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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퍽-!
“아야…….”
마리는 대공녀의 방문을 열자마자 날아온 쿠션에 얼굴을 정통으로 맞았다.
너무 아파 눈물이 찔끔 나올 정도였지만 방 안의 상황을 보니 아프단 말을 내뱉어선 안 될 것 같았다.
세이아가 던진 건 쿠션 하나가 아니었다. 마리는 인형, 쿠션, 베개들이 널브러진 방 안의 상황을 보고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마리는 씩씩거리며 인형을 던지는 세이아를 보다 잰걸음으로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유모에게 다가가 속삭이듯 물었다.
“유모님, 대공녀님이 왜 저리 화가 나신 거예요? 분명 아침까지만 해도 기분이 좋으셨는데…… 요.”
하녀장이 급히 일을 도와 달라고 불러 마리는 오후 내내 세이아의 곁을 비웠다.
유모는 영문을 모르겠단 얼굴로 말했다.
“아까 정원에서 대공 전하와 디아나 아가씨를 만나시고 온 뒤로 저렇게 화가 나셨어. 대체 왜 저리 화가 나신 건지……. 저렇게 화를 내시다 혹 다치시기라도 할까 봐 불안한데 의원을 부르지도, 대공 전하께 알리지도 못하게 하시니…….”
대공 전하와 디아나 아가씨.
마리는 세이아가 왜 저리 화가 났는지 이유를 알아차렸지만 세이아가 천사같이 착한 줄 아는 유모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초조한 얼굴로 세이아를 보던 유모는 도저히 안 되겠다 싶은지 방 안에 널브러진 인형들을 넘어 세이아에게 다가갔다.
“대공녀님, 진정하세요. 이러다 쓰러지실까 걱정되어요.”
세이아는 안절부절못하는 유모의 목소리는 안 들린다는 듯 눈앞에 보이는 토끼 인형을 들어 벽에 세게 집어던졌다.
거친 행동에 유모가 화들짝 놀라는 것이 느껴졌지만 세이아는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대체 왜, 그 천한 것을 보고 웃어 주시는 거야?’
세이아는 정원에서 분명 보았었다.
대공이 환하게 웃고 있는 디아나를 보며 미소 짓는 것을.
그 미소를 보았을 때의 기분은 난생처음 느끼는 것이었다.
심장이 철렁 내려앉고 한 번도 겪은 적 없는 불안감에 떨리는 손을 꽉 그러쥐었었다.
그래서 아버지를 향해 귀족 영애의 예법을 무시하고 뛰어갔었다.
거리가 꽤 있었음에도 급히 달려가 디아나를 향해 있던 아버지의 시선을 빼앗았다.
아버지의 시선도 미소도 그리고 애정도 온전히 자신의 것이어야 했으니까.
“왜 자꾸 챙기는 거냐고!”
그 더러운 것에게 미소를 지어 준 것도 불안해 견딜 수가 없는데 아버지는 디아나를 수도로 데리고 가신다고 했다.
아버지와의 첫 여행에 디아나가 함께한다는 것도 화가 났지만 다른 곳도 아닌 수도에 디아나를 데리고 간다는 사실에 결국 폭발했다.
제국의 수도는 폐쇄적인 북방과 달리 수많은 귀족들이 머무르고 있는 곳이었다.
그런 곳에 디아나를 데리고 간다는 것은 곧 그 많은 귀족들이 디아나의 존재를 알게 된다는 뜻이다.
수도 귀족들 앞에 디아나가 서는 것을 상상만 해도 진저리가 나게 싫었다.
태어나고 자란 모든 순간들 속에서 사람들은 하나뿐인 대공녀인 자신을 찬양했다.
그러니 처음부터 끝까지 대공가의, 아버지의 자식은 자신 하나여야 했다.
그런데 디아나라니!
디아나를 대공성에서 쫓아낼 것이라 말했을 때 아버지도 겉과 달리 속마음은 자신과 같다고 생각해 안심했었다.
언젠가 사라질 디아나니까, 대공성 안에서 공부하든 하녀를 데리고 있든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한데…… 지금은 아버지가 정말 디아나를 쫓아낼 마음이 있는 건지 의심이 됐다.
‘정말 쫓아낼 거였다면 수도에 데려가지도 않으셨을 거야.’
디아나, 디아나. 대체 그 더러운 것을 어떻게 해야 이 대공가에서 없애 버릴 수 있을까.
분노에 머리가 터질 거 같던 그때, 갑자기 방 밖에서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꺄아악!”
심상치 않은 비명 소리에 세이아는 물론이고 마리와 유모까지 화들짝 놀랐다.
세이아는 손에 잡힌 인형을 던지려 했던 것도 잊고 유모를 바라보았다.
“갑자기 무슨 일이야? 알아봐, 유모.”
세이아의 목소리가 무서운지 살짝 떨리고 있었다. 유모는 뒤를 돌아 마리를 보았다.
“마리, 어서 나가 봐, 무슨 일인지.”
“네? ……아, 네.”
갑자기 들린 비명 소리가 무서운 건 마리도 마찬가지였지만 어쩔 수 없이 떨떠름한 얼굴로 방문을 살짝 열었다.
복도를 빼꼼 내다보자 등 뒤에서 유모가 채근했다.
“뭐 하니? 나가서 집사님께 무슨 일인지 물어봐, 어서.”
“……네.”
울상을 지은 마리가 결국 방을 완전히 나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방으로 돌아왔다.
세이아는 놀란 얼굴로 돌아온 마리를 보며 물었다.
“무슨 일이 생긴 거야?”
“아, 그게……. 하녀 한 명이 대공 전하가 보살피시는 몬스터에게 공격을 받았어요.”
“왜?”
“그, 대공 전하의 방에 하녀가 들어갔다가 몬스터의 공격을 받았나 봐요.”
마리의 말에 유모가 이해 안 된다는 듯 물었다.
“하녀가 왜 대공 전하의 방에 들어갔지? 지금 대공 전하의 방엔 몬스터가 있어서 집사님 말고는 출입 금지잖아. 집사님께서 청소도 다 하신다고 들었는데, 하녀가 갑자기 왜 들어가?”
마리는 세이아의 눈치를 살피며 곤란한 얼굴을 했다.
“그게…… 이번에 일손이 부족해서 급히 구한 하녀가 나쁜 마음을 먹고 몰래 방에 들어간 거 같아요.”
하녀들의 도둑질.
귀족가에서 한 번씩 일어나는 일이었다.
좋지 않은 소식에 유모가 다른 얘기를 꺼내려던 순간 세이아가 마리에게 물었다.
“그래서 그 하녀는 죽었니?”
“아, 아뇨. 다행히 저택에 기사단장님이 계셔서 죽진 않았어요. 근데 상처가 커서 복도에 피가 흥건하더라고요.”
마리는 복도에 가득했던 붉은 피가 떠오르자 소름이 돋아 몸을 부르르 떨었다.
“어휴, 그 몬스터는 저번에 대공녀님도 공격하더니……. 너무 위험한 몬스터예요, 정말 무섭네요.”
유모가 정말 무섭다는 듯 팔을 문질렀지만 세이아의 얼굴은 갑자기 밝아졌다.
이야기를 듣는 순간 세이아의 머릿속으로 디아나를 없애 버릴 수 있는 좋은 생각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세이아는 들고 있던 인형을 놓으며 유모에게 말했다.
“유모, 나 시원한 물이 먹고 싶어. 쿠키도 먹고 싶고.”
“네. 마리, 주방으로…….”
마리에게 시키려는 유모에게 세이아가 황급히 말했다.
“유모가 가져다줘. 마리는 방을 치워야 하니까.”
“아, 알겠습니다, 대공녀님.”
유모가 인형들을 넘어 방을 나가고 마리는 바닥에 널브러진 것들을 치우려 허리를 숙이려 했다.
세이아가 부르지만 않았다면.
“마리.”
“네?”
“네가 해야 할 일이 생겼어.”
세이아는 의아한 얼굴로 자신을 보는 마리에게 짙은 미소를 지었다.
* * *
“전하, 로운과 집사님께서 오셨습니다.”
“들어와.”
집무실로 들어온 로운과 집사가 예를 갖추려 하자 대공이 손을 휘저었다.
“됐다. 나간 일은 어떻게 됐지? 무슨 일인 거냐.”
평상시처럼 집무실에서 로운에게 보고를 받고 있던 때 갑자기 저택을 울리는 날카로운 비명 소리가 울렸었다.
비명을 듣고 곧장 대공은 로운과 집사를 함께 보내 상황을 파악하게 했다.
로운이 먼저 입을 열었다.
“전하의 방에 몰래 침입한 하녀가 유네스의 공격을 받아 내지른 비명이었습니다.”
대공은 집사의 바짓단에 묻은 피를 보며 눈매를 찡그렸다.
“하녀는 죽었나?”
“아뇨, 상처는 심하나 목숨에 지장은 없을 듯합니다.”
“유네스는 어떻지?”
“현재 흥분한 상태라 일단 방에 가두어 놓았습니다.”
“후…….”
한동안 유네스를 대공이 잘 돌봐 몸 상태가 좋아지고 있었던 터라 대공은 갑작스럽게 벌어진 사단에 짜증이 났다.
대공은 피곤한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일단 하녀를 제대로 치료해 주도록. 그 이후에 그 하녀가 지은 죄를 처벌하도록 하지.”
“네, 전하.”
로운이 고개를 숙이자 집사가 허리를 숙였다.
“전하, 저택의 고용인들을 잘못 관리한 저의 불찰로 불미스런 일이 벌어졌으니 저를 벌해 주십시오.”
감히 하녀가 대공의 침실의 물건을 훔치려 하다니, 너무도 큰 죄였다.
그 하녀를 면접한 것은 하녀장이었지만 최종적으로 뽑은 것은 집사였다.
대공은 고개를 숙인 하론을 보며 쯧, 혀를 찼다.
“됐다. 근본적인 원인을 따지자면 수도로 가는 일정을 갑자기 앞당겨 일손을 부족하게 만든 나겠지.”
“아닙니다. 모든 것이 저의 불찰입니다.”
“이미 저택에서 피를 보았으니 더 이상의 소란을 만들고 싶지 않다. 뒤처리나 차질 없게 마무리해. 그걸로 벌을 대신할 테니까.”
“……네, 전하.”
“그리고 로운 넌 유네스를 다시 원래 있던 내 개인 연무장에 데려다 놔라. 구속구를 채우거라. 가는 길에 다른 사람과 마주칠 수 있으니.”
“네.”
유네스의 흥분 지수가 올라가면 마법으로 충격이 가해지는 구속구라 대공은 최악의 경우가 아니면 채우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사람을 다치게 할 정도로 흥분한 상태라 어쩔 수 없었다.
“연무장에 도착하면 구속구는 풀어 주거라. 치료사가 올 때까진 격리하는 게 좋겠지.”
“곧 치료사가 올 테니 너무 걱정 마십시오, 전하.”
북방의 문이 열리는 날이 곧이니 잠시 격리해 놓아도 괜찮을 듯했다.
“네, 전하.”
“그럼 그만 나가라.”
대공은 짧은 축객령을 내리고는 보던 서류로 시선을 내렸다.
집무실을 나온 로운은 곧장 대공의 방으로 향했다.
방문 앞에 흥건했던 피는 어느새 사라져 흔적도 찾아볼 수 없었지만 흐릿하게 남은 피 냄새에 인상을 찡그리던 로운은 방문을 열었다.
쾅- 파지직-!
방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요란한 소리가 울렸다.
유네스가 크르르, 울음소리를 내며 이빨을 드러냈다.
“쉬이, 유네스 진정해.”
로운은 유네스와 눈을 맞추며 나직이 말했다.
공격할 의사가 없다는 듯 양손을 들어 보이자 이빨을 드러내던 유네스의 기세가 한풀 꺾였다.
유네스가 잠잠해지자 로운은 유네스에게 구속구를 채우고 방을 나갔다.
“네가 빨리 나아야 할 텐데.”
복도를 걸으며 로운은 유네스에게 말했다.
대공 전하만큼은 아니더라도 로운 역시 유네스를 아끼고 있기에 하루빨리 불안정한 상태가 치료되길 바랐다.
그런 뒤 대공녀와도 잘 지낼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테니까.
“앗, 로운 경.”
막 중앙 계단을 내려가려던 로운은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마리?”
그를 부른 사람은 다름 아닌 대공녀의 하녀였다. 마리는 로운의 곁에 있는 유네스를 바라보았다.
크르릉. 유네스가 마리를 경계하자 로운이 진정하라는 듯 목의 뒤편을 주물렀다.
로운의 손길에 유네스가 안정되자 흠칫했던 마리가 입을 열었다.
“……로운 경, 유네스를 다른 곳에 격리시키려는 건가요?”
“맞아.”
“……아까의 소란 때문에 그런가 보군요.”
“소란이 대공녀님 방까지 울렸었군. 대공녀님은 괜찮으신 거냐.”
“네, 대공녀님은 괜찮으세요. 무슨 일인지 들으시곤 오히려…… 유네스가 괜찮은지 물으셨어요.”
“아, 유네스는 괜찮다. 단지 좀 흥분한 상태라 예전에 있던 곳에 잠시 격리해 놓기로 했지.”
“예전에 있던 곳이라면…… 대공 전하의 개인 연무장 말씀이신가요?”
“그래, 거기다.”
유네스가 갑자기 날뛰자, 로운은 구속구를 살짝 누르며 말했다.
“아무래도 난 이만 가 봐야겠군. 대공녀님께 유네스는 안전하다고 전해 드려라.”
“……네.”
마리는 로운의 뒷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바라보다 굳은 얼굴로 몸을 돌렸다.
* * *
“내일이면 드디어 문이 개방되네. 이제 정말 겨울이 끝났나 봐.”
“그러게. 넌 좋겠다, 이번에 휴가 한 번에 몰아 써서 남부로 간다며.”
“뭐가 좋아, 내가 남부에 가는 건 놀러 가는 게 아닌걸. 집이 그곳이니…… 이번에 가면 또 부모님 잔소리나 듣겠지.”
“그래도 부러워…….”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 방으로 돌아가는 길.
디아나는 복도를 지나가는 하녀들의 이야기를 가만히 듣다 피비를 바라보았다.
“내일이구나, 문이 열리는 날이.”
“네, 그래서 그런지 대공성의 분위기가 오늘은 유난히 들떠 있어요.”
이때까진 북방의 문이 열리든 말든 디아나와는 거리가 먼 이야기였지만 이번은 아니었다.
내일 북방의 문이 열리면 디아나도 얼마 지나지 않아 수도로 출발하게 될 테니까.
수도에 가다니.
대공에게 직접 자신도 수도에 갈 거라는 얘기를 들었지만 실감이 잘 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수도에 가는 상상을 할 때면 심장이 두근거리고 벅찬 기분이 들었다.
“……나도 기대돼.”
그림책에서만 보았던 제국의 수도가 어떤 모습일지 궁금하고 설렌다.
도서관에서 가져온 책을 꼭 끌어안고 발그레 볼을 붉히는 디아나가 너무 귀여워 피비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제 수도로 가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온 뒤로 디아나는 이따금씩 볼을 붉게 물들이며 눈을 반짝이곤 했었다.
그 모습이 너무 귀여워 볼 때마다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싶은 것을 온 힘을 다해 참고 있는 중이었다.
혼자 또 미소 짓는 디아나를 보던 피비는 문득 떠오른 일에 깨물고 있던 입술을 놓았다.
“아가씨, 근데 정말 새 옷을 사지 않으셔도 되겠어요? 지금 옷들은 너무 평상시 입는 옷들이라서요…….”
어제 집사가 방에 들러 옷과 신발이 부족하지 않냐고 물었었다. 디아나는 괜찮다고 했지만 피비는 너무도 아쉬웠다.
이번 기회에 무난한 일상복이 아닌 화려한 드레스들을 몇 벌 사서 디아나를 인형처럼 꾸며 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검소한 피비의 아가씨는 좋은 기회를 단칼에 거절했다.
그래도 마음을 돌려 볼 수 있지 않을까 싶어 피비는 시무룩한 얼굴을 하고 물었지만 디아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냐, 어차피 얼마 전에 날이 풀렸다고 봄옷이 또 새로 왔잖아.”
“그렇긴 하지만…….”
“그 옷이면 돼. 수도에 가는 준비를 하느라 안 그래도 다들 정신없는데 굳이 일을 더 늘리지 말자.”
수도에 데려가 주는 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하니까.
디아나의 미련 없는 얼굴에 피비는 결국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눈앞에 떠오르는 귀여운 드레스들이 꽤나 아쉬웠지만 피비는 언젠가 있을 다음 기회를 생각하기로 했다.
“한데 아가씨, 어제 오늘 빌리시는 책들이 전부 제국의 정령과 관련된 책들이네요.”
복도를 다시 걸으며 피비는 디아나의 품에 꼭 안긴 책을 보며 말했다.
디아나는 책을 힐긋 내려다보았다.
[제국의 수호 정령, 가디언의 신비로운 힘에 대하여.]
“응. 정령에 대해 궁금해져서…….”
“근데 오늘 빌린 책은 어린이 서적이 아닌데 읽기 괜찮으시겠어요?”
“괜찮아. 모르는 건 넘기고 아는 것만이라도 읽을 거야.”
분수대에서 제힘을 확인한 다음 날, 디아나는 대공에게 바로 말하기보다 스스로 먼저 찾아보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마법보단 정령의 힘이 자신과 가까운 거 같아 먼저 정령의 힘을 알아보기 위해 도서관에서 정령과 관련된 동화책들을 모두 읽었다.
하지만 아무래도 어린이용이라 그런지 전부 전설을 동화로 풀어 놓은 것뿐, 디아나가 원하는 정령의 힘에 관한 이야기는 없었다.
그래서 오늘은 어린이 서적이 아닌 두꺼운 어른들의 책을 가져왔다.
기본적인 글자는 이제 다 떼긴 했지만 그래도 아직 어려운 단어들이 많아 읽는 데 어려움이 많을 거 같지만 그래도 동화책보단 정보를 얻을 수 있을 거 같았다.
“저도 잘은 모르지만 그래도 혹시 막히는 단어 있으면 제가 도와드릴게요.”
“응, 고마워, 피비.”
디아나는 피비에게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곧장 소파에 자리를 잡고 책을 펼치자 피비가 익숙하다는 듯 소파 앞 테이블 위로 달달한 쿠키와 차를 놓아주었다.
“아가씨, 전 잠시 빨래터에 좀 다녀올게요.”
“응. 다녀와.”
“그럼 쉬고 계세요.”
달칵, 방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디아나는 피비가 놓아준 버터쿠키를 한 입 베어 물며 책의 첫 장을 읽었다.
[제국을 수호하는 가디언, 그 힘의 시작은 초대 황제로부터 시작된다. 당시 대륙을 뒤덮었던 어둠의 힘……(중략) 황제가 죽는 순간 가디언은 모습을 감추었다. 하지만 가디언이 여전히 살아 있다는 것을 증명하듯 제국의 황족들은 가디언의 힘을 사용할 수 있었다…….]
디아나는 이미 알고 있는 이야기에 책장을 빠르게 넘겼다. 몇 장을 더 넘기자 디아나의 눈길을 사로잡는 내용이 나타났다.
[지금 황족들이 사용하는 힘은 당시 기록된 초대 황제가 보여 주었던 힘에 비하면 아주 미약한 일부였으며 지금까지도 가디언의 힘을 제대로 쓸 수 있는 황족은 나오지 않는데 그 이유에 대해선 많은 가설이 전해지고 있다.
그중에서 믿을 만한 몇 가지의 가설들은 가디언이 어둠의 힘을 봉인하며 힘이 약해져 아직까지 힘을 회복 중이라는 것과 초대 황제가 가졌던 엄청난 마력의 크기를 아직까지 황족들이 타고 나지 못했단 것이다.
둘 다 꽤나 신빙성 있는 가설이다.
뭐가 진실이든 언젠가 가디언의 힘을 전부 쓸 수 있는 황족이 나와야 한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봉인된 어둠의 힘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고 언젠가 봉인이 풀려 제국은 물론이고 아르칸 대륙 전체가 위험해지는 날이 올 수도 있으니 말이다.]
“어둠의 힘…….”
디아나는 왠지 섬찟한 마지막 문장을 보다 책장을 넘겼다.
정령의 힘이 발현되는 시점이나 물을 다스리는 방법에 관한 내용이 있나 찾던 그때,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똑똑-.
피비였다면 문을 두드리지 않기에 디아나는 책을 덮고 고개를 들었다.
“들어와.”
문이 열리고 들어온 사람을 본 디아나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마리.”
디아나의 방을 찾아온 사람은 다름 아닌 대공녀의 하녀, 마리였다.
대공녀도 함께 온 것일까 싶어 마리의 뒤를 살폈지만 열린 문 사이로 더 이상 들어오는 사람은 없었다.
마리가 고개를 까닥이며 싫다는 감정이 역력한 얼굴로 입을 열던 그때, 피비가 방으로 들어왔다.
“안에 누가 오셨나…….”
피비는 방 안에 서 있는 마리를 보고 말을 멈추었다.
피비와 마리는 서로를 마주 보며 동시에 얼굴을 와그작 찡그렸다.
두 사람이 저번에 몸싸움을 했던 것을 떠올린 디아나는 혹시나 소란이 일까 마리를 불렀다.
“마리, 무슨 일로 온 거야?”
“대공녀님의 말씀을 전하러 왔어요. 대공녀님께서 아가씨께 정원으로 나오시라 하셨습니다.”
“정원으로?”
할 말이 있다면 방으로 찾아오면 될 일인데 왜 정원으로 오라고 한 거지.
세이아가 디아나와 티타임을 하자고 부른 것도 아닐 텐데 말이다.
디아나가 의아해 되묻자 마리가 귀찮음 가득한 표정으로 말했다.
“네, 방금 말씀드렸잖아요.”
상당히 무례한 말투에 피비가 고개를 홱 돌렸다.
“피비.”
디아나는 아무 말도 하지 말란 눈빛으로 피비를 부르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대공녀님이 계신 곳으로 안내해 줘.”
“네, 근데 하녀는 두고 오라 하셨어요.”
“피비는…….”
채 말을 끝내기도 전에 디아나의 곁으로 피비가 바짝 붙었다.
“그건 안 돼요. 멀리 서 있더라도 제가 따라가야 해요, 아가씨.”
“대공녀님의 말씀을 하녀인 네가 무시하겠단 거야?”
마리가 눈을 홉뜨며 피비에게 날카롭게 외쳤다. 피비는 안 들린다는 듯 디아나만 보고 있었다.
“피비, 넌 여기 있어. 다녀올게.”
“네? 하지만…….”
“괜찮아.”
디아나는 단호히 피비의 말을 잘랐다.
하녀를 데리고 오지 말라고 한 건 좀 찝찝하긴 했지만 지금은 세이아의 기분을 거스르고 싶지 않았다.
괜히 세이아와 문제가 생겼다 수도에 가지 못하게 될 수도 있으니까.
피비를 억지로 데려가면 세이아의 화만 돋울 것이다.
디아나는 걱정 가득한 눈빛으로 자신을 보는 피비에게 걱정 말라고 미소를 지어 주곤 마리를 따라 방을 나갔다.
“잠시만, 여긴 정원이 아니잖아.”
마리를 따라 걷던 디아나는 저택 앞 중앙 정원이 아닌 별채 쪽으로 향하자 걸음을 멈추었다.
“이쪽에도 정원이 있어요, 아가씨.”
“하지만 거긴…….”
디아나는 마리의 말에 미간을 찡그렸다.
마리가 말하는 곳은 사용인들이 머무는 별채 뒤쪽에 있는, 하녀들이 주로 쉬는 공간인 작은 정원을 말하는 것일 거다.
하지만 그곳은 정원이라기보다 빨래터의 뒷산과 연결된 숲길 같은 곳이었다.
세이아가 그런 곳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다고?
“혹시 하녀들이 머무는 별채와 가까워 불쾌하신 건가요?”
입꼬리를 비틀며 비아냥거리는 마리의 모습에 눈살이 절로 찌푸려졌지만 디아나는 화를 내진 않았다.
고작 저 정도의 비아냥거림에 보통의 어린아이처럼 화를 내기엔 디아나의 삶이 그리 평탄하진 않았다.
그저 모시는 주인과 정말 많이 닮았다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그런 거 아냐.”
“그런 게 아니라면 서두르시죠. 대공녀님께서 기다리고 계시니까요.”
마리는 눈을 흘기며 다시 걸음을 서둘렀다.
디아나는 멀어진 저택을 돌아보았다. 알 수 없는 불길한 예감이 스쳤다.
‘……어차피 대공성 안인데 무슨 일이 있겠어.’
최악이라고 해 봤자 세이아에게 뺨 몇 대 맞는 것이 전부일 거다.
“아가씨!”
디아나는 짜증스럽게 자신을 부르는 마리의 목소리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걸음을 서둘렀다.
마리를 따라 얼마쯤 걷자, 세이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기야.”
마리가 옆으로 비켜서자 정원이라 부르긴 많이 부족한 숲 공터에 마련된 티 테이블이 보였다.
그리고 그곳에 앉아 있는 세이아가 디아나에게 반갑다는 듯 손을 흔들고 있었다.
“디아나, 이리 와.”
세이아는 아주 반가운 사람을 본 것처럼 미소를 짓고 있었다.
적대감이라곤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모습에 디아나는 저도 모르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혹시, 이곳에 세이아 말고 다른 사람이 있는가 싶어서.
하지만 휑한 숲의 공터엔 세이아와 마리, 그리고 디아나가 전부였다.
저택과는 거리가 먼 곳으로 부르기에 분풀이를 하려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디아나는 불안감을 느끼며 세이아게로 다가갔다.
“어서 앉아, 디아나.”
“네, 대공녀님.”
세이아의 속내가 무엇인지 알 수 없어 불안했지만 디아나는 일단 의자에 앉았다.
“달달한 홍차를 준비했는데, 홍차 좋아해?”
“……네, 감사합니다.”
세이아는 싱긋 미소 지으며 차를 한 모금 들이켰다. 그리고 차를 마시지 않고 가만히 찻잔을 바라보는 디아나를 채근했다.
“왜 안 마셔? 홍차 싫어해? 그럼 다른 차로 준비해 줄까?”
“네? 아, 아니에요.”
세이아가 대체 왜 이러는지를 생각하고 있던 디아나는 당황해 고개를 저었다.
“이상한 거 안 탔으니까 마셔, 디아나.”
세이아는 무서운 이야기를 아무렇지 않게 하며 디아나를 말간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평소였다면 저 금빛 시선에 디아나를 향한 들끓는 적의가 가득해야 했건만 오늘은 그런 감정을 찾기가 힘들었다.
오히려 무언가를 기대하는 듯한 눈빛이었다.
‘내게 기대할 게 뭐가 있다고.’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졌지만 세이아의 집요한 시선에 찻잔을 들었다.
차를 마시는 순간 홍차에 무얼 탄 것일까 하는 그런 불길한 느낌이 들었지만 생각과 달리 목을 타고 넘어가는 홍차는 부드럽기만 했다.
다른 때였다면 홍차의 달달함에 미소가 절로 나왔겠지만 지금은 딱딱하게 굳은 얼굴이 펴지지 않았다.
디아나는 찻잔을 내려놓고 세이아를 바라보았다.
마음 같아선 자길 부른 용건이 뭔지, 갑자기 왜 잘해 주는 것인지 묻고 싶었지만 디아나는 대공녀에게 감히 따져 물을 수 있는 위치가 아니었다.
“디아나, 오늘 날씨 정말 좋지 않아? 내일이면 북방의 문이 열린다더니 이제 정말 봄인가 봐.”
세이아는 숨을 크게 들이켜며 푸른 하늘을 올려보았다.
그리고 고개를 내리며 디아나에게 눈웃음을 지었다.
정말 진심으로 기분이 좋아 보이는 세이아의 모습에 아이러니하게도 디아나의 얼굴은 더욱 딱딱해졌다.
‘소리 지르며 천한 것이라 욕하는 게 더 편하겠어.’
이 자리가, 세이아의 미소가 몹시도 불편해지던 그때, 세이아가 마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마리, 차만 마시려니 좀 아쉬운 거 같아. 쿠키랑 케이크를 가져와 줄래?”
“네, 다녀오겠습니다, 대공녀님.”
마리가 빠른 걸음으로 사라지자 세이아는 다시 디아나를 응시했다.
“수도로 가는 준비는 잘되어 가?”
세이아의 입에서 수도 이야기가 나오자 디아나의 손이 움찔했다.
디아나는 집요한 옅은 금빛 시선을 비스듬히 피하며 답했다.
“딱히…… 준비할 건 없어서요. 그저 수도에 갈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한 일인걸요.”
“하긴 그건 그래. 네가 수도에 가다니 이건 상상도 못할 일이잖아. 정말 웃긴 일이야. 디아나가 수도에 가다니.”
세이아는 상상도 못할 일이 현실로 벌어진 것이 재밌다는 듯 웃었다.
조롱이 담긴 웃음소리에 디아나는 드디어 세이아의 본심이 나온 거 같아 우습게도 한껏 긴장됐던 몸이 조금 풀어졌다.
“그래도 디아나, 이왕 가게 되었으니 제대로 준비하지 그랬어. 드레스도 사고 신발도 사고. 아, 머리핀이나 목걸이 같은 것도 사고 말이야. 집사에게 그런 걸 사 달라고 하는 게 눈치 보이면 내가 말해 줄까?”
고개를 살짝 숙이고 있던 디아나는 예상과는 전혀 다른 말에 당혹스러움을 느꼈다.
빈정거림이 시작되었으니 찻잔을 집어 던지거나 홍차를 머리 위로 퍼부을 줄 알았다.
한데 나를 도와주고 싶다는 듯한 이 말은 뭐지.
악의라곤 전혀 느껴지지 않는 순수한 물음에 세이아의 시선을 피하던 디아나가 고개를 들었다.
세이아는 뭐든 말해 보란 듯한 얼굴로 디아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대체 무슨 의도인 거지?’
세이아는 상당히 영악한 아이였지만 디아나는 레아 덕분에 적대적인 감정엔 남다른 눈치를 가진 아이였다.
그렇기에 이때까진 세이아가 가짜 미소를 짓더라도 미소 속에 숨겨진 악의적인 의도를 눈치챌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무리 보아도 세이아가 뭘 바라고 이러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세이아는 정말 즐겁다는 눈빛으로 디아나를 보고 있었으니까.
“디아나, 말해 봐. 네가 못 하겠으면 내가 도와줄게. 응?”
“……아뇨, 아니에요. 전 괜찮아요.”
“그래? 너무 아쉽다. 난 네가 수도로 가는 걸 아주아주 많이 기대했으면 했거든.”
‘왜……?’
디아나는 정말 아쉽다는 듯 눈썹을 축 내린 세이아를 보며 턱 끝까지 차오른 말을 삼켰다.
“아! 디아나.”
갑자기 무언가 떠올랐는지 세이아는 손뼉을 치며 다시 밝은 얼굴로 디아나를 불렀다.
“네?”
“여기 말이야. 사실 내가 널 위해 특별히 준비한 자리인데 마음에 들어?”
“여기가요?”
“응, 네가 살던 오두막이랑 그리 멀지 않은 곳이잖아. 빨래터랑도 가깝고 익숙해서 좋지 않아?”
“……이곳은 잘 온 적이 없어서요. 별로 익숙한 곳은 아니에요.”
“그래? 난 네가 이곳이랑 정말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구나.”
“네.”
세이아는 실망한 듯 시무룩한 얼굴로 디아나를 바라보다 흠, 작은 숨을 내뱉었다.
무얼 고민하는지 톡톡 작은 손가락으로 턱을 두드리던 세이아는 나직이 중얼거렸다.
“마리가 너무 늦네. 무슨 일인 건지 내가 잠시 다녀와야겠어.”
세이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아니에요, 제가 다녀올게요.”
디아나가 따라 일어나며 말하자 세이아가 다급히 외쳤다.
“안 돼!”
“……?”
허공을 울리는 날카로운 목소리에 디아나의 눈이 커졌다.
세이아는 방금 소리를 지른 아이답지 않게 방긋 미소를 지었다.
“디아나, 넌 여기에 있어. 내가 다녀올게. 내가 널 여기로 초대한 건데…… 손님을 움직이게 할 순 없잖아.”
“그래도 제가 어떻게…….”
“아냐, 정말 괜찮아. 금방 다녀올 테니까 잠시만 기다리고 있어.”
괜찮다는 말에도 디아나가 서 있자 세이아는 그녀에게로 다가왔다.
“앉으라니까.”
세이아는 디아나의 어깨를 잡고 앉으라는 듯 꾹 눌렀다.
아이답지 않게 강한 힘에 디아나는 반쯤 억지로 다시 자리에 앉게 되었다.
어깨가 아파 눈살이 찌푸려지려던 때 세이아가 어깨를 잡은 손을 놓았다.
“어디 가지 말고 여기서 가만히 있어야 해. 알았지?”
“……네.”
디아나의 대답을 들은 세이아는 만족스러운지 환한 미소를 지으며 몸을 돌렸다.
하지만 숲을 나가면서도 뭐가 그리 불안한지 세이아는 몇 번이나 뒤를 돌아보며 디아나에게 어디 가지 말고 기다리라 외쳤다.
세이아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자 디아나는 그제야 긴장을 풀며 깊은 숨을 내쉬었다.
“후…… 대체 왜 이러는 거지.”
디아나는 세이아가 뭘 하려고 이러는 건지 생각해 보았지만 딱히 떠오르는 게 없었다.
‘정말 갑자기 자신과 잘 지내고 싶어진 건…… 당연히 아닐 테고.’
“이곳에서 밤까지 혼자 기다리게 하려고 그러나.”
가장 그럴 듯했지만 세이아의 괴롭힘치곤 너무 약했다.
이곳은 인적이 드문 곳도 아니었고 이제 겨울도 다 지나 세이아를 기다리며 추위에 떨 일도 없었다.
겨우 이 정도로 괴롭힐 작정으로 티 테이블을 마련하고 둘만 있는데도 그렇게 밝은 얼굴을 하고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세이아는 문득문득 디아나를 바라볼 때 뭔가를 기대하는 듯한 눈빛으로 보았었다.
그렇다면 이곳에서 뭔가를 할 생각은 맞는다는 건데…….
“그게 뭘까.”
디아나는 너른 공터와 숲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가까운 하녀들의 저택도 보았다.
하지만 아무리 둘러보아도 디아나를 괴롭힐 만한 것들은 눈에 띄지 않았다.
혹시나 싶어 찻잔도 만져 보고 테이블도 살펴보았지만 어디 부서지거나 금이 간 곳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럼 자기 물건을 일부러 망가뜨렸다는 거짓말을 할 생각도 아니란 건데.
“정말…… 이상해.”
디아나가 수도에 따라간다는 말을 들었을 때 죽일 듯이 노려보던 세이아의 눈빛을 아직 기억하고 있었다.
그런데 세이아가 이렇게 가만히 있는다고?
알 수 없는 불안감에 입술을 살짝 깨문 그때, 숲속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뭐지.”
디아나는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은 빨래터와 연결되는 지점으로 큰 나무와 잡초들이 무성한 곳이었다.
긴장된 얼굴로 그곳을 바라보았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바람 소리였나.”
착각이었나 보다, 하고 고개를 돌리려던 그때 소리가 한 번 더 울렸다.
바스락, 바스락.
이번엔 소리가 멈추지 않고 연이어 들려왔다. 그리고 소리는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풀숲엔 사람의 인영이라곤 보이지 않았다.
“뭐야…….”
디아나는 알 수 없는 무언가의 발소리에 몸이 뻣뻣하게 경직되었다.
두려움에 젖은 시선으로 그곳을 보던 디아나는 갑자기 빨라지는 발소리에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의자가 뒤로 퍽 넘어졌지만 디아나는 그걸 신경 쓸 틈이 없었다.
도망가야 해.
본능적으로 느낀 위험에 급히 몸을 돌린 그 순간 풀숲에서 무언가 팍 튀어나와 디아나를 향해 덤벼들었다.
“꺄아아아아…… 아?”
자신을 향해 뛰어오른 형체에 눈을 감으며 비명을 지르려던 디아나는 미약한 동물의 울음소리에 실눈을 떴다.
“냐아-.”
그러자 자신의 어깨에 발을 올리고 선 커다란 고양이가 보였다.
정면으로 마주친 고양이의 짙고 푸른 눈동자를 본 순간 디아나의 입술이 느리게 움직였다.
“……넌 그때…… 그 야옹이?”
매서운 눈바람이 불었던 밤, 오두막이 너무 추워 혼자 장작을 구하러 갔던 언덕에서 만났던 커다란 고양이, 유네스였다.
어둠 속에서 봤을 때와 달리 밝은 낮에 보니 야옹이라고 부르기엔 좀 많이 큰 것 같았지만 짙고 푸른 눈동자를 반짝이는 유네스를 보니 미소가 절로 나왔다.
“아…… 그러고 보니 여기랑 거기랑 그렇게 멀지 않구나.”
고양이가 나온 곳이 빨래터로 이어지는 쪽이었으니 길을 헤맸거나 아님 이곳이 고양이가 하녀들에게 밥을 얻어먹는 곳인 듯했다.
“냐아-.”
디아나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자 꼭 자신을 부르듯 울음소리를 냈다.
유네스는 디아나의 어깨 위로 턱을 올렸다.
왠지 안아 달라는 듯한 느낌의 행동에 디아나는 어설프게 팔을 들어 유네스를 안아 주었다.
그러자 유네스는 기분 좋은지 가르릉 소리를 내며 디아나의 목에 얼굴을 비볐다.
“간지러워.”
디아나는 보들보들한 털에 웃음을 터뜨리며 목을 움츠렸다.
그러자 유네스가 이번엔 디아나의 얼굴을 핥았다.
다른 사람이 본다면 고양이가 오랜만에 만난 주인에게 애교를 부린다고 오해할 듯한 모양새였다.
유네스의 격한 애교에 웃던 디아나는 이러다 볼이 침 범벅이 될 것 같아 고양이를 밀어냈다.
“숲에서 나온 게 너였다니, 괜히 겁먹었네.”
디아나는 몬스터라도 나오는 줄 알고 비명을 질렀던 것이 생각나 머쓱한 미소를 지었다.
“냐아-.”
푸른 털을 가진 유네스는 디아나와 거리가 멀어지자 싫다는 듯 다시 몸을 디아나 쪽으로 기대었다.
“……사람을 좋아하는구나.”
디아나는 애달프게 우는 고양이가 안쓰러워 부드럽게 등을 쓰다듬어 주었다.
“근데…… 그때도 느꼈지만 고양이가 원래 이렇게 큰가? 너 고양이 맞는 거지?”
디아나는 큰 동물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고개를 갸웃했다.
글도 배웠고 데릴에게 수업을 듣고 있어 예전보다 아는 것이 많이 늘긴 했지만 아직 동물들에 관해선 잘 몰랐다.
지금은 제국의 신화와 역사 등 기본적인 문화에 대해 공부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몬스터나 동물에 관해선 아직 책을 읽고 본 것이 적어 아는 것도 부족했다.
눈앞의 고양이도 언젠가 쿤타가 자신이 키우는 고양이라며 보여 준 그림과 많이 닮아 고양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었다.
물론 쿤타의 그림 속과 크기는 많이 달랐지만 그냥 좀 많이 크다고 느낄 뿐 뭐가 이상한지는 정확히 알지 못했다.
디아나는 유네스를 잠시 바라보다 이내 고개를 저었다.
“당연히 고양이겠지. 네가 고양이가 아님 뭐겠어. 그치?”
괜히 의심한 거 같아 미안해 목을 만져 주자 유네스는 눈을 나른하게 접으며 긴 꼬리를 살랑살랑 느리게 흔들었다.
같이 나른해지는 기분에 미소를 짓던 디아나는 낮게 중얼거렸다.
“근데…… 대공녀님은 왜 이리 안 돌아오시는 걸까.”
잠깐 하녀를 찾으러 다녀온다던 세이아는 시간이 꽤 흘렀음에도 아직까지 이곳으로 오지 않고 있었다.
“정말 그냥 날 여기서 하루 종일 기다리게 하려고 부른 거였나?”
다른 수가 있었다면 진작 일어나도 일어났을 텐데.
“그래도 혼자는 아니라 덜 외롭겠다.”
“냐아.”
디아나는 또 자신의 말을 알아듣는 듯 답하는 유네스를 보며 피식 웃고는 넘어진 의자를 세웠다.
의자에 앉아 편하게 시간을 보내려던 그때, 멀리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쪽이야! 어서 서둘러!”
“……?”
“디아나가 위험해! 어서 서둘러야 해!”
급박함이 가득한 목소리가 또 한 번 울리자 디아나는 그 목소리가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있었다.
“세이아?”
분명 세이아의 목소리였다.
‘근데 내가 위험하다니 그게 무슨 말이지?’
의아함과 동시에 사람들의 급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숲길을 뛰어오는 듯한 소리를 듣자 디아나는 무슨 일이 벌어질 것 같은 불길함에 얼굴을 딱딱하게 굳혔다.
발소리는 이쪽으로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우르르 울리는 발소리는 절대 한두 명의 것이 아니었다.
세이아의 알 수 없는 다급한 말과 사람들의 발소리.
디아나는 그것들이 절대 우연이 아닐 거란 걸 알았다.
‘대체 무슨 일을 꾸민 거야, 세이아.’
대체 뭘 하려는 건지 짐작이 가지 않아 당황하던 그때, 얌전하던 고양이의 분위기가 바뀌었다.
“카악!”
방금까지 느른한 울음소리를 내며 엎드려 있던 유네스는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풀숲 너머를 향해 날카로운 송곳니를 드러냈다.
보드랍던 털이 바짝 서고 푸른 눈동자가 세모꼴로 바뀌었다.
순하디순했던 유네스가 드러낸 맹수 같은 공격성에 디아나는 순간 저도 모르게 고양이에게서 손을 거두었다.
털에 숨겨진 날카로운 발톱까지 드러나자 디아나는 제 곁에 선 이 동물이 고양이가 맞는 건지 재차 의심이 들었다.
“……야옹아?”
디아나의 목소리가 살짝 떨린 순간 관리되지 않은 정원의 잡초를 밟으며 사람들이 공터로 모습을 드러냈다.
디아나는 하인들이 들고 있는 두꺼운 쇠봉을 보고 굳은 얼굴을 했다.
그게 무엇에 쓰는 물건인지는 정확히 몰라도 상당히 위험한 물건이란 건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무기 같은 것이 디아나의 앞에 서 있는 고양이를 향해 있다는 것도.
‘고양이를 왜…….’
하인들이 쇠봉을 겨누자 유네스의 꼬리가 바짝 섰다.
“크르르…….”
유네스의 위험한 울음소리가 공터를 스산하게 울렸다.
몸을 앞으로 낮추는 모습이 하인들을 향해 당장 튀어나갈 듯 아슬아슬해 보였다.
안 좋은 일이 벌어질 거 같은 예감에 유네스를 향해 손을 뻗은 순간 하인 한 명이 디아나에게 외쳤다.
“아가씨, 괜찮으십니까?!”
“……난.”
“디아나? 디아나를 발견했어? 디아나는 어때? 많이 다친 거야? 어떻게 됐어?”
하지만 디아나가 대답을 하기도 전에 하인들의 뒤편에서 세이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곧 세이아는 위험해서 안 된다는 하인들의 다리를 밀어내며 모습을 드러냈다.
“디아나, 어떡…….”
유네스에게 다쳐 아파하고 있을 디아나가 있을 것이라 기대했던 세이아는 멀지 않은 곳에 멀쩡히 서 있는 디아나를 보고 말을 멈추었다.
“……어떻게…….”
다친 곳은 하나도 없어 보이는 디아나의 모습에 세이아의 얼굴에서 울음 섞인 슬픔이 완전히 사라졌다.
세이아가 떠나고 시간이 짧았던 것도 아니었다.
분명 유네스의 공격을 받고도 남을 시간이었는데, 어째서 다친 곳이 하나도 없는 거지?
거기다 지금 디아나를 공격해야 할 유네스는 꼭 디아나를 지키는 것처럼 디아나를 등지고 서 있었다.
‘말도 안 돼.’
자신을 보자마자 공격했던 유네스가, 불과 이틀 전에 사람을 크게 다치게 한 그 유네스가 디아나를 지키듯 서 있다니 이건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자신의 엄마와 각인을 한 상급 몬스터라고 했었다.
치료를 받으면 자신에게 충성할 귀하디귀한 상급 몬스터.
그런 유네스가 다른 사람도 아닌 디아나를 지키려 한다니 믿기지 않는 일이었다.
“유네스…….”
눈앞에 벌어진 믿기 힘든 상황에 멍해진 세이아가 유네스의 이름을 중얼거린 순간 유네스의 세모꼴 눈동자가 정확히 세이아를 향했다.
마치 죽여야 할 적을 찾아낸 것처럼.
서슬 퍼런 유네스의 눈빛에 세이아의 몸이 쩍 굳은 순간 유네스가 땅을 박차며 튀어 올랐다.
“꺄아아!”
“대공녀님!”
“꺄아악!”
“캬악!”
정확히 세이아를 향해 덤빈 유네스의 공격에 상황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굳어서 움직이지 못하는 세이아를 옆으로 밀어낸 하인이 쇳덩이로 유네스의 날카로운 발톱을 막아 보려 했지만 유네스가 발을 한번 휘두르자 종잇장처럼 쉽게 날아가고 말았다.
“대공녀님을 피신시켜!”
하인들이 소리를 지르며 유네스를 둘러쌌다. 뒤에서 유네스의 등을 쇠봉으로 내려치고 양쪽 옆에서 쇳덩이로 유네스를 압박했다.
“대공녀님, 어서, 어서 도망가셔야 해요.”
마리는 덜덜 떨며 세이아를 붙들었다. 넋이 나간 듯한 세이아의 손을 잡고 서둘러 도망가려던 순간 유네스를 압박하고 있던 하인들이 우수수 튕겨 나갔다.
“카아악!”
하인들의 공격에 더 기세가 사나워진 유네스의 울음소리가 몬스터의 포효처럼 황량한 정원을 크게 울렸다.
애초에 기사들도 아닌 하인들로 상급 몬스터를 막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 게 실수였다.
세이아가 기사들에게 알리면 아버지가 알게 될 것이니 싫다고 고집했어도 기사들을 불렀어야 했다.
마리는 뒤늦게 후회했지만 이미 늦은 일이었다.
아니, 어쩌면 세이아의 명령으로 목숨 걸고 유네스를 몰래 풀어 주었던 그때부터 이미 예견되었던 건지도 몰랐다.
“대공녀님, 정신 차리세요. 도망가셔야 해요!”
마리는 다급히 외쳤지만 이미 겁을 먹은 세이아는 덜덜 떨고 있을 뿐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크르르-.
점점 이쪽으로 가까워지는 유네스에 마리는 주변을 급히 둘러보았지만 축 늘어진 하인들은 일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아, 안 돼…….”
코앞까지 다가온 유네스가 마리와 세이아를 잡아먹을 듯 입을 벌린 그 순간, 디아나의 목소리가 허공을 크게 울렸다.
“안 돼!”
모든 상황이 눈 깜짝할 새 벌어졌다.
디아나가 이 상황을 제대로 인식하기도 전에 말이다.
하인들이 쓰러져 널브러진 처참한 광경에 몸을 살짝 떨던 디아나는 겨우 정신을 차리며 느리게 눈을 깜박였다.
정신을 차리자마자 보인 것은 대공녀와 하녀를 향해 고양이가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는 모습이었다.
소름이 돋는 두려움에 디아나는 온 힘을 다해 소리쳤다.
“안 돼!”
디아나의 목소리가 허공을 날카롭게 울린 순간 거짓말처럼 유네스가 멈추었다.
이빨을 숨기며 천천히 입을 다문 유네스는 디아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자신을 바라보는 짙푸른 눈동자는 여전히 맹수처럼 위험하게 번뜩이고 있었지만 디아나는 왜인지 그 눈빛이 두렵지 않았다.
디아나는 천천히 고양이를 향해 걸음을 내디뎠다.
빠르지 않게, 한 걸음씩.
그렇게 마침내 유네스의 앞에 당도한 디아나는 덜덜 떨고 있는 마리와 넋을 놓은 세이아의 앞을 막아섰다.
“……야옹아, 나야.”
디아나는 나직이 고양이를 불렀다.
여기까지 걸어오는 동안 유네스는 짙푸른 눈동자를 깜박이지도 않고 디아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괜찮아. 괜찮아, 야옹아.”
디아나는 마주친 눈을 피하지 않으며 천천히 손을 들었다. 이 모든 상황이 벌어지기 전, 유네스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던 그때처럼.
난 널 공격하지 않아.
그리고 너도 날 공격하지 않을 거야.
디아나의 마음이 전해진 듯 유네스의 거친 숨소리가 조금씩 가라앉기 시작했다.
가까워지는 작은 손을 향해 고양이의 머리가 숙여지던 그때, 날카로운 비명 소리가 정원을 울렸다.
“꺄아아악!”
넋을 놓고 있던 세이아가 갑자기 발작하듯 비명을 질렀다.
“저리 가! 저리 가!”
세이아는 눈앞의 유네스에게 미친 듯이 소리를 질렀다.
“대공녀님, 진정, 진정하세요!”
마리가 다급히 세이아를 붙잡았지만 지금 세이아는 겁에 단단히 질려 제정신이 아니었다.
이성을 잃은 세이아에게 마리의 목소리는 들리지도 않았다.
탁!
“아앗!”
세이아는 어린아이의 힘이라고 믿을 수 없을 만큼 강한 힘으로 마리를 세게 밀쳤다.
마리가 뒤로 넘어지며 디아나를 밀쳤고 결국 마리와 디아나 둘 다 바닥에 쓰러지게 되었다.
“크르르!”
디아나가 바닥으로 넘어지자 유네스의 기세가 다시 사나워졌다.
유네스는 세이아를 향해 한 발을 내디디며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냈다.
“까아악! 살려 줘!”
세이아는 당장 날카로운 이빨로 자신을 잡아먹을 듯한 유네스의 모습에 기겁하며 비명을 내질렀다.
“야옹아! 안 돼!”
“안 돼!”
디아나의 다급한 목소리가 울린 그 순간 수풀 속에서 누군가 나타났다.
“으아아-!”
비명 같은 기합을 내지르며 나타난 사람은 재빠르게 달려와 유네스의 옆구리로 날카로운 나무토막을 찔러 넣었다.
캬악-!
옆구리를 깊게 찔린 유네스의 커다란 몸이 비틀거렸다.
땅바닥으로 흩뿌려지는 선명한 피도 충격적이었지만 더 경악스러운 것은 날카로운 나무토막을 들고 있는 사람이었다.
“……엄마?”
헝클어진 갈색 머리카락, 다 해진 옷, 거기다 피가 묻은 날카로운 나무토막을 들고 있는 모습은 사람이 아닌 귀신 같았지만 분명 레아였다.
디아나의 미약한 음성이 허공으로 흩어진 순간 피가 뚝뚝 떨어지는 나무토막을 들고 있던 레아의 고개가 움직였다.
그리고 정확히 디아나를 내려다보았다.
어릴 적, 자신을 죽기 직전까지 때릴 때 보았던 눈빛이었다.
살의가 넘실거리는 위험한 눈빛.
디아나는 본능적인 공포심에 몸이 딱딱하게 경직되었다.
“크아악!”
잠시 비틀거렸던 고양이의 짐승 같은 포효 소리가 울리자 레아는 더 이상 디아나를 바라보지 않았다.
“죽어 버려!”
붉은 피가 선명한 날카로운 나무토막을 높이 쳐든 순간 유네스의 커다란 발이 레아의 몸을 후려쳤다.
피에 젖은 나무토막이 바닥으로 떨어지고 레아의 몸도 바닥을 뒹굴었다.
“아악!”
또 한 번 눈앞에서 본 유네스의 공격에 세이아는 공포에 질린 비명을 내질렀다.
레아에게 방향을 틀었던 유네스가 비명 소리에 세이아를 향해 몸을 돌리자 덜덜 떨고 있던 마리가 널브러진 나무토막을 들고 유네스에게로 뛰어들었다.
하지만 채 닿기도 전에 마리의 몸이 속절없이 튕겨 나갔다. 나무에 세게 부딪친 마리의 몸이 축 늘어졌다.
그 모습을 본 세이아는 몸을 덜덜 떨며 목이 쉬도록 소리를 질렀다.
“살려 줘! 아버지! 아버지!”
아버지가 나타나 자신을 구해 주길 바라며 애타게 외쳤지만 세이아의 목소리가 저택까지 닿을 리는 만무했다.
세이아의 울음 섞인 목소리에 디아나는 경직된 몸을 억지로 일으켰다.
갑자기 나타난 레아가, 자신을 죽일 듯 보던 레아가 무서웠지만 지금은 세이아를 구하는 것이 먼저였다.
“야옹아, 제발 이러지 마.”
황급히 달려가 고양이의 앞을 막았지만 고양이의 짙푸른 눈동자는 디아나를 보고도 온순해지지 않았다.
계속되는 공격과 위협에 디아나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는 거 같았다.
유네스는 피를 토한 듯 붉은 선혈이 가득한 이빨을 드러내며 디아나를 향해 울부짖었다.
“꺅, 싫어!”
짐승의 으르렁거림을 들은 세이아가 디아나를 거칠게 밀었다.
“아!”
“크악!”
디아나의 몸이 앞으로 기울었다. 그것을 공격이라 오해한 유네스가 큰 머리로 디아나의 몸을 세게 쳤다.
“윽!”
디아나의 몸이 바닥을 굴렀다. 온몸이 부서지듯 아파 디아나는 순간 아무런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디아나가 나가떨어지자 유네스는 진득한 붉은 피를 흘리며 세이아에게 한 발 한 발 가까워졌다.
세이아는 엉덩이를 뒤로 밀며 도망쳤지만 턱, 등 뒤로 단단한 나무가 닿았다.
더 이상 도망갈 곳이 없었다.
“꺼져! 저리 가! 가까이 오지 마!”
“윽…….”
멀리서 들려오는 세이아의 목소리에 디아나는 신음을 흘리며 고개를 들었다.
뚝뚝-.
디아나의 머리에서 피가 떨어졌다.
손으로 이마를 쓸자 손바닥이 붉게 물들었다.
“아…….”
피를 닦으며 일어나자 밀려드는 어지러움에 몸이 비틀거렸다.
“도움을…… 도움을 청해야…… 하는데…….”
디아나는 저 멀리 보이는 대공성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곳까지 달려갈 힘은 없었다,
뭐라도 해야 해…….
디아나는 커다란 고양이의 뒷모습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 앞엔 마지막 발악을 하듯 세이아가 손에 잡히는 모든 것을 마구잡이로 던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짐승의 공격성을 더욱 자극한 듯 사나운 울음소리가 정원을 크게 울렸다.
“대공녀님!”
땅을 울리는 그 소리에 정신을 차린 레아가 벌떡 일어났다.
그러다 방해물을 치우듯 제 앞에서 비틀거리는 디아나의 작은 몸을 세게 밀치며 세이아를 향해 달려갔다.
철푸덕, 다시 넘어진 디아나는 쓰라린 무릎을 느끼며 고개를 들었다.
레아는 세이아의 몸을 꽉 끌어안고 온몸으로 보호하고 있었다.
어딘지 익숙한 그 모습에 디아나는 멈칫했지만 두 사람을 향해 앞발을 높이 쳐드는 고양이의 모습에 디아나의 눈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안 돼!”
세이아를 해치면 고양이는 절대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고양이를 잃고 싶지 않아 간절히 외친 순간, 그녀의 몸속에서 무언가 쑥, 빠져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하아…….”
온몸에 힘이 빠지며 디아나의 몸이 옆으로 쓰려졌다.
그리고 아무것도 없던 허공에서 갑자기 만들어진 물의 소용돌이가 유네스를 덮쳤다.
커다란 유네스의 몸을 모두 집어삼킨 소용돌이는 유네스를 가차 없이 바닥으로 내려쳤다.
깽- 약한 소리를 낸 유네스는 곧 미동조차 없어졌다.
그 순간 허공에 떠 있던 물의 소용돌이가 터지듯 바닥 위로 전부 쏟아졌다.
“이게…… 무슨…… 설마…….”
믿기 힘든 광경을 모두 본 레아가 황망히 중얼거렸다.
레아는 자신의 품에서 의식을 잃은 세이아를 끌어안으며 천천히 디아나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그곳엔 갈색 눈이 아닌 영롱한 황금색으로 빛나는 디아나의 눈동자가 정확히 자신을 응시하고 있었다.
“……!”
선명한 황금안을 마주한 순간 레아는 목이 조여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어, 어떻게…….”
공포와 경악으로 물든 레아의 목소리가 떨렸다.
턱까지 덜덜 떨며 디아나에게서 뒷걸음질 치던 그때, 디아나의 눈동자가 갈색으로 바뀌며 바닥으로 머리를 툭 떨구었다.
의식을 완전히 잃은 듯 움직임이 없는 디아나를 보며 레아는 두려움에 질린 얼굴로 품 안의 세이아를 더욱 꽉 끌어안았다.
* * *
“폐하께 드릴 선물은 다 준비되었나?”
“네, 북방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검은머리독수리를 훈련시켜 준비했습니다.”
“검은머리독수리라…… 괜찮군, 형님께선 사냥을 즐기시니 만족하실 거 같군. 잘했다, 로운.”
“감사합니다, 전하.”
이제 수도로 출발하는 날이 얼마 남지 않았기에 모든 준비가 차질 없이 되었는지 대공이 직접 확인해야 했다.
“하론, 세이아와 디아나의 준비도 다 되었나?”
“네, 전하. 대공녀님과 아가씨의 짐도 모두 다 준비되었습니다.”
“그렇군. 그래도 혹시 모르니 마지막까지 빠짐없이 체크하도록 해라. 그리고 의사…….”
함께 떠날 의사도 준비시키라 말하려던 대공은 순간 느껴지는 마나의 파동에 말을 멈추었다.
‘이게 뭐지?’
강력한 마나의 기운이 느껴졌다.
그리고 이것은 그에게 상당히 익숙한 느낌의 마나 파동이었다.
같은 황족들에게서 느껴지는 가디언의 힘이었다.
아직 문이 열리지 않은 북방에 황족이 당도했을 리 없으니 대공 자신이 아니라면 남은 사람은 하나였다.
“전하, 왜 그러십니까.”
대공의 얼굴이 갑작스레 서릿발처럼 굳자 로운 역시 미소를 지우며 물었다.
“하론, 지금 세이아가 어디 있지?”
“그것이…… 오늘 정원에서 티타임을 즐기신다고 하셨…….”
똑똑-.
집사의 말이 끝나기 전, 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다급한 하인의 목소리가 크게 울렸다.
“대공 전하, 큰일 났습니다!”
대공과 로운이 급히 달려 나갔다.
대공은 귀족의 예법마저 잊은 듯 선두로 빠르게 달리고 있었다.
평소에는 차지 않던 검집까지 차고서.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스쳐 지나가는 대공에게서 사람의 숨을 막히게 하는 압도적인 기운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사용인들은 어깨를 뻣뻣이 굳히며 침을 꿀꺽 삼켰다.
잠시 뒤 검은 갑주를 입은 무장한 기사들이 대공의 뒤를 따르자 대공가의 사용인들은 생각했다.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졌다고.
- 하녀들의 정원에서 큰일이 벌어졌습니다. 그 몬스터가 대공녀님과 디아나 아가씨를 공격했습니다. 하인들이 다 쓰려졌고…… 또 대공녀님과 디아나 아가씨께서도 쓰러지셨는데 그…… 제가 감히 대공녀님을 건드릴 수가 없어서…….
하인은 혼란스런 얼굴로 횡설수설했다.
하지만 거기까지 들은 것만으로 충분했다.
대공은 곧장 무장한 기사들을 준비시킨 뒤 제일 먼저 정원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유네스의 공격, 그리고 마력의 파장.
대공은 아리엘을 잃은 그날 밤처럼 피가 차갑게 식어 가고 있었다.
잡초가 무성한 길을 달려 깊숙이 들어가자 넓은 공터가 드러났다.
심장이 두근거리고, 손끝이 차가워진 순간 대공의 시선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홀로 쓰러져 있는 디아나였다.
쿵, 대공의 심장이 크게 울린 순간 그를 부르는 아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버지!”
세이아였다.
그제야 대공은 정신을 차리고 느리게 고개를 돌렸다.
그곳엔 자신의 딸이 있었다.
잔뜩 헝클어지고 눈물 젖은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 난 너를 걱정했었다.’
마력의 파동을 느꼈던 그 순간부터 이곳에 오기까지 그의 머릿속엔 오직 하나뿐인 자신의 딸 세이아의 생각뿐이었다.
한데 왜 그의 시선이 먼저 찾은 것은 디아나였을까.
본능과 이성의 괴리감에 대공은 이성을 찾으려 호흡을 짧게 가다듬었다.
이제 괜찮다.
세이아에게 그리 말하려던 대공은 세이아를 안고 있는 사람을 보고 눈썹을 매섭게 올렸다.
“……레아.”
귀신인지 사람인지 모를 몰골을 하고 세이아를 안고 있는 여자는 다름 아닌 디아나의 친모 레아였다.
‘저 여자가 어떻게 이곳에.’
역겨운 저 여자를 당장 세이아에게서 떼어 놓고 싶었지만 문제는 유네스였다.
쓰러져 있긴 했지만 의식이 있는 건지 없는 건지 확신할 수 없었다.
유네스는 적을 공격하기 전 매복을 하고 숨을 죽일 줄 아는 상급 몬스터였으니까.
“경계를 늦추지 마라.”
스릉-.
대공의 뒤에 선 기사들이 검을 뽑았다.
이 사단을 만들 정도라면 지금 유네스는 극도로 흥분한 상황일 것이다.
대공도 알아보지 못할 가능성이 높았다.
대공은 검집에 손을 얹고 유네스에게로 다가갔다.
검을 뽑으려던 그는 비릿한 피 냄새에 고개를 내렸다.
유네스에게서 흘러나온 피가 땅 위로 작은 웅덩이를 만들고 있었다.
그의 신발을 적신 진득한 피에 대공은 검집에서 손을 거두었다. 그리고 유네스의 주변 땅이 젖은 것을 보았다.
그곳에서 그가 느꼈던 가디언의 힘이 느껴지고 있었다.
단순히 땅이 젖은 것이 아니었다.
유네스에게서도 미미하게 느껴지는 마력.
그것은 가디언의 힘 중 하나인 물을 다스리는 힘이었다.
하지만 어떻게 물을 다스리는 힘이 느껴지는 것인지는 그도 알 수 없었다.
축축한 땅을 굳은 얼굴로 바라보던 대공은 뒤의 기사들에게 명령했다.
“검을 내려라, 의식이 없는 거 같으니. 로운, 유네스에게 목줄을 채워.”
“네.”
대공은 세이아를 향해 가기 위해 몸을 돌렸다.
분명 그리하려 했지만 디아나가 쓰러진 지점에서 대공은 저도 모르게 걸음을 멈칫했다.
“으윽…….”
미약한 신음 소리가 들렸다.
천천히 고개를 돌리자 아이의 눈꺼풀이 미약하게 떨리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곧 디아나가 파르르 눈가를 떨며 실눈을 떴다.
“아버지!”
마주친 시선에 저도 모르게 디아나를 향해 몸이 돌아가려던 순간 세이아의 목소리가 그를 붙잡았다.
대공은 결국 그를 바라보는 디아나의 시선을 외면했다.
시선이 마주했던 아주 짧은 순간이 지나가고 대공은 울먹이고 있는 세이아에게로 달려갔다.
“세이아.”
대공이 나직이 불렀으나 세이아는 몸을 바르르 떨며 레아의 품 안으로 파고들었다.
그가 아닌, 그것도 레아의 품에 안기는 세이아의 모습에 대공의 머리가 차갑게 식었다.
서릿발 같은 대공의 눈빛과 레아의 시선이 마주친 순간 레아가 세이아에게 무어라 속삭였다.
대공의 얼굴이 무섭게 일그러지기 직전 세이아가 레아의 품에서 벗어나 대공에게 와락 안겨들었다.
그리고 너무 무서웠다며 엉엉 울었다.
잘게 떨리는 세이아의 몸에 대공은 레아를 향한 들끓는 분노를 잠재웠다.
크게 놀란 듯 울고 있는 아이에게 안 좋은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세이아의 등을 쓰다듬으며 나직이 속삭였다.
“늦어서 미안하다.”
대공의 낮은 음성에 잔뜩 긴장했던 몸이 풀린 세이아는 엉엉 울다 곧 다시 의식을 잃었다.
“세이아!”
축 늘어지는 몸에 놀란 대공이 세이아를 안아 들었다.
“대공녀님!”
경악이 깃든 레아의 목소리가 날카롭게 울리고 그 소리를 들은 로운이 황급히 대공의 곁으로 다가왔다.
대공비님이 돌아가셨을 때의 대공을 로운은 아직도 선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대공녀님이 쓰러지셨으니 그때처럼 이성을 잃으실까 불안해 대공의 곁으로 달려왔지만 그의 걱정과 달리 대공은 그리 격앙된 모습이 아니었다.
대공은 미간을 좁히며 세이아의 경동맥을 짚을 뿐이었다.
“긴장이 풀려 쓰러진 것이군.”
“전하, 괜찮…… 으십니까.”
“잠깐 놀라긴 했지만 괜찮다.”
“정말, 정말 괜찮으신 겁니까? 의식을 잃으셨습니다! 한데 어찌 그리 가볍게 말씀하십니까?!”
어찌 그럴 수 있냐는 듯 레아가 대공에게 소리쳤다.
찰나의 조소를 머금은 대공은 세이아를 품에 안으며 싸늘한 목소리로 로운을 불렀다.
“로운.”
그의 서릿발같이 차가운 기운은 로운을 향하고 있지 않았다.
부랑자와 다름없는 몰골로 저를 바라보는 레아를 향해 있었다.
로운은 서슬 퍼런 대공의 눈빛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레아를 발견한 로운의 얼굴이 무자비하게 일그러졌다.
“지금 당장 이 여자를 감옥에 가둬라. 그리고 이 여자가 오두막을 나온 건지 알아봐라.”
고개를 숙이고 있던 레아가 억울하다는 듯 머리를 쳐들었다.
“감옥이라뇨! 대공 전하, 전 대공녀님을 구했습니다!”
“구해? 감히 네가 누굴 구해? 넌 구금되어 있는 상태였다. 어떤 사술을 써 밖으로 나온 것인지 모르겠지만 넌 나의 명령을 어겼다. 지금 당장 네 목을 날리지 않는 나의 자비에 감사해.”
대공은 짐승이 으르렁거리듯 금안을 살기로 번뜩였다.
서슬 퍼런 살기를 정통으로 맞은 레아는 순간 어깨를 움츠리며 목을 웅크렸다.
“……전 몬스터의 포효 소리를 듣고 제 딸을 구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예까지 달려온 것입니다.”
대공의 살기에 몸을 떨면서도 레아는 억울하다는 듯 말했다.
“네 딸? 하, 그리 모성애에 애가 타 목숨 걸고 나온 네가 안고 있던 것이 왜 네 딸이 아닌 내 딸인 것이냐. 너는 그 역겨운 낯짝으로 아직도 너의 딸을 찾는구나.”
“전 분명 제 딸을!”
대공의 살기에 이성을 잃은 듯 희번덕한 눈으로 외치던 레아는 곧 말을 멈추었다.
레아의 시선이 대공의 품에 안긴 세이아를 향했다, 황급히 떨어졌다.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레아의 눈동자가 거세게 흔들렸다.
그것을 본 대공은 몸을 감싸는 위화감에 눈썹을 구겼다.
방금, 뭐였지.
대공은 레아의 시선이 닿았던 세이아를 내려다보았지만 이상한 점은 찾아볼 수 없었다.
“전하, 어서 대공녀님을 의사에게 보이는 것이 좋겠습니다.”
로운의 말이 맞았다.
“라울, 세이아를 방으로 데려가.”
잿빛 머리칼의 기사가 대공에게 고개를 숙이며 세이아를 안아 들었다.
라울이 빠른 걸음으로 정원을 나가고 대공의 시선이 레아를 향했다.
“이 여자를 당장 감옥에 처넣어.”
대공의 싸늘한 명령에 하인들이 레아의 두 팔을 잡고 끌었다.
이번엔 아무런 말 없이 고개를 숙이고 있는 레아의 모습이 그의 신경을 거슬리게 했지만 지금 중요한 것은 참혹한 이 상황이었다.
그리고 아까 느꼈던 마력을 제대로 알아봐야…….
힘이 느껴졌던 자리로 가려 몸을 돌리던 대공은 디아나를 안고 있는 에드윈의 모습에 멈칫했다.
“……의식을 잃은 건가.”
왜인지 깊숙이 가라앉는 심장에 대공은 느리게 입술을 뗐다.
“네, 전하.”
디아나를 안은 에드윈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답했다.
많이 놀라 울었을 뿐 크게 다친 곳은 없어 보이는 세이아와 달리 에드윈이 안고 있는 디아나의 몰골은 처참했다.
바닥을 몇 번이나 구른 것인지 흙투성이의 옷과 헝클어진 머리 그리고 이마의 굳은 피까지.
대공의 얼굴이 얼음장처럼 차갑게 굳었다.
“에드윈, 디아나를 데리고 가라. 의사가 도착할 때까지 네가 곁에 있어라.”
“네, 전하.”
에드윈은 의식이 없는 디아나를 조심스럽게 안고 걸음을 옮겼다.
에드윈이 떠나고 쓰러진 하인들과 하녀를 등에 업은 기사들도 모두 정원을 나갔다.
유네스와 로운 그리고 대공만이 정원에 남아 있었다.
대공은 마력이 느껴지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한쪽 무릎을 굽히고 앉자 로운이 물었다.
“전하, 왜 그러십니까.”
“마력이 느껴진다.”
“네?”
대공은 물에 젖은 땅 위로 손을 가져다 대며 눈을 감았다. 그의 손에서 흰빛이 뿜어져 나왔다. 땅 위를 빠르게 훑은 빛이 다시 대공의 손으로 스며들었다.
감았던 눈을 뜬 대공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심각한 얼굴로 자신의 손을 그러쥐었다.
땅 위로 스며든 물은 처음 그의 생각대로 가디언의 힘이 맞았다.
그 말은 곧 초대 황제 이후로 단 한 번도 발현되지 않았던 물을 다스리는 힘이 나타났다는 것이다.
바로 이곳에서.
대공의 옆에서 숨을 죽이고 있던 로운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전하, 적의 침입이라도 있었던 것입니까?”
대공성엔 마법사가 없었다. 마력을 다룰 줄 아는 사람은 대공이 전부였으니 이곳에서 마력이 느껴졌다면 누군가의 침입일 것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어린 대공녀는 아직 의식을 치르지 못했으니까.
로운의 말에도 대공은 굳은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의식을 치르지도 않은 황족이 가디언의 힘을 사용했다.
기나긴 제국 역사 속에서도 이런 경우는 들어 본 적이 없다.
그리고 마력도 마력이지만 이 사단이 왜 일어났는지를 알아야 했다.
“적은 아니다. 로운, 넌 유네스를 일단 내가 쓰던 연무장으로 옮기고 하인들이 깨어나는 대로 이번 일의 진상을 조사해라. 그리고 그 여자가 어떻게 오두막을 나온 것인지도 알아내.”
“네, 전하.”
유네스를 이용해 이런 일을 벌인 자를 용서치 않을 것이다.
대공은 차디찬 얼굴로 쓰러진 유네스를 바라보다 저택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대공이 저택으로 들어서자 기다렸다는 듯 집사가 심각한 얼굴로 다가왔다.
“전하, 대공녀님께서 막 의식을 차리셨습니다.”
“알았다.”
곧장 계단을 오르려던 대공은 물을 담는 은그릇을 들고 2층 복도를 급히 달리는 하녀를 보고 걸음을 멈추었다.
바로 디아나의 하녀였다.
에드윈의 품에 축 늘어져 있던 디아나의 모습이 떠올랐다.
많이 심각한 것인가.
아이의 상태가 걱정되었다.
자신도 모르게 하녀가 들어가는 방 쪽으로 몸을 틀던 대공은 집사의 의아한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전하?”
뒤를 따르던 집사가 갑자기 멈춘 자신을 의문스럽게 보는 것이 느껴졌지만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하론, 디아나의 상태는 어떻지?”
“……아가씨께선 아직 치료를 받으시는 중이라 의원에게 정확한 진단을 받지 못했습니다.”
대공은 디아나의 방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이내 고개를 돌렸다.
그의 딸은 디아나가 아닌 세이아였으니까.
대공은 빠르게 계단을 올라갔다.
하지만 차갑게 돌린 마음과 달리 그의 머릿속엔 피딱지가 굳어 있던 처참한 디아나의 모습이 자꾸만 떠올랐다.
“데려와! 어서 ……를 데려오라니까!”
세이아의 방으로 가까워질수록 날카로운 목소리가 대공의 귀를 울렸다.
대공은 걸음을 서둘렀다.
그리고 방문 앞에 도달하자 정확히 듣지 못했던 세이아의 말을 제대로 들을 수 있었다.
“레아를 데려오라고!”
“레아?”
레이의 이름을 듣자마자 대공의 얼굴이 싸늘하게 굳었다.
그는 집사가 열기도 전에 반쯤 열린 방문을 벌컥 열었다.
갑작스럽게 열린 문에 세이아와 유모의 시선이 대공을 향했다.
놀란 얼굴의 유모가 먼저 황급히 허리를 숙였다.
“대공 전하.”
“아버지!”
침대에 앉아 있던 세이아가 벌떡 일어나 쪼르르 대공에게 달려왔다.
대공은 익숙하게 자세를 낮추었지만 세이아를 품에 안지 않고 작은 어깨를 잡았다.
“세이아, 방금 뭐라 했느냐.”
“……네?”
“방금 내가 들어오기 전에 유모에게 했던 말 말이다.”
“……레아를 데려오라고 했어요.”
자신이 잘못 들었나 싶었는데 그를 비웃듯 세이아는 레아의 이름을 분명히 말했다.
세이아가 그 여자를 찾다니.
순간 딱딱하게 얼굴이 굳을 뻔했다. 그는 본능적인 분노로 번뜩일 금안을 숨기려 고개를 숙였다.
다른 사람도 아닌 자신과 아리엘의 딸이 레아를 간절히 찾는 것을 이해할 수도 이해하고 싶지도 않았지만 세이아는 겨우 10살이었다.
어른들의 과거의 원한들을 이해하기엔 세이아는 너무 어렸다.
거친 호흡을 가다듬으며 분노를 다스린 그는 다시 세이아를 바라보았다.
“……레아는 왜 찾는 거니.”
“아까 몬스터가 덮쳤을 때, 레아만 절 지켜 줬어요. 마리는 도망갔고, 하인들도 몬스터를 이기지 못했는데 레아가 절 구해 줬어요. 그러니 아버지, 레아를 불러 주세요.”
그의 옷자락을 꽉 그러쥔 세이아에 대공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세이아는 단단히 겁을 먹은 듯한 얼굴이었다.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엔 두려움이 가득했다.
충격을 받은 듯한 아이에게 차마 안 된다고 단호히 말할 수 없었다.
세이아를 안고 일어난 그는 침대 위로 세이아를 내려놓았다.
침대 헤드에 등을 편히 기대게 해 주고 무릎 위로 이불을 덮어 준 대공은 침대에 걸터앉았다.
“세이아, 지금 네가 느끼는 두려움이 크다는 걸 잘 알고 있단다. 하지만 이제 무서운 일은 다 끝났으니 안심하거라. 다시는 그 무엇도 널 해칠 수 없게 할 것이다.”
“레아가 있으면 더 안심이 될 거 같아요. 아버지, 레아를 불러 주세요.”
맹세와 같은 말에도 세이아는 앵무새처럼 레아를 불러 달라는 말만 반복했다.
“유네스가 또 이곳으로 오면 어떡하죠? 제가 또 위험해졌는데 아무도 없으면 어떡해요? 유모도 마리도 아무도 못 믿겠어요. 레아가 있어야 해요.”
세이아는 너무 무섭고 불안하다는 듯 눈물을 방울방울 흘리며 울었다.
엉엉 우는 세이아의 모습에 유모가 곁으로 와서 달래 보려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세이아.”
대공의 목소리도 들리지 않는 듯했다.
세이아의 울음소리가 방 안을 가득 채웠다.
그때 난감한 얼굴을 하고 있던 집사가 무언가 결심한 듯 얼굴을 굳히며 대공에게 다가갔다.
“전하, 의원의 말로는 대공녀님께서 몸의 상처는 없으나 정신적으로 충격이 크신 것 같다고 하셨습니다. 더 놀라시면 또 쓰러지실 수 있다고 하셨으니…… 일단은 대공녀님의 말씀을 들어주시는 것이 어떠신지…… 요?”
조심스럽게 말한 집사는 대공의 날카로운 시선에 고개를 조아렸다.
“지금 그 여자를 부르라 했느냐.”
“……송구합니다. 하나 지금은 대공녀님을 안정시킬 다른 방도가 없습니다, 전하.”
그런 말을 할 것이면 당장 나가라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세이아의 울음소리는 점점 커지고 있었다.
대공은 집사가 아닌 숨이 넘어갈 듯 우는 세이아를 바라보았다.
세이아의 울음을 그치게 할 다른 방도를 찾고 싶었지만 진정제를 쓰지 않는 이상 세이아가 안정될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어린아이에게 독한 약을 쓸 순 없기에 남은 방도는 하나였다.
얼굴을 일그러뜨린 대공은 짓씹듯 집사에게 명했다.
“하론, 레아를 데려와.”
“네, 전하.”
집사가 급히 나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와.”
누군지 굳이 듣지 않아도 방문 앞에 누가 서 있을지 알 수 있기에 대공은 차갑게 굳은 얼굴로 말했다.
문이 열리고 레아가 방으로 들어왔다. 다른 사람은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는 듯 레아는 곧장 울고 있는 세이아에게로 달려갔다.
“대공녀님, 왜 이리 우시는 겁니까. 혹 어디 크게 다치신 겁니까?”
레아가 무슨 보물을 쓰다듬듯 세이아의 볼을 쓰다듬자 방이 떠나가라 엉엉 울었던 세이아의 울음이 거짓말처럼 멈추었다.
세이아는 레아의 손이 유일한 동아줄인 것처럼 꼭 잡으며 훌쩍였다.
“흡…… 무서웠어. 레아가 아무도 날 공격하지 못하게 지켜 줘야 해.”
“네, 네, 그러겠습니다. 아무런 걱정하지 마세요.”
“응.”
세이아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이제야 안심이 된다는 듯 레아의 가슴에 머리를 기댔다.
도저히 그 모습을 보고 있기 힘들어 대공은 결국 몸을 돌렸다.
그렇지 않으면 당장 자신의 딸을 끌어안은 저 역겨운 여자를 방 밖으로 집어던질 거 같았기 때문이다.
지금은 세이아의 안정만 생각해야 한다.
세이아가 안정을 찾고 나면 다시 지하 감옥에 처넣으면 될 것이다.
대공은 애써 들끓는 마음을 다스렸다.
“하론, 저것이 딴짓을 하지 못하도록 네가 직접 감시해라.”
하론 말곤 아무도 듣지 못할 작은 목소리였다.
“네, 전하.”
세이아를 다독이는 레아의 목소리를 듣고 있던 대공은 얼음장처럼 굳은 얼굴로 방을 나섰다.
세이아의 방을 나온 대공은 집무실이 아닌 계단을 한 층 내려갔다.
복도로 몸을 돌리자마자 막 디아나의 방에서 나오는 의원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대공을 발견한 의원이 고개를 숙이자 그는 빠른 걸음으로 의원의 앞에 섰다.
“디아나의 치료는 끝난 것이냐.”
“네.”
“상태는?”
“전신의 타박상과 이마가 찢어지셨습니다만 다행히도 내상의 흔적이나 머리 내부를 크게 다치시진 않으셨습니다.”
“……머리에서 피가 많이 났던데 정말 괜찮은 것이냐.”
멈칫하던 의원은 흔들림 없는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네, 전하.”
“수고했다.”
“네, 전 그럼 치료약을 준비하러 가 보겠습니다.”
“그래.”
머리를 조아린 의원이 복도를 떠나고 대공은 디아나의 방문 앞에 섰다.
문고리를 향해 손을 뻗던 그는 멈칫하며 손을 내렸다.
그는 복잡한 눈빛으로 디아나의 방문을 바라보았다.
그는 북방의 주인인 대공이었고 이 저택은 자신의 것이다.
디아나의 방에 들어가는 것에 망설일 이유가 조금도 없었지만 이상하게도 지금은 쉽지 않았다.
정원에서 디아나를 외면했던 것이 목에 가시가 걸린 듯 그의 마음을 불편하게 했기 때문에.
분명 디아나는 그를 보았었다.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눈이 마주쳤었고 무어라 입술을 달싹이던 디아나를 그는 외면했다.
세이아에게 가기 위해.
“하아.”
대공은 얼굴을 거칠게 쓸어내리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학대당한 디아나를 불쌍하게 여기고 있긴 하지만 디아나가 세이아를 넘어설 순 없었다.
위급 상황이 온다면 당연히 그는 디아나가 아닌 세이아를 챙겨야 한다.
근데 왜 이렇게 디아나를 외면한 게 마음에 걸리고 죄책감이 드는 거지.
레아의 딸인 디아나에게 그는 이미 과분할 정도의 호의를 베풀었는데 말이다.
달칵-.
스스로가 이해되지 않아 짜증이 나던 그때 닫혀 있던 문이 열렸다.
피비는 문 앞에 서 있는 대공의 모습에 놀라 움찔하다 황급히 허리를 숙였다.
“대공 전하를 뵙니다.”
피비의 목소리에 방 안에서 디아나를 보고 있던 에드윈이 문 쪽으로 나왔다.
“대공 전하를 뵙니다.”
“둘 다 일어나라.”
대공은 에드윈을 바라보았다.
“디아나는 일어났나?”
“아직…… 의식이 없으십니다.”
“……그렇군.”
아직도 의식이 없다니.
큰 돌덩이가 그의 가슴을 짓누르는 기분이 들었다.
“들어오시겠습니까, 전하.”
에드윈의 물음에 대공은 방 안의 침대를 바라보았다.
침대 위에 미동도 없이 누워 있는 디아나의 모습이 흐릿하게 보였다.
“……잠시 보고 가지.”
대공은 방 안으로 들어섰다. 복잡한 마음에 침대까지 얼마 되지도 않는 거리를 느린 걸음으로 걸었다.
마침내 걸음을 멈춘 대공은 침대 위, 고요하게 누워 있는 디아나를 내려다보았다.
이마에 덕지덕지 묻어 있던 핏자국은 없었지만 하얀 붕대가 이마의 반을 가리고 있었다.
머리를 칭칭 싸맨 붕대를 보자 속에서 뭔가 울컥하는 기분에 간신히 숨을 골랐다.
그리고 천천히 시선을 내렸다.
치료를 했음에도 자잘하게 쓸린 상처들이 얼굴과 팔, 다리에 많았다.
제 자식이 아님에도 그 상처가 가슴을 묵직하게 눌렀다.
한데.
“……근데도 그 여잔 너를 한 번 쳐다보지도 않았어.”
열 달을 품어 목숨 걸고 낳은 자기 자식은 이렇게 의식도 없이 누워 있는데 레아는 디아나의 안위는 궁금해하지도 않았다.
정원에서도 레아는 디아나에게 눈길 한 번 준 적이 없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나.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혹시라도 자신이 아이를 죽일까 두렵다며 몰래 의원의 도움도 없이 산파 한 명과 아이를 낳았다 했었다. 그렇게 힘들게 낳은 아이가 제게 인정을 받지 못해 미쳐 버리기라도 한 걸까.
레아는 자신의 딸이, 가계도에도 오르지 못한 디아나가 아닌 대공녀로 칭송받는 세이아라는 듯 감싸고 있었다.
“하긴 제정신이 아니니 제 자식을 죽이려 했겠지.”
거기다 유네스의 습격도 레아의 소행일 가능성이 높았다.
대공은 레아를 보통의 어미들과 비교한 스스로에게 조소를 머금었다.
눈을 감고 있는 디아나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대공이 에드윈에게 물었다.
“의식을 차린 적은 없었나?”
“네, 정원에서부터 계속 의식이 없으십니다.”
“흠.”
정원에서 지금까지 시간이 꽤 흘렀는데.
대공이 미간을 좁히던 그때, 의원이 다시 방으로 들어왔다.
침대로 다가온 의원은 대공에게 약소한 인사를 올리고 동그란 통을 열었다.
시원한 향이 올라오는 약초는 대공도 잘 알고 있는 가벼운 타박상에 쓰는 약초였다.
의원은 약초의 원액을 뽑아내 만든 찐득한 연고를 디아나의 팔과 다리 곳곳에 발라 주었다.
그리고 모든 치료를 마쳤다는 듯 몸을 일으켰다.
“잠깐.”
대공은 방을 나가려는 의원을 붙잡았다.
“네, 전하.”
“머리를 다치지 않았다고 했었지?”
“네.”
“그럼 단순한 의식 소실이라는 건데 왜 아직도 의식이 돌아오지 않는 것이냐.”
대공의 물음에 의원의 얼굴에 당황이 스쳐 지나갔다.
“그것이…… 저도 왜 아직까지 의식을 차리지 못하시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뭐? 그걸 말이라고 하는 것이냐.”
“송구하오나 전하, 정말로 디아나 아가씨의 머리엔 아무런 이상이 없습니다. 단지…… 조금 이상한 점이 있다면 내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몸의 기운이 많이 약해져 있단 것입니다.”
“왜지?”
“그것의 원인은 저도 모르겠습니다. 예전에 마력을 무리하게 써서 기력이 쇠한 마법사를 봤을 때와 좀 비슷하긴 하지만, 지금 예상할 수 있는 것은 그저 크게 놀라셔서 몸의 기운이 약해졌다는 것뿐입니다.”
의원의 말에 대공의 눈썹이 위로 꿈틀했다.
마력이라…….
설마 싶었지만 불가능한 일이었다.
디아나는 자신의 핏줄이 아니니까.
“의식은 언제쯤 차릴 수 있지?”
“내상이나 머리를 다치진 않으셨으니 늦어도 내일은 눈을 뜨실 겁니다.”
의원이 송구하다는 듯 고개를 조아렸다.
대공은 확실한 진단을 내리지 못하는 의원의 말이 못마땅했지만 의원의 얼굴에 거짓은 없어 보였다.
“알았다. 그만 나가 보거라.”
의원이 빠르게 방을 나가고 대공은 근심 깊은 숨을 내쉬며 디아나를 바라보았다.
내상은 없는데 몸의 기운이 약해졌다라…….
“으음…….”
순간 디아나가 미간을 좁히며 몸을 뒤척였다.
깨어나는 것인가 싶어 숨을 죽이고 보았으나 잠시간의 뒤척임이었는지 다시 고요함이 내려앉았다.
그래도 움직이는 것을 보니 아까보단 마음이 조금은 편해졌다.
밤이 깊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해야 할 일들이 있기에 대공은 이만 돌아가야 했다.
“오늘은 디아나의 곁을 지키도록 해라.”
대공은 걱정 가득한 얼굴을 숨기지 못하는 에드윈에게 말했다.
“네…… 전하.”
“디아나가 깨어나면 내게 알리거라.”
“네, 전하.”
피비의 답을 들은 것을 마지막으로 대공은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에 힘을 주며 방을 나갔다.
* * *
별이 반짝이고 고요함이 깊게 내려앉은 대공가의 깊은 밤, 대공성의 문이 열리며 기사들이 말을 타고 들어왔다.
저택 앞에서 말을 멈춘 로운은 말에서 내린 뒤 말 위에서 몸을 잔뜩 움츠리고 있는 하녀에게 손을 뻗었다.
“내려라.”
하녀는 불안에 가득 찬 얼굴로 저택을 바라보았다.
“끌어내려 주길 바라나?”
“아, 아닙니다.”
하녀는 로운의 손을 잡고 말에서 내렸다.
“너희들은 이만 숙소로 돌아가.”
그를 따라 함께 임무를 수행한 기사들에게 명한 그는 두려움이 가득한 하녀를 끌고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 * *
깊은 밤을 밝히듯 밝은 촛불들이 켜져 있는 대공의 집무실.
대공은 유네스의 습격으로 미처 처리하지 못한 서류들을 전부 처리하고 로운을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다.
유네스의 습격과 의식이 있기도 전에 발현된 가디언의 힘.
거기다 레아까지.
생각할 것이 많아 머리가 터질 듯 복잡했다.
“무엇 하나 마음 편한 일이 없군.”
대공은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누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후, 숨을 내쉬며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의 심란한 마음과 달리 조용한 밤하늘을 보며 머리를 식히던 그때,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시선을 내리자 로운과 기사들의 말이 저택 앞에서 멈추는 것이 보였다.
“잡았군.”
대공은 차가운 얼굴로 창문에서 몸을 돌렸다. 그는 작은 종을 울려 문밖에서 대기하고 있는 하인을 불렀다.
종이 울리자마자 문이 열리고 하인이 고개를 숙였다.
“부르셨습니까, 전하.”
“대공녀의 방으로 가서 레아를 데리고 와라.”
“네.”
복도를 급히 걸어가는 하인의 발소리가 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로운이 집무실 앞으로 도착했다.
“전하, 로운입니다.”
“들어와.”
대공은 집무실 안으로 들어서는 여자를 바라보았다.
“저 여자가 레아를 도와준 하녀인가?”
“네, 전하.”
대공은 덜덜 떨고 있는 하녀와 눈을 마주쳤다. 하녀는 ‘흡’ 숨을 들이켜 황급히 마주한 시선을 낮추었다.
“전하께 무릎을 꿇어라.”
무릎을 꿇지 않으면 억지로 몸을 짓누를 듯한 목소리였다.
하녀는 몸을 바르르 떨다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전하,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한 번만, 한 번만 용서해 주십시오.”
애초에 그 돈을 받지 말았어야 했는데.
기사들이 그녀가 묵고 있는 여관에 들이닥쳤을 때 자신이 한 일을 후회했지만 이미 일은 벌어진 뒤였다.
데이지는 제발 목숨만은 살려 달라 대공에게 간청했다. 대공은 눈물 섞인 간청에도 무감한 얼굴로 데이지를 내려다볼 뿐이었다.
대공은 로운에게 손짓했다.
그의 손짓을 알아들은 로운이 데이지의 상체를 억지로 세웠다.
대공은 눈물범벅인 데이지와 눈을 마주했다.
“네가 사실대로 전부 말한다면 목숨은 살려 주마.”
“네, 네! 전부 사실대로 말하겠습니다.”
데이지가 고개를 주억거린 그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또 한 번 들려왔다.
“전하, 레아가 왔습니다.”
“들여보내.”
그새 목욕을 하고 옷을 바꿔 입었는지 레아는 귀신같았던 몰골이 아닌 깔끔한 모습으로 집무실로 들어왔다.
레아는 무릎 꿇고 있는 데이지를 보고 움찔했지만 곧 당당하다는 듯 허리를 곧추세우고 목에 힘을 주었다.
그 모습을 본 대공은 삐뚜름한 미소를 그리며 로운에게 명했다.
“꿇려.”
“네.”
로운이 거칠게 레아의 어깨를 눌렀다. 레아는 강한 힘에 무릎을 꿇으며 소리를 질렀다.
“악! 이게 무슨 짓…….”
“지하 감옥에서 고신을 당하고 싶다면 더 지껄이거라.”
대공의 차가운 일갈에 레아는 입을 다물었다.
“네 이름이 뭐지?”
“……데이지입니다.”
“그래, 데이지. 네가 레아와 한 거래를 지금 이곳에서 전부 사실대로 말해라. 거짓이 하나라도 있었다간 넌 오늘 이곳에서 살아나가지 못할 것이다.”
데이지는 은은한 어둠 속에서 번뜩이는 대공의 황금안에 숨이 턱 막히는 듯했다.
데이지는 떨어지지 않는 입술을 억지로 움직이며 레아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전부, 전부 저 여자가 시켜서 한일이었습니다. 제게 금화를 주며 하인들에게 상한 음식을 먹이라고 시켰습니다. 그리만 해 주면 더는 일하지 않아도 될 만큼의 금화를 준다고 하여……. 제가 순간 돈에 눈이 멀어 해서는 안 될 짓을 하였습니다, 대공 전하.”
데이지는 울먹이며 품속에서 주머니를 꺼내 바닥에 놓았다.
“여기 저 여자에게 받은 금화가 그대로 있습니다. 제발 목숨만은 살려 주십시오.”
대공은 바닥에 놓인 주머니를 보곤 다시 데이지를 바라보았다.
그는 눈썹을 매섭게 치켜세웠다.
“내가 레아와 한 거래를 전부 말하라 하였을 텐데, 지금 내게 거짓말을 고하는 것이냐.”
“네?”
데이지는 이해되지 않는다는 얼굴로 대공을 보았다.
“레아가 시킨 짓이 하인들의 음식에 손을 대는 것, 그게 전부란 말이냐.”
“네, 네, 전하.”
데이지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데이지를 바라보는 대공의 금안이 날카롭게 번뜩였다.
“내가 사실대로 전부 얘기해야 널 살려 준다 했을 텐데, 내 말이 믿기지 않는가 보구나.”
“네? 정말 그게 전부입니다.”
데이지가 황급히 말했지만 대공의 눈빛은 차갑기만 했다.
그는 유네스를 불러낸 것이 레아일 것이라고 짐작했기 때문이다.
레아는 아리엘의 하녀였기에 유네스의 존재를 잘 알고 있었고 유네스의 습격과 레아가 오두막을 나온 순간이 너무도 절묘하게 맞아 떨어졌다.
“유네스.”
대공이 한 마디를 내뱉자 입을 다물고 있던 레아가 소리쳤다.
“아닙니다!”
“너 말곤 유네스를 이용해 이런 사달을 낼 사람이 없다. 거기다 넌 유네스가 습격한 그때 오두막을 나왔지. 모든 상황이 맞아떨어지는데 아니다?”
“네, 아닙니다, 전하. 전 오두막에 있었습니다. 거기다 데이지는 저택 내부를 담당하는 하녀도 아닙니다. 유네스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는 하녀가 어떻게 유네스를 풀어 준단 말입니까!”
레아가 억울하다는 듯 소리치자 대공의 입매가 삐뚜름하게 올라갔다.
“네가 알지 않느냐. 유네스에 대해서. 유네스가 있던 내 연무장에서 습격이 일어난 정원까지 유네스가 즐겨 먹는 생닭의 부스러기가 길을 잇듯 떨어져 있었다고 했다. 그 말은 곧 먹이를 이용해 유네스를 유인했다는 것이지. 그리고 넌 한때는 대공비의 하녀로 일하며 유네스가 무얼 잘 먹는지 가장 가까운 곳에서 봤었다. 네가 들어도 가장 유력한 용의자는 너이지 않느냐.”
레아를 보는 대공의 금안이 위험하게 빛났다. 찬란한 태양보다 빛나는 금안이 제 목을 죄는 듯했다.
레아는 턱을 바르르 떨며 말했다.
“……전하, 전 유네스가 전하의 연무장에 있단 사실도 지금 알았습니다. 전, 정말 아닙니다.”
레아는 숨이 턱턱 막혀 한 마디 한 마디를 힘겹게 내뱉었다.
대공의 살기에 레아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지만 그는 미동 하나 없는 얼굴로 레아를 더욱 압박했다.
“하녀를 통해 알아보면 충분히 알아낼 수 있는 일이다.”
“……데, 이지는 저택에서 일하는 하녀가 아닙니다.”
레아는 턱에 힘을 주며 입술을 꾸역꾸역 말을 내뱉었다.
목에 칼이 들어와도 제가 옳다고 말할 듯한 독기 어린 레아의 눈빛에 대공은 어이없다는 듯 비소를 머금었다.
대공은 더 이상 마주하고 싶지도 않은 레아에게서 눈을 떼고 반쯤 넋이 나간 듯한 하녀를 보았다.
“너도 레아와 같은 말을 할 것이냐, 유네스에 대해 알지 못한다고.”
“……저, 전 정말…… 유네스를 잘 모릅니다, 전하. 전 레아의 말, 대로 저택에서 일하는 하녀가 아니라 사용인 저택 식당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데이지는 창백한 얼굴로 어깨를 떨며 말했다.
두려움이 가득한 데이지의 얼굴은 절대 거짓을 말하는 것 같지 않았다.
아니, 거짓을 말할 수 있는 얼굴이 아니었다.
저 하녀가 정말 저택에서 일한 적이 없다면 레아가 유네스를 유인했다는 것은 말이 안 되는 것이다.
유네스의 위치는 습격이 있기 고작 하루 전 늦은 밤에 옮겨졌기에 사용인들에게 소문이 퍼지기엔 시간이 너무 짧았다.
그의 예상이 틀어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하녀장을 데려와.”
하인이 급히 떠나고 집무실 안엔 무거운 정적이 내려앉았다.
데이지의 불안에 젖은 호흡 소리만 크게 울리던 그때, 하인의 목소리가 울렸다.
“전하, 하녀장님께서 도착하셨습니다.”
“들여보내.”
“대공 전하를 뵙니다.”
하녀장은 집무실의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얼굴을 굳히며 예를 갖추었다.
“일어나.”
“네.”
“하녀장, 그대를 부른 이유는 저 데이지라는 하녀의 말을 확인하기 위해서다. 데이지는 구금되어 있는 레아에게 돈을 받고 레아가 오두막을 나올 수 있게 도와주었지. 그 죄가 절대 가볍지 않으니 그대도 내게 사실만을 얘기해야 할 것이다.”
“네, 전하.”
“데이지의 말로는 자신은 저택 안에서 일하는 하녀가 아니라고 하던데 맞나?”
하녀장은 힐긋 데이지의 얼굴을 확인하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전하. 데이지는 저택이 아닌 하녀들의 식당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그럼 어제나 오늘 데이지가 저택에 들린 적은 없었나? 잘 생각해 보거라.”
“……그것이…….”
고민을 하듯 눈썹을 찡그리던 하녀장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전하, 어제 오늘 저택에 데이지가 온 적은 없었습니다.”
하녀장의 말에 대공의 얼굴은 굳었고 레아는 반색했다.
“전하, 전 정말 유네스의 일과는 관련이 없습니다. 애초에 유네스가 덮친 곳엔 제 딸이 있었는데 어떻게 제가 이런 일을 꾸밀 수 있겠습니까!?”
“아직도 디아나를 이용하다니, 정말이지 그 낯짝 두꺼운 얼굴이 역겨워 신물이 올라올 지경이다. 저택의 아무나를 붙잡고 물어봐라. 이 저택에서 디아나에게 제일 위험한 사람은 바로 너라고 답할 테니.”
얼굴을 와그작 찡그리며 레아가 무어라 입을 열려 했으나 대공은 무시하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저택에 들리지 않았다 하여 이번 일에 관련이 없다고 단정 지을 수는 없지. 몰래 저택에 들어왔을 수도 있는 것이고 또 하인들을 통해 이야기를 전해 들은 것일 수도 있겠지.”
“전, 전 정말 저택에 가지 않았습니다. 유네스의 일은 맹세코 아무것도 모릅니다! 전하, 제발, 제발 믿어 주십시오!”
“전하, 하론입니다.”
데이지의 간절한 외침이 끝나자마자 집무실 밖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공은 데이지가 아닌 문으로 시선을 들었다.
“무슨 일이냐.”
“……대공녀님께서 잠에서 깨셨는데 레아를 찾고 계십니다.”
순간 대공의 얼굴이 무참히 일그러졌다. 유모는 어딜 갔냐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울고불고 레아를 찾던 세이아의 모습을 보았기에 분노를 억눌렀다.
대공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레아를 세이아에게 데려다주어라.”
유네스의 습격을 레아가 꾸몄다는 증거도 확실하지 않은 지금 이 상황에선 레아의 죄보다 그의 하나뿐인 딸의 안정이 더 중요했다.
“하오나, 전하.”
“명령이다.”
세이아의 상태를 알지 못하는 로운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그를 불렀으나 대공은 손을 들며 로운을 막았다.
레아는 자리에서 일어나 보란 듯이 구겨진 옷자락을 털었다.
연신 두려움에 떨고 있는 데이지와는 너무도 비교되는 모습에 로운의 얼굴이 구겨졌다.
잘못한 것 하나 없다는 듯 당당히 고개를 쳐든 레아는 대공을 바라보았다.
그런 레아를 무감각한 얼굴로 바라보던 대공은 아직 허리에 매여 있는 검집을 잡았다.
“전하, 그럼 전 이만 대공녀님께 가 보겠…….”
스릉-.
레아는 자신의 목에 닿는 서늘한 칼날에 말을 끝내지 못했다.
날카롭게 벼려진 칼날이 레아의 목을 파고들었다.
약한 살결이 베이고 붉은 핏줄이 선득하게 목을 타고 흐르자 그제야 정신을 차린 레아가 떨리는 눈동자로 대공을 보았다.
“……전, 전하, 무…….”
“그래, 이게 네가 내게 보여야 할 모습이지.”
대공은 공포에 젖은 레아의 눈빛을 보며 비틀리는 미소를 그렸다. 그는 죽지 않을 만큼 레아의 목에 댄 검에 힘을 주었다.
“크윽…….”
“항상 기억하거라. 네 목숨은 내게 한낱 벌레만도 못하다는 것을. 다시는 내 앞에서 주제도 모르고 당당히 고개를 쳐들지 마라. 그 순간이 너의 마지막이 될 테니까.”
대공은 목을 잘라 버릴 듯 힘을 주었던 검을 거두었다.
“하윽.”
레아는 피가 흐르는 목을 황급히 손으로 막으며 고개를 숙였다.
그녀는 몸이 바들바들 떨리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목을 파고들던 검날의 서슬 퍼럼과 짙은 살기는 그녀가 감당할 수 없는 것이다.
목을 드는 순간, 말을 하는 순간 대공의 칼이 제 목을 날릴 것 같은 공포심에 레아는 고개를 들지 못했다.
“데리고 나가.”
대공은 칼을 유려하게 검집으로 넣으며 하인에게 명했다.
하인은 굳어 있는 레아를 끌다시피 잡고 집무실을 나갔다.
대공은 이젠 거의 쓰러지기 직전의 데이지를 보며 쯧, 혀를 찼다.
“이 하녀도 데리고 나가라.”
“네.”
하인들의 부축을 받으며 데이지도 집무실을 나가자 집무실 안엔 대공과 로운, 하녀장만이 남았다.
대공은 밀려드는 피곤함에 긴 숨을 내쉬었다.
“하녀장.”
“네, 전하.”
“그대도 오늘 유네스의 습격에 대해 들었겠지.”
“……네.”
“그대의 생각은 어떻지? 유네스에 대해 절대 모른다는 데이지의 말이 사실 같나?”
“……전하,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저 역시 레아를 생각한다면 너무도 의심스러우나…… 데이지의 말은 거짓이 아닌 거 같습니다. 저택에 들어오는 이들의 명패를 철저히 확인하고 있고 데이지가 일하는 주방 일이 워낙에 바빠 몰래 자리를 비우고 싶어도 그럴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군. 수고했다. 그대도 이만 나가 봐.”
“네, 전하.”
하녀장이 물러가고 집무실엔 침묵이 내려앉았다. 데이지는 아니다.
대공도 이미 데이지를 심문했을 때 그녀의 말이 거짓이 아니란 건 느끼고 있었다.
단지 레아 때문에 인정하고 싶지 않았을 뿐.
“전하.”
“말해.”
“저택에 들어올 순 없었다 하더라도…… 전하의 말씀대로 하인들에게 유네스가 어디 있는지를 들었을 수도 있지 않습니까.”
“네가 유네스를 옮긴 지 겨우 하루다. 밤중이었고 사람을 해친 직후였기에 더 소란을 만들고 싶지 않아 집사에게 유네스에 대해 함구령을 내렸지. 저택의 하인들도 네가 유네스를 어디로 옮겼는지에 대해 아는 자가 거의 없을 것이다.”
대공은 마음에 들지 않는 상황에 거칠게 머리를 쓸어넘겼다.
레아의 짓이 아니라면 대체 누가.
대공의 미간이 좁아지던 그때, 같이 고뇌하던 로운의 머릿속으로 잊고 있었던 한 사람이 떠올랐다.
로운은 얼굴을 굳히며 흠칫했다.
“아…… 설마.”
“뭐 짐작 가는 사람이라도 있는 거냐.”
“그것이…… 유네스를 옮기던 그날 밤 마주친 사람이 있었습니다.”
“누구냐.”
로운은 바로 답하지 못하고 입술을 달싹였다.
“로운.”
“대공녀님의 하녀인 마리입니다.”
“세이아의…… 하녀?”
“네, 하녀가 제게 대공녀님께서 유네스를 걱정한다는 얘기를 전해 주었고 전 짧은 이야기를 나누다 유네스가 대공 전하의 연무장으로 옮겨진다고 말했습니다.”
“…….”
대공은 가만히 로운을 바라보다 몸을 돌렸다.
로운의 말에 따르면 지금 유네스 습격의 배후엔 세이아가 관련 있을 수도 있다는 거였으니까.
하지만 세이아는 겨우 10살이었다.
‘그 어린아이가 어떻게…….’
혼란스럽게 얽히는 상황들에 대공은 눈을 감고 차분히 하나씩 정리해 보았다.
유네스의 습격이 있기 전 티타임에 세이아가 디아나를 초대했다.
그 정원은 평소 세이아가 즐겨 놀던 정원이 아니었다. 그리고 세이아는 디아나를 싫어한다.
천천히 눈을 뜬 대공은 얼굴을 얼음장처럼 굳혔다.
“로운.”
“……네, 전하.”
“세이아의 유모와 하녀를 데리고 와.”
“……네.”
로운은 어두운 얼굴로 집무실을 대공의 명을 받들었다.
“자장…… 자장…….”
불안에 떠는 아이의 머리를 연신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나직한 자장가를 불러 주던 레아는 어느새 새근새근 잠이 든 아이의 말간 얼굴을 젖은 눈으로 바라보았다.
아이가 잠드는 모습을 이렇게 가까이에서 보는 건 처음이었으니까.
제대로 안아 보지도 못하고 떠나보낸 아이였다.
애틋하고 또 애달픈 하나뿐인 그녀의 진짜 딸.
“세이아.”
레아는 아무도 듣지 못하게 나직이 세이아의 이름을 부르며 감격에 겨운 미소를 지었다.
세이아의 볼을 부드럽게 쓰다듬은 레아는 젖은 눈가를 갈무리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대공녀님께선 잠이 드셨습니다.”
집사는 싸늘한 눈빛으로 레아를 한번 바라봤을 뿐 아무런 말을 하지 않고 의자에 앉았다.
말은 없었지만 그녀에 대한 감시를 늦추지 않는다는 걸 보여 주듯 집사는 정자세로 의자에 앉아 있었다.
레아는 주름이 지긋한 집사의 얼굴을 보며 인상을 구겼다.
‘나이에 비해 몸은 왜 저리 정정한 거지.’
저자가 갑자기 병이 들어 더 이상 저 얼굴을 보지 않는 게 레아의 소원 중 하나였다.
레아는 집사의 눈을 흘기다 아릿한 통증이 느껴지는 목에 눈살을 찌푸렸다.
“읏.”
세이아를 달래는 게 먼저라 천으로 대충 묶어 놓았었는데 상처가 다시 벌어졌는지 피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지혈제라도 발라야 할 거 같았다.
레아는 정자세로 앉아 있는 집사에게 한 걸음 다가갔다.
“집사님.”
“…….”
“집사님.”
레아가 한 번 더 부르자 집사가 미간을 좁히며 입을 열었다.
“왜 부르는 것이냐.”
“저, 잠시 오두막에 다녀와야 할 거 같습니다.”
“안 된다.”
집사는 이유는 묻지도 않고 칼 같이 답했다. 혐오가 담긴 눈빛이 대공의 눈빛과 똑같았다.
“피가 멈추질 않아서 그럽니다. 그리고 제가 오두막에 간다고 무슨 나쁜 일을 꾸밀 수 있다고 안 된다 하십니까? 정 못 미더우시면 오두막까지 따라오시든 저택에 있는 약을 가져다주시든 해 주십시오.”
“뭐라?”
예의 없는 언행에 집사의 눈빛이 매서워지자 레아는 울컥한 마음을 다스렸다.
‘대공의 심기가 안 그래도 날카로운데 집사에게까지 밉보여 봤자 내게 좋을 게 없겠지.’
레아는 시선을 낮추며 말했다.
“대공녀님께서 안 그래도 불안정하신데 피가 잔뜩 묻은 제 목을 보면 더 놀라시지 않겠습니까? 제 상처가 아파 이러는 것이 아니라 대공녀님이 걱정되어 이럽니다.”
집사는 붉게 젖은 천을 보고 눈을 찡그렸다.
마음 같아선 피를 흘리든 말든 움직이지 못하게 하고 싶었지만 레아의 말이 맞았다.
집사는 어둑한 창밖을 바라보았다.
레아를 혼자 보내는 것이 조금 마음에 걸리긴 하지만 어차피 유네스는 기사들이 지키고 있었고 유모가 방으로 돌아간 지금 대공녀님을 혼자 두고 레아를 따라갈 순 없었다.
“……15분 안에 다녀와라. 오지 않으면 바로 대공 전하께 알릴 것이다.”
“네, 곧장 다녀오겠습니다.”
레아는 집사가 말을 바꾸기 전에 황급히 방을 나갔다. 그리고 그녀도 겁에 질린 세이아가 걱정되었기에 정말 빨리 다녀올 생각이었다.
한데 대체 누가 유네스를 푼 것일까. 자신은 정말 아니었다.
그녀는 방해가 되는 유네스를 죽일 생각을 하고 있었지 디아나와 세이아를 습격하게 할 생각은 맹세코 하지 않았다.
그러니 그녀가 오두막을 몰래 나온 오늘 벌어진 유네스의 습격은 정말 우연이었다.
애초에 몬스터의 포효 소리만 아니었다면 오늘 레아는 데이지를 찾아가 그녀가 대공성을 나갈 때 쓰는 마차에 몰래 태워 달라고 할 예정이었으니 말이다.
“그럼…… 누구의 짓이지?”
이상한 일이라고 생각하며 중앙 계단을 향하던 레아는 계단을 막 올라오는 로운의 모습을 보게 되었다.
후다닥 뒤로 물러나 코너의 벽 뒤로 몸을 숨긴 레아는 얼굴만 살짝 빼고 로운을 훔쳐보았다.
혹 자신을 다시 데리러 온 것인가 싶었지만 로운이 멈춘 곳은 대공녀의 방이 아닌 유모의 방문 앞이었다.
“잠시 나와 보게.”
“로운 경?”
방문을 열고 나온 유모가 의아한 얼굴로 로운을 보았다.
“유모, 지금 대공 전하께 함께 가 주어야겠네.”
“네? 이 시각에 갑자기…… 왜. 혹 대공녀님께 무슨 일이 생기신 겁니까?”
“그건 아닐세.”
“그럼 무슨 일로 저를 찾으시는지요? 이렇게 늦은 시각에 저를 찾으신 적은 한 번도 없으셨는데 말입니다.”
“오늘 있었던 유네스의 습격 사건 때문이네. 곧 집무실로 마리도 도착할 것이야.”
로운의 굳은 얼굴에 유모는 좋지 않은 예감을 느꼈다. 유모는 불안한 얼굴로 횡설수설했다.
“사실 오늘 대공녀님께서…… 갑자기 생전 가신 적도 없는 사용인들의 정원에서 티타임을 연다고 하셨지요. 그때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은 했었는데, 설마 이번 습격에 마리가 연관이 된 것은 아니겠지요? 아…… 아닐 겁니다. 마리가 일은 빠릿빠릿하지 않아도 간이 작은 아이라 그런 큰일은 꾸미지…….”
“유모, 일단 가서 얘기하지. 여기서 이야기를 나눌 사안은 아니니.”
“……네, 네. 그러지요.”
유모는 초조함과 불안이 뒤섞인 얼굴로 로운의 뒤를 따라갔다.
로운과 유모의 발소리가 더 이상 복도를 울리지 않을 때쯤, 몸을 숨겼던 레아가 모습을 드러냈다.
“유네스를 푼 게 설마…….”
레아는 아까의 여유롭던 모습과 달리 돌처럼 딱딱해진 얼굴로 세이아의 방문을 바라보았다.
* * *
“대공 전하, 대공녀님의 하녀가 도착했습니다.”
“들여보내.”
아직 몸이 회복되지 않은 듯 마리는 하인의 부축을 받으며 집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대공 전하를 뵙니다.”
유모와 마리 두 사람이 전부 모이자 굳은 얼굴로 의자에 앉아 있던 대공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둘을 부른 이유는 오늘 있었던 유네스의 습격 사건 때문이다.”
대공은 마리의 어깨가 눈에 띄게 움찔거리는 것을 보았다.
“오늘 세이아가 티타임을 연 장소는 평소 세이아가 즐겨 찾는 장소와는 거리가 먼 곳이었지. 아니, 애초에 대공녀가 갈 만한 곳도 아니었다. 그리고 유네스가 저택을 나가던 밤, 로운과 네가 만났었다지?”
대공과 마리의 시선이 마주쳤다.
마리는 황급히 대공의 시선을 피했지만 떨리는 시선을 감추진 못했다.
“저, 전…….”
“됐다.”
대공은 마리의 말을 끊으며 몸을 돌렸다.
“그만들 나가 보거라.”
갑작스런 축객령에 당황한 유모와 마리가 집무실을 나가고 로운이 대공의 곁으로 다가왔다.
“전하, 어찌 추궁도 하지 않고 돌려보내셨습니까.”
“추궁하지 않아도 이미 답을 들었으니까.”
마리가 시선을 내리기 전, 짧은 순간이었지만 대공은 모든 것을 보았었다.
마리의 얼굴에 스치는 두려움, 불안, 공포가 뒤섞은 감정들을.
들켜서는 안 되는 무언가를 숨긴 명백한 죄인의 얼굴.
단순한 물음에 몸을 떨며 감정을 숨기지 못했다. 얼굴에 감정이 다 드러날 만큼 심약하고 소심해 보였다.
그리 심약한데 혼자 이런 큰일을 계획하진 않았을 것이다.
마리를 움직일 만한 측근은 유모와 세이아뿐이었다.
유모는 아니었으니 남은 것은…….
대공은 믿고 싶지 않은 가정에 고개를 가로저었지만 하나둘 밝혀지는 진실들이 세이아를 가리키고 있었다.
의식을 차린 하인들의 증언도 그랬다. 그들은 갑자기 마리와 세이아가 찾아와 디아나가 위험에 처했다고 말했다 했고, 기사들을 부르겠다는 하인을 만류하며 소수의 인원만 데리고 정원으로 향했다고 했다.
위험한 상황에 대공녀님은 오시지 말라고 말렸지만 세이아는 굳이 그들을 따라가 디아나를 보겠다며 앞으로 나섰다고 말이다.
디아나를 싫어하는 줄은 알았지만 이렇게 위험한 일까지 벌일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어떻게 이런 짓을 벌인단 말인가.
그는 분명 세이아에게 디아나는 저택을 떠날 거라고 말해 주었다. 세이아가 가진 그 무엇도 디아나가 가지지 못할 것이라고 말이다.
“설마 수도에 함께 가는 것 때문에 그런 건가.”
가장 가능성이 있었지만 단지 수도에 함께 가게 되었단 것 때문에 디아나를 죽이려 했다고 믿고 싶지 않았다.
세이아는 어렸고, 그 어린 나이에 벌일 수 있는 일이라기엔 잔인하고 악랄했으니까.
대공은 창가로 걸어갔다. 답답한 마음에 하늘을 올려다보자 새벽 밤 빛나는 별들이 반짝이고 있었다.
세이아를 어떻게 키워야 하는 걸까. 대공은 그의 자식이지만 너무도 낯선 세이아를 어떻게 바로잡아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았다.
‘내가 너무 오랜 시간을 혼자 둔 탓이겠지.’
“아리엘 네가 있었더라면…….”
괴로운 얼굴로 나직이 중얼거린 그는 이윽고 표정을 갈무리하며 로운을 불렀다.
“로운.”
“네.”
“내일, 문이 열리는 대로 치료사를 불러라. 그때까지 유네스의 상태를 잘 살피도록.”
“네, 한데 전하, 이번 일은…….”
“누구의 짓인지 밝힐 것이다. 그게 설령 세이아라 할지라도.”
이번 일은 절대 그냥 넘어갈 수 없었다. 세이아를 위해서라도 잘못된 것은 짚어야 한다. 더 늦기 전에 세이아를 바로잡을 것이다.
“하니 내일 세이아의 하녀를 다시 심문한다.”
“네, 전하.”
대공은 아리엘을 떠오르게 하는 은빛 달을 보며 참담한 마음을 달래었다.
* * *
“집사님, 저 다녀왔어요.”
레아는 시간에 맞춰 다녀오느라 힘들었다고 낮게 투덜거리며 한쪽에 마련된 의자에 털썩 앉았다.
그런 레아를 못마땅하게 보던 집사는 이맛살을 찡그리며 이내 고개를 돌렸다.
레아는 한참 동안 집사의 빳빳이 세워진 등을 바라보았다. 그의 자세가 조금이라도 풀리는 그 시점을 기다리면서.
새벽 깊은 시간, 아무런 행동이 없는 레아의 모습에 조금 긴장이 풀린 건지 집사의 어깨가 편히 내려갔다.
잠깐 조는 듯 고개가 아래로 향한 그때 레아는 슬그머니 몸을 일으켰다.
드레스 룸으로 기척 없이 숨어든 레아는 그곳에서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모았다.
‘어둠의 신이시여, 그대의 종이 간절히 비나니 부디 저의 생명을 드시고 그 힘을 빌려주시옵소서.’
마음속으로 빈 순간 온몸이 부서지는 듯한 고통이 레아를 덮쳤다.
혹 신음이 새어 나갈까, 이를 악물고 고통을 견뎌 냈다. 이윽고 고통이 사라지자 그녀의 평범한 갈색 눈이 붉게 변하고 하얀 팔엔 신비로운 문양들이 새겨졌다.
어둠의 힘이 깨어난 것이다.
태초에 존재했던 어둠의 힘과 그 힘을 따랐던 어둠술사들. 그리고 레아가 바로 얼마 남지 않은 어둠술사의 후손이었다.
“힘을…… 다신 쓰고 싶지 않았는데…….”
레아는 어둠의 힘을 나타내는 팔의 문양을 보며 속삭였다.
그녀의 생명력을 갉아먹는 대신 어둠을 깨울 수 있는 힘.
그녀의 부모님은 어둠을 두려워했고 절대 이 힘을 쓰지 말라 하였다.
레아 역시 제 목숨을 갉아먹는 힘이 두려웠기에 디아나와 세이아를 바꾼 그때를 마지막으로 다시 쓸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상황이 바뀌었다. 디아나는 어둠의 힘을 누르고 금안을 드러냈고, 세이아는 대공의 의심을 받게 생겼다.
그리고 유네스를 공격했던 디아나의 정령술. 황족들은 마력과는 다른 황족들만의 정령의 힘을 느낄 수 있다고 했다.
그러니 대공은 분명 유네스를 공격한 힘이 정령술이란 걸 알아차렸을 것이다.
‘혹시라도 그 힘이 디아나의 것이라 생각하게 해선 안 돼. 세이아의 것이라 여기게 해야 해.’
정령의 힘이 없는 세이아에게는 위험한 일이었지만 디아나에게 정령의 힘이 있단 걸 알게 되는 것이 더 최악이었다.
의식 때 세이아가 정령의 선택을 받지 못하면 의심이 생길 수도 있지만 어차피 의식은 몇 년이나 남았다.
의식이 있기 전에 어떻게든 디아나를 대공가에서 쫓아내거나…… 없애 버리면 된다.
황족이라 해도 정령의 선택을 받지 못하는 경우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니 디아나만 없어진다면 세이아가 갑자기 정령술을 쓰지 못하게 되었다 해도 의심하지 못할 것이다.
어차피 후계자는 세이아 하나뿐이니까.
지금은 대공의 시선이 디아나에게 향하지 않게 하는 것이 먼저였다.
그리고 이번 습격이 세이아의 짓이라는 증거도 없애야 한다. 세이아는 완벽한 대공녀로 살아야 하니까. 사생아를 죽이려 했단 오명을 뒤집어써서는 안 된다.
하니 모든 걸 덮어쓸 희생양이 있어야겠지.
레아의 입꼬리가 비틀린 순간 자신을 찾는 집사의 목소리가 들렸다.
‘늙어서 그런가 잠도 없어.’
레아는 짜증스럽게 머리를 쓸어 넘기며 일어났다. 때마침 드레스 룸 앞으로 집사가 나타났다.
“거기서 뭘 하는 것…… 윽.”
레아는 집사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녀의 손끝에서 나온 검은 연기에 집사의 눈동자가 흐려졌다.
“조용히 네 자리를 지키고 있어.”
레아의 명령에 집사는 인형처럼 걸어가 의자에 앉았다.
그 모습을 만족스럽게 보던 레아는 세이아에게 다가갔다.
“세이아, 아무 걱정 말렴. 엄마가 다 해결해 줄 테니까.”
잠든 세이아의 볼을 부드럽게 쓰다듬은 레아는 곧 소용돌이치는 검은 연기와 함께 방 안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 * *
해가 완전히 뜨지 않은 이른 새벽, 사용인들의 평화로운 아침이 시작되는 곳에서 끔찍한 비명 소리가 울려 퍼졌다.
같은 시각, 대공의 침실.
밤을 새우다시피 한 대공은 세안을 마치고 옷을 입고 있었다.
복잡한 상황들에 머리가 아픈 대공은 하인들의 손길을 물리고 혼자 준비를 하고 있었다.
셔츠의 마지막 단추를 잠그고 짙은 청색의 프록코트에 손을 뻗은 그때,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전하, 로운입니다.”
“로운?”
아직 로운이 출근할 시간이 아니었다. 한데 이른 시간에 그를 찾아왔다면 로운이 들고 온 소식은 절대 좋은 일이 아닐 것이다. 눈썹을 꿈틀한 대공은 코트를 걸치며 답했다.
“들어와.”
“대공 전하를 뵙니다.”
“일어나, 무슨 일이냐.”
“대공녀님의 하녀가 숨진 채로 발견됐습니다.”
“뭐?”
차라리 유네스의 상태가 좋지 않아졌다고 하는 게 더 나았을 것이다.
생각한 것보다 더 최악의 소식에 대공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로운은 굳은 얼굴로 대공에게 반으로 접힌 종이를 내밀었다.
“하녀가 남긴 유서입니다.”
유서를 받아 든 대공은 거친 손길로 접힌 종이를 펼쳤다.
[저의 죄를 사죄드립니다. 대공가에서 대공녀님을 모시며 큰 은혜를 입은지라, 대공녀님의 앞길에 방해가 되는 디아나 아가씨를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어 해서는 안 되는 일을 꾸몄습니다. 모든 것은 저 혼자 벌인 일입니다. 그리고 어리석은 저의 판단으로 모두가 위험해진 순간 신비한 힘으로 모두를 구해 주신 대공녀님께 마지막으로 감사의 말씀을 올립니다.]
유서를 쭉 읽은 대공은 마지막 줄의 내용을 다시 읽었다.
‘신비한 힘이라…….’
습격 사건의 진상과 세이아의 상태 때문에 잠시 뒤로 미뤄 두었던 문제였다.
유네스를 공격한 가디언의 힘.
그것이 세이아의 힘일 것이라고 대공 역시 생각하고 있었다.
단지 세이아는 아직 의식을 받기 전이고 또 의식 전에 힘이 발현된 경우는 들은 적이 없었기에 확신을 하지 못하고 있었을 뿐이다.
한데 유서에는 세이아가 힘을 쓰는 것을 직접 본 것처럼 적혀 있었다.
대공은 어제 보았던 하녀의 모습을 다시 떠올려 보았다.
겁이 많고 심약하고 감정을 조금도 숨기지 못하는 소심한 사람. 큰일을 꾸밀 수도 큰 비밀을 숨길 수도 없는 성격일 것이다.
“세이아가 힘을 쓰는 것을 보았다면 의식을 차리자마자 얘기했었겠지.”
거기다 유서의 내용 역시 죽기 직전의 하녀가 썼다고 하기엔 너무 차분하고 정적이었다.
‘뭔가 이상해.’
“로운, 죽은 하녀의 방으로 안내해라. 내가 직접 살펴봐야겠다.”
대공은 싸늘하게 굳은 얼굴로 종이를 접으며 방을 나갔다.
* * *
“어쩜 대공녀님께선 이리 머리카락도 비단결처럼 부드러우실까요. 정말 너무 예쁘세요.”
레아는 세이아의 옅은 금발을 빗으로 빗어 내리며 연신 찬양하고 있었다.
거울을 통해 벅찬 듯한 표정의 레아를 보던 세이아는 불퉁하게 입술을 내밀었다.
“유모랑 마리는 대체 왜 안 오는 거야. 내가 걱정되지도 않는 건가?”
하룻밤 푹 자서인지 세이아는 바람만 불어도 비명을 질렀던 어제와 달리 안정을 찾은 상태였다.
그래서인지 원래라면 진즉에 왔어야 할 유모와 마리를 찾고 있었다.
레아는 마리와 유모가 왜 오지 못하는지 알고 있었지만 모르는 척 미소를 그릴 뿐이었다.
세이아는 방 한쪽에 서 있는 집사를 불렀다.
“집사, 유모랑 마리는 오늘 정말 안 오는 거야?”
집사는 난감함에 미간을 좁혔다.
어제 새벽 대체 무슨 일이 있은 건지 마리가 자살한 채로 발견되었다. 마리의 갑작스런 죽음에 충격을 받은 유모는 지금 세이아를 돌봐줄 상태가 아니었다.
“그것이…… 유모는 오늘 몸이 좋지 않아 아무래도 힘들 거 같습니다.”
“마리는?”
“마리도…… 오늘은 못 올 거 같습니다.”
어린 세이아에게 마리가 죽었다고 알릴 수 없어 집사는 그저 유모와 마리 둘 다 몸이 안 좋아 오지 못한다고 둘러댔다.
“유모랑 마리랑 단 한 번도 이런 적이 없었는데…… 아무래도 내가 가 봐야겠어.”
“아, 안 됩니다, 대공녀님!”
벌떡 일어나는 세이아에게 레아가 다급히 소리치자 집사의 미간이 좁아졌다.
“왜 안 돼?”
“그게…… 제가 유모님과 마리를 보았는데 상태가 너무 안 좋았습니다. 열도 심하게 나고 기침도 심하고…… 자칫 안 좋은 병이 대공녀님에게까지 옮을까 걱정되어 그럽니다.”
“……그렇게 심해?”
“네, 아주, 아주 심하답니다.”
“큼, 그럼…… 안 가는 게 낫겠다. 집사가 유모랑 마리에게 좋은 약 가져다줘.”
“네, 대공녀님.”
세이아가 미련을 버리고 다시 앉자 집사와 레아의 시선이 마주쳤다.
집사의 눈빛엔 못마땅함이 가득했지만 세이아가 충격을 받지 않는 게 먼저인지 아무런 말을 하지 못했다.
‘아무것도 기억 못하는 주제에.’
레아는 속으로 비웃으며 세이아의 머리를 빗던 빗을 내려놓았다.
“대공녀님, 이제 옷을 갈아입으러 가실까요?”
“그래.”
세이아는 레아가 못마땅한 듯하면서도 아직 불안함이 가시지 않은 듯 레아의 손을 꼭 잡았다.
드레스 룸의 문을 닫은 레아는 예쁜 하늘색 드레스를 꺼내 세이아에게 다가갔다.
“옷을 갈아입혀 드릴게요.”
“조심히 해.”
“네, 걱정 마세요.”
잠옷을 벗기고 드레스를 입힌 레아는 단추를 잠그며 조심스럽게 세이아를 불렀다.
“대공녀님.”
“왜.”
“어제, 유네스의 습격이 있던 그때 말이에요.”
움찔, 세이아의 어깨가 불안하게 튀었다.
“그때 얘기하기 싫어. 무서워.”
레아는 단추를 다 채우고 세이아의 몸을 황급히 돌려세웠다.
“무서운 얘기 아니에요. 대공녀님께서 유네스를 물리친 이야기를 해 드리려는 거였어요.”
“내가…… 유네스를 물리쳤다고?”
“네, 비록 대공녀님께선 그 일을 기억하지 못하시겠지만 유네스가 모두를 위험하게 했던 그 순간 대공녀님께서 대공 전하처럼 신비한 황족의 힘을 쓰셨답니다. 그 덕분에 유네스가 쓰러지고 모두가 무사할 수 있었죠.”
세이아는 믿기지 않는 듯 눈을 크게 떴다.
‘아버지와 같은 힘이라니, 역시 난 디아나 따위와는 비교할 수 없는 특별한 사람이야.’
세이아는 환히 미소 지었다.
“내가 아버지처럼 정령의 힘을 사용한 거야? 지금도 쓸 수 있나?”
세이아가 신기하다는 듯 손을 이리저리 휘젓자 레아가 세이아의 손을 잡았다.
“아뇨! 지금은 쓰실 수 없으실 거예요. 아마 위급한 상황에 무의식적으로 나오신 힘이실 테니까요.”
“그래? 아쉽다.”
“그보다 대공 전하께서 이 사실을 아시면 분명 기뻐하실 거예요. 대공녀님께서 비록 무의식적이었다곤 하지만 의식을 치르시기도 전에 정령의 힘을 쓰신 거니 얼마나 대견하고 뿌듯하시겠어요. 그러니 나중에 대공 전하를 뵈면 꼭 힘을 쓰신 거 같다고 말씀드리세요.”
“음…… 어떻게 쓴 건지 기억이 안 나는데…….”
“그건 중요하지 않아요. 그냥 어젠 미처 놀라 몰랐는데 오늘 떠올려 보니 갑자기 몸이 이상했고 유네스를 알 수 없는 힘이 공격했다고…… 그리 말씀하시면 대공 전하께서 알아차리시고 기뻐하실 거랍니다.”
“알았어. 내가 정령의 힘을 다룰 수 있다니, 어서 이 소식을 아버지께 말씀드려야겠어.”
세이아는 어제의 일은 까맣게 잊은 듯 반짝이는 눈으로 레아의 손을 잡았다.
“네, 대공 전하께 가서 꼭 말씀드리세요.”
밝아진 세이아의 얼굴에 레아는 미소를 지으며 함께 드레스 룸을 나왔다.
하지만 레아의 미소는 드레스 룸의 문을 열자마자 사라지고 말았다.
언제 온 것인지 방 안에 로운과 대공이 서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빨리 올 줄은 몰랐는데.
대공의 금안이 그녀의 얼굴을 스치자 어제 목을 파고들던 서늘한 검날이 떠올랐다.
레아는 대공의 시선을 피하듯 허리를 숙였다.
“대공 전하를 뵙니다.”
“일어나.”
레아를 차가운 눈빛으로 훑은 대공은 세이아에게로 다가갔다.
“세이아.”
“아버지.”
그를 보는 세이아의 얼굴이 어제보단 나아진 거 같아 다행이라 생각하던 그때 세이아가 환한 미소를 지었다.
천진난만한 얼굴은 지금 대공가의 심상치 않은 분위기와는 너무도 괴리감이 들었다.
안정을 찾은 것은 다행이었지만 이렇게 아무렇지 않길 바라지는 않았다. 세이아는 유네스의 습격에 책임이 있으니까.
적어도 그런 일을 벌인 것에 대한 두려움과 수많은 사람들을 다치게 한 죄책감은 느끼길 바랐다.
한데 이토록 밝은 얼굴이라니.
대공의 머리가 차갑게 식었다.
“…….”
세이아는 평소와 달리 아무런 반응이 없는 그가 이상한지 의아한 얼굴을 했다.
“아버지?”
그는 동그란 눈을 깜박이는 세이아를 품에서 살짝 밀어냈다. 세이아가 당황한 듯 그를 올려다보는 것이 느껴졌다.
“세이아, 소파에 앉거라.”
대공은 세이아를 지나쳐 먼저 소파에 자리를 잡았다. 싸늘함이 느껴지는 대공의 태도에 세이아는 엉거주춤 소파에 앉았다.
대공은 도르륵 눈을 굴리는 세이아를 나직이 불렀다.
“세이아.”
“네.”
“네가 많이 놀라겠지만 꼭 해야 하는 이야기가 있단다.”
“네.”
“너의 하녀였던 마리가 어제 사고의 여파로 오늘 아침 숨을 거뒀단다.”
“……네? 숨을 거뒀다니…… 그럼 죽었다는 건가요?”
세이아의 옅은 금빛 눈동자가 거세게 떨렸다.
“그래. 어제 유네스에게 당한 부상이 커서 결국 치료를 못 하였단다.”
“말도 안 돼요. 분명 집사랑 레아가 유모와 마리는 감기가 심한 것뿐이라고 했는데…….”
“그건 네가 많이 놀랄 거 같아 집사가 거짓말을 한 것이란다.”
대공은 하녀의 죽음에 대해 말해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고민을 많이 했었다.
자살을 했단 소식을 전하기엔 세이아는 어렸으니까.
하지만 하녀의 죽음과 모든 것을 혼자 한 것이라 남긴 유서 때문에 더 이상의 조사를 할 수 없게 되어 대공은 차라리 마리의 죽음으로라도 세이아가 이번 일에 대해 잘못을 깨닫길 바랐다.
자신이 한 일이 정말로 사람을 죽일 만큼 위험한 일이란 것을 알기를 말이다.
세이아는 많이 놀란 듯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잘못을 뉘우치길 바라는 마음에 충격을 주긴 했지만 그의 마음이 편하진 않았다.
세이아가 저지른 잘못에 대해 이야기하고 달래 주려던 그때 세이아가 먼저 입을 열었다.
“……마리가 그렇게 됐다니…… 슬픈 일이에요. 저, 그보다 아버지에게 드릴 말씀이 있어요.”
“……뭐?”
세이아의 얼굴에서 슬픔이란 감정이 너무도 빨리 사라져 세이아가 정말 슬픔을 느끼긴 했을지 의문이 들 정도였다.
자신과 가장 가까웠을 하녀가 죽었다는 소식에도 일말의 죄책감도 느껴지지 않는 세이아의 모습에 대공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아버지, 제가 아무래도 정령의 힘을 쓴 거 같아요.”
“……정령의 힘을 말이냐?”
“네, 어제 유네스가 저를 공격하기 직전에 몸이 이상했거든요. 뭔가 힘이 빠지는 느낌…… 이 들었어요. 그리고 의식을 잃어 몰랐는데 레아가 제가 정령의 힘으로 유네스를 물리치는 것을 보았대요.”
“레아가?”
대공의 시선이 레아를 향했다.
레아는 고개를 들지 않고 답했다.
“네, 전하. 제가 분명 보았습니다. 대공녀님의 금안이 반짝임과 동시에 물의 소용돌이가 나타나 유네스를 공격하는 것을요.”
“보세요, 아버지. 제가 정말 정령의 힘을 쓴 것이에요.”
세이아는 어서 칭찬을 해 달라는 듯 밝은 목소리로 외쳤다. 마리의 존재는 이미 세이아의 머릿속에서 지워진 듯했다.
정령의 힘이 발현되었다는 말에 로운과 집사가 놀란 얼굴로 세이아를 바라보았다.
세이아가 힘을 쓴 것이 확실하다면 대공 역시 놀라야 하는 것이 맞았다. 그리고 기뻐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감정이 들지 않았다. 지금 중요한 것은 정령의 힘이 아니라 세이아가 저지른 잘못이었으니까.
“세이아.”
세이아는 칭찬을 기대하는 초롱초롱한 눈빛을 했다.
“네, 아버지.”
“정령의 힘 말고 어제 벌어진 유네스의 일에 대해 내게 할 말은 없느냐.”
“네? 음…… 없어요.”
“정말 없느냐, 내 너에게 마지막으로 묻는 것이다.”
딱딱하다 못해 얼음장같이 굳은 대공의 얼굴에 세이아의 몸이 움찔했다.
설마 아버지가 유네스를 유인한 게 자신이라는 걸 아는 게 아닐까 두려움이 들었지만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 일을 아는 사람은 마리뿐인데 마리는 죽었잖아…….’
세이아는 이윽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없어요.”
“……그래, 알겠다. 어제의 일로 아직 몸이 피곤할 터인데 푹 쉬도록 해라.”
“아버지, 벌써 가시게요?”
‘아직 내 정령의 힘에 대해 아무 말씀이 없으셨는데.’
세이아가 당황해 물었으나 대공은 세이아를 보지 않았다.
“일이 바빠 그만 가 봐야 할 듯하구나. 오늘은 일이 많아 저녁 식사를 함께하는 것은 무리일 듯하니 기다리지 말고 먹거라.”
“아버…….”
대공은 그를 부르는 세이아의 목소리를 싸늘하게 외면하며 방을 나갔다.
집무실로 돌아온 대공은 하인들을 모두 내보냈다.
달칵, 집무실의 문이 닫히자마자 차갑게 굳어 있던 대공의 얼굴이 사납게 구겨졌다.
그는 가슴이 꽉 막힌 듯 답답해 거칠게 셔츠 상단의 단추를 풀었다.
“전하, 괜찮으십니까.”
“괜찮지 않다. 너도 보았지 않느냐, 일말의 죄책감도 느끼지 않는 세이아의 모습을. 자신과 가장 가까웠던 하녀가 죽었다는 소식에도 어쩜 그리 반응이 없을 수 있단 말이냐.”
아주 잠깐 놀라고 슬퍼했을 뿐 세이아는 금세 잊었다.
제 탓으로 유네스에게 공격을 받아 마리가 죽었다고 했는데도 말이다.
대공은 세이아를 방치해 그리 만든 것 같은 자신과 잘못을 뉘우칠 생각을 않는 세이아 모두에게 화가 났다.
로운은 답지 않게 분노를 쉬이 다스리지 못하는 대공의 마음이 이해 가면서도 복잡한 마음에 난감한 얼굴을 했다.
로운도 이번 유네스의 습격에 세이아가 관련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이때까지 봐 왔던 사랑스런 대공녀님의 모습과 이번 사건은 너무도 괴리감이 커 아직도 믿기지가 않았다.
하지만 그도 보았다.
마리가 죽었다는 소식을 금방 지워 버리며 말간 얼굴로 대공을 바라보던 세이아를.
그때 로운은 처음으로 주군의 하나뿐인 딸, 사랑스러운 대공녀에게 소름 돋는 낯섦을 느꼈다.
‘그렇다 해도…… 그분이 대공녀님이신 건 변하지 않는다.’
로운은 자꾸만 떠오르는 세이아의 말간 얼굴을 지우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전하, 대공녀님은…… 어리십니다. 하니 측근 하녀가 죽었다 하더라도 그 사실을 쉽게 인지하실 순 없으실 겁니다.”
“내가 말하는 것은 하녀의 죽음에 대한 이해가 아니다. 그 하녀가 유네스의 공격 때문에 죽었다 했는데도 세이아는 조금의 두려움도 죄책감도 없었다. 그리고 끝내 내 물음에도 거짓을 말했어.”
“…….”
로운이 곤란한 낯을 하자 대공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하아, 세이아의 비틀림을 어디서부터 잡아 주어야 할지 감이 오질 않는구나.”
“……어려서 그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천천히 기다려 보신다면…….”
“어리다고 하기엔 그 아이가 벌인 일이 아이답지 않게 용의주도하고 잔인해. 유네스를 이용해 디아나를……. 입에 담고 싶지도 않군.”
진심으로 세이아가 바랐던 상황을 상상하고 싶지 않았다.
대공 역시 냉정하다, 피도 눈물도 없다는 평가를 달고 사는 사람이었지만 무자비하고 잔인한 사람은 아니었다.
냉철함과 잔인함은 분명히 달랐고 그는 세이아가 무자비한 사람으로 자라길 바라지 않았다.
어떻게 가르쳐야 하는 건가.
대공은 아리엘도, 그렇다고 자신도 닮지 않은 거 같은 세이아의 잔인함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한데 전하, 대공녀님께서 아까 하셨던 말씀 말입니다. 정령의 힘을 사용하셨다는 말씀이 진짜입니까? 혹 그날 확인하신 마력이 정령의 힘이었습니까?”
“그래, 맞다. 하나 모르겠구나.”
대공은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눌렀다.
“모르시겠다니……. 만약 대공녀님께서 정말 정령의 힘을 사용해 유네스를 기절시킨 거라면…… 의식 전에 정령의 힘을 쓴 것이 아닙니까. 테라비타 황족의 역사에 최초로 남을 일입니다, 전하.”
로운은 격앙된 목소리로 말했지만 대공은 그저 미간을 좁힐 뿐이었다.
“세이아가 그 힘을 쓰는 것을 보았다고 말한 사람이 두 사람이 있었다. 바로 레아와 마리. 하나 마리는 의문스러운 자살을 했고 덕분에 남은 유일한 목격자는 레아가 되었지. 거기다 마리가 남긴 유서는 수상한 점이 많구나.”
대공의 말에 흥분했던 로운의 분위기가 급격히 가라앉았다.
“……레아, 그 여자가 하녀의 죽음에 관련이 있다 여기십니까?”
“찝찝한 심증은 드나 물증이 없다. 너도 함께 보았지 않느냐. 침입의 흔적도, 그렇다고 의심 갈 만한 몸싸움의 흔적도 전혀 없었던 하녀의 방을.”
방 안과 벽 곳곳을 매의 눈으로 살펴보았지만 타살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전하, 그 여자가 의심을 받아 마땅한 사람은 맞으나, 어젯밤 레아를 감시한 사람이 다름 아닌 집사였습니다. 거기다 저택과 사용인들의 별채는 거리가 꽤 있기에 몰래 하녀의 방에 다녀왔다면…… 집사가 눈치채지 못했을 리 없습니다.”
“그래, 그렇지.”
“거기다 전하께서 마력을 직접 확인하지 않으셨습니까. 정령의 힘이 맞는다면…… 이 대공성에 대공 전하 말고 그 힘을 쓸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전하의 피를 이은 대공녀님뿐이십니다.”
“…….”
대공은 그 부분에 대해선 아무런 의심을 할 수가 없었다.
그가 확인했고, 마력은 분명 정령의 힘이었으니까. 하니 로운의 말이 맞다.
모든 답들이 정해진 듯 세이아라고 하고 있었지만 대공은 왜인지 무시하기 힘든 찝찝함이 들었다.
갑작스런 하녀의 죽음, 위화감이 드는 유서 그리고 레아.
무언가 연결고리가 잡힐 듯 아무것도 잡히지 않던 그때, 하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전하, 디아나 아가씨께서 의식을 차리셨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