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제01화
“재희야, 사랑한다. 널 지키기 위해선 어쩔 수 없이 그 여자와 부부인 척 연기를 해야 했어.”
재희의 표정이 환해졌다.
거봐, 그럴 리가 없잖아.
오빠가 날 버릴 수 있을 리 없어.
“사랑해, 오빠.”
성큼성큼 다가온 강헌이 팔을 벌려 재희를 강하게 끌어안았다.
‘오빠가 먼저 안아 줬어……!’
환희에 찬 재희가 그의 등을 감싸는 순간.
시끄러운 소리가 나더니 이윽고 강헌의 것이 아닌 목소리가 귀로 흘러들어 왔다.
“……희야, 재희야.”
눈앞에 수평으로 그어진 빛의 띠가 점점 커졌다.
눈꺼풀을 들어 올린 재희는 자신을 내려다보는 선영을 보며 멍한 표정을 지었다.
“재희야, 정신이 들어?”
“……선영이?”
“그래, 나야.”
눈을 깜박이던 재희가 ‘여긴?’이라고 중얼거렸다.
“병원이야. 너 쓰러져 있었어.”
재희 눈의 초점이 서서히 돌아오더니 이내 미친 듯이 휴대폰을 찾기 시작했다.
“휴, 휴대폰 어딨어? 내 휴대폰! 강헌 오빠한테 전화해야 돼!”
“…….”
그런 재희를 익숙하다는 듯 바라보던 선영.
쓰러진 후에도 손에서 휴대폰을 놓지 않던 재희였다.
선영은 챙겨 온 휴대폰을 건네주었고, 그것을 받자마자 재희는 단축번호 1번을 눌렀다.
- 지금 거신 번호는 없는 번호이오니…….
강헌의 휴대폰 번호가 결국 바뀌어 버렸다.
절망한 재희의 손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휴대폰이 그녀의 무릎 위로 툭, 떨어졌다.
그녀의 일과는 늘 똑같았다.
술병이 굴러다니는 방 안에 틀어박혀 제 머리카락을 쥐어 잡고 절망하며 절규하다가 닿지 않는 연락을 하염없이 반복하는 하루.
“기, 김 실장한테 연락해야겠어.”
재희는 급히 강헌의 비서실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연결이 되어도 돌아오는 답은 언제나 같았다.
- 본부장님께선 정해진 일정을 소화하시느라 바쁘십니다. 남길 메시지가 있으시다면 전달해 드리겠습니다.
“그놈의 일정, 일정……! 내가 누군지 몰라요? 나, 배우 서재희예요,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배우고, 강헌 오빠 연인이었던 서재희라구요!”
- 따로 남길 말씀이 없으시다면 이만 끊겠습니다.
재희가 다급히 외쳤다.
“자, 잠깐! 잠깐만요, 그럼 제발 이 말만은 전해 주세요. 오빠한테 도움이 될 만한 걸 가지고 있다고, 오빠가 기조그룹 총수가 될 수도 있을 만큼 대단한 거라고요.”
평소와는 달리 비서실장은 생각에 잠긴 듯 곧바로 끊지 않았다.
희망을 느낀 재희가 말을 이었다.
“절대로 후회하지 않을 거예요. 믿어 줘요, 제발. 나 강헌 오빠 사랑해요. 누구보다도 오빠가 잘 되기를 바라는 사람이에요, 네?”
- ……전달해 드리겠습니다. 그럼.
뚝. 전화가 끊겼다.
휴대폰 화면을 멍하니 바라보던 재희가 그대로 스르르 주저앉았다.
“어떻게 날 이렇게 대할 수가 있어. 어떻게…….”
연예계 잠정 은퇴를 선언한 후.
재희는 줄곧 짙고 음울한 어둠 속에서 살았다.
아니, 그야말로 생지옥이었다.
사람들은 더 이상 재희를 선망하는 눈빛으로 바라보지 않았고, 찬사를 보내지도 않았다.
그녀에게 날아오는 것은 유부남인 재벌가 자제를 꼬여 내려다가 실패한 꽃뱀이라는 욕설의 돌멩이뿐이었다.
얼마 전,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서 강헌을 만나러 나간 적이 있었다.
커다란 모자에 얼굴을 다 가리는 마스크를 쓰고 두꺼운 외투로 몸까지 다 가리고 지하 주차장에서 차로 이동을 시도했다.
그런데 잠복하고 있던 기자들과 유튜버 등이 재희의 차를 알아보고 뒤를 쫓아왔다.
유튜버들이 차창을 열고 차마 입에 담지 못할 말로 조롱하고 욕을 내뱉으며 쫓아오는 바람에 결국 다시 집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그날 찍힌 사진은 온라인에서 큰 화제가 되며 다시 대중의 안줏거리가 되었다.
연예계 관계자들도 마찬가지였다.
기조그룹의 눈치를 보느라 아무도 그녀에게 다가오지 않았고, 연락을 받지도 않았다.
기조그룹의 투자를 받고 있는 에이전시 대표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여전히 재희가 소속 배우임에도, 회사에서는 그녀를 케어하지 않았다.
살아날 가망이 없다고 보는 것이다.
“나 없으면 아무것도 못 하는 것들이…….”
그간 내가 그들에게 가져다준 것이 얼마인데.
내가 아니었다면 빛나는 영광은커녕 밑바닥에서 굴러다녔을지도 모르는 인생들인데.
내 눈에 들기 위해, 내 마음에 들기 위해 그렇게 아양을 떨고 아부를 떨고 고개를 숙이며 손을 비비던 사람들이었는데.
지금 자신의 곁에는 아무도 없다.
선영이라도 없었다면 자신은 정말로 미쳐 버렸을지도 모른다.
“재희야.”
“선영아, 나 정말 돌아 버릴 것 같아. 오늘부터 나랑 같이 있어 줘. 짐 싸서 우리 집으로 들어…….”
“더는 네 곁에 못 있겠어.”
재희의 동공이 미친 듯이 떨렸다.
“서, 선영아, 내가 고칠게. 네 마음에 안 드는 점, 말투, 행동 뭐든 다 고칠 테니까, 응?”
“무서워.”
자신을 바라볼 때 언제나 따뜻했던 선영의 눈에 두려움이 어려 있었다.
“네가 너무 무서워. 순수한 얼굴 뒤에 또 뭘 감추고 있을까, 다음에 망치려는 건 내가 아닐까, 무서워서 견딜 수가 없어. 사람이…… 어떻게 그래. 어떻게 그런 거짓말을 해!”
“너, 너무 사랑해서 그랬어…… 오빠가 떠나는 게 너무 무서워서 그랬어. 이, 이제 안 그럴게, 응?”
“우리 할머니가 그러셨어. 이미 오래도록 거짓 속에서 살아온 사람은 빛 아래로 나올 수가 없다고.”
빛. 그저 어두운 제 삶에 빛 한 점 끌어오려 했을 뿐인데 추락해 버렸다.
하루아침에 모든 것을 다 잃고 말았다.
사랑도, 명예도, 사람도.
눈물을 뚝뚝 흘리는 재희를 보며 선영은 마음이 아팠지만 단호하게 말했다.
“그렇다고 죽으려고 하지는 마. 그건 본부장님께도, 그리고 네 연기와 네 존재에 행복해했던 사람들에게도 큰 죄를 짓는 거니까.”
내가 죽지 않고 어떻게 살아? 응? 어떻게…….
“배우 서재희가 무너지는 건 용서 못 해. 내가 바친 열정을 생각해서라도 버텨.”
아무리 붙잡아도 선영은 냉정했다.
홀로 남은 재희는 엉망이 된 얼굴로 중얼거렸다.
“왜…… 왜 나한테만 이러는 건데……. 그 여자만 아니었으면…… 그 여자만 아니었어도 지금쯤 다 같이 모여서 웃고 있을 텐데…….”
강헌에 대한 원망이 사빈에게로 번져 갔다.
알고 보니 그 여자, 국회의원의 귀한 막내딸이 아니라 학대를 받고 자란 조카였단다.
“대체 그 여자는 되고 난 안 되는 이유가 뭔데!”
부모가 없는 건 천사빈이나 저나 똑같았고 그 외 모든 점은 자신이 더 뛰어났다.
그 여자도 꽤 예쁘장하지만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미녀로 칭송받은 제 외모에 비할 바가 못 되고.
죽은 부모가 딱히 유산을 물려준 것 같지도 않으니 재력도 자신이 더 뛰어나다.
내가 그 남자를 더 사랑하는데.
평생 강헌만 바라보며 살 자신이 있는데.
재희는 머리를 쥐어뜯으며 울부짖었다.
“흐윽…… 오빠…… 내가 잘못했어. 돌아와, 제발……. 그 여자랑 행복하지 마…….”
어두운 방 안에서 새어 나오는 흐느낌은 한동안 멈추지 않았다.
***
“본부장님.”
보고서를 읽고 있던 강헌이 고개를 들었다.
“오늘도 서재희 씨로부터 연락이 왔었습니다.”
멈칫하던 강헌은 다시 보고서로 시선을 돌렸다.
“평소대로 김 실장 선에서 알아서 처리하십시오.”
“저…… 서재희 씨가 말하기를 본부장님께 도움이 될 만한 걸 가지고 있다고 했습니다.”
김 실장이 눈치를 보며 말을 이었다.
“외람되지만…… 기조그룹의 총수가 될 수도 있을 만큼 대단한 것이라고…….”
날카로워진 강헌의 눈빛에 김 실장이 고개를 숙였다.
“기조그룹의 총수가 될 만큼 대단한 것?”
“예. 꼭 전해 달라고 읍소하듯 말했습니다.”
그의 미간이 좁혀졌다.
관계 정리를 고한 이후로 재희와는 단 한 번도 만나거나 통화를 한 적 없었다.
“그게 뭔지 김 실장이 알아 오십시오. 그리고 보고 시에는 서재희에 대한 말은 빼고 그것에 대해서만 보고해야 할 겁니다.”
“알겠습니다, 본부장님.”
김 실장이 문을 닫고 나갔다. 계속해서 보고서를 검토하던 강헌의 손이 문득 멈췄다.
“…….”
기조그룹의 총수가 될 수 있을 정도로 대단한 것이라.
아마도 이서훈 회장과의 작당 모의와 관련된 것일 테다.
생물학적인 아버지와 부자(父子)간의 정을 느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저 서로가 서로를 필요한 도구로 여겼을 뿐.
그렇기에 마음에 거리끼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강헌은 자신을 기만하고 사빈에게 상처를 준 재희와 이 회장을 향한 분노를 억누른 채 기회를 보고 있었다.
재희는 무너졌으니 남은 것은 이 회장뿐이었다.
속이 답답해져 오던 찰나.
사빈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화면에 뜬 ‘아내’라는 단어를 보자마자 거짓말처럼, 강헌의 얼굴에서 그늘이 씻은 듯이 지워졌다.
“응, 사빈아.”
- 강헌 씨, 지금 통화할 수 있어요?
“당신과는 언제든.”
아이참, 하고 사빈이 수줍게 웃는 소리가 탁해졌던 강헌의 머릿속을 맑게 정화했다.
- 혹시 오늘 저녁 약속 있나요?
“아니, 없어. 집으로 바로 들어갈 거야.”
- 몇 시쯤요?
“왜? 일찍 갈까?”
- 아뇨!
곧바로 부정하는 사빈의 목소리에 그의 미간에 힘이 들어갔다.
- 아, 저, 실은…… 저녁을 만들 예정이거든요. 그런데 시간이 조금 걸릴 것 같아서…… 지금부터 하면 강헌 씨 퇴근 시간에 딱 맞출 것 같아서요.
그제야 그의 얼굴이 반듯이 펴졌다.
“나야 좋지만, 힘들지 않겠어? 혼자 하는 거야?”
- 네, 박 여사님한테 일찍 퇴근하시라고 했어요. 오롯이 제가 만들고 싶어서요.
아, 박 여사. 그 사람도 하루빨리 사빈과 자신의 집에서 내보내야 한다.
“무리하지 마. 당신이 만드는 건 뭐든 맛있을 테니까.”
- 응, 알았어요. 조심해서 와요.
“사랑해.”
이제는 숨 쉬듯 자연스러운 말에 사빈도 웃으면서 화답했다.
- 저도 사랑해요, 강헌 씨. 빨리 와…… 아, 아니. 적당히 빠르게 와요!
귀여운 말에 강헌은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알았어. 무리하지 말고. 힘들면 바로 그만둬. 알았지?”
빨리 가서 사빈을 보고 싶었지만 조금 참아야겠다고 생각하던 찰나.
- 알았어요. 남은 일 잘 마무리하고, 운전 조심해서 와요…… 여보.
수줍게 덧붙이는 단어에 강헌의 피가 순식간에 뜨겁게 덥혀졌다.
지금 당장 달려가서 사빈을 안고 입술을 포개며 몸을 겹치고 싶었다.
향긋한 목덜미에 코를 묻고 이를 박으며 아내의 안에 자신을 깊이 새겨 넣고 싶었다.
그런데 일찍 가면 안 된다니.
그 이유가 자신을 위해 요리를 만들기 때문이라니.
이거야 원, 달콤한 지옥에 빠진 격이다.
“후우…….”
강헌은 크게 심호흡을 하며 어떻게든 속을 진정시키기 위해 애썼다.
- 강헌 씨, 왜 그래요? 어디 아파요?
“응. 갑자기 아프네.”
- 어, 어디가요?
놀란 사빈의 목소리가 떨려 오자 강헌이 멋쩍은 표정을 지으며 곧바로 그녀를 진정시켰다.
“당신 빨리 보고 싶은데 못 봐서. 마음이 아프다.”
- 아이, 정말! 깜짝 놀랐잖아요.
사빈이 휴, 하고 숨을 내쉬었다. 붉은 입술을 모으고 가슴을 쓸어내릴 모습을 상상하니 강헌은 더더욱 참기가 어려워졌다.
“간단한 요리법으로 만들 수 있는 음식만 했으면 하는데. 내 인내심이 그다지 많지가 않아.”
- ……알았어요, 최대한 그렇게 해 볼게요.
“보고 싶다, 사빈아.”
낮은 음성에 애정과 다정과 그리움이 담뿍 담겨 있었다.
사빈과 떨어져 있을 땐 그녀가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고, 사빈의 곁에 있으면 강헌은 눈을 깜빡이는 그 찰나조차 아까웠다.
같이 있을 땐 잠시도 떨어지지 않는데도 왜 이토록 보고 싶은지.
강헌은 자신이 중증이라는 것도, 앞으로 평생 이 병을 치료할 수 없을 거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치료할 필요도 없고 말이다.
- 저도 보고 싶어요. 오늘 틈틈이 휴대폰으로 강헌 씨 사진을 엄청 본 거 있죠. 헤헤.
너무나도 사랑스러운 말에, 강헌은 마른세수를 했다.
“지금 당장 안고 싶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