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편의 연인에게 (89)화 (89/90)

특별 외전 제4화

집으로 돌아와 씻고 나온 사빈은 서재로 가려다가 문득 발을 옮겼다.

침대 위에 앉은 그녀는 강헌의 베개를 품에 가만히 끌어안았다.

그의 체향이 맡아졌다.

마음을 편하게 해 주는 짙고 깊은 우디 향이 온몸을 감싸는 느낌이었다.

이 향기를…… 다른 여자도 알고 있을까.

“하…….”

생각만으로도 심장이 쪼개지는 듯 아파 왔다.

사빈은 강헌의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코끝이 뜨거워지더니 이내 눈물이 났다.

‘정말 그런 걸까?’

예전에 천문호와 추연실에게 듣기는 했다.

‘이 세계’에서는 남자가 정부를 두는 게 당연하다고. 그러니 나중에 시집을 가서도 그 부분에 대해서는 절대로 문제 삼지 말라고.

그 당시에는 그 집안에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따로 좋아하는 여자가 있는 남자여도 괜찮다는 생각이었고, 그랬기에 강헌과 결혼을 하기는 했다.

하지만 그때와 지금은 완전히 다르다.

강헌에게 다른 여자가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발밑이 무너지고 온몸이 갈기갈기 찢기는 기분이었다.

만약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지.

‘우리 건이는…….’

가장 먼저 떠오른 건 아들인 건이었다.

건과 떨어져서는 절대로 살아갈 수가 없을 것 같았다.

‘건이는 내가 데리고 갈 거야.’

어떻게 해서든, 무슨 수를 써서든 내 아들은 내가 키울 것이다.

그렇게 다짐하던 사빈의 눈에서 또다시 눈물이 터졌다.

이런 생각을 한다는 건 강헌과의 헤어짐을 전제로 하는 것이기에.

진우에게서 들은 말은 충격이었다.

강헌이 다른 여자와 별장을 보러 다녔을지도 모른다니.

‘확실한 건 아냐. 이모의 착각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네가 이런 고민까지 할 정도면 말을 해 주어야 할 것 같아서.’

이제는 진우까지 원망스러웠다.

왜 제게 그런 얘기를 전달한 건지.

고민을 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 차라리 말을 말지.

그러다 진우를 원망하는 것을 그만두었다.

차라리 잘된 것인지도 모른다.

대비할 시간을 번 셈이니까.

하지만…… 기조그룹 부회장을 상대로 자신이 뭘 어쩔 수 있단 말인가.

그의 아내가 아닌 천사빈 자체로는 도저히 그를 이길 수가 없었다.

“흐윽… 흑… 왜 하필…….”

게다가, 게다가…… 이틀 뒤면 그들의 결혼기념일이다.

건이 태어난 후 처음으로 둘만의 시간을 달콤하게 보내리라 생각했는데, 이런 일이 생길 줄이야.

이런 순간에도 그의 베개를 끌어안고 있는 스스로가 비참했다.

눈물로 젖은 베개를 제자리에 놓은 사빈은 흐느끼는 채로 욕실로 들어가 다시 세수를 하고 나왔다.

약한 모습을 보일 수는 없다.

건을 지켜야 하니까.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입술을 마주 댔던 남편이 적이 되어 버렸다.

잔인한 현실에 울컥 솟아오르는 감정을 억누르려 사빈은 천천히 심호흡을 했다.

‘건이는 세상에서 하나뿐인 내 유일한 가족이야. 절대로 잃을 수는 없어.’

* * *

“사빈아.”

현관으로 들어선 강헌은 아무도 나와 있지 않은 것을 보고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보았다.

그녀는 서재에서 업무를 볼 때면 자신이 오는 것도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집중했다.

책상 위에 놓은 작은 스탠드 하나만 켜 두고 블라인드를 치면 창문 밖으로 불빛이 새어 나오지 않아서 언뜻 아무도 없는 것처럼 보일 때가 많았다.

요즘 그녀 혼자 온전히 주도하여 기획하는 전시회 준비에 한창이었기에 당연히 서재에 있다고 생각한 강헌은 우선 씻기로 했다.

침실로 들어가 불을 켜자 거대한 침대가 보였다.

그의 시선은 곧바로 사빈이 눕는 공간으로 향했다.

그러자 몸이 뻐근해졌다.

그녀의 달콤한 향기와 가느다란 몸, 부드러운 피부가 떠오른 탓이다.

사실 업무 시간을 제외한다면 강헌은 하루 종일 사빈을 생각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지금 뭘 하고 있을까, 밥은 잘 먹었을까, 일정이 힘들지는 않을까.

걱정에 걱정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이따금 아들보다 더 걱정이 될 때가 있다는 것은 혼자만의 비밀이었다.

사빈이 알게 된다면 ‘남들 앞에서는 절대로 그런 소리 하면 안 돼요!’라며 얼굴을 붉히겠지.

건에게는 의지할 수 있는 든든한 엄마로 보이기를 바라는 모양이었다.

‘참 귀엽다니까.’

피식 미소를 지은 강헌은 옷을 벗은 뒤 샤워를 하고 나왔다.

그리고 그 역시 자신의 서재로 향했다.

부부의 서재는 2층 복도의 끝과 끝에 위치해 있어, 문을 열고 나오면 곧바로 상대방 서재의 문이 보였다.

강헌은 굳게 닫힌 맞은편 문을 바라보았다.

마치 그 문이 사빈이라도 되는 양 애틋한 눈빛이었다.

‘보고 싶군.’

같은 집에 살고 있지만 왜 눈에 보이지만 않으면 여전히 이리도 애가 타는지 모르겠다.

하나 그에게는 중요한 할 일이 있기에 아쉬움을 뒤로 하고 서재로 들어갔다.

그는 책상에 앉자마자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준비는 다 되어 갑니까?”

- 네, 부회장님.

맞은편에서 여자의 청아한 목소리가 들렸다.

- 마지막으로 말씀하신 작품까지 모두 수장고에 가져다 놓았습니다.

“수고했습니다.”

- 사모님께서 무척 행복해하시리라고 생각합니다.

그 말에 강헌이 옅은 미소를 지었다.

얼굴을 붉히며 좋아할 사빈을 떠올리니 꿀에 절인 듯 달콤한 기분이 들었다.

- 그럼 최종 정리한 현장 사진 보내드리겠습니다.

“예. 마무리하고 퇴근하십시오.”

통화를 종료한 강헌은 태블릿을 켜고 여자가 보낸 사진을 화면에 띄웠다.

‘좋아했으면 좋겠군.’

이틀 후가 무척 기대되었다.

그는 제가 준비한 선물을 다시 한번 살피며 혹 부족하거나 허술한 부분이 있는지 점검했다.

그런 다음, 사빈의 사진만 모아둔 폴더를 클릭했다.

“……예쁘군.”

화면 속에서 웃고 있는 사빈을 보니 그의 입가에도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참 한결같이 사랑스러운 여자다.

아이를 낳고 아름다움이 배가 되어 곤란할 정도였다.

힘든 시간을 함께 버텨 내고 진정한 부부가 된 우리다.

앞으로 그 어떤 어려움이 닥치더라도 사빈과 서로 의지하며 이겨 낼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잠시 자잘한 업무를 손보고 나니 시간이 꽤 지나있었다.

시계를 본 강헌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서재를 나선 그는 긴 복도를 걸어가 굳게 닫힌 문을 두드렸다.

“사빈아.”

안에서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혹시 잠들었나, 싶어서 조심스럽게 문을 열자 텅 비어있었다.

‘침실로 간 건가?’

아무래도 문이 닫힌 것을 보고 방해가 될까 싶어서 먼저 내려간 모양이었다.

강헌은 빠르게 계단을 내려갔다.

어서 아내를 품에 끌어안고 입을 맞추고 싶었다.

“사빈아.”

침실 문을 열자 사위가 깜깜했다.

스탠드의 옅은 불빛조차도 없었다.

사빈은 침대에 누워 있었다.

그의 자리를 등진 채.

평소 옆으로 누워도 항상 강헌이 쓰는 쪽을 바라보며 눕던 그녀였기에 강헌은 어쩐지 희미한 위화감을 느꼈다.

“사빈아. 자는 거야?”

조심스럽게 불러 보았지만 그녀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잠든 모양이었다.

‘많이 피곤했나.’

되도록 자신이 내려올 때까지 기다리던 그녀였는데.

걱정이 된 그는 한달음에 달려가 최대한 조심조심 그녀의 곁에 누웠다.

제게서 등을 돌린 사빈의 모습을 보니 어쩐지 심장이 덜컹거린다.

‘뭐지. 이 기분은.’

어쩐지 불길한 마음이 들어, 강헌은 팔을 뻗어 사빈의 뒤에서 허리를 끌어안았다.

품에 쏙 들어오는 가냘픈 체구와 특유의 달콤하고 포근한 향기를 맡으니 수런거리던 속이 조금씩 가라앉기 시작했다.

그는 그대로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아직 강헌은 잠이 들지 않은 상태였다.

하나 고른 숨소리 때문에 그가 잠에 빠진 줄 알았는지, 사빈이 뒤척이며 움직였다.

제 허리를 가로지른 굵고 단단한 팔을 조심스럽게 들어 치우고 침대 가장자리로 바짝 붙었다.

“…….”

강헌은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제게서 멀어진 사빈의 뒷모습이 보였다.

제게 조금이라도 닿을까 봐 몸을 한껏 웅크린 채였다.

“사빈아.”

“…….”

그녀에게서는 대답이 없었다.

미간을 찌푸린 그가 상체를 일으켰다.

“왜 그래?”

“…….”

“무슨 일 있어?”

“좀 피곤해요.”

돌아오는 대답은 차가웠다.

예전에 그녀에게서 이런 목소리를 들은 적이 있었다.

서재희, 그리고 아버지인 이 회장 때문에 저와의 이혼을 결심한 사빈이 해남으로 떠났을 때.

‘이혼에 관한 건 회장님과 얘기 끝났어요. 앞으로는 대리인을 통해서 연락을 취했으면 해요.’

그녀를 찾아가자 사빈은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처럼.

‘다시는 만나지 말아요. 처음부터 몰랐던 것처럼 그렇게 살아요.’

아주 가끔, 강헌은 악몽을 꾸었다. 바로 그때로 되돌아가는 꿈이었다.

그래서 아이를 낳고 행복하게 살고 있는 지금도 사빈만 보면 여전히 애가 타고 갈급하게 구는 것인지도 모른다.

심장이 반으로 쪼개지는 것만 같은 통증에 손바닥으로 가슴을 지그시 누른 강헌은 숨을 들이마시고 스탠드를 켰다.

절대로 자신을 돌아보지 않겠다는 듯 단호한 뒷모습을 보자 목울대 안쪽이 뜨겁게 달아오르며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사빈아.”

그는 겨우겨우 입술을 뗐다.

“왜 이러는지 말을 해 줘. 응?”

그러자 사빈이 이불을 코 아래까지 끌어올렸다. 대화할 의지가 없다는 뜻이었다.

“대체 무슨…….”

“놔요!”

강헌이 그녀의 어깨를 조심스럽게 쥔 순간, 날카롭게 외친 사빈이 그의 손을 떼어 내며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노려보았다.

강헌의 동공이 커다래졌다.

사빈이 울고 있었다.

“왜 울어, 응? 내가 뭐 잘못한 게 있나? 그럼 말해 줘. 고칠 테니까.”

“흐윽…… 건이는 내가, 흑, 내가 키울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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