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4화
“그렇게 해서 얻은 대가가 지금 네가 있는 자리구나.”
- 오빠, 일단 만나 줘, 응? 다 오해야, 오해라구!
“널 여동생처럼 생각했다. 보육원에서 지낼 때 네가 작은 위안이 되었던 것도 사실이야.”
- 강헌 오빠, 제발…….
“그러나 여기까지다. 배우 서재희와 기조그룹은 더 이상 어떤 관련도 없어. 나도 마찬가지고.”
재희가 울부짖으며 계속해서 강헌의 이름을 불러 댔다.
하나 그의 마음에는 조금도 닿지 못했다.
“그나마 네가 가지고 있는 거라도 지키려면 입 다물고 네 삶에 집중하며 살아. 이게 내가 네게 베풀 수 있는 마지막 자비니까.”
- 오, 오빠! 어떻게, 어떻게 나한테 그렇게 말할 수 있어? 나랑 다시는 안 볼 생각이야?
“난 아내가 있고, 평생 그 여자만 사랑하고 바라보며 살 거다.”
강헌의 눈빛이 짙어졌다.
“내가 널 가만히 두는 건. 내 아내에게 조금이라도 피해가 갈까 봐, 혹 아주 작은 상처라도 입을까 봐서야. 그러니 헛된 기대와 희망은 버려.”
- 흐윽, 오빠…… 사랑해, 너무 사랑해서 그랬어…….
강헌은 자신을 진짜 사랑하는 사람의 눈빛과, 말과, 행동을 알고 있었다.
그 사람은 재희와는 아주 많이 달랐다.
“그건 사랑이 아니라, 집착이고 오기야.”
- 아냐, 난 오빠를 사랑한다구!
“네가 사랑하는 건 이강헌이 아니라 기조그룹 후계자겠지.”
사빈은 모든 것을 버리고 그녀에게 가겠다는 자신의 말에 자신을 안아 주었고, 지켜 주겠다고 말했다.
사빈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에 따뜻하고 뭉클한 것이 차올랐고 입가에는 미소가 번졌다.
안심이 되는 동시에 심장이 뛰었다.
한시라도 빨리 얼굴을 보고 싶어서 미칠 것 같았고, 얼굴을 보고 있어도 그리웠다.
이것이 사랑이었다.
진짜 사랑을 알게 된 강헌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내 여자를 건드리려는 생각은 버려. 용서는 한 번뿐이니까.”
***
먼저 객실을 나선 강헌은 발걸음이 빨라지고 마음이 급해졌다.
사빈이 보고 싶었다.
싱그러운 향기를 풍기며 제게 사랑스러운 미소를 지어 주는 아내를 품에 가득 안고, 흰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싶었다.
그리고 사랑한다고 속삭이고 싶었다. 몇 번이고.
강헌은 오렌지색 일기장을 떠올렸다.
사빈이 사라졌을 때, 그녀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을까 싶어서 서재를 뒤지다가 발견한 것이었다.
사빈이 미처 챙기지 못한 그 노트에는 자신을 향한 그녀의 진심이 한 글자, 한 글자 꾹꾹 눌러 새겨져 있었다.
그것을 처음 봤을 때 어찌나 심장이 터질 것 같던지.
그것을 읽지 않았더라면, 제 곁에 있는 것이 미치도록 괴롭다는 그녀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어서 후회로 점철된 선택을 했을지도 모른다.
‘보고 싶다.’
그는 차의 속력을 높였다.
한시라도 빨리 그녀를 보고 싶었다.
이윽고 자택에 도착하여 차고에 주차를 마친 그는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
청렴하고 신사적인 이미지로 호감을 쌓아 왔던 천문호와 그 일가의 추악한 민낯이 드러났다.
위조된 성과와 자격증, 그리고 청탁을 통해 상급 학교에 진학해 온 자식들.
국회의원이라는 지위를 이용하여 얻어 낸 정보로 불린 부동산.
차명 계좌에 넣어 둔 은닉 자금과 올해 태어난 팔촌 조카까지 이용한 탈세 정황.
사람들이 가장 경악한 것은 조카를 딸로 입적하여 학대하고 폭력까지 휘둘렀다는 사실이었다.
퇴근하던 천문호는 시민이 던진 계란과 돌을 맞아 이마가 찢어졌고, 외출을 나섰던 추연실 역시 시민들의 비난에 얼굴을 붉히며 곧바로 차에 올랐다.
두 아들도 마찬가지였다.
차에는 컬러 스프레이로 온갖 욕설이 도배가 되었고, 사이드미러가 부서지는 등 성한 곳이 없었다.
그들이 나서기만 하면 사람들이 휴대폰 카메라를 켜고 온통 달려드는 통에 집 밖을 나설 수가 없었다.
“오늘도 연결이 안 돼? 당장 다시 걸어 봐!”
천문호의 벼락같은 고함에 추연실은 벌벌 떨면서 사빈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일은 없었다.
그때 전화가 걸려 왔다. 보좌진이었다.
- 의원님, 방금 기조그룹 측에서 입장을 발표했다는 속보가 떴습니다! 그리고…… 내일 검찰 조사 소환에 응하셔야 할 듯합니다…….
속보? 검찰 조사? 이 무슨 개 같은……!
천문호는 다급히 텔레비전을 켰다.
- ……기조그룹은 천문호 의원의 의혹에 대해 유감이라 밝히면서도 공정하고 깨끗한 수사가 이루어기를 바란다며 최대한 협조하겠다고 덧붙였습니다.
- 충격적인 소식도 있네요?
- 네, 그렇습니다. 지난 5월 기조그룹 이서훈 회장의 아들, 이강헌 기조전자 상무이사와 결혼한 천사빈 씨는 천문호 의원의 막내딸로 알려져 있었는데요. 실은 천 의원의 조카인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저, 저게 무슨……!”
천문호의 충혈된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
- 천 의원의 죽은 남동생 천 모 씨의 딸인 천사빈 씨는 큰아버지인 천 의원에게 입적되어 학대를 받아 온 정황이…….
“여, 여보!”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추연실이 천문호의 팔을 붙잡았다.
- ……천사빈 씨 본인에게 직접 확인을 했다고 합니다.
- 그럼 의혹이 사실이었군요.
- 그렇습니다. 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조그룹 이서훈 회장은 ‘천사빈 씨는 여전히 그의 가족이며, 아팠던 만큼 따뜻하게 보듬어 줄 것’이라는 뜻을 밝혔습니다. 이에 많은 사람들이 놀람과 감동을…….
텔레비전을 꺼 버린 천문호는 리모컨을 거칠게 내던졌다.
“그 개 같은 년이 키워 준 은혜도 모르고 기어이!”
더 확실하게 교육을 했어야 했는데. 감히 목덜미를 물 생각조차 하지 못하도록.
서재로 들어간 천문호는 곧바로 UM그룹 회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간 만일을 대비하여 쌓아 왔던 인맥을 적극 활용할 때가 온 것이다.
그러나 그의 바람과는 다르게 UM 회장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대학 후배인 검찰총장도, 그간 제게 줄을 대지 못해 안달이던 숱한 기업의 총수와 간부들도, 누구 하나 천문호의 전화를 받지 않았다.
고립된 것이다.
버려진 것이다, 이 천문호가.
“개 같은, 이런 개 같은……!”
아아악! 천문호는 손에 잡히는 대로 집어 던지며 소리를 내질렀다.
순간 죽은 남동생의 얼굴이 떠올랐다.
늘 저보다 사랑받지 못하는 형을 보며 비웃던 천진호가.
착한 척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위선을 떨던 남동생을, 천문호는 증오했다.
‘동생은 괜찮은데 형은 영.’ 따위의 말을 들을 때마다 속에서 천불이 뻗쳤다.
만약 김혜원이라는 천한 여자를 데려와 결혼하겠다고 난리를 치지 않았다면, 아버지는 분명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남동생에게 물려주려 했을 것이다.
[집안을 잘 다스려 갈 사람은 네가 아니라 진호다.]
그렇게 말하던 아버지는 진호가 죽은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따라가듯 숨을 거두었다.
평생 저를 인정하지 않던 아버지는 죽을 때까지도 진호가 먼저였다.
화가 나서 미칠 것 같았다. 천문호는 그 분노를 죄다 사빈에게 풀었다.
사빈의 얼굴 위로 떠오르는 남동생의 모습을 볼 때마다 그는 손찌검을 하는 것으로 울분을 풀었다.
남동생의 딸이 저를 두려워하고 제 입맛대로 움직이는 것을 볼 때마다 희열을 느꼈다.
평생 그렇게 인형처럼 마음대로 조종하며 살아갈 수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진작 기를 죽여 놨어야 했어…….”
시간을 돌릴 수만 있다면 더 철저히 가르쳤을 텐데.
그러나 후회하기엔 너무 늦었다.
앞으로 살길을 도모해야 했다.
천문호는 던졌던 휴대폰을 집어 들고 다시 이곳저곳에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스스로 평생 부귀와 명예를 누리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천 씨 가문 장손의 초라한 말로의 시작이었다.
***
“사빈아.”
박 여사가 퇴근한 후.
홀로 거실에서 천문호 관련한 뉴스를 보고 있던 사빈은 그의 목소리에 깜짝 놀라 소파에서 일어났다.
“강헌 씨, 언제 왔어요?”
“방금.”
- 천문호 의원 측은 접촉이 되지 않는 상태…….
아차. 사빈은 얼른 텔레비전을 껐다.
그녀에게 다가간 강헌은 그녀를 품에 깊이 끌어안았다.
“사빈아.”
“네.”
그의 팔에 힘이 들어갔다.
“누구도 당신 건드릴 수 없게 할 거야.”
사빈은 손을 들어 그의 등을 감쌌다.
“믿어요. 그리고 저도 강헌 씨 지켜 줄 거예요. 외롭지 않게. 상처받지 않도록.”
가슴이 든든했고 감정이 벅차올랐다.
서로의 눈을 깊이 들여다보던 그들은 키스를 나누었다.
아주 당연하다는 듯이 입술을 겹치고, 혀를 뭉근히 섞고, 널따란 소파에 누워 서로의 몸을 탐했다.
온기를 느낌으로써 함께 있다는 것을 실감하고 싶었고, 그동안 느꼈을 긴장감을 위로해주고 싶었다.
사빈에게서 흘러나오는 달콤한 액체를 마음껏 탐닉하던 강헌은 이내 그녀에게 몸을 묻었다.
비벼지는 살갗은 뜨거웠고, 농밀한 신음은 서로의 입으로 흘러들어 갔다.
“너, 너무 깊……!”
사빈은 그의 어깨를 힘없이 밀어내다가 결국 목을 끌어안았다.
“사빈아, 내 아내…….”
격렬한 몸짓과는 다르게 다정한 목소리로 그녀를 달래며, 강헌은 수도 없이 그녀를 안았다.
뇌가 녹아 버릴 정도로 황홀했고 정신이 나가 버릴 정도로 달콤했다.
마치 투명하고 달콤한 꿀통에 빠져 제 몸이 온통 절여지는 듯한 기분이었다.
사빈이 선사하는 찬란한 쾌감만이 강헌을 지배하고 있었다.
달랑달랑 흔들리는 발목을 붙잡아 제 어깨에 올린 그는 자신을 더 깊이 밀어 넣었다.
잘게 경련하는 그녀의 모습은 무척이나 아름다웠고 그에게 또다시 흥분감을 안겨 주었다.
미치게 좋았다.
그녀도 저와 같은 감각을 느꼈으면 했고, 아픔과 긴장을 잊었으면 싶었다.
결과적으로 강헌의 바람은 이루어졌다.
거의 혼이 나가버린 사빈의 머릿속에서는 방금 전에 보았던 천문호 관련 뉴스는 흔적도 없이 지워졌다.
강헌이 끝없이 주입한 뜨거운 쾌락만이 남아서 정신을 어지럽게 만들었다.
“그만…… 히, 힘들어…….”
그녀의 관자놀이와 눈가에 입을 맞추며 달랜 강헌이 사빈의 입술을 머금었다.
그토록 맛봤는데도 왜 이토록 부족한지 모를 일이다.
온몸에는 그의 손과 입술이 남긴 붉은 자국으로 가득했지만 강헌은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참아야겠지. 오늘은.’
진이 빠져 제 품에서 기절한 듯 눈을 감고 있는 작은 얼굴을 내려다보던 그는 심호흡을 하며 욕망을 참아 보기로 했다.
한 번 둑이 터지니 도저히 멈출 수가 없다.
전에는 어떻게 멈췄더라.
시간이 갈수록 사빈을 정말로 안고 싶어서 곤혹스러웠지.
다시 그때로 돌아가면 절대로 참을 수 없을 것 같다.
하얀 이마에 다시 한번 입을 맞춘 강헌은 축 늘어진 아내의 몸을 안아 들어 침대로 향했다.
“강헌 씨이…….”
“응, 여기 있어.”
얼른 그녀의 옆에 누운 강헌이 팔베개를 해주었다.
그리고 사빈의 얼굴을 부드럽게 쓸며 속삭였다.
“내 연인은 평생 당신뿐이야.”
그녀가 배시시 웃으며 눈을 접었다.
“알아요.”
그렇게 대답한 사빈은 그의 품을 파고들었다.
하얀 어깨에 촉, 입을 맞춘 그는 미소를 지으며 따뜻하고 작은 몸을 끌어안고 잠을 청했다.
부디 그녀가 달콤하고 행복한 꿈을 꾸기를 바라며.