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권-9화 (9/16)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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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이 안 좋구나. 몸이 안 좋은 거 같은데 정말 괜찮은 것이냐.”

“아…… 괜찮아요. 속이 안 좋아 아침을 조금만 먹었더니 조금 어지러웠어요.”

“그럼 이만 돌아가 쉬어야겠구나. 무리하면 또 몸이 나빠질 것이다. 이만 돌아가 쉬거라.”

그만 나가 보라는 말에 세이아는 뒤에 서 있는 레아를 힐긋 보았다.

“레아는 두고 먼저 가거라.”

레아와 함께 가고 싶었지만 대공의 굳은 얼굴에 차마 말이 나오지 않았다.

“……네, 아버지.”

세이아가 나가고 대공은 고개를 숙이고 있는 레아를 직시했다.

“널 부른 이유는 너도 짐작하고 있겠지.”

“……네.”

“저번엔 채찍질 50대로 끝났지만 한 번만 더 내 명을 어긴다면 그땐 채찍질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명심하겠습니다.”

“나가라.”

더 이상 말을 섞기도 싫다는 듯한 차디찬 축객령이 떨어졌다.

“물러가겠습니다.”

허리를 숙인 레아는 고개를 들지 않고 집무실을 나갔다.

달칵-.

문이 완전히 닫히자 대공은 로운 옆,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향해 말했다.

“이 정도의 시간이면 확인이 되었겠지.”

대공의 말이 끝나자 허공에서 밝은 빛이 번쩍했다.

곧 아무것도 없던 바닥에 동그란 마법진이 나타나고 루이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상급 마법사들만이 쓸 수 있는 투명 마법이었다.

루이스는 책상 앞으로 다가갔다.

“네, 확인은 했습니다만 전하, 저 하녀에겐 마법 서클이 없었습니다.”

“뭐?”

대공의 미간이 좁아졌다.

“마법 서클이 없다니, 그럼 마법을 쓰지 못한단 말이 아닌가?”

“……네, 맞습니다. 소량의 마나는 느껴졌지만 서클은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확실한 것이냐.”

대공의 기운이 날카로워지자 루이스는 난감한 얼굴로 말했다.

“……네, 몇 번이나 확인했습니다.”

“마법사가 아니라니, 다른 가능성은 없는 건가? 저 하녀와 관련된 자들이 모두 미심쩍은 죽음을 맞이했다. 단순한 우연이라고 보기 힘든 죽음 말이다.”

대공의 말에 루이스는 고심을 하는 듯 미간을 좁혔다.

“만약의 가능성이라면…… 하녀의 능력이 마법이 아닌 다른 것일 수도 있습니다.”

“다른 것? 마법과 다른 능력이라면 정령술과…… 어둠술사.”

대공은 떠오른 것에 말을 멈추었다. 루이스는 대공의 말에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전하. 정령술은 황족들만이 사용할 수 있는 것이니 불가능하고 남은 것이 바로 어둠의 힘입니다. 어둠의 힘은 마나 서클의 힘으로 쓰는 마법과는 완전 다른 것이라 8서클 이상의 마법사들만이 그 힘을 느낄 수 있으니 저는 알 수가 없습니다.”

어둠술사의 힘을 느끼지 못하는 건 정령술을 쓰는 대공도 마찬가지였다.

태초의 시대, 초대 황제가 싸웠던 어둠의 힘과 힘의 신봉자들인 어둠술사들.

정령의 모든 힘을 쓸 수 있었던 초대 황제는 어둠의 힘을 느낄 수 있지만 지금의 황족들은 아니었다.

정령의 힘을 일부만 쓸 수 있기에 그 능력도 한정되었으니까.

“어둠술사라…….”

대공은 미간을 좁혔다.

대륙 전쟁에서 패하고 수많은 시간이 흐르며 어둠술사들은 그 모습을 감춘 지 오래였다.

대공이 바로 떠올리지 못한 것도 이 어둠술사들이 사라진 지 이백 년이 넘어 그 존재는 이제 신화 속에서나 나왔기 때문이다.

“어둠술사라면…… 제가 힘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 말이 되긴 하지만 사실 희박한 가능성입니다. 그들이 대륙에서 자취를 감춘 지 너무 오래되었으니까요.”

“희박하긴 하지만 불가능한 건 아니다. 어둠의 힘은 완전히 사라진 게 아니라 봉인되어 있는 것이니 그 신봉자들도 어쩌면 모습을 숨기고 있을 수도 있겠지.”

만약 레아가 어둠술사라면 의구심이 드는 주변인들의 죽음을 납득할 수 있었다.

마법진을 통해 시전되는 마법과 달리 어둠의 힘은 시전자의 의지로 움직이는 정령술과 비슷했으니까.

태초의 어둠술사들은 사람들의 정신까지 조종했다고 한다. 자살로 위장하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지금으로선 그 하녀가 어둠술사란 확증은 없습니다. 저의 능력으론 확인할 수 없는 문제라…….”

루이스가 난감한 얼굴을 했지만 대공의 심장은 이미 빠르게 뛰고 있었다.

“마탑주는 가능하지. 마탑주가 언제 돌아온다 했지?”

“사흘 뒤에 돌아오십니다.”

“사흘…….”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대공에겐 길게 느껴졌다.

진실을 손안에 쥘 듯 쥐지 못하는 기분이었으니까.

“마탑주가 마탑으로 돌아오는 대로 대공가로 전서를 보내 주게.”

“네, 전하.”

마탑주만 도착하면 모든 게 해결되리라.

대공은 차분함을 되찾으려 노력하며 로운에게 말했다.

“로운, 루이스를 사람들 눈에 띄지 않는 후문으로 안내해 주거라.”

“네.”

루이스와 로운이 집무실을 나가고 대공은 손에 얼굴을 묻으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만약 정말 레아가 어둠술사라면.

세이아와 디아나가 바뀌었다는 그 엄청난 가정도 진실에 한 걸음 가까워지는 것이다.

“그리되면 난…….”

진실이 되는 일도, 진실이 아니게 되는 일도 어느 쪽 하나 그의 마음을 편하게 하지 못했다.

그렇게 대공성을 떠나지 말았어야 했는데.

한순간의 잘못된 선택이 모든 것을 엉망으로 만든 것 같은 불안감에 머리가 터질 거 같았다.

그는 미간을 좁히며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

“후…….”

긴 숨을 내뱉으며 당기는 목뒤를 주무르던 그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울렸다.

“들어와.”

로운일 것이라 예상했던 것과 달리 집무실로 들어선 것은 하인이었다.

“무슨 일이냐.”

“대공 전하, 시아페 후작가의 마차가 도착했습니다.”

“뭐?”

대공은 순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오늘 방문한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막상 당도했다는 소식을 들으니 놀랐다.

다시는 대공가에 발을 붙이지 않을 거라 생각했으니까.

방문한다 했을 때도 완전히 믿진 않았다.

그의 생각보다 이른 방문에 당황했지만 곧 하인에게 명했다.

“……어서 문을 열어 드려라. 내가 직접 마중을 나갈 것이니 로비에 몇 명만 남기고 사용인들을 물리거라.”

“네, 전하.”

하인이 급히 집무실을 나가고 대공은 창문으로 몸을 돌렸다.

창밖, 대공저의 성문을 바라보자 후작가의 문양이 박힌 마차가 저택으로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굳은 얼굴로 마차를 바라보던 대공은 프록코트를 걸치며 급히 집무실을 나갔다.

저택의 로비.

대공은 긴장된 얼굴로 저택 앞에 멈추는 마차를 바라보았다.

10년 만이었다.

아리엘의 장례식 이후로.

- 대공 전하께서 죽이신 겁니다.

10년 전 후작이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 떠올랐다.

가슴이 무겁게 짓눌리는 느낌에 그의 얼굴이 어둡게 굳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대공 전하.”

시아페 후작의 중후한 목소리가 저택의 로비를 울렸다. 과거의 상념에서 깨어난 대공은 후작을 맞이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시아페 후작님. 이렇게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더 일찍 왔어야 했는데, 시간이란 게 참으로 빠르더이다. 마음을 추스르는 것이 왜 그리도 잘 안 되던지. 자식을 가슴에 묻는다는 것이 어느새 10년이 흘렀더군요.”

무덤덤한 후작의 말이 대공의 가슴을 후벼 파는 듯했다.

“……죄송합니다.”

“제게 죄송할 게 뭐가 있겠습니까. 10년 동안 혼자 남았던 전하의 자식에게 죄송하셔야겠죠.”

“……네.”

후작의 보랏빛 눈동자는 무심했고, 그만큼 차가웠다.

“전하, 더 하실 말씀이 없으시다면 세이아를 만나 보고 싶은데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어찌 제 허락을 구하십니까. 언제든 세이아를 보러 오셔도 됩니다. 이쪽으로 오시지요. 세이아를 불러와라.”

대공은 뒤에 시립해 있던 하인에게 명한 뒤 후작을 응접실로 안내했다.

후작에게 자리를 권한 대공은 상석이 아닌 맞은편의 소파에 앉았다.

하녀가 대공과 후작 앞에 찻잔을 내려놓았다.

은은한 홍차 향이 아닌 씁쓸한 향이 올라왔다.

“동방국의 차군요.”

“네. 방문하신다기에 후작께서 즐겨 드시는 차로 준비했습니다.”

“……기억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지만 후작은 말과 달리 찻잔에 손을 뻗지 않았다. 그리고 대공을 보지도 않았다.

응접실엔 침묵이 내려앉았다.

침묵이 바위처럼 무겁게 응접실을 짓누르고 있던 그때, 하녀장의 목소리가 울렸다.

“대공녀님 오셨습니다.”

자주색 드레스를 차려입은 세이아가 응접실로 들어서자 후작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후작은 천천히 세이아의 모든 것을 바라보았다. 옅은 금발과 금빛 눈동자, 그리고…….

시아페 후작의 눈빛이 살짝 흔들린 그때, 대공이 말했다.

“세이아, 이쪽은 너의 외할아버지 되시는 시아페 후작님이시다.”

대공의 말에 세이아의 눈이 커졌다. 갑작스런 만남에 놀란 것인지, 당황한 얼굴의 세이아를 보던 후작이 입을 열었다.

“이렇게 갑자기 찾아와 놀라게 해서 미안하구나. 수도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너의 얼굴을 한번 보고 싶었단다. 너무 늦었지만, 만나서 반갑구나.”

긴장한 듯한 세이아에게 후작은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

“……저도 만나서 반가워요, 할아버지.”

그 미소에 긴장이 풀린 듯 세이아가 입술을 뗐지만 여전히 어색한 얼굴이었다.

후작은 그런 세이아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보랏빛 눈동자가 누군가를 그리듯 집요히 세이아를 훑었지만 곧 아무런 그리움을 찾지 못했다.

“앉아서 편히 이야기 나누시지요, 후작님.”

대공이 세이아를 바라보기만 하는 후작에게 말했다.

“……아닙니다. 황궁으로 가기 전 잠시 얼굴을 보고 싶어 들린 것이었습니다. 갑자기 방문해 이야기를 나누자고 하면 세이아도 많이 당황스럽지 않겠습니까. 오늘은 서로 얼굴만 보고 다음에 다시 만나는 것이 좋겠지요.”

후작은 대공에게 고개를 저은 후 다시 세이아에게 말했다.

“다음에 다시 만나 많은 이야기를 나누자꾸나. 널 위해 작은 선물을 준비했으니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구나.”

후작이 응접실 한편에 서 있던 보좌관에게 눈짓했다. 보좌관은 네모난 작은 상자를 세이아에게 내밀었다.

상자를 받아 든 세이아는 곧장 상자를 열어 보았다.

금빛 보석 목걸이가 영롱하게 빛나는 것을 본 세이아가 미소를 지었다.

“감사합니다, 할아버지.”

“마음에 드는 듯해 다행이구나. 전하, 그럼 전 이만 가 보겠습니다.”

“제가 배웅해 드리겠습니다.”

대공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거절하지 않겠습니다.”

후작의 보랏빛 눈동자가 대공을 응시했다. 할 말이 있다는 뜻을 읽은 그는 세이아에게 말했다.

“세이아, 넌 방으로 돌아가도 된단다.”

“네, 아버지.”

후작과 대공을 번갈아 본 세이아는 곧 응접실을 나갔다.

“배웅해 주시지요.”

후작이 대공에게 말했다.

“네, 가시지요.”

대공과 후작은 나란히 응접실을 나섰다.

무언가 할 말이 있어 보였던 눈빛에 대공은 후작의 말을 기다렸으나 로비를 넘을 때까지 후작은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후작가의 문양이 새겨진 마차 앞까지 당도한 대공은 걸음을 멈추었다.

마부가 마차의 문을 열었다.

“전하, 의식을 앞당기셨다고 들었습니다.”

“그걸 어찌 아셨습니까.”

대공의 눈썹이 꿈틀 움직였다. 황제에게 말한 지 채 하루밖에 되지 않은 소식을 어찌 알게 된 것인지, 장인과 사위의 관계를 떠나 황족으로서 반응한 것이다.

“황궁엔 눈과 귀가 많지요. 황제 폐하께서 갑자기 절 찾으시어 조금 알아보았습니다.”

시아페 후작은 대륙 현자의 탑에 이름을 올린 사람이었다.

아카데미에서 교수로 재직하기도 했었기에 황궁엔 그의 제자들이 아주 많았다.

귀족들은 물론이고 황제의 직속 시종들 중에도 있었다.

정보를 얻고자 한다면 그리 힘든 일은 아닐 것이다.

“네, 의식을 앞당겼습니다.”

“갑자기 의식을 앞당긴 이유를 물어도 되겠습니까.”

“……세이아가 정령의 힘을 일찍 발현했습니다. 그래서 의식을 앞당기기로 했습니다.”

“정말 그뿐이십니까?”

후작의 보랏빛 눈빛이 날카로웠다.

- 후작님께서도 디아나 아가씨가 대공비님과 닮으셨다 느끼시는 거 같았습니다.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끼신 건가. 하지만 아직 완전한 확신이 없는 의심을 차마 후작에게 말할 수가 없었다.

아리엘의 죽음으로 후작과 대공의 사이는 너무나 멀어졌기 때문에.

“……네.”

“알겠습니다. 부디 정말 그뿐이길 바랍니다.”

후작은 굳은 얼굴의 대공을 뒤로하고 마차에 올라탔다.

문이 닫히고 마차가 출발했다.

저택을 나가는 동안 얼굴을 딱딱하게 굳히고 있던 후작은 보좌관에게 입을 열었다.

“해리스.”

“네, 후작님.”

“대공비가 죽었던 날, 대공비를 진찰했던 의사와 산파, 하녀 그리고 레아라는 하녀에 대해서도 조사해 보거라.”

“……네, 후작님.”

아리엘의 어릴 적 모습이 하나도 보이지 않는 대공녀와 아리엘의 어릴 적 모습을 똑 닮은 하녀의 아이.

무언가 잘못됐다는 직감이 들었다.

오랫동안 죽어 있던 후작의 보랏빛 눈동자가 번뜩였다.

* * *

사람이 잘 다니지 않는 저택 화원의 뒤편.

철퍽-!

허공에 있던 커다란 물방울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흠…… 오래 유지하는 건 잘 안 되네. 좀 더 크게 만드는 것도 힘들고.”

디아나는 바닥을 적시는 물을 보며 고민했다.

오늘 오전부터 노을이 지는 지금까지 디아나는 물을 다루는 힘을 이리저리 써 보고 있었다.

처음엔 물을 대야에 받아 와 이리저리 움직여 보다, 이젠 허공에서 물을 만들어 내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없는 물을 만들어 내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것인지 커다란 물방울이 허공에서 생겨났다가도 금방 터지며 사라져 버렸다.

“뭔가 몸도 너무 피곤한 느낌이네.”

힘을 쓸 때마다 조금씩 기운이 빠지는 느낌이 들었다.

“냐아-.”

디아나가 연습하는 것을 가만히 보고만 있던 유네스가 발목으로 다가와 머리를 비볐다.

“유네스.”

디아나는 유네스를 안으며 붉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이제 그만 돌아갈까? 피비가 서운해할 테니까.”

어제도 오늘도 힘을 연습하느라 피비에게 혼자 화원에서 조용히 책을 읽고 싶다고 했었다.

그에 피비는 저택의 다른 일을 하고 있겠다고, 괜찮은 듯 말했지만 서운함을 완전히 숨기진 못했다.

“일찍 가서, 같이 놀아 달라고 해야겠어.”

심심하다고 놀아 달라 할 때 피비는 가장 좋아했으니까.

핑계로 들고 왔던 두꺼운 책을 들자 유네스가 내려 달라는 듯 울었다.

“걸어갈래? 불편해?”

“냐아-.”

대답을 하듯 울자 미소를 지은 디아나는 유네스를 바닥에 내려 주었다.

“내일은 오전엔 피비랑 있다가 오후에 나와야겠어.”

유네스와 함께 발맞춰 정원을 걸어 나가던 그때, 갑자기 유네스의 기세가 사나워졌다.

하악-!

꼬리를 바짝 세우는 유네스를 보던 디아나는 미간을 좁혔다.

설마…….

혹시나 해서 고개를 돌리자 역시나 길목 맞은편에 세이아가 서 있었다.

디아나는 홀로 서 있는 세이아를 보고 의아한 눈빛을 했다.

‘왜 혼자 있지?’

레아가 채찍질을 당해 거동이 힘들다는 건 피비에게 들어 알고 있었다. 대신에 하녀장과 하녀들이 돌아가며 시중을 든다고 들었는데.

이상하다고 생각하던 그때, 세이아가 성큼성큼 디아나에게 다가왔다.

“대공녀…….”

찰싹-!

인사를 하려는 순간 날카로운 타격이 볼에서 느껴졌다.

생각지도 못하게 뺨을 맞은 디아나는 얼얼한 볼을 손으로 감쌌다.

꽤 오래 세이아의 손찌검을 겪지 못해 방심했었다.

“크르르-.”

하지만 얼얼한 뺨보다 세이아에게 달려들려는 유네스를 제지하는 게 먼저였다.

흠칫, 유네스에 놀라 본능적으로 뒤로 물러나던 세이아는 곧 디아나에게 소리쳤다.

“왜 하필 너야?! 난 잘못한 거 없어, 다 네가 문제야. 난 하나도 안 뺏길 거라고! 내가 왜 너 같은 거 때문에 불안해해야 하는 거야!”

“그러게요, 대공녀님은 대체 뭐가 그렇게 불안하세요?”

디아나는 유네스를 품에 단단히 끌어안으며 세이아를 똑바로 마주 보았다.

“정말 궁금해서 그래요. 대체 뭐가 그렇게 불안해서 유네스를 이용해서까지 절 죽이려 하신 건지요.”

디아나는 싸늘한 눈빛으로 세이아를 바라보았다.

세이아가 자신을 싫어하는 것, 습격이 있기 전까진 받아들일 수 있었다. 사생아인 자신을 좋아하는 게 더 말이 안 되니까.

어차피 레아가 자신을 학대하는 것만큼의 고통은 아니었고 목숨을 위협하는 일도 없었으니까, 그 정도는 견딜 수 있었다.

‘하지만 날 죽이려 했어.’

그건 절대 참을 수 없었다.

자신도 좋아서 태어난 게 아닌데도 왜 모두들 자신만 못살게 군단 말인가.

“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유네스를 이용해 널 죽이려 한 건 마리였어. 이미 그렇게 밝혀진 일이야.”

“네, 그렇게 밝혀졌다고 하더라고요. 저도 들었어요. 하지만 그날 전 분명히 보았는걸요. 제가 얼마나 다쳤을까 기대하던 대공녀님의 얼굴을요. 그리고 그날 대공녀님은 정말 이상했죠.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전 알아요. 그 일을 꾸민 건 대공녀님이란 걸요.”

디아나는 소리를 지르지도 눈물을 흘리지도 않았다.

차분하고 차가운 얼굴로 세이아를 쳐다볼 뿐이었다.

세이아는 흔들림 없는 눈빛으로 직시하는 디아나의 모습에 당황을 숨기지 못했다.

“난 아냐. 전부 마리가 꾸민 짓이 맞아. 증거도 없으면서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처음엔 제가 수도로 따라가는 게 싫어 그런 일을 꾸몄나 생각했는데, 생각할수록 고작 수도로 가는 일 때문에 절 없애려고 하진 않았을 거 같았어요. 근데 지금 알았네요. 대공녀님은 제가 대공녀님의 모든 걸 뺏을까 봐 불안해하시고 계신 거였어요.”

“뭐?”

“그렇게 말씀하셨잖아요, 하나도 안 뺏길 거라고.”

세이아가 저도 모르게 꺼낸 진심을 나직이 다시 말해 주자 옅은 금빛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안 불안해. 네가 감히 어떻게 날…….”

“대공녀님, 전 대공녀님의 것을 원한 적도 바란 적도 없어요. 이때까지 단 한 번이라도 제가 대공녀님 것을 욕심낸 적이 있었나요? 그런 적 없다는 거 대공녀님이 더 잘 아실 거예요. 그러니 쓸모없는 불안으로 더 이상 괴롭히지 말아 주세요. 한 번 더 절 위협하시면 그땐 가만히 당하고 있지 않을 거예요.”

디아나는 조금도 기죽지 않는 당당한 얼굴로 세이아를 보았다.

꼭 자신이 아래가 된 듯한 기분에 세이아의 분노가 치솟았다.

“가만히 안 당하면 네가 어쩔 건데?!”

세이아가 위협적으로 손을 추켜올리자 유네스가 이빨을 드러내며 공격 태세를 취했다.

“캬악-!”

물어뜯을 듯한 소리에 움찔하던 세이아는 이젠 자신보다 한참 작아진 유네스를 보며 비소를 지었다.

“공격도 못할 만큼 작아진 게 어디서!”

유네스를 때리려는 듯 세이아가 손을 높게 쳐들었다.

세이아의 손이 유네스를 향해 뻗어진 순간.

“꺄악!”

차가운 물 덩어리가 세이아의 머리 위로 쏟아졌다.

온몸이 얼얼할 만큼 차가웠지만 그것보다 더 경악스러운 건 난데없이 허공에서 생겨난 물이었다.

정령술…….

세이아는 방금 생겨난 물이 정령술이란 것을 알았다.

세이아는 떨리는 시선으로 디아나를 바라보았다.

디아나는 그런 세이아의 앞으로 보란 듯이 다시 한번 커다란 물방울을 만들어 냈다.

세이아의 바로 앞에서 물방울이 위협적으로 터졌다.

“아무래도 제가 황족들만이 가질 수 있다는 정령의 힘을 쓸 수 있는 거 같아요. 대공녀님이 늘 천한 것이라 했던 제가 정령술을 쓸 수 있다니 정말 놀라운 일이에요. 그리고 대공 전하께서 이 사실을 알게 되면 어떻게 반응하실까요?”

디아나는 경악으로 물든 세이아를 차분하게 바라보았다.

비밀로 할 힘을 세이아에게 밝힌 것은 세이아가 절대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지 못할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천한 것인 자신이 고귀한 대공녀님도 할 수 없는 정령술을 쓴다는 것은 세이아의 자존심이 절대 허락하지 않을 테니까.

특히 대공 전하껜 더욱 말하지 못하겠지.

“……네가…….”

세이아는 처음으로 자신을 보며 두려움에 젖은 눈빛을 했다.

“대공녀님, 전 대공녀님이 절 가만히 내버려 둔다면 이 힘을 대공 전하께 밝힐 생각 없어요. 그러니까 부디 제가 스스로 대공 전하께 정령술을 밝히지 않게 해 주세요. 절 괴롭히시면 가만히 있지 않겠단 말 이젠 어떤 의미인지 알아들으셨을 거라 믿을게요.”

“…….”

세이아는 입술을 꽉 깨물며 디아나를 노려보았지만 아무런 말을 하지 못했다.

디아나는 흥분한 유네스를 쓰다듬으며 몸을 바르르 떨고 있는 세이아에게 무심하게 인사를 전했다.

“그럼 대공녀님, 먼저 가 보겠습니다.”

대답을 듣지도 않고 무시하듯, 디아나는 세이아를 지나쳤다.

한 번도 해 본 적 없는 무례한 행동이었지만 이상하게 불안하기는커녕 마음이 편안해졌다.

어딘지 조금 통쾌함마저 들었다.

“유네스, 이젠 내가 지켜 줄게.”

디아나는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 * *

“어머나! 대공녀님, 몸이 왜 그리 젖으셨어요!”

정원을 나와 저택으로 들어서자마자 마주친 하녀가 호들갑을 떨며 말했다.

세이아는 속을 태우는 분노와 불안감에 상관없으니 꺼지라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보는 눈이 너무 많아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아, 정원의 분수대에서 장난을 치다가 빠졌지 뭐야…….”

“안 다치셨어요? 의원을 부를까요?”

“아니, 다치지 않았어. 그냥 발만 젖은 거니까 신경 쓰지 않아도 돼. 걱정해 줘서 고마워.”

세이아는 걱정하는 하녀들을 빠르게 지나치며 계단을 올랐다.

그렇지 않으면 참지 못하고 소리를 지를 거 같았으니까.

계단을 뛰는 듯한 걸음으로 빠르게 올라갔다.

세이아는 자신의 방이 아닌 레아의 방문 앞으로 향했다.

레아의 방을 지키고 있던 하인이 인사를 하기도 전에 세이아가 차갑게 말했다.

“잠시 물러가 있어.”

평소답지 않게 굳은 대공녀의 얼굴에 움찔하던 하인이 고개를 숙였다.

“……네, 대공녀님.”

하인이 계단을 내려가고 세이아는 방문을 벌컥 열었다.

엉거주춤 옷을 정리하고 있던 레아가 화들짝 놀라며 뒤를 돌아보았다.

“세이아, 어디서 그렇게 젖은 거니?”

온몸이 푹 젖은 세이아의 모습에 눈이 커진 레아가 곧 담요를 세이아의 몸에 둘렀다.

“세이아, 이걸-.”

탁-.

레아의 손을 세게 친 세이아가 날카롭게 소리쳤다.

“이름 부르지 마! 난 대공녀야!”

“……네, 그럴게요, 대공녀님.”

레아가 말을 높였지만 그것도 마음에 안 든다는 듯 세이아가 얼굴을 와그작 구겼다.

“이게 다 너 때문이야. 이제 어떡할 거야! 아버지는 의식을 앞당긴다고 했고 외할아버지까지 날 찾아왔어!”

“소리 지르시면 안 돼요. 밖으로 새어 나가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이러세요. 그리고 의식은…… 의식 당일 날 갑자기 쓰러지시거나…….”

앞당겨진 의식에 레아도 지금 머리가 터질 거 같았다. 어떻게 해야 좋을지 답을 찾지 못했으니까.

하지만 세이아에게 불안을 줄 순 없었다. 레아는 걱정 말라는 듯 말했다.

“시간이 한 달 남았으니 제가 어떻게 방법을 찾아볼게요. 그리고 시아페 후작은…… 걱정 마세요. 후작과 대공의 사이가 아주 안 좋답니다. 그러니 저택에 자주 찾아오는 일 없을 거예요. 대공녀님은 지금처럼 쭉 아무렇지 않게 지내시면 되는 거예요.”

레아가 미소를 지으며 세이아의 손을 잡으려 했지만 세이아가 매섭게 레아의 손을 쳐 냈다.

“아무렇지 않게? 내가 어떻게 아무렇지 않게 지내. 그럼 처음부터 나한테 진실은 말하지 말았어야지. 디아나가 이미 정령술을 쓰고 있는데 의식을 미룬다고 뭐가 달라져? 디아나가 정령술로 날 공격하며 그랬다고, 대공한테 다 말할 거라고!”

“뭐? 방금 뭐라고 했니? 디아나가 다 말한다고 했다니, 정령술을 쓴단 걸 대공에게 말한다고 했다는 거니?”

너무 놀란 레아는 세이아의 어깨를 잡고 다그치듯 물었다.

“그래, 말할 거라고 했어. 자길 한 번만 더 건드리면 아버지에게 정령술을 쓸 수 있다고 말한다고 했다고! 디아나가 말해 버리면…… 아버지도 결국 알게 되실 거야. 다, 다 알게 되실 거야.”

대공이 진실을 알게 되는 상상이 머릿속을 뒤덮었다. 심장이 두근거리고 손에 땀이 찼다.

‘디아나가 진짜 대공녀라는 걸 아버지가 알게 되면 난 어떻게 되는 거지?’

금발에 금안을 한 디아나가 아버지 옆에 서 있는 모습이 그려지자 세이아는 발작적으로 소리쳤다.

“싫어! 너무 싫어! 어떻게 하면 디아나를 없앨 수 있는 거야? 그 애가 없어져 버렸으면 좋겠어. 진실이 밝혀져도 아무것도 할 수 없게. 절대 대공녀가 될 수 없게 해 줘, 어떻게든 해 줘.”

세이아는 울먹이며 레아에게 매달렸다.

진실이 밝혀지는 것보다 디아나가 대공녀가 되는 것이 더 싫다.

엉엉 울며 매달리는 세이아를 보자 레아는 가슴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좋은 것만 보고 귀한 것만 누리게 해 주고 싶었는데, 그 망할 것이 다 망쳐 버렸다.

아예 말도 못 할 때 죽여 버렸어야 했는데.

바보같이 대공가에서 내쫓기만 하면 될 줄 알았다.

레아는 세이아를 품으로 끌어안았다. 분하다는 듯 우는 세이아의 등을 달래듯 쓰다듬으며 레아는 나직이 말했다.

“하나뿐인 내 딸, 아무 걱정하지 마. 엄마가 전부 해결할 테니까. 절대 디아나가 정령술을 쓴다는 게 밝혀질 일도, 디아나가 대공녀가 되는 일도 없을 거란다.”

전부 없애 버릴 거니까.

“그러니 아무런 걱정 말렴.”

절대,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을 거란다.

세이아를 품에 안은 레아의 눈동자가 위험한 살기로 번뜩였다.

* * *

화창하던 봄의 햇살이 구름에 가려진 쌀쌀한 날.

에키온은 비가 올 듯한 창밖의 하늘을 보며 말했다.

“아무래도 오늘 오후 검술 대련은 취소해야 할 거 같네.”

“아직 비 안 오는데.”

1황자의 방, 소파에 앉아 있던 카이루스가 책에서 시선을 떼지 않으며 말했다.

“창밖을 보지도 않고 말하냐? 곧 올 거 같아. 하늘이 우중충해.”

“흠…….”

카이루스는 책을 덮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에키온의 말처럼 하늘에 먹구름이 끼고 있었다.

“비가 올 거 같긴 한데…… 밤이나 되어야 올 거 같아. 네 검술 훈련 시간은 피해 갈 거 같은데.”

“아냐, 안 피해 가. 못 피해 가. 방금 감이 왔어.”

“비가 온다는 감이 아니라 오늘은 검술 훈련하기 싫다는 감이겠지.”

카이루스가 피식 웃으며 진실을 말해 주자 에키온이 어깨를 으쓱했다.

“뭐 어느 쪽이든 감이 왔다는 게 중요한 거지. 근데 넌 갑자기 정령술에 관한 책은 왜 읽고 있는 거야?”

에키온의 시선이 책을 향했다.

카이루스는 잠시 책을 보다 느리게 입술을 움직였다.

“……그냥, 갑자기 궁금한 게 생겨서.”

- 형, 이건 절대 비밀이야. 아무한테도 말하면 안 돼. 세이아의 저택에서 본 그 영애 있잖아…… 막 물을 하늘까지 치솟게 했었다? 그림책에서나 봤던 걸 내가 진짜 봤었어. 그렇게 어린 마법사는 나 처음 봤어!

저택에서 돌아온 날 밤, 레귤러스가 비밀이라며 카이루스에게 말해 주었다.

마법.

아직 어려 마법의 한계에 대해 잘 모르는 레귤러스는 디아나가 마법사라고 생각하는 듯했지만 그는 아니었다.

‘아마…… 정령술이겠지.’

믿기 힘들긴 하지만 시동어나 마법진도 없이 물이 치솟게 할 만큼의 힘이었다면 마법은 아닐 것이다.

그런 마법을 쓰기 위해선 마법 서클도 높아야 하지만 마법진이 필수 일 것이다.

하지만 그곳에 마법진은 없었다.

마법일 가능성은 없다고 봐야겠지.

애초에 디아나는 사생아이긴 해도 황족이었다.

테라비타 제국의 황족들은 정령의 수호를 받는 자들이다.

눈앞의 에키온도 바람의 힘을 쓰니까.

물의 힘을 썼다는 황족은 초대 황제 말고 들은 적이 없긴 하지만…… 아마 맞을 것이다.

하지만 의식을 치르지도 않았는데 정령술을 썼다는 게 신기하긴 했다.

“궁금한 거? 뭐가 궁금한데, 카이. 네 눈앞에 정령술을 쓰는 내가 있는데 궁금한 걸 왜 책에서 찾아? 나 좀 서운하다?”

“서운하다니까 물어볼게. 의식을 치르지 않고 정령술을 쓸 수 있어?”

“뭐? 너 어떻게 알았어?”

장난기 서린 미소를 짓고 있던 에키온이 얼굴을 굳혔다.

갑자기 심각해지는 얼굴에 카이루스가 당황하던 그때 에키온이 말을 이었다.

“극비리에 진행된다고 들었는데. 뭐야, 너 나 모르는 정보망이라도 있어?”

‘레귤러스가 에키온에게도 말한 건가?’

순간 그리 생각했지만 에키온이 덧붙이는 말을 들으니 레귤러스와 관련된 일이 아닌 거 같았다.

“……뭘 알아?”

“세이아 말하는 거 아냐?”

카이루스의 눈썹이 올라갔다.

“세이아? 그게 누구야?”

“뭐?”

에키온이 황당하다는 얼굴을 했다. 하지만 곧 싱거운 웃음을 흘렸다.

“와, 카이. 물론 네가 타인에게 관심이 심히 없다는 건 알고 있는데 말이야. 고작 사흘 전에 만난 내 사촌 동생의 존재를 잊어버리는 건 좀 심하지 않니?”

에키온의 말에 카이루스는 그제야 대공녀를 떠올렸다. 레귤러스가 너무 싫다 했던 대공녀.

“대공녀의 존재를 잊은 건 아냐. 그냥 이름을 깊이 기억하고 있지 않았을 뿐이지. 근데 대공녀가 지금 이 이야기랑 무슨 관련이 있는 건데.”

“그 반응 보니 알고 있었던 게 아닌 거 같네.”

“어, 정말 몰라.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내가 황실 극비 정보를 어떻게 알아. 네가 나한테 말해 주면 알고 아님 모르는 거지.”

카이루스는 별 관심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하긴…… 넌 나 말고 친구 없지.”

카이루스의 얼굴이 살짝 구겨졌지만 틀린 말이 아니라 반박을 못했다.

에키온이 재밌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장난이야, 장난. 그리고 뭐…… 극비라기보다 최대한 조용히 진행해야 하는 일이 좀 생겼어. 근데 넌…… 알아도 되겠다. 어차피 들어도 관심 없어서 내일이면 까먹을 거 같거든. 세이아의 의식이 앞당겨졌어, 한 달 뒤로.”

“한 달 뒤? 원래 5년 뒤 아니었어? 그냥 앞당기기엔 너무 많이 앞당긴 거 같은데.”

“네가 방금 물었던 일이랑 관련 있어. 세이아가 의식을 치르지도 않았는데 정령의 힘을 발휘했거든.”

“뭐?”

카이루스의 흑빛 눈동자에 이채가 스쳤다.

“어떻게, 어디서?”

“대공성에 있을 때 발현됐다고 하던데, 그리고 발현된 속성이 물인가 봐. 이때까지 한 번도 물의 정령술이 나온 적은 없었는데 말이지……. 어쩌면 정령술의 힘도 여태까지와 달리 엄청 강한 게 아닐까 하고 아버지께서 기대하고 있으셔.”

“물의…… 힘…….”

레귤러스가 보았다는 디아나의 힘이 물의 힘이다.

카이루스는 상당히 찝찝한 예감이 스쳤다.

“나도 좀 기대되긴 해. 너무도 이례적인 일이니까. 의식을 치르고 나면 세이아의 정령술이 더 강해질 거 같다는 느낌이 딱 오거든.”

에키온은 즐거움이 가득한 얼굴이었다.

카이루스는 에키온을 보다 입을 다물었다.

레귤러스에게 들은 말이 마음에 걸렸지만 에키온에게 말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으니까.

대공녀와 디아나가 평범한 자매였다면 말했을 것이다.

하지만 한쪽은 직계 혈통이었고 한쪽은 가주의 인정을 받지도 못한 사생아였다.

이 일이 알려지면 자칫 디아나가 위험해질 수도 있었다.

그리고 그는 디아나가 위험해지는 것은 원하지 않았다.

우연한 첫 만남 이후로 카이루스는 디아나가 계속 생각났다.

디아나가 했던 말이 굳게 잠겨 있던 그의 마음을 두드렸으니까.

처음엔 인정하지 않았었다.

자신보다 어린, 생전 처음 본 사람의 말에 흔들렸다는 것은 믿기 힘든 일이었으니까.

어머니를 잃은 뒤로 그의 세상은 죽었다. 어머니의 억울한 죽음에 무엇 하나 하지 못하고 타국으로 도망쳐야 했으니까.

정말 죽지 못해 사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디아나가 죽어 있던 그를 깨운 것이다.

상처에 익숙해지지 마라.

어머니가 떠오르는 그 한마디가 그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처음 만났던 그 골목에 다시 혼자 가 보았을 때 카이루스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우연한 만남에 마음이 흔들렸다는 걸.

하지만 이름도 몰랐고 가문도 몰랐다. 다시 만날 일이 있을까, 포기하고 있던 차에 다시 만나게 된 것이다.

뜻밖의 곳에서.

대공가의 사생아.

나이답지 않게 그늘이 많아 보였던 모습이 이해 갔다.

상처에 익숙해지지 말란 말은 아마 자기 자신에게도 해당되는 말이었겠지.

카이루스는 지금 자신의 마음이 동정인지 동질감인지, 아님 다른 것인지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한 가지는 알았다.

디아나가 상처받지 않았으면 한다는 것과 디아나를 더 오래 보고 싶다는 것.

“그래, 네 기대가 깨지지 않길 바랄게.”

카이루스가 그리 말하며 에키온의 시선을 비스듬히 피한 그때,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울렸다.

“황자 전하, 대공가에서 서신이 도착했습니다.”

“들어와.”

문을 열고 들어온 시종이 에키온과 카이루스를 향해 허리를 숙였다.

“1황자 저하와 카이루스 오도어 왕자님을 뵙니다.”

“일어나. 대공가에서 서신이 왔다고?”

“네, 대공녀님이 보내오셨습니다.”

시종이 에키온에게 대공가의 인장이 찍힌 서신을 내밀었다.

슥-.

나이프가 종이를 자르는 소리가 울리고 에키온이 편지를 읽었다.

“내일이면…… 좀 곤란한데.”

에키온은 난감한 듯 미간을 좁혔다.

“뭐가 곤란한데?”

“아, 세이아가 내일 레귤러스와 함께 교외로 피크닉을 나가자고 하네.”

“피크닉?”

“응, 레귤러스랑 만찬 때 언쟁이 있었던 게 계속 신경 쓰였나 봐. 내일 꼭 레귤러스랑 피크닉을 가고 싶다네. 하긴 사흘 전에 저택을 방문했을 때도 둘이 대화도 제대로 나누지 못하긴 했었지.”

“근데 내일은 너 황후 폐하와 함께 보육원 봉사 간다고 했던 거 같은데.”

“어, 맞아. 내일 어머니와 함께 보육원 봉사 가는 날이야. 한 달 전부터 잡아 놨던 거라 바꿀 순 없는데. 흠…… 아무래도 레귤러스만 보내야겠어.”

“근데 대공녀와 함께 피크닉이면 피크닉 끝나고 대공가에 들를 수도 있겠네. 저녁을 함께 먹을 수도 있으니까.”

“뭐…… 세이아가 초대한다면 그렇겠지. 레귤러스만 간다고 답신을 보내 줘야겠어. 하일, 종이와 깃펜을 가져와.”

에키온이 대수롭지 않게 말한 그때, 카이루스의 흑안이 빛났다.

“내가 너 대신 갈게.”

“뭐?”

에키온의 눈이 커졌다. 진심으로 놀란 듯한 표정이었다.

그도 그럴 게 카이루스는 절대 먼저 어딜 가겠다, 뭘 하겠다고 말하지 않았다.

특히 그의 어머니가 죽은 뒤로는 더욱.

저번 대공가의 방문도 레귤러스가 함께 가자고 조르고 졸라 간 것이다.

“내가 잘못 들은 건가. 방금 되게 이상한 말을 들은 거 같다?”

에키온이 귀를 후비며 한 말에 카이루스는 눈썹을 찡그렸다.

“잘못 들은 거 아냐. 내가 너 대신 가겠다고, 그 피크닉.”

“허. 진짜 간다고? 네가? 아니 갑자기 왜? 너 혹시 세이아한테 관심 있는 건…… 라고 하기엔 세이아 이름도 몰랐네.”

“대공녀에겐 아무런 관심 없으니 걱정 마. 그냥…… 레귤러스와 대공녀의 사이가 좋지 않은데, 너도 없으면 더 싸울 수도 있잖아. 나라도 있는 게 나을 테니까 그래서 간다는 거야.”

맞는 말에 에키온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긴…… 하지. 그래도 네가 먼저 간다니까 의외긴 하다. 너 진짜 레귤러스를 아끼는구나.”

“……아끼지. 귀엽잖아.”

레귤러스를 먼저 생각한 게 아니었던 카이루스는 느리게 입을 열었다.

“레귤러스도 너도, 서로를 아끼는 만큼 반만이라도 날 좀 신경 써 봐.”

에키온은 툴툴거리며 서신을 빠르게 적었다.

서신을 봉투에 넣어 황가의 인장을 찍은 에키온이 카이루스를 바라보았다.

“그래도 네가 간다니까 좀 안심이긴 하다. 둘이 싸우지 못하게 좀 챙겨 줘.”

“걱정 마. 아무 일도 없게 내가 잘 볼 테니까.”

“그래, 하일, 대공가로 보내.”

“네, 전하.”

시종이 방을 나가자마자 창밖에서 굵은 빗줄기가 창문을 때리기 시작했다.

* * *

먹구름으로 가득해진 하늘, 매서운 비가 하늘에서 쏟아지고 있었다.

“비가 많이 오네.”

귀를 때리는 빗소리에 디아나는 읽던 책을 덮고 창밖을 보았다.

“그러게요, 아가씨. 아쉬우시겠지만 오늘은 정원에서 책 읽기는 못 할 거 같아요.”

“응. 오늘은 어차피 나갈 생각 없었어. 피비랑 그림 그리며 놀고 싶었거든.”

“정말요?”

“응, 정말.”

피비의 얼굴이 확 밝아졌다.

요 며칠 정령술 연습을 하느라 피비와 보내는 시간이 거의 없었다.

그에 서운해하던 피비가 환한 미소를 짓자 디아나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잠시만 기다리세요, 아가씨. 제가 금방 종이랑 유화 물감을 가지고 올게요.”

신이 난 피비가 하던 일을 멈추고 문을 향했다. 하지만 피비가 문을 열기 전에 노크 소리가 울렸다.

“대공녀님이십니다.”

하녀의 목소리가 울림과 동시에 문이 열렸다.

소파에서 일어난 디아나는 반사적으로 공격성을 드러내는 유네스를 품에 안았다.

“대공녀님을 뵙니다.”

피비는 갑작스런 세이아의 방문이 걱정되는지 긴장된 얼굴로 인사를 올렸다.

하지만 디아나는 피비와 달리 긴장하지 않았다.

‘일부러라도 날 피해 다닐 줄 알았는데.’

다른 것도 아니고 황족들만이 가질 수 있다는 정령술을 보였으니까.

디아나는 세이아가 대공가의 유일한 후계자, 고귀한 핏줄에 대한 자긍심이 높은 걸 잘 알고 있었다.

천한 자신이 자기보다 먼저 정령술을 쓸 수 있다는 건 세이아에게 큰 충격이었을 거다.

적어도 몇 년은 조용히 지낼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고작 삼 일 만에 다시 찾아온 세이아에 디아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대공녀님.”

세이아와 디아나의 시선이 마주쳤다. 먼저 시선을 피한 것은 디아나가 아닌 세이아였다.

“……너에게 전할 말이 있어서 왔어.”

“네.”

“내일 2황자 저하와 교외로 피크닉을 가기로 했으니까 너도 준비해.”

“네?”

황족들과의 피크닉에 같이 가자니?

뜬금없는 말에 디아나가 황당한 듯 되물었다.

“못 들었니? 내일 피크닉에 같이 가야 하니까 준비하라고.”

“……제가 갑자기 왜 그 피크닉에 같이 가야 하나요?”

황족들과의 피크닉에 자신을 끼워 준다니 이해되지 않는 일이었다.

세이아라면 황족들에게 자신의 존재를 말하고 싶지도 않을 텐데.

“나라고 뭐 너랑 같이 가고 싶겠어? 2황자 저하께서 너랑 같이 가고 싶다고 했어.”

“2황자…… 저하께서요…….”

디아나는 순간 화원 분수대 앞에서 만났던 레귤러스가 떠올랐다.

자신의 정령술을 보며 환호했던 모습과 다음에 꼭 보자 소리쳤던 목소리가.

“2황자 저하께서…… 저택에 온 날 내 또래의 갈색 머리 영애를 봤다고, 그 영애가 친구면 함께 피크닉에 가고 싶다고 서신을 보내셨어. 저택에 나 말고 또래는 너뿐이잖아. 너랑 그날…… 만난 것 같은데, 아니야?”

“……아뇨, 저 맞아요.”

“그럼 내일 준비해. 황자 저하의 부탁을 거절할 순 없으니까.”

금방 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황자는 디아나를 기억한 모양이었다.

‘끝까지 물을 솟구치게 한 건 내가 아니라고 부정했어야 했나.’

조용히 살다 떠나고 싶은 디아나로서는 황족의 관심이 달갑지 않았다.

어차피 그들도 사생아인 자신을 달갑게 보진 않을 것이다.

‘다시 만나면 신분을…… 정확히 밝혀야 하나.’

그땐 호감 가득한 순수한 눈빛에 망설였지만 황자와 엮이는 것은 피하고 싶었다.

하지만 신분을 밝히자니 문제가 하나 있었다. 2황자가 자신의 정령술을 보았다는 것.

자신의 신분을 전혀 눈치채지 못해 마법이라 단정 지은 거 같지만 대공의 사생아라는 걸 알면 그 힘이 정령술이란 걸 알아차릴 수도 있었다.

거기다 사생아와 한 비밀을 지켜 주려 하지도 않겠지.

뒤늦은 후회가 밀려왔다.

꼬여 버린 상황에 어떻게 해야 할지 답을 찾지 못하는데 세이아가 말했다.

“안 갈 생각은 하지도 마. 방금 말했듯 황자 저하의 부탁은 거절할 수 있는 게 아니니까.”

“……네.”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세이아는 이곳에 조금도 더 있기 싫다는 듯 눈살을 찡그리며 방을 홱 나가 버렸다.

“아가씨, 괜찮으세요?”

“응…… 괜찮길 바랄 뿐이야.”

쾅-!

작은 한숨을 내쉰 순간, 디아나의 심정을 대변하듯 하늘에서 천둥소리가 크게 울렸다.

번개가 번쩍이는 창밖을 보며 디아나는 차라리 저 거센 비바람이 내일까지 그치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 * *

디아나의 바람과 달리 거센 비는 아침이 밝기도 전에 그쳤다.

비바람이 휘몰아치고 간 뒤 깨끗해진 맑은 하늘 아래, 대공성은 아침부터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대공의 침실.

대공은 창밖으로 분주하게 움직이는 하인들을 보다 짙은 보라색의 얇은 프록코트를 입었다.

외출 준비를 마친 그는 곧장 방을 나섰다.

아침도 먹지 않고 저택을 나서려던 그때, 로비로 로운이 들어왔다.

로운은 이른 시간부터 외출 준비를 마친 대공을 보고 놀란 눈을 했다.

“대공 전하를 뵙니다.”

“일어나.”

“전하, 이른 시간에 어딜 가시는지요? 오늘 일정이 없는 걸로 압니다만…….”

“마탑으로 갈 것이다. 오늘은 마탑주가 돌아오는 날이니까.”

“루이스 자작이 서신을 보내면 저택으로 부르시는 게 낫지 않을까요?”

“아니, 내가 갈 것이다.”

사흘을 기다리는 것도 고역이었다.

오늘 돌아온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인지 그는 답지 않게 초조함에 밤까지 새었다.

레아와 어둠술사.

그 두 개의 연결 고리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는 것이 마탑주였으니까.

대공은 더 이상 기다릴 여유가 없었다.

“마탑주가 올 때까지 마탑에 쭉 있을 거니 혹 무슨 일이 생기면 그리로 사람을 보내라.”

“네, 한데 전하, 오늘 피크닉에 붙일 기사들 말입니다. 몇 명이나 각출할까요?”

“2황자 저하의 근위 기사단에서 기사들이 나올 테니, 부단장과 실력 좋은 몇 명만 붙여라. 어차피 세인트 별장이 있는 곳은 황가의 땅이라 다른 사람의 출입이 금해진 곳이니까.”

“네, 전하. 그럼 다녀오십시오.”

“그래.”

대공은 빠른 걸음으로 저택을 나갔다.

대공이 탄 마차가 떠나고 로운은 디아나의 방으로 가기 위해 계단으로 몸을 돌렸다.

오늘 외출 일정이 있는지 물어보기 위해서였다.

부단장이 나가면 기사단의 일을 로운이 봐야 하기 때문에 일정을 조정하려면 미리 알아야 했다.

그런데 계단을 막 오르려던 그때, 하인이 로운을 불렀다.

“로운 경.”

뒤를 돌아보자 그를 부른 하인과 하인 곁에 서 있는 정보원이 보였다.

‘로투스 공의 위치를 알아낸 건가.’

로운은 하인을 물리고 정보원에게 다가갔다.

“위치를 알아낸 것이냐.”

“……로투스 공의 위치를 알아냈습니다만…… 이미 돌아가신 지 오래되셨습니다. 한데 그 아들이 대공 전하를 뵙고 싶다며 함께 시골 영지에서 올라왔습니다.”

“아들이?”

“네, 왜인지 물었지만 제겐 말해 줄 수 없다고만 했습니다.”

‘로투스 공이 죽었는데 아들이 할 말이 있다라…….’

“그 아들은 그럼 지금 어디 있지?”

“수도의 여관에서 머물고 있습니다.”

‘대공 전하는 마탑주님을 만나는 게 우선이시니…….’

잠시 고민하던 로운은 지나가는 하인을 불렀다.

“너, 내 말을 기사단에 전해야겠다.”

“네.”

“부단장에게 피크닉은 자신 포함 5명의 기사들만 각출하라 하고, 에드윈에게 디아나 아가씨의 호위를 맡기라고 전해라.”

“네, 로운 경.”

하인은 전할 말을 까먹지 않으려는 듯 빠른 걸음으로 저택을 나갔다.

로운은 정보원에게 시선을 돌렸다.

“아들이 있는 곳으로 안내해. 일단 내가 먼저 만나 봐야겠다.”

“네, 로운 경.”

로운은 정보원과 함께 급히 저택을 나섰다.

* * *

“아가씨, 역시 노란색보단 이 색이 더 잘 어울리시는 거 같아요.”

피비가 거울 속 베이지색 원피스를 입고 있는 디아나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나도 이게 제일 잘 어울리는 거 같아. 그러니까, 이제 그만 갈아입을래.”

5번째로 옷을 갈아입은 디아나가 힘들어 눈초리를 내리자 피비는 미안하면서도 귀여워 광대가 씰룩거렸다.

“고생 많으셨어요, 아가씨. 머리는 다 묶으셨고……. 근데 오늘은 로운 경이 좀 늦으시네요.”

보통 이맘때쯤이면 로운이 방으로 들러 물었다.

외출할 예정이 있는지 없는지.

“그러게……. 아님 대공녀님에게 내가 피크닉 따라간다는 걸 이미 들어서 안 오는 거 아닐까? 어차피 호위 기사들이 함께 갈 테니까…….”

“아, 그럴 수도 있겠네요.”

피비가 고개를 끄덕인 그때,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로운 경인가?”

“아가씨, 에드윈입니다.”

“에드윈?”

의외의 목소리에 눈이 커짐과 동시에 얼굴이 밝아졌다.

피비에게 얼른 문을 열어 주라 말한 디아나는 방문 앞으로 쪼르르 다가갔다.

“에드윈! 오랜만이야!”

문이 열리고 에드윈을 보자마자 디아나는 반가움에 외쳤다.

“오랜만입니다, 아가씨.”

에드윈은 눈을 반달로 휘며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근데 여긴 어쩐 일이야? 검술 대회 준비 때문에 바쁘다고 들었는데.”

“아, 검술 대회의 일정이 갑자기 미뤄져서 조금 여유가 생겼답니다.”

“일정이 미뤄졌어? 왜?”

“아…… 황궁에 무슨 일이 있는 듯합니다. 자세한 건 공식적인 발표가 있어야 알 수 있을 거 같아요. 좀 아쉽긴 했지만 그래도 미뤄진 덕분에 이렇게 아가씨의 호위를 맡게 되었으니 좋네요.”

“오늘 내 호위를 에드윈이 하는 거야?”

“네, 단장님이 급한 일이 생겨 제가 일을 맡게 되었습니다.”

“너무 잘됐다!”

디아나는 기쁨을 감추지 못하며 환한 미소를 지었다. 볼을 분홍빛으로 물들이며 밝게 웃는 디아나의 얼굴에 에드윈과 피비의 얼굴에도 미소가 맴돌았다.

“아가씨께서 이렇게 좋아해 주시니 저도 기쁘네요. 오늘 저택에 계실 건가요? 아니면 어디 나가시나요?”

“응? 아…… 나 오늘 피크닉에 함께 가게 됐는데 못 들었어?”

“피크닉이라면 대공녀님께서 황자 저하와 함께 가는 그 피크닉 말씀이신가요?”

에드윈은 미간을 살짝 좁혔다.

대공녀와 황자가 피크닉을 간다는 것은 에드윈도 알고 있었다. 호위 인원 꾸리느라 기사단이 시끌시끌했었으니까.

하지만 그 피크닉에 디아나 아가씨도 동행한다는 말은 처음 들었다.

‘단장님이 아셨다면 내게 전하셨을 텐데.’

“음…… 단장님이 바쁘셔서 제게 전하는 것을 깜박하셨나 봅니다.”

‘아무 말이 없으셨던 걸 보면 단장님도 모르시는 일이라는 건데, 단장님이 모르신다면 대공 전하도 모르시는 게 아닐까?’

조금 이상한 거 같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뒤이어 하인이 건넨 말에 생각을 더 깊이 할 수 없었다.

“황실 마차가 도착했습니다, 아가씨. 대공녀님께서 지금 출발해야 하니 빨리 내려오라 하셨습니다.”

“벌써 도착하셨다니. 바로 내려가셔야겠어요, 아가씨.”

피비는 황급히 얇은 외투를 챙겼다.

“아, 응.”

“냐아-.”

디아나가 급히 방을 나가려던 순간 유네스가 울었다. 쪼르르 디아나의 앞으로 다가온 유네스가 안아 달라는 듯 디아나의 다리로 앞발을 올렸다.

“유네스, 미안해. 오늘은 같이 못 가.”

디아나 혼자만의 피크닉이 아니었다. 유네스가 자칫 황자를 깨물 수도 있기에 데리고 갈 수 없었다.

미안함에 유네스의 머리를 두어 번 쓰다듬어 준 디아나는 곧 몸을 돌렸다.

유네스의 애처로운 울음소리를 뒤로하고 디아나는 피비, 에드윈과 함께 방을 나섰다.

* * *

황성의 마탑 앞으로 대공가의 마차가 멈춰 섰다.

대공은 마부가 문을 열기도 전에 스스로 문을 열고 내렸다.

마차 문으로 다가온 마부가 당황스런 눈빛으로 대공을 보았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귀족의 품위 따위가 아니다.

마탑주를 만나야 한다는 생각이 전부였다.

그는 이제 막 출근하고 있는 마법사들을 지나치며 빠른 걸음으로 탑으로 향했다.

탑의 최상층에서 내린 대공은 막 마탑주의 집무실에서 나오는 루이스와 마주쳤다.

마법진에서 내리는 대공을 보고 눈이 커졌던 루이스가 황급히 인사를 올렸다.

“대공 전하를 뵙니다.”

“마탑주는 나왔나?”

“네? 아, 네. 방금 출근하셔서 전하께 서신을…….”

“알았다.”

대공은 루이스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를 지나쳤다. 집무실로 향하는 대공을 본 루이스가 급박하게 다가가 집무실의 문을 두드려 주었다.

“마탑주님, 대공 전하께서 오셨습니다.”

루이스의 말이 끝나자마자 문이 열렸다.

이젠 나이 때문에 숨길 수 없는 흰머리가 푸른 머리칼 사이로 드문드문 올라온 마탑주가 대공에게 인사를 올렸다.

“대공 전하, 오랜만에 뵙습니다.”

“오랜만이군, 페럴트.”

“대공 전하께선 10년이 흘렀는데도 여전히 멋있으시군요, 허허. 안으로 들어오시지요.”

페럴트는 미소를 지으며 대공을 맞이했다.

대공이 집무실 안으로 들어서자 루이스가 문을 닫으며 물러갔다.

“이쪽으로 앉으시겠습니까.”

“아니, 앉아서 여유롭게 할 말은 아닌지라 바로 본론을 꺼내겠네.”

대공의 굳은 얼굴에 마탑주의 올라갔던 입꼬리가 내려갔다.

“안 그래도 대공 전하께서 절 찾으신다는 말은 루이스에게 전해 들었습니다만…… 무슨 일이 있으신 겁니까?”

“어둠술사에 관해 물으려고 하네.”

“어둠술사…… 요?”

“그래, 루이스의 말로는 그대가 어둠술사의 힘을 감지할 수 있다 했는데 맞나?”

“네, 마법진과 마법을 통해 어둠술사의 힘을 알아낼 수는 있습니다만…… 갑자기 왜 이런 것을 물으시는지요?”

어둠술사는 절대 가벼운 문제가 아니었기에 마탑주의 미간이 좁아졌다.

“어둠술사로 의심 가는 사람이 있다. 그 사람과 관련된 사람들이 모두 죽었는데 상당히 의심스러운 자살이었다. 셋 다 평소엔 아무런 징조가 없다 갑자기 자살로 죽었지. 루이스에게 알아보니 장거리의 사람을 그렇게 자살로 죽일 수 있는 마법은 없다고 하던데.”

“……네, 원거리에서 그렇게 정교하게 조정할 수 있는 정신 계열 마법은 아직 없습니다. 확실히 의심스러운 정황이군요. 옛날 어둠술사들은 사람의 정신을 파고들어 복종하게 하거나 스스로 목숨을 끊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어둠의 힘에 당해 죽은 자들은 그 시신에…….”

똑똑-.

누군가 찾아온 듯 문에서 들리는 소리에 마탑주는 말을 멈추었다.

“누구냐.”

“마탑주님, 대공 전하께 급히 아뢸 것이 있다는 자가 왔습니다.”

“저택에서 보낸 사람인 거 같으니 들이거라.”

대공의 말에 마탑주가 문을 열었다.

로운이 보낸 하인일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대공은 하인의 복장을 하고 있지 않은 남자를 보고 눈썹을 치켜세웠다.

“누구지?”

빛바랜 갈색 머리를 가진 남자가 고개를 조아렸다.

“로운 경의 밑에서 일하고 있는 한스라고 합니다. 로운 경께서 급히 서신을 전해 드리라 하셨습니다.”

한스는 가슴팍에서 꺼낸 반으로 접힌 종이를 내밀었다.

대공은 종이를 펼쳤다.

[로투스 공의 아들이 수도로 와 있습니다. 어둠술사와 관련된 증거를 아들이 알고 있는 듯합니다. 내용이 너무 중요해 직접 들으셔야 할 거 같습니다.]

“어둠술사의 증거.”

서신을 읽은 대공의 얼굴이 얼음장처럼 딱딱해졌다.

“어둠술사의 증거를 찾으신 겁니까?”

대공의 번뜩이는 금안이 마탑주를 향했다.

“페럴트, 지금 나와 함께 가 주어야겠다.”

한스가 안내한 곳은 수도의 번화가를 벗어나 있는 낡은 여관이었다.

“제 아버지가 하는 곳이라 가장 안전한 곳입니다.”

“여기에 로운과 로투스 공의 아들이 있는 건가?”

“네, 여관에 다른 손님은 한 명도 받지 않았습니다.”

한스는 대공의 물음에 답하며 여관의 문을 열었다.

대공은 마탑주와 함께 여관 안으로 들어섰다.

손님을 받지 않았단 말이 진짜인 듯 1층 식당 홀에는 로운과 군청색 머리칼의 남자만이 앉아 있었다.

“로운 경.”

한스가 부르자 무어라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두 사람이 일어났다.

“대공 전하를 뵙니다.”

“대공 전하…… 를…… 뵙니다.”

“일어나라.”

대공은 그들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로운이 아닌 한껏 긴장한 듯한 군청색 머리의 남자를 바라보았다.

“로투스 공과 많이 닮았군.”

로투스 의원의 군청색 머리칼과 짙은 남색 눈동자를 그대로 물려받은 듯한 남자는 굳이 소개를 받지 않아도 그의 아들이란 걸 알 수 있었다.

“이름이 뭔가.”

“……데인 로투스라고 합니다, 전하.”

“데인, 로운이 그러길 내가 직접 들어야 할 만큼 중요한 이야기를 그대가 알고 있다 하던데, 맞나.”

안 그래도 초조함을 느끼고 있었기에 대공은 자신도 모르게 서릿발 같은 기운을 흘렸다.

“그것이…….”

몸을 찌르는 듯한 대공의 매서운 기운에 데인의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전하, 데인이 많이 긴장한 거 같습니다.”

지켜보고 있던 로운이 나직이 말하자 대공은 이성을 차렸다.

그는 짧은 한숨을 내쉬며 차가운 기운을 갈무리했다.

“아, 내가 너무 급해 실수했군. 데인, 편히 말해라.”

“네, 전하. 먼저 전하께서 아버님을 찾으신다는 소식은 들었습니다만, 안타깝게도 아버지는 이미 10년 전에 돌아가셨습니다.”

로운의 서신을 받았을 때, 어느 정도 로투스의 죽음을 짐작하고 있었다.

로투스의 아들이 왔다고만 했을 뿐 로투스의 언급은 없었으니까.

한데 죽은 시기가 10년 전이라니.

“10년 전이라면 대공가를 나가자마자 죽었다는 건가?”

“네, 아버지께서 은퇴하시고 고향으로 돌아오신다기에 제가 북방으로 모시러 갔습니다만, 제가 도착했을 땐 이미 아버지께서 돌아가신 뒤였습니다.”

“……북방을 떠나기 전이었다니, 로투스가 고향으로 돌아간 줄 알았는데.”

“그때 아버지의 죽음을 대공성에 알리기엔…… 시기가 좋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대공가엔 차마 알릴 수 없었습니다.”

그땐 대공이 대공비가 죽고 장례를 치르자마자 기사들을 이끌고 전장으로 나간 시기였다.

북방이 가장 침체된 시기였으니 말할 수 없었으리라.

그의 사람을 또 한 명 놓친 것에 대공의 마음이 무거워졌다.

“로투스의 죽음에 애도를 표하네. 한데 혹시…… 자살이었나?”

“네, 전하. 대공비님을 살리지 못한 것에 대한 죄책감이 적힌 유서를 남기신 채…… 스스로 목숨을 끊으셨습니다.”

또 자살이라.

의심이 점점 확신이 되어 갈 수밖에 없었다.

“한데 이상한 점이 있었습니다.”

“이상한 점?”

“네, 고향으로 내려가 장례를 치르기 위해 시신을 보존해 옮겼는데 장례를 치르려 시신을 확인하니…… 이상한 문양이 온몸에 퍼져 있었습니다.”

“문양?”

“네, 생전 처음 보는 문양이었습니다. 너무 이상한 일이라 의심이 들었지만 그땐 이미 대공 전하께서 전장으로 떠난 뒤셨고, 시골 영지에 그런 것을 알 만한 자도 없었기에 어쩔 수 없이 장례를 치렀습니다. 하지만 혹시라도 후에 이렇게 전하께서 찾으시는 일이 있을 거 같아 종이에 문양을 그려 놓았었습니다.”

데인은 품에 고이 간직해 온 낡은 종이를 대공에게 내밀었다.

종이를 펼치자 기묘하지만 어딘지 익숙한 문양이 그려져 있었다.

정확히 기억나지 않아 대공의 눈썹이 치켜세워진 그때, 가만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마탑주가 말했다.

“이것은 어둠의 표식입니다.”

어둠의 표식.

마탑주의 말을 들은 순간 대공은 이 문양을 어디서 본 건지 기억했다.

황성 깊은 곳, 정령의 의식이 치러지는 곳 벽화에 새겨진 어둠의 표식이었다.

마탑주가 믿기 힘들다는 듯 데인에게 되물었다.

“이 문양이 자네 아버지 온몸에 새겨져 있었다고?”

“네, 네, 맞습니다. 이런 문양이 온몸에 퍼져 있었습니다.”

“이걸 확인한 게 자네 아버지가 죽고 정확히 며칠 뒤였나? 사흘이 넘었나?”

“네, 제가 고향으로 아버지의 시신을 옮기는 기간이 5일 걸렸으니 사흘은 넘었습니다.”

데인이 고개를 주억거리자 마탑주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하, 전하 이 표식은 어둠술사들에 의해 죽은 자들의 몸에 새겨지는 증거와도 같은 것입니다. 하지만 표식이 나타나기까지 시간이 걸려 증거를 잡기가 힘들지요. 대부분 그전에 장례를 치르니까요. 하지만 전하.”

“……말하라.”

“이렇게 증거를 찾은 이상, 전하께서 하신 의심이 진짜인 듯합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정말 레아가 어둠술사였다니.”

모든 것을 듣고 있던 로운의 얼굴이 충격으로 물들었다.

무언가 있을 거라고 의심을 하는 것과 확인하는 것은 충격의 크기가 달랐다.

“……레아가 어둠술사가 맞았다.”

대공의 서릿발 같은 음성이 허공으로 흩어졌다. 초조함으로 들끓었던 머리에 찬물이 끼얹어진 듯 온몸이 차갑게 식었다.

레아가 어둠술사가 맞는다면, 세이아와 디아나는…….

심장이 콱 조이는 기분에 대공은 이를 까득 물었다.

“지금 당장 저택으로 간다. 오늘 반드시 모든 것을 밝혀낼 것이다.”

대공은 어둠의 표식이 그려진 종이를 살기 띤 눈빛으로 꽉 그러쥐었다.

“대공 전하를 뵙…….”

“대공…….”

저택으로 돌아온 대공에게 인사를 올리던 사용인들은 당장 누군가의 목이 날아갈 듯 살벌한 기운에 몸을 부르르 떨며 대공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계단을 두 개씩 오르는 대공의 머릿속엔 지금 단 하나밖에 없었다.

레아를 추궁해 진실을 알아내는 것. 그는 디아나가 누구의 딸인지 알아야 했다.

쉽게 입을 열지 않는다면 사지를 하나씩 잘라서라도 입을 열게 하리라.

레아의 방문 앞에 도착한 대공은 미간을 좁혔다.

‘지키고 있는 자가 왜 없지?’

레아를 감시해야 하는 하인이 보이질 않았다. 대공은 불길한 기분에 벌컥, 문을 열었다.

그러자 있어야 할 레아는 없고 방 안에 쓰러져 있는 하인이 보였다.

“전하, 제가…….”

로운이 생사를 확인하려 방으로 들어가기도 전에 대공이 먼저 하인에게 다가갔다.

하인의 경동맥을 짚은 대공은 뛰지 않는 맥에 얼굴을 딱딱하게 굳혔다.

갑자기 하인이 즉사했을 리는 없다.

“페럴트.”

대공은 함께 온 마탑주를 불렀다.

“네, 전하.”

“어둠의 힘으로 죽은 것인지 확인할 수 있나?”

“네.”

마탑주는 빠르게 마법진을 그렸다.

“이 위로 시신을 옮겨 주시게.”

마탑주의 말에 하인들이 죽은 하인의 시신을 마법진 위로 옮겼다.

페럴트가 시동어를 외치자 마법진 위에서 빛이 발했다.

그러자 하인의 팔다리 위로 어둠의 술식이 떠올랐다.

“젠장!”

레아는 어둠술사가 맞았다.

하인의 몸에 남은 문양이 그 증거였으니까.

대공은 확신과 동시에 절망을 느꼈다. 하지만 지금 더 중요한 것은 사라진 레아였다.

대체 어디로.

레아가 이렇게 사라질 이유는…….

“디아나.”

대공은 순간 등줄기가 서늘해지는 감각에 급히 방을 나갔다.

계단을 뛰어 내려간 그는 디아나의 방문을 벌컥 열었다.

하지만 그곳엔 아무도 없었다.

“디, 아나, 디아나는 지금 어디 있지?”

대공의 목소리가 미약하게 떨렸다.

“……디아나 아가씨께선 오늘 아침 대공녀님과 함께 피크닉을 가셨습니다.”

“뭐?”

하녀장의 대답을 들은 순간 목을 턱 죄는 두려움과 공포가 전신을 휘감았다.

예정에도 없이 갑자기 피크닉을 떠난 디아나, 하인을 죽이고 사라진 레아.

‘설마.’

온몸의 피가 빠져나가는 듯 미칠 듯한 불안감으로 손끝이 떨렸다.

살면서 단 한 번도 느낀 적 없는 두려움이었다.

떨리는 손을 힘주어 그러쥔 대공은 정신을 차리기 위해 이를 까득 깨물었다.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벌어지기 전에 그가 가야 했다.

“로운.”

“네, 전하.”

“기사들을 무장시켜라. 디아나를, 찾으러 갈 것이다.”

대공은 서릿발처럼 굳은 얼굴로 짓씹듯 내뱉었다.

* * *

“그러니까…… 네가…… 그…… 사생아라고.”

디아나는 떨리는 금안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황자 저하.”

“아…….”

2황자는 디아나를 보며 느리게 눈을 깜박였다. 방금까지만 해도 밝았던 얼굴이 당황으로 물들었다.

그럴 만했다.

2황자는 디아나의 생각보다 더 디아나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황실 마차에 이렇게 태워 줄 정도로 말이다.

대공가에서 출발하기 직전, 레귤러스는 디아나를 보자마자 자신의 마차에 타라고 손을 내밀었다.

디아나가 당황스러워 거절하려 했지만 세이아가 더 빨랐다.

- 황자 저하께서 디아나와 함께 마차를 타고 싶어 하시니 전 그럼 오도어 왕자님과 함께 대공가의 마차에 타겠습니다.

황자 저하의 친절을 거절하면 안 된다며 자신에게 속삭인 세이아는 황자의 대답을 듣지도 않고 오도어 왕자에게 손을 내밀었다.

뭔가 상황이 묘해졌고 오도어 왕자, 카이루스는 디아나를 잠시 보다 세이아의 손을 잡았다.

가만히 그 순간을 떠올리자 왜인지 기분이 좋지 않았다.

생각을 떨친 디아나는 눈앞의 2황자를 바라보았다.

2황자는 사생아라 밝힌 자신을 어떻게 대해야 좋을지 모르겠는지 금빛 눈동자를 도르륵 굴리며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디아나 역시 황자의 모습을 바라볼 뿐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대공가의 마차보다 더 값비싸 보이는 마차는 소음을 완전히 막아 주는 듯 달리는 마차의 덜컹거림도 느껴지지 않았다.

덕분에 2황자와 디아나의 침묵이 마차 안을 빼곡히 매웠다.

‘마차에서 내가 먼저 내려야 하나?’

디아나는 몹시 불편해 보이는 2황자를 보며 고민했다. 자리는 한없이 편했지만 분위기는 무겁기만 했다.

‘피비가 보고 싶네.’

사용인들의 마차로 옮기고 싶단 생각을 한 그때 2황자가 입을 열었다.

“근데, 의외네. 세이아의 성격을 봐선 사…… 생아인 널 되게 싫어했을 거 같은데 이렇게 같이 피크닉에 데려오다니 말이야.”

디아나는 2황자의 말에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네? 절 피크닉에 초대하신 건 황자님이라고 들었는데…… 아니었나요?”

“내가?”

2황자는 그게 무슨 말이냐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물었다.

“네, 대공녀님이 황자님께서 절 초대하셨다고 하셨어요.”

“그게 무슨…… 아니야. 난 형님께 세이아가 나와 피크닉을 가고 싶다고 했단 말을 전해 들었을 뿐이야. 서신의 답장도 형님이 보냈는데, 내가 어떻게 널 초대해.”

2황자는 어이가 없다는 듯 말했다.

거짓말을 하는 거 같지 않았다. 아니, 애초에 2황자가 자신에게 거짓말을 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세이아가 거짓말을 했다는 건데……. 왜?

디아나는 이해되지 않는 이상함에 눈가를 살짝 찡그렸다.

“근데 세이아는 왜 너한테 그런 거짓말을 한 거지? 널 꼭 이 피크닉에 데리고 가고 싶었나?”

디아나는 2황자의 말에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

‘날 꼭 데리고 가고 싶었다……?’

순간 유네스의 습격이 있었던 날이 떠올랐다. 디아나를 정원으로 초대했던 그날이.

‘뭔가…… 느낌이 좋지 않아.’

세이아가 이 피크닉에 자신을 데려가야 할 이유는 단 하나도 없다.

‘만약 그때처럼 무슨 일을 꾸미려는 거라면…….’

디아나가 불길함을 느낀 그 순간 밖에서 쾅, 커다란 폭발음이 들림과 동시에 마차가 크게 흔들렸다.

“으악!”

“꺄악!”

넘어질 만큼 크게 흔들린 마차에 2황자와 디아나의 몸이 옆으로 넘어졌다.

마차 벽에 머리를 박은 디아나는 순간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밖에서 들리는 다급한 목소리들이 귓가를 웅웅거리며 맴돌았다.

“어서…… 황자 전하를!”

“대공……! 전하를……!”

흐릿한 시야가 조금씩 선명해지던 그때, 마차 문이 벌컥 열렸다.

“황자 저하! 괜찮으십니까?!”

기사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흐릿한 디아나의 정신을 깨웠다.

눈을 깜박이자 눈앞에 신음을 흘리고 있는 2황자가 보였다.

“황자님…….”

“황자 저하, 내리셔야 합니다!”

마차 안으로 들어온 황실 기사가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2황자를 안고 급히 내렸다.

‘대체 무슨 일이…….’

열린 마차 문으로 보이는 바깥 상황이 엉망이었다.

검게 피어오르는 연기와 사람들의 비명, 기사들의 외침이 얽혔다.

“……피비.”

디아나는 피비가 떠올랐지만 마차 안에선 피비를 찾을 수가 없었다.

‘일단, 여기를 나가야 해.’

주르륵, 이마에서 흐르는 피를 손으로 닦은 디아나가 억지로 몸을 일으키려던 그때, 문 앞으로 검은 그림자가 졌다.

눈만 내놓은 검은 사람과 시선이 마주쳤다.

암살자.

살기로 번뜩이는 눈빛은 디아나를 향하고 있었다. 암살자가 단도를 쳐들었다.

디아나의 눈이 커졌다.

‘죽고 싶지 않아.’

디아나를 향해 단도를 던지려 한 순간 암살자의 얼굴에 세찬 물이 쏟아졌다.

“으악!”

용암수처럼 뜨거운 물에 암살자가 비명을 내질렀다.

퍽-!

동시에 갑자기 날아든 발에 암살자의 몸이 튕겨져 나갔다.

“아가씨!”

암살자를 걷어찬 기사는 다름 아닌 에드윈이었다. 볼에 핏방울이 묻은 에드윈은 처음 보는 급박한 얼굴로 디아나에게 손을 뻗었다.

“어서, 잡으세요!”

디아나는 에드윈의 손을 잡고 마차를 벗어났다.

그러자 바닥에 쓰러져 있는 사람들이 정확히 보였다.

흙바닥에 낭자한 피들은 쓰러진 사람들이 죽은 것이라 말하고 있었다.

디아나는 사람들의 시신에 순간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하지만 지금 중요한 것은 눈앞의 시신들이 아니었다.

디아나가 마차를 나온 순간 암살자들이 디아나의 주변으로 몰려들었기 때문이다.

마치 디아나가 그들의 표적이라는 듯이.

“젠장.”

낮은 욕지기를 내뱉은 에드윈은 주변을 둘러싸는 암살자들에 긴장된 얼굴로 검을 그러쥐었다.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그를 지원해 줄 기사들은 없었다.

암살자들의 수가 10명이 넘었고, 기사들이 모여 있던 곳에서 폭발이 일어나 황궁 기사들의 절반이 날아갔다.

대공가의 기사들은 다행히 뒤편에 있어서 폭발은 피했지만 애초에 그 수가 많지 않았다.

“대공녀님을 지켜라!”

“황자 저하를 보호하라! 대열을 유지해!”

부단장의 목소리와 황실 기사의 목소리가 연이어 아수라장 속을 울렸다.

“아가씨, 절대 제 뒤에서 벗어나시면 안 됩니다.”

에드윈은 디아나를 뒤로 숨기며 긴장된 목소리로 말했다. 자신 혼자였다면 암살자들을 상대하는 것에 무리가 없겠지만 누군가를 지키며 싸우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검을 세운 순간 암살자들이 달려들었다.

날아오는 단검을 검집으로 쳐 낸 에드윈은 검을 횡으로 그었다. 곧바로 치고 들어오는 암살자의 가슴에 검을 박았다.

하지만 적들의 수가 너무 많았다.

에드윈의 옆구리로 검이 훅 들어온 순간 암살자의 머리 위로 뜨거운 물이 쏟아졌다.

“으아악!”

암살자의 복면에서 식은 김이 피어오를 만큼 뜨거운 물이었다.

에드윈은 갑자기 나타난 물 공격에당황했지만 곧장 비명을 지르는 암살자에게 검을 찔렀다.

하지만 암살자들은 여유를 주지 않고 몰려왔다.

두 개의 검이 동시에 에드윈을 향했다. 팔을 베이는 것을 각오하고 한쪽 팔을 내준 그때, 또 한 번 암살자의 머리 위로 커다란 물방울이 터졌다.

“대체 누가……?”

그를 도와주듯 연이은 공격에 에드윈이 멈칫한 순간 디아나가 외쳤다.

“에드윈, 조심해!”

빈틈을 찾은 암살자의 검이 에드윈의 심장을 향했다.

그러나 암살자의 검은 에드윈에게 닿지 못했다.

디아나가 용암처럼 뜨거운 물을 암살자에게 쏟아부었으니까.

“하아…….”

디아나는 연속해서 쓴 정령술 때문에 몸에서 힘이 빠졌다.

“아가씨, 혹시 아가씨의 힘인 겁니까?”

디아나의 도움으로 달려든 암살자들을 모두 처리한 에드윈이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힘을 쓰지 않으면 죽을 상황인 이곳에서 더 이상 숨길 수 없었다.

“……응, 내가 한 거 맞아.”

디아나가 맞는다고 하자 에드윈이 고개를 돌렸다. 많이 놀랐는지 디아나를 바라보는 푸른 눈동자가 떨렸다.

“……어떻게…….”

“그것보다 에드윈, 나 많이는 못 도와줄 거 같아.”

몸이 점점 무거워지고 있었으니까.

너무 놀라 미처 보지 못했던 디아나의 창백한 얼굴이 보였다. 무리하게 힘을 쓴 것인지 하얀 얼굴이 더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걱정 마세요, 아가씨. 이제 제가 알아서 할 테니 무리하지 마세요.”

자신 있으니 걱정 말라 미소를 짓고 몸을 돌렸지만 상황이 좋지 않았다.

그의 검으로 해치운 암살자의 수가 적지 않았음에도 대체 얼마나 몰려온 것인지 다시 적들에 둘러싸였다.

지원을 받아야 하는 상황이었지만 그를 도와줄 기사들이 보이지 않았다.

황궁의 기사단은 부상자가 많아 황자를 지키기에도 벅찼고 대공가의 기사들은 부상자는 없었지만 수가 적었다.

이미 대공녀님 곁으로 네 명이 붙었기에 선두에서 암살자들을 처리하는 부단장 말고는 자신이 다였다.

‘지금 몰려드는 암살자의 수를 봐선 아가씨가 표적 같은데.’

정면에서 지키고 있는 그는 디아나를 향한 암살자들의 살기를 느꼈다.

‘하지만 도와주지 않겠지.’

황궁의 기사단은 황자를, 대공가의 기사들은 대공녀를 지키는 것이 의무였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지원병이 올 때까지 버텨야 해.’

습격을 받자마자 신호탄을 쏘아 올렸으니 지원병이 오고 있을 것이다.

그의 곁으로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오는 암살자들을 경계하며 두 손으로 검을 잡은 순간 암살자들의 대열이 무너졌다.

공격 대열을 무너뜨리며 검을 휘두르는 사람은 기사가 아니었다.

“……카이루스.”

흰빛이 둘러진 검을 휘두르자 암살자들의 몸이 타들어 갔다.

“으아악!”

“신검…….”

카이루스는 앞을 가로막는 암살자를 베고 허공에 검을 크게 휘둘렀다.

순간 뿜어진 빛이 암살자들의 시야를 가렸다. 카이루스는 암살자들이 움직이지 못하는 틈을 타 디아나가 있는 곳으로 달렸다.

“괜찮습니까, 영애.”

“……전, 괜찮은데 피가…….”

디아나는 카이루스의 어깨에서 새어 나오는 붉은 자국을 보며 눈을 크게 떴다.

“괜찮습니다. 지금은 상처가 문제가 아니니까요.”

맞는 말에 디아나는 입을 다물었다.

“신검을 얼마큼 유지하실 수 있으십니까, 왕자님.”

에드윈의 물음에 카이루스는 미간을 좁혔다.

“글쎄, 나도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오래는 아니겠지.”

신성력을 검에 두른 것은 이번이 두 번째였다.

처음 발현한 뒤로 연습을 제대로 하지 않았기에 얼마나 유지될지 카이루스도 알 수 없었다.

“지원병이 올 때까지 버티실 수 없으시다면 황실 기사들의 호위를 받으시는 게 안전합니다.”

도와 달라고 하고 싶지만 타국의 왕자였다.

그의 신변에 문제가 생기면 국제적 문제가 발생할 수도 있는 것이다.

에드윈의 말뜻을 이해한 카이루스는 피식, 자조적인 웃음을 흘리며 검을 바로잡았다.

“내가 죽을까 봐 그런 거라면 걱정 안 해도 돼. 어차피 내 조국은 내가 죽길 바라니까, 국가적 분쟁은 없을 거다. 그리고 신검이 아니더라도 충분히 도움 될 거다.”

“……그렇다면 아가씨와 떨어지지 말아 주십시오. 제가 앞에 서겠습니다.”

“알았다.”

말이 끝남과 동시에 에드윈이 먼저 암살자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디아나를 보호하지 않아도 되어 한결 자유로워진 에드윈과 신검을 가진 카이루스가 힘을 합쳐 암살자들을 빠르게 처리해 갔다.

그들이 위험해질 때마다 디아나가 정령술로 그들을 도와준 덕분이기도 했다.

“조금만 더 버티면 되겠군.”

카이루스는 검에 깃든 빛이 희미해지자 다시 한번 신성력을 들이부었다.

“부단장, 이쪽입니다!”

황자 쪽에 있던 암살자들까지 몰려들자 에드윈이 가장 가까이 있는 부단장을 향해 외쳤다.

갑자기 썰물처럼 빠지는 암살자들에 부단장의 시선이 디아나가 있는 곳에 닿은 순간 검은 로브를 두른 사람이 숲속에서 걸어 나왔다.

다른 사람들은 아직 보지 못한 듯했지만 디아나는 짙은 로브를 입은 사람에게 시선이 멈추었다.

깊게 눌러쓴 로브 후드 사이로 붉은 안광이 번뜩였다.

“……엄마?”

후드 안의 얼굴이 흐릿했지만 익숙했다.

‘엄마가…… 어떻게.’

디아나의 온몸에 소름이 돋아난 순간 로브 사이로 손이 뻗어졌다.

에드윈을 향해 달려오고 있는 부단장을 향해.

순식간에 뻗어져 나온 검은 기운이 부단장의 몸을 감싸자 아수라장 속에 경악의 정적이 흘렀다.

“……어둠술사?”

믿을 수 없다는 듯 카이루스의 흑빛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하지만 그가 잘못 본 게 아니라는 듯 검은 기운이 로브를 뒤집어쓴 자의 주위를 맴돌았다.

“어떻게…….”

경악이 담긴 카이루스의 목소리가 울렸지만 지금 디아나는 그 말이 들리지 않았다.

로브를 입은 자가 한 걸음 한 걸음 가까워질수록 디아나는 후드 속의 얼굴에서 눈을 뗄 수 없었으니까.

“엄마…… 가 맞아.”

붉은 눈을 가진 얼굴이 선명해진 순간 검은 기운에 휩싸여 하늘 높이 올랐던 부단장의 몸이 땅으로 추락했다.

“부단장님!”

기사들의 끔찍한 외침에 디아나의 정신이 번쩍 들었다.

땅으로 추락한 부단장의 몸은 움직이지 않았다.

강한 기사가 속절없이 무너진 모습에 디아나의 몸이 두려움으로 떨렸다.

암살자들과 차원이 다른 공포였다.

“대열을 유지해!”

부단장의 죽음에 기사들이 흔들리자, 황궁 기사가 외쳤다.

그리고 허리를 숙이고 울컥 피를 토해 낸 레아가 천천히 몸을 세웠다.

입가에 붉은 피가 가득한 레아는 정확히 디아나를 바라보며 손을 뻗었다.

“죽어!”

레아의 검은 기운이 디아나를 향해 뻗어졌다. 정령술을 생각할 수도 없을 만큼 빠른 속도로.

죽음의 공포를 느낀 순간 검은 기운 대신 익숙한 기사 제복의 등이 보였다.

에드윈.

자신의 앞을, 죽음을 각오하고 가로막은 것은 바로 에드윈이었다.

심장이 쿵, 내려앉은 디아나는 비명을 내지르듯 강하게 외쳤다.

“안 돼!”

제발!

간절히 외친 그 순간 디아나의 몸속에서 무언가 뜨겁게 치고 올라왔다.

[드디어, 깨어났구나.]

온몸을 뒤덮는 열기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던 그때, 머릿속에서 알 수 없는 음성이 울렸다.

[모든 것은 내게 맡기고 잠시만 잠들었다 일어나거라, 아이야.]

몸을 태울 것 같았던 뜨거운 기운이 아늑한 따스함으로 변하고 눈이 스르르 감겼다.

눈을 완전히 감은 그 순간을 기다렸다는 듯 디아나의 몸에서 폭발하듯 빛이 뿜어져 나왔다.

곁에 있던 카이루스와 앞을 막아선 에드윈이 밀려나고 마침내 어둠의 기운이 뒤로 밀려났다.

동시에 맨땅에서 물기둥이 치솟아 올라 레아를 덮쳤다.

“꺄아악!”

물줄기가 그녀의 온몸을 꽁꽁 묶은 순간 대공이 도착했다.

“이게, 무슨……!”

히이잉-!

하늘을 향해 솟구치는 빛의 기둥에 대공은 급히 말을 멈추었다.

한발 늦은 듯, 이미 습격을 당한 현장은 아수라장이었다.

짙은 피 냄새와 폭발물의 잔재 속에서 대공의 시선이 가장 먼저 찾은 것은 디아나였다.

“디…… 아나…….”

빛에 휩싸인 디아나를 본 대공의 금안이 거세게 흔들렸다.

정령의 힘.

다른 사람은 몰라도 그만은 저 빛이 무슨 힘인지 알 수 있었다.

손끝이 떨렸다.

무엇을 향한 두려움일지 모를 심장을 옥죄는 불안에 그는 입술을 깨물었다.

혀끝을 감싸는 비릿한 맛에 정신을 차린 그는 움직이지 않는 발에 힘을 주었다.

디아나를 향해 한 걸음 내디딘 순간 빛이 사라졌다.

그리고 드러난 디아나의 모습에 대공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갈색 머리칼은 찬란한 금빛으로 변했고 감겨 있던 눈이 떠진 순간 빛나는 금안이 정확히 그를 직시했기 때문에.

“술식이…… 풀리다니…….”

레아의 눈이 공포로 물든 순간,

“……네가…… 진짜, 내…… 딸이었어.”

온몸이, 모든 감각이 멈춰 버린 대공이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대공의 모든 것이 무너진 순간, 디아나의 눈이 감겼다.

스르륵, 힘없이 쓰러지는 디아나에게 대공이 단숨에 달려갔다.

쓰러지는 디아나를 품 안으로 받아낸 대공은 눈을 감은 아이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그가 본 것이 꿈이 아니라는 듯, 디아나의 머리칼은 화려한 금발이었다. 감은 눈 위로 내려앉은 금빛 속눈썹.

대공은 눈부시게 선명한 금빛에 숨이 턱 막혔다. 목이 죄이고, 심장이 터질 거 같았다.

경악과 분노, 후회, 무어라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의 소리 없는 절규가 그를 덮쳤다.

“내, 가 무슨…… 짓을…….”

디아나를 안은 대공의 손이 덜덜 떨렸다.

자식이 뒤바뀐지도 모르고, 대체 난 지금까지…….

돌이킬 수 없는 커다란 후회에 절망을 느끼던 순간 로운이 대공의 곁으로 다가갔다.

“전하, 대공 전하. 정신 차리셔야…… 합니다.”

로운의 말에 정신을 차린 대공은 긴 숨을 내쉬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에드윈.”

대공은 굳은 얼굴로 서 있는 에드윈을 불렀다.

“……네, 전하.”

“디아나를 안고 있어라.”

“네?”

디아나를 넘길 것이라고는 예상치 못한 에드윈이 당황했으나, 대공은 조심스런 손길로 디아나를 넘겼다.

미동 없는 디아나를 괴로운 얼굴로 바라보던 대공은 기사들에게 둘러싸인 레아에게 다가갔다.

소리 없는 절규에 일그러졌던 대공의 얼굴이 차갑게 굳었다.

“비켜라.”

대공의 명령에 기사들이 물러나고 마탑주의 마법진에 구속된 레아가 보였다.

충격을 먹은 듯 넋이 나간 얼굴의 레아와 대공의 시선이 마주쳤다.

짙은 살기로 뒤덮인 금안을 번뜩인 순간 정신을 차린 레아가 도망치려 몸을 크게 들썩였다.

“놔! 이거 놔!”

하지만 마법진의 푸른 줄에 온몸이 묶인 레아는 도망칠 수 없었다.

스릉-.

대공은 발악하는 레아를 보며 검을 뽑았다.

소름 끼치도록 표정 없는 대공의 얼굴에 레아의 두 눈이 떨리고 대공의 검이 유려한 포물선을 그린 순간.

“아아악!”

레아의 양팔이 잘려 나갔다.

피가 솟구치고, 팔이 잘린 레아의 비명이 끔찍하게 허공을 울렸다.

“어둠술사들은 어둠의 신에 대한 기도로 힘이 발현된다지? 두 팔이 없어졌으니, 다시는 네 신을 찾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니 네 목이 붙어 있는 한 허튼짓할 생각하지 말거라.”

진동하는 비릿한 피 냄새에도, 숨넘어갈 듯한 비명에도 대공의 눈빛은 흔들림이 없었다.

그저 지금 당장 레아의 목을 베고 싶은 충동을 참을 뿐이다.

“고작 팔이 잘린 것에 그리 비명을 지르는구나. 내 속엔 네 고통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절규가 끊이질 않는데.”

심장에 칼이 꽂힌 것 같았다.

그는 보이지 않는 피를 토하듯 입술을 짓씹으며 말했다.

“페럴트.”

검을 집어넣은 대공이 마탑주를 불렀다.

“……네, 전하.”

“비명을 지르지 못하게 입도 막아 버려라. 그리고 아직 죽으면 안 되니 포션으로 목숨은 붙여 놓고, 대공가로 압송해라.”

“네, 전하.”

마탑주가 레아에게 다가가고, 곧 귀를 찢을 듯하던 비명이 멈추었다.

대공은 피가 떨어지는 검을 갈무리하며 몸을 돌렸다.

그 순간 먼 거리에서 대공을 부르는 세이아의 목소리가 울렸다.

“아버지! 아버지!”

애타는 아이의 목소리였지만 대공은 세이아에게로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로운.”

“네, 전하.”

“……세이아 또한 압송해라. 기사를 곁에 두고 방 안에 구금해라.”

“네, 전하.”

대공은 곧장 에드윈에게 다가갔다.

“혹시 디아나의 의식이 돌아왔나?”

“아뇨, 아직 돌아오지 않으셨습니다.”

대공은 에드윈의 품에서 여전히 잠들어 있는 디아나를 다시 안아 들었다. 조심스럽게 받아 든 그는 미간을 좁혔다.

“몸이 너무 차갑구나. 담요 같은 것이 필요한데.”

“여기! 있습니다, 대공 전하.”

가까이 다가오지 못하고 떨어져 지켜보고만 있었던 피비가 황급히 담요를 가지고 대공의 곁으로 다가왔다.

“이리 다오.”

피비는 떨리는 시선으로 디아나를 보며 대공에게 담요를 내밀었다.

푸른 담요로 차가운 디아나의 몸을 휘감은 그는 서둘러야겠다 생각했다.

디아나가 쓴 정령술의 힘이 너무 컸다. 거기다 어둠의 술식에 의해 봉인되었던 모습까지 드러났다. 이 정도의 힘이 폭발하듯 방출됐으니 몸속에 내상이 있을 수도 있었다.

급히 몸을 돌린 그때, 황궁 기사들이 보였다.

디아나와 레아만 생각하느라 순간 2황자를 잊었던 것이다.

미간을 좁힌 대공은 다가온 황궁 기사에게 말했다.

“2황자 저하께선 의식이 있느냐. 부상의 정도는 어떻지?”

“네, 의식은 돌아오셨고 큰 부상은 없으십니다.”

“지금 바로 황궁으로 모셔라.”

“네.”

“케인, 넌 황궁 기사들을 도와 부상자들을 추스르고 현장을 정리해라.”

대공은 말 위로 오르며 남청색 머리칼의 기사에게 명했다.

“아버지!”

다급한 세이아의 목소리가 또 한 번 울렸지만 대공은 들리지 않는다는 듯 말을 달렸다.

세이아는 사라지는 대공을 보며 입술을 꽉 깨물었다.

디아나의 모습을 가린 술식이 풀릴 줄은 상상도 못했다.

당연히 오늘, 이 자리에서 디아나가 죽을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한데 정령술로 어둠의 힘을 물리치고, 전설 속에나 나올 법한 빛을 뿜으며 술식을 풀다니.

그 모습을 본 순간 세이아는 경악을 넘어 심장이 멈추는 것 같았다.

‘디아나가 대공녀인 게 밝혀졌으니, 난 이제 어떻게 되는 거지?’

불안함에 입술을 짓씹던 세이아는 낯선 위화감에 주변을 둘러보았다.

기사들과 하녀들이 세이아를 연신 흘끔거리고 있었다.

그 시선에 담긴 당황과 경악, 그리고 선명한 의심이 느껴졌다.

금발과 금안이 드러나며 정령술을 썼던 디아나의 모습을 모두가 보았다.

그에 그들은 세이아의 존재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세이아가 대공녀가 맞는지를.

온몸의 피가 식은 것처럼 떨렸다.

모두 다 알게 된 것이다.

진짜가 누구인지.

“난, 난…….”

본능적으로 레아를 찾았지만 기사들에게 둘러싸여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세이아의 눈동자가 두려움을 젖어 든 그때, 세이아의 앞으로 로운이 섰다.

로운은 불안해 보이는 세이아를 무감한 눈빛으로 내려다보았다.

“대…….”

하지만 습관적으로 대공녀님이라 부르려던 로운은 입술을 다물었다.

세이아는 더 이상 대공녀가 아니었으니까.

“저택으로 모시겠습니다.”

“로운, 아버지에게 가야겠어, 아버지를…….”

세이아는 로운의 말 같은 건 들리지 않는다는 듯 중얼거렸다.

세이아가 대공을 따라가겠다는 듯 달려가려던 순간 로운이 세이아의 앞을 막았다.

세이아는 그제야 로운을 올려다보았다. 시리도록 차가운 눈동자가 세이아를 바라보고 있었다.

“대공 전하께선 이미 떠나셨습니다. 그러니 저택으로 가시지요.”

로운은 미소를 짓지도, 세이아를 대공녀라 부르지도 않았다.

“더 지체할 수 없습니다. 너, 아가씨를 마차로 모셔라.”

로운이 지목한 하녀가 엉거주춤 세이아에게 다가왔다. 그러곤 넋을 놓은 듯 덜덜 떠는 세이아를 데리고 마차에 올라탔다.

마차 문을 닫은 로운은 기사들에게 명했다.

“……호위가 아닌 감시 체제로 바꾼다. 세이아 아가씨에게서 눈을 떼지 마라.”

“네.”

마차가 떠나고 로운은 무거운 얼굴로 말에 올라탔다.

* * *

히이잉-!

대공가의 저택 앞, 빠르게 달리다 급히 발을 멈춘 흑마의 울음소리가 크게 울렸다.

흑마의 주인이 누군지 아는 대공가의 사용인들이 서둘러 저택 앞으로 나왔다.

한바탕 소란이 있었던 터라 대공가 사용인들의 얼굴엔 불안감이 가득했다.

긴장된 침을 삼키며 말에서 내리는 대공을 기다린 그때, 대공이 저택 안으로 들어섰다.

“대공 전하를…….”

“하녀장, 의원을 불러라.”

서릿발 같은 대공의 목소리가 사용인들의 인사를 잘랐다.

심상치 않은 목소리에 긴장된 얼굴로 고개를 든 하녀장은 대공의 품에 안긴 아이를 보고 눈을 크게 떴다.

“……디아나 아가씨?!”

담요를 두른 아이는 분명 디아나였다. 하지만 푸석한 갈색 머리칼은 어디로 간 것인지, 대공과 똑 닮은 금발로 바뀌어 있었다.

하나둘 고개를 든 사용인들의 경악 서린 시선이 디아나를 향했다.

대공은 그들의 시선을 차단하듯 디아나를 품에 안으며 싸늘하게 말했다.

“내 명령을 듣지 못했느냐. 지금 당장 의원을 불러, 그리고 비켜라.”

“……네, 전하.”

칼처럼 날선 대공의 분위기에 하녀장이 황급히 고개를 숙이고 사용인들이 물러났다.

대공은 굳은 얼굴로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디아나의 방으로 들어온 대공은 침대 위로 디아나를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냐아-.”

그러자 방 안에 있던 유네스가 폴짝 침대 위로 뛰어올랐다. 유네스는 구슬픈 울음소리를 내며 디아나의 베개 옆으로 똬리를 틀었다.

“유네스…….”

대공은 턱을 디아나의 어깨에 올린 채 작게 우는 유네스를 보며 참담한 얼굴을 했다.

처음부터 유네스는 알았던 것이다.

아리엘의 딸이 디아나라는 것을.

그랬는데, 디아나의 친부인 자신은 멍청하게도 유네스가 그저 아픈 것이라 치부했었다.

분노와 후회로 가슴이 터질 거 같았다.

이성을 찾을 수 없는 감정의 격랑에 대공은 떨리는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는 디아나에게 손을 뻗다 멈칫했다.

‘감히 내가 너의 손을 잡아도 되는 걸까.’

디아나를 처음 만났던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의 모든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눈앞에 두고도 알아보지 못하다니…….’

하지만 그보다 더 심장을 옥죄는 것은, 이 사단을 만든 것이 10년 전 딸의 얼굴 한번 보지 않고 전장으로 떠난 자신 때문이라는 것이다.

“내가 대체 무슨 짓을…….”

자신의 슬픔만을 생각했다. 아리엘을 닮았다는 딸의 얼굴을 볼 자신이 없어, 일부러 보지 않았다.

그때, 태어난 디아나의 모습을 제대로 확인만 했더라면, 전장으로 도망치듯 떠나지 않았더라면, 딸의 곁을 지켰더라면.

끝없는 후회가 밀려들었다.

하지만 후회 끝에 남은 것은 어리석은 자신에 대한 원망뿐이다.

그가 없는 10년, 디아나는 레아에게 학대를 받았고, 돌아와서도 그는 병신처럼 아무것도 깨닫지 못하고 디아나를 외면했다.

짓씹은 입술이 터져 입 안으로 피가 흘렀다.

하지만 가슴이 무너지는 고통엔 비할 바가 못 됐다.

디아나의 작은 손을 차마 잡지 못하고 손을 그러쥔 그때, 하녀장의 목소리가 들렸다.

“대공 전하, 의원께서 도착하셨습니다.”

“……들여보내.”

의원이 들어와 인사를 건네려 하자 대공이 막았다.

“인사는 필요 없으니, 디아나의 상태부터 살펴라.”

“……네, 전하.”

의원은 빠른 걸음으로 침대로 다가갔다. 의원은 디아나의 변한 모습을 보고 눈을 크게 떴다.

“크르르-.”

하지만 그보다 디아나에게 손대지 말라는 듯 이빨을 드러내는 유네스에 손을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유네스, 괜찮다.”

디아나의 상태 때문인지 유네스는 대공의 말에도 쉬이 진정하지 못했다.

결국 대공이 유네스를 안아 들고 나서야 의원이 진료를 시작했다.

한 걸음 뒤로 물러난 그는 초조함을 감출 수 없어 의원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혹시라도 내상이 깊은 거라면…….

디아나의 상태를 살피는 의원의 얼굴에 주름이 깊어지자 대공은 참지 못하고 물었다.

“상태가 많이 안 좋은 것이냐.”

대공가의 의원 역시 명의였지만 여차하면 마탑주의 도움은 물론이고 황궁의들도 부를 생각이었다.

“송구하오나 전하, 디아나…… 아가씨께선 아무런 이상이 없으십니다.”

“뭐?”

“저번, 유네스의 습격 때와 비슷하게 몸의 기운이 약해지시긴 했지만 저번보단 훨씬 안정적이십니다. 의학적 소견을 말씀드리자면 피로에 지쳐 잠이 드신 것뿐이십니다.”

“……내상은 전혀 없다니, 큰 마력이 한 번에 방출되었다. 확실한 것이냐.”

“내상은 전혀 없습니다. 오히려 몸 내부의 기운은 평소보다 더 안정적이십니다, 전하.”

“그럼…… 의식은 언제쯤 돌아오겠느냐.”

“의식이 돌아오는 시점은 확실히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몸이 스스로 회복하기 위해 깊은 잠에 빠진 것이라, 몇 시간이 될 수도 있고 길면 며칠이 흐를 수도 있습니다. 일단은 저번처럼 몸의 회복을 돋는 약을 처방하도록 하겠습니다.”

“……알았다.”

의원은 인사를 올리고 방을 나갔다.

달칵-.

문이 닫히자마자 유네스가 내려 달라는 듯 대공의 손을 깨물었다.

침대 위로 내려 주자 유네스는 쪼르르 디아나의 곁으로 가 자리를 잡았다.

디아나의 볼을 할짝이던 유네스가 얌전해지고 방 안엔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대공은 디아나를 가만히 볼 뿐 차마 유네스처럼 가까이 다가갈 수 없었다.

‘디아나가 의식을 찾으면 난…….’

대공은 디아나에게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너를 알아보지 못한 못난 아비를 용서해 달라, 염치없는 사과를 빌어도 되는 것일까.

괴로움에 얼굴이 일그러지던 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울렸다.

“전하, 로운입니다.”

“들어와.”

무거운 얼굴로 대공의 앞에 선 로운은 힐긋, 고요한 디아나를 보았다.

침대 위로 늘어진 선명한 금발이 로운의 마음을 무겁게 만들었다.

“디아나…… 아니, 대…… 공녀님께선 괜찮으십니까, 전하.”

습관처럼 쓰던 호칭을 입술을 씹으며 바꾼 로운은 차마 디아나를 볼 낯이 없어 시선을 낮추었다.

“다행히 내상은 없다고 하더군. 하지만 의식이 돌아오면 아이가 받을 충격은…… 그 어떤 상처보다 크겠지.”

“……송구합니다.”

“네가 송구할 게 뭐가 있겠느냐. 전부, 나의 잘못일 뿐이다. 로운, 현장 정리는 다 끝난 것이냐.”

“네, 부상자들은 현재 대공의 별채에서 치료를 받고 있습니다. 그리고 살아남은 암살자들은 지하 감옥에서 심문 중입니다. 레아는 마탑주님의 감시 아래 특별 감옥에 구금되었습니다.”

“수고했다. 하녀들과 기사들도 다 돌아온 것이냐.”

“네, 전하.”

대공은 잠시 디아나를 바라보다 문을 향해 말했다.

“하녀장.”

그의 부름에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하녀장이 들어왔다.

“네, 전하.”

“디아나의 하녀와 기사단에 사람을 보내 에드윈을 불러와.”

“네, 전하.”

디아나가 의식을 차릴 때 처음 보는 인물이 그보단 익숙한 사람들인 편이 더 나을 테니까.

하녀장이 떠나고 침묵이 내려앉았다. 로운은 시선을 들었다. 비탄스런 대공의 얼굴이 보였지만 무어라 차마 말을 꺼낼 수 없었다.

자신도 이토록 마음이 무거운데 지금 대공의 마음이 어떨지, 감히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로운이 굳은 얼굴로 시선을 낮춘 순간,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고 에드윈과 피비가 들어왔다.

“대공 전…….”

“인사는 됐으니, 너희 둘은 디아나가 깨어날 때까지 곁을 지켜라.”

“네, 전하.”

“네, 전하.”

대공은 침대 맡으로 다가가 디아나를 바라보았다.

눈을 감은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싶었지만 시간을 지체할 수 없었다.

아직 해결해야 하는 일들이 남았다.

“로운, 세이아의 방으로 갈 것이다. 마탑주를 데리고 와.”

“네, 전하.”

* * *

“너희들은 물러가라.”

“네, 전하.”

기사들이 물러가고 대공은 세이아의 침대로 다가갔다.

얼마나 운 것인지 눈가가 벌건 세이아가 대공을 보고 어깨를 바르르 떨었다.

“……아버지.”

세이아가 떨리는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애처로운 부름이었지만 ‘아버지’라는 그 한마디에 대공이 심장은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 말은 저 아이가 입에 담을 말이 아니었으니까.

세이아가 그저 평범한 아이였다 해도 레아가 저지른 죄에서 세이아를 따로 보기 힘들었을 것이다.

한데 세이아는 평범한 아이가 아니었다. 제 친모를 그대로 닮은 듯 디아나를 괴롭히고 죽이려 들었다.

그 모든 것을 보았기에 세이아에 대한 일말의 동정마저 들지 않았다.

“……난 네 아비가 아니니 격식을 차려 부르거라.”

차가운 일갈에 세이아의 볼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렸지만 대공의 얼굴은 조금의 흔들림도 없었다.

세이아는 이때까지 자신이 보았던 차가움은 아무것도 아니었단 걸 깨달았다.

지금 대공의 눈빛은 당장 세이아를 죽일 거 같았으니까.

몸이 떨려 손을 그러쥐었지만 두려움은 쉬이 가라앉지 않았다.

모든 것을 밝히고 용서를 애원할까, 온갖 생각을 했지만 세이아는 대공을 마주한 지금 깨달았다.

대공이 절대 자신을 용서해 주지 않을 거란 걸.

세이아가 입술을 꾹 깨문 그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울렸다.

“전하, 마탑주님께서 도착하셨습니다.”

“들어와.”

마탑주가 방으로 들어서자 세이아의 눈동자가 거세게 흔들렸다.

기사들이 둘러싸기 전, 마탑주가 레아를 움직이지 못하게 구속하는 것을 봤기 때문이었다.

자신도 마탑주의 마법에 묶이는 것일까, 몸을 잘게 떤 순간 그것보다 더 무서운 말이 대공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페럴트, 세이아에게 걸린 어둠의 술식을 풀어라.”

대공의 말에 세이아의 눈이 공포로 홉떠졌다.

술식이 풀리면 자신이 대공의 핏줄이 아니란 것이 다 밝혀질 것이다.

단순히 사생아와 대공녀가 뒤바뀐 것이 아니라 세이아의 존재 자체가 거짓이 되는 것이었다.

그럼 정말 자신은 끝이었다.

완전히, 정말 완전히 대공가에서 제명될 게 분명하니까.

대공은 절대 모른다고, 사생아인 디아나가 자신의 핏줄인 줄 알고 있다고 레아가 분명 그렇게 말했었다.

하지만 지금 세이아를 바라보는 대공의 차디찬 눈빛은 이미 모든 진실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세이아가 자신의 핏줄이 아니란 것을.

“아, 아버지…… 어둠의 술식이라니, 아니에요, 그런 게 제게 있을 리가 없잖아요!”

세이아가 다급히 소리쳤지만 대공의 얼굴엔 조금의 떨림도 없었다.

페럴트가 마법진을 완성하고 하녀가 세이아의 팔을 잡았다.

“싫어! 난 절대 하지 않을 거야! 놔! 이거 놔!”

세이아는 발악하듯 하녀의 손을 뿌리쳤다. 결국 하녀 한 명이 더 붙어 세이아를 마법진 위로 이끌었다.

소리를 지르는 세이아를 직시하며 대공은 싸늘히 명했다.

“페럴트, 시작해라.”

하녀들에게 붙잡힌 세이아가 마법진 위에 서자 페럴트가 마법을 시전했다.

그리고 곧 세이아의 몸에서 검은 기운이 팍 터지듯 뿜어져 나왔다.

검은 기운은 방향을 잃은 듯 아지랑이처럼 흔들리다 마법진 속으로 빨려들었다.

“머리…… 색이…….”

검은 기운이 모두 사라지고 세이아를 잡고 있던 하녀의 눈이 경악으로 커졌다.

옅은 금발이 푸석한 갈색 머리칼로 바뀌었기 때문에.

낮은 중얼거림을 들은 세이아가 하녀의 팔을 뿌리치며 노려보자, 번뜩이는 갈색 눈에 더 놀란 하녀가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아냐! 이건 내가 아니라고!”

세이아는 색이 변한 머리칼을 움켜잡으며 소리를 질렀다.

진짜 모습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자신은 대공녀인데, 누구보다 완벽했던 대공녀였는데.

세이아는 손안에서 흐트러지는 푸석한 갈색 머리칼을 전부 뜯어 버리고 싶었다.

끔찍한 악몽을 꾸고 있다 믿고 싶던 순간, 얼음장보다 차가운 금안과 시선이 마주쳤다.

아버지.

차가운 금안 위로 자신을 애정 어린 시선으로 봐주었던 대공의 눈빛이 겹쳐졌다.

‘언제나 그랬듯 날 받아주실 거야.’

세이아는 너무 놀라 굳은 하녀들을 지나 대공에게 달려갔다.

“아버지, 이건 제가 아니에요. 전 아버지의 딸이에요. 이건 다 거짓말이에요!”

세이아는 대공의 옷자락을 잡고 억울하다고 외쳤다.

눈물을 방울방울 흘리며 호소하는 세이아를 가만히 내려다보던 대공은 옷을 잡고 있는 세이아의 손을 잡고 레아를 똑 닮은 갈색 눈동자를 직시하며 입을 열었다.

“이게 진짜 너의 모습이다. 그러니 다시는 감히, 나를 아버지라 부르지 말거라.”

냉정하게 손을 떼어낸 대공은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세이아는 그제야 정신을 차렸는지, 흐린 눈빛으로 주변을 느리게 둘러보았다.

자신을 바라보는 경멸 어린 눈빛.

주춤거리며 뒷걸음질 치던 세이아는 이내 발이 꼬여 바닥으로 털썩 넘어졌다.

하지만 그 어느 누구도 세이아에게 달려와 부축해 주지 않았다.

철저히 혼자가 된 세이아는 큰 울음을 터뜨렸다. 악을 지르는 듯한 울음소리에 미간을 좁히던 대공은 기사들에게 명했다.

“지금 이 순간부터 세이아는 더 이상 대공녀도, 나의 사생아도 아니다. 처벌이 정해질 때까지 죄인의 신분으로 방 안에 구금한다.”

“네, 전하.”

아아악!

비명을 지르는 세이아를 뒤로하고 대공은 방을 나갔다.

문이 닫히자 귀를 긁는 거 같았던 세이아의 목소리가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로운, 레아가 갇힌 감옥으로 안내해라.”

세이아의 진짜 모습까지 밝혀졌으니 레아의 죗값을 치르게 할 때였다.

* * *

뚝뚝.

습한 천장에서 물방울이 떨어지고 스산한 기운이 가득한 지하 감옥에 비명 소리가 아닌 딱딱한 구둣발 소리가 울렸다.

지하 감옥 가장 깊은 곳에 갇혀 있던 레아는 그녀가 있는 곳으로 가까워지는 구둣발 소리에 핏기 하나 없는 얼굴을 들었다.

“……대공…….”

음산하게 갈라지는 목소리가 레아의 입술을 비집고 나왔다.

또각-.

레아가 갇힌 철장 앞에서 걸음을 멈춘 대공은 감옥 안, 차디찬 벽에 몸뚱이를 기대고 있는 레아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양팔이 없어지고 고문을 당한 레아의 몰골은 사람의 것이라 할 수 없을 만큼 처참했다.

비릿한 피 냄새와 무언가 썩는 듯한 냄새가 진동했지만 대공은 그 속에서 번뜩이는 레아의 눈빛을 마주했다.

“내게 분노하고 있는 눈빛이군.”

레아의 눈빛에 선명한 살기와 분노는 정확히 대공을 향하고 있었다.

“어차피 죽을 목숨인데 내가 널 왜 두려워해.”

“대공 전하께 감히 너라니! 죽고……!”

미쳐 버린 듯 황족을 감히 너라 칭하는 레아에게 분노한 로운이 죽일 듯 눈을 번뜩였지만 대공이 손을 들어 막았다.

죽음이 코앞인 사람에게 죽음으로 겁을 줘 봤자 먹힐 리가 없었으니까.

“그래, 넌 어차피 죽을 목숨이다. 감히 더러운 네 딸을 내 친딸이라 속이고 대공녀 행세를 하게 만들었으니까.”

“어차피 내 딸도 당신의 딸인데, 대공녀의 행세가 아니라 원래 대공녀인 게 맞잖아. 내가 뭘 잘못했는데.”

레아는 억울하다는 듯 외쳤다.

진심이 가득한 레아의 얼굴에 대공은 어이가 없어 실소를 흘렸다.

“정말이지 마지막 순간까지 그 역겨운 거짓말을 멈추지 않는구나. 네가 낳은 딸이 내 딸이라고 했느냐? 아니, 세이아는 내 딸이 아니다. 난 널 단 한 번도 품은 적이 없으니까.”

“하! 당신이 술에 취했던 그날 밤…….”

“그날 밤! 난 널 안지 않았어!”

쾅-!

철장을 거칠게 잡은 대공이 짐승이 으르렁거리듯 소리쳤다.

그 성난 기세에 이제 두려울 게 없다 생각했음에도 레아는 본능적으로 몸을 흠칫 떨었다.

“한때는 네 말대로 술에 취해 실수를 저질렀다 생각한 적도 있었지만 전장에서 수없는 밤을 지새우며 그날, 내가 너와 밤을 보내지 않았다는 걸 기억했다. 그땐 기억이 왜 흐릿했었는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지금은 알 수 있지, 술에 취한 내게 네가 어둠의 힘을 썼다는 걸 말이야.”

“난, 난 그런 적 없어! 세이아는 당신 딸이 맞아!”

“세이아는 내 핏줄이 아닌, 클론 하워드. 하워드 백작가의 소문난 망나니의 핏줄이다. 넌 그 사실을 숨기기 위해 클론 하워드를 죽였어. 그 외에 네가 저지른 끔찍한 짓을 덮기 위해 너무 많은 사람들을 죽였지.”

“아냐! 세이아는 당신 딸이야! 고귀한 황족의 피를 이은 아이라고!”

레아가 소리를 빽 질렀다. 악을 지르는 모습이 어찌나 세이아와 닮았는지 대공의 입가에 비소가 서렸다.

“이미 네가 세이아의 모습을 감추기 위해 걸었던 어둠의 술식까지 풀렸다.”

대공의 차가운 일갈에 레아의 눈동자가 바르르 떨렸다.

“그, 그건 그 술식은 디아나와 세이아의 자리를 바꾸기 위해…… 세이아는 진짜…….”

“술식 따위 없었다 해도, 세이아는 내 딸이 아니다. 네가 죽인 그 사람들이 증거이니까. 그리고 네 딸은 감히 황족을 사칭한 죄를 톡톡히 치르게 될 것이다.”

흔들리던 레아의 눈빛이 두려움으로 물들었다. 자신의 죽음은 두렵지 않아도 세이아가 받게 될 벌은 견딜 수 없는 얼굴이었다.

레아는 몸을 질질 끌어 철장으로 다가왔다.

“전하, 전하 제발, 세이아는 아무것도 몰랐습니다. 세이아는 그저 어미를 잘못 만난 죄밖에 없습니다. 어린아이일 뿐입니다. 제발, 제발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자식을 생각하는 어미의 절절한 눈빛이었다.

하지만 대공은 그 절절함에 치가 떨리고 역겨움에 구역질이 올라왔다.

“아무런 죄도 없는 어린아이라고 했느냐. 하면 디아나, 내 자식은 대체 무슨 죄가 있어 너에게 10년간 모진 학대를 받아야 했지? 하, 죄 없는 어린아이니 용서해 달라고? 네 그 어린 딸이 내 딸을 죽이려고 들었다. 그런데 내가 왜 네 자식을 어리다고 용서해 줘야 하지?”

“전하, 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제 잘못입니다.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제발…….”

“네 하찮은 목숨 수백 번을 죽인다 해도 널 용서할 수 없다. 네 죽음의 고통 따위는 내가 느끼는 절망과 고통의 발끝에도 닿지 못해. 해서 이곳으로 오는 동안 고민을 했었지. 어떻게 해야 네가 내가 느끼는 절망의 발끝이라도 느낄까, 하고 말이야.”

지하 감옥 안 희미한 불빛 아래 대공의 금안이 소름 돋게 번뜩였다.

엉망진창인 레아의 얼굴에 공포가 서린 순간 대공의 입술이 비틀렸다.

“세이아의 이름을 박탈하고 그 신분을 노예로 강등시킬 것이다. 북방의 가장 척박한 탄광에서 평생 노예로 일하며 이름도 없이, 디아나의 발끝도 보지 못할 것이다. 죽게 될 것이다. 그게 네가 목숨보다 아끼는 딸의 최후가 될 것이야.”

레아에게 죽음은 가장 큰 고통도 두려움도 아닐 것이다.

디아나를 죽이기 위해 이미 자신의 목숨을 걸었으니까.

그리고 그 모든 것은 자신의 딸인 세이아를 지키기 위해서라는 걸 이젠 알았다.

자식을 위해 목숨쯤은 아무것도 아닌 부모에게 가장 큰 벌은 그 자식의 파멸이겠지.

“아냐! 안 돼! 내 딸은 노예가 아니야! 안 돼, 세이아, 세이아!”

레아는 세이아의 이름을 부르며 울부짖었다. 절망으로 일그러지는 레아의 얼굴을 싸늘한 눈빛으로 바라보던 대공은 몸을 돌렸다.

“내일 날이 밝는 대로 교수형을 집행하고 시신은 짐승들의 먹이로 던져라.”

“네, 전하.”

“왜 나만 벌을 받지?! 디아나가 그렇게 된 건 나 때문만이 아냐! 당신이 외면했으니까 그렇게 된 거야! 제 자식을 한 번이라도 봤었으면, 대공가를 떠나지 않았으면 디아나가 내 딸로 10년을 사는 일 따윈 없었…… 악!”

“닥쳐.”

참지 못한 로운이 레아의 어깨에 칼을 박았다.

“로운, 그만둬라. 어차피 마지막 발악일 뿐이니까.”

대공은 핏줄이 터진 레아의 붉은 눈을 마주했다.

“그래, 내가 대공가를 떠나지만 않았다면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았겠지. 돌이킬 수 없는 후회에 대한 내 죗값은 내가 치를 것이다. 하니 넌 네 죗값을 자식이 짊어지는 것에 가슴을 쥐어뜯으며 후회해라.”

아아악!

대공은 레아의 마지막 발악을 뒤로하며 감옥을 나갔다.

* * *

집무실로 들어온 대공은 털썩, 쓰러지듯 소파에 몸을 묻었다.

“전하…… 괜찮으십니까.”

로운은 몹시 피곤해 보이는 대공의 뒷모습을 보며 걱정스런 눈빛을 했다.

몸도 정신도 모두 피곤했다. 하지만 대공은 눈을 감을 수도 편히 쉴 수도 없었다.

지금은 숨을 내뱉는 것조차 죄책감이 들었으니까.

“……괜찮다. 로운, 암살자들의 조사를 빠르게 마무리해라. 늦어도 내일, 폐하께 모든 일에 대해 알려야 하니까.”

“네, 대공녀님에 관한 것도…… 바로 알리실 겁니까? 소식이 전해지면 신문사에서 득달같이 달려들 것입니다. 좀 더 시간을 두시고…….”

“어차피, 내일 신문에 습격 사건이 특보로 뿌려질 것이다. 현장에 있던 모두가 디아나의 모습이 바뀌는 것을 보았는데 미룬다 하여 숨길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최대한 빨리 상황을 정리해 괜한 구설을 줄이는 것이 먼저다.”

“……네, 전하. 그럼 암살자들의 심문을 서두르도록 하겠습니다.”

“심문이 끝나는 대로 내게 알리거라.”

대공은 그만 소파에서 몸을 일으켜 외투를 갈아입었다. 잠시 집무실에 들린 것은 지하 감옥의 눅눅한 피 냄새가 밴 옷을 갈아입기 위해서였다.

디아나에게 썩은 내를 맡게 할 순 없으니까.

외투를 바꿔 입은 대공이 방을 나가기 위해 몸을 돌리자 눈치를 보며 망설이던 로운이 입을 열었다.

“전하, 조금 더 쉬시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물론 마음이 편치는 않으시겠지만 며칠 대…… 공녀님과 관련된 일들을 밝히느라 잠을 거의 못 주무셨습니다. 이러다 몸에 이상이라도 생기실까…….”

“로운, 디아나가 저렇게 누워 있는데 내가 어떻게 쉴 수 있겠느냐. 그리고 나 역시 이 모든 일을 만든 죄인이다. 쉰다는 것은 말이 안 돼.”

대공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자조적인 그의 한숨에 로운은 더 이상 말을 하지 못하고 입술을 다물었다.

“네 마음은 알지만 난 지금 걱정도 동정도 받을 때가 아니다. 로운, 암살자들을 심문하기 전에 대공가의 마차로 마탑주를 돌려보내거라.”

“……네, 전하.”

로운이 집무실의 문을 열자 막 문을 두드리려던 참이었는지 시종이 어설픈 자세로 서 있었다.

“대공 전하를 뵙니다.”

“무슨 일이냐.”

“대공 전하, 저택에 손님이 오셨습니다.”

“손님?”

오늘 대공가를 방문할 손님은 없었다. 방문 약속을 잡지 않고 대공가를 방문할 수 있는 사람은 흔하지 않았다.

‘황실은…… 2황자 때문에 바쁠 터인데, 대체 누가.’

예정에 없던 손님에 대공의 눈썹이 치켜 올라갈 때쯤 하인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시아페 후작님께서 오셨습니다.”

날카로워지던 대공의 분위기가 단번에 가라앉았다.

“후작께서 갑자기 어찌…….”

로운이 놀란 얼굴을 했다.

대공 역시 좋지 않은 예감에 안색이 어두워졌다.

시아페 후작은 절대 이렇게 갑자기 대공가로 방문할 사람이 아니었다.

미리 서신을 보내지도 않고 온 것이라면, 서신을 보낼 시간도 없을 만큼 급한 일이라는 것.

그 일이 디아나와 관련 있을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로운, 넌 이만 네 일을 보러 가거라.”

“네? 전하, 제가 후작 각하를 맞이하겠습니다. 대공녀님께 가시지요. 혹시라도 의식을 차리셨을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아직 소식이 없는 걸 보면 의식을 차리지 못한 것일 거다. 그리고…… 깨어난다 해도 제일 먼저 날 보고 싶진 않을 거 같구나.”

디아나가 스스로에 대해 무언가를 알아차렸다면 더욱 대공을 보고 싶어 하지 않을 것이다.

디아나는 습격 이후로 이미 자신을 외면하고 있었으니까.

“……전하.”

“가 보거라.

대공은 풀어진 단추를 채우며 집무실을 나갔다.

계단을 내려가자 이미 저택 로비 앞에 도착한 후작가의 마차가 보였다.

마차 문이 열리고 후작이 내리는 것을 본 대공은 그에게로 걸음을 옮겼다.

가까워질수록 후작의 서릿발 같은 얼굴이 선명히 보였다.

“대공 전하를 뵙니다.”

후작은 약소한 예를 갖추며 대공에게 먼저 인사를 건넸다. 예법을 지키는 행동과 달리 시아페 후작의 보랏빛 눈동자는 시리도록 차가웠다.

“……각하, 잘 지내셨습니까.”

“전하, 제가 여유로운 마음으로 대공가로 달려온 것이 아니라 바로 본론을 꺼내겠습니다. 디아나는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아이를 보아야겠습니다.”

“……디아나는 방에 있습니다. 어찌 아신 겁니까.”

후작이 왔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부터 생각했었다. 혹 진실을 알게 되어 온 게 아닐까 하고 말이다. 지금 대공을 바라보는 후작의 눈빛을 보니 생각은 확신이 되었다.

그를 바라보는 후작의 눈빛엔 짙은 분노가 넘실거렸으니까.

“디아나를 보고, 저택에서 세이아를 보고 난 뒤 의심을 품었습니다. 그리고 황궁에서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2황자와 대공녀가 함께 간 피크닉 행렬을 어둠술사가 습격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정령의 힘이 발현되며 한 아이의 모습이 변했다……. 그 소식을 듣는 순간 제 의심이 틀리지 않았다는 걸 알았습니다. 제가 들은 소식 중 잘못된 것이 있습니까.”

“……아뇨, 없습니다.”

“그렇다면 방문을 허락해 주십시오. 전 제 손녀의 안위를 확인해야겠습니다.”

“각하…….”

“전하와 더 나눌 이야기는 없습니다. 10년, 그 긴 세월을 날리신 분이 제게 변명을 늘어놓으시려는 건 아니길 바랍니다. 전 들어드릴 마음 없으니까요. 방문을 허락해 주지 않으신다면 이곳에서 며칠 밤낮이라도 기다리겠습니다.”

후작은 얼마든지 기다릴 준비가 됐다는 듯 심지 굳은 눈빛으로 대공을 바라보았다.

흔들림 없는 보랏빛 눈동자가 아리엘과 너무도 닮아 대공은 감히 시선을 마주하지 못했다.

“……제가 어찌 각하의 방문을 막겠습니까. 저를 따라오시지요.”

대공은 후작과 함께 디아나의 방으로 향했다. 가는 동안 후작은 대공을 보지도, 어떠한 말을 꺼내지도 않았다.

마치 아리엘의 장례식 때로 돌아간 기분이 들었다.

그때도 아무것도 못 했고, 지금도…….

스스로가 싫어 대공은 피가 통하지 않을 만큼 손을 그러쥐었다.

“먼저, 들어가시죠, 각하.”

“네.”

방으로 들어서자 에드윈과 피비가 대공을 향해 몸을 돌렸다.

“대공 전하를…….”

인사를 올리려는 그들을 손을 들어 막은 대공이 물었다.

“디아나의 의식은 아직 돌아오지 않은 것이냐.”

“네, 전하. 아직 아무런 반응이 없으십니다.”

피비가 침울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아이에게 가까이 가 봐도 되겠습니까.”

후작이 대공에게 물었다.

“제게 허락을 구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후작께선 디아나의…… 외할아버지시지 않습니까.”

“그렇지요. 너무 늦게 찾아왔지만.”

후작은 느린 걸음으로 침대 머리맡으로 다가갔다.

그 뒷모습이 과거 아리엘의 마지막을 바라보던 후작의 뒷모습과 닮아 보여 대공의 눈앞이 살짝 흐려졌다.

10년이 흘러도 선명한 그날의 순간에 그는 손을 더욱 꽉 그러쥐었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 들었지만 그 아픔은 울컥하는 감정의 고통에 비할 바가 못 되었다.

“……부상이 심한 것입니까.”

후작의 묵직한 목소리가 방을 울렸다.

“아닙니다, 다행히도 큰 부상은 없다고 합니다. 지금은 한꺼번에 많은 힘을 쓴 탓에 회복하기 위해 잠이 든 것입니다.”

“그렇군요. 이 일을 벌인 자는 어찌 되었습니까.”

“레아는 내일 교수형에 처해질 것이고 세이아는…….”

대공은 말끝을 흐렸다.

레아에겐 세이아의 신분을 노예로 강등시키겠다 했지만 아직 확실한 결정을 내리진 못했다.

세이아를 용서하려는 것은 절대 아니었다. 노예로라도 목숨을 살려 둘지 아니면…… 후환을 없애 버릴지 결정하지 못한 것이다.

하지만 대공의 침묵을 오해한 듯 후작이 고개를 돌렸다.

“아이는 용서하시려는 겁니까.”

“아닙니다.”

“……옛날, 아리엘이 후작가에 있던 시절 레아가 아리엘의 물건을 훔쳤다 발각된 적이 있었습니다. 레아를 후작가에서 쫓아내야 한다, 후환을 남겨 두지 말라 죽은 후작 부인이 말했었지요. 그러나 저와 아리엘은 레아에게 한 번의 기회를 더 주자고 후작가에 두었습니다. 그리고 긴 세월이 흐른 지금, 후작 부인의 말이 맞는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후작은 대공의 금안을 직시하며 말했다.

“대공 전하, 후환을 남기지 마십시오.”

“……네, 후작님.”

대공은 고민의 답을 내렸다.

레아는 어차피 죽을 것이니, 세이아를 굳이 노예로 살려 둘 필요는 없을 것이다.

잔인한 결정이겠지만, 후환은 없어야 하는 게 맞았다.

한순간의 잘못된 선택이 너무도 긴 세월을 엉키게 한다는 것을 이미 충분히 겪고 있으니까.

똑똑-.

“전하, 황제 폐하께서 저택에 오셨습니다.”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은 방 안에 하인의 다급한 목소리가 울렸다.

“폐하께서?”

대공이 놀라 묻자 후작이 차분히 입을 열었다.

“이미 폐하께서도 디아나의 모습이 바뀌었다는 것을 전부 아실 테니, 놀라서 오신 게 아니겠습니까. 다녀오시지요, 전하. 디아나의 곁은 제가 지키고 있겠습니다.”

디아나를 지그시 바라보는 후작의 뒷모습을 보던 대공이 하인에게 말했다.

“폐하를 응접실로 모셔라. 각하, 그럼 전 잠시 다녀오겠습니다.”

“손녀의 곁을 지키느라 미처 폐하께 인사를 드리지 못하는 불충을 용서해 달라, 폐하께 전해 주십시오.”

“……네.”

대공은 미동 없는 후작을 복잡한 눈빛으로 보다 이윽고 몸을 돌렸다.

대공이 방을 나가고 후작은 디아나에게 한 걸음 더 다가갔다. 그러자 디아나의 곁을 지키고 있던 유네스가 고개를 들었다. 경계심이 서렸던 눈동자는 후작임을 확인하고 온순하게 바뀌었다.

유네스가 조용히 다시 디아나의 곁에 자리를 잡자 후작은 디아나를 바라보았다.

베개 위로 늘어진 금발은 대공의 것과 똑같았지만 잠든 얼굴은 아리엘의 어린 시절을 보는 거 같았다.

“……아리엘.”

후작의 가슴이 아릿하게 울렸다.

“또 한 번 잃을 뻔했구나.”

‘아리엘, 이 아비가 널 잃은 슬픔에 네 딸을 외면하고 말았구나.’

아내를 겨우 가슴에 묻고 살아가던 그에게 또 한 번의 시련이 닥쳐 후작은 제정신이 아니었다.

제국에 머물면 아리엘의 모든 것들이 떠올라 자식을 떠나보낼 수 없을 것 같아 밖으로 떠돌았다.

10년을.

한 번쯤은 손녀를 보러 왔어야 했는데, 자신이 없었다.

그는 대공이 원망스러웠고, 손녀에게서 대공의 모습이 보이면 아리엘의 핏줄인 손녀마저 원망하게 될까 두려웠으니까.

그래서 피했다.

하지만 그의 외면이 이리도 잔혹한 결과를 가져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

후작은 후회와 죄책감에 가슴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레아도, 세이아도 죄인이었지만 부모의 역할을 다 하지 못한 대공도 그 죗값을 치러야 할 것이다.

“하니 이번엔 절대 물러서지 않을 것이야.”

이번만큼은 절대 자신의 손녀를 외면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디아나.”

디아나의 이름을 나직이 부른 후작은 결연한 얼굴로 작은 손을 조심스럽게 그러쥐었다.

대공가의 응접실.

황제는 답지 않게 초조한 얼굴을 숨기지 못하며 응접실을 서성이고 있었다.

“어떻게, 어떻게…….”

입 밖으로 감히 내뱉고 싶지도 않았다.

황제의 미간이 좁아지던 그때, 대공이 응접실로 들어섰다.

“제국의 태양이신 황제 폐하를 뵙니다.”

“인사가 중요한 게 아니니, 어서 일어나라.”

“……네, 폐하.”

황제의 불안 가득한 눈빛에 대공은 손짓으로 응접실의 하인들을 모두 물렸다.

황제와 대공 둘만이 남자 황제가 다급히 입을 열었다.

“정말 바뀐 것이냐? 세이아가 정말 가짜였던 것이냐?!”

“……네, 폐하.”

굳은 얼굴로 대공이 답하자 황제는 큰 충격을 받은 듯 순간 몸을 비틀거렸다.

“형님!”

대공이 황급히 황제의 팔을 잡으며 부축했다.

“일, 단…… 좀 앉아야겠다.”

황제는 뒷골이 당기는지 머리를 짚으며 응접실 소파에 앉았다.

갑작스런 충격에 혼미해졌던 정신이 돌아오자 황제는 마주 앉은 대공을 보았다.

정신이 돌아오자마자 황제는 속이 울컥 뒤집혔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이더냐! 대공녀가 바뀌다니, 세이아가 가짜라니! 아무리 그 요망한 하녀가 어둠술사였다 해도 어떻게 일을 이 지경으로 만들어!”

황제는 분노를 감추지 못하며 소파 손잡이를 세게 내려쳤다.

“……송구합니다.”

“송구? 송구하단 말로 될 일이냐?! 네 딸이 바뀐 것이다. 무려 10년 동안 네 핏줄도 아닌 것이 대공녀의 모든 것을 누렸고, 진짜 대공녀는 사생아로 살며 학대를 받은 것이야! 그 사실을 너도 그리고 황실도 까맣게 몰랐던 것이다. 바닥으로 내려쳐질 황실의 권위는 둘째 치고 진짜 아이가 받았을 충격은, 상처는 어찌한단 말이냐!”

대공이 의심을 시작했을 때, 황제는 진심으로 진실이 아니길 바랐다.

무려 10년이었으니까.

10년 동안 그 아이가 사생아로 살며 받았을 멸시와 고통을 상상조차 하고 싶지 않았다.

황제는 참담하다는 듯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 소식이 알려지면 어둠술사에게 10년간 농락당한 황가의 일이 신문 1면을 장식할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황실의 권위보단 자신의 진짜 신분도 모르고 사생아로 10년을 살았을 아이가 걱정이었다.

그리고 앞으로 쏟아질 수많은 말들로 인해 받을 상처도 걱정이었다.

“네가 아무리 힘들어 북방을 걸어 잠갔다 해도 내가 갔어야 했는데……. 아니, 널 전장에 내보내선 안 됐어. 너를 다그쳐서라도 네 아이의 곁에 두었어야 했는데……. 태어난 아이는 생각지 못하고 네 슬픔만 본 내가 어리석었다.”

황제의 자조적인 음성이 허공으로 흩어졌다.

“……모든 것은 저의 잘못입니다. 제가 어리석었습니다.”

황제는 무거운 눈빛으로 대공을 응시했다.

순간적으로 울컥해 보지 못했던 눈가의 거뭇거뭇함과 피곤함이 가득한 대공의 얼굴이 보였다.

생기라곤 찾아볼 수 없는 대공의 눈빛을 보던 황제는 쯧, 혀를 찼다.

자신도 이렇게 가슴이 무너지는데, 친아버지인 대공의 심정은 오죽할까 싶었기 때문에.

“……아이는 괜찮은 것이냐.”

“다행히도 큰 부상은 없습니다.”

“기사의 말로는 정령술을 썼다고 하던데…… 그때 세이아가 썼다는 힘이 그 아이의 힘이었던 것이냐.”

“네, 그 현장에 디아나도 있었습니다. 이번 일처럼 무의식 상태에서 정령의 힘이 발현된 거 같습니다.”

“하아, 그 아이의 이름이 디아나였구나.”

“네…….”

“그래도 이름의 뜻은 좋구나. 사생아로 자라 이름마저 천하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다행이라 해야 할지…… 좋은 이름을 주었구나.”

좋은 이름…….

대공은 그 말에 순간 누가 목을 턱 조르는 듯 아무런 말을 할 수 없었다.

그는 디아나에게 이름을 지어 준 적이 없었으니까.

디아나에겐 정말 아무것도 해 준 것이 없는 것이다. 아이의 이름마저도.

“……제가 지어 준 것이 아닙니다.”

“뭐?”

“전 아이에게 이름을 지어 주지 않았습니다. 아무것도…… 해 준 게 없습니다. 형님, 전 앞으로 디아나에게 어떻게 용서를 빌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아니, 용서를 받을 수는 있을지…….”

차라리 목숨을 내놓아서라도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10년 전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모든 것을 바로 잡고 싶었다.

하지만 이미 흘러 버린 시간은 돌이킬 수 없었다.

괴로움에 얼굴을 일그러뜨리자 황제의 긴 한숨이 들렸다.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디아나가 모든 일을 받아들일 수 있는 시간, 그 시간이 얼마가 걸리든 기다려라. 그게 10년간 네가 하지 못했던 아버지로서의 의무다.”

황제는 소리 없는 통곡을 하듯 얼굴이 무참히 구겨진 대공에게 위로를 하지 않았다.

어설픈 위로를 한다 하여 자식을 지키지 못한 대공의 잘못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으니까.

“어둠술사는 어찌 처리할 것이냐.”

“내일 아침 교수형에 처해질 겁니다.”

“그래, 빨리 처리하는 게 좋을 것이다. 오래 살려 두어 봤자, 신문사에서 떠들 거리만 주는 일이 될 테니까. 조용히 빠르게 처리하거라. 그럼 세이아는 살려 둘 것이냐.”

“……후환을 없애려 합니다.”

“……그래, 그게 맞을 것이다.”

황제는 창밖의 붉었던 하늘이 어느새 어두워진 것을 보며 그만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만 돌아가야겠군.”

“배웅해 드리겠습니다.”

응접실을 나가는 황제의 뒤를 따르자 황제가 손을 휘저었다.

“배웅은 됐으니 그만 디아나에게로 가 보거라. 혼자 있을 것이 아니냐.”

“시아페 후작께서 계십니다.”

대공의 말에 황제의 걸음이 멈추었다.

“시아페 후작이? 지금 여기 있단 말이냐?”

“네. 폐하가 오시기 조금 전에 먼저 도착하셨습니다.”

“하, 아무것도 모르고 오진 않았을 테고…… 전부 알고 있는 것이겠지?”

“……네.”

“후작이…… 조금 늦게 알길 바랐는데. 하긴 황궁에 후작의 제자들이 몇인데 늦게 알 수가 없겠군. 후작이 별말 없더냐?”

시아페 후작이 대공을 싫어한다는 것은 황제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대공비가 죽고 그 골이 더욱 깊어졌다는 것도.

“아직은 별말씀 없으셨습니다.”

“이번 일을 후작이 그냥 넘어가지는 않을 것이다. 신문사에서 쏟아질 기사들과 귀족들의 말까지, 앞으로의 일들에 각오 단단히 해야 할 것이다.”

“네, 폐하.”

“……그럼 그만 디아나에게 가 보거라. 그리고 디아나가 깨어나면 내게도 소식을 전해 주거라.”

“네.”

황제는 기다리고 있던 시종장과 함께 저택을 떠났다.

“전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디아나의 방으로 돌아가자 후작이 기다렸다는 듯 대공에게 말했다.

“밤이 깊었는데 오늘은 저택에서 머무시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각하. 방을 마련하라 하겠습니다.”

어둑한 하늘에서 비까지 쏟아지고 있었다.

창밖의 하늘을 힐긋 본 후작은 단호한 얼굴로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요, 돌아가겠습니다. 정리해야 할 일도 있고, 또 앞으로의 일을 준비해야 하기도 하고요.”

후작의 의미심장한 보랏빛 눈동자가 대공을 직시했다.

- 후작이 그냥 넘어가지 않을 것이다.

황제가 했던 말이 순간 떠올랐지만 대공은 후작이 뭐라 하든 할 말이 없었다.

“……알겠습니다. 디아나가 깨어나면 후작가로 바로 소식을 전하겠습니다.”

“그래 주시지요. 그럼 이만 가 보겠습니다. 배웅은 사절하겠습니다.”

후작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대공을 지나쳐 방을 나갔다.

“디아나에게 약을 먹인 것이냐.”

대공은 피비가 들고 있는 은쟁반을 보며 물었다.

“네, 약은 드셨는데 아직 의식은 없으십니다.”

“그렇군. 오늘 밤은 내가 디아나의 곁에 있을 거니 너희들은 이만 물러가 보거라.”

“네, 전하.”

“네, 전하.”

피비와 에드윈까지 모두 물린 대공은 침대 머리맡에 있는 작은 의자에 앉았다.

조용한 방 안에 창문을 때리는 빗소리가 울렸다.

갑작스런 소나기인 듯 하늘에서 떨어지는 빗줄기가 매서웠다.

디아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대공은 침대 위로 손을 올렸다. 디아나의 작은 손을 살짝 그러쥐자 따뜻한 온기가 느껴졌다.

“……미안하다.”

대공의 낮은 음성이 떨렸다.

너무 늦어 버린 사과라는 것을 안다.

먹먹한 가슴에 눈가가 뜨거워졌다.

“미안하다, 디아나.”

대공은 결국 디아나의 손등 위로 고개를 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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