지 않고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다.
황제는 시종에게 입을 열었다.
“그보다 디아나는 의식을 차렸느냐? 의원은 뭐라 했지?”
“영애께선 아직 의식은 없으십니다만 크게 놀란 것일 뿐 상처는 없다 하였습니다.”
“불행 중 다행이군.”
디아나라도 멀쩡하다는 말에 깊은 안도의 한숨을 내쉰 황제는 무어라 이야기를 나누듯 머리를 맞대는 의원들을 보았다.
“살 순 있겠나?”
황제는 의원들에게 다가가며 물었다. 냉정함을 가장하며 물었지만 그의 속은 말이 아니었다.
하나뿐인 동생이 자신보다 먼저 죽는 것은 상상하고 싶지 않은 일이었으니까.
황제는 고요히 눈을 감은 대공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촛불의 불빛이 아른거림에도 창백하게 질린 얼굴은 이미 죽은 사람의 것과 비슷했다.
참담함에 일그러지는 표정을 갈무리한 황제는 황궁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황궁의는 고개를 조아리며 답했다.
“다행히도 고비는 넘기셨습니다. 하니 생명엔 지장이 없으실 겁니다.”
“하아…….”
불안감으로 피가 차갑게 식었던 황제는 황궁의의 말에 팽팽했던 긴장의 줄이 탁 끊어지는 것 같았다.
급 밀려드는 피로함에 얼굴을 쓸어내린 그때 황궁의가 다시 입을 열었다.
“하나 폐하, 생명엔 지장이 없으시나…… 현재로선 의식을 언제 차리실 수 있을지, 그리고 후유증이 없다곤 장담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뭐? 그게 무슨 말이냐, 하면 살아는 있어도 의식이 영영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단 것이냐?”
잠시나마 안도했던 황제는 다시 얼굴을 굳혔다.
“최악의 경우엔 그럴 수도 있으나…… 그런 일이 없도록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단지 빠르게 의식을 되찾으시는 것은 힘들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알겠다. 최선을 다하도록 해라. 무슨 일이 있어도 멀쩡한 모습으로 의식을 찾아야 한다.”
“네, 폐하.”
의원들이 다시 대공을 둘러싸고 황제는 시종을 향해 다가갔다.
“돌아가서 황후에게 대공은 고비는 넘겼지만 아직 의식은 없다고 전해라. 난 내일 날이 밝으면 돌아가겠다고 하고.”
“네, 알겠습니다, 폐하.”
예를 올린 시종은 곧 문을 나갔다. 그리고 곧장 대공가의 기사단장인 로운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제국의 하나뿐인 빛이신 황제 폐하를 뵙니다.”
“일어나. 추격은 어찌 되었느냐.”
로운은 황제의 명령으로 어둠의 정령의 뒤를 쫓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디아나가 황궁에 도착했을 당시 잠시 모습을 드러낸 가디언이 벌어졌던 일련의 상황을 황제에게 말해 주었었다.
어둠의 정령의 힘이 생각보다 더 약해져 있었단 말을 들은 황제는 곧장 로운을 선두로 기사들을 붙여 수색을 맡겼다.
가디언은 어둠의 정령이 이미 숨어 못 찾을 것이라 했었지만 일말의 가능성을 가지고 말이다.
그리고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대공과 디아나를 저리 만든 것에 대한 분노가 잠재워지지 않을 거 같았다.
하지만 역시 가디언의 말이 맞았는지 로운은 어두운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빈민가는 물론이고 그 주변, 그리고 수도 외곽까지 샅샅이 뒤졌지만 어둠의 정령을 찾을 순 없었습니다. 아마 이미 은밀한 곳에 몸을 숨긴 듯합니다.”
“분홍 머리칼을 가진 남자아이라 했었던가.”
“네, 빈민가의 아이가 본 귀공자와 대공녀님께서 보시고 따라가셨다는 귀공자가 동일한 분홍 머리칼을 가지고 있다 했습니다. 에드윈 경의 도움으로 공자의 초상화를 그리고 있습니다. 초상화를 가지고 데이빗이란 귀공자를 수소문할 계획입니다. 이름과 얼굴을 아니 빠르게 찾을 수 있을 겁니다.”
분홍 머리칼의 소년.
대공과 디아나 모두 보았던 그 소년이 지금으로선 어둠의 정령과 연결 지을 수 있는 유일한 실마리였다.
“일단 조심스럽게 알아보거라. 지금으로선 심증만 있을 뿐 물증이 없는 상황이니까. 함부로 움직였다간 일이 커질 수 있다. 가문을 찾고 조용히 급습해라. 아무도 모르게.”
“네, 폐하.”
로운은 고개를 들고 침대에 누운 대공을 바라보았다. 단 한 번도 이렇게 침상에 의식을 잃고 누워 있는 대공을 본 적이 없었다.
로운은 주군을 이리 만든 어둠의 정령에 대한 분노가 치밀어 오름과 동시에 디아나가 걱정되었다.
대공이 쓰러지는 것을 보았으니 많이 놀랐을 것이다.
디아나가 또래 아이답지 않게 어른스럽다는 것은 알지만 그렇다고 아이가 아닌 것은 아니었다.
로운은 황제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폐하, 대공녀님은…… 괜찮으십니까?”
“크게 놀라긴 했지만 몸에 이상은 없다 하더군. 하지만 마음이 쉬이 진정되진 않겠지…….”
“…….”
황제는 로운만큼이나 어두운 얼굴로 대공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러니 크로우드…… 네가 빨리 일어나야 한다.”
황제는 부디 대공이 듣길 바라며 간절한 마음으로 말했다.
* * *
‘이곳에서 폭죽을 보는 게 제일 절경이다.’
나직한 목소리와 함께 곧 대공은 자신을 나무 의자 위에 앉혀 주었다. 딱딱한 얼굴과 달리 다정한 손길이었다. 이윽고 하늘에 화려한 폭죽들이 터지고 디아나는 눈을 반짝이며 감탄을 내뱉었다.
밤하늘을 수놓는 폭죽을 보다 고개를 돌린 순간 대공과 눈이 마주쳤다.
[디아나. 전부 괜찮을 것이다.]
대공은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부드럽게 미소를 그렸다.
“……이건 진짜가…… 아냐…….”
디아나는 대공과 처음 폭죽을 보았던 축제 날 밤을 하나도 빠짐없이 기억하고 있다.
그날 대공은 자신에게 이렇게 다정한 미소를 보여 준 적 없었다.
[왜 그러니.]
행복한 미소를 그리고 있는 대공의 얼굴을 보자 디아나는 지금 이 순간이 진짜가 아니란 걸 알았다.
모든 게 다 완벽한데 너무 슬퍼서 눈물이 났다.
눈물을 흘리는 자신에게 대공이 손을 뻗은 순간 디아나는 눈을 꼭 감았다.
그리고 눈가를 닦아 주는 손길을 느꼈다.
“디아나, 정신이 드느냐.”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중후한 음성은 할아버지의 목소리였다.
“……할아버지…….”
디아나는 느리게 눈을 깜박이며 잠에서 완전히 깨어났다. 그리고 벌떡 상체를 일으켰다.
“디아나, 왜 그러느냐. 악몽이라도 꾼 것…….”
“할아버지, 대공 전하는 어떻게 되셨어요? 무사하신 거예요? 지금 어디에 계세요?”
디아나는 걱정 가득한 할아버지의 말을 끊으며 다급히 물었다.
“진정하거라, 대공 전하께선 무사하시단다.”
“정말요? 그럼 제가 지금 만날 수 있는 건가요? 만나고 싶어요, 정말 괜찮으신지 직접 보고 싶어요.”
꿈속에서 보았던 행복한 미소를 그리던 모습과 달리 디아나가 마지막으로 본 건 죽을 거 같았던 창백한 모습이었다.
대공이 흘리던 피가 아직도 눈에 선명했다.
대공의 멀쩡한 모습을 직접 봐야 불안이 사라질 거 같았다.
후작은 디아나의 흔들리는 눈빛을 보며 난감한 얼굴을 했다.
“디아나, 대공 전하께선 무사하지만 지금 만나는 것은 조금 힘들단다. 나중에 만나는 것이 어떻겠니?”
“왜요? 무사하신데 왜 못 만나나요?”
무사하단 게 거짓말일까.
디아나의 눈빛에 의심이 스치자 후작이 바로 답했다.
“생명에 지장은 없으시지만 아직 의식이 돌아오지 않으셨단다. 하지만 정말 몸은 괜찮다고 했으니 걱정 말거라. 곧 의식을 차리시면 예전과 똑같은 모습으로 널 보러 올게다.”
후작은 디아나가 조금이라도 진정할 수 있게 아무렇지 않은 척 미소를 지었다.
디아나는 잠시 고민하듯 미간을 좁히다 창밖의 밝은 하늘을 보곤 다시 입술을 열었다.
“의식이…… 아직 없으셔도 보러 가면 안 될까요?”
의식이 없다고 해도 디아나는 대공을 보고 싶었다. 마지막 모습이 자꾸만 떠올라 조금이라도 괜찮아진 모습을 봐야 마음이 놓일 거 같았다.
후작은 잠시 망설이다 곧 고개를 끄덕였다.
대공이 의식이 없으니 안 보여 주는 게 낫다고 생각했지만 지금 디아나의 모습을 보니 숨기는 것이 더 불안한 듯했다.
“네가 보고 싶다면 당연히 가도 된단다. 마차를 준비하라고 하마. 함께 가자구나.”
후작은 디아나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안심하라는 듯 미소를 지었다.
* * *
이른 아침, 대공가의 저택.
후작가의 마차가 저택의 정문을 들어섰다.
마차의 문이 열리자 후작은 디아나를 안고 마차에서 내렸다.
“전 정말 괜찮은데…….”
황성을 나올 때부터 후작은 디아나를 안고 다녔다. 디아나는 괜찮다고 했지만 아침도 먹지 않고 움직여 쓰러질까 걱정된다고 후작은 디아나의 발이 땅에 닿게 하질 않았다.
“일어나자마자 바로 온 것이니 괜히 무리하지 않는 게 좋단다.”
그의 단호한 얼굴에 디아나는 포기하며 몸을 편안히 기댔다. 등을 토닥여 준 후작은 미리 연락을 받고 마중 나와 있는 황제에게로 걸어갔다.
“제국의 하나뿐인 빛이신…….”
“인사는 되었네, 후작. 그보다 디아나, 몸은 괜찮은 것이냐. 이리 움직이다 몸이 상할까 걱정이구나.”
후작이 디아나를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디아나는 황제를 올려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전 괜찮아요, 폐하. 대공 전하……는 아직도 의식이 없으신가요?”
황제는 곤란한 낯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일어나지 못했단다. 하지만 곧 일어날 거란다. 네가 혹 더 놀랄까 보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만나고 싶니?”
“네, 전 괜찮아요. 못 만나는 게 더 불안한걸요.”
후작과 무언의 눈빛을 교환한 황제는 이내 미소를 지으며 디아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알겠다. 그럼 함께 대공을 보러 가자꾸나.”
디아나는 황제의 손을 잡고 꽤 오랜만에 대공저로 들어섰다.
* * *
달칵, 문을 열고 들어간 대공의 침실은 무거운 고요함이 내려앉아 있었다. 그 속에서 들리는 규칙적인 숨소리가 아니었다면 텅 빈 방이라 생각될 정도였다.
침대로 걸어가던 디아나는 코끝을 자극하는 향기에 고개를 갸웃했다.
“향초를 피운 건가요?”
언젠가 황후의 침실에서 맡은 것과 비슷한 향이었다.
“진정과 숙면에 좋은 향초란다. 깊이 숙면을 취해야 몸이 빨리 낫는 법이거든.”
황제의 답을 들은 디아나는 침대 맡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혹시나, 자신이 들어왔을 땐 이미 의식을 차리지 않았을까 했지만 대공은 평온한 얼굴로 눈을 감고 있었다.
그래도 마지막으로 본 피투성이의 모습은 아니었다. 다시는 눈을 뜨지 않을 거 같던 창백한 얼굴도 아니었다. 그저 깊은 잠을 자는 듯한 모습이었다.
“디아나, 대공은 정말 괜찮단다. 오래 자고 나면 전보다 더 건강해진 모습으로 일어날 것이다.”
디아나가 대공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자 혹 아픈 아버지의 모습에 겁을 먹은 것일까 걱정된 황제가 말했다.
하지만 디아나는 겁을 먹은 게 아니었다. 오히려 말끔해진 대공의 모습을 보자 불안했던 마음이 차츰 가라앉았다.
“……화살을 엄청 많이 맞았는데…… 그건 이제 정말 다 괜찮은 건가요? 이렇게 잠들어 있으면 하나도 안 아픈 건가요?”
어젯밤의 기억이 떠오른 디아나는 황제에게 고개를 돌렸다. 화살을 얼마나 맞았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대신 맞았다는 건 확실히 알았다.
등에서 피가 계속 흘렀으니까.
상처에 대한 고통이 얼마나 큰지 디아나는 누구보다 잘 알았기에 잠들어 있어도 아픈 게 아닐까 걱정되었다.
다른 아이들과 달리 아플까 걱정하는 모습에 멈칫했지만 황제는 빠르게 표정을 갈무리하며 말했다.
“그래, 이렇게 잠들어 있으면 하나도 안 아프단다. 그리고 그 상처들도 이제 말끔히 없어질 것이야.”
“다행이에요.”
디아나는 그제야 옅은 미소를 지었다. 디아나가 괜찮은 듯 보이자 황제와 후작도 안도감을 느꼈다.
방 안으로 들어왔을 때부터 혹시라도 디아나가 더 충격을 받을까 노심초사했었다.
후작은 디아나의 곁으로 다가왔다.
“디아나, 대공 전하께서 무사하신 것을 보았으니 이제 그만 돌아가는 것이 어떠니? 가서 아침도 먹고……또 피비와 유네스도 널 기다리고 있을 거란다.”
후작의 말에도 디아나는 무언가를 깊이 고민하는 얼굴로 대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황제와 후작은 그런 디아나를 가만히 기다려 주었다.
한참이나 가만히 있던 디아나는 마침내 느리게 입술을 뗐다.
“저…… 대공 전하가 깨어날 때까지 여기에 있고 싶어요.”
“뭐?”
“대공저에 말이냐?”
예상치 못한 반응에 황제와 후작이 놀란 눈빛으로 디아나를 내려다보았다.
“네, 이곳에 있고 싶어요. 그래도 될까요?”
디아나를 물끄러미 보던 후작은 몸을 낮추었다. 디아나와 시선을 마주한 그는 상냥한 목소리로 말했다.
“디아나, 혹 대공 전하가 너 때문에 다쳤다고 생각해 이러는 것이라면 그러지 않아도 된단다. 무리하게 이곳에 있지 않아도 돼. 대공 전하께서도 네가 죄책감을 가지는 걸 원하진 않을 거란다.”
“그래, 맞다. 지금처럼 황성에서 레귤러스와 놀고 편히 지내도 된다. 아까도 말했지만 대공은 곧 아무렇지 않게 일어날 테니 말이야.”
황제가 이곳엔 별일 없다는 듯이 호쾌하게 웃으며 덧붙였다.
“그치만, 황성으로 돌아가도…… 대공 전하가 보고 싶을 거 같아서, 이곳에 있고 싶어요. 이곳에서 머물면 보고 싶을 때마다 볼 수 있잖아요. 지금 가도 분명 또 오고 싶을 거예요.”
자신을 구하려다 다친 대공에게 마음이 무거워진 것도 있었지만 축제 날 때도, 황성에 지낼 때도 문득문득 대공이 떠올랐었다.
분명 그가 원망스러운 마음은 여전했는데도 말이다.
그랬는데 지금은 대공이 이렇게 아파서 누워 있으니 황성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여전히 대공이 불편하고 미웠지만 좋았던 기억들도 있었다.
이렇게 혼란스런 마음은 아직 디아나에겐 너무도 어려운 마음이었다.
그래서 그냥 지금 당장 생각나는 대로, 하고 싶은 대로 하려 했다.
“피비와 유네스도 함께 있을 거고 전 여기 있어도 괜찮아요.”
디아나는 망설이는 듯한 황제와 후작에게 씩씩하게 말했다. 하지만 영 마음이 놓이지 않는지 두 사람은 미간을 좁혔다.
디아나를 한 번, 대공을 한 번 바라본 황제가 결론을 내린 듯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래도 아직 대공도 의식이 없는데 널 이곳에 혼자 두는 것이 마음에 걸린단다. 음…… 그럼 후작 그대가 같이 머무는 것이 어떻겠는가. 그대가 있으면 디아나도 편할 테고, 나도 마음이 놓일 거 같군.”
“전 좋아요!”
디아나의 말에 후작은 결국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손을 먼저 잡아 오는 디아나를 보며 후작은 미소를 지었다.
“그래, 알겠다. 그럼 제가 한동안 디아나와 함께 이곳에서 지내겠습니다.”
“그러게나. 그럼 황궁으로 사람을 보내 디아나의 하녀와 유네스를 데리고 와야겠군.”
“에드윈도요.”
“아, 에드윈 경은 대공저에 있단다. 지금 아마 로운 경과 함께 소년……아니, 잠시 일을 보고 있을 것이다.”
황제는 황급히 말을 바꾸었지만 디아나는 소년이란 분명히 들었다.
에드윈과 소년이라면 어젯밤에 본 분홍 머리의 소년이 분명할 것이다.
“데이빗, 그 소년을 찾은 건가요? 혹시 그 소년이랑 세이아…… 아니, 어둠의 정령이랑 연관이 있는 건가요? 그 소년은 무사한가요?”
디아나의 물음에 황제의 표정이 어색해졌다. 아니라고 말하려 했지만 어른의 말을 잘 믿는 레귤러스와 달리 디아나는 믿을 거 같지 않았다.
“폐하, 솔직히 말해 주셔도 될 것입니다. 어차피 늦게라도 결국 디아나가 알게 될 일들이지 않습니까.”
후작의 말에 황제는 한숨을 삼키며 솔직히 말했다.
“그래, 알겠네. 디아나 너의 우려대로 데이빗이란 소년은 어둠의 정령과 연관이 있었다. 최근에 빈민가에서 사람들이 사라졌는데 그 일을 어둠의 정령의 명령으로 데이빗이란 소년이 도운 듯하더구나. 그 소년의 엄마가 어둠술사였고…… 그들의 말론 강제적으로 돕게 된 것이라 하여…… 일단은 조사 중에 있단다.”
엄마가 어둠술사…….
디아나는 데이빗을 날카롭게 부르던 여자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얼굴은 보지 못했지만 레아와 비슷한 느낌이었다.
“데이빗은 어떻게 되는 건가요? 벌을 받나요? 전 데이빗이 원해서 그런 일을 하게 됐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분명 억지로 어쩔 수 없이 하게 됐을 거예요.”
딱 두 번, 그것도 아주 잠깐 동안 마주친 것이지만 디아나는 왜인지 데이빗에게 동질감이 들었다.
“나 역시 데이빗이 나쁜 마음으로 어둠의 정령을 도왔다고 생각하지 않는단다. 데이빗이 다치는 일은 없을 테니 걱정 말려무나.”
디아나를 보는 황제의 눈빛엔 데이빗을 향한 의심 같은 건 없었다. 디아나는 황제가 데이빗을 벌주지 않을 거란 걸 믿을 수 있었다.
나중에 조사가 다 끝났다고 하면 데이빗을 만나 봐야지.
디아나는 데이빗만큼이나 중요한 어둠의 정령에 대해 물었다.
“아, 어둠의 정령은 어떻게 됐어요? 찾았나요?”
“아니, 데이빗의 가문인 갈레노스 백작가를 샅샅이 뒤졌지만 어둠의 정령은 찾을 수 없었단다. 마탑주까지 가서 확인했지만 흔적을 찾을 수 없었지. 아마 너의 공격에 꽤 큰 데미지를 입고 어딘가 숨은 듯하구나.”
“……그렇군요.”
자신을 향해 번뜩이던 붉은 눈동자.
어둠의 정령은 세이아와 닮았지만 더 무자비하고 잔인했다. 아무렇지 않게 사람의 목을 조르고 무언가를 죽이는 것에 망설임이 없었다.
그건 더 이상 세이아가 아니었다.
그리고 그 무자비함을 이기려면 디아나 역시 더 강해져야 할 것이다.
“디아나, 이제 그만 쉬는 것이 어떻겠니. 잠도 얼마 못 자고 식사도 하지 않았잖니.”
어둠의 정령에 대한 생각에 빠져 있던 디아나는 후작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그러고 보니 계속 대공의 방 안이었다. 이곳에서 계속 있을 순 없었다.
“전에 제가 쓰던 방을 쓰고 싶은데…….”
“잠시만 기다리거라, 집사를 부르마.”
황제는 침대 옆에 있는 설렁줄을 잡아당겼다. 곧 문을 열리고 한 푸른 머리칼의 남자가 들어왔다.
“부르셨습니까, 폐하.”
“디아나와 후작이 당분간 저택에서 지낼 것이다. 디아나가 전에 쓰던 방과 후작이 지낼 방을 준비하도록 해라.”
황제의 명을 받드는 남자를 본 디아나가 의아한 얼굴을 했다.
“집사……?”
분명 대공가의 총집사 복장을 입고 있었지만 디아나가 알던 총집사와 다른 사람이었다.
머리 색도 달랐고 무엇보다 얼굴이 훨씬 젊었다.
고개를 든 총집사가 디아나를 향해 인사를 올렸다.
“처음 뵙겠습니다, 대공녀님. 대공저에서 새로이 일하게 된 아모스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아모스가 정중하게 예를 갖추었다.
전의 집사의 불편한 눈빛과 달리 군더더기 없는 태도.
그랬기에 편했지만 의아하기도 했다.
근데 언제 바뀐 거지.
디아나가 당황하던 때 황제가 입을 열었다.
“디아나, 네가 후작가로 가고 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대공 저택의 사용인들이 전부 바뀌었단다. 모두 심사숙고해 대공이 직접 뽑은 자들이니 혹여 널 불편하게 하는 이들은 없을 것이다.”
저택의 사용인들이 전부 바뀌었다는 말에 디아나는 놀란 눈빛으로 누워 있는 대공을 바라보았다.
대공녀란 게 밝혀지고 자신을 보는 저택 사용인들의 시선이 불편했었다. 대공 저택을 나가고 싶던 이유 중에 하나가 사용인들 때문일 정도였다.
근데 다 바뀌었다니.
대공이 그런 부분을 알고 있을 거라곤 생각 못했었다. 물론 너무 늦게 바뀌긴 했지만 그래도 놀랍고 기분이 이상했다.
“디아나, 이만 올라가서 쉬는 게 좋겠구나. 아침도 먹고. 벌써 시간이 정오야.”
고요히 눈을 감은 대공을 빤히 보던 디아나는 후작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네, 그럴게요.”
디아나는 후작이 걱정이 많은 거 같아 그만 대공에게서 시선을 거두었다.
괜찮다는 듯 미소를 지은 디아나가 집사를 따라 나가고 방문이 닫히자 후작은 누워 있는 대공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정말 괜찮은 겁니까?”
후작의 물음에 황제의 평온하던 얼굴에 근심이 가득해졌다.
“고비는 넘겼다고 했지만 의식을 언제 찾을지는 모르겠다고 하더군.”
황제의 말에 후작은 깊은 한숨을 삼켰다.
황후에게 대충 전해 들어 대공의 상태가 좋지 않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직접 보니 마음이 무거워졌다.
황제는 쯧, 혀를 차며 후작에게 말했다.
“그보다…… 디아나가 이곳에서 지낸다니 마음이 안 놓이는군. 크로우드가 빨리 의식을 회복하지 않으면 디아나가 불안해할까 걱정이야.”
디아나의 마음이 너무도 확고해 어쩔 수 없이 대공가에 머무르라 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대공의 상태에 대해 의심을 할 거 같았다.
디아나는 또래 아이들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똑똑하고 눈치 빠른 아이였으니까.
“언제쯤 일어날 수 있을지 전혀 짐작할 수 없습니까?”
“지금으로선 그런 거 같네, 물론 크로우드가 내일이라도 당장 눈을 뜬다면 모두가 행복하겠지만 의식을 찾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린다면…… 디아나를 계속 대공가에 둘 순 없어.”
“네, 그렇겠지요. 하지만 당분간은 디아나가 대공가를 떠나려 하지 않을 겁니다. 순한 아이이긴 하지만 자기주장은 확고한 아이니까요.”
“그럼 일단 상태를 보고 좋지 않다 싶으면 어떤 핑계라도 만들어 후작가로 데려가든 황성으로 데려오든 하지.”
“네, 제가 이곳에서 머물며 디아나가 상처받지 않도록 잘 보살피겠습니다.”
후작의 말에 조금은 안심이 된 듯 황제의 주름진 미간이 펴졌다. 황제는 대공에게 다가갔다.
“크로우드, 디아나가 널 기다리고 있다. 그러니 빨리 일어나거라. 또 한 번 디아나를 기다리게 해서 되겠느냐.”
잠든 대공에게 나직이 속삭인 그는 이내 몸을 돌렸다.
“후작, 그럼 난 그대를 믿고 이만 환궁하겠네. 혹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연락을 주게.”
“네, 폐하.”
황제는 피곤한 한숨을 삼키며 밤새 지켰던 대공의 방을 나갔다.
* * *
“……그대로네.”
자신이 지냈던 방문을 연 디아나는 익숙한 방 안을 둘러보았다. 대공가를 떠났던 날과 하나도 달라진 것이 없는 거 같아 작게 중얼거리자 따라온 집사가 말했다.
“대공 전하께서 물건 위치 하나도 바꾸지 말라 명하셨습니다.”
꼭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던 거 같은 방 안의 풍경에 기분이 좋은 듯, 좋지 않은 듯 이상했다.
“아침 식사는 방으로 준비해 드릴까요, 대공녀님?”
“아…… 대공녀…….”
대공녀라 부르지 말라고 하려던 디아나는 말을 멈추었다. 대공 저택에서 지낼 때만 해도 사용인들이 부르는 대공녀란 호칭이 몹시도 거북했었는데 이상하게 지금은 그리 거북하진 않았다.
조금 어색한 정도였다.
사람이 달라져서 그런 걸까.
대공 전하가 깨어날 때까지 머물러야 할 텐데…… 서로 불편하면 좀 그렇겠지.
거기다 눈앞의 집사는 어릴 적 디아나를 무시했던, 경멸 어린 눈빛으로 봤던 사람이 아니다.
죄책감도 꺼림칙함도 없이 순수한 호의만 느껴지는, 피비와 닮은 눈빛에 디아나의 마음도 한결 편해졌다.
“혹, 불편하신 점이 있으신가요?”
디아나가 아무런 말이 없자 기분이 상한 것일까 걱정된 건지 집사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디아나는 총집사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아냐, 아무것도. 식사는 방으로 가져다줘.”
“네, 바로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예를 갖춘 집사가 방을 나가자 디아나는 방 안을 둘러보다 소파에 앉았다.
그 순간 기다렸다는 듯 가디언이 모습을 드러냈다.
“가디언님!”
“디아나, 이제 좀 괜찮은 것이냐.”
디아나의 마음이 불안정해 가디언의 상태도 불안정해져 모습을 감추고 있었다. 걱정이 된 가디언은 디아나의 마음이 조금 진정된 것을 느끼자마자 모습을 드러냈다.
“전 이제 괜찮아요. 대공 전하께서 무사하신 걸 봤으니까요.”
“그자가 너의 아버지인 것이지?”
대공이 에이루스의 후손인 것은 바로 느낄 수 있었지만 아무리 가디언이라 해도 후손들의 자세한 관계까진 바로 알 수 없었다.
디아나가 대공을 아버지라 부르지 않았지만 아이가 느끼던 감정과 기억들을 생각해 보면 아버지가 맞는 듯했다.
“……네, 맞아요.”
가디언은 디아나의 기억들을 모두 보았다. 그렇기에 고귀한 아이가 슬프게도 너무 많은 상처를 가지고 있단 걸 누구보다 잘 알았다.
가디언은 디아나 가까이 날아갔다.
“디아나, 난 사실 인간의 감정에 대해선 잘 모른단다. 하지만 너의 감정을 느낄 순 있지. 하니 네가 슬플 땐 언제든 내게 기대어도 된단다. 난 언제나 너와 함께하는 수호자이니까.”
언젠가 에이루스가 가디언에게 말했었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어쭙잖은 위로를 하는 것은 최악이라고.
천년이 넘는 세월을 살았지만 안타깝게도 인간의 감정에 대한 답을 알지는 못하기에 함께 있어 주는 것밖에 해 줄 수 없다.
가디언은 미안해했지만 디아나에겐 함께 있어 주는 것이 가장 큰 위로였다.
디아나는 가디언을 보며 해사한 미소를 그렸다.
“네, 잊지 않을게요.”
심장에 따스하게 퍼지는 가디언의 힘을 느끼던 디아나는 중요한 일이 떠올라 얼굴을 굳혔다.
“그보다…… 가디언님, 어둠의 정령을 놓쳐서 죄송해요. 폐하께 들은 바에 따르면 어둠의 정령이 모습을 꽁꽁 감춘 거 같았어요.”
고개를 살짝 숙이자 가디언이 날개를 크게 움직였다. 강한 바람이 디아나의 턱 끝을 들어 올렸다.
“죄송하다니, 그런 말 하지 말거라. 이제 겨우 정령술을 익힌 네가 어둠의 정령을 그 정도로 몰아붙인 것만으로도 엄청난 일이었다. 만나자마자 어둠의 정령을 그리 쉽게 소멸시킬 수 있었다면 초대 황제가 자신을 희생해 가며 후대에 소멸을 맡겼겠느냐. 디아나 넌 아주 잘 하고 있으니 그런 죄책감 따위 가지지 말거라.”
“네. 음…… 근데 어둠의 정령은 당분간은 안 나타날까요?”
“흠, 아마 그럴 것이다. 생각보다 강한 너의 힘에 놀랐을 테니까, 한동안은 더욱 몸을 숨기겠지. 그렇지만 영원히 숨어 살 순 없으니 결국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우린 그날을 생각하며 더욱 강해져 있으면 되는 것이다. 지금처럼 말이다.”
“그땐, 절대 놓치지 않을 거예요.”
“네가 정말 괜찮은 듯하니 이제 안심이 되는구나. 그럼 난 이만 자연계로 돌아가마. 정령술을 연습할 때 다시 보자꾸나.”
가디언은 디아나의 이마에 부드럽게 입을 맞추곤 모습을 감추었다.
디아나는 편히 소파에 기대어 방을 둘러보았다. 오랜만에 돌아와서 일까, 익숙한 공간인데 괜히 외로움이 들었다.
“피비랑 유네스가 빨리 오면 좋을 텐데…….”
아침에도 제대로 보지 못해 더 보고 싶었다.
피비가 절대 떨어지지 말자 했는데 또 떨어졌다 쓰러졌으니, 걱정을 많이 하겠지.
언제쯤 올까 생각하던 디아나는 유네스가 항상 있었던 자리에서 시선을 멈추었다.
“음, 저긴 좀 좁을 거 같은데.”
유네스의 자리 역시 여전했지만 유네스의 크기가 달라진 게 문제였다.
고양이 같았던 유네스에게 안성맞춤이었던 방석을 보던 디아나는 낮게 중얼거렸다.
“방석을 치우고 카펫을 가져 달라 해야겠어.”
복슬복슬한 양털 카펫은 유네스가 제일 좋아하는 것이었다.
똑똑-.
설렁줄을 잡아당기려던 찰나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들어와.”
“대공녀님, 식사를 준비해 왔습니다.”
트레이를 끌고 들어온 하녀가 디아나에게 깍듯이 인사를 올렸다.
“이쪽에 놓아줘.”
“네, 대공녀님.”
하녀는 디아나가 가리킨 테이블 위로 차분히 식사를 차렸다. 힐긋, 하녀의 얼굴을 보자 정말 모두 바뀐 것인지 한 번도 본 적 없는 얼굴이었다.
디아나의 시선을 느낀 듯 식사를 차린 하녀가 고개를 숙였다.
“혹, 제게 하실 말씀이 있으신가요?”
“응? 아니, 아니야.”
훔쳐보다 들킨 거 같아 머쓱해 손을 내저은 디아나는 할 말이 떠올랐다.
“아, 저기 저 방석을 치우고 큰 양털 카펫을 가져와 줬으면 좋겠어.”
“네, 알겠습니다.”
하녀는 말끔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하녀가 방을 나가고 디아나는 테이블에 차려진 음식을 내려다보았다.
각종 과일이 들어간 샐러드와 사과주스, 그리고 속에 무리가 가지 않는 콩 수프가 차려져 있었다.
그리고 특히 시선을 사로잡는 것은 역시 디아나가 가장 좋아하는 과일인 사과였다.
사과 주스는 물론이고 샐러드 안에도 특히 사과가 듬뿍 들어 있었다.
자신이 좋아하는 과일을 신경 써서 준비했다는 게 느껴졌다.
폐하께서 미리 말씀해 놓으신 걸까, 아님 대공 전하께서…… 이 방처럼 내가 돌아올 날을 기다리며 다 준비해 놓은 걸까.
저택의 사용인들을 바꾼 것도, 방 안이 그대로인 것도 전부 자신을 위한 일이란 걸 모를 수가 없었다.
자신이 아니라면 굳이 사용인들이 전부 바뀔 일은 없었으니까.
“……언제든 돌아오라고 했었는데…….”
저택을 떠나기 전 자신에게 대공이 했던 말이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어젯밤 대공의 모습에 디아나는 기분이 가라앉았다.
“……아냐, 괜찮을 거라고 했잖아.”
곧 일어난다고 했으니까, 괜찮을 거야.
디아나는 울적해지는 마음을 떨치며 늦은 식사를 시작했다.
* * *
“냐아--.”
할짝, 할짝.
“음, 으음, 유네스, 하지 마…….”
얼굴을 핥는 미끄덩한 혀에 디아나는 손을 휘젓다 멈칫했다. 유네스의 털이 선명히 만져졌기 때문에.
“유네스……?”
화들짝 놀라며 눈을 뜨자 유네스의 푸른 눈동자가 제일 먼저 보였다.
“진짜 유네스네!”
디아나는 벌떡 일어나 유네스의 목을 끌어안았다. 예전 같았으면 유네스를 품에 안았겠지만 이젠 목을 끌어안아 주는 것도 버거웠다.
“냐아--.”
디아나의 어깨에 머리를 비빈 유네스가 기분 좋은 울음소리를 냈다.
덩치만 커졌지 애교 많은 것은 여전했으니까.
“언제 왔어, 유네스. 아침 먹고 잠깐 잠들었는데…….”
아침 식사를 마치자 기다렸다는 듯 밀려드는 노곤함을 이기지 못한 디아나는 결국 침대에 누웠다. 그리고 눈을 감자마자 잠이 들었었다.
잠시 잠이 든 사이에 유네스가 도착한 듯했다.
“아가씨, 잘 주무셨어요?”
그렇게 생각하며 소리가 들린 쪽을 향해 고개를 돌리던 디아나는 창문 사이로 들어오는 환한 햇살이 눈부셔 눈을 찡그렸다.
“음…….”
디아나가 잠들 때도 낮이긴 했지만 뭔가 창밖의 햇살은 잠들기 전과 좀 달라 보였다.
막 아침이 밝은 듯한 그런 느낌이랄까.
“피비, 나…… 얼마나 잔 거야……?”
“음, 어제 제가 저택에 도착했을 때 이미 잠들어 계셨으니…… 하루를 꼬박 주무셨어요.”
“하루를?!”
설마 했던 게 정말이자 디아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디 크게 아팠던 것도 아닌데 이렇게 꼬박 하루를 잠든 것은 처음이었다.
그것도 불편하기만 했던 대공 저택에서 말이다.
“아마 크게 놀라셨다가…… 대공 전하를 뵙고 나니 긴장이 풀리셨을 거예요. 저도 그래서 일부러 어젠 아가씨를 안 깨웠던 거고요. 푹 자고 나니 몸이 한결 가볍지 않으세요?”
“……응, 그렇긴 해. 아, 피비, 그럼 대공 전하는? 혹시 의식을 차리셨어?”
하루가 흘렀다는 사실을 인식하자마자 대공에 대해 묻자 피비가 고개를 내저었다.
“아직, 일어나셨단 소식은 못 들었어요.”
“그렇구나……. 빨리 일어난다고 했었는데…….”
금방 일어난다는 건 하루, 이틀이 아닌 걸까. 내일이 돼도 일어나지 않으면 어쩌나 하는 불안감이 들었다.
얼굴이 어두워지던 디아나는 침대가 푹 꺼지는 무게감에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침대에 걸터앉은 피비가 보였다.
피비는 디아나의 흐트러진 머리칼을 다정한 손길로 정리해 주며 미소를 지었다.
“하루하루 재밌게 아무렇지 않게 보내고 있으면 대공 전하께서도 곧 일어나실 테니 걱정 마세요, 아가씨. 그보다 후작 각하께서 아침을 같이 드시려고 기다리고 계세요.”
“할아버지가?”
“네, 그러니 우리 얼른 세수하고 옷 입고 식당으로 가요, 아가씨.”
아무 일도 없었던 거처럼 똑같은 피비의 미소에 잠시나마 불안해졌던 디아나의 마음이 가라앉았다.
“응!”
* * *
“유네스! 유네스! 어디로 가는 거야…….”
후작과의 아침 식사를 마친 디아나는 화원에서 유네스와 시간을 보내려 했었다.
한데 유네스는 갑자기 잡기 놀이라도 하고 싶은 건지 자꾸만 방향을 틀고 있었다. 저택 1층, 디아나는 로비에서 갑자기 방향을 틀고 달리는 유네스의 뒤를 쫓고 있었다.
유네스의 커다란 덩치에 하녀들이 화들짝 놀라며 옆으로 비켜났다.
“유네스! 그럼 안 된다니까!”
디아나가 소리를 지르자 잠시 멈춘 유네스가 고개를 돌렸다.
“하아, 유네스, 이리 와.”
짐짓 혼을 내듯 엄하게 허리에 손을 얹고 말했다.
디아나를 보던 유네스의 귀가 살짝 뒤로 넘어갔다. 낑, 큰 덩치답지 않게 여린 울음소리가 복도를 크게 울렸다.
마음 약해진 디아나가 허리에서 손을 내린 순간 시무룩해진 건 연기였다는 듯 유네스가 휙 몸을 돌렸다.
그러다 복도 끝 방, 살짝 열린 문을 몸으로 밀고 들어가 버렸다.
“유네스! 너, 진짜!”
디아나는 황급히 유네스의 뒤를 따랐다.
“냐아--.”
방 안으로 들어가자 유네스가 기다렸다는 듯 디아나에게로 다가와 애교를 부렸다.
더 이상 도망갈 곳 없는 막다른 곳이 나오면 잡기 놀이는 끝이었다.
그럼 유네스가 다가와 용서해 달란 듯 애교를 부리곤 했었다. 물론 몸집이 작았을 때 말이다.
“읏.”
디아나는 배를 툭 치는 강한 힘에 뒤로 두 걸음이나 밀려났다. 넘어질 듯 비틀거리는 다리에 힘을 준 디아나는 유네스의 머리를 잡았다.
“유네스, 너 또 갑자기 도망가면 그땐 진짜 혼내줄 거야. 간식도 안 줄 거야, 알았어?”
“낑…….”
간식을 안 준다는 말이 효과가 있는지 유네스의 꼬리가 내려갔다. 조금 불쌍하긴 했지만 단단히 경고를 해 둬야 했다.
이제 저택 안에서 잡기 놀이를 했다간 커진 덩치 때문에 다른 사람이 다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아까도 하녀와 부딪힐 뻔했었지.’
얌전해진 유네스의 머리를 쓰다듬던 디아나는 어딘지도 모르고 들어오게 된 방 안을 둘러보았다.
“이곳은…… 대공 전하의 집무실이잖아.”
디아나가 낮게 속삭이자 맞는다는 듯 유네스가 디아나의 손에 머리를 비비며 울었다.
“냐아-.”
커다란 원목 책상과 한쪽에 있는 너른 소파, 한 벽을 가득 채운 책장들이 서 있는 이곳은 대공의 집무실이 분명했다.
대공성에 있는 집무실과 달리 수도 저택의 집무실엔 거의 온 적이 없었지만 저택을 떠나던 날 한 번 왔었다.
그날 저 소파에 앉아 있던 대공이 아직도 선명히 기억났다. 소파를 보던 디아나는 커다란 원목 책상으로 고개를 돌렸다.
주인이 없는 텅 빈 책상은 허전하고 쓸쓸해 보였다.
“여긴…… 왜…… 혹시 대공 전하가 보고 싶어서 이리로 온 거야?”
유네스는 자신을 좋아하는 것만큼 대공을 좋아했다. 디아나가 저택을 나가고 오랜 시간 대공을 보지 못했으니 혹시 보고 싶었던 걸까 싶어 물었지만 유네스는 그저 자신에게 애교를 부릴 뿐이었다.
“대공 전하가 일어나시면…… 같이 보러 가자.”
“냐아.”
“이만 나가자, 유네스.”
디아나의 말에 책상 앞에 얌전히 앉아 있던 유네스가 곧장 일어났다.
쿵-.
순간 유네스가 책상에 부딪히며 큰 소리가 집무실을 울렸다. 아직 커진 자신의 덩치에 적응하지 못한 유네스는 주변에 있는 물건에 잘 부딪히곤 했다.
“유네스, 괜찮아?”
책상 모서리에 머리를 세게 부딪친 거 같아 놀라 다가갔다.
“낑--.”
꽤 아팠는지 유네스의 울음소리가 애처로웠다. 불쌍하기도 했지만 멍청한 모습이 웃기기도 해 쿡, 참지 못한 웃음을 흘리던 디아나는 충격에 열린 책상 서랍을 발견했다.
“아, 이런.”
부딪히는 반동으로 열렸는지 서랍들이 툭 튀어나와 있었다. 디아나는 책상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서랍을 닫으려 손을 뻗던 디아나는 서랍 안의 서신을 보고 멈칫했다.
“……뭐지?”
디아나의 눈길을 사로잡은 건 첫 번째 서랍 안의 서신이었다.
흐트러진 서신들 사이에서 자신의 이름이 적힌 편지가 제일 위에 놓여 있었다.
[디아나에게.]
자신에게 보내는 편지인 거처럼.
‘대공 전하께서 내게 보내는 서신인 걸까.’
저도 모르게 서신을 향해 손을 뻗던 디아나는 정신을 차리곤 멈추었다.
자신의 이름이 적힌 서신이 무슨 내용일지 보고 싶었지만 주인의 허락을 받지도 않고 뜯어 보면 안 될 거 같았다.
“……그래, 열어 보면…… 안 될 거야…….”
그만 서랍을 닫고 돌아가야지.
그렇게 생각은 했지만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편지가 너무 궁금했으니까.
미간을 좁히던 디아나는 고개를 들어 주변을 보았다.
디아나가 들어오자 집무실의 문은 저절로 닫혔고, 점심시간이 다가오는 시간이라 저택 안엔 돌아다니는 사용인들도 거의 없을 것이다.
하니 자신이 이곳에서 서신을 몰래 열어 본다 해도 아무도 알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어차피 이 편지는 내 이름이 적힌 거니까…… 괜찮을 거야. 디아나는 처음 하는 나쁜 짓에 심장이 두근거려 심호흡을 한 후 서신을 꺼냈다.
누가 보는 것도 아닌데 후다닥 서신을 들고 집무실의 소파로 향했다. 푹신한 소파에 몸을 묻은 디아나는 떨리는 마음으로 편지 봉투를 열었다.
[디아나에게.
봄이 완연해져서인지 꽃들이 많이 피어났단다. 너의 생일이 다가와서 일까, 오늘따라 네 생각에 잠을 이룰 수 없어 부치지 못할 편지를 쓴단다.
디아나 너를 가졌단 말을 처음 아리엘에게 들었을 때, 난 너무도 행복했단다. 세상을 다 가진 듯한 기분이었지. 하지만 그 행복은 오래가지 못했단다. 아리엘이 죽고, 내가 어리석게도 스스로 그 행복을 버렸기 때문이지. 너를 두고 대공성을 떠나선 안 되는 것이었는데, 어리석은 난 그 당시엔 제대로 된 판단을 하지 못했단다.
내가 놓쳐 버린 순간들 속에서 네가 뒤바뀌어 버리고 레아의 밑에서 받았을 고통을 생각하면 하루에도 수십 번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단다. 시간을 되돌려 네가 받은 상처를 지울 수만 있다면 악마에게 영혼을 빼앗겨도 좋다 여길 만큼 말이다. 하지만 이미 흘러간 시간을 되돌릴 수도, 이미 네가 받은 상처에 내 괴로움을 비할 수도 없겠지.
디아나, 너에게 너무도 미안하구나.
너를 두고 대공성을 떠난 것도, 네가 내 딸이란 걸 너무도 늦게 알아 버린 것도, 모든 순간, 모든 것들이 후회뿐이라 미안하다.
디아나, 지금은 네가 내 곁에 없지만 너의 마음이 풀리는 그날까지 언제까지고 기다릴 것이다.
몇십 년이 걸린다고 해도.
이게 내가 너에게 용서를 빌 유일한 길일 테니까.
하니, 언젠간 네가 꼭 돌아왔으면 좋겠구나.
너에게 마음의 짐이 될 걸 알기에 비록 이 편지를 부칠 수 없겠지만 편지에서만이라도 너에게 꼭 말하고 싶구나.
디아나, 많이 사랑하고 정말 미안하다.]
“…….”
툭, 새하얀 편지지 위로 눈물 한 방울이 떨어졌다. 디아나의 눈물이었다. 차오른 눈물에 편지의 마지막 글자들이 흐리게 보였다.
손등으로 눈물을 닦은 디아나는 편지의 마지막 줄을 읽고 또 읽었다.
대공을 처음 봤던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의 모든 일들이 떠올랐다.
디아나가 뒤바뀐 것도, 너무 늦게 딸이란 걸 안 것도, 전부 대공 때문이라 여겼다.
유네스의 습격을 받았을 때, 대공이 외면했기에 모든 기대가 무너졌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떠오르는 건 아팠던 순간들이 아니라 좋았던 순간들이었다.
함께 불꽃을 본 것, 축제를 걸어 다닌 것, 레아에게서 벗어나게 해 준 것, 글을 배우게 해 준 것, 그리고 유네스를 자신에게 보내 준 것.
불행했던 시간들 속에 찾아온 행복엔 대공이 있었다.
싫다, 원망스럽다 해도 정말 외면할 순 없었다.
“냐아--.”
디아나의 눈물에 다가온 유네스가 볼을 핥았다.
“유네스…… 대공 전하가 보고 싶어.”
“냐-.”
유네스의 푸른 눈동자를 바라보던 디아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편지를 잘 접어 봉투에 넣어 손에 꼭 쥔 디아나는 이윽고 집무실을 뛰어나갔다.
“대공…….”
“대공녀님?!”
복도를 달리는 디아나를 보고 놀란 사용인들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쉬지 않고 복도를 달려 대공의 침실 앞에 도착한 디아나는 벌컥 문을 열었다.
하지만 디아나의 바람과 달리 대공은 여전히 침대에 누워 있었다. 천천히 침대로 다가간 디아나는 고요히 눈을 감은 대공을 바라보았다.
“대공 전하…….”
나직이 그를 불렀지만 눈을 뜨지 않았다.
“……금방…… 일어난다고 했잖아……. 언제까지고 날 기다린다고 했잖아…….”
몇십 년이 걸려도 좋으니 돌아올 때까지 언제까지고 기다린다고 했으면서 왜, 깨어나지 않는 거야.
디아나는 왈칵 터지는 울음을 참지 못하고 대공의 팔에 얼굴을 묻었다.
“……아…… 빠…….”
대공의 큰 손을 꼭 잡은 디아나의 울음 섞인 작은 목소리가 적막한 방 안을 울렸다.
그리고 그 순간 미동도 없었던 대공의 눈꺼풀이 움찔거렸다. 가지런히 늘어져 있던 손가락이 꿈틀거렸지만 울음이 터진 디아나는 미처 보지 못했다.
“……디아나…….”
“……!”
자신의 울음소리만이 울리던 그때 머리 위에서 갈라지는 낮은 음성이 들려왔다.
대공의 손등에 얼굴을 묻고 있던 디아나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대공 전하?”
제 이름을 부르는 낮은 음성을 잘못 들은 게 아닐까, 불안한 마음으로 고개를 돌리자 금빛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쳤다.
다시는 일어나지 않을 것처럼 눈을 감고 있던 그가 드디어 눈을 뜬 것이다.
“디아나, 난 괜찮으니 울지 말거라.”
대공은 무거운 손을 들어 디아나의 볼을 감쌌다. 연신 흘러내리는 눈물을 조심스럽게 손끝으로 닦아 주었다.
볼에 닿는 따스한 온기가 지금 이 상황이 꿈이 아니라 말해 주고 있었다.
“놀라게 해서 미안하다.”
갈라지는 낮은 음성이 방 안을 울렸다.
미안하다, 그 말을 들은 순간 그가 자신에게 적은 편지가 떠올랐다.
많이 사랑하고 미안하다 했던 그 말이.
언제까지고 기다리겠다던 말처럼 대공은 가만히 디아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흑…….”
울컥하는 감정에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목이 꽉 조여 울음 말곤 아무런 말이 나오지 않았다.
“디아나, 어디 아픈 것이냐?”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눈물만 흘리는 디아나의 모습에 이상하다 느낀 대공이 몸을 일으켰다.
온몸에서 격통이 느껴졌지만 그에겐 디아나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가 상체를 일으키자마자 디아나가 품으로 달려들었다.
흐아앙!
디아나답지 않게 어린아이 같은 큰 울음을 터뜨리면서.
“디아나, 왜 그러는 것이냐? 어디 안 좋은 것이냐? 이런, 의원을 불러야겠군.”
놀란 대공은 침대 옆 설렁줄을 잡아당겼다. 침실로 들어온 하녀가 놀라며 황급히 의원을 부르러 갈 때까지도 디아나는 대공의 품에서 고개를 들지 않았다.
멈추지 않는 디아나의 큰 울음소리가 가슴을 아프게 했다.
“디아나, 어디가 아픈지 말해 줄 수 없겠느냐? 얼굴을 좀 보여 다오.”
눈물이 가슴팍을 적실 정도가 되자 대공은 억지로라도 디아나를 살피려 했다.
작은 어깨를 잡은 순간 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서, 웠어요, 다시는 못 볼까 봐…… 기다리겠다고 했으면서…… 왜…… 왜……. 이제 쓰러지지 마세요, 다시는 쓰러지지 마세요.”
울음 섞인 목소리가 애처롭게 떨렸다.
몸의 부상보다 디아나의 애처로운 부탁에 가슴이 더 찢기듯 아파 왔다.
그는 크게 놀란 듯한 디아나를 떼어 내지 않고 품 안으로 끌어안았다. 디아나를 편하게 안은 그는 작은 등을 토닥여 주었다.
“그래, 다신 쓰러지지 않겠다고 약속하마. 너에게 또 상처를 주어 미안하다. 다시는 기다리게 하지 않으마.”
부드럽게 등을 쓰다듬는 손길에 쌓이고 쌓였던 서러움들이 다 터져 버렸다.
모든 것이 바뀌어도 자신을 아껴 주는 사람들이 있으니 다 괜찮다, 괜찮다 했지만 정말 괜찮지 않았다.
엄마, 아빠에 대한 채워지지 않는 외로움은 언제나 마음 한편에 남아 있었으니까.
사랑한다, 미안하다는 말을 가장 듣고 싶었던 사람은 다른 누구도 아닌 대공이었다.
디아나는 넓은 어깨에 얼굴을 묻고 참고, 참았던 울음을 토해 냈다.
“대공 전…….”
“……”
대공이 일어났다는 소식에 급히 침실로 온 로운과 후작은 눈앞에 보이는 상황에 걸음을 멈추었다.
대공은 그들과 뒤이어 들어온 의원에게 잠시 기다리라 손을 들어 보였다.
모두가 숨을 죽인 채 가만히 있자, 방 안엔 디아나의 울음소리와 그런 디아나를 달래는 나직한 대공의 목소리가 가득 찼다.
그렇게 대공은 한참을 디아나의 울음이 멈출 때까지 아이의 등을 토닥여 주었다.
멈추지 않을 거처럼 엉엉 울던 디아나가 지쳤는지 대공의 품 안에서 잠이 들었다.
가슴팍에 기대에 새근새근 숨을 내뱉는 디아나를 가만히 보던 그는 조심스럽게 디아나를 침대에 눕혔다.
그제야 그는 의원에게 다가오라 손짓했다.
당연히 대공의 상태부터 살피려 의원이 손을 뻗자 대공이 막았다.
“나 말고, 디아나부터 살펴.”
“……네, 전하.”
의원은 잠든 디아나의 몸 상태를 조심스럽게 살폈다.
“울음을 다 쏟아내시고 지쳐서 잠드신 겁니다. 크게 놀라거나 충격을 받으신 건 아니시니 푹 주무시고 일어나실 겁니다.”
“다행이군.”
혹 충격으로 쓰러진 것일까 걱정했던 대공은 안도하며 디아나의 머리를 다정한 손길로 쓸었다.
디아나를 다시 보는 것이 어찌나 믿기지 않는지 꼭 꿈같았다.
꿈이라면 영원히 깨어나고 싶지 않을 만큼 말이다.
그 모습을 보던 후작은 짧은 한숨을 내쉬며 대공에게 다가갔다.
“디아나가 괜찮다 하니 이제 전하의 몸을 살피시죠. 부상이 심각했습니다.”
마음 같아선 전부 내보내고 디아나와 함께 있고 싶었지만 다른 사람도 아닌 후작의 말을 거절할 순 없었다.
“네, 그러겠습니다.”
의원이 기다렸다는 듯 대공의 상태를 살폈다. 미간을 좁히며 이곳저곳을 살피던 의원이 물러났다.
참지 못한 로운이 제일 먼저 물었다.
“전하의 상태는 어떠신가?”
“다행히도 큰 후유증이 남진 않으신 듯합니다.”
“다행이군. 그럼 내일부터 바로 일상으로 복귀해도 되겠나?”
대공의 물음에 로운이 말도 안 된다는 듯 말했다.
“전하, 깨어나시지 못하실 수도 있었습니다. 부상이 너무 심해 황궁의와 의원들이 날을 지새웠을 정도였습니다.”
로운은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대공에게 심각했던 상황을 토로했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대공 성격에 제대로 쉬지도 않고 바로 일을 시작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로운, 난 괜찮으니 목소리 높이지 말거라.”
대공은 미간을 좁혔다. 혹시라도 디아나가 깼을까 살피자 다행히도 깊이 잠든 듯 미동도 없었다.
“전하, 아직 일상으로 복귀하시는 것은 무리가 있습니다. 충분히 쉬시고 복귀하셔야 합니다.”
의원의 말에 로운이 덧붙였다.
“맞습니다. 전하, 다들 전하께서 언제 일어날지도 모른다고 했습니다. 후유증이 크게 남을 수도 있다고 했고요. 지금 이렇게 빨리 멀쩡히 일어나신 건 기적과도 같은 일입니다”
“기적처럼 일어났으면 된 것이다. 그리고 처리해야 할 일들이 많아. 이미 회복하기 시작했으니 일을 하다 보면 알아서 좋아질 거다. 회복에 좋은 약을 올려라.”
부상을 한 번도 겪어 보지 못한 사람도 아니고, 대공은 자신의 몸을 잘 알았다. 죽지 않는 이상 회복이 빠르단 걸 말이다.
단호한 대공의 말에 의원은 난감했지만 어쩔 수 없이 고개를 숙였다.
“……네, 전하.”
의원이 나가고 로운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더 쉬시라 말하고 싶었지만 어차피 듣지 않을 거란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로운, 어둠의 정령은 어떻게 되었지?”
“아, 어둠의 정령은…….”
“그 이야기는 제가 답해 드릴 테니 잠시 로운을 물려 주시겠습니까, 전하.”
후작이 대공에게 말했다. 할 말이 있어 보이는 듯한 후작의 눈빛에 대공은 로운을 물렸다.
문이 굳게 닫히고 대공이 먼저 입을 열었다.
“……혹…… 제가 일어났으니 디아나를 이만 데리고 후작가로 돌아가시겠단 말씀을 하시려는 겁니까?”
왜 디아나가 대공저에 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아마 그가 큰 부상을 당했기 때문일 것이라 짐작할 순 있었다.
다신 쓰러지지 말라고 디아나가 말했으니까.
그가 일어날 때까지만 대공저에 머무르려 했을 것이다.
“그건 제가 결정할 일이 아닙니다, 전하.”
“네?”
후작의 시선이 잠든 디아나를 향했다. 대공의 곁에서 깊은 잠에 빠진 아이의 얼굴을 물끄러미 보던 후작이 느리게 입술을 뗐다.
“디아나가 결정할 일이지요. 잠에서 깨어나 후작가로 돌아가고 싶다면 함께 갈 것이고…… 그게 아니라면…… 원하는 곳에 머무르겠지요.”
“아마 돌아간다 할 것입니다.”
“그리 생각하십니까.”
후작은 체념한 듯 말하면서도 시선은 디아나를 향해 있는 대공을 보며 피식, 알 수 없는 웃음을 흘렸다.
“디아나가 일어나면 알게 되겠지요. 어쨌든 제가 드릴 말씀은 그게 아닙니다.”
“그럼 무엇입니까, 각하.”
대공의 시선이 후작을 향했다. 선명한 금안을 마주 보던 후작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미안합니다.”
머리까지 숙이는 후작의 모습에 대공은 크게 당황했다.
“……네? 각하, 갑자기 왜 이러십니까.”
“아리엘을 죽인 건 대공 전하라 했던 그 말을 사과하고 싶었습니다.”
고개를 든 후작이 나직이 말했다.
- 아리엘을 죽인 건 다른 누구도 아닌 대공 전하십니다.
10년 전 장례식장에서 후작이 대공에게 남긴 말이었다. 대공은 그 말을 단 한 번도 잊은 적이 없다.
그 말이 맞는다고 여겼으니까.
대공은 시선을 떨어뜨렸다.
“……틀린 말도 아닌 것을 왜 사과하십니까.”
“아니요, 틀린 말입니다. 그땐 너무 화가 나서, 분노를 풀 곳이 없어서 눈앞에 있는 대공 전하께 풀어 버린 것입니다. 아리엘이 죽은 게…… 어찌 대공 전하 때문이겠습니까. 그저 나쁜 운명이었을 뿐입니다. 누구의 잘못이라 할 수 없습니다. 아리엘 역시 그 누구도 탓하지 않을 것입니다.”
대공에게 했던 말은 늘 후작의 마음 한구석을 무겁게 만들었다.
언젠가 대공을 다시 만나면 그 말을 사과해야겠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디아나의 일이 터지며 말할 기회를 놓쳐 버렸다.
여전히 대공이 좋진 않지만 모든 감정과 별개로 아리엘의 남편이자 디아나의 아버지인 그에게 해선 안 될 말이었다.
오랜 세월 마음속에 담아 두었던 말을 마친 후작은 깊은 숨을 내쉬었다.
“……전 괜찮습니다. 제가 더 죄송할 따름입니다. 아리엘도 디아나도 잘 지키지 못했으니까요.”
“아리엘은…… 먼 훗날 다시 만나시면 직접 말하시고 디아나의 일도 제게 사과할 문제가 아니니, 디아나에게 직접 말해 주십시오.”
“그럴 것입니다.”
디아나가 깨어난다면 후작가로 돌아가기 전에 꼭 말할 생각이었다.
“으음…….”
그때 잠들어 있던 디아나가 살짝 뒤척였다. 대공은 조심스럽게 볼을 타고 흘러내린 금빛 머리칼을 귀 뒤로 넘겨 주었다.
몇 번 등을 토닥이자 이맛살을 구겼던 디아나가 평온해졌다.
“각하, 어둠의 정령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어둠의 정령은 몸을 숨겼습니다. 폐하께서 어둠의 정령을 도왔던 귀족 가문을 수색하고 수도 빈민가와 수도 외곽 지역까지 샅샅이 훑었지만 제대로 숨은 듯 찾지 못했습니다. 몸을 숨겼던 곳까지 전부 발각되었으니 아마 당분간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겠지요.”
“역시, 그리되었군요.”
예상치 못한 일은 아니었기에 대공은 큰 동요를 보이지 않았다.
단지 기회를 놓친 것이 아쉬울 뿐이다.
“어둠의 정령을 도운 자는 로운 경이 조사를 맡고 있습니다. 더 궁금한 것이 있습니까.”
“아니요, 나머진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흠, 그럼 전 이만 나가 보겠습니다.”
“네.”
후작은 몸을 돌리려다 멈칫했다.
“전하, 부상이 심하셨습니다. 무리하게 움직이지 않는 게 좋을 것입니다. 무리하다 또 쓰러지시면 디아나가 슬퍼할 테니까요.”
“……명심하겠습니다.”
후작이 방을 나가고 방 안엔 침묵이 내려앉았다.
대공은 디아나를 내려다보았다. 아이에게서 들려오는 규칙적인 숨소리가 불안한 마음에 안도감을 주었다.
골목에서 의식을 잃던 순간 사실 그는 이대로 영원히 깨어나지 못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었다.
화살을 정통으로 맞았고, 그가 흘린 피가 엄청났으니까.
그리고 죽을 뻔했던 것은 착각이 아니었는지 그는 꿈속에서 아리엘을 만났었다.
아리엘이 죽은 지도 벌써 10년이 흘렀건만 단 한 번도 그의 꿈속에 나타나지 않았다. 매정하다 싶을 정도였다.
한데 그녀가 꿈에 나왔다.
넓은 숲, 커다란 나무 아래에서 그는 그녀를 만났다. 아리엘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역시 그 모든 것이 꿈이란 것을 인지하지도 못했기에 그들은 나무 아래에서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너무도 행복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무언가 이상했다.
화창한 하늘의 구름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고, 함께 있는 아리엘의 몸은 차디찼다.
기묘한 감각을 느낀 그때 작은 흐느낌을 들었다. 자신을 부르는 디아나의 목소리를 들었다.
그 순간 알았다.
그가 꿈을 꾸고 있단 것을.
‘로우, 어서 가요. 우리 아이가 기다리고 있잖아요.’
‘미안해. 미안해, 아리엘.’
헤어지고 싶지 않았지만, 그는 디아나가 있는 곳으로 돌아가야 했다. 대공은 그렇게 아리엘의 손을 놓으며 눈을 떴다.
“디아나…….”
대공은 나직이 디아나의 이름을 불렀다. 잠든 아이의 손을 꼭 잡았다.
“이렇게 계속 함께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그건 내 욕심이겠지.”
어찌 자신을 쉽게 용서할 수 있을까. 디아나가 다시 떠난다 해도 그는 할 말이 없다.
대공은 기적처럼 주어진 이 시간이 조금이나마 늦게 흐르길 바라며 잠든 디아나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 * *
“음…… 으음…….”
깊은 잠에 빠져 있던 디아나의 눈꺼풀이 움찔거렸다. 그리고 곧 눈을 뜬 디아나는 느리게 눈을 깜박였다.
많이 울어서인지 눈꺼풀에 돌을 얹은 듯 무거웠다.
창밖의 하늘이 새카맣게 어두운 것을 본 디아나는 낯선 창문과 천장에 자신의 방이 아니란 걸 알았다.
“……여긴…….”
천천히 몸을 돌리자 잠든 대공의 얼굴이 보였다. 그제야 자신이 대공의 품에 안겨 울다 지쳐 잠든 것이 떠올랐다.
대공 전하가 일어난 게 꿈은 아니었겠지.
그때, 꿈이 아니란 듯 대공의 손이 디아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깨어난 건가 싶어 숨을 죽였으나 잠결에 하는 행동인 듯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이 무척이나 느렸다.
‘꿈이 아니었어.’
디아나는 대공을 바라보며 옅은 미소를 그렸다.
그리고 곧 자신의 미소에 움찔했다. 행복한 감정에 지은 미소였으니까.
대공의 얼굴만 봐도 불편해 어쩔 줄 몰랐는데 지금은 거북하지도 불편하지도 않았다.
원래의 자신이었다면 아마 그가 깨어난 걸 봤으니 이만 방으로 돌아가야지 하고 생각했을 것이다
“…….”
하지만 디아나는 움직이지 않았다.
돌아가고 싶단 생각이 들지 않았으니까.
함께 있는 지금이 편안했다.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큰 손에 안도감이 들었다.
그래서 좀 더 함께 있고 싶었다.
디아나는 느리게 머리를 쓰다듬는 대공의 손길을 느끼며 아무 생각 없이 다시 눈을 감았다.
아침이 밝아 와도 더 이상 변하는 것들이 없길 바라면서.
* * *
“냐--.”
귀를 간지럽히는 소리에 디아나는 천천히 눈을 떴다. 그러자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유네스의 얼굴이었다.
“유네스?”
“냐--.”
디아나는 몸을 누르는 무거운 유네스의 발을 살짝 밀며 상체를 일으켰다.
몽롱한 정신에 멍하니 있자 유네스가 다가와 디아나의 볼을 길게 핥았다.
“음…… 유네스…… 난 괜찮아.”
유네스의 애정 표현이 싫은 건 아니었지만 크기가 커진 이후로 혀도 커져 예전과 달리 한 번만 핥아도 얼굴이 침 범벅이 되었다.
디아나는 소매로 얼굴을 닦다, 정신이 들어 휙 고개를 돌렸다.
“어, 어디 가셨지……?”
새벽에 눈을 떴을 때만 해도 침대에 누워 있었던 대공이 보이지 않았다.
텅 빈 침대에 눈이 동그래진 그때 방 안쪽에 있던 문이 열렸다.
그곳에서 나온 대공이 디아나를 보고 눈을 크게 떴다.
“일어났구나.”
드레스 룸이었던 듯 대공은 잠옷이 아닌 하얀 셔츠와 바지를 입고 있었다.
디아나에게로 다가온 대공은 무의식적으로 손을 뻗다 멈칫했다. 디아나는 반쯤 올라왔다 내려가는 대공의 손을 보았다.
“……혹 어디 아픈 곳은 없느냐?”
걱정스런 물음에 디아나의 미간이 살짝 좁아졌다.
이 말을 들을 사람은 자신이 아닌 거 같았으니까.
“전 괜찮아요. 저보다 전하께서 더 아프시잖아요.”
“몇 번이고 말했지만, 디아나 난 괜찮단다. 걱정하지 않아도 돼.”
“……정말 괜찮아요?”
대공은 옅은 미소를 그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어제 의원에게 진찰을 받았고 의원이 다 나았다고 했단다.”
의원이 들으면 기겁할 말이었지만 대공은 디아나에게 괜한 걱정을 주고 싶지 않았다.
디아나는 말을 믿는 듯 한껏 좁아졌던 미간을 폈다.
“냐아--.”
디아나의 얼굴이 펴지자 가만히 앉아 기다리던 유네스가 대공에게 다가왔다. 그는 제 다리에 몸을 비비는 유네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유네스가 이렇게 원래 모습으로 돌아오다니, 많이 놀랐단다. 디아나네가 정말 잘 보살펴 주었구나. 이제 너의 몬스터이긴 하지만 그래도 고맙다.”
“……아니에요.”
대공은 디아나에게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최근 들어 한 번도 본 적 없는 편안한 미소였다. 또 이렇게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너무 오랜만이었다.
불편하진 않았다. 하지만 어색하긴 했다.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몰라 입술을 잘근 깨물던 그때, 하녀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대공 전하, 후작 각하께서 식당에 도착하셨습니다.”
“벌써? 늦었군. 바로 가마. 아…….”
바로 나가려던 대공은 디아나와 눈이 마주쳐 걸음을 멈추었다. 디아나가 늦게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해 아침을 후작과 함께하기로 했었다.
앞으로의 일도 논의할 겸 말이다.
하지만 말똥말똥한 눈으로 자신을 보고 있는 디아나가 있으니 그냥 나갈 수 없었다.
잠시 고민을 하던 그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디아나, 혹 아침을 함께 먹겠니?”
“네? 아…….”
일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약간 멍해 있던 디아나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디아나가 망설이는 것을 본 대공이 빠르게 덧붙였다.
“네가 불편하다면 외할아버지와 둘이서 편히 아침 식사를 하렴. 난 어차피 집무실에서 자주 먹으니 괜찮단다.”
함께 있어서 너무도 행복했지만 더 많은 것을 바라는 것은 그의 욕심일 것이다.
그가 하녀에게 말을 전하려던 그때, 디아나가 말했다.
“아니에요, 같이 먹어요.”
“같이…… 먹자고? 나와?”
대공은 믿기지 않아 다시 물었지만 디아나는 전처럼 시선을 피하지 않으며 답했다.
“네.”
멈칫하던 대공은 곧 매끄럽게 입꼬리를 올렸다.
“그래. 같이 먹자꾸나.”
* * *
달그락, 달그락.
넓은 식당 안에 식기가 움직이는 소리가 울렸다. 수프를 한 스푼 먹은 디아나는 힐긋 생선 살을 썰고 있는 대공을 보았다.
함께 식사를 하자며 대공의 손을 잡고 식당까지 왔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막상 이렇게 같이 앉아 식사를 하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어색함이 맴돌았다.
할아버지와 식사를 할 땐 유네스의 이야기라든가 정말 별거 아닌 이야기들이 쉽게 나왔었는데 대공이 있어서인지 입술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디아나, 이걸 먹으렴.”
눈을 도르륵 굴리던 그때, 대공이 디아나의 앞으로 접시를 내려놓았다. 자신을 위해 썬 것인 듯 작게 썰린 생선 살이 보였다.
“……감사합니다.”
“어서 먹어 보렴.”
대공의 시선에 디아나는 포크로 생선 살을 찍어 먹었다.
입 안에서 부드럽게 녹는 살이 느껴졌지만 어색한 상황에 맛을 잘 느낄 수 없었다.
하지만 자신의 답을 기다리는 대공의 눈빛에 맛을 모르겠다고 하긴 그랬다.
“……맛있어요.”
느리게 답하자 대공은 미소를 그리며 그제야 식사를 시작했다. 식사를 하면서도 그는 디아나를 챙겨 주었다. 샐러드도 접시에 덜어 주고 과일도 먹기 좋게 잘라 접시 위로 놓아주었다.
다정한 배려가 어색했지만 거북하진 않았다. 오히려 기분이 조금 좋았다.
마음속의 깊은 원망이 조금은 풀려서일까, 이제 다 나았다는 듯 함께 식사를 하는 것도, 조심스럽게 챙겨 주는 것도 불편함이 없었다.
식사를 마치고 후식으로 사과를 먹으며 옅은 미소를 지은 그때, 후작이 입을 열었다.
“디아나.”
“네?”
“대공 전하께서 이리 일어나셨으니 할아버지는 이만 후작가로 돌아가려 하는데 네 마음은 어떠니?”
“아…… 그게…….”
아직은 후작가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대공과 지내는 것이 더 이상 불편하지 않았다.
잠시 망설이던 디아나는 입술을 열었다.
“……할아버지와 전하만 괜찮으시다면 전 이곳에서 지내고 싶어요.”
아직 대공에 대한 마음의 원망이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었지만 떨어져 살면 보고 싶을 거 같았다.
“……뭐?”
디아나의 말을 들은 대공의 표정이 무너졌다. 디아나와 함께 산다는 건 그에게 상상도 하지 못했던, 감히 바라지도 못했던 일이었으니까.
대공은 흔들리는 눈빛을 감추지 못했다.
“……디아나, 혹 내가 걱정되어 그러는 거라면…… 억지로 이곳에 머물지 않아도 된단다.”
“그런 건, 아니에요.”
갑작스런 디아나의 심경 변화가 믿기지 않는 듯했다.
망설이듯 손을 꼼지락거리던 디아나가 대공에게 고개를 돌렸다.
“……편지를 읽었어요, 제게 부치시지 못하신…… 편지를요.”
“편지라면…… 설마, 집무실에 있던…….”
“네, 몰래 읽으면 안 되는 건데 제 이름이 있어서 너무 궁금해서 읽었어요. 그리고 편지의 내용이 거짓말 같지 않아서…… ”
디아나의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타인보다 부모에게 받은 상처가 더 많은 아이였기에 본능적으로 거부당할까 불안했던 것이다.
디아나의 예쁜 얼굴이 불안함으로 굳은 순간 대공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대공은 디아나의 앞에 섰다. 한쪽 무릎을 꿇고 자세를 낮춘 그는 디아나와 시선을 맞추었다.
“디아나, 편지에 적은 모든 내용은 진짜란다. 너에게 적은 편지인데 어떻게 거짓을 적을 수 있겠니.”
“…….”
그는 살짝 떨리는 디아나의 눈빛을 보았다. 그는 작은 손을 꼭 잡으며 한 자, 한 자 디아나가 제대로 들을 수 있게 말했다.
“디아나 난, 내 목숨보다도 널 사랑한단다. 그리고 그런 널 지키지 못해서, 상처를 줘서 정말 미안하다.”
묵직한 목소리와 흔들림 없는 눈빛.
디아나는 물론이고 식당 안에 있는 모두가 대공의 절절한 진심을 느낄 수 있었다.
대공의 말을 들은 순간 울컥했지만 어제 너무 많이 울어서일까, 눈물이 나오진 않았다.
디아나는 대공이 잡은 손을 내려다보았다.
대공은 따스한 온기가 사라질세라 디아나의 손을 꼭 잡아 주었다.
디아나는 자신의 답을 기다리는 대공을 바라보았다.
“……아직, 전부 용서하진 못할 거 같아요.”
그를 향한 원망이 많이 풀리긴 했지만 아직 전부 풀린 것은 아니었다.
대공은 다른 사람들과 다른 디아나의 하나뿐인 아버지였으니까.
사소한 것이라도 서운함이 남들보다 클 수밖에 없었다.
“괜찮아. 당연한 거니 그런 마음에 조금도 너를 탓하지 말거라. 지금도, 네 마음이 중요하단다.”
“제 마음은…… 이제 더 이상 떨어져 살고 싶지 않다는 거예요. 유네스랑 피비랑 에드윈이랑…… 아버…… 지와 함께 살고 싶어요.”
디아나의 나직한 말에 대공은 눈을 꼭 감았다. 그러지 않으며 디아나 앞에서 못나게 눈물을 흘릴 거 같았기 때문이다.
너무도 미안했고, 또 함께할 수 있단 것에 염치없지만 행복했다.
가슴을 치는 격한 감정을 안간힘으로 다스린 그는 천천히 감았던 눈을 떴다.
그는 디아나의 볼을 손으로 감싸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고맙구나, 디아나. 미안하고 정말로 많이 사랑한단다.”
그가 눈감는 날까지 디아나만을 위해 살 것이다.
마음속으로 맹세한 순간 디아나가 대답 대신 그에게 먼저 안겼다. 대공은 품으로 파고드는 작은 아이를 꼭 끌어안았다.
다시는 이 온기를 놓치지 않으리라 다짐하며 환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디아나의 입가에도 옅은 미소가 그려졌다.
* * *
저택 정문 앞.
“같이 가지 못해서 죄송해요.”
디아나가 대공가에 남기로 하자 후작은 홀로 후작가로 돌아가기로 했다.
디아나는 그런 후작을 배웅했다.
함께 지낸 시간이 있어서인지 혼자 돌아가시는 것이 신경 쓰였다.
시무룩한 얼굴로 말하자 후작이 고개를 가로로 저었다.
“죄송하다니, 그런 말 말거라. 원래 너의 집은 이곳이지 않니. 돌아갈 곳으로 돌아온 것인데 내게 왜 미안하니. 그리고 그리 말하면 꼭 앞으로 날 보러 오지 않겠단 말처럼 들려 서운하단다.”
후작이 슬프다는 듯 눈꼬리를 내리자 디아나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황급히 말했다.
“아니에요! 할아버지 보러 자주 놀러 갈 거예요! 진짜로요!”
손을 덥석 잡으며 외치는 디아나의 모습에 후작은 웃음을 터트렸다.
눈을 크게 뜨고 올려다보는 모습이 너무 귀엽고 사랑스러웠기 때문이다.
어찌나 크게 웃었는지 후작 뒤에 서 있던 보좌관이 놀랄 정도였다.
그도 그럴 게 제국의 최연소 현자인 후작은 점잔 빼면 시체랄 정도로 조용한 사람이었으니 말이다.
환한 웃음을 짓던 후작은 곧 다정한 손길로 디아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걱정 말거라. 이 할아비가 괜히 농담을 한 것이니까. 언제든 후작가로 놀러 오려무나. 나도 자주 놀러 오마.”
“네, 할아버지.”
디아나는 해사한 미소를 지었다. 두 사람을 가만히 지켜보던 대공이 후작의 앞으로 한 걸음 다가왔다.
“저도…… 자주 찾아뵙겠습니다.”
“네, 전하. 디아나를 잘 부탁합니다. 앞으론 절대 상처 주지 마십시오. 혹 또 상처를 주신다면 그땐 디아나를 데리고 제국을 떠나 버릴 것입니다.”
뒷말은 대공만이 들을 수 있게 낮게 속삭였다. 미소를 지으며 말했지만 진심이었다.
진심이란 걸 대공도 느낀 듯 그는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명심하겠습니다.”
“그럼 전 이만 가 보겠습니다. 디아나, 또 보자꾸나.”
“네, 할아버지.”
“조심해서 가십시오, 각하.”
후작가의 마차가 저택을 나갈 때까지 배웅한 대공은 디아나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디아나, 우리도 이만 들어가자꾸나.”
대공의 큰 손을 본 디아나가 멈칫했다.
함께 살기로 마음 먹었지만 아직은 어색함이 더 컸으니까.
하지만 디아나는 대공의 손을 조심스럽게 잡았다.
따뜻한 손이 그녀의 손을 감싸자 이윽고 입가에 옅은 미소가 서렸다.
디아나는 그렇게 대공과 함께 저택으로 향했다.
* * *
펑- 펑-!
커다란 풍선이 터지는 소리와 함께 맑은 푸른 하늘에서 형형색색의 꽃잎이 떨어졌다.
“와!”
“와아!”
하늘에서 쏟아지는 꽃잎에 신이 난 아이들이 광장을 뛰어다니며 소리를 지르자 어른들의 얼굴에도 웃음꽃이 피었다.
“이번 검술 대회는 정말 마지막까지 크게 열리네요.”
“그러게 말이에요. 개막 전부터 성대하더니 오늘은 결승전이라고 이렇게 꽃잎으로 하늘을 수놓다니, 내 평생 이렇게 시끌벅적한 검술 대회는 처음이에요.”
“맞아요, 매년 열렸지만 이번은 특히 다르네요.”
“다를 만하지, 10년 만에 대공 전하께서 돌아와 참석한다고 하잖아.”
“거기다 그 소문의 대공녀가 오늘 결승전에서 모습을 드러낸다던데.”
서로 대화를 나누고 있던 사람들은 소문의 대공녀가 나온다는 말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정말, 오늘 나온다고?”
“내가 후작가에 물품을 납품하잖아. 우연히 들었는데 이번에 이렇게 결승전을 크게 여는 이유가 대공녀님이 결승전을 참관하시기 때문이랬어.”
“하긴 이번에 결승전에 오른 기사가 대공가의 기사라잖아요, 그……이름이…….”
“에드윈! 에드윈이랬어요.”
“대공가의 기사가 우승하고 대공녀님까지 나오신다니…… 정말 기대되는구만, 기대돼.”
광장을 메운 사람들은 어느새 흩날리는 꽃잎은 잊고 대공가의 이야기로 열을 올렸다.
그렇게 세간의 관심이 집중된 검술 대회 결승전의 막이 오른 그때, 대공 저택에선 격한 감탄사가 터져 나오고 있었다.
“꺄아! 너무, 너무 예뻐요!”
“정말 너무 인형 같으세요!”
“인형이라뇨! 전 이렇게 예쁘고 귀엽고 사랑스런 인형을 본 적이 없는걸요!”
볼을 감싸고 소리를 지르는 하녀들을 보며 피비가 만족스런 미소를 지었다.
“대공녀님은 어떠세요? 오늘 치장 마음에 드시나요?”
하녀들의 끊임없는 감탄사에 정신이 혼미해졌던 디아나는 주변이 조용해지자 그제야 거울을 제대로 마주했다.
예쁘게 땋아서 틀어 올린 머리엔 작은 보석 핀들이 꽂혀 있었고, 하얀 드레스엔 선명한 자주색 꽃들이 드문드문 수놓아져 있었다.
거기다 황후 폐하가 선물해 준 신발 역시 작은 보석들이 촘촘히 박혀 빛을 발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이렇게까지 화려하게 꾸며 본 적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옷과 신발을 보았을 땐 너무 과하다고 느꼈지만 이렇게 직접 차려입고 보니 과하단 생각은 들지 않았다.
“예쁘다.”
자신이 보기에도 예쁘고 아름다울 뿐이었다.
거울을 보며 옅은 미소를 그리자 피비가 환한 미소를 지었다.
“마음에 드시는 거죠?”
“응, 너무 마음에 들어, 피비.”
“후후, 그럼 우리 자주 이렇게 꾸며요, 대공녀님.”
“자주…….”
디아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말끝을 흐렸다. 거울 속의 모습이 너무너무 마음에 들긴 했지만 평소의 두 배는 걸렸던 치장 시간을 생각하면 자주는 힘들었으니까.
피비의 열망 어린 시선을 슬쩍 피한 디아나는 얌전히 앉아 기다리고 있던 유네스에게 다가갔다.
“유네스, 유네스가 보기에도 오늘 나 예뻐?”
“냐아--.”
디아나를 빤히 보던 유네스는 꼭 예쁘다 말하는 거처럼 작게 울며 꼬리를 흔들었다.
“고마워. 유네스도 예쁘다고 했으니까 다른 사람들도 다들 좋게 보겠지?”
“긴장되세요, 대공녀님?”
다른 하녀들에게 정리를 시킨 피비가 디아나에게 다가왔다.
“응, 긴장돼. 오늘은 아주 중요한 날이잖아.”
오늘은 바로 에드윈이 참가하는 검술 대회의 결승전이자 수많은 귀족들 앞에서 대공녀로 처음 모습을 드러내는 날이다.
피비가 대공녀라 부르는 것이 익숙해질 만큼, 후작가로 돌아가지 않고 대공 저택에 머무른 지도 벌써 보름이 넘게 흘렀다.
그동안 어둠의 정령은 완전히 모습을 감췄고 검술 대회가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비록 검술 대회를 직접 관람하진 못했지만 하녀들의 이야기에 따르면 에드윈은 압도적인 검술 실력으로 결승전까지 올라왔다고 했다.
거의 우승은 에드윈의 것이나 다름없다고 모두가 말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결승전에 대공가가 빠질 수 없게 되었고 며칠 전 대공이 디아나에게 조심스럽게 물어왔었다.
검술 대회에 참석할 수 있겠냐고.
다른 귀족들이 전부 모이는 자리이기에 싫다면 참석하지 않아도 된다 말했지만 에드윈의 결승전은 꼭 보고 싶었다.
그렇게 자신이 참석하겠다고 한 뒤 대공가는 엄청 바빠졌다.
살롱의 디자이너들이 몇 명이나 다녀갔고 상단의 짐마차가 몇 개씩 아침마다 대공가로 들어왔었다.
그리고 그것들은 전부 디아나의 것들이었다.
저택에 지내면서부터 대공이 틈날 때마다 뭘 선물해 주려고 했었지만 디아나는 딱히 갖고 싶은 것이 없어 거절했었다.
하지만 이번엔 에드윈의 결승전에 가는 거니 예쁘게 하고 가고 싶어 디아나가 먼저 새 드레스를 맞추고 싶다 한 것이었다.
‘난 그냥 한 벌만 필요한 거였는데.’
드레스 룸 안에 가득 찬 드레스들을 질린 눈으로 보던 디아나는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방문을 열고 들어온 집사가 디아나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대공녀님, 검술 대회 경기장으로 출발하실 시간이 되셨습니다.”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구나.”
“네, 대공 전하께서 로비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아, 알았어.”
디아나가 유네스에게 고개를 돌렸다.
“유네스, 오늘 사람들 많은 곳에 갈 건데 혹시라도 막 위협하고 그러면 안 돼, 알았지?”
황실 일원들이 관람하는 장소는 경기장 위쪽에 따로 마련되기 때문에 유네스를 데리고 갈 수 있었다.
사실 유네스를 데리고 가기로 결정한 건 레귤러스의 말 때문이었다.
-유네스를 데리고 딱 나타나면 너무 멋있어서 다른 귀족들은 아무런 말도 못할 거야!
유네스의 크기가 커진 뒤 유난히 관심과 찬양이 많아진 레귤러스였다.
제국에서 몇 마리 없는 몬스터라 귀하긴 했지만 그중에서도 유네스만큼 멋진 표우는 없다며 말이다.
하지만 낯을 많이 가리는 유네스는 레귤러스에게 별 흥미가 없었다.
오늘도 디아나에게 애교를 부리는 유네스를 보며 레귤러스 혼자 방방 뛸 것이다.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모습에 피식 웃은 그때 유네스가 대답하듯 작게 울었다.
“냐아--.”
“가자, 유네스.”
디아나가 유네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함께 방을 나서자 그 뒤를 피비와 집사가 따랐다.
“디아나.”
계단을 막 내려온 디아나는 나직이 이름을 부르며 다가오는 대공에게 고개를 들었다.
검은 제복을 멋지게 차려입은 대공은 평소보다 훨씬 멋있었다.
“아버지.”
대공녀란 호칭이 익숙해진 만큼 아버지라 부르는 것도 이젠 어색하지 않았다.
하지만 디아나와 달리 대공은 아버지란 말을 들을 때마다 가슴이 벅차올랐다.
오늘따라 더욱 사랑스러운 디아나가 그를 보며 살짝 미소를 짓자 대공의 걸음이 멈칫했다.
“아버지, 왜 그러세요?”
멈춘 대공을 보며 디아나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 모습이 어찌나 사랑스러운지 시립하고 있던 사용인들은 슬쩍 고개를 숙이며 미소를 지었다.
“오늘 너무, 예쁘구나, 디아나.”
멈추었던 걸음을 마저 내디딘 그는 자신을 올려다보는 디아나에게 부드럽게 미소를 그렸다.
“……감사해요.”
물론 아직까진 디아나와 대공의 사이가 친밀하진 않았다. 그래도 조금씩 두 사람은 확실히 가까워지고 있었다.
옅은 미소를 짓는 디아나를 보던 대공은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디아나의 마음이 완전히 풀릴 때까지, 그리고 적응이 될 때까지 시간이 많이 필요할 것이란 걸 안다.
그렇기에 그는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디아나에게 다가가고 있었다.
“외할아버지께서 벌써 도착해 있으시다더구나. 그러니 우리도 이만 출발하자.”
“네.”
디아나는 대공의 손을 잡고 마차에 올랐다.
* * *
수많은 사람들이 모인 검술 대회 경기장.
원형으로 만들어진 경기장엔 대망의 결승전을 보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평민들은 물론이고 귀족들까지 모였기에 만석이 된 경기장은 사람들의 열기로 후끈했다.
특히 오늘은 10년 만에 말 많은 대공가가 공식적으로 참석하는 날이기 때문에 더욱 시끌시끌했다.
한창 시끄럽던 그때, 경기장에 한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황족의 상징인 찬란한 금발과 검은 제복.
제국 최고의 검사 대공이었다.
웅성거림이 단번에 잦아들고 사람들의 시선이 대공을 향해 모여들었다. 그리고 대공에 이어 나타난 작은 여자아이를 본 순간 모두 숨을 죽였다.
인형보다 더 인형 같은 아름다운 소녀는 문제가 있어 숨기는 것이라던 소문이 무색할 만큼 압도적인 분위기를 풍겼다.
자신의 몸보다 큰 표우를 한 손으로 쓰다듬으며 사뿐사뿐 걸어가는 소녀의 모습은 그 누구도 감히 반박할 수 없는 황족의 고귀함을 풍기고 있었다.
마침내 대공과 대공녀가 따로 마련된 황실의 좌석으로 들어간 순간 경기장에 큰 웅성거림이 퍼졌다.
“와, 방금 대공녀님 봤어?”
“대체 문제가 있다고 씨부렸던 신문사 어디였지? 저렇게 고귀한 대공녀님에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한 거람?”
“그러니까. 희귀 상급 몬스터인 표우를 막 한 손으로 이렇게 쓰다듬는 거 다들 봤지? 하여간 신문사들 말은 믿을 수가 없어요.”
처음 모습을 드러낸 대공녀는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평민들의 소란스러움을 듣는 귀족들 역시 아닌 척했지만 범상치 않았던 대공녀의 모습에 다들 눈을 빛냈다.
같은 시각, 황족을 위해 특별히 마련된 룸으로 들어온 디아나는 이미 도착해 있는 황실 식구들을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디아나, 왔구나.”
황제는 대공이 보이지도 않는다는 듯 지나치며 디아나의 앞에 섰다.
“제국의 태양이신…….”
“인사는 되었단다. 그보다 오늘 너무 예쁘구나. 마치 요정 같아. 아니, 요정보다 우리 디아나가 더 예쁜 거 같지 않습니까, 황후.”
황제의 곁으로 다가온 황후는 디아나를 보며 빙그레 미소를 그렸다.
“네, 그렇습니다. 어디 감히 요정 따위가 디아나에게 범접할 수 있겠습니까. 이렇게 사랑스런 요정은 어느 책에서도 보지 못했습니다.”
하하, 호호 즐겁게 웃는 황후와 황제를 보던 디아나의 볼이 발그레 붉어졌다.
원래 칭찬을 많이 해 주긴 했지만 디아나가 마음을 조금씩 연 뒤론 만날 때마다 찬양을 해 주고 있었다.
특히 황후 폐하의 칭찬은 피비보다 더 화려했기에 쉽게 적응이 되지 않았다.
“……과찬이세요, 폐하, 황후 폐하.”
“과찬이라니, 난 언제나 진실만을 얘기한단다.”
황제가 미소 짓던 그때, 가만히 보고 있던 대공이 슬쩍 디아나의 앞을 막아 주었다.
“그 정도 하시지요, 형님. 디아나가 부담스러워 합니다.”
“맞습니다. 디아나가 얼마나 부담스럽겠습니까. 왜 어린아이를 놀리고 그러세요.”
디아나가 부끄러워 볼을 붉히는 것이 사랑스러워 일부러 더 격하게 칭찬하는 것을 알고 있는 에키온이 한 마디 하자 황제와 황후가 큼, 아닌 척 작은 헛기침을 내뱉었다.
“부담스러웠다면 미안하구나.”
“아니에요, 괜찮아요.”
기분 나쁜 말도 아니었기에 디아나는 대공의 뒤에서 고개를 빼꼼 내밀며 미소를 지었다.
“디아나.”
그때 듣기 좋은 낮은 음성이 디아나를 불렀다.
“할아버지!”
디아나는 후작에게 쪼르르 달려갔다. 자주 놀러 가겠다고 했지만 바쁜 후작 때문에 헤어진 뒤로 얼굴을 처음 보는 것이었다.
반가움에 왈칵 안기자 후작이 허허,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잘 지냈느냐.”
“네! 할아버지는 잘 지내셨어요?”
“그래, 나도 잘 있었단다. 그보다 오늘 정말 예쁘구나.”
“피비가 꾸며 줬어요.”
“정말 예쁘게 꾸며 줬구나.”
후작은 피비에게 미소를 짓곤 디아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리고 곧 자신의 차례만 기다리고 있던 레귤러스가 다가왔다.
“디아나, 나도 있어.”
“레귤러스, 잘 지냈어?”
이젠 서로 말을 놓기로 했다.
미소를 지으며 먼저 묻자 레귤러스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응, 잘 지냈어. 유네스…… 너도 잘 지냈지……?”
레귤러스는 속사포로 답하곤 유네스에게 고개를 돌렸다. 디아나는 반응 없는 유네스를 애정 어린 눈빛으로 보는 레귤러스를 바라보다 자신을 향하는 시선을 느끼곤 고개를 돌렸다.
“오도어 왕자님.”
“영애.”
눈이 마주친 카이루스가 디아나를 향해 다가왔다.
그날 축제에서 헤어지고 처음 보는 것이다. 레귤러스와 에키온은 몇 번 대공 저택으로 놀러 왔지만 카이루스는 오지 않았다.
전해 들은 이야기론 카이루스가 너무 바빠 놀러 올 시간이 없다고 했었다.
“잘 지내셨나요, 영애.”
“네, 전 잘 지냈어요. 그날 축제 때 그렇게 먼저 가서 죄송했어요.”
“아니에요, 그날은…… 일이 많았으니까요. 괜찮아 보이셔서 다행이에요. 그리고 오늘 정말 너무 예쁘시네요.”
눈을 반달로 휘며 웃는 카이루스에 디아나의 금빛 눈동자가 살짝 떨렸다.
안 본 사이 왜인지 카이루스는 더 잘생겨져 있었기 때문이다.
또 얼굴이 빨개질 거 같아 시선을 살짝 피한 디아나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레귤러스에게 바쁘시다고 들었는데 이젠 괜찮으신 건가요?”
“아, 그게…… 사실 이번 검술 대회가 끝나면 전 오도어 왕국으로 돌아간답니다.”
“네?”
놀란 디아나가 눈을 크게 떴다. 오도어 왕국으로 돌아간다니.
물론 카이루스는 오도어 왕국의 왕자이고, 고국으로 돌아가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이제 못 본다니 아쉬움이 밀려들었다.
오랜 시간을 함께 보낸 건 아니지만 카이루스는 디아나를 많이 도와주었으니까.
이제 떠나면 영영 못 보는 걸까.
아쉽고 조금 서럽기까지 했다.
편지를 나누자고 하기엔 그렇게까지 친한 사이가 아니라 말하기가 망설여졌다.
감정을 숨기지 못한 디아나의 얼굴이 시무룩해지자 카이루스의 미소가 더욱 진해졌다.
“영애, 제가 떠나는 게 싫으신가요? 가지 말까요? 영애가 가지 말라고 하면 안 갈게요.”
“네?”
내가 가지 말라고 하면 안 간다고……?
디아나는 당황하던 그때 에키온이 불쑥 두 사람 사이로 끼어들었다.
“뭘 안 가. 카이, 네가 오도어 왕국에서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얼른, 얼른 가야지.”
에키온은 디아나를 완전히 가리며 카이루스의 어깨를 꼭 잡았다.
카이루스가 이제는 익숙한 에키온의 방해에 싱거운 웃음을 흘린 그때 디아나의 목소리가 울렸다.
“왕자님, 제가 가끔 편지…… 보내도 될까요?”
“뭐? 편지?”
망설이다 먼저 묻자 에키온이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디아나는 그저 카이루스만 보고 있었다.
순간 디아나가 한 말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던 카이루스가 느리게 입술을 움직였다.
“저한테 편지를…… 요?”
“아, 불편하시면 안 보낼게요.”
디아나가 오해하고 한 걸음 뒤로 물러나자 카이루스가 에키온을 휙 밀며 황급히 답했다.
“아뇨, 영애. 너무 좋습니다. 제가 먼저 편지를 보내도 될지 물어보려 했었는데 이렇게 먼저 말해 줘서 기쁩니다.”
카이루스가 환하게 웃자 멈칫했던 디아나의 얼굴에도 미소가 서렸다.
“그럼, 자주 편지 주고받아요, 왕자님.”
“그리고 나중에 모든 게 정리되면 영애를 만나러 올게요.”
“네, 왕자님.”
서로를 보며 웃고 있는 두 사람의 모습에 에키온의 얼굴이 당황으로 물들던 그때, 경기장에 뿔 나팔 소리가 크게 울려 퍼졌다.
우와아--!
연이어 들리는 사람들의 함성 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경기장으로 들어서는 두 기사의 모습이 보였다.
“에드윈.”
디아나는 대공가의 검은 제복을 차려입은 에드윈을 보곤 난간으로 다가갔다.
그 순간 에드윈이 고개를 들었다. 왠지 이곳을, 자신을 보는 거 같은 느낌에 디아나는 힘내라고 환한 미소를 지었다.
“에드윈 드로이트, 그리고 필레인 유나스. 엄청난 실력으로 결승전까지 올라온 두 기사님께 박수를 보내드리며 제30회 검술 대회 결승전을 시작하겠습니다!”
사회자의 목소리가 마법구를 통해 경기장을 크게 울리고 드디어 결승전이 시작되었다.
* * *
“우승자는 에드윈 드로이트 경입니다!”
사회자의 목소리가 경기장을 크게 울린 순간 디아나는 환한 미소를 지었다.
“와, 에드윈 진짜 강하다.”
“응! 정말 강해!”
디아나는 신이 나 레귤러스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정말로 에드윈은 엄청 멋있고 강했다.
결승전이 시작되고 단 몇 분 만에 승리했을 정도로 말이다. 너무도 금방, 또 압도적으로 끝나 버린 결승전에 경기장엔 정적이 흘렀었다.
사회자마저 당황했는지 주춤거리다 황급히 경기장으로 내려와 에드윈의 우승을 발표했다.
방금 전 경기를 본 수많은 관중들이 에드윈의 이름을 연호하며 엄청난 함성을 내지르고 있었다.
“저번에 카이루스와 대련했을 때보다 검술 실력이 더 는 거 같은데. 아무리 강하다 해도 작년 우승자를 저렇게 맥도 못 추게 만들다니 말이야.”
어느새 다가온 에키온이 에드윈을 내려다보며 나직이 말했다.
그 말을 들은 디아나가 놀라며 에키온에게 고개를 돌렸다.
“에드윈의 상대자가 작년 우승자예요?”
“응, 작년 검술 대회 우승자야.”
근데 이렇게 쉽게 이기다니.
검술에 대해 잘 몰라도 에드윈이 너무 손쉽게 상대를 몰아갔다는 것은 느낄 수 있었다.
그가 검을 휘두를 때마다 상대는 계속 뒤로 밀려나기만 했으니까.
작년 우승자라면 약한 기사도 아닐 텐데 이렇게 멋지게 우승하니 디아나는 더욱 뿌듯함이 들었다.
“에드윈 정말 대단하다.”
그의 우승이 너무 기분 좋아 자신의 가슴이 다 벅차올랐다.
“어, 황제 폐하?”
에드윈을 보며 예쁘게 웃고 있던 디아나는 경기장으로 모습을 드러낸 황제를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왜 내려가신 거지……?
의아함에 고개를 갸웃하자 에키온이 디아나의 머리를 은근슬쩍 쓰다듬으며 설명해 주었다.
“검술 대회의 우승자에게 폐하께서 직접 검을 수여하시거든.”
“그리고 기사는 그 검으로 자신이 모시는 주인에게 충성의 맹세를 해! 그때가 제일 멋있다니까!”
레귤러스가 크게 외쳤다.
‘주인에게 충성을 맹세? 주인이라면 당연히…….’
디아나의 생각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그 순간 사회자의 목소리가 들렸기 때문이었다.
“에드윈 드로이트 경, 황제 폐하께 무릎을 꿇으십시오.”
에드윈은 황제의 앞에서 한쪽 무릎을 꿇었다.
이윽고 황제의 근엄한 목소리가 경기장을 크게 울렸다.
“에드윈 드로이트 경, 그대는 출중한 실력으로 대회에서 우승하였다. 그 상으로 황제의 인장이 찍힌 검을 하사하니 앞으로도 훌륭한 검술로 제국을 빛내 주길 바란다.”
“감사합니다, 폐하.”
에드윈은 경건한 자세로 황제에게 검을 받았다.
“드로이트 경, 혹 하고 싶은 말이 있는가?”
의례적인 질문이었다. 검을 하사받은 기사에게 대놓고 충성 맹세를 물어보는 것은 강요로 보이기에 에둘러 물어보는 것이었다.
먼저 충성 맹세를 하고 싶다 말할 수 있게 말이다.
검술 대회 우승자들은 실제론 귀족가의 명예를 드높이는 역할이었으니 당연히 모든 기사들은 제 가문에 충성을 맹세한다.
에드윈은 황제에게 천천히 입술을 움직였다.
“폐하께서 허락해 주신다면 우승의 영광을 제 주인이신, 디아나 테라비타 대공녀님께 바치고 싶습니다.”
“그래, 그대의 갸륵한 충성심……뭐……?”
늘 그랬듯 똑같은 말을 하던 황제는 당황하며 말을 멈추었다.
충성의 맹세 때문이 아니라 맹세의 대상에 놀란 것이다.
대공이 아니라 대공녀라니.
이때까지 그 누구도 가문의 수장이 아닌 후계자에게 충성의 맹세를 바친 적이 없었다.
황제의 당황만큼이나 관중들도 놀랐는지 웅성거리는 소리가 순식간에 객석을 가득 메웠다.
황제는 소리 증폭기를 끄고 에드윈에게 낮게 말했다.
“드로이트 경, 자네 방금 대공녀라 말한 것이 맞나?”
“네, 맞습니다, 폐하. 혹 아니 되는 것입니까?”
“아니, 안 될 건 없네.”
충성의 맹세를 하는 것은 기사의 선택이었으니, 황제가 관여할 문제는 아니었다.
그저 전례 없던 일에 당황했을 뿐이었다.
에드윈은 황제의 좁아지는 미간을 보고 나직이 말했다.
“대공녀님을 둘러싼 불결한 소문들이 많습니다. 대공가를 대표하는 제가 대공녀님께 충성을 맹세한다면 더 이상 대공녀님을 의심하는 소문들은 모두 잠식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검술 대회에 출전하면서부터 디아나에게 충성의 맹세를 바치겠다 마음먹었다.
처음부터 그의 작은 주인을 위해 우승하고 싶었으니까.
에드윈의 결연한 얼굴을 내려다보던 황제는 이윽고 증폭기를 켰다.
“그대의 청을 허락하노라.”
황제의 목소리가 울린 그때 디아나도 정신을 차렸다.
에드윈이 대공이 아닌 자신의 이름을 말한 순간 너무 놀라 잠시 멍해지고 말았었다.
“디아나, 디아나! 네가 충성의 맹세를 받는데!”
레귤러스는 마치 자신이 호명된 것처럼 발을 동동 구르며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응…….”
디아나는 아직도 얼떨떨했다.
충성의 맹세는 당연히 아버지가 받을 것이라고 생각했으니까.
왜 내게, 아니 내가 받아도 되는 건가.
“이런 경우는 처음 보지만 뭐 법도에 어긋나는 일은 아니니까……. 그보다 디아나 네가 귀족들에게 제대로 각인되겠어.”
에키온의 말은 귓가를 맴돌기만 했다. 디아나가 당황스러워 어쩔 줄 모르던 그때, 대공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디아나.”
디아나는 자신의 곁으로 다가온 대공을 올려다보았다.
“아버지, 에드윈의 맹세를 제가 받아도 되는 걸까요……?”
“당연히 된단다. 너 역시 대공가의 주인이니까.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말거라. 그저 에드윈이 너에게 주는 선물이라고 편히 생각하렴.”
대공은 갑작스런 일에 놀란 디아나의 마음을 읽은 듯 부드럽게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선물…….”
에드윈의 선물이라 생각하자 불편했던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근데…… 저기로 내려가야 하는 거죠?”
디아나는 관중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을 경기장을 떨리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경기장에 들어설 때부터 사람들의 시선을 받긴 했었지만 경기장의 중앙에 서는 것은 훨씬 더 큰일이었다.
수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받는 일은 아직 디아나에게 익숙하지 않은 일이었기 때문에.
“내가 함께 가 주마. 사람들의 시선은 내가 막아 줄 테니 걱정 말거라. 그 누구도 감히 함부로 불쾌함을 줄 수 없을 것이다.”
대공은 디아나의 손을 꼭 잡으며 나직이 말했다.
고개를 들자 흔들림 없는 금빛 눈동자가 디아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심지 강한 눈빛은 언제나 디아나에게 안도감을 주었다.
대공과 함께한다면 사람들의 시선도 견딜 수 있을 것이다.
“네, 아버지.”
디아나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대공과 함께 경기장으로 내려갔다.
“디아나 테라비타, 대공녀님께 맹세합니다. 제 검이 녹슬고 제 육신이 땅에 묻히는 그날까지 대공녀님만을 지키고 섬기겠노라, 황제 폐하의 검 앞에서 충성을 맹세합니다.”
에드윈은 검 끝을 바닥에 박으며 경건하게 디아나의 앞에 두 무릎을 꿇었다.
동화책에서 보았던 기사의 서약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신성한 진짜 맹세에 디아나의 금빛 눈동자가 경외감으로 살짝 떨렸다.
그때 대공이 괜찮다는 듯 디아나의 등을 살짝 쓰다듬었다. 그의 작은 미소를 본 디아나는 손을 놓고 한 걸음 에드윈에게로 다가갔다.
모두가 숨죽인 고요함 속에서 침을 꼴깍 삼킨 디아나는 대공이 알려 주었던 말을 떠올리며 분홍빛 입술을 열었다.
“에드윈 드로이트, 그대의 충성스런 맹세를 받아들이겠다.”
디아나의 미성이 증폭기를 통해 경기장을 크게 울리고 마침내 우레와 같은 함성이 커다란 경기장을 가득 메웠다.
* * *
태양궁의 만찬장, 검술 대회가 끝나고 황실 식구들은 물론 시아페 후작과 오도어 왕자, 에드윈까지 초대한 작은 만찬이 열리고 있었다.
다들 얼굴에 은은한 미소가 감돌던 그때, 황제의 호쾌한 웃음소리가 만찬장을 크게 울렸다.
“내 황제가 된 이후 이토록 마음에 들었던 검술 대회는 처음이었다. 매년 열리는 행사에 의례적으로 참석하고 축하한 게 다였는데 오늘만큼은 절대 잊히지 않을 거 같구나. 특히 시끄럽게 떠들던 귀족파의 귀족들이 찍소리도 못하고 경기장을 떠나는 것이 아주 장관이었어.”
대공가가 시끄러워진 이후 호시탐탐 황권을 위협할 생각만 하고 있던 귀족파였다.
한데 오늘 경기장에서 대공가의 기사가 우승하고, 대공가의 약점이라 생각했던 디아나가 충성의 맹세를 받은 것이다.
그 모습을 본 제국민들과 귀족들은 연신 환호를 내질렀고, 디아나를 둘러싼 의심 섞인 시선들은 경외심으로 완전히 바뀌었다.
귀족파 수장의 떨떠름한 얼굴을 떠올리던 황제가 만족스런 미소를 그리며 디아나에게 고개를 돌렸다.
“디아나, 오늘 정말 잘했단다. 그렇게 수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받은 건 처음이었을 텐데, 아주 의연하게 잘 했어.”
“맞아. 디아나! 오늘 정말 멋있었어!”
레귤러스가 신난 얼굴로 맞장구를 쳤다. 디아나도 오늘은 기분이 너무 좋았기에 밝은 미소를 지었다.
“감사합니다, 폐하.”
“그보다, 식사가 얼추 끝났으니 아이들은 이만 내보내 주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폐하. 이리 저희와 있는 것보다 화원으로 가 함께 노는 것이 더욱 즐거울 것입니다.”
황후의 말에 황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좋겠군요. 에키온, 카이루스, 너희가 아이들을 데리고 다녀오거라.”
“디아나, 우리 화원에 가자!”
황제의 말이 끝나자마자 레귤러스가 디아나에게로 쪼르르 달려왔다.
그 모습을 본 황제가 순간 어이없다는 듯 싱거운 웃음을 흘렸지만 곧 디아나에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디아나, 혹 레귤러스가 귀찮게 하거든 언제든 버리고 가도 된단다.”
“아버지! 저 디아나 안 괴롭혀요!”
“농담이다, 농담.”
황제는 억울하다는 듯 외치는 레귤러스를 보며 장난스런 미소를 지었다.
“디아나, 밤바람이 차가우니 혹 추워지면 바로 들어오거라.”
대공은 자리에서 일어나는 디아나에게 다정히 말했다.
“네, 다녀올게요.”
대공에게 옅은 미소를 지은 디아나는 레귤러스와 함께 만찬장을 나갔다.
“유네스, 이거 좀 봐. 완전 예쁘지?”
“……냐…….”
황제궁의 화원을 거니는 디아나는 연신 말을 거는 레귤러스에게 무심히 한 번씩 답하는 유네스를 바라보다 쿡, 작은 웃음을 흘렸다.
“유네스랑 레귤러스가 많이 친해진 거 같네. 그동안 유네스가 항상 무시했던 거 같은데.”
에키온은 레귤러스와 유네스를 보며 신기하다는 듯 말했다.
돌이켜보면 유네스는 레귤러스에게 호의적이지 않았다.
딱히 레귤러스라서가 아니라 디아나와 대공 그리고 정말 측근인 피비와 에드윈 빼곤 전부 유네스에게 타인이었고 경계 대상이었다.
매일 보는 대공가의 하녀들에게도 아직 이빨을 드러낼 때가 있는데 레귤러스와는 매일 보는 것도 아닌데 꽤 빨리 친해지고 있었다.
“음…… 그러게요, 점점 유네스가 레귤러스를 편하게 대하는 거 같아요.”
그러고 보니 빨리 친해진 게 신기하긴 했다.
이유가 뭘까, 고민하며 ‘흠……’ 작은 숨을 내쉰 그때 카이루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표우는 주인과 친밀한 관계인 사람에겐 호의적이니까, 아마 영애의 영향을 받은 게 아닐까요?”
디아나는 카이루스에게 고개를 돌렸다.
“저요?”
“네, 요즘 레귤러스와 많이 친해지셨잖아요. 표우는 주인의 감정을 예민하게 느끼니 영애가 레귤러스를 편하게 대하는 것을 느끼고 유네스의 경계심도 풀어진 걸 거예요.”
“아…….”
그러고 보니 최근 들어 레귤러스와 예전보다 더 친하게 지내고 있었다. 서로 이름을 허락했고 또 둘이서만 놀 땐 가끔 편하게 반말도 했다.
그리고 항상 디아나의 곁에 있는 유네스는 그 모습을 전부 다 보았다.
“왕자님의 말이 맞는 거 같아요. 와, 어떻게 표우에 대해서 그렇게 잘 아세요? 그러고 보니 왕자님은 정말 모르는 게 없으신 거 같아요. 검술도 잘하시고 신성력도 쓰시고 정말 책에서 나오는 왕자님 같으세요.”
카이루스의 대단한 점을 손가락을 하나씩 접어 가며 말한 디아나가 눈을 반짝이며 순수하게 감탄했다.
그러자 카이루스의 수려한 얼굴이 보기 드물게 당황으로 물들었다.
“아뇨, 딱히…… 그리 대단한 건…… 없는데…….”
귀까지 새빨개지며 당황하자 에키온이 씨익, 입꼬리를 올렸다.
“대단하지 않다니, 카이루스 네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데. 디아나 말대로 동화 속의 왕자님 같다. 아니, 동화 속보다 더 멋진 왕자님 같아. 그러니 꼭 동화 속의 아름다운 공주님을 만나길 바라. 저기 어디지, 남쪽 슈에트 왕국의 공주님이 그렇게 미인이라고 소문이 자자하던데…….”
에키온은 점점 미간이 좁아지는 카이루스를 보다 디아나에게 고개를 돌렸다.
“디아나, 미인이라 소문난 아름다운 공주님과 카이루스가 결혼하면 너무 잘 어울릴 거 같지?”
동화 속의 결말은 언제나 아름다운 공주와 멋진 왕자의 결혼이었다.
행복한 미래를 그리던 동화의 내용만을 순수하게 떠올린 디아나가 환하게 미소를 그렸다.
“네, 왕자님이 꼭 아름다운 공주님을 만나기를 바랄게요.”
“아…… 감…… 사합니다…… 영애.”
티 없이 맑은 얼굴로 행복을 빌어 주는 디아나에게 카이루스는 느리게 답했다.
어딘지 어색한 미소를 짓고 있는 카이루스의 얼굴에 디아나가 고개를 갸웃했다.
“왕자님, 괜찮으세요? 어디 불편해 보이시는데…….”
그때, 에키온이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황자 저하……?”
“에키온, 식사를 든든히 해서 힘이 넘치는 거 같은데 같이 대련이라도 할래?”
뭐가 그리 즐거운지 한참 웃던 에키온은 나직한 카이루스의 음성에 별안간 웃음을 멈추었다.
“큼, 음, 어우, 아니. 나 힘 하나도 없어. 레귤러스 쟨 또 어디 가는 거야. 난 레귤러스한테 가 봐야 할 거 같아. 그럼 디아나 잘 부탁해, 카이루스.”
에키온은 엉뚱한 대답과 함께 갑자기 레귤러스에게 달려갔다.
뭐지…….
뭔가 자신만 모르는 게 있는 거 같은 상황에 의아함을 느끼던 때, 유네스가 다가왔다.
“냐아--.”
에키온이 레귤러스를 데리고 저 멀리 가 버리자 디아나에게로 돌아온 것이다.
유네스는 디아나의 손을 자신의 머리 위로 올렸다.
마치 칭찬을 바라듯 쓰다듬어 달라는 행동에 디아나는 미소를 지으며 다정히 유네스를 쓰다듬었다.
“냐--.”
기분이 좋아졌는지 꼬리를 살랑 흔든 유네스는 카이루스의 곁으로도 다가갔다.
경계심을 드러내지 않고 카이루스의 다리에 자신의 몸을 스쳤다. 애교까진 아니었지만 호의를 드러내는 행동이었다.
“그러고 보니 유네스는 레귤러스 황자님보다 왕자님을 더 좋아하는 거 같아요.”
레귤러스보다 만난 횟수도 훨씬 적은데 유네스는 카이루스에게 항상 호의적이었다.
“신성력 때문일 거예요, 신성력은 자연 친화적인 힘이 있거든요.”
“그렇군요.”
카이루스에게 영역 표시를 하듯 냄새를 묻힌 유네스가 디아나에게 돌아와 자리를 잡았다.
“왕자님이 떠나시면 왠지 유네스도 그리워할 거 같아요. 언제쯤 왕국으로 돌아가세요?”
“아마 모레 갈 거 같아요.”
“모레요?”
생각보다 빠른 날짜에 놀란 디아나가 눈을 크게 떴다.
“오랜 시간 떠나 있었던 터라…… 돌아가서 해야 할 일이 많거든요.”
카이루스는 디아나를 보며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디아나는 수려한 그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다 조심스럽게 물었다.
“……음…… 배웅하러 와도 될까요?”
“물론이죠, 영애. 안 오실 생각이셨나요? 서운하네요.”
카이루스가 장난으로 시무룩한 얼굴을 하자, 디아나는 당황하다 이윽고 진지한 얼굴로 답했다.
“꼭 올게요, 왕자님.”
사뭇 결연하기까지 한 디아나의 표정에 카이루스는 즐거운 웃음을 터뜨렸다.
“농담이에요, 영애. 일이 있으시면 꼭 안 오셔도 돼요. 어차피 또 만날 테니까요.”
다정한 눈빛으로 웃는 그의 모습에 디아나의 금빛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
주변에 잘생긴 사람들이 많았지만 카이루스의 잘생김은 항상 적응될 듯 적응되지 않았다.
뭔가 카이루스와 있으면 가끔 기분이 이렇게 설명할 수 없게 이상해질 때가 있다.
레귤러스와 놀 때와는 달리 편안한 와중에 가끔씩 이렇게 가슴이 쿵쿵 뛰었다.
아직은 낯설기만 한 생경한 감정이 무엇인지 모르는 디아나는 눈을 도르륵 굴리다 카이루스를 바라보았다.
“음, 모레면 바쁜 일 없으니 괜찮아요. 그리고 편지…… 자주 해도 될까요?”
“당연하죠, 영애가 귀찮아할 만큼 편지를 자주 보낼 테니 부디 귀찮다고 외면하지 말아 주세요.”
“꼭 다 답장할게요.”
“저도 꼭 다시 제국으로 돌아올게요, 영애.”
마치 약속을 말하듯 카이루스의 검은 눈동자가 밤하늘 아래 빛났다.
왕국에서 도망친 것이란 말을 기억하고 있는 디아나는 그가 조금이라도 힘을 내길 바라며 상냥한 미소를 그렸다.
“네, 왕자님 돌아오시는 날을 꼭 기다릴게요.”
“반드시 돌아와 영애를 지켜 드릴게요.”
“네?”
“디아나!”
언제 돌아왔는지 자신을 크게 부르는 에키온의 목소리에 카이루스의 말을 미처 듣지 못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영애.”
카이루스가 눈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가볍게 내저었다. 그에 잠시 멍해진 디아나는 자신을 또 한 번 부르는 레귤러스의 목소리에 그제야 고개를 돌렸다.
카이루스는 이제 오랫동안 보지 못할 디아나의 뒷모습을 눈에 담듯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