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 * *
“황제의 집무실 안에 이런 비밀 공간을 만들어도 되는 겁니까.”
가족 간의 만찬을 마치고 오랜만에 회포를 풀자는 황제를 따라 집무실에 온 대공은 집무실 책장 뒤에 만들어진 비밀 공간에 들어오게 되었다.
“거기다 전부…… 술이군요.”
대공이 술병이 빼곡히 진열되어 있는 벽장을 보며 말하자 황제는 어깨를 으쓱이며 와인 한 병을 진열장에서 꺼내 들었다.
“뭐 어떻느냐, 어차피 내 집무실인데. 그리고 다음 대의 황제도 아마 이런 공간이 있단 걸 알면 아주 만족스러워 할 거다. 내 핏줄일 테니까.”
황제의 태평한 말에 대공은 참으로 형님답다며 피식, 싱거운 웃음을 흘렸다.
“그리 서 있지 말고 앉거라.”
황제는 방 중간에 마련된 체스터필드 소파를 턱짓으로 가리켰다.
와인 따개를 드는 황제를 본 대공이 손을 뻗었다.
“제가 하겠습니다. 힘은 어릴 적부터 제가 더 셌지 않았습니까.”
“……부정할 수 없구나.”
황제는 웃으며 대공에게 와인 병을 건네주었다.
소파에 편히 먼저 자리를 잡자 대공이 와인 병과 잔을 들고 소파에 앉았다.
와인 잔에 와인을 따른 대공이 잔을 황제에게 밀었다.
“여전히 레드와인만 즐기시는군요.”
“와인이 붉지 않으면 영 와인 같지가 않아 말이다.”
대공의 잔에도 붉은 와인이 채워지자 황제가 잔을 들었다.
“10년 만에 네 얼굴을 본 기념으로 잔이나 맞추자꾸나.”
“……그럴까요.”
두 개의 잔이 부딪히는 소리가 맑게 울리고 대공과 황제는 우아하게 와인을 한 모금 마셨다.
대공은 잔을 내려놓으며 황제를 바라보았다.
대공은 화기애애했던 만찬에서 차마 하지 못했던 말을 조심스럽게 꺼냈다.
“……제가 죄송합니다. 10년 전에 그렇게 전장에 나가 버리면 안 되는 것이었는데, 그땐 남은 사람들을 생각할 수가 없었습니다. 형님도…… 제 딸 아이까지도요.”
“되었다. 네가 이리 무사히 돌아왔으니 됐다. 너에게 대공비가 어떤 존재였는지 누구보다 내가 잘 알고 있다. 네가 전장에서 죽지 않아 준 것만으로 난 괜찮다.”
10년 전 영혼이라곤 느껴지지 않는 얼굴로 출정을 허락해 달라던 크로우드의 얼굴을 일리오스는 선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모두가 죽으러 나간 것이라 떠들었다. 세이아가 있기에 그러지 않을 것이라 일리오스는 그리 말했지만 마음 한구석에선 불안했다.
크로우드의 죽을 자리를 자신이 허락해 준 것일까 봐.
대공은 황제의 그런 불안을 모르지 않았기에 고개를 숙였다.
“송구합니다, 형님.”
“됐다. 고개 들거라. 말했지 않느냐. 난 괜찮다고. 10년이 흘렀다. 과거의 일을 다시 꺼내며 마음 아프고 싶지 않구나. 앞으로의 일들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벅찰 테니까. 크로우드.”
황제는 와인 잔을 내려놓으며 진중한 목소리로 대공의 이름을 불렀다.
“네, 형님.”
“네가 전장에서 돌아오기 전 보낸 서신에서 그랬지. 10년 동안 그날의 일을 되짚어 봤지만 넌 대공비의 하녀와 잠자리를 가지지 않았다고, 그 하녀의 술수에 빠진 것이라고 말이다.”
“……네, 아리엘이 죽었을 당시엔 너무 정신이 없어 무엇 하나 이성적으로 판단할 수가 없었습니다만 이젠 아닙니다.”
“그러면 그 하녀가 낳은 아이도…… 네 아이가 아닌 것이냐.”
디아나.
대공은 순간 아이의 얼굴이 떠올랐다. 아닌 것이 확실한데 왜인지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황제의 시선이 짙어질 때쯤 대공의 입술이 움직였다.
“네, 저의 아이가…… 아닙니다.”
“그렇군……. 그럼 앞으로 어떻게 할 생각이냐.”
“증거를 잡아 진실을 밝히고 자신이 저지른 짓에 뼈저리게 후회할 만큼 고통스럽게 죽일 것입니다. 감히 황족의 아이를 품었다 거짓을 꾸몄으니까요.”
“그래, 그래야지. 감히 황족을 기만했으니 가장 고통스런 죽음을 맞이해야 할 것이다. 그 악랄한 것을 잡는 일은 잘되어 가고 있는 거겠지?”
“증거를 잡는 일은 곧 될 듯합니다만 생각지도 못한 문제가 생겨 버렸습니다.”
“생각지 못한 문제라니?”
“세이아가 그 여자를 의지하고 있습니다.”
“뭐?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
“대공성에서 많은 일이 있었습니다. 10년간의 공백이 너무도 컸는지, 제 뜻대로 되는 일이 없더군요. 특히 자식 일은 더 그런 거 같습니다.”
“세이아에게 무슨 문제라도 있는 것이냐? 만찬에서 보았을 땐 다른 아이들보다 조숙하고 잘 웃고 혼자 자란 것에 비해 얼굴에 그늘이 보이지 않아 다행이라 생각했는데…….”
“그 모습이 진짜 세이아의 모습이었다면 참으로 좋겠지만…… 세이아의 삐뚤어짐 역시 모두 저의 탓이겠죠. 지금은 형님께서 세이아를 돌봐주시겠다 했을 때 보낼 것을 후회가 됩니다.”
대공의 자조적인 한숨에 황제의 얼굴도 심각해졌다.
“크로우드, 설령 세이아가 삐뚤어졌다 해도 그 아이는 네 딸이다.”
“……알고 있습니다. 알고 있는데…… 왜 이리 그 아이가 낯선지 모르겠습니다. 저도, 그렇다고 아리엘도 닮지 않은 세이아를 볼 때마다 꼭 제 딸이 아닌 듯한 느낌이 듭니다.”
황제는 세이아의 얼굴을 다시금 떠올렸다. 사실 그도 세이아를 보며 대공과 대공비를 닮았단 생각을 한 번도 하지 못했었다.
하지만 외면이 닮지 않았다 하여 대공녀가 대공의 딸이 아닌 것은 아니었다.
“10년의 세월은 결코 짧지 않다. 아무리 네 아이라 해도 태어나 한 번도 보지 않은 아이가 어떻게 갑자기 받아들여지겠느냐. 천천히 시간을 두거라.”
“……시간이 지나면 정말 해결될까요?”
대공의 복잡해 보이는 얼굴에 황제는 침음과 함께 미간을 좁혔다.
“당연히 답이겠지. 그보다 크로우드, 그러면 그 아이는 어떻게 할 것이냐?”
“네?”
“그 여자가 낳은 아이 말이다. 네 자식이 아니라고 했으니…… 앞으로 어찌할 생각이냐. 그 여자와 함께 죽일 것이냐?”
“아뇨. 그러지 않을 겁니다.”
“왜지? 함께 죽이는 것이 제일 깔끔할 텐데.”
“그 아이는 그 여자의 자식이라 하기엔 불쌍한 아이입니다. 그 미친 여자가 제 자식을 학대하며 키웠으니까요. 그 아이는 이미 그 여자와 격리되었습니다.”
“학대했다고? 정말 악랄한 것이로군. 그럴 거면 왜 거짓말까지 하며 낳았다더냐. 참으로 이해할 수 없구나. 하면 그 아이는 적당한 임시 보호자를 정해 북방에서 내보낸 것이냐?”
“……제가 보호하고 있습니다.”
“네가? 네가 왜?”
황제는 이해할 수 없단 눈빛으로 대공을 바라보았다.
당연했다. 이성적으로 판단한다면 그가 아닌 다른 보호자를 찾아줬어야 했으니까.
하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다.
“……모르겠습니다. 형님이 들으면 미쳤다고 하시겠지만…… 이상하게 디아나를 볼 때마다 아리엘이 떠오릅니다. 그래서 그 아이가 성인이 될 때까진 제가 보호해 주고 싶었습니다.”
“……뭐? 네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알고 하는 것이냐? 네 딸도 아니고 대공비와는 조금도 상관없는 하녀의 딸이 대공비를 닮았다고? ……정말 미친 것이냐.”
황제는 말도 안 되는 소리에 인상을 무참히 구겼다.
하지만 대공은 그 반응에 무어라 변명하지 못했다.
그는 아직도 디아나를 볼 때마다 아리엘이 떠올랐고 신경 쓰였으니까.
황제는 말을 못하는 대공을 보며 하, 어이가 없어 헛웃음을 내뱉었다.
“자기 딸은 낯설다고 하고 그 여자의 딸은 아리엘을 닮아 신경 쓰인다고 하니, 누가 보면 대공녀와 그 사생아가 바뀐 줄 알겠구나.”
황제는 황당하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지만 그의 말을 들은 대공의 얼굴은 순식간에 딱딱하게 굳었다.
둘이 바뀌었다……
지독히도 낯선 세이아, 그리고 아리엘을 닮은 디아나.
황제도 어이가 없어 아무렇게 내뱉은 말이었지만 사실 대공도 딱 한 번 그런 생각을 한 적 있었다.
생각이 들자마자 바로 미쳤다고 접어버렸지만.
왜인지 지금 이 말을 들으니 그때완 다른 기분이 들었다.
그간 세이아의 행동을 봐 왔기 때문인가.
“크로우드, 무슨 생각을 하길래 그리 심각한 것이냐.”
황제의 목소리에 대공은 상념에서 깨어났다.
대공과 황제의 금안이 마주쳤다. 대공의 금안에 담긴 의심을 읽은 황제가 얼굴을 찡그렸다.
“크로우드, 내 말을 설마 진지하게 받아들인 것은 아니겠지? 세이아는 너의 딸이다. 세이아는 황족의 상징인 금발과 금안을 타고난 아이다. 혹 하녀의 딸도 금발과 금안이더냐?”
디아나는 평범한 갈색 머리칼에 갈색 눈을 가지고 있었다.
“……아닙니다.”
“그렇다면 더 물을 것도 없겠구나. 대공비가 출산했을 때, 의원이 아이의 눈과 머리색이 금발이란 것을 확인했다 하지 않았더냐. 아니냐?”
“확인했다…… 했습니다.”
“그렇다면 하녀가 대마법사쯤 되는 것이 아니라면 무슨 능력으로 황족의 상징을 타고난 아이를 바꾸겠느냐. 쓸데없는 의심을 접고 세이아만 생각하거라.”
“……네, 형님.”
황제의 말이 맞았다. 마법사도 아닌 레아가 어떻게 두 아이를 바꿀 수 있겠는가.
“와인 한 잔에 벌써 취한 게 아니라면 쓸데없는 생각은 접고 술이나 들거라.”
“네.”
대공은 아무렇지 않은 척 술을 들이켰지만 그의 머릿속에선 자꾸만 말도 안 되는 생각이 맴돌고 있었다.
* * *
“아가씨, 밤이 늦었어요.”
“벌써?”
책을 보고 있던 디아나는 고개를 들어 창밖을 보았다.
깊어진 어둠에 별이 반짝이는 밤하늘이 보였다.
“언제 시간이 이렇게 흘렀지? 저녁 먹은 지 얼마 안 된 거 같은데…….”
디아나가 심각하다는 듯 눈썹을 모으자 피비가 웃음 지었다.
“아가씨는 책에 한번 빠지시면 시간 가는 줄 모르시잖아요. 오늘 도서관에서 빌린 책이 엄청 재밌으신가 봐요. 전 영 재미없을 거 같은데…… 말이죠.”
피비는 디아나가 덮은 책의 표지를 흘끔 보며 말했다.
[제국의 수호 정령, 그 힘에 관하여.]
“재밌다기보단…… 어려워서 집중하지 않음 잘 모르겠더라고.”
동화책이 아닌 성인들이 읽는 책이라 단어 하나하나 곱씹으며 읽어야 했다.
그럼에도 모르는 단어들이 많아 사실 읽는 게 쉽지 않았다.
‘하루라도 빨리 내가 가진 힘을 사용하려면 무슨 힘인지부터 알아야 해.’
“너무 무리하진 마세요, 아가씨. 지금도 충분히 빨리 배우고 계시니까요. 그러다 몸살 나실까 걱정돼요.”
“응, 무리하진 않을게.”
디아나는 침대 옆 협탁에 책을 놓고 침대에 몸을 뉘었다.
침대 이불을 정리해 준 피비는 방 안을 밝혔던 등을 하나씩 껐다.
“아가씨, 하나는 켜 둘게요.”
“응.”
“그럼 좋은 꿈 꾸세요.”
“피비도 잘 자.”
방문 앞에서 디아나를 향해 미소 지은 피비는 이윽고 문을 닫았다.
촛불 하나만이 켜진 방 안엔 고요함이 내려앉았다.
디아나는 창가로 몸을 돌려 별이 빛나는 어둑한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 사람은 괜찮을까.”
검은 밤하늘을 바라보자 저 밤과 똑 닮았던 소년이 떠올랐다.
짙은 어둠을 머금은 머리칼과 눈을 가진 소년은 대공처럼 수려한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대공만큼이나 무감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어딘지 대공과 비슷하면서도 많이 달랐던 소년을 떠올리던 디아나는 걱정스레 얼굴을 했다.
“상처…… 치료받았을까?”
피가 쉽게 멈추지 않을 만큼 큰 상처였다.
그런 상처를 대수롭지 않다는 듯 행동했던 것을 생각하면 제대로 치료하지 않았을 거 같았다.
“……아냐, 그렇게 완벽히 사라질 정도면 마법사 같았어.”
‘마법사라면 그 정도 상처는 쉽게 치료했을 거야. 그래, 그럴 거야.’
디아나는 괜찮을 거라 말하면서도 자꾸만 소년이 떠올랐다.
무감한 얼굴이, 리본을 묶어 주는 것을 빤히 보던 검은 눈빛이.
“……이상해.”
처음 본 소년이 왜 이렇게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건지.
낯선 타인을 이렇게 혼자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었는데 말이다.
디아나는 눈앞을 아른거리는 소년의 모습에 이불을 턱 끝까지 올렸다.
“……다시 만날 수 있을까.”
디아나는 수도를 떠나기 전, 한번쯤은 소년을 다시 만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어둑한 밤하늘을 오랫동안 가만히 바라보았다.
* * *
따스한 햇살이 부드럽게 몸을 감싸는 정오의 시각, 황후의 장미 화원에선 세이아의 해맑은 웃음소리가 연신 울리고 있었다.
“……그다음 날 아버지께서 제가 말했던 걸 바로 선물해 주셔서 깜짝 놀랐었어요.”
대공과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하며 수줍게 웃음 짓는 세이아를 보며 황후는 상냥한 미소를 그렸다.
“아버지의 선물에 세이아의 기분이 좋았겠구나.”
“네, 엄청 좋았어요. 아버지께서 제가 한 말을 다 기억해 주셨으니까요.”
“당연히 기억할 거란다. 넌 대공의 하나뿐인 딸이지 않니.”
세이아를 향해 황후가 짙은 미소를 지은 그때 홍차를 따르던 시녀가 실수로 잔을 엎지르고 말았다.
“꺄악!”
드레스를 적시는 홍차에 놀란 세이아가 반사적으로 비명을 질렀다.
“세이아!”
비명 소리에 놀란 황후가 자리에서 일어나 세이아에게로 다가갔다.
“죄송합니다, 대공녀님. 정말 죄송합니다.”
큰 실수에 당황한 시녀가 안절부절못하며 손수건으로 세이아의 드레스를 닦으려 손을 뻗은 순간 세이아가 시녀의 손을 매몰차게 때렸다.
작은 손이었지만 힘이 얼마나 센지 시녀의 손등이 금세 붉어졌다.
세이아의 싸늘한 눈과 마주친 시녀가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세이아, 괜찮은 것이냐. 다친 곳은 없느냐?”
황후가 다가서자 언제 눈을 번뜩였냐는 듯 세이아는 안쓰럽게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괜찮습니다, 황후 폐하. 홍차가 뜨겁지 않아 다친 곳은 없었어요.”
“다행이구나.”
세이아는 고개를 숙이고 있는 시녀를 향해 말했다.
“옷은 갈아입으면 되는 거니 굳이 닦아 주지 않아도 돼.”
“네, 죄송합니다, 대공녀님.”
“샤를, 그만 일어나거라.”
“네, 황후 폐하.”
황후는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시녀를 보다 시녀장에게 눈길을 주었다.
황후의 눈빛을 알아들은 시녀장이 샤를을 데리고 화원을 빠르게 나갔다. 황후는 세이아에게 시선을 돌렸다.
“샤를이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시녀라, 세이아 너에게 실수를 저질렀구나. 아직 서툴러 그런 것이 네가 너그러운 마음으로 이해해 주면 좋겠구나.”
“네, 당연하죠. 전 정말 괜찮으니 걱정 마세요, 황후 폐하.”
“그리 말해 주어 고맙구나.”
“저…… 황자님들이 오시기 전에 옷을 갈아입어야 할 거 같은데…… 잠시 다녀와도 괜찮을까요?”
“이런, 옷을 갈아입는 것이 급한데 내가 다른 얘기를 하고 있었구나. 미안하다. 레베카.”
황후는 고개를 돌려 남색 머리를 틀어 올린 시녀를 불렀다.
“네, 황후 폐하.”
“대공녀를 드레스 룸으로 안내해 주고, 치장도 네가 도우렴.”
“네, 황후 폐하. 대공녀님, 제가 모시겠습니다.”
“다녀오겠습니다.”
“그래.”
세이아와 시녀가 정원을 떠나자 황후의 얼굴에 가득했던 미소가 점차 사그라졌다.
“흠.”
황후는 짧은 한숨을 내쉬며 시녀들이 치우고 있는 깨진 찻잔을 내려다보았다.
- 크로우드가 세이아가 삐뚤어진 거 같다고 걱정을 많이 하더군요. 만찬에서 세이아를 봤을 땐 딱히 이상한 점을 느끼지 못하였는데……. 황후는 어떻던가요?
‘삐뚤어졌다라…….’
황후는 어젯밤 황제가 했던 말과 아까 세이아의 모습을 떠올리며 눈썹을 치켜세웠다.
“황후 폐하.”
황후는 돌아온 시녀장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일레인, 샤를은 괜찮으냐.”
“네, 많이 놀라긴 했지만 홍차가 뜨겁지 않아 다친 곳은 없었습니다.”
“……세이아가 친 손등은?”
“괜찮아 보였습니다.”
황후는 세이아가 눈빛을 바꾸며 시녀의 손등을 때리는 것을 보았다.
대공녀가 실수를 저지른 시녀가 싫어 손등 한번 친 것은 크게 문제 될 일이 아니었지만 아이답지 않게 번뜩였던 눈빛이 마음에 걸렸다.
차라리 대놓고 싫은 티를 내며 시녀를 혼내 달라 했다면 이리 찝찝한 마음이 들진 않았을 것이다.
한데 세이아는 그녀가 다가가자 낯빛을 확 바꾸며 가련한 얼굴을 했다.
귀족 영애들이 상황에 따라 얼굴을 바꾸는 것쯤은 이미 수백 번 보아 온 일이지만 고작 10살 난 아이가 그러는 것은 흔하지 않았다.
혼자 자라면서 타인에 대한 경계심이 강해진 걸까.
가끔 부모의 보호를 받지 못하고 자란 아이들이 나이답지 않은 조숙한 행동을 하는 것을 보았었다.
세이아와는 조금 결이 다르긴 했지만…… 말이다.
‘대공의 반대에도 세이아를 황성으로 데려와 내가 보살폈어야 했어.’
“이래서야 나중에 아리엘을 볼 낯이 없겠어.”
황후는 오랜 친구를 떠올리며 씁쓸한 미소를 머금었다.
“어머니.”
“에키온, 언제 왔니?”
황후는 갑자기 들리는 목소리에 상념에서 깨어났다.
고개를 돌리자 에키온이 레귤러스의 손을 잡고 서 있었다.
“어머니, 저도 왔어요.”
형을 먼저 본 것이 불만인지 불퉁한 얼굴로 자신도 있다고 말하는 레귤러스의 모습에 황후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어머나, 우리 레귤러스도 왔구나. 이리, 엄마 옆에 앉으렴.”
황후가 자신이 옆자리를 가리키자 레귤러스는 말간 미소를 지으며 쪼르르 황후의 옆에 자리를 잡았다.
작은 강아지 같은 모습에 피식 웃던 에키온은 주변을 둘러보며 물었다.
“한데 어머니, 세이아는 어디 있나요?”
“아, 드레스에 홍차가 쏟아져 옷을 갈아입으러 갔단다.”
“이런, 다친 데는 없나요?”
에키온의 걱정에 황후는 고개를 저었다.
“다행히도 다친 곳은 없단다.”
“정말 다행이군요.”
황후와 에키온의 대화를 가만히 듣고 있던 레귤러스는 손을 꼼지락거리며 말했다.
“음…… 어머니, 전 대공녀가 싫어요.”
“응?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이니, 레귤러스.”
“레귤러스, 그럼 안 된다니까.”
에키온의 엄한 표정에 레귤러스가입을 꾹 다물었다.
“에키온, 괜찮다. 동생에게 그러지 말렴. 레귤러스, 왜 세이아가 싫으니?”
황후의 상냥한 목소리에 레귤러스가 눈을 도르륵 굴렸다.
“어제 식사를…… 할 때…… 대공녀가 식기 사용이 느린 절 비웃듯이 쳐다보았어요. 절 무시하듯이요.”
“……그랬니.”
황후는 입술을 툭 내미는 레귤러스를 보며 어색한 미소를 머금었다.
레귤러스는 머리는 좋았지만 다른 아이들보다 말이나 행동이 조금 느렸다.
그리고 느린 행동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도 많이 받았었다.
아무래도 수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받을 수밖에 없는 황손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전 대공녀가 싫어요. 대공녀는 언제 떠나나요, 어머니?”
여과 없이 말하는 레귤러스에 에키온이 무어라 말을 하려 했지만 황후가 손을 들어 막았다.
황후는 레귤러스의 금빛 머리칼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레귤러스, 너의 기분이 나빴다는 건 이 어미도 충분히 이해한단다. 하지만 아직 세이아와 만난 것은 한 번뿐이지 않니. 뭔가 서로 오해가 있었을 수도 있고…… 또 세이아는 단순한 귀족 영애가 아니라 레귤러스와 가족이니 좀 더 함께 지내봤으면 좋겠구나.”
레귤러스는 상냥한 어머니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마음 같아선 싫다고 하고 싶었지만 레귤러스는 이 세상에서 어머니가 제일 좋았다.
“……노력해 볼게요, 어머니.”
레귤러스가 고개를 끄덕이자 황후가 온화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때, 옷을 갈아입은 세이아가 돌아왔다.
“황후 폐하.”
“옷은 괜찮니? 황궁에 황녀가 없어 방문하는 귀족 영애들을 위해 임시로 준비한 옷들이라 걱정이구나.”
“아니에요, 아주 마음에 들어요.”
“그렇다면 다행이구나.”
황후가 세이아에게 자리를 권하려던 때 시녀장이 황후에게 다가왔다.
“황후 폐하, 실리아 후작 부인이 알현을 요청하셨습니다.”
“실리아 후작 부인이? 음…… 곧 간다고 전해라.”
황후는 세이아에게 시선을 돌렸다.
“갑자기 일이 생겨 난 먼저 일어나야 할 거 같구나. 세이아, 미안하다.”
“괜찮습니다, 황후 폐하.”
“에키온, 네가 세이아를 잘 챙기렴.”
“네, 어머니.”
황후가 급히 정원을 나가고 세이아는 에키온과 레귤러스를 보며 싱긋 미소를 지었다.
“1황자님과 2황자님을 뵙니다.”
“황자님이라니…… 공식적인 자리 아닌 곳에선 편하게 오라버니라고 불러, 세이아.”
에키온의 말에 세이아의 얼굴이 환해졌다.
“네, 그럼 오라버니라고 부를게요.”
사이좋아 보이는 에키온과 세이아를 보던 레귤러스는 불퉁한 얼굴로 말했다.
“나도 레귤러스라고 불러. 우린 나이가…… 같으니까…… 말 편하게 해.”
이름을 허락하는 게 싫었지만 에키온의 시선에 어쩔 수 없었다.
“응, 그럴게, 레귤러스. 오라버니, 어제 말씀해 주셨던…….”
세이아는 레귤러스를 힐긋 보곤 곧장 에키온의 옆자리에 앉았다.
그러곤 레귤러스는 보이지 않는다는 듯 에키온만을 보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예 몸까지 돌린 건 레귤러스를 무시하는 듯한 행동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어릴 적 구설수에 휘말린 적 있는 레귤러스는 무시당하는 것엔 눈치가 빨랐다.
- 1황자님과 달리 2황자님은 너무 느리네요.
- 조금 모자란 게 아닐는지…….
자신을 무시하는 세이아의 모습에 좋지 않은 기억이 떠오른 레귤러스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돌아가서 책이나 읽고 싶어.’
자신은 보이지 않는다는 듯한 형님과 세이아의 웃음소리에 숨이 막힐 거 같던 때,
“레귤러스 황자님.”
나직한 목소리가 화원을 울렸다.
“카이 형!”
레귤러스는 카이루스를 보고 밝은 얼굴로 외쳤다.
레귤러스는 의자에서 내려가 쪼르르 카이루스에게 뛰어갔다.
어찌나 반기는지 꼭 사람을 향해 꼬리를 흔드는 강아지 같은 모습이었다.
카이루스는 함박웃음을 지으며 올려다보는 레귤러스를 보며 옅은 미소를 그렸다.
“황자 저하, 제게 형이라 부르면 안 된다니까요.”
카이루스와 에키온은 친우라 사적인 자리에선 반말을 하곤 했지만 어쨌든 카이루스의 신분은 황자들보다 아래였다.
친우끼리 반말이야 그렇다 쳐도 황자가 타국의 왕자를 형이라 하는 것은 말이 나올 수 있는 문제였지만 늘 그랬듯 레귤러스는 고개를 저었다.
“음…… 싫어. 카이루스는 내게 형이야. 우리끼리 있을 땐 그렇게 부를 거야. 형도 말 편하게 해.”
막무가내로 그에게 엉기는 레귤러스에 카이루스는 졌다는 얼굴로 피식 웃음을 지었다.
“그럼 사적인 자리에서만이야, 레귤러스.”
“응!”
카이루스는 발랄한 강아지 같은 레귤러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대체 누가 친형인지 모르겠단 말이지. 한 번도 날 저렇게 밝게 반긴 적이 없거든.”
둘의 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던 에키온은 그들에게 다가갔다.
“1황자 저하께서 2황자 저하께 잘해 주시면 어련히 반기지 않겠습니까. 그럴 땐 남 탓을 하지 말고 자신의 행동을 돌아보는 게 좋답니다, 황자님.”
“카이 형 말이 맞아.”
레귤러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하자 에키온이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흘렸다.
“하, 나만큼 동생 챙기는 형 있으면 나와 보라 그래. 그리고 넌 또 왜 갑자기 격식이냐. 여기 그런 거 따질 사람 누가 있다고.”
에키온은 카이루스의 어깨를 가볍게 툭, 치며 말했다.
“뒤쪽에 계신 분을 잠시 잊으신 건가요, 에키온 황자님.”
“아.”
에키온이 아차 하며 세이아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세이아는 에키온이 무어라 말하기 전에 일어나 그들에게로 다가갔다.
세이아는 카이루스라 불린 흑발의 소년을 빤히 바라보았다.
‘아름다워.’
아버지와 황족들 덕분에 세이아의 심미안은 상당히 높아진 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눈앞의 소년은 아름답다는 말로밖에 설명되지 않았다.
새카만 밤하늘을 그대로 머금은 듯한 머리칼과 눈, 그리고 별처럼 밝은 새하얀 피부.
예술가가 빚은 조각처럼 생긴 수려한 소년의 얼굴은 세이아의 시선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오라버니, 이분은 누구신가요?”
세이아가 먼저 묻자 에키온을 바라보고 있던 카이루스의 시선이 그녀를 향했다.
흑요석같이 깊은 소년의 눈동자가 저를 향하자 세이아의 옅은 금안에 이채가 돌았다.
“이쪽은 내 친우이자 신성국, 오도어 왕국의 5황자 카이루스 오도어야. 그리고 카이루스, 이쪽은 어제 말했던 내 사촌 동생 세이아 테라비타 대공녀이지.”
카이루스는 매끄럽게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대공녀님. 카이루스 오도어라고 합니다.”
그의 미소를 본 순간 세이아의 심장에 큰 파동이 일었다.
“……만나서 반가워요. 오라버니의 친우이시니 편하게 세이아라고 불러 주세요.”
“그럼 그러겠습니다, 세이아.”
카이루스가 세이아의 이름을 부른 순간 세이아의 볼이 살짝 붉어졌다.
그것을 본 레귤러스는 눈살을 찡그리며 카이루스의 손을 잡았다.
“카이 형, 우리 화원을 산책하자. 가만히 있으려니까 재미없어.”
“그럴까? 에키온, 난 레귤러스와 산책을 할게. 그럼 대공녀님, 기회가 닿는다면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아! 저도 가만히 앉아 있으려니 지루했는데……. 오라버니, 저도 화원을 걷고 싶어요.”
세이아는 카이루스가 떠날까 황급히 말했다.
“그럼 다 같이 가자.”
에키온의 말에 세이아의 얼굴엔 미소가, 레귤러스의 얼굴은 구겨졌다.
순간 세이아와 레귤러스의 시선이 마주쳤다.
대놓고 싫다는 듯 표정을 구긴 레귤러스를 본 세이아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정말, 마음에 안 든다니까.’
세이아는 어딘지 모자라 보이는 레귤러스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고귀한 황족의 피를 이는 사람들은 완벽해야 했으니까.
‘하필 나랑 동갑이라니. 모자란 애와 엮이고 싶지 않은데, 나까지 모자라 보일 거 아냐. 친하게 지내지 말아야지.’
세이아는 레귤러스의 시선을 무시하곤 에키온과 함께 산책로로 향했다.
* * *
같은 시각, 제국의 도서관.
“피비, 저 위 칸의 책 좀 꺼내 줘.”
“네, 잠시만요, 아가씨.”
사다리를 가져온 피비가 위로 올라가 책을 꺼내 내려왔다.
[초대 황제의 정령술, 그 모든 것에 대해.]
디아나에게 책을 건네주려던 피비는 디아나의 품에 있는 세 권의 책을 보고 멈칫했다.
“아가씨, 책은 제가 드는 게 낫지 않을까요?”
“아냐, 내가 들게.”
다른 것엔 몰라도 유난히 책에 대한 욕심이 많은 디아나였다.
디아나가 달라는 듯 손을 뻗자 피비는 어쩔 수 없이 책을 건네주었다.
품에 책이 가득 차자 디아나의 얼굴엔 미소가 맴돌았지만 피비는 팔이 아플 거 같아 걱정스러웠다.
“아가씨, 어제 왔을 때 마감 시간이라고 닫혀 있던 휴게실 말이에요. 오늘은 낮에 와서 그런지 아까 보니까 열려 있더라고요. 거기도 막 책장이 있고 되게 독서하기 좋게 잘 꾸며져 있던데…… 더 찾으실 책 없으시면 가 보시지 않겠어요?”
“음…….”
디아나는 높은 책장을 올려다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응, 가자. 일단 이 책들부터 읽어야겠어.”
디아나가 책을 꼭 끌어안고 휴게실로 향하자 피비와 도서관 한쪽에 서 있던 로운이 뒤를 따랐다.
도서관 한쪽에 따로 배치된 휴게실은 생각보다 훨씬 넓었고 잘 꾸며져 있었다.
개인이 편하게 도서를 즐길 수 있도록 1인용 소파와 테이블이 마련되어 있었다.
휴게실 한편엔 여러 종류의 차와 가볍게 먹을 수 있는 쿠키들도 진열되어 있었다.
피비는 1인용 소파 두 개를 붙여 자리를 마련했다.
“아가씨, 앉아 계세요. 전 차랑 쿠키를 좀 가져올게요.”
“아, 아냐. 괜찮아.”
“에이, 그래도 여기 오래 계실 거 같은데 차 한잔 가져오는 게 좋죠.”
진열대 앞에 대기 줄이 길었다.
로운과 둘이 남는 것은 여전히 어색했다.
디아나는 로운을 힐긋 보다 로운의 푸른 눈동자와 딱 시선이 마주쳤다.
디아나는 불편함을 들킨 거 같아 당황한 얼굴을 했다.
로운은 디아나가 아닌 피비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넌 아가씨 옆에 있어라. 제가 다녀오겠습니다.”
“아…….”
로운은 디아나가 대답하기도 전에 진열대가 있는 곳으로 가 버렸다.
‘내가 불편해하는 걸 느꼈나.’
로운의 뒷모습을 잠시 보던 디아나는 이윽고 시선을 거두었다.
‘하지만 로운이 먼저 날 싫어했으니까.’
디아나는 소파에 앉으며 책을 테이블 위로 내려놓았다.
<정령술에 관한 모든 것>이란 책을 펼치려던 디아나는 피비의 말에 고개를 들었다.
“와, 여기 되게 자유로운 분위기네요. 그쵸, 아가씨?”
“응?”
디아나는 피비처럼 주변의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책을 읽는 사람들, 편하게 지인과 대화를 나누는 사람들 그리고 간혹 잠을 자고 있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귀족이 아니었다.
평범한 재질의 옷을 입고 있는 평민들이 더 많았다.
“그러고 보니 수도에 관한 책을 읽었을 때 제국의 도서관은 모두가 평등한 곳이라고 했던 거 같아.”
대공성에 있는 작은 도서관과 비교해 보면 크기도 크기였지만 세심한 부분들이 정말 달랐다.
책을 찾는 것도, 읽는 것도 어린아이들마저 쉽게 이용할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
“그런가요? 왜 그럴까요?”
“음, 글쎄, 그것까진 안 나와 있어서…….”
책엔 그 이유까지 나와 있지 않았다.
디아나가 미간을 좁히며 고민하던 그때, 낯선 목소리가 디아나의 옆에서 들려왔다.
“제국의 도서관이 모두에게 평등한 것은 도서관을 만드신 3대 황제 폐하의 유지 때문이지. 3대 황제 폐하이신 베이도르 황제 폐하께선 제국민들의 교육에 유난히 관심이 높으셨고 배움에 있어서만큼은 신분의 차별이 없어야 한다고 생각하셨던 분이기에, 이 도서관은 그분의 의지를 담아 모든 사람들이 쉽게 들어오고 쉽게 책을 볼 수 있게 만든 것이란다.”
디아나는 고개를 돌렸다.
디아나의 궁금증에 시원한 답을 준 사람은 은발이 멋진 노신사였다.
값비싸 보이는 옷은 그가 평민이 아니란 걸 알려 주었다.
디아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약식의 예의를 차렸다.
“알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은발의 노신사는 군더더기 없는 디아나의 인사에 너털웃음을 지었다.
“허허, 어린 아가씨답지 않게 예의가 바르구나. 한데 이 책들은 꼬마 아가씨가 읽으려 가져온 거니?”
노신사의 시선이 테이블 위의 책들을 향했다.
“꼬마 아가씨가 읽기에는 어려운 내용일 텐데…….”
“어렵긴 하지만 그래도 배울 게 많은 책이라서…… 그리고 천천히 읽으면서 새로운 단어를 배우는 것도 나름 재밌어서요.”
디아나가 부끄럽다는 듯 볼을 살짝 붉혔다.
그런 디아나를 보던 노신사의 보랏빛 눈동자에 순간 그리움이 맺혔다.
“새로운 것을 배우는 게 재밌다라……. 내 딸도 꼬마 아가씨처럼 호기심이 많았는데, 오랜만에 그때가 생각나는구나. 그러고 보니…….”
노신사는 말끝을 흐리며 디아나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리움이 가득한 보랏빛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
“……닮았어.”
“네?”
작은 목소리에 디아나가 잘 듣지 못하고 되물었지만 노신사 물끄러미 디아나를 바라볼 뿐이었다.
집요한 시선이 조금 불편했지만 디아나는 왠지 슬픈 노신사의 시선을 외면할 수가 없었다.
“큼…….”
가만히 두 사람을 보고 있던 피비가 노신사에게 들으라는 듯 크게 헛기침을 내뱉었다.
정적이 깨지고 노신사는 머쓱한 미소를 지었다.
“하하, 이거 내가 실례를 저질렀구나. 내 딸과 네가 너무…….”
“시아페 후작님?”
노신사의 말이 끝나기 전, 로운의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리자 언제 온 것인지 티 세트와 쿠키를 들고 선 로운이 서 있었다.
로운은 놀란 얼굴로 은발의 노신사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는 사람인가?’
디아나는 의아한 눈빛으로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로운 경.”
로운을 본 노신사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딱딱하게 굳은 얼굴은 너무도 차가워 순간 디아나의 몸이 움찔할 정도였다.
“후작님께서 여긴 어쩐 일로…….”
후작……?
디아나의 생각보다 더 고위 귀족이었다.
“나야말로, 로운 그대를 여기서 만날 줄은 몰랐네. 대공가가 이번 검술 대회에 참가한다는 말이 진짜였나 보군. 대공의 심복인 자네가 수도에 있는 걸 보니 말이야. 한데 로운 경, 자네가 어울리지 않게 도서관엔 웬일인가.”
후작의 말에 로운의 얼굴이 당황으로 물들었다.
시아페 후작은 로운이 들고 있는 쿠키 접시와 티 세트를 보다 이름 모를 작은 아가씨에게 시선을 내렸다.
그러자 로운이 더욱 당황하는 것이 느껴졌다.
대공의 심복과 작은 아이라.
‘혹시, 설마.’
후작의 눈빛이 순간 심하게 흔들렸지만 디아나의 갈색 눈에 이성이 돌아왔다.
대공녀가 아니라면…….
시아페 후작의 보랏빛 눈동자가 어둡게 가라앉았다.
디아나는 갑자기 어두워진 후작의 눈빛에 당황한 얼굴을 했다.
묘한 눈빛으로 디아나를 보던 노신사가 입을 열었다.
“난 이만 가 봐야 할 듯하군. 로운 경, 대공 전하께 안부 전해 주게나.”
“……네, 후작님.”
“만나서 반가웠습니다…… 후작님.”
로운이 후작이라 부르는 것을 들었기에 디아나는 예의를 제대로 갖추었다.
그런 디아나를 가만히 보던 후작의 입술이 느리게 움직였다.
“……나도 만나서 반가웠다.”
인자한 웃음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잠시 복잡한 눈빛으로 디아나를 보던 후작은 몸을 돌려 빠르게 휴게실을 나갔다.
후작이 사라지고 디아나는 소파에 앉았다. 디아나는 책을 펼치다 좋지 못한 얼굴의 로운을 바라보았다.
심각하게 굳은 얼굴의 로운은 후작이 사라졌음에도 후작이 있던 곳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누구길래 그러지.
디아나는 로운의 심각한 얼굴과 로운을 보자마자 얼굴이 굳었던 후작을 떠올렸지만 관계를 알 수 없었다.
‘대공 전하를 언급한 거 보면 대공 전하도 아는 거 같은데……. 근데 왜 날 그런 눈빛으로 본 걸까?’
그저 로운과 인사를 나눈 사람이었다면 이렇게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디아나의 마음에 걸리는 것은 후작이 대공과 로운을 알고 있어서가 아니라 그녀를 보았던 후작의 그리워하는 눈빛 때문이다.
그리고 그 비슷한 그리움이 담긴 눈을 디아나는 본 적이 있었다.
축제 날, 대공이 디아나를 보던 눈빛이었으니까.
‘뭘까……?’
뭐가 됐든 자신과 상관없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싶었지만 왜인지 후작의 보랏빛 눈동자가 마음 어딘가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결국 디아나는 책을 펼쳤지만 한참 동안이나 글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 * *
책에 영 집중을 하지 못한 디아나는 결국 해가 지고 나서야 대공가의 저택으로 돌아왔다.
“아가씨, 저녁은 방에서 드실 거죠?”
“응, 그렇게 배가 고프지 않아. 가볍게 먹고 싶어.”
“네, 그럼 많이 준비하지 않을게요.”
저택의 로비로 들어선 디아나는 2층으로 올라가기 전 로운에게 고마웠다 인사를 하려 몸을 돌렸다.
로운과의 사이는 불편했지만 그거와 별개로 기사단장인 그에게 예의는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어제는 너무 불편해 못했지만 오늘은 해야지.’
“로…….”
하지만 디아나는 말을 꺼내자마자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처음 보는 남자가 로운에게 다급히 다가왔기 때문이다.
남자에게서 서신을 전해 받은 로운은 곧 얼굴이 차갑게 굳었다.
심각한 얼굴로 서신을 내려다보던 로운은 곧 디아나에게로 몸을 돌렸다.
“아가씨, 혹시 내일도 외출하실 건가요?”
“응? 아…… 아니, 내일은 안 할 거야.”
도서관에서 책을 거의 읽지 못해 저택에서 읽으려 책을 4권이나 빌려왔다.
내일은 이 책들을 읽느라 외출할 시간도 없을 것이다.
“그러시군요. 제가 내일은 일이 생겨 아무래도 아가씨의 호위를 맡지 못할 거 같습니다. 하지만 기사단에 말해 놓을 테니 혹시 외출하실 일이 생기시면 기사단에 언질을 넣어 꼭 호위 기사와 함께 나가십시오.”
“응…… 알았어.”
“그럼 전 이만 가 보겠습니다.”
“아…… 고…….”
급히 저택을 나가는 로운에게 결국 디아나는 오늘도 인사를 전하지 못했다.
‘오늘 뭔가 많은 일이 있는 거 같네.’
누군지 정확히 알 수 없는 후작도 그랬고, 저택에 도착하자마자 일이 생긴 듯 나간 로운도 그랬다.
둘 다 뭔가 좋지 못한 일 같아 괜히 신경이 쓰였다.
한데 오늘 벌어질 일이 하나 더 남았던 것인지 2층에 도착하자마자 익숙한 목소리가 디아나를 불렀다.
“디아나.”
“…….”
뒤에서 들려오는 레아의 목소리에 순간 디아나의 몸이 뻣뻣이 굳었다.
이미 수도로 출발하기 전에 세이아 와 함께 마차에 오르는 레아를 봤었다.
하지만 멀리서 보는 것과 막상 레아를 마주하는 것은 너무도 다른 일이었다.
본능적으로 디아나의 심장이 쿵쾅거린 때 레아의 목소리가 또 한 번 디아나를 불렀다.
“디아나, 엄마가 부르는데 쳐다보지도 않는 거니?”
레아는 돌아볼 생각을 않는 디아나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이지, 버릇없는 건 여전하구나. 아니 더 버릇이 없어진 거 같아. 엄마가 이렇게 부르는데 들은 척도 하지 않다니 말이야.”
레아는 늘 그랬듯 디아나를 힐난하며 다가갔다.
대공이 저택을 떠났을 때부터 디아나와 마주치기만을 기다렸었다.
어젠 호위 기사가 방문으로 들어가는 것을 지켜보고 있어 다가가지 못했지만 오늘은 운이 좋았다.
호위 기사도 없었고 지나가다 하녀장에게 들은 바론 대공이 오늘 돌아오지 않고 황궁에서 하루 더 묵는다고 하였으니까.
이곳에 디아나를 보호해 줄 사람은 없었다.
레아는 오늘 디아나에게 경고를 좀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한데 레아는 디아나에게 다가가기도 전에 앞이 가로막혔다.
“뭐야?”
레아는 눈썹을 매섭게 치켜세우며 앞을 막은 하녀를 쳐다보았다.
“아가씨께 다가가면 안 될 텐데요.”
레아의 앞을 가로막은 건 다름 아닌 피비였다. 피비는 자신보다 한 뼘이나 큰 레아에게도 기죽지 않으며 당당히 말했다.
“대공 전하께서 당신이 아가씨의 곁으로 얼씬도 하지 못하게 하라 했습니다.”
피비의 목소리에 굳어 있던 디아나는 정신을 차렸다.
“하! 당신? 너 지금 나한테 당신이라고 했니?”
몸을 돌리자 레아가 어이가 없다는 듯 실소하는 것이 보였다.
“네, 같은 하녀 처지인데 제가 뭐 말을 잘못한 게 있나요?”
“뭐? 같은 하녀? 이 조그만 게 정말, 하, 내가 정말 어이가 없어서. 주제 파악을 못 하는 꼴이 딱 디아나를 닮았구나.”
레아의 말에 피비의 얼굴이 와그작 구겨졌다. 자신을 욕하는 것은 얼마든지 참을 수 있지만 방금 레아의 말은 디아나까지 싸잡아 모욕한 것이다.
‘주제 파악이라니.’
피비는 손을 꽉 그러쥐었다. 당장 사과하라고 소리치려던 그때, 디아나의 작은 목소리가 울렸다.
“……피비에게 사과하세요.”
‘방금 내가 뭐라고 한 거지?’
피비를 욕하는 말에 저도 모르게 말이 나갔다.
디아나는 스스로의 행동에 놀라 어깨를 움찔 들썩였다.
“디아나, 너 방금 이 엄마한테 말한 거니?!”
레아의 번뜩이는 시선이 디아나를 향했다. 살기가 번뜩이는 듯한 그 시선 뒤엔 항상 죽을 만큼 아픈 체벌이 따랐다.
생각하고 싶지 않았지만 몸이 기억하는 두려운 매질의 기억이 머리를 천천히 잠식했다.
디아나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 가던 순간 따뜻한 손이 디아나의 손을 그러쥐었다.
그 온기에 늪 같은 기억에서 깨어난 디아나는 피비를 바라보았다.
피비는 걱정 말라는 듯 괜찮다는 미소를 지어 주었다. 그러자 두근거리던 디아나의 심장이 빠르게 가라앉았다.
맞아, 난 이제 혼자가 아니잖아.
- 아가씨, 어머니를 두려워하지 않으셔도 돼요. 이젠 제가 있잖아요! 아가씨에게 해코지를 하려 한다면 제가 가만있지 않을 거예요!
피비가 해 주었던 말이 떠올랐다.
레아의 앞을 막아선 피비는 자신이 했던 말을 지키고 있었다.
레아 앞에서 혼자가 아니라는, 자신을 보호해 주는 누군가 있다는 사실은 디아나에게 너무도 큰 힘이 되었다.
‘두려워하지 않을 거야.’
디아나는 공포심에 낮추었던 시선을 똑바로 들었다.
디아나는 처음으로 레아를 똑바로 마주 보며 말했다.
“네, 피비를 모욕하셨으니 사과하라고 했어요.”
무섭지 않다는 듯 흔들림 없는 디아나의 눈빛에 레아의 얼굴이 당황으로 얼룩졌다.
평범한 갈색 눈동자가 순간 대공과 같은 황금안으로 보이는 듯한 착각마저 들었다.
마치 레아를 내려다보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런 일은…… 절대 벌어지지 않아.’
레아는 흔들리던 정신을 똑바로 잡으며 디아나에게 소리쳤다.
“네가, 지금 날 똑바로 보고, 감히 어디서! 훈육을 받지 않은 지 오래되어 디아나 네가 정신이 나갔구나. 이리 와!”
레아가 참을 수 없다는 듯 얼굴을 와그작 구기며 위협적으로 한 걸음 내딛자마자 피비가 다시 디아나의 앞을 보호하듯 막아섰다.
피비가 레아에게 딱딱한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이 행동들, 대공 전하께 다 고하겠어요.”
“누가 보면 네가 대공 전하의 심복이라도 되는 줄 알겠다?”
“전하께서 제게 명하셨어요. 혹시라도 당신이 아가씨께 다가오면 바로 말하라고요.”
“하, 내가 내 딸을 보겠다는데 혈육의 정을 누가 끊어! 아무 상관 없는 너나 꺼져.”
“기사들 부르기 전에 돌아가시죠.”
“하, 기사들? 그래 불러, 근데 어떻게 부를 거니? 여긴 아무도 없는데. 아 그래, 기사들이 머무는 별관은 저택 뒤쪽에 있는데 여기에 디아나를 놔두고 혼자 다녀올 거니? 그럼 나야 너무 고마운데?”
레아의 말이 맞았다.
당장 기사들을 부르고 싶었지만 복도엔 디아나와 피비, 레아 말곤 아무도 없었다.
수도의 저택엔 사용인들이 많지 않은 데다 저녁 준비 시간이라 하녀들이 바쁜 탓이었다.
‘하필 이럴 때.’
피비가 분함을 못 참고 입술을 깨물자 레아의 입꼬리가 비틀렸다.
“왜 그러고 서 있니? 어서 기사들이라도 부르라니까?”
레아가 비아냥거린 그때, 2층으로 올라오는 마지막 계단을 밟는 구둣발 소리가 들리고,
“기사를 부를 필요 없다.”
서릿발 같은 낮은 음성이 복도를 울렸다.
디아나는 이쪽으로 향하는 발소리에 고개를 돌아보았다. 대공이 싸늘한 얼굴로 복도를 걸어왔다.
디아나는 그의 뒤를 따르는 로운과 막 계단을 오른 세이아를 볼 수 있었다.
대공이 피비의 앞에 멈춰 서고 디아나는 세이아가 아닌 대공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대공 전하를 뵙니다.”
“대공 전하.”
피비와 디아나는 그들의 앞에서 멈춘 대공에게 예를 갖추었다.
“일어나.”
대공은 디아나와 피비를 보다 창백한 얼굴을 한 채 돌처럼 움직이지 않는 레아에게 고개를 돌렸다.
“내 명령을 어긴 것도 모자라 이젠 아예 나를 무시하기로 한 건가.”
바로 옆에서 들리는 싸늘한 목소리에 정신을 차린 레아가 황급히 대공을 향해 허리를 숙였다.
“……송구합니다. 대공 전하를 뵙니다.”
대공은 일어나란 말을 하지 않고 피비에게 물었다.
“네가 얘기해라. 여기 있으면 안 되는 인간이 왜 여기 있는 건지.”
“그것이…… 막무가내로 아가씨를 보실 거라고 왔습니다. 다가오면 전하께 고할 것이라고 말했는데도 듣질 않았습니다.”
“그게 아니오라!”
“내가 언제 너에게 일어나라 했지.”
대공은 차가운 눈빛으로 고개를 쳐든 레아를 내려다보았다.
살기로 번뜩이는 금안에 흠칫한 시선을 낮추며 허리를 숙였다.
“내가 분명 디아나에게 다가가지 말라 했을 텐데. 세이아가 너에게 의지하니 내 명령이, 경고가 우스워 보였나 보군. 그래, 생각해 보니 내가 세이아를 신경 쓰느라 죄인에게 이때까지 너무 관대한 처사를 보였군.”
“전하, 그것이 아니오라 제 말을…….”
레아는 허리를 숙인 채 간절하다는 듯 말했으나 대공의 얼굴은 차갑기만 했다.
“명백히 죄를 지은 자의 변명 따위 들을 이유가 없지. 로운.”
“네, 전하.”
“감히 나의 명령을 어겼으니 끌고 가 채찍 50대를 때려라.”
채찍 50대라니.
듣는 것만으로도 무서운 말에 디아나의 얼굴이 굳었다.
“전하! 제가 잘못했습니다, 전하!”
명령을 들은 레아는 무릎을 꿇고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가만히 상황을 보고 있던 세이아가 대공에게 다가왔다.
“아버지, 채찍 50대는…….”
“세이아, 네가 끼어들 일이 아니다.”
세이아의 말을 단칼에 자른 대공은 레아를 서늘한 눈빛으로 내려다보았다.
“황족의 명을 어긴 대가는 즉결 처분이다. 세이아 네가 자꾸 레아를 옹호한다면 난 더 큰 벌을 내릴 것이다. 아니면 지금 즉결 처분도 나쁘지 않겠지.”
머리 위로 느껴지는 진득한 살기가 느껴졌다.
당장 목을 친다는 말은 거짓이 아니다. 레아는 어깨를 바르르 떨며 입술을 다물었고 세이아도 더는 말을 하지 못했다.
로운이 불러온 하인들이 레아의 양팔을 잡고 억지로 일으켰다.
“세이아를 보필해야 하니 처벌이 끝난 후에는 지혈 포션을 써라. 아이에게 피 냄새를 풍기게 할 순 없으니.”
지혈 포션은 말 그대로 피가 나지 않게만 할 뿐 상처를 치료해 주는 포션이 아니었다.
즉 채찍으로 인한 상처와 고통은 그대로 느낀다는 말이었다.
“네, 전하.”
하인들은 하얗게 질린 레아를 끌고 갔다.
자신의 하녀가 끌려가는 모습에 세이아의 얼굴이 구겨졌다. 세이아는 입술을 깨물었지만 차디찬 대공의 얼굴에 무어라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이게 다 디아나 때문이야.’
세이아는 가만히 이 상황을 지켜보고 있는 디아나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시선을 느낀 디아나가 세이아를 향해 고개를 돌리려던 순간 대공이 세이아를 불렀다.
“세이아, 시간이 늦었으니 이만 방으로 올라가거라. 벌이 끝날 때까지 네 시중은 다른 하녀들이 들 것이다.”
“……네.”
싸늘하게 느껴질 만큼 단호한 대공의 말에 세이아는 몸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세이아가 3층으로 올라가고 대공과 디아나의 시선이 마주쳤다.
“……감사합니다.”
디아나는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시선을 비스듬히 피하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
“네가 고마워할 일은 아니다. 오히려 레아가 네 곁으로 다가가지 못하게 하겠다고 했던 약속을 지키지 못한 것이니…… 미안하구나.”
“……아니에요. 전 괜찮아요.”
사과를 들을 것이라곤 생각지 못했는지 디아나는 동그래진 눈으로 대공을 올려다보았다.
당황한 듯한 디아나의 모습을 보던 대공은 이참에 그날의 일도 사과하려 했다.
“그리고…….”
그날 외면해서 미안하다고 말이다.
하지만 그의 마음과 달리 입술이 움직이질 않았다.
어느새 당황은 사라지고 고요히 가라앉은 눈빛으로 자신을 보는 디아나가 어려웠기 때문에.
정말이지 웃기게도 지금 대공은 저 작은 아이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스스로가 어이없었지만 그날 디아나를 외면한 것이 아직까지도 그의 마음을 무겁게 했다.
디아나의 눈치가 보일 만큼.
대공은 달싹이던 입술을 이내 일자로 다물었다.
디아나는 대공의 기색을 살피고 있었다. 말이 안 되는 생각이었지만 꼭 대공 전하가 자신의 눈치를 보는 거 같았다.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었지만 말이다.
디아나가 이상하다고 생각할 때쯤 대공은 머리를 쓸어 넘기며 한숨을 내쉬었다.
대공은 복잡한 시선을 갈무리하곤 디아나에게 말했다.
“많이 놀랐을 테니, 들어가 쉬거라.”
“네, 전하.”
대공은 몸을 돌려 복도를 걸어갔다.
“……이상해.”
외면할 땐 언제고, 왜.
레아를 벌하고 사과하고, 디아나를 살피는 대공의 모습에 순간 굳게 닫은 마음이 흔들렸지만 이윽고 고개를 저었다.
더 이상 어떤 기대도 하지 않기로 했잖아.
대공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디아나는 무감정한 눈빛으로 고개를 돌렸다.
* * *
집무실로 돌아온 대공은 프록코트의 단추를 풀며 소파에 앉았다.
로운이 한 걸음 다가갔다
“황궁에서 무슨 일이 있으셨습니까? 오늘 아침 서신에 하룻밤 더 묵으신다 하여 내일 오시는 줄 알았습니다.”
“아, 황후 폐하께서는 그러길 원했지만 저녁 식사 중 일이 좀 생겨 돌아왔다.”
“안 좋은 일이라도 있으셨습니까.”
로운의 물음에 대공은 미간을 좁히며 만찬 때의 일을 떠올렸다.
- 거짓말, 의식을 치르지도 않았는데 정령의 힘을 어떻게 써? 그런 적이 있다는 걸 한 번도 듣지 못했어.
- 진짜야, 내가 왜 거짓말을 해? 레귤러스…… 네가 나보다 조금 부족하다 해서 날 거짓말쟁이로 몰지 말아 줘.
- 내가 왜 너보다 부족해?! 네가 말이 안 되는 거짓말을 한 거야!
- 거짓말 아니라니까! 아버지, 말씀해 주세요, 제가 정령술을 쓴 것을 아버지는 알잖아요.
만찬이 시작되자마자 왜인지 분위기가 좋지 않던 세이아와 레귤러스는 결국 작은 언쟁을 벌였다.
그리고 그 두 사람의 언쟁 속에 담긴 내용은 황제와 황후의 이목을 끌기에 충분했다.
언쟁보다도 아직 의식을 치르지 않은 세이아가 정령술을 썼다는 것은 엄청난 일이었으니까.
- 아직 의식을 치르지 않았는데…… 정녕 정령술을 쓸 수 있단 말이냐.
- 그게 정말이라면 엄청난 일이 아닙니까. 대공, 정말입니까?
황제와 황후는 진지한 얼굴로 답을 원했고 그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정령의 힘이 발현된 건 거짓이 아니었으니까.
황제는 대단한 일이라며 웃음 지었지만 레귤러스는 분한지 결국 울음을 터뜨렸고 만찬장의 분위기는 엉망이 되었다.
황제는 세이아가 발현한 정령의 힘에 대해 더 자세히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했다.
하지만 대공은 그날의 일을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그리고 그 힘에 대한 찝찝함이 있었기에 자리를 피해 저택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형님이 그냥 넘어가시지 않겠지.’
아직 의식까지 5년이 남았는데, 의식을 치르기도 전에 발현된 힘이었으니까.
한 번도 없었던 일이었다.
어쩌면 잠들어 있는 정령에 대한 새로운 단서가 생길 수도 있으니 황제는 지대한 관심을 기울일 것이다.
사실 대공 역시 그래야 하는 것이 맞았지만 걸리는 것이 많아 그러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대공은 수도로 올라오자마자 복잡해진 상황에 피로가 몰려들었다.
“하아.”
머리가 지끈거리는 거 같아 한숨을 내쉰 그는 로운에게 고개를 저었다.
“지금으로선 좋은 일일지 안 좋은 일일지 모르겠군. 한데 넌 무슨 일이길래 다급하게 날 찾아오려 한 것이냐.”
대공이 저택에 막 도착했을 때 로운은 심각한 얼굴로 막 황궁으로 출발하려고 했다.
로운은 심각한 얼굴로 품에서 서신을 꺼냈다.
“그것이 저번에 알아냈던 레아와 관련된 사람들의 정보가 들어왔는데…… 모두 죽었다고 합니다.”
“뭐?”
대공의 눈썹이 매섭게 치켜세워졌다.
그는 관자놀이를 누르던 손을 떼고 로운이 건네는 서신을 받아 펼쳤다.
[클론 하워드, 제국력 884년 사망. 오스칼, 제국력 884년 사망.]
“오스칼은 누구지?”
“그때, 수도에서 레아의 임신을 확진해 준 의원입니다. 평민들을 상대로 하던 큰 병원에서 일하던 의사라 생각보다 빠르게 찾을 수 있었습니다.”
서신의 내용을 보던 대공의 미간이 좁아졌다.
“한데 둘이 죽은 연도가 같군.”
“……네, 그게 이상합니다. 더 이상한 점은 하워드 영식과 오스칼 둘 다 자살을 했다고 합니다. 하워드 백작이 영식의 장례를 비공식적으로 치르고 죽음에 대해 알리지 않은 것도 자살 때문인 거 같습니다.”
“둘 다 자살을 했다…….”
“또 하나의 공통점은 둘 다 특별한 이상 증세가 없다 갑자기 자살을 했다는 것입니다.”
대공은 심각하게 얼굴을 굳혔다.
레아와 관련된 사람들이 둘 다 죽은 것도 이상했지만 그들이 죽은 방식이 동일하다는 것이 더 기이했다.
“클론 하워드와 오스칼의 연결 고리는 없나?”
“네, 두 사람은 일면식이 없었던 거 같습니다.”
“일면식도 없는 사람이 같은 해에 그것도 둘 다 자살을 했다. 한데 그 둘 사이엔 레아가 있고.”
“정말…… 이상한 일입니다. 차라리 둘 다 암살을 당했다면 레아가 암살자를 쓴 것이라고 생각했겠지만 둘 다 자살이라니……. 어떻게 이런 우연이 벌어진 걸까요.”
“우연이라고 생각하나?”
“……믿긴 힘들지만 그들의 자살에 레아가 무언가를 했다고 하기엔 그럴 수 있는 방법이 없지 않습니까.”
잠시 침묵을 지키던 대공은 금안을 번뜩였다.
“세이아의 하녀.”
“네?”
“세이아의 하녀 말이다. 습격이 있은 다음 날, 자살한 채로 발견되었지. 자기가 쓴 거 같지 않은 유서만을 남긴 채로 말이다.”
“아…….”
“로운, 난 이 모든 것이 단순한 우연이 아닐 거 같단 감이 온다.”
“……하지만 레아가 대체 어떻게 그런 일을 꾸밀 수가 있었을까요.”
“그래, 그게 이상하단 말이야. 대체 어떻게 그런 일을 꾸밀 수 있었지? 레아가 마법을 쓸 수 있다고 가정한다 해도 이런 일을 꾸미려면 대마법사 정도는 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마력의 흔적이 남지 않을 수가 없었을 텐데.”
모든 것이 우연이 아니란 직감은 왔지만 그 역시 대체 어떻게 한 것인지는 도통 감이 오지 않았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레아에게 대공이 모르는 무언가가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무언가가 어쩌면 그가 예측하는 것보다 더 큰 것일 수도 있다. 대공은 그런 예감이 들었다.
“내가 알지 못했던 능력을 가지고 있다라…….”
그리고 그 능력이 만약 엄청난 것이라면.
- 하녀가 대마법사쯤 되는 것도 아니라면 무슨 능력으로 황족의 상징을 타고난 아이를 바꾸겠느냐.
대공은 순간 황제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말도 안 되는 일이라 치부했던 가정이.
사람 셋을 자살로 위장해 죽일 수 있는 능력이 정말이라면 디아나와 세이아를 바꾸는 것도 가능한 일이 아닐까.
그 생각을 한 순간 대공의 심장이 크게 두근거렸다.
‘만약 정말…… 바뀐 것이라면.’
심장이 쿵쾅거리고 온몸의 피가 차갑게 식었다.
“전하, 괜찮으십니까.”
로운은 소파의 손잡이를 꽉 그러쥐는 대공의 손을 보았다.
뼈마디가 튀어나올 정도로 강하게 그러쥔 손은 피가 통하지 않는 듯 창백해지고 있었다.
“전하.”
걱정스러워 목소리를 높여 다시 부르자 흐려졌던 대공의 금빛 눈동자가 선명해졌다.
로운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린 대공은 긴 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떨리는 심장은 쉬이 가라앉지 않았다.
확실한 것이 아니다.
그저 그의 가설일 뿐이었고 정말 그런 일이 벌어졌을 확률은 지극히 낮았다.
이성적으로 생각하려 노력했지만 등줄기가 서늘해지고 쉬이 진정되지 않았다. 좀 더 확실한 증거가 필요하다.
대공은 입술을 깨물며 침착함을 되찾았다.
“로운.”
“네.”
“잠시 레아와 관련된 사람들은 접고 로투스 공이 지금 어디 있는지 알아 봐라. 그리고 아리엘이 세…… 아니, 출산할 당시 있었던 산파를 전부 찾아.”
로운은 순간 레아와는 관련 없는 명령을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딱딱하게 굳은 심각한 대공의 얼굴에 아무것도 물을 수 없었다.
“……네, 전하.”
“그리고 로운, 난 내일 황궁으로 갈 것이다. 한데 내일 황궁에서 황자들이 올 테니 네가 하녀장과 황자들을 맞이하거라.”
“네, 알겠습니다.”
“더 전할 말 없으면 이만 가서 쉬거라.”
네, 라고 답하려던 로운은 급한 전보에 잊었던 일이 떠올랐다.
“전하, 한 가지 더 전해 드릴 일이 있습니다.”
“무엇이냐.”
“……오늘 시아페 후작님을 우연히 만났습니다.”
“그러고 보니 시아페 후자께서 제국으로 돌아온다 했었지. 영지로 가시지 않고 수도로 오셨나 보군.”
시아페 후작.
후작을 떠올린 대공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한데 오늘 후작께서 디아나 아가씨를 우연히 보게 되셨습니다.”
“뭐?”
대공의 얼굴이 당황으로 물들었다.
하필 후작과 디아나가 만나다니.
아리엘의 아버지와 대공의 사생아로 알려진 디아나.
정말이지 질 나쁜 우연이라고 생각하던 대공은 문득 생각했다.
시아페 후작 또한 디아나에게서 아리엘을 보았을까.
“로운…… 혹시 후작이 디아나를 보고 어땠지?”
“네? 딱히…… 별다른 말씀은 없으셨습니다. 표정도 크게 다르신 점은 없으셨습니다.”
“그런가…… 알겠다. 더 전할 게 있나?”
“아뇨, 없습니다. 그럼 전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전하.”
“그래.”
로운이 집무실을 나가고 대공은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세이아와 디아나 그리고 레아.
모든 상황들이 꼬여 버린 거 같은 불길한 기분을 떨칠 수가 없었다.
대공가로 돌아와 레아를 처단하고 10년 동안 보듬어 주지 못한 세이아를 위해 남은 평생을 살 것이라 마음먹었다.
하지만 만약 처음부터 어그러진 것이라면, 정말 둘이 바뀐 것이라면 그땐…….
“그땐 난…… 어떻게 널…….”
그를 바라보던 디아나의 무감정한, 모든 것을 체념한 듯한 눈빛이 떠올랐다.
숨이 턱 막히는 기분에 그는 셔츠 단추를 거칠게 풀어냈다.
“하아…… 일단은 조사부터…… 그래, 조사부터 해야 해. 아닐…… 가능성이 더 높다.”
침착을 가장했지만 심장은 불안한 듯 빠르게 뛰고 있었다.
그는 고개를 뒤로 젖히며 손으로 눈을 가렸다.
깊은 한숨이, 오늘 밤 내내 끝나지 않을 낮은 한숨이 그의 입술에서 새어 나왔다.
* * *
구르르- 구르르-.
따스해진 날씨에 햇살을 즐기는 새들이 나무 위에 앉아 노래를 부르는 오전.
디아나는 저택의 화원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피비마저 돌려보내고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던 디아나는 책 위로 툭, 머리를 올리는 유네스에 집중이 깨졌다.
한참 책에 집중하던 때라 조금 아쉬웠지만 책에 질투하는 유네스의 행동이 너무 귀여웠다.
유네스는 디아나의 시선이 자신을 향하자 아예 책 위로 올라와 디아나의 손에 자신의 머리를 얹었다.
“쓰다듬어 달라는 거구나.”
디아나는 미소를 지으며 유네스를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었다.
그러자 기분이 좋은지 유네스는 갸르릉 작은 울음소리를 냈다.
“흠…… 유네스, 아무래도 내가 가진 힘은 정령술이 맞는 거 같아.”
디아나는 유네스에게 말하듯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정령술에 관한 책을 다섯 권째 읽고 있었다.
책의 내용을 완전히 이해하기엔 어려운 단어들이 많아 힘들었지만 책들에 공통적으로 나오는 내용들이 있었다.
바로 정령술은 마법과는 다르다는 것이다.
정교한 마법진과 마력의 서클 고리를 하나씩 하나씩 몸속에 쌓아 시전하는 마법과 달리 정령술은 제약이 없다 했다.
시전자의 의지로 움직이는 힘이라 더욱 특별하고 강력하다고 말이다.
디아나는 마법진도 알지 못하고 몸속 서클의 움직임 같은 것도 몰랐다.
단지 힘을 쓸 때마다 차가운 물이 따뜻하게 바뀌길 바랐을 뿐이다.
의지. 책에 나오는 ‘의지로 시전되는 힘’이었다.
그러니 정령술이 맞을 것이다.
한 가지 걸리는 점은 의식을 치러야만 쓸 수 있다고 한 점이 걸리긴 했지만 마법이 아닌 것은 분명했다.
“또 의지에 따라서 그 힘을 조절할 수 있대. 지금의 황족들은 초대 황제처럼 큰 자연을 움직일 만큼 힘이 강하진 않지만 그래도 터득하고 익숙해지면 자신을 지킬 수도, 적을 공격할 수도 있대. 신기하지, 유네스.”
그 힘을 잘 터득만 하면 자신은 물론이고 유네스도 지킬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이 힘을 어떻게 혼자 다루냐는 거지.”
책엔 힘을 사용하는 방법까진 자세히 나와 있지 않았다.
힘은 생겼지만 이걸 어떻게 써야 하는지 알려 줄 사람이 없었다.
대공에게는 말하지 않을 것이다.
혹시라도 이 힘 때문에 대공가에 남아야 할 수도 있으니까.
디아나는 이미 떠나기로 마음먹었다. 대공가에 남아 봤자 사생아라는 굴레를 평생 벗어나지 못할 테니 대공을 벗어나, 아니, 아예 제국을 떠나는 것도 생각하고 있었다.
이름도 바꾸고 멀리 떠나면 사생아라 불리지 않고 새롭게 살 수 있을 테니까.
물론 그러기 위해선 더 자라야 하고, 힘도 더 길러야겠지만 말이다.
“흠, 가르쳐 줄 사람이 없으니…… 혼자 해 볼까?”
무심코 뱉은 말이었는데 좋은 생각 같았다.
어차피 책을 계속 읽어 봤자 비슷한 내용의 반복일 테니. 계속 이렇게 저렇게 힘을 써 보다 보면 쓰는 법을 익히게 되지 않을까.
디아나는 유네스를 옆으로 내려놓고 책을 덮었다.
“냐아-.”
흔들의자에서 일어서자 유네스가 어딜 가냐는 듯 디아나를 바라보았다.
“멀리 안 갈 거야, 유네스.”
디아나는 화원 중앙에 마련된 작은 분수대로 다가갔다.
대공성의 정원 분수대 반만 한 작은 분수대는 아기 천사의 뿔 나팔에서 물이 쏟아지고 있었다.
“일단…… 따뜻하게 바꾸는 것부터.”
후- 디아나는 호흡을 가다듬으며 정신을 집중했다.
물이 따뜻해졌으면 좋겠단 생각만을 하며 분수대 안으로 손을 넣었다.
손을 감싸던 차가운 물이 점점 따뜻해지기 시작했다.
이미 몇 번 경험한 일이기에 신기했지만 놀라진 않았다.
“좀 더 따뜻하게도 할 수 있는 걸까.”
더 따뜻하게라고 생각한 순간 차가운 물에서 김이 폴폴 나기 시작했다.
따뜻하다 못해 뜨거워지자 디아나는 황급히 손을 뺐다.
“아, 뜨거!”
“냐아-.”
디아나의 놀란 목소리에 유네스가 쪼르르 달려왔다.
“괜찮아. 안 다쳤어, 유네스.”
디아나는 걱정하는 듯 다리를 긁는 유네스에게 나직이 말했다.
머리를 쓰다듬어 주자 진정이 되었는지 유네스는 디아나의 발 옆에 얌전히 앉았다.
“흠…… 되게 신기하다. 근데 뭔가 저번보다 힘을 쓰기 쉬워진 거 같은데 착각…… 인가.”
물을 따뜻하게 하는 것은 몇 번 하긴 했지만 이번엔 생각을 한 번 하자마자 바로 실현되는 느낌이었다.
“흠…….”
묘한 기분에 디아나는 분수대의 물줄기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근데 생각으로 힘이 발현되는 거면 굳이 물에 손을 넣을 필요가…… 없는 거 아닐까.”
확인해 보고 싶었다.
디아나는 흐르는 물줄기를 가만히 바라보며 저 물줄기가 방향을 바꾸어 위로 치솟는 것을 상상했다.
그러자 그 순간 분수대의 물이 높이 치솟아 올랐다.
디아나가 상상한 것보다 훨씬 높이 그리고 훨씬 더 많이.
철퍽-!
놀라서 생각을 멈추자 솟아올랐던 물이 분수대로 곤두박질쳤다.
많은 양의 물이 서로 부딪치는 타격음과 함께 분수대의 물이 크게 넘쳤다.
바닥을 적시고 미처 피하지 못한 디아나의 발과 유네스의 온몸을 적실 정도로.
“캬아!”
온몸이 젖은 유네스가 날카롭게 울고,
“우와!”
디아나의 뒤에서 처음 듣는 목소리가 크게 울렸다.
순간 멍해졌던 디아나는 낯선 목소리에 흠칫, 몸을 굳혔다.
‘누가 있어!’
디아나는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러자 그녀가 앉아 있던 벤치 곁에 어린 남자아이 한 명이 서 있었다.
‘여긴 언제…… 온 거지.’
다른 사람이 있다는 걸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보통은 누군가 있거나 다가오면 유네스가 먼저 반응했기에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이번엔 유네스도 물줄기에 놀라 미처 느끼지 못한 거 같았다.
금발에 금안.
디아나는 처음 보는 남자애의 선명한 황금빛에 순간 대공을 떠올렸다.
“방금 그 물 막 위로 치솟게 한 거 네가 한 거 맞지? 너 마법사야? 너처럼 어린 마법사는 처음 봐!”
황족의 상징.
그 의미를 깨달은 디아나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눈앞의 금빛 남자아이는 황족이 틀림없으니까.
제국의 신화에 대해 배우며 현 황족의 가계도 역시 배웠었다.
제국의 42대 황제인 일리오스 테라비타 황제와 황후 리리오페 테라비타 그리고 그들의 슬하엔 2명의 황자가 있었다.
1황자 에키온 테라비타와 2황자 레귤러스 테라비타.
1황자 저하는 15살이라고 했으니까…… 지금 눈앞의 황자는 자신과 동갑인 2황자 레귤러스 테라비타일 것이다.
황급히 정신 차린 디아나는 황족에 대한 예의부터 갖추었다.
“제국의 별이신 황자 저하를 뵙니다.”
데릴 선생님에게 배운 대로 디아나는 차분하게 무릎을 살짝 굽혔다.
“아…… 음…… 일어나.”
디아나의 인사에 흥분이 좀 가라앉았는지 2황자는 우다다 말을 내뱉었던 방금과 달리 나직이 말했다.
“네, 저하.”
“방금 네가 막 물을 솟구치게 한 거 맞지? 막 이렇게 물을 다루는 마법사가 있다는 건 책에서도 보지 못했어!”
디아나가 일어나자마자 2황자가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호기심이 가라앉은 게 아니었는지 2황자의 볼이 발그레 달아올라 있었다.
‘어떡하지? 다른 사람도 아니고 황자에게 들키다니.’
자신이 했다고 하면 어린 황자가 다른 사람들에게 다 말할 거 같았다. 디아나를 보는 눈빛이 상당히 신나 있었으니까.
‘들키면 안 되는데.’
디아나는 난감함에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그런 디아나를 보던 레귤러스는 한껏 올렸던 입꼬리를 내렸다. 레귤러스는 사람들의 감정에 기민하게 반응했기 때문이다.
“음…… 말해 주기 곤란한 거야?”
“아…… 그게…….”
“곤란한 거면 말 안 해도 돼.”
“네?”
디아나는 예상치 못한 반응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레귤러스는 그저 어깨를 으쓱일 뿐이었다.
“궁금하긴 하지만 네가 말하기 싫은데 억지로 알고 싶진 않아. 황자라고 해도 다른 사람을 곤란하게 하면 안 되는 거니까. 우리 어머니가 그랬거든.”
레귤러스는 상냥한 어머니를 떠올리며 수줍은 미소를 지었다.
부끄러운 듯 자랑스러운 레귤러스의 얼굴에 디아나는 저도 모르게 풋, 웃음이 나왔다.
“어, 웃었다. 나 때문에 웃은 거 맞지?”
“……네, 기분 나쁘셨다면 죄송해요.”
“아냐, 아냐. 기분 하나도 안 나빠. 대신 나 때문에 즐거워서 웃은 거니까, 아까 물 솟구치게 한 신기한 그거 한 번만 보여 주면 안 될까?”
“……네?”
“아무한테도 말 안 할게. 너한테 어떻게 한 거냐고도 안 물어볼게. 너무 신기해서 한 번만 더 보고 싶어. 진짜 보기만 할게.”
곤란하게 하는 건 안 되는 거지만 초대 황제 폐하의 전설이 담긴 책에서나 봤던 물이 저절로 움직이는 것을 실제로 보자 딱 한번만 더 보고 싶은 마음을 참기가 힘들었다.
진짜로 아무 말 없이 보기만 하겠다며 간절한 눈빛으로 말하자 디아나가 난감한 듯 미간을 살짝 좁히다 주변을 샅샅이 둘러보았다.
혹시라도 다른 사람이 더 있나 했지만 화원 안으로 들어온 것은 레귤러스 혼자인지 사용인들도 호위 기사도 보이지 않았다.
“……정말 비밀로 해 주시는 건가요?”
“응! 내 이름과 황족의 명예를 걸고 약속해. 진짜 아무한테도 말 안 할게.”
황족의 이름과 명예까지 들먹이자 디아나는 조금 놀랐지만 비밀로 해 주겠단 말이 진짜 같아서 안도감이 들었다.
디아나는 분수대로 몸을 돌렸다.
나팔에서 아래로 떨어지는 물을 바라보며 아까와 같이 마음속으로 생각하자 물길이 또 한 번 위로 치솟았다.
“우와!”
레귤러스는 황족의 체면도 잊은 듯 입을 크게 벌리며 감탄을 내뱉었다.
치솟았던 물길이 다시 아래로 떨어지자 디아나는 이번엔 재빨리 레귤러스의 손을 잡고 뒤로 피했다.
자신은 몰라도 황자가 젖으면 큰일일 테니까.
레귤러스는 물이 철퍽 넘치는 것을 보고 재밌다는 듯 신난 얼굴로 웃었다.
디아나는 분수대에 시선이 쏠린 황자의 손을 놓고 한 걸음 옆으로 물러났다.
‘이래도 도망가면 안 되겠지?’
디아나는 분수대에서 눈을 뗄 줄 모르는 레귤러스를 보고 순간 도망칠까 생각했다.
황자와 오래 있을수록 자신에게 득이 되지 않을 거 같아서.
하지만 안 된다고 생각하자마자 황자가 디아나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최고였어, 꼭 책에 나오는 전설 속의 한 장면 같았어. 너…… 아니 음…… 너라고 하기 싫은데…… 이름이 뭐야?”
“……디아나예요.”
“디아나, 이름 예쁘다. 음…… 근데 너 누구야?”
방금까지 신나 있던 레귤러스는 고개를 갸웃하며 디아나를 바라보았다.
뒤늦게 돌아온 현실감에 생각해 보니 여긴 대공 저택의 화원이었다. 치솟는 물에 신기해 잠시 까먹었지만 말이다.
“대공가에 세이아 말고 다른 대공녀가 있었던가.”
레귤러스는 이상하다는 듯 디아나를 훑으며 말했다. 실크 옷을 입고 있는 것을 보면 귀족가의 영애가 맞는 것 같은데, 여긴 대공가였다.
“아, 대공녀의 친구야? 어느 가문 영애야?”
레귤러스의 악의 없는 물음에 디아나의 얼굴에 당황이 물들었다.
‘내 존재를 모르는 건가?’
알면서 묻는 거라고 하기엔 레귤러스의 눈빛이 너무도 순수했다.
‘내 존재 자체를 모르는 황자에게 내가 먼저 대공의 사생아라고 말해도…… 되는 걸까.’
정령술을 보여 달라고 했을 때보다 더 난감했다. 바로 답하지 못하고 입술을 달싹인 그때, 유네스가 갑자기 털을 세우며 날카롭게 울었다.
“캬악-!”
화원의 입구 쪽을 보며 공격성을 보이듯 꼬리까지 세웠다.
낯선 사람을 경계하긴 하지만 이렇게 사납게 구는 것은 특정 인물들에게만 그랬다.
혹시 세이아나 레아가 온 건가?
디아나의 얼굴이 굳어 가던 그때, 낮은 음성이 2황자를 불렀다.
“2황자님, 여기 있으신가요?”
“나 여기 있어, 카이 형!”
낯설면서도 익숙한 목소리였다.
자신을 찾는 소리에 레귤러스는 몸을 돌리며 외쳤다.
화원의 길목에 구둣발이 보이고 디아나는 이쪽으로 오는 소년을 보게 되었다.
“어…….”
소년을 본 디아나의 눈이 커졌다.
‘저 사람은…….’
흑발의 소년 역시 디아나를 보고 걸음을 멈칫했다.
멀지 않은 거리에서 디아나와 소년의 시선이 뒤엉켰다.
디아나를 바라보는 흑빛 눈동자가 거세게 흔들렸다.
‘저 사람이 왜 여기에.’
2황자가 분명 카이 형이라고 했었다.
‘그럼 1황자…… 아니야.’
1황자와 나이는 비슷해 보였지만 검은 머리 소년은 황족의 상징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하지만 황자들과 친한 사이라면 평범한 신분은 아닐 것이다.
서로를 알아본 두 사람이 놀라 침묵하고 있을 때 레귤러스의 밝은 목소리가 울렸다.
“형, 나 찾으러 온 거야?”
멈춰 선 카이루스를 향해 쪼르르 달려가 웃었다.
굳은 듯 디아나를 바라보던 카이루스의 시선이 레귤러스를 향했다.
“……황자님, 이곳은 대공 저택이니 형이라 부르시면 안 됩니다.”
“아, 음…… 알겠습니다. 아, 제가 방금 만난 영애를 소개해 드릴게요!
레귤러스는 카이루스의 손을 잡고 이끌었다.
디아나의 앞에서 멈춰 선 레귤러스는 웃으며 말했다.
“대공 저택에 세이아 말고 또래 영애가 있을 줄 몰랐어요. 아마 세이아의 친구인 거 같아요. 디아나 영애, 이쪽은…… 아 맞아. 디아나, 어느 가문의 영애야?”
레귤러스는 카이루스의 등장으로 잠깐 까먹은 질문을 다시 물었다.
소년을 물끄러미 보고 있던 디아나의 얼굴이 다시금 곤란함으로 물들었다.
“응? 왜 말을 안 해 줘?”
레귤러스가 고개를 갸웃했다.
더 이상 황자의 물음에 입을 다물고 있을 수 없었다.
“그게…….”
디아나가 입을 연 순간 가만히 그녀를 보고 있던 카이루스가 말했다.
“황자님, 1황자님께서 계속 찾고 있고 호위 기사들도 황자님께서 갑자기 사라져 놀랐습니다. 영애의 소개는 다음에 받는 걸로 하죠. 지금은 1황자님께 돌아가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아, 이런 형님께 혼나겠다.”
“1황자님께선 저택의 로비에 계십니다.”
“아…… 으, 아니, 네. 우리 다음에 또 봐, 디아나! 다음에 꼭 보자!”
레귤러스는 어색한 존대와 함께 디아나에게 빠르게 인사했다. 그리고 아주 급하다는 듯 카이루스를 두고 후다닥 화원을 뛰어나갔다.
레귤러스가 너무도 빨리 사라지고 화원엔 카이루스와 디아나 둘만이 남았다.
디아나는 어색한 얼굴로 소년을 바라보았다.
한 번쯤은 다시 만나 보고 싶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렇게, 이런 곳에서 다시 마주칠 거라곤 상상도 못했다.
“제 이름은 카이루스…… 입니다, 디아나 영애.”
갑자기 자기소개를 할 줄 몰랐던 디아나는 당황스런 눈빛으로 느리게 눈을 깜박였다. 곧 디아나는 느리게 입술을 움직였다.
“……전, 디아나예요.”
소년이 성을 밝히지 않아 디아나도 굳이 신분을 명확히 말하지 않아도 되었다.
‘날 생각해 준 건가?’
아까 레귤러스가 가문의 성을 물었을 때 그녀를 보는 카이루스의 눈빛이 바뀌는 것을 보았었다.
아마 그녀가 누구인지 짐작한 듯한 눈빛이었다.
한데 굳이 묻지 않는다는 건 그의 배려라고밖에 할 수 없었다.
‘왜 날……?’이라고 하기엔 이미 한번 카이루스에게 도움을 받은 적이 있었다.
무감정한 새카만 눈빛과 다르게 다른 사람에게 상냥한 사람인 걸까.
디아나는 그를 보다 상처가 떠올랐다.
“아! 상처, 상처는 괜찮으세요?”
디아나는 그의 팔로 시선을 내렸다. 소매가 길어 안의 상처는 보이지 않았지만 어쩐지 붕대를 감은 거 같지 않았다.
“치료를 받으신 거예요? 혹시 방치해 두고…….”
“치료받았고, 다 나았습니다.”
걱정이 한가득인 디아나의 얼굴에 카이루스는 팔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아…… 다행이네요.”
“영애는 괜찮나요?”
“네?”
“그날, 나쁜 일을 당할 뻔했잖습니까. 많이 놀라셨을 텐데…… 제 상처 때문에 신경 쓰지 못했습니다.”
“아니에요, 전 괜찮아요. 어차피 전 다친 곳도 없었는 걸요.”
“괜찮으시다니 다행이네요.”
카이루스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수려한 그의 얼굴에 미소가 번지가 자신의 마음과 상관없이 심장이 두근거렸다.
부정하기엔 눈앞의 카이루스는 너무도 잘생겼다.
계속 보면 심장이 더 뛸 거 같아 시선을 살짝 돌리는 찰나 멀리서 카이루스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저도 이만 가 봐야 할 거 같네요, 디아나…… 영애. 당분간 수도에 계시는 건가요?”
“네, 아마도요.”
“그럼 다음에 영애를 뵈러 와도 될까요?”
다음을 기약하는 말에 디아나는 카이루스를 놀란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내가 누군지 짐작했을 텐데.’
황족과 연이 있는 귀족이라면 절대 낮은 신분은 아닐 것이다. 당연히 사생아일 리도 없을 것이다.
‘근데 왜 나랑…….’
디아나가 망설이자 카이루스가 물었다.
“혹시 제가 싫으시다면 거절해도 됩니다.”
“아, 아니에요.”
반사적으로 대답이 튀어나왔다. 디아나는 어색한 얼굴로 말을 덧붙였다.
“……다음에 또 봬요.”
“다행이네요, 거절하지 않으시길 바랐거든요.”
카이루스-.
또 한 번 그를 찾는 목소리가 울렸다. 카이루스는 소리가 들린 쪽을 힐긋 보곤 디아나에게 옅은 미소를 지었다.
“전 이제 정말 가 봐야 할 거 같군요. 오늘 다시 만나서 반가웠습니다, 디아나 영애.”
그는 유려한 몸짓으로 인사한 뒤 몸을 돌렸다.
카이루스가 빠른 걸음으로 화원을 나갔다.
“냐아-.”
유네스의 울음소리가 울리며 발목에 부드러운 털의 감촉이 느껴졌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디아나는 자신이 카이루스의 뒷모습을 하염없이 보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날 찾아온다고 했어. 근데 정말 올까?’
우연히 그에게 도움을 받았고, 우연히 이곳에서 마주치긴 했지만 특별한 관계는 아니었다.
‘근데 왜.’
왠지 기분이 이상해졌다.
자신을 보며 옅은 미소를 짓던 카이루스의 얼굴이 떠오른 디아나는 이내 생각을 떨치듯 머리를 가로로 흔들었다.
“말만 그런 걸 거야.”
은근히 그녀의 마음을 건드리는 그의 말을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디아나는 이제 도서관에 가야 할 시간이라 유네스를 안고 이만 화원을 나갔다.
* * *
“세이아, 몸이 많이 안 좋은 거니? 갑자기 속이 안 좋다니, 아까 먹은 디저트에 무슨 문제라도 있었나?”
에키온이 걱정스러운 얼굴을 하자 세이아는 살짝 입꼬리를 올리며 미소를 지었다.
“아니에요, 오라버니. 그냥…… 갑자기 속이 좀 불편해진 거뿐이에요. 오늘 푹 쉬면 좋아질 거 같아요.”
“그러니? 그래도 네 얼굴이 하얗게 질린 게 단순한 소화불량은 아닌 거 같은데…… 내가 아버지께 말해서 황궁의를 보낼게.”
“아니요!”
황궁의라니.
세이아는 다급함에 소리를 빽 질렀다. 저도 모르게 크게 나온 소리에 에키온은 물론 레귤러스와 카이루스의 시선까지 쏠렸다.
‘그냥 가라고 하면 좀 조용히 갈 것이지.’
세이아는 순간 에키온에게 짜증이 치솟았다.
놀란 레귤러스의 눈빛은 상관없었지만 카이루스의 눈빛은 신경 쓰였다.
그에겐 항상 좋은 모습만 보여 주고 싶었으니까.
짙은 흑빛 시선을 의식한 세이아는 얼굴이 확 구겨질 것 같은 감정을 참으며 억지로 입꼬리를 올렸다.
“아…… 괜히 폐하께 심려 끼치고 싶지 않아요, 오라버니. 대공가의 의원도 실력이 좋으니…… 걱정 마세요.”
“세이아는 속도 깊구나. 그래, 말하지 않을게. 그럼 오늘은 푹 쉬렴. 몸 괜찮아지면 황궁으로 놀러 와.”
“네, 그럴게요, 오라버니. 레귤러스, 카이루스 왕자님, 오늘 시간 많이 못 보내서 아쉽네요. 다음에 꼭 같이 재밌는 시간 보내요.”
세이아가 카이루스를 바라보며 부드럽게 미소 짓자 레귤러스가 못 볼 것을 보았다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
세이아는 레귤러스의 그런 얼굴을 모른 척 웃으며 황실 마차에 오르는 세 사람을 배웅했다.
마차가 저택의 정문을 나가고 세이아는 곧장 몸을 돌려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굳은 얼굴로 계단을 올라가려던 찰나 세이아는 화원에서 저택으로 돌아온 디아나를 보았다.
디아나는 세이아를 못 본 듯 웃으며 품 안의 유네스를 쓰다듬고 있었다.
세이아는 그 모습을 보고 입술을 꽉 깨물었다.
‘어떻게, 어떻게 네가.’
디아나를 매섭게 노려보던 세이아는 유네스 사건이 벌어진 그날의 확실한 진실을 알기 위해 계단을 빠르게 올라갔다.
세이아는 레아의 방문 앞을 지키고 있는 하인을 보고 미간을 찡그렸다.
얼마 전, 레아가 디아나를 만난 그 소란 이후 붙은 감시였다.
세이아는 하인을 보며 살짝 미소를 지었다.
“피곤하지? 잠시 쉬고 와, 어차피 내가 레아랑 잠시 있을 거니까.”
“네? 전 괜찮…….”
“내가 있는데 레아가 어떻게 디아나에게 가겠어. 거기다 레아는 지금 잘 움직이지도 못하잖아. 잠시 쉬고 와. 아무 일 없을 거니까.”
하인은 눈을 굴리다 곧 어색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럼…… 잠시만 물러갔다 오겠습니다.”
몇 시간 동안 가만히 서 있느라 지루했던 하인은 횡재라 생각하며 계단을 빠르게 내려갔다.
하인이 계단을 내려가고 미소를 지운 세이아는 레아의 방문을 열었다.
쾅-!
문이 닫히는 큰 소리에 놀란 레아가 고개를 들었다.
“대공녀님, 여긴 왜…… 이런 누추한 곳에 왜 오셨어요…… 윽.”
레아는 엎드려 있던 몸을 황급히 일으키다 등에서 느껴지는 찢기는 듯한 고통에 얼굴을 구겼다.
지혈 포션을 들이부었기에 겉으로 보기엔 멀쩡해 보였지만 채찍질의 상처와 고통은 그대로였다.
오히려 찢긴 상처의 피를 억지로 멈추게 하는 포션은 상처를 마르게 해 통증을 더욱 가중시킬 뿐이었다.
하지만 지금 레아에게 중요한 건 통증이 아니라 무슨 일이 있는 건지 딱딱하게 굳은 얼굴의 세이아였다.
“대공녀님, 무슨 일이라도…….”
“나한테 거짓말한 거야?”
세이아는 레아에게 다가가 따지듯 물었다. 레아의 아픈 얼굴은 보이지도 않는 듯했다.
“네? 제가 거짓말이라니, 그게 무슨 말씀이신가요?”
“그날, 유네스가 날 공격한 날, 내가 물의 정령술로 유네스를 해치웠다고 했잖아.”
“네, 네, 그랬었습니다.”
“근데 왜 내가 아닌 디아나가 정령술을 쓸 줄 아는 건데!”
세이아는 소리를 빽 질렀다.
큰 소리에 놀란 레아는 저도 모르게 위험천만한 말이 밖으로 새어 나갈까 세이아의 입을 막았다.
세이아의 옅은 금안과 레아의 떨리는 갈색 눈이 가까이에서 마주쳤다.
불안으로 떨리는 눈동자를 본 세이아가 입을 막은 레아의 손을 우악스럽게 떼 냈다.
“진짜, 거짓말이었어? 내가 아니라 디아나…… 그 애가 정령술을 쓴 게 맞는 거야?”
세이아가 충격을 받은 듯한 얼굴로 중얼거리자 레아는 당황했던 눈빛을 갈무리하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에요, 그 미천한 아이가 어떻게 정령술을 쓸 수 있겠어요, 대공녀님. 대공녀님이 쓴 힘이 맞아요! 제가 보았고, 또 안타깝게 죽어 없지만 마리도 분명 보았어요.”
“거짓말! 그럼 방금 내 입은 왜 막은 건데? 그리고 내가 봤다고, 디아나가 정령술을 쓰는 걸!”
“……봤다니,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디아나가 정령술을 썼다는 건가요?”
“그래! 화원에서 분수대의 물을 솟구치게 하는 걸 내가 봤어. 그리고 그걸 레귤러스도 봤고! 난 네 말만 믿고 황제 폐하께 정령술을 쓸 수 있다고 했는데 이제 어떡할 거야!”
세이아의 말에 레아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정령술을 쓸 수 있단 걸 황제 폐하께 말씀하셨다니, 정말, 정말로 말씀하셨어요?!”
갈색 눈을 번뜩이며 다그치는 레아의 모습에 화를 내던 세이아가 주춤거렸다.
“……네가 말해 준 거잖아. 내가 정령술을 쓸 수 있다고 아버지에게도 자랑하라고 그랬잖아.”
“그건! 그건 대공 전하가 의심을 하고 대공녀님을 멀리하려 하니까 관심을 돌리려고! 아니, 그걸 왜! 대체 왜, 황제 폐하께 말씀하신 거예요! 일이 커져 의심이라도 받으면 어떡하려고!”
레아가 날카롭게 소리치자 세이아는 두려움을 느끼며 움츠러들다 억울하다는 듯 따졌다.
“의심이라니, 내가 무슨 의심을 받아?!
“대공녀님이 가짜라는 의심이요!”
“뭐?”
세이아는 방금 들은 말을 이해하지 못한 듯 멍한 얼굴을 했다.
“아…… 그게…….”
레아는 당황스런 얼굴로 입술을 달싹였다. 오고 가는 언쟁 속에 저도 모르게 말이 튀어나와 버렸다.
아니라고 말하기엔 세이아가 정확히 들어 버린 뒤였다.
“……내가…… 가짜라고?”
얼빠진 얼굴로 나직이 말한 세이아는 이윽고 얼굴을 와그작 일그러뜨렸다.
“너 미쳤구나! 역시 디아나의 친모였어. 너 같은 걸 내 옆에 두면 안 되는 거였는데! 날 위하는 척 옆에 와서 디아나를 후계자로 만들려고 한 거야! 너 내가 아버지에게 이 일을 다 말씀드릴 거야! 감히 하나뿐인 대공녀를 가짜라고 말했다고! 아버지께서 절대 널 가만두지 않을 거야!”
세이아는 당장 이 사실을 알리겠다는 듯 문으로 몸을 돌렸다.
“안 돼! 가짜라는 말이 나오는 순간 대공이 의심할 거라고!”
하지만 문고리를 채 잡지 못하고 레아에게 어깨를 잡혔다.
“이거 안 놔?! 아파!”
몸부림치자 더 세게 잡는 손아귀 힘에 어깨가 부서질 거 같았다.
강제로 몸이 돌려진 세이아는 차갑게 굳은 레아의 얼굴을 마주했다.
처음 보는 레아의 무서운 얼굴에 세이아는 몸을 움찔했다.
“……안 놓으면 소리 지를 거야.”
“소리 질러도 아무도 안 올 거예요. 아무도 못 들을 테니까.”
“그게 무슨 말…….”
세이아는 마주친 레아의 눈동자가 붉게 변하는 것을 보고 놀라 말을 멈추었다.
방 안의 온도가 갑자기 낮아지는 듯 세이아의 몸을 싸늘한 공기가 감싸 안았다.
붉게 변한 눈동자와 세이아의 어깨를 잡고 있는 팔에 알 수 없는 검은 문양들이 올라왔다.
“……뭐, 뭐야…….”
소름 끼치는 두려움에 세이아의 목소리가 잘게 떨린 순간 어둠의 힘을 깨운 레아가 느리게 눈을 깜박였다.
레아는 겁에 질린 눈빛을 한 세이아의 볼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절대, 죽을 때까지 모르길 바랐는데. 내 말을 듣질 않으니 어쩔 수가 없구나.”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미쳤다고 소리를 지르고 싶었지만 마주한 붉은 눈동자가 너무도 무서워 목소리도 잘 나오지 않았다.
“백 번 설명하는 것보다 직접 보는 것이 좋겠지.”
레아의 붉은 눈동자가 짙어지자 검은 연기가 세이아의 몸을 뱀처럼 기어올랐다.
“싫…….”
싫다고 소리를 지르고 싶었지만 세이아는 검은 연기에 머리부터 발끝까지 잠식되었다.
이윽고 목을 죄는 것 같았던 검은 연기가 사라진 순간 세이아의 몸이 홱, 거울 앞으로 돌려졌다.
연기가 사라지자마자 살려 달라 소리를 지르려 했던 세이아는 거울 속의 자신을 보고 멍청히 입을 벌렸다.
벌린 입술 사이로 나오는 것은 비명이 아닌 소리 없는 경악이었다.
아버지를 닮은 옅은 금발과 금안.
언제나 자랑스러웠던 황족의 색이 감쪽같이 사라져 버렸기 때문에.
대신 평범한 갈색 머리칼과 갈색 눈을 한 자신이 보였다.
“……말도…… 안 돼…….”
거울 속의 자신을 부정하듯 뒷걸음질 쳤지만 세이아는 레아에게 가로막히고 말았다.
한 발짝도 물러서지 못하게 하겠다는 듯 작은 어깨를 꽉 잡은 레아는 거울 속의 세이아와 눈을 마주치며 붉은 입술을 열었다.
“세이아, 네가 바로 내 진짜 딸이란다.”
* * *
“폐하, 대공 전하께서 알현을 청하십니다.”
집무실에서 한창 서류를 보고 있던 황제는 시종의 말에 고개를 들었다.
“대공이 왔다고? 오늘은 오지 않을 줄 알았는데.”
잠시 의아함을 느끼던 황제는 곧 문을 열라 명했다. 집무실로 들어온 대공은 황제에게 예를 갖추었다.
“제국의 태양이신 황제 폐하를 뵙니다.”
“일어나거라. 이쪽으로 앉거라.”
책상에서 일어난 황제는 한쪽에 마련된 소파로 향했다.
상석에 앉은 그는 대공에게 자리를 권했다.
소파에 앉은 대공은 황제의 비밀스런 술 창고가 있는 벽장을 힐끔 보며 말했다.
“오늘은 저곳에 초대해 주지 않는 겁니까.”
“놀리지 말거라. 내가 술을 즐기긴 하지만 공사 구분을 못 할 정도는 아니지. 낮엔 안 마신다.”
황제는 피식, 싱거운 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한데 어쩐 일이냐, 오늘은 방문하지 않을 줄 알았는데. 거기다 지금쯤이면 너희 저택에 아이들이 도착했을 시간인데 말이야. 에키온이 너에게 검술 대련을 해 달라 할 것이라 기대하고 갔는데 허탕 쳐 실망했겠구나.”
“황자 저하의 검술 실력이 나날이 늘고 있단 소문은 익히 들었습니다. 다음에 시간 될 때 대련을 한번 해 드려야겠군요.”
“아직 너와 대련할 정도의 실력은 아니지, 아마 너에게 먼지 나도록 맞지 않겠느냐. 그리고 황자 저하는 무슨, 조카에게 그리 격식 차리지 말거라.”
“네, 형님.”
황제는 대공의 얼굴을 가만히 보다 만찬 때의 일을 떠올렸다.
“그…… 애들 얘기가 나와서 말이다. 만찬 때 레귤러스가 세이아와 언쟁을 벌인 일은 네가 이해해 주길 바란다. 레귤러스, 그 아이가 좋지 못한 구설수를 겪어 낯선 사람을 받아들이는 데 시간이 좀 걸린다. 세이아가 싫어서 그런 것은 아닐 테니 기분 나빠하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황후는 아이들의 일이니 어른들이 끼어들지 말자 했지만 황제는 영 마음에 걸렸다.
어제 만찬이 정말 좋지 않은 분위기로 끝났기 때문이다.
일리오스는 이제까지의 황제들과 달리 가족에 대한 정이 많은 사람이었다. 자신과 대공이 좋은 형제 관계를 유지하듯 그들의 자식들도 서로를 의지할 수 있는 가족이 되길 바랐다.
레귤러스와 세이아가 동갑이라 더욱 친하게 지낼 것이라 기대했는데…….
그래서 오늘 아이들이 대공가의 저택으로 놀러 가 사이를 좀 회복하길 바랄 뿐이었다.
“세이아는 괜찮습니다. 오히려 레귤러스가 상처를 받은 거 같던데 형님께서 잘 보듬어 주십시오.”
“황후가 잘 달래 주었으니 걱정 말거라. 그나저나 애들 얘기로 서론이 길어졌군. 갑자기 알현을 요청한 이유가 무엇이냐. 혹 세이아의 정령술과 관련된 것이냐.”
가족 간의 할 말이 있었다면 이리 공식적으로 황제에게 알현을 요청하지 않았을 것이다.
황제는 풀어졌던 얼굴을 굳혔다.
“네, 그렇습니다.”
대공이 답하자 황제는 뒤의 시종들에게 명했다.
“너희들은 모두 나가 있어라.”
황제의 시종들이긴 했지만 완전히 믿을 수 없는 황궁의 눈과 귀였다.
의식을 치르기도 전에 정령술이 발현된 황족의 이야기는 결코 가벼운 이야기가 아니었기에 황제는 시종들을 모두 내보냈다.
“흠…… 어제 네 얼굴을 보니 그 일에 대해 말하고 싶지 않아 하는 거 같았는데 생각보다 빨리 말을 꺼내는구나.”
“말하지 않겠다고 하면 묻어 주셨을 겁니까?”
황제는 무슨 말이냐는 듯 단호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 한 며칠은 기다려 줬을 거란 얘기였다.”
사실 어제 만찬이 끝나고 묻고 싶었던 것을 꾹 참고 있었다.
일리오스는 금안을 번뜩이며 말을 이었다.
“하니 얘기해 보거라. 정말 세이아가 의식을 받기도 전에 정령술을 쓴 것이냐.”
“일단은…… 그렇습니다. 제가 세이아가 정령술을 쓰는 것을 보진 못했지만 분명 정령술의 기운이 남아있었으니까요.”
“직접 보지 못했다 해도, 어차피 정령술을 쓸 수 있는 것은…… 세이아뿐이지 않더냐.”
“……네. 일단…… 은요.”
대공은 답지 않게 확신이 없는 얼굴이었다.
정령술의 마력을 확인한 게 맞는다면 세이아 말고 누가 있다고……. 설마 그 사생아를 생각하고 있는 건가.
황제는 미간을 깊이 좁혔다.
대공이 세이아와 사생아가 바뀌었을 수도 있단 의심을 하고 있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일단이란 말은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이냐.”
“……그래서 확실히 하기 위해 부탁드릴 것이 있습니다.”
“부탁?”
“네, 세이아의 의식을 앞당겼으면 합니다.”
“얼마나 말이냐.”
“한 달 이내로요.”
“한 달 이내? 한 달 뒤에 검술 대회가 열린다. 너도 모르지 않을 터인데?”
“네, 알고 있습니다. 세이아의 의식은…… 비밀리에 조용히 진행했으면 합니다.”
성인식과 같은 황족의 의식은 공식적인 행사는 아니지만 제국의 모든 귀족들이 관심을 기울이는 큰일이었다.
황족이 정령의 선택을 받는다는 것은 아직 제국이 굳건하다는 것을 알리는 상징적인 일이었으니까.
“크로우드, 너도 알지 않느냐, 완전히 비밀에 부칠 수 없다는 것을. 의식을 준비하는 동안 황궁에 소문이 먼저 돌 것이고 그럼 결국 신문사에서 냄새를 맡고 기사를 낼 것이다. 하면 귀족들이 가만히 있겠느냐.”
황제는 흠, 침음을 내뱉으며 고개를 저었다.
“안 그래도 네가 10년 만에 돌아와 귀족들의 관심사가 온통 대공가에 쏠릴 텐데, 세이아의 의식까지 앞당겨진다면…… 다들 검술 대회는 잊어버릴 것이다. 두 개를 같이 진행할 순 없어.”
“……그렇다면 정말 송구스럽지만 검술 대회를 미뤄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세이아의 의식을 검술 대회가 끝나고 하면 안 되는 것이냐.”
“최대한 빨리 의식을 치러야 할 거 같습니다.”
“왜, 세이아에게 정말 정령의 힘이 있는 건지 확인하고 싶은 거냐.”
“……네.”
대공의 답에 황제는 한숨을 내쉬었다.
“네 딸을 의심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는 거다.”
“송구합니다.”
이미 결정을 내린 듯 대공의 얼굴은 굳어 있었다.
잠시 고민하던 황제는 쯧, 혀를 차며 입을 열었다.
“황실 내부 문제로 검술 대회 일정을 미루겠다고 하겠다. 크로우드, 난…… 네 의심이 부디 틀렸으면 좋겠구나.”
만약, 그 의심이 진실이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그 진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감당할 순 있을지 황제는 답을 알 수가 없었다.
대공은 황제의 무거운 얼굴을 바라보다 그만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도 그러길 바랍니다.”
진짜 딸을 놓친 게 아니길, 자신이 그 정도로 어리석은 인간은 아니길 바랐다.
“그럼 전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하아, 그래.”
깊은 한숨을 내쉬는 황제에게 인사를 올린 대공은 곧 집무실을 나갔다.
대공이 태양궁을 나오자 기다렸다는 듯 마부가 그에게 다가왔다.
“전하, 저택으로 모실까요?”
“아니, 마탑으로 갈 것이다.”
“네.”
대공가의 마차 문이 닫히고 곧 마부의 손짓에 말들이 빠르게 달렸다.
제국의 마탑은 황궁 서쪽 끝, 말 그대로 탑처럼 생긴 성이었다.
제국의 모든 마법사들이 모인 그곳은 황실의 지원을 받으며 수많은 연구를 하며 마법사들을 양성하는 곳이었다.
마차에서 내린 대공은 곧장 마탑 안으로 향했다.
미리 언질하지 않고 갑작스럽게 방문한 것이라 대공을 본 마법사들이 화들짝 놀라며 눈을 크게 떴다.
자신들이 방금 본 것이 그 유명한 제국의 검, 크로우드 대공이 맞는지 확인하려는 듯 말이다.
하지만 정작 대공은 쏠리는 시선들을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는 이동 마법진 위로 몸을 실었다.
최고층의 버튼을 누르자 곧 마법진이 빛을 발했다.
마탑주의 집무실이 있는 최고층의 마법진 위로 순간 이동한 대공은 마법진에서 내려왔다.
“……대공 전하?”
마탑주의 집무실 옆에 고위 마법사들의 연구실이 있었다.
막 연구실을 나온 분홍 머리칼의 젊은 남자 마법사가 대공을 발견하고 멍청한 얼굴을 했다.
대공은 그에게 다가갔다.
“마탑주를 만나러 왔다.”
낮은 음성으로 말하자 분홍 머리 남자는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멍청한 표정을 지웠다.
“대공 전하를 뵙니다.”
마법사는 황급히 예를 갖추었다.
“……인사는 됐다. 마탑주 안에 있나?”
고개를 든 마법사는 곤란한 얼굴을 했다.
“아…… 그게, 마탑주님께선 2주 전에 서부 고대 마법 유적지로 출장을 가셨습니다.”
“이런.”
대공의 얼굴에 낭패감이 스쳤다.
“언제 돌아오지?”
“사흘 뒤 돌아오십니다.”
“흠.”
대공은 난감한 신음을 흘렸다.
오늘 마탑주를 찾아온 건 레아의 힘에 대해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그는 정령술에 대해선 잘 알았지만 마법에 대해선 깊이 알지 못했다.
사람들을 손대지도 않고 자살로 만든 것이라면 아마 평범한 마법은 아닐 게 분명했다.
그가 알지 못하는 고대 마법진을 알고 있거나 포션을 썼거나. 여러 가지 가정을 해 보고 있었지만 확실한 답은 마탑주가 알고 있을 것이다.
‘사흘 뒤에 다시 와야겠군.’
대공은 돌아가려다 분홍 머리 마법사의 푸른 망토를 보고 멈칫했다.
제국의 마법사들은 세 가지 색상의 망토로 초급 마법사, 중급 마법사, 그리고 수석 마법사임을 구별했다.
푸른 망토는 제국 내에 10명밖에 없는 수석 마법사들의 망토였다.
“이름이 뭐지?”
“네? 아…… 루이스 쿠웨틴입니다.”
“쿠웨틴이라면 톨란드 쿠웨틴 재상의 아들인가?”
“네, 그렇습니다.”
마법사가 겸연쩍은 얼굴로 답했다. 재상이라면 친황제파의 수장이었다.
레아에게 마법을 쓸 수 있는 마나의 서클이 있는지 비밀리에 알아보기 위해선 귀족들에게 말을 퍼뜨리지 않을 입이 무거운 자가 필요했다.
일리오스 황제의 왼팔이라 불리는 마탑주 같은 사람 말이다.
‘재상의 아들이라면…… 나쁘지 않겠군.’
“루이스, 그대는 상급 마법사이니 다른 사람의 마나 서클이 어느 정도인지도 알아낼 수 있나?”
“아…… 네, 가능합니다. 저보다 서클이 높은 상급자라면 알아내기가 좀 힘들겠지만 현재 제국엔 저보다 높은 마법사는 마탑주님밖에 없으시므로 마법진으로 충분히 알아낼 수 있습니다.”
루이스는 은근 능력을 과시하듯 자신 있는 얼굴로 말했다.
“그렇다면 그대가 날 좀 도와줬으면 좋겠는데, 혹 내일 시간 되나?”
루이스는 자색 눈동자를 반짝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전하.”
“단, 내가 시키는 일에 대해선 그대의 아버지에게도 함구해야 한다. 입을 다물 자신이 없다면 하지 않아도 돼.”
가벼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 주듯 대공은 얼굴을 굳히고 루이스를 직시했다.
위압감이 느껴지는 대공의 금안을 마주한 루이스는 선명한 위압감에 등줄기가 서늘해지는 기분이었다.
대공이 맡기는 일에 함부로 입을 놀렸단 살아남지 못하리라.
본능적으로 위험을 느낀 루이스는 바짝 마른 입술을 열었다.
“……네, 명심하겠습니다, 전하.”
“도와주겠다니 고맙군. 물론 그대의 도움에 대한 사례는 넉넉히 할 테니 걱정 마라. 그럼 내일 그대 가문의 저택에 사람을 보낼 테니…… 마탑으로 출근하기 전에 대공가로 들러라.”
“네, 전하.”
“그럼 수고하게.”
경직된 루이스의 어깨를 긴장 풀라는 듯 가볍게 두드린 대공은 그만 몸을 돌려 이동 마법진으로 향했다.
* * *
“아가씨, 오늘은 정령에 관한 책들을 안 찾으시네요.”
빌렸던 책을 반납하고 정령 서적이 아닌 새로운 책들을 둘러보자 피비가 놀랐다는 듯 속삭였다.
그럴 만했다.
디아나는 도서관에 올 때마다 정령과 관련된 서적들만 보았으니까.
“아…… 이제 궁금한 게 해결됐어.”
이제 이론보다 실제 연습을 해야 할 단계였다.
디아나가 대수롭지 않게 말하자 피비는 감탄이 가득한 표정으로 말했다.
“와, 대단하세요. 책을 읽는 것만으로도 궁금증을 해결하시다니…… 역시 아가씨께선 천재의 기질이 보이세요.”
“……아냐, 그런 거. 절반은 모르는 단어라 그냥 넘긴 장들이 더 많았어. 여러 책을 보면서 아는 단어들과 문장들만 이해한 것뿐이야. 다행히도 내가 궁금해했던 부분은 그리 어려운 단어들로 설명되어 있지 않았거든.”
정령술에 관한 복잡한 용어들은 당연히 이해하지 못했다.
“여러 책들을 보시며 뜻을 알아내시다니, 더 대단하신데요?”
하지만 피비는 디아나의 설명이 들리지 않는 듯했다.
피비는 자랑스럽다는 눈빛으로 디아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다른 사람이 보았다면 부끄러웠겠지만 다행히도 지금은 디아나와 피비뿐이었다.
로운은 도서관 한편에서 디아나를 지켜보며 장거리 호위를 하고 있었으니까.
“……칭찬 고마워, 피비. 우리 저쪽으로 가 보자.”
피비의 칭찬을 멈추는 방법은 화제를 돌리는 것뿐이란 걸 디아나는 이제 터득했다.
어린이용 서적이 있는 곳을 가리키며 고개를 돌리던 디아나는 마주친 사람에 느리게 손을 내렸다.
“어…… 저분은…….”
디아나는 열 걸음 정도 떨어진 곳에 서 있는 은발의 노신사를 보며 느리게 눈을 깜박였다.
저번에 도서관에서 만난 대공과 관련 있는 귀족이었다.
“그때…… 시아, 페 후작님이라고 했던 거 같은데.”
디아나가 그의 이름을 떠올리며 나직이 중얼거린 그때, 후작이 디아나를 향해 걸음을 내디뎠다.
디아나를 똑바로 바라보면서.
후작이 디아나의 앞에 서기 직전 로운이 먼저 옆으로 다가섰다.
로운은 굳은 얼굴로 디아나의 앞으로 비스듬히 섰다. 꼭 후작에게서 디아나를 가리는 듯한 모양새였다.
‘왜…….’
후작은 대공과 관련 있는 사람이지 디아나와 관련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후작과 디아나는 그날 처음 만난 것이었으니까.
‘한데 왜 막아서지?’
로운의 등을 의아한 눈빛으로 보던 찰나 로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시아페 후작님.”
“로운, 잘 지냈는가, 라고 안부를 묻기엔 어색한 사이 같군. 대공 전하껜 내 안부를 전했는가.”
“……네, 전해 드렸습니다.”
로운의 목소리에서 평소와 달리 긴장감이 느껴졌다. 잘 보이지 않지만 그런 로운을 보며 후작은 여유로운 미소를 그렸다.
“그렇군. 한데 내 그대에게 볼일이 있는 것이 아닌데 좀 비켜 주겠나.”
“후작님…….”
로운은 곤란함이 가득한 목소리로 말끝을 흐렸다.
“로운, 내가 아이에게 무슨 해코지라도 할까 봐 이러는 건 아니겠지? 걱정 말게. 내 그리 상식 없는 사람은 아니니.”
“……그런 뜻은 아니었습니다. 송구합니다.”
“그런 뜻이 아니었다면 좀 물러나 주겠나. 시간 오래 뺏지 않을 걸세.”
후작의 말투는 한없이 부드러웠지만 그 목소리엔 위압감이 서려 있었다.
로운은 마주한 보랏빛 눈동자에 먼저 시선을 내리며 옆으로 물러났다.
로운이 비켜서자 후작은 디아나에게로 한 걸음 다가왔다.
“다시 만나 반갑구나.”
디아나는 로운의 굳은 얼굴과 입으로만 미소를 그리고 있는 후작을 보았다.
마냥 상냥한 눈빛으로 디아나를 보았던 저번과 달리 지금 자신을 내려다보는 눈빛은 날카로웠다.
자신을 둘러싼 분위기가 몹시 불편했지만 디아나는 차분하게 후작에게 예를 갖추었다.
“다시……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시아페 후작님.”
“호오, 저번에도 느꼈지만 나이에 비해 조숙하구나.”
“……칭찬 감사드립니다.”
“그때, 이름을 듣지 못했는데 이름이 무엇이니?”
“디아나…… 라고 합니다.”
“디아나…… 좋은 뜻을 가진 이름이구나. 널 다시 한번 보고 싶었단다.”
“……저를 왜요?”
디아나는 궁금했다.
후작이 왜 이곳에서 자신을 기다린 것인지, 그리고 왜 자신을 보며 어딘지 서글픈 미소를 짓는 것인지 말이다.
“모르겠구나.”
모르겠다고?
디아나는 의아한 얼굴을 했지만 후작은 그저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
후작은 디아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날카로웠던 보랏빛 눈동자가 흐려졌다. 디아나를 보고 있지만 디아나를 보고 있지 않는 듯한 눈빛이었다.
후작은 느리게 입술을 움직였다.
“……네가 계속 생각나더구나. 그래서 한 번 더 보고 싶었단다. 네가 생각나는 이유가 무엇 때문인지 확인하고 싶었거든.”
후작은 그리 말하곤 입을 다물었다. 디아나는 가만히 답을 기다렸다.
대공과 닮은 복잡한 눈빛으로 디아나를 바라보던 후작은 허무함이 느껴지는 웃음을 흘렸다.
“……어떻게, 이렇게 많이 닮은 것인지…… 이상한 일이구나.”
무슨 뜻인지 알 수가 없는 말들이었다.
뜻을 이해할 순 없었지만 한 가지 느낄 수 있는 건 후작의 눈빛이 슬퍼 보인다는 거였다.
후작은 디아나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디아나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미안하구나, 어린 네가 무얼 안다고 혼잣말만 늘어놓았어.”
“……괜찮습니다.”
복잡한 감정이 뒤섞인 듯한 눈빛으로 디아나를 보던 후작은 로운에게로 몸을 돌렸다.
“로운 경.”
“네, 후작님.”
“내가 저택에 방문하고 싶다고 대공 전하께 전해 주게나. 내일 오랜만에 찾아뵙겠다고, 그리고…… 세이아도 만나고 싶다고 말일세.”
세이아?
후작은 대공녀의 이름을 편하게 불렀다. 무척 가까운 사람인 것처럼 느껴졌다.
대체, 어떻게 대공과 관련된 사람인 거지.
“……네, 후작님.”
로운은 무거운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오늘 갑자기 시간을 뺏어 미안했다. 디아나, 다음에 연이 닿는다면 또 보자꾸나.”
“……네, 후작님. 만나서 반가웠습니다.”
흐린 미소를 지은 후작은 이내 몸을 돌려 자리를 떠났다.
후작의 뒷모습이 완전히 사라지고 디아나는 고개를 돌려 심각한 얼굴로 굳어 있는 로운을 불렀다.
“로운.”
깊은 생각에 잠겨 있던 것인지 디아나의 목소리에 움찔한 로운은 고개를 돌렸다.
“네, 아가씨.”
“아까, 그 후작님…… 누구신지 알려 줘.”
로운의 푸른 눈동자가 순간 흔들렸다. 그의 얼굴이 난감함으로 물들었지만 디아나는 물러나지 않았다.
로운은 이윽고 짧은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시아페 후작님은 대공비님의 아버님 되시는 분입니다. 대공 전하껜 장인이, 대공녀님껜 외할아버지가 되시는 분이시죠.”
“……아.”
대공비님의 아버지.
디아나는 순간 심장이 철렁하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 다 그 재수 없는 모녀 때문에 대공비님이 죽은 거야.
항상 디아나를 따라다녔던 족쇄 같은 말이 떠올랐다.
“아가씨, 괜찮으세요?”
순간 멍해졌던 디아나는 피비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아…… 괜찮아.”
“얼굴이 창백하십니다. 정말 괜찮으십니까.”
로운의 걱정스런 목소리도 들렸다.
“괜찮아. 정말, 괜찮아.”
솔직히 말하면 괜찮지 않았다.
대공비님의 아버지인 후작은 왜 자신을 만나러 온 거였을까.
‘내가 누굴 닮았다는 걸까.’
슬펐던 보랏빛 눈동자를 생각하자 그리움이 짙은 대공의 금빛 눈동자도 떠올랐다.
‘대체 다들 날 보며 누굴 생각하는 거지?’
머리가 혼란스러워지자 갑자기 피로가 밀려들었다. 생각지도 않았던 대공비의 아버지를 알게 되어 그런 것도 있었다.
한동안 잊고 지냈던 말들이 머릿속을 맴돌고 후작과 대공의 눈빛이 계속 신경 쓰였다.
디아나는 책을 읽고 싶은 기분이 나지 않았다.
“오늘은 이만 돌아가야겠어.”
“네, 그래요, 아가씨.”
“네.”
디아나의 어두워진 얼굴에 피비도 로운도 다른 말을 덧붙이지 않고 도서관을 떠났다.
* * *
“대공 전하를 뵙니다.”
“대공 전하를 뵙니다.”
저택으로 돌아오자 로비에서 로운과 하녀장이 대공을 맞이했다. 한데 로운과 하녀장의 얼굴이 모두 좋지 않았다.
대공은 코트를 벗어 하녀장에게 건네며 먼저 물었다.
“표정이 왜 그렇지, 저택에 무슨 일이 있었나?”
“대공녀님께서 조금 아프십니다.”
“세이아가?”
대공의 눈썹이 치켜세웠다.
“배탈이 나셨는지 점심때부터 저녁까지 제대로 드시지 못하셨습니다.”
“갑자기? 의원의 진찰은 받은 것이냐.”
“네, 의원님의 말씀으로 큰 이상은 없으시다고 하는데……. 아마 수도로 오는 동안 누적된 피로가 긴장이 풀린 지금 몰려온 것 같다고 하셨습니다.”
“혹시 황자들이 왔을 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은 아니냐.”
레귤러스와 또 싸운 것인가 싶어 물었지만 하녀장은 고개를 가로로 내저었다.
“황자 저하들께선 오신 지 얼마 되지 않아 바로 돌아가셨습니다. 대공녀님이 속이 좋지 않다고 하셔서요.”
대공은 세이아의 방이 있는 3층을 올려다보다 시간을 확인했다.
시계의 시각은 이미 11시가 훌쩍 넘어 있었다.
“세이아는 잠들었겠군.”
“……네, 전하.”
“내일 주방장에게 일러 아침 식사는 세이아가 좋아하는 음식들로만 준비하라 해라. 그리고 내일 아침에 의원에게 한 번 더 진찰을 받게 해.”
“네, 전하.”
“잠시.”
대공은 물러가려는 하녀장을 불렀다.
“네.”
“레아는 세이아의 시중을 들고 있나?”
“아…… 잠시 대공녀님과 함께 계셨으나 거동이 많이 불편해서 대공녀님이 더 쉬라고 물리셨습니다.”
“거동이 많이 불편한가? 일어나지도 못할 정도인가?”
거동이 불편하다는 말에 대공은 미간을 좁혔다. 걷지 못하면 내일 일에 차질이 생길 테니까.
“아뇨, 걷지 못하는 정도는 아닙니다. 움직일 수는 있습니다. 조금 주춤거릴 뿐입니다.”
“그렇군.”
“당분간은 하녀장과 다른 하녀들이 돌아가며 세이아의 시중을 들어라.”
“네, 전하.”
고개를 조아린 하녀장이 물러가고 대공은 로운에게 시선을 돌렸다.
“넌 왜 그렇게 굳은 얼굴이냐. 혹 벌써 로투스 의원과 산파들을 찾은 것이냐.”
“아, 아직 그 일은 답이 오지 않았습니다.”
“하면 왜.”
“……시아페 후작님께서 내일 저택에 방문하시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무감하던 대공의 얼굴이 크게 흔들렸다.
“……후작께서 오신다고.”
“네, 오랜만에 대공 전하도 뵙고…… 또 대공녀님을 만나고 싶으시다고 전해 달라 하셨습니다.”
“외할아버지가 손녀를 보고 싶으시다는데 내가 막을 수 있나. 편하신 시간에 방문하시라 후작가에 서신을 보내라.”
“네. 그리고 전하, 저번에 제게 후작님께서 디아나 아가씨를 보고 아무런 말씀이 없으셨냐고 물으셨던 일 말입니다.”
“그랬지……. 후작께서 디아나를 보고 무어라 했느냐?”
“오늘 후작님을 만난 것이 도서관이었습니다. 후작님께서 디아나 아가씨를 만나고 싶어 기다리고 계셨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전하께서 느끼신 것처럼 후작님께서도 디아나 아가씨가 대공비님과 닮으셨다 느끼시는 거 같았습니다.”
“……그렇군. 알겠다. 그리고 로운.”
“네.”
“세이아의 의식을 앞당기기로 했다. 의식 준비로 내가 황궁에 왔다 갔다 하는 일이 잦을 테니 로투스 의원과 관련된 소식이 오면 황궁으로 사람을 보내거라.”
대공의 말에 로운의 눈이 커졌다.
의식을 갑자기 앞당긴다니.
대공은 아무렇지 않은 듯 말했지만 결코 가벼운 소식이 아니었다.
대공의 수하로 10년이 넘는 세월을 보낸 로운이었다.
설마, 대공녀님의 존재를 의심하시는 건가.
하지만 전과 달리 로운은 별말을 고하지 않았다.
대공가로 돌아와 지금까지 겪었던 일들, 레아와 관련된 의문들에 로운 또한 무언가 이상하단 생각이 들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로운은 굳은 얼굴로 대공에게 고개를 숙였다.
“네, 전하. 최대한 빨리 로투스 공과 산파들을 찾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그럼 쉬십시오, 전하. 저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로운이 저택을 나가고 로비에 혼자 남은 대공은 고개를 들었다.
램프의 불들이 은은하게 밝혀진 곳에서 그는 세이아가 아닌 디아나의 방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곧 집무실로 몸을 돌렸다.
* * *
동이 튼 지 얼마 되지 않은 이른 아침, 대공저로 마차 한 대가 들어섰다.
저택 문 앞에서 마차가 멈추자 기다리고 있던 로운이 다가섰다.
마차의 문이 열리고 푸른 망토를 걸친 분홍 머리 마법사, 루이스가 내렸다.
루이스는 저택 앞에 선 붉은 머리칼의 남자를 보고 미소를 지으며 다가갔다.
“처음 뵙겠습니다, 로운 경. 루이스 쿠웨틴이라 합니다.”
로운은 자신을 알고 있는 루이스에 놀란 눈빛을 했다.
“저를 아시는군요, 루이스 자작님.”
“물론입니다. 대공 전하의 오른팔이라 불리는 붉은 머리 기사는 대공 전하만큼 유명하니까요.”
“제가 그리 유명한지 몰랐군요. 반갑습니다. 대공 전하께서 기다리고 계시니 바로 올라가시지요.”
“네, 그러죠.”
짧은 인사를 나눈 로운과 루이스는 사용인들이 출근하기 전에 곧장 집무실로 향했다.
똑똑-.
집무실의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울렸다.
작은 액자에 담긴 아리엘의 초상화를 바라보고 있던 대공은 액자를 책상 서랍에 넣었다.
“들어와.”
누구라 말하지 않았지만 로운이란 걸 알고 있었다.
집무실로 들어선 로운과 루이스는 대공에게 예를 갖추었다.
“대공 전하를 뵙니다.”
“대공 전하를 뵙니다.”
“일어나라.”
대공은 루이스를 바라보았다.
“이른 시간에 불러서 미안하네. 하지만 그대가 오는 것을 저택의 사용인들이 보지 않는 게 좋아서 말이야.”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아침은 먹었는가? 아직이라면 집무실로 아침 식사를 준비해 주겠네.”
“아, 전 아침을 원래 잘 먹지 않습니다.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렇다면 바로 본론을 꺼내겠네. 내가 그대에게 부탁할 일은 사람 한 명을 좀 알아봐 줬으면 하네.”
“사람을요? 마법으론…… 사람의 뒷조사가 힘듭니다.”
“뒷조사를 부탁하는 게 아니야. 그 사람이 마법사인 거 같은데 의심만 갈 뿐 확신이 없어서. 그 사람에게 마력이 있는지, 있다면 몇 서클의 마법사인지를 알아봐 주었으면 해. 어제 자네에게 한번 물었던 일이지.”
대공의 설명을 들은 루이스가 곤란해하던 얼굴을 폈다.
“아…… 네. 그건 가능합니다, 전하. 그럼 그분은 어디 계신가요?”
“준비가 다 끝나면 내가 집무실로 부를 걸세. 어제 말론 마력을 알아내기 위해선 마법진을 그려야 한다고 하지 않았나?”
“네, 마법진이 있어야 합니다. 그분이 집무실로 오신다면…… 이쯤 서 있는 걸까요?”
루이스는 자신이 서 있는 곳을 가리키며 물었다.
“그쯤이 될 듯하군.”
“전하, 그분이 자신을 조사한다는 사실을 몰라야 하는 것인가요?”
“그렇다.”
“……이 카펫 아래로 마법진을 그리겠습니다. 그럼 보이지 않을 테니까요.”
“그러도록 해라. 그리고 한 가지 더, 어제도 말했듯 오늘 일은 절대 함구해야 할 것이다. 그대가 한 일과 나중에 그대가 조사할 사람에 대해서도.”
“네, 전하. 그럼 지금 바로 시작할까 하는데 괜찮을까요?”
“괜찮다. 로운, 네가 도와줘라.”
“네.”
로운이 카펫을 들자 루이스가 마법진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던 대공은 몸을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수평선에 머물러 있던 해가 하늘 높이 올라가고 저택으로 사용인들이 출근하기 시작했다.
대공은 복잡한 마음과 달리 새파란 하늘을 보며 깊은 한숨을 삼켰다.
* * *
“대공녀님, 대공녀님…….”
“아…….”
세이아는 자신을 부르는 하녀의 목소리에 멍하던 정신을 차렸다.
흐려졌던 초점을 맞추자 거울에 비친 하녀와 눈이 마주쳤다.
“왜?”
“치장이 다 끝났습니다.”
“……그래, 수고했어.”
세이아는 거울 속의 자신을 바라보았다. 굵은 웨이브가 물결치는 옅은 금빛 머리칼과 선명하진 않지만 대공과 닮은 옅은 금빛 눈동자.
분명 자신이 알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이게 가짜라고?’
거울 속 자신의 모습에서 금빛이 사라지고 평범하디평범한 갈색이 덧씌워지는 환영이 보였다.
세이아는 끔찍함에 눈을 질끈 감았다.
‘내가 가짜라니.’
심장이 두근거리고, 도저히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자신이 가짜라는 것은 그렇게 경멸하고 혐오했던 제 인생의 불순물이라 여겼던 디아나가 진짜 대공녀라는 것이었으니까.
‘내 아버지가 대공이 아니라니. 싫어, 너무 싫어. 내가 가짜라는 것보다, 디아나가 대공의 유일한 진짜 딸이란 사실이 더 싫어.’
세이아는 주먹을 꽉 그러쥐었다.
“대공녀님, 어디 불편하신가요?”
하녀의 걱정스런 목소리가 들렸다.
“의원을 다시 부를까요?”
세이아는 눈을 뜨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아니, 괜찮아. 그냥 잠시 어지러웠을 뿐이야.”
“아침 식사를 거의 하지 않으셔서 그런 게 아닐까요? 조금이라도 더 드시는 것이…….”
“아냐, 괜찮아. 아직 속이 안 좋아서 많이 먹지 않는 게 좋을 거 같아.”
세이아가 의자에서 일어나려던 찰나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대공녀님, 하녀장입니다.”
“들어와.”
문을 열고 들어온 하녀장이 허리를 숙였다.
그리고 그 옆에 선 레아도 허리를 숙였다.
레아를 본 세이아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무슨 일이야.”
“대공 전하께서 대공녀님과 레아를 찾으셨습니다.”
“……아버지가? 갑자기 왜?”
세이아는 화들짝 놀라며 되물었다.
‘혹시 알아차리셨나? 아냐, 갑자기 어떻게 아셨겠어.’
들켰을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진실을 알고 나니 불안을 지울 수가 없었다.
“네? 글쎄, 요. 전하께서 왜 부르시는지까진 말씀해 주지 않으셨습니다.”
하녀장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평소와 달리 불안해하는 세이아의 모습에 레아는 하녀장과 하녀들이 이상함을 눈치챌까 세이아의 곁으로 다가갔다.
움찔, 세이아가 뒤로 물러나려 했지만 레아가 먼저 팔을 잡았다.
레아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세이아에게 말했다.
“대공녀님, 대공 전하께서 대공녀님이 몸이 안 좋다는 것을 듣고 걱정되셔서 부르신 게 아닐까요? 대공 전하께선 대공녀님을 극진히 아끼시잖아요.”
레아는 세이아의 떨리는 눈동자를 마주하며 낮게 속삭였다.
“불안해하지 말렴.”
레아의 작은 목소리는 세이아만이 들을 수 있었다. 세이아는 레아의 갈색 눈동자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조금의 흔들림도 없는 눈빛은 절대 들키지 않을 거란 확신이 있어 보였다.
자신을 가짜로 만든 레아가 너무도 싫었지만 신기하게도 레아의 눈빛을 보자 세이아의 불안이 조금씩 가라앉았다.
“……지금 바로 갈게.”
“네, 대공녀님.”
세이아는 미소 짓는 레아와 함께 방을 나갔다.
똑똑-.
“전하, 대공녀님 오셨습니다.”
“들어와.”
집무실의 문이 열리고 세이아가 먼저 집무실로 들어섰다.
그는 이 순간만큼은 세이아가 아닌 뒤를 따르는 레아를 먼저 바라보았다.
채찍질의 후유증이 꽤 큰 듯 레아는 몸을 움직이는 게 불편해 보였다. 한 걸음 한 걸음, 어색한 발걸음을 내디딘 레아는 양털 카펫 위로 멈춰 섰다.
레아의 발을 힐긋 바라보던 대공은 천천히 시선을 들었다.
“아버지.”
“대공 전하를 뵙니다.”
세이아가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하고 레아가 허리를 굽혔다.
“일어나라.”
고개를 든 세이아는 해사한 미소를 지으며 대공의 책상 옆에 서 있는 로운을 바라보았다.
“로운도 있었네.”
“대공녀님을 뵙니다.”
로운은 대공이 있었기에 약식으로 인사를 올렸다.
로운을 보던 세이아는 고개를 돌려 대공을 보았다.
“아버지, 좋은 아침이에요.”
세이아는 늘 그랬듯 대공을 향해 한 걸음 다가갔다.
자신이 다가가면 대공은 책상에서 일어났고 함께 소파로 가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하지만 세이아가 다가가도 대공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래, 좋은 아침이구나. 몸이 안 좋다 들었는데 이젠 괜찮은 것이냐.”
“……네, 괜찮아요.”
세이아는 당황을 감추며 미소를 지었다.
“괜찮다니 다행이구나. 나중에 혹시라도 안 좋으면 바로 의원을 부르렴.”
“네, 아버지.”
“세이아, 널 부른 것은 의식과 관련해 해 줄 말이 있어서란다.”
“의식이라면…… 정령의 의식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그래, 맞다.”
정령의 이야기가 나오자 밝기만 했던 세이아의 얼굴이 멈칫했다.
“……의식은 갑자기 왜요?”
“네가 정령의 힘을 의식이 있기도 전에 발현했지 않느냐. 그땐 여러 가지 일들이 겹쳐 내가 신경을 쓰지 못했지만 의식이 있기도 전에 힘이 발현한 것은 아주 대단한 일이란다. 그래서 너의 의식을 앞당기기로 했단다.”
“앞당긴다고요?”
세이아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집무실을 크게 울리는 목소리에 대공의 눈썹이 살짝 위로 올라갔다.
“아…… 갑작스런 소식이라 놀라서 저도 모르게. 죄송해요.”
세이아는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괜찮단다. 놀랄 일이긴 하지. 이때까지 의식을 이렇게 빨리 치른 황족은 없었으니까. 그만큼 네 힘이 일찍 발현된 것은 아주 큰일이란다.”
대공은 기쁜 일이라는 듯 옅은 미소를 지으며 시선을 살짝 돌렸다.
세이아가 아닌 고개를 숙이고 있는 레아에게로.
고개를 숙이고 있어 표정을 볼 순 없었지만 움츠린 어깨는 긴장한 듯 굳어 있었다.
“의식이…… 얼마나 앞당겨진 건가요, 아버지?”
대공의 시선이 다시 세이아를 향했다.
“의식은 한 달 뒤에 치러질 것이다.”
“……한 달 뒤요?”
“그래. 한 달 뒤라 해도 걱정할 거 없단다. 어차피 준비는 황실과 내가 할 것이고 넌 그저 늘 지내던 대로 지내면 된단다. 무서울 거 없는 의식이니 긴장하지 말거라.”
“그래도…….”
“세이아, 정령의 힘이 이미 너에게 있으니 의식은 아주 편안할 것이다.”
세이아는 부드럽지만 단호한 대공의 말에 무어라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자신의 입으로 이미 황궁에서 정령의 힘이 발현됐다 말했으니 이제 와 의식을 피할 수도 없는 것이다.
세이아는 자신을 바라보는 대공의 금안이 오늘따라 숨이 막히게 느껴졌다.
-3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