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권-1화 (1/16)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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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이 벌써 이렇게 추워지는데 대공 전하는 언제쯤 돌아오실는지.”

“그러게, 벌써 몇 년이나 흐른 거야.”

“10년쯤, 되지 않았나?”

“10년이나 됐어? 하긴 대공녀님이 갓난쟁이일 때 떠나셨으니 벌써 그렇게 됐겠네.”

“10년 끝자락이지. 이번 겨울을 넘기면 11년이었어.”

겨울바람이 매서운 빨래터에서 하녀들의 재잘거리는 목소리가 연신 울리고 있었다.

아이 하나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아이가 빨랫감을 들고 물가로 들어서자 빨래를 두드리고 있던 하녀들의 시선이 아이에게로 쏠렸다.

재잘거리던 입술을 꾹 다문 채로.

“오셨어요, 아, 가씨.”

차마 일어나지 않을 수는 없는 듯 제일 나이 든 하녀가 빨랫감을 놓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방금 말한 하녀의 말대로 아이, 디아나도 이 대공가의 아가씨였으니까.

그녀를 따라 줄줄이 일어난 하녀들이 디아나를 못마땅하게 훑어보았다.

디아나는 내심 억울했다. 디아나라고 여기 오고 싶어서 온 게 아닌데.

아무도 디아나의 옷을 빨아 주질 않으니 직접 할 수밖에 없었다.

“하던 거 계속해.”

디아나는 그들과 조금 떨어진 물가에 자리를 잡았다. 빨랫감 속에서 원피스 하나를 들어 물에 담그자 손이 너무 시려 순간 온몸이 움츠러들었다.

“하아.”

옷을 물에 빠르게 적시고 꺼낸 뒤 차가운 손에 입김을 호호 불었다.

매서운 겨울바람에 얼음장처럼 차가운 물은 도저히 익숙해지지가 않는다.

하지만 손이 시리다고 대신해 줄 하녀는 디아나에게 없다. 그리고 더러운 옷을 입고 있으면 또 그 여자가 화를 낼 테니까.

디아나는 제 손보다 두 배는 큰 몽둥이를 잡고 빨래를 두드렸다.

“대공 전하께서 빨리 돌아오시면 좋겠어. 전쟁터로 떠나시고 이 대공가가 얼마나 삭막해졌니.”

“맞아, 대공녀님도 아버지가 많이 보고 싶으실 거야.”

“근데, 만약에 대공 전하가 돌아오시면 저…… 아, 가씨는 어떻게 되는 거래?”

힐끔, 자신을 훔쳐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약간의 동정이 섞인 시선들.

대공녀와 디아나가 자라나면서 점점 더 늘어나는 익숙한 시선이었다.

대공 전하께서 돌아온다면이라.

10년간, 아니 태어나서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디아나의 생물학적 아버지, 크로우드 테라비타.

테라비타 제국 황제의 하나뿐인 동생이자 제국에서 가장 강한 검사인 남자.

그리고 디아나는 그 남자의 사생아였다.

거기다 엄마는 대공이 자신의 목숨보다 사랑했다는 안주인의 하녀였다.

이것만 말해도 다들 알 수 있을 것이다. 디아나가 대공가의 오점이라는 것을.

완벽하기 그지없는 대공의 하룻밤 실수로 태어난 딸.

술에 잔뜩 취했던 대공이 하녀를 자기 부인으로 착각하고 안았다고 했었다.

그 딱 한 번의 실수로 디아나가 만들어졌다. 그녀는 만들어진 순간부터 운이 좋지 못했다.

더 최악인 건 엄마가 디아나를 가진 시점과 그의 아내가 아이를 가진 시점이 같았다는 거였다.

그 덕에 대공가에서 그녀의 엄마 되는 사람을 얼마나 더 배척했을지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것이다.

하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마음씨 착한 대공가의 안주인인 대공비는 하해와 같은 마음으로 제 남편의 아이를 가진 하녀를 죽이지 않았다.

어찌 됐든 대공의 핏줄이라고 대공가에서 아이를 낳고 키울 수 있도록 허락해 주었다.

그래, 거기까지는 괜찮았을 텐데.

디아나의 불운은 거기까지가 아니었는지, 대공비가 아이를 낳다 죽어 버리고 말았다.

기적적으로 아이는 살았지만 출산하는 과정에서 피를 너무 많이 흘린 대공비가 그만 죽고 만 것이다.

대공은 상실감을 참을 수 없었는지 갓 태어난 아이를 보지도 않고 대공가를 떠나 전쟁에 몰입했다.

대공이 그렇게 사라져 버리자, 남은 대공가의 사람들은 주인과 안주인을 한 번에 잃은 상실감과 분노를 디아나와 그녀의 엄마인 레아에게 돌렸다.

재수 없는 두 사람 때문에 마님이 죽은 것이라고 말이다.

그때부터 디아나의 불행한 인생이 시작되었다.

디아나를 낳은 엄마는 몸을 추스르기도 전에 대공비가 내주었던 본성의 방에서 쫓겨났다.

대공성의 뒤쪽 숲에 위치한 차가운 오두막으로.

그 뒤로 쭉 레아는 주인이 없는 대공가에서 멸시와 무시를 받았다.

그리고 그로 인한 분노를 디아나에게 폭력과 학대로 풀었다.

레아는 디아나가 엄마라고 부르는 것도 몹시 싫어했다.

그래서인지 디아나도 어느 순간부터 엄마를 떠올릴 때면 무의식적으로 엄마가 아닌 레아란 이름으로 생각했다.

그렇게 디아나는 레아의 학대를 버티고 버티며 10년을 살아왔다.

어릴 적엔 자신을 때리는 레아가 마냥 무섭고 누군가 자신을 구해 주기만을 바랐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자신을 구해 주는 사람은 없었다.

끝없는 외로움과 모진 학대 속에서 디아나는 빨리 철이 들 수밖에 없었다.

디아나는 겨우 10살이었지만 대공가에서 자신의 위치를 정확히 알게 되었다.

너무 이른 나이에 많은 것을 알게 된 디아나는 자신을 버린 대공을 원망했었다.

그는 자신의 아버지였으니까.

대공이 있었다면 어쩌면 레아가 자신을 괴롭히지 않지 않았을까. 아니, 그가 구해 주지 않았을까.

그런 원망 섞인 희망을 품었었다.

하지만 그 원망도 10살에 접어들며 사라졌다.

아무리 눈을 감았다 떠 보아도 대공은 오지 않았고, 외롭고 힘든 하루도 달라지지 않았으니까.

그때부터 디아나는 스스로 살아남기 위해 노력했다.

레아의 기분을 거스르지 않게 청소와 빨래를 스스로 하고 또 레아의 눈을 피해 밥도 먹었다.

그녀가 화가 나지 않게 조심, 또 조심해서일까.

덕분에 요즘은 레아의 손찌검이 많이 줄었다.

성년이 될 때까지만 이렇게 버티다 스스로 대공가를 나가는 것.

그것이 디아나의 유일한 꿈이었다.

아마 스스로 나가겠다고 하면 아무도 잡지 않을 것이다.

아니, 오히려 좋아하겠지.

반드시 대공이 돌아오기 전에 이곳을 떠나야 한다.

저들의 말처럼 성년이 되기 전에 대공이 돌아오면 어쩌나 싶지만, 모두들 알고 있다. 대공이 돌아오지 않을 거라는 걸.

다들 대공이 돌아왔으면 하고 말은 하지만, 언젠가 하녀들이 하는 이야기를 들었었다.

‘전장을 누비는 대공 전하의 모습이 꼭 죽을 자리를 찾으러 다니는 귀신 같다고 하더라.’

‘아마 대공 전하께선 마님을 따라가시려는 게 아닐까.’

‘죽기 전까진 북방에 돌아오시지 않겠지. 대공녀님이 불쌍할 뿐이야.’

대공비를 잊지 못한 대공은 절대 북방으로 돌아오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니 ‘대공이 돌아왔을 때의 상황’ 같은 건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혼자 수긍하며 살짝 고개를 끄덕이던 순간 멈추었던 말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대공 전하는 대공녀님이 보고 싶으시지도 않나? 이제 대공녀님도 10살이고 5년 뒤면 의식이 있는데……. 10년 세월도 금방 지나갔는데, 이러다 정말 안 돌아오시는 게 아닐지…….”

“그러게요, 황족들이 치르는 의식은 정말 중요한 거라고 하던데, 의식이 있기 전엔 돌아오셨으면 좋겠어요.”

“그때까진 돌아오시겠지. 아직 5년이나 남았잖아. 괜한 걱정하지 마.”

“더 빨리 돌아오셨으면 좋겠어서 그래요. 혼자 계시는 대공녀님을 보면 얼마나 마음이 아픈지…….”

디아나는 다른 이야기보다 ‘의식’이란 단어에 고개를 갸웃했다.

5년 뒤면 성인이 되는 나이라 성인식을 말하는 건가, 싶지만 황족들이란 말이 나오는 걸 보니 좀 다른 거 같았다.

처음 듣는 얘기에 순간 하녀들을 힐긋 쳐다보았다. 하녀들은 이제 디아나를 신경 쓰지 않는 듯 자신들끼리 안타깝다는 얼굴로 빨래를 두드리고 있었다.

“대공녀님이 서운해하시겠어요.”

“그러게, 안 그래도 마음이 여린 분이신데.”

그들이 말하는 ‘의식’이 뭘까 생각하던 디아나는 들리는 말에 인상을 와작 찌푸렸다.

대공녀가 마음이 여리다니.

얼마 전 대공녀에게 맞았던 뺨에 아직도 푸른 멍이 남아 있는데.

대공녀의 작은 손은 레아의 손만큼이나 아팠다.

대공녀는 착했다던 대공비의 심성은 닮지 않은 게 분명했다.

“디아나!”

속으로 중얼거리며 거의 마무리 단계인 빨래의 물기를 짜고 있던 디아나는 날카로운 목소리에 몸을 움찔했다.

잘못 들은 거였으면 좋겠는데.

“디아나!”

하지만 잘못 들은 게 아니라는 듯 새된 목소리가 빨래터로 한층 더 가까워졌다.

멀지 않은 곳에서 푸른 드레스 자락이 흩날렸다. 그리고 저 레이스가 가득 박힌 푸른 드레스가 누구의 것인지 잘 알고 있었다.

디아나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레아가 그녀 앞에 도착했다.

“엄…….”

짝!

겨울바람보다 매서운 소리가 빨래터를 울렸다.

레아에게 뺨을 맞은 몸이 크게 휘청이며 옆으로 넘어졌다. 어찌나 강한 힘이었는지 순간 눈앞이 멍할 정도였다.

선명해진 시야로 빨랫감들이 흙바닥에 어질러진 것이 보였다.

미리 몸에 힘을 단단히 주었어야 했는데. 그럼 적어도 넘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요즘 매질을 당하지 않아 방심했다.

근데 이 여자는 왜 또 이렇게 화가 난 걸까. 무얼 잘못했나 생각하기도 전에 레아의 목소리가 크게 울렸다.

“디아나, 너 나 몰래 하녀 식당에서 빵을 얻어먹었니?!”

‘아, 이런. 어떻게 알았지?’

또다시 손을 드는 그녀의 손짓에 몸이 움츠러들었다.

하지만 살기 위해 다짜고짜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죄송해요. 잘못했어요.”

배가 고파서 그랬다는 변명 같은 건 하지 않았다.

변명을 하면 할수록 레아는 말이 많다며 더 손찌검을 했으니까.

“거지새끼도 아니고, 왜 몰래 하녀들의 식당에서 빵을 얻어먹니! 정말이지 넌 이렇게 내 위신을 깎아 먹는구나!”

“잘못했어요.”

손을 다시 휘두르려던 레아가 멈칫하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직 빨래터에 남은 하녀들이 이쪽의 상황을 주시하고 있는 게 보였다.

레아는 어정쩡하게 손을 내리며 씩씩거리는 숨을 내뱉었다.

“당장 일어나!”

레아는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 대놓고 때린 적은 없었다.

이번에도 시선이 신경 쓰이는지 그녀는 치켜든 손을 내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레아가 거칠게 디아나의 팔을 잡아당겼다. 순간 팔이 빠질 거 같은 두려움이 들어 바로 몸을 일으켰다.

“따라와!”

레아가 디아나를 개처럼 거칠게 끌고 갔다. 이 정도로 화가 난 건 오랜만이었다.

본능적인 두려움에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사람들은 모두 그녀를 외면했다.

어느새 사람들이 있는 빨래터를 벗어난 뒤였다.

저녁 식사 시간이 가까워졌기에 저택 밖을 돌아다니는 사용인들도 보이지 않았다.

“오늘 네 버릇을 단단히 고쳐 놓겠어.”

어금니를 아드득 깨물며 말하는 레아의 목소리에 심장이 두려움으로 두근거렸다.

벌컥, 제발 도착하지 않았으면 했던 오두막 같은 별채의 문이 열리고 바닥으로 던져졌다.

“윽.”

레아의 뒤로 노을이 지는 붉은 하늘이 꼭 앞으로 벌어질 일의 참혹함을 예언하는 거 같았다.

“……정말…… 잘못했어요. 다신 안 그럴게요…….”

그래도 조금이라도 덜 맞기 위해 두 손을 모으고 레아를 바라보았지만 레아는 야차 같은 얼굴로 오두막의 문을 걸어 잠갔다.

* * *

드르렁, 드르렁.

고요한 오두막에서 코를 고는 소리가 크게 울렸다.

그리고 꼬르륵, 디아나의 배 속에서도 소리가 열심히 울리고 있었다.

‘배고파.’

낡은 벽난로 옆 구석에서 몸을 웅크린 디아나는 소파 위에서 잠든 레아를 조심스럽게 쳐다보았다.

깊이 잠든 걸까.

레아는 한번 잠들면 잘 깨지 않지만 간혹 선잠을 잘 때면 작은 소리에도 금방 일어나곤 했다.

지금 깨어나면 또 때릴 게 분명했다.

분노가 풀려 잠이 든 게 아니라 자신을 때리다 지쳐 잠이 든 거였으니까.

스륵, 순간 움직이는 그녀의 손에 디아나가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디아나는 숨까지 참으며 가만히 있었다.

다행히 레아는 깨어나지 않고 다시 드르렁, 코를 골았다.

디아나는 무릎을 끌어안고 최대한 몸을 웅크렸다.

그리곤 창문을 타고 들어온 달빛에 비친 팔등을 보았다.

회초리 자국이 선명하게 남은 팔등의 멍이 이번에는 꽤 오래갈 거 같았다.

사실 팔등만 그런 게 아니었다.

온몸이 욱신거렸다.

머리와 얼굴을 최대한 맞지 않으려 막아 내느라 팔등의 상처가 유독 컸을 뿐 안 맞은 곳이 거의 없었다.

‘아파.’

아무리 태연한 척해 보아도 몸의 고통에까지 태연할 수는 없었다.

그저 울지 않기 위해 입술을 깨물 뿐이었다.

울면 더 많이 맞을 테니까.

디아나는 고픈 배를 참으며 무릎 사이로 고개를 푹 숙였다.

아무래도 오늘 밤은 몰래 나가 빵을 얻어먹을 수 없을 거 같았다.

레아가 거실에서 잠이 들었으니까.

아픈데 배까지 고파서일까, 디아나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울컥하는 감정을 누르려 더욱 고개를 무릎 사이로 파묻었다.

그때 은빛이 아닌 주홍빛이 창문을 타고 바닥 위를 넘실거렸다.

‘이게 뭐지?’

디아나는 고개를 들어 창밖을 보았다.

그리고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대공가의 본채에서 횃불을 환히 밝히고 있는 게 보였다.

‘횃불을 왜……?’

한 번도 본 적 없는 일이었다.

디아나는 소파에 누운 레아의 상태를 조심히 살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최대한 발소리를 죽이고 한 걸음 한 걸음 창가로 다가갔다.

창문은 거의 디아나의 머리 위치에 있었다.

창틀을 잡고 까치발을 들어야 겨우 창밖의 풍경을 온전히 볼 수 있었다.

까치발을 든 순간 보이는 광경에 디아나는 눈을 크게 뜨며 작은 탄성을 내뱉었다.

“아…….”

“으음.”

순간 들리는 레아의 신음에 놀라 황급히 입을 다물었지만 창밖을 향한 시선을 뗄 순 없었다.

대공가에서 단 한 번도 본 적 없던 검은 갑옷을 입은 기사단을 보았기 때문에.

발끝에 힘을 준 디아나는 목을 높이 빼고, 창문 밖을 신기한 눈으로 보았다.

말에서 내리는 기사들이 보였다.

그중 디아나의 시선을 사로잡은 건 기사들이 입고 있는 새카만 갑주였다.

검은 갑주 위, 은빛 새가 수놓아져 있었다.

‘아, 저건…….’

대공가에서 살고 있는 자라면 마구간의 하인도 아는 저 문양은 바로 대공가의 상징인 가디언이었다.

그리고 가디언은 황실의 수호 정령이기도 했다.

제국의 초대 황제가 계약했다는 수호의 정령 가디언.

자세한 전설은 모르지만 현 제국에는 정령의 힘을 사용할 줄 아는 자가 3명 있다고 한다.

황제, 대공 그리고 1황자.

디아나는 가끔씩 짧게나마 들었던 정령에 대한 전설을 좋아했다.

신비스러운 이야기를 들을 때면 자신의 아픔을 잊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설을 좋아하는 것에 비해 자세하게 알지는 못했다.

디아나에게 전설을 자세히 알려 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니까.

대공가에 도서관이 있긴 하지만 글자를 모르는 디아나는 전설에 관한 동화를 찾아볼 수도 없었다.

10살이 되도록 글자를 모른다는 건 상당히 창피한 일이었지만 레아는 디아나에게 절대 글을 알려 주지 않았다.

예전에 몰래 식당의 주방장인 쿤타에게 글자 책을 받은 적이 있었지만 레아는 엄청 화를 내며 책을 불태워버렸다.

글을 배울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디아나는 글을 배우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글만은 디아나 혼자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했다.

드르렁- 드르렁.

디아나는 점점 커지는 레아의 코 고는 소리에 뒤를 돌아보았다.

절대…… 허락해 주지 않겠지.

디아나는 레아가 글을 배우는 걸 허락할 리 없다는 걸 안다.

작은 한숨을 삼킨 디아나는 잡고 있던 창틀을 놓았다.

창밖의 먼 풍경에서 분주한 움직임이 느껴졌다.

늘 고요했던 대공가와 어울리지 않는 소란스러움이었지만 그건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일 것이다.

디아나의 힘든 하루는 단 한 번도 달라진 적이 없었으니까.

조용히 바닥에 발을 붙인 디아나는 몸을 돌려 다시 벽난로 옆 구석으로 향했다.

방으로 가서 몸을 쭉 펴고 싶었지만 레아가 일어났을 때 여기 없으면 또 매질을 당할 테니 어쩔 수 없었다.

차라리 내일 아침이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럼 매질을 당하지 않을 테니까.

레아가 누워 잠든 소파 아래로 떨어져 있는 긴 나무 막대기가 보였다.

바로 레아가 그녀를 때릴 때 쓰는 막대기.

‘저걸 부러뜨릴까?’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당연히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다.

‘난 언제 크는 걸까.’

오늘따라 아픈 것도 서럽고, 작은 몸인 것도 서럽고, 그냥 모든 게 서럽다.

무릎을 모으고 몸을 잔뜩 웅크렸다. 고개를 푹 숙이자 바닥에 비친 횃불의 그림자가 보였다.

10년 동안 한 번도 켜진 적 없던, 대공가의 밤을 밝히는 횃불.

디아나는 무릎 사이로 넘실거리는 주홍 불빛이 부디 자신에게 더 아픔을 주는 일은 아니길 바라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 * *

“으으…….”

‘추워.’

싸늘한 바람이 온몸을 스치고 지나갔다. 살결의 털이 바짝 서는 느낌. 너무 추워서 좋지 않은 몸 상태임에도 억지로 눈이 떠졌다.

어젯밤 울어서일까, 퉁퉁 부은 눈두덩이가 느껴졌다. 억지로 눈을 뜨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가장 먼저 보이는 건 텅 빈 소파였다.

‘……어디 갔지?’

코를 골며 잠들었던 레아는 어디로 간 건지 보이지 않았다. 다른 곳에 있을지도 몰라. 디아나는 잠시 숨을 죽였다. 화장실을 갔거나, 주방에 있을 수도 있었으니까.

하지만 숨을 죽이고 귀를 기울여 보아도 집 안에서 인기척이 들려오지 않았다.

이상한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이렇게 사라질 레아가 아니었다.

레아는 분명 그녀를 발로 차 깨우는 것으로 아침을 시작했을 거다.

근데 없다니.

맞지 않아서 다행이란 안도보다 익숙하지 않은 상황에 대한 두려움이 더 크게 다가왔다.

문득 활짝 열려 있는 창문을 보았다.

추웠던 게 창문 때문이었나 보다.

디아나는 주방을 한번 살피고는 도도도 창가로 뛰어갔다.

아, 안 된다. 까치발을 들고 창문을 닫으려 손을 뻗었지만 손잡이를 잡는 건 역시 무리였다.

그녀는 작은 박스를 가지고 와 그 위로 올라갔다.

“어…….”

손잡이로 손을 뻗던 디아나가 멈칫했다.

디아나는 저 멀리 본성으로 향하고 있는 레아의 뒷모습을 멍하니 보았다.

‘갑자기 본성엔 왜 가는 거지?’

레아는 본성에 잘 가지 않았다. 출입금지인 건 아니었지만 본성의 사용인들이 레아가 나타나면 죽일 듯 화를 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정말 특별한 일, 그러니까 한 달에 한 번 집사에게 생활비를 받으러 갈 때가 아니면 절대 가지 않았다.

오늘이 생활비가 나오는 날이었던가.

벽 한쪽에 달력이 걸려 있었지만 아직 달력 읽는 법을 배우지 못해 읽을 수 없었다.

하지만 숫자는 셀 수 있었다.

하녀들이 하는 말을 어깨너머로 들으며 날을 세는 법과 50까지의 숫자 세는 법을 익혔으니까.

디아나는 기억을 더듬으며 손가락을 하나씩 접어 숫자를 셌다.

레아가 장터에 나갔던 게 한 11일 전이니까, 오늘은 생활비가 나오는 날이 아니다.

생활비를 받아 오는 날이면 레아는 항상 장터에 놀러 나가곤 했다.

그리고 무언가를 잔뜩 사 왔었다.

옷이나 맛있는 빵과 쿠키 같은 것을 말이다.

당연히 그녀에게 돌아오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꼬르륵-.

레아가 사 왔던 빵과 쿠키를 떠올리자 굶주린 배에서 소리가 우렁차게 울렸다.

“배고파…….”

디아나는 창문을 닫고 상자에서 내려왔다. 텅 빈 위장이 요동치는지 속이 따끔거렸다.

배를 움켜잡으며 허리를 숙이던 때, 집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똑똑.

디아나는 화들짝 놀라며 얼굴을 굳혔다.

레아가 본성으로 향하는 것을 보았지만 본능적인 두려움에 몸이 먼저 반응한 것이다.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던 순간, 익숙한 목소리가 문밖에서 들려왔다.

“디아나 아가씨, 접니다.”

낮은 음성의 주인은 다름 아닌 하녀들의 식당에서 일하는 주방장, 쿤타였다.

이 삭막한 대공성에서 유일하게 호의를 베풀어 주는 사람.

디아나는 반색하며 문으로 다가갔다.

“잠시만 기다려.”

문고리는 까치발을 들어야 닿는 높이였다. 그녀는 발끝에 힘을 주고 겨우 고리를 풀었다.

“디아나 아가-, 어휴, 이게 무슨…….”

집 안으로 들어선 쿤타는 디아나의 헝클어진 머리와 팔, 다리의 상처를 보고 인상을 처참하게 찌푸리며 혀를 찼다.

디아나는 성격이 좋아 항상 웃는 낯인 쿤타가 저리 인상을 구기는 걸 보니 제 꼴이 말이 아니구나, 생각했다.

쿤타는 대공성에 들어온 지 아직 얼마 되지 않아, 그녀가 이렇게 많이 맞은 건 처음 본 것이다.

디아나는 어색한 손짓으로 헝클어진 머리칼을 바로 했다. 얼굴은 멀쩡하기에 애써 옅은 미소를 지었지만 쿤타의 미간 주름이 더욱 좁아졌다.

그는 짙은 갈색 눈에 걱정과 미안함을 한가득 담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아유, 이 작은 몸을 때릴 데가 어디에 있다고……. 아가씨, 이걸 어쩝니까. 아니 아무리 엄마라지만 그래도 대공가 영애인 분을 이리…….”

쿤타는 차마 더 말하지 못하겠다는 듯 참담한 얼굴로 말을 멈추었다.

“음…… 난 괜찮아.”

그의 표정이 너무 참담해 건넨 말인데 어쩐지 더 그를 슬프게 만든 듯했다.

쿤타는 죄책감이 가득한 눈빛으로 그녀를 보다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아가씨. 아무런 도움을 못 드려서.”

“아니야, 날 제일 많이 도와주는 게 쿤타인 걸.”

쿤타가 대공성에 들어오고 나서 그나마 배를 곯는 일이 줄어들어 숨통이 트이는 거 같았는데 미안하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다.

디아나가 손을 휘휘 저으며 말하자 쿤타가 고개를 들었다.

여전히 죄책감이 서린 눈빛이었다.

“어제, 빨래방 하녀들에게 아가씨 얘기를 듣고 아무것도 못 먹었을 거 같아 음식을 좀 챙겨 왔습니다.”

그는 손에 들고 있던 작은 바구니를 디아나에게 내밀었다.

“고마워, 아.”

바구니를 받으려 팔을 올리려던 그녀는 욱신거리는 통증에 반도 올리지 못했다.

그런 그녀를 본 쿤타가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아휴, 제가 차려 드리겠습니다.”

“고마워.”

그를 따라 주방으로 들어가자 식탁 위로 쿤타가 바구니 안의 음식을 내려놓았다.

하녀들이 먹는 묽은 수프와 퍽퍽한 호밀빵이 전부였지만 그간 비어 있던 배는 기다렸다는 듯 어서 달라 아우성을 쳤다.

디아나는 쿤타가 건네주는 빵을 수프에 찍어 허겁지겁 먹었다.

“아가씨, 천천히 드셔요. 그러다 체할까 봐 걱정됩니다.”

“괘, 찬하아.”

빵을 씹으며 어설프게 대답하자 쿤타가 안쓰럽다는 눈빛으로 그녀를 보다 혀를 차며 말했다.

“대체 아가씨에게 음식을 드린다는 걸 누가 레아 님께 말을 한 건지……. 이게 다 제가 조심성이 없어 일어난 일입니다. 아가씨를 볼 면목이 없네요.”

디아나는 쿤타를 보다 빵을 꿀꺽 삼켰다.

“아냐, 난 정말 괜찮아. 그런 말 하지 마. 지금도 쿤타 아니었으면 굶고 있었을 거야.”

“……대공가의 아가씨가 어찌 이런…….”

쿤타는 눈물이 맺힌 눈가를 손으로 쓸며 중얼거리다 큼, 짧은 기침을 내뱉었다.

그는 뭔가 달라진 얼굴로 디아나에게 말했다.

“그래도, 이제 아가씨의 상황도 예전과는 달라질 겁니다.”

“응?”

상황이 달라질 거라니 무슨 말이지.

그녀는 모르겠다는 얼굴로 쿤타를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엔 알 수 없는 확신이 서려 있었다.

“여태까진 아가씨의 이런 상황을 다들 모른 척해 왔지만 대공가의 주인님이 돌아오신 이상 이런 말도 안 되는 상황을 가만두진 않으실 거 아닙니까.”

쿤타는 반드시 그렇게 되어야 한다는 듯 혼자 고개를 주억거리기까지 했다.

하지만 디아나는 그의 말을 듣고 순간 사고가 느리게 움직였다.

‘내가 방금 뭘 들은 거지? 대공가의…… 주인이 돌아왔다고?’

대공가의 주인이라면.

“대공 전하가…… 돌아왔다는 거야?”

그리 묻자 쿤타가 흥분하며 말했다.

“네, 맞습니다, 아가씨! 드디어 대공 전하께서 긴 전쟁을 끝내시고 대공가로 돌아오셨답니다. 그러니 아가씨도 이제 본성으로 들어가 귀족가의 영애로서 정당한 대우를 받으시며 살날만 남으신 겁니다.”

쿤타는 앞으로 벌어질 일을 상상하며 흡사 감격에 겨운 듯했지만 디아나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절대 돌아오지 않을 줄 알았던 대공이 돌아왔다니.

어젯밤 소란스러웠던 대공가의 횃불이 무엇인지 이제야 알 수 있었다.

갑자기 왜 돌아왔을까.

- 따님이 보고 싶으셔서라도 오지 않을까.

순간 빨래터에서 들었던 이야기가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정말, 딸이 보고 싶어서 돌아온 걸까.

그리고 그 딸은 절대 자신이 아닐 것이다.

본성에서 자라난 귀한 대공가의 영애인 세이아겠지.

쿤타는 대공성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되어서 자세한 내막을 몰라 기대를 가지겠지만 대공성의 사람들은 모두 알고 있을 거다.

대공이 돌아온다 한들, 디아나의 처지가 바뀌는 일은 없을 거란 걸.

디아나를 버린 사람이 바로 대공이었다.

대공비를 배신한 하녀와 그 하녀의 딸인 디아나.

디아나를 거두는 게 아니라 쫓아내지 않으면 다행일 것이다.

당장 대공성 밖으로 쫓겨나가는 상상을 하자 디아나는 눈앞이 캄캄해졌다.

‘아직은 밖에 나가 살 여력이 안 되는데……. 준비해야 할 것이 산더미인데.’

디아나는 빵을 잡은 자신의 작은 손을 보며 속으로 깊은 한숨을 쉬었다.

이대로 쫓겨나면 추위에 굶어 죽을 것이다.

하필 이렇게 추울 때 대공이 돌아오다니.

아니, 사실 절대 돌아오지 않을 줄 알았는데.

이렇게 빨리 돌아올 줄은 몰랐다.

대공의 갑작스런 귀환에 디아나의 작은 머릿속이 불안해졌다.

레아가 본성으로 그렇게 급하게 간 것도 그럼…… 대공을 보러 간 것일까.

문득 대공이 전장에서 미쳤다는 말이 생각났다.

미쳐버렸다는 대공이 레아를 죽이면 어떡하지…….

레아를 죽인다면 나도 살려두지 않을 텐데…….

“아가씨, 괜찮으세요? 아이고 너무 급하게 드시더라니, 안색이 창백해졌네. 속이 안 좋으시죠?”

디아나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자 쿤타가 걱정스럽게 말했다.

차라리 체한 게 더 나을지도.

“의원을 불러오겠습니다.”

쿤타가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것을 디아나가 황급히 잡았다.

“아니야!”

“네? 아가씨, 안색이 너무 안 좋으신데…….”

“괜찮아, 난 정말 괜찮아.”

의원이라니. 의원은 본성에 있었다.

의원을 부르면 대공이 디아나의 존재를 알게 될 것이다.

아니 이미 알고는 있겠지만 디아나는 대공의 눈에 띄는 것이 몹시 두려웠다.

최대한 늦게, 늦게 마주치고 싶었다.

디아나가 질색을 하자 쿤타는 어쩔 수 없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럼 전 레아 님이 오시기 전에 이만 가 보겠습니다.”

“그래, 음식 가져다줘서 고마웠어.”

바구니에 빈 그릇을 챙기는 쿤타에게 인사를 건네자 쿤타가 눈물 맺힌 눈으로 나를 보았다.

“이제 이런 음식은 드실 일 없을 거예요. 본성으로 들어가실 테니까요. 그리고 이건 레아 님 몰래 꼭 바르세요. 멍에 잘 듣는다는 연고입니다.”

쿤타가 주머니에서 꺼낸 작고 동그란 통을 비밀스럽게 디아나의 손에 쥐여 주었다.

“……고마워.”

디아나는 손안 가득 들어오는 동그란 통을 꼭 쥔 채 쿤타가 나간 문을 걸어 잠갔다.

그리고 주방으로 돌아가 황급히 빵 부스러기를 치운 그때,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 집 열쇠를 가지고 있는 건 한 사람뿐이었다.

디아나는 주방에서 후다닥 나와 레아를 맞이했다.

“엄, 엄마 오셨어요.”

대공성에 다녀온 날이면 기분이 안 좋은 레아였기에 디아나는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하며 눈을 내리깔았다.

‘뺨 한 대는 맞겠지.’

미리 마음을 먹으며 눈을 질끈 감고 있는데 얼굴엔 차가운 바람만이 스칠 뿐이었다.

‘뭐지?’

디아나는 눈을 뜨고 고개를 들었다. 디아나의 앞에 서 있던 레아는 디아나를 지나 거실 벽난로 앞을 서성거리고 있었다.

“그럴…… 리가 없는데. 왜…… 왜 그런 걸 묻는 거야, 왜…… 갑자기.”

레아의 떨리는 목소리가 집 안으로 흩어졌다. 대공성에서 무슨 일을 겪은 건지 레아는 디아나의 얼굴만큼이나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대공을 만난다고 꾸민 건지 평소와 달리 입술에 붉은색이 칠해져 있었다. 하지만 붉은 입술은 창백한 얼굴 때문에 아름답기는커녕 귀신처럼 느껴졌다.

순간 먼 허공을 보고 있던 레아의 시선이 디아나를 향했다. 잠시 멍하니 그녀를 보고 있던 디아나는 마주친 섬찟한 눈빛에 몸을 움찔했다.

“이게, 다 너 때문이야.”

레아는 갑자기 분노가 차올랐는지 디아나에게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당장 뒤돌아 도망가고 싶었지만 디아나에게 도망갈 곳은 없었다.

한 번 도망쳤다 돌아온다면 더 큰 고통이 기다리고 있을 거니까.

디아나는 레아의 손이 번쩍 올라가는 것을 보고 눈을 질끈 감았다.

“악! 정말! 왜! 왜!”

하지만 아픔이 느껴지지 않았다.

레아의 분통 터져 하는 날카로운 목소리만이 들려왔다.

실눈을 뜨자 바닥에 발을 구르며 소리를 지르는 레아의 모습이 보였다.

디아나를 때리려 짝 펴졌던 손바닥은 뼈마디가 튀어나올 듯 주먹을 쥔 상태였다.

‘대체 왜 저러는 거지?’

맞지 않은 것에 안도감이 들기보단 미친 것 같은 레아의 모습에 공포심이 들었다.

레아는 분을 이기지 못하는 사람처럼 발을 쾅쾅 바닥에 내리치다, 갑자기 발을 멈추며 긴 숨을 내뱉었다.

“하아, 그래…… 괜찮아, 알 리가 없잖아…….”

‘대체 아까부터 뭐라고 하는 거지?’

연신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말소리가 뒤로 갈수록 그녀의 입 안으로 삼켜지듯 들리지가 않았다.

똑똑-.

호기심을 못 이긴 디아나가 귀를 기울이며 한 걸음 그녀에게 가까워진 그때, 오두막의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바닥을 내려다보고 있던 레아가 문 쪽으로 고개를 홱 돌렸다.

그녀의 빠른 반응에 지레 겁먹은 디아나 역시 빠르게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런 디아나를 못마땅하게 여기면서도 그녀는 잰걸음으로 문 앞으로 다가갔다.

“누구시죠?”

신경쇠약에 걸린 듯 날카로운 목소리였다.

“나다, 문을 열어라.”

나이 든 남자의 목소리가 문밖에서 들려왔다.

‘누구지?’

남자의 목소리는 낯설었지만 그렇다고 완전 처음 듣는 목소리는 아니었다.

‘들어 본 적 있는 목소리인데…….’

레아는 남자의 목소리를 듣고 화들짝 놀라며 문을 열었다.

문이 열리자 문 앞에 서 있는 남자의 반짝반짝 닦인 구두코가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다.

“아니, 집사님께서 여긴 어쩐 일이세요.”

아까의 신경질적이던 목소리는 어디로 갔는지 레아의 목소리가 순하게 바뀌었다.

‘집사가 왜 우리 집에 왔지?’

대공성을 관리하는 집사, 그는 그간 주인 없는 대공성의 실질적인 주인이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디아나는 그동안 그를 마주한 적이 없었다.

‘아, 딱 한 번 있었어.’

2년 전쯤, 별채에서 한 번 마주친 적이 있었다.

그래서 목소리가 낯설긴 했지만 아예 처음 같진 않았구나.

디아나는 자신을 보던 집사의 서늘한 눈빛이 생각났다.

별채의 하인들은 그녀가 자랄수록 레아는 미워해도 그녀는 동정 어린 시선으로 보곤 했었다.

하지만 집사는 아니었다. 우연히 마주친 집사의 시선에서는 조금의 동정도 느껴지지 않았었다.

‘다시 보고 싶지 않은 사람이었는데.’

디아나는 집사의 구두코를 보는 시선을 올리지 않고 그대로 고개를 돌렸다.

무슨 일이 됐든 빨리 돌아갔으면 하고 말이다.

한데 디아나의 바람과는 다른 말소리가 들려왔다.

“아가씨를 대공성으로 모셔와라. 대공 전하의 명이시다.”

“네? 아니, 갑자기 왜, 디아나를…….”

‘나를 데려오라고?’

순간 디아나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대공이 왜 나를…….’

디아나의 눈이 경악에 가까운 당혹감으로 물들었다.

그리고 디아나만큼이나 놀랐는지 잔뜩 떨리는 레아의 목소리가 울렸다.

“집사님, 디아나가 몸이 좋지 않습니다. 아무래도 대공 전하를 뵙기에는…….”

레아는 뒤에 서 있는 디아나를 불안한 눈빛으로 한번 보고는 집사를 보았다.

디아나는 레아의 뒤를 보다 순간 자신을 아래위로 훑어보는 무감각한 회색빛 눈동자와 마주쳤다.

디아나의 상태를 본 집사의 미간이 살짝 좁아졌다.

그는 차가운 시선으로 레아를 바라보았다.

“대공 전하의 명이시다. 아가씨의 옷을 갈아입혀 본성으로 와라.”

집사는 레아의 답은 들을 생각도 없는 듯 그대로 몸을 돌려 사라졌다.

“정말, 왜 갑자기 이런 일들이!”

레아가 문을 쾅 닫으며 소리쳤다. 그녀는 불안한 듯 손톱을 깨물다 디아나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디아나를 훑어본 레아가 인상을 와그작 구겼다.

그녀는 입술을 잘근 깨물곤 디아나에게 다가왔다.

“꼬라지가 이게 뭐야, 넌 일어나서 씻지도 않은 거니?!”

“……죄송해요, 지금 씻을게요.”

“당장 가서 씻고 와. 그 냄새날 거 같은 몰골을 좀 어떻게 해 보란 말이야!”

레아가 날카롭게 소리쳤다. 야차 같은 레아의 모습에 디아나는 맞을까 황급히 욕실로 뛰어 들어갔다.

“빨리 씻고 나와! 시간 없으니까!”

욕실 문을 닫은 순간, 레아의 외침이 다시 한번 들려왔다.

“네!”

디아나는 그녀의 화를 더 돋우지 않기 위해 크게 대답하며 대야에 물을 채웠다.

큰 양동이에 받아 놓은 물은 빨래터의 계곡에서 가져온 물이라 겨울엔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우리 집에도 정령석이 있으면 좋을 텐데.’

물의 정령석이 있으면 겨울에도 따뜻한 물을 쓸 수 있다.

하지만 디아나는 당연히 정령석을 가질 수 없었다.

대야 안으로 손을 살짝 넣자 얼음장 같은 물이 손을 얼얼하게 했다.

‘너무 차가워.’

부르르 몸을 떨며 손을 뺀 디아나는 닫힌 문을 확인하고 차가운 물에 다시 손을 넣었다.

‘따뜻해져라.’

디아나는 속으로 주문을 외우듯 몇 번 되뇌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대야 안의 물이 씻기에 적당한 미지근한 온도로 바뀌었다.

이번엔 성공이다.

자신이 이런 마법 같은 일을 할 수 있다는 걸 알게 된 지는 얼마 안 되었다.

너무 추워서 씻기 싫었을 때, 뜨거운 물을 간절히 상상하자 갑자기 물이 미지근하게 바뀌었다.

그 뒤로 몇 번 성공할 때도 있었고 실패할 때도 있었다.

이 능력이 무엇인지 궁금했지만 그녀에게 알려 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당연히 레아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이게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알 수 없는데 말했다가 무슨 봉변을 당할지 모르니까.

디아나는 빠르게 얼굴을 씻고 팔과 다리도 씻어 냈다.

욕실을 나가자 레아가 몇 벌 되지도 않는 디아나의 옷을 전부 꺼내 거실 바닥에 흩어 놓은 게 보였다.

“옷이 왜 다 이런 거밖에 없는 거야!”

멀쩡한 옷은 사 준 적이 없으니까 당연히 저런 허름한 옷밖에 없었다.

디아나가 가진 옷이라고는 대공가의 아가씨가 입는 옷이라고 생각할 수 없는 정말 허름한 원피스 5벌이 전부였다.

그중에서 겨울옷은 겨우 2벌이었고.

원피스를 들었다 놓았다 하던 레아는 화가 나는지 원피스를 바닥에 내던졌다.

“넌 대체 옷을 어떻게 입었길래, 이렇게 다 낡고 해져서 평민들도 입지 않을 거 같은 옷을 만든 거야!”

몇 벌 되지도 않는 옷이 찢어질까, 상할까 늘 조심조심 입은 디아나로서는 억울하기 짝이 없는 말이었다.

하지만 디아나는 고개를 숙이는 거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씩씩거리는 숨을 내뱉던 레아는 그녀를 툭 밀치며 갑자기 집을 나갔다.

홀로 남은 디아나는 쾅 닫히는 문소리에 몸을 움찔하다, 바닥에 널브러진 옷들을 하나씩 주웠다.

“먼지가, 다 묻었네.”

그녀는 바닥의 먼지가 잔뜩 묻은 원피스를 털며 인상을 구겼다.

‘빤 지 얼마 되지 않은 건데…….’

디아나가 서글픔에 터져 나오는 한숨을 억누르며 원피스를 모두 개었을 때, 닫혔던 문이 벌컥 열렸다.

어디서 들고 온 건지 모를 분홍색 레이스 원피스가 레아의 손에 들려 있었다.

툭, 레아가 디아나의 발치에 원피스를 거칠게 던졌다.

“내가 너 때문에 왜 돈을 써야 되는 건지. 어서 갈아입어, 시간 없으니까!”

“……네.”

서둘러 분홍색 원피스로 갈아입었다. 보드라운 원단의 감촉에 순간 작은 탄성이 흘렀지만 옷을 갈아입자마자 손을 잡아끄는 레아 때문에 제대로 감탄도 할 수 없었다.

“빨리 와, 늦었으니까.”

그녀는 디아나를 본성으로 빠르게 데려갔다. 거의 끌고 가는 거나 마찬가지였지만.

그녀에게 잡힌 팔이 너무 아팠지만 말한다고 힘을 빼 줄 거 같지 않았다.

레아는 지금 제정신이 아닌 듯했으니까.

본성에 가까워질수록 레아의 얼굴에선 핏기가 사라지고 있었다.

디아나는 레아에게서 시선을 돌려 어느새 눈앞으로 다가온 대공가의 본성을 올려다보았다.

새하얀 눈이 내린 산을 등지고 서 있는, 뾰족한 지붕이 높이 치솟은 대공가의 본성은 짙은 푸른색의 지붕과 새하얀 벽돌로 지어진 거대한 성이었다.

성을 보느라 잠시 넋을 놓고 있던 디아나는 순간 발이 미끄러져 몸이 휘청거렸다. 본성으로 향하는 기다란 보도에 깔린 살얼음이 원인이었다.

“디아나, 제대로 걸으렴!”

“죄송해요.”

눈을 내리깔고 고개를 숙이자 머리 위로 레아의 거친 한숨이 내려앉았다.

그녀는 다시 디아나의 팔목을 강하게 잡아끌며 걸음을 재촉했다.

본성에 들어서자 하인들과 하녀들의 시선이 두 사람에게 집중되었다.

놀란 듯 눈이 커진 사람들도 있었고 두 사람을 보고 수군거리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때, 두 사람 앞으로 집사가 다가왔다.

그는 레아가 아닌 디아나를 보며 고개를 숙였다.

그의 눈동자만큼이나 하얗게 바랜 머리칼이 살짝 흔들렸다.

“이쪽으로 가시지요, 아가씨.”

마치 레아가 없는 듯 행동하는 집사의 태도에 레아의 창백하던 얼굴에 열기가 올랐다.

“저는 같이 가지 않는 건가요, 집사님?”

고개를 든 집사의 서늘한 시선이 레아에게 닿았다.

그는 마치 불쾌하다는 듯 눈썹을 찡그리며 말했다.

“대공 전하께서 보자고 하신 건 아가씨뿐이다. 널 보자고 한 적은 없으니 이곳에서 기다리도록.”

“하지만 아직 디아나가 어려서…… 대공 전하를 혼자 뵙기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디아나는 걱정스럽다는 듯이 자신의 등을 쓰다듬으며 말하는 레아의 모습에 순간 팔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지만 다행히 겨울용 원피스가 팔다리를 꽁꽁 숨겨 주었다.

“대공 전하의 명령이시다. 다른 말이 더 필요한가?”

집사의 날카로운 눈빛에 레아가 시선을 내렸다.

“아닙니다.”

레아는 집사에게는 안 보이게 디아나의 등을 살짝 밀었다.

고개를 숙인 그녀를 올려다보자 눈빛이 분노로 타오르는 게 느껴졌다.

흠칫한 디아나에게 집사가 말했다.

“아가씨, 대공 전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어서 가시지요.”

“……네.”

대답을 들은 집사가 멈칫하며 나를 보았다.

“아가씨, 제게 존대를 하시면 안 됩니다.”

사생아라 할지라도 디아나는 대공의 핏줄을 이은 아이였다.

물론 실질적인 권력과 위치는 집사 쪽이 훨씬 높겠지만 말이다.

디아나는 다시 입을 열었다.

“……으응.”

집사의 말이 맞긴 했지만 쿤타나 다른 하녀들에게 할 때처럼 쉽게 입이 떨어지진 않았다.

디아나의 작은 대답이 마음에 찼는지 그는 멈추었던 걸음을 다시 내디뎠다.

디아나는 본성 사용인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집사의 뒤를 따라갔다.

“대공 전하, 아가씨께서 도착하셨습니다.”

백색의 커다란 문에는 두 개의 검이 서로를 가로지르며 대각선으로 그려져 있었다.

그 문양을 보자 디아나는 자신이 정말 대공의 집무실 앞에 서 있다는 게 실감이 났다.

‘내가 대공님의 얼굴을 보게 되다니.’

얼떨결에 여기까지 오게 되었지만 막상 대공을 마주할 생각을 하니 심장이 터질 듯 두근거렸다.

‘내…… 아버지.’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대공저의 본성에 초상화가 걸려 있다 들었지만 디아나가 그걸 볼 수 있을 리 없었다.

죽기 전까지는 돌아올 일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빨리 마주하게 될 줄이야.

긴장감 때문인지 손바닥이 축축해졌다.

손을 꼭 그러쥔 그때, 문 안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와.”

마침내 문이 열렸다.

디아나는 시선을 들지 않고 바닥을 보며 집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집사가 멈추자, 디아나도 그 뒤에 가만히 섰다.

앞에 있던 집사의 발이 오른쪽으로 물러났다.

“흠.”

고요한 집무실 안에서 낮은 숨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들지 않아 누구의 것인지 보지 못했지만 누구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왜 나를 보자고 했을까. 날 쫓아내려고……?’

쿵쿵, 심장이 뛰고 머릿속은 최악의 상상만을 그리고 있었다.

디아나의 고사리 같은 손이 하얗게 질릴 때쯤 머리 위에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들어 봐라.”

“…….”

디아나는 고개를 드는 대신 가만히 있었다.

절대 일부러 그의 말에 불복하려 함은 아니었다.

너무 긴장이 돼서 저도 모르게 몸이 굳어 버린 것이다.

“아가씨.”

여전히 땅만 보고 있는 디아나를 재촉하듯 부르는 집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정말 뻣뻣한 목이 쉽사리 움직이지 않았다. 이러면 안 되는데.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이런, 작은 아가씨가 너무 긴장한 거 같습니다, 대공 전하.”

낯선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지? 집무실에 다른 사람이 있었나?’

예상치 못한 목소리의 등장에 디아나는 간신히 뻣뻣한 목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집무실 책상 옆에 서 있는 남자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타오를 듯한 적발, 머리칼과는 다르게 숲을 닮은 녹빛 눈동자.

눈이 마주치자 움찔한 디아나와 달리 그는 디아나를 보며 눈을 반달 모양으로 접었다.

“만나서 반가워요, 아가씨.”

“…….”

살가운 인사였지만 입술이 움직이질 않았다. 분명 남자는 미남이었고 미소도 부드러웠지만, 그의 눈빛이 너무 차가웠다.

디아나는 학대의 영향으로 타인의 기분에 눈치가 빨랐다.

‘내게 호의적인 사람이 아니야.’

디아나는 남자가 입고 있는 검은 제복, 가슴팍 중앙에 수놓아진 가디언을 힐긋 보았다.

“이런, 저까지 이렇게 경계하실 줄이야. 어린아이들은 대부분 절 좋아하는데 말이죠.”

남자는 상처받았다는 듯 눈초리를 내리며 책상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를 따라 자연스럽게 시선을 돌리던 디아나는 순간 금안과 눈이 마주쳤다.

영롱한 금색의 눈동자에 디아나는 저도 모르게 짧은 탄성을 흘렸다.

하지만 그것은 찰나의 순간일 뿐, 디아나는 눈이 마주친 남자의 존재를 깨닫고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크로우드 테라비타. 테라비타 제국의 대공이자, 자신과 같은 피가 흐르는 자신의 아버지.

디아나는 나이가 무색하게 수려한 그의 얼굴에서 쉽게 눈을 뗄 수 없었다.

백금발에 금안. 스스로 빛나는 듯한 황금색은 그의 위압감을 더욱 부각시키고 있었다.

마치 전설 속에나 나올 법한 신처럼.

대공에 대한 찬양은 많이 들었었지만 그의 얼굴이 이상하게 상상이 되질 않았었다.

그의 압도적인 분위기에 디아나는 흡, 숨을 들이마신 채 내쉬질 못했다.

그렇다고 쉽게 시선을 내릴 수도, 피할 수도 없었다.

대공의 금안이 디아나를 샅샅이 훑어보았다.

디아나는 마치 보이지 않는 줄에 묶인 거미처럼 가만히 그를 마주하고 있었다.

대공의 시선이 디아나의 발끝을 찍고 다시 올라왔을 때, 가지런한 대공의 눈썹이 위로 움직였다.

“로운, 조용히 해라.”

적발의 기사에게 일갈한 대공은 디아나를 바라보았다.

“생각보다 작군. 세이아와 동갑이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대공의 시선이 디아나가 아닌 집사를 향했다.

“네, 아가씨와 대공녀님의 나이는 같사옵니다.”

“근데 왜 저리 작지, 세이아보다 키가 두 뼘은 작은 거 같은데. 어디 아픈 건가?”

대공의 질문에 순간 집사는 답을 하지 못하고 입술을 달싹였다.

디아나의 몸이 작은 이유는 아파서가 아니라 못 먹어서였으니까.

그리고 집사도 이미 알고 있을 것이다.

레아의 학대를.

대공가의 대부분이 알면서도 모른 척하고 있었으니까.

“하론, 왜 말이 없지?”

집사를 보는 대공의 눈빛이 날카로워지며 집사의 얼굴이 점점 하얗게 변해 갔다.

집사가 곧 쓰러질 거 같던 순간 디아나는 저도 모르게 입을 움직였다.

“아, 픈 곳은 없어요.”

목소리가 살짝 떨렸지만 대공에게 들릴 만큼은 되었는지, 대공이 시선을 돌려 디아나를 보았다.

“하도 말이 없어, 말을 못하는 건가 했는데 그건 아니었군. 이름이 디…… 아나였던가.”

“……네.”

“아픈 게 아닌 거치곤 너무 말랐군. 편식이 심한 것이냐?”

너무 평범한 질문에 순간 말문이 막혔다.

대공은 디아나를 쫓아낼 생각으로 부른 게 아닌 듯했다. 그리고 자신의 처지를 조금도 알지 못하는 것 같았다.

‘편식이라니, 편식이란 걸 한번 해 봤으면 소원이 없겠다.’

순간 울컥했지만 디아나는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순간 집사의 눈이 디아나를 향했다.

디아나가 사실대로 말하지 않은 게 이해가 안 가는 듯한 눈빛이었다.

하지만 디아나는 대공에게 레아의 학대에 대해 말할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왜냐면 말해 봤자 달라질 게 없을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그가 지금 왜 디아나를 불러 이런 관심을 두는지 알 수 없지만 디아나는 대공가의 누구에게도 아무런 기대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처음부터 원하지 않은 아이였다고 했다.

자신을 쫓아낼 마음은 없다 해도 대공이 이제 와 자신을 보살펴 주지도 않을 것이다.

그럴 마음이 있었다면 지금까지 방치하지 않았을 테니까.

그리고 지금 대공이 그녀를 보는 눈빛만 봐도 아무런 감정을 느낄 수 없었다.

대공은 아무 말 없이 디아나를 응시했다.

경멸도 애정도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무감정한 금안에 디아나의 등줄기에 땀이 찼다.

땀 한 방울이 등줄기를 타고 아래로 흘러내렸을 때, 대공이 입을 열었다.

“어미를 닮지 않았군.”

방금까지와는 다른 싸늘한 목소리였다.

그가 디아나를 보는 눈빛과도 같은 목소리.

레아를 닮지 않았다는 말을 처음 듣는 것도 아니었지만 대공의 입에서 나오자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왜 저런 말을 하는 걸까.

어미를 닮지 않았다니. 무슨 뜻인지 디아나는 이해되지 않았다.

심장이 쿵쿵 뛰고 정신이 혼란스러웠다.

디아나는 무어라 답을 해야 할지 몰라 그저 손을 꼭 마주 잡았다.

마주 잡은 작은 손이 창백해질 때쯤, 쯧, 대공이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려왔다.

흐릿한 초점이 돌아오자 대공의 수려한 미간에 주름이 진 게 보였다.

“저러다 쓰러지겠군. 집사는 이만 아이를 데리고 나가거라.”

“네, 전하.”

디아나의 떨리는 손끝을 힐끔 본 집사는 처음과는 달리 누그러진 눈빛으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이제 나가셔도 됩니다. 저를 따라오시지요.”

집사의 목소리에 그제야 꽉 붙잡고 있던 디아나의 손에서 힘이 빠졌다.

드디어 이곳을 나갈 수 있게 되었다.

디아나는 당장 뛰쳐나가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며 조용히 집사의 뒤를 따랐다. 절대 집무실 책상 근처는 보지 않으려 노력하면서.

탁, 집무실의 문이 닫히는 소리가 크게 울리자 기다렸다는 듯 집무실 책상 앞으로 로운이 섰다.

“갈색 머리와 갈색 눈동자. 대공가의 핏줄이라고 하기엔 황금빛은 조금도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아이에게 보여 주었던 서글서글한 모습은 거짓이었다는 듯 로운의 눈빛이 날카로웠다.

“어미를 닮지 않았더군.”

어미를 닮지 않은 것보다 그를 당혹스럽게 했던 것은, 갈색 머리를 가진 아이에게 은발만 덧씌운다면 마치 아리엘의 어릴 적 모습이 떠오를 것만 같다는 것이다.

아니, 그럴 리가 없지.

대공은 아이가 서 있었던 빈자리를 차가운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10살이라고 믿기 힘들 만큼 작고 말랐던 아이.

그를 보며 창백하게 질린 낯빛은 전쟁터에서나 보았던 고아의 모습과 별다를 게 없었다.

“친모를 닮지 않은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대공가의 핏줄인지 아닌지가 중요합니다.”

로운의 말에 대공은 빈 공간에서 시선을 거두었다. 로운의 말이 맞았다. 10년, 아내가 죽고 미친놈처럼 전장을 헤매느라 모든 것을 외면하고 있었지만 이젠 아니다.

그는 돌아왔고, 곧 있을 후계 의식 전에 모든 일을 깨끗하게 마무리하고 싶었다.

아내가 남긴 유일한 딸을 위해서라도.

“그래, 넌 계속 조사해 보거라. 분명 숨기지 못한 실마리가 남아 있을 테니. 어떻게든 의식 전까지 모든 것을 마무리해야 한다.”

“네, 전하.”

로운은 기사의 예를 갖추곤 집무실을 나갔다. 로운이 나가고 혼자 남은 대공은 서류로 시선을 내렸다.

“하아.”

하지만 도통 눈에 들어오지 않는 글자들에 다시 시선을 들었다.

왜 이렇게 답답한 것일까.

이상하게 자꾸만 마음 한구석이 불편했다.

대공은 텅 빈 책상 앞을 보았다.

아무도 없는 그곳을 보는 대공의 머릿속으로 작은 아이가 떠올랐다.

아이는 죄가 없다고 하지만 그 여자의 핏줄이었다.

그가 없는 이 대공가에서 그 역겨운 여자가 자신의 핏줄인 아이를 얼마나 애지중지 키웠을지 궁금해 아이를 불렀었다.

한데 아이의 모습은 그의 예상과는 많이 달랐다.

레아를 닮지도, 그렇다고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란 거 같지도 않았다.

오히려…… 갈색 눈동자는 10살 난 아이의 것이라 할 수 없을 만큼 풀이 죽고 가라앉아 있었다.

기묘한 위화감에 미간을 좁히던 대공은 이내 고개를 저었다.

‘내가 신경 쓸 일이 아니야.’

찝찝한 기분을 지우려 창밖으로 시선을 돌리자 황폐해진 대공가의 정원이 눈에 들어왔다.

한때는 겨울에도 생기 있는 정원이었는데.

“아리엘.”

다시는 만질 수도, 볼 수도, 들을 수도 없는 그녀를 향한 그리움에 굳어 있던 그의 심장이 고통스러워졌다.

얼굴을 무참히 구기던 그는 손으로 거칠게 얼굴을 쓸어내렸다.

“실책은 한 번으로 족해.”

‘이미 한 번의 실수로 널 잃었으니, 이번만큼은 무슨 일이 있어도 너와 나의 딸을 지킬 것이다.’

대공은 다시 굳은 얼굴로 약지에 낀 결혼반지를 애틋하게 어루만졌다.

집무실을 벗어나 대공성의 로비로 돌아온 디아나는 아까 그대로 서 있는 레아를 보았다.

디아나를 기다리고 있었는지 그녀를 본 레아가 반색했다.

“디아나.”

살갑게 이름을 부르는 레아의 목소리에 순간 그녀를 향해 가던 걸음이 멈칫했다.

소리 지르는 것도 무섭지만 저렇게 다정히 부르는 게 더 무섭다는 걸 방금 깨달았다.

대공성의 사용인들이 두 사람의 관계를 모르지 않을 텐데 저렇게 살가운 엄마인 척하다니, 얼굴 철판이 참으로 대단했다.

“다녀왔어요.”

“그래, 잘 다녀왔니? 대공 전하께서 뭐라고 하셨어?”

레아는 무릎을 굽혀 자세를 낮추었다. 언뜻 보면 다정하게 묻는 듯하지만 디아나의 어깨를 잡은 그녀의 손에 힘이 가득했다.

물론 다른 사람들 입장에서 보면 그저 다정한 엄마와 딸의 대화 장면 같을 것이다.

‘아파.’

앙상한 뼈를 누르는 감각에 얼굴이 찌푸려질 거 같았지만 참았다.

자신을 보는 레아의 눈빛이 잡아먹을 듯 형형했으니까.

“……별…… 말씀 안 하셨어요.”

“그러니까, 무슨 말씀을 하셨는지 자세히 말해 보렴.”

레아는 꼭 들어야겠는지 좀처럼 디아나를 놓아주지 않았다.

‘왜 이렇게 작고 말랐냐고 물었는데.’

그걸 레아에게 말하면 안 될 거 같다는 생각이 본능적으로 들었다.

디아나가 입술을 달싹거리던 때, 머리 위에서 낮은 음성이 들렸다.

“대공 전하께선 그저 아가씨를 보셨을 뿐 특별한 질문은 하지 않았다.”

집사의 말에 레아는 디아나의 어깨를 놓으며 몸을 일으켰다.

“갑자기 찾으시길래…… 배운 것이 없는 디아나가 실수를 했을까 걱정이 되어 그랬답니다. 그럼 이제 저희는 별관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그래. 아, 그리고 얼마 뒤에 의원을 보낼 것이다.”

“의원이요?”

디아나의 손을 잡고 몸을 돌리려던 레아가 화들짝 놀라며 되물었다.

“그래, 그러니 허튼짓하지 말고 얌전히 지내거라.”

집사는 찌르는 듯한 눈빛으로 레아를 바라보았다. 그에 레아는 반사적으로 몸을 움찔했다.

“……허튼짓이라뇨, 집사님.”

“대공가의 주인이 돌아오신 만큼 저택 내에 더 이상의 소란은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네.”

레아는 분한지 입술을 꾹 깨물며 눈을 내리깔았다.

볼일이 끝난 듯 돌아서는 집사의 뒷모습을 노려보던 레아는 디아나의 팔을 거칠게 붙잡으며 대공가의 본성을 나갔다.

“언제까지 저렇게 기고만장할지 두고 보자. 내가 나중에 저 늙은 영감탱이부터 이 대공가에서 치워 버리고 말 거야.”

‘대공가의 실세인 집사를 치워 버린다니. 설마 진짜 대공가의 안주인 자리를 노리고 있는 건 아니겠지?’

아주 가끔이지만 레아는 술에 잔뜩 취할 때면 ‘내가 대공가의 안주인이었다면…….’라며 말도 안 되는 일들을 중얼거리곤 했다.

그때마다 돌아오지도 않는 대공을 상대로 헛된 꿈을 꾼다 싶어 아무 생각 하지 않았지만 지금은 아니다.

대공이 돌아왔으니까.

디아나는 아까 보았던 서늘한 금빛 눈동자를 떠올렸다.

그의 눈빛은 냉철하고 얼음장보다 차가웠다.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거 같은 대공이 레아 같은 여자를 사랑하는 일은 절대 없을 것이다.

어설프게 들이댔다간 오히려 죽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여파가 자신에게도 오는 건 아닌지.

디아나는 레아를 불안한 눈빛으로 올려다보았다.

그녀는 분한 얼굴로 씩씩거리다 돌연 반색하며 환한 미소를 지었다.

“대공녀님!”

고개를 돌리자 대공가의 본성을 나가는 외길 보도 앞에 서 있는 세이아가 보였다.

내 손까지 놓은 레아가 세이아에게로 뛰어갔다.

“아니, 날씨도 이렇게 추운데 어찌 하녀도 대동하지 않고 밖에 나와 계세요, 대공녀님.”

레아가 걱정 가득한 목소리로 세이아에게 말했다.

“비켜, 너 보러 온 거 아니거든?!”

하지만 세이아는 그런 레아를 쳐다보지도 않고 지나치며 디아나에게로 걸어왔다.

세이아는 레아를 좋아하지도 않는데 왜 매번 혼자 저러는 걸까.

디아나는 이해되지 않는 레아의 뒷모습을 보다 어느새 자기 앞에 선 세이아를 보았다.

대공과 비슷하지만 다른 빛바랜 금발과 색이 옅은 금빛 눈동자.

디아나는 자신을 형형하게 노려보는 세이아에게 황급히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대공녀님.”

세이아와 디아나가 같은 피가 섞인 자매이긴 했지만 둘 사이에는 도저히 뛰어넘을 수 없는 신분의 벽이 있었다.

그녀는 정실의 딸, 디아나는 아직 대공가의 호적에도 올라가지 못한 사생아.

그러니 당연히 디아나는 그녀에게 예의를 갖추어야 했다.

“네가 왜 여기에 있는 거야?”

그야 대공이 불렀으니까.

하지만 그대로 대답했다간 당장 뺨을 올려붙일 듯한 살벌한 목소리였다.

슬쩍 시선을 들어 보자 아직도 죽일 듯이 저를 노려보고 있는 세이아와 눈이 마주쳤다.

저 눈빛을 보니 뭐라고 답해도 한 대는 맞을 것 같았다.

세이아는 대공가의 사생아인 디아나를 항상 경멸했었다.

어쩌다 마주칠 때마다 화를 내는 세이아에게 맞는 일이 드문 일도 아니었기에 뺨 한 대는 내줄 각오로 입을 열었다.

“대공 전하께서 부르셔서 왔다 가는 길입니다.”

“아버지가 널 왜 불러?! 너같이 천한 걸 아버지가 불렀을 리 없잖아!”

세이아는 믿기가 힘든 건지, 싫은 건지 정확히 알 수 없는 얼굴로 입술을 꾹 깨물다 입을 열었다.

“너, 설마 감히 본성으로 들어올 기대 같은 걸 하고 있는 건 아니지?”

본성으로 들어가다니.

그런 기대는 해 본 적도 없다.

아니, 애초에 다신 이곳에 발도 들이기 싫다고 생각했다.

디아나가 세이아에게 아니라고 말하려던 그때, 레아가 달려와 세이아의 옆에 섰다.

“대공녀님, 그럴 일은 절대 없을 겁니다. 천한 저희가 어찌 대공가의 본성으로 들어올 수 있겠습니까. 혹여 디아나가 그런 어리석은 생각을 한다 해도 제가 바로잡을 것이니 그런 걱정은 하지 마세요.”

레아는 과할 정도로 손을 내저으며 세이아에게 몸을 낮추었다.

본성의 집사와 하녀들에게도 저런 모습은 한 번도 보인 적이 없었는데.

돌이켜 보면 레아는 항상 세이아를 이상할 정도로 좋아하며 굽신거렸었다.

세이아는 애절할 정도로 자신을 보고 있는 레아를 귀찮은 눈빛으로 보며 어이없다는 듯 콧방귀를 뀌었다.

“걱정은 무슨, 저딴 게 본성에 들어올 리가 없잖아. 난 그저 어리석은 것이 헛된 상상을 할까 현실을 말해 주려던 거뿐이야.”

“네, 네, 맞습니다, 대공녀님.”

레아의 호응에 조금 기분이 풀렸는지 세이아의 날카로운 기세가 조금 누그러졌다.

“근데 너 입고 있는 옷이 화려하다?”

나를 아래위로 훑은 세이아의 눈썹이 위로 치켜졌다. 레아가 황급히 손을 저으며 세이아에게 말했다.

“아, 이건 디아나의 옷이 아닙니다. 잠시 빌린 것이에요. 천한 디아나가 어떻게 이런 옷을 입을 수 있겠어요?”

제 옷이 아닌 건 맞지만, 엄마가 자기 딸을 천하다고 하다니.

딱히 레아에게 애정을 바란 것은 아니지만 대놓고 천한 아이라고 하니 상처가 되었다.

한낱 동물도 자기 새끼는 아낀다는데 레아는 정말 자신에게 조금의 애정도 없는 걸까.

“어쩐지 이상하다 했지. 옷 더럽히지 말고 잘 돌려주도록 해. 정말이지 집안의 수치라니까.”

세이아가 디아나를 보며 비틀린 미소를 머금었다.

그 비웃음이 오늘따라 디아나를 작아지게 만드는 기분에 옷자락을 꾹 쥐었다.

“대공녀님 말씀이 다 맞아요.”

그래, 이런 기분이 드는 건 레아 때문이다.

세이아에게 이런 말을 처음 듣는 것도 아니었는데 오늘따라 유독 주눅이 드는 건 레아가 세이아의 옆에서 맞장구를 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상황 속에서도 레아에게 맞을까 찍소리도 못하는 제 처지가 불쌍하고 속상했다.

아무것도 못하는 게 억울해 뼈마디가 드러나도록 손에 힘을 준 그때, 애달픔이 가득한 레아의 목소리가 머리 위를 울렸다.

“대공녀님, 괜히 천한 아이 때문에 기분 상하지 마시고 날도 추운데 어서 저택으로 돌아가셔요. 감기라도 걸리실까 봐 걱정이 됩니다.”

“안 그래도 좀 추웠는데 이만 돌아가야겠어. 너, 할 말 있으니까 고개 들어.”

“디아나, 뭐 하니. 대공녀님이 부르는데!”

디아나가 고개를 들지 않고 있자 레아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그녀를 다그쳤다.

눈물이 나올 거 같아 입술을 깨물고 있던 디아나는 울지 않으려 눈에 힘을 주며 고개를 들었다.

세이아를 바라보자 마치 못 볼 꼴을 억지로 본다는 듯 세이아의 얼굴이 구겨졌다. 세이아는 쯧, 혀를 차며 경고하듯 말했다.

“너, 다신 이 본성에 얼씬도 하지 마. 여긴 너 같은 더러운 게 올 곳이 아니라고! 알겠어?”

“……네.”

디아나는 저 역시 다시 올 맘 따위 없다고 소리치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며 양순히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레아가 세이아에게 말했다.

“대공녀님, 제가 저택까지 모셔다드리겠습니다. 얼음이 낀 바닥은 미끄러워 혼자 다니시기엔 위험해요.”

“흠…… 어쩔 수 없지.”

레아의 말이 내키지 않는 듯 인상을 구기던 세이아는 언 땅바닥을 내려다보다 레아에게 손을 내밀었다.

황송하다는 듯, 감격에 찬 얼굴로 세이아의 손을 살포시 잡는 레아를 보던 디아나는 더 이상 못 보겠어 시선을 내렸다.

“넌 집으로 조용히 돌아가. 옷은 벗어서 곱게 개어 두고, 알겠니?”

레아는 세이아에게 말할 때와는 전혀 다른 차가운 목소리로 디아나에게 말했다.

디아나는 그들을 보고 싶지 않아 시선을 내린 채 대답했다.

“네.”

저건 대체 뭐가 저리 재수 없게 어두침침한 건지. 레아의 경멸이 담긴 중얼거림이 공기 중으로 흩어졌다.

디아나는 두 개의 발소리가 멀어지는 것을 듣고 있다, 더 이상 소리가 들리지 않자 그제야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가야지.”

여기 가만히 있다 돌아오는 레아에게 걸리면 또 좋지 못한 소리를 잔뜩 들을 게 분명했다.

디아나는 천천히 본성을 나가는 외길 위로 걸음을 옮겼다.

“앗!”

몇 발짝 걸었을까, 디아나는 그만 미끄러운 얼음 바닥에 몸을 크게 휘청이다 엉덩방아를 찧었다.

“아파.”

올 때는 레아의 힘에 끌려와 몰랐는데 얼음이 꽁꽁 언 길 위는 조금만 발을 잘못 디뎌도 넘어질 만큼 미끄럽고 위험했다.

손에 닿은 바닥 역시 얼음이 꽁꽁 얼어 있었다.

- 얼음이 낀 바닥은 미끄러워 혼자 다니시기엔 위험해요.

걱정스럽다는 목소리로 세이아에게 말하던 레아의 모습이 문득 떠올랐다.

디아나에게는 한 번도 보여 준 적 없는 모습.

울컥, 속에서 올라오는 감정 덩어리에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녀는 눈물을 삼키며 작게 중얼거렸다.

“……춥다. 빨리 가야 되는데.”

손바닥에서 올라오는 얼음의 한기가 추운 건지, 마음속에 가득한 외로움이 시린 건지 알 수 없는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일까, 기어이 눈물 한 방울이 볼을 타고 흘러내린 순간 뒤에서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공녀님?”

대공녀? 세이아가 돌아온 건가?

디아나는 황급히 볼을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고 일어났다. 뒤를 돌아보자 검은 제복을 입은, 하늘색 머리칼을 가진 남자가 서 있었다.

디아나를 유심히 살피던 남자의 녹빛 눈동자가 조금 의아함을 담았다.

“대공녀님은…… 금발이라고 들었던 거 같은데…….”

남자가 고개를 갸웃하며 작게 중얼거렸다.

세이아가 돌아온 게 아니라 디아나를 대공녀로 착각한 거였다.

디아나는 대공가의 기사로 보이는 남자에게 말했다.

“전 대공녀가 아니에요.”

“아니라고…… 요? 그럼 누구시지요?”

디아나의 신분을 짐작할 수 없는지 남자가 어색하게 존대를 했다.

‘이 사람…… 날 모르는 건가?’

그러니까,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이자는 대공가에 사생아가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는 얼굴이었다.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대공성에서 오래 일한 자들이 아니고 새로 들어오는 사용인들은 디아나의 존재를 몰랐던 듯 처음 마주했을 땐 놀란 얼굴을 하곤 했으니까.

애초에 그녀는 대공가의 가계도에 올라가지 못한 아이였다.

그러니 사생아를 수치라 여긴 대공이 대외적으로 그녀의 존재를 숨겼을 가능성이 높았다.

“…….”

디아나는 기사의 물음에 선뜻 대답을 하지 못하고 입술을 달싹였다. 제 존재를 모르는 것에 상처를 받아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저 누구라고 답을 해야 할지 모르겠는 것뿐.

제 입으로 사생아라고 해야 하는 걸까, 아니면…… 대공 전하의 가계도에 오르지 못한 자식이라고 해야 하나.

어느 쪽이든 뭔가 본인 입으로 말하기가 이상했다.

디아나가 짧은 고민을 하고 있던 그때, 하늘색 머리의 기사가 갑자기 무릎을 굽히며 몸을 낮추었다.

디아나와 시선을 맞춘 기사가 살짝 미소를 지었다.

“말하기 곤란한 거라면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됩니다. 어디로 가는 길인지 물어도 될까요?”

기사는 디아나를 대공저 내에 기거하는 귀족 영애라고 결론을 내렸는지 상냥하게 말했다.

아니라고 말해야 할까?

기사의 착각을 풀어 주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자신을 보는 상냥한 녹빛 눈동자에 아니라고, 입이 선뜻 열리지 않았다.

대부분 디아나가 사생아인 것을 알고 나면 그녀를 보는 눈빛부터가 달라졌으니까.

너무나 오랜만에 느껴 보는 호의에 디아나는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입술을 다물었다.

“음…… 이것도 말씀하기 싫으시다면 이 얼음길만 잘 건너실 수 있게 도와드려도 될까요?”

디아나가 망설이자 기사가 걱정스럽다는 듯 미간을 모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길이 미끄러워 혼자 걸으시기엔 위험합니다. 또 넘어지면 예쁜 드레스가 망가질 수도 있어요. 그럼 아깝잖아요.”

디아나의 분홍 드레스를 보며 찡긋 눈웃음을 지은 기사가 잡으라는 듯 손을 내밀었다.

디아나는 그의 큰 손을 가만히 보다 천천히 제 손을 내밀었다.

마침내 그의 손 위로 손을 올리자 남자가 디아나를 보며 환하게 미소 지었다.

“참, 에스코트를 청하며 제 이름도 말씀 안 드렸네요. 제 이름은 에드윈 드로이트. 편하게 에드윈이라고 부르시면 된답니다.”

에드윈 드로이트.

디아나는 속으로 그의 이름을 되뇌었다.

비록 디아나의 정체를 알게 되면 지금까지와는 다른 눈으로 보게 되겠지만 지금 이 순간의 호의는 오래도록 기억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고마워요.”

디아나는 에드윈에게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별말씀을.”

그런데 그녀의 작은 속삭임을 들었는지 에드윈이 디아나를 내려다보며 미소를 지었다.

꼭 숨겼던 무언가를 들킨 아이처럼 부끄러워진 디아나는 황급히 그의 시선을 피해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에드윈이 디아나의 손을 꼭 잡았다.

‘뭔가 이상한 기분이 들어.’

아까까지 춥기만 했던 몸에 따스한 온기가 퍼지는 느낌이었다.

디아나는 몽글몽글한 이상한 기분 속에서 에드윈의 손을 잡고 꽁꽁 언 길을 천천히 걸어 나갔다.

* * *

“에드윈, 어딜 갔다 이제 오는 거야?”

기사단으로 돌아오자마자 부단장의 일침이 에드윈에게 떨어졌다. 에드윈은 곧장 부단장 데릴의 앞에 서서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대공녀님을 찾느라 조금 늦었습니다.”

“너도 찾으러 나갔었냐?”

한 시간 전, 갑자기 저택의 하녀가 기사단에 와서 도움을 요청했었다. 대공녀님이 보이지 않는다며 수색해 달라고 말이다.

데릴은 일단 성을 뒤져 보고 안 되면 비상조치를 내려야겠다고 생각하며 휴식 시간을 보내고 있던 기사들을 풀었다.

거기에 에드윈이 포함된 줄은 몰랐다.

“너 수련 시간 아니었어?”

데릴의 물음에 에드윈이 고개를 들었다.

“아, 수련은 다 끝났습니다.”

“벌써?”

데릴은 놀란 눈빛으로 에드윈을 보았다. 분명 오늘 수련은 단장님이 직접 하신다고 하셨는데 벌써 끝났다니. 에드윈의 실력이 또 성장한 듯했다.

데릴은 태연한 얼굴로 답하는 에드윈을 보며 속으로 놀랐지만 표정을 빠르게 갈무리했다.

과연 단장님과 대공 전하께서 눈여겨보는 놈이라 생각하면서.

에드윈은 데릴을 보다 난감한 듯 눈썹을 모았다.

“수련이 빨리 끝나…… 대공녀님을 찾으러 가긴 했는데 송구하게도 찾지는 못했습니다. 대공녀님은 아직도 못 찾았나요?”

잠깐 다른 일에 정신이 팔려 대공녀의 존재를 잊어버렸던 것이 마음에 걸린 에드윈이 걱정스런 얼굴을 했다.

“대공녀님은 찾았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데릴의 말에 에드윈의 얼굴이 한결 밝아졌다.

“다행입니다.”

“그래, 그러니 그 일은 걱정 말고 오후 단체 훈련을 준비하도록 해라.”

“아, 저 부단장님.”

에드윈은 집무실로 돌아가려는 부단장을 붙잡았다.

“무슨 일이지?”

“다름이 아니라…… 혹시 대공성에 다른 귀족 영애가 와 있나요?”

“다른 귀족 영애?”

데릴은 뜬금없는 질문에 미간을 좁혔다.

“네, 대공녀님과 나이가 비슷한 영애가 와 있나요?”

“아니. 대공성에 방문한 다른 귀족 영애는 없다.”

“아, 그런가요.”

“왜?”

“아뇨, 아닙니다. 제가 잘못 알았나 봅니다.”

데릴의 매서운 눈초리에 에드윈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다행히 데릴은 에드윈에게 더는 묻지 않고 집무실로 들어갔다.

데릴이 사라지자 에드윈은 웃음기를 지웠다.

‘대공성에 방문한 다른 귀족 영애는 없다. 그럼 그 아이는 누구지? 사용인들의 아이인가?’

에드윈은 아까 보았던 작은 아이를 떠올렸다.

갈색 머리칼에 갈색 눈동자.

입고 있는 분홍 드레스를 봐서는 평민은 아닌 거 같았는데. 하지만 자세히 보니 귀족 아이라고 하기엔 너무 깡말랐다.

뼈만 남은 거 같은 작은 아이의 몸을 생각하니 절로 미간이 좁혀졌다.

부모가 누구인지는 몰라도 아이를 그렇게 키우다니.

분명 제대로 보살피지 않았을 것이다.

에드윈은 제대로 된 부모 밑에서 자라지 못해 학대받는 아이들의 상태를 누구보다 잘 알았다.

아이의 부모에게 분노를 느끼던 에드윈은 걱정스런 얼굴을 했다.

저택에서 나가는 걸 보면 대공성의 별채에서 지내는 걸까.

아까 아이가 사는 곳까지 따라갈 것을.

에드윈이 뒤늦은 후회를 하던 그때, 그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에드윈, 거기서 뭐 해. 훈련 시간 다 됐어.”

“아, 응.”

연무장으로 가고 있는 기사들의 모습에 에드윈은 상념을 끝내며 그들의 뒤를 따라갔다.

* * *

밤이 찾아오자 대공가의 밤을 밝히는 횃불들이 켜졌다.

늦은 시간까지 일을 처리하느라 저녁도 거른 대공은 일이 끝나자마자 세이아의 방으로 향했다.

대공이 세이아의 방문 앞에 도착한 순간 문이 열리며 세이아의 유모가 나왔다

“대공 전하를 뵙니다.”

“일어나라.”

“네.”

“세이아는 잠이 든 것이냐.”

“네, 전하. 방금 막 잠이 드셨습니다.”

“그렇군…….”

대공은 잠시 고민하듯 말끝을 흐리다 유모에게 말했다.

“그대는 이만 물러가 보거라.”

유모가 물러가고 대공은 조심스런 손짓으로 방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은은한 촛불이 켜져 있는 넓은 방엔 세이아가 좋아하는 인형들과 장난감들이 한쪽에 모여 있었다.

그것들을 잠시 보던 대공은 발소리를 죽이며 침대로 다가갔다.

하얀 레이스 휘장을 살짝 걷자 규칙적인 숨소리를 내며 잠든 세이아의 모습이 보였다.

좋은 꿈이라도 꾸는 듯 아이의 입가엔 미소가 걸려 있었다.

하지만 그런 세이아를 바라보는 대공의 얼굴엔 미소 하나 보이지 않았다.

“아무리 봐도 아리엘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군. 나를…… 닮은 건가.”

대공의 낮은 목소리가 허공으로 흩어졌다.

그는 대공성으로 돌아오자마자 세이아부터 보았었다.

그땐 너무 늦은 밤이라 아이의 잠든 모습을 자세히 보지 못하고 방을 나갔었다.

하지만 다음 날 아침 세이아를 제대로 마주했을 때, 대공은 저도 모르게 멈칫했다.

자신의 딸이 너무도 낯설게 느껴졌기 때문에.

대공은 전장으로 나간 뒤 일부러 세이아의 얼굴을 한 번도 보지 않았다.

아리엘을 닮은 세이아의 얼굴을 본다면 더 견딜 수 없을 거 같았기 때문이다.

어리석은 슬픔에 딸을 외면했었지만 항상 마음속엔 딸을 생각했었다.

- 대공녀님께서 마님을 참으로 많이 닮으셨습니다.

대공가의 주치의가 대공가를 떠나가기 전, 그에게 했던 마지막 말을 떠올리며 대공은 아리엘을 닮은 세이아를 머릿속으로 그렸었다.

한데 10년 만에 만난 자신의 딸은 낯설 만큼 아리엘을 조금도 닮지 않았다.

대공가의 상징인 금발과 금안을 가지고 있긴 했지만 세이아에게서는 어딘지 위화감이 느껴졌다.

“하아.”

세이아의 얼굴을 날카로운 눈빛으로 살피던 대공은 순간 스스로에게 환멸을 느꼈다.

10년 만에 만난 딸에게 이게 무슨 짓이란 말인가.

아리엘을 볼 낯이 없는 자신의 행동을 반성하며 거칠게 얼굴을 쓸어내린 그는 잠든 세이아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비록 그가 곁에 있어 주진 못했으나 대공성에서 극진한 보살핌을 받은 세이아의 얼굴엔 어두운 구석이 없었다.

맑은 피부와 포동포동하게 오른 살은 사랑을 많이 받은 10살 귀족 소녀의 전형이었다.

아이의 얼굴에 그늘이 없어 다행이라 생각하며 살짝 미소를 짓던 대공은 낮에 보았던 디아나가 떠올라 입매를 굳혔다.

세이아와는 너무도 차이 났던 아이의 모습.

푸석한 갈색 머리칼과 10살 난 아이답지 않게 얼굴에 그늘이 가득한 모습.

입고 있던 분홍색 드레스는 또 어찌나 안 어울리던지 꼭 그런 옷을 처음 입어 본 아이처럼 어색해 보였다.

아직 10살밖에 안 된 아이의 모습이 왜 그런 것인지.

거기다 묘하게 아리엘을 닮았던 아이의 얼굴…….

대공은 생각을 멈추고 얼굴을 굳혔다.

그 추악한 여자의 아이가 아리엘을 닮았다니, 아리엘에게 너무도 모욕적인 생각이다.

대공이 신경을 거슬리게 하는 디아나의 모습을 지우려 미간을 깊이 찡그리던 그때, 세이아가 미약한 칭얼거림을 보였다.

“으음…….”

세이아는 춥지 않게 데운 방 안의 온도가 더운지 이불을 밀어냈다.

“감기라도 걸리면 어쩌려고.”

대공은 얇은 이불을 다시 세이아에게 덮어 주며 낮게 속삭였다.

“널 외롭게 두어 미안했다, 세이아.”

대공은 쓸데없는 상념들을 머릿속에서 지우며 세이아의 옅은 금발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설령 아리엘을 닮지 않았다 하더라도 세이아는 자신의 딸이다.

여태까지 못 해 준 것들을 지금부터 모두 해 줄 것이라 다짐하며 대공은 뒤척이는 세이아가 깊이 잠들 때까지 곁을 지켰다.

* * *

“으, 추워…….”

오늘따라 매서운 바람이 부는 저녁이었다.

세이아를 데려다주고 집으로 온다던 레아는 어디로 사라진 건지 해가 지고 어두운 밤이 찾아온 지금까지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물론 레아가 보고 싶어 기다리는 것은 아니었다.

단지 이렇게 추운 날엔 레아도 추위를 견디지 못해 작은 벽난로를 켰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늘은 레아가 없었기에 살을 에는 듯한 추위에도 디아나가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이렇게 있다가는 얼어 죽겠어.”

한껏 몸을 웅크리고 있던 디아나는 고개를 들어 본성으로 갈 때 입었던 겨울용 원피스를 쳐다보았다.

곱게 벗어 놓으라는 레아의 말에 따라 집에 오자마자 옷을 벗어 개어 놓았다.

‘저거라도 입으면 좀 나을까?’

지금 디아나가 입고 있는 얇은 원피스보단 보온이 뛰어날 것이다.

침대에서 내려와 옷으로 손을 뻗으려던 디아나는 순간 멈칫했다.

만약 옷을 입고 있다 레아에게 걸리기라도 한다면…….

그땐 또 매질을 당할 게 분명했다.

자신의 말을 듣지 않았다고 말이다. 디아나는 작은 한숨과 함께 체념하며 손을 거두었다.

“어떡하지. 이대론 너무 추운데.”

아무리 잔뜩 웅크려 보아도 덜덜 떨리는 몸에는 아무 도움이 되지 않았다.

‘장작을 구해 와야 하나?’

예전에 레아에게서 벽난로에 넣을 나뭇가지 같은 게 어디 있는지 들은 적이 있었다.

원래는 대공성에서 겨울용 장작을 주지만 두 사람이 싫어서인지 대공성에서 주는 장작은 그리 많지 않았다.

겨울이 긴 이곳에선 적은 장작으로 버티긴 당연히 힘들었다. 그럴 때면 레아는 집사를 욕하며 말했었다.

이 추운 날에 매번 빨래터 뒤쪽에 있는 작은 언덕까지 가게 만든다고 말이다.

빨래터 뒤쪽이면 디아나가 자주 다니던 오두막과 그리 멀지 않다.

‘추위에 얼어 죽는 것보단 그냥 다녀오는 게 낫지 않을까.’

디아나는 어두운 밖을 바라보았다.

어린아이가 이 어둡고 추운 밤에 아무도 없는 뒷산에 가는 건 상당히 위험한 일이다.

대공성의 경비는 삼엄하지만 혹시 모를 위험이란 게 있을 수 있으니까.

어둠 속을 혼자 다녀와야 한다는 것에 두려움이 들었지만 얼음장 같은 추위를 이겨 낼 자신이 없었다.

두려움보다 추위에서 벗어나고픈 본능이 먼저였다.

그리고 나중에 레아가 집에 왔을 때, 디아나가 저 옷을 입고 있는 것보다 나뭇가지를 가져와 벽난로를 피워 놓는 것이 그녀의 심기를 덜 거스를 것이다.

디아나는 밤이 더 깊어지기 전에 다녀와야겠다 생각하며 램프를 들었다.

* * *

“이 정도면 되겠지?”

디아나는 나뭇가지를 품에 한가득 들고는 땅에 내려놓았던 램프를 들었다.

휘잉-.

그때 매서운 칼바람이 음산한 울음소리를 만들었다.

빨래터 뒤의 작은 언덕.

어두운 밤 아무도 없는 이곳에서 들리는 스산한 소리도 무서웠지만 그보다 시린 바람에 턱이 덜덜 떨렸다.

빨리 내려가야지.

그래도 집에 가면 이제 난로를 피울 수 있다.

오로지 몸을 녹일 생각만 하며 여기까지 온 디아나였다. 나뭇가지도 모았으니 서둘러 돌아가려 발을 옮긴 순간 등골이 서늘한 느낌이 들었다.

‘뭐지? 꼭 누가 날 보는 거 같은데.’

디아나는 램프를 든 채 뒤를 돌아보았다.

휘이잉---.

랜턴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살폈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뭐지…… 분명 누군가의 시선을 느낀 거 같았는데…… 무서워.’

소름 돋아 딱딱하게 굳은 순간, ‘냐-’ 하는 소리와 함께 풀숲에서 커다란 짐승 한 마리가 나타났다.

“…….”

디아나를 잡아먹을 수도 있을 만큼 큰 짐승에 순간 숨을 죽였다.

하지만 그때, 날카롭던 짐승의 동공이 풀어지며 디아나의 곁으로 다가왔다.

짐승은 디아나에게 다가오더니 발목에 얼굴을 비볐다. 생긴 것이 꼭 하녀들이 밥을 주던 길고양이와 비슷했다.

물론 그 덩치는 길고양이라기엔 상당히 컸지만.

“음, 좀 덩치가 큰 고양이…… 인가?”

디아나는 고양이를 많이 보지 못했기에 애교를 부리는 짐승을 의심하지 않았다.

하녀들이 별채 뒤쪽에 애교 많은 길고양이들이 많다고 하기도 했었고.

디아나는 자연스럽게 큰 짐승이 고양이라 결론을 내렸다.

고양이의 애교에 두려움이 가라앉은 디아나는 고양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어쩌지, 난 너에게 줄 먹을 게 없는데. 미안해.”

커다란 고양이에게는 미안하게도, 디아나에게는 먹을 게 하나도 없었다.

“으, 추워.”

또 한 번 부는 매서운 바람에 디아나는 고양이를 쓰다듬던 손길을 거두었다.

“추운데 돌아다니지 말고 어디 들어가 있어. 내가 외투라도 있었으면 벗어 주고 갔을 텐데.”

사람도 이렇게 추운데 고양이는 얼마나 추울까.

마음 같아선 고양이와 함께 집으로 가고 싶지만 레아가 고양이를 발견한다면 화를 낼 것이다.

자신이 맞는 것보다 괜히 고양이가 레아의 손에 위험해질까 무서워 데려갈 수가 없었다.

혼자 가서 미안해.

고양이에게 작게 속삭인 디아나는 점점 심해지는 눈바람에 어쩔 수 없이 서둘러 언덕을 내려갔다.

“냐~.”

차가운 바람이 부는 언덕 위에서 작은 아이의 발소리가 점점 멀어지자 고양이가 작게 울었다.

그러자 나무 뒤로 몸을 숨겼던 한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어둠 속에서도 빛나는 금안을 가진 남자는 다름 아닌 대공이었다.

“이리 온, 유네스.”

디아나가 고양이라 착각한 짐승, 유네스가 대공의 부름에 곁으로 다가왔다.

대공이 부드럽게 유네스의 털을 쓰다듬자 신기하게도 어두운 푸른빛이었던 털이 보랏빛 털로 바뀌었다, 다시 돌아갔다.

디아나는 유네스를 고양이로 착각했지만 사실 유네스는 고양이가 아니었다.

고양이와 비슷하게 생겼을 뿐 유네스는 몬스터였다.

사람을 공격하는 하급 몬스터가 아닌 주인을 향한 충성심이 강한 상급 몬스터 표우.

표우는 주인과 각인을 하게 되면 원래의 털인 푸른빛에서 주인의 눈 색과 똑같은 색으로 자신의 털색을 바꾸었다.

자신의 색을 바꿀 만큼 충성심이 강하기에 주인 외에 다른 사람에겐 경계심도 높았다.

함부로 다가갔다간 목숨이 위험할 정도로 말이다.

유네스는 그런 표우들 중에서도 순혈이기에 더욱 강한 충성심과 힘을 가졌고 그의 아내였던 아리엘과 각인한 표우였다.

아리엘과 자신 외의 다른 사람에겐 한 번도 먼저 다가간 적이 없었는데.

대공은 그의 손길에 늘어지는 유네스를 보며 미간을 살짝 좁혔다.

“그 여자의 딸에게 애교를 부리다니, 어디 아픈 것인가.”

아리엘이 죽고 사람을 더욱 경계했던 유네스였다.

그 경계심이 너무도 위협적이라 그의 어릴 적 훈련장이 있던 곳에 격리해 돌보고 있었던 것인데 그 여자의 딸에게 먼저 다가가 애교를 부리다니.

그의 눈으로 보았지만 믿기 힘든 장면이었다.

이 추위에 10살 난 아이 혼자 언덕에 있는 것만큼이나 말이다.

“대체 저 애가 이 시간에 여긴 왜.”

오늘 밤은 매서운 눈바람이 예고되어 대공성의 사용인들에게도 밤에는 외출을 삼가라는 명을 내린 상태였다.

그래서 처음 숲속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들었을 때도 사람일 거란 가정은 아예 하지도 않았었다.

야생 동물이 숲속으로 들어온 것이라 생각했던 그는 오랜만에 사냥이나 하라고 유네스를 풀어 놓은 것이다.

처음 아이를 보았을 때 그는 진심으로 자신이 헛것을 본 줄 알았었다.

어른들도 동상에 걸릴 수 있는 매서운 추위라 외출을 막기까지 한 날에, 어린아이가 보호자도 없이 그 얇은 원피스 차림으로 이곳에 오다니 도저히 그의 머리로는 이해가 되지 않았으니까.

거기다 아이의 모습은 낮에 보았던 것보다 더 참담한 모습이었다.

낮에 본 질 좋은 분홍 드레스가 아닌 평민도 잘 입지 않을 낡고 해진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거기다 그 원피스는 결코 제국에서도 혹독한 추위를 자랑하는 이곳, 북방에서 입을 법한 겨울용 옷이 아니었다.

낮에는 보지 못했던 앙상한 팔과 다리는 죽도 제대로 먹지 못하는 전쟁고아의 모습 같았다.

아이의 모습이 믿기지 않았지만 그가 본 게 헛것이 아니라는 듯 유네스는 아이에게 다가가 애교를 피웠고 아이는 유네스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혹독한 추위에 손등이 다 튼 작은 손으로.

그 손이 다시금 떠오르자 대공은 무언가 참을 수 없는 기분에 얼굴을 무참히 구겼다.

“거슬려.”

그렇게 악을 쓰며 낳은 아이가 아니었던가.

그런 아이인데 왜 저런 몰골인 거지?

덜 자란 몸에 사랑이라곤 받아 본 적 없는 거 같은 죽은 눈, 거기다 전쟁고아보다 못한 모습이라니.

그가 한 번씩 이를 까득 물며 상상했던 모녀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대공은 이제 보이지도 않는 아이가 있던 자리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캬악!”

그때 유네스가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그의 품에서 뛰어내렸다.

유네스의 소리에 정신을 차린 대공은 짧은 한숨을 내쉬며 얼굴을 쓸어내렸다.

“……쓸데없는 것에 신경을 쓰다니 나답지 않아.”

- 로드, 아이가 무슨 죄가 있겠어요. 배 속에 있는 아이는 아무런 죄가 없어요. 어른들의 싸움에 아이가 희생되어선 안 돼요.

관계없다, 스스로에게 그리 말하려던 대공의 머릿속으로 순간 아리엘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어른들의 싸움에 아이를 희생시키지 말라던 아리엘의 말이.

그는 레아를 죽일 것이다.

그 결심은 지금도 변함없었다.

그는 그 여자를 절대 용서하지 않을 테니까.

그렇다면 그 여자가 죽은 뒤 그 아이는?

대공성에 돌아와 디아나를 마주하기 전까진 레아와 디아나를 같이 처리해 버릴 생각이었다.

아리엘이 아이는 죄가 없다 했지만 그 여자의 핏줄을 살려놓을 순 없다, 결심했다.

하지만 막상 디아나를 마주하니 죽이겠단 결심이 서질 않았다.

경멸스러워야 할 아이가 오히려 안쓰럽게 느껴졌다.

“……하아.”

디아나를 향한 복잡한 감정에 그의 한숨이 무거웠다.

짙은 한숨이 공기 중으로 흩어지고,

디아나…….

한참을 그렇게 멍하니 서 있던 대공은 이내 굳은 얼굴로 걸음을 옮겼다.

* * *

디아나가 대공성에 다녀온 지 일주일이 흘렀다.

“오늘도 없네.”

디아나는 오늘도 텅 비어 있는 거실을 보다 주방으로 갔다.

레아는 매서운 눈바람이 불었던 그날 밤, 결국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이른 아침이 되어서야 들어온 레아는 디아나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자신의 방에서 오후가 될 때까지 잠을 잤었다.

하지만 레아의 외박은 그리 놀랄 일이 아니었다.

오히려 대공성에 다녀온 뒤로 달라진 디아나의 생활이 놀라운 일이었다.

레아의 얼굴은 안 좋아지고 있었지만 반대로 디아나의 생활은 점점 윤택해지고 있었다.

가장 큰 변화는 바로 식탁 위에 차려진 음식. 디아나에게 먹을 것이 제대로 조달되고 있다는 것이다.

식탁 위에 차려진 빵과 쨈 그리고 과일 조금. 이것은 일주일 전부터 하녀장이 직접 가져다주고 있는 디아나의 식사였다.

대공성에 보낸 의사.

디아나의 생활이 바뀐 가장 큰 이유는 의사의 진찰 덕분이었다.

의원을 보내겠다는 대공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는지 대공을 만났던 그다음 날 바로 의원이 집사와 함께 오두막을 찾아왔었다.

레아가 꽤 초조한 얼굴로 디아나를 진찰하는 의원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의원은 그런 레아를 쳐다보지도 않고, 차분한 얼굴로 디아나에게 영양실조라는 진단을 내렸다.

레아는 말도 안 된다며 펄쩍 뛰었지만 집사는 레아를 무시하며 별채를 관리하는 하녀장을 불러 명했다.

앞으로 디아나의 식사를 하녀장이 책임지라고.

레아는 자기 자식 일을 다른 사람에게 넘길 수 없다며 난리를 피웠지만, 집사와 무어라 둘이서 대화를 하고 오더니 조용히 하녀장에게 디아나의 식사를 맡겼다.

그 뒤로 일주일 동안 디아나는 한 번도 식사를 거른 적이 없었다. 그래서인지 빼빼 말랐던 몸에 조금씩 살이 오르고 있었다.

디아나는 잘 구워진 빵에 버터를 발라 한 입 베어 물었다.

‘맛있다.’

잘 구운 호밀빵과 과일 몇 가지.

귀족의 식사에 비하면 많이 모자란 식단이었지만 디아나에게는 이것만으로도 성찬이나 다름없었다.

예전엔 아예 먹지를 못했으니까.

그리고 또 다른 변화가 하나 더 있었다.

바로 레아의 손찌검이 멈추었다는 것.

레아는 의원이 디아나의 몸을 여기저기 살펴봐서인지 그날부터 디아나에게 손도 대지 않았다.

의원이 돌아가고 레아는 악을 지르며 분노했지만 디아나를 죽일 듯 노려보기만 할 뿐 때리진 않았다.

그러다 집을 나가 버렸지…….

디아나를 더 이상 괴롭힐 수 없어서일까 레아는 그날부터 아침 일찍 집을 나가 저녁 늦게 돌아오곤 했다.

그래서 레아의 얼굴을 마주하지 못한 지도 벌써 일주일째였다.

‘근데 대체 어딜 갔다 오는 걸까…….’

레아나 디아나나 대공성 말곤 딱히 갈 곳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특히 레아는 대공비를 배신한 하녀라는 게 소문이 파다해 영지민들도 싫어한다고 했었다.

그런데 대체 어딜 그렇게 돌아다니는 걸까.

디아나는 다 먹은 접시를 정리하다 고개를 저었다.

“생각하지 말자.”

그 여자가 뭘 하고 돌아다니든 사실 레아와 마주치지 않는 게 디아나에게 더 득이 되는 일이었으니까.

지금이야 눈치가 보여 날 때리지 못한다 해도 언제 그녀의 마음이 바뀔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부디 지금의 평화가 오래도록 지속되길 바랄 뿐.

디아나는 부엌에서 나와 방으로 갔다. 며칠 동안 빨래를 하지 않아 빨랫감이 많이 쌓여 있었다.

바구니에 빨랫감을 담아 다락방에서 내려온 디아나는 시계를 바라보았다.

글은 몰라도 숫자는 알았기에 시계도 볼 수 있었다.

거기다 늦지 않게 집안일들을 하라며 레아가 시계 보는 법은 대충 가르쳐 주기도 했다.

11시 20분.

‘30분은 더 있어야 하녀장이 오겠네.’

하녀장은 일정한 시간에 맞춰서 음식을 가져다주고 빈 접시를 다시 가져갔다.

“흠.”

디아나는 잠시 고민했다. 하녀장을 기다렸다가 빨래터로 갈까, 아님 직접 접시를 가져다줄까.

고민은 금방 결론이 났다.

디아나는 접시들을 빨랫감 위로 조심히 놓고 집을 나섰다.

하녀들이 머무는 별채는 오두막과 그렇게 멀지 않았다. 별채에 들어섰지만 다들 저택으로 일을 하러 간 건지 사람들이 보이지 않았다.

“음…… 다 먹은 접시니까, 주방으로 바로 가져다주면 되겠지?”

하녀장에게 전해 주고 가려 했던 계획이 예상치 못한 문제로 틀어졌지만 쿤타에게 전해 주고 가면 될 거 같았다.

디아나는 아무도 없는 로비를 둘러보다 주방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주방의 문을 살짝 열자, 로비와 달리 분주하게 움직이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다들 바빠 디아나가 들어온지도 몰랐다.

디아나는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쿤타를 발견하고 그곳으로 쪼르르 뛰어갔다.

“쿤타.”

야채를 막 썰고 있던 쿤타는 화들짝 놀라며 디아나를 보았다.

“아가씨! 여긴 어쩐 일이세요? 혹 배가 고프셔서, 아니, 아니다. 분명 오늘 아침 식사를 제가 준비해 드렸는데.”

쿤타는 디아나가 갑자기 이곳에 나타난 것이 당황스러운지 걱정스런 얼굴로 횡설수설했다.

디아나는 그런 그의 앞치마를 걱정하지 말라는 듯 붙잡고 말했다.

“배고파서 온 거 아니야. 빈 접시를 가져다주려고 들렸어.”

“아, 다행이네요. 전 또 레아 님이 아가씨의 식사에 손을 대…… 아니, 아닙니다. 근데 왜 빈 접시를 직접 가지고 오셨어요? 하녀장님이 가시지 않나요?”

“응, 와. 근데 내가 오늘 빨래터에 가야 돼서 가는 길에 가져온 거야.”

디아나는 접시를 하나씩 쿤타에게 전해 주었다. 쿤타는 접시를 받으며 디아나가 들고 있는 빨래 바구니를 안쓰러움 가득한 눈초리로 보았다.

“아직도 아가씨가 직접 빨래를 하시는 건가요? 하녀장님께 말씀하시면 아마…….”

“아냐. 난 이게 익숙해서 편해.”

지금 분위기라면 쿤타의 말대로 하녀들이 디아나의 빨래도 해 주겠지만 괜히 눈 밖에 날 행동을 하고 싶지 않았다.

‘하녀장도 집사의 명령에 어쩔 수 없이 내 식사를 챙기고 있는 걸 테니까.’

괜히 하녀들에게 이것저것 시키다 안 좋은 소문이 대공의 귀에라도 들어간다면…… 그날로 대공성에서 쫓겨날 것이다.

‘적어도 5년은 더 대공성에서 버텨야 돼.’

디아나는 걱정 가득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쿤타에게 괜찮다며 미소를 지어 보이곤 주방에서 나갔다.

“그래도 오늘은 덜 춥네.”

디아나는 별채를 나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오랜만에 찬바람이 멈추고 햇살이 가득 내리쬐고 있었다.

‘오늘은 물이 좀 덜 차가우려나.’

“어?”

“아.”

디아나는 빨래터로 가려다 별채로 향하는 한 사람과 정면으로 마주쳤다.

하늘색 머리칼에 녹색 눈동자.

마주친 사람은 다름 아닌 본성에서 디아나를 도와주었던 기사, 에드윈이었다.

디아나를 보는 에드윈은 놀란 듯 눈을 크게 뜨다 이내 미소를 지었다.

“역시 별채에 지내고 있었구나.”

디아나는 갑자기 짧아진 에드윈의 말에 머리를 갸웃했지만 그는 정말 반가운 표정으로 디아나에게 다가왔다.

“널 찾아서 몇 번 별채에 왔었는데, 못 봐서 내가 전설에나 나오는 숲속의 요정을 본 건가 했다니까. 잘 지냈니?”

‘날 찾았다고? 왜……?’

그가 자신을 찾은 이유도 궁금했지만 편하게 말을 놓는 걸 보니 아마도 자신이 누구인지 아직 모르는 모양이었다.

‘어떡하지?’

디아나는 무해한 미소를 짓는 에드윈을 보며 난감해졌다.

그날은 다신 마주칠 일이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이렇게 금방 다시 만나게 될 줄이야.

‘날 하녀의 아이라고 오해하는 거 같은데…… 내가 누구인지 사실대로 말해야 할까?’

물론 그에게 존대를 듣고 싶어 그러는 것은 아니다.

단지 그가 나중에 자신이 누구인지 알고 곤란해질까 걱정돼서였다.

“아가씨?”

사실대로 말해야겠다고 생각한 그때, 다른 목소리가 두 사람 사이를 갈랐다.

디아나는 저를 부르는 목소리의 주인공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하녀장.”

저택에서 돌아오는 길인지 드레스 몇 벌을 든 하녀장이 내게로 빠르게 다가왔다.

“아가씨, 여긴 어쩐 일이신가요?”

“아가씨?”

하녀장의 물음에 답한 건 디아나가 아니었다. 그녀 앞에 있던 에드윈이 무슨 말이냐는 듯 하녀장을 보았다.

‘내가 말하려고 했는데.’

이렇게 밝혀지는 걸 바라지 않았기에 디아나는 낭패감이 서린 얼굴로 하녀장과 에드윈을 번갈아 보았다.

하지만 디아나의 이런 마음을 모르는 하녀장은 이미 에드윈을 보고 있었다.

“본성의 기사님 아니신가요?”

하녀장은 에드윈이 입고 있는 제복을 훑으며 물었다.

“맞네.”

“한데 별채에는 어쩐 일로 오신 건가요?”

“아, 그게 어제 기사 휴게실을 청소한 하녀가 물건을 떨어뜨리고 간 거 같아서, 전해 주러 왔네.”

에드윈은 제복 상의 안쪽 주머니에서 손수건 하나를 꺼내 하녀장에게 내밀었다.

“아, 이런 죄송합니다. 이런 번거로운 일이 없게 앞으로 당번 하녀들을 단속하도록 하겠습니다.”

“아니, 뭐 실수로 떨어뜨린 걸 테니…… 괜찮아.”

고개를 숙이는 하녀장에게 에드윈이 괜찮다며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하녀장이 고개를 들자 에드윈은 디아나를 힐긋 보며 하녀장에게 물었다.

“그보다 방금 아가씨라고…… 했나?”

“네? 아, 네.”

“대공성에 다른 귀족 영애의 방문은 없는 걸로 아는데 아니었나?”

“네? 아, 그게…….”

하녀장의 얼굴이 난감함으로 물들었다. 디아나는 하녀장의 눈길이 자신에게 향하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디아나 앞에서 사생아라고 말을 하긴 눈치가 보이는 거 같았다.

말끝을 흐리며 말을 못하는 하녀장을 에드윈이 뭔가 이상하단 눈빛으로 보았다.

두 사람을 보고 있던 디아나는 결국 에드윈을 보며 입을 열었다.

“전 다른 귀족가의 영애가 아니라 대공 전하의 사생아예요. 대공가의 가계도에 오르지 못했기 때문에 절 모르시는 게 당연하실 거고요.”

“아.”

에드윈은 놀란 듯 짧은 소리를 냈다. 하녀장은 디아나와 에드윈의 눈치를 보다 말했다.

“아가씨, 기사님, 전 급히 마무리해야 할 일이 있어 먼저 물러가도 될까요?”

“그러게.”

“그래. 아, 접시는 쿤타에게 전해 주었으니 집에 들를 필요 없어.”

“네, 아가씨.”

하녀장은 이 상황이 엄청나게 불편했는지 대답과 동시에 별채 안으로 뛰듯이 들어갔다.

그리고 불편한 건 디아나도 마찬가지였다.

디아나가 사생아라고 스스로 밝힌 뒤로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에드윈은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고 있었다.

디아나는 슬쩍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어 그의 녹빛 눈동자를 마주했다.

그가 자신을 경멸하더라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가계도에 오르지 못한 귀족가의 사생아는 평민들도 좋게 보지 않으니까.

에드윈은 디아나를 보다 갑자기 미간을 좁혔다.

저번에 아무 말 하지 않고 귀족 영애인 척 그의 도움을 받은 걸 떠올리며 화를 내는 걸까?

디아나는 대공가의 하인들도 무시하는 사생아였으니 자신과 엮인 것 자체를 모욕이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저번 일은 미안하다고 해야겠어.’

점점 얼굴이 구겨지는 에드윈에게 사과를 하려던 그때, 에드윈이 눈초리를 아래로 늘어뜨리며 한쪽 무릎을 꿇었다.

“정말 죄송합니다, 아가씨. 제가 대공가의 기사가 된 지 오래되지 않아 제대로 알지 못해 아가씨에게 무례를 저질렀습니다. 부디 저의 무례를 용서해 주세요.”

“……네?”

‘방금 내가 뭘 들은 거지?’

디아나는 용서를 구하듯 고개를 푹 숙이는 에드윈의 행동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니, 왜 이러세요, 기사님.”

에드윈이 홱 고개를 쳐들었다. 그는 매우 놀란 얼굴로 나를 보았다.

“아가씨, 기사님이라뇨! 제게 존대를 하시다니 그러시면 안 됩니다.”

‘이 사람 내가 아까 한 말을 제대로 못 들은 건가?’

디아나가 대공의 딸이긴 했지만 가계도에 오르지 못했다.

그러니 귀족의 성이 있는 에드윈이 암묵적으론 그녀보다 더 높은 신분이나 마찬가지였다.

가계도에 오르지 못했다는 건 대공가의 일원으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뜻.

그건 누군가 디아나를 모욕하더라도 대공가에서 상관도 하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했다.

근데, 자기에게 존대를 하면 안 된다니.

자신을 대공녀와 다름없이 대하고 있는 에드윈을 보며 디아나가 나직이 말했다.

“방금 제가 말씀드렸는데……. 전 대공가의 가계도에 오르지 못했다고…… 요.”

“그렇다 하더라도 아가씨의 부친이 대공 전하이신 건 달라지지 않는 진실이죠. 전 대공가의 피를 이은 모든 분들을 목숨 바쳐 지키겠다 서약한 기사입니다. 하니 다른 건 제게 중요하지 않아요. 아가씨, 부디 존대를 거두어 주십시오.”

“…….”

부드러운 미소마저 지우고 굳은 얼굴로 말하는 에드윈에게 거짓은 없어 보였다.

디아나는 그의 진심이 당황스러워 입술을 달싹였다.

지금껏 그녀가 사생아인 걸 알았을 때 사람들이 보여 주었던 반응과는 전혀 달랐다.

거의 둘 중에 하나였다.

디아나를 동정하거나 비웃거나.

하지만 에드윈은 사생아라는, 디아나라는 존재 위로 덧씌워진 오명이 아닌 그저 디아나라는 존재 자체를 보고 있었다.

이런 반응은 태어나 처음 겪는 것이다.

낯선 감정이 디아나의 심장을 울렸다.

누군가의 호의가 익숙하지 않은 아이였기에 디아나는 순간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아, 울면 안 돼.’

울고 싶지 않아 눈에 힘을 주는데 그 때문에 얼굴 표정이 이상해졌는지 에드윈이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물었다.

“아가씨, 괜찮으신가요?”

“……괜찮아…… 요.”

“존대는 하시면 안 된다니까요.”

“알, 아니, 응.”

디아나가 말을 바꾸자 그제야 만족스러운 듯 에드윈이 굳어 있던 얼굴에 부드러운 미소를 띠었다.

“한데 아가씨, 그건 뭔가요?”

에드윈의 시선이 디아나의 빨래 바구니로 향하자 그녀는 황급히 바구니를 뒤로 숨겼다.

왠지 그가 알게 되면 하녀들을 부른다고 소란을 피울 거 같았다.

“아무것도 아니야.”

“음, 그렇군요.”

“응. 그럼 이만 가 봐. 나도 갈 데가 있어.”

“아, 그러시군요. 그럼 제가 모셔다드리겠습니다.”

“응? 아니야, 괜찮아. 바쁠 텐데 가 봐.”

기사들은 원래 바쁘지 않나? 잘은 모르지만 이렇게 한가로이 돌아다니면 안 될 거 같았다.

하지만 디아나의 생각이 틀렸는지 에드윈은 고개를 저었다.

“오전 훈련이 끝났기 때문에 전혀 안 바쁩니다. 그러니 아가씨 가시는 곳으로 제가 모셔다드릴게요. 그 뒤에 짐도 제게 주세요.”

“정말…… 괜찮아.”

디아나가 한 걸음 뒤로 물러나자 에드윈이 멈칫했다. 그는 디아나의 완강한 거부를 느꼈는지 곤란하다는 듯 미간은 좁히다 입을 열었다.

“정말 괜찮으시다면…… 전 물러가 보겠습니다.”

“응. 어서 가 봐.”

“그렇게 바로 답해 주시다니…… 혹시 제가 싫으신 건 아니시죠?”

디아나가 너무 초고속으로 답해서 서운했는지 에드윈의 눈초리가 아래로 쳐졌다.

디아나는 황급히 좌우로 고개를 저었다.

“아냐! 안 싫어해, 진짜 그런 거 아냐.”

“그런가요?”

언제 서운했냐는 듯 에드윈이 눈을 반달 모양으로 휘며 말을 이었다.

“그럼 전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아가씨.”

에드윈이 멀어지는 것을 보고 있던 디아나는 그가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등 뒤로 물렸던 손을 바로 했다.

빨래 바구니를 품에 안은 디아나는 빨래터로 걸음을 옮기려다 에드윈이 떠난 자리를 힐긋 보았다.

“또 만날 수 있으면 좋겠다.”

쿤타 이후로 대공성에서 처음으로 자신에게 순수한 호의를 보여 준 사람.

본성에 지내는 그를 또 만날 수 있을까 싶었지만 조금의 기대가 생기는 건 막을 수 없었다.

디아나는 자꾸만 올라가는 입꼬리를 누가 볼까 서둘러 빨래터로 발걸음을 옮겼다.

날씨가 풀렸다고는 하지만 아직 겨울이라는 걸 잊지 말라는 듯 냇가의 물은 차디찼다.

“으, 차가워.”

도저히 익숙해지지 않는 얼음장 같은 물에 옷을 담갔다 꺼내자 몸이 부르르 떨렸다.

“방망이가 어디 있더라.”

주변을 둘러보자 이미 빨래를 끝내고 돌아간 하녀들이 한쪽에 놓아둔 방망이가 보였다.

“빨리하고 가야지.”

방망이를 가지고 돌아온 디아나는 동상이 걸릴 듯 빨개지는 손에 서둘러 큰 돌멩이 위로 자리를 잡았다.

빨랫감을 펼쳐 방망이를 내리치려던 그때, 자갈을 밟는 묵직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하녀들이 빨래를 하러 올 시간은 아닌데, 누구지?’

고개를 든 디아나는 자갈을 밟고 서 있는 사람의 존재를 확인하고 너무 놀라 눈만 크게 떴다.

냇가의 자갈을 밟고 서 있는 남자의 황금빛 머리칼이 햇살 아래 눈부시게 빛났다.

너무 놀라면 혼이 나간다고 했던가. 전혀 예상치 못했던 사람의 등장에 들고 있던 방망이마저 떨어뜨렸다.

디아나는 그를 보며 무의식적으로 입술을 움직였다.

“대공…… 전하.”

작은 목소리가 차가운 공기 중으로 흩어졌다. 아주 미약한 중얼거림이었건만 대공의 귀에는 들린 것인지 디아나를 등지고 있던 대공의 시선이 정확히 디아나를 향했다.

“또 너인가.”

디아나를 보고 놀란 듯 대공의 금안이 흔들렸다. 하지만 찰나의 순간일 뿐 대공은 곧 표정을 갈무리하며 차가운 시선으로 디아나를 바라보았다.

‘또 너라니……?’

꼭 그때 이후 만난 적이 있는 거처럼 말하는 그의 말에 순간 의아함이 느껴졌지만 디아나는 대공의 서늘한 눈빛에 정신을 차리고 멍하니 벌렸던 입술을 꽉 다물었다.

처음 만났던 그때보다 더 싸늘한 눈빛.

‘무서워.’

디아나는 두려움을 느끼며 몸을 움츠렸다.

레아에게 맞을 때와는 차원이 다른 두려움이었다. 물리적인 어떠한 위협도 가하지 않았지만 대공은 분위기와 눈빛만으로도 디아나를 짓누르고 있었다.

디아나는 도저히 그의 시선을 마주할 수 없어 눈을 내리깔았다. 바닥의 울퉁불퉁 모난 돌들을 보며 겁에 질려 쿵쾅거리는 심장을 가라앉히려 노력했다.

숨조차 죽이고 있던 그때, 대공의 발이 움직였다.

제발 못 본 척 돌아가 주었으면.

하지만 그녀의 간절한 바람과는 달리 대공의 발은 점점 그녀 쪽으로 가까워지고 있었다.

대공이 신고 있는 검은 구두코가 눈앞에서 멈추었다.

“고개를 들어라.”

낮은 음성이 머리 위로 내려앉았다.

그의 명을 못 들은 척할 수 없었기에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기다렸다는 듯 대공의 황금안과 눈이 마주쳤다.

“아.”

디아나는 파르르 눈꺼풀을 떨며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예의가 아닌 행동이었지만 두려움이 앞선 본능적인 움직임이었다.

한데 그에게서 몸을 물린 그 순간 중요한 사실 하나를 떠올렸다.

바로 아직 대공에게 인사를 하지 않았다는 것을 말이다.

저번에 집무실에서 그를 처음 만났을 때도 너무 긴장한 나머지 인사를 올리는 것을 까먹고 말았었다.

한 번은 넘어가 줄지 몰라도 두 번이나 이런다면 좋게 보지 않을 것이다.

냇가의 얼음장 같은 물보다 더 차가워 보이는 대공의 분노만큼은 피하고 싶었기에 황급히 대공에게 허리를 숙였다.

“인사 올립니다, 대공 전하.”

“……뭐 하는 거지?”

“네?”

뭐 하는 거냐니?

디아나는 그의 말에 숙였던 허리를 바로 세우며 물었다. 한데 고개를 들자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눈썹을 치켜세운 대공의 얼굴이 보였다.

심기가 거슬린 듯한 그의 모습에 디아나는 몸을 움찔했다.

‘내가 뭘 잘못한 거지? 예를 잘못 갖춘 걸까?’

그럴 확률이 제일 높았다. 그녀는 귀족에게 어떻게 예를 갖추어야 하는지 제대로 배운 적이 없었으니까.

방금 한 인사는 집사나 하녀장에게 사용인들이 하는 인사를 따라 한 것이다.

디아나는 자신을 빤히 내려다보는 대공의 시선에 등에 땀이 차는 거 같았다.

잘못했다고 말해야 하는 걸까.

하지만 대공의 분위기에 압도되어서인지 그 말마저 쉽게 내뱉을 수가 없었다.

말이 안 나온다면 행동으로라도 보여 주려 엉거주춤 무릎을 꿇으려던 그때, 대공이 짧은 한숨을 내뱉었다.

“하아, 뭘 하려는 건진 모르겠지만 됐으니 그만해라.”

“죄송, 합니다.”

“네가 잘못한 건 없으니 고개 숙이지 마라.”

“네.”

대공의 말에 디아나는 숙이던 고개를 번쩍 들었다.

하지만 디아나가 잘못한 게 없다는 그의 말과 달리 그의 표정은 여전히 심기가 몹시도 불편해 보였다.

대체 무엇이 그렇게 마음에 안 드는 걸까. 차라리 말을 해 주면 좋을 텐데.

하지만 대공의 입술은 꾹 다물린 채 미동이 없었다.

그는 그렇게 말없이 또 디아나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아까와 달리 한결 풀어진 눈빛에 숨 막히는 압박감을 느끼진 않았다.

근데 대공은 대체 왜 여기 있는 걸까.

한결 긴장이 풀리고 나니 의문이 들었다.

이 냇가는 대공성의 하녀들이 빨래를 하는 곳이다. 그렇기에 하녀들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의 출입은 거의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그가 빨래터를 찾을 이유가 없다.

“무슨 생각을 그리하는 거지?”

“아…… 대공 전하께서 왜 여기 계신 것인지…… 헙, 아니, 아무것도 아니에요.”

‘내가 방금 무슨 짓을!’

생각에 너무 깊이 빠져 버린 나머지 대공의 물음에 곧바로 대답을 하고 말았다.

말이 끝나기 직전에야 정신을 차린 디아나는 입을 틀어막았지만 이미 대공은 디아나의 말을 전부 들은 듯했다.

이 성은 대공의 성이다. 성의 주인인 그가 어딜 돌아다니든 그의 자유인데 자신이 뭐라고 의문을 가졌을까.

자신과 하등 상관없는 일에 괜히 관심을 가졌다 사고를 쳤다.

속으로 자신을 질책하고 있던 순간 대공의 고저 없는 목소리가 울렸다.

“난 냇가 위에 있는 숲에 볼일이 있어 들른 것이다.”

디아나는 입을 틀어막은 손을 내리며 그를 보았다.

‘화를 내지 않고 내 물음에 답을 해 준 거야……?’

네가 알 바 아니다, 이런 싸늘한 말과 서슬 퍼런 눈빛을 마주할 거라고 예상한 디아나는 대공의 아무렇지 않은 대답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물론 살가운 목소리도 부드러운 미소도 없는 무미건조한 답이었지만 그가 자신의 물음에 답을 주었다는 거 자체가 놀라웠다.

순간 당황한 디아나는 멍한 얼굴로 되물었다.

“네?”

“네가 방금 물은 것에 답을 준 것이다. 여기 냇가 위쪽 숲엔 내가 어릴 적 수련했던 연무장이 있다. 그곳에 볼일이 있어 들른 것이다.”

대공은 냇가 위의 숲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다시 설명을 해 주었다.

“아…… 네…….”

대체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

그날 본성을 나올 때까지만 해도 대공을 다시는 볼 일이 없기를 바라며 바랐다.

그런데 대공이 다시 자신을 불러 만난 것도 아니고, 저택과는 거리가 먼 빨래터에서 우연히 만나 대화를 나누고 있다니.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이 상황에 대해 머릿속이 복잡하게 뒤엉키고 있을 때, 대공이 물었다.

“근데 넌 왜 이곳에 있는 거지?”

“네?”

“여긴 하녀들이 빨래를 하는 곳일 텐데, 네가 왜 이곳에 있는 건지 물었다. 거기다 그것들은 다 무엇이냐?”

대공의 시선이 아래로 내려갔다. 디아나의 빨랫감과 바구니, 방망이를 훑는 그의 시선이 매서웠다. 그는 이해되지 않는 시선으로 다시 디아나를 바라보았다.

“아…… 그게…….”

디아나는 말끝을 흐렸다.

대공에게 사실대로 ‘여기에 빨래를 하러 왔어요.’라고 말을 하자니 뭔가 그래선 안 될 거 같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어릴 때부터 레아의 눈치를 살피며 커 와서인지 디아나는 다른 사람들보다 눈치가 빠른 편이었다.

특히 사람들의 부정적인 감정에는 더더욱.

그 눈치가 지금 말하고 있었다.

대공은 지금 기분이 좋지 않다고.

특히 그녀 주변에 있는 빨랫감들을 본 뒤 대공의 분위기는 더욱 가라앉았다.

이럴 땐 절대 함부로 입을 놀려선 안 된다.

그는 싸늘한 눈빛으로 아직 시작도 못 한 빨래 더미를 힐긋 보며 말했다.

“설마 저 빨래를 네가 직접 하는 것이냐?”

직구로 날라 온 물음에 디아나는 그의 시선을 비스듬히 피하며 느리게 입술을 움직였다.

“……가끔, 가끔…… 제가 하고 있어요.”

“가끔?”

“네, 엄마가 바쁘실 땐…… 제가 일을 도와 드리고 있어요.”

팔다리를 제대로 움직이고 걸어 다닐 수 있던 그때부터 해 왔던 일이었지만 디아나는 아닌 척 대공에게 거짓을 말했다.

디아나는 그날도 지금도 대공에게 레아의 학대를 말하지 않았다.

비록 그는 그녀의 생물학적 아버지였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 대공가에서 그녀와 가장 먼 사람이기도 했다.

그는 디아나를 가계도에 올리지도 않았고, 이름 역시 내려 주지 않았다.

디아나는 사실 4살 때까지 이름이 없었다.

대공이 이름을 주지 않았으니 레아 역시 디아나에게 이름을 지어 주지 않았다.

레아는 디아나를 사생아라고 불렀다.

이름 없는 아이에게 이름을 지어 준 것은 이제 이곳에서는 일하지 않는 늙은 하녀였다.

그녀는 레아에게 학대당하는 그녀를 불쌍히 여겼었다.

그래서였는지 그녀는 대공성을 나가기 전, 디아나에게 해 줄 게 이것뿐이라며 이름을 지어 주었다.

디아나.

고대어로 뜻은 사랑받아 마땅한 아이.

고대어의 뜻을 레아가 알았다면 아마 이 이름은 디아나의 것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다행히 레아는 그리 똑똑하지 못했고 왜인지 몰라도 늙은 하녀가 이름을 지어 주었다는 사실이 그녀의 마음에 찬 듯 그녀를 디아나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아이에게 이름이 생긴 것이다.

그러니 대공은 디아나에게 아버지로서 아무것도 해 준 게 없었다.

아니, 애초에 그는 디아나를 딸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그가 먼저 저를 버렸는데 그에게 보호를 바란다는 건 너무 멍청한 일이다.

대공은 디아나의 대답에 눈살을 찌푸렸다. 어쩐지 화가 난 듯 그의 황금안이 서늘하게 번뜩였다.

“가끔이라도 이걸 네가 왜, 하녀, 아니, 아니다.”

대공은 말을 멈추며 한숨을 내쉬었다.

분노가 스치던 황금안이 차분해지고 일그러졌던 대공의 표정이 다시 서늘하게 굳었다.

왜 하녀에게 시키지 않고 직접 빨래를 하느냐고 물으려던 걸까.

근데 대공은 정말 몰라서 물으려던 걸까.

아비에게 버림받은 사생아와 그의 모친이 밑의 사람들에게 어떤 취급을 당하는지 말이다.

귀족가의 정실들도 남편의 사랑을 받지 못하면 하녀들이 무시한다고 들었다.

한데 레아는 디아나를 낳았음에도 여전히 하녀였고, 디아나는 그런 여자와의 사생아였다.

그런 두 사람이 대공가 사용인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하고 있었을까.

아니, 대공은 알고 있었을 것이다.

디아나가 당한 학대는 몰랐다고 해도 대공성에서 레아와 디아나가 배척당할 거라는 것은 알고 있었을 것이다.

대공과 디아나의 시선이 허공에서 뒤얽혔다.

대공은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인지 알 수 없는 묘한 눈빛으로 디아나를 바라보았다.

디아나는 차가운 빛이 사라진 대공의 시선을 마주 보다 먼저 시선을 내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가지 않는구나.”

대공의 낮은 음성이 들렸다. 혼잣말인 듯 그의 말소리는 아주 작았다.

디아나는 시선을 들지 않고 바닥에 깔린 자갈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빨리 빨래하고 돌아가야 하는데.’

혹시라도 레아가 집에 일찍 왔을 수도 있고, 또 곧 있으면 점심을 가져다줄 시간이었다.

그의 앞에서 쭈그리고 앉아 빨래를 시작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먼저 돌아가겠다고 말할 자신도 없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던 그때, 의외의 목소리가 침묵을 깨뜨렸다.

“대공 전하, 역시 여기 계셨군요.”

디아나는 고개를 들어 대공이 아닌 그의 뒤를 보았다.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건 햇볕 아래로 불타고 있는 듯한 남자의 적발이었다.

‘저 사람은…….’

일전에 대공의 집무실에서 보았던 남자였다. 디아나를 보며 살가운 거짓 웃음을 지었던 위험한 남자.

‘그때 이름이…… 로, 운이라고 했던 거 같은데.’

“로운.”

디아나의 기억이 틀리지 않았는지 대공이 그를 보고 로운이라 부르며 말을 이었다.

“에드윈은 왜 데리고 온 것이냐.”

에드윈?

익숙한 이름을 말하는 대공 때문에 디아나는 다시 로운이 있는 곳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로운의 뒤로 걸어오는 하늘색 머리칼이 보였다.

디아나의 눈빛이 낭패감으로 얼룩졌다.

에드윈에게 빨래터에 온 것을 들켜 그런 것은 아니었다.

에드윈이 대공의 앞에서 아는 척하면 어쩌나 걱정되었다.

에드윈은 디아나 또한 대공의 피를 이은 사람이라고 했는데 아까처럼 대공녀 대하듯 하면?

그렇게 되면 디아나는 물론이고 에드윈 역시 대공에게 밉보일 거다.

대공이 제 자식으로 인정하지 않았는데 에드윈이 마음대로 디아나를 공녀 취급하는 꼴이니까.

‘나 때문에 에드윈이 욕먹기라도 하면 안 되는데.’

디아나와 에드윈의 시선이 마주쳤다. 디아나를 발견한 에드윈은 무척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할 일이 없다고 돌아다니고 있기에 데려왔습니다만…… 대공 전하 혼자 계신 게 아니었군요.”

로운의 목소리가 울렸다,

디아나는 에드윈에게서 시선을 거두며 로운을 보았다.

그는 오늘도 디아나를 보며 그때와 같은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그의 눈빛은 디아나를 날카롭게 훑어보고 있었다.

그는 디아나의 주변을 전부 훑어본 뒤 아주 잠깐 미간을 찡그렸으나 대공의 목소리에 언제 그랬냐는 듯 미소를 지었다.

“무슨 일이냐.”

“전하께서 오실 시간이 넘어도 돌아오지 않아 제가 이리 찾으러 온 것이 아니겠습니까. 중요하게 전해 드릴 말씀도 있고요.”

“중요한 일?”

대공의 눈썹이 위로 치켜졌다.

“네. 저번에 따로 명하신 일 관련입니다.”

힐긋, 로운의 시선이 디아나를 향했다 대공에게로 돌아갔다.

뭔가 기분 나쁜 시선이었다. 꼭 디아나가 있어서 말을 못하겠다는 그런 시선.

나라고 여기 있고 싶어 있는 것도 아닌데.

디아나는 뭔가 비밀스런 눈빛을 주고받고 있는 대공과 로운에게서 시선을 돌려 에드윈을 보았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디아나는 에드윈이 순간 자신에게 인사를 할까 불안해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런 그녀를 보던 에드윈은 슬쩍 고개를 돌려 대공과 로운을 보았다.

대공과 로운은 무슨 이야기를 나누는지 몰라도 이쪽에 관심이 없었다.

에드윈은 꼭 몰래 눈치를 살피는 사람처럼 그들을 확인하곤 조심스레 디아나를 바라보았다.

에드윈은 다 안다는 듯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리고 아주 빠르고 신속하게 디아나에게 고개를 숙이며 예의를 갖추었다.

고개를 든 그의 환한 미소에 디아나의 불안함이 싹 날아갔다.

에드윈의 배려가 너무 고마워 디아나는 그를 보며 살짝 미소를 그렸다. 그러자 에드윈의 녹빛 눈동자가 당황한 듯 흔들림을 보였다.

‘내가 웃는 게 이상한가?’

웃을 일이 거의 없어 디아나는 제 웃는 얼굴이 어떤지 모른다.

에드윈의 반응에 디아나는 황급히 올라갔던 입꼬리를 내렸다.

“아.”

디아나가 웃음기를 싹 지우자 에드윈은 무언가 다급하게 할 말이 있는 듯 입술을 벌렸다가 대공의 움직임에 재빨리 입을 다물었다.

로운과 이야기가 끝났는지 대공의 시선이 디아나를 향했다.

대공은 디아나를 가만히 보다 에드윈에게 시선을 돌렸다.

“에드윈.”

대공의 부름에 에드윈이 몸에 힘을 바짝 주며 경직된 얼굴로 답했다.

“네, 대공 전하.”

“오후 훈련까지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았나?”

“네, 그렇습니다.”

“그럼 네가 저 빨래를 대신 하거라.”

“네, 네……?”

곧장 대답하던 에드윈이 순간 이해를 못 한 얼굴로 대공을 보았다.

로운 역시 놀란 눈빛으로 대공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디아나도 마찬가지였다.

대공은 세 사람의 시선이 한꺼번에 쏠리자 기분 나쁜지 미간을 좁혔다.

그에 디아나가 제일 먼저 대공에게서 시선을 거두었다.

“다시 말해야 하는 거냐?”

“아닙니다. 정확히 알아들었습니다, 전하.”

에드윈이 기합이 들어간 목소리로 답했다.

“그래, 일이 다 끝나면 디아…… 나를 집까지 데려다주고 복귀하도록.”

“네, 전하.”

디아나는 이해가 가지 않는 배려에 무심코 대공을 바라보았다.

대공도 디아나를 보고 있었는지 고개를 돌리자마자 그와 시선이 마주쳤다.

디아나를 바라보던 대공의 가지런한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는 무언가 복잡한 표정으로 디아나를 아래위로 훑어보다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몸을 돌렸다.

“그만 돌아간다.”

“네, 전하.”

대공은 빠르게 냇가를 걸어갔다. 로운은 디아나를 서늘한 눈빛으로 한번 보고는 대공의 뒤를 쫓았다.

디아나가 멀어지는 대공의 뒷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자, 에드윈이 그녀를 불렀다.

“아가씨.”

에드윈은 디아나를 안쓰러운 눈빛으로 보고 있었다.

아마 디아나가 대공을 바라본 것의 의미를 오해한 듯했다.

“난 괜찮아.”

“네, 아가씨.”

에드윈은 더 묻지도, 위로를 하지도 않고 싱긋 미소를 그렸다.

디아나는 그를 따라 미소를 짓다 움찔하며 입꼬리를 멈추었다.

자신이 웃으면 그가 또 당황할까 봐.

어색하게 입꼬리를 내린 디아나가 에드윈에게 물었다.

“에드윈, 나 웃으면 많이 못생겼어?”

“네? 그게 무슨…… 아, 아까! 역시 오해하셨군요.”

“오해?”

무슨 오해? 디아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에드윈을 보았다. 에드윈이 디아나에게 몸을 기울였다.

“네, 제가 놀랐던 건 아가씨가 웃는 모습이 너무 예뻐서였습니다. 정말 요정님이 나타난 줄 알았다니까요.”

요정이라니.

“……말도 안 돼.”

그의 말에 괜히 부끄러워져 볼에 열이 올랐다.

“말도 안 된다뇨, 아가씨께서 얼마나 예쁘신데요. 다들 말을 안 해서 그렇지, 속으론 요정님 같다고 생각하고 있을 겁니다. 제가 확신할 수 있어요.”

비장하기까지 한 에드윈의 진지한 얼굴을 본 디아나는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하하, 웃던 디아나는 순간 제 웃음소리에 화들짝 놀랐다.

그리고 혹시라도 누가 보았을까 본능적으로 주변을 살폈다.

‘내가 소리를 내서 웃다니.’

처음이었다.

디아나가 당황스럽고 얼떨떨해하던 그때, 에드윈이 한쪽 무릎을 굽히며 디아나와 시선을 맞추었다.

그는 디아나를 보며 괜찮다는 듯 상냥한 미소를 지었다.

“웃으니까 정말 예쁘세요, 아가씨. 그러니까 아무런 걱정 말고 항상 밝게 웃으셨으면 좋겠어요.”

“……응, 고마워.”

디아나는 난생처음으로 편안하게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 말했다. 에드윈은 따뜻한 눈빛으로 디아나를 보다 빨랫감으로 시선을 내렸다.

“흠, 그럼 이제 한번 시작해 볼까? 아가씨, 추우신데 이거라도 입고 계세요. 옷이 너무 얇으시네요.”

에드윈은 입고 있던 기사 제복 상의를 벗어 디아나의 어깨 위에 걸쳐 주었다.

에드윈에겐 딱 맞는 상의였지만 디아나에게는 땅바닥에 끌릴 정도로 큰 옷이었다.

에드윈의 재킷이 바닥에 끌리는 것을 본 디아나는 화들짝 놀라며 재킷을 벗으려 했지만 에드윈이 안 된다며 옷을 잡았다.

“입고 계세요.”

“아냐, 그리고 빨래는 에드윈이 안 해 줘도 돼. 내가 할게. 나 빨래 잘해.”

디아나는 에드윈에게 빨래를 맡길 생각이 없었다.

자신의 일이었고, 얼음장 같은 물에 빨래를 한다는 건 꽤 힘든 일이었으니까.

“대공 전하의 명령에 불복하면 전 기사단에서 쫓겨날 겁니다. 저 갈 데도 없는데…… 그냥 제가 하게 해 주시면 안 될까요?”

에드윈이 울상을 지으며 디아나를 보았다.

갈 데도 없는데 이 겨울에 쫓겨나다니. 그건 정말 끔찍한 일이다.

디아나가 항상 해 오던 걱정이라 그런지 그의 마음이 백 번 공감되었다.

“그래도…… 손이 많이 시릴 텐데…….”

디아나가 냇물을 힐끔 보며 말하자 에드윈이 고개를 저었다.

“전 원래 추위를 잘 안 탑니다. 그러니 그런 걱정은 안 하셔도 됩니다. 아가씨, 그럼 여기 앉아 계세요. 제가 금방 끝낼 테니까요.”

에드윈은 디아나를 커다란 바위 위에 앉혀 놓고는 빨랫감을 방망이로 두드리기 시작했다.

퍽퍽-.

빨래를 하는 에드윈의 손짓은 꽤 어설펐지만 힘이 세서 그런지 평소 디아나의 빨래 속도보다 훨씬 빨랐다.

순식간에 뚝딱 빨래의 때를 지우고 빨랫감들을 냇물에 헹구는 에드윈의 뒷모습을 보던 디아나는 문득 대공을 떠올렸다.

‘나를 싫어하는 줄 알았는데…….’

조금의 애정도 보이지 않던 서늘하고 싸늘했던 눈빛은 지금도 선명하게 기억이 났다.

그의 눈빛은 흡사 세이아와 비슷했다.

그랬던 그가 아까 디아나의 물음에 대답해 주고, 에드윈을 시켜 디아나의 일도 도와주었다.

그러고 보면 의원도 보내 주었다.

당장 이 집에서 내쫓고 싶다는 눈빛으로 보았으면서.

‘대체 그분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그게 무엇이든 부디 안 좋은 쪽은 아니었으면 좋겠는데, 자꾸만 불길한 예감이 든다.

“아가씨, 다 끝났습니다. 많이 기다리셨죠?”

어느새 빨래를 다 끝낸 에드윈이 바구니를 들고 다가왔다.

“아니, 난 괜찮아. 에드윈이 추웠을 텐데, 미안해.”

“미안하다뇨, 다음부턴 그런 말씀 마십시오. 그럼 이만 집으로 가실까요?”

에드윈이 바구니를 한 손에 들고 디아나에게 손을 내밀다 움찔하며 갑자기 손을 뒤로 물렸다.

“왜 그래? 손 다쳤어?”

“아뇨, 그게 아니라…… 아직 제 손이 많이 차가워서 아가씨가 잡기엔 무리일 거 같아서요.”

“음…… 손이 시릴 땐 꼭 잡으면 따뜻해져. 내가 자주 해 봤거든.”

디아나는 멀어지는 에드윈의 손을 먼저 잡았다. 혹 도망갈까 힘을 주어 꼭 잡자 놀란 듯 움찔하던 에드윈이 곧 미소를 지으며 디아나의 손을 맞잡았다.

‘빨리 따뜻해졌으면 좋겠어.’

디아나는 에드윈의 차가운 손이 미안해 마음속으로 바랐다.

그러자 그녀의 마음이 전해진 건지, 에드윈의 손이 금세 따뜻해졌다.

“어? 아가씨의 말이 맞았네요. 되게 빨리 손이 따뜻해졌어요.”

에드윈은 놀란 듯 눈을 크게 뜨다 곧 디아나에게 미소를 지었다.

“아가씨 덕분이에요, 감사해요.”

“아냐, 내가 더 고마워.”

“음, 집으로 가는 길에 손이 다시 차가워질 수도 있으니…… 이렇게 잡고 가는 게 좋겠죠?”

“응? ……응!”

다시 식지 않을 만큼 따뜻해진 손이었지만 에드윈의 손을 놓치고 싶지 않아, 디아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밝은 얼굴로 답하는 디아나의 모습에 에드윈의 입꼬리가 스르르 올라갔다.

“그럼 이제 집으로 가시죠, 아가씨.”

디아나는 에드윈의 손을 꼭 잡고 집으로 향했다.

“여기에서, 지내고 계셨군요.”

디아나와 레아가 사는 오두막 앞에 도착한 에드윈은 오두막을 보다 미간을 좁혔다.

다른 사용인들의 무시는 익숙했지만 왠지 에드윈에겐 이 허름한 곳을 보이기 창피해 디아나는 볼을 붉혔다.

별채의 하녀, 하인들이 지내는 건물보다 훨씬 못한 곳이었다. 마구간보다 조금 나은 정도랄까.

디아나는 에드윈이 혹시라도 걱정할까 태연한 얼굴로 대답했다.

“응, 나 여기서 지내.”

디아나는 이곳에서 어릴 적부터 지금까지 살아와 정말 아무렇지 않기도 했다.

물론 겨울엔 난방이 잘되지 않아 그게 좀 힘들긴 했지만 그것도 이젠 적응이 되어 버틸 만하다.

에드윈은 그런 디아나를 안쓰러운 눈빛으로 보았지 부러 씩씩한 척하는 디아나의 마음을 느낀 듯 곧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가씨, 혹시 필요하신 게 있으시면 저에게 언제든 말씀해 주세요. 제가 가져다드릴 테니까요.”

“응, 알았어. 에드윈, 바구니 이제 줘. 내가 들게.”

“아, 네.”

에드윈이 디아나에게 바구니를 내밀던 그때.

“디아나!”

레아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렸다.

디아나는 화들짝 놀라며 목소리가 들린 곳으로 몸을 돌렸다.

매일 저녁 늦게 들어왔었는데, 하필 오늘 일찍 오다니.

레아는 빠르게 디아나 앞으로 다가왔다. 그녀는 디아나와 에드윈을 매서운 눈초리로 번갈아 보았다.

한데 먼저 입을 연 건 의외로 레아가 아닌 에드윈이었다.

“어…… 혹시, 저희 어디서 본 적 있지 않나요?”

에드윈은 눈을 가늘게 뜨며 레아의 얼굴을 보고 있었다.

본 적이 있냐니. 그게 무슨 말이지?

디아나는 에드윈과 레아를 번갈아 보았다.

에드윈과 레아, 레아와 에드윈.

두 사람이 어디서 만났다고 하기엔 너무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었다.

레아는 에드윈의 말에 순간 당황한 얼굴을 했지만 곧 표정을 갈무리하며 입술을 움직였다.

“아뇨, 전 기사님을 본 적이 없습니다.”

레아의 칼 같은 반응에 에드윈은 가늘어진 눈매를 바로 했다.

“아, 죄송합니다.”

머쓱한 얼굴로 답한 에드윈이 사과하자 레아의 시선이 아래로 내려왔다.

에드윈과 마주 잡은 디아나의 손으로.

레아보다 키가 큰 에드윈은 보지 못했지만 디아나는 순간 레아의 눈빛이 살벌하게 번뜩이는 걸 보았다.

디아나의 본능이 에드윈의 손을 당장 놓으라 소리쳤다.

함께 걸어오는 동안 따뜻해진 에드윈의 손을 놓고 싶지 않았지만 디아나는 어떤 불호령이 떨어질지 몰라 얼른 그에게서 손을 뺐다.

에드윈의 시선이 저를 향한 것이 느껴졌지만 디아나는 그를 보지 않았다.

“혹시 아가씨의 어머니 되시나요?”

에드윈의 목소리가 머리 위에서 울렸다. 레아는 디아나를 빤히 보다 에드윈에게 답했다.

“네, 제가 디아나의 엄마예요. 한데 어째서 대공성의 기사님이 디아나와 함께 있는 거죠?”

레아의 물음에 디아나는 순간 몸을 움찔했다. 대공과 만났다는 걸 레아가 알게 되면 화를 낼 거 같았다.

“……당신이 부모였군.”

디아나가 불안하게 눈치를 살피던 그때 질문의 답과는 거리가 먼 에드윈의 작디작은 중얼거림이 머리 위로 흩어졌다.

그의 뜬금없는 말도 말이었지만 디아나는 한 번도 들어 본 적 없는 에드윈의 낮은 목소리에 놀라 그를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에드윈의 시선은 디아나가 아닌 레아를 향하고 있었다.

레아는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는 에드윈에게 다시 물었다.

“네? 방금 뭐라고 하셨나요? 소리가 작아 듣지 못했어요.”

소리가 너무 작아 레아에겐 들리지 않은 듯했다. 에드윈은 꼭 화가 난 사람처럼 레아를 집요하게 쳐다보며 주먹을 그러쥐었다.

에드윈에게서 무언가 이상함을 느낀 듯 레아의 얼굴에 의심의 가닥이 서리던 그때, 에드윈은 특유의 서글서글한 미소를 지었다.

“아, 별말 아니었습니다. 하하, 전 별채에 볼일이 있어 들렀다가 아가씨가 무거운 짐을 들고 있는 거 같아 도와드린 것입니다.”

응?

디아나는 자연스럽게 거짓말을 하는 에드윈의 얼굴을 힐긋 보았다.

디아나와 눈이 마주친 에드윈이 눈을 찡긋했다.

두 번이나 자신을 구해 준 그를 신기하게 보던 디아나는 레아의 목소리에 시선을 황급히 거두었다.

“어머나, 정말 감사드립니다. 이렇게 옷까지 빌려주시고 짐까지 들어다 주시다니 정말 고마운 일이에요. 디아나, 옷을 이제 돌려 드리지 그러니?”

“아, 네.”

디아나는 아직 입고 있던 에드윈의 재킷을 벗어 그에게 건넸다.

레아가 다시 말했다.

“디아나, 그냥 돌려 드리기만 하다니 이게 무슨 예의 없는 행동이니. 감사하다고 인사를 드려야지.”

레아는 디아나에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저번 대공성에서처럼 좋은 엄마인 척하는 그녀의 모습은 두 번 겪어도 좀처럼 적응이 되지 않는다.

레아 때문에 몸에 소름이 오소소 돋아난 그때, 에드윈이 말했다.

“감사 인사는 괜찮습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이니까요.”

레아는 과하게 놀란 표정으로 에드윈을 보며 말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이라뇨, 기사님. 디아나는 기사님의 호의를 받을 수 있는 위치가 아니랍니다. 디아나는 대공 전하의 사생아일 뿐이니까요.”

“…….”

에드윈의 얼굴에서 순간 웃음기가 사라졌다.

디아나는 그의 부드러운 녹빛 눈동자에 분노가 번뜩이는 것을 보았지만 레아는 보지 못한 듯 다시 디아나를 보며 말했다.

“디아나, 뭐 하니. 어서 기사님께 고개 숙여 감사 인사를 드리렴.”

고개 숙여 감사 인사를 드리라니.

아까부터 디아나를 아가씨라 부르는 에드윈의 말을 들었을 텐데도 레아는 굳이 디아나의 신분이 그보다 낮다는 걸 확인시켜 주고 싶은 것 같았다.

친엄마면서 어쩜 이렇게 한결같이 디아나를 업신여기지 못해 안달 난 사람처럼 행동할까.

속에서 울컥 화가 올라왔지만 디아나가 할 수 있는 건 양순한 대답뿐이었다.

“……네.”

레아는 디아나가 고개를 숙이지 않으면 강제로 머리를 눌러 버릴 듯한 눈빛으로 보고 있었다.

굳은 표정의 에드윈에게 고개를 숙이려던 그때, 에드윈이 큰 소리를 냈다.

“아!”

“깜짝이야. 왜 그러시나요, 기사님?”

에드윈의 짧은 탄성에 놀란 레아가 에드윈에게 고개를 돌렸다.

디아나도 숙이려던 고개를 다시 들어 올렸다.

방금까지 굳어 있던 에드윈의 얼굴에 다급함이 서려 있었다.

에드윈은 나와 레아를 번갈아 보더니 미안한 듯 눈썹을 모았다.

“이런, 제가 급한 일이 있는 걸 깜빡했군요. 인사는 다음에 받아야 할 거 같습니다. 그럼 전 이만.”

속사포처럼 말한 에드윈은 정말 급한 일이 있는 듯 인사도 받지 않고 부리나케 달려갔다.

에드윈의 갑작스런 행동에 의아해하던 그때, 디아나는 자신을 향한 집요한 시선을 느꼈다.

고개를 돌리자 서슬 퍼런 눈빛으로 저를 보고 있는 레아가 있었다.

“……엄마.”

“넌 정말이지!”

레아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리고 디아나의 뺨을 칠 듯 그녀의 손이 높이 들렸다.

한동안 이어졌던 평화의 끝이 온 건가.

디아나는 곧 이어질 아픔을 예상하며 눈을 질끈 감았다.

한데 몇 초가 흘러도 아무런 아픔이 느껴지지 않았다.

슬쩍 눈을 떠 보자 레아의 손은 이미 내려가 있었다. 레아는 가슴이 답답한 듯 주먹으로 자신의 명치를 두드리고 있었다.

“그래그래, 조금만 더 참으면 돼. 흠집 내면 가…….”

레아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집으로 들어갔다.

뭘 참으면 된다는 거지?

이해되지 않는 레아의 말에 디아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디아나, 안 들어오고 뭐 하니!”

하지만 그녀의 고민은 레아의 세찬 목소리에 길게 이어지지도 못했다. 디아나는 그저 안 맞은 걸 다행으로 여기자고 생각하며 황급히 집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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