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제09화
190센티미터에 육박하는 신장.
넓고 탄탄한 어깨.
눈이 마주치면 누구라도 먼저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는 카리스마 넘치는 눈빛.
어마어마한 위압감을 자랑하는 남자가 작은 침대를 내려다보더니 별안간 미소를 지었다.
“건아, 맘마 먹자.”
“까아아우.”
익숙하게 아기를 받쳐 안은 강헌이 침대 옆에 있는 1인용 리클라이너 소파에 앉아서 아들에게 젖병을 물렸다.
병아리 부리처럼 작고 통통한 입술이 젖꼭지를 야무지게 물고 쪽쪽 빨아들였다.
아들과 눈이 마주치자 강헌이 혀로 딱, 소리를 내며 얼렀다.
그러자 건이 눈을 휘며 배시시 웃었다.
“예쁘게 웃는 건 엄마랑 똑같네.”
오물오물 작게 움직이는 입술도, 꼬물꼬물 작은 손가락도, 어느 하나 신기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가장 신기한 것은 건의 얼굴 위로 떠오르는 두 사람의 얼굴이었다.
벌써부터 새까맣고 숱 많은 머리카락과 눈썹은 아빠를 꼭 닮았는데, 수채화처럼 연한 눈동자와 웃는 모습은 엄마를 쏙 빼닮았다.
건을 보고 있으면 매 순간 신기하고 신비로운 면면을 발견하느라 시간 가는 줄을 몰랐다.
아이가 내는 모든 소리는 경이로웠고 아이의 움직임을 보고 있노라면 세상의 진리를 깨치게 된 철학자가 된 기분이었다.
“건아. 엄마 보고 싶어?”
아빠와 눈을 맞춘 건이 눈을 깜빡거렸다.
“아빠도 보고 싶다.”
슬슬 사빈이 퇴근할 시간이었다.
아직 육아휴직 중이지만 오늘 급히 확인해야 할 작품이 있어서 출근한 아내가 무척이나 보고 싶었다.
분유를 다 먹인 강헌이 아이를 품에 안고 일어나 서성이며 등을 다독거렸다.
이윽고 건이 작게 트림했다.
“잘했어, 우리 아들.”
“우우웅.”
“우리 건이는 트림도 잘하네.”
아가 방에서 나온 강헌이 건을 안은 채 거실로 나와 폴딩 도어 밖으로 펼쳐진 정원을 보았다.
“곧 라일락이 활짝 필 거야. 엄마가 좋아하는 꽃이니까 잘 알아 둬야 해, 아들.”
“우웅.”
건이 고개를 앞뒤로 크게 흔들었다.
우연이겠지만 꼭 아들이 결의에 차 대답하는 것 같아서 강헌은 대견한 표정을 지었다.
“건아. 엄마는 베리 종류를 좋아해. 그래서 건이가 엄마 배에 있었을 때도 많이 먹었지.”
“부우우.”
“우리 건이도 좋아하려나?”
강헌이 한 번 얼러 주자 건이 까르르, 높은 소리를 내며 좋아했다.
그러자 그의 입가에도 환한 미소가 그려졌다.
“이우우우.”
“한 번 더 해 줄까?”
“까아아!”
그렇게 몇 번 놀아 주며 사빈이 올 때까지 함께 정원을 구경했다.
어느 순간부터 건이 눈을 깜빡이며 칭얼거리기 시작했다.
“건이 졸리구나.”
“우웅.”
“엄마는 아빠 혼자서 맞이해야겠다.”
제 어깨에 아들의 작은 머리를 기대게 한 강헌이 손바닥에 다 들어오는 작고 여린 등을 토닥토닥 두드렸다.
“자자, 우리 아들.”
바닷속처럼 깊고 낮은 아빠의 음성에 건의 눈꺼풀이 스르르 내려왔다.
쌕쌕, 아기가 깊이 잠든 숨소리를 내자 방으로 돌아간 강헌은 건을 아기 침대에 조심스레 눕혔다.
무슨 꿈을 꾸고 있는지 작은 입술을 오물거린다.
베리를 먹는 꿈이라도 꾸는 것일까?
잠든 모습이 사빈과 똑같아서 강헌이 픽 웃었다.
‘귀여워 죽겠네, 둘 다.’
조용히 문을 닫고 나온 강헌은 사빈에게 전화를 걸었다.
통화 버튼을 누른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 강헌 씨!
아내의 맑고 높은 음성에 그가 저도 모르게 웃음 지었다.
“사빈아. 어디야?”
- 집에 거의 다 와 가요. 신호 기다리는 중. 건이는요?
“맘마 먹고 트림하고 잘 놀다가 방금 잠들었어.”
사빈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왜?”
- 강헌 씨 그 굵은 목소리로 맘마라고 말하는 게 아무리 들어도 웃겨요.
강헌이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건과 함께 생활하니 아기를 대하는 말투가 입에 배어 버렸다.
오죽하면 회사에서도 튀어나올 정도였다.
[……이것으로 회의 마치겠습니다. 아까 지적한 사항들 수정하여 퇴근 전까지 보고서 올리십시오.]
[네, 본부장님.]
그렇게 회의가 잘 마무리되려나 싶던 그때.
불현듯 무언가 생각났는지 강헌이 김 실장에게 물었다.
[김 실장, 어제 말한 까까 이름 알아왔습니까?]
[……예?]
[김 실장 둘째한테 먹였다는 까까 말입니다. 아기 몸에도 좋고 이에도 좋다던.]
차갑게 굳은 얼굴과는 매우 어울리지 않는 단어 선택에 회의실에는 정적이 흘렀다.
[……쿡.]
결국 누군가 웃음을 참지 못하고 소리를 내고 말았다.
[뭡니까? 내 말이 우스워요?]
[아,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날카로운 강헌의 눈빛에 다들 입술을 깨물고 허벅지를 꼬집으며 웃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써 댔다.
참다못한 비서실장이 나중에 슬쩍 말을 꺼냈다.
[저, 본부장님. 요즘 부쩍 아이에게 말하는 듯한 단어를 많이 쓰시는데…… 물론, 잘못된 말은 아니지만 본부장님의 위치와 회의 분위기상 적절하지 않은 말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 조심스럽게 말씀드려 봅니다…….]
그리 말하는 김 실장도 웃음을 참느라 콧구멍이 한껏 커져 있었다.
그때를 떠올리니 제아무리 얼음처럼 딱딱한 강헌이라도 참으로 민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 그래도 듣기 좋아요.
하지만 아내의 한마디에 그의 민망함은 씻은 듯이 날아갔다.
뭐 어떤가.
사빈이가 좋다는데.
그의 입가에 다시금 웃음이 번졌다.
- 어, 강헌 씨, 신호 바뀌었어요. 곧 만나요!
“응, 조심히 와.”
통화를 종료한 강헌의 심장이 조금씩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여전히 사빈을 생각할 때면 가슴에 자잘한 떨림이 일었고, 직접 얼굴을 보면 터질 듯 세차게 약동했다.
아내가 너무 예뻤다.
건을 낳은 후 사빈은 더더욱 아름답고 사랑스러워졌다.
한시도 곁에서 떼어 놓고 싶지 않을 만큼.
월패드에 차고로 차가 진입 중이라는 알람이 울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현관문이 열리고 사빈이 모습을 드러냈다.
“강헌 씨!”
현관에 서 있던 강헌은 당연한 듯 제 품으로 뛰어드는 사빈을 안고 머리에 입을 맞추었다.
“잘 다녀왔어?”
“네. 강헌 씨도 건이랑 잘 있었어요?”
“응. 둘이서 당신 보고 싶다고 내내 얘기했지.”
사빈이 눈을 접으며 웃었다. 건과 꼭 닮아 있는 모습에 강헌의 심장이 크게 일렁였다.
턱을 비스듬히 기울인 그가 사빈의 입술을 살짝 머금고 놓았다.
“…….”
쪽. 그녀가 다시 입술을 부딪치자, 강헌은 두 손으로 사빈의 뺨을 감싼 채 본격적으로 키스를 퍼부었다.
촉촉하고 부드러운 입술을 벌려 말캉하고 유연한 근육을 밀어 넣고 안에 고인 달콤한 액을 잔뜩 핥고 빨아들였다.
혀와 혀가 느릿하게 얽히며 서로를 끌어당겼다.
사빈이 그의 옷깃을 꼭 붙잡으며 매달리자, 강헌은 그녀의 머리를 감싸고 가는 허리를 감으며 지탱했다.
“하아…….”
순간순간 떨어지는 입술 사이로 사빈이 뜨거운 숨결을 흘리자 강헌이 그녀를 번쩍 안아 들었다.
“강헌 씨, 저 샤워부터…….”
“끝나고 씻겨 줄게.”
그의 그윽한 목소리와 욕망으로 탁하게 가라앉은 눈빛에 사빈의 아랫배에 고인 열기가 단단하게 뭉쳤다.
강헌에게 달랑 들린 채 침실로 들어온 사빈은 곧바로 그의 아래에 눕혀졌다.
“아직 건이 얼굴도 못 봤는데.”
그는 익숙하게 블라우스의 단추를 풀어 내리고 왼쪽 허리에 위치한 스커트의 지퍼를 쭉 내렸다.
“지금 들어가면 깰지도 몰라.”
능숙한 손놀림은 스타킹과 속옷을 빠르고 매끄럽게 벗겨 냈다.
“그래도…… 하읏…….”
그의 혀가 희고 굴곡진 몸을 따라 촉촉하게 젖은 길을 내기 시작했다.
사빈의 몸은 신기할 정도로 달고 부드러웠다.
거기에 건을 낳은 후로 농염함까지 더해져서 강헌은 이전보다 더 아내를 갈구했다.
“아으……!”
점점 아래로 내려가는 그의 머리를 감싼 사빈.
그의 입술이 가장 민감한 곳에 닿은 순간 고개가 뒤로 젖혀졌다.
“흣, 강헌 씨……!”
이윽고 혀가 할짝거리는 소리를 내며 자극하자 그녀는 몸을 잘게 떨며 전율했다.
쏟아지는 달콤한 액체를 잔뜩 받아 마신 강헌의 입술이 야하게 번들거렸다.
만족스러운 눈빛도 잠시.
단정하던 아내가 제 밑에서 순식간에 마구 흐트러진 모습에 그의 이성이 날아갔다.
그는 진작부터 딱딱하게 굳어진 제 욕망을 사빈의 안으로 서서히 밀어 넣었다.
두 사람의 입에서 동시에 탄성과 신음이 흘러나왔다.
서로를 뜨겁게 파고들며 조이는 감각에 정신이 혼미해졌다.
“후…… 사빈아.”
쾌감으로 일그러진 강헌의 얼굴은 더없이 색정적이었다.
사빈이 손을 뻗어 그의 뺨을 감싸자, 강헌이 곧장 고개를 돌려 그녀의 손바닥에 입술을 묻었다.
“보고 싶었어.”
사빈이 그의 아래에서 흔들리며 간신히 대답했다.
“저, 저도요.”
“죽는 줄 알았어. 시간이 안 가서.”
강헌이 여린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입술로 살결을 빨아들였다.
“하루 종일 당신만 생각했어.”
그의 움직임이 더욱 거세짐과 동시에 쩍 갈라진 등 근육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강헌이 제 허리를 감싼 사빈의 하얀 허벅지를 자국이 남도록 꽉 움켜쥐었다.
“아……!”
이윽고 격렬한 움직임이 멎어 들었다. 두 사람의 몸이 여파로 인해 잘게 떨렸다.
강헌은 가쁜 숨을 내쉬는 사빈의 얼굴 이곳저곳에 입을 맞추고 눈을 맞추었다.
“사랑해.”
볼이 붉게 달아오른 사빈이 배시시 웃었다.
“사랑해요.”
마주 보며 미소한 두 사람이 부드럽게 입술을 겹쳤다.
그녀의 위에서 내려온 강헌이 팔베개를 해 주며 사빈을 품에 안았다.
“강헌 씨. 건이 잘 자고 있는지 보고 올까요?”
한번 잠들면 중간에 깨어나는 일 없이 서너 시간은 쭉 자지만 그래도 오늘 돌아오자마자 건의 얼굴을 보지 못해서인지 사빈은 조금 불안했다.
그녀의 표정에 강헌이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러자.”
사빈은 커다란 강헌의 셔츠를 몸에 걸치고 단추를 잠그며 부부의 침실 바로 옆에 위치한 아가 방으로 향했다.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아기 침대로 다가가니 쌔근쌔근 자고 있는 건의 모습이 보였다.
그제야 그녀가 안심한 표정을 지었다.
“우리 건이 꿈나라 여행 중이구나.”
미소 지으며 작게 중얼거린 사빈은 건이 입술을 오물거리는 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내가 낳았지만 어쩜 이렇게 천사 같을까?
팔불출 같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귀여워서 어쩔 수 없었다.
그렇게 미소를 지으며 얼마간 보고 있었을까.
바지만 입고 다가온 강헌이 뒤에서 그녀의 허리를 감았다.
“우리 아들 너무 귀엽죠.”
“응, 당신 닮아서 아주.”
“하루 종일 보고 있어도 지루하지 않을 것 같아요.”
사빈의 신경은 온통 건에게 쏠려 있었다.
“…….”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강헌은 아내의 허리를 감은 팔에 힘을 주었다.
“강헌 씨?”
“우리 아들 귀여운 건 알겠는데. 그래도 지금은 나 좀 봐 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