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편의 연인에게 (83)화 (83/90)

외전. 제08화

한편, 혼자 남은 사빈은 2층에 있는 서재로 향했다.

평소 계단을 오르내릴 때마다 위험하다면서 강헌은 거의 들어 올리다시피 부축을 해 주었는데 그새 그게 습관이 되었는지 혼자서 올라가는 게 좀 무서웠다.

그러다 그런 스스로가 어이없어서 픽 웃었다.

“진짜 초등학생 다 됐다, 나. 그치, 건강아?”

무사히 서재로 도착한 사빈은 책상에 앉아서 서랍을 열고 크림색 일기장을 꺼냈다.

강헌과 마음이 통한 진짜 부부가 된 날 새로 구입한 것이었다.

일전에 쓰던 오렌지색 노트는 상자에 잘 넣어서 밀봉해 두었다.

새 일기장도 벌써 몇 장째 쓰고 있는 중이었다.

주로 하루의 일과를 적거나 엄마 아빠에게 편지를 썼고, 이따금 강헌에게도 썼다.

비록 그는 읽지 못하겠지만 여기에 적힌 자신의 마음은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강헌에게 매일 하는 말을 적어 놓는 데 지나지 않으니까.

주로 사랑한다, 고맙다, 행복하다 등의 말이었다.

오늘은 부모님께 편지를 쓰기로 했다.

엄마 아빠. 오늘 날씨가 참 좋아. 거기도 좋아요?

얼마 전에 초음파검사를 하면서 아기 심장 소리를 들었는데, 엄마 아빠 생각이 났어.

처음으로 내 심장 소리를 들었을 때도 이렇게 기뻐하셨겠지, 생각하니까 막 눈물이 나는 거 있지.

병원에서부터 집에 돌아와서 한참을 울었어. 엄마 아빠가 옆에 있었다면 참 좋아했을

여기까지 썼는데 갑자기 마구 눈물이 고였다.

“아이, 참. 이제 그만 울기로 해 놓고.”

사빈은 잠시 펜을 내려놓고 고개를 뒤로 젖혀 하늘을 보았다.

그녀는 남편을 생각했다.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든든해지고 따뜻해지는 내 편.

제 앞에서 티를 내지는 않았지만 실은 강헌이 무척 바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새벽이면 그는 제게 이불을 어깨까지 꼭 덮어 준 뒤 사무실로 꾸민 지하로 향했다.

자신과 보낼 시간을 마련하기 위해 최대한 빠른 시간 내에 많은 업무를 보는 것도.

자신이 깰 시간이 되면 슬그머니 올라와 제 옆에 누워 방금 일어난 척하는 것도 알고 있었다.

회사로 출근하는 것이 어떠냐고 물으면 그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당신이 옆에 없으면 일에 집중이 안 돼. 집에서 있을 때보다 효율이 더 떨어질 거야.]

그렇게 말할 정도였는데 오늘 회사로 간 것을 보면 어지간히 바쁜 모양이었다.

그래서 사빈도 티를 내지 않기 위해 애썼다.

요즘 들어 눈물이 많아지고 감정 기복이 심해졌다.

특히 부모님이 보고 싶었다.

이건 강헌도 어떻게 해 줄 수 없는 것이었고, 그는 사빈이 원하는 것을 해 줄 수 없다는 걸 견딜 수 없어 했다.

그래서 사빈은 그의 앞에서는 그리움을 꾹꾹 참고 웃었다.

해남댁이 알게 된다면 반드시 강헌의 귀에 들어가게 될 것이므로, 그녀의 앞에서도 티를 내지 않고 있다가 지금처럼 2층 서재로 올라와서 문을 잠그고 울었다.

“흐윽……. 건강아, 엄마가 슬퍼서 우는 게 아니라…… 그냥…… 외할머니랑 외할아버지가 너무 보고 싶어서 그래.”

살아 계셨다면 우리 건강이 많이 예뻐해 주셨을 텐데.

하루 종일 품에서 떨어뜨리지 않고 예쁜 것, 좋은 것 많이 보여 주고 알려 주셨을 텐데.

특히나 얼마 전부터는 어릴 적, 엄마가 직접 만들어 주셨던 도넛이 먹고 싶어졌다.

하지만 시중에서 파는 도넛은 엄마가 만든 맛과는 달라서 한 입 베어 물고는 말았다.

도넛을 시작으로 엄마가 만들어 준 음식들이 줄줄이 떠올랐다.

다시는 먹을 수 없고 어디에서도 만들 수 없는 요리들이.

해남댁도 물론 그녀의 입맛에 맞게 음식을 잘했지만 그래도 엄마의 손맛을 따라갈 수는 없었다.

사빈은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건강이가 들을까 봐 차마 입 밖으로는 내지 못한 채 속으로 말했다.

엄마, 아빠.

사실 나 조금 무서워.

아이를 가진 건 너무 좋은데 잘 낳을 수 있을지, 잘 기를 수 있을지 자신이 없어.

주변에서 도와주려는 사람들도 많고, 남편도 무척이나 잘해 주는데…… 그래도 엄마 아빠가 옆에 있었으면 좋겠어.

“흡…….”

사빈은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그녀의 여린 어깨가 마구 떨려 왔다.

엄마 아빠의 손을 붙잡고 나들이를 가던 시절.

자신이 어른이 되어도 부모님이 당연히 곁에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아빠, 왜 운동 열심히 해?]

[음, 엄마한테 잘 보이고 싶어서?]

[정말?]

아빠는 눈을 접으며 웃었다.

[하하. 그것도 그런데. 아빠가 건강해야 우리 사빈이가 이다음에 커서 결혼하고 아기를 낳은 후에도 옆에 있어 주지.]

[사빈이가 아기 낳아?]

[그래도 되고, 아니면 엄마 아빠랑 평생 같이 살지, 뭐.]

[응, 엄마 아빠랑 평생 같이 살 거야!]

엄마 아빠가 돌아가신 순간부터 부모님이 그립지 않은 때가 없었다.

하지만 그간의 그리움을 모두 합쳐도 지금만 못했다.

부모님이 필요했다.

무척이나 간절하게.

“흐으윽…….”

한참을 눈물을 쏟아 내던 그때.

누군가가 계단을 급히 올라오며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사빈아!”

서재 문이 벌컥, 열렸다.

숨을 거칠게 몰아쉬던 강헌의 동공이 그녀를 보자마자 크게 벌어졌다.

“사빈…….”

붉게 짓무른 눈가에서 흘러내려 뺨을 온통 적신 눈물이 턱 아래에서 뚝뚝 떨어졌다.

혼자서 서럽게 울고 있는 아내의 모습에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가슴이 반으로 쪼개지는 듯한 통증이 일었다.

황급히 그녀에게로 다가간 강헌이 몸을 낮추어, 고개 숙인 사빈과 시선을 맞추었다.

“사빈아, 무슨 일이야? 어디 아파?”

“……아니에요.”

“나 봐, 응?”

하지만 사빈은 고개를 돌려 그의 시선을 피했다.

심장이 바짝바짝 탄 강헌이 그녀의 손을 조심스럽게 붙잡았다.

“사빈아, 왜 그러는지 말해 줘. 내가 고칠게.”

“그런 거 아니…….”

사빈의 눈에서 또 눈물이 흘렀다.

무조건 자신의 잘못이라며 안절부절못하는 남편의 모습에 또 감정이 울컥 차올랐다.

이렇게 나만 생각해 주는 사람이 있어서 행복했고, 이 사람을 부모님께 직접 소개하지 못한다는 사실에 슬퍼졌다.

“엄…… 빠가 보고…… 져서…….”

흐느낌 새로 드문드문 이어지는 말에 강헌의 미간에 힘이 들어갔다.

엄마 아빠가 보고 싶어져서.

아무리 노력해도 이루어 줄 수 없는 일이었기에 그의 눈에 슬픔이 번졌다.

“흐윽, 미안해요……. 갑자기 왜 이러는지…….”

“미안할 일 아니야. 당연한 거지. 사빈아, 일단 소파에 편하게 기대앉자.”

강헌은 사빈을 조심스럽게 안아 들고 작업용 테이블 앞에 놓인 소파로 향했다.

그는 아내를 제 허벅지 위에 앉히고 제 어깨에 머리를 기대게 했다.

“흑…….”

사빈이 그의 목을 끌어안으며 파고들었다.

강헌은 그녀가 울음을 그치고 진정할 때까지 여린 등을 토닥였다.

얼마나 그리웠을까.

혼자서 얼마나 불안하고 두려웠을까.

사빈의 상태를 좀 더 일찍 알아차리지 못한 스스로가 한심했다.

“미안해. 내가 미안해.”

그렇게 얼마간 달래며 다독였을까.

그녀의 몸의 떨림이 서서히 잦아들기 시작했다.

“……강헌 씨.”

희미한 목소리에 그는 즉각 반응하며 사빈과 눈을 맞추었다.

“다 울었어?”

끄덕. 작은 고갯짓에 가슴이 쓰렸다.

“미안해. 내가 당신 마음을 알아차렸어야 했는데.”

사빈이 크게 도리질을 쳤다.

그럼에도 강헌의 표정은 나아지지 않았다.

이 작고 여린 사람이 이 커다란 슬픔을 제 눈 닿지 않는 곳에서 홀로 겪어 냈을 거라 생각하니…….

아무래도 불안해서 김 실장에게 연락을 하고 다시 돌아온 게 다행이었다.

“엄마 아빠가 보고 싶어지기도 했고. 또, 속상하기도 했어요.”

속상하다는 말에 강헌의 눈빛이 더욱 가라앉았다.

“강헌 씨를 직접 소개해 주고 싶었는데 그럴 수가 없어서.”

자신의 소홀함을 반성하고 있던 강헌은 생각지도 못한 말에 눈을 크게 떴다.

“미안해요, 신경 쓰이게 해서.”

“제발 그런 말 하지 마, 사빈아.”

강헌이 사빈의 뺨을 감쌌다.

“평생 당신이 내게 미안해할 일은 없어.”

“강헌 씨…….”

“울고 싶으면 언제든지 울어. 혼자서 꾹 참지 말고, 내 앞에서, 내 품에서.”

울지 말란 말보다 훨씬 더 위로가 되는 말이었다.

부모님이 당신들 대신 보내 주셨나 보다, 이 사람을.

혼자서 너무 슬퍼하지 말라고.

외로워하지 말라고.

“사랑해요.”

사빈이 여전히 목멘 소리로 말했다.

“사랑해요, 강헌 씨.”

내게 와 줘서. 내 곁에 있어 줘서.

“당신은 평생 내 마음을 따라올 수 없을 거야.”

두 사람은 서로를 끌어안았다.

맞닿은 몸에서 퍼지는 온기가 슬픔의 파도가 차갑게 일렁이던 마음에 햇빛이 되어 내렸다.

***

다행히 그 후로 사빈의 눈물은 아주 많이 줄었다.

감정 기복이 심해질 때도 있었지만 그때마다 강헌이 하나하나 다 맞춰 주고 이야기를 들어 주어서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수안구 자택을 방문한 카페 <트라몬토> 사장 부부는 양손 가득 사빈에게 해 먹일 재료와 아기 선물을 가져왔다.

신기하게도 그녀가 끓여 준 미역국이 엄마가 끓여 준 미역국과 똑같은 맛이 나서 사빈은 울면서 웃었다.

[엄마가 해 준 것 같아요.]

[내가 사빈이 먹고 싶을 때마다 올라와서 해 줄게. 아휴, 왜 나도 눈물이 나는지 몰라.]

그녀는 사빈을 꼭 끌어안고 등을 쓸어 주었다. 꼭 엄마 품에 안겨 있는 듯한 기분에 사빈이 미소를 지었다.

하루가 다르게 사빈의 얼굴에선 윤기가 흘렀고 배 속 아이도 태명처럼 무척이나 건강했다.

뽀얗게 살이 오른 아내가 너무 예뻐 보여서 이따금 아주 곤란하기는 했지만, 그것만 빼면 강헌도 무척이나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건강아, 엄마 아빠가 우리 건강이 아주 많이 기다렸는데. 우리 곧 볼 수 있겠다, 그치?”

사빈이 배를 매만지며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열 달을 꽉 채우고 건강이가 세상에 태어났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