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화 (4/16)

4

* * *

“와, 점점 필체가 좋아지세요.”

대공가의 한적한 도서관 안에 에드윈의 밝은 목소리가 크게 울렸다.

수업을 시작한 지도 벌써 일주일째.

딱 봐도 아직 서투른 게 많은 글자였지만 에드윈의 눈엔 그렇지 않은 듯 그는 나날이 디아나를 향한 칭찬이 늘고 있었다.

하늘이 내린 천재를 보는 듯한 반짝이는 녹빛 눈동자가 부끄러워 디아나는 그에게서 종이를 쓱 뺏었다.

“아냐…… 아직 많이 부족해.”

“부족하지 않아요, 아가씨. 아직 수업을 7번밖에 하지 않았는데 필체가 점점 올곧아지시잖아요. 거기다 습득력도 빠르시고. 제국의 기본 단어를 겨우 7일 만에 외우다니 그건 정말 대단하신 거예요.”

“……다들 빨리 외우지 않아?”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저만 해도 어릴 때 글자를 외우는 데 다섯 달이나 걸렸는걸요. 보통은 서너 달 정도 걸립니다. 그에 비하면 엄청 빠르신 거예요.”

“그럼 다행이고…….”

보통 글자를 배우는 나이보다 훨씬 많은 나이였으니 더 빨리 배워야 했다.

‘그래도 칭찬은 기분 좋아.’

디아나는 에드윈의 칭찬에 부끄러우면서도 뿌듯해 볼이 뜨거워졌다.

자꾸만 올라가는 입꼬리에 눈을 도르륵 굴렸지만 치솟는 광대를 숨기지 못했다.

에드윈은 그런 디아나를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아가씨는 충분히 잘하고 계십니다. 그럼 오늘은 여기까지 하면 되겠죠?”

“응. 오늘도 고마워, 에드윈.”

디아나가 책을 정리하며 미소 짓던 그때 갑자기 도서관 밖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공녀님! 이렇게 누추한 곳까지 어쩐 일이신가요?!”

대공녀?

순간 디아나도 에드윈도 모든 행동이 멈추었다.

먼저 정신을 차린 것은 다름 아닌 에드윈이었다.

에드윈은 낯선 목소리에 눈썹을 올리며 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 순간 기다렸다는 듯 새로운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가 대공녀님께 그런 것을 왜 묻니! 실없는 소리 그만하고 비켜. 대공녀님께서 안으로 들어가야 하는데 네가 문을 막고 있어 들어가실 수가 없잖아.”

“난 괜찮아, 마리. 도서관에 볼일이 있는 하녀인 듯한데 너무 그러지 마.”

그리고 뒤이어 들려온 목소리에 디아나의 눈이 커졌다.

“대공녀…….”

디아나는 경악하며 중얼거렸다.

지금 저 문밖에 세이아가 서 있는 것이다.

‘세이아가 내가 글을 배우는 것을 알게 된다면…….’

그다지 상상하고 싶지 않은 일들이 머릿속으로 펼쳐졌다.

대공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유일한 존재가 세이아라고 했었다.

디아나가 에드윈에게 글을 배운다는 것을 세이아가 알게 되어 디아나에 대한 분노가 더 커진다면…… 대공에게 안 좋은 말을 전할 수도 있었다.

세이아는 충분히 그럴 만한 성격이었으니까.

그럼 디아나는 물론이고 괜히 글을 가르쳐준 에드윈까지 벌을 받을 수도 있다.

‘그건 절대 안 돼.’

“들키면…… 안 되는데…….”

디아나가 초조함과 불안함에 어쩔 줄 몰라 하던 그때 에드윈의 낮은 음성이 들려왔다.

“아가씨,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아!”

에드윈이 디아나를 안아 들었다. 디아나는 갑자기 휙 들린 몸에 놀랐지만 에드윈의 어깨를 잡으며 입을 꾹 다물었다.

에드윈은 빠르게 책들을 챙겨 도서관 책장 사이로 몸을 숨겼다.

그리고 에드윈과 디아나가 몸을 숨긴 바로 그 순간 도서관의 문이 열렸다.

한 발만 늦었어도 문이 먼저 열렸을 것이다.

작은 구둣발 소리와 세이아의 뒤를 따르는 하녀의 발소리가 고요한 도서관을 울렸다.

혹시라도 들킬까 손으로 입을 막고 있던 그때, 작은 구둣발 소리가 두 사람이 숨어 있는 책장 사이로 들어섰다.

‘왜 하필 이쪽으로.’

점점 가까워지는 발소리에 입술을 꽉 깨물던 디아나와 에드윈의 눈이 마주쳤다. 불안으로 흔들리는 디아나의 눈동자를 보던 에드윈은 안심하라는 듯 옅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리고 그는 천천히 소리 없는 움직임으로 디아나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는 아주 작은 목소리로 디아나에게 속삭였다.

“아가씨, 제가 대공녀님의 시선을 끌 테니 그사이에 도서관을 나가세요.”

그 말을 끝으로 에드윈은 디아나가 잡을 새도 없이 세이아에게 제 모습을 드러냈다.

“어?”

“대공녀님을 뵙습니다.”

놀란 듯한 세이아의 짧은 탄성과 에드윈의 평온한 목소리가 책장 너머로 들려왔다.

“대공가의 기사인가?”

“네, 에드윈 드로이트라고 합니다, 대공녀님.”

“에드윈…… 아! 저번에 로운에게 얘기 들었어. 아버지께서 아끼는 기사라고, 만나서 반가워.”

“저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두 사람의 대화를 숨죽이며 듣고 있던 디아나는 정신을 차렸다.

‘여기 있으면 안 돼.’

힐긋, 책들 사이로 건너편을 보자 세이아와 마리가 에드윈을 빤히 보고 있는 게 보였다.

고개를 든 에드윈이 싱긋 미소를 지으며 세이아에게 한 걸음 다가갔다.

“한데 대공녀님, 도서관엔 어쩐 일이신가요?”

“아, 마리가 도서관이 생각보다 크다고 해서 구경을…….”

‘지금 나가야 해.’

에드윈은 세이아에게 계속 시답잖은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세이아가 물음에 답하느라 정신이 없는 지금 나가야 했다.

디아나는 최대한 발소리를 죽이며 빠르게 문으로 향했다.

하지만 문에 다다른 순간 걸음을 멈추었다.

문이 굳게 닫혀 있었다.

‘어떡하지?’

문을 열려고 하면 세이아와 마리의 시선이 이쪽을 향할 수도 있었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입술이 바짝 마르던 그때, 갑자기 문이 스윽 열렸다.

그리고 반쯤 열린 문틈 사이로 피비의 얼굴이 보였다.

‘피비가 왜…….’

주홍빛 눈동자를 도르륵 굴리던 피비와 디아나의 눈이 마주쳤다.

눈을 크게 뜬 피비는 몸을 낮추고 있는 디아나에게 어서 나오라는 듯이 손짓했다.

돌아가는 상황이 이해되지 않았지만 디아나는 일단 세이아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서둘러 피비가 열어 준 문으로 빠져나갔다.

문을 빠져나오자 피비는 조심스럽게 도서관의 문을 닫으며 말했다.

“아가씨, 이쪽으로 오세요.”

피비는 디아나가 걸어온 길이 아닌 다른 쪽으로 이끌었다.

“…….”

디아나는 피비에게 묻고 싶은 것이 많았지만 지금 당장 물을 순 없어 입술을 달싹이다 피비의 손을 잡고 도서관에서 멀어졌다.

도서관의 문이 살짝 열렸다, 닫혔다.

세이아와 마리는 보지 못했지만 그것을 본 에드윈은 디아나가 나간 것을 확인하고 안도감을 느꼈다.

‘혼자서 잘 나가셨구나.’

혹시라도 나가지 못할까 걱정했었는데 역시 똑똑한 아가씨라고 생각한 그는 살짝 미소를 그리다 입꼬리를 내렸다.

‘한데 아까는 왜 그렇게 불안해하셨던 걸까.’

대공녀가 왔다는 말을 듣자마자 디아나는 몸을 딱딱하게 굳혔다.

에드윈도 갑작스런 대공녀의 방문에 놀라긴 했지만 차라리 대공녀라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대공녀의 심성이 전 대공비를 닮아 아주 착하다는 말을 기사단장인 로운 경에게 수도 없이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 대공녀님은 심성이 너무 착하시고 여리셔서 나중에 나쁜 놈들이 주변에 꼬일까 내가 벌써부터 걱정이라니까.

- 싫어도 싫다는 말도 내색도 안 하시는 분이야. 겨우 10살이신데 어쩜 그리 마음이 깊으신지…… 정말 나이답지 않게 의젓한 분이셔.

그 정도로 심성이 고운 분이라면 디아나 아가씨와 자신을 보아도 유하게 넘어가 주실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아가씨는 왜…….

에드윈은 아까 보았던 디아나의 반응이 이해되지 않았다.

단순히 누군가에게 들킬지도 모른다는 것에 그리 반응한 걸까, 아니면…… 대공녀가 왔다는 사실에 그리 굳은 걸까.

‘대공녀님과 디아나 아가씨의 사이는 어떻지?’

보통 귀족 가문을 생각해 본다면 정실의 자식이 사생아와 잘 지내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아니, 솔직히 그런 일은 없는 게 현실이었다.

‘하지만 대공녀님이 디아나 아가씨를 싫어한다는 소문을 들어 본 적이 없는데.’

단장님의 말에 따르면 대공녀님은 디아나 아가씨를 저택으로 들인 일에도 잘된 일이라며 미소를 지었다고 했었다.

‘단장님의 말과 디아나 아가씨의 반응이 너무도 달라.’

에드윈은 책들을 구경하며 자신의 하녀와 웃음 짓고 있는 대공녀를 보았다.

옅은 금발과 옅은 금색 눈동자.

대공의 선명한 황금빛과는 다르긴 했지만 대공가의 색을 타고난 대공녀는 딱 10살 아이의 순진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에드윈의 시선을 느낀 듯 대공녀가 그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에드윈?”

“아, 죄송합니다. 대공녀님 볼에 무언가 묻은 거 같아서 보고 있었습니다.”

“아, 그래?”

세이아는 작은 손으로 볼을 매만졌다.

“이제 떨어졌네요, 대공녀님.”

에드윈이 싱긋 웃으며 말하자 대공녀는 그를 보며 예쁘게 미소를 그렸다.

“고마워, 에드윈.”

순간 세이아의 미소가 너무 순수해 에드윈은 방금까지 대공녀를 의심한 것이 불편해졌다.

‘고작 10살이신데, 내가 무슨 생각을 했던 거지.’

그리고 대공녀 역시 그가 지켜야 하는 대공 전하의 핏줄이었다. 기사가 주인을 의심하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에드윈은 스스로를 질책하며 대공녀를 향해 들었던 무언가 꺼림직한 느낌을 머릿속에서 지워 버렸다.

‘디아나 아가씨께선 그저 누군가에게 글을 배운다는 게 들킬까 불안해하셨던 걸 거야.’

차분히 생각을 정리한 그는 자신을 보고 있는 대공녀를 바라보았다.

“대공녀님, 오후 훈련 시간이 다 되어 전 이만 물러가야 할 거 같습니다.”

“아…… 벌써? 좀 더 같이 얘기를 나누고 싶었는데…….”

몇 마디 나누지 않았건만 세이아는 에드윈에게 호감이 생긴 듯 옅은 금빛 눈동자를 반짝였다.

세이아의 반짝이는 눈동자를 보자 에드윈은 디아나의 눈동자가 떠올랐다.

대공가의 금빛은 찾아볼 수 없는 평범한 갈색 눈동자.

하지만 어째서인지 세이아를 마주한 지금 그는 대공녀보다 디아나의 눈이 대공을 닮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나하나 따져 보면 디아나와 대공의 닮은 점을 찾기는 어려웠지만 말이다.

그래도 아까 디아나가 공부에 집중할 때의 그 눈빛은 언젠가 보았던 대공의 날카로운 눈빛과 비슷한 분위기를 띠고 있었다.

‘디아나 아가씨도 대공 전하의 딸이니 닮은 것은 당연한 것이겠지. 하지만 대공녀님은 대공 전하와…….’

에드윈은 자신도 모르게 대공녀와 대공 전하의 닮은 점을 찾다 황급히 정신을 차렸다.

미친 건가.

아까부터 이상하게 대공녀님에게 하극상을 저지르고 있었다. 에드윈은 아무래도 강도 높은 훈련으로 정신을 차려야겠다고 생각했다.

“송구합니다, 대공녀님. 저도 아쉽지만 오늘은 훈련 때문에 이만 돌아가야 할 듯합니다.”

“어쩔 수 없지. 다음에 꼭 나랑 같이 놀아 줘.”

세이아는 에드윈에게 환한 미소를 지었다.

“네, 대공녀님.”

에드윈이 인사를 하고 도서관을 나가자 세이아의 얼굴에서 미소가 단번에 사라졌다.

세이아는 사뿐사뿐 걸으며 도서관을 둘러보았다.

하지만 아까 에드윈과 있을 때와 달리, 세이아의 눈은 즐거워 보이지 않았다.

책들을 시큰둥한 눈빛으로 훑은 세이아는 입술을 삐죽였다.

“크기만 하지 별로 볼 것도 없네. 오히려 아버지의 서재가 훨씬 좋은 거 같아.”

불만이 서린 세이아의 목소리에 마리는 움찔하며 일부러 밝은 목소리고 말했다.

“어휴, 감히 대공 전하의 서재를 이곳과 비교할 수 있나요. 그래도 대공녀님, 이곳도 나름 넓고 볼 게 많지 않나요?”

“흠…….”

“저쪽에 가면 재밌는 소설들이 있어요. 집사님께서 항상 수도에서 가장 유명한 소설들을 구입해 주시거든요.”

마리는 세이아의 흥미를 돋우어 보려 노력했지만 세이아는 마리의 말에 조금의 흥미도 생기지 않는 얼굴이었다.

‘어떡하지.’

마리는 세이아의 불퉁한 표정에 점점 손에 땀이 찼다.

세이아의 기분이 안 좋아질수록 곤란해지는 것은 마리 자신이었기 때문이다.

마리가 대공녀를 모신 지도 벌써 10년째. 마리는 대공성의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대공녀의 모습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모습들은 절대 대공성에 알려진 ‘천사 같은 대공녀’와는 전혀 달랐다.

그래도 예전엔 그리 심하게 심통을 부리지 않았지만 최근 디아나가 저택에 들어온 이후로 세이아의 심술이 극심해졌다.

하루에도 몇 번씩 기분이 바뀌고 마리가 세이아의 기분을 풀어 주지 못하면 그날은 마리가 유모에게 체벌을 받는 날이 되었다.

마리는 풀어질 줄 모르는 세이아의 표정에 속으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 종아리 멍이 남아 있는데.’

멍이 든 곳에 또 매질을 당하면 얼마나 아플지 상상하고 싶지도 않았다.

세이아의 안색이 어두워질수록 마리의 심장이 두려움으로 크게 뛰던 그때.

툭.

작은 손끝으로 책을 만지작거리던 세이아는 책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재미없어. 이쪽에도 볼 게 없잖아. 책도 낡았고 먼지투성이에 냄새도 나는 거 같아.”

불만이 가득해진 세이아의 표정에 마리는 낭패감을 느끼며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대공녀님”

마리는 황급히 책을 주웠다. 마리의 머리 위로 세이아의 작은 목소리가 울렸다.

“그나마 재미있었던 건 에드윈 하나뿐이었네.”

유모에게 혼나는 상상에 벌써 눈물이 찔끔 나오려던 마리는 순간 무언가가 떠올랐다.

시큰둥한 표정으로 입술을 내밀고 있는 세이아의 흥미를 이끌어 낼 수 있는 정보가 말이다.

마리는 번쩍 고개를 들어 세이아를 보았다.

“대공녀님, 사실 제가 얼마 전에 아까 만나셨던 에드윈 경에 대한 소식을 하나 들었답니다.”

“에드윈의 소식?”

마냥 못마땅한 표정이던 세이아의 얼굴에 궁금증이 서렸다. 그에 마리는 반색하며 세이아에게 신나게 입을 열었다.

“네, 에드윈 경께서 내년 봄에 열리는 검술 대회에 대공가의 대표로 참가하시게 되었답니다!”

“검술 대회? 그게 뭐였지?”

수업 시간에 들은 것 같긴 하나 잘 떠오르지 않아 세이아의 미간이 좁아졌다.

“매년 봄에 제국의 수도에서 열리는 검술 대회 말입니다, 대공녀님.”

마리의 설명에 그제야 세이아는 기억해 냈다.

검술 대회는 제국에서 매년 열리는 행사 중 건국제 다음으로 크게 열리는 행사라고 가정교사에게 들은 적이 있었다.

하지만 세이아는 태어나서 단 한 번도 그 대회에 참석해 본 적이 없었다.

대공이 대공성을 떠나고 세이아는 단 한 번도 북방의 영지를 벗어난 적이 없었으니까.

대공이 전장으로 떠나면서 대공성이 있는 북방의 영지는 폐쇄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번 무투 대회엔 우리 대공가도 참석하는 거야?”

에드윈이 대공가의 대표로 무투 대회에 참가한다는 건 어쩌면 대공녀인 자신도 검술 대회를 관람할 수 있단 뜻이었다.

북방의 영지를 벗어나 드디어 제국의 수도로 가 볼 수 있다니. 세이아의 옅은 금빛 눈동자가 반짝였다.

“대공 전하가 떠나시고 저희 대공가는 그 검술 대회에 쭉 참가하지 않았는데 이번에 대공 전하가 돌아오시게 되어 무투 대회에 기사를 내보내기로 했답니다.”

“마리, 그거 진짜야?”

“네, 그럼요. 믿을 만한 기사님께 들은 이야기예요.”

“그럼 정말 수도에 가 볼 수 있는 거야? 대공가의 기사가 대회에 나가니까 아버지와 나도 대회를 관람할 수 있을 거 아냐.”

“당연하죠, 아가씨.”

마리가 맞장구를 쳐 주자 세이아의 얼굴이 환해졌다. 제국의 수도로 갈 생각에 행복해하던 세이아는 문득 에드윈을 떠올렸다.

“근데 마리, 대공가의 대표로 에드윈이 나간다는 건 에드윈의 실력이 그만큼 뛰어나다는 거지?”

“그럼요, 대공녀님. 원래 무투 대회는 귀족 가문들 간의 자존심이 걸린 싸움이라 언제나 가문의 기사단장 다음으로 강한 기사를 내보낸답니다.”

“그럼 에드윈이 로운 다음으로 강한 기사란 거네.”

“그렇죠.”

마리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세이아는 친절한 미소를 짓던 에드윈의 모습을 떠올렸다.

평범한 가문의 기사들 중 하나인 줄 알았는데, 로운 다음으로 강한 기사였다니.

세이아의 에드윈에 대한 관심이 깊어지던 그때, 마리가 시간을 확인하며 세이아에게 말했다.

“대공녀님, 이제 곧 윈스틴 부인께서 오실 시간이시라 그만 방으로 돌아가셔야 해요.”

“알았어. 그만 돌아가자. 아, 마리. 수업 끝나면 로운 경을 좀 데려와.”

“네, 대공녀님.”

‘나중에 로운에게 에드윈에 대해 더 물어봐야지.’

세이아는 에드윈이라는 새로운 즐거움이 생긴 것에 미소를 지으며 방으로 돌아갔다.

* * *

탁-.

피비가 방문을 닫고, 이제야 안심이 된다는 듯 가슴팍을 쓸어내리며 긴 숨을 내쉬었다.

디아나는 그런 피비를 아무런 말 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대체 어떻게 피비가 그곳에 있었던 거지.

도서관과 하이리스가 핀 정원은 정반대의 길인데.

대체 이게 무슨 상황인지 도통 이해가 되지 않았다.

숨을 다 골랐는지 피비는 디아나와 시선을 마주했다.

디아나의 굳은 얼굴을 본 피비는 어색하게 볼을 긁었다.

“피비.”

“……네, 아가씨.”

디아나는 조심스럽게 그녀에게 물었다.

“……내가 도서관에 있는 걸 어떻게 알았어?”

“그게…….”

피비는 곤란한 표정으로 말끝을 흐렸다.

입술을 달싹이던 피비는 갑자기 털썩, 무릎을 꿇었다.

“갑, 갑자기 왜 그래, 피비!”

디아나는 갑작스런 그녀의 행동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일어나라고 그녀에게 손을 뻗었지만 피비는 고개를 푹 숙였다.

“아가씨, 죄송해요. 아가씨를 모시는 하녀로선 해선 안 되는 행동을 했어요.”

“해서는 안 되는 행동이라니?”

“그게…… 저 오늘 아가씨를 미행했어요.

“……날 왜 미행해?”

“절대, 절대로 나쁜 의도가 있어서 아가씨를 몰래 따라간 건 아니었어요. 단지 아가씨께서 혼자 어딘가로 가시는 거 같아서, 혹시라도 길을 잃으시거나 다치실까 걱정되어 몰래 따라간 거였어요.”

“…….”

“정말 나쁜 의도는 전혀 없었어요. 아가씨께서 도서관 가시는 길 내내 주변을 살피며 가시길래, 아무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으신 거 같아서 조용히 뒤를 따라갈 수밖에 없었어요. 그렇다고 아가씨 혼자 돌아다니시게 둘 순 없었으니까요.”

“그럼 아까 도서관 밖에서 일부러 큰 소리를 낸 건…… 왜 그런 거야?”

“……주변까지 살피시면서 몰래 도서관으로 가시는 걸 보니 왠지 다른 분들께 들키면 안 되는 일 같아서…… 일단 소리를 크게 질렀어요. 혹시 제가 쓸데없는 짓을 했던 걸까요?”

“아니, 그런 건 아니야…….”

눈치를 살피며 안절부절못하는 피비를 보던 디아나는 긴 숨을 내쉬었다.

피비가 몰래 자신을 미행했다고 했을 땐 당황스럽고 무서웠지만 이유를 들어 보니 자신이 걱정되어 따라온 것 같았다.

믿어도 되는 걸까.

디아나는 피비를 빤히 쳐다보았다.

디아나의 의심을 안다는 듯 피비는 눈을 피하지 않았다.

피비의 주홍빛 눈동자는 조금의 흔들림도 없었다.

디아나를 향한 악의도 느껴지지 않았다.

에드윈과 똑같은 눈빛이었다.

마침내 의심을 거둔 디아나는 여전히 무릎을 꿇고 있는 피비에게 손을 내밀었다.

“피비, 그만 일어나. 그렇게 무릎 꿇고 있으면 아플 거 아냐.”

“……네, 아가씨.”

피비는 엉거주춤 몸을 일으켰다.

“저…… 아가씨.”

“응?”

“제가 매일 꽃을 따러 간 시간마다 도서관에 가셨던 건가요?”

피비는 작은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아…… 응.”

“거기서 무얼 하고 계셨던 건가요?”

“……글을 배우고 있었어.”

“글을요?”

피비의 눈동자가 놀람으로 커졌다.

“응, 나 아직 글을 모르거든. 우연히 도서관에서 한 기사님을 만났는데 그 기사님이 내게 글을 가르쳐 주신다고 해서 얼마 전부터 글을 배우기 시작했어.”

“아…… 좋은 기사님을 만나셨네요.”

“으응…….”

에드윈의 이름은 일부러 숨겼다.

최대한 자신과는 엮이지 않는 게 좋을 테니 말이다.

“그럼 저도 도와드릴게요.”

“피비가?”

“네, 제가 엄청 똑똑하진 않지만 그래도 글을 배웠으니 아가씨께 조금의 도움은 드릴 수 있을 거예요.”

“아…… 그게…….”

그럼 피비도 같이 도서관에 가는 건가.

에드윈의 존재를 숨기고 있는데 그럼 피비가 에드윈을 보게 될 것이다.

거기다 에드윈에게 피비를 데려가도 되는지 물어봐야 할 거 같은데.

갑작스런 제안에 어버버 거리자 피비가 말을 덧붙였다.

“기사님과 도서관에서 배우시고 돌아오셔서 저랑도 연습하시면 더 빨리 글을 배우실 수 있을 테니 좋지 않을까요?”

“돌아와서? 방으로 와서 피비랑 공부한다는 거지?”

“네!”

에드윈을 들키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디아나의 얼굴이 확 밝아졌다.

“그럼 할래! 아니, 하고 싶어! 잘 부탁해, 피비.”

“저 정말 최선을 다해서 아가씨를 도와드릴게요!”

디아나가 미소를 지으며 손을 내밀자 피비는 환한 웃음을 지으며 작은 손을 꼭 마주 잡았다.

* * *

어느새 시린 겨울이 모두 지나고 산 정상의 얼음마저 다 녹은 겨울의 끝자락이었다.

“아가씨, 좀 쉬었다 하세요.”

피비의 말에 디아나는 글을 쓰다 고개를 들었다.

“열심히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적당히 쉬는 것도 중요하잖아요? 여기 사과 셔벗을 가지고 왔어요, 남부의 사과는 달아서 맛이 아주 좋을 거예요.”

피비는 디아나의 앞으로 사과 셔벗이 놓인 접시를 내려놓았다.

어서 셔벗을 먹어 보란 피비의 눈빛에 디아나는 잠시 깃펜을 내려놓았다.

스푼으로 셔벗을 떠먹자 시원한 달콤함이 입 안을 가득 메웠다.

“아가씨, 이제 문장 응용력이 저보다 좋은 거 같아요. 제대로 배우신 지 아직 한 달 정도밖에 안 됐는데 벌써 이렇다니, 아가씨는 정말 천재라니까요.”

피비는 디아나가 종이에 적은 문장들을 보며 에드윈과 똑같은 이야기를 했다.

처음엔 천재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부끄러웠지만 이젠 그들의 과한 칭찬도 익숙해져 웃어넘길 수 있는 수준이 되었다.

“이게 다 피비가 도와준 덕분이지. 그러니 피비도 한 입 먹어.”

“……감사합니다.”

처음엔 간식을 나눠 주면 괜찮다며 완강히 거부하던 피비였지만 같이 먹는 게 즐겁다는 디아나의 고집에 결국 그녀가 져 주었다.

피비는 푸딩을 한 입 먹고는 미소를 지었다.

“역시, 남부의 사과는 맛있네요.”

“……매번 대공가로 오는 과일들은 남부에서 오는 거지?”

“네.”

“근데 왜 항상 남부의 과일만 오는 거야? 북부에도 온실이 있다고 하지 않았어?”

“북부에도 온실이 있긴 한데, 남부의 과일만큼은 못해요. 아무래도 남부는 북부와 달리 겨울에도 온도가 20도 이하로 잘 떨어지지 않거든요. 자연적인 온도가 높아서 과일들의 당도가 높고 품질이 상급이죠. 그래서 대공가엔 매번 남부의 과일들만 온답니다.”

“그렇구나. 난 추운 건 싫어서 언젠가 남부에 가 보고 싶어.”

디아나는 추위에 떨며 산 세월이 너무 길어서인지 겨울이 싫었다.

셔벗을 한 입 더 먹으며 겨울의 끝자락인 창밖의 풍경을 보는데 오늘따라 하녀들이 삼삼오오 모여 있는 것이 보였다.

평소라면 한참 각자의 일을 하느라 바쁜 시간일 텐데. 오늘따라 하녀들이 상당히 들떠 보였다.

그러고 보니 아까 산책 나갔을 때도 다들 뭔가 기분이 좋아 보였다.

‘무슨 일이 있는 건가.’

“피비, 혹시 오늘 대공가에 무슨 좋은 일 있어?”

“네? 대공가엔…… 별다른 소식이 없는 걸로 아는데요. 왜 그러세요?”

“아, 하녀들이 다들 들떠 보여서.”

“아, 그건 오늘 영지에서 열리는 축제 때문일 거예요.”

“축제?”

“네, 이번에 대공 전하께서 10년 만에 북부로 돌아오셨잖아요. 그걸 축하하기 위해 작은 축제가 열린다고 들었어요.”

“축제…….”

디아나는 생소하기만 한 ‘축제’라는 단어에 창밖의 들떠 있는 하녀들을 부러운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언젠가 쿤타에게 고향의 축제가 얼마나 화려하고 큰지에 대해 들은 적이 있었다.

맛있는 먹거리들이 가득하고 서커스단이 공연을 하고 거리는 웃음소리로 가득 찬다고 했었다.

‘나도 그런 곳에 가 보고 싶은데…… 안 되겠지.’

대공성을 나가려면 일단 대공의 허락을 받아야 하는데 축제에 가 보고 싶다는 말을 꺼내기가 그랬다.

“아가씨?”

“응?”

“혹시 축제에 가고 싶으세요?”

“……아니.”

순간 가고 싶다고 나올 뻔한 말을 참느라 대답이 한 박자 느리게 나오고 말았다.

느릿한 디아나의 대답에 그녀의 속마음을 알았는지 피비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축제에 가고 싶으시다면 제가 집사님께 말씀드릴게요. 그럼 집사님께서 준비를 해 주실 거예요.”

“아냐, 그러지 마. 괜한 민폐를 끼치고 싶지 않아.”

“민폐라뇨, 아가씨께서 하시는 일이 어떻게 민폐인가요.”

“집사에게 말하면 대공 전하께 허락을 받으러 갈 거고 또 나 혼자 보낼 수 없다고 사람을 붙여 줄 거잖아.”

“네, 그러실 거예요.”

당연하다는 듯 말하는 피비에게 디아나는 진지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피비, 피비도 알다시피 난 피치 못할 사정으로 대공 전하의 보호를 받고 있어. 그러니 최대한 조용히 지내고 싶어. 고작 축제에 가고 싶단 이유로 대공성 사람들을 귀찮게 하고 싶지 않아.”

이제 피비를 완전히 믿고 있기에 솔직하게 말했다.

디아나의 담담한 말에 조금 당황한 듯 피비의 주홍빛 눈동자가 떨렸다.

“난 정말 괜찮아. 이곳에서 피비랑 있는 것도 즐거우니까.”

그녀에게 괜찮다고 살짝 미소를 짓자 피비는 뭔가 결심한 표정으로 입술을 열었다.

“그럼 아가씨, 저와 몰래 축제에 다녀와요.”

“……몰래 나가자고?”

방금 제대로 들은 게 맞는 건가.

디아나는 동그래진 눈으로 피비를 바라보았다.

피비는 놀란 표정의 디아나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몰래요. 제가 대공성의 개구멍을 하나 알고 있거든요. 거기로 조용히 나갔다 오면 아무도 모를 거예요.”

“진심이야?”

“네!”

피비가 한껏 들뜬 얼굴로 답했다. 디아나의 얼굴에 당혹감이 서렸다.

몰래 대공성을 나가자니.

말도 안 되는 일이라 생각하면서도 가슴이 두근거렸다.

개구멍이란 말이 좀 걸리긴 했지만 아무도 모른다면 조용히 나갔다 와도 되지 않을까…….

어차피 디아나의 방엔 피비 말고 오는 사람도 없었다.

가끔 집사가 방문하긴 하지만 그것도 낮이나 오전에 잠깐 들러 생활이 괜찮은지 확인하는 것이 다였다.

그러니 디아나가 정문으로 나가지 않는 이상 저녁에 뭘 해도 아무도 모를 것이다.

‘정말 나가도 되는 걸까?’

한 번도 몰래 나가 본 적도, 그런 생각을 해 본 적도 없었다.

“나가고 싶긴 한데…….”

나가고 싶은 마음과 달리 망설이던 그때, 창밖에서 하녀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어서 축제를 보러 가고 싶다는 말과 함께.

디아나는 그녀의 답을 기다리고 있는 피비를 머뭇거림이 서린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조용히 다녀오면 정말 아무도 모르겠지?”

이미 나간다는 쪽으로 마음이 기울었다.

그렇지만 괜히 마음이 불안해 피비에게 동의를 구하듯 묻자 피비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죠, 아가씨. 아.무.도 모를 거예요.”

‘아무도 모르게 다녀온다면 대공에게 민폐를 끼칠 일도 없을 거야.’

디아나는 마음 한구석에 있던 불안감을 날려 버리고 자신만만해하는 피비에게 미소를 지었다.

“그럼 피비, 우리 몰래 축제에 다녀오자.”

해가 지고 하늘이 어둑해지기 시작한 시점. 대공성의 외벽 쪽에서 피비의 작은 목소리가 울렸다.

“아가씨, 이쪽이에요.”

피비의 목소리에 건물 벽에 숨어 있던 디아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디아나는 피비의 어릴 적 옷을 입고 있었다. 하지만 또래보다 작은 디아나에겐 사이즈가 약간 컸다.

때문에 긴 소매를 한 번 접어 올리고 치마가 발목까지 내려온 엉거주춤한 디아나의 모습을 보던 피비가 귀엽다며 미소를 지었다.

“아가씨, 어쩜 이렇게 귀여우시죠.”

디아나를 보는 피비의 눈빛이 과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가끔 피비가 그녀의 머리칼을 가지고 이런저런 모양을 만들어 주고 옷도 여러 벌 갈아입힐 때가 있는데 딱 그때의 눈빛 같았다.

‘위험해.’

디아나는 자칫 피비의 인형이 될 거 같은 느낌에 눈을 도르륵 굴리며 피비의 시선을 돌릴 것을 찾았다.

“저 구멍이야?”

이리저리 시선을 돌리던 디아나는 성벽 맨 밑, 나뭇가지와 풀이 잔뜩 쌓여 있는 구멍을 발견했다.

“아, 네. 이 구멍이에요.”

피비는 쭈그려 앉아 구멍 안에 쌓인 나뭇가지와 풀들을 멀끔히 치웠다.

구멍을 막았던 것들이 사라지자 생각보다 큰 구멍이 드러났다.

덩치 큰 어른 남자는 힘들겠지만 여자들은 몸을 구부리면 왔다 갔다 할 수 있을 정도의 구멍이었다.

“근데 피비, 이 구멍은 어떻게 발견한 거야?”

누군가 의도적으로 만든 것 같기도 한 구멍이 궁금해 묻자 피비는 당황한 듯 손을 꼼지락거리다 입을 열었다.

“그게…… 사실은 제가 만든 구멍이에요.”

“응? 왜?”

“아, 가끔 다른 하녀들이랑 문제가…… 생기면 너무 답답해서 여길 산책하곤 했거든요. 근데 우연히 성 외벽에 작은 구멍이 난 걸 보고 제가 더 크게 만들었어요. 밤엔 성 밖을 나가는 게 쉽지 않으니 이곳을 통해 나가서 산책을 좀 하고 들어오면 기분이 풀려서요……. 아가씨, 비밀로 해 주시면 안 될까요…….”

제발 부탁드린다는 듯한 피비의 간절한 눈빛에 디아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비밀로 해야지. 나도 이 구멍으로 몰래 나가는 건데.”

“아, 아가씨, 혹시라도 저 몰래 이곳을 이용하시면 절대 안 돼요. 가끔 나가시고 싶으실 땐 저와 함께 나가요.”

“알았어. 걱정 마.”

“그럼 이만 나갈까요? 이제 해가 져서 축제가 본격적으로 시작됐을 거예요.”

“응, 빨리 가자.”

축제. 말만 들어도 기대감에 심장이 두근거렸다. 어서 축제에 가고 싶은 마음에 디아나는 부랴부랴 작은 구멍으로 몸을 구부렸다.

“와.”

디아나는 광장의 반짝이는 불빛과 많은 사람들에 감탄사를 내뱉으며 입을 크게 벌렸다.

레아를 따라 한 번 온 적 있는 광장이었지만 나른함이 가득했던 낮의 풍경과는 완전히 달랐다.

사람들도 훨씬 많았고 특히 밤이란 걸 잊을 만큼 온갖 노점상과 불빛들이 거리에 가득했다.

‘마법인가?’

촛불이 아닌 게 분명한 화려한 불빛들을 디아나가 넋 놓고 보던 그때 피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랜만에 열리는 축제라 그런지 사람들이 정말 많네요. 영지의 사람들이 다 광장에 모인 거 같아요. 아가씨, 제 손 꼭 잡으세요.”

“응.”

피비는 생각보다 많은 인파에 디아나를 잃어버릴까 걱정되어 디아나의 손을 꼭 잡았다.

“어디부터 구경할까요?”

디아나는 광장과 상점들이 즐비한 거리를 둘러보았다.

그리고 광장 한쪽에 유난히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이 보였다.

디아나는 사람들이 모인 곳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저기 가 보자. 무슨 공연을 하는 거 같아.”

“네.”

피비는 디아나의 손을 꼭 잡고 능숙하게 많은 인파를 쏙쏙 뚫고 지나갔다.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에 도착했지만 둥글게 모여 있는 사람들 때문에 안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잘 보이지 않았다.

“음, 잘 안 보이시죠?”

“……응.”

“아가씨, 잠시만 실례할게요.”

“응?”

피비는 디아나를 번쩍 안아 들었다.

디아나보다 겨우 세 뼘 정도 큰 피비지만 힘이 좋은지 디아나를 안고도 끄떡없었다.

하지만 피비는 디아나에게 씩 웃어 보이곤 모인 사람들의 틈을 파고들었다.

피비는 중앙이 잘 보이는 곳까지 들어온 뒤에야 디아나를 내려주었다.

디아나는 드디어 사람들이 모여 보던 공연을 보게 되었다.

‘근데…… 저게 뭐지……?’

디아나는 중앙 무대에서 움직이고 있는 실이 달린 인형을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인형들에 달린 실을 따라 올라가니 사람이 실패를 잡고 있었다.

그 사람의 손짓에 따라 실에 매달린 인형들이 움직였다.

디아나는 처음 보는 광경에 입을 벌리고 집중했다. 그때 피비에게서 답이 흘러나왔다.

“광대라도 온 줄 알았는데 인형극을 하고 있었구나.”

“인형극? 저게 인형극이야?”

“아, 아가씨는 처음 보시겠군요. 네, 인형에 실을 매달아서 하는 연극을 인형극이라고 해요. 축제가 열리는 곳엔 항상 인형극이 있죠.”

“그렇구나.”

디아나는 피비의 설명을 듣고 다시 인형들에 시선을 집중했다.

무슨 내용인 거지.

화려한 드레스를 입은 여자 인형에게 제복을 입은 남자 인형이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인형을 움직이는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빛의 주신 루멘께 맹세하오니 내 평생에 단 하나의 사랑은 아리엘 시아페 단 한 사람뿐일 것입니다. 내 심장을 그대에게 바치니, 아리엘 시아페, 부디 나와 결혼해 주시겠습니까.”

남자의 나긋한 목소리에 여자가 답했다.

“네, 당신과 결혼하겠어요, 크로우드.”

두 인형이 애절하게 서로를 품에 안는 것을 본 사람들이 기쁜 듯이 박수를 쳤다.

반대로 디아나의 얼굴에서는 미소가 사라졌다.

인형극의 주인공들은 다름 아닌 대공과 대공비였으니까.

크로우드, 대공의 이름을 들었을 때 인형극의 주인공들이 그들이란 걸 알 수 있었다.

대공과 대공비의 사랑 이야기가 유명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런 식으로 접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청혼 장면밖에 보지 않았지만 청혼의 말만 들어도 대공이 얼마나 부인을 사랑했을지 느껴졌다.

그리고 디아나는 그 행복한 사랑을 망쳐버린 여자의 딸이었다.

“크으, 역시 대공 전하의 프러포즈는 언제 들어도 멋있어.”

“그러니까요. 제국의 건국 무도회에서 했던 대공 전하의 청혼은 아주 유명하죠. 대공비님과 영원히 행복하게 사셨으면 참 좋았을 텐데…….”

“그게 다…… 대공비를 모셨던 하녀의 배신 때문이 아니겠어요?”

“맞아요, 그 하녀가 결국 아이를 낳는 바람에…….”

“어휴, 그런 재수 없는 이야기는 하지 말아요. 이제 대공 전하도 돌아오셨고, 대공녀님과 행복하게 지내실 거예요.”

“맞아, 맞아.”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가 방어막 없이 디아나에게 그대로 들려왔다.

“아가씨, 저희 그만 가요.”

피비도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은 듯 디아나에게 다급히 말했지만 이미 디아나는 다 들은 뒤였다.

이미 대공성에서 수없이 들은 말들이었다.

사실 그들의 말이 틀린 것도 아니었다.

단지 그저 인형극으로 본 대공과 대공비의 사랑이 너무 잘 느껴져 기분이 이상했을 뿐이다.

뭔가 마음이 답답하고 행복한 그들에게 죄를 지은 듯한 기분.

디아나는 점점 가라앉는 기분에 짧은 숨을 내쉬었다.

‘내가 이렇게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것도 아닌걸.’

애초에 디아나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디아나는 우울해지는 기분을 떨치려 피비에게 고개를 돌렸다.

펑!

그런데 그 순간 인형들이 모여 있던 곳에서 큰 폭발 소리와 함께 불길이 확 치솟았다.

“꺄악!”

갑작스런 불길에 놀란 사람들이 우왕좌왕 흩어지고 디아나는 사람들에 휩쓸려 피비와 헤어지고 말았다.

“피비!”

피비의 이름을 크게 불렀지만 이미 디아나는 인파에 휩쓸린 뒤였다.

도망가는 사람들을 따라 이리저리 움직이던 디아나는 순간 누군가의 다리에 등을 세게 부딪쳤다.

“앗.”

그대로 몸이 앞으로 기울었다.

넘어진다!

가까워지는 땅바닥에 눈을 질끈 감은 순간 디아나의 몸을 누군가 잡아챘다.

디아나는 자신의 몸을 잡는 손길에 눈을 번쩍 떴다.

피비인가 싶었지만 피비라고 하기엔 손이 너무 컸다.

디아나가 넘어지지 않게 몸을 잡아준 손은 그녀를 제대로 세워 준 뒤 물러났다.

디아나는 감사의 인사를 전하기 위해 몸을 돌렸다, 마주친 밝은 눈동자에 몸을 멈칫했다.

그녀를 내려다보는 후드 속의 황금빛 눈동자.

“혹시나 했는데 정말 너였군.”

대공의 서늘하고 낮은 음성이 디아나의 귀를 정확히 파고들었다.

대공이 왜 이곳에.

눈을 휘둥그레 뜨고 있던 디아나는 낮은 목소리에 번쩍 정신을 차리며 입을 열었다.

“대공 전하…….”

“네가 왜 여기에 있지? 그것도 이렇게 혼자서.”

고개를 숙인 디아나를 보는 대공은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눈썹을 치켜세웠다.

“아…… 그게…….”

몰래 나오기 전, 몰래 나간 것을 들키는 몇 가지의 상상을 했었지만 이렇게 밖에서 대공과 마주칠 줄은 상상도 못했다.

디아나는 대공의 날카로운 눈빛에 어쩔 줄 몰라 하며 입술을 달싹였다.

혼자 나온 게 아니라 해도 일단 몰래 나왔다가 들킨 상황이었으니까.

“왜 대답을…….”

“아가씨!”

“주군!”

디아나는 대공의 말에 끼어드는 두 사람의 목소리에 말을 끝까지 듣지 못했다.

피비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디아나의 앞까지 뛰어온 피비가 털썩 무릎을 꿇으며 그녀의 어깨를 잡았다.

“아가씨, 다치신 곳은 없으신가요? 아프신 데는요? 너무 갑자기 없어지셔서, 다치셨을까 봐…….”

피비는 많이 놀랐는지 횡설수설하며 속사포로 말을 내뱉었다.

디아나는 진정하라는 듯 피비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난 괜찮아, 피비. 다친 곳 없으니까 진정해.”

“하아…… 다행이에요.”

피비는 그제야 숨을 몰아쉬었다.

아직 봄이 완연하지 않은 날씨라 밤의 온도가 낮았음에도 얼마나 뛰어다닌 건지 피비의 이마엔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피비는 괜찮아? 다친 데 없어?”

“전 괜찮아요. 아가씨가 무사하셔서 다행이에요.”

피비는 안도했다는 듯 미소를 지으며 바닥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그때, 잠시 잊었던 싸늘한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네가 디아나의 전속 하녀인가.”

“헉, 대공 전하…….”

피비는 대공을 발견하곤 헙, 숨을 들이켰다.

몸이 뻣뻣이 굳어 있던 피비는 이내 빠르게 허리를 숙였다.

“대공 전하를 뵙니다.”

“일어나.”

“……네.”

“디아나를 모시는 하녀가 너인지 물었다.”

“……네, 제가 맞습니다, 전하.”

“제 주인을 안전하게 보필해야 하는 게 너의 의무인데 디아나와 함께 몰래 대공성을 빠져나온 것도 모자라, 네 주인을 광장 한복판에서 놓치기까지 했군.”

“…….”

대공의 차가운 말이 꼭 날카로운 칼날처럼 느껴졌다. 피비는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너의 죄가 크다는 걸 알고 있겠지.”

당장 피비를 벌할 거 같은 분위기였다.

“제가 졸랐어요! 제 잘못이에요. 피비는…… 제 명령을 어길 수가 없어서 어쩔 수 없이 따라 나온 것뿐이에요.”

디아나가 대공에게 외쳤다.

피비를 향했던 대공의 차가운 시선이 디아나를 향했다.

디아나는 자비가 느껴지지 않는 대공의 눈빛에 시선을 아래로 떨구며 말했다.

“오늘 축제가 열린다고 해서…… 축제를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서 나오고 싶다고 제가 그랬어요. 피비는 집사에게 말해서 정식으로 외출 허락을 받자고 했는데 제가…… 축제를 보러 가는 것 때문에 괜히 사람들을 귀찮게 하면 저를 더 싫어하게 될까 봐 그러지 말자고 했어요, 죄송해요.”

“…….”

디아나는 점점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풀이 잔뜩 죽은 모습에 대공은 순간 하려던 말을 꺼내지 못했다.

그런 대공의 침묵을 오해한 디아나가 다시 한번 고개를 숙였다.

“죄송해요, 잘못했습니다.”

“…….”

잠시 짧은 침묵이 흘렀다. 디아나는 아무 말이 없는 대공에 살짝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황금안과 정면으로 눈이 마주쳤다.

그녀를 바라보는 금안이 살짝 흔들리는 것이 보였다.

알 수 없는 감정이 대공의 눈동자를 스쳤지만 디아나는 마주친 시선에 움찔하며 바로 시선을 낮추어 보지 못했다.

“이렇게 호위도 없이 나온 것이 위험한 일이긴 하지만 오늘은 축제이기도 하고 주군의 귀환을 축하하는 자리이니 용서해 주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무겁게 내려앉은 침묵을 깬 것은 상황을 지켜만 보고 있던 로운이 말했다.

“흠.”

대공은 짧은 숨을 내뱉었다.

하지만 아까보단 살짝 풀린 분위기에 로운이 디아나에게 말했다.

“아가씨, 다음부턴 이리 몰래 나오시면 안 됩니다. 다음엔 꼭 집사에게 요청하시어 정식으로 외출을 하셔야 합니다.”

디아나는 자신을 바라보는 로운을 쳐다보았다.

항상 그녀를 바라보던 로운의 눈동자엔 불쾌함이 서려 있었다.

한데 오늘은 어쩐 일인지 그런 불쾌함을 찾을 수가 없었다.

달라진 눈빛에 잠시 멈칫하던 디아나는 곧 고개를 끄덕였다.

“……응.”

옅은 미소를 지은 로운은 대공에게 시선을 돌렸다.

“주군, 아가씨께서도 많이 반성하시는 것 같습니다.”

대공의 시선이 로운을 향했다.

후드를 쓰고 있어 고개를 돌린 대공의 얼굴을 볼 수 없었지만 로운을 바라보는 얼굴이 좋은 표정은 아닐 거 같은 느낌이 들었다.

쯧,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려오고 대공이 다시 디아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앞으로는 이런 위험한 행동을 하지 말거라.”

“네.”

“한데 대공성에선 어찌 몰래 나온 것이냐. 정문으로 나왔으면 하녀나 경비대가 너의 얼굴을 보았을 터인데.”

대공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게…….”

피비가 파 놓은 개구멍으로 나왔어요.

대공의 차가운 눈빛에 저도 모르게 사실을 말할 뻔했으나 디아나는 간신히 참아 냈다.

‘개구멍이 있단 건 절대 말하면 안 돼.’

그럼 피비가 곤욕을 치를 게 분명했다.

디아나는 머리를 굴리다 떠오른 것에 입술을 열었다.

“하녀들이 타고 나가는 마차의 짐칸에 몰래 숨어서 나왔어요.”

레아가 대공가에서 타고 나갔던 마차의 짐칸을 떠올리며 말하자 대공이 미간을 좁혔다.

“짐칸이라니.”

어떻게 그런 것을 타냐는 듯한 시선으로 디아나를 보던 대공은 또 한 번 혀를 찼다.

“다시는 그런 것을 타지 말거라.”

“네…… 죄송합니다.”

시무룩한 얼굴로 고개를 숙이는 디아나의 모습에 대공의 분위기가 다시금 나빠지던 때 로운이 대공에게 물었다.

“주군, 경비대를 시켜 아가씨를 모시게 할까요?”

대공과 로운은 축제가 열리는 틈을 타 영지의 상황을 보러 조용히 나온 것이었다.

불법으로 영지에 들어온 용병들을 아직 다 살피지 못했기에 로운은 당연히 대공이 디아나를 먼저 보내고 시찰을 계속할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로운의 생각과 달리 대공은 디아나를 가만히 보다 손을 내저었다.

“됐다. 오늘은 이 정도로 마무리하고 디아나와 같이 돌아가는 게 좋겠군.”

“……네?”

같이 돌아간다고?

디아나도 로운만큼이나 당황스런 시선으로 대공을 바라보았다.

“왜 그리 보지?”

“아, 아니에요.”

대공이 눈썹을 꿈틀거리자 디아나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디아나의 입꼬리가 어색하게 올라가던 때 대공이 디아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잡아라.”

“네?”

디아나는 순간 대공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되물었다. 대공은 미간을 좁히며 다시 말했다.

“손을 잡으라고 했다.”

대공의 손을 잡으라고……?

디아나는 자신의 손보다 몇 배는 큰 대공의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크고 단단해 보이는 손.

‘내가 이 손을 잡아도 되는 건가.’

그 큰 손을 가만히 보던 그때 디아나의 머리 위에서 작은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사람이 많다. 손을 잡고 가지 않으면 또 인파에 휩쓸릴 게다.”

대공은 말이 끝남과 동시에 망부석처럼 굳어 있는 디아나의 손을 잡았다.

디아나의 작은 손은 그의 반도 채 되지 않았다.

묘한 기분에 눈을 살짝 찡그리던 대공은 이내 표정을 가다듬고 걸음을 내디뎠다.

디아나는 자신의 손을 전부 감싼 큰 손에 기분이 이상해졌다.

대공의 손바닥은 굳은살이 가득해 돌처럼 단단했다.

하지만 매번 그녀를 보던 차가운 시선과 달리 맞잡은 손은 따뜻하기만 했다.

디아나는 처음으로 대공을 향해 묘하고 심장이 간질거리는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마치 아빠 같아.’

하지만 티 내면 이 모든 것들이 사라질까 봐 디아나는 저도 모르게 움찔거리는 입꼬리에 꽉 힘을 주며 대공의 걸음을 따라가기 위해 발걸음을 재촉했다.

“곧 있으면 폭죽이 터지는 거예요?”

“응, 이제 하늘이 완전히 어두워졌으니 곧 마법 폭죽이 터질 거야.”

“기대돼요!”

“하늘을 수놓는 폭죽들이 별보다 아름다우니 기대해도 좋단다.”

디아나는 지나가는 부녀의 대화에 저도 모르게 귀를 기울였다.

별보다 아름답다니.

그건 대체 어떤 것일까.

디아나는 지금은 아무것도 없는 어두운 하늘을 보며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마법 폭죽…….”

이제껏 들은 적도 본 적도 없는 것들이 축제에는 참 많은 것 같았다.

나오자마자 돌아가게 된 것이 아쉬웠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언젠가 다음에 또 한 번은 오게 되겠지.

언제가 될지 모를 미래의 축제를 마음속으로 기약하던 때 갑자기 대공이 걸음을 멈추었다.

디아나는 하늘을 보던 시선을 내려 대공을 바라보았다.

대공은 잠시 디아나처럼 하늘에 시선을 두다, 디아나를 바라보았다.

“폭죽, 본 적 있나?”

“……아뇨.”

디아나가 느리게 고개를 젓자 광장 주변을 둘러보던 대공이 낮게 중얼거렸다.

“어차피 이렇게 된 거 한 번쯤은 나쁘지 않겠지.”

무어라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린 대공이 뒤로 고개를 돌렸다.

“로운, 좀 더 있다 돌아갈 것이니, 넌 아까 하던 일을 마무리하고 와라.”

“네?”

갑자기 무슨 말이냐는 듯 로운이 대공에게 되물었다.

“두 번 말해야 하나?”

“아닙니다. 그럼 전 다녀오겠습니다.”

대공의 싸늘한 음성에 로운은 바로 뒤돌아 어디론가 급히 발걸음을 옮겼다.

멀어지는 로운을 보던 디아나는 갑자기 대공이 마음을 바꾼 것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갑자기 볼일이 생각났나?’

디아나가 설마 하던 그때.

“디아나.”

“네?”

디아나는 고개를 들어 대공을 바라보았다.

“불꽃놀이가 잘 보이는 명소를 알고 있다. 좀 걸어 올라가야 하는데 괜찮겠나?”

“……불꽃놀이를 보고 가는 건가요?”

디아나는 정말 그녀 때문에 걸음을 멈춘 것인지 믿기지 않아 조심스럽게 다시 물었다.

대공은 미동도 없는 평이한 얼굴로 디아나를 바라보며 답했다.

“불꽃은 한 번도 본 적이 없다고 했으니, 이 기회에 보고 가는 것도 좋을 것 같아서. 싫은 건가?”

싫을 리가 없다. 하지만 그보다 대공이 그저 그녀에게 불꽃을 보여 주려 걸음을 멈췄다는 사실이 기분을 이상하게 만들었다.

디아나는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대공에게 느릿하게 입술을 움직였다.

“……아뇨.”

“서둘러야겠군. 곧 있으면 불꽃이 터질 테니.”

대공은 검은 밤하늘을 보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흠, 짧은 숨을 내쉬던 그가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아이의 걸음으로 걸어가면 불꽃이 터지기 전에 도착하지 못하겠군.”

그럼 안 간다는 건가.

디아나는 들떴던 기분이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저도 모르게 쓸데없는 기대라도 한 걸까.

디아나는 뒤숭숭한 마음을 다잡으며 대공에게 괜찮다고 말하려 했다.

그런데 그 순간 디아나의 몸이 번쩍 들어 올려졌다.

정확히는 대공의 품에 안겼다.

디아나를 안아 든 대공은 심하게 가벼운 몸에 미간을 살짝 찡그렸다.

“집사의 말로는 요즘 잘 먹고 잘 지낸다 들었는데 이렇게 가볍다니. 먹는 것이 부실한 것이냐.”

대공의 낮은 목소리에 순간 멍해졌던 디아나가 정신을 차렸다.

엄청나게 가까워진 대공의 수려한 얼굴이 디아나에게 너무도 잘 보였다.

그래서인지 그가 무언가 불만스럽다는 듯 눈썹을 치켜세운 것도 아주 잘 보였다.

“피비가 챙겨 줘서 잘 먹고 있어요.”

“근데 왜 이리 말랐지? 쯧, 집사에게 좀 더 신경 쓰라 해야겠군. 또래보다 네 몸이 많이 작구나.”

디아나에게 하는 말인지 혼잣말인지 대공은 혀를 찼다. 그리고 딱히 디아나의 답을 들을 생각은 없었는지 피비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속도를 낼 것이니 놓치지 않게 걸음을 서둘러야 할 것이다.”

“네.”

피비의 답을 들은 대공은 곧장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앗!”

디아나는 감히 대공을 잡을 생각을 하지 못하고 두 팔을 어중간하게 허공에 두고 있었다.

대공의 걸음에 몸이 흔들려 팔을 허우적거리자 대공의 시선이 디아나를 향했다.

차가운 금빛 눈동자가 꼭 디아나를 바보 취급하는 듯했다.

대공의 눈빛에 괜히 머쓱해지던 그때, 그의 입이 열렸다.

“떨어지고 싶은 게 아니라면 내 목이나 어깨를 잡도록 해라.”

“……네.”

디아나는 대공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차마 그의 어깨를 꽉 잡진 못하고 로브 자락을 살짝 그러쥔 디아나는 대신 떨어지지 않으려 몸에 힘을 주었다.

대공은 빠르게 걸어 상점이 즐비한 길을 지나갔다.

산으로 향하는 나무 계단을 쉬지 않고 오른 그는 언덕 중턱쯤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여긴 변한 게 없군.”

대공의 뒤에서 헉헉거리며 따라오는 피비를 걱정스런 눈으로 보고 있던 디아나는 대공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사람이 앉을 수 있는 나무 의자가 하나 있는 중턱의 공터는 앞이 환히 트여 있었다.

땅과 하늘이 동시에 시야 가득 들어오는 광경에 디아나는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우와.”

“이곳에서 폭죽을 보는 게 제일 절경이다.”

대공은 반짝이는 눈으로 풍경을 바라보고 있는 디아나를 바닥에 내려주었다.

“의자에 앉아서 보면 될 것이다.”

“네, 감사합니다.”

대공에게 감사하다 말한 디아나는 의자에 앉지 않고 막 계단을 다 오른 피비에게 쪼르르 뛰어갔다.

“피비, 괜찮아?”

“헉, 헉…… 네, 괜, 괜찮아요, 아가씨.”

대공의 걸음은 평범한 사람의 걸음 속도가 아니었다.

거기다 대공은 아주 빨리, 그것도 잠시도 쉬지 않고 산 중턱까지 올라왔다.

그런 대공을 여자인 피비가 따라오는 것은 힘든 일이었을 게 분명했다.

그를 증명하듯 피비는 상당히 지친 얼굴로 잔뜩 흐른 땀을 닦아 냈다.

괜히 미안해진 디아나는 원피스 소매로 피비의 땀을 닦아 주었다.

“어후, 아니에요, 아가씨. 옷 더러워지세요.”

“이거 어차피 피비 옷이잖아.”

“그렇긴…… 하지만, 그래도 아가씨 손이 더러워질 수도 있잖아요.”

괜찮다고 말하려던 디아나에게 피비가 뒤를 살짝 보며 낮게 속삭였다.

“그리고 아가씨, 대공 전하께서 다 지켜보고 계세요.”

“아…….”

피비의 지친 얼굴에 저도 모르게 잠시 대공의 존재를 잊고 말았다.

디아나는 피비에게서 한 걸음 물러나 몸을 돌렸다. 대공은 귀찮다는 듯 후드를 벗으며 말했다.

“하녀를 들이는 걸 부담스러워 했다던데 어느새 사이가 좋아졌나 보구나.”

“아…… 네, 피비가 제게 잘해 줘서요.”

대공의 시선이 피비를 향했다. 날카로운 눈빛에 피비의 몸이 움찔했으나 곧 대공은 관심 없다는 듯 시선을 거두었다.

그는 잠시, 디아나도 피비도 바라보지 않고 주변의 풍경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아직 디아나가 앉지 않은 의자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어딘지 쓸쓸해 보이는 대공의 시선에 디아나도 나무 의자에 시선이 갔다.

뭔가 추억이 있는 의자인가.

나무 의자는 너무도 평범하고 오래되어 보였지만 대공의 시선엔 그리움 같은 것이 담겨 있었다.

대공비와 관련된 걸까.

아까 보았던 인형극이 다시금 떠올랐다.

어린 디아나가 듣기에도 절절해 보였던 사랑 맹세.

저 의자엔…… 앉으면 안 되겠어.

디아나는 또다시 불편해지는 마음에 나무 의자에서 시선을 거두었다.

“계속 서 있을 것이냐.”

디아나가 시선을 뗀 그때 대공이 물어왔다.

“아…… 전 여기서 보는 게 더 좋을 거 같아서요.”

디아나는 어색하게 미소를 지으며 탁 트인 절벽 쪽으로 한 걸음 발을 내디뎠다.

“위험해.”

그리 가깝지도 않았건만 디아나가 발을 내디딘 순간 대공이 그녀의 몸을 안아 들었다.

“앗, 전 괜찮…….”

“여기서 떨어지면 시신을 찾기도 힘들다. 의자에 앉아 얌전히 보거라.”

시신…….

무서운 대공의 말에 디아나는 괜찮다는 말을 삼키고 입을 다물었다.

얌전해진 디아나가 만족스러운지 미간의 주름을 편 대공은 디아나를 의자에 앉혀 주었다.

디아나가 조용히 의자에 자리를 잡자 대공은 의자 옆, 커다란 나무에 등을 기대었다.

그리고 모두가 말이 없어져 어색한 침묵이 흐르던 순간 펑, 하늘 위로 빛이 치솟았다.

“시작했군.”

대공의 나직한 음성이 울림과 동시에 폭죽이 터지는 소리가 하늘을 크게 울렸다.

펑-펑-펑!

황금빛, 푸른빛, 붉은빛, 보랏빛…….

세상의 모든 색들이 다 빛이 된 듯 검은 하늘을 말 그대로 별빛보다 아름답게 수놓았다.

꼭 검은 하늘에 큰 별의 그림을 그리듯 아름답게 퍼지는 폭죽의 빛에 디아나는 감탄사를 말하는 것도 잊어버리고 멍하니 하늘만 바라보았다.

살면서 이렇게 아름다운 것은 본 적이 없었다.

황홀경을 보는 듯 입술을 살짝 벌리고 하늘을 바라보던 디아나가 입술을 움직였다.

“너무…… 아름다워…….”

디아나의 작은 목소리가 폭죽이 터지는 사이로 울렸다.

감흥 없는 눈빛으로 하늘을 보던 대공은 디아나의 목소리에 고개를 내렸다.

작은 아이를 바라보는 순간 황보랏빛 불빛이 펑 터지며 보랏빛의 잔재가 디아나의 눈을 비추었다.

그리고 그 순간 디아나와 아리엘의 모습이 너무도 닮아 보여 대공의 금빛 눈동자가 커졌다.

“……아리엘…….”

그도 모르게 아리엘의 이름을 말한 순간 빛이 사라지며 디아나의 눈은 다시 평범한 갈색으로 바뀌었다.

“이제 끝인가 봐요.”

큰 보라색 불꽃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 하늘 위로 아무런 불빛이 치솟지 않았다.

피비의 말에도 하늘에서 쉽게 눈을 떼지 못하던 디아나가 천천히 고개를 내렸다.

“……그런가 봐.”

다 끝났으니 이제 돌아가는 건가.

디아나는 피비와 마주 보다 불꽃놀이가 다 끝났음에도 말이 없는 대공에게 시선을 돌렸다.

대공은 고개를 비스듬히 숙이고 있었다. 한데 무슨 일인지 대공의 얼굴이 심각할 정도로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왜 저러지?’

폭죽이 터지는 시간이 그리 길지도 않았는데 그사이에 차갑게 굳은 대공의 얼굴이 이해되지 않았다.

짧은 시간 동안 디아나는 자신이 무언가를 실수했나 돌이켜 보았지만 그녀는 폭죽을 보느라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대공의 얼음장 같은 얼굴에 디아나는 그를 부르려 했던 마음을 접었다.

입술을 꾹 다물고 혹시라도 대공의 심기를 거스를까 긴장하며 기다리던 그때 대공이 천천히 숙였던 고개를 들었다.

“……불꽃놀이는 다 끝난 것 같군…….”

“……네, 그런 거 같아요.”

어딘지 대공답지 않게 멍한 목소리에 디아나는 조심스럽게 답했다.

대공의 시선이 디아나를 향했다.

대공은 아무런 말을 하지 않고 디아나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

“…….”

‘왜…… 날 저렇게 보는 거지.’

생각을 짐작할 수 없는 짙은 시선에 디아나는 긴장되어 손을 꼭 마주 잡았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한참이나 말없이 디아나의 얼굴을 바라보던 대공의 붉은 입술이 열렸다.

“이만 내려가자꾸나.”

“……네.”

디아나는 의자에서 내려가려 했다. 하지만 그녀의 발이 땅에 닿기도 전에 대공이 또 그녀를 번쩍 안아 들었다.

“아, 저 걸어갈 수 있어요.”

대공의 기분이 좋지 않아 보여 조심스레 말을 꺼냈지만 대공은 디아나를 내려 주지 않았다.

“내가 이게 편하다. 너를 안고 가는 것이 빠르니 불편해도 참거라.”

대공이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말하자 디아나는 더 토를 달지 않고 양순히 답했다.

“……네.”

작은 목소리로 답하는 디아나를 차가운 표정과 달리 조심스럽게 고쳐 안은 그는 무언가 생각에 빠진 얼굴로 언덕의 계단을 빠르게 내려갔다.

계단을 내려오자 폭죽놀이가 끝나서인지 상점 거리에 아까보다 사람이 많아져 있었다.

“저, 이제 걸을게요.”

대공이 안은 채로 걸음을 옮기려 하자 디아나 급히 그에게 말했다.

“많이 불편한가?”

“……네.”

“알았다.”

대공은 디아나를 땅 위로 부드럽게 내려 주었다.

사실 대공의 품에 안겨 있는 것이 불편하진 않았다.

아무도 없는 산속을 올라갈 땐 상관없었지만 사람이 많은 이곳에서 대공의 품에 안겨 있는 것은 기분이 이상했다.

번화가엔 딸을 품에 안고 다니는 아버지들이 많이 보였으니까.

꼭 사이좋은 부녀인 그들의 모습을 어설프게 따라 하는 거 같았다.

그들은 진짜 행복한 가족이겠지만 대공과 디아나는 부녀라고 부르기도 어색했다.

비록 대공이 디아나의 친부이긴 하지만 그들의 사이는 남보다 더 멀었다.

디아나는 지나가는 행복한 아빠와 딸의 모습을 흘긋 보다 시선을 거두었다.

‘아까까진 기분 좋았는데…….’

화목한 가정 같은 건 바란 적도 없기에 부럽지도 않았다.

그저 레아에게서 벗어날 수 있기만 빌었고 언제나 혼자 살아갈 궁리를 했었기 때문이다.

한데 오늘은 유난히 화목한 가족의 모습이 디아나의 눈에 박혔다.

레아를 벗어나 삶이 여유로워졌기 때문일까.

아니면…….

디아나는 생각을 잇는 것을 멈추고 그녀의 손을 꼭 잡고 있는 큰 손을 쳐다보았다.

굳은살이 박여 거칠지만 든든한 보호막 같은 안도감을 주는 따뜻한 손.

또 한 번 심장이 간질거리는 느낌에 디아나는 헛기침을 켈록, 내뱉었다.

“추운 것이냐.”

대공의 목소리가 디아나의 머리 위를 울렸다.

“아, 아니에요. 괜찮아요.”

“옷이 얇은데.”

디아나를 보는 대공의 눈썹이 위로 솟구쳤다. 마음에 들지 않음이 역력한 표정으로 디아나를 보던 그는 갑자기 방향을 틀었다.

목도리와 망토를 파는 가판대 앞에서 멈춘 그는 서글서글한 미소를 짓고 있는 주인에게 입을 열었다.

“이 아이가 입을 만한 망토와 목도리 하나씩 주게.”

“전 괜찮…….”

“내가 안 괜찮다.”

디아나는 몸을 훑는 대공의 싸늘한 눈빛에 입을 다물었다.

“어서 주시게.”

디아나와 대공의 대화에 잠시 망설이는 상점 주인에게 대공이 한 번 더 말했다.

“네, 네.”

주인은 확 밝아진 얼굴로 분홍색 목도리와 약간 붉은 망토를 들고는 디아나에게 다가왔다.

“어머나, 귀엽게 생긴 아가씨네. 몇 살이니? 7살?”

“……아뇨, 10살이에요.”

“10살? 어머 그럼 내 딸이랑 동갑인데, 넌 너무 작구나.”

디아나는 걱정스런 얼굴을 한 주인을 보며 어색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주인은 능숙한 솜씨로 디아나에게 목도리와 망토를 둘러 주었다.

안 춥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목도리와 망토로 몸을 감싸자 온기가 퍼져 기분이 좋아졌다.

“마음에 드나?”

대공이 디아나에게 물었다. 디아나가 답하기 전 상점 주인이 먼저 입을 열었다.

“어머, 이렇게 잘 어울리는 걸요. 예쁜 딸에게 아버지가 너무 무뚝뚝하시다.”

“…….”

주인의 말에 디아나는 크게 당황했다.

아버지와 딸이라니.

물론 피가 섞이긴 했지만 대공은 디아나를 딸로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니 그가 이런 말을 들으면 기분이 나쁠 게 분명했다.

‘화가 많이…… 났으려나.’

디아나는 당혹감으로 떨리는 시선을 천천히 올렸다.

하지만 디아나의 불안감과 달리 대공의 얼굴엔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그저 무표정일 뿐이었다.

“마음에 안 드는 것이냐.”

“……아뇨, 마음에 들어요.”

“그럼 됐다. 이걸로 하겠네. 얼마지?”

“두 개 다 해서 40실버입니다.”

“여기 있네.”

디아나는 값을 치르는 대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여전히 불쾌한 기색은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상점 주인이 우스갯소리로 한 말이니 신경 쓰지 않는 걸까.

생각해 보면 상점 주인에게 화를 내 봤자 대공이 얻을 건 없었다.

거기다 지금 대공은 신분을 감추려 짙은 로브를 두르고 후드까지 깊게 눌러 쓰고 있었으니 괜한 소란을 피우면 신분이 밝혀질 것이다.

그러니 소란을 피울 바엔 무시가 낫겠지.

디아나는 괜히 싱숭생숭해지는 마음에 대공이 불쾌해하지 않는 이유를 스스로 찾으며 납득했다.

“이제 좀 볼만하군.”

대공은 만족스런 눈빛으로 디아나를 훑곤 가판대를 벗어났다.

다시 대공의 손을 잡고 번화가를 걸어가던 디아나는 가판대의 물건들을 구경했다.

처음 보는 신기한 물건들이 많아 디아나는 대공 때문에 복잡해졌던 감정도 잊고 가판대들에 시선을 집중했다.

“신기해.”

“축제라 많이 열린 것도 있지만 한 달에 한 번씩 이렇게 시장이 크게 열리지. 집사에게 말해 놓을 테니 다음번엔 제대로 구경을 나오거라.”

“네, 감사합니다.”

감사 인사를 하던 디아나는 문득 대공의 발걸음이 아까보다 훨씬 느려진 것을 눈치챘다.

그녀를 안고 산으로 향할 때만 하더라도 이 거리를 단숨에 지나갔었는데 지금은 아까보다 훨씬 느린 걸음으로 걷고 있었다.

‘설마 날 생각해서?’

아니라고 부정하기엔 그의 발걸음이 그녀에게 맞춰지고 있는 게 보였다.

심장이 두근거리고 뭔가 이상하게 들뜨는 기분에 디아나는 바닥을 보던 시선을 들었다.

후, 하고 숨을 크게 내쉬었지만 붕 뜨는 기분은 쉽게 가라앉질 않았다.

머리가 어느 정도 자라고 사람들의 눈치를 읽을 수 있었을 적부터 디아나는 대공의 이야기를 들었다.

대공이 자신을 버렸다는 것을 말이다.

한때는 자신을 버린 아버지를 원망한 적도 있었지만 그것도 짧은 순간이었을 뿐, 디아나는 아버지란 존재에 대한 기대감 자체가 없었다.

그랬는데, 대공이 대공성으로 돌아온 뒤로 뭔가 많이 바뀌었다.

대공은 그녀를 싫어했지만 레아의 학대 속에서 구해 주었고, 생활환경도 신경 써 주었다.

레아는 한 번도 신경 쓰지 않은 그녀의 의식주부터 이런 사소한 것들까지.

기대감도 관심도 가지지 않으려 애쓰고 있었는데 오늘은 좀처럼 감정이 마음대로 되질 않는다.

축제에 화목한 가족들이 많아서일까, 꼭 지금 이 순간만큼은 대공이 진짜 아버지처럼 느껴졌다.

‘진짜…… 아버지라니.’

디아나는 고개를 살짝 들어 대공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앞을 보고 있는 그의 수려한 옆얼굴은 여전히 차가웠고 거리감이 들었다.

‘전하는 날 딸로 인정하지 않으면서 왜 도와주는 거예요?’

그에게 진심으로 궁금한 것이 목 끝까지 차올랐다.

왜 버린 딸인 자신을 왜 챙겨 주는 것인지 그에게 묻고 싶었다.

“꼬마 아가씨, 맛있는 사과 절임이에요. 아주 달고 맛있답니다.”

불쑥, 디아나의 앞으로 무언가가 내밀어졌다.

“앗.”

대공을 보며 생각에 빠져 있던 디아나는 깜짝 놀라 걸음을 멈추었다.

그녀의 앞으로 내밀어진 것을 다시 보자 막대기에 꽂힌 사과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붉은 사과 위에 설탕을 녹인 것인지 반들거리는 것이 잔뜩 묻어 있었다.

저번에 레아와 나왔을 때 먹은 절임과 비슷한 것 같았다.

‘맛있겠다.’

붉은 사과에 설탕이 발라져서 그런지 아주 먹음직스러워 보였다.

디아나는 사과에서 시선을 쉽게 떼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 먹을 수는 없을 거 같아 사과에서 시선을 떼려던 그때 피비의 목소리가 불쑥 들려왔다.

“아가씨, 하나 드실래요? 사과 좋아하시잖아요.”

“응? 아, 그게…….”

과일 셔벗도 이젠 사과 셔벗만 먹을 정도로 과일 중에선 사과를 제일 좋아했다.

피비는 당장 사 줄 듯한 얼굴로 디아나를 보고 있었다.

‘먹어도 되나?’

먹고 싶은 마음은 컸지만 지금 먹어도 될지 망설여졌다. 말끝을 흐리며 대공을 흘긋 보자 피비도 디아나를 따라 대공을 힐긋 보았다.

그리고 디아나가 쉽게 답하지 못하는 이유를 알아차렸는지 조금 머쓱한 얼굴을 했다.

피비는 아무래도 디아나처럼 사과에 눈이 팔려 대공과 함께 있다는 걸 잠깐 잊은 듯했다.

디아나가 피비만 볼 수 있게 고개를 살짝 젓자 피비는 한 걸음 원래 서 있던 자리로 물러났다.

“하하, 역시 지금 말고…….”

“사과를 좋아한다고?”

피비가 어색하게 웃던 그때 대공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

“사과를 좋아하냐고 물었다.”

방금까지 조금 풀렸던 대공의 분위기가 다시 사나워졌다.

사과를 좋아하냐고 하면 화를 낼 듯한 얼굴로 묻는 대공에 디아나의 몸이 움찔했다. 하지만 이미 피비가 한 말이 있으니 아니라고 하기도 뭐했다.

“……네, 좋아해요.”

“하아.”

좋아한다고 말하면 화를 낼 것이라 예상했던 것과 달리 대공은 화를 내는 대신 짜증이 담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미간을 깊이 좁히며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하다 곧 입술을 열었다.

“정말 이상하게 겹치는군.”

대공이 무어라 말을 하는 것 같았지만 소리가 작아 디아나는 듣지 못했다.

갑자기 급변한 대공의 분위기에 디아나가 눈치를 살피던 때 사과를 내밀었던 상인이 웃으며 말했다.

“꼬마 아가씨가 사과를 좋아한다는데 하나 사 주시지 그러십니까. 원래 8실버인데 따님이 귀여우니 특별히 5실버만 받겠습니다.”

서슬 퍼런 대공의 눈이 후드에 가려져 있어 미처 보지 못한 상인이 대공을 향해 사과를 내밀었다.

대공의 시선이 설탕이 묻은 붉은 사과를 향하자 디아나는 이번에야말로 뭔가 사달이 날 거 같아 몸을 뻣뻣이 굳혔다.

‘얼른 안 먹는다고 해야겠어.’

대공이 저 사과를 던져 버릴 거 같아 얼른 입을 열려던 순간 대공이 디아나의 손을 놓았다.

그리고 디아나가 미처 입을 열기도 전에 사과를 향해 손을 뻗었다.

“잠…….”

‘잠깐만’이라고 외치려던 디아나는 막대 사과를 받아드는 대공에 멍하니 입을 다물었다.

“5실버라고?”

“네, 네. 싸게 드리겠습니다.”

“여기 받게.”

“네? 이건 10실버인데…….”

“좋은 날이니 운이 좋다고 생각하게.”

대공은 상인이 말한 돈보다 더 많이 준 듯했다.

사과 상인은 놀란 듯 눈이 동그래졌지만 대공은 대수롭지 않은 모습으로 고개를 내려 디아나를 보았다.

“자, 받거라.”

대공이 디아나에게 막대 사과를 내밀었다.

디아나는 막대를 받아들고 당황스런 눈빛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방금까지 사과를 부숴 버릴 것처럼 분위기가 안 좋았던 사람이 맞는 건가.

“좋아한다고 하지 않았나?”

“네, 감사합니다.”

디아나는 손에 든 사과를 바라보았다.

당장 먹고 싶을 만큼 맛있어 보였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쉽게 베어 물기가 그랬다.

‘진짜 먹어도 되는 건가.’

사과를 들고 가만히 있자 머리 위에서 대공의 목소리가 울렸다.

“대공성까지 그리 들고 가려는 건 아니겠지.”

“아, 아니에요.”

디아나는 어서 먹으라는 듯한 그의 말에 사과를 한 입 베어 물었다.

‘아삭’ 하는 소리와 함께 입 안에 달콤함이 가득 퍼졌다.

‘맛있어.’

눈치를 보는 상황이긴 하지만 맛있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절로 입꼬리가 올라간 디아나는 사과를 한 입 더 베어 물었다.

그렇게 순식간에 사과를 다 먹은 디아나는 입술에 묻은 설탕을 핥았다.

그리고 조용한 주변에 고개를 살짝 들자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금안과 시선이 마주쳤다.

“정말 잘 먹는군.”

설마 했지만 진짜로 대공은 디아나가 먹는 걸 쭉 지켜본 거 같았다.

아까 언덕 위에서처럼 대공은 알 수 없는 시선으로 디아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디아나를 보는 금빛 눈동자는 복잡한 감정이 뒤엉켜 보였다.

“다 먹었으니 이제 가도 되겠군. 한데 그건 버리고 가야겠는데.”

“아가씨, 막대기는 제가 버릴게요.”

뒤에 서 있던 피비가 막대기를 가져가고 대공은 잡으라는 듯 디아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몇 번 그와 손을 잡아서일까, 이젠 망설임 없이 대공의 손을 꼭 잡은 디아나는 대공과 함께 축제가 한창인 광장을 벗어났다.

대공가의 마차가 세워진 곳에 도착하자 마차 앞에 서 있는 로운의 모습이 보였다.

“로운.”

“전하.”

로운이 대공에게 고개를 숙였다.

“일은 다 마무리한 것이냐.”

“네.”

“그럼 이만 대공성으로 돌아가지. 로운, 따로 하녀가 탈 마차가 없으니 너의 말에 디아나의 하녀를 태우도록 해라.”

“네, 알겠습니다.”

대공의 말에 피비가 움찔하며 고개를 숙인 로운의 옆얼굴을 바라보는 게 보였다.

로운은 기사님, 그것도 대공가의 기사단장이었으니 그와 말을 함께 타는 것이 피비에겐 상당히 부담스러운 일일 것이다.

피비를 도와주고 싶었지만 디아나가 해 줄 수 있는 게 없었다.

디아나의 앞에 선 마차는 레아가 타고 다니는 평범한 마차가 아닌 화려한 음각 무늬를 금으로 채운 귀족의 마차였으니까.

한껏 당황한 피비를 보던 디아나는 대공의 부름에 시선을 거두었다.

“발판을 밟고 오르거라.”

마부가 놓아준 발판을 밟고 마차에 오른 디아나는 화려한 마차 내부를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둘러보며 의자에 앉았다.

레아와 함께 탔던 마차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앉은 자리가 푹신했다.

“출발해.”

마차 문을 닫은 대공의 명령에 말이 우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출발하는 듯한 마부의 채찍 소리와 말의 울음소리만 들렸을 뿐 마차 안은 조금의 흔들림도 없었다.

밖의 소리가 아니었다면 출발하지 않은 줄 알았을 것이다.

진짜…… 좋다.

그녀의 방 침대보다 더 푹신푹신한 의자와 등받이에 디아나는 자꾸만 몸이 늘어졌다.

하지만 디아나의 맞은편에 앉은 대공이 있었기에 디아나는 허리에 힘을 주고 바른 자세를 유지하려 애썼다.

분명 애는 쓰고 있는데 자꾸만 눈꺼풀이 무거워지고 몸에 나른함이 퍼졌다.

‘이러면 안 되는데…….’

디아나는 등받이에 머리만 기대도 그대로 잠들 거 같은 느낌에 눈에 힘을 줬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디아나의 고개가 점점 아래로 내려갔다.

자신도 모르게 꾸벅 존 디아나는 번쩍 고개를 들었다.

봤을까, 아냐, 못 봤을 거야.

대공은 마차에 앉은 순간부터 마차 의자 한편에 놓여 있던 서류를 보고 있었다.

서류에서 시선을 한 번도 들지 않았으니 디아나가 조는 것도 보지 못했을 것이다.

안심하며 밀려드는 잠을 막으려 애쓰던 그때, 대공의 낮은 음성이 울렸다.

“잠이 오면 자거라, 도착하면 깨워줄 테니.”

“아니에요, 잠 안 와요.”

디아나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강하게 저었다. 그러자 서류로 시선을 내리고 있던 대공이 고개를 들었다.

대공은 눈을 부릅뜨고 있는 디아나를 보며 눈썹을 치켜세웠다.

“그냥 자거라. 자지 않으려 몸을 움직이는 것이 더 신경에 거슬리니.”

“……조심하겠습니다.”

디아나의 대답이 만족스럽지 않은 듯 미간을 좁히던 그는 이내 쯧, 혀를 차며 다시 서류로 시선을 내렸다.

그렇게 마차 안엔 다시 고요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간간이 대공이 종이를 넘기는 소리만이 울렸고 사락거리는 작은 소리가 디아나에겐 마치 자장가처럼 들려왔다.

‘자면…… 안 돼…….’

하지만 그녀의 의지와 달리 눈꺼풀은 점점 무거워져 마침내 완전히 눈이 감겼다.

정신을 차려야 한다고 생각하던 그 순간을 마지막으로 디아나는 깊은 수마에 빠져들었다.

툭.

잠이 든 디아나의 몸이 앞으로 쏠렸다. 디아나의 몸이 완전히 기울기 전, 대공의 손이 디아나의 몸을 받쳤다.

서류를 한쪽으로 치운 대공은 디아나의 몸을 안아 들었다.

깊이도 잠들었는지 아까 한껏 긴장하고 있던 모습과 달리 대공의 손길에도 디아나는 눈을 뜨지 않았다.

고요히 눈을 감고 있는 디아나를 보던 대공은 맞은편 의자에 아이를 내려놓으려다 팔을 멈칫했다.

의자엔 디아나의 머리를 받칠 만한 것도, 디아나의 몸을 덮어 줄 만한 담요도 없었다.

“흠.”

아무것도 없는 의자에 그저 디아나를 덜렁 눕혀 놓자니 그건 썩 마음에 들지가 않았다.

잠든 디아나의 얼굴을 한번 보고 의자를 한번 본 그는 이윽고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그는 자신이 앉은 쪽에 디아나를 데려왔다.

제 무릎 위에 디아나의 머리를 조심스레 내려놓고 벗어 놓은 로브를 디아나의 몸에 덮어 주었다.

그리고 그는 잠이 든 디아나의 얼굴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새근새근 고른 숨을 내쉬는 디아나의 얼굴 위로 아리엘의 얼굴이 겹쳤다.

아리엘을 닮은 디아나를 보던 대공은 짙은 한숨과 함께 디아나에게서 시선을 거두었다.

아리엘과 디아나를 겹쳐 보던 잔상을 지우기라도 하듯 눈을 꼭 감은 그는 머리를 뒤로 젖혔다.

하지만 눈을 감자 아까 보랏빛 폭죽이 터지던 그 순간이 더욱 선명히 떠올랐다.

보랏빛이 디아나에게 스민 순간 대공은 오래전 보아 흐릿했던 아리엘의 어린 시절 초상화가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디아나가 아리엘을 닮았기 때문에.

대공은 미간을 좁히며 눈을 떴다.

자꾸 이런 생각을 하는 자신이 싫으면서도 닮았다는 걸 부정할 수 없는 사실 때문에 더 짜증 났다.

“대체 왜 자꾸 겹쳐 보이는 것인지…….”

레아의 딸인 디아나가 아리엘을 닮았다니, 정말 이게 무슨 농간이란 말인가.

레아는 아리엘과 조금도 비슷하지 않았다.

한데 대체 왜, 레아의 딸인 디아나는 아리엘을 닮은 것인가.

대공은 시선을 내려 다시 디아나를 바라보았다.

자신의 착각이길 바라며 디아나의 눈코입을 매섭게 훑었지만 디아나의 이목구비엔 아리엘의 분위기가 서려 있었다.

‘거기다 식성까지 비슷했어.’

디아나는 아리엘이 가장 좋아했던 과일인 사과를 좋아했었다.

혹 거짓말인가 싶어 사과를 사 주어 봤건만 디아나는 대공의 존재마저 잊은 듯 눈앞에서 사과 한 개를 맛있게 먹었었다.

사과를 먹는 그 모습마저 아리엘과 닮아 대공의 머릿속이 심각하게 혼란스러워졌다.

레아의 딸인 디아나가 꼭 아리엘의 딸 같았으니까.

“미쳤구나.”

대공은 생각과 동시에 조소를 머금었다.

미쳐도 단단히 미친 것이다.

아무리 닮았다지만 어떻게 레아의 딸이 아리엘의 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수 있단 말인가.

애당초 레아의 딸이 아리엘의 딸이란 게 말이 안 되지 않는가.

디아나가 아리엘의 딸이면 세이아는 누구란 말인가.

“선을 넘었군.”

대공은 머릿속을 어지럽히는 모든 생각을 접었다.

닮았다 한들 그의 딸이 아니란 것은 변함없는 사실일 테니까.

신의 지독한 장난이라 여기며 그는 무거운 숨을 삼켰다.

대공이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꾹 누른 그때, 잠든 디아나가 작은 소리를 냈다.

“음…….”

그 작은 신음에 대공은 무의식적으로 모든 행동을 멈추었다.

작은 뒤척임이었는지 디아나는 곧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고 조용해졌다.

아이가 깰까 순간적으로 몸을 굳혔던 대공은 스스로가 어이없어 피식, 자조적인 웃음을 흘렸다.

“이게 뭐 하는 짓인지…….”

대공은 좋은 꿈을 꾸는지 옅은 웃음을 짓는 디아나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그저 동정이라고, 아리엘의 말을 따르기 위해 어른들의 싸움에 아이를 끼워 넣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해 왔지만 사실 부정할 수 없었다.

디아나를 많이 신경 쓰고 있다는 것을.

“하아.”

대공은 답답한 마음에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왜, 하필 아리엘을 닮아서는…….”

그의 낮은 물음에도 디아나는 답이 없었다.

그저 아무것도 모른다는 얼굴로 옅은 미소를 그리며 눈을 감고 있을 뿐.

똑똑-.

“전하, 대공성에 도착했습니다.”

로운의 목소리였다.

“알았다…….”

알겠다고 대답한 대공은 잠시 아무것도 하지 않고 디아나를 바라보았다.

깨워야 하는데 디아나가 너무 깊이, 잘 자고 있었다.

미간을 좁히며 잠시 고민하던 대공은 곧 디아나의 이름을 불렀다.

“디아나, 일어나거라.”

하지만 말과 달리 대공의 목소리는 한없이 작았다. 속삭이는 듯한 그의 목소리가 깊이 잠든 디아나에게 닿았을 리 없었다.

한 번 더 불렀지만 미동도 없는 디아나를 보며 쯧, 혀를 찼다.

“어쩔 수 없겠군.”

그는 디아나의 머리 뒤로 손을 넣고 작은 아이의 몸을 조심스럽게 들어 올렸다.

“으음…….”

디아나의 이맛살이 찡그려지며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러자 대공은 저도 모르게 세이아에게 했듯 디아나의 등을 부드럽게 두드려 주었다.

톡-톡.

갓난아이를 재우듯 아이의 등을 몇 번 두드리자 곧 디아나의 숨결이 규칙적으로 바뀌었다.

“전하?”

다시 한번 밖에서 문을 두드렸다. 아마 그가 마차에서 내리지 않고 있어 그런 듯했다.

“내릴 것이다, 문을 열어라.”

“네.”

대공의 말에 마부가 문에 다가가려 했지만 로운이 제지하며 자신이 마차 문을 열었다.

당연히 디아나가 먼저 나올 것이라 생각하고 손을 내민 로운은 대공의 모습에 손을 멈칫했다.

그리고 대공의 품에 안겨 있는 디아나의 모습에 눈을 크게 떴다.

“…….”

디아나를 아주 조심스럽게 로브로 감싸 안고 있는 대공의 모습에 로운은 순간 아무런 말을 하지 못했다.

아니, 정확히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대공비의 말을 따라 어른들의 싸움에 죄 없는 아이를 희생시키지 않겠단 대공의 의지는 이해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이 모습도 그 범주 안에 들어가는 건지, 로운은 하고 싶은 말들을 꾹 참았다.

“다들 계속 그렇게 서 있기만 할 건가?”

대공은 망부석처럼 굳어 있는 로운과 피비를 싸늘한 눈빛으로 훑었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두 사람 중 피비가 먼저 입을 열었다.

“전하, 아가씨는 제가 안고 가겠습니다.”

“……아니, 됐다. 지금 넘기면 깰 것이다.”

피비는 당연히 대공이 디아나를 넘겨줄 것이라 생각해 손을 뻗었다, 당황한 얼굴로 팔을 내렸다.

그녀는 당혹스런 얼굴로 대공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곧 서릿발 같은 황금안에 시선을 낮추었다.

“디아나의 방으로 먼저 가지.”

대공은 당황으로 굳어 있는 두 사람을 두고 먼저 저택 안으로 들어섰다.

꽤 늦은 저녁 시간이라 저택 안엔 사람들이 별로 없었지만 집사는 대공을 기다리고 있었다.

“전하, 잘 다녀…… 오셨습니까.”

집사는 유려하게 예를 갖추다 대공의 품에 잠들어 있는 디아나를 보고 당황해 살짝 말이 느려졌다.

집사의 당혹스런 시선이 디아나를 향해 있었다.

“디아나에 대한 이야기는 나중에 하지, 집사. 몸이 피곤하니 목욕 준비를 해 놓거라.”

“네, 알겠습니다.”

대공은 집사를 지나 디아나의 방으로 향했다. 계단을 오르고 복도를 걷는 와중에도 디아나는 일어나지 않았다.

대공은 곧장 침대로 걸어가 디아나를 조심스럽게 침대 위로 눕혀 주었다.

“나머지는 네가 정리하거라.”

“네, 전하.”

이불을 덮어 줄까 했지만 거기까지 하는 것은 도를 넘은 것 같았다.

대공은 디아나를 깨웠지만 일어나지 않아 어쩔 수 없이 아이를 안고 온 것이니 말이다.

스스로 그리 납득하고 있는 것이 우스웠지만 지금 그에겐 이런 이성의 선이 필요했다.

“전하, 로브를 지금 빼 드릴까요?”

“아니, 됐다. 내일 가져오거라.”

“네.”

피비가 디아나의 잠자리를 정리해 주는 것을 보던 대공은 몸을 돌렸다.

그만 나가려던 대공은 걸음을 멈칫하며 방을 둘러보았다.

저번에 왔을 때만 해도 삭막하기만 했던 아이의 방이 이젠 제법 10살 난 아이의 방처럼 포근해 보였다.

“그나마 좀 낫군.”

인형과 어린이용 가구들에서 시선을 거둔 대공은 이내 디아나의 방을 나갔다.

대공은 자신의 방문 앞에 서 있던 로운과 함께 방으로 들어갔다.

“냐~.”

문을 열자 기다렸다는 듯 유네스가 대공의 품으로 뛰어들었다.

“유네스, 잘 있었느냐.”

유네스의 털을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자, 유네스가 답을 하듯 갸르릉 소리를 냈다.

“전하, 욕조에 물을 받아 놓았습니다.”

욕실에서 집사가 나와 대공에게 허리를 숙였다.

원래라면 하녀들이 해야 하는 일이었지만 유네스가 그의 방에서 지내게 된 이후로 집사가 대공에 관한 모든 일을 처리하고 있었다.

유네스가 그나마 오랫동안 저택에서 일한 집사의 얼굴을 알아 공격성을 강하게 드러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전하, 한데 아가씨께서 몰래 나가신 겁니까.”

대공은 집사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래, 축제를 보고 싶어 몰래 나왔다고 하더군. 용서하기로 했으니 모른 척하거라.”

“하녀는 어찌할까요?”

“하녀?”

“네, 아가씨를 제대로 보필하지 못하였습니다. 대공성에서 내보낼까요, 아님 아가씨를 더 이상 모시지 못하게 하는 선에서 마무리할까요.”

‘그 하녀를 내보낸다라.’

대공은 유난히 하녀와 사이가 좋아 보였던 디아나의 모습이 떠올랐다.

늘 사람들의 눈치를 보는 아이의 모습을.

안 그래도 남의 눈치를 보는데 그나마 정을 붙인 하녀를 데려간다면…… 더욱 위축되겠지.

지금도 충분히 소심한데 더 위축된 모습을 보고 싶진 않았다.

“됐다, 하녀도 그대로 두거라.”

“네? ……알겠습니다, 전하.”

예상치 못한 대답에 잠시 당황하던 집사는 곧 고개를 조아렸다.

“그럼 전 물러가 보겠습니다, 전하.”

집사가 방을 나가고 대공은 셔츠 단추를 두어 개 풀며 유네스를 바닥으로 내려놓았다.

세이아를 공격했던 그날과 달리 많이 안정된 유네스는 철장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방 안을 유유히 걸어 다녔다.

“유네스의 상태가 많이 안정된 거 같습니다, 전하.”

“많이 좋아졌지. 하지만 전문가에게 치료를 받긴 해야 한다. 산맥의 눈이 모두 녹으면 수도에서 치료사가 올 수 있으니 그때까지 별일 없길 바랄 뿐이야.”

대공은 소파에 앉으며 로운에게 물었다.

“영지의 상황은 어떻지?”

일전 에드윈을 통해 영지로 들어온 질 나쁜 용병들에 대해 알아보라 했었지만 디아나의 일이 겹쳐 그들의 실태를 완벽히 알아내지 못했었다.

어차피 겨울의 눈이 다 녹기 전까진 영지 밖으로 완전 추방을 할 수도 없기에 치안만 강화하고 더 두고 보려 했으나 생각보다 사고를 많이 쳐 오늘 대공과 로운이 직접 나간 것이었다.

“여관 하나를 중심으로 용병들이 모여들고 있었습니다.”

“여관을 중심으로? 그럼 그 여관이 불법 거래의 공급처인가.”

“아무래도 그런 듯합니다. 여관 주인이 북방의 사람이 아니라고 하더군요. 약 6년 전에 영지로 들어와 상인들에게 돈놀이를 하며 급격히 사업을 성장시켰다고 합니다.”

“돈놀이 자체가 북방에선 불법이거늘, 시작부터 아주 제멋대로였군.”

“경비대 윗선에도 돈을 먹여 걸리지 않은 듯합니다.”

로운의 말에 대공의 황금안이 포식자의 눈빛으로 번뜩였다.

“눈이 녹고 날이 풀리면 제대로 정리를 시작해야겠구나.”

전장에서 적군을 치기 전에 나오는 대공의 눈빛을 읽은 로운은 한차례의 피바람을 예상하며 고개를 숙였다.

“네, 준비하겠습니다.”

“그리고 로운.”

“네.”

“디아나 말이다, 아리엘과 닮은 것 같지 않으냐?”

“……네? 대공비님을 말입니까?”

“그래. 나만 그리 느끼는 것인지 아님 너도 그리 느끼는지 알고 싶구나.”

대공의 말에 로운은 디아나의 얼굴을 머릿속으로 떠올려 보았다.

그리고 그가 존경하는 대공비님의 모습도 함께 말이다.

모든 감정을 최대한 배제하고 두 사람의 모습을 비교하던 로운은 미간을 살짝 찡그렸다.

로운은 그를 바라보고 있는 대공에게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닮은 듯합니다.”

한 번도 두 사람을 겹쳐 생각해 본 적이 없어 몰랐으나 가만히 두 사람의 모습을 겹치니 묘하게 닮은 듯한 느낌이 드는 것을 부정할 수 없었다.

“역시, 나의 착각은 아니었나 보군.”

대공은 고민이 깊은 얼굴로 소파 손잡이를 톡톡 두드리는 것을 보던 로운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저 우연 아니겠습니까.”

우연이라 말하면서도 로운은 마음 어딘가가 불편했으나 무시했다.

우연이 아니고서야 디아나와 대공비가 닮을 이유 같은 건 없었으니까.

대공의 손이 멈추었다.

대공과 로운의 시선이 마주쳤다.

대공은 로운의 눈빛에서 불안을 읽었다.

말도 안 되는 가정으로 그가 어리석은 판단을 내릴까 불안해하는 눈빛.

그가 전장에서 한참 미친놈처럼 돌아다닐 때 보이던 눈빛과 같다.

그만큼 지금 그가 이성적이지 않단 거겠지.

스스로도 아니라 생각하면서도 왜 계속 미련을 두는 건지.

로운이 불안해하는 건 당연했다.

대공은 냉정한 표정을 되찾으며 답했다.

“그래, 그렇겠지. 그저 내 눈이 이상한 건지 아닌지 확인하고 싶었을 뿐이다. 그만 물러가 보거라.”

“……네, 알겠습니다, 전하.”

달칵, 문이 닫히는 소리가 울리고 냉철했던 그의 얼굴이 다시 복잡함으로 물들었다.

* * *

오전의 햇살이 가장 밝은 시각.

대공가 기사단 연무장엔 우렁찬 기합 소리가 울리고 있었다.

“합!”

검술 연습이 한창인 기사들은 땀을 뻘뻘 흘리며 목검을 대열에 맞추어 흔들었다.

“모두 그만.”

단장의 목소리가 연무장을 울리자 기사들의 움직임이 일제히 멈추었다.

로운은 한껏 달아오른 기사들의 얼굴을 둘러보며 말했다.

“합동 연습은 여기까지 하고 지금부터 대련을 시작하겠다.”

“네!”

우렁찬 목소리와 함께 기사들은 빠르게 연무장의 중앙을 비웠다.

“오늘 대련 순서는…….”

대련 순서를 말하려던 로운은 연무장에 들어서는 팔랑이는 연분홍 드레스를 보고 말을 멈추었다.

로운은 단상에서 급히 내려가 세이아에게 뛰어갔다.

“대공녀님.”

로운이 예를 갖추자 그의 뒤로 기사들이 일제히 한쪽 무릎을 굽히며 세이아를 향해 몸을 낮추었다.

세이아는 입꼬리를 예쁘게 말아 올리며 로운을 불렀다.

“로운.”

“대공녀님, 이 시간에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로운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모르는 척 물었지만 대공녀가 왜 연무장에 온 것인지 알고 있었다.

최근 들어 대공녀는 연무장에 출근 도장을 찍다시피 했으니까.

그리고 그 이유는 하나였다.

“에드윈을 보러 왔어.”

“아…… 에드윈을 보러 오셨군요.”

오늘도.

로운은 입 안으로 마지막 말을 삼키며 세이아를 향해 곤란하다는 듯 턱을 긁었다.

“어…… 저, 대공녀님, 오늘은 저희가 자유 수련이 아니라 대련이 있어 지금 에드윈을 만나실 수는 없습니다.”

“그래?”

세이아의 옅은 금빛 눈동자가 강한 아쉬움을 머금었다. 하지만 곧 세이아는 좋은 생각이 떠올랐는지 다시 얼굴이 밝아졌다.

“그럼 나 대련하는 거 구경할래.”

“네?”

방으로 돌아갈 것이라 예상했던 그의 예상과는 상당히 빗나가는 세이아의 대답에 로운은 당황했다.

“대공녀님께서 보시기엔 험할 것입니다. 대련이라 하여도 목검을 쓴다 뿐이지 실전 싸움과 거의 다를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아냐, 난 괜찮아. 기사들의 대련…… 한번 보고 싶었어. 내가 보면 많이 곤란한 거야, 로운?”

세이아는 눈꼬리를 내리며 시무룩한 낯빛을 했다. 그 모습에 로운의 마음이 약해졌다.

‘대련의 강도를 낮추면 되겠지.’

로운은 세이아에게 다시금 미소를 지었다.

“아닙니다. 대공녀님께서 대련을 봐 주신다면 기사들에게 한없이 영광스러운 일일 것입니다.”

“영광이라니, 내가 민폐가 아니라면 다행이야.”

“대공녀님, 잠시만 이곳에서 기다려 주십시오. 대공녀님이 앉을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하도록 하겠습니다.”

“응.”

로운은 다른 기사들에게 시켜 의자와 그늘막을 준비하라 일렀다.

로운의 명령을 받은 기사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는 동안 로운은 에드윈에게 다가갔다.

“에드윈.”

“……네, 단장님.”

“대공녀님께선 널 보러 오셨다.”

“……네.”

에드윈은 떨떠름한 얼굴을 숨기며 답했다.

대공녀를 보았을 때부터 예상했다.

자신을 보러 온 것이라고.

도서관에서 우연히 만났던 그날 이후로 대공녀는 그에게 많은 관심을 보였다.

몇 번 자신의 방으로 에드윈을 초대하더니 이젠 연무장으로 직접 행차까지 하고 있었다.

에드윈은 처음엔 쉽게 사그라들 짧은 관심이라 생각했으나 그의 생각보다 길어지는 대공녀의 관심에 난감함을 느끼고 있었다.

에드윈의 얼굴에서 난감함을 읽은 로운이 에드윈의 어깨를 잡았다.

“에드윈, 대공녀님이시다. 대공녀님의 관심은 곧 대공 전하의 관심이시니 좋게 생각하거라. 그리고 이대로라면 네가 대공녀님의 전속 호위 기사로 임명될 것이다.”

로운은 자랑스럽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대공녀의 호위 기사가 된다는 말은 대공가의 하나뿐인 후계자의 호위 기사가 된다는 것이다.

후계자의 호위 기사는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후계자의 호위 기사는 후계자의 최측근이었고 곧 가문의 기사단장이 될 수 있는 가장 가능성 높은 자리였다.

그러니 대공녀의 호위 기사가 된다는 것은 기사로서 명예롭고 기쁜 일이었다.

어쩌면 무투 대회에 나가게 된 것보다 더 말이다.

그러나 에드윈의 얼굴은 그리 밝지 않았다.

“제가…… 요?”

“그래, 대공녀님이 너에게 이렇게 관심이 많은데 당연히 널 추천하시겠지. 사실 대공녀님의 뜻이 아니더라도 네가 내정되어 있긴 할 거다.”

“……네.”

에드윈의 짧은 대답에 로운의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

“그 미적지근한 반응은 뭐지? 대공녀님의 호위 기사가 된다는 뜻이 무엇인지 모르는 것은 아니겠지?”

“아, 알고 있습니다. 제가 그리……된다면 너무도 영광스러…… 울 것입니다.”

에드윈은 로운을 바라보며 올라가지 않는 입꼬리를 억지로 말아 올렸다.

“그래, 영광스럽고 너의 앞길이 보장된 일이지. 오늘 대련에 열심히 임하거라. 너의 미래의 주인께서 보는 첫 대련이니 말이야.”

로운은 만족스런 얼굴로 에드윈의 어깨를 두어 번 두드리곤 몸을 돌렸다.

로운이 멀어지자 미소를 짓고 있던 에드윈은 입꼬리를 내리며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대공녀님의 호위 기사라…….”

분명 기뻐야 하는 일인데 어쩐지 전혀 기쁘지 않았다.

에드윈은 그늘막 아래에 자리를 잡고 있는 세이아를 바라보았다. 기사들에게 친절한 미소를 짓고 있는 세이아는 완벽한 대공녀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에드윈은 어쩐지 대공녀를 알면 알수록 정이 가질 않았다.

대공녀님은 자신이 가장 존경하고 목숨을 바치겠다고 맹세한 대공 전하의 딸이고 앞으로의 대공가를 책임질 후계자였다.

그 모든 사실을 정확히 인지하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드윈은 대공녀에게 충성심은커녕 정도 들지 않았다.

“이러면 안 돼.”

에드윈은 자꾸만 대공녀를 향해 드는 불편함을 억눌렀다.

대공녀에게 좋은 모습을 보이기 위해 마음을 다잡으며 목검을 잡았지만 에드윈은 아까 호위 기사란 단어를 들었을 때부터 대공녀가 아닌 다른 사람을 떠올렸다.

‘디아나 아가씨에게는 호위 기사가 배정되지 않겠지.’

에드윈은 디아나를 대공 전하의 자식으로 대하고 있지만 가계도에도 오르지 못한 귀족가의 사생아가 어떤 취급을 받는지는 그 역시 잘 알고 있으니까.

‘대공 전하는 디아나 아가씨를 끝까지 인정해 주지 않으실까?’

감히 한낱 기사 따위가 품어서는 안 되는 생각이었지만 에드윈은 날이 갈수록 그런 생각을 했다.

대공이 언젠간 디아나를 인정해 주지 않을까 하는…… 생각.

디아나가 대공가에 입적된다면 그가 디아나의 호위 기사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로운의 말을 들었을 때 에드윈은 잠깐이지만 자신의 주인을 세이아가 아닌 디아나로 그려 보았었다.

“에드윈, 준비되었으면 나오거라.”

하지만 그것은 이루어질 수 없는 상상뿐이라는 듯 로운의 목소리가 에드윈의 상념을 깨뜨렸다.

복잡한 생각은 잠시 잊고 목검을 고쳐 잡은 에드윈은 준비가 끝난 대련장으로 한 발 내디뎠다.

“에드윈, 검은 언제부터 배운 거야?”

대련 시간이 모두 끝나고 찾아온 기사단의 휴식 시간.

세이아는 대련이 전부 끝나자마자 에드윈에게 쪼르르 다가가 말을 걸었다.

몇 번째 질문인지도 모르겠는 속사포 질문에 답하고 있던 에드윈은 자신을 보며 눈을 반짝이고 있는 세이아와 시선이 마주쳤다.

에드윈은 관심과 호감이 가득한 세이아의 눈빛이 살짝 부담스러워 시선을 내리며 입을 열었다.

“10살 때부터 검을 정식으로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우와, 10살이면 지금 내 나이인 거잖아. 정말 어릴 때부터 검을 배웠구나.”

세이아가 두 손을 잡으며 감탄하자 그녀의 옆에 있던 로운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영애들과 달리 영식들은 보통 10살 때부터 검을 배우기 시작합니다. 검술은 귀족 남성의 기본 소양이기 때문에 대부분 빨리 배우죠.”

로운의 친절한 설명에 대충 고개를 끄덕인 세이아는 에드윈에게 다시 고개를 돌렸다.

“아, 그렇구나. 그럼 에드윈, 에드윈은 언제부터 기사가 되겠다고 결심한 거야?”

“기사가 되겠다고 결심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습니다. 우연히 국경 지역에서 대공 전하를 만나게 되어…… 그때부터 전하의 밑에서 기사로 일하게 되었습니다.”

“그랬구나. 뭔가 대단한 사연이 있는 거 같아.”

“……그리 대단할 것은 없는 사연입니다, 대공녀님.”

에드윈은 과거의 장면을 스치듯 회상하다 느리게 답했다.

세이아가 또 작은 입을 열어 질문을 하려던 그때, 로운이 입을 열었다.

“한데 대공녀님, 이제 곧 제클린 공이 오실 시간이 아닌가요?”

제클린 공은 역사학자로 세이아의 수업을 봐주고 있었다.

로운의 말에 에드윈에게 입을 열려던 세이아가 멈칫하며 고개를 돌렸다.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나…….”

“네, 대공녀님. 지금 가셔야 할 시간입니다.”

아까부터 초조한 얼굴로 회중시계를 보고 있던 마리가 황급히 대답했다.

다른 것은 몰라도 수업을 빠지는 것은 아버지가 싫어했기에 세이아는 그만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음…… 아쉽지만 오늘은 이만 가야겠네.”

세이아는 정말 아쉬움이 가득한 얼굴로 그만 자리에서 일어났다.

“조심히 돌아가십시오, 대공녀님.”

로운과 에드윈이 몸을 낮추자 마리의 손을 잡던 세이아가 다시 에드윈을 향해 몸을 돌렸다.

“에드윈, 나 내일 또 올 테니, 내일은 아버지를 어떻게 만나게 됐는지 얘기해 줘.”

“……네, 알겠습니다.”

한 박자 늦게 답하는 에드윈을 보며 환한 미소를 지은 세이아는 이윽고 마리의 손을 잡고 연무장을 나갔다.

대공녀가 사라지자 에드윈은 시간을 확인하곤 급히 몸을 일으켰다.

‘시간이 늦었어. 아가씨께서 기다리시고 계실 텐데.’

“에드윈?”

벌떡 일어나는 그를 왜 그러냐는 듯 로운이 불렀다.

“단장님, 전 잠시 볼일이 있어 실례하겠습니다.”

“무슨…… 일, 아니, 뭐가 저렇게 급해.”

로운은 순식간에 모습을 감춘 에드윈의 뒷모습을 어이없이 보다 이내 자신의 집무실로 걸음을 옮겼다.

연무장을 나온 세이아는 뾰로통한 얼굴로 저택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마리.”

“네?”

“에드윈 말이야, 내가 관심을 가져 줘도 딱히 기뻐하는 기색이 보이지 않지?”

“아…….”

세이아의 뒤를 졸래졸래 따라 걷고 있던 마리는 난감한 질문에 어색한 얼굴을 했다.

“그게…… 원래 좀 담담한 성격이신 게 아닐까요?”

“아냐, 로운이나 다른 기사들은 내가 말만 걸어도 다들 기쁜 듯 미소를 짓는데 에드윈은 좀 이상해. 가끔은 나를 귀찮아하는 듯한 느낌까지 받는다니까?”

세이아는 말을 하다 갑자기 화가 오르는지 인상을 찌푸리며 걸음을 멈췄다.

자신은 이 넓은 북부의 주인인 대공의 하나뿐인 딸이다.

대공성의 사람들은 모두 그녀를 우러러 봤건만 에드윈은 이상하게 그녀에게 호의적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적대적인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로운이나 다른 대공성의 사용인들과는 달랐다.

묘하게 그녀를 향한 눈빛에 감정이 없었다.

“어떻게 그러지? 난 아버지의 하나뿐인 딸인데. 안 그래?”

불만이 가득한 얼굴로 마리에게 묻자 마리는 황급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러게요, 모든 기사님들은 대공녀님을 존경하고 경외해야 하는 게 맞는데 말이죠.”

“맞아.”

세이아는 마리의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새초롬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대공녀님, 한데 지금 시간이 얼마 안 남아서요. 일단 수업을 가시는 게 어떨까요?”

마리는 기분이 조금 풀린 듯한 세이아에게 조심스럽게 말했다.

“하…… 오늘 수업하기 정말 싫은데, 선생들은 어떻게 하루도 아프지 않는 거야.”

세이아는 투덜거리며 다시 걸음을 내디뎠다. 저택에 들어서자 집사가 기다렸다는 듯 세이아에게 다가왔다.

“대공녀님, 오늘도 연무장에 다녀오셨습니까.”

“응, 선생님이 벌써 도착하신 거야?”

“아닙니다.”

“그럼 왜? 무슨 일 있어?”

“아, 제클린 공이 오늘 갑자기 일이 생기셔서 수업을 오지 못한다는 전갈을 보내셨습니다.”

“수업을 못한다고?”

순간 반색하며 소리를 질렀던 세이아는 사용인들의 시선에 큼, 목을 가다듬으며 아쉬운 듯한 표정을 지었다.

“어떡해, 아쉽게 됐네. 난 혹시라도 수업 시간 늦었을까 빨리 온 것이었는데, 너무 아쉽다.”

전혀 아쉽지 않았지만 세이아는 정말 아쉽다는 듯 짧은 한숨까지 푹 내쉬었다.

그리고 걱정스런 눈빛으로 다시 집사에게 물었다.

“한데 제클린 공께 무슨 안 좋은 일이 생긴 건 아니지?”

“네, 아닙니다. 단순한 집안일이라 하셨습니다. 다음 수업부턴 절대 이런 일이 없을 것이라고 전해 달라고 하셨습니다.”

“아…….”

절대 없다니.

세이아는 올라가지 않는 입꼬리를 억지로 올렸다.

“그래, 알았어, 집사. 그럼 난……산책을 좀 해야겠어.”

“네, 조심히 다녀오십시오, 대공녀님.”

집사의 인사를 받으며 세이아는 다시 저택을 나왔다. 정원을 향해 걸어가던 세이아는 돌연 눈을 반짝이며 걸음을 멈추었다.

“에드윈에게 갈까?”

“또요?”

마리는 순간 진심이 툭 튀어나왔다. 세이아의 싸늘한 눈초리에 마리는 어색한 미소를 그리며 말을 바꾸었다.

“또 연무장에 가시면 대공녀님께서 피곤하실까 봐 걱정이 돼서요.”

“흠, 안 피곤해. 아까 못 들은 에드윈과 아버지의 이야기도 듣고 싶고, 그리고 연무장에서 기사들과 노는 게 재밌어.”

처음엔 에드윈에게 관심이 생겨 연무장을 줄기차게 드나든 것이 맞지만 이젠 연무장에 가는 것 자체에 재미를 느끼고 있었다.

기사들의 연습을 구경하고 또 기사들의 관심을 잔뜩 받는 것이 꽤나 즐거웠기 때문에.

“연무장으로…… 어?”

세이아는 연무장으로 가자고 마리에게 말하려다 에드윈을 발견했다.

“어딜 저렇게 급하게 가는 거지?”

다급하게 어디론가 향하고 있는 에드윈을 보며 세이아의 눈초리가 가늘어졌다.

“흠, 저쪽에 뭐가 있더라…….”

“저쪽 방향은 저택 외관이라…… 기사님이 갈 만한 곳은 도서관밖에 없어요.”

“아, 에드윈을 처음 만났던 그 도서관.”

“네, 대공녀님.”

“근데 도서관을 왜 저리 급하게 가지?”

도서관에 뭔가 일이 있는 건가.

이상하다고 생각하던 세이아는 곧 뭔가 결심한 얼굴로 마리를 불렀다.

“마리.”

“네?”

“에드윈을 몰래 따라가 보자.”

“몰래요?”

“응.”

세이아는 당황스런 마리의 얼굴을 무시하며 에드윈이 사라진 곳으로 발걸음을 내디뎠다.

* * *

창에서 햇살이 따스하게 들어오는 시간, 디아나는 피비와 함께 대공가의 도서관으로 향하고 있었다.

피비가 에드윈과의 수업을 알게 된 뒤론 쭉 이렇게 같이 다니고 있었다.

디아나가 에드윈과 수업할 동안 다른 사람이 오지 않나 피비가 망도 봐줄 겸 말이다.

“날씨가 정말 많이 풀린 거 같아.”

디아나가 몸을 따뜻하게 해 주는 햇살에 하늘을 올려다보며 말하자 피비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제 정말 봄이 온다는 게 실감이 나네요. 그때 축제 이후로 저녁에도 차가운 바람이 많이 잦아들었어요.”

대공성을 몰래 나갔던, 그날 밤의 축제.

잊지 못할 기억이 된 그날 밤이 지난 지도 벌써 일주일이 지났다.

대공은 그날 밤의 일을 정말로 묻어 주었다.

디아나에게도 피비에게도 별다른 처벌을 내리지 않아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평화로운 일상이 반복되고 있었다.

이 평화로움에 디아나는 가끔 축제 날의 밤이 겨울 끝의 꿈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했었다.

그날 밤 대공이 디아나를 대하던 모습들은 꿈이라고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만큼 달랐으니까.

순간 그녀의 손을 꼭 잡아 주던 대공의 따뜻한 손이 떠올랐다.

그리고 왠지 간질거리는 가슴께에 큼, 작은 헛기침을 내뱉었다.

“그러게, 이제 정원에도 봄꽃들이 많이 피었겠어.”

“네, 안 그래도 슬슬 봄꽃의 봉오리가 맺히기 시작했더라고요.”

“그래? 다음에 피면 보러 가야겠다.”

“아가씨, 대공가의 봄꽃도 예쁘지만 대공성 밖의 프렐리야 언덕이라고 있어요, 나중에 봄이 만개하면 거기에 피크닉을 가요.”

“피크닉?”

“네, 맛있는 샌드위치를 싸서 꽃이 만개한 언덕에서 풍경을 감상하며 먹는 거예요. 정말 좋을 거 같지 않나요?”

피비가 주홍빛 눈을 반짝이며 묻자 디아나가 기분 좋은 미소를 그렸다.

“응, 상상만으로도 기분이 좋아. 다음에 날이 풀리면 꼭 가자.”

“네, 그리고 이번엔 몰래 말고 당당히 정문으로 나가요, 아가씨. 이번에도 몰래 나갔다가 걸리면…… 전 아마 대공 전하께 뼈도 못 추릴 거예요.”

대공에게 혼났던 기억이 떠올랐는지 피비가 시무룩한 얼굴을 했다.

디아나 역시 대공에게 제대로 걸려 다신 대공가를 몰래 나갈 생각은 하지 않고 있었다.

“응, 우리 이제 몰래 나가진 말자.”

피비와 웃으며 대화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도서관의 문이 보였다.

“아가씨, 오늘도 수업 열심히 들으세요.”

“응. 그럼 좀 있다 봐.”

디아나는 피비에게 싱긋, 미소를 짓고 도서관의 문을 열었다.

“에드윈은 아직 안 온 건가.”

평소라면 에드윈이 디아나를 맞이했을 텐데 오늘은 도서관 안에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무슨 일이 있나?”

고요한 도서관에 걱정스런 디아나의 목소리만 울리던 그때, 도서관의 문이 열렸다.

“하, 죄송합니다, 아가씨. 제가 좀 늦었습니다.”

도서관 안으로 들어온 에드윈은 상당히 급히 왔는지 하늘색 머리칼이 잔뜩 흐트러져 있었다.

“에드윈, 뛰어왔어?”

디아나의 물음에 머쓱한 미소를 지은 에드윈은 머리칼을 빠르게 정리했다.

“오늘 연습이 좀 늦게 끝나는 바람에 급히 오느라 좋지 못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머리칼을 정리한 그는 디아나와 함께 소파에 앉았다. 디아나는 에드윈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을 보던 디아나가 뭔가 결심한 얼굴로 에드윈을 불렀다.

“에드윈.”

“네?”

“일이 바쁘면 수업은 그만둬도 돼. 사실 피비에게 들었거든, 에드윈이 검술 대회에 나가게 됐다고.”

“아, 들으셨군요.”

“응! 진짜 축하해!”

“감사합니다. 아가씨.”

“그러니까 나 안 도와줘도 돼. 정말이야.”

에드윈 덕분에 글을 빨리 배워 동화책 정도는 읽을 수 있는 수준이 되었다.

물론 좀 더 배우면 좋겠지만 대회 준비로 바빠질 그의 시간을 억지로 뺏을 수는 없었다.

더 이상 그를 곤란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으니까.

심각한 디아나의 얼굴에 에드윈은 잠시 당황하다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괜찮아요, 아가씨. 아직은 여유롭습니다.”

“정말?”

“네, 정말이죠.”

디아나가 에드윈의 표정을 살피자 에드윈이 보란 듯 씨익, 미소를 지었다.

거짓 없는 표정에 디아나의 얼굴이 편해지자 에드윈이 말했다.

“아가씨, 그럼 수업을 시작해 볼까요?”

“응.”

“그럼 오늘은 조금 어려운 문장들을 가르쳐 드리겠습니다. 귀족들은 평민들보다 어려운 어휘를 많이 사용하기 때문에 지금까지 배웠던 단어들보다 어려우실 거예요.”

에드윈은 설명과 함께 시범을 보이듯 종이에 처음 보는 글자들을 썼다.

“글자가 더 예뻐진 거 같아.”

“귀족들이 사용하는 글씨체는 평민들이 사용하는 것보다 화려합니다.”

에드윈은 글자들을 어려워하지 않고 눈을 반짝이는 디아나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종이에 단어들을 쭉 적은 에드윈이 디아나에게 종이를 내밀었다.

“그럼 이제 아가씨께서 한번 적어 보시겠어요?”

“응.”

새로운 것에 흥미가 동한 디아나가 신난 얼굴로 깃펜을 든 순간 도서관 밖에서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비키라니까, 왜 이리 말을 안 들어?! 마리, 얘 잡아!”

“세이아…….”

세이아의 목소리에 디아나가 본능적으로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이번엔 디아나가 미처 자리를 피하기도 전에 벌컥, 도서관의 문이 열렸다.

“에드윈…… 디아나?”

거칠게 문을 열고 도서관으로 들어선 세이아의 시선이 에드윈을 지나 디아나에게 닿았다.

미처 숨지 못한 디아나는 낭패 어린 얼굴을 했다.

왜 하필, 지금.

그동안 세이아와 부딪히는 일이 없었다.

간혹 우연히 세이아를 봤을 땐 무슨 좋은 일이 있는지 얼굴에 항상 웃음기가 가득했었다.

그렇게 디아나는 세이아의 시선을 피해 평화로운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근데 이렇게 갑자기 세이아와 마주하게 되다니.

그것도 가장 곤란한 상황에서 말이다.

디아나는 자신을 향한 옅은 금빛 눈동자에 난색을 표했다.

대공성에서 디아나가 무언가를 배우고, 아니, 무언가를 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세이아의 심기를 거스를 게 분명했으니까.

‘어떡하지?’

무슨 일이 벌어질 것 같아 불안한 눈빛으로 세이아를 보던 그때, 도서관의 문이 벌컥 열렸다.

피비와 마리는 서로 먼저 들어오겠다는 듯 어깨를 부딪치며 도서관 안으로 들어왔다.

“대공녀님!”

“아가씨!”

그들의 큰 목소리에 세이아와 디아나의 시선이 각자의 하녀를 향했다.

디아나는 상당히 흐트러진 피비의 모습에 놀란 눈을 하다 세이아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아가씨? 너 방금 디아나에게 아가씨라고 한 거야?”

“……네? ……네.”

피비는 세이아의 서늘한 목소리에 멈칫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세이아는 피비의 얼굴을 빤히 보다 디아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설마 이 애, 디아나 네 하녀…… 야?”

‘이런.’

디아나는 자신을 바라보는 세이아의 굳은 얼굴에 일이 커질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을 느꼈다.

세이아가 입버릇처럼 달고 사는 ‘하찮은 디아나’가 감히 하녀의 시중을 받고 있다니, 세이아로서는 절대 납득할 수 없는 일일 것이다.

하지만 지금 이렇게 된 상황에 피비가 자신의 하녀가 아니란 거짓말을 할 수도 없었다.

디아나는 자신을 보고 있는 옅은 금안을 마주했다.

“네, 제 하녀에요, 대공녀님.”

대답을 들은 순간 세이아의 입가가 파르르 떨렸다.

‘감히 천한 네가 하녀를 부려?!’라고 소리치고 싶은 듯한 얼굴이었다.

당장 디아나의 뺨을 칠 듯 세이아의 눈빛이 매서워졌다.

하지만 주변의 사람들을 의식한 듯, 특히 에드윈이 신경 쓰이는지 세이아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아니, 좀 더 정확히는 하고 싶은 말을 애써 참는 듯 입술을 꾹 힘주어 다물고 있었다.

“…….”

그렇게 조용히 디아나를 보기만 하던 세이아는 곧 옅은 미소를 그리며 입을 열었다.

“그랬구나. 하긴 저택에서 혼자 생활하는 것이 많이 불편했을 텐데…… 디아나를 도와줄 하녀가 있어야지. 내가 집사에게 말할까 했는데, 집사가 알아서 챙겨 줬다니 다행이야.”

“……네.”

정확히는 집사가 아닌 대공의 명령이었지만 그것까지 알면 디아나를 향한 세이아의 분노가 더 커질 것 같았다.

“근데 디아나, 여기서 뭘 하고 있었던 거야? 하녀까지 밖에 세워 두고 에드윈이랑 둘이서 뭘 한 거야?”

“아…… 그게…….”

차마 글을 배우려 했다는 말이 바로 나오지 않았다.

세이아는 순수하게 궁금하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말했지만 디아나는 분명 보았다.

세이아의 옅은 금안이 자신을 향한 선명한 적의로 번뜩이는 것을.

피비의 존재로 이미 기분이 나빠졌을 것이다.

그런데 대공가의 기사에게 글을 배우고 있단 걸 알게 되면 아마 매일매일 제 방에 드나들며 잡아먹을 듯 괴롭힐 것이다.

그동안의 평화가 깨질 게 너무도 뻔해 디아나는 벌써부터 머리가 지끈거렸다.

‘다른 핑계를 댈 게 없을까?’

고민하던 그때, 디아나를 다그치는 듯한 세이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디아나, 왜 말을 못 하는 거야? 대체 뭘 하고 있었길래 그래?”

세이아는 갑자기 눈을 동그랗게 뜨며 디아나와 에드윈을 번갈아 보았다.

그러더니 이윽고 옅은 금빛 눈동자가 경악으로 물들었다.

“설마…… 둘이 이상한 모략이라도 꾸미고 있었던 거야?!”

어떻게 그럴 수 있냐는 듯 소리친 세이아는 끔찍한 범죄 현장을 목격한 것처럼 소스라치게 놀랐다.

물론 범죄 현장의 범인은 자신과 에드윈이란 눈빛이었다.

“어떻게 이럴 수 있는 거야, 디아나……. 이런 짓은 절대 하면 안 되는 거야, 이번 일은 네 편을 들어줄 수가 없을 거 같아.”

당장 기사들을 부를 듯한 세이아의 격한 반응에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에드윈이 입을 열었다.

“아닙니다, 대공녀님. 오해이십니다.”

다급함이 느껴지는 에드윈의 목소리에 세이아의 시선이 그를 향했다.

“에드윈…… 나쁜 모략을 꾸민 게 아니라면 대체 뭘 하고 있었던 건데? 디아나랑 에드윈이 조용히 만날 일이 뭐가 있다고.”

세이아의 물음에 에드윈은 바로 답하지 못하고 입술을 달싹였다.

디아나가 대공녀에게 글을 배운다는 사실을 숨기고 싶어 한다는 것을 에드윈도 눈치로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에드윈 역시 그럴싸한 다른 이유를 찾기 위해 머리를 굴렸다.

하지만 세이아의 말처럼 디아나와 굳이 남몰래 만날 이유가 없었다.

에드윈의 얼굴에 난감함이 서린 그때, 이미 결론을 내린 듯한 얼굴을 하고 있는 세이아에게 디아나가 말했다.

“기사님께 글을 배우고 있었어요.”

“뭐?”

순간 디아나의 말을 이해 못 한 듯 세이아의 표정이 멍해졌다.

그런 세이아에게 디아나는 차분하게 다시 말했다.

“기사님께 도움을 받아 글을 배우고 있었어요, 대공녀님.”

이미 다 들킨 상황이었다.

숨기면 숨길수록 수상해지고 최악엔 정말 나쁜 짓을 했던 것이라 오해를 받을 수도 있었다.

앞으로 벌어질 세이아의 괴롭힘이 힘들겠지만 그녀를 도와준 에드윈까지 난감한 상황에 놓이게 할 수는 없었다.

피할 수 없다면 오해라도 받지 말아야 한다.

디아나의 미동 없는 눈동자를 바라보던 세이아는 돌연 표정을 딱딱하게 굳혔다.

“거짓말.”

세이아의 차가운 목소리가 도서관을 울렸다.

“네?”

거짓말이라니, 그게 무슨.

예상치 못한 대답에 디아나는 당황스러워 얼굴이 굳었다.

사실대로 말하면 일단은 억지 미소를 짓고 세이아가 도서관을 나갈 줄 알았다.

지금은 시선을 의식해 물러나고 나중에 그녀의 방을 찾아와 행패를 부릴 것이라고 생각했다.

세이아는 레아와 비슷한 면이 많았으니까.

그런데 저렇게 싸늘한 눈빛이라니.

세이아가 차디찬 눈빛으로 디아나를 바라보았다.

“글을 배우려 했다는 그 말을 내가 어떻게 믿어? 글을 배우는 게 죄도 아닌데 이렇게 몰래 배우려 했다는 게 말이 안 돼.”

“아니에요, 진짜 글을 배우려 했던 게 맞아요!”

디아나가 외쳤지만 세이아는 고개를 저었다.

“진짜 글을 배운 거면 왜 처음에 물어봤을 때 바로 대답하지 않은 거야? 에드윈도 너도 망설였잖아. 떳떳한 일이라면 망설이지 않았을 거야. 글을 배웠다는 걸 믿을 수 없어.”

차갑게 얼굴을 굳히고 있던 세이아의 눈빛이 위험하게 번뜩였다.

분노가 가득한 옅은 금빛 눈동자에 디아나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이번 일은 아버지께 사실대로 말씀드릴 거야. 디아나 널 지켜 주지 못해 미안해.”

‘대공 전하께 말해서 나와 에드윈을 벌주려고…….’

디아나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벌써 눈앞에 벌을 받는 에드윈의 모습이 그려지는 거 같았다.

더러운 사생아라 비웃고 손찌검 몇 번 하는 괴롭힘과는 비교도 안 되게 큰일이었다.

어쩌면 다시 레아에게 돌아가게 될 수도 있다.

생각만으로도 끔찍해 디아나는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디아나는 세이아의 억지에 흔들리지 않으려 침착하게 말했다.

“대공녀님, 나쁜 일을 꾸미다니, 맹세코 그런 적 없어요. 정말로 글을 배운 것이 전부예요.”

디아나에 이어 에드윈도 입을 열었다.

“대공녀님, 사실만을 말씀드린 겁니다. 애초에 제가 디아나 아가씨와 꾸밀 나쁜 일이 뭐가 있겠습니까. 전 대공가에 충성을 맹세한 기사인 것을요. 대공녀님이 하시는 말은…… 명백한 오해입니다.”

에드윈은 세이아에게 굳은 얼굴로 말했다.

하지만 세이아는 에드윈을 무시하며 도서관을 나가려는 듯 몸을 돌렸다.

에드윈이 세이아를 붙잡아 보려 다가가려던 순간, 도서관 입구에서 낮은 음성이 들려왔다.

“세이아.”

도서관에 있던 모두의 시선이 입구로 향했다.

디아나는 문 앞에 서 있는 금발에 수려한 얼굴을 한 남자를 보고 몸을 굳혔다.

왜 하필, 지금…….

“대공 전하를 뵙니다.”

“대공 전하.”

대공을 향한 에드윈과 하녀들의 인사가 도서관을 크게 울렸다.

“일어나.”

귀찮다는 듯 그들을 향해 손을 휘저은 대공은 성큼성큼 걸어 세이아에게 다가갔다.

세이아의 앞에 선 대공의 시선이 잠시 디아나를 향했다, 멀어졌다.

“세이아.”

“아버지.”

대공은 주변을 둘러보며 입술을 열었다.

“대체 무슨 일이길래 이리 모여 있는 것이지?”

대공이 묻자 기다렸다는 듯 세이아는 심각해진 얼굴로 분홍빛 입술을 열었다.

“……너무 큰일이라 어떻게 말씀을 드려야 할지…….”

“괜찮으니 편히 말해 보거라.”

세이아는 대공의 말에도 쉽지 않다는 듯 곤란한 얼굴로 디아나를 힐긋 보았다.

하지만 세이아의 시선을 따라 대공의 금안이 디아나를 향하자 세이아는 다급히 대공의 소매를 잡았다.

빛나는 황금안이 오롯이 그녀를 향하자 깊은 만족감이 세이아의 마음을 울렸다.

아버지의 시선이 천한 디아나를 향하는 게 싫었다.

금안에 오로지 자신만이 담긴 것이 너무 좋아 분위기도 잊고 입꼬리가 올라갈 뻔했지만 아닌 척 세이아는 눈을 내리깔며 답했다.

“아버지, 디아나와 에드윈이 몰래 이곳에서 나쁜 일을 꾸미고 있었던 거 같아요.”

세이아를 내려다보는 대공의 눈썹이 치켜세워졌다.

“나쁜 일?”

“네, 이곳에서 몰래 만남을 가지며 좋지 않은 일을 꾸민 거 같았어요. 나쁜 일이 아니고서야…… 아무도 없는 도서관에서, 그것도 하녀에게 망을 보게 하고 몰래 만날 이유가 없으니까요.”

세이아는 이런 말을 하는 것이 괴롭다는 듯 입술을 살짝 깨물며 애처롭게 고개를 숙였다.

대공은 그런 세이아를 잠시 아무 말 없이 바라보았다.

“대공녀님의 말은 사실이 아니에요.”

순간, 디아나의 목소리가 도서관을 울렸다. 세이아를 보던 대공의 시선이 디아나를 향했다.

“사실이 아니라고?”

“네, 사실이 아니에요. 전 단지…… 에드윈에게 글을 배우고 있었을 뿐이에요.”

“글을 배웠다고?”

디아나의 말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대공의 미간이 좁아졌다.

“네, 전하. 사실 전 아직 글을 모릅니다. ……배운 적이 없거든요.”

“…….”

디아나의 말에 대공은 적지 않게 놀란 듯 무감한 얼굴에 당황한 빛이 스쳤다.

대공의 표정이 흔들리자 세이아가 고개를 들고 소리쳤다.

“거짓말하지 말라고 했잖아, 디아나! 아버지, 말이 안 돼요. 사실이라면 글을 배우는 게 죄도 아니고 왜 이렇게 다른 사람들 눈을 피해서 배우겠어요. 이상하잖아요.”

“부끄러워서 그랬어요.”

“뭐?”

디아나의 말에 세이아가 어이없다는 눈빛으로 보았다.

디아나는 자신을 보는 대공의 금안을 피하듯 시선을 내리깔았다.

“이제야 글을 배운다는 사실을 창피해서…… 그래서 에드윈에게 몰래 가르쳐 달라 부탁했어요. 에드윈은 그런 절 불쌍히 여겨 도와준 것이고요. 대공녀님, 아까 창피해서 물음에 바로 답하지 못한 점 죄송해요.”

디아나가 세이아에게 깍듯이 허리를 숙이며 사과하자 세이아의 얼굴이 당황으로 물들었다.

“뭐, 뭐 하는…….”

세이나는 여전히 허리를 깊이 숙이고 있는 디아나를 보다 대공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말도 안 된다고, 디아나가 거짓말을 하는 것이라고 말하려던 세이아는 마주친 금안에 입술을 다물었다.

처음 보는 싸늘한 눈빛이었다.

-2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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