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제07화
“축하드립니다.”
권 박사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천사가 찾아왔네요.”
사빈은 눈을 깜빡깜빡했다.
“네? 그게 무슨.”
“아기를 가지셔서 피로를 쉽게 느끼셨나 봅니다.”
아기라는 단어가 두 사람의 머리를 세게 때렸다.
“방금 아기……라고 하셨어요?”
“네, 임신하셨습니다. 현재 4주 차에 접어들었네요.”
너무 놀라 말을 잃은 사빈을 보며 권 박사가 안경을 고쳐 썼다.
“전혀 예상하지 못하셨나요?”
“아, 네, 네……. 생리가 워낙 불규칙해서요. 스트레스를 받으면 건너뛴 적도 많아서…… 전혀 몰랐어요. 요즘 일도 많았거든요.”
천문호의 집에서 살 때, 늘 신경을 곤두세운 채 눈치를 보느라 몸이 피곤하고 예민했었다.
그 때문인지 생리 날짜는 들쭉날쭉이었고 생리통도 심했다.
게다가 그녀가 새로운 프로젝트 책임자에 임명된 후로 임신은 이르다고 판단, 관계를 가질 때마다 피임을 확실히 했었다.
‘아. 설마 그날인가?’
그러다 사빈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날이 있었다.
처음으로 맡았던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끝낸 날.
선물 받은 와인을 마시며 강헌과 자축했다. 술이 들어가니 날아갈 듯 기분이 좋아졌고, 그대로 다이닝룸에서 강헌을 덮치고(?) 말았다.
[강헌 씨이…… 우리 남편은 왜 이렇게 잘생겼지? 으응?]
[사빈아. 다리 위에 앉아서 이렇게 움직이면 좀 위험한데.]
[위험하면 안 돼요? 우리밖에 없는데.]
[……당신이 유혹한 거야.]
[으응. 내가 우리 남편 먼저 유혹했어. 헤헤.]
다음 날 허리며 허벅지며, 아프지 않은 곳이 없었다.
술에 취해 이성을 잃고 몸을 섞은지라 피임 여부는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어쨌든 아기가 생겼다는 말에 사빈은 아직은 납작한 제 아랫배에 손을 올렸다.
아기. 아기라니.
배 안에 강헌 씨와 내 아이가 자라고 있다니.
반쯤 나갔던 정신이 서서히 되돌아오기 시작하자 환희와 감격이 차올랐다.
“강헌 씨.”
사빈이 고개를 돌리자 강헌은 권 박사를 바라본 채 여전히 굳어 있었다.
“우리 아기가 생겼대요.”
그의 동공이 서서히 사빈에게로 옮겨 왔다.
“내가 엄마가 된대요.”
“……엄마?”
희미한 음성에 사빈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강헌 씨는 아빠가 되는 거고요.”
강헌의 눈동자가 잘게 떨리기 시작했다.
가슴이 벅차올랐다.
심장이 터질 듯했다.
떨리는 손이 사빈을 조심스럽게 안았다.
혹 힘을 주면 부서지기라도 할까 봐 조심하고 또 조심하는 손길에서 애정과 감격이 그대로 느껴졌다.
권 박사가 놀란 표정을 짓다가 이내 미소를 지었다.
그가 아는 강헌은 감정 표현이 극히 적었고 눈빛은 언제나 무감정했다.
기쁜 일이 있어도 슬픈 일이 있어도 한 번도 흐트러진 모습을 보인 적이 없던 사람이 저토록 동요하다니.
사빈을 만난 후로 강헌은 달라졌다.
뭐, 여전히 다른 사람에게는 차갑긴 하지만.
적어도 사빈과 함께 있을 때만큼은 세상 그 누구보다도 다정한 눈빛과 미소를 지닌 사람이었다.
“고마워…… 고마워, 사빈아.”
권 박사가 보고 있다는 것도 잊은 채 강헌은 사빈을 품에 꼭 끌어안고 연신 고맙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이 말밖에는 할 수가 없었다.
제게 가족이 되어 주고, 또 가족을 만들어 준 사빈이 고맙고 또 고마울 뿐이었다.
넘쳐흐르는 이 마음을 도무지 표현할 수가 없었다.
“내가 더 잘할게.”
“지금도 넘치게 잘해 주는걸요.”
“사랑해.”
사랑해. 그녀의 귓가에 속삭이며 강헌은 아내를 안은 손에 힘을 주었다.
그들에게 잠시 잊힌 권 박사는 머쓱한 표정을 짓다가 이내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
그날부터 강헌의 과보호가 시작되었다.
시작은 그의 육아휴직 신청이었다.
임신 사실을 알게 된 지 아직 일주일밖에 안 됐는데.
아직 아기가 모습을 갖추기도 전인데, 그는 마치 사빈이 내일 당장 출산이라도 할 것처럼 굴었다.
“육아휴직이요?”
“본래는 그랬는데, 김 실장이 아직 그것만은 안 된다고 읍소를 해서 재택근무로 돌렸어.”
“재택근무?”
사빈의 눈이 동그래졌다.
“응. 아주 급한 회의가 있을 때만 회사로 가게 될 거야. 일단 지하를 임시 사무실로 꾸미려고 해. 사람들 드나들어도 신경 쓰지 말고 편하게 쉬어. 알았지?”
부드러운 표정과 말투로 저를 대하는 강헌을 보며 사빈은 입을 벌렸다.
“어, 어떻게 그런……. 강헌 씨가 회사에 없으면 안 되는 일이 많잖아요. 회장님께서 허락을 해 주셨어요?”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당신 남편 능력과 권력이 꽤 커. 내가 내 아이 가진 내 아내 옆에 있겠다는데 감히 누가 말릴까.”
게다가 강헌은 사원들, 특히 남자 직원들이 눈치를 보지 않고 육아휴직을 신청할 수 있도록 관련 조항을 대폭 개정하라고 지시했단다.
현대에도 다소 보수적인 분위기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기조그룹 내에서 부는 신선한 바람이었다.
뿐만 아니라 강헌은 시간이 날 때마다 틈틈이 임신, 출산, 육아에 관한 서적과 관련 동영상을 탐독했다.
“당신도 쉬었으면 좋겠는데. 임신 초기가 무척 중요하다는군.”
“제가 직접 눈으로 보고 확인해야 할 사항이 많아서요. 이번 프로젝트 끝날 때까지는 출근을 해야 할 것 같아요.”
미간을 좁힌 강헌이 잠시 생각하더니 입을 열었다.
“미술관 내에 사무실 하나 마련하라고 지시해야겠어. 당신 출근시켜 주고 난 거기서 업무 본 다음, 함께 퇴근하면 되겠군.”
기조전자 본부장이 임신한 아내가 걱정되어 기조미술관 건물에서 업무를 본다니.
이 사실이 외부로 새어 나가면 결코 좋은 평가를 듣지 못할뿐더러, 당장 양쪽 직원들도 무척이나 불편해하며 결국 저희 부부를 원망하게 될 것이다.
“강헌 씨.”
“응. 필요한 거 있어?”
“그게 아니라요. 말도 안 되는 말인 거 잘 알고 있죠?”
“당신이랑 우리 아기 위해서라면 내가 못 할 일은 없어.”
“전 있어요. 다른 직원들 생각해서라도 그렇게는 못 하겠네요.”
단호한 그녀의 표정에 움찔한 강헌.
“그렇게 안 할 거죠?”
“……응.”
“좋아요. 약속한 거예요.”
“당신 신경 안 쓰이는 곳에서 있으면 안 될까?”
아내의 눈빛에 강헌은 조용히 입을 닫았다.
하지만 출퇴근만큼은 절대로 양보하지 않았다.
아니, 강헌이 양보하지 않은 것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집 안에서는 사빈 혼자 세 발짝 이상 걷지 못 하게 했고 항상 어깨를 감싸 부축하거나 안아 들어 직접 옮겼다.
아주 사소한 것이라도 직접 가져다주는 것은 물론, 손목에 무리가 간다며 음식도 떠먹여 주려고 했다.
사빈이 거절했기에 망정이지, 아니었다면 그녀의 손으로 연필 한 자루도 쥐지 못할 뻔했다.
불안하다며 씻겨 주겠다고 욕실로 들어오려던 것도 몇 번이나 거절했는지 모른다.
결국 문을 열어 주고 만 적이 더 많지만.
마침내 사빈이 완전히 육아휴직에 돌입하여 집에만 머무르게 되었을 때.
이제야 좀 안심이 된다는 듯 강헌의 얼굴이 환하게 폈다.
“그렇게 좋아요?”
“응. 당신 혼자 걸어 다니는 거 볼 때마다 가슴이 조마조마해서 하루 종일 걱정했거든.”
어이가 없어서 사빈이 헛웃음을 지었다.
이러다가는 혼자서 하품도 못 하게 생겼다.
그러다 그녀는 곧 미소를 지었다.
강헌이 얼마나 설레어 하는지, 아기를 얼마나 기다리고 있는지 아주 선명하게 느껴지기 때문이었다.
그녀 역시 마찬가지였으니까.
외롭게 자란 두 사람이었기에 가족이 늘어나는 것이 무엇보다도 기뻤다.
어느덧 임신 7주 차.
병원에서 검사를 마치고 온 그들은 침대 위에서 초음파 사진을 보고 있었다.
“너무 신기해요. 이곳에 아기가 있다니.”
사빈은 강헌의 가슴팍에 등을 기대고 있었다.
뒤에서 뻗어 온 강헌의 커다란 손이 사빈의 배를 조심스럽게 감쌌다.
“그러게. 아직도 이따금 믿기지가 않아.”
“저도 그래요. 그래도 아까 병원에서 심장 소리 들었을 땐 정말 아기가 있는 거구나, 확신이 들더라고요.”
초음파검사를 하면서 아기의 심장 소리를 들었을 때.
사빈은 저도 모르게 눈물이 나왔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이 몽글몽글 솟아올라서 가슴을 촉촉이 적셨다.
집으로 돌아와서도 마찬가지였다. 눈물이 멈추질 않았다.
[우리 엄마 아빠도 처음으로 내 심장 소리를 들었을 때 얼마나 기뻐하셨을까 생각하니까…… 흑…….]
강헌은 그런 아내를 하루 종일 품에 안아 달랬고, 이제 겨우 진정하여 함께 사진을 보고 있는 중이었다.
“참, 일주일 후에 해남에서 사장님 올라오시는 거, 기억하고 있죠?”
“물론. 게스트룸도 치워 놨어.”
카페 <트라몬토> 사장 부부는 사빈의 임신 소식에 무척이나 기뻐했다.
그간 부모님의 납골당 때문에 연락을 주고받던 그들은 어느새 가족처럼 가까워져 있었다.
그간 해남댁을 통해서 축하의 메시지와 함께 몸에 좋은 것을 이것저것 보내던 그들은 안 되겠다며, 직접 올라오기로 했다.
사빈은 무척 좋아했다.
마치 해남에 사는 이모를 기다리는 기분이었다.
“너무 좋아요. 우리 건강이도 좋아하는 것 같아요.”
아기의 태명은 건강이였다.
사빈과 아기가 그저 무사하기만을 바라는 마음으로 강헌이 지었다.
“건강아, 나중에 해남에 같이 내려가서 재미있게 놀자. 알았지?”
사빈이 눈을 접으며 웃었다.
여전히 붉게 부푼 눈가를 보니 강헌의 마음이 쓰려 왔다.
“강헌 씨?”
뒤에서 안아 오는 굵은 팔에 사빈이 고개를 반쯤 돌렸다.
“내가 더 잘할게.”
“또 그런다. 이미 충분히, 넘치게, 아주아주 잘해 주고 있어요, 우리 남편.”
사빈이 외롭지 않도록 늘 곁에 있을 것이다.
좋은 것만 보고, 좋은 것만 먹고, 좋은 것만 듣게 해 줄 것이다.
속으로 다짐하며 강헌은 그녀의 어깨에 살며시 입을 맞추었다.
“사랑해.”
“저도 사랑해요.”
“우리 건강이도 사랑한다.”
그의 말에 사빈이 소리 내어 웃었다.
“아빠가 책 마저 읽어 줄게.”
강헌은 어젯밤에 읽다 만 동화책을 펼쳤다.
듣기 좋은 낮고 굵은 음성이 침실을 따뜻하게 채웠다.
***
오늘, 강헌은 회사에 출근을 해야 했다.
UM그룹과의 계약 체결에 관한 논의에 그가 빠질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사빈을 바라보았다.
“정말 혼자 있어도 괜찮겠어? 오늘 해남댁 아주머니도 늦게 오시는 날인데.”
어젯밤 갑작스러운 아들 내외의 방문에 해남댁은 오후에 출근하기로 되어 있었다.
“괜찮아요. 얼른 다녀와요.”
아까부터 현관에 서 있었지만 강헌의 발걸음은 도통 떨어질 줄을 몰랐다.
이 커다란 집에 사빈을 혼자 남겨 두고 간다 생각하니 몸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하지만 사빈이 해남댁 말고는 불편해해서 다른 사람을 부를 수도 없었다.
본래라면 일주일 전에 오기로 했던 카페 부부도 집안 사정 때문에 방문이 다음 주로 미뤄진 상황이었다.
“강헌 씨. 저 초등학생 아니에요. 무슨 일 있으면 연락할 테니까 걱정 말고 가요. 응?”
“……자주 연락해. 나도 되도록 빨리 올 테니까. 알았지?”
“응. 다녀와요. 건강이도 아빠 잘 다녀오시라고 인사하자.”
허리를 숙인 강헌이 사빈의 배에 입을 맞추었다.
“엄마 말 잘 듣고 있어. 알았지?”
남편의 진지한 표정에 사빈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 모습에 강헌은 조금 안심이 되었다.
사빈의 이마와 입술에 입을 맞춘 강헌이 차고로 향했다.
머릿속에선 회사에 도착하자마자 동선과 해야 할 일이 착착 진행되고 있었다.
얼마 전 사빈이 가벼운 빈혈을 일으킨 이후로 그의 걱정이 극에 달했다.
‘최대한 빨리 와야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