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권-5화 (5/16)

목차

5

6

7

8

5

“……아버지.”

“세이아, 아무래도 네가 오해를 한 것 같구나.”

대공의 목소리가 서릿발처럼 차가웠다.

뭐라 더 말한다 해도 전혀 들어 줄 것 같지 않은 딱딱한 대공의 얼굴에 세이아는 시선을 낮추었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대공은 제 말보다 디아나의 말을 믿는 게 분명했다.

“네…….”

“그렇다면 디아나에게 오해해서 미안하다고 하는 게 좋겠구나.”

“네?”

사과를 하라니.

세이아가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대공을 올려다보았지만 대공의 눈빛은 흔들림이 없었다.

세이아는 느리게 디아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오해해서 미안해.”

“……괜찮습니다, 대공녀님.”

디아나는 분노가 번들거리는 세이아의 눈빛을 비스듬히 피했다.

사과를 받은 게 아니라 널 가만두지 않겠단 경고를 받는 기분이었으니까.

디아나가 사과를 받자마자 대공이 말했다.

“세이아, 넌 이만 방으로 돌아가 쉬는 게 좋겠구나.”

“네? 저 혼자…… 요?”

대공은 답하지 않으며 하녀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대공녀를 모시거라.”

“네, 전하.”

축객령과 다를 바 없었다. 대공의 싸늘한 눈빛에 마리가 후다닥 세이아의 곁으로 다가갔다.

“대공녀님, 제가 모실게요.”

“아니…… 잠깐…….”

“나중에 방에 들리마, 세이아. 어서 데리고 가거라.”

대공의 명령을 받은 마리에게 세이아가 반쯤 끌려가다시피 도서관을 나가고 뒤이어 문이 굳게 닫혔다.

무거운 정적이 내려앉은 그때, 대공의 시선이 굳어 있는 디아나를 향했다.

시선을 아래로 두고 꼭 큰 잘못을 저지른 듯 처분을 기다리는 아이의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흠.”

대공의 못마땅해하는 숨소리가 고요한 도서관을 울렸다.

한데 그 숨소리가 디아나에게 왜 그리도 크게 들리는 것인지 디아나의 몸이 절로 움찔했다.

‘왜…… 아무 말이 없는 거지.’

에드윈과 나쁜 모략을 꾸몄다는 오해는 풀었지만 대공이 인정하지 않은 사생아인 제가, 대공가의 기사와 몰래 만난 것은 충분히 기분 나쁠 만한 일이었다.

‘벌을 받으려나? 대공 전하의 허락을 받지도 않고 내 마음대로 대공가의 기사를 불러낸 거니까…….’

쓴소리를 들을 각오로 기다리고 있는데 어쩐지 아무리 기다려도 대공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

위화감이 느껴져 내리깔고 있던 시선을 들자 줄곧 디아나를 보고 있었던 듯 대공의 금안과 시선이 마주쳤다.

“디아나.”

“……네.”

“너도 이만 방으로 돌아가 보거라.”

“네?”

디아나는 뭐라 하지 않는 대공에게 놀라 되물었다.

하지만 대공은 그저 귀찮다는 듯 눈썹을 위로 올렸을 뿐이었다.

“방으로 가 보라 했다.”

“아…….”

디아나는 대공의 좋지 않은 표정에 에드윈을 힐긋 걱정스런 눈으로 보았다.

‘에드윈이 나 때문에 벌을 받으면 어쩌지?’

하지만 에드윈은 걱정 말라는 듯 디아나에게 옅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 미소를 보자 더욱 마음이 쓰였다.

디아나가 에드윈을 보며 망설이는 것을 본 대공의 눈썹이 꿈틀거린 순간 디아나가 대공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전하, 에드윈 기사님은 아무 잘못이 없어요. 전부 제가 억지로 부탁한 거예요.”

거짓말이 아니라 말할 때보다 더 간절한 눈빛이었다.

디아나의 눈을 가만히 보던 대공이 느리게 입술을 움직였다.

“……알겠으니, 걱정 말고 방으로 돌아가거라.”

“아가씨, 가셔요.”

무거운 분위기에 줄곧 눈치를 살피던 피비가 디아나에게 다가와 작게 속삭였다.

마음 같아선 에드윈과 함께 도서관을 나서고 싶었으나 분위기상 더 버티면 안 될 거 같았다.

디아나는 어쩔 수 없이 양순히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네.”

디아나가 도서관을 나가자 에드윈은 곧바로 대공을 향해 무릎을 꿇었다.

“뭐 하는 거냐.”

죄를 청하는 듯한 에드윈의 행동에 대공의 눈썹에 매섭게 올라갔다.

“감히 제가 전하께서 허락하지 않은 일을 하였으니 벌을 받아 마땅합니다. 절 벌해 주십시오.”

그는 대공의 명령으로만 움직이는, 충성을 맹세한 기사였다.

한데 대공의 명령도 없이 디아나와 접촉을 하였고, 결국 대공 앞에서 좋지 못한 소란까지 만들었다.

그 죄가 명백하다 여겼기에 에드윈은 대공에게 머리를 조아렸다.

대공은 엄숙하게 죄를 청하는 에드윈을 바라보았다.

고작 이 정도의 일로도 스스로를 꾸짖는 그가 디아나와 나쁜 모의를 꾸몄다니.

애초에 말이 안 되는 소리였다. 가문의 기사가 고작 어린 사생아와 만나 획책할 일이 무엇이 있단 말인가.

“하아, 너 때문에 화난 것이 아니다. 일어나. 명령이다.”

명령이라는 말에 에드윈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여전히 죄를 지은 듯 고개를 숙였다. 그런 에드윈의 머리 위로 대공의 목소리가 울렸다.

“에드윈, 난 너의 충성심을 의심하지 않는다. 그러니 그만 고개 들어. 그보다 디아나가 글을 모른다는 게 사실이냐.”

대공은 도무지 믿기지 않아 다시 물었다.

10살 난 아이가 글을 모르는 것은 디아나의 말처럼 평민들 중에서도 흔한 일이 아니었으니까.

“네, 전하. 사실입니다. 아가씨께선 글을 전혀 모르셨습니다.”

“하!”

대공은 분노가 섞인 짧은 숨을 내뱉으며 얼굴을 험악하게 일그러뜨렸다.

“정말이지, 그 여자의 악랄함은 내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군.”

대공은 서슬 퍼런 얼굴로 낮게 중얼거렸다.

하긴 제 자식을 죽이려고 한 여자이니, 친절히 글을 가르쳐 줬을 거라 생각하는 게 더 이상한 일이겠군.

대공은 신랄한 비소를 흘렸다.

“전하, 정말 송구합니다. 디아나 아가씨의 글공부를 봐주기 전에 전하께 먼저 고했어야 했는데…….”

“됐다, 근무 시간도 아닌 휴식 시간에 네가 뭘 하던 내 알 바 아니니 괜찮다.”

“……네, 전하.”

하지만 대공의 괜찮다는 말에도 에드윈은 쉽게 고개를 들지 못했다.

기사가 된 지 오래되지 않았지만 대공은 에드윈이 얼마나 충성스런 기사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쉽게 고개를 들지 못하는 에드윈의 마음도 이해는 갔다.

주군이 인정하지 않은 사생아와 엮인다는 것은 주군에게 충성을 바치는 기사의 도리와는 거리가 먼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대공은 이미 일전의 일로 에드윈이 디아나에게 신경을 쓰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고 있었다.

그러니 에드윈이 디아나의 글공부를 봐준 것에 사리사욕이나 악의가 있었을 것이라곤 생각하지 않는다.

‘굳이 이유를 찾는다면 동정이었겠지.’

에드윈은 전쟁터에서도 전쟁고아들의 처우에 유난히 많은 신경을 기울였었다.

또래보다 작고 마른 디아나, 아마 에드윈의 눈엔 전쟁고아들과 별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에드윈.”

“네.”

“디아나의 글공부는 언제부터 봐주고 있었던 것이냐.”

“……두 달이 되어 가고 있습니다.”

“그렇군.”

생각보다 긴 시간이었다.

“그 정도 시간이면 디아나도 가벼운 마음으로 글을 배운 것은 아니겠군.”

대공의 혼잣말에 에드윈이 낮추고 있던 시선을 들었다.

“가벼운 마음은 절대 아니십니다. 그리고 다른 아이들보다 머리가 좋으셔서 배움의 속도도 빠르십니다. 어릴 때부터 제대로 글을 배웠더라면 지금쯤 상류층의 화술도 무리 없이 사용하셨을 겁니다.”

“상류층의 화술을?”

에드윈의 말에 대공의 미간이 좁아졌다.

상류층의 화술은 10살 무렵의 귀족 자제들도 구사하기 어려워한다. 글을 다 떼고 몇 년의 연습을 한 뒤에야 어느 정도 우아한 화술을 구사할 수 있었다.

“디아나의 배움 속도가 그렇게 빠르단 말이냐.”

“네, 전하. 아가씨께선 정말 배움의 속도가 빠르십니다. 겨우 일주일 만에 단어를 다 떼시고 지금은 문장 교육을 시작했으니까요. 문장도 빠르게 습득하고 계십니다.”

늦게 배운 아이들일수록 배움의 속도가 늦다고 했다.

한데 평범한 아이들의 속도보다 더 빠르다라.

대공은 혹 에드윈이 과장하는 것은 아닐까 했지만 에드윈의 얼굴은 진지했다.

“흠…… 그렇다면…….”

대공은 고민을 하듯 턱 끝을 쓸다 에드윈을 불렀다.

“에드윈.”

“네.”

“앞으로 디아나의 글을 봐주는 것을 그만두거라.”

“네…… 네?”

무의식적으로 대공에게 답하던 에드윈이 놀란 얼굴로 되물었다.

대공은 에드윈의 놀란 눈에도 그저 귀찮다는 듯 이맛살을 찡그리며 말했다.

“디아나의 글공부를 봐주는 것을 오늘부로 그만두라고 했다. 두 번 말하게 하지 말거라.”

그만두라니.

예상했던 것과 정반대의 결과에 에드윈의 얼굴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에드윈은 디아나의 배움이 빠르다고 한 말에 대공이 관심을 보이는 듯해 대공이 이번 일을 넘어가 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한데 그만두라니.

에드윈은 이제 갓 동화책들을 읽을 수 있게 되어 기뻐하던 디아나의 모습이 떠올라 마음이 더욱 무거워졌다.

‘이대로 그만두면 아가씨께서 글을 배울 마땅한 사람을 찾을 수 없으실 텐데.’

에드윈은 무례인 것을 알지만 대공에게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전하…… 아가씨께서 이제 겨우 책을 읽으실 수 있는 정도가 되었습니다. 지금 그만두면 이때까지 배운 것을 잊어버리실 수도 있으니, 책 한 권을 완벽히 읽을 정도가 되실 때까지만이라도……. 제가 선을 넘었습니다. 송구합니다.”

에드윈은 말을 이을수록 짙어지는 금안에 결국 입술을 다물었다.

대공은 시선을 내리까는 에드윈을 조금 의외라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에드윈은 단 한 번도 그의 명령에 토를 단 적이 없었다.

“흠.”

‘단순한 동정은 아닌건가. 그새 디아나와 정이라도 들었나 보군.’

양순하기만 하던 디아나도 답지 않게 에드윈을 비호했었으니까.

도서관을 나갈 때까지 에드윈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던 디아나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가 에드윈을 잡아먹기라도 할까 봐 걱정하는 눈빛이었다.

‘타인에게 감정도 잘 드러내지 않던 아이인데.’

디아나가 에드윈을 신경 쓰던 모습이 떠오르자 왜인지 대공은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충성스런 자신의 기사가 디아나와 엮인 것이 기분 나쁘다고 하기엔 뭔가 감정이 미묘했다.

무어라 딱 단정할 수 없는 불쾌함이 들었지만 그 불쾌함이 정확히 무엇인지 알 수 없어 애써 머릿속에서 떨쳐냈다.

대공은 참담한 분위기의 에드윈에게 시선을 맞추었다.

‘누가 보면 사형 선고라도 내린 듯한 모습이군.’

대공은 어이없음을 느끼며 입을 열었다.

“에드윈, 어차피 넌 이제부터 수련 시간이 늘어날 것이라 쉬는 시간이 저녁 말고는 없을 것이다. 검술 대회가 석 달이 채 남지 않았다는 걸 잊은 것은 아니겠지?”

에드윈의 어깨가 순간 움찔했다.

“……죄송합니다.”

요새 에드윈은 세이아의 방문과 디아나의 수업으로 사실 검술 대회를 잠시 까먹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석 달이 채 남지 않았다니.’

지금부턴 바짝 검술 연습에만 돌입해야 했다. 대공가의 명예를 달고 나가는 대회에서 절대 질 수 없으니까.

‘하지만 내가 연습에 집중하면……아가씨의 공부는 어떻게 하나?’

검술 대회가 중요한 것을 알지만 그렇다고 디아나를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대공은 에드윈의 복잡해 보이는 얼굴을 보다 쯧, 혀를 찼다.

“지금 너에게 제일 중요한 것은 검술 대회다. 그러니 딴 일은 머릿속에서 비워라. 그리고 디아나의 공부는 네가 아니더라도 계속될 것이다.”

“그 말씀은…….”

“제대로 된 선생을 붙일 것이다. 그게 디아나에게도 더 좋은 일이겠지.”

“감사합니다, 전하!”

에드윈이 반색하며 대공에게 고개를 숙였다.

누가 보면 디아나가 에드윈의 자식인 줄 알 만큼 세상 밝은 얼굴이었다.

“……네가 감사할 일은 아니다.”

“아, 네. 송구합니다.”

에드윈은 대공의 싸늘해진 분위기에 입꼬리를 빠르게 내렸다.

하지만 여전히 에드윈의 입꼬리는 언제라도 올라갈 듯 움찔거리고 있었다.

“쉬는 시간이 끝났으니 연무장으로 돌아가 있거라. 그리고 오늘 저녁에 나와 대련을 할 것이니 준비하도록.”

“전하께서 말씀이십니까? 오늘은 단장님과 하는 줄 알았습니다.”

그의 대련 상대는 로운이 맞지만 방금 대공이 바꾸었다.

“내가 할 것이다. 준비 단단히 하거라. 봐주지 않을 것이니.”

“네!”

우렁찬 대답이 오늘따라 대공의 신경을 자극했다.

왠지 짜증이 올라와 눈살을 찡그리던 대공은 에드윈에게서 몸을 돌렸다.

도서관을 나가려 한 걸음 내딛던 대공은 문득 떠오른 것이 있어 걸음을 멈추었다.

“에드윈.”

“네, 전하.”

“네가 디아나를 신경 쓰는 것은 뭐라 하지 않겠지만…… 네 진짜 주인은 디아나가 아닌 세이아란 것을 잊지 말거라.”

세이아가 에드윈에게 관심이 많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에 비해 에드윈의 반응이 시큰둥하다는 것도 말이다.

에드윈이 디아나와 유대 관계가 깊다 한들 결국 에드윈이 모셔야 하는 진짜 주인은 디아나가 아닌 세이아였다.

대공의 묵직한 말에 숨겨 왔던 불경스런 마음을 들킨 거 같아 에드윈의 얼굴이 굳었다.

“……네, 전하.”

에드윈의 한 박자 느린 대답을 들은 대공은 더 이상 무어라 말을 하지 않고 도서관을 나섰다.

* * *

붉게 타올랐던 노을이 모두 지고 어둠이 찾아온 시각, 대공의 집무실엔 여전히 불빛이 밝았다.

“전하, 저녁 식사를 집무실에 준비해 드릴까요?”

집사는 서류에서 시선을 떼지 않는 대공에게 다가가 조심스레 물었다.

서류만 보고 있던 대공이 갑자기 고개를 들었다.

“저녁? 벌써 시간이 그리되었나.”

창밖으로 시선을 돌리자 어느새 어두워진 하늘이 보였다.

“시간이 언제 이리 흐른 것이지.”

급한 일만 마무리하고 세이아에게 가려 했던 그는 생각보다 많이 흘러버린 시간에 미간을 좁혔다.

“하론, 세이아는 이미 저녁을 먹었겠지?”

“네? 아, 네 대공녀님께선 한 시간 전에 이미 식사를 하셨습니다. 혹 같이 드시려 하셨습니까, 전하.”

“그러려고 했었지.”

대공의 답에 집사는 당황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송구합니다. 미처 제가 준비하지 못했습니다.”

“아니다. 내가 집사에게 미리 말을 하지 않았으니 몰랐던 게 당연해.”

세이아와 저녁을 함께 먹는 날엔 언제나 대공이 집사에게 미리 말을 해 주었다.

오늘도 미리 언질을 주었어야 했는데 갑자기 처리할 일이 생겨 대공이 깜박한 것이었다.

“세이아는 이미 잠이 들었으려나.”

대공의 나직한 혼잣말에 고개를 숙였던 집사가 물었다.

“전하, 시종을 보내 대공녀님께서 잠자리에 들었는지 알아볼까요?”

평소였다면 시간이 늦었으니 되었다고 했겠지만 오늘은 낮의 도서관 일 때문에 신경이 쓰였다.

거기다 자신이 들르겠다 말했으니 아직 기다리고 있으면 어쩌나 살짝 걱정이 되었다.

“세이아가 잠들었는지 사람을 보내 알아보거라.”

“네, 전하.”

“대공녀님, 시간이 많이 늦었는데 이만 잠자리에 드시지요.”

잘 시간이 넘었음에도 침대에 누울 생각을 않는 대공녀를 보며 유모가 걱정된다는 듯 이마에 주름을 지었다.

“싫어, 안 자. 아버지가 오시기로 했는걸.”

세이아의 단호한 말에 마리와 유모가 당황스런 시선을 주고받았다.

아직 대공에게서 아무런 언질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유모는 불만이 가득한 세이아를 달래 보려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대공녀님, 아무래도 오늘은 대공 전하께서 일이 바쁘셔서 오지 못하시는 거 같습니다. 내일 대공녀님이 집무실로 찾아가시면 어떨까요? 분명 전하께서 기뻐하실 거예요.”

“네, 네, 맞아요. 전하께선 대공녀님이 집무실에 오실 때마다 아주 기뻐하셨잖아요. 내일 찾아가시면 정말 좋아하실 거예요.”

마리가 유모의 말에 맞장구를 치며 목소리를 밝게 꾸몄다.

하지만 그들의 말에도 세이아는 꿈쩍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오늘 오신다고 했다니까!”

세이아의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방 안을 크게 울렸다.

날카로운 세이아의 반응에 유모와 마리는 안절부절못하며 시선을 교환했다.

그런 그들의 부산스러운 시선을 느낀 세이아는 짜증이 났다.

거기다 슬슬 밀려오는 잠에 눈꺼풀이 무거워지고 있었다.

하지만 세이아는 눈을 부릅뜨며 잠을 쫓아냈다.

아버지를 만나야 속을 뒤집는 이 분노를 잠재울 수 있기 때문이었다.

아버지가 자신이 아닌 디아나를 감쌌다. 자신의 말이 아닌 디아나의 말을 믿었다.

그리고 질책하는 듯 싸늘한 눈빛으로 본 것도 모자라 디아나에게 사과를 하게 만들었다.

그 더럽고 천한 디아나에게!

세이아는 생각하면 할수록 속에서 열불이 나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내가 왜, 왜 디아나에게 미안하다고 해야 하는 건데. 그 앤 존재부터가 잘못된 애인데.

세이아는 디아나의 존재 자체가 너무도 싫었다.

디아나만 없었다면 모두가 찬양하는 제 어머니도 살아 있었을 테고, 아버지도 자신을 두고 10년이나 전쟁에 나가지 않았을 것이다.

디아나만 없었다면 세이아는 대공의 유일한 딸로 모든 것을 누리며 사랑받는 완벽한 삶을 살 수 있었다.

한데 그 더러운 사생아 때문에 모든 게 망가졌다.

죽은 듯이 오두막에 갇혀 살기라도 했다면 모를까, 지금은 보란 듯이 저택에 들어와 있었다.

그리고 이젠 천하디천한 것이 자신처럼 하녀까지 부렸다.

거기다 세이아 자신이 눈여겨보는 기사와 친분까지…….

도서관에서 평소와 달리 자신을 똑바로 쳐다보던 디아나의 모습을 떠올리자 분노로 손이 파들파들 떨릴 정도였다.

“디아나…….”

절대 가만두지 않을 거야.

세이아가 섬찟하게 디아나의 이름을 읊조린 그때,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세이아의 눈이 반짝였다.

아버지가 오신 건가.

세이아는 유모에게 급히 말했다.

“어서 문 열어 줘.”

“네.”

채근이 섞인 세이아의 목소리에 유모는 곧장 문을 열었다. 하지만 세이아의 기대와 달리 열린 문 앞에 서 있는 것은 대공이 아니었다.

하인 하나가 고개를 숙이며 유모에게 물었다.

“대공 전하께서 대공녀님이 잠자리에 드셨는지 알아 오라 하셨습니다.”

“안 자.”

유모가 대답하기도 전에 세이아가 말했다.

“나 아직 안 자고 있다고 어서 아버지께 전해.”

세이아가 다급하게 말했다.

“어서 안 가고 뭐 해?”

평소의 차분하고 착했던 모습과 달리 앙칼진 세이아의 목소리에 하인은 당황스러운 얼굴을 하다 황급히 고개를 조아렸다.

“네, 지금 바로 가겠습니다.”

하인이 후다닥 떠나자 세이아는 그제야 머릿속을 가득 채웠던 분노가 가라앉는 기분이었다.

세이아는 자신의 눈치를 살피고 있는 유모와 마리에게 살가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봐, 내가 그랬잖아. 아버지가 오실 거라고.”

세이아의 확 달라진 분위기에 유모와 마리는 부자연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요, 대공녀님의 말이 맞으셨어요.”

“일찍…… 주무셨음 큰일 날 뻔했네요.”

유모와 마리가 어색한 미소를 짓던 그때, 열린 문으로 다가오는 묵직한 구두 소리가 울렸다.

마침내 발소리가 세이아의 방문 앞에 멈춘 순간 세이아는 밝은 미소를 지으며 소파에서 일어났다.

“아버지!”

세이아는 함박웃음을 지으며 대공에게 도도도 달려갔다.

계속 대공이 언제 올까 기다리고만 있었기에 반가움이 더욱 컸다.

대공은 자신에게 달려오는 세이아를 보곤 자세를 낮추었다. 폭, 그의 품에 안긴 세이아를 번쩍 안아 든 대공은 세이아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늦은 시간까지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구나.”

“아니에요, 오늘따라 잠이 잘 오지 않았는걸요.”

세이아는 눈을 예쁘게 반달 모양으로 접으며 배시시 웃음 지었다.

그런 세이아를 보며 옅은 미소를 지은 대공은 고개를 숙이고 있는 유모와 마리에게 시선을 돌렸다.

“너희들은 잠시 나가 있거라.”

“네, 대공 전하.”

“네, 대공 전하.”

유모와 마리가 문을 닫으며 방을 나가자 대공은 세이아를 안은 채 침대로 향했다.

세이아를 침대 위로 조심스럽게 내려놓은 대공은 침대에 걸터앉은 세이아의 앞으로 의자를 가지고 와 앉았다.

대공은 자신을 바라보는 세이아의 옅은 금안을 응시했다.

그를 향한 애정이 어찌나 선명하고 강한지 대공은 순간 세이아의 눈빛이 부담스럽게 느껴졌다.

아이가 그에게 애정을 갈구하는 것에 비해 그의 마음은 고요했기 때문에.

세이아에게 애정을 돌려주지 못하는 것에 죄책감이 서리던 때 세이아가 먼저 입을 열었다.

“아버지, 아까 낮의 일은 제가 너무 놀라서 오해했었나 봐요. 하지만 아버지에게 허락을 받지도 않고 디아나 혼자 에드윈을 부린 것은…… 잘못된 일 같아요.”

오해는 오해였고, 대공가의 기사를 아버지의 허락도 없이 디아나가 마음대로 부린 것은 잘못된 것이다.

디아나가 말했던 부탁이란 말은 머릿속에서 말끔히 지운 세이아는 걱정스럽다는 듯 대공을 바라보았다.

대공은 바로 답하지 않고 세이아를 잠시 가만히 바라보았다.

디아나를 향한 적의를 세이아는 숨긴다고 숨겼지만 대공에게는 빤히 보였다.

아까 도서관에서도 지금도 세이아는 디아나를 악의적으로 몰아가고 있었다.

정실의 자식들이 사생아를 경멸하는 것은 흔한 일이긴 하지만 이렇게 어린 나이에, 그것도 의도적으로 모함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아직 10살밖에 되지 않은 세이아가 그의 생각보다 더 영악한 것 같아 대공은 묘한 기분이 들었다.

“아버지?”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기만 하는 대공의 시선에 조금 긴장이 되는지 세이아의 옅은 금안이 살짝 흔들렸다.

그에 대공은 괜찮다는 듯 세이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세이아, 디아나가 에드윈을 부렸다는 말은 조금 잘못된 거 같구나. 디아나는 분명 부탁을 하였다 했고, 에드윈 역시 자신의 의지로 도운 것이라 했다.”

“그렇지만 아버지께 알리지 않은 것은…….”

“세이아.”

대공은 세이아의 말을 끊으며 이름을 나직이 불렀다.

세이아는 자신의 손을 잡는 따뜻한 대공의 손과 달리 차가움이 느껴지는 금안에 입을 다물었다.

대공은 가만히 그를 바라보는 세이아에게 말을 이었다.

“네가 디아나를 불편해하는 것을 알고 있단다.”

“……아니, 에요. 전 디아나를 싫, 어하지 않아요.”

남들에겐 아무렇지 않게 내뱉었던 거짓말인데 세이아는 왜인지 지금 이 순간 목소리가 떨렸다.

자신을 바라보는 짙은 금안이 너무도 압도적이었기 때문에.

“세이아, 디아나는 성인이 되면 대공가를 나갈 거란다. 절대 너의 자리를 넘보거나 너의 것을 가질 수는 없을 것이다.”

“……디아나를 정말 대공가에서 내보내실 건가요?”

“그래, 내보낼 것이다.”

대공의 단호한 답에 세이아의 금안에 이채가 생겼다.

그 이채를 놓치지 않은 대공은 세이아의 손을 꼭 잡아 주며 말했다.

“그러니 나는 네가 그동안은 디아나를 모르는 척했으면 좋겠구나.”

세이아는 차가웠던 대공의 금안이 부드러워지자 움츠렸던 어깨를 펴며 얼굴에 환한 미소를 그렸다.

“네, 그럴게요, 아버지.”

“그럼 세이아, 밤이 늦었으니 이만 자도록 하렴.”

대공은 이만 방을 나가려 의자에서 일어났다.

“아버지도 좋은 밤 보내세요.”

그의 이야기가 퍽 만족스러웠는지 세이아의 얼굴엔 억지로 숨긴 불만 같은 것이 없었다.

디아나가 나간다는 사실에 환해진 세이아의 얼굴 위로 가면 같던 세이아의 거짓된 미소가 겹쳐 보였다.

대공은 위화감이 드는 기분에 세이아에게 뻗으려던 손을 멈추었다.

“……그래, 잘 자거라.”

대공은 그를 올려보는 세이아의 기대감 어린 눈빛을 외면하며 몸을 돌렸다.

* * *

“아가씨.”

동화책을 펼쳐 놓고 같은 장만 바라보고 있던 디아나는 피비의 부름에 시선을 들었다.

“응?”

“괜찮으세요?”

피비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디아나를 바라보았다.

벌써 몇 시간째 책장이 넘어가지 않는 것을 피비도 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 괜찮아.”

디아나는 멈춰 있는 책을 향하는 피비의 시선을 느끼고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책을 덮었다.

아무렇지 않은 척 책을 덮었지만 사실 도서관에서 돌아온 뒤로 모든 상황이 걱정되어 식사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었다.

피비의 걱정스런 시선을 피해 창밖으로 고개를 돌리자 어느새 어둑해진 하늘이 보였다.

“언제 밤이 됐지.”

디아나가 책을 펼쳤을 때만 해도 노을이 지고 있었는데 생각에 빠진 사이 시간이 훌쩍 흐른 것 같았다.

“음…… 해가 진 지 벌써 3시간이나 흘렀는걸요.”

“그랬구나.”

흘긋 시계를 보자 이미 잘 시간이 넘었다.

‘피비도 이만 돌아가 쉬어야 하는데.’

디아나는 그만 책을 테이블 위에 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꽤 긴 시간 같은 자세로 있었던 탓인지 몸이 찌뿌둥하고 뻣뻣했다.

“으음…… 이만 자야겠어. 피비도 그만 돌아가서 쉬어.”

기지개를 켜며 잠자리에 들기 위해 침대로 향하자 피비가 디아나의 뒤를 따랐다.

“아가씨, 배는 안 고프세요? 저녁 거의 드시지 않으셨잖아요. 제가 지금이라도 간단하게 먹을 것을 가지고 올까요?”

“아니, 괜찮아. 배 안 고파.”

머릿속이 에드윈과 세이아 그리고 앞으로 자신이 어떻게 될지에 대한 걱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러니 아무리 맛있는 걸 가지고 온다 해도 지금은 입맛이 돌지 않았다.

“너무 안 드셔서 걱정돼요.”

“한 끼 정도는 괜찮아, 피비.”

원래 잘 챙겨 먹고 살던 것도 아니었고.

디아나는 피비가 들으면 슬퍼할 뒷말을 삼키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럼 머리 빗겨 드리고 갈게요.”

피비는 잠자리에 들기 전 항상 디아나의 머리칼을 큰 빗으로 빗겨 주었다.

하지만 오늘은 시간이 늦었으니 그냥 대충 혼자 머리를 풀고 자려 했었다.

“괜찮은데…….”

“제가 할 일은 하고 가야 저도 마음이 편해요. 앉으세요, 아가씨.”

피비가 싱긋 웃으며 화장대 앞의 의자를 두드리자 디아나도 더는 거절하지 않고 의자에 앉았다.

사실 디아나도 피비가 머리를 빗겨 주는 게 좋았다.

이제까지 누가 이렇게 부드럽게 머리를 빗겨 준 적이 한 번도 없었으니까.

피비는 예쁘게 묶인 디아나의 반 묶음 머리를 풀고 큰 빗을 가져왔다.

그리고 부드럽게 빗으로 갈색 머리칼을 빗겨 내렸다.

“아가씨.”

머리를 빗으며 피비는 나직이 디아나를 불렀다. 디아나는 거울 속의 피비를 바라보았다.

“응.”

“걱정 마세요, 다 잘될 거예요.”

디아나의 걱정을 다 알고 있다는 듯 피비가 위로하듯 말했다.

“난 괜찮은데 에드윈이 벌을 받을까 그게 걱정돼.”

“아니에요, 그러지 않을 거예요. 대공 전하께선 대공녀님의 말이 사실이 아니란 것도 아시고…… 또 대공 전하는 공명정대한 분이시니 이런 일로 에드윈 님이나 아가씨도 벌하지 않으실 거예요.”

“……그랬으면 좋겠다.”

피비의 자신을 믿어 보라는 듯한 당당한 목소리에 디아나는 시선을 들었다.

거울에 비치는 피비와 시선이 마주쳐 미소를 지으려던 그때, 디아나는 피비의 목을 보고 눈을 크게 떴다.

“피비, 다쳤어?”

목에 그어진 붉은 선을 본 디아나가 놀라 아예 피비에게로 몸을 돌렸다.

“상처가 너무 크잖아!”

디아나의 걱정 가득한 시선이 피비의 목을 향했다.

피비는 머쓱한 얼굴로 자신의 목에 생긴 상처를 손끝으로 쓸다 걱정 말라는 듯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디아나에게 말했다.

“아…… 별거 아니에요, 아가씨.”

“별게 아니긴, 이렇게 길게 긁혔는데……. 설마 아까 마리에게 긁힌 거야?”

디아나의 채근에 피비는 답하지 않고 어색한 미소를 그렸다.

그 미소가 곧 긍정이나 마찬가지였다.

돌이켜 보면 도서관에 피비와 마리가 들어왔을 때부터 상태가 많이 흐트러져 있었다.

분명 몸싸움을 한 거 같은 모습이었다.

그 모습을 보고 놀랐었지만 세이아의 행동과 연이어 나타난 대공 때문에 피비가 마리와 싸웠다는 것을 그만 까먹고 말았다.

돌아오자마자 피비가 다친 곳은 없는지부터 물었어야 했는데.

디아나는 자신 때문에 다친 피비에게 죄책감이 들어 얼굴이 어두워졌다.

“피비, 미안해.”

선명한 상처에 미안하다 사과하자 피비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고개를 붕붕 저었다.

“아니에요, 아가씨. 아가씨가 왜 미안하세요. 이건 그 마리 계집애가 나쁜 거죠. 다짜고짜 사람의 멱살을 잡다니, 그 앤 정말 나쁜 애라니까요.”

“멱살을 잡았다고?”

피비의 말에 디아나의 눈이 커지자 피비는 저도 모르게 말이 나왔던 것인지 당황한 얼굴로 황급히 말을 바꾸었다.

“아니, 그게 아니라요…… 정말 별거 없었어요, 아가씨. 그러니 걱정 마세요. 이건 몇 번 약만 바르면 금방 나을 거예요.”

“그래도 내가 좀 더 신경 썼어야 했는데……. 마리 그 애를 혼내 줄 수도 없고 미안해.”

마음 같아선 피비를 괴롭힌 마리에게 벌을 주고 싶지만 디아나는 그럴 권한이 없었다.

디아나의 얼굴이 시무룩해지자 피비가 디아나에게 작게 속삭였다.

“아가씨, 그렇게 슬퍼하지 않으셔도 돼요. 사실은 제가 오늘 마리 그 애의 머리칼을 한 움큼이나 뽑았거든요. 아마 머리에 큰 구멍 하나는 났을 거예요.”

비밀을 말해 주듯 속삭인 피비는 뿌듯한 미소를 그렸다.

머리에 구멍이라니.

그 모습을 상상하자 피비의 말대로 통쾌함이 들어 쿡, 웃음이 나왔다.

복수를 해 주었다는 피비의 말에 다시 몸을 돌린 디아나는 거울에 비친 피비를 보며 사뭇 결연한 얼굴로 말했다.

“그럴 일은 없어야겠지만 다음에 또 마리가 피비를 괴롭히면 그땐 구멍 두 개를 만들어 줘 버려.”

“두 개라니, 상상만으로도 벌써 즐겁네요. 꼭 그럴게요, 아가씨.”

장난스런 미소를 지으며 다시 디아나의 머리를 빗던 피비는 무언가 떠올랐는지 올라갔던 입꼬리를 천천히 내렸다.

“아가씨.”

“응?”

“아까 도서관에서 느낀 건데 말이죠……. 대공녀님은 소문과는 좀 다르신 것 같아요.”

대공성 내의 소문에 따르면 세이아는 천사보다 더 착하고 아름답다고 하는데, 피비가 오늘 본 모습은 천사라기보다 소악마에 가까운 모습이었다.

이런 불경한 생각을 누가 알까 무서워 움찔했지만 피비는 자꾸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소문 속의 대공녀와 실제 대공녀의 모습은 다른 것 같다고 말이다.

디아나는 미간을 좁히고 혼란스러워하고 있는 피비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이해할 수 있었다.

세이아를 제대로 마주하기 전까지만 해도 디아나 역시 하녀들의 소문을 통해 세이아가 천사만큼 착한 아이인 줄 알았었다.

그래서 더 어릴 적엔 천사 같은 대공녀님을 혼자 동경하고 부러워했던 적도 있었지만 그게 말도 안 되는 환상이었단 걸 세이아를 만난 뒤 알게 되었다.

다른 사람들에겐 몰라도 디아나에게 세이아는 천사가 아닌 천사의 가면을 쓴 작은 악마였다.

세이아에게 이때까지 뺨을 맞은 횟수는 열 손가락을 쉽게 넘었다.

새삼 떠오르는 기억에 볼이 화끈거리는 거 같아 볼을 살짝 쓸어내린 디아나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음, 피비, 앞으로 대공녀님과 자주 마주칠 수 있어. 그럴 때마다 절대 대공녀님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게 조심해. 알았지?”

세이아가 모든 걸 알았으니 앞으로 가만있진 않을 거다.

디아나야 세이아의 괴롭힘에 면역이 있지만 처음 겪는 피비가 혹시라도 실수를 해 세이아의 눈 밖에 날까 걱정이었다.

“……네, 아가씨.”

피비는 조금 의아한 눈빛으로 디아나를 보았지만 디아나가 이런 말을 왜 하는지 대충은 눈치를 챈 듯 곧 고개를 끄덕였다.

“피비, 그만 가서 쉬어. 나도 이제 잘래.”

갑자기 가라앉은 분위기를 털어 버리려 디아나는 싱긋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잠자리를 봐 드릴게요.”

“아냐, 아냐. 많이 늦었어. 피비는 아침 일찍 일어나야 하잖아. 어서 가.”

침대로 향하는 피비를 만류한 디아나는 냉큼 침대 안으로 쏙 들어갔다.

후다닥 베개를 베고 누워 이불을 목까지 올리고 피비를 바라보자 피비의 주홍빛 눈이 과하게 반짝였다.

디아나가 귀여워 죽겠다는 듯이.

피비는 작은 토끼 같은 디아나의 머리를 마구마구 쓰다듬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며 애정이 가득 담긴 미소를 지었다.

“아가씨, 그럼 내일 봬요. 좋은 꿈 꾸세요.”

“응, 피비도 잘 자.”

탁, 불이 꺼지자 디아나는 밀려드는 수마에 그대로 눈을 감았다.

* * *

다음 날.

디아나는 늦게 잠들었음에도 이른 아침 눈을 떴다.

아무래도 자꾸만 드는 걱정 때문에 잠을 설친 것이 원인인 듯했다.

몽롱한 정신으로 피비가 챙겨 주는 아침을 먹는 둥 마는 둥 한 디아나는 지금 소파에 앉아 창밖을 구경하고 있었다.

“날이…… 안 좋네.”

디아나의 복잡한 마음을 대변이라도 하듯 오늘 하늘엔 검은 먹구름이 가득했다.

“에드윈은 괜찮을까.”

마음 같아선 지금 바로 연무장으로 달려가 에드윈을 만나고 싶었지만 아직 어떻게 된 건지 아무것도 모르는데 괜한 문제를 일으키게 되는 걸까 봐 그럴 수도 없었다.

어제 피비의 상처도 에드윈의 일도 디아나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거 같아 답답했다.

‘빨리 성인이 되었으면 좋겠어.’

비가 쏟아질 거 같은 하늘을 물끄러미 보고 있던 디아나는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똑똑-.

“피비?”

피비라면 이제 방문을 두드리고 들어오지 않는데.

“하론입니다.”

역시나 피비가 아니었다. 주에 한 번 정도 방문하는 집사였지만 오늘은 방문할 때가 아니었다.

왠지 좋지 않은 예감에 얼굴을 굳힌 디아나는 나직이 답했다.

“들어와.”

창문을 향해 있던 몸을 돌리자 집사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아가씨, 대공 전하께서 부르십니다.”

불안했던 감은 틀리지 않았다.

“응.”

대공이 부른다는 말에 어깨가 움찔한 디아나는 곧 소파에서 일어나 집사를 따라 방을 나갔다.

집사를 따라온 곳은 다름 아닌 대공의 집무실 앞이었다.

문에 새겨진 대공가의 문양을 바라보고 있던 디아나는 문득 대공을 처음 만났던 그날이 생각났다.

디아나를 바라보았던 맹수 같은 황금빛 눈동자도.

지금은 그때보단 많이 약해진 눈빛으로 디아나를 보지만 처음 만났던 그날만 해도 대공은 당장이라도 디아나를 죽일 듯 날카로운 눈빛으로 디아나를 훑었었다.

집무실 앞에 다시 서게 돼서인지 괜스레 그때의 기억이 떠오른 디아나는 긴장감에 손을 그러쥐었다.

- 괜찮을 거예요!

어깨와 목이 뻣뻣해지던 그때 디아나는 피비의 자신만만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디아나의 불안했던 마음이 조금 편해졌다.

‘맞아, 피비의 말대로 다 괜찮을 거야.’

글을 배우려 한 게 죄는…… 아니니까.

디아나가 마음을 다잡은 그때, 집사가 대공에게 말을 전했다.

“전하, 디아나 아가씨께서 도착하셨습니다.”

“들여보내.”

대공의 낮은 목소리가 울리고 집무실의 문이 열렸다. 집무실 안으로 한 걸음 내디디려던 디아나는 갑자기 떠오른 것에 걸음을 멈추었다.

집사가 의아하게 바라보자 디아나는 잠시 머뭇거리다 결심한 듯 집사에게 작게 속삭였다.

“집사, 나중에 긁힌 상처에 바르는 약을 좀 가져다줄 수 있을까?”

집사는 순간 그게 갑자기 무슨 말이냐는 듯한 눈빛으로 디아나를 보았지만 곧 빠르게 시선을 갈무리하며 답했다.

“네,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고마워.”

피비의 상처에 좋은 약을 구해 줄 수 있을 거 같아 뿌듯해진 디아나는 한결 편해진 마음으로 집무실 안으로 향했다.

달칵.

디아나가 집무실 안으로 들어서자 시종들이 문을 닫았다.

디아나는 대공이 앉아 있을 책상으로 시선을 들었다, 놀란 듯 멈칫했다.

당연히 책상에 앉아 있을 것이라 생각했던 대공이 그곳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디아나가 조금 당황한 그때, 대공의 낮은 목소리가 디아나의 오른쪽에서 들려왔다.

“이리로 오거라.”

디아나는 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책상과는 조금 떨어진, 휴식을 위한 공간인 듯한 소파와 테이블이 놓여 있는 곳이 있었다.

소파는 디아나를 등지고 있었지만 팔걸이에 놓인 큰손을 보고 대공이 소파에 앉아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네.”

나직이 답한 디아나는 대공이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대공 전하.”

대공의 소파 옆에 선 디아나는 대공을 향해 살짝 고개를 숙였다.

“거기 편히 앉거라.”

“네.”

디아나가 자리에 앉자 대공은 테이블에 놓인 찻잔을 디아나의 앞으로 밀었다.

‘와, 예쁘다.’

디아나는 자신의 앞에 놓인 찻잔에 순간 속으로 감탄을 내뱉었다.

아름다운 붉은 꽃이 그려진, 이렇게 화려한 찻잔을 디아나는 처음 보았다.

꼭 꽃이 개화하는 듯한 모양새로 생긴 예쁜 찻잔에 저도 모르게 시선이 뺏긴 그때 대공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과일 차다. 네가 좋아하는 사과를 말려 우린 차이니 맛이 괜찮을 거다.”

“아, 네. 감사합니다.”

대공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린 디아나가 재빨리 답했다.

그리고 가만히 대공의 다음 말을 기다리는데 어쩐지 대공은 아무런 말 없이 디아나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 시선이 어찌나 집요한지 디아나의 옆얼굴이 따가울 지경이었다.

‘크게 혼나는 걸까……?’

대공이 어제의 일을 무어라 말할지 그것만 기다리고 있던 디아나는 결국 살짝 고개를 돌려 대공을 바라보았다.

고개를 돌리자마자 대공과 시선이 마주쳤다.

선명한 금안에 혹시라도 분노가 스며 있나 살폈지만 딱히 화가 난 거 같진 않았다.

대공의 의도를 알 수가 없어 의아함을 느끼던 때 대공의 입술이 열렸다.

“차를 마시기 싫은 건가.”

“네?”

예상치 못한 말에 디아나가 당황하며 되묻자 대공의 시선이 찻잔을 향했다.

“네가 사과를 좋아해서 집사에게 과일 차를 준비하라 했지. 맛이 나쁘지 않을 거다.”

아까와 비슷한 말이었다.

대공은 찻잔을 힐긋 보고 다시 디아나를 바라보았다.

그제야 디아나는 대공이 자신을 보고만 있던 이유를 깨달았다.

대공은 자신이 차를 마시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를 위해 준비했다는 차와 그걸 마시길 기다리는 대공.

디아나는 문 앞에서 한껏 긴장했던 마음이 무색하게 기분이 몽글몽글해졌다.

디아나는 풀어지려는 얼굴 근육에 힘을 주며 찻잔으로 손을 뻗었다.

조심스럽게 차를 한 모금 들이켜자 달콤한 맛과 향긋한 사과 향이 입 안 가득 퍼졌다.

생각보다 훨씬 맛있는 차 맛에 눈이 커진 디아나는 한 모금 더 차를 홀짝였다.

“먹을 만한가?”

“……네, 맛있어요.”

디아나는 풀어지는 얼굴에 힘을 주며 답했지만 하얀 볼엔 붉은 기가 올랐고 입꼬리도 살짝 올라가 있었다.

디아나 본인은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누가 봐도 맛있는 차를 먹어 기분이 좋아 보이는 얼굴이었다.

대공은 그런 디아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찻잔을 들었다.

한 모금 들이켜자 대공이 먹기에는 조금 단맛이 입 안 가득 퍼졌다.

하지만 사과 향이 짙은 것이 딱 아리엘이 좋아했던 그 차 맛이었다.

- 어때, 로우? 맛있지 않아? 난 남부의 사과 차가 제일 좋아. 사과 차 중 제일 사과 향이 강하거든. 나중에 우리 아이도 사과 차를 좋아하겠지?

대공을 바라보며 눈웃음을 짓던 아리엘의 모습이 떠올랐다.

대공은 오랜 시간이 흘렀음에도 선명한 기억의 파편에 눈을 느리게 감았다 떴다.

그러자 그의 앞에 앉은 디아나가 보였다.

영문을 모르는 듯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는 작은 아이.

디아나와 있을 때마다 아리엘이 떠올랐기에 대공은 과거의 상념이 깊어지기 전에 그리움을 끊어 냈다.

대공은 자신의 눈치를 살피고 있는 아이를 불렀다.

“디아나.”

“네.”

디아나는 잠시 흐릿했던 금안이 선명해진 것을 보고 허리에 힘을 주어 자세를 꼿꼿이 했다.

“오늘 널 부른 것은 어제의 일을 마무리하기 위해서다.”

“……네.”

“먼저 더 이상 에드윈에게 글을 배우는 것은 안 된다.”

‘역시…….’

예상했던 일이었지만 막상 선고를 받듯 대공에게 들으니 서글픈 기분이 들었다.

디아나가 어두워진 얼굴로 시선을 내리던 그때, 대공의 입술이 다시 움직였다.

“그리고 에드윈 대신 널 제대로 가르칠 수 있는 선생을 붙여 주마.”

“……네, 네?”

디아나는 처벌을 달게 받겠다는 생각으로 양순히 답하다 번쩍 시선을 들었다.

‘내가 잘못 들었나?’

디아나는 대공이 방금 한 말이 믿기지 않았다.

하지만 디아나가 잘못들은 게 아니라는 듯 대공은 태연한 얼굴로 말했다.

“에드윈에게 글을 계속 배워 봤자 너에게 큰 도움이 되지 않을 거다. 애초에 공부를 하려면 제대로 된 선생에게 배워야겠지.”

“정말 제게 선생님을 보내 주신다는 건가요?”

놀람이 가득한 디아나의 얼굴을 보며 대공은 소파에 편히 등을 기대었다.

“그래, 에드윈이 그러더구나. 너의 배움의 속도가 다른 아이들보다 훨씬 빠르고 훌륭하다고 말이야. 그러니 제대로 된 선생을 만나 한번 열심히 배워 보거라. 그게 너의 미래를 위해서도 좋을 것이다.”

‘나의 미래…….’

디아나는 자신의 미래를 말하는 대공 때문에 기분이 이상해졌다.

디아나는 대공을 바라보다 충동적으로 입을 열었다.

“……저한테 왜 잘해 주시는 거예요?”

그간 꾹 참아 왔던 물음이었다.

자신의 존재를 인정하지도 않으면서 대체 왜 이런 과분한 호의를 계속 베풀어 주는 것인지.

디아나는 자신이 충동적으로 한 말에 당황했지만 이미 내뱉은 말을 돌이킬 수 없었다.

디아나는 떨리는 마음을 숨기며 대공을 똑바로 응시했다.

처음 보는 디아나의 눈빛에 대공의 눈썹 끝이 꿈틀 움직였다.

흔들림 없는 아이의 얼굴 위로 언제나 올곧은 눈빛으로 사람을 보던 아리엘이 겹쳐졌다.

그는 아리엘의 모습을 지우듯 디아나의 시선을 비스듬히 피하며 말했다.

“난 네 어미에게서 너를 떼어 놓았다. 하니 네가 저택에 머무는 동안 내게는 너를 보호해야 할 의무가 있다. 나중에 네가 이 대공가를 나가더라도 잘 살 수 있도록 준비를 해 주는 것도 나의 의무다.”

“……보호자…….”

디아나는 기분을 묘하게 만드는 그 단어를 나직이 중얼거렸다.

디아나는 이미 너무 어릴 적부터 보호자라는 존재를 포기하고 살았었다.

누구보다 그녀와 가까운 보호자였던 엄마인 레아가 그녀를 학대했으니까.

그렇기에 디아나는 자신의 인생에서 보호자가 되어 줄 사람은 없을 것이라고 이미 단념했다.

한데 다른 사람도 아닌 대공이 자신의 보호자라니.

피를 나눈 사이로 누구보다 자신과 가까웠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누구보다도 가장 멀었던 사람이 바로 대공이었다.

디아나는 문득 레아에게서 그녀를 구해 주었던 그날 대공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 아무것도 두려워할 것 없다. 내가 네 옆에 있는 한 이곳에서 널 해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니…….

그때부터 자신의 보호자가 되어 주리라고 결심했던 걸까.

‘……대공 전하를 믿어도 되는 걸까.’

비록 대공이 그녀를 레아에게서 구해 주었지만 대공을 믿어서도, 그에게 어떠한 기대도 해서는 안 된다고 그렇게 스스로에게 수없이 되뇌었었다.

하지만 지금은 대공의 말을 듣자 이때까지 쌓아 왔던 마음의 벽이 무너지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디아나는 무너진 마음의 벽 틈 사이로 밀려드는 낯선 감정에 얼굴의 긴장감이 모두 풀어질 것만 같았다.

벅차오르는 감정을 대공에게 들킬까 디아나는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디아나?”

그런 디아나가 이상해 보였는지 대공이 불렀지만 디아나는 무어라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입을 열면 아직 갈무리되지 않은 감정이 툭 튀어 나올 거 같았기 때문에.

디아나가 입술을 앙다문 그때, 집무실 밖에서 집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전하, 기사단장님이 오셨습니다.”

“아, 벌써 시간이 그리되었군. 들여보내라.”

대공은 집사에게 답하곤 고개를 숙이고 있는 디아나에게 말했다.

“디아나, 이만 돌아가야 할 거 같구나.”

대공의 말에 디아나는 오히려 잘되었다고 생각했다. 후, 짧은 숨을 내쉰 디아나는 감정을 추스르며 천천히 입술을 열었다.

“네, 전 이만 가 보겠습니다.”

디아나가 자리에서 일어난 그때 로운이 집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디아나는 혹여 눈물을 참느라 붉어진 눈을 들킬까 꾸벅 고개를 숙이고 황급히 집무실을 나갔다.

“아가씨…….”

로운은 자신이 무어라 인사를 하기도 전에 빠르게 집무실을 나가는 디아나의 뒷모습을 보고 말을 멈추었다.

의아한 눈빛으로 사라지는 디아나의 모습을 보던 로운은 곧 궁금증을 떨치고 몸을 돌렸다.

집무실의 문이 닫히고 로운은 어느새 소파에서 책상으로 자리를 옮긴 대공에게 기사의 예를 갖추었다.

“대공 전하를 뵙니다.”

“일어나라.”

“네, 전하.”

대공은 책상 가득 쌓인 서류들을 살피며 로운에게 물었다.

“요즘 기사들의 상태는 어떻지? 긴 휴식 기간에 나태해지진 않았나?”

기나긴 전쟁을 끝내고 돌아온 만큼 기사들에게 긴 휴식을 주었었다.

하지만 이제 날이 완전히 풀리면 영지의 여러 일들과 겨울잠에서 깨어난 몬스터들을 토벌할 시기가 올 것이다.

그렇기에 이젠 휴식을 끝내고 그때를 준비해야 한다.

로운은 대공의 물음에 매끄럽게 입꼬리를 올리며 즐거운 얼굴로 말했다.

“그럴 리가요, 전하. 그런 걱정은 전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지나치게 자신만만한 로운의 목소리에 서류를 살피던 대공이 시선을 들었다.

빙그레 미소를 짓고 있는 얼굴을 보아하니 요즘 기사들의 연습 강도가 어떤 수준일지 안 봐도 알 수 있었다.

대공은 쯧, 혀를 차며 말했다.

“적당히 해라. 봄이 오자마자 기사들이 줄줄이 북방을 나가게 하지 말고.”

그만큼이나 로운도 기사들을 굴리는 훈련 강도가 셌다.

오죽 심했으면 그 소문이 제도에까지 퍼질 정도일까.

과거 로운의 훈련을 견디지 못해 기사단을 나간 기사들도 여럿 있었다.

그가 정곡을 찌른 듯 로운은 머쓱한 얼굴로 올라갔던 입꼬리를 내렸다.

“네, 적당히 하겠습니다.”

로운은 머릿속으로 그렸던 방대한 훈련 계획을 접었다.

대공은 결재한 서류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조사는 어찌 되어 가고 있느냐.”

“아무래도 북방의 문이 닫혀 마법진으로만 서신을 주고받고 있어 많이 진전되진 못했습니다만, 하워드 백작가 둘째 영식이 10년 전쯤 시골 영지로 내려갔다고 합니다. 그래서 사교계를 중심으로 찾았을 때 보이지 않았던 듯합니다.”

“시골로? 갑자기 왜? 둘째 영식이라면 꽤나 방탕한 것으로 말이 돌았던 거 같은데.”

“네, 10년 전쯤 비아텐 후작 부인을 건드려 후작의 분노를 샀다고 합니다. 그 일로 하워드 백작의 화가 폭발해, 아무도 모르게 새벽에 하인들을 시켜 시골 영지로 보내 버렸다고 합니다.”

“그리고 10년 동안이나 수도로 올라오지 않았단 말이냐?”

아무리 벌을 받았다 한들 10년 동안이나 시골 영지에 발을 묶어 둔다는 것은 조금 이상했다.

대공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저도 그 부분이 이상한 것 같아 조사를 명했습니다만 시간이 걸릴 거 같다고 합니다.”

“왜?”

“그게, 현재 둘째 영식이 쫓겨난 곳은 하워드 백작가의 영지 중에서도 제일 척박한 채비스 영지인데, 정보원의 말론 그곳의 분위기가 영 좋지 않다고 합니다. 특히 영지에 내려온 둘째 영식에 대해선 입을 열지 않는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다른 쪽으로 접근을 해야 할 거 같습니다.”

“흠, 이상하군. 10년 동안이나 영지에서 나오지 않는다는 것도, 영지민들이 말을 아낀다는 것도 말이야.”

“네, 그래서 현재 둘째 영식이 영지 내에 있는지도 확인이 불가한 상태입니다. 곧 북방의 문이 열리고 수도로 가실 테니, 그때 정보원과 접선을 해 보겠습니다.”

수도에서 정보원과 로운이 직접 만나면 더욱 조사에 박차를 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 최대한 빨리 알아내거라. 봄을 넘기기 전에 그 추악한 것이 저지른 짓을 밝혀야 하니까.”

감히 황실의 핏줄이라 속인 죗값을 제대로 치르게 할 것이다.

대공의 금안이 위험하게 번뜩였다.

“네, 반드시 봄을 넘기기 전에 둘째 영식을 찾겠습니다. 한데 전하.”

“말해라.”

“디아나 아가씨께서 집무실엔 어쩐 일이신가요? 혹 안 좋은 일이라도 있는 건가요? 아까 보니 급히 도망치듯 집무실을 나가시던데…… 말입니다.”

로운은 아까 집무실을 나가던 디아나의 뒷모습이 떠올리며 말했다.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디아나는 다급히 자리를 떠났다.

하지만 요즘 디아나를 대하는 대공을 보면 혼을 내진 않았을 텐데.

그가 이해하기 힘들 정도로 디아나를 신경 쓰고 있었으니까.

“흠.”

대공은 로운의 말에 답하지 않고 짧은 숨을 내뱉었다. 그리고 뭔가 못마땅한 듯 미간을 좁혔다.

로운은 심기가 불편해 보이는 대공의 모습에 괜한 말을 꺼냈다 생각하며 숨을 죽였다.

실없는 소리를 했다, 입을 열려던 순간 대공의 목소리가 울렸다.

“디아나가 많이 이상했나?”

“아…… 네, 아가씨의 모습이 평소와는 조금 다르게 보였습니다.”

“아까…… 좀 이상하긴 했었지.”

대공은 반듯한 미간에 주름을 지으며 턱 끝을 매만졌다.

저를 그리 당돌한 시선으로 바라봤던 아이가 갑자기 고개를 숙이며 말을 하지 않았지.

“왜 그랬을까.”

디아나와 했던 대화를 돌이켜 보아도 딱히 디아나의 기분을 상하게 할 만한 말은 없었다.

오히려 기뻐할 것이라 생각했는데. 고개를 숙여 숨긴 얼굴이 무엇인지 봤어야 했나.

로운마저 디아나의 상태가 이상해 보였다고 하니 대공은 신경이 쓰였다.

대공의 미간 주름이 점점 깊어지는 걸 보고 있던 로운이 대화를 환기시켰다.

“크게 안 좋은 대화를 나누신 게 아니시라면 별일 아니지 않겠습니까, 갑자기 해야 할 일이 생각나셨다거나…… 아님 화장실이 급해지셨다거나…….”

심각해지는 분위기를 풀어보려 했지만 대공의 표정은 쉬이 풀리지 않았다.

“그런 거라면 다행이겠지만, 흠.”

“뭐가 됐든 별일 아닐 겁니다. 요새 아가씨께 큰 문제가 있던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그래, 나쁜 소식을 전했던 것도 아니니까. 괜찮겠지.”

대공은 로운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중요한 일을 맡기기 위해 로운을 불렀다.

“로운, 너에게 시킬 일이 있다.”

“네, 전하.”

“디아나의 공부를 봐줄 선생이 필요하다. 귀족 선생들을 붙일 순 없으니…… 평민들 중 쓸 만한 자가 있는지 알아보거라.”

“……디아나 아가씨를 가르칠 선생 말씀이십니까.”

“그래. 디아나의 머리가 꽤 좋은 듯하니 어중간한 놈 말고 제대로 된 선생을 구해.”

선생을 붙여 준다니.

로운은 작정하고 디아나를 키우려는 듯한 주군의 모습이 몹시 당황스러웠지만 티를 내지 않으려 애썼다.

디아나와 관련된 일로 선을 넘지 말라, 경고를 받았었으니까.

그저 부디 그의 주군이 디아나에게 많은 정을 주지 않길 바랄 뿐이었다.

“……네, 알겠습니다, 전하. 저, 그리고…….”

로운은 답지 않게 말끝을 흐렸다.

한 가지 들은 소식이 있으나 이것을 대공에게 알리는 것이 좋을지 안 알리는 것이 좋을지 감이 오지 않았기 때문에.

“그리고, 뭐?”

대공은 서류로 시선을 내리며 물었다.

“시아페 후작께서 제국으로 돌아오신다고 합니다.”

들려오는 로운의 말에 서류를 살피던 그의 손이 그대로 멈추었다.

시아페 후작, 그는 바로 아리엘의 부친이었다.

“……그 소식을 언제 들었지? 확실한 것이냐.”

“네. 하워드 백작가를 알아보다 우연히 듣게 되었습니다. 곧 제국으로 돌아오신다 합니다.”

“후작께서 돌아오신다…….”

대공은 서류를 완전히 놓으며 의자에 몸을 기댔다.

심란한 마음에 눈을 감자 대공의 눈앞에 형언할 수 없는 슬픔이 가슴을 울리는, 평온히 눈을 감은 아리엘의 모습이 보였다.

숨죽인 울음소리밖에 들리지 않는 그곳에 곧 묵직한 구둣발 소리가 울리고 대공의 곁으로 아리엘과 똑 닮은 은발을 가진 남자가 섰다.

남자는 담담한 얼굴로 관속에 누운 자신의 딸을 바라보며 대공에게 말했다.

- 아리엘이 전하와 만난다는 것을 알았을 때부터 전 대공 전하가 싫었습니다. 제 딸을 행복하게 해 주지 못할 거 같은 느낌이 들었으니까요. 그 감을 믿고 말렸어야 했는데……결국 이리되었군요. 전 말입니다, 다른 어떤 변명도 듣지 않을 것입니다. 제게 아리엘을 죽인 사람은 다른 누구도 아닌 대공 전하이시니까요.

악을 지르지도 짓씹듯 말하지도 않았다.

그저 무덤덤하게 그 말만을 남긴 후작은 아리엘의 위로 꽃 한 송이를 남긴 뒤 그렇게 장례식을 나갔다.

대공은 느리게 감았던 눈을 떴다.

짧은 과거의 상념에서 깨어나자 꼭 장례식의 그날처럼 어두운 얼굴로 서 있는 로운이 보였다.

“전하, 후작께서 돌아오시면 서신이라도…….”

“아니다. 어차피…… 내가 보내는 서신은 열어 보시지도 않을 것이다.”

대공은 고개를 저었다.

세이아마저 보지 않고 사시는 분이니 대공의 연락을 받아 줄 리 없었다.

마지막으로 들은 소식이 몇 년 전 제국을 떠났다는 것이었는데 두문불출하던 후작이 무사하다는 것에 그저 만족해야 했다.

“로운, 그만 나가 보거라.”

“네, 전하.”

로운이 집무실을 나가고 대공은 다시 서류로 손을 뻗었다.

하지만 서류의 문장 한 줄을 채 다 읽지 못하고 다시 놓았다.

율리스 시아페.

커다란 고목나무를 연상시키는 율리스의 모습을 떠올리던 대공은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시아페 후작은 절대 쉬운 상대가 아니었다.

시아페 후작가는 초대 황제 때부터 명맥이 이어져 온 제국의 유서 깊은 가문이었고 시아페 가문의 또 다른 이름은 바로 현자의 가문이다.

바슘 시아페.

시아페 가문의 초대 가주인 그는 초대 황제의 재상을 지냈을 정도로 머리가 비상한 자였다.

그 비상한 머리의 명맥이 후손들에게 이어졌는지 후작가는 대대로 현자의 탑에 많은 이름을 올렸었다.

율리스 시아페 역시 현자의 탑에 이름을 올린, 그것도 제국에서 최연소로 현자의 칭호를 받은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가 어려운 가장 큰 이유는 아리엘의 아버지라는 사실이다.

율리스 후작과 대공의 사이는 제국에 공공연하게 알려질 정도로 좋지 않았다.

정확히는 율리스 후작이 일방적으로 대공을 싫어하는 것이었지만.

아리엘의 죽음 때문만은 아니었다.

아리엘이 죽기 전부터, 정확히는 아리엘과 대공이 정식으로 교제를 시작했을 때부터 후작은 대공을 싫어했었다.

장례식장에서 말했듯이 말이다.

처음엔 율리스 후작이 그를 싫어하는 이유는 하나뿐인 딸인 아리엘에게 가문을 물려줄 수 없게 되어 그런 것이라 생각했었다.

대공인 그를 데릴사위로 들일 순 없었으니까.

하지만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대공은 후작이 그를 싫어했던 것은 정말 아리엘의 불행을 예감했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그런 기분이 들었다.

그는 많은 것을 꿰뚫어 보는 현자였으니까.

어쩌면 후작의 말대로 아리엘을 죽인 것은 그녀를 끝내 지키지 못한 자신일지도 모르겠다.

‘로우.’

눈을 감고 고요함에 귀를 기울이면 아직도 그를 부르는 아리엘의 목소리가 선명히 들려왔다.

눈을 뜨면 그를 바라보며 미소 짓는 아리엘이 있을 거 같지만 그의 앞엔 아무도 없었다.

대공은 꽉 조이는 심장에 탄식 같은 긴 숨을 내뱉었다.

긴 시간이 흘렀지만, 앞으로 또 긴 시간이 흐른다 해도 그는 절대 아리엘을 잊을 수 없을 것이다.

그 상실감이 영원히 채워지지 않겠지만 대공은 아리엘을 따라갈 순 없다.

그에겐 아리엘만큼이나 소중한 아이가 남아 있으니까.

대공은 순간 머릿속에 떠오른 아이의 모습에 얼굴이 굳었다.

그가 무의식적으로 떠올린 소중한 아이는 세이아가 아니었다.

“하아.”

대공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혼란스런 얼굴로 아이의 이름을 나직이 내뱉었다.

“……디아나.”

그 아이는 내 아이도, 아리엘의 아이도 아니야.

대공은 너무도 당연한 진실을 스스로에게 되뇌며 주먹을 꽉 그러쥐었다.

하지만 눈앞의 뻔히 보이는 진실과 달리 복잡한 마음은 그리 쉽게 가라앉질 않았다.

* * *

“아가씨!”

방으로 돌아와 문을 열자마자 피비가 놀란 얼굴로 디아나에게 다가왔다.

“괜찮으세요? 방으로 돌아오니 아가씨는 없고 하녀가 와서는 갑자기 아가씨께서 대공 전하께 불려 가셨다는 말만 남기고 가 버리지 뭐예요! 괜찮으세요? 대공 전하께서 뭐라고 하시던가요?”

피비는 디아나의 얼굴을 살피며 숨을 쉬지도 않고 말을 내뱉었다.

그러다 어딘지 이상한 표정의 디아나를 보곤 울상을 지었다.

“아가씨, 대공 전하께서 많이 혼내시던가요……?”

“……아냐. 혼난 거 아냐.”

디아나는 조금 느리게 피비에게 답했다.

“그럼 표정이 왜…….”

“음…… 모르겠어, 뭔가 기분이 이상해.”

“네?”

피비는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얼굴로 디아나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디아나도 지금 물밀듯이 밀려드는 감정들을 무어라 설명할 수가 없었다.

보호자.

그 말을 처음 들었을 땐, 가슴속 깊은 곳에서 울컥하는 감정에 눈물이 날 거 같았다.

하지만 점점 시간이 지날수록 이게 현실이 맞는 건지, 정말 대공을 믿어도 되는 건지 불안감도 들었다.

“피비, 대공 전하께서…… 내 보호자래…….”

나직하게 말하는 디아나의 말에 피비는 순간 당황했다.

대공 전하가 디아나의 보호자인 것은 피비가 보기엔 너무도 당연하니까.

한데 피비가 모시는 작은 아가씨는 볼을 발그레 붉힌 채 ‘보호자’라는 말을 생전 처음 듣는 아이처럼 벅찬 눈빛을 하며 말했다.

디아나의 모친에 대한 이야기를 듣긴 했었지만 디아나는 피비가 생각한 것보다 더 험한 일을 겪고 자란 거 같았다.

피비는 양 볼을 발그레 붉힌 디아나를 보며 당황스러움을 지우고 밝은 미소를 지었다.

“와, 정말요? 잘되었어요. 역시 대공 전하께선 아가씨를 아끼시고 계신 게 분명해요.”

“아끼다니……. 그런 건 아닐 거야. 그냥…… 아마 내가 이곳에 지내게 되었으니까 어쩔 수 없이 그런 말씀을 하셨던 걸 수도 있어.”

디아나는 본능적으로 부정을 했지만 마음속엔 ‘어쩌면’이란 기대감이 피어올랐다.

“절대 어쩔 수 없이 하신 말씀은 아니실 거예요. 그러니 그런 생각은 하지 마세요, 아가씨.”

피비가 싱긋 웃으며 말하자 디아나의 억눌려 있던 기대심이 점점 부풀어 올랐다.

“피비의 말대로 억지로…… 는 아니었으면 좋겠다.”

자신을 아끼는 것까진 바라지도 않았다. 그저 지금까지 보여 준 호의들이 적어도 대공의 진심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보호자라는 그 말도…… 거짓이 아니길 말이다.

디아나는 옅은 미소를 짓다 복받치던 감정에 제일 중요한 사실을 까먹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아!”

“왜 그러세요?”

“피비, 나 선생님이 생겨!”

디아나는 아까보다 훨씬 밝은 얼굴로 피비에게 외쳤다.

울컥했던 감정들 때문에 잠시 까먹었지만 선생님이 생긴다는 건 상상도 해 보지 못했던 기쁜 일이었다.

피비 역시 이런 일까진 예상하지 못한 듯 깜짝 놀란 얼굴로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선생님이요? 정식으로 아가씨의 공부를 봐주실 선생님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응! 전하께서 내 공부를 가르쳐 주실 선생님을 보내 주신대!”

“정식 선생님이라니! 정말 잘됐어요! 그럼 이제 더 이상 몰래 글을 배울 필요도 없고 아가씨께서도 더 많은 걸 배우실 수 있으시겠네요!”

더 많은 것을 배운다.

그 말이 디아나의 심장을 두근거리게 만들었다.

무언가를 알아 가고 배운다는 건 디아나가 항상 꿈꿔 왔던 일이었기 때문이다.

“하루라도 빨리 선생님이 오셨으면 좋겠다.”

“하루라도 빨리 공부를 하시고 싶으셔서요?”

피비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묻자 디아나는 답지 않게 큰 목소리로 답했다.

“응!”

디아나의 큰 목소리에 피비가 놀란 얼굴을 했지만, 디아나는 상기된 얼굴을 감추지 못하며 말했다.

“알고 싶은 게 너무 많으니까!”

거기다 이젠 누군가의 눈치를 살필 필요 없이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니, 너무도 꿈꿔 왔던 일이 곧 현실이 되는 것이다.

디아나는 선생님을 만날 날을 상상하며 환한 미소를 지었다.

* * *

삼 일 내내 쏟아졌던 비가 그치고 난 북방의 하늘은 그림 같은 푸름으로 물들어 있었다.

겨울의 마지막을 알리는 비였는지 비가 그친 하늘에서 쏟아지는 햇살이 유난히도 따뜻했다.

따스한 햇살 아래, 대공성의 사용인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는 오전, 대공성으로 마차 한 대가 들어섰다.

귀족가의 마차는 아닌 듯 평범한 마차는 대공성의 넓은 정원을 지나 저택의 입구에서 멈추었다.

저택의 입구에 서 있던 집사는 마차가 멈추자 허리를 꼿꼿이 펴며 손님을 맞을 준비를 했다.

마침내 마차의 문이 열리고 한 남자가 마차에서 내렸다.

햇빛 아래 부드러운 갈색 머리칼과 한창 무르익은 숲의 색을 닮은 카키색 눈동자를 가진 남자는 꽤나 수려한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20대 중반의 나이로 보이는 남자는 커다란 대공가의 저택을 바라보다 입구에 서 있는 집사를 보고 조금 놀란 얼굴을 했다.

그를 맞이하기 위해 대공가의 집사가 직접 나올 것이라곤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는 귀족이 아니었으니까.

표정을 빠르게 갈무리한 남자가 집사 앞에 서자 집사가 먼저 인사를 건넸다.

“어서 오십시오, 데릴 님.”

“이렇게 환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데릴은 집사에게 가볍게 묵례를 했다.

“아닙니다, 데릴 님. 대공 전하께서 기다리고 계시니 저를 따라오시길 바랍니다.”

“네.”

데릴은 집사를 따라 위엄이 느껴지는 저택 안으로 발을 내디뎠다.

같은 시각, 대공성의 정원을 산책하고 있던 세이아는 저택으로 들어서는 낯선 남자의 뒷모습을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저 남자는 뭐지? 마차는 또 왜 저리 낡았어?”

세이아는 자연스럽게 남자가 타고 온 마차를 보다 눈살을 찌푸렸다.

저택의 입구에 서 있는 마차는 하녀들이 타고 다니는 마차와 크게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저런 마차가 감히 대공가의 저택 앞에 서 있다니, 세이아는 괜히 기분이 나빠졌다.

“귀족은 아니신 거 같은데…….”

마리는 세이아의 말에 마차와 남자의 뒷모습을 가늘어진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러다 문득 떠오른 사실에 입술을 움직였다.

“아, 디아나 아가씨의 선생인가 봐요.”

“뭐? 선생?”

세이아는 디아나의 이름이 나오자 눈을 치켜뜨며 마리를 돌아보았다.

마리는 매서운 세이아의 눈빛에 아차 싶었지만 이미 망할 놈의 주둥이는 말을 내뱉은 뒤였다.

마리는 눈을 되록되록 굴리며 말했다.

“그게…… 저도 그냥 어쩌다 들은 말이라 정확하지 않아요.”

“그 어쩌다 들은 말이 뭔지 일단 말해. 디아나에게 선생이라니?”

세이아는 그냥 넘어갈 마음이 없는 듯 팔짱을 끼며 마리를 바라보았다.

조그만 아가씨에게서 느껴지는 압박감에 마리는 등 뒤로 땀이 삐질 흘러내렸다.

“그게…… 이틀 전인가, 하인들이 이야기하는 걸 들었는데 대공 전하께서…… 디아나 아가씨에게 붙여 주실 평민 선생을 찾고 있다고 하더라고요…….”

마리는 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죄를 고하는 듯한 기분으로 말했다.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마리는 세이아가 디아나를 얼마나 싫어하는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얼마 전 도서관의 일도 있었는데, 하필 디아나 아가씨의 이야기를 꺼내다니.

마리는 세이아의 분노가 터질 것이라 예상하며 잔뜩 긴장했지만 세이아는 인상을 와그작 찡그렸을 뿐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그 고요함이 더 무서워진 마리가 조심스럽게 세이아를 불렀다.

“아가씨?”

“왜.”

“아니…… 그게, 괜찮으신지…….”

세이아가 눈을 세모꼴로 뜨며 마리를 쳐다보았다.

사실 마리가 무얼 묻는지 세이아는 알고 있었다.

세이아에게 있어 디아나는 하녀들보다 더 천한 존재였기에 그런 디아나에게 선생이 붙는다는 건 세이아가 당연히 분노할 일이다.

하녀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열이 받는데 이젠 선생이라니.

그 말을 들었을 땐 순간 속에서 불길이 치솟았지만 곧 대공의 말이 떠올랐다.

- 디아나는 성인이 되면 대공가를 나갈 거란다. 절대 너의 자리를 넘보거나 너의 것을 가질 수는 없을 것이다.

대공이 그녀에게 약속했던 그 말이.

더러운 사생아인 디아나가 자신의 것을 넘보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지만 그래도 디아나가 저택에 들어왔을 땐 조금 불안했었다.

천한 것이 혹시라도 자신이 가진 것을 탐할까 봐.

항상 무덤덤한 얼굴로 그녀를 보는 디아나가 당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으니까.

하지만 아버지는 자신에게 약속해 주었다.

디아나가 절대 그녀의 것을 넘보지 못하게 하겠다고.

‘조금만 참으면 어차피 디아나는 쫓겨날 거야.’

물론 마음과 달리 분노를 참는 게 쉽지는 않겠지만 아버지께서 이해해 달라고 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그 말을 어기고 싶지 않았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세이아를 바라보던 대공의 차가운 눈빛이 선명하게 기억에 남았기 때문에.

세이아는 다신 보고 싶지 않은 차가운 눈빛을 머릿속에서 지우며 마리에게 퉁명스럽게 말했다.

“뭐가? 내가 괜찮지 않을 일이라도 있어?”

그러자 마리는 황급히 고개를 저으며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하하, 당연히 없죠. 오늘은 날씨도 좋고 또 대공 전하께 귀한 선물도 받으셨으니 당연히 좋은 날이죠. 하하.”

“그래, 맞아. 오늘은 그렇게 좋은 날이야.”

세이아는 새침한 얼굴로 몸을 돌렸다.

비가 그치자 더욱 화사하게 피어난 꽃들이 정원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붉은 꽃이 매우 아름답게 피어 있었지만 세이아의 방엔 꽃보다 더 아름다운 보석이 있었다.

보석은 마리가 말한 대공이 보내온 선물이었다.

귀족들도 몇 달 전부터 예약을 해야 겨우 의뢰할 수 있을 만큼 유명한 세공사가 세공한 보석이라고 집사가 설명해 주었었다.

곧 봄이 오면 제도에서 검술 대회가 열리고 세이아도 그곳에 참석하게 되니 아버지께서 특별히 보낸 선물이라고 말이다.

완연한 봄이 오면 세이아는 아버지와 제도로 떠날 것이고 디아나는 이곳에 혼자 남을 것이다.

‘그래, 디아나와 난 달라. 아버지가 인정하지도 않은 애에게 신경을 쓸 필요도, 기분 나빠할 것도 없는 거야.’

“마리, 그만 방으로 돌아가자. 이런 꽃들 말고 아버지가 보내신 선물들을 다시 봐야겠어.”

불쾌했던 감정은 사라지고 만면에 미소가 가득해진 세이아는 어리둥절한 마리를 데리고 저택으로 걸음을 옮겼다.

* * *

집사를 따라 대공의 집무실 앞에 도착한 데릴은 큰 문에 새겨진 두 개의 검을 바라보았다.

데릴은 귀족은 아니었지만 그의 직업상 귀족가에 방문한 적이 여러 번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문부터 위압감이 느껴지는 가주의 집무실은 처음이었다.

‘과연 제국의 검이라 불리는 테라비타 대공의 집무실답군.’

“대공 전하, 데릴 님께서 도착하셨습니다.”

집사가 대공에게 아뢰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낮은 음성이 안에서 들려왔다.

“들여보내.”

문이 열리자 데릴은 긴장감에 후, 짧은 숨을 내쉬고 집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자네가 데릴이군.”

대공은 책상에 앉아 데릴을 바라보았다.

데릴.

그는 로운이 찾은 명석한 머리를 가진 평민으로, 디아나의 선생이 될 자였다.

평민으론 살아남기 힘들다는 툰드라 아카데미를 수석으로 졸업하였다고 한다.

귀족 자제들의 개인 교습을 한 경험도 있었고, 몇 개의 왕국에서 스카웃 제의를 받을 정도로 뛰어난 머리를 가지고 있다고 들었었다.

‘한데 생각보다 젊군.’

대공은 나이가 꽤 있을 거라 예상한 것과 달리 젊은 데릴의 모습에 의아함을 느끼다 로운이 주었던 데릴의 이력서를 힐긋 다시 살폈다.

그리고 그곳엔 대공이 놓쳤던 한 줄의 문장이 있었다.

[아카데미 최연소 수석 졸업]

최연소라…….

대공은 이력서에서 시선을 거두고 다시 데릴을 바라보았다.

데릴은 그를 똑바로 마주하는 금안에 순간 숨을 들이켰다.

대공에 대한 수많은 소문을 들었었다. 하지만 사람의 말이란 것이 늘 그렇듯 부풀려지기 마련이니 대공에 대한 소문 역시 마찬가지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을 비웃듯 데릴이 직접 마주한 대공은 마치 거대한 몸집을 가진 짐승처럼 사람을 누르는 압도적인 기세를 지녔다.

데릴은 뻣뻣이 굳은 몸을 숙이며 예를 갖추었다.

대공은 귀족이 아님에도 귀족보다 더욱 우아한 몸짓으로 예를 갖추는 데릴을 보며 눈썹을 살짝 올렸다.

“대공 전하를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일어나게.”

“네, 전하.”

데릴이 숙였던 몸을 일으키자 대공은 책상에서 일어나 소파가 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야기는 이곳에서 나누는 게 편하겠지.”

대공은 상석에 앉으며 데릴에게 빈자리에 앉으라는 듯 손짓했다.

데릴은 대공의 오른쪽에 앉았다.

그가 앉자 하인이 다가와 테이블 위로 찻잔을 내려놓았다. 찻잔에서 은은하게 올라오는 의외의 달달한 향에 데릴의 눈썹이 꿈틀했다.

북방의 추위보다 더 차가운 분위기를 가진 대공이 달콤한 차를 마신다는 게 뭔가 어울리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내가 요즘 즐겨 마시는 사과 차를 준비했는데 괜찮을지 모르겠군. 남부의 사과를 말려 만든 것이라 맛은 좋은데 말이야.”

“아, 괜찮습니다. 제 고향이 남부라 사과 차 같은 과일 차엔 익숙합니다.”

“고향이 남부였군.”

대공이 의외라는 듯 말했다.

“네, 전하.”

“한데 고향이 남부인데 지금은 왜 남부와 멀리 떨어진 북부에 머물고 있지? 최근 이력을 보니 쉬고 싶어 제도의 모든 일을 정리하고 떠났다고 적혀 있던데. 보통은 그리 떠나면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나?”

대공은 방금까지와 달리 조금 날카로운 시선으로 데릴을 훑었다.

화려한 이력을 가진 그가 굳이 고향과 먼 북방에 온 이유에 다른 의도가 있을까, 확인하기 위해.

그러나 들려온 대답은 대공이 예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말이었다.

“네, 보통은 그렇지만 제가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고 북방으로 온 것은 시아페 후작님 때문입니다.”

“……시아페 후작이라 했나?”

대공은 생각지도 않은 후작의 등장에 눈썹이 살짝 위로 올라갔다.

“네, 제가 몇 년 전부터 약초학에 관심이 많아졌는데 후작께서 제게 북방의 산맥엔 희귀한 약초들이 많다고 추천해 주셨습니다.”

데릴은 태연한 얼굴로 대공에게 답했다. 대공은 그런 데릴을 물끄러미 보며 소파의 원목 손잡이를 손끝으로 두드렸다.

대공과 시아페 후작의 사이가 좋지 못하다는 것은 제국의 평민들도 알 만큼 유명한 이야기였다.

한데 지금 데릴은 대공의 앞에서 아무렇지 않게 시아페 후작의 이야기를 꺼낸 것이다.

‘일부러 나를 자극하려 말한 것인가.’

대공의 눈매가 매서워졌다.

하지만 일부러라고 하기엔 대공을 바라보는 데릴의 얼굴엔 어떠한 의도도 보이지 않았다.

정말 대공이 물었기에 그에 답한 듯한 무감한 얼굴이었다.

‘머리는 좋은데 눈치는 없는 건가.’

대공은 차분한 기색의 데릴을 보며 삐뚜름히 입꼬리를 올렸다.

“그대, 혹 시아페 후작과 나의 관계를 모르나?”

“네?”

데릴은 순간 대공의 말이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하고 되물었다.

안 그래도 데릴은 답을 하자마자 분위기가 매서워진 대공에 의아함을 느끼고 있던 차였다.

근데 갑자기 시아페 후작과의 관계라니.

데릴은 그게 무슨 말인가 하다 순간 떠오른 사실에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시아페 후작. 그는 아리엘 시아페의 부친으로 죽은 대공비의 아버지가 되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시아페 후작과 대공의 사이가 극도로 좋지 않다는 것은 길거리의 꼬마들도 알 만큼 유명한 가십거리였다.

데릴의 장점이자 단점이라 할 수 있는 게 바로 한 가지 일에 집중하면 주변의 다른 일들을 까먹는다는 것이다.

최근 약초학에 빠져 사람들을 잘 만나지도 않았다.

갑작스럽게 대공의 부름을 받지만 않았다면 아마 그는 연구실에 스스로를 가두고 봄이 완전히 찾아온 뒤에야 집 밖을 나왔을 것이다.

‘이런,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한 거지.’

대공성에 오기 전에 대공과 주변 사람들의 관계를 한번 알아보고 왔어야 했는데 워낙 연구실에만 박혀 있느라 세상의 일과는 멀어지고 말았다.

대공과 시아페 후작, 두 사람의 너무도 유명한 소문까지 잊어버릴 정도로 말이다.

데릴은 낭패감을 느꼈지만 이미 그의 입에서 시아페 후작의 이름이 나오고 난 다음이었다.

데릴은 그를 빤히 바라보는 황금안에 사색이 된 얼굴로 황급히 시선을 낮추었다.

“죄송합니다. 제가 한동안 연구실에만 박혀 사느라 두 분의 사이를 까먹고 말았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혹 전하의 심기가 저 때문에 불쾌해지셨다면 벌을 달게 받겠습니다.”

단순한 귀족도 아니고 무려 황제의 동생인 대공의 심기를 거슬렀다.

당장 이곳에서 쫓겨난다 해도 어쩔 수 없었다.

대공은 당장이라도 쓰러질 듯 창백한 데릴의 얼굴을 보다 비소를 지었던 입꼬리를 내렸다.

툭 치면 쓰러질 듯 하얗게 질린 얼굴 어디에도 거짓은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됐네. 당장 죽을 듯한 그 모습을 보니 그대가 일부러 내 앞에서 후작의 이야기를 꺼낸 건 아닌 거 같군. 벌을 줄 생각은 없으니 고개 들어.”

“……감사합니다, 전하.”

“어차피 후작의 이야기가 나온다 한들 내 심기가 불편해지는 건 없네. 서로를 싫어한다는 소문은 진짜가 아니니까.”

후작이 대공을 일방적으로 싫어하는 것으로, 대공은 후작에게 죄책감만 있을 뿐이다.

피식, 자조적인 웃음을 흘린 대공은 그의 말에 의아한 얼굴을 하고 있는 데릴을 보다 뒤에 서 있는 집사에게 말했다.

“계약서를 가지고 와.”

“네, 전하.”

테이블 위로 집사가 가져온 종이가 조심스럽게 놓였다.

데릴은 계약서를 보다 대공을 바라보았다.

그를 찾아온 로운 경에게 대충 무슨 일을 해 달라는 말을 듣긴 했지만 이렇게 바로 계약서를 받게 될 줄은 몰랐다.

오늘 대공과의 만남도 일종의 면접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대공은 놀란 듯한 데릴을 보며 태연한 얼굴로 말했다.

“로운에게 대충 얘기를 들었겠지.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 말이야.”

로운은 데릴에게 대공가에 지내는 아가씨의 가정교사 자리를 제안했다.

로운은 그 아가씨에 대해 다른 어떠한 말도 덧붙이지 않았지만 데릴은 그 아가씨가 누구일지 단번에 알았다.

대공가에 대공이 인정하지 않는 사생아가 있다는 것은 사교계의 공공연한 비밀이었으니까.

사생아의 가정교사를 맡는 것은 사실 그의 커리어에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 자칫 잘못 얽히면 목숨도 위협받을 수 있었다.

그렇기에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땐 거절하려 했지만 로운이 내건 조건이 상당히 매력적이라 오히려 데릴 쪽에서 매달려야 할 판이었다.

로운이 제안한 것은 다름 아닌 대공성의 허가를 받아야만 들어갈 수 있는 북방 히말론 산맥의 출입권이었다.

히말론 산맥에 있는 수많은 신비한 약초들에 눈독을 들이던 데릴에겐 절대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이었다.

데릴은 계약서에 적힌 출입권 조항을 홀린 듯이 보다 대공에게 차분히 답했다.

“네, 제게 이곳에 사는…… 아가씨의 가정교사가 되어 달라고 들었습니다.”

“로운에게 들은 대로 난 그대가 디아나의 선생이 되어 줬으면 해. 그러니 이 계약서를 읽고 문제없다면 서명하면 되네.”

아주 잠깐 후작의 이야기가 나왔을 때, 데릴을 의심했지만 그건 사소한 실수였다.

그것 말곤 로운이 준 이력서와 데릴의 외적인 모습 모두 딱히 문제 될 게 없었기에 디아나의 선생으로 적합했다.

대공은 서명하지 않고 망설이는 데릴을 보고 눈썹을 치켜세웠다.

“왜 그러지? 계약서에 문제라도 있나? 아님 더 원하는 게 있나? 원하는 게 있다면 말해.”

“아, 아닙니다. 이미 제안해 주신 산맥의 출입권이면 제겐 충분합니다.”

그저 바로 진행되는 계약에 잠시 당황했을 뿐이었기에 데릴은 곧장 계약서에 서명을 마쳤다.

하인이 계약서를 챙기자 대공은 문득 떠오른 것을 데릴에게 물었다.

“한데 시아페 후작과는 어떻게 아는 사이인가?”

데릴은 살짝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아…… 후작께서 잠시 아카데미에서 강의를 하셨을 때 수업을 들은 제자입니다. 그때 후작께서 과분하게도 저를 좋게 봐주시어 아직까지 인연이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그렇군.”

시아페 후작의 사람 보는 눈이 얼마나 높은지 대공은 잘 알고 있었다.

‘그런 후작이 좋게 본 자라.’

대공은 아까와는 조금 다른 눈으로 데릴을 보며 말했다.

“출근은 내일부터 바로 가능한가?”

“네, 바로 가능합니다.”

“그럼 오늘 디아나와 인사를 하고 정식 수업은 내일부터 진행하는 걸로 하지. 아, 데릴.”

“네.”

대공은 서늘한 눈빛으로 데릴을 직시하며 입을 열었다.

“그대도 디아나에 대해 이미 알고 있겠지만 어쨌든 난 그 아이를 내 보호 아래에 두고 있네. 그러니 허튼 실수는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사생아의 교사직을 맡고 싶어 하는 사람은 없다는 걸 대공도 잘 알고 있다.

비록 그가 인정하지 않은 아이이긴 하지만 그의 보호 아래에 있는 아이니 함부로 대하지 말라는 명백한 경고였다.

“네, 명심하겠습니다, 전하.”

순순히 고개를 숙이는 데릴에 만족스런 눈빛을 한 대공은 그만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이만 일어나지.”

“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전하.”

“그러길 바라네.”

볼일이 끝난 대공은 다시 책상에 앉아 서류로 시선을 내렸다.

데릴은 책상에 앉은 대공에게 허리를 숙여 인사하곤 집무실을 나갔다.

데릴과 함께 집무실을 나온 집사가 말했다.

“그럼 디아나 아가씨의 방으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네.”

* * *

“아가씨, 오늘 비도 그쳤고 하니 산책을 나가시지 않겠어요?”

피비는 화창한 하늘을 보다 책을 보고 있는 디아나에게 말했지만 디아나는 피비의 말을 못 들은 듯 여전히 동화책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흠.”

피비는 그런 디아나를 보며 속으로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가 모시는 작은 아가씨가 얼마나 공부에 강한 열의를 가지고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특히 신비로운 그림이 많이 그려진 제국 건국 신화와 관련된 동화책은 디아나가 가장 좋아하는 것이었다.

- 피비, 피비. 초대 황제께선 막 바람도 불게 하고, 나무들을 움직이고, 땅도 흔들리게 하셨대! 여기 이 그림 봐 봐, 정말 신기하지 않아? 난 너무 신기하고 재밌어! 이런 그림책은 처음 봐.

조숙한 디아나답지 않게 동화책을 처음 봤던 날은, 동그란 눈을 반짝이며 피비에게 책 내용을 외치듯 설명했다.

그 모습이 정말 앙증맞아 깨물어 주고 싶을 만큼 귀여웠지만 갈수록 책만 보는 시간이 늘어나고 있어 조금 걱정도 되었다.

‘오늘은 비도 그쳐서 날씨도 좋으니 바깥에 나가시면 좋을 텐데…….’

특히 요 며칠 디아나는 밥 먹는 시간도 잊어버리고 동화책만 보았으니 더 신경이 쓰였다.

피비는 가만히 디아나를 보다 결심한 얼굴로 성큼성큼 디아나에게로 다가갔다.

“아가씨.”

피비는 디아나의 바로 앞에서 디아나를 불렀지만 얼마나 책에 집중하고 있는 건지 디아나는 미동도 없었다.

‘와. 우리 아가씨 집중력 대단한데.’

저도 모르게 속으로 감탄하던 피비는 아차, 하며 디아나의 앞으로 무릎을 굽혔다.

“아가씨.”

나직하게 다시 부르자 그제야 디아나가 시선을 들었다.

디아나는 자신의 앞에 쭈그리고 앉아 있는 피비를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피비, 뭐 해?”

“아가씨께서 불러도 답이 없으셔서 저 좀 봐 달라고 앉았어요.”

피비가 부드럽게 미소를 짓자 디아나의 입가에도 옅은 미소가 걸렸다.

“불렀구나…… 몰랐어.”

“괜찮아요. 우리 아가씨 집중력이 나날이 느는 걸 보니 기분 좋았는걸요. 근데 우리 책은 그만 보고 산책을 나가는 게 어떨까요?”

“산책?”

“네! 책도 좋지만 적당한 운동이 건강한 몸을 만들어 주니까요. 아침 드시고 벌써 몇 시간째 책만 보셨으니, 잠시 쉬시는 게 좋아요.”

피비의 말을 듣자 왠지 디아나의 목과 어깨가 기다렸다는 듯 뻣뻣하게 아파 오기 시작했다.

“그래, 그러자.”

디아나는 몸을 좀 풀어 줘야 할 것 같아 책을 덮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싱긋 미소를 지은 피비와 함께 방을 나가려는 그때,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똑똑-.

“아가씨, 집사입니다.”

집사가 이 시간엔 왜.

피비가 문을 열자 집사가 방으로 들어왔다. 한데 집사는 혼자가 아니었다. 디아나는 집사의 뒤를 따라 들어오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누구지?’

그녀와 비슷한 머리색을 가진 남자는 에드윈처럼 잘생겼다.

알 수 없는 남자를 이리저리 살피던 디아나는 순간 그녀를 바라보는 남자의 카키색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쳤다.

그녀를 훑는 남자의 시선에 움찔하던 그때 집사가 입을 열었다.

“아가씨, 이쪽은 아가씨의 수업을 맡으신 데릴 님이라고 합니다.”

집사의 소개에 경계심 어린 눈빛으로 남자를 보던 디아나의 눈이 커졌다.

“선생님?”

이렇게 빨리 선생님이 찾아올 줄은 몰랐다.

데릴은 놀란 듯한 디아나에게 한 걸음 다가갔다. 데릴은 디아나와 시선을 맞추듯 한쪽 무릎을 굽히며 자세를 낮추었다.

“정식으로 인사드리겠습니다, 디아나 아가씨. 전 앞으로 아가씨의 개인 교습을 맡게 될 데릴이라고 합니다.”

데릴은 많이 놀란 듯 멍한 얼굴로 입을 살짝 벌리고 있는 디아나에게 악수를 청하듯 손을 내밀었다.

“아.”

디아나는 자신의 앞으로 다가온 큰 손에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지금 디아나의 앞에 있는 사람은 그토록 기다리던 선생님이었다.

디아나는 데릴의 손을 잡으며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디아나라고 해요. 잘 부탁드려요, 선생님.”

디아나의 환한 미소를 본 세 사람은 순간 멈칫했다. 집사는 처음 보는 디아나의 밝은 미소에 놀랐고 피비는 낯을 많이 가리는 디아나가 처음 보는 사람에게 미소를 짓는 것에 놀랐다.

그리고 데릴은 디아나의 미소를 본 순간 왜인지 누군가 스치듯 머릿속에 떠올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너무 찰나였던지라 누구를 떠올렸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분명 누군가를 닮은 거 같은데.’

데릴은 디아나를 보며 그렇게 생각했지만 스쳐 지나간 누군가는 다시 떠오르지 않았다.

데릴은 자신의 손을 잡은 작은 손을 보다 곧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저야말로 잘 부탁드립니다, 아가씨. 그리고 말씀은 편하게 하셔도 됩니다.”

“아니에요, 선생님이시잖아요. 전 이게 편해요.”

데릴은 의외라고 느꼈다. 보통 귀족들은 그에게 성이 없다는 것을, 평민이란 걸 알게 되면 바로 자신의 아래로 봤기 때문이었다.

물론 디아나가 사생아이긴 하지만 평범한 귀족의 사생아도 아닌 황족의 사생아였으니 귀족으로서의 거만함이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이는 디아나가 어떻게 자랐는지 몰랐기에 가능한 생각이었다.

데릴은 순수한 디아나의 눈동자를 바라보다 살짝 입꼬리를 올렸다.

“네, 아가씨.”

데릴은 디아나의 손을 조심스럽게 놓아주며 무릎을 폈다.

디아나는 그런 데릴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며 물었다.

“선생님, 그럼 수업은 언제부터 시작하나요?”

데릴은 눈을 반짝이며 자신을 보는 디아나의 모습에 조금 놀랐다.

학문에 열의를 보이는 작은 디아나가 귀엽기도 하지만 의외였기 때문이다.

보통 디아나 또래의 아이들은 선생님을 보면 눈을 반짝이는 게 아니라 도망치거나 불만 가득한 얼굴을 하곤 했으니까.

“수업은 내일부터 합니다, 아가씨.”

“아.”

오늘부터였으면 좋았을 텐데.

아쉬움이 디아나의 얼굴을 스쳤다. 내일부터 수업이라고 하면 다들 질린 얼굴을 하건만 디아나의 얼굴에 가득한 명백한 아쉬움에 데릴은 쿡, 웃음이 나올 뻔했다.

데릴은 다른 아이들과는 다른 특이한 아가씨라고 생각하며 디아나에게 미소를 지으며 인사했다.

“아가씨,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아, 네, 선생님.”

데릴과 집사가 방을 나가자 디아나는 상기된 얼굴로 피비를 바라보았다.

“피비, 내일부터 수업이래! 거기다 선생님도 너무 좋아 보여, 그치?”

“네, 정말 잘생기셨네요. 앗, 아니 그게 아니라 너무 좋아 보이세요. 하하.”

피비는 저도 모르게 속마음을 말했다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하지만 피비의 말을 정확히 들은 디아나는 장난스런 미소를 지었다.

“피비, 볼 빨개졌어.”

“앗, 아니에요, 갑자기 더워서……아가씨, 놀리지 마세요…….”

피비는 강아지 같은 얼굴로 울상을 지었다. 디아나는 웃으며 피비에게 손을 내밀었다.

“알았어. 피비, 우리 산책 가자.”

갑작스런 방문에 멈추었던 산책을 가자고 말하자 피비가 손부채질을 멈추고 미소를 지으며 디아나의 손을 잡았다.

“정원 두 바퀴는 돌고 들어와야 해요, 아가씨.”

“응!”

디아나는 내일이 기대되는지, 기분 좋은 발걸음으로 피비의 손을 잡고 방을 나갔다.

* * *

햇살이 좋았던 낮이 지나고 밤이 찾아온 시각.

어두워진 밤하늘에 만월이 신비롭게 빛을 발하고 있었다.

환한 대공저에서 떨어진 곳, 사용인들의 저택 뒤편에 위치한 작은 오두막으로 하녀가 작은 바구니를 들고 빠르게 다가가고 있었다.

오두막의 문 앞을 지키고 선 하인 두 명이 지루함에 하품을 늘어지게 하다 다가온 하녀에게 인사를 건넸다.

“데이지 왔네.”

“식사를 가져왔어요.”

데이지는 바구니에서 샌드위치 두 개를 꺼내 하인들에게 내밀었다.

“아, 샌드위치 말고 제대로 된 식사를 하고 싶은데, 이번 주는 힘들겠지.”

짙은 갈색 머리를 가진 하인이 샌드위치를 받으며 투덜거리자 옆에 서 있던 녹색 머리의 하인이 그의 팔을 툭 쳤다.

“그래도 다음 주면 당번 바뀌잖아. 그때까지만 참자. 그리고 여기 지키면 수당도 더 쳐주니 얼마나 좋아.”

갈색 머리 하인은 그래도 불만스런 얼굴로 샌드위치를 한 입 베어 물곤 오두막을 힐긋 보았다.

“근데 대공 전하는 대체 언제까지 이 여자를 그냥 가둬 두기만 하는 거지? 차라리 아예 대공성 밖으로 쫓아 버리면 좋을 텐데.”

“아마…… 대공성이 아니라 북방에서 쫓아내시려는 거 아닐까. 곧 문이 열리니 그때 쫓아내시겠지.”

녹색 머리 남자는 시큰둥하게 답하며 샌드위치를 먹어치웠다.

그들을 가만히 보고 있던 데이지는 바구니를 다시 챙기며 오두막 문 쪽으로 다가갔다.

“그럼 맛있게들 드세요. 전 안에 계시는 분 저녁 드리고 나올게요.”

“그래.”

데이지는 굳게 잠긴 자물쇠를 풀고 오두막의 문을 열었다. 어두컴컴한 안으로 들어가자 주방 쪽에서 작은 불빛이 보였다.

데이지는 익숙하게 촛불 하나 달랑 켜진 식탁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그곳엔 흡사 귀신 같은 모습으로 앉아 있는 레아가 있었다.

레아의 시선이 데이지를 향했다.

데이지는 레아의 번뜩이는 시선이 익숙하다는 듯 아무렇지 않게 식탁 위로 묽은 수프 그릇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잠시 오두막의 문을 살핀 데이지는 바구니 안쪽에 숨겨 온 샌드위치를 꺼내 레아에게 내밀었다.

“여기요.”

레아가 샌드위치를 먹기 시작하자 데이지는 묽은 수프를 쓰레기통에 부어 버렸다.

허겁지겁 샌드위치를 다 먹은 레아는 입가를 소매로 대충 닦았다. 그런 레아에게 데이지가 빈손을 내밀었다.

무언가를 달라는 듯이.

레아는 그 손을 짜증스런 눈빛으로 보다 주머니에서 은화 한 개를 꺼내 데이지의 손에 쥐여 주었다.

데이지는 그릇을 바구니에 넣으며 말했다.

“뭐 딴 거 먹고 싶은 거 있음 말해요. 내가 잘 숨겨서 갖고 올 테니까.”

레아는 은화에 만족스런 미소를 짓는 데이지를 보다 주머니 속의 금화를 만지작거렸다.

대공이 그녀를 감금했을 당시 하인들이 온 집안을 뒤져 돈과 돈이 될 만한 모든 것들을 가져갔었다.

하지만 다행히도 대공이 돌아왔을 때 혹 이런 일이 생길까 바닥에 몰래 숨겨 둔 돈이 있었다.

많진 않지만 데이지를 매수하기엔 충분했다.

다른 하녀들이었다면 금화를 갖다 바쳐도 레아를 돕는 일은 하지 않았겠지만 데이지는 딱히 대공가에 대한 충성심도 타인의 일에도 관심이 없었기에 그저 돈을 주면 그녀가 원하는 것을 해 주었다.

“데이지.”

레아는 막 나가려는 데이지를 불렀다.

말을 잘 하지 않던 레아가 자신을 부르자 데이지는 의아한 눈빛으로 레아를 보았다.

“왜요? 뭐 먹고 싶은 거 있어요?”

“아니, 먹고 싶은 건 없고 알고 싶은 게 있어.”

얼마 전 하인들이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들었었다.

대공녀께서 대공비가 키웠던 몬스터에게 크게 다칠 뻔했다고.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레아는 온몸의 피가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

설마 유네스가 아직까지 살아 있는 줄은 몰랐기 때문에.

유네스.

대공비가 죽고 대공성에서 보이지 않아 주인을 따라 죽은 줄 알았는데 유네스가 살아 있었던 것이다.

거기다 자신에게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냈던 유네스가 이젠 대공녀를 공격했다고 한다.

감히 대공녀에게 말이다.

하지만 하인들은 그 뒤로 유네스가 어찌 되었는지에 대해선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그녀가 알기로 유네스와 같은 표우는 주인의 피 냄새로 각인을 하기 때문에 주인의 자식들에게까지 충성심을 보인다고 했었다.

한데 유네스가 대공녀를 공격했다.

레아는 초조하고 불안해졌다.

그 짐승만도 못한 몬스터가 절대 밝혀져선 안 되는 비밀을 건드릴까 봐.

‘제 주인이 죽자마자 따라 죽을 것이지, 왜 아직까지 살아서는.’

유네스가 설치기 시작한 이상 이곳에 갇혀 있을 수만은 없었다.

레아는 이를 까득 악물다 데이지를 바라보았다.

“뭐가 알고 싶은 거죠?”

데이지의 물음에 레아는 주머니에서 금화 두 개를 꺼내 데이지 앞으로 내려놓았다.

“대공 전하께서 데리고 있는 희귀종 몬스터가 어찌 되었는지, 그리고 대공녀님과…… 내…… 딸이 어떻게 지내는지에 대해 알려 주면 이 금화 두 개를 전부 줄게.”

금화를 본 데이지의 눈빛이 반짝였다.

“……정말 그것만 알려 주면 금화를 주는 거예요?”

“그래, 일단은 소식부터 알아야 하니까.”

그리고 난 뒤 움직일 것이다.

데이지는 미처 보지 못한 레아의 두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 위험하게 번뜩였다.

* * *

“아가씨, 너무 예쁘시네요.”

피비는 디아나의 긴 머리칼에 웨이브를 넣고 반 묶음 머리를 리본으로 묶었다.

디아나에게 있는 가장 예쁜 연노랑 드레스를 입힌 피비는 자신을 바라보고 서 있는 디아나를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피비가 예쁘게 꾸며 줘서 그래.”

“어머, 어쩜 이렇게 심성까지 고우실까요. 아가씨는 정말 완벽하세요.”

입을 틀어막으며 눈을 반짝이는 피비를 보며 디아나의 볼이 살짝 붉어졌지만 예전처럼 엄청 부끄러워하진 않았다.

날이 갈수록 더해지는 피비의 칭찬에 이제 어느 정도 익숙해졌기 때문이었다.

디아나는 피비를 보다 몸을 돌려 거울을 바라보았다.

거울 속에 비치는 자신의 모습을 보며 디아나는 볼을 발그레 물들였다.

피비의 말대로 오늘 자신의 모습은 스스로 보아도 예뻐 보였으니까.

이렇게 치장을 공들여 한 것은 처음이었다.

평소라면 이렇게 치장을 하고 다니지 않지만 오늘은 특별한 날이었다.

바로 데릴 선생님과의 첫 수업이 있는 날.

첫인상을 좋게 보이고 싶어서 디아나는 오늘 피비에게 먼저 예쁘게 꾸며 달라고 말했다.

물론 어제 데릴과 이미 만나긴 했지만 그래도 정식 수업은 오늘이 처음이 맞으니까.

“선생님도 피비처럼 예쁘다고 생각해 주실까? 예쁘게 봐주셨으면 좋겠는데…….”

타인에 대한 경계심이 강한 디아나는 기대감 어린 눈빛으로 드레스의 레이스를 만지작거렸다.

볼을 살짝 붉히는 디아나를 보니 피비의 광대가 절로 올라갔다.

“당연히 예쁘다고 생각하실 거예요! 아가씨, 절 믿으세요!”

피비가 밝게 웃자 디아나도 따라 미소를 그렸다.

“이제 시간 다 된 거 같은데.”

디아나가 힐긋 시계를 쳐다본 그때,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지금 시간에 디아나의 방을 찾을 손님은 딱 한 사람밖에 없다.

“아가씨, 데릴입니다.”

디아나가 반짝이는 눈빛으로 피비를 보자 피비가 싱긋 미소를 지으며 방문으로 다가갔다.

피비가 문을 열어 주자 데릴이 방으로 들어왔다.

“선생님, 어서 오세요.”

디아나가 미소를 지으며 데릴에게 인사를 하자 데릴의 입꼬리도 매끄럽게 말려 올라갔다.

“아가씨, 어제 하루는 잘 보내셨나요?”

“네.”

“오늘 입은 드레스가 정말 잘 어울립니다.”

“아, 감사합니다.”

데릴의 칭찬에 디아나의 귓불이 붉어졌다.

부끄러운 듯 수줍은 미소를 짓는 디아나를 귀엽다는 듯 보던 데릴이 흠, 짧은 숨을 내뱉으며 말했다.

“그럼 오늘 수업을 시작해 볼까요?”

기다리고 기다렸던 수업이었다. 하녀들의 자식이 무슨 공부를 시작했다더라는 이야기를 들으며 부러워만 했었는데, 오늘은 드디어 디아나가 그 수업을 듣는 날이었다.

데릴의 말에 가슴이 두근거린 디아나가 조금 큰 목소리로 답했다.

“네!”

방에 마련된 원목 테이블을 두고 데릴과 디아나가 마주 앉았다.

데릴은 테이블 위로 두꺼운 책을 턱 올려놓았다.

책을 보고 눈이 동그래진 디아나를 보며 데릴이 미소를 지었다.

“제가 알기로 아가씨께선 이미 글자는 다 익히셨고, 웬만한 동화책은 무리 없이 읽으실 수 있는 정도라 들었습니다만 맞으신가요?”

“네, 맞아요.”

“그렇다면 글공부는 굳이 수업 시간에 진행하지 않겠습니다. 문장은 책을 계속 읽으신다면 자연스럽게 느실 테니, 조금 어려운 문장 공부는 제가 숙제를 내드리는 걸로 하겠습니다. 괜찮으실까요?”

“네.”

디아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처음 배우실 내용은 바로 테라비타 제국의 역사입니다. 정확히는 테라비타 제국이 어떻게 만들어지게 되었는가에 대한 전설들부터 배우게 됩니다. 전설 중에 혹시 아시는 것들이 있나요?”

“네! 제국의 신화가 너무 신기해서 동화책을 몇 번이나 읽었어요!”

시작하자마자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부분이 나오자 저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였다.

데릴의 눈이 커지자 그제야 제 높은 목소리를 알아차린 디아나가 머쓱한 미소를 지었다.

“……죄송해요.”

“아닙니다. 오히려 이렇게 열정적으로 임해 주시니 제가 더 기분이 좋은걸요.”

데릴은 친절한 미소를 지으며 책을 펼쳤다.

“아가씨가 읽으신 동화책과는 조금 다를 겁니다. 초대 황제 폐하의 힘만을 강조한 동화와 달리 역사책은 실제 있었던 일을 기반으로 서술하니까요.”

디아나는 데릴이 펼친 책을 내려다보았다.

데릴의 말처럼 책의 첫 장에는 형체를 정확히 알 수 없는 검은 것이 땅과 하늘을 뒤덮고 있는 그림이 있었다.

디아나는 섬찟한 검은 것에 흠칫하다 데릴을 바라보았다.

데릴은 책에 그려진 검은 것을 살짝 쓸며 말을 이었다.

“대륙이 만들어지고 인간들이 아직 모여 나라를 만들지 못했던 시절, 어둠의 정령이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잡아먹고 공격했었습니다. 알 수 없는 어둠의 힘에 사람들은 제대로 싸움을 해 보지도 못하고 죽어 갔고 또, 어둠의 힘에 굴복하여 어둠의 기사를 자청한 사람들이 모였죠. 결국 대륙엔 어둠에 굴복한 어둠술사들과 굴복하지 않은 자들로 나뉘게 되었답니다.”

데릴은 책장을 넘겼다.

그러자 모든 걸 집어삼켰던 검은 것에 맞서듯 금발의 남자가 검을 들고 서 있었다.

금발.

선명한 책속의 색을 보던 디아나는 순간 대공이 떠올랐지만 그림의 주인공이 초대 황제란 걸 알 수 있었다.

“혼란의 시기에 압도적으로 어둠의 힘이 강해지던 그때, 대륙의 정령과 계약을 한 한 남자가 나타나게 됩니다. 그는 정령의 힘으로 형체를 알 수 없는 어둠과 맞서 싸웠고 어둠술사들에 대항할 수 있는 사람들을 모았답니다. 결국 대륙의 대전투에서 어둠의 정령을 봉인하고 승리를 거머쥐게 된 그는 함께 싸운 사람들을 모아 한 나라를 세우게 됩니다. 그게 바로 이 테라비타 제국이랍니다, 아가씨.”

데릴이 넘긴 다음 장에서 금발의 남자는 검을 하늘을 향해 높이 들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주변으로 불과 물과 바람이 휘몰아치는 듯 그를 감싸고 있었다.

“바로 이분이 제국의 초대 황제 폐하, 에이루스 테라비타 폐하이십니다. 이 넓은 대륙에서 제일 먼저 나라를 만드시고 어둠의 힘을 봉인한 아주 전설적인 분이시죠.”

“아…….”

제대로 된 설명을 들으니 동화책으로 볼 때보다 더 엄청나게 느껴졌다.

“몇천 년 전의 일이기 때문에 몇몇 타 왕국의 사람들은 제국을 깎아내리기 위해 초대 황제 폐하의 전설이 사실이 아니라 부정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저희에겐 대륙의 정령과의 계약이 거짓이 아니었단 증거가 있기에 그들도 결국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죠.”

증거라고 하니 디아나도 떠오른 것이 있었다.

바로 대공가의 문양이자 황족의 상징이라던 수호 정령 가디언. 그리고 그 정령의 힘은 황족들만 쓸 수 있다 하였다.

“정령의 힘을 말하는 건가요?”

“네, 맞습니다, 아가씨. 초대 황제 폐하께선 붕어하실 당시 대륙의 정령에게 이 나라를 부탁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정령은 황제 폐하의 유언을 받들어 폐하의 피를 이은 후손들은 정령의 힘을 쓸 수 있을 것이라 맹약을 맺어 주었습니다.”

긴 설명에 잠시 호흡을 가다듬은 데릴이 말을 이었다.

“혹 현재 황족들 중 누가 그 힘을 쓸 수 있는지 아십니까?”

“네, 황제 폐하와 1황자 전하…… 그리고 대공 전하께서 쓸 수 있다고 들었어요.”

“맞습니다. 지금 현재 정령의 힘을 쓸 수 있는 황족분들은 세 분뿐입니다. 하지만 아마 좀 더 시간이 지나면 더 늘어날 것입니다.”

‘그게 무슨 말이지?’

디아나가 궁금증 가득한 눈빛으로 데릴을 보자 데릴이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황족분들이 정령의 힘을 사용하기 위해선 15살이 되는 해에 정령의 의식을 치르셔야 합니다. 물론 의식을 치른다고 모든 황족이 힘을 쓸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만 대부분의 황족들은 정령의 선택을 받습니다. 그러니 2황자 전하와…… 대공녀님이 의식을 치르시면 정령의 힘을 쓰는 황족이 늘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데릴은 말을 끝내고 조금 껄끄러운 마음이 들었다. 그도 그럴 게 디아나 역시 황족의 피를 이었지만 의식을 치를 가능성은 거의 없기 때문이었다.

몇천 년이 넘는 역사 속에서 황가의 사생아가 디아나가 처음일 리는 없었다.

수많은 사생아가 있었지만 그들은 황실의 피를 이었음에도 정령의 의식은 치르지 못했었다.

자칫 사생아가 정령의 선택을 받아 힘을 얻게 되면 적장자에게 위협이 될 수도 있었기에 그 기회를 원천 차단하는 것이다.

디아나를 앞에 두고 디아나는 제외되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니 데릴의 마음이 불편한 것은 당연했다.

어쩌면 디아나의 이름을 거론하지 않는 데릴의 말에 디아나의 기분이 나빠졌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데릴의 걱정과 달리 디아나는 밝은 얼굴로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와, 신기해요. 전 그냥 처음부터 정령의 힘을 타고나는 줄 알았거든요. 의식이라니, 그것도 너무 신비로운 일 같아요.”

실망한 기색도, 그렇다고 기분이 나쁜 기색도 전혀 없는 디아나의 모습은 대공가에서 완벽히 자신을 배제한 듯한 모습이었다.

당연히 자기는 이 가문의 일원이 아니라는 듯 말이다.

어린아이가 보일 만한 태도가 아닌데.

데릴은 씁쓸함이 뒤섞인 묘한 기분이 들었지만 곧 미소를 지었다.

“네, 신비롭고 신성한 일입니다.”

“그렇군요. 선생님, 그럼 정령의 힘은 대충 어떤 힘을 말하는 건가요?”

“초대 황제께서 보여 주었던 정령의 힘은 대지를 움직이고 물과 불을 다스리고 바람을 휘몰아치게 했다고 합니다. ”

“와…… 초대 황제 폐하의 힘은 정말 대단하네요.”

“네, 엄청났죠. 하지만 현재의 정령의 힘은 그때만큼 강력하지 않습니다. 정령술이 약해져 걱정될 수도 있겠지만 다행인 것은 정령의 힘이 약해지며 자연스럽게 어둠술사들도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되었단 것이지요.”

“더 이상 안 보인다는 건…… 완전히 없어졌단 건가요?”

“아뇨, 그건 아마 아닐 겁니다. 어둠의 정령이 완전히 사라진 게 아니라 봉인되어 있는 것이기에, 아마 어둠술사들도 일부는 남아 있을 것입니다.”

“그렇군요. 아, 근데 선생님, 황족분들께서는 정령의 힘 일부를 사용할 수 있다 했는데 그게 어떤 것들인가요?”

“일부란 4가지의 힘 중 하나만을 사용할 수 있단 말입니다. 현 황제 폐하이신 케일론 테라비타 폐하와 1황자 전하께선 바람의 힘을 사용하십니다. 그리고 대공 전하께선 땅의 힘을 사용하시고요. 이때까지 가장 흔하게 내려온 힘이 바람과 땅의 힘입니다.”

“아, 그럼…… 물을 다스리는 힘은요? 그건 흔한 게 아닌가요?”

디아나는 문득 자신에게 몇 번 일어났던 신기한 일을 떠올리며 물었다.

실패할 때가 더 많았지만 한 번씩 성공했었던 물의 온도를 바꾸는 일.

데릴은 흠, 고민을 하듯 숨을 내쉬다 고개를 저었다.

“네, 물의 힘은 흔하지 않습니다. 초대 황제 폐하 이후로 아직까지 물의 힘을 받았던 황족은 없으니까요.”

“…….”

‘한 명도 없었다고? 그럼 내게 일어난 그 신기한 일들은 뭐였을까.’

정령의 이야기를 들으며 디아나는 자신이 썼던 신기한 힘도 어쩌면 정령과 관련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런데 물의 힘을 쓴 사람은 없었다니, 디아나는 조금 혼란스러워졌다.

“아가씨, 왜 그러시나요?”

데릴은 갑자기 가라앉은 디아나의 얼굴에 의아함을 느꼈다.

“아…… 아니에요. 저, 갑자기 궁금한 게 있는데요.”

“네.”

“혹시 마법사들은 마법을 쓸 때 그냥 생각만 하면 마법을 쓸 수 있는 건가요?”

“네?”

지금까지의 주제와는 전혀 관련 없는 얘기에 데릴은 순간 당황했으나 빠르게 답했다.

“마법은…… 상당히 어려운 시동어와 마법진들의 조합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라 생각만으로 마법을 쓸 순 없습니다. 엄청난 고클래스의 마법사라면 마음속으로 시동어를 외워 마법을 쓸 수 있다고 전해지긴 하나…… 그런 마법사는 현재 대륙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 그렇군요.”

디아나는 눈을 살짝 내리깔았다. 긴 속눈썹이 갈색 눈동자 위로 그늘을 만들었다.

‘그럼 대체 내가 쓴 그 힘은 뭐였지? 정령도 아니고 마법도 아니고. 혹시 내가 그 힘을 썼던 거 자체가 내 착각이었을까?’

디아나는 너무 혼란스런 나머지 그런 생각까지 했다.

거기다 최근엔 그 힘을 쓴 적이 없었으니 말이다.

“아가씨, 한데 갑자기 마법에 대해선 왜 물으신 건가요?”

데릴의 눈빛이 디아나의 속마음을 캐듯 살피고 있었다.

눈치가 빠른 디아나는 데릴의 가늘어진 눈빛에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아, 그냥 동화책에서 읽은 마법사가 갑자기 생각나서요.”

디아나는 데릴에게 솔직하게 말하지 않았다.

어쩌면 데릴은 디아나의 고민을 풀어 줄 답을 알고 있을 수도 있지만 아직 데릴이 어떤 사람인지 모르는데 제 비밀을 말할 순 없었다.

선생님을 만나 기쁜 것과 데릴을 믿는 것은 별개의 일이었으니까.

“그러셨군요.”

다행히 데릴은 디아나의 말에 별다른 의심을 하지 않고 넘어갔다.

“그럼 다시 제국의 이야기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네.”

“그렇게 제국을 세운 초대 황제께선 빠르게 사람들을 모아…….”

데릴의 설명이 시작되자 디아나는 알 수 없는 자신의 힘에 대한 생각은 잠시 접어 두고 다시 수업에 집중했다.

* * *

같은 시각, 대공가의 집무실.

늘 그렇듯 대공은 영지의 서류들을 살피고 있었다.

집무실 안에는 대공이 서류를 넘기는 소리만이 고요하게 울렸다.

하인들이 숨소리마저 죽이던 그때, 고요함을 깨는 소리가 들려왔다.

대공은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시선을 들었다.

“대공 전하, 집사입니다.”

“들어와.”

문을 열고 들어온 집사는 대공을 향해 예를 갖추었다.

“무슨 일이냐.”

대공은 다시 서류를 살피며 집사에게 물었다.

“방금 텔레포트로 황실에서 서신이 도착해 전해 드리러 왔습니다.”

겨울에는 전서구를 통한 서신 교환이 불가능해 텔레포트로 급한 소식들을 바깥과 주고받곤 했다.

“황실에서?”

서류에서 시선을 들 수밖에 없는 말이었다.

“네, 전하.”

집사는 고개를 숙이며 대공에게 서신을 내밀었다.

대공은 금빛 인장이 찍힌 서신을 받아 들었다.

“흠.”

대공은 나이프로 봉투를 열었다.

[친애하는 나의 하나뿐인 동생에게.

로우, 네가 10년 만에 검술 대회에 참석한다는 말을 듣고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사실 네가 대공성으로 돌아간다고 하였을 때, 당장 북방으로 내려가 너를 맞이하고 싶었지만 어느새 세월이 흘러 무릎이 시큰거리는 나이가 되어 쉽지 않더구나.

하나, 이렇게 네가 수도로 온다는 소식을 들으니 내 기쁨이 이루 말할 수 없단다. 너는 물론이고 네가 꽁꽁 숨겨 놓았던 세이아의 얼굴을 보는 것이 너무도 기대되는구나.

물론 수도에서의 일정이 있겠지만 내가 나이가 들어서인지 하루하루 기다리는 것이 너무도 힘이 드는구나. 또 내가 이렇게 나이가 들었는데 언제 어떻게 아파 갑자기 쓰러지기라도 하면 너와 세이아의 얼굴을 보지 못할…….]

두 장이나 되는 편지를 다 읽은 대공은 짧은 한숨과 함께 서신을 책상 위로 내려놓았다.

긴 내용이었지만 한 줄로 충분히 줄일 수 있는 내용이었다.

결론은 하나.

북방의 문이 열리자마자 수도로 올라와 얼굴을 보여 달란 말이었다.

그 말을 어찌나 돌려서 하는지, 특히 ‘나이가 들어서’란 문장은 한 열 번은 쓴 듯했다.

그의 형님은 그보다 고작 5살이 더 많았다.

형님의 나이가 이제 적지 않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나이에 비해 아주 정정하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갑자기 쓰러질 수도 있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다.

하지만 10년의 세월 동안 얼굴 한 번 안 비추었으니 형님이 보고 싶어 하는 것도 충분히 이해되었다.

대공은 결코 좋은 모습으로 전장으로 나간 것이 아니었으니, 걱정도 많이 하셨을 것이다.

“세이아도 많이 보고 싶으시겠군.”

그 역시, 오래 보지 못한 형님의 얼굴이 보고 싶었다.

“일정을 좀 서둘러 볼까.”

대공은 나직이 혼잣말을 하다 집사를 바라보았다.

“수도로 떠나는 일정을 한 일주일 정도 앞당길 테니 차질 없이 준비하거라.”

“네, 전하. 아, 그리고 디아나 아가씨께선 오늘 문제없이 수업을 시작하셨습니다.”

“그렇군.”

대공은 무감하게 답하며 서신을 서랍에 넣고 서류를 잡으려다 멈칫했다.

왜인지 축제 날 디아나의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대공성 사용인들의 눈치를 봐 몰래 대공가를 나와 축제를 봤었던 아이.

“하론.”

“네, 전하.”

“디아나가 정식으로 대공성을 나간 적이 있나?”

집사는 잠시 기억을 더듬어 보았지만 디아나가 대공성을 나갔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없…… 습니다, 전하.”

“그렇군.”

흠, 대공은 불편한 숨을 내뱉었다.

축제를 구경하며 웃던 디아나의 얼굴이 자꾸만 대공의 머릿속을 맴돌았기 때문에.

하지만 디아나를 수도로 데려가면 세간에 말이 크게 돌 수 있었다.

대공가의 후계에 관한 괜한 말들이 말이다.

귀족들은 어쨌든 디아나가 대공의 핏줄이라 알고 있으니까.

그렇기에 디아나를 두고 수도로 떠나는 것이 맞았지만 막상 그러자니 그의 마음이 도무지 편하지 않았다.

“쓸데없는 소문은 무시하면 그만이겠지.”

사람들이 뒤에서 무어라 떠들든 어차피 대공의 앞에서 함부로 입을 열 수 있는 자는 없을 것이다.

책상을 손끝으로 두드리며 갈등하던 대공은 곧 결정을 내린 듯 손을 그러쥐었다.

“하론, 수도로 가는 일정에 디아나를 데리고 갈 것이니 준비하도록 해라.”

고개를 숙이고 있던 집사의 어깨가 순간 움찔했다.

“……네, 전하.”

반 박자 느리게 답한 하론이 고개를 조아린 뒤 집무실을 나가자, 대공은 다시 서류로 시선을 내렸다.

* * *

“그럼 오늘은 여기까지 수업하도록 하겠습니다.”

“네, 선생님.”

데릴은 책을 덮으며 디아나에게 미소 지었다.

“그럼 어제 내드린 숙제를 검사하겠습니다.”

첫 수업을 한 지 벌써 2주나 흘렀다.

데릴은 매번 그녀에게 숙제를 내주었고 수업이 끝나고 나면 숙제를 확인하며 디아나의 문장력을 봐주었다.

데릴은 빼곡히 글이 적힌 종이를 만족스런 눈빛으로 훑어보고 디아나에게 웃음 지었다.

“더 이상 글공부 숙제는 내드리지 않아도 될 듯합니다. 어려운 문장들도 정말 빠르게 익히시는군요, 아가씨.”

“앗…… 감사합니다.”

갑작스런 데릴의 칭찬에 디아나는 눈을 되록되록 굴렸다. 하지만 기분이 좋은 것은 숨길 수 없어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쑥스러운 미소를 짓던 디아나는 요즘 대공성을 들썩이게 하던 소식이 떠올라 데릴에게 입을 열었다.

“아, 근데 선생님, 며칠 뒤면 북방의 문이 개방된다던데…… 선생님은 어디 안 가시나요?”

피비의 말에 따르면 하녀들은 벌써 가까운 다른 영지에 놀러 간다고 휴가 신청 싸움이 치열하다고 들었다.

“아, 저도 이번에 잠시 영지를 떠난답니다. 제 스승님이…… 이번에 수도로 돌아오셨단 소식을 들어 수도에 들리게 되었답니다.”

“수도라면…… 곧 있음 수도에서 검술 대회도 열린다던데 그럼 선생님도 검술 대회를 보실 수 있으시겠네요?”

“아마 그럴 듯합니다.”

“그럼…… 꽤 오래 있으시다 오시겠군요…….”

수도로 가서 검술 대회까지 보고 온다면 하루 이틀의 일정이 아닐 것이다.

디아나와 데릴은 주 4회 수업을 하고 있었지만 아마 데릴이 수도로 떠나면 그 주는 수업을 아예 못하게 될 듯했다.

그리고 수업도 수업이지만 다들 수도로 가는 것이 사실 부러웠다.

하녀들의 이야기를 들으니 대공도 세이아도 모두 수도로 떠난다고 했다.

그 준비를 하느라 사용인들이 요즘 바삐 움직였고 말이다.

‘나도 갈 수 있다면 좋을 텐데.’

특히 에드윈이 참가하는 검술 대회를 못 본다는 것은 참으로 아쉬운 일이었다.

“아가씨?”

갑자기 시무룩해진 디아나의 얼굴에 의아함을 느낀 데릴이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디아나는 어색하게 미소를 지었다.

“아, 그냥…… 그럼 한동안 수업을 못할 거 같아 아쉬워서요. 조심히 잘 다녀오세요, 선생님. 전 여기서 열심히 복습하고 있을게요.”

아무렇지 않은 척 디아나가 말하자 데릴은 이상하다는 듯 눈썹을 구겼다.

“여기서 복습하신다니…… 아가씨께서도 수도로 가시는 게 아니었습니까?”

데릴의 물음에 순간 당황한 디아나가 곧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전 안 가요.”

자신이 수도로 간다니.

그런 건 꿈도 못 꿀 일이다.

애초에 대공과 세이아가 함께하는 여행에 디아나가 포함될 리가 없지 않는가.

디아나는 데릴이 아직도 대공저의 상황을 모르는 거라 생각하며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데릴은 미간을 좁히며 신음을 내뱉었다.

며칠 전, 수도로 가는 일정 때문에 집사에게 수업을 빠진다 말했을 때 집사가 디아나 역시 그 시기에 수도로 가게 되어 상관없다고 했기 때문이었다.

한데 수도로 가지 않는다니. 자신이 잘못 들은 것인가.

데릴은 미간을 좁히며 고민하다 디아나에게 옅은 미소를 지었다.

“복습을 열심히 하신다고 하니……그럼 제가 돌아오는 길에 아가씨의 선물을 하나 사 오겠습니다.”

데릴은 집사에게 들은 말이 확실하지 않은 거 같아 디아나의 말에 다른 이야기를 덧붙이지 않았다.

“와, 감사해요.”

디아나는 조금 가라앉은 분위기에 괜히 더 밝은 목소리로 괜찮은 척 말했다.

데릴은 디아나에게 옅은 미소를 지으며 그만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아가씨, 전 모레 방문하도록 하겠습니다.”

“네, 조심히 돌아가세요, 선생님.”

데릴은 디아나에게 묵례를 하고 방을 나갔다. 데릴이 나가고 수업을 하는 동안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피비가 바로 방으로 들어왔다.

“아가씨, 오늘도 수업 즐거우셨나요?”

“응…….”

디아나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지만 피비는 디아나의 얼굴에 스친 시무룩함을 놓치지 않았다.

“아가씨, 오늘 선생님께 혼나셨어요?”

“아니, 안 혼났어.”

“근데 왜 그렇게 가라앉아 있으세요? 아니라고 하지 마세요. 전 이제 아가씨 눈빛만 봐도 어떤 기분인지 다 안다고요.”

피비가 거짓말 말라는 듯 엄한 얼굴로 디아나를 바라보았다.

피비가 날이 갈수록 디아나의 감정을 귀신같이 알아차리기에 디아나는 억지로 올리고 있던 입꼬리를 내렸다.

“……선생님도 수도로 가신대. 검술 대회를 보시고 내려오신다고 하더라.”

“아…….”

피비는 순간 당황하여 입술을 달싹였다.

선생님께 혼났다면 선생님을 욕해 주고, 오늘 공부가 힘들었다면 달달한 디저트를 준비해 줄 참이었지만 이 문제만큼은 피비도 답을 바로 찾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마음 같아선 디아나의 손을 잡고 당장 수도로 놀러 가고 싶었지만 피비에겐 그럴 능력이 없었다.

피비의 난감한 얼굴을 본 디아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괜찮아, 신경 쓰지 마, 피비.”

아무렇지 않게 말한 디아나는 책을 들고 소파에 앉았다.

아까까지 읽었던 부분을 연결해 읽으려 다시 펼친 그때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가씨, 하녀장입니다.”

하녀장?

하녀장이 갑자기 왜? 디아나는 의아함을 느끼다 피비에게 문을 열어 주라 말했다.

방으로 들어온 하녀장은 디아나에게 고개를 숙였다.

“아가씨, 죄송하지만 피비를 잠시 데려가도 될까요? 수도로 갈 준비를 하느라 하녀들의 일손이 부족해서요.”

“피비, 괜찮겠어?”

디아나는 하녀장에게 답하기 전에 피비에게 먼저 물어보았다. 피비가 걱정스런 눈빛으로 디아나를 바라보았다.

“아가씨, 저 없이 괜찮으시겠어요?”

디아나의 기분이 좋지 않아 신경이 쓰였다.

그런 피비의 마음을 안다는 듯 디아나는 괜찮다며 미소를 지었다.

“괜찮아. 책 읽고 있으면 시간 금방 가는 걸. 가서 도와주고 와.”

“그럼…… 잠시 가서 일손을 거들고 올게요, 아가씨.”

“그래.”

“감사합니다, 아가씨.”

인사를 한 하녀장은 많이 바쁜지 꽤나 급한 걸음으로 피비를 데리고 방을 나갔다.

“수도로…… 갈 준비라…….”

방 안에 혼자 남은 디아나는 아까 피비에게 보였던 미소를 지우고 나직이 중얼거렸다.

허공으로 흩어진 작은 목소리가 사라지자 쓸쓸한 고요함이 내려앉았다.

디아나는 공연히 축 처지는 기분에 고개를 세게 젓고는 이내 책을 펼쳤다.

책에 집중하려 했지만 이상하게 글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음…… 하아.”

영 책을 읽을 기분이 아니다.

디아나는 결국 책을 덮고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천장을 멍하니 보던 디아나는 심심하고 외로워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뭐 하지…….”

피비가 있을 때와 없을 때가 이렇게 차이 나다니.

피비에게 너무 익숙해져 버린 자신에게 놀라던 디아나는 순간 들려오는 새 소리에 창문으로 고개를 돌렸다.

구르르-.

날이 풀리긴 많이 풀렸는지 안 들리던 새 소리가 요즘 자주 들려오고 있었다.

“날씨 좋다.”

요 며칠 숙제와 수업의 복습에 파묻혀 살았던 디아나는 새삼 화창한 하늘에 잠시 시선을 빼앗겼다.

따뜻해 보이는 햇살을 바라보던 디아나는 그 아래로 꽃이 흐드러지게 핀 정원을 보았다.

“산책을 갈까.”

햇살이 반짝이는 것을 본 디아나의 고민은 짧았다.

디아나는 오랜만에 혼자만의 산책을 즐겨야겠다고 생각하며 창문을 닫고 방을 나갔다.

“예쁘다.”

디아나는 활짝 핀 분홍 꽃을 살짝 들어 올려 숨을 크게 들이켰다.

그러자 향긋한 꽃향기가 디아나의 코 안으로 가득 밀려들어 왔다.

‘나오길 잘했어.’

따스한 햇살도 쬐고 꽃향기도 맡으니 확실히 우울했던 기분이 확 풀렸다.

“근데…… 정말 다들 바쁘긴 한가 보네.”

정원을 걷던 디아나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아무도 없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하녀장이 피비를 찾아올 만큼이면 바쁜 게 맞긴 하겠지만 정말 이렇게 정원 주변에 사용인이 한 명도 없을 줄은 몰랐다.

원래라면 지나가는 하녀들이나 하인들이 드문드문 보여야 했는데 말이다.

피비에게 언뜻 들은 말론 원래 떠나려던 일정이 갑자기 앞당겨졌다고 했었다.

그것 때문에 엄청 바빠진 건가.

“그래서…… 세이아도 조용한 건가.”

디아나는 저택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3층, 왼쪽에서 3번째 방.

창문이 닫혀 있는 그곳은 다름 아닌 대공녀, 세이아의 방이었다.

도서관의 일이 있은 후 이상하리만치 조용한 세이아.

디아나는 일이 있은 당일 저녁 당장 난리를 피울 것이라 생각했었지만 세이아는 디아나를 찾아오지 않았다.

그다음 날도, 또 그 다음 날도 말이다.

왜 이렇게 조용한 걸까.

디아나는 세이아가 그녀를 괴롭히지 않는 것에 마냥 안심할 수 없었다.

오히려 평화가 길어질수록 세이아를 향한 불안감은 커지고 있달까.

차라리 세이아가 주기적으로 디아나를 찾아와 패악을 부린다면 그게 더 마음이 편할 거 같았다.

이렇게 조용하다 갑자기 최악의 상황이 벌어지는 건…… 아니겠지?

“아냐, 일정이 앞당겨졌으니 대공녀님도 바쁜 걸 거야.”

디아나는 괜스레 커지는 불안감에 대공녀의 방에서 시선을 돌렸다.

대공가의 그 많은 사용인들도 정신이 없을 만큼 바쁘니 대공녀인 세이아도 준비할 게 많을 것이다.

디아나는 순간 스쳤던 불길한 기분을 애써 무시하며 다시 흐드러지게 핀 꽃들을 바라보았다.

“다 괜찮을 거야.”

세이아에 대한 불안감만 없다면 요즘 디아나의 생활은 더할 나위 없이 행복했으니까.

좋은 생각을 많이 해야 좋은 일만 생긴다고 했던 피비의 말을 떠올리며 디아나는 세이아의 생각을 머릿속에서 떨쳐 버렸다.

향기로운 꽃향기를 맡으며 꽃길을 쭉 걸어가던 디아나는 정원의 중앙을 보곤 눈을 크게 떴다.

“우와, 물이 다 녹았네.”

대공가의 정원 중앙엔 아름다운 조각상이 있는 분수대.

겨울 내내 꽁꽁 얼어 있던 분수대에서 물이 솟구치는 걸 본 디아나는 쪼르르 분수대를 향해 다가갔다.

얼어 있던 모습도 상당히 아름다웠지만 물이 쏟아지는 분수대는 생동감이 넘쳐 훨씬 더 아름다웠다.

특히 여인이 분수대로 물을 붓고 있는 형상의 동상이 디아나의 눈길을 끌었다.

겨울의 눈이 녹자 드러난 여인의 얼굴은 몹시 아름다웠다.

디아나는 미소를 짓고 있는 동상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너무 예쁘다.”

그저 동상일 뿐인데 이상하게 눈을 뗄 수 없었다.

한참이나 가만히 동상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던 디아나는 분수대의 찰랑이는 물로 시선을 내렸다.

흐르는 물줄기를 보다 문득 데릴과 이야기를 나누었던 정령의 힘이 떠올랐다.

- 물의 힘은 흔하지 않습니다. 초대 황제 폐하 이후로 아직까지 물의 힘을 받았던 황족은 없었으니까요.

물을 다스리는 힘.

그날 이후로 일상이 바빠 잠시 자신의 신비한 힘에 대해선 잊고 지냈었다.

데릴의 말에 따르면 디아나가 겪은 현상은 마법도 아니고 정령의 힘도 아닐 가능성이 높았다.

‘애초에 내가 힘을 썼던 건 맞을까?’

마법도 정령도 아닌 신비한 힘 같은 걸 자신이 가지고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오두막에서 지내던 시절 이후론 한 번도 써 본 적이 없으니 더 스스로가 의심이 되었다.

“지금…… 해 볼까.”

진짜인지, 가짜인지.

스스로 확인해 보는 게 가장 정확할 테니까.

디아나는 초조한 눈빛으로 정원을 둘러보았다.

혹시라도 다른 사람이 있을까 했지만 다행히도 이 넓은 정원에는 디아나 혼자뿐인 것 같았다.

방에선 피비와 거의 붙어 있기에 힘을 써 보기 난감했으니 확인해 보기인 지금이 최적이었다.

디아나는 분수대로 한 걸음 더 다가갔다.

디아나가 손만 뻗으면 분수대의 물에 손을 넣을 수 있을 만큼 가까운 거리였다.

“후.”

굳은 얼굴로 긴장된 숨을 내뱉은 디아나는 이윽고 물이 가득한 분수대 안으로 손을 넣었다.

물은 녹았지만 아직은 겨울의 찬 기운이 가득한 얼음장 같은 물이 디아나의 손을 아릿하게 만들었다.

“으…… 차가워.”

손을 타고 올라오는 한기에 어깨가 부르르 떨리자 본능적으로 따뜻한 물을 상상한 그 순간 디아나의 손을 감싼 물의 온도가 바뀌었다.

“……따뜻해.”

몸이 떨릴 만큼 차가웠던 물이 어느새 온수로 바뀌어 디아나의 손을 감쌌다.

분명 디아나가 오두막에서 썼던 그 힘이었다.

그녀가 미친 게 아니라면 차가웠던 물이 갑자기 따뜻하게 느껴질 리 없을 것이다.

“그럼 내가 가진 힘은 진짜란 건데…….”

물의 온도를 바꿀 수 있는 이 힘의 정체는 대체 뭘까.

따뜻해지라는 생각을 멈추자 물은 순식간에 얼음장처럼 차가워졌다.

“앗, 차가워.”

따뜻해졌던 물이 갑자기 차가워지자 놀란 디아나가 황급히 물속에서 손을 뺐다.

“대체…… 뭘까.”

디아나는 물에 젖은 자신의 손을 바라보다 분수대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고요한 분수대는 방금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여전히 물을 퐁퐁 내뿜고 있을 뿐이었다.

자신에게 뭔가 신비한 힘이 있는 건 확실한 것 같은데 그게 뭔지 알 수가 없으니 답답했다.

‘데릴 선생님께 솔직히 말하고 물어볼까?’

잠시 고민하던 디아나는 이윽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데릴은 친절하고 좋은 선생님이었지만 어디까지나 선생님일 뿐이었지 그리 가까운 사이는 아니었다.

지금 디아나가 제일 믿을 수 있고 가까운 사람은 에드윈과 피비였지만 에드윈은 만나기가 힘들었고 피비는 이런 것에 대해 아는 게 없을 것이다.

‘나를 보호해 줄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할 텐데.’

그 순간 디아나는 스스로 자신의 보호자라고 말했던 한 사람이 떠올랐다.

바로 대공.

대공이라면 디아나의 힘에 대한 답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위험한 것이라 해도 그것을 막아 줄 수 있는 능력도 있을 것이다.

대공은 아주 강한 사람이니까.

“대공 전하…….”

디아나가 나직이 중얼거린 그때, 분수대 주변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풀잎을 밟는 소리에 디아나는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곳엔 막 분수대 쪽으로 들어선 대공이 서 있었다.

방금까지 대공을 생각하고 있던 디아나는 정말 눈앞에 나타난 대공의 모습에 괜히 지레 놀라 몸이 굳었다.

“산책을 하러 나온 것이냐.”

대공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린 디아나는 고개를 숙이며 무릎을 살짝 굽혔다.

“대공 전하…… 를 뵙니다.”

며칠 전 데릴에게 약식으로 배운 귀족의 인사법이었다.

예전에 허리를 숙이지 말라고 꾸지람을 들은 이후, 인사법을 몰라 묵례만 해 왔기에 데릴에게 물어 배운 것이었다.

“흠, 고개 들어라.”

천천히 고개를 들자 대공이 묘한 눈빛으로 디아나를 보다 피식, 찰나의 웃음을 머금었다.

“선생은 잘 구한 거 같군.”

낮게 중얼거린 그는 디아나의 곁으로 다가와 얼음이 녹은 분수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정확히는 분수대의 동상을 보고 있었다.

아름다운 여자의 동상을.

선명한 금안이 살짝 흐려졌다.

그런 대공의 옆모습을 디아나는 복잡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알 수 없는 힘에 대해 말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갈등이 됐기 때문이었다.

바쁜 대공 전하를 만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니 우연히 만난 지금이 기회였다.

말할까.

디아나의 입술이 살짝 벌어지던 그때, 대공의 목소리가 먼저 울렸다.

“공부는 할 만한가?”

대공은 분수대를 바라보며 디아나에게 물었다.

디아나는 막 입 밖으로 나가려던 말을 억누르며 답했다.

“네, 데릴 선생님께서 너무 잘 가르쳐 주셔서 잘 배우고 있어요.”

“선생이 혹 너를 불편하게 한 적은 없고?”

“아뇨, 선생님께선 제게 정말 잘해 주세요.”

빠른 대답에 대공이 디아나를 향해 시선을 내렸다.

대공은 어쩐지 디아나의 말이 진짜인지를 확인하는 눈빛으로 그녀의 얼굴을 샅샅이 훑었다.

거짓말이 아니란 걸 아는 듯 매서운 눈빛을 푼 대공이 디아나에게 나직이 말했다.

“혹 선생이 너를 불쾌하게 하는 일이 있다면 언제든 집사에게 말하거라.”

친절하고 좋은 선생님인 데릴이 그럴 일은 없을 것 같았지만 대공의 집요한 눈빛에 디아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한데 오늘은 혼자 산책 나온 것이냐? 네 하녀가 보이질 않는구나.”

“아, 피비는 하녀장의 일을 도와주러 갔어요, 하녀장이 일손이 부족하다고 해서요.”

“일손이?”

“수도로 가는 일정이 앞당겨져서 그렇다고 들었어요.”

“급히 일정을 당기긴 하였지. 한데 넌 왜 이리 한가하지? 준비는 다 한 것이냐?”

“네?”

‘준비를 다 했냐니, 그게 무슨 말이지?’

“수도로 가려면 옷을 더 산다거나, 아님 신발을 산다거나 너도 준비할 게 많을 터인데.”

“수도로 간다고요? 제가요?”

이게 대체 무슨 말인가 싶어 묻자 대공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집사에게 아무런 말을 듣지 못했나?”

“네, 아무런 말도 듣지 못했어요.”

짧은 한숨을 내쉰 대공이 말했다.

“디아나 너도 이번에 수도로 함께 갈 것이다.”

“제가요?!”

상상도 못한 일에 순간 저도 모르게 목소리가 크게 나왔다.

“그래, 너도 갈 것이다.”

대공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말했지만 디아나는 깜짝 소식에 입꼬리가 올라가는 것을 주체할 수 없었다.

어쩌다 자신이 수도에 가게 된 것인지, 혹시 세이아가 이 일로 화내진 않을지 걱정도 들었지만 지금은 수도로 갈 수 있단 사실이 더 기뻤다.

수도라니!

생각지도 않은 행운을 얻은 기분이었다.

“정말 감사합니다!”

빨리 이 소식을 피비에게 말해 주고 싶었다.

‘아, 근데 피비도 갈 수 있는 건가.’

너무 좋아 두근거렸던 심장이 멈칫했다. 디아나는 조심스럽게 대공에게 물었다.

“저…… 전하, 피비도 함께 갈 수 있는 건가요?”

“피비? 아, 네 하녀를 말하는 건가.”

“네.”

“당연히 너와 함께 갈 것이다.”

피비와 함께 갈 수 있단 말에 잠시 주춤했던 디아나의 얼굴이 확 밝아졌다.

디아나는 숨길 수 없는 미소를 지으며 대공을 바라보았다.

순간 대공의 눈빛이 흔들렸지만 디아나는 너무 기분이 좋아 그것을 미처 보지 못했다.

“이렇게 좋아할 줄은 몰랐는데……데려가길 잘했군.”

대공은 디아나가 듣지 못할 말을 낮게 중얼거리다 여전히 기쁨을 감추지 못하는 디아나를 보며 희미한 미소를 띠었다.

디아나가 처음 보는 대공의 미소에 눈을 크게 뜨던 그때 대공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버지!”

정원 어딘가에서 튀어나온 세이아가 대공에게로 달려갔다. 대공은 그에게 달려와 안긴 세이아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그리 뛰다 다치면 어쩌려고. 조심하거라.”

대공의 품에서 고개를 든 세이아가 말간 미소를 지었다.

“네, 다음부턴 조심할게요.”

세이아는 대공의 손을 잡으며 몸을 돌려 디아나를 바라보았다. 세이아가 나타났을 때부터 얼굴 가득했던 디아나의 미소는 이미 사라져 있었다.

디아나는 세이아의 시선을 비스듬히 피하며 고개를 숙였다.

“대공녀님, 오랜만에 뵈어요.”

그날 도서관에서 본 뒤로 처음 보는 것이었다.

디아나가 먼저 인사를 하자 세이아는 대공의 팔에 머리를 기대며 미소를 지었다.

“디아나, 잘 지냈어?”

“……네, 잘 지냈어요.”

디아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세이아를 마주 보았다.

마치 그동안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세이아는 디아나를 향해 상냥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마주친 옅은 금안에서 번뜩인 적대감이 아니었다면 도서관의 일은 꿈이었나 싶었을 정도였다.

“요즘 열심히 공부한다고 들었어. 예절 공부도 같이하는 거야?”

“조금씩 같이 배우고 있어요.”

“그럼 이제 많이 부족했던 행동들을 고칠 수 있겠구나. 가끔 너의 행동들을 이해하기가 힘들었는데…… 하나씩 배우면 금방 좋아질 수 있을 거야, 디아나.”

마치 디아나에게 상당히 많은 문제가 있었던 것처럼 느껴지는 말이었다.

사실 행동의 문제로만 따지자면 디아나보다 세이아에게 더 교육이 필요해 보였지만 디아나는 입 안을 맴도는 말을 삼키며 시선을 낮추었다.

“네, 대공녀님.”

세이아는 얌전히 답하는 디아나를 만족스런 눈빛으로 보다 대공을 올려다보았다.

“참, 아버지, 이번에 수도로 가면 돌아오는 길에 디아나의 선물을 하나 사 오는 게 어떨까요? 디아나 혼자 저택에 남아 있는 게 신경이 쓰여서요.”

세이아는 힐긋 디아나가 불쌍하다는 듯 시선을 던졌다.

대공은 특유의 무감한 듯한 얼굴로 세이아를 보다 입술을 열었다.

“그럴 필요 없단다. 수도엔 디아나도 함께 가기로 했으니까.”

“……네?”

한껏 눈꼬리를 내리고 안타까움을 가장하고 있던 세이아의 얼굴이 움찔했다.

세이아는 방금 들은 대공의 말을 믿고 싶지 않은 듯한 눈빛으로 디아나를 바라보며 다시 물었다.

“디아나도 수도로 함께 가기로 했단 말씀이신 거죠……?”

세이아의 목소리가 흔들리는 것이 디아나에게도 선명히 들렸지만 대공은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얼굴로 답했다.

“그래, 그렇단다.”

세이아는 얼굴을 굳히며 입술을 깨물었다.

대공이 보고 있음에도 착한 아이의 가면을 쓰지 않았다.

대공은 여전히 세이아의 손을 잡고 세이아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세이아의 떨림을 보듬어 주진 않았다.

그 모습에서 느껴지는 알 수 없는 차가움에 디아나의 어깨가 움찔한 그때, 대공이 말했다.

“디아나, 너는 이만 돌아가는 것이 좋겠구나.”

“네.”

어차피 세이아가 왔을 때부터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컸기에 디아나는 곧바로 대답하며 몸을 돌렸다.

등 뒤로 꽂히는 세이아의 적의 가득한 시선을 애써 무시하며 꽃길을 빠르게 걸어갔다.

디아나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고 난 뒤, 대공은 여전히 입술을 꽉 깨물고 있는 세이아에게 몸을 낮추었다.

“세이아.”

나직이 이름을 부르자 옅은 금안이 대공과 시선을 마주했다.

“……네.”

“보내 준 보석들을 마음에 들어 했다고 집사에게 전해 들었다. 혹 더 가지고 싶은 게 있다면 언제든 집사에게 말하렴.”

대공이 부드럽게 말했지만 세이아는 당황스러운 얼굴을 했다.

세이아가 예상한 말은 이런 게 아니었으니까.

자신이 싫어하니 디아나를 수도로 데려가지 않겠다는 그런 말을 해 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버지, 디아나는…….”

“세이아, 전에도 말했지만 디아나는 어차피 시기가 되면 대공가를 나갈 것이니 그때까진 네가 이해했으면 한단다. 그럼 난 이만 일이 있어 가 봐야겠구나.”

대공은 세이아의 대답을 듣지도 않고 몸을 일으켰다.

정원 한구석에서 기다리고 있던 유모를 손짓해 부른 대공은 세이아의 손을 유모에게 넘겨주었다.

“곧 해가 질 거 같으니 밖에 너무 오래 있진 말거라.”

“아버…….”

세이아가 떠나려는 대공을 불렀지만 대공은 들리지 않는다는 듯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났다.

“대공녀님…….”

탁, 유모의 손을 거칠게 쳐 낸 세이아는 멀어지는 대공의 모습을 노려보다 입술을 피가 터지도록 꽉 깨물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