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편의 연인에게 (86)화 (86/90)

특별 외전 제1화

“오후까지 내가 언급한 부분에 대한 수정이 이루어지지 않을 시 한 사람 한 사람 모두에게 책임이 돌아갈 겁니다.”

강헌과 눈이 마주칠까, 너 나 할 것 없이 대회의장 안에 있는 이들이 모두 고개를 푹 숙이거나 돌렸다.

“내가 더 실망하는 일이 없어야 할 겁니다.”

좌우를 둘러보는 그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

“그랬다간 지금 이 자리에 있는 몇 명은 다시는 기조그룹의 문턱을 밟을 수 없을 테니까.”

회의를 마치고 나온 직원들이 한숨을 내쉬었다.

“아드님 태어나시고 난 뒤로 조금 온화해지신 것 같았는데. 잠시뿐이었네요.”

“그러게 말이야. 에휴, 오늘도 간 떨려 죽는 줄 알았다.”

“작년 매출액 정확히 기억하시는 거 보고 혀를 내둘렀다니까요. 아마 집에서도 자는 시간 외에는 일만 하시는 게 분명해요. 사실 전 육아를 하시지는 않을까, 생각했거든요.”

김 과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말이야. 기억나지? 아이 태어난 지 얼마 안 됐을 때 회의실에서 김 실장님한테 ‘둘째한테 먹였다던 까까 이름이 뭐냐’라고 하신 거.”

“네, 똑똑히 기억해요. 회사 다니면서 그날만큼 놀랐던 적이 없다니까요. 그렇게 차갑고 날카로운 눈빛으로 ‘까까’라니.”

“그때 다들 깜짝 놀랐지. 본부장님이, 아, 그때는 부회장님이 아니라 본부장님이었으니까. 뭐, 어쨌든. 설마 지금도 그러시겠어?”

윤 대리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절대요, 절대. 회의하실 때 보면 서재에서 한 발자국도 안 나오실 것 같아요. 부엌은 밥 먹을 때 말곤 쳐다보지도 않으실 것 같고요. 아마 직접 뭘 만들어 보신 적도 없으실걸요?”

“나 같은 평범한 사람도 퇴근하고 집에 가면 녹초가 되는데, 부회장님은 오죽하실까. 분명 가사도우미가 다 하겠지.”

“하긴. 사모님께서도 미술관 때문에 바쁘실 테니까요. 이번에 전시회 크게 하던데.”

그러다 김 과장과 윤 대리가 서로를 마주 보는 채 한숨을 푹 내쉬었다.

“오후까지 수정해야 할 보고서에나 신경 쓰자.”

“네. 회사에서 쫓겨나게 되는 사람이 저희가 될지도 모르니까요.”

“그래, 일이나 하자고.”

강헌의 냉정한 눈빛을 떠올린 두 사람은 어깨를 늘어뜨리고 회의실로 향했다.

* * *

“건아. 우리 엄마가 좋아하는 케이크 만들까?”

“웅!”

“앞치마부터 하자. 아빠가 매줄게요.”

“녜!”

강헌은 커다란 손으로 앙증맞은 앞치마를 아들에게 입혀 주고 뒤에서 리본을 매어 주었다.

“다 됐다. 뒤돌아보세요.”

“쨔쨘!”

건이 뒤돌아서 팔을 위로 번쩍 들었다.

“압빠. 건이 머싯써요?”

“응. 건이 멋있어요.”

“압빠 닮아써요?”

“네, 아빠 닮았어요.”

“엄마가 엄총 조아하시게따!”

“엄마가?”

강헌의 반문에 건이 작은 머리를 끄덕거렸다.

“엄마가 그래떠요. 건이가 압빠 닮아서 조타구.”

천진난만한 목소리에 강헌이 피식 웃었다.

“압빠가 웃을 때 가슴이 콩닥콩닥거린다고 해떠요.”

“엄마가 그러셨어?”

“웅! 건이두 아빠가 웃으면 기분 조아요. 헤헤.”

눈을 접으며 웃는 아들의 하얀 볼에 우물이 팼다.

“아빠도 건이 웃을 때 기분이 좋아. 엄마 닮아서.”

아들을 꼭 끌어안고 머리에 입을 맞춘 강헌이 건을 가볍게 들어 어린이용 발판 위에 놓아주었다.

커다란 아일랜드 식탁 위에는 케이크를 만드는 데 필요한 재료들이 준비되어 있었다.

“아빠랑 달걀 깨 볼까?”

“녜! 이러케 톡- 톡- 두드려서 깨뜨려요!”

“우리 건이 정말 잘하네. 지난번보다 더 잘하는걸?”

아빠의 칭찬에 신이 난 건이 동글동글한 달걀을 열심히 깨뜨렸다.

하나씩 깨뜨릴 때마다 강헌은 열렬하게 칭찬을 해 주었고, 그럴 때마다 건은 뿌듯한 얼굴로 작은 손을 꼼지락거리며 바쁘게 움직였다.

강헌은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오늘은 오랜만에 여유로운 주말을 맞았다.

본래는 사빈까지 세 식구가 함께 서울 근교로 나들이를 떠나기로 했으나, 아침에 미술관에서 급한 연락이 오는 바람에 그녀는 서재에서 업무를 봐야 했다.

그래서 두 남자는 그들이 가장 사랑하는 여자를 위해 요리를 만드는 중이었다.

강헌은 아들이 열심히 두드려 깐 계란 위에 설탕과 물엿, 바닐라 익스트림을 넣고 핸드믹서기로 휘핑했다.

그런 다음 반죽 위에 박력분과 옥수수 전분을 체에 걸러 탈탈 털어 넣었다.

그 일련의 과정이 매우 매끄럽고 자연스럽게 진행되는 것을 보아, 강헌은 케이크를 만드는 데 아주 익숙해 보였다.

그는 아내가 좋아하는 케이크를 직접 만들어 주고 싶은 마음에 바쁜 시간을 쪼개어 베이킹을 배웠다.

비록 생크림 케이크밖에 만들지 못하지만 사빈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해했다.

“와아. 압빠 엄총 머시떠요! 잘해!”

“고마워요. 건이가 도와준 덕분이야.”

서로를 바라보며 환하게 웃는 부자(父子)의 모습은 무척 닮아 있었다.

“건이가 빵 위에다 생크림 발라볼래?”

“녜! 건이가 할래!”

강헌은 건이 다치지 않도록 뒤에서 함께 스패출러를 붙잡고 천천히 크림을 펴 발랐다.

별거 아닌 움직임에도 아이는 까르르 웃으며 기뻐했고, 해맑은 모습에 강헌 역시 입가에서 미소가 떠나질 않았다.

이윽고 완성된 케이크 위에 건이 라즈베리와 딸기를 콕콕 깜찍하게 올려놓았다.

“와아! 다 돼따!”

건이 다리를 위아래로 움직이며 손뼉을 짝짝짝- 쳤다.

“바로 자르면 모양 망가지니까 조금 식은 다음에 잘라 보자. 알았지?”

“녜, 압빠!”

“그동안 정원에서 농구 할까?”

“꺄아아악! 농구!”

건의 손을 씻기고 앞치마를 풀어 준 강헌은 자신의 앞치마도 풀고 정원으로 향했다.

7월의 하늘은 맑고 깨끗했다. 조금 덥기는 했지만 평소보다 습기가 적은 날이라 야외에 있어도 괜찮을 듯했다.

그래도 혹시 몰라 건에게 모자를 씌워 준 건은 어린이용 농구공을 바닥에 통통 튕기다가 건에게 넘겨주었다.

“잡아따!”

“잘했어요. 건이 이제 잘 잡네?”

“헤헤. 엄마랑 연습해떠요!”

“엄마랑? 언제?”

“압빠가 집에 오시기 전에 엄마랑 열씨미 연습해떠요!”

담당하는 프로젝트가 많아진 사빈은 이곳저곳에서 쇄도하는 초청과, 또 그녀 스스로 필요에 의해 따로 공부를 병행하는 중이었다.

그런데 자신이 퇴근하기 전에 늘 건과 놀아 주었다니. 그것도 농구를 말이다.

가늘고 여리여리한 아내의 몸을 떠올리자 강헌은 절로 미간에 힘이 들어갔다.

“압빠. 얼굴에 먹구름이 몰려와떠요.”

건이 울망울망한 눈으로 올려다보자 얼른 표정을 갈무리한 강헌이 아들을 살짝 끌어안고 머리에 입을 맞추었다.

“건이가 농구를 너무 잘해서 아빠도 열심히 해야겠다고 생각했어.”

“정말?”

“응. 이제 골인할 수 있겠다. 우리 골대에 던져 볼까?”

“녜!”

고개를 힘차게 끄덕인 건은 아빠의 지시에 따라 요기조기 열심히 뛰며 공을 튕겼다.

통- 통- 통-

열어놓은 창문 사이로 농구공이 바닥에 튕기는 귀여운 소리가 들려왔다.

모니터에서 시선을 뗀 사빈이 자리에서 일어나 창밖을 내려다보았다.

‘귀여워라.’

그녀의 입가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정원에서 농구를 하고 있는 두 남자의 모습이 무척이나 귀엽고 사랑스러웠다.

그러다 건의 모자가 벗겨지자 강헌이 얼른 주워 툭툭 털어 준 뒤, 아들에게 조심스럽게 씌워 주고는 미소를 지었다.

그 근사한 미소에 사빈의 심장이 두근거렸다.

남편은 아직도, 여전히, 참으로 한결같이 잘생기고 멋있었다.

함께 외출을 나가면 건의 손을 붙잡고 있음에도 여자들은 그에게 시선을 빼앗겼다.

누가 보아도 마음에 드는 이성을 바라보는 눈빛에 사빈은 속으로 질투 아닌 질투를 한 적도 많았다.

“우리 건이도 크면 아빠처럼 인기가 많겠지?”

건은 벌써부터 싹이 보였다. 아직 아기임에도 불구하고 이목구비가 각자 선명한 존재감을 뿜어내고 있었다.

길을 가다가 어린이 모델 제의를 받은 적도 몇 번이나 있었다.

“너무 귀여워.”

팔불출이라는 걸 알고 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너무 귀여운 걸 어떡하나.

그러다 문득 동영상으로 모습을 남겨야겠다는 생각에 휴대폰을 가져왔다.

직사각형의 프레임 안에 그녀가 사랑하는 두 남자가 담겼다.

강헌이 건네준 공을 작은 손으로 열심히 두드리며 어린이용 낮은 골대로 달려가는 건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사빈은 가슴이 뭉클했다.

갓 태어난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저렇게 씩씩하게 뛰어다니다니.

“우아아! 들어가따!”

골인한 건이 깡충깡충 뛰며 제 아빠에게 매달렸다.

강헌이 아들을 가볍게 안아 들며 볼에 뽀뽀를 해 주었다.

그러다 고개를 든 건이 어! 하고 손가락으로 위를 가리켰다.

“엄마다!”

눈이 마주친 사빈은 한 손으로는 휴대폰을 든 채 다른 한 손으로 손을 흔들었다.

“엄마아!”

“우리 건이 농구 잘하네?”

“엄마 보고 시퍼!”

“응, 엄마 지금 내려갈게요.”

“꺄아아악!”

건이 손뼉을 치며 좋아했다. 사빈을 보며 눈을 접고 있는 강헌 역시 속으로는 아들처럼 격렬하게 기뻐하는 중이었다.

“건아. 우리도 들어갈까? 엄마한테 케이크 보여드려야지.”

“녜!”

1층에서 마주한 가족은 마치 각자 여행을 떠났다가 오랜만에 만난 사이처럼 서로를 끌어안고 쪽쪽 뽀뽀를 하며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다.

“엄마, 건이랑 압빠랑 케이크 만들어떠요!”

“어머, 그랬어요?”

“녜! 엄마랑 건이가 조아하눈 베리로 만들어떠요!”

“세상에, 좋아라. 우리 얼른 손 씻고 먹으러 갈까요?”

강헌이 건을 바닥에 내려주며 말했다.

“손 씻기고 올게.”

“응, 만드느라 고생 많았어요.”

건이 짧은 다리로 먼저 욕실로 향하고 있는 것을 본 강헌이 사빈의 목을 감싸며 입술을 머금었다.

놀라 벌어진 틈으로 젖은 혀를 밀어 넣은 강헌이 그녀의 입 안을 한 번 훑고는 혀를 가볍게 휘감았다 놓았다.

“빨리 밤이 됐으면 좋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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