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 * *
“으음…….”
디아나는 몽롱한 정신에 느리게 눈을 깜박였다.
아주 깊은 잠을 잔 듯, 시야가 멍한 기분이었다.
“아가씨, 아가씨. 제 말 들리세요?”
익숙한 목소리에 침대의 레이스 캐노피를 올려다보던 디아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피, 비…….”
“흡…… 아가씨.”
갈라진 목소리로 작게 피비를 부르자 피비의 눈가가 바르르 떨리며 눈물이 차올랐다.
울지 말라고 말하려던 디아나는 피비의 뒤로 다가온 남자의 모습에 눈을 크게 떴다.
“……에드윈?”
“네, 아가씨. 접니다.”
에드윈은 눈가가 붉어지진 않았지만 피비만큼이나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에드윈이…… 여긴…… 왜…….”
디아나가 멍한 얼굴로 중얼거리자 에드윈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아가씨, 의식을 잃기 전이 기억나지 않으십니까?”
“의식을…… 잃기 전?”
에드윈의 녹빛 눈동자를 가만히 바라보던 디아나는 천천히 떠오르는 기억에 눈을 찡그렸다.
세이아와의 어색한 티타임, 그리고 고양이…… 무기를 든 하인들과 고양이의 공격, 그리고 의식을 완전히 잃기 직전 그녀가 보았던 차가운 황금안.
기억의 끝, 마주쳤던 차가운 금안과 자신을 외면했던 대공의 무감한 얼굴이 떠오르자 디아나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아가씨? 머리 아프신가요? 아님 몸이 어디 아프신 거예요?”
“아냐, 그런 거 아냐.”
걱정을 넘어 불안해 보이는 피비의 얼굴에 디아나는 고개를 저었다.
“음, 그보다 피비…… 나 물 마시고 싶어.”
“네, 바로 드릴게요.”
디아나는 일단 일어나야겠다고 생각하며 몸에 힘을 주었다. 손으로 침대를 짚고 상체를 일으키려 했지만 팔에 힘이 하나도 들어가지 않았다.
끙, 소리를 내자 에드윈의 목소리와 손이 동시에 디아나에게 닿았다.
“실례하겠습니다, 아가씨.”
에드윈은 디아나의 등을 침대 헤드에 편하게 기대게 해 주었다.
“고마워, 에드윈.”
“여기 물이에요, 아가씨. 아, 힘이 없으시니 제가 먹여 드릴게요.”
그 정도는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왜인지 몸에 힘이 없어 피비의 도움을 받아 물을 마셨다.
그러고 보니…… 제일 처음 의식을 잃기 직전에 몸에서 힘이 전부 빠져나가는 듯한 느낌을 받았었는데.
디아나는 그때를 자세히 생각하다 그곳에 있었던 한 사람을 떠올렸다.
레아.
친모였지만 엄마라 부르고 싶지도 않은 사람이었다.
분명 오두막에 갇혀 있다고 했는데 어떻게 거기에 나타날 수 있었던 거지? 아니 그보다…… 고양이의 공격을 받기 전이었는데 어떻게…… 됐지?
디아나는 몰골이 소름 끼치게 무서웠던 레아의 모습이 떠올라 몸을 부르르 떨었다.
“아가씨, 많이 추우세요? 몸이 아직 회복이 안 돼서…… 아니, 그보다 일단 의원님을 모셔올게요.”
“아냐, 그런 게…… 아니라…… 에드윈.”
“네, 말씀하십시오, 아가씨.”
“레아, 그러니까…… 내…… 엄마는 어떻게 됐어? 그곳에 갑자기 나타났었는데…… 고양이의 공격을 받기 직전에 내가 갑자기 의식을 잃어서…… 그러니까…….”
디아나는 사람이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본능적인 두려움과 한편으론 레아가 다시 자신을 찾아올 것만 같은 공포심에 횡설수설했다.
에드윈은 떨리는 디아나의 작은 손을 부드럽게 잡았다.
“아가씨, 괜찮습니다. 괜찮아요, 그분은 절대 아가씨를 해할 수 없어요. 다시는 아가씨의 곁으로 오지 못할 것입니다. 예전과 달리 아가씨의 곁엔 피비도, 저도 그리고 대공 전하가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엄마가 무사하긴 한 거구나…….”
디아나는 사람이 죽지 않았다는 사실에 기뻐해야 할지 레아가 무사하다는 사실에 절망해야 할지 혼란스런 기분이 들었다.
“그렇지만 예전처럼 그분에게 돌아가시지 않을 테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대공 전하께서 절대 그러지 않으실 테니까요.”
“……대공 전하…… “
에드윈의 녹빛 눈동자는 확신으로 가득 차 있었지만 디아나의 갈색 눈동자는 차갑게 굳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디아나 역시 대공을 믿었다.
한 번도 친부의 존재를 느껴 보지 못했지만 보호자라 말해 준 그에게 처음으로 부모의 애정이란 게 있지 않을까 기대를 품었다.
하지만 그날, 대공이 디아나를 외면한 그 순간 대공을 향한 기대심과 애정이 헛된 욕심일 뿐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온몸이 부서지듯 아픈 순간, 곧 죽을 거 같은 두려움을 느낀 그때 대공은 그녀의 간절한 눈빛을 못 본 척 외면했으니까.
세이아처럼 품에 안아 주는 것까진 바라지도 않았다. 그저 손을 내밀어만 줬더라도…….
“아가씨?”
울컥하는 기분에 디아나가 에드윈의 시선을 피하던 때 방문이 벌컥 열렸다.
“대공 전하를 뵙니다.”
“대공 전하를 뵙니다.”
갑자기 열린 문에 놀란 에드윈과 피비가 차례로 대공에게 예를 갖추었다.
“……일어나.”
대공의 무감한 목소리가 울렸다.
무슨 큰일이 생긴 듯 다급히 방문을 연 사람치곤 고요한 모습이었다.
대공은 특유의 무감정한 얼굴로 침대로 향했으나, 그의 걸음은 평소와 달리 느렸다.
디아나가 깨어났다는 소식에 방까지 걸음을 서둘렀던 것과 달리 방에 들어서자마자 쓰러졌던 디아나를 외면했던 순간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내가 외면한 것을 기억하고 있을까.’
그 장면이 자꾸만 떠오르며 그의 마음을 무겁게 했다.
침대 맡에서 멈춰 선 그는 디아나와 시선이 마주쳤다.
하지만 그날과 달리 시선을 먼저 외면한 것은 대공이 아닌 디아나였다. 디아나는 시선을 낮추며 고개를 숙였다.
“대공 전하.”
예를 갖추려 몸을 움직이려 하자 디아나의 머리 위로 대공의 목소리가 울렸다.
“됐다. 편히 있거라.”
“네, 감사합니다.”
“……몸은 어떻느냐, 아픈 곳은 없느냐.”
“네.”
디아나는 짧게 답하며 계속 시선을 낮추고 있었다.
예전이었다면 걱정이 느껴지는 목소리에 대공을 바라보며 괜찮다고 어색한 미소라도 지었겠지만 지금은 대공을 보고 싶지 않았다.
자신을 외면하고 세이아를 보듬은 것이 당연한 일이라 생각하면서도 디아나는 상처를 받았다.
바보처럼 자신의 부모에게 또 헛된 기대를 품었으니까.
‘대공은 애초에 날 자식으로 인정하지도 않았는데, 보호자란 말에 바보같이…… 아버지가 있다고 생각했어.’
그냥 저택에 들이고 방치해 두지. 아무것도 해 주지 않고 관심을 보이지도 않았다면 헛된 기대 같은 건 품지도 않았을 텐데.
희망을 품게 만들었으면서 자신을 매정하게 외면한 대공이 원망스러웠다.
디아나가 울컥하는 감정을 숨기려 시선을 더욱 아래로 내렸다.
“……머리를 다쳤는데 어지럽거나 하진 않느냐.”
“네.”
줄곧 시선을 내리고 있는 디아나를 바라보던 대공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디아나의 행동이 평소와 달라졌기 때문이다.
그가 묻는 물음에 양순히 대답을 하고 있긴 했지만 그를 바라보지 않고 단답으로 떨어지는 목소리는 싸늘하기만 했다.
그를 어려워하고 눈치를 많이 보긴 했지만 이렇게 외면한 적은 없었다.
꼭 화가 난 듯한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를 쳐다도 보지 않는 디아나의 모습은 아리엘이 화가 났을 때 했던 행동과 비슷했다.
아리엘도 화가 나면 항상 그를 눈앞에 두고도 무시했었다.
차라리 화를 내고 소리를 지르는 게 백 번 낫지, 고요히 사람을 무시하는 건 정말이지 애가 탔었다.
그리고 지금 디아나의 모습에 대공은 초조함을 느꼈다.
디아나가 화가 난 것에 애가 타는 듯한 스스로의 기분에 대공은 미간을 좁혔다.
‘내가 디아나에게 무슨 애정을 그리 가지고 있다고…… 이런 기분이 들지?’
“전하, 의원이 도착했습니다.”
스스로의 감정을 이해할 수 없었는데 잘되었다고 생각하며 대공은 침대에서 한 걸음 물러났다.
“대공 전하를 뵙니다.”
“인사는 됐으니, 디아나부터 살피거라.”
“네.”
침대 가까이에 있는 작은 의자에 의원이 앉자 줄곧 아래를 바라보고 있던 디아나가 시선을 들었다.
그를 외면하던 디아나가 다른 사람을 편히 보자 대공의 금안이 살짝 흔들렸으나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가씨, 지금 제일 불편하신 곳이 어디신가요?”
“음…… 몸에 힘이 잘 들어가지 않아요.”
“아직도 그러시군요. 잠시 몸을 살피겠습니다.”
디아나의 몸을 살핀 의원이 흠, 하는 신음과 함께 눈을 찡그리자 대공이 바로 물었다.
“왜 그러지? 몸이 더 안 좋아진 건가?”
“크게 몸이 안 좋으신 것은 아닙니다만…… 생각보다 회복이 느리신 듯합니다.”
“정말 다른 이상은 없는 것인가?”
“네, 전하. 일단 몸의 기운을 돌게 할 약을 지어 올리겠습니다. 약을 드시면 빠르게 좋아지실 겁니다.”
“수도로 떠나는 날이 사흘 뒤인데, 그때까지 디아나의 몸이 회복될 수 있겠나? 무리라면 일정을 뒤로 미룰 것이다.”
“그때…….”
“전 괜찮아요.”
의원이 답하기도 전에 디아나가 말했다.
대공과 디아나의 시선이 마주쳤다.
딱딱하게 굳어 있는 디아나의 얼굴에 대공의 눈썹이 살짝 치켜세워졌다.
“괜히 저 때문에 민폐 끼치고 싶지 않아요.”
“민폐가 아니다.”
“네, 그리 말씀해 주셔서 감사하지만 전 괜찮아요. 데려가 주시기만 한다면 신경 쓰이지 않게 조심하겠습니다.”
디아나는 그 말을 끝으로 시선을 돌렸다. 보이지 않는 선이 대공과 디아나의 사이에 쫙 그어진 기분이었다.
원래 디아나는 아이답지 않게 정중히 말을 하긴 했지만 이렇게까지 냉정하진 않았었다.
미묘하게 달라진 디아나의 모습에 대공의 가슴 한구석이 무거워졌다.
가라앉은 분위기에 눈치를 보던 의원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전하, 사흘 뒤 출발이시라면 크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몸에 큰 이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약을 드시면 바로 좋아지실 테니까요.”
“그렇군. 그렇다면 좋은 약재를 아끼지 말고 쓰도록 해라. 혹 약재가 모자라다면 집사에게 말해라.”
“네, 전하.”
의원은 이만 약을 지으러 가겠다며 물러갔다.
의원이 나가자 대공은 다시 시선을 내린 디아나를 바라보았다.
계속 자신을 외면하고 있는 것이 불편하고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무슨 이야기를 어떻게 꺼내야 할지 떠오르지 않았다.
그날 널 외면해 미안하다, 그리 말이라도 해야 하는 건가. 아니, 그게 미안해야 하는 일인가. 디아나보다 세이아를 먼저 챙기는 건 당연한 것인데.
머릿속에서 두 개의 자아가 뒤엉키는 기분이었다.
눈을 찡그린 그때, 에드윈이 대공의 뒤로 다가왔다. 그가 몸을 비스듬히 돌리자 에드윈이 디아나에게 들리지 않을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전하, 디아나 아가씨께서 친모에 대해 불안해하셨습니다.”
레아.
‘그러고 보니 현장에서 디아나와 마주쳤겠군.’
좋지 않은 상황들이 연속해서 벌어지느라 디아나와 레아가 만난 거까진 생각하지 못했었다.
학대했던 친모와 그것도 위급한 상황에서 마주쳤으니 충격이 컸을 것이다. 큰 이상이 없는데도 회복이 더딘 것이 충격을 받아서인가.
대공은 디아나를 나직이 불렀다.
“디아나.”
“네.”
“혹 레아 때문에 불안해하고 있다면 걱정하지 말거라. 널 그 여자에게 돌려보내는 일은 없을 테니까. 그리고 그 여잔…….”
곧 없어질 것이다.
대공은 뒤에 이어질 뻔한 말을 삼켰다. 학대를 받아 좋은 기억은 없겠지만 그래도 어린아이 앞에서 할 말은 아닌 듯했다.
대공은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 그를 보지 않는 디아나에게 말을 이었다.
“……레아의 일은 걱정 마라.”
“……네, 감사합니다.”
디아나는 살짝 묵례를 하곤 입을 다물었다.
‘이제 그만 가 주셨으면 좋겠어.’
디아나는 지금은 대공과 함께 있고 싶지 않았다. 그의 걱정과 배려는 자신의 상처를 더 건드릴 뿐이었으니까.
몸이 좋지 않아 쉬고 싶다고 말하려던 순간 대공을 찾는 목소리가 들렸다.
“전하, 로운입니다.”
“무슨 일이지?”
“몬스터 치료사가 도착했습니다.”
“알겠다.”
수도에 있는 치료사에게 일찍이 전갈을 보냈기에 미리 북방 근처로 와 있던 치료사가 문이 열리자마자 도착한 듯했다.
유네스의 상태는 그가 함께 보아야 했기에 대공은 그만 나가 보려 했다. 디아나가 그를 붙잡지 않았다면.
“저…… 전하.”
“할 말이 있는 것이냐.”
몬스터 치료사.
그 말을 들은 순간 디아나는 커다란 고양이가 떠올랐다.
고양이가 맞나 싶을 정도로 몸집이 크고, 위험하다는 몬스터처럼 공격성을 보였던 푸른 눈동자의 야옹이.
야옹이는 무사한 걸까. 대공녀를 공격했단 벌로 죽은 게 아닐까.
디아나는 고개를 들어 대공을 바라보았다.
“그…… 거기에 있던 큰 고양이는 어떻게 되었나요? 무사한가요?”
대공은 디아나의 떨리는 눈을 보다 문득 과거의 한 장면이 스쳐 지나갔다.
매서운 겨울바람이 불었던 밤, 초라한 몰골로 유네스를 쓰다듬던 디아나의 모습이었다.
‘그러고 보니, 유네스가 디아나를 따랐었지.’
하지만 디아나는 유네스의 공격을 받아 부상을 당했다.
“유네스의 공격을 받았는데도 그 아이가 무사한지 걱정하는 것이냐.”
“유네스…… 고양이의 이름이 유네스인가요?”
“그래. 그리고 유네스는 고양이가 아니다. 상급 몬스터이지. 널 공격해 이리 만든 유네스가 두렵지 않나?”
푸른 눈을 번뜩이며 디아나를 공격했던 그 순간은 두려웠지만 유네스가 자신을 지키려 했던 순간도 기억하고 있었다.
“두렵지 않아요. 유…… 네스는 착한 고, 아니, 몬스터예요. 사람들이 갑자기 몰려와 공격하려고 해서 유네스도 공격한 거지, 절대 먼저 공격하려 하진 않았어요.”
이렇게 크게 다칠 정도로 공격을 받았음에도 유네스를 옹호하는 디아나의 모습을 보니 기분이 묘해졌다.
혹시라도 유네스가 올까 두려움에 떨고, 유네스를 물리쳤다고 당당히 말하던 세이아와는 상반되는 모습이었기 때문에.
대공은 잠시 디아나를 말없이 응시하다 손을 내밀었다.
“그럼 나와 함께 유네스를 보러 가겠느냐.”
함께?
디아나의 갈색 눈동자에 갈등이 스쳤다.
유네스를 보러 가고 싶었지만 대공과 함께는 불편했기에.
하지만 걱정돼.
디아나는 자신을 바라보며 골골, 기분 좋은 울음소리를 내며 따뜻한 온기를 주었던 유네스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 온기가 차갑게 식지 않길 바랐다.
디아나는 대공을 향한 불편함을 잠시 접어 두기로 했다. 디아나는 대공의 손을 조심스레 잡았다.
“네, 유네스가 보고 싶어요.”
대공은 디아나의 손을 꼭 잡으며 한 걸음 다가갔다.
“걷는 것은 무리일 테니, 안고 가야겠군.”
대공은 디아나를 조심스럽게 안아 들었다. 그리고 이런 호의가 거북한 듯한 디아나의 불편한 얼굴을 마주하게 됐다.
“불편해도 잠시만 참거라.”
“네.”
짧은 대답과 함께 대공에게서 시선을 돌리는 디아나를 복잡한 눈으로 보던 대공은 이내 걸음을 옮겼다.
‘이곳에…… 이런 장소가 있었구나.’
대공의 품에 안긴 디아나는 너른 연무장을 신기한 눈으로 둘러보았다.
높이 솟아오른 나무들과 수풀이 둥글게 보호막을 친 연무장은 아는 사람이 아니라면 찾을 수 없을 만큼 비밀스러웠다.
빨래터 뒤쪽의 숲을 여러 번 올랐지만 연무장에 온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으니 말이다.
대공은 연무장을 둘러보는 디아나의 시선을 느꼈다.
대공의 후계자들은 항상 이 비밀스런 연무장을 사용했었다.
그들은 평범한 검사들과 달리 정령의 힘을 함께 사용했기 때문이다.
의식을 치른다 해도 정령의 힘을 바로 능숙하게 사용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상당한 연습이 필요했다.
하나 그 힘이 강력해 자칫 다른 사람이 다칠 수 있어 이런 비밀 연무장을 사용하는 것이다.
디아나의 반짝이는 눈동자에 연무장에 대해 설명을 해 주려던 대공은 흠칫하며 입술을 다물었다.
대공의 후계자도, 대공가의 일원도 아닌 아이에게 비밀 연무장을 알려 줄 필요는 없었다.
디아나가 물었다면 설명을 해 줄 수도 있었겠지만 디아나는 이곳까지 오면서 한 번도 대공을 바라보지도 무언가를 묻지도 않았다.
“전하.”
앞서가던 로운이 뒤를 돌아보자 대공은 디아나를 고쳐 안고 유네스가 있는 무기 창고로 향했다.
끼익-.
나무 문이 열리는 소리가 울리자 유네스를 살피고 있던 백발의 남자가 고개를 돌렸다.
“앗, 대공 전하를 뵙니다.”
백발의 남자는 이마가 무릎에 닿을 듯 대공에게 몸을 숙였다.
“일어나라.”
“감사합니다, 전하.”
“그대가 제국에 있는 몬스터 치료사들 중 가장 실력이 좋다 들었다. 이름이…… 오르웰이라 했던가.”
“네, 전하. 소인의 이름을 기억해 주시다니 영광입니다.”
크릉-.
오르웰이 감격스럽다는 듯 말한 순간 디아나와 유네스의 짙푸른 눈동자가 마주쳤다.
디아나에게 반응하듯 유네스의 몸이 거칠게 꿈틀거리자 목에 채워진 금빛 구속구에서 빛이 터졌다.
“컁-!”
“야옹아!”
파지직, 소름 돋는 소리에 이어 유네스가 힘겨운 울음소리를 내자 놀란 디아나가 소리쳤다.
짙푸른 동공이 좁아졌다.
고통스러운 듯한 유네스의 모습에 디아나의 얼굴도 일그러졌다.
닿을 수도 없었지만 디아나가 유네스를 향해 손을 뻗은 그때 대공의 목소리가 울렸다.
“유네스에게 가 보고 싶은 것이냐.”
“……네, 그래도 될까요?”
일련의 상황을 묵묵히 지켜보던 대공은 안고 있던 디아나를 조심스럽게 내렸다.
“여기까지 왔는데…… 안 될 것은 없겠지. 한데 혼자 걸을 수 있겠느냐.”
“네.”
굳은 얼굴로 대답했지만 다리에 힘을 주자마자 몸이 말을 듣지 않고 비틀거렸다.
디아나를 잡아 준 대공이 혀를 차며 작은 손을 꼭 잡았다.
“나와 함께 가는 것이 좋겠군.”
“……감사합니다.”
디아나는 천천히 유네스에게로 다가갔다.
유네스의 코앞에서 멈춘 디아나는 자신을 바라보는 짙푸른 눈동자를 응시했다.
그날, 사람들을 공격할 때 보였던 세모꼴의 눈동자가 아닌 디아나의 손에 얼굴을 비비던 순한 눈빛이었다.
“야…… 아니…… 유네스.”
디아나가 제대로 된 이름을 부르자 끼잉- 유네스가 답을 하듯 미약한 울음소리를 내며 머리를 들이밀었다.
디아나는 유네스의 콧잔등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오호, 혹시 이 표우가 대공녀님의 표우이십니까?”
오르웰이 디아나에게 다가와 물었다.
대공녀? 표우?
표우가 무엇인지 몰랐지만 그게 무엇이든 ‘자신의 것’이 아님은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보다 앞의 문제가 더 중요했다.
디아나는 오르웰이 자신을 대공녀로 오해하고 있는 것을 알고 고개를 저었다.
“전 대공녀가 아니에요. 그리고 유네스 역시…… 제 표…… 우가 아니에요.
“네?”
오르웰의 얼굴이 당황으로 물들었다. 대공에게 안겨 들어온 것을 봤는데 대공녀가 아니라니…….
오르웰은 눈을 도르륵 굴리며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몬스터와 동물들을 치료하며 귀족들을 상대해 본 경험이 많은 오르웰은 묘한 분위기를 읽고 하하, 웃음을 지었다.
“하하, 죄송합니다. 이거 제가 오해를 했습니다, 아가씨. 제가 도착했을 때까지만 해도 표우가 상당히 흥분한 상태였는데 아가씨를 보자마자 흥분이 가라앉아 물은 것이었답니다. 그렇다면 혹 대공 전하의 표우이신가요?”
“아니다. 표우의 주인은…… 죽었다. 주인을 잃고 유네스의 상태가 더 안 좋아졌지.”
“그랬군요…….”
“다른 것은 알려 하지 말고 유네스의 상태만 치료해라.”
“네, 알겠습니다, 전하. 아가씨, 잠시만 옆으로 나와 주시겠습니까?”
디아나는 낑낑 소리를 내는 유네스에게 괜찮다 말해 주곤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오르웰은 아까 살폈던 유네스의 부상과 전체적인 몸 상태를 빠르게 훑었다.
오르웰이 움직이는 소리와 간간이 들리는 유네스의 울음소리만이 무기 창고를 울렸다.
마침내 진찰을 끝낸 듯 오르웰이 고개를 돌렸다.
“유네스의 상태는 어떻지?”
“그것이…….”
오르웰은 바로 대답하지 못하며 말끝을 흐렸다. 그는 힐끔 디아나를 쳐다보았다.
어린 디아나에게 말하기 난감하단 눈빛이었다.
“전 괜찮아요.”
디아나는 혹시나 대공이 나가 있으라고 할까 다급히 외쳤다.
대공은 잠시 디아나를 보다 오르웰에게 말했다.
“괜찮으니, 말해라.”
“음…… 그것이 표우의 몸 상태가 너무도 안 좋습니다. 치료를 한다 해도 제 명대로 살 것이란 장담을 해 드릴 수 없을 정도입니다.”
“……이번에 다친 것 때문인가?”
“이번 부상 때문이라기보다 주인을 잃으며 표우의 심장 부근의 마력 자체가 무너졌습니다. 아마 그때부터 쭉 무너진 마력이 돌아다니며 표우의 생명력을 갉아먹고 있었을 것입니다.”
“치료법은 전혀 없나?”
“일단…… 표우 스스로가 살고자 하는 의지가 생겨야 합니다. 보통 주인이 먼저 죽은 경우엔 주인들의 자식이나 배우자를 새로운 주인으로 인식하는 경우가 많습니다만…… 유네스의 경우엔 현재 스스로가 새로운 주인을 받아들이지 못한 듯합니다.”
“…….”
유네스는 치료사의 말을 다 알아듣는 것처럼 눈을 지그시 감았다.
모든 것을 체념한 듯한 유네스의 모습에 대공의 마음이 무거워졌다.
아리엘이 자식처럼 아꼈던 유네스를 이리 만든 것은 자신이나 다름없으니까.
“전하, 일단 지금 급한 것은 유네스의 마나를 진정시키는 것입니다. 강력한 마법 포션을 먹여 유네스의 몸집을 3분의 1로 줄일 것입니다. 그리되면 원래 마나의 움직임도 줄어 시간을 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오르웰은 갑자기 말을 멈추었다. 그의 머릿속에 치료법이라 할 수 있는 방법이 하나 떠오르긴 했으나 이걸 말해도 되는 것일지 감이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금 가장 좋은 치료법은 유네스에게 새로운 주인이 생기는 것이다.
그리고 방금 그가 본 것이 맞는다면 유네스의 새로운 주인으로는 눈앞의 작은 꼬마 아가씨가 가장 적합해 보였다.
이미 표우도 주인이라 인식을 한 듯 행동했고 말이다.
하지만 대공이 인정하지 않았다는 사생아 아가씨에게 귀하디귀한 표우를 주라 말해도 되는 것인가.
“그리고?”
오르웰의 침묵을 기다리던 대공의 눈썹이 꿈틀했다.
“……그…… 유네스가 새로운 주인을 인식할 수 있도록…… 호감을 보이는 아가씨께서 돌보신다면…… 아마 스스로 살려는 의지가 생기지 않을까 생각되옵니다.”
말을 한다는 것이 어찌 이리 힘든 일인지. 오르웰은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았다.
대공은 디아나를 내려다보았다. 오르웰의 말을 들은 디아나 역시 대공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제게…… 맡겨 주신다면 최선을 다해 돌볼게요.”
“…….”
대공은 선뜻 디아나에게 그리하라 말할 수가 없었다. 유네스는 아리엘의 표우였으니까.
디아나는 표우의 각인과 유네스가 대공비의 표우였다는 것을 모르기에 선한 마음으로 돌보겠다 한 것이겠지만 얽혀 있는 것들이 복잡했다.
거기다 지금이야 유네스의 몸이 안 좋아 디아나의 피 냄새를 맡지 못한다 해도 나중에 레아의 피 냄새를 인식하면 디아나를 공격할 것이다.
그럼 결국 디아나도 상처를 받을 것이다.
“로운.”
“네, 전하.”
“디아나를 방으로 데려가라.”
“……네.”
로운이 다가와 디아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디아나는 눈을 감고 있는 유네스를 바라보곤 로운이 아닌 대공을 보았다.
“전하, 저 정말로 잘 돌볼 수 있어요.”
“네 마음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유네스는 상급 몬스터이고 어린아이가 돌보기엔……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생각해 볼 테니, 이만 방으로 돌아가거라.”
“……네.”
좀 더 유네스의 곁에 있고 싶었지만 대공의 단호한 눈빛에 그럴 수 없었다.
디아나를 안아 든 로운이 무기 창고를 나가고 대공은 눈을 감고 있는 유네스에게 다가갔다.
털을 쓰다듬자 유네스가 눈을 떠 그를 바라보았다.
“오르웰.”
“네.”
“유네스의 후각은 완전히 상실된 건가?”
차라리 완전히 상실된 것이라면 디아나에게 보내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아리엘의 표우를 레아의 딸에게 보내는 것이 기분이 좋진 않았지만 유네스의 남은 생은 유네스가 좋아하는 사람과 편히 보냈으면 하기 때문이다.
“네? 전하,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요?”
대공은 황당하다는 듯한 오르웰에게 시선을 돌렸다.
“유네스의 몸 상태가 최악이라고 하지 않았나? 그리고 유네스는 주인의 혈육의 냄새도 제대로 구별하지 못하고 있다.”
“그럴 리가……. 전하, 잠시 제가 다시 살펴보겠습니다.”
이상하단 얼굴로 오르웰은 유네스를 다시 살폈다. 그리고 이해되지 않는 듯 미간을 좁혔다.
“전하, 송구하오나 유네스의 후각엔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없다고? 하지만 유네스는 주인의 하나뿐인 혈육에게 이빨을 드러냈다.”
“표우는 피 냄새로 각인을 하는 몬스터인데…… 어찌 그런 일이…….”
“정말 후각엔 아무런 문제가 없는 거냐.”
“네, 지금으로선 후각에 이상이 없습니다. 내상이 큰 문제이지요.”
후각에 아무런 이상이 없는데 왜 세이아를 공격하고 디아나를 따르지.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대체 왜 그러는 것이냐고 유네스에게 묻고 싶었지만 유네스는 짙푸른 눈동자로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저…… 전하, 후각의 이상이 없어도…… 나이가 들수록 자연스럽게 후각의 기능을 상실하는 경우가 간혹 있다고 들었습니다.”
“상실한다고?”
“네, 이상이 있는 것은 아니나 나이가 들며 후각의 기능이 퇴화하여 제 역할을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 경우가 흔한가?”
“아니요, 아주 드뭅니다. 하지만 그런 사례들이 몇 번 있었기 때문에 유네스가 정말 주인의 혈육에게 공격성을 드러냈다면 지금으로선 그 이유가 유일할 것입니다.”
“그렇군.”
아주 드물긴 하지만 불가능한 일은 아니라……. 뭔가 개운치 않았지만 그 이유 말곤 다른 해답이 없었다.
“후각이 퇴화하는 것이면 다시 돌아올 일은 없겠군.”
“……네, 그렇습니다.”
끼잉-.
대공은 애처로운 울음소리를 내는 유네스의 털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유네스, 디아나에게 가고 싶으냐.”
낑-.
대답을 하듯 짧은 소리가 울렸다. 짙푸른 눈동자는 아직도 이렇게 선명한데 능력이 퇴화하고 있다니. 모든 것이 그의 잘못 같았다.
“널 이리 만들어 미안하구나.”
죄책감이 짙은 사과를 건넨 대공은 유네스에게서 한 걸음 물러났다.
“오르웰, 포션을 먹이고 치료를 시작해라.”
“네, 전하.”
대공은 자신을 빤히 응시하는 짙푸른 눈동자와 시선을 맞추었다.
“치료가 다 끝나면 널 기다리는 사람에게 보내 주마, 유네스.”
나직이 말한 그는 왜인지 자꾸만 뭔가를 놓친 거 같은 불안함에 약지에 낀 결혼반지를 매만졌다.
* * *
구름 한 점 없는 푸른 하늘 아래, 대공 저택 앞에는 평소와 달리 마차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유네스의 습격으로 침체됐던 대공가에 오랜만에 활기가 도는 모습이었다.
하인들과 하녀들이 분주히 마차에 짐을 싣고 있었다.
“어서, 어서 짐을 실어. 거기 줄 안 풀리게 꽉 묶고!”
하녀장이 큰 목소리로 사용인들을 재촉하는 것을 들으며 저택의 로비에 선 디아나는 눈을 크게 뜨며 감탄을 내뱉었다.
“우와, 마차가 정말 많다. 역시 수도로 가는 건 엄청 큰일인가 봐, 피비!”
한동안 가라앉았던 디아나의 기분이 오늘 확 풀리는 거 같았다. 오늘이 바로 수도로 떠나는 날이었으니까.
디아나는 사건과 관련된 것은 전부 잊고 피비를 반짝이는 눈으로 올려보았다.
“그러게요, 아가씨. 저도 수도는 처음이라 너무 기대되네요.”
피비는 발그레한 얼굴로 웃는 디아나가 사랑스러워 절로 광대가 올라갔다.
거기다 사고 이후 피비가 디아나에게 매달리다시피 해서 잘 챙겨 먹이다 보니 볼살이 포동하게 올라 더욱 예뻤다.
“나도 너무 기대돼. 수도에선 유네스에게도 내게도 좋은 일만 있었으면 좋겠어.”
디아나가 나직이 말하자 대답하듯 안겨 있던 유네스가 낑, 하고 작게 울었다.
“유네스도 기분이 좋은가 봐요.”
“응, 그런가 봐.”
디아나는 품에 쏙 들어오는 작은 유네스를 꼭 끌어안았다.
사흘 전, 대공과 함께 유네스를 보러 갔던 그날 밤, 대공이 작아진 유네스를 디아나에게 데려다주었다.
- 유네스를 앞으로 잘 부탁한다.
잠시 맡는 것이 아니라 평생 함께하라고 했다. 유네스는 이제 디아나의 것이라고 말이다.
평생 함께.
꼭 새로운 가족이 생긴 것 같아 유네스를 안겨 주던 그 순간은 배신감이 들었던 대공에게 진심으로 감사를 느꼈다.
대공가를 떠날 때 혼자가 아니게 해 주었으니까.
그렇게 사흘 동안 디아나는 자신도 아픈 상태였음에도 유네스를 더 각별히 보살피며 보듬었다. 작은 생명을 직접 돌본 것은 처음이었다.
처음엔 너무 작아진 유네스에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몇 번 실수하기도 했지만 곧 디아나는 친동생이 생긴 거처럼 유네스를 챙겼다.
그래서인지 잘 움직이지도 못할 만큼 상태가 안 좋았던 유네스는 사흘 만에 뛰어다닐 수 있을 만큼 빠른 회복을 보였다. 치료사인 오르웰이 놀랄 정도로 말이다.
“유네스, 나랑 오래오래 같이 살아야 해.”
나중에 대공성을 나가서 내가 어른이 되고 나이가 들고 죽을 때까지 쭉.
언젠가는 떠나야 할 피비, 에드윈과 달리 유네스는 디아나의 곁에 쭉 있을 수 있었다. 그 사실이 디아나에겐 너무도 큰 위안이었다.
“그러니 오래 있어 줘.”
피비에게 들리지 않을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자 유네스가 디아나의 손을 핥았다.
할짝-.
미끌한 혓바닥이 간지러워 웃던 디아나는 문득 유네스가 아직 아침을 안 먹은 게 기억났다.
“아, 피비, 육포 하나만 꺼내 줘.”
“네.”
피비는 유네스 덕분에 생긴 허리춤에 달린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말린 육포를 꺼내 디아나에게 내밀자 디아나가 아닌 유네스가 바로 입으로 물었다.
“유네스가 많이 배고팠나 봐요.”
피비는 육포를 빠르게 먹는 유네스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피비는 처음에 유네스가 디아나에게 왔을 땐 대공에게 경악했었다. 아무리 고양이처럼 크기가 작아졌다고 해도 아가씨를 공격한 몬스터를 보내다니. 피비의 이성으론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하루하루 지날수록, 유네스를 보며 행복하게 웃는 디아나의 모습에 피비도 유네스를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그래도 혹시라도 아가씨께 이빨을 드러내며 가만두지 않겠어.’
잠시 경계심 가득한 눈빛으로 유네스를 보던 피비는 디아나와 눈이 마주치자 아닌 척 눈웃음을 지었다.
“그보다 아가씨, 몸이 회복되셔서 다행이에요. 회복이 더디실까 봐 엄청 걱정했었는데. 혹시라도 이동 중에 아프시거나 힘드시면 저한테 꼭 말씀해 주셔야 해요.”
“알았어. 근데 걱정 마. 나 이제 정말 괜찮으니까. 의원도 나 아무 이상 없다고 했잖아.”
어제 머리에 감았던 붕대를 풀며 검진을 했었다. 물론 결과는 당연히 수도에서 뛰어다녀도 괜찮을 만큼 건강하다는 것이었다.
사실 좀 덜 나았어도 디아나는 크게 개의치 않고 수도에 갈 생각이었다. 레아에게 맞고 자라 웬만한 상처에는 익숙했기 때문이다.
물론 그런 말을 하면 피비와 에드윈이 슬퍼할 걸 알기에 말하진 못했지만.
“그래도 수도까지 가는 길은 짧지 않잖아요, 거기다 중간엔 워프 마법진도 타셔야 하고…….”
“괜찮아! 피비, 우리 어서 마차로 가자. 밖에 준비 다 끝난 거 같아.”
디아나는 피비의 걱정이 길어질 것 같아 일부러 손을 잡아끌었다.
디아나는 가까이서 보니 더욱 큰 행렬에 감탄사를 내뱉었다.
“우와.”
마차들은 물론이고 줄줄이 짐이 쌓인 짐마차까지, 이렇게 큰 행렬은 처음 보는 것이라 디아나의 눈이 커졌다.
“우리가 탈 마차는…….”
디아나는 마차들을 보다 막 대공가의 마차에 오르는 세이아를 보고 멈칫했다. 정확히는 세이아의 뒤를 따르는 레아를 보고 말을 멈춘 것이었다.
레아는 세이아의 드레스 자락을 펴주며 살뜰히 챙겨 주고 있었다.
‘예전부터 엄마는 이상하게 세이아를 좋아했었지. 누가 보면 내가 아닌 세이아가 자기 딸인 거처럼.’
피비에게 듣긴 했었다. 세이아가 레아를 계속해서 찾고, 상태가 좋지 않아 레아가 결국 임시로 대공녀의 하녀가 되었다고 말이다.
그 일로 대공이 처음으로 세이아에게 크게 화를 냈다고 했었다.
디아나는 레아가 저택에서 지내게 되었단 말에 두려움을 느꼈었다.
하지만 집사가 찾아와 대공 전하의 말을 전해 주었었다. 절대 레아가 자신의 곁에 오지 못하게 할 것이니, 안심하라고.
대공에 대한 믿음이 부서졌지만 레아를 막을 수 있는 건 대공뿐이기에 그 말을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일부러 레아를 생각하지 않고 지냈었다. 그러다 지금, 두 사람이 함께 있는 것을 보게 된 것이다.
물론 그들은 디아나를 보지 못했지만 말이다.
디아나는 두 사람, 특히 레아가 고개를 움직인 순간 저도 모르게 불안해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수도까지 따라가는 줄은 몰랐는데.
디아나가 레아의 뒷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하던 그때 낮은 음성이 울렸다.
“디아나.”
“……대공 전하를 뵙니다.”
언제 온 것인지 고개를 돌리자 어느새 대공이 서 있었다.
“레아에 대해선 걱정 말거라. 네 곁에 얼씬도 못 하게 할 테니.”
대공은 디아나가 레아를 바라보던 것을 본 것 같았다. 걱정 말라는 듯 무심한 얼굴 속의 금안이 친절했지만 디아나는 시선을 피했다. 대공의 관심은 이제 불편할 뿐이니까.
“……네.”
짧은 대답에 침묵이 흐르고, 디아나를 가만히 보던 대공이 비스듬히 디아나에게로 몸을 돌렸다.
디아나에게 할 말이 있어 보이는 대공의 모습에 피비는 옆으로 물러났다.
디아나는 멀어지는 피비를 바라보았고 대공은 디아나를 내려다보며 시선이 엇갈렸다.
대공은 디아나를 보다 품 안에 있는 유네스에게 시선을 두었다.
“오르웰이 유네스의 회복이 빠르다 하더니 정말 좋아 보이는구나.”
디아나에게 데려다줄 때만 해도 퍼석퍼석했던 푸른 털에 윤기가 흐르고 있었다.
“디아나 네가 잘 돌봐 주었나 보구나.”
“……제 가족이니까요,”
“가족…… 그래, 이제 너의 가족이지.”
문득 아리엘이 떠올랐던 대공은 씁쓸한 눈빛으로 유네스를 보다 시선을 들었다.
디아나는 유네스를 애정 가득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유네스 역시 디아나의 손길이 좋은지 기분 좋은 울음소리를 냈다.
세이아에게 바랐던 모습을 디아나를 통해 보는 것에 기분이 묘해졌지만 이상하게 낯설지는 않았다.
“디아나.”
대공의 부름에 유네스를 보고 있던 디아나의 시선이 그를 향했다.
“네.”
아까와 같은 무감각한 눈빛이었다.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지만 오히려 더 감정을 건드리는 눈빛이었다.
‘차라리 화가 난 듯 내 시선을 피하는 게 더 나겠군.’
대공의 입술이 느리게 움직였다.
“……몸은 이제 완전히 나은 것이냐.”
“네,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어린아이답지 않게 깔끔한 대답이었다. 다시 한번 보이지 않는 선이 그어지는 느낌이었다.
대공이 입술을 달싹인 때 그를 빤히 보고 있던 디아나가 입을 열었다.
“전하, 저도 이만 마차로 가 보겠습니다. 그리고 다시 한번 수도로 데려가 주셔서 감사합니다.”
디아나는 고개를 숙였다. 감사 인사는 진심이었다. 대공이 디아나를 굳이 수도로 데려가야 할 이유는 없으니 말이다.
대공에 대한, 아버지란 존재에 대한 기대심에 잠시 혼란스러웠지만 지금은 안다.
인정하지도 않은 사생아에게 대공이 상당히 많은 호의를 베풀고 있다는 것을.
그러나 대공은 정중히, 처음 보는 사람에게 호의를 받은 듯 고개를 숙이는 디아나의 모습에 눈썹을 구겼다.
“……감사 인사는 필요 없으니 그만 고개를 들어라.”
복잡한 기분 때문인지 말투가 싸늘하게 나왔다.
뭐라 다른 말을 덧붙이려 했지만 그가 입을 열기도 전에 디아나가 먼저 말했다.
“네, 그럼 전 이만 가 보겠습니다, 전하.”
디아나는 왜인지 불안정한 눈빛을 보이는 대공의 금안에 의아함이 들었지만 곧 외면했다.
“피비, 우리도 가자.”
“네? 아, 이렇게 빨리요?”
피비는 당황스런 눈빛으로 대공과 디아나를 보며 머뭇거렸다.
“응, 가자.”
디아나는 대공은 바라보지 않으며 단호히 답했다. 굳이 더 있을 이유가 없었으니까.
“……전하, 그럼 물러가 보겠습니다.”
꿈쩍 않는 디아나의 시선에 피비는 대공에게 인사를 하곤 디아나의 손을 잡았다.
디아나는 자신을 응시하는 대공의 시선을 외면하며 피비와 함께 저택을 나갔다.
집사가 디아나가 타고 갈 마차라고 가리킨 것은 상당히 호화스러운 마차였다.
대공녀가 타는 마차만큼은 아니었지만 사용인들이 타는 평범한 마차보다는 훨씬 좋았다. 딱 봐도 귀족의 마차 같았으니까.
디아나는 푹신한 의자 한쪽에 잠든 유네스를 내려놓고 미소를 그렸다.
“아가씨, 괜찮으세요?”
“응?”
디아나는 유네스를 쓰다듬던 손길을 멈추며 고개를 들었다.
“괜찮냐니? 갑자기 왜?”
“아니, 아까…… 어머니를 갑작스럽게 보셨잖아요. 많이 놀라셨을 텐데 괜찮으신지 걱정되어서요.”
“아, 아까…….”
디아나는 걱정 가득한 피비의 얼굴을 보며 씩 미소를 그렸다.
“괜찮아.”
“아가씨, 혹시라도 수도에서 그분이 괴롭히시거나 대공녀님이 괴롭히시면 바로 절 부르세요. 제가 금방 달려갈게요!”
“응, 바로 말할게.”
“저, 근데 아가씨.”
“응?”
“대공 전하께 혹시 화가 나신…… 건가요?”
“……아니, 내가 어떻게 감히 전하께 화를 내겠어.”
디아나는 차분한 얼굴로 말했지만 피비는 오히려 어색함을 느꼈다.
의식을 막 차렸던 그날 이후로 대공을 대하는 디아나의 모습이 달라졌다.
‘대공 전하께 조금 차가워진 거 같달까…….’
사고가 벌어진 날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그날을 기점으로 묘하게 달라진 디아나의 모습에 피비는 뭐라 말은 못해도 계속 걱정하고 있었다.
대공 전하와 가까워지며 조금씩 아이다워지는 디아나의 모습에 다행이라 생각했는데.
‘무슨 일이 있으셨냐고 물어도 말해 주지 않으시겠지.’
피비는 이 일은 시간을 두자고 생각하며 모른 척 미소를 지었다.
“그럼…… 제가 착각했나 봐요. 아가씨, 수도에 도착하시면 어디부터 가 보고 싶으세요? 제가 아가씨께서 가 볼 만한 몇 군데를 알아봤거든요. 일단 어린 아가씨들이 가장 좋아한다는 인형 가게랑 디저트 가게, 그리고 옷가게들을 봤는데 어디부터 가고 싶으세요?”
“음…… 난 도서관부터 가고 싶어.”
인형을 든 디아나, 디저트를 먹으며 볼을 발그레 붉히는 디아나, 공주님 옷을 입고 있는 디아나를 상상하던 피비의 얼굴이 당황으로 떨렸다.
“네, 물론…… 물론 도서관도 가실 건데, 그 전에…….”
“피비, 난 도서관부터 갈래. 사실 도서관만 가도 시간이 부족할 거 같아. 그러니까 수도에 도착하면 짐 정리하고 바로 도서관을 가자.”
“바로…… 요?”
“응.”
디아나는 떨떠름해하는 피비의 얼굴을 모른 척하며 싱긋 입꼬리를 올렸다.
자신에게 보호자란 존재는 과분한 욕심이었다는 것을 깨달은 이상 스스로 더 배우고 노력해야 한다.
‘나중을 대비해서라도 내가 가지고 있는 이 신비한 힘을 키워야 해.’
디아나는 이번 사고를 겪으며 자신을 지키고 소중한 것을 지킬 힘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레아까지 돌아온 이상 앞으론 여유 부리지 않고 더 노력할 것이다.
디아나가 결심한 순간 마차 밖에서 출발을 알리는 하인의 큰 목소리가 울렸다.
“출발합니다!”
덜컹, 작은 흔들림과 함께 마차가 움직이자 디아나는 진짜 수도로 간다는 것이 실감 나 설렘 가득한 미소를 지었다.
“피비, 드디어 출발이야!”
* * *
뭉게구름이 넘실거리는 푸른 하늘 아래, 테라비타 제국 황성이 금빛으로 번쩍이고 있었다.
태양처럼 빛나는 금발과 황금안.
신의 축복을 받은 듯한 제국의 상징인 금색은 널리 빛날 수 있도록 하늘로 솟은 지붕에도 새겨져 있었다.
저 멀리까지 빛나는 황성의 오전은 언제나 분주했지만 오늘은 조금 다른 소란스러움이 느껴지고 있었다.
“대공 전하께서 10년 만에 수도로 오신다는 게 사실이야?”
“나도 들었어, 오늘이나 내일쯤 도착하신다던데. 이번 검술 대회에 대공가도 참석하기로 했다더라.”
“맞아, 맞아. 행정부에서 일하는 내 동생이 명단에 대공가가 있는 걸 보고 엄청 놀랐었잖아. 전쟁터로 나가 잠적했던 대공이 드디어 수도로 돌아온다고.”
“대공비가 죽고 따라 죽을 각오로 전장으로 나간 거라고 다들 그랬는데, 사실이 아니었나?”
“대공비가 죽었다고 해도 대공녀가 있는데 대공 전하께서 어떻게 쉽게 죽으시겠어.”
“맞아. 하나뿐인 딸이라고 엄청 애지중지한다고 들었어. 혹시라도 대공비의 죽음으로 귀족 사회에서 상처받을까 봐 자랄 때까지 대공성 안에만 두었다잖아.”
“황제 폐하는 물론이고 황후마마와 황자 저하들의 출입까지 막으셨다고 하던데? 아마 검술 대회보단 슬슬 대공녀님을 사교계에 진출시킬 준비를 하러 올라오신 게 아닐까?”
“하긴 곧 있으면 11살이 되시니 더 이상 사교계를 멀리하실 수도 없으실 거야.”
“오랫동안 대공성에서만 갇혀 지냈는데 대공녀가 사교계에 잘 적응할 수 있을까?”
“그런 걱정을 왜 해? 대공녀라는 신분 하나면 이미 사교계의 정점인데.”
“맞아, 지금 제국엔 황후마마 말곤 황녀님도 없잖아.”
“황후마마께서 벌써 대공녀의 선물을 준비하고 계셔. 사교계에 적응을 못 하는 게 문제가 아니라 대공녀와 한 번이라도 말을 섞어 볼 수 있냐가 문제일걸.”
시녀들은 재밌다는 듯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다 누군가 목소리를 낮게 깔았다.
“근데…… 그 사생아는 어찌 됐을까?”
“사생아? 그 대공비의 하녀가 낳았다는 사생아?”
“응. 낳았다는 말은 돌았는데 대공가로 입적됐다는 말도 없고, 죽었는지 살았는지에 대한 말도 없잖아. 죽었으려나?”
“야, 너 어디 가서 사생아 얘기는 꺼내지도 마. 금기어야. 그 애가 죽었든 말든 그 얘긴 금기어라고.”
“알았어.”
“여기엔 우리밖에 없으니 괜찮지만 다른 곳에서 괜히 입 잘못 놀렸다가는 경을 칠 거야.”
분위기가 무겁게 가라앉자 곧 시녀들은 떨떠름한 얼굴로 하나둘 자리를 떠났다.
한창 시녀들이 이야기를 나누었던 황성 정원에 고요함이 내려앉았다.
그리고 그 고요함 속엔 모습을 감춘 채 시녀들의 이야기를 전부 듣고 있던 한 사람이 있었다.
정원 중앙에 있는 커다란 고목의 굵은 나뭇가지 위에 앉아 고요함을 즐기고 있는 검은 머리칼의 소년.
부드러운 봄바람에 흑단 같은 검은 머리칼이 흔들렸다.
미동 없이 눈을 감고 있는 소년의 얼굴은 선이 곱고 수려해 신비로운 한 폭의 그림 같았다.
마침내 찾아온 정적을 즐기고 있던 그때 살랑거리던 봄바람이 갑자기 매서워졌다.
겨울바람 같은 차가움에 고요히 눈을 감고 있던 검은 머리칼의 소년이 눈을 떴다.
그는 반듯한 미간을 살짝 찡그리며 낮게 속삭였다.
“에키온.”
“카이루스, 네가 거기 있을 줄 알았지.”
키득거리는 소리가 나무 밑에서 울렸다.
한참이나 높은 위치였기에 서로의 존재가 보이지 않았지만 카이루스는 에키온이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지 짐작이 갔다.
잠잠하던 바람이 또 한 번 강해지며 카이루스의 등을 툭, 때렸다
“에키온, 어린애들이나 하는 장난이다.”
카이루스는 그의 등을 툭툭 때리는 바람이 자연의 힘이 아닌 것을 알았다. 이것은 황족들만이 쓸 수 있는 정령의 힘이었다.
“그러니까 얼른 내려와. 심심해.”
“하아.”
짧은 한숨을 내쉰 카이루스는 앉아 있던 나뭇가지에서 일어났다. 무감한 표정으로 아찔한 높이를 내려다본 그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뛰어내렸다.
자기 키의 세 배는 될 듯한 높이에서 뛰어내린 카이루스는 안정적으로 착지했다.
손에 묻은 흙을 털며 일어난 카이루스는 대단하다는 듯 박수를 치는 에키온을 바라보았다.
“와, 매번 보는 건데도 대단한 체술이야, 카이.”
“카이루스라 부르시죠, 1황자 저하.”
찬란한 금발에 금을 박은 듯한 황금안. 카이루스를 보며 장난스런 눈웃음을 짓는 사람은 다름 아닌 테라비타 제국의 1황자였다.
에키온은 그의 딱딱한 표정은 익숙하다는 듯 피식 웃으며 카이루스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에이, 뭐 이 정도 장난 가지고 그럴까. 이젠 익숙해질 때도 됐잖아. 기분 풀어.”
에키온은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눈앞에서 꽃잎들이 바람에 따라 움직였다.
꼭 무희가 춤을 추듯 아름다웠지만 카이루스의 검은 눈동자는 그저 무감하기만 했다.
하지만 카이루스는 느낄 수 있었다. 에키온의 상태가 평소보다 상당히 밝다는 것을. 아마 시녀들이 얘기했던 그 이야기들과 관련 있겠지.
카이루스는 어깨에 둘러진 에키온의 팔을 풀며 정원 한편에 마련된 흔들의자에 앉았다.
황자가 서 있는데 먼저 의자에 앉는 것은 궁중 법도에 어긋나는 일이었지만 카이루스는 태어났을 때부터 에키온과 친우인지라 사적인 자리에선 법도를 따지지 않았다.
“시녀들의 이야기를 들으니 오늘이나 내일 도착한다며, 네가 그렇게 보고 싶어 했던 사촌 동생이.”
“역시 너도 들었구나. 하긴 요즘 궁내 시녀들과 시종들이 모였다 하면 작은아버지의 이야기를 하니 아무리 세상사에 관심 없는 너라도 안들을 수가 없겠지.”
에키온은 미소를 지으며 카이루스 옆에 앉았다.
에키온은 손을 또 한 번 튕겼다.
그의 기분을 보여 주듯 꽃잎이 바람을 타고 하늘을 날았다.
“……정령의 힘을 이렇게 쓰는 황족은 아마 너뿐일 거다.”
“뭐 어때, 어차피 나한테 주어진 힘인데 내가 좋은 데 쓰면 그만 아니겠어?”
에키온은 어깨를 으쓱이며 힘을 거두었다. 그러자 하늘에서 꽃잎이 봄바람을 타며 느리게 떨어졌다.
카이루스는 못 말린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네가 이해해. 오늘은 내가 기분이 아주 좋은 날이거든. 너도 알다시피 보고 싶었던 사촌 동생이 수도로 오는 날이니까.”
“내일이 아니라 오늘인가 보네.”
“응. 아까 어머니께서 아버지께 연락을 받으셨어, 오늘 작은아버지가 수도에 도착한다고 말이야. 아마 오늘 저녁쯤엔 작은아버지가 사촌 동생을 데리고 황궁으로 오시겠지.”
기대된다는 듯 에키온의 목소리는 한껏 들떠 있었다.
다른 일이었다면 뭐가 그리 좋냐고 타박했겠지만 이번 일은 그 역시 에키온이 얼마나 고대하던 일인지 잘 알고 있었다.
카이루스는 에키온에게 한 번도 본 적 없는 사촌 동생에 대해 귀가 닳도록 이야기를 들었으니까.
얼마나 예쁘게 컸을지, 에키온의 무뚝뚝한 동생인 레귤러스와 달리 귀엽고 사랑스러울지 기대된다는 이야기들이었다.
“10년 만에 보는 거라고 했나?”
“응. 태어났다는 소식만 들었지, 초상화도 그렇다고 영상이 담기는 마나석을 통해서도 한 번도 본 적이 없어. 그러니 이번이 진짜 처음 보는 거지. 나 너무 기대돼. 마치 내게 처음으로 동생이 생기는 기분이야.”
“너 동생 있잖아. 레귤러스. 귀여운 동생이 멀쩡히 살아 있는데 처음이라니, 레귤러스 서운해한다.”
카이루스의 말에 에키온이 인상을 구겼다.
“레귤러스 걘…… 안 귀여워. 아니 10살밖에 안 된 애가 왜 벌써 사회학 같은 걸 배우냐고.”
“너보다 머리가 좋으니까.”
카이루스는 부정하지 못하고 썩은 표정을 짓는 에키온을 보며 피식 웃었다.
“근데 너 이렇게 나랑 있어도 되는 거야? 오늘 저녁이면 준비해야 할 게 많은 거 아냐?”
“안 그래도 이제 가야 돼. 너한테 온 건 어머니가 저녁 만찬 때 너도 참석하는 게 어떠냐고 물으셔서 온 거야. 너도 올래?”
“아니, 가족이 모이는 만찬에 내가 가면 이상해.”
“가족이나 마찬가지지, 그리고 뭐 너도 오도어 왕국의 왕자인데 참석한다고 해도 이상할 건 없어.”
자신을 가족처럼 챙겨 주는 황후마마와 에키온의 마음은 알지만 이번 만찬은 빠지는 게 좋을 거 같았다.
수도를 들썩이게 만드는 대공가의 부녀에 대해 그는 관심이 없었으니까. 아니, 그는 세상사 자체에 관심이 없었다.
“이번엔 빠질게.”
카이루스의 단호한 거절에 에키온은 더 이상 강요하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 그럼. 난 이만 가야겠다. 준비해야 할 게 많아서. 그럼 내일 보자.”
“그래.”
“아, 카이루스, 나 가고 또 하루 종일 나무에만 있지 말고 여기저기 좀 돌아다녀. 애벌레도 아니고 맨날 나무에 붙어 있냐.”
“……애벌레.”
카이루스의 눈썹이 구겨졌지만 에키온은 이미 정원을 나간 뒤였다.
다시 사방이 고요해지고 카이루스는 흔들의자에 몸을 완전히 기대며 고개를 들었다.
구름이 유유히 흘러가는 것을 가만히 바라보던 그는 공허함이 느껴지는 검은 눈을 느리게 깜박였다.
“……황궁이 꽤 시끄러울 테니 잠시 나가 볼까.”
* * *
황성과 가장 가까운 수도의 베이첸 거리.
고위 귀족들의 저택이 즐비한 베이첸 거리에서도 가장 돋보이는 저택이 있었다.
바로 황성처럼 금빛 지붕을 가진, 다른 저택과는 규모부터가 남다른 테라비타 대공의 저택이었다.
하지만 10년이 되도록 거대한 저택의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주인이 찾지 않는 저택은 이제 어린아이들에겐 괴담의 근원지처럼 불리곤 했다.
한데 오늘, 드디어 10년 만에 저택의 철문이 활짝 열렸다.
베이첸 거리에 들어서는 대공가의 긴 행렬에 귀족들은 체면까지 잊고 각 저택의 창문을 열고 머리를 내밀었다.
검은 매가 수놓아진 깃발이 바람에 펄럭이고, 검은 갑주를 입은 기사들이 행렬을 지켰다.
그리고 가장 선두에 선, 흑마를 탄 남자의 화려한 금발은 아무리 멀리 있는 사람의 시선도 단숨에 사로잡았다.
크로우드 테라비타.
황제의 단 하나뿐인 동생이자, 제국의 검이라 불리는 남자의 귀환이었다.
“서두르지 말고 짐을 하나씩 조심히 내리게!”
하녀장의 목소리가 크게 울리고 짐마차에서 짐을 내리는 사용인들의 움직임이 분주해졌다.
이 모든 광경이 디아나에겐 옅은 실루엣처럼 흩어졌다.
“와…….”
마차에서 내린 디아나는 황금으로 만들어진 저택의 지붕을 보며 깊은 감탄사를 내뱉었다.
‘이렇게 화려한 저택은 처음 봐.’
햇빛을 받아 눈이 부시게 빛나는 저택의 높은 지붕은 마치 하늘의 빛을 머금은 듯했다.
“아가씨.”
넋 놓고 빛을 바라보던 그때, 피비가 나직이 디아나를 불렀다.
고개를 돌리자 피비가 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저희가 드디어 수도에 도착했어요!”
수도…….
북방보다 따스한 바람과 화려한 저택. 5일 동안의 긴 여정 끝에 정말로 수도에 도착한 것이다.
디아나는 처음으로 북방을 벗어난 것에 벅찬 감정을 느끼며 말간 얼굴로 웃음 지었다.
“응, 드디어 도착했어. 그러니 우리 어서 정리하고 도서관에 가자!”
“……도서관이요? 정말 바로 도서관부터 가시게요?”
수도에 도착해 신이 났던 피비의 얼굴이 떨떠름해졌다.
디아나는 피비의 처지는 눈꼬리를 못 본 척 고개를 끄덕였다.
“응, 바로 가고 싶어.”
“아가씨의 학구열은 정말 못 말리겠어요.”
피비는 졌다는 듯 바람 빠진 미소를 지었다.
“일단은 도서관 갔다가…… 어차피 수도에 있을 시간은 많으니까 나중에 피비가 말한 데도 가 보자.”
피비도 수도에 처음 오는 것인데 자신 때문에 가 보고 싶은 곳을 못 가는 것은 마음에 걸렸다.
“정말요? 사실 제가 아가씨를 모시고 꼭 가고 싶은 곳이 있었거든요.”
“……나랑 꼭 가고 싶은 곳……?”
“네!”
디아나는 눈을 반짝이는 피비를 보니 어쩐지 등이 싸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왠지 그곳에 가면 내가 인형이 될 거 같은 기분인데.’
“정말…… 예쁜 옷이 많다고 했어요. 그 옷들을 아가씨가 입으시면 얼마나 예쁠까요.”
피비는 벌써 그곳에 가 있는 듯 몽롱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역시, 인형이 될 예정이었어.’
디아나가 그곳엔 정말 나중에 가야겠다고 생각하던 그때, 하녀장이 다가왔다.
“아가씨, 방으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응.”
디아나는 피비의 손을 잡고 저택으로 향했다.
세이아는 이미 내려서 저택으로 들어갔는지 대공녀의 마차는 문이 열린 채 비어 있었다.
“대공성의 저택과는 많이 다르네요. 그쵸, 아가씨?”
“응, 정말…… 화려하다.”
로비에 들어선 디아나는 외관만큼이나 번쩍이는 내부에 눈을 크게 떴다.
로비의 양쪽으로 줄 서 있는 번쩍이는 갑옷들과 금빛 장식들, 천장에 그려진 그림들이 아름다웠다.
“아가씨가 머무르실 방은 2층에 있습니다.”
“응.”
천장의 그림을 보느라 멈춰 있자 하녀장이 말했다.
고개를 바로 하고 하녀장을 따라 걸음을 옮기던 디아나는 계단 앞에 서 있던 대공과 눈이 마주쳤다.
로운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대공이 몸을 살짝 틀었다.
“디아나.”
“대공 전하를 뵙니다.”
5일간의 일정을 함께 움직였지만 대공과 마주칠 일은 거의 없었다.
디아나가 마차에서 내릴 일은 여관에 도착하거나 일정 중간중간 쉬는 시간이 다였다.
그때 멀리서 기사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대공의 뒷모습을 몇 번 본 게 전부였다.
“긴 일정이었을 텐데 어디 아픈 데는 없느냐.”
“네, 전하.”
디아나는 그리 답하며 시선을 내리깔았다.
원래라면 자신을 걱정해 준 대공에게 감사 인사를 전하거나 안부를 되묻는 것이 예의지만 디아나는 그저 짧은 대답만 했다.
대공과 긴 대화를 나누고픈 마음은 없으니까.
표정 없는 얼굴로 시선을 내리깔고 있자 주변의 시선이 전부 자신에게 쏠리는 것이 느껴졌다.
그 시선들이 불편해질 때쯤 대공의 목소리가 머리 위에서 울렸다.
“……피곤할 테니, 방으로 가서 쉬거라.”
“네, 감사합니다.”
디아나는 미련 없이 피비의 손을 잡고 계단을 올랐다.
대공인지 로운인지 모를 시선이 디아나의 등 뒤를 꽤 오랫동안 바라보는 것을 모른 척하면서.
디아나의 모습이 계단에서 사라지자 대공은 짧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모든 것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로운이 이상하단 얼굴로 입을 열었다.
“전하, 디아나 아가씨께서 조금 달라지신 거 같은데 무슨 일이 있으셨습니까?”
감정 변화가 크게 없던 디아나의 굳은 얼굴은 예전과 비슷했지만 어딘지 말투나 눈빛이 전보다 차가워져 있었다.
이전에도 무표정이긴 했지만 점점 표정이란 게 생겼고, 특히 최근 들어선 대공을 대하는 모습이 많이 유해지고 있었다.
축제 날 밤에만 해도 이런 모습은 아니었는데.
로운은 유네스의 습격 당시 무슨 일이 있었던 건 아닌지, 자기도 모르게 디아나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있었다.
“……내가 외면했었다.”
“네?”
“다친 아이가 날 보았는데 내가 외면했었다. 세이아에게 가야 했으니까.”
대공의 목소리가 무거웠다. 수려한 얼굴은 무감한 듯했지만 오랜 시간 대공의 곁을 지킨 로운은 알 수 있었다. 대공이 지금 죄책감을 느낀다는 것을.
“전하, 설령 디아나 아가씨께서 다치셨다 하더라도 그 상황에서 전하께서 대공녀님을 먼저 챙기시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입니다.”
“알고 있다. 하지만 디아나 역시 어린아이이니 그저 마음이 조금 불편할 뿐이다. 다친 아이를 외면한 것이니까. 별일 아니니 신경 쓸 거 없다.”
“……네, 전하.”
복잡해 보이는 대공의 얼굴을 보니 별일이 아닌 게 아닌 거 같았지만 로운은 더 말하지 않았다.
그동안 몰랐던 대공녀의 실체를 알게 되고 디아나를 알아갈수록 로운도 디아나가 조금씩 다르게 보이고 있었기 때문에.
“로운, 난 세이아가 준비를 마치는 대로 황궁으로 갈 것이다. 그러니 네가 하녀장과 함께 저택을 정리하도록. 집사가 함께 오지 못했으니 하녀장 혼자 전부 하는 것은 무리일 거다.”
“네, 제가 돕겠습니다.”
“그리고 디아나가 편히 외출할 수 있도록 호위 기사는 에드윈…… 에게 맡길 순 없겠군.”
대공은 미간을 좁혔다. 낯을 많이 가리는 디아나의 호위 기사로 친분이 있는 에드윈이 제일 적합했으나 검술 대회 준비로 에드윈은 시간이 나지 않을 터였다.
마땅한 다른 기사가 떠오르지 않던 때 로운이 말했다.
“제가 디아나 아가씨의 호위를 맡겠습니다.”
“네가? 넌 대공가의 기사단장이다. 네가 맡을 업무가 아냐.”
“음…… 단장이긴 하지만 사실 실질적인 기사단의 업무는 부단장이 다 보고 있지 않습니까. 뭐 이때까지 대공 전하의 비공식적인 업무는 다 제가 해 왔는걸요.”
로운이 장난스럽게 말하자 대공의 눈썹이 구겨졌다.
대공의 날카로운 눈빛에 큼, 헛기침과 함께 장난기를 없앤 로운이 차분히 말을 이었다.
“제일 중요한 이유는 에드윈 말고 다른 기사들은 디아나 아가씨를 별로 좋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어차피 대공 전하께서 명한 업무는 따로 사람을 시킬 거니 문제없고 저택 관리는 하녀장이 전반적으로 할 테니 시간이 여유로운 제가 제일 나을 겁니다.”
일리 있는 말이었다.
표면적으로만 본다면 기사단장을 디아나에게 붙이는 것이 말이 안 되나 내부적인 요인들을 살피면 로운이 가장 나았다.
잠시 고민을 하던 대공은 곧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일단 네가 디아나의 호위를 맡도록 해라. 혹시 급한 일이 생긴다면 다른 기사에게 넘기고.”
“네, 전하.”
“나도 이만 만찬 준비를 해야겠군. 오늘은 황궁에서 잘 것이니 기다리지 마라.”
“네.”
대공은 2층 디아나의 방을 힐긋 보곤 옷을 갈아입기 위해 1층의 제 방으로 향했다.
* * *
“역시, 이 옷이 아가씨께 잘 어울릴 줄 알았어요.”
디아나는 자신이 입은 연분홍 드레스를 내려다보았다.
넓게 벌어지는 치마 위엔 프릴이 수놓아져 있었고 어깨엔 앙증맞은 리본이 달려 있었다.
디아나는 제가 입고 있는 옷을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피비, 근데 이 옷은 뭐야? 한 번도 본 적 없는데.”
“그게…… 이건 제가 따로 산 옷이에요.”
“따로 샀다고?”
“네, 물론 아가씨께서 다른 옷은 더 필요하지 않다고 하셨지만 그래도 수도로 오는 건데 이런 예쁜 드레스 하나는 있었으면 해서…… 제 사비로 딱 한 벌만 샀어요.”
“……비싼 거 아냐?”
디아나가 걱정스러워 묻자 피비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제가 모아 놓은 돈이 얼마나 많은데요. 대공가가 귀족가 중에서 하녀들에게 월급을 제일 많이 줘요. 그러니 이 정도는 전혀 무리 없어요.”
사실 몇 달 치 월급이 한 번에 나갔지만 피비는 아무렇지 않다며 미소를 지었다.
오히려 드레스가 디아나에게 너무 잘 어울려 한 벌만 산 것이 아쉬울 정도였으니까.
피비의 미소에 걱정이 한가득이었던 디아나의 얼굴이 조금씩 펴졌다.
디아나는 보들보들한 옷을 만지작거리며 거울을 보았다.
자신의 처지에 옷을 더 사 달라 하는 것이 눈치 보였던 것일 뿐 예쁜 옷이 싫은 것은 아니었다.
디아나는 거울 속의 자신을 보다 피비에게 미소를 지었다.
“피비…… 고마워. 너무 예쁘다. 마음에 들어.”
디아나의 기분이 무척 좋을 때마다 나타나는 특징이 있었다. 바로 하얀 볼이 발그레 붉어지는 것.
피비는 볼을 붉히는 디아나가 너무 귀여워 빈손을 꽉 그러쥐었다.
안 그래도 작은 토끼처럼 귀여운 디아나인데 연분홍 드레스를 입혀 놓으니 정말 인형처럼 예뻐 꽉 끌어안고 싶은 충동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충동을 억누르며 후, 숨을 내뱉은 피비는 디아나의 머리를 손봐주었다.
오늘은 평소와 달리 양 갈래로 머리를 나누어 땋았다. 드레스와 비슷한 색인 분홍색 리본으로 머리를 묶었다.
“……아가씨, 정말 어쩜 이렇게 예쁘실 수 있죠? 제가 돈만 많았으면 영상석을 사서 이 모습을 영원히 남겨 두었을 텐데……. 진짜 너무 사랑스러우세요.”
“……피비가 잘 꾸며 줘서 그런 거야.”
“아니에요, 아가씨는 원래 예뻐요.”
피비는 드레스의 밑단을 정리하며 단호히 말했다. 피비의 진지한 얼굴에 디아나의 볼이 부끄러움으로 더욱 붉어졌다.
디아나가 수줍어하는 모습에 피비의 광대가 위로 치솟았다.
좀 더 놀리고 싶었지만 그러면 디아나가 곤란해할 거 같아 피비는 마음을 다스리며 몸을 일으켰다.
“아가씨, 그럼 전 하녀장님께 아가씨 외출하실 거라고 말씀드리고 올게요.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응.”
“앗, 깜짝이야.”
문을 연 피비는 문 바로 앞에 선 남자에 놀라 소리를 질렀다.
피비의 놀란 목소리에 저도 모르게 움찔한 디아나는 문으로 고개를 돌렸다.
“피비, 왜 그래? ……로운 경.”
디아나는 문 앞에 서 있는 붉은 머리의 남자를 보고 얼굴을 굳혔다.
“놀라게 하려 한 건 아니었는데 미안하다.”
“아, 아닙니다, 로운 경.”
로운의 사과에 정신을 차린 피비는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여긴 어쩐 일이야, 로…… 운.”
디아나는 어색하게 그의 이름을 불렀다.
대공성에서 대공 다음으로, 아니 어쩌면 대공만큼이나 불편한 상대가 바로 로운이었으니까.
로운이 디아나에게 먼저 찾아온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보통 우연히 대공을 마주치면 그 자리에 로운이 있거나 아님 잠시 뒤 로운이 나타나거나 둘 중 하나였다.
‘저 사람이 갑자기 왜 날 찾아온 거지?’
디아나는 경계심 서린 눈빛으로 로운을 보았다.
옅은 갈색 눈동자에 떠오른 선명한 경계심을 읽은 로운은 조금 당황스러웠지만 생각해 보면 당연한 반응일 터였다.
디아나는 보통의 아이들과 달리 눈치가 상당히 빠른 아이였으니까.
아마 첫 만남 때부터 그의 미소 아래 깔린 적대심을 눈치챘을 것이다.
그 뒤로도 몇 번 마주쳤지만 딱히 디아나와 제대로 대화를 나눈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내가 호위 기사를 맡으면 안 되는 거였나.’
디아나의 선명한 경계심에 로운은 순간 망설여졌지만. 에드윈이 안 된다면 최선의 선택지는 자신이었다.
다른 기사들과 달리 그는 디아나에 대한 생각이 많이 바뀌었으니까.
레아의 딸인 디아나를 좋게 보는 거까진 아니었지만 적어도 이젠 디아나가 레아와는 많이 다르단 건 알았다.
로운은 디아나에게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다름이 아니라, 수도에 계신 동안 제가 아가씨의 호위를 맡았다는 것을 알려드리러 왔습니다.”
“네? 로운 경이요?”
대답은 디아나가 아닌 피비에게서 흘러나왔다. 피비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놀라며 되묻자 로운이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내가 맡게 되었다.”
로운이 확답을 주듯 다시 말하자 디아나가 미간을 살짝 좁혔다.
디아나는 어색하게 입꼬리를 올리고 있는 로운을 보며 난감해졌다.
‘왜 하필 로운이 내 호위를 맡았지?’
“……로운은 기사단장인데 내 호위를 맡아도 되는 거야?”
“아, 제가 기사단장이긴 하지만 크게 하는 일은 없어서……. 아가씨의 호위를 맡아도 괜찮답니다.”
“그래도 기사단장인데 내 호위를 맡는 건…… 이상하지 않을까?”
기사단장이 사생아의 호위를 맡는다는 것도 이상한 일이긴 했지만 사실 지금 디아나는 상대가 로운이라서 불편할 뿐이었다.
하지만 디아나의 바람과 달리 로운은 싱긋 미소를 지었다.
“그런 걱정은 전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대공 전하께서 이미 명하신 일이니까요.”
대공 전하의 명.
그렇다면 디아나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로운의 푸른 눈동자를 가만히 보던 디아나는 문득 비슷한 눈동자 색을 가지고 있는 에드윈이 떠올랐다.
대공이 붙여 준 호위가 로운이 아니라 에드윈이었다면 좋았을 텐데.
낯선 기사보다 더 불편한 로운 때문에 에드윈이 갑자기 너무 보고 싶어졌지만 힘들다는 것을 디아나도 알고 있었다.
수도에서 열리는 검술 대회 때문에 에드윈은 많이 바쁠 테니까.
“그런데 아가씨, 지금 나가시려는 건가요?”
로운은 디아나의 모습을 전체적으로 살펴보았다.
연분홍 드레스에 예쁘게 양 갈래로 땋은 머리. 귀엽게 차려입은 디아나의 모습은 누가 봐도 방 안에서 쉬려는 차림새는 아니었다.
디아나는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로운의 시선에 머쓱해져 드레스 자락을 꼭 쥐었다.
“응. 피비와 함께 도서관에 가려고 했어.”
“도서관…… 네? 도서관이요?”
로운은 자신이 잘못 들은 건가 싶어 되물었다.
당연히 수도에 있는 디저트 가게나 인형 가게 같은 곳을 갈 줄 알았기 때문이었다.
“응, 도서관에 갈 거야.”
하지만 디아나는 오히려 되묻는 로운이 이상하다는 듯 눈을 살짝 찡그리며 답했다.
그러고 보니 또래보다 머리가 좋다고 했었지. 학구열이 높은…… 건가.
로운은 솔직히 다아나가 선택한 수도에서의 첫 행선지가 이해 가지 않았지만 아닌 척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아, 네……. 그런데 도서관까지 가는 길이 저택에서 그리 멀지 않으니 마차를 타지 않고 거리를 구경하시며 가는 건 어떠신지요?”
“좋아.”
디아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전 하녀장에게 잠시 명할 것이 있어 먼저 내려가 보겠습니다. 준비가 끝나시는 대로 내려오시면 됩니다.”
“……응.”
부자연스런 미소를 지은 로운이 떠나고 디아나는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수도에 있는 동안 로운과 함께 다녀야 한다니.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는데 벌써 피곤해지는 기분이었다.
“아가씨, 괜찮으세요?”
“응, 괜찮아. 피비, 내 옆에서 절대 떨어지지 마.”
로운이랑 둘만 남지 않게.
“당연하죠.”
뒷말은 삼킨 디아나는 다정한 미소를 그리는 피비의 손을 꼭 잡았다.
* * *
“와, 정말 길이 잘 닦여 있네요. 마차가 그리 많이 다니는데도 어쩜 거리가 이렇게 깔끔할까요?”
디아나의 손을 잡은 피비는 쓰레기 한 점 없는 거리를 둘러보며 신기한 눈빛을 했다.
북방의 영지도 잘 관리되고 있는 편이지만 이 정도로 깔끔하진 않았다.
디아나 역시 반짝이는 눈으로 연신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다.
“여긴 청소부들이 상시 대기하며 말똥이나 쓰레기를 바로바로 치운대. 그리고 거리의 깨끗함을 유지하기 위해 백 년 전부턴 노점상도 이 베이첸 거리엔 들어올 수가 없도록 법이 만들어졌대.”
디아나가 나직이 설명하자 로운과 피비가 놀란 얼굴을 했다.
특히 피비의 말을 듣고 막 베이첸 거리에 대해 설명하려 했던 로운이 피비보다 더 놀랐다. 디아나의 설명이 그가 말하려 했던 것보다 더 상세했기 때문에.
“와, 아가씨, 그걸 어떻게 아셨어요?”
“아, 여기 오기 전에 수도에 관한 책들을 찾아봤어. 수도의 거리라던가 황성의 궁들의 이름이라든가……. 알고 오면 더 재밌을 거 같아서.”
“역시, 우리 아가씨! 책을 보고 미리 알아오시다니 정말 천재시라니까요!”
피비가 손뼉을 마주치며 찬양하자 디아나는 볼을 붉히며 눈을 도르륵 굴렸다.
피비의 찬양은 익숙한 것이었지만 오늘은 그 칭찬을 디아나만 듣는 것이 아니었기에 부끄러웠다.
로운은 뒤에서 살짝 거리를 두고 따라오고 있긴 했지만 피비의 목소리를 듣지 못할 만큼 거리가 멀지는 않았다.
‘다 들었겠지.’
로운이 비웃지는 않을까 생각한 그때, 낮은 음성이 들려왔다.
“수도에 관한 책은 아직 읽기 어려우실 텐데, 정말…… 대단하시군요.”
‘지금 날 칭찬한 거야……?’
디아나는 항상 자신을 아니꼽게 보던 로운이 말한 게 맞는 건지 놀라 걸음을 멈칫했다.
고개를 돌리자 로운의 푸른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쳤다.
로운의 푸른 눈동자를 볼 때마다 느꼈던 적대심과 못마땅함이 지금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아까 날 호위하겠다고 할 때도 싫어하는 거 같지 않았어.’
그렇다고 딱히 자신에게 호감이 있는 건 아니지만.
‘갑자기 왜 바뀐 거지?’
디아나는 로운을 빤히 바라보다 이내 시선을 내렸다. 그의 심경 변화 따위 굳이 자신이 알 필요는 없었다. 어차피 수도를 떠나면 로운과는 마주칠 일도 거의 없을 테니까.
“……그냥 몇 줄 외웠을 뿐이야.”
디아나는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는 듯 다시 걸음을 내디뎠다.
“몇 줄 외운 것뿐이라뇨. 저도 수도에 관한 책을 읽었지만 기억나는 게 몇 개 없는걸요. 책의 내용을 기억하는 것만으로도 대단하신 거예요.”
“음…… 근데 저긴 왜 저렇게 사람이 많은 거야?”
디아나는 계속될 것 같은 피비의 찬양에 주변을 둘러보다 사람들로 북적이는 상점을 발견했다.
손을 뻗어 가리키자 피비의 관심사가 그리로 옮겨졌다.
“그러게요, 뭘 파는 곳이길래 저렇게 줄이 길까요?”
“도넛을 파는 곳입니다.”
“도넛?”
로운의 답에 디아나가 고개를 갸웃하자 피비가 뭔가 떠올랐다는 손뼉을 쳤다.
“그러고 보니 수도에 역사가 되게 오래된 제과점이 있다고 들었어요. 거기서 파는 도넛이 정말 맛있다고 했는데 저기인가 봐요, 아가씨.”
“도넛이 뭐야?”
디아나는 생전 처음 들어보는 이름에 호기심 어린 눈빛을 했다.
“아…… 맞다, 북방엔 도넛을 파는 빵집이 없으니 아가씨께선 모르시겠네요. 도넛은 일종의 빵인데…… 동그란 모양에 중간에 구멍이 뚫려 있어요. 그리고 엄청 부드러운 식감을 가졌죠.”
“근데 왜 북방에선 안 팔아?”
디아나의 물음에 피비가 당혹스런 얼굴을 했다.
그냥 없다는 것만 알 뿐 왜 없는지는 피비도 몰랐기 때문이다. 피비의 얼굴에 난감함이 서리던 그때, 로운이 디아나의 옆으로 다가왔다.
“북방의 토양은 척박해 도넛을 만들 수 있는 부드러운 곡식이 나질 않습니다. 북방의 곡식들은 거의 남부에서 사서 오는 것인데 부드러운 밀은 값이 비싸기 때문에 평민들은 사기가 어렵습니다.”
“아…… 그렇구나.”
솔직히 로운의 말을 완벽히 이해한 것은 아니었지만 무슨 뜻인지는 알아들었다.
“알려 줘서 고마워.”
“별말씀을요.”
로운은 디아나를 보며 싱긋 미소를 지었다.
디아나는 그의 친절함이 아직은 불편했기에 어색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아가씨, 저희 도넛 먹어 볼까요?”
“응?”
“설명으로 아는 것보단 직접 먹어 보는 게 더 좋을 테니까요.”
“음…… 그럴까.”
디아나는 북적이는 사람들을 보았다.
‘저렇게 줄을 서서 먹을 정도면…… 엄청 맛있는 게 아닐까?’
디아나는 달달하고 부드러운 것을 좋아했기에 사실 먹어 보고 싶긴 했다.
“먹어 봐요, 아가씨. 보니까 사람이 계속 몰려서 그렇지, 줄은 금방 빠지는 거 같아요.”
“근데 곧 해가 질 거 같은데 도서관이 문 닫지 않을까?”
붉어지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말하자 로운이 답했다.
“도서관은 저녁 늦게까지 운영하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겁니다.”
“아…… 그럼 먹어 보자, 피비.”
“제가 먼저 뛰어가서 줄을 서고 있겠습니다.”
디아나는 후다닥 뛰어가는 피비의 뒷모습에 순간 당황했지만 이미 로운과 둘뿐이었다. 도넛에 정신이 팔려 아까 자신이 한 말을 잊은 모양이었다.
“아가씨, 사람이 많으니 제 손을 잡으시는 게 좋겠습니다.”
“……응.”
상점에 가까워지자 워낙 북적여 키가 작은 디아나의 시야를 가릴 정도였다.
자칫 사람들에게 치일 정도라 디아나는 얼른 로운의 손을 잡았다.
“이쪽에서 기다리면 될 거 같군요.”
“응…….”
손을 잡고 있었지만 디아나와 로운 사이엔 불편한 기운이 가득했다.
‘피비는 언제 오는 거지…….’
긴 줄 끝에 간신히 선 피비를 바라보던 디아나는 마침내 주문을 하는 피비를 볼 수 있었다.
이제 곧 로운의 손을 놓을 수 있다는 것에 안도감을 느끼던 때 로운의 혼잣말이 들렸다.
“혼자 저걸 다 들고 올 수 있는 건가…….”
응?
무슨 말인가 싶어 피비를 보자 양손 가득 빵 봉지를 받아 드는 피비가 보였다.
양손으로 들고도 버거울 만큼 빵을 산 피비는 사람들에게 부딪히면 다 쏟을 듯 위태로웠다.
“로운, 가서 피비 도와줘.”
“네? 하지만 아가씨를 혼자 둘 순 없습니다.”
“난 괜찮아. 어차피 멀리 가는 것도 아니고……. 저기서 내가 여기 있는 거 보이잖아. 그리고 여긴 사람들도 많지 않으니까, 피비를 좀 도와줘.”
디아나의 말대로 멀리 가는 것은 아니었다. 도로를 가로지르는 짧은 길 하나를 건너면 끝이었다.
그의 호위 반경에서 벗어날 만큼의 거리는 아니었기에 잠시 고민하던 로운은 디아나의 손을 놓았다.
“그럼 잠시만 이곳에 계십시오. 금방 다녀오겠습니다.”
“응, 여기서 보고 있을게.”
로운은 빠른 걸음으로 길을 건넜다. 로운과 피비가 만나는 것을 보던 그때, 디아나는 누군가와 어깨를 부딪쳤다.
“앗, 죄송합니다, 레이디.”
레이디…… ?
디아나는 어깨를 부딪친 남자아이와 눈이 마주쳤다.
분홍 머리칼에 진저색 눈동자를 가진 남자아이는 자신과 키는 비슷했지만 나이는 더 어려 보였다.
“레이디, 괜찮으신가요?”
디아나가 답이 없자 아이는 걱정이 되었는지 다시 물었다.
레이디.
생전 처음 들어보는 어색한 단어에 왠지 몸이 간질거리는 느낌이 들었다. 디아나는 목을 움츠리고 싶은 것을 참으며 괜찮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괜찮아요.”
“다행입니다. 제가 주의했어야 했는데 죄송해요.”
“아니에요.”
“저…… 근데 혹시 실례가 안 된다면 어느 가문의 레이디인지 물어도 될까요?”
어느 가문.
가문을 묻는 말에 디아나의 얼굴이 당혹으로 물들었다.
‘나한텐…… 가문이 없는데.’
인정받지 못한 사생아는 아버지의 가문을 따를 수 없으니까.
이름 모를 남자아이는 디아나를 보며 볼을 살짝 붉히고 있었다.
그 모습에 솔직히 말하려 입술을 달싹인 순간 여자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렸다.
“데이빗, 거기서 뭐 하는 거니! 어서 이리 와!”
“아, 네, 어머니!”
남자아이를 부르는 소리였는지 아이는 어깨를 움찔하며 황급히 답했다.
“레이디, 다음에 만나게 된다면 꼭 이름을 알려 주세요.”
아쉬움이 가득한 얼굴로 디아나에게 말한 남자애는 빠른 걸음으로 푸른 드레스를 입은 귀부인에게 돌아갔다.
‘다음에 만날 일은 없을 텐데.’
귀부인과 함께 마차에 오르는 남자애를 무심하게 보던 디아나는 고개를 돌렸다.
“아…… 안 보이네…….”
언제 들어선 건지 상점 앞쪽 거리에 마차 한 대가 정차해 있었다.
마차 때문에 건너편의 피비와 로운이 보이지 않았다.
“곧 오겠지.”
마차가 지나가면 바로 건너올 것이라 생각하던 그때 디아나의 발끝에 무언가 턱 걸렸다.
“뭐지?”
고개를 내리자 반짝이는 브로치가 보였다. 동그란 푸른 보석이 크게 박힌 브로치는 몹시도 값비싸 보였다.
‘이런 게 왜 바닥에…… 아.’
“아까 그 아이.”
분홍 머리 남자애가 디아나와 부딪치며 떨어뜨린 게 분명했다.
‘비싼 브로치를 잃어버리면 혼날 텐데.’
고개를 돌리자 아직 떠나지 않은 마차가 보였다.
아까 아이를 부르던 여자의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레아와 겹쳐 보이자 디아나는 기다려야 한다는 것을 잊어버리고 마차를 향해 뛰었다.
거의 마차에 당도했을 때쯤 갑자기 마차가 움직였다.
“아…… 잠시만요!”
디아나는 크게 외치며 출발하는 마차를 따라 달렸지만 짧은 다리로 큰 마차를 따라잡을 수는 없었다.
마차가 빠르게 멀어지고 디아나 역시 다리에 힘이 풀렸다.
“하아, 하.”
가쁜 숨을 고르던 디아나는 문득 주변이 너무 고요함을 느꼈다.
“……여기가 어디지?”
디아나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조용한 거리에 얼굴을 딱딱하게 굳혔다.
마차만 보고 달리느라 어디로 향하는지도 모르고 뛰었던 것이다.
“피비…….”
낯선 상황에 순간 두려움이 밀려들어 피비를 불러 보았지만 당연히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는 없었다.
‘괜찮아, 디아나. 정신 차리자.’
디아나는 두려움에 후, 숨을 내쉬곤 차분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도움을 요청할 사람을 찾아보려 했지만 사람은 보이지 않았고 상점은 커튼까지 치고 문을 닫은 상태였다.
아까 사람들이 북적였던 거리와는 완전히 다른 분위기에 디아나는 긴장했다.
단순히 조용한 것이 아니었다. 햇빛마저 잘 들어오지 않는 거리는 어딘지 스산한 기운이 감돌았다.
‘일단 이 거리를 나가야 해.’
빛이 밝게 보이는 거리의 끝을 발견한 디아나가 걸음을 내디딘 그때, 디아나의 앞으로 큰 그림자가 생겼다.
“꼬마 아가씨, 혹시 길을 잃었나요?”
쩍쩍 갈라지는 나이 든 목소리에 고개를 들자, 검은 로브를 입은 할머니가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니요, 잠시 길을 잘못 들어온 것뿐이에요. 지금 나가려고 했어요.”
서글서글한 웃음을 짓고 있었지만 디아나를 내려다보는 붉은 눈동자는 소름 돋게 번뜩이고 있었다.
‘좋은 사람이 아냐.’
눈치 빠른 디아나는 할머니의 옆으로 지나가려 했다. 노파가 갑자기 지팡이로 디아나의 앞을 막지만 않았다면.
“좋은 옷을 입은 우리 꼬마 아가씨께선 평민은 아닌 거 같은데, 왜 하녀도 없고 주변을 호위하는 기사님도 없으실까. 귀한 아가씨가 이렇게 혼자 위험한 곳으로 길을 잘못 들면 쓰나.”
킬킬 흘러나오는 웃음소리가 무서웠지만 디아나는 못 들은 척 지팡이를 피해 지나가려 했다.
하지만 처음부터 보내 줄 마음이 없었는지 노파가 주름진 손으로 디아나의 손목을 잡아챘다.
“아! 이거 놔!”
디아나는 아파 얼굴을 찡그리며 외쳤지만 노파의 손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오랜만에 잡은 값비싼 물건인데 놓아줄 수 없지. 그러게, 왜 하필 길을 잘못 들어도 이 브룩첸 거리로 왔니. 여긴 너 같은 아이들이 올 곳이 아닌데.”
불쌍하다는 듯 혀를 차다가도 곧 즐겁다는 듯 킥킥, 목을 긁는 웃음소리를 흘렸다.
‘제정신이 아니야.’
이대로 끌려가면 죽을 것이 분명했다.
‘도망쳐야 해.’
디아나가 노파의 손에서 벗어나려 손목을 비틀려는 순간 누군가 노파의 손목을 잡았다.
탁-.
“악!”
노파의 손목이 비틀렸다. 노파는 비명을 지르며 디아나의 손목을 놓았다.
“경비대의 순찰이 강화됐다던데 아직도 이런 쓰레기가 설치고 다녔네.”
나직한 낮은 음성은 어른의 것이라고 하기엔 미성이 섞여 있었다.
‘누구지…….’
고개를 들자 검은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쳤다. 별빛 하나 없는 밤하늘 같은 눈동자에 디아나는 순간 밤이 찾아온 게 아닐까 착각이 들 정도였다.
소년의 수려한 얼굴을 넋 놓고 바라보던 그때 노파가 날카롭게 비명을 질렀다.
“악, 놔! 놓으라고!”
주름진 얼굴을 무참히 구긴 노파는 고통스럽다는 듯 몸을 떨고 있었다.
“경비대를 피해 숨어 있던 잔챙이 같은데 내가 이런 물건을 놓아줄 리 있나.”
소년은 일말의 동정도 없는 눈빛으로 노파를 바라보며 매끈한 입매를 비틀어 올렸다.
“사, 살려 줘.”
“살고 싶었다면 이런 어린애는 건들지 말았어야지.”
“아이야, 아이야, 네가 나를 좀 도와 다오. 내가 잘못했다, 내가 잘못했으니 날 좀 도와줘.”
노파는 눈물 젖은 목소리로 디아나에게 손을 뻗었다.
그 손을 따라 소년의 시선이 디아나에게로 향한 순간 노파의 붉은 눈동자가 위험하게 번뜩였다.
소년에게 생긴 빈틈을 놓치지 않은 노파가 비어 있는 손으로 숨겨 두었던 단검을 꺼냈다.
휙-.
검이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울리고 소년의 팔에 정확히 검이 박혔다.
“안 돼!”
경악이 담긴 디아나의 외침과,
“윽.”
소년의 짧은 신음이 동시에 울렸다. 얼굴을 일그러뜨린 소년의 손에서 힘이 빠졌다.
그 순간을 놓치지 않은 노파는 소년의 손을 뿌리쳤다. 도망치는 노파를 잡으려 디아나가 손을 뻗었지만 작은 손으론 로브의 끝자락을 잡지도 못했다.
노파가 어두운 골목으로 완전히 사라지고 디아나는 소년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괜찮냐고 물으려던 디아나는 소년의 행동에 말을 멈추었다.
미간을 살짝 좁힌 소년은 입술을 깨물며 팔에 박힌 단검을 뽑았다.
후두둑-.
바닥으로 떨어지는 피와 소년의 거친 행동에 놀란 디아나의 눈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뭐 하는 거예요!”
디아나는 봇물 터지듯 나오는 피를 막으려 소년의 팔목을 두 손으로 황급히 움켜잡았다.
“검을 그렇게 함부로 뽑으면 어떡해, 피가 너무 많이 나오잖아요. 아프지 않아요? 사람을 불러와야 할 거 같은데…….”
디아나는 막아 보려 해도 흘러나오는 붉은 피에 자기가 다친 듯 얼굴을 고통스레 일그러뜨렸다.
“누가 보면 네가 다친 줄 알겠네.”
피가 바닥을 적시는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심드렁한 목소리였다.
“뭐……?”
디아나는 고개를 들었다. 소년의 무감한 흑안과 시선이 마주쳤다.
마치 이 정도의 상처는 별거 아니라는 듯한 눈빛이었다.
레아의 모진 매질에 온몸이 욱신거려도 스스로에게 괜찮다 되뇌던 과거의 자신과 닮았다.
디아나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소년은 팔을 잡고 있는 작은 손을 밀어냈다.
“괜찮아.”
피가 주르륵 흘러내리자 디아나는 얼굴을 확 구겼다.
“안 괜찮아요! 괜찮을 리가 없잖아요! 피가 이렇게 많이 흐르는 데…….”
디아나는 피비가 머리를 묶어 준 리본 하나를 풀었다. 그리고 자신을 밀어낸 소년의 손을 뿌리치며 소년의 손목에 리본을 감았다.
“뭐 하는 거야. 이 정도 상처는…….”
“이 정도 상처면 아파요. 아무리 상처에 익숙하다 해도 정말 안 아픈 건 아니잖아요. 다칠 때마다 아픈 게 상처예요.”
“…….”
괜찮다, 익숙하다, 그러니 별거 아니다, 이렇게 말하는 건 디아나도 수없이 했던 말들이다.
하지만 그렇게 말한다 해도 아픈 건 아팠다. 단지 상처를 보듬어 줄 사람이 없는 걸 알기에 스스로를 위안한 것뿐이다.
디아나의 손을 밀어낼 듯했던 소년의 손이 조용히 내려갔다.
소년은 아무런 말을 하지 않고 팔목에 리본을 야무지게 묶는 디아나를 바라볼 뿐이었다.
“이렇게 하면 잠시는 괜찮을 거예요.”
소년은 팔목에 단단히 묶인 분홍색 리본을 내려다보았다.
“……한두 번 묶어 본 게 아닌 거 같은데.”
“많이 해 봤으니까, 풀릴 걱정은 안 해도 돼요.”
“……많이 해 봤다고?”
레아 때문에 혼자서 붕대를 수십 번 감아 보았다. 사실 붕대도 제대로 못 구해 천을 잘라 감은 적이 더 많았다.
풀리지 않게 꽉 묶는 법도 그때 혼자 터득한 것이었다.
소년은 시선을 들었다.
디아나는 더 이상 무감하지 않은 낯선 흑안을 마주하며 입을 열었다.
“그래도 그건 잠시뿐이니까 꼭 의원에게 치료를 받아야 해요. 아, 그러지 말고 저랑 같이 나가서 의원에게 가요. 저랑 같이 온 사람들이 있으니…….”
“저 사람들을 말하는 건가.”
소년의 시선이 디아나의 뒤를 향한 순간 피비의 목소리가 크게 울렸다.
“아가씨!”
“피비!”
뒤돌자 피비가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치마까지 잡고 뛰어온 피비는 디아나의 몸부터 살폈다.
“아가씨, 괜찮으세요? 아니, 대체 왜 갑자기 사라지신 거예요?! 제가 얼마나 놀랐는지 아세요? 영지도 아니고 이 큰 수도에서 아가씨를 잃어버렸을까 봐 정말…… 정말…….”
“미안해, 피비. 브로치를 주웠는데, 그게…… 주인을 찾아주려다…… 미안해. 다신 안 그럴게.”
디아나는 땀에 젖은 피비의 얼굴에 죄책감이 들었다.
자신을 찾느라고 얼마나 뛰어다녔을지 안 봐도 알 수 있었으니까.
“후…… 아니에요, 아가씨. 이렇게 무사하시니 됐어요. 이렇게 다시 만났으니까 괜찮아요.”
“……응, 그래도 정말 미안해. 피비, 다신 혼자 가지 않을게.”
디아나가 고개를 들자 피비는 안도의 한숨과 함께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래도 빨리 찾아서 다행이에요. 해가 졌으면 정말…… 상상하고 싶지 않네요.”
“해가 졌으면 기사단을 전부 풀어야 했을 겁니다.”
디아나는 피비의 옆에 선 로운을 올려다보았다. 딱딱하게 굳은 얼굴은 피비와 마찬가지로 땀에 젖어 있었다.
“……미안해, 로운.”
“……아닙니다. 제가 떨어지지 말았어야 했는데 제 잘못입니다. 아가씨, 정말 괜찮으신가요? 이곳은 우범지대라…….”
로운이 미간을 좁히며 주변을 둘러보던 순간 디아나는 잠시 잊었던 흑발의 소년이 번뜩 떠올랐다.
“아, 맞아! 날 구해 주다 다친 사람이…….”
디아나는 텅 빈 거리에 말을 멈추었다. 분명 그녀의 뒤에 서 있어야 할 다친 소년이 없었다.
어떻게 된 거지?
디아나는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소년의 흔적은 찾을 수가 없었다. 거기다 땅바닥을 흥건하게 적셨던 피도 사라져 있었다.
디아나는 자신의 두 손을 펼쳤다.
“……어떻게.”
디아나의 손바닥엔 소년의 피가 없었다. 손을 뜨겁게 적셨던 붉은 피의 기억이 머릿속엔 선명한데 손은 마치 꿈이라도 꾼 거처럼 깨끗하기만 했다.
‘대체 이게 어떻게 된 거지. 정말 내가 꿈이라도 꾼 건가?’
디아나의 눈동자가 혼란스러움으로 떨리자 피비가 걱정스럽다는 듯이 물었다.
“아가씨, 왜 그러세요? 무슨 일이 있으셨어요?”
“그게, 나를 도와준 사람이 있었어.”
“도와준 사람이라면…… 누군가와 함께 계셨습니까?”
로운의 물음에 디아나는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여기 같이 있었는데…….”
피비와 로운이 시선을 교환하는 게 느껴졌다. 아마 자신의 말을 완전히 믿지 못하는 거 같았다.
이해했다. 자신도 흔적 하나 없이 사라진 흑발의 소년이 정말 눈앞에 있었던 게 맞는지 혼란스러우니까.
“어, 아가씨 머리 리본 하나가 풀어지셨네요.”
“……리본.”
풀어진 머리의 리본은 디아나가 푼 것이다.
소년의 손목에 묶어 주기 위해서.
풀어진 머리를 매만지자 디아나의 혼란스러움이 가라앉았다.
소년은 진짜 있었어.
마법사일까.
그러니 그렇게 갑자기 사라질 수 있었던 거 아닐까.
소년에 대해 생각하던 디아나는 걱정스런 눈빛의 피비와 시선이 마주쳤다.
디아나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
“아…… 리본이 아까 여기로 달려오다 떨어졌나 봐.”
“다시 묶어 드릴게요.”
피비는 여분의 리본을 꺼내 디아나의 머리를 예쁘게 땋아 주었다.
“이제 그만 가자. 곧 해가 지겠어.”
“아가씨, 방금 말씀하신 같이 있으셨단 사람의 인상착의와 상황을 자세히 말씀해 주시면 제가 한번 찾아보겠습니다.”
“착각이었어.”
“네?”
“내가 너무 놀라서 착각했나 봐.”
갑자기 말을 바꾸자 로운의 얼굴이 당황으로 물들었지만 디아나는 소년에 대해 더 말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이렇게 갑자기 자취를 감춘 거면 다른 사람에게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아 그런 것일 테니까.
“그만 가자. 여기 더 있고 싶지 않아.”
더 있고 싶지 않다는 말에 로운은 떨떠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제 손 꼭 잡으세요.”
“응, 절대 안 놓을게.”
소년이 서 있던 자리를 한번 돌아본 디아나는 피비의 손을 잡고 어둑한 거리를 나갔다.
디아나가 거리에서 완전히 사라지자 붉게 물들었던 하늘이 어둑해졌다.
밤이 찾아오자 브룩첸 거리 상점들이 하나둘 문을 열기 시작했다.
그리고 골목에 몸을 숨겼던 흑발의 소년이 모습을 드러냈다.
카이루스는 작은 소녀와 함께 서 있던 장소로 걸어 나왔다.
그곳엔 더 이상 갈색 머리 소녀가 없었지만 그의 팔목엔 분홍 리본이 단단히 묶어져 있었다.
- 아무리 상처에 익숙하다 해도 정말 안 아픈 게 아니잖아요.
작은 소녀의 목소리가 머릿속을 맴돌았다.
- 카이루스, 아프다고 말해도 된단다. 상처에 익숙해지지 말렴.
그리고 소녀의 말은 그의 어머니를 떠올리게 했다.
깊은 의식 속에 묻어 놓았던 어머니의 기억이 떠오르자 카이루스의 무감한 얼굴이 일그러졌다.
주변 사람들의 위로에도 무너진 적이 없었는데 생전 처음 보는 작은 소녀 때문에 묻어 뒀던 기억이 떠오르다니.
카이루스는 꽉 잠가 놓은 감정의 자물쇠가 풀릴 것 같은 기분에 긴 숨을 내쉬었다.
어차피 다시 만날 일 없는, 우연히 만난 소녀였을 뿐이다. 그러니 다시 그의 감정이 흔들릴 일도 없을 것이다.
감정을 다스린 카이루스는 붉게 물드는 분홍 리본을 내려다보았다.
종이에 물감이 퍼지듯 리본에 그의 피가 번지는 것을 물끄러미 보던 카이루스는 리본을 풀었다.
왜인지 리본이 피로 더러워지는 것이 싫었다.
카이루스는 피가 묻은 리본을 손으로 그러쥐었다. 그러자 그의 손에서 성스러운 하얀 빛이 번쩍였다.
손을 펼치자 리본을 붉게 물들였던 핏자국이 말끔히 사라졌다.
“……버릴까.”
원래 그였다면 이미 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버릴 거였다면 애초에 리본을 정화하기 위해 신성력을 쓰지도 않았겠지.
고민은 짧았다. 리본을 접어 바지 주머니에 넣은 그는 피가 멈추지 않는 상처에 손을 얹었다.
하얀 빛이 다시 한번 뿜어져 나왔다. 구멍이 났던 상처에 피가 멈추고 새살이 돋아났다.
새하얘진 팔목은 처음부터 상처가 없었던 듯 깨끗했다.
“피곤하네.”
오랫동안 쓰지 않았던 신성력을 오늘 갑자기 많이 쓴 탓이었다.
직접적으로 손을 대지 않고 무언의 신성력으로 소녀의 손과 거리에 남아 있던 피의 흔적을 정화했으니 몸에 무리가 갈 수밖에 없었다.
“하아, 일찍 돌아가야겠어.”
저녁 늦게 황궁으로 귀환하려 했으나 피곤함이 밀려들어 더는 무리였다.
완전한 밤이 되자 브룩첸 거리에 사람이 몰려들었다.
카이루스는 로브의 모자를 눌러쓰고 황궁을 향해 발걸음을 돌렸다.
* * *
어두워진 하늘빛에 테라비타 제국 황성의 불이 더욱 밝게 밝혀졌다.
오늘은 특히 오랜만에 귀한 손님이 오는 날이라 황성 입구에서부터 밝은 불빛이 번쩍이고 있었다.
제국 황성의 중앙.
황제가 기거하는 빛의 궁전 앞으로 황가의 일원들이 나와 있었다.
“아직인가? 저택에서 황성까지 거리가 얼마 되지 않거늘, 너무 늦는군.”
테라비타 제국의 황제, 일리오스 테라비타의 어린아이 같은 불평에 옆에 서 있던 황후의 입가에 웃음이 서렸다.
“폐하, 출발한다는 전언이 온 지 아직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전언이 오자마자 이리 나와 계시니 당연히 늦는 거처럼 느껴지지 않겠습니까.”
“맞습니다, 아바마마. 그리고 왠지 이리 나와 있는 것을 숙부님께선 반기지 않을 거 같습니다.”
황후의 말에 맞장구를 치듯 1황자 에키온 테라비타가 말했다.
일리오스는 자신과 똑 닮은 아들을 내려다보며 눈썹을 치켜세웠다.
“황제인 내가 마중을 나오겠다는데 두 팔 벌리며 환영해야지, 누가 감히 반기지 않는다더냐.”
일리오스의 못마땅해하는 눈빛에 에키온은 모른 척 미소를 지으며 옆에 양순히 서 있는 동생, 레귤러스의 금발을 쓰다듬었다.
일리오스는 그리 말했지만 하나뿐인 동생의 딱딱한 얼굴이 떠올랐다.
“대공께서 요란스러운 것을 싫어하긴 하지요.”
황후의 말에 황제가 움찔했지만 곧 위엄 있는 모습을 되찾았다.
“큼, 황후, 난 크로우드를 마중 나온 것이 아닙니다. 태어나서 한 번도 보지 못한 조카의 마중을 나온 것이니 크로우드도 별말 못 할 겁니다.”
황후는 아닌 척 대공의 눈치를 보는 황제의 모습에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귀족들에겐 냉혹한 황제라 칭해지지만 가족에겐 한없이 약해지는 사람이란 걸 잘 알고 있으니까.
황제는 다시 마차가 들어오는 길목을 빤히 바라보았다.
지켜보는 눈이 많아 태연함을 가장하고 있었지만 일리오스의 금안엔 그리움이 가득했다.
10년 만에 보는 동생을 기다리며 일리오스의 마음이 초조해지던 그때, 궁전으로 들어서는 마차가 보였다.
금으로 문양이 새겨진 마차는 황족만이 탈 수 있는 마차였다.
“드디어 왔군.”
마침내 궁전 앞에 대공가의 마차가 멈추었다.
황가의 일원들은 물론이고 궁인들까지 마차에 시선을 집중했다.
사람들이 숨을 죽인 그때, 마차의 문이 열렸다.
마차에서 세이아의 손을 잡고 내린 대공은 궁전 앞에 서 있는 사람들을 보고 걸음을 멈칫했다.
세이아 역시 마중을 나온 듯한 사람들을 보았다.
금발, 금안.
세이아는 자신의 아버지처럼 찬란하게 빛나는 금발을 가진 일원들을 황홀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그녀와 같은 고귀한 황족들이 분명했다.
세이아의 입가에 미소가 서린 그때, 황제가 그들을 향해 다가왔다.
“크로우드.”
10년 만에 만난 서로의 얼굴을 볼 수 있을 만큼 가까운 거리였다.
일리오스는 10년이나 흘렀음에도 별로 늙지 않는 동생의 얼굴을 보며 피식, 미소를 지었다.
“이거 나이를 나만 먹은 거 같구나.”
“저와 같은 생각을 하셨습니다. 10년 전과 변한 게 없으십니다, 형님.”
황제가 대공의 말에 즐겁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어머나 대공, 그리 말하시면 폐하께서 진짜인 줄 아십니다.”
어느새 그들에게로 다가온 황후가 부채로 입가를 가리며 미소를 지었다.
대공은 황후에게 예를 갖추었다.
“황후 폐하를 뵙니다. 그간 무탈하셨는지요.”
“그리 격식을 차리니 서운합니다. 한 가족인데요.”
“그럼 편히 부르겠습니다, 형수님.”
“이런, 우리끼리 이야기를 나누느라 가장 중요한 손님을 잊고 있었군.”
기분 좋은 웃음이 가득하던 황제의 시선이 세이아를 향했다.
“그러게 말입니다.”
황후의 시선까지 세이아를 향하자 대공은 세이아에게 나직이 말했다.
“세이아, 폐하와 황후 폐하께 인사를 올리거라.”
세이아는 말간 미소를 지으며 차분히 예를 갖추었다.
“제국의 태양과 달이신 폐하와 황후 폐하를 뵙니다.”
군더더기 없는 예법에 황제와 황후가 환한 미소를 지었다.
“어머나, 아직 10살밖에 안 되었는데 이리 몸가짐이 차분하다니 대공께선 기쁘시겠습니다.”
“그러게나 말입니다, 황후. 우리 레귤러스와 세이아가 동갑인데 레귤러스와는 영 딴판입니다.”
“저도 잘합니다!”
황후의 곁으로 쪼르르 다가온 레귤러스가 불만 가득한 목소리로 황제에게 항의했다.
대공의 시선이 레귤러스를 향했다. 1황자와 달리 2황자는 태어났다는 소식만 들었을 뿐 처음 보는 것이었다.
‘형님보단 형수님을 닮았군.’
대공은 레귤러스와 눈을 마주쳤다.
“처음 뵙겠습니다, 황자 저하.”
“……처음 뵙겠습니다, 숙부님.”
레귤러스는 낯선 대공이 무섭다는 듯 황후의 치맛자락 뒤로 몸을 반쯤 숨겼다.
강아지 같은 모습이 귀여워 대공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간 순간 에키온이 대공에게 다가왔다.
“숙부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1황자 저하, 세월이 많이 흐르긴 했군요. 저하께서 이리 크시다니 말입니다.”
겨우 그의 무릎쯤에 오던 에키온은 어느새 그의 가슴께까지 자라 있었다.
“10년이나 흘렀으니까요.”
새삼 10년의 세월을 실감한 대공은 에키온의 미소에 옅은 미소를 그렸다.
“자, 여기서 이럴 것이 아니라 만찬장으로 가 회포를 푸는 게 좋겠군. 이러다 밤이 깊어지겠어.”
“그러시지요, 폐하.”
황제와 황후가 먼저 만찬장으로 향하고 황자들이 그 뒤를 따랐다.
그 화목한 가족의 모습에 순간 대공의 몸이 멈칫했다.
- 로우.
서로를 보며 미소 짓는 황제와 황후를 보자 그의 귓가에 아리엘의 목소리가 환청처럼 맴돌았다.
고개를 돌리면 황후처럼 아리엘이 그를 보며 미소를 지을 거 같았다.
하지만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갑자기 왜 이러는 건지.’
씁쓸함에 얼굴을 쓸어내리자 세이아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버지, 우리도 어서 가요.”
세이아는 기분이 좋은지 평소보다 더 밝은 얼굴이었다.
“……그래.”
세이아의 미소를 무감한 눈빛으로 바라보던 그는 이윽고 세이아의 손을 잡고 만찬장으로 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