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권-13화 (13/16)

목차

13

14

15

16

13

* * *

“1황자 저하께서 아직 계실까요?”

“음, 시간상으로 있을 거 같긴 한데, 잘 모르겠어. 왜? 형님의 검술 대련이 보고 싶어?”

함께 연무장으로 향하고 있던 레귤러스는 디아나에게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사실 2황자의 검술 대련보단 1황자의 검술 대련이 보고 싶긴 했다.

아무래도 검을 제대로 잡지도 못할 거 같은 2황자보단 1황자 쪽이 재밌을 것이다.

하지만 솔직히 말하면 실망하겠지.

디아나는 자신을 빤히 보는 레귤러스를 보며 어색한 미소를 그렸다.

“꼭…… 검술 대련이 보고 싶다기보다 1황자 저하를 뵙는 게 좋으니까요.”

“그런 거라면 걱정 마. 검술 대련이 끝난다고 바로 궁으로 돌아가시는 게 아니거든. 기사단에서 시간을 좀 보내시니까 우리가 갈 때까진 당연히 있을 거야.”

“다행이네요.”

“근데 디아나.”

“네?”

“내 검술 대련은 정말 볼 게 없을 거야. 난 아직 베기도 다 배우지 못했거든. 실망할 수도 있어.”

레귤러스는 꼬리가 축 처진 강아지 같은 모습으로 눈을 도르륵 굴렸다.

자신이 실망할까 걱정된다는 모습에 디아나는 미소를 지었다.

“아니에요, 전 목검을 들지도 못하는 걸요. 저보다 훨씬 대단해요.”

“음, 그건 아냐. 디아나에게는 검술 따위 필요 없을 만큼 강한 정령술이 있잖아. 디아나 네가 훨씬 대단해.”

레귤러스의 진지한 얼굴에 디아나는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레귤러스는 고민을 하듯 미간을 좁히다 입을 열었다.

“음, 내 연습은 진짜 재미가 없을 거고…… 나 말고 디아나 네 기사의 대련을 보는 게 어때?”

“에드윈이요?”

디아나는 당황스런 얼굴로 뒤따라 온 에드윈을 바라보았다.

에드윈 역시 갑자기 자신을 향하는 시선들에 당황한 얼굴이었다.

레귤러스는 에드윈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제국에서 제일 강한 기사들이 모여 있다는 대공가의 기사잖아. 나랑은 비교도 안 되는 진짜 검술 대련을 보여 줄 수 있을 거야. 내가 저번에 기사들한테 들었는데 황궁 기사들도 대공가의 기사들한테 관심이 엄청 많댔어. 에드윈 경이 대련하자고 하면 아마 황궁 기사들도 서로 하고 싶다고 할걸?”

레귤러스는 에드윈의 대련이 보고 싶은지 눈을 반짝였지만 디아나는 곤란한 얼굴을 했다.

기사들의 예의에 대해 자세히 아는 건 없지만 그래도 이렇게 갑자기 대련을 해 보라 하면 기분이 나쁠 수도 있을 거 같았다.

“……그래도 이렇게 갑자기는 에드윈에게 실례인 거 같아요, 저하.”

“아…… 그런가. 내 대련은 정말 볼 게 없어서……. 기분 나빴다면 미안해, 에드윈 경, 디아나.”

레귤러스는 디아나의 말에 빠르게 에드윈에게 사과했다.

“괜찮아요, 저하.”

성격이 급하긴 해도 레귤러스가 나쁜 성격이 아니란 걸 알기에 디아나는 사과를 받아들였다.

에드윈 역시 2황자의 사과에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

“괜찮습니다, 저하. 그리고 아가씨께서 원하신다면 얼마든지 대련을 할 수 있습니다.”

“아냐, 괜히 나 때문에 무리할 필요 없어. 갑자기 대련하면 힘들잖아.”

디아나는 진심으로 걱정된다는 듯 심각한 얼굴로 눈썹을 모았다.

에드윈은 디아나에게 매끄럽게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걱정 마세요. 기사는 언제나 검을 쓸 준비가 되어 있답니다, 아가씨. 그리고 아가씨께서 제 검술 실력이 보고 싶다는 건 제게 언제나 영광스런 일이랍니다.”

“그렇대, 디아나.”

레귤러스가 디아나를 부추기듯 작게 속삭였다.

에드윈이 정말 괜찮은 거라면 디아나도 보고 싶긴 했다.

에드윈이 검을 쓰는 모습은 무척 멋있을 거 같았으니까.

“에드윈이 정말 괜찮다면 보고 싶어.”

“네, 아가씨. 그럼 황자 저하의 수업이 끝나고 대련하도록 하죠.”

“아, 굳이 내 수업은 안 해도 되는데…….”

“전 황자 저하의 모습도 보고 싶은 걸요?”

“……그래. 그럼 어쩔 수 없지.”

떨떠름한 얼굴을 숨기지 못하는 레귤러스를 보며 디아나는 웃음을 터뜨렸다.

디아나의 맑은 웃음에 레귤러스의 입가에도 미소가 서렸다.

그렇게 함께 이야기를 나누며 연무장으로 도착한 순간 다급한 외침이 디아나의 귀를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위험해!”

“으악!”

“아가씨!”

레귤러스와 에드윈의 목소리가 연이어 들리고 디아나는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무언가를 보고 눈을 크게 떴다.

에드윈이 자신을 감싸 안은 순간 몸속에서 힘이 솟구쳤다.

그리고 거센 바람이 디아나의 머리칼을 흩날렸다.

한차례 휘몰아쳤던 바람이 사라지고 디아나는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아이야, 괜찮으냐.”

에드윈의 품에서 나오자 자신의 앞으로 작은 검은 새가 다가왔다. 검은 새의 금빛 눈동자가 디아나를 걱정하듯 바라보고 있었다.

“전 괜찮아요, 방금 바람은 가디언님의 힘인 건가요?”

디아나는 헝클어진 머리칼을 귀 뒤로 넘기며 물었다.

“나의 힘이고 너의 힘이기도 하지. 그보다 다친 곳이 없어 다행이구나.”

“……가디언……? 그 전설 속의 가디언……?”

레귤러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디아나는 아차, 하며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하지만 이미 레귤러스의 시선은 가디언에게 박히듯 닿아 있었다.

“흠, 너도 에이루스의 후손이구나. 아직 의식을 치르진 않았군.”

“정말, 가디언…… 이에요?”

레귤러스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

가디언은 레귤러스의 앞으로 날아갔다. 그리고 약하게 날개를 펄럭였다. 그러자 땅에 있던 작은 잡초가 무럭무럭 자라 레귤러스의 허리까지 올라왔다.

“……와, 진짜 가디언…… 와…….”

레귤러스는 자라난 식물을 조심스런 손길로 어루만지며 입을 다물지 못했다.

경악과 감탄이 섞인 표정으로 무어라 말을 내뱉지 못하는 레귤러스에게 가디언은 차분히 말했다.

“넌 토양과 친화적인 힘을 가지고 있구나. 나중에 의식을 치른다면 흙을 다루는 힘을 가지게 될 것이다.”

“흙을 다루는 힘이라니. 근데…… 가디언님이 어떻게 여기에……. 깊은 잠을 자고 있다고 책에 적혀 있었는데…….”

레귤러스는 멍하니 중얼거리다 갑자기 디아나에게 고개를 휙 돌렸다.

“설마…… 디아나 네가 가디언님을 부른 거야? 그럼 방금 엄청 세게 불었던 그 바람도 형의 정령술이 아니라 네 힘인 거야?”

가디언을 바라보는 신기한 눈빛과 별다르지 않는 반짝이는 눈빛으로 레귤러스는 디아나를 바라보았다.

“아니…… 그게…….”

디아나는 당황스런 눈빛으로 가디언을 바라보았다.

레귤러스에게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도 감이 오지 않았고 지금 이렇게 가디언이 모습을 드러내도 되는 건지도 불안했다.

다른 사람들이 막 봐도 되는 건가.

디아나가 불안한 눈빛으로 주변을 훑어보았지만 가디언은 아무렇지 않은 모습으로 디아나의 어깨에 안착했다.

“불안해하지 않아도 된다.”

디아나의 심리를 느낀 듯 가디언이 말했다.

신기하게도 가디언의 한마디가 디아나의 불안했던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혔다. 그때, 멍하니 연무장에 서 있던 에키온과 카이루스가 디아나를 향해 달려왔다.

“디아나, 괜찮아? 다친 곳은 없어? 미안하다, 네가 오는지 미처 보지 못했어. 정말 목검에 부딪힌 곳은 없는 거야?”

에키온은 많이 놀란 듯 처음 보는 불안해 보이는 표정을 지었다.

자신을 향해 날아왔던 것이 목검이었던 듯했다. 하지만 디아나는 그게 무엇인지 제대로 보기도 전에 에드윈에게 안겼고, 거센 바람이 휘몰아쳤었다.

제대로 보지도 못했으니 당연히 닿지도 않았다.

“전 괜찮아요, 저하.”

“휴…… 다행이다. 많이 놀랐을 텐데. 다시 한번 정말 미안해, 디아나.”

“전 정말 괜찮으니 걱정 마세요.”

디아나가 살짝 미소 짓자 그제야 에키온의 불안했던 얼굴이 풀렸다.

혹시나 조금의 상처라도 났을까 사색이 되었던 에키온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디아나의 어깨에 앉은 검은 매와 시선이 마주쳤다.

“가디언님, 처음 뵙겠습니다. 에키온 테라비타라고 합니다.”

레귤러스는 몰랐지만 에키온은 황제에게 디아나의 상황에 대해 이미 들었다.

가디언과 어둠의 정령이 깨어났다는 것을 말이다.

요즘 그가 검술에 매진하고 있는 이유였다.

“감정을 다스리지 못하면 정령술을 조절할 수 없다. 특히 검을 들었을 땐 더욱 냉철한 판단이 필요하지. 다루지 못하는 힘은 위험을 자초할 뿐이다.”

가디언의 말에 에키언은 머쓱한 얼굴을 감추지 못했다.

가디언은 알고 있었다.

방금 목검이 디아나를 향해 날아든 이유가 카이루스와 대련하다 무리하게 힘을 쓴 에키온 때문이란 걸.

한 번도 정령술을 무리하게 쓴 적이 없었다. 하지만 오늘은 카이루스의 신성력이 어느 정도인지 보고 싶어 무리하게 힘을 썼던 것이다.

어둠의 정령이 디아나를 노리는 이상 많은 힘이 필요했고, 카이루스의 신성력이 강할수록 도움이 될 것이었다.

하지만 대련을 하다 보니 검술만으론 카이루스의 힘을 완전히 끌어낼 수 없어 에키온은 무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힘을 썼다.

하필 딱 그 순간에 디아나가 나타날 줄이야.

아무도 없는 연무장이라 안심한 것이 무색했던 순간이었다.

“아무도 오지 않을 거라 생각해 방심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죄송할 건 없다. 아직 힘을 다루는 것이 미숙한 건 어쩔 수 없는 것이니.”

에키온은 처음 마주한 전설의 가디언과 처음 연무장을 찾은 디아나에게 부끄러운 모습을 보인 거 같아 얼굴이 뜨거웠다.

“형, 얼굴이 붉어졌어.”

“안 붉어. 네가 잘못 본 거야, 레귤러스.”

눈치 없이 해맑은 동생의 머리를 억센 손길로 쓰다듬던 그때, 쿡, 카이루스의 작은 웃음소리가 울렸다.

순간 디아나의 어깨에 가만히 앉아 있던 가디언이 날아올라 카이루스에게 다가갔다.

카이루스는 자신을 직시하는 가디언의 황금빛 눈동자에 긴장으로 얼굴을 굳혔다.

“흠, 넌…… 누구지? 평범한 인간은 아닌 거 같은데.”

가디언의 말에 디아나와 에키온, 레귤러스의 시선이 카이루스를 향했다.

카이루스는 신비로운 가디언의 목소리에 어깨를 움찔했다.

전설 속에나 나오던 가디언을 마주하고 있다는 게 잘 실감나지 않았다.

“……신성국의 왕자 카이루스 오도어입니다.”

“신성국? 내가 잠든 이후로 생겨난 건가? 그보다 너에게서 빛의 힘이 느껴지는데, 빛의 나무와 관련 있는 건가?”

“……네, 제 조상께서 빛의 나무의 힘을 받으셨습니다.”

“그렇군, 빛의 나무라면 내가 있던 시절에도 있었지……. 그보다 너, 누굴 닮은 거 같은데. 너의 조상이 내 시대에도 살아 있었던 건가. 너무 오랜 시간을 잠들어 있어서인지 에이루스 말곤 정확히 기억나는 자들이 없군.”

가디언은 카이루스를 빤히 바라보며 알 수 없는 말들을 중얼거렸다. 하지만 카이루스에게서 쉽게 시선을 거두지 않고 한참을 바라보았다.

작은 새임이 분명하건만 번뜩이는 황금안은 카이루스를 압도하고 있었다.

한없이 큰 태산 앞에 서 있는 기분.

가디언의 매서운 눈빛에 카이루스의 등줄기에 땀이 찼다.

숨이 턱 막힐 거 같던 때 디아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가디언님…….”

가디언이 카이루스를 바라볼수록 디아나는 점점 빠르게 뛰는 심장박동을 감당하기 힘들었다.

“이런, 내가 과거를 돌이키느라 너의 힘을 무리하게 썼구나.”

카이루스에게서 시선을 거둔 가디언은 디아나에게로 다가왔다. 그러곤 디아나의 이마에 부리를 갖다 댔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몸 안으로 따뜻한 기운이 쫙 퍼지며 터질 듯이 뛰던 심장이 차분히 가라앉았다.

“이제 괜찮을 것이다, 아이야. 아직 내가 힘을 완전히 되찾지 못해 이런 것이란다. 정령석을 빨리 되찾으면 좋으련만…… 난 이만 정령계로 돌아가야 할 거 같구나. 이곳에서 과거의 기억들을 확인하면 네 몸에 무리가 갈 테니……. 하지만 걱정 말거라. 보이지 않을 뿐이지 난 언제나 너와 함께 있단다.”

“네, 가디언님.”

가디언은 살랑이는 바람을 남기고 모습을 감추었다.

“오늘도 뵐 줄은 몰랐는데. 이렇게 보니 더 반갑습니다, 영애.”

디아나는 자신에게 한 걸음 다가온 카이루스를 보았다.

“저도요, 왕자님.”

“그리고 오늘 정말 예쁘십니다.”

“아…….”

카이루스의 수려한 얼굴에 그려지는 그림 같은 미소에 디아나는 눈을 도르륵 굴렸다.

오늘 예쁘단 말을 한두 번 들은 것도 아닌데 이상하게 카이루스가 예쁘다고 하니 얼굴이 홧홧해졌다.

부끄러워 손을 꼼지락거리던 때, 갑자기 카이루스의 몸이 옆으로 훅 밀렸다.

“어이쿠, 미안. 발을 헛디뎠네.”

에키온은 넘어질 뻔했는지 몸을 비틀거렸다.

“괜찮으세요?”

디아나가 놀라 묻자 에키온은 괜찮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아, 괜찮아, 디아나. 그냥 잠시 발을 헛디딘 것뿐이야. 하하.”

“……괜찮다니, 참 다행이네.”

카이루스는 에키온이 밀쳤던 어깨를 툭툭 털었다.

“아유, 미안하다. 갑자기 왜 발이 꼬였는지, 네가 옆에 없었으면 큰일 날 뻔했어.”

에키온이 씨익 미소를 그리자 카이루스는 인상을 구겼다.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묘한 분위기에 고개를 갸웃하던 디아나는 에키온과 시선이 마주쳤다.

에키온은 디아나를 가만히 바라보다 이내 환한 미소를 그렸다.

“그보다 디아나, 오늘 정말 너무 예쁘다. 미래가 아주 걱정될 정도야.”

미래가 걱정된다는 말은 이해하지 못했지만 칭찬의 말인 듯해 디아나는 입꼬리를 올렸다.

“감사해요, 저하.”

“근데 갑자기 연무장엔 어쩐 일이니?”

“아, 그게, 2황자 저하께서 검술 연습하시는 것도 보고, 기사들의 연무장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서 구경 왔어요. 궁에서 가만히 있으려니 심심해서요.”

“하긴, 갑작스럽게 지내게 됐으니 네 물건을 챙겨 올 새도 없었지.”

에키온의 말이 끝나자마자 카이루스가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

“영애, 황궁에서 지내시는 건가요?”

“네, 왕자님. 일이 좀…… 생겨서 당분간 황궁에서 지내기로 했어요.”

“그렇군요.”

카이루스는 기분 좋은 듯 매끄럽게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갑자기 밝아진 카이루스의 얼굴에 디아나는 의아함을 느꼈다.

내 말에…… 기분 좋을 만한 게 있었던가.

“디아나가 황궁에서 지내긴 하겠지만, 디아나는 아주 바쁘게 지낼 거야. 틈날 때마다 나랑 레귤러스가 궁에 들를 거거든. 그래서 디아나는 다른 사람을 만날 시간이 없어.”

에키온은 미소를 짓고 있는 카이루스를 샐쭉한 눈빛으로 보며 말했다.

“그래, 그래. 알았어.”

카이루스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에키온의 얼굴이 구겨졌다.

방금 전처럼, 두 사람 사이에 알 수 없는 신경전 같은 게 느껴졌다.

그러고 보니, 어제 레귤러스 황자의 궁에서도 이랬던 거 같은데……. 엄청 친한 친구 사이라고 했었는데 다툰 건가.

디아나는 두 사람을 번갈아 보다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 두 분 혹시 싸우신 건가요? 좋지 못한 상황이라면 전 이만 돌아갈게요. 연무장은 다음에 구경해도 돼요.”

“아냐, 디아나!”

“아, 아닙니다, 영애. 싸운 적 없습니다.”

디아나가 돌아가려는 듯하자 에키온과 카이루스가 황급히 외쳤다.

“정말…… 싸우신 거 아니에요? 근데 어제도 그렇고 지금도 왠지 사이가 안 좋아 보이세요.”

디아나는 걱정스런 눈빛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그러게……. 좀 그런 거 같기도 하고…….”

디아나의 곁에 있던 레귤러스까지 거들자 에키온은 당황하다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싸우긴 뭘 싸워. 하나도 안 싸웠어. 우리가 얼마나 사이가 좋은데. 걱정 말렴, 디아나, 레귤러스.”

둘 다 사람들의 감정에 기민하게 반응하는 아이들이었다. 디아나와 레귤러스가 눈치를 볼까 에키온은 과장된 웃음과 함께 카이루스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우리 사이 아무 문제없지, 카이?”

“……물론이지. 대련을 하느라 잠시 분위기가 날카로웠나 보네요. 저흰 아무 문제없으니 돌아가지 않으셔도 됩니다, 영애.”

카이루스는 디아나에게 부드럽게 미소를 그렸다. 어딘지 그의 미소가 어색해 보였지만 더 물어보기도 그래 디아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형님, 기사들은 다 어디 갔나요?”

“아, 내가 카이루스와 대련을 한다고 다들 물렸다. 네가 갑자기 검술 연습을 하러 올 줄은 몰랐거든. 원래 연무장엔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잖아.”

“……가끔씩은 왔었어요.”

레귤러스는 부끄러운지 디아나를 힐긋 보며 불만스런 눈빛으로 에키온을 올려다보았다.

에키온은 귀여운 동생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이미 기사단은 물렸으니, 오늘은 그냥 내가 네 검술 수업을 봐줄게.”

“형님이요?”

“그래, 싫으냐?”

“싫은 건 아니지만…… 그럼 에드윈 경의 대련을 볼 순 없겠네요.”

“에드윈 경의 대련?”

에키온의 시선이 디아나의 곁에 서 있는 에드윈을 향했다.

“아가씨를 호위하는 에드윈 드로이트라고 합니다, 저하.”

하늘빛 머리칼과 녹빛 눈동자를 가진 꽤 잘생긴 기사는 부드러운 호남형이었지만 다부진 몸은 검을 허투루 배운 거 같은 분위기가 아니었다.

디아나가 후작가에서 지내고 있긴 하지만 후작가의 기사 같진 않은데…….

에드윈은 황궁의 정예 기사들과 비슷한 분위기를 가지고 있었다.

“혹 대공가의 기사인 건가?”

“네, 맞습니다, 저하.”

“흠…… 그렇단 말이지…….”

에키온은 에드윈을 보며 금빛 눈동자를 반짝였다. 아까부터 다른 사람은 보이지도 않는다는 듯 디아나만 보고 있는 카이루스를 흘긋 본 에키온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기사들은 이미 물렸지만 에드윈 경의 상대가 될 만한 사람이 있네. 카이루스, 네가 에드윈 경과 대련을 해 보면 어때?”

“뭐?”

카이루스는 에키온을 휙 돌아보았다.

“갑자기 무슨 말이야, 에키온. 기사와 대련이라니.”

카이루스는 형형한 눈빛으로 에키온을 바라보았다. 디아나만 없었다면 이런 차분한 말이 아닌 미쳤냐는 말부터 나왔을 것이다.

에키온의 제안은 그만큼 갑작스럽고 어처구니가 없었으니까.

카이루스의 검술이 에키온보단 월등하긴 하지만 에드윈은 제국에서 가장 강한 검사들이 모인다는 대공가의 기사였다.

거기다 전장을 겪은 기사이기도 했다. 굳이 대련해 보지 않아도 검술만으론 이길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에키온은 카이루스의 눈빛은 모르겠다는 듯 더욱 짙은 미소를 지었다.

“아니, 이미 물러간 기사들을 또 굳이 데려와 대련을 시키는 것보단 여기 있는 네가 하는 게 낫잖아. 그리고…… 디아나도 한껏 기대하고 왔을 텐데, 그냥 돌아가면 얼마나 실망스럽겠어.”

“아, 전 괜찮…….”

“아냐, 디아나. 이왕 왔는데 검 쓰는 거 구경하고 가야지. 카이루스에게는 어려운 일도 아닌걸. 그치?”

디아나의 말을 끊은 에키온은 카이루스를 보며 눈웃음을 지었다.

카이루스가 상당히 어이없을 거란 건 에키온도 알았지만 대련에서 지고 난 심통이기도 했고, 그의 정령술도 막아 냈던 카이루스의 검술이 얼마나 성장한 건지 궁금했다.

에드윈 같은 실력자가 상대라면…… 아마 카이루스도 자신의 실력을 모두 드러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에키온의 말에 카이루스의 말문이 막혔다. 일부러 그런 것이 분명했다.

카이루스는 반짝이는 에키온의 눈빛에 결국 졌다는 듯 짧은 한숨을 내쉬며 에드윈을 보았다.

“에드윈 경, 괜찮다면 나와 대련해주겠어?”

“……영광입니다, 왕자님.”

대련용 검을 고르는 에드윈에게 다가간 디아나는 작은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에드윈.”

“네, 아가씨.”

“불편하다면 대련 안 해도 돼. 음…… 에드윈이랑 같은 기사도 아니고…… 왕자님이니까.”

혹시라도 카이루스가 다치면 에드윈이 혼날까 걱정되었다.

“내가 지금이라도 황자 저하께 몸이 안 좋아서 이만 돌아가야 할 거 같다고 할게.”

다른 사람이 듣지 못하게 디아나는 에드윈에게 작게 속삭였다. 지금 와서 못 하겠다고 하면 기사인 에드윈의 명예가 실추될 거 같아 나름 고민해서 떠올린 계책이었다.

에드윈은 자기만 믿으라는 듯 결연한 디아나의 눈빛에 결국 웃음이 터졌다.

“에드윈?”

“하하, 아, 죄송합니다, 아가씨. 너무 귀여우셔서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어요.”

“귀엽다니, 엄청 중요한 얘기였잖아.”

기껏 고민한 계책인데.

디아나가 샐쭉한 표정을 짓자 에드윈이 웃음을 거두며 미안한 얼굴을 했다.

“아가씨 말씀을 가볍게 여긴 건 아닙니다. 저를 걱정해 주시는 아가씨의 모습이 너무 귀여워서 그만…… 기분 나쁘셨다면 죄송합니다.”

“아니야…… 난 진짜 에드윈이 걱정돼서, 내가 지금 가서 황자 저하와 왕자님께 말할까?”

디아나가 다시 눈을 반짝이자 에드윈은 다정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아뇨, 전 괜찮습니다.”

“진짜 괜찮겠어?”

“네, 제가 먼저 대련을 신청했다면 문제가 좀 있었겠지만 왕자님이 먼저 대련을 하자 말씀해 주신 거라 대련 중에 부상이 있어도 암묵적으로 넘어가게 된답니다. 먼저 대련을 신청해 놓고 나중에 다쳤다고 벌을 내리면 왕자님의 명예가 실추되시거든요.”

“아…… 그렇구나.”

“네, 그러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오도어 왕자님이 나중에 다른 말 하실 분도 아닌 거 같고요.”

“그래, 그럼…… 다치지 마, 에드윈.”

“네, 절대 안 다치겠습니다.”

“디아나, 무슨 일 있니?”

“아뇨. 그럼 난 이만 가 볼게, 에드윈.”

“네.”

에키온에게 돌아가려던 디아나는 멈칫하며 에드윈에게 말했다.

“……에드윈, 왕자님도 안 다치게 해줘.”

“네? ……아, 알겠습니다, 아가씨.”

놀란 듯 눈이 커졌던 에드윈은 이내 미소를 그렸다.

디아나가 1황자의 곁에 자리 잡자, 에드윈은 가벼운 장검을 손에 쥐곤 준비를 마친 카이루스에게로 걸어갔다.

“에드윈 경, 잘 부탁해.”

“저야말로 잘 부탁드립니다. 진검으로 하는 승부인 만큼 왕자님의 모든 능력을 사용하셔도 됩니다.”

에드윈은 카이루스에게 신성력을 써도 좋다고 말한 것이었다.

검술만으론 상대가 안 될 것이란 건 카이루스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여유가 느껴지는 에드윈의 모습은 카이루스의 억눌려 있던 승부욕을 자극했다.

사실 디아나가 에드윈에게 무어라 속삭이던 때부터 그의 승부욕이 머리를 들기 시작했었다.

이기고 싶어.

카이루스는 디아나가 있는 곳을 힐끔 바라보곤 검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카이루스는 하얀 기운이 서린 검을 망설임 없이 에드윈을 향해 휘둘렀다.

챙-!

진검이 부딪히는 날카로운 소리가 연무장을 울렸다.

에드윈은 카이루스의 공격을 여유롭게 막았지만 생각보다 강한 힘에 놀란 눈빛을 했다.

“……검을 오래 배우셨나 봅니다, 왕자님.”

생각해 보면 암살자들의 습격이 있던 날에도 기사들 못지않게 암살자들을 막아 냈었다.

에드윈은 가볍게 받아 낼 상대는 아니란 생각에 미소를 머금었던 얼굴을 진지하게 굳혔다.

“어설프게 배우진 않았어.”

카이루스가 검에 힘을 더욱 싣자 에드윈이 한 발 뒤로 밀렸다.

에드윈의 검에서 힘이 살짝 빠진 순간 카이루스는 빈틈을 찾은 듯 검의 방향을 바꾸었다.

하지만 빈틈을 보았다 여긴 건 그의 착각이라는 듯 카이루스가 검을 들자마자 에드윈이 공격해 왔다.

챙-챙—챙--!

에드윈은 조금의 여유도 주지 않고 카이루스를 밀어붙였다.

“윽…….”

카이루스는 맹렬한 에드윈의 검을 쉴 틈 없이 막아 냈다. 하지만 한 번 검이 부딪힐 때마다 확연히 느껴지는 힘 차이가 점점 그를 뒤로 밀려나게 만들었다.

이때까지 에키온이나 황궁의 기사들과 했던 대련과는 차원이 달랐다.

전장에서 맞붙는 듯한 실전 같은 대련에 카이루스의 반듯한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막아 내기만 하시면 질 겁니다.”

허리를 찌르고 들어오는 검을 막은 순간 에드윈의 낮은 음성이 울렸다.

“……!”

카이루스와 에드윈의 눈이 마주쳤다.

대련을 시작할 때의 온화한 느낌은 더 이상 찾아볼 수 없었다. 카이루스의 목에 칼을 꽂을 듯 번뜩이는 에드윈의 눈빛에 카이루스의 흑빛 눈동자가 짙어졌다.

검술만으론, 절대 이길 수 없다.

카이루스는 속에서 뜨거워지는 힘을 느꼈다.

“질 생각은 없어.”

카이루스의 흑빛 눈동자가 맹수처럼 번뜩였다.

그의 의지를 느낀 신성력이 검을 휘감고 검을 둘러싼 빛이 눈이 부실 만큼 강해졌다.

“으윽.”

갑자기 무거워지는 카이루스의 검에 에드윈의 얼굴이 구겨진 순간 카이루스의 검이 에드윈의 검을 받아치며 큰 곡선을 그렸다.

카이루스의 검에서 강한 힘이 폭발하듯 뿜어져 나오고 힘을 정면으로 받은 에드윈의 몸이 거세게 밀쳐졌다.

“신성력을 검기처럼 쓰다니…….”

자신의 예상보다 훨씬 강한 카이루스의 신성력에 에키온은 멍하니 중얼거렸다.

신성력을 저 정도로 다룰 수 있는 건 신성왕국의 왕들이나 가능했다.

아니, 왕이라 할지라도 고작 15살의 나이에 신성력을 검기처럼 썼다고 한 사람은 없었다.

지금 나이에 이 정도면 앞으론 더 강해질 것이다.

카이루스를 바라보는 에키온의 금빛 눈동자가 흔들린 순간 디아나가 외쳤다.

“에드윈!”

바닥을 두 번이나 구르는 에드윈의 모습에 놀란 디아나는 당장 연무장으로 달려가려 했다.

레귤러스가 잡지만 않았다면.

“디아나, 진검으로 하는 대련 중엔 함부로 끼어들면 안 돼…….”

“아…….”

다가가지 못한 디아나가 발을 동동거린 때 넘어졌던 에드윈이 일어났다.

머리에 묻은 흙을 털 듯 거칠게 쓸어넘긴 그는 카이루스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왕자님의 신성력이…… 이렇게 강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제대로 대련을 했다간 제 몸이 성한 채로 끝나진 않을 거 같아 이쯤에서 기권해야겠습니다. 제 주인께서 절대 다치지 말라 하셨거든요.”

싸울 수는 있었지만 다치지 않는단 보장이 없었다.

카이루스의 신성력은 강했으니까.

자신이 쓴 강한 힘에 스스로 놀랐던 카이루스는 에드윈의 말에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묘하게 기분이 나빠 눈썹이 꿈틀거렸다.

다치지 말라 한 주인은 디아나일 테고, 공격을 당했음에도 에드윈은 여유가 있어 보였다.

성인인 에드윈과 아직은 소년인 그와의 어쩔 수 없는 차이겠지만 어쩐지 영 개운하지 못했다.

기권이면 분명 자신이 이긴 것임에도 이긴 거 같지 않은 찝찝한 마음.

“……이쯤에서 그만두는 게 좋겠어.”

더 대련을 이어 가면 카이루스의 힘도 바닥이 날 테고 연무장도 성하지 못할 테니 그만두는 게 맞았다.

“영광이었습니다, 왕자님.”

“나도, 좋은 경험이었어. 고마워.”

서로에게 인사를 하자마자 발을 동동거리고 있던 디아나가 에드윈에게로 달려왔다.

“에드윈, 괜찮아? 다친 데 없어?”

“전 괜찮습니다, 아가씨. 놀라게 해 드려 죄송합니다.”

“아니야, 다친 데가 없다니 다행이야.”

에드윈의 상냥한 미소를 본 디아나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난 검술 대련이랑 잘 안 맞나 봐. 누가 다치기라도 할까 봐 엄청 불안했어.”

디아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대련이 시작되자 디아나는 기대했던 마음과 달리 혹시라도 두 사람 중 누군가 다칠까 마음이 초조했었다. 손바닥에 땀이 가득 찰 만큼 말이다.

에드윈이 바닥을 굴렀을 땐, 심장이 철렁 바닥으로 떨어지는 줄 알았다.

책 속에서 나온 기사들의 멋진 대련을 상상해 보고 싶었던 것인데 실제로 보니 멋진 게 아니라 불안해 죽을 뻔했다.

자신이 아끼는 사람이 다칠까 걱정되어 말이다.

“전 괜찮습니다, 아가씨. 설령 다친다 해도 기사들에게 대련의 상흔은 노력과 성장의 훈장 같은 거라 자랑스럽죠.”

“……다쳤는데 뭐가 자랑스러워. 난 에드윈이 다치는 거 싫어.”

디아나는 에드윈의 말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 불만 어린 표정을 했다.

입술을 툭 내미는 귀여운 모습에 에드윈은 매끄럽게 입꼬리를 올렸다.

“알겠습니다. 앞으로 어떤 일이 있어도 안 다치도록 노력할게요.”

“응, 다치지 마.”

에드윈의 약속에 디아나의 얼굴이 그제야 펴졌다.

“와, 디아나가 에드윈 경을 엄청 따르는구나. 이런 모습은 처음 보는 거 같네. 에드윈 경이랑은 오래 알았던 거니?”

디아나를 뒤따라온 에키온은 에드윈에게 자신의 감정을 숨기지 않고 투정까지 부리는 디아나의 모습에 조금 놀랐다.

이때까지 그가 본 디아나의 모습은 차분하고 정적인 어른 같은 모습이었으니까.

“에드윈은 대공 저택에서부터 절 챙겨 줬어요. 그러니까, 제 모습이 바뀌기 전부터요.”

“그랬구나.”

단순히 대공이 붙여 둔 기사는 아니었군.

에키온은 에드윈과 디아나를 의외의 눈빛으로 보다 카이루스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의 예상대로 딱딱하게 굳은 카이루스의 얼굴을 본 에키온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무표정을 가장하고 있지만 에키온은 디아나와 에드윈을 바라보는 카이루스의 흑빛 눈동자가 번뜩이는 걸 봤다.

질투를 하다니.

생전 처음 보는 모습이 신기하면서도 재밌었다. 에키온의 시선을 느낀 듯 카이루스는 느리게 눈을 깜박이며 시선을 돌렸다.

“에키온, 수업 있지 않아? 이만 가 봐야 하는 거 아닌가?”

“아, 걱정 마. 오늘 정치학 수업 내일로 미뤄졌어. 나 오늘 할 일 없어.”

“……그렇군.”

카이루스의 낮은 음성을 들은 디아나가 고개를 돌렸다.

“아, 왕자님, 왕자님도 괜찮으신가요? 다치신 곳 없나요?”

“없습니다, 영애.”

카이루스는 언제 얼굴을 굳혔냐는 듯 디아나를 향해 따스한 미소를 그렸다.

“다행이에요, 왕자님.”

디아나의 입꼬리도 살짝 올라갔다.

뭔가 좋은 분위기가 흐르는 디아나와 카이루스를 보던 에키온은 크게 헛기침을 내뱉었다. 마주 보던 디아나와 카이루스의 시선이 자신을 향하자 에키온은 목을 가다듬으며 입을 열었다.

“큼, 큼…… 음, 다들 배고프지 않아? 카이루스 넌 나랑 대련하느라 점심도 못 먹었잖아. 디아나, 시간 괜찮으면 우리랑 같이 디저트라도 먹을래?”

“아, 저도요?”

“에드윈 경도 함께 먹으면 좋잖아. 대련하느라 출출해졌을거야.”

“그래, 디아나. 같이 가자. 아까 타르트 다 못 먹고 왔잖아. 응?”

이대로 헤어지긴 아쉬운지 레귤러스가 디아나의 팔을 흔들며 눈을 반짝였다.

꼬리를 흔드는 강아지 같은 레귤러스의 모습에 디아나는 결국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저도 갈게요, 저하.”

“그럼 다들 내 궁으로 가자.”

카이루스가 디아나에게 한 걸음 다가가려던 찰나 그를 본 에키온이 잽싸게 먼저 손을 내밀었다.

“디아나, 궁까지 내가 에스코트해도 될까?”

“……네, 좋아요.”

카이루스를 보지 못한 디아나는 에키온의 손을 잡으며 살짝 웃음 지었다.

에키온은 카이루스와 레귤러스의 불만 가득한 시선을 무시하며 만족스런 미소를 그리며 디아나와 함께 궁으로 향했다.

* * *

대륙에서 가장 황량한 땅 위, 하늘에 닿을 듯 높은 현자의 탑이 세워져 있었다.

모두가 버린 땅 위에 세워진 덕분에 현자의 탑은 제국과 왕국의 간섭을 받지 않으며 오로지 대륙의 수천 년 역사와 학문을 연구할 수 있었다.

마법조차 허용하지 않는 유구한 역사를 가진 현자의 탑 앞으로 황무지를 달린 말 한 필이 멈추었다.

히이잉-.

“워, 워.”

로브의 모자를 벗은 시아페 후작은 한참을 달려 흥분한 말을 달래며 고삐를 꽉 쥐었다.

치솟았던 말의 앞발이 안정적으로 땅을 밟자마자 후작은 말에서 내렸다.

후작은 오랜만에 찾은 현자의 탑을 올려다보았다.

쨍쨍한 햇볕 아래로 뾰족한 탑의 끝이 번쩍였다.

소니드 왕국에 들어서고 밤낮없이 꼬박 이틀을 달려와 몸이 무겁고 피로했지만 여유를 부리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디아나가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후작은 서둘러 탑으로 향했다.

“율리스 시아페, 이게 얼마만인가.”

“오랜만에 뵙습니다, 스승님.”

현자들만이 출입할 수 있는 탑의 상층부. 후작은 늘 그렇듯 연구실을 지키고 있는 자신의 스승에게 고개를 숙였다.

“허허, 그래, 정말 오랜만이군. 이리 다시 보니 반가워.”

필레인 유스터.

소니드 왕국의 사람이자 현재는 현자의 탑을 이끄는 수장이었다.

후작은 어느새 백발이 된 자신의 스승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자주 찾아뵙지 못해 죄송합니다, 스승님.”

“아니야, 이런저런 일들이 많지 않았나. 이제라도 이렇게 잘 지내는 모습을 보니 좋군. 내 율리스 자네가 방문한다는 서신을 받고 얼마나 기뻤는지 몰라. 하지만 아무런 이유 없이 현자의 탑을 이리 급히 찾아오진 않았겠지.”

필레인은 후작을 보며 안경을 추켜올렸다. 푸른 로브에 잔뜩 묻어 있는 흙먼지를 보니 한가로이 마차를 타고 현자의 탑을 방문한 게 아니었다.

말을 타고 달릴 정도로 급한 일이 있단 것이었다.

“자네, 식사는 제대로 하면서 온 겐가?”

“전 괜찮습니다.”

“아무리 급해도 먹는 건 잘 챙겨 먹게. 자네도 이제 건강을 신경 쓸 나이지 않는가. 이리 앉아 차라도 마시게.”

후작이 괜찮다 말했지만 필레인은 이미 몸을 돌려 찻잔을 들었다. 찻주전자에 우려 놓은 진한 곡물차를 따른 그는 후작에게 돌아와 차를 내밀었다.

“마시게.”

“감사합니다, 스승님.”

뜨끈한 차를 한 모금 들이켜자 피로에 지쳤던 몸에 온기가 돌았다.

“그래, 무슨 일로 이리 급히 왔는가?”

후작은 찻잔을 내려놓으며 굳은 얼굴로 필레인을 바라보았다.

“다름이 아니라, 가디언의 비석에 대해 알아보러 왔습니다.”

“가디언의 비석?”

“네, 현재 얼마나 해석이 되었는지, 그리고 비석을 만든 사람에 대한 자료가 있는지 알아보러 왔습니다.”

“흠…….”

마냥 사람 좋은 얼굴로 후작을 보고 있던 필레인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흠, 제국에 무슨 일이 생긴 건가? 한 번도 비석에 관한 일은 먼저 물은 적이 없지 않는가?”

“……죄송합니다.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비석이 제국의 유물이긴 하지만 대륙의 역사와도 관련이 깊기에 현자의 탑에서 관리하고 있네. 현자의 탑은 국가에 귀속되지 않기에 함부로 유물의 정보를 유출하지 않아. 그대의 제안을 내가 거절한다 해도 이유를 말해 주지 않을 건가?”

“……네.”

“고집 센 건 예나 지금이나 변하질 않는군. 잠시 기다리게.”

필레인은 자리에서 일어나 연구실 안에 있는 또 다른 방으로 들어갔다. 방에서 무언가 소리가 들리고 곧 필레인은 종이 뭉치를 들고 나왔다.

“비석은 아직 다 해석되지 않았네. 이제 겨우 반 정도를 해석했을 뿐이야. 그리고 비석을 만든 사람에 대한 조사도 계속하곤 있지만…… 아직 확실히 찾진 못했네.”

필레인은 종이 뭉치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비석을 만든 자에 대한 추론도 전혀 없는 것입니까?”

“흠…… 제국 초대 황제의 수하였다곤 전해지지만 비석을 새긴 자에 대한 내용은 제국의 역사에도 남아 있지 않지 않는가. 가설로 몇 명의 사람들을 추론하긴 했지만 뒷받침할 자료들이 턱없이 부족하지. 가장 최근에 떠오른 인물은 이 사람이네.”

산더미처럼 쌓인 자료에서 종이 하나를 꺼낸 필레인이 후작에게 내밀었다.

“……이 사람은…….”

후작은 종이에 적힌 이름을 보고 눈을 크게 떴다.

“그래, 오도어 왕국의 초대 왕인 스토렐 오도어이지. 나도 한 학자가 처음 이자를 거론했을 때 정말 어이가 없었네. 그대도 알다시피 오도어와 제국은 지리적으로도 꽤 떨어져 있는데다, 스토렐 오도어와 초대 황제의 시대는 전혀 겹치지 않지. 오도어 왕국은 제국이 세워지고 300년 뒤에 세워졌으니 그 시간이 인간의 수명을 한참이나 넘어섰어.”

“한데 어떻게 이분이 나온 것입니까.”

“오도어 왕국의 설화와 증거 하나가 힘을 실어 주고 있네. 오도어 왕국 초대 왕이 신성목의 힘을 받아 인간의 수명보다 훨씬 오래 살았다는 민간설화는 자네도 들어보았겠지?”

“네, 들었습니다. 하지만 그것만으론…… 다른 증거는요?”

“흠, 최근에 오도어 왕국의 한 작은 마을에서 작은 비석이 발견되었는데 그 비석에 초대 왕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고 하네. 그리고 그 비석이 만들어진 시기는 초대 황제의 시대와 정확히 겹쳤네.”

“하지만 어떻게……. 신성목 때문에 300년을 살았다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그 작은 마을에 전해져 오는 얘기에 따르면 초대 왕이 진귀한 보석 같은 것을 몸에 지니고 다녔다고 하더군.”

“진귀한 보석이요?”

“그래, 그 보석이 초대 왕의 수명을 늘려 주었다더군. 아직 이 부분에 대해선 조사 중이네. 알지 않나, 현자의 탑의 일 속도가 그리 빠르지 않다는 것을 말이야.”

대륙에서 가장 똑똑한 사람들이 모였다고 하지만 일 속도는 그리 똑 부러지는 편이 아니었다.

연구가 시작되면 글자 하나하나를 세세하게 해석하고 회의하기 때문이다.

부정할 수 없는 말에 후작은 짧은 숨을 내쉬며 자료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처음엔 말도 안 된다고 여겼지만 작은 마을에서 발견되었다는 비석과 왕이 가지고 있었다는 진귀한 보석이 마음에 걸렸다.

만약 그 보석이 가디언의 정령석이라면…… 정령석이 수명을 늘릴 수도 있는 걸까.

그에 대한 답은 가디언이 알고 있을 것이다.

“비석 해석본은 거의 진전된 게 없다 하셨지요?”

“그래. 자네가 알고 있는 내용과 별다를 게 없네. 이만 돌아갈 텐가?”

“네, 아무래도 바로 길을 떠나야 할 거 같습니다.”

필레인은 답지 않게 초조함이 가득한 후작의 얼굴을 보며 쯧, 혀를 찼다.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좋은 일은 아닌 거 같아 맘이 편치 않구나. 아무쪼록 잘 해결되길 바란다.”

“감사합니다, 스승님.”

후작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필레인이 일어나며 말했다.

“잠시 기다리거라.”

“네?”

필레인은 책상으로 갔다. 서랍 속에서 작은 주머니를 꺼내 후작에게 내밀었다.

“말린 육포다. 보아하니 올 때처럼 쉬지 않고 달려갈 거 같아 주는 것이야. 아무리 바빠도 끼니는 거르지 말려무나.”

스승의 걱정에 후작은 옅은 미소를 지었다.

“잘 먹겠습니다. 또 들리겠습니다, 스승님.”

“그래, 내 죽기 전엔 한 번 더 보자꾸나.”

스승의 살벌한 농담에 웃은 후작은 인사를 올리곤 연구실을 나갔다.

“디아나는 괜찮으려나.”

소식을 듣고 싶었지만 마법 전서구 사용도 불가능했기에 디아나가 잘 지내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소니드 왕국에 도착하자마자 황실에 연락을 해 봐야겠군.

그리고 후작가에도 연락을 해야 할 것이다. 보좌관을 오도어 왕국으로 서둘러 보내야 했으니까.

오도어 왕국의 초대 왕이 비석을 만든 자가 맞는지, 그리고 그가 가지고 다녔다는 진귀한 보석에 대한 정보가 더 필요했다.

보좌관과 함께 왔더라면 여기서 바로 오도어 왕국으로 보냈을 텐데. 이곳에서 후작가로 전서구를 보낸다 해도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렸다.

“이곳에서 오도어 왕국까진 거리가 멀지 않은데…….”

가디언을 만나야 하는 것만 아니라면 후작이 갔을 텐데, 몸이 2개가 아니라 어쩔 수 없었다.

서둘러 탑의 계단을 내려가던 후작은 순간 보이는 익숙한 얼굴에 걸음을 멈추었다.

“……데릴?”

후작의 목소리를 들은 남자가 고개를 돌리고 곧 환한 미소를 그렸다.

“스승님!”

후작이 제대로 본 게 맞았다.

탑 로비에서 다른 학자와 인사를 나누고 있던 데릴은 후작에게 다가와 꾸벅 고개를 숙였다.

“여기서 자네를 마주칠 줄은 몰랐군.”

“저도 이렇게 우연히 스승님을 뵐 줄은 몰랐습니다. 그래도 이렇게 뵈니 좋습니다. 스승님,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벌어진 일들이 많아 걱정했습니다.”

데릴은 제국을 한바탕 뒤집어 놓았던 뒤바뀐 대공녀의 사건을 떠올리며 걱정스런 얼굴을 했다.

후작도 후작이었지만 디아나를 알고 있기에 더욱 걱정이 되었었다.

하지만 일개 가정교사인 그가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수도로 간 동안은 수업이 중단된 상태였기에 디아나를 만나 볼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자네가 대공가에서 가정교사를 하게 되었다고 했었지.”

“……네, 제가 디…… 아니, 대공녀님의 수업을 맡고 있었습니다. 대공녀님은 잘 지내시고 계신가요?”

“잘 지낸다고 하기엔 그 아이가 겪은 일들이 너무 엄청났지. 하지만 디아나가 행복해질 수도 있도록 최선을 다할 생각이야.”

“……영특한 영애셨습니다. 제가 눈치가 좀만 빨랐더라면 대공비님을 닮았다는 것을 스승님께 알려 드렸을 텐데……. 진실이 밝혀지고 나서야 영애께서 닮은 분이 대공비님이란 걸 떠올렸습니다. 죄송합니다.”

세상사엔 관심이 없어 신문도 잘 읽지 않는 그였지만 디아나와 관련된 기사들은 모두 다 읽었었다.

그가 가르쳤던 제자가 디아나가 처음인 것도 아니었건만 그 아이에겐 유독 마음이 쓰였기 때문이었다.

디아나를 보며 항상 누군가를 닮았다고 생각하기만 하고 깊이 고민하지 않았던 걸 후회할 만큼 말이다.

데릴의 무거운 얼굴에 후작은 옅은 미소를 그렸다.

“자네가 죄송할 게 뭔가. 다 제대로 아이를 보호하지 못한 우리의 책임이지. 그보다 자네는 어딜 가는 길이기에 현자의 탑까지 온 건가.”

“아, 전 오도어 왕국에 가는 길입니다.”

“오도어 왕국?”

“네, 최근에 오도어 왕국에서 새로운 약초가 발견됐다고 해서요. 오도어 왕국으로 가는 길에 동기의 얼굴을 보러 들렸습니다.”

“그렇군.”

새로운 약초 소식에 신난 듯한 데릴의 얼굴을 보던 후작은 문득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데릴, 오도어 왕국에 가는 길이라면 내 자네에게 부탁 하나만 해도 되겠나?”

후작의 번뜩이는 보랏빛 눈동자에 입꼬리를 내린 데릴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스승님의 부탁이라면 뭐든 들어드려야지 않겠습니까. 제가 무엇을 하면 되나요?”

후작은 데릴에게 한 걸음 더 다가가 굳은 얼굴로 속삭였다.

“오도어 초대 왕이 지니고 있었다는 보석에 대해 알아봐 주어야겠네.”

* * *

“냐아---.”

“유네스, 조심해!”

디아나는 테라스 난간을 아슬아슬하게 뛰어다니는 유네스에게 외쳤다.

방 안으로 들어온 나비를 쫓다 난간 위까지 올라갔던 유네스는 디아나의 목소리가 불안한 것을 느끼곤 바로 난간에서 폴짝 뛰어내렸다.

“냐--.”

디아나에게 쪼르르 달려와 안긴 유네스는 걱정 끼쳐 미안하다는 듯 턱에 머리를 비볐다.

“위험하게 뛰어다니지 마, 네가 다치면 내 맘이 아프단 말야.”

“냐--.”

꼭 그러겠다고 답하는 거 같은 유네스의 모습에 디아나는 다정한 미소를 지었다.

유네스를 쓰다듬던 디아나는 나른한 햇살이 가득한 창밖을 내려다보았다.

정원을 손질하는 정원사와 조용한 오후 시간을 즐기는 시녀들의 모습이 보였다.

전 대륙을 위험하게 했던 어둠의 정령이 깨어났다곤 믿기 힘들 만큼 평화로운 시간이었다.

디아나 역시, 가디언이 깨어난 것을 직접 경험하지 못한다면 다른 사람들과 다를 바 없었을 것이다.

자신이 어둠의 정령을 소멸시켜야 한다고 했지만 아직은 그 일이 실감이 나지 않았으니까.

“가디언님은 아직 회복이 안 되신 건가.”

연무장에 놀러 간 뒤로 이틀이 흘렀다.

그날 가디언은 곧 디아나에게 모습을 드러내겠다고 했었지만 아직 디아나의 꿈속에서조차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언제나 자신의 곁에 있다곤 했지만 아직은 가디언의 기운이 잘 느껴지지 않았다.

“언제쯤…… 모습을 나타내실까, 난 이렇게 가만히 있어도 되는 건가.”

어둠의 정령이 오기 전에 가디언님과 함께 정령술을 연습해야 하는 게 아닌지.

“난 아직 정령술을 능숙하게 쓰지 못하는데.”

“냐아, 냐아.”

품 안에 있던 유네스는 또 무언가를 발견했는지 놓아 달라 울었다.

디아나가 놓아주자 유네스는 가벼운 몸짓으로 뛰어내려 쏜살같이 방 끝까지 달려갔다.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유네스를 보던 디아나가 고민하듯 미간을 좁혔다.

“흠, 유네스의 몸이 많이 좋아진 거 같은데…….”

대공가에서 수도로 온 이후로 유네스의 상태가 아주 많이 호전되었다.

점프 높이도 점점 높아졌고, 뛰어다니는 속도도 빨라졌다.

“그때 치료사가 몸이 많이 좋아지면…… 예전 모습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했는데.”

물론 유네스의 몸이 좋아질 확률은 지극히 낮을 것이라고 덧붙이기도 했었다.

“치료사에게 진료를 한번 받아야 할 텐데……. 음, 할아버지는 지금 안 계시고 황후 폐하께 부탁드리면 될까.”

“황후 폐하께 뭘 부탁하시려고요?”

드레스 룸에서 옷을 정리하고 있던 피비가 정리가 끝났는지 방으로 돌아왔다.

“아, 치료사를 불러 유네스의 상태를 봐야 할 거 같아서.”

“하긴 대공저에서 진료 보고…… 꽤 시간이 흐르긴 했네요.”

“응, 황후 폐하께 말씀드려 봐야겠어.”

디아나가 바로 황후를 찾아갈 듯 일어나자 피비가 눈을 반짝였다.

“지금 뵈러 가실 건가요?”

“……으응…….”

“그럼 옷을 갈아입으셔야겠어요. 머리도 다시 만지고……. 안 그래도 옷 정리하면서 딱 머릿속으로 떠오른 치장이 있었거든요.”

“아…… 그냥 이렇게 다녀와도 될 거 같은데…….”

디아나는 번뜩이는 피비의 주홍빛 눈동자에 저도 모르게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어머, 아가씨, 걱정 마세요, 오늘은 머릿속에 이미 그려져 있기 때문에 오래 걸리지 않을 거예요.”

디아나를 잡을 듯 피비가 한 걸음 다가온 순간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울렸다.

디아나는 반색하며 말했다.

“어서 들어와.”

“영애, 황후 폐하께서 부르십니다.”

“아, 그래? 황후 폐하를 기다리게 할 순 없지. 피비, 치장은 다음에 해야겠다.”

피비의 얼굴에 아쉬움이 물들고 디아나의 얼굴이 밝아진 순간 시녀장이 입을 열었다.

“아, 영애. 치장은 안 하셔도 됩니다. 살롱의 디자이너들이 맞춤복 제작을 위해 영애를 기다리고 있으니까요.”

“어머나! 드디어!”

“……맞춤복…….”

감격한 피비의 나직한 탄성이 울리고 미소를 그리던 디아나는 좋지 못한 예감에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 * *

“뭘 입으셔도 너무 예쁘셔서 감탄이 절로 나옵니다, 영애.”

“지금도 이리 어여쁘신데 나중에 성인이 되시면 제국 제일의 미인이 되어 영식들의 마음을 사로잡겠습니다.”

살롱 디자이너들은 제 머리칼과 똑같은 금빛 드레스를 입고 있는 디아나를 보며 연신 찬양했다. 그에 황후가 빙그레 미소를 그렸다.

“내, 내 조카라 이리 예뻐 보이는 것인가 했는데 그대들이 보기에도 우리 디아나가 어여쁜가 보군.”

“이를 말씀이십니까. 숱한 귀족 가문의 영애들을 보았지만 디아나 영애만큼 사랑스런 영애는 보지 못했습니다. 호호.”

진저색 머리칼을 틀어 올린 디자이너가 눈을 반달 모양으로 휘며 말했다.

황가에 잘 보이기 위한 감언이설이 섞인 것을 알지만 디아나를 칭찬하는 말에 황후의 입꼬리가 내려가지 않았다.

디아나가 예쁜 것은 사실이었으니까.

“디아나, 옷은 어떠니? 디자인이 마음에 드니?”

황후의 상냥한 목소리에 멍하니 서 있던 디아나는 정신을 차렸다.

“아…… 네, 너무 예뻐요.”

정확히 12번째 같은 말을 반복하고 있었다.

피비의 인형 놀이는 장난이었다는 듯 디아나는 황후궁의 응접실에서 드레스의 난을 겪고 있었다.

맞춤복을 맞추려는 것이라기에 오늘은 사이즈만 재서 가는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디아나의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디자이너들은 디아나만을 위한 맞춤복을 기성복 사이즈로 먼저 만들어 와 입혀 본 뒤 괜찮은 것들을 골라 다시 제작하는 것이었던 거다.

결국 디아나는 그들이 만들어 온 옷들을 거의 다 입어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디아나는 9벌쯤 갈아입었을 때부터 정신이 멍해지고 있었다.

“이런, 많이 힘들었나 보구나.”

황후는 디아나의 멍한 표정에 안쓰럽다는 듯 눈썹을 모았다. 차마 아니라고 못하고 어색한 미소를 짓자 황후가 디자이너들에게 말했다.

“드레스는 몇 벌 더 남았지?”

“20벌 정도 남았습니다.”

“……20벌…….”

20벌이나 더 입어야 한다는 건가.

아찔함에 디아나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진 순간 황후의 목소리가 울렸다.

“음…… 생각보다 많이 남았네. 아무래도 아이가 힘들어 더 옷을 입는 것은 무리일 거 같으니 그냥 전부 맞춤복으로 제작해 오게.”

“……전부 말씀이십니까?”

진저색 머리칼의 디자이너가 동그래진 눈으로 되물었다.

다른 귀족가보다 황실의 손이 크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수십 벌의 맞춤복을 한 번에 주문한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황자들의 옷도 10벌씩만 주문하는 검소한 황후 폐하로 유명했으니 말이다.

“이 옷들을 전부 말인가요?”

전부란 말에 디아나도 놀란 목소리로 물었다.

황후는 디아나를 보며 매끄럽게 미소를 지었다.

“그래, 디아나. 한 번 맞추는 김에 많이 해 두는 게 좋단다. 어차피 이 옷들은 나중에 후작가로 같이 보낼 테니, 계절 바뀌는 김에 옷을 맞춘다고 편히 생각하렴. 별로 비싼 옷들도 아니란다.”

비쌀 거 같은데.

망설이듯 고민하자 황후는 혹시라도 디아나가 거절할까 황급히 디자이너들에게 입을 열었다.

“그대들은 빠른 시일 내에 맞춤복을 제작해 황궁으로 보내도록 하게. 오늘 수고했고, 이만 물러들 가게나.”

“네, 황후 폐하.”

“네, 황후 폐하.”

“어…….”

디아나는 무어라 말을 하기도 전에 응접실을 재빠르게 나가는 디자이너들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디아나, 이리 와서 좀 쉬렴.”

황후는 디아나에게 자신의 옆으로 오라고 손을 내밀었다.

“네.”

디아나가 옆자리에 앉자 황후는 다정한 손길로 디아나의 옷매무새를 정리해 주었다.

“예쁜 옷을 많이 해 주고 싶은 마음에 네가 힘든 걸 못 봤구나, 미안해.”

“아니에요, 힘들긴 했지만 예쁜 드레스들을 많이 입어 봐서 좋았어요.”

괜찮다는 듯 디아나가 미소를 짓자 황후는 감격에 겨운 얼굴을 했다.

“어쩜, 이렇게 착하고 예쁜 건지.”

옷 한 번 맞추자고 하면 이런저런 이유를 대며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가는 말썽쟁이 두 아들만 키우다 디아나를 보니 황후는 가슴이 벅찼다.

이대로 쭉 황궁에 데리고 살고 싶을 만큼 말이다.

“디아나, 뭐 더 갖고 싶은 것은 없니? 액세서리 같은 거라든가…… 신발이나 머리핀이라든가. 뭐든지 말만 하렴. 내가 제국 상단 전부를 뒤져서라도 가져오마.”

황후는 디아나를 보며 눈을 반짝였다. 궁전을 달라고 해도 줄 거 같은 눈빛에 디아나는 얼떨떨한 얼굴을 하다 곧 필요한 일을 떠올렸다.

“저 황후 폐하께 부탁드릴 일이 있어요.”

“그게 뭐니? 뭐든 말하렴.”

“유네스의 치료사를 불러 주실 수 있을까요?”

“응? 유네스의 치료사?”

예상치 못한 말에 황후는 잠시 멈칫했다.

“네, 수도로 오기 전에 유네스가 치료를 받았었는데 시간이 꽤 흐르기도 했고 지금 몸이 괜찮은 건지 걱정돼서요.”

“아, 그랬구나. 치료사를 부르는 일이야 어렵지 않단다. 내일 바로 에메랄드 궁으로 방문할 수 있게 해 주마.”

“감사합니다.”

“그거 말고 다른 거 갖고 싶은 건 없니? 뭐 보석류에 흥미가 없다면…… 저택이나 영지나…….”

저택, 영지…….

디아나는 어쩐지 점점 규모가 커지는 단어에 당황하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뇨, 전 괜찮아요, 황후 폐하.”

“하긴…… 아직 어리니 그런 것들은 무리겠구나. 내 차차 좋은 것들을 추려 네가 좀 더 자라면 선물해 주마.”

“네?”

디아나는 당혹스러웠지만 황후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혼자 고개를 끄덕이며 행복한 미소를 그렸다.

그때, 응접실로 시종 하나가 들어왔다.

“황후 폐하, 폐하께서 찾으십니다.”

“폐하께서? 알겠다, 곧 가마.”

황제가 황후를 찾는다는 말에 디아나는 그만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전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황후 폐하.”

“아쉽지만 그래야 할 거 같구나. 함께 이야기를 나누다 저녁을 먹으려 했었는데…… 내일이든 언제든 심심하면 내 궁에 놀러 오렴.”

“네, 황후 폐하.”

디아나는 아쉬움을 숨기지 못하는 황후에게 미소를 짓고 응접실을 나갔다.

“흐아…….”

황후궁을 나온 디아나는 찌뿌둥한 몸에 팔을 위로 뻗으며 기지개를 폈다.

“아가씨, 많이 힘드셨죠?”

피비가 디아나에게 다가와 작은 어깨를 주물러 주었다.

“괜찮아.”

디아나는 피비의 손을 잡으며 뒤를 돌아보았다. 한데 디아나의 예상과 달리 피비는 걱정스런 눈빛으로 디아나를 보고 있지 않았다.

입꼬리가 한껏 올라간 피비의 얼굴에 디아나의 눈이 샐쭉해졌다.

“피비, 기분 좋아 보여.”

“어우, 아니에요. 아가씨께서 그렇게 고생하시는 걸 봤는데 제가 어떻게 기분이 좋겠어요.”

그리 말했지만 피비는 자꾸만 올라가는 광대를 숨기지 못했다. 디아나의 가늘어지는 눈초리에 피비는 결국 사실대로 말했다.

“죄송해요, 아가씨. 고생하신 건 너무 마음이 아픈데 각양각색의 옷을 입으시는 아가씨를 보니 너무 기분이 좋았어요. 헤헤. 어서 빨리 맞춤복이 도착했으면 좋겠어요.”

디아나는 신난 듯한 피비의 밝은 웃음을 이길 수 없어 따라 미소를 지었다. 피비가 좋으면 디아나도 좋으니까.

“아가씨, 바로 궁으로 가실 건가요?”

“에드윈, 언제 왔어?”

들려오는 에드윈의 목소리에 디아나는 놀라서 몸을 돌렸다.

“방금 왔습니다. 아가씨께서 움직이시는데 당연히 제가 따라와야죠. 저만 궁에 두고 가셔서 섭섭했습니다. 아가씨, 제가 미워지신 건가요?”

상처 받았다는 듯 에드윈의 눈꼬리가 쳐지자 디아나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냐, 일부러 에드윈만 두고 나온 거 아냐. 에드윈은 검술 연습하는 게 더 좋을 거 같아서…… 황후 폐하 궁은 멀리 있는 것도 아니니까 그래서 내가 피비에게 알리지 말라고 한 거야.”

어제 공식적으로 황가의 발표가 있었다.

바로 한차례 미뤄졌던 검술 대회를 개최한다는 것이다.

디아나는 그 소식을 듣자마자 에드윈에게 뛰어갔다.

검술 대회에 출전하라고 말이다.

디아나를 위해 잠시 대공가를 나와 있긴 했지만 에드윈은 원래 검술 대회에 출전할 예정이었다.

자신 때문에 그가 검술 대회를 포기하는 것은 싫어 대공가로 돌아가서 참가하라 했지만 에드윈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대공가의 기사로 검술 대회에 참가하는 것보다 아가씨의 기사로 검술 대회에 참가하고 싶습니다. 전 아가씨의 호위 기사이니까요, 아가씨께서 허락만 해 주신다면 가문을 넣지 않고 평검사의 신분으로 대회에 참가하겠습니다.’

에드윈의 확고한 의지가 느껴지는 녹빛 눈동자에 디아나는 고개를 끄덕였고 결국 그는 대공가로 돌아가지 않았다.

대공가로 돌아가지 않았으니 준비할 시간이 부족할까 봐 일부러 연습할 수 있는 시간을 주고 싶었던 건데.

디아나가 그런 의도가 아니었다, 손사래를 치자 에드윈은 언제 우울한 얼굴을 했냐는 듯 싱긋 미소를 지었다.

“압니다. 아가씨께서 절 두고 움직이셔서 서운한 마음에 해 본 농담이었습니다. 그리고 아가씨, 제 연습까지 아가씨께서 신경 써 주시지 않으셔도 된답니다. 제게 중요한 것은 검술 대회가 아니라 아가씨의 안위이니 궁 앞 정원에 나가시더라도 꼭 절 데려가 주세요.”

“응, 알았어.”

“그럼 이제 궁으로 돌아가시는 건가요?”

“음…….”

디아나는 아직 어두워지지 않은 하늘을 올려보았다. 화창한 날씨가 따뜻하고 기분 좋았다.

“황후 폐하 궁에서 멀지 않은 곳에 넓은 화원이 있다고 해요. 궁에만 있으면 지루하니 좀 걸으시고 들어가시겠어요?”

“응, 좋아.”

미소를 지은 디아나는 피비의 손을 잡고 화원으로 향했다.

* * *

제국을 찾는 손님들을 위한 궁인, 루비 궁전.

“흠…….”

그곳에서 지내고 있는 카이루스는 살랑이는 바람에 커튼이 휘날리는 것도 모른 채 깊은 생각에 빠져 있었다.

반듯한 미간에 주름이 진 카이루스는 손을 접었다, 폈다를 반복했다.

그리고 곧 활짝 펴진 그의 손바닥 위로 하얀 빛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확실히 강해졌어.”

카이루스는 선명하게 느껴지는 강한 힘에 흑빛 눈동자를 반짝였다.

소중한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신성력과 검술 연습에 매진하고 있었지만 이렇게 갑자기 힘이 강해질 줄은 몰랐다.

그의 신성력이 달라졌다고 확실히 느끼기 시작한 건 에드윈과의 대련 직후였다.

신성력이 검기처럼 터져 나왔던 순간 카이루스 안에 있던 힘의 크기가 달라진 것이다.

“이 정도의 힘이라면…….”

오도어 왕국의 왕자들 중 그가 제일 강할 것이다.

신성력을 검기처럼 쓰는 건 왕국에서도 흔한 일이 아니었다. 누군가 검기를 썼다면 분명 타국까지 소문이 들렸을 것이다.

“……돌아갈 때가 다가오는 건가.”

언제까지 제국에서 손님으로 머물 수는 없었다.

지금 그는 신분만 왕자일 뿐이지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사람이었으니까.

디아나를 지키기 위해선 힘뿐만 아니라 더 확실한 신분이, 권력이 필요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시간이 흘러갈수록 그는 디아나에게, 에키온에게 짐이 될 뿐이다.

“검술 대회가 끝나면 왕국으로 돌아갈 준비를 시작해야겠어.”

마음을 굳힌 카이루스는 소파에서 일어났다.

툭-.

그러자 가슴 쪽에 달린 상의 주머니에서 무언가가 떨어졌다.

“아, 이런.”

카이루스는 황급히 바닥으로 떨어진 목걸이를 주웠다.

목걸이에 걸린 영롱한 하늘빛 보석이 그의 검은 눈동자에 담겼다.

세공되지 않은 원석 같은 이 알 수 없는 보석은 그의 어머니가 그에게 남긴 유품이었다.

왕이 후궁에게 준 선물치곤 너무도 보잘 것 없는 보석이었다.

천한 신분의 어머니를 후궁으로 인정하기 싫다는 왕의 마음이 느껴지는 선물.

하지만 어머니는 살아생전 이 선물을 너무도 아꼈다. 보석 상자에 고이 모셔 두고 시간 날 때마다 가만히 바라보곤 했었다.

처음엔 보잘것없는 이 보석이 어머니를 무시한다는 상징 같아 싫어했지만 보석을 볼 때마다 행복한 얼굴을 한 어머니를 보고 카이루스 역시 귀하게 여기게 되었다.

“……대체 무슨 보석일까.”

카이루스는 이제는 신비함이 느껴지는 보석을 보며 미간을 살짝 좁혔다.

보석 감별사에게 물어보았지만 이게 어떤 원석인지 알지 못했다.

하지만 볼수록 기묘하고 영롱한 빛을 띠는 보석은 어딘지 예사롭지 않은 느낌이 있었다.

왜인지 몽롱한 기분이 들게 하는 보석을 보던 그는 곧 목걸이의 체인을 정리했다.

가죽 주머니 안에 목걸이를 넣은 그는 곧 방을 나갔다.

* * *

“어, 2황자 저하 화원에서 본 나비다.”

디아나는 꽃잎에 앉아 있는 노랑 날개 나비를 보며 눈을 반짝였다.

혹시 날아갈까 조심히 관찰했지만 인기척을 느낀 나비는 휙 하늘로 날았다.

“시녀님들에게 들었는데 이 화원이 선대 황제 폐하께서 선대 황후 폐하를 위해 만드신 곳이라고 해요. 여기 있는 모든 꽃들이 선대 황후 폐하가 좋아하셨던 꽃이라고 하더라고요.”

아쉬운 눈빛으로 나비를 보던 디아나는 피비의 말에 주변을 둘러보았다.

흐드러지게 피어나는 꽃이 아닌, 은은하게 줄기를 따라 작은 하얀 꽃잎이 피어난 처음 보는 꽃이었다.

하얗고 예쁜 갈대 같은 꽃들은 향기마저 강하지 않고 좋았다.

“꽃 이름이 뭐야?”

“아…… 그건…… 못 들었어요.”

피비는 볼을 긁적이며 어색하게 웃었다.

“음, 에드윈은 알고…… 에드윈?”

혹시나 싶어 에드윈에게 고개를 돌리던 디아나는 어딘가를 직시하고 있는 그의 모습에 말을 멈추었다.

그를 따라 시선을 던지자 꽃길을 걸어오는 한 사람이 보였다.

“아가씨, 오도어 왕자님께서 오신 듯합니다.”

디아나는 하얀 꽃길 사이에서 유독 선명하게 느껴지는 검은 머리칼을 보다 몸을 완전히 돌렸다.

디아나를 향해 다가온 카이루스는 몇 걸음을 남겨두고 멈춰 섰다.

“디아나 영애.”

“오도어 왕자님.”

약식의 예를 갖춘 카이루스는 디아나를 보며 상냥한 미소를 그렸다.

“산책을 나오신 건가요?”

“네, 이 화원이 예쁘다고 해서요. 왕자님도 산책 나오신 건가요?”

“산책 비슷한 휴식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이해하지 못한 디아나가 고개를 갸웃하자 카이루스가 손가락으로 어딘가를 가리켰다.

그의 손끝을 바라보자 화원 중앙에 있는 커다란 나무가 보였다.

“제가 저 나무 위에서 쉬는 걸 좋아하거든요.”

“……저 나무 위에서요?”

디아나가 눈을 크게 뜨자 카이루스가 웃었다.

“네, 근데 오늘은 저 나무까진 가지 않아도 되겠네요. 영애, 저와 함께 걸으시겠어요?”

카이루스가 디아나에게 에스코트를 청하듯 손을 내밀었다.

“네, 좋아요.”

디아나는 그의 손을 잡았다. 피비와 에드윈이 자연스럽게 두 사람의 뒤로 물러나고 디아나는 카이루스의 손을 잡고 꽃길을 걸었다.

“디아나 영애.”

“네?”

“그날은 대련 때문에 정신이 없어 묻지 못했는데, 괜찮으신가요? 가디언님의 선택을 받은 게 얼마큼 큰일일지 감히 짐작할 순 없지만 솔직히 말씀드리면 축하보단 걱정이 들었습니다. 전 영애가 힘들지 않았으면 좋겠거든요.”

카이루스는 걱정이 서린 눈빛으로 디아나를 보고 있었다.

어둠의 정령 때문이겠지.

자신의 모든 주변 사람들이 걱정하고 있었으니까.

어둠의 정령만 아니었다면 아마 전설 속 가디언의 선택을 받은 자신을 다들 축하해 주지 않았을까.

디아나는 그에게 괜찮다는 듯 미소를 그렸다.

“전 괜찮아요, 어둠의 정령을 생각하면 무섭긴 하지만 예전과 달리 지금은 절 도와줄 사람들이 많으니 두렵지 않아요.”

카이루스를 바라보는 디아나의 금빛 눈동자가 씩씩하게 반짝였다.

어두운 골목에서 만났던 그날의 모습과 달리 디아나의 얼굴은 날이 갈수록 밝아지고 있었다.

“저도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언제든 도와드릴게요.”

“감사해요.”

디아나의 미소가 짙어지던 순간 화원에 바람이 불었다. 바람결에 흩날리는 하얀 꽃잎에 시선이 뺏긴 디아나의 금안에 이채가 스쳤다.

“……예쁘다.”

“아펠리아는 바람에 날릴 때가 가장 아름답죠.”

“꽃 이름을 아세요?”

디아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카이루스는 바라보았다.

“네, 화원을 가득 메운 꽃은 제국에서만 자라는 아펠리아라는 꽃이에요. 선대 황제 폐하께서 황후 폐하께 청혼하던 날 바친 꽃이라 더욱 유명하죠.”

“청혼…….”

“네, 아펠리아 꽃말이 의미가 있거든요.”

“꽃말이 뭔데요?”

디아나의 물음에 카이루스 얼굴이 당황으로 물들었다. 잠시 아무 말 없이 디아나를 응시하던 그는 조심스럽게 손을 놓으며 몸을 돌렸다.

카이루스는 아펠리아 한 송이를 꺾어 디아나에게로 몸을 돌렸다.

“왕자님?”

그는 고개를 갸웃하는 디아나에게 꽃을 내밀었다.

“영원히 당신을 지켜 드리겠습니다.”

“네?”

나직한 그의 말에 디아나의 금빛 눈동자가 크게 흔들린 순간 카이루스가 다정한 미소를 지었다.

“아펠리아의 꽃말입니다.”

“아…… 꽃말…….”

진심인 줄 알고 당황했던 디아나는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그 말을 들은 순간 당황스럽기도 했지만 어딘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이때까지 들어본 적 없는 간질간질한 말이었으니까.

자신을 보던 카이루스의 흔들림 없는 검은 눈동자가 자꾸만 떠올랐다.

기분이 이상해.

괜히 부끄러워져 볼이 발그레 물든 디아나는 카이루스의 시선을 슬쩍 피하며 멈추었던 걸음을 내디뎠다.

* * *

깊은 어둠이 내려앉은 밤.

횃불 여러 개가 산속을 밝혔다.

“이곳입니다, 대공 전하.”

대공은 고개를 조아리는 델라이트 영주를 지나 낡은 창고를 향해 시선을 두었다.

이끼가 낀 벽돌로 지어진 창고는 사람의 손길이 오래 닿지 않은 버려진 곳 같았다.

영주에게 시선을 돌린 대공의 미간이 좁아졌다.

“이렇게 외지고 낡은 창고에 시신을 보관한 것인가?”

“아, 그것이…… 저도 이러고 싶지 않았습니다만 시신의 상태가 워낙 괴이하고 갑자기 연달아 영문도 모르고 죽어 나가니 영지민들의 공포가 극심해 어쩔 수 없었습니다. 다들 당장 짐승의 먹이로 던져 버리라는 시위까지 일어났었습니다.”

영주는 어쩔 수 없었다는 듯 곤란한 얼굴을 했다.

대공은 심각할 정도로 가라앉아 있던 영지민들의 분위기를 떠올리곤 더 이상 무어라 추궁하지 않았다.

“로운, 문을 열어라.”

“네, 전하.”

끼이익-.

다 닳은 쇳덩이가 내는 소름 끼치는 소리가 산속을 기이하게 울렸다.

영주는 열린 창고 안을 두려움에 젖은 시선으로 보며 침을 꿀꺽 삼켰지만 대공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안으로 들어갔다.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나는 역한 냄새에 얼굴이 일그러졌지만 곧 횃불 아래로 드러난 시신들의 모습에 대공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대공이 시신들의 상태를 살피려던 찰나 짙은 색의 로브를 입은 남자가 모자를 벗으며 대공에게 말했다.

“제가 살펴보겠습니다. 제가 살피는 것이 제일 정확할 테니까요.”

“그러게, 페럴트.”

마탑주는 시신들을 하나씩 확인했다. 그리고 곧 심각한 얼굴로 대공에게 다가왔다.

“어둠의 힘이 맞습니다. 아무래도 가디언의 정령석에 힘을 빼앗긴 어둠의 정령이 사람들의 생명으로 힘을 회복하려 하는 것 같습니다.”

대공의 굳은 얼굴엔 큰 동요가 없었다.

델라이트 영지의 사건을 들었을 때 어둠의 정령의 짓일 것이라 거의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다른 것이 마음에 걸렸다.

“이 정도의 사람들을 죽였다는 것도 놀랄 일이지만 걸리는 것은 수많은 영지 중 치안이 가장 약한 델라이트 영지에 왔다는 게 마음에 걸려. 어둠의 정령은 수도에서 세이아를 자신의 몸으로 선택했어. 천년이 넘는 시간 동안 봉인되어 있었으니 힘이 급했다면 수도와 가까운 영지를 덮쳤겠지. 굳이 수도와 먼 동쪽 끝까지 왔다는 게 이상하다.”

“그 말씀은…….”

“마치 이곳이 황실의 시선이 잘 닿지 않고, 치안이 좋지 않은 곳이란 걸 알고 일부러 선택한 거 같다. 하지만 오랫동안 봉인되어 있던 어둠의 정령이 제국의 영지 상황을 그리 자세히 알 순 없겠지.”

“……추종자가 생긴 걸까요?”

로운의 낮은 물음에 대공의 금빛 눈동자에 이채가 스쳤다.

“분명 어둠의 정령을 돕고 있는 자가 있다. 그리고 난 왠지 그 사람이…… 귀족일 거 같구나.”

“…….”

“……귀족이라면…….”

대공은 굳은 얼굴의 로운과 마탑주를 보며 입술을 열었다.

“지금 바로 수도로 출발할 것이다.”

* * *

바람 한 점 불지 않을 거 같은 푸른 하늘 아래, 고요한 연무장에 갑자기 강한 바람이 휘몰아쳤다.

강한 바람은 점차 강해지며 작은 소용돌이를 만들었다.

완벽한 회오리바람이 만들어진 순간 맑은 목소리가 연무장을 울렸다.

“성공했어요!”

디아나는 연무장 중앙에서 회오리 치고 있는 작은 소용돌이를 보며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무려 20번의 시도 끝에 성공한 바람의 정령술이었으니까.

디아나는 며칠간의 가뭄 끝에 단비를 맞은 아이처럼 신이 난 얼굴로 가디언을 바라보았다.

가디언은 날개를 펄럭이며 디아나에게 다가왔다.

“잘했다, 디아나. 나의 힘이 느껴지느냐.”

“네, 느껴져요. 시원하면서 부드러운 작은 바람이 몸을 감싸는 거 같아요.”

디아나는 몸을 휘감는 가디언의 힘을 선명히 느꼈다.

희미하기만 했던 감각들이 하루하루 지날수록 눈을 감아도 느낄 만큼 강해지고 있었다.

“고작 며칠 만에 이렇게 빠르게 성장하다니 자연 친화력이 상당히 좋구나.”

가디언은 빠르게 성장하는 디아나의 능력에 놀라고 있었다.

스스로가 선택한 아이였지만 아직은 너무 어렸기 때문에 자신과 영혼의 교감을 나누는 것이 쉽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디아나는 가디언의 힘을 빠르게 흡수하고 있었다.

마치 초대 황제 에이루스처럼.

“정말요? 그럼 제가 잘하고 있는 건가요?”

“물론이다. 나의 예상보다 훨씬 빠르게 정령술을 터득하고 있단다. 너도 나와의 교감이 점점 강해진다는 것을 느끼지 않느냐?”

“느껴요.”

디아나에게 가디언이 다시 모습을 드러낸 지 사흘째, 이젠 눈으로 가디언을 보지 않아도 손에 잡힐 듯 존재감을 느낄 수 있었다.

“너와 나의 교감이 깊어질수록 정령술도 강해질 것이다. 내가 정령석을 되찾는다면 이 황성을 통째로 날릴 만큼 강한 회오리바람을 부리겠지.”

섬찟하면서도 묘하게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렇게 강해지면 제가 좋아하는 사람들을 다 지킬 수 있겠죠?”

“너의 소중한 사람들을 지킬 수도, 너를 위협하는 사람들도 쉽게 해치울 수 있겠지. 어쩌면 네 의지와는 달리 다른 사람들이 다칠 수도 있단다. 강한 힘을 가진 사람들은 그만큼의 책임감이 생기는 법이거든.”

아직 디아나가 완전히 이해하기엔 어려운 말이었다.

디아나가 심각한 얼굴로 고민하자 가디언은 부드러운 바람을 불어 주었다.

흐려졌던 디아나와 금안이 가디언을 향했다.

“어린 네가 이해하긴 어려울 것이다. 시간이 지나며 네가 자랄수록 자연스럽게 알게 될 테니, 지금은 그저 뛰어난 너의 능력을 기뻐하고 연습하려무나.”

“네. 가디언님. 그럼 이번엔 물로 회오리를 만들어 볼게요!”

“그래. 머릿속으로 네가 쓸 힘을 먼저 그리며 집중하거라.”

“네.”

디아나가 눈을 감으며 다시 정령 술의 연습이 시작되었다.

* * *

같은 시각, 황제의 집무실.

재상과의 기나긴 회의를 끝내고 잠시 쉬려던 찰나 시종의 목소리가 울렸다.

“폐하, 시아페 후작께서 알현을 청하십니다.”

막 소파에 앉으려던 황제는 놀란 얼굴로 다시 몸을 일으켰다.

“시아페 후작이 벌써……. 얼른 들여보내거라.”

황제가 몸을 돌리자마자 집무실의 문이 열렸다.

황제는 생각보다 일찍 돌아온 것에 한 번, 집무실 안으로 들어오는 후작의 몰골에 또 한 번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제국의 태양이신 황제 폐하를 뵙니다.”

“일어나게, 그보다 후작…… 괜찮은 것인가?”

황제는 흙먼지가 가득 묻은 로브와 며칠 식사도 제대로 하지 못한 듯 야윈 후작의 얼굴에 미간을 깊이 좁혔다.

“전 괜찮습니다. 어느 때보다 정신이 멀쩡합니다.”

몰골은 몹시 좋지 않았지만 후작의 보랏빛 눈동자는 젊은 시절처럼 번쩍이고 있었다.

“폐하, 디아나는 잘 지내고 있습니까?”

“잘 지내고 있네. 디아나 걱정은 말게나. 그보다…… 이리 온 것은 무언가 실마리를 잡은 것인가?”

“네.”

후작은 집무실을 지키고 있는 시종들을 힐긋 보았다. 후작의 눈빛을 읽은 황제가 입을 열었다.

“모두 물러가거라.”

시종들이 물러가고 후작은 황제를 향해 한 걸음 다가왔다.

“폐하, 가디언님의 정령석을 가지고 간 사람이 누구인지 갈피를 잡았습니다.”

“안 그래도 내 쪽에서도 실마리가 나와 그대에게 연락을 넣었는데 마탑에 아무리 교신을 넣어도 응답이 없더군. 난 자네에게 무슨 일이 생긴 줄 알았어.”

“쉬지 않고 급히 말을 달려오느라 미처 통신구를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그보다 폐하께서 가지고 계신 실마리가 무엇입니까.”

“가디언님께서 기억해 내신 이름이네. 하지만 제국의 모든 역사서를 뒤져 보아도 그런 이름을 가진 사람은 찾지 못했어.”

사흘 전 가디언이 디아나를 통해 전언을 보냈다. 기억 속에서 이름을 찾았다고 말이다.

황제는 책상으로 향했다. 자물쇠로 잠긴 두 번째 서랍을 연 황제는 종이 한 장을 꺼내 후작에게로 향했다.

“과거의 기억에서 찾은 이름이 스틸이라고 했네.”

황제의 말에 후작의 보랏빛 눈동자에 환희가 깃들었다.

“스틸은 스토렐 왕의 별명이었습니다. 역시 오도어 왕국의 초대 왕이 가지고 있었던 것이 확실합니다, 폐하.”

“오도어 왕국의 초대 왕이?”

“네. 스토렐 왕이 인간의 수명보다 훨씬 길게 살았다는 설화가 있지 않습니까. 그 설화가 왕의 신비함을 부각시키기 위한 거짓이라 여겼지만 최근 왕국이 세워지기 전 스토렐 왕이 적은 비석이 발견되었습니다. 사람을 보내 알아본 결과 스토렐 왕에 관한 자세한 이야기들이 적힌 다른 비석들도 있었습니다. 스토렐 왕은 당시 신비로운 힘을 가진 보석 같은 것을 가지고 있었고, 그 힘이 자신의 수명을 늘려 주는 것이라 말했다고 했답니다.”

“그 보석이…… 정령석이겠군.”

“네, 가디언께서 스틸이란 이름까지 기억해 낸 이상 스토렐 왕이 정령석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 확실해졌습니다.”

“흠, 그렇다면 그 정령석을 오도어 왕국에서 보관하고 있을 텐데……. 그들은 그걸 몰랐을까?”

“몰랐을 것입니다. 왕이 따로 유언을 남기거나 특별한 물건이라 칭하지 않았으니까요. 혹시라도 신비한 힘을 가진 정령석이란 게 밝혀지면 스토렐 왕의 사후 다른 사람들이 정령석을 훔치거나 훼손할 수 있으니 철저히 숨겼을 것입니다.”

후작은 고민하듯 미간을 좁히며 말을 이었다.

“아마 조용히 왕국 창고에 보관하지 않았겠습니까. 제가 알기론 오도어 왕국은 초대 왕의 모든 유품을 왕국 보물 창고에 보관하고 있다 했으니까요.”

“오도어 왕국이 정령석인 것을 알면 쉽게 넘겨줄지 그게 걸리는군. 오도어 왕국과 제국은 친선 관계이긴 하지만 지금 오도어 왕국의 왕은 그리 좋은 사람이 아니야. 능력에 비해 야심만 큰 인물이지. 호시탐탐 주변국의 땅을 노리고 있지 않나. 그런 자에게 정령석의 존재를 밝히는 것이 걸리는군.”

황제의 말이 맞았다.

현 오도어 왕국의 왕은 그리 현명하지 못했다.

하지만 정령석이란 걸 밝히지 않고 남의 왕국 보물 창고를 열어 달라 할 수도 없었다.

난감함에 후작의 얼굴에 주름이 지던 때, 황제가 짧은 숨을 내뱉었다.

“잘하면 방법이 있을 거 같군. 우리가 그들에게 사실을 밝히지 않고 내부 사람을 통해 정령석을 빼 오는 방법 말이다.”

“……왕실 보물 창고는 왕족만이 들어갈 수 있습니다. 간자를 보낸다고 해결될 일이 아닐 텐데요.”

“간자를 보내려는 게 아니네. 제국에 오도어 왕국의 왕자가 있거든.”

“……카이루스 오도어 왕자님.”

1황자와 절친한 친우 사이인 카이루스 오도어.

그가 제국에서 머물고 있단 걸 잊고 있었다.

후작은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그분이…… 도와주시겠습니까. 어쩌면 현 왕을 배반하는 일이 될 텐데요.”

“……도와주길 바라야겠지. 지금으로선 우리에겐 카이루스밖에 없으니까.”

황제는 이름이 적힌 종이를 접으며 종을 울렸다. 집무실로 들어온 시종장이 고개를 숙였다.

“네, 폐하.”

“오도어 왕자를 불러오거라.”

“네.”

잠시 후.

“폐하, 오도어 왕자님께서 도착하셨습니다.”

“들여보내라.”

달칵-.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카이루스의 목소리가 울렸다.

“제국의 태양이신 황제 폐하를 뵙니다.”

“이리 와 앉거라.”

소파로 향한 카이루스는 황제의 오른쪽에 앉아 있는 사람을 보고 멈칫했다.

후작은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처음 뵙겠습니다, 오도어 왕자님. 시아페 율리스 후작이라 합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시아페 후작님의 명성은 많이 들어왔습니다. 현자님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이른 나이에 현자의 탑에 이름을 올린 시아페 후작은 제국뿐만 아니라 타국에서도 유명한 사람이었다.

“좋게 봐주셨다니 감사합니다. 왕자님, 편하게 말씀하시지요.”

시아페 후작이 유명하긴 했지만 왕족보다 신분이 높진 않았다.

하지만 그는 디아나의 외할아버지였다.

카이루스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

“아닙니다. 존경하는 현자님께 하대를 할 순 없습니다. 전 이대로가 좋습니다.”

“후작이 포기하게. 카이루스는 에키온보다 더 고집이 세거든.”

황제는 카이루스를 보며 피식, 웃었다.

에키온에게 카이루스와 디아나가 가깝다는 사실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만들 앉게. 할 얘기가 많아.”

황제의 말에 카이루스와 후작은 자리에 앉았다.

“뭐 좀, 마시겠느냐?”

“아니요. 괜찮습니다.”

카이루스는 티 내지는 않고 있지만 무거운 황제와 후작의 분위기를 느끼고 있었다. 집무실 안엔 시종들조차 없었으니까.

뭔가 좋지 않은 일이 있는 것인가.

에키온과 어릴 적부터 친우로 자라서인지 황제는 카이루스를 친조카처럼 잘 대해 주었다.

그렇기에 카이루스 역시 황제의 얼굴만 봐도 곤란함을 읽을 수 있었다.

그는 입술을 달싹이는 황제에게 먼저 물었다.

“폐하, 좋지 않은 일이라도 있는 건가요? 담소를 나누시려 저를 부르신 것은 아닌 거 같습니다.”

“눈치 빠른 것은 여전하구나. 그래, 내 너에게 부탁할 것이 있어 이리 불렀다.”

“네, 폐하.”

“가디언의 정령석이 오도어 왕국 보물 창고에 있는 거 같구나. 네가 그걸 우리에게 몰래 가져다주어야겠어.”

“네, 알겠습니다. 정령석이 어떻게 생겼는지 알려 주시면 오늘 바로 왕국으로 떠나겠습니다.”

카이루스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답했다. 그에 오히려 황제가 당황스런 얼굴을 했다.

“카이루스, 내 말을 제대로 들은 것이냐?”

“네, 왕국 보물 창고에 있는 정령석을 왕국 몰래 가져다 달라는 것 아닌가요?”

“……그래, 맞다. 한데 고민도 없이 그리 바로 답하는 것이냐? 위험한 일이다. 혹시라도 일이 커지면 현 왕이 널 가만두지 않을 수도 있다.”

“굳이 그 일이 아니라도 현 왕께선 지금도 절 못마땅해하십니다. 폐하께서도 아시지 않습니까, 전 아버지에게 인정받지 못한 자식이란 걸요.”

카이루스의 친모가 죽고 왕이 그를 보호해 주지 않아 제국으로 와 있다는 것을 황제가 제일 잘 알고 있었다. 담담한 말에 황제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이번 일은 지금까지와는 다른 일이다. 하니 네가 신중히 고민해 보고 결정하거라. 만약에 네가 내 부탁을 들어주지 못하겠다고 해도 이해할 것이다.”

“고민할 것 없습니다. 어차피 검술 대회가 끝나고 왕국으로 돌아갈 생각이었습니다. 조금 시기를 앞당기는 것뿐입니다. 그리고 제 아버지는 가디언의 정령석이 왕국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절대 내주지 않을 것입니다. 그분은…… 대륙의 안위보다 사익이 더 중한 분이니까요.”

카이루스는 오도어 왕국의 현 왕인 자신의 아버지를 잘 알고 있었다.

그가 얼마나 욕심이 많은지, 그리고 제국에 큰 자격지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정령석이 왕국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그 힘을 이용해 제국과 전쟁을 일으키려 할 것이다.

신분은 오도어의 왕자이지만 제국에서 받은 은혜가 더 컸다.

그리고 디아나를 지켜 주겠다 스스로 약속했기에 카이루스는 고민을 할 이유가 없었다.

카이루스의 흔들림 없는 눈빛에 황제는 무거운 숨을 삼켰다.

“네 뜻이 그러하다면…… 부탁하마. 어둠의 정령이 더 힘을 키우기 전에 정령석이 가디언에게로 돌아가야 한다.”

“네, 최대한 빨리 움직이겠습니다. 정령석이 어떻게 생겼는지를 알려 주시겠습니까?”

“후작, 정령석에 대해 아는 것을 전부 말해 주게.”

후작은 데릴에게 받은 서신을 떠올리며 입을 열었다.

“네, 폐하. 왕자님, 제가 듣기로 초대 왕께서 지니고 계셨던 정령석은 짙은 푸른빛을 띤 동그란 모양의 보석이라 합니다. 아마 지금은 시간이 많이 흘렀기 때문에 그 색이 많이 옅어졌을 것입니다. 그리고 정령석이기 때문에 보석으로 판별이 되지 않습니다. 보물 창고에서 보석으로 구분되지 않은…… 옅은 푸른빛의 원석이 보인다면 그게 정령석일 것입니다.”

후작의 말을 듣던 카이루스의 얼굴이 점점 이상해졌다.

“카이루스, 무슨 문제라도 있는 것이냐?”

“그것이…… 제가 그 원석을 본 적이 있는 거 같아서…… 말입니다.”

“본 적이 있다고?”

황제의 눈이 커졌다. 카이루스는 미간을 좁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리고 지금 제가 가지고 있는 거 같기도 합니다.”

“뭐?!”

“그게 정말입니까?”

황제와 후작이 크게 놀라며 묻자 카이루스는 그들을 보다 상의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보석으로 판별할 수 없는 옅은 푸른색의 원석……. 제 어머니의 유품의 생김새와 동일합니다.”

카이루스는 테이블 위로 어머니의 유품을 내려놓았다.

가죽 줄에 매달린 하늘빛 원석은 보석이라 하기엔 볼품없었지만 신기하게 사람의 시선을 끌어당겼다.

“후작 각하의 설명과 정확히 일치합니다. 몇 번 보석 감별사에게 원석에 대해 물었지만 아무도 원석이 어떤 광물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영롱한 하늘빛에 홀리듯 순간 눈빛이 흐려졌던 황제와 후작은 카이루스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확실히 이때까지 한 번도 본 적 없는 광물이군.”

“네, 폐하. 왕자님, 이것이 왕국의 보물 창고에 있던 것은 확실합니까?”

“오도어 왕국에선 후궁 직위를 받으면 왕이 왕실의 보물 창고에서 보석을 선물로 줍니다. 어머니가 후궁이 되신 날 왕께서 보내신 것이니…… 보물 창고에서 나온 것은 확실합니다.”

“그렇다면…… 폐하, 이것이 진짜 정령석이 맞는지 지금 바로 가디언님께 확인을 해야겠습니다.”

후작은 영롱한 하늘빛 원석을 보며 눈을 번뜩였다.

* * *

“으앗!”

회오리를 치며 올라가다 무너지는 물줄기가 바닥을 세차게 적셨다.

후드득, 자신에게로 튀는 물줄기에 디아나는 황급히 팔을 엑스 자로 만들며 막았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디아나의 팔과 옷은 물에 젖지 않았다.

디아나가 소리치자마자 유네스가 한달음에 달려와 보호하듯 앞을 막아 주었기 때문이었다.

“냐--.”

“유네스, 괜찮아?”

유네스는 칭찬해 달라는 듯 디아나에게 머리를 박으며 툭 밀었다.

“윽.”

디아나는 유네스가 머리를 박았던 배를 문지르며 비틀거리는 다리에 힘을 주어다.

다행히 넘어지진 않았지만 뒤로 두 걸음이나 밀려났다.

“냐아--.”

유네스는 디아나가 휙 밀려나자 당황한 듯 애처롭게 울었다.

“난 괜찮아, 유네스.”

디아나는 맹수의 모습으로 돌아온 유네스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치료사를 불러 진료를 다시 받은 유네스는 몸이 거의 회복되었다는 기쁜 소식과 함께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건강해져 큰 모습으로 돌아온 것은 너무 좋았지만 가끔 이렇게 자꾸 자기가 커졌다는 걸 까먹고 애교를 부릴 땐 고통이 컸다.

하지만 아픈 티를 내면 유네스가 슬퍼하는 것을 알기에 디아나는 욱신거리는 배를 무시하며 미소를 지었다.

“유네스, 많이 젖었지……. 보자.”

팍, 튀는 물을 그대로 맞은 유네스의 한쪽 털이 젖어 있었다. 손으로 물기를 툭툭 털어 주자 유네스는 기분 좋은 울음소리를 냈다.

어느 정도 물기를 털어낸 디아나는 유네스의 큰 얼굴을 잡았다.

“유네스, 난 괜찮으니까 앞으론 이렇게 뛰어들지 마. 위험할 수도 있단 말이야. 알았지?”

지금이야 물기 정도로 끝났지만 혹시라도 정말 위험한 정령술일 땐 유네스가 크게 다칠 수도 있다.

애초에 유네스에게 큰 내상을 입혔던 건 자신이 조절하지 못한 정령술이었으니까.

“…….”

유네스의 짙고 푸른 눈동자가 디아나의 시선을 피했다. 꼭 디아나의 말을 못 알아들은 듯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유네스가 자신의 말을 다 알아듣는다는 걸 알고 있었다.

“유네스, 어서 대답해.”

혼을 내듯 목소리를 깔고 말하자 유네스의 살랑이던 꼬리가 축 아래로 쳐졌다.

“……냐.”

그리고 곧 정말 짧은 단말의 울음소리가 울렸다.

못마땅함이 느껴지는 유네스의 푸른 눈빛에 디아나는 푸시시 미소를 지었다.

“유네스, 네가 다치면 내 마음이 아파. 그러니까 유네스가 이해해 줘. 난 유네스랑 오래오래 같이 살고 싶어.”

“……냐아-!”

유네스는 마음이 풀렸는지 디아나의 목에 이마를 비볐다.

잠시 유네스를 안고 쓰다듬던 디아나는 손을 거두었다.

유네스가 다시 나무 밑으로 돌아가고 디아나는 가디언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디아나가 계속해서 실패하는 동안 가디언은 아무 말 없이 지켜만 보고 있었다.

“흠…….”

가디언은 디아나 가까이로 날아왔다. 가디언의 금안과 디아나의 금안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가디언의 금안이 짙어지자 디아나의 심장을 둘러싸는 신비한 힘이 느껴졌다.

“디아나, 너의 심장에 뭉쳐 있는 나의 힘이란다. 이것을 느껴야 한다. 지금 감각을 잊지 말렴.”

“하, 하아…….”

거세게 소용돌이치던 힘이 가라앉자 디아나는 거친 숨을 내쉬었다.

꼭 긴 거리를 달린 느낌이었다.

아직도 두근거리는 심장 소리가 컸지만 머리는 한층 더 맑아진 거 같았다.

‘지금이라면 성공할 수 있을 거 같아.’

디아나의 마음을 읽은 가디언이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눈을 감은 디아나는 심장을 둘러싸는 힘을 느끼며 손을 뻗었다.

하늘을 향해 치솟는 회오리를 그린 순간 메마른 땅에서 푸른 물줄기가 치솟았다.

세찬 회오리를 만들며 치솟는 물줄기에 주변의 땅이 흔들렸다.

천천히 눈을 뜬 디아나는 엄청난 물회오리를 보고 감탄을 금치 못했다.

하늘을 향해 쏟아지는 물줄기에 무지개가 만들어졌다. 물줄기를 따라 쭉 내려온 가디언은 디아나의 이마에 부리를 맞추었다.

“잘했다, 디아나. 정말 잘했어. 이제 천천히 힘을 거두어 보거라.”

무지개를 바라보던 디아나는 가디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후, 숨을 내쉬었다.

힘을 쓰는 것만큼 어려운 것이 힘을 거두어들이는 것이었다.

물줄기를 압축하듯 천천히 회오리 속도를 느리게 만들었다.

“서두르지 말거라.”

마치 작은 상자 안에 물회오리를 담는 것처럼 디아나는 모든 감각을 집중했다.

이마에 송골송골 땀이 맺힐 만큼 집중하던 순간 낯선 발소리가 들려왔다.

“누구…… 앗!”

갑작스런 소리에 움찔한 그때, 집중력이 흐트러졌다.

줄어들던 회오리가 다시 거센 물줄기가 되어 디아나의 무의식을 따라 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뻗어 나갔다.

“이런!”

가디언의 당황스런 외침이 울리고 누군가 물줄기를 방어하듯 연무장에 강한 바람이 불었다.

하지만 세찬 바람에도 방향을 틀지 않은 물줄기는 제일 앞에 서 있는 카이루스를 향해 맹렬한 기세로 빠르게 다가왔다.

하지만 모두의 예상과 달리 날카로운 물줄기는 카이루스를 덮치지 못했다.

카이루스가 신성력을 쓰기도 전에 물줄기가 공격을 멈추었기 때문이다.

황제와 후작은 경악을 감추지 못하며 말끝을 흐렸다.

“이게…… 무슨…….”

“어떻게…….”

물줄기는 카이루스의 가슴팍에 스며들 듯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정확히는 카이루스의 가슴이 아닌 안주머니 안에 있는 어머니의 유품으로 물이 빨려들고 있는 것이었다.

웅웅-.

물줄기를 모두 빨아당긴 보석은 마치 생명이 깃든 것처럼 웅웅 진동했다.

너무도 믿기지 않는 일에 멍하니 서 있던 카이루스는 진동에 정신을 차리고 안주머니에서 보석을 꺼냈다.

하늘빛 보석이 빛을 발하며 진동하고 있었다.

“정령석, 나의 정령석이다.”

보석에게 이끌리듯 날아온 가디언이 황금빛 눈동자를 빛냈다.

“이게, 가디언님의 정령석…….”

디아나는 마치 자신을 부르는 것만 같은 하늘빛 보석을 향해 다가왔다.

자신이 가까워지자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보석이 더욱 강하게 진동했다.

쿵- 쿵- 쿵.

가디언의 힘을 느낄 때와 똑같이 심장이 보석에게 공명하듯 크게 뛰었다.

“정말 이 보석이 가디언님의 정령석이 맞습니까?”

후작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가디언은 정령석에서 눈을 떼지 않으며 답했다.

“맞다. 오랜 세월이 흘러 평범한 보석처럼 잠들어 버렸지만 지금 내 힘을 느끼고 깨어난 것이다. 분명 나의 정령석이야, 디아나.”

가디언은 디아나를 향해 머리를 돌렸다.

“나의 주인은 곧 너이니, 디아나 네가 정령석의 힘을 흡수해야 한다.”

홀린 듯이 하늘색 보석을 바라보던 디아나의 입술이 느리게 움직였다.

“……제가요……?”

“그래, 두려워 말거라. 아프거나 고통스럽지 않단다. 그저 네가 정령석을 잡기만 하면 된다. 그럼 모든 것은 정령석이 알아서 할 것이다.”

자신을 부르는 듯 진동하는 정령석을 보던 디아나는 그것을 쥐고 있는 카이루스와 눈이 마주쳤다.

금안에 서린 찰나의 망설임을 느낀 것일까 카이루스는 아무 걱정 말라는 듯 올곧은 눈빛이었다.

그에게서 안도감을 느낀 디아나는 느리게 눈을 깜박였다.

가디언의 힘은 곧 나의 힘.

디아나는 일말의 망설임을 말끔히 떨치며 자신을 부르는 정령석을 향해 손을 뻗었다.

손끝에 느껴지는 따스한 기운에 마침내 정령석을 두 손으로 꼭 그러쥐었다.

‘따뜻해.

온몸을 감싸 안는 따스함은 가디언의 말대로 하나도 아프지 않았다.

아늑한 숲이 자신을 안아 주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그 순간 엄청난 빛이 디아나를 덮쳤다.

“영애!”

“디아나!”

순식간에 빛 속에 감춰지는 디아나의 모습에 카이루스와 후작이 다가가려 했지만 강한 바람에 몸이 밀려났다.

“기다려라.”

가디언의 목소리가 울리고 밝은 빛의 기둥이 하늘을 향해 솟구쳤다.

구름을 뚫으며 하늘 끝까지 솟구치는 신비로운 광경에 황제와 후작은 넋을 잃고 하늘을 올려보았다.

그리고 곧 빛이 서서히 사라지며 빛의 기둥 속에 감춰졌던 디아나의 모습이 드러났다.

살랑이는 바람에 황금빛 머리칼이 흔들리고 허공으로 흩어지는 반짝이는 빛들이 마치 요정처럼 디아나의 주변을 맴돌았다.

“……디아나…… 영애.”

빛의 신이 있다면 지금 이 모습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아름다운 모습에 카이루스의 흑빛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디아나는 넋을 놓고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들을 보다 천천히 손을 뻗었다.

자신의 손끝에서 만들어진 작은 바람들이 회오리를 만들고, 물방울이 모여 물줄기를 만든다.

땅에서 올라온 흙이 작은 언덕을 쌓았다.

자연의 모든 것이 자신의 뜻대로 움직였다.

자연의 모든 것들이 자신에게 귀 기울였다.

“디아나, 이것이 진정한 나의 힘이란다.”

디아나는 자연의 축복을 느끼며 환하게 미소를 그렸다.

* * *

똑똑-.

“누구야?”

“마님, 조간신문을 가지고 왔습니다.”

“방 앞에 두고 가.”

“네, 마님.”

하녀의 발소리가 점점 멀어지고 더 이상 들리지 않자 붉은 머리칼을 틀어 올린 여자가 몸을 일으켰다.

조용히 방문을 열어 신문을 가지고 몸을 돌린 여자는 언제 온 것인지 소파에 앉아 발장구를 치고 있는 여자아이를 보고 몸을 움찔했다.

“페넬로페, 쓸데없는 짓은 하지 말라 했는데, 또 마법사를 찾아갔니?”

아이의 목소리는 천진난만했지만 페넬로페를 바라보는 눈동자는 그녀의 머리 색보다 더 붉었다.

위험하게 번뜩이는 붉은 눈빛에 페넬로페의 어깨가 떨렸다.

“…….”

“네가 백날 마법사들을 찾아가 봤자 어차피 내 술식은 풀리지 않아. 사실 푸는 방법이 없는 건 아냐. 네가 하나를 포기하면 내가 술식을 풀어 줄 수도 있어.”

세이아의 미소에 페넬로페의 눈동자가 잘게 떨렸다.

갑작스럽게 자신의 집으로 들어와 원하지 않은 어둠의 술식을 몸에 새겼다.

어둠의 정령은 그녀가 자신을 부른 것이라 했지만 자신의 앞길을 막는 자들을 다 없애 버리고 싶단 생각은 단순한 분노였을 뿐 실행에 옮길 마음은 없었다.

하지만 어둠의 정령은 손가락 하나 까딱이는 것으로 수많은 사람들을 죽이고 있었다.

페넬로페는 이 힘, 눈앞의 어둠의 정령에게서 도망칠 수만 있다면 전 재산도 내놓을 수 있다. 필요하다면 제 자식까지도.

“……제가 무엇을 내놓으면 되나요?”

“네 목숨. 내게 영혼을 바치면 그 술식도 자연스럽게 풀려. 어때? 원한다면 지금이라도 너의 목숨을 내가 친히 거둬 줄게.”

페넬로페는 어둠의 정령이 사람의 목숨을 거두는 것을 두 눈으로 직접 보았었다.

어둠 속에서 사람의 생기를 빨아 먹던 기이하고 소름 끼치는 모습을 말이다.

그것은 단순한 죽음이 아닌 영혼의 소멸 같았다.

사람에게 가장 큰 공포는 죽음.

페넬로페는 죽고 싶지 않았다.

무릎을 꿇은 페넬로페는 고개를 조아렸다.

“주인님, 제가 어리석은 생각을 했습니다. 한 번만 용서해 주신다면 다신 허튼짓을 하지 않겠습니다. 주인님의 충실한 종으로 살겠습니다.”

세이아는 바르르 떠는 페넬로페를 보며 짙은 미소를 지었다.

“그래, 그래야 나의 착한 종이지. 넌 내가 깨어난 뒤 선택한 첫 번째 종이니 특별히 한 번 더 기회를 줄게. 이때까지 네가 날 도운 일들이 꽤나 마음에 들었으니까.”

“감사합니다, 주인님.”

“페넬로페, 신문을 이리 가져와.”

“……네.”

페넬로페는 올라간 소매 사이로 드러난 어둠술식을 숨기며 세이아에게 다가갔다.

신문을 건네받은 세이아는 첫면에 실린 기사를 보며 눈썹을 치켜세웠다.

[황성에 나타난 빛의 기둥과 가디언의 재림.]

“정령석을 찾은 거야.”

어둠의 정령은 짓씹듯이 말했다.

정령석만 생각하면 속에서 뜨거운 분노가 차올랐다. 당장이라도 가디언을 갈기갈기 찢어 버리고 싶을 만큼 말이다.

“감히 내 힘을 훔쳐가?”

가디언은 자신을 봉인하며 농간을 부렸다. 바로 어둠의 정령이 봉인된 곳에 자신의 정령석을 박은 것이었다.

봉인되어 있는 동안 많은 어둠의 힘이 정령석으로 흡수되었다.

그 사실을 처음 깨어났을 땐 알지 못했다.

처음엔 오래 봉인된 탓에 힘이 아직 돌아오지 않은 것이라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시간이 흘러도 어둠의 힘은 예전 같지 않았다. 그제야 알게 된 것이다.

자신이 가디언의 농간에 놀아났다는 것을 말이다.

검은 새 새끼가 감히 어둠의 신인 자신을 농락하다니.

힘을 되돌리기 위해 짐승처럼 인간의 영혼을 찾아 헤매야 했다.

하지만 그렇게 했음에도 완전한 힘이 돌아오진 않았다.

참을 수 없는 분노에 신문을 꽉 그러쥐었다.

“반드시 모두 소멸시켜 버릴 거야.”

가디언도, 감히 인간 주제에 머리를 조아리지 않았던 에이루스가 만든 이 나라도 전부 소멸시켜 버릴 것이다.

세이아는 핏빛 같은 눈동자를 번뜩이다 두려움에 고개를 숙이고 있는 페넬로페를 바라보았다.

“페넬로페.”

“……네, 주인님.”

“아무래도 내 추종자들과 한번 모여야겠구나. 세간에서 가디언의 재림이니 뭐니, 시끄럽게 떠드는 꼴을 볼 수가 없어. 조만간 조용히 만날 곳을 알아봐.”

“……네, 주인님.”

“그리고 힘을 더 모아야겠어. 먹잇감들을 더 모아. 곧 델라이트 영지로 한 번 더 가야겠어.”

“……그건…… 안 됩니다. 이미 델라이트 영지에서 사람들이 기이하게 죽어 나간다고 말이 많아졌습니다. 경비가 삼엄해져 잘못하면 들킬 수도 있습니다.”

세이아의 얼굴이 와그작 일그러졌다.

“거기가 안 되면 수도 빈민가라도 뒤져 먹잇감을 가져와. 이 거지 같은 힘으론 아무것도 할 수가 없어!”

“……제가 움직이면 너무 눈에 띄어…….”

하지만 페넬로페는 온몸을 휘감는 검은 연기에 더 이상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켁, 컥……살…….”

페넬로페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던 찰나 세이아는 눈썹을 추켜세웠다.

세이아의 시선이 문을 향하자 술식이 풀린 페넬로페가 풀썩 주저앉았다.

“남의 말을 함부로 엿듣는 건 아주 나쁜 짓이란다.”

세이아가 손을 살짝 휘젓자 방문이 벌컥 열렸다. 그러자 방 안으로 소년이 넘어졌다.

페넬로페는 엉거주춤 일어나는 데이빗을 보며 날카롭게 외쳤다.

“이곳에 얼씬도 하지 말라 했잖아!”

“어머니가…… 걱정돼서…….”

“네 걱정 따위 필요 없어!”

데이빗은 움찔하며 세이아를 힐긋 보았다. 위험한 존재. 그날 방 안으로 침입한 저 여자아이가 어머니를 괴롭히고 있다는 걸 안다.

데이빗의 눈빛을 본 세이아가 피식 웃었다.

저 조그만 인간이 제 엄마가 걱정되는 건지 틈만 나면 이야기를 엿듣고 있다는 건 진작에 알고 있었다.

세이아는 페넬로페의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페넬로페는 자신을 대신해 자식을 제물로 바치려 했던 여자다.

그 정도로 썩어빠진 인간이기에 어둠의 힘이 이끌린 것이다.

제 엄마가 자신을 죽이려 한 것도 모르고 저렇게 걱정하다니, 멍청한 것.

세이아는 멍청한 데이빗을 비웃다 문득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귀찮게 하지 말고 방으로 돌아가!”

“페넬로페, 아이에게 그렇게 소리를 지르면 안 돼. 데이빗이 놀라잖아.”

“……주인님…….”

갑자기 분위기가 유해진 세이아를 페넬로페는 당황스런 눈빛으로 보았다.

세이아는 그녀를 신경 쓰지도 않고 데이빗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데이빗, 이리 와 봐.”

데이빗은 자신을 부르는 붉은 눈동자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다가가고 싶지 않아 멈춰 있자 어느새 다가온 페넬로페가 어서 가라고 등을 세게 밀었다.

“……왜…… 부르셨어요?”

데이빗은 세이아가 두려운지 손을 떨었다. 그것을 본 세이아는 미소를 그리며 데이빗의 손을 잡았다.

“데이빗, 엄마가 많이 걱정되니? 엄마가 힘들지 않았으면 좋겠어?”

“……네…….”

“그래, 참 착한 아이구나. 이렇게 엄마를 위하다니…… 네가 엄마를 도와줄 수 있는 일이 있는데 한번 해 보겠니?”

“……네?”

데이빗은 세이아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눈빛이었다.

“엄마가 힘든 게 싫다고 했잖아. 네가 엄마의 일을 도와줄 수 있어. 네가 잘만 도와주면 내가 네 엄마 곁을 떠나줄게. 너 나 싫어하잖아.”

“…….”

데이빗은 차마 답을 하지 못하며 시선을 내리깔았다.

“괜찮아. 어차피 네가 답하지 않아도 난 네 마음을 읽을 수 있거든.”

“……제가 뭘 도와드리면 돼요?”

데이빗은 떨리는 눈동자로 세이아를 바라보았다.

자신의 말을 철석같이 믿고 있는 어리석은 소년의 얼굴을 보며 세이아는 짙은 미소를 그렸다.

“먹잇감을 모으는 미끼가 되어 주면 돼.”

* * *

“맛있는 닭꼬치가 무려 3쿠퍼입니다! 달달한 맛이 일품이니 다들 한번 드셔 보세요!”

“검의 모양을 따서 만든 바게트입니다!”

“작년 검술 대회 우승자, 에인트 경의 검을 본떠 똑같이 만든 모형 검입니다!”

길게 늘어선 노점 상인들의 목소리가 활기찼다.

이틀 뒤 열리는 검술 대회의 축제가 시작된 것이었다.

제국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대공가의 사건과 어둠술사들의 일은 잠시 잊은 듯 사람들은 축제를 즐기느라 다들 바빴다.

그리고 그 수많은 사람들을 구경하는 디아나 역시 잠시 어둠의 정령에 대해선 잊고 있었다.

디아나가 축제를 나온 건 황후의 제안이었다.

하루 종일 가디언과 정령술만 연습하고 있는 디아나에게 잠시 머리를 식히라며 말이다.

축제에 사람이 많을 것이라 좀 망설였지만 마탑에서 보내준 포션 덕에 디아나는 편하게 축제를 즐기고 있었다.

마탑에서 보내준 포션이 디아나의 번쩍이는 금빛 색깔들을 평범한 갈색으로 바꿔 줬기 때문이었다.

떠들썩한 거리를 구경하며 걷던 디아나는 피비의 목소리에 걸음을 멈췄다.

“아가씨, 저 인형 꼭 유네스를 닮지 않았나요? 물론 이젠 너무 커져 버렸지만요.”

피비가 나무 좌판대에 놓인 고양이 인형을 가리켰다. 고양이 인형은 작았을 때의 유네스와 똑 닮아 있었다.

“응, 닮았어. 저만할 때 정말 귀여웠는데……. 물론 지금 건강한 모습도 좋지만.”

방에서 자신을 얌전히 기다리고 있을 커다란 유네스를 떠올리며 디아나가 미소를 그린 그때, 레귤러스가 외쳤다.

“디아나, 저거 좀 봐!”

디아나는 레귤러스가 가리킨 곳을 보았다.

그곳엔 각종 식물들이 있었다.

씨앗을 파는 곳인 듯, 제국의 식물은 물론이고 타국의 식물 씨앗들도 구비해 놓았다.

식물을 좋아하는 레귤러스는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디아나, 저긴 꼭 가야 해!”

성격 급한 레귤러스가 가판대로 먼저 뛰어가고 디아나는 카이루스와 눈이 마주쳤다.

“우리도 가 볼까요, 영애.”

카이루스는 디아나를 보며 빙그레 미소를 그렸다. 순간 화원에서의 일이 떠올랐다.

‘영원히 당신을 지켜 드리겠습니다.’

꽃말이란 걸 알지만 그날 들은 말이 가끔 생각나곤 했었다.

그리고 떠오를 때마다 얼굴에 열기가 오른다.

또 그날처럼 간질거리는 기분에 디아나는 그의 시선을 비스듬히 피했다.

“네.”

“사람들이 많아요, 길을 잃지 않게 손을 잡는 게 좋겠습니다.”

“……네.”

디아나는 카이루스의 손을 꼭 잡았다. 이미 가판대 앞에 도착한 레귤러스는 주인장과 함께 신나게 대화를 나누는 거 같았다.

어차피 디아나와 카이루스는 식물 씨앗에 크게 관심이 없었기에 그곳을 향해 천천히 걸었다.

짧은 거리는 아니었지만 침묵이 어색하게 느껴졌다.

디아나는 힐긋, 카이루스의 수려한 옆얼굴을 보다 입을 열었다.

“……1황자 저하는 갑자기 무슨 일이 생기셔서 못 오신 건가요?”

원래라면 오늘 축제에 에키온도 함께 오기로 했었다. 한데 저녁에 갑자기 일이 생겼다며 카이루스만 온 것이었다.

“아, 큰일은 아니고 에키온이 맡은 행사가 하나 있는데 그쪽에 문제가 좀 생겼나 봐요.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영애.”

“그렇군요…….”

더 이상 물을 게 없었다.

사실 1황자 저하의 일에 대해서도 크게 궁금한 건 없었다.

단지 카이루스와 함께 있는 고요함이 어색했던 거니까.

갑자기 왜 이렇게 불편해졌지.

카이루스가 쉬운 사람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고마운 사람이었고 크게 불편한 사이도 아니었다.

디아나는 계속 신경 쓰게 되는 카이루스의 옆얼굴을 힐긋거리다 어느새 레귤러스의 뒤에 도착했다.

“정말 이게 사막에서 자라는 그 나무의 씨앗이라고? 되게 구하기 힘든 건데…….”

“정말입니다! 구하기 힘들긴 해도 못 구하는 씨앗은 아닙지요, 제 아버지가 사막의 사람인데…….”

레귤러스와 주인장은 사막의 어떤 식물에 대해 한창 열정적인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흥미가 돋지 않는 이야기에 고개를 돌리던 디아나는 한쪽 가판대에 놓인 액세서리들을 보았다.

그리고 한 목걸이를 보고 눈을 크게 떴다.

“어…… 저건.”

“영애, 왜 그러시나요?”

“왕자님, 우리 저기로 가요.”

디아나는 카이루스를 이끌고 액세서리 노점상으로 향했다.

“어머나, 예쁜 손님이 오셨네요. 어떤 게 마음에 드시나요? 머리핀부터 팔찌, 반지, 목걸이, 귀걸이까지 없는 게 없답니다.”

주인장이 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디아나는 망설임 없이 아까 보았던 목걸이를 가리켰다.

“이걸로 줘.”

언뜻 하늘빛으로 보이는 푸른 보석이 박힌 목걸이였다. 주변에 놓인 화려한 목걸이들과 달리 장식 하나 없이 밋밋한 모양이었다.

“음…… 이거요? 이건 예쁜 아가씨가 하시기엔 너무 밋밋한데. 옆에 이 분홍색 목걸이는 어떠세요?”

“제가 보기에도 옆에 목걸이가 더 예뻐 보이는데 싫으신가요?”

카이루스도 덧붙였지만 디아나는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아뇨, 이걸로 할 거예요.”

잠깐 당황하던 주인장이 곧 영업용 미소를 그렸다.

“알겠습니다. 예쁘게 포장해 드릴게요.”

“제가 내겠습니다, 영애.”

카이루스가 돈을 내려 하자 디아나가 황급히 그의 손을 잡았다.

“아니에요! 이건 제가 사야 돼요.”

“네?”

카이루스가 당황스러워 하던 찰나 디아나가 주머니에서 은화를 꺼내 재빨리 값을 치렀다.

그리고 디아나는 작은 선물 상자를 카이루스에게 내밀었다.

“……영애, 왜 이걸 제게……?”

“제가 드리는 선물이에요.”

“……네?”

“할아버지께 들었어요. 정령석이 왕자님 어머니의 유품이었다고요. 어머니의 유품보단 보잘것없지만…… 그래도 비슷한 거 같아서 왕자님께 드리고 싶어요.”

하늘색 목걸이를 보는 순간 정령석을 떠올렸다.

그땐 정신이 없어 카이루스에게 고맙다는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이후 유품이란 말을 듣고 내내 마음이 무거웠다.

힘을 흡수한 뒤 돌려줄 수 있었다면 좋았겠지만 힘이 사라진 정령석은 가루가 되어 자연으로 돌아가 버렸다.

이 목걸이로 조금이나마 그에게 미안한 마음을 전하고 싶었다.

“……그걸 신경 쓰고 계실 줄은 몰랐습니다. 어차피 처음부터 가디언의 것이었으니 원래 주인을 찾아 돌아간 것인걸요.”

“음…… 그래도 정령석을 가지고 있는 동안 어머니와의 추억이 있잖아요. 전…… 엄마와의 추억이 하나도 없어요. 하지만 만약 엄마와 관련된 소중한 물건이 있었다면 그게 제 것이 아니라 해도 쉽게 주진 못했을 거예요. 그러니 왕자님께 너무 감사한걸요. 받아 주셨으면 좋겠어요.”

“…….”

카이루스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혹시 가판대에서 산 거라 기분이 나쁜 걸까.

디아나는 말이 없는 그에 불안해지던 찰나 카이루스가 느리게 입술을 열었다.

“영애는…… 정말…… 언제나 저를 놀라게 합니다.”

“네? 너무 별로신 거면…… 제가 더 좋은 걸로 다음에…….”

디아나가 목걸이를 그러쥐려던 때, 카이루스가 손을 잡았다. 그는 디아나를 바라보며 매끄럽게 입꼬리를 올렸다.

“마음에 듭니다. 제가 이때까지 받은 어떠한 선물도 이만큼 값지진 않을 거예요.”

디아나의 얼굴이 당황으로 물들었다. 자신이 산 목걸이는 값진 물건이 아니었으니까.

고작 몇 실버였다. 값을 치르는 것을 그도 보았으니 모르지 않을 거다.

하지만 진심으로 기뻐하는 그의 미소에 디아나는 다른 말을 할 수 없었다.

카이루스는 목걸이를 가지고 가 곧장 목에 걸었다.

“어떤가요, 영애?”

머리 색과 눈 색이 바뀌었다 해도 그의 수려한 외모는 그대로였다. 밋밋한 목걸이였지만 그가 걸자 마치 엄청 비싼 보석처럼 보였다.

“……너무 잘 어울리세요.”

“다행이네요. 선물 감사합니다, 영애.”

카이루스의 긴 눈매가 반달 모양으로 예쁘게 접혔다.

정말 마음에 들어 하는 그의 반응에 디아나도 기분이 좋아져 미소를 지었다.

“다음엔 더 좋은 걸로 드릴게요, 왕자님.”

“기대…….”

“형, 디아나!”

카이루스의 말을 잘라먹은 레귤러스의 큰 목소리가 들렸다. 약초 상인과의 대화가 다 끝났는지 레귤러스는 양손 가득 씨앗 주머니를 들고 서 있었다.

“레귤러스, 너무 많이 산 거 아냐?”

“별로 안 샀어. 저기 있는 거 다 사고 싶었는데 어머니께 혼날 거 같아서 참았는걸.”

레귤러스는 도리질을 하며 혹시라도 카이루스가 씨앗을 뺏어갈까 품에 안았다.

“안 뺏어, 레귤러스. 안 뺏을 테니까 기사에게 넘겨줘. 네가 들기엔 무거우니까.”

“음…….”

“나중에 주머니 떨어뜨려서 씨앗 다 바닥에 흘리면 그게 더 아깝지 않겠어?”

망설이던 레귤러스는 씨앗을 떨어뜨리는 상상이라도 한 건지 사색이 되어 기사에게 주머니들을 넘겼다.

“근데 디아나, 방금 뭐 산 거야?”

“아, 그게 왕…….”

“그냥 잠시 구경한 거야. 별거 안 샀어.”

카이루스는 디아나의 말을 자르며 거짓말을 했다.

왜…… 말하지 않는 거지?

디아나가 의아한 눈빛으로 카이루스를 보았지만 그는 그저 미소를 짓고 있을 뿐이었다.

“그래? 그럼 우리 저기 구경 가자. 저기서 무슨 공연 같은 거 하나 봐!”

금세 흥미를 잃은 레귤러스가 광장 중앙을 가리켰다. 사람들이 둥글게 모인 그곳엔 무슨 공연을 하는 지 하늘 위로 연기가 올라가고 있었다.

“레귤러스, 잠시…… 만…….”

“빨리, 빨리 가 보자! 디아나 너도 어서 와!”

레귤러스는 카이루스의 손을 잡고 달려 나갔다. 카이루스가 무어라 말을 하는 거 같았지만 이미 레귤러스에겐 들리지 않는 듯했다.

계속 뒤를 돌아보던 카이루스는 결국 포기한 듯 레귤러스와 함께 뛰었다.

억지로 끌려가는 그의 뒷모습을 보던 디아나는 쿡, 웃음을 흘리며 피비를 돌아보았다.

“아가씨, 저희도 가 볼까요?”

“응.”

디아나는 피비의 손을 잡고 그들의 뒤를 따랐다.

* * *

축제의 환한 불빛이 닿지 않는 한적한 골목길.

골목의 한쪽 벽에 검은 로브를 쓴 장신의 남자가 등을 기대고 서 있었다.

골목 너머로 들리는 사람들의 웃음소리와 달리 로브 속 남자의 얼굴은 수심이 가득했다.

눈을 감고 축제의 소리를 듣던 남자의 입술에서 낮은 음성이 흘러나왔다.

“……디아나…….”

대공은 눈을 감고 마지막으로 보았던 디아나의 얼굴을 그려 보았다.

어떻게 지내고 있을지, 걱정되고 보고 싶었다.

그가 없어 오히려 더 잘 지내고 있겠지만 그래도 그리움은 막을 수가 없었다.

디아나를 생각하자 먹먹해지는 가슴에 입술을 깨물던 그때, 한적한 골목에 발소리가 들렸다.

눈을 뜬 순간 익숙한 목소리가 골목 안을 울렸다.

“대공 전하.”

“로운.”

대공은 몸을 바로 하며 골목 안으로 들어오는 로운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전하, 알아본 결과 최근 빈민가엔 붉은 머리 여자가 한 번도 온 적이 없었다고 합니다. 귀족은 물론이고 평민으로 보이는 여자도요.”

로운의 말에 대공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델라이트 영지에서 올라오기 직전, 우연히 영지 내에서 낯선 사람을 보았던 목격자를 찾았었다.

얼굴은 정확히 보지 못했지만 어떤 작은 아이와 함께 있는 붉은 머리의 여자를 보았다고 했다.

대공은 작은 아이의 설명을 듣지 않아도 세이아일 것이란 본능적인 직감이 들었다.

그리고 그 붉은 머리 여자가 세이아를 돕는 추종자일 확률이 높았다.

작은 실마리를 가지고 수도로 복귀하자마자 들린 소식은 빈민가에서 사람들이 실종되고 있단 것이었다.

빈민가에서 사람들이 하나둘 없어지는 것은 늘 있는 일이라 경비대는 관심을 두지 않았지만 대공은 아니었다.

델라이트 영지에서 사람의 생명력을 흡수한 것은 꽤 지난 일이었다.

그리고 델라이트 영지 이후로 어느 곳에서도 그런 집단적인 죽음이 벌어진 적이 없었다.

그는 델라이트 영지가 끝이 아닐 거라 생각해 빈민가의 사건을 더 알아보았다.

결과는 그의 예상이 맞았다.

빈민가의 실종은 단순한 실종이 아니었다. 벌써 없어진 사람의 수만여 명이 넘었다.

분명 누군가 사람들을 어둠의 정령에게 이끄는 것이다.

붉은 머리칼의 여자.

마음 같아선 수도를 모조리 뒤져 찾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제국이 발칵 뒤집힐 것이다.

거기다 문제는 붉은 머리칼의 여자가 한둘이 아니란 것이었다.

붉은 머리의 여인들을 모두 잡아다 조사할 순 없었다.

“로운, 붉은 머리칼의 여자가 아니더라도 빈민가 주변에 낯선 사람이 온 적은 없다더냐?”

“네. 본 사람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빈민가 사람들이 지금 공포에 휩싸여 물어도 말을 잘 해 주질 않습니다.”

“……마지막으로 빈민가에 사람이 없어진 지 얼마나 되었지?”

“한 이틀 된 거 같습니다.”

“고작 닷새 만에 열 명이 실종되었다고 했다. 그런데 이틀이라…….”

대공은 말끝을 흐리며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요요히 빛나는 만월을 보던 그는 금안을 번뜩이며 입을 열었다.

“로운, 내가 빈민가로 직접 가야겠다.”

* * *

피융- 피융- 펑!

하늘 위로 날아오른 폭죽이 터지며 형형색색의 아름다운 불꽃을 만들었다.

레귤러스가 가리켰던, 광장 중앙에 사람들이 모여 있던 곳은 특별한 공연이 펼쳐지고 있었다.

인형극이나 음유시인이 아닌 불이 둘러진 고리와 처음 보는 신기한 도구들로 사람들이 위험하면서도 환상적인 공연을 펼치고 있었다.

한참을 그렇게 곡예를 펼치던 사람들이 인사를 하고 물러나자 기다렸다는 듯 하늘에서 불꽃이 터지기 시작한 것이다.

“와!”

“너무 예쁘다! 그치, 엄마?”

“그러게, 너무 아름답네.”

밤하늘을 물들이는 불꽃의 향연에 사람들은 연신 감탄을 내뱉으며 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디아나 역시 하늘을 올려다보며 크게 터지는 금빛 불꽃에 입을 벌렸다.

“예쁘다.”

“꼭 아가씨 눈동자 색 같아요. 물론 아가씨의 눈동자가 훨씬 영롱하고 아름답지만요.”

불꽃을 보면서도 놓치지 않는 칭찬에 곁에 있던 에드윈도 쿡 웃음을 흘렸다.

하지만 디아나는 미소를 그리지 않았다. 그저 연신 하늘에 펼쳐지는 불꽃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어딘지 가라앉은 디아나의 분위기를 느낀 피비가 고개를 갸웃했다.

“불꽃이 이렇게나 예쁜데 우리 아가씨 기분은 왜 별로이실까요?”

“……자꾸 생각나서.”

“네?”

장난스럽게 물었던 피비는 진지한 디아나의 얼굴에 한껏 올라갔던 입꼬리를 내렸다.

“뭐가 생각나시는데요?”

“…….”

디아나는 입술을 달싹이다 이내 꾹 다물었다.

자꾸 생각나는 것은 바로 자신의 아버지인 대공이었으니까.

불꽃을 본 순간 대공가의 영지에서 보았던 불꽃이 떠올랐다.

피비와 함께 몰래 대공성을 나와 축제에 갔던 그날, 우연히 대공을 만나 함께했던 그날이 말이다.

난생처음 보았던 축제, 난생처음 보았던 불꽃. 함께 발 맞춰 걸으며 자신을 챙겨 주었던 대공의 모습들이 자꾸만 밤하늘을 수놓는 불꽃 위로 아른거렸다.

그리고 그가 보고 싶었다.

축제 거리에서 자신과 나이가 비슷해 보이는 아이들이 아빠와 손을 잡고 지나갈 때마다 신경 쓰지 않는 척하면서도 자신의 손을 잡아 주던 대공이 생각났다.

그는 지금 어디에 있는 걸까.

정령의 의식을 치렀던 그날 우연히 대공의 모습을 본 것이 마지막이었다.

어둠의 정령을 뒤쫓고 있다고 황제가 지나가듯 말해 준 것이 전부였다.

황제와 황후 모두 혹시라도 자신이 불편해할까 대공에 대한 이야기를 잘 하지 않는 거 같았다.

불편한 것은 사실이기에 디아나도 묻지 않았지만 축제가 한창인 거리를 거닐수록 대공이 떠오르는 것은 어찌할 수가 없었다.

딱 한 번 있는 축제의 추억 속엔 대공도 함께였으니까.

“음, 이제 끝난 거 같아요, 아가씨.”

디아나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어느 정도 눈치를 챈 듯 조용히 바라만 보고 있던 피비가 나직이 말했다.

대공을 향한 생각에 빠져 있던 디아나는 느리게 눈을 깜박였다.

흐려졌던 초점이 선명해지자 더 이상 불꽃이 터지지 않는 어두운 하늘이 보였다.

고개를 내리자 멈추었던 걸음을 내딛는 사람들이 보였다.

“디아나!”

자신을 크게 부르는 레귤러스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조금 떨어져 서 있는 두 사람이 보였다.

신이 난 레귤러스와 흥분한 레귤러스를 진정시키는 카이루스.

“완전 멋있었어! 그치, 디아나? 형도 멋있었지? 원래 이렇게 크게 안 했었는데 오늘은 작년보다 훨씬 크고 길었어!”

방방 뛰는 레귤러스의 머리를 누르듯 쓰다듬고 있는 카이루스의 모습에 디아나는 작은 웃음을 흘렸다.

급격히 피로해 보이는 그의 모습이 재밌어 웃으며 그들에게 걸어가던 디아나는 순간 자신의 앞으로 튀어나온 사람에 화들짝 놀랐다.

“앗!”

“아, 죄송합니다!”

빠른 속도로 뛰어온 소년은 멈추지 못하고 결국 디아나와 부딪히고 말았다.

디아나는 다행히 에드윈이 바로 막아 주어 크게 넘어지지 않았지만 소년은 에드윈의 반사적인 방어에 그만 뒤로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에드윈은 디아나를 똑바로 세워 주며 걱정스럽게 물었다.

“아가씨, 괜찮으세요?”

“응, 난 괜찮아. 그보다…….”

디아나는 뒤로 넘어진 소년에게 한 걸음 다가갔다. 밝은 분홍 머리가 제일 먼저 보였다. 왠지 익숙하다 느낀 순간 소년은 벌떡 몸을 일으켰다.

“어……!”

디아나는 마주한 소년의 얼굴에 눈을 크게 떴다.

“죄송합니다, 영애. 제가 급히 뛰어오느라 앞을 제대로 보지 못했어요. 죄송합니다.”

하지만 디아나가 무어라 말을 하기도 전에 빠르게 사과한 소년은 곧장 어디론가 뛰어갔다.

저 애는…….

디아나가 소년의 뒷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하자 피비가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

“아가씨, 왜 그러세요? 아시는 분이에요?”

“응, 예전에 본 적이 있어.”

수도에서 길을 잃었던 그날 마주쳤던 소년이 분명했다.

“이름이…… 데이빗이었던가…….”

날카롭게 소년을 부르던 여자의 목소리가 왠지 귀를 울리는 거 같았다.

“어, 이거 저 영식이 흘리고 간 거 같은데요.”

디아나는 피비에게 고개를 돌렸다. 피비의 손에 들린 작은 주머니를 보던 디아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뭔가 기분이 이상했기 때문이었다.

한 번 본 적 있는 소년이어서라기보다 왜인지 이상하리만큼 몹시 급해 보이던 소년의 모습과 아까부터 뭔가 기분 나쁜 느낌이 들어 찝찝했다.

“아무래도 따라가 봐야겠어.”

기분 나쁜 기운.

디아나는 피비의 손에 있던 주머니를 들었다.

“네?”

“피비, 왕자님과 황자 저하께 나 잠시 어디 좀 다녀온다고 해. 에드윈, 가자.”

“네, 아가씨.”

“아가씨, 갑자기 어딜…….”

디아나는 피비의 당황스런 목소리와 놀란 얼굴의 카이루스를 뒤로하고 소년을 따라 걸음을 서둘렀다.

* * *

화려한 제국 수도의 그늘이라 할 수 있는 빈민가는 수도의 동쪽 끝에 위치해 있었다.

다른 나라의 빈민가들은 성벽 밖으로 쫓겨나 있었지만 제국은 초대 황제가 빈민가를 성벽 밖으론 내쫓지 못하게 법령을 만들어 놓았었다.

성벽 밖으로 나가게 되면 산적은 물론이고 들짐승들의 먹이가 되기 십상이었다. 아무리 천한 자들이라 해도 최소한의 생명권은 보장되어야 한다는 초대 황제의 뜻이었다.

“…….”

하지만 지금 빈민가의 상황을 두 눈으로 직접 보니 최소한의 생명권이라는 건 옛말이 되어 버린 듯했다.

대공은 빈민가에 들어서자마자 느껴지는 짙게 깔린 공포심에 얼굴을 굳혔다.

“전하, 알아보실 것이 있다면 제가 대신 알아보겠습니다.”

로운이 말했지만 대공은 고개를 저었다.

“어둠의 정령도 문제지만 빈민가의 상황이 심각하군. 이대로 두어선 안 되겠어.”

“……아무래도 연이은 실종에 사람들의 공포가 극에 달한 거 같습니다.”

대공이 거리에 들어서자마자 사람들은 두려움에 젖은 눈빛으로 집안으로 숨어 버렸다.

눈만 마주쳐도 덜덜 떨며 도망가는 통에 무언가를 물어볼 수도, 알아볼 수도 없었다.

대공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둠의 정령을 잡아야 한다는 사실에 집중해 이들이 겪었을 공포심에 대해서는 미처 생각지 못했다.

황실의 일원들은 초대 황제의 유지를 받들어 빈민가의 구제를 외면하지 않았다.

그 역시 황족의 피를 이은 황손이었다.

“로운, 경비대에게 알리면 시끄러워질 테니, 기사단에 사복을 입혀 빈민가의 경비를 세워라. 그리고 대공가의 식량 창고를 풀어 먹을 것을 조달해 주어라.”

“네, 알겠습니다.”

“이만 돌아가야겠군.”

밤이 깊어 달이 높이 떠 있었다.

무얼 물어보기도 힘들었고 거리의 상황을 보아하니 지금은 그가 돌아다니는 것 자체가 공포인 듯했다.

한데 돌아가려 몸을 돌린 그 순간 어린아이의 울음소리가 그의 발목을 붙잡았다.

“흑흑…….”

대공은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전하?”

“잠시, 이곳에서 기다리거라.”

따라오려는 로운에게 손을 들어 막아 보인 그는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향했다.

길을 따라 쭉 걸어가자 문이 열려 있는 허름한 집이 보였다.

대공은 문이라고 하기도 힘든 나무판자를 밀었다.

끼이익-.

기름칠이 되지 않은 소리가 울리자 몸을 웅크리고 있던 어린아이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아빠?!”

당장이라도 달려올 듯 일어났던 아이는 대공을 발견하곤 멈칫했다.

그리고 곧 두려움에 몸을 바르르 떨었다.

대공은 겁에 질린 듯 얼굴이 하얘지는 아이의 모습에 검은 로브를 벗으며 몸을 낮추었다.

“괜찮아. 난 너를 헤치려는 것이 아니다.”

아이에게 두 손을 들어 보이며 몸을 낮추자 무서워 바들바들 떨던 아이가 점차 차분함을 보였다.

“……누구…… 세요?”

아이는 황금빛으로 빛나는 대공을 바라보며 느리게 말했다.

어둠 속에서도 번쩍이는 황금빛, 빈민가의 무지한 아이라도 한 번쯤은 들어본 황족의 상징이었다.

아이는 곧 눈앞의 남자가 황족이란 걸 깨닫고 바닥에 넙죽 엎드렸다.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아무런 죄도 짓지 않았지만 아버지가 높을 분을 마주치면 무조건 이렇게 빌라 가르쳤다.

손이 발이 되도록 비는 아이의 모습에 미간이 좁아진 대공은 다가가 아이의 어깨를 잡았다.

“아무런 잘못을 하지 않았으니 그리 빌지 말거라. 오히려 너의 집에 허락도 들어온 내 잘못이 크니, 편히 고개를 들거라.”

상냥하진 않지만 무서운 목소리는 아니었다.

이상하게 믿음이 가는 목소리에 아이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아버지를 기다리고 있던 것이냐?”

허름한 집이었지만 어린아이 혼자 사는 거 같진 않았다. 어린아이의 손으로 할 수 없는 정리 정돈이 되어 있었으니까.

“……네…… 그런데 아빠가 돌아오질 않아요…….”

아버지가 떠올랐는지 아이는 서러운 울음을 터뜨렸다. 대공은 집안을 둘러보았다.

집안엔 아직 사람의 온기가 있었다. 즉, 아이의 아비가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은 듯했다.

이 밤중에 일을 나갔을 리는 없을 텐데.

순간 좋지 않은 예감이 스쳤다.

“아버지가 어딜 갔는지 모르느냐? 혹 익숙지 않은 사람이 이곳에 왔었다거나, 아버지를 데리고 가진 않았느냐?”

“흑…… 이상한 사람이 온 적은 없어요. 근데 그 귀공자님이 오신 날엔 꼭 사람이 없어졌어요. 그래서 아빠에게 가지 말라고 했는데…… 아빠가 갔어요…….”

“귀공자?”

“네, 비싼 로브를 입고 얼마 전부터 이곳에 오는 귀공자님이 있었어요.”

“어떻게 생겼는지, 이름은 무엇인지, 아는 것이 없느냐.”

“……없어요. 아빠가 귀공자님의 눈에 띄면 안 된다고 해서…… 나간 적이 없었어요.”

대공의 다급한 질문이 무서운지 아이가 어깨를 움츠렸다.

대공은 굳은 얼굴을 풀며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괜찮다. 널 탓하는 것이 아니니. 그리고 네 아비는 내가 찾아보마.”

“정말요?”

“그래. 최선을 다하마.”

사라진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아직은 살아 있을 수도 있었다.

“위험하니 문은 잠그고 있거라.”

몸을 일으킨 그가 나가려던 찰나, 아이가 말했다.

“아, 머리칼…… 귀공자님의 머리색이 분홍색이라고 다른 애에게 들은 적이 있어요.”

“분홍색…….”

대공은 잊지 않기 위해 나직이 중얼거리며 서둘러 집을 나갔다.

* * *

“여기로 온 거 같았는데…….”

디아나가 주변을 둘러보며 소년의 흔적을 찾던 때 에드윈이 다가왔다.

“아가씨, 아무래도 영식을 놓친 거 같으니 그만 돌아가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메인 광장에서 꽤 멀어져 위험하기도 하니까요.”

“아…….”

긴장감이 느껴지는 에드윈의 낮은 음성에 디아나는 주위가 지나치게 조용하다는 걸 느꼈다.

소년을 붙잡아야 한다는 생각에 앞만 보고 달려오다 보니 어느새 광장과 꽤 멀어진 거 같았다.

“근데 에드윈, 여긴 어디야?”

수도의 화려한 곳과 달리 뭔가 주변의 건물들이 허름했다.

“……이곳은 천민들이 사는 구역입니다. 조금 더 가면 빈민가가 나옵니다. 경비대의 치안이 약한 곳이니 이만 돌아가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빈민가…….”

책에서 수도 안에 빈민가가 있다는 것은 보았었다. 하지만 막상 그 근처로 와 보니 수도의 거리와는 분위기가 완전 달랐다.

일전에 우연히 카이루스와 만났던 스산한 거리보다 더 황폐했다.

축제의 소란마저 이곳엔 닿지 못하는 거 같았다.

“아가씨, 그만 가시죠.”

에드윈은 주변을 둘러보는 디아나의 시선을 슬쩍 막았다.

여느 귀족들이 가지고 있는 빈민가에 대한 혐오가 있어 그런 것은 아니었다.

단지 아직 어린 디아나에게 좋은 것만을 보여 주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이곳의 어두운 면은 어른이 되면 자연스럽게 알게 될 테니까.

“근데 그 영식은 왜 이쪽으로 간 거지? 이곳의 치안이 안 좋은 거면 그 영식도 위험한 거 아닌가? 호위 기사도 없었잖아.”

“그건…….”

디아나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영식은 분명 귀족이었다.

오늘 부딪혔을 때 입고 있던 옷도 비싼 것이었고, 예전에도 분명 귀족가의 마차에 타는 것을 보았었다.

그런 영식이 왜 위험한 곳에 온 거지?

“저희가 잘못 본 게 아닐까요? 뒤를 쫓으며 몇 번 놓치지 않았습니까, 어쩌면 착각한 걸 수도 있습니다. 귀족…… 영식이 홀로 이곳에 올 이유는 없으니까요.”

“그런 걸까…….”

소년의 뒤를 쫓아오긴 했지만 이 거리로 들어오는 것을 본 건 아니었다. 마지막으로 본 소년이 가던 길을 따라 쭉 오다 보니 이곳이었던 것이다.

“네, 아마 저희가 못 본 사이 마차를 타고 떠나신 거 같습니다.”

에드윈이 확신하듯 말했다.

하지만 디아나는 찝찝함이 남았다.

좀 더 이곳을 뒤져 소년을 찾아보고 싶은 그런 마음이 들었지만 에드윈은 서둘러 돌아가고 싶은 듯했다.

불안한 눈빛으로 주변을 살피는 에드윈의 얼굴엔 긴장감이 서려 있었다.

이곳이 위험해 혹시라도 자신에게 무슨 일이 생길까 걱정하는 듯했다.

사실 이곳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 디아나도 놀라긴 했지만 무섭진 않았다.

디아나에게 가디언이 있으니까.

정령석을 흡수한 뒤 디아나의 정령술은 빠른 속도로 발전했다. 아직 한 몸처럼 가디언의 힘을 쓸 순 없었지만 그래도 이젠 어렵지 않게 정령술을 쓸 수 있었다.

그 힘은 황성의 반을 날려 버릴 만큼 강했다.

그래도 에드윈이 불안해하니까.

이곳은 위험한 곳이었고, 혹시라도 디아나가 다칠까 염려하는 그를 난감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알겠어. 그만 돌아가자, 에드윈.”

에드윈의 손을 잡으려던 순간 어디선가 비명이 울렸다.

“으아악!”

날카로운 남자의 비명 소리에 디아나는 물론이고 에드윈도 얼굴을 굳혔다.

손을 거둔 그는 당장이라도 검을 뽑을 듯 검집을 잡으며 말했다.

“아가씨, 제 뒤로 서십시오.”

디아나를 뒤로 숨긴 그는 매서운 눈빛으로 주변을 훑었다. 하지만 가까이 다가오는 적의 기운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때, 또 한 번 비명이 울렸다.

“살려 줘! 큭!”

곧 숨이 끊어질 거 같은 단말마의 비명과 함께 온몸에 소름이 돋는 익숙한 기운이 느껴졌다.

피크닉을 가다 습격을 당했던 날에 느꼈던 소름 끼치는 감각과 똑같았다.

“이건…….”

디아나는 털을 바짝 서게 만드는 이 기운이 뭔지 알았다. 디아나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비명이 들린 곳을 향해 달렸다.

“아가씨!”

에드윈이 황급히 뒤를 따랐다. 디아나는 어둠이 짙게 깔린 골목 앞에서 멈추었다.

축 늘어진 남자와 그 앞에 서 있는 사람의 뒷모습이 보였다. 검은 로브에 모자까지 쓴 사람은 체구가 작았다.

“……세이아?”

본능적으로 눈앞의 존재가 누군지 알 거 같았다.

디아나의 나직한 목소리가 골목 안을 울리자 아이는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리고 로브 모자를 벗으며 디아나를 마주했다.

구름이 지나가고 드러난 달빛 아래로 붉은 눈동자가 디아나를 향해 번뜩였다.

자신의 예상이 맞았다.

눈앞의 존재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던 세이아였다.

그 순간 디아나의 금빛 머리칼이 흔들리고 어둠의 정령의 힘을 느낀 가디언이 모습을 드러냈다.

“디아나, 긴장을 늦추지 말거라.”

가디언은 낮게 속삭이며 디아나의 어깨에 자리를 잡았다.

“얼굴이 꽤 바뀌었을 텐데, 단번에 알아봤구나. 가디언이 선택한 아이라 그런가.”

세이아는 비틀린 미소를 그렸다.

확실히 옅은 금빛 머리칼은 갈색으로, 눈동자도 피를 머금은 듯 붉게 바뀌었다.

얼굴도 조금 바뀐 듯했지만 디아나는 자신을 보며 눈을 번뜩이는 모습에 상대가 세이아라는 것을 확신했다.

그 눈빛은 너무도 익숙한 것이었으니까.

스릉-.

에드윈은 디아나의 곁에 서며 굳은 얼굴로 검을 뽑았다. 그 모습을 본 세이아가 재밌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고작 그런 검으로 날 이길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는 거야? 아무리 내가 어린아이 몸에 들어와 있다고 하지만 그렇다고 저딴 검 하나를 들이밀면 내 자존심이 상한단 말이야.”

세이아는 서운하다는 듯 눈썹을 모으며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에드윈이 들고 있던 검이 가루가 되어 허공으로 흩어졌다.

“어떻게…….”

눈앞에서 가루가 돼 버린 검을 바라보며 에드윈은 경악에 말을 잇지 못했다.

“네가 상대할 수 있는 자가 아니다.”

에드윈이 위험해질까 불안해하는 디아나의 마음을 읽은 가디언은 곧장 바람을 일으켰다.

에드윈의 몸을 골목 밖으로 밀어 버린 가디언은 그의 머릿속을 언령으로 지배했다.

[이곳은 나에게 맡기고 기사들을 데려와라.]

에드윈의 녹빛 눈동자가 흐려지고 곧 가디언의 명에 따라 급히 달려갔다.

사람의 정신을 조종하는 것은 어둠의 정령의 주특기라 하고 싶지 않았지만 이리 하지 않으면 충직한 기사는 절대 떠나지 않을 것이라 어쩔 수 없었다.

에드윈이 떠나자 디아나는 안도했다. 눈앞의 세이아보다 에드윈이 위험한 것이 더 두려웠으니까.

“지원군이라도 부른 건가? 기사들 좀 몰려온다고 내게 위협이나 될까? 아니, 아마 기사들이 도착하기도 전에 네 계약자는 죽어 있을 거 같은데.”

“닥쳐라.”

세이아의 빈정거림에 가디언이 싸늘하게 답했다. 처음 들어보는 차가운 음성이었다. 하지만 그보다 디아나는 어딘지 낯선 세이아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뭔가 이상해.

분명 세이아가 맞지만 진짜 세이아 같지 않았다.

[어둠의 정령이 영혼을 잡아먹은 것이다. 껍데기만 사람일 뿐 진짜 영혼은 이미 사라졌다.]

기묘한 느낌에 대한 답이 머릿속을 울렸다.

세이아의 영혼이 죽었다니.

순간 머릿속으로 패악을 부리던 세이아의 모습들이 스쳤다.

세이아의 영혼이 죽었다는 사실은 충격적이었지만 슬프진 않았다. 세이아는 자신을 죽이려 했었으니까.

디아나는 자신을 향해 번뜩이는 붉은 눈동자를 피하지 않고 응시했다.

일말의 두려움이 없는 금빛 눈동자가 꼭 누군가를 떠오르게 해 세이아의 입술이 비틀렸다.

“그래, 우리가 이렇게 한가로이 대화를 나눌 사이는 아니지.”

세이아의 말이 끝난 순간 갑자기 사방이 완전히 어두워졌다.

하늘의 달빛마저 사라지고 찾아온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디아나는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었다.

본능적인 두려움이 들려던 찰나,

[디아나, 넌 혼자가 아니다.]

가디언의 목소리가 들렸다.

머릿속이 차분해지자 아무것도 보이지 않던 어둠 속에서 작은 균열이 느껴졌다.

그곳을 향해 손을 뻗었다. 손끝에서 만들어진 매서운 바람의 소용돌이가 정확히 어둠의 균열을 향해 몰아쳤다.

“윽!”

신음 소리가 들리고 어둠이 사라졌다. 눈을 깜박이자 어둠은 허상이었다는 듯 골목 안의 풍경이 돌아왔다.

[어둠의 정령의 힘이 약해져 있을 것이다. 지금이 기회야.]

이렇게 우연히 어둠의 정령을 만나게 될 거라 상상도 못 했지만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디아나는 공격을 맞은 듯 벽을 위태롭게 짚고 선 세이아를 향해 금빛 눈동자를 번뜩였다.

평평한 땅 위에서 세 개의 물줄기가 솟아올라 마치 맹수들처럼 세이아를 물어뜯을 듯 달려들었다.

철퍽-!

맹렬히 달려들었지만 세이아가 만들어 낸 방어벽에 채 닿지 못하고 물줄기가 사라졌다.

하지만 그게 끝은 아니었다.

디아나에겐 이제 시작이었으니까.

짧은 숨을 내쉰 디아나는 가디언의 힘을 느끼며 정신을 집중했다.

어둠 속에서 황금빛 눈동자가 또렷이 빛난 순간 고요하던 골목길 안에 거센 회오리바람이 솟구쳤다.

먼지바람을 일으킨 바람은 세이아를 집어삼킬 듯 크기가 커졌다.

세이아는 손을 크게 휘저었다.

손끝에서 나온 검은 연기가 채찍처럼 가열차게 달려오는 회오리바람을 갈랐다.

두 개로 갈라진 회오리바람은 곧 힘을 잃고 사라졌다.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라는 듯 하늘 위에서 물 폭탄이 쏟아졌다.

“젠장.”

입술을 짓씹은 세이아는 머리 위로 방어막을 둘렀다.

엄청난 물 폭탄에 검은 방어벽이 흔들렸다. 금이 가는 방어벽에 세이아의 붉은 눈동자가 번뜩였다.

방어벽이 강해지고 쏟아지는 물을 빠르게 흡수했다. 연이은 공격이 사라졌지만 세이아는 안도할 수 없었다.

이 정도는 가디언의 힘의 반의반도 보이지 않은 것일 테니까.

가디언에게 수만이 넘는 병사들을 날려 버릴 힘이 있다는 것은 어둠의 정령이 제일 잘 알았다.

가디언과 대륙 전쟁을 치른 것이 어둠이 정령이었으니까.

문제는 지금 자신에게 남은 어둠의 힘이 대륙 전쟁을 치를 당시의 힘의 반의반도 안 된다는 것이다.

망할 가디언이 자신의 힘을 빼앗아갔기 때문이다.

과거였다면 이 정도의 공격 따위 손가락 하나로 날려 버렸을 것이다.

이렇게 수치스럽게 골목 안으로 밀릴 일 따위는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세이아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인간의 비릿한 피 맛의 느껴졌다.

당장 저 조그만 가디언의 계약자의 온몸을 갈기갈기 찢어 버리고 싶었다. 비릿한 피 향이 이 골목 안을 다 뒤덮어 버리도록.

분노로 이가 갈렸지만 지금은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디아나는 제 생각보다 정령술을 자유자재로 다뤘다. 깨어난 지 아직 얼마 되지 않아 미숙할 것이라는 예상을 보란 듯이 빗나갔다.

힘을 더 모아야 해…….

이대로라면 이 허름한 골목 안에서 어이없게 소멸 당할 처지였다.

분통이 터졌지만 지금은 도망쳐야 했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도망갈 곳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골목의 뒤는 막혀 있었고 입구는 디아나와 가디언이 지키고 있었다.

어둠의 힘으로 모습을 감추려 해도 분명 정령술이 따라붙을 것이다.

거기다 디아나가 다시금 정령술을 쓰려는 듯 주변의 바람이 모여들고 있었다.

붉은 눈동자에 초조함이 서리던 어둠의 정령은 흔들림 없는 디아나의 눈빛을 보다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붉은 시선은 골목 벽에 붙어 덜덜 떨고 있는 남자를 발견했다.

숨통이 끊어진 게 아니었는지 먹잇감의 의식이 어느새 돌아와 있었다.

입술의 피를 핥아먹은 세이아는 남자를 향해 손을 뻗었다.

검은 연기가 남자의 몸을 칭칭 감았다. 팔, 다리, 목까지 감은 검은 연기는 남자의 몸을 일으켰다.

“컥…….”

바람을 모으는 데 집중하고 있던 디아나는 떠오르는 남자의 몸에 멈칫했다.

허공으로 발이 뜬 남자는 검은 연기에 온몸이 휘감겨 있었다. 목을 휘감는 검은 연기에 숨이 막히는 지 남자는 거친 숨을 토해 냈다.

그 모습을 보는 디아나의 금빛 눈동자가 흔들렸다.

이와 같은 장면을 본 적이 있었다.

마차 습격이 있던 날, 검은 연기에 휘감겨 높이 떠올라 그대로 땅으로 곤두박질쳤던 기사단장의 추락 장면이 눈앞의 상황과 겹쳐 보였다.

[디아나, 괜찮은 것이냐?]

불안하게 떨리는 자신의 기분을 느낀 듯 머릿속으로 가디언의 목소리가 울렸다.

“……괜찮아요.”

디아나는 손을 꼭 그러쥐며 답했지만 사실 괜찮지 않았다.

눈앞의 남자가 그날의 기사단장처럼 당장 죽을 거 같았으니까.

불안감을 감추려 했지만 이미 흐트러진 집중력에 모여들던 바람들조차 흩어져 버렸다.

“이따위 짓을 한다고 네가 살아남을 수 있을 거 같으냐. 이미 네 힘이 예전만 못하다는 것을 내가 제일 잘 안다.”

가디언이 세이아를 향해 말했다.

“그래, 그렇지. 내 힘을 도둑고양이처럼 훔쳐간 게 바로 너니까, 당연히 네가 제일 잘 알겠지. 근데 지금 나한테 같잖은 위협을 할 때가 아닌 거 같은데. 네 어린 계약자가 겁을 단단히 먹었잖아.”

가디언을 비웃듯 어둠의 정령은 검은 연기를 조였다.

“큭, 살, 려…… 커억……!”

당장이라도 숨이 넘어갈 듯 남자의 목이 뒤로 젖혀졌다. 채 끝맺지 못한 살려 달라는 애타는 외침이 디아나의 귀를 파고들었다.

“안 돼!”

눈앞에서 사람이 죽어 나가는 것을 볼 순 없었다. 디아나는 바람으로 검은 연기를 흩트리려 했다. 하지만 불안감으로 집중력이 흐트러진 것인지 정령술이 뜻대로 되지 않았다.

[디아나, 정신 차리거라.]

가디언의 목소리가 울렸지만 죽어 가는 남자의 목소리가 더 크게 들리는 거 같았다.

디아나의 초조함을 느낀 가디언이 불안하게 날개를 퍼덕였다.

그들의 교감이 완전히 흐트러졌다는 것을 알아차린 세이아가 짙은 미소를 지었다.

디아나의 시선이 남자에게 집중된 그 순간 세이아는 손끝을 튕겼다.

남자의 몸을 칭칭 휘감았던 검은 연기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털썩, 땅으로 떨어진 남자가 신음을 흘리고 놀란 디아나의 눈이 커진 순간 검은 연기가 다시 나타났다.

수십 개의 화살이 된 모습으로.

수십 개의 검은 화살촉은 정확히 디아나를 향해 날아왔다.

“디아나!”

가디언의 다급한 목소리와 함께 바람이 휘몰아쳤지만 검은 화살촉 전부를 없애 버리진 못했다.

늦었다.

디아나는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화살들에 몸이 뻣뻣하게 굳어 버렸다.

곧 닥칠 엄청난 아픔에 경악한 그 순간 누군가 자신의 앞을 덮쳤다.

질끈 눈을 감은 디아나는 누군가 자신을 꼭 끌어안은 것을 느꼈다.

넓은 가슴팍에서 느리게 눈을 뜬 디아나는 짙은 땀 냄새와 익숙한 목소리를 들었다.

“디아나…….”

자신과 똑같은 금빛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쳤다.

“대공 전하가…… 왜 여기에…….”

디아나는 너무 놀라 순간 말을 잇지 못했다.

디아나가 괜찮다는 것을 확인한 대공은 곧장 몸을 일으키며 검을 뽑았다.

목에서 울컥 피가 올라왔지만 지금 중요한 것은 그의 몸이 아니었다.

몸을 돌리자마자 그가 만든 흙벽이 무너지고 검은 연기에 몸을 맡기는 세이아가 보였다. 그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검을 던졌다.

세이아의 심장을 향해 날아간 검은 연기에 의해 벽으로 튕겨 나갔다.

“고작 이런 검 따위로…… 윽!”

대공을 비웃던 세이아는 자신의 발목을 휘감는 풀줄기에 시선을 내렸다.

“고작 검으로, 잡으려 한 적 없다. 널 잡기 위한 속임수였을 뿐.”

그가 날린 검은 세이아의 시선을 붙잡기 위한 속임수였을 뿐이다. 발목을 붙잡힌 세이아가 순간 당황한 듯 검은 연기가 흐트러졌다.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 땅의 기운을 모은 순간 대공은 속에서 느껴지는 엄청난 고통에 허리를 숙였다.

“큭…….”

식도를 넘은 붉은 핏덩이가 토해졌다.

땅을 적시는 선명한 핏덩어리는 그의 내상이 심각하다는 것을 말해 주었다.

디아나를 향하던 화살을 전부 대공의 몸으로 막은 탓이다.

“호오, 화살이 제대로 명중했나 보네.”

“……대공 전하…….”

순식간에 벌어진 상황에 놀라 굳어 있던 디아나는 코끝을 찌르는 비릿한 피 냄새에 정신을 차렸다.

허리를 숙인 대공이 피를 토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절대 무너지지 않을 것 같던 커다란 대공이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에 디아나의 손끝이 떨렸다.

대공이 위험하니 어둠의 정령을 공격해야 한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피를 토하는 대공의 모습에 몸이 굳어 버렸다.

“난, 괜찮다. 위험하니 다가오지 마라.”

대공은 피가 흐르는 입가를 손등으로 닦으며 허리를 폈다.

곧 죽을 듯 창백한 낯빛임에도 아이를 보호하는 대공의 모습에 세이아는 비릿한 미소를 그렸다.

“날 잡기 위한 속임수가 검이었다면 널 잡기 위한 약점은 저것이겠군.”

발목을 칭칭 휘감은 풀줄기를 검은 연기로 말린 세이아는 디아나를 향해 손을 뻗었다.

검은 연기가 날카로운 단도가 되어 디아나를 향해 빠르게 날았다.

[디아나!]

가디언의 다급한 외침이 디아나의 머릿속을 울렸지만 검은 멈추지 않았다.

디아나가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대공이 먼저 움직였다. 단번에 디아나를 끌어안은 그는 검을 피하기 위해 옆으로 한 바퀴 굴렀다.

쿵-! 그의 몸이 골목 벽에 세게 부딪히고 이미 내상을 입은 몸에 엄청난 고통이 밀려들었다.

“윽…….”

신음을 삼킨 그는 고개를 들었다.

표적을 놓친 검이 허공에서 사라지는 것이 보였다.

굳어 있는 디아나를 끌어안은 그는 세이아를 향해 고개를 돌렸지만 이미 세이아는 검은 연기에 휩싸여 사라지고 있었다.

이대로 놓치는 것이 분통했지만 지금은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가 입술을 짓씹은 순간 품 안에서 디아나의 미약한 신음이 들렸다.

“읏…….”

그는 꽉 끌어안았던 팔을 풀고 디아나의 어깨를 잡으며 몸을 살폈다.

“디아나, 괜찮으냐. 많이 다친 것이냐? 어디가 아픈 것이냐?”

갑자기 바닥을 굴러 정신이 혼미해졌던 디아나는 걱정이 가득한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마주친 그의 눈동자가 불안하게 떨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보다 디아나는 대공의 처참한 모습을 보고 눈이 커졌다.

“전, 괜찮아요. 저보다…… 전하가 더 아파 보여요…….”

입술에 묻은 붉은 피와 창백하게 질린 얼굴이 선명히 보였다. 아까 목이 졸리던 남자보다 지금 대공이 더 위태로워 보였다. 바닥을 적시는 피를 본 디아나가 힘겹게 입술을 뗐다.

“……치료를…… 사람들을…… 불러…….”

자신을 부르는 가디언의 목소리도, 사라진 세이아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파도처럼 밀려드는 걱정과 불안에 목소리가 떨렸다.

눈물이 차오르는 디아나의 눈을 본 대공은 긴 숨을 내쉬었다. 툭 건드리면 울음을 터뜨릴 듯 디아나는 많이 불안해하고 있었다.

“디아나.”

나직이 이름을 부르자 디아나의 눈물 맺힌 눈동자가 그를 향했다.

“난, 괜찮다. 곧 로운과 기사들이 올 것이다. 그러니 울지 말거라.”

“……피가 계속…… 나요…….”

“곧 멈출 거란다. 별거 아냐.”

대공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 피가 흐르는 손을 털어냈다.

애처롭게 떨리는 등을 쓰다듬어 주고 싶었지만 사실 그는 말하는 것조차 버거웠다.

적어도 다른 기사들이 올 때까진 버터야 하는데.

불안함에 젖은 디아나의 앞에서 의식을 잃고 싶지 않았다. 마지막 남은 힘을 다해 손을 든 그는 안심하라는 듯 디아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디아나, 난 정말 괜찮단다. 너만 무사하다면 이 정도 상처는 아무것도 아니야. 그러니 걱정 말렴.”

괜찮다, 괜찮다. 주문 같은 말이 반복될수록 디아나의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이 점점 느려졌다. 디아나의 금안이 잘게 떨린 순간,

“전하! 대공 전하!”

결국 대공의 손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눈을 감고 고개를 숙이는 대공의 모습에 디아나의 눈이 커졌다. 크게 그를 불렀음에도 대공은 눈을 뜨지 않았다.

의식이 없는 그의 모습에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디아나, 이 남자는 괜찮다. 죽지 않았어.”

가디언이 날개를 펄럭이며 말했지만 그래도 디아나는 불안했다.

아무리 어깨를 흔들어도 대공은 눈을 뜨지 않았으니까.

혹시라도 그가 죽은 걸까 봐, 디아나는 너무 무서웠다.

보고 싶지 않다고, 대공을 원망했었지만 그가 죽는다는 생각은 단 한 번도 해 본 적 없었다.

그가 이렇게 쓰러질 거란 상상도 해 본 적 없었다.

디아나에게 대공은 언제나 같은 자리에 있는 사람이었으니까.

이대로 영원히 일어나지 않을까 두려워 몸이 떨리던 순간 사람들의 다급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아가씨!”

“에드윈!”

골목 안으로 제일 먼저 모습을 드러낸 사람은 에드윈이었다. 에드윈은 디아나에게로 한달음에 달려왔다.

“아가씨, 괜찮으신 겁니까? 어둠의 정령은…… 대공 전하?”

디아나만을 보며 상태를 살피던 그는 디아나가 꼭 잡고 있는 옷자락을 보았다.

고개를 돌리자 피투성이 모습으로 의식을 잃은 대공이 있었다.

“아니, 어떻게…….”

쓰러진 남자가 대공일 것이라곤 상상도 못한 에드윈은 크게 놀라 말을 더듬었다.

“날 구해 주시려다 화살을, 대신 맞으셨어. 아무리 불러도 일어나질 않아. 에드윈, 어떡해…… 흡…….”

에드윈을 보자 안도감이 든 디아나는 참았던 눈물을 터트렸다.

디아나는 어린아이처럼 흐아앙, 크게 울음을 터뜨리며 에드윈에게 안겼다.

그만큼이나 많이 놀란 거 같았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디아나의 큰 울음에 에드윈은 디아나를 안고 몸을 일으켰다.

이렇게 크게 부상을 당한 대공을 본 것은 에드윈도 처음이었다. 아무리 고전을 겪는 전장에서도 대공은 언제나 가장 강한 검사였다.

미동도 없는 대공의 모습이 충격적이었지만 에드윈은 최대한 아무렇지 않게, 디아나가 더 이상 대공을 보지 못하게 안으며 말했다.

“괜찮습니다, 아가씨. 대공 전하께선 잠시 의식을 잃으신 것뿐입니다. 무사하실 거니 걱정 마세요.”

에드윈이 달래 주었지만 한 번 터진 울음은 쉽게 잦아들지 않았다. 자꾸만 이대로 대공이 일어나지 않을 거 같은 불안감이 들었다.

다시는 볼 수 없을까 봐 무서워 아이처럼 서럽게 울던 디아나는 결국 정신을 잃고 축 늘어졌다.

“아가씨! 아가씨, 정신을…….”

“잠시 기절한 것이니 걱정 마라.”

에드윈에게 디아나의 상태를 알려 준 가디언은 가라앉지 않는 불안함에 날개를 빠르게 퍼덕였다.

디아나의 감정들을 가디언이 고스란히 느끼고 있기 때문이었다.

“나도 이만 정령계로 돌아가야겠군.”

불안한 상태론 도움이 되지 않을 거 같아 가디언은 곧 모습을 감추었다.

“아가씨!”

“대공 전하!”

디아나가 편히 기댈 수 있게 자세를 바꿔 안자마자 골목 안으로 피비와 로운이 뛰어들어 왔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에요? 아가씨께 무슨 일이 벌어진 거죠!? 꺅! 이거 피, 피잖아요!”

에드윈의 앞으로 달려온 피비는 숨도 고르지 않고 디아나를 살폈다. 피비는 의식이 없는 디아나에 놀라고 작은 손에 묻은 피를 보고 경악했다.

“이건, 아가씨의 피가 아니다.”

“그게 무슨…….”

피비가 의아한 눈빛을 한 순간 로운의 다급한 목소리가 골목을 울렸다.

“대공 전하, 전하! 젠장! 대공 전하께서 부상을 당하셨다! 어서 마차를 가져와!”

고개를 돌린 피비는 의식이 없는 대공을 보고 얼굴을 굳혔다. 대공의 주위에 낭자한 피를 보니 디아나의 손에 묻은 피가 누구의 것인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대공가의 기사들이 골목 안으로 들어와 대공의 몸을 일으켰다. 기사들이 조심스럽게 대공을 부축해 골목을 나가고 로운은 곧장 에드윈에게 몸을 돌렸다.

“대공녀님은 괜찮은 것이냐?”

“놀라서 기절을 하신 것뿐, 다른 부상은 없으신 듯합니다.”

에드윈의 말에 로운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이다. 에드윈 넌 이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아느냐?”

“저도 자세히는 모르지만 어둠의 정령에게서 아가씨를 구하려다 대공 전하께서 부상을 당하신 것 같습니다. 제가 이곳을 떠나기 전 어둠의 정령과 마주쳤으니까요.”

“……역시 어둠의 정령이…….”

로운의 시선이 디아나의 손에 묻은 피를 향했다. 기다리란 명을 무시해서라도 대공의 뒤를 따랐어야 했단 뒤늦은 후회가 밀려들었다.

“……그래, 그렇겠지. 에드윈, 일단 넌 대공녀님을 모시고 황궁으로 돌아가라. 황궁 기사들은 어디 있지? 설마 혼자 온 건 아니겠지?”

“아닙니다. 황궁 1기사단이 골목 밖에 대기 중입니다.”

“내가 정신이 없어 미처 보지 못했군. 그래도 혹시 어둠의 정령이 다시 나타날 수도 있으니 경계를 늦추지 마라.”

“네, 단장님. 그럼 먼저 가 보겠습니다”

대공의 피가 흩어진 땅에 멈칫한 에드윈은 디아나를 더욱 꼭 안고 피비와 함께 골목 안은 빠르게 나갔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