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제10화
강헌이 사빈의 가슴을 조금 세게 움켜쥐며 귀를 앙, 아프지 않게 물었다.
“앗, 가, 강헌 씨.”
사빈이 어떻게든 소리를 내지 않으려 입술을 깨물었다.
“이, 이러다 건이 깨겠어요.”
그 말에 강헌은 아내의 허리를 감은 채로 아기 방을 나섰다.
조심스레 문을 닫은 두 사람은 다시 침실로 돌아왔다.
강헌이 사빈의 목덜미에 입술을 묻으며 속삭였다.
“평소엔 당신 관심 빼앗겨도 참지만. 이 순간만큼은 양보 못 해 줘.”
사빈 못지않게 강헌 역시 건에 대한 사랑과 관심이 지대했다.
아이가 내는 소리에 즉각 반응하며 뛰어갔고, 잠시만 눈을 떼도 걱정스러웠으며 보고 싶었다.
그렇지만 지금처럼 건이 서너 시간 정도 깨어나지 않을 것이 확실한 상태에서는 이렇게 고집(?)을 부리곤 했다.
부부만의 시간을 가질 때만큼은 사빈이 제게 온전히 집중해 주었으면 했다.
자신이 그러하듯이.
그녀의 목을 지분거리던 강헌이 별안간 아내의 여린 어깨에 이마를 기대고 중얼거렸다.
“가끔 내가 미친놈 같다는 생각이 들어.”
그의 말에 눈을 크게 뜬 사빈이 그의 어깨를 붙잡으며 자신과 얼굴을 마주 보게 했다.
“왜 그런 생각을 했어요?”
강헌이 그답지 않게 머뭇거리자 사빈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강헌 씨, 왜 그래요? 무슨 말 못 할 일이라도 있어요?”
강헌이 미간을 좁혔다.
확실히 쉽게 말을 꺼낼 수 없는 일이긴 했다.
어떻게 말하겠는가.
이따금 아들에게 질투를 느낄 때가 있다고 말이다.
건과 함께 있을 때, 사빈은 종종 세상에 오직 둘밖에 없다는 듯한 분위기를 풍겼다.
그녀의 머릿속에 온통 아들밖에 들어차지 않은 순간을 목도할 때마다 건은 강렬한 감정에 사로잡혔다.
물론 세상 그 누구보다도 건을 사랑하지만…… 그에게는 여전히 사빈이 우선이었다.
사빈 역시 자신을 가장 우선시해 주기를 바랐다.
여전히 그녀에게는 자신이 가장 중요한 사람이기를 바랐다.
그런 생각을 하다가 문득 고개를 돌린 건이 저를 보며 방긋 웃으면…….
마음이 사르르 녹아내리면서.
도대체 이게 뭐하는 건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저렇게 예쁘고 사랑스러운 내 아이에게 질투를 느끼다니.
스스로에게 어이가 없어졌고 또한 죄책감이 들었다.
과연 아빠 자격이 있는 것인가.
이 상태를 정상이라고 할 수 있을까.
건에게 좋은 아빠가 될 수 있을까.
또, 사빈에게는 좋은 남편이 될 수 있을까…….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한없이 이어졌다.
“강헌 씨.”
사빈이 그의 뺨을 감쌌다.
“숨기는 거 없이 마음을 솔직하게 털어놓기로 했잖아요.”
아내의 부드러운 음성에 강헌이 무거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이따금.”
“이따금?”
“……건에게 질투를 느껴.”
“질투요?”
“이제 당신에게 가장 우선시되는 사람이 내가 아니라는 생각에.”
강헌이 다급히 덧붙였다.
“그렇다고 건이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건 아냐. 내게도 우리 건이는 무척 소중해. 내 목숨을 내놓을 수 있을 만큼.”
후, 하고 그가 한숨을 내쉬었다.
“이상하지. 나도 이런 내가 이상하고 이해가 안 가.”
정말로, 하고 그가 덧붙였다.
“내가 건이에게 좋은 아빠가 될 수 있을지 자신이 없어.”
사빈이 그를 안아 주며 단단하고 너른 등을 다독였다.
“권 박사님이 그러셨는데, 그건 지극히 당연한 감정이래요. 둘만이 전부이던 세계에, 어쨌든 한 사람이 더 끼어드는 거니까요.”
강헌은 속마음이나 감정을 누구에게도 터놓지 않았다.
오직 사빈을 제외하고는.
사빈이 그의 전부였다.
그를 잘 알고 있는 권 박사는 미리 사빈에게 일러두었었다.
[온전히 자신을 향하던 관심이 아이에게 분산되면 남편은 혼란을 느끼고 질투를 느끼게 됩니다. 이건 자연스러운 감정이에요. 여자뿐만이 아니라 남자도 산후 우울증을 겪을 수 있고, 아빠가 될 마음의 준비가 필요합니다. 그 기간은 사람마다 다르지요.]
[아, 그렇군요.]
[특히 본부장님처럼 자신의 세계에 지극히 한정된 사람만 받아들이는 성향이라면 더욱 그렇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권 박사는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 사빈을 보며 빙그레 웃었다.
[혹여 나중에 본부장님께서 그러시거든 잘 다독여 주십시오. 누구에게 속내를 털어놓거나 도움을 청할 분이 아니니까요.]
이 순간, 사빈은 오랜 기간 동안 강헌을 지켜보고 진심으로 생각해 주는 권 박사에게 다시 한번 고마움을 느꼈다.
“아이를 향해 지나치게 적의를 불태우거나 무관심하며 방치하는 게 아니면 괜찮다고 하셨어요.”
그녀가 싱긋 웃었다.
“강헌 씨는 저도 못 듣는 건이가 칭얼거리는 소리를 듣고 새벽에도 벌떡 일어나서 달려가잖아요. 같이 있으면 한시도 눈을 떼지 않아서 지금껏 어디 부딪치거나 스친 적도 없고요.”
이따금 자신이 다가오는 소리도 듣지 못할 정도로, 강헌은 건에게 온 신경을 집중했다.
아들이 웃으면 따라 웃었고, 갑자기 울음을 터뜨리면 심장이 내려앉는다는 눈빛으로 어르고 달랬다.
그런 남자가 좋은 아빠가 될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자신 없어 하다니.
이런 고민을 하는 것이야말로 그가 좋은 아빠가 될 가능성이 높다는 방증이었다.
“아주 잘하고 있어요, 강헌 씨.”
사빈이 발끝을 들어 그의 입술에 쪽! 하고 가볍게 키스했다.
“이렇게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강헌 씨가 좋은 아빠라는 증거예요.”
“……그럴까.”
“그럼요. 그리고 지금도, 시간이 아주 많이 흐른 뒤에도 제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은 강헌 씨예요.”
사빈이 눈을 접으며 배시시 웃었다.
“사랑해요. 세상에서 제일, 강헌 씨가 상상하는 그 이상으로 아주 많이요.”
그녀의 말에, 불안하게 흔들리던 강헌의 마음이 순식간에 안정을 되찾았다.
자신의 마음속 파도를 불러일으키고 또 잔잔하게 만드는 사람은 예나 지금이나 오직 사빈뿐이었다.
이 여자가 자신의 아내라는 사실이, 제 아이의 엄마라는 사실이 그저 기적처럼 느껴졌다.
사빈이 아니었더라면 자신은 여전히 어두운 지옥 속을 헤매고 있었으리라.
“사랑해, 사빈아.”
강헌은 웃음 짓는 사빈의 얼굴 이곳저곳에 키스를 흩뿌리고는 다시 번쩍 안아 들었다.
“꺄악!”
“아까 약속한 대로 씻겨 줘야지.”
그가 나른한 미소를 지었다.
“씻겨만 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잔뜩 부끄러워하던 사빈이 그의 목을 끌어안고 속삭였다.
“저도 좋아요. 씻기만 하는 것보다.”
그의 혈관을 흐르는 피가 순식간에 뜨겁게 덥혀졌다.
사빈을 안아 든 그의 몸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욕실의 문은 한동안 열리지 않았다.
***
“건아. 뭐 먹고 싶어?”
“움. 따기쥬스!”
“또 뭐 먹고 싶어?”
“부루베리쥬스!”
운전을 하던 강헌이 눈을 접으며 미소를 지었다.
“건이 입맛이 엄마랑 똑같네.”
“그러게? 우리 건이, 이제 베리왕자님이라고 불러야겠다.”
“베리완쟈?”
“완자가 아니고 왕, 자. 건아, 엄마 따라 해 보세요, 왕. 자.”
“완. 쟈.”
아직 발음이 서툰 아기의 앙증맞은 목소리에 사빈과 강헌이 웃음을 터뜨렸다.
“우리 건이 완자야? 그럼 엄마가 앙, 먹어 버려야겠다. 우리 건이 팔을 앙, 먹어 볼까?”
“꺄아아아!”
사빈이 희고 통통한 팔을 들어 무는 시늉을 하자, 건이 까르르 높은 소리를 내며 웃었다.
해맑은 웃음소리에 강헌도 따라 웃지 않을 수 없었다.
세 가족은 현재 해남에 내려와 있었다.
KTX를 타고 해남에 내린 뒤, 파라다이스 리조트 측에서 준비한 차량을 타고 납골당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강헌을 닮아 건강하고 체력이 좋은 건은 다행히 아무런 탈 없이 잘 따라와 주었다.
“건아. 오늘 엄마랑 아빠랑 어디에 간다고 그랬지요?”
“외하부지랑 외하무니 보러 가요!”
“우리 건이 기억도 잘하네.”
사빈이 아빠를 닮아 숱 많고 새까만 건의 머리카락을 뒤로 부드럽게 넘겨 주었다.
납골당에 도착한 검은 세단이 미끄러지듯 멈춰 섰다.
차에서 내린 세 사람은 손을 붙잡고 나란히 걸었다.
희고 고요한 건물 뒤편으로 걸어가자 산 아래에 위치한 가족 납골묘가 보였다.
카페 주인 부부가 정성껏 관리해 준 덕분에 무척이나 깨끗했다.
“건아. 외할아버지, 외할머니께 인사드리자.”
엄마 아빠의 손을 놓은 건이 작은 손을 배꼽 위에 겹치고 고개를 꾸벅 숙였다.
“외하부지, 외하무니. 앙영하떼오. 저는 이건임니다. 셰 살이에오.”
“우리 건이 잘하네.”
아빠의 칭찬에 고개를 든 건이 헤헤, 하고 웃었다.
순간 사빈은 울컥 목이 메어 왔다.
이런 날이 올 줄은 몰랐다.
천문호에게 입적되었을 때만 해도, 강헌과 세인트마리아 호텔에서 맞선을 보게 되었을 때도.
결코 올 리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순간이었다.
남편과 아이의 손을 붙잡고 엄마 아빠에게 인사를 오게 될 줄이야.
그런 사빈의 마음을 알아차렸는지 강헌이 그녀의 어깨를 감쌌다.
“어머님, 아버님께서도 무척 좋아하고 계실 거야.”
“응. 아주 좋아하실 거예요.”
엄마 아빠가 납골묘를 바라보며 마음속으로 부모님께 인사를 건네는 사이.
주위를 아장아장 걸어 다니던 건은 폴랑폴랑 날갯짓을 하는 흰 나비 두 마리를 발견하고는 눈을 빛냈다.
뾱뾱.
걸을 때마다 신발에서 귀여운 소리가 작게 울렸다.
흰 나비들은 건을 납골묘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으로 이끌었다.
건물 모퉁이를 돌면 작게 마련된 텃밭이었다.
이름 모를 넓은 잎과 꽃잎 위에 앉은 나비를 입을 벌리며 보고 있던 건은 앞에 꽂힌 푯말을 발견했지만 아직 글자를 읽을 수가 없었다.
“우아아.”
땅에 꽂힌 작고 얇은 플라스틱 팻말을 톡 뽑은 건은 문득 고개를 들었다.
저쪽에서 누군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엄마?”
엄마를 꼭 닮은 여자와 남자가 환하게 웃으면서 제게 손을 흔들고 있었다.
건도 따라 웃으며 고사리 같은 손을 좌우로 열심히 흔들었다.
엄마 아빠에게 알려 줘야겠다고 생각하며, 건은 부모님이 있는 곳으로 우다다다 달려갔다.
작은 손에 쥔 푯말이 좌우로 흔들렸다.
[이름: 나비사랑초
꽃말: 당신을 끝까지 지켜 줄게요.]
<완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