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 * *
“이리 앉으렴.”
황제는 디아나에게 먼저 자리를 권했다. 황제의 옆자리에 앉은 디아나는 테이블 위에 준비된 각종 디저트들을 보았다.
과일 셔벗부터 초코 쿠키와 딸기 잼을 바른 쿠키, 그리고 타르트까지 종류도 다양했다.
디아나의 시선을 본 황제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네가 뭘 좋아할지 몰라 내 주방장에게 전부 준비하라 했단다. 혹 좋아하는 디저트가 있다면 말하렴, 당장 준비해 주마.”
당장이라도 이 집무실을 디저트로 채워 버릴 거 같은 황제의 눈빛에 후작은 떨떠름한 표정을 했다.
당황한 디아나는 황급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에요, 폐하. 전 이것들만으로도 충분해요.”
“그러니? 그럼 뭐 갖고 싶은 거라든가 필요한 것이라든가…….”
“큼.”
황제의 반짝이는 눈빛에 디아나의 얼굴이 점점 난감해졌다.
그것을 본 후작이 그만하라고 작은 헛기침을 내뱉었다.
그에 정신을 차린 듯 황제는 머쓱한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내 너에게 해 주고 싶은 게 많아 마음이 앞섰구나. 미안하다.”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예의 바른 인사였지만 황제는 그 조숙함에 마음이 아릿했다. 흠, 작은 숨을 내쉰 그는 이만 본론을 꺼냈다.
“디아나, 나를 만나고 싶다 한 게 네 의사라 들었단다. 내게 부탁할 일이라도 있는 거니?”
디아나가 입을 열려던 그때, 후작이 먼저 말을 꺼냈다.
“폐하, 먼저 시종들을 물려주시겠습니까.”
황제는 진지한 후작의 얼굴을 보고 디아나를 보았다.
디아나의 금빛 눈동자에서 긴장감을 읽은 황제는 뒤에 시립해 있던 시종들에게 명했다.
“모두들 잠시 나가 있거라.”
“네, 폐하.”
시종들이 집무실을 모두 나가고 문이 닫히자 황제가 다시 입을 열었다.
“흠…… 듣는 귀를 모두 내보냈으니, 디아나, 편히 말해 보렴.”
황제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지만 디아나는 왠지 긴장되었다.
아직은 낯설기만 한 황제보다 좀 더 익숙한 후작을 힐긋 보았다.
살짝 불안한 듯한 디아나에게 후작은 괜찮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에 안도감이 든 디아나는 황제에게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폐하께, 부탁드리고 싶은 일이 있어요.”
“그래, 무엇이니?”
“가디언이 잠든 곳으로 들어가게 해 주세요.”
“……가디언이 잠든 곳이라면 의식을 치르는 곳을 말하는 거니?”
가디언의 이야기가 나올 줄은 몰랐던 황제가 한 박자 느리게 반응했다.
“네, 습격 사건이 있은 뒤 꿈속에서 가디언의 목소리를 들었어요. 자신이 있는 곳으로 와 달라고 가디언이 제게 말했어요.”
“……가디언의 목소리…….”
디아나가 동요할까 애써 평정을 유지하고 있지만 황제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가디언의 목소리를 들었다는 것은 여태까지 벌어진 적 없는 엄청난 일이었으니까.
황제는 디아나가 아닌 후작을 바라보았다.
후작과 무언의 눈빛을 주고받은 황제는 디아나를 향해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래, 디아나. 네 부탁이니 당연히 들어줘야겠지. 한데 가디언이 자신이 있는 곳으로 오라 한 건 아마 단순히 그 장소로 오라는 게 아니라 그곳에서 네가 의식을 치르란 뜻일 거란다. 그렇기에 지금 바로 그곳으로 갈 순 없단다. 네가 의식을 치를 수 있게 조금 준비할 것들이 필요해서 말이다.”
황제는 미안하단 눈빛으로 디아나를 바라보았다.
“……시간이 많이 걸릴까요?”
목소리를 들은 후로 꽤 시간이 흘렀기에 디아나는 마음이 조금 초조해졌다.
가디언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거 같아서.
거기다 하루빨리 강해진 정령의 힘에 대한 답을 알고 싶기도 했다.
“음…… 최대한 빨리 준비할 것이다. 한 몇 시간만 기다려 주겠니?”
“네! 그 정도는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어요.”
며칠은 기다려야 하는 줄 알았던 디아나가 밝은 얼굴로 답했다.
처음 보는 디아나의 밝은 얼굴에 눈이 살짝 커졌던 황제는 이윽고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이곳에서 나와 기다리는 것은 지루하기만 할 테니…… 2황자의 궁에서 잠시 놀고 있는 것이 어떻겠느냐. 안 그래도 레귤러스가 저번에 너를 만난 뒤 또 보고 싶다고 노래를 부르고 있었거든. 물론 불편하다면 거절해도 된단다.”
“아니에요, 저도 2황자님과 함께 노는 거 재밌었어요.”
“그렇다니 다행이구나.”
황제는 소파 옆 협탁에 있던 작은 종을 울렸다.
그러자 시종장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황제는 시종장에게 물었다.
“오늘 2황자의 수업이 많더냐?”
“역사 수업이 끝나셨고, 오후에 외교 수업이 있으십니다.”
“흠, 오후 수업은 취소하도록 하고 디아나를 2황자 궁으로 데려다주거라.”
“네, 폐하.”
“디아나, 레귤러스와 재밌게 놀고 있으면 내 준비를 다 하고 사람을 보내도록 하마.”
네, 라고 대답하려던 디아나는 후작을 보았다.
“할아버지는 여기에 있으시는 건가요?”
“할아버지…….”
순간 친근한 호칭에 놀란 황제가 작게 중얼거렸다.
하지만 후작은 못 들은 척 매끄럽게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난 여기서 폐하와 함께 잠시 나눌 이야기가 있단다. 에드윈이 함께 갈 테니…… 괜찮지 않겠니?”
“아, 전 괜찮아요. 그럼 나중에 뵈어요, 할아버지.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폐하.”
“나중에 보자꾸나.”
“……그래, 디아나.”
디아나는 황제에게 예를 갖추곤 곧 시종장과 함께 집무실을 나갔다.
디아나가 집무실을 나가자 황제는 후작을 바라보았다.
“할아버지라니, 후작과 디아나의 관계가 그새 가까워졌나 봅니다.”
부러움 때문인지 묘하게 가시가 느껴지는 말이었지만 후작은 모른 척 미소를 지었다.
“이제 겨우 함께하게 되었습니다. 가까워졌다 하기엔 아직 갈 길이 멀지요. 디아나가 착해 못난 저를 그래도 할아버지라 불러 주는 게 아니겠습니까.”
“디아나에게 아직 많은 것을 바라면 안 된다는 건 알지만 그래도, 그 친근한 호칭은 정말 부럽군. 그래도 후작가에서 디아나가 잘 적응하는 거 같아 한편으론 마음이 놓이오.”
“……제가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후작의 마음이야 의심할 여지가 없지. 단지…….”
황제는 대공의 얼굴을 떠올리고 마음이 착잡해졌다.
디아나가 떠난 날 황제는 대공이 걱정되어 밤늦은 시각 대공가의 저택을 방문했었다. 그리고 살아 있지만 영혼은 없는 듯한 대공의 얼굴을 보았었다.
대공은 왜 후작에게 칙서를 적어 준 것이냐고 따지지도, 묻지도 않았다.
그저 담담히 모든 것을 받아들인 듯했지만 그 속에 스민 슬픔은 너무도 컸다.
“……디아나를 영원히 제 곁에 두고자 함은 아닙니다. 대공 전하께서 어떤 심정일지 자식을 키운 아비의 마음으로 이해하지만 지금은 디아나가 편히 쉴 수 있길 바랍니다.”
말끝을 흐린 황제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차린 후작이 말했다.
황제는 깊은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의 말이 맞네. 그저 형으로서 동생을 걱정하는 마음이었을 뿐이야. 그보다 지금 중요한 건 이런 일이 아닌 거 같군.”
가디언의 목소리.
황제는 디아나의 말을 떠올리고 얼굴을 딱딱하게 굳혔다.
“디아나가 가디언의 목소리를 들었다고 했네. 오랫동안 잠들어 있던 가디언이 깨어난다는 건 어둠의 봉인도 풀린다는 게 아닌가. 내 오래전 일이긴 하지만 분명 현자의 탑에서 해석한 유물의 내용을 그리 기억하네만, 맞는가?”
“……네, 맞습니다.”
“하아…… 디아나가 착각을 한 거라 치부하기엔 디아나는 의식을 치르기도 전에 정령의 힘이 발현된 특이한 경우였지. 거기다 어둠술사들이 다시 모습을 드러낸 것도 사실이고…….”
황제의 미간의 주름이 깊어졌다.
심각한 사안에 복잡한 눈빛을 하던 황제가 후작에게 물었다.
“어둠의 봉인이 풀릴 것을 대비해 마탑에서 연구를 거듭하여 강력한 마법진으로 한 번 더 봉인했던 것을 기억하나? 그때의 마법진이 어둠의 힘을 막을 수도 있지 않겠나?”
초대 황제가 정령의 힘으로 어둠을 봉인한 뒤로 남은 후대의 사람들이 마냥 가만히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수대에 걸쳐 마법사들이 봉인을 더욱 강력하게 하는 마법진들을 연구했고 해가 바뀔 때마다 그 마법진을 확인하고 더욱 강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마법진이란 것이 어둠의 힘과는 본질적인 것이 달라…… 정령의 힘이 약해지지 않도록 돕는 것뿐이었습니다. 결국 마법의 힘만으론 어둠의 힘을 막을 수 없단 말이 되는 것이지요.”
“……그렇군.”
“거기다 어둠의 힘이 강해진 것도 사실이니…… 최근에 어둠술사가 된 세이아가 사람들을 현혹하고 고대 전쟁 때처럼 어둠의 후계자들을 모으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다시 대륙 전쟁이 벌어질 수도 있단 건가. 디아나, 그 어린아이가 전쟁을 겪는다니……. 끔찍한 일이야.”
“하니 거기까진 가지 않도록 막아야지요. 초대 황제 폐하 시절엔 대륙에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군대도 마법사들도요. 하지만 지금은 다르지 않습니까. 제국은 건재하고 가디언의 힘뿐만 아니라 기사들과 마법사들까지 있습니다. 정말 어둠의 정령의 봉인이 풀린 것이라면…… 어둠이 군대를 꾸리기 전에 조기 진압해야 할 것입니다.”
“일단…… 어둠의 정령이 봉인되어 있는 헬킨 산맥부터 확인해야겠군. 뭔가 봉인이 틀어졌다면 이상 현상이 있겠지.”
“네, 확실히 알기 위해 마탑주를 직접 보내는 것이 좋을 거 같습니다. 미리 현자의 탑에 방문을 요청했습니다. 유물에 대한 해석이 더 진행된 것이 있는지, 어둠의 정령을 소멸시키는 방법이 있는지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그래, 그대는 그쪽으로 움직이게. 일단 오늘 정령의 의식은 치러야 하는 거겠지……?”
디아나가 정말 가디언의 선택을 받은 게 맞는다면 빨리 진행하는 것이 맞겠지만…… 앞으로의 일들을 생각하면 디아나를 정령에게서 멀리 떨어뜨려 놓고 싶었다.
하고 많은 황족들 중 왜 하필 디아나인 것인지.
차라리 황제 자신이나 대공이었다면 이리 마음이 무겁지 않았을 것이다.
“……네, 미룬다고 해결될 일은 아닙니다. 그리고 어둠을 봉인한 것이 바로 가디언입니다. 그러니 어둠의 정령을 가장 잘 아는 가디언이 깨어나야 합니다.”
“그렇겠지…….”
“그리고 폐하, 대공 전하께도 이 일을 알리시지요.”
후작의 말에 황제는 의아한 눈빛을 띠었다.
“대공에게 말인가? 대공에게 알리지…… 말라 할 줄 알았네만 의외군.”
“사적인 감정을 생각할 때가 아니니까요. 대공 전하께선 제국에서 가장 강한 검사가 아니십니까. 그리고 헬킨 산맥은 어둠의 기운이 스며 위험한 몬스터들이 많으니 마탑주와 동행하시는 것이 좋을 겁니다.”
“그렇긴 하지…… 대공이 함께한다면 몬스터 습격을 대비할 수 있을 테니…….”
흠, 숨을 내쉰 황제는 곧 시종장에게 명했다.
“지금 당장 마탑주와 대공을 불러오거라.”
* * *
“디아나!”
2황자 궁에 도착해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들리는 목소리에 디아나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디아나, 여기야!”
위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고개를 들자 3층 테라스에 몸을 반쯤 빼고 손을 흔들고 있는 2황자의 모습이 보였다.
아슬아슬해 보인다는 생각은 디아나만 한 것이 아니었는지 2황자의 뒤로 시녀들이 소리를 질렀다.
“꺅, 황자 저하, 위험하셔요!”
“괜찮아, 괜찮아. 디아나, 어서 와…… 으앗!”
시녀들에게 괜찮다며 2황자가 난간에서 한 손을 뗀 순간 황자의 몸이 앞으로 기울었다.
“저하!”
놀란 디아나와 시녀들의 경악 어린 외침이 울려 퍼진 아찔한 찰나, 불쑥 나타난 카이루스가 2황자의 팔을 잡았다.
“아…… 죽을 뻔했네…….”
“레귤러스, 위험하잖아.”
카이루스의 엄한 얼굴에 레귤러스는 어색한 미소를 짓다 밑을 가리켰다.
“디아나가 놀러 와서 나도 모르게…….”
카이루스의 시선이 난간 아래를 향하자 놀란 눈으로 테라스를 응시하고 있던 디이나와 눈이 마주쳤다.
“카이루스…… 왕자님…….”
디아나는 멀리서 흩날리는 흑발을 보다 에드윈의 목소리에 고개를 내렸다.
“2황자 저하께선 다행히 무사하신 듯하니 안으로 드시지요.”
“아…… 응.”
“얼른 올라와!”
“네!”
디아나는 레귤러스에게 큰 소리로 답해 주곤 궁으로 들어섰다.
디아나가 향한 곳은 2황자궁의 3층, 응접실이자 놀이방이었다.
하지만 평범한 아이들의 놀이방과는 달랐다.
장난감이나 인형 대신 책들이 한가득 쌓여 있었다. 그리고 한편엔 그림을 그리는 듯 새하얀 종이와 물감들이 놓여 있었다.
“디아나! 보고 싶었어!”
열린 문으로 들어서자 레귤러스가 디아나에게로 뛰어왔다.
진심으로 환영하는 밝은 얼굴에 디아나도 절로 미소가 그려졌다.
“저도…… 보고 싶었어요, 황자 저하. 그래도 저하, 다음부턴 아까처럼 위험한 행동은 하지 마세요. 저 정말 놀랐어요.”
“아…… 응, 미안. 너무 반가워서 그만……. 안 그래도 카이 형에게 계속 혼나고 있었어.”
레귤러스의 말에 디아나는 카이루스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카이루스가 디아나에게로 다가왔다.
“잘 지내셨나요, 영애.”
흑발의 미소년이 부드럽게 미소 짓는 것은 몇 번을 보아도 멋있었다.
시선을 사로잡는 그의 미소를 보던 디아나는 느리게 입술을 열었다.
“……네, 전 잘 지냈어요. 왕자님도 잘 지내셨나요?”
“전…….”
카이루스가 답하려던 그때, 레귤러스가 신난 얼굴로 말했다.
“카이 형은 요즘 진짜 바쁘게 지냈어. 막 검술 연습도 엄청 하고 어려운 책도 많이 읽고 진짜 바빠서 얼굴도 잘 못 봤었어. 근데 오늘 연무장 놀러 갔다가 카이 형 봤는데, 마침 네가 온다고 해서 같이 온 거야.”
레귤러스의 설명에 디아나는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카이루스는 이런 레귤러스가 익숙한지 싱거운 웃음을 흘리며 디아나에게 말했다.
“저하의 말씀대로 저도 잘 지냈습니다, 영애.”
“하하, 네.”
“근데 디아나, 갑자기 황궁엔 어쩐 일이야? 나 아버지께 너한테 서신 보내도 되냐고 물었는데 아버지가 안 된다고 하셨어. 그래서 너 만나려면 더 오래 기다려야 하는 줄 알았는데…….”
“아…… 그게…….”
디아나는 말끝을 흐렸다. 2황자가 싫은 것도 믿지 못하는 것도 아니었지만 가디언의 일을 말해도 되는 건지는 감이 오지 않았다.
다들 말은 안 하지만 후작과 황제의 반응으로 보아 가디언의 목소리를 들은 일이 평범한 일은 아닌 듯했다.
궁금증에 눈을 반짝이는 2황자를 보며 디아나는 입술을 뗐다.
“황제 폐하를 뵈러 왔어요.”
“아버지를? 왜?”
“그건…….”
마땅한 이유를 찾지 못한 디아나가 눈을 도르륵 굴린 때 카이루스가 말했다.
“영애께서 폐하께 인사를 드리러 온 것이겠죠. 폐하를 정식으로 뵌 적이 없으실 테니까요. 안 그런가요, 영애?”
카이루스는 디아나를 보았다.
자신을 주시하는 그의 눈빛을 읽은 디아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 네, 맞아요.”
“그랬구나……. 네가 온다고 미리 말해 줬으면 더 좋았을 텐데. 어제 화원에 열린 열매를 땄거든. 어제 다른 궁에 다 나눠 주고 여기 있는 건 내가 다 먹어서…… 없어. 맛있는 건데…… 미안해.”
레귤러스의 시무룩한 얼굴에 디아나는 미소를 지었다.
“아니에요, 저하. 제가 오는 걸 모르셨잖아요. 다음에 꼭 같이 먹어요.”
“맞아. 우리 다음엔 꼭 같이 먹어. 그것보다 뭐 하고 놀지……. 여긴 내가 좋아하는 것들뿐이라…… 나가서 노는 건 아마 허락하지 않을 테고…… 음…….”
2황자는 고뇌하듯 미간을 좁혔다.
그때 디아나는 아까 방으로 들어오면서 눈길을 사로잡은 미술품들이 있는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저 그림들…… 저하께서 그리신 건가요?”
“응? 아…… 응. 어머니가 황족으로서 예술에 대한 조예가 기본적으론 있어야 한다고 하셔서……. 사실 난 정말 그림이 재미없지만 말이야.”
레귤러스는 그림 도구들을 보며 인상을 찡그렸지만 디아나의 금빛 눈동자는 반짝였다.
이제껏 남이 그린 그림들은 많이 봤지만 직접 그림을 그려 본 적은 없었기 때문이다.
“영애께선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시나요?”
카이루스의 물음에 레귤러스의 시선이 디아나를 향했다.
“아…… 디아나, 그림 그리기 좋아해?”
“좋아한다기…… 보단 해 보고 싶긴 해요.”
“그래? 그럼 하자!”
레귤러스는 뭐가 문제냐는 듯 밝게 외쳤다.
“네?”
이렇게 바로?
디아나가 당황스런 눈빛을 했지만 레귤러스는 이미 신난 얼굴이었다.
“아, 저건 내가 쓰던 물감들이라…… 맞아, 나 얼마 전에 새 물감 좋은 거 받았어. 그거 가지고 올게.”
“아니에…….”
쓰던 거 써도 괜찮다 말하려 했지만 성격 급한 2황자는 벌써 방문을 도도도 달려 나갔다.
쌩하니 사라진 2황자의 모습에 디아나는 멍한 얼굴을 하다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미소를 짓고 있는 카이루스와 눈이 마주쳤다.
“그림을 그리려면 여기 삼각대 앞에 앉으시는 게 좋겠네요. 여기 정리 좀 해 줘.”
카이루스의 명에 시녀들이 황자가 어질러 놓은 물감과 종이들을 빠르게 정리했다.
디아나는 카이루스의 권유에 삼각대 앞 작은 의자에 엉거주춤 앉았다.
그리고 카이루스는 당연하다는 듯 디아나의 옆에 의자를 가지고 와서 앉았다.
디아나는 카이루스의 그린듯한 옆선을 힐긋힐긋 쳐다보았다.
조각 같은 외모만큼이나 카이루스는 디아나에게 조금 어려운 사람이었다.
그렇다고 불편하거나 싫다는 뜻은 아니었다.
너무 많은 도움을 받은 것에 비해 카이루스에게 제대로 된 감사 인사를 한 적이 없어 미안하기도 했고 카이루스의 분위기 자체가 평범하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신성국의 왕자.
오도어 왕국에 대해서 깊이 알지는 못하지만 역사 수업으로 기본적인 지식들은 알고 있었다.
어둠이 봉인되고 혼란스럽던 대륙, 빛의 힘을 품은 신성목 아래에서 태어난 초대 왕이 세운 나라가 바로 오도어 왕국이었다.
제국만큼이나 신비로운 힘을 품고 있었고, 그 증거인 신성목과 신성력 또한 후대로 이어지고 있었다.
대륙에서 제국 다음으로 가장 강한 힘을 가진 나라.
그런 강한 왕국의 왕자가 왜 제국의 황실에 있는 걸까.
“영애.”
자연스럽게 궁금증이 생기던 찰나 카이루스가 디아나를 불렀다.
“……아, 네.”
그를 훔쳐보고 있던 디아나가 움찔하며 그림으로 황급히 눈을 돌렸다.
“에키온에게 후작가로 가게 되셨단 말을 들었습니다. 후작가는 괜찮으신가요?”
훔쳐본 걸 들킨 걸까 싶어 마음 졸이던 디아나는 의외의 말에 그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네, 괜찮아요. 제 외할버지 댁이라 오히려 더 편해요.”
“다행이네요. 계속 불안정하신 게 아닐까 걱정했거든요. 저도 떠도는 처지라 영애의 심정을 조금은 아니까요.”
떠도는 처지…….
“……왕자님께선 왜 제국에 계신 건가요?”
궁금증이 머릿속에 남아 있던 디아나는 저도 모르게 입술을 움직였다.
줄곧 앞을 보고 있던 카이루스의 턱 끝이 미세하게 굳어졌다.
그가 디아나에게 고개를 돌리고 시선이 마주쳤다.
카이루스의 눈을 본 디아나의 얼굴이 당혹으로 물들었다.
자기도 모르게 뱉은 물음이었으니까.
조금 기분 나쁘게 들릴 수도 있는 질문이었어.
“아, 그게 제 말은…….”
“괜찮습니다. 처음 듣는 질문도 아니니까요.”
디아나의 당황과 달리 카이루스는 부드럽게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는 어딘지 서글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제가 제국에 있는 건…… 일종의 도망입니다.”
“도망이요?”
“네, 왕국의 후궁이셨던 어머니가 억울하게 돌아가시고 저를 둘러싼 상황들이 많이 변해 버렸거든요. 저를 공격하는 사람들과 맞서 싸워야했지만…… 그땐 그러고 싶지 않았습니다. 유일한 안식처였던 어머니가 떠나시니 살고 싶지 않았거든요. 그렇게 멍청하게 시간을 보내고 있던 와중에 왕국을 방문한 에키온이 저를 보고 제국으로 함께 가자고 했습니다. 그렇게 제국으로 오게 된 것입니다.”
카이루스는 담담하게 말했지만 그의 눈은 몹시 슬퍼 보였다.
마치 처음 만났던 그날처럼.
유일한 안식처였던 어머니…….
디아나는 비록 엄마에 대한 그의 슬픔을 완벽히 이해할 순 없었지만 피비와 에드윈에게 대입해 본다면 조금은 알 거 같았다.
그들이 갑자기 디아나를 떠난다면 너무너무 슬퍼 아무것도 하기 싫을 것이다.
정말 매일매일 울고 있을 거야.
상상만으로도 감정이 울컥해 눈물이 주체되지 않았다.
“울리려고 한 얘기는 아니었는데…… 영애, 울지 마세요. 전 괜찮습니다.”
붉어지는 눈가에 힘을 준다고 주었는데도 눈물이 떨어졌는지 카이루스가 당황한 얼굴로 손을 뻗었다.
디아나의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 한 방울을 손끝으로 조심스레 훔친 카이루스는 다정한 미소를 그렸다.
“영애께서 울면 저도 슬퍼져요.”
“아…… 안 울게요. 그러니 슬퍼하지 마세요.”
디아나가 눈물을 닦으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카이루스는 온 힘을 다해 노력하는 디아나를 보며 작은 웃음을 흘렸다.
“네, 안 슬퍼할게요. 그리고 사실 지금은 새롭게 소중한 사람이 생겼습니다. 그 사람을 잃지 않기 위해 강해질 거고요.”
카이루스의 흑빛 눈동자가 순간 짙어졌지만 디아나는 흐릿한 시야 때문에 보지 못했다.
소중한 사람……?
누군지는 몰라도 카이루스가 아프지 않길 바라며 진심을 가득 담아 답했다.
“……꼭 지키시길 바라요.”
“반드시 그러겠습니다.”
“카이루스! 여기 있었구나!”
손부채질을 하며 울컥했던 감정을 식히던 디아나는 갑자기 들리는 목소리에 화들짝 놀랐다.
놀람이 채 가시기도 전에 언제 다가온 것인지 디아나의 앞을 가리는 등판에 느리게 눈을 깜박였다.
“……1황자 저하……?”
디아나는 레귤러스보다 큰 키의 금빛 뒤통수를 올려다보며 작게 속삭였다.
그러자 바로 1황자가 휙 몸을 돌렸다.
“디아나, 오랜만이다. 네가 레귤러스를 보러 왔다고 해서 잠시 얼굴 보러 왔어. 잘 지내고 있지?”
“아…… 네, 잘 지내고 있어요.”
디아나는 빠르게 말을 내뱉는 1황자에게 얼떨떨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잘 지내고 있다니 다행이야. 너랑 더 얘기를 나누고 싶은데, 내가 곧 검술 수업이 있어서 아쉽게도 그럴 수가 없네. 다음에 기회가 되면 얘기를 나누도록 하자.”
“……네.”
디아나에게 싱긋 웃어 보인 그는 다시 고개를 돌렸다.
“넌 일어나. 나랑 같이 연무장으로 가야 하니까.”
카이루스를 향해 낮게 속삭이는 1황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자신에게 향했던 상냥한 목소리와는 너무도 다른 살벌한 목소리에 디아나는 당황스러웠다.
둘이 엄청 친한 친구 사이라고 하지 않았었나……?
뭔가 이상한 분위기가 느껴졌지만 에키온은 언제 그랬냐는 듯 부드러운 미소를 그리며 카이루스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그럼 디아나, 카이루스와 난 가 볼 테니 레귤러스와 재밌는 시간 보내렴.”
“아, 네, 저하…… 왕자님도 다음에 뵈어요.”
카이루스에게 인사를 건넨 순간 왜인지 에키온의 입꼬리가 파르르 떨린 거 같았다.
“네, 다음에 또 뵙죠, 영애.”
디아나가 본 것이 착각이라는 듯 카이루스는 아무렇지 않은 미소를 지으며 곧 에키온과 함께 방을 나갔다.
“디아나! 내가 제일 좋은 물감을 가지고 왔어.”
뭔가 카이루스가 억지로 끌려 나간 거 같았는데…… 착각이겠지……?
왠지 찝찝한 기분이 들었지만 디아나는 신난 레귤러스의 목소리에 더는 카이루스를 생각할 수 없었다.
얼마나 그림에 집중하고 있었을까, 시간 가는 줄도 몰랐던 디아나는 레귤러스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우와, 디아나, 그림 잘 그린다. 나보다 훨씬 소질이 있는 거 같아.”
레귤러스는 디아나가 그린 꽃을 보며 연신 감탄사를 내뱉었다.
진짜 대단하다는 듯 금빛 눈동자를 반짝이는 레귤러스의 모습에 디아나는 쑥스러워 볼을 붉혔다.
처음 그린 그림이기도 했고, 새하얀 종이에 그저 노란 꽃 한 송이를 그린 게 다였기 때문이다.
“아니에요, 저하께서 훨씬 더 잘…… 그리세요.”
디아나는 2황자가 그린 알 수 없는 식물에 순간 멈칫했지만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내가? 에이, 아냐. 난 내 실력을 알아. 내 미술 담당 선생인 안젤라 부인도 항상 디아나처럼 어색하게 웃어.”
자신의 미소가 진짜가 아니란 걸 들킨 거 같았다.
“아, 그게…….”
디아나가 당황하자 레귤러스는 괜찮다는 듯 씨익 미소를 지었다.
“괜찮아. 뭐…… 그림 못 그리는 건 어쩔 수 없지. 그래도 난 다른 거 더 잘하는 게 많으니까, 그림 실력엔 상처받지 않아.”
“음…… 맞아요. 저하께선 식물도 잘 아시고, 또 직접 가꾸고 키우실 수도 있잖아요. 정말 대단한 일이에요.”
“맞아! 난 그런 대단한 능력이 있어. 그래서 말이야, 난 나중에 정령의 의식을 치르게 되면 꼭 숙부님처럼 땅을 다루는 능력을 가지고 싶어. 그럼 비옥한 토양으로 더 좋은 식물들을 키워 낼 수 있을 테니까.”
“분명 그렇게 되실 거예요.”
“헤헤, 진짜 그렇게 되면 좋겠다. 디아나 너처럼 정령술의 힘도 강하면 더 좋고……. 아, 맞다. 디아나, 그날 이후로 정령술 계속 연습하고 있어? 형이 그랬는데 정령술은 계속 연습해야 더 는다고 했어. 아, 그보다 넌 정령의 의식을 먼저 치러야 하는 거 아닌가?”
그 의식을 오늘 치르겠지만 레귤러스에게 말해도 되는 걸까.
아니 말하면 안될 거 같아.
레귤러스는 정말 착하지만 입이 무겁진 못했으니까.
디아나는 말을 돌리려 머리를 굴렸다.
“아, 의식은…… 음…….”
그러던 도중 그녀에게 다가오는 시녀가 보였다.
“영애, 폐하께서 보내신 시종이 왔습니다.”
준비가 다 되면 보낸다던 시종이 도착한 것이다.
“아. 저하, 전 이만 일어나야 할 거 같아요.”
“벌써?”
레귤러스가 아쉬움 가득한 얼굴로 디아나를 바라보았다. 디아나도 더 놀고 싶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가디언을 만나러 가야 했으니까.
“다음에 또 올게요, 저하.”
“가야 한다면 어쩔 수 없지. 대신 정말 다음에 꼭 놀러 와야 돼?”
“네, 아님 다음엔 저하께서 후작가로 놀러 오세요.”
“그래도 돼?”
“음…… 할아버지께서도 허락해 주실 거예요.”
디아나의 말에 시무룩해졌던 레귤러스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응! 언제든 좋으니까, 빨리 초대해 줘. 놀러 갈게. 그리고 이건 선물. 디아나가 써.”
주섬주섬 물감들을 챙긴 황자가 디아나에게 상자를 내밀었다.
“이거…… 저 주셔도 되는 거예요?”
“응. 어머니께서 보내 주신 건데…… 아마 너 줬다고 하면 좋아하실 거야. 그러니 걱정 말고 가져가.”
디아나는 값비싸 보이는 물감을 조심스럽게 받았다.
“감사합니다, 저하. 그럼 전 정말 가 볼게요.”
“응, 잘 가.”
디아나는 환한 미소를 지어 보이곤 이윽고 시녀를 따라 방을 나갔다.
“바로 출발하는 게 좋겠습니다.”
“정예 기사들 몇 명을 추려 바로 마탑으로 가겠네. 워프 마법진으로 움직이지.”
“네, 대공 전하.”
2황자의 궁에서 태양궁으로 돌아온 디아나는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들리는 목소리에 걸음을 멈칫했다.
“……대공 전하…….”
태양 궁전 앞,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며 마차로 다가가는 금빛 머리칼의 남자는 다름 아닌 대공이었다.
꽤 거리가 있어 대공은 디아나를 보지 못한 듯했지만 디아나는 대공이 보였다.
‘어딜 가는 걸까.’
바쁜 듯 보이는 걸음걸이와 분위기가 평소보다 더 날카로워 보였다.
그를 보던 디아나는 마지막으로 보았던 그의 미소가 떠올랐다.
카이루스보다 훨씬 더 슬펐던 미소.
대공가의 마차가 태양궁을 떠났지만 디아나는 그곳에서 쉽사리 눈을 떼지 못했다.
그 모습에 마음 한편이 불편해지자 디아나는 저도 모르게 잡고 있던 에드윈의 손에 힘을 주었다.
“아가씨.”
디아나는 에드윈의 부름에 고개를 들었다.
“대공 전하는 강인하신 분입니다. 그리고 힘들어도 이겨 낼 수 있는 어른이시죠. 그러니 아가씨께서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가씨께선 아직 어른들의 마음을 살필 나이가 아니세요.”
“……그래도…… 신경 쓰여. 전하는 정말 괜찮으시겠지?”
“물론입니다. 대공 전하께선 제국 제일의 검사이십니다. 그분이 얼마나 강한지 제가 제일 잘 알고 있으니 걱정 마세요. 아가씨, 저 믿으시죠?”
“응, 믿어.”
디아나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바로 답할 줄은 몰랐던 에드윈은 조금 놀랐지만 디아나의 믿음에 뿌듯한 미소를 그렸다.
“믿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가씨.”
“당연한 일인걸.”
“그럼 이제 안심하셨을 테니, 이만 궁으로 가실까요? 폐하와 후작 각하께서 기다리실 겁니다.”
“응.”
에드윈의 위로에 한결 마음이 편해진 디아나는 에드윈의 손을 잡은 채 태양궁으로 향했다.
* * *
태양궁의 가장 깊숙한 곳.
가디언이 잠들어 있는 지하의 육중한 문이 무거운 소리를 내며 열렸다.
지하 특유의 차가운 한기에 몸을 살짝 떨던 디아나는 손을 잡아 주는 온기에 고개를 살짝 들었다.
그러자 안심하라는 듯 후작이 디아나를 보며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이곳이 바로 가디언이 잠들어 있는 곳이란다, 디아나.”
열린 문으로 먼저 들어간 황제의 목소리가 울리고 횃대에 불이 밝혀졌다.
어두웠던 공간이 확 밝아지자 보이는 넓은 원형 공간에 디아나는 눈을 크게 떴다.
“와…….”
한 걸음, 한 걸음. 후작의 손을 잡고 의식의 장소로 들어선 디아나는 둥근 벽에 새겨진 벽화에 입을 크게 벌리며 감탄사를 내뱉었다.
초대 황제와 어둠의 정령의 전쟁을 그려 놓은 벽화는 책에서 보았던 것과는 차원이 다르게 크고 섬세했다.
특히 어둠의 표식들이 새겨진 어둠술사들을 향해 검을 겨눈 초대 황제의 얼굴과 눈빛은 마치 살아 숨 쉬는 것처럼 위엄이 있었다.
“……이 새가…… 가디언인가요?”
디아나는 초대 황제의 곁에 선 검은 매를 바라보았다. 대공가의 깃발에 새겨진 새이자, 황가의 상징이기도 한 검은 매.
검은 털 한 올 한 올이 꼭 살아 있는 거처럼 그려진 새는 당장이라도 벽화 속에서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그래, 이게 바로 제국을 수호하는 가디언이란다.”
디아나의 곁으로 다가온 황제가 검은 매를 바라보며 말했다.
“아름다워요.”
“……아름답다고?”
황제는 놀란 눈으로 디아나를 내려보았다.
새카만 검은 털색과 부리부리한 눈동자는 위압감이 남달랐기 때문에 보통 검은 매를 본 사람들은 두려움을 느낀다.
첫 만남에 아름답다는 말은 디아나가 처음일 것이다.
황제는 가디언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는 디아나를 보며 흠, 낮은 숨을 내뱉었다.
“가디언의 선택을 받은 아이라…… 뭔가 다른 건가.”
디아나의 홀린 듯한 눈빛을 보며 입 안이 씁쓸해졌다.
디아나가 가디언의 선택을 받은 게 아니길 바랐으니까.
후작 역시 무거운 눈빛으로 디아나를 보다 곧 입을 열었다.
“폐하, 의식을 시작하는 게 좋겠습니다.”
“그래. 디아나.”
황제의 나직한 부름에 디아나는 마침내 검은 매에서 시선을 뗐다.
“디아나, 이쪽으로 오렴.”
둥근 방 안의 중앙에 선 황제가 디아나를 향해 말했다.
“저곳엔 혼자 가야 한단다.”
후작은 디아나의 손을 놓아주며 말했다.
황제가 서 있는 중앙이 바로 가디언이 잠든 곳인 듯 바닥의 모양이 달랐다.
각진 네모난 모양의 돌은 바닥의 다른 회색 돌과 달리 새하얀 색이었었다.
잠시 물끄러미 보던 디아나는 가디언이 잠든 곳으로 걸음을 디뎠다.
“이 밑에 가디언이 잠들어 있단다. 정령의 의식은 바로 가디언이 잠든 이 위로 황족의 피를 한 방울 떨어뜨리는 것이지. 그럼 피의 계약에 따라 정령의 힘이 황족에게 스며든단다.”
“……피 한 방울이면 되나요?”
“그래, 한 방울이면 된다.”
황제의 곁으로 시종이 다가와 작은 금빛 바늘을 내밀었다.
디아나의 시선이 황제가 내미는 바늘을 향했다.
피 한 방울 흘리는 것이 무서운 건 아니었다. 정말 가디언이 깨어날지가 의문이었다.
“디아나.”
뻣뻣하게 굳은 디아나의 모습에 황제가 나직이 불렀다.
“네…….”
“나도 후작도 이곳에 있을 테니, 걱정 말거라.”
부드러운 미소에 쿵쾅거리던 디아나의 심장이 차즘 가라앉았다.
“…….”
“준비됐니?”
“네, 준비됐어요.”
디아나의 답에 황제는 작은 손을 잡았다.
마침내 뾰족한 바늘 끝이 디아나의 손끝을 찌르고 붉은 핏방울이 톡, 가디언의 위로 떨어졌다.
떨어진 작은 핏방울은 하얀 돌 위로 퍼지지 않았다. 마치 돌이 피를 마시는 거처럼 핏방울은 돌로 완전히 흡수됐다.
핏방울이 완전히 사라진 그 순간,
‘드디어…… 왔구나, 아이야.’
디아나의 머릿속으로 목소리가 울렸다.
“……가디언…….”
나직한 디아나의 목소리에 황제가 고개를 돌린 순간 고요하던 새하얀 돌에서 거센 빛이 뿜어져 나왔다.
‘아이야, 오랫동안 널 기다려 왔단다.’
환한 빛에 눈을 뜰 수가 없었다. 그러는 와중, 선명한 목소리가 디아나의 머릿속을 울렸다.
“디아나!”
할아버지의 다급한 목소리가 어디선가 들리는 거 같았다.
하지만 온몸을 감싸는 따뜻한 온기에 디아나는 답을 하지 못했다. 몸의 힘이 쭉 빠지고 나른한 수마가 밀려들었다.
‘무리했으니, 조금만 자고 일어나렴.’
다정한 목소리라고 생각한 순간 디아나는 완전히 의식을 잃었다.
온 방을 뒤덮었던 하얀 빛이 사라지자 황제와 후작은 그제야 간신히 눈을 똑바로 떴다.
그리고 눈앞에 보이는 커다란 새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
“……가디언.”
성인의 몸채보다 큰 커다란 검은 새.
신화 속 그림에서만 보던 가디언이 지금 눈앞에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윤기 나는 흑빛 털과 부리부리한 금빛 눈동자를 바라보던 황제는 가디언의 품 안에 있는 디아나를 발견했다.
“디아나!”
양 날개로 소중히 디아나를 품고 있던 가디언은 다가온 황제에게 길을 열 듯 날개를 펼쳐 주었다.
“디아나, 디아나, 정신을 좀 차려 보거라.”
디아나를 품에 안은 황제는 의식이 없는 아이의 볼을 쓰다듬었다. 축 늘어진 몸에 심장이 철렁한 황제는 눈앞에 있는 가디언의 존재에 대해서는 생각하지도 못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후작은 천천히 가디언의 곁으로 다가왔다.
영롱하게 빛나는 새의 금빛 눈동자가 후작과 시선을 마주했다.
후작은 순간 온몸을 휘감는 압도감에 손끝이 떨렸다.
마치 감히 인간으로서 마주할 수 없는 신을 마주한 기분이었다.
위압감에 온몸이 딱딱하게 굳었지만 두려움을 뛰어넘은 것은 디아나를 향한 걱정이었다.
후작은 떨어지지 않는 입술에 힘을 주어 움직였다.
“……가디언이시여, 제 손녀는……디아나는 괜찮은 것입니까.”
새의 금빛 눈동자가 번뜩인 그때, 방 안에 낯선 목소리가 울렸다.
“아이는 괜찮다. 나를 깨우기 위해 갑자기 많은 힘이 빠져나가 잠시 잠든 것뿐이니 힘이 회복되면 깨어날 것이다.”
성별을 짐작할 수 없는 신비로운 목소리가 마치 머릿속을 울리는 듯 귓속을 파고들었다.
초대 황제가 가디언과 의사소통이 가능했다는 것은 신화의 해석을 통해 머리로는 알고 있었지만 직접 가디언의 목소리를 들으니 이성은 소용이 없었다.
경외심이 드는 신비로운 목소리에 황제와 후작은 순간 정신이 멍해질 지경이었다.
가디언의 목소리에 그제야 정신을 차린 황제는 디아나를 품에 안고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켰다.
“……제국의 수호신이시여.”
그리고 황제는 가디언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넌 에이루스의 자손이군.”
에이루스 테라비타.
제국의 초대 황제이자 신화의 주인공의 이름을 친우 부르듯 편히 부르는 목소리에 황제는 정말 자신이 신화 속의 가디언을 마주하고 있단 것이 실감 났다.
“그대들이 내게 물을 것이 많을 것 같구나. 하지만 지금은 아이의 회복이 먼저이니…… 아이가 깨어나면 그대들에게도 디아나에게도 답을 주도록 하지.”
가디언은 굳은 얼굴로 고개를 숙이고 있는 황제와 후작을 한번씩 보곤 커다란 날개를 크게 펄럭였다.
큰 바람이 불 것이라 예상하고 황제는 디아나를 황급히 감싸 안았지만 바람 대신 밝은 빛이 또 한 번 방 안을 가득 메웠다.
빛이 사라지자 거대한 새가 있던 자리는 텅 비어 있었다.
“……사라진…… 아.”
황제가 사라진 가디언에 당황한 찰나 눈앞으로 작은 새가 날아왔다.
“내가 다시 깨어났다는 것을 아직은 알리지 않는 게 좋겠지. 내가 잠들었던 그때완 세상이 많이 달라졌을 테니까. 안 그런가?”
“……네, 그렇습니다.”
황제는 진중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당분간은 이렇게 눈에 띄지 않게 지낼 것이니, 걱정 말거라.”
“감사합니다.”
“폐하, 일단 자리를 옮기는 것이 좋겠습니다. 디아나가 쉴 수 있도록요.”
“그래야겠군.”
여전히 의식이 없는 디아나를 고쳐 안은 황제는 걸음을 서둘렀다.
황제의 침소.
“디아나는 어떻지?”
황제는 진찰을 마친 황궁의에게 다가가 물었다.
“큰 이상은 없으십니다. 약을 쓰기에도 애매해…… 의식을 차리실 때까지 두시는 것이 더 나을 것 같습니다.”
황궁의의 말에 황제는 속으로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가디언은 디아나가 아무런 이상이 없을 거라 했지만 그래도 의식이 없어 불안했었다.
“알겠다. 그만 물러가 보거라.”
의원을 물린 황제는 디아나의 머리맡에 자리를 잡고 있는 작은 새를 보았다.
황궁의가 진찰을 할 때까지 고요히 눈감고 있던 가디언은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자 눈을 떴다.
“그리 걱정 말거라. 난 절대 아이를 해하는 일은 하지 않는다.”
가디언이 황제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말했다. 몸은 작아졌다 해도 검은 눈을 마주하자 숨이 턱 막힐 듯한 위압감이 절로 느껴졌다.
황제는 숨통을 트듯 숨을 들이마시며 입을 열었다.
“가디언께서 디아나를 해할 것이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제국을 수호하고 황실의 피를 지켜 주는 정령이 아니십니까. 단지…… 앞으로 아이가 짊어져야 할 일들이 걱정되어 그런 것입니다.”
황제의 무거운 얼굴을 보던 가디언은 고요히 잠든 디아나를 내려다보았다.
새근새근한 숨소리와 살짝 올라간 입꼬리는 아이가 좋은 꿈을 꾸고 있단 뜻이었다.
그리고 그 꿈을 꾸게 해 준 것은 가디언이었다.
“……내가 깨어나는 것은 에이루스와의 약속이었고, 일어날 수밖에 없는 필연적인 일이었다. 하지만 나는 디아나를 위험에 빠뜨리기 위해 깨어난 것이 아니라 에이루스의 피로 세워진 이 제국을 지키고 그와의 마지막 약속을 다하기 위해서 깨어난 것이다. 예정된 운명은 바꿀 수 없다. 하니 아이의 앞날이 걱정된다면 너희들은 너희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야겠지.”
“……예정된 앞날이란 것은…… 역시 어둠의 봉인 또한 풀린다는 것입니까.”
후작이 침대 머리맡으로 다가와 물었다. 가디언의 영롱한 금빛 눈동자가 후작을 향했다.
“봉인은 이미 깨졌다.”
“이미…… 깨졌다니…… 그게 정말이십니까?”
“이리 빨리 깨져선 안 되는 것이었는데…… 너무 빨리 일이 진행되었다. 예정대로라면 내가 깨어나는 것은 디아나가 성인이 되었을 때여야 했다.”
가디언은 디아나를 힐긋 보곤 말을 이었다.
“하지만 디아나에게 어둠의 힘이 섞이며 모든 것이 틀어지기 시작한 거 같구나. 어둠의 힘이 봉인을 예상보다 빨리 깨뜨려 버렸고, 나 역시, 이 아이를 지키기 위해서 더 일찍 잠에서 깨어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황제는 참담한 얼굴로 눈을 지그시 감았다.
가디언이 깨어난다면 어둠의 정령이 깨어날 것이라 그리 예상하곤 있었지만 그래도 그 시기라도 디아나가 성인이 될 때까지 늦춰지길 바랐다.
하지만 이미 봉인이 깨졌다니.
복잡한 마음으로 눈을 뜬 황제는 가디언을 응시했다.
“그럼 앞으로 어찌 되는 것입니까? 어린 디아나가 어둠의 정령을 찾아 맞서야 하는 것입니까? 다른 방법은 없는 것입니까?”
“없다. 어둠의 봉인이 깨졌다는 것은 이미 어둠의 정령이 자신의 숙주가 될 사람을 찾았다는 것이니까. 이미 자신의 추종자들을 모으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디아나가 움직이지 않는다 해도 어둠의 정령이 내가 깨어난 것을 안다면 결국 제 발로 날 찾아올 것이다, 날 소멸시키기 위해서.”
황제가 침음을 삼킨 그때 가디언이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렇다 하여 그대들이 할 수 있는 일이 없는 것은 아니다. 앞으로 많은 수련을 통해 나와 디아나의 연결이 더욱 깊어져야 한다. 그러니 그때까지 그대들이 사라진 어둠의 숙주를 찾고 내가 이번 대에 어둠을 소멸하기 위해 준비해 둔 정령석들을 찾아와야 한다.”
“어떤 정령석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두 개의 정령석이 필요하다. 하나는 내가 오랜 동면에 들기 전 내 힘이 자연 속으로 흩어지지 않도록 힘을 응축해 만든 정령석이고 하나는 어둠의 정령을 봉인한 곳에 만든 정령석이다. 봉인되어 움직이지 못하는 어둠의 힘을 오랜 시간 동안 흡수한 정령석으로, 강한 힘이 녹아들었을 것이다.”
“어둠이 봉인된 곳에 있는 것이라면 하나는 헬킨 산맥에 있을 것이고…… 다른 하나의 행방은 모르십니까?”
황제의 물음에 가디언은 고개를 가로로 저었다.
“하나의 행방은 나 또한 알지 못한다. 당시…… 에이루스가 전쟁의 신화를 새겼던 자신의 수하에게 보관을 맡긴다 했지만 어느 순간 그 기운이 황성에서 사라졌다. 하니 지금은 그게 어디로 갔는지 행방을 알 수가 없다.”
“그 수하의 이름은 모르십니까?”
“모른다. 난 어둠의 정령을 봉인하고 힘이 쇠약해져 바로 깊은 동면에 들었으니까. 내가 아는 것은 단지 후대에 남길 신화를 비석에 새긴 자라는 것만 알고 있다.”
“비석…….”
가디언의 말을 들은 후작이 낮게 속삭였다.
신화의 내용이 담긴 비석은 현자의 탑에서 해독 중이었다.
비석을 새긴 자의 이름 역시 비석에 새겨져 있을 것이다.
“왜 그러는가? 후작, 뭐 아는 거라도 있는가?”
“아직은…… 알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하지만 비석이 현자의 탑에 있으니 비석에 내용을 새긴 자부터 찾으면 정령석의 행방을 찾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현재 현자의 탑에서 비석 해독은 얼마나 진행되었나?”
“그것은 제가 현자의 탑에 가 봐야 알 수 있을 거 같습니다…….”
후작은 잠든 디아나를 바라보았다.
아이가 깨어날 때까지 곁에 있고 싶지만 봉인이 깨졌다고 들은 이상 하루라도 빨리 움직여야 한다.
그래야 디아나의 앞길이 조금이라도 평탄해질 테니까.
“폐하, 전 지금 바로 현자의 탑으로 가겠습니다. 제가 다녀올 때까지 디아나를 황궁에서 보살펴 주십시오.”
“알겠네, 후작.”
인사를 올린 후작은 디아나를 한 번 더 보곤 빠르게 방을 나갔다.
“헬킨 산맥이라면…… 크로우드에게 알려야겠군.”
대공과 마탑주가 헬킨 산맥으로 향했으니 그들이 정령석을 가지고 돌아와야 한다.
하지만 이 일을 시종을 통해 알릴 수는 없었다.
“다녀와라. 어차피 내가 있는 한 이곳에서 아이를 위협할 수 있는 자는 없다.”
망설이는 황제의 기운을 느낀 듯 가디언이 말했다. 시종들은 가디언의 존재 때문에 모두 밖으로 물러나 있었다.
가디언을 못 믿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둘만 남겨 두기엔 마음이 불편했다.
아직 의식이 없는 디아나를 보며 고민하던 황제는 곧 시종을 부르는 종을 울렸다.
“부르셨습니까, 폐하.”
“시종장, 황후를 불러와라.”
* * *
“……으음…….”
디아나는 이마를 간지럽히는 작은 바람에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눈을 떴다.
머리를 흩뜨리는 따스한 바람과 코끝을 간지럽히는 향긋한 꽃향기.
기분 좋으면서도 어딘지 이질감이 느껴지는 상황에 디아나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낯선 주변을 둘러보았다.
“여기가 어디지?”
새하얀 꽃들이 흐드러지게 핀 언덕은 생전 처음 보는 곳이었다.
하지만 무섭진 않았다.
온몸을 부드럽게 감싸는 햇살도, 향긋한 꽃향기도 전부 왜인지 익숙했으니까.
꽃밭 사이로 한 걸음 발을 내디딘 순간 디아나는 언덕 위로 모습을 드러낸 은발의 아름다운 여자를 보았다.
“로우, 여기예요.”
환한 미소를 지으며 누군가를 향해 손을 흔들고 있는 여자의 얼굴은 디아나가 아는 얼굴이었다.
바로 초상화 속에서 보았던 대공비의 얼굴과 똑같았다.
“……엄마……?”
멍하니 그녀의 환한 미소를 보던 디아나는 대공비의 곁으로 다가온 남자를 보았다.
찬란하게 빛나는 금빛 머리칼과 금빛 눈동자. 대공비를 향해 부드러운 미소를 짓는 남자는 대공이었다.
“로우, 오늘 날씨가 정말 좋은 거 같아요.”
“그러게.”
대공은 대공비의 어깨를 부드럽게 감싸 안으며 언덕을 둘러보았다.
“아…….”
순간 다이나는 자신을 향하는 대공의 시선에 당황했지만 대공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는 듯 천천히 언덕을 둘러보았다.
“내가…… 보이지 않는 건가…….”
디아나의 기시감이 강해진 순간 미성이 또 한 번 언덕을 울렸다.
“어머, 우리 아가도 기분이 좋은가 봐요. 방금 움직였어요.”
“아가……?”
디아나는 대공비가 다정한 손길로 쓰다듬는 배로 시선을 내렸다. 산달이 다 된 듯 만삭인 배가 보였다.
저 배 속의 아기가 자신이란 걸 알아차린 디아나의 눈빛이 떨린 순간 대공의 목소리가 들렸다.
“정말?”
“로우, 손 얹어 봐요. 여기.”
대공비는 대공의 손을 이끌어 볼록하게 부른 제 배 위에 얹었다. 그리고 곧 딱딱한 대공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퍼졌다.
처음 보는 그 미소에 디아나의 눈빛이 크게 흔들렸다.
“정말, 움직였어.”
“우리 아이도 오늘 아빠랑 같이 나들이를 나와서 기분이 좋은가 봐요.”
“그렇다면 더 자주 나와야겠군.”
“음…… 지금도 좋지만 곧 아이가 태어날 테니, 아기가 태어나면 그때 더 자주 나오는 건 어때요?”
“음…….”
“로우? 왜 망설여요, 설마 싫어요?”
대공비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묻자 대공은 황급히 고개를 가로로 저었다.
“싫을 리가…… 그냥 아이가 태어나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모습을 상상하니…… 너무 불안해서. 혹 다치기라고 하면 어쩌나 하고. 그때마다 내가 곁에 있어야 할 텐데, 아이들은 어느 순간 훌쩍 커 버리겠지. 날 떠나 멀리 가는 날이 올 테고……. 그때가 되면 내가 잘 버틸 수 있을지도 걱정이고 또…… 내가 아이에게 좋은 아빠가 될 수 있을지도…….”
“로우.”
대공이 답지 않게 불안한 얼굴로 횡설수설하자 대공비가 부드러운 미소를 그렸다.
대공의 금빛 눈동자가 대공비를 향했다.
대공비는 대공의 손을 꼭 잡았다.
“잘할 수 있을 거예요. 당신은 좋은 아빠가 될 거야. 난 믿어 의심치 않아. 왜냐면 난 당신이 우리 아이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고 있으니까. 불안해 말아요. 아이는 우릴 닮아서 똑똑하고 착할 거예요. 그러니까 아이가 넘어지면 우리가 함께 일으켜 주고, 거센 바람이 불어와도 흔들리지 않게 붙잡아 주고 그렇게 우리의 하나뿐인 딸 예쁘게 잘 키우는 거예요.”
“아리엘…… 나 최선을 다할게. 앞으로는 당신과 아이를 위해서 살아갈 거야.”
“음…… 내게만 말하지 말고, 우리 아이한테도 말해 줘요.”
대공비의 말에 대공은 천천히 몸을 숙였다.
그리고 부른 배를 바라보며 손을 얹은 대공은 다정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아가야, 엄마 아빠는 널 정말 많이 사랑한단다. 그러니 꼭 건강한 모습으로 엄마, 아빠의 품에 안겨 주렴.”
봄바람보다 더 따스한 목소리를 들은 디아나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너무도 사랑스럽고 행복한 모습이었다.
그 속에 자신이 있단 것이 믿기지 않을 만큼.
엄마가 자신을 사랑했을까, 의심했던 것이 바보 같을 만큼 대공비는 너무도 사랑스럽단 눈으로 부른 배를 쓰다듬고 있었다.
“……엄마…….”
디아나의 볼을 타고 눈물 한 방울이 흘러내린 순간 공간을 크게 울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울지 마라, 아이야.]
그 목소리와 함께 눈앞의 모든 장면들이 흩날리는 꽃잎들과 함께 사라졌다.
어둠이 다시 찾아오고 눈을 감은 디아나는 볼을 쓰다듬는 손길에 천천히 의식을 차렸다.
“으음…….”
“디아나, 정신이 드니?”
온화한 목소리에 디아나는 무거운 눈꺼풀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제일 처음 눈에 보이는 천장이 몹시 낯설었다.
여긴…… 어디지……?
대공가도, 그렇다고 후작가도 아닌 거 같은 방의 모습에 느리게 눈을 깜박이던 때 디아나의 시야로 분홍빛 머리칼이 보였다.
“디아나, 괜찮니? 어디 아픈 곳은 없니?”
들은 적이 있는 목소리에 시선을 돌리자 낯익은 아름다운 여인이 걱정 가득한 눈빛으로 자신을 보고 있었다.
“……황후 폐하……?”
“그래, 그래, 나란다. 디아나, 몸은 어떠니?”
“전 괜찮아요.”
“정말 아픈 곳은 없니?”
“네, 아픈 곳은 없어요.”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야.”
불안함이 가득하던 황후는 그제야 안도감이 드는지 짧은 숨을 내쉬며 디아나의 볼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한데 황후 폐하…… 이곳은 어디인가요?”
디아나는 황후를 보다 낯선 방 안을 둘러보았다.
넓은 방은 여태까지 디아나가 봤던 곳들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고풍스러웠다.
금빛이 들어간 벽지와 하나같이 값비싸 보이는 가구들, 천장에 그려진 그림들도 범상치 않았다.
“디아나, 이곳은 황제 폐하의 침실이란다.”
황후의 말에 디아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폐하의 침실이요?”
황제의 침실이라니, 디아나는 화들짝 놀랐다.
이렇게 누워 있으면 안 될 거 같은 기분에 몸을 일으키려 하자 황후가 안절부절못하며 어깨를 잡았다.
“디아나, 아직 일어나지 않는 게 좋을 거 같은데…… 많이 불편하니?”
“조금요.”
“알겠다. 그럼 내가 도와주마. 완전히 일어나진 말고 기대 있으렴.”
황후의 도움을 받아 침대 헤드에 등을 기대게 된 디아나는 천천히 생각을 더듬었다.
황궁으로 가디언을 만나러 온 것과 2황자의 궁으로 간 일, 그리고 가디언의 의식…….
눈을 감기 전 마지막으로 보았던 환한 빛.
“황후 폐하, 할아버지와…… 폐하는 어디에 계신 건가요?”
가디언이 제대로 깨어난 것인지 확인을 해야 했다.
한데 방 안엔 황후 말고 다른 사람은 없었다.
“시아페 후작은 급히 현자의 탑으로 갔고 폐하께서도 지금 마탑으로 가셨단다. 폐하께선 아마 곧 돌아오시겠지만 네가 궁금해하는 것들은…… 가디언께서 말씀해 주실 거란다.”
“가디언이요? 가디언이 정말 깨어난 건가요? 지금 어디에 있나요?”
“여기 있단다. 계속 네 옆에 있었단다, 아이야.”
황후가 답한 게 아니었다.
머릿속에서만 울렸던 목소리가 선명히 귓가를 울렸다.
묘한 기분을 느끼며 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작은 검은 새가 자신을 보고 있었다.
“……가디언……?”
디아나는 예상치 못한 모습에 고개를 갸웃했다.
그도 그럴 게 그림 속에서 봤던 검은 새는 아주 크고 위엄 있었다.
한데 눈앞의 새는…… 그림의 반의반도 안 되는 크기였다. 물론 그림 속 새의 모습과 똑 닮긴 했지만…… 위엄을 찾긴 힘들었다.
오히려…….
“……귀여워.”
“흠. 귀엽다는 말은 아주 오랜만에 들어보는군. 한 천년은 넘은 거 같구나.”
“앗, 죄송해요. 저도 모르게…… 말이 나와서…….”
자기도 모르게 입 밖으로 내버린 말에 놀라 입술을 막자 검은 새가 포르르 디아나의 앞으로 날아올랐다.
“괜찮다. 오랜만에 그런 얘기를 들으니 젊어진 거 같고 기분이 좋구나.”
디아나는 자신의 앞에서 날갯짓을 하고 있는 검은 새를 보다 천천히 입술을 가린 손을 내렸다.
“정말…… 가디언이신가요? 제 꿈속에 나왔던…….”
“그래, 맞다. 내가 바로 너를 부른 제국의 수호 정령 가디언이란다.”
“진짜였어……. 전 제가 그냥 꿈을 꾼 게 아니었을까 의심했어요.”
말하는 새는 책 속에서도 본 적 없었다. 거기다 금빛 눈동자가 또렷한 새는 분명 벽화에 나온 가디언과 같았다.
하니 자신의 눈앞에 가디언이 있는 것이다.
확 느껴지는 현실감에 디아나는 신기하고 경외심 가득한 눈빛으로 작은 새를 보았다.
디아나의 반짝이는 눈빛에 가디언은 날개를 더 활짝 펴 보이다 이내 침대 위로 앉았다.
“디아나, 내게 궁금한 것들이 많겠지? 뭐든 물어보거라. 전부 답해 주마.”
디아나는 가디언을 향해 입술을 떼려다 자리를 지키고 있는 황후를 힐긋 보았다.
“내가 불편하다면 비켜 주마.”
“불편한 건 아니에요. 그냥 잠시 말해도 되는 건가 싶어서…….”
황제와 후작의 심상치 않았던 분위기를 보았었기에 잠시 망설인 것이다.
“걱정 말렴. 지금 상황에 대해서 폐하께 전부 전해 들었단다. 그러니 편히 말해도 된단다, 디아나.”
황후가 괜찮다는 듯 미소를 짓자 디아나는 가장 먼저 가디언에게 묻고 싶은 것을 떠올렸다.
“다른 것보다…… 꼭 묻고 싶은 게 있어요.”
“그게 무엇이냐?”
“의식을 차리기 전에 꿈속에서…… 엄마를 보았어요. 그 꿈속에서 본건…… 가디언께서 만들어 낸 가짜인가요? 아님 진짜인가요?”
왜 자신을 선택했는지, 가디언이 깨어나는 게 좋은 일인 건지 나쁜 일인 건지 그 모든 것들보다 꼭 알고 싶었다.
꿈속에서 본 엄마의 모습이 진짜가 맞는지 말이다.
“흠…… 디아나 네가 꾼 꿈은 진짜란다. 네가 기억할 수 없는 아주 태초의 순간들을 나의 힘으로 꺼낸 것이지. 하니 의심하지 말려무나. 너의 어미는 제 목숨보다 널 사랑했으니까.”
“아…….”
디아나는 떨리는 탄성을 내뱉었다.
자기 목숨보다 날 사랑했다니.
디아나는 행복한 표정으로 부른 배를 쓰다듬던 엄마의 모습이 떠올라 벅차는 감정을 주체할 수 없었다.
눈가에 차오른 눈물이 방울방울 떨어지자 황후가 디아나를 꼭 끌어안았다.
“디아나…… 아리엘은 널 가지고 정말 행복해했단다. 모든 순간 널 사랑했고, 지금도 닿을 순 없어도 널 바라보고 있을 거란다. 하니 아가, 아팠던 과거들은 절대 네 잘못이 아니란다.”
비록 기억할 순 없지만 모든 순간 자신을 사랑했다는 말에 디아나는 결국 참았던 눈물을 왈칵 터뜨렸다.
한참을 황후의 품에서 눈물 흘린 디아나는 코를 훌쩍이며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고귀한 황후의 드레스 앞섶이 디아나의 눈물로 흥건하게 젖어 있었다.
하지만 황후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상냥한 미소를 지으며 디아나의 등을 토닥였다.
“이제, 좀 괜찮니?”
“……네, 죄송해요. 저 때문에 옷이 다 젖으셨어요.”
“이런 옷쯤이야 갈아입으면 그만이란다. 내가 걱정하는 것은 디아나 너의 마음에 남아 있을 상처란다. 이 옷처럼, 울음 한 번으로 네 상처가 사라지면 좋겠지만 그럴 수 없겠지. 그래도 디아나 네 마음이 조금은 가벼워졌으면 좋겠구나. 내 품은 수십 번, 아니 수백 번이고 내어줄 수 있으니까.”
디아나를 바라보는 황후의 눈빛은 다정하면서도 안쓰러움이 담겨 있었다.
자신을 진심으로 걱정해 주는 그녀의 마음에 디아나는 퉁퉁 부은 눈가를 닦으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감사합니다, 황후 폐하.”
“큰어머니라…… 아직은 그리 부르긴 힘들겠지?”
“……노력해 볼게요…….”
황후가 싫은 것은 아니었지만 입에 붙지 않는 어색한 호칭이 쉽게 나오질 않았다.
입을 오물거리는 디아나를 본 황후의 입가에 웃음기가 스몄다.
황후는 괜찮다는 듯 디아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으니 호칭은 네 마음이 편해질 때 그리 불러 주렴.”
“네, 황후 폐하.”
“아이야, 이제 좀 진정이 되었느냐.”
황후의 품에서 나온 디아나는 가디언을 향해 시선을 내렸다. 가디언의 금빛 눈동자가 디아나의 얼굴을 살피듯 도르륵 움직였다.
“……많이도 울었구나.”
퉁퉁 부은 눈을 보던 가디언이 포르르 날아올라 디아나의 얼굴로 다가왔다.
검은 날개를 디아나를 향해 퍼덕이자 뜨겁게 달아오른 눈가에 시원한 바람이 스며들었다.
가디언의 정령술이었다.
부은 것까지 가라앉히진 못했지만 그래도 열기가 가시자 한결 눈이 편해졌다.
“감사해요.”
“감사할 것 없다. 내가 너를 선택한 이상, 이제 나의 힘은 곧 너의 힘이니까.”
“선택…… 이란 게 정확히 어떤 의미인가요?”
시원한 바람에 울컥했던 감정들이 빠르게 가라앉은 디아나는 지금 당장의 문제를 생각했다.
꿈속에서 자신은 가디언의 목소리를 들었고, 허상이 아니었다는 듯 가디언은 지금 자신의 앞에 있다.
가디언의 전설에 대해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진 않지만 역대 황족들 중 자신과 같은 경우를 겪은 사람이 없다는 건 안다.
단 한 사람 초대 황제는 빼고.
“내가 널 선택했다는 건 즉, 내가 너에게 계약으로 종속되었단 걸 의미한단다. 원래 정령은 인간과 계약을 맺고 영혼의 교감을 나누며 힘을 바친단다.”
계약, 영혼의 교감…….
“잘…… 이해가 되지 않아요.”
디아나는 또래보다 영특한 아이긴 하지만 그럼에도 지금 가디언이 하는 말들을 이해하기 힘들었다.
“흠, 내가 너무 어렵게 말했군……. 그러니까, 좀 더 쉽게 설명하자면 난 태초의 시대, 대륙이 가진 자연의 힘에서 태어난 정령이란다. 난 어느 곳에든 존재하지만 하나의 생명체는 아니었단다. 난 그저 자연이었으니까. 하지만 어둠의 정령이 나타나고 세상이 혼란스러워지며 난 나와 상성이 맞는 인간을 찾아 어둠의 정령에 맞서야 했단다.”
긴말을 이해할 수 있도록 잠시 기다려 준 가디언이 말을 이었다.
“그렇게 나와 영혼의 교감이 되는 인간을 찾던 중 만나게 된 것이 바로 너의 선조이자 이 나라를 건설한 황제 에이루스란다.”
“초대 황제 폐하…….”
“맞다. 바로 이 나라의 초대 황제이지. 에이루스의 영혼의 힘이 내게 하나의 생명체 같은 몸을 만들어 주었고 난 에이루스의 영혼에 종속되어 그에게 나의 힘을 바쳤지. 그게 바로 정령과 인간의 계약이란다. 에이루스와 난 어둠의 정령에 맞서 싸웠단다. 하지만 어둠의 정령의 힘은 쉽게 종말시킬 수 있는 것이 아니었지.”
과거를 그리듯 가디언의 검은 눈 살짝 흐려졌다. 하지만 곧 선명해진 눈으로 말했다.
“에이루스와 난 이대론 끝내 어둠의 정령을 완전히 소멸할 수 없단 걸 깨달았지. 그래서 우린 결단을 내릴 수밖에 없었단다. 디아나, 여기까진 이해가 가니?”
“네.”
디아나가 이해한다고 고개를 끄덕이자 가디언은 설명을 이었다.
“우리가 내린 결단은 어둠의 정령의 소멸을 후대로 미루는 것이었단다. 오랜 전쟁으로 약해진 정령의 힘을 일단 봉인하고 후대에 다시 한번 어둠과 맞서기로 결정한 것이었지. 그렇게 지금 내가 다시 깨어나게 된 것이란다.”
설명을 들은 디아나는 잠시 말이 없었다.
어둠의 정령을 소멸시키는 일을 후대에 넘겼고, 다시 깨어난 가디언은 자신을 선택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그럼 앞으로 제가 가디언님과 함께 어둠의 정령을 소멸시켜야 한다는 건가요?”
“……그래, 그렇단다.”
차분히 설명을 하던 목소리와 달리 가디언은 조금 느리게 답했다.
“아…….”
디아나는 탄식인지 탄성인지 모를 작은 소리를 내뱉었다.
‘내가 어둠의 정령을 소멸시켜야 한다니.’
순간 디아나는 레아가 떠올랐다.
그녀가 보았던 어둠술사의 모습은 레아가 유일했으니까.
번뜩이던 붉은 눈동자와 스멀스멀 흘러나오던 검은 기운.
그 순간 느꼈던 두려움은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에 남아 있었다.
그날의 기억에 소름이 돋은 디아나가 팔을 문지르자 가디언이 말했다.
“너 혼자 어둠의 정령에 맞서야 하는 것은 아니란다. 네 곁엔 항상 내가 있을 것이고, 또 너를 지켜 줄 수많은 사람들이 함께할 거란다. 하지만…… 네가 두려운 것은 당연하겠지. 넌 아직 어리고…….”
“두렵지 않아요.”
디아나는 걱정스럽다는 듯 말하는 가디언에게 말했다. 그러자 가디언의 금빛 눈동자가 느리게 깜박였다.
디아나의 이런 반응을 예상치 못한 듯 놀란 목소리로 물었다.
“두렵지 않다 했느냐?”
“사실 어둠의 정령을 소멸해야 한다는 가디언님의 말을 모두 이해하진 못했어요. 신화 속에서만 보던 일들이고 제겐 너무 꿈같은 일이니까요. 하지만 한 번 어둠술사와 만난 적이 있어요. 그때 전 혼자가 아니었어요. 절 지켜 주었던 사람들이 있었죠. 그러니 다시 그런 상황이 온다 해도…… 두렵지 않아요. 혼자가 아닐 테니까.”
그때의 기억이 떠올라 소름이 돋았던 건 맞지만 두렵지는 않았다.
그날 레아의 공격에도 온몸으로 자신을 지켜 주었던 에드윈부터 언제나 자신의 곁을 지켜 주는 피비, 그리고 외할아버지와 황가의 사람들까지, 디아나의 주변엔 갈수록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었다.
디아나는 어릴 적처럼 혼자가 아니었다.
가디언은 디아나의 금빛 눈동자를 지그시 응시했다.
가디언 스스로 어린 디아나를 선택했지만 어린아이이니 바로 모든 것을 받아들이지 못해도 어쩔 수 없다 생각했다.
한데 디아나의 금빛 눈동자는 흔들림이 없이 맑았다.
어린아이답지 않게 영특하고 올곧았다.
그 정직한 눈빛을 보던 가디언은 순간 잊을 수 없는 한 사람이 떠올랐다.
천년의 세월이 흘렀음에도 선명히 기억나는 오랜 친우, 에이루스.
자신의 희생조차 두려워하지 않았던 그의 눈빛과 디아나의 올곧은 금빛 눈동자는 많이 닮아 있었다.
역시, 에이루스의 후손인 건가.
가디언은 디아나에게 다가가 작은 손 위로 날개를 살짝 덮었다.
“……내가 네게 이끌렸던 이유는 단순히 어둠의 힘 때문만은 아니었나 보구나.”
“네?”
알 수 없는 말에 디아나가 되물었지만 가디언은 손 위에 얹었던 날개를 거두며 포르르 날아올랐다.
“그저 나의 혼잣말이었다. 디아나, 손을 내밀어 다오.”
디아나는 가디언의 말에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가디언은 디아나의 손등 위로 부리를 내렸다.
“나의 계약자여, 그대의 목숨이 다하는 날까지 우리의 계약은 절대 풀리지 않을 것이다.”
손등 위에서 화끈한 통증이 느껴졌다. 미간을 좁힌 찰나 순식간에 가라앉은 통증에 고개를 갸웃하자 가디언이 손등에서 머리를 들었다.
“어…….”
“영혼의 계약이 성립되었다는 표식이다.”
디아나의 손등 위로 선명히 새겨진 새의 문양은 점점 선이 옅어지며 피부 안으로 스며들 듯, 이내 완전히 모습을 감추었다.
신기한 광경에 놀라 눈을 크게 뜨자 가디언이 말했다.
“디아나 네가 나를 부르거나, 나의 힘을 쓸 때 이 문양이 발현될 것이란다. 계약도 잘 마쳤고, 너도 무사히 깨어났으니 난 자연계로 돌아가야겠구나. 오랜 잠에서 깨어나 아직 힘이 불안정하단다. 네 몸 상태가 완전히 나아지면 다시 나타나마.”
디아나가 무어라 입술을 떼기도 전에 가디언은 자취를 감추었다.
갑자기 눈앞에서 사라졌지만 디아나는 불안하지 않았다.
손등에 문양이 새겨진 그 순간부터 알 수 없는 은은한 기운이 디아나의 심장을 맴돌았으니까.
그 기운이 가디언의 것이란 건 누가 설명해 주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저 황후 폐하, 저도 이만 후작가로 돌아가야 할 거 같아요.”
창밖의 하늘은 이미 어둑해져 있었다.
“음, 디아나, 후작이 자신이 돌아올 때까지 널 황궁에서 맡아 달라 부탁하고 갔단다.”
“할아버지가 돌아오시기까지 오래 걸리시나요?”
“현자의 탑은 제국의 영토에서 멀리 떨어진 소니드 왕국 국경선에 있단다. 거기다 현자의 탑은 마법을 쓸 수 없기 때문에…… 왔다 갔다 하는 데 시간이 꽤 걸린단다. 아마 일주일 정도는 있어야 할 것이야.”
“일주일이나요? 피비랑 유네스가 걱정할 텐데…….”
디아나는 난감한 얼굴을 했다.
피비와 유네스를 만나고 단 한 번도 일주일이나 떨어져 있은 적이 없었다.
피비도 피비였지만 특히 유네스가 걱정되었다. 유네스는 디아나가 오래 안 보이면 극도로 불안해했다.
“걱정 말렴, 디아나. 안 그래도 너의 하녀와 유네스를 황궁으로 불렀단다.”
“정말요?”
디아나가 반색하며 눈을 동그랗게 뜨자 황후가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 후작이 그러더구나, 유네스와 하녀가 있어야 네가 편히 황궁에서 지낼 수 있을 거라고. 후작이 길을 떠나며 후작가에 연통을 넣는다 했으니 아마 곧…….”
황후의 말이 끝나기 직전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울렸다.
“황제 폐하 드십니다.”
시종장의 목소리에 황후가 의자에서 일어났다. 디아나 역시 일어나려 했지만 황후가 그러지 말라는 듯 어깨를 살짝 눌렀다.
“디아나, 몸은 괜찮은 것이냐.”
방으로 들어오자마자 황제가 침대로 다가왔지만 디아나의 시선은 황제의 뒤를 따라 들어오는 사람에 향해 있었다.
“피비, 유네스?”
“냐아-.”
황제의 뒤를 따라 걸어 들어온 사람은 분명 피비였다. 그리고 피비의 품엔 유네스가 안겨 있었다.
디아나의 목소리를 들은 유네스가 크게 버둥거렸다. 그에 긴장하고 있던 피비가 유네스를 놓쳐버리고 말았다.
“앗, 안 돼…….”
피비가 당황하여 외쳤지만 이미 유네스는 이미 디아나가 있는 침대로 달려간 뒤였다.
“유네스!”
“냐아-.”
디아나의 품으로 뛰어든 유네스가 턱을 핥으며 애교를 부렸다.
“간지러워…… 큭.”
디아나는 축축해지는 턱과 볼에 웃으며 유네스를 밀어냈다. 품에 유네스를 편하게 앉힌 디아나는 그제야 사방이 고요하단 걸 눈치챘다.
시선을 돌리자 방 안의 사람들 전부가 자신을 보고 있었다.
그리고 디아나는 그녀와 똑같은 황금색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쳤다.
“아…….”
황제 폐하였다.
황제도 함께 왔는데 피비와 유네스를 본 순간 그의 존재를 잊어버리고 말았다.
감히 황제를 면전에 두고 무시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디아나가 당황을 숨기지 못하며 안절부절못하자 황제가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괜찮다. 괜찮아. 혹 어디 아픈 곳이 있을까 걱정했는데 웃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놓이는구나.”
“……송구합니다, 폐하.”
“아니다. 반가운 사람이 먼저 보이는 것은 당연한 것이지. 신경 쓰지 말려무나.”
황제가 고개를 숙이려는 디아나에게 그러지 말라는 듯 손을 휘젓자 황후가 황제의 곁으로 다가왔다.
“한데 폐하, 디아나의 하녀와는 어찌 같이 오신 겁니까?”
“아, 마탑에서 돌아오는 길에 본궁 입구에서 딱 만났답니다. 후작가의 마차에서 내리는 걸 보고 디아나의 하녀란 걸 바로 알았지요.”
“그러셨군요.”
황후는 고개를 숙이고 있는 피비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이름이 피비라고 했던가?”
“네, 황후 폐하.”
“당분간 디아나가 황궁에서 지내야 한단다. 황궁에서 지내는 데 불편함이 없게 내 시녀를 몇 명 너에게 붙여 줄 테니 디아나를 곁에서 잘 보필하거라.”
“네, 황후 폐하.”
“그럼 폐하, 황후궁에 디아나가 지낼 거처를 마련하도록 하겠습니다.”
황후가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황제에게 말하자 황제는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황후궁이라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황후?”
“무슨 말이라뇨, 폐하. 디아나는 당연히 황후궁에서 제가 보살펴야 하지 않겠습니까?”
“오, 아닙니다, 황후. 궁궐을 관리하는 것만으로 충분히 바쁠 터인데 그리 수고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디아나는 태양궁에서 지내고 제가 시간 날 때마다 보살피겠습니다.”
황제가 인자한 웃음을 지으며 말하자 황후의 아름다운 얼굴에 당황이 스쳤다.
하지만 곧 더 짙은 미소를 지으며 황제에게 말했다.
“폐하, 아무리 제가 바쁘다 하여도 국사를 보시는 폐하만큼 바쁘겠습니까. 디아나는 제가 보살피겠습니다. 디아나도 저와 있는 것이 더 편할 것이랍니다. 그렇지 않니, 디아나?”
디아나는 자신을 향한 황후와 황제의 시선에 난감함을 느꼈다.
황제와 황후는 분명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알 수 없는 신경전이 느껴지고 있었다.
“디아나, 황후궁에서 지내는 게 편하겠느냐? 태양궁에서 지내는 것도 나쁘지 않을 터인데…….”
편히 말하라, 황제가 덧붙였지만 분위기상 디아나가 황후궁으로 가겠다고 하면 몹시 서운해할 분위기였다.
무어라 말하기 어려운 분위기에 입술을 달싹인 그때, 시종의 목소리가 울렸다.
“폐하, 1황자 저하와 2황자 저하께서 오셨습니다.”
황자들이 저녁 문안을 올리는 시간이었다.
“아, 벌써 시간이 이리되었군. 들라하라.”
황제와 황후의 시선이 문을 향하자 디아나는 작게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아버지, 저녁 인사를 올리러 왔습니…… 다…… 디아나?”
먼저 들어온 에키온은 황제에게 예를 갖추다 침대에 기대앉아 있는 디아나를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디아나가 있다고?”
뒤따라온 레귤러스는 에키온의 말에 고개를 휙 돌렸다.
디아나를 발견한 레귤러스는 황제와 황후는 보이지도 않는다는 듯 침대 머리맡으로 쪼르르 달려갔다.
“디아나! 아직 후작가로 안 돌아갔네? 어, 근데 왜 이렇게 있어? 유네스도 있네? 오늘 집에 안 가? 황궁에 있는 거야? 근데 눈이 왜 그렇게 부었어? 금붕어 같아, 디아나. 어디 아픈 건가?”
레귤러스는 급한 성격답게 우다다 말을 쏟아냈다.
질문에 머리가 어지러운 느낌을 받은 그때, 레귤러스의 몸이 뒤로 딸려 갔다.
“레귤러스, 그렇게 다가가면 디아나가 놀라잖니. 황자가 체통 없이 이럼 안 된다. 그리고 아버지에게 인사를 먼저 올려야지.”
황후는 침대 위로 기어 올라갈 기세인 레귤러스의 뒷덜미를 우아하게 붙잡으며 말했다.
황후와 눈이 마주친 레귤러스는 꼬리가 내려간 강아지 같은 모습으로 황제를 향해 몸을 돌렸다.
“아…… 네. 어머니, 아버지, 인사 올립니다.”
“그래, 레귤러스. 오늘 하루도 잘 보냈느냐.”
“네, 아버지. 아버지도 오늘 하루 잘 보내셨나요?”
“나도 무탈히 보냈단다.”
인사를 마친 레귤러스의 눈길이 자꾸만 디아나를 향했다. 그것을 본 황제는 피식, 웃으며 레귤러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레귤러스, 디아나와 놀고 싶은 네 마음은 알겠지만 오늘은 힘들 거 같구나. 디아나의 몸이 좋지 않아 오늘은 쉬어야 하거든.”
“아…… 그렇군요.”
레귤러스는 아쉬움이 가득한 얼굴로 디아나를 보았다.
“디아나, 푹 쉬어.”
“저하, 저 당분간 황궁에서 지내게 됐으니 몸이 괜찮아지면 함께 놀아요.”
풀이 죽은 모습에 옅은 미소를 그리며 말하자 레귤러스의 얼굴이 확 밝아졌다.
“정말? 황궁에서 지내? 얼마나? 아니, 어느 궁에서 지내?”
“아…… 한 며칠 정도 지낼 거 같고…… 궁은…… 아마…….”
디아나는 반짝이는 레귤러스의 눈동자를 보다 다시금 자신을 향하는 황제와 황후의 시선에 말끝을 흐렸다.
“디아나가 어디서 지낼지 아직 안 정해진 건가요?”
모든 상황을 차분히 지켜보고 있던 에키온이 한 걸음 다가왔다.
“아, 디아나는 아마 내 궁에서 지내게 될 거란다.”
“허허, 황후, 아직 디아나가 답을 하지 않았습니다.”
에키온은 어딘지 익숙한 황제와 황후의 모습을 번갈아 보았다.
그가 막 말을 배우기 시작했을 무렵 ‘아빠가 좋아, 엄마가 좋아’란 아주 어려운 질문을 받았을 때의 느낌과 똑같았다.
그리고 디아나는 그때의 자신과 똑같은 곤란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순간 디아나와 에키온의 시선이 마주쳤다.
에키온은 난감한 얼굴을 한 디아나에게 나만 믿으라는 듯, 매끄럽게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큼, 작은 헛기침을 내뱉은 에키온은 황제와 황후의 시선을 끌었다.
“아버지, 어머니, 제 생각으론 디아나가 황궁에서 편히 지내려면 궁을 하나 내주는 것이 나을 거 같습니다.”
“본궁이나 황후궁 말고 아예 새 궁을 내주란 것이냐?”
“네, 태양궁도 황후궁도 아버지와 어머니의 궁이니 디아나가 편히 지내기엔 눈치가 보이지 않겠습니까. 물론 아버지와 어머니께서 디아나를 잘 챙겨 주시겠지만 정말 편히 지내시길 바란다면 떨어져 있는 게 나을 것입니다.”
“흠…….”
황제가 고민하듯 신음을 내뱉자 에키온이 막 생각났다는 듯 손뼉을 가볍게 마주치며 말했다.
“황성에 황녀들이 사용하는 궁전이 전부 비어 있지 않습니까. 그중 에메랄드 궁이 좋을 거 같습니다. 태양궁과 황후궁 사이에 위치한 궁이니 지리적으로도 안전하고 또 어머니 아버지께서도 디아나를 보살피기 편하지 않겠습니까?”
에메랄드 궁은 대대로 황실에서 가장 사랑받는 황녀들이 하사받는 궁이었다.
“에메랄드 궁이라면…… 황후궁과도 가까우니 제가 디아나에게 언제든 들를 수 있겠군요……. 에키온의 생각이 나쁘지 않은 거 같습니다, 폐하.”
“그런 것 같군요…….”
“그럼 이제 디아나의 거처가 정해졌군요. 잘됐습니다.”
에키온이 환한 미소를 짓자 황제와 황후는 어딘지 떨떠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디아나, 그럼 지금 에메랄드 궁으로 가는 거야? 나도 같이 구경…….”
“레귤러스.”
레귤러스는 반색하다 또 한 번 황후에게 뒷덜미를 잡혔다.
황제가 말했다.
“지금은 밤이 늦어 에메랄드 궁을 준비시킬 수 없단다. 디아나, 불편하겠지만 오늘은 일단 내 궁에서 지내고 내일 준비가 되는 대로 궁을 옮겨야겠구나.”
“아, 네. 배려 감사합니다, 폐하.”
“아니다. 그럼 시간이 늦었으니, 다들 물러나 주는 게 좋겠군. 디아나, 혹 필요한 게 있다면 뭐든지 네 하녀에게 말하도록 해라. 그럼 다들 나가자꾸나.”
황제가 가족들과 함께 방을 나가려 하자 디아나가 당황스러워 다급히 물었다.
“폐하, 제가 이곳에서 자나요?”
“응? 왜 여기가 싫으냐? 그래도 이 궁에서 이곳이 제일 좋은 방인데…… 더 좋은 방은 없단다.”
황제는 곤란한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는 더 좋은 방이 있다면 당장 그 방으로 디아나를 옮겨 줄 듯한 아쉬운 눈빛이었다.
“아뇨, 제 말은 그런 뜻이 아니라…… 여긴 폐하의 방인데 제가 어떻게 감히…….”
“하하하, 내 잠자리 걱정도 다 해 주고, 어쩜 이리 착한 것인지. 하하하.”
그리 착한 일인 거 같지 않았지만 너털웃음을 터뜨리는 황제의 모습에 디아나는 얼떨떨한 얼굴을 했다.
“하하, 디아나, 걱정해 줘서 너무도 기쁘다만 내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단다. 태양궁에 널린 게 방이니 난 다른 방에 가서 자면 된다. 내 걱정은 하지 말려무나.”
“제가 다른 방에서…….”
“아니, 이곳이 제일 좋은 방이다. 디아나 네가 제일 좋은 방에서 쉬어야 내 마음도 편하단다.”
부드럽지만 단호함이 깃든 황제의 말과 괜찮다는 듯 디아나를 보는 황후의 눈빛에 뭐라고 더 거절할 수 없었다.
디아나의 머리를 다정한 손길로 쓰다듬은 황제는 곧 가족들을 이끌고 방을 나갔다.
“휴…… 아가씨, 괜찮으세요?”
방문이 닫히자 피비는 긴장했었는지 큰 숨을 내쉬곤 디아나에게 다가왔다.
“응, 괜찮아. 나보다 피비가 더 안 좋아 보여. 괜찮아?”
“전 이제 아가씨 곁에서 절대 안 떨어져야겠어요. 제가 곁에 없을 때마다 아가씨가 이렇게 쓰러졌단 소식이 들려오니…… 제 심장이 남아나질 않아요. 이제 어딜 가시든 저 데리고 가세요,”
“알았어. 근데 오늘은 정말 아프거나 다쳐서 쓰러진 건 아니야. 의식을 잃긴 했는데 엄청 좋은 꿈을 꿔서 선물을 받은 기분이야.”
“정말 좋은 꿈 꾸신 거 맞으세요? 눈이 많이 부으셨는데…….”
“엄마가 나오는 꿈이었어. 꿈에서 깼을 땐 울었는데 지금은 괜찮아. 엄마가 날 많이 사랑했단 걸 알았으니까.”
디아나는 볼을 발그레 물들이며 미소를 지었다. 눈은 퉁퉁 부어 있었지만 행복이 느껴지는 미소에 피비도 시무룩했던 얼굴을 폈다.
“당연하죠, 아가씨가 얼마나 예쁘고 사랑스런 분이신데요. 아가씨를 가지시고 대공비님께서도 너무너무 행복하셨을 거예요.”
엄마가 자신을 사랑했다는 걸 이젠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함께할 순 없어도 꿈속에서 보았던 엄마의 행복한 얼굴을 디아나는 영원히 기억할 것이다.
“응, 정말 행복해 보였어.”
디아나는 엄마의 행복한 미소를 그리며 환한 웃음을 지었다.
* * *
어두운 밤하늘이 시간이 지나 푸른빛으로 바뀌었을 때, 태양궁 앞으로 말이 멈추었다.
히이잉-.
고요한 황성에 울음소리가 울리자 새벽 번을 서던 시종들의 시선이 말에서 내리는 사람을 향했다.
“대공 전하를 뵙니다.”
시종에게 말고삐를 건넨 대공은 흐트러진 금발을 쓸어 넘겼다.
“폐하는 침실에 계신가?”
“집무실에서 대공 전하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폐하, 대공 전하께서 도착하셨습니다.”
초조한 얼굴로 책상을 지키고 있던 황제는 시종의 말을 듣자마자 답했다.
“어서 들여보내라.”
문이 열리고 집무실에 들어선 대공을 본 황제는 코끝으로 훅 파고드는 몬스터의 피 냄새에 미간을 좁혔다.
“제국의…….”
“인사는 됐다. 산맥의 상황이 험했던 거 같은데 몸은 괜찮은 것이냐?”
“네, 다친 곳은 없습니다.”
“다행이구나. 산맥의 상황은 많이 안 좋은 것이냐? 몬스터의 습격을 대비해야 할 정도이냐?”
“아직 몬스터들이 산맥 밖으로 나오고 있진 않지만 혹시 모르니 헬킨 산맥 경계령에 있는 영지들엔 대피령을 내리는 것이 좋을 거 같습니다. 그리고 마법사들을 경계령에 파견해 방어선을 구축해야 할 것입니다.”
“예상보다 안 좋은 건 맞구나. 알겠다. 바로 명을 내리도록 하마. 그보다 내가 보낸 연락은 받았던 것이냐?”
황제의 금빛 눈동자에 긴장감이 서렸다.
가디언에게 정령석의 이야기를 듣고 곧장 마탑주에게 연락을 보냈었다.
정령석을 가지고 오라고 말이다.
하지만 헬킨 산맥까지 거리가 멀어 그 연락이 제대로 갔을지는 미지수였다.
“네, 통신이 원활하진 못했지만 폐하께서 전달하신 말씀은 받았습니다. 그리고 전해 주신 대로 정령석을 가지고 돌아왔습니다.”
대공은 제복 상의 안주머니에서 정령석을 꺼내 책상 위로 내려놓았다.
“이게, 정령석이란 말이지?”
새카맣고 동그란 모양의 정령석은 가디언의 힘 특유의 신성한 느낌이 아닌 몹시 불길한 기운을 풍기고 있었다.
“네, 이게 맞습니다. 마탑주의 말론 오랜 시간 동안 어둠의 힘을 흡수했기 때문에 정령의 기운보다 어둠의 기운을 더 많이 품고 있다고 하더군요.”
“그래. 가디언께서도 그리 말씀하시긴 했다.”
“……가디언은 정말 깨어난 것입니까?”
대공의 목소리가 무거웠다.
헬킨 산맥으로 향하며 디아나가 의식을 치를 것이라는 것과 가디언과 어둠의 정령에 관한 이야기들을 들었다.
하지만 대공은 그 모든 이야기들보다 디아나가 어둠의 정령과 맞서야 한다는 그 사실만이 머릿속에 선명히 남았다.
후작가로 아이를 보내고 그는 죽을 만큼 힘들었지만 그래도 디아나의 마음은 편해질 것이라고 한편으론 안도하고 있었다.
한데, 갑자기 가디언이 깨어났다니.
황족으로서, 신성히 여겨야 하는 일이겠지만 디아나의 아버지로선 청천벽력과도 같은 말이었다.
“그래, 가디언은 깨어났다. 네 심정을 모르지 않는다. 나 역시 어둠의 정령과 맞서야 할 디아나를 생각하면 잠이 오질 않으니까. 하지만 어쩌겠느냐. 이미 벌어진 일이니 우리가 할 수 있는 방법으로 디아나를 도와야 한다.”
“네, 알고 있습니다. 디아나가 위험해지는 것을 보고만 있진 않을 것입니다. 제힘으로 어둠의 정령을 소멸할 순 없겠지만 목숨을 바쳐서라도 디아나를 지킬 것입니다.”
“모두가 그럴 것이다. 그보다 어둠의 정령의 숙주가 어디 있는지부터 찾아야 할 터인데……. 당연히 그 아이겠지?”
황제의 물음에 대공은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어둠의 정령이 선택한 사람은 세이아가 맞을 것입니다. 여태까지 기록된 어둠술사와는 완전히 다른, 디아나처럼 이례적인 일이었으니까요.”
“세이아의 행방은 아직 모르는 것이냐?”
“확실하진 않지만 의심 가는 곳이 있습니다. 제국 동쪽 끝에 위치한 델라이트 영지에서 사람들 수십이 이유도 없이 죽어 나갔다고 합니다. 한데 그 시신의 상태가 피 한 방울 흘린 상처도 없고 꼭 생기를 빨아먹힌 것처럼 삐쩍 말라 있어 몹시 괴이하다고 합니다.”
“흠……”
“어둠술사와 관련된 옛 서적에 인간의 생기를 빨아먹으며 힘을 키웠단 이야기가 있지 않았습니까.”
“그렇긴 하지……. 한데 델라이트 영지는 국경선의 끝이라 척박하고 범죄와 약탈이 잦은 곳이 아니더냐. 그곳은 예전부터 괴이한 소문이 많은 곳이었다.”
“그래서 확실히 확인하기 위해 제가 직접 가 보려 합니다.”
“네가 직접?”
“네, 정말 어둠술사와 관련이 있는 것이라면 시신에 흔적이 남아 있을 겁니다. 작은 단서라도 찾아야 합니다. 그래야 어둠의 정령이 지금 어떻게 움직이는 것인지 예측할 수 있으니까요.”
델라이트 영지는 산적들의 출몰이 잦은 곳으로 치안이 몹시 좋지 않았다.
대공의 검술 실력을 못 믿는 것은 아니었지만 몬스터들을 상대하고 돌아오자마자 또 위험한 곳으로 간다니 마음이 좋지 않았다.
대공은 자신의 수척한 얼굴을 보는 황제의 시선을 느꼈다.
“전 괜찮습니다, 폐하. 10년을 전장에서 보냈습니다. 이 정도의 일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 알겠다. 그럼 네가 직접 가서 확인하거라. 조용히 움직이거라. 가디언이 깨어났단 말과 어둠의 봉인이 풀렸다는 소문이 돌면 제국에 혼란만 가중될 테니까.”
“안 그래도 소문을 막기 위해 폐하께 건의드릴 것이 있습니다.”
“건의?”
“네, 소문을 막기 위해선 이목을 끌 수 있는 일이 필요합니다. 해서 잠시 미루셨던 검술 대회를 개최하시는 것이 좋을 거 같습니다.”
“검술 대회라면…… 제국의 큰 행사이니 귀족들의 이목을 끌 수 있겠구나.”
“디아나의 일로 황실을 주시하고 있는 신문사의 이목도 돌릴 수 있을 것입니다.”
“좋은 방법이구나. 검술 대회를 작년보다 더 크게 개최해야겠다. 그 자리가 디아나가 귀족들에게 처음으로 모습을 내보이는 자리가 되기도 할 테니까.”
만족스러운 듯 미소를 그린 황제의 얼굴을 보던 대공은 점점 밝아 오는 하늘을 보다 느리게 입술을 뗐다.
“폐하, 디아나는 지금 태양궁에 있습니까?”
“그래. 후작이 현자의 탑으로 가며 디아나를 당분간 황성에서 보살펴 달라 했다. 날이 밝는 대로 에메랄드 궁을 준비시킬 것이다. 그때까진 태양궁에 있을 것이고…… 보고 싶으냐.”
“…….”
대공은 차마 아니라고 말하지 못했다. 그렇다고 보고 싶다 말하기엔 염치가 없어 결국 입을 다물었다.
“델라이트 영지로 떠나면 돌아오는 시간이 걸릴 테니…… 디아나가 일어나면 한번 물어는 보는 것이…….”
대공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닙니다. 디아나는 아직 제가 불편할 것입니다. 괜한 부담을 주고 싶진 않습니다……. 아직 자고 있을 테니 조용히 괜찮은지만 확인하고 가겠습니다. 자는 얼굴이라도 무사하단 걸 봐야 마음이 놓일 거 같아서요.”
“그럼 그리하거라. 그리고 디아나 걱정은 말거라. 내 자식들보다 디아나를 더 챙길 테니까.”
“감사합니다, 폐하. 그럼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대공은 황제에게 감사 인사를 올리고 곧장 집무실을 나섰다.
* * *
달칵-.
고요한 방 안에 문이 열리는 작은 소리가 울렸다. 사람에겐 작디작은 소리였지만 기민한 청각을 가지고 있는 몬스터에겐 큰 소리였다.
디아나의 곁에서 잠을 청하고 있던 유네스는 벌떡 일어나 문을 향해 푸른 눈동자를 날카롭게 빛냈다.
“유네스, 나란다.”
나직한 목소리를 들은 유네스는 바로 경계 태세를 풀며 대공을 향해 다가오려 했다.
대공은 유네스의 움직임에 디아나가 깰까, 황급히 입술 위로 손가락을 댔다.
영특한 유네스는 조용히 해 달란 대공의 뜻을 알아차린 듯 푸른 눈을 느리게 깜박이다 이내 디아나의 옆에 다시 누웠다.
잠시 걸음을 멈췄던 대공은 천천히 침대 머리맡으로 다가갔다.
“음…….”
“디아나…….”
대공은 평온한 얼굴로 잠든 디아나를 보며 작게 이름을 속삭였다.
정령의 의식을 치렀다는 말에 헬킨 산맥으로 떠나면서도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가디언이 깨어나는 건 단 한 번도 없었던 일이었기에 디아나의 몸에 무리가 갈지 안 갈지 알 수 없었다.
혹여 가디언이 깨어나며 디아나에게 해가 가는 건 아닐까, 몬스터를 상대할 때에도 머릿속은 온통 디아나 생각뿐이었다.
“……상한 곳은 없는 거 같군.”
정말 다행히도 디아나는 크게 다치거나 아픈 곳은 없어 보였다.
평온히 눈을 감은 아이의 얼굴엔 근심이 없어 보였고 발그레 물든 통통한 볼살은 딱 그 나이대 아이처럼 건강해 보였다.
대공가에 있을 때보다 얼굴이 편해 보여 다행이다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론 마음이 무거웠다.
앞으로도 이렇게 쭉 행복한 모습으로 자라 주면 좋을 텐데.
어둠의 정령과는 아무런 상관없이 말이다.
하지만 이미 시작된 운명의 수레바퀴를 되돌릴 방법은 없다.
되돌릴 순 없어도 적어도 너를 지킬 수는 있어야겠지.
몇 번이고 놓치고 만 아이를 이번만큼은 꼭 자신이 지킬 것이다.
“디아나, 아무 걱정 말고 좋은 꿈만 꾸렴.”
들리지 않을 작은 속삭임이 허공으로 흩어지고 대공은 동이 트는 하늘에 이윽고 몸을 돌렸다.
* * *
푸른 여명이 짙게 깔린 방 안, 색이 옅은 붉은 머리칼을 틀어 올린 여자가 신경질적으로 다 읽은 편지지를 내동댕이쳤다.
“아악! 왜, 대체 왜 내 뜻대로 되는 일이 하나도 없는 거야!”
여자는 날카롭게 소리를 지르며 탁상 위에 놓여 있던 화분을 벽에 던졌다.
쨍그랑-!
고요한 새벽을 울리는 서슬 퍼런 소리가 방 안을 크게 울렸다.
하지만 파공음보다도 여자의 진저색 눈동자가 더욱 살벌하게 번뜩였다.
가문에 이혼하겠단 서신을 보냈지만 돌아온 답신은 귀책사유가 자신에게 있으니 도와줄 수 없단 것이었다.
전부 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자신을 외면한 가문도, 겨우 백작위밖에 가지지 못하는 한심한 자신의 남편도.
이를 까득 깨문 그때, 굳게 닫혀 있던 방문이 조심스럽게 열리며 분홍 머리칼을 가진 작은 남자아이가 머리를 내밀었다.
“어머니…….”
그녀와 똑 닮은 진저색 눈동자를 가진 아이.
“데이빗…….”
“어머니, 다치신 곳은 없으…….”
짝-!
데이빗은 깨진 화병을 보고 놀란 듯 제 어미에게 다가가 손을 뻗었지만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매몰차게 거부당했다.
어찌나 세게 맞았는지 데이빗의 뺨이 붉게 달아올랐지만 데이빗은 소리 내어 울지 않았다.
어머니에게서 진득한 술 냄새가 나고 있었기 때문에.
술을 먹은 날엔 꼭 손찌검을 했었다.
‘술이 깨시면 날 보듬어 주실 거야.’
데이빗은 늘 그랬듯 제 어미가 술이 깰 때까지 숨을 죽였다.
조용히 몸을 웅크리는 데이빗에게 여자가 악을 질렀다.
“너, 너만 아니었어도 내가 이딴 가문과 결혼하는 일은 없었어. 너만 안 가졌으면 난 지금보다 훨씬 좋은 삶을 살고 있었을 거라고! 다 네가 원흉이야! 너 때문에 내 인생이 바닥을 친 거야!”
여자는 화를 참을 수 없다는 듯 데이빗을 세게 밀쳤다.
“어머니, 잘못했어요…….”
데이빗이 잘못했다 했지만 그녀에게는 그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듯했다.
“한심한 네 아비도, 내 말은 귓등으로도 안 듣는 내 아비도 다 미치도록 다 싫어. 도움도 안 되는 인간들 다 죽여 버렸으면……!”
엄마의 진저색 눈동자가 살벌하게 번뜩인 순간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도와줄까?”
데이빗은 고개를 들어 목소리가 들린 곳을 보았다.
아침 하늘이 밝아 오는 창밖 너머, 테라스 난간에 앉아 있는 작은 소녀.
누군가 들어오는 기척은 전혀 없었다.
굳게 닫힌 문 또한 열린 적이 없었다.
그렇다면 저 아이는 어떻게 3층 높이의 테라스에 온 것일까.
데이빗이 갈색 머리칼의 소녀를 멍하니 보던 그때, 여자가 당황스런 목소리로 외쳤다.
“뭐, 뭐야. 넌 누구야? 어떻게 들어온 것이냐?!”
“네가 불렀으니까 왔지.”
소녀는 여자의 높은 목소리에도 전혀 두렵지 않다는 듯 여유로운 얼굴로 갈색 머리카락을 손끝으로 돌돌 말고 있었다.
“내가 언제 널……. 밖에 아무도 없어?! 침입자가 있다!”
여자는 종을 울리며 하인들을 불렀지만 아무도 문을 박차고 들어오지 않았다.
그사이 소녀는 테라스 난간에서 내려와 천천히 방 안으로 들어왔다.
소녀의 시선이 주저앉아 있는 데이빗을 향했다.
소녀와 눈이 마주친 데이빗은 사람 같지 않은 붉은 눈동자에 소름이 돋아났다.
겁을 먹어 아무 말도 못하는 데이빗을 비웃은 소녀는 유유히 그를 지나쳐 여자에게로 다가갔다.
“너, 언제 이곳까지……!”
“그렇게 소리 질러 봤자 소용없어. 아무도 오지 않을 거니까. 밖에선 이 방에서 사람이 죽어 나가도 아무런 소리를 듣지 못하거든.”
“그게, 무슨…….”
나직이 말하는 소녀의 말에 여자는 난생처음으로 공포란 걸 느꼈다.
소녀의 붉은 눈동자가 요요히 빛나며 여자를 훑었다.
“그렇게 겁먹을 거 없어. 아까도 말했듯 네가 날 불렀다니까? 난 널 도와주러 온 거야.”
“……날 도와주러?”
붉은 눈빛에 홀리는 거처럼 여자의 표정이 점점 멍해지고 있었다.
“그래, 도와주러 왔어. 너의 분노를, 억울함을 내가 다 느꼈거든. 누군가를 죽이고 싶어 하는 그 마음, 그 절실함이 나를 부른 거야. 그러니 네가 나의 충실한 종이 되겠다면 난 네가 싫어하는 그 모든 것들을 없애 줄게.”
소녀의 목소리가 달콤하게 여자의 귓속을 파고들었다.
“……넌 대체…… 누구야……?”
소녀는 점점 몽롱하게 풀리는 여자의 얼굴을 보며 매끄럽게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내 이름은 세이아. 네 주인이 될 어둠의 정령이지.”
* * *
“냐-.”
유네스에게 인형을 흔들어 주던 디아나는 오늘따라 구름 한 점 없는 푸른 하늘에 시선을 빼앗겼다. 그러자 가만히 디아나를 기다리던 유네스가 결국 참지 못하고 울음소리를 냈다.
“냐아!”
“아, 미안해, 유네스. 다시 흔들어 줄게, 이거 잡아 봐.”
디아나가 인형을 살살 흔들자 유네스는 기다렸다는 듯 앞발을 휙휙 인형을 따라 움직였다.
그러다 자세를 낮추고 한 번의 도약으로 인형을 낚아챘다.
“와, 잘했어! 유네스!”
상급 몬스터인 유네스에게 인형잡기는 장난 축에도 못 드는 일이겠지만 유네스는 아직 큰 몸으로 돌아가 사냥을 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디아나는 유네스가 우울해하지 않도록 일부러 더 큰 목소리로 반응해 주었다.
“냐아-.”
디아나의 칭찬에 기분이 좋은지 유네스는 디아나의 손에 머리를 비볐다.
“잘했어, 정말 잘했어. 자, 간식.”
기다란 육포를 하나 입에 문 유네스는 쪼르르 뛰어가 소파 위에서 자리를 잡았다.
“유네스 몸이 많이 나아졌는지 확인해 봐야 할 텐데…….”
치료사를 불러야겠다고 생각하던 디아나는 대공의 모습을 떠올렸다.
디아나는 자꾸만 머릿속을 맴도는 낮은 목소리에 미간을 살짝 좁혔다.
해가 뜨기 전, 꿈결에 디아나는 대공의 목소리를 들었었다. 무어라 했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대공의 목소리를 들은 것은 선명히 기억났다.
하지만 눈을 떴을 땐 아무도 없었다.
“…… 꿈이었던 걸까.”
디아나는 마차를 타고 떠나던 대공의 뒷모습과 꿈속에서 보았던 행복한 얼굴이 겹쳐 떠올랐다.
어디로 갔던 걸까.
왠지 멀리 가는 거 같은 분위기였는데…… 내가 의식을 치른 건 알고 있을까.
자신을 지켜 주겠다며 엄마에게 맹세하던 모습은 사랑이 가득해 보였다.
대공이 대공비를, 대공녀를 얼마나 아끼고 사랑하는가에 대해선 대공가에 살 적 하녀들에게 수십 번도 더 들은 이야기였다.
그랬기에 그 모습을 보았다고 대공을 향한 원망이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날 두고 떠나지만 않았다면…….”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대공은 아버지였기 때문에 그 원망이 쉽게 풀릴 수 없었다.
아버지를 향한 애정을 바랐으니까.
“오늘 날씨가 참 좋긴 해요, 그쵸?”
상념에 빠져 있던 디아나는 피비의 목소리에 눈을 깜박였다.
“……그러게. 날씨 되게 좋다.”
“산책이라도 갈까요? 아까 시녀장님께서 말씀 전해 주셨는데, 아가씨께서 가고 싶은 곳이 있다면 황궁 어디든 허락한다고 따로 묻지 않으셔도 된다고 하셨어요.”
“정말?”
“네, 저도 듣고 좀 놀랐어요. 황궁의 법도 같은 건 잘 모르긴 하지만 그래도 모든 걸 허락한다는 그 명이 엄청난 특별 대우란 건 알겠던데요? 폐하께선 아가씨를 아주아주 많이 아끼시나 봐요.”
“음…… 그런가…….”
황제가 신경 써 주고 있단 건 디아나도 알고 있었지만 아주아주 많이 아낀다는 건 뭔가 엄청 큰 의미 같았다.
“내가 황녀도 아닌데 아주아주 아끼시진 않지 않을까? 그리고 난 폐하를 뵌 게 이번이 처음인걸.”
“근데 제가 아까 시녀들에게 들었는데 폐하께서 아가씨에게 내주신 궁이 평범한 황녀의 궁이 아니래요.”
“그럼?”
“대대로 황제 폐하께서 가장 아끼시는 황녀에게만 하사하는 궁이라고 하던데요? 황후께서 엄청 아끼시는 조카 멜리사 영애가 잠시 황궁에 머문 적이 있었을 때도 에메랄드 궁을 내준 적은 없대요. 그러니 그 의미가 엄청 큰 거라고 그랬어요.”
“……그렇게 큰 의미가 있는 곳인 줄은 몰랐어.”
“저도요. 그래도 전 아가씨께서 제일 좋은 궁을 받아서 기분은 좋아요. 황궁에서 지내시게 되셨는데 이왕이면 제일 좋은 게 좋잖아요. 우리 아가씨가 그만큼 대단하단 의미이기도 하니까요.”
피비는 자랑스럽다는 듯 어깨를 펴며 미소를 지었다.
“피비가 좋다면 나도 좋아.”
에메랄드 궁이 가지고 있는 의미는 디아나에게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하지만 피비가 저렇게 좋아하니 디아나도 그 궁이 좋아질 거 같았다.
“아흑……. 아가씨, 정말 왜 이렇게 귀여우신 거예요? 날이면 날마다 더 귀여워지시는 거 같아요.”
긴 눈매를 반달 모양으로 접으며 웃는 디아나를 보던 피비가 가슴께를 부여잡은 그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울렸다.
“영애, 시녀장입니다.”
“들어와.”
문을 열고 들어온 태양궁의 시녀장은 디아나를 향해 허리를 숙였다.
“영애, 에메랄드 궁의 준비가 다 되었습니다.”
* * *
“우와…… 예쁘다.”
황제의 궁과 황후의 궁전 중간에 위치한 에메랄드 궁전.
황제의 자식 중 가장 아끼는 황녀에게 내주었던 궁전답게 에메랄드 궁전은 황성에서 가장 화려한 외양을 가지고 있었다.
디아나는 새하얀 돌로 만들어진 궁전을 보며 감탄을 금치 못했다.
하얀 돌로 만들어진 순백의 궁전의 지붕은 크리스털로 만들어졌는지 눈이 부실 정도로 반짝이고 있었다.
거기다 벽돌 중간중간 박힌 보석들도 화려한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태양 궁전이 웅장하게 화려하다면 에메랄드 궁전은 별빛처럼 화려했다.
“진짜, 예쁘네요. 정말 고귀한 황녀님이 살 거 같은 궁전이에요.”
피비의 말에 디아나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응, 진짜 예쁘고 아름다운 황녀 저하께서 살 거 같은 궁전이야.”
“음, 아가씨와 정말 잘 어울리는 궁전이네요.”
피비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디아나는 자신의 곁으로 다가와 말하는 에드윈을 올려보았다.
“나랑 잘 어울린다고?”
“네, 아가씨가 바로 고귀하고 예쁘고 아름다운 영애시니까요. 전 이 궁전을 보자마자 딱 아가씨를 위한 궁전이구나 생각했는걸요? 안 그래, 피비?”
에드윈이 묻자 피비가 기다렸다는 듯 손뼉을 마주쳤다.
“오, 맞아요! 아가씨보다 예쁘고 아름다운 영애는 없는걸요. 이 궁은 딱 아가씨를 위한 궁전이에요!”
“예쁘고, 아름다운…….”
고개를 주억거리는 두 사람에 디아나의 볼이 부끄러움으로 붉어졌다.
쑥스러움에 품에 안은 유네스만 더 꼭 끌어안던 때 궁전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시녀가 다가왔다.
청색 머리칼을 틀어 올린 시녀는 디아나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디아나 영애, 전 황후궁의 시녀장인 비올렛 크레타라고 합니다.”
“황후 폐하의 시녀장?”
황후궁의 시녀장이면 꽤 높은 신분 아닌가.
놀란 디아나가 눈을 동그랗게 떴지만 비올렛은 차분하게 말했다.
“황후 폐하의 명으로 영애께서 에메랄드 궁에 지내시는 동안 제가 궁의 관리를 맡게 되었습니다. 혹 불편하시거나 필요하신 게 있으시다면 언제든 하녀를 통해 제게 말씀해 주십시오.”
“아, 응. 앞으로 잘 부탁해.”
“저야말로 성심을 다하겠습니다.”
비올렛은 우아한 몸짓으로 디아나에게 예를 갖추었다.
“방의 청소가 다 되어 있으니 바로 침소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에드윈 경, 폐하께서 영애의 호위 관련 문제로 할 말이 있으시다 하셨습니다. 집무실로 가시면 됩니다.”
“알겠습니다. 아가씨, 전 그럼 잠시 태양궁에 다녀오겠습니다.”
“응.”
에드윈이 떠나자 디아나는 피비와 함께 비올렛을 따랐다.
“이곳이 영애께서 지내실 침소입니다. 급히 준비하느라 커튼과 침대 이불보만 먼저 바꾸었습니다. 가구들이 마음에 드시지 않겠지만 오늘 하루만 이해해 주시면 내일 바로 새 가구들이 들어올 것입니다. 바로 준비해 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비올렛은 송구하다는 듯 고개를 숙였지만 디아나는 대체 뭐가 마음에 안 든다는 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열린 창문으로 들어오는 바람이 살살 흔드는 연녹색의 커튼과 금실이 은은하게 수놓아진 베이지색 이불, 침대 위로 예쁘게 떨어지는 레이스 캐노피, 그리고 방 안에 놓은 화장대와 소파 등의 가구들은 모두 반짝반짝 빛이 나고 화려했다.
“너무 예쁜데? 새 가구로 안 바꿔도 돼. 난 지금도 마음에 들어.”
“정말 괜찮으신가요? 전대 황녀님께서 쓰던 가구들이라…… 불편하시지 않겠습니까?”
비올렛이 눈치를 보듯 가구들을 훑었다.
하지만 디아나는 정말 괜찮았다.
“응, 괜찮아. 낡은 것도 아니고, 또 나 여기 그렇게 오래 있을 것도 아니니까.”
남이 쓰던 가구들이라 불편할 수도 있었지만 어차피 디아나의 집은 이 궁이 아니었다.
며칠만 지내다 후작가로 돌아갈 텐데 괜히 가구들까지 바꾸고 싶진 않았다.
“영애께서 괜찮으시다면…… 가구들은 그대로 두겠습니다.”
“저기 소파 옆에 푹신한 방석 같은 것만 하나 준비해 줘. 유네스가 쉴 곳이 필요하거든.”
“네, 바로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방에 더 필요하신 건 없으신가요?”
“응, 없어.”
“그렇다면 드레스 룸에 준비해 둔 것들을 보여 드리겠습니다. 이쪽으로 오시지요.”
“준비해 둔 것들?”
디아나가 고개를 갸웃하자 비올렛은 살짝 미소를 지으며 방 안에 있는 또 다른 문을 열었다.
먼저 들어가라는 듯 비올렛은 문을 잡고 서 있었다.
피비와 시선을 주고받은 디아나는 곧 드레스 룸으로 발걸음을 내디뎠다.
“우와.”
드레스 룸 안을 가득 메운 옷들을 보며 디아나가 짧은 감탄을 내뱉은 찰나 피비가 감격에 겨운 얼굴로 소리쳤다.
“어머, 너무 예뻐요! 이 옷들이 전부 아가씨의 것인 거죠?”
피비는 흥분을 숨기지 못한 얼굴로 비올렛에게 물었다.
“그렇네.”
비올렛이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제가 꿈꿨던 드레스들이 여기 다 있어요, 아가씨. 제가 이런 옷들을 아가씨한테 얼마나 입혀 보고 싶었는데…… 이게 꿈은 아니겠죠?”
피비는 황홀함에 취한 얼굴로 드레스들을 만졌다.
디아나는 이때까지 자신이 입었던 드레스들은 평범한 옷이었다는 듯 화려한 형형색색의 드레스를 보며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를 얼굴을 했다.
예쁜 옷들이란 건 부정할 수 없지만 이 수많은 옷들을 입으며 피비의 인형이 될 생각을 하니 벌써 몸이 피곤한 느낌이었기 때문이다.
“이 자주색 드레스, 이거 너무 예뻐요. 아가씨에게 찰떡처럼 어울릴 거 같은데, 그렇지 않나요?”
피비는 꺅, 감탄을 내지르며 자주색 드레스를 꺼내 들었다. 반짝이는 비즈로 꽃 모양이 수놓아진 드레스는 디아나가 이때까지 본 드레스 중 제일 아름다웠다.
“……예쁘긴…… 하다…….”
“그쵸? 아가씨에게 당장 입혀 보고 싶어요.”
피비의 번뜩이는 눈동자에 디아나는 어깨를 움찔하며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드레스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 목걸이와 팔찌, 머리핀 그리고 저쪽엔 신발과 작은 손가방들이 있습니다.”
다행이라 해야 할지, 피비는 비올렛의 말에 디아나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디아나도 비올렛을 따라 진열장으로 다가갔다.
한쪽 벽장엔 작은 손가방들이, 다른 한쪽엔 신발 그리고 양산과 부채들도 있었다.
그리고 디아나는 피비가 눈을 떼지 못하는 유리 진열장으로 다가갔다.
“다, 반짝거려.”
빛을 받아 반짝이는 보석부터 푸른 사파이어, 붉은 루비 등 온갖 보석들을 모아 놓은 듯 진열장 안의 보석들이 눈이 부셨다.
“냐아— 냐아--.”
반짝이는 빛을 좋아하는 유네스가 유리 진열장으로 앞발을 뻗었다.
“그럼 안 돼, 유네스.”
발톱을 드러내는 유네스를 끌어안은 디아나는 넋이 나간 피비를 보았다.
“피비…… 괜찮아?”
“하, 아뇨, 괜찮지 않아요, 아가씨. 다 너무 아름다워서 이제 아가씨를 치장할 때, 제 고민이 늘어나겠어요.”
진심으로 고민이라는 듯 피비는 심각한 눈빛으로 보석들을 하나하나 살피고 있었다.
왠지 앞으로 치장 시간이 더 길어질 거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디아나는 비올렛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근데 비올렛, 이것도 전 황녀님이 쓰던 것들이야? 내가 써도 되는 거야?”
디아나의 물음에 비올렛은 그게 무슨 말이냐는 듯 눈을 크게 뜨며 답했다.
“영애, 드레스 룸 안의 모든 것들은 디아나 영애만을 위해 황후마마께서 준비해 주신 것들입니다. 감히 어떻게 영애께 다른 분들이 쓰던 옷과 보석들을 내놓겠습니까. 가구들은 들어오는 시간이 걸려 어쩔 수 없었던 것이고 옷과 보석, 신발, 드레스 룸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은 오늘 새벽 살롱과 상단에서 들어온 새 상품들입니다.”
“이 많은 것들을 다?”
“많다니요, 급히 준비하느라 오히려 신경을 쓰지 못해 송구할 따름입니다. 내일과 모레에도 더 들어올 예정입니다.”
디아나는 당황스러웠지만 비올렛과 피비는 당연하다는 듯한 얼굴이었다.
“그, 혹시 그럼 제가 몇 개 추가 주문할 수도 있나요?”
“당연히 해도 되네. 영애께 필요한 것들이 있다면 내게 말하게.”
“아, 아까 신발들을 살펴보니 색들이 너무 한정적인 거 같아서요. 좀 더 다양한 색상으로 가져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알겠네. 상단에 그리 전하도록 하지. 영애께선 특별히 생각하신 것들이 없으신가요?”
“난…… 없어. 지금도 괜찮아.”
“알겠습니다. 그럼 필요하신 게 생기면 언제든 말씀해 주십시오. 그럼 전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응.”
비올렛은 인사를 올리곤 드레스 룸을 나갔다. 방을 완전히 나가는 소리가 들리자 디아나는 바로 유네스를 바닥으로 내려주었다.
안겨 있는 시간이 답답했던 듯 유네스는 드레스 룸 안을 뛰어다녔다.
그런 유네스를 보며 웃던 디아나는 신난 피비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피비.”
“네?”
“황후 폐하를 뵈러 가는 게 좋겠지? 이렇게 많은 걸 준비해 주셨으니까.”
“그렇죠, 누군가에게 큰 선물을 받았다면 고맙다고 인사를 전하는 게 예의 바른 행동이니까요.”
“그럼 곧 점심 드실 시간이니까, 지금 가는 게 좋을 거 같아. 비올렛에게 황후 폐하께 인사드리러 가고 싶다고 전해 줘.”
“네, 그럴게요. 근데 아가씨.”
“응?”
“이왕 감사 인사를 전하는 거니…… 황후 폐하께서 선물해 주신 옷을 입고 가는 게 좋지 않을까요?”
“아, 그렇겠다. 그럴게.”
“그럼 비올렛 님께 말씀 전하고 바로 와서 치장을 준비해 드릴게요.”
“응…… 으응?”
순진하게 답하던 디아나는 씨익, 의미심장한 웃음을 짓는 피비의 모습에 뭔가 잘못됨을 느꼈다.
하지만 이미 늦은 듯 피비는 디아나가 무어라 말하기도 전에 쌩하니 드레스 룸을 나갔다.
“아…… 치장…….”
“냐아-.”
디아나가 드레스 룸 안에 걸린 수십 벌의 옷들을 보며 작은 한숨을 내쉬자 유네스가 힘내라는 듯 발목에 머리를 비볐다.
* * *
챙-!
제1황자를 모시는 황궁 2기사단의 연무장.
두 개의 검이 부딪히는 타격음이 넓은 연무장을 울렸다.
“실력이 많이 느셨습니다, 저하. 요즘 검술 수업에 열의가 느껴지시는군요.”
“강해져야 하는 이유가 생겼거든.”
“네?”
에키온의 말에 기사단장이 의아한 얼굴을 했다.
빈틈을 본 에키온은 살짝 밀리는 검에 더욱 힘을 주었다. 기사단장의 검이 밀리고 에키온은 틈을 놓치지 않고 검을 단장의 옆구리를 향해 찔러 넣었다.
챙그랑-!
하지만 아직 기사단장을 이기는 것은 무리였는지 손목을 기습당한 에키온은 검을 놓쳤다.
“윽.”
“더 빠르고 강하게 찔러 넣으셔야 합니다. 속도를 더욱 기르셔야겠군요, 저하.”
“검을 찌르는 속도에 바람을 살짝 더하면 속도가 더 빨랐을 텐데 말이야.”
“저하, 정령술은 한계가 있지 않습니까. 검술만으로도 적을 물리칠 수 있는 실력을 갖추셔야 합니다.”
단장의 단호한 말에 에키온은 쩝, 입맛을 다시며 바닥에 떨어진 검을 향해 손을 뻗었다.
바람이 검을 감싸고 곧 바람에 딸려온 검이 에키온의 손에 안착했다.
“정령술을…….”
“정령술을 그리 함부로 쓰시면 안됩니다, 라고 말하려 했지? 검을 다루는 일이 어찌 가벼운 일이겠습니까, 포트웰. 난 검에 예우를 다한 거라고.”
근엄한 척 말하는 에키온의 능글맞음에 기사단장은 피식, 싱거운 웃음을 흘렸다. 그리고 곧 연무장으로 들어오는 익숙한 사람을 보았다.
“저하, 오도어 왕자님께서 오셨습니다. 그럼 전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수고했어, 포트웰.”
“저하, 물을 좀 드시지요.”
기사단장이 연무장을 나가자 시종이 그에게 하얀 수건과 얼음물을 내밀었다.
땀을 대충 닦고 물을 마신 에키온은 그의 곁으로 다가온 카이루스를 힐긋 보았다.
“오늘은 나 안 피하나 봐?”
“피하다니? 난 너 피한 적 없는데.”
카이루스가 태연한 얼굴로 어깨를 으쓱이자 에키온이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피한 적이 없으세요? 요새 계속 내가 디아나 이야기만 꺼내면 갑자기 할 일이 생각났다고 가 버렸잖아.”
카이루스가 대체 디아나를 어떻게 알고 있는 건지 그리고 디아나에게 보이는 모습들이 얼마큼의 진심인 건지, 에키온은 그를 만날 때마다 추궁하고 있었다.
어제만 해도 레귤러스의 궁에서 디아나에게 수작을 부리고 있는 카이루스를 발견하고 데리고 나왔지만 카이루스는 능구렁이처럼 상황을 빠져나갔다.
“흠. 디아나 영애에 대해 내가 다 말하면 네가 어떤 말을 할 줄 짐작이 되니까 피한 거지.”
“짐작이 된다니? 넌 아직 디아나와 어떻게 알게 된 사이인지 말도 안 했어. 그리고 네 마음이 어떤지도 정확히 말 안 했고. 근데 내가 어떤 말을 할지 네가 어떻게 알아.”
“내가 영애를 어떻게 만났는지, 영애에게 진심인지 말하면 디아나 영애 곁에 다가가도록 허락해 줄 거냐?”
“아니, 절대 안 돼.”
에키온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부정했다. 카이루스는 맹수가 제 새끼를 지키듯 으르렁거리는 에키온을 보며 피식, 싱거운 웃음을 흘렸다.
“봐, 이미 답이 나와 있잖아.”
“당연하지! 디아나는 이제 겨우 10살이라고! 그런 애한테 흑심을 품은 늙은 널 내가 어떻게 허락해?! 미쳤어?”
“늙었다니…… 너랑 나 동갑인 건 알지?”
“……알아! 그러니까 넌 디아나보다 무려 5살이나 많아. 늙었어! 더 어리고 멋진 영식들이 자라날 텐데, 넌 나이부터 탈락이야.”
에키온은 잠시 멈칫했지만 단호히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을 이었다.
“그러니 내 예쁜 사촌 동생에게 흑심 품지 마라.”
“흑심이라니…… 난 영애에게 이상한 마음 같은 거 품은 적 없어. 단지 내게 새로운 삶의 의미를 줬으니 나도 디아나 영애를 지키고 싶은 거야.”
“디아나 때문에 네가 갑자기 이렇게 변한 거라고?”
에키온의 금빛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
제국에서 항상 무료히 시간만 보내던 카이루스는 요새 들어 정말 많이 달라졌다.
놓았던 검을 다시 잡았고, 신학 공부는 물론 시간 날 때마다 도서관에서 군주론까지 공부하고 있었으니까.
죽은 듯이 지내던 그가 달라진 게 정말 디아나 때문일 줄이야.
세상 무심한 카이루스가 디아나에게만은 남다른 모습을 보였을 때 뭔가 범상치 않다는 건 느끼긴 했지만 진짜일 줄은 몰랐다.
대체 언제…… 디아나와 그런 사이가 된 거지?
흔들리는 에키온의 표정을 보며 카이루스는 차분히 답했다.
“그래. 영애에게 큰 선물을 받은 적이 있어.”
“그게 언제인데? 너랑 디아나가 딱히 만날 접점이 없었잖아.”
카이루스는 어서 말하라는 에키온의 얼굴을 보며 망설였다. 그리고 이내 짧은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가짜 대공녀가 처음 황궁으로 왔던 날, 혼자 황궁 밖으로 나갔다가 위험에 처했던 디아나 영애를 만났었어.”
“아…… 그날.”
에키온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디아나를 어떻게 만난 것이냐고 묻는 에키온의 추궁을 피했던 건 가짜 대공녀 때문도 있었다.
가짜 대공녀 사건은 황족들에게 큰 충격을 준 일이었다. 특히 세이아를 아꼈던 에키온은 말은 안 했지만 디아나에게 죄책감을 느끼고 있는 거 같았다.
에키온의 가라앉은 분위기에 카이루스가 무어라 입을 열려던 찰나 그가 입을 열었다.
“그날이었으면…… 꽤 시간이 지난 거잖아? 그럼 너 예전에 갑자기 대공저에 같이 갔던 거랑 피크닉 따라갔던 것도 다 디아나 보려고 그런 거였어?”
“……아니라곤 못하겠네.”
“와…….”
시선을 살짝 피하는 카이루스의 모습에 에키온은 충격을 받고 입을 벌렸다.
하긴 돌이켜 보면 이상했다.
카이루스가 레귤러스를 아끼긴 했지만 귀찮은 일들을 사서 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리고 세이아의 이름도 잘 외우지 못했던 놈이 대공저에 따라갔던 것도 카이루스답지 않은 일이었다.
그땐 디아나의 존재를 생각지 못해 넘어갔지만 돌이켜보니 놀랍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디아나를 생각하는 카이루스의 마음이 진심이란 걸 알 수 있었다.
흑심이라 놀리긴 했지만 카이루스가 그럴 리 없다는 건 에키온이 제일 잘 알았다.
설마설마했는데.
“물론 그렇다고 허락할 순 없지…….”
“뭐라고? 잘 안 들려.”
에키온의 작은 중얼거림을 듣지 못한 카이루스가 미간을 좁혔다.
말해 줄 마음이 없는 에키온은 어깨를 으쓱였다.
“안 들어도 되는 말이야. 그보다 카이, 너 오늘은 나 피할 마음 없는 거지?”
“없어. 너 연무장에 있는 거 알고 온 거니까.”
“그럼 오랜만에 나랑 대련이나 하자.”
“그래, 뭐 그러지.”
피식, 싱거운 웃음을 지은 카이루스가 목검이 있는 곳으로 향하려던 그때, 날카로운 바람이 그의 앞을 막았다.
“에키온?”
이게 뭐 하는 거냔 눈빛에 에키온은 매끄럽게 입꼬리를 올리며 카이루스에게 진검을 내밀었다.
“목검 말고 진검으로, 힘의 제한 없이 실전처럼 붙는 거야.”
단순한 목검으로 하는 대련이 아닌 정령술을 더한 진짜 검술을 쓰겠다는 말이었다.
이채가 서린 에키온의 금빛 눈동자를 마주하던 카이루스는 이윽고 그가 건넨 검을 잡았다.
“좋아.”
* * *
황후궁의 정원.
황후는 테이블에 마주 앉은 디아나를 다정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식사는 입에 맞았니?”
“네, 너무 맛있었어요.”
디아나의 밝은 얼굴에 황후의 입가에도 은은한 미소가 퍼졌다.
“급히 준비하느라고 네 입맛에 맞지 않으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다행이다.”
“아니에요, 정말 맛있어요. 그리고 이 타르트도 너무 좋아요.”
디아나는 사과 타르트를 보며 미소를 그렸다.
“네가 사과를 특히 좋아한다는 것을 들었단다.”
“할아버지께서 알려 주신 건가요?”
“……그래, 그랬지.”
어딘지 어색한 미소를 짓던 황후는 고개를 갸웃하는 디아나를 보며 눈을 반짝였다.
“그보다 디아나, 오늘 정말 사랑스럽구나. 머리 장식도 그렇고, 드레스도 그렇고 전부 너무 잘 어울려.”
가슴팍에 큰 리본이 달린 하늘색 원피스는 은은한 비즈가 박혀 반짝반짝 빛이 났고 양 갈래 머리는 사파이어 핀으로 고정되어 있었다.
물의 요정 같은 디아나의 모습은 황후궁에 도착했을 때부터 황후와 시녀들의 감탄을 자아냈다.
디아나는 황후와 시녀들의 반짝이는 눈빛을 느끼곤 부끄러워 얼굴을 살짝 붉혔다.
“……황후 폐하께서 신경 써 주신 덕분이에요, 감사합니다.”
“어머나.”
디아나는 발그레한 얼굴로 황후에게 미소를 지었다.
심장이 쿵, 하는 사랑스러움에 디아나를 꼭 끌어안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충동을 가까스로 참은 황후는 짙은 미소를 지었다.
“옷은 마음에 들었니? 상단에 일러 최상품으로만 준비하라 했지만 급히 준비하느라 맞춤복이 아니라서 미안했단다.”
“다 마음에 들어요. 전 원래 맞춤복을 입지 않아서 괜찮아요.”
아무렇지 않은 디아나의 말에 미소를 그리고 있던 황후의 입가가 파르르 흔들렸다.
귀족, 특히 신분이 위로 올라갈수록 기성복이 아닌 맞춤 드레스를 입었기 때문이다.
한데 맞춤복을 입지 않는다니.
“……남자들이란…….”
아직도 기본적인 것들을 챙겨 주지 않는 대공과 후작의 무심함을 속으로 욕한 황후는 의아한 표정인 디아나를 보며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기성복도 예쁘긴 하지만 맞춤 드레스는 더 예쁘단다. 그리고 디아나 너만을 위해 만들어진 옷이란 가치가 있지. 황궁에서 지내는 동안 살롱의 디자이너들을 불러 맞춤복을 만들어야겠구나.”
“네…… 네?”
별생각 없이 답하던 디아나는 눈을 크게 떴지만 황후는 아주 기쁜 얼굴로 시녀에게 명했다.
“헤일리, 수도의 유명 살롱 디자이너들에게 전부 방문 요청을 넣으렴.”
“아…… 전 정말 괜찮은데…….”
“네, 황후 폐하.”
디아나는 피비와 같은 황후의 눈빛에 황급히 입을 열었지만 이미 늦은 듯 미소를 지은 시녀가 종종걸음으로 화원을 빠져나갔다.
자신 빼고 다 신난 듯한 주변의 분위기에 왠지 등골이 서늘해지던 찰나 익숙한 목소리가 화원을 울렸다.
“어머니, 저 왔어요!”
“레귤러스, 어서 오렴,”
황후의 말에 디아나는 고개를 돌렸다.
“디아나! 여기 있었네?”
“황자 저하를…….”
디아나가 일어나려 하자 레귤러스가 손을 저었다.
“인사는 됐어. 우리 사이가 멀어 보이잖아.”
“레귤러스, 이리 와 앉으렴.”
“네, 어머니.”
황후의 옆자리에 앉은 레귤러스는 디아나를 빤히 보다 이내 감탄사를 내뱉었다.
“우와, 디아나 오늘 되게 예쁘다. 꼭 동화 속에 나오는 요정 같아.”
레귤러스는 금빛 눈동자를 빛내며 순수하게 감탄했다. 처음 레귤러스를 만났던 그날, 디아나의 힘을 보고 놀라던 눈빛과 똑같았다.
“칭찬 감사합니다, 저하.”
쑥스러움에 귀가 새빨개졌지만 디아나는 레귤러스의 칭찬이 기분 좋아 옅은 미소를 지었다.
“레귤러스, 근데 이 시간에 여긴 어쩐 일이니? 지금쯤이면 예절 수업이 있는 시간 아니니?”
“아, 그게 비스틴 남작 부인이 집안에 일이 생겼다고 오늘 수업을 취소했어요. 그래서 시간도 남았고…… 어머니께 디아나에게 놀러 가도 될지 허락 맡으러 들렀어요.”
황자의 말을 들은 황후의 눈빛이 황자의 시종을 향했다.
“진짜예요, 어머니.”
레귤러스는 황후가 자신의 말이 진짜인지 시종에게 확인하자 뾰로통한 얼굴을 했다.
황후는 불만 가득한 레귤러스의 볼을 톡 두드리며 미소를 지었다.
“그래, 그래, 알았다. 의심하지 않을 테니 표정 풀렴. 그보다 예절 수업이 취소됐으면 검술 수업을 앞당기면 되지 않니? 안 그래도 벌써 며칠이나 바쁘단 핑계로 검술 수업을 빼먹고 있지 않니.”
검술 수업을 제일 재미없어하는 레귤러스는 눈을 도르륵 굴렸다.
“아…… 검술 수업은…… 그것도 중요하지만 디아나가 심심해할 거 같아서요. 황궁에 적응도 잘 안 될 텐데, 제가 놀아 줘야죠!”
그럴싸한 핑계를 찾은 레귤러스가 밝게 외쳤다.
황후는 그런 레귤러스를 묘한 눈빛으로 보다 디아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디아나, 레귤러스와 함께 놀고 싶니?”
“디아나, 우리 같이 놀기로 했었잖아. 헤헤…….”
레귤러스는 황후의 눈치를 보며 디아나에게 조심스럽게 말했다. 마치 구해 달라는 듯한 작은 강아지 같은 모습에 차마 외면할 수 없었다.
쿡, 작게 웃은 디아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같이 놀기로 했었어요, 황후 폐하.”
“흠, 그렇구나. 디아나, 2황자 궁에서만 노는 건 재미가 없을 테니 이번엔 야외에서 노는 건 어떠니?”
“네?”
“예를 들면 기사들의 연무장에서 우리 레귤러스의 검술 대련을 구경한다든가…… 오, 그래, 너의 기사와 함께 말이다.”
순간 이해하지 못한 디아나에게 황후가 눈을 찡긋했다. 그녀의 속내를 알아차린 디아나는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검술 대련이라니, 재밌을 거 같아요.”
“아냐, 디아나 정말 재미없어.”
레귤러스는 마음과 다르게 흘러가는 상황에 당황을 숨기지 못했지만 황후는 사르르 부드러운 눈웃음을 지었다.
“어머, 디아나가 그리 보고 싶다니. 레귤러스, 오늘 검술 수업을 열심히 받는 모습을 꼭 보여 주렴.”
“아니, 갑자기 왜……. 디아나, 우리 정원에서 놀자. 새로운 식물이 들어왔어. 그게 더 재밌을 거야.”
“음…… 전 저하의 검술 수련을 보는 게 더 재밌을 거 같아요. 한 번도 대련하는 걸 본 적이 없거든요.”
“……정말 한 번도 본 적 없어?”
“네, 없어요.”
황후를 살짝 도와주고 있는 것도 맞지만 진짜로 검술 대련을 보고 싶기도 했고 기사들의 연무장이 어떤지 궁금하기도 했다.
디아나의 반짝이는 눈빛에 레귤러스는 더 이상 싫다고 할 수 없는지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별거 없는데…… 디아나 네가 보고 싶다면 가야지. 지금 바로 가자. 지금 가면 아마…… 형님의 검술 대련도 볼 수 있을 거야. 어머니, 디아나와 지금 일어나도 될까요?”
레귤러스의 물음에 황후는 매우 만족스러운 미소를 그렸다.
“디아나만 괜찮다면. 디아나, 후식 좀 더 먹고 가지 않아도 괜찮겠니?”
“아, 네, 전 괜찮아요.”
“그럼 나중에 새 타르트를 만들어 궁으로 보내 주마. 레귤러스, 디아나를 잘 배려하렴.”
“네, 걱정 마세요. 디아나, 가자.”
검술 수업이 싫다고 죽상을 짓던 얼굴은 어디로 갔는지 디아나와 놀러 간다는 것에 레귤러스는 신이 난 거 같았다.
“네, 저하. 그럼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황후 폐하.”
“그래, 그러렴.”
디아나는 레귤러스와 손을 잡고 화원을 나갔다. 발을 맞춰 함께 화원으로 나가는 두 아이의 뒷모습을 보던 황후는 피식, 가벼운 웃음을 흘렸다.
“저렇게 좋을까.”
“그래도 2황자 저하 덕분에 디아나 영애께서 황궁에 잘 적응하시는 거 같습니다.”
“그런가, 난 레귤러스가 디아나를 너무 괴롭히는 게 아닐까 걱정인데.”
황후는 디아나에게 연신 재잘거리며 멀어지는 레귤러스를 보며 미간을 살짝 좁혔다.
“2황자 궁의 시녀들의 말론, 저번에도 재미있게 잘 노셨다고 합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듯합니다, 황후 폐하.”
“그렇다면 다행이군. 그보다 내일 힐데르트 후작 부인을 황후궁으로 부르게.”
“그분은 귀족파의 수장인 힐데르트 후작의 부인이 아닙니까?”
“그래, 그래서 부르는 것이다. 폐하께서 곧 검술 대회를 여신다고 하셨다. 그 대회에서 디아나가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내게 될 터인데, 귀족들 사이에서 괜한 말이 나오게 할 순 없지. 쓸데없는 말 하지 못하도록 내 힐데르트 후작 부인에게 작은 선물을 해 주려 한단다.”
“네, 황후 폐하.”
지난 10년 동안은 대공에게 가로막혀 디아나를 위해 해 줄 수 있는 것이 없었지만 이젠 달랐다.
디아나를 위해 사교계를 한번 뒤집을 생각인 황후는 굳은 얼굴로 찻잔 끝을 매만졌다.
-4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