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편의 연인에게 (75)화 (75/90)

제75화

사빈은 미술관으로 다시 출근하기 시작했다.

“피해자가 숨어 지내야 할 이유가 전혀 없다고 생각합니다. 더 이상 저와 같은 사람들이 생기지 않도록 힘을 보태고 싶습니다.”

출근길, 기자들이 들이대는 마이크에 답한 사빈의 인터뷰에 많은 이들이 열광했고, 기조그룹의 이미지와 주가가 동반 상승했다.

전부 이 회장의 지시이기는 했지만 사빈의 진심이 담긴 말이기도 했다.

기조그룹의 이미지 쇄신의 상징과도 같은 인물이 된 사빈은 많은 사람들의 관심의 대상이 되었고, 그에 따라 천문호를 향한 비난이 더욱 거세졌다.

검찰의 강도 높은 조사 아래 천문호는 결국 자녀 입시비리와 정치자금 불법 은닉·횡령, 세금 탈루 혐의 등 11개 범죄혐의로 기소되었다.

일명 ‘천문호 의원 사태’와 더불어 또 화제가 된 연예계 소식이 있었다.

바로 톱스타 서재희의 잠정 은퇴 선언이었다.

[많은 분들이 함께 있던 자리에서, 마치 둘만 있던 것처럼 연출한 사진을 게재하여 여러분께 혼란을 초래한 점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 모두 사회적으로 지탄을 받을 만한 행동은 전혀 하지 않았습니다.

저로 인해 많은 피해를 받고 계신 분들께 진심으로 사죄드립니다.

책임을 통감하며, 저는 연예계를 잠정 은퇴하겠습니다.]

재희의 입장문 발표 이후.

권력이 있는 재벌인 데다 유부남인 강헌이 훨씬 욕을 많이 먹고 있던 상황이 반전되었다.

강헌을 유혹하기 위해 재희가 술수를 쓰다가 실패한 것이 아니냐는 의견이 순식간에 퍼져나갔고 재희는 마녀가 되었다.

항간에는 재희와 강헌이 보육원에서 만났다, 재희가 강헌의 아이를 낳아 기르고 있다, 아니다, 강헌의 아이를 낳으려다가 실패해서 폭주를 한 것이다, 기조그룹 경쟁사의 사주를 받은 것이다 등의 소문이 돌았다.

그러나 먼지처럼 떠도는 말들의 진위 여부는 파악할 수 없었다.

시끄러운 가운데, 사빈과 강헌은 묵묵히 각자의 위치를 지켰다.

그렇게 시간이 흐른 뒤.

“강헌 씨. 이거 어때요?”

그의 가슴팍에 편하게 등을 기댄 사빈이 카탈로그의 한 부분을 펼쳤다.

“이거 보고 느껴지는 게 있나요?”

하얀 손가락이 짚은 것은 농도와 채도가 다른 보라색으로 섬을 표현한 작품이었다.

“이 작품 이름이 ‘퍼플 오브 하트’인데요, 다른 사람들은 메인 전시작품으로는 약하다고 하는데 제 눈에는 괜찮게 보여서요.”

사빈은 이번에 전시회의 기획과 개최를 담당하게 되었다.

이 회장이 내건 조건을 훌륭하게 이행했기에 권한이 대폭 확장된 것이다.

사빈이 해남에 내려갔을 때, 강헌은 세인트마리아 호텔 김서경 사장과 모종의 계약을 맺었다.

세인트마리아 호텔은 한국을 대표하는 유서 깊은 곳이지만 자체적인 호텔 브랜드만을 내세우기엔 해외 고객 유치가 쉽지 않았다.

때문에 세계적으로 유명한 동시에 자사 호텔 브랜드를 보유하지 않고 있는 기조그룹과 손을 잡으면 시너지를 발휘할 수 있을 것으로 봤다.

이러한 계약이 오간 것을 모르는 이서훈 회장은 저도 모르게 사빈과 강헌을 도운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사빈은 기조그룹 내에서 자신의 위치를 다시 한번 공고히 다지게 되었다.

그녀가 맡게 된 업무는 좀처럼 해외로 진출하기 힘든 개발도상국 출신 신진작가들의 작품을 전시하고, 판매수익을 해당 국가에 기부하는 형식의 전시회였다.

처음으로 커다란 프로젝트를 책임지게 된 사빈은 요즘 바쁘지만 즐겁게 일하고 있었다.

“색깔이랑 구성이 마음에 드는데.”

“음.”

강헌의 커다란 손이 그림을 짚은 사빈의 손가락을 감쌌다.

“정말 약하게 보이는…… 읏!”

사빈의 손가락을 살짝 깨문 강헌이 이내 그녀의 목덜미에 입술을 묻었다.

“가, 강헌 씨.”

쪽, 쪽. 야릇한 마찰음이 점점이 이어졌다.

“예뻐. 향기롭고.”

“으응…….”

“당신처럼.”

가는 허리를 감싸고 있던 커다란 손이 위로 올라와 가슴을 부드럽게 움켜쥐었다.

“그, 그림에서 어떻게 향기가…… 하읏.”

사빈이 쥐고 있던 카탈로그가 이불 위에 아무렇게나 나뒹굴었다.

“느껴져. 나한테는.”

손가락으로 꼿꼿하게 곤두선 곳을 둥글게 매만지며, 강헌은 다른 손으로 그녀의 홈드레스 자락을 위로 걷고 속옷 위를 문질렀다.

“회장님이 당신 일하는 방식을 무척 마음에 들어 하시던데.”

“으응…… 강헌 씨…….”

“지금보다 더 바빠지면 당신 만질 시간이 너무 줄어드는데.”

마음에 안 드는군. 그가 그녀의 귀를 부드럽게 베어 물며 속삭였다.

그의 손길에 따라 사빈의 몸이 이리저리 흔들렸고, 그럴수록 쾌락은 커졌다.

“아……!”

크게 흔들린 그녀의 몸이 잘게 떨리며 전율했다.

젖은 손가락을 핥은 강헌은 그녀를 눕히고 위로 올라갔다.

그리고 정염에 잠식된 뜨거운 눈동자로 그녀를 내려다보며 순식간에 니트 티셔츠를 벗어 던졌다.

매번 근육이 잘게 쪼개진 탄탄한 상체가 드러날 때마다 사빈은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렇게 보면 곤란한데.”

그가 무릎으로 사빈의 허벅지를 양옆으로 벌리며 자리를 잡았다.

“못 멈출 것 같아서.”

은밀한 곳이 서로 맞닿아 비벼지자 두 사람의 입에서 낮은 신음이 터졌다.

“강헌 씨…… 내일 해남에 내려가야 하잖아요.”

모레는 그들이 결혼한 지 벌써 1년이 되는 날이었고, 그 기념으로 주말에 해남에 내려가기로 했다.

바쁜 와중이지만 의미 있는 곳에서 축하하고 싶었다.

“응. 가야지.”

“운전하려면 피곤할 텐데.”

강헌이 사빈의 콧등을 톡, 건드리며 픽 웃었다.

“지금 내 걱정할 땐가?”

붉은 입술을 살짝 머금은 강헌이 자신을 그녀의 안으로 천천히 밀어 넣었다.

“당신 자신을 걱정해야지. 밤새 안 놔줄 건데.”

“하읏……!”

“……후.”

그가 천천히 심호흡했다.

그간 매일같이 안았는데도, 아내의 여린 몸은 여전히 자신을 받아들이는 첫 순간을 버거워했다.

사빈을 끌어안고 부드럽게 키스한 그가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윽고 거친 호흡과 신음이 한데 뒤섞여 달큰한 열기를 자아냈다.

강헌은 허리를 세워 그녀의 발목을 쥐고 매끈한 종아리에 입을 맞추었다.

그러다 벌어진 그녀의 입술이 탐이 났고, 이윽고 상체를 숙여 그녀와 입술을 겹치며 과즙처럼 달콤한 타액을 빨아들였다.

“맛있어서 입을 뗄 수가 없어.”

평소에는 서늘하고 무감한 표정이지만 사랑을 나눌 때의 강헌은 보다 솔직하고 뜨거웠다.

자신의 앞에서만 보여주는 모습이었다.

그의 목을 끌어안은 사빈의 몸에 힘이 들어갔다.

“윽…….”

사방에서 자신을 죄어 오는 감각에 강헌은 미간을 좁히며 그녀의 안으로 더 깊이 들어갔다.

“아읏……!”

맞닿은 부위에서 발생한 쾌감이 전류처럼 온몸을 짜릿하게 자극했다.

끌어안은 채로 서로를 갈구하던 두 사람의 움직임이 점점 더 격해졌다.

“사빈아.”

쾌락에 젖어 달뜬 얼굴로 신음하는 사빈을 내려다보는 그의 눈빛이 점점 더 짙게 물들었다.

“사랑한다.”

절정에 달할 때, 그는 늘 사랑을 속삭였다.

하루에도 몇 번이나 듣는 말이었지만 사빈은 매번 대답하지 못하고 신음을 흘릴 뿐이었다.

“하아, 하…….”

사빈은 기진맥진한 듯 그의 품에 안겨 가쁘게 호흡했다.

강헌은 그런 아내의 이마에 입을 맞추고 얼굴을 부드럽게 쓸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해야겠지.’

내일을 위해서.

그는 아쉬운 마음을 달랬다. 부디 자신이 준비한 선물이 사빈의 마음에 들기를 바라며.

***

해남에 도착한 그들은 파라다이스 리조트에 머무르기로 했다.

극진한 안내를 받으며 가장 좋은 로열스위트룸에 짐을 푼 두 사람은 곧바로 카페 <트라몬토>로 향했다.

“늘 전화 통화만 하다가 오랜만에 만나게 되니까 좀 떨려요. 설레고.”

“당신이 만나서 떨리고 설레는 사람은 나뿐이었으면 하는데.”

“아이 참, 강헌 씨도.”

사빈이 곱게 눈을 흘기자 강헌이 피식 웃으며 아내의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그런데 넥타이, 답답하지 않아요?”

“어머님, 아버님 뵙는 날이니까.”

“그래도…… 편하게 입어도 되는데. 엄마 아빠도 옷이 몸을 옥죄면 안 된다고 늘 헐렁하게 입고 다니셨거든요.”

그녀의 말에 강헌은 그저 웃기만 했다.

검은 세단이 트라몬토 카페 정문에서 미끄러지듯 멈춰 섰다.

차에서 내린 두 사람이 안으로 막 들어섰을 때.

“세상에…….”

사빈은 두 손으로 입을 막았다.

작은 뜨락이 형형색색의 꽃으로 장식되어 있었고, 가운데에는 붉은 카펫이 버진로드처럼 깔려있었다.

“결혼을 축하합니다!”

카페 주인 부부가 그들에게 꽃을 뿌리며 커다란 소리로 인사를 건넸다.

“강헌 씨, 이게 무슨……?”

“결혼식을 다시 올리고 싶었어. 상황에 떠밀려서 하는 결혼식이 아니라, 진짜 결혼식을.”

그들의 첫 번째 결혼식이 열렸던 세인트마리아 호텔에 비하면 규모도, 장식도 비할 바가 못 되었다.

그런데 왜 이 작은 카페가, 그 화려하고 웅장한 호텔 예식장보다 크고 아름답고 반짝거리는 것인지.

“그래서 이 옷을…….”

아침에 출발할 때, 강헌은 당신에게 잘 어울릴 것 같아서 샀다며 박스를 내밀었다.

그것을 열어 보니 무릎까지 오는 길이의 새하얀 원피스가 곱게 접혀 있었다.

어쩐지 스몰웨딩에서나 입을 법한 드레스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 입었는데.

정말로 웨딩드레스였다니.

“두 분께서 증인이 되어 주기로 하셨어.”

사빈과 눈이 마주치자 카페 주인 부부가 눈을 찡긋거렸다.

“강헌 씨 전화 받고 준비하면서 어찌나 설렜는지 몰라.”

“우리 결혼할 때 생각도 나고.”

“전…… 전혀 몰랐어요…….”

“당연히 몰라야지! 서프라이즈인걸.”

두 사람이 환하게 웃었다.

사빈의 눈가에 서서히 눈물이 고였다.

“천사빈 씨.”

자신을 부르는 낮고 깊은 음성에 그녀가 강헌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제 아내가 되어주시겠습니까?”

“강헌 씨…….”

사빈의 눈가에 눈물이 촉촉하게 고이기 시작했다.

“절대로 혼자 울게 하지 않겠습니다. 평생 당신만 보며 사랑하겠습니다.”

그가 재킷 안주머니에서 꺼낸 붉은 벨벳 상자를 열었다.

핑크 다이아몬드가 햇빛을 받아 반짝거렸다.

“내게 당신의 마음을 주십시오.”

왼손 네 번째 손가락에 반지가 딱 맞게 끼워졌다.

결국 사빈의 볼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이미…… 당신 거예요.”

1년 전, 그들은 결혼과 동시에 이혼을 약속했다.

그리고 1년 후 지금.

두 사람은 영원한 사랑을 맹세하며 진짜 부부가 되었다.

키스를 나누는 그들의 위로 붉고 하얀 꽃가루가 뿌려졌다.

끝도 없이 찬란하게.

<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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