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화 (3/16)

3

* * *

디아나의 방에서 집무실로 돌아온 대공이 책상에 자리를 잡은 그때, 집무실의 문이 열리며 집사가 들어왔다.

“방금 대공녀님의 예절 교육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렇군.”

집사는 평소와 달리 무미건조한 대공의 목소리에 의아함을 느끼며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다른 생각에 빠진 듯 이맛살을 구기고 있는 대공의 얼굴이 보였다.

‘대공녀님의 일을 보고드리는데 다른 생각을 하시다니.’

대공이 성으로 돌아온 이후로 대공은 세이아의 모든 일거수일투족을 보고받았고 대공녀의 일을 보고받을 때면 하던 일도 멈추고 집중했던 그였다.

한데 갑자기 다른 생각이라니, 집사는 의아함과 놀람을 동시에 느꼈지만 조금의 동요도 내보이지 않은 채 대공에게 조심스레 말했다.

“대공 전하, 혹 더 물으실 건 없으신-.”

“하론.”

집사의 말이 채 끝나기 전에 대공이 그를 불렀다.

“네, 전하.”

“디아나의 방 말이다. 네가 준비하지 않았던가?”

“네?”

당연히 세이아의 일을 물어볼 것이라 짐작하고 있던 집사는 예상치 못한 물음에 당황한 눈빛으로 대공을 보았다.

하지만 대공은 두 번 말하지 않고 가만히 집사를 바라보았다.

대공의 서늘한 눈빛에 정신을 차린 집사는 빠르게 답했다.

“네, 전하. 제가 준비하였습니다.”

“한데 방이 너무 삭막하더구나. 어린아이의 방이라고 하기엔 그 흔한 봉제 인형 하나 없고…….”

대공은 아까 둘러본 디아나의 방이 세이아의 방과 너무 차이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물론 대공녀인 세이아의 방만큼 꾸며야 한다는 것은 아니었지만 넓은 방 안에 달랑 가구 두 개만 놓인 삭막한 방에서 어린아이가 지내는 것이 신경 쓰였다.

그리고 그런 방이 좋다고 진심으로 말하는 디아나의 모습이 더욱 그의 신경을 자극했다.

이해할 순 없지만 디아나와 관련된 대공의 불편한 심기를 읽은 집사는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그것이…… 전…… 대공 전하께서 원래 레아에게 주던 예산 정도의 선에서 방을 꾸미라는 말씀이신 줄 알고…… 송구합니다, 전하.”

집사가 말을 줄이며 머리를 조아렸다.

집사의 말을 들은 대공은 순간 굳은 표정을 움찔하다 미간을 깊이 좁혔다.

집사에게 화가 나서가 아니었다.

이번 일은 디아나가 다쳤을 때 카이투스 약을 가지고 왔던 의원의 일과 같은 맥락이었으니까.

그때의 그 의원도 지금의 집사도 그가 디아나를 자신의 딸로 인정하지 않았기에 그에 맞는 대우를 한 것뿐이다.

가주의 인정을 받지 못한 사생아에게 비싼 약초를 쓸 수도, 방을 꾸미는 데 돈을 많이 들일 수도 없는 건 당연한 일.

그러니 저들이 이렇게 행동하는 것은 그의 암묵적인 명을 따르는 것이다.

인과관계를 깨닫자 대공의 기분은 바닥을 쳤다.

이 상황을 만든 스스로에게 그리고 신경 쓰지 않아도 될 디아나를 무시하지 못하는 것도 짜증 났다.

평소의 그였다면 이성을 흩뜨리는 원인을 단칼에 끊어버렸을 텐데.

우습게도 대공은 그의 머릿속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원인이 디아나인 것을 알면서도 머릿속에서 아이를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디아나가 자신의 손을 꼭 잡으며 울먹였던 그 순간이 그의 머릿속에 선명히 기억되고 있었으니까.

“하.”

대공은 탄식이 섞인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디아나, 그 아이만 관련되면 내 이성이 마비돼 버리는 거 같군.’

대공은 지끈거리는 머리에 관자놀이 부근을 꾹 눌렀다.

‘계속 이렇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다간 내가 미쳐버리겠어.’

디아나를 머릿속에서 떨치든, 그 아이를 신경 쓰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든 무언가 결정이 필요했다.

이미 답은 나와 있었다.

그는 디아나를 모른 척할 수 없다.

순간 레아의 얼굴이 떠올라 세이아를 향한 죄책감이 들었지만 지금으로선 디아나를 버릴 수가 없었다.

그리고 사실 디아나는 레아 그 여자의 사랑을 받고 자라난 아이도 아니었으니까.

아이는 죄가 없다고 말했던 아리엘의 말을 지키는 것이라고 여길 수밖에.

스스로에게 하는 변명 같았지만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복잡해지는 머릿속 때문에 정말 미쳐 버릴 거 같았다.

‘그 애가 좀 더 자랄 때까지만, 그래, 그때까지만 보살펴 주고 대공가에서 내보내면 되겠지.’

결론을 내리자 조금 가벼워지는 마음에 대공은 아직 고개를 조아리고 있는 집사를 보았다.

“하론, 고개를 들어. 그대의 잘못이 아니니.”

“송구합니다, 전하.”

고개를 든 집사는 대공을 향해 다시 말문을 열었다.

“전하, 하오면 디아나 아가씨의 방을 좀 더 꾸며 드릴까요?”

대공은 휑했던 방 안을 떠올리며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아이가 지낼 만한 방 정도는 만들어 주거라. 그렇다고 세이아에게 하듯 하라는 말은 아니다.”

“네, 전하. 그럼 전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집사가 몸을 돌리려던 때, 대공은 세이아에게 미안함과 죄책감이 들어 집사를 다시 불렀다.

“하론.”

“네, 전하.”

“얼마 전에 세이아가 조랑말이 갖고 싶다고 하였으니 혈통이 뛰어난 조랑말 세 마리를 사도록 해라. 그리고 오늘 저녁은 세이아와 함께 먹을 테니 신경 써서 준비하도록.”

“네, 알겠습니다, 전하.”

집사는 대공녀를 언급하는 대공의 모습에 작은 미소를 띠며 집무실을 나갔다.

집무를 보려던 대공은 문득 아까 디아나의 방에서 보았던 세이아의 모습을 떠올렸다.

“분명…… 디아나를 싫어하는 거 같았지.”

디아나를 몹시 아끼는 척 그에게 말을 하고 미소를 지었지만 그는 고작 10살 어린아이의 거짓말에 속아 넘어갈 사람이 아니었다.

아마 디아나가 넘어진 것도 세이아 때문일 것이다.

세이아의 행동이 잘못되긴 했지만 그에 화가 나진 않았다.

적통인 대공녀와 사생아인 디아나.

어느 귀족 가문에서도 적자가 사생아를 아끼고 챙기는 집은 없었다. 적자의 입장에선 사생아의 존재는 언제나 불편하고 불명예스러운 존재였으니까.

하니 정말로 세이아와 디아나의 사이가 좋았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었겠지.

집사에게 들었을 적에도 디아나가 본성에 온 적은 거의 없다 하였으니…… 별로 본 적도 없는 디아나를 아낀다는 건 말이 안 되는 일이다.

그래서 대공은 다 알고 있었음에도 아까 방에서 세이아에게 모른 척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

단지 조금 의외였다.

아무렇지 않게 거짓을 말하는 세이아의 모습과 디아나를 몹시도 경멸하는 아이의 눈빛이,

그가 이제껏 봐 왔던 아이의 모습과는 많이 달랐으니까.

‘그렇게 빨리 얼굴 표정을 바꿀 줄이야.’

대공은 또 슬며시 올라오는 세이아를 향한 위화감에 쯧, 스스로에게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세이아가 디아나를 싫어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야.”

그걸 예상하고 있었기에 디아나가 손님방에 머무르는 것을 세이아가 알게 될까 사용인들의 입을 철저히 함구시켰던 게 아닌가.

한데 이제 와 세이아가 조금 험한 행동을 했다고 이런 생각을 하다니.

대공은 아버지답지 못하다며 스스로를 질책했다.

세이아가 디아나의 일로 스트레스가 상당할 것이기에 대공은 앞으로 더욱 세이아에게 신경을 써야 한다고 스스로 다짐했다.

하지만 그렇게 다짐하면서도 마음 한구석을 짓누르는 찝찝함을 떨치진 못했다.

“하아.”

대공은 이맛살을 찌푸렸다.

“……세이아가 내 딸이야.”

그는 스스로에게 낮게 읊조렸다.

대공은 머릿속에서 아른거리는 디아나의 모습을 애써 떨치며 밀린 서류에 시선을 내렸다.

* * *

“음…….”

햇살이 창문을 넘어 디아나의 얼굴을 비추었다. 디아나는 나른함에 베개에 얼굴을 비비다 천천히 눈을 떴다.

“아…….”

너무도 평온한 아침에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았다. 손님방에 머무를 땐 시간마다 몸 상태를 확인하러 오는 하녀 때문에 이렇게 평온하지는 않았다.

춥지도, 레아의 날카로운 목소리도 없는 고요한 아침.

거기다 현재 시각은 10시가 훌쩍 넘었다.

오두막에 살 땐 꿈도 꾸지 못할 늦잠까지 자다니, 디아나는 새삼 자신이 정말 오두막을 벗어났다는 것이 실감났다.

“계속 이렇게 지낼 수만 있다면 세이아의 괴롭힘쯤이야 얼마든지 버틸 수 있을 거 같아.”

디아나는 보드라운 이불의 감촉을 만끽하며 침대 위에서 좀 더 늑장을 부렸다.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디아나의 배에서 꼬르륵하는 소리가 울렸다.

‘배고프네.’

아침을 먹을 시간이 한참 지났으니 이럴 만했다. 디아나는 침대에서 꾸물꾸물 일어나 침대 옆의 설렁줄을 잡아당겼다.

얼마 지나지 않아 디아나의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울렸다.

“들어와.”

문이 열리고 하녀 한 명이 들어와 고개를 숙였다.

“부르셨어요, 아가씨.”

“응, 아침을 가져다줬으면 좋겠어.”

“네, 알겠습니다.”

하녀가 방을 나가자 디아나는 침대에서 내려와 창밖을 바라보았다. 겨울의 끝자락, 봄이 오고 있다는 걸 증명하듯 하늘이 맑고 햇볕이 따뜻해 보였다.

디아나는 하늘에서 시선을 내리다 삭막한 정원의 모습에 멈칫했다.

‘저 정원이 대공비께서 아꼈다던 정원이구나.’

언젠가 하녀들이 하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대공비가 손수 가꾸었다던 정원의 이야기를.

대공비가 직접 관리했다던 정원에 꽃이 필 때가 되면 정원의 절경을 구경하러 먼 곳의 귀부인들까지 방문했다고 했었다.

화려하게 핀 꽃들 속에 선 대공비의 아름다움은 마치 꽃의 여신 같았다고.

디아나는 왜인지 어쩌다 듣게 된 그 이야기를 쉽게 잊지 못했다.

혼자 꽃의 여신 같다던 대공비를 상상해 봤을 만큼.

강렬하게 기억에 남았다.

하지만 지금 디아나의 눈에 보이는 정원의 모습은 생기를 잃은 시든 꽃들만이 머리를 숙이고 있을 뿐이었다.

이상하게 그 모습이 마음을 먹먹하게 만들어, 디아나는 시선을 돌려 다른 곳을 바라보았다.

“저기가 산책로인가.”

수풀 사이로 길이 만들어진 곳이 눈에 띄었다.

대공가의 작은 숲과 연결된 길을 보고 있던 그때,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응.”

문이 열리고 하녀가 트롤리를 끌고 들어왔다. 하녀는 빠르게 테이블 위로 접시들을 놓았다. 디아나는 고소한 빵 냄새에 이끌리듯 창가에서 테이블로 걸어갔다.

“맛있겠다.”

아픈 몸 때문에 속이 안 좋아 한동안 옥수수 수프만 먹었기에 김이 모락모락 나는 빵은 단번에 디아나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때깔만 보아도, 쿤타가 몰래 챙겨 주었던 하녀들의 식사와는 차원이 달랐다.

하녀가 음식들을 차려 주고 방을 나가자, 디아나는 의자에 앉아 부드러운 호박 수프부터 한술 떠먹었다.

“너무, 맛있다.”

안 그래도 배가 고팠던 터라 음식을 맛보자 손을 멈출 수가 없었다. 디아나는 빠르게 빵과 수프를 해치우고 샐러드까지 전부 먹었다.

마지막으로 오렌지 주스까지 비운 디아나는 잔을 탁자에 내려놓으며 포만감이 가득한 숨을 내쉬었다.

“하아…… 배불러.”

너무 급하게 먹었나. 가득 찬 위장이 무겁게 느껴졌다.

하지만 배가 부르다는 감각도 난생처음으로 느끼는 것이다. 버겁지만 생경한 느낌이 싫지만은 않았다.

좀 걸어야 하나. 생각을 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아까 보았던 산책로가 떠올랐다.

“하지만 내가 거길 가도 되는 걸까.”

저택에서 지내게 되었지만 대공성을 이리저리 마음대로 돌아다녀도 된다는 허락을 받은 적은 없었다.

산책로는 별채가 아닌 저택과 이어진 곳이니 함부로 다녔다간 대공에게 혼이 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럼 어디서 걷지?’

좀 걸어야 하는데 저택 안이 안 된다면 별채로 가야 했다. 하지만 별채로 갔다가 레아라도 만난다면…….

얼마 전에 하녀에게 레아가 어찌 되었는지 물었을 때, 큰 벌을 받고 오두막에 갇혀 근신 중이라고 했었다.

오두막에 갇혀 있다면, 나오지 못하겠지만 그래도 혹시나 싶어 디아나는 밖으로 나가기 망설여졌다.

그냥 방 안에서 몇 바퀴 돌자.

그렇게 결론을 내리고 자리에서 일어나는데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똑똑-.

벌써 접시를 가지러 온 건가.

그러기엔 너무 빠른데. 디아나가 고개를 갸웃하던 그때, 낮은 음성이 문밖에서 들려왔다.

“아가씨, 집사입니다.”

“아, 들어와.”

디아나는 하녀를 맞이했을 때와 달리 원피스의 구겨짐을 펴며 자세를 바로 했다.

괜히 집사에게 안 좋은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한데 문이 열리고 디아나의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집사의 얼굴이 아니었다.

“……저것들은 다…… 뭐지.”

디아나는 집사의 뒤로 줄지어 들어오는 물건들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작은 박스부터 인형, 예쁜 레이스 쿠션과 큰 가구들이 디아나의 방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서랍과 테이블은 저쪽을 놓고 쿠션과 인형들은 거기 소파 옆으로 놓거라. 그리고 너희들은 아가씨의 침대보와 이불을 바꾸거라.”

“네, 집사님.”

하인들이 분주하게 가구들을 옮기고 하녀들은 난생처음 보는 분홍 레이스가 들어간 이불을 가지고 침대로 갔다.

밋밋한 무늬였던 침대보와 이불 대신 아기자기하고 화려한 레이스 이불이 침대를 예쁘게 꾸몄다.

빈 공간이 더 많았던 방 안이 가득 채워지는 것을 멍하니 보던 디아나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아니, 갑자기 이게 무슨…….”

이렇게 화려하고 값비싸 보이는 가구들과 인형들을 가져 본 적도 없었다.

마음에 들지 않고 말고를 떠나 디아나는 귀족 영애의 방처럼 꾸며지는 것이 몹시 당황스러웠다.

“전부 대공 전하께서 하사하신 것들입니다. 이곳에서 지내는 동안 아가씨께서 불편함이 없길 바라신다,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대공 전하께서?

이 방을 내준 것만으로도 디아나에겐 너무도 큰일이었는데…….

디아나는 어느새 완벽히 꾸며진 방 안을 둘러보며 낯선 기분을 느꼈다.

마냥 좋아할 수 없는 혼란스런 기분에 디아나의 표정이 이상하게 굳었다.

정리가 끝나고 하인들과 하녀들이 나가자 집사가 디아나를 불렀다.

“아가씨.”

“응?”

“필요하신 것들이 있으시다면 언제든 제게 말씀해 주십시오. 제 선에서 처리 가능한 요구라면 바로 들어드릴 수 있습니다.”

집사의 말에 디아나는 문득 아까 포기했던 한 가지 일이 떠올랐다.

“그럼…… 나 저기 저택 밖의 산책로로 걸어도 될까?”

“……산책로 말씀이십니까? 그저 거길 걷는 걸 물으시는 건가요?”

자신이 들은 말이 미심쩍은 듯 집사는 미간을 살짝 좁히며 물었다.

‘역시 안 되는 건가.’

디아나는 그의 반응에 조금 긴장하며 대답했다.

“응.”

디아나의 대답에 집사의 동공이 살짝 커졌다, 가라앉았다. 그는 곧 느리게 입술을 움직였다.

“……됩니다, 아가씨. 저택에서 머무르게 되신 이상 대공 전하의 집무실과 금고를 제외한 다른 곳은 모두 가 보셔도 됩니다. 둘러보시는 것에 대한 제약은 없으니까요.”

“아, 정말? 다행이다.”

돌아다니는 것에 제약이 없다는 말에 디아나는 활짝 웃었다.

사실 방 안에만 갇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니 답답했기 때문이다.

집사는 그런 디아나를 보다 입을 열었다.

“아가씨, 그럼 전 이만 다른 일이 있어 물러가 보겠습니다.”

“응.”

집사가 방을 나가자 디아나는 창가로 쪼르르 달려갔다.

저택 밖, 왼쪽에 있는 산책로의 위치를 제대로 확인한 디아나는 옷을 갈아입기 위해 옷장을 열었다.

“아.”

디아나는 순간 당황해 짧은 탄식을 흘렸다.

휑한 옷장엔 용병의 습격을 받았던 날 레아가 사 주었던 원피스와 망토, 신발이 전부였기 때문이었다.

“……가구들이 문제가 아니었네.”

방 안은 겉은 화려해졌지만 정작 생활에 필요한 옷가지와 신발이 없었다.

집사에게 말해야 하나.

편히 말하라곤 했지만 말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일단 이거라도 입어야겠지…….”

이걸 다시 입고 싶진 않았지만 지금 디아나가 입고 있는 옷으론 밖에 나갈 수 없었다.

지금 입고 있는 원피스는 디아나가 아플 당시 하녀가 갈아입혀 준 것으로 잠옷 겸용인 얇은 실내 원피스였다.

얇은 옷을 몇 번 만지작거리던 디아나는 어쩔 수 없음을 인정하며 레아가 사 준 원피스로 손을 뻗었다.

이 옷을 다시 입는 것이 찝찝했지만 그나마 다행인 건 하녀가 옷을 싹 빨아 주었기에 흙먼지나 그때 묻었던 피는 전부 지워졌다는 것이다.

옷을 빠르게 갈아입은 디아나는 망토를 둘렀다.

날이 많이 풀리긴 했지만 아직 겨울이었고, 몸이 다 낫지 않았는데 무리했다 감기라도 걸리면 여러 사람들을 귀찮게 할 테니까.

‘조금만 걷다가 들어와야지.’

방을 나선 디아나는 사람이 없는 복도에 고개를 갸웃했다.

“이 시간엔 원래 하녀들이 많이 다닐 시간일 텐데.”

아직 12시가 되기 전이었다. 한참 별채의 하녀들이 저택으로 와 청소할 시간일 텐데. 디아나는 이상하다 생각하며 중앙 계단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아.”

계단을 내려가려던 디아나는 1층 로비의 분주함을 보고 멈칫했다.

디아나는 로비에 한가득 쌓인 물품들과 계속해서 문을 통해 들어오는 물건들을 보며 입을 살짝 벌렸다.

자신의 방으로 들어오던 가구의 행렬과는 비교도 안 되게 많은 것들이었다.

화병, 도자기, 향로, 그림 등 화려한 사치품들이 보였다. 그때, 디아나의 눈길을 단번에 사로잡는 것이 있었다.

바로 수십 벌은 되어 보이는 어린이용 드레스들.

세이아의 옷인 듯한 드레스들을 하녀들이 운반하고 있었다.

봄옷인 듯 가벼워 보이는 알록달록한 색상의 원피스들은 솔직히 너무 예뻤다.

그리고 저 옷들을 보니 봄옷이 하나도 없는 자신의 처지가 서글펐다.

오두막에서 원래 입던 옷이라도 가져올까.

지금 입고 있는 옷이 그 낡은 옷들보단 좋았지만 이 옷을 입은 날 당한 일 때문에 싫었다.

거기다 레아가 사 준 하나뿐인 드레스는 겨울용이었기에 날이 풀리면 입고 싶어도 입고 다닐 수 없을 것이다.

하녀에게 부탁해서 가지고 와 달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옷을 어디서 구하지, 역시 집사에게 말해야 하는 걸까.

그게 지금으로선 유일한 방법인 거 같았지만 그걸 실행에 옮기기가 쉽지 않다는 게 문제였다.

옷을 사 달라고 말해도 되는 건가.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든지 말하라고 하긴 했지만 눈칫밥을 먹는 입장으로선 무엇 하나 해 달라고 말하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특히, 그냥 하녀도 아닌 대공의 직속 하인인 집사에게는.

디아나가 한숨을 내쉬던 그때, 하녀들이 갑자기 자신이 서 있는 중앙 계단을 바라보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일제히 사용인들이 이쪽으로 허리를 숙였다.

‘어…… 설마.’

혹시나 싶어 고개를 돌리자 계단을 타고 3층에서 내려오는 대공의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그의 옆에는 불편하게 느껴지는 로운이 함께였다.

계단을 빠르게 내려온 대공은 디아나의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대공 전하를 뵙습니다.”

디아나는 허리를 숙이지 말라고 했던 그의 말을 기억하며 고개를 숙였다.

“……고개를 들어라.”

고개를 들자 디아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대공과 시선이 마주쳤다.

그의 시선이 부담스러워 고개를 살짝 돌리자 대공의 곁에서 서 있던 로운과 시선이 마주쳤다.

대놓고 못마땅한 눈빛.

로운의 입가엔 가짜 미소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디아나를 보기도 싫다는 듯 먼저 시선을 거두었다.

로운이 뿜어내는 선명한 불쾌함에 움찔하던 디아나는 어쩔 수 없이 대공에게 시선을 돌렸다.

디아나와 눈이 마주치자 대공이 먼저 입을 열었다.

“어딜 가는 길이지?”

“아…… 잠시 산책을 좀 하고 싶어 나왔습니다.”

“산책? 밖으로 나가도 될 만큼 몸이 좋아진 것이냐?”

“네, 오늘은 아주 좋습니다.”

“그렇다면 다행이군. 너무 오래 밖에 있지…….”

대공은 갑자기 말끝을 흐리며 입술을 다물었다. 그리고 아래위로 디아나의 모습을 훑어보았다.

“이 옷은…… 그때 그 옷이군.”

디아나의 옷이 못마땅하다는 듯 대공의 미간이 깊이 좁아졌다.

그때가 언제인지를 너무 잘 알고 있는 디아나는 당황하며 원피스 자락을 꼭 쥐었다.

“……네.”

“그 옷은 버렸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다른 옷을 입지, 왜 하필 그 옷을 입은 것이냐.”

대공의 싸늘한 목소리에 디아나가 반사적으로 몸을 움츠렸다.

‘나도 입고 싶어서 입은 게 아닌데…….’

디아나는 망설이다 느리게 입술을 열었다.

“옷이 이것밖에 없어서요…….”

디아나의 작은 목소리가 울리고 순간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대공은 당황스런 눈빛으로 디아나를 바라보았다. 곧 그의 입술이 느릿하게 움직였다.

“……옷이 없을 거란 생각은 못 했군.”

대공은 디아나의 아래위를 가는 눈으로 훑어보았다.

그러다 곧 입을 열었다.

“산책을 가는 길이었다 했던가?”

“……네, 전하.”

대공은 그리 말하며 생각에 잠긴 듯하다 다시 말을 이었다.

“이만 가 보아도 된다. 몸이 안 좋으니 너무 오래 밖에 있지는 말거라.”

머리 위로 대공의 목소리가 내려앉았다.

꼭 걱정을 해 주는 듯한 그의 목소리에 디아나는 순간 기분이 이상해졌다.

그 혼란스런 표정을 들킬까, 디아나는 고개도 들지 않고 대공에게 인사했다.

“네, 그럼 이만 가 보겠습니다.”

디아나는 곧장 계단을 내려갔다. 로비로 내려온 디아나에게 사용인들의 시선이 모이는 것이 느껴졌다.

아마 대공과 대화를 나눈 것 때문이겠지.

동정과 무시가 섞인 시선으로 나를 보았던 자들이 지금은 몹시도 당황스런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이 느껴졌다.

버려진 사생아 디아나와 대공이 아무렇지 않게 대화를 나누었으니 다들 지금 상황이 믿기지 않는 얼굴이었다.

그들의 시선이 좋진 않았지만 이해는 갔다.

디아나도 자신이 이곳에 머무르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었으니까.

하지만 너무 대놓고 쳐다보는 시선에 디아나는 몸이 따끔따끔한 기분이었다.

그 시선들을 피하듯 디아나는 작은 발을 서둘러 저택 로비를 벗어났다.

디아나가 저택을 나가고 사용인들이 다시 분주하게 움직였지만 대공은 그 자리에 멈춰 움직일 줄을 몰랐다.

깊은 생각에 빠진 듯 그의 얼굴이 굳어 있었다.

그런 대공을 옆에서 가만히 보고 있던 로운이 먼저 입을 열었다.

“전하, 무슨 생각을 그리하십니까. 설마 디아나 아가씨의 생각은 아니시겠지요?”

상념이 깨진 대공이 로운을 돌아보았다.

로운은 대놓고 디아나를 향한 경멸을 드러내고 있었다.

로운은 디아나가 부상당해 저택에 머무르게 됐던 그때도 격렬하게 반대했었다.

레아의 딸을 거두어선 안 된다고 말이다.

로운의 마음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대공은 이미 마음을 정했다.

“내가 말했을 텐데. 앞으로 디아나를 그 여자와는 별개로 보겠다고 말이야.”

대공은 디아나가 어느 정도 자라면 대공성에서 나가도 잘 살 수 있도록 거처를 마련해 줄 생각이었다.

“전하. 정말 저 아이를 거두신단 말씀이십니까, 저 아이는 마님을 죽음으로 몰아간…….”

“로운.”

대공이 선득한 눈빛으로 대공의 말을 잘랐다.

더 이상의 하극상은 용납하지 않겠다는 대공의 싸늘한 눈빛.

로운은 빠르게 시선을 아래로 낮추었다.

“제가 선을 넘었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전하.”

고개를 깊이 숙이며 용서를 구하는 로운의 모습에 대공은 쯧, 혀를 차며 더 뭐라 하진 않았다.

로운은 그의 충직한 가신이었고 그가 디아나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을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에.

“디아나의 일을 받아들이지 못하겠다면 모른 척해라. 디아나와 관련된 일로 널 벌하고 싶지 않으니.”

“……네, 전하.”

대공이 먼저 계단을 내려가자 그 뒤를 로운이 따랐다.

대공이 마지막 계단을 내려오자 집사가 다가와 깊이 허리를 숙였다.

“대공 전하.”

“일어나. 이것들이 전부 동방국에서 온 진상품들인가?”

집사가 허리를 바로 하며 대공을 진상품 앞으로 안내했다.

“네, 전하. 황실에서 전하의 앞으로 보내 준 동방국의 진상품이라 합니다.”

“형님께서 정말 많이도 보내셨군, 이 정도의 진상품을 마법진으로 보내려면 꽤나 많은 마나석을 사용했어야 했을 텐데 말이다.”

겨울이 되면 북방의 출입은 통제되고 있었다. 특히 수도로 이어지는 테이란 산맥은 겨울엔 절대 넘을 수 없는 혹독한 설산으로 바뀌기 때문에 상단 행렬이 북방으로 올 수 없었다.

“내 그리 많이 필요치 않다 하였는데.”

로운이 대공의 옆으로 다가오며 말했다.

“아마 이번 전쟁에 대한 포상도 따로 받지 않으신다 하니 더욱 신경이 쓰여 이렇게 보내신 게 아니겠습니까.”

“흠. 그러지 않으셔도 된다 하였건만. 이리 보내셨으니 곧 있을 1황자 전하의 생일 선물을 귀한 것으로 준비해야겠군. 로운, 네가 신경 쓰도록 해라.”

“네, 전하.”

진상품들을 확인한 대공은 집사에게 명령했다.

“저 백색 도자기와 부채만 내 집무실로 옮기고 나머지는 전부 창고에 넣어 두도록 해라.”

“네, 전하.”

집무실로 돌아가려 몸을 돌린 대공은 하녀들이 서 있는 곳을 보곤 걸음을 멈추었다.

“저 옷들은 세이아의 것들인가.”

대공의 물음에 로운과 집사의 시선이 하녀들이 들고 있는 옷들로 향했다.

집사는 매끄럽게 입꼬리를 올리며 대공의 물음에 답했다.

“네, 수도 살롱의 마담이 대공녀님을 위해 특별 디자인한 옷들입니다.”

특별히 디자인하여 제국에 단 하나밖에 없는 옷들.

그것도 수도에서 가장 유명한 의상 살롱의 디자이너가 하나하나 전부 수작업한 것이다.

고위 귀족들도 대기해서 한정된 수량의 옷을 받아야 할 만큼 유명한 의상 살롱 디자이너였다.

그런 디자이너가 직접 만든 옷들답게 하나하나가 예쁘고 사랑스러웠다.

“……예쁘군.”

대공의 칭찬에 집사의 얼굴이 밝아졌다.

옷을 가만히 보던 대공이 말했다.

“하론, 영지의 괜찮은 의상 살롱을 찾아 디아나의 옷도 주문하도록 해라.”

“네?”

예상치 못한 말에 집사가 순간 멍청한 얼굴을 했다.

디아나 아가씨의 옷을 주문하라, 직접 말씀하시다니.

지금 대공녀의 드레스도 대공의 명으로 산 게 아니었는데 말이다.

이런 사소한 일에 대공이 관심을 가진 적 없었다.

디아나를 자꾸 챙기는 대공의 모습을 집사는 이해하기 힘들었다.

하지만 빠르게 정신을 차린 집사는 떨떠름한 표정을 감추며 고개를 숙였다.

“네, 알겠습니다, 전하.”

대공은 태연한 얼굴로 로비를 떠났지만 로비에 남은 사용인들은 디아나에게 관심을 보이는 대공의 모습에 당황스런 눈빛을 한참이나 서로 주고받았다.

* * *

“날씨가 정말 좋네.”

겨울바람은 여전히 매서웠지만 오늘은 바람은 잦아든 대신 햇살이 쏟아지고 있었다.

산책로는 그늘진 곳 없이 햇살이 쏟아지고 있어 겨울의 차가움보다는 햇살의 따스함이 가득했다.

절로 좋아지는 기분에 미소를 그리며 걸음을 내디뎠다.

“내가 이곳을 떠날 때까지 이렇게 계속 평화롭다면 얼마나 좋을까.”

디아나는 머리 회전이 빠른 아이였다.

지금이야 이렇게 대공저에 머무르게 되었지만 언제까지 이곳에 머무를 순 없을 거란 걸 알고 있다.

세이아가 그녀가 너무 싫다 한마디만 해도 대공은 자신을 내보낼 테니까.

그래도 15살이 될 때까진 대공성에 살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성인식은 16살이었지만 그래도 15살이면 대공성을 나가더라도 작은 일들을 구할 수 있을 나이였다.

언제 이곳에서 쫓겨날지 모르니 대공가를 나가 혼자 살기 위해선 지금보다 많이 배워야 한다.

디아나는 이제 열 살인데도 제국에 대해, 아니, 이 대공가에 대해서도 아는 게 없었다.

“근데…… 그러려면 책을 읽을 줄 알아야 하는데…….”

디아나는 글을 모른다.

제국이든 뭐든 배우고 알기 위해선 책을 읽어야 하는데 글을 모르니 시작도 할 수 없었다.

시작하기도 전에 부딪힌 커다란 난관에 디아나는 미간을 좁혔다.

“글을 어떻게 배우지.”

혼자서 글을 배우는 것은 무리였다. 천재였다면 가능할지도 모르겠지만 자신은 천재가 아니니까.

그렇다고 대공에게 글을 배우고 싶으니 선생님을 붙여 달라는 말을 할 수도 없었다. 혹시나 주제넘는다고 생각할까 봐.

“일단은…… 혼자서 글자를 배울 책이 있는지부터 찾아볼까.”

과연 혼자 책을 보며 글을 배우는 게 가능한가 의문이 들었지만 일단 뭐든 시도해 보기로 했다.

집사는 대공성을 마음대로 돌아다녀도 된다고 했었다. 대공성 안에 서재가 있을 테니 일단 그곳에서 책을 찾아보는 게 좋을 듯했다.

“근데 내가 서재에 들어갈 수 있을까?”

서재는 대공의 개인적인 공간일 수도 있었다. 뭐 하나를 해 보려 할 때마다 가로막히는 문제들에 디아나는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좀 더 나이가 있었다면 영지 밖으로 나가 도서관을 찾았을 텐데.

하지만 디아나처럼 어린아이가 함부로 성을 나가는 것은 위험했다.

그렇다고 대공성 내에 친한 사용인이 있다면 모를까, 쿤타마저 고향으로 내려간 지금은 부탁을 할 만한 사람도 없었다.

“아…… 에드윈에게 부탁해 볼까.”

에드윈이라면 글을 잘 알고 아는 것도 많을 테니 많은 걸 배울 수 있을 것이다.

순간 표정이 밝아졌던 디아나는 이내 그가 대공가의 기사라는 것을 떠올렸다.

그가 자신에게 글을 가르쳐 주려면 자주 만나야 할 텐데 에드윈과 제가 친하다는 것이 대공성에 소문나 봐야 좋을 게 없을 것이다.

‘에드윈은 안 돼.’

제 작은 손을 보며 뭘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하던 그때, 어디선가 소란스런 소리가 들려왔다.

‘뭐지?’

디아나는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조심히 발걸음을 옮겼다.

산책로를 벗어나 수풀이 우거진 뒤쪽으로 가자 웅웅거리던 목소리가 선명하게 들렸다.

“내 물건을 훔친 주제에 어디서 눈을 똑바로 뜨고 노려보는 거야?”

“마리의 물건을 훔친 도둑 주제에 적반하장이라니, 정말이지 어쩌다 대공성에 이런 못된 아이가 들어온 건지 모르겠어.”

“어서 집사님께 말씀드리자. 매질을 당하고 내쫓겨야 정신을 차릴 거야.”

매질이라니.

디아나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하녀들의 뒷모습을 보았다. 그리고 시선을 살짝 돌리자 하녀들 앞에 주저앉아 있는 주홍빛 머리칼의 하녀가 보였다.

주홍색 머리를 가진 하녀가 누군가에게 밀쳐져 넘어진 것으로 보였다.

어린 하녀는 제 머리칼과 똑같은 주홍빛 눈동자를 이글거리며 하녀들을 바라보며 소리쳤다.

“난 훔치지 않았어! 난 마리의 목걸이는 본 적도 없다고! 그리고 갑자기 너희들 마음대로 내 물건들을 뒤져서 찾은 목걸이잖아!”

“그게 뭐가 중요하니? 네 가방에서 내 목걸이가 나왔다는 게 중요하지!”

“그 가방은 대공가에 들어온 뒤로 한 번도 열어 본 적 없는 가방이었어. 나랑 같이 방 쓰는 하린에게 물어봐, 난 가방에 손도 잘 대지 않았으니까!”

“내, 내가 왜 굳이 물어야 해? 어차피 내 목걸이는 네 가방에서 나왔으니 다 끝난 일인데! 괜히 집사님께 매질을 당하기 전에 네가 알아서 대공성을 나가!”

마리라 불리는 하녀의 목소리가 살짝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

대충 들은 것이었지만 저 마리라는 하녀가 주장하는 도둑질의 정황이 상당히 어설프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하녀들 간의 괴롭힘인가.’

별채에 머무르며 대공가의 사용인들과 가까이 지냈기에 가끔씩 하인들끼리의 괴롭힘에 대해 들은 적이 있었다.

새로 들어온 하녀와 하인들에게 텃세를 부리면 괴롭힘을 못 견딘 자들이 대공성을 나간다고 말이다.

그런 일들이 한 1년 전쯤 심해진 적이 있었다. 그때 집사와 하녀장이 사용인들을 크게 혼내 뒤로는 이런 일이 없어졌다고 들었는데…….

‘다시 또 시작된 건가.’

디아나는 상황을 지켜보다 고개를 내저었다.

‘내가 상관할 일이 아니야.’

억울해 보이는 하녀에겐 미안하지만 디아나의 대공가에서의 위치도 많이 위태로웠기에 이런 분란에 끼어드는 것은 좋지 못했다.

소란의 중심에 휘말렸다 자칫하면 당장 대공가에서 쫓겨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디아나가 조용히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한 순간 어린 하녀의 눈물 맺힌 주홍빛 눈이 보였다.

주홍빛 눈동자에 억울함이 가득했지만 어린 하녀는 답답한 상황에 아무도 자기편이 없다는 것을 알았는지 입술을 꾹 깨물었다.

억울하지만 어쩔 수 없이 체념하는 그 모습을 본 순간 디아나는 돌아설 수가 없었다.

저 하녀가 어떤 심정인지 디아나가 누구보다 잘 알았으니까.

디아나는 늘 간절히 바랐었다. 막막한 상황 속에서 자신을 구해 줄 누군가를.

그리고 그 간절한 기도를 신께서 들어주신 건지 지금 디아나는 레아에게서 벗어나 있었다.

절대 벗어날 수 없을 거 같았던 폭력 속에서 살아남은 것이다.

지금 내가 가 버리면 저 하녀는 매질을 당할 거야.

내가 레아에게 맞았던 거처럼.

상상만으로도 디아나의 몸이 저릿했다.

레아에게 맞은 멍은 나았지만 기억 속에 남은 아픔은 아직 선명했으니까.

내가 도와줘야 해.

디아나는 떨리는 마음에 작은 손을 꼭 그러쥐며 한 걸음 그들에게로 다가갔다.

“거기 무슨 일이야?”

수풀을 울리는 디아나의 목소리에 등을 보이고 있던 하녀들이 화들짝 놀라며 몸을 돌렸다.

“……아가씨?”

디아나를 발견한 하녀 한 명이 느리게 입술을 움직였다. 하녀들은 당황한 표정을 보이면서도 마치 ‘네가 왜 이곳에 있냐’는 눈빛으로 디아나를 바라보았다.

디아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하녀들에게 다가갔다.

“산책하다가 소리가 들리기에 와 봤는데…… 어, 너는!”

아무것도 모르겠단 순진무구한 눈빛으로 하녀들을 둘러본 디아나는 넘어져 있는 어린 하녀를 보며 한 걸음 다가갔다.

“넌 아까 내가 심부름을 시킨 하녀잖아? 쿠키를 가져다 달라고 했는데 왜 안 오나 했더니, 넘어져서 다친 거야?”

디아나와 시선이 마주친 어린 하녀의 주홍빛 눈동자가 당황으로 흔들렸다.

그녀는 디아나에게 그런 심부름을 받은 적이 없었으니까.

디아나는 주변에 모여 있는 하녀들을 둘러보다 무섭다는 듯 어깨를 살짝 움츠렸다.

“근데…… 왜 다들 여기에 모여 있는 거야? 무슨 일 있는 거야?”

말끝을 흐리며 작은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묻자 하녀들은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무언의 눈빛을 주고받던 그들 중 하나가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라뇨, 아무 일도 없습니다. 그저 쉬는 시간이라 잠시 이야기를 나누던 중이었어요.”

“네, 맞아요, 아가씨.”

그들은 어색한 미소를 띠며 디아나를 바라보았다. 디아나가 끼어든 이상 더 소란을 만들 필요 없다고 결론을 내린 모양이었다.

디아나는 한없이 어색한 그들의 미소를 보며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구나, 난 또 안 좋은 일이라도 생긴 줄 알았어.”

“그럴 리가요, 호호. 아, 저희는 이제 쉬는 시간이 끝나서 이만 일하러 가 봐야 할 거 같아요. 아가씨, 먼저 물러가 보겠습니다.”

“물러가 보겠습니다.”

하녀들은 황급히 인사를 하고 빠른 걸음으로 숲을 나갔다. 그들이 다 사라지고 난 뒤 디아나는 저를 빤히 보고 있는 어린 하녀에게 말했다.

“너도 가야 하지 않아?”

“아…… 가야 합니다.”

하녀는 그제야 넘어졌던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녀는 일어나며 다리를 절뚝였다.

아마 넘어질 때 다리를 접질린 거 같았다.

“다리 다친 거 같은데 괜찮아?”

그녀의 오른쪽 다리를 가리키며 묻자 하녀가 움찔했다.

“아…… 괜찮습니다, 아가씨.”

“그래도 나중에 자기 전에 차가운 물에 발을 좀 담갔다가 자. 아니면 내일 아침 퉁퉁 부을지도 몰라.”

레아에게 맞아 다리를 접질렸을 때, 움직일 힘도 없어 그대로 누워 잠들었다가 다음 날 발목이 퉁퉁 부어 제대로 걷지도 못한 적이 있었다.

몇 번의 경험으로 차가운 물에 발목을 담그고 잔 다음 날엔 발이 붓지 않는다는 걸 알았다.

그 아픔을 알기에 말해 주자 하녀의 주홍빛 눈동자가 살짝 떨렸다.

‘내가 뭘 잘못 말한 건가?’

그녀의 반응에 당황한 그때 하녀가 활짝 미소를 지었다.

“감사합니다, 아가씨. 말씀해 주신 대로 꼭 차가운 물에 담글게요. 한데 아가씨, 아까 제게 심부름을 시키셨다고…….”

그 말에 디아나는 이제야 생각났다는 듯 손뼉을 치며 그녀의 말을 잘랐다.

“아, 생각해 보니 네가 아니었어. 다른 사람이었는데 내가 착각하고 말았네. 미안.”

도와주려 일부러 그랬다고 말하는 것보다 착각했다고 하는 것이 좋을 듯했다.

어린 하녀는 잠시 말없이 디아나를 보다 밝아진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미안하시다뇨. 아니에요, 오히려 제가 감사한걸요. 아가씨 덕분에 큰 화를 피할 수 있었거든요.”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지만 다행이야.”

디아나는 모르는 척 옅은 미소만 지어 보였다. 하녀는 그런 디아나에게 부드러운 미소를 그리며 말했다.

“저도 이만 돌아가야 해서…… 그럼 정말 감사했습니다.”

“……응.”

허리를 숙여 인사한 어린 하녀는 급한 걸음으로 숲을 벗어났다.

절뚝거리는 걸음이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그래도 밝은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을 보니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후, 아무 일 없이 마무리돼서 다행이다.”

소란에 끼어든 것은 조금 위험한 행동이긴 했지만 그래도 잘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디아나는 뿌듯한 미소를 지으며 방으로 돌아갔다.

* * *

똑똑-.

“아가씨, 하론입니다.”

아침을 먹고 침대에 누워 쉬고 있던 디아나는 집사의 목소리에 후다닥 침대에서 내려왔다.

‘갑자기 무슨 일이지?’

디아나가 이 방에 머무른 지도 벌써 5일째, 산책로에서의 소란을 겪은 뒤로 디아나는 줄곧 방에서 쥐 죽은 듯이 지내고 있었다.

세이아도 무슨 마음인지 첫날 이후론 다시 디아나를 찾아오지 않아 며칠 동안 조용하고 평화로운 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집사의 갑작스런 방문이 당황스럽게 느껴졌다.

디아나는 구겨진 원피스를 펴며 말했다.

“들어와.”

디아나는 열린 문 사이로 보이는 것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문이 열리고 제일 먼저 들어온 사람은 집사가 아닌 하인들이었다.

하인들은 각자 들고 있던 커다란 상자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이게 다 뭐지?’

낯선 상자들에 고개를 갸웃하던 그때, 하인들이 모두 나가고 집사가 방으로 들어왔다.

“아가씨, 지내시는 데 불편함은 없으신가요?”

“아…… 응, 없어. 근데 이건 다 뭐야?”

“아가씨의 옷입니다.”

“내 옷?”

놀라서 되묻자 집사는 태연한 얼굴로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대공 전하께서 아가씨의 옷을 구입하라 명하셨습니다. 영지의 살롱에서 상급으로만 가져왔습니다만 혹 살펴보시고 마음에 안 드시는 옷들이 있다면 하녀를 통해 돌려주시면 됩니다.”

집사의 설명이 귀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이 많은 옷들을 대공 전하가 보낸 거라니.

상자들을 당혹스런 눈빛으로 보던 디아나는 문득 며칠 전 대공과 나누었던 말이 떠올랐다.

- 옷이 이것밖에 없어서요…….

‘설마 내가 옷이 없다는 말을 했다고 정말 옷을 사 준 거야……?’

그것도 이렇게나 많이?

디아나는 수십 벌의 옷들을 보며 놀람을 감추지 못했다.

고맙다기보다 부담되었다.

이런 호의에 익숙치 않아서 그런 것도 있지만 대공이 저택으로 자신을 받아 준 것은 충동적인 결정이 아니었을까, 계속 생각하고 있었다.

헌데 이렇게 방을 꾸며 준 것도 모자라 자신의 말을 기억하고 옷까지 보내 주니 자신을 진심으로 생각하는 게 아닐까, 하는 낯선 기분이 들었다.

산책로로 나가기 전 그가 제게 했던 말도 처음 만남과 달리 부드러웠다.

착각이라 치부했었는데 그게 착각이 아니었던 걸까.

디아나는 이내 작게 고개를 저었다.

그가 자신을 걱정하고 신경 쓴다니, 말이 안 되는 일이다.

그는 레아를 죽일 듯 경멸한다. 대공이 레아를 얼마나 무서운 눈빛으로 바라보는지 직접 보았었다.

그리고 자신은 그가 그토록 경멸하는 레아의 딸이었고.

디아나는 계속되는 대공의 호의가 이해되지 않았다.

그러다 문득 자신을 도와주었던 쿤타가 떠올랐다.

몰래 빵을 챙겨 주던 쿤타의 동정심 가득하던 눈빛.

‘대공 전하도…… 날 동정하는 걸까.’

동정…….

그렇게 생각하자 이상하게 디아나의 마음이 욱신거렸다.

쿤타가 자신을 동정할 땐 아무렇지 않았는데…….

대공이 자신을 동정한다 생각하니 슬퍼졌다.

대공에게 애정을 바란 적은 없었지만 그래도 대공이 자신을 챙겨 주는 이유가 동정인 건…… 마음이 아팠다.

그리고 그가 베푸는 작은 호의에 자꾸만 디아나의 마음이 흔들리고 있었다.

차라리 쥐 죽은 듯이 조용히 지내라는 일갈을 전해 받았다면 이렇게 마음이 뒤숭숭하진 않을 텐데.

이상한 기분에 입술을 깨물던 그때, 방문 쪽에서 듣고 싶지 않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디아나.”

고개를 돌리자 방 안으로 막 들어서는 세이아의 모습이 보였다.

‘한동안 너무 조용하다 했었지.’

디아나는 불편한 마음을 감추며 세이아에게 고개를 숙였다.

세이아는 집사가 있어서인지 입가에 미소를 띠며 디아나에게 다가왔다.

“디아나, 잘 지냈어?”

“네, 대공녀님.”

“너한테 자주 오고 싶었는데 아버지께서 굳이 너에게 신경 쓸 필요 없다고 말씀하셔서 오지 못했어.”

“아, 그렇군요. 괜찮습니다, 대공녀님.”

세이아는 기분 나쁘라고 한 말이겠지만 지금 디아나가 대공에 바라는 것은 차라리 무관심이었다.

아무렇지 않게 살짝 미소를 지으며 답하자 세이아의 올라간 입매 끝이 살짝 움찔거렸다.

‘상처받은 척할 걸 그랬나.’

괜히 세이아의 신경을 건드린 건가 싶어 올렸던 입꼬리를 내린 그때, 세이아의 시선이 아래로 내려갔다.

정확히는 바닥에 놓여 있는 수십 개의 상자들을 향해서 말이다.

“근데 이게 다 뭐야?”

세이아는 딱 봐도 선물 상자로 보이는 상자들을 집요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이걸 하필 세이아가 보게 되다니, 낭패감이 들었다.

세이아의 성격상 이 옷들을 대공이 보낸 것이라는 걸 알게 되면 절대 가만두지 않을 테니까.

물론 아무 일 없어도 세이아는 디아나를 괴롭히겠지만 말이다.

세이아의 분노에 불을 붙일 게 뻔하기에 쉽게 입을 떼지 못하고 있던 그때, 집사가 말했다.

“대공녀님, 이것들은 디아나 아가씨의 옷들입니다.”

“디아나의…… 옷?”

디아나는 세이아의 눈빛이 살짝 떨리는 것을 보았다. 하지만 집사는 보지 못한 것인지 세이아를 향해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네, 대공녀님.”

집사의 말을 들은 세이아는 디아나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디아나는 순간 마주한 세이아의 눈빛에 흠칫 걸음을 뒤로 물러날 뻔했다.

눈빛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었다면 디아나는 지금 죽고 없었을 것이다.

그 정도로 번뜩이는 눈빛으로 디아나를 보던 세이아는 갑자기 환한 미소를 지었다.

‘뭐지?’

돌연 바뀐 세이아의 태도에 디아나의 팔에 소름이 돋아나던 순간, 세이아가 디아나에게 한 걸음 다가왔다.

“디아나, 우리 같이 받은 옷들을 구경하자, 응? 얼마나 예쁜 옷들이 들어있을지, 너에게 잘 어울릴지 너무 궁금해.”

세이아는 친한 척 디아나의 팔을 덥석 잡았다.

디아나는 본능적으로 세이아의 팔을 밀칠 뻔한 것을 참았다.

‘세이아가 대체 무슨 생각인 거지?’

세이아의 의중이 뭔지 알 수 없었지만 싫다 할 수 없으니 디아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대공녀님.”

“마리, 들어와서 상자들을 풀어 줘.”

‘마리? 들은 적이 있는 이름 같은데.’

익숙한 이름에 고개를 갸웃하던 디아나는 방 안으로 들어온 하녀의 얼굴을 보자 기억이 났다.

마리는 산책로 수풀에서 어린 하녀를 괴롭히던 하녀들 중 한 명이었다.

디아나와 눈이 마주친 마리 또한 그날의 일이 떠올랐는지 황급히 시선을 피했다.

대공성에서 일하는 수많은 하녀 중에 하필 마리가 세이아의 하녀였다니.

문득 그 주인에 그 하녀란 말이 딱 떠올랐다.

마리가 상자의 리본을 하나씩 풀어 상자를 열자 세이아는 디아나의 손을 꽉 잡으며 상자로 이끌었다.

“와, 이 옷 너무 예쁘다. 그치, 디아나.”

세이아는 상자에 담긴 드레스 중 제일 눈에 띄는 디자인의 드레스를 가리켰다.

연분홍색 드레스는 화려하진 않았지만 가슴팍에 리본 모양 레이스가 달려 제법 귀여웠다.

디아나는 세이아의 악력 때문에 드레스의 디자인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지만 떨어지지 않는 입술을 억지로 움직였다.

“……네, 예뻐요, 대공녀님.”

‘아파.’

대체 뭘 먹기에 이리 힘이 좋은 건지 디아나는 세이아의 손에 제 손이 부러질 것만 같았다.

순간 세이아가 손을 놓으며 상자 속의 드레스를 꺼냈다.

그녀는 순진무구한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몸에 드레스를 갖다 대었다.

“어때, 디아나? 입으면 더 예쁠 거 같아?”

“어머 대공녀님, 너무 예쁘세요. 꼭 대공녀님의 옷처럼 너무 잘 어울려요.”

디아나가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마리가 기다렸다는 듯 호들갑을 떨며 말했다.

그러자 옷을 대보며 웃고 있던 세이아의 얼굴이 갑자기 시무룩해진 표정으로 바뀌었다.

“아냐, 마리. 이건 내 옷이 아닌걸. 난 그냥 입으면 더 예쁠 거 같아서 디아나에게 보여 준 것뿐이야. 물론 나도 분홍색 정말 좋아하긴 하지만…….”

“아……. 하지만 옷이 대공녀님과 너무 잘 어울리세요, 그렇지 않나요?”

‘지금 나한테 묻는 건가.’

디아나는 자신을 바라보는 마리와 시선이 마주쳤다.

자신의 말이 맞지 않느냐는 마리의 눈빛에 디아나는 세이아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여전히 시무룩한 얼굴로 드레스의 레이스를 만지작거리고 있는 세이아.

그 모습을 보자 디아나는 세이아가 지금 왜 이러는 것인지 알아차릴 수 있었다.

세이아는 지금 자신이 먼저 저 드레스를 세이아에게 주겠단 말을 하길 바라는 것이었다.

분홍 드레스가 예쁘긴 했지만 지금 세이아가 입고 있는 드레스에 비하면 급이 상당이 떨어진다는 건 그냥 눈으로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그러니 세이아가 정말 이 드레스가 마음에 들어 이런 행동을 하는 것은 아닌 거다.

그저 디아나의 것을 뺏고 싶어서.

집사 앞에서 디아나의 드레스를 찢어 놓을 순 없으니 다른 방법을 선택한 것이다.

디아나는 드레스를 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네 말대로 대공녀님에게 잘 어울려.”

어차피 이 옷들은 디아나의 마음을 불편하게 할 뿐이었으니 세이아가 가져가도 상관없었다.

“어머, 아니야, 디아나. 난 그냥 한번 대본 것뿐이야.”

“아니에요, 대공녀님. 지금 보니 드레스가 대공녀님에게 너무 잘 어울리는걸요. 제가 아닌 대공녀님이 입으시는 게 맞을 거 같아요.”

“정말? 아, 난 괜찮은데…… 이건 디아나의 옷이잖아.”

“……전 어차피 그런 화려한 옷은 필요가 없는걸요. 일상복 몇 개만 있으면 돼요.”

“하긴…… 디아나는 딱히 외출할 일이 없지. 아버지께서 너에게도 이곳저곳을 다니게 해 주시면 좋을 텐데…….”

세이아는 디아나가 안쓰럽다는 듯 말하면서 분홍 드레스를 마리에게 넘겼다.

“디아나가 필요 없다니 나라도 입는 게 좋겠어. 버리면 아까우니까.”

“네, 대공녀님.”

마리가 세이아에게서 드레스를 받아들던 순간, 가만히 있던 집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리, 그 드레스는 다시 상자로 내려놓거라.”

집사의 말에 디아나와 세이아, 마리의 시선이 그를 향했다.

다시 내려놓으라니, 자신이 잘못 들은 건가 싶어 집사를 보는데 당황한 듯한 세이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집사? 이건 디아나가 나에게 준 선물이야. 집사도 들었잖아. 디아나는 이 옷이 필요 없다고 한 거.”

“네, 대공녀님. 저도 들었습니다.”

“근데 왜 다시 놔둬?”

세이아의 표정이 살짝 굳었음에도 집사는 온화한 미소를 그리며 말했다.

“대공녀님, 그 옷은 대공녀님이 입기에는 재질이 그리 좋지 않습니다. 대공녀님께서 저 디자인이 마음에 드신다면 똑같은 디자인으로 의상 살롱에 주문을 넣도록 하겠습니다. 하니 저 옷은 입지 않으시는 게 좋을 듯합니다.”

“아…… 그래서 만졌을 때 까끌거리는 느낌이 있었구나. 재질이 별로라니……. 집사, 디아나의 옷도 좋은 재질로 사 주지 그랬어.”

“다음번엔 더 신경 쓰도록 하겠습니다.”

집사는 디아나가 아닌 세이아에게 죄송하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세이아는 아까와 달리 기분이 풀렸는지 굳은 얼굴을 펴며 마리에게 말했다.

“마리, 옷을 다시 상자에 넣어 둬.”

“네, 대공녀님.”

“디아나, 내가 말했으니 다음번엔 집사가 더 좋은 옷으로 사 줄 거야. 지금은 옷이 없으니…… 이거라도 입고 지내.”

마리가 옷을 대충 접어 상자에 넣어 놓는 것을 보고 있던 디아나는 고개를 들지 않고 답했다.

“네, 감사합니다, 대공녀님.”

“아냐, 내가 당연히 널 신경 써야지. 난 이제 승마 수업이 있어서. 그럼 다음에 봐.”

세이아가 마리와 함께 방을 나가자, 디아나는 가만히 상자 안의 옷들을 바라보았다.

‘차라리 세이아가 다 가지고 가는 게 더 나았을 텐데.’

대공의 호의에 마음이 복잡해지던 그때 집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가씨, 옷이 마음에 안 드신다면 다른 옷들로 바꿔 드리겠습니다.”

디아나와 눈이 마주치자 집사는 답지 않게 먼저 시선을 아래로 떨어뜨렸다.

아마도 디아나를 앞에 두고 대놓고 그 옷들은 재질이 나쁜 옷들이라 말한 것이 걸리는 모양이었다.

‘난 괜찮은데.’

그간 입었던 옷들에 비하면 이 옷들은 최고급에 속했으니까. 또, 그녀는 대공성에서의 제 처지를 잘 알았다.

거기다 오늘 세이아의 행동은 평소에 비하면 귀여운 정도였다.

대놓고 천것이니 더러운 것이라는 말도 하지 않았으니까.

세이아가 퍼붓는 악담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린 지 오래였다.

“괜찮아. 이거면 충분해.”

아무렇지 않게 답하자 집사는 잠시 말이 없다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알겠습니다. 아가씨, 더 필요하신 게 있으시다면 언제든 말씀해 주십시오.”

필요한 거…….

한 가지 중요한 일이 떠오른 디아나는 방을 나가려는 집사를 불렀다.

“아, 집사.”

“네, 아가씨.”

방을 나가려던 집사가 뒤를 돌아보았다.

“어느 곳이든 가도 좋다고 저번에 그랬잖아.”

“네.”

“그럼 나 대공가의 서재 같은 곳도 가도 돼?”

“서재…… 혹 도서관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응.”

고개를 살짝 끄덕이자 집사는 잠시 묘한 눈빛으로 디아나를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도서관이라면 가셔도 괜찮습니다. 도서관은 저택의 본관을 나가셔서 오른쪽 복도로 쭉 가시다 보면 음…… 혼자 찾기는 어려우실 테니, 복도를 지나가는 하녀나 하인들에게 위치를 물어보시면 찾기 편하실 겁니다, 아가씨.”

“응, 고마워.”

“그럼 전 이만 가 보겠습니다.”

집사가 방을 나가자, 디아나는 가지런히 정리된 옷장 앞에 섰다.

“예쁘긴 정말 예쁘다.”

디아나는 레이스가 달린 원피스부터 어깨에 리본 장식이 들어간 드레스 그리고 반짝이는 구슬 같은 게 촘촘히 박힌 원피스들을 차례로 보며 미소를 지었다.

레아가 사 준 옷보다 훨씬 좋은 옷들.

거기다 옷이랑 잘 어울리는 머리핀과 신발까지 있었다.

여전히 언제 쫓겨날까 불안함은 가득했지만. 옷장을 가득 채운 것들을 보니 어쩔 수 없이 입꼬리가 올라갔다.

“일단 옷을 갈아입고 가는 게 좋겠지?”

지금 입고 있는 옷은 실내용이라 밖에 나갈 때 입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레아가 사 준 옷은 두 번 다시 입기 싫었고.

“뭘 입어볼까?”

디아나는 작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옷을 골랐다.

디아나는 작은 알갱이 같은 보석이 촘촘히 박힌 아이보리색 일상용 드레스를 꺼내 갈아입고 레아가 사 준 옷을 상자에 넣어 방을 나섰다.

* * *

“에드윈의 실력이 날이 갈수록 좋아지더군.”

기사단 연무장에서 에드윈의 훈련을 직접 주관하고 돌아가는 길에 대공이 로운에게 말했다.

대공은 에드윈에게 많은 관심을 두고 있었다.

대공의 관심을 받는 것은 에드윈에게 상당히 영광스러운 일이긴 했지만 그 관심이 상냥하진 않았다.

로운은 아까 연무장에서 대공에게 신명 나게 얻어맞던 에드윈을 떠올리다 답했다.

“에드윈의 습득 능력이 뛰어난 거 같습니다만 그래도 전하께서 조금 봐주시지 그러셨습니까. 아까 보니 너무 맞고 있던데요?”

“제국 최고의 기사단의 유망주인데 그 정도 훈련은 당연히 견뎌야지. 그래도 갈수록 몸이 빨라지고 있더군.”

그리고 난 이미 충분히 많이 봐주고 있어.

대공이 낮게 덧붙였다.

진심으로 검을 휘둘렀다면 오늘 에드윈의 뼈 몇 개는 부러졌을 테니까.

로운이 가벼운 웃음을 흘렸다.

대공의 실력은 누구보다 로운이 잘 알았다.

대공이 에드윈을 많이 봐준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압니다. 농담이었습니다. 그보다 전하, 에드윈의 실력이 나날이 좋아지니 다가오는 제국 검술 대회에 대공가의 대표로 에드윈을 내보내도 좋을 듯합니다.”

대공은 잠시 고민하듯 미간을 살짝 좁히다 답했다.

“그래, 그것도 나쁘지 않겠군.”

매년 봄이 되면 열리는 제국의 검술 대회.

신분의 제한 없이 열리는 검술 대회였기에 수많은 용병들과 검 좀 쓴다 하는 평민들도 참가하지만 사실상 우승은 언제나 귀족 가문의 기사들이었다.

무투 대회가 열리면 각 귀족 가문에선 자신들의 기사단에서 가장 강한 검사를 내보내 가문의 명성을 높이려 했다.

10년 전까지만 해도 검술 대회의 우승자는 언제나 대공가에서 나왔지만, 대공비의 죽음 이후 대공이 전장으로 떠난 뒤부터 대공가에선 검술 대회에 기사를 내보내지 않았었다.

하지만 이젠 대공이 돌아왔으니 곧 있을 검술 대회에 대공가의 기사를 내보내야 할 것이다.

제국의 최고 무가는 명실상부 테라비타 대공가였으니까.

“봄에 있을 검술 대회를 준비하려면 에드윈의 훈련 강도를 더욱 높여야겠군.”

“네? 아, 네.”

불쌍한 에드윈. 로운이 속으로 에드윈의 앞날에 위로를 전하고 있을 즈음, 대공의 걸음이 갑자기 멈추었다.

“전하?”

로운은 갑자기 걸음을 멈춘 대공이 무언가를 바라보고 있단 걸 알아차렸다.

대공의 시선을 따라 시선을 옮기자 하얀색 비슷한 원피스를 입은 작은 아이가 보였다.

디아나였다.

로운은 디아나의 뒷모습에 미간을 좁혔지만 대공은 디아나의 뒷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집사가 준비한 옷을 입은 건가.’

마지막으로 보았던 옷이 아닌 새로운 옷인 것을 보니 집사가 그의 명령을 제대로 수행한 듯했다.

‘한데, 어딜 가는 거지.’

디아나가 향하는 곳엔 아이가 걸을 만한 산책로 같은 곳도 없었다. 의문을 가진 대공이 디아나의 뒷모습을 가만히 보던 그때, 디아나가 발을 헛디뎠는지 몸을 크게 휘청거렸다.

털썩.

결국 앞으로 넘어진 디아나의 모습에 대공이 저도 모르게 몸을 움찔거렸다.

“…….”

“이런…….”

꽤 크게 넘어진 디아나의 모습에 로운도 놀라 목소리를 낸 순간 디아나는 아무렇지 않게 치맛자락을 털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디아나는 그렇게 아픈 티 하나 내지 않고 어디로 가는 것인지 작은 발을 열심히 움직이며 빠르게 사라졌다.

디아나가 코너를 돌아 사라지고 난 뒤 로운은 대공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대공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디아나가 사라진 자리에서 눈을 떼지 않고 있었다.

‘전하께선 대체 왜 저 아이를 이토록 신경 쓰시는 거지?’

로운은 아무리 이해하려 해봐도 대공이 디아나를 거두는 것이 이해되지 않았다.

디아나는 인간 같지도 않은 레아의 딸이었으니까.

원래 아이들이라면 다 좋아하는 그였지만 레아의 딸인 디아나는 아이라고 해도 싫었다.

레아가 벌인 일이 너무나 경멸스러웠으니까.

레아의 사랑을 받고 자라진 않았다곤 하지만 어쨌든 레아의 피를 받은 아이가 아닌가.

로운은 핏줄을 무시할 수 없다 생각했다.

저 아이가 자라나며 레아처럼 안된다는 보장이 어딨는가.

하지만 대공은 디아나를 레아와 별개로 보겠다고 했다.

로운이 대공을 주인으로 모신 지도 벌써 15년.

짧지 않은 시간 동안 대공을 모시며 대공의 냉정하고 냉철한 모습을 봐 왔던 그였기에 더욱 이해하기 힘들었다.

이성적으로 판단한다면 쓸데없는 불씨가 될 수 있는 디아나를 거둘 이유가 없었으니까.

디아나를 동정해서라기에도 대공은 잔정에 흔들리는 인물이 아니었다.

하지만 디아나에 대해 더 이상 말을 꺼내지 말라는 경고를 받았기에 로운은 할 말이 많아도 참아야 했다.

로운이 묻고 싶은 말들을 꾹 참으며 시선을 내렸다.

그때 대공이 나직이 중얼거렸다.

“혼자 다니는 게 위험해 보이는군.”

“…….”

“하녀를 한 명 붙여 줘야 하나…….”

하녀라니.

가계도에도 오르지 못한 사생아에게 어느 귀족이 하녀를 붙여 준단 말입니까.

로운은 목구멍까지 차오른 말을 참지 못하고 시선을 든 순간 대공과 눈이 마주쳤다.

대공은 그런 로운을 보며 피식, 싱거운 웃음을 흘렸다.

“불만이 상당히 많아 보이는구나.”

“아닙니다.”

다 안다는 대공의 눈빛에 로운이 시선을 내렸다.

“로운, 아리엘이 내게 그랬었다. 어른들의 싸움에 죄 없는 아이는 희생시키지 말라고 말이야. 디아나는 이미…… 많은 고초를 겪었고 난 아리엘의 말을 지키고 싶다.”

“……대공비께서 그런 말씀을 하셨었는지 몰랐습니다.”

대공비의 말을 지키고 싶다는 대공의 말에 로운은 이때까지 이해 가지 않던 대공의 마음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

대공이 대공비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잘 알고 있으니까.

어른들의 싸움에 아이를 희생시키지 말자.

참으로 대공비다운 말이었다.

- 로운, 네가 보는 것들만이 진실이라고 너무 확신하지 마. 때론 눈에 보이지 않는 진실들이 숨어 있을 때도 있으니까.

그리고 문득 대공비가 그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왜 갑자기 이 말이 떠오르는 걸까.

디아나 아가씨.

디아나와 관련된 주변 상황은 전부 무시하고 단지 레아의 딸이란 이유만으로 경멸하고 있었다.

아직도 그 마음은 여전했지만…….

“로운, 안 가나?”

“아, 네.”

로운은 어느새 앞서가는 대공의 뒷모습에 디아나의 생각을 접으며 대공의 뒤를 따라갔다.

* * *

“생각보다…… 크네.”

복도에서 마주친 하녀에게 도서관의 위치를 안내받아 도착한 디아나는 생각했던 것보다 넓은 도서관의 내부를 동그래진 눈으로 둘러보았다.

2층으로 이루어진 내부는 책들로 가득 차 있었다.

이곳에서 태어나 책이란 걸 한 번도 보지 못하고 자라서인가, 책장을 가득 메운 책의 모습이 새삼 신기하게 느껴졌다.

“너무 좋다.”

생경한 광경에 감탄을 느끼며 책장을 둘러보던 것도 잠시, 디아나는 수많은 책들이 있어도 이것들이 어떤 책인지 그녀가 찾고 있는 책이 어디 있는지를 알 수가 없었다.

디아나는 글을 몰라 책의 제목을 읽을 수 없었으니까.

꼬불꼬불한 글자들을 이리저리 보던 디아나는 작은 한숨을 내쉬며 책을 제자리에 꽂아놓았다.

거기다 책장의 높이가 높아 그녀의 손이 닿지 않는 책들이 너무 많았다.

“이래서야 책을 찾을 수도 없겠다.”

‘여기를 관리하는 사람은 없나?’

디아나는 도서관을 이리저리 둘러보았지만 보이는 사람은 없었다.

“어떡하지.”

스스로 찾아보려 책상을 두리번거렸지만 혼자 하기엔 도서관이 너무 크고 넓었다.

글을 배우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은데 첫 시작부터가 쉽지 않았다.

글자 책을 찾지도 못하고 있었으니까.

아무도 없는 넓은 도서관이 괜히 서럽게 느껴져 디아나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혼자서도 잘 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첫 단계부터 막혀버리다니.

‘하녀라도 불러와야겠어.’

우울한 생각도 잠시 도움을 받아야겠다고 생각한 그때 고요하던 도서관에 낯선 소리가 들렸다.

‘누구지?’

누군가의 발소리에 디아나는 저도 모르게 책장 뒤로 몸을 숨겼다.

생각해 보면 딱히 숨을 이유는 없었지만 본능적으로 한 행동이었다.

책장 뒤에서 고개를 빼꼼 내밀어 방문객의 모습을 살폈다.

“어…….”

익숙한 하늘색 머리칼이 보였다.

그에 디아나는 반색하며 책장 뒤에 숨겼던 몸을 일으켰다.

“에드윈.”

이름을 부르자 책장으로 향하던 에드윈이 디아나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디아나를 발견한 그의 녹빛 눈동자가 놀란 듯 커졌다.

“아가씨?”

디아나는 놀란 듯한 그에게로 쪼르르 달려갔다.

그러자 에드윈이 한쪽 무릎을 굽히며 몸을 낮추었다.

“에드윈, 잘 지냈어?”

습격을 당했던 그날 이후로 처음 보는 것이었다.

반가워서 미소를 짓자 에드윈의 눈이 부드럽게 휘어졌다.

“전 언제나 잘 지내고 있습니다. 아가씨는 몸은 이제 다 나으신 건가요?”

“응, 이제 다 나았어. 멀쩡해. 그때 구해 줘서 고마워.”

“아닙니다. 전 그저 제가 할 일을 했을 뿐인걸요. 한데 아가씨, 이곳엔 어쩐 일이신가요? 그보다 혼자 오신 건가요?”

에드윈은 디아나의 뒤로 누가 더 있을 거라 생각하는지 눈을 이리저리 굴렸다.

“응, 혼자 왔어.”

“……그렇군요.”

“에드윈, 혹시 바빠?”

“아뇨, 훈련이 끝나 몇 시간 동안은 자유 시간입니다.”

“그럼 나 좀 도와줄 수 있을까.”

조심스럽게 그에게 묻자 그의 얼굴에 의아함이 서렸다.

“무엇을 도와드리면 될까요?”

“글자를 배울 수 있는 책을 찾아줬으면 좋겠어.”

“글자…… 말씀이시군요. 혹시 아가씨께서 배우시려는 건가요?”

에드윈의 조심스런 질문에 난 곧장 고개를 끄덕였다.

“응.”

“아…… 네.”

에드윈은 내색하지 않으려 했지만 속으로 몹시 놀라고 있었다.

10살 난 아이가, 그것도 귀족가에서 자라난 아이가 글자를 모르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니까.

대공성의 사용인들마저 전부 글을 알고 있으니 디아나가 글을 모르는 것은 상당히 이상한 일이었다.

그 여자 때문이겠지.

디아나를 학대한 친모. 그 여자가 글도 안 가르쳐 준 것이다.

에드윈은 레아를 향해 차오르는 분노를 삼켰다.

그는 디아나에게 티 내지 않으며 미소를 그렸다.

“음, 글을 처음 배우시는 거면 그림책으로 보시는 게 편하실 겁니다. 한데 이곳에 그런 책이 있을지…… 아가씨, 일단 저쪽으로 가실까요?”

에드윈은 도서관 중앙에 있는 소파를 가리켰다.

“응.”

에드윈은 디아나를 소파에 앉혀 주고 책장들이 즐비한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책을 찾는 듯 여기저기를 살피던 그는 곤란한 얼굴로 돌아왔다.

“역시 이곳엔 그림책이 없네요.”

“그래?”

“이 도서관은 대공가에서 일하는 사용인들과 기사들을 위해 만들어 놓은 곳이라 어린아이를 위한 책은 잘 없답니다.”

“아…….”

디아나는 괜찮은 척하려 했지만 실망을 감출 수 없었다.

도서관에서 에드윈을 본 순간 이제 해결되었구나 하고 반색했었는데 역시 일은 쉽게 풀리지 않았다.

“어쩔 수 없지.”

디아나는 자신이 계속 시무룩해하면 에드윈이 더 곤란해할 거 같아 괜찮은 척 소파에서 내려왔다.

그러자 무언가 고민을 하던 에드윈의 녹빛 시선이 디아나를 향했다.

“아가씨.”

“응?”

“제가 밖에서 그림으로 된 글자책을 구해 오겠습니다.”

“에드윈이?”

“네, 그리고 아가씨만 괜찮으시다면…… 제가 글을 배울 수 있게 봐드려도 될까요?”

기대하지 않았던 제안에 디아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에드윈을 바라보았다.

그림책을 사 주는 것만으로도 고마운데 글을 가르쳐 주겠다니.

디아나는 너무 좋다고 답하려다 멈칫했다.

“……그치만 에드윈은 바쁘지 않아?”

저번에 설핏 보니 에드윈은 대공과 기사단장인 로운과 함께 다니고 있었다.

기사들 중에서도 꽤 높은 직급인 게 분명했다.

그런 그가 사생아인 자신과 어울려도 되는 걸까.

디아나는 괜히 자신 때문에 에드윈이 피해를 볼까 봐 걱정됐다.

“음, 그런 거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고 말씀드려도 아가씨는 신경 쓰시겠죠?”

“……응…….”

디아나의 무거운 표정과 달리 에드윈은 싱긋 밝은 미소를 지었다.

“아가씨, 아무 걱정 마세요. 전 괜찮습니다. 그리고 오히려 영광스러운 일이죠. 한낱 기사인 제가 아가씨의 글을 가르쳐 드릴 수 있는 것이니까요.”

뿌듯하다는 듯 말한 그는 도서관을 한번 둘러보곤 비밀스런 이야기를 하듯 목소리를 낮추었다.

“그리고 또 제가 얼핏 들었는데 도서관은 아침저녁 청소를 하는 하녀들 말고는 거의 사람이 드나들지 않는다고 하더라고요. 제가 아가씨의 글을 봐드린다 해도 아무도 아가씨께서 글을 배우는 것을 모를 겁니다.”

“……그래?”

“네, 그러니 안심하시고 제 도움을 받으셔도 된답니다.”

생각해 보면 아까 하녀에게 도서관의 위치를 물었을 때도 하녀는 멍한 얼굴로 그런 곳이 있었던가 생각하다가 간신히 디아나를 도서관까지 데려다주었었다.

거기다 도서관을 관리하는 사람도 없고, 에드윈 말대로 사람들이 찾지 않는 곳인 거 같았다.

에드윈이 자신을 도와주는 걸 아무도 모른다면…… 나 때문에 곤란해지진 않을 거야.

한결 마음이 편해진 디아나가 에드윈과 시선을 마주했다.

그녀는 기대감 가득한 눈빛으로 에드윈에게 말했다.

“에드윈이 정말 괜찮다면…… 나 에드윈에게 글 배우고 싶어.”

“앞으로 열심히 해 보겠습니다. 잘 부탁드려요, 아가씨.”

에드윈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하며 손을 내밀었다.

드디어 글을 배울 수 있다는 기쁨에 디아나는 환한 미소를 그리며 그의 손을 잡았다.

* * *

“……시간이 너무 안 간다.”

오늘은 에드윈과의 첫 수업이 있는 날이다.

수업 시간까지는 아직 30분이나 남은 시간에 탁자 위로 엎드렸다.

‘점심이라도 좀 늦게 먹을 걸 그랬어.’

평소보다 일찍 점심을 먹고 모든 준비를 마쳐서 그런지 더욱 시간이 안 가는 것처럼 느껴졌다.

사실 시간이 느리게 간 건 어제부터였다.

어제는 오늘 있을 첫 수업이 기대되어 잠까지 오지 않았으니까.

‘에드윈에게 글을 열심히 배워서 도서관에 있는 책들을 전부 읽어 봐야지. 그럼 나중에 대공성을 나가 살 때에도 부족한 지식이 없을 거야.’

톡톡.

미래를 상상해 보던 디아나는 문득 레아가 떠올랐다.

어제 산책을 나갔다 우연히 오두막에 갇혀 근신 중이라는 레아의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었다.

- 어찌나 성격이 더러운지 오두막을 지키는 하인의 얼굴을 심하게 긁어서 한바탕 난리가 났었대.

그 말을 듣는 순간 디아나는 레아가 당장이라도 자신을 쫓아오지 않을까 두려웠다.

“……생각하지 말자.”

디아나는 머리를 좌우로 흔들며 레아에 대한 두려움을 떨쳤다.

‘여긴 대공이 있는 본성이니까, 절대 올 수 없을 거야.’

오늘 있을 수업을 다시 상상해 보던 그때,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가씨, 집사입니다.”

익숙한 목소리에 디아나는 얼른 대답했다.

“들어와.”

문을 열고 들어온 집사는 혼자가 아니었다.

디아나는 집사의 뒤로 따라 들어오는 하녀를 보았다.

하녀가 고개를 숙이고 있어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저 머리색…… 어디서 본 적이 있는 거 같은데.’

이제껏 다양한 머리색을 보아 왔지만 저렇게 붉은 기가 강한 주홍빛 머리칼은 흔하지 않았다.

“아가씨, 대공 전하의 명으로 아가씨의 시중을 들 하녀를 데려왔습니다.”

“……하녀를?”

디아나는 당황스러움을 숨기지 못하고 되물었다. 저번엔 옷을 보내고 이번엔 하녀를 붙여 준다고?

“네, 전하께서 아가씨의 나이가 아직 어리시니 혼자 생활하는 것에 어려움이 있을 것이라며 전속 하녀를 보내셨습니다.”

“…….”

감사하다고 전해 달라 말해야 하는데 너무 당황스러워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전속 하녀라니.

자신을 돌봐주는 사람이 생긴다니.

대공성에 널린 게 하녀였지만 한 번도 그들에게 대우받을 생각도 해 보지 못했던 디아나였다.

디아나는 얼떨떨한 표정을 숨기지 못한 채 물었다.

“정말…… 대공 전하께서 하녀를…… 보내셨어?”

“네, 그렇습니다.”

왜?

디아나의 목 끝까지 물음이 차올랐다.

레아를 벌하여 그녀를 구해 주고 예쁜 옷이랑 신발도 보내줬다.

그런데 이제 하녀까지.

디아나는 꼭 자신이 정말 대공의 딸이 된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대공 전하께서 날 인정해 주려는 걸까.

그리 생각하자 심장이 두근, 작게 뛰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자신을 바라보던 대공의 차가운 얼굴이 머릿속으로 그려졌다.

‘말도 안 돼.’

디아나는 아주 잠깐이었지만 기대감으로 뛰었던 심장에 속으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정신 차려, 디아나. 헛된 기대가 얼마나 큰 상처를 남기는지 넌 이미 잘 알고 있잖아.’

디아나도 한때는 하나뿐인 엄마 레아의 사랑을 받아 보려 아등바등한 적이 있었다.

노력을 했지만 돌아온 것은 결국 레아의 손찌검뿐이라는 것을 깨닫고 모든 기대를 접어 버렸다.

자신에게 부모의 사랑 같은 건 존재하지 않을 거라고 말이다.

‘쓸데없는 생각 따윈 접자.’

기대감이 서렸던 마음을 완전히 떨치려 고개를 휘휘 젓자 집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가씨, 괜찮으십니까?”

“……괜찮아. 근데 집사.”

디아나는 집사의 뒤에서 고개를 숙이고 있는 하녀를 보곤 그에게 말했다.

“난 하녀 없이도 혼자 잘 생활할 수 있어.”

대공의 호의는 더 이상 받지 않는 게 좋을 거 같아 거절하자 집사의 얼굴에 곤란함이 서렸다.

“아가씨, 송구하오나 이번 일은 대공 전하의 명령이라 물릴 수가 없습니다.”

“아…….”

단호한 집사의 말에 디아나는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그리고 아가씨께선 아직 저택을 잘 모르시니, 하녀가 있는 것이 생활하시는 데 편하실 겁니다. 피비, 아가씨께 인사를 드리거라.”

“디아나 아가씨, 피비라고 합니다.”

집사의 뒤에 서 있던 하녀가 앞으로 나왔다.

피비는 허리를 깊이 숙이며 인사했다.

디아나는 정수리가 바닥에 닿을 듯한 과한 인사가 부담스러워 바로 말했다.

“고개 들어도 돼.”

“네.”

피비가 고개를 들자 디아나는 그제야 알 수 있었다.

피비는 산책로에서 괴롭힘을 당했던, 바로 그 어린 하녀였다.

괴롭힘의 주동자는 세이아의 하녀였고 자신에게 온 하녀는 그 피해자라니, 신기한 우연이었다.

디아나와 시선이 마주친 피비는 미소를 그렸다. 디아나를 바라보는 그녀의 주홍빛 눈동자가 반짝였다.

반짝이는 눈동자 속에서 느껴지는 호의에 디아나가 어색한 표정으로 피비를 보던 그때, 집사가 말했다.

“피비가 비록 대공성에 들어온 지 아직 얼마 되지 않았으나 일은 아주 잘하는 아이이니 아가씨를 잘 모실 것입니다.”

“……응.”

느리게 고개를 끄덕이자 집사는 피비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피비, 앞으로 아가씨의 생활에 불편함이 없도록 하거라.”

“네, 집사님.”

“그럼 전 이만 가 보겠습니다, 아가씨.”

“응.”

집사가 방을 나가자 피비가 디아나게로 한 걸음 다가왔다.

“아가씨,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저번에 절 도와주셔서 정말 감사했어요. 앞으로 성심껏 아가씨를 모실게요.”

“……그래, 고마워.”

피비는 밝은 미소를 지으며 디아나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자신을 도와준 디아나에게 호의를 가지고 있는 듯했지만 디아나는 피비의 호의를 쉽게 믿을 수 없었다.

디아나는 고작 열 살이었지만 평범하게 자라나지 못하며 배운 게 있었다.

사람을 쉽게 믿어선 안 된다는 것.

그녀에게 잠시 동안 호의를 베풀었던 사람들이 없지 않았지만 결국 대부분이 디아나를 외면했었다.

그러니 피비 역시 나중에 어떻게 변할 줄 몰랐다.

특히 하녀들이 얼마나 뒤에서 윗사람들에 대한 뒷담을 많이 하는지 디아나는 너무 많이 들었었다.

그래서 불안했다.

피비가 자신에 대해 안 좋은 소문을 퍼뜨릴까 봐, 그리고 그 소문이 대공의 귀에 들어가게 될까 봐 말이다.

물론 아직은 알 수 없는 일이었지만, 피비가 에드윈처럼 좋은 사람일까.

“아가씨, 어디 불편하신가요?”

갑자기 어두워진 디아나의 얼굴에 피비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아니, 그냥 방에만 있으려니 좀 답답한 거 같아서.”

“그럼 아가씨, 날씨도 좋은데 산책이라도 나가시겠어요?”

“응? 아. 맞다!”

디아나는 그녀의 말에 정신을 차리며 시간을 확인했다.

그렇게 느리던 시간은 어느새 빠르게 흘러 에드윈과 만나야 할 시간이 되어 있었다.

‘이런, 첫날부터 늦겠어.’

서둘러 방을 나가려던 디아나는 앞에서 미소를 지은 채 서 있는 피비를 보며 몸을 멈칫했다.

“무슨 급한 일이라도 있으신가요?”

“응? 아, 그게…….”

디아나는 말끝을 흐렸다.

아직 피비가 어떤 사람인지 알지도 못하는데 섣불리 에드윈과의 일을 말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피비를 어떻게 떼어 놓고 가지.

디아나가 나간다고 하면 피비가 따라붙을 게 당연했다.

방법은 떠오르지 않는데 시간은 계속 흘러 난감하던 그때, 디아나를 보던 피비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왜 그러지?’

피비는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어머, 아가씨. 옷에 뭐가 묻었네요. 모르셨어요?”

“응?”

피비를 따라 시선을 내리자 노란 원피스에 붉은 자국이 묻어 있는 게 보였다.

“아…… 아침에 토마토 주스를 먹었었는데 언제 흘렸지.”

“옷 갈아입으시겠어요? 제가 빨아 올게요.”

“응? 아…… 그래.”

디아나는 대답하면서 시계를 힐긋 보았다.

에드윈이 도착했을까?

옷을 갈아입을 때가 아니었지만 붉은 자국이 선명해서 안 갈아입는다고 할 수도 없었다.

진한 녹색 원피스로 갈아입은 디아나는 얼룩이 묻은 원피스를 챙기는 피비를 보며 초조해졌다.

눈을 이리저리 굴리던 그때, 디아나의 눈에 창밖의 꽃이 피기 시작한 산책로가 보였다.

음…….

“피비.”

“네?”

“저번에 보니까 산책로에 예쁜 꽃들이 피었더라고. 그래서 말인데 그 꽃들을 방 안에서도 볼 수 있음 좋을 거 같아.”

“꽃이요?”

“응, 예쁜 꽃을 보면 기분이 좋아지니까…….”

너무 말도 안 되는 핑계인가, 디아나가 말끝을 흐리던 그때 피비가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아, 그쵸. 예쁜 꽃을 보면 기분이 좋아지죠. 그럼…… 제가 보고 예쁜 꽃들로 가져올게요. 음, 말 나온 김에 지금 다녀올까요?”

“응, 그리고 오늘만 따 오지 말고 매일 생기 있는 꽃으로 바꿔줘.”

디아나가 어색하게 웃으며 말하자 피비의 주홍빛 눈동자가 살짝 짙어졌다.

하지만 이윽고 피비가 싱긋 미소를 지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매일…… 이 시간쯤 꽃을 가져올게요.”

“응, 고마워. 그럼 나가 봐. 난 쉬고 있을게.”

“네, 그럼 쉬고 계세요, 아가씨.”

피비는 잠시 디아나를 바라보다 인사를 하며 방을 나갔다.

“미안해…… 피비.”

괜히 피비를 고생시키는 거 같아 마음이 편치 못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아, 이럴 때가 아니야. 에드윈이 기다리겠어.”

시간이 계속 흘러가고 있었다.

디아나는 피비에 대한 미안함은 잠시 접어 두고 서둘러 방을 나갔다.

* * *

도서관 문 앞에 도착한 디아나가 문을 열기 위해 손을 뻗은 순간 문이 저절로 열렸다.

‘뭐지?’

눈을 동그랗게 뜨자 열린 문으로 에드윈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가씨, 접니다.”

‘내가 도착한 걸 어떻게 알았지?’

발소리를 최대한 죽이면서 왔었는데.

“내가 온 걸 어떻게 알았어?”

신기한 눈빛으로 그를 보자 에드윈의 입가에 미소가 서렸다.

“실력이 좋은 기사는 작은 인기척도 놓치지 않는 법이랍니다. 제가 좀 실력이 좋죠.”

디아나는 태연한 표정을 자기 자랑을 하는 에드윈에 웃음을 지었다.

책이 놓여 있는 소파에 앉자 에드윈이 미소를 그리며 말했다.

“그럼 공부를 시작해 볼까요?”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아가씨, 조금 쉬었다 하시는 게 어떠신가요?”

에드윈의 목소리가 머리 위를 울렸다. 디아나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벌써?”

디아나의 물음에 에드윈이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

“벌써라뇨, 아가씨께서 글자를 적으신 종이가 10장이 넘었는걸요?”

에드윈의 말에 고개를 옆으로 돌리자 테이블 위로 쌓여 있는 종이들이 보였다.

새하얗던 종이들은 그녀가 쓴 글자들로 빼곡하게 매워져 있었다.

“그리고 시간도 많이 흘렀답니다. 손 안 아프세요?”

“음…… 좀 아픈 거 같기도 해.”

얼마나 집중했는지 시간이 흐르는지도 모르고 있었다. 에드윈의 말을 듣자 그제야 펜을 쥔 손이 뻐근하게 아파 왔다.

“첫날부터 너무 무리하시면 나중에 하기 싫으세요. 그러니 오늘은 여기까지 할까요?”

디아나는 펜을 놓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이제 그만하고 싶어.”

“네, 충분히 많이 하셨어요.”

에드윈은 책을 덮으며 물었다.

“아가씨, 저택에서 지내시는 건 어떠신가요? 불편하신 점은 없으신가요?”

“없어, 너무 잘 지내고 있어.”

“잘 지내신다니 다행입니다.”

에드윈이 부드러운 미소를 그렸다.

“에드윈.”

“네?”

“……대공 전하는 어떤 분이셔?”

“…….”

에드윈의 얼굴에서 옅은 미소가 사라졌다.

에드윈은 많이 당황한 듯 답을 하지 못하고 입술을 다물었다.

‘내가 너무 불편한 질문을 했나.’

하지만 에드윈은 대공에 대해 그녀보단 잘 알 거 같았다.

대공을 곁에서 본 시간이 더 많을 테니까.

짧은 침묵이 흐르고 에드윈이 입술을 열었다.

“음, 전하께선 정말 대단하신 분이십니다. 검술로는 따라갈 자가 없으시고 힘든 전장에서 한 번쯤은 지칠 만도 하신데 단 한 번도 흐트러진 모습을 보인 적 없으시죠. 전하는 정말 냉철하고 이성적인 분이시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구나.”

디아나가 대공을 보며 생각했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말이었다.

하긴 에드윈이 대공의 기사라곤 하지만 대공의 속마음을 알 수는 없을 것이다.

“제가 도움이 되는 답을 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아냐, 나도 그냥 갑자기 궁금해서 물은 것뿐이었어.”

“아가씨, 전하께선 자신이 결정한 일을 절대 번복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적어도 제가 여태까지 봐온 대공 전하는 그랬습니다.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에드윈을 바라보는 디아나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

“……고마워. 에드윈이 있어서 다행이야.”

만약 에드윈을 만나지 못했더라면 디아나는 아직도 레아의 학대받고 있거나 어쩌면 그날 용병들에게 이미 죽은 목숨이었을 것이다.

에드윈이 내 가족이었다면 좋았을 텐데.

그랬더라면 앞으로 평생 에드윈과 살 수 있을 테니까.

‘난 대공성을 떠날 사람이니 나중에는 에드윈을 보지 못하겠지.’

갑자기 울컥하는 마음에 눈물이 서린 눈으로 그를 보자 에드윈의 얼굴에 당황이 서렸다.

“아가씨, 제가 무슨 말실수라도…….”

“갑자기 눈에 뭐가 들어갔나 봐.”

안절부절못하는 에드윈에 난 아무렇지 않은 척 눈가를 닦았다.

에드윈이 신경 써 주는 것은 알지만 선을 넘은 말은 그를 불편하게 만들지도 모른다.

“……이곳이 먼지가 좀 많죠.”

어설픈 거짓말임을 분명 알 텐데 에드윈은 더 묻지 않으며 일부러 먼지를 털 듯 허공에 손을 휙휙 내저었다.

그의 어설픈 손짓에 쿡, 웃음을 흘리자 에드윈의 얼굴에도 미소가 서렸다.

“역시 아가씨는 웃으시는 게 제일 예쁘십니다.”

“……고마워.”

“그럼 오늘은 이만 수업을 마칠까요?”

“그래.”

“정리는 제가 하겠습니다. 내일 같은 시간에 이곳에서 뵈어요.”

“알았어.”

내일 봐, 에드윈.

디아나는 환한 미소로 그에게 인사하곤 도서관을 나가 걸음을 서둘렀다.

* * *

끼익-.

자신의 방문을 조심스레 열고 들어간 디아나는 아무도 없는 방 안에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휴, 다행이다.”

혹시나 하는 불안한 마음에 방에 도착할 때쯤엔 거의 뛰다시피 왔었는데 다행히 피비는 아직 정원에서 돌아오지 않은 거 같았다.

“아가씨, 피비입니다.”

안도하자마자 방문 밖에서 피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도감 뒤에 바로 들리는 목소리에 움찔 놀란 디아나는 문을 열어 주었다.

방으로 들어온 피비는 하이리스를 품에 한 아름 안고 있었다.

방 안 가득 퍼지는 하이리스의 꽃내음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와, 향기 정말 좋다.”

“하이리스가 제일 만개하는 시점이라 향기도 지금이 제일 좋다고 해요.”

피비는 디아나의 감탄에 기분이 좋은 듯 상냥한 눈웃음을 지으며 화병에 하이리스를 담았다.

“제가 매일 예쁜 꽃을 따 올게요.”

“응, 고마워 피비.”

고맙다고 말하던 그때, 꼬르륵, 배 속에서 울리는 적나라한 소리에 화들짝 놀랐다.

“앗.”

소리를 막아 보려 황급히 배 위로 손을 얹었지만 피비가 못 듣기엔 너무 큰 소리였다.

고개를 살짝 돌리자 피비와 눈이 마주쳤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되었네요. 가벼운 간식을 드실 시간이 지났는데 죄송해요, 아가씨. 제가 오는 길에 간식을 챙겨왔어야 했는데, 잠시만 기다리세요. 제가 얼른 다녀올게요.”

“아…….”

아니라고 말하기도 전에 피비는 후다닥 방을 나갔다.

빠르게 닫힌 문을 멍하니 보던 그때, 배에서 또 한 번 소리가 울렸다.

꼬르륵-.

디아나는 배고프다고 소리치는 배를 쓰다듬었다.

“오늘따라 왜 이리 배가 고프지…….”

저녁을 먹으려면 세 시간이나 남았다.

피비는 간식을 먹을 시간이라며 간식을 가지러 갔지만 디아나는 이제껏 간식을 먹은 적이 없었다.

정해진 식사조차 하지 못한 그녀가 간식을 먹을 수 있을 리 없었으니까.

본성으로 거처를 옮긴 뒤에도 하녀가 챙겨 주는 세 끼 식사를 하는 것만으로도 만족해 간식은 생각도 못해 본 디아나였다.

그러니 이 시간에는 배가 고프지 않는 게 맞는데 오늘 좀 움직여서 그런가.

생각해 보니 오늘은 평소와 달리 아침 일찍 일어난 데다 에드윈을 만나 공부까지 했다.

‘평소보다 많이 움직여서 그런가.’

연신 꼬르륵거리는 배를 쓰다듬던 그때, 피비가 돌아왔다.

“아가씨, 들어갈게요.”

“응.”

피비는 작은 트롤리를 끌며 안으로 들어왔다.

“오늘 후식은 딸기 타르트래요. 남부의 신선한 딸기가 어제 들어왔다고 하더라고요. 달달한 홍차도 같이 가지고 왔으니 어서 드셔 보세요, 아가씨.”

피비는 테이블 위로 접시와 찻잔을 내려놓으며 미소 지었다.

디아나는 난생처음 보는 예쁜 디저트에 작은 감탄사를 내뱉었다.

“와, 예쁘다.”

먹음직하게 구워진 파이 위에 발라진 새하얀 생크림 위로 새빨간 딸기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무얼 바른 건지는 모르겠지만 반짝반짝 윤이 나는 딸기들은 디아나의 시선을 사로잡기 충분했다.

“예쁜 만큼 맛도 좋을 거예요. 어서 드셔 보세요.”

피비는 나이프로 먹기 좋게 타르트를 잘라 포크로 타르트 한 조각을 찍어 디아나에게 내밀었다.

‘이런 걸 내가 먹어도 되는 걸까?’

처음 보는 예쁜 후식에 정신이 팔려 생각하지 못했는데 이런 건 자신이 먹어선 안 될 거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녀가 생각한 간식은 그저 빵이나 옥수수, 하녀들이 자주 먹던 감자 같은 것이었다.

물론 저택에서 살게 된 뒤 디아나의 식사가 많이 좋아지긴 했지만 이런 고급 디저트는 없었다.

피비가 세이아의 것을 착각하고 가져온 게 아닐까?

그럼 피비도 혼날 텐데.

“아가씨?”

“……피비, 근데 이거 내가 먹어도 되는 거 맞아?”

“네?”

“아니…… 이거 너무 비싼 음식 같아서. 혹시 대공녀님이나 대공 전하의 음식을 잘못 가져온 게 아닌가 해서.”

“…….”

피비는 순간 포크를 든 채 멍한 얼굴을 했다.

역시 뭔가 잘못된 거야.

그런 피비의 얼굴을 보며 다시 돌려놓고 오라고 말하려던 그때, 피비가 두 눈을 깜박이며 정신을 차렸다.

그녀는 디저트와 디아나를 번갈아 보곤 왜인지 결연한 낯빛으로 말했다.

“아가씨, 앞으로 아가씨의 모든 식사와 간식은 전부 제가 챙길게요. 다른 하녀들의 손을 거치지 않겠어요.”

“응?”

이해할 수 없는 말에 고개를 갸웃하자 피비는 내게 포크를 쥐여 주었다.

“그리고 이건 아가씨께서 드실 디저트가 맞아요. 제가 주방장님께 디아나 아가씨께서 드시는 거니 딸기 하나 더 얹어 달라고 말씀드렸는걸요. 만약 아가씨의 디저트가 아니었다면 주방장님께서 제 말을 듣고 딸기를 이렇게 가득 올려주실 리 없잖아요.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아…….”

‘이게 정말 내 거라면, 먹어도 되는 걸까?’

싱싱하고 먹음직스럽게 윤기 나는 붉은 딸기가 디아나를 유혹했다.

그간 과일이라고는 제대로 구경도 못 한 디아나였다.

그런데 평생 입에 대 본 적 없는 달콤한 향이 나는 딸기가 얹어진 타르트라니.

“어서 드셔 보세요. 크림 떨어지겠어요.”

피비의 말대로 포크를 타고 커스터드 크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크림이 떨어질까 디아나는 반사적으로 타르트를 한입에 넣었다.

달달하고 부드러운 크림이 입 안으로 사르륵 퍼지자 처음 맛보는 황홀함에 눈이 커졌다.

‘맛있어!’

정말 너무 맛있었다.

언젠가 쿤타에게 받았던 설탕 조림 과자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깊은 달콤함이 입 안을 가득 채웠다.

그리고 아삭하게 씹히는 딸기의 새콤함에 입꼬리가 절로 올라갔다.

“맛있으시죠?”

디아나는 행복함에 눈을 사르르 휘었다.

“응, 너무 맛있어.”

두 볼을 발그레 물들인 어린아이의 해맑은 미소에 피비도 기분이 좋아졌다.

“대공성엔 이것보다 훨씬 맛있는 디저트들이 매일매일 만들어지니까, 제가 매일 가져다드릴게요.”

피비는 그녀를 보며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

가식 없는 그녀의 미소에 디아나는 그녀에게 미안해졌다.

차라리 피비가 다른 하녀들처럼 그녀에게 친절하지 않았다면 죄책감이 덜 했을 텐데.

디아나의 불안과 달리 피비는 그녀에게 너무 잘해 주고 있었다.

그녀를 바라보는 눈빛과 표정엔 귀찮음이 없었고, 호감과 옅은 애정마저 느껴졌다.

아직 어린 디아나로서는 제게 향하는 애정에 약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인지 디아나는 피비를 경계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점점 호감이 생기는 걸 막을 수 없었다.

“피비도 먹어.”

디아나는 타르트 조각을 포크에 찍어 그녀에게 내밀었다.

피비가 움찔하더니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제가 어떻게 감히. 아가씨의 디저트인걸요.”

“나 이거 혼자 다 못 먹어. 이렇게 예쁜 디저트를 버리면 아깝잖아. 같이 먹어.”

“그래도…… 안-.”

안 된다고 말하려는 듯 벌어진 피비의 입 안으로 타르트가 쏙 들어갔다.

혀끝을 달콤하게 휘감는 디저트에 피비의 주홍빛 눈동자가 커졌다.

“맛있지?”

디아나의 물음에 피비는 배시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정말…… 맛있네요.”

부정할 수 없다는 듯 웃는 피비를 보며 디아나의 얼굴에도 미소가 서렸다.

그 모습을 보던 피비는 달콤한 디저트를 삼키곤 디아나에게 나긋하게 말했다.

“하지만 전 이것만으로도 충분하답니다. 감사해요.”

디아나의 기분이 상하지 않게 부드럽게 거절한 그녀는 찻잔에 홍차를 따랐다.

“아가씨, 홍차도 드셔 보세요. 먹기 좋게 식었을 거예요.”

찻잔에 담긴 홍차를 후후 불어 준 피비가 디아나에게 잔을 내밀었다.

하지만 디아나는 찻잔이 아닌 피비를 가만히 보고 있었다.

혹시라도 뜨거운 차에 델까 차를 불어 주던 피비의 모습이 이상하게 디아나의 심장을 간지럽혔기 때문이었다.

‘피비라면…… 에드윈처럼 믿어도 되지 않을까?’

“아가씨?”

디아나가 말없이 쳐다보고만 있자 피비가 의아한 낯빛을 하며 고개를 갸웃했다.

디아나는 혹시라도 간질거리는 마음을 들킬까 시선을 내렸다.

“고마워, 잘 마실게.”

디아나는 흔들리는 마음을 애써 무시하며 피비가 따라 준 따뜻한 홍차를 마셨다.

* * *

둥근 만월이 하늘을 요요하게 빛내고 있는 어두운 밤.

횃불로 밝힌 대공가의 연무장에선 검을 휘두르는 소리가 울리고 있었다.

날카로운 검날이 바람을 가르는 소리만이 연무장을 울렸다. 에드윈은 적의 심장을 찌르듯 강하게 검을 내질렀다.

그의 검이 유려한 선을 그리며 거두어진 순간 연무장에 낮은 음성이 울려 퍼졌다.

“더 빠르게 움직여라. 검을 휘두름에 망설임을 두지 말라 내가 누누이 말했던 거 같은데, 에드윈.”

에드윈은 대공의 목소리에 황급히 검을 갈무리하며 예를 갖추었다.

“대공 전하를 뵙니다.”

“일어나라.”

대공은 연무장으로 들어서며 한편에 놓여 있던 목검을 들었다.

“검을 다시 잡아라.”

대공의 명령에 에드윈은 굳은 얼굴을 한 채 두 손으로 검을 잡았다.

긴장감으로 굳은 에드윈과 달리 한 손으로 목검을 잡은 대공에게선 여유가 느껴졌다.

“들어와.”

대공의 명령이 떨어짐과 동시에 에드윈이 기합 소리와 함께 진검을 휘둘렀다.

힘이 가득 실린 진검을 가볍게 목검으로 쳐낸 대공은 에드윈의 빈틈을 향해 검을 내리쳤다.

탁-!

에드윈의 허리에 목검이 내려쳐지는 소리가 신호탄이 된 것처럼 에드윈은 대공에게 제대로 된 반격 한 번을 못하며 속수무책으로 뒤로 밀려났다.

탁-탁-탁!

먼지 나게 목검으로 온몸을 두드려 맞은 에드윈은 결국 목에 닿은 목검에 검을 내렸다.

“……졌습니다.”

“그래도 실력이 많이 늘었어. 연습을 게을리하진 않는구나.”

일방적으로 맞기만 했는데 실력이 늘었다니.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의아했겠지만 에드윈은 대공의 말이 어떤 뜻인지 알고 있었다.

예전보단 덜 맞았다는 뜻.

많이 맞긴 했지만 몇 번은 대공의 치고 들어오는 공격을 막아 냈다.

대공은 제국에서 가장 강한 검사였으니 평범한 기사였다면 대공의 공격을 단 한 번도 막아 낼 수 없었을 것이다.

“감사합니다.”

“이 정도 실력이면 검술 대회에 나가도 대공가의 체면은 안 구기겠군.”

“네?”

검술 대회?

에드윈이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듯 멍한 표정으로 되묻자 대공은 눈썹을 살짝 올렸다.

“로운에게 듣지 못했나. 봄에 열리는 검술 대회에 출전할 대공가의 기사로 널 내보내기로 했다.”

대공은 마치 식사 메뉴를 정하는 것처럼 아무렇지 않게 말했지만 에드윈에겐 절대 가벼운 일이 아니었다.

제국에서 1년에 한 번씩 열리는 검술 대회는 모든 검사들의 로망이었다.

그리고 귀족 가문의 기사들에겐 더욱 특별한 의미가 있는 대회였다.

가문의 대표로 검술 대회에 나간다는 것은 가주에게 인정을 받음과 동시에 다음 대의 기사단장으로 예정되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한데 자신이 대공가의 대표로 검술 대회에 나가게 되었다니.

에드윈은 자신이 잘못 들은 것은 아닌지 귀를 의심할 정도였다.

대공은 멍청한 얼굴로 굳어 있는 에드윈을 보며 미간을 좁혔다.

“뭘 그리 멍청히 굳어 있는 것이냐. 그 꼴을 보니 내가 제대로 결정을 내린 게 맞는지 숙고하게 되는군.”

“아, 아닙니다!”

정신을 차린 에드윈이 크게 외쳤다.

“정말 제가 나가게 된 것이 맞는지 순간 믿기지가 않아서…… 죄송합니다.”

“에드윈, 넌 내가 본 기사들 중 가장 빠른 속도로 성장하고 있다. 그러니 무투 대회에 나갈 자격은 충분해.”

대공의 칭찬에 에드윈의 얼굴이 환해졌다.

“감사합니다. 대공가에 누가 되지 않도록 반드시 승리하겠습니다.”

“당연히 그래야지.”

피식, 대공이 옅은 미소를 지은 그때, 어두운 숲속에서 짐승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냐~.”

“고양이?”

에드윈은 푸른 털의 큰 짐승을 보며 놀란 눈을 했다.

저건…….

고양이와 울음소리가 똑같았지만 그를 노려보는 황금안과 큰 덩치는 절대 고양이의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고양이가 아니라 표우다.”

대공의 답에 에드윈은 신기한 눈빛으로 푸른 털의 표우를 다시 보았다.

표우는 제국에서도 희귀 몬스터로 지정되어 그 모습을 쉽게 볼 수 없었다.

과거엔 고위 귀족들이 많이 키웠던 표우였지만 워낙에 번식이 어려운 몬스터라 그 개체 수가 많이 줄어 희귀 몬스터가 되어 버렸다.

“유네스, 이리 온.”

대공의 손짓하자 유네스는 우아하게 도약해 한 번에 대공에게 안겼다. 큰 덩치에 밀릴 만도 했지만 대공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유네스는 에드윈을 향해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냈다.

하악-.

당장이라도 에드윈의 목을 물어뜯을 듯한 유네스의 기세에 에드윈은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대공은 공격성을 드러내는 유네스를 세게 안았다.

“유네스와 시선을 맞추지 말거라. 눈을 마주치면 공격성이 강해진다.”

“아, 네.”

에드윈이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지만 유네스의 공격성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잔뜩 경계심을 높이는 유네스의 하악질에 대공은 미간이 좁아졌다.

“이래서야 치료는 받을 수 있을는지.”

대공이 유네스를 뒤쪽 숲에서 데리고 나온 것은 유네스의 몸 상태가 좋지 않기 때문이었다.

표우는 자신의 주인이 죽고 나면 종종 스스로 목숨을 끊을 만큼 충성심이 강한 몬스터였다.

다행히 유네스는 스스로 죽지는 않았지만 대공이 전장을 떠도는 동안 혼자 격리되어 지내어서인지 몸이 좋지 않았다.

그러나 상태가 많이 악화되었는지 발톱과 털이 빠지는 것을 본 대공이 치료사에게 치료를 받기 위해 유네스를 데리고 나온 것이었다.

“유네스, 진정해.”

대공의 손길에 유네스의 공격성이 조금씩 잦아들었다.

“한데…… 전하, 그 표우는 대공 전하의 표우입니까?”

“아니, 대공비의 표우였다.”

“아, 네.”

유네스를 쓰다듬던 대공은 대공비 언급에 어쩔 줄 몰라 하며 자신의 눈치를 살피는 에드윈의 모습에 픽, 싱거운 웃음을 흘렸다.

“금기어라도 들은 모양새구나. 눈치 볼 시간에 검술 연습에 더 집중해라. 곧 봄이 올 테니까.”

“네, 전하.”

“그럼 연습 계속하거라.”

대공이 그만 돌아가려 몸을 돌린 그때, 에드윈이 대공을 불렀다.

“아, 저, 전하.”

“무슨 일이지?”

에드윈은 쉽게 입을 열지 못하고 입술을 달싹였다. 대공의 황금안은 언제나 사람을 짓누르는 위압감을 가지고 있었다.

감히 그가 이런 말을 해도 되는 것일까.

에드윈이 망설이던 그때, 그를 불러놓고 말이 없는 에드윈의 모습에 이맛살을 구긴 대공이 입을 열었다.

“에드윈, 할 말이 있어 날 부른 것이 아닌가.”

“그게, 저 디아나 아가씨께선 괜찮으신지, 저택에서 계속 지내게 되신 것인지 궁금하여…… 제가 선을 넘었습니다. 송구합니다.”

에드윈은 말을 이을수록 점점 날카로워지는 대공의 눈빛에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한낱 기사가 물을 만한 이야기가 아니었다.

거기다 디아나는 대공가의 사생아였으니, 자칫 디아나에 대한 언급은 주군의 치부를 건드리는 일이 될 수도 있었다.

에드윈은 벌을 받을 각오로 고개를 숙였다.

한데 그의 예상과는 다른 말이 머리 위를 울렸다.

“디아나는 괜찮다. 그리고 그 아이가 어느 정도 자랄 때까진 아마 내 보호 아래에서 지내게 되겠지.”

대공은 고개를 든 에드윈의 얼굴을 매서운 시선으로 훑었다.

에드윈은 잔정이 많은 사람이었다.

하지만 정으로 공사를 구분하지 못하는 멍청한 인사는 아니었다.

그런 에드윈이 그에게 사생아의 안위를 확인했다라, 에드윈답지 않은 행동이었다.

‘디아나와 에드윈 사이에 내가 모르는 다른 인연이라도 있는 건가.’

돌이켜 보면 디아나가 다쳐서 돌아온 그날도 에드윈의 얼굴에 숨길 수 없는 분노가 드러나 있었다.

에드윈의 의로움과 충성심을 잘 알고 있기에 그날은 그냥 넘어갔지만 사실 생각해 보면 아무런 연도 없는 사생아에게 보인 감정치곤 과했다.

디아나와 에드윈이라.

에드윈의 긴장감 가득한 얼굴을 차가운 눈빛으로 바라보던 대공은 이내 시선을 거두었다.

연이 있다 해도 크게 문제 될 건 없겠지.

디아나가 에드윈과 사소한 연이 있다 한들 문제를 일으킬 위치는 아니었으니까.

“네가 구한 아이이니 궁금했겠지. 이해한다. 하지만 선을 넘진 말거라.”

“네. 명심하겠습니다, 전하.”

대공은 굳어 있는 에드윈의 어깨를 힘 풀라는 듯 툭 가볍게 두드리곤 이내 연무장을 나갔다.

연무장에서 저택으로 돌아온 대공은 유네스를 안고 곧장 침소로 향했다.

사람들과 마주치면 유네스의 공격성에 자칫 사고가 일어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대공은 마주치는 사용인들의 인사도 무시하며 서둘러 걸었다.

그의 방문 앞에서 문을 열려던 그때, 뒤에서 들리는 맑은 목소리에 걸음을 멈추었다.

“아버지!”

“세이아.”

뒤를 돌자 그를 향해 도도도 뛰어오고 있는 세이아의 모습이 보였다.

세이아는 함박웃음을 지으며 대공의 앞에 섰다.

늘 그랬듯 대공의 품에 안기려 다가가던 세이아는 순간 대공에게 안긴 짐승을 보고 걸음을 멈추었다.

“우와, 신기하게 생겼다!”

세이아는 윤기 나는 푸른 털을 가진 짐승에 손을 뻗었다.

그리고 그 순간.

“캬악!”

대공이 말릴 새도 없이 유네스가 이빨을 드러내며 앞발로 세이아의 손을 세게 쳐 버렸다.

“꺅!”

세이아의 비명이 크게 울렸다.

“세이아!”

대공은 유네스를 놓고 뒤로 넘어지려는 세이아의 몸을 감싸 안았다.

“캬악!”

“이런, 유네스!”

유네스의 하악질을 들은 대공은 황급히 외쳤지만 이미 유네스는 그의 손이 닿지 않는 거리까지 물러났다.

이빨과 날카로운 발톱을 전부 드러낸 유네스가 세이아의 하녀들을 공격하려던 순간 붉은 머리칼이 대공의 시야를 스쳐 지나갔다.

“로운.”

대공의 옆을 빠르게 지나간 붉은 머리의 남자는 다름 아닌 로운이었다.

로운은 유네스의 몸을 뒤에서 잡아채 목을 눌러 제압했다.

유혈 사태가 일어나지 않음에 안도의 숨을 내쉰 대공은 그의 품에서 떨고 있는 세이아를 살폈다.

“세이아, 어디 다친 데는 없느냐. 고개를 들어 보아라.”

걱정이 가득한 대공의 목소리에 세이아는 벌벌 떨다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대공은 세이아의 몸을 이리저리 살폈다.

다행히도 세이아는 유네스의 발톱에 직접적으로 닿지 않았는지 상흔은 없었다.

살면서 처음 당해 본 위협적인 순간에 세이아의 눈가에 눈물이 글썽거렸다.

“무, 무서워…….”

“이제 괜찮다.”

대공이 볼을 타고 흐르는 세이아의 눈물을 조심스럽게 닦아 주자 세이아는 대공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었다.

“아버지, 너무 무서워요.”

“미안하다. 내가 조심했어야 했는데, 널 공격하지 않을 거라 생각했던 게 실수였다.”

대공은 아직 잘게 떨고 있는 세이아를 안으며 안심하라는 듯 등을 부드럽게 두드렸다.

아버지의 상냥함에 놀란 마음이 빠르게 진정된 세이아는 살짝 고개를 들었다.

“한데 아버지, 절 죽이려 한 저 짐승은 대체 뭔가요?”

“유네스는…… 표우란 몬스터로 네 어머니가 기르던 몬스터였단다.”

“몬스터라니, 어머니는 대체 왜 저런 흉측한 것을 기른 것인가요. 저 몬스터는 절 죽이려고 했어요. 아버지, 저 몬스터가 다신 절 공격하지 못하게 없애 주세요.”

세이아는 끔찍하다는 눈빛으로 로운의 품에 있는 유네스를 바라보았다.

그런 세이아를 보는 대공이 멈칫했다.

없애 달라니.

유네스의 공격성에 많이 놀라 그런 것이라 이해하면서도 대공은 아무렇지 않게 유네스를 죽여달라 말하는 세이아가 낯설게 느껴졌다.

무서워하는 것과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생명을 죽이려 하는 것은 다른 일이었으니까.

천진난만하던 웃음이 사라진 세이아를 보는 대공의 금안이 짙어졌다.

아리엘, 그도 생명을 이렇게 쉬이여기는 사람은 아니었는데.

한데 세이아는…….

부모의 부재가 너무 컸던 건가.

대공은 유네스를 형형한 눈빛으로 노려보는 세이아를 보다 어두워졌던 시선을 갈무리했다.

‘다 내 잘못이야.’

대공은 세이아의 차가운 말에 별의미를 두지 않으려 했다.

대공이 손을 잡자, 유네스를 향했던 세이아의 시선이 대공을 향했다.

대공은 옅은 금빛 눈동자에 스민 선명한 분노를 애써 보지 않으며 입을 열었다.

“세이아, 네 마음은 충분히 이해한단다. 미리 막아 주지 못해 미안하구나. 하지만 유네스는 제국의 희귀 몬스터인데다 네 어머니가 아꼈던 몬스터이기에 쉽게 없앨 수가 없단다.”

“저를 공격했는데도 없앨 수 없단 건가요?”

세이아는 믿을 수 없단 얼굴로 대공에게 되물었다.

대공은 순간 말을 멈추며 눈썹을 움찔거렸다.

대공녀를 정말 다치게 했더라면 대공도 유네스를 가만두진 않았을 것이다.

아무리 유네스가 아리엘이 아끼던 표우라 할지라도 대공녀와 비견될 순 없으니까.

하지만 다행히도 세이아는 다치지 않았다.

그는 아리엘이 제 자식처럼 아꼈던 유네스를 단순히 공격성을 보였단 이유로 죽이고 싶지 않았다.

유네스의 공격성도 주인을 잃은 유네스를 오랫동안 홀로 방치한 탓에 생긴 것이니까.

물론 세이아는 그의 이런 결정을 서운해할 것이다.

그 마음을 이해하기에 대공은 세이아의 마음을 달래려 나긋하게 말했다.

“물론 널 공격한 것은 중죄란다. 하지만 유네스는 한낱 짐승이고 지금 몸이 좋지 않아 날카롭게 반응한 것이니 너그러운 마음으로 네가 이해해 주었으면 좋겠구나.”

대공의 차분한 말에도 세이아의 표정은 풀릴 줄을 몰랐다.

못마땅함이 가득한 얼굴로 입술을 잘근 깨물던 그때, 로운이 세이아에게 말했다.

“대공녀님, 표우는 아주 충성심이 강한 몬스터랍니다. 한번 각인이 되면 죽을 때까지 자신의 주인을 위해 살죠. 지금은 유네스가 몸이 안 좋아 공격성이 심해졌지만 몸이 다 낫고 나면 대공비님의 하나뿐인 딸인 대공녀님만을 따를 겁니다.”

로운의 말에 뾰로통하던 세이아의 얼굴에 흥미가 돋아났다.

“……정말?”

“네, 정말입니다. 표우에 관한 책을 찾아보신다면 표우가 얼마나 매력적이고 귀한 몬스터인지 알 수 있으실 겁니다.”

세이아는 로운에게 제압된 유네스를 아까와는 다른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귀한 데다가 강한 충성심까지 있다니.

세이아는 로운의 말에 유네스를 보며 눈을 반짝였다.

아까까지 그녀를 향해 번뜩였던 유네스의 샛노란 눈동자를 머릿속에서 지워 버린 세이아는 대공을 바라보았다.

“아버지 말씀대로 제가 이해할게요. 아파서 그런 거였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니까요.”

“……그래, 고맙구나.”

방금까지 불만이 가득한 표정이 기대감 서린 얼굴로 바뀌는 것을 본 대공은 기분이 묘했지만 티 내지 않으며 세이아에게 옅은 미소를 보였다.

대공은 낮추었던 몸을 일으켰다.

“시간이 늦었으니 세이아를 이만 방으로 데려가거라.”

“네, 대공 전하.”

세이아는 하녀의 손을 잡고 대공을 올려다보았다.

“아버지, 그럼 좋은 밤 보내세요.”

“너도, 좋은 꿈 꾸렴.”

세이아가 하녀들과 함께 멀어지자 대공은 로운을 향해 다가갔다.

“이리 다오.”

로운에게서 유네스를 건네받은 대공은 여전히 심장 박동이 빠른 유네스의 상태에 미간을 좁혔다.

“왜 이렇게 흥분한 것이지?”

세이아가 그에게 다가왔을 때, 유네스를 강하게 잡지 않은 것은 유네스가 세이아를 향해 공격성을 드러내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표우는 본디 주인에 대한 충성심이 심장에 각인된다.

그래서 주인은 물론이고 주인의 피를 이은 사람들에게도 우호적이었다.

그리고 가끔 대를 이어 표우의 각인을 받게 되는 경우도 있었다.

그렇기에 당연히 유네스는 세이아에게 우호적일 거라 생각했다.

유네스도 세이아의 몸에 흐르는 아리엘의 피를 느낄 테니까.

한데 세이아에게 달려들다니.

정말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대공은 미간을 깊이 좁혔다.

“이해가 되지 않는군.”

로운은 대공의 손길에 점차 진정되는 유네스를 보다 말했다.

“유네스의 몸 상태가 좋지 않아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유네스는 대공녀님을 처음 본 것이니 대공녀님의 피 냄새를 제대로 맡지 못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표우는 후각이 엄청나게 발달된 몬스터로 사람이 절대 바꿀 수 없는 고유의 피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그렇기에 표우에게 후각은 주인과 적을 구별할 수 있는 그들만의 절대적인 특성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런 후각이 마비되다니.

유네스의 몸이 많이 안 좋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대공의 마음이 무거워졌다.

“……정말 후각이 안 좋아진 건가.”

“그럴 겁니다. 지금 유네스는 털 색깔도 일정하지 못할 정도로 불안정한 상태가 아닙니까. 아마 후각이 마비되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로운의 말대로 유네스는 표우의 본래 색인 푸른 털과 아리엘과 각인하며 얻은 색인 보랏빛 털이 왔다 갔다 하고 있었다.

유네스의 행동이 이해되지 않았으나 로운의 말대로 몸이 안 좋아 후각이 마비된 것이라면 세이아를 향한 공격성도 이해가 되었다.

아리엘이 자식처럼 아꼈던 유네스를 병들게 하다니.

“흠.”

대공은 침음 같은 숨을 내뱉으며 말했다.

“로운, 철장을 하나 가져오거라. 후각이 약해진 것이라면 대공가의 사용인들이나 세이아를 향해 언제든 달려들 수 있으니 치료가 될 때까지 철장 안에 두어야겠다.”

“차라리 이때까지 지내던 뒤쪽 숲에 놔두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안 그래도 병이 들었는데 그곳에 더 놔둘 순 없다. 내겐 공격성을 보이지 않으니 내 방에서 함께 지내면 될 일이다.”

“네, 알겠습니다.”

로운이 물러가고 대공은 유네스를 안고 방 안으로 들어왔다.

바닥에 유네스를 내려놓자 유네스는 아리엘과 그가 함께 지냈던 이 방이 익숙한지 소파 위에 편안하게 자리를 잡았다.

“정말 후각이 약해진 것일까.”

대공은 그의 방에 빠르게 적응하는 유네스를 보다 미간을 좁혔다.

“그게 아니라면 유네스가 세이아를 공격할 이유가 없어.”

스스로 답한 대공은 유네스에게서 시선을 거두었다.

세이아와 유네스 때문에 피곤함이 밀려든 그는 드레스 룸으로 들어갔다.

재킷을 벗고 셔츠의 단추를 하나 풀던 그는 문득 떠오른 한 장면에 손을 멈추었다.

매서운 눈바람이 불었던 그 밤, 유네스의 머리를 쓰다듬던 디아나와 디아나의 손길에 기분 좋은 울음소리를 내던 유네스가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모두에게 공격성을 보이는 유네스가 왜 디아나에겐 공격성을 보이지 않았던 거지.

먼저 다가가 애교를 부리기까지 했었다.

표우 중에서도 순혈의 도도한 유네스에게선 보기 힘든 모습이었다.

꼭 아리엘에게 하듯 애교를 부렸어.

대공은 잠시 모든 움직임을 멈추고 생각에 잠겼다.

아리엘의 딸인 세이아에겐 공격적이고 레아의 딸인 디아나에겐 우호적이라.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아리엘이 살아 있을 적만 해도 유네스가 레아를 몇 번이나 공격하려던 것을 대공이 직접 보았기 때문이다.

유네스의 행동만 본다면 세이아가 아닌 디아나가 아리엘의 딸 같았다.

“하아…… 내가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대공은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는 자신이 한심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쓸데없는 생각을 했군.”

대공은 찝찝한 의문들을 머릿속에서 떨쳤다.

“최대한 빨리 치료사를 불러야겠군.”

몬스터 치료사는 제국에 많지 않았기에 수도에 서신을 보내 부른다 해도 당장 올 수 없었다.

북방의 영지는 한겨울에 산맥을 넘는 것이 위험해 영지 간의 출입이 금지되기 때문이었다.

아마 눈이 어느 정도 녹고 난 후에야 수도에서 치료사가 들어올 수 있을 것이다.

“그때까지 부디 별다른 일이 없어야 할 텐데.”

대공은 옷을 갈아입고 드레스 룸을 나왔다.

그러자 그의 발밑으로 다가온 유네스가 그의 다리에 몸을 비볐다.

유네스의 애교에 대공은 유네스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곤 침대로 향했다.

잠을 청하기 전, 침대 옆 협탁에 놓은 작은 액자를 들었다.

액자 속엔 아리엘의 초상화가 담겨있었다.

만삭의 배를 쓰다듬으며 환하게 웃고 있는 아리엘의 초상화를 그리운 눈으로 보던 대공은 세이아의 모습을 떠올리다 미간을 좁혔다.

“리엘, 내가 세이아를 잘 키울 수 있을까.”

그의 나직한 말에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어두운 얼굴의 그와 달리 한없이 환한 미소를 그린 그 순간에 머문 아리엘을 가만히 보던 대공은 피식, 씁쓸한 미소를 흘렸다.

당신이 보고 싶어.

차마 뱉지 못하는 말을 삼키며 대공은 액자를 다시 내려놓았다. 그러다 문득 대공은 디아나를 떠올렸다.

“……잘 지내고 있는 건가.”

우연히 디아나가 혼자서 대공가를 돌아다니는 것을 보고 하녀를 붙여 주긴 했지만 그 뒤로 디아나를 제대로 본 적이 없었다.

눈치를 많이 보던 아이가 하녀와 잘 지내고 있을는지.

“……쓸데없는 걱정이야.”

디아나를 걱정하는 자신을 향해 쯧, 혀를 찬 그는 생각을 접으며 침대에 누웠다.

하지만 그의 마음과 달리 그는 한참을 뒤척이다 잠이 들었다.

자꾸만 떠오르는 디아나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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