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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대공가의 집무실.
톡- 톡-.
값비싼 원목 책상 위를 손톱 끝으로 두드리는 대공의 표정은 싸늘하게 굳어 있었다.
대공은 로운에게 전해 들은 것을 다시 정리하듯 말했다.
“그러니까 11년 전쯤 하워드 백작의 둘째 영식과 그 여자가 접촉을 했단 말이지.”
“네, 몇 번이나 만나는 것을 본 적 있는 사람을 찾았습니다.”
하워드 백작의 둘째 영식이라면 대공도 한번 들은 적이 있었다.
워낙 문제가 많고 방탕하게 여자들을 만나고 다녀 하워드 백작의 근심이 크다고 말이다.
“한데 하워드 백작의 둘째 영식이라면 수도의 귀족일 텐데 레아와 어떻게 만난 거지?”
공작의 미간이 좁아진 때, 로운이 차분히 말했다.
“그게 마님께서 어린 시절 수도에서 지내신 적이 있었는데 그때 옆집이 바로 하워드 백작가의 저택이었다고 합니다. 아마 그때부터 인연이 생기지 않았나 짐작하고 있습니다.”
“그렇군. 하긴 아리엘이 시아페 후작가 관할령보단 수도에서 더 오래 지냈으니…….”
황금안에 깊은 그리움이 스쳐 지나갔다. 로운은 주인의 슬픔을 못 본 척 시선을 내리깔았다.
집무실에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먼 곳을 그리듯 흐려졌던 황금안에 초점이 선명해지고 대공은 로운을 보았다.
“더 알아낸 것은 없나?”
“네, 일단 그 여자가 만났던 남자가 하워드 백작의 둘째 영식이라는 것만 알아냈습니다. 하지만 누군지 실마리를 잡았으니 대공성과 수도에 사람들을 풀어 레아와 하워드 영식의 사이를 아는 다른 사람들을 더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레아의 임신을 확진했던 의원은 찾았나?”
“대공가의 영지에서 처음으로 임신을 확인한 것은 아닌 듯합니다. 일단 수도 쪽으로 찾아보고 있습니다.”
“그래, 그때 분명 그 여자는 자신이 먼저 임신 사실을 확진받고 아리엘에게 임신을 했다고 말했었다. 당시 대공성의 의원이었던 로투스 공은 임신 시기를 여자가 말한 마지막 월경일에 따라 어림짐작을 할 뿐 정확히 판단할 수는 없다고 했었지. 그러니 그 여자가 처음 확진받은 의사를 반드시 찾아야 해.”
“네, 명심하겠습니다.”
“그러고 보니, 내가 급히 전장으로 나가는 바람에 로투스 공의 퇴직도 챙기지 못했군. 그가 우리 세이아를 살려 주었는데 말이야.”
끔찍한 난산이었다고 들었다.
대공비는 물론이고 하나뿐인 딸인 세이아까지 목숨이 위태로웠던 상황 속에서 세이아의 목숨이라도 살린 건 오랜 세월 대공가를 살펴온 명의 로투스 의원의 공이 컸다.
‘내가 좀 더 신경을 썼어야 했는데.’
아내를 잃은 견딜 수 없는 슬픔에 모두를 버리고 전장으로 나갔던 지난날의 선택이 후회가 되어 돌아오고 있었다.
미처 챙기지 못한 대공가의 충신은 물론이고 그의 하나뿐인 딸도 마찬가지였다.
너무 오랜 시간 부모의 빈자리를 느끼게 했다.
대공은 자신의 딸을 떠올렸다.
세이아에 대한 미안함과 죄책감에 옅은 한숨을 내쉬던 그는 문득 빨래터에서 본 아이를 떠올렸다.
작고 마른 아이, 디아나.
대공성에서 봤던 것과 달리 허름한 차림의 아이.
그의 표정과 눈치를 연신 보는 아이의 모습은 10살 난 어린아이 같지 않았다.
이상하게 그의 신경을 자극하는 아이 때문에 관자놀이가 지끈거렸다.
그의 얼굴빛이 좋지 않은 것을 본 로운이 물었다.
“전하, 괜찮으십니까?”
“괜찮다.”
대공은 괜찮다고 했지만 그의 얼굴은 여전히 어두웠다.
로운은 잠시 망설이듯 입술을 달싹였지만 결심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전하, 과거의 일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때 전장으로 나가지 않으셨다면 전하는 아마 버티지 못하셨을 겁니다. 그러니 지난 일에 너무 후회하며 힘들어하지 마십시오.”
그때의 대공은 정말 당장 죽을 것처럼 위태로운 상태였다.
물론 그의 선택이 옳은 선택은 아니었지만 로운은 대공의 충신이었기에 다른 이유는 제쳐 두고 대공만을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대공은 고개를 숙이고 있는 로운을 보며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로운의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후회를 하고 있는 건 사실이었지만 그의 머리를 지끈거리게 하는 건 다른 이유였다.
디아나, 또 생각나는 아이의 얼굴에 대공은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손끝으로 누르며 로운에게 말했다.
“네 잘못도 아닌 것에 고개 숙일 필요 없다. 고개 들어라.”
“네, 전하. 혹 전하께서 신경이 쓰이신다면 시골 영지로 내려간 로투스 공을 한번 찾아보겠습니다.”
“로투스 공을? 말년은 조용히 보내고 싶다며 어디로 갈 것인지 말하지 않고 떠났지 않았느냐.”
“그렇긴 하지만 찾으려면 찾을 수 있습니다. 제가 들은 말에 의하면 로투스 공이 자식들이 농사를 짓고 있는 곳으로 갈 거라고 항상 얘기했다고 했습니다.”
“자식들이 있는 곳이라……. 그의 노후를 방해하고 싶진 않지만 제대로 보상을 해 주지 못한 것이 마음에 걸리는군. 찾아보거라. 로투스 공에게는 물론 그의 자식들도 편히 살 수 있게 마땅한 보상을 해 주어야겠다.”
“네.”
로운이 명을 받들며 고개를 숙인 그때 집무실의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전하, 대공녀께서 오셨습니다.”
집사의 목소리가 문밖에서 울렸다.
대공의 무감각하던 표정이 움찔 흔들렸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들어와라.”
집무실의 문이 열리자 화려한 노란 드레스를 입은 세이아가 들어왔다.
“아버지!”
세이아는 환하게 웃으며 대공의 품으로 달려들었다.
와락 안기는 세이아를 대공은 멈칫하다 마주 안아 주었다.
“대공녀께서 전하가 보고 싶으셨나 봅니다.”
대공과 세이아를 흐뭇한 얼굴로 보고 있던 로운이 말했다.
세이아는 대공의 품에서 고개를 돌려 로운을 보았다.
“로운도 보고 싶었어. 반가워.”
“정말이십니까? 대공녀님이 제가 보고 싶으셨다니 감동받아 눈물이 날 거 같군요.”
로운은 눈물 한 방울 나오지 않는 눈가를 손으로 훔치는 시늉을 했다.
그 모습을 본 세이아가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로운, 그만 물러가 보거라.”
대공은 세이아와 장난을 치고 있는 로운에게 말했다.
“네, 그럼 전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두 분 즐거운 시간 보내십시오.”
로운이 집무실을 나가자 대공은 자신을 올려다보며 환하게 웃는 세이아를 바라보았다.
빛바랜 금발과 옅은 금빛 눈동자.
‘그래, 이 아이가 내 딸이다.’
대공은 계속 답답한 가슴을 부정하며 속으로 되뇌었다.
대공은 세이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소파로 가서 편히 앉자꾸나.”
“네.”
대공은 세이아의 손을 잡고 소파로 향했다.
그는 자리에 앉자마자 집사를 불렀다.
“하론.”
집무실의 문을 열고 들어온 집사가 허리를 깊이 숙였다.
“네, 전하.”
“세이아가 먹을 만한 차와 과일을 준비해 오거라.”
“네.”
집사가 나가고 대공은 세이아를 바라보았다.
아직 작은 세이아는 바닥에 닿지 않는 발을 흔들며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세이아.”
“네, 아버지.”
“요즘 갖고 싶은 것은 없느냐.”
세이아가 태어나자마자 얼굴도 보지 않고 전장으로 떠났던 그였다.
아빠로서, 엄마를 잃은 세이아의 곁에 남아 있어야 했지만 그는 그 역할을 다하지 않았다.
그랬기에 그는 지금부터라도 세이아에게 아빠로서의 책임을 다하고 싶었다.
이미 지나간 과거를 되돌릴 수 없었으니 지금부터라도 잘해 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세이아가 원하는 모든 것을 들어주리라 스스로 다짐하며 대공성으로 돌아왔으니까.
한데 하나뿐인 딸을 마주하고 있음에도 왜 이리 무심하기만 한 건지 그의 마음이 스스로도 이해되지 않았다.
분명 혼자 세이아를 생각할 때면 세이아에 대한 미안함과 죄책감에 더욱 잘해 주어야겠다고 계속 다짐하건만 정작 세이아와 마주하면 이상하게 그 마음이 옅어졌다.
세이아가 아리엘을 닮지 않아서일까.
아리엘을 닮지 않았다고 제 자식이 아닌 것이 아닌데 계속 세이아에게서 아리엘의 모습을 찾는 자신을 막을 수가 없었다.
“음…….”
세이아는 고민하며 미간을 좁혔다. 그러다 이내 조막만 한 입술을 움직였다.
“지금은 갖고 싶은 것이 없어요. 이렇게 아버지와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정말 행복하니까요. 나중에 생각나면 말씀드릴게요.”
“……그래, 그리하거라.”
세이아는 사랑스럽게 미소를 지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이상하게 대공은 그런 세이아가 사랑스럽게 느껴지지 않았다.
아리엘을 조금도 닮지 않은 세이아가 낯설었지만 더 이상 그런 생각은 하지 않고 아이를 사랑하리라 마음먹었다.
그렇게 다짐한 지 얼마나 되었다고 또 이런 낯선 위화감이 든단 말인가.
대체 왜 이러는 것일까.
대공은 느리게 눈을 깜박이며 환한 미소를 짓고 있는 세이아를 바라보았다.
아이의 얼굴에서 익숙함을 조금이라도 찾으려 애썼지만 보면 볼수록 낯선 느낌만 가중될 뿐이었다.
아리엘을 닮지 않았다고 내 딸이 낯설다니.
너무 전장에 오래 머물러 미친 것일까.
이럴 때 아리엘이 곁에 있었더라면 못난 생각을 하는 자신의 등을 세게 때렸을 것이다.
아리엘이 그를 나무라던 모습이 떠오른 대공은 피식, 씁쓸한 미소를 머금었다.
세이아가 아리엘을 조금이라도 닮았더라면 좋았을 텐데.
아리엘을 닮은 구석이 없는 세이아를 체념의 눈빛으로 바라보던 그는 자연스럽게 디아나를 떠올렸다.
디아나.
그 여자의 딸.
그동안 단 한 번도 생각한 적 없던 아이다.
그 애가 세상 밖에 나온 것이 역겨워 이름조차 지어 주지 않았던 그였다.
한데 세이아를 볼 때마다, 아리엘을 떠올릴 때마다 그 아이가 떠올랐다.
내가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을 알면 아리엘이 얼마나 슬퍼할까.
대공은 자조적인 비소를 지었다.
그 여자의 딸을 신경 쓰는 스스로가 미쳤다고 생각하며.
똑똑-.
“전하, 다과상이 준비되었습니다.”
“들어오게.”
집사의 목소리에 대공은 어리석은 상념을 치웠다.
은쟁반을 들고 온 집사가 테이블 위로 차와 과일, 그리고 쿠키 접시를 내려놓았다.
“내가 좋아하는 버터쿠키다!”
세이아가 즐거운 듯 말했다. 대공은 그런 세이아에게 쿠키를 하나 집어 내밀었다.
“이걸 좋아하는구나.”
“네.”
기억해 놓아야겠다고 생각하며 대공은 세이아가 먹는 것을 보다 시선을 내렸다.
대공은 과일이 놓인 접시에서 시선을 멈추었다.
예쁘게 썰린 사과와 배는 생전 아리엘이 가장 좋아하던 과일이었다.
“그러고 보니 아리엘이 세이아 너를 가졌을 때도 이 과일들만 찾았었지.”
대공은 초봄에 잘 익은 사과가 먹고 싶다는 아리엘을 위해 남쪽 영지에서 사과를 공수해 왔던 일을 떠올리며 피식, 미소를 지었다.
대공은 어느새 쿠키를 다 먹은 세이아에게 포크로 사과를 찍어 내밀었다.
세이아는 포크에 찍힌 사과를 보자마자 인상을 와그작 찡그렸다.
“으! 아버지, 전 사과를 못 먹어요.”
“못 먹는다고?”
“네, 사과가 너무 싫어요. 식감도 별로고 맛이 없어요.”
기묘한 위화감이 그를 스쳤다. 대공은 굳은 얼굴로 멈칫하며 포크를 다시 내려놓았다.
아리엘이 사과를 좋아했다 하여 세이아도 좋아해야 하는 법은 없다.
어리석은 생각이라 여기며 대공은 세이아에게 쿠키를 하나 더 집어 주었다.
쿠키를 받아 든 세이아가 대공에게 말했다.
“감사해요, 아버지. 저 집무실에 자주 놀러 와도 되나요?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어요. 오랫동안 떨어져 있었잖아요.”
세이아는 그를 빤히 보며 말했다. 아이의 두 눈동자에 담긴 깊은 애정이 그에게 전해졌다.
그 눈빛에 잠깐이었지만 세이아에게 실망한 것이 죄책감이 되어 그의 가슴을 짓눌렀다.
대공은 미안함에 세이아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래, 그러자. 언제든 네가 좋을 때 오렴.”
그의 손길이 좋은 듯 환한 미소를 지은 세이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세이아는 저녁 시간이 다 되어서야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하인들을 모두 물린 대공은 창가에 서서 노을이 지는 붉은 하늘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저 멀리 하인과 하녀들이 머무는 별채가 있는 곳으로 시선을 두었다.
별채는 보였지만 아이가 머물고 있을 작은 오두막은 대공성에선 절대 보이지 않았다.
그만큼 멀리, 외진 곳에 위치한 곳이었으니까.
휭-.
저녁이 찾아오자 창밖으로 매서운 겨울바람이 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시린 바람 소리를 듣고 있자, 대공은 작은 아이의 붉어진 손등이 떠올랐다.
차가운 냇물에 얼마나 오래 손을 담근 것인지 작은 손등은 그저 보는 것만으로도 아픔이 느껴질 만큼 붉어져 있었다.
분명 한두 번 차가운 물에 담근 손이 아니었다.
그를 바라보며 서 있는 디아나에게서 그날 밤 추위에 떨던 아이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그때, 그의 가슴속에서 무언가 알 수 없는 울컥한 감정이 치솟았었다.
그 순간 당장 레아를 끌고 와 묻고 싶었다.
모시던 주인까지 배신하며 낳은 아이가 왜 이런 노예 꼴을 하고 있는 것이냐고.
이해할 수 없는 분노였지만 다른 것을 다 떠나 생각하더라도, 제 아이를 그리 키우는 것이 이해되지 않았다.
대공은 레아가 디아나를 낳기 위해 얼마나 많은 발악을 했는지 다 보았기 때문이었다.
고작 10살 난 아이이건만.
대공은 순간 디아나를 향한 동정이 들었다.
그리고 디아나를 향한 자신의 감정에 미간을 깊이 좁혔다.
10년 동안 전장을 누비며 전장귀, 피에 미친 악마라는 수식어를 얻은 그였다.
한데 다른 사람도 아닌 레아의 딸에게 동정이라니.
그의 손에 죽어 나간 자들이 듣는다면 얼마나 우습겠는가.
하지만 그가 본 디아나의 모습은 레아의 딸이라기엔 너무도 처참했고 아리엘이 했던 말이 떠올라 그의 마음을 불편하게 했다.
어찌 됐든 그는 아이를 희생시키지 말자 했던 아리엘의 말을 지키지 못했으니까.
“하아.”
- 제가 하고 있어요.
- 엄마가 바쁘실 땐…… 제가 일을 도와드리고 있어요.
디아나는 아무렇지 않은 듯 태연한 얼굴로 말했지만 그 덤덤함이 더 그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그 어린아이가 추운 겨울의 빨래터로 나오는 상황을 익숙하게 만든 사람이 바로 자신이었으니까.
차라리 그 여자를 닮았더라면 이리 불편하진 않았을 텐데.
하지만 아무리 보아도 디아나는 그 여자를 조금도 닮지 않았다.
오히려 보면 볼수록…….
“아니, 그건 말이 안 되는 일이야.”
스스로의 생각을 끊어 내는 서늘한 대공의 목소리가 허공으로 흩어진 그때, 집무실의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누구냐.”
집사까지 모두 물렸기에 집무실 앞을 지키는 사람이 없었다.
대공은 창가에서 몸을 돌렸다. 곧 익숙한 목소리가 문밖에서 들려왔다.
“전하, 에드윈입니다.”
대공은 시계를 보았다. 7시가 훌쩍 넘은 시각, 에드윈은 이런 시간에 집무실을 찾을 만한 성격이 아니다.
무슨 일이 있는 것인가.
대공은 책상에 다시 자리를 잡으며 문을 향해 말했다.
“들어와.”
“대공 전하를 뵙니다.”
집무실에 들어선 에드윈이 한쪽 무릎을 꿇으며 기사의 예를 갖추었다.
“일어나.”
“네, 전하.”
“이 시각에 무슨 일이냐.”
“중요한 사안인지 아닌지 사실 고민을 많이 했지만 말씀을 드리지 않으면 제가 나중에 후회를 할 거 같은 예감이 들어 늦은 시각에 이리 무례를 범했습니다.”
에드윈이 송구하다는 듯 고개를 조아리자 대공은 귀찮다는 듯 손을 가볍게 휘저었다.
“서론이 길구나. 본론을 말해.”
“그것이…… 제가 최근에 디아나 아가씨의 모친을 대공성 밖에서 본 적이 있습니다.”
“네가 디아나의 어미를 보았다고?”
예상치 못한 이야기에 대공의 눈썹이 매섭게 치켜 올라갔다.
* * *
벌컥, 열리는 문소리에 디아나는 화들짝 놀라며 감고 있던 눈을 떴다.
“그만 자고 일어나! 언제까지 잠만 자고 있을 거니!”
레아의 날카로운 목소리에 디아나는 후다닥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혹시 늦잠을 잔 것인가 싶어 시계를 보았다.
7시 30분.
평소 디아나가 일어나던 시간보다 빠른 시간이었다.
원래 레아가 디아나의 방에 들어오는 일은 거의 없었다.
그리고 레아는 요즘 계속 아침 일찍 집을 나가고 있었기에 디아나가 일어났을 때 마주치는 일도 예전보다 적었다.
그런데 오늘 갑자기 들이닥친 것이다. 그것도 이렇게 아침 일찍.
레아가 평소와 다른 행동을 할 때마다 디아나에게 좋은 일이 있은 적이 없었기에 디아나는 숨을 죽이고 그녀를 보고 있었다.
“방 꼴이 이게 뭐야, 정말. 너는 정리도 제대로 할 줄 모르니? 쯧.”
방을 둘러보던 레아는 옷 정리를 제대로 해 놓지 않았다고 짜증을 내다 디아나를 돌아보았다.
디아나는 레아의 싸늘한 눈빛에 몸을 움찔했다.
“갈 데가 있으니까, 씻고 옷 갈아입고 빨리 내려와.”
“네.”
레아가 문을 쾅 닫고 나가자 디아나는 그제야 쪼그라들었던 가슴을 쭉 폈다.
근데 갈 데가 있다니, 이렇게 이른 아침에 어딜 가려는 걸까.
의아함이 들었지만 고민을 하고 있을 시간이 많지 않았다.
빨리 준비하지 않으면 레아의 불호령이 떨어질 테니까.
디아나는 욕실에서 빠르게 얼굴을 씻고 옷들 중 그나마 제일 깔끔한 회색 원피스로 갈아입었다.
원피스의 주름을 손으로 펴던 그때, 문득 며칠 전 에드윈이 집에 데려다주었을 때 들었던 레아의 중얼거림이 떠올랐다.
- 조금만 더 참으면 돼…….
그때, 이상한 말을 하는 레아를 며칠 의심스런 눈길로 관찰하였지만 특별히 이상한 점을 발견할 수 없었다.
레아는 계속 아침 일찍 나가 저녁 늦게 들어왔고 디아나를 건드리는 일은 없었으니까.
한데 오늘은 뭔가 달라졌다.
등줄기를 서늘하게 스치는 불길한 예감에 디아나는 움직이던 손을 멈칫했다.
‘날 어디로 데려가려는 거지?’
이렇게 이른 시간인 걸 보면 본성에서 디아나를 불렀을 리도 없다.
그럼 어디로?
무언가 좋지 않은 예감이 자꾸 디아나를 자극했다.
거울 속에 비친 제 모습을 빤히 보던 디아나는 고개를 휙휙 저었다.
‘아냐. 아무 일도 없을 거야.’
대공이 돌아온 뒤로 레아는 갑자기 사람들의 눈치를 살피며 손찌검도 멈춘 상황이었다.
사람들의 눈치를 보는 그녀가 밖에서 제게 무슨 짓을 할 리 없을 것이다.
차라리 집 안이면 모를까.
디아나는 불길한 예감을 억누르며 원피스에 묻은 먼지를 손으로 털어 냈다.
‘괜한 생각하지 말고 빨리 내려가야지. 화난 엄마의 목소리를 듣고 싶지 않아.’
하지만 기다렸다는 듯 문밖에서 레아의 날 선 외침이 들렸다.
“빨리 안 내려오니!”
“네! 지금 내려가요, 엄마.”
디아나는 그 목소리에 반사적으로 움찔하며 황급히 방을 나섰다.
겨울의 이른 아침은 숨결이 하얀 김이 되어 사라질 만큼 추웠다.
디아나가 입고 있는 옷은 추위를 막기에는 부족한 얇은 원피스에 낡은 코트가 전부였다.
디아나는 두꺼운 코트와 목도리까지 한 레아의 뒷모습을 보며 몸을 잔뜩 움츠렸다.
그때, 레아가 뒤를 돌아보았다.
“빨리 좀 걸어. 이러다 늦겠어. 정말이지 몸이 저리 굼떠서는.”
레아는 디아나를 보며 혀를 찼다. 몸이 굼뜬 게 아니라 추워서 몸이 굳은 거였지만 그녀에게 반박할 순 없었다.
디아나는 짜증이 가득 서린 레아의 눈빛에 고개를 숙이며 발걸음을 더욱 빨리했다.
‘본성으로 가는 건가?’
레아는 본성이 있는 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전하께서 나를 부르신 건가?’
그 이유가 아니라면 레아가 자신을 본성으로 데려갈 이유가 없을 테니까.
생각을 잇다 보니 문득 그날 냇가에서 보았던 대공의 모습이 떠올랐다.
왜인지 복잡한 감정이 뒤섞인 눈빛으로 자신을 보던 대공, 그리고 이해할 수 없는 친절을 베풀던 그의 행동.
하지만 디아나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이유가 뭐건 디아나는 대공을 만나고 싶지 않았다. 처음 보았을 때 경멸이 스쳤던 그의 차가운 눈빛을 잊을 수가 없다.
언제든 자신을 내칠 수 있는, 어쩌면 레아보다 제게 더 위험할지도 모르는 사람이었으니까.
디아나가 스스로 대공가를 나갈 수 있는 그날까지 대공과는 최대한 엮이지 않는 게 안전한 일일 거다.
본성으로 향하는 외길이 눈에 보였다. 디아나가 속으로 한숨을 쉬던 그때, 레아는 외길이 아닌 다른 방향으로 몸을 틀었다.
‘저택으로 가는 게 아닌가?’
디아나는 순간 당황해서 레아의 걸음을 뒤쫓지 못했다. 디아나가 멍하니 서 있자 레아가 또 뒤돌아 소리쳤다.
“뭐 하고 있는 거야, 시간 없다니까!”
뭐가 그리 시간이 없는 건지 레아는 디아나에게 다가와 그녀의 손목을 거칠게 잡았다.
그런데 레아가 디아나를 잡아끌고 향하는 방향은 별채의 하녀들이 성을 나가는 문이었다.
“엄마, 엄마, 잠시만요!”
디아나는 처음으로 레아의 행동을 거부하며 소리쳤다. 양순하기만 했던 디아나의 거부에 순간 놀란 듯 레아가 걸음을 멈추었다.
그런 레아에게 디아나가 급히 물었다.
“엄마, 우리 지금 성을 나가는 거예요?”
레아는 잠시 말이 없다 이맛살을 구겼다.
“그래, 성을 나가는 거야. 첫 마차를 타고 나가야 하는데 네가 자꾸 굼뜨게 행동하니 늦어지고 있잖아! 너 엄마가 화냈으면 좋겠니?!”
레아가 눈을 부릅뜨며 위협적으로 보았지만 디아나는 두려움보다 당혹스러움을 먼저 느꼈다.
성을 나간다니. 디아나는 그간 태어나 한 번도 성 밖을 나가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자신을 데리고 왜 성을 나가려는 거지?
디아나의 심장이 불안으로 쿵쾅거렸다.
‘나를 성 밖으로 내쫓으려는 걸까, 날 버리면 어떡해?’
불길한 예감이 틀리지 않은 걸까.
아직은, 아직은 안 된다. 이렇게 어린 나이에 아무것도 모른 채 성 밖을 나가면 자신이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추운 겨울날 밖에서 굶어 죽고 싶진 않았다.
상상만으로도 두렵고 무서워 몸 안의 피가 차갑게 식어 버리는 느낌이었다. 디아나는 레아를 떨리는 눈동자로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엄마, 저 성 나가기 싫어요. 제가 잘못했어요.”
디아나는 손목을 당기는 레아의 힘을 이길 수 없어 풀썩 주저앉아 버렸다.
“뭐?”
순간 당황한 듯 레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녀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하지만 이른 시간이라 그런지 주변에는 레아와 디아나밖에 없었다.
주변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레아가 인상을 찡그리며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너 지금 뭐 하는 거야? 나가기 싫다니. 성 밖에 뭐 괴물이라도 있어? 바닥에 주저앉지를 않나, 이게 무슨 못 배운 행동이야?! 당장 일어나! 이번 마차 놓치면 다음 마차는 정오에나 있으니까.”
레아가 힘을 주어 디아나의 손목을 잡아당겼다. 그녀와 디아나의 힘 차이는 분명했다. 그녀가 힘을 주자 디아나의 몸이 딸려 올라갔다.
“아, 엄마, 엄마, 제가 잘못했어요. 잘못했어요, 제발 용서해 주세요.”
디아나가 눈물까지 글썽이며 말하자 레아가 짜증스럽게 소리쳤다.
“누가 보면 내가 너 성 밖에다 버리러 가는 줄 알겠다, 정말!”
“…….”
디아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 제 침묵이 긍정이라는 걸 알아차렸는지 레아의 눈동자가 잠시 흔들렸다.
그것도 잠시 그녀는 ‘하!’ 하는 어이없다는 탄성과 함께 기가 막힌 얼굴을 했다.
“부모의 은혜도 모른다는 말은 딱 너보고 하는 말일 거다. 내가 여태껏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 나를 파렴치한으로 취급하다니. 정말 어이가 없어서……. 일어나! 네 옷 사러 나가려는 거니까!”
“……옷이요?”
“그래! 매번 같은 옷만 입고 다니는 게 꼴 보기 싫어서 그래. 집사도 그렇고 하녀장도 그렇고 갑자기 왜들 지랄인 건지. 당장 일어나, 이러고 있을 시간 없어!”
레아는 정말 진저리난다는 얼굴로 말했다.
‘믿어도 되는 걸까?’
디아나는 의심을 완전히 거두지 못했다. 불안한 눈빛으로 몸을 움찔하자 레아가 짜증스런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곤 디아나의 몸을 번쩍 안아 들었다. 가볍기만 한 몸은 저항 없이 쑥 들렸다.
레아는 매서운 눈초리로 디아나를 보았다.
“너랑 이러고 있을 시간 없으니 얌전히 있어. 이번에도 말 안 들으면 정말 가만두지 않을 거니까.”
진심인 듯 레아의 목소리가 살벌했다. 디아나는 더 이상 반항을 하면 버려지기도 전에 맞아 죽을 거 같아 입을 다물었다.
제발 레아의 말이 거짓말이 아니길 바라면서.
* * *
“이 옷이 제일 잘 어울리는 거 같네요. 이걸로 하시겠어요?”
푸근한 인상을 가진 중년의 여자가 레아를 보며 묻자 레아는 디아나를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흠…….”
디아나는 입고 있는 연노란색의 드레스를 내려다보았다. 레이스가 예쁘게 들어간 드레스는 꼭 세이아가 입는 옷처럼 화려했다.
거기다 안감은 보들보들한 기모처리가 되어 있어 보온 효과까지 뛰어났다.
예쁘고 따뜻해.
생전 처음 입어 보는 값비싼 옷에 마음이 들뜨지 않을 수 없었다.
‘엄마의 말이 거짓말이 아니었어.’
두 사람은 아슬아슬하게 성을 나가는 첫 마차에 올라탔다.
대공저는 번화가에서 꽤 거리가 있었는지 숲길을 한 시간을 넘게 달렸다.
디아나는 처음에는 두려워 창밖의 풍경을 제대로 보지도 못했지만 광장으로 들어선 순간 마차 밖의 풍경에 넋을 놓았다.
분수대가 있는 광장과 여러 상점이 즐비한 거리, 사람들의 활기찬 모습들.
생전 처음 보는 광경을 멍하니 보고 있던 그때, 마차가 멈춰 섰다.
레아는 디아나가 마차에서 내리지 않을까 의심됐는지 다시 그녀를 안고는 마차에서 내렸다.
광장에 발을 내디딘 그때, 멍하던 정신이 번쩍 돌아온 디아나는 긴장하며 레아의 옷자락을 꼭 잡았다.
혹시라도 레아가 자신을 버리고 도망갈까 봐.
레아는 그런 디아나를 귀찮은 눈빛으로 보았지만 디아나의 손을 쳐 내지는 않았다.
그리고 그녀는 곧장 지금의 옷가게에 왔다.
그리고 디아나에게 여러 벌의 옷을 입혔다, 벗겼다를 반복하며 옷을 고르고 있는 중이었다.
디아나는 시선을 들어 레아를 보았다. 순간 레아와 눈이 마주쳤다. 레아는 눈썹을 사납게 치켜 올리다 가게 주인의 시선이 자신들을 향하자 사르르 미소를 지었다.
“디아나, 이 옷이 마음에 드니?”
“…….”
레아는 어서 말해 보라는 듯 친절한 목소리로 물었지만 디아나는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일단 레아의 이런 상냥함은 옷가게 주인의 시선을 의식한 가짜였고, 이 옷은 너무 값비싸 보였으니까.
좋다고 말했다가 나중에 혼이 날까 두려웠다.
디아나는 드레스의 프릴을 손으로 만지작거리며 레아의 눈치를 살폈다. 그때 가게 주인이 레아를 보며 말했다.
“어휴, 이게 딱이에요. 따님이랑 이 색도 너무 잘 어울리잖아요. 값이 비싸서 망설이는 거면 내가 좀 깎아 줄게요. 이걸로 해요.”
레아는 고민하는 듯하다 미소를 지으며 주인에게 말했다.
“제가 봐도 우리 디아나에게 이 옷이 제일 잘 어울리는 거 같네요. 이걸로 주세요. 아, 저기 저 신발이랑 저 머리핀도 같이 주세요.”
“어머나, 우리 예쁜 아가씨는 좋겠네. 엄마가 이렇게 좋은 걸 많이 사 줘서.”
주인이 디아나를 보며 말했다. 디아나는 자신을 빤히 보고 있는 레아의 눈빛을 느끼며 억지로 입꼬리를 올렸다.
“……네, 너무 좋아요.”
“빨리 좀 준비해 주시겠어요? 저희가 좀 바빠서.”
레아가 주인에게 말하자 주인이 빠르게 신발과 머리핀을 가져왔다.
디아나는 연노랑과 비슷한 노란색 구두를 신고 연녹색의 예쁜 보석이 달린 머리핀을 꽂았다.
그렇게 한껏 차려입은 거울 속의 디아나는 꼭 다른 사람처럼 빛이 나는 거 같았다.
“예쁘다…….”
디아나는 작게 중얼거리다 혹시 레아가 들었을까, 뒤를 슬쩍 보았다. 하지만 레아는 주인에게 물건값을 치르는 중이었다.
디아나는 다시 고개를 돌려 거울 속의 자신을 보았다.
이게 꿈은 아니겠지.
레아가 이런 옷을 사 주다니, 정말 믿기지 않았다.
“디아나, 그만 보고 이리 오렴, 갈 데가 있단다.”
값을 다 치른 것인지 레아는 시계를 힐긋 보더니 디아나를 부드럽게 불렀다.
디아나가 다가가자 레아가 손을 잡으라는 듯 손을 내밀었다.
한껏 들뜬 디아나는 레아의 손을 잡고 옷가게를 나갔다.
가게를 나온 레아와 디아나는 시장을 걸어가다 갑자기 앞을 가로막는 한 남자 때문에 걸음을 멈추었다.
“예쁜 모녀 두 분, 우리 과자 하나 드시면서 가세요. 방금 구워서 정말 맛있답니다.”
도둑인가 싶어 움찔했지만 다행히도 남자는 설탕 절임 과자를 파는 노점상의 주인인 듯 우리에게 호객행위를 하고 있었다.
레아는 짧은 한숨을 내쉬며 구릿빛의 작은 동전 같은 걸 남자에게 내밀었다.
“아이 먹이게 하나만 주세요.”
“네!”
남자는 막대기에 기다란 과자를 꽂아 디아나에게 내밀었다.
“예쁜 아가씨, 맛있게 먹으렴.”
“……감사합니다.”
디아나가 막대기를 손에 들자 레아는 다시 발걸음을 재촉했다. 빠른 걸음으로 걷는 그녀를 쫓아가느라 디아나는 들고 있는 과자를 맛볼 수가 없었다. 떨어뜨리지 않는 것만으로도 다행이었다.
또 어딜 가야 하는 건지 레아는 꽤 초조한 얼굴로 걸음을 재촉했다.
그러다 분수대가 있는 광장에서 갑자기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뭔가 낭패 어린 얼굴을 했다.
“아, 이런! 가방을 놓고 왔잖아!”
가방……?
디아나는 레아의 다른 손을 힐긋 보았다. 그러자 아무것도 들고 있지 않은 그녀의 손이 보였다. 집에서 나올 때 레아는 작은 손가방을 하나 들고 나왔었다.
그걸 옷가게에 놔두고 온 듯했다. 레아는 짜증이 나는지 머리칼을 거칠게 쓸어넘기며 나를 돌아보았다.
“너, 이리 와 봐.”
레아는 디아나의 손을 잡고 광장의 분수대로 이끌었다. 분수대 앞에는 쉴 수 있게 의자가 마련되어 있었다. 레아는 그곳에 디아나를 앉히고는 말했다.
“시간이 없으니까, 넌 일단 여기 앉아서 얌전히 기다려. 난 가방을 찾아올 테니까.”
“저 혼자요?”
혼자 두고 간다는 말에 디아나는 반사적으로 레아의 옷자락을 잡았다. 레아는 그에 소리를 치려는 듯 입을 크게 벌렸다 주변 사람들을 의식한 듯 입을 다물었다.
후, 속의 화를 참는 듯 깊은숨을 내쉰 레아가 무릎을 굽히며 몸을 낮추었다.
그녀는 디아나의 어깨를 꽉 잡으며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널 데리고 왔다 갔다 하면 시간이 이중으로 들잖니. 정오에 대공가의 마차가 오니까, 시간이 별로 없어. 늦지 않게 집으로 돌아가려면 내가 얼른 뛰어가서 가방을 가져오는 게 낫지 않겠니? 마차를 놓쳐서 저녁까지 이곳을 떠돌고 싶어?”
“……아뇨, 그렇지만 혼자는…….”
어깨를 점점 꽉 쥐어 오는 레아의 힘에 디아나는 말끝을 흐렸다. 레아는 디아나의 이름을 부드럽게 불렀다.
“디아나, 네가 자꾸 이러면 내가 화가 나지 않겠니? 집으로 돌아가 매질을 당하고 싶은 게 아니라면 얌전히 이곳에서 기다리고 있어.”
부드러운 목소리와 달리 살벌한 레아의 말에 디아나는 움찔 몸을 떨며 고개를 끄덕였다.
“안 그래도 시간이 다 되었는데.”
레아는 광장의 높은 시계탑을 보았다. 그녀의 시선을 따라 시계탑으로 고개를 돌리자 정말 정오가 얼마 남지 않은 시각이었다.
‘그래, 마차가 어디로 오는지 내가 아는데 날 여기에 버린다는 건 말이 안 돼.’
그리고 정말 레아는 가방을 놔두고 온 게 맞기도 하니까.
디아나는 잡고 있던 레아의 옷을 놓았다. 레아는 그제야 만족스러운 듯 싱긋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여기서 얌전히 기다리고 있으렴. 금방 다녀올 테니까.”
“네.”
빨리 다녀오겠다는 말이 거짓이 아니었는지 레아는 앞만 보고 걸으며 옷가게가 있는 방향으로 향했다.
디아나는 레아의 등이 더 이상 보이지 않을 때까지 보고 있다 그녀가 사라지고 나서야 시선을 뗐다.
“괜찮아, 괜찮을 거야.”
마차가 어디로 오는지는 알고 있었지만 막상 낯선 곳에 혼자 남겨지니 덜컥 무서워졌다.
디아나는 스스로를 달래며 두 손을 꼭 잡았다. 무서움을 떨치려 일부러 광장을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추위가 조금 가신 따스한 오전이라 그런지 광장에는 사람들이 많이 나와 있었다.
아이들을 데리고 나온 부모들, 연인들, 또래 친구들과 함께 뛰어다니는 아이들도 있었다.
평화로워 보이는 그들을 보자 불안했던 기분이 점차 가라앉았다.
‘전하가 오랫동안 자리를 비웠는데도 영지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나 보네.’
그러고 보니 예전에 하녀들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대공가의 영지가 제국에서 제일 부유한 영지라고 자랑스럽다는 듯 말했던 것이.
“저기, 누나.”
갑자기 들리는 목소리에 디아나는 생각을 멈추었다. 고개를 돌리자 작은 아이가 보였다.
디아나보다 한두 살 어린 남자아이.
디아나는 남자아이의 허름한 옷차림을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광장을 뛰어노는 아이들과는 너무 다른 차림이었다.
디아나는 왠지 아이의 얇은 옷차림에서 눈을 떼기 힘들었다.
저런 차림으로 겨울을 보내는 게 얼마나 추울지 잘 알아서.
남자애는 디아나를 빤히 보다 다시 입을 열었다.
“누나 이름이 디아나 맞아요?”
“응? 내 이름을 어떻게 알았어?”
“레아라는 분이 제게 심부름을 시켰어요.”
“레아……?”
아이는 품에서 작은 구릿빛 동전 두 개와 목도리 하나를 꺼내 보여 주었다.
목도리는 다름 아닌 레아가 오늘 하고 나온 것이다.
‘정말 엄마가 보낸 건가 봐.’
남자애가 디아나를 보며 말했다.
“마차 시간이 다 되었으니 그리로 바로 오라고 하셨어요. 저쪽으로 가면 지름길이 있으니 그 골목을 지나 빨리 오라고요.”
디아나는 시계탑을 보았다. 언제 시간이 이리 흘렀는지 어느새 정오까지 10분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디아나는 다시 남자애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거짓말은 아니겠지……?
디아나는 남자애가 들고 있는 목도리를 가늘어진 눈초리로 다시 살펴보았다. 그러자 남자애가 디아나에게 목도리를 내밀었다.
“여기요, 늦게 드려 죄송해요. 제가 가지려는 마음 같은 건 없었어요.”
“응……?”
남자애는 디아나의 시선을 오해한 거 같았다. 그 애는 진짜라는 듯 절박한 눈빛으로 디아나를 바라보았다.
꼭 디아나가 레아에게 잘못을 빌 때처럼.
디아나는 가늘어진 눈매를 바로 하며 남자애에게 미소를 지었다.
“알아, 그냥 여기 목도리에 먼지가 묻은 거 같아서 자세히 본 거였어.”
목도리를 건네받으며 묻지도 않은 먼지를 떼어 내는 척하자 남자애가 그제야 안심한 듯 얼굴을 풀었다.
디아나가 의자에서 일어나자 남자애가 말했다.
“제가 골목까지 모셔다드릴게요.”
“응, 고마워.”
디아나는 얼마 남지 않은 시간에 남자애와 함께 발걸음을 서둘렀다. 거의 뛰다시피 골목 앞에 도착하자 밝았던 광장과 달리 어두운 골목에 멈칫했다.
거기다 주변을 둘러보았는데 이상하게 사람들이 보이지 않았다.
골목의 입구는 시장과 겨우 한 블록 떨어진 곳이었음에도 이곳은 시장과는 완전 동떨어진 외진 곳처럼 느껴졌다.
‘뭔가 느낌이 안 좋아.’
디아나가 골목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망설이자 남자애가 말했다.
“무서우면 같이 가 드릴까요? 전 여기 자주 다녀서 괜찮아요.”
“응? 아…… 그래 줄래?”
남자애의 씩씩한 말에 디아나는 망설일 시간이 없었기에 부탁했다.
‘같이 가면 좀 덜 무섭겠지?’
디아나는 고개를 끄덕이는 남자애의 손을 잡고 골목 안으로 걸어갔다.
골목의 반쯤을 걸었을까, 뒤에서 두 사람의 것과는 다른 무거운 발소리가 들려왔다.
한데 이상하게도 그 발소리는 꼭 두 사람을 따라오는 느낌이었다.
‘아냐, 그럴 리가 없잖아. 길이 하나이니 그냥 같은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일 거야.’
그래도 뭔가 불안해 힐긋 뒤를 돌아본 순간, 기다렸다는 듯 시선이 마주친 남자가 씩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그 미소에 디아나의 온몸에 소름이 돋아났다.
더러운 가죽 갑옷을 입고 얼굴에는 긴 칼자국이 있는 붉은 머리의 남자.
‘저 사람…… 위험해.’
그리고 디아나의 예감이 맞은 듯 그는 킬킬거리며 입을 열었다.
“이거, 좋은 게 하나 걸려들었네.”
디아나는 남자애의 손을 힘주어 잡았다. 순간 남자애의 시선이 디아나를 향했다. 감이 예민한 디아나는 저들이 자신을 노린다는 걸 바로 알아차렸다.
하지만 처음 겪는 무서운 상황에 몸이 굳어 움직이질 않았다.
디아나는 두려움에 손을 떨며 남자애의 손을 꽉 잡았다.
“도망가야 해요…….”
남자애가 작게 속삭인 순간 골목 안쪽에서 또 다른 남자가 나타났다.
중단발의 초록 머리를 가진 남자는 붉은 머리칼의 남자에게 반갑다는 듯 손을 흔들었다.
그들은 한패였다.
디아나와 남자애가 덜덜 떨고 있던 그때 그들의 앞으로 초록 머리 남자가 다가왔다.
디아나는 겁에 잔뜩 질린 목소리로 남자에게 말했다.
“……저희는 가진 게 없어요. 제발 그냥 보내 주세요…….”
그런데 그 말이 뭐가 그리 웃긴지 남자가 폭소를 터뜨렸다.
“하하하! 진짜 웃기는 아가씨네. 가진 게 없어요? 어유, 귀여운 아가씨, 아가씨 존재 자체가 내게는 목돈이야.”
불법적으로 노예를 사고판다는 것을 하인들에게 들은 적이 있었다. 남자가 무슨 의도로 한 말인지 알아들은 디아나는 온몸의 피가 싹 빠져나가는 느낌이었다.
“오, 생각보다 더 반반하네. 이 정도면 못해도 100골드는 받을 수 있겠는데?”
어느새 디아나에게 다가온 붉은 머리 남자가 말하자 초록 머리 남자가 즐겁다는 듯 웃으며 맞장구를 쳤다.
“그러게, 이거 정말 그년 말대로 남는 장사야.”
‘그년 말대로……?’
그들의 말에서 기묘한 위화감을 느꼈지만 점점 가까워지는 두 남자 때문에 다른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근데 이 꼬맹이는 뭐야? 나한테 한 명이라고 하지 않았어?”
디아나의 코앞에 선 붉은 머리 남자의 시선이 디아나가 아닌 떨고 있는 남자애에게 향했다.
다른 남자가 귀찮다는 듯 말했다.
“몰라, 뭐가 중요해. 우리가 챙길 건 하나니까, 빨리 처리해.”
“그래, 곧 경비병이 순찰 돌 시간이네. 내가 이놈 처리할게, 대장은 요 아가씨를 맡아.”
초록 머리 남자가 디아나를 보며 섬뜩한 미소를 지은 순간 다른 남자가 칼을 빼 들었다.
그들이 말한 처리의 뜻은 남자아이를 죽이는 것이다.
자신에게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아차린 남자아이의 몸이 사시나무 떨리듯 떨렸다.
공포에 질린 남자아이의 푸른 눈동자와 디아나의 눈이 마주쳤다.
휙-.
칼이 휘둘러진 순간, 디아나가 순간적으로 아이의 몸을 힘껏 밀었다. 아이가 넘어지자 남자의 칼은 허공을 갈랐다.
두 남자가 당황한 순간.
“도망쳐!”
정신이 번쩍 든 디아나가 아이에게 소리치며 골목을 달렸다.
퍽-.
“아!”
하지만 디아나는 얼마 달리지도 못하고 등에서 느껴진 아픔에 앞으로 넘어졌다.
“아, 조막만 한 게 짜증 나게 하네. 아저씨들 말을 잘 들어야 아프지 않지? 응? 안 그래?”
디아나의 머리채를 억세게 잡은 초록 머리 남자가 더러운 이를 드러내며 웃고 있었다.
“윽…….”
“이거, 겁 좀 줘야겠네.”
남자는 킬킬거리며 디아나의 목을 뒤로 꺾어 버릴 듯 머리채를 세게 당겼다. 숨을 제대로 들이마실 수 없어 켁켁거렸지만 그는 자비 없이 디아나의 목을 더욱 꺾었다.
‘주, 죽을 거 같아.’
“아악!”
옆에서 들리는 아이의 비명을 들었지만 디아나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숨을 쉴 수 없어 흐려지는 의식 속에서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린 그 순간, 디아나의 머리채를 잡고 있던 남자의 몸이 날아갔다.
“켁, 켁! 우웁- 하, 하아.”
디아나는 앞으로 주저앉으며 막혔던 숨을 몰아쉬었다.
헛구역질까지 하고 있던 그때, 고통에 찬 남자의 비명이 골목을 울렸다.
“아아악! 사, 살려…… 아악!”
디아나는 안간힘을 쓰며 고개를 들어 비명이 들리는 곳을 보았다.
대공가의 기사를 상징하는 검은 제복과 하늘색 머리칼.
“……에드윈.”
“아가씨!”
디아나는 자신을 향해 고개를 돌린 에드윈의 얼굴을 확인하는 것을 마지막으로 의식을 잃었다.
* * *
작은 몸이 차가운 바닥 위로 쓰러지는 것을 본 에드윈은 남자의 다리에 박았던 칼을 거칠게 뽑았다.
“으아악!”
고통에 찬 비명이 들렸지만 에드윈은 조금도 신경 쓰지 않고 쓰러진 디아나에게 달려갔다.
“아가씨!”
디아나의 작은 몸을 안은 에드윈은 미동도 없는 디아나의 모습에 순간 섬찟함을 느끼며 황급히 어린 가슴에 귀를 갖다 대었다.
쿵- 쿵- 쿵.
미약하지만 분명 심장이 뛰고 있었다.
‘죽은 게 아니야. 기절한 거야.’
얼음장처럼 굳었던 에드윈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에드윈은 뒤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초록 머리 남자가 엉망이 된 한쪽 다리를 질질 끌며 골목을 빠져나가려고 하는 것이 보였다.
“어딜 감히!”
에드윈은 그를 놓쳐선 안 된다는 다급함에 그의 허리를 향해 단검을 날렸다.
한데 하필 그 순간 다리가 미끄러진 남자가 넘어지며 단검이 남자의 목덜미에 정확히 박혔다.
“안 돼!”
죽어서는 안 된다.
에드윈은 디아나를 품에 안고 황급히 초록 머리 남자에게 달려갔다.
에드윈은 다량의 피를 흘리고 있는 남자를 보며 인상을 구겼다.
만약의 가능성을 생각하며 남자의 경동맥에 손을 대 보았지만 단검을 맞은 순간 즉사한 듯 경동맥에선 아무런 박동이 느껴지지 않았다.
“젠장.”
에드윈은 낮은 욕지기를 내뱉으며 한 손으로 머리를 거칠게 헝클었다.
증좌가 될 수 있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
에드윈은 골목에 쓰러진 두 남자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붉은 머리의 남자는 에드윈이 골목에 들어서자마자 검으로 베어 버렸다.
한 놈은 살렸어야 했는데, 이성적으로 판단하지 못했다.
디아나가 쓰러진 순간, 이성이 날아가 버린 그였다.
원래라면 일단 초록 머리 남자를 완전히 제압한 뒤 디아나에게 달려갔어야 했다.
하지만 디아나가 그의 이름을 부르며 쓰러진 순간 다른 것을 생각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가 처음 골목에 도착했을 때 본 디아나의 모습은…….
“내가 좀 더 일찍 왔어야 했는데.”
후회로 가득한 에드윈의 목소리가 스산한 골목 안을 울렸다. 피 냄새가 진동하기 시작하자 에드윈은 디아나를 조심스럽게 안아 들었다.
그때, ‘끙’ 하는 작은 소리가 들렸다. 에드윈은 잠시 잊고 있었던 작은 남자아이에게 다가갔다.
정신을 차린 듯, 남자애가 눈을 느리게 깜박였다.
주변을 둘러보다 시신을 발견한 아이의 몸이 덜덜 떨렸다.
에드윈은 빠르게 아이를 일으켰다. 그러곤 아이와 시선을 맞추며 말했다.
“괜찮아. 이제 다 괜찮아졌으니 걱정하지 마.”
“…….”
에드윈은 아직 떨고 있는 남자애의 차림을 훑었다. 낡은 옷과 해진 신발.
빈민가의 아이인가.
빨리 대공가로 돌아가야 하는데.
디아나가 아직 의식이 없었다. 어서 돌아가 의원에게 치료를 받아야 했다.
하지만 눈앞의 아이를 이대로 놓고 가는 것이 그의 마음에 걸렸다.
그리고 증좌로 내세울 수 있는 자들이 다 죽어 버렸으니, 어쩌면 아이가 아는 것이 하나라도 있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아이까지 함께 데려갈 수는 없는데.
난감한 상황에 에드윈이 미간을 좁히던 그때, 경비대가 골목 앞으로 나타났다.
“거기 무슨 일이십니까?”
에드윈은 잘되었다 생각하며 그들을 불렀다.
“대공가의 기사다. 이쪽으로 와라.”
“앗, 네!”
대공가의 기사라는 말에 기합이 바짝 들어간 경비대 두 명이 골목 안으로 들어왔다.
경비병들이 시신을 발견하고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자연스럽게 경비병들의 시선이 에드윈이 안고 있는 디아나에게 향했다.
“시선을 돌려라.”
에드윈의 싸늘한 목소리에 경비병들의 시선이 아래로 내려갔다.
에드윈은 그들에게 명령했다.
“시신을 치우고 이 아이를 데려가서 임시 보호하도록. 만약 이 아이가 갈 곳이 없다면…… 다시 내게 연락하도록 해라. 나의 이름은 에드윈 드로이트, 대공가의 기사단으로 연통을 넣도록.”
“네, 알겠습니다.”
에드윈은 경비대에게 아직 떨고 있는 남자아이를 맡기고 급히 골목을 빠져나갔다.
* * *
대공성의 본성, 손님용 방에는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아 있었다.
침대에 의식 없이 누워 있는 디아나를 진찰하던 의사가 몸을 일으켰다.
그때, 방문이 벌컥 열렸다.
의원에게 다가가려 했던 에드윈은 갑자기 방문을 열고 들어온 대공의 모습에 놀라며 예를 갖추었다.
“대공 전하를 뵙니다.”
“일어나.”
대공은 예를 갖추고 있는 에드윈을 그대로 지나쳐 의원에게 다가갔다.
“진찰은 끝난 건가?”
대공의 시선이 힐끔, 눈을 감고 있는 디아나에게 닿았다가 떨어졌다.
의원이 대공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큰 내상은 없으나 상태가 그리 좋다고 할 순 없습니다. 크게 놀란 듯 몸의 기운이 많이 흐트러졌습니다. 원래 몸이 건강했다면 모를까 원체 허약했기 때문에 약을 먹이며 경과를 지켜봐야 할 거 같습니다.”
“……목숨이 위태로울 수도 있다는 말인가?”
“그것은 정말 최악의 경우이옵고, 아직 거기까지 걱정할 정도는 아닙니다.”
“그렇군.”
대공은 알 수 없는 묘한 안도감을 느끼며 입을 다물었다.
“그럼 전하, 저는 약을 준비하러 가 보겠습니다.”
“그리하라.”
의원이 방을 나가고 대공은 그 자리에 멈춰 서 있었다.
디아나에게 다가가기엔 그래야 할 이유가 없었고, 그렇다고 이 방을 나가고 싶지 않았다.
에드윈이 의식이 없는 디아나를 데리고 대공성에 도착한 것을 집사에게 들었을 때, 그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아이를 본성에 들였다.
그리고 자기도 모르게 책상에서 일어났다.
문을 열기 전 로운이 어딜 가시는 것이냐 묻지 않았다면 그대로 아이가 있는 곳으로 갔을 것이다.
하지만 로운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린 대공은 다시 책상에 앉아 일을 마무리하려 했다.
자꾸 디아나의 생각이 나지만 않았다면.
대공은 결국 일을 전부 마무리하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로운이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시선으로 자신을 보는 것이 느껴졌지만 대공은 그를 무시하곤 이곳으로 향했다.
책상에 가만히 앉아 있어 봤자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할 테니까.
그래서 디아나가 어떤 상태인지만 확인하려 했다.
삐쩍 마른 그 아이가 의식까지 잃었다니,
그래서 그 아이의 생사만 확인하고 집무실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분명 이 방을 들어올 때까지만 해도.
하지만 대공은 아이의 생사를 확인한 지금도 발을 뗄 수가 없었다.
답답한 스스로가 짜증 나 미간을 깊이 좁히던 그때, 에드윈이 대공에게 다가왔다.
“전하.”
대공은 디아나에게서 시선을 거두며 에드윈을 보았다.
“그 여자를 쫓다 오늘 일을 발견한 것인가?”
“네, 그렇습니다.”
그렇다는 대답에 대공의 눈썹이 치켜졌다.
여자를 쫓다 아이가 이리된 것을 발견했다고……?
대공은 순간 의심이 들었다. 대공이 서늘한 눈빛으로 에드윈을 보며 물었다.
“그 여자와 이번 일이 관계있을 확률이 있나?”
“그것이…….”
에드윈은 대공의 질문에 말끝을 흐렸다.
심증은 있었지만 결정적인 증인들을 실수로 모두 죽여 버리고 말았으니까.
명확한 답을 하지 못하는 에드윈을 보며 대공은 며칠 전 늦은 시각, 에드윈이 찾아와 했던 말을 다시 떠올렸다.
- 제가 디아나 아가씨의 모친을 대공성 밖에서 본 적이 있습니다.
- 네가 디아나의 어미를 보았다고?
- 네, 전하. 전하께서 대공성을 비운 동안 영지를 드나들며 불법을 저지른 용병들을 수색하라 명을 내리셨잖습니까.
- 그래, 그랬지.
대공이 고개를 끄덕이자 에드윈이 다시 입을 열었다.
- 그 명을 수행하며 용병들이 자주 드나드는 여관을 수색했을 때, 그곳에서 아가씨의 모친을 보았습니다.
- 용병들이 드나드는 여관?
- 네, 특히 그 여관에 머무는 용병들은 불법적으로 인신매매를 하는 용병들이 많은 곳이었습니다. 악질 중에서도 악질들만 모이는 곳이라 대공가의 영지민들은 거의 방문을 하지 않는 곳이 되어 버렸다고 하더군요. 한데 그곳에서 그 모친이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 거기서 일을 했다라…….
수상한 구석이 상당히 많았다.
대공은 디아나를 자신의 딸로 인정하진 않았지만 전장으로 나갈 때만 해도, 그는 정말 그의 실수로 레아와 밤을 보낸 줄 알았기에 일정 금액의 생활비는 조달해 주라 집사에게 명했었다.
본성에서 내쳐 버리긴 했지만 살아가는 데 지장은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갑자기 나가서 일을 한다?
굳이 왜?
이해할 수 없는 그 여자의 행동에 대공은 미간을 좁히다 고개를 숙이고 있는 에드윈에게 말했다.
- 에드윈, 넌 내일부터 그 여자의 뒤를 밟도록 해라. 왜 그곳에서 일을 하고 있는지, 따로 꾸미는 일이 있는 것인지 알아보아라.
- 네, 전하.
비밀스런 대공의 명을 받은 에드윈은 굳은 얼굴로 답했다.
그날을 떠올린 대공은 입술을 달싹이고 있는 에드윈을 보았다.
에드윈답지 않게 명확한 답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대공은 그에 이상함을 느끼며 매서운 눈빛으로 에드윈을 보았다.
“너 내게 말하지 않은 것이 있었나?”
에드윈은 대공의 서릿발 같은 시선에 몸이 굳었다. 에드윈은 곧장 무릎을 꿇었다.
“송구합니다, 전하. 제가 감히 전하께 숨긴 것이 있었습니다.”
“그게 무엇이냐.”
“사실…… 전 아가씨의 모친이 그곳에서 일하는 것이 아가씨와 관련이 있는 것은 아닐까 싶었습니다. 그곳에서 일을 하는 또 다른 자에게 들은 말로는 모친이 인신매매를 주로 하는 용병들에게 술을 따라 주며 이야기를 자주 나누었다고 들었기 때문입니다.”
“근데 그 일이 왜 디아나와 관련이 있다는 것이냐?”
“오늘 아가씨를 습격한 자들은 용병이었습니다. 아가씨를 급히 모시느라 그들의 패를 확인하지 못했으나 경비대에게 패를 확인해 조사해 본다면 분명 인신매매를 하는 놈들이었을 거라 확신할 수 있습니다.”
에드윈의 말을 들은 대공의 얼굴이 얼음장처럼 차가워졌다.
지금 들은 말로 한 가지 사실을 유추해 낼 수 있었기 때문에.
짧은 침묵이 대공과 에드윈 사이에 흘렀다. 대공은 잔뜩 경직된 몸으로 고개를 떨구고 있는 에드윈을 내려다보며 입술을 움직였다.
“에드윈, 고개를 들어라.”
에드윈은 쉬이 움직이지 않는 목에 힘을 주며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에드윈은 마주친 선명한 황금안에 순간 숨을 멈추었다. 번뜩이는 황금안이 마치 그의 목을 옥죄는 거 같았기에.
에드윈이 눈도 깜박이지 못하고 돌처럼 굳어 있던 순간 대공은 천천히 입술을 움직였다.
“그러니까, 지금 네 말은 디아나를 저리 만든 것이 그 여자 짓이라는 것이냐.”
거짓을 말한다면 바로 목이 베일 듯 서슬 퍼런 기운이 대공에게서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에드윈의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네, 전 그리 짐작하고 있습니다.”
“어미가 제 자식을 저리 만들었다고?”
“네, 전하.”
“왜?”
레아와 디아나의 사이가 조금 이상하다는 것은 대공도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이건 어미가 제 자식을 죽이려 한 일이다.
설마 그렇게까지 했으리라 대공은 선뜻 믿을 수 없었다.
그는 악을 쓰고 아이를 낳을 것이라 말하던 레아를 똑똑히 기억하고 있으니까.
“그것이…….”
‘아가씨가 모친에게 학대를 받고 있는 거 같기 때문입니다.’
라고 에드윈은 차마 잇지 못한 말을 속으로 내뱉었다. 에드윈은 솔직히 말할 수 없었다. 왜냐면 그의 말에는 아무런 증좌가 없었으니까.
그저 그의 감으로 의심하고 있었을 뿐이다.
에드윈은 어릴 적 아버지에게 수도 없이 맞으며 자랐다.
말을 듣지 않으면 매질은 물론이고 밥도 주지 않아 밖을 나돌아 다니며 먹을 것을 구해야 했다.
그때의 그 서럽고 외로운 감정을 에드윈은 지금도 선명히 기억하고 있다.
그런데 에드윈이 처음 디아나를 마주했던 그날, 차가운 얼음 바닥에서 울고 있던 디아나의 눈빛은 어릴 적 그의 눈빛과 같았다.
그래서 에드윈은 그가 대공녀를 찾고 있다는 사실마저 잊고 디아나에게 손을 내밀었던 것이다.
그리고 우연히 레아를 마주했을 때 확신을 가졌었다.
그녀는 가식적인 미소를 띠고 있었지만 디아나를 보는 눈빛에는 조금의 애정도 담겨 있지 않았다.
아니, 애정은커녕 살기가 느껴질 정도였다.
하지만 이 모든 건 그의 심증이기에 대공에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에드윈이 말을 하지 못하며 입술을 깨물었다.
그런 에드윈을 보던 대공의 머릿속으로 이 모든 상황을 이해할 수 있는, 외면하고 싶던 한 가지의 가설이 떠올랐다.
디아나의 삐쩍 마른 몸과 보호자도 없이 궂은일을 하는 디아나를 이해할 수 있는 사유.
대공은 딱딱하게 굳어 버린 얼굴로 말했다.
“에드윈, 넌 디아나의 어미가 디아나를 학대한다 그리 생각하느냐.”
“……!”
에드윈은 화들짝 놀란 얼굴로 대공을 바라보았다.
설마 했었는데…….
에드윈은 허튼 의심을 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그런 에드윈이 의심을 품었다면 거의 사실이 되어 드러나곤 했다.
아니, 그 역시 레아의 학대를 예상하고 있었다.
단지 그의 강한 무의식이 부정하고 싶었을 뿐.
대공의 시선이 침대 위의 디아나를 향했다.
또래보다 작고 마른 아이.
처음 만났을 때, 그는 마치 저 아이가 부모 잃은 전쟁고아 같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전하…… 모든 것은 저의 의심일 뿐 확실한 증거는 없습니다.”
에드윈이 송구하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그에 대공은 미간을 좁혔다.
그 역시 예상일 뿐 확실한 증거 같은 것은 없었으니까.
만약 학대가 맞는다면…… 누군가는 알고 있었을 것인데.
대공은 순간 저 아이를 처음 보았던 날 이상한 행동을 보였던 집사가 생각났다.
- 근데 왜 저리 작지, 세이아보다 두 뼘은 작은 거 같은데. 어디 아픈 것이냐?
대공가의 집사가 이 대공가를 보필한 지 벌써 50년이었다.
선대의 대공 때부터 일해 온 자가, 그리 노련한 자가 그 평범한 물음에 답을 하지 못했다라…….
확실히 이상했다.
대공의 황금안에 이채가 번뜩였다.
대공은 방문을 보며 말했다.
“하론, 밖에 있나?”
“네, 전하.”
집사의 목소리가 방문 밖에서 들려왔다.
“안으로 들어와라.”
대공의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방문이 열리며 집사가 들어왔다.
집사가 대공에게 허리를 깊숙이 숙였다.
“부르셨습니까, 전하.”
“하론.”
“네, 전하.”
“디아나와 레아의 사이가 평상시에 어땠지?”
“……네?”
집사가 고개를 들었다. 집사의 회색빛 눈동자에 당혹스러움이 가득했다.
그 반응에 대공은 순간 심장이 차갑게 식는 기분이 들었다.
대공은 서늘한 눈빛으로 집사를 보며 물었다.
“왜 대답을 못 하는 것이냐, 내가 지금 어려운 질문을 했던가.”
“……그, 그것이…….”
“진실만을 말하거라. 이미 짐작하고 있으니까.”
대공의 말에 집사가 무릎을 꿇으며 머리를 조아렸다.
“송구합니다, 전하. 모든 것이 저의 불찰입니다. 전하가 없으실 때 제가 더 신경 써서 대공가를 관리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습니다.”
“……하론, 그 여자가 디아나를 학대하는 것을 직접 본 적이 있느냐.”
대공의 물음에 집사의 머리가 더욱 아래로 떨어졌다.
“전 본 적이 없지만…… 별채의 하녀들의 말로는…… 아가씨의 식사도 제대로 챙겨 주지 않았다, 그리 들었습니다.”
대공은 집사의 말에 주먹을 꽉 그러쥐었다.
또래보다 작고 삐쩍 마른 몸의 이유가 굶어서였다니.
제국에서 황실 다음으로 부유한 대공가에서 굶는 아이라.
대공은 더 이상 레아의 학대를 부정할 수 없었다.
“하, 어떻게 제가 낳은 자식을…… 그리 낳고 싶어 발버둥 칠 땐 언제고…….”
이성이 끊기는 느낌과 동시에 대공은 속에서 들끓는 분노를 쉬이 진정시킬 수 없었다.
왜 이렇게 화가 나지?
학대당한 사실을 마주해서 이렇다기엔 지금 그의 분노는 너무도 컸다.
그 아이가 겪었을 고초가 크다는 것도, 어쩌면 그의 외면에 아무 잘못도 없는 아이가 피해를 보았을 거란 것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단지 그것들 때문에 이리 분노하기엔 그는 그리 감성적인 사람이 아니었다.
디아나를 향한 동정은 인정하지만 동정일 뿐 애정은 없었으니까.
이성은 그리 생각하면서도 그의 심장은 그렇지 못했다.
대공은 당장 그 여자의 목에 칼을 들이밀고 싶은 충동이 들 정도였다.
디아나가 아리엘을 닮아서일까.
부정하고 싶지만 디아나를 볼 때마다 아리엘의 얼굴이 어렴풋이 보이는 것을 부정할 수 없었다.
레아의 딸이 아리엘을 닮다니, 차라리 그를 닮았다면 이렇게 마음이 쓰이지 않았을 것이다.
아리엘의 자식도 아닌 디아나에게서 왜 아리엘의 얼굴이 보이는 것인지.
이게 무슨 신의 농간이란 말인가.
“하아.”
대공은 짧은 숨을 내쉬며 열이 오른 얼굴을 손으로 쓸어내렸다.
하지만 디아나가 아리엘을 닮았다고 할지언정 감정에 휘둘려선 안 된다.
‘저 아이는…… 내 자식이 아니다.’
대공은 디아나를 힐긋 보곤 아직도 무릎을 꿇고 있는 집사를 보았다.
대공가를 잘 돌보지 못한 제 잘못이라며 용서를 구하고 있지만, 집사가 디아나를 외면한 것을 이해했다.
집사는 아리엘을 극진히 모셨었다.
한데 아리엘이 그리 허망하게 죽었으니, 아마 그 여자와 그 딸인 디아나를 쳐다보고 싶지도 않았을 것이다.
레아를 향한 원망에 알면서도 방관했던 것이겠지.
그리고 자신이 저들에게 명분을 주었다.
디아나를 그의 자식으로 인정하지 않으며, 방관해도 상관없을 이유를 만들어 주었으니까.
디아나를 직접 보기 전까지만 해도 디아나의 삶엔 조금도 관심이 없었다.
그들이 대공성에서 어떤 취급을 받든 상관없다 생각했다.
아니 사실은 철저히 소외되고 외면받길 바랐다.
은연중에 그들이 고통스럽게 살길 바랐다.
그러니 지금 이 상황은 어쩌면 그가 원했던 파국일지도 모른다.
그리 목숨 걸고 낳은 제 딸을 스스로 망가뜨리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대공은 조금도 웃을 수가 없었다.
대공의 머리가 터질 거 같던 그때, 문밖에서 시종의 목소리가 들렸다.
“대공 전하.”
“무슨 일이냐.”
“그것이…… 저택 입구에서 아가씨의 모친이 소란을 피우고 있다 합니다.”
“뭐?”
하인의 말을 듣는 순간 누가 그의 머리에 찬물을 부은 거처럼 정신이 돌아왔다.
그 여자가 스스로 왔다고.
대공은 문밖의 하인에게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당장 이리로 데려와라.”
얼마 지나지 않아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전하, 레-.”
“들여라.”
어차피 올 사람은 하나였기에 대공은 하인의 말을 끊으며 차갑게 말했다.
문이 열리고 방으로 들어온 레아는 방 안에 무릎 꿇은 두 명의 남자를 보고 입술을 깨물었다.
방 안의 분위기가 범상치 않았다.
레아의 얼굴이 창백해지던 그때 시선을 돌리던 레아와 대공의 눈이 순간 마주쳤다.
레아는 자신을 찢어 죽일 듯한 서슬 퍼런 황금안에 황급히 눈을 내리깔며 허리를 숙였다.
“대공 전하를 뵙니다.”
“…….”
몇 분의 시간이 흘렀음에도 대공은 그녀의 인사를 받아 주지 않았다.
레아의 허리가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더 이상 버티다간 허리가 끊어지겠다고 생각한 순간 대공의 차가운 목소리가 울렸다.
“고개를 들어라.”
고개를 든 레아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대공은 자신의 눈을 마주하지 못하는 역겨운 여자를 보며 입술을 열었다.
“여긴 왜 온 것이냐.”
“……전하, 전…… 제 딸을 데리러 온 것입니다.”
“네 딸을 데리러 왔다고?”
“네, 전하.”
“정말 어떻게 이렇게 뻔뻔할 수가 있는 건지. 네가 네 딸을 저리 만들어 놓고 이렇게 태연히 데리러 와? 아, 혹시나 살아 있을까, 확인을 하러 온 것이냐?”
대공의 싸늘한 말에 고개를 숙이고 있던 레아가 고개를 번쩍 쳐들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제 딸이 살아 있을까 확인을 하러 오다니요. 아무리 기다려도 디아나가 오지 않아 온 시장을 찾아 헤매다 혹시나 해서 대공가로 돌아온 것입니다. 이곳에 있다는 말을 듣자마자 달려온 것인데 어떻게…… 어떻게 그런 말씀을……. 전하께선 우리 디아나가 왜 저리 누워 있는지, 무슨 일을 당한 것인지 알고…… 계신, 겁니까?”
레아는 침대에 누워 있는 디아나를 보다 눈물을 훔쳤다.
그렁그렁한 눈물을 매단 채 대공을 올려다보는 레아의 얼굴은 누가 봐도 자식을 걱정하는 어미의 얼굴이었다.
하지만 다른 사람이라면 모를까, 대공은 절대 레아의 눈물을 믿지 않았다.
눈물로 거짓을 말하며 아리엘의 마음을 뒤흔들었던 간악한 여자라는 걸 이미 알고 있었으니까.
대공은 레아의 눈물을 역겹다는 눈빛으로 보며 말했다.
“이미 집사에게 네가 디아나를 학대하며 키웠다는 진실을 전해 들었다. 거기다 오늘 디아나를 습격한 용병은 네가 얼마 전부터 일했다는 여관을 출입하던 용병이었다지. 네가 디아나를 학대한 것을 다 알고 있으니, 감히 내 앞에서 거짓을 말할 생각 말아라. ”
레아는 온몸을 죄어 오는 대공의 살기에 부들부들 떨었다.
당장 그녀의 목을 베어 버릴 듯한 눈빛으로 보던 대공이 거친 한숨과 함께 시선을 거두었다.
그에 레아는 막혔던 숨을 내쉬며 힘겹게, 억울하다는 듯 소리쳤다.
“학대라뇨! 저는 절대 디아나를 학대한 적이 없습니다! 제겐 하나뿐인 딸입니다. 집사님이 그런 말을 했다 하셨습니까, 전하. 집사님은 사용인들이 머무는 별채는 물론이고 제가 사는 오두막 근처에는 온 적도 없는 사람입니다. 한데 어찌 그런 자의 말을 믿으십니까!”
“집사가 본 것이 아니라 별채의 하녀들이 말해 준 것을 들은 것이다! 네가 저 어린아이의 먹을 것도 제대로 챙겨 주지 않았다는 사실을 말이야!”
대공은 그답지 않게 목소리를 높였다.
그의 사나운 일갈에 레아는 물론이고 무릎을 꿇고 있던 집사와 에드윈의 몸까지 움찔 떨렸다.
레아는 몸을 움츠렸지만 그것도 잠시 악을 쓰듯 소리쳤다.
“그것은 디아나의 편식이 심해 훈육을 하기 위해 그런 것입니다! 한데 학대라니, 그 하녀들을 전부 데려와 주십시오! 제가 디아나를 무지막지하게 때리는 것을 한 번이라도 본 적이 있는지, 전부 데려와 확인을 해 주십시오! 전 결단코 아이를 훈육했을 뿐 학대를 한 적은 없습니다. 디아나는 제 딸이니까요!”
마지막 발악이라도 하는 것인가.
대공은 번뜩이는 눈빛으로 자신을 보고 있는 레아를 보다 집사를 불렀다.
“하론, 지금 당장 레아의 학대를 입증할 하녀들을 찾아 전부 데려와라.”
“네, 전하.”
집사가 일어나 방 안을 나갔다.
집사가 방을 나간 순간 레아의 손이 떨려왔다. 혹여 대공에게 들킬까, 레아는 두 손을 모아 꽉 잡았다.
하지만 대공은 레아가 아닌 의식이 없는 디아나에게 몸을 돌렸다.
이 시끄러움 속에서도 미동조차 보이지 않는 아이.
창백하게 질린 아이의 낯빛을 보자 또 복잡한 감정이 들어 그의 가슴이 답답해지던 때,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전하, 하녀들을 데려왔습니다.”
“들어와라.”
문이 열리고 여섯 명의 하녀들과 집사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하녀들은 범상치 않은 방 안의 분위기에 서로 눈치를 살피다 대공에게 허리를 숙였다.
“대공 전하를 뵙니-.”
대공은 인사를 자르며 바로 그들에게 물었다.
“인사는 되었으니, 바로 말하거라. 너희들이 저 여자가 디아나를 학대하는 것을 본 자들이 맞느냐.”
날카로운 대공의 눈빛에 하녀들은 겁을 먹은 얼굴로 서로 눈치를 보았다.
무서워 그런 것인지 섣불리 말을 하지 못하는 하녀들을 보고 있던 집사가 한 명의 이름을 불렀다.
“메리, 네가 저번에 내게 말하지 않았느냐. 레아가 아가씨를 너무 괴롭히는 거 같다고 말이야.”
메리라고 불린 갈색 머리 하녀가 당황한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네?”
눈치를 살피듯 도르륵 옅은 갈색 눈동자를 굴리는 메리를 보던 대공이 말했다.
“사실대로 말하면 아무런 일도 없을 테니, 걱정 말고 말해라.”
메리는 무의식적으로 목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돌리다 마주친 대공의 눈동자에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메리는 입술을 달싹이다 말을 하기 시작했다.
“그것이…… 저는 빨래터에서 일하는 하녀인데…… 추운 겨울에도 항상 어린 아가씨가 빨래를 하러 나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고작 그걸 보고 내가 학대했다고 말하는 겁니까?!”
가만히 있던 레아가 소리쳤다.
레아의 무시무시한 기세에 놀란 듯 어린 하녀가 몸을 움찔했다.
“누가 너에게 말해도 좋다고 했지?”
대공의 서늘한 목소리가 울렸다. 레아는 한겨울 매서운 겨울바람보다 차가운 대공의 눈빛에 입을 꾹 다물었다.
“그리고 고작이라 했느냐. 추운 겨울에 그 어린아이에게 빨래를 시킨 게 네겐 고작이라면 대체 평소엔 무슨 짓을 하고 있다는 것이냐.”
대공이 싸늘하게 말하자 하녀가 말을 덧붙였다.
“전하, 제가 또 본 것이 있습니다. 냇가에서 아가씨의 뺨을 때리는 것을 보았었습니다. 이건 저뿐만이 아니라 다른 하녀들도 같이 본 것입니다.”
메리는 도와 달라는 듯 옆의 다른 하녀들을 보았다.
메리의 눈빛에 하나둘 입을 열었다.
“네, 저도 그날 빨래터에 있었는데 분명 보았습니다.”
“네, 네, 저도 보았습니다. 그리고 남들 앞에서는 직접적으로 때리는 것을 삼간다고 하지만, 레아가 아가씨를 대하는 모습은 누가 봐도 딸을 대하는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레아는 제 입으로 들어가는 음식은 신경 써서 먹으면서도 아가씨에게는 피죽조차 아까워했습니다. 오죽하면 주방 하인이 따로 디아나 아가씨에게 음식을 가져다주었겠습니까.”
“주방 하인이?”
하녀들이 고개를 주억거리며 대공을 바라보았다.
“네, 쿤타란 하인이 디아나 아가씨를 참 많이 도와준 것으로 압니다, 대공 전하.”
“그 하인을 지금 불러와라.”
집사에게 말하자 집사가 곤란한 얼굴을 했다.
“쿤타는 며칠 전에 집안에 일이 생겼다며 급히 사직서를 내고 떠났습니다.”
“그렇군.”
대공이 잠시 고민을 하듯 미간을 좁히자 하녀들을 노려보던 레아가 외쳤다.
“전하, 저들의 말을…….”
“네가 한 짓들에 대한 변명을 들어줄 생각 없다. 네가 고작이라 말한 그 일부터 이미 넌 학대를 인정한 것이나 다름없으니까.”
“……전, 억울합니다.”
손을 꽉 그러쥐고 있는 레아는 억울함이 가득한 눈빛으로 그를 보고 있었다.
그 모습에 대공은 비소를 지었다.
대공은 레아를 보며 말했다.
“네 억울함이, 제 어미의 학대를 받고 저리 누워 있는 디아나의 심정보다 절절하겠느냐.”
“용병들을 사주하다뇨, 전하. 전 그런 일을 꾸민 적이 없습니다.”
레아는 억울해 죽겠다는 얼굴로 말했다. 하지만 대공은 그런 레아를 무시하며 에드윈을 보았다.
“에드윈, 네가 들었다는 말을 이 여자에게 해 주어라.”
대공의 말에 레아의 시선이 에드윈을 향했다.
레아는 그의 얼굴을 제대로 확인하고 얼굴을 구겼다.
저 남자는 디아나와 함께 있던 그때 그 기사였다.
그날도 어딘지 꺼림칙한 눈빛으로 그녀를 보았었다.
재수 없는 눈빛으로 그녀를 보더니 결국 사달을 냈다.
레아가 눈을 번뜩이며 에드윈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에드윈은 그런 레아를 차가운 눈빛으로 응시하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여관에서 일하는 자에게 들은 말에 의하면 아가씨의 모친이 인신매매를 주로 하는 용병들에게 다가가 안주를 더 주는 등, 그들과 친해지려 하는 모습을 보였다고 했습니다. 어쩔 땐, 그들의 테이블에 함께 앉아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하더군요.”
미리 뒷조사를 한 듯한 에드윈의 말에 레아는 몸 안의 피가 차갑게 식는 기분이 들었다.
집요하고 매서운 시선으로 자신을 구석으로 몰아넣는 에드윈을 보며 레아는 입술을 깨물며 목소리를 쥐어짰다.
“전…… 아닙니다.”
“여관을 좀 더 조사하고 네가 이야기를 나누었단 용병들에 대해 알아보면 증거는 금방 나올 것이다.”
“제가 무어라 말해도 믿지 않으실 테니, 할 말이 없습니다.”
“그래, 넌 할 말이 없다. 굳이 용병의 일이 아니더라도 네가 디아나를 학대했다는 증좌는 이미 충분하니까.”
대공은 비소를 머금다 얼굴을 굳혔다.
“하론.”
“네, 전하.”
“레아를 지하 감옥으로 끌고 가 죄를 뉘우칠 때까지 고신하거라. 정신을 잃으면 오두막에 가두고 사흘간 어떠한 약도 물도 음식도 주지 말라.”
“네, 전하.”
지하 감옥의 고신이라면 채찍질은 물론이고 손톱 발톱까지 뽑는 잔인한 고문이란 뜻이었다.
대공의 명령에 사색이 된 레아가 외쳤다.
“전하, 전하! 제발, 살려 주십시오!”
“걱정 말거라, 죽지 않을 정도로만 고문할 것이니.”
아직 이렇게 쉽게 죽어선 안 되지.
대공은 바닥을 기는 레아를 경멸스런 눈빛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하인들이 레아의 양팔을 잡고 방 밖으로 끌어냈다. 끌려 나가는 동안 얼마나 악을 지르는지 대공은 귀가 아파 눈살을 찡그렸다.
그런데 그때, 침대에서 미약한 신음 소리가 들려왔다.
* * *
익숙한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렸다.
일어나야 해.
디아나는 본능적인 두려움에 몸을 움직였다. 하지만 누가 몸 위에 무거운 돌덩이를 얹은 듯 쉬이 말을 듣지 않았다.
디아나는 끙, 신음을 내뱉으며 무거운 눈꺼풀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아…….”
매일 보던 나무 천장이 아닌 처음 보는 화려한 천장 무늬에 느리게 눈을 깜박였다.
‘여긴 어디지…… 난 왜 여기에 있지.’
무언가를 생각하려 하자, 머리가 지끈거리며 두통이 밀려들었다.
“윽.”
아픔에 눈살을 찌푸린 그때, 낮은 음성이 들려왔다.
“깨어난 것이냐?”
디아나는 목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빛을 머금은 듯한 황금안과 눈이 마주쳤다.
“……대공 전하.”
“잠시 기다려라. 의원을 부를 테니.”
대공은 나를 빤히 보다 곧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하론, 디아나가 의식을 차렸으니 의원을 불러라.”
“네, 전하.”
방 밖에서 집사의 목소리가 들림과 동시에 문밖에서 높은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디아나!”
“……!”
분명 레아의 목소리였다. 디아나가 깜짝 놀란 순간 밖에서 소란이 이는 듯하더니 곧 레아가 문을 열고 디아나에게로 달려왔다.
대공의 얼굴이 살벌하게 구겨지는 것이 보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디아나는 레아에게 얼굴을 붙잡혔다.
울었던 건가, 레아의 눈가가 붉었다. 디아나에게로 다가온 레아가 디아나의 볼을 손으로 감싸 안았다.
동시에 레아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졌다.
“디아나, 내가, 내가 얼마나 너를 걱정했는…… 흡, 널 그곳에 혼자 두고 가서는 안 됐는데, 다 엄마의 잘못이다. 미안해. 정말 미안하다, 디아나.”
레아의 말을 듣자 머릿속으로 하나씩 상황들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아침 일찍 레아와 시장에 나간 것부터 옷을 사고, 그녀가 가방을 찾으러 가고, 남자아이를 만나고…… 용병들에게 맞은 거까지.
디아나의 기억이 전부 떠오른 그때, 레아가 참을 수 없다는 듯 디아나의 작은 몸을 끌어안으며 눈물을 왈칵 쏟아 냈다.
레아의 어깨가 들썩이는 것이 느껴졌다. 울음소리가 어찌나 슬픈지 다른 사람이 이리 울었다면 저도 모르게 같이 눈물이 났을 거 같았다.
하지만 지금 울고 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이 아닌 레아였다.
레아가 자신을 걱정해서 운다……?
아주 잠깐 흔들렸지만 그때, 돌아온 기억 속에서 초록 머리 남자가 했던 말이 경고처럼 떠올랐다.
- 그년의 말대로.
분명 다른 여자를 지칭하는 말이었다.
그리고 디아나는 그 여자가 누구인지 본능적으로 알 것 같았다.
그걸 깨닫자 레아가 자신을 안고 있다는 사실에 소름이 돋았다.
“디아나, 네가 어서 대공 전하께 말해 주렴. 내가 널 학대하지 않았다고, 엄마가 널 얼마나 아꼈는지 어서 말해 주렴. 네가 말해 주지 않으면 엄마는 죽고 말 거란다.”
죽는다니.
디아나는 레아를 향한 두려움과 죽는다는 알 수 없는 말에 머리가 혼란스러워졌다.
하지만 몸이 좋지 않아 그녀를 밀어낼 힘 같은 건 없었기에 가만히 레아의 울음이 멈추기를 기다리고 있던 그때, 대공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조용히 나가라, 네 자식에게 더 추한 꼴을 보이지 말고.”
대공의 싸늘한 목소리에 디아나마저 움찔했다.
울고 있던 레아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레아는 대공이 안 보인다는 듯 디아나의 볼을 애처롭게 쓰다듬었다.
디아나의 이름을 부드럽게 속삭이면서.
“디아나, 하나뿐인 내 딸.”
하나뿐인 그 딸을 대체 왜 죽이려고까지 한 거야…….
디아나가 그런 레아의 눈을 차마 마주할 수가 없어 시선을 피하자, 까득 이를 깨무는 소리가 들렸다.
레아는 대공에게 고개를 돌렸다.
“이렇게 아픈 아이를 두고 전 못 갑니다. 안 그래도 놀란 아이에게서 어떻게 어미를 떼어놓으려 하십니까. 저까지 없으면 디아나가 얼마나 무서워하겠습니까!”
레아는 빽, 하고 소리를 질렀다 마주친 금안에 어깨를 움츠렸다.
당장 그녀의 목을 틀어쥘 듯한 살기가 느껴졌다.
대공은 레아를 지나쳐 디아나의 곁으로 다가갔다.
대공의 시선이 디아나를 향했다. 디아나와 대공의 눈이 마주쳤다.
선명한 황금안이 디아나의 속마음을 들여다보듯 집요하게 훑었다. 디아나는 저도 모르게 덜덜 떨었다.
디아나의 떨림을 본 대공의 눈썹이 매섭게 올라갔다.
그는 디아나를 저번과 비슷한 복잡한 감정이 뒤섞인 눈빛으로 보고 있었다.
말없이 디아나를 보던 그는 천천히 입술을 움직였다.
“한 가지만 물으마, 네 어미와 함께 있고 싶으냐.”
“…….”
‘왜 그런 걸 묻는 거지?’
디아나가 무어라 답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어 입을 다문 그때,
“싫다는 한마디 말이면 넌 더 이상 네 어미와 함께 살지 않아도 된다.”
대공이 나직이 말했다.
디아나의 눈동자가 거세게 흔들렸다.
‘방금 내가 무슨 말을 들은 거지?’
싫다는 말 한마디면 된다니…….
믿을 수 없는 말에 디아나는 혹시 꿈을 꾸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마주친 금안은 디아나를 오롯이 바라보고 있었다.
꿈이 아니라는 듯이.
레아에게서 벗어날 수 있게 도와주는 사람이 대공이라니.
디아나는 도무지 대공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어 입술을 꾹 깨물었다.
레아에게 돌아가고 싶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믿을 수 없는 대공의 제안을 덥석 받아들일 수도 없었으니까.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눈을 도르륵 굴리다 레아의 번뜩이는 시선을 보았다. 그녀는 눈빛으로 경고하고 있었다.
입을 잘못 놀리면 죽이겠다고.
디아나는 그 살기 띤 시선에 등골이 오싹해졌다. 몇 년 동안 레아에게 맞으며 길들여진 그녀였다.
레아의 시선을 본 순간 아니라고 말해야겠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반사적으로 입을 열려던 순간 대공의 몸이 먼저 움직였다.
그는 레아를 완벽히 가리고선 디아나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그는 다시 입을 열었다.
“두려워할 것 없다. 내가 네 옆에 있는 한 이곳에서 널 해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러니 넌 그저 한마디만 하면 된다.”
정말, 이상하게도 그의 말을 듣는 순간 두려움에 뛰고 있던 심장이 점차 가라앉았다.
대공에게 안도감을 느끼다니,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대공은 디아나에게 레아만큼이나 믿을 수 없는 사람이었으니까.
디아나의 친부이면서 자신을 버린 사람.
하지만 대공과 레아 둘 중에 한 사람을 택해야 한다면 지금은 대공이었다.
자신을 죽이려 했던 여자에겐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디아나는 대공를 보며 천천히 입을 움직였다.
“……싫…… 어요.”
디아나를 보던 대공의 입꼬리가 매끄럽게 올라갔다. 그는 디아나를 응시하는 시선을 돌리지 않으며 문밖의 집사에게 큰 목소리로 명령했다.
“하론, 레아를 끌고 나가라. 그리고 지금 당장 저택에 디아나가 지낼 방을 마련하도록 해라.”
* * *
깜박, 깜박.
디아나는 도무지 적응이 되지 않는 화려한 천장을 보며 눈을 깜박이고 있었다.
‘내가 정말 이곳에 남게 되다니.’
불과 몇 분 전에 있었던 소란이 떠올랐다.
싫다는 한마디면 된다던 그 말을 대공은 정말로 지켜 주었다.
대공의 명령에 하인들이 레아를 질질 끌고 방을 나갔다.
당연히 레아는 받아들이지 못했다.
대공이 막아 주어 그녀의 얼굴을 제대로 볼 수는 없었지만 목소리는 선명히 들을 수 있었다.
- 디아나! 네가 어떻게 내게 이럴 수 있니, 디아나!
얼핏 들으면 슬픈 말이었지만 레아가 디아나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는 악이 가득 찼다.
레아의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살기에 디아나는 절로 몸이 떨렸지만 곧 그녀의 목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게 되었다.
“너희들도 이만 물러가라.”
대공은 새하얗게 질린 채 레아가 끌려 나가는 것을 전부 목도한 하녀들에게 축객령을 내렸다.
하녀들이 나가고 잠시간의 무거운 침묵이 방안에 내려앉았다.
복잡한 시선으로 디아나를 보고 있던 대공은 에드윈에게 방을 지키라 명하고 방을 나갔다.
이 모든 게 고작 몇 분 안에 벌어졌던 일이었다.
디아나는 대공이 방을 나가고 나서야 굳게 다물었던 입술을 열었다.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건 아니겠지…….”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아직 현실감이 들지 않았다.
제가 누워 있는 푹신한 침대도, 몸을 감싸는 보드라운 이불도, 그리고 한겨울의 찬바람이 하나도 들어오지 않는 따스한 방까지.
만약 이게 꿈이라면 정말 달콤한 악몽이 아닐까.
디아나의 작은 속삭임이 공기 중으로 흩어지자, 그녀 곁을 지키고 있던 에드윈의 목소리가 들렸다.
“꿈이 아닙니다.”
“에드윈…….”
고개를 돌려 그를 보자 그가 눈을 찡긋하며 말했다.
“정 못 믿으시겠으면 볼이라도 꼬집어 볼까요?”
“……그럴까?”
디아나가 제 볼을 꼬집으려 손을 움직이기도 전에 에드윈이 먼저 손을 움직였다.
그는 자신의 볼을 꽉 꼬집더니 아픈지 인상을 콱 찡그렸다.
“아!”
그의 큰 목소리에 놀란 디아나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괜찮아? 왜 자기 볼을 꼬집어.”
에드윈이 꼬집은 볼을 살살 쓸며 미소를 지었다.
“그야, 당연히 아가씨의 볼을 꼬집을 순 없으니까요. 아가씨, 걱정 마세요. 제가 방금 확인해 본 결과 절대 꿈이 아닙니다.”
정말이지…… 그는 왜 자신에게 이렇게 잘해 주는 걸까.
디아나는 에드윈을 보며 말을 삼켰다.
오늘도 만약 그가 자신을 구하러 오지 않았더라면 디아나는 아마 이렇게 대공저에서 편히 누워 있지 못했을 거다.
죽었거나, 어디론가 팔려 가 지금보다 더 비참한 삶을 살았을지도.
디아나는 에드윈을 보며 느리게 입술을 움직였다.
“에드윈, ……고마워.”
“네?”
“오늘…… 나 구해 준 거.”
디아나의 말에 미소를 짓고 있던 에드윈의 입꼬리가 내려갔다.
‘내가 말을 잘못했나?’
습관적으로 그의 눈치를 살피던 그때, 에드윈이 디아나에게로 한 걸음 다가왔다.
침대 옆으로 다가온 그는 침대 옆에 마련된 의자에 앉는 대신 자신의 한쪽 무릎을 굽히며 자세를 낮추었다.
누워서 고개만 돌리고 있는 디아나와 시선을 맞춘 에드윈이 다시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아가씨, 제가 그때도 말씀드렸지만 제게 그런 말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전 아가씨를 지키기 위해 있는 기사이니까요.”
“그치만…….”
디아나가 눈을 도르륵 굴리며 눈치를 보자 에드윈이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제 눈치를 살피지 마십시오. 전 아가씨가 무슨 행동을 해도 언제나 아가씨의 기사일 테니까요. 그저 명령만 하시면 됩니다.”
에드윈의 녹음 같은 눈동자가 디아나를 흔들림 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넓은 숲의 커다란 고목 같은 그의 눈을 응시하고 있던 디아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래도 이번 한 번은 말할래. 고맙다고.”
그가 자신을 구해 준 덕에 제 삶이 바뀌었으니까. 단순히 하나의 위험에서 구해 준 게 아니었다.
그 덕에 레아에게서까지 벗어날 수 있었다. 앞으로 어찌 될지는 몰라도.
혹시라도 그가 거절할까 후다닥 감사 인사를 말하는 디아나에, 에드윈이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뜨다 이내 웃음을 지었다.
“하하, 정말…… 아, 이런 말은 하면 안 되지만 아가씨 너무 귀여우세요. 그럼 감사 인사는 이번만 받겠습니다.”
에드윈이 디아나가 귀엽다며 웃자 디아나의 눈이 동그래졌다.
귀엽다니.
디아나는 자신과 어울리지 않는 단어가 당황스럽기도 했지만 기분이 좋기도 했다.
귀엽다는 말은 처음 들어본 것이었으니까.
디아나는 쑥스러운 듯 시선을 살짝 피하며 배시시 미소를 지었다.
지금 이 순간의 평화로움이 계속되었으면.
자신을 때리는 레아나 언제 저를 쫓아낼지 모르는 대공 말고, 그냥 이렇게 에드윈이랑 둘이서 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 그때, 닫혀 있던 방문이 열렸다.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다름 아닌 대공이었다.
디아나를 보고 있던 에드윈이 황급히 일어나 대공에게 한쪽 무릎을 꿇었다.
“대공 전하를 뵙니다.”
“일어나.”
처음 보는 기사의 인사에 흥미로운 눈길로 에드윈의 뒷모습을 보고 있던 디아나는 머리 위에서 울리는 낮은 음성에 고개를 돌렸다.
“아픈 곳은 없나?”
고개를 돌리자 언제 옆으로 온 건지 대공이 디아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네.”
“그렇군.”
“…….”
대공은 디아나의 대답을 듣고도 가만히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방 안에 불편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대공의 시선에선 무언가를 읽기가 힘들었다. 대공의 얼굴은 거의 무표정했고, 금빛 눈동자는 언제나 서늘했으니까.
하지만 예전과 달리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는 건 적어도 자신을 향한 경멸은 더 이상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경멸은 느껴지지 않지만…… 그래도 불안했다.
대공이 자신을 다시 레아에게 보내 버릴까 봐.
만약 지금 레아에게 다시 돌아간다면…….
상상만으로도 너무 무서웠다. 레아는 분명 자신을 가만두지 않을 거다.
매질은 물론이고 이번엔 정말로 죽일지도 모른다.
레아가 자신을 때릴 때마다 사용했던 회초리를 떠올리자 고통을 기억하고 있는 몸이 절로 욱신거렸다.
디아나는 두려움에 이불을 꽉 그러쥐었다.
그때, 대공의 목소리가 또 귀를 울렸다.
“얼굴이 창백한데, 정말 아픈 곳이 없는 것이냐?”
“…….”
들리는 소리에 자연스레 바라본 디아나는 몸을 움찔했다.
그의 눈빛이 꼭 자신을 걱정하는 거 같아서.
말도 안 돼.
대공이 자신을 걱정할 리가 없잖아.
순간이었지만 스스로의 착각이 당황스러워 입술을 꾹 다물고 있자 대공의 미간이 좁아졌다.
“역시, 아직 몸이 좋지 않군. 에드윈.”
디아나를 향하던 그의 시선이 에드윈에게로 돌아갔다. 대공이 입술을 움직이려던 순간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전하, 의원님이 약을 가지고 왔습니다.”
“들어와.”
방문이 열리고 의원과 은쟁반을 든 하녀 한 명이 같이 들어왔다. 곧장 침대 쪽으로 걸어온 그들은 대공에게 허리를 깊이 숙였다.
인사를 받은 대공은 급한 일이 있는 사람처럼 손을 휘저으며 바로 말했다.
“일어나.”
대공은 의원이 고개를 채 들기도 전에 다시 입을 열었다.
“바론, 디아나의 몸이 다시 안 좋아진 거 같으니 어서 상태를 살펴라.”
“……네, 전하.”
이름이 바론이었구나.
두 번이나 마주친 의원이었지만 이름은 처음 알게 되었다.
“아가씨, 어디 아프신 곳이 있으십니까?”
“……아뇨, 괜찮아요.”
디아나가 창백해졌던 것은 아파서가 아니라 레아를 상상했기 때문이었으니.
고개를 젓자 바론의 미간이 좁아졌다. 그는 디아나의 몸을 살피며 맥을 짚었다.
“흠…… 아까보다 마음이 많이 불안정해지셨군요.”
바론의 말에 이불을 꽉 쥐고 있던 손이 움찔했다. 정곡을 찔렸기 때문에.
바론은 깊은 고민을 하듯 이마에 주름을 짓다 대공에게 고개를 돌렸다.
“전하, 아가씨께선 지금 몸의 아픔보단 마음이 많이 불안정하신 듯합니다.”
“마음이?”
대공의 시선이 디아나를 보다 바론에게로 돌아갔다.
“네, 전하. 몸의 기운은 약으로 많이 좋아지실 것이나 불안정한 마음은 약으로 치료되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이 갑자기 왜 불안정해졌다는 것이냐. 아까 진찰을 했을 때는 그런 말이 없지 않았나?”
“아까도 좋지는 않았습니다만 지금처럼 심하지는 않았기에 말씀을 드리지 않았습니다. 그사이에 무슨 일이라도 있었던 겁니까? 불안정한 마음 상태가 지속되면 몸의 회복에 좋지 않으니…… 옆에서 신경을 써 주는 사람이 있는 게 좋겠습니다.”
대공은 의원의 말에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인지 미간을 좁히다 의원에게 말했다.
“알았으니, 일단 약부터 먹이거라.”
“네, 전하.”
바론이 답하자 하녀가 침대 옆 테이블에 은쟁반을 놓고 디아나에게 다가왔다.
그녀는 잘 움직이지 못하는 디아나의 상체를 안아 들었다.
디아나가 기댈 수 있게 등 뒤에 쿠션을 받쳐 준 하녀는 은쟁반을 가지고 돌아왔다.
은쟁반 위에는 작은 크리스털 잔이 놓여 있었다.
그리고 그 잔 안에는 보는 것만으로도 맛을 짐작할 수 있는 녹색의 액체가 들어 있었다.
“많이 쓰시겠지만 다 드셔야 합니다, 아가씨.”
하녀의 도움을 받아 약을 들이켠 디아나는 이불을 잡은 손에 힘을 꽉 주었다.
‘이건 많이 쓴 정도가 아닌데.’
역한 맛에 순간 속에서 구역질이 올라왔지만 자신을 보고 있는 대공 때문에 인상을 찌푸릴 수도 없었다.
자칫 약을 뱉거나 인상을 찡그리면 복에 겨운 투정을 부린다고 대공이 쫓아낼까 불안했다.
약을 전부 삼킨 디아나는 ‘후’ 숨을 내쉬었다.
입에서 역한 냄새가 퍼져 나갔다.
하녀는 물론이고 대공에게까지 냄새가 닿은 듯 대공의 얼굴이 와그작 구겨졌다.
숨을 조금 늦게 내쉴 걸 하고 후회한 그때 대공이 바론을 보며 말했다.
“이 냄새는 설마 카이투스 약초인가?”
“네, 전하.”
바론의 대답에 대공의 눈동자가 놀란 듯 커졌다, 이내 얼굴을 싸늘히 굳혔다.
“그 약초는 어른들도 역해서 잘 먹지 못하는 것이지 않나? 그걸 아이에게 먹였다고? 카이투스와 같은 효능을 가진 달레이아 약초가 있을 텐데, 왜 굳이 저것을 쓴 것이냐.”
대공의 서늘한 눈빛에 바론의 얼굴이 당황으로 물들었다.
“그것이…… 전하, 달레이아 약초는 몹시 귀한 것으로 대공가에도 많은 양이 있지 않아…… 막…… 쓸 수가 없는 약초입니다.”
바론은 디아나를 힐긋 보며 대공에게 조심스럽게 말했다. 바론의 말이 끝나고 방 안에는 잠시 침묵이 흘렀다.
다들 바론이 한 말의 의미를 알아들었다.
사생아인 디아나에게 비싼 약초를 쓸 수는 없다는 것이다.
대공의 시선이 순간 디아나를 향했다. 제 표정을 살피는 듯한 눈빛에 디아나는 양순히 눈을 내리깔았다.
이런 일을 한두 번 겪는 것도 아니고 치료를 받을 수 있다는 걸로도 충분했다.
한데 대공의 손이 디아나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대공은 뼈마디가 선명히 드러날 정도로 주먹을 꽉 그러쥐었다.
마치 끓어오르는 분노를 안간힘을 쓰며 참는 거처럼.
이해할 수 없는 대공의 행동에 의아함이 든 순간, 대공의 낮디낮은 음성이 울렸다.
“달레이아를 전부 써도 좋으니 앞으로 디아나의 치료에 다른 것은 생각하지 마라.”
뭐라고?
디아나는 너무 놀라 숙였던 고개를 번쩍 들었다.
대공과 디아나의 시선이 마주쳤다.
비싼 약초를 전부 써도 좋으니 아끼지 말라니.
자신이 제대로 들은 것이 맞는 건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믿을 수 없는 놀람을 담은 눈빛으로 대공을 보자 마주친 그의 황금안이 순간이지만 미세하게 흔들렸다.
이내 대공이 먼저 디아나의 시선을 피했다.
대공은 여전히 놀란 빛을 숨기지 못하는 바론을 보며 살짝 미간을 좁혔다.
“……바론, 왜 대답이 없지?”
“네? 아, 네. 명심하겠습니다, 전하.”
바론이 대공에게 머리를 조아렸다.
그제야 디아나는 자신이 제대로 들은 것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대공의 행동을 이해할 순 없지만 그보다 먼저 드는 감정은 안도감이었다.
적어도 지금 대공의 태도를 본다면 자신을 본성에서 쫓아낼 거 같진 않았으니까.
디아나는 이해할 수 없다 해도 지금은 그저 대공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는 것만 생각하기로 했다.
‘이젠 어떻게든 이곳에서 버텨야 해.’
이제 레아와 함께 지내는 건 지금 당장 대공성 밖으로 쫓겨나는 것과 다를 게 없어졌으니까.
레아에게 돌아가나 이 상태로 바로 대공성 밖으로 쫓겨나나, 결과는 죽음뿐일 것이다.
그러니 이 저택에서 쥐 죽은 듯이, 숨만 쉬며 지내는 거다.
대공가의 하녀들은 대부분 어릴 적부터 일을 했던 사람들이었는지 가끔 자신들이 어릴 때 했던 일들을 얘기하곤 했었다.
그때, 귀 기울여 들은 이야기들이 몇 개 있었다. 어린아이들이 할 수 있는 일들을 말이다.
그러니 15살까지만이라도 이곳에서 버티자.
디아나는 대공에게 드는 이해할 수 없는 의문들을 모두 밀어 버리고 오직 한 가지만 생각하기로 했다.
살아남는 것.
“아가씨, 곧 약 기운이 돌 것입니다. 불안함은 접어 두시고 오늘은 푹 주무십시오.”
“……네.”
디아나의 대답에 바론은 하녀에게 눈짓했다.
그에 하녀가 다가와 디아나를 조심스레 다시 침대 위로 눕혀 주었다.
디아나의 상태를 한 번 더 확인한 바론은 대공에게 몸을 돌렸다.
“전하, 그럼 전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그리하라.”
바론과 하녀가 나가자 디아나는 여전히 침대 옆에 서 있는 대공의 손끝을 보다 에드윈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대공의 뒤, 조금 멀리 서 있던 에드윈은 눈이 마주치자 기다렸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다 괜찮다는 듯이.
‘에드윈이 항상 내 곁에 있어 주면 좋을 텐데.’
그의 미소에 디아나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려던 순간 낮은 음성이 방 안을 울렸다.
“에드윈.”
대공의 부름에 움찔 놀란 에드윈은 미소를 지우며 대공에게 고개를 숙였다.
“네, 전하.”
“시각이 꽤 되었는데 이만 돌아가 보거라.”
벌써 가야 한다고?
디아나는 힐긋 방 한편에 세워진 원목으로 만들어진 괘종시계를 보았다.
에드윈을 보내고 싶지 않은 디아나의 마음과 달리 대공의 말대로 밤 9시를 훌쩍 넘었다.
오늘 가면 언제 다시 볼 수 있을까.
본성 쪽이 그가 있는 기사단과 거리는 가까웠지만 여기선 보는 눈이 많아 오두막에서 지낼 때처럼 아는 척을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럼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전하.”
디아나는 아쉬운 마음을 감출 수 없어 대공에게 인사를 하고 방을 나가는 에드윈의 뒷모습을 빤히 바라보았다.
탁, 문이 닫히고 나서야 디아나는 눈을 느리게 깜박였다.
‘정말 갔네.’
에드윈이 나가자 괜히 이 넓은 방이 춥게 느껴졌다.
분명 온열 마법으로 방 안의 온도는 따뜻하게 유지되고 있는데도 말이다.
“표정이 안 좋군.”
낮은 음성에 디아나는 아차, 하며 이불을 꼭 움켜쥐었다.
‘아직 이 방에 전하가 있었어.’
에드윈만 생각하느라 잠시 그의 존재를 잊고 말았다. 도저히 잊을 수 없는 존재감을 내뿜는 사람을 말이다.
디아나는 시선을 살며시 들어 대공을 보았다.
그의 한쪽 눈썹이 삐뚜름하게 올라가 있었다.
무언가 마음에 안 찬다는 듯이.
디아나는 방금 대공이 무어라 말했는지를 떠올리곤 꾹 다문 입술을 억지로 열었다.
“……약을 먹어서 그런 거 같아요.”
대충 둘러댄 말이었다. 다행히도 대공은 별다른 의심 없이 눈썹을 내렸다.
“하긴…… 그 약은 어린아이가 먹기엔 독한 약이었으니…….”
대공은 말끝을 늘이며 무언가 생각에 잠긴 듯 입술을 다물었다.
그런 그를 가만히 보고 있던 디아나는 말이 씨가 되기라도 한 건지 점점 나른한 기운이 퍼지는 걸 느꼈다.
‘음…… 이러면 안 되는데…….’
대공이 나갈 때 인사를 해야 하는데, 그래야 예의가 있는 아이라고 생각할 텐데…….
이성이 소리쳤지만 어린 몸으론 독한 약 기운을 막을 방도가 없었다.
눈을 깜박이는 속도가 점점 느려지고 노곤한 기분에 팔다리의 힘이 빠졌다.
“흐음…….”
잠을 떨쳐 보려 작은 숨을 내쉬었지만 오히려 그 짧은 숨을 마지막으로 디아나는 완전히 눈을 감고 말았다.
새근, 새근.
규칙적인 아이의 숨소리가 방 안을 울렸다. 혼자만의 상념에 잠겨 있던 대공은 그 숨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시선을 내리자 어느새 잠이 든 디아나의 모습이 대공의 눈에 들어왔다.
“언제, 잠이 들었지.”
분명 방금까지만 해도 풀 죽은 얼굴로 그를 보고 있었는데 말이다.
아이들은 원래 이렇게 빨리 잠드는 건가.
“아니면 약이 독해서인가.”
디아나가 먹은 카이투스 약초를 생각하자 대공의 미간이 좁아졌다.
그의 후각을 자극했던 독한 냄새의 잔영 때문도 있었지만 그것을 먹은 디아나의 얼굴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올라오는 구역질을 참는 것인지 약을 먹기 전보다 창백해졌던 아이의 얼굴.
어른도 먹기 힘든 약초를 먹고도 인상을 찌푸리기는커녕 어른들의 눈치를 보던 디아나의 모습이 그의 기분을 몹시도 나쁘게 만들었다.
“하아.”
대공은 또 아이와 관련해 격해지는 감정에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미 충분히 휘둘렸어.”
대공은 스스로에게 낮게 읊조렸다.
저택에 아이를 들이고, 아이의 건강을 걱정하고, 아이를 위해 값비싼 약초까지 썼다.
자신의 자식도 아닌 레아, 그 역겨운 여자의 자식을 위해서 말이다.
세이아를 생각해서라도 더 이상 디아나에게 신경을 써서는 안 된다.
대공은 복잡한 마음을 정리하며 디아나에게서 시선을 거두었다. 방을 나가려 몸을 돌리던 순간 방 안에 미약한 흐느낌이 울렸다.
“흐으…… 흑…….”
디아나의 흐느낌.
그 작은 소리에 한 발짝 내디딘 대공의 발이 딱 멈추었다.
도저히 떨어지지 않는 자신의 발을 내려다보던 대공은 얼굴을 무참히 구겼다.
이성은 방에서 나가라 소리치고 있지만 그의 몸은, 발은 바닥에 붙어 버리기라도 한 듯 움직이질 않았으니까.
“……정말, 미치겠군.”
대공이 깊은 한숨을 내쉬며 다시 디아나가 누운 침대를 향해 몸을 돌리자 디아나의 미간이 좁아지며 옅은 울음소리가 또 한 번 흘러나왔다.
“흑…….”
그리고 아이의 눈가에서 눈물이 한 방울 가로로 흘러내렸다. 그리고 그 순간 대공은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디아나에게 손을 뻗어 아이의 눈물을 닦아 주었다.
“대체 이게 뭐 하는 짓인 건지…….”
자조적인 목소리가 흘러나왔지만 대공은 디아나에게서 손을 거둘 수가 없었다.
무슨 꿈을 꾸는 것인지 디아나는 연신 눈물을 흘리며 서글픈 흐느낌을 내뱉고 있었다.
문득 의원의 말이 떠올랐다.
- 전하, 아가씨께선 지금 몸의 아픔보단 마음이 많이 불안정하신 듯합니다.
“설마, 그 여자를 그리워하는 것인가.”
의원에게 그 말을 처음 들었을 때, 제일 먼저 들었던 생각이었다.
혹 어린아이이니, 자신의 말에 겁을 먹어 억지로 어미에게 가기 싫다고 대답한 것은 아니었나, 하고 말이다.
그 여자가 학대를 했을 것이라 확신했기에 디아나와 여자를 떼어 놓았지만, 디아나는 이제 겨우 열 살이니 본능적으로 어미를 찾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무리하게 떼어 놓는 대신 그 여자에게 돌려보내고 감시를 붙여야 하는 것인가.
마음에 들지 않는 대안이었다.
또 디아나 때문에 복잡해지는 그의 머릿속과 감정에 대공의 미간 주름이 깊어지던 순간 디아나의 입술이 움직였다.
“……보내…….”
“뭐?”
순간 잠이 깬 것인가 싶었지만 디아나의 눈은 여전히 감겨 있었다.
잠꼬대였나.
그때, 디아나의 입술이 또 한 번 움직였다.
“당최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작아서 들리지가 않는군.”
대공은 연신 무어라 중얼거리는 디아나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저 잠꼬대라 무시하기엔 눈물을 뚝뚝 흘리는 것이 그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쯧, 혀를 찬 대공은 잘 들리지 않는 소리에 몸을 숙여 작은 입술에 귀를 가져다 댔다.
“흑, 제발…… 엄마에게…… 돌려보내지, 말아…… 주세요…….”
작은 흐느낌이 정확히 대공의 귀를 파고들었다. 그리고 그 애처로운 중얼거림을 들은 대공의 얼굴이 돌처럼 딱딱하게 굳었다.
그는 천천히 숙였던 몸을 일으켰다.
“하.”
한창 엄마를 찾을 아이가 제 엄마에게 제발 돌려보내지 말아 달라니.
차가운 비소가 그의 입술을 타고 흘러나왔다.
얼마나 아이를 괴롭혔으면.
대공은 가슴에 퍼지는 거센 분노를 도저히 참을 수 없어 주먹을 꽉 그러쥐었다, 손을 폈다.
여전히 분노가 일렁였지만 그보다 더 신경 쓰이는 것이 그의 눈에 보였기 때문에.
두렵다는 듯이 바들바들 떨고 있는, 이불을 꽉 그러쥔 디아나의 작은 손.
그 손이 그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이건 정말…… 나답지 않아.
스스로에게 그리 말했음에도 그의 몸은 이미 침대 옆에 놓인 의자에 자리를 잡았다.
대공은 스스로 미친 짓이라 생각하며 떨고 있는 작은 손 위를 그의 손으로 덮었다.
두려워 말라는 듯이.
그리고 그는 그 작은 손을 꽉 잡아 주며 낮게 속삭였다.
“절대, 널 보내지 않을 테니 두려워하지 말아라.”
이것도 동정인가.
자조적인 의문이 들었지만 자신의 엄지를 꽉 잡아 오는 디아나의 손을 차마 놓을 수가 없었다.
* * *
“아가씨, 속은 어떠신가요? 답답하고 쓰린 느낌은 사라지셨나요?”
의사의 말에 디아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좋아졌어요.”
“흠…… 그렇다면 더 이상 약을 먹을 필요가 없을 거 같군요. 치료가 아주 잘된 거 같습니다.”
의원은 디아나의 몸을 한 번 더 체크하곤 뒤에서 상황을 지켜보고 있는 집사에게 말했다.
의사의 진료가 끝날 때까지 아무 말도 없이 서 있던 집사가 입을 열었다.
“바론 님, 저번엔 불안정한 심리 상태 때문에 한동안은 주변 환경을 바꾸지 말라 하셨는데, 지금은 어떠한가요. 아가씨께서 움직이셔도 될 거 같습니까?”
“아, 방을 옮겨야 한다고 하셨었죠.”
집사의 말에 바론이 막 기억났다는 듯 자신의 허벅지를 손으로 가볍게 때렸다.
“네, 아가씨의 방은 이미 준비가 되었습니다. 바론 님이 허락해 주신다면 오늘 바로 옮길 것입니다.”
바론은 짧은 신음을 흘리며 디아나를 돌아보았다.
디아나를 유심히 살핀 바론은 이내 집사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이제 몸이 많이 좋아지셨고, 심리적으로도 많이 안정되셨으니 방을 바꾸어도 괜찮을 거 같습니다.”
“알겠습니다, 바론 님.”
바론의 시선이 다시 디아나를 향했다. 항상 딱딱한 얼굴만 보여 주었던 의사는 웬일로 디아나를 보며 살짝 미소를 그렸다.
“그럼 이제 건강해지셔서 부디 저와 만날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아가씨.”
“……치료 잘해 주셔서 감사해요.”
디아나는 막 일어나려는 그에게 망설이다 용기를 내어 그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했다.
디아나가 쓰러지고 손님방에 머무른 지도 벌써 일주일째였다.
매번 무표정이긴 했지만 그동안 매일매일 주치의는 디아나의 몸 상태를 살뜰히 살펴 주었다. 덕분에 디아나는 빠르게 회복할 수 있었다.
그래서 그에게 용기 내어 작게나마 감사 인사를 전한 것이다.
디아나의 인사를 들은 의사는 더 환한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전 이만 나가 보겠습니다. 아, 대공 전하께는 제가 직접 보고를 드려야 하는 건가요?”
“아뇨, 오늘은 제가 보고를 드릴 것입니다. 수고하셨습니다, 바론 님.”
“네.”
주치의가 방을 나가자 디아나는 집사와 단둘이 남았다.
‘불편해.’
차라리 이름 모를 하인이 있는 게 덜 불편했을 텐데. 집사는 다른 저택의 사용인들처럼 마냥 무시할 수 없는 존재였다.
사실 무시는커녕 디아나가 눈치를 살펴야 할 입장이다.
그는 직접 대공을 모시고, 오랜 세월 대공가의 저택을 관리한 집사니까.
그래도 그나마 다행인 것은 처음 대공 앞에 섰던 날, 곤란해하는 집사를 디아나가 도와준 이후로 자신을 경멸하듯 보던 눈빛은 사라졌다는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에드윈처럼 디아나에게 호의적인 감정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어쨌든 지금 집사는 적의도 그렇다고 호의도 아닌 무감정한 태도를 고수하고 있어 디아나를 더 숨 막히게 했다.
언제 그가 돌변할지 알 수 없으니까.
하지만 도망갈 수도, 먼저 말을 걸 용기도 없었기에 가만히 침대 이불자락을 손으로 꼼지락거리고 있던 때, 집사의 목소리가 방 안을 울렸다.
“아가씨, 몸이 괜찮으시다면 지금 아가씨의 방으로 가셨으면 합니다. 움직이실 수 있으신가요?”
“아, 응!”
디아나는 바로 대답했다.
“그럼 지금 아가씨의 방으로 안내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혹 챙기실 것이 있으신가요?”
“아니, 없어.”
애초에 가지고 온 게 없었으니 챙길 게 있을 리가.
“알겠습니다. 그럼 가시죠.”
디아나는 집사의 말에 침대에서 내려와 그를 따라 방을 나갔다.
그를 따라 2층으로 올라간 디아나는 복도의 오른쪽 끝 방에서 멈춰 섰다.
집사가 뒤를 돌아 디아나에게 말했다.
“이곳이 앞으로 아가씨께서 머무르실 방입니다.”
그 말을 마치자마자 그는 방문을 열었다. 활짝 열린 문 사이로 넓은 방 안의 내부가 들여다보였다.
“와아.”
디아나는 작은 탄성을 내뱉으며 방 안으로 들어갔다.
오두막의 방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넓은 방이었다. 그리고 어린 여자아이의 취향을 고려한 것인지 창문에는 노란색 커튼이, 침대도 옅은 노란빛의 침구로 꾸며져 있었다.
“마음에 드십니까?”
반짝이는 눈빛으로 방 안을 둘러보고 있는 디아나에게 집사가 물었다.
“응, 정말 마음에 들어!”
디아나는 조금 높아진 목소리로 그에게 답했다. 디아나의 밝은 대답에 순간 집사는 조금 놀란 듯 눈동자가 커졌다, 사그라들었다.
“마음에 드신다니 다행입니다.”
집사는 무언가 불편한 얼굴로 느리게 말했다. 그는 시계를 힐긋 보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럼 전 이만 일이 있어 물러가 보겠습니다. 식사는 시간이 되면 하녀가 방으로 가져다줄 것입니다. 그 외에 혹 필요한 게 있으시다면 침대 옆의 줄을 잡아당기십시오. 그럼 하녀가 아가씨의 방으로 올 것입니다.”
“응, 알았어.”
집사는 묵례를 해 보이곤 방을 나갔다. 탁,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자마자 디아나는 참고 있었던 환한 미소를 지었다.
“진짜 좋다.”
침대와 테이블, 그리고 작은 소파 하나가 전부였지만 앞으로 살아가는 동안 오늘을 절대 잊을 수 없을 것이다.
난생처음으로 자신만의 공간이 생기다니.
얼마나 지속될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레아가 언제 소리를 칠까, 언제 방문을 열고 들어와 때릴까 하는 걱정은 완전히 사라졌다.
창밖을 보아도 레아와 살던 음침한 오두막의 지붕조차 보이지 않는 것이 특히 더 마음에 들었다.
“성인이 될 때까지 이곳에서 죽은 듯이 지내는 거야.”
그리고 성인이 되면 이 대공성을 떠나, 열심히 일해서 이 방보다 훨씬 멋진 나의 집을 사야지.
행복한 상상을 그리며 침대에 풀썩 앉은 그때, 방문이 벌컥 열리며 날카로운 하이톤의 목소리가 방을 울렸다.
“정말이었어!”
“대공녀님.”
디아나는 화들짝 놀라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방문 앞에 선 세이아는 경악한 듯 입을 벌린 채 손가락으로 정확히 디아나를 가리키고 있었다.
그러다 곧 놀란 정신이 돌아왔는지 세이아는 성큼성큼 방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세이아는 디아나를 향한 손가락을 내리지 않으며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소리쳤다.
“너!삭제 네가 왜 여기 있어?! 내가 말했잖아! 저택에 다시는 오지 말라고! 근데 네가 왜 여기에 있어!”
세이아의 고함이 귀청을 때렸다.
디아나는 고막을 울리는 세이아의 높은 목소리에 순간 인상을 구길 뻔했지만 다행히도 빠른 순발력으로 구겨지려던 얼굴을 펼 수 있었다.
“……죄송해요…….”
디아나는 황급히 시선을 내리며 세이아에게 고개를 숙였다.
저택으로 들어오지 않겠다고 세이아에게 약속을 한 적도, 이곳에 오고 싶어서 오게 된 것도 아니었지만 디아나가 세이아에게 할 수 있는 말은 별로 없었다.
괜히 따지고 들어 봤자 돌아오는 것은 따귀이거나, 최악의 경우 자신의 딸에게 대들었다며 대공이 디아나를 레아에게 다시 보낼 수도 있다.
그러니 세이아의 분노가 조금이라도 풀리길 바라며 잘못을 빌 수밖에 없다.
하지만 세이아는 디아나가 고개를 숙였음에도 분노가 사그라들지 않는지 씩씩거리는 숨을 내뱉었다.
“죄송? 죄송하다면 다니?! 난 네가 여기 있는 게 싫다고! 어떻게 너 같은 더러운 것이 저택에 들어올 수 있는 거야! 여긴 돌아가신 고귀한 내 어머니와 아버지, 나의 집이라고!”
퍽-.
세이아는 디아나의 어깨를 강한 힘으로 밀쳤다.
예상치 못한 세이아의 밀침에 디아나는 뒤로 풀썩 넘어지고 말았다.
바닥에 찧은 엉덩이가 아팠지만 분노에 휩싸인 세이아 때문에 신음을 내뱉을 수도 없었다.
주먹을 꽉 그러쥔 세이아는 서슬 퍼런 눈빛으로 디아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난 네가 정말 싫어. 싫어서 미칠 거 같다고! 내가 왜 너랑 이 저택에서 함께 살아야 하는 거야! 너 같은 천것이랑 왜! 왜! 난 차라리 지금이라도 네가 죽…….”
“방문이 열려 있군.”
문 쪽에서 남자의 낮은 음성이 울린 순간 세이아의 악에 가득한 목소리가 거짓말처럼 딱 멈추었다.
디아나는 정지 버튼을 누른 듯 굳은 세이아를 보다 그녀의 뒤, 목소리가 들린 방문 쪽을 보았다.
그리고 방문 앞에는 디아나의 예상대로 대공이 서 있었다.
그는 큰 보폭으로 방 안으로 들어섰다.
하필 이런 때 오다니.
디아나가 낭패감에 젖은 순간 대공은 두 사람을 번갈아 보며 미간을 살짝 좁혔다.
디아나가 얼른 일어나야겠다고 생각하며 몸에 힘을 주려 한 그때, 갑자기 세이아가 울상을 지으며 디아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미안해, 디아나. 네가 넘어지는 걸 내가 잡아 줬어야 했는데. 네가 이렇게 갑자기 미끄러질 줄 몰랐어. 아직 몸이 많이 안 좋았구나.”
“…….”
디아나는 자신이 무슨 소리를 들은 것인지 순간 이해가 되지 않았다.
세이아는 아예 디아나에게 다가와 몸을 낮추며 디아나의 양팔을 부여잡았다.
일어나라는 듯이.
그리고 세이아는 디아나의 귓가에 조용히 속삭였다.
“아버지께 이상한 소리 하면 가만두지 않을 거야.”
디아나는 세이아가 이끄는 대로 조용히 일어났다.
세이아의 협박이 무서워서라기보단 대공의 앞에서 소란을 피울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대공녀가 자신을 밀치고 폭언을 퍼부은 것을 알게 된다 해도, 세이아는 대공의 하나뿐인 금쪽같은 딸.
대공이 누구의 편을 들지는 뻔하다.
디아나가 얌전히 일어나자 세이아는 언제 그녀를 협박했냐는 듯 표정을 싹 바꾸며 눈가에 눈물을 방울방울 매단 채 사과했다.
“정말 미안해, 디아나.”
디아나는 그런 세이아의 모습에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세이아는 아직 자신처럼 어린아이였다.
그런데 어떻게 이렇게 단번에 표정이 바뀔 수 있는 건지.
꼭 다른 사람들 앞에선 자신을 때리지 않았던 레아를 보는 거 같았다.
세이아는 정말이지 레아와 비슷한 면이 많았다.
세이아가 대공녀만 아니었다면 레아의 딸이라 해도 전혀 이상할 게 없어 보였다.
“혼자 넘어진 것이냐.”
대공의 목소리가 방 안을 울렸다. 디아나는 대공의 말에 시선을 아래로 내리며 답했다.
“……네, 제가 갑자기 다리에 힘이 풀려 넘어졌어요.”
“아직 몸이 회복되지 않은 건가. 바론의 말로는 많이 좋아졌다고 했는데.”
“많이 좋아졌어요. 잠시 현기증이 나서…… 지금은 정말 괜찮아졌습니다.”
디아나가 답하자 수려한 눈썹이 꿈틀거리다 시선을 돌려 세이아를 바라보았다.
“세이아, 한데 넌 왜 여기 있는 것이냐.”
“아, 하녀들이 디아나가 저택에서 머무르게 되었다고 해서…… 디아나의 얼굴을 보고 싶어 들렸어요.”
방금까지 제 얼굴을 한 대 치려던 눈빛을 정확히 기억하고 있는 디아나는 어이가 없었지만 속으로 생각할 뿐 겉으로 드러낼 순 없었다.
“디아나의 얼굴을?”
대공은 이해하기 힘든지 반듯한 미간을 좁혔다.
그는 디아나와 세이아를 한 번씩 보더니 세이아에게 다시 물었다.
“평소 디아나와 친하게 지냈던 것이냐?”
대공의 직구에 순간 당황한 듯 세이아의 옅은 금안이 흔들렸다.
세이아의 시선이 힐긋 디아나를 향했다.
아무 말 못 하고 가만히 있는 디아나를 본 세이아는 곧 대공을 향해 말간 미소를 지어 보였다.
“자주 보거나 그런 것은 아니지만 디아나를 항상 신경 쓰고 있었어요. 디아나가 대공성 밖에 머무는 게 마음이 아팠거든요…….”
세이아는 아주 착하디착한 아이처럼 디아나가 대공의 인정을 받지 못해 슬프다는 듯 눈초리를 아래로 내리며 말했다.
다른 사람들이 본다면 열이면 열 세이아가 디아나를 아끼고 있다고 생각할 모습이었다.
하지만 대공은 그런 세이아를 보고서도 크게 표정이 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세이아를 보는 대공의 황금안에 불편한 감정이 스쳐 지나갔다.
뭐지? 죽을 만큼 사랑했다는 대공비가 남긴 하나뿐인 소중한 딸이라 들었는데, 아니었던가.
대공은 느리게 눈을 한번 깜빡인 뒤, 세이아를 보며 말했다.
“네가 디아나를 챙기고 있었다니 다행이구나. 이번 일을 너에게 미리 말해 주지 못해 혹 네 기분이 나쁠까 걱정했는데, 그러지 않아 다행이구나.”
대공의 말이 끝난 순간 세이아는 쪼르르 대공에게 달려가 그의 팔을 잡았다.
“기분이 나쁘다뇨. 전 정말 아무렇지도 않아요. 오히려 디아나와 함께 저택에서 지낼 수 있게 되어 기쁜걸요. 앞으로 제가 디아나를 잘 챙길 테니 걱정 마세요.”
세이아는 세상 착한 아이의 미소를 지으며 대공의 팔에 이마를 비볐다.
분명 사랑스러운 애교였지만 어쩐지 대공은 큰 반응이 없었다.
디아나는 문득 의문이 들었다.
아까도 그렇고 이번에도 그렇고 왜 대공의 눈빛에서 애정이 느껴지지 않는 걸까.
대공이 대공성으로 돌아온 뒤 하녀들의 이야기는 온통 대공이 세이아를 얼마나 아끼는지에 대한 이야기뿐이었다.
수도에서 알아준다는 비싼 드레스를 사 준 것부터 세이아가 좋아하는 인형, 액세서리, 진귀하다는 모든 물건을 세이아에게 선물한다고 했다.
거기다 그 차가운 대공 전하께서 세이아 아가씨만 보면 미소를 짓는다며 자기들끼리 모이기만 하면 떠들어 디아나도 알 정도였다.
한데 지금 모습은 하녀들의 이야기와는 좀 다르게 느껴졌다.
애정이 가득한 게 아니라 오히려 세이아를 불편해하는 거 같달까.
눈치 빠른 디아나에겐 그렇게 느껴졌다.
“네가 그리 말해 주니 고맙구나. 앞으로 디아나와 싸우지 말고 잘 지내길 바란다.”
대공은 다른 한 손으로 세이아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다정한 모습에 디아나는 속으로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착각한 건가 봐.
디아나는 자신이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했다고 여기며 쓸데없는 의구심을 머릿속에서 지워 버렸다.
“네, 아버지의 말씀을 꼭 지킬게요.”
행복함이 가득한 세이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렇게 아빠가 좋을까 싶으면서도, 한편으론 세이아가 부러웠다.
자신을 지켜 주고 사랑해 주는 부모가 있다는 사실이 말이다.
디아나는 따지고 보면 생물학적 엄마와 아빠가 다 살아 있지만 양쪽 다 자신을 지켜 줄 사람은 아니었다.
대공도 레아도 디아나를 언제 내칠지 알 수 없는 사람들. 어쩌면 디아나에게 그들이 제일 위험한 사람들일지도 모른다.
부모가 자식에게 제일 위험한 사람들이라니.
새삼 제 신세가 참 씁쓸하게 느껴지던 그때, 대공이 세이아의 머리를 쓰다듬던 손을 거두며 말했다.
“그래. 한데 세이아, 좀 있으면 예절 선생이 올 시간이니 이만 방으로 돌아가는 게 좋을 거 같구나.”
세이아는 아쉽다는 듯 시무룩한 눈빛으로 시계를 확인하곤 대공을 보았다.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되었다니…… 아! 아버지, 아버지도 이제 집무실로 가실 테니 저를 방까지 데려다주시고 집무실로 가시면 안 될까요?”
세이아는 예절 교육, 대공은 집무실. 드디어 두 사람이 제 방에서 나가는구나.
디아나는 세이아의 말에 그들 몰래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어서 나가기를 바라며 가만히 기다리고 있는데 디아나의 바람과는 다른 대공의 말이 들려왔다.
“아니, 난 디아나와 할 이야기가 있단다. 그러니 먼저 돌아가는 게 좋겠구나.”
대공은 제 팔을 잡고 있는 세이아의 손을 조심스럽게 떼어 냈다.
한없이 부드러운 손길이었지만 완강한 거부의 의미가 느껴지는 대공의 행동에 디아나뿐만 아니라 세이아도 당황한 듯 옅은 금안이 크게 흔들렸다.
“……정말 저 혼자 가나요?”
세이아는 이 상황이 믿기 힘들다는 얼굴로 대공에게 다시 물었지만 대공의 표정은 흔들림 없었다.
“그래. 혹 혼자 가는 것이 싫다면 하녀를 불러 주마. 수업에 늦으면 캐롤 부인이 난감해한단다. 어서 가서 수업 준비를 하는 게 좋겠구나.”
대공은 부드러운 어조로 달래듯 말했지만 세이아가 진짜 원하는 것을 들어주지는 않았다.
세이아도 대공의 말에 더 고집을 피울 수는 없는지 양순하게 답했다.
“혼자 갈 수 있어요. 그럼 전 먼저 가 볼게요, 아버지.”
“그래. 조심히 올라가거라.”
발을 뗄 듯 말 듯 망설이는 세이아에게 대공이 쐐기를 박자, 세이아는 어쩔 수 없이 몸을 돌렸다.
그렇게 조용히 방을 나가는구나 싶던 그때, 세이아가 갑자기 디아나를 돌아보았다.
“디아나, 앞으로 잘 지내 보자.”
싱긋 미소를 지으며 말했지만 세이아의 눈빛은 결단코 웃고 있지 않았다.
앞으로 잘 지내기는 어려울 거 같은 그녀의 눈빛에 디아나는 속으로 깊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숙였다.
“잘 부탁드려요, 대공녀님.”
나도 잘 부탁해, 공기 중에 흩뿌리듯 미약한 목소리로 말한 세이아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방을 나갔다.
디아나는 그 뒷모습에서 세이아가 지금 얼마나 화가 났는지를 알 수 있었다.
앞으로 방문을 걸어 잠그고 살아야 하는 걸까.
정말 그럴 수만 있다면 그렇게 해서라도 세이아의 방문을 막아 보고 싶었다.
레아라는 한 고비를 넘기니 새로 찾아온 세이아라는 고비에 어떻게 해야 하나 싶던 그때, 대공이 디아나를 불렀다.
“디아나.”
“네, 대공 전하.”
“……방은 어떻지?”
“네?”
순간 대공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되묻자 대공의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
디아나는 뒤늦게 그의 물음을 이해하곤 재빨리 말을 이었다.
“……마음에 들어요, 정말 감사합니다.”
디아나는 꾸벅 대공에게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한데 자세를 바로 하고 난 뒤 보게 된 대공은 심기가 불편해진 듯 미간을 좁히고 있었다.
제가 또 뭘 잘못한 건가 싶어 침을 꼴깍 삼킨 그때, 대공이 입을 열었다.
“허리를 숙이는 인사법은 평민들이 하는 것이다. 넌…… 평민은 아니니 앞으로 그 누구에게도 허리를 숙이는 인사는 하지 마라.”
“……네, 전하.”
사생아와 평민의 차이가 크지 않을 텐데, 아니, 오히려 인정받지 못한 사생아는 평민에게도 무시받으니 평민보다 못한 처지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디아나는 대공의 말에 토를 달 수 없었기에 온순하게 대답했다.
대공은 그런 디아나를 보다 방 안을 쭈욱 둘러보았다.
“……너무 아무것도 없군.”
방 안을 둘러본 대공이 무어라 입술을 움직였지만 너무 작은 목소리라 잘 들리지가 않았다.
그가 뭐라고 한 건지 궁금했지만 혼잣말 같아 되묻지 못했다.
어차피 디아나완 관계 없는 말일 것이다.
‘쉬고 싶어.’
많이 회복하긴 했지만 세이아와 대공 때문에 긴장해서인지 갑자기 피로가 몰려왔다.
‘침대에 누워서 자고 싶어.’
밀려드는 피곤함에 몸에서 힘이 쭉쭉 빠지던 그때.
“……하암. 압!”
디아나는 저도 모르게 하품이 크게 나오고 말았다.
황급히 입을 막았지만 이미 황금안이 디아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디아나는 입을 막았던 손을 내리며 황급히 말했다.
“죄송합니다.”
“……많이 피곤해 보이는군. 죄송할 필요 없다. 아직 몸이 다 회복된 게 아닐 테니까.”
“…….”
디아나는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가만히 입을 다물었다. 대공은 그런 디아나를 빤히 보다 짧은 한숨과 함께 다시 말문을 열었다.
“하아, 그만 쉬도록 해라. 혹 지내다 불편한 점이 있으면 집사에게 말하도록 하고. 알겠나?”
“네, 전하.”
디아나는 무의식적으로 그에게 인사하기 위해 허리를 반쯤 숙이다 멈칫했다.
‘아, 이렇게 인사하지 말라고 했는데.’
디아나는 어정쩡해진 자세를 재빨리 바로 하며 힐긋 대공의 얼굴을 살폈다. 다행히도 제 실수에 그렇게 화가 난 듯한 얼굴은 아니었다.
그저 뭔가 마음에 안 든다는 듯 이맛살을 잠시 찡그리던 그는 별다른 말 없이 몸을 돌려 방을 나갔다.
탁, 방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고 나서야 디아나는 긴장을 풀며 긴 숨을 내쉬었다.
“하아, 드디어 다 갔다. 근데 나 계속…… 이렇게 지내야 하는 건 아니겠지?”
오두막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공간이 생겼다고 좋아하는 자신에게 정신 차리라는 듯 한바탕 폭풍이 지나간 거 같았다.
세이아가 괴롭힐 거 같긴 하지만 대공이 디아나를 자주 찾을 리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세이아의 괴롭힘쯤이야, 레아에게 맞는 거에 비하면 충분히 견딜 수 있을 정도였다.
다 괜찮을 것이라 생각하며 침대에 눕자 폭신한 감촉이 디아나의 몸을 부드럽게 감싸 안았다.
“아, 좋다.”
아픈 동안 머물렀던 손님방의 침대도 좋긴 했지만 이 침대와 비교될 건 아니었다.
디아나는 잠시나마 들었던 걱정이 싹 날아가고 몸을 감싸 안는 푹신함에 기분이 다시 좋아졌다.
몸이 풀어지자 기다렸다는 듯 밀려드는 수마에, 모든 걱정은 잠시 내려놓고 천천히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