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편의 연인에게 (78)화 (78/90)

외전. 제03화

터덜터덜 걸어오는 천문호에게서는 더 이상 위엄과 권위가 느껴지지 않았다.

자신의 걸음걸음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고개를 숙이며 복종했던가.

그런 생각을 하며 집에 돌아온 그는 대문을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투척된 개똥으로 여기저기에서 기분 나쁜 냄새가 피어올랐다. 욕설이 적힌 편지, 뭉쳐진 기저귀, 돌덩이와 벽돌 등으로, 조경이 훌륭하던 정원이 어느새 황폐하게 변해 버렸다.

한숨을 내쉰 그는 쑥대밭이 되어 있는 거실을 보고 입을 벌렸다.

“이, 이게 무슨 일이야?”

“아빠…….”

소파 밑에서 몸을 웅크리고 앉아 있던 큰아들, 무진이 천문호를 보자마자 다시 흐느꼈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이냐고 묻잖아!”

아무리 검찰의 조사를 받고 있다지만 그래도 자신은 여전히 국회의원이다.

이렇게 집 안까지 들어와서 휘저을 수는 없었다.

“제, 제가 대출을…….”

“대출?”

처음 듣는 소리에 천문호의 눈이 커졌다.

“이, 이 서방이 제 사업에 투자해 줄 줄 알고 좀 많이 땡겼는데…….”

기가 막힌 소리에 천문호는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았다.

“맨날 아빠 엄마 도움만 받으니까, 이번에는 내 힘으로 어떻게든 해 보고 싶어서…… 흐윽…… 그래도 친구가 아는 사람이래서 믿었는데, 날짜 미뤄 준다고 얘기하재서 문 여니까 이렇게…….”

“이, 이 멍청한 새끼를 자식이라고……!”

망연자실한 표정을 지은 천문호가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세상이 암흑으로 변해 버렸다.

***

“너무 맛있었어.”

강헌의 말에 사빈이 눈을 접으며 웃고 말았다.

“그 말, 몇 번째인지 알아요?”

퇴근한 그는 아내가 준비한 음식을 정말로 맛있게 먹었다.

만들다 보니 평소보다 양이 조금 더 많아졌는데도 강헌은 깨끗이 비웠다.

“정말 억지로 먹어 준 거 아니죠?”

그리고 사빈의 이 말도 벌써 몇 번째였다.

“내가 싫은 걸 억지로 할 사람으로 보여?”

씩 웃은 강헌이 그녀의 뺨을 감싸 느릿하게 문지르며 속삭였다.

“그래도 당신보다는 아니야. 사빈이가 더 달지.”

응? 의미를 단번에 알아듣지 못한 사빈의 얼굴이 곧 빨갛게 달아올랐다.

“가, 강헌 씨!”

“하하.”

강헌이 소리 내어 웃으며 사빈을 품에 꼭 끌어안았다.

그들은 벌써 한 차례 사랑을 나눈 뒤였다.

오늘도 침대 아래에는 다급히 벗긴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옷가지와 속옷이 널브러져 있었다.

그녀의 얼굴을 부드럽게 쓸며 강헌이 물었다.

“오늘은 별일 없었고?”

“응. 평화로웠어요. 프레젠테이션도 잘 끝냈고, 날짜 조율도 원만하게 합의됐어요.”

“잘됐네.”

“강헌 씨는요?”

그의 가슴에 머리를 기대고 있던 사빈이 고개를 들어 그와 눈을 마주했다.

“강헌 씨도 별일 없었어요?”

순간 재희에게서 온 연락이 떠올랐으나 곧바로 지워 버렸다.

사빈과 함께 있을 땐 오로지 사빈에게 집중하고 싶었고, 또 더는 재희와 엮일 생각이 없었다.

“강헌 씨, 무슨 일 있었어요?”

“있었지.”

“뭔데요?”

그녀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집에 더 빨리 들어가고 싶었는데 아내가 좀 늦게 오라고 했거든.”

그가 괜찮다는 듯 사빈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보고 싶어 죽겠는데 참아야 해서 힘들었어.”

그녀가 곱게 눈을 흘겼다.

“정말. 이렇게 장난 잘 치는 사람인 줄 몰랐어요.”

“장난처럼 보여?”

눈빛이 순식간에 짙게 물드는가 싶더니 강헌이 사빈의 위로 올라왔다.

“늘 진심이야, 난.”

커다랗게 벌어진 그녀의 동공이 긴장으로 인해 잘게 흔들리자, 간신히 잠재워 놓았던 욕망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가, 강헌 씨?”

“계속 당신 생각뿐이야. 지금은 뭘 하고 있을까. 뭘 먹고 있을까. 누구와 어떤 얘기를 하고 있을까.”

그가 사빈의 머리카락을 조금 쥐고 입술을 묻었다.

“내가 이렇듯 당신도 내 생각을 할까.”

스르륵. 바스락. 침구가 뱀처럼 조용히 움직이며 들썩거렸다.

사빈의 허벅지를 제 허리에 감은 강헌이 여린 곳에 자신을 느리게 문지르며 자극했다.

“읏…… 강헌 씨…….”

연약한 목소리에 금세 물기가 어렸다.

그의 흥분감이 더욱 커졌다.

아내의 연약한 목덜미에 입술을 붙인 그가 혀로 느릿하게 핥다가 강하게 빨아들이며 흔적을 남겼다.

허리는 계속 움직이는 채였다.

비벼지는 곳이 물기로 촉촉이 젖어 갔다.

사빈이 참지 못하겠다는 듯 그의 어깨를 꽉 부여잡자, 강헌도 한계를 느꼈다.

“사빈아.”

그의 목소리가 탁해졌다.

“아이 갖고 싶어?”

얼마 전, 두 사람은 함께 백화점에 방문했다.

밖에서 데이트를 하기엔 아직 무리라고 판단되어 결정한 장소였다.

세부 사항은 조금씩 다르지만 백화점마다 폐점 뒤 VVIP들을 위해 문을 여는 ‘오프타임 마케팅’을 펼치고 있었다.

백영백화점은 최근 세간의 화제가 된 기조그룹 후계자와 그의 배우자가 방문한다는 연락에, 오직 두 사람만을 위한 ‘오프타임’을 열었다.

[정말 우리밖에 없는 건가요?]

[그렇습니다, 작은사모님. 편하게 둘러보시고, 궁금한 점이 있으시거나 마음에 드는 물건이 있으시면 언제든 말씀해 주십시오.]

손을 맞잡은 그들은 천천히 백화점을 돌면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며 물건을 구경했다.

아내의 눈길이 오래 머무는 것이 무엇인지 살피느라 강헌의 눈동자가 기민하게 움직이던 그때.

사빈의 눈이 무언가를 뚫어지게 응시했다.

시선을 따라가니 전혀 예상치 못한 물건이었다.

육아용품 코너에 진열된 아기 신발이었다.

풀과 구름이 수놓인 민트색 신발이 무척이나 앙증맞았다.

하지만 사빈은 별다른 말을 하지 않은 채 코너를 지나갔다.

거리를 둔 채 따라오고 있는 퍼스널쇼퍼와 보안요원 때문에 그 자리에서는 말할 수가 없었다. 혹시나 잡음이 생겨서 사빈이 신경 쓰이는 일이 생길까 염려하는 마음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날 신발을 보던 사빈의 눈빛이 잊히지가 않았다.

“아이……?”

“그때 아기 신발에서 눈을 못 떼기에. 자수가 놓인 민트색.”

“그걸 봤어요?”

강헌이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난 늘 당신을 보고 있으니까.”

사빈의 볼과 눈가에 기쁨과 수줍음이 붉게 번졌다.

“엄마 아빠가 생각나서요. 어릴 적에 그거랑 비슷한 신발을 직접 만들어 주셨거든요.”

“……그랬구나.”

부모님 얘기가 나오자 강헌의 눈동자가 가라앉았다. 사빈이 괜찮다는 듯 작게 미소를 지었다.

“유치원 다니는 내내 그것만 신고 다녔어요. 발이 커진 후에도 그걸 신겠다고 땡깡을 부렸던 게 생각나서 쳐다봤어요.”

“난 당신이 아이를 갖고 싶어 하는 줄 알았어. 그래서 그동안 이것저것 알아봤는데.”

“뭘요?”

그녀의 뺨을 감싸고 있던 커다란 손이 긴 목을 타고 내려와 쇄골을 지나 가슴으로 내려왔다.

“앗…….”

살결을 부드럽게 움켜쥐자 사빈이 어깨를 움츠리며 옅은 신음을 내뱉었다.

“임신을 하게 되면 찾아오는 여러 가지 변화라든가. 좋은 부모가 되기 위한 준비라든가, 하는 것들.”

놀라 눈을 크게 뜬 사빈은 그의 혀가 꼿꼿하게 굳어진 정점을 스치자 몸을 비틀었다.

“하읏……!”

하얀 손가락이 강헌의 검은 머리카락 사이를 헤집었다.

“강헌, 씨, 내일 출근해야…… 읏.”

그는 일부러 음란한 소리를 숨기지 않으며 부드럽고 탄력 있는 살결을 양껏 빨아들였다.

그녀로 인해 입 안 가득 고인 단물이 다시금 사빈의 몸 곳곳을 적셨다.

“사빈아.”

강헌의 눈가가 욕망으로 인해 붉게 짓물렀다.

“아이, 원해?”

제 안을 헤집는 긴 손가락의 움직임이 집요해지고 깊어질수록 사빈의 입에서 교성과 신음이 터졌다.

“모, 몰라…… 아읏, 요……!”

“그래…… 당신이 원할 때 말해 줘. 하루 종일 침대 밖으로 내보내지 않을 거니까.”

강헌은 잔뜩 젖은 제 손가락을 빼낸 곳에 욕망으로 딱딱하게 뭉친 것을 천천히 밀어 넣었다.

사방에서 조여드는 감각에 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윽…….”

심호흡한 그는 가는 허리를 붙잡고 느리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비벼질 때마다 불꽃처럼 터지는 쾌감에 두 사람은 금세 열락에 빠져들었다.

“강헌 씨…….”

사빈이 손을 뻗자 그가 상체를 낮추어 그녀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그 반동에 서로의 몸이 더욱 깊이 닿아서 그들은 동시에 신음을 흘렸다.

“난 당신이 가장 소중해.”

강헌이 아내의 귀를 잘근잘근 씹으며 나른히 속삭였다.

“뭐든 당신 뜻에 따를 거야.”

“으응……!”

“사랑해.”

잘게 떨리는 사빈의 몸을 끌어안은 강헌의 몸짓이 더욱 격렬해졌다.

정점에 다다른 순간, 쉴 새 없이 이어지던 야릇한 마찰음과 색스러운 교성이 폭발하듯 산산이 부서졌다.

“하아, 하아…….”

“후…….”

두 사람은 서로를 끌어안은 채 가쁘게 호흡했다.

강헌은 사빈의 눈가에 생리적으로 흐른 눈물을 엄지로 닦고는 입을 맞추었다.

눈가를 비롯해서 사빈의 얼굴 곳곳에 그의 입술이 내려앉았다.

그러다 문득 상상해 보았다.

그녀를 닮은 아이는 어떨까.

눈망울은 크고 맑을 것이다.

살결은 희고 투명할 테고.

그러다 눈을 사르르 접으며 미소를 지으면 사랑스러워서 견딜 수가 없겠지.

수줍어서 빨갛게 달아오르는 볼과, 부끄러울 때면 입술을 안으로 말고 눈을 깜빡거리는 모습도 닮았으면 좋겠다.

“왜 그렇게 봐요?”

멍한 눈으로 자신을 내려다보는 강헌을, 사빈이 의아하게 바라보았다.

“사빈일 닮으면 참 예쁠 거야.”

“뭐가요?”

“우리 아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러울 거야.

나직한 속삭임에 사빈이 눈을 접으며 배시시 웃었다.

“강헌 씨를 닮아도 사랑스러울 거예요.”

흠, 강헌을 닮은 아이라.

“엄청 카리스마 있으면서도 속이 깊고 다정한 아이겠죠?”

그리고 뭐든 클 것이다.

키도, 체격도, 마음도.

그가 손가락으로 사빈의 코끝을 톡, 건드렸다.

“예쁜 소리만 하네.”

헤헤, 하고 사빈이 파고들자, 강헌은 기꺼이 제 품을 내어 주었다.

“난 당신이 좋다면 언제든 좋아.”

“응, 저도 그래요.”

“오늘부터 진지하게 생각해 보자.”

끄덕이는 아내의 이마에 키스한 강헌이 눈을 감았다.

***

흰색, 연분홍색, 노란색 등 다채로운 색깔의 꽃이 핀 광활한 동산에 강헌은 홀로 서 있었다.

머리 위에서 햇빛이 반짝, 하고 빛나서 잠시 눈을 찡그린 찰나.

우우웅.

어디선가 작게 그르렁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저쪽에서 털이 아주 희고 궁둥이가 통통한 무언가가 그에게로 아장아장 다가오고 있었다.

‘새끼 호랑이?’

눈이 마주치는 순간.

우우! 그르릉. 부우우.

흰 새끼 호랑이가 마치 웃는 것 같은 소리를 내며 기쁜 듯 꽃이 만발한 정원을 뒹굴고 있었다.

검은 눈동자는 또렷하고 맑았으며 하얀 털에서는 윤기가 자르르 흘렀다.

그러다 짧고 오동통한 다리로 열심히 뛰어온 새끼 호랑이가 그의 품 안으로 폴짝 뛰어들었다.

강헌은 새끼 호랑이를 붙잡고 들어 올려 눈을 마주했다.

그러자 새끼 호랑이가 앙증맞은 혀로 그의 얼굴을 마구 핥아 댔다.

그 모습이 어찌나 귀엽던지, 강헌은 저도 모르게 웃었다.

작은 짐승을 보자 그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떠올랐다.

‘사빈이를 닮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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