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편의 연인에게 (81)화 (81/90)

외전. 제06화

“일어났어?”

몇 번 깜빡거리다 서서히 눈꺼풀을 들어 올리자 강헌의 다정한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

침대 헤드에 등을 기대고 앉아 있던 그의 손에는 태블릿이 들려 있었다. 잠든 제 옆에 앉아 업무를 보고 있던 모양이었다.

“으응…… 지금 몇 시예요?”

“9시.”

“버, 벌써요?”

놀란 사빈이 황급히 몸을 일으키자 강헌의 미간이 살며시 찌푸려졌다.

“그렇게 갑자기 일어나다 다치면 어쩌려고 그래.”

“그래도 늦잠을…….”

“주말인데 어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9시까지 잠을 자다니.

결혼 전에도 후에도, 지금껏 사빈은 아침 6시를 넘겨서 일어난 적이 없었다.

주말에도 마찬가지였다.

게으름을 피우자고 마음을 먹어도 습관은 무서운 것이어서, 5시만 되면 눈이 떠졌다.

늦어도 6시를 넘기지 않았는데 오늘은 9시까지 자 버리다니.

강헌의 곁에 있어서 마음이 편해진 걸까?

“괜찮아. 더 자도 돼.”

“으응, 잠 깼어요.”

말은 그렇게 하면서 사빈은 그에게 안기며 굵고 단단한 허리를 꼭 끌어안았다.

강헌은 제 품으로 꼬물꼬물 파고드는 아내의 어깨를 굵은 팔로 감싸며 머리에 입을 맞추었다.

“잘 잤어?”

“음…… 이상한 꿈을 꿨어요.”

“어떤?”

사빈이 기억을 더듬거리며 말했다.

“엄청나게 커다란 하얀 솜뭉치가 폴짝폴짝 뛰어와서 저한테 안기는데, 자세히 보니까 호랑이였어요.”

“호랑이?”

그녀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되게 이상하죠.”

강헌은 얼마 전 꾼 꿈을 떠올렸다.

재희와 이 회장의 일을 처리하느라 깜빡 잊고 있었는데.

하얀 호랑이라니.

강헌이 꿈에 대해 설명하자, 사빈이 어머, 하고 눈을 크게 떴다.

“정말 신기해요! 이번 전시회 준비하는 동안 둘이서 동물 그림을 많이 봐서일까요?”

사빈이 현재 맡고 있는 전시회의 주제는 ‘흰, 그리고 마음’이었다.

자신의 마음속에 자리한 하얀 감각을 형상화하여 드러내고자 하는 것인데, 한 작가가 그린 흰 호랑이가 마음에 들어서 강헌과 내내 그림을 보며 감탄했었다.

“그럴 수도 있겠군.”

“어쨌든 신기하네요. 같은 꿈을 꾸다니.”

“응. 기분 좋네.”

강헌이 그녀의 목덜미와 어깨에 촉촉, 입을 맞추자, 사빈이 간지럽다며 웃었다.

“하아.”

“왜?”

“꿈을 꿔서 그런지 배가 고파요.”

엉뚱한 소리도 귀여웠다. 픽 웃은 강헌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밥 먹으러 가자.”

“응, 빨리 씻고 나올게요.”

사빈이 욕실에서 씻는 동안 강헌은 아침을 차렸다. 주말은 가사 도우미 없이 둘이서만 지내는 날이었다.

옷을 갈아입고 나온 사빈의 얼굴은 뽀얬고, 몸에서는 은은한 향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울컥 욕정이 솟았지만 강헌은 배고프다는 그녀의 말을 떠올리며 참았다.

“와아, 마침 집밥 먹고 싶었는데.”

“해남댁 여사님께서 해 놓고 가신 것들이야.”

얼마 전부터 박 여사 대신 새로 가사를 도와주고 있는 해남댁은 해남의 카페 <트라몬토>의 주인 부부 중 아내 쪽의 사촌이었다.

[10년도 더 전에 외아들이 대학 합격한 이후로 서울에서 쭉 살고 있었거든. 근데 그 아들 결혼 후로 혼자서 적적하게 지내고 있다네? 음식도 아주 잘하고 입도 무거워. 일 처리도 깔끔하고.]

더 이상 이 회장의 감시 속에 살지 않아도 되었으므로 그들은 곧바로 박 여사를 돌려보내고 해남댁을 채용했다.

박 여사도 음식을 잘했지만 해남댁은 비교를 불허할 정도로 요리의 달인이었고, 정이 많은 성격이라 강헌과 사빈, 둘 다 아주 만족하고 있었다.

“음, 맛있다.”

사빈은 평소보다 조금 더 많이 먹었다. 어쩐지 입맛이 당겼다.

그간 전시회 준비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서 끼니를 제대로 챙겨 먹지 못한 탓인 듯했다.

강헌은 그런 그녀를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요즘 일에 집중하면서 너무 마른 것이 아닌가 걱정했는데, 잘 먹는 모습을 보니 기분이 좋았다.

“디저트도 먹을까?”

“응, 좋아요.”

픽 웃은 강헌이 그녀의 앞에 늘 구비되어 있는 세인트마리아 호텔 베이커리의 레몬 마들렌과 라즈베리 케이크를 내어 주었다.

사빈은 그것도 아주 맛있게 먹었다.

“음, 역시 맛있어. 그죠?”

“응. 당신보단 아니지만.”

“아이, 정말.”

얼굴을 붉힌 채 눈을 곱게 흘기는 사빈이 귀여워서 자꾸만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여전히 이런 얘기에는 수줍게 반응하는 모습이 사랑스러웠다.

“날씨도 좋은데, 데이트할까?”

“응, 좋아요.”

“가고 싶은 곳 있어?”

“전시회 준비하면서 직원들이랑 대화하다가 알게 됐는데 개봉한 영화 중에 재밌어 보이는 게 있더라고요.”

“그래, 다 먹고 가자.”

그녀가 배시시 웃고는 다시 케이크를 포크로 조금씩 베어서 입으로 가져갔다.

사빈이 접시를 비우는 동안 강헌은 아내에게서 한시도 눈을 떼지 않았다.

‘……귀여워.’

식사를 끝내고 외출 준비를 마친 두 사람은 차고로 향했다.

출퇴근 시 이용하는 세단 대신 사적인 용도로 사용하는 짙은 그레이 컬러의 SUV에 오른 두 사람의 표정은 무척 즐거워 보였다.

“오랜만에 데이트하는 것 같아요. 그간 둘 다 너무 바빴죠. 이렇게 있으니까 너무 좋아요.”

“응, 좋다.”

왼손으로 핸들을 잡은 강헌이 오른손으로 그녀의 손을 잡았다.

“위험한데.”

“곧 신호 걸릴 거야.”

그의 말대로 빨간불에 차가 멈춰 섰다.

강헌이 사빈의 손등에 쪽쪽 입을 맞추다 손가락을 살짝 깨물었다. 그러자 그녀가 부끄러운 듯 눈을 접으며 웃었다.

그렇게 알콩달콩 장난을 치며 영화관에 도착한 두 사람은 미리 대기하고 있던 직원의 안내에 따라 프리미엄관으로 입장했다.

딱 스무 명만 들어갈 수 있는 프리미엄관은 전 좌석이 리클라이너 소파였고 간격이 넓었으며 영상의 화질과 사운드가 일반 영화관에 비해 훨씬 좋았다.

한동안 시끄러운 소식으로 세간의 주목을 받았던 그들의 사진이 많이 퍼졌기에 알아보며 수군거리는 사람이 많았다.

그래서 강헌은 사빈이 외출 준비를 하는 동안 그곳을 통째로 대여했다.

두 사람은 가운데 위치한 2인석에 착석했다.

“슬리퍼와 담요를 준비했습니다. 그 밖에 필요한 것이 있으면 언제든 호출 벨을 눌러 주시기 바랍니다.”

직원이 상냥하게 말했다. 꼭 일등석 비행기에 탑승한 기분이었다.

“네, 알겠습니다.”

“그럼 즐거운 관람 되십시오.”

직원이 물러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조명이 서서히 꺼졌다.

“시작하나…… 읍.”

어두워지기가 무섭게, 강헌이 입술을 겹쳐 왔다.

곧바로 틈을 벌리고 들어간 혀가 사빈의 혀를 찾아내 매끄럽게 휘감았다.

젖은 근육이 유연하게 뒤엉키며 야릇한 소리를 냈다.

“하아…….”

입술을 떼자마자 사빈이 참았던 숨을 토해 냈다.

쪽. 강헌이 그런 그녀에게 다시 살짝 입을 맞추었다.

“가, 강헌 씨.”

“괜찮아. 우리 둘뿐이야.”

“그래도…… 밖이라 좀 부끄러워요.”

“광고 끝날 때까지만. 응?”

망설이던 그녀가 수줍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빈의 어깨를 끌어안은 강헌이 입술을 포개며 그녀를 제게로 더욱 당겼다.

방금보다 더 농밀해진 혀의 움직임에 사빈은 저도 모르게 희미한 신음을 흘려 댔다.

아랫배에 열기가 고여 와서 그의 옷깃을 붙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강헌은 놔줄 듯 놔주지 않으며 계속해서 아슬아슬하게 키스를 이어 갔다.

그녀의 뺨을 감싼 손이 스르륵 가슴으로 내려가 살짝 쥔 순간.

- 보다 안전한 영화 관람을 위하여 상영관의 위치 및 출구…….

“하아…… 강헌 씨…… 영화 시작하겠어요.”

그의 손목을 꼭 붙잡은 사빈이 가쁘게 호흡하며 말했다.

미간에 힘을 준 강헌이 후, 하고 숨을 길게 내쉬었다.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다.

사빈과 닿아 있으면 인지능력이 흐려지는 기분이었다.

시간과 장소에 상관없이 그녀를 안고 싶어졌다.

밖에선 인내심과 자제력의 달인이라고 불리는 그는 아내와 함께 있을 때 자주 절제를 잃고 흐트러졌다.

‘사빈이가 보고 싶어 했으니까.’

그리 생각하며 강헌은 그녀의 즐거운 여가를 지켜 주기로 했다.

영화는 코믹액션 영화였다.

초반 대사 몇 마디를 제외하고는 시끄러운 사운드가 내내 귓전을 때렸다.

그때 강헌의 어깨 위로 무언가가 스르르 내려왔다. 사빈의 머리였다.

열다섯 대의 차가 연쇄 추돌하여 뒤집어지고 깨지고 폭발하는 장면이 계속 이어지고 있는데도, 사빈은 마치 고요한 침실에 있는 듯 잠에 빠져 있었다.

‘많이 피곤했나.’

강헌은 그녀가 편히 기댈 수 있도록 어깨를 조금 더 아래로 조심스럽게 내리고, 그 상태로 영화가 끝날 때까지 미동도 하지 않았다.

***

“정말 미쳤나 봐요.”

돌아가는 차 안에서 사빈이 속상한 표정으로 말했다.

“진짜 보고 싶은 영화였는데. 오랜만에 강헌 씨랑 밖에서 하는 데이트였는데.”

눈을 뜨니 강헌의 어깨에 기대어 자고 있었고 영화는 엔딩 크레디트까지 모두 올라간 후였다.

“미안해요, 강헌 씨.”

“사과할 일 아냐. 그보다 걱정돼. 당신 컨디션이 많이 안 좋아진 것 같아서.”

신호에 차가 멈췄을 때, 강헌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그녀를 보며 말했다.

“진찰을 받아 보는 게 어때, 사빈아?”

“진찰이요?”

“응. 이대로는 걱정돼서 손에 일도 안 잡힐 것 같아.”

잔뜩 가라앉은 그의 표정에 사빈은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 진찰을 받고 의사의 말에 따르면 컨디션은 금방 회복할 거다. 남편의 걱정도 덜어 줄 수 있을 테고.

“알았어요.”

“내일 당장 가자.”

“그렇게 빨리요?”

이 상태로 일주일을 더 보내게 할 수는 없었다.

그러다 큰일이라도 난다면.

생각하기도 끔찍하다는 듯 강헌의 미간이 구겨졌다.

“응. 집에 가자마자 권 박사님께 말씀드려 놓을게.”

그때까지도 강헌과 사빈은 그들의 꿈의 의미를 전혀 모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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