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 외전 제5화
강헌의 머릿속이 하얗게 비워졌다.
“건이는 나한테, 흐윽, 하나밖에 없는 가족이고…… 저는 건이가 없으면…… 아무도, 아무도…….”
사빈이 말을 하면 할수록 그의 영혼이 깎여 나갔다.
대체 이 무슨 끔찍한 소리란 말인가.
심장이 멈춰 버릴 것 같았다.
크게 심호흡을 한 그는 손으로 입을 가리고 흐느끼는 사빈의 어깨를 붙잡았다.
“사빈아.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천천히…… 내가 이해할 수 있게 말해 봐. 응?”
그의 손을 뿌리친 그녀의 커다란 두 눈에는 원망이 가득 담겨 있었다.
“우리가 이혼해도 건이는 내가 키울 거예요.”
이혼.
그 단어가 강헌의 머리를 세게 후려쳤다.
순간 제대로 호흡을 할 수가 없었다.
얼어붙은 그의 침묵에 사빈의 표정이 무너져 내렸다.
정말이었구나.
정말…… 그에게 다른 여자가…….
침대를 박차고 나온 사빈은 드레스룸으로 향했다. 그리고 캐리어를 꺼내어 손에 잡히는 대로 옷을 집어넣었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강헌이 그녀의 뒤를 따랐다.
“사빈아, 뭐 하는 거야!”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요? 어떻게, 어떻게 나와 건이를 두고 다른 여자를 만날 수가 있냐고요!”
“뭐……?”
강헌이 황망한 표정을 지었다.
다른 여자라니. 대체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인가?
사빈 외의 여자들은 그의 머릿속에 단 1초도 머문 적 없었다.
그녀가 왜 이런 오해를 하는지 알아야 했다.
“내가 다른 여자를 만나고 있다는 말이야?”
“발뺌할 생각은 말아요. 목격자도 있으니까.”
“목격자?”
“진우 오빠가 말해줬어요.”
사빈의 입에서 나온 진우의 이름에 강헌이 반사적으로 미간을 찌푸렸다.
“세인트 마리아 호텔 대표님께서 별장에 내려갔다가 보셨대요. 강헌 씨가 다른 여자와…… 별장을…….”
사빈의 목소리가 흔들렸다.
“이제 나한테 질렸어요?”
그녀의 뺨을 타고 투명한 물줄기가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이젠 내가…… 싫어졌어요? 그래서 더는 곁에 있기도…….”
강헌은 더 듣지 못하고 그녀를 와락 끌어안았다.
“그만.”
“난, 나는 아직도 강헌 씨를…….”
사랑하는데.
왈칵 차오른 울음이 입을 막았다. 제 머리를, 등을 다정하게 쓰다듬는 그의 손길에 더욱 서글퍼졌다.
“난 예전과 달라요. 다르다고요. 강헌 씨한테 다른 여자가 있는 걸 알면서 함께 살 수는 없단 말이에요.”
“놀라게 해서 미안해.”
머리 위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놀라울 정도로 차분했다.
눈가가 붉게 달아오른 사빈은 이를 악물고 그의 얼굴을 노려보았다.
워낙 맑고 유순한 얼굴이라 그런지 독하다기보다는 처연해 보였고, 그랬기에 강헌의 가슴이 더 아파 왔다.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여자를 울렸다는 사실에 자책감이 가슴을 강하게 눌러왔다.
“미안해.”
사빈이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그가 사과하는 이유는 자신의 말이 사실이기 때문이었다.
“깜짝 놀라게 해 주고 싶었어.”
“하.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거예요?”
“결혼기념일 선물을 주고 싶었어.”
그가 입을 열면 열수록 사빈은 기가 막히다 못해 황당하기까지 했다.
결혼 선물로 바람을 피웠단 말인가?
어이없다는 사빈의 표정에 강헌은 아, 하고 문득 마른세수를 했다.
‘이혼’이라는 단어가 주는 충격에 여전히 사로잡혀 있다 보니 말에 두서가 없었다.
“실은 이틀 후에 주고 싶었는데. 아무래도 지금 주어야 할 것 같군. 더는 그런 끔찍한 오해를 받는 건 사양이라.”
“오해란 말인가요?”
“응.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내가 사랑하는 여자는 당신 한 사람뿐이야.”
너무나도 진실된 눈빛에 이번에는 다른 의미로 말문이 막혔다.
거짓말을 하는 사람의 눈이 이토록 맑고 고요할 수는 없었다.
“나가자, 사빈아.”
“……어딜 가자는 거예요.”
“세인트 마리아 호텔 대표가 어디서 무엇을 본 건지 알려 줄게.”
강헌은 사빈의 손을 붙잡고 차고로 이끌었고, 그녀는 얼결에 차에 타게 되었다.
“갑자기 어디에 간다는 거예요.”
“억울해서. 평생 한 여자밖에 몰랐는데 이런 오해를 받게 될 줄이야.”
그가 안전벨트를 매어 주기 위해 그녀 쪽으로 상체를 기울였으나 사빈이 가볍게 밀어냈다.
“내가 할게요.”
늘 강헌이 매어 주며 입술에 가볍게 키스를 하는 것이 관행이었다.
미간을 찌푸리던 그가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자업자득이라는 말이 이럴 때 쓰는 표현이 맞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어쨌든 깜짝 선물이랍시고 그녀에게 비밀로 하다 이 사달이 났으니, 사빈의 오해는 모두 자신의 탓이었다.
구구절절 변명을 하느니 차라리 선물을 앞당겨 보여 주는 것이 낫다고 판단한 그는 핸들을 돌렸다.
“어디 가는 거냐니까요?”
“결혼기념일 선물 보여 주려고. 원래 이틀 뒤에 주려고 했는데 지금이 아니면 안 되겠군.”
대체 선물을 보여 주려 어디에 간다는 말인가.
차가 도로 위에 합류했기에 인제 와서 내릴 수도 없었다.
옅은 한숨을 내쉰 사빈은 시트에 몸을 묻고 고개를 살짝 돌려 차창 밖을 바라보았다.
밤이 깊어 가고 있는데.
대체 어디를 가겠다는 건지.
하지만 이대로 집에 있고 싶은 생각도 없어서 사빈은 될 대로 되라지, 하고는 눈을 감았다.
“…….”
그런 그녀를 본 강헌은 빨간불에 차가 섰을 때 그 와중에도 챙겨 나온 카디건을 여린 몸 위에 덮어주었다.
“괜찮아요.”
“가지고 있어 줘.”
“…….”
그녀는 하는 수 없이 그의 커다란 카디건으로 무릎 위를 덮었다.
실은 반바지를 입는 바람에 조금 휑하다고 느끼던 차였다.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너무나도 잘 아는, 늘 제게서 눈을 떼지 않는 강헌이었다.
그런 남자가 바람이라니.
‘아냐. 방심하지 말자. 원래 그런 사람들은 철저하댔어.’
굳게 다짐한 그녀를 태운 차가 멈춘 곳은 서해 바다가 보이는 한 단독주택 앞이었다.
“여긴 왜……?”
강헌은 대답 대신 먼저 차에서 내려 조수석의 문을 열어 주었다.
조금 경계하는 눈빛으로 주춤주춤 차에서 내린 사빈은 설명을 구하는 눈빛으로 그를 보았다.
“들어가자.”
앞장서는 강헌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그녀는 숨을 들이마시고는 그의 뒤를 따랐다.
강헌이 도어록에 손가락을 올리자 지문을 인식한 문이 달칵, 열렸다.
입구에 있는 스위치를 누른 순간.
사빈의 눈이 커다래졌다.
“이, 이게 무슨…….”
“당신을 위해서 준비했어.”
커다란 별장의 사방에는 미술 작품들이 걸려 있었다.
신진 작가에서부터 호당 100만 원에서 심지어는 1000만 원에 해당하는 작가의 작품이 적당한 간격을 두고 얌전히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모두 그녀가 좋아하는 작품들이었다. 그에게 몇 번이고 보여 주던 작품도 있었고, 지나가듯이 아름답다고 말한 작품까지 빠지지 않고 전시되어 있었다.
“몇 개는 해외에서 공수하느라 시간이 빠듯했어. 다행히 일정에 맞출 수 있었고, 큐레이터와 감정가와 레일을 설치하는 직원들이 다녀갔어. 세인트 마리아 호텔 대표가 본 여자는 이번 프로젝트 총 책임자였고.”
“총 책임자……?”
“참고로 유부녀야. 직원 중에 남편이 있고. 세쌍둥이 부모라고 하더군.”
어안이 벙벙한 사빈이 말을 잇지 못하자 강헌이 휴대폰을 꺼냈다.
“못 믿겠으면 통화라도 시켜 줄게. 만남을 가지겠다면 그래도 되고.”
강헌이 직원에게 전화를 걸었다.
- 네, 부회장님.
“별장에 왔습니다. 아내도 함께.”
- 어머, 그러셨군요! 사모님께서도 기뻐하셨지요? 여보, 부회장님이셔. 지금 두 분이서 별장에 가셨다나 봐.
그때 뒤에서 아기 울음소리와 함께 남편인 듯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 혹시 무슨 문제라도 있었을까요, 부회장님?
“아니, 없었습니다. 고생했습니다. 이만 쉬십시오.”
- 네, 부회장님도 사모님과 행복한 시간 보내시기를 바랍니다.
통화를 종료한 강헌이 사빈을 보며 눈썹을 으쓱했다.
“이래도 못 믿겠다면 직원들 전부 만나게 해 줄게. 아, 내 차 블랙박스도 보여 줄게. 직원들 블랙박스도 전부 수거해서…….”
“아니, 아니요!”
사빈이 거세게 도리질을 했다.
“그러니까 이걸 준비하느라…….”
“응. 지하에는 수장고도 있어. 이 그림 전부와 별장까지 전부 당신에게 주는 결혼기념일 선물이야.”
그녀의 눈이 커다래졌다.
“벼, 별장까지요?”
“1년 전부터 준비했어. 그래서 해남댁 아주머니께 건이를 부탁드렸고.”
아아, 그래서 데려가신 거구나.
난 그것도 모르고…….
“불안하게 해서 미안해. 당신한테 깜짝 선물을 해 주고 싶은 마음에 그만.”
“전, 전 그것도 모르고 강헌 씨를…….”
강헌은 눈시울을 붉히는 사빈을 품에 안고 머리와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사랑해. 내가 평생 사랑할 여자는 당신뿐이야.”
“흐윽…… 미안해요, 정말…….”
“그 말 말고. 내가 좋아하는 말로 해 주지?”
강헌이 커다란 손으로 사빈의 눈가를 훔치며 미소를 지었다.
“……사랑해요, 강헌 씨.”
하얀 이마와 젖은 눈가, 두 볼에 차례로 입을 맞춘 강헌은 사빈의 입술을 머금었다.
천천히 벌어지는 입술 사이로 혀가 부드럽게 엉켜 들었다.
“내 아내가 되어 줘서 고마워. 평생 사랑하고 아끼며 살게.”
“강헌 씨가 내 남편이라 행복해요.”
서로를 바라보며 미소를 짓는 두 사람의 얼굴이 닮아 있었다.
강헌이 그녀를 안아 들었다.
“가, 강헌 씨?”
“건이가 해남에 내려가기 전에 나한테 살짝 속삭이더라고. 동생이 가지고 싶다네.”
“네에?”
“우리 아들이 원하는 건 뭐든 들어주기로 약속한지라.”
“정말!”
얼굴이 붉어진 그녀가 강헌의 어깨를 살짝 때렸다.
그러자 그가 소리 내어 웃었다.
커다란 통창 밖으로 떠 있는 보름달이 환하게 빛났다.
소원을 이루어 주겠다는 듯이.
<완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