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 외전 제3화
요즘 준비하는 전시회와 관련한 도록을 이리저리 살펴보던 사빈이 갑자기 움직임을 멈추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하아. 집중이 안 되네.”
자리에서 일어난 그녀는 창문을 활짝 열었다.
상쾌한 바람이 귓가를 스쳤지만 기분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그녀의 신경을 건드리는 것은 다름 아닌 강헌이었다.
요즘 남편이 이상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건과 셋이서 케이크를 만들어 먹으며 무척 행복한 시간을 보냈던 그들이다.
‘그날 이후로 강헌 씨가 좀 변한 것 같아.’
제게 잘 대해 주는 것은 여전했다.
출근하기 전에는 꼭 끌어안고 이마와 입술에 다정하게 입을 맞춰 주었고, 퇴근하고 나서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시도 때도 없이 저와 붙어 있으려 했던 예전과는 달리, 그는 서재에서 머무는 시간이 늘었고 저와 함께 있어도 누군가와 통화를 하느라 바빴다.
이해는 한다. 부회장으로 승진한 이후 강헌의 일정은 더욱 빡빡해졌고, 책임져야 할 일도 늘었다.
그래도 어떻게 해서든 시간을 내어 가족과 시간을 보내려 했던 그였는데.
바쁜 걸 안다, 알고 있다. 그래서 어쩔 수 없다는 것도.
머리로는 아는데 마음은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특히 이틀 전, 해남댁이 건을 데리고 해남으로 데리고 간 이후 더욱 심해졌다.
‘건이는 우리가 볼 테니까 오랜만에 두 분 시간 보내세요. 응?’
‘그래도 너무 죄송해서…….’
‘매년 내려갔는걸, 뭐. 그리고 내려가면 엄마 아빠는 뒷전이고 형아, 누나들이랑 놀기 바쁘잖아요. 제가 잘 챙길 테니까 걱정 마세요. 시간마다 사진이랑 영상 보낼게.’
그들은 매년 여름이면 함께 해남에 내려가 납골당에 다녀온 뒤 카페 <트라몬토> 식구들과 시간을 보냈다.
카페 주인 부부뿐만이 아니라 부부의 자녀와 손주들과도 가까워지게 되었고, 정말 해남에 사는 친척처럼 생각하게 되었다.
그런데 올해는 해남댁이 건은 자신이 돌볼 테니 부부만의 시간을 보내는 것이 어떠냐고 제안했다.
건과 처음 떨어지는 것이라 사빈은 걱정했지만 강헌은 ‘독립심을 키워 줄 수 있을 것 같다’며 흔쾌히 허락했다.
때문에 사빈 역시 은근히 기대를 한 것이 사실이었다.
연애를 하던 때처럼 지낼 수 있을 것 같다는.
하지만 착각이었다.
‘강헌 씨. 어디 가요?’
‘잠깐 전화 좀 받고 올게.’
잠깐 웃어 주고는 다시 일을 보러 서재로 향하는 강헌의 뒷모습을 볼 때마다 이따금 울컥하는 감정에 휩싸였다.
함께 있을 땐 업무와 관련된 전화가 와도 자신이 있는 자리에서 받았고, 매우 여의치 않은 상황에서만 어쩔 수 없다는 듯 서재로 향하던 재헌이었다.
문을 닫는 그 순간까지 제게 미소를 지어 주면서.
어떤 상황에서든 자신이 눈에서 보이지 않을 때까지 시선을 떼지 않던 남편이었는데.
이제 먼저 등을 돌려 멀어진다.
‘우선순위가 바뀌어서 그런 걸까?’
아무래도 아이에게 더 관심이 쏠리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으니까.
하지만 그렇다기에는 건이 지금보다 더 어렸을 때도 자신을 우선시하던 강헌이었다.
게다가 건은 해남에 내려가 있지 않은가.
‘혹시…… 아냐, 그럴 리가 없어.’
고개를 세차게 저으며 부정했지만 사빈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 있었다.
설마…… 설마 다른 여자가 생긴 건 아니겠지?
부회장으로 승진하며 강헌은 전보다 많은 사람을 만나야 했고, 개중엔 눈에 뜨이는 미인도 여럿 있었다.
지난번 부부 동반 파티에 참석했을 때가 떠오른다.
말이 부부 동반이지, 그 자리에는 미혼의 여자 배우, 모델 등이 바글바글했고 그들은 강헌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아내인 자신이 곁에 있었는데도 말이다.
만약 강헌이 그중에 누군가와 만나고 있는 거라면…….
생각만으로도 숨통이 턱 막히고 몸이 덜덜 떨려 왔다.
“아냐, 내가 왜 이런 생각을.”
그럴 리가 없다. 강헌은 자신을 가장 사랑한다고 했고, 저를 늘 소중히 대해 주었다.
“다른 여자가 있을 리 없잖아.”
그런데 왜 세차게 뛰는 가슴은 진정될 기미를 보이지 않는 건지.
천천히 심호흡을 한 사빈은 어떻게든 업무에 집중하려 애를 썼고, 어떻게든 시간이 흘러 퇴근할 때가 되었다.
미술관 주차장을 빠져나가며 그녀는 블루투스와 연결된 휴대폰으로 강헌에게 전화를 걸었다.
- 응, 사빈아. 퇴근하는 중이야?
“네. 강헌 씨는요?”
- 나는 조금 더 있어야 할 것 같은데.
“오늘 저녁 같이 먹으려고 했는데.”
- 아…… 어쩌지? 집에 가면 저녁 먹기엔 좀 늦을 것 같은데.
그의 곤란한 목소리에 사빈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핸들을 붙잡은 손끝이 차갑게 식는다. 식은 손끝이 떨린다. 자꾸만 시야가 흐려져서 눈을 몇 번이나 깜빡거렸다.
“네, 그럼 그렇게 알고 있을게요.”
- 먹고 싶은 거 있어? 윤 실장한테 말해 놓을게.
“아뇨, 알아서 해결할게요.”
- 절대 거르면 안 돼. 알았지?
“네. 이따 조심히 와요.”
- 응. 집에서 봐.
통화를 종료하자마자 사빈은 참았던 숨을 토해 냈다.
‘이런 적이 처음도 아니잖아.’
강헌은 최대한 가족과 함께 식사를 하려 했으나 일정상 그렇지 못할 때가 있었다.
그런데 이번엔 생각이 자꾸만 이사한 쪽으로 튄다.
그의 목소리가 평소와 다른 것 같은데.
누구와 함께 있던 건 아닐까?
지금 회사에 있는 게 맞을까…….
그리고 오늘은 사랑한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누구와 있어도 그 말은 빼먹지 않았는데.
“…….”
사빈은 집으로 가는 대신, 방향을 돌려 세인트 마리아 호텔로 향했다.
혼자 집에 있으면 자꾸 나쁜 쪽으로만 생각할 것 같았고, 달콤한 것을 먹으면 기분이 나아지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직원에게 발렛파킹을 맡기고 호텔 안으로 들어온 사빈은 곧장 베이커리로 향했다.
저녁은 디저트로 때울 생각이었다.
그녀를 알아본 지배인이 반가운 얼굴로 다가왔다.
“안녕하십니까, 사모님.”
이제는 제법 익숙해진 호칭에 사빈은 살짝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셨어요.”
“베이커리에 오셨나 봅니다.”
“네, 맞아요.”
“마침 오늘 신상품이 출시된 날이랍니다.”
“제가 때를 잘 맞춰 왔네요.”
지배인과 간단히 대화를 마친 사빈은 호텔 베이커리로 향했다.
신제품인 살구 마들렌과 얼그레이 마들렌, 그리고 라즈베리 케이크를 주문한 사빈은 가장 안쪽에 자리를 잡고 앉아 포크로 케이크 가장자리를 천천히 베어 냈다.
그녀는 일부러 맛을 느끼는 데 집중했다. 강헌이 떠오를 때마다 혀끝이 아리도록 다디단 크림과 빵을 계속 집어넣었다.
“천사. 뭘 그렇게 전투적으로 먹어?”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고개를 들자 진우가 미소를 지은 채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선배.”
“미술관에서 무슨 일 있었어?”
“아, 아뇨. 그냥. 갑자기 먹고 싶어서요.”
“남편은?”
“회사요. 야근이에요.”
사빈의 맞은편에 자리를 잡고 앉은 진우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표정이 너무 어두운데?”
“요즘 일이 많아서요. 이것저것 신경 쓸 일이 많다 보니 스트레스가 쌓여서 단 게 먹고 싶더라고요.”
진우는 여전히 의아한 표정을 지우지 못했다.
결혼한 이후 사빈의 얼굴이 이토록 어두운 적도, 스트레스가 많이 쌓였다고 말한 적도 처음이었다.
남편인 이강헌 부회장이 사빈이 우울하도록 놔둘 리가 없는데.
아이를 낳은 이후, 강헌은 사빈을 더더욱 싸고돌았다. 그의 유별난 아내 사랑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그 바쁜 와중에도 아내를 위한 케이크는 반드시 호텔에 직접 들러 사 갔고, 부부 동반 모임에서는 마치 물가에 내놓은 어린아이처럼 아내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녀를 바라보는 눈빛이 어찌나 다정한지, 그들을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이 보면 막 연애를 시작한 연인처럼 보일 정도였다.
이렇게 사빈 혼자 다니게 두는 일 따위도 없었는데.
“혹시 남편이랑 무슨 일 있어? 이 부회장님이 널 우리 호텔에 혼자 보낼 리 없는데.”
더군다나 과거 그녀를 향한 자신의 감정을 잘 알고 있는 강헌이 다른 곳도 아니고, 자신이 있는 세인트 마리아 호텔에 사빈 혼자 출입하도록 두고 볼 리가 없었다.
무슨 일이 생긴 게 분명했다.
“선배.”
진우를 불러놓고 잠시 생각에 잠긴 사빈이 마들렌을 멍하니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남자들은. 언제 여자한테 질려요?”
“뭐어?”
“연애를 할 때도 질려 하는 경우가 많은데. 결혼하고 아이를 낳으면 더 그렇겠죠?”
진우는 지금 자신이 무슨 말을 들었는지 이해가 안 된다는 듯 검지로 관자놀이를 긁었다.
“저기. 그러니까 지금 네 남편 얘기하는 거 맞아?”
“…….”
“애처가로 소문난 기조그룹 이강헌 부회장님?”
목소리를 잔뜩 낮추고 묻자 사빈이 크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숙였다.
“왜, 설마 그렇게 느낄 만한 일이 있었던 거야?”
잠시 생각하던 그녀가 고개를 저었다.
“딱히 그런 일이 있던 건 아니에요. 그냥…… 요즘 너무 바쁜 것 같아서요. 얼굴 보기도 힘들고 대화하는 시간도 줄어들고. 같은 집에 있는데 따로따로인 느낌.”
말을 꺼내니 사빈은 스스로가 바보 같다 느껴졌다.
강헌은 그저 바쁜 일정을 소화하는 것뿐이고, 자신 또한 집에서 그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는 입장이 아니라 어엿한 직장이 있는 사람이다.
“말하고 나니까 별거 아니네요. 그냥 이것저것 처리해야 할 일이 많아져서 예민해졌나 봐요.”
그리 말하며 자조하던 사빈을 보던 정우가 이내 눈을 고쳐 떴다.
얼마 전 이모가 하신 말씀이 떠오른 탓이다.
‘별장 부지 알아보러 갔는데 거기서 기조그룹 이 부회장을 본 것 같아서. 여자랑 같이 온 것 같기는 한데…….’
‘여자? 사빈이요?’
‘아니었어. 여자 얼굴은 확실히 봤는데 남자 얼굴을 자세히 못 봐서. 그래도 그 키에 그 체격이 흔하지가 않으니까.’
‘에이, 그럼 절대 아니에요. 그 사람은 사빈이한테 눈이 돌아 있거든요.’
‘얘는, 말도.’
그때는 그럴 리가 없다며 웃어넘겼는데.
설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