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 * *
“아가씨, 피곤하지 않으세요?”
“응, 괜찮아.”
2황자와의 티타임을 마치고 디아나는 저택으로 돌아가기 위해 마차에 올랐다.
쉬지 않고 이어지는 2황자의 말에 생각보다 더 오랜 시간을 화원에서 머물게 되었지만 힘들고 불편한 시간은 아니었다.
레귤러스 황자가 해 주는 이야기들은 꽤 재밌었으니까.
“괜찮으시다니 다행이에요. 사실 오늘 걱정 많이 했는데, 아가씨께서 많이 웃으셔서 좋았어요. 2황자님도 되게 좋으신 분 같았어요.”
“응, 좋은 분 같았어.”
황족이란 게 너무도 아쉬울 정도로 레귤러스와 보낸 시간은 재밌고 즐거웠다.
매일매일 함께 놀고 싶단 마음이 들 정도로 말이다.
하지만 2황자와 친구처럼 지낼 수 있는 건 디아나가 ‘대공녀’의 신분이기 때문이다.
즐거웠지만 마냥 기뻐할 수 없어 마음이 복잡해진 디아나는 잠든 유네스의 부드러운 털을 쓰다듬었다.
“아, 그리고…… 그 오도어 왕국의 잘생긴 왕자님도 정말 좋은 분 같던데요? 저번에 에드윈 경과 함께 싸울 때도 그렇고 오늘도 아가씨를 되게 잘 챙겨 주셨잖아요.”
디아나는 피비의 말에 생각을 멈추었다.
“……응, 그랬지.”
화원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카이루스는 자잘하게 디아나를 신경 써 주었다.
디저트로 나온 타르트도 먹기 좋게 잘라 자신의 앞에 놓아주고, 2황자 궁을 나올 땐 에스코트까지 해 주었다.
‘내게 왜 그렇게 친절한 걸까.’
그러고 보니 내게서 선물을 받았다고 했었는데, 그 선물이 대체 뭐지?
다시 떠오른 의문에 디아나가 미간을 좁히던 찰나 피비가 말했다.
“아가씨께 호감이 있으신 게 아닐까요? 사실 누가 와도 아가씨에겐 모자라겠지만 오도어 왕자님 정도면 그래도 한번 기회 정도는 드려도 될 거 같기도 하고…….”
“응? 그게 무슨 말이야?”
호감은 그렇다 쳐도, 기회라니?
디아나는 이해되지 않는 말을 하며 어딘지 흐뭇한 미소를 짓는 피비를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냥…… 먼 미래의 얘기였달까요?”
피비는 궁금증이 가득한 디아나의 얼굴을 보며 웃음 지었다.
“뭐야, 왜 피비만 알아…….”
디아나가 입술을 삐죽인 순간 갑자기 마차가 급하게 정차했다.
“앗.”
“아가씨, 괜찮으세요?”
크게 덜컹인 마차에 피비가 놀란 얼굴로 디아나의 몸을 잡았다.
“응, 괜찮아. 근데 무슨 일이지?”
순간 습격을 받았을 때가 떠올라 얼굴이 굳었지만 이곳은 황궁이었다.
마차가 출발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황궁을 벗어났을 리는 없다.
디아나가 이상하다 느끼며 마차 문을 열려 한 순간, 마차의 작은 창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가씨.”
에드윈의 부름에 피비가 창을 급히 열었다.
창을 열자마자 에드윈이 물었다.
“아가씨, 괜찮으신가요? 다치신 데는 없으신가요?”
“응, 난 괜찮아. 근데 마차가 왜 갑자기 멈춘 거야?”
“그게, 앞에 달리던 마차가 갑자기 멈춰서 부딪히지 않기 위해 저희 마차도 급정차를 하게 되었습니다.”
“아…… 그럼 별다른 일은 없는 거지?”
“네, 큰 문제는 없습니다.”
에드윈이 미소 짓던 그때,
“아이고, 죄송합니다. 저희 말들이 갑자기 발이 꼬여서……. 마차 안에 계신 분은 괜찮으신 건가요?”
“네, 대공녀님은 무사하십니다.”
“아이고, 대공가의 마차였군요.”
마부끼리 이야기를 나누는 듯, 대화 소리가 들렸다.
“아가씨께서 괜찮으시니 제가 현장 정리해서 바로 출발하도록 하겠습니다.”
“응, 에드윈.”
에드윈이 창가에서 멀어지자 피비가 다시 창을 닫았다.
“그래도 큰일이 아니라 다행이에요.”
마차가 덜컹거린 순간 피비도 겁을 먹었었는지 하얘졌던 얼굴에 이제야 혈색이 돌았다.
“그러게. 곧 출발한다니까, 괜찮을 거야.”
“정말 다치신 곳은 없으신 거죠?”
“응, 없어. 유네스도 괜찮은 거 같고.”
디아나는 혹시나 싶어 유네스를 이리저리 살폈지만 딱히 다친 곳은 없는 거 같았다.
마차가 덜컹인 찰나 바로 유네스를 안은 덕분인 듯했다.
“냐아-.”
여기저기 살피는 디아나의 손길이 불편했는지 마차 한편으로 쪼르르 도망가는 유네스를 보며 웃던 그때, 마차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울렸다.
“출발하는 게 아니었나.”
디아나가 고개를 갸웃했다.
피비가 문을 살짝 열자 에드윈이 난감하다는 얼굴로 디아나를 보았다.
“아가씨, 시아페 후작께서 잠시 뵙기를 청하십니다.”
“시아페 후작님?”
디아나는 도서관에서 만났던 은발의 노신사가 떠올랐다.
그리고 그가 누구인지도.
대공비의 아버지, 그러니까 자신의 외할아버지가 되는 분이었다.
도서관에서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 자신을 보던 후작의 복잡한 눈빛이 생각났다.
“그러고 보니…… 아가씨께서 의식이 없으실 때 후작님께서 다녀가셨었어요. 걱정을 많이 하셨는데…….”
피비의 말에 디아나가 고개를 돌렸다.
“후작님께서 날 보러 왔었어?”
“네, 아가씨께서 의식이 없으실 때 오셔서 아가씨를 살피고 가셨어요.”
“…….”
자신을 보고 갔다는 말에 기분이 이상해졌다. 대공에게 느끼는 원망이나 거북함과는 달랐다.
그렇다고 기쁜 것도 아니었다. 뭐라고 설명할 수 없는 이상한 기분이었다.
“근데…… 시아페 후작님이 지금 왜 이곳에 있지?”
디아나가 이상해 의아한 얼굴을 하자 에드윈이 설명을 덧붙였다.
“앞에 갑자기 멈춰 섰던 마차가 시아페 후작가의 마차였던 거 같습니다. 후작님께서 아가씨께서 이 마차에 타고 계신 걸 들으시고 마차에서 내리셨습니다.”
“아. 알았어.”
이미 기다리고 있는 듯해 디아나는 곧장 자리에서 일어났다.
에드윈의 손을 잡으며 마차에서 내리자 마차 가까이 서 있는 후작의 모습이 보였다.
디아나를 본 후작이 먼저 다가왔다.
“……시아페 후작님을 뵙니다.”
디아나는 시아페 후작에게 예를 갖추었다. 그가 외할아버지라는 것은 알고 있지만 갑자기 친근한 호칭으로 부를 수는 없었다.
두 번 만나긴 했지만 그땐…… 모든 게 밝혀지기 전이었으니까.
“내가…… 이름으로 불러도 되겠느냐. 네가 불편하다면 격식을 차려 부르마.”
디아나는 살짝 떨리는 보랏빛 눈동자를 바라보다 천천히 입술을 움직였다.
“……이름으로 부르셔도 돼요.”
“허락해 줘 고맙구나, 디아나.”
후작은 슬픔이 가득한 눈빛으로 옅은 미소를 지었다.
“이렇게 갑자기 불러내어 미안하다. 네가 깨어났단 소식은 들었는데 아직 널 보지 못해 걱정스러웠던 마음이 마차에 네가 있단 걸 알자 조바심으로 바뀌어 버렸단다. 몸은 괜찮은 것이냐.”
“네…… 괜찮아요, 걱정……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뒤늦은 걱정이라 미안할 따름이지. 디아나.”
“네?”
자신을 부른 후작은 바로 말하지 않고 망설이듯 입술을 달싹였다.
‘왜 그러시지?’
침묵이 길어질 때쯤, 후작이 입을 열었다.
“……괜찮다면 내게 잠시만 시간을 주지 않겠니?”
“시간이요?”
“너와 이야기를 나눠 보고 싶단다. 물론 강요는 절대 아니니 네가 불편하다면 돌아가도 괜찮단다. 부담가지지 말라 하고 싶지만 이런 얘기 자체가 부담스럽겠구나, 미안하구나.”
후작은 진심으로 미안한지 머쓱한 웃음을 지었다. 한마디, 한마디가 조심스러운 후작을 보던 디아나는 짧은 고민 끝에 답했다.
“……좋아요, 후작님.”
“고맙구나.”
긴장된 얼굴로 디아나를 바라보던 후작의 얼굴에 마침내 미소가 서렸다.
* * *
“아가씨, 도착했습니다.”
에드윈이 마차 문을 열며 말했다.
유네스를 안은 피비가 먼저 마차에서 내리고 디아나는 에드윈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마차에서 내렸다.
“예쁘다.”
디아나는 눈앞의 2층짜리 건물을 보며 감탄사를 내뱉었다.
은은한 연분홍색 벽돌 위로 장미 넝쿨이 내려와 있고 아기자기한 문양들이 새겨져 있었다.
굴뚝에서 연기가 연신 올라오는 진분홍 지붕을 보던 디아나는 건물 앞에 걸린 글자를 읽었다.
“……몽…… 블랑…… 카페?”
“여기가 바로 수도 귀족 영애들에게 가장 유명하다는 몽블랑 카페예요, 아가씨.”
디아나의 곁에 서 있던 피비가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여기 디저트도 정말 유명하고 한쪽에선 인형도 판매하는데 그 인형들도 너무 예쁘대요. 수도에 올라왔을 때 아가씨와 이곳을 꼭 와 보고 싶었는데…… 오늘 와 보게 됐네요.”
피비의 반짝거리는 눈을 보던 디아나는 후작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도착했구나, 디아나.”
꽤 빨리 먼저 도착했었는지, 후작은 카페 안에서 문을 열고 나왔다.
‘후작님이 먼저 출발하긴 했지만…… 같은 길로 온 게 아니었나.’
디아나가 의아해하던 그때, 후작은 카페를 힐긋 보곤 디아나에게 미소를 지었다.
“어린 영애들이 가장 선호하는 곳이라 이곳으로 오자 했는데, 네 마음에 들지 모르겠구나. 혹 이런 곳이 싫다면 다른 조용한 곳으로 가도 좋단다.”
이곳은 함께 이야기를 나누자 한 후작이 오자고 한 곳이었다.
대공가에서 이야기를 나눌 줄 알았는데 의외였다.
하지만 대공가보단 오히려 이런 곳이 더 편하고 좋았기에 디아나는 살짝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아니에요, 예뻐요.”
“그렇다면 다행이구나. 그럼 들어가자꾸나.”
“……네.”
디아나는 후작과 함께 꽃으로 만들어진 아치문으로 들어갔다.
딸랑, 맑은 종소리가 울리고 카페 안으로 들어서자 밖에서 은은히 퍼지던 달콤한 향이 디아나의 몸을 감쌌다.
하지만 디아나는 달콤한 향보다 텅 빈 실내에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굴뚝에서도 연신 올라왔던 연기와 달리 내부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아무도 없네요?”
디아나가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하자 후작이 허허, 웃음을 흘렸다.
“내가 잠시 이곳을 비워 달라 부탁했단다. 이곳의 주인이 내가 가르친 제자이거든.”
“아…….”
“저쪽에 앉자구나.”
디아나는 후작을 따라 각양각색 동물 인형들이 앉아 있는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피비가 매번 디아나에게 토끼처럼 귀엽다고 해서서일까, 소파에 앉혀진 귀가 긴 토끼 인형이 디아나의 시선을 끌었다.
‘유네스가 사냥놀이 하기 딱 좋아 보이네.’
“인형 좋아하니?”
디아나는 후작의 물음에 시선을 돌렸다.
“……싫어하진 않아요. 그렇다고 엄청 좋아하지도 않고요. 이건 유네스가 좋아할 거 같아서요.”
“아…… 그래, 그러고 보니 그날도 너의 곁에 유네스가 있었지.”
후작의 시선이 피비의 품에 안긴 유네스에게 향했다.
유네스는 대공비의 표우였다.
디아나는 유네스를 바라보는, 그리움이 서린 후작의 보랏빛 눈동자를 응시했다.
“유네스가, 몸이 안 좋은가 보구나. 몸이 많이 작아졌어.”
“냐아-.”
후작의 말에 답하듯 유네스가 작게 울었다. 경계심을 보이지 않는 유네스를 보던 디아나가 말했다.
“유네스를 안아 보시겠어요? 지금은 몸이 많이 좋아졌어요.”
“그래도 되겠니?”
“네, 유네스도 후작님께 가고 싶은 거 같아요.”
디아나가 피비에게 눈짓하자 피비가 후작에게 다가가 유네스를 넘겨주었다.
“냐아-.”
유네스는 가족을 오랜만에 만난 것처럼 구슬픈 울음소리를 내며 후작의 품을 파고들었다.
“……애교가 많은 것은 세월이 흘러도 여전하구나.”
후작은 미소를 지으며 유네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후작의 손길을 몇 번 받던 유네스는 곧 테이블을 넘어 디아나에게로 왔다.
“유네스가 너를 새 주인으로 받아들인 듯하구나. 다행이다.”
후작은 디아나의 곁에 자리를 잡는 유네스를 보며 미소를 그리다 말을 이었다.
“디아나, 너와 둘이서만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데 잠시만 하녀와 호위 기사를 물려주겠니?”
‘둘이서만……?’
“중요한 이야기라 그런단다.”
후작이 덧붙였다.
피비와 에드윈을 보던 디아나는 후작에게 말했다.
“피비랑…… 에드윈은 절 항상 도와줬던 사람들이에요. 중요한 이야기라면 비밀을 지켜 줄 거예요.”
두 사람은 디아나가 가장 믿고 의지하는 사람들이었다.
디아나의 신뢰가 가득한 금빛 눈동자를 보던 후작이 두 사람에게 물었다.
“정말 비밀을 지켜 줄 수 있겠는가. 누구에게도 말해선 안 되네. 대공 전하께도 말이야.”
“네.”
“…….”
피비는 바로 대답했지만 에드윈의 얼굴엔 난감함이 서렸다.
에드윈은 대공에게 충성을 맹세한 기사였으니까.
에드윈이 곤란해하는 걸 본 디아나가 에드윈은 나가 있어도 된다 말하려던 찰나 그가 입을 열었다.
“……말하지 않겠습니다.”
“에드윈……?”
디아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에드윈을 보았다.
자신이 사생아인 줄 알았을 때에도 대공 전하의 핏줄이란 이유 하나만으로 깍듯한 예의를 차렸었다.
그런데 대공 전하에게 거짓말을 하겠다니.
디아나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에드윈, 불편하면 나가 있어도 돼.”
혹시 자신 때문에 무리하는 건 싫었다.
“아뇨, 전 아가씨의 호위 기사니 한시도 떨어질 수 없습니다. 그리고 지금 제 주인은 대공 전하가 아닌 아가씨이시니 당연히 비밀을 지키는 것이 맞습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에드윈은 디아나를 보며 싱긋 미소 지었다.
대공에게 충성의 맹세를 했지만 이미 에드윈의 주인은 디아나였다.
디아나는 대공의 핏줄이고, 따지고 보면 대공가를 향한 피의 맹세를 거역하는 것은 아니니 에드윈은 이번 한번만 디아나를 택하기로 결정했다.
“……그대의 이름이 에드윈인가?”
후작이 물었다.
“네, 에드윈 드로이트입니다.”
“그렇군. 기억하겠네. 좋은 사람들을 곁에 두었구나, 디아나.”
후작은 미소를 지으며 디아나를 바라보았다
“……감사합니다.”
흠, 짧은 숨을 내쉰 후작은 진지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디아나, 대공가에 계속 지내고 싶으니?”
“……네?”
“네 진짜 신분을 찾기 전까지, 네가 대공가에서 많은 고생을 한 것을 알고 있단다. 그리고 지금도…… 갑작스럽게 변한 환경을 받아들이기 힘들겠지. 그래서 네가 대공가를 나오고 싶다면 내가 돕고 싶구나.”
후작의 말에 디아나의 얼굴이 당혹으로 물들었다.
“……왜…… 요?”
대공가를 나가기를 계속 원했고 후작의 말에 선뜻 기뻐하지 못했다.
아직 후작은 그녀에게 낯선 사람이었기 때문에.
후작이 외할아버지라는 사실은 인지하고 있었지만 아직 몇 번 만난 게 전부였다.
이렇게 마주 앉아 제대로 대화를 나누는 것은 지금이 처음이었고.
부모조차 낯선 지금 조부모가 디아나에게 익숙해지긴 힘들었다.
경계심을 내보이는 디아나를 보던 후작은 깊은 한숨을 삼켰다.
아직 타인을 경계하고 의심하기엔 디아나는 너무 어린 아이였으니까.
후작은 익숙하다는 듯 어른의 눈치를 보며 의중을 살피는 모습에서 디아나의 험난한 삶이 느껴져 마음이 무거워졌다.
후작은 아릿한 가슴에 숨을 고르며 입을 열었다.
“이제 와 외할아버지 노릇을 하겠다는 것이 염치없지만, 너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을 줄 수 있는 게 있다면 해 주고 싶구나. 물론 디아나 네가 싫다면 아무것도 하지 않을 거란다. 그저 언제든 네가 원한다면 내가 널 도와줄 수 있다는 것만 알아주렴.”
후작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그래서인지 디아나는 지금 상황이 딱히 불편하지도 울컥하지도 않았다.
후작의 진한 보랏빛 눈동자는 흔들림이 없었다. 디아나의 답을 언제까지든 줄곧 기다려 주겠다는 듯.
“……대공가를 나오면 전 어디로 가나요?”
디아나의 조심스런 물음에 피비와 에드윈의 시선이 닿는 것이 느껴졌다.
“대공가를 나온다면 나와 함께 후작저에 머물렀으면 한다만…… 네가 그것도 불편하다면 따로 저택을 하나 마련해 줄 생각이란다.”
“…….”
생각에 잠기는 듯한 아이를 보던 후작이 살짝 덧붙였다.
“물론 내 마음은 네가 성인이 될 때까지만이라도 보호자의 곁에서 지냈으면 하지만…… 말이다.”
‘그건 내 욕심이겠지.’
후작이 씁쓸한 미소를 지은 때, 디아나가 말했다.
“……저…… 혹시…… 후작저에 어머니가 지내던 곳이 아직 남아 있나요?”
“……아리엘이 지내던 방은 그대로 남아 있단다. 그곳에서 지내고 싶니?”
“……그럴 수 있다면요.”
디아나는 작게 답했다.
후작을 마주했을 때부터 계속 엄마가 떠올랐었다.
대공비는 은발에 보랏빛 눈동자라고 했으니까.
똑같은 색을 가지고 있는 후작과 많이 닮지 않았을까 하고 말이다.
그래서 후작의 제안을 들었을 때, 대공가를 떠날 수 있다면 엄마가 지냈던 곳으로 가 보고 싶어졌다.
엄마에 대해 알고 싶으니까.
“네가 그 방에서 지내 준다면 분명 아리엘도 기뻐할 거란다.”
“그럼…… 언제쯤 그곳으로 갈 수 있을까요?”
디아나는 이미 결정을 내린 듯했다.
후작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최대한 빨리 네가 올 수 있도록 하마. 조금만 기다려 다오. 그리고 네가 원한다면 너의 하녀와 기사도 함께 와도 된단다.”
후작의 말에 디아나는 피비와 에드윈을 힐긋 보았다.
마음 같아선 당장 그러겠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들이 자신과 함께 갈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순간 피비의 주홍빛 눈동자가 디아나를 바라보았다. 디아나의 눈동자가 불안으로 떨리던 찰나 피비가 결심한 얼굴로 말했다.
“아가씨, 전 아가씨가 가시는 곳이 어디든 따라갈 거예요.”
“진짜?”
디아나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눈을 크게 뜨고 되물었다. 그러자 피비는 더 놀랐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말했다.
“아가씨가 가는 곳에 제가 없다니 그건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에요. 설마 절 두고 가실 생각이셨어요?”
“피비…….”
“아가씨, 저랑 같이 가요.”
피비가 미소를 짓자 조용히 있던 에드윈이 입을 열었다.
“저도 그러겠습니다.”
“에드윈…… 무리하지 않아도 돼.”
피비는 그저 대공가의 하녀이니 일자리를 옮긴다 해도 큰 무리는 없겠지만 에드윈은 기사니 그럼 안 될 거 같았다.
“아닙니다. 전 아가씨의 호위 기사이니 당연히 아가씨가 가시는 곳으로 따라가야 합니다. 후작 각하께서 모든 일을 마무리하시면 제가 대공 전하께 청할 것이니 아가씨께선 걱정하지 마세요.”
“…….”
대공가를 떠나면 당연히 그들과 떨어질 거라고 항상 생각했는데 함께 가겠다니.
자신을 보며 부드러운 미소를 짓는 두 사람을 보자 순간 울컥했다.
“다들…… 정말 고마워.”
디아나는 뜨거워지는 눈시울과 울컥하는 마음에 코를 킁 삼켰다. 울음을 꾹 참는 모습이 안쓰러우면서도 너무 귀여워 피비의 입가가 파르르 떨렸다.
“아가씨, 울지 마세요.”
피비는 디아나의 곁으로 다가와 눈가를 손수건으로 닦아 주었다.
“후작가로 올 때까지, 그리고 앞으로도 디아나를 잘 부탁하네. 내 둘에게 꼭 보상을 하도록 하지.”
“아닙니다, 후작 각하.”
“아가씨를 모시는 일에 보답을 바란 적 없습니다, 후작 각하.”
에드윈과 피비가 빠르게 거절하자 후작의 미소가 짙어졌다.
“그대들이 더 마음에 드는군. 보상이 필요 없다니 더 큰 걸 주고 싶은 마음이야. 이제 그만 대공가로 돌아가야 할 듯하구나. 디아나, 내 곧 너를 데리러 가마.”
“……네, 기다릴게요.”
디아나는 피비의 손을 꼭 잡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 * *
“전하, 도착했습니다.”
대공은 읽고 있던 신문을 접으며 마차에서 내렸다.
로비에 서 있던 집사가 다가와 허리를 숙였다.
“오셨습니까, 전하.”
“저택엔 별일 없었나, 디아나는 도착했나?”
“네, 전하께서 오시기 좀 전에 도착하셨습니다.”
“좀 전에?”
집사의 말에 대공의 눈썹이 꿈틀 움직였다. 그도 그럴 게 이미 하늘이 어둑해졌기 때문이었다.
2황자와 이렇게 오래 있었을 리는 없을 텐데.
“네, 전하. 방금 방으로 올라가셨습니다.”
집사의 말에 대공은 로비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갔다. 그러자 정말 도착한 지 얼마 안 된 듯 계단을 올라가는 디아나의 뒷모습이 보였다.
대공은 로비에서 자신을 보고 인사하려는 하인들을 손을 들어 막았다.
괜히 자신이 온 것을 안 디아나가 다시 내려와 인사를 하게 하고 싶진 않았기 때문이다.
하인들이 숨을 죽이고 지나가자 대공은 디아나의 뒷모습을 묵묵히 바라보았다.
그러다 문득 디아나를 스쳐 지나가는 하녀들의 시선을 느꼈다. 눈에 띄게 디아나를 의식하는 불편한 시선들이.
눈치를 보는 듯, 바뀐 모습이 신기하다는 듯 대공가의 사용인들은 연신 디아나를 힐끔거리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던 대공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대공가의 사용인들은 디아나가 어릴 적부터 일해 왔던 자들이었다.
그 말은 즉 디아나를 멸시했던 자들이 대부분이었단 말이다.
미리 정리를 했어야 했는데 대외적인 일들이 너무 많아 미처 살피지 못했다.
저택을 관리하는 일은 원래 안주인이 도맡아 하는 일이었으니까.
전부 정리해야겠군.
“전하, 왜 그러십니까.”
싸늘해진 대공의 기운에 로운이 물었지만 대공은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집사는 집무실로 들어오고 로운 넌 이만 퇴근해라.”
“……네, 전하.”
달칵-.
대공은 외투를 벗고 책상 앞에 앉았다.
집사가 책상 앞으로 다가오자 대공은 집사의 얼굴을 잠시 응시했다.
하론은 황자 시절부터 그와 함께했다. 그가 대공 작위를 받으며 시종이었던 하론을 총집사로 데려온 것이었다.
그러니 그저 대공가의 사용인으로 보기엔 함께한 세월이 남달랐다.
‘하지만…… 더 이상은 무리겠지.’
총집사가 디아나를 싫어했던 것이 죄라고 하기엔 어려울 것이다. 그는 디아나가 레아의 딸인 줄로만 알았으니까.
하지만 이미 벌어진 일들에 용서를 구하는 건 디아나에게 너무 잔인한 일일 것이다.
디아나를 위해서 대공가의 사용인들을 모두 잘라 내야 한다.
하지만 그의 충성심을 알기에 대공은 무거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
“하론, 그대가 나를 위해 일한 지도 벌써 20년이 넘었군.”
“……네, 전하.”
“그대가 날 위해 최선을 다한 것을 알고 있다. 그에 나 역시 고맙게 생각하고 있지. 하지만 너무 많은 일들이 벌어져…… 대공가의 사람들을 전부 정리해야 할 거 같구나.”
총집사는 대공의 의중을 알아들은 듯 고개를 숙였다.
“……지당하신 말씀이십니다, 전하. 제가 비록 몰랐다고 하나 어린 대공녀님을 방치했던 것도 사실입니다. 총집사로서 대공가 사용인들의 멸시 어린 눈빛을 다스리지 않은 것도 사실이고요. 저의 죄가 가볍다 할 수 없습니다. 단지 하나 청이 있다면 갑자기 사용인들이 대거 그만두게 되면 대공가의 일들이 엉망이 될 것입니다. 며칠의 시간을 주신다면 빠르게 사용인들을 내보내고 괜찮은 사람들을 뽑아 놓겠습니다. 그리고 다음으로 들어올 집사에게 바로 모든 전권을 정리해 넘기겠습니다.”
“……그래, 그리하거라. 오랜 시간 날 위해 일했으니 퇴직금은 섭섭지 않게 챙겨 주마.”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전하. 그럼 물러가 보겠습니다.”
“그러거라.”
총집사가 나가고 대공은 약지에 낀 반지를 매만지며 작게 중얼거렸다.
“아리엘…… 염치없지만 오늘은 그대가 너무 보고 싶어.”
디아나와 웃으며 지낼 수 있는 날이 죽기 전까지는 올까.
대공은 어둑한 하늘보다 더 어두운 대공가의 분위기에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 * *
이른 아침, 황궁의 행정관들이 막 출근한 시각.
태양궁의 앞으로 시아페 후작가의 마차가 멈춰 섰다.
“후작 각하, 황궁에 도착했습니다.”
마부가 문을 열어 주며 말하자 후작은 손안 가득 서류들을 들고 마차에서 내렸다.
“자료들을 이리 주고 넌 이곳에서 기다리거라.”
후작은 뒤를 따르려는 보좌관에게 말했다.
“네? 하지만 다 들고 가시기엔 무거우실 텐데요…….”
“이 정도쯤은 아직 거뜬한 나이니 그리 보지 말거라. 20년은 더 멀쩡히 살 것이다.”
후작은 걱정스럽다는 듯 눈썹을 모으는 보좌관에게 피식 웃으며 서류 뭉치들을 가벼이 들었다.
후작의 품 안에 쌓인 종이들이 두꺼운 산을 이루고 있었다.
하지만 이 무거운 종이들보다 그의 마음이 더 무거웠다.
후작은 굳은 얼굴로 태양궁으로 향했다.
* * *
태양궁의 황제 집무실.
이른 아침 출근해 각종 서류와 신문을 살피고 있던 황제에게 시종장이 다가왔다.
“폐하, 시아페 후작이 알현을 청합니다.”
“시아페 후작이 지금?”
오늘 시아페 후작과 만날 예정은 없었다.
이 시간에, 그것도 이렇게 갑자기 후작이 찾아온 적은 단 한 번도 없어 황제는 미간을 깊이 좁혔다.
황제는 좋지 않은 예감에 끙, 침음을 내뱉었다.
“……디아나에 관한 일일 거 같은데.”
그리고 분명 대공에게 이로운 일은 아닐 거 같았다.
황제는 벌써 골머리가 아파, 자리에 없다고 하고 싶었지만 후작의 만남을 언제까지고 피할 순 없을 것이다.
“……들여보내거라.”
황제는 황실에 대해 우호적인 논조로 바뀐 신문들을 접으며 열린 문으로 들어오는 후작을 바라보았다.
“제국의 태양이신 황제 폐하를 뵙니다.”
후작은 황제를 향해 예를 갖추었다.
“일어나게, 후작. 그보다…… 짐이 많군. 이쪽으로 와서 앉지.”
황제는 후작의 품에 가득한 종이들에 살짝 미간을 좁혔다.
소파에 먼저 앉은 그는 후작에게 자리를 권했다.
후작은 소파에 앉으며 테이블 위로 서류 뭉치를 내려놓았다.
“……후작, 이게 다 무엇인가.”
“법적 증거 자료입니다.”
“……법적 증거 자료라니, 그게 무슨 말인가.”
후작은 굳은 얼굴로 황제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폐하, 저희 시아페 가문은 언제나 황실에 충성을 다했습니다. 한데 아시다시피 지금 시아페 가문엔 후계가 없습니다. 저는 이미 이리 나이가 들었고 이제 후계를 정할 때가 되었습니다. 하여, 고민 끝에 후계를 찾았습니다.”
황제는 좋지 않은 예감에 느리게 답했다.
“……그게 누구인가.”
“비록 제 하나뿐인 딸인 아리엘은 죽었지만 그 핏줄이 아직 남아 있지 않습니까. 폐하, 전 디아나를 후계자로서, 시아페 후작가의 가계도에 이름을 올리려 합니다.”
황제는 좋지 않았던 예감이 정확히 들어맞는 상황에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시아페 후작은 난처함으로 물드는 황제의 얼굴을 보며 말을 이었다.
“사실, 가문의 후계를 정하는 일을 사사로운 일을 이렇게 폐하께 고하는 경우는 드문 일입니다만 디아나는 황실의 핏줄을 이은 아이이기도 하기에 이렇게 폐하의 허락을 받으러 왔습니다.”
“후작…….”
황제는 난감한 눈빛을 했지만 후작은 못 본 척 태연히 말을 이었다.
“부디 제가 아이를 대공가에서 무리 없이 데려올 수 있게 폐하께서 후계자로 인정한다는 칙서를 적어 주셨으면 합니다.”
“……후작, 디아나는 아리엘의 아이이기도 하지만 대공의 하나뿐인 핏줄이기도 하네.”
비록 모든 상황이 엉켜 버렸지만 디아나가 대공의 뒤를 이었으면 하는 건 황제로서, 가족으로서 당연한 일이었다.
“네,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제가 이리 폐하께 청을 올리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후작, 그대의 마음은 백번 이해하네. 나도 자식을 키우는 아비인데 대공이 큰 잘못을 저질렀다는 걸 왜 모르겠는가. 디아나가 받았을 상처를 생각하면 잠을 편히 잘 수가 없을 지경이야.”
“…….”
“하지만 그렇다 해도 대공이 디아나의 친부가 아닌가. 디아나를 외면했지만 그 누구보다 가슴 치고 후회하고 있을 걸세. 기회를 한 번은 줘야 하지 않겠는가. 이대로 디아나를 데려가면…… 부모 자식 간의 연을 끊으란 말이 아닌가.”
황제는 참담한 얼굴로 말했다.
대공에겐 모질게 말했지만 영원히 두 부녀의 사이가 멀어지길 바란 적은 없었다.
시간이 오래 걸리더라도 조금씩 조금씩 두 사람의 사이가 회복하길 바랐다.
“폐하, 전 지금은 디아나 말곤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습니다. 대공 전하를 이해하는 것은 더더욱 하고 싶지 않고요. 대공 전하는 무려 10년 동안 아이를 방치했습니다. 전장은 허울 좋은 핑계였을 뿐이지요. 대공이 떠나지만 않았어도, 아니 10년이란 세월을 허비하지만 않았어도 이 사달이 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후작은 차오르는 분노를 삭히듯 잠시 말을 멈추었다.
그리곤 천천히 다시 입을 열었다.
“대공의 일방적인 외면으로 아무 죄도 없는 아이가 큰 상처를 받아야 했습니다. 물론 저 역시 외할아버지로서의 역할을 다하지 못했습니다만 그렇기에 이제라도 디아나의 뜻을 따라 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순간 황제의 표정이 살짝 흔들렸다.
“……디아나의 뜻이라 했나.”
“네, 디아나는 대공가를 떠날 수 있다면 떠나고 싶다, 분명 그리 말했습니다. 아이의 의사도 묻지 않고 독단적으로 결정한 일이 아니니 폐하께서도 제 청을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
황제는 입술을 가로로 다물었다. 아이가 떠나고 싶다는데 그러지 말라, 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일을 대공이 곱게 받아들일 수 있을지…….
황제는 명확한 답을 내릴 수 없는 상황에 미간을 깊이 좁혔다.
“후작.”
“네, 폐하.”
“……디아나는 지금 당연히 대공가가 싫을 걸세. 모든 진실이 밝혀진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까. 후작, 그런 상황에서 꼭 이렇게까지 해야겠나?”
“폐하, 전 차선책을 말씀드린 것입니다. 제가 디아나를 대공가에서 데려오려 했던 원래의 방식은 이리 이성적이지 않습니다.”
후작은 테이블에 놓인 서류들 위로 손을 얹고 다시 입을 열었다.
“이 모든 것들이 친권 소송에 대한 자료들입니다. 대공 전하께서 아버지로서의 역할을 다하지 못했단 증거는 이미 차고 넘칩니다. 디아나는 벌써 10살임에도 아직 대공가의 가계도에도 오르지 못했지요.”
“그건, 이제까진 디아나가 핏줄인지 몰랐고, 이제 겨우 진실이 밝혀졌는데 마음의 문을 열지도 않은 아이를 마음대로 가계도에 올릴 순 없지 않나.”
“네, 모든 상황을 이해하면 그렇지요. 하나 법정에선 그 모든 것들이 제게 유리해질 것입니다. 친권 재판이 열린다면 제가 이길 것이 분명하겠죠. 하지만 전 그 방법을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후작은 긴말에 잠시 숨을 고르고 입을 열었다.
“황가에 오래도록 충성을 맹세한 후작가가 황가를 상대로 친권 소송을 거는 것만으로도 황권에 대한 말이 나올 테고, 또 세간의 이목이 다시 디아나에게 집중되겠죠. 그 수많은 시선과 힘든 재판을 겪게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제가 원하는 것은 디아나가 조금이라도 더 나은 생활을 하는 것이니까요. 만약 폐하께서 끝까지 반대하신다면 시아페 후작가는 더 이상 황가에 충성을 맹세하지 못할 것입니다.”
피치 못할 시 소송이라도 불사하겠다는 후작의 결연함에 황제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후작, 지금 날 협박하는 것인가.”
“협박이라뇨, 그저 손녀딸이 행복하길 바라는 마음일 뿐입니다. 폐하, 폐하께서도 디아나가 잘 지내길 바라지 않습니까?”
“누구보다도 그 아이의 앞길이 행복하기를 바라네.”
“하면, 허락해 주십시오.”
황제는 무거운 침음을 삼키며 소파에 몸을 묻었다. 잠시간 황제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고뇌에 빠졌다.
침묵이 집무실을 가득 메웠을 때쯤 황제는 감았던 눈을 뜨고 시종장에게 명했다.
“……종이와 펜을 가져와라.”
시종장이 테이블 위로 종이와 펜을 대령하고 황제는 굳은 얼굴로 새하얀 종이 위로 펜을 들었다.
인장을 찍고, 봉투에 칙서를 넣은 황제는 후작에게 칙서를 내밀었다.
“그대가 원한 칙서이네.”
“……감사합니다, 폐하.”
“후작, 내 한 가지만 부탁하지.”
“……네.”
“만약, 나중에라도 디아나가 대공가로 돌아가고 싶다면 그땐 붙잡지 말아 주게. 약속해 주겠나?”
“디아나가 원하다면, 당연히 보내줄 것입니다. 폐하, 그럼 전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칙서를 품에 넣은 후작은 종이 뭉치를 들고 일어났다.
“……오늘 바로 데려갈 것인가.”
“네.”
“……알겠네, 그만 물러가게나.”
후작은 황제에게 인사를 올리고 집무실을 나갔다. 후작이 나가고 황제는 심란한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인상을 구겼다.
디아나만을 생각하여 칙서를 써 주었지만 눈앞에서 자식을 또 한 번 뺏길 대공을 생각하니 마음이 무거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잠시 떨어져 있는 것이 낫겠지.”
그리 생각하면서도 복잡한 마음에 황제는 결국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에 서서 황궁을 빠져나가는 후작가의 마차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 * *
“신문사들이 빠르게 우호적인 기사들을 쏟아내고 있습니다.”
신문들을 보고 있던 대공은 로운의 말에 고개를 들었다.
“악의적인 기사를 낸 신문사가 한순간에 망하는 걸 봤기 때문이겠지. 황가에서 이제까지 자신들에게 자비를 베풀고 있었다는 걸 확실히 깨달았을 것이다.”
“귀족들 사이에 퍼지는 소문들도 빠르게 가라앉겠군요.”
“그럴 것이다.”
대공이 신문들을 접어 책상 한편으로 밀어 버린 그때, 집무실의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울렸다.
“들어와.”
문을 열고 들어온 총집사가 대공의 앞으로 급히 다가와 고개를 숙였다.
“무슨 일이냐.”
“시아페 후작가의 마차가 저택 정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어서, 문을 열어 드려라.”
“네, 전하.”
총집사가 집무실을 나가고 대공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대공녀님을 뵈러 오신 걸까요.”
대공은 프록코트의 단추를 채우며 로운을 바라보았다.
“……아마, 그렇지 않겠느냐.”
그저 디아나를 보러 온 것이길 바라지만 나쁜 예감이 들었다.
디아나가 깨어난 지 수일이 지날 때까지 안부를 묻는 서신 한 장이 없었다.
거기다 일전에 보았던 대법관과 함께 있던 모습이 마음에 걸렸다.
정말 디아나의 안위만 확인하기 위해 들린 것일까.
아닐 거 같단 불길한 예감이 등줄기를 스쳤다.
대공은 불길함을 억누르며 집무실을 나섰다.
저택의 문을 나서자 때맞춰 후작가의 마차가 멈춰 섰다.
마차에서 내리는 후작에게 대공은 서둘러 다가갔다.
“오셨습니까, 후작 각하.”
“잘 지내셨습니까, 대공 전하.”
“……네, 별다른 일 없이 지내고 있습니다. 디아나를 보러 오신 겁니까.”
“보러온 게 아니라 데리러 왔습니다.”
후작은 대공의 금안을 똑바로 마주 보며 말했다.
“……데리러 왔다니,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요.”
불길한 예감이 그의 전신을 휘감았다.
대공의 금안이 불안함으로 살짝 떨렸지만 후작은 더없이 차분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보는 눈이 많습니다. 괜한 소란을 피우고 싶지 않으니 집무실로 가시지요. 제가 온 이유를 정확히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저택의 사용인들을 둘러본 대공은 굳은 얼굴로 후작에게 말했다.
“……따라오시지요, 각하.”
“차는 됐으니 사람들을 모두 물려 주시겠습니까.”
대공과 함께 집무실로 들어온 후작은 소파에 앉으며 말했다.
대공은 찻잔을 들고 있는 총집사에게 손을 들어 보인 뒤 로운에게 말했다.
“둘 다 나가 보거라.”
“네, 전하.”
달칵, 총집사와 로운이 나가고 집무실의 문이 굳게 닫혔다.
집무실 안에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은 때, 대공이 먼저 입을 열었다.
“디아나를 데리러 오셨다는 말씀이 무슨 뜻인지 설명해 주십시오.”
후작은 대공을 응시했다. 대공의 수려한 얼굴 위로 불안감이 서렸다.
후작은 그를 보다 품에서 황제의 칙서를 꺼냈다.
테이블 위로 칙서를 내려놓은 그는 대공에게 말했다.
“황제 폐하의 칙서입니다. 읽어 보시지요.”
대공은 후작을 초조한 눈빛으로 바라보다 서신을 들었다. 봉투를 여는 그의 손끝이 살짝 떨렸다.
이 안에 담겨 있는 내용을 보는 것이 두려웠다.
마침내 칙서를 읽은 대공이 돌처럼 굳었다.
황제의 인장이 찍힌 칙서의 내용은 길지 않았다.
디아나를 시아페 후작가의 후계자로 인정한다는 짧은 한 줄뿐이니까.
하지만 그 한 줄에 담긴 의미는 대공의 심장을 멈추게 할 만큼 큰 것이었다.
충격으로 굳은 대공을 보며 후작은 입술을 열었다.
“대공 전하, 칙서의 내용대로 디아나는 이제 시아페 후작가의 가계도에 이름을 올리게 될 것입니다. 하여 디아나를 후작가로 데려가려 합니다.”
후작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린 대공은 칙서를 접었다.
대공은 처음으로 후작에게 날카로운 기운을 드러냈다.
“디아나를 데려갈 순 없습니다. 후작 각하께서 디아나를 생각하시는 마음은 알겠지만 제 딸을, 뺏어 가실 순 없습니다.”
대공은 맹수 같은 기운을 내뿜었지만 후작의 얼굴엔 흔들림이 없었다.
“대공 전하의 의사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이미 폐하께서 디아나를 후작가의 후계로 인정하셨고 이제부턴 제가 디아나의 보호자입니다.”
“후작님, 전 절대 디아나를 보내지 않을 것입니다.”
대공의 번뜩이는 눈빛은 무력을 불사하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었다.
이대로 디아나를 데려가겠다고 했다간 정말 대공가에서 큰 소란이 생길 수도 있다.
후작은 한발 물러나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대공 전하, 한 가지만 묻지요. 대공가에서 지내는 디아나가 행복해 보이십니까?”
후작의 물음에 대공의 눈빛이 크게 동요를 보였다.
디아나는 대공녀란 신분조차 거북해하고 있다.
그런 디아나가 대공가에서 행복해할 리가…… 없다.
“……지금 갑자기 바뀐 모든 것들 때문에 디아나가 안정적이지 않다는 것은 인정합니다. 하지만 곧 대공 저택의 사용인들도 전부 물갈이가 될 거고, 저도 천천히 디아나에게 다가가려 노력할 것입니다. 지금 당장 아이의 행복을 논할 수 없다는 것을 후작께서도 아시지 않습니까.”
“압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물러나지 않으려 합니다.”
“……제가 잘못했다는 것을 압니다. 그 후회를 하루하루 뼈저리게 느끼고 있고요. 제 죄는 평생 속죄하고 살 테니 제발 저와 디아나에게 시간을 주십시오.”
아리엘의 부친이자 디아나의 외할아버지가 되는 사람이다.
아리엘과 디아나를 생각해서라도 후작과 더 척을 지고 싶지 않았다.
대공이 고개를 숙이자 후작의 굳세었던 표정도 살짝 흔들렸다.
하지만 이런 부탁에 약해질 것이었다면 애초에 시작도 하지 않았을 일이었다.
“전하, 전하께선 디아나의 부친으로서의 역할을 다하지 못했고 그 결과 아이는 10년 동안 방치되었습니다. 전하의 간절한 청으로 제 마음이 약해지기엔 디아나에 대한 죄책감이 너무 큽니다. 하니 대공 전하께서 물러나 주시길 바랍니다. 전 어린아이를 데리고 추잡한 법정 싸움까진 가고 싶지 않습니다.”
“……법정 싸움이라니 설마…….”
“네, 대공 전하께서 허락해 주지 않으신다면 공개적으로 친권 소송을 걸 생각입니다. 그건 최악의 경우겠지요. 전 대공 전하께서 그런 최악까진 가지 않으리라 믿고 싶습니다. 그리고 대공가를 떠나는 것은 디아나의 의지이기도 합니다.”
“……디아나의 의지라고요?”
“네, 그렇습니다. 정 못 믿으시겠다면 디아나에게 직접 물어보시지요.”
대공은 복잡한 눈빛으로 입을 다물었다.
침묵을 지키던 대공이 이윽고 시종을 불러 명했다.
“……디아나를 불러와라.”
* * *
“아, 피비, 유네스 육포 주지 마. 오늘 벌써 5개나 먹었어.”
디아나는 주머니에서 육포를 꺼내는 피비를 향해 말했다.
“앗, 유네스, 너 왜 안 먹은 척해.”
피비가 육포를 다시 넣으며 말하자 피비에게 애교를 부리듯 앞다리를 쭉 폈던 유네스는 미련 없다는 듯 등을 돌렸다.
“와, 유네스…….”
유네스가 디아나의 곁으로 쌩 가 버리자 피비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그 모습을 보던 그때,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울렸다.
피비가 문을 열자 총집사가 들어왔다.
“대공녀님.”
대공에게 차갑게 선을 그은 뒤 총집사가 디아나의 방을 찾는 일은 없었다.
설마 다시 식사를 하잔 제안이 시작된 건가.
디아나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무슨 일이야?”
“대공 전하께서 대공녀님을 집무실로 부르셨습니다.”
“……날 왜?”
“이유는…… 말씀해 주지 않으셨고, 시아페 후작과 함께 있으시단 말씀을 전하라 하셨습니다.”
“시아페 후작님?”
디아나의 눈이 놀람으로 물들었다.
- 곧 데리러 가마.
후작이 했던 말을 기억하고 있었지만 이렇게 빨리 찾아올 줄은 몰랐다.
‘정말 오셨구나.’
“네, 대공녀님.”
고개를 숙이는 총집사를 보던 디아나는 소파에서 일어났다.
“알았어, 지금 갈게.”
“대공녀님이 도착하셨습니다.”
총집사가 집무실의 문을 열자 디아나는 집무실 안으로 걸음을 디뎠다.
“디아나.”
눈앞의 텅 빈 책상을 본 디아나는 목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대공 전하를 뵙니다.”
“……일어나렴.”
천천히 고개를 든 디아나는 소파에서 일어난 대공이 아닌 시아페 후작을 바라보았다.
후작과 디아나의 시선이 마주쳤다.
시아페 후작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디아나, 잘 지냈느냐.”
“네, 잘 지냈어요.”
어색함이 없는 두 사람의 인사를 보던 대공은 무거운 얼굴로 말했다.
“……이쪽으로 와서 편히 앉으렴.”
“네, 전하.”
디아나는 후작에게 답할 때와 달리 차가운 목소리로 답하며 소파에 자리를 잡았다.
“디아나, 널 부른 것은 묻고 싶은 게 있어서란다.”
“네.”
디아나의 대답은 차분했지만 대공은 입술을 떼기가 힘들었다. 아니, 솔직히 디아나에게 대공가를 떠나고 싶냐고 묻고 싶지 않았다.
그를 바라보는 차가운 디아나의 눈빛에서 대답을 짐작할 수 있었으니까.
“……디아나, 대공가를 나가고 싶으냐.”
대공은 입 안을 맴돌던 변명들을 덧붙이지 않았다. 그 변명들은 결국 자신을 위한 것일 테니 말이다.
불안한 듯 흔들리는 대공의 금안을 마주하자 디아나는 바로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디아나의 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지금은 대공을 보는 것도, 대공저에서 지내는 것도 너무 힘들었기에 하루빨리 벗어나고 싶었다.
“……네, 전 대공저를 나가고 싶어요.”
디아나의 나직한 목소리가 집무실을 울린 순간 대공은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대공가를 나가고 싶단 말은 결국 아버지인 자신을 떠나겠단 말이었으니까.
못 간다, 내가 잘못했으니 대공가에 머무르라 매달리고 싶었지만 디아나는 어린아이였다.
이미 많은 일을 겪은 아이에게 그런 못난 모습까지 보여 줄 순 없었다.
대공은 괴로운 얼굴을 숨기려 고개를 살짝 숙였다. 긴 숨을 내쉬었지만 가슴이 무너지며 울컥하는 감정에 목구멍이 조여들었다.
“……디아나의 뜻이 이러니, 대공 전하께서 물러나 주셨으면 합니다.”
후작이 고개를 숙인 대공에게 말했다.
대공은 주먹을 그러쥐며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대공은 후작이 아닌 디아나를 바라보았다.
“디아나, 네게 제일 중요한 건 너의 마음이란다. 네가 단순히 나가서…… 지내고 싶은 거라면 내가 저택을 따로 마련해 줄 수 있단다. 정말…… 후작가로…… 가고 싶은 거니?”
“……네, 후작가로 가서 지내고 싶어요.”
디아나는 흔들림 없는 금빛 눈동자로 대공에게 말했다.
일말의 희망마저 무너진 대공은 심장이 찢기는 듯 고통스러웠다. 손끝이 차갑게 식고 눈가가 붉어졌지만 대공은 온 힘을 다해 평정심을 가장했다.
하지만 디아나는 대공의 떨리는 손을 보았다.
대공의 눈빛이 몹시 슬프다는 것도 느껴졌다.
디아나는 그 눈빛을 마주하기 싫어 시선을 내렸다.
“……디아나. 이것 하나만 기억해 주렴. 네가 어디에 있든 난 언제나 네 뒤에 있을 거란다. 돌아오고 싶어진다면 언제든 돌아오렴.”
대공은 가슴이 무너지는 참담함을 억누르며 디아나를 위해 옅은 미소를 지었다.
* * *
“피비, 나 왔어.”
방으로 돌아온 디아나는 문을 닫자마자 다가오는 피비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가씨, 괜찮으세요? 별일 없으셨어요?”
피비는 디아나가 어디 다치기라도 한 것처럼 이곳저곳을 살폈다.
시아페 후작이 가벼운 마음으로 대공가에 방문한 게 아니란 것을 피비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혹시라도 대공 전하와 시아페 후작 사이에서 디아나가 곤욕을 치른 게 아닐까 걱정되어 잠시도 가만히 있지 못했던 피비였다.
디아나는 피비의 걱정스런 눈빛에 괜찮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응, 괜찮아. 별일 없었어. 그냥…… 대공 전하께서 정말 후작가로 가고 싶은지 물어봤고…… 난 그러고 싶다 한 게 다였어.”
디아나는 상처를 받은 듯 흔들리던 눈동자와 무너지듯 무거웠던 목소리가 떠올랐지만 애써 머릿속에서 지웠다.
“대공 전하께서…… 후작가로 가도 된다고 하시던가요?”
피비가 불안한 눈빛으로 물었다.
- 네 행복을 바랄 뿐이란다.
디아나는 그 말을 하던 대공의 얼굴이 떠올랐다. 힘들게 미소 짓는 듯 떨리던 그의 입꼬리와 붉어지던 눈가가 말이다.
미소를 짓고 있음에도 슬퍼 보이던 대공의 모습이 자꾸만 떠올라 디아나는 떨떠름한 얼굴로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허락해 주셨어. 그리고 피비와 에드윈이 같이 가도 좋다고 해 주셨어.”
디아나의 말에 걱정하던 피비의 얼굴이 한결 밝아졌다.
“정말요? 다행이네요.”
“……그러게.”
디아나도 대공이 이렇게 쉽게 허락해 줄지는 몰랐다.
자신의 의사와 상관없이 대공녀로서의 삶을 강요할 거라 은연중에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대공은 자신의 행복이 가장 중요하다, 말했다.
“아가씨, 왜 그러세요?”
피비는 디아나의 어두워지는 얼굴에 걱정스런 낯빛을 했다.
“응? 아, 아니야. 그냥…….”
기분이 이상해서.
대공가를 떠날 수 있다면 정말 기쁠 거라 생각했는데, 막상 지금은 그리 기쁘지 않고 마음이 혼란스러웠다.
대공이 자신이 생각했던 것과 다른 반응을 보였기 때문일까.
혼란스러워 보이는 디아나를 보던 피비가 자세를 낮추며 디아나를 마주 보았다.
“음…… 아가씨, 있잖아요. 제가 어릴 때 저희 집에서 되게 구박을 많이 받았거든요? 그래서 집을 나오게 됐을 때 되게 기쁠 거라고 생각했어요. 근데 막상 떠나는 날이 되니 그렇게 기쁘지 않았어요. 그리 좋은 기억이 없는 가족들인데도 함께한 시간들이 있어서인지 슬프기도 하고, 웃음도 나지 않더라고요. 그러니까…… 제가 하고 싶은 말은요…….”
피비는 고민하듯 미간을 살짝 좁히다 말을 이었다.
“아가씨께서 지금 느끼는 우울한 기분이 절대 이상한 게 아니란 거예요. 그러니 혹시라도 아가씨가 잘못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은 하지 마셔요. 후작가로 가는 것에 큰 의미를 두지 마시고, 지금 이곳이 너무 답답하니…… 저랑 같이 놀러 간다, 이런 마음으로 가시면 되는 거예요.”
“……피비.”
피비는 디아나가 느끼는 혼란스런 감정을 다 안다는 듯, 그리고 괜찮다는 듯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디아나는 피비의 목을 끌어안으며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정말 다 괜찮겠지?”
“당연하죠, 아가씨. 아가씨는 아가씨만 생각하시면 돼요. 어른들의 상황을 생각하기엔 아가씨는 너무 어린 걸요. 아가씨는 그저 어른들에게 힘들면 힘들다, 싫으면 싫다 투정 부리고 기대면 되는 거예요.”
“……응, 피비.”
“아무 걱정 마세요. 아가씨가 어디로 가든 제가 곁에 있을 거니까요.”
등을 토닥이는 다정한 손길에 디아나는 피비의 품으로 더욱 파고들며 혼란스런 감정을 진정시켰다.
* * *
“대공 전하, 정말 이대로 대공녀님을 보내실 겁니까?”
디아나가 후작가의 마차에 오르는 것을 본 로운이 다급히 집무실로 와 말했지만 대공은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그저 대공가를 떠나는 후작가의 마차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전하, 대공녀님을 이리 보내시면…….”
“디아나가 원한 일이다.”
대공은 창문에서 몸을 돌리지 않고 답했다.
대공가를 떠나고 싶다 말하던 디아나의 나직한 목소리가 귓가를 맴돌자 그는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설득이라도…….”
“뭐라 설득한단 말이냐. 좋지 않은 기억이 많아도 이곳에서 지내야 한다고? 내가 너의 아비이니 이렇게 가면 안 된다고? 내가 무슨 염치로 그런 말을 하겠느냐, 그리고 이미 어른들의 눈치를 과하게 살피는 아이다. 그런 아이에게 억지로 용서를 구하면 더 힘들지 않겠느냐.”
- 대공 전하, 디아나는 나이답지 않게 참으로 마음 씀씀이가 조숙한 아이입니다. 한데 전 그 아이가 그리 차분한 모습을 보일 때마다 가슴이 아픕니다. 투정을, 고집을 부려 봤자 달라지는 게 없다는 걸 깨달은 체념 같아서요. 전하, 이 대공가에서 디아나가 마음껏 투정 부리고 고집 피울 수 있을까요?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전 디아나가 아이답게 살기를 바랍니다.
후작의 말에 대공은 아무런 반박도 할 수 없었다.
자기 마음대로 할 거라고 떼를 쓸 나이에 어른들의 눈치를 살피고, 나이답지 않게 조숙한 것은 좋은 것이 아니란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디아나의 조숙함은 레아의 학대로 인해 일찍 철이 들어 버린 탓이니까.
그리고 디아나가 대공가에선 마음 편히 투정을 부릴 수 없단 것도 알았다.
그렇기에 잡고 싶어도 잡을 수 없었다.
“……전하…….”
“디아나는 이미 겪지 않아도 될 상처를 너무 많이 겪었다. 하니 난 지금이라도 디아나가 원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해 줄 것이다.”
그의 마음이 무너지더라도 말이다.
후작가의 마차가 마침내 대공가의 저택 정문을 벗어났다.
디아나가 원하지 않을 거 같아 일부러 배웅도 하지 않았다.
‘벌써 이렇게 그리운데…… 멀리서라도 널 볼 것을.’
후회가 밀려들었지만 이미 마차는 떠난 뒤였다.
후작가로 갔다 하여 더 이상 그의 딸이 아니게 될 순 없지만 디아나의 얼굴을 쉽게 볼 수도 없을 것이다.
디아나의 마음이 풀리기까지 며칠이 걸릴지 몇 년이 걸릴지 알 수 없으니까.
대공은 더 이상 보이지 않는 후작가의 마차에 창문에서 시선을 거두었다.
“……로운, 그만 나가 보거라.”
“……네, 전하.”
낮디낮은 대공의 목소리에 로운은 무거운 얼굴로 집무실을 나갔다.
* * *
“도착했습니다. 후작 각하, 아가씨.”
마차 밖에서 에드윈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가씨, 조심해서 내리세요.”
“응, 에드윈.”
후작에 이어 마차에서 내리려던 디아나는 에드윈의 조심스러운 손길에 미소를 지으며 손을 잡았다.
“여기가 시아페 후작가의 저택이란다. 블레인 영지에 더 큰 성이 있긴 하지만 이곳도 꽤 좋은 풍경을 가진 저택이지.”
후작의 말에 디아나는 시선을 들었다.
그리고 눈앞의 커다란 저택을 바라보았다.
웅장한 성 같았던 대공가의 저택과 달리 적갈색 벽돌로 지어진 저택은 크기는 조금 작았지만 우아하고 고전적인 느낌을 풍기고 있었다.
“후작가에 온 것을 환영한단다, 디아나.”
시아페 후작은 저택을 올려보는 디아나에게 나직이 말했다.
“후작 각하!”
디아나가 미소 짓는 후작에게로 고개를 돌리던 그때, 저택에서 큰 목소리가 울렸다.
그리고 우다다 거의 뛰는 듯한 발소리가 울렸다.
“해리스, 아직 귀먹을 나이 아니니 목소리 좀 낮추거라.”
후작은 미간을 살짝 좁히며 달려온 남자에게 말했다. 디아나는 급하게 달려온, 해리스라 불린 푸른 머리칼의 남자를 올려보았다.
해리스의 하늘빛 눈동자가 디아나를 향하고 곧 놀란 듯 두 눈이 커졌다.
“아니, 이렇게…… 바로…….”
“해리스, 보고는 집무실에서 받도록 하마.”
후작은 당황으로 얼룩진 해리스의 말을 끊었다. 후작의 중후한 목소리에 정신을 차린 듯 해리스의 놀란 얼굴이 진정되었다.
“아…… 네, 하하, 제가 실례했습니다.”
어색한 미소를 짓는 해리스를 엄한 얼굴로 보던 후작은 디아나를 향해 미소를 그렸다.
“디아나, 이쪽은 내 보좌관인 해리스 롬페란다. 덤벙대긴 해도 못난 놈은 아니니 편히 대하면 될 것이다.”
덤벙이란 말에 표정이 잠시 흔들렸던 해리스는 디아나에게 고개를 숙였다.
“처음 뵙겠습니다, 디아나 영애. 앞으로 편하게 해리스라고 불러 주십시오.”
“만나서 반가워, 해리스. 앞으로 잘 부탁해.”
“하하, 저야말로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해리스가 밝은 미소로 대꾸하자 후작은 그를 비스듬히 가리며 디아나에게 말했다.
“인사는 이 정도면 됐으니, 이만 저택으로 들어가자꾸나.”
“네.”
후작은 디아나의 손을 꼭 잡으며 함께 저택으로 들어갔다.
“이곳이 아리엘, 그러니까 너의 엄마가 지냈던 방이란다.”
2층 복도 첫 번째 방.
후작은 오랫동안 열지 않았던 문을 열며 말했다.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아리엘이 대공가로 떠났던 그날과 똑같은, 물건의 위치 하나 달라진 것이 없었다.
후작은 창가의 테라스를 바라보았다.
아리엘이 자주 서 있던 그곳을 물끄러미 보던 후작이 느리게 눈을 깜박인 그때, 디아나의 목소리가 들렸다.
“테라스…… 예쁘다.”
“네 엄마가 좋아했던 곳이란다. 바람 쐬는 걸 좋아했거든.”
“가 봐도 돼요?”
“물론이지.”
디아나는 테라스로 향했다. 하늘하늘한 하늘색 커튼 너머로 나가자 넓은 후작가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와, 아가씨, 석양 질 때 정말 예쁘겠어요.”
“응, 그럴 거 같아.”
테라스에 서 있는 디아나의 모습을 그리운 눈빛으로 바라보던 후작은 디아나가 고개를 돌리자 재빨리 슬픈 표정을 감추었다.
후작은 디아나에게 다가가며 말했다.
“디아나, 이 방이 오랫동안 꾸미지 않아 네가 지내기엔 조금 삭막할 텐데…… 정말 새로 꾸미지 않아도 되겠느냐.”
후작가로 오는 마차 안에서 후작이 방을 새로 꾸며 주겠다고 했지만 디아나가 거절했다.
하지만 후작은 십몇 년 전 방식으로 꾸민 이 방이 어린 디아나에겐 잘 맞지 않는 거 같아 신경이 쓰였다.
“음…….”
디아나는 천천히 방 안을 둘러보았다.
베이지색 이불보, 원목 화장대, 화려하지 않은 가구들과 심플한 소파.
확실히 수도 저택 내 디아나의 방보다 삭막한 느낌이 강했지만 왜인지 디아나는 이곳의 오래된 느낌이 싫지 않았다.
오히려 방에 들어왔을 때부터 아늑하다고 생각했었다.
“괜찮아요, 전 이대로가 좋아요.”
“흠…… 가구가 너무 오래되었는데…… 그럼 소파와 화장대라도 바꾸는 게 어떠니?”
후작은 뭐라도 해 주고 싶어 물었지만 디아나는 고개를 저었다.
한 번도 본 적 없지만 엄마가 사용한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는 화장대와 소파가 더 좋았기 때문이다.
“……엄마가 썼던 것들이라 더 좋아요. 엄마에 대해 알고 싶은 게 많거든요.”
디아나의 담담한 말에 후작의 보랏빛 눈동자가 살짝 떨렸다.
“……그래, 언제든 엄마에 대해 궁금한 게 있다면 내게 물어보렴. 그리고 아리엘의 초상화가 내 집무실에 있단다. 네가 보고 싶다면 방으로 옮겨 주마.”
“보고 싶어요!”
디아나는 바로 답했다.
머릿속에서만 그려 봤던 엄마의 얼굴을 볼 수 있다니, 디아나의 눈이 기대감으로 반짝였다.
차분한 아이답지 않게 높은 목소리에 후작의 입가에 미소가 서렸다.
“내일 바로 가져다주마.”
“감사합니다.”
“디아나, 그렇게 일일이 인사를 할 필요 없단다. 난 너의 외할아버지지 않니, 그저 필요한 것이 있으면 언제든 말하렴.”
필요한 것.
디아나는 순간 가디언에 관한 일이 떠올랐다.
가디언을 만나러 가는 일을 자꾸 미룰 수는 없었다.
하지만 지금 당장 말하기엔 창밖으로 이미 노을이 지고 있었다.
“디아나, 필요한 게 있니?”
디아나가 고민하듯 눈을 도르륵 굴리는 것을 놓치지 않고 본 후작이 물었다.
“그게…… 저, 황제 폐하를 만나 뵙고 싶어요.”
“……황제 폐하를? 무슨 이유인지 물어도 되겠니?”
‘말해도 되는 걸까.’
후작이 나쁜 사람이 아니란 것도, 자신을 많이 신경 쓰는 것도 알고 있지만 가디언에 대한 이야기를 뭐라 설명하기가 어려웠다.
디아나가 망설이듯 입술을 달싹이자 후작이 먼저 입을 열었다.
“말하기 어렵다면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된단다. 그리고 아마 폐하께서도 네가 만나고 싶다면 아주 기뻐하실 거 같구나. 최대한 빨리 만나고 싶은 거겠지?”
“네.”
“알겠다. 내일 폐하께 서신을 보내도록 하마. 벌써 해가 져 가고 있으니 오늘은 이만 쉬려무나. 내일 정식으로 집사와 하녀장도 소개해 주마.”
디아나는 저택 로비에 서 있던 사용인들을 떠올리다 고개를 끄덕였다.
“네…… 할아버지도…… 푹 쉬세요.”
디아나의 말에 후작의 눈이 크게 떠졌다. 후작가로 오게 된 이상 계속 후작님이라 부르는 건 이상할 거 같아 용기 낸 것이었다.
하지만 막상 말하고 나니 부끄럽기도 하고 너무 어색해 디아나는 눈을 도르륵 굴렸다.
쑥스러움에 디아나의 볼이 발그레 물들었다.
그런 디아나를 보던 후작은 가슴 깊은 곳에서 울컥함이 치솟았지만 큼, 감정을 고르며 자연스럽게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허허, 그래, 그래. 디아나 좋은 밤 보내렴. 그럼 자네는 날 따라오게.”
“네, 각하.”
너털웃음을 터뜨리던 후작은 곧 문 쪽에 서 있던 에드윈을 데리고 방을 나갔다.
방문이 닫히자마자 디아나는 피비에게 말했다.
“피비, 유네스 내려줘.”
유네스는 방 안에 들어왔을 때부터 내려가고 싶다는 듯 피비의 품 안에서 바르작거렸었다.
피비가 바닥에 내려주자 유네스는 기다렸다는 듯 방 안 이곳저곳을 뛰어다녔다. 침대부터 소파 그리고 테라스까지, 유네스는 이곳이 몹시 익숙하고 좋은 듯했다.
침대 옆, 커다란 둥근 카펫 위에 자리를 잡은 유네스는 디아나를 보며 울었다.
“냐아-.”
“음…… 거기가 네 자리였어?”
지금은 작아져 유네스에게 큰 카펫이었지만 원래 크기를 떠올려 보면 유네스의 몸과 딱 맞는 크기였다.
“냐아-.”
유네스는 그렇다는 듯 답했다.
디아나는 카펫 옆에 있는 소파에 앉았다. 그리고 기분 좋아 보이는 유네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미소를 지었다.
“유네스, 엄마도 여기에 앉아서 이렇게 널 봤겠지?”
“냐아-.”
유네스는 짙은 푸른 눈동자로 디아나를 응시했다. 엄마도 이렇게 앉아 유네스의 이 눈동자를 똑같이 보았을 것이다.
한 번도 보지 못한 엄마에 대해 디아나는 뒤늦게라도 하나씩 알아가고 싶었다.
그래야 아직은 혼란스러운 자신의 진짜 모습도 천천히 받아들일 수 있을 거 같았다.
그리고…… 엄마는 레아와 달리 자신을 진심으로 사랑했을지도 궁금했다.
자신이 학대를 당한 건 자신이 못나서가 아니라 레아가 친엄마가 아니었기 때문이라고 믿고 싶었으니까.
“냐아, 냐야-.”
디아나가 우울한 생각을 하는 것을 어떻게 알았는지 폴짝 소파로 뛰어올라 온 유네스가 앞발로 장난을 쳤다.
“놀고 싶구나.”
디아나는 잠시 떠올렸던 레아를 머릿속에서 지우고, 유네스의 앞발에 맞장구치듯 손을 움직여 주었다.
그 모습을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보고 있던 피비는 어느새 어둑해진 하늘을 보고 말했다.
“아가씨, 전 저녁을 가지러 다녀올게요. 유네스와 함께 쉬고 계세요.”
“응, 피비.”
이곳에서 적응을 못하면 어쩌나 하던 걱정과 달리 들려오는 디아나의 맑은 웃음소리에 피비는 안도하며 방을 나갔다.
* * *
시아페 후작가의 집무실.
집무실 책상에 자리 잡은 후작은 단정히 매었던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며 대공가의 기사를 쳐다보았다.
“에드윈 드로이트 경, 내 편하게 에드윈이라 불러도 되겠는가?”
“네, 물론입니다, 각하.”
“디아나를 따라와 주어 고맙네. 디아나가 그대를 참 많이 의지하는 거 같았거든.”
“과분한 말씀이십니다.”
“흠, 에드윈, 내 그대가 좋은 기사라는 것엔 의심이 없네. 하지만 그대가 대공가의 기사인 것은 변하지 않는 사실이지. 지금 디아나를 따라 후작가에 와 있다곤 하나 그대의 신분은 대공가에 소속되어 있지 않은가.”
후작의 날카로운 눈빛에 에드윈의 얼굴에 긴장감이 맴돌았다.
“네, 그렇습니다. 혹 제가 후작가로 들어오길 바라시는 겁니까?”
“아냐, 그건 아닐세. 시아페 후작가는 무가가 아니라 문가라 기사들의 미래가 그리 밝다고 할 수 없지. 제국에서 최고는 황궁 기사와 대공가의 기사가 아닌가. 어떻게 그 명예를 버리라 하겠는가. 내 그리 상식 없는 사람은 아니야. 그저 그대에게 당부하고 싶은 게 있을 뿐이지.”
“말씀하십시오, 각하.”
“내 그대의 기사단장인 로운을 좀 알지. 대공 전하에 대한 충성심이 정말 남다른 자야. 아마 그렇기에 아무런 말도 덧붙이지 않고 자네를 보내 주진 않았을 거야. 하나 난 디아나가 후작가에 있는 동안은 조용히 지냈으면 하네. 대공가에 쓸데없이 디아나의 일거수일투족을 알리지 말게나.”
“……네, 이미 아무것도 말할 수 없다 단장님께도 말씀드렸습니다. 전 아가씨에게 충성을 맹세한 기사입니다. 기사는 목에 칼이 들어와도 주인을 배신하지 않습니다.”
에드윈은 단정한 얼굴로 답했다.
흔들림 없는 녹빛 눈동자를 보던 후작은 유려한 미소를 그렸다.
“자네는 정말 볼수록 마음에 드는군. 그대가 기사인 게 아까울 정도야. 그대가 행정관이었다면 내 밑에 두었을 텐데 말이야.”
“……과분한 칭찬 감사드립니다.”
“내 앞으로 자네의 일이라면 외면하지 않겠네. 하니 힘든 일이 생기거든 언제든 시아페 후작가에 도움을 요청하게.”
후작의 말에 옆에 서 있던 보좌관의 눈이 동그래졌다.
시아페 후작은 방금 단순한 보상이 아닌, 후작가가 평생 비호하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이었다.
그 의미를 알기에 에드윈도 놀라 어깨를 움찔했다.
“거절하지 말게나. 내 디아나를 위해 이 정도는 해 주고 싶어.”
후작이 디아나까지 언급하자 에드윈은 차마 거절할 수 없었다.
“……감사합니다, 후작님.”
“후작가의 기사단엔 미리 말을 해 놓았으니 크게 불편한 것은 없을 걸세. 혹 지내는 데 불편함이 있다면 언제든 말하고.”
“네.”
“그럼 이만 돌아가 쉬게나.”
“네, 각하.”
에드윈이 집무실을 나가자마자 모든 상황을 묵묵히 지켜보고 있던 보좌관 해리스가 왕방울만 해진 눈으로 책상 앞에 섰다.
“각하, 정말 대공녀님을 오늘 바로 데려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황궁에서 후작이 홀로 마차를 타고 떠날 때 대공가로 간다고 하긴 했지만 해리스는 떠나는 마차를 보며 설마설마했다.
한데 진짜, 대공녀가 후작가로 오다니.
해리스는 너무도 순식간에 벌어진 상황에 사실 아직도 어안이 벙벙했다.
“내가 대공가로 디아나를 데리러 간다 하지 않았더냐. 거기다 내가 디아나를 데리고 오기 위해 준비했던 서류들을 정리한 게 너다. 뭘 그리 놀라.”
“그렇긴 하지만, 대공 전하께서 대공녀님을 보내 주실 줄 몰랐습니다. 전 사실…… 무력 싸움이라도 나는 게 아닐까 걱정했으니까요.”
해리스가 진지한 얼굴로 말하자 후작은 어이가 없어 실소를 흘렸다.
“무력 싸움이라…… 그래, 꽤 소란스러울 뻔했지.”
시아페 후작은 대공이 보였던 선명한 적의를 떠올리며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래도 어쩌겠느냐. 제 딸이 싫다는데 전장의 악귀라느니 제국 제일의 검이라는 칭호도 제 딸 앞에선 아무 소용이 없는 법이지. 자식을 이길 부모가 어딨을까.”
그도 결국 아리엘의 뜻을 꺾지 못하고 대공에게 보내지 않았던가.
후작의 씁쓸함을 본 해리스가 나직이 말했다.
“그래도 대공 전하께서 순순히 아가씨를 보내 주셔서 다행입니다.”
“순순히라…… 그것보단…….”
후작은 대공의 무너지던 모습을 떠올렸다.
디아나가 집무실을 나가고 대공은 복받치는 감정을 참을 수 없는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가 그렇게 괴로워하는 얼굴은 아리엘의 장례식장에서도 보지 못했다.
자신의 잘못된 선택에 하루하루가 후회뿐이란 말은 거짓이 아닌 것 같았다.
겨우 되찾은 진짜 자식이 스스로 곁을 떠나고 싶다 말했다.
자식의 거부에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눈앞에서 떠나는 것을 봐야 만 하니 그 마음이 얼마나 무너질지 짐작 갔다.
후작 또한 자식을 키운 아버지였으니까.
하지만 그 무너지는 억장을 짐작할 수 있다 하여 모든 일을 되돌릴 순 없었다.
그렇게 하기엔 디아나가 받은 상처가 너무 컸고, 둘 중에 소중한 사람은 당연히 디아나였다.
괴로워하는 모습에 잠시 동정이 스쳤지만 아직은 원망이 더 짙었다.
“후작님?”
말끝을 느리며 상념에 잠긴 후작을 해리스가 불렀다.
후작은 절망하던 대공의 모습을 머릿속에서 떨치며 다물었던 입을 열었다.
“아니다. 네 말대로 디아나가 후작가에 오게 되어 기쁘구나.”
“……그럼 각하, 정말 대공녀님을 후작가의 가계도에 올리시고 시아페 후계자로서의 교육을 시작하실 건가요?”
“아니, 그건 디아나를 후작가로 데려오기 위한 구실이었지. 정말 실행에 옮길 생각은 없었다. 나중에라도 디아나가 원한다면…… 그리하겠지만 당분간은 그저 이곳에서 디아나가 편히 쉬도록 할 것이다.”
딸을 지키지 못한 못난 대공을 원망하고 있지만 정말 부녀간의 연을 끊게 만들 마음은 없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그 일은 접어두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그러니 이곳에선 디아나가 대공녀란 직위와 세간의 가십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지낼 수 있게 사용인들의 입을 철저히 단속하거라.”
“네, 집사와 하녀장에게 전하겠습니다. 더 당부하실 말씀은 없으신가요?”
“하나 더, 내일 황제 폐하께 알현을 요청하는 서신을 보내거라. 디아나가 폐하를 뵙고 싶다는구나.”
“대공녀님께서요? 갑자기 왜 폐하를…… 뵈려 하신답니까?”
“말하는 것을 망설여 이유는 묻지 않았다. 그냥 내일 서신을 보내거라.”
“네, 각하. 그럼 전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그래.”
해리스가 집무실을 나서며 문을 닫자 후작은 밀려드는 피곤함에 얼굴을 거칠게 쓸어내렸다.
디아나를 데려올 준비를 하느라 거의 잠을 자지 못했고, 오늘 하루 동안은 한껏 긴장감을 몸에 두르고 있었다.
일이 마무리되자 몸이 물에 젖은 솜처럼 무거워졌다.
하지만 눈을 감기엔 마음이 무거웠고 오늘따라 딸의 얼굴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후작은 책상 두 번째 서랍을 열었다.
그리고 그곳에 놓여 있는 아리엘의 초상화를 꺼냈다.
돌돌 말려 있는 초상화를 아주 오랜만에 풀어 본 그는 여전히 아름다운 자신의 딸을 보며 흐린 미소를 지었다.
딸이 죽기 1년 전에 보내 주었던 초상화였다.
‘넌 이 모습에서 영원히 멈춰 있겠지.’
후작은 초상화 속 아름다운 아리엘의 얼굴을 손으로 쓰다듬으며 나직이 속삭였다.
“아리엘…… 내가 디아나를 위해 최선을 다할 테니, 넌 이제 아무 걱정 말고 편히 쉬렴.”
깊어 가는 밤, 후작은 오랜 시간 동안 초상화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 * *
“냐아, 냐아--.”
“으음…….”
디아나는 얼굴을 톡톡 두드리는 말랑한 발바닥의 감촉에 얼굴을 찡그렸다.
유네스가 자신을 깨우기 위해 앞발로 누르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포근한 침대가 좋아 모른 척 몸을 돌렸다.
그러자 서러운 울음소리와 함께 등을 살살 긁는 유네스의 발길질이 느껴졌다.
“큭…….”
간지러움에 결국 잠이 깬 디아나는 웃음 지으며 몸을 돌렸다.
“유네스, 오늘따라 왜 이렇게 일찍…….”
디아나는 스치듯 보인 시계의 시간에 말을 멈추었다.
시계가 가리키고 있는 시간은 벌써 정오에 가까워지고 있었던 것이다.
디아나는 화들짝 놀라 벌떡 일어났다.
“이렇게 늦잠 잔 적 없었는데…….”
낯선 방에서의 첫날 밤이 이렇게 포근할 줄 몰랐다. 잠이 잘 오지 않을 거 같아 일부러 일찍 잠자리에 들었는데, 걱정과 달리 디아나는 정말 푹 잔 것이다.
“냐아-.”
드디어 일어난 디아나가 좋은지 유네스가 품 안으로 파고들었다.
“미안, 내가 너무 늦게 일어났지, 유네스. 심심했겠다.”
유네스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던 그때, 방문이 아주 조심스럽게 열렸다.
“어머, 아가씨. 일어나셨네요.”
“피비, 어디 나갔다가 온 거야?”
“네, 너무 곤히 주무시고 계셔서 깨우기가 그랬어요.”
“아…….”
“아가씨, 일어나셨으니 전 세숫물을 가져올게요.”
“응.”
피비가 욕실로 향하고 디아나는 부스스한 금빛 머리칼을 귀 뒤로 넘기며 침대에서 내려왔다.
유네스를 바닥에 내려놓자 피비가 은대야를 가지고 돌아왔다.
미지근한 물로 세수를 마친 디아나는 익숙하게 화장대에 앉아 머리를 만져 주는 피비의 손길을 받았다.
피비는 금실 같은 얇은 금빛 머리칼을 네모난 나무 빗으로 조심스럽게 빗겨 주었다.
부드러운 빗질이 기분 좋아 눈을 감고 잇던 디아나는 피비의 부름에 눈을 떴다.
“아가씨.”
“응?”
“아까 그 후작님의 보좌관께서 오셔서 말씀을 전하셨는데, 후작님께서 함께 점심을 먹겠냐고 물으셨어요. 물론 부담스러우시면 거절하셔도 된대요.”
피비는 괜히 디아나가 말만으로도 부담을 가질까 일부러 대수롭지 않다는 듯 가벼이 말했다.
“음…….”
디아나는 고민했다.
후작이 엄청 편하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식사를 같이하기 싫을 만큼 불편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대공과 달리 후작은 엄마의 아버지였고, 자신을 배려해 준 후작에게 고마움이 있었다.
그렇기에 어제 후작이란 딱딱한 호칭 대신 할아버지라 부른 것이었다.
짧은 고민을 마친 디아나는 피비에게 말했다.
“같이 먹겠다고 전해 줘.”
“정말요? 괜찮으시겠어요?”
이렇게 빨리 편한 얼굴로 수락할 거라 생각지 못한 피비가 놀라 묻자 디아나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
“할아버지와…… 가까워지고 싶어. 엄마의…… 아버지니까.”
“……알겠어요, 아가씨. 그리 전할게요. 그런 의미에서 제가 후작님께서 입이 떡 벌어질 만큼 귀엽게 꾸며 드릴게요!”
“아, 아냐. 그냥 식사를 하는 것뿐인데…… 그렇게까지 안 해도 돼.”
피비의 결연한 외침에 인형 놀이의 불길함을 느낀 디아나가 다급히 외쳤다.
하지만 이미 늦은 듯 디아나를 바라보는 피비의 주홍빛 눈동자가 열의로 반짝였다.
“역시, 아가씨는 분홍색이 너무 찰떡처럼 어울리세요. 아가씨, 마음에 드세요?”
한차례 폭풍 같았던 피비의 손길이 지나가고 디아나는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을 바라보았다.
금발을 양 갈래로 묶은 진분홍 리본부터 연분홍 드레스, 그리고 작은 분홍 구두까지.
꼭 분홍 나라의 공주님 같은 모습이었다.
하지만 과하다고 느껴지진 않았다.
디아나는 정말 예쁜 인형 같은 자신의 모습이 신기한 듯 거울에 이리저리 비춰 보았다.
그 사랑스런 모습에 피비의 심장이 아파 올 쯤 디아나가 몸을 돌렸다.
“마음에 들어, 피비.”
무려 6벌의 옷을 갈아입는 힘든 과정이 있었지만 이렇게 예쁜 모습을 보니 디아나의 입가에도 미소가 맴돌았다.
“아가씨가 마음에 드신다니 저도 기뻐요. 그럼 이제 식당으로 가실까요? 시간이 다 되었어요.”
“그래. 유네스, 다녀올게.”
유네스에게 인사를 건넨 디아나는 피비의 손을 잡고 방을 나섰다.
* * *
“후작 각하께선 이미 도착해 계십니다. 들어가시면 됩니다, 영애.”
식당 앞에선 갈색 머리의 남자가 디아나를 보며 부드러운 미소를 그렸다.
“……고마워.”
문을 열어 주는 집사 같은 그에게 인사를 건넨 디아나는 식당 내부로 들어갔다.
대공가의 큰 식당보단 작았지만 4인용 식탁과 아기자기한 소품들이 많은 식당은 포근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디아나, 오.”
시아페 후작은 디아나를 보며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 곧 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오늘 정말 예쁘구나. 내 순간 눈앞에 사람인 서 있는 건지 인형이 서 있는 건지 착각했을 정도야. 안 그런가?”
후작의 물음에 뒤에 시립해 있던 하녀들이 미소를 지었다.
“네, 정말 인형보다 예쁘십니다.”
“어쩜 이렇게 귀여우실까요.”
하녀들의 칭찬에 디아나의 볼이 발그레 달아올랐다. 그런 디아나를 사랑스런 눈빛으로 보던 후작이 너털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이리, 이리 와 앉으려무나.”
“네, 할…… 아버지.”
아직은 입에 익숙지 않은 호칭을 느리게 말한 디아나는 후작의 앞자리에 앉았다.
문득 디아나는 식탁에 상석이 없다는 걸 깨닫고 고개를 갸웃했다.
“할아버지는 원래 이쪽에 앉으셔야 하는 거 아닌가요?”
디아나가 의자가 없는 상석을 보며 묻자 후작이 미소를 지었다.
“가주들은 보통 상석에 앉지만 난 그런 체면치레를 싫어하는 편이란다. 그리고 식사는 이렇게 마주 보며 먹는 게 더 좋지 않니?”
“……좋아요.”
디아나는 인자한 후작의 얼굴을 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수프가 다 비워지고 메인 요리인 생선 스테이크가 나왔다.
디아나가 포크를 들려던 찰나, 후작이 말했다.
“내가 썰어 주마.”
후작은 생선 살을 먹기 좋은 크기로 잘라 접시를 바꾸었다.
“먹어 보렴.”
작은 조각을 먹은 디아나는 부드러운 살코기와 달짝지근한 맛에 눈을 반짝였다.
“맛있니?”
“네, 맛있어요.”
디아나는 진심 가득한 미소를 지었다.
“네 엄마가 특히 좋아했던 요리란다.”
일부러 아리엘이 좋아했던 음식으로 준비한 것은, 디아나의 식성이 아리엘을 많이 닮았다고 대공이 말해 주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후작은 당분간은 대공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을 계획이었다.
후작의 말에 스테이크를 먹던 디아나가 조금 달라진 눈빛으로 접시를 내려다보았다.
“아…….”
엄마가 좋아했던 음식이 자신에게도 맛있다니, 뭔가 가슴 한구석이 간질거렸다.
“어서 먹자꾸나, 맛있는 사과 디저트도 준비해 놓았단다.”
“혹시 사과 디저트도 엄마가 좋아했나요?”
“그래, 좋아했단다. 네 엄마가 널 가졌을 때 가장 즐겨 먹었던 과일도 사과였지.”
“제가 제일 좋아하는 과일이 사과인데…… 그럼 엄마를…… 닮아서 그런 걸까요……?”
“그렇지 않겠니, 넌 아리엘의 딸이니까.”
엄마와의 공통점을 찾은 디아나는 볼을 발그레 물들였다.
“엄마가 좋아했던 것들을…… 전부 알고 싶어요.”
“하나씩, 하나씩 내가 알려 주마.”
“네.”
디아나는 기분 좋은 미소를 지으며 식사를 이어 갔다.
접시를 깨끗이 비우고 디저트가 도착했다.
노릇노릇, 바삭하게 구운 사과 타르트를 한 조각 자른 후작이 디아나의 접시 위로 먼저 놓아주었다.
“잘 먹겠습니다.”
디아나는 바삭하고 입 안 가득 퍼지는 사과 향이 좋아 식탁 아래로 다리를 흔들었다.
디저트를 거의 다 먹었을 때쯤 식당 문이 열렸다.
들어온 사람은 후작의 보좌관인 해리스였다.
디아나에게 미소를 지어 보인 해리스는 후작에게 다가갔다.
“무슨 일이냐.”
“황실에서 답신이 왔습니다.”
“벌써? 서신을 보낸 지 아직 몇 시간 되지도 않았는데?”
“네…… 저도 생각보다 너무 빨리 와서 놀랐습니다.”
해리스는 금빛 봉투를 후작에게 건넸다. 봉투를 뜯어 서신을 읽은 후작은 디아나를 보았다.
“디아나.”
“네?”
“내가 오늘 아침 황궁으로 서신을 보냈단다. 네가 폐하를 만나고 싶어 한다고 말이야. 그리고 폐하께서 답신을 보내셨구나. 오늘은 마침 국무회의 일정이 있어 안 되지만 내일이든 모레든 날도 시간도 상관없으니 네가 편할 때 들리라고 말이다.”
“아, 그럼…… 내일 바로 가도 될까요?”
“당연히 된단다. 아마 폐하께선 오늘 당장 만나지 못한 것을 몹시 아쉬워하셨을 테니까.”
서신을 받자마자 답신을 보낸 것을 보면 만남을 그만큼 고대하고 있단 뜻이었다.
아마 정기적인 국무회의가 아니었다면 취소해서라도 디아나를 황궁으로 불러들였을 것이다.
“그보다 내일 황궁으로 혼자 가고 싶으니? 물론 혼자 간다 해도 피비와 에드윈이 함께할 테니 큰일은 없겠지만 그래도 내 마음이 편하지 않아, 네가 허락해 준다면 함께 가고 싶구나.”
“아…….”
함께 가게 되면 후작도 디아나가 가디언을 만나려고 하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잠깐 망설였지만 굳이 알게 된다 해도 이상할 게 없었다.
“네, 같이 가요, 할아버지.”
“허락해 주어 고맙구나.”
“그리고…… 제가 내일 폐하를 만나려 하는 이유는…….”
디아나는 말끝을 흐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후작에겐 말해도 될 거 같았지만 후작가의 사용인들과 보좌관은 아직 믿기 힘든 사람들이었다.
디아나의 불편한 눈초리를 읽은 후작은 주변을 물렸다.
“다들 이만 나가 보거라.”
사용인과 보좌관이 식당을 나가고 후작의 시선이 디아나를 향했다.
“말해 보렴. 폐하를 만나려 하는 이유가 무엇이니?”
“가디언이 있는 곳으로 가야 해서요.”
“가디언?”
후작은 미간이 살짝 좁아졌다.
그는 곧 디아나가 정령술을 쓸 수 있다는 사실을 상기했다.
“그러고 보니, 디아나 네가 정령술을 쓸 수 있었지. 다른 일들을 생각하느라 그 사실을 잠시 잊었구나. 정령의 의식을 앞당겨서 치르고 싶은 거니?”
“의식을 치르려는 건 아니에요.”
“그럼 왜 가디언이 있는 곳으로 가려 하니? 가디언이 잠들어 있는 곳은 의식을 치르는 장소란다.”
“꿈속에서 가디언의 목소리를 들었어요. 자신이 있는 곳으로 와 달란 목소리를요.”
디아나가 차분히 말하자 후작의 얼굴이 일순 굳었다.
“가디언의…… 목소리를…… 들었단 말이냐?”
“……네, 꿈속이었지만…… 분명 가디언의 목소리 같았어요.”
믿어 달라는 듯 디아나가 덧붙이자 후작이 굳은 얼굴을 풀며 입을 열었다.
“아, 네 말을 믿지 못하는 것이 아니란다. 그저 초대 황제 폐하 이후 가디언의 목소리를 들었다고 말한 분은 없었던 터라 놀란 것이란다……. 하지만 넌 이미 정령의 힘에 관한 전례를 부순 아이이니 뭔가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것이겠지…… 단지…….”
“단지요?”
궁금함이 가득한 디아나의 금빛 눈동자를 보던 후작은 돌연 미소를 지었다.
“하하, 아니다. 그저 너무 놀라 그런 것이니 신경 쓰지 말려무나.”
“아…… 전 괜찮아요. 가디언의 목소리가 무섭게 들리지도 않았고 오히려 아주 편안한 기분이었거든요.”
“그렇다니 다행이구나. 오, 벌써 시간이 이리 되었군. 디아나, 내 일이 있어 먼저 일어나야 할 거 같은데 디저트는 방으로 보내 줄 테니 피비와 함께 먹는 것이 어떠니?”
“좋아요.”
“그래, 그리고 곧 방으로 선물 하나를 보내 주마. 기대해도 좋단다.”
“선물이요?”
디아나가 궁금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지만 후작은 말해 줄 마음이 없는지 그저 부드러운 미소를 그렸다.
“그래, 기대해도 좋단다.”
* * *
똑똑-.
“영애, 집사입니다.”
식사를 마치고 돌아와 방에서 유네스와 놀고 있던 디아나는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피비가 문을 열어 주자 방 안으로 들어온 집사는 디아나에게 예를 갖추었다.
“디아나 영애, 정식으로 인사드립니다. 후작가의 집사를 맡고 있는 막시모프라고 합니다. 편히 시프라고 불러 주시면 됩니다.”
“일어나, 시프.”
“네, 영애.”
디아나의 예상대로 후작가의 집사는 아까 식당 앞에서 보았던 갈색 머리의 남자였다.
“근데, 무슨 일이야?”
“후작님이 보내신 선물을 드리려 왔습니다.”
디아나는 식당을 나가기 전 기대하라던 후작의 말을 떠올렸다.
그리고 집사의 손에 들린 돌돌 말려 묶인 종이를 보았다.
“설마.”
디아나의 금빛 눈동자가 흔들린 순간 집사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두루마리를 내밀었다.
“대공비님의 초상화입니다, 영애.”
“……엄마의 초상화…….”
디아나는 떨리는 손끝으로 초상화를 받아 들었다.
손에 든 종이에 한 번도 보지 못한 엄마의 얼굴이 그려져 있다니.
심장이 쿵쾅거리고 입술이 바짝 마를 만큼 긴장됐다.
“아가씨, 열어 보셔요.”
피비의 다정한 목소리에 떨리던 손끝이 가라앉은 디아나는 천천히 두루마리의 매듭을 풀었다.
촤륵-.
종이가 펼쳐지는 소리가 울리고 곧 디아나의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
“……너무…… 예뻐…….”
초상화 속 엄마는 디아나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아름답고 예뻤다.
연노랑 드레스를 입고 은발을 곱게 틀어 올린 엄마는 초상화 속에서 상냥한 미소를 그리고 있었다.
꼭 자신을 보며 미소 짓는 것처럼.
그리움인지 슬픔인지 알 수 없는 울컥한 감정에 눈물이 쏟아졌다.
디아나는 혹시라도 초상화에 눈물이 번질까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황급히 손으로 훔쳤다.
“……전 그럼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디아나의 눈물을 본 집사는 못 본 척 고개 숙여 인사를 올리고 방을 나갔다.
“아가씨, 괜찮으세요?”
“……응, 괜찮아. 정말 괜찮아. 피비, 이것 봐. 엄마, 진짜 예쁘지?”
순간 울컥했지만 디아나는 눈물을 멈추었다.
초상화일지라도 엄마를 처음 보는 것인데 우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디아나의 마음을 알았는지 피비는 초상화를 보며 밝은 미소를 지었다.
“너무너무 아름다우세요. 그리고 아가씨와 많이 닮으셨어요.”
“정말? 나랑 닮았어?”
초상화 속 아름다운 엄마와 자신이 닮았다니, 디아나는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피비를 바라보았다.
“네, 여기 눈, 코, 입 전부 대공비님과 똑 닮으셨는걸요?”
“나랑 닮았구나…….”
레아와 함께 있을 때는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말이었다.
‘엄마와 내가 닮았어. 내가 진짜 엄마의 딸인 거야.’
벅차오르는 기분에 초상화 속 엄마를 보며 환한 미소를 지은 디아나는 오랫동안 엄마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 * *
같은 시각, 후작의 집무실.
영지에 관련된 일들을 보고하기 위해 후작을 찾은 해리스는 책상 가득 널브러진 책에 눈을 크게 떴다.
“각하…… 이게, 다 무슨…… 아니, 어둠의 힘과 관련된 책들은 갑자기 왜 전부 가져오신 겁니까?”
해리스의 목소리에 책에 몰두하고 있던 후작이 고개를 들었다.
디아나에게 미소를 짓던 모습과 달리 딱딱하게 굳은 얼굴의 후작은 해리스에게 말했다.
“디아나가 가디언의 목소리를 들었다는구나. 이건…… 예사로운 일이 아니야. 어쩌면 천년 넘게 봉인되었던 정령과 어둠의 힘이…… 깨어나려는 걸 수도 있다.”
“……네?”
해리스는 후작의 말에 당황한 낯빛을 숨기지 못했다.
“봉인된 어둠이 깨어난다뇨, 각하. 전 당최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 됩니다.”
혼란스런 해리스의 얼굴에 후작은 서적을 살피느라 꼈던 안경을 벗으며 말했다.
“초대 황제 폐하께서 어둠의 정령을 소멸하지 못한 것은 너도 알고 있겠지?”
“네, 그건 저도 알고 있습니다.”
“당시 어둠의 힘을 봉인할 때의 상황을 적어 놓은 고대 유적이 현자의 탑에 있는 것도 아느냐?”
“네, 들은 적이…… 있습니다.”
“약 오백 년 전 발견된 것으로 아직 고대 문자를 완전히 해독하진 못했다. 하지만 일부분 해독한 부분엔 봉인에 대한 문구가 적혀 있었지.”
두려움이 비친 후작의 눈빛에 긴장한 해리스도 손을 그러쥐었다.
“그게, 무엇입니까, 각하.”
“어둠의 봉인은 영원한 것이 아니다. 하지만 어둠의 봉인이 풀릴 때 가디언도 깨어날 테니, 가디언의 목소리를 듣는 자가 대륙을 구할 것이다…… 란 문구였지.”
“그러니까…… 어둠의 정령의 봉인이 깨지면 가디언도 깨어난다는 것이군요. 그리고…… 디아나 영애가 가디언의 목소리를 들었고요.”
“그래, 맞다. 디아나는 정령의 의식을 치르기도 전에 정령의 힘을 사용했다. 무구한 제국의 역사 속에서 단 한 번도 일어난 적 없었던 일이지. 하지만 만약 디아나를 공격한 어둠술사로 인해 봉인이 풀렸고 그 여파로 가디언이 깨어난 것이라면…… 디아나가 전례를 깨뜨린 것도 이해할 수 있다.”
“……디아나 영애가 가디언의 선택을 받았다는 거군요.”
“……정말 가디언이 깨어난 것이라면…… 그런 것이겠지.”
너무도 엄청난 사실에 해리스는 눈을 느리게 깜박였다.
아직 현실로 받아들여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멍한 해리스와 달리 후작은 지끈거리는 관자놀이에 이마를 짚으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디아나가 선택받은 아이라니.
후작은 디아나가 가디언의 선택을 받은 것이 신기하지도, 놀랍지도, 기쁘지도 않았다.
전설 속 가디언의 선택을 받은 황족의 탄생.
모든 제국민들과 귀족들이 열광하겠지만 가디언의 선택은 무거운 짐일 뿐이다.
세상을 구하는 영웅.
겉만 본다면 화려하겠지만 그 뒷면의 책임감과 외로움은 오로지 영웅 혼자만의 몫이었으니.
후작은 디아나가 그런 가시밭길을 가지 않길 바랐다.
목숨이 위험할 수도 있는 상황이 닥칠 것이다.
이제 겨우 찾은 손녀를, 아리엘처럼 잃는다면…….
후작은 상상만으로도 눈앞이 아찔하고 심장이 터질 거 같았다.
두 번 다시, 자식을 먼저 보내는 끔찍한 일을 겪고 싶지 않았다.
“각하, 아직…… 정확한 것은 모르지 않습니까. 그리고 어둠의 정령은 강력한 정령술과 그 위를 덧댄 마법진으로 둘러싸여 헬킨 산맥에 봉인되어 있지 않습니까. 어둠의 힘과는 상관없이 영애께서 가디언의 선택을 받으신 걸 수도 있지 않을까요?”
멍했던 정신을 차린 해리스는 여러 가정을 말해 보았지만 후작의 심각한 낯빛은 점점 더 깊어질 뿐이었다.
“하아, 느낌이 좋지 않구나.”
후작의 미간에 주름이 깊어졌다.
“설마 어둠의 봉인이 풀리는 것이 내 대에서, 그것도 내 손녀와 관련이 있을 줄이야…….”
후작은 답답함에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 그럼 영애께서 정말 가디언의 목소리를 들은 것이 맞는지부터 확인을 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내일 황궁으로 가는 이유가 가디언이 잠들어 있는 의식 장소로 가기 위해서다. 디아나가 정말 가디언의 선택을 받은 것이라면 의식 속에서 가디언이 깨어나게 되겠지……. 하지만 중요한 것은 가디언이 깨어나는 것이 아니다. 그 뒤에 디아나에게 닥칠 위험한 일들이야.”
“제게 시키실 일이 있으십니까?”
디아나가 정말 가디언의 선택을 받는다면, 후작도 아이를 위해 앞으로의 일을 준비해야 할 것이다.
후작은 결연한 얼굴로 해리스에게 말했다.
“현자의 탑에 내가 방문을 요청한다는 서신을 보내거라.”
* * *
다음 날.
후작은 디아나와 함께 황궁으로 향하고 있었다.
“디아나, 불편한 곳은 없니? 피비를 데리고 오지 못해 미안하구나.”
“아니에요, 일부러 같이 안 가는 것도 아니고 의식 때문에 같이 못 가는 거니, 전 괜찮아요, 할아버지.”
저번에 황자를 만나러 갔을 때는 피비가 동행했지만 오늘은 함께하지 못했다.
오늘은 단순히 황제를 만나러 황궁으로 가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정령의 의식이 치러지는 곳은 황제의 인가를 받은 황족들과 극소수의 친인척 관계인 귀족들만 들어갈 수 있었다.
그렇기에 아쉽지만 어쩔 수 없었다.
디아나는 걱정스런 눈빛으로 바라보는 후작을 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이해해 주니 고맙구나, 디아나.”
후작이 답하듯 온화한 미소를 지은 순간 황궁에 도착한 듯 마차가 멈추었다.
“태양궁에 도착했습니다, 각하, 영애.”
마부가 아닌 에드윈의 목소리가 들리고 마차 문이 열렸다.
후작이 먼저 내리고 디아나는 에드윈의 손을 잡고 마차에서 내렸다.
“……와, 크다.”
2황자의 궁에 가 보긴 했지만 그 궁전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커다란 궁전이 눈앞에 있었다.
“황성 중 가장 큰 궁전인 태양궁이랍니다. 특히 하늘에 닿을 듯한 저 뾰족한 지붕은 황제 폐하의 높은 위엄을 상징한다고 해요.”
눈을 커다랗게 뜨고 감탄하는 디아나를 다정한 눈빛으로 보던 에드윈은 몸을 살짝 숙이며 속삭였다.
에드윈의 설명을 들은 디아나는 빛나는 지붕을 향해 시선을 높게 들었다.
“어서 오거라.”
하늘 높이 솟은 금빛 지붕을 보던 디아나는 낯선 목소리에 시선을 내렸다.
빛을 받아 번쩍이는 금발과 금안, 금실이 수놓아진 의복. 디아나는 그가 제국의 황제란 걸 알아차렸다.
“폐하께서 마중을…….”
후작의 놀란 목소리가 들리고 황제가 성큼성큼 디아나의 앞으로 다가왔다.
“제국의 하나뿐인 태양이신 황제 폐하를 뵙니다.”
“제국의 하나뿐인 태양이신 황제 폐하를 뵙니다.”
후작과 디아나의 인사가 거의 동시에 울렸다.
“일어나게, 후작. 일어나렴.”
후작에게 손을 흔들어 보인 후작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디아나에게 말했다.
천천히 숙였던 몸을 일으킨 디아나는 황제를 바라보았다.
대공과 아주 많이 닮은 얼굴에 디아나의 눈빛이 잘게 떨린 그때, 황제의 떨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네게 무슨 말부터 꺼내야 할지…….”
황제는 디아나의 얼굴을 떨리는 눈동자로 응시했다.
선명한 금발과 금안.
황후는 디아나가 아리엘을 똑 닮았다 했지만 황제는 디아나의 얼굴에서 아리엘뿐만 아니라 크로우드의 얼굴도 보았다.
특히 선명한 금빛은, 크로우드와 아주 똑 닮았었다.
디아나와 시선을 마주하던 황제는 천천히 몸을 낮추었다.
한쪽 무릎을 꿇는 황제의 모습에 뒤에 시립해 있던 시종과 시녀, 기사들은 물론 후작과 에드윈이 어쩔 줄 몰라 했다.
제국의 주인인 황제가 몸을 낮춘다는 것은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으니까.
“폐하…….”
시종장이 황제에게 황급히 다가와 고개를 조아렸지만 황제는 손을 들어 시종장을 막았다.
범상치 않은 주변의 분위기에 디아나의 얼굴에도 당혹감이 서리려던 그때, 디아나를 마주 본 황제의 입술이 열렸다.
“미안하구나.”
황제는 흐린 미소를 지으며 디아나에게 말을 이었다.
“네가 받았을 상처들에 이런 사과 같은 건 소용없다는 것을 안단다. 하지만 그래도 너에게 꼭 말하고 싶었단다. 진심으로 미안하다고. 용서해 달라 말하는 것은 아니니 부담 가지지 않아도 된단다. 얼마의 시간이 걸려도 좋으니 네가 하고 싶은 대로, 네 마음이 가는 대로 하렴. 내가…… 널 이름으로 불러도 되겠니?”
디아나, 이 이름마저 대공이 지어 준 것이 아니라 했기에 황제는 허락을 구하고 싶었다.
“……네, 폐하.”
디아나는 느리게 답했다. 황제가 자신에게 미안하다 말한 그 순간부터 주변의 모든 것들이 흐려졌었다.
진심으로 사죄하는 황제의 눈빛은 죄책감과 슬픔으로 가득했다.
한 번도 본 적 없었던 사이인데, 황제는 너무도 마음이 아프다는 듯 애달픈 눈빛으로 디아나를 보고 있었다.
그 진심이 전해졌기에 디아나는 후작에게 그랬듯 경계심을 내려놓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후작에게처럼 친근한 호칭은 나오지 않았다. 황제를 볼 때마다 대공의 얼굴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정말 고맙구나, 디아나.”
황제는 환한 미소를 지어 보이곤 낮추었던 몸을 일으켰다. 마음 같아선 디아나에게 손을 내밀어 함께 들어가자 하고 싶었지만 이제 겨우 인사를 나눈 사이이니 부담을 줄 순 없었다.
“디아나, 그럼 이만 궁으로 들어가자꾸나. 후작도 드시게나.”
황제는 미련을 뒤로하고 먼저 성으로 걸음을 옮겼다.
“디아나, 우리도 가자꾸나.”
“네, 할아버지.”
디아나는 상냥한 미소를 그린 후작의 손을 잡고 거대한 태양궁으로 첫발을 내디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