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제05화
“실장님, 꽃 장식은 어디에 둘까요?”
“라운지 창가 쪽 테이블에 배치하는 게 좋겠군요.”
“알겠습니다. 그리고 4시 VIP룸 회의실 세팅 준비 완료했습니다.”
“알겠습니다. 30분 후에 점검하러 내려가겠습니다. 이상 있으면 집무실로 오십시오.”
진우는 엘리베이터에 탑승했다.
오늘은 사빈이 호텔을 방문하는 날이었다.
이모인 김서경 사장을 만나러 오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래도 진우는 설렜다.
강헌을 라이벌로 의식하여 그를 사빈의 곁에서 몰아내려는 시도는 진작 그만둔 지 오래다.
그렇지만 마음은 도무지 머리의 속도를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
머리로는 친한 후배인데, 마음에서 사빈은 여전히 제 첫사랑이었다.
첫사랑을 어떻게 단번에 잊을 수 있겠는가.
그저 시간이 빨리 흐르기를 바랄 뿐이다.
그럼 이 떨림도, 설렘도 서서히 잦아지겠지.
‘그래, 그러니까 일에나 집중하자.’
요즘 진우는 호텔 경영 실무에 대해 배우고 있었다.
자식이 없는 이모 부부는 진우로 하여금 그들의 뒤를 잇게 하려 했다.
작긴 하지만 자신만의 집무실도 갖게 되었다.
창가에서 맑은 하늘에 둥둥 떠다니는 흰 구름을 보다가 진우는 문득 대학 시절을 떠올렸다.
대학을 다닐 때, 가장 큰 사건을 꼽으라면 단연 사빈과 만나게 된 순간이었다.
첫눈에 보자마자 알았다.
저 애를 오래도록 눈에 담을 것이란 걸.
***
“안녕하세요. 경영학과 연진우입니다.”
진우는 경영학과에서 가장 인기가 많은 남학생이었다.
183센티미터에 달하는 신장과, 뼈대미남이라는 별명이 생길 정도로 모델처럼 비율이 훌륭한 몸과, 이온 음료 광고 모델 같은 훈훈한 생김새까지.
외모도 뛰어난데 집안까지 좋았다.
외가는 유서 깊은 세인트마리아 호텔을 창시·경영한 집안이었고, 친가는 ‘대한민국의 식탁을 책임지는 기업’이라는 별명을 지닌 세운그룹이었다.
한국대학교 경영학과에는 내로라하는 집안 아이들이 많았지만 진우는 그중에서도 특별했다.
그와 친해진 사람들은 진우의 장점으로 그의 외모와 배경보다는 성격을 더 쳐주었다.
“연진우는 다 가졌다, 진짜. 외모에, 집안에, 서글서글하고 유머 감각 쩌는 성격까지.”
“그러니까. 주식투자 동아리 애들처럼 있는 집 자식이랍시고 다른 사람 무시하고 도도하게 구는 것들과는 차원이 달라.”
입학할 때부터 지금까지 한국대의 명물이라는 평을 받고 있던 진우는 신입생으로 들어온 한 여학생을 보자마자 생각했다.
오늘부터 우리 학교의 명물은 저 애라고.
그 애는 이름도 특별했다.
천사빈.
그야말로 천사의 강림이었고, 진우의 긴 짝사랑의 시작이었다.
사빈이 제가 소속된 동아리인 ‘인하모니’에 가입했을 때, 진우는 느꼈다.
이건 운명이라고.
숙명이자 인연이라고.
“천사빈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목소리도 어찌나 맑고 고운지.
“야, 쟤 엄청 예쁘지 않냐?”
어. 겁나 예뻐. 그러니까 눈독 들이지 마, 새꺄.
“뭐…… 그런가. 잘 모르겠는데.”
“짜식, 눈 높기는. 쟤, 국회의원 딸이야. 천문호던가? 여당에서 힘깨나 쓰는 사람이라고 아버지가 그러셨어.”
국회의원의 딸이라. 얼추 집안도 맞는 것 같다. 부모님이 반대하지는 않을 정도?
머릿속에서 이미 사빈과 결혼 허락을 맡으러 가는 단계까지 다다른 진우였지만 겉으로는 괜히 무관심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지만 눈은 계속 사빈을 따라가고 있었다.
‘한 달 내로 내 여자 친구로 만든다.’
그는 자신이 있었다.
스스로 이런 얘기를 하긴 뭣하지만, 딱히 빠지는 부분이 없으니까. 다른 사람들의 말도 그렇고.
그러나 며칠이 지나도 진우는 그녀와 말 한 마디 제대로 섞을 수 없었다.
사빈이 교양과목으로 경영학과 수업을 듣는다는 얘기에 빨리 가까워질 수 있겠다고 생각했지만 …….
수업이나 동아리 활동이 끝나면 부리나케 사라지는 통에 대화는 고사하고 인사조차 나누지 못했다.
동아리 사람들 중에 진우와 밥을 먹지 않은 사람은 사빈이 유일했다.
그녀는 얼마 되지도 않는 양의 밥을 거의 마시듯 넘긴 후 거의 99%의 확률로 도서관으로 향했다.
마치 장학금을 받지 못하면 죽는 사람처럼, 여전히 수험생인 것처럼 공부만 해 댔다.
그런 사빈의 웃는 모습을 보게 된 건 아주 우연한 순간이었다.
그날도 수업이 끝나자마자 사빈은 부리나케 강의실을 빠져나갔다.
‘오늘은 꼭 밥 같이 먹자고 해야지.’
다짐한 진우가 긴 다리로 성큼성큼 그녀의 뒤를 따랐다.
경영대학 건물 뒤편에는 도서관으로 빠르게 갈 수 있는 작은 샛길이 있었다.
다소 가파르고 어두워서 다니는 사람이 별로 없었는데 사빈은 이곳으로 잘도 다녔다. 이동 시간을 아끼려는 모양이었다.
그를 미리 알고 있던 진우의 걸음걸이는 먼저 건물 뒤편으로 향한 사빈의 모습이 보이지 않아도 여유로웠다.
막 건물을 돌았을 때.
사빈이 샛길 옆에서 몸을 쭈그리고 앉아 무언가를 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가방에서 부스럭거리며 스틱 같은 것을 꺼냈다.
“안녕. 오늘도 있네.”
야-옹.
“내가 츄르 사 왔어. 연어 맛이야. 마음에 들어?”
애오오오-옹.
“그럴 줄 알았어. 먹어 볼까?”
사빈은 끄트머리를 찢고 스틱을 고양이의 입가에 가까이 가져다 댔다.
킁킁, 냄새를 맡은 고양이가 선홍빛 혀를 내밀어 츄르를 할짝할짝 핥기 시작했다.
“맛있게 잘 먹네. 다행이다.”
진우의 눈이 커졌다.
그의 세상이 멈추었다.
사빈이 미소를 지은 순간의 햇빛과 온도와 습도가 그의 머릿속에 사진처럼 저장되었다.
그녀가 미소를 짓는 모습이 마치 슬로모션처럼 매우 느리게 보였다.
그는 저도 모르게 한 걸음 앞으로 다가갔고, 그 소리에 놀란 사빈이 미소를 거두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키야옹! 하고 고양이가 날카로운 울음소리를 내며 도망갔다.
“……연진우 선배님?”
사빈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린 진우가 마른세수를 하며 말을 더듬었다.
“어, 어. 안녕. 나, 나도 이쪽 길로 자주 다니거든.”
“아, 네.”
“도서관 가는 길이야?”
“네.”
“가, 같이 갈까? 마침 나도 가는 길이거든.”
사빈은 별로 내키지 않는다는 표정이었지만 대놓고 거절할 수는 없었던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나이스.’
진우는 고양이에게 줄 츄르를 열 박스 정도 주문해야겠다고 생각하며 사빈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나란히 선 두 사람은 어색하게 걷기 시작했다.
“공부 열심히 하더라. 신입생이 과탑까지 하고 말이야.”
“아, 네.”
“부모님 좋아하시겠다. 대학 들어오면 대개 흐트러지는데 아직도 고3처럼 열심히 하고.”
“아…… 네.”
고양이에게는 그렇게 다정한 눈빛과 목소리를 내 주더니, 제게는 딱딱한 단답만 내어 준다.
그게 못내 섭섭하고 고까워서 진우가 불퉁하게 내뱉었다.
“너 아까 고양이한테 말할 땐 목소리 높아지더라? 되게 이상했어. 성대가 콧속에 있는 줄 알았다, 야.”
내내 무덤덤하던 사빈이 순간 참지 못하고 울컥했다.
“제가 언제 그랬다고……!”
아기 고양이가 하악질을 하는 것처럼 앙칼지게 반응하는 모습조차 귀여웠다.
감정을 내보이는 사빈의 모습을 본 사람은 제가 처음일 거다.
그렇게 생각하니 방금 전까지 진우의 안에 가득 쌓였던 서운함과 언짢음이 씻은 듯이 사라졌다.
아차 하는 표정을 지은 사빈이 목을 가다듬으며 다시 냉정을 유지하기 위해 애썼다.
꼭 억지로 가면을 뒤집어쓰려는 것 같아서 진우는 그녀를 계속해서 건드렸다.
“너 사실 도서관 가서 잔 적이 더 많지?”
“……아뇨.”
“나 중간고사 때 너 본 적 있다. 제3열람실 창가에 앉았었지? 그때 헤드뱅잉 장난 아니게 하던데. 난 너 록 그룹으로 데뷔하는 줄 알았어.”
“그런 적 없는데요!”
“성영이도 같이 봤어. 전화해 볼까? 진짠지 아닌지?”
“그, 그건.”
동공에 지진이 일어난 사빈을 보며 진우가 하하하, 크게 소리 내어 웃었다.
그날 이후로 두 사람은 서서히 가까워졌다. 이윽고 사빈이 선배님에서 ‘님’ 자를 빼고 부르는 유일한 선배가 되었을 때, 어찌나 기쁘던지.
이대로라면 연인이 되는 것은 식은 죽 먹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진우가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가려 하면 사빈은 어김없이 두 걸음도 아닌 다섯 걸음 뒤로 물러서서 벽을 쳤다.
“왜 표정이 어두워? 어제 가족 모임 있다고 일찍 갔잖아.”
“그냥 좀. 컨디션이 안 좋아서요.”
“아닌 것 같은데. 저번에도 부모님이랑 밥 먹어야 한다고 연습 중간에 나갔잖아. 그다음 날에도 죽상이었어, 오늘처럼.”
“잘못 보신 거예요. 저 먼저 가 볼게요, 조심히 들어가세요.”
“어어, 같이 밥 먹기로 했잖아!”
그게 한두 번 반복되자 사빈이 제게 완전히 거리를 두려 하는 것이 느껴져서, 진우는 선배 이상으로 더 다가갈 수가 없었다.
다행인 것은 사빈이 남자 친구를 만들 생각이 없어 보인다는 거였다.
그래서 진우는 한동안 그녀와 가장 가깝게 지내는 선배 타이틀에 만족해야만 했다.
그래도 사빈에 대해 알아 가는 게 하나씩 늘어 갈 때마다 행복했다.
베리류를 좋아해서 ‘베리공주’라는 별명을 붙여 준 것도 그중 하나였다.
“야, 천사. 우리 망원동 갈래?”
“거길 왜요?”
“라즈베리 케이크 기가 막히게 하는 곳이 있다던데.”
시큰둥한 표정을 짓던 사빈의 눈에서 곧바로 반짝반짝 빛이 났다.
‘으으, 귀여워.’
꼭 가장 좋아하는 연어 츄르 얘기에 표정 관리하려고 애쓰는 새끼 고양이 같았다.
진우는 사빈의 말랑한 볼을 꼬집어 주고 싶은 욕구를 간신히 눌렀다.
“그 근처에 볼일이 있기는 한데.”
“어떤 볼일?”
“어, 그…… 뭐 좀 사러요. 망원동에서만 파는 떡이 있다고 해서.”
“너 떡 싫어하지 않았나? 지난번에도 윤철 선배가 9년 만에 졸업하는 기념으로 돌린 떡, 혼자만 안 먹었잖아. 이에 들러붙고 목 막힌다고.”
당황한 사빈의 볼이 점점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변명거리로 왜 하필 떡을 택했지, 머릿속에 굴러가는 생각이 다 보여서 정말이지 돌아 버릴 만큼 귀여웠다.
“뭐, 어쨌든 가자. 하루 수량 정해져 있어서 서두르지 않으면 못 먹을 거야.”
“저 5교시에 1시간짜리 강의만 들으면 돼요.”
“오케이. 그럼 학관 앞에서 만나.”
“네. 이따 봐요, 선배.”
뒤돌아서서 걸어가는 사빈의 발걸음이 눈에 띄게 가벼워진 게 보였다.
진우는 이번에는 미소를 참지 못했다.
“귀여워 죽겠다, 천사빈.”
내가 꼭 네 애인이 되고 만다.
‘학교 다닐 때 못 되면 졸업한 후에라도 쫓아다닐 거다.’
하지만 그 후로도 사빈과는 좀처럼 연인으로 발전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그렇게 시간은 흘러만 갔다.
유학이 정해지고 나서 조급해진 진우가 사빈에게 실수를 저지르게 된 것은 그로부터 한 달 후의 일이었다.
***
간절히 바라도 이루어지지 않는 일이 있다. 예를 들면 첫사랑 같은.
씁쓸한 감정을 곱씹던 그 순간.
Rrrrrrr-.
벨소리가 울렸다. 사빈이었다.
- 선배, 저 지금 회의 끝났는데.
“응, 지금 바로 내려갈게.”
- 베이커리에서 기다릴게요. 강헌 씨가 여기 마들렌을 좋아하거든요.
“……그래, 조금만 기다려.”
전화를 끊은 진우가 긴 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잘 왔다, 후배님.”
그리고 잘 가라, 내 첫사랑.
앞으로는 행복만 펼쳐지기를.
옅은 미소를 지은 진우가 집무실을 나섰다.
그의 발걸음이 저도 모르게 빨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