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제04화
점심시간이 끝난 뒤.
“…….”
모니터가 켜져 있었지만 강헌의 시선은 책상 위 어딘가를 부유하고 있었다.
‘아직도 생생하군.’
간밤 꾸었던 꿈이 여전히 기억에 선명했다. 마치 영화를 보고 난 것처럼 말이다.
심지어 새끼 호랑이를 안았을 때 느껴진 털의 감촉과 말캉한 배, 제 얼굴을 핥던 분홍색 작은 혀에 난 돌기까지 또렷했다.
‘사빈이를 닮아서 그런가.’
아침에 눈을 뜬 순간부터 지금까지 꿈에서 본 새끼 호랑이를 생각하던 그때.
똑똑-.
갑자기 들려온 노크 소리에 정신을 차린 강헌이 목을 가다듬었다.
“들어오십시오.”
김 실장이 조용히 문을 닫고 들어와 고개를 숙였다.
“본부장님, 서재희 씨를 만나고 왔습니다.”
재희의 이름에 그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증거는 가져왔습니까?”
“저, 그게…… 본부장님을 직접 뵙거나 최소한 전화 연결이라도 되어야만 건네주겠다고 합니다. 아무리 말을 해 보아도 그 조건이 지켜지지 않으면 힘들다고 했습니다. 죄송합니다.”
김 실장이 고개를 더욱 깊이 숙였다.
재희가 그것을 빌미로 자신을 만나려 할 것이란 건 예상한 바였다.
“뭔지는 알아냈습니까.”
“회장님과 관련된 녹음 파일과 동영상이라고 했습니다. 그 자리에서 재생하여 잠깐 확인했는데.”
잠깐 숨을 참은 김 실장은 집무실에 강헌과 자신 둘뿐임에도 목소리를 낮추었다.
“서재희 씨가 허세를 부린 것은 아니었습니다.”
재희가 퇴원한 뒤 김 실장과 재희는 재희가 거주하는 강남의 주상복합아파트 지하 주차장에서 접선했다.
김 실장의 차에 올라탄 재희는 그간 몰래 녹음해 왔던 음성과 영상을 맛보기라며 재생했다.
김 실장은 재희 몰래 휴대폰으로 그 녹음본을 녹음하여 강헌에게 들려주었다.
내용은 충격적이었다.
상태가 완전히 또렷하지는 않았으나 그래도 목소리를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는 되었다.
- 이 회장은 참 좋겠어. 이런 미인을 옆에 두고 말이야.
- 지금은 윤 부회장님 옆에 있잖아요. 그런데 아까 하신 말씀은 뭐예요? 정부가 예산을 지원한다는 어려운 얘기요. 너무 멋있어 보여요.
- 아, 그거……. 일단 술 한 잔 먼저 마실까?
강헌이 필요하여 모종의 계약을 맺은 그들은 긴 시간 동안 서로를 철저히도 써먹었다.
이 회장은 재희를 톱스타로 올린 뒤 각계각층의 유력 인사들과의 접대 자리에 그녀를 불렀다.
그럼 재희는 그들로부터 수집한 정보를 이 회장에게 건넸다.
이로써 이서훈 회장은 아들인 강헌을 제 뜻에 따라 움직일 수 있었고 회사의 입지를 더욱 공고히 할 수 있었다.
‘이게 본모습이었나.’
강헌은 미간을 좁혔다.
자신의 앞에서는 언제나 청순하고 연약한 소녀였던 재희가 밖에서는 간드러지는 콧소리를 지닌 요부처럼 행동하고 있었다.
“본부장님, 괜찮으십니까?”
김 실장이 속이 거북한 듯 안색이 안 좋아진 강헌을 향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심호흡을 한 그가 지끈거리는 이마를 손으로 누르며 말했다.
“회장님과 관련된 부분은.”
“아주 조금 녹음을 했는데…… 들어도 괜찮으시겠습니까? 나중에 할까요?”
“아니. 지금 재생하십시오.”
어차피 나중에 또 들어야 할 텐데 그 전에 면역이라도 기르는 게 낫지 싶었다.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강헌은 습관적으로 왼손 엄지로 약지에 낀 결혼반지를 매만졌다.
그가 고개를 끄덕이자 김 실장이 녹음한 음성을 재생했다.
- 내일 잘해라.
- 건설 입찰에 관해서 물어보면 되는 거죠?
- 그래. 정명헌이는 눈치가 빠르니까 강헌이를 속이고 있는 것처럼 잘해야 한다.
- 저, 이번 주말에 오빠랑 있을 수 있게 해 주세요.
- 이번 주말이라……. 결과가 좋으면, 그러지. 워크숍에서 이 본부장은 빼 주마.
“……회장님과 관련된 내용은 여기까지밖에 들려주지 않았습니다.”
“역겹군.”
김 실장이 송구스럽다는 듯 어두운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내게 이걸 넘겨준 대가로 서재희는 뭘 바라는 겁니까.”
“예전으로 다시 돌아가고 싶다고 했습니다. 사모님과 결혼 생활을 계속 이어 가도 좋으니, 이따금 만나고 싶다고…….”
강헌이 주먹으로 테이블 위를 쾅, 내리쳤다.
“……감히.”
감히 그따위 말을.
불륜을 종용하는 것으로도 모자라서 마치 자신이 허락을 해 주는 위치인 것처럼 말하다니.
“서재희 녹음본, 어떻게든 전부 가져오십시오. 그 정도는 해낼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예. 안 그래도 진짜인지 아닌지 확인하겠다는 명목으로 건네받은 서재희 씨 휴대폰에 해킹 앱 설치해 두었습니다. 최대한 빠르게 보고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서재희 휴대폰이든 노트북이든 증거들은 삭제해야 할 겁니다. 더는 그것으로 협박하지 못하도록.”
그의 눈이 짙게 가라앉았다.
“다시는 나와 만날 일 없게.”
“예, 본부장님.”
김 실장이 나간 뒤.
강헌은 마른세수를 하며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향했다.
그들에게 자신은 인간이 아니라 도구였다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달은 순간이었다.
시원한 시티뷰가 펼쳐진 광경을 내려다보고 있어도 답답한 속은 나아지지 않았다.
사빈이 보고 싶었다.
저를 향해 미소 짓는 말간 얼굴을 보고, 제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를 듣고, 부드럽고 향기로운 몸을 끌어안으면 좀 나아질 듯싶었다.
하나, 지금 당장 그럴 수가 없어서 그는 자신의 반지에 가만히 입을 맞추었다.
그것이 사빈이라도 되는 것처럼.
***
며칠 후.
조찬 모임을 마치고 돌아온 이 회장이 막 집무실에 들어선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강헌이 방문했다.
“일찍부터 어쩐 일이냐. 한창 보고서 검토로 바쁜 시간에.”
“검토해 주십사 하는 것이 있어서 왔습니다.”
“뭐냐.”
“일단 앉으시죠.”
이 회장은 커다란 1인용 소파에, 강헌은 그 앞쪽으로 길게 놓인 소파에 앉았다.
강헌이 품에서 휴대폰을 꺼내어 무언가를 클릭했다.
그러자 이 회장과 재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유를 부리던 이 회장은 얼굴을 찌푸렸다.
“……이게 뭐냐.”
“회장님께서 서재희와 모의한 정황입니다. 접대, 불법 정보 획득, 도청, 감시 등.”
“이강헌, 지금 이게 뭐하자는 거야!”
“이걸 언론에 뿌리면 어떻게 될까요.”
“뭐, 뭐야?”
“기조그룹의 이미지는 완전히 무너질 겁니다. 신뢰는 바닥을 치고 떨어진 주가는 한동안 오르지 않겠죠. 회장님은 세간의 비난을 받을 뿐만 아니라 모든 임직원에게 원망을 사게 될 겁니다.”
“하, 지금 날 협박하는 게냐?”
이 회장이 어이없다는 듯 실소를 터뜨렸다.
“그렇게 되면. 넌 무사할 것 같으냐?”
강헌의 목소리에 힘이 들어갔다.
“그렇게 되면 새로운 리더를 원하게 될 겁니다. 예를 들면 젊고, 거대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성사시킨 전력이 있고, 상처 입은 제 사람을 따뜻하게 끌어안을 줄 아는, 그런 지도자 말입니다.”
주먹을 꽉 쥔 이 회장의 손이 부르르 떨렸다.
“주주회의를 열면 이러한 의견을 더 선명하게 들을 수 있을 겁니다.”
“이미 공사를 마친 모양이군.”
이 회장의 머릿속에 강헌의 편으로 돌아설 가능성이 높은 임원들의 얼굴이 차례로 떠올랐다.
“또한 UM이 보유한 기조전자 주식 일부를 양도받는 대신 히트펌프 공급 계약 체결을 맺기로 했습니다. 이 회장님과 직접.”
그가 혀를 찼다. 이번엔 감탄이었다.
하. 경쟁사까지 끌어들여 수작을 펼쳤다?
그것도 기조그룹이라면 이를 가는 UM그룹 이 회장과 직접 계약이라니.
“내가 호랑이를 키웠구나.”
그 말에 새까맣게 가라앉은 강헌의 눈이 번뜩였다.
“사람을 짐승처럼 여긴 대가라 여기십시오.”
언중유골. 말 속에 뼈가 있었다.
이 회장은 아들의 서늘한 시선을 응시했다.
“그래서. 총수 자리라도 꿰차겠다는 거냐?”
“직위는 그대로 두겠습니다. 얼마간 업무도 볼 수 있게 해 드리죠.”
“뭐, 뭐야?”
“그러니 조용히 물러나십시오. 할아버님을 몰아낸 자리에 틀어 앉아 평생을 바친 기조그룹이 망가지는 꼴을 보고 싶지 않다면.”
고함을 지르는 것도 아닌데 낮게 깔린 강헌의 음성은 상대방으로 하여금 목이 졸리는 듯한 압박감을 느끼게 했다.
“그리고…… 회장님이 홍콩에 설립한 페이퍼컴퍼니를 통해 비자금을 조성한 정황도 파악 중입니다.”
“……뭐?”
“기조그룹이 언제 세명해운사를 인수했는지 모를 일이군요.”
이 회장은 가상의 명의로 국내 중견 해운사를 사들인 뒤, 파나마 법인 명의로 조세피난처에 선적을 두고, 그곳에서 발생한 이익을 홍콩의 페이퍼컴퍼니 명의 계좌에 숨겼다.
약 1,570억 정도였다.
“국세청에 익명의 투고를 날려 볼까요.”
“너, 너 그걸 어떻게…….”
“권력의 원동력인 정보의 출처는 철저히 기밀로 하라는 회장님의 가르침을 따라, 밝힐 수 없습니다.”
강헌의 검은 동공에선 빈틈 한 점 찾아낼 수가 없었다.
보육원에서 거두어들인 뒤 재희를 목줄로 삼았을 때만 해도, 강헌이 이렇게 제 뒤통수를 칠 거라고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언제까지고 제 입맛에 맞게 움직일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요즘 매스컴에 너무 소홀하셨습니다, 회장님.”
이 회장이 이를 악물며 말했다.
“깐죽거리지 마라. 내가 잡혀 들어가면 너 역시 곤란해질 거다. 또한, 네 처도.”
이 회장은 아들의 유일한 약점을 언급했다.
아니나 다를까, 얼음으로 빚은 듯 차갑게 굳어 있던 강헌의 얼굴이 단번에 찌푸려졌다.
“매스컴에 오르내려서 시끄러운 건 나뿐만이 아닐 거다. 그 과정에서 너와, 네 처가 개입되었다는 정황이라도 나오게 되면 어쩌려고.”
인위적으로 정황을 위조할 수도 있다는 얘기였다.
“그런 정황은 나오지 않을 겁니다. 회장님의 비자금을 관리하는 윤석헌 전무는 가족을 무척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더군요.”
이 회장의 동공이 떨렸다.
“지금껏 미국으로 유학을 간 윤 전무의 딸을 빌미로 잡고 있으셨나 본데. 그 딸, 한국으로 귀국시켰습니다.”
“이강헌!”
이 회장이 진노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거두어들인 검은 머리 짐승이 날카로운 이빨로 제 목덜미를 물어뜯자, 이 회장의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자중하셔야 할 겁니다. 명예로운 은퇴식을 치르시려면.”
하나 강헌에게는 그 어떤 영향도 주지 못했다.
“아, 하나 더.”
그의 음성이 심해처럼 낮게 깔렸다.
“한 번만 더 제 아내를 언급하며 협박하신다면 참지 않겠습니다.”
“감히, 감히……!”
“또다시 제 아내에게 상처를 준다면 그땐 명예로운 은퇴식도, 유유자적한 노년 생활도 없을 겁니다. 차가운 골방에서 혼자 외롭게 썩어 갈 테니 그리 아십시오.”
강헌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취임식 때 이런 말씀을 하셨더군요. 늙고 추한 것은 처절하게 몰아내야 젊고 환한 것이 싱그럽게 자라난다고.”
이 회장을 내려다보는 그의 눈빛은 우위를 점한 포식자의 그것이었다.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부디 처절하게 몰려 나가지 않도록 주의하시길.”
홀로 남은 이 회장은 아버지를 몰아낸 지난날의 저와 꼭 닮아 있는 강헌의 뒷모습을 그저 망연자실하게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