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제02화
사빈이 숨을 작게 들이마시는 소리가 들렸다.
분명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라 입술을 깨물거나 안으로 말며 어쩔 줄 몰라 하고 있겠지.
그 모습이 선명하게 떠오르자 인내심이 바닥을 드러냈다.
“저녁, 꼭 오늘 만들어야 하나?”
탁하게 가라앉은 목소리에서 열기가 배어났다.
- 꼭 직접 만들고 싶었는데 늘 이렇게 미뤄졌잖아요.
음, 확실히 그건 그렇지만.
- 오늘이 아니면 앞으로 더 바빠져서 시간이 없을 것 같아요.
더 바빠진다는 사빈의 말에 강헌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더 바빠진다고?”
- 기조미술관 산하 레이블을 설립해서 아예 신진 작가들의 작품만 전시, 유통할 예정이에요. 제가 책임자를 맡게 되었고요.
하아. 강헌의 입에서 한숨이 길게 새어 나왔다.
“아내가 능력이 뛰어나도 괴롭군.”
- 혼자 있는 거 맞죠? 다른 사람하고 같이 있을 때 그런 말 하면 안 돼요!
“회의실에 사람들 다 모아 놓고 스피커폰으로 통화 중인데.”
- 저, 정말요?
“아니. 그랬다간 당신 내 얼굴 안 볼 거 아냐. 그런 짓을 할 리가 없지.”
- 강헌 씨!
사빈이 발끈하자 그가 픽 웃었다.
농담을 모르고 살았던 강헌이었으나 요즘은 아내를 놀리는 재미로 살고 있었다.
반응이 너무나도 귀여워서 자꾸만 건드리고 싶어졌다. 입술을 안으로 말고 저를 곱게 흘겨보는 얼굴이 얼마나 예쁘던지.
- 흥. 오늘 궁중요리 할 거예요. 그러니까 밤 9시쯤 들어와요.
“밤새워도 괜찮겠어? 조금이라도 재우려고 했더니 안 되겠군.”
사빈이 또 발끈하며 제 이름을 부르자 강헌이 눈을 접으며 소리 내어 웃었다.
“하하.”
- ……내가 강헌 씨 웃는 거에 약한 거 알고 이러는 거죠?
“부부는 한마음이라잖아. 나도 당신 웃는 거에 약하니까 동등한 거 아닐까?”
- 그건…… 그런가?
두 사람은 동시에 작게 웃었다.
- 조심히 와요.
“응, 사랑해.”
- 저도 사랑해요.
이대로 평생 휴대폰을 붙잡고 통화를 하고 싶었지만 그러다 자칫 야근을 해야 할 수도 있었다.
사빈을 한시라도 빨리 보려면 서둘러야 한다.
아쉬운 표정으로 통화를 종료한 강헌은 사진첩에 가득 저장되어 있는 사빈의 사진을 보았다.
자신을 향해 환하게 웃는 모습이 너무나도 아름다웠다.
깜박 잠이 든 모습도, 창밖을 바라보는 뒷모습도, 그림을 응시하는 옆모습도 모두 사랑스러웠다.
“보고 싶다, 천사빈.”
왼손을 들어, 네 번째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의 한가운데 박힌 핑크 다이아몬드에 살짝 입을 맞춘 강헌은 정시에 퇴근하기 위해 박차를 가했다.
***
먼저 퇴근한 사빈은 음식의 간을 보고 있었다.
어릴 적 엄마가 만들어 준 닭볶음탕이 먹고 싶어졌고, 강헌에게도 맛보게 해 주고 싶었다.
“음, 맛있다. 조금만 졸이면 되겠어.”
인덕션의 열을 조절한 사빈은 식탁 위에 놓인 태블릿을 집어 들었다.
위치가 높아지고 권한이 많아진 만큼 책임감과 해야 할 일도 늘었다.
해서 그녀는 요즘 틈만 나면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고 업무를 보려 했다.
그럴 때마다 번번이 강헌에게 방해를 받기는 했지만.
함께 있을 때는 제게 집중하라며 자신의 손에 들린 것을 빼앗아 내려놓고 입술을 겹쳐 오곤 했다.
그럼 한동안 침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지금 빨리해야지.’
하지만 일에 집중하려던 그녀는 아까 그와의 통화를 떠올리고는 작게 웃었다.
“참 귀엽다니까, 이강헌 씨.”
몸은 그렇게 큰데 말이지. 미소를 지으며 자료를 찾기 위해 포털 사이트에 접속한 사빈.
그러다 메인 화면에 떠 있는 기사를 보고 멈칫했다.
[국회의원 천문호, 잇따른 비리 의혹…… 이번엔 국회윤리특별위원회가 제대로 작동할까.]
“…….”
여전히 천문호의 이름만 보아도 사빈은 심장이 옥죄이는 기분이었다.
손가락 끝이 떨려 왔다. 그녀는 눈을 감고 천천히 심호흡을 했다.
‘괜찮아. 겁낼 필요 없어.’
난 안전한 곳에 있고, 그 사람들과 더는 엮일 일 없어.
‘강헌 씨도 옆에 있는걸.’
남편을 떠올리자 불안하게 뛰던 가슴이 서서히 가라앉는다.
“후우…….”
숨을 크게 들이쉬고 내뱉기를 반복한 사빈은 조심스럽게 기사를 클릭했다.
천문호에 대한 르포 형식의 기사였다.
[……뿐만 아니라 그의 일가붙이들도 그의 비리에 덩굴처럼 얽혀 있다.
스스로의 힘으로 무언가를 이루어 본 적 없이 세상에 나와 온갖 갑질을 자행해 온 두 아들, 불법 취득한 정보로 재산을 불린 그의 집안과 처가, 게다가 갓 태어난 조카의 명의까지 이용하는 파렴치함에 혀를 내두르지 않을 수 없었다.]
사빈의 머릿속에 자신을 외면했던 사람들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입적된 후 처음 한두 번 명절 때 얼굴을 본 친척들은 천문호와 추연실이 자신을 어떻게 대하는지 뻔히 알고 있으면서도 누구 하나 말리는 사람이 없었다.
어린 사빈을 감싸는 것보다, 천문호에게서 떨어지는 콩고물을 받아먹는 것이 더 이득이라고 생각한 것이리라.
이런 집안에서 어떻게 아빠 같은 사람이 나올 수 있었는지 의아했고, 동시에 아빠가 그들과는 다르다는 생각에 안도했었다.
참 지독히도 외롭고 힘들었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괜찮다.
진짜 가족이 생겼으니까.
강헌만 있다면 이제 사빈은 아무것도 두려울 게 없었다.
세상에 자신을 아끼고 사랑해 주는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다면 그걸로 족했다.
[천문호 의원은 온 국민의 지탄을 받고 있다. 학부모, 취업 준비생, 직장인 등 너나 할 것 없이 그의 행태에 좌절하고 분노를 느낀다. 그러나 과연 천 의원이 제대로 된 처벌을 받을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이 대목에서 사빈은 저도 모르게 숨을 멈췄다.
[헌법에는 그들을 보호하는 방탄 특권이 기재되어 있다. 그들은 문제가 생겨도 어물쩍 넘긴다. ‘다음엔 내 차례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서로 감싸 주기 급급한 국회의원들의 잘못된 동료애가 만연하고 있는 가운데, 과연 여당의 실세라고 할 수 있는 천문호 의원이 합당한 처벌을 받을 수 있을지 의심된다.]
만약 천문호가 그 죄에 합당한 처벌을 받지 않고 피해 간다면.
그래서 다시 자유롭게 된다면.
혹시라도, 만약에 다시 마주치게 되기라도 한다면…….
[방탄 특권은 국민이 뽑아 준 국민의 대표이기 때문에 누릴 수 있는 것이다. 1991년 만들어진 윤리위가 허울뿐인 조직으로 남지 않으려면 이번에야말로 제대로 작동해야 할 것이다.
더불어, 레임덕 위기에 처한 정부가 국민들로부터 조금이라도 신뢰를 회복하기 위해서라도 이 사안은 결코 ‘평소처럼’ 가볍게 넘겨서는 안 될 것이다.
다행히 이번 천문호 의원 파문은 쉬이 가라앉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향후…….]
댓글은 3천 개가 넘게 달려 있었다. 대개가 기자의 의견에 동의하는 내용이었다.
“……휴.”
숨을 내쉰 사빈은 태블릿의 커버를 닫고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씻었다.
지금은 요리에 집중하자. 강헌 씨가 맛있게 먹는 모습만 떠올리면서.
그녀는 다른 반찬을 만들기 시작했다. ‘가만히 강물을 보고 있으면 원수의 시체가 떠내려오는 걸 볼 수 있다’는 노자의 명언을 떠올리면서.
***
길고 길었던 검찰 조사를 마친 천문호는 곧장 소속된 당의 핵심 멤버들을 불러냈다.
그러나 평소 그의 연락에 어디에 있든 바람처럼 달려 나오던 이들은 모두 전화 연결이 되지 않았고, 모인 사람은 고작 네 명뿐이었다.
“지금까지 내가 물어다 준 게 얼마인데, 날 이렇게 외면하고 무시해도 되는 거야? 내가 나만 죽을 것 같아?”
“뭘 갖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랬다간 천 의원님 징역 살 때 가족들이 무사하지 않을 겁니다.”
“뭐, 뭐야?!”
이곳에 모인 사람들 중 가장 나이가 어리고 경력도 짧은 의원이 한심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혼잣말 같지만 천문호 들으라고 한 소리였다.
“기조그룹이 개입한 이상 게임 끝이라고 봐야지. 그걸 아직도 모르시나.”
천문호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물들었다.
“너, 정치 인생 여기서 끝내고 싶어? 새파란 게 분수도 모르고 어딜 기어올……!”
“지금 끝나게 생긴 게 누군데, 정말. 당의 명예를 위해서 혼자 짊어지고 들어가면 열사 취급은 해 줄 수 있습니다. 지금 천 의원님 한 사람 때문에 우리 당이 거의 몰락 위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요.”
“조 의원 말이 맞습니다. 솔직히 천 의원님 일 터지기 전까지 우리 당, 다음 대선 때도 승리가 점쳐졌습니다. 근데 지금 이게 뭡니까. 망쳐 놨으면 책임도 져야 할 거 아닙니까! 더 위에서도 압박이 들어오고 있습니다.”
“쯧쯔. 눈치도 없이 기어 나와선.”
“그러게 말이야. 난 솔직히 천 의원님이 알아서 물러날 줄 알았습니다. 똑똑한 척은 그렇게 다 하더니.”
“평소 입버릇처럼 말씀하셨잖습니까. 피해 끼치는 인간들은 상종하지 말고 단칼에 잘라 버려야 한다고.”
아무도, 아무도 이 천문호를 이토록 무시한 적이 없었다.
대선 후보로까지 점쳐지던 자신이 어쩌다 이토록 추락해 버렸는가.
모두 다 사빈 때문이었다. 잘 길들이면 그만이라고 여겼는데.
결국 길들여지지 않았다.
집안의 입맛에 길들여지지 않은 그 애의 아비처럼.
“날 희생양으로 삼아서 쇄신의 이미지를 쌓아 보겠다고? 감히, 날……?”
“가족들을 조금이라도 생각하신다면 이쯤에서 그만 물러나시죠.”
자신을 가장 잘 따른다 여겼던 김 의원마저도 점잖은 목소리로 몰락을 권하고 있었다.
“의원님께서 책임지시고, 가족들은 지방이든 해외든 나가 살고 있으면 언젠가 잊힐 겁니다. 그때 다시 앞날을 논의해 보도록 하지요.”
그 말을 끝으로 김 의원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나머지 세 명도 따라 일어나 룸을 나섰다.
“기, 김 의원! 조 의원, 윤 의원! 야, 이명현, 넌 내가 당선시켜 준 거나 마찬가지인 거 잊었어?!”
“그 대가로 지금껏 개같이 부려 먹지 않았습니까.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고. 내가 속으로 얼마나 이를 갈았는지 알아?”
이 의원이 제 옷자락을 잡은 천문호의 손을 거칠게 뿌리쳤다.
“이거 놔요, 어디 범죄자가 의원 몸에 함부로 손을 대나.”
탁. 문이 닫혔다.
텅 빈 공간에 홀로 남은 천문호가 주먹으로 테이블 위를 쾅! 내리쳤다.
“젠장, 젠장! 그년만 아니었어도……!”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욕설을 내뱉어 보아도 망치로 명치를 내리친 것 같은 답답함은 사라지지 않고 오히려 더욱 심해져만 갔다.
요즘 그를 비롯하여 가족들은 밖으로 한 발짝도 나갈 수 없었다.
정원 안으로는 협박, 저주, 욕설로 가득한 쪽지가 날아왔고 계란, 돌은 기본이요, 벽돌, 칼, 심지어는 아기의 똥 기저귀와 개똥까지 던져 댔다.
사무실은 폭주하는 전화로 업무가 마비되어 사실상 폐쇄되었고, 소통을 위해 만든 블로그 등 SNS도 모두 비공개로 돌리거나 삭제했다.
휴대폰 번호를 바꾸어도, 가족 모두에게 매일 문자메시지와 음성메시지가 몇백 개씩 쌓여서 제대로 켜지도 못했다.
아마도 연락을 취한 지인들 중 누군가가 그들의 연락처를 언론과 온라인에 뿌리고 있는 모양인지라, 불안한 마음에 보좌진과도 연락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고립되어 버린 것이다. 이 세상으로부터.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제게 잘 보이려는 인간들이 주위에 득실거렸는데.
한 번만 만나 달라고 사정사정해 댔었는데.
대한민국이 제 손아귀에 있었는데.
천문호는 그대로 털썩 무릎을 꿇고 주저앉았다.
“끝인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