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 * *
[아이야, 행복했던 기억만 떠올리렴.]
아무것도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 어둠 속에 잠겨 있던 디아나는 낯선 목소리를 들었다.
곧 한 번도 들어 본 적 없는 아름다운 목소리가 연이어 들려왔다.
[아가야.]
심장이 간질간질해질 만큼 아름다운 목소리. 하지만 눈을 뜨는 것이 쉽지 않았다.
깨고 싶지 않아.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는 고요함이 좋아 눈을 더 꼭 감자 선명한 목소리가 한 번 더 울렸다.
[아가야, 너무 보고 싶었단다. 예쁜 내 아가.]
애달프고 벅찬 감정이 가득한 목소리였다. 그리고 따스한 온기가 온몸을 감싸 안았다.
마치 엄마의 품에 안긴 거 같은 느낌.
디아나는 귓가에 들리는 심장 박동 소리에 느리게 눈을 떴다.
그리고 흐릿한 시야로 누군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게 보였다.
흐릿한 시야 속에서 달빛을 닮은 은발을 본 순간 모든 것들이 사라졌다.
‘……누구지?’
[아가야, 엄마가 행복하게 해 주고 싶었는데…… 이렇게 먼저 떠나면 안 되는데…….]
울먹이는 목소리에 디아나의 가슴도 먹먹해졌다.
엄마?
디아나의 심장이 아릿하게 아파 온 순간 눈앞이 새카맣게 변했다.
다정했던 목소리도, 따스한 품도 사라졌다.
끝없는 어둠으로 추락하는 소름 끼치는 감각에 디아나는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며 눈을 번쩍 떴다.
“하아…….”
디아나는 작은 숨을 내쉬었다.
심장이 쿵쾅거리고 등 뒤로 식은땀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흐린 초점을 맞추려 몇 번 눈을 깜빡이자 익숙한 천장이 보였다.
‘이곳은…… 내 방이야.’
대공 저택에 있는 자신의 방이 분명했다.
‘내가 왜 여기에…….’
분명 피크닉을 갔었는데.
기억을 떠올리려 하자 머리가 지끈거렸다. 황실 마차를 타고, 2황자와 어색한 대화를 나누고 그리고…… 그 뒤에 무슨 일이 벌어진 거 같은데 정확히 기억나지 않았다.
애써 기억을 더듬어 보려 하자 이마에 송골송골 식은땀이 맺히고 몸이 힘들었다.
‘왜 이러지…….’
피비를 부르고 싶었지만 입술을 뗄 힘도 없을 만큼 온몸이 축 늘어졌다.
‘너무…… 피곤해.’
비에 젖은 꽃잎처럼 온몸이 축 늘어졌다.
어서 다시 잠들라는 듯 눈꺼풀이 무거워지고 눈이 스르르 감기려던 순간 디아나는 누군가 자신의 손을 잡고 있단 걸 깨달았다.
피비인가.
손에서 느껴지는 따스한 온기에 천천히 시선을 내리자 어둠 속에서도 선명한 빛을 발하는 금발이 눈에 들어왔다.
‘대공 전하…….’
디아나의 손을 꼭 잡은 채 의자에 기대어 눈을 감고 있는 사람은 피비가 아닌 대공이었다.
‘대공 전하가 왜 여기에…… 이렇게 있는 거지.’
눈을 감고 있는 대공은 잠이 든 거 같았다.
디아나는 촛불의 불빛이 아른거리는 대공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자신의 손을 꼭 잡고 있는 것도 이상했지만 울기라도 한 듯 붉은 눈가와 자면서도 미간을 찡그리고 있는 대공의 얼굴은 몹시 괴로워 보였다.
그리고 그에게 잡힌 손이 불편했다.
이런 따스한 온기를 주고받을 사이가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불편함도 잠시 디아나는 밀려드는 수마를 참을 수 없었다.
[아직 몸이 회복되지 않았으니 좀 더 자거라.]
알 수 없는 목소리가 머릿속을 울린 순간 디아나는 무거워지는 눈꺼풀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눈을 감았다.
다시 눈을 떴을 땐 대공이 없길 바라면서.
* * *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매서운 소낙비가 그치고 구름 하나 없는 새벽하늘이 밝았다.
그리고 아침이 막 밝은 그 시각 푸르른 하늘과 달리 조금의 빛도 들어오지 않는 지하 감옥의 문이 열렸다.
뚜벅이는 여러 명의 발소리가 감옥 안을 울리자 철장 안의 죄수들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들이 들고 있는 튼튼한 밧줄은 형을 집행하기 위한 도구였으니까.
로운은 지하 감옥 가장 안쪽, 강력한 마법진이 그려져 있는 특별 감옥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곳엔 정신 줄을 놓은 레아가 있었다.
사람의 몰골이라고 하기엔 처참할 만큼 엉망이었지만 로운의 얼굴엔 일말의 동정도 스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레아가 지은 죄에 비해 벌을 덜 받았다고 생각했다. 로운은 넋을 놓은 레아의 모습에 미간을 찡그리며 입을 열었다.
“형 집행 시간이다.”
철그덕, 기사들이 철장의 자물쇠를 풀고 감옥 안으로 들어갔다. 벽에 기대 축 늘어진 레아를 끌어 목에 밧줄을 감자 정신이 돌아온 듯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고 있던 레아의 시선이 로운을 향했다.
레아는 몸을 비틀며 로운에게 외쳤다.
“세이아, 그 아이는 건들지 마! 세이아는 아무런 죄가 없어! 그러니 제발 그 애를 놓아줘, 제발 ”
“네 딸을 지키고 싶었다면 처음부터 이런 끔찍한 짓을 저지르지 말았어야지. 결국 네 딸은 네가 불행하게 만든 거다.”
“거짓말! 닥쳐! 세이아는 감히 너 따위가 입에 담을 수……!”
“형 집행해.”
로운은 더 이상 귀를 긁는 레아의 목소리를 듣고 싶지 않았다.
로운의 명령에 기사들이 줄을 당기자 레아의 몸이 들렸다. 마지막 순간 레아는 정령을 부를 수는 없지만 모든 곳에 스며 있는 어둠이 자신의 말을 듣길 바라며 속삭였다.
“어, 둠의 정령, 이시여…… 제 딸을…… 지켜…… 주…….”
레아의 입술이 움직이는 것을 본 로운이 미간을 좁혔다.
하지만 그 소리가 너무 작아 로운에게 들리지 않았다.
“허튼소리 못하게 빨리 끝내라.”
로운의 싸늘한 명령에 기사들의 손에 힘이 가해지고 이윽고 레아의 버둥거림이 멈췄다.
“시신은 은밀히 옮겨 짐승들에게 던져 줘라.”
“네.”
기사들이 레아의 시신을 수습하는 것을 보며 로운은 통쾌함이 아닌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레아는 죽었지만 그녀가 저지른 악행의 상처들이 너무도 선명히 남았기 때문이었다.
죄인은 죽었음에도 무엇 하나 해결된 것이 없었고, 상처의 고통은 남은 자들의 몫이었으니까.
로운은 어두운 얼굴로 지하 감옥을 나갔다.
* * *
잠시 잠이 들었던 대공은 창문으로 들어오는 아침 햇살에 눈을 번쩍 떴다.
그리고 그는 곧장 디아나부터 살폈다.
혹시라도 그가 잠든 사이 디아나의 안위에 무슨 일이 생겼을까, 불안함에 금안이 흔들렸다.
디아나의 숨소리를 확인한 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히도 여전히 잠을 자는 듯 디아나의 숨소리는 규칙적이었다.
대공은 의자에 털썩, 앉으며 거친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하아…… 언제 잠이 든 것이지.”
자신도 모르게 피곤함을 이기지 못하고 잠이 든 거 같았다. 일주일 넘게 팽팽히 당겨진 신경에 거의 잠을 자지 못했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겠지만 지금은 그저 제 몸 상태에 짜증이 일뿐이었다.
“한심하기 짝이 없군.”
자조적인 한숨을 내쉰 그때,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울렸다.
“대공 전하, 로운입니다.”
“들어와.”
방문을 열고 들어온 로운이 대공을 향해 예를 갖추려 했지만 대공이 먼저 입을 열었다.
“인사는 됐다. 레아의 형은 집행했느냐.”
“네, 시신은 명하신 대로 짐승들의 먹이로 던져 주었습니다.”
“……수고했다.”
대공의 목소리는 로운의 어두운 얼굴만큼이나 무거웠다.
레아를 죽였지만 10년 전으로 돌아갈 수도, 디아나가 겪은 일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암살자들의 조사는 끝났느냐.”
“네, 암살자들은 레아에게 약 50골드 상당의 보석을 받고 일을 맡았다고 자백했습니다. 한데 정확히 어떤 명령을 들었는지 기억을 못 하는 걸로 봐선 어둠술에 기억이 조작된 것 같았습니다.”
“어둠술에 속았다고 하더라도 황족을 시해하려 한 죄, 기사들을 죽인 죄가 크니 본보기를 보여 주기 위해서라도 암살단을 한번 소탕해야겠구나. 그래야 쓸데없는 소문들이 나지 않을 테니까. 오늘 폐하께 인가를 받아 내일 바로 황궁 기사들과 함께 암살단을 치도록 해라.”
“네, 전하.”
“그리고 로운, 비밀리에 일립스를 구해라.”
“일립스라면…… 독초가 아닙니까, 전하.”
“그래, 맞다.”
일립스는 무색무취, 그리고 먹는 순간 몇 분 내에 죽게 되는 강력한 독초였다.
빨리 죽음을 맞이하기에 다른 독에 비해 그 고통이 짧다면 짧다 할 수 있었다.
“일립스는 갑자기 왜…….”
로운은 의아함에 묻다 말을 멈추었다.
대공이 일립스를 어디에 쓰려는 것인지 알아차렸기 때문이었다.
“세이아를…… 죽이려 하십니까.”
“굳이 후환을 남겨 둘 이유는 없으니까. 그리고 아무런 죄 없는 아이라기엔 그 아이는 제 친모를 너무도 닮았어. 살려 두면 분명 후환이 될 것이다.”
“네. 전하 한데…… 대공녀님께선 여전히 의식이 없으십니까?”
“아직 없다. 어둠의 술식을 스스로 풀었다. 술식을 푸는 것은 마탑주 정도의 고클래스 마법사들만이 할 수 있을 만큼 많은 마나가 소모되는 일이지. 한데 그것을 아직 의식을 치르지도 않은 불안정한 상태에서 했으니…… 죽지 않은 것만으로도 기적이다.”
기적이거나, 정령의 힘이 엄청나거나.
대공은 잠든 디아나를 복잡한 눈빛으로 응시하다 침대 옆 긴 줄을 잡아당겼다.
디아나의 곁에 계속 머무르고 싶었지만 해야 할 일이 많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부름을 받은 피비가 도착하자, 대공은 그만 자리에서 일어났다.
“들어와라.”
“대공 전하를 뵙니다.”
“디아나가 땀을 많이 흘린 거 같으니 옷을 갈아입히고 몸을 닦아 주어라.”
“네, 전하.”
피비가 침대로 다가가자 대공은 문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문을 열기 전 대공은 피비를 돌아보았다.
“혹, 디아나가 의식을 차리면 바로 알리거라.”
“네, 전하.”
대공은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억지로 옮겨 방을 나갔다.
* * *
‘감히 대공녀의 행세를 하다니. 비천한 하녀의 딸 주제에.’
‘대공 전하의 핏줄도 아니었어. 우리 모두를 속인 거야!’
‘가짜 주제에 진짜 대공녀님을 죽이려 하다니!’
경멸과 혐오 가득한 시선으로 자신을 내려다보는 사람들 속에서 세이아는 몸을 덜덜 떨었다.
‘아니야, 아니야, 난 하녀의 딸이 아니야. 대공녀야, 대공인 아버지의 하나뿐인 딸인 대공녀라고!’
‘거짓말!’
누군가의 손이 세이아를 향해 뻗어진 순간 세이아는 비명을 지르며 번쩍 눈을 떴다.
“저리 가! ……하, 하아.”
거친 숨을 몰아쉬는 세이아의 얼굴은 백지장처럼 하얗게 질려 있었다.
세이아는 턱 끝을 덜덜 떨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익숙한 천장과 가구들. 이곳은 자신의 방 안이었다. 세이아가 머물던 대공녀의 방.
하지만 그녀가 두려움에 덜덜 떨고 있어도 방 안을 지키는 하녀들은 세이아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차갑게 굳은 얼굴로 방을 지키고 있을 뿐이었다.
세이아는 처음 겪는 경멸과 외면, 외로움을 견디기 힘들었다.
꿈속에서처럼 모든 사람들이 자신을 손가락질하고 욕할 것 같았다.
“흑…… 흑.”
퉁퉁 부은 눈에서 눈물이 쏟아졌지만 아무도 그녀를 위로해 주지 않았다. 세이아는 서러운 울음을 터뜨리며 이불을 뒤집어썼다.
그렇게 한참을 울다 지쳐 버린 세이아는 이불을 뒤집어쓴 채 숨을 죽였다.
어차피 그녀가 움직여 봤자 하녀들의 싸늘한 시선이 더욱 짙어질 뿐이었으니까.
잠든 척, 가만히 이불을 뒤집어쓰고 있자 얼마 지나지 않아 방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곧 하녀들의 대화 소리가 들려왔다.
“식사 가져왔어.”
“응. 안 그래도 배고팠는데, 넌 밥 먹었어?”
“나야, 먹었지……. 근데 이렇게 얘기해도 돼?”
“울다가 잠들었어.”
“어휴, 이게 대체 무슨 일이래, 대공녀가…… 가짜였다니. 아직도 믿기지가 않아.”
“너도 봤잖아, 그날 디아나 아가…… 아니, 대공녀님의 모습이 바뀌는걸. 대공녀님이 가짜였단 것도 충격이지만 레아 그 여자가 어둠술사였다니. 난 어둠술사가 아직 남아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어.”
“맞아. 어둠술사가 사라진 지가 언제인데…… 오늘 아침에 죽었다며, 레아…….”
하녀의 조심스런 목소리에 이불을 뒤집어쓰고 있던 세이아의 몸이 움찔했다.
레아가…… 죽었다고?
세이아의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린 순간 다른 하녀가 답했다.
“응. 시신이 오늘 새벽 아침에 저택을 나가는 걸 몇몇 하인들이 봤다더라. 교수형이었다던데…… 어후, 너무 끔찍해.”
“그럼 세이아…… 아가씨는 어떻게 되는 거지?”
“그게, 내가 어제 기사님들 식사 준비하러 갔다가 살짝 들었는데…… 세이아 아가씨가 대공 전하의 핏줄이 아니래.”
“뭐?”
“목소리 낮춰, 아직 공식적으로 말씀하신 건 아니니까. 여튼 대공 전하의 자식이 아니라 노예로 신분이 강등된다고 들었어.”
“노예라니…….”
“그러게, 하늘 같은 대공녀님으로 살다 한순간에 노예가 되고, 누군 사생아에서 대공녀라니.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이럴 줄 알았으면 디아나 아가씨한테 좀 잘해 드릴걸…….”
하녀들이 한숨을 쉬던 그때, 방문이 열렸다.
“리리, 주방에 일손이 부족하대. 가자.”
“갑자기 왜? 나 아까까지 주방에 있었는데?”
“대공녀님께서 의식을 차리셔서, 대공 전하께서 대공녀님의 식사를 준비하라 명하셨어.”
“대공녀님이 의식을 차리셨다고?”
“그래, 그러니 빨리 가야 돼.”
“아, 알았어. 루나, 나중에 봐.”
리리라 불린 하녀가 서둘러 방을 나가는 발소리가 들리고 곧 문이 닫혔다.
“대공녀님이 의식을 차리셨다니 이제 세이아 아가씨는 끝이겠네.”
남은 하녀의 말이 고요한 방 안을 울린 그때, 하녀들의 대화를 모두 들은 세이아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내가, 노예가 된다니.’
레아가 죽었단 사실보다 노예로 신분이 강등된다는 것이 더 충격적이었다.
‘디아나는 고귀한 대공녀가 되고 난 노예가 된다는 거야?’
노예가 된 자신 앞에 선 디아나를 상상하자 세이아는 분노로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싫다, 너무 싫다.
노예로 살고 싶지 않아.
‘이게 다…… 디아나 때문이야.’
그 애만 없었다면 처음부터 밝혀지지도 않았을 진실들이었다.
디아나만 없었다면 자신은 영원히 대공녀로 살았을 것이다.
디아나만, 없었다면.
디아나를 향한 세이아의 어그러진 분노와 복수심이 머릿속을 뒤덮은 순간 스산한 목소리가 귀를 울렸다.
[내가 도와줄까.]
귀를 웅웅 울리는 낯선 목소리에 세이아는 몸을 흠칫했다.
이 방 안엔 하녀와 세이아 단둘뿐이었으니까.
하녀도 자신도 아니라면…… 이 목소리는 누구지.
‘당신…… 누구야…….’
세이아가 두려움이 서린 물음을 던지자 머릿속으로 목소리가 울렸다.
[난 모든 인간들의 악을 먹고 사는 어둠의 정령이다.]
어둠의 정령.
세이아는 그녀에게 찾아온 이 목소리가 무엇인지 알아차렸다.
레아의 핏빛 눈동자와 팔 위로 새겨졌던 선명한 어둠의 표식을 떠올린 세이아는 본능적인 공포심에 몸을 움츠렸다.
‘난 어둠의 힘은 바라지 않아.’
[난 무섭고 끔찍한 것이 아니다. 네 어미의 영혼과 너의 강한 원념이 나의 깊은 잠을 깨운 것이다. 그러니 두려워 마라. 난 널 해치려는 것이 아니라 네가 염원하는 그 복수를 도와주려는 것이니까.]
‘……내 복수를 도와준다고?’
두려움이 가득하던 세이아의 눈동자에 이채가 스쳤다.
[네 영혼의 소유권을 내가 가지게만 해 준다면 난 네 복수를 이루어 줄 것이다.]
‘영혼의 소유권?’
[무섭고 아픈 일이 아니다. 그저 네가 죽고 나서 네 영혼을 내가 가지게 되는 것뿐이다. 네가 살아 있는 동안은 네 영혼을 건드리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나와 계약하겠느냐.]
영혼의 소유권…….
섬찟한 말이었지만 세이아에게 있어 자신을 둘러싼 현재 상황보다 무서운 건 없었다.
‘노예로 살아갈 바에야 죽고 나서 영혼을 주는 게 더 나아. 나만 이렇게 불행해질 순 없어. 디아나, 너도 내가 반드시 불행하게 만들 거야.’
세이아는 눈을 번뜩이며 달콤하게 속삭이는 어둠의 정령에게 답했다.
‘계약하겠어.’
[이로써 너와 나의 계약이 성립되었다.]
스산한 목소리가 울리고 미소를 짓던 세이아의 얼굴이 굳었다.
“하윽!”
온몸이 불에 타는 듯 고통스러웠기 때문에.
속이 비틀리고 살결이 모두 타오르듯 미친 듯이 뜨거웠다.
세이아는 비명을 지르며 온몸을 비틀고 싶었으나 손가락 하나 제 의지로 움직일 수 없었다.
[참으로 네 어미를 많이 닮았구나. 어리석은 인간이여, 헛된 욕심에 일그러진 너의 영혼은 이제 영원히 나의 것이다. 하지만 걱정 말거라. 네 영혼과 육신은 이제 사라지겠지만 계약대로 이뤄 줄 테니.]
음산한 목소리가 세이아의 머릿속을 울렸다.
악으로 가득한 레아의 영혼이 깨운 어둠은 자비심이라곤 없었다.
어둠은 세이아의 괴로운 비명을 즐기며 세이아의 심장을 불태웠다.
꺼지라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목구멍이 불에 타는 듯, 나오는 것은 뜨겁고 끔찍하게 고통스런 숨뿐이었다.
아무도 듣지 못하는 고통의 비명을 지르는 세이아의 눈이 홉뜨인 순간 갈색 눈동자가 새빨간 핏빛으로 바뀌었다.
스르르 온몸의 힘을 푼 세이아는 붉은 눈을 요요히 깜박이며 손을 접었다, 폈다.
어둠의 정령에게 완전히 잡아먹혀 악의 영혼만이 남은 세이아는 짙은 미소를 지으며 웅크렸던 몸을 일으켰다.
“일단 여기를 나가 볼까?”
* * *
“대공녀님…….”
몽롱한 의식 속에서 디아나는 피비의 걱정 가득한 목소리를 들었다.
‘피비…….’
눈을 뜨고 싶지만 몸이 물에 젖은 듯 무거웠다.
‘좀 더 자고 싶어.’
몸을 웅크리고 몽롱함에 몸을 맡기려던 찰나 디아나는 낯설면서도 어딘지 익숙한 목소리를 들었다.
[아이야, 이제 그만 일어나야 할 때다.]
다정하면서도 단호한 목소리가 머릿속을 울렸다.
그리고 디아나는 머릿속을 울리는 목소리를 들은 적이 있었다.
하지만 어디서 들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았다.
‘……당신은 누구지?’
[난 너와 피로 맺어진 가디언, 아주 오랜 시간 동안 널 만나기를 기다려 왔단다.]
‘……가디언?’
[그래, 너와 평생을 함께할 가디언이지. 하지만 난 아직 봉인이 풀리지 않았어. 봉인이 완전히 풀리기 위해선 네가 내가 잠들어 있는 곳으로 와야 한단다, 아이야. 이제 너의 진짜 모습을 되찾았으니, 널 기다리고 있는 내게 너무 늦지 않게 찾아와 다오.]
널 기다리고 있으마.
마지막 말과 함께 디아나의 흐렸던 기억들이 선명해졌다.
2황자와 이야기를 나누던 순간 크게 흔들린 마차, 폭발음과 암살자들 그리고 자신을 죽이려 했던 레아.
가디언의 목소리를 들은 순간 몸속에서 폭발하듯 치솟던 힘과 뜨거워졌던 몸.
눈을 감기 직전 보았던 대공의 충격을 받은 얼굴까지.
디아나는 모든 순간을 기억해 냈다.
“하…… 하아…….”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 올린 디아나는 거친 숨을 내쉬었다.
한 번에 많은 기억들이 떠오르자 심장이 쿵쾅거렸기 때문이었다.
“아가씨, 아니, 대공녀님! 정신이 드세요?”
천천히 눈을 깜박이며 천장을 바라보자 피비의 놀란 목소리가 옆에서 들려왔다.
고개를 돌리자 피비가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자신을 보고 있었다.
“……피비.”
디아나는 딱 붙어 떨어지지 않으려는 입술을 억지로 뗐다.
약간 갈라지는 목소리가 흘러나왔지만 그 목소리조차 감격스럽다는 듯 피비가 눈물을 한 방울 흘렸다.
“대공녀님, 깨어나셔서 정말, 정말 다행이에요. 의원은 아무런 이상이 없다고 했지만 갑자기 모습도 바뀌시고…….”
피비는 크흡, 떨리는 숨을 들이마시곤 말을 이었다.
“흡…… 혹시라도 못 깨어나실까 봐 너무 무서웠어요.”
정말 두려웠던 듯 피비의 목소리와 손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난…… 괜찮아, 피비. 그보다, 나 좀 앉고 싶은데.”
“아, 네. 제가 일으켜 드릴게요.”
피비는 디아나의 상체를 조심스럽게 일으켰다. 피비의 도움을 받아 상체를 일으킨 디아나는 침대 헤드에 등을 기댔다.
눈물을 닦고 디아나를 보며 미소 짓던 피비는 무언가 떠오른 듯 황급히 몸을 일으켰다.
“아, 대공녀님, 전 대공녀님께서 깨어나셨다고 알려야 해서…… 잠시만, 잠시만 계세요.”
“…….”
피비는 디아나가 뭐라 말하기도 전에 급히 방을 나갔다. 피비가 나간 문을 잠시 바라보던 디아나는 어깨를 넘어 가슴께에 닿아 있는 자신의 머리칼을 내려다보았다.
대공 전하의 머리칼과 똑 닮은 금발.
디아나는 손끝으로 자신의 머리칼을 잡았다. 그리고 가차 없이 잡아당겼다.
“아…….”
그러자 두피에서 머리칼이 뽑힐 거 같은 선명한 아픔이 느껴졌다. 이 금실 같은 머리칼은 자신의 것이 확실하다고 말이다.
‘꿈이길 바랐는데, 꿈이 아니었네.’
의식을 차리기 전, 쓰러지기 전의 순간들이 기억났기에 자신의 모습이 바뀌었다는 건 알고 있었다.
“대공녀…….”
피비는 분명 자신을 그리 불렀었다.
‘모습이 바뀌었다곤 하지만 어떻게 내가…… 대공녀지?’
디아나는 마지막으로 보았던 대공의 경악스런 얼굴이 떠올랐다.
자신을 대공녀라 부르던 피비, 대공의 경악, 그리고 진짜 모습을 찾았다 말했던 꿈속의 가디언.
“……거울을 봐야겠어.”
디아나는 바뀐 자신의 모습을 직접 확인하고 싶었다.
진짜 모습.
가디언이 했던 그 말이 자꾸 걸렸기 때문에.
침대에서 멀지 않은 곳에 전신 거울이 있었다. 디아나는 천천히 다리를 움직여 침대에서 내려갔다.
순간 다리에 힘이 풀려 몸이 비틀거렸다. 가까스로 협탁을 짚어 넘어지지 않았다.
“후…….”
디아나는 숨을 천천히 내쉬며 조심스럽게 한 걸음씩 내디뎠다. 그렇게 위태로운 걸음으로 마침내 거울 앞에 선 디아나는 거울 속의 자신을 바라보았다.
“……아.”
짧은 감탄사가 저도 모르게 흘러나왔다.
금을 박은 듯한 눈동자와 찬란하게 빛나는 금발.
색 하나 바뀌었을 뿐인데 디아나는 거울 속의 자신이 너무도 낯설었다.
누가 보아도 고귀해 보이는 자신의 모습이 말이다.
“이게…… 나라고?”
거울을 향해 손을 뻗자 거울 속의 자신도 손을 들었다.
고귀한 금빛을 가진 소녀는 자신이 맞았다.
디아나의 금빛 눈동자가 옅게 흔들린 순간 방문이 벌컥, 거칠게 열렸다.
“디아나.”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디아나가 기다린 피비가 아닌 대공이었다.
디아나의 앞으로 한달음에 달려온 대공은 무릎을 굽히며 몸을 낮추었다.
“디아나, 괜찮은 것이냐? 어디 아픈 곳은 없느냐? 이제 의식을 차렸는데 왜 일어나 있는 게냐, 어디 안 좋아지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대공은 숨도 쉬지 않고 말했다.
그는 걱정 가득한 눈빛으로 디아나의 이곳저곳을 살펴보았다.
가끔 자신을 바라보던 흐릿한 걱정도, 복잡해 보이는 눈빛도 아니었다.
대공은 또렷하게 디아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주 애달픈 눈빛으로.
디아나는 걱정을 넘어 불안해 보이는 대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디아나는 눈치가 빠른 만큼 자신의 상황에 큰 변화가 생겼다는 것은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디아나를 바라보는 대공의 감정들이 이해되지 않았다.
아니 그의 달라진 태도가 왜인지 알고 싶지도 않았다.
디아나는 이미 다시는 대공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겠다 결심했으니까.
“디아나, 침대로…….”
그래서 디아나는 자신을 향해 손을 뻗는 대공에게서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분명히 자신의 손을 피하는 듯한 디아나의 모습에 대공의 금안이 흔들렸다.
그는 말을 끝내지 못하고 디아나의 눈을 응시했다.
그와 닮은, 아름다운 금빛 눈은 차갑게 그를 거부하고 있었다.
“……대공 전하를 뵙니다.”
디아나는 조금 늦은 예를 갖추었다.
디아나의 인사는 군더더기 없이 완벽했지만 그만큼 좁힐 수 없는 거리감이 느껴졌다.
“……예는 갖추지 않아도 된다. 피비, 디아나를 부축해 주거라.”
대공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자신을 거부하는 것이 분명한 아이에게 억지로 다가갈 순 없으니까.
피비가 황급히 디아나에게로 다가와 팔을 잡았다.
“대공녀님…… 침대로 가셔요.”
“응, 피비.”
디아나는 피비에게 옅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자신을 향해서는 짓지 않는 그 미소에 대공의 심장이 아릿했다.
디아나가 침대 헤드에 몸을 기대고 대공은 침대 맡에 놓인 의자에 앉았다.
디아나는 슬픈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대공을 보다 주변으로 시선을 돌렸다.
어색한 얼굴로 눈치를 살피는 피비, 죄를 지은 것처럼 무거운 얼굴로 고개를 숙이고 있는 로운.
디아나는 자신을 둘러싼 모든 것에 위화감을 느꼈다.
‘대공녀와 관련이 있는 거겠지.’
왜 자신을 대공녀라 부르는 것인지 물으려던 순간 방문을 알리는 소리가 울렸다.
“전하, 의원께서 도착하셨습니다.”
“들여라.”
“대공 전하와 대공녀님을 뵙니다.”
의원은 대공과 디아나에게 예를 갖추었다. 그 모습에 디아나의 미간이 살짝 좁아졌다.
대공녀.
디아나는 그 불편한 호칭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모두가 자신을 대공녀라 부르는 이 상황이 거북하기만 했으니까.
“일어나라. 디아나의 몸부터 살피거라.”
“네, 전하.”
디아나에게 다가온 의원이 고개를 숙였다.
“대공녀님, 그럼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의원은 평소보다 더 깍듯이 예의를 차리며 디아나의 몸을 진찰했다.
“혹 어지럽거나 아프신 곳은 없으십니까.”
“……없어요, 힘이 좀 없을 뿐 아프진 않아요.”
“네.”
의원은 진찰을 마친 듯 대공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전하, 대공녀님의 몸은 괜찮으십니다. 힘이 없으신 것은 잘 먹고 잘 쉬시면 곧 회복되실 겁니다. 곧 몸을 보하는 약을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알겠다.”
“그럼, 전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의원이 인사를 올리고 방을 나갔다.
방 안에 다시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대공 전하.”
디아나는 이 불편함을 빨리 벗어나고 싶어 대공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대공과 디아나의 금빛 시선이 마주했다.
“왜 자꾸만…… 절 대공녀라고 부르는 건가요? ……전 대공녀님이 아닌걸요…….”
디아나는 곤란한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대공은 디아나를 보며 입술을 달싹였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두려웠기 때문에.
하지만 더는 망설이고 있을 수 없었다. 그는 디아나의 황금안을 똑바로 마주 보며 천천히 입술을 뗐다.
“……디아나, 모두가 널 대공녀라 부르는 것은 네가 내 진짜 딸이기 때문이란다.”
“진짜 딸…… 제가 비록 대공 전하의 인정을 받진 못했지만 저 역시 대공 전하의 피를 이어받았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이제야…… 진짜 딸이란 건가요……?”
디아나는 대공의 말에 상처를 받은 듯 두 손을 그러쥐었다.
대공과 똑같은 금발과 금안.
이렇게 모습이 바뀌고 나서야 딸이라 인정해주겠다, 디아나에겐 대공의 말이 그렇게 들렸다.
디아나의 떨리는 손을 본 대공의 얼굴이 당황으로 물들었다.
절대 그런 뜻으로 한 말이 아니었다.
“이걸 너에게 어찌 설명해야 할지…….”
대공은 디아나가 몰랐던 진실을 어떻게 풀어서 설명해야 할지 머릿속에서 뒤엉키는 사실들을 빠르게 풀어냈다.
그리고 침착하게 디아나에게 말을 꺼냈다.
“디아나 네가 이해하기 어렵겠지만 쉽게 말해서 레아가 낳은 자식은 내 피가 섞이지 않은, 처음부터 내 자식이 아니었단다.”
“……네?”
“그러니까 내 자식은 처음부터 너 하나뿐이었단다. 네가 원래 나와 대공비의 자식이었고 유일한 대공녀였지만, 레아의 어둠의 술식으로 세이아와 네가 바뀌어 버린 것이란다.”
“……저와 세이아가 바뀌었다고요……?”
“그래. 내 자식을 낳지 않았음에도 내 자식을 낳았다 모두를 속이고 자기 자식인 세이아와 너를 어둠술로 바꿔버렸단다. 하지만 너의 몸속에 내재 되어있던 정령의 힘이 모든 게 끔찍한 거짓이란 걸 밝혀 이렇게 네가 본래의 모습을 되찾은 것이란다.”
긴말을 끝낸 대공은 짧은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긴장된 얼굴로 디아나를 바라보았다.
디아나가 어디까지 이해했을지 모르겠지만 자신이 대공녀였단 사실은 받아들인 거 같았다.
대공은 믿기 힘든 사실에 충격받았을 디아나를 위로하려 손을 뻗었다.
하지만 그의 손이 닿기 전 디아나의 작은 입술이 먼저 움직였다.
“……그렇군요.”
담담한 아이의 목소리가 방안을 울렸다.
어떤 충격도 느껴지지 않는 초연한 목소리에 대공의 손이 멈칫했다.
그는 디아나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디아나는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으며 마주보았다.
디아나의 반짝이는 금빛 눈동자엔 분노도 경악도 없었다. 그저 무감한 눈빛으로 가만히 그를 보고 있을 뿐이었다.
마치 이 모든 일이 타인의 일이라는 듯이.
“……디아나 괜찮은 것이냐……?”
대공의 물음에 디아나는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괜찮아요.”
대공의 눈빛이 순간 흔들렸지만 디아나는 정말 괜찮았다.
금발에 금안.
완전히 바뀌어 버린 자신의 모습을 봤을 때부터 엄청난 일이 생겼다는 건 본능적인 감으로 알았었다.
꿈속에서 알 수 없는 웅장한 목소리까지 들었었으니까.
이미 마음의 준비를 했기 때문일까, 모든 사실이 놀랍긴 했지만 엄청나게 충격적이진 않았다.
단지 자신을 그렇게 학대하면서 이상하게 세이아를 챙겼던 레아의 행동에 대한 이유를 이제는 알 것 같았다.
그리고 더더욱 레아를 용서할 수 없게 되었다.
디아나는 대공에게 물었다.
“레아와 세이아는 어떻게 되었나요?”
“레아는…… 사형되었고…… 세이아도 곧 대공 저택을 완전히 떠나게 될 것이다.”
레아가, 죽었다.
마지막으로 보았던 레아의 붉은 눈동자가 떠올랐다.
디아나를 마지막까지 응시했던 붉은 눈동자.
선명하게 그려지는 소름 끼치는 눈빛에 디아나의 손끝을 말아쥐었다.
두려움 때문이 아니라 갈 곳을 잃은 분노 때문에.
아직 레아에게 사과를 받지도 못했는데 이미 죽었다니.
레아가 사라져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은 많았지만 이렇게 정말 세상에서 사라졌다고 하니 자신의 억울함을 누군가에게 풀어야 할지 알 길이 없다.
디아나는 허무함에 꽉 그러쥔 손에서 힘이 빠졌다.
“디아나 미안하구나. 모든 게 어리석은 내 잘못이다.”
그때 대공의 낮은 음성이 울렸다.
대공이 고개를 숙이며 사과하고 있었다.
하지만 디아나는 그 사과를 받아주고 싶지 않았다.
모든 진실을 알게 된 지금 디아나는 레아뿐만 아니라 대공도 용서할 수 없었다.
이제 와 대공녀라고 해도, 자신의 딸이 맞다고 해도 디아나에게 대공이 싫다.
어둠술에 속았다고 해도 10년 동안 전장으로 떠나 자신을 방치했고 돌아와서도 디아나가 자신의 딸이란 걸 알지 못했다.
거기다 또 한 번 디아나를 버렸었다.
그런데 어떻게 대공을 아버지라고 받아들일 수 있을까.
대공녀라고 온 사람들이 자신을 떠받들어 준다고 해도 싫을 뿐이었다.
이제 와서 이 대공가에, 대공 전하에게 남은 애정 같은 건 없으니까.
“제게 사과하실 필요 없어요. 앞으로도 사과하지 마세요. 듣고 싶지 않아요.”
디아나의 싸늘한 목소리에 대공의 눈빛이 크게 흔들렸다.
“디아나, 난…….”
“이제 와서 전하께서 제 아버지라 한다고 뭐가 달라지죠? 지난 10년간 전 아버지라 믿었던 대공 전하께 이미 수없이 외면당했는걸요.”
다급히 입을 열던 대공은 디아나의 말에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디아나는 대공의 흔들리는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전하, 전 고귀한 대공녀님으로 살고 싶지 않아요. 이 대공가도 대공 전하도 다 싫어요. 여태까지 절 사생아라 손가락질했던 기억들이 선명한걸요. 전 앞으로도 디아나로 살 거예요. 그러니 저한테 사과하지 마세요.”
아이답지 않은 또박또박한 말이었다.
그렇기에 한 글자 한 글자가 더욱 날카롭게 대공의 가슴을 후벼 팠다.
이미 마음을 굳게 닫은 듯 차분한 분노를 드러내는 디아나에게 대공은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
“지금 당장은 홀로 살아갈 수 없으니 좀 더 대공가에 머무르고 싶지만 대공 전하께서 이런 제가 불편하시다면 지금이라도 바로 나가겠습니다.”
자신을 죽이려 하는 레아가 이 세상에 없으니, 바깥세상으로 홀로 나간다 해도 어떻게든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디아나는 당장이라도 집을 나갈 준비가 된 결연한 눈빛을 보였다.
지금이라도 당장 영원히 그와 연을 끊을 준비가 되었다 말하는 거 같아 대공의 가슴이 더욱 무너져 내렸지만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차라리 아이처럼 엉엉 울며 어떻게 이럴 수 있냐고 소리를 질렀다면 수백 번 수천 번 용서를 빌었을 것이다.
하지만 디아나는 이미 모든 것을 정리한 눈빛으로 자신을 보고 있었다.
미안하다, 어리석은 아비를 용서해달라는 말들을 꺼낼 수 없었다.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지만 대공은 조여드는 목으로 간신히 침을 삼켰다.
“……불편하다니, 그럴 리가 있겠느냐...이곳이…… 이곳이 바로 너의…….”
너의 집이란 말은 차마 할 수가 없었다.
무슨 염치로 그런 말을 할 수 있을까.
대공은 말을 마무리 짓지 못하고 결국 입을 다물었다.
“……그럼 조금만 더 이곳에 머무를게요.”
“……얼마든지 네가 원하는 만큼 있으렴.”
“……더 할 말이 없으시다면 이만 쉬어도 될까요?”
디아나는 대공을 보고 싶지 않다는 듯 시선을 낮추었다.
자신을 외면하는 디아나의 모습에 심장이 욱신거렸지만 아픈 아이를 더 힘들게 할 순 없었다.
오늘은 이만 물러가야 했다.
“……그래, 푹 쉬렴.”
대공이 의자에서 일어나던 찰나 디아나는 갑자기 스치는 소름 돋는 기운에 고개를 번쩍 들었다.
“……레아?”
디아나는 이 기운을 느낀 적이 있었다. 붉은 눈을 번뜩이며 자신을 노려보던 레아에게서 흘러나왔던 검은 기운과 똑같았다.
디아나의 낮은 중얼거림을 들은 대공은 몸을 멈칫했다.
“디아나, 왜 그러느냐.”
갑자기 딱딱하게 얼굴을 굳히는 디아나를 본 대공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디아나는 팔에 돋아난 소름에 어깨를 잘게 떨다 대공을 바라보았다.
“전하, 정말 레아가 죽은 게 확실한가요?”
디아나는 불안이 서린 눈빛으로 대공을 바라보았다.
“분명 죽었습니다. 제가 직접 확인했습니다, 대공녀님.”
디아나의 물음에 대한 답은 대공이 아닌 로운이 답했다.
“죽었는데…… 왜…….”
“디아나, 왜 그러느냐. 갑자기 왜 그러는 것인지 말을 해 보렴.”
대공은 창백한 디아나의 얼굴에 다시 의자에 앉았다. 디아나와 시선을 맞춘 그는 불안해 보이는 작은 손을 잡았다.
차가워진 손에서 느껴지는 온기에 본능적으로 떨렸던 심장이 가라앉았다.
“기운이 느껴졌어요. 그날 레아의 몸에서 뿜어져 나왔던 검은 기운과 똑같은 기운이요. 지금은…… 사라졌지만…….”
디아나는 더 이상 느껴지지 않는 소름 돋는 기운에 말끝을 흐렸다.
‘대체 뭐였지?’
디아나의 말을 들은 대공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설마.”
대공은 디아나의 손을 놓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전하, 왜 그러십니까.”
“로운, 넌 이곳에서 디아나를 지키고 있어라.”
로운은 심각한 대공의 얼굴에 불안한 눈빛을 했으나 대공은 굳은 얼굴로 곧장 방을 나갔다.
대공은 급히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하인들은 대공의 다급한 모습에 눈을 휘둥그레 떴다.
“대공 전…….”
“대공 전하를 뵈…….”
한달음에 세이아의 방 앞에 도착한 그는 기사들의 인사도 무시하며 방문을 벌컥 열었다.
“하, 젠장.”
방 안으로 들어온 대공은 텅 빈 침대와 쓰러져 있는 하녀를 보며 욕지기를 내뱉었다.
그의 예상이 맞았다.
디아나의 말을 들은 순간 대공은 세이아를 떠올렸었다.
한번 어둠의 정령과 계약을 맺으면 그 다음 대의 자식들까지 어둠술사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이렇게 일이 이렇게 될 줄은 예상치 못했다.
레아의 두 팔을 잘라 어둠의 정령을 부르는 것은 막았다고 생각했으니까.
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입술을 짓씹은 대공은 쓰러져 있는 하녀를 지나 활짝 열린 창문을 보았다.
“지금 당장 저택의 정문을 닫아라. 그리고 저택 안에 세이아가 숨어 있을 수도 있으니 샅샅이 수색해.”
“네, 전하.”
서릿발 같은 대공의 명령을 들은 기사가 급히 달려가고 대공은 하녀의 생사를 확인했다.
하녀의 맥은 뛰지 않았다.
“시신을 수습해.”
하인들이 황급히 다가와 하녀를 둘러메고 나갔다.
아무도 남지 않는 방 안을 둘러보며 대공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저택을 샅샅이 뒤지라 명하긴 했으나 아마 세이아는 이미 저택을 빠져나갔을 가능성이 더 높았다.
세이아를 놓치다니, 그것도 어둠의 정령과 계약한 세이아를.
“더 단단히 단속했어야 했는데!”
세이아가 고작 10살이라 어둠의 정령과 계약할 거라 생각지 못한 그의 실책이었다.
밀려드는 후회에 그는 거칠게 머리를 헝클었지만 이미 모든 상황은 끝난 뒤였다.
놓치고 만 세이아에 분노가 쉬이 잠재워지지 않았다.
대공은 성난 눈빛으로 텅 빈 침대를 노려보다 이윽고 차갑게 굳은 얼굴로 방을 나갔다.
* * *
[돌아온 어둠술사, 황실을 농락하다.]
[어둠술사에 의해 만들어진 가짜 대공녀, 황실의 권위가 흔들렸다.]
[뒤바뀐 대공녀! 크로우드 테라비타 대공의 비극은 어디서부터 시작된 것인가.]
[어둠술사에게 10년을 속은 황가, 황실을 믿어야 하는 것인가.]
제국의 2황자와 대공녀의 암살 미수 사건이 알려지며 신문사들은 연일 특보를 뿌리고 있었다.
사건이 일어난 지 사흘, 황실의 입장 발표가 있었음에도 사그라들지 않는 언론들이 오늘도 제국의 황성을 시끄럽게 만들고 있었다.
“어휴, 황실에서 입장 발표를 했는데도 이렇게 특보로 신문을 내다니 정말 조용해지지가 않네.”
황실의 정원.
삼삼오오 모인 시녀들 중 한 명이 테이블 위에 쌓인 신문들을 보다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입장 발표가 있긴 했지만 그 발표가 딱히 궁금증을 해소시켜 주는 발표는 아니었잖아. 그냥 2황자 저하와 대공녀는 무사하다, 어둠술사는 사형되었으니 안심해라. 이게 전부였으니 신문사들이 조용해질 리 있나.”
“하긴 그래. 대공녀에 대한 질문에 답은 하나도 내주지 않고, 그 가짜 대공녀가 어찌 되었는지도 아직 말이 없잖아.”
“떠도는 소문엔 그 가짜 대공녀가 어둠의 정령이랑 계약해서 사라졌단 말도 있던데? 그래서 발표를 못하는 거래.”
“설마…… 아니겠지. 근데 난 그것보다 그 진짜 대공녀님이 궁금해. 10년 동안이나 사생아로 살았던 거잖아.”
“맞아. 거기다 대공 전하께서 인정해 주지도 않은 사생아였는데, 하루아침에 대공녀라니 기분이 어떨까.”
“엄청 좋지 않을까? 사생아에서 황족이 된 거잖아.”
“근데 내가 살짝 들었는데, 그 사생아였던 진짜 대공녀가 학대를 받고 자랐단 말이 있더라.”
“학대?”
“응, 친모가 아니잖아. 그래서 학대하면서 키웠단 말이 있더라고.”
“학대를 받으면서 컸으면…… 좀 문제 있는 거 아냐? 정신적으로 모자라다거나…… 그래서 진짜 대공녀에 대해선 아무런 말을 하지 않는 거 아닐까?”
“설마, 의식을 치르기도 전에 정령술을 썼잖아. 모자란 건…….”
아닌 척 눈을 반짝이며 가십거리를 말하던 붉은 머리 시녀는 당황스런 얼굴로 말을 멈추었다.
“……1황자 저하와 오도어 왕자님을 뵙니다.”
황급히 일어난 붉은 머리 시녀가 예를 갖추자 줄줄이 일어난 시녀들이 어찌할 바 모르는 얼굴로 예를 갖추었다.
시녀들의 신난 대화를 모두 들은 에키온과 카이루스는 굳은 얼굴로 침묵했다.
그렇게 몇 분이 흐르고 무릎을 굽힌 시녀들의 다리가 부들부들 떨리자 그제야 에키온의 입술이 움직였다.
“모두, 일어나라.”
평소와 달리 차가운 1황자의 목소리에 시녀들은 주춤거리며 자세를 바로 했다.
“언제부터 황궁의 정원이 평민들의 장터 바닥이 되었지.”
“……잘못했습니다, 저하.”
서릿발 같은 목소리에 시녀들이 어깨를 움츠리며 고개를 숙였다.
“잘못된 걸 안다니 벌을 받아야겠구나. 어느 궁의 시녀들이냐.”
“……침방궁 시녀입니다.”
에키온은 시종에게 명했다.
“여기 있는 침방궁 시녀들을 오늘 당장 궁 밖으로 내쫓아라. 감히 황실에서 입을 함부로 놀린 죄, 그 죄를 각 가문에 명명백백히 밝혀 근신시키도록.”
시녀들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시종들에게 시녀들이 끌려나가고 에키온은 짧은 한숨을 내쉬며 의자에 앉았다.
그는 테이블 위에 쌓인 신문들을 보며 인상을 구겼다.
“정말, 하루도 쉬지 않고 떠들어. 아주 물 만난 고기들이라니까.”
카이루스는 에키온의 맞은편에 앉으며 신문을 보았다.
그의 시선에 가장 먼저 들어오는 단어는 대공녀였다.
디아나.
어둠술사가 습격한 그 현장에 카이루스 또한 있었다.
디아나의 정령술이 폭발하듯 발현되며 모습이 바뀌는 것을 직접 보았다.
찬란한 금발에 금안.
분명한 황족의 상징이었다.
‘괜찮을까.’
카이루스는 디아나의 안위가 걱정되었다.
그날 디아나가 정신을 잃은 뒤 카이루스는 디아나에게 다가갈 수가 없었다.
대공이 디아나를 감싸 안고 곧장 현장을 떠났기 때문이다.
아주 잠깐이었지만 그가 본 대공은 차가운 성미를 가진 사람 같았다.
‘그 아이가 괜찮은지 신경 쓰여.’
하지만 디아나를 만나러 갈 명분이 카이루스에겐 없었다.
추측성 기사들이 한가득인 신문을 보던 카이루스는 에키온의 짙은 한숨에 고개를 돌렸다.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는 건지……. 세이아가 가짜일 줄은 정말 상상도 못했다.”
에키온의 얼굴은 참담한 빛을 띠고 있었다.
사건이 벌어지고 황실은 발칵 뒤집혔다. 다행히도 2황자 레귤러스는 큰 상처 없이 돌아왔지만 현장에서 밝혀진 충격적인 진실에 모두 경악했다.
에키온은 세이아가 가짜였단 말을 듣고 너무 놀라 순간 말을 잃었을 정도였다.
세이아를 직접 보고 함께 시간을 보내기도 했으니까.
10년이나 기다려 만난 사촌 동생이 가짜였다니
어떻게 충격적이지 않겠는가.
그리고 사생아로 살아왔다는 진짜 대공녀인 아이에게 미안해졌다.
아직 얼굴도 한 번 보지 못했지만 그 아이를 향한 죄책감은 가족이었기에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어두운 에키온의 얼굴에 카이루스가 입을 열었다.
“누구도 상상할 수 없었던 일이야. 아이를, 그것도 황족을 바꿔치기하다니, 감히 누가 상상이나 했겠어. 그리고 대공비가 죽고 북방과의 소통이 단절됐었으니까. 황실은 더욱 알 수가 없었지. 에키온, 너무 죄책감 느끼지 마.”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그렇지만, 어쨌든 난 그 애의 사촌 오빠고……가족이니까. 그 애는 10년 동안 외면받은 거잖아. 그 상처가…… 클 거야.”
에키온은 아직 만나지 못한 사촌 동생을 어떤 얼굴로 봐야 할지 씁쓸했다.
카이루스는 무어라 위로를 해 주고 싶었지만 상처에 익숙해 보이던 디아나의 모습이 떠올라 입을 열지 못했다.
자신이 만났던 디아나는 평범하게, 행복하게 자란 소녀의 눈빛이 아니었으니까.
“레귤러스가 나보다 나아.”
“어? 갑자기 레귤러스는 왜?”
“그렇잖아. 레귤러스가 세이아 엄청 싫어했잖아. 지금 돌이켜보니 레귤러스가 나보다 사람은 더 정확히 본 거 같아서. 그리고 레귤러스는 그 애도 만났다고 했었지? 아, 그러고 보니 너도 봤겠네, 디아나를.”
“……봤었지.”
“어땠어? 분위기라던가…….”
“……글쎄, 잠깐 본 거라서 잘 모르겠다.”
카이루스는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
에키온은 현 황제처럼 아닌 척해도 가족에 대한 애정이 강했다.
며칠 잠도 제대로 못잔 듯 피곤해 보이는 에키온에게 디아나의 상처까지 말한다면 더 힘들어할 거란 것이다.
“빨리 안정돼서 그 애를 만나고 싶어.”
“……대공가로 방문하면 안 되나?”
“그러고 싶긴 한데…… 상황이 좋지 않으니까.”
카이루스는 고민하듯 미간을 좁히는 에키온을 보다 느리게 입술을 뗐다.
“……레귤러스가, 대공녀를 만나고 싶어 하던데. 둘은 만난 적이 있으니까, 레귤러스는 거부하지 않지 않을까.”
“흠, 하긴. 레귤러스를 통해 서신을 넣어 봐야겠다. 카이, 웬일로 좋은 생각이야.”
“방문하게 되면 나도 같이 갈게.”
“네가? 갑자기 왜?”
“그날 나도 현장에 있기도 했고…… 레귤러스는 대공녀를 아는 데, 넌 엄청 어색할 거 아냐. 아는 얼굴 한 사람이라도 더 있는 게 낫겠지.”
“음…… 그런가.”
뭔가 맞는 듯 맞지 않는 듯한 말에 고개를 갸웃하던 에키온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러자. 레귤러스에게 얘기해 봐야겠네.”
나직이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에키온을 보며 카이루스는 디아나를 생각했다.
부디 많은 상처를 받지 않았길 바라면서.
* * *
“유네스, 이리 와.”
소파에 앉은 디아나가 옆자리를 툭툭 두드리자 유네스가 폴짝, 뛰어올라 왔다.
“냐아-.”
유네스는 작게 울며 디아나의 허벅지에 턱을 기댔다.
유네스의 애교에 기분이 좋아진 디아나는 미소를 지으며 윤기 나는 털을 쓰다듬었다.
“조용하고 좋다, 그치?”
날씨는 화창했고 열린 창문 사이로 봄바람이 살랑살랑 불어와 디아나의 금빛 머리칼을 흔들었다.
의식이 돌아오고, 어느새 사흘이 흘렀다.
하루아침에 디아나의 모습이 바뀌고, 어둠술로 세이아가 사라진 대공가는 며칠 동안 정말 정신이 없었다.
방 안에만 있던 디아나도 느낄 수 있을 만큼 말이다.
피비의 말론 이틀 동안 저택은 물론이고 수도를 샅샅이 뒤졌지만 세이아의 모습은 찾을 수 없었다고 했다.
별로 놀랍지 않았다.
디아나가 느낀 기운이 세이아의 힘이란 걸 알았을 때, 아마 찾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었다.
세이아를 찾기 위한 수색이 시작됐을 땐 더 이상 그 기운을 느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어둠술사가 된 세아아가 완전히 자취를 감춰 버렸지만 이상하게 두렵진 않았다.
정령술이 있기 때문일까.
‘자신이 있는 곳으로 찾아오라고 했었는데…….’
디아나는 깨기 직전 들었던 가디언의 말을 떠올렸다.
아직은 봉인되어 있으니 자신이 있는 곳으로 와 달라 했었다.
그게 어디일까.
디아나는 딱 떠오르지 않는 답에 미간을 좁혔다.
대공은 알고 있지 않을까.
디아나는 사흘 전 보았던 대공의 슬픈 눈빛이 떠올랐다.
그날 이후로 아직 한 번도 대공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아니, 사실 매일매일 대공이 찾아왔으나 디아나가 만나지 않았다.
갑자기 자신을 애달픈 눈빛으로 보는 것도 싫었고, 자신의 말에 상처받은 듯한 얼굴도 보고 싶지 않았다.
거북하기만 한 대공보단 에드윈이 더 보고 싶었다.
하지만 에드윈 역시 세이아를 찾는 수색으로 너무 바쁜 상태였다.
“그래도 에드윈은 무사하다고 했으니까…… 나중에, 좀 조용해지면 에드윈을 보러 가야겠어.”
빨리 그날이 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던 디아나는 유네스를 품에 안고 소파에서 일어났다.
자신을 불편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사용인들을 마주치기 싫어 며칠 방안에만 있었지만 슬슬 느껴지는 지루함에 밖으로 나가고 싶었다.
“흠…… 도서관에 가고 싶긴 한데…….”
문제는 며칠 동안 대공가 주변을 기웃거리는 기자들 때문에 대공가의 경비가 삼엄해졌다는 것이었다.
디아나는 혹시나 싶어 유네스를 바닥에 내려놓고 창문으로 다가갔다.
저택의 정문을 향해 고개를 돌리자 멀리 보이는 정문 앞에, 기사들이 일렬로 서있는 것이 보였다.
“역시, 아직 나가는 건 무리겠어.”
“네? 대공녀님, 외출하시고 싶으세요?”
잠시 나갔다 돌아온 피비가 창문 앞에 서 있는 디아나를 향해 물었다.
“피비, 대공녀라 부르지 말라니까.”
디아나는 대공녀란 호칭이 너무 거북해 피비에게 그리 부르지 말라 했다.
다른 하녀들이 대공녀라 부르는 건 아무렇지 않게 무시할 수 있었지만 피비가 그렇게 부르는 것은 싫었다.
정말 자신이 대공녀가 된 것처럼 느껴졌으니까.
피비는 질색하는 디아나의 반응에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하하, 네, 제가 깜박했어요, 아가씨. 근데 외출하시고 싶으세요?”
“아…… 좀 답답해서 나갈까 했는데 아직 경계가 삼엄한 거 같아.”
디아나의 곁으로 다가온 피비는 힐끔 정문 쪽을 보았다.
“괜찮아요, 아가씨. 아가씨께서 나가고 싶으시다면 대공 전하께서 알아서 다 준비해 주실 거예요. 사람들은…… 신경 쓰지 마세요.”
디아나의 모습이 바뀌고 대공가의 사람들은 물론이고 제국 전체가 디아나에 대해 떠들고 있었다.
피비도 그 시선들이 불편한데 당사자인 디아나는 분명 더 힘들 것이다.
피비가 걱정스런 눈빛으로 보자 디아나는 괜찮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괜찮아. 대공 전하께 민폐 끼칠 부탁 같은 거 하고 싶지 않아.”
대공 전하.
선을 확실히 긋는 호칭에 피비의 어깨가 움찔했다. 하지만 무어라 감히 말을 꺼낼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대공 전하와 디아나.
피비는 가장 가까이에서 두 사람을 보고 있었기에 그 골이 얼마나 깊은지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사실 디아나가 대공 전하를 거부하는 마음도 이해했다.
디아나가 어떻게 자랐는지 피비는 알고 있으니까.
피비는 괜히 축 처지는 분위기에 밝은 얼굴로 말했다.
“아가씨, 아직 점심 먹긴 좀 이르니까…… 디저트 드실래요? 오늘 주방장이 딸기 타르트를 만들었는데 정말 맛있어 보이더라고요.”
“딸기 타르트? 음…… 그…….”
디아나가 소파에 앉으며 대답하려던 찰나,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울렸다.
“대공녀님, 집사입니다.”
집사의 목소리에 디아나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집사는 디아나가 의식을 차린 그 다음 날 수도로 올라왔다.
대공가에 많은 사건들이 벌어지자 사용인들의 어수선함을 하녀장 혼자서는 제대로 다스리지 못해 집사가 오게 되었다고 피비가 말했었다.
저택에 당도한 집사는 모든 사실을 알고 난 후 가장 먼저 디아나에게 무릎을 꿇었다.
10년간, 대공이 없는 저택을 총괄했던 자신이 의무를 다하지 못했다며 사죄를 청했다.
하지만 디아나는 모든 게 불편하고 거북할 뿐이었다.
집사의 진심 어린 사과도, 대공녀라 부르며 연신 자신의 눈치를 살피는 저택의 사용인들도.
“아가씨…… 문을 열까요?”
피비가 잠시 상념에 빠졌던 디아나를 불렀다.
디아나는 닫힌 문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사실 문을 열어 주고 싶지 않았다. 요즘 집사가 디아나를 찾아오는 이유는 딱 하나뿐이었으니까.
미간을 살짝 찡그리던 디아나는 짧은 한숨과 함께 말했다.
“열어 줘.”
피비가 문을 열자 집사가 디아나에게 예를 갖추었다.
“대공녀님을 뵙니다.”
“……무슨 일이야.”
“대공 전하께서 함께 점심 식사를 하시지 않겠냐고 전하셨습니다.”
역시 디아나의 예상대로 집사는 대공의 말을 전하기 위해 온 것이었다.
- 대공 전하께서 이렇게 제 방에 오시는 것 자체가 불편해요.
그 말 이후로 대공은 집사를 보내고 있었다.
‘내 말은 다른 사람이 오면 괜찮다는 게 아니었는데.’
디아나는 집사에게 단호히 말했다.
“송구하지만 함께 먹고 싶지 않다고 전해 줘.”
아침, 점심, 저녁 이틀째 계속 찾아오고 있었다.
한두 번 거절한 게 아니면 디아나의 뜻을 대공도 알고 있을 텐데, 이렇게 계속 집사를 보내는 것이 이젠 불편함을 넘어 불쾌하기까지 했다.
자신의 의사를 무시하는 거 같아서.
“……네, 전하겠습니다, 대공녀님.”
집사는 무거운 얼굴로 인사를 하고 방을 나갔다.
요즘 대공저의 사용인들은 모두 집사와 같은 어두운 얼굴을 하고 디아나의 눈치를 살피곤 했다.
‘차라리 예전처럼 무관심한 게 더 편했어.‘
갑자기 자신의 눈치를 보고 과하게 예의를 갖추는 모습들이 거북할 뿐이었다.
“냐아.”
디아나의 가라앉은 기분을 느꼈는지 유네스가 폴짝 소파 위로 올라와 디아나의 볼을 핥았다.
미끈한 혀가 간지러워 결국 디아나의 얼굴에 웃음이 피어났다.
“유네스, 간지러워. 큭큭.”
“냐아.”
디아나가 웃자 유네스는 슬퍼하지 말라는 듯 디아나의 허벅지 위로 자리를 잡고 디아나와 시선을 마주했다.
유네스의 짙은 푸른 눈동자는 디아나가 초라하기만 하던 그때부터 지금까지 변함없는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디아나를 걱정스럽게 보는 피비도 그랬다.
변한 것이 없는 유네스와 피비를 보자 시무룩해졌던 디아나의 얼굴이 한결 밝아졌다.
디아나의 웃음에 걱정스러웠던 피비의 얼굴도 펴졌다.
“아가씨, 잠시만 계세요, 제가 금방 주방에 다녀올게요.”
“아, 아냐. 피비. 나 타르트 안 먹을래.”
“네? 왜요, 드시면 기분이 한결 좋아지실 거예요.”
“음…… 그냥 유네스랑 산책 좀 할게. 너무 방 안에만 있었더니 답답하기도 하고 지금 시간이면 다들 바빠서 돌아다니는 사용인들이 많진 않을 테니까. 유네스도 나가고 싶을 거 같아. 그치, 유네스?”
잠시라도 바깥바람을 쐬어야 이 답답함이 내려갈 거 같았다.
“냐아-.”
유네스는 디아나의 말에 대답하듯 꼬리를 살랑 흔들었다. 디아나는 유네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피비에게 말했다.
“피비, 나 잠시 혼자 있고 싶어. 유네스랑 둘이서만 산책 다녀올게.”
“알겠어요, 아가씨. 대신 타르트는 안 드셔도 점심은 드셔야 하니 너무 오래 있다가 오진 마세요.”
“응.”
피비에게 미소를 그린 디아나는 유네스를 안고 방을 나섰다.
“유네스, 너무 멀리 가지 마.”
디아나는 정원의 꽃들 사이를 뛰어다니는 유네스에게 말하며 분수대 옆에 있는 긴 나무 의자에 앉았다.
사흘 만에 방을 나와서인지 오늘따라 얼굴로 내리쬐는 따스한 햇빛이 너무 좋았다.
거기다 저택의 정원엔 원래 사람이 잘 다니지 않았다.
대공은 한 번도 온 적이 없고 세이아가 있을 적에도 십 년간 딱 한 번 마주친 게 전부였으니까.
디아나는 저택 안의 불편한 분위기에서 벗어나 모처럼 편안하게 햇살이 반짝이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러다 문득 햇살만큼이나 반짝이는 자신의 금빛 머리칼로 시선을 내렸다.
“대공녀…….”
디아나는 아무리 들어도 익숙해지지 않는, 아니, 익숙해지기 싫은 호칭을 입 안으로 굴리다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난 대공녀로 살고 싶지 않은데.”
대공의 자식으로, 대공녀가 되어 대공가에서 살고 싶지 않았다.
그 모든 것이 애초에 자신의 것이 아니라고 귀에 못이 박힐 듯 들어왔으니까.
마음 같아선 이곳에서 당장 나가고 싶었지만 지금 당장 나가면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막막했고 갈 곳도 딱히 없었다.
차라리 예전처럼 평범한 갈색 머리칼에 갈색 눈이었다면 어디로든 멀리 떠날 수도 있었겠지만 지금 자신의 모습은 너무 눈에 띄었다.
선명한 금발과 금안.
누가 봐도 황족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제국은커녕, 황도를 벗어나는 것조차 힘들겠지.’
“답답해.”
자신을 둘러싼 모든 상황들이 답답하게 느껴졌다.
짧은 한숨을 내쉬던 그때, 수풀을 뛰어다니던 유네스가 분수대로 폴짝 뛰어올랐다.
위태로워 보이는 유네스는 순간 분수대 안으로 몸을 기울였다.
“유네스!”
유네스가 빠질까 겁을 먹은 디아나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난 순간 분수대의 물들이 위로 홱 치솟아 올랐다.
유네스의 몸을 밀어내는 듯한 물길에 유네스가 울음소리를 내질렀다.
“냐아!”
황급히 분수대로 달려간 디아나는 걱정과 달리 물에 발장구를 치는 유네스를 보곤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유네스, 물에 빠지는 줄 알았잖아. 예전처럼 큰 몸이 아니라 조심해야 해.”
“냐아-.”
유네스는 분수대에 앉아 디아나의 손에 머리를 턱, 올려놓았다.
쓰다듬어 달라는 유네스의 행동에 피식 웃은 디아나는 유네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러다 문득 아직도 물기둥이 위로 솟아 있단 걸 깨달았다.
“아…….”
여태까지 정령술은 디아나의 생각이 옅어지면 바로 사라졌었다.
한데 이렇게 오래 유지되고 있다니.
디아나는 놀란 눈빛으로 물기둥을 보았다.
꿈에서 들었던 정령의 목소리와 관련 있는 걸까.
생각해 보면 어둠의 술식도 자신이 가진 정령의 힘으로 깨뜨렸다고 했다.
‘힘이 예전보다 강해진 건가. 근데 왜 강해진 거지?’
정령의 목소리고 그렇고, 디아나의 정령술은 책 속의 내용과 많이 달랐다.
“하긴, 책에선 의식을 치르기 전엔 정령술을 사용하지 못한다고 했었으니…… 처음부터 다르긴 했어.”
디아나의 혼잣말이 허공으로 흩어진 순간 번뜩 무언가 떠올랐다.
정령의 의식.
정령은 분명히 자신이 있는 곳으로 와 달라고 했었다.
어쩌면 그곳이 의식을 치르는 곳이 아닐까.
디아나는 자신의 생각이 맞을 거 같았다.
‘의식을 치르는 곳으로 가려면……황궁으로 가야 할 텐데.’
정령의 의식을 치르는 곳은 황제가 기거하는 본궁 지하에 위치하고 있다고 책에서 본 적이 있었다.
“거길 어떻게 가지?”
미간을 좁히던 디아나는 문득 뒤에서 들려오는 낯선 발소리를 들었다.
‘없어져.’
아직 솟아 있는 물기둥을 재빨리 없앤 디아나는 발소리가 멈추자 몸을 돌렸다.
“……디아나.”
분수대로 다가온 사람은 대공이었다.
대공과 디아나의 시선이 마주쳤지만 곧 디아나가 먼저 시선을 피했다.
“대공 전하를 뵙니다.”
디아나는 늘 그랬듯 예를 갖추었다. 변함없는 그 모습에 대공의 눈빛이 흔들렸다.
“……일어나거라.”
예를 갖추지 말라 하여도 아마 디아나는 듣지 않을 것이다. 대공을 받아들이지 않겠단 의미로 예를 갖추는 것이니까.
그간 문전박대를 당하며 디아나의 뜻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유네스와 함께 산책을 나온 것이냐.”
“네, 전하.”
“냐아-.”
딱딱하게 굳은 얼굴의 디아나와 달리 유네스는 대공이 반가운지 맑은 울음소리를 냈다.
디아나는 대공에게 가고 싶은 듯 몸을 바르작거리는 유네스를 꼭 안았다.
유네스는 대공과 함께 오랜 시간을 보냈으니 반가운 것은 당연히 이해하지만 그렇다고 보내 주고 싶진 않았다.
‘돌아가야겠어.’
대공과는 조금이라도 함께 있고 싶지 않았다.
그만 가 보겠다 말하려던 찰나 대공이 입을 열었다.
“……함께 좀 걷지 않겠느냐.”
디아나는 대공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무감한 얼굴과는 어울리지 않는 초조함이 스쳐 지나갔다.
‘같이 산책이라니. 그런 건 다정한 부녀 사이에나 어울릴 법한 거 아닌가.’
대공을 보던 디아나의 얼굴이 살짝 구겨졌다.
애초에 함께 있는 것이 익숙한 사이도 아니었고, 지금은 더욱이 그가 싫었다.
의식을 차리고 난 후 하루하루 지난날을 회상할수록 가장 원망스러운 사람은 대공이었으니까.
지금은 자신을 학대한 레아보다 대공이 더 원망스러웠다.
디아나는 대공의 금빛 눈동자를 피하지 않고 입술을 열었다.
“전하, 전 전하와 함께 걷고 싶지 않아요.”
디아나의 차가운 말에 대공의 금안이 흔들렸다. 그 싸늘한 눈빛은 마치 당장이라도 그에게서 등을 돌려 떠날 것만 같았다.
대공은 디아나가 사라질까, 저도 모르게 한 걸음 내디뎠다.
“디아나, 난…….”
“그날도 말씀드렸지만 전 대공녀로 살지 않을 거예요. 그러니 대공 전하와 그 무엇도 함께하고 싶지 않아요.”
며칠간 참아 왔던 말을 내뱉으며 디아나는 다가온 대공에게서 한 걸음 물러났다.
날카로운 디아나의 거부에 대공은 더 이상 다가갈 수 없었다.
유네스를 꼭 끌어안은 디아나는 차디찬 눈빛과 함께 온몸으로 대공이 싫다 말하고 있었으니까.
대공은 아무런 말을 하지 못하고 입술을 다물었다.
디아나는 자신과 너무도 닮은 대공의 금안이 슬픔으로 얼룩지는 것을 보았다.
하지만 그에게 미안하지도 그 슬픔이 마음 아프지도 않았다.
진실을 알게 된 자신의 상처가 더 아팠으니까.
“……제게 아무것도 바라지 마세요. 애정도, 용서도. 전 대공 전하를 용서할 마음…… 없으니까요.”
“…….”
디아나는 떨리는 대공의 손끝을 보았지만 못 본 척 그를 외면했다.
‘난 이곳을 떠날 거야.’
그러니 대공과 어떤 말도 나누지 않을 것이다.
마음을 가다듬은 디아나는 충격을 받은 듯 굳은 대공을 보다 버둥거리는 유네스를 더 꼭 안고 예를 갖추었다.
“그럼 전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대공 전하.”
디아나는 바위처럼 움직이지 않는 대공을 지나치며 뒤도 돌아보지 않고 빠른 걸음으로 정원을 나갔다.
디아나가 떠나고 난 뒤, 대공은 한참이나 그 자리에서 움직이질 못했다.
디아나가 서 있던 자리를 못 박힌 듯 바라보던 대공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얼굴을 쓸어내렸다.
- 용서할 마음 없으니까요.
디아나의 단호한 목소리와 자신을 보던 시린 눈빛이 잊히지 않았다.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디아나가 그를 외면하는 것은 각오했던 일이었다.
하지만 그의 생각보다 디아나의 마음은 더 굳게 닫혀 있었다.
그에게 조금의 틈도 보여 주지 않았다.
그가 아예 어떤 말도 꺼낼 수 없도록 선을 긋고 있었다.
용서조차 빌 수 없게 말이다.
그만큼 아이의 상처가 크다는 거겠지.
그리고 그 상처는 그 때문이다.
대공은 참담함에 쓰라린 한숨을 삼켰다.
부모로서 책임을 다하지 못했고, 아이를 지켜주지도 못했다.
넘치게 사랑만 받아도 부족할 나이인데…… 그는 아무것도 주지 못했다.
그의 죄가 깊다는 것을 알지만 그렇다고 이제야 겨우 찾은 딸을 또다시 잃을 순 없었다.
염치없다는 것을 알지만 용서를 빌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를 극도로 거부하는 디아나에게 용서를 비는 것은 이기적인 행동이다.
방금 디아나가 온몸으로 거부하는 것을 보니 집사를 보냈던 것도 아이에게 부담이 되었을 거란 걸 깨달았다.
“또…… 나만 생각했던 거야.”
이대로라면 당장 내일이라도 디아나는 짐을 싸서 나가버릴지도 모른다.
“……시간이, 지금은 시간이 필요하겠지.”
그를 거부하는 아이에게 억지로 다가가선 안 될 거 같았다.
어떻게 감히 용서를 빌어야 할지 갈피조차 잡히지 않아, 가슴이 찢어질 거 같았지만 그는 슬퍼할 자격도 없었다.
처연한 한숨을 내쉰 대공이 천천히 몸을 돌린 때, 막 그를 찾으러 온 듯한 로운이 보였다.
로운은 한달음에 대공의 앞으로 다가와 서신을 내밀었다.
“대공 전하, 황실에서 서신이 도착했습니다.”
집무실로 돌아온 대공은 의자에 앉으며 따라 들어온 로운에게 물었다.
“폐하께서 보낸 서신이냐.”
“아뇨, 2황자 저하께서 보내신 서신입니다.”
“2황자?”
생각지 못한 인물에 대공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로운은 황가의 인장이 찍힌 서신을 대공에게 내밀었다.
대공은 나이프로 봉투를 뜯고 서신을 펼쳤다.
2황자가 직접 쓴 서신인 듯, 필체가 어린아이의 것이었다.
“흠.”
서신을 쭉 읽은 대공은 고민하는 듯 한숨을 내뱉었다.
“왜 그러십니까, 전하.”
“2황자가 디아나를 만나러 오고 싶다는구나. 그날 함께 있었고, 또 디아나가 괜찮은지 궁금하다고 말이야.”
“그러고 보니, 2황자 저하와 대공녀님께서 같은 마차에 타고 계셨지요.”
“피크닉에 디아나가 합류되게 된 것도 2황자와 한번 만난 적이 있기 때문이라 했었지.”
“네, 피비가 그리 말했었습니다.”
대공은 서신을 보며 미간을 살짝 좁혔다.
2황자는 디아나와 동갑이었다.
2황자가 서신을 보낸 것은 디아나를 둘러싼 상황들과는 관계없이 순수하게 디아나를 걱정하는 마음일 것이다.
‘한번 만난 적이 있다곤 하지만 지금 같은 상황에 황자를 대공가로 불러도 되는 걸까.’
“지금 디아나는 자신의 신분을 거부하고 있는데, 황족인 황자를 만나고 싶어 할까?”
디아나는 대공을 거부하고 있었고 황자는 따지고 보면 대공의 혈육이었으니 말이다.
대공의 얼굴에 그늘이 지자 로운의 얼굴도 어두워졌다. 대공의 말뜻을 알아들었기 때문이다.
디아나가 대공과 대공가의 모든 것을 거부한다는 것은 로운도 알고 있었다.
디아나가 깨어난 그날, 로운도 그 방에 있었으니까.
디아나는 이미 대공가를 떠나겠다고 마음먹은 듯 진실을 알았음에도 무덤덤했다.
로운은 무감정한 얼굴이 오히려 엉엉 울고 불같이 화를 내는 것보다 더 무섭다는 것을 그날 처음 느꼈다.
이미 모든 것을 정리한 듯한 냉정한 눈빛에 용서를 빌 수도, 변명을 할 수도 없었으니까.
대공녀님께서 마음의 문을 열어 주실지…….
로운은 확신할 수 없었다.
대공가에서 디아나는 너무 많은 상처를 받았으니까. 그리고 상처를 준 사람들에 자신도 포함되어 있었다.
아이답지 않게 눈치가 빨랐으니 그의 경멸을 분명 느꼈을 것이다.
그래서 에드윈과 달리 그를 경계했던 거겠지.
지난 일을 떠올릴수록 커다란 돌덩이가 로운의 마음을 짓누르는 거 같았다.
진실을 몰라 그랬다고 변명하기엔 디아나가 받은 상처가 너무 컸다.
로운은 마음이 무거웠지만 모든 것을 포기할 순 없었기에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전하, 그래도 2황자님은 대공녀님과 동갑이시니 서로 좀 더 편히 마음을 나눌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2황자님의 도움으로 대공녀님이 차차 마음을 여실 수도 있으니…… 만남을 허락하시는 게 좋을 거 같습니다.”
“나이가 같으니, 친구처럼 편할 수도 있겠지만…….”
만약 그게 아니라면 괜히 디아나를 더 불편하게 만들까 불안했다.
대공은 말끝을 흐리며 서신을 잠시간 바라보았다.
대공은 곧 결정을 내린 듯한 얼굴로 서신을 접어 봉투에 넣었다.
“2황자와 나의 마음이 어떻든 내가 결정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구나. 디아나에게 전해 주거라. 디아나가 직접 서신을 읽고 만나고 싶다면 초대하고 아니면 거절하거라.”
대공은 로운에게 서신을 내밀었다.
“로운, 네가 직접 서신을 전하지 말고 문밖에서 피비에게 전해 주거라. 또 내일부턴 디아나의 호위도 당분간 에드윈에게 넘겨라.”
제 욕심으로 무리하게 다가간 것이 오히려 아이의 반감을 샀다.
그러니 당분간은 디아나에게 익숙한 사람들만을 옆에 두게 할 계획이었다.
“네, 그리하겠습니다, 전하.”
“그보다, 세이아의 흔적은 조금도 없는 것이냐.”
세이아가 사라진 지 사흘째, 대공은 최대한 비밀리에 마탑주의 도움을 받아 세이아의 뒤를 쫓고 있었다.
“아직 이렇다 할 흔적이 없습니다. 마탑주께서도 어둠술사가 가까이 있다면 마법진으로 확인할 수 있지만 멀리 있는 어둠술사를 찾는 것은 힘들다 하셨습니다. 일단은 황도의 모든 여관과 빈민가까지 사람을 풀어 찾고는 있습니다만…… 비밀리에 움직이다 보니 한계가 많습니다.”
“흠…….”
“시간상 이미 황도를 벗어났을 수도 있습니다. 하여 전하, 이제는 수색 범위를 넓혀야 할 때가 된 거 같습니다.”
대공의 미간 주름이 깊어졌다.
수색 범위를 넓히면 결국 소문이 나게 될 것이다.
세이아에 대한 소문이 퍼지기 시작하면 디아나에 대한 가십 또한 쉽게 잠잠해지지 않을 것이다.
‘레아와 같이 죽였어야 했어.’
그러지 않은 자신에게 욕을 퍼붓고 싶었지만 이미 벌어진 일은 돌이킬 수 없었다.
더 늦기 전에, 일이 더 커지기 전에 수습하는 것뿐.
“……황도 밖으로 수색을 넓히려면 황군의 도움이 필요할 것이다. 일단 내일 황궁으로 가 폐하와 함께 상의해 보겠다. 따로 명령이 있을 때까진 사람을 더 풀어 비밀리에 찾아라. 그리고…… 발견 시 바로 그 자리에서 죽여라.”
“네, 전하.”
“후작 쪽에서 보낸 서신은 아직 없는 건가?”
“네, 아직 후작가에서 온 서신은 없습니다.”
앞으로의 일을 준비하겠다는 의미심장한 말을 하고 떠난 뒤 벌써 사흘이었다.
디아나가 의식을 차리자마자 대공가로 다시 올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너무 조용한 것이 더 불안했다.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신 거지.’
좋지 않은 예감이 들었지만 차마 아리엘의 아버지인 후작의 뒷조사를 명할 순 없었다.
“로운, 혹시 후작가에서 소식이 오면 바로 내게 알리거라.”
“네, 전하. 그럼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굳은 얼굴로 인사를 올린 로운이 집무실을 나가고 대공은 책상 한편에 놓인 작은 액자를 바라보았다.
“아리엘.”
‘이 모든 일들을 당신이 보았다면…… 나를 절대 용서하지 않았겠지.’
대공은 액자 속에서 아름다운 미소를 짓고 있는 아리엘의 초상화를 차마 마주할 낯이 없어 고개를 숙였다.
“……당신에게도, 디아나에게도 너무 미안해.”
미안하단 말을 내뱉는 것조차 죄악처럼 느껴질 만큼.
괴로운 얼굴을 아래로 감춘 대공은 깊은 한숨을 삼켰다.
* * *
“유네스, 이거 먹어.”
디아나가 반으로 자른 말린 육포를 손바닥에 얹어 내밀자 물고기 인형을 사냥하듯 뜯고 있던 유네스가 쪼르르 뛰어왔다.
“냐아-.”
손에 있는 육포를 맛있게 먹은 유네스는 만족스러운지 디아나의 품으로 폴짝 뛰어올라 디아나의 턱 아래를 제 머리로 비볐다.
“큭, 간지러워, 유네스.”
보들보들한 털이 간지러워 디아나가 웃자 유네스는 볼을 핥으며 더 애교를 부렸다.
“유네스, 나 괜찮아.”
디아나는 유네스를 쓰다듬으며 나직이 말했다.
유네스는 평소에도 애교가 많긴 하지만 지금처럼 연신 애교를 피우진 않았다.
아마 정원에서 대공을 만난 뒤 계속 가라앉아 있던 디아나의 기분을 유네스도 느낀 거 같았다.
유네스는 항상 디아나의 기분을 빠르게 알아차렸으니까.
짙은 푸른 눈동자를 보며 미소지어 주자 그제야 안심이 되는지 유네스는 디아나의 곁에 자리를 잡았다.
“……대공가를 나가야 하는 걸까.”
디아나는 어느새 어둑해진 하늘을 보며 낮게 속삭였다.
정원에서 대공과 마주친 뒤, 디아나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대공에게 가까이 다가오지 말라 말하긴 했지만, 대공저에 계속 함께 사는 이상 마주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거기다 저택의 사람들은 자신을 대공녀라 부르고 있어 갈수록 사용인들의 시선이 부담스럽게 느껴졌다.
대공도, 대공가의 사용인들도 없는 곳으로 가고 싶어.
“피비, 에드윈, 유네스 이렇게 말이야.”
“냐아-.”
디아나의 말에 답하듯 유네스가 고개를 들며 울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힘들겠지.’
피비와 에드윈은 대공가의 사람들이고, 애초에 대공가를 나가는 것부터가 힘들었다.
디아나의 나이는 이제 겨우 10살이었고, 대공이 허락해 줄지도 미지수다.
“……허락을 구하기 위해 봐야 하는 것도 지금은 너무 싫어.”
디아나는 사생아로 지낼 때보다 더 답답하게 느껴지는 대공가에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디아나의 얼굴에 점차 그늘이 지던 찰나 유네스가 디아나의 입술을 기습적으로 핥았다.
“냐아-.”
갑작스런 뽀뽀에 놀란 디아나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유네스를 보았다.
“유네스…… 애교가 점점 느는 거 같다?”
처음 받은 뽀뽀에 디아나는 놀람과 동시에 어두워졌던 얼굴이 사르르 풀리며 밝은 미소를 그렸다.
“너무 귀여워! 사랑해!”
디아나는 자신을 보며 눈을 반짝이는 유네스가 너무 사랑스러워 꼭 끌어안으며 작은 볼에 뽀뽀를 퍼부었다.
“전 유네스보다 아가씨가 더 귀여워요.”
디아나는 갑자기 들려온 피비의 목소리에 흠칫 놀라 유네스의 볼에 뽀뽀하던 것을 멈추곤 고개를 들었다.
“피비…… 언제 왔어?”
하녀장이 잠시 불러서 나간 피비가 돌아온 줄도 모르고 유네스에게 몸을 비틀며 뽀뽀를 마구 퍼붓고 있었던 것이다.
의도치 않게 경망스런 모습을 들킨 거 같아, 디아나는 부끄러움에 볼이 살짝 붉어졌다.
아무렇지 않은 척 유네스를 옆자리에 내려놓으며 큼, 작게 헛기침을 하는 디아나를 보며 피비는 장난스런 미소를 지었다.
“‘유네스, 너무 귀여워!’ 이렇게 말씀하셨을 때 막 돌아왔답니다.”
몸까지 흔들며 재연해 주는 피비에 디아나의 얼굴이 더욱 새빨갛게 물들자 피비는 그 사과 같은 얼굴이 너무 귀여워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피비, 놀리지 마.”
“하하, 죄송해요. 아가씨께서 너무 귀여우셔서…… 참을 수가 없었어요.”
“……안 귀여워.”
창피해 눈을 샐쭉이자 피비가 말도 안 된다는 듯 눈을 크게 뜨며 말했다.
“안 귀엽다뇨. 아가씨가 세상에서 제일 귀엽고, 아름답고, 우아하고, 예쁘고…….”
“알았어, 알았어. 그만해, 피비.”
디아나는 이대로 뒀다가는 피비의 입에서 온갖 부끄러운 수식어들이 나올 거 같아 황급히 말렸다.
“역시 아가씨가 제일 귀엽죠? 아가씨도 아셔야 해요. 아가씨가 얼마나 사랑스러우신지.”
“……알겠어. 근데 피비 손에 든 건 뭐야?”
화끈거리는 볼에 손부채질을 하던 디아나는 문득 피비의 손에 있는 봉투를 보았다.
“아…… 이거, 황실에서 온 서신이에요. 대공 전하께서 아가씨께 전해 드리라 하셨어요.”
“황실에서 온 서신을 왜 나한테 줘?”
디아나는 이해가 가지 않아 되물었다.
“그게, 2황자님께서 보내신 서신이래요.”
“아…….”
레귤러스 테라비타.
디아나는 자신에게 호의 가득한 눈빛을 반짝였던 동갑 황자가 기억났다.
‘그러고 보니 그날 마차에서 정신을 잃었던 것 같은데, 괜찮은 건가.’
황실 기사에게 안겨 나가는 것은 보았지만 그 뒤론 2황자를 본 적이 없었다.
“……근데, 왜 내게 서신을 보냈지?”
따지자면 두 사람은 어색한 사이였고 일이 나기 전에 나눴던 대화 역시 즐거운 내용이 아니었다.
자신이 사생아라고 말한 직후였으니까.
물론 지금은 디아나가 사생아가 아닌 줄 알았겠지만 그거 때문에 갑자기 서신을 보내진 않았을 텐데.
디아나가 눈을 살짝 찡그리자 피비가 말했다.
“정확히는 대공 전하께 온 서신인데, 대공 전하께서 아가씨가 읽어 보시고 결정하라고 하셨어요.”
“읽어 볼게. 이리 줘.”
디아나는 이미 뜯어져 있는 봉투에서 서신을 꺼내 읽었다.
서신의 내용은 디아나의 생각을 벗어나는 의외의 내용이었다.
어색한 사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무색하게 2황자는 자신이 무사한지 보고 싶고 걱정된다는, 내용이었다.
거기다 정갈하지 못한 필체를 보니 2황자가 직접 쓴 서신 같았다.
디아나는 진심 어린 걱정이 느껴지는 서신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리고 가장 눈길을 끄는 부분은 자신을 대공녀라 칭하지 않고 디아나, 이름으로 부른 것이었다.
2황자는 그저 아무 의미 없이 대공녀가 아닌 디아나의 이름을 적은 것일 수도 있지만 디아나는 서신에 적혀 있는 이름에 살짝 기분이 좋아졌다.
서신을 보며 잠시간 고민하던 디아나는 이윽고 결정을 내렸다.
“피비, 대공 전하께 내가 2황자 저하를 만나러 황궁으로 가겠다고 전해 줘.”
디아나의 대답이 의외였는지 피비의 눈이 커졌다.
“황궁으로 직접요? 괜찮…… 으시겠어요?”
피비는 디아나가 대공녀의 신분으로 바뀐 뒤 대공가의 사용인들조차 꺼림칙해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한데 직접 황궁으로 간다니.
피비가 걱정스런 눈빛을 하자 디아나는 괜찮다는 듯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음, 괜찮아, 사흘 동안 방 안에만 있었잖아. 답답하기도 하고…… 황궁엔…….”
디아나가 황궁으로 가려는 진짜 이유는 따로 있었다.
바로 정령의 의식이 치러지는 곳, 가디언이 잠들어 있는 곳이 황궁에 있기 때문에.
‘2황자는 그곳이 어디인지 알 거야.’
2황자의 도움을 받는다면 대공의 도움을 받지 않아도 된다.
이 서신이 아니었다면 황궁으로 들어가는 것부터 대공에게 도움을 요청해야 했을 텐데, 2황자 덕에 손쉽게 황궁으로 갈 수 있는 명분이 생겼으니 2황자를 만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대공녀로 살지 않으려면 대공에게서 빨리 벗어나야 해.’
길어지는 상념에 디아나의 말끝이 흐려지자 피비가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황궁엔요?”
“응? 아, 황궁엔…… 되게 멋진 것들이 많잖아. 책에서만 보던 걸 직접 볼 수 있으니 꼭 한 번은 가 보고 싶어.”
디아나는 정령에 관한 이야기는 하지 않으며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피비도 이젠 디아나가 정령술을 쓸 수 있단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가디언의 목소리를 들었단 건 아직 아무에게도 말한 적 없었다.
지금도 충분히 주목을 받고 있는데 가디언의 목소리까지 들었단 게 알려지면 사람들의 관심이 더욱 심해질 테니까.
그리고 가디언의 일은 피비가 도와줄 수 없는 문제였으니 괜히 말해서 신경 쓰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긴…… 하지만…….”
디아나는 피비가 뭘 걱정하는지 알고 있었다.
“피비, 걱정 마. 난 정말 괜찮으니까. 그리고 내일 황궁에 갈 땐 피비도 같이 갈 거고, 유네스도 데려갈 거야. 그러니 누가 내게 쉽게 다가올 수 있겠어. 우리 유네스가 가만있지 않을 텐데.”
“냐아!”
디아나의 곁에서 얌전히 있던 유네스가 답을 하듯 강하게 울었다.
꼭 자신만 믿으라는 듯 자신감이 느껴지는 울음소리에 디아나는 웃음을 지었다.
“아가씨의 말이 맞아요. 유네스도 있고 저도 있는데 제가 괜한 걱정을 했어요. 그럼 전 대공 전하께 말씀 전하고 올게요.”
“응.”
어딘지 비장해진 피비는 서신을 들고 방을 나갔다.
피비가 나가자 디아나의 얼굴에선 웃음기가 사그라들었다.
“가디언……. 내가 들은 목소리가 정말 정령의 목소리가 맞는 거겠지?
가디언의 말은 전부 기억하고 있지만 자신이 정말 들은 게 맞는지 꿈을 꾼 건 아닐지 완전한 확신은 없었다.
꿈에서 깨어난 뒤론 가디언의 목소리를 들은 적이 없으니까.
“……가디언이 맞았으면 좋겠어. 그래야 혼자서도 잘 살 수 있을 테니까.”
힘이 있어야 대공가를 확실히 벗어날 수 있을 테니까.
“냐-.”
유네스는 위로인지 서글픔인지 알 수 없는 구슬픈 울음소리를 냈다.
“유네스, 넌 내가 대공가를 나가는 게 싫어?”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유네스는 유난히도 대공을 잘 따랐으니까.
‘하지만 대공의 표우는 아니라고 했어. 그때…… 유네스의 주인은 이미 죽었다고 했었는데.’
유네스가 크게 다쳤던 그때, 치료사에게 대공이 그리 말했었다.
“그럼…… 유네스는 누구의 표우였던 거지?”
그땐 유네스가 걱정되어 다른 이야기들을 흘려들었지만 지금 돌이켜보니 궁금해졌다.
낯선 사람에 대한 경계심이 엄청난 유네스가 유독 대공을 따르는 걸 보면 분명 대공과 가까운 사람이 유네스의 주인이었을 것이다.
“설마.”
대공과 가깝고 이미 죽은 사람은, 한 명뿐이었다.
“……대공비.”
디아나가 작게 중얼거리자 맞는다는 듯 유네스가 구슬픈 울음소리를 냈다.
“유네스, 네가 대공비님의…… 표우였구나.”
그러니까, 나의 친…… 엄마.
디아나는 기분이 이상해졌다.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었다.
사생아로 지낼 적엔 당연히 그녀를 생각할 이유가 없었고, 신분이 바뀐 이후엔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디아나의 머릿속은 대공을 향한 원망과 대공가를 나가고 싶다는 마음만 가득했으니까.
“……엄…… 마.”
대공비를 말할 때면 하녀들은 모두 입을 모아 찬양했었다.
여신처럼 아름답고 자애로우신 분이라고.
하지만 디아나는 대공비에 대해 아는 것이 없다.
‘날…… 많이 사랑했을까.’
디아나에게 ‘엄마’에 대한 기억은 레아의 학대가 전부였기에, 엄마의 사랑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다.
대공비가 궁금했지만 알려 줄 수 있는 사람은 대공밖에 없었다.
디아나의 얼굴이 어두워지자 그러지 말라는 듯 유네스가 품으로 파고들었다.
체온이 높은 유네스가 품에 안기자 따스한 온기가 퍼졌다.
“유네스, 네가 말할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엄마의 표우였으니까, 엄마에 대해 잘 알고 있을 테니.
‘유네스가 날 이렇게 좋아해 주는 걸 보면…… 엄마도 날 싫어하진 않았을 거야.’
표우는 충성심이 강한 몬스터니까.
진짜 엄마를 떠올리자 마음 한편이 서글퍼진 디아나는 따스한 유네스를 더욱 꼭 끌어안았다.
엄마의 온기도 이랬을 거라고 생각하며.
* * *
이틀 뒤.
해가 하늘 높이 솟아오른 시간, 디아나는 오랜만에 피비와 함께 인형 놀이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황궁으로 가겠단 서신을 보낸 그날, 곧장 답장이 왔다.
다음 날 점심을 함께하자고, 기다리겠다고 말이다.
디아나는 그러겠다고 직접 서신을 적어 2황자에게 보냈고 드디어 오늘이 황궁으로 가는 날이었다.
그렇기에 지금 인형 놀이의 인형은 당연히 디아나 본인이었다.
“음…… 이것도 예쁘시긴 한데.”
벌써 5벌째 옷을 갈아입고 거울 앞에 선 디아나는 갈등이 서린 피비의 얼굴을 보고 황급히 외쳤다.
“피비, 난 이게 제일 예쁜 거 같은데 피비는 어때?”
“음…… 아가씨께선 뭘 입으셔도 예쁘시지만 오늘은 다른 곳도 아니고 황궁으로 가시는 거니 더 좋은 드레스를 입는 게…… 좋지 않을까요?”
피비가 조심스럽게 물으며 고개를 돌렸다.
피비의 시선은 디아나가 아직 입어 보지 않은, 이틀 전 도착한 새로운 드레스들을 향해 있었다.
저 드레스들은 수도에서 가장 유명한 살롱에서 보내온 드레스라고 했다.
그래서인지 이제까지 디아나가 받았던 드레스들보다 훨씬 아름답고 재질이 좋아 보였지만 디아나는 저 옷들을 입고 싶지 않았다.
저 드레스들은 대공녀의 것이니까.
“저 옷들은 입지 않을 거야. 내 앞으로 온 게 아니야. 난 대공녀가 아니니까.”
디아나의 단호한 말에 피비도 미련을 더 두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치장을 하는 하녀의 마음으로는 조금 더 예쁜 드레스를 입히고 싶었지만 디아나의 마음이 더 중요했으니까.
피비는 미련을 버리고 다시 디아나의 모습을 살폈다.
“음…… 아가씨, 정말 이 옷이 마음에 드세요?”
“응, 당연하지. 피비가 사 준 옷이잖아. 난 이게 제일 좋아.”
피비가 사 준 옷이 제일 좋다는 건 진심이었다.
디아나가 입꼬리를 예쁘게 말아 올리며 바라보자 주홍빛 눈동자가 감동으로 물들었다.
“제가 사 준 옷이라 제일 좋다니, 아가씨…… 앞으로 월급 다 털어서라도 더 예쁜 드레스를 사 올게요.”
피비의 비장한 얼굴에서 진심을 읽은 디아나가 다급히 말했다.
“아냐, 그러지 마. 이걸로 충분해. 피비가 힘들게 일해서 번 돈인데 왜 내 옷을 사는 데 다 털어. 그러지 마.”
“힘들다뇨, 아가씨 곁에 있는 게 얼마나 좋은데요. 거기다 이렇게 제 월급까지 걱정해 주시고…… 전 정말이지 너무 행복해요.”
피비는 감격스럽다는 듯 환한 미소를 지었다.
거울에 비친 피비의 얼굴을 가만히 보던 디아나는 눈을 도르륵 굴리다 수줍게 입을 열었다.
“나도, 피비 덕분에 행복해.”
작은 목소리였지만 피비에게는 분명히 들렸다.
“어머나, 아가씨…….”
말해 놓고 부끄러운지 볼을 발그레 물들이며 시선을 피하는 디아나의 사랑스런 모습에 피비는 입을 틀어막았다.
아니면 당장 ‘꺄악!’ 하고 소리를 지를 거 같았으니까.
피비의 격한 반응에 쑥스러워진 디아나가 ‘큼’ 작게 헛기침을 한 그때,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대공녀님, 에드윈입니다.”
“에드윈?”
디아나는 물론이고 피비도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서 들어와.”
디아나가 빠르게 답하자 곧 문이 열리고 에드윈이 방 안으로 들어섰다.
“대공녀님을 뵙니…….”
“에드윈!”
디아나는 예를 갖추려는 에드윈의 앞으로 한달음에 달려갔다.
그리고 한쪽 무릎을 굽힌 에드윈의 목을 꽉 끌어안았다.
“에드윈, 무사해서 정말 다행이야.”
무사하다는 것을 듣긴 했었지만 직접 보지 못해 마음 한편에 불안이 쌓였다.
하지만 에드윈을 보자마자 불안했던 마음이 안도감과 기쁨으로 바뀌었다.
평소 얌전하던 디아나답지 않게 와락 안기자 놀란 에드윈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것도 잠시, 에드윈은 해사한 미소를 지으며 디아나를 살짝 안아 주었다.
“대공녀님도 무사하셔서 정말 다행입니다.”
에드윈의 품에서 나온 디아나는 미간을 살짝 좁혔다.
“에드윈, 대공녀라고 부르지 마.”
순간 에드윈의 얼굴에 당황이 스쳤으나 곧 미소를 그렸다.
디아나가 대공가를 거부하고 있다는 건 이미 로운에게 들어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 네. 그보다 아가씨, 오늘 정말 예쁘시네요.”
분홍 드레스를 입고 금빛 머리칼을 예쁘게 땋아 올린 모습은 인형보다 더 예뻤다.
“고마워.”
디아나는 쑥스러워 볼을 붉히며 미소를 지었다.
“근데, 에드윈은 오늘 어쩐 일이야?”
“앞으로 아가씨의 호위는 제가 맡게 되었습니다.”
“정말?”
“네, 그러니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아가씨.”
“나야말로 잘 부탁해. 에드윈이 내 호위 기사라니, 너무 좋아.”
로운이 올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기에 에드윈이 더욱 반가웠다.
대공의 오른팔이나 다름없는 로운은 대공만큼이나 불편했으니까.
“저도, 아가씨를 모시게 되어 정말 기쁘답니다. 한데 준비는 다 끝나신 건가요? 황궁으로 갈 마차는 준비가 끝났습니다.”
“아, 나 준비 다 했어. 그치, 피비?”
“네, 아가씨.”
“그럼, 바로 내려가시겠어요?”
“응! 유네스, 이리 와.”
폴짝 품으로 뛰어든 유네스를 안은 디아나는 에드윈에게 기분 좋은 미소를 그리며 방을 나갔다.
* * *
테라비타 제국의 황성, 2황자의 궁전인 프로키온 궁전 앞으로 마차 한 대가 멈춰 섰다.
“아가씨, 조심해서 내리셔요.”
디아나는 피비의 손을 잡고 마차에서 내렸다.
그리고 궁전 앞에 서 있는 사람들을 보고 몸을 주춤거렸다. 2황자만 있는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디아나는 멀지 않은 거리에서 2황자의 곁을 지키고 있는 사람들을 한 사람씩 바라보았다.
먼저 2황자의 손을 잡고 서 있는 아름다운 여자가 디아나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분홍빛 머리칼을 우아하게 틀어 올린 채 금빛 의복을 입고 있는 예사롭지 않은 분위기의 여자.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지만 디아나는 그녀가 제국의 황후인 리리오페 테라비타라는 걸 눈치챘다.
그리고 2황자의 왼쪽에 서 있는, 황가의 상징인 금발에 금안을 가진 소년은 1황자 에키온 테라비타.
마지막으로…… 디아나는 1황자의 곁에 선 소년에게서 시선이 멈추었다.
바람에 살랑이는 검은 머리칼과 수려한 얼굴, 그리고 자신을 보고 있는 칠흑 같은 눈동자.
그는 카이루스였다.
그리고 이젠 그가 누구인지 정확히 알았다.
카이루스 오도어, 신성왕국 오도어 왕국의 왕자란 걸 피크닉 날 알게 되었으니까.
‘그러고 보니 에드윈과 함께 날 지켜 주었었는데.’
디아나는 신비로운 힘을 검에 두르고 싸우던 그의 모습을 기억하고 있었다.
잠시 서로를 바라보던 그때, 디아나가 먼저 시선을 돌렸다.
디아나는 피비에게 유네스를 건네주고 긴장된 얼굴로 그들이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제국의 달과 빛이신 황후 폐하와 황자 저하들을 뵙니다. 디아나…… 라고 합니다.”
디아나는 긴장한 얼굴로 고개를 살짝 숙이며 예를 갖추었다.
성을 말하지 않는 디아나의 인사에 1황자와 황후의 얼굴에 일순 당황이 서렸다.
하지만 빠르게 표정을 갈무리한 황후는 디아나에게 부드럽게 말했다.
“일어나렴.”
“감사합니다, 황후 폐하.”
황후는 고개를 든 디아나의 얼굴을 보자마자 짧은 탄성을 내뱉었다.
디아나가 잊을 수 없는 친우의 어린 시절과 너무도 닮았기 때문이었다.
아리엘.
이렇게 닮았는데, 그 오랜 세월 동안 아무도 대공녀가 바뀌었다는 사실을 모른 채 지내고 있었다니.
자신이 어떻게 해서라도 북방으로 갔었다면, 하는 후회가 밀려들었다.
황후는 세이아를 보았을 땐 느끼지 못했던 그리움과 울컥함에 짧은 숨을 내쉬었다.
“이렇게 황궁을 찾아 주어 고맙구나. 편하게 디아나라고 이름을 불러도 되겠느냐.”
황후는 디아나를 보며 온화한 미소를 그렸다.
아이가 아직 대공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단 건 이미 황제에게 들어 알고 있었다.
거기다 성을 붙이지 않고 말하는 디아나의 모습까지.
대공녀란 신분을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의사가 분명한 아이에게 굳이 호칭으로 스트레스를 주고 싶지 않았다.
디아나는 상냥한 황후의 자줏빛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언뜻 그리움과 슬픔이 스쳤지만 황후는 디아나를 애정 어린 눈빛으로 응시하고 있었다.
디아나는 어딘지 기분이 이상해져 시선을 낮추었다.
“……네, 편히 불러 주세요.”
“그래, 허락해 주어 고맙다, 디아나.”
천천히, 한 걸음씩 디아나에게 다가갈 생각으로 황후가 웃은 그때 계속 눈치만 보고 있던 레귤러스가 참지 못하고 외쳤다.
“디아나, 어서 와. 보고 싶었어!”
레귤러스는 밝은 얼굴로 디아나에게 스스럼없이 다가왔다.
갑자기 훅 다가오는 레귤러스에 놀랐는지 피비에게 안겨 있던 유네스가 크르르, 위험한 울음소리를 냈다.
“그러면 안 돼, 유네스.”
디아나가 유네스를 안아 들며 진정시키는 모습에 황후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
“……몸집이 작아 고양이인 줄 알았는데, 유네스였구나.”
“네.”
황후는 유네스를 아는 거 같았다.
그리움이 가득한 시선으로 유네스를 보던 황후는 제 곁으로 레귤러스를 잡아당겼다.
“레귤러스, 그렇게 갑자기 다가가면 실례란다.”
“아…… 죄송해요. 미안, 디아나. 난 네가 무사한 게 반가워서. 놀랐다면 미안해.”
“아니에요, 전 괜찮아요, 저하.”
“저하라니, 레귤러스라고 편하게 불러. 우린 가족이잖아.”
레귤러스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지만 주변의 분위기는 일순 굳었다.
레귤러스는 디아나가 진짜 대공녀라는 것만 들었지, 대공가의 깊은 사정에 대해선 알지 못했다.
좋은 일들이 아니었기에 어린 황자의 귀엔 들리지 않게 황후가 시녀들을 철저히 단속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렇게 해맑게 말하는 레귤러스를 보니 조금의 언질은 주었어야 했나 후회가 든다.
디아나가 살짝 굳은 얼굴로 2황자를 바라보았다.
‘설마 가족 행세를 하려고 날 부른 건가?’
거북한 마음이 들려 했지만 자신을 보는 황자의 금빛 눈동자가 너무 순수했다.
정말 순수하게 디아나가 좋아서 그리 말한 거 같았다.
디아나는 호감 가득한 2황자의 눈빛을 비스듬히 피하며 입술을 열었다.
“송구하지만 전, 존칭을 쓰는 것이 더 편합니다, 저하.”
“아……. 아쉽지만 네가 그게 편하다면 어쩔 수 없지.”
2황자는 실망한 듯 시무룩한 얼굴을 했다.
“나중에 편해지면 언제든 레귤러스라고 불러, 우린 가…….”
“레귤러스.”
레귤러스가 밝은 목소리로 또 한 번 ‘가족’이라 말하려던 찰나 조용히 있던 에키온이 말을 막았다.
말이 끊긴 게 기분 나쁜지 레귤러스의 샐쭉한 눈초리가 에키온을 향했다.
에키온은 미안하다는 듯 레귤러스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디아나에게 말했다.
“만나서 반갑다. 난 1황자 에키온 테라비타라고 해. 나도 디아나라고 편히 불러도 될까?”
“……네.”
디아나의 대답에 에키온의 눈이 반달로 휘었다. 다정한 웃음에 디아나의 굳었던 얼굴도 조금 풀렸다.
“고마워. 아, 그리고 이쪽은 이미 한 번 만난 적 있겠지만…… 카이루스 오도어, 내 친우이자 오도어 왕국의 왕자야.”
“다시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디아나 영애.”
카이루스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디아나는 마주한 흑빛 눈동자를 가만히 바라보다 옅은 미소를 지었다.
“저도 다시 뵙게 되어 기쁘네요, 오도어 왕자님.”
“영애, 편하게 카이루스라고 부르셔도 됩니다.”
사근사근한 그의 목소리에 순간 에키온이 놀란 눈을 했지만 카이루스는 에키온을 보지 않았다.
“……네, 카이루스 왕자님.”
디아나는 거절하지 않았다. 카이루스는 황족이 아니었고, 그는 두 번이나 자신을 구해 준 고마운 사람이었으니까.
디아나의 옅은 미소에 에키온의 눈동자가 더욱 커졌다.
에키온이 두 사람을 번갈아 보던 그때, 황후가 입을 열었다.
“서로 인사는 다 한 거 같으니 이만 안으로 들어가는 게 좋겠구나. 식사가 준비되었단다.”
“네, 황후 폐하.”
“레귤러스와 먼저 들어가, 디아나. 우린 잠시 할 얘기가 생겨서. 하하.”
“……네, 저하.”
디아나는 갑자기 카이루스의 어깨를 붙잡는 에키온을 힐긋 보다 레귤러스와 함께 황후를 따라갔다.
* * *
2황자 궁의 화원.
점심 식사를 마친 디아나는 2황자와 둘이서 화원을 걷고 있었다.
황후는 점심 식사를 마치자 일이 있다며 먼저 떠났고, 1황자 에키온은 수업이 있다며 카이루스를 억지로 데리고 나갔다.
다들 떠나는 분위기에 디아나도 이만 일어나야 하는 건가 싶었지만 레귤러스가 붙잡았다.
다들 갔으니 더 잘됐다며 같이 화원에서 놀자고 말이다.
디아나는 2황자에게 물을 것이 있었기에 당연히 함께 화원으로 향했다.
화원은 호기심이 많은 2황자의 성격을 반영한 듯 다른 화원들과는 다르게 꽃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꽃도 있긴 있었지만 다양한 식물들이 공존하고 있는, 식물원에 가까운 주변을 둘러보던 디아나는 레귤러스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이 나무는 벤트라란 나무인데, 이렇게 줄기를 만지면 잎이 인사를 하는 거처럼 움직여.”
디아나의 시선이 나무를 향하자 레귤러스가 보란 듯 줄기를 쓰다듬었다.
그러자 레귤러스의 말대로 잎사귀가 인사를 하듯 기울어지는 것이 보였다.
“냐아-.”
움직이는 잎사귀를 잡으려는 듯 발을 뻗는 유네스를 고쳐 안으며 디아나가 말했다.
“우와, 신기하네요.”
“그치? 이게 서부에서만 나는 나무인데, 책에서 보고 어머니께 부탁해 씨앗을 받아 내가 직접 키운 거야.”
“직접이요? 대단하시네요.”
디아나가 레귤러스보다 한 뼘 더 큰 나무를 보며 감탄하자 레귤러스가 신이 나 덧붙였다.
“여름이 되면 열매도 열려. 되게 맛있는데 몸에도 좋아. 나중에 여름이 되면 우리 같이 먹자.”
같이…….
디아나는 바로 답을 하지 못했다
2황자가 싫은 것은 아니었지만, 2황자의 금발과 금안을 볼 때면 대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디아나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화제를 돌렸다.
“저긴 쉼터인가요?”
디아나는 화원 중앙에 있는 가제보를 가리키며 물었다.
“응, 차도 마시고 디저트도 먹는 곳이야. 음, 많이 걸었으니까 저기서 좀 쉴래?”
“네, 좋아요, 저하.”
“그래.”
디아나는 레귤러스와 함께 가제보로 향했다.
폭신한 의자와 쿠션들이 있는 가제보 아래에 자리 잡은 디아나는 방석 위에 유네스를 내려놓았다.
“이름이 유네스라고 했지?”
레귤러스의 시선이 유네스를 향했다. 반짝거리는 황금빛 눈동자는 유네스를 만지고 싶은 듯했지만 유네스는 심드렁하게 하품을 할 뿐이었다.
“네, 유네스예요.”
“이렇게 작은 표우라니. 뭐, 물론 아파서 작아진 거긴 하지만 그래도 너무 귀엽다. 아, 이런 말은 실례인가?”
“아니에요, 저도 귀엽다고 생각하는 걸요.”
“냐아-.”
디아나가 유네스를 쓰다듬자 기분 좋다는 듯 울음소리를 냈다. 레귤러스 황자가 둘을 부러운 눈빛으로 보고 있을 때 시녀들이 트레이를 끌고 왔다.
시녀들에게서 차를 건네받은 피비가 디아나의 앞에 차를 놓아주었다.
“네가 과일 차를 좋아한다고 해서, 어제 어머니께서 준비해 주신 거야.”
디아나의 앞에 놓인 찻잔에서 달콤한 사과 향기가 올라왔다.
디아나는 식사 내내 자신을 살뜰히 챙겨 주던 황후의 모습이 떠올랐다.
인자하면서도 다정한 황후의 눈빛은 디아나의 기분을 간질거리게 만들었다.
디아나가 상상했던 엄마의 다정한 눈빛 같았기 때문이었다.
디아나는 사과 차를 한 모금 마셨다. 달콤한 맛에 절로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황후 폐하께 감사하다고 전해주세요.”
“응, 네가 좋아했다고 하면 분명 어머니도 기뻐하실 거야.”
레귤러스는 즐거운 듯 눈웃음을 지으며 초코 쿠키를 먹었다.
차를 따라 준 시녀들이 가제보에서 한 걸음 물러나자 디아나는 진지한 얼굴로 찻잔을 내려놓았다.
“저하.”
“응?”
“그…… 제가 정령술을 쓸 수 있는 거 아시죠?”
“당연하지, 내가 두 눈으로 봤었잖아. 거기다 그날…… 아, 이런 건 물어보면 안 된다고 했는데…….”
레귤러스는 곤란한 듯 눈을 살짝 찡그리다 디아나에게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날 일에 대해 말해도 돼? 어머니는 네가 기분 나쁠 수 있으니 말하지…… 말라고 했거든. 혹시 지금 이렇게 묻는 것도 기분 나쁘다면 미안해.”
“아, 괜찮아요. 말씀하셔도 돼요.”
디아나의 허락에 시무룩해졌던 레귤러스의 얼굴이 확 밝아졌다.
“정말? 고마워! 사실 네가 그날 쓴 정령술을 잊을 수가 없었거든. 네가 책에서 나오는 초대 황제 폐하처럼 보였다니까? 어떻게 그럴 수 있지? 너무 신기하고 대단해.”
레귤러스는 신난 듯 속사포로 말을 내뱉었다.
쏟아지는 감탄에 당황하던 디아나는 하하,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전…… 그날 정령술을 쓴 게 정확히 기억나지 않아서요.”
“그래? 왜 그렇지? 신기하네…….”
“그보다 저하, 황성에 정령의 의식을 치르는 곳 있잖아요. 갑자기 궁금해져서 그런데 그곳은 어디에 있나요?”
“정령의 의식을 치르는 곳? 거긴 태양궁에 있어.”
“태양궁이라면 황제 폐하가 기거하시는 곳 아닌가요?”
“응, 맞아. 정령이 황족의 상징이잖아. 그래서 황제가 기거하는 태양궁 지하에 잠들어 있다고 했어.”
“아…… 그곳에 가려면…… 황제 폐하의 허락이 필요한가요?”
“당연하지. 거긴 병사들이 지키고 있는 데다 강력한 마법진으로 출입이 통제되고 있어. 아버지의 승인을 받지 못한 사람은 아무도 들어갈 수 없어.”
레귤러스의 단호한 말에 디아나의 얼굴에 실망감이 서렸다.
쉽게 들어갈 수 없을 것이라 예상하긴 했지만 그래도 황자와 함께라면 들어갈 수 있지 않을까 기대했었다.
한데 황제의 허락이 필수라니.
‘어떻게 하지?’
난감함에 디아나가 미간을 좁히던 그때, 레귤러스가 물었다.
“디아나, 왜 그래? 뭐 불편한 거 있어?”
“아, 그냥…… 저 뒤에 나비 같은 게 지나간 거 같아서…… 하하.”
걱정스럽다는 듯 한껏 눈썹을 모으고 자신을 보는 레귤러스에게 그리 둘러대자 레귤러스의 몸이 갑자기 휙 돌아갔다.
“나비? 어디, 어디?! 으악!”
나비를 보겠다고 레귤러스가 몸을 크게 들썩인 순간 찻잔이 흔들리며 넘어졌다.
바지에 찻물을 쏟은 레귤러스는 놀라 소리를 질렀다.
“황자 저하, 괜찮으십니까!”
레귤러스의 목소리를 들은 시녀들이 달려오고 디아나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괜찮으세요?”
“아, 괜찮아, 괜찮아. 뜨거운 차도 아니었고 내가 갑자기 움직여서 쏟아진 거야. 미안, 나 때문에 놀랐지?”
“전 괜찮아요…… 저보단 황자저하가…….”
디아나는 레귤러스에게 미안해졌다. 대충 둘러대기 위해 나비라 말한 것인데 레귤러스가 이렇게 격한 반응을 보일 줄 몰랐다.
“아냐, 아냐. 나도 괜찮아. 그보다 나 옷 갈아입고 와야 할 거 같은데…… 잠시만 혼자 있을 수 있겠어? 물론 시녀들은 있을 거야. 아님 혼자 있기 싫으면 나랑 같이 가도 돼.”
“아니에요. 여기서 기다릴게요. 걱정 말고 다녀오세요, 저하.”
디아나는 미안함에 미소를 지으며 일부러 더 밝게 말했다.
“그래, 그럼 나 빨리 다녀올게.”
레귤러스는 빨리 다녀온다는 말을 지키겠다는 듯 화원을 달려 나갔다.
시녀 두 명이 황급히 레귤러스의 뒤를 따라가고 그 뒷모습을 보던 디아나는 가벼운 웃음을 흘렸다.
“아가씨, 차를 더 따라 드릴까요?”
피비가 다가와 디아나에게 물었다.
“아니, 괜찮아.”
“그럼 필요한 게 있으시면 불러 주세요.”
“응, 피비.”
피비가 가제보에서 나간 찰나 화원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벌써 돌아왔나?’
하지만 2황자가 돌아오기엔 너무 일렀다.
의아하여 고개를 돌리자 레귤러스보다 키가 두 뼘은 큰 검은 머리칼의 소년이 눈에 들어왔다.
“카이루스…… 왕자님.”
가제보 근처에 서 있는 에드윈과 짧은 인사를 나눈 카이루스는 디아나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왔다.
“영애, 또 뵙네요.”
듣기 좋은 목소리에 정신을 차린 디아나는 어느새 바로 앞에 도착한 카이루스를 올려보았다.
“크르르-.”
익숙지 않은 사람을 경계하는 유네스를 피비에게 넘기려 하자 카이루스가 말했다.
“괜찮습니다. 유네스와 친해지는 법을 알고 있거든요.”
“네?”
그게 무슨 말이냐는 듯 카이루스를 바라보자 그는 미소를 지으며 유네스에게 손을 뻗었다.
그의 손에서 하얀 빛이 뻗어 나오자 사납던 유네스의 기세가 단번에 순하게 바뀌었다.
“어떻게…….”
“표우는 원래 신성국에서 생겨난 몬스터입니다. 그래서 신성력에 순하게 반응한답니다.”
“아, 그렇군요.”
“영애, 저도 여기에 앉아도 될까요?”
“아, 네. 당연히 앉으셔도 되죠.”
“감사합니다, 영애. 저하께선 곧 오실 거예요. 빨리 옷을 갈아입고 온다며 달려가셨거든요.”
오는 길에 2황자를 마주친 듯 카이루스는 웃음기가 서린 얼굴로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제가 나비를 봤다고 하는 바람에, 저하께서 실수로 차를 쏟으셨어요.”
“저하께서는 호기심이 많으십니다. 모든 것에 반응이 크신 거니, 영애 잘못이 아닙니다. 아마 레귤러스 저하도 그렇게 생각할 겁니다.”
카이루스의 나직한 목소리에 디아나는 왠지 안도감이 들었다.
“그렇다면…… 다행이에요.”
카이루스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찻잔을 들었다.
차를 마시는 카이루스의 모습이 그림처럼 우아해 멍하니 보던 디아나는 순간 그가 도와준 일이 떠올랐다.
에드윈과 함께 자신을 지켜 주었던 그때가.
디아나는 찻잔의 테두리를 만지작거리다 입술을 열었다.
“……그날은 감사했어요. 그때도 그렇고 그날도 절 구해 주셨네요, 두 번이나……. 늦었지만 감사합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그리고 전 이미 영애에게 선물을 받았답니다. 영애께서 준 선물 덕에 요즘 제 생활이 많이 변했습니다.”
“네?”
‘선물? 내가 선물을 줬다고?’
디아나는 카이루스에게 선물을 준 기억이 없었다. 영문 모를 말에 디아나가 고개를 갸웃했지만 카이루스는 그저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그보다 영애, 대공가의 생활은…… 괜찮으신가요? 많은 것들이 한꺼번에 변하면 아무리 오래 지낸 곳이라도 적응하기가 힘들죠. 영애와 같은 상황은 아니지만 저도 큰 변화를 겪은 적이 있었거든요. 그래서 영애가 걱정되었답니다.”
카이루스의 흑안이 디아나를 고요히 응시했다. 얼핏 찰나의 그리움이 스친 그의 얼굴은 진지했다.
진심으로 걱정하는 듯한 그의 눈빛에 디아나는 기분이 조금 이상해졌다.
카이루스와 만난 것은 몇 번 되지 않았지만 이상하게 항상 기억에 오래 남았다.
지금 자신을 바라보는 카이루스의 걱정 서린 눈빛도 왠지 쉽게 잊히지 않을 거 같았다.
‘너무 사람답지 않게 잘생겨서 그런 걸까.’
많은 사람들을 보고 자란 것은 아니지만 카이루스는 정말 대공 전하만큼이나 잘생겼다.
디아나는 카이루스를 물끄러미 보다 답했다.
“걱정해 주셔서 감사해요. 많은 것이 변해서 거북하긴 하지만 그래도 피비랑 에드윈이 있어서 괜찮아요.”
“다행이네요. 많이 힘들면 저랑 같이 도망가자, 하려고 했는데.”
도망가자니, 그것도 자신과 함께.
상상조차 해 본 적 없는 말에 디아나의 눈이 동그래졌다.
놀란 얼굴을 숨기지 못하는 디아나를 보며 카이루스가 장난스런 미소를 그렸다.
“농담이었습니다, 영애. 제가 감히 어떻게 영애에게 도망가자 하겠습니까. 아마 그럼 에키온이 절 죽이려 들 거예요.”
이미 경고를 받기도 했지만요. 카이루스는 작게 덧붙였다.
‘여기서 1황자가 왜 나오지?’
뭔가 알 수 없는 이야기만 하는 카이루스의 모습에 디아나의 얼굴에 궁금증이 서린 때, 레귤러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많이 기다렸지, 디아나?”
레귤러스는 뛰어왔는지 가쁜 숨을 내쉬며 가제보 안으로 들어왔다.
“아니에요, 저하.”
목이 말랐는지 사과 차를 물 마시듯 들이켠 레귤러스가 자리에 앉자 카이루스는 디아나에게서 시선을 거두었다.
“디아나 네 말이 맞았어. 화원을 뛰어오다가 나비를 보았는데 그 나비는…….”
곧 신이 나 연신 재잘거리는 레귤러스의 목소리와 잠시 주변의 상황들을 잊은 디아나의 웃음소리가 가제보 안을 가득 메웠다.
* * *
“세이아의 흔적은 아직 나온 것이 없느냐.”
황제의 집무실, 대공은 황제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네, 아직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제국의 모든 영토로 수색 범위를 넓혔으니 곧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 아직 수색 범위를 넓힌 지 하루밖에 되지 않았으니 더 기다려야 하겠지. 한데 정말이지, 그 아이가 어둠술사가 되어 사라질 줄은 상상도 못했다. 어둠술사들의 힘이 대를 잇는다는 것은 들었지만 세이아는 고작 10살이 아니더냐.”
“……저도 세이아가 아직 어려 어둠술사가 될 수 있을 거란 예상은 하지 못했습니다. 어둠술의 계약은 영혼의 계약이라 악에 물든 인간들을 찾는다고 알고 있으니까요.”
“맞다, 어둠의 힘은 악의 감정에 이끌리는데 그 어린아이가 어둠을 부를 만큼 악한 감정을 가지고 있다니…… 끔찍한 일이다. 얼른 찾아야 할 터인데.”
쯧, 황제는 혀를 차며 미간을 좁혔다.
뒤바뀐 대공녀부터 새로운 어둠술사까지, 요즘 벌어지는 일들은 황제의 예상을 넘어서는 일들뿐이었다.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황제를 보며 대공은 굳은 얼굴로 말했다.
“폐하, 오늘 온 것은 세이아의 수색 때문이 아닙니다.”
“신문사의 배후를 찾은 것이냐.”
“네, 제일 특보를 많이 내는 신문사의 뒤를 알아보니 차일러스 공작가가 있었습니다. 특보가 터지기 전부터 차일러스 공작이 신문사에 후원금을 넣고 있었고, 최근 특보가 보도된 뒤 거액의 후원금이 추가로 들어갔다고 합니다.”
하, 황제는 기가 막힌다는 듯 헛웃음을 내뱉었다.
“차일러스 슈테르 이놈, 황가의 방계 출신이라 오냐오냐해 줬더니 정신 못 차리고 기어오르는구나. 설마설마했는데 정말 그놈일 줄이야. 전 공작은 오만하긴 했어도 황가엔 고개를 숙일 줄 알았는데. 제국에 큰 공을 세웠던 카탈리나 선황후의 핏줄이라 예우해 주었더니 감히.”
황제의 서릿발 같은 목소리가 집무실을 울렸다. 그도 그럴 것이 최근 황가를 의도적으로 저격하는 신문사들의 특보가 연일 쏟아지고 있었다.
원래가 귀족들의 후원을 받는 신문사들이라 꽤나 시끄러울 것이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선을 넘는 신문사가 있었다.
현 황제는 제국의 자유로운 분위기를 깨고 싶지 않아 강압적인 정치와 제도를 시행하지 않았지만 황권에 반기를 드는 것을 묵과할 정도로 너그럽진 않았다.
거기다 이대로 떠들게 놔두면 대공녀에 대해서도 물고 늘어질 게 뻔했다.
벌써 대공녀의 자질을 의심하는 기사들이 나오기 시작했으니까.
그렇기에 대공이 먼저 신문사에 대한 뒷조사를 한 것이다.
배후가 누군지 찾은 이상,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대공은 차가운 분노가 서린 금안을 번뜩이며 말했다.
“배후를 알게 되었으니, 그 자금줄부터 막으려 합니다. 차일러스 공작가의 상단으로 들어가는 북방의 철과 광산의 거래를 전부 끊을 것입니다. 보석과 무기가 가장 큰 수익원이었으니 공작가가 파산에 이를 때까지 압박할 생각입니다.”
황실을 공격하기 위해 감히 디아나에 대한 더러운 유언비어를 퍼뜨리다니. 대공은 자비를 베풀 마음이 없었다.
“그리하거라. 내 평화를 명목으로 귀족들을 너무 풀어 놓았단 걸 이번 일로 느꼈다. 불미스런 일을 기회 삼아 허튼짓을 하면 어떻게 된다는 것을 귀족들에게 보여 줄 필요가 있어.”
“네, 폐하. 그럼 바로 일을 진행하겠습니다.”
“그래. 그리고 디아나는 여전한 것이냐. 오늘 황궁으로 레귤러스를 만나러 왔다 들었는데.”
황제의 물음에 대공의 얼굴이 어둡게 굳었다.
디아나와의 관계는 진전될 희망이 보이지 않았으니까.
“네, 아마 지금쯤 레귤러스와 함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디아나와는 시간이 오래 필요할 거 같습니다. 제가 다가가는 것 차제를 거북해하고 있으니까요.”
황제는 근심 어린 얼굴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디아나의 마음이 쉽게 풀린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다. 그 애가 받았을 상처를 생각하면…… 용서를 구하는 것조차 죄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제 겨우 되찾은 자식을 놓으라 할 수도 없고……. 어쩌다 이런 일이 생긴 것인지…….”
대공은 칼에 베인 상처는 치료할 줄 알아도 마음의 상처를 치료하는 법은 모를 것이다.
스스로의 상처를 보듬지 못해 전장으로 도망쳐 버렸으니까.
동생으로선 이해할 수 있지만 한 아이의 아버지로선 대공을 용서할 수 없었다.
황제는 싸늘한 눈빛으로 무어라 변명도 늘어놓지 못하는 대공을 불렀다.
“크로우드.”
“네.”
“기다리거라. 디아나가 스스로 용서할 마음이 설 때까지. 설령 그게 평생이 걸린다 해도, 아니 네가 죽을 때까지 용서받지 못한다 해도 그저 기다리거라. 디아나를 먼저 버렸던 것은 바로 너니까.”
위로도 해답도 주지 않았다.
애초에 위로를 해선 안 될 일이었고, 디아나의 상처를 치료할 해답 같은 건 황제 역시 알 수 없었으니까.
“……네, 그럴 것입니다.”
차갑게 말했지만 대공의 힘든 얼굴을 보니 황제의 마음이 편치 못했다.
“……더 보고할 일이 없다면 그만 가 보거라.”
보고 있으면 마음이 약해질 거 같아 축객령을 내리자 대공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네, 그럼 물러가 보겠습니다, 폐하.”
대공이 집무실을 나가자 황제는 답답한 마음에 창가로 걸어갔다.
“……부디 너도, 디아나도 더 이상 상처 입지 않아야 할 텐데.”
황제는 복잡한 마음과 달리 푸르른 하늘을 보며 긴 숨을 내쉬었다.
* * *
태양궁을 나와 마차로 향하던 대공은 앞서 복도를 걸어가는 한 사람의 뒷모습을 보고 걸음을 멈추었다.
“전하, 왜 그러십니까.”
대공의 뒤를 따르던 로운이 주춤하며 물었다.
“시아페 후작 각하시군.”
대공은 익숙한 뒷모습을 바라보다 후작의 곁에 선 사람에게 시선을 돌렸다.
“저자는…….”
“카를로스 대법관님 아니신가요?”
로운이 후작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사람을 보며 말했다.
“맞다.”
대공은 후작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대법관을 보며 미간을 좁혔다.
“한데, 두 분이 왜 함께 있으신 걸까요?”
“카를로스 대법관은 후작 각하와 어린 시절부터 함께 자란 친우다. 함께 있는 것은…… 이상할 게 없지.”
“그렇군요.”
로운에겐 대수롭지 않게 말했지만 후작과 대법관을 보는 대공의 표정은 굳어 있었다.
갑자기, 대법관은 왜.
좋지 않은 예감이 스쳤지만 후작과 대법관은 어느새 멀어져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사라진 두 사람이 있던 자리를 가늘어진 눈빛으로 보고 있던 대공은 로운의 목소리에 상념에서 깨어났다.
“전하, 저택으로 돌아가시겠습니까.”
“아니, 마탑주를 만나고 갈 것이다.”
이윽고 아무도 없는 복도에서 시선을 거둔 대공은 몸을 돌려 마차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